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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9월 마지막 밤에 읽는 이상국의 詩

by 이성근 2023. 9. 30.

적멸보궁 가는 길 / 꿈의 해석 / 천장지구/ 흰 웃음소리 / 개싸움 / 단천집 할아버지 / 서천(西天)

밤길 / 하늘/미황사 생각/ 못을 메우다/ 존엄(尊嚴)에 대하여 / 그래도 그렇지

씻은 듯이/ 겨울 남해에서/ 겨울 초월암 갔다가/ 분단 장사/ 유월의 이승 / 감자떡

날짐승 들짐승의 사랑이 그러하듯/ 먹이사슬/ 대밭집 홍강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싶다

연민/ 벽에 기대어/ 진부령/ 어느날 스타벅스에서/ 다음 노래 / 그늘

새 잘 잡던 상준이/ 성묘 / 여름/ 자두/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 오길 잘했다/ 신발에 대하여/ 장마당에서/ 남대천 / 단풍/ 밥상을 버리며

아들과 함께 보낸 여름 한 철 / 고래 아버지 / 제삿날 저녁/ 산속에서의 하룻밤

샛령을 넘으며/ 그곳/ 탑/ 하나뿐인 별에서/ 성자(聖者)/ 한계산성에 가서

싸움 / 시 파는 사람

 

1999년 제1회 백석문학상1999년 제9회 민족예술상
경력2023.03~ (사)구상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적멸보궁 가는 길 / 이상국

저 벌거숭이 나무보살 나무나한들

겹겹이 에워싼 중대(中臺) 한나절 올라가면

이승의 클리토리스 같은 궁()이 있다니,

이를테면 천원에 두 편씩 하는 비디오를

새벽까지 보다가 잠들면

그게 요즘 나의 적멸인데

 

왜 나는 자꾸 집을 나서는지

월정사 들머리 바다횟집 가자미더러 어디서 왔냐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고 가라고 무안을 준다

저것도 뭘 아는 것 같다

다들 손님으로 다녀간 곳,

세상은 유곽 같은 곳이어서

날마다 색정으로 밤을 밝히고도

또다른 궁을 찾아

오늘은 얼굴을 가리고 산 들어서는데

사천왕 같은 전나무들이 길을 막고

기어이 마음뚜껑을 열어본다

 

누가 산꼭대기에 궁을 갖다놓았을까

이 추위를 뚫고 올라가면

정말 생()이 환하게 섹스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수족관 가자미처럼

나는 너무 깊이 들어온 건 아닌지

아침에 먹으면 저녁에 싸는 것을 데리고

겨울 안개 속 산을 오른다

 

꿈의 해석

뱀에게 쫓기는 꿈을 꾸다가

침대에서 떨어지고는 혼자 컴컴하게 웃었다.

이 말을 시인들에게 했더니 태몽이라고 한다.

나는 자궁이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영혼이 외로운 거라고 한다.

시인들의 말은 뱀 같다.

 

한때는 꽃이 지고서야 꽃인 줄 알았다거나

그대에게 가려고 십 년을 걸었으나

그대가 내 안에 있었다느니

그런 시를 좋아한 적도 있었고

어떤 날은 강가에서 맥없이

해 지는 걸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 게 영혼이 하는 일이라면

나의 영혼은 아직 정처가 없는 모양이다.

얼마 뒤 꿈 해몽을 검색했더니

꿈 자체가 꿈이라고 나왔다.

 

그날 밤 흐릿한 방구석에서

뱀 같은 것이 나를 지켜보는 것도 같았으나

꿈에도 안과 밖이 있어서

졸린 영혼을 데리고 다시 꿈속으로 들어갔다.

 

천장지구(天長地久)

어떻든 세상은 정상이다.

주 오일제가 되고도 송아지 다리는 넷이고

죽니 사니 해도 주말이면

사람들은 벌떼처럼 맛집을 찾아나선다.

얼마나 외로우면 댓글주의자가 되었겠니.

다시 학교를 다니면

높은 사부 밑에서 구름과 물소리를 공부하자.

소소한 날들의 헌 마일리지를 모아

폭설 내리는 날 시뻘건 소 타고

저항령쯤 들어가거나

앳되고 앳되던 초등학교 때 선생님 보고 싶다.

생은 대부분 우연이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알던 사람들은 어느날 죽기도 했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컴컴한 노래방에 들어가 춤을 추겠니.

살아보니 집은 작은데 비밀번호가 너무 많다.

어떻든 세상은 오래 되었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흰 웃음소리

내가 한 철

인제 북천

조용한 마을에 살며

한 사미승을 알고 지냈는데

어느해 누군가 슬피 울어도 환한 유월

그 사미는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고

동네 처자는 치마폭에다 그걸 받는 걸 보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바람이 다 집어먹고

흰 웃음소리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북천 물소리가 싣고 가다가

돌멩이처럼 뒤돌아보고는 했다

아무 하늘에서나 햇구름이 피던 그날은

살다가 헤어지기도 좋은 날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환해진다

 

개싸움 /

나는 감춘 것도 별로 없고 그냥 사는 게 일인 사람인데

동네 철대문집 개는 내 발소리만 들어도 짖는다.

산책 갈 때도 그 집 대문에서 되도록 멀리 근신하며 지나가지만 매번 이제 됐다 싶은 지점에서 그가 담벼락을 무너뜨릴 듯 짖어대기 시작하면 뭔가 또 들킨 것처럼 가슴이 덜커덩한다.

나는 쓰레기도 철저히 가려서 내다 버리고 적십자회비도 제때 내며 법대로 사는 사람이지만 아무래도 그는 내 속의 누군가를 아는 것 같다.

그깟 개를 상대로 분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겁을 먹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것이 개든 무엇이든 내 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언짢은 일이다.

 

단천집 할아버지

효도관광 떠나듯

아바이들 고향 가게 되었다고

동사무소로 방북신청 하러 몰려가던 날

일흔네 살 단천집 할아버지

노인회관에 앉아 담배만 피웠다

 

무슨 선언

무슨 회담

무슨 합의

이제는 안 속는다

 

북쪽이나 남쪽이나

통일해서 손해 보는 패가 있고

통일을 개 끌고 다니듯 끌고 다니며

이득 보는 무리들 있는 한

살아서 단천 못 간다

 

잠시 피난 갔다 온다고

고향 떠난 지 서른아홉 해가 지났다

두고 온 자식과 이남서 얻은 자식들이야

어떻게든 서로 알게 되겠지만

마흔 해 동안 편지 한 장 못 오간 고향을

효도관광 떠나듯 그렇게 갈 수 있겠냐고

청호동 단천집 할아버지 방북신청 안 한다

 

서천(西天)

초승달 옆에 샛별이 반짝인다

달은 집에 갔다 보름 만에 왔는데

샛별이 몰래 따라갔다 왔다고 한다

지금은 둘 사이가 걸어가면 오분 거리다

 

오늘은 음력 정월 초아흐렛날

별들은 마당을 씻어놓고 집 밖에 나앉았는데

달이 혼자 집에 갔다 안 올까봐 샛별이

또 지키고 섰다

 

밤길

밤길을 간다

어려서는 어머니 등에 업혀 이 길을 갔고

아비가 되어서는 어린 자식 업고 가던 길

오늘은 혼자 간다

나 들으라고 노래하며 간다

이 길을 가며 때로는

몰래 뒤를 밟는다는 짐승이나

시커먼 어둠도 두려웠지만

언제나 무서운 건 사람이었다

 

하늘 /

품에 안은 아이가 죽어간다며 한사코 따라오는 바라나시 여인에게 우리나라 오백원짜리 동전을 던져주고 먼지와 자동차 경적과 인파를 헤치고 멀리 온 길,

 

어느새 거기까지 따라온 여인이

이거 못 써

이거 못 써

동전을 간절하게 내민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는데......

*논어 팔일(八佾)편에서.

 

미황사 생각

미황사는 남쪽 땅끝에 있다.

미황, 하고 부르면 황 자가 오래 울리는 곳이다

자동차로 가면 한나절이면 되는 곳을

한해께 봄 승() 동천 효림을 걸고

박찬 시인과 가기로 한 약속을

그가 너무 빨리 세상을 버렸으므로 지키지 못했다.

시인은 가며 내게 아름다운 절 한채를 맡겼으나

산다는 건 정말 죽음보다 냉정한 것이어서

나는 절도 시인도 다 잊고 살았다.

그러나 봄만 되면 그가 실없이

앞머리에 도라지색 브리지를 넣고 와

죽으면 카톡도 못 한다며

우리가 해남 땅에 맡겨둔 술은

언제 마실 건지 묻고는 했다.

훗날 효림은 설악산문을 나와

풍요(風謠)를 부르며 천안 동막골로 들어가고

나 혼자 바람 불고 국민연금 나오는 세간에 남아

해마다 꽃상여 같은 봄을 바라보는데......

 

못을 메우다 /

마당에 손바닥만 한 못을 파고 연() 두어 뿌리를 넣었다

그 그늘에 개구리가 알을 슬어놓고 봄밤 꽈리를 씹듯 울었다

가끔 참새가 와 멱을 감았다

소금쟁이와 물방개도 집을 지었다

밤으로 달이나 별이 손님처럼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다

날이 더워지자 개구리를 사랑하는 뱀도

슬그머니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와 마주친 아내가 기겁을 한 뒤로

장에 나가 개 한 마리를 구해다 밤낮으로 보초를 서게 했다

그사이 연은 막무가내 피고 졌다

마당이 더는 불미(不美)하지 않았으나

마을에 젊은 암캐가 왔다는 소문이 나자

수컷들이 몰려들어 껄떡대는 바람에 삼이웃이 불편해했고

어쩌다 사날씩 집을 비울 때면 그의 밥걱정을 해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못을 메워버렸다

마당에 평화가 왔다

 

존엄(尊嚴)에 대하여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미안하지만 남은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문 좀 두드려달라던 작가는 스스로를 버렸다

식은밥이나 이웃에게도 그랬겠지만

자기가 쓴 시나리오에게도 떳떳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주검을 치우는 사람에게

개의치 마시고 국밥이나 한 그릇 자시라며

제 손으로 목숨을 접은 어느 독거노인은

따뜻한 국밥 몇 그릇을 세상에 남겼다

가난했지만

죽음에게까지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그 소중한 유산을 남겼던 것이다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주검들이 수줍게 떠올라도

아이들 몇몇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 앳된 나이에 퉁퉁 부은 민낯을

죽어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송파 어디선가 월세 살던 세 모녀가

공과금과 마지막 집세를 계산해놓고

한날한시에 세상을 버린 것도

다시는 볼 일이 없더라도

국가와 집주인에게 당당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뭔가에게 굽히기 싫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

저녁에 학교 운동장을 돈다

앞서가는 중년쯤의 여자 둘이

군대처럼 팔을 휘저으며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다가

무슨 얘기 끝에 갑자기 언성을 높인다

종일 당하기만 하다가

간만에 고를 했는데 글쎄

씨팔년이 바닥 패를 보면 알지

똥광을 내야 하는데 비피를 내고 자빠졌지 뭐야

그렇게 해서 바가지를 쓰고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어둠 속에서 씩씩거리며 운동장을 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몇 바퀴 더 돌거나

하룻밤 자고 나면 좀 누그러지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누군가 광이 필요한데 피를 주면 못쓴다

 

씻은 듯이 /

씻은 듯이,

이 얼마나 간절한 말인가

 

누이가 개울물에 무 밑둥을 씻듯

봄날 천방둑에 옥양목을 빨아 널 듯

 

혹은 밤새 열에 들뜨던 아이가

날이 밝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르튼 입술로 어머니를 부르듯

 

, 씻은 듯이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인가

 

겨울 남해에서 /

이 절도 다 됐구나

 

뒷산에서는 물오른 동백이 백댄서처럼 몸을 흔들고

절마당 아래까지 술집이 들앉았으니

한때는 힘깨나 썼을 부처가 오빠처럼 보이는구나

 

내 오늘 늙은 기러기처럼 이 땅을 지나가며

절집만 봐도 생이 헌 옷 같고

나라가 다 측은하다만

혹 다시 못오더라도

월경처럼 붉은 꽃들아

해마다 국토의 아랫도리를 적시고

또 적시거라

 

겨울 초월암 갔다가

누가 같이 자자 그랬는지

뾰로퉁하게 토라진 동백은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절 아래 레지도 없는 찻집

굴뚝 모퉁이에서 오줌을 누는데

살색 브래지어 하나 울타리에 걸려 있다

 

저 젖가슴은 어디서 겨울을 나고 있는지

 

중늙은이 하나가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오봉리 버스 정류장을 지나간다

나도 오리처럼 푸른 목도리를 하고

남 다 살다 간 세상을 건너간다

 

분단 장사 /

그대가 속초 거진 대진 명파 지나

동해 통일 전망대 이르러 두려움에 가슴 조이며

망원경 구명에 500원 주화를 넣어보면 알게 되리

빨려들어갈 듯 북쪽을 바라보다가 화면이 끊기면

결국 북조선이 500원짜리 상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

반도의 몸값을 관리하는 아메리카 같은 큰 자본가들의 나라나

돈이 되는 것이라면 에미 속곳도 팔아먹는

그런 장사꾼들 손에 들면

조국이니 통일이니 하는 것들이 결국

닳지 않는 장사 밑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

철조망 같은 그리움으로도 오갈 수 없는 땅의

소나무숲과 인민군 초소와 사람 사는 마을을

단돈 500원에 볼 수 있다니

그대는 자본가들의 고마움에 눈물짓게 되리

 

유월의 이승 /

아내의 생일을 잊어버린 죄로

나는 나에게 벌주를 내렸다.

 

동네 식당에 가

등심 몇점 불판에 올려놓고

비장하게

 

맥주 두병에

소주 한병을 반성적으로

그러나 풍류적으로 섞어 마시며

아내를 건너다보았다.

 

그이도 연기와 소음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승에서는 더 이상

데리고 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감자떡 /

하지가 지나면

성한 감자는 장에 나가고

다치고 못난 것들은 독에 들어가

가을까지 몸을 썩혔다

헌 옷 벗듯 껍질을 벗고

물에 수십번 육신을 씻고 나서야

그들은 분보다 더 고운 가루가 되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

 

강선리 늙은 형수님은 아직도

시어머니 제삿날 그걸로 떡을 쪄서

우리를 먹이신다

 

날짐승 들짐승의 사랑이 그러하듯 /

이 땅

꽃과 나무들의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들 사랑 또한

무엇의 허락을 받는 게 아니고

그리운 눈빛과 부푼 젖가슴으로

우리들의 절반과 몸을 섞는 일이야

 

날짐승 들짐승의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들의 짝짓기는

우리 땅 햇빛 아래

화염병처럼 타오르는 피와

따뜻한 자궁으로

깨끗한 새끼들을 퍼뜨리는 일이야

 

먹이사슬 /

봉희네 큰집 개가 죽던 날

아침나절 내린 비로 나무 잎새들 더욱 번들거리고

텃밭에서는 마늘쫑이 한참 서고 있었는데

우리는 죽은 개를 먹었다

수만이 형 돈수 아제 웃집 세희 아버지랑

냇가에 짚불을 놓고 그슬려 각을 뜨고

내장은 깊이 묻었다

가래질은 벌써 끝냈다

하늘 똥구멍이 찢어졌는지

올봄 따라 잦은 비로 냉해가 걱정이긴 해도

그깟 놈의 못자리 거덜이 난들

노가다 사흘이면 쌀이 한 가마였다

봉희네 큰집 개가 죽던 날

봄일 끝의 헛헛한 아랫도리를 위하여

소줏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깊이 보신을 했다

두엄 썩는 냄새 훅훅 끼쳐오는 봉희네 마루에서

어둠이 마을 길과 숲을 덮어올 때까지

농약 먹고 빌빌하는 재만이 젊은 처 이야기와

서울놈이 도망가 밭을 계약만 하고 자빠지는 바람에

생돈 2백만 원 먹었다는 원우 아버지 일로 침을 튀기며

포식을 했다

그날 우리는 죽은 쥐를 먹고 죽은 개를 먹었다

 

대밭집 홍강이 /

대밭집 홍강이

같이 살다가는 둘 다 못쓰게 된다고

논 팔아 하나뿐인 동생 서울로 보내고

팔순 노모 모시고 산다

 

중학교는 나왔어도 농사하는 죄로

쉰이 가깝도록 시집 오겠다는 과수댁조차 없어

들일에 빨래하고 밥 해먹으며 그림자처럼 산다

 

그 살림에 장 보러 가는 게 남새스럽다고

쌀이나 고구마 가방 속에 넣어 메고

아는 사람 없는 곳 가서 몰래 팔고 오는 홍강이

 

아랫복골 대밭집

혼자 늙는 홍강이를 보면 눈물 난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싶다 /

벌써 오래 되었다.

부엌 옆에 마구간 딸린 아버지의 집을 떠나

마당도 굴뚝도 없는 아파트에 와 살며

나는 그게 자랑인 줄 알았다.

 

이제는 그 부드러운 풀이름도 거반 잊었지만

봄 둑길에 새 풀이 무성할 때면

우리 소가 생각난다.

 

어떤 날 저녁에는

꼴짐지고 돌아오는 아버지가 늦는다고

동네가 떠나갈 듯 우는 울음소리도 들었다.

이제는 그 소도 아버지도 다 졸업했다고

이 도시의 시민이 되어 산 지 오래인데도

우리 소가 잘 먹던 풀밭 만나면

한 짐 베어 지고

그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연민 /

흐르는 강이 나이를 자시면

무엇이 되는지

양양 남대천 물너름에 와서 보아라

한때는 살을 내줄 것 같던 사랑이나

몸을 내던지며 울던 슬픔도

생의 굽이굽이를 돌며 치이고 닳아

이제는 모래처럼 순해졌으니

산그림자 속으로 새들 돌아가고

저무는 강둑에서 제 몸 비춰보는 저것,

자식낳이 다한 어머니처럼

거대한 자궁을 열어놓고

혼잣노래 하는

저 오래된 연민을 보아라

 

벽에 기대어 /

때로는 벽에 기대어 시무룩하게 바라보면

형님은 또 담배를 붙여 물고

그림자처럼 앉았던 형수는 저것 보라며

슬픈 주먹총을 놓는 거였다

 

암종 든 한쪽 폐를 병원에 버리고 와서도

담배를 두려워 않는 저이,

뜯어낸 늑골 때문에

생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면

기우는 그 반대편에 삶의 온갖 잡동사니를 얹어

용케 균형을 잡아가는 늙은 전사

 

낡은 형광등이 찌르레기처럼 운다

큰조카는 괜히 날이 너무 가물지요 하고

누구에랄 것도 없이 묻고는

그 공허한 뒤끝을 허물려고

연신 손으로 파리를 낚아채는 시늉을 하는데

 

해 지고 나면

땅거미가 들과 마을로 차례로 덮어오듯

한발 다가오는 거대한 그 무엇과

겁 없이 맞서는 형님의 적막한 싸움을

나는 또 천치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진부령 /

내 스무살

저 지랄 같은 새벽,

아버지 소 판 돈 몰래 들고

서울 가는 디젤버스 기름냄새에

개처럼 헐떡이며 넘던 영.

그 큰 소 다 털어먹고

추석명절 달그늘만 믿고 돌아오던 날

먼지낀 차창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면목없는 얼굴을 비춰보다가

고개말량 이르면 눈물나던 영.

 

어느날 스타벅스에서 /

나에게는 이제 남아 있는 내가 별로 없다

어느새 어둑한 헛간같이 되어서

산그늘 옛집에 살던 때 일이나

살이 패이도록 외롭지 않으면

어머니를 불러본 지도 오래되었다

 

저녁내 외양간에 불을 켜놓고

송아지 나올 때를 기다리거나

새벽차를 타고 영을 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거의 새것이다

 

그동안 많은 것을 보고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아닌

나는 저 산천의 아들, 혹은

강가에 모래 부려놓고 집으로 가는 물처럼

노래하는 사람

 

나에게는 지금 내가 아는 내가 별로 없다

바퀴처럼 멀리 와 무엇이 되긴 되었는데

나도 거의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그 사람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음 노래 /

-산목련에게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사랑한다고 다 가질 수는 없으니

비 오다 그친 아침

젖은 몸으로 만난 그대

기다려다오

내 이 허접한 생을 마치고

어느날 밤처럼 스며들어

그대와 한 이불을 덮는다면

어느 산이 알겠느냐

 

그늘 /

봄이 되어도 마당의 철쭉이 피지 않는다

집을 팔고 이사 가자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꽃의 그늘을 내가 흔든 것이다

 

몸이 있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아내는 집이 좁으니 책을 버리자고 한다

그동안 집을 너무 믿었다

그들은 내가 갈 데가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옛 시인들은 아내를 버렸을 것이나

저 문자들의 경멸을 뒤집어쓰며

나는 나의 그늘을 버렸다

 

나도 한때는 꽃그늘에 앉아

서정시를 쓰기도 했으나

나의 시에는 먼 데가 없었다

 

이 집에 너무 오래 살았다

머잖아 집은 나를 모른다 할 것이고

철쭉은 꽃을 버리더라도 마당을 지킬 것이다

 

언젠가 모르는 집에 말을 매고 싶다

 

새 잘 잡던 상준이 /

우리는 해방되던 바로 뒷해에 겨우 태어나 '우리의 맹세'를 외우며 큰 개울 건너 학교에 다녔는데 마흔해도 훨씬 지난 오늘, 새 잘 잡던 상준이 혼자만 고향에 남았다. 중학교 졸업장만 있어도 면서기가 되었거나 읍내 아파트 수위라도 해먹을 텐데 이 세상 괜찮은 자리는 배운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그에겐 논과 밭이 돌아갔다. 그래서 새 잘 잡던 상준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직장의 평생사원이 되었다.

 

성묘 /

- 야덜아 내 죽거든 태워서 물치 바다에나 뿌려다오

어머니는 살아생전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선산이 수만 평이나 있고 아들자식들이 모두 이름 석 자는 쓰고 사는 집에서 될 법이나 한 일이냐고 감동골 솔밭 속의 아버지와 합장을 해드렸습니다

30촉짜리 전등이라도 하나 넣어드릴걸

평생 어두운 집에서 사시던 분들

 

여름 /

산을 내려온 바람이

멧돼지처럼 옥수수밭을 뒤지고 다니는 저녁이다

 

하루살이들 이악스럽게 달려드는 멍석마당에서

하늘의 별들이 가끔 더 먼 곳으로 날아가는 걸 바라보며

어머니는 감자를 깎으시고

오뉴월 하루 볕이 다른데

어디 보자며

불쑥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감자톨 같은 내 불알을 만져보시던

 

아버지야 아버지야

 

자두 /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알은척을 안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 것만 먹으면 탈 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달은 아직 그 달이다 /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 /

자다 깨면

어떤 날은 방구석에서

소 같은 어둠이 내려다보기도 하는데

나는 잠든 아이들 얼굴에 볼을 비벼보다가

공연히 슬퍼지기도 한다

그런 날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들에서 돌아오는 당신의

모자나 옷을 받아들면

거기서 나던 땀내음 같은 것

그게 아버지의 생의 냄새였다면

지금 내게선 무슨 냄새가 나는지

 

나는 농토가 없다

고작 생각을 내다 팔거나

소작의 품을 팔고 돌아오는 저녁으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나는 아버지의 농사를 생각한다

그는 곡식이든 짐승이든

늘 뭔가 심고 거두며 살았는데

나는 나무 한그루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오길 잘했다 /

어느 날 저녁 동네 골목길을 지나다가 자즈러질 듯 우는 갓난애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 누군가 새로 왔구나

그리고 저것이 이제 나와 같은 별을 탔구나 하는 즐거움

 

티브이 속에서 줄줄이 끌려가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꼴좋다 꼴좋다 외치는 즐거움

 

아무 생각없이 생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쓰다가

남 모르게 우주의 창고를 열어보는 이 든든함

 

때로 따뜻한 여자 속에서 내 그것이 죽어가는 즐거움

 

친구를 문상 가서 웃고 떠들다가 언젠가 저것들이 내 주검 앞에서 나를 흉보며 내 음식을 축내는 즐거움을 미리 보는 즐거움

 

어쩌다 공돈이 생긴 날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나무 이파리들이 멋도 모르고 바람에 뒤집어지는 걸 바라보며

아무래도 세상에 오길 잘했다는 이 즐거움

 

신발에 대하여 /

그전에 선배가 입대하며

신던 구두를 벗어주고 간 적이 있었다

비만 오면 구두 속이 미나리꽝 같았던 시절

나는 마치 집 한채를 얻은 것 같았다

 

어쩌다 바꿔 신기만 해도

몸이 낯설어하는데

교통사고라도 있어

길바닥에 나뒹구는 신발을 보면 언짢다

누군가 생을 다치고 다시는

저 신발을 못 신을지도 모른다는……

 

신발을 벗는다는 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에 취해 한뎃잠을 자는 사람들도

길바닥에 공손하게 신발을 벗어놓고

더러는 울며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아이들도

신발을 벗어놓고 간다

 

우리집 신발장에는 뒤축이 닳았거나

낡은 신발들이 가득하다

내가 그 어느 것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하는 건

그것들이 늘 내 삶의 무게를 견뎌주었고

아직 나와 같이 갈 데가 있어서다

 

장마당에서 /

우리나라 나이 잡수신 길들은

아직 장마당에서 만난다

장작을 여 내 고무신을 바꾸고

소를 내다 팔아 며느리를 보던 사람들

난전 차일 아래 약장수가 놀고

장돌뱅이들 이악스럽게 설쳐대도

농사꾼들은 해마다 낫과 쇠스랑을 벼리고

감자꽃 같은 아낙들 무릎마중을 하고

산 너머 집난이 소식 끝에 치마폭에 코를 풀던 곳

때로는 사는 게 팍팍하여

참나무 같은 어깨를 부딪치며

막걸리 사발에 가슴을 데우거나

우전머리에서 송아지 엉덩판 후려치며

공연히 음성 높이던 사람들 다 어디 가고

우리나라 울툴불퉁한 길들만

장마당에서 겨우 만나고 헤어진다

 

남대천

저무는 강변길로

아버지 같은 사람이 뒷짐 지고

혼잣소리하며 돌아온다

그이 외롭다고 따라오는 강

괜찮다 괜찮다 하며

흐르는 물소리 들어보아라

 

물은 대청봉 같은 큰산 지고 가거나

풀이파리들 꿈을 씻으며 흐르다가

서림 범부* 잘 아는 죽음들 불러내

동해로 가는데

한세상 돌아온 연어들은

다시 산으로 들어가는구나

 

누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마을의 어둠속에서 송침*을 한다

세상은 이미 낡았어도

이 물에 오는 아이들 피를 씻고

맑은 날 양양 여자들이

그들 삶을 옥양목처럼 바래 너는 강

 

슬픔도 꽃도 지천인데

산 내다버리고 오는 물처럼

누가 다시는 세상과 싸우지 않겠다며

늙은 소 같은 어둠을 앞세우고 돌아오는데

다 안다 다 안다 하며

물소리가 따라오고 있다

*서림, 범부는 남대천 상류에 있는 마을

*송침; 양양 지방에서 아이를 낳으면 추녀 끝에 꽂는 소나무가지

 

단풍 /

나무는 할 말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잎잎이 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다

봄에 겨우 만났는데 벌써 헤어져야 한다니

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 뚝뚝 흘리며

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밥상을 버리며

오래 받아 먹던 밥상을 버렸다

어느날 다리 하나가 마비되더니

걸핏하면 넘어지는 그를 내다 버리며

어딘가 갈 데가 있겠지 하면서도 자꾸 뒤가 켕긴다

아이들이 이마를 맞대고 숙제를 하고

좋은 날이나 언짢은 날이나 둘러앉아 밥을 먹었는데……

남들은 다 어떻게 살든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하고 또 하는 잔소리에

아이들은 눈물밥을 먹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아내는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고

딱하다는 눈총을 주기도 했지

나는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가족들에게, 실은 나 자신을 향하여

쓸데없는 호통을 치기도 했지

그러나 한끼 밥을 위하여 종일 걸었거나

혹은 밥술이나 먹는 것처럼 보이려고

배를 있는 대로 내밀고 다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속옷 바람으로 둘러앉아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웃던 일들을

그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래 받아 먹던 밥상을 버렸다

그러나 그가 어딜 가든 나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안다

 

아들과 함께 보낸 여름 한 철

아들과 천렵을 한다 다리 밑에서 웃통을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소주를 마시며

나도 반은 청년 같았다

 

이제사 말이지만 나는 어려서 면서기가 되고 싶었다

어떤 때는 벌레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시인이 되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

아들아, 시인에 대해 신경 좀 써다오

 

저 빛나는 어깨와 한 소쿠리는 되는 사타구니

아들의 것은 다 내가 힘들여 만들었는데

아직 새것이다

근사하다 내가 저 아름다운 청년을 만들다니……

 

내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전에

어른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했을 때

나는 슬퍼했다

지금도 외로울 때면 그 생각을 한다

인터넷을 믿는 아들은 그런 슬픔을 모르겠지만

 

아직 세상에는 내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가진 게 별로 없기 때문인데

다행이다

그래도 아들에게는 천지만물을 거저 물려주었으니

고맙게 여기고 잘 쓸 것이다

 

세월을 건너가느라 은어들도 엄벙덤벙 튄다

저것들은 물이 집이다

요즘도 다리 밑에다 애들을 버리긴 버리는 모양인데

알고 보면 우리가 사는 이 큰 별도 누군가 내다 버린 것이고

긴 여름도 잠깐이다

 

한 잔 받아라

 

고래 아버지

아버지는 고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옛날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았다고 했다

나도 고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 자연교과서에서나 보다가

티브이가 나오며 겨우 보았는데

크고 힘차고 신비스러웠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작았다

아버지도 실제 고래를 보았더라면

옛집 자랑을 그렇게 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걸핏하면

 

고래등 같은 집을 들먹였던 것은

우리나라 모든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식민지를 머슴처럼 살고 나서

집은 전쟁으로 불타버리고

여름 제사에 이밥을 먹으면

 

배탈이 날 정도로 가난했지만

우리가 그래도 밥술이나 먹었다거나

본래 이렇게 살 가문이 아니라는 거였다

멀리 있거나 보지 못한 것은 대부분 아름답다

아버지도 고래가 되었다

 

제삿날 저녁 /

장작을 집어넣을 때마다

불꽃들이 몸서리치며 튀어오른다

서로의 몸뚱이에 불을 붙이면서도

저렇게 태평스러운 불길들

가마솥의 물이 끓는다

뜨겁다고 끌어안고 아우성이다

저것들도 언젠가 얼음이 되리라

지난날 어머니와 내가

나란히 앉았던 아궁이 앞에

오늘은 아들과 함께

하염없이 불꽃을 바라본다

우리는 저 불꽃 속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혹은 물에서 왔을까

장작불 앞에서

술 취한 사람처럼 벌건 얼굴로

끓는 물소리를 듣고 있는데

뜬김 자욱하게 서린 부엌 안에

우리말고 또 누가 있는 것 같다

 

산속에서의 하룻밤 /

해지고 어두워지자

산도 그만 문을 닫는다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큰 바위들도 팔베개를 하고

물소리 듣다 잠이 든다

 

어디선가 작은 버러지들 끝없이 바스락거리고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새들은 몇 번씩 꿈을 고쳐 꾼다

 

커다란 어둠의 이불로 봉우리들을 덮어주고

숲에 들어가 쉬는 산을

별이 내려다보고 있다

 

저 별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저항령 어둠속에서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별을 쳐다본다

 

샛령을 넘으며 /

영을 넘는다

 

동해 어염 지고

인제 원통 바꿈이 다니던 사람들의

길은 지워지고

고래등처럼 푸른 영만 남았는데

이렇게 험한 곳에서도

나무들은 문중을 이뤘구나

 

북설악 한여름에 무슨 잔치가 있었는지

골짝 물마다 얼굴이 벌건 가재들이 어슬렁거리고

벙치매미도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비탈이 험한 곳일수록 꼿꼿한 나무들이

그들 말로

오늘은 꽤 지저분한 짐승 하나가

지나간다고 하는 것 같은데

 

물소리가 얼른 지우며 간다

 

그곳 /

나무들도 엉덩이가 있다

새벽 숲에 가면 군데군데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날 아침은 산이 향기로 가득하다

 

내 사는 설악산의 엉덩이는 얼마나 깊고 털이 무성한지

내 그것과는 감히 견줄 수가 없다

또 어떤 날은 미시령을 넘어가며

달도 엉덩이를 보일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답고 섹시해서

나는 어둠 속에서 용두질을 할 때도 있다

 

모든 것들은 엉덩이가 있고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왔는데

하늘은 발딛을 데가 없으므로

더러 구름이나 물새를 보내거나

오줌 소나기로 강을 닦아 놓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비춰 보고는 한다

 

/

수타사터 논 속의 탑에게

 

한때는 절 받고

돈도 받았겠지

이름 있는 날이면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아무개와 같이 살게 해달라고

숱한 사람들이 찾아와

원을 빌었겠지

 

절이 가난했던지

지키지 못할 약속이 너무 많았던지

어느날 부처는 산을 내려가고

탑이 혼자 그 책임을 다 졌는데

 

천년도 넘은 세월이 지나고

온몸을 거의 부수고 나서야 그는

겨우 논물에 비치는 제 몸속의 탑을

조용히 바라보는 거였다

 

하나뿐인 별에서 /

이 별은 너무 몸이 무겁다

특히 아메리카나 유럽 쪽으로 돌 때면

별은 망가질 듯 삐걱거린다

쓸데없이 가진 게 많아서 그럴 것이다

지구라는 별은 원래 조금 삐뚜름하게 걸려 있는데

한족에만 자꾸 짐이 실리면 아주 기울어서

어느날 중심을 잃고

어둠속으로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미 무역센터 빌딩 같은 것도 그래서 무너지는 것이다

이 별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황폐한 땅들은 갈아엎고 땅콩을 심거나

한 만년 묵밭으로 쉬게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별이 견딜 수 있을지

오늘밤도 별은 물레방아처럼

삐거덕거리며 돌고 있다

 

성자(聖者) /

곡우 무렵 산에 갔다가

고로쇠나무에 상처를 내고

피를 받아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도

무엇이 모자라서 사람들은

나무의 몸에까지 손을 집어넣는지,

능욕 같은 그 무엇이

몸을 뚫고 들어와

자신을 받아내는 동안

알몸에 크고 작은 물통을 차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그가

내게는 우주의 성자처럼 보였다

 

한계산성에 가서 /

그해 가을 한계산성 깊이 들어갔다가

나무 이파리 덮고 누운 토끼의 주검을 보았다

희고 가늘게 육탈된 뼈를

그의 마른 가죽이 죽어라고 껴안고 있었는데

그 겁 많던 눈이 있던 자리에

어린 상수리나무가 집을 짓고 있었다

 

나무뿌리가 조금씩

조금씩 몸속으로 들어올 때

그는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생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누군가에게 나를 내주어야 할 때가 온다면

나도 웃음을 참으며

나무에게 나를 내주고 싶다

벌레들에게 몸을 맡기고 싶다

 

싸움 /

여러 해 전이다.

내설악 영시암에서 봉정 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와 등칡넝쿨이

엉켜 붙어 싸우고 있는 걸 보고는

귀가 먹먹하도록 조용한 산중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한판 싸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싸움은 저쯤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산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듯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다만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저들은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거나

밤낮없이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인데

올 여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누군가 넝쿨의 아랫도리를 잘라

전나무에 업힌 채 죽어 있었다

나는 등찱넝쿨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시 파는 사람 /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

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데다

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

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

일년에 열 편쯤 팔면 잘판다

그것도 더러는 외상이어서

아내는 공공근로나 다니는 게 낫다고 하지만

사람이란 저마다 품격이 있는 법.

이 장사에도 때로는 유행이 있어

요즘은 절간 이야기나 물푸레나무 혹은

하늘의 별을 섞어내기도 하는데

어떤 날은 서울에서 주문 오기도 한다

보통은 시골보다 값을 조금 더 쳐주긴 해도

말이 그렇지 떼이기 일쑤다

그래도 그것으로 자동차의 기름도 사고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는데

가끔 장부를 펴놓고 수지를 따져보는 날이면

세상이 허술한게 고마워서 혼자 웃기도 한다

사람들은 내 시의 원가가 만만찮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우주에서 원료를 그냥 퍼다 쓰기 때문에

팔면 파는 대로 남는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시 파는 집 간판을 내리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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