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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동해남부선

by 이성근 2023. 9. 17.

개화산에서 / 박철

강변여관 / 김명기

저 서평 / 성윤석

/ 정희성

행복 / 박영희

보석달 / 이정록

도둑같다 잡초들 / 정진규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 / 송경동

도루묵구이 / 김창균

동해남부선 / 백무산

부역사건 혐의자 희생 지역 / 김명기

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 사는가 2 / 허수경

내가 처음 본 아름다움 / 송진권

자전거의 연애학 / 손택수

늙은 느티나무에 들다 / 곽효환

희망이란 것 / 이규리

그에게 전화를 걸어주고 싶었다 / 맹문재

스무 살 / 문정희

고독사에 대한 보고서 / 공광규

소년 / 허연

지퍼헤드 2 / 이산하

소나기 지나간 여름날 / 송진권

우족탕 한 그릇 / 이덕규

추전역에서 / 박영희

 

 

개화산에서 / 박철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

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

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

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나가기도 하니

 

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

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

내가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오자

산은 슬며시 나의 옷깃을 잡으며

곧 볍씨 뿌리는 들판이 될 것이라 귀띔을 한다

 

따뜻한 바람을 모아 군불 지피는

끝내 고향이 되어버린 아우 같은 산

머리 긁적이며 돌아보니 오솔길은 발장난을 치고

묵은 꽃향기 수북이 손등처럼 쌓여 있다

 

 

강변여관 / 김명기

 

이른 봄 먼 여관에 몸을 부렸다

움트지 못한 나뭇가지가

지난겨울 날갯죽지처럼 웅크린 저녁

피는 꽃 위로 어둠이 포개지고

흐르는 물결 속으로 달빛이 스민다

모든 게 한 번에 일어나는 일 같지만

오랜 생을 나눠가진 지분들이 서로 허물을

가만히 덮어준다 경계를 지우며 살 섞는 시간

낯선 세상에 와 있다는 건

욕망의 한 부분을 드러내

무던히 참았던 육신을 들어내는 일

시시해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아

허물을 격려하지 못해 멀어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잊어버린 주문처럼 쓸쓸한 이름

가끔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는

측은한 저녁이 올 테지

허물 대신 온기 없는 낡은 침대와

살을 섞으며 시든 불화의 목록에서

견디지 못해 그어버린 경계를

그렇게나마 지워 보는 것이다

 

 

저 서평 / 성윤석

 

한 번 만나고 안 만나주는 여자를

선창 사내가 찾아가는 길처럼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는데

바다 너머로 노을이 늘어진 스웨터처럼 퍼졌다.

모든 일이 옛일이며, 어둠인데

해는 오늘도 옛사람의 붉은 옷을 내보이는구나.

가자 가자 가자 잿빛 물길에 가라앉는 여자의 눈빛이

다 주고도 생이 지겨워

바람에 펄럭이는 노숙자의 옷깃에서

한 노독이 다른 노독을 불러

노래하게 하는 수변 공원을 보게 하는구나.

밤은 이렇게도 오는구나.

주점의 문이 열리면서

밤은 방파제를 향한 불빛에 차곡차곡

엎어지고 엎어지는구나.

한 번 만나고 안 만나주는 여자를 찾아가는 길처럼

나는 산복도로 칠십 계단을 다시 오를 것이나, 밤은 왔고

, 이제 누가 다시 저 어둡고 두터운 책을 펼쳐

서러움을 배울 것인가.

 

 

 

/ 정희성

 

전쟁통에 폭탄이 쏟아지는데

아빠는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납작 엎드리고

엄마는 두 아이 머리를 감싸 안고 엉거주춤 엎디었다고

이승원 교수가 말머리를 꺼내자

 

엄마는 바다와 동의어라고

신달자 시인이 한마디 거드는

 

사이

 

어려운 시절 저 살기 바쁘다고

암탉처럼 후배들을 품어주지 못한 게

나는 못내 아쉬웠다고

 

 

행복 / 박영희

 

저녁상 물리고 옥상에 오른다

 

며칠 전 통닭에 묻어온 은빛돗자리를 깔고 세 식구 누우니 시멘트 바닥은 장작 지핀 아랫목처럼 뜨끈뜨끈하고 칠월 저녁바람에 빨랫줄은 살랑살랑 그네를 탄다

 

저어기 저것은 지구의 외아들 다알!

저어기 저것은 우주의 미인 그음성!

 

빈둥대는 한량으로 누운 나는 나하고 눈맞춤하자며 깜빡거리는 머언 나라의 별만 헤면 된다

 

 

보석달 / 이정록

 

식 올린 지 이 년

삼 개월 만에 결혼 패물을 판다

내 반지와 아내의 알반지 하나는

돈이 되지 않아 남기기로 한다

다행이다 이놈들마저 순금으로 장만했다면

흔적은 간데없고 추억만으로 서글플 텐데

외출해도 이제 집 걱정 덜 되겠다며 아내는

부재와 평온을 혼돈하는 척, 나를 위로한다

 

농협빚 내어 장만해준 패물들

빨간 비단상자에서 꺼내어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양파껍질인 양 신문지에 둘둘 만다

버려야 할 쓰레기처럼 밀쳐놓고 화장을 한다

거울에 비친 허름한 저 사내는 누구인가

월급날이면 자장면을 먹고 싶다던

그때처럼 화장시간이 길다

동창생을 만나러 나갈 때처럼

오늘의 화장은 서툴러 자꾸 지우곤 한다

 

김칫거리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꽁무니에 걸터앉아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콧노래 부르며 노을이 이쁘단다

금 판 돈 떼어 섭섭해 새로 산

알반지 하나를 쓰다듬으며 아내는

괜히 샀다고 괜히 샀다고

젖은 눈망울을 별빛에 씻는다

오래 한 화장이 지워지면서

아내가 보석달로 떠오른다

 

도둑같다 잡초들 / 정진규

 

늦여름 되어서야 찾아간 빈집 녹슨 자물쇠를 따고 들어선 집 내 떠나 있는 동안 제멋대로 轄據할거턴, 도둑같다 잡초들, 햇빛도 바람도 빗줄기도 마음놓고 드나들었으리 잘했다 자물쇠가 가둘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물쇠가 잠글 수 있었던 것은 자물쇠뿐이었다 할거턴 잡초들, 전같으면 가차없이 모두 뽑아버렸겠으나 이번엔 그대로 두었다 비인 집에 머물러 뿌리를 내려준 게 그게 그저 고마웠다 군불도 같이 때고 잘 놀았으며 등불 켜고 저녁 상도 겸상했다 나도 그들안에 할거케 된 것일까 野性야성이 눈뜨는 저녁, 할거란 말씀이 몸을 씩씩하게 했다 도둑들과 놀았다 집은 제 마음대로 할 거 할 수 있어야지 사람이 집을 거느려야지 그들과 나는 順番순번이 다르지 않지 내 집이 따로 있는 게 아니지 저녁비 한 줄금, 夕佳軒* 집모퉁이 활짝 핀 배롱나무 꽃, 이슬 머금은 꽃가지들이 화안히 나를 기웃거렸다

 

* 夕佳軒석가헌: 내 고향 草堂(, 張灝學山堂印譜에서 빌림)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 / 송경동

 

이제 그만 그 거대한 무대를 치워주세요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게

작은 사람들의 작은 테이블로 이 광장이 꽉 찰 수 있게

 

이제 그만 연단의 마이크를 꺼주세요

모두가 자신의 말을 꺼낼 수 있게

백만개 천만개의 작은 마이크들이 켜질 수 있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친절한 안내를 멈춰주세요

나의 시간을 내가 선택할 수 있게

광장이 스스로 광장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게

 

전체를 위해 노동자들 목소리는 죽이라고

소수자들 목소리는 불편하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부분들이 행복해야 전체가 행복해요

 

어떤 민주주의의 경로도 먼저 결정해두지 말고

어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한계도 먼저 설정해두지 말고

오늘 열린 광장이 최선의 꿈을 꿔볼 수 있게

 

광장을 관리하려고 하지 말고

광장보다 작은 꿈으로 광장을 대리하려 하지 말고

대표자가 없다는 말로 오늘 열린 광장이

어제의 법과 의회 앞에 무릎 꿇지 않게 해주세요

 

위만 나쁘다고

위만 바뀌면 된다고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나도 바꿔야 할 게 많아요

그렇게 내가 비로소 나로부터 변할 때

그때가 진짜 혁명이니까요

 

 

도루묵구이 / 김창균

 

나도 친구도 술집 아줌마도

오래된 연탄 화덕에 둘러앉아 있다.

뻘겋게 단 석쇠 위에

알 도루묵을 한 마리씩 얹으며 나는

비늘도 없이 만삭의 몸으로 헤엄쳐온 그 몸에

왕소금 한 줌 뿌려준다.

한때는 바닷물에 젖 물리며 살았을

저들의 배를 들여다보며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데

순간 붉은 알들 툭툭 배 밖으로 튀어나온다.

저렇게 알집을 통째로

몸 밖에 드러내는 일이 예사롭지 않아

거기 내 한 몸 얹어도 가라앉지 않을 것 같으니

그믐을 갓 넘긴 달이 뜨는 겨울밤은

뼈째 휘어진 몸을 뒤집으며

나도 친구도 술집 아줌마도

속 환하게 내놓고 밤 늦도록 술을 마신다.

 

 

동해남부선 / 백무산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서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정말,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 옆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내가 예전에 이곳 바닷가에서 일하던 때

소나기에 갇힌 대합실에서 오도가도 못하던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 빌려주던 아이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데

손은 터무니없이 크고 거칠었던 아이

열일곱이랬고 삼양라면에 일 다녔댔지

우산을 돌려주려 갔던 자취방 앞에서

빵봉지를 들려주다 잡고 놓지 못했던 손

누가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는 떠나는데

봄볕이 저 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데

누가 제발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부역사건 혐의자 희생 지역 / 김명기

 

어둠 짙은 험한 고개를 넘어오는데

골짜기 가득 개구리 운다

어둠 돋우는 저 소리를

왜 운다고 말할까

개구리가 울고 새가 울고

멀리서는 산짐승이 운다고

사람 아닌 것들의 기쁨은 알 길 없고

거두지 못해 넘쳐 버린 슬픈 연민을

저들에게 떠넘겨 버린 건 아닐까

그런 우리가 가여워

곡비처럼 자꾸만 우는지도 몰라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부질없이

서로를 헤아리는 밤

 

어디선가 또 산 꿩이 운다

 

 

 

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 사는가 2 / 허수경

 

귀가길 골목길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나도 아버지도 술에 취해 있다

 

아버지 미국이 우리의 숨통을 조여요

얘야 월급을 다 못 타왔다

 

아버지 군부독재가 우리의 먹을 양식을 빼앗아가요

얘야 너의 어머니 관절염은 어쩌지

 

아버지 분노가 눈 앞을 막아요

그들이 몰려와 동료들을 개처럼 끌고 갔어요

얘야 숱한 동료들이 사라져간다

나는 쓸쓸하다 다만

무력할 뿐 무력한 세계에서

건강할 뿐

 

대문을 연다

다녀왔습니다

 

골목길에 그림자를 남겨두고

아버지는 장년의 그림자를

나는 청년의 그림자를

 

그리하여 우리는 불안하다

집으로 돌아왔음에도 자꾸

 

 

내가 처음 본 아름다움 / 송진권

 

쇠뿔에 고삐 감아 산에다 풀어놓고 나는 골짜기 돌이나 뒤지며 가재나 잡던 것이었는데요 그때쯤이면 앞뒷산 능선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옴팡골 밖으로 풀어져나가는 것이었는데 워낭 소리가 희미해지다가 드디어 가뭇없어지는 데쯤에서 나는 소를 찾아 나서는 것인데요 잡았던 가재 도로 물에다 풀어놓고 주근깨 송송 박힌 산나리꽃을 쥐어뜯으며 네미 네미 소를 불렀던 것인데요 어둑발 내리는 산골짜기를 허위허위 오르노라니 소는 어디로 갔는지 당최 코빼기도 볼 수 없던 것인데요 희미하니 들리는 워낭 소리를 따라 껑충한 원추리꽃 분지르며 넘어갔을 적엔 퍽이나 커다란 산초나무를 만났던 것인데요 웬 놈의 호랑나비떼가 산초나무에 그리 빼곡하니 앉았는지 더러는 훨훨 날아다니는 놈도 있고 더러는 앉아서 교접하기도 하며 산초나무가 이룬 한세상 꽃밭에다 죄다 입을 박고 꿀을 빠는 것인데 하 그런 장관이 없어서요 나는 소를 찾을 걱정도 다 잊어버리고 신령한 뭔가를 보듯 황홀하게 산초나무를 우러르며 주저앉았던 거였는데요

 

 

 

자전거의 연애학 / 손택수

 

홀아비로 사는 내 늙은 선생님은 자전거 연애의 창안자다 그에 따르면 유별한 남녀 사이를 자전거만큼 친근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없다 일단 자전거를 능숙하게 탈 줄 알아야 혀 탈 줄 안다는 것, 그건 낙법과 관계가 있지 나는 주로 하굣길에 여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점찍어 둔 가방을 낚아채는 방법을 썼어 그럼 제깐 것이 별수 있간디, 가방 달라고 죽어라 뛰어오겠지 그렇게만 되면 만사가 탄탄대로라 이 말이야 지쳐서 더 뛰어오지 못하는 여학생 은근슬쩍 뒤에 태우고 유유히 휘파람이나 불며 달려가면 되는 것이지 뒤에서 허리를 꼭 잡고 놓지 못하도록 약간의 과속은 필수항목이고, 그렇게 달려가다 갈대숲이나 보리밭이 나오면 어어어 브레이크가 말을 안듣네 이를 어째 가능한 으슥한 곳을 찾아 재깍 넘어지는거야 그리고는 아주 드러누워버리는 것이지 어째 허리가 펴지질 않는다고, 발목이 삐끗했나보다고, 아무래도 여기서 쪼깐 쉬어가는 게 낫겠다고..... 아울러 이 모든 일엔 품위가 있어야 혀 서화담이 황진이 만나듯인 아니더래도 서규정*이 직녀를 만나듯은 격이 있어야 된단 이 말씀이지 이것이 요즘 너희 젊은것들 잘 나가는 오토바이나 스포츠카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자전거 연애라는 것이야 허허허 좋은 세상이란 그런 것이지 젊으나 젊은것들이 불알 두 쪽만 갖고도 연애를 걸 수 있는 세상이지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한 말씀 더 남기신다 그런데 그 맛에 너무 깊이 빠지면 못써, 잘못하면 나처럼 이 나이껏 혼자서 살아야 할 테니께.

 

*서규정 직녀에게, 빛남출판사 1999.

 

 

늙은 느티나무에 들다 / 곽효환

 

언제부터였을까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을

동리의 정자를 품은 느티나무

사방으로 가지를 곧게 뻗어

무성한 그러나 인적 없는 여름을 떠받치고 있다

비늘처럼 껍질이 듬성듬성 떨어져 나간

늙은 느티나무 그늘에

몸 들이고 기대었던 사람을 생각한다

그를 닮고 싶었던 더러는 그렇게 살았던

 

바람이 전하는 말과

시간이 쌓아둔 흔적,

무수히 드리웠다 사라지는 삶들을

그는 오랫동안 켜켜이

몸 안에 쌓아두었을 것이다

 

얼음처럼 투명한 세포들이 쌓은 나이테

이제 그는 단단한 풍경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쉽게 흔들리지도 그렇게

일찍 지지도 그렇게

흘러가지도 않을 것이다

 

 

희망이란 것 / 이규리

 

부레옥잠은 팔뚝에 공기주머니 하나 차고 있다

탁한 물에서도 살 수 있는 건

공기주머니 속에 든 희망 때문이다

가볍게 떠 있던 물 속 시간들

희망이 꼭 미래를 뜻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팔뚝에 희망 하나 차고 다닌 적 있다

잊을 수 없는 일마저, 건널 수 없는 세상마저

그 속에 밀어넣었던 적 있다

그런 희망이 텅 빈 주머니란 걸

 

언제라도 터뜨려 질 수 있는 눈물이란 걸

나는 몰랐을까

부레옥잠이 떠 있는 건

희망 때문이 아니다

속을 다 비워낸 가벼움 때문이 아니다

잎잎마다 앉은 한 채씩의 승가람

그 자리는 서늘해서 누구나

바람 소릴 노래처럼 안고 가는데

옥잠이란 이름에 부레 하나 더 얹은

쓸쓸한 감투가 그의 이름이듯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주고 싶었다 / 맹문재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아무 말도 않고 새끼를 잃은 짐승처럼 흐느꼈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큰 길가인데도 개의치 않고 구덩이를 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일까?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일까? 동료가 안전사고를 당한 것일까? 아니면 아내가 집을 나간 것일까?

나는 사내의 울음을 친구에게 온 연애편지를 훔쳐 읽듯 들어보고 싶었다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술에 취해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본 것처럼 뿔도 없고 가시도 없는 그를 흘끔거리며 피해 갔다

사내는 어디에 구호 신호라도 보내는 듯 전화기를 꼭 쥐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라도 걸어주고 싶었다

나도 작업복을 입은 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저렇게 운 적이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기를 바라는 월급쟁이들이 소 떼처럼 고향으로 몰려가는 추석 전날의 밤이었다

 

스무 살 / 문정희

 

스무 살은 나이가 아니라 눈부심이다

커피에 적시어 먹는 마들렌처럼

부드럽고 달콤하다가 그만 사라진다

눈만 크고 괜히 사나운 고양이같이 야옹거리며

별 하나를 캐 보려고

궁리하는 사이

스무 살은 산뜻한 돌림병처럼 왔다 간다

그 바람에 첫사랑이 스쳐 가는 것도 모른다

 

스무 살은 고귀한 보석을 거기 두고 온 것을 알고

남은 생애 동안

두 눈이 빠지도록 그리워하는 풀밭이다

날개를 펴서 미처 부딪혀 보기도 전에

자유보다 더 많은 상처를 증거처럼 남기고

얼떨결에 떠나 버린다

 

 

고독사에 대한 보고서 / 공광규

 

시골 재당숙이 혼자 살다 돌아가셨다

집안 역사교과서 한 권이

동네 이야기책과 지적도 한 책이

신명꾼 하나가 사라졌다

혈관부에 피가 돌던 굽은 나무 한 그루가

평생 동네를 떠나본 적 없는 말뚝 하나가 뽑혔다

매일 아침 열리던 대문이 며칠째 닫혀 있자

독거노인 둘이 방문을 열었다고 한다

산비탈에 황토 구덩이를 파놓고

대전으로 부검 받으러 떠난 시체를 기다리는 노인들

혼자 살다 죽으면

칼로 배가 갈려 한 번 더 죽어야 한다며

노을이 번질 때까지 투정하는 인부들

땅을 향해 몸이 자꾸 꼬부라지는 노인들이

겨우겨우 무덤 가까이에 친 천막에 올라와

고인이 나이롱 뽕을 좋아하고

'갈대의 순정'이 십팔번이었다고 회고했다

동네에 들어와 사는 타지 출신 중늙은이 몇과

시골노인들이 보는 앞에서 관을 들고

비탈에 올라 청태산 낙타봉을 좌향 삼아 심었다

동네회관에 내려와 저녁 먹고 술을 나누는데

재당숙이 보이지 않던 며칠간

자식들 대신 까마귀가 집 주위를 돌며

맑게 울다 떠났다고 했다

 

 

원폭수첩 3 / 허수경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김씨는

외상 없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고

외면했던 소녀는 히로시마에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후 칠년 뒤 원폭의 자죽은

김씨를 덮쳐

, 김씨도 트럭 꽁무니에 매달려 버려지고 있었습니다

조국처럼

 

살려주세요 난 아직 안 죽었어요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몇 번을 까무라치고 배를

움켜쥐고 마루로 기어나오면

칠흑 같은 어둠 저 너머

그 소녀가 실려가고 있었습니다

 

치료 한 번 못 받고 버림당한 김씨의

느티나무 건너 천수답 나락처럼

꺼멓게 말라가며 외치고 있었습니다

 

살려주세요 난 아직 안 죽었어요

조국처럼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

 

 

 

소년 / 허연

 

그 며칠 동안

세상의 슬픈 노래는 우리 동네에 다 있었다

옆집에선

키울 수가 없는 강아지들을

개장수에게 팔고 있었다

남은 강아지와 떠나는 강아지들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한참을 울어댔다

그 울음소리가 자꾸 들려서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간신히 통잠을 자기 시작할 무렵

진석이네 누이가

병원도 못 가보고 퉁퉁 부은 채 죽었다.

소년원에 갔던

동네 아이들 몇 명은

이만큼 커서 돌아왔다

 

복이라곤 없는 녀석들은

열여덟도 되기 전

폐를 앓기도 하고

손가락이 잘리기도 하고

아픈 아이도 낳고 그랬다

 

그 며칠

미군 부대서 흘러나온

낡은 오르골에선 매일 똑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여자애들 몇은 동두천으로 의정부로 갔고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는

싸늘한 평상에 누워 오지 않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구름은 달아나기만 했고······

 

 

 

지퍼헤드 2 / 이산하

 

어느날 우연히 그랜토리노라는 영화를 보는데

한국전쟁 참전용사로서 무공훈장을 받은 주인공 이스트우드가

자기 차를 훔치려는 동양계 소년에게 M1개런드 소총을 겨누며

"릴렉스, 찌퍼헤드"라고 소리쳤다.

내 귀엔 '쫄지 마, 이 찌퍼대가리야'라는 뜻으로 들리면서

오래전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청년의 술주정이 벼락같이 꽂혔다.

'이 찌퍼대가리 같은 간나새끼---'

법 없이도 산다는 사람의 외로움을 스스로 달래기라도 하듯

혼자 폭음을 할 때마다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지퍼헤드'(Zipperhead)가 한국전쟁 때 미군지프에 깔려 죽은

북한 인민군들 머리와 몸의 바퀴자국이 마치 지퍼무늬 같다고 해서

플래툰영화에도 나오듯 미군이 한국인들을 경멸할 때 쓰는

가장 잔인하면서도 가장 슬픈 말이란 걸 한참 뒤에 알았다.

 

오늘은 내 구속 충격으로 심장마비로 떠난 아버지의 기일이다.

난 장롱 깊이 묻어둔 청년의 색 바랜 미군잠바를 꺼냈다.

낡고 녹슨 지퍼가 열려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벌어진 상처를 꿰매듯 지퍼를 잠갔다.

그러자 내 머리 위로 미군지프들이 지나갔다.

바퀴자국을 꾹, 꾹 눌러 새기듯 천천히 지나갔다.

난 촘촘한 휴전선 철조망 같은 지퍼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이 찌퍼대가리 같은 간나새끼---'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퍼 전체를 면도날로 도려내 천천히 소지처럼 불태웠다.

 

 

 

소나기 지나간 여름날 / 송진권

 

길마다 미꾸라지 올챙이 박실박실 기어나왔지

뻐끔뻐끔 입을 벌린 채 튀어나왔지

소나기에 섞여 내려온 피라미 붕어 새끼

길가 웅덩이에서 놀았지

험상궂은 산은 안개를 쓰고

서리서리 열두발 늘인 용을 놀게 했지

해와 달이 한 하늘에서 놀고

지지고 볶고 놀았지

사내와 계집이

사람과 짐승이 한 하늘에서 놀았지

애초에 구분된 것도 없고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한 말을 하고

하늘이고 땅이고 따악 맞붙어서

우물이며 산골작 도랑마다 용이 오르고

남에서는 주작이 북에서는 현묘가 놀았지

꼭 오늘만 같았지

길바닥 웅덩이마다 물고기가 뛰어오르고

산천초목 다 눈을 번히 뜨고

굼실굼실 승천하는 용을 보았지

무지갯빛 꼬리의 봉황이 날아다니는 걸 보았지

 

 

우족탕 한 그릇 / 이덕규

 

우족탕 진국 위에

별보다 많은 발자국이 둥둥 떠 있네

빈 수레를 끌고

진흙 같은 밤하늘을 떠도는

발자국들

어디쯤 갔나

파장 무렵

황소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어스러기 수소 한 마리

깡마른 뒷발목이

꿈결인 듯

자꾸 헛발질을 해대네

그 먼길 한 그릇

단숨에 후루룩 떠먹으니

뜨거운 목젖 아래

함부로 밟힌 들꽃 향기 진동하네

 

 

 

추전역에서 / 박영희

 

돌아오는 이보다

떠나는 이 더 많은

역으로 가는 길이 숨차다

 

가던 길에 짓밟히고

오던 길에 짓밟혀 신음을 깨물고도

아프다는 한 마디 없이

텅 빈 길 홀로 늙어가는

가장 높은 곳에서

기다림 하나로 일생을 바친

 

세상의 모든 역은 어머니를 닮았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 855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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