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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곽재구시인의 詩

by 이성근 2023. 11. 4.

도솔암 풍경/ 연심이 고모/ 서울 세노야 / 송화강/ 그리움 / 조경님

목련사설 / 자두꽃 핀 시골길/ 해남 / 봉선화/ 징검다리 2/봄 편지/세한도

모래톱 이야기/ 나한전 풍경 /참 맑은 물살 /봄언덕

약천리 허상갑씨가 굴비 식사를 하고 난 뒤 /전장포 아리랑

화개 장터/ 사평역에서

조선의 눈동자 /별똥 떨어진 곳/ 따뜻한 편지/ 기다림 / 김치찌개평화론/ 깡통

 

 

도솔암 풍경

 

칡꽃 향기 달빛 쏟는

선운사 도솔암에서 하룻밤 비럭잠을 잤습니다

밤늦게 최승자의 시집을 읽는다는 처녀보살은

광주에서 왔다는 말 듣고서

내 행장에 최루탄 냄새 나더라고 웃었습니다

지장보살도 산 아래 내려가면

최루 가스에 울먹일 것이라 말했더니

방금 친 인절미 한 접시 따뜻하게 내왔습니다

밤 깊어 머슴새 울음 잠들고

창문 열면 노오랗게 불 밝힌 선방 하나

계곡물 소리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연심이 고모

 

연심이 고모 아는 사람 없다

그 아들 두칠이 아는 사람 없다

토벌대에 잡힌 산사람 남편 구하기 위해

연심이 고모 토벌대장에게 몸 주었다

큰 애기 적부터 몸달았던 만수

웃으며 긴 밤 내내 연심이 고모 껴안았다

잡혔다던 남편 석주관 계곡 시체로 발견되고

남편 대신 열 달 만에 아들 하나 얻었다

연심이 고모 슬픔 북두칠성처럼 빛났다

연심이 고모 섬진강 물가에서 두칠이와 살았다

아버지 바뀐 두칠이는 어릴적부터 푼수

나이 서른 되어서야 광주 건축 공사장 일 나갔다

잡부 일 보름 만에 두칠이 광주에서 죽었다

바보 두칠이 금남로에서 왜 사람 패냐고

공수대원에게 달겨들다 칼맞아 죽었다

부처님 오신 날에 피 쏟으며 죽었다

연심이 고모 미쳐 뛰다 줄초상 났다

석주관 섬진강 물가에 피 쏟으며 죽었다

칡꽃 향기 얼얼한 늦여름 옛 지아비

쓰러진 그 자리에 농약 먹고 죽었다.

 

 

서울 세노야

 

오 년 만의 연락에도

시 쓰는 동무들 모이지 않아

깊게 술 마신 밤

어기어차 노 저어 상도동 산 1번지

강형철네 포구로 간다

휘몰이 밤물길 젓고 또 저어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마지막 물굽이

자주달개비꽃 빼어 닮은 형철이 각시는

술상 보러 새로 두시 밤물길 눈 비비며 가는데

세노야

멸치잡이 그물 온밤내 던져봐도

멸치꼬랑지만한 금빛 시 한 줄 서울의

가을바다에 걸리지 않고

세노야

달은 떠서 산 넘어 가는데

우리 갈 길 아득하고.

 

 

 

송화강

 

강물 위

해당화 핀 조선족 마을이 있다

곰취나물에 수수밥을 먹은 노인이 쟁기질을 한다

소는 목에 자운영 꽃목걸이를 둘렀다

이러 이러

자러 자러

모국어와 워낭 소리가 섞여 자운영꽃을 피운다

파랑새 한마리가 가끔 마을에 들르는데

혼자 사는 노인이 밥상머리에

강낭콩 몇알을 놓아둔다고 한다

 

 

그리움

 

 

달빛

하얀 밤

 

두엄자리 곁

분꽃 피었다

 

오래전

당신이 똥 눈 자리

그 자리가 좋아서

나도 쭈그리고 앉아

똥 누었지

 

함께 눈

세월의 똥

 

그립고 아득하여라

때로는 별이 잠긴 호수가 되고

 

불칼이 되고

하얀 물고기가 되고

 

당신이

똥 누던 소리 속으로

분꽃처럼 우수수 별들 쏟아지고

 

 

조경님

 

늦은 밤 남면 가는

시외버스 차창에서

고단한 네 하현의 눈썹을 보았구나

봉숭아 물든 손톱 너머로

고향집 마당 가득 푸른 하늘은 펼쳐 있고

가을걷이 끝난 들판 억새밭 위로

희게 웃는 식구들의 얼굴도 보이겠지

감잣대를 엮어 말리는 엄마 곁에서

동생들은 또 지난여름 산사태를 생각할까

흙더미에 묻힌 아버지와 막내

자갈길에 버스는 자꾸 퉁겨 오르고

그때마다 깜박 깨어나는 네 졸음 속으로

덧없는 한 시대의 어둠과 슬픔은 밀려가고

차창 밖 어둠 속에 꽃을 던지는

마을의 도라지꽃 불빛이 스스럽다

여느 밤 충장로 거리에 나서면

가시내들은 엉덩이를 부풀린

목 짧은 바지에 퍼머넌트 히히덕거리고

무슨 잭슨 플록이다 카라얀이다 요란하지만

경님아 그것들이 지닌 영혼은

밤 버스에 깜박깜박 조는

고단한 네 일상의 눈썹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그것들이 떠들어 대는 피아노 협주곡은

오라잇 하는 네 발차소리보다 정직하지 못하고

그것들이 떠드는 무슨 비구상파 그림들은

네 손톱 끝 연연한 고향 하늘

봉숭아 빛 꿈보다 깨끗하지 못하다

늦은 밤 버스는 논길인 듯 고향 꿈길인 듯

졸며 흔들흔들 떠나고

네 졸음 틈틈이

땀 절은 동전 몇 개를 건네주고 내려서는

저 힘없는 사람들의 뒷등이 따스하다.

 

 

목련사설

- 김광석을 위하여

 

목련꽃이 피는 삼월이었다네

광주일고 동창생 몇 모여 꽃향기 마셨다네

죽은 광석이 생각 불현듯 떠올라

소주잔 나누다 말고 광석이 고향집 찾았다네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

텅 빈 세 칸 집은 낡고 쓸쓸하여

방금 분 봄바람에 쓸려 날아갈 것만 같았다네

곡수 받던 사람들 광석이 이야기에 눈물 글썽이네

그 자석 세상 효자고 수재였는디

앞산 뒷산 뭉게구름 산그늘도 가슴 울먹였다네

광석이 엄니 정리댁 소주 서 말 한숨에 마셨다네

울면서 지아비와 험한 세상 버리자고

군대 있던 작은아들 면회하고 열차에서 뛰어내렸다네

아이고아이고 무정한 세상

죽음조차 뜻대로 안되는구나

금촌 도립병원에서 정리댁 아들 대신 살아났다네

아들 모습 남아 있는 고향땅엔 돌아갈 수 없어

아픈 다리 두들겨 패며 임진강물 건넜다네

그곳 지뢰밭에 논농사 부쳐먹으며

발목지뢰야 발목지뢰야

이 내 발에 콱 밟혀라

죽은 내 아들 저승에서나 만나보자

하염없는 노랫소리 한 십 년 흘렀다네

광석이 고향집 다녀온 친구들 동창회 열었다네

목련꽃 시나브로 지는 교정 한 귀에

광석이 흉상 하나 세우고 싶었다네

검사도 되고 판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사장님도 되고 더러는 기업체의 중간 간부도 되어

동창생들 승용차 몰고 교정에 들렀다네

그 동창생들 추모사업 아무 흥미 없었다네

창밖은 목련꽃 피는 봄날이었다네

아가

무슨 잠이 이리도 깊으냐

깨어나 에미랑 말 좀 해보자

정리댁 한숨소리 목련꽃처럼 펑펑 피어났다네.

 

* 김광석. 1980521일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산화함. 당시 26세 법학도.

 

자두꽃 핀 시골길

 

우리고물상 지나

용당식물원 지나

낙원주유소 담장 위 노란 호박꽃

어린 태양의 축제 같아라

시가 찾아와 깜빡이등 켜고

길가에서 시 쓰는데 경찰이 달려오네

주정차 금지 구역 열심히 설명하는 젊은 경찰에게

면허증을 건네니

뭐 하셨소? 묻네

호박꽃이 좋아 시를 쓰는 중이었소, 하니

호박꽃이 좋으오? 또 묻네

아니오 평소엔 자두꽃을 좋아한다오

그가 천천히 면허증을 건네주며

다음번엔 자두꽃 핀 시골길에서 시를 쓰오, 하네

 

 

해남

 

산벚꽃 바람에 날린다

산수 공부 하는 1학년 아이들 목소리가 크다

딸기 두개 자두 세개를 접시 위에 놓아요 모두 몇개지요?

산더덕꽃 눈빛 초롱한 젊은 여선생님이 환하게 묻고

저요!

저요!

고물 경운기가 학교 담장 아래 지나간다

황톳빛 보리밭에서 보라색 햇살 냄새가 난다

처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던 봄날

사랑이 내게로 왔다

그것은 한줄의 시

피 냄새 없는 혁명이

꽃바람 속 불어왔다

 

 

봉선화

- 박은옥에게

 

남도 석성 안 마을

김봉길씨 돌각담 고샅길에는

여름 한철 아름다운 우리나라

왼갖 꽃들 다 피었는데

채송화랑 분꽃이랑 맨드라미랑 물봉선이랑

접시꽃이랑 호박꽃이랑 족두리꽃이랑 옥잠화랑

마음 착하고 얼굴 이쁜

우리나라 조선꽃들 다 피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이쁜 건

동무여 그대가 달빛 엮은 목소리로

손톱 끝에 물들인 봉선화꽃이라네

스스로 선택한 고통을 위해

먼 길 떠날 수 있음은 아름다운 일

쾡한 눈빛으로 이웃의 슬픔 곁에

스스로의 육신을 눕힐 수 있음은 더더욱 아름다운 일

동무여 밤 늦게 길을 걷다가

먼 마을의 불빛처럼 귀에 내려앉는

그대의 맑은 목소리

바라보면 아련히 흔들리는

별들의 춤 같기도 하고

세상 밖 오래 떠돌다 잠든

그애의 착한 어깨선 같기도 하고.

 

 

징검다리 2

 

강물 위에 초승달이 떴다

강물이 다가올 때마다 징검다리는 가슴이 뛰었다

강물이 초승달을 데려다주면 함께 세상 끝까지 갈 것 같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곳에 당신이 머물기 때문이다

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다

날이 새면 제비꽃 한 송이가 강물을 따라온다

초승달이 머물던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당신은 내게 기약 없는 입맞춤을 한다

 

 

봄 편지

 

강에 물 가득

흐르니 보기 좋으오

꽃이 피고 비단 바람 불어오고

하얀 날개를 지닌 새들이 날아온다오

아시오?

바람의 밥이 꽃향기라는 것을

밥을 든든히 먹은 바람이

새들을 힘차게 허공 속에 띄운다는 것을

새들의 싱싱한 노래 속에

꽃향기가 서 말은 들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새들의 노래를 보내오

굶지 마오

우린 곧 만날 것이오

 

 

세한도

 

조합신문에 내 시가 실린 날

작업반 친구들과 소주를 마셨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친구들은

매듭 굵은 손으로 석쇠 위의

고깃점들을 그슬려주었지만

수돗물도 숨차 못 오르는 고지대의 전세방을

칠년씩이나 명아주풀 몇 포기와 함께 흔들려온

풀내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나는 또 쓰고 싶다.

 

방안까지 고드름이 쩌렁대는 경신년 혹한

가게의 덧문에도 북풍에도 송이눈이 쌓이는데

고향에서 부쳐온 칡뿌리를 옹기다로에 끓이며

아내는 또 이 겨울의 남은 슬픔을

뜨개질하고 있을 것이다.

은색으로 죽어 있는 서울의 모든 슬픔들을 위하여

예식조차 못 올린 반도의 많은 그리움을 위하여

밤늦게 등을 켜고

한 마리의 들사슴이나

고사리의 새순이라도 새길 것이다.

 

 

모래톱 이야기

- 화개에서

 

스무해 전엔

바람이 산을 업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네

 

산을 업은 바람이

섬진강 모래밭을 오래오래 달려

황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네

모든 것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 시절에도

바람과 산이 한데 어울려

섬진강 물 속으로 깊게 잠기는 시간들을

알지 못했네

 

물새들이 물수재비를 뜨고 있었네

사람들이 작은 이야기들의 불씨들을

산마을마다 낮은 목소리로 지피는 동안

모래틈에 스민 물방울들이

영혼의 피리를 불고 있었네

 

스무해 전엔 산이 바람에게

'널 사랑해' 하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네

산이 바람의 어깨 위에

자주달개비꽃 한 송이 가만히 얹어주는

모습을 보지 못했네

 

보지 못했네

얼마나 많은 산이 바람을 위하여

꽃을 피워내는지

얼마나 많은 산이 바람을 위하여

구름을 불러모으는지

얼마나 많은 산이 바람을 위하여

슬픔과 고독과 찬란한 무지개를 피워내는지

얼마나 많은 모래알들이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어둠 속에서 빛나는지.

 

 

 

나한전 풍경

 

고물 선풍기가

밤새 돌고 있는 그 나한전에는

부처님이 좌정할 연꽃방석 같은 것은 없어서

할 일 많으신 부처님 모실 생각은 애시당초 없고

간혹 시궁쥐나 길고양이의 울음소리만

텅텅 목어를 두드리다 가는데

 

낮 동안

살과 뼈를 다 벗긴 이 집의 나한들이

밤이 되면 천도복숭아 하나씩 들고 들어와

월세 십오만원 선풍기 바람 아래 눕지요

이때만은 고물 선풍기도

아주 선선한 별빛을 바람 속에 섞어 날리기도 하는데

 

세평 반지하 나한전 앞에는

그 흔한 목백일홍 꽃나무 하나 서 있지 않고

돌구시 위 쪼르르 떨어지는 대나무통 물길 하나 흐르지 않고

피곤에 전 나한들의 꿈만 번져가는데

그때 손톱에 봉숭아물 보기 좋게 들인

나한의 손 하나가 바로 곁에 누운

기름때 밴 보살의 손을 살며시 잡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아마도 흰 소를 타고

이승의 제일 맑고 시원한 호수로 소풍 가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그때 그 꿈 언저리에

목백일홍꽃들 수북수북 피어나고

월출산 도갑사 대웅전 앞마당에 놓인

아주 씩씩하고 잘생긴 돌구시 위로

쪼르륵쪼르륵 산물은 극락처럼 또 흘러내리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참 맑은 물살

-회문산에서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봄언덕

-팽목에서

 

냉이꽃들이 바람에 하염없이 흩날리네

황톳길 칠십리 하룻길은 아직 멀었는데

눈에 부딪는 산과 강 다 그리워

버리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가네

사랑하는 사람아

냉이꽃밭 위 찢긴 몸 그대로 누워라

조선의 사월의 가장 맑은 바람

이 꽃밭 속에 숨어 사나니

내 그 바람 한 줄기 불러다가

최루가스 짓물린 네 눈물자욱도 닦아주고

엄지손톱 끝 머릿니랑 서캐랑 뚝뚝 눌러주고

곤봉으로 피멍든 첫사랑 이야기도 들어주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해 저물면

마을에 내려가 더운밥 한 그릇도 얻어다 줄게

 

 

약천리 허상갑씨가 굴비 식사를 하고 난 뒤

 

약천리 허상갑씨는

육이오 때 인민군도 다녀오고

국군에도 다녀온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요

 

마을에서 제일 부자인

청성 심씨 종손 댁 큰머슴을 살다가

주인 아들 대신

인민군에 다녀왔겠지요

 

낙동강 전투에서

패잔병이 되어

터벅터벅 걸어서 고향 마을까지

혼자 돌아왔는데요

 

이번에는 주인 아들의

국군 영장이 나와서는

영락없이 또 국군에 들어갔겠지요

 

전쟁 다 끝나고

허상갑씨 집으로 돌아왔을 때

주인댁애서 한상 걸게 차려냈는데

잘 구운 법성 굴비 한마리를

꼬리부터 뼈 하나 남김없이 다 먹은 뒤에

소 몰고 곧장 들로 나갔지요

 

자운영꽃 수북하게 핀

논을 갈아엎으며

이러이러 땅 보니까 힘 난다

전쟁놀음 같은 건 한순간에 잊었지요

 

 

전장포 아리랑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

웬 눈물방울 이리 많은지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나라 눈물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우리나라 사랑 보았네

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

한 오천 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

자그맣고 슬픈 우리나라 사랑들 보았네

꼬막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긴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배어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

웬 설움 이리 많은지

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그늘에 띄우면서.

 

 

화개 장터

 

탁수기씨는 화개 장터에서

반달낫 갈며 한 오십년 살았지

화개나루에 소금배 들고 복사꽃 피던 이팔청춘에

처음 쇳물 끓이고 풀무질 익혔지

된장 내음 땀내 적시는 저녁 나절이면

운천리 백사장에 누워 하늘의 별을 세었지

아니 아니 운천리 안열 부락 김초시네

둘째딸 생각으로 별이 보이지 않았지

작은 토담 타고 돌다 칡꽃 한 묶음 깨금발로 던지면

꽃내음보다 먼저 토방문이 열리고

그때 처음 사랑을 알았지

섬진강 푸른 강물과 지리산 산바람이

어느 산곡에서 속삭이다 함께 어둠에 드는지도 알았지

그 이쁜 전라도 가스나 동란 끝나고 죽었지

산사람 밥 한 솥 푸짐하게 해낸 죄로 강물되어 떠났지

탁수기씨 화개 장터에서

반달낫 갈며 한 오십년 살았지

고스레 고스레 거칠은 강바람에 소주 한잔 부으며

앞으로도 한 백년 운천리 백사장 별을 헤겠지.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조선의 눈동자 

 

​조선의 눈동자들은 

황룡들에서 빛난다 

​ 

그날, 우리들은 

짚신발과 죽창으로 

오백년 왕조의 부패와 치욕 

맞닥뜨려 싸웠다 

  

​청죽으로 엮은 

장태를 굴리며 

허울뿐인 왕조의 야포와 기관총을 

한 판 신명나게 두들겨 부쉈다 

​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은 

오직 하나 

  

​복사꽃처럼 

호박꽃처럼 

착하고 순결한 

우리 조선 사람들의 

사람다운 삶과 구들장 뜨거운 자유(自由) 

​ 

아, 우리는 

우리들의 살갗에 불어오는 

한없이 달디 단 조선의 바람과 

순금 빛으로 빛나는 가을의 들과 

그 어떤 외세나 사갈의 이름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을 

한없이 파란 조선의 하늘의 

참주인이 되고자 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와 손주가 

한 상에서 김 나는 흰 쌀밥을 먹고 

장관과 머슴과 작부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민들레와 파랑새가 우리들의 황토 언덕을 

순결한 노래로 천년만년 뒤덮는 꿈을 꾸었다 

  

조선의 눈동자들은 

황룡들에서 빛난다 

​ 

그 모든 낡아빠진 것들과 

그 모든 썩어빠진 것들과 

그 모든 억압과 죽음의 이름들을 불태우며 

조선의 눈동자들은 이 땅 

이 산 언덕에서 뜨겁게 빛난다

 

 

 

별똥 떨어진 곳

스무살 적에

그는 학생운동을 했지

화염병을 들고

페퍼포그 장갑차 앞에 서서 옷소매를 펄럭였지

서른살에 그는 광고회사 팀장이 되었지

연인들이 어떤 맥주를 마셔야 하는지 다정하게 알려줬고

어떤 치킨을 밤참으로 먹어야 입사 시험에 합격하는지 속삭였지

새로 지은 브랜드 아파트 분양 광고를 하다가

마흔이 되어 여당 대통령 출마자의 선거 참모가 되었지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우리의 꿈이라는 카피를 썼지

오십이 되어 총선 공천을 얻어 국회의원이 되었지

사년 동안 악머구리 이리떼의 소굴을 전전하다 제 발로 나왔지

여의도를 떠난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

스무살이 되기 전 지용의 시를 좋아했고

언젠가 별똥 떨어진 곳 찾아간다 했지

 

 

따뜻한 편지 (바람에게 )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들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은

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데

버리지 못하는 지상의 꿈들로

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

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기다림

ㅡ연화리 시편 10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딥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김치찌개 평화론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춧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할,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

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

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깡통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출생-1954. 광주광역시
소속-순천대학교(교수)
데뷔-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사평역에서' 등단
수상- 201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학부문 
         1992년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
         1997년 제9회 동서문학상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연인들』에 이르기까지 초기 시 세계는 현실의 거대한 폭력에 대한 분노와 그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는 비루한 그들의 삶에 피어 있는 조그만 들꽃을 발견해내는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다.

첫 시집 『사평역에서』에서 시작하여 『서울 세노야』에 이르기까지 그는 현실에서 억압 받는 삶에 대하여 서정적으로 노래해왔다. 이들 시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80년대를 겪은 이들에게 분노는 근본 감정이다. 80년대를 노래했던 많은 시들이 그저 분노에 찬 절규와 외침으로 끝나버린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곽재구 시인의 시들은 그 분노를 아름다운 시어들을 통해 가슴에 와닿도록 절절하게 깊이 있는 정조로 노래했다.

민주화시대를 거치면서 『서울 세노야』 이후 곽재구의 시는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 인간 본래의 순수성과 사랑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남루한 현실, 힘겨운 현실을 노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현실과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첫 시집 『사평역에서』(1983)를 비롯하여 『전장포 아리랑』(1985), 『한국의 연인들』(1986), 『서울 세노야』(1990), 『참 맑은 물살』(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와온 바다』(2012) 등을 간행한 바 있으며, 시선집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2011)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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