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괜찮은 詩

화양연화(花樣年華)

by 이성근 2023. 9. 7.

 

풍경달다 .정호승

봄날> 이동순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김영남

제비와 제비꽃 >최승호

화양연화(花樣年華)>김사인

적멸(寂滅)>강연호

月蝕>강연호

사월 목련> 도종환

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지

인생>최영미

부석사에서>윤제림

봄 안부> 강인호

편지>오은

다시 봄비는 내리고>이승희

흐르다>나희덕

미황사(美黃寺)>김태정

미황사>박남준

티벳만행>신정민

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느냐> 허형만

사랑에 관한 누군가의 말 >이 기 운

허공 이덕규

휘영청이라는 말 이상국

눈 감으면 흰빛 신미나

모기장 동물원>안도현

장마 지나간 옥상> 박영희

장마 1>권대웅

장마>안상학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 진란

칠월>허연

바보 꽃잎에 물들다-김시천

오월 편지-도종환

여름을 닮은 사랑

미라보 다리-기욤 아폴리네르

 

 

 

풍경달다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봄날> 이동순

 

꽃은 피었다가

왜 이다지 속절없이 지고 마는가

봄은 불현듯이 왔다가

왜 이다지 자취없이 사라져버리는가

 

내 사랑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모두 이렇게 다 떠나고

끝까지 내 곁에 남아 나를 호젓이 지키고 있는 것은

다만 빈 그림자뿐이려니

 

그림자여

너는 무슨 인연 그리도 깊어

나를 놓지 못하는가

 

이 봄날엔 왜 그저

모든 것이 아쉬웁고 허전하고 쓸쓸한가

만나는 것마다

왜 마냥 서럽고 애틋한가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김영남

 

벚꽃 소리 없이 피어

몸이 몹시 시끄러운 이런 봄날에는

문 닫아걸고 아침도 안 먹고 누워있겠네

 

한 그리움이 더 큰 그리움을 낳게 되고...

그런 그리움을 누워서 낳아보고 앉아서 낳아보다가

마침내는 울어버리겠네 소식 끊어진 H을 생각하며

그러다가 오늘의 그리움을 어제의 그리움으로 바꾸어보고

어제의 그리움을 땅이 일어나도록 꺼내겠네 저 벚꽃처럼

 

아름답게 꺼낼 수 없다면

머리를 쥐어뜯어 꽃잎처럼 바람에 흩뿌리겠네

뿌리다가 창가로 보내겠네

 

꽃이 소리 없이 사라질까 봐

세상이 몹시 성가신 이런 봄날에는

냉장고라도 보듬고 난 그녀에게 편지를 쓰겠네

저 벚나무의 그리움으로

 

 

제비와 제비꽃 >최승호

 

제비가 제비꽃에게 말했다.

"참 예쁘구나. 네가 꽃 필 무렵이면 우리는 바다를 건너 날아온단다."

그러자 제비꽃이 제비에게 말했다.

"네가 날아오면 나는 꽃을 피워.“

 

 

이 별의 일>심보선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화양연화(花樣年華)>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 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맛당겨주지 않지 어느 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이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적멸(寂滅)>강연호

 

지친 불빛이 저녁을 끌고 온다

찬물에 말아 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 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때는 수천 번이었을 다짐이 문득 헐거워질 때

홀로 켜지는 불빛, 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 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 터진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할지라도

이 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

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그동안 베껴 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혹은 그대의 텅 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

 

 

 

옛날 사람들이 비밀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알아?

나무에 구멍을 파서 비밀을 말한 후 평생 그 비밀을 가슴에 묻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생을 다 바쳐서라도 되돌리고 싶은 순간...

- 영화 <화양연화> 중에서

 

 

 

月蝕>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사월 목련> 도종환

 

남들도 나처럼

외로웁지요

 

남들도 나처럼

흔들리고 있지요

 

말할 수 없는 것뿐이지요

차라리 아무말

안하는 것뿐이지요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돌아가는

사월 목련

 

 

 

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지

 

처음에는

없는 것이 생겼다가

다시 없어졌다가

그래도 남아 있는 모래언덕처럼

 

우리는 조용한 모래 꿈꾸는 모래였지

 

고요한 곳에서 혼자 멈춰 있던 고운 입자

바람과 만나야 살아나서

둘이어야 춤추게 되어서

그러다가도

또 바람 때문에 모든 것이 부서져서

오랜 시간 속에서 곱게 다듬어져

안 보이는 손에 의해 의미를 가지다가

 

바람과 모래의 인연이 우리를 여기로 불렀지

 

이렇게 함께 겪는다는 것이

또 어렵사리 처음이 되는 것이지

 

 

인생>최영미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부석사에서>윤제림

 

이륙하려다 다시 내려앉았소,

귀환이 늦어질 것 같구려

 

달이 너무 밝아서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 실은

사과꽃 피는 것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차일피일

결국은 또 한철을 보내고 있다오

 

누가 와서 물으면 지구의 어떤 일은

우주의 문자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지구의 어떤 풍경은 외계의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다고만 말해주오

 

지구가 점점 못쓰게 되어간다는 소문은 대부분 사실인데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소

어르고 달래면 생각보다 오래 꽃이 피고

열매는 쉬지 않고 붉어질 것이오

 

급히 손보아야 할 곳이 있어서 이만 줄이겠소

, 사과꽃은 당신을 많이 닮았다오.

 

 

봄 안부> 강인호

 

당신 없이도 또 봄날이어서 살구꽃 분홍빛 저리 환합니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찾아갔었을 분홍빛 오늘은 내 가슴에 스며듭니다. 머잖아 저 분홍빛 차차 엷어져서는 어느 날 푸른빛으로 사라지겠지요. 당신 가슴속에 스며들었을 내 추억도 이제 다 스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르는데 살구꽃 환한 나무 아래서 당신 생각합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저 분홍빛이 그대와 나, 우리 가슴속에 찾아와 머물다 갈런지요. 잘 지내주어요. 더 이상 내가 그대 안의 분홍빛 아니어도 그대의 봄 아름답기를

 

 

편지>오은

 

잘 지내지?

잘 지내렴.

 

꼭 필요한 말만 남겨두고

다 지웠더니

두 문장만 남았다

 

너에게 물으며

나에게 대답하고 있었다

 

겉봉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시 봄비는 내리고>이승희

 

봄비라는 말 속에서 너를 만났다. 지친 뒤척임만 가득한 눈을 보며 그 속으로 살러 가고 싶었다. 낭떠러지 같은 말 봄비 속에서 너와 사랑을 했다. 비명도 없이 절벽을 뛰어내리던 꿈. 너와 살고 싶은 저녁이 봄비라는 말 속에 있다. 천국이 있다면 봄비라는 말 속에서부터 시작될 거라고 나무들이 키를 키우며 책처럼 펼쳐지던 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거짓말처럼 또다른 생이 시작되었고, 단절은 나를 멈추게 하지만 절벽은 나를 뛰어내리게 하였다고 나는 기록한다. 나의 절망은 비루하였고, 꽃이 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이 네가 떠나간 흔적처럼 남았다.

 

봄비를 맞으며 골목을 지나가는 연인들. 저들은 서로를 버티느라 또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내가 없이 봄비가 내리는 저녁.

 

 

 

흐르다>나희덕

 

좋아하는 동사를 묻자 그는

흐르다, 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 동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가 흘러내리다, 의 동의어라는 것을

 

그저 수평적 움직임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눈물의 수직성을

 

눈에서 입술로, 상류에서 하류로, 젊음에서 늙음으로, 살아 있음에서 죽음으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최초의 순간에서 점점 멀어지는 방식으로,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방향으로, 기억의 밀도가 높은 시간에서 낮은 시간으로

 

흐르는 모든 존재는

흐르는 동시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흘러오르다, 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고여 있거나

갇혀 있지 않는 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물과 흙

피와 눈물

세포와 원소

사랑과 우정

또는 시간과 기억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끝내 우리를 데려가 부려놓는 곳

어떤 하류의 퇴적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라는 동사는 더 이상 흐르지 못한다는 것을

 

 

 

미황사(美黃寺)>김태정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미황사>박남준

 

미황사까지는 아직 멀다 마음은 저 산 너머로만 가 닿는데

이제 나아갈 길은 없구나

밤바다가 낯선 발자국에 자꾸 몸을 뒤집는다

여기까지라니 먼저 밀려온 물결이 땅 끝에 이를 때마다

부르지 않은 지난 일들이 나지막한 이름을 부른다

 

봄밤이 깊다 달마산 너머

열나흘 지나 보름 달빛이 능선을 향해 오를수록

산은 한편 눕고 혹은 일어나기를 거듭한다

잊었다는 듯이 잊지 않았다는 듯이

그래 때가 되면 이윽고 가야지

꽃숭어리째 붉은 동백이 긴 봄밤을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땅바닥에 뚝뚝 목을 내놓는다

 

미황사까지가 멀다……

그때 대웅전에 들며 나는 왜 그 말을 떠올렸을까

미황사를 등뒤로 발길을 떼어놓는다

내게 있어 아득히 잡히지 않는 먼 길을 떠올린다

결국 알 수 없는 그곳까지가 멀다

 

 

티벳만행>신정민

 

그리운 사람의 옷을

먼 호수까지 걸어가 적셔본 적 있는가

그 옷의 물기로 입술을 적시고 간절한 그리움을

달래어 본 적 있는가

 

그리움 없이 사는 건 죽은 것이다

 

사람이 그리우면 티벳에 가라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면 티벳에 가라

 

그리움은 빙하가 되어 흐르고

안타까웠던 사랑은 들녘이 되어 있다

 

꽃이 된 기억들

만년설이 되어버린 시간들

고통스럽게 얻은 바람의 진언들

 

모든 것을 고통과 상의하는 사람

바람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

움직이는 묵상. 그 조용한 누군가를 만나려면

잃어버린 것들이 보관되어 있는 땅.

침묵의 형벌을 말없이 견디고 있는 땅으로 가라

 

그립다. 는 무책임하다

......

 

떠난다는 말은 돌아오지 않을 때만 쓸 수 있다.

.......

 

라사로 가는 길은 여백으로 가득하다

창밖에 펼쳐지는 우아한 지옥이 한가하다

.......

 

티벳의 들녘은

완성되는 순간 쓸어버린 만다라

수행승의 손끝에서 떨어진던 색색의 모래 알갱이들

.......

 

이승은 신들이 꿈꾸는 마지막 거처

멀리 즐거운 지옥과 따분한 극락 사이에

단 한 사람

길을 내며 걷고 있다

없던 길을 가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걷느라 길을 잃고 헤매었구나

걸어야 길이 생기는 허허벌판을 읽는다

 

 

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느냐> 허형만

 

봄날

하늘하늘 날리는

꽃잎만 보아도 눈물이 난다

꽃잎에 반짝

머금은 햇살에도 눈물나더니

소주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보고 싶다 생각만으로

눈물부터 피잉 도니 어인 일이냐

보이는 것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느냐

몹쓸 눈물이 먼저 뽀르르 앞서느냐

 

 

 

사랑에 관한 누군가의 말 이 기 운

 

깊은 밤 홀로 울다가 길을 떠난다

이 세상에 수많은 길이 있다지만

나의 길은 오직 그대에게만 열려있네

 

당신은 날 포로로 잡고 오랜 침묵

나는 바보천치, 듣지 않는 그대에게

한없이 소곤대고 있네

쓸쓸하고 외로워도

그대만을 바라보다가

세상 모든 것이 안개가 되고

 

사람 사는 거리에 이방인처럼 떠돌며

나는 말없이 기도하는 수행자

그대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

 

처음부터 외로운 이는 그대였네

눈물 흘리는 이도 그대였네

 

내 온몸이 갓난아기처럼

그 피의 연못에서 방금 씻겨지고

내 손이 천국의 강물에 담갔던 것이라면

당신의 손을 잡아 줄 수 있으련만

 

아이야 일어나라

말하지 못해도

 

그대는 언제나 홀로 서는 자

아아, 사랑이여

 

 

 

허공 이덕규

 

자라면서 기댈 곳이

허공밖에 없는 나무들은

믿는 구석이 오직 허공뿐인 나무들은

어느 한쪽으로 가만히 기운 나무들은

끝내 기운쪽으로

, 쓰러지고야 마는 나무들은

기억한다 일생

기대살던 당신의 그 든든한 어깨를

당신이 떠날까봐

조바심으로 오그라들던 그 뭉툭한 발가락을

 

 

 

휘영청이라는 말 이상국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던

그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때

지붕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 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말

 

 

 

눈 감으면 흰빛 신미나

 

살 무르고 눈물 모르던 때

눈 감고도 당신 얼굴을 외운 적 있었지만

한번 묶은 정이야 매듭 없을 줄 알았지만

시든 꽃밭에 나비가 풀려나는 것을 보니

내 정이 식는 길이 저러할 줄 알아요

 

그래도 마음 안팎에 당신 생각을 못 이기면

내 혼은 지읒 시옷 홑겹으로 날아가서

한밤중 당신 홀로 잠 깰 적에

꿈결엔 듯 눈 비비면 기척도 없이

베갯머리에 살비듬 하얗게 묻어나면

내가 다녀간 줄로 알아요, 그리 알아요

 

 

 

모기장 동물원>안도현

 

나방이 왔다 풍뎅이가 왔다 매미가 왔다

형광등 불빛 따라 와서 모기장 바깥에 붙어있다

오지 말라고 모기장을 쳐놓으니까 젠장, 아주 가까이 와서

나를 내려다 보며 읽고 있다

 

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

나는 한 마리의 슬픈 포유류

 

책을 덮고 생각 중이다

저 곤충 손님들에게는 내가

모기장 안쪽에 있는가

바깥 쪽에 있는가

 

 

장마 지나간 옥상> 박영희

 

된장에 찍어 먹으면 딱 좋을

풋고추 대롱대롱 달려있고

긴 싸움 이겨낸 늠름한 얼굴로

석편아짐 좋아하는 가지 몇 실하게 매달려있고

찬바람 불면 할마씨들 입맛 돋울

대추 알들 따글따글 열려있고

막걸리 둬 사발에 헤헤 두 다리 풀렸으나

철봉대 꼭 움켜쥔 빨래들 보고 있자니 불알 두 쪽이

포도송이마냥 탱글탱글해집니다

열받으면 가지만해지는 고놈도

덩달아 뜨뜻해집니다

열받아야 크는

풋고추 가지마냥 칠월 옥상은

자고 나면 커지고

자고 나면 굵어지는 것들뿐입니다

참 살맛 나는 날들입니다

 

 

 

장마 1>권대웅

 

너무 긴 한 정거장이었다

꿈쩍 않던 구름과 남루한 안개

더운 습도가 겨드랑이에서 버섯처럼 피어났다

빗방울을 머금은 등불은 어둡고

슬픔의 모래주머니는 무거워

마르지 않는 상처 속을 오체투지로 기어야 했다

골목에 서 있던 오역의 문장과 젖은 청춘

눅눅한 그림자가 배고픈 아이들처럼 엉겨 붙었다

한 걸음이 뒷산을 멘 것만큼 무거웠다

외로움이 포화 상태에 달하면

터져 죽어버리는 열대어 블랙몰리처럼

입술을 내밀고 끈끈이주걱 속을 헤맸다

불러도 대답 없는 적막

메아리조차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

침묵이 두려워 자꾸 울어야 했다

돌아갈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던 정거장

어깨에 목에 팔뚝에 망집을 짊어지고

비를 맞으며 한 사내가 오래 서 있었다

 

 

장마>안상학

 

세상 살기 힘든 날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강가에 나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저렇게 살아갈 수 없을까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이 땅에 젖어들지 않고

젖어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흔적도 없이 강물에 젖어

흘러 가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 내리지도 않고

무심히 강물과 몸 섞으며

그저 흘러흘러 갔으면 좋지 않을까

비조차 마음 부러운 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생각한 날

강가에 나가 나는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 진란

 

하루 종일 하늘이 무거웠다

먹구름이 잔뜩 물을 들이켰는지

한낮도 한밤중 같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고

창문을 마구 흔들어 덜그럭거렸다

문이란 문을 죄다 닫아걸었더니

틈을 찾는 바람의 울음이 휘잉 휘이잉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안다고

불온한 목소리로 흔들어댔다

들판에 배곯은 승냥이 울음 같은

사랑이 두려웠다

이름을 불러가며 빙빙 도는데

나는 여기 없는 척 숨을 죽이고

악착같은 네 사랑을 믿지 않았다

 

 

칠월>허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바보 꽃잎에 물들다-김시천

 

그냥 물들면 되는 것을

그냥 살포시 안기면 되는 것을

저절로 물이 들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을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로만 요란하였구나

그만, 바보짓을 하였구나

 

그냥 물들며 되는 것을

 

노을이 하늘에 물드는 것처럼

꽃에 꽃물이 드는 것처럼

 

그냥 꽃잎에 기대어

가만히 가만히 물들면 되는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그냥 당신에게 물들면 되는 것을

 

 

오월 편지-도종환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있는 자리마다 깊디깊은 침묵이 앉습니다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 있는 그곳에도 봄이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다 그러하겠지만

오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멥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 없이 흔들리는 붓꽃 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자리로 바람이 가득가득몰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 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 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 와 머물다 소리 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여름을 닮은 사랑>

혹서에 자신의 열기를 견디다 못해 옆의 가지와 부딪혀 불을 내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자연발화라고는 하지만, 나무 스스로 불을 지르는 셈이다. 자신의 뜨거움을 몰아내려 오히려 뜨거움으로 뛰어들고마는 참혹한 형편이다. 그런데 이 운명이 나무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한여름의 숲을 바라볼 때마다, 불에 그슬어가는 나무와 그 둘레를 감도는 연기를 상상한다. 그것이 꼭 사랑하는 일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요절한 가수 라사(Lhasa)의 노래 중에 "영혼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 불을 지른다"는 가사가 있다. 한번 듣고 잊히지 않았던 건, 내가 그런 영혼과 마주한 적이 있어서이다.

p59

 

- 한정원 시와 산책(시간의흐름, 2020) 중에서

 

 

미라보 다리-기욤 아폴리네르 (1880 1918)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흘러가는데, 나는 이곳에 머무르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흘러가는데, 나는 이곳에 머무르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사랑은 흘러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흘러가는데, 나는 이곳에 머무르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흘러가는데, 나는 이곳에 머무르네.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9월 마지막 밤에 읽는 이상국의 詩  (0) 2023.09.30
동해남부선  (0) 2023.09.17
내가 돌아오지 말걸  (0) 2023.09.07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0) 2023.04.24
아득한 한 뼘  (0) 2023.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