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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내가 돌아오지 말걸

by 이성근 2023. 9. 7.

내가 돌아오지 말걸-이동순

동상 암살-서해성

까치구멍집 안상학

외길 이태수

부르면 그 이름으로 온다 백무산

내부수리

미황사 편지> 도종환

운주사>함민복

운주사>이재무

탁발승의 새벽노래> 정태춘

폭설> 마종기

폭설>이재무

폭설, 그 흐릿한 길>심재휘

인생>이재무

장미빛 인생>기형도

 

 

내가 돌아오지 말걸-이동순

-홍범도 장군의 독백

 

내가 돌아오지 말걸

공연히 돌아와서 이 꼴을 보네

내 평생 미워하고 싸웠던

내 아내와 두 아들까지 죽인

저 왜적은 나의 적 우리 겨레의 적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그리 될 수 없는 악독한 승냥이

마시면 바로 병들거나 죽는다는

저 무시무시한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그냥 바다에 쏟아 지구 죽이려는

뻔뻔스런 일본은 교활한 강도

반성도 후회도 모르는 요망한 도깨비 무리

온 겨레가 걱정하며 반대하는데

그 일본 감싸며 두둔하는 놈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말하라 네 조국은 일본인가

을사오적 정미칠적의 씨앗들인가

대답하라 반역의 무리여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키려

국립묘지 기록조차 서둘러 지우고

지나간 100년 전의 일로

일본이 무릎 꿇어 사죄하는 일

더 이상 그만 하자는 놈은 누구인가

가만히 있어도 욕 먹을 종자들이

서로 일본 앞잡이 하려고 안달이 났네

어찌 요 모양 요 꼴인가

나라 따위야 기울어지건 말건

국민들이야 죽건 말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악마의 생각이

이 강토를 병들게 하고 있는데

배제와 배척만 즐기는 무리여

농민을 존중할 줄 모르는 족속이여

한국을 미 일 중 러

4대 강국의 꼭둑각시로 만들고

위안부 지원병 강제징용

그 피해보상을 한국기업이 맡도록

물고를 튼 자는 누구인가

이 무슨 해괴망측한 방식인가

죄는 일본이 지었는데

보상은 어찌 우리 스스로 하는가

처참한 재앙을 불러오는

저 막된 무지와 무능과 굴욕

그간 힘들게 쌓아올린 민주의 진전을

하루아침에 되돌려놓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게 만든

나라를 극한위기로 가득 채우는

그 흉포한 자는 누구인가

노동탄압 길거리 떼죽음

최소한의 반성도 수치도 모르고

국민을 모조리 죄인으로 몰고가는

저 패덕한 자는 누구인가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위기 불러오고

겨레를 몰역사 반민족 비민주로 몰아넣은

저 패덕한 자는 누구인가

정부 여당 언론은

날마다 어명만 받들게 하고

낡은 왕조 썩은 대한제국이 다시

무덤 속에서 꿈틀꿈틀 부활하는구나

국민에 대한 경멸 위에

악당들의 궁전을 세우는구나

점점 야만화 되어가는 한국사회여

민주주의 감각의 완전한 마비여

처벌만이 능사라 외치는 자여

틈만 나면 수갑을 흔들며 겁주는 자여

중하층이 부르짖는 고통의 신음과

겹겹이 쌓인 불안을 못 보는가

내가 돌아오지 말걸

공연히 돌아와서 이 꼴을 보네

오늘은 숫돌에 장검을 들게 갈아

망나니처럼 덩실덩실 칼춤이나 출까나

너희 도깨비 무리를 단칼에 썩 베는

신나는 칼춤이나 출까나

 

동상 암살-서해성

 

동상도 암살된다.

광복 뒤 살아서 귀환한 독립군들은 마저 소탕되었다.

조국의 총알로.

나라가 해방되었다고 해서 다 해방되는 건 아니다.

어젯밤 다시 김좌진이 암살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지청천이라고도 했다.

저 광복군 총사령관 말이다.

홍범도 옆에 흉상으로 선 연좌죄로 함께 처형될 것이라고 했다.

이범석은 아라사 권총을 들고 싸웠으므로 죄가 되었을까.

아침 아홉 시

이회영이 청동 쇳물로 돌아간다는 소문을 누군가 확인했다.

동상도 암살된다.

죽은 자들을 소탕하라.

동상을 소탕하라.

얼굴 모양을 빚어 생물이 된 죄로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다섯 동상이 암살되려 하고 있다.

병사들이 사용한 탄피 5만 발을 녹여서 만든 게 죄였을까.

동상이 암살되는 나라가 있다.

잃어버린 나라를 총칼로 되찾고자 한 건

오래도록 죄였다.

버젓이 지금도 죄다.

동상이 울고 있다.

산 자들을 백주에 암살하던 때가 차라리 나았던 것일까.

죽어서 겨우 살아난 동상들이 암살되고 있다.

독립전쟁 영웅

다섯 동상이 지금 빗속에 울고 있다.

 

 

까치구멍집 안상학

 

내가 한 일은 다만

1948년 그 사내가 안동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

제주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휘관을 암살한,

국군이 국민에게 결코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던

대한민국 제1호 사형수 문상길 중위

고향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향년 스물셋 사내, 고향은 안동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내력을 찾아낸 것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

그 사내가 떠난 곳,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

사내처럼 사라진 마을, 흉흉한 소문 떠도는

쉬쉬대며 살아온 일가붙이들 산기슭에 남은 곳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사진 몇 장 찾은 것

소년처럼 해맑은 사내의 마지막 웃음

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

가슴에는 휘장 대신 표적, 흑백사진 붉은 피는

두 눈 가린 채 목이 꺾인 사내의 최후 진술

내 비록 미군정 인간의 법정에서는 사형을 받고 사라지나

공평한 하늘나라 법정에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가 살던 집을 찾아낸 것

당당하게 살아남은 그 사내의 흔적

300년 문화재 기와 까치구멍집 건재한 사내의 생가

수몰을 피해 남후면 검암리로 옮겨 앉은 남평 문씨 종가

그를 기다린 40년 고향을 뒤로하고

1988년 옮겨 앉은 낮선 땅 32, 기다리고 기다린

72년 만에야 불귀 주인 소식 전해들은 까치구멍집

오른쪽 첫번째

무자년 사내가 가고 72년 만에 내가 한 일은 다만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일 뿐, 고작 대문간에 막걸리 한잔 올리고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일이었을 뿐, 그 사이 하늘나라 법정에서 받아놓았을 그 사내의 판결문을 이 집 우체통에 전해주는 일은 그날 이후 남겨진 모든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음복주를 마셨다. 경자년 경칩 무렵, 복수초가 까치구멍집 화단에 피어 있는 날이었다.

<기와까치구멍집> 경북 민속문화재 69.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바우길 28-3. 문상길 중위 생가. 임하댐으로 수몰된 마령리 이식골에서 이축했다.

 

 

외길 이태수

 

요즘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좌지우지 세상 주무르는 사람들이

역겨워 되레 내게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보다가도 더 싫어지니 왜일까

같이 가던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

내 눈에 문제가 있는지 다시 생각하다

제자리로 돌아오니 더 괴로워진다

괴롭고 슬퍼도 마냥 그대로 가려 한다

세상이 영영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마음 안 내키는 길은 안 가려 한다

설령 벼랑에 이르는 길일지라도

오직 가고 싶은 길로만 가려 한다

아프고 외로워도 내처 가려 한다

 

 

부르면 그 이름으로 온다 백무산

-기후위기

 

하룻밤 내린 눈에 도시가 마비되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마당에 나가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참 포근하게도 내리네

아침 뉴스 화면은 온통 아수라장이 된 재난방송이다

폭설이 내리면 풍년이 온다고

파릇한 보리밭에 이불을 덮어주고

겨울 나는 것들에게 깊은 잠을 재워준다고

한 철 겨울나무 곁방에 들어

너와 결별하는 대신

말 없는 모든 것들과 결별한 뒤로

희고 고요하고 말 없는

저들을 우리는 재앙이라고 부른다

부르면 불리는 이름으로 온다

 

내부수리 

 

치킨집이 문을 닫았다 열었다 다시 닫았다

표정 없던 여자가 손님이 오든 가든

인사도 없고 친정은 담쌓은 표정이고

튀김솥을 안고 얼굴은 언제나 붉게 달아 있었고

늘 어디 꼴린 우거지 남자는 밖으로만 돌더니

안에 있을 땐 사채업자처럼 여자를 다그치고

여자는 목줄이 타도록 혼자 널뛰다 또 문을 닫았다

금일휴업 팻말이 며칠씩 계속 달려 있더니

내부수리 알림판이 달포 가량 붙어 있더니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날 바람도 얼음바람인데

문은 환히 열어젖혀져 있었다

음악도 틀어져 있었고 여자가 인사도 밝게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부수리 흔적은

없었고 딱 하나 바뀐 것이 있었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는 못 보던 남자였다

공사에 들어간 비용 때문에 둘은 열심히 뛰었다

사실 내부수리가 급한 건 나였다 곰팡이도 피고

내부가 낡고 지저분했지만 어디서 손을 써야 할지

도무지 어디까지가 내부인지

내부가 저 바깥에 있거나 저 미래에 있기도 해서

내 생각이 문제일까 정말 내부수리가 필요한 건가

나올 것도 없는데 나는 왜 자꾸 나를 다그쳐

토목공사를 해야 하는 것일까

치킨이 나오는 동안 나는 명상에 들어갔다

내부수리가 꼭 공사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제 좀 친절할 수는 없겠는가

내게 오는 사소한 것들에게 조금 더 친절해질 수는 없겠는가

내가 나에게 좀 다정할 수는 없겠는가

 

 

 

미황사 편지> 도종환

 

집 나온 지 아흐레가 되었습니다

새벽예불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소쩍새도 울음을 그쳤습니다

삼경에서 새벽까지 우는 밤새도

풀리지 않는 번뇌가 있는 걸까요

동쪽 봉우리 위에 뜬 북두칠성이

바다 쪽으로 발을 뻗을 때까지 뒤척이는 별들은

무슨 고뇌를 안고 골똘히 밤을 지새는 걸까요

금강스님은 동백나무를 보며

그늘에서 자라는 동백은 사월이 갈 때까지도

붉게 핀다 하셨지요

빛을 빼앗기고 억센 참나무 둥치에 시달리며

자라는 동안 긴장을 늦추지 않는 치열한 정신이

뜨겁고 고운 꽃을 오래 피우는 거겠지요

그러나 저는 시련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소멸과 빛에 대해 말하려는 겁니다

사람답게 사는 빛의 길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답게 사는 일과 같은 굵기로 꼬인

번뇌의 억센 동아줄에 몸이 묶여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싸워 이긴 날들의 업적과

똑같은 크기로 쌓이는 이 업은 또 어이해야 합니까

그물과 나와 세상이 함께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짐승의 우리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쳐왔습니다 그러나

세월 흘러도 핏자국은 왜 지워지지 않는 겁니까

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이렇게 많은 산을 넘어왔는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달마산 바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봅니다

오늘도 저 숲과 나무들은 온종일

바람에 시달릴 것입니다

어떤 나무들은 허리가 휘기도 하고

나 같은 나무들은 이파리를 매단 관절 마디마디가

바늘로 찌를 듯이 아플 것입니다

언제쯤 무명의 밤이 지나고

적멸의 새벽을 맞이하게 될까요

새도 달마산도 별도 사람도 맑고 고요해져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될까요

그대 먼저 길을 찾아가시면

부디 발자국 하나라도 남겨주세요

그대 발에 밟혔다 누운 풀잎을 흔들며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버드나무 씨앗처럼 가벼워져서

골짜기 물처럼 알몸으로 투명해져서

 

 

운주사>함민복

 

비 내려

와불의 눈에 빗물 고인다

내 아픔이 아닌

세상의 아픔에 젖을 수 있어

내리는 비도

눈물이구나

그렇게, 다 그렇게 되어

세상에

눈물의 강 흐르면

그 위를

마음 배들

구름처럼 평화롭게

떠갈 수 있다는 설법인가

 

 

운주사>이재무

 

다 늦은 봄날, 눈은 내려서

길도 마음도 젖은 흙이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부질없고 아득해져서

생각의 배 맞는 지기 몇 더불어

운주사 가니

큰 배 한 척 산중에 정박중인데

크고 작은 선실마다에

성도 이름도 없이 촌부들 저희끼리

누워 혹은 기대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어디서 메주 뜨는 내음 솔솔 풍기고

점심 거른 배 하도나 출출하여

통성명 없이 情人된 절간 속 장삼이사들

데불고 가서 추어탕 한 그릇

탁주 한 발로 요기와 한기 풀며

거하게 취해 천 년을 살다 오는 길

마음도 길도 미풍에 날려

볼에 와 닿는,

춥지 않은 춘설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달빛 받은 창호지같이

환하고 까닭없이 그저 고맙고

 

 

 

 

탁발승의 새벽노래> 정태춘

 

승냥이 울음 따라 따라 간다

별빛 차가운 저 숲길을

시냇가 물소리도 가까이 들린다

어서, 어서 가자

길섶의 풀벌레도 저리 우니

석가 세존이 다녀 가셨나

본당의 목탁소리 귀에 익으니

어서, 어서 가자

이 발길 따라오던 속세 물결도

억겁 속으로 사라지고

멀고 먼 뒤를 보면 부르지도 못할

이름 없는 수많은 중생들

추녀 끝에 떨어지는 풍경소리만

극락 왕생하고

어머님 생전에 출가한 이 몸

돌계단의 발길도 무거운데

한수야, 부르는 쉰 목소리에

멈춰 서서 돌아보니

따라온 승냥이 울음소리만

되돌아서 멀어지네

 

주지 스님의 마른 기침 소리에

새벽 옅은 잠 깨어나니

만리길 너머 파도 소리처럼

꿈은 밀려나고

속세로 달아났던 쇠북 소리도

여기 산사에 울려 퍼지니

생로병사의 깊은 번뇌가

다시 찾아든다

잠을 씻으려 약수를 뜨니

그릇 속에는 아이 얼굴

아저씨, 하고 부를 듯하여

얼른 마시고 돌아서면

뒷전에 있던 동자승이

눈 부비며 인사하고

합장해주는 내 손끝 멀리

햇살 떠올라 오는데

한수야, 부르는 맑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해탈 스님의 은은한 미소가

법당 마루에 빛나네

 

 

폭설> 마종기

 

무엇이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가.

깊은 산속에서 만난 눈사태

앞이 보이지 않게 한정 없이 내리는 꽃잎.

눈 내리는 소리는 침묵보다 조용하다.

온몸에 눈 덮고 잠이 드는 나무들.

아름다운 것은 조용하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간단하다.

아직 잠들지 못한 나무는 추위를 많이 타는가.

폭설을 핑계 삼아 기대고 다가서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게 서로를 만지는 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큰 눈꽃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용한 것이 무서워진다.

저녁이 내리는 우리들이 무서워진다.

 

 

폭설>이재무

 

한 열흘 독감 앓고 나서

가벼워진 몸으로 문을 나선다

앓는 내내 눈은 내려서

세상은 백지 한 장으로 크게 펼쳐져 있다

지키지 못한 약속, 멀어진 인연들을

떠올린다 재작년 백두산 가는 길에 만났던

가는 허리의 자작나무들

새삼 자꾸만 눈에 밟혀온다

내 몸에 유숙하며 육신 물어뜯던

바이러스 그 사나운 심술에 대하여도

나는 어느새 너그러워지고 있다

그들은 내내 생에 신중할 것과

겸허할 것을 주문해오지 않았던가

한 열흘 앓고 나니

덩달아 세상도 수척해 보이고

사람들의 표정 넉넉하고 유순해 보인다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단순하게 살아가야 하리

잠든 휴대폰 꺼내 전원을 연다

사소한 오해로 멀어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폭설, 그 흐릿한 길>심재휘

 

아주 떠나버리려는 듯

가다가 다시 돌아와 소리 없이 우는 듯이

눈이 내린다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뛰어가다가 뒤돌아서서

폭설이 퍼붓는 길이다 그러면 이런 날은

붉은 신호등에도 길을 건너가버린 그 사랑이

겨우 보이도록 흐릿해져서

이런 날은 도무지 아프지가 않다

 

부풀어오른 습설이 거리에 온통 너무 흩날려

이편과 저편의 경계가 지워진 횡단보도는

건너지 않는 자들도 그냥 가슴에 품을 만하다

길 옆 나무가 내게 손을 내미는지

내게서 손을 거두어가는지 알 필요가 없고

휘청거리는 저녁은 어디쯤에 있는지

이별은 푸른 등을 켰는지

분간할 필요도 없어서

 

그저 떨어지는 빗금들이 뒤엉켜 서로의 빗금을 지울 때

흐릿한, 모든 것들, 사이에, 쓰다 만 글자처럼 서 있으면

그날의 윤곽은 악보 없이 부르는 나지막한 노래 같아서

눈코입이 뭉개어진 이런 날은 오래도록 아프지가 않다

 

 

인생>이재무

- 애월에서

 

저무는 먼바다 먹빛으로 잔잔한데

방파제 둑 위, 할머니 한 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네, 유모차 밀며.

흑백의 풍경 속 몇 겹으로 주름진 시간

고여 출렁이고 있었네

저무는 먼 바다 하늘로 이어지는 수평선에서

노을은 가지를 떠나는 꽃잎같이 점으로

흩어져 선홍이 낭자한데

거북처럼 낮게 몸 웅크린, 지금은 다만

묵직한 침묵으로 밤을 기다리는,

밤이 오면 어화 피고 먹물 튀기며

비린내 땀내 진동할 오징어잡이 선박들

등 뒤에 두고

방파제 둑 위, 등이 활같이 휜 할머니 한 분

천천히 실루엣으로 걸어가고 있었네,

아주 먼 미래를 밀며.

 

 

장미빛 인생>기형도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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