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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임화(林和)의 詩

by 이성근 2023.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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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미완으로 남은 그들의 꿈과 생애

80년대 대학 시절 한국문학사 수업시간에 만난 일제시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관련 문건들에서는 어김없이 삭제된 글자나 문장이 등장했다. X, X, XXXX 혁명, XX투쟁. 사라진 글자는 하나의 미로였고, 이를 추측한다는 것은 복잡한 퍼즐게임을 푸는 과정과도 같았다.

삭제된 문자 투성이의 구문서들은 이들 존재의 운명에 대한 내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을 학문적인 용도로 언급한다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시기였다. 일제시대 계급과 민족 문제로 이념과 열정을 불태우다 월북했던 지식인들의 삶은, 실천적 지성이 요구되었던 80년대의 대학인들에게는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러나 1988년 정작 월북 문인들의 작품이 해금되었을 때, 그 금지된 문서에서는 이념의 치열성이나 강렬한 혁명의 열기는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너무 순수하거나 소박했고 혹은 아무런 이념적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많았다. 그들 작품이 불온문서로 취급되었다는 것 자체가 전율을 일으켰다.

백석의 시들은 이념이 아니라 유년 시절에 품었던 온갖 신화와 몽상들로 채색되어 있었고, 결혼 실패와 방랑, 실직과 이직 같은 개인적인 어떤 상처에 기대 있었다.

월북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적색 이념의 공포, 비밀경찰, 국경선을 넘나들 때의 그 비장한 마음의 자물쇠 같은 것들, 어느 것도 느낄 수 없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월북 시인으로 규정당한 백석의 생애와 그의 시가 보여주는 순수 유년의 세계 사이의 낙차는 역사가 한 개인에게 던지는 폭력을 의미했다.

소풍가듯 나 이북간다하고 월북한 김순남의 운명은, 월북 지식인들에게서 이념의 절대성과 투철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의아한 것이었고, 한 개인의 운명에서 참혹한 역사의 사슬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들 청춘들이 품었던 열정과 이념을 향한 순수동기와 월북의 후일담은 그래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그들 월북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북한 조선문학등의 잡지에서 그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거나 일본인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은 풍문을 통해 그들 최후를 추정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 이름이 문학 연구서들에서 언급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 문학 전체나 생애 자체가 복원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해금은 시작에 불과했다. 월북 지식인들의 생애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백석, 임선규, 김순남 등등의 사망연대는 여전히 물음표로 표기되었다. 이 물음표는 아마 우리 지성사 또는 이념사가 미완의 형태로 남겨졌음을 보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이제 분단된 우리 현대사의 정리, 사상사적 정리, 인간학적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 갈라지고 훼손된 지성사를 복원함으로써 정신적 이념적 통합을 이룰 바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월북 지식인들은 너무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잊혀졌고 망각의 존재로 현대사에 묻혀 있었다. 이쾌대를 보고 독자들이 갖게 된 우리에게도 이런 화가가 있었던가하는 놀라움은 그 망각의 이면이었다.

함흥이 고향인 한설야가 어떻게 월북 지식인인가라는 독자 질문은, 월북 이념 전향 등의 문제는 개인의 내적인 이념 성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현실정치와 남북한 역학관계 등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되돌아보게 했다. 월북이란 단순한 공간 이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대 지식인들의 월북은 많은 경우, 그들이 이상적으로 품었던 인간화 된 사회 및 체제,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동경을 의미했다. 또한 그들의 월북은 이념의 선택이라는 능동적 성격을 가지기에 앞서 이념인으로서 규정당함이라는 피동성과 그로 인한 비극성을 동시에 내포했다.

카프-월북-숙청은 월북 지식인사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백남운이나 이기영 등은 자연사로 생애를 마감했고 정치적으로도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최후의 흔적조차 불분명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월북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명의 표정을 띠고 있어서 존재 자체가 내밀한 울림으로 전해졌다. 감정적으로 움직였고 친구따라 별 사상적 고민없이 북을 선택했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은 전적으로 오류였거나 사상의 미성숙에 의한 조급증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 몇몇은 후회했을 것이다. 시 쓰기를 금지당하고 작곡을 금지당하고 학자적 양심을 접은 채 정치에 이용당하고 협동농장이나 수용소로 추방되면서 그들은 월북한 것에 대한 뼈아픈 후회를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을 비판하고 이념인으로서의 오류를 하나 하나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문득 소련기행을 쓰고 공산주의로부터 전향한 앙드레 지드를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지드는 말했다.

아아, 내가 공산주의에 도달한 것을 감정적인 일로 본 당신들은 얼마나 옳았는가. 그러나 그런 내가 옳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가.”

지드는 그것을 인간에 대한 열정,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몰입해 간 사상의 궤도를 어떻게 잘-잘못의 직선을 그어 단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이념의 토양이 됐던 민족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이제 우리가 품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조영복<광운대 국문과 교수ㆍ문학평론가>/조선일보,2001.3.15

월북시인의 시

사람이 결혼하면 각자가 읽던 책들도 합해진다는 의미로 <서재의 결혼>이라는 책도 나왔지만 아직 나의 서재는 완전한 합일에 이르지 못했다. 주인을 따라 나서지 못한 나의 책들 중에는 여전히 청춘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보듬고 친정에서 그간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들이 꽤 있다. 그래서 지금도 부모님을 뵙고 오는 돌아올 적마다 가방 안에는 으레 한두 권의 책이 숨어 들어있다. 부모님 눈치 차리지 못하시게 책을 옮기는 나의 비밀 공수작전이다. 출가한지 십 몇 년이 지난 지금, 이제 와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자식들이 모두 출가하여 텅 빈 집안에서 서가마저 비게 하는 것은 송구스런 일인듯 하여 드러나게 책을 안고 나오지 못한다.

신정 때에 가서는 시집 몇 권을 가지고 왔다. 이용악과 임화의 시집 두어 권이었다. 얇은 책 피의 시집들을 가방에 챙겨 넣으면서 이상하게도 버릇처럼 가슴이 졸여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는 누렇게 색까지 바랜 그 시집들은 대학시절 누구나 알지 못하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읽어야 했던 책들이었다. 소위 월북시인들의 작품들이지 않는가. ‘북한이 금기시 되던 시대에 월북이라니, ‘접근금지가 많기도 하던 시대였다. 자의든 타의든 북한으로 가버린 시인의 시들은 금지구역안의 열매들이었다. 하지만 울타리를 두른다고 과일의 향기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을 텐가. 그때 가슴 졸이며 읽던 그 시들이 발하던 빛은 얼마나 강렬하던지!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를 읽으며 나는 한껏 부풀게 돛을 올리고 바다를 가르는 배를 그리며 그 위에 나를 둥실 얹어 두었다. 백석, 정지용, 이용악, 임화.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던 그 공기의 서늘함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요즘 서점에 나가면 한때 내가 감추며 읽었던 시집들이 진열대에 버젓이나와 있다. 시인들의 얼굴도 전면으로 나와 있고 시집의 장정은 과분할 정도로 멋있다. <현대시 100년 총서> 시리즈에도 우리가 낙인찍었던 월북시인들이 자리를 떡하니 하나씩 잡고 앉아있다. 어쩌면 감격스러워야할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왠지 아리기만 하다. 내가 기억하는 그 광휘를 지금의 시집에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이 좋아져서아무도 숨어서 시를 읽을 필요는 없게 되었다. 누구든지 원하는 것은 손에 넣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들의 시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어쩌면 이제 그들은 다른 책들에 비하면 경쟁력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그저 한 권의 시집일 뿐이리라. 영어참고서나 대입 논술고사 준비서나 취업지침서나 그런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시집인 것이다.

설사 같은 시집들의 반열에서 경쟁한다고 해도 글쎄,. 읽기 쉽고 달콤한 시들이 지천인데 민족의 설움이나 분단의 고통을 살을 발라내듯이 노래해 놓은 그 시인들의 작품이 어떻게 지금의 감성에 다가올 수나 있을까? 잃어버린 귀한 것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건만 무심한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갈 뿐이다.

얼마 전 임화의 시가 몇 편 더 발굴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오늘도 또한 나 젊은 청년들은/ 부지런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이 바다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내일도 또한/ 현해탄은 청년들의 해협이리라/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임화의 현해탄중에서)

난리통인 조국의 형편 때문에 이리 찢기고 저리 갈라진 시인들의 시편들이 다시 귀퉁이를 맞춰 나오니 반가운 소식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복원되는 시집의 권수와 그 책 부피가 두꺼워 질 때 마다 나는 여전히 가슴이 쓰리다. , 우리가 잃어버리고 산 시대정신이 저만큼이나 되는구나. 한 시대를 뭉텅 잘려 버린 채 우리는 자랐다. 아마도 그 결핍감은 영원히 다시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전념하는 시민운동의 진정한 목적은 그런데 있지 않을까. 작게는 한 시민이, 크게는 한 시대가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나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

아직도 내게는 커 보이기만 하는 월북시인의 시집을 다시 열어본다.

백년이 몇 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울어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이용악의 오랑캐꽃중에서).

권은정 (인터뷰전문기자, 번역문학가)/ 참여연대2004-01-13

 

', 뒤돌아보던 고라니’- 이중기,

냅다 줄행랑치다 말고 앞발 딱 버틴 채

, 뒤돌아보는 고라니 눈빛에서

그렁그렁한 광채를 보는 순간이었다

참 슬픈 사회주의자.

별처럼 빛나는 문장의 월북 작가를 생각했다

짧게,

아주 잠깐 머문 자리에 써놓고 간

산머루 같은 몇 알

환약시편을 나는 읽었다

한사코 북으로 가야 했던 남녘기러기 월북 작가

끝없는 벼랑이었던 서울 발로 차버리고

삼팔선 넘다 말고 홱, 뒤돌아보던

어느 새벽 남쪽에서 만났을 저 고라니 눈빛

생의 마지막 문장

한국문학사의 아픈 가시, 그 서러운 문장

시집 ,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

 

 

효용을 위한 문학임화 ()

시문학계 샛별로 떠오른 네거리의 순이

 

감이 붉은 시골 가을이

아득히 푸른 하늘에 놀 같은

미결사의 가을 해가 밤보다도 길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고,

한간 좁은 방 벽은 두터워,

높은 들창 갓에

하늘은 어린애처럼 찰락어리는 바다.

 

나의 생각고 궁리하던 이것저것을,

다 너의 물결 위에 실어,

구름이 흐르는 곳으로 뛰어볼가!

 

동해바다 가에 작은 촌은,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이고,

한강 물이 숭얼대는

영등포 붉은 언덕은,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

 

오늘도 연기는

구름보다 높고,

누구이고 청년이 몇,

너무나 좁은 하늘을

넓은 희망의 눈동자 속 깊이

호수처럼 담으리라.

 

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카프의 시인,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우리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임화. 그는 수려한 외모를 가져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임화(林和)<신인문학> 19368월호에 선보인 하늘이다. 정지용(鄭芝溶)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기렸다는 작품으로 임화 두 번째 아내인 작가 지하련이 즐겨 읊조렸다고 한다. 일제 억누름에 밀려 카프를 뜯어헤친 다음이었지만 카프시대 품었던 뜨거운 문학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곁말로 깊이 감춰두는 가운데 예술적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10년 동안 카프를 이끌었던 임화는 깊은 허물어짐과 무릎꿇음에 빠져 이따금 선보이는 작품 또한 까다로운 처음 때 다다풍 추상시 비스무레한 것들이었는데, 하늘만은 깨끗한 서정으로 슬픈 겨레 모습을 노래하고 있어, 정지용과 지하련 손뼉이 올바른 것임을 보여준다.

어떻게 임화를 떼버려야겠는데, 귀찮아서 죽겠단 말야. 글쎄 밥상에다 담뱃재를 그냥 털어놓지 않나, 밥상 한 번 들고 일어나서 안으로 갖다주는 법이 없단 말야. 그러니까 어머님도 이맛살을 찌푸리시고, 아버님은 화를 막 내시지 뭐야. 일본이나 갔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어떻게든지 노자를 만들어줘야겠는데.”

박영희(朴英熙)가 김기진(金基鎭)한테 하는 말이었다. 그때에 임화는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던 다다이즘 냄새 시를 쓰던 젊은이로 카프 이론가 박영희 집에 개기면서문학적 갈팡질팡을 하고 있었다. 192518살 때였다. 박영희가 얻어다 준 노잣돈으로 동경에 간 임화는 카프 동경지부장인 이북만(李北滿)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였다. 이북만이 목대잡던 사회주의 잡지 <무산자> 꾸미는 일을 거들며 김남천(金南天안막(安漠한재덕(韓在德) 같은 사회주의 예술이론가들과 어울리며 사회과학 책들을 두루 읽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인 1928년 사회주의사실주의 문예이론에 바탕한 임화 맨 첫 시인 젊은 순라의 편지를 선보임으로써 다다이즘 때 헤맴에서 벗어난다. 1929<조선지광>네거리의 순이우리 오빠와 화로를 선보이면서 조선시문학계에 샛별로 떠오르니, 21살 때였다. 그즈음 임화 문학관을 보여주는 글이 있다. <조선지광> 1928년 정월호에 실린 효용을 위한 문학으로, 전 해인 1219일 쓴 것이다.

지금 우리 조선사람들에게는 단지 문학이나 예술뿐이 아니라 모든 문화 그것도 우리의 당면한 이익의 획득을 위한 존재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현재에 있어서의 우리 조선인의 행동의 일체는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즉 그 효용을 위하여 활동하고 활용되는 것이므로 현재 우리의 효용이란 전 우리의 이익이라는 한 표적 하에다 모든 특수적이고 개별적인 효용의 문제를 전 조선 이익의 획득이란 그 앞으로 몰수하고 그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의 지금 가져야 할 문학이란 어떠한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먼저 말한 문화발전의 그것과 같이 우리 조선인 전체의 이익을 위한 문학이어야 할 것을 정확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학은 XXXX 효용의 가치를 중심으로 제작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운동의 당면의 제문제 즉 조직이라든지 기타의 문제를 위하여 우리의 활동의 일부로 소위 문단이란 외면에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러한 효용의 가치를 중심으로 제작되지 않는 작품은 우리 조선에 필요치 않은 것이다. 오직 효용을 위한 문학이어야 조선의 문학이 될 것이다.

이웃 여고생들에게 연예박사로 불려

본이름이 임인식(林仁植)인 임화는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제 동숭동 동쪽 창신동 산동네인데, 본적은 종로 가회동으로 기소장에 나온다. <삼천리문학> 19371월호에 그가 쓴 자서전에 보면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어머니 슬하에 행복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임화 시집 <현해탄> 표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은 192215살 때였다. 시인 이상(李箱), 평론가 이헌구(李軒求), 정치인 이강국(李康國유진산(柳珍山)이 한반 동무였고, 시인 김기림(金起林), 평론가 김환태(金煥泰)가 한 해 밑이었다. 김남천이 안막한테 들었다는 말인데 아이 적엔 면도만 반들반들하게 하고 휘파람 불고 다녔다고 한다. 보성과 이웃한 숙명고녀 여학생들한테 연애박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미소년이어서 아이노꼬 같다는 말을 들었다. 혼혈아처럼 잘 생겼던 그는 나중 영화배우가 되어 두 편 영화에서 으뜸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문장> 19402월호에 그가 쓴 어떤 청년의 참회라는 글이 나오는데, 문학청년 임화 고백기로 읽힌다. 보성고보에 들어가면서부터 근현대 세계명작들을 두루 읽었으며 더러는 외울 만큼 빠삭하였다.

16살 때 하이네 시를 읽었는데 어여쁜 소녀를 그리워하며 흐뭇했다고 한다. 19살 나던 5학년 때 집안이 거널나 학교를 그만두었고, 헌책방에 교과서를 판 돈으로 그때에 바람을 일으키던 조타모(鳥打帽)를 사 쓴 다음 부모한테 문학의 길로 나가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리고 맑스엥겔스 책들을 읽으며 다다이즘에 빠져든다.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인 이기영, 최서해, 이상화, 윤기정, 박영희, 김기진, 김복진, 박팔양, 송영, 안석영들과 사귀게 된 것도 이무렵부터였다.

임화가 충남 천안 출신 가난한 농사꾼 자식으로 뼈센 사회주의자이던 이북만한테 개기면서건져올린 것은, 맑스엥겔스 사상을 바탕으로 한 문학 갈닦음만이 아니었다. 임화와 동갑인 이북만은 5살 밑인 누이 이귀남(李貴男)과 같이 있었는데, 이 처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임화 22, 이귀남 17살 때였다. 이귀남 또한 카프맹원으로 지하촌이라는 영화에서 으뜸 구실을 하게 되었는데, ‘세길로라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와 눈길을 끌던 임화가 몸짓재주를 채잡아주게 되면서 가까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촌스러운 사내 이름인 귀남귀례(貴禮)’로 바꾼 다음 같이 살게 된 것은 1930년 끝무렵이었고, 다음해 귀국하여 혜화동에서 새살림을 차리게 된다. 두 사람은 혼인식을 치르지 않았는데, 까닭을 묻는 기자에게 이귀례는 이렇게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입장에서 혼인식이란 형식적 허례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견지에서 그만두었다.”

견결한 프롤레타리아 전사였던 이귀례와 기질적으로 시인이었던 임화는 찢어지게 된다. 2차카프사건이 터지면서 카프가 헤쳐지고 임화가 일제에 무릎꿇으면서였으니, 계급적 선자리에 뚜렷하지 못한 말랑한 예술가에게 어기찬 계급전사 이귀례 꿈이 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귀례가 임화를 카트쳐버렸던 것이다. 1950628일 인민군 장성 계급장을 단 임화가 서울로 와서 너 어느 곳에 있느냐?”며 그렇게도 애타는 부정(父情)으로 딸 혜란(蕙蘭)을 찾았지만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 모녀였다.

두번째 부인 지하련은 단편 도정남겨

많은 여성들이 임화를 좋아하였고 많은 연애이야기를 뿌렸던 임화였다. 소문의 참과 거짓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임화는 두 번째 부인을 얻게 되니, 이현욱(李現郁)이었다. 임화보다 4살 밑인 이현욱은 경남 마산에서 자라났고 동경에서 고녀를 나와 대학물까지 먹은 아름다운 얼굴의 고학력자였다. “여자로서 알맞은 키에 예쁜 얼굴이었다고 작가 최정희(崔貞熙)는 말하였다. 다음은 <몽양 여운형>을 쓴 이기형(李基炯) 증언이다.

길쭉한 얼굴, 시원한 검은 눈, 콧날은 날카로운 편, 키는 호리호리하였으며, 늘 치마저고리를 입었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19

358월 가운데 때 묵은병인 결핵을 다스리고자 마산으로 내려갔던 임화가 만난 여성이었다. 1940년 백철(白鐵)이 밀어줘 <문장>지에 단편 몌별을 선보이며 작가로 올라서는 붓이름 지하련(池河連)으로, 남편 임화를 좇아 월북하였다가 작품 한 편 못 쓰고 제명에 못 죽는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단편소설 상수(上手)였던 이태준(李泰俊)과 어깨를 겨루었던 사람이다. 조선문학가동맹에서 1946해방기념조선문학상을 만들었을 때 이태준 해방전후와 함께 지하련 도정이 마지막 겨루기를 하였던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도정을 높이 기렸다.

지하련의 도정8·15 직후 국내에서 발흥한 민주주의운동에 있어서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서, 새로운 조선문학이 창조하여 나갈 인간형상의 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심리묘사 및 인물의 형상화에 있어 표시된 작자의 비범한 자질과 더불어 우리들 가운데 있는 소시민의 음영을 감지하는 예민한 감각은 주목에 값하는 것이다.”

임화 출세작 가운데 하나인 네거리의 순이(順伊)’. ‘단편서사시로 일컬어지는 이야기시인데, 잘 짜여진 단편소설을 읽는 것 같다는 이들 이야기시는 임화가 처음 길을 연 것으로, 뒷날 신경림(申庚林)의 뛰어난 노래 <농무>로 그 물줄기가 이어진다.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順伊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상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핀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아래 줄임)

효용을 위한 문학임화 ()

문맹결성 조선문학 헤게모니 잡다

천지를 뒤덮을 듯한 해방조선의 만세! 지축을 진동할 듯한 일본제국의 타도의 보무! 그리고 조선공산당재건만세!’의 함성과 연합군 환영의 흥분! 지난 911일 정오경부터 건준주최로 경성운동장에는 부내와 영등포의 공업지대에서 화학, 금속, 기계, 철도, 체신, 토목, 출판, 섬유 등 각 산업별 남녀 노동조합 회원을 비롯하여 청년, 학도, 시민 등 기외 근로인민대중 1만수천 명이 참집하여 각각 대 기와 스로-의 깃발을 때마침 비내리는 하늘 높이 휘날리면서 광화문을 거쳐 총독부를 휘돌아 동 오후 4시경에 해산하였다. 이날 근로대중들의 불타는 듯한 투혼과 강철 같은 단결의 힘은 여실히 발휘되어 일찍이 볼 수 없던 대성과를 거두었으며 일반 시민과 연합군에게도 우리들의 위력이 깊이 인식되었다. 또 이날 야수와 같은 일본제국주의 경관의 흉탄에 맞아 건국의 초석으로 사라진 연전 학도 두 동지의 유해를 모신 학도대의 엄숙한 장렬도 합류하여 더욱 이날의 시위행렬을 뜻깊게 하였다.

<해방일보> 1945919일 창간호 기사이다. ‘조선공산당 통일재건 만세!’ ‘조선인민공화국을 절대 지지하자!’는 커다란 활자가 박힌 21쪽짜리 타블로이드판 일간지이다. 이날의 가슴벅참을 읊은 임화 시가 있다. ‘911이라는 제목이고 부제가 ‘1945, 또 다시 네거리에서이다.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首領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鋪石마다 널린

서울ㅅ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

眩氣로워 바라볼 수 없는

鐘路ㅅ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마냥 여드는

千 萬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골

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든 ㅅ발

자꾸만 바라보며

 

사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가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카프가 없어지면서 임화 삶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살아 있되 이미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일제 윽박지름이 아무리 모지락스럽다지만 민족의 원수요 계급의 원수며 문학예술의 원수인 일본제국주의에 무릎꿇었다는 데서 오는 비꾸진 마음으로 시 또한 처음 때 추상적 다다풍으로 뒷걸음질하던 임화였다. 그러던 임화가 8·15를 맞으면서 한창 때 서슬과 스스로 믿는 마음을 되찾게 되니, 이 시가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닥쳐올 제 한살매를 지레짐작하는 듯한 슬픈 가락이 눈에 밟히지만, 문득 한물 때 단편서사시가락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8·15를 맞아서 가장 힘차게 움직였던 것이 임화였다. 김남천(金南天이원조(李源朝) 같은 이들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얽은 것이 816일이었으니, ‘준비된 문건이었다. 818문건위 모임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얽고 이들 모임을 채잡는 문학론으로 내놓은 것이 인민적 기초 위에서의 민족문학이었다. 12문건예맹을 뭉뚱그려 조선문학가동맹을 얽는 데 앞장서 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니, 조선문학 헤게모니를 잡게 된 것이었다.

문맹에서 차린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에서 조선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라는 밑가락 연설을 하였고, 문화부문 통일전선체로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을 얽어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7항쟁시만을 모은 제2시집 <찬가>를 펴내고 1938년 펴내었던 처녀시집 <현해탄><회상시집>이라는 이름으로,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조카 조벽암(趙碧巖)이 세운 건설출판사에서 박아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민족문학론을 깊어지게 한 문학에 있어 봉건적 잔재와의 투쟁임무’ ‘문학의 인민적 기초같은 문학을 이끄는 길을 내보였다. 47년 미군정 뒷받침을 받는 극우테러단의 좌익신문사 습격과 시인 유진오(兪鎭五) 구속, 시낭송 원고 검열, <찬가> 판매금지, ‘문화공작대피습, 좌익인사 검거선풍이 도를 더해 간다. 더 이만 서울에 있을 수 없는 셈평이 된 것이었다.

1947년 월북, 황해도 해주에 머물러

4511월 이기영과 한설야가 올라갔고, 463월 박세영(朴世永)이 올라갔으며, 6월에는 이태준이 올라갔다.

임화가 월북한 것은 4710월쯤이었다. 비슷한 때에 오장환(吳章煥) 또한 월북하였는데 같이 갔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임화가 간 곳은 평양이 아니라 황해도 해주였다. 남로당 윗선 목대잡이가 있는 그곳에서 제1인쇄소를 책임맡아 <민족조선> <인민조선> 같은 여러 간행물과 팸플릿을 찍어 남으로 내려보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장사꾼들이 오갔고 길잡이만 붙이면 38선을 넘나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46315일 비롯된 남북 우편물 교환은 6·25 사흘 전까지 개성·여현역을 거쳐 주 1회쯤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북조선에 보낼 편지는 ‘38우편물이라고 불렀다. 그 겉봉에 ‘38 이북이라고 빨간 글씨로 쓰도록 했는데 이 ‘38우편물도 여느 우편물과 같이 전국 우체국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남조선 노동당이 이름만일망정 합법정당이었던 것은 49년 끝무렵까지였다.

목대잡이들이 모두 월북한 문맹에는 소설가 박찬모(朴贊謨)가 위원장 몸받아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해주에서 내려보내는 임화 분부에 따라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었다. 해주에 있으면서 임화는 인민항쟁가같은 노랫말들을 지어 내려보냈고, 남조선음악동맹 위원장이었던 작곡가 김순남(金順男)이 곡을 붙인 이 노래들은 입산투쟁을 벌이고 있는 재산인민유격대를 비롯한 남로당 사람들 신바람을 북돋아주는 북소리 같은 것이었다.

1950628일 서울에 온 임화는 조선문화총동맹을 얽고 그 부위원장 자리를 맡는다. 그때 8닢 시를 묶은 전선문고 <너 어느 곳에 있느냐>라는 시집을 내었다고 한다. 백철(白鐵)이 임화를 보았던 느낌이다.

불과 2~3년간에 임화의 모습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머리가 반백에 가깝게 흰머리가 많이 생겨난 일이다. 임화와 나는 나이가 동갑이니까 그때 아마 마흔다섯 정도였을 터인데 얼른 보면 50이 넘은 노신사의 풍모였으니 거기 가서 그렇게 팔자가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이라는 것을 보자. ‘림화 조쏘문화협회 중앙위원회 전 부원장’.

그는 1935년 일제경찰과 야합하여 혁명적 문화단체인 카프를 해산시키도록 책동하였으며 친일 문인보국회리사의 직위에 있으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소위 내선일체의 사상을 주창하는 등 민족반역 행위를 감행하여 왔으며 8·15해방 후는 미국 정탐기관의 밀정으로 가담하여 리승엽 등과 련계 밑에 간첩행위를 감행한 자로() 19518월에는 무장폭동음모 활동에 참가하여 폭동음모 본부를 조직하고 폭동시 조일맹과 같이 정치 및 선전선동조직 책임을 담당하고 그의 역량 집결을 위하여 문화예술 단체를 자기들의 수중에 장악하려고 활동하였다.”

리승엽이 짠 박헌영정권에서 문화교육상을 맡는 것으로 되어 있는 임화가 처형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사형판결을 받은 53년이라는 설도 있고 그 2년 뒤에 있은 박헌영재판에 증인을 선 다음이었다는 설도 있다. 1920년대 뒤판부터 1940년대에 걸쳐 우리 민족문학운동의 사북에 서 있던 임화는 두 권 시집 말고도 우리 근대문학사를 나름의 과학적 방법론 자리에 서서 간추린 <조선문학사>가 있다.

북한서 간첩혐의 받아 형장의 이슬

지하련은 1948년 끝 무렵 처녀창작집 <도정(道程)>이 나오는 것을 본 다음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6·25때 만주로 피난해 있다가 뒤늦게 임화가 잡혀갔다는 소문을 듣고 평양으로 달려왔을 때, 임화는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거의 실성상태가 된 지하련은 치마끈도 제대로 매지 못한 반미치광이 모습으로 알 만한 사람들이 있는 기관이나 단체를 수소문하여 돌아다니다가 내무서원에게 붙잡혀 평북 희천 근처 산 속에 있는 교화소로 끌려갔는데, 1960년 첫 무렵 앓다죽었다고 한다. 임화와 지하련 사이에 태어난 남매 살매는 알 길이 없다. 임화가 노랫말을 쓴 해방조선의 노래이다.

1.전사들아 일어나거라

영웅들아 일어나거라

압박의 사슬은 끊어지고

자유와 희망의 새날이 왔다

일어나거라 전사들아

-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2.서백리아 바람 찬 벌판

현해탄의 거친 파도에

한 많이 쓰러진 수없는 생명

ㅅ발은 벌거니 피에 젖었다.

잊지 말아라 혁명 동지를

-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3.등불도 없이 걸어오던

눈물도 없이 울어오던

어둔 밤 우리의 머리 위 높이

호올로 빛나는 그대들 이름

높이 들어라 전사의 ㅅ발

-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 <> <국수> 등을 냈다/ 2009.05.12ㅣ위클리경향 824

 

'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일제강점기 "가장 무서운" 문인으로 임화(본명 임인식)를 가리켰다. 현대 문학비평의 거두 김윤식은 <한국근대문예비평사 연구>(1976) 부록 '임화 연구'에서 이상, 한용운, 홍명희, 이병기, 염상섭과 함께 임화를 극복해야 할 한국 문학사의 거봉으로 거론했다.

임화의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동지이자 절친 김남천은 "예술 운동의 우수한 운전수"로 임화를 찬양했다. 조동일은 임화의 시를 평가할 수 없다고 비평을 포기했고 유종호는 임화의 시가 실패했다고 혹평했다. 해방공간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김동석은 임화를 '병든 지식인'으로 혹평하며 가혹할 정도로 폄훼했다.

정말 임화는 한국 문학사에서 어떤 인물이었을까? 늘샘 김상천은 오랜 기간 자료를 모으고 논구한 역작 <청년 임화>에서 임화야말로 '조선 민족문화 건설의 총사령관이자 오늘날 '조선적인' K-문화의 정신적 뿌리임을 역설한다.

20대 청년 임화(1908-1953)가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심취해 발표한 '네거리의 순이'(1929),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1929), '양말 속의 편지'(1930) 등 단편 서사시는 1930년 전후로 전개된 '혁명적 노조 운동'을 배경으로 발표된 작품들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가혹한 착취와 이에 맞선 조선 민중이 처한 현실을 단편서사시 형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작가 김상천은 이를 노동쟁의 현장을 충실히 담아낸 '쟁의 서사'라는 독창적인 용어로 별칭했다. 이는 스물한두 살 청년 임화를 문단에서 일약 주목받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프로 문학 작품들이다.

30대 청년 임화는 헤겔 철학에 심취했다. 임화 스스로 고백했듯이 자신을 만든 팔할은 독서였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역사철학강의>을 탐독한 뒤 문학사가로서 <개설신문학사>(1939)를 통해 '이식문학론'을 설파했다. '이식문학론'은 모방과 이식을 통해 가장 '조선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조선 문학의 탄생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현대 조선 문학의 환경'(1940.7)에서 이렇게 비유했다.

"동경에서는 벚꽃이 삼월 초에 피지만 경성에서는 사월 하순에 피고, 내지에서는 밀감이 열리지만 조선에서는 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경성의 벚꽃을 삼월 초에 피우려 한들 불가능한 것이다. (중략) 결국 조선 문학은 우리 본래의 독특한 방식의 소산이다. 사람들은 객관적으로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주관적으로는 다른 환경을 체험한다. (중략)이 체험이 이른바 '우리만의 현실'이고 이 현실 속에서 전혀 새로운 인간이 형성되매, 그런 사람 가운데서 또한 새로운 사고방식이나 정감, 독특한 양식이 생겨난다."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이 일어났을 때 임화는 최남선의 국수주의와 이병도의 실증 사학으로 위장한 식민사학을 비판하며 조선학 운동에 열정을 바쳤다. 오늘날 <한국사> 교과서엔 단 한 줄도 언급돼 있지 않지만 임화와 외우 김태준이 연구하고 출간한 <원본 춘향전>, <조선민요선>, <조선전래동요선>, <조선연극사>, <조선소설사>, <고려가사>, <청구영언>을 비롯해 수많은 조선학 관련 출판물들이 바로 그것을 입증한다.

임화는 <문학의 논리>(1940)를 통해 탁월한 문예비평가로서도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나아가 임화는 30년대 치열하게 전개된 한글맞춤법 논쟁에서 '자연음'(박승빈, 최남선)과 한글운동파(주시경, 이극로, 최현배)'이상음'"조선어학회류의 관념론"이라 비판하며 민중의 생활언어인 '현실음'(홍기문, 임화)을 역설했다. '작장면',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이 맞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해 임화는 "조선 문학은 조선 민중의 언어 위에 성립할 수 있다"며 조선다운 주체성을 강조했다.

임화의 민중 언어 사상은 "존재(생활)가 의식(언어)보다 우선"이라는 임화의 현실주의 언어사상이 반영된 모습으로 ''(1968)의 시인 김수영으로 계승되었다. 김수영은 자신이 흠모하고 존경했던 임화의 언어사상을 이어받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민중의 생활이 바뀌면 자연히 언어가 바뀐다"고 강조했다. 현실주의 언어관을 피력한 임화의 언어사상을 두고 작가 김상천은 러시아의 언어철학자 바흐친에 비견될 만한 언어사상가라고 극찬했다.

<청년 임화>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한국 문학사에서 철두철미 밀봉된 임화를 역사 사실적으로 논구한 숙작(熟作)이다. 이전에 출간된 <네거리의 예술가들>(2021), <철학자 김수영>(2022)과 함께 반쪽짜리 한국 문학사를 온전한 모습으로 정립하는 데 주춧돌이 될 문예비평서임을 단언한다. 23.07.14 오마인쥬스 하성환(hsh703) 문인 임화를 향한 오해, 여기서 풀고 갑시다에서

 

임화 시집 현해탄

 

네거리의 순이(順伊)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듯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웠고,

언 밥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듯한 품속에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세월

시퍼렇게 흘러내리는 노들 강

 

나뭇가지를 후려 꺾는 눈보라와 함께

얼어붙어 삼동 긴 겨울에 그것은

살결 센 손등처럼 몇 번 터지고 갈라지며,

또 그 위에 밀물이 넘쳐/ 얼음은 두 자 석 자 두터워졌다.

 

!

부드러운 바람결 옷깃으로 기어들 제,

얼음판은 풀리고 녹아서,

돈짝 구들장 같은 조각이 되어 황해바다로 흘러간다.

 

이렇게 때는 흐르고 흘러서, 넓은 산 모서리를 스쳐내리고, 굳은 바위를 깎아,

천리 길 노들 강의 하상을 깔아놓았나니,

세월이여! 흐르는 영원의 것이여!

모든 것을 쌓아 올리고, 모든 것을 허물어 내리는,

오오 흐르는 시간이여, 과거이고 미래인 것이여!

우리들은 이 붉은 산을, 시커먼 바위를,

그리고 흐르는 세월을, 닥쳐오는 미래를,

존엄보다도 그것을 사랑한다.

몸과 마음, 그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세월이여, 너는 꿈에도 한번

사멸하는 것이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허락한 일이 없고,

과거의 망령이 생탄하는 어린것의 울음 우는 목을 누르게 한 일은 없었다.

너는 언제나 얼음장 같이 냉혹한 품안에

이 모든 것의 차례를 바꿈 없이

담뿍 기르며 흘러 왔다.

 

우리들은 

타는 가슴을 흥분에 두근거리면서 젊은 시대의 대오는

뜨거운 맥이 높이 뛰는 두 손을 쩍 벌리고,

모든 것을 그 아름에 끼고 닥쳐오는 세월! 미래!

그대를 이 지상에 굳건히 부여잡는다.

우리는 역사의 현실이 물결치는 대하 가운데서/ 썩어지며 무너져가는 그것을 물리칠 확고한 계획과

그것을 향해 갈 독수리와 같이 돌진할 만신의 용기를 가지고,

이 너른 지상의 모든 곳에서 너의 품안으로 다가선다.

 

오오, 사랑하는 영원한 청춘 세월이여.

너의 그 아름다운 커다란 푸른빛 눈을 크게 뜨고,

오오, 대지의 세계를 둘러보라!

누구가 정말 너의 계획의 계획자이며!

누구가 정말 너의 의지의 실행자인가?

 

오오, 한 초 한 분

온 세계 위에 긴 날개를 펼치고 날아드는 한 해여!

우리는 너에게 온 세계를 요구한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불 닿는 말썽 가운데서/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을.

……

……

……

오오! 감히 어떤 바람이 있어, 어떤 힘이 있어,

물결이여, 돌아서라! 하상이여, 일어나라! 고 손질할 것이며,

세월이여, 퇴거하라! 미래여, 물러가거라! 고 소리치겠는가?

 

미래여! 사랑하는 영원이여!

세계의 모든 것과 함께 너는 영원히 젊은 우리들의 것이다.

 

주리라 네 탐내는 모든 것을

젊었을 그 때엔 저렇듯 아름다운 꽃 이파리도,/ 이곳엔 꿈인 듯 흩어져 버리고,/ 천년의 긴 목숨을 하늘 높이 자랑하든/ 저 아름드리 솔 잣나무의 높고 큰 줄기도/ 역시 이곳에는 허리를 꺾고 넘어지나니,/ 이 모든 것의 위에를 마음대로 오르고 내리는/ 온갖 새의 임금인 독수리여!/ 너도 역시 마지막엔 그 크고 넓은/ 두 날갯죽지를 흐늘어뜨리고,/ 저무는 가을 날 초라한 나뭇잎새 바람에 나부껴 흩날리듯/ 옛 그날이 있는 듯 만 듯 덧없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가?// 노한 구름이 비바람 뿌리며 소리치던/ 그 험한 날 천리 먼 길에도,/ 일찍이 날개를 접어 굴욕(屈辱)의 숲속에서/ 부끄러운 눈알을 한번도/ 두려움에 굴려본 기억이 없는/ 오오! 하늘의 영웅이여! 너도/ 주검이 한번 네 큰 몸을 번쩍 들어 땅 위에 메다치면/ 비록 어지러운 가슴을/ 누를 수 없는 노함과 원한에 깨칠지언정,/ 날개를 펼쳐 다시 한 번/ 이곳에서 하늘을 향하여/ 화살처럼 내닫지는 못했는가?// 오오! 말 없는 악령(惡靈)이여!/ 모든 것의 무덤인 대지여!/ 너는 말하지 못하겠는가?/ 정말로 너는 목숨 있는 모든 것을/ 주검으로 거두는,/ 살아있고 살아가는 모든 것의 최후의 원수인지……/ 너는 대답지 못하겠는가?/ 천고의 옛날과 같이 지금도/ 또 끝없을 먼 미래에까지/ 너는 역시 말 없는 짐승이 되어/ 이곳에 엎뎌져 있겠는가?// 높은 산악이여! 굳은 암석이여!/ 끝없는 바다까지도 네 품에 안고 있는/ 무한한 담묵과 암흑의 군주여!/ 만일 네 넓고 푸른 대양이나 호수의 눈과 같이/ 언제나 뜨고서도 보지를 못한다면,/ 이 한 몸 둥그런 돌멩이 만들어/ 영원히 감지 않는 네 속에 풍덩 뛰어 들리라./ 만일 네 누르고 푸른 가죽이나 검고 굳은 바위처럼/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다면은,/ 사랑하는 어머님 젖가슴 뜯으며 어리광 부리던,/ 이 두 손으로 네 위에 더운 피 흐르도록 두드리리라./ 만일 네 아늑한 산맥의 귓전이/ 하늘을 찢는 우뢰(雨雷)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면,/ 못 잊을 임 볼 밑에서 뜨거운 마음을 하소연 하던,/ 이 다문 입을 열어/ 입술이 불되도록 절규하리라./ 만일 네 깊은 심장이/ 어둠과 침묵 밖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싫어한다면,/ 두 손과 다리를 가슴에 한데 모아/ 운석(隕石)이 되어/ 네 위에 떨어지리라.// 그래도 만일/ 네 영원히 침묵의 제왕으로/ 주검밖에 아무것도 알지를 못한다면,/ 주리라! 오오, 네 탐내는 모든 것을……/ 너의 멀고 넓은 태평양 바다의 한옆/ 아늑한 내해 가운데/ 한 오리 내어민 반도 동쪽 가,/ 성천강(城川江) 물줄기 맑게 흐르는 남쪽 기슭인/ 네 한길 품속에 영원히 잠든/ 내 사랑하는 벗 그가/ 네게 내어준 그것과 같이/ 심장 두 팔 두 다리,/ 도 그 위를 뛰고 달리며/ 일찍이 어떠한 두려움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청년의 이 온몸을……/ 너는 탐내는가? 말해보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도 아직/ 네 탐욕의 목마름은 나을 수가 없겠는가?// 오오! 주리라!/ 그러면 살아있는 이 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울고 웃는 모든 것과,/ 흐르는 세월의 물결 이외의/ 아무런 권위 앞에서도/ 일찍이 머리를 숙여보지 않았던,/ 부라는 정열과 살아있는 생각의 모두를……/ 암흑의 심장이여! 주검의 악령이여!/ 네 이 가운데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를 탐낸다면,/ 소리 높여 대답하라.// 그러나 만일,/ 오오! 그래도 만일,/ 네 악마의 검은 배가/ 그것으로도 아직 찰 수가 없다면,/ 주리라! 그의 벗 되는 이 몸과 나머지 모든 것을……/ 그리고/ 그가 안고 울고 웃고 즐기고 노하며/ 마지막 그의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오히려 무서운 매발톱이/ 어린 목숨을 탐내어 하늘을 감돌 제,/ 철모르는 어린것을 두 깃으로 얼싸안는/ 어미새의 가슴처럼,/ 그것을 그것을 지키려고/ 온 몸을 흥분에 떨던,/ 그의 평생의 요람이었고/ 그의 모든 벗의 성곽이었던/ 청년의 정열과 진리의 무대까지도……// 그러나 또 만일, , 또 만일,/ 탐욕의 열병에 썩어가는 네 오장이/ 그것으로도 아직 찰 수가 없다면,/ 그의 자라나던 성곽과 노래의 대오/ 살림의 진실과 진리의 길을/ 꽃 위에 수놓던 군대의 모두가,/ 열 몇 해 오랫동안 그 배 위에서,/ 산 같은 풍랑의 두려움에도/ 신기루의 달큼한 유혹에도,/ 오직 검은 하늘 저쪽/ 밝은 별 이끄는 만리 뱃길에/ 키 자루를 어지럽히지 않았던,/ 이 검은 쇠로 굳게 무장한/ 전함 돛대 끝 높이 빛나는 우리들/ ‘××××’의 깃발까지도,/ 네 그칠 바 모르는 오장의 밑바닥을 메우려고/ 검은 두 손을 벌린다면,/ 벌레의 구물대는 그 위에/ 내놓기를 아끼지 않으리라!// 그러나 네 높고 큰 산악의 귓전을 기울여보라!/ 네 잠잠히 넓은 대양과 호수의 푸른 눈알을 굴려보아라!/ 이 누워있는 불룩한 무덤위에/ 조는 듯 피어있는 머리 숙인 할미꽃이라든가,/ 아침 햇빛에 잠자던 머리를 들어/ 아득히 먼 저 끝까지/ 날마다 푸른 물결 밀려가는/ 이 아름다운 봄철의 들판이라든가,/ 그 위에 우뚝 허리를 펴/ 지나간 시절에게 패전한 흉터가 메일랑 말둥한/ 움 터오는 나뭇가지들의 누런 새 순이라든가,/ 저 버들가지 흩날리는 언덕 아래/ 텀벙 엎더져 눈[]을 털고/ 동해바다 넓은 어구로 흘러내리는/ 성천강의 얼음조각이라든가를……/ 으오, 유빙(流氷)이다!/ 보는가! 저 얼음장 뒹구는 위대한 물결을!/ 진실로 미운 것이여!/ 다시 두 번 어깨를 겨누어 하늘 아래 설 수 없는/ 정말로 정말로 미운 것이여!/ 아는가?/ 세월은 네 품이 아닌/ 먼 저쪽에서 흐르면서 죽어가는 것 대신에 영구히 새로운 것을 낳고있다./ 어제도, 지난해에도, 태고의 옛날에도,/ 그리고 끝 모를 먼 미래에까지도……// 정말로/ 가을에 아프고 쓰라린 기억은 한번도/ 누런 풀숲에서,/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는/ 할미꽃의 용기를 꺾지는 못했었고,/ 거센 동해의 산 같은 격랑도/ 삼동(三冬) 긴 겨울/ 길 넘게 얼어붙은 빙하를 녹여/ 하구로 내려 미는/ 한 오리 성천강의 가냘픈 힘을/ 막아본 적은 없었다.// 하물며 이른 봄의 엷은 바람으로/ 어찌 새싹 푸르러/ 손뼉같은 큰 잎새 피어,/ 태양과 함께 청공 아래 허덕이는/ 여름철의 기름진 성장의 힘을/ 누를 수 있겠는가?/ 모진 바람 지동 치는 암흑한 언덕 위에/ 죽은 듯 엎더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수없는 슬픔을/ 영구히 벗지 못할 겉옷 속에/ 장사지내려던 눈 덮인 들/ 너와 함께 태초로부터/ 불타던 태양까지가 그의 힘을 잃고/ 헛되이 긴 동안을 글러가던/ 그 끝없이 차고 흰 벌판 위에/ 일제히 생탄의 마당으로 잡아 일으킬/ 이 세월의 영원한 흐름을,/ 철수의 위대한 힘을,/ 닥쳐오는 봄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원수여! 말해보라!/ 막을 수 있겠는가?// 주리라! 주검의 악령이여! 네 탐내는 모든 것을……/ 가을의 산야가 네 위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눈 속 깊이 내어 맡기듯……// 그러나 종달새 우는 오월/ 푸른 하늘 아래 나팔을 불며/ 군호 소리 높이 두 발을 구르고/ 잠자는 모든 것을 일으키고,/ 침묵한 온갖 것의 입을 열어/ 절규의 들로 불러 내이며,/ 죽어진 그 시절의 모든 목숨을/ 무덤으로부터 두손을 잡아 일으킬,/ 저 열길 얼음 속에서도 아직/ 산 것을 자랑하는 어린 물고기의 마음이,/ 한 줄기 빛깔도 엿볼 수 없는/ 이 어두운 땅속에서,/ 두 주먹을 고쳐쥐며 높이고 있는/ ‘한니발의 굳은 맹서를……/ 암흑이여! 주검의 어머니인 대지여!/ 말해보라! 꽉 그 목을 눌러/ 영구히 숨줄을 끊을 수 있겠는가?// 자거라!/ 이제는 두번 살아 우리 앞에 나서지 못할/ 사랑하는 옛 벗 ‘××’! 고이 자거라!/ 지금 살아서 죽는 우리들과 함께./ 누가 감히 네가/ 영구히 죽었다고 말하겠는가?// 불길은 타서 숯등걸 되고/ 그것은 일어날 새 불의 어머니 되나니,/ 벗아! 저 컴컴한 골짝 속에서도/ 오히려 머지않아 닥쳐올 대양의 큰 파도 소리를 자랑하며,/ 묵묵히 흐르는 실낱 냇물이 속삭이는/ 옅은 콧노래 가운데,/ 오는 날의 모든 것을 들으면서/ 고이 두 손을 가슴에 얹어라!// 이 아래 한길 되는 어둔 땅 속에/ 지금 대양의 절규 대신에 잠잠한 침묵에 내가 잠자고 있노라!//

나는 못 믿겠노라

지금 나는 멀리 남쪽 시골서 온 자네의 봉함편지를 접어 머리맡에 놓고,/ 눈을 감아 생각하려 잠을 멈추고 자리에 누웠다./ 풋내의 밀물이/ 짙어가는 여름 드높은 하늘의 깊은 어둠을 헤여,/ 고기떼처럼 춤출 듯 꼬리를 접어 이슬ㅅ발을 끊어 던지고,/ 내 마음의 적은 배가 어젯날의 거칠은 바다 항로에서/ 풍파가 준 깊다란 상처를 다스리려,/ 헌 뱃등을 비스듬히 언덕에 누이고 있는 내 아늑한 굴강인 좁은/ 방으로/ 얼싸안는 듯 덮치는 듯 듬뿍이 스며든다.// / 지나간 황혼의 포구와의 별리(別離)가 오래되어 낡아갈수록/ 산악의 푸른 눈썹은 기억의 쓰라림에 젖어,/ 하늘을 나는 새들도 날개를 접고,/ 젊은 식물들이 네 활개 저으며 가쁘게 호흡하는 저 위/ 눈동자 맑은 밤하늘이 호올로 어둠에 슬픈 옷자락을 길게 끄을면서,/ 정강이 허리가 묻혀 곧 머리까지도 보이지 않을/ 시커먼 수렁으로 비척비척 걸어간다.// 어둠/ 오랜 사공인 별들조차 갈 길을 잃어 구름 속에 헤매는 어둠,/ 돌 바위의 굳은 마음이나 산악의 큰 정신도/ 이 속에서는 넋을 잃고 쓰러질 무겁고 진한 풋내,/ 아무리 길고 억센 생명도 재 되어 쓰러질 흙의 독한 냄새,/ 영원히 건강한 태양도 지금엔 다리를 절어 멀리 산 뒤에 숨은/ 이 두렵고 미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구렁 속에서,/ 밤의 몸집은 한없이 크고 넓게 성장하며,/ 나는 새벽 항구를 멀리 남긴 채 나이 먹고 늙어서 죽어갈 것일가?// 우뢰의 큰 소리로 부름도 아니련만,/ 썰물의 굳센 손이 이끎도 아니련만,/ 무엇이 부르는 듯, 이끄는 듯,/ 내 몸과 마음은 밤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아마도 밤은/ 이 두텁고 무거운 이불을 덮어/ 주검의 검은 자리 우에 나를 누이지 않고는/ 이곳으로부터 내내 물러가지 않으려나보다.// 마치 내 즐기는 산이나 들의 고운 색깔을 걷지 않고는/ 이놈의 여름철이 달아올 수 없는 것처럼, 정말로 밤은/ 의상 없는 심술 사나운 악령인가보다.// 그러나 밤/ 이 두렵고 고단한 오늘날의 긴 밤을 헛되이 달려보고,/ 허위대는 어리석음이라든가/ 내일을 옳게 살으려 고요히 잠자는 것의 중함이라든가를,/ 이 사람, 낸들 어찌 분간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겠는가?// 말없이 움직임 없이 오직/ 죽은 듯 하룻밤을 꿀꺽 참아/ 선뜻 개는 아침,/ 두 팔을 걷어 어지러운 들길을 열어나갈 오늘날의 용력(勇力)일 나는,/ 대망(待望)의 아득한 잠자리의 값을/ 나는 허덕이는 가슴 위에 두 손길을 얹고 눈을 감아 금쳐 본다.// “밤의 굳은 손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누일 때,/ 그저 운명에 종용(從容)함이 오는 아침을 위()하여 가장 현명(賢明)할 것이다.”/ 어찌 자네뿐이겠는가!/ 일찍이 선배인 어느 비평가의 논문도/ 냉정한 이성의 지혜로운 길/ 우리들이 걸어갈 유일의 길이라고 지시했음을,/ 나는 다시 한 번 새롭게 기억한다.// 정말로 가시덤불은 무성하여 좁은 앞길을 덮고,/ 깊은 밤 날씨는 언짢아, 두터운 암흑이/ 그 위에 자욱 누르고 있다./ 이미/ 자네는 부상한 채 사로잡히고, 나는 병들어 누워,/ 벌써 몇 사람의 진실로 존귀한 목숨이/ 고난에 찬 그 험한 길 위에 넘어졌는가?/ 이제 우리들의 긴 대오는 허물어지고 전선은 어지럽다.// 그러나 이 사람!/ 이 괴로운 밤이 다시 우리들을 찬란한 들판으로 나르는 대신/ 이름도 없는 세월의 헛된 제물로/ 번쩍 잡초 우거진 엉구렁 아래 메어치고 달아나지나 않을지?/ 나는 벌레 먹어 무너져 가는 내 가슴이 맞이할 운명과 더불어/ 몇 번 고단한 몸을 뒤척이고,/ 몇 번 괘종의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시커먼 파도 가운데서 대답을 찾으며 생각하였을까?/ 내 수척한 육신은 기름땀내 잠기고,/ 돌멩이처럼 머리는 침묵의 괴로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순간/ 나는 주위를 둘러싼 두터운 침묵이 무너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비로소 보이지도 않게 방안 가득 진 친 셀 수도 없는 모기떼의/ 무수한 입추리 가운데/ 참담히 누워있는 내 육신의 전모를/ 나는 모진 아픔과 몸서리를 같이 발견했다.// 오오, 이 밤의 어두운 꿀이/ 그들의 온갖 활동에 얼마나 크고 넓은 자유를 주는 것일까?/ 암석까지도 진땀을 내뿜는 이 계절의 진한 입김이/ 그들의 엷은 두 날개를 얼마나 가볍고 굳세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 보고 아는 모든 자유를 죽여가고,/ ‘습격자를 향하여 몸을 일으킬 육신의 적은 힘까지도 잃어간다.// ! 아우성소리 치며 눈 위를 감돌고,/ 소리개처럼 탁 귓전을 후려,/ 이 밤의 아픔의 가장 혹독한 전초(前帩)들은 꽉 뒷다리를 버티고,/ 우리들의 몸에 입추리를 꽂아,/ 밤이 주고 그들이 탐내는 모든 것을/ 우리들의 전신에서 약탈한 참혹한 자유를 향락하고 있다.// , 지금은 육촉 전등 흐릿한 좁다란 마루판자,/ 굵은 창살이 네모진 하늘을 두부같이 저며 놓은 높다란 들창 아래,/ 내 자네의 여윈 몸은/ 고된 일에 넘어진 마소처럼 쓰러져 있지 않은가?/ 얼마나 이 밤의 죄악의 통렬한 집행자들은/ 무참하고 아프게 그 입추리를 박았을까?/ 비비여 죽여도, 눌러 죽여도,/ 벗아, 내 분함이 어찌 풀리겠는가?// 자네, 이 모진 아픔에 잠들 수 있겠는가?/ 자네, 이 무거운 더위에 숨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직도/ 오는 아침 우리는 정말 건전할 수 있겠는가?// 오오, 몸을 일으키어 두 팔을 걷어라./ 그리하여 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잡아,/ 이 졸음과 생각을 다 한데 깨치고,/ 바로 우리 병들고 수척한 육신을 쥐어뜯는/ 밤의 미운 초병단(哨兵團)을 향하여,/ 주검으로써 야격(夜擊)에 일어서라.// 만일 우리가/ 자네와 그 아류(亞流)들이 말하는 거룩한 철리(哲理)를 좇는다면,/ 닭이 홰를 치고 바자 밑에 울며/ 이놈의 일족(一族)이 밤과 더불어 숲속에 물러갈 그 때,/ 우리들은 두엄이 되어 굴욕의 들판에 넘어졌을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육신을 뜯기지도 않고/ 우리들을 헛되이 늙히지도 않는/ 그렇게 착한 여름밤이 있다는 신화와 함께/ 내일을 위하여 맘의 아픔에 종용(從容)하라는/ 그 거룩한 철리를 믿을 수는 없다.//

옛 책()

무더운 여름 한밤의 깊은 어둠이/ 모색의 힘든 노동에 오래 시달린/ 내 노력의 전신을 지그시 누른다.// 꺼칠한 눈썹 아래 푹 꺼진 두 눈,/ 한 끝이 먼 희망의 항구로 닿아 있어,/ 아이 때 쫓던 범나비 자취처럼/ 잡힐 듯 말 듯 젊은 날의 긴 동안을 고달피던/ 꿈길 아득한 옛 기억의 맵고 쓴 나머지를/ 다시 그러모아 마음의 헌 누각을 중수하려/ 몇 번 힘을 내고 눈알을 굴려 방안에 좁은 하늘로 헤매었는가?// 그러나/ 검은 눈썹은 또다시 피로에 떨면서,/ 길게 눈알을 덮고,/ 주검의 억센 품안에서 몸을 떨쳐 휘어나려/ 오늘도 어제와 같이 고된 격투(格鬪)에 시달린 육신은/ 푸근히 식은 땀의 생을 터치며/ 쪽 자리 위에 네 활개를 내어 던진다.// 그러면 벌써 나의 배는 파선하고 마는 것일까?/ 한 조각의 썩은 널조차 나를 돌보지 않고,/ 그것 없이는, 정말로 그것 없이는,/ 평탄한 물에서도 온전히 그 길을 찾을 수 없는/ 진리에로 향한 한 오리 가는 생명의 줄까지도/ 인제는 정말로 끊어져,/ 손을 들어 최후의 인사를 고하려는가?/ 오오, 한 줌의 초라한 내 머리를 실어 오랫동안,/ 한마디 군소리도 없이 오직 나를 위하여 충실하던 내 조그만 베개/ 반딧불만한 희망의 빛깔에도 불길처럼 타오르고,/ 풀잎 하나 그 앞을 가리어도 천오 리 머리털이 활줄 같이 울던/ 청년의 마음을 실은 내 탐탁한 거루인 네가/ 이제는 저무는 가을의 지는 잎 되어 거친 파도 가운데 엎드려지면서,/ 그 최후의 인사에 공손히 대답하려는가?// 나는 다시 한 번 온몸의 격렬한 전율을 느끼며,/ 춥고 바람 부는 삼동(三冬)의 긴 겨울밤,/ 그렇게도 잘 새벽 나루로 나를 나르던,/ 내 착하고 충성되니 거루의 긴 항행(航行)을 회상한다./ 굴욕의 분함이 나를 땅바닥에 메다쳤을 제도,/ 너는 보복의 뜨거운 불길을 가지고 나를 일으키었고,/ 패퇴의 매운 바람결이/ 내 마음의 엷은 피부를 찢어,/ 절망의 깊은 골짝 아래 풀잎 같이 쓰러뜨렸을 그때에도,/ 너는 어머니와 같이 나를 달래어 용기의 귀한 젖꼭지를 빨리면서,/ 아침 해가 동쪽 산머리에 벙긋이 웃을 때,/ 일지도 않게 늦지도 않게 새벽 항구로 나를 날랐었다.// 지금/ 우리들 청년의 세대의 괴롭고 긴 역사의 밤,/ 검은 구름이 비바람 몰고 노한 물결은 산더미 되어,/ 비극의 검은 바다 위를 달리는 오늘/ 그 미덥던 너도 돛을 버리고 닷줄을 끊어,/ 오직 하늘과 땅으로 소리도 없는 절망의 슬픈 노래를 뜯어,/ 가만히 내 귓전을 울린다.// 오오, 이것이 청년인 내 주검의 자장가인가?// 나는 참을 수 없는 침묵에서 몸을 빼어 뒤척일 때,/ 거칫 손에 닿는 조그만 옛 책자를 머리맡에서 집었다.// 책장은 예와 같이 활자의 종대(縱隊)를 이끌고,/ 비스듬히 내 손에서 땅을 향하여 넘어간다.// 이 곳 저 곳에 굵게 내리 그은 붉은 줄,/ 틈틈이 빈 곳을 메운 낯익은 내 서투른 글씨,/ 나는 방안 그득히 나를 사로잡은 침묵의 성돌을 빼는,/ 그 귀여운 옛 책의 날개 소리에 가만히 감사하면서,/ 푸르륵 최후의 한 장을 헛되이 닫칠 때,/ 나는 천지를 흔드는 포성(砲聲)에 귓전을 맞은 듯,/ 꽉 가슴에 놓인 빙낭(氷囊)을 부여잡고 베개의 깊은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NL () 1905년의 의의// 1905!/ 1905!// 베개는 노래의 속삭임이 아니라, 위대한 진군의 발자국 소리를,/ 어둠은 별빛의 실이 아니라, 태양의 타는 열과 눈부신 광채를,/ 고요한 내 병실에 허덕이는 내 가슴 속에 들이붓고 있다.// 저 긴, 긴 북국의 어두운 밤,/ 얼마나 더럽고 편하게 그 자들은 살고,/ 얼마나 깨끗하고 괴롭게 그들은 죽었는가?/ 밝은 것까지도 밤의 질서로 운행되어가는/ 이 괴롭고 긴 밤,/ 주검까지도 사는 즐거움으로 부둥켜안은 청년의 아픈 행복을,/ 나는 두 눈을 감아 아직도 손바닥 밑에 고요히 뛰고 있는,/ 내 정열의 옛 집에서 똑똑히 엿들었다.//

골프장() ]

까만 발들이 바쁘게 지나간다./ 이슬방울이 우수수 떨어지며,/ 흙 새에 끼었던 흰 모래알이/ 의붓자식처럼 한 귀퉁이에 밀려난다./ 그러면 어린 풀잎들이 느껴 운다.// , 인젠 그 연한 풀잎이/ 알몸으로 뙤약볕을 쏘여야 하니까……/ 정말 가는 이파리들은 아직 나이 어려도,/ 염천(炎天) 아래서 찌는 듯한 폭양(暴陽)을 온종일 받아야 할 쓰라림을 잘 알고 있다.// 외국말을 쓴 세모난 다홍 기가/ 승리자처럼 흰 깃대 위에 너울거린다./ 흘러가는 흰 구름이나 엷은 바람,/ 모두가 그에겐 행복스런 음악 같다.// ! 모진 소리가 까만 저 끝에서,/ 푸른 하늘의 파문을 일으키며 울려온다./ 기다란 커브가 끝나자/ 패랭이의 분홍꽃, 클로버의 긴 줄기,/ 모두다 사태에 밀리듯 쓰러지며,/ 너희들은 사냥개처럼 풀밭 위를 뛰어간다./ 뒤이어 짜그르르 끓는 손뼉 소리에 섞여,/ 신여성의 외국말이 고양이 소리처럼 날카롭다./ 참말 등()나무 시렁 밑이란 무척 시원하렷다.// 해는 벌써 버드나무 위에 이글이글하다./ 그 위에를 달리고 있는 까만 머리 아래 가는 목덜미 마른 잔등이가 가죽처럼 탔구나!/ 잠방이만 입고, 아이들아! 너희는 저고리를 잊었니?/ 아하! 궁둥이가 뚫어졌구나./ 그럼 필연코 너희들은 해진 잠방이밖엔 없던 게구나./ 바가지 모자를 쓴 신사어른들도 잠방이를 입었다./ 허나 누런 빛 월천꾼이 바지는/ 몹시 값진 옷감이다./ 그이들이 아까 공채를 둘러매고 자동차로 왔다./ 물론 신여성이 어깨에 매어달려 달게 웃고,/ 너희를 욕하던 뽀이 놈이 날아갈 듯 인사를 했다.// 월천꾼이가 도랭이 먹은 개처럼 몸을 비틀면,/ “어쩌면 저렇게 스타일이?”……/ 뽀이 놈은 아가리를 벌리고, 신여성은 고양이 소릴 치며 술잔을 든다./ 이래서 담뱃대 같은 공채가 땅만 긁다가 비뚜로라도 공을 맞히면,/ 만세! 소리 박수 소리 찌어지는 여자의 목소리 똑 가축시장 같다.// 별로 공이 가본 일도 없는 싱거운 삼백 야드 말뚝이,/ 어제 정신을 잃고 집으로 업혀 간,/ 그애의 이마를 깠구나./ 죄 없는 풀 이파리가 함부로 짓밟히고,/ 네들은 홧김에 말뚝을 걷어찼다./ 그때도 이놈에 손뼉과 웃음은 멎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이런 유별난 병에 걸렸나 보다.// 아이들아, 너희들은 공을 물어오는 사냥개!/ 월천꾼들은 눈먼 포수(砲手)!/ 그러나 사냥개란 집에서 놀릴 때도 고기를 주지만,/ 그렇게 너희들은 온종일 마당에 풀만 뜯다/ 비를 맞으며 강아지처럼 달달 떨고,/ 둑을 넘어서 집으로 가 내놀 것이란 빈손뿐이니, 들앉았던 아버지는 화를 내실밖에?/ 그럼 너희들은 이곳에 놀러 온 것은 아니로구나.// 이곳은 어른들이 장난하는 곳,/ 공이란 놈은 너희들의 설은 속도 모르고,/ 제 갈 대로 떴다 굴렀다 달아만 난다./ 누구가 알까?/ 넘어지는 풀잎의 아픔이나 네들의 설음을!/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좋아라 즐겨하는 월천꾼이 신여성의 마음은 공보다 더하다./ 아이들아! 네들의 운명은 공보다도 천하구나?// 왜 이렇게 넓은 곳에 곡식을 심지 않았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보던 네 아우에게,/ 착한 아이들아! 네들은 무어라 대답했니?/ 이곳은 우리들의 미움을 심는 곳!/ 그러고……가만히 귓속 해줄 제 고운 풀잎들은 즐거움에 떨었다./ 네 귀여운 동생은 네 가슴에 안기며 머리를 꼭 박고 언니,/ 우리 한 푼도 쓰지 말고 아빠 갖다가 줍시다……./ 네 불쌍한 동생은 눈깔사탕을 단념했다.// 아이들아! 내 아이들아!/ 만일 우리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대체 무엇을 아끼겠는가? 네들의 행복을 위하는데……// 햇님까지도 그 큰 입을 벌리라 말하지 않니?/ 이따위 일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고.//

 

다시 네거리에서

지금도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네거리 복판엔 문명의 신식 기계가/ 붉고 푸른 예전 깃발 대신에/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린다./ 스톱주의/ 사람, , 동물이 똑 기예[敎鍊] 배우듯 한다./ 거리엔 이것밖에 변함이 없는가?// 낯선 건물들이 보신각을 저 위에서 굽어본다./ 옛날의 점잔은 간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다지도 몹시 바람은 거리를 씻어 갔는가?/ 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 지붕 위 벽돌담에 기고 있구나./ ×//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 나는 왔다, 멀리 낙산(駱山) 밑 오막살이를 나와 오직 네가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넓은 길이여, 단정한 집들이여!/ 높은 하늘 그 밑을 오고가는 허구한 내 행인들이여!/ 다 잘 있었는가?/ , 나는 이 가슴 그득 찬 반가움을 어찌 다 내토를 할까?/ 나는 손을 들어 몇 번을 인사했고 모든 것에게 웃어 보였다./ 번화로운 거리여! 내 고향의 종로여!/ 웬일인가? 너는 죽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 잊었는가?/ 나를! 일찍이 뛰는 가슴으로 너를 노래하던 사내를,/ 그리고 네 가슴이 메어지도록 이 길을 흘러간 청년들의 거센 물결을,/ 그때 내 불쌍한 순이는 이곳에 엎더져 울었었다./ 그리운 거리여! 그 뒤로는 누구 하나 네 위에서 청년을 ××긴 원한에 울지도 않고,/ 낯익은 행인은 하나도 지나지 않던가?// 오늘밤에도 예전 같이 네 섬돌 위엔 인생의 비극이 잠자겠지!/ 내일 그들은 네 바닥 위에 티끌을 주으며……/ 그리고 갈 곳도 일할 곳도 모르는 무거운 발들이/ 고개를 숙이고 타박 타박 네 위를 걷겠지./ 그러나 너는 이제 모두를 잊고,/ 단지 피로와 슬픔과 꺼먼 절망만을 그들에게 안겨 보내지는 설마 않으리라./ 비록 잠잠하고 희미하나마 내일에의 커다란 노래를/ 그들은 가만히 들고 멀리 문밖으로 돌아가겠지.// 간판이 죽 매어 달렸던 낯익은 저 이계(二階) 지금은 신문사의 흰 기가 죽지를 늘인 너른 마당에,/ 장꾼 같이 웅성대며, 확 불처럼 흩어지는 네 옛 친구들도/ 아마 대부분은 멀리 가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순이의 어린 딸이 죽어간 것처럼 쓰러져 갔을지도 모를 것이다./ 허나, 일찍이 우리가 안 몇 사람의 위대한 청년들과 같이,/ 진실로 용감한 영웅의 단[] 발자국이 네 위에 끊인 적이 있었는가?/ 나는 이들 모든 새 세대의 얼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건재하라! 그대들의 쓰린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 원컨대 거리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내가 자동차에 실려 유리창으로 내다보던 저 건너 동산도/ 벌써 분홍빛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넓다란 푸른 이파리가 물고기처럼 흰 뱃바디를 보이면서,/ 제법 살았소 하는 듯이 너울거린다./ 어느새 여름도 짙었는가보다.// 그러기에 내가 이 절에 올 때엔,/ 겨우 터를 닦고 재목(材木)을 깎던 집들이/ 벌써 기둥이 서고 지붕이 덮이어,/ 영을 깔고 용마름을 펴는 일꾼이 밀짚모자를 썼지.// 두드러지게 잘된 장다리밭 머리를/ 곱게 다린 황나적삼을 떨쳐 입고,/ 꽁지가 빨간 잠자리란 놈이 의젓이 날고 있다.// 밭머리에 서 있는 싱거운 포플러나무가/ 헙수룩한 제 그림자를 동그라니 접어 안고,/ 산 넘어 방적회사의 목 멘 고동이/ 서울 온 촌 아기들을 식당으로 부를 때,/ 아주 소리개 모양으로 떠돌아 보고,/ 물을 차는 제비나 된 듯 내달으며 넘놀아도 보던,/ 잠자리 녀석들도 꼬리를 오그리고 죽지를 끌며,/ 장다리가 세로 가로 쓰러져 있는 밭 가운데로,/ 졸리는 듯 내려앉는다./ 정말 요새 뙤약볕이란 돌도 녹일까 보다.// 후끈한 바람이 진한 걸음 내를 품기며,/ 나무 끝을 건드리고 밭 위를 지나간다./ 벌 떼가 몇 개 안 남은 무색한 보라빛 꽃수염을/ 물었다 놓고, 놓았다 물며,/ 왕 왕 날개를 울리면서 해갈을 한다./ 호랑나비는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독한 가루를 잔득 실고 아롱거린다.// 꼬리를 건드리고 머리를 만져도/ 저 잠자리란 녀석은 다시 일지를 않으니,/ 졸고 있나, 그렇지 않으면 인제 벌써 죽었나?/ 거미줄 채를 손에 든 선머슴 아이들이/ 신발을 벗어 들고 성큼 발소리를 죽여 가며,/ 한 걸음 두 걸음 곧 손이 그 곳에 미칠텐데,/ , 저런 망한 녀석들의 심술궂은 눈 좀 보게.// 어쩌면……/ 고렇게 꼿꼿하고 고운 두 날개,/ 빨간 빛깔이 기름칠 한 것처럼 윤택 나는 날씬한 체구가/ 어찌 될지!/ 어째 맵기 당추 같은 고추짱아의 마음도 모르고 있을까?/ 앵두꽃 진 지가 얼마나 된다고 요만한 뙤약볕에,/ 쨍이야, 벌써 호박처럼 맑던 네 눈도 어두워졌니?// 녹음의 짙은 물결이 들 가득 밀려오고 밀려간다./ 동산은 어른처럼 말없이 잠잠하다./ 아마 연연한 봄의 고운 배는 벌써 엎어졌나보다./ 정말 이 따가운 뙤약볕의 소나기통에,/ 굳은 날개도 두터운 비름 이파리도 다 또 일수 없이 풀이 죽고 말았을까?/ 골짜기 속에서 낮잠을 자던 게으른 풀숲에,/ 젊은 꾀꼬리가 한 마리 푸드득 나뭇잎을 걷어차고,/ 고요한 침묵의 망사를 찢고 하늘로 날아갔다.// 오오, 고마워라, 얼마나 고마울까!/ 문득 나는 이 조그만 괴로운 꿈을 깨어,/ 단장을 의지하여 허리를 펴서 뒷산을 보았다.// 숲 사이에 원추리가 한 떨기 재나 넘은 보름달처럼,/ 음전히 머리를 쳐들고,/ 꾀꼬리가 남긴 노래 곡조의 여음을 듣고 있지 않은가!/ 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어 산비탈을 올라가면서,/ “꿈꾸지 말고 시대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라는 식물들의 흔드는 손을 보았다./ “너는 아직도 죽지 않았었구나하고,/ 원추리가 다정스러이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잠깐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고운 나비와 무성한 식물들의 겨우살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나는 아직 살아있는 행복이 물결처럼 가슴에 복받침을 느끼었다.//

 

()가로 가자

얼음이 다 녹고 진달래 잎이 푸르러도,/ 강물은 그 모양은커녕 숨소리도 안 들려준다.// 제법 어른답게 왜버들가지가 장마철을 가리키는데,/ 빗발은 오락가락 실없게만 구니 언제 대하를 만나볼까?// 그러나 어느덧 창밖에 용구새가 골창이 난지 십여 일,/ 함석 홈통이 병사(病舍) 앞 좁은 마당에 뒹구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침대를 일어나 발돋움을 하고 들창을 열었다./ 답답어라, 고성 같은 백씨기념관(白氏紀念館)만이 비에 젖어 묵묵(黙黙)하다.// 오늘도 파도를 이루고 거품을 내뿜으며 대동강은 흐르겠지?/ 일찍이 고무의 아이들이 낡은 것을 향하여 내닫든 그대와 같이// 흐르는 강물이여! 나는 너를 부()보다 사랑한다./ ‘우리들의 슬픔을 싣고 대해로 달음질하는 네 위대한 범람(氾濫)!// 얼마나 나는 너를 보고 싶었고 그리웠는가?/ 그러나 오늘도 너는 모르는 척 저 뒤에 숨어 었다, 누운 나를 비웃으며,/ 정말 나는 다시 이곳에서 일지를 못할 것인가?/ 무거운 생각과 깊은 병의 아픔이 너무나 무겁다.// 오오, 만일 내가 눈을 비비고 저 문을 박차고 않으면,/ 정말 강물은 책 속에 진리와 같이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인연 없이 흐를지도 모르리라.// 누구나 역사의 거센 물가로 다가서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의 방랑자로 죽어버릴지 누가 알 것일까?/ 청년의 누가 과연 이것을 참겠는가? 두말 말고 강가로 가자,/ 넓고 자유로운 바다로 소리쳐 흘러가는 저 강가로!//

눈알을 굴려 하늘을 쳐다보니,/ 참 높구나, 가을 하늘은/ 멀리서 둥그런 해가 네 까만 얼굴에 번쩍인다.// 네가 손등을 대어 부신 눈을 문지를 새,/ 어느 틈에 재빠른 참새놈들이/ 푸르르 깃을 치면서 먹을 콩이나 난 듯,/ 함박 논 위로 내려앉는다.// 휘이! 손뼉을 치고 네가 줄을 흔들면,/ 벙거지를 쓴 꺼먼 허수아비 착하기도 하지,/ 언제 눈치를 챘는지, 으쓱 어깻짓을 하며 손을 젓는다.// ! ! 건넛말 네 동무들이 풋콩을 구워놓고,/ 산모퉁이 모닥불 연기 속에 두 손을 벌려 너를 부르는구나!// 얼싸안고 나는 네 볼에 입맞추고 싶다./ 한 손을 젓고 말없이 웃어 대답하는/ 오오, 착한 네 얼굴.// 들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어찌 마음이 없겠니?/ 덥고 긴 여름 동안 여위어온 네 두 볼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철둑에 선 나뭇잎들마저 흐드러져 웃는구나!// 지금 네 눈앞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오지게 찬 벼이삭이 누렇게 여물어가듯,/ 푸르고 넓은 하늘 아래 자유롭게 너희들은 자라겠지……/ 자라거라! 자라거라, 초목보다도 더 길길이./ 오오! 그렇지만 내 목이 메인다.// 바람이 불어온다./ 수수밭 콩밭을 지나 네 논 두둑 위에로,/ 참새를 미워하는 네 마음아,/ 한 톨의 벼 알을 뉘 때문에 아끼는고?//

가을바람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데,/ 무에라고 네 마음은 종이 풍지처럼 떨고 있니?/ 나는 서글프구나 해맑은 유리창아!/ 그렇게 단단하고 차디찬 네 몸,/ 어느 구석에 우리 누나처럼 슬픈 마음이 들어있니?// 참말로 누가 오라고나 했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달아 와서,/ 그리 마다는 나뭇잎새를 훑어놓고,/ 내 아끼는 유리창을 울리며 인사를 하게.// 너는 그렇게 정말 매몰하냐?/ 그렇지만 나는,/ 영리한 바람아, 네가 정답다./ 재작년, 그러고 더 그 전해에도, 가을이 올 적마다,/ 곁눈 하나 안 떠보고, 내가 청년의 길에 충성되었을 때,/ 내 머리칼을 날리던 너는, 우렁찬 전진의 음악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누구가 퇴각이란 것을 꿈에나 생각했던가?/ 눈보라가 하늘에 닿은 거칠은 벌판도 승리에의 꽃밭이었다.// 오늘……/ 오래된 집은 허물어져 옛 동간 들은 찬 마루판 위에 얽매어 있고,/ 비열한들은 이상과 진리를 죽그릇과 바꾸어,/ 가을비가 낙엽 위에 찬데,/ 부지런한 너는 다시 그때와 같이 내게로 왔구나!// 정답고 영리한 바람아!/ 너는 내 마음이 속삭이는 말귀를 들을 줄 아니, 왜 말이 없느냐?/ 필연코 길가에서 비열한들의 군색한 푸념을 듣고 온 게로구나!/ 입이 없는 유리창이라도 두드리니깐 울지 않니?/ 마음 없는 낙엽조차 떨어지면서, 제 슬픔을 속이지는 않는다.// 짓밟히고 걷어채이면서도, 웃으며 아첨할 것을 잊지 않는 비열한들을,/ 보아라! 영리한 바람아, 저 참말로 미운 인간들이,/ 땅에 내던지는 한 그릇 죽을 주린 개처럼 쫓지 않니?// 불어라, 바람아! 모질고 싸늘한 서릿바람아, 무엇을 거리끼고 생각할까?/ 너는 내 가슴에 괴어 있는 슬픈 생각에도 대답지 말아라./ 곧장 이 평양성(平壤城)의 자욱한 집들의 용마루를 넘어,/ 숲들이 흐득이고 강물이 추위에 우[]는 겨울 벌판으로……/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았으니까……//

벌레

사람들이 말하기를,/ 벌레는 하등동물이다./ 참으로 이것을 의심할 수야 없는 것이다.// 하룻날/ 가을바람과 함께 오지게 익어가는 논배미 좁은 길을,/ 이슬진 풀잎을 걷어차며 바닷가에 나아가니,/ 벌써 제철을 보낸 늙은 벌레가 하나,/ 새로 쌓아올린 매축지(埋築地) 시멘트벽을 기어가다,/ 나를 보고 놀라기나 한듯,/ 소스라쳐 물속으로 뒹굴어 떨어진다.// 텀벙……지극히 조그만 소리가 나면서 엷은 파문이/ 마치 못 이기어 인사치레나 하듯 스르르 퍼진다.// 그러나 물결이 한번 돌을 치고 물러갈 때/ 바다는 아까와 다름없이 아침 햇발을 눈부시게 반사한다./ 아직 아무도 밟아본 듯싶지 않은 정한 돈대 위에,/ 좁쌀 같은 새까만 뚱알이 여나문 나란히 벌려 있었다.// 이것은 충분히 늙은 벌레가 죽음으로 가던 길이면서,/ 그가 아직도 살았었노라 하던,/ 최후의 유물임을 누구가 의심할까.// 네가 한 마리 이름 없는 벌레와 다른 게 무엇이냐./ 고지식한 마음이 제출하는 질문의 대답을 찾으려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었을 제,/ 심히 노한 태양의 표정에/ 두 손으로 나는 얼굴을 가리었다.// 이때 물결이 어머니처럼 이르기를,/ 사람은 봄에 났다 가을에 죽는 벌레는 아니니라.//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도 이젠 소용이 없는가?/ 포구 저쪽으로 물결은 돌아갔다//.

안개 속

하늘 땅 속속들이/ 먹 위에 먹을 갈아 부었다./ 발부리조차 안 뵌다만,/ 나는 아직도 외롭지 않다.// 비가 흩뿌리더니,/ 우뢰가 요란하고,/ 번개가 날카롭고,/ 드디어 내 잠자는 마을,/ 뭇 집 들창이 캄캄하다./ 길 가 불들도 꺼졌다./ 별도, 달도,…….// 밀물처럼 네가 쓸어와,/ 다시는 불도/ 내일 낮도 없을 듯하더라만,/ 나의 마을 사람들은 대견하더라!/ 앞을 다투어 깜북 깜북// 여러 들창이 환하니/ 흐득임을 보아,/ 오무러졌다 펴는 불촉이 분명타.// 길 가는 나그네들이/ 나비떼처럼 불 가로 찾아든다./ 볼이 패이고 뼛골이 드러났다./ 별빛보다 희미한 들창이/ 그들에 역력한 고난을 비친다./ 정녕 몇 사람을/ 너는 험한 길 위에 죽었을 게다.// 네 손은 아귀가 세고 끈끈하다./ 부썩 힘을 주어 움키면,/ 아무것이고 다 부여잡히리랴만,/ 모래알처럼/ 손가락 틈을 새는 것이 있으리라./ 꼭 쥐면 쥘수록 틈이 번다./ 안개 끼인 밤에는/ 호롱불이 보름달 같으니라.// 물론 나그네들이야 집도 없고 길도 멀다./ 그 대신 희망이 꽉 찼더라./ 눈동자는 굴속 같아야,/ 한 점 불이 별 같고,/ 가슴은 한층 밝아,/ 밤새도록 환히 아름답더라./ 내야 눈마저 흐리다만,/ 아직 외롭지 않다.//

일년(一年)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낙엽이 저 눈발이 덮인/ 시골 능금나무의 청용(靑容)과 장년(壯年)……/ 언제나 너는 가고 오지 않는 것.// 오늘도 들창에는 흰 구름이 지나가고,/ 참새들이 꾀꼬리처럼 지저귄다./ 모란꽃이 붉던 작년 오월,/ 지금은 기억(記憶)마저 구금 되었는가?// 나의 일년이여, 짧고 긴 세월이여!/ 노도(怒濤)에도, 달콤한 봄바람에도,/ 한결같이 묵묵하던 네 표정을 나는 안다,/ 허나 그렇게도 일년은 정말 평화로웠는가?// ‘피녀(彼女)’는 단지 희망하는 마음까지/ 범죄 그 사나운 눈알로 흘겨본다./ 나의 삶이여! 너는 한바탕의 꿈이려느냐?/ 한간 방은 오늘도 납처럼 무겁다.// 재빠른 가을바람은 멀지 않아,/ 버들잎을 한 움큼 저 창() 틈으로,/ 지난해처럼 훑어 넣고 달아나겠지,/ 마치 올해도 세계는 이렇다는 듯이.// 그러나 한개 여윈 청년은 아직 살았고,/ 또다시 우리 집 능금이 익어 가을이 되리라./ 눈 속을 스미는 가는 샘이 대해에 나가 노도를 이룰 때,/ 일년이여, 너는 그들을 위하여 군호를 불러라.//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잊어진 시절을./ 일년 평온무사한 바위 아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넓고 큰 대양의 앞날을 향하여,/ 지금 적막한 여로를 지키는 너에게 나는 정성껏 인사한다.//

하늘

감이 붉은 시골 가을이/ 아득히 푸른 하늘에 놀 갈은/ 미결사의 가을 해가 밤보다도 길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고,/ 한간 좁은 방 벽은 두터워,/ 높은 들창 가에/ 하늘은 어린애처럼 찰락어리는 바다.// 나의 생각하고 궁리하던 이것저것을,/ 다 너의 물결 위에 실어,/ 구름이 흐르는 곳으로 띄워볼까!// 동해바다 가에 적은 촌은,/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이고,/ 한강 물이 숭얼대는/ 영등포 붉은 언덕은,/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 오늘도 연기는/ 구름보다 높고,/ 누구이고 청년이 몇,/ 너무나 좁은 하늘을/ 넓은 희망의 눈동자 속 깊이/ 호수처럼 담으리라.// 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최후(最後)의 염원(念願)

얼마나 크고,/ 얼마나 두려운 힘이기에,/ 세월이여! 너는/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왔느냐?// 밀치고, / 박차고 하면,/ 급기야 나는/ 최후의 항구로 외로이/ 돌아오지 않는 손이 되리라만,/ 낙일(落日)이여! 나에겐,/ 아직 한마디 말이 있다.// 참말 머리 위엔/ 별 하나이 없고,/ 어둔 하늘이/ 홍수처럼/ 산하를 덮어,/ 한자욱 발길조차/ 나의 고향을/ 밟을 수가 없다면,// 아아, 꺼지려는 눈아!/ 네 빛이 흐리기 전에,/ 차라리 나는/ 호화로이 밤하늘에 흩어지는/ 오색 불꽃에,/ 아름다운 운명을/ 배우련다.// 최후의 염원이여!/ 너는 나의/ 즐거움이냐? 슬픔이냐?

주유(侏儒)의 노래

나의 마음은 괴롭노라……/ 제군은 나의 이런 탄식을 좋아한다.// 어쩌다 나의 노래가 울음이 될 양이면,/ 제군은 한층 더 나를 사랑한다.// !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 제군은 벌써 열광하고 있다.// 물론 나는 잘 안다./ 제군들이 비극을 사랑하는 높은 취미를…….// 막 끝이 되면 주인공은 병아리처럼 쓰러지고,/ 제군은 고조된 비극미에 취할 듯하다.// 하물며 비극의 종말이 가져오는 일장의 희극,/ 제군, 요컨대 나의 말로를 보고 싶다는 게지!// 경애하는 제군, 만일 시이저가, 결코 제군이 아니라, 시이저가,/ 성병(聖餅)의 맛을 경계했다면, 파탄은 좀더 연기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 번, 아니, 얼마든지 말해줄까?/ 제군, 실로 나의 마음은 괴롭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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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만일 너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는 사랑이 아니니라. 너의 적을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복음서

1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 나는 이때 예수교도임을 자랑한다.//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내 벗을 죽음으로써 괴롭혔을 때,/ 나는 우정을 적에 대한 잔인으로 고치었다./ 적이 드디어 내 벗의 한사람을 죽였을 때,/ 나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적이 우리들의 모두를 노리었을 때,/ 나는 곧 섬멸의 수학을 배웠다.//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 사랑스런 것! 너의 이름은 적이다.// 2/ 때로 내가 이 수학 공부에 게을렀을 때,/ 적이여! 너는 칼날을 가지고 나에게 근면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무모한 돌격을 시험했을 때,/ 적이여! 너는 아픈 타격으로 전진을 위한 퇴각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비겁하게도 진격을 주저했을 때,/ 적이여! 너는 뜻하지 않은 공격으로 나에게 전진을 가르치었다./ 만일 네가 없으면 참말로 사칙법(四則法)도 모를 우리에게,/ 적이여! 너는 전진과 퇴각의 고등수학을 가르치었다.// 패배의 이슬이 찬 우리들의 잔등 위에 너의 참혹한 육박이 없었더면,/ 적이여! 어찌 우리들의 가슴속에 사는 청춘의 정신이 불탔겠는가?// 오오! 사랑스럽기 한이 없는 나의 필생의 동무/ 적이여! 정말 너는 우리들의 용기다.// 너의 적을 사랑하라!/ 복음서는 나의 광영이다.//

지상(地上)의 시()

태초에 말이 있느니라……/ 인간은 고약한 전통을 가진 동물이다./ 행위하지 않는 말,/ 말을 말하는 말,/ 이브가 아담에게 따 준 무화과의 비밀은,/ 실상 지혜의 온갖 수다 속에 있었다.// 포만의 이야기로 기아를,/ 천상의 노래로 지옥의 고통을,/ 어리석게도 인간은 곧잘 바꾸었었다,/ 그러나 지상의 빵으로 배부른 사람은/ 과연 하나도 없었던가?/ 신성한 지혜여! 광영이 있으라.// 온전히 운명이란, 말 이상이다./ 단지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것,/ 운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말을 가진 것이,/ 침묵한 행위자인 도야지보다 우월한 점이다./ 말을 행위로,/ 행위를 말로,/ 자유로 번역할 수 있는 기능/ 그것이 시의 최고의 원리./ 지상의 시는/ 지혜의 허위를 깨뜨릴 뿐 아니라,/ 분명히 태초의 행위가 있다…….//

너 하나 때문에

오직 있는 것은/ 광영 하나뿐이고,/ 정녕 굴욕이란 없는가?/ 있어도 없는 것인가?/ 만일 싸움만 없다면…….// 그러나 싸움이 없다면,/ 둘이 다 없는 것,/ 싸움이야말로/ 광영과 굴욕의 어머니,/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 패배의 피가/ 승리의 포도주를 빚는 것도,/ 굴욕이/ 광영의 향료를 끄어내는 것도,/ 모두 다 싸움의 넓은 바다.// 바다는/ 넓이도 깊이도 없어,/ 승리가 실컨/ 제 즐거움의 진주를 떠내고,/ 패배이 죽도록/ 제 아픔의 고귀한 값을 알아내는 곳.// 회복될 수 없는/ 굴욕의/ 제군은 이 말의 의미를 아는가?/ 아프고 아픈 상처가,/ 붉은 피가/ 장미 떨기처럼 피어나는 곳.// 아아! 너 하나, 너 하나 때문에,/ 굴욕마저를 사랑한다.//

홍수(洪水)

하나도 아니었고,/ 둘도 아니었다.// 활개를 젓고 건너가,/ 죽지를 늘이고 돌아온/ 이 항구의 추억은,/ 참말 열도 아니었다.// 그러나 굳건하던/ 작고 큰 집들이/ 터문도 없이 휩쓸려 간/ 홍수 뒤,/ 황무지의 밤바람은/ 너무도 맵고 거칠어.// 언제인가 하루아침,/ 맑은 희망의 나발이었던/ 고동 소린 오늘 밤,/ 청춘의 구슬픈 매장의 노래 같아야,// 고향의 부두를 밟는/ 나의 무릎은 얼듯 차다.// 긴 밤차가 닫는 곳,/ 나의 벗들을 사로잡은/ 차디찬 운명 속에서도,/ 청년의 자랑은/ 꺼지지 않는 등촉처럼 밟았으면……// 아아 이 하나로 나는/ 평생의 보배를 삼으련다.//

야행차(夜行車)

사투리는 매우 알아듣기 어렵다./ 허지만 젓가락으로 밥을 날라가는 어색한 모양은,/ 그 까만 얼굴과 더불어 몹시 낯익다.// 너는 내 방법으로 내어버린 벤또를 먹는구나.// “젓갈이나 걷어 가주올 게지……”/ 혀를 차는 네 늙은 아버지는/ 자리가 없어 일어선 채 부채질을 한다./ 글쎄 옆에 앉은 점잔한 사람이 수건으로 코를 막는구나.// 아직 멀었는가 추풍령(秋風嶺)……/ 그믐밤이라 정거장 표말도 안 보인다./ 답답워라 산인지 들인지 대체 지금 어디를 지나는지?// 나으리들뿐이라, 누구한테 엄두를 내어/ 물을 수도 없구나.//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양복장이는 모를 말을 지저귄다./ 아마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아나보다./ 되놈의 땅으로 농사 가는 줄을 누가 모르나./ 면소(面所)에서 준 표 지()를 보지, 하도 지척도 안 뵈니까 그렇지!// 차가 덜컹 소리를 치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필연코 어제 아이들이 돌멩이를 놓고 달아난 게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너 그 사이다병은 집어넣어 무얼 할 때./ 오호 착해라, 그래도 누이 시집갈 제 기름병을 할라고…….// 노하지 마라 너의 아버지는 소 같구나./ 빠가! 잠결에 기대인 늙은이의 머리를 밀쳐도,/ 엄마도 아빠도 말이 없고 허리만 굽히니……// 오오, 물소리가 들린다 넓고 긴 낙동강에…….// 대체 어디를 가야 이 밤이 샐까?/ 애들아, 서있는 네 다리가 얼마나 아프겠니?/ 차는 한창 강가를 달리는지,/ 물소리가 몹시 정다웁다./ 필연코 고향의 강물은 이 꼴을 보고 노했을 게다.//

해협(海峽)의 로맨티시즘

바다는 잘 육착한 몸을 뒤척인다./ 해협 밑 잠자리는 꽤 거친 모양이다.// 맑게 갠 새파란 하늘/ 높다란 해가 어느새 한낮의 카브를 꺾는다./ 물새가 멀리 날아가는 곳,/ 부산 부두는 벌서 아득한 고향의 포구인가!// 그의 발밑,/ 하늘보다도 푸른 바다,/ 태양이 기름처럼 풀려,/ 뱃전을 치고 뒤로 흘러가니,/ 옷깃이 머리칼처럼 바람에 흩날린다.// 아마 그는/ 일본 열도(列島)의 긴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다./ 흰 얼굴에는 분명히/ 가슴의 로맨티시즘이 물결치고 있다.// 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 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동경(東京),/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청년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었다.// 바람 잔 바다,/ 무더운 삼복의 고요한 대낮,/ 이천오백 돈()의 큰 기선이/ 앞으로 앞으로 내닫는 갑판 위,/ 흰 난간 가에 벗어젖힌 가슴,/ 벌건 살결에 부딪치는 바람은 얼마나 시원한가!// 그를 둘러 산 모든 것,/ 고깃배들을 피하면서 내뿜는 고동 소리도,/ 희망의 항구로 들어가는 군호 같다./ 내려앉았다 떴다 넘노니는 물새를 따라,/ 그의 눈은 몹시 한가로울 제/ 뱃머리가 삑! 오른편으로 틀어졌다.// 훤히 트이는 수평선은 희망처럼 넓구나!/ 오오! 점점이 널린 검은 그림자,/ 그것은 벌써 나의 섬들인가?/ 물새들이 놀라 흩어지고 물결이 높다./ 해협의 한낮은 꿈 같이 허물어졌다.// 몽롱한 연기,/ 희고 빛나는 은빛 날개,/ 우뢰 같은 음향,/ 바다의 왕자가 호랑이처럼 다가오는 그 앞을,/ 기웃거리며 지내는 흰 배는 정말 토끼 같다.// ‘반사이!’ ‘반사이!’ ‘다이닛……’/ 이등 캐빈이 떠나갈 듯한 아우성은,/ 감격인가? 협위인가?/ 깃발이 마스트높이 기어 올라갈 제,/ 청년의 가슴에는 굵은 돌이 내려앉았다.// 어떠한 불덩이가,/ 과연 층계를 내려가는 그의 머리보다도/ 더 뜨거웠을까?/ 어머니를 부르는, 어린애를 부르는,/ 남도 사투리,/ 오오! 왜 그것은 눈물을 자아내는가?// 정말로 무서운 것이……/ 불붙는 신념보다도 무서운 것이……/ 청년! 오오, 자랑스러운 이름아!/ 적이 클수록 승리도 크구나.// 삼등 선실 밑/ 동그란 유리창을 내다보고 내다보고,/ 손가락을 입으로 깨물을 때,/ 깊은 바다의 검푸른 물결이 왈칵/ 해일처럼 그의 가슴에 넘쳤다.// 오오, 해협의 낭만주의여!//

밤 갑판(甲板)

너른 바다 위엔 새 한 마리 없고,/ 검은 하늘이 바다를 덮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배는 한 곳에 머물러 흔들리기만 하느냐?// 별들이 물결에 부딪혀 알알이 부서지는 밤,/ 가는 길조차 헤아릴 수 없이 밤은 어둡구나!/ 그리운 이야 그대가 선 보리밭 우에 제비가 떴다./ 깨끗한 눈가엔 이따금 향기론 머리같이 날린다./ 좁은 앙가슴이 비둘기처럼 부풀어 올라,/ 동그란 눈물 속엔 설음이 사무쳤더라.// 고향은 물도 좋고, 바다도 맑고, 하늘도 푸르고,/ 그대 마음씨는 생각할수록 아름답다만,/ 울음소리 들린다, 가을바람이 부나 보다.// 낙동강 가 구포벌 위 갈꽃 나부끼고,/ 깊은 밤 정거장 등잔이 껌벅인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누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건넛마을 불들도 반짝이고, 느티나무도 꺼멓고, 앞내도 환하고,/ 벌레들도 울고, 사람들도 울고,// 기어코 오늘밤 또 이민열차가 떠나나보다.// 그리운 이야! 기약한 여름도 지나갔다./ 밤바람이 서리보다도 얼굴에 차,/ 벌써 한해 넘어 외방 별 아래 옷깃은 찌들었다.// 굶는가, 앓는가, 무사한가?// 죽었는가 살았는가도 알 수 없는/ 년의 길은 참말 가혹하다.// 그대 소식 나는 알 길이 없구나!// 어느 누군 사랑엔 입맛도 잃는다더라만,/ 이 바다 위 그대를 생각함조차 부끄럽다.// 물결이 출렁 밀려오고, 밀려가고,/ 그대는 고향에 자는가?/ 나는 다시 이 바다 뱃길에 올랐다.// 현해(玄海) 바다 저쪽 큰 별 하나이 우리의 머리 위를 비칠 뿐,/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않는다만,/ 아아, 우리는 스스로 명령에 순종하는 청년이다.//

해상(海上)에서

가라앉듯 멀리/ 대마도 남단은 수평선 위에 스러졌다.// 동그란 해가 어느새 붉게 풀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곳,/ 드문드문 검은 점들은 유구열도(流球列島)인가?// 물새들도 어느새 검은 옷을 입어,/ 눈 선 나그네를 희롱듯 노니는구나!// 아아! 불빛이 보인다./ 어렴풋 관문해협(關門海峽)의 저녁 불들이/ 그 가운데는 붉고 푸른 불들도 있다.// 연락선은 곤두설 듯 속력(速力)을 돋운다만,/ 인제 고향은 아득히 멀어졌고,/ 나는 저 곳 산천의 이름도 못 들었다.// 정녕 이곳에 고향으로 가지고갈 보배가 있는가?/ 나는 학생으로부터 무엇이 되어 돌아갈 것인가?// 가슴을 짚어보아라,/ 하얗고 가는 손아,// 누구가 이러한 저녁/ 청년들의 가슴 위에 얹힌/ 떨리는 손에 흐르는/ 더운 맥박을 짐작하겠는가.// 태평양, 태평양 넓은 바다여!// 일본열도 저 위/ 지금 큰 별 하나이 번적였다./ 내일 하늘엔 어떤 바람이 불 것인가?// 배는 아직 바다 위에 떠있고,/ 인제 겨우 동해도연선(東海道沿線)의 긴 열차는 들어온 듯하나,// 아아! 나는 두 손을 벌리어 하늘을 안고,/ 목적한 땅 위에 서 물결치는 태평양을 향하여/ 고함을 지른다.//

황무지(荒蕪地)

도망해 나온 시골 어머니가/ 밤마다 머리맡에 울더라만,/ 끝내 나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늙고 병들어 벌서 땅에 묻혔다./ 그래야 나는 산소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도, 고향도,/ 나에게는 소용없었다./ 나는 젊은 청년이다…….// 자랑이 가슴에 그뜩하여,/ 배가 부산 부두를 떠날 때도,/ 고동 소리가 나팔처럼 우렁만 찼다.// 어느 한구석 눈물이 있을 리 없어,/ 그 자리에 내 좋아하는 누이나 연인이 죽는대도,/ 왼눈 하나 깜짝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는 내 마음은,/ 웬일인지 소년처럼 흔들리고 있다./ 차가 철교를 건너는 소리가 요란이야 하다,/ 그렇지만 엎어지려는 뱃간에서도,/ 나는 무릎 한번 안 굽혔다.// 대체 네가 무엇이기에,/ 아아! 메마른 들 헐벗은 산,/ 그다지도 너는 내게 가까웠던가!// 벌써 강판은 얼어,/ 너른 구포벌엔 황토 한 점 안 보인다./ 눈발이 부연 하늘 아래,/ 나는 기차를 타고 추풍령을 넘어,/ 서울로 간다./ 서울은 나의 고향에서도 천리,/ 다만 나의 어깨의 짐을 풀 곳일 따름이다.// 자꾸만 차창을 흔드는 바람 소린,/ 슬픈 자장일가? 아픈 신음소릴까?/ 아이들을 기르고 어머니를 죽인,// 아아! 오막들도 전보다 얕아지고,/ 인제 밤에는 호롱불 하나이 없이 산단구나.// 황무지여! 황무지여!/ 너는 아는가?/ 청년들이 어떤 열차를 탔는가를…….//

향수(愁鄕)

고향은/ 인제 먼 반도에/ 뿌리치듯/ 버리고 나와,// 기억마저/ 희미하고,/ 옛일은/ 생각할수록/ 쓰라리다만,// 아아! 지금은 오월/ 한창 때다.// 종달새들이/ 팔매 친 돌처럼/ 곧장/ 달아 올라가고,/ 이슬방울들이/ 조으는,/ 초록빛 밀밭 위,// 어루만지듯/ 미풍이 불면,/ 햇발들은/ 화분(花粉)처럼 흩어져.// 두 손을 벌려,/ 호랑나비를 쫓던/ 도랑가의 꿈이,/ 아직도/ 어항 속에/ 붕어처럼/ 맑다만.// 지금은 오월/ 한창때// 소낙비가 지나간/ 도회의 포도(舖道) / 한줌 물속에,// 아아! 나는/ 오월의/ 푸른 하늘을 보며,/ 허위대듯/ 잊기 어려운/ 나비를 쫓고 있다.//

내 청춘(靑春)에 바치노라

그들은 하나도/ 어디 태생인질 몰랐다./ 아무도 서로 묻지 않고,/ 이야기 하려고도 안했다.// 나라와 말과 부모의 다름은/ 그들의 우정의 한 자랑일 뿐./ 사람들을 갈라놓는 장벽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얽어매듯 한데 모아,// 경멸과 질투와 시기와/ 미움으로 밖엔,/ 서로 대할 수 없게 만든 하늘 아래,/ 그들은 밤바람에 항거하는/ 작고 큰 파도들이,/ 한 대양에 어울리듯,// 그것과 맞서는 정열을 가지고,/ 한 머리 아래 손발처럼 화목하였다./ 일찍이 어떤 피일지라도,/ 그들과 같은 우정을 낳지는 못했으리라.// 높은 예지, 새 시대의 총명만이,/ 비로소 낡은 피로 흐릴/ 정열을 씻은 것이다.// 오로지 수정 모양으로 맑은 태양이,/ 환하니 밝은 들판 위를/ 경주하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곧장 앞을 항하여 뛰어가면 그만이다.// 어미를 팔아 동무를 사러 간다는 둥,/ 낡은 고향은 그들의 잔등 위에/ 온갖 추접한 낙인(烙印)을 찍었으나,/ 온전히 다른 말들이 부르는/ 단 한 줄기 곡조는,/ 얼마나 아름다웠느냐?// 미여진 구두와 헌 옷 아래/ 서릿발처럼 매운 고난 속에/ 아 슬픔까지가/ 자랑스러운 즐거움이었던/ 그들 청년의 행복이 있었다.//

지도(地圖)

두 번 고치지 못할 운명은/ 이미 바다 저쪽에서 굳었겠다./ 바라보이는 것은 한가닥 길뿐,/ 나는 반도의 새 지도를 폈다.// 나의 눈이 외국 사람처럼/ 서툴리 방황하는 지도 위에/ 몇 번 새 시대는 제 낙인을 찍었느냐?/ 꾸긴 지도를 밟았다 놓는/ 손발이 내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분명히 심장 속에 파고 든다.// 이 새 문화의 촘촘한 그물 밑에/ 나는 전선줄을 끊고 철로길에 누웠던/ 옛날 어른들의 슬픈 미신을 추억한다.// 비록 늙은 어버이들의 아픈 신음이나,/ 벗들의 괴로운 숨소리는,/ 두려운 침묵 속에 잠잠하여,/ 희망이란 큰 수부(首府)에 닿는 길이/ 경부철로(京釜鐵路)처럼 곱다 안할지라도,/ ! 벗들아, 나의 눈은/ 그대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는,/ 남북 몇 곳 위에 불똥처럼 발가니 달고 있다.// 산맥과 강과 평원과 구릉이여!/ 내일 나의 조그만 운명이 결정될/ 어느 한 곳을 집는 가는 손길이,/ 떨리며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이름도 없는 일 청년이 바야흐로/ 어떤 도시 위에 자기의 이름자를 붙여,/ 불멸한 기념을 삼으려는,/ 엄청난 생각을 품고 바다를 건너던,/ 어느 해 여름밤을/ 너는 축복(祝福)지 않으려느냐?// 나는 대륙과 해양과 그러고 성신(星辰) 태양(太陽),/ 나의 반도가 만들어진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우리들이 사는 세계의 도면이 만들어진/ 복잡하고 곤란한 내력을 안다.// 그것은 무수한 인간의 존귀한 생명과,/ 크나큰 역사의 구둣발이 지나간,/ 너무나 뚜렷한 발자욱이 아니냐?// 한 번도 뚜렷이 불려보지 못한 채,/ 청년의 아름다운 이름이 땅 속에 묻힐지라도,/ 지금 우리가 일로부터 만들어질/ 새 지도의 젊은 화공(畵工)의 한 사람이란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삼등 선실 밑에 홀로,/ 별들이 찬란한 천공(天空)보다 아름다운/ 새 지도를 멍석처럼 쫙 펼쳐보는/ 한 여름밤아, 광영이 있거라.//

어린 태양(太陽)이 말하되

알지 못할 새/ 조그만 태양이 된/ 나의 마음에/ 고향은/ 멀어갈수록 커졌다.// 누구 하나/ 남기고 오지 않았고,/ 못 잊을/ 풀 한 포기 없건만,/ 기적이 울고/ 대륙에 닿은 한 가닥 줄이/ 최후로 풀어지며,/ 그만 물새처럼/ 나는 외로워졌다.// 잊어버리었던 고향의/ 어둔 실현의 무게가/ 떠오르려는 어린 태양을/ 바다 속으로 누를 듯/ 사납다만./ 나무 하나 없는/ 하늘과 바다 사이/ 구름과 바람을 뚫고,/ 하룻저녁/ 너른 수평선 아래로,/ 아름다이 가라앉는/ 낙일(落日),/ 나의 가슴에/ 놀처럼 붉다.// 이제는 먼 고향이여!/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나를 내치고,/ 이내 아픈 신음 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대의 마음은/ 너무나 진망궂은/ 청년들의 운명이구나!// 참아야 할 고난은/ 나의 용기를 돋우고,/ 외로움은/ 나의 용기 위에/ 또 한 가지 광채를 더했으면……// 아아, 나의 대륙아!/ 그대의 말없는 운명 가운데/ 나는 우리의 무덤 앞에 설/ 비석의 글발을 읽는다.//

고향(故鄕)을 지나며

당신의 마을은 이미 잠들었습니까?/ 등불 하나이 없이 캄캄하니 답답습니다.// 여기 그대 아들이 있습니다.// 부산을 떠난 막차가 환하니 달리지 않습니까?/ 개 소리 한마디 들림직 하건만 하늘과 땅이 소리도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누런 수캐란 놈도 혹여 양식이 되지나 않았습니까?// 인젠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림도 속절없다./ 주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집도 다하고,/ 기름도 마르고, 기운도 지쳐,// 아아, 마음 아픕니다. 죽은 듯 마당에 쓰러지지나 않았습니까?// 기적이 우니 차가 굴속에 드나봅니다./ 안타깝습니다, 이제 고향은 눈앞에 스러지렵니다.// 어머님 묻힌 건넛산 위 별들이 눈물 어렸습니다.// 인제 내 하나가 있고, 벼락 맞은 수양이 섰고,/ 그대가 늘 소를 매어 여름이면 파리가 왕왕 끓었습니다.// 아들이 마을 전설과 옛 노래를 익힌 곳도 게 아닙니까?// 오는 새벽 비가 내리면, 그대는 또 괭이를 잡고, 논 가운데십니까?/ 당신의 굽은 등골의 아픔이 아들의 온몸에 사무칩니다.// 아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대 슬픔은 너무나 큽니다./ 그대 정숙한 아내도 이 속에 죽었고,/ 당신의 청승궂은 자장가로 자란 누이도 이 속에 죽고,// 그만 떨치고 일어나, 당신을 받들 먼 날을 그리어 내지로 간/ 아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오는 아들의 손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흙방 위에 꼬부리고 누운 그대를 헛되이 눈감아 생각할 뿐.// 한 되는 일입니다. 그대 이름 부를 자유도 없습니다./ 곧장 내일 아침 지정받은 곳에 닿아야 합니다./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은 준엄한 길입니다.// 그대여! 당신은 아들의 길을 축복합니까?// 그대 무릎 아래 다시 엎드려 볼 기약도 막막한,/ 슬픈 길이 북쪽으로 뻔하니 뚫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압니까, 아들의 길이 눈물보다도 영광의 어린 것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호올로 흐르는 그대의 눈물이/ 아들의 타는 마음속에 기름을 붓는 비밀을.// 아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다시 인젠 천공(天空)에 성좌(星座)가 있을 필요(必要)가 없다

바다, 어둔 바다,/ 쭉 건너간 수평선 위,// 다시 인젠/ 별들이 깜박일 필요는 없다.// 파도 위 하늘 아래,/ 일찍이 용사이었던.// 그러니라……/ 뱃머리를 돌려라,// 돛을 꼬부리고./ 남풍이다./ 에헷! 그물 줄을 늦추고.// 이마 위에 한 손을 얹고,/ 하늘을 우러러 얼굴을 들면,/ 별들은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웠다.// 별들은 결코 속이지 않았다.// 우리의 가슴은 바다인 듯,/ 고기들과 조개의 온갖 비밀을 알았고,/ 은하 오리온 먼 대웅(大熊)/ 조그만 속삭임 하나,/ 우리의 귀는 빼놓지 않았다.// 우리의 몸은 새보다도/ 날래고 자유로워,/ 바람이나 파도는/ 얼른 우리 앞에 맞서지를 못했다.// 거친 파도와 바람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묻어 놓은 것은,/ 자신과 굳은 신념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밤 얼굴의/ 깊은 주림과 꺼진 눈자위가/ 밤하늘보다 오히려 어두워,/ 타고 있는 조그만 배가/ 장차 닿을 항구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다.// 살림의 물결, 가난의 바람은,/ 현해 바다보다도 거세게 매웠던가?// 마음과 얼굴에 함부로 파진,/ 깊고 어둔 골창들은/ 험한 생애의 풍우(風雨)가 물어뜯은/ 지울 수 없는 상처들.// 그곳에서 흐른/ 아프고 붉은 이야기가,/ 고향의 온갖 들과 내 위에/ 노래가 되어 흐르고 있다.// 푸른 잎, 붉은 꽃과, 누른 열매,/ 가없는 하늘 밑에 드러누운 대륙의/ 헤아리기 어려운 삼림을 기르랴/ 너무나 비싼 생명들은 노가,// 아아! 벌써 한개 숙명인 얼굴에,/ 그 메마른 피부 위에/ 어둔 해협의 밤바람이 부딪친다.// 앞에도 뒤에도 얼굴/ 아낙네, 아이, 어른, 한줌의 얼굴들// 눈들은 제각각 알지 못할 운명에 촛불처럼 떨고 있다.// 대체 이런 똑같은 얼굴들아,/ 아아! 그대들은 다 형제인가……/ 통 통 통 통/ 국법을 어기는 명백한 음향이/ 현해 어둔 바다 하늘 위에 떨린다.// 아아 북구주 해안엔/ 대체 무엇이 기다린단 말인가!// 쳇 쓸데없는 별들이다.// 인젠 곱다란 연락선 갑판 위/ 성장(盛裝)한 손들 머리 위나 빛나거라.// 너희는/ 그들의 사랑과 축복의 꽃다발이리라.// 몇 번 너희들은 이러한 밤,/ 정말 몇 번/ 눈 밝은 경비선을 안내했는가?// 듣거라, 하늘아!/ 다시 인젠/ 바다 위에 성좌가 있을 필요는 없다.//

월하(月下)의 대화(對話)

몇 시……/ 두 시.// 삐걱! 뱃전이 울었다.// 물결이 높지요!/ 달이 밝습니다.// 바다가 설레를 쳤다.// 얼마나 왔을까요?/ 반 넘어 왔습니다.// 아직 조선반도는 안 보였다.// 아버님이……/ 아니요, 조선이, 세상이,// 달이 구름 속에 숨었다.// 무서워요,/ 바다가?……// 청년은 여자를 끌어안았다.// 아아! 당신을……/ 나도 당신을……/ 둘이 함께 인생도 없습니다.”// 물결이 질겁을 해 물러섰다.// 그 다음/ 여자가 어찌했는지,/ 청년이 어찌했는지,// 본 이가 없으니, 울 이도 웃을 이도 없고,/ 나란히 놓인/ 남녀의 구두가 한 쌍,// 갑판 위엔 유명한 춘화(春畫)가 한 폭 남았다.// 일봉이 좋기사 좋습디더/ 아모덴 와? 없어 병이구마// 삼등선실 밑엔 남도 사투리가 한창 곤하다.// 어느 해 여름 현해탄 위,/ 새벽도 멀고,/ 마스트 위엔 등불이 자꾸만 껌벅였다.//

눈물의 해협(海峽)

아기야, 너는 자장가도 없이 혼곤히 잔다./ 너는 인제서야 잠이 들었다만,/ 너무나 오랫동안 보채어,/ 좁은 목이 칼칼하니 쉬었다.// 너는 오늘밤/ 이 해협 위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의 단 한 가지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잔다.// 바람이 지금 바다 위에서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물결이 갑판 위에서 무엇을 쓸어가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물밑에 어족(魚族)들이 무엇을 탐내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이따금,/ 동그란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것이 정녕 주검의 검은 그림자인 것도 너는 모른다.// 아마 우리를 실은 큰 배가,/ 수평선 아래로 영원히 가라앉는 비창한 통곡의 순간이 온다 해도,/ 너의 고운 잠은 깨이지 않으리라.// 아기야, 너는 오늘밤,/ 이 바다 위에 기적의 손길이 미쳐 있는 줄 아느냐?// 눈물이 흐른다./ 현해탄 넓은 바다 위/ 지금 젖꼭지를 물고 누워/ 뒹굴을 듯 흔들리는 네 두 볼 위에,/ 하염없이 눈물만이 흐른다.// 아기야, 네 젊은 어머니의 눈물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 줄 아느냐?/ 한 방울 눈물 속엔/ 일찍이 네가 알고 보지 못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자라난 요람의 옛 노래가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뜯던 봄나물과 꽃의 맑은 향기가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꿈꾸던 청춘의 공상이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갈아붙인 땅의 흙내가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어루만지던 푸른 보리밭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안아보던 누른 볏단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걸어가던 촌 눈길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나무를 베던 산의 그윽한 냄새가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죽이던 도야지의 비명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듣던 외방 욕설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받았던 집행 표지가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작별한 멀리 간 동기의 추억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떠나 온 고향의 매운 정경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이따금 생각했던 다툼의 뜨거운 불길도 있다.// 참말로 한 방울 눈물 속은 이 모든 것이 들어있기엔 너무나 좁다./ 그러므로 눈물은 떨어지면 이내 물처럼 흘러가지 않느냐?// 나의 아기야, 그래도 이 속엔 아직 그들의 탄 배의 이름도 닿을 항구의 이름도 없고,/ 이 바다를 건너 간 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조금도 똑똑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바람과 파도와 그밖에 온갖 악천후에 대하여,/ 눈물은 다만 하염없을 따름이다.// 밝은 날 아침 다행히 물결과 바람이 자서/ 우리의 배가 어느 항구에 들어간대도 이내 세 운명이 까마귀처럼 소리칠 게다./ 나는 그 고이한 소리가 열어놓는 너의 소년과 청춘의 긴 시절을 생각한다./ 아기야, 해협의 밤은 너무나 두려웁다.// 우리들이 탄 큰 배를 잡아 흔드는 것은 과연 바람이냐? 물결이냐?/ ! 그것은 현해탄이란 바다의 이상한 운명이 아니냐?/ 너와 나는 한 줄에 묶여 나무토막처럼 이 바다 위를 떠 가고 있다.// 아기야, 너는 어찌 이 바다를 헤어가려느냐?/ 날씨는 사납고,/ 아직 너는 어리고,/ 어버이들은 이미 기운을 잃고,/ 내 손은 너무 희고 가늘고,/ 기적이란 오늘날까지 있어본 일이 없고,// 그러나, 아끼는 나의 아기야,/ 오늘밤 이 바다 위에 흐르는 눈물이,/ 내일 너의 젊은 가슴 속에 피워 놓을 한 떨기 붉은 장미의 이름을/ 아아! 나의 아기야, 나는 안다.//

상륙(上陸)

전차도 커지고,/ 자동차도 새로워지고,/ 삼층 사층 양실들이 곱다란/ 이 넓은 길이 어디로 통하는가?// 정신을 차려라……// 클랙슨이 먼지를 풍기며 노호(怒呼)한다./ 인제 부산도 옛 포구가 아니다./ 트럭이 지냈는가 하면,/ 자동차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스톱! 하늘엔 여객기의 통과다.// 정녕 나는 연락선에서 들고 내린,/ 묵은 가방을 털어보아야 할까보다./ 몇 해 전 가지고 건너갔던/ 때 묻은 선입견이 남은 모양이다./ 부두의 딸가닥 소리가 사람들을 놀랜 것은 벌써 옛 목가(牧歌)로구나.// 내가 입고 자란 옷,/ 주절대고 큰 말소린/ 하나도 찾을 길이 없다./ 나는 고향에 돌아온 것 같지도 않고,/ , 고향아!/ 너는 그 동안 자랐느냐? 늙었느냐?// 외방 말과 새로운 맵시는 어느 때 익혔느냐?// 벌렸다 다물고, 다물었다 벌리는,/ 강철 개폐교(開閉橋) 이빨 새에/ 낡은 포구의 이야기와 꿈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리라만,/ 그렇다고 나는 저 산 위 올망졸망한,/ 오막들의 고달픈 신음 속에,/ 구태여 옛 노래를 듣자 원하진 않는다./ 나의 귀는 신음과 슬픈 노래에 너무나 찌들었다.// 비록 오는 날,/ 나의 조상들의 외로운 혼령이/ 잠시 머무를 한낱 돌이나 나무가 없고,/ 늘비한 굴뚝이 토하는 연기와 그을음에,/ 흰 모래밭과 맑은 하늘이/ 기름걸레처럼 더러워진다 해도,/ 아아, 나는 새 시대의 맥박이 높이 뛰는 이 하늘 아래 살고 싶다.// 연기들은 바람에 날리면서도,/ 끝내 위로 높이만 오르는/ 저 하늘 한복판에,/ 나는 오는 날의 큰 별을 바라본다.// 행인들아!/ 그대들은 이 포구의 흰 모래가/ 시커멓게 변한 위대한 내력을 아는가?/ 나는 제군들 모두의 손을 잡고,/ , 친애의 정을 베풀고 싶다.// 일찍이 저 시커먼 큰 건물들은,/ 제군들의 운명을 고쳤으나,/ 이내 제군들이 아름다운 항만의 운명을 개척할 새 심장이,/ 또한 저 자욱한 건물들 속에서 만들어짐은 즐거웁지 않으냐./ 나의 고향은 이제야, 대륙의 명예를 이을 미더운 아들을 낳았구나.// 바다에는 기폭으로 아로새긴 만국지도,/ 거리엔 새 시대의 왕자 금속들의 비비대는 소리./ 목도(牧島) 앞뒤엔 여명이 활개를 치고 일어나는 고동 소리,/ 이따금 현해 바다가 멀리서/ 사자처럼 고함치며 달려오고……// 바야흐로 신세기의 화려한 축제다.// 누가 이 새 고향의 찬미가를 부를 것이냐?/ 교향악의 새 곡조를 익힌 악기는 어느 곳에 준비되었는가?/ 대양, 대양, 대양,/ 실로 대양의 파도만이 새 시대가 걸어가는/ 장엄한 발자취에 행진곡을 맞추리라.//

현해탄(玄海灘)

이 바다 물결은/ 예로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대마도를 지내면,/ 한 가닥 수평선 밤엔 티끌 한 점 안 보인다./ 이곳에 태평양 바다 거센 물결과/ 남진해온 대륙의 북풍이 마주친다.// 몽블랑보다 더 높은 파도,/ 비와 바람과 안개와 구름과 번개와,/ 아세아의 하늘엔 별빛마저 흐리고,/ 가끔 반도엔 붉은 신호등이 내어걸린다.//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첫번 항로에 담배를 배우고,/ 둘쨋번 항로에 연애를 배우고,/ 그 다음 항로에 돈 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청년이 아니었다.// 청년들은 늘/ 희망을 안고 건너가,/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느티나무 아래 전설과,/ 그윽한 시골 냇가 자장가 속에,/ 장다리 오르듯 자라났다.// 그러나 인제/ 낯선 물과 바람과 빗발에/ 흰 얼굴은 찌들고,/ 무거운 임무는/ 곧은 잔등을 농군처럼 굽혔다.// 나는 이 바다 위/ 꽃잎처럼 흩어진/ 몇 사람의 가여운 이름을 안다.// 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갔다./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敗北]에 울었다./ 그 중엔 희망과 결의와 자랑을 욕되게도 내어 판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지금 기억코 싶지는 않다.// 오로지/ 바다보다도 모진/ 대륙의 삭풍 가운데/ 한결같이 사내다웁던/ 모든 청년들의 명예와 더불어/ 이 바다를 노래하고 싶다.// 비록 청춘의 즐거움과 희망을/ 모두다 땅속 깊이 파묻는/ 비통한 매장의 날일지라도,/ 한번 현해탄은 청년들의 눈앞에,/ 검은 상장(喪帳)을 내린 일은 없었다.// 오늘도 또한 나젊은 청년들은/ 부지런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이 바다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내일도 또한/ 현해탄은 청년들의 해협이리라.//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삼등선실 밑 깊은 속/ 찌든 침상에도 어머니들 눈물이 배었고,/ 흐린 불빛에도 아버지들 한숨이 어리었다./ 어버이를 잃은 어린 아이들의/ 아프고 쓰린 울음에/ 대체 어떤 죄가 있었는가?/ 나는 울음소리를 무찌른/ 외방 말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오오! 현해탄은, 현해탄은,/ 우리들의 운명과 더불어/ 영구히 잊을 수 없는 바다이다.// 청년들아!/ 그대들은 조약돌보다 가볍게/ 현해의 큰 물결을 걷어찼다./ 그러나 관문해협 저쪽/ 이른 봄바람은/ 과연 반도의 북풍보다 따사로웠는가?/ 정다운 부산 부두 위/ 대륙의 물결은,/ 정녕 현해탄보다도 얕았는가?// 오오! 어느 날,/ 먼 먼 앞의 어느 날,/ 우리들의 괴로운 역사와 더불어/ 그대들의 불행한 생애와 숨은 이름이/ 커다랗게 기록될 것을 나는 안다./ 1890년대의/ 1920년대의/ 1930년대의/ 1940년대의/ 19××년대의/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폐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 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칠 때,/ 현해탄의 물결은,/ 우리들이 어려서/ 고기떼를 쫓던 실내처럼/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구름은 나의 종복(從僕)이다

흰 구름은 하늘에 비끼고,/ 나는 풀밭에 누워 휘파람을 불고,/ 공상이란 미상불/ 고삐를 끊어 던진 흰 말이다.// 만일 구름보다 자유로운 것이 있다면,/ 대체 그것은 무엇일가?// 그놈의 흰 갈기를 부여잡고,/ 힘을 모아 배때기를 걷어차면,/ 우박송이처럼 당황하여,/ 나의 곁을 지내가는 별들을 볼 것이다.// 참으로 그 뭉글뭉글한 잔등을 어루만지며,/ 나는 구름 위에 유유히 앉은 내 모양을 칭찬한다.// 생각할수록 별들이란/ 겁이 많고 지나치게 영리한 게으름뱅이다./ 저렇게 많은 족속들이/ 한낱 태양 아래 박쥐처럼 비겁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태양이란 것도/ 한껏 교만할 따름이지 실상은/ 앞산 그림자가 한 발을 더듬기 시작만 하면,/ 벌써 산정에 꼬리를 감추는/ 교활한 노총각이다.// 그렇다고 나는 하늘을 휩쓰는 장한 바람이 되어보고 싶지도 않다./ 조그만 숲 하나를 헤어나가려/ 몸부림을 치고 아우성을 지르고,/ 법석을 하는 꼴이란/ 너무나 치졸하다./ 한껏 죽지를 벌려 고개를 들고,/ 높은 산마루에서 화살처럼/ 하늘을 날아보려던/ 일찍이 꿈꾸었던 코스는,/ 지금 생각하니 일부러/ 고운 하늘을 눈알을 휩뜨고 날기도 애석하고,/ 피곤하여 바위 아래 허덕이며,/ 숨을 들이는 비장한 순간이란/ 나의 적들이 볼까 두렵고,// 아아, 역시 희고 가벼운 구름아!/ 네가 오로지 한 평생 가도/ 넓은 하늘이 좁은 줄을 모른다.// 산맥처럼 장한 체수건만,/ 어느 모서리에 부딪쳐야,/ 깨어지는 수도 없고,/ 아프지도 않고,/ 솜처럼 자꾸만 피어 나가다가,// 칵 답답하여/ 짜증이 날 때도 없고,/ 아아! 나는 너의 그 무한한 탄력성을 사랑한다.// 영맹한 저기압과/ 원지(遠地)의 바람이,/ 우리들의 지상을 향하여,/ 엄청난 습격을 시험할 때,/ 너는 잽싸게 검은 연막으로 무장을 고쳐,/ 시급한 방어 임무에 당하더라.// 자재(自在)한 둔갑술이여!// 이윽고 ×두가 한창 격연(激然)할 때,/ 한 줄기 소나기가 되어,/ 마른 남새밭을 발을 구르며 지내면,/ 나는 초목들과 더불어 손뼉을 친다.// 생생한 목숨이여!// 새들이다./ 어린 참새들이다. 제비들이다./ 마을 추녀 끝에 물초가 쥘 때쯤,/ 너는 어른처럼 옷깃을 걷어 들고/ 햇볕이 쨍쨍한 하늘 가로/ 붉은 놀이 되어 스러진다.// ()한 결단력이여! 구름아!/ 어느게 너의 자유이고 의지이냐?/ 너는 부자유도 자유이냐?/ 그렇지 않으면, 너는 불가능이란 것을 모르느냐?/ ‘나폴레옹이다!// 지금 네가 떠있는 곳은 바다이냐, 섬이냐?/ 하늘이다!// 너는 오늘 가벼이 하늘을 거닐고,/ 사자가 되어 이리를 쫓다가,/ 바위가 되어 물결을 차다가/ 강아지가 되어 공을 굴리다가,/ 어린애가 되어 달음질을 하다가,/ 너는 유희를 즐기는구나!// 자 듣거라, 구름아!/ 오늘 나는 너의 주인이다./ 휘파람 부는 내 가슴은 줌을 못 넘고,/ 머리는 땅 위에 한길을 못 오를 망정,/ 한대도 나의 생각은 네 위/ 너른 하늘을 내려본 일이 없느니라.// 종순(從順)한 나의 흰 말아!/ 고삐를 내게 던져라.//

새 옷을 갈아입으며

젊은 아내의/ 부드런 손길이 쥐어 짠/ 신선한 냇물이 향그런가?// 하늘이 높은 가을,/ 송아지 떼가 참새를 쫓는/ 마을 언덕은/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냐만,/ 고혹적인 흙내가/ 나의 등골에 전류처럼/ 퍼붓고 지나간 것은,/ 어째서 고향의 불행한 노래뿐이냐?// 언제부터 살찐 흙 속에 자라난/ 나뭇가지엔 쓴 열매밖에,/ 붉은 꽃 한 송이 안 피었는가!/ 가끔 촌 사람들이/ 목을 매고 늘어진 이튿날 아침,/ 숲속을 울리던 통곡 소리들/ 나는 잊지 않고 있다.// 행복이란 꾀꼬리 울음이냐?/ 푸른 숲에서나, 누른 들에서나,/ 한번 손에 잡히지 않았고,/ ……/ 태양 아래 자유가 있다 하나,/ 땅 위엔 행복이 있지 않았다./ 새 옷을 갈아입으며,/ 들창 너머로 불현 듯/ 자유에의 갈망을 느끼려는/ 나의 마음아!/ 너는 한낱 철없는 어린애가 아니냐?//

행복은 어디 있었느냐?

두 손을 포켓에 찌른 채,/ 너는 누런 레인코트를 입고,/ 하늘을 치어다보는 양 어깨 위엔,/ 어느새 밤이슬이 뽀야니 무겁다.// 돌아갈 집도 멀고,/ 걸을 길도 아득한,/ 나의 젊은 마음아./ 외딴 교외의 플랫폼 위/ 너의 따르는 꿈은 무엇이냐?// 첫사랑에 놀란 조그만 가슴이,/ 인젠 엄청난 생각을 지녔구나.// 기다리던 사람은 누구냐?/ 아직도 그가 올 시간은 멀었느냐?/ 시계를 들여다보고,/ 이따금 별들을 헤어보고,/ 너는 달이 밝고,/ 하늘이 푸르고,/ 깨어지는 물방울이/ 진주보다도 아름다운/ 고향의 바닷가를,/ 어린애처럼 거니느냐?// 밤은 깊고,/ 그는 드디어 오지 않았구나./ 구름이 쫓기듯 밀려가,/ 별빛마저 흐린 동경만 위/ 어둔 하늘 아래/ 아아, 너는/ 아무데고 하룻밤/ 안식의 잠자리를 구해야겠다.// 너의 다섯 자 작은 몸을 누일,/ 따뜻한 지붕 밑은 어디메냐?/ 자욱한 집들이나,/ 밝은 길을 가는 뭇 행인은,/ 너무나 눈 설고,/ 싸늘한 남들이라,/ 한낱 두려운 눈알이,/ 불똥처럼 발개서,/ 방황하는 너의 뒤를/ 쏠듯이 따를 뿐이다.// 아아, 만일/ 기다리던 그는 영영 오지 않고,/ 돌아갈 집은 자리 밑까지 흐트러져,/ 모진 운명이 머리 위를/ 쓸어 덮는다면// 나의 마음아!/ 한 가지 장미처럼 곱기만 했던,/ 너는 인제/ 집 잃은 어린 아이로구나!// 가이여운 마음아!// 소금기를 머금은/ 외방 바람이,/ 스미는 듯 엷은 살결에 차다./ 서글픈 밤,/ 머리에 떠올랐다 스러지고,/ 스러졌다간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 눈동자 속에,/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가도 없는 표박(漂泊)의 길이/ 모두 다 따뜻한 요람이었고,/ 가는 곳마다/ 그들은 고향을 발견하지 않았느냐?/ 어느 날 고향의 요람으로/ 돌아갈 기약도 막막한/ 영원한 길손의 마음이,/ 어리우듯 터를 잡지 않았든가,// 그 속은 언 호수보다 서글펐으나,/ 바다 속처럼 깊더라.// 참말 그들도, 나도,/ 도토리 알 같은/ 어린 때의 기억만이,/ 고향 산비탈, 들판에/ 줍는 이도 없이 흩어져,/ 어쩐지 우리는 비바람 속에 외로운/ 한 줄기 어린 나무들 같다만,/ 누를 수 없는 행복과 즐거움이/ 위도 아니고 옆도 아니고, 오로지/ 곤란한 앞을 향하여 뻗어나가는,/ 아아, 한 가지 정성에 있더구나!//

바다의 찬가(讚歌)

장하게/ 날뛰는 것을 위하여,/ 찬가를 부르자.// 바다여/ 너의 조용한 달밤을랑,/ 무덤 길에 선/ 노인들의 추억 속으로,/ 고스란히 선사하고,/ 푸른 비석 위에/ 어루만지듯,/ 미풍을 즐기게 하자.// 파도여!/ 유쾌하지 않은가!/ 하늘은 금시로,/ 돌멩이를 굴린/ 살얼음판처럼/ 빠개질 듯하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 두 발을 구르며,/ 동동걸음을 치고,/ 나는/ 번개 불에/ 놀라 날치는/ 고기 뱃바닥의/ 비늘을 세고// 바다야!/ x (너의)/ x (가슴에는)/ x (사상이 들었느냐)// 시인의 입에/ 마이크 대신/ 재갈이 물려질 때,/ 노래하는 열정이/ 침묵 가운데/ 최후를 의탁할 때,// 바다야!/ 너는 몸부림치는/ 육체의 곡조를/ 반주해라.//

[현해탄 시집] 後書(후서)

이 책 속엔 이때까지 발표된 내 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수록되었다. 그중엔 발표된 가운데서도 부득이 빼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있으며, 또한 미발표대로 들어간 것도 있으나, 내가 작품 위에서 걸어온 정신적 행정을 짐작하기엔 과히 부족됨이 없을 줄 안다.

실상은 지난 가을에 처음 어느 친구로부터 이때까지 쓴 작품을 모아 출판했으면 어떻겠느냐는 즐거운 권유를 받았을 때, 비로소 사산(四散)된 구고(舊稿)들을 모으기 비롯하여 한 권이 되었으나, 그간의 여러 가지 형편으로 초지(初志)를 이루지 못하고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었다.

현해탄이란 제() 아래 근대 조선의 역사적 생활과 인연 깊은 그 바다를 중심으로 한 생각, 느낌 등을 약 이삼십 편 되는 작품으로 써서 한 책을 만들어볼까 하였다.

이 가운데 맨 뒤에 실린 바다가 많이 나오는 일련의 작품이 그것이다.

그러나 재능의 부족과 생각의 미숙 등 외의 여러 가지 곤란에 부닥쳐, 끝까지 써나갈 용기와 자신을 다 잃어버렸다.

그래 할 수 없이, 그 전에 한 권에 모았던 가운데서 얼마를 빼고 새로 쓴 작품과 어울러서, 이 한 책이 된 셈이다.

편순(編順), 대략 연대순으로 하였는데, 그렇다고 반드시 발표 연월을 고사(考査)하여 차례를 매지도 않았다.

이 중엔 약간 그런 의미의 연대는 어긋나는 곳이 한두군데 있으나 전체로서 이해를 방해할 만한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다.

단지 네거리의 순이(順伊)로부터 세월에 이르는 동안 내 작품 경향 발전상 한 개 새 시대였다고 볼 수 있는 몇 작품이 들지 않았다.

그 밖에도 네거리의 순이(順伊)한 편으로 그 때 내 정신과 감정(感情)생활의 전부를 이해해 달라 함은 좀 유감되나 할 수 없는 일이고, 세월에서 암흑(闇黑)의 정신(精神)그러고 주리라 네 탐내는 모든 것을에 이르는 한 시기로부터, 그 뒤의 한두 번 변한 내 작품 경향을 이해하기엔 충분한 작품이 거의 전부 모여 있다.

맨 끝에 실린 바다의 찬가(讚歌)는 이로부터 내가 작품을 쓰는 새 영역의 출발점으로서 특히 넣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더 이런 경향의 작품을 넣으려 하였으나, 매수도 너무 많고 하여 일후 다행의 다시 작품집을 하나 더 가질 수 있다면 하는 요행을 바라고 욕심을 덮어두어 버렸다.

자꾸 변명 같아서 구구하지만 하나 더 미진한 점을 말하면 네거리의 순이(順伊)이전 내 전향기의 작품과 그보다도 전, 어린 다다이스트이었던 시기의 작품을 넣고 싶었다가 구할 수도 없고 초고(草稿)도 상실되어 못 넣은 것이다.

이것은 내 지나간 청춘과 더불어 영구히 돌아오지 않는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생각하면 쓸 때에 그렇게 열중했던 소위 노력의 소산이란 것이 뒷날 돌아보면 이렇게 초라한가를 생각하면 부끄럽다느니보다도 일종 두려움이 앞을 선다.

내 자신이 이럴 바에야 하물며 인연 없는 제군에게 있어선 이 가운데 단 한편이라도 나의 이름과 더불어 기억되리라고는 차마 믿을 수가 없다.

단지 바라는 것은 나의 앞날을 위하여 매운 비판의 회초리로 이 작품들이 읽혀짐을 열망할 따름이다.

끝으로 일년 넘어 이 책의 탄생을 위하여 노력해주신 동광당 이남래(李南來) 형과, 일산(逸散)된 원고들을 모아준 젊은 우인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이들 없이는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가 도저히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난잡한 글을 일일이 한글로 고쳐주신 이극로(李克魯) 씨에게 삼가 후의를 감사하는 바이다.

정축(丁丑) 동짓달,

합포(合浦)에서 저자(著者) ()

 

자고 새면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란 것을 생각코 있다

 

자고 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행복되려는 마음이

나를 여러 차례

주검에서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그날 가운데

찾아지지 아니할 때

나의 생활은

꽃 진 장미넝쿨이었다

 

푸른 잎을 즐기기엔

나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마른 가지를 사랑키엔

더구나 마음이 앳되어

 

그만 인젠

살려고 무사하려던 생각이

믿기 어려워 한이 되어

몸과 마음이 상할

자리를 비워주는 운명이

애인처럼 그립다.

 

 

우리 오빠와 화로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永男[영남]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젓가락만이 불쌍한 永男[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卷煙[궐련]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永男[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연기에 싸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그래서 저도 永男[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製糸機[제사기]를 떠나서 백 장에 일전짜리 封筒[봉통]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永男[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封筒[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永男[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永男[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永男[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永男[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임화(林和, 1908~1953) 시인, 문학평론가, 정치가

서울 출신으로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아호(雅號)는 쌍수대인(雙樹臺人), 성아(星兒), 청로(靑爐)이다. 그 외에도 '임화'(林華), '김철우'(金鐵友)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남조선로동당 창당 활동 등에 참여했다. 1947년 두 번째 배우자이며 소설가인 지하련과 함께 월북, 남북 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나 휴전 직후인 1953년 박헌영, 이강국, 리승엽 등 남로당 수뇌부와 함께 미제간첩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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