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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8.31~9.15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by 이성근 2020. 9. 17.

 

제도적 애국주의와 조국백서경향 2020.08.31.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상소문 매일신문 2020-08-31

믿음과 앎 경향 2020.09.01.

이재명의 기병전 vs 이낙연의 진지전 경향 2020.09.01.

카뮈, 역병시대의 종교와 의사 한겨레 2020.09.01.

고 박원순 시장이 여성시민에게 남긴 빚 한국 2020.09.01.

한국 좌파 지배해 온 혁명의 노스탤지어여, 이젠 안녕 프레시안 2020.09.02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경향 2020.09.03.

'관주주의'를 넘어서 프레시안 2020.09.03.

전교조 합법화 판결을 둘러싼 비이성적 진영논리 CBS노컷뉴스 2020.09.04.

그래서 우린 주식을 산다 한국 2020.09.04.

소멸된 공론의 정치, 갈등 부추기는 언론 프레시안 2020.09.04.

경제민주화 절호의 기회를 잡아라 한겨레 2020-09-07

의사와 변호사 한겨레 2020-09-07

무엇이 포퓰리즘 정책인가? 경향 2020.09.08

개문발차한 한국판 뉴딜경향 2020.09.09

댓글 달기의 허무함 경향 2020.09.09.

파업아닌 불법의료거부 행위 한겨레 2020.09.09.

의술에 앞서 민주주의부터 배워라 한겨레 2020.09.09.

피플파워와 초엘리트들 한겨레21 2020-09-11

2020의사라는 전문직 mediatoday. 2020.09.12.

개천의 용들이 세상과 싸우는 법 경향 2020.09.14

파일명 추미애경향 2020.09.14.

개천절 집회는 바람잡이들이 책임지고 막아라 한겨레 2020-09-14

검찰개혁 물 건너가나 한겨레 2020-09-14

코로나 vs 부동산 한겨레 2020-09-15

대한문 앞 화단의 씁쓸한 추억 경향 2020-09-15

원격수업의 민낯 경향 2020-09-15

 

 

 

제도적 애국주의와 조국백서

2주 전 열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는 가치와 제도를 사랑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고해성사 장이었다. 미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제도적 애국주의라 부른다. 제도에 내장된 가치와 윤리규범을 존중하고 이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이성과 감정을 말한다. 조 바이든과 카멀라 해리스는 아직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저소득층 백인들이 기성 제도를 증오하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잘 설계된 제도가 작동하던 정상시대로의 복원? 이미 건국의 시조들이 디자인한 근대 소프트웨어 자체가 금권과 거부권 정치, 그리고 자연 착취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선의와 윤리의식을 존경한다. 민주당 리더들과 콜린 파월 같은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은 트럼프라는 전체주의와의 절박한 싸움을 위해서 자유주의 정치의 규칙을 내던지거나 자식들의 스펙을 비윤리적 방식으로 디자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조국(미국 말이다)에 대한 진심 어린 공화주의적 애국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존경한다.

 

바이든과 달리 나는 애국이 강요되던 나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미국의 긴즈버그 대법관은 여성인권과 평등한 사회를 위해 평생 싸워온 진보의 아이콘이지만 때로는 진보진영에 단호하게 쓴소리한다. 그녀의 공적 이성과 실천 도덕으로서의 삶의 무게에 저절로 나의 고개가 숙여진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아니라 엉뚱한 이가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아직도 군사독재 시절, 10년형을 구형받을 때 어느 한 판사가 고개를 숙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의 인생을 결정하는 순간에 조느라 말이다. 그가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대우했을지 짐작이 가능했다. 나는 그때 이 무감각한 기득권 제도를 반드시 무너뜨려야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나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제기된 윤리적 문제 등의 의혹에 눈을 감고 주로 유무죄 여부만 따지던 지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에겐 사랑할 법과 윤리가 없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우리만 우아한 제도주의자가 되면 결과는 저들의 내로남불쇼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흰머리가 희끗해진 나는 대한민국의 제도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회색인으로 변했다. 사실 우리는 이제 공직 윤리와 과학적 이성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정은경 본부장이나 김영란 전 대법관, 이국종 의사 등을 무수히 만들어내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존 법망을 교묘히 악용하여 세습하면서도 왜 한국인들은 정의롭지 못하냐고 일갈하는 내로남불에 여전히 분노해야 하는 나라이다. 조수용 대표의 네이버 사옥 건축 과정을 다룬 백서처럼 직원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더 소중히 여기는 선진국이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 사회에 내몰리며 오직 서울 부동산의 최종 향방에 매달리는 구조적 약탈’(강준만 교수님의 탁월한 표현)이 진행되는 후진국이다.

 

전환기 대한민국은 두 가지 새로운 과제가 동시에 제기되어 있다. 하나는 제도적 애국주의의 성숙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제도의 불판 자체를 불(탄소 기반 민주주의)이 나지 않는 새로운 인덕션(탈탄소 생명공동체)으로 바꾸는 일이다. 지난 29일 이낙연 민주당 의원의 당대표 당선으로 이제 한국도 대선 국면이 시작되었다. 기존의 친문 대 반문의 대립은 틀렸고 시대착오적이다. ‘민주+공화에 대한 제도적 애국이냐의 여부로 크게 가치연합의 판을 흔들어야 한다. 좌파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와 우파 콜린 파월이 제도적 애국의 관점에서는 같이 하는 행보가 우리는 왜 안 되는가? 조국백서의 가장 큰 잘못은 이제 바이든과 해리스의 미국보다 더 사랑할 만한 민주공화국의 제도와 윤리를 본격 만들어야 할 절체절명의 시대에 트럼프 스타일의 내로남불을 선동한다는 점이다.

 

또한 지금의 복합위기 시대에는 단지 좋은 민주주의 제도로는 매우 부족하다. 즉 기존 근대 불판은 가장 나은 버전조차도 현재의 인간 민주주의일 뿐 미래와 다양한 비인간들에게는 자기들만의 닫힌 공동체이다. 바이든과 문재인은 훌륭한 인격의 근대주의자들이다. 하지만 감염병과 기후파국 시대에는 다음 세대 주도의 새 지구적 정치질서와 규범을 만드는 생명정치운동에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연대해야 한다. 이 험난한 두 과제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바이든과 문재인 행정부도 성공할 수 있다.

 

미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은 어쩌면 지금의 고통스러운 코로나19 국면조차 좋았던 시절이라 추억할 파국적 위기와 마지막 대회전을 치르게 될 이후 행정부에 마운드를 잘 물려주어야 한다. 이제 행동해야 할 때이다./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경향 2020.08.31.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상소문

부질없는 말이 되었지만 20175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엔 "~()겠습니다"란 말이 60차례 등장한다. 나라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겠다'는 약속이 단문 단문 폭포수처럼 이어졌다. '연설문'은 명문장이었다. 대통령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다' 했다. 이를 듣는 국민들의 가슴도 뜨거웠다.

 

그럼에도 부질없다고 한 것은 모두가 식언(食言)이 되어서다. 몇 가지만 꼽아본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습니다"던 약속. 최장집 명예교수는 문재인 정부 3'대통령의 권한'은 확장돼 왔고, '법의 지배'는 위협받았다는 말로 이를 일축했다.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던 다짐도 이내 버려졌다. 그러고도 최근 수도 이전 주장을 들고나왔다가 "대통령 집무실도 광화문으로 옮기지 못한 주제에"라는 핀잔을 들었다. "주요 사안은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고 한 것은 허언이었다. 국민들은 궁금한 점이 많다. 나라 경제는 상처투성이고 국민 삶은 힘겨운데 '기적 같은 경제 선방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어디서 나왔는가. 코로나 전쟁의 최일선에 선 의사들의 등을 돌리게 한 공공의대 정책은 갑자기 왜 튀어나왔나. '부동산 정책은 자신 있다'던 그 자신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대통령은 한 번도 이런 현안에 대해 언론에 직접 설명한 적이 없다.

 

"권력 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다"란 말 역시 토사구팽이 됐다. 국민들은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한 윤석열의 검찰이 몇 차례 인사를 통해 어떻게 정치권력의 애완견으로 전락하는지를 똑똑히 지켜봤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대목은 조국 전 수석과 맞물리면서 웃음거리가 됐다. 대통령은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다. 이는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내 편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도 그렇게 공허해졌다.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조차 "언제부턴가 우리 편과 저 편을 가르기 시작했고 이중 잣대로 가늠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시중엔 대통령이 취임사 중 지킨 유일한 약속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든 것이라는 역설적 해석이 회자된다.

 

이러니 나라 걱정을 하는 국민들이 많아졌다. 지난주엔 스스로를 '먼지'라 칭한 이(진인 조은산)가 대통령에게 올린 시무 7조 상소문이 화제였다. 상소문 역시 그 운율과 은유, 날카로운 관찰과 분석이 돋보이는 명문장의 연속이었다. "실정의 책임을 폐위된 선황에게 떠밀며 실패한 정책을 그보다 더한 우책으로 덮어 백성들을 우롱하니 그 꼴이 점입가경"이라 했다. "정책은 난무하나 결과는 전무하다"고 꼬집은 대목은 위정자로선 뼈아픈 대목이다. '감성보다 이성을 중히 여기는 정책' '명분보다 실리를 중히 여긴 외교'를 펼치라는 고언도 잊지 않았다.

 

조선조는 상소의 시대였다. 각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상소가 올라왔다. 세종 같은 현군은 사소한 상소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연산군 같은 폭군은 상소 기능을 없애려 했다. 선조는 왜적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무시했다가 무능한 왕이 됐다.

 

진인의 상소문 청원인이 30일 현재 40만 명에 육박한다. 옛 상소엔 임금이 직접 답했다. 문 대통령도 직접 답하기를 기대한다. 이는 대통령이 한 문장 한 문장을 직접 읽고 의미를 반추할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이 상소문에 온 국민이 폭발적으로 반응한 것을 허투루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대통령이 더 이상 내 편 말만 듣고 접하며 나라를 이끌 수는 없지 않은가./정창룡 논설주간 jcy@imaeil.com 대구 매일신문 2020-08-31

 

 

믿음과 앎

유럽에서는 지금 코로나19 확산 경고등이 다시 켜졌다. 나름대로 위기관리를 잘해왔던 독일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여름 휴가철을 보내면서 많은 사람이 긴장을 풀고 방역수칙을 잘 지키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

 

코로나19 사태 대응에서 지금까지 모범적인 나라 중 하나로 평가받았던 한국의 최근 상황에 관한 보도나 논평도 눈에 띈다. 특히 신천지교회사랑제일교회와 같은 일부 개신교가 원인이 된 코로나19 확산에 관심을 보인다. 집단감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주일 대면예배를 꼭 보아야 한다는 한국교회 안팎의 복잡한 사정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진단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각종 음모설이 난무한다. 빌 게이츠가 코로나19 칩을 개발해 많은 사람에게 이식,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거나 코로나19가 중국이 세계제패를 위해 개발한 생물무기라는 등 음모론의 끝이 없다. 사랑제일교회도 질병관리본부가 과학적으로 검증 안 된 방식으로 누적확진자를 집계,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고 방역실패의 책임을 자신들의 교회에 전가한다는 음모론을 제기한다.

 

감염 증상이 왜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면역력이 생겼는지, 머지않아 나올 예방접종물질이 과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명확한 지식과 정보는 아직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수행된 그 많은 방역대책과 연구가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 위기는 과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더 확산시켜 종교적 감성을 새롭게 자극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코로나19에 걸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현대 의학의 성과를 전면 부정하는 주장이 설 땅은 있는가.

 

심각한 코로나19 사태로 허덕이는 브라질에는 악마의 전술인 코로나19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에 걸리지 않는다고 설교하는 백만장자이자 오순절 교회계통의 목사인 에질 마체두, 코로나19신의 복수라고 주장하는 발드미루 산티아구와 같은 목사도 있다. 한국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는 기사를 나도 읽었다.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정을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믿음과 앎 사이의 갈등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그가 정말 이런 말을 남겼는지에 대한 진위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를 교황청은 1992년에 정식으로 복권했다. 앎의 세계를 결코 믿음의 세계 속에 강제로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긴 역정이었다.

 

가톨릭교의 보수주의적 신학자로서 2005년 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된 요제프 라칭거와, 자신을 종교적인 음치(音癡)’라 부른 비판이론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의 유명한 토론이 2004년 있었다. 토론 주제는 믿음과 앎, 종교와 이성이 자유로운 국가의 도덕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데 있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였다.

 

이 자리에서 하버마스는 종교가 인본주의, 계몽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힘들게도 했지만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양식에 반하지 않는 종교생활은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살아지는 건전함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라칭거는 종교에 병리적 현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성의 병리적 현상은 이보다 더 위험하다고 강조하면서 인류의 거대한 종교적 유산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이상학 이후의 사고를 꾸준히 설파한 하버마스가 세속적인 시민사회에서 믿음과 앎 사이의 번역이 가능하다고 말한 대목은 나에게는 좀 의외였다. 라칭거도 신앙과 이성 사이에 순화와 치유를 통한 상호연관과 상호인정은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종교적인 근본주의와 이와 정반대로 당위성을 존재로부터 절대 도출할 수 없다는 과학적 자연주의도 모두 믿음과 앎 사이에 통약(通約)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와 라칭거는 두 세계 사이의 소통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의견 접근을 보였다.

 

라칭거가 다문화 세계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강조했지만 이 중심에는 여전히 기독교가 놓여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토속신앙, 불교, 유교 등 전통적인 믿음의 체계와 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압축성장의 속도와 비례해 폭풍 성장한 한국의 기독교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이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독일에서도 코로나19 시대에 교회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거나 홈 오피스에 앉아있는 목사나 신부는 코로나19와 힘들게 싸우는 방역일꾼처럼 체제에 꼭 필요하지 않다는 비판의 소리도 커졌다. 사회적 영향력이 점점 줄어드는 독일교회가 이 코로나19 위기를 지나면서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개신교 지도자들을 만나 방역은 신앙이 아니라 과학의 영역이라면서 교계의 협조를 구했는데 일부 지도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거론하면서 교회를 흡사 영업장이나 사업장처럼 취급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지구촌의 생활세계 모든 영역을 지금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 위기가 제기하는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문제를 너무 안이하고 근시안적으로 대한다는 생각이 든다. 위기를 진정한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도 이제는 코로나19 이전의 사고와 행동양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자기 밖의 세계와 직접 소통해야 한다. 너무 많은 비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의식의 파국적인 결여가 교회의 위기를 낳았다는 뮌스터대학의 가톨릭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의 경고가 다시 생각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경향 2020.09.01.

 

이재명의 기병전 vs 이낙연의 진지전

여울목에서 냇물은 떨리고 빨라진다. 5년마다 리셋되는 대선도 그런 길목이 있다. 대세론이 깨질 때다. 4년간 제왕적 총재로 군림한 이회창 대세론이 노무현 바람에 꺾인 20023, 공고하던 박근혜 대세론이 안철수 바람에 흔들린 201110월이 그랬다. 수해와 코로나19가 할퀸 20208월에도 변곡점이 찍혔다. 14개월째 이어진 이낙연 대세론을 이재명이 엎었다. 누가 마지막에 웃을까. 2002년 이회창은 두번째 무너졌고, 10년 뒤 박근혜는 결승선에서 부활했다.

 

8월의 여론조사는 대동소이하다. 이재명은 경기·인천·TK, 이낙연은 호남에서 서로를 앞서고 서울·충청·PK는 백중세다. 3040은 이재명, 60대 이상은 이낙연이 오차범위 밖 우세다. 진보·중도층은 이재명이 1, 민주당 지지자에선 이낙연이 6 4로 앞선다. 지지층의 외연과 확장성은 이재명이 넓고, 이낙연은 반대로 견고하다. 당내 예선과 본선을 치르는 대선에서 유불리를 따지기 이른, 서로 다른 두 색깔의 출발이다.

 

1·2위가 바뀐 지지율에 대해 이재명은 바람 같은 것이라 했고, 이낙연은 엎치락뒤치락할 것이라 했다. 굽이굽이 풍운이 몰아칠 긴 여정으로 보는 것일 테다. 우연일까. 두 사람의 말에선 승부 호흡과 복선도 읽힌다. 이재명은 바람을 일으켜야 주도권과 승기를 쥘 수 있다. 민심이 당심을 이긴 2002년 노무현, 2007년 이명박의 길이다. 여당의 새 대표가 된 이낙연은 엎치락뒤치락할 국정의 호재·악재와 자신의 운명을 뗄 수 없다. 당의 중심과 조직을 쥐고 대선을 치른 2012년 박근혜, 2017년 문재인의 길이다. 말 그대로, ‘기병전 대 진지전의 서막이 올랐다.

 

합니다.” 이재명의 특장과 힘을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세 글자다. 채무자 돕는 주빌리은행, 첫 동네서점협동조합, 청년배당, 무상교복, 산후조리 공공지원의 싹을 틔운 성남시장 이재명의 캐치프레이즈는 성남은 합니다였다. 헛돈을 줄이니 되더라고 했다. 책 제목도 직접 <이재명은 합니다>로 잡았다. 경기지사 이재명은 198개 계곡의 평상·방갈로를 치우고, 기본소득(10만원)을 도입하고, 중산층도 관심 가질 장기임대 기본주택과 값싼 배달앱을 설계하고 있다. 생활정치·생활진보로 이목을 잡는 서울 밖의 첫 도백(道伯)이다. 촛불집회에서 박근혜 하야를 처음 외친 이재명은 경기도에선 4급까지 다주택을 처분토록 했다. 한 발씩 더 나가는 사이다언행은 때로 포퓰리즘 시비를 낳고, 그는 국민에게 피해간 정책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그의 상승곡선은 한 달 전 대법 판결로 선거법 디스카운트가 끝나며 시작됐다. 대선 19개월 앞에, 처음 올라선 지지율 1위는 양날의 칼이다. 견제는 당 안팎에서 세질 것이다. 그 가시밭길을 넘어야, 호미질(성남시장쟁기질(경기지사)하고 트랙터(대통령)를 몰고 싶다는 이재명의 꿈도 영글 수 있다.

 

당의 중심을 잡고, 기민하게 대처하겠다.” 그제 압승으로 끝난 전대에서 이낙연이 힘줘 한 말이다. 부동산·윤미향·박원순 파동에서 실착한 공룡여당부터 제 궤도를 찾겠다는 걸로 들렸다. 개인적으로도, 4·15 총선 후 40% 찍은 지지율은 반토막 나고, 현안과 거리두고 답을 미루다 엄중낙연소리도 들은 넉 달의 시련기였다. 애당초 이낙연의 특장과 힘은 마이크였다. 노무현 후보를 흔드는 사람들에게 지름길을 모르겠거든 큰 길로, 큰 길을 모르거든 직진하라던 일갈도, 야당 공격을 받아치고 장관들을 떨게 한 총리 시절의 사이다·송곳 펀치도 마이크에서 쏟아졌다. 대통령과 주례 독대하며 27개월 최장수 총리를 지낸 이낙연이 다시 여권의 메인 마이크를 잡았다. 당과 국정과 한 묶음 된 책임을 지고, 정기국회를 지휘하며, 홀로서기도 시동걸어야 할 6개월이다. 강점은 종로 부촌에서도 총선 표를 적잖이 받은 안정감이다. 호남대망론은 뒷심도 되고 변수도 될 것이다. 6공의 노태우를 빼면, 대권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감이 된 적은 없었다.

 

대선 얘기가 돌고 돌 때 정치원로들이 맺는 말이 있다. 변화무쌍한 대선도 누구나 살아온 대로싸우더라는 것이다. 1야당이 백지로 남아 있는 대선은 대세론 깨진 여당에서 불꽃이 먼저 튀고 있다. 길을 뚫어가는 이재명의 기병전과 성을 높여가는 이낙연의 진지전은 운명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첫 고비는 민심이 섞일 추석까지의 한 달이다. 기싸움은 재난지원금 전 국민·선별 지급에서부터 불거졌다. 대선까지 갈 대치다. 선거법 굴레를 벗은 이재명과 마이크를 다시 잡은 이낙연의 긴 승부가 시작됐다./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2020.09.01.

 

 

카뮈, 역병시대의 종교와 의사

그려, 콜레라 조심하고.” 어머니는 오늘도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긴 이름 대신에 콜레라라고 했다. 벌써 몇번 제대로 된 이름을 고쳐서 알려드렸으나, 매번 친숙한 이름 콜레라로 돌아갔다.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할까. 세상의 역병은 이름만 다를 뿐 늘 같았고, 전염병이 빚어낸 인간의 모습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바이러스로 죽어간 사람의 수는 가을비 내리는 오늘이나 꽃망울 터뜨리던 초봄이나 별다르지 않다. 어쩌면 나는 이름에 얽매이고, 어머니는 본모습만 보는 것이리라. 오늘은 부러 이름을 고쳐서 알려드리지 않았다.

 

올봄에 불티나게 팔렸다는 카뮈의 고전적 소설 <페스트>의 배경도 실은 콜레라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이라는 곳에서 19세기 중반에 생긴 일을 소재로 삼았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선언되자, 상술 좋은 사람들이나 글 소재가 궁색한 이들은 앞뒤를 따지지도 않고 페스트에 대해 적었다. 나는 시큰둥했다. 2차 대전 직후에 이 책이 나왔을 때 대중적 인기는 대단했으나, 당대의 지식인들은 비판적이었다. 정치적 책임을 묻거나 혁명적인메시지가 없다며 불평을 쏟아냈다. 그런데, 지금은 지식인들이 나서서 카뮈 장사에 나서는 모습이 좋지 않았다. 카뮈는 역병의 공포와 함께 성찰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드디어 틀렸구나 했다.

 

내가 시큰둥했던 이유는 또 있었다. 올봄만 하더라도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냥 왔다가 언젠가는 떠나게 될 불쾌한 방문자라고 생각했다. 경제와 일자리에 있을 중단기적 영향을 더 염려했다. 페스트가 닥치자, 페스트 이후의 삶을 상상한다고 분주했던 오랑 시민의 마음과 똑같았던 셈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떠올랐다. 역병이 물러나서 시민들이 거리에서 환호하고 기뻐하지만 그들은 역병이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올 것을 알지 못한다고 썼다. 1년에 걸친 사투를 담담하게 묘사한 소설의 끝 구절로는 잔인했다. 듣고 싶지 않은 말, 나는 애써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페스트>를 다시 꺼내 읽는다. 바이러스 시대는 길어지고 그 끝은 아직 보이지 않고, 인간은 불안한 만큼 분열하고 있다. 광화문에 수만 명이 하느님을 찾아 나섰고, 카뮈의 군상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한때 과장됐다고 생각했던 카뮈의 말이 맴돈다. 역병이나 전쟁이 들이닥치면 우린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이 어찌 오래가겠어, 라면서. 하지만 전쟁은 어리석다고 중단되지 않는다. 어리석음은 항상 끈덕진 법이다.

 

소설에서 오랑 시민을 역병의 공포에 몰아넣는 계기는 두어번 있다. 첫번째는 페스트라는 역병의 존재를 인정한 순간이었다. 시민들은 걱정하고 전문가는 의심했지만, 누구도 페스트라 말하지 못했다. 죽음의 소문과 숫자가 떠돌 때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숫자에 이웃이나 가족들이 포함될 때에야 사람들은 역병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숫자는 너무나 추상적이라서, “최소한 아는 얼굴들을 익명의 시체 더미 위에 올려놓을 수 있어야만 현실이 된다. 그제서야 도시는 봉쇄되고, 사람들은 격리된다.

 

두번째 계기는 투사적인 예수교도파늘루 신부의 설교다. 사람들이 , 여기에, 우리가?”라고 물었지만, 누구도 답하지 못한다. 비가 쏟아지던 일요일, 중간 키에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신부는 궁극의 답을 찾는 시민들에게 선언한다. “형제들이여, 재앙이 왔도다. 그리고 형제들이여, 당신은 이 재앙을 받아 마땅하도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페스트는 그분이 사랑하는 방식이며, 이를 통해 그분은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하려 한다. “출애굽기에서 페스트는 신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방식이었듯이, 역병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영생의 길인 것이다. 역병을 받아들이고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애써 멀리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죽음마저도 두려워 말라 한다. 신부는 당당한 위로의 말을 전했으나, 시민들의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보다는 부적을 찾았다.

 

신부의 설교는 소설의 주인공인 의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도시 밖에서 죽어가는 아내를 홀로 남겨 두고 온몸으로 역병과 싸우는 인물이다. 이 싸움은 병의 불확실성과 싸움이자, 인간의 날 선 욕망과 시퍼런 편견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신부의 말과도 싸웠다. “인간의 구원이란 저에게 너무 거창한 말이다나는 그저 인간의 건강을 염려하고 그걸 최우선으로 삼을 뿐이다.” 구원을 이유로 눈앞의 생명에 눈감을 수는 없었다.

 

한 아이의 죽음으로 이 불화는 정점에 달한다. 발병 때부터 아이의 고통과 사투를 보아온 의사는 혈청주사마저도 아무런 효과도 없자 절망한다. 가망 없는 싸움에 패배하고 아이는 죽어간다. 아이의 죽음은 째깍거리는 초침처럼 다가오고, 의사는 아빠의 소식을 묻는다. 그가 격리수용소에 있다는 답만 돌아온다. 부를 사람이 없다. 아이의 외로운 마지막 비명은 모든 고통받는 자들이 같이 쏟아내는 소리 같다. 신부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한다. 의사는 신부에게 묻는다. 저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신부는 잠시 흔들리지만, 곧 두번째 설교를 한다. 썰렁해진 성당에서 그는 페스트가 신의 뜻임을 다시 선언한다. 그 후, 그도 앓아 쓰러지지만, 의사를 부르지는 않는다. 신부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고, 의사는 사인을 페스트라고 특정하지 못한다. 병명 미상.

 

늦은 여름비가 쏟아지는 날, 책을 덮는다. 역병의 시대란 낮이고 밤이고 어느 인간이나 비겁해지는 시간이다. 두려움과 공포와의 싸움이다. 부유한 자는 부족함이 없었고, 가난한 자는 기댈 곳이 없다. 누군가는 떼돈 벌 궁리도 하고, 또 누군가는 도시를 홀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의사 리외는 늘 흔들리면서도 굳건했다. 그래서 종교와 거침없이 불화한다. “성자들보다는 패배자와 더 연대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념과 이해를 자양분으로 삼는 영웅주의와도 멀리하면서, 그의 눈은 오직 단 한 명의 인간에만 향해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종교적인사람은 의사 리외다. 그는 왜 역병과의 싸움에 자신이 나서야 하는지를 묻고 고뇌한다. 답을 멀리서 찾지 않았다. 답답해서 창문을 열자, 도시의 소음이 몰려왔다. “가까운 공장으로부터 짧게 반복되는 날카로운 기계톱 소리그 소리에서 그는 깨닫는다. 인간의 확신은 확성기를 통해 터져나가는 구원의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저 매일매일의 노동에 있다. 그리고 그 노동이 가져다주는 구원’.카뮈는 말한다.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의 종교일 수 없다.” 콜레라 시대에도 유효한 얘기이고, ‘코비드19’이라는 암호명 같은 이름을 가진 바이러스 시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한겨레 2020.09.01.

 

고 박원순 시장이 여성시민에게 남긴 빚

() 박원순 시장이 세상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의 죽음에 관련된 정황을 두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를 하고 있다지만, 우리는 아직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래서 간간이 칼럼이나 페이스북에 오르는 개인적 소회의 글들이 누군가에는 슬픔을, 누군가에는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우리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에 있다.

 

고인의 실종과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의 업적도 그에 대한 기억도 아니었다. 그와 함께 여성운동과 여성정책을 펼쳐 나갔던 사람들, 여성운동의 오랜 동지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와 고락(苦樂)을 함께 하며 애썼던 공무원들, 지식과 경험을 나눴던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 가장 아프게 떠올랐던 이들은 25개 자치구에서 활동하는 여성주민들이었다. 고인은 시장으로 당선된 후 주민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의 활성화에 힘을 기울였다. 시장 재임 초기 관료주의적 관행에 물들어 있던 공무원들의 저항과 정치적 반대자의 공세를 무릅쓰고 시민의 시정(市政)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제도를 만들고 예산과 인력을 투입했다. 이런 고인의 노력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했던 이들이 여성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전업맘, 일과 돌봄 사이에서 쫓기는 워킹맘, 청년여성들, 중년과 노년 여성들이다. 살아온 내력과 살고 있는 모습, 살아갈 미래는 다르지만 마을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함께 모여 주민자치와 마을만들기 운동을 해나간 여성들이다.

 

이들은 공동육아센터를 만들었고,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었다. 낡은 주택을 도서관으로 개조해 운영하기도 하고, 동네 밥집과 부엌을 만들었다. 계절이 바뀌면 장터와 축제를 열어 평소에는 얼굴 보기 힘든 주민을 초대했고, 어린아이부터 중년까지 함께 하는 연극무대를 꾸렸다. 동네를 친환경 에너지 마을로 바꾸기도 했고 아파트 건설로 사라질 뻔한 동네 뒷산을 지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젠더거버넌스를 꾸리는 여성들이다. 성평등 정책을 제안하고 시정을 감시하는 여성정책 네트워크다. 이들은 성인지예산이나 성별영향평가 같은 사업을 시행해 연말이면 사업보고회를 열었고, 이 자리는 늘 박 전 시장이 참석했다. 몇 해 전 이 모임에 강사로 참여했을 때 보았던 이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따뜻한 지지와 뜨거운 열망. 서울시가 더 적극적으로 성평등 정책을 시행해 가야 한다는 열망과 그 책임자로서 고인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었다.

 

이들은 사업비 이외에 별도의 금전적 보상을 받지 않는다. 일과 중 상당한 시간을 이 활동으로 보내지만 대부분 어떤 직함도 없다. 그래서 나는 몇 해 전 명함을 하나씩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명함을 만들려면 약간의 돈이 필요한데 당시 그 예산도 없었다. 명함조차 주어지지 않은 활동에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쏟아 부었다.

 

유서에도 남겼듯이 고인은 많이 미안할 것이다. 그동안 서울의 여성정책이 성과를 거뒀다면 고인만의 몫은 아니다. 이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여성들이 성평등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들이 느꼈을 슬픔과 상처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이 느낀 감정이 분노든, 연민이든, 배신감이든, 상실감이든 위로의 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으로 끝나 여성친화적인 사람이라는 그의 오래된 농담에 늘 신선한 듯 웃어주던 서울의 여성시민들에게 고인이 진 빚을 누군가는 갚아야 할 것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전 한국여성학회장 한국 2020.09.01.

 

한국 좌파 지배해 온 혁명의 노스탤지어여, 이젠 안녕

비혁명의 시대를 넘어 전환의 시대로

지금 나는 신간 한 권을 마주하고 있다. 광주항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로 일곡유인호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한 정치학자 김정한의 저서 <비혁명의 시대: 19915월 이후 사회운동과 정치철학>(빨간소금, 2020)이다. 참으로 반가운 책이지만, 막상 손에 들고 읽자 하니 망설여진다. 실은 반가운 이유도, 읽기 망설이는 이유도 하나다. 부제에 선명히 박혀 있는 "19915" 때문이다.

 

19915월의 기억은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의 역사에 크나큰 상흔으로 남아 있다. 경찰 폭력으로 강경대 열사가 무참히 희생되자 폭발한 전국적 시위는 4년 전 기억(19876월 항쟁)을 떠올리게 만들며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불과 4년 전의 경험과는 달리 그해 5월은 쓰라린 죽음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패배로 끝나 버렸다. 그렇다. 패배였다. 이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비혁명의 시대>의 저자는 이 패배가 이후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을 둘러싼 논의와 고민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추적하려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미처 책을 들기도 전에 이와는 다른 방향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좌파를 움직여온 힘은 과거의 향수, 노스탤지어가 아니었을까? 5공화국과 제6공화국 내내 이 사회를 바꿔보려 노력했던 이들은 실은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패배가 확정된 과거에 매달려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국 좌파를 지배해온 노스탤지어적 이념들

19915월의 거리에서 막연하나마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1987년에 미완으로 남은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생각이었다. 군부독재 세력이 심판을 받기는커녕 선거로 집권을 연장한 제6공화국은 19876월의 거리에서 희구했던 그 민주주의 혁명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은 절대 끝난 게 아니었다. 단지 긴 소강 국면을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앞에 붙은 수식어는 다르더라도 '민주주의 혁명(DR)'론을 내세우던 거의 모든 운동권이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밑바탕에는 민주주의 혁명이 더 높은 단계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대중 항쟁에 바탕을 둔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들 믿었다. 누구는 그러한 다음 단계 혁명이 '민족해방혁명'이라 했고, 누구는 '민중민주혁명'이라 했다. 하지만 어쨌든 제6공화국의 불철저한 민주화에 대한 불만이 오히려 모종의 탈자본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라는 전제만은 다들 같았다.

 

19915월의 패배는 이런 운동권 공통 이념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대중은 4년 전 거리에서만큼 시위대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더 많은 대중은 1987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 실패로 확정된 현실 정치 경로를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민주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의 재개라는 범운동권 비전은 이들 비전이 상정하는 만큼 '전 민중적'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더불어, 민주주의 혁명의 '성장, 전화'에 바탕을 둔 다음 단계 혁명들의 시나리오 역시 모두 붕괴했다.

 

, 당시 한국의 범좌파는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이미 지나간 기회에 미래를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혁명은 1987년에 시작된 불철저한 민주화 이행으로 완결되어가고 있었고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혁명의 급진화를 통한 더 높은 수준의 변혁이라는 전망을 저만치 추월하고 있었는데도, 범좌파는 민주주의 혁명의 미완성에 집착하며 그 뒤늦은 완성을 꿈꾸고 있었다. 그들을 지배한 것은 어쩌면 회한으로 남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강박이었다. 한 마디로, 노스탤지어적 이념이었다.

 

따지고 보면, 1980년대 중후반을 거치며 범좌파 내에서 갑자기 다수가 된 민족해방(NL)파야말로 이런 노스탤지어적 이념의 극단적 형태였다. 민족해방파는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가 한반도 통일국가 수립 실패에서 비롯됐다 주장하면서 모든 실천을 예외 없이 조국 통일 완수로 수렴시켰다. 강박적으로 해방 직후의 처참한 실패의 순간들로 돌아갔고, 마치 그 실패들을 만회하려는 노력인 양 현재 자신들의 실천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들의 그 도저한 회한과 향수에도 불구하고 한국 자본주의는 분단 현실을 등에 짊어진 채 이미 저 앞으로 아득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해방파만의 문제나 한계는 결코 아니었다. 민족해방파의 정통 노선과는, 거의 정반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먼 이념-노선 역시 한국 사회에서는 결국 어떤 노스탤지어적 사고와 실천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진보정당운동을 지배해온 한국식 사회민주주의 흐름이 그러했다.

 

다름 아닌 19915월의 패배를 겪은 뒤에 좌파 지식인, 운동가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넓은 의미의 사회민주주의 흐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불만족스러운 형태이지만 한국식 민주화 과정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군부 쿠데타의 사후적 불법화와 양김 씨의 순차적 집권 등)에 이르러 있었고, 민주주의 혁명의 급진화를 통한 탈자본주의 전망은 한국 사회 자체의 경험뿐만 아니라 현실사회주의권 붕괴를 통해서도 처절하게 무너졌다. 그럼 남은 길은 하나였다. 개혁의 길, 즉 그 내부에 다시 여러 차이가 존재할지라도 어쨌든 '사회민주주의'로 통칭될 수 있는 길이 그것이었다.

 

한데 사회민주주의에도 역시 그만의 전제 조건들이 있었다. 민주주의 혁명(DR)론들이 아주 까다롭게 여러 역사적 조건들이 교차하는, 거의 예외적이다 싶은 상황을 전제하는 것처럼, 사회민주주의의 성공도 그만큼 흔치 않은 조건들의 만남을 요구한다. 대의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돼야 할 뿐만 아니라 고도로 단결한 정치적 행위자로서 노동계급이 형성돼 있어야 한다. 20세기 초중반에 좌파정당과 산업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서유럽 여러 나라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그럼 한국 사회에 이런 노동계급이 성장해 있었던가? 1996-97년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반대 총파업 와중에는 머지않아 이 물음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으리라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때는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과 몇 달만에 상황이 반전됐다. 외환위기와 함께,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시작된 한국 노동계급 형성의 대장정은 돌연 중단됐다. 아니, 정반대 방향으로 꺾여 버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 정부에 구제금융 조건을 강요해, 한국 사회에 이미 그 싹이 존재하던 이중 노동시장을 새로운 시장지상주의 축적 구조를 뒷받침할 토대로 확대했다.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할 법률 근거들이 도입됐고, 기업별 노동조합들은 비정규직의 존재를 전제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전략을 실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참담한 노동 현실로 이어지게 될 20여 년 여정의 시작이었다. 국회 날치기로는 열 수 없었던 길이 외환위기를 빌미로 한 초국적 개입을 통해 열린 것이다.

 

이때 노동 유연화 공세에 가장 격렬히 맞선 것은 노동운동 내 급진좌파였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이 결국 좌절되면서 기회를 영영 놓친 것은 오히려 다른 세력이었다. 바로 범사회민주주의 흐름이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국가복지제도 확장이나 광범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단체협약 등 사회민주주의적 성과를 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반인 노동계급 형성과 연대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빠르게 신자유주의화한 한국 사회는 20세기에 서유럽에서 열렸던 이런 기회를 저항 세력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후 20여 년간 한국의 진보정당-사회운동은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한국 사회의 역사 전개 경로가 이미 이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쪽으로 갈라져 버렸는데도 좌파 지식인, 운동가들은 마치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것처럼 '북유럽형 복지국가'의 꿈을 놓지 않았다. 무산된 기회에 대한 또 다른 강박, 또 다른 노스탤지어적 이념이었다.

 

생태 전환, 이제까지와는 다른 도전

이것이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와 그 저항 세력이 전개해온 역사다. 한국 사회가 선택한 돌진적 근대화의 속도는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구축하고 이를 변화하는 전 지구적 상황에 맞춰 변형하는 데는 더없이 효과적이었지만, 한국 사회 내부에서 이 질서에 맞서며 새 질서를 준비할 세력이 성장하고 역사적 기회를 부여잡기에는 지나치게 빨랐다. 이런 세력이 되고자 했던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은 늘 지배 질서 재편의 속도에 추월당하며 의도하지 않게 향수병 환자가 되고 말았다.

 

새삼스레 이렇게 지난 역사를 회고하는 것은 단지 <비혁명의 시대>가 오랜만에 환기시킨 지난 세기 마지막 10년대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지금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이 마주한 역사적 상황과 과제를 더욱 정확하고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역사적 상황과 과제란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기후 재앙에 따른 인류 문명의 존립 위기이고, 이에 맞서 문명의 생존력과 회복력을 최대화하려는 생태 전환의 노력이다.

 

기나긴 장마 뒤에 다시 잇단 태풍을 맞이하는 요즘, 기후 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이 지면에서 굳이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기후 변화를 되돌릴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기후 급변 속에서 문명을 최대한 유지, 생존시키기 위해서라도 생태 전환에 매진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장벽은 결국 자본주의다. 자본의 끊임없는 확대 재생산이 전제 조건이 되는 사회 질서는 인류 생존의 최대 걸림돌이다.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새로운 질서를 사고하고 실행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역사적 경로를 밟아온 지구 위 모든 이들에게 '동시'에 닥친 도전이다. 물론 돌진적 근대화의 궤적을 등지고 선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한국의 좌파도 다른 나라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탈자본주의 방향에서 생태 전환을 추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의 진보정당-사회운동이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정확히 현재의 급박한 과제를 풀어나가는 노력으로서 자신의 이념-운동을 정초할 기회이기도 하다. 노스탤지어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현재적'인 과업을 떠안을 기회다.

 

향수병은 병일 뿐이다. 그간 한국 좌파 이념 지형을 지배하던 미완의 과제들은 향수병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풀려나가지 않는다. 지배 질서의 진화에 추월당한 미해결의 문제들은 오직 가장 최근에 닥친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분단 질서를 넘어서는 일도, 20세기 복지국가가 그랬듯이 사회권을 보장하는 일도 생태 전환과 결합됨으로써만 과거의 실패나 공백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21세기의 현재적 과제가 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혁명의 시대는 오직 않았고, 개혁의 시대는 그저 '비혁명의 시대'에 머물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배 질서의 승리로 역사가 종언을 고한 것은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도 더는 피하거나 건너뛸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전환의 시대다. 이제 우리의 지난날에 대한 모든 진실한 애도와 해원은 이 전환의 시대를 가장 충만하게 살아감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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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프레시안 2020.09.02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나는 장로회 계통의 미션스쿨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른바 뺑뺑이시절이었다. 3년간의 꽤 강렬했던 경험은 개신교에 대한 나름의 경험과 인식을 만들어주었다. ‘야한이야기도 잘하시던 교목님이 진행한 아침 기도 시간과 주 1시간의 성경 수업은 구약·신약을 통해 웅숭깊고 상징성 풍부한 문학을, 합창반 활동은 다채로운 복음성가와 개신교 문화를 체험하게 해주었다. 해마다 봄가을에 열린 부흥회에서는 음란마귀 들렸던 죄 많은 남고생들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한때나마) 회개하고 신앙인으로 바뀌는 은혜로운 광경도 봤다. 교사들 중에는 장로나 집사 직함을 가진 분도 여럿이었다. 몇몇 자애로운 선생님들은 철없던 친구들에게 참사랑을 베풀었으며 또 다른 몇 선생님들은 개신교가 폭력과 차별을 수반할 수도 있음을 몸소 시전해주셨다. 지금도 나는 교련 담당 장로님의 싸대기를 얼얼하게 잊지 못하고 있다.

 

크고 구조적인 가르침도 있었다. 설립자 겸 이사장이자 목사였던 분은 몸소 교장을 겸하기도 했다. 고교생 주제에 목사님+이사장님의 경영 방침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나중에 모교의 재단은 학교법인으로서는 정말 보기 드물게 부도를 냈다. 재단이 교체된 후에도 끝없는 분쟁에 휘말리고 편입학 및 인사 비리, 공금 유용, 발전기금 불법 조성 등 사학재단이 저지를 수 있는 거의 모든 범법에 연루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 학교는 비리 사학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주여!) 나는 경상도 사람은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모교의 특별한 이름(구약의 지명), 고교 평준화의 성과와 사학 문제의 유다른 사례로 사람들에게 자랑스레(?) 들려주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 학교는 한 마리 어린 양이 제도종교와 사학재단 문제에 관심 많은 시민으로 성장하게 만든 어떤 미션을 이룬 셈이다. 굳이 주일마다 교회를 다니며 헌금 내고 애써 배워야 하는 것을 정규 고교과정을 통해 저절로 보고 배우게 됐으니 일석이조라고 해야 할까.

 

몽매한 나는 지난봄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수 발생했을 때 그 클래식한 이름 때문에 신천지가 유불선과 기독교를 종합한 교리로써 소박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모은 단체일 거라 넘겨짚었다. 참고로 내가 사는 서울 은평구엔 ○○동자, XX보살, ○○장군 같은 뭔가 샤머니즘스럽고 전근대적(?) 풍취를 한껏 뿌리는 철학관이나 사찰의 명칭을 단 종교시설이 참 많다. 대나무 신대가 꽂힌 곳도 있고 불상과 제례 용품을 파는 전문 가게도 있다. 그런 집들이 3호선 연신내역 인근의 허름한 건물들 여기저기에 입주해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나는 서민 삶의 어려움과 현대 종교의 기복 기능 같은 주제를 떠올려보곤 한다. 그런데 신천지엔 전문직을 포함한 번듯한직장인과 교리에 매우 충실한(?) 20~30대 형제자매들이 많다고 한다. 삶의 파편성과 영혼의 갈급은 ‘AI시대청년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겠다.

 

지난주 대통령에게 교회를 일반 영업장처럼 다루지 말라고 꾸중하신 목사님의 말씀도 새기고 싶다. 현대 종교와 자본주의의 필연적이고도 긍휼한 일체성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뇌를 표현한 말씀이라 사료된다. 이 나라에서 신자유주의와 국가라는 현대성의 판 위에 프로테스탄티즘이 얹힌 모양은, 베버적인 것을 넘는 생존주의와 냉전 문화사의 주제처럼 보인다. 그것은 급진적이고 정치적이다. ‘합리적이고 공동체적인 신앙’ ‘사회적 책임을 다 하는 개신교같은 말은 근본적으로는 동그란 네모’ ‘따뜻한 냉거피같은 것 아닐까?

 

이교도들은 코로나19 재확산이 사랑제일애국성도들의 궐기 때문이라며 화를 내고, 믿음 약한 형제들은 이제 개신교 신자 수가 줄어들고 개신교 혐오가 증가할 것이라며 지레 걱정한다. 그러나 개신교의 힘은 단지 저 다윗 군대 같은 사학재단과 강남 대형 교회에만, 그리고 새된 유튜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장님을 위시해서 국회에는 여전히 온유하게 하나님 나라를 착실히 지키는 기독 의원들이 계시다. 오히려 21대 국회에서는 개신교도 의원의 비율이 전보다 더 커졌다 한다. 마치 확진자의 비율처럼 인구 전체에서의 개신교도 비율보다 훨씬 높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차별금지법 같은 신의 뜻에 대한 잔망스러운 도전에 대해 걱정 말라고 말씀하셨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장 힘든 한 주다. 초유의 거리 두기 2.5’와 영업시간 제한이 자영업자와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어떤 시련을 가져다주고 있는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이번주에는 절대로 아프지 말자. 의사를 만나지도, 병상에 눕지도 못한 채 내 생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주님의 뜻이 뭔지를 헤아려야 하는 상황을 맞으면 안 되겠다.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경향 2020.09.03.

 

'관주주의'를 넘어서

우리 모두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존이 어렵습니다

지난 달 필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솔직히 필자는 아직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안쓰럽고 그리움에 사무칩니다. 잠도 잘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니 너무도 슬프기 때문에 더욱 하고픈 얘기일 수 있을 것입니다. 먼 길을 떠나간 아내도 필자가 다시 일어서 성실하게 사회적 공적 활동을 실천하는 모습을 가장 바라고 있을 것이므로 더욱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필자는 예전에도 아내에게 자문을 많이 구하며 글을 썼기 때문에 이 글도 아내가 옆에 있으면서 같이 수행하는 공동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와 관련해 그간 두 차례에 걸쳐 프레시안에 기고문을 썼는데, 많은 분들이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한 분 한 분에게 마음 속 깊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필연적 환경 재앙, 우리가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현실로 다가온 이 음산하고 암울한 잿빛의 기후 재앙과 환경 악화를 눈앞에서 목도하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의 전 지구적 확산 역시 극단적 환경 파괴의 후과라는 커다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산업혁명 이래 석탄, 석유 등 지하자원의 무제한적 개발로 인한 지속 불가능한 성장’, 소비의 극단적 추구 그리고 인간 욕망의 극대화라는 외길로 치달아온 필연적 결과일 것입니다. 불행하지만, 어쩌면 이미 임계점을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바야흐로 모든 인간과 생명이 절멸될 미증유의 대위기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생명과 생존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습니다. 아내와의 이별을 겪어서인지 필자에게는 너무도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가 이제 눈앞의 자그마한 나의 이익을 넘어서 이 생존 위기를 가장 시급하고도 절박하게 해결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선결적으로 해결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제와 성장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혹시 우리 세대는 어떻게 견뎌 나간다 할지라도 아무리 늦어도 우리 바로 후대, 후손들은 반드시 겪고야 말 중차대한 현실입니다.

 

먼저 정치권이 각성하여 기후악당 국가라는 오명을 떨쳐내야 합니다. 또한 언론계를 비롯하여 학계, 시민단체 등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층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환경 보호란 본래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각자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실천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보수와 진보, 파행적 정쟁을 지양하고 공적 가치로 집중해야 합니다 현대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는 세계적으로 대위기에 봉착해있습니다. 본래 정당이란 대중들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고 정치를 통해 이를 관철시키는 것을 임무로 합니다. 그리고 국가와 대중을 위한 선의의 정책 경쟁을 통하여 선거에 의해 대중들에게 선택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현재 정당은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적으로도 비슷비슷 유사한 정당끼리 정책이 아니라 오직 정쟁의 끝없는 확대재생산과 선동에 의한 대중들의 극단적 분열에 기생하고 의존하는 생존방식이라는 퇴행적 행태만을 노정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정당이 유발하고 선동하는 이 적대적 대결과 반목은 신속하게 사회 전체로 확산됩니다. 대중들은 정치가 유발시킨 적대적 대결의 소용돌이에 매우 손쉽게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휩쓸리면서 전체 사회가 적대적으로 분열되고 대치합니다. 이것이 현대 정치, 현대 사회의 실제적 모습입니다. 지금 세계 모든 나라의 정치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우리나라는 가장 극심하게 표출되어 나타나는 나라에 속합니다. 이 땅의 정치는 정쟁 외에 그 어떠한 무기도, 수단도 없습니다. 이는 결국 공도동망(共倒同亡), 공멸의 길일 뿐입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는 모두 우리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가치입니다. 새는 좌우 날개가 있어서 비로소 그렇게 날 수가 있습니다. 보수는 보다 합리성을 갖춰나가야 하고, 진보는 진정 진보적인 사고방식과 정책으로 사회와 시민들에게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인류 생존의 위기라는 이 절체절명의 현 상황에서 보수와 진보 모두 공적 가치와 공공성을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사적 이익과 당리당략만을 추구하고 오로지 상대 진영에 대한 비난과 부정에 토대하여 정치공학과 선거 유불리에만 매몰되는 현재의 파행적 정쟁은 이제 그만 지양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시대가 정치권에 부여하고 있는 지상 과제이며 엄숙한 명령입니다.

 

우리 삶이 바뀌기 위하여, 관료조직의 변화가 절실합니다 일부 고위공직자의 언행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국가 정책은 정치권이 좌우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처럼 겉으로 보이는 몇몇 정책이나 조치에 불과할 뿐 대중들의 삶을 결정하는 구체적인 시책에서 대부분 관료조직이 그 결정권자인 경우가 지배적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주주의(官主主義)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관료조직은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은 중요한 제도적 토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국면에서도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부의 편중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은 요인 중 주요한 한 요인은 바로 보수적이고 오직 관행규정에만 익숙한 관료집단의 존재입니다. 이러한 낡은관료조직이 우리 사회 운용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한,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구체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료조직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관료조직 스스로도 변화의 자세를 갖춰야 하고, 새롭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관료조직의 개혁과 변화가 절실합니다/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프레시안 2020.09.03.

 

 

전교조 합법화 판결을 둘러싼 비이성적 진영논리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일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내려진 '법외노조' 통보 조치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전교조는 다시 합법화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이번 판결은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조치가 온당했다는 1,2심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이를 놓고 "정치적 판결"이라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정치권과 교원단체, 일부 언론이 이번 대법원의 판결에 대법원의 구성을 들이대며 또다시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앞선 재판과 헌재의 결정이 무리한 법해석이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판결의 핵심은 "노동3권은 법률로만 제한이 가능한데 하위 법령인 노동조합법(교원노조법) 시행령을 근거로 법외노조 처분을 내린 것은 위헌"이라는 취지에 있다. 대법원은 이례적으로 이 시행령을 가리켜 '악법'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노조할 권리는 국민 기본권이라는 헌법상의 원칙을 확인하고 행정권 발동은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법리적 상식에 근거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대해 일각에서 "진보색채가 강해진 대법원의 코드판결"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설득력이 부족한 주장이다. 재판에 참여한 12명의 대법관 가운데 절대 다수인 10명이 위법판결을 내렸다. 전체 대법관 14명 가운데 변호사 시절 전교조를 변호했던 김선수 대법관과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판결에서 빠졌다. 위법판결을 내린 박상옥, 권순일, 김재형 대법관은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됐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4명의 대법관 가운데 3명이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 합법 판결을 내린 2명 가운데 한명인 이동원 대법관은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됐다. 따라서, 이번 대법원의 판결을 기계적으로 보수와 진보 진영논리로 해석하거나 대법원의 정치적 성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특히, 현재 대법원 구성을 거론하며 앞으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김경수 경남지사 판결까지 연결시켜 예단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판결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법리는 시대적 상황과 사회현실에 맞게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의 대법관이 내린 판단을 정치적 논리에 따라 근거도 없이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사회가 아무리 갈등과 대립이 심각해도 대법원의 판결만큼은 수용하는 너른 자세가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의 마지막 보루인 대법원 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사회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대법원 판결에까지 정치적 잣대를 들이미는 비이성적 습관이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김규완 기자 CBS노컷뉴스 2020.09.04.

 

그래서 우린 주식을 산다

인생은 한 번 뿐이니 삶을 즐겨야 한다는 욜로(YOLO)’가 화두였던 때가 있었다. 젊은 세대는 소유보다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이 인사이트가 되어 트렌드 서적을 장식한 적도 있었다. 나 역시 그 말에 공감하던 90년대생 젊은 세대로 해마다 수차례 해외여행을 가고 취향에 맞춰 소확행을 즐기며 왕성한 소비력을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고 세상이 변했다. 재난이 일상화되었다. 하루에도 수 통씩 재난 문자를 받는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되면서 스타벅스에서는 앉아 있을 수조차 없고 오후 9시 이후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제는 삶이 즐길 대상이 아니라 재난으로 느껴진다.

 

욕망이 막힌 시대에 특별히 경험할 것도 없고 즐길 수 있는 것도 없다. 돈 쓰는 젊은 세대이자, 돈 쓰게 만드는 이커머스 기획자이지만 올해는 도무지 소비재에 돈 쓸 일이 없었다. 외출을 줄이니 옷을 안 사고 마스크 쓰고 다니니 화장도 잘 안 하게 되었다. 직장은 계속 다녔으니 돈은 계속 벌었을 텐데, 남은 돈은 어디에 썼을까? 주식 샀다.

 

코로나를 제외하면, 올해 친구들과 가장 많이 이야기한 소재는 주식과 부동산이다. 가장 관심있었던 인플루언서는 스마트스토어 부업을 유행시킨 신사임당이었다. 한 때는 구찌 가방 이야기나 이번 휴가에는 어느 나라에 갈까가 화제였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관심에서 멀어진 느낌이다. 부동산 대책이 발표될 때마다 단톡방을 시끄럽게 하며 설왕설래할 뿐이다.

 

돈 버는 것이 쉽지 않다지만 사실은 방법을 알면서도 실천할 능력이 없는 것에 가깝다. 최근 카카오 게임즈 공모주 청약이 있었는데 경쟁률이 무려 1,5241이었다. 많은 금액을 넣어야 공모주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자본이 몰려 역대 최대 증거금 기록을 갈아치웠다. 큰손은 70대이고 평균 3억원대를 청약했다고 한다. 청약이 되면 시세차익을 누릴 것이다.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많은 돈을 넣을 자본도 신용도 없어 바라만 보았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수년 전 내가 입사했을 때 강남에 집을 샀으면 지금 수 억원 대 시세차익을 누렸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번 연봉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큰 금액이다. 쉽지 않은 경쟁을 거쳐 취업해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의미가 있나라는 회의감이 피어오른다. 부모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서울에서는 집을 살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직장은 서울 근처에 몰려 있고 모두의 부모님이 자녀를 도와줄 수는 없는데.

 

욕망을 간단히 말하자면, 돈 벌고 싶다. 직장 가까운 서울 역세권에 집 사고 싶다. 부모님 세대처럼, 설령 당장은 아닐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내 집이 생기고 자산이 증식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릴 때는 당연해 보이던 것이 너무 어려워서 어른의 삶이란 이렇게 고된 것인가 깜짝 놀랄 지경이다. 전세 끼고, 대출 영끌해서 집을 사놓은 친구들이 부러울 뿐이다.

그래서 주식을 산다. 부동산은 넘볼 수 없고 연봉 상승은 뻔하며 침체된 경기는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남은 것이 주식 뿐이랄까. 실물 경기가 그렇게 안 좋은데 코스피는 2,400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현실이 또래 개미들의 분투를 보여주는 것 같다.

생존이 위기인 시대, 그래서 우린 주식을 산다./곽나래 이커머스 기획자/ 한국 2020.09.04.

 

 

소멸된 공론의 정치, 갈등 부추기는 언론

정치와 언론은 제대로 기능하는가?

정치사회적 의제에 대해 합의를 모색하는 메커니즘이 실종된 공동체가 경쟁력을 가질리 만무하다. 상호 차별성을 인정하고 중용을 모색하는 기능의 부재는 갈등과 대립의 연속만을 결과하기 때문이다. 타자(他者)를 승인하고 인정하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그러나 지배와 합병을 통한 이익의 추구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촛불집회의 주인공들인 시민의 공화주의적 덕성 또한 희미해졌다.

 

정치를 무력화하고 폄훼함으로써 이득을 취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는 세력, 이에 부화뇌동하는 어용지식인들이 정치적 무관심을 선동한 적이 있었다. 군사권위주의 시절 때 얘기다. 그러나 수많은 매체와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정치 기사와 정보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언론과 매체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노출되면서 정치적 무관심이 반정치의 주범으로 인식되는 때는 지났다.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의 의사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편파성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여론은 위험하다. 문제는 올바른 여론의 형성인데 편견과 당파성에 포위된 언론이 여론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면 불편부당한 여론의 순기능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사회적 의제나 쟁점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것은 민주사회의 역동성과 다양성의 조화라는 면에서 원칙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준거적 관점에서만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는 독해법에 익숙한 한국사회에서 의견의 다름은 다양성의 긍정적 기능과는 거리가 먼 차별과 배제로 이어진다. 경쟁과 길항을 넘는 냉소와 적대의 차원에서 현상에 대한 관념을 받아들이는 한국에서 통합이 강조되는 이유일 것이다.

 

논어에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구절은 꽤 알려져 있는 문장이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되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같음을 강요하며 공존하지 못 한다'는 뜻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지배담론과 비판담론으로 나뉘어 경쟁하되 상호존중과 공존의 질서를 이루는 것이 '화이부동'이다. 우리사회는 이와는 대척에 있는 '동이불화'의 사회다.

 

한나 아렌트(H. Arendt)'정치적인 것''사회적인 것'을 구별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객관적 평가의 잣대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답을 이끌어내는 것이지만 정치적인 것은 객관적 척도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없는 의견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적 의제로 전화(轉化)한 사회적 문제는 공적 담론의 장에서 토론과 설득의 방식으로 다뤄져야 한다. 전문가나 이해당사자들에게만 맡겨지고 시민사회에서의 공론장의 토론이 생략되는 의견은 결국 정치의 포기에 다름 아니다.

 

의료계와 정부의 최근 갈등은 공공의 영역과 시민의 건강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에서 공적 담론이 배제된 대표적 케이스다. 정부와 의료계는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기저에는 '대화로 안 되면 각자의 길을 간다''동이불화'의 논리가 깔려있다.

 

긴급재난지원금에 대해서 여당의 이낙연 대표와 이재명 경기지사의 갈등은 정책의 우위를 점하는 쪽이 기선을 제압한다는 정치공학의 지배 담론이 작동하고 있다. 물론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이재명 지사와의 공방, 여권 내, 여야 간의 정책을 둘러싼 담론 투쟁은 토론을 통한 합의의 모색이라는 기본 원칙이란 면에서 볼 때 긍정적인 면이 많지만 이에도 시민들의 공론의 장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언론은 보수언론과 반대 진영의 진보언론으로 양분되어 있다. 사회적 이슈와 현안에서도 거의 정확히 입장이 갈린다. 역사적 연원 및 언론사 탄생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지만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신문이 비교적 일관된 이념적 지향성을 보이는 것에 반해 방송들은 대체로 인사와 내용면에서 신문에 비해 정권의 지향에 상대적으로 민감하다. 언론은 편견을 배제하고 자신의 준거 틀에 입각한 진영논리에 기대어 이익을 보려는 퇴행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기존의 전제들에 대한 판단을 중지·유보해야 한다.

 

의정 갈등, 긴급재난금 지원의 대상과 시기, 부동산 불평등 문제, 광화문 집회와 사랑제일교회 등 사회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촛불정부가 시민의 동의에 기반해 정당성을 확보한 정권이라면 다시 시민적 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나가는 정치를 복원하는데 진력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들 다수의 의식 속에 지금의 권력 엘리트들은 이러한 과정들을 생략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오해'들을 풀 당사자는 야당이 아닌 여당과 집권 핵심들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프레시안 2020.09.04.

 

경제민주화 절호의 기회를 잡아라

헌법 1192항 경제민주화 조항은 1987년 헌법에서 빠질 뻔했다. 최종 검토 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빼려고 했다. 김종인 의원은 뺄 수 없다고 버티며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이야 정치세력이 경제세력에 비해 권한이 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을 앞지르게 될 것이고 자기들 마음대로 나라를 움직이려는 욕심을 갖게 될 것이다. 경제세력은 언제든 위헌 소송을 걸어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려 들 것이다. 그들을 제어할 헌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러면 그냥 그대로 넣어야겠군이라고 딱 한마디를 했다. 경제민주화는 그래서 헌법에 들어갔다. 1987년 이후 경제 관련 입법이나 행정처분에 대해 경제계가 함부로 위헌이라고 주장하지 못한 것은 경제민주화 조항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경제민주화가 다시 눈길을 끈 것은 친재벌 노선의 이명박 정부 때였다. 민주당이 20117월 당내 기구로 ‘119 경제민주화특위를 설치하고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 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위기에 처한 여당의 구원자로 나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김종인 전 의원을 영입하고 경제민주화를 공약했다. 정강·정책에도 넣었다.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를 위해서였다. 여당과 야당이 경제민주화는 우리가 진짜라고 싸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201212월 대선에서 이긴 박근혜 대통령은 20137월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재계가 아우성을 쳤다. 박근혜 대통령이 10대 재벌 총수들을 만났다.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나 과도한 규제로 변질되지 않고 본래 취지대로 운영되도록 하겠다.”

 

항복 선언이었다. 정부는 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결국 재벌의 로비에 휘말려 탄핵당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경제민주화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2020년 총선 참패로 주저앉은 야당을 김종인 위원장이 접수했다.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를 넣었다. 그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우리 당은 약자와 함께하지 못하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정당으로 인식됐다후퇴하지 않을 변화와 혁신의 디엔에이를 당에 확실히 심겠다고 했다.

 

정부가 825일 국무회의에서 공정경제 3(상법 일부개정 법률안,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 법률안, 금융그룹의 감독에 관한 법률안)을 의결했다.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경제민주화 법안이다. 정부는 31일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무회의 이튿날 이른바 보수신문 지면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다. 공정경제 3법을 실행하면 경제가 무너지고 나라가 망할 것처럼 썼다. 상주보다 곡장이가 더 서럽게 운다는 말이 있다. 보수신문은 도대체 왜 그럴까? 김종인 위원장은 광고를 무기로 기사 보도와 사설의 논조를 좌우한다고 했다. 그런가? 이른바 보수신문이 재벌과 일심동체가 된 지 오래다.

 

다행인 것은 공정경제 3법에 대한 국민의힘의 태도다. 825일 국무회의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공식 논평을 내지 않고 있다.

김종인 위원장은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 개혁이 아니라, 재벌의 탐욕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 정부에서 시도했던 출자총액제한이나 순환출자금지 등으로는 한계가 있다. 기업의 의사결정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 재벌그룹 계열의 상장회사 이사회가 민주적이고 투명한 감시체제를 갖추도록 이사회 운영 관련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2012)

정부의 공정경제 3법과 일치한다. 그래서 참 궁금하다. 국민의힘이 공정경제 3법에 찬성할까, 반대할까?

 

우리나라 보수의 디엔에이는 친재벌이다. 국민의힘은 보수의 전위다. 따라서 결론은 둘 중 하나다.

첫째, 김종인 위원장이 변화와 혁신의 디엔에이를 심는 수술에 성공하는 경우다. 국민의힘이 공정경제 3법에 찬성할 것이다. 2022년 대선에서 국민의힘의 집권 가능성은 커진다.

둘째, 수술에 실패하는 경우다. 국민의힘이 공정경제 3법에 반대할 것이다. 김종인 위원장은 쫓겨날 것이다. 2022년 대선에서 국민의힘의 집권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대선 승부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이다. 지금 우리는 경제민주화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놓치지 말아야 한다./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0-09-07

 

의사와 변호사

휴전이다. 의협(대한의사협회)이 일단 파업을 풀었다. 하지만 짐작건대 의대 정원 확대 등이 다시 추진된다면 의사 파업도 재개될 것이다.

 

파업의 최대 맹점은 객관적 사실 자체의 부인이다. 우리나라 인구 1천명당 의사 수는 2.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인 3.5명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런데도 의협은 우리나라 의사들은 효율적이라서 수 부족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3분 진료가 환자 입장에서도 효율적일까. 주장의 이면엔 의사 수 통제를 통한 특권 유지의 바람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의사들만의 바람은 아니다.

 

대국민 법률서비스 문턱을 낮추겠다는 취지로 노무현 정부가 1천명 선발의 사법시험을 뒤로하고 입학생 2천명의 로스쿨 설립을 추진할 때 변협(대한변호사협회)은 거세게 저항했다. 당시 변협의 저항은 지금의 의협 못지 않았다. 이후 로스쿨 출신 회원이 늘자 전략을 바꿨다. 해마다 변호사 시험(변시) 합격자 발표일이면 변협은 시위까지 불사하며 신규 변호사 배출 축소를 외친다.

 

전문직 단체들은 전문직 수 통제, 전문직 피교육자 수 통제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먼저 자격을 취득한 것이 신규 진입 제한의 정당한 권리인 것처럼. 높은 보수나 특권이 대학 입시·전문직시험 등의 좁은 문을 통과한 마땅한 대가인 것처럼. 하지만 전문직은 일정 기준만 충족하면 그 수가 몇이든 자격을 취득할 수 있어야 하고, 국가는 관련 교육 제공에 최대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직업의 보수는 노동의 대가여야지 좁은 문을 통과한 대가가 되어선 안 된다.

 

다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의 증원 비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의협은 인구당 의사 수가 OECD 평균의 65.7%, 의대 졸업자 수가 58%에 불과하다며 증원 자체는 지지하면서도, 필수 진료과 및 지방의 공공병원 확충, 지속가능한 공공의사 양성 등 공공시스템 구축이 빠진 정부안을 비판했다. 자칫 사립의대 정원만 늘리고 소수라도 그나마 양성된 공공의대 졸업생들마저 몇 년 근무 뒤 먹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리한 지적이다. 로스쿨을 통해 변호사들이 다소 늘었지만 시민들의 법률적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누구나 경찰수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사의 조력을 받는 형사공공변호인제도. 매달 몇천원의 보험료만 지급하면 언제든 법률 상담을 받고 성공보수 부담 없이 소송을 맡기는 권리보호보험제도. 로스쿨을 통한 법조인 증원은 선진국의 이런 공공 내지 보편적 법률 복지 시스템 구축 없이 출발했다. 그 결과 시민에게 변호사는 여전히 멀다. 또 시장에 내던져진 변호사들의 저항이 법무부를 흔들어 변시 합격률이 통제됨으로써 로스쿨 고시학원화, 변시낭인, 천여 명의 변시 평생응시금지자 등의 문제들이 야기됐다.

 

특히 외과·산부인과 등은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인 만큼 그 존폐를 시장에만 맡겨선 안 된다. 국방·치안·수도·전기 서비스에서 우리는 수익 창출을 기대하지 않는다. 공공재 서비스에서 적자가 나는 것은 당연하며 이를 민영에만 맡기는 것은 시민 보호의 포기다. 또 의료·법률 서비스가 공공시스템 안에 자리 잡은 사회의 의사·변호사들에게 신규진입자는 공포가 아니다. 큰돈을 벌 수는 없어도 보람된 전문서비스를 제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굳이 의료 봉사, 무료 변론을 하지 않아도 직업적 삶 자체가 봉사적이고 공익적일 수 있다.

 

공공시스템 구축 없이 의대 정원만 늘리면 의료계에서도 법조계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의협이 절대평가인 국시의 상대평가 전환을 추진하거나 채점을 왜곡해 상당수가 불합격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그 속에서 국시가 고시화되며 의대 교육이 무너질 수 있다. 시민의 의료서비스 문턱은 별반 낮아지지 않은 채.

 

지난해 밤샘근무 중 순직한 고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은 생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우리나라에 의사 수가 많다는 걸 의사 말고 누가 동의할까라고 남겼다. 전문직의 수는 통제되어선 안 된다. 다만 증원만으론 부족하다. 시민에게 가까운 전문 서비스, 정상적인 전문직 교육을 위해선 전문 서비스의 공공 내지 보편적 복지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의사 파업이 일단락된 지금, 파업을 규탄하면서도 공공의료 시스템 구축을 간과한 개혁안도 비판한 인의협의 성명을 곱씹어야 할 때다.

박은선 | 변호사·법조문턱낮추기실천연대 공동대표/ 한겨레 2020-09-07

 

무엇이 포퓰리즘 정책인가?

지난 칼럼 이후로 대략 네 가지 정도 큰 사건이 있었다.

첫째, 론스타 문건이 대량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워싱턴에서 진행된 투자자-국가 중재(ISDS) 사건에서 론스타와 우리 정부 간에 오고간 서면의 원문이 처음으로 공개되었고, 싱가포르에서 론스타와 하나금융지주 간에 있었던 국제상사중재(ICC) 결정문도 공개되었다.

 

이들 서류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점은 론스타의 교활함과 우리 정부의 비겁함이다. 우선 론스타는 자신들이 어떠한 경우에도(심지어 외환은행이 부실은행이었다고 하더라도) 외환은행을 인수할 수 없었던 비금융주력자(산업자본)라는 점을 끝까지 숨기면서, “한국 정부는 한번도 우리를 비금융주력자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는 표현 뒤에 숨어서 간계를 꾸미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면서 우리가 론스타 너희를 얼마나 잘 대해줬는데 이럴 수 있냐?”는 식의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론스타가 20039월 현재 비금융주력자인지 다시 조사해 만일 론스타가 비금융주력자에 해당하면 론스타의 당초 외환은행 인수 자체를 취소해야 한다. 그리고 국회는 시급히 론스타 청문회를 개최해 국민들이 감춰진 진실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하여, 멍하니 있다가 어느 날 지갑을 털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둘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드디어 기소되었다. 사필귀정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시간이 경과하다 보니 마치 기소가 무슨 큰일이라도 되는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생겼다. 검찰의 공소장만 130, 수사기록만 21만쪽에 달하고 심지어 수사결과를 빼곡하게 요약한 보도자료가 22쪽이었다. 이 보도자료를 보면 그동안 삼성이 숨겨온 여러 가지 더러운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요약되어 있다. 심지어 유명인사의 칼럼을 대필하여 게재했다는 사실까지 있다.

 

언론 왜곡 사례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이러니 이 부회장의 불법 승계 사건에서 국민은 귀머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회는 지금이라도 검찰에 공소장을 요구해 국민들이 이 대형 범죄의 전말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법무부나 법원도 피고인이 우리나라 최고의 변호인단을 구성할 정도로 방어권 행사에 문제가 없고, 이 사건이 가지는 사회적 파급효과가 지대한 만큼 검찰의 수사결과가 공개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제 최근 있었던 네 가지 사건 중 나머지 두 개만 남았다. 이 두 사건은 무엇이 포퓰리즘 정책인가?’라는 질문과 매우 깊숙하게 맞닿아 있다.

 

우선 한국판 뉴딜펀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3일 청와대에서 제1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20조원의 국민참여형 뉴딜펀드 설치 등 뉴딜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목적은 경제위기 극복과 성장 잠재력 배양이다. 그럴 수 있다.

 

문제는 각론이다. 국민참여형 뉴딜펀드는 처음에 원금보장에 수익률 3%를 약속하는 펀드로 포장되었다. 무리수 없이 이런 펀드가 존재할 수 없고(존재 가능했다면 자본시장이 이미 출시했을 것이다), 설사 무리수를 동원해 이런 펀드를 판매하더라도 원금보장 상품을 파는 것은 자본시장법 위반이다. 무리수가 부족해 약속이 깨진다면 그것은 불완전 판매다. 거의 모든 경우의 수가 지뢰밭인 정책인 것이다. 그런데 3일 오후 부총리와 금융위원장은 버젓이 언론 앞에서 사실상 원금보장 상품이고 국고채 이자보다는 높은 수준일 것이라면서 상품을 홍보했다.

 

펀드의 실상을 보면 더욱 가관이다. 왜 이 펀드가 사실상 원금보장이 되는가? 상품 자체가 안전해서 그런가? 아니다. 누군가가 그 손실을 먼저 떠안기 때문이다. 그가 누군가? 국민이다. 국민이 혈세로 막는다는 것이다. 즉 부총리와 금융위원장의 말을 다시 쓰면 국민 여러분, 이 상품 안전해요. 왜냐고요? 국민 여러분이 세금으로 다 막아주니까요이런 것이 된다.

 

사업 대상이 어떻게 선정될지도 모르고 이에 대한 감시체제도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국토교통부는 지난 617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철도 분야 민간 제안 사업의 경우 예비타당성조사, 기본계획 등을 거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만일 이런 사업에 국민 혈세가 손실분담용으로 투입된다면 어찌될 것인가? 이런 정책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국민들은 잘못하면 골병 드는 대표적인 포퓰리즘 정책이다.

 

마지막으로 제2차 재난지원금 지급 문제를 보자. 정부는 선별지급 방침을 굳혔다. 마치 보편지급을 주장하는 것이 무책임한 포퓰리즘인 것처럼 폄하하면서. 그러면서 재원은 국채 발행으로 조달하기로 했다. 국채는 나중에 세금 걷어야 한다. 결국 정부는 선별지급미래 징세를 선택한 것이다. ? 지금 세금 걷으면 정치적으로 불리할까봐. 이게 포퓰리즘이다.

 

나는 계속 보편지급선별징세를 외쳐왔다. 국민 전부에게 지급하고 그 재원은 지금 부자에게 돈 걷으라는 것이다. 보편지급을 해야 하는 이유는 코로나19 사태의 피해 규모를 선별하는 작업을 신속하고 정교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고, 선별징세가 가능한 이유는 세율, 누진구조, 면세 등의 측면에서 나름대로 오랫동안 구축한 우리 사회의 합의가 징세구조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세금을 걷어야 하는 이유는 미래 세대에게 그 부담을 떠넘기지 않기 위해서다. 부자에게 걷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장 고통을 감내할 능력이 크기 때문이다.

 

경제정책은 정직하게 해야 한다. 헛된 약속으로 국민을 기망해서는 안 되고, 이를 꽉 깨물어 총알을 물어야 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 정부는 총알을 물지 않고 꽹과리만 치고 있다./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경향 2020.09.08

 

개문발차한 한국판 뉴딜

국가경제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간다. 하나는 성장이며 다른 하나는 분배다. 성장은 오늘보다 풍요한 내일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하며, 분배는 그 풍요의 온기가 모두에게 미치도록 한다. 성장의 바퀴만 커지면 빈부격차에 따른 불만이 증폭되고, 분배의 바퀴만 커지면 일할 의욕이 사라지게 만든다. 두 바퀴의 균형은 체제 안정의 전제조건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면서 성장과 분배 대책을 세웠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다. 소득주도성장은 이름만 성장정책이지 실제로는 분배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복지를 확대했다. 실질적인 효과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을지언정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리려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성장정책인 혁신성장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미래차, 드론, 재생에너지, 인공지능, 핀테크, 스마트시티, 스마트팜, 스마트공장 등 8대 핵심사업을 통해 2022년까지 30만개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동안 혁신성장의 성과가 무엇인지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가 지난주 한국판 뉴딜사업 구상과 뉴딜 금융지원 방안을 공개했다. 골자는 5년간 총 20조원 규모의 정책형 뉴딜펀드등 뉴딜펀드를 만들고, 정책금융기관과 민간금융회사가 각각 100조원, 70조원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 자금으로 한국판 뉴딜프로젝트와 뉴딜기업에 투입해 2025년까지 일자리 190만개를 창출하겠다는 구상이다.

 

한국판 뉴딜은 시중 유동성을 부동산 대신 생산적인 투자부문으로 유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뿐 아니라 코로나19 극복 이후 글로벌 경제를 선도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5년짜리 국가 대전환 장기 프로젝트라는 원대하고 담대한목표에 비해 구체성은 떨어지고 허술하기조차하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의 양대축으로 그린 뉴딜디지털 뉴딜을 내세웠다. 이는 2018년 추진했던 혁신성장의 3대 전략분야로 선정한 데이터 경제, 인공 지능, 수소경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번에 달라진 건 이들 분야에 장기간 대규모로 돈을 풀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천문학적인 돈인 만큼 철저한 사전준비와 대책이 필요하다. 국가 투자사업은 국민의 혈세가 들어간다. 분명한 사업내용과 투자대상, 투자효율을 따져봐야 한다. 이를 근거로 투자금액을 정하는 게 정석이다. 지금까지 나온 투자대상은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 등 뉴딜 관련 기업과 태양광 발전 프로젝트, 수소충전 프로젝트 등 뉴딜프로젝트가 전부다. 구체적인 투자처가 정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투자금액은 확정됐다.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190만개 일자리라는 것도 어떤 일자리를 말하는지 모호하다.

 

명확한 기준이 없다보니 부작용은 피하기 어렵다. 경쟁력 없는 기업에 대한 묻지마 지원이 우려된다.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분야에 빌붙어 연명하는 좀비기업, 하루살이 기업이 양산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전 정권에서는 기업의 목줄을 죄더니 이번 정부에서는 금융기관의 팔비틀기를 한다는 말도 나온다.

 

국민이 참여하는 정책형 뉴딜펀드는 지속적인 논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펀드는 정부가 내는 7조원과 민간의 13조원을 매칭투자해 만든다. 당초 정부와 여당에서는 원금보장에다 최소 연 3%의 수익을 약속했다. 그러다 원금보장이 자본시장법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나오자 사실상 원금보장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어쨌든 원금을 약속했다. 뉴딜펀드가 성공하면 투자자들은 수익을 얻는다. 실패해도 세금으로 충당하므로 손해볼 것이 없다. 펀드 가입 여력이 없는 서민들은 수익에는 소외되고, 손해가 생기면 이를 보전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하는 꼴이다.

 

뉴딜펀드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법개정과 운용사 선정을 거쳐야 하므로 투자시기는 빨라야 내년 2분기다. 20대 대선을 1년도 안 남긴 시점이다. 정부는 디지털·그린 경제는 글로벌 추세이기 때문에 다음 정부에서도 지속될 사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 정부의 정책을 차기 정부가 추진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이명박 정부 때 녹색펀드, 박근혜 정부 때의 통일펀드는 모두 흐지부지됐다.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를 계기로 뉴딜 속도전에 나서고 있다. 천문학적인 돈을 뿌려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에 온기를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돈을 쓰면 언젠가 청구서는 날아온다. 무엇이 급했는지 만원 버스가 문을 닫지도 않고 출발했다.

박종성 논설위원 경향 2020.09.09

 

댓글 달기의 허무함

세상에는 왜 이렇게 댓글을 달 일이 많은지.

지난 815일 광화문 집회 이후 코로나19는 심화되었고 의사들은 파업하고, 국회의원의 발언은 넘쳐난다. 경제 위기부터 성추문까지, 뉴스와 신문의 사회란은 연일 새로운 소식으로 갱신한다. 좀 더 디테일하게 이야기하자면 사건이 많다는 말보다 악당이 많다는 말이 더 들어맞으리라. 세상에 이렇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니. 세상엔 타인을 때리고, 모욕 주고, 업신여기고, 탈취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미디어는 매일매일 새로운 악당을 전시한다.

 

그런데 악당에 비해 나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다. 이미 사회는 너무 거대해 나 같은 일개 개인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듯하다. 그럴 때 손쉬운 도피처가 바로 댓글이다. 악당들에게 욕을 하고 모욕을 주고 내 마음에 작은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내가 욱한 마음에 댓글이라도 달아서 화풀이해야겠다 싶으면 그 기사의 댓글난은 이미 엉망진창이다.

 

그렇기에 댓글의 주어는 종종 라는 단수가 아니라 우리라는 집단이 된다. 국민, 시민, 독자, 고객, 학생. ‘라는 개인의 목소리는 쉽게 닿지 않으니 나라는 사람을 비대하게 부풀려 허세를 부려야만 한다. 나는 그저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는 배달원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행위는 쉽게 정의로운 것처럼 포장되곤 한다. 내가 속한 집단이 모두 나쁘다라고 하거나, 내가 속한 집단이 모두 좋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니, 그러한 행위를 나서서 댓글로 다는 것이 얼마나 사명감 충만한 행위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종종 악당이 등장하는 기사에 악플을 다는 것이 마치 정의로운 시민의 의무인 양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런 댓글 달기가 정말로 정의로운 행동일까. 그 누구도 기사의 악플이 상대에게 제대로 닿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단지 그럴지도 모른다며 자신을 속일 뿐이다. 기사 속 사건이나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다. 단지 너도 이 글을 보면 화나지? 나도 화나. 그러니까 서로 악플을 쓰면서 우리가 같은 정서를 갖고 있다고 확인하자’. 같은 댓글러들의 사회적 행위만 허무하게 남을 뿐.

 

그래서 사회가 바뀌는가? 그렇지 않다.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픈,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확인만 무한하다. 댓글은 사건을 마주한 직후 즉시 일어나는 원초적 감정이다. 슬픈 기사를 보면 누구나 동물적으로 슬퍼하고, 기쁜 기사를 보면 누구나 동물적으로 기뻐한다. 때로는 기사가 아니라 키워드 몇 개가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본문을 보지 않고 다는 댓글들도 허다하니, 그야말로 감정의 쓰레기통이 될 뿐이다.

 

세상에는 왜 이리 댓글 달 일이 많은지. 오늘도 수많은 뉴스들이 내 피드를 가득 채운다. 어떤 사람의 거짓말은 또 화가 나고, 어떤 집단의 정치적 수사는 또 화가 나고, 어떤 살인자의 뻔뻔스러움은 또 화가 나고. 울화통 터지는 세상 속에서 할 수 있는 게 고작 댓글밖에 없다니. 댓글 넘치는 사회 속, 댓글 숫자와 정비례한 허무감만 쌓인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경향 2020.09.09.

 

파업아닌 불법의료거부 행위

지난 94일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가 합의를 했다. 코로나19로 국민 모두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시점에서 국회의 중재로 파국(?)은 막은 듯하다. 그러나 그간의 과정을 지켜본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몇 가지 느낀 바가 있다. 대부분 부유한 중상류층에서 성장하고, 사교육을 통해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졸업 후 수련과정을 거치는 전공의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확인한 것이다.

 

첫째, 대한민국 전공의 약 16000명에게 묻고 싶다. 의사의 직업적 소명의식은 무엇인가.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했고, 우리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되는 시점에서 병원 밖으로 나가야 할 명분은 무엇인가. 전공의 집단이 제기한 정부 정책이 미흡하고, 소통 부족이나 보완이 필요한 것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의대 증원 및 공공의대 신설 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비 의료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편이기도 하다. 특히 의료시스템의 인적·물적 자원 확충과 제도개선은 의료공공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방향이다.

 

둘째, 전공의 집단휴진은 불법 의료거부 행위. 초기 의사협회와 일부 언론들은 ‘20년 만의 파업’, ‘전공의 파업 시작등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파업 주체는 노동조합만이 가능하다. 파업도 절차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조합원 찬반투표와 노동위원회 조정·중재 과정을 거쳐야 파업이 가능하다. 현행 법률은 환자의 생명·안전을 위해 응급실과 중환자실에는 파업에도 필수인력을 남겨두도록 하고 있다. 전공의 단체는 노동조합이 아니다. 그러니 파업도 아니고, 업무개시명령에도 복귀하지 않았으니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전공의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공정성 아닌가.

 

셋째, 병원의 방임과 의대 교수들의 전공의 지지는 동료애인가. 진료거부 행위에 전임의 동참, 의대 교수 지지 그리고 의대생의 국가시험 거부 행태는 어떻게 봐야 하나. 과거 로스쿨 도입 당시 법대 교수와 법대생 그리고 변협까지 똘똘 뭉친 모습과 흡사하다. 솔직해지자. 두 집단 모두 노동시장의 공급 확대로 생길 수 있는 경제적 불이익 때문 아니던가. 한 학자는 이를 두고 사회적 지위가 공고한 집단 이기주의를 내세워 국가는 물론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들이댄 것이라고 표현했다. 직종별 노동시장이 완고히 형성된 의사집단의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전공의들이 떠난 자리는 병원노동자들이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주위 몇몇 간호사 선생님들께 여쭈어보니 감염병실에서 3개월 일하다 보면 정신적 스트레스와 고통이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고 한다. 초기에는 인공호흡기 작동 방법부터 익혀야 하는 곳도 있었다. 코로나19 시기 의료현장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병원노동자들에게 우리 사회는 고마움의 표시를 해야 한다. 고마움은 제도적 개선부터 구체적인 지원까지 정부의 몫이다. 특히 공공병원의 투자와 확대는 메르스와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더 절실함이 확인되었다

 

최근 독일은 의대 입학 정원의 50% 확대를 발표했다. 게다가 매년 의대 졸업생의 10%가 지방에서 일하도록 하는 농촌지역 의사 할당제를 주마다 확대하고 있다. 아마도 코로나19 경험이 반면교사가 된 듯하다. 우리는 어떠한가. 또다시 집단휴진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회적 약자와 불평등에는 관심조차 없고, 자기네 기득권만을 지키려는 전교 1의 행태에 우리 사회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김종진 유니온센터 이사장·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한겨레 2020.09.09.

 

의술에 앞서 민주주의부터 배워라

의사단체들의 집단휴진, 법적으로는 불법 진료거부(의료법 59)가 일단락됐다. 수술과 진료 연기로 큰 고통을 겪은 환자들이 뒤늦게나마 치료를 받고 국민들도 불안감을 덜 수 있게 돼 다행이다. 그럼에도 이번 집단휴진 과정에서 의사단체들이 보여준 상식 이하의 행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건 국민의 당연한 권리다. 이번 4대 의료정책(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한방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비대면 진료 육성)에 대해 의사단체뿐 아니라 시민단체와 노동계도 이유는 다르지만 비판했다. 문제는 의사단체들의 행태다. 오만, 독선, 아집, 무책임, 몰염치 등등.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만 일컫는 게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때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 제1 원칙은 대화와 타협이다. 토론을 통해 차이를 확인하고 상호 양보를 통해 절충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힘으로 밀어붙여 자신의 이해를 100% 관철하려 할 때 민주주의는 설 땅을 잃게 된다

 

정부는 의사단체들이 집단휴진을 예고하자 지난달 5일 협의체를 만들어 요구 사항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사실은 이에 앞서 대한의사협회(의협)가 먼저 제안을 했다. 그런데도 의사단체들은 협의체 참여를 거부한 채 4대 의료정책의 전면 철회를 요구하며 집단휴진을 강행했다. 정부가 공식 발표한 정책을 논의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철회하라니,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비민주적 의사결정 행태는 의사단체 내부에서도 드러났다. 의협의 산하단체인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의협이 정부·국회와 협의해 가져온 합의안을 번번이 뒤엎었다. 특히 지난달 30일엔 집단휴진 연장을 부결한 1차 투표 결과를 뒤집으면서까지 판을 깼다. 전권을 위임받은 최대집 의협 회장이 지난 4일 정부와 합의한 최종안에 대해서도 강경파들은 독단적 행동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민주주의는 소수의견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다수결 원칙에 승복해야 한다. 하지만 의사단체들은 소수의견은 무시하고 다수결 원칙은 부정했다.

 

민주주의는 행동에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의사단체들은 책임엔 눈감은 채 권리만 내세웠다. 집단휴진으로 환자들이 큰 고통을 겪을 것을 알면서도 의료 현장을 떠났다. 애초 의사단체들은 응급실과 중환자실 등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업무는 제외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그 결과 응급환자가 진료 인력이 있는 응급실을 찾지 못해 목숨을 잃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그런데도 의사단체들은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없다.

민주주의는 상호존중의 바탕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의사단체들은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 매진한 의사성적은 한참 모자르지만(‘모자라지만의 오기)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중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물었다. 오만의 극치다. 세상에는 전교 1등은커녕 반에서 1등 한번 못 해본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윤리를 지켜가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다만 의사만큼 돈을 벌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도 의사단체들은 시험 성적으로 사람을 가르는 천박한 인식을 드러냈다.

 

의사단체들은 집단휴진을 합리화하려고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렸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언론이 팩트체크를 통해 가짜뉴스라는 사실을 밝힌 뒤에도 퍼날랐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의대 커리큘럼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의대에서 의술 말고 무엇을 배우는지 모른다. 하지만 의대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의사 국가시험 문제를 정부가 어떻게 처리할지 국민들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의사단체들은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의대생들을 구제해주지 않으면 다시 집단휴진에 들어갈 것이라고 협박한다. 의대생들이 시험을 거부하는 마당에 정부가 알아서 기회를 주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의사단체들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의대생들이 먼저 시험 거부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재시험의 기회를 요청하기 전에 정부가 손을 내밀어선 안 된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엘리트들이 공동체의 기본 원칙을 허무는 일을 일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안재승 논설위원실장 한겨레 2020.09.09.

 

피플파워와 초엘리트들

문재인 대통령은 피플파워라고 했지만 이 정권의 성격은 엘리트주의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소수 지배계층에 속한 사람들끼리 통용할 논리를 당연한 것처럼 얘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느 여당 출신 인사의 조국 전 장관은 대한민국의 초엘리트라는 말도 이 점을 드러낸다. 특정인이 엘리트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엘리트니까 그럴 수 있다는 걸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보수야당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사진)의 아들 문제를 두고 2의 조국 사태라고 하는데, 물론 법적 기준으로 보면 두 사안은 완전히 다르다. 추미애 장관 사건에는 사학재단을 운영하는 집안도, 56억원에 이르는 재산도, 금융사기꾼에 가까운 5촌 조카도 없다. 그러나 앞서 초엘리트란 기준으로 본다면 비슷한 느낌도 있다. 군에서 발생한 문제 해결을 위해 부모의 부하 직원을 동원할 수 있는 군인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실체는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국민의힘이 며칠에 걸쳐 떠들썩하게 공개한 녹취록이란 것에 등장하는 군 관계자들은 모호한 말을 하거나 상황을 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일부 여당 관계자가 추미애 장관 아들의 편의를 목적으로 활발히 움직인 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추미애 장관은 신속한 검찰 수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라는 특수성과 검찰이 8개월 동안 사실상 수사를 뭉개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임검사는 아니더라도 수사에 독립성을 기할 수 있는 실질적 조처가 필요하다. 이게 선제로, 또 적극적으로 돼야 의문을 갖는 여론을 안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엄호에 나선 여당 의원 일부의 주장은 사태를 악화하고 있다. 보좌관의 전화는 청탁이 아니라 문의라면서 식당에서 김치찌개 빨리 달라고 한 것과 같다는 발언도 나왔는데, 군대는 식당이 아니다. 카투사 자체가 편한 군대라 휴가 논란은 별 의미가 없다는 우상호 의원의 주장은 엘리트니까 그럴 수 있다는 얘기와 비슷한 뉘앙스로 다가온다.

 

엘리트의 대중 지배는 합의된 통치 방식을 대중이 수용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의혹이 제기되면 물의를 일으킨 것에 일단 사과하고 수사에 적극적으로 임해 명예회복의 길을 찾겠다고 하는 것도 이런 행태의 하나다. 그러나 여당 의원들의 태도는 이런 합의가 무너졌다는 걸 보여준다. 합의된 통치가 아니라 양대 엘리트 파벌의 아귀다툼에 모든 사회적 자원이 동원되는 것이다.

 

청와대 국민소통수석 출신 윤영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카카오 너무하군요. 들어오라고 하셍이란 메시지도 이런 사례다. 윤 의원은 2015년 네이버 임원 신분으로 국회에 나왔을 때는 포털 사이트 기사 배치에 대한 정치권의 압박은 언론 자유 위축이라고 했다. 2015년과 2020년의 윤영찬을 하나의 일관성으로 이해하려면 파벌을 기준으로 하는 수밖엔 없다.

 

이런 사건은 개혁이란 명분이 대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만 쓰이는 현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바람직한 것은 그 반대, 즉 개혁하기 위한 대립이다. 이걸 위해선 개혁을 위해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 다 가질 순 없다. 정치적 책임이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포기할지 정하는 게 본질이다. 여당 사람들은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김민하 칼럼니스트 한겨레21 2020-09-11

 

2020의사라는 전문직

지난 814일 정부의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안에 반발해 들어간 총파업이 94일 대한의사협회와 보건복지부의 합의, 그리고 이에 반발하던 전공의들이 97일 업무 복귀를 결정함으로써 한 고비를 넘겼다.

 

이번 파업 사태는 의사들의 이해관계 관철이라는 표면적 요구보다 한국 사회에서 전문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의사, 법률가, 학자 등 전문직은 사람의 생명, 법적 처벌, 정확한 정보와 해설의 전달 등 업무 특성으로 일정 수준 자격을 취득하고 엄격한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이러한 자격과 책임은 전문직이 외부 간섭이 없이 자신의 판단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권리에 따르는 조건이다. 그러나 전문직에 대한 사회적 인정은 늘 안정적이지 않다.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와 동료들은 전문직 형성과 변화에 네 가지 요건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첫째 과학이나 기술 등 다른 분야 변화에 영향을 받아 직업 영역이 재구성되거나 해체될 때다. 현미경, 청진기 발명은 이발사와 의사의 구분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었고 유전학의 성장은 새로운 의료 분야를 형성했다.

 

둘째 문화적 가치와 신념의 변화다. 유럽에서는 인간 신체의 해부는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14세기까지 금지돼 왔다. 전문직은 당대의 가치 체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지 또 어떤 분야가 유행하는지에 따라 성장과 정체를 거듭한다.

 

셋째 전문직 지위와 고용 형태에 영향을 주는 대중 요구와 정치적 변화다. 의료계에서는 시기마다 각광받는 분야가 달랐다. 서구에서는 1980년대까지 방사선학이나 마취학에 수요가 높았다. 그러나 이후 가정의학과, 감염학과 같은 분야가 더 중요성을 인정 받아 왔다.

 

더 중요한 것은 전문직 고용 형태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변화다. 과거 한의사와 같이 의사 한 명이 모든 것을 관리하고 결정하는 자율적 영역은 대형 병원 출현으로 위계와 고용관계에 종속되는 대규모 월급직 피고용인으로 채워졌다.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는 영리병원 등장은 의사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이 아니라 이기적 고연봉직으로 인식을 바꾸었다.

 

넷째 전문직 실무 종사자들의 혁신이다. 요즘 예로 든다면 새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백신 개발이 여기에 해당된다.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할 때마다 기존 의료 지식보다 화학, 전자공학 등 타 분야 지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사회에 기여하게 된다. 이러한 창의성은 단지 사회적 인정과 높은 연봉이 아니라 환자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보람, 새로운 지식 발견 기쁨과 같은 내적 동기에 유래한다.

 

지난 한 달 동안의 의료계 파업은 정부의 의료 정책에 대한 반발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료대학 설립 반대는 한국 의료계가 대형병원 중심 노동시장으로 급변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신종 바이러스가 몇 년을 주기로 발생하면서 의사라는 전문직에 사회적 요구가 증가했다.

 

이에 따라 정부와 시민들은 의사 인력 증원을 반드시 필요한 의료서비스 확대로 보았지만, 당사자인 의사들은 이를 노동시장 변화로 받아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문직 실무 종사자 혁신 또한 대형병원을 소유한 기업과 일부 대학, 그리고 의료산업에 투자한 주주라는 이해당사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약을 받아왔다.

 

이런 체제에서 의사는 새로운 백신을 개발했다는 보람 같은 내적 동기보다 관료적 체계 내 성과와 보상에 더 민감하게 된다. 결국 이번 의사 파업은 의료계에 대한 정부의 표면적 인식, 그리고 이제는 전문직의 지위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의사들의 민낯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결국 오늘날 한국에서 의사라는 전문직은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자문하는 정체성의 과제를 안게 됐다. 자신의 직업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사회적 가치와 인정은 어떻게 받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정체성에 대한 측정법 중 하나인 거울 테스트는 한 가지 사례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런던 주재 독일 대사가 축하 의식에서 에드워드 7세에게 매춘부를 제공할 것을 요구받자 직위를 사임한 일이 있었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침에 면도하면서 거울 속에 있는 포주를 보기 싫었을 뿐이요.”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전문위원 mediatoday. 2020.09.12.

 

 

개천의 용들이 세상과 싸우는 법

새벽에 응급실에 앉아 있으면 안다. 그들의 위대함을.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가 도착하고 나면 이내 망연자실한 표정의 가족들이 온다. 그들은 젊은 의사의 몇 마디에 눈물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거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거기에 묵묵히 앉아 있으면, 내가 하는 일의 무용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럴듯하게 꾸며 말하고, 쓰고, 때로는 정책에 개입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터럭 하나라도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만 내가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눈앞의 사람들을 죽이고 살린다. 생명의 위급함 앞에서 그들은 신처럼 위대하다. 그들 앞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처럼 위대한 그들을 내가 병원 밖에서 만났을 때, 의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말했다. “여러분 자식이 그렇게 고생해서 의대를 졸업했는데, 한 달에 1000만원 밖에 못 번다고 하면 여러분은 납득하겠어요? 당연히 2000만원, 3000만원 벌기를 원할 것 아닙니까?” 공공병원 설립에 관한 토론회였다.

 

대학에서 하는 농담으로 흔히 2가지 종류의 교수가 있다고 한다. ‘이상한 교수아주 이상한 교수. 어디서든 떠받들어 주니 자신이 고귀하고 존경스러워서 그런 줄 착각하고, 자기들끼리 잘난 척하는 집단에서 그 착각을 더 키우다가 타인에 대해 공감할 줄 모르고 이상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데, 대체로 정도의 차이만 있지 대동소이하다는 나름의 자평이다. 아주 작은 분야의 지식을 가진 헛똑똑이들, 실은 멍청이들이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다.

 

비단 대학에서만 그럴 리가 없다. 멍청한 교수처럼 멍청한 판사와 검사, 멍청한 엔지니어와 과학자, 멍청한 공무원, 멍청한 정치인, 멍청한 의사가 세상에는 가득하다. 자기 분야에서는 나름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행차한다. 그럴수록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모르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어떤 지위나 자격을 얻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한 사람은 그에 응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보상이 반드시 돈이어야 하고 무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 보상에 일정한 사회적 특권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가끔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아무렇게나 차를 세우고 가는 부모들의 뒤에서 아이들이 멈칫거리는 것을 본다. 십중팔구 커다란 고급차다. 그중 한 부모가 우리는 그래도 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지위를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험을 잘 본다고 해서 생각까지 옳은 것은 아니다

 

개천의 용이라는 말이 언제까지 유용할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요즘 들어 개천에서 난 용들이 개천으로 돌아와 미꾸라지와 피라미, 각시붕어를 남김없이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이 용이 되기 위해 노력한 대가이므로, 공정한 결과라고 말한다. 또한 이것이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개천의 용이라는 패러다임을 장려했던 결과다.

 

현재의 의료체계에서 전공의들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적 대우와 강요된 희생, 구조적 폭력은 심각한 문제다. 대형병원과 교수, 전문의, 개업의들의 목소리만 크게 들리는 세상에서 고난의 시절을 지나 받게 될 대가를 빼앗기게 된다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지방을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의사가 내려오지 않는다고 비난만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자신의 특권을 내세우기보다 더 많은 사회적 연대의 손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 옆에 있는 간호사들은 어떤가? 영원히 전공의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대다수 인문사회 전공 박사들은 어떤가? 헛똑똑이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보고 싶다.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가족이 있다. 학교에서 늘 전교 1등을 하던 상국이는 어느 날 학교 앞에 찾아온 막일하는 아버지를 못 본 척하고 지나친다. 이 광경을 본 엄마가 회초리를 들어 아이를 혼내는데,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달동네 꼭대기에 오른다. ‘공부 잘하는 우리 상국이는 나중에 판사, 의사 될 사람인데, 막일하는 아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비는 아들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런 아비를 상국이는 꼭 안고 놓지 않았다. 나는 상국이가 어떤 의사가 되었을지 종종 생각해 본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향 2020.09.14

 

파일명 추미애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나희덕 시인의 <파일명 서정시> 첫 구절이다. ‘파일명 서정시는 구동독 정보국이 서정시인 라이너 쿤체의 모든 것을 수집한 자료집 이름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서정시인은 불온한 존재이다. 취임과 동시에 불온한정치 환경과 맞닥뜨린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지금 한국 정치가 <파일명 서정시>를 다시 쓴다면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추미애>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이 대표는 관리형이 아닌 미래권력이라는 스포트라이트까지 받았다. 코로나 강점기를 뚫고 미래로 나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낡은 과거로뒷걸음질 치고 있다. 고위공직자 다주택 현황은 여야 모두 중산층 이상의 계급 기반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의료파업·종교집회는 엘리트층의 선민의식을 과시하며 공동체 정신을 무너뜨렸다.

 

이 대표는 교섭단체 대표연설 30분 동안 한국판 뉴딜, 신성장 등 5대 어젠다를 꺼냈다. 스스로 미래권력이라는 지위를 생각했을 테다. 그의 기대와 달리 정치는 과거로 되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대전환의 시대에 과거 방식으로 대응’(미국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하고 있다. 진영·세 대결은 정치권뿐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까지 강화됐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공공의료엔 80~90%가 동의하면서도 문재인 정부라는 단어 하나만 추가하면 응답 비율은 5 5로 갈라진다. 절반 정도는 양측 어디에도 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단순한 정치 불신이나 정부 정책을 지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내 편(지지 정당)의 이익과 상처가 정치적 선택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 중요한 정치 과제가 다른 세력에는 혐오가 되는 것.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특혜 의혹은 이 심각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군대 문제는 역린이다. 지난해 조국 대전은 다른 역린인 교육을 건드렸다. 교육은 부모 입장에선 자식들을 위한 성공 자본이자 욕망의 대물림 영역이다. 군대 문제는 결이 다르다. 부모 세대에겐 집단적 체험을 끄집어내는 악몽이자, 자식 세대에겐 똑같이 고생해야 하는공정의 영역이다. 여성을 2등 인간으로 취급하는 기제인 만큼 여성 문제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다. 군대는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다루는상명하복 문화를 체화하는 곳이다. 군대는 또한, 곳곳에서 폭력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클리셰로 통용되고 있다. 군대의 역린이란 이처럼 모두에게 현재진행형 서사이다.

 

부대 밖에서 휴가 연장 전화를 하고 휴가명령서도 없다. 보좌관이, 혹은 장관 부부가 국방부 민원실로 전화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세상천지에 연줄 하나 없는 사람들은 자식이 어느 부대에 있는지 몰라 속이 타들어갈 때쯤에야 국방부 민원실이란 곳을 알게 될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잡아줄 수 있는 손이 있고 없는 것, 군대는 이 지점에서 계급 문제까지 파고든다.

 

이 엄청난 역린 앞에서 거대 여당은 왜 이렇게 왜소하고 옹졸한가. “병역 미필자는 국민의힘에 더 많다는 말은 176석이나 차지하고도 비주류를 못 벗어났다는 걸 입증한다. 다음엔 불법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주장한다. 시민들은 특혜 아니냐고 의심하는데 법을 앞세운다. 이는 법을 권력의 빅마우스로 삼겠다는 기득권적 태도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시대정신이고 정치는 그 가치를 최대한 반영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의 자세 아닌가. 심지어 당직사병의 실명을 거론하며 단독범’ ‘배후세력을 운운한다. 이 정도면 시민을 상대로 밀리면 안 된다는 스크럼 정치를 선포했다고 봐야 한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정치에 말을 걸고 있는데, 별 볼 일 없이 근근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마저도 힘겨워하는데 집권여당의 울타리는 가시 돋친 철조망을 겹겹이 두르고 있다. 마치 페스트가 창궐했던 14세기 중세 유럽, <데카메론> 귀족들의 위험한도피처 피에솔레처럼

 

6개월 후 이 대표는 얼마나 많은 파일명을 기록할지, 그 파일 안에 어떤 세상을 담을지 모르겠다. 한국판 뉴딜, 신성장 다 좋다. 그러나 당분간 내려놓길 바란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지금은 집권여당 대표가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해야 할 때다. 성난 마음의 뿌리를 돌아봐야 할 때다. 이 대표의 첫 파일명은 <추미애>여야 한다./ 구혜영 정치부장 경향 2020.09.14.

 

개천절 집회는 바람잡이들이 책임지고 막아라

전광훈 일파가 개천절 집회 강행을 예고했다. 경찰이 금지하자 이번에도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겠다고 한다. 거리두기는 2단계로 완화됐지만 하루 확진자는 여전히 100명 안팎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광복절 때처럼 집회를 열겠다는 건 대국민 협박이나 다름없다. 서울시는 10명 이상 집회 금지 조처를 1011일까지 연장했다. 이들은 법원이 금지하면 기자회견 형식을 빌려서라도 밀어붙일 태세다. 광복절 집회 땐 문재인 탄핵을 내세웠으나 이번엔 방역 독재 규탄명분이 추가됐다. 정부가 방역 실패 책임을 교회에 떠넘긴다고 주장한다.

 

이단 취급 받는 신천지 교주도 국민 앞에 사죄하며 무릎을 꿇었지만 퇴원한 전씨는 사과는커녕 재수감 직전까지 순교운운했다. 감염병마저 정치투쟁 소재로 삼더니 결국 그의 지지자들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까지 고발했다. “광화문 집회 참석자들을 감염의 주범으로 조작하는 데 앞장섰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이 하나님만 믿고 이런 국민 밉상짓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간 전씨 일파를 부추겨온 바람잡이들 가운데 제1야당은 일단 꼬리를 내렸다. 광복절 집회를 앞두고 집회 참석은 개인의 자유라던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두 손 모아 부탁드린다며 개천절 집회 연기를 요청했다. 광복절 집회를 3·1 운동에 비유하며 헛발질하긴 했으나 일단 전씨 일파와는 거리두기에 나섰다. 일부 보수언론들도 개천절 집회 취소하고 추석도 언택트 불가피’(<중앙일보> 97일치), ‘코로나 위기에 개천절 서울 도심 집회 안 된다’(<동아일보> 99일치)며 사설로 집회 취소를 요구했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여전히 전씨 일파를 감싸고돈다. 코로나 확산 책임을 전씨 일파대신 정부에 돌린다. 정부가 종교단체 소모임 금지를 해제하고 임시공휴일을 지정하는 바람에 코로나 확산에 씨를 뿌렸다는 것이다. ‘사랑제일교회와 전광훈 목사, 광화문 집회희생양삼아 덤터기 씌우며 적반하장으로 화낸다고 정부를 비난한다. ‘광화문 집회 참가자에게 하듯이 해운대 피서객 인파를 검사하면 확진자가 쏟아졌을 것이란 주장은 광복절 집회 뒤 전씨 일파가 일부 언론에 실었던 가짜뉴스광고 문안을 빼닮았다. 이렇게 방어해주는데 전씨 일파가 개천절 집회를 취소할 이유가 있을까.

 

정부가 소모임 규제를 푼 게 코로나 확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815일 이전까지 100명 안팎이던 확진자가 이후 300~400명 수준까지 폭증한 건 통계로 확인되는 팩트다. 14일까지 사랑제일교회 관련 확진자만 1167, 광화문 집회(서울 도심 집회) 관련자는 579명에 이른다.

 

방역당국은 일상생활방역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고심하며 거리두기 단계를 결정해왔다. 그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판단이 잘못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설사 그런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대놓고 방역 전선을 무너뜨리는 이들의 책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정부의 실책을 지적하더라도 이와 별개로, 코로나 확산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집회를 강행한 책임은 엄중하게 따지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광화문 집회의 코로나 확산 책임엔 의도적으로 침묵해왔다. 전씨 일파에겐 신도 명단 제출하고 당국에 협조하라고 촉구했을 뿐 광화문 집회 자체를 정면으로 비판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들이 억울하게 코로나 확산 주범의 누명을 썼다며 안타까워하는 글이 넘쳐난다. 과거 논조에 비춰 집회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으로 보기는 어렵다. ‘---정부 때리기의도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조선일보는 코로나19 발생 초기부터 그랬다. 확진자가 11명에 불과하던 2월 초부터 방역 참사라며 방역당국을 겨냥했다. 외국 언론들까지 방역의 모범 사례로 칭찬할 때도 시진핑 주석 방한 성사를 위해 국민을 제물로 바쳤다는 등 정부 비난에 골몰했다. 이제는 바이러스 테러하는 이들의 책임까지 감춰주며 옹호에 나선 것이다. 급기야 전씨 일파 같은 극우와 단절하려는 제1야당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지경까지 갔다. 방역에까지 정치 프레임을 씌운 결과다. 언론 논리가 아니라 정치 논리다.

 

이른바 ‘1등 언론을 자처하는 데가 이러니 전씨 일파가 굳이 사죄할 이유가 없다. 개천절·한글날 집회까지 강행하겠다는 것도 이런 뒷배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동안 전씨 일파를 키워준 바람잡이정당·언론들이 개천절 집회를 막아야 한다. 그럴 책임이 있다.

김이택 대기자 rikim@hani.co.kr 한겨레 2020-09-14

 

검찰개혁 물 건너가나

검사는 소추와 공소 유지를 담당하는 당사자로서의 지위 외에도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지위에서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옹호해야 할 의무도 지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에 구현된 검사의 소임을 이렇게 정리했다.(94헌마60결정) 검사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범죄자는 반드시 처벌받도록 해야 하지만, 억울한 사람은 그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죄가 되면 기소하고 죄가 안 되면 그냥 수사를 끝내야 한다. 검사를 공익의 대변자(대표자)라 거창하게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그동안 검찰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공익을 대변하기보다 정치권력과 재벌, 그리고 검찰 조직을 지키는 데 더 힘썼다. ‘봐주기 수사’ ‘표적 수사라는 말이 익숙하고, 진보와 보수 정권 가릴 것 없이 검찰개혁을 주요 국정과제로 삼은 것이 이를 방증한다. 박근혜 정부 말기에 촛불을 든 시민들은 무엇보다 검찰개혁을 먼저 요구했다. 검찰을 검찰답게 만들어 달라는 주권자의 정당한 요구였다. 따라서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가 검찰개혁에 올인하다시피 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현 정부의 검찰개혁은 지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 조국 사태 때 목격했던 검찰과, 지금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관련 수사를 하고 있는 검찰은 같은 정부의 검찰로 보기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평행선상에 위치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평행우주론을 체험하는 것 같다. 100여명의 특수부 검사와 수사관을 투입하고 무려 70여곳을 압수수색한 조국 전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는 검찰권 남용 논란을 낳았다. 당시 수사팀은 사모펀드를 둘러싼 거대한 권력형 범죄인 것처럼 소란을 피웠지만, 지금 남은 것은 입시용 스펙의 진위 여부다. 죄가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리지 않고 탈탈 털다시피 한 결과다. 그렇다고 추 장관 아들 관련 수사를 검찰개혁의 전범으로 볼 수도 없다. 군대 휴가 규정 위반 여부를 따지는 간단한 사건인데도 검찰은 무려 8개월이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이슈로 비화돼 온 나라가 시끄러워지자 지난 13일 추 장관 아들을 소환조사하는 등 뒤늦게 움직이고 있다. 정권의 입맛에 맞게 수사 속도와 결과를 조절하는 모습은 과거 정치검찰의 전매특허였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이 권력 눈치나 살피며 수사를 질질 끄는 검찰을 만들겠다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촛불 시민들은 똑 부러진 수사로 똑 부러진 결과를 내놓는 검찰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죄가 되면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당당하게 수사 결과를 내놓는 검찰을 원했다. 하지만 추 장관이 취임 8개월 동안 4차례 인사를 통해 세팅한 검찰은 이와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쩌면 현 정부의 검찰개혁은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웠는지 모른다. ‘윤석열 사단이 주도한 적폐청산은 무죄추정 원칙과 피의자 방어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수사였다. 수사 대상자를 압박하기 위한 피의사실 공표도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이로 인해 현직 검사를 비롯해 이전 정권에서 잘나갔던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법농단 수사 때는 양승태(전 대법원장) 체제에 순응했다는 이유로 판사 수십명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 갔다. 이들 중 일부는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압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는 잘 드는 칼에 취해 윤 사단의 폭주를 제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요청에 따라 인지부서(특수부) 기능을 더욱 확대했다. 검찰개혁에 역행한 것이다.

 

추 장관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검찰은 정권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으로 또 다른 부작용을 낳고 있다. 추 장관은 검찰개혁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메모를 읽어봤으면 한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불법대선자금 수사 때 청와대 참모들과 여권 인사들의 공격으로부터 검찰을 감쌌다. 자신도 불만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가 남긴 메모에는 그의 검찰개혁 철학이 잘 담겨 있다. “검찰, 지켜주자. 그리고 바로 세우자.”

이춘재 사회부장 한겨레 2020-09-14

 

코로나 vs 부동산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인종, 계급, 젠더를 둘러싼 고정관념이 있다. 물론 흑인, 여성,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편견이 강하고 대개 생물학이 근거로 동원된다. 두 가지로 대응이 가능하다. 하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차이는 개인차일 뿐, 집단 전체를 특징지을 수 있는 동일성은 없다. 또 하나는 현실임을 인정하고 이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여성은 주차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는 그만큼 주변을 살피는 안전한 운전자라는 의미다. 편견(偏見)은 말 그대로 치우친 생각이기에, 다른 치우친 생각으로 제압(?)하면 된다.

 

성별과 수학의 관계를 보자. 수학 과목의 대수 점수에서는 남녀 차이가 별로 없는데, 기하에서는 여학생의 점수가 낮다는 보고가 있다. 융합적 사고는 정보를 가공하는 능력이다. “역시 여성은 수학에 약해라는 통념을 믿지 말고, 이를 새로운 사유의 자원으로 생각해야 한다

 

비슷한 예로, 여성은 노동시장 참여 여부와 관련 없이 집사람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집사람. 여성은 집인가? 사람인가? 혹은 집에만 있는 사람인가? 남성은 아무리 두문불출해도 집사람으로 불리지 않는다. 이는 성별에 따라 똑같이 집을 나가도, ‘도를 닦는 출가위험한 가출로 구별하는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여아는 남아에 비해 곱게키워야 하기 때문에 야외 활동량, 여행, 운전을 통제하는 문화가 있다. ‘적절한 수동성이 바람직한 여성성으로 여겨지는 문화는 여성의 공간 지각력에 영향을 미친다. “지도를 못 보는 여자, 남의 말은 안 듣는 남자는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즉 생물학적 적응의 결과이다.

 

시간에서 공간으로

문제는 드러난 팩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데이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같은 데이터로 다른 결론을 내는 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 융합에 필요한 핵심 요소 중 하나는 관점이다. 관점에 따라 데이터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점은 당파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는 훈련이다.

 

위 이야기는 성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공간(space)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사람에게 적용되고, 그로 인해 사회적 억압이 발생하는가. 공간에 대한 사고방식이 사회를 구성하는 예이다. 공간 개념은 차별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성별에 따른 공간 지각력은 서구 철학에서 공간을 다루어 온 방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플라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그들 사고의 중심 주제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시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했다. 원시 사회-봉건제-자본주의 등 문명의 발전에 따라 서열화된 역사, 역사를 과거의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 “세계 최초 그래서 최고”, “~ 아버지라는 말처럼, 시원(始原)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한 사회의 역사밖에 서술하지 못한다. 세계 200여개국이 동시에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지역마다 삶이 다른데, 하나의 시간을 기준으로 사유하면 문명인, 야만인같은 구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시간 중심의 사고는 하나의 사회(서구)가 기준이 되어 강자 중심의 보편성을 만든다. 나머지 사회는 서구를 따라잡아야 할 역사의 대기실로 간주된다. 타자(the others)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단일한 시간개념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의 패권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다. 이때 선점을 경쟁하는 발전주의는 문명의 원동력인 양 위세를 부린다. 자연은 파괴(정복)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 사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지구의 비명이자 복수이다.

 

이제까지 공간개념은 시간적 진보를 증명하는 도구그 시대 위대한 건축물였다. 공간은 인식론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인간의 인식 대상, 그릇(用器), 미지의 세계 등 인간 생활의 결과물로 간주되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로 지구를 들어 올릴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했지만, 그 이론은 지구 밖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즉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아르키메데스의 예는 체현되지 않는 지식을 생산해 온 백인 남성 중심 사고의 전형이다. <2의 성>만큼 남성의 초월성에의 욕망을 비판한 책도 드물 것이다. 보부아르는 노예와 여성은 노동하는 내재적존재로서 열등하고 지식인 부자 남성은 세상사로부터 벗어난 초월적이고 우월한 존재라는 인식을, ‘만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여성은 평생 일상에 매여 사유와 지식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기껏해야 남성이 상상한 어머니 대지였다. 문학사에서 거의 모든 비유는 젠더, , 자연, 공간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남성의 사유가 투사된 것이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 중심의 인식론을 개척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소련의 멸망 원인 중 하나를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도농 분리, 도시 중심의 국가운영이라고 보았다. 그는 공간이 인간의 사용처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재생산하는 주요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경험하는바, 여행을 다녀오거나 다른 공간을 체험하면 다른 인간이 됨을 이론화한 것이다.

 

집의 크기와 구조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시대다. 지금 한국 사회는 부동산 문제를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집이 교환가치가 된 현실도 기가 막힐 판인데, 재산 증식 수단의 최고 상품이라니. 인간은 공간을 차지하는 주체가 아니다. 우리가 소유와 인권을 분리하는 사회를 지향한다면, 집은 누구에게나 평생 임대 개념의 주거 공간이 되어야 한다. 토지를 임대하고 부를 창출하는 지주(집주인)-소작농(세입자)의 관계는 공간과 노동을 분리시킨다. 경자유전(耕者有田), 토지 소유권은 직접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 집은 사는 곳이지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다.

홈리스에 대한 편견도 공간을 소유해야 시민권을 갖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 때문이다. 홈리스야말로 무소유의 자유인이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운영되는 쉼터가 필요할 뿐이다. 노숙자보다 자기 관리를 못하는, 집에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비대면 공간이 없는 상황

코로나 시대 최대 아이러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반드시 실천해야 하지만 사회의 대안으로서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다. ‘집콕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생활이 아니다. 주거가 불안정한 사람, 가정폭력과 노동으로 집이 지옥인 사람, 종일 보살핌 노동에 지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리적 거리두기인데, 집에서 물리적 거리두기가 가능한가. 거리두기가 공적인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된 것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양육이다.

 

특히 도시의 경우 웬만큼 넓은 평수(최소 11), 동거인들과 사이가 좋고, 가사 분업 잘되는 가구가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집은 집 자체로 좁고, 세간살이 때문에 작다. 누구나 한번쯤 빌딩숲을 지나가다 하는 말이 있다. “세상에 이렇게 건물이 많은데, 내 집 한 칸이 없다니.” 코로나 스트레스는 곧 공간 스트레스다.

 

이 스트레스를 상업화하는 움직임도 빠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인테리어 산업은 호황이고 반려식물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텔레비전의 집 관련 프로그램을 보자. <구해줘 홈즈>, <신박한 정리>, <나 혼자 산다>, <온 앤 오프>, <바퀴 달린 집>, <여름방학>, <나의 판타집>, <홈데렐라>, (무인도에서)<삼시 세끼>, <자연스럽게> 등 다른 집을 경험하는 환상과 욕망의 세계를 보여준다.

 

인간은 지구를 정복했다’. 그러나 자기 한 몸 누일 공간이 없다. 톨스토이의 장편(掌篇) 제목대로,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지금 우리 사회에 집이 부족한가? 아니면 건설회사만 넘치는가? 어느 지역에 사느냐, 어느 동()에 사느냐, 몇 평에 사느냐로 내 인격이 규정되던 시대조차 지났다. 코로나 시대에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갈 곳이 없다. 코로나 시대 부동산 문제는 투기, 교육(학군)을 떠나 생존 이슈다.

 

비대면은 중요하다. 그러나 대면을 피할 공간이 없다. 부동산(不動産),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재산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금을 사는 게 어떨까. 휴대 가능하고 세금도 적고 얼마나 좋은가. 정희진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한겨레 2020-09-15

 

대한문 앞 화단의 씁쓸한 추억

서울시청 광장 맞은편은 덕수궁이다. 덕수궁 정문은 대한문이다. 며칠 전 그 앞으로 지나다 인도 보도블록 위 화단을 보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직도 이 화단이 그대로 있다니. 무심히 지나가는 인파들은 이 화단에 눈을 주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이 화단은 땅 위에 일군 게 아니다. 보도블록 위에 흙을 그대로 덮어서 거기에 꽃들을 심고 서울 중구청에서 열심히 가꾸고 있다

 

이 화단이 생긴 건 20135월이었다. 20124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계속되는 해고자와 그 가족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분향소를 이곳에 경찰의 방해를 뚫고 세웠다. 그때 벌써 22번째 희생자가 나온 뒤였다. 그곳에서 죽음의 행렬을 끊자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졌고, 그 위에 이명박 정권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피해를 당한 제주 강정마을, 용산참사, 밀양 송전탑 희생자들이 모여 함께 살자 농성촌을 꾸렸다. 국가폭력에 피해를 입은 이들이 집결된 상징적인 곳으로 변했다. 박근혜 정권은 이전 정권에서 벌어진 국가폭력-국가범죄를 풀기보다는 분향소와 농성촌을 치워버리는 일에만 골몰했다.

 

중구청이 나서서 농성장이 있던 자리에 화단을 만들었고, 경찰은 그곳에 농성장 재설치를 강력히 제지하고, 어떤 항의행동도 허용하지 않았다. 집회신고도 아예 막아버렸다. 그 후 규탄 집회와 기자회견이 이어졌지만 그때마다 경찰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강제해산을 하거나 체포를 하기 일쑤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쌍용차 노조 지부장과 민변 변호사가 체포되기도 했다. 나는 중구청과 경찰의 행패에 항의하러 화단에 들어가 피켓을 들었다가 5분 만에 끌려나왔다. 5분의 피켓 시위로 150만원의 벌금을 받았다.

 

그런 막무가내식 체포와 진압을 현장에서 지휘했던 사람이 당시 남대문의 아이히만으로 불린 남대문경찰서 경비과장이었다. 그는 걸핏하면 강제해산을 남발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상의 보호조치위험발생 방지도 남발했다. 그는 201312월 압수수색 영장 없이 민주노총 건물을 진입하게 하는 등 곳곳에서 말썽을 일으켰다. 그런 그가 박근혜 정권에서 총경으로 승진해갔다.

 

최근 경찰은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이 정부 들어 지지부진하던 권력기관 개혁 방향이 지난 730일 당··청 협의를 통해 가닥을 잡았고, 그때 협의된 내용이 84경찰법 전면개정법률안’(김영배 의원 대표발의)으로 국회에 발의되었다. 730일 당··청은 국가정보원 개혁과 관련해서는 대외안보정보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내 정보 수집과 대공수사권을 삭제하는 등의 개혁 내용을 확정했다. 지금까지 정치권이나 시민사회에서 논의되었던 내용들이 대체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의 개혁 방향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다.

 

개정 검찰청법은 검찰이 직접 수사하게 되어 있는 6개 범죄(부패·경제·공직자·공직선거·방위산업·대형참사)를 규정했는데, 입법예고된 시행령에서는 마약범죄와 사이버범죄까지 할 수 있도록 범위를 확대했다. 이렇게 검찰이 직접 수사할 수 있는 범위를 늘려버리면 기소와 공소 유지를 검찰이 맡게 한다는 수사권 조정의 취지가 무색해져버린다.

 

경찰개혁과 관련해서는 더욱 문제가 많다. 그간 경찰개혁위원회와 시민사회에서는 수사권 조정에 따라 경찰이 수사 분야에서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고, 국정원의 대공수사권도 넘겨받고 정보 수집 권한도 갖게 되므로 권력을 분산하고, 내외부 권력감시와 견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의견을 내왔다. 자치경찰제 도입 권고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전국의 13만 경찰 조직을 경찰총장이 틀어쥐고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게 문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화된 권한에 비해 이를 감시, 견제하는 장치는 거의 전무하다. 지금의 자문기구인 경찰위원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국가경찰위원회, 그리고 시·도 경찰위원회만 법안에 담겨 있다. 그런데 중대한 치안 상황이 벌어지면 경찰청장은 전국의 경찰을 지휘하면서 개입할 수 있고, 중대한 수사에 대해서도 국가수사본부를 통해 개입할 수 있다. 사실상 인사권도 경찰청장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자치경찰제 도입 취지가 실종되어버렸다.

 

그래서 경찰개혁을 위해 노력해온 인권단체들은 지난 3년여간의 경찰개혁 논의 과정을 거치며 정부·여당이 내놓은 경찰개혁안은 앞으로 정말 잘할 테니 믿어달라는 것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평가하고, “‘민주적 통제경찰 권한 분산과 축소를 이룰 수 있는 경찰개혁법안을 다시 발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 정권에 들어와 진행해온 권력기관 개혁을 셀프개혁으로 맡겨놓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권력기관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몸부림 앞에서 이 정권에 요구되었던 적폐청산은 흐지부지되어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부터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까지 광범위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경찰이 시민의 감시와 통제를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일까? 언제고 경찰을 통한 권력 유지를 원하는 정권이 들어선다면 남대문의 아이히만은 곳곳에서 출몰할 것이다. 다시 경찰개혁이 국정과제로 등장하는 나쁜 상황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부와 정치권은 이제라도 시민사회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금도 덕수궁 대한문 앞 화단에는 꽃이 피어나고 있을까? 저 화단부터 치웠으면 좋겠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경향 2020-09-15

 

원격수업의 민낯

아이는 지금도 아침마다 컴퓨터를 켠다. 이젠 익숙하다 못해, 마지못해 먹어야 하는 약을 삼키듯 무미건조하게 화상회의 플랫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누른다. 학부모들 요구로 2학기 개학 후 1교시는 선생님과 쌍방향 수업을 하지만, 교실에서보다 집중력과 학습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며칠 전 영어수업 때였다. 영어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정규과목에 포함된다. 올해 초3인 아이는 지난해부터 영어학원을 다녔지만, 우리 동네의 경우 교과서로 영어를 처음 접한 아이들도 꽤 많다. 그러나 수업은 아이들의 학습수준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뤄지고 있었다.

 

가령 교과서에 그려진 고양이를 보고 이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영어로 물으면 아이들은 이것은 고양이입니다를 완성된 영어 문장으로 답해야 했다. 1학기 때 영상을 보고 알파벳과 영단어를 공책에 받아쓰는 과정은 있었지만, 주어와 동사를 갖춘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선생님이 한 아이를 지목했다. 학습속도가 더뎌 1학년 때부터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던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 소리는 전체 음소거 돼 누가 대신 답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아이는 잠깐 머뭇거리다, 비디오를 끄고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답을 하는 대신 자신의 존재를 감춰버린 것이다.

 

수업진도를 곧잘 따라가던 아이들도 공부에 흥미를 잃기는 마찬가지다. 30~40분 쌍방향 수업이 끝나면 나머지는 EBS 온라인 클래스에 올라온 영상을 봐야 하는데, 아이는 수업 영상을 보기 전 꼭 몇 분 길이인지를 확인한다. 3~4분짜리에는 환호하고, 15분 넘어가는 영상에는 한숨부터 쉰다. 수학시간이었다. 영상 속 선생님이 ‘481 곱하기 2는 몇일까요라고 묻더니 몇 초 뒤 ‘962라고 답을 알려줬다. 아이는 화면을 보고 있다 교과서에 답을 받아적기 바빴다. 풀이과정을 배우기보다 답을 채우는 법부터 익힌 것이다. 한 지인은 아이들이 영상 자료에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주의집중력이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유치원도 원격수업을 하는 세상이다. 간혹 영상을 통해서라도 아이들과 교감하며 쌍방향 수업을 하는 유치원도 있지만, 대개는 간단한 학습 꾸러미를 제공하거나 동화구연 등의 동영상 링크만 공유한다. 그런데도 수십만원에 달하는 유치원비를 모두 내야 한다. 휴원에 따른 원격수업도 엄연한 수업이라는 논리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하나 마나 한 원격수업에 비해 유치원비가 과도하다고 하소연한다. 부실한 원격수업과 환불 요구, 지난 1학기 대학 등록금 반환 운동과 겹쳐지는 장면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비대면 원격수업은 거스를 수 없는 교육 방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학력격차와 학습공백을 마주하고 있다. 일부 유치원과 대학, 학원 등은 원격수업을 교육보다 교육비 징수를 위한 수단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코로나19로 등교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지 7개월이 흘렀다. 교육부는 아직도 이 모든 것을 초유의 사태이기 때문에,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라고 계속 이야기만 할 것인가.

이성희 정책사회부 차장 경향 2020-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