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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9.16~9.29 음모론의 시대

by 이성근 2020. 9. 29.

 

 

이재명 현상', 진보정치가 마땅히 채웠어야 할 공백의 다른 이름 프레시안 2020. 9.16

불법여부보다 중요한 것 한겨레 2020. 9.16

광장의 도시와 길의 도시/ 아파트 단상 경향 2020. 9.17

내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 한겨레 2020. 9.17

원전 사고를 막으려면 경향 2020. 9.17

되돌아본 덩샤오핑의 지혜 경향 2020. 9.18

역병, 우리의 거울 경향 2020. 9.18

코로나19, 네 가지 방역을 생각한다 경향 2020.09.22

 

가난 물려받은 싼허청년경향 2020.09.22.

이 또한 공정한가 경향 2020.09.22.

자본주의 만세 한겨레 2020-09-23

코로나19 재앙을 축복으로 만들 조건 경향 2020-09-24

대지를 살리고 떠난 아프리카의 여성 한겨레 2020 9.24

왜 이성은 감정을 이기지 못할까 한겨레 2020 9.13

코로나 시대, 신은 어디에 있을까 경향 2020-09-26

 

한국은 가난하다 시사인 2020.9.26.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한겨레 2020-09-29

음모론의 시대 경향 2020-09-29

 

 

'이재명 현상', 진보정치가 마땅히 채웠어야 할 공백의 다른 이름

'이재명'이란 거울에 진보정당을 비춰봐야 할 때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주자 경쟁이 급속도로 이낙연 대표 대 이재명 경기도지사 구도로 정리되고 있다. 이재명 지사는 2017년 조기대선을 앞둔 당 내 후보 경선에서 이미 일정한 바람을 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2018년 지방선거 이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면서 한 동안 대선 주자 경쟁에서 밀려난 듯 보이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감안하면, 현재 이낙연 대표를 어떤 면에서 압도하기까지 하는 그의 약진은 분명 놀라운 데가 있다.

 

작금의 코로나19 대유행 정국이 이재명 지사가 스스로를 부각시키는 절호의 기회가 됐음은 틀림없다. 대유행 상황에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워낙 몰상식한 행보를 계속하는 바람에 정부-여당이 한껏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지만, 이재명 지사는 소속 정당과 달리 여기에서 성큼 더 나아갔다. 그는 항상 중앙정부보다 몇 걸음 먼저, 역병의 창궐에 의연하게 맞서는 행정 책임자의 모습을 보였으며, 정책 논쟁에도 뛰어들어 긴급 재난지원금 지급 같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조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이재명 지사의 이런 행보에서 많은 이들이 재난 시대에 '비상사령관'에게 요구됨직한 자질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이 대선 주자로서 그의 지지율이 상당히 탄탄하게 상승하는 주된 이유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우리는 이재명 바람이 그냥 단명하고 말 현상은 아니라고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2022년 대선의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이재명이 될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다.

 

그런데 내가 이재명 지사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점점 더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른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이렇게 부상할수록 이는 마치 그 동전 반대 면과 같은 또 다른 현실을 아프게 드러낸다. 그것은 이재명 지사에게 늘 한 걸음 이상 뒤처지곤 하는 또 다른 세력, 진보정당의 문제다. 지금 '이재명'은 어쩌면 진보정당이 마땅히 채워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공백들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이재명 현상'을 낳은 대중 정치가 이재명의 미덕

이재명 지사의 행보 가운데는 아주 위험해 보이거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구석도 적지 않다. 가령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의 원흉으로 지목받은 종교 집단에 대한 신속한 고발이나 행정 조치는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과단성 있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를 위해 '소수'의 인권쯤은 쉽게 무시할 수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의 내부 역학을 고려해서인지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태나 추미애 현 장관 논란에 대해 '충당파'스러운 발언만 내놓는 것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재명 지사가 한 사람의 대중 정치가로서 보여주는 미덕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러한 한계나 단점을 압도한다. 그는 '촛불 정부'라 자임한 현 정부-여당이 그러한 선언과 멀어져 거리를 둘수록 그 간극을 메꾸는 대안으로 자신을 부각시켰다. 정부-여당이 사회 개혁을 포기하고 이와 반대되는 길을 갈수록 그는 그렇게 버려진 목소리들의 대변자로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과거 한국 리버럴정당들과 달리 이른바 '내부 진보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 진보정당이나 사회운동에 몸 담았던 국회의원들은 있어도 그들이 당의 왼쪽 지대를 넓힐 정도로 당 내 주류와 구별되는 독자 정치를 펼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한 사람이 그 몫을 통째로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지사다.

 

실은 이재명 지사가 메꾼 그 빈 공간은 진보정당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어야 할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보정당보다 먼저, 더 효과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의 대권 주자 이재명이 이를 도약대 삼아 멀찍이 앞서 나가고 있다.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재명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있고 진보정당에게는 무엇이 없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나는 이재명식 정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한다.

 

첫째, 이재명 지사는 나름 체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비전을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자기 확신도 투철하다.

 

얼핏 보면 이재명 지사와 '이념'이란 말은 인연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스스로도 그런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이념'이란 말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들을 걷어내고 이를 한국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려는 일관된 비전이라 이해한다면, 이재명이야말로 현재 한국 정치에서 이념이 가장 뚜렷한 인물이라 할 수도 있다.

 

기본소득에서 기본주택으로 이어지고 다시 기본대출로 변주된 정책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재명 지사는 오래 전부터 기본소득의 열렬한 지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기본소득을 깊이 있게 다룬 저작의 번역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단순히 이를 정치적 상품으로 활용해보려는 수준이 아니다. 그런 수준에 머물렀다면, 코로나19 사태가 닥치자마자 기본소득을 재난기본소득으로 변주해 때맞춰 제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난기본소득 제안을 어떻게 평가하든, 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상당한 이해도와 확신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정치 행위였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자 내놓은 기본주택 방안도 마찬가지다. 상당히 완성도가 높으면서 한국의 진보적 주거 대안에 자주 빠져 있던 부분(중산층 혹은 잠재 중산층에게 매력을 지닌 공공주택 형태)을 제대로 포착한 방안이 역시 시의 적절하게 제시됐다. 이는 이재명식 정치의 밑바탕에 '기본'이라는 공통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재편하려는 비전이 자리함을 보여준다. 물론 이게 기본대출 같은 좀 설익은 변주로 나타나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도 하지만 말이다.

 

둘째, 이재명 지사는 자신이 누구를 지지 기반으로 삼아야 하며 이들에게 호소하려면 어떤 정치를 펼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재명 지사는 지지 기반 측면에서 다른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이 주로 중산층에게 호소하면서, 특히 상위 중산층의 이익과 관심의 테두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데 반해 그는 중산층 이외의 계층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한다. 중산층보다 아래에 있는 계층, 가령 생산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청년 구직자 등에게 다가간다. 실제로 이재명 지사의 열렬한 지지자 가운데에는 이런 계층이 많다. 이런 전략은 '10대 고학생 노동자'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과 맞물리며 한국 정치에서 처음 보는 독특한 흐름을 탄생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재명 지사가 단지 중산층 '아래'의 계층에게 주목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적극 지지층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서민이 체감하는 여러 문제들의 병목 지점이 어디인지 노련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 지점들을 건드리는 정책과 담론, 전략을 영리하게 구사한다. 기본대출이라는 의문스러운 정책도, 이 정책 자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문제가 실제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함을 잘 알고 있기에 나온 것이다. 아무튼 이런 노력을 통해 이재명식 정치는 중산층을 놓고 경쟁하느라 여념이 없는 양대 정당 주류 정치와는 다른 흐름을 가시화하는 데 일정하게 성공했다.

 

셋째, 이재명 지사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행동할 줄 안다.

정치의 팔, 구 할은 타이밍이다. 정치가의 최대 자질은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할 줄 아는 것이다. 논의해야 할 때가 있고, 행동에 나서야 할 때가 있다. 이재명 지사는 대중적 논의가 필요한 때에는 이를 주도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할 때에는 제일 먼저 몸을 움직인다.

 

가장 극명한 사례는 지난 820일의 광경이었다. 누가 봐도 2차 대유행이 시작된 상황에서 아직 정부가 미처 움직이지 않을 때에 경기도지사가 이를 '쓰나미'라 규정하며 다시 한 번 '비상사령관'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이 언급 하나만으로 이날 하루 정국의 주도자가 결정됐다. 그는 대통령도 아니고 어느 정당 대표도 아닌 경기도지사였다.

 

이재명이라는 거울에 비춰본 진보정당의 미래 리더십

지금까지 말한 이재명식 정치의 강점은 고스란히 현재 진보정당의 뼈아픈 약점이다. 그렇기에 자칭 '촛불 정부'와 사회 개혁 민심이 어긋나고 둘의 간극이 커짐에도 이를 넘어서려는 의지가 우선은 진보정당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내의 이단적 흐름, 이재명 지사의 정치로 쏠리고 있는 것이다. , 이재명의 정치는 진보정당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마련해야 할 리더십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에 다름 아니다.

 

가령 진보정당은 이념을 더욱더 고민하고 정제해야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 이념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념이란 곧 비전이다.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대출을 꿰뚫는 것과 같은 철학(세계관)이고 준비된 방법론이다.

 

이재명 같은 리버럴정당 소속 정치인이 기본소득을 자신 있게 제시하고 나서는데, 진보정당이 진보 지식인들의 논쟁만 바라보며 "계속 고민 중"이라 둘러댈 수는 없다. 기본자산이든 전국민고용보험이든 자신의 제안을 과감히 내세우며 그와 어울리는 종합적인 대안 사회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진보정당은 1차 지지층으로 삼으려는 계급-계층을 분명히 하고, 이들과 한 몸이 되어가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 예들 들어, 이미 널리 알려진 '6411번 버스'라는 비유가 있다. 서울 구로에서 강남으로 가는 이 버스를 타고 매일 새벽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보정당이 지향하는 이 기본 지지층은 이재명 지사의 경우와 크게 겹친다.

 

하지만 진보정당에 부족한 것은 '6411' 사람들을 정치화하려는 노력이다. '6411' 사람들은 누구와 적대하는가? 이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기존 질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물음의 답을 선명히 지목할 때에 '6411' 사람들은 비로소 휴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아니라 정치의 주역이 된다. 진보정당은 바로 이들의 시각으로 연금이든 주거든 다양한 쟁점에 대해 기존 관성을 넘어서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보정당은 이제 몸이 좀 더 가벼워져야 한다. 국회 의석이 고작 몇 석밖에 안 되는 진보정당은 여당 소속 경기도지사에 비해 자원이 극히 제약돼 있다. 이런 형편에 국회에서 폼만 잡고 있을 수는 없다. 삶의 현장 어디든 찾아다니며 자기 정치의 무대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꼭 누추한 일만은 아니다. 앞으로 기후 재난에 맞서는 생태 전환을 진보정당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놓고 활동하려면, 이쪽이 훨씬 더 어울리는 선택일지 모른다. 주류 정치 세력 모두가 마치 '정치' 의제가 아닌 듯 취급하는 문제를 부여잡고 정치를 하자면, 정치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까지 바꿔야 하니 말이다. 여의도 정치를 넘어서야 할 뿐만 아니라 경기도지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대중 정치'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마침 당직 선거를 치르고 있는 정의당에서 여러 후보들이 비슷한 문제의식과 해법을 내놓고 있어 반갑다. 가령 정의당 대표단 후보들의 첫 번째 유세에서 김종철 후보는 "앞으로 정의당은 보수화한 민주당과의 싸움이 아니라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의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불평등을 깨기 위해 소득세 최고세율을 50% 이상으로 올리도록 하는 등 정의당이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보수화한 민주당 아닌 이재명과 싸움 준비", 정의당 대표 유세', <연합뉴스> 2020. 9. 12).

 

이런 목소리가 진보정당의 새 길을 여는 포문이 되길 바란다. 이재명식 정치와 대등하게 경쟁하며 이를 타고 넘는 진보정당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래서 한국 정치 전체의 스펙트럼을 지금보다 훨씬 더 넓히는 결과를 낳길 바란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이 커다란 위기의 시기에 정치를 통해 더 많은 생존과 지속, 자유의 가능성을 잡아챌 수 있을 것이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0. 9.16

 

불법여부보다 중요한 것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 복무 관련 의혹을 둘러싼 공방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지금까지만으로도 씁쓸한 구석이 많다.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의 마음을 토로한 추 장관 심경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사안의 성격상 그렇게만 보긴 쉽지 않다. 이 사건은 불법 여부는 물론 공정의 문제, 고위 공직자의 처신, 정당의 미숙한 대응 등 곱씹어볼 대목이 여럿 있다.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현재로선 추 장관이 직접 관련된 위법 사실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추 장관 아들의 병가 연장 의혹은 당시 추 장관 보좌관이 상급 부대 장교와 통화한 대목의 위법성 여부가 초점이 될 듯하다. 또 아들의 자대 배치나 평창올림픽 파견 선발 과정에서 추 장관 쪽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법 적용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보수 야당이 마치 이 사건을 두고 군과 검찰, 정부 여당이 총체적으로 짜맞춰 부정을 감추고 있다는 식의 공세를 펴는 건 온당치 않다. 권력에 대한 의혹 제기는 필요하지만 사안의 성격을 엄밀히 따져야 한다. 이번 건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건의 재판이란 주장도 침소봉대다. 폭발성이 적다고 하긴 어렵지만 훨씬 간단하고 명료한 사건이다.

 

문제는 침착하게 해결하면 될 일을 미숙한 대응으로 외려 키운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간 추 장관과 여당은 야당의 의혹 제기에 맞서 합법, 불법 여부에만 매달리다가 사건의 민감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같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6“‘불법이다, 아니다이렇게만 바라보는데, 국민에게 죄송스럽다. 교육과 병역은 국민의 관심사이고 역린인 만큼 예민하게 다루고 낮은 자세로 처리해야 한다고 말한 건 매우 적절하다. 박 의원 시각으로 이 사건을 돌아보면 짚어볼 대목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추 장관이 군에 간 아들 문제를 놓고 제1야당 대표, 집권당 대표로서 적절하게 행동했는지 여부다. 또 사건이 불거진 이후 장관으로서 제대로 처신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추 장관 아들은 201611월 카투사로 입대했고, 20188월 제대했다. 문제의 병가 논란이 불거진 때는 20176월이고, 평창올림픽 통역병 파견 논란이 빚어진 때는 넉달 뒤인 그해 10월이다. 둘 다 추 장관이 여당 대표로 있던 때다. 용산 자대 배치 논란은 신병 훈련 무렵으로 야당 대표 시절이다.

이들 시기는 모두 촛불이 한창 타오르거나 적폐청산이 강력히 진행되던 때다. 공정의 문제가 화두가 됐다. 정치 지도자라면 이 문제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했던 때다. 추 장관은 아들을 용산으로 배치해 달라거나, 평창에 파견해 달라는 민원이나 청탁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반면 해당 부대 책임자는 다수 있었다고 한다. 만일 추 장관 쪽에서 어떤 형태로든 청탁이 있었다면 시대의 화두인 공정과는 배치되는 일이다.

 

무릎 수술에 따른 병가 연장 문제도 마찬가지다. 휴가를 연장하는 과정에서 보좌관이 개입했다면 군 입장에선 그를 추 장관의 대리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설사 추 장관이 여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추 장관이 아들에게 엄마 찬스를 제공하려 했다는, 이른바 갑질 논란을 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더욱 문제 되는 건 추 장관을 비롯한 일부 여당 인사들의 일반 정서와는 동떨어진 언행이다. 추 장관은 소설 쓰시네라는 거친 말로 논란을 증폭시켰고, 여당 의원들은 카투사는 편한 군대” “국민의힘에 군대 안 간 사람이 더 많다” “제보 사병은 단독범이라는 등의 막말로 국민 정서를 자극했다. 추 장관 아들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한 여당 대변인의 궤변은 낯뜨거울 지경이다.

 

이처럼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식의 생경하고 뻣뻣한 대응은 자칫 진보의 오만이나 독선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거친 대응은 일시적으로 지지자들을 불러모아 위기 국면을 벗어나는 수단이 될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국민들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다.

지난 주말 추 장관이 페이스북 글에 기필코 검찰개혁을 완성하겠다고 적은 대목도 논란거리다. 추 장관은 검찰개혁을 흔들려는 악의적인 의혹 제기에 쐐기를 박겠다는 뜻이겠지만, 자칫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자신에게 쏠린 의혹을 피해 가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국민들은 첨예한 이슈에 대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사안의 성격과 무게를 감지한다. 모든 사안을 불법과 합법으로만 볼 수는 없다. 불법 여부 못지않게 소중히 여겨야 할 기준과 가치가 있기 마련이다. / 백기철편집인 한겨레 2020. 9.16

 

광장의 도시와 길의 도시

 

생활공간으로서 활기찬 골목길을 주택 내부로 확장하는 산새마을 두레주택 계획안

 

눈부신 고대 그리스 문명은 아고라에서 시작되었고, 로마제국의 중심은 포로로마노의 도시 광장이었다. 광장의 발상지인 유럽은 광장의 역사가 곧 도시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그것은 문화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자 소통의 장소로 작용하였다. 도시 광장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고 통행, 회합, 교환, 상호인식의 장소였다. 그뿐만 아니라 장터, 문화, 예술, 의식, 집회 등으로 다채롭게 채워지는 광장은 사회적 열린 공간으로 작동한다. 이렇듯 유럽의 도시문화는 광장에 집중된 한편으로 그들의 은 사회적 소통이나 생활 터전의 의미보다는 단순한 교통 수단에 불과하였다. 서구 도시의 고대 건축물은 석조 건물로 두껍고 높은 벽으로 건축의 내외부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벽의 외부는 상시적으로 자연의 위협이 존재하므로 길이 아닌 중정이나 광장이 공동체 생활의 터전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광장이 엄청난 의미를 갖는 서구에 비해 매력적인 광장이 전무한 우리나라에서 그것의 역할을 대신하는 공간은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도시 곳곳에 숨겨진 골목길이다. 도시에는 고속도로도 필요하고 자동차가 다니는 길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생활공간으로서 보행 길의 네트워크이다. 고속 성장과 개발 시대에 길이란 속도를 의미하는 차들로 장악된 공간이었다. 생활 터전으로서 길이란 보행 공간과 다양한 시설들이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구성되어야 하는데, 그저 빨리 지나치게 하는 차들의 길이 차지하면서 공간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 될 수 없었다. 근래 도시별로 많은 골목길들이 차들을 밀어내고 걷는 사람들로 채워 넣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중요하다. 길은 인접한 건축물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공간이다. 보행 길을 시민 생활공간의 연장으로서 활용하여 도시생활을 풍부하게 할 것인가는 건축가에게 늘 풀어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 두레주택은 생활 터전으로서 골목길을 내부에 품은 건축이다. 은평구의 한구석 산새마을에 자리한 두레주택은 다섯 개 방과 공동 거실을 가진 사회 초년생을 위한 자그마한 공공 임대주택이다. 담장과 내부 복도를 없애고 마을 속 굽이치는 골목길 네트워크를 집 안으로 끌어들여 마치 하나의 도시와 같이 입체적인 길과 마당들을 가지고 있다. 각자 집으로 오가며 이웃 주민과 마을사람과 경계 없이 마주치고 소통할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의 실험적 공동주거이다. 완고한 벽에 의한 안과 바깥의 대립을 통해 서구의 광장과 도시가 형성되었다면 우리는 안과 밖의 경계를 느슨히 하여 길이 확장되고 걷기 흥미로운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생활공간으로서 활기찬 골목길을 주택 내부로 확장하는 산새마을 두레주택 계획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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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상

지구상 인구 100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가 25곳 정도 있지만 산세 지형인 곳은 서울이 유일하다. 뉴욕, 도쿄, 베이징, 파리, 런던과 같은 평지 입지와는 근본적으로 차별되는 고유성이다.

 

서울은 내사산과 외사산이 조화를 이뤄 만드는 입체적 지형 속에 굽이치는 한강과 여러 지천이 어우러져 고유한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따라서 연속적이고 수려한 산세가 중요한 도시의 랜드마크인 서울에 짓는 건축물은 그 자연의 위대한 질서를 훼손하지 않도록 잘게 나누어 지어져야 옳다. 마치 자로 그은 듯한 외국 평지도시의 질서와 달리 다양한 사이 틈과 흐름이 좋아야 한다. 작은 건축과 사이 골목길들이 만드는 아기자기하고 느슨한 질서의 군집이 우리 고유 도시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작은 조직의 복잡 풍부한 관계성이 우리나라 가구 수의 절반, 1000만가구 이상이 거주하는 아파트에도 적용되면 어떨까.

 

천편일률적으로 긴 담장 같거나 높은 탑형으로 홀로 우뚝 서서 고립된 섬과 같이 울타리로 둘러친 경계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반대로 작은 공동주택들이 오밀조밀 입체적으로 쌓여 주변 경관과 보행을 막힘없이 열어주는 새로운 아파트를 상상해본다(사진). 가로와 마당으로 소통하는 친밀한 이웃의 단위인 10가구 정도의 저층 집합주택(큐브)을 기본 단위로 하여 입체적으로 엇갈리게 쌓는다. 단위 큐브들의 자유롭고 느슨한 조합으로 아래에는 길이 열리고 위에는 경치가 연속된다. 막힘없이 집들 사이 여러 틈들로도 골목이 생겨 바람과 빛이 통하고 여러 옥상들은 하늘마당이 된다. 지난 세월 숨가쁜 도시 개발 과정에서 사라진 마당. 우리에게 그것은 만남과 소통, 사유와 휴식의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초점은 사라진 골목길을 아파트에 도입하고 마당의 기능을 다시 옥상 하늘마당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이른바 작은 부분들의 질서와 친밀성의 최소 단위로 최대의 연결을 가진 미니맥스(Mini-Max) 마을이다. 이는 중심이나 위계적 질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소소한 부분들에서 복잡 다양한 가치를 찾는 새로운 방식이다.

 

과학자 일리야 프리고진은 산일구조(散逸構造) 이론을 통해 불완전한 상태에서 작은 요소 간의 부분적 관계성의 연쇄작용에 의해 거시적인 안정적 구조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는 비단 화학영역뿐 아니라 거대 도시나 아파트의 질서에도 적용되는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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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만 건축가 경향 2020. 9.17

 

내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

내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 백년 전인 1920년에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청년은 아나키즘에 의식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도쿄 부두 잡역부로 하루 일해 이틀 살면서 크로폿킨의 <청년에게 고함> <상호부조론>을 일본어로 읽었다. 반지배주의자, 평화주의자로서 신념은 해방 후 결혼해 얻은 첫아들의 이름을 세계평화를 줄여 세화라고 짓게 했다. 마침 자식 항렬의 돌림자가 ()’자였다. 아나키스트는 전쟁과 분단의 거친 회오리바람 속에서 패배자의 삶을 살았다. 세월이 흐른 뒤 한 출판사 편집자가 아들에게 <청년에게 고함>을 한국어로 번역해달라고 요청했다. <청년에게 고함>은 크로폿킨이 애당초 프랑스어로 썼던 팸플릿이다. “아니, 이젠 추종세력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 19세기 말에 유럽 청년들에게 던졌던 발언을 지금 여기서 누가 관심을 가지겠는가?” 의아해하는 아들의 반문에 편집자는 역사성을 가진 책은 한국어 번역본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아들이 번역을 마치고 책이 출간된 2014, 아흔네 살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던 젊은 시절의 증거물인 아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독자는 칼럼 서두에 사적인 이야기를 펼친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왜였을까, 느닷없이 <청년에게 고함>이 아나키스트 아버지의 젊은 모습과 함께 떠오른 것은? 대중의 무관심 또는 능멸의 대상이 된 사회주의에 대한 애달픔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늦어진 전교조 합법화와 의사들의 집단진료거부 사태가 뇌리에서 뒤엉긴 탓일까. 가장 강력한 상념은 삶이라는 거대한 도전 앞에서 설레고 떨리고 흔들리는 청년 정신의 소멸에 대한 것이었다. ‘아빠 찬스’ ‘엄마 찬스의 수혜자에서 방황과 번민의 젊은 시절을 욕망 소비로 대체한 채 아빠 찬스’ ‘엄마 찬스의 제공자로 대물림하는 사회가 돼버린 게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내 우려대로 별 반응을 얻지 못해 출판사에 손해를 입혔을 <청년에게 고함>은 아나키즘보다 사회주의를 강조한 책이다. 크로폿킨은 이 작은 책자에서 노동자는 물론이고 교사, 의사를 지망하는 청년들에게도 왜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지 역설했다. <동의보감>지금 의사는 오직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마음은 고칠 줄 모르니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 쫓는 격이며, 그 근원을 캐지 않고 말류만 손질하는 것이다라고 썼다면, 크로폿킨은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사회는 고칠 줄 모르니라면서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식이다.

 

나는 언감생심, 오늘 이 땅의 의사와 교사에게 사회주의자를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청년은 청년이어야 하지 않는가. 당시 유럽 청년들이 크로폿킨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지금 여기는 사회주의는 물론 그 어떤 이상(理想)도 들을 청년이 없지 않으냐고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자아를 실현할 것인가의 물음 앞에서 잠 못 이루고,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도 불현듯 과연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인가?”라고 고민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밤이 없다면 젊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의대생들이 국가시험을 집단거부했다. 그것은 이른바 4대 의료정책(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한방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비대면 진료 육성)에 대한 문제점을 공화국의 출발 정신인 공공성의 시각에서 비판한 게 아니라, ‘전교 1들이 누리는 특권에 작은 변화도 용납할 수 없다는 집단의지의 표현이었다. 대한의협 산하 의료정책연구소는 ‘A=전교1등 의사‘B=성적이 모자란 공공의대 출신 의사중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물었다. 내가 ‘B=성적이 모자란 공공의대 의사를 택하는 것은 오기 때문이 아니다.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기 때문이며,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쪽은 A보다 B이기 때문이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의대생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 더 절망적이었다. 그들에게서 젊음을 느낄 수 없었다. ‘휴거’ ‘임대충’ ‘이백충이라고 놀리고 조물주 위 건물주를 지망하는 초등학생한테서 어린이를 느낄 수 없듯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자식이 피부색이 아닌 캐릭터의 내용으로 평가되는 나라에서 사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꿈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캐릭터에는 관심이 없다. 높은 구매력을 보증하는 부모의 문화자본과 경제력에 기대어 획득한 학위와 자격증이 가장 값지다. 각광받는 분야는 의료, 법률, 경영 컨설팅, 금융, 아이티(IT) 분야다. 그리하여, 청년들의 꿈과 열정은 부모 역량에 힘입은 성적순의 배치 앞에서 무산되었다. 이과 전교 1은 의사, 문과 전교 1은 법률가, 그다음 경영, 금융, 아이티 분야가 선점되고, 교사도 1등급이 아니면 꿈꾸지 못한다. 소고기에 특1등급, 1·2등급이 매겨지듯, ‘전교 1’ ‘1등급’ ‘9등급으로 매겨지고 서열화된 대학과 학과 입학에 따라 자기 위치를 스스로 규정한다. 이렇게 과거 봉건시대의 신분제처럼 세습 질서가 자리 잡은 곳에 청년의 설렘과 떨림이, 이상과 열정이 설 자리가 있겠는가. 불평등 세습에 공모했다면서 자신을 고발한 매슈 스튜어트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귀족 계층인 능력자 계층은 다른 사람들의 자녀를 희생양 삼아 부를 축적하고 특권을 대물림하는 오래된 술책을 터득했다. (줄임) 하지만 우리가 벌이고 있는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결국 모두가 처참하게 패배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전교조에 법외노조의 굴레를 푸는 길은 아주 간단했다. 문재인 정권이 노조 아님 통보를 직권으로 취소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전교조는 법률가 집단, 의사 집단에 비해 힘이 없다. ‘전교 1출신이 아닌데다 감히 노동조합이기 때문이다. 이젠 ‘1등급출신 교사들이 충원되지 않아 생물학적으로 젊음을 잃었다. 3, 4년 전부터 민주시민교육이 운위되고 있는데, 정작 교사에겐 정치적 시민권이 없다. 역대 기득권 세력은 분단체제 아래 철학은 프롤레타리아한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한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에서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에 담긴 정신적 무기의 아주 작은 가능성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176석의 민주당은 국제노동기구(ILO)의 요구대로 공무원과 교사들에게 정치적 시민권을 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면 이 사회의 청년은, 그리고 정신은 꿈틀댈 수 있을 것이다.

(뱀발: 아나키스트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이름을 민족평화를 줄여 민화라고 지었다. 6·25 전쟁이 터졌고 첫돌 전에 병들어 죽었다. 아나키스트 아버지가 남겨준 이름, 그것은 나에게 버거우면서 기꺼운 짐으로 작용했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대표 한겨레 2020. 9.17

 

원전 사고를 막으려면

지난 11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열렸지만 공식 안건에 최근 태풍 관련 원전 가동정지 건이 포함되지 않았다. 원전 6기의 가동이 정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직후 열린 원안위에서 이 사고가 어떻게 보고되고 심의됐는지에 대해 언론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원안위는 조사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관련 심의를 비공개로 했다. 하지만 관련법에 의해 원안위 회의는 공개해야 하고,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은 비공개 사유가 될 수 없다.

 

지진·쓰나미·강풍·해수 범람 등 재해로 인해 국내 원전이 영향을 받은 사례는 2000~2015년 무려 20건이나 된다. 19877월 태풍 셀마의 영향으로 송전선로 및 계전기 고장 등으로 고리 1~4호기 원자로가 정지됐다. 20039월 태풍 매미영향으로 고리 1~4호기는 송전선로 고장으로, 월성2호기는 비산물에 의해 각각 원자로가 정지됐다.

 

원전은 가동 중이거나 정지 중 고온의 핵연료를 계속해서 식히지 않으면 멜트다운으로 이어질 수 있어 전기 공급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태풍으로 국내 원전의 외부 전원이 상실되는 사고는 지난 33년 동안 3번이나 발생했다. 후쿠시마 사고도 지진으로 외부 전원이 상실되고, 비상디젤발전기가 쓰나미로 침수되면서 멜트다운과 수소폭발로 이어졌다.

 

그런데 신고리 5·6호기 등 국내 원전은 비상디젤발전기가 원전 1기당 2대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에서 표준설계인증을 받은 ARP1400 원자로는 비상디젤발전기가 원전 1기당 4대이다. 미국 핵규제위원회는 비상디젤발전기 2대로는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같은 APR1400 원자로인 신고리 5·6호기는 비상디젤발전기가 원전 1기당 2대인데, 수출형은 4대인 것이다. 그만큼 국내 원전은 안전성이 부족하다.

 

사고 위험을 막기 위해선 정확한 원인 규명을 위해 지역주민·시민단체·외부전문가가 참여해 독립적이고 공정한 조사를 해야 한다. 사고 관련 데이터와 정보를 실시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며, 규정 위반이 확인될 경우 엄중하게 책임을 묻고 안전성 확보 조치를 확실히 해야만 할 것이다/ 김영희 변호사·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 공동대표 경향 2020. 9.17

 

 

되돌아본 덩샤오핑의 지혜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연구의 석학인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덩샤오핑 평전>에서 일본을 방문해 깊은 인상을 준 외국 지도자가 3명 있었다고 언급했다. 한 명은 1960년에 방문했던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고, 다른 한 명은 1978년 방일했던 덩샤오핑이며, 나머지 한 명은 1998년 방문했던 김대중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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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일본에 가장 저자세였던 사람은 덩샤오핑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 지도자로서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일왕을 만났던 덩은 중국을 하루빨리 문화대혁명의 그늘에서 건져내고 개혁·개방 정책으로 이끌고 싶었다. 따라서 그는 일본과의 협력 강화를 원했다. 이를 통해 일본이 중국에 더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기술과 기업 관리 분야에서 교류 및 협력 증진을 얻어내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도 지금처럼 중·일 간에는 역사 인식의 차이와 영토 분쟁이 민감한 현안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덩은 방문 당시 기자회견에서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 열도) 분쟁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된다. 그는 준비한 답을 차분히 내놓았다. ·일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양국 정부가 영토 분쟁 문제를 후대사람들에게 넘기자. 우리 세대의 지혜가 부족해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으나 후세들은 훨씬 총명하여 능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덩은 나아가 방문 기간 내내 일본을 높이고 끊임없이 칭찬했다. 덩이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 팽배했던 민족주의적 반일감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또한 군국주의 일본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 억울함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덩은 외교가 당당한 감정의 만족이 아닌, 냉철한 국익의 계산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평행선을 달리는 역사 인식과 영토 분쟁의 문제를 양보하는 것이 아닌, 다른 한편에 그대로 쌓아둔 반면 경제 분야에서는 협력을 강화시키는 외교력을 보였다. 투트랙(two-track) 외교의 교과서적 사례였다.

 

당시 미국 다음으로 자본과 기술에서 앞서있던 일본에 대한 덩의 투트랙 접근은 아이러니하게도 32년 후 경제 규모에서 중국이 일본을 앞지르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덩의 후세들은 국제사회가 인식하는 G2의 한 축으로 올라섰고 저자세였던 한국 및 일본과 협력도 하지만 종종 압박을 가하고 민족적 반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데 거침없던 중국에 동북아 지역에서 안보적 우려가 생겼다. 미국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이유로 한·미 및 미·일 동맹을 강화하는데 중국의 시각에서는 미국의 표적이 아무래도 북한이 아닌 중국 같았다. 또한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동아시아 미사일방어체계(MD) 구축을 위해 일본에 이어 한국의 참여를 종용하고 나아가 한··3국 동맹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중국은 전략적으로 한국을 끌어당겨보았으나 한국은 사드를 배치했다. 압박을 했더니 반중 감정이 일어 한·미 동맹을 재평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은 놓치지 않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성사시켰다. 중국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했다. 한국이 MD와 한··3국 동맹으로 기울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우려는 기우였다. 역사인식 문제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며 지금의 한·일관계로는 미국의 목표 달성이 요원해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에 대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감소했다.

 

나날이 격화되는 미·중 간 전략적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한국이 주권과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종종 강대국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후세에 굴욕 외교로 평가받지 않으려면 한국 스스로 전략적 가치를 높이고 국력을 증진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누구도 덩의 대일외교를 굴욕이라 표현하지 않는 이유다.

 

한국이 스스로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첫 단추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다. 아베 전 총리와 유사한 스가 총리의 최근 한국 현안 관련 발언으로 본다면 한·일관계에 당분간 변화가 나타나기는 어려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일 전문가들이 상호 이익을 위해 양국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이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한·일관계의 개선을 요구한다면, 후일 아베의 승계를 넘어 자신의 정치력을 높인 스가 총리가 한국정책에서 어떠한 변화를 보일지 아직 알 수 없다. 한국은 대일 외교에서 투트랙의 원칙을 견지하고, 일본 내 전문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미국의 지지를 얻는 장기적인 노력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할 것이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 경향 2020. 9.18

 

역병, 우리의 거울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변했지만, 바이러스 재난은 변할 조짐이 없다. 변하지 않는 거로 따지자면 사람도 코로나 바이러스 못지않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는 말은 질리도록 했지만, 사태에 걸맞은 변화는 찾아볼 수 없다. 지난 7월 발표된 한국판 뉴딜도 결국 경기를 부양해 빨리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지금 사태가 이전과 별개로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면 이런 대책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2020 경향포럼>에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코로나19라는 외생변수가 문제고, 지금의 경제는 이 악재만 사라지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반등할 것으로 전망했다. 여기에도 비슷한 전제가 깔린 걸 본다. 그러나 바이러스 재난이 지금의 경제와 엮여 있다면, ‘이전으로의 복귀는 가능하다고 해도 문제의 원인을 지속하거나 강화할 뿐이다. 원인이 같은데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최근 녹색연합은 한국갤럽에 의뢰해 만 14~69세 시민 1500명에게 기후변화 위기 인식에 관한 여론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97.7%가 기후위기가 심각하다고 답했고, 그렇게 인식한 계기로 응답자의 95.8%가 올여름 폭우, 코로나19, 재작년 폭염을 꼽았다. 다수가 최근의 재난을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기후변화라는 맥락에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재난에 대한 시민의 인식은 넓고 깊어졌다. 바이러스 재난을 기후변화와 연결해서 볼 과학적 근거는 충분하다. 최근만 해도 세계보건기구, 유엔환경계획과 국제축산연구소,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이 바이러스 감염병 창궐은 야생동물 서식지 파괴 등 자연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가 주요 원인이라고 밝혔다. 이런 생태 문제의 뿌리에는 대량 생산과 소비를 기반으로 이윤과 성장에 목매는 지금의 경제가 있다. 코로나19 감염병은 현상적으론 질병의 문제지만 근본적으론 경제의 문제다. 이 재난을 질병이라는 개별적 차원에서 접근하면 문제의 본질과 근원을 놓치고, 결국은 문제 해결에 실패할 것이다.

 

이 바이러스 재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역병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이다(프랭크 스노든). 방역과 백신 개발이 당면한 재난 대처에 중요하다면,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의 확인은 장기적이고 근본적으로 바이러스 재난의 반복을 막는 데 긴요하다. 코로나19에는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생태적 훼손을 자행하고 방치해온, 욕망에 찌든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바이러스 재난은 폭력적 삶의 방식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고, 변하지 않으면 상황은 반복되고 악화할 거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성장 신화에 중독된 우리는 이 경고를 새겨듣지 않는다. 버릇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기획재정부는 경남 하동군이 추진하는 알프스 하동 프로젝트라는 이상한 이름의 지리산 산악철도 사업을 법 제정을 통해서라도 지원하겠다고 한다. 국토교통부는 생태계 보고로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 서식지인 민통선 지역에 필요하지도 않은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나선다. 자연을 개발과 돈벌이 대상으로 보는 건 여전하다.

 

거울에 담긴 불편한 진실을 부정하면 가야 할 새 길은 보이지 않고 가지 말아야 할 옛길만 보이는 법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만큼이나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는 겸손과 용기가 절실한 때다.

조현철 신부 녹색연합 상임대표 경향 2020. 9.18

 

코로나19, 네 가지 방역을 생각한다

지난 1월 말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보고된 지 8개월이 지났다. 코로나19가 안긴 충격은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에 버금갈 만하다. 경제를, 사회를, 문화를 바꿨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한 까닭의 하나도 정부 방역 정책에 대한 평가에 있었으니 정치까지 바꿨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예견하듯, 내년에는 백신이 상용화돼 대다수 나라들이 코로나19와 결별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시점을 누구도 특정할 수 없으니, ‘코로나 시대’ ‘위드 코로나 시대’ ‘포스트 코로나 시대등 그 무엇으로 불리든, 코로나19 팬데믹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오늘 살펴보려는 것은 우리나라 코로나19 방역의 중간 평가다. 그 갈래는 의학적,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방역이다.

 

먼저 의학적 방역의 경우 우리나라의 성과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지난 9개월간 우리 정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와 확진자 동선 공개라는 우리만의 독특한 방역 정책을 구축하고 추진했다. 이 방식은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서구사회나 경제적으로 빈곤한 비서구사회에선 효과를 얻기 어려운 한국식 방역이다. 일각에서 지적하듯 이 방식이 사회적 비용을 적잖이 지불하긴 하지만, 확진자와 사망자 규모를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우수한 방역 정책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방역의 경우 역시 현재까지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보면, 우리나라는 -1.0%로 예상되지만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주요 20개국(G20)과 비교할 때에도 중국을 제외하곤 가장 양호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물론 국가 간 비교다. 국제 비교라는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국민 삶의 질이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보면 코로나19는 우리 삶과 경제를 완전히 뒤흔들어온 대재난이다. 당장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등 코로나19로 크게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현실을 지켜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미증유의 바이러스 폭풍은 의학적, 경제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 사회적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이와 연관해 심리적 방역의 경우는 전환점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의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뉴스와 정보에서 느끼는 감정은 8월 말 불안이 47.5%, 분노가 25.3%, 공포가 15.2%였다. 8월 초와 비교할 때 분노가 11.5%에서 25.3%로 증가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또 고려대 KU마음건강연구소의 조사 결과, 9월 중순 응답자 10명 중 4명이 코로나 블루(우울)’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에 따라선 코로나 블루가 코로나 레드(화병)’로 진화하고, 어떤 이들은 자살 등 고위험에 노출돼 있다.

 

심리적 방역이 무너지면 마음의 안정감이 훼손된다. 나아가 타인에 대한 혐오가 증가한다. 코로나19가 야기하는 스트레스, 불안, 분노를 관리하기 위한 정부는 물론 국민 개개인의 노력이 중요한 까닭이다. 코로나19로 우리 마음의 둑이 무너져선 안 된다. 따라서 정부 차원에선 코로나19 트라우마에 대한 적극적이고 섬세한 대책이 요구되고, 국민 차원에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되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개인적 운동 등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마지막 사회적 방역의 경우는 이 모두를 포괄한다. 코로나19는 의학적 위험이자 사회적 위험이다. 이 사회적 위험은 평등하지 않다. 폭염 등 기후위기에서 볼 수 있듯, 코로나19가 미치는 영향은 계층·직업·세대에 따라 다르다. 특히 비정규직, 자영업자, 고령세대 등에게 코로나19가 안기는 위험 수준은 상대적으로 높다. ‘코로나19 불평등현상이다.

 

사회적 방역에서 주목할 것은 사회적 약자들의 보호와 공동체적 유대의 강화다. 긴급재난지원금과 한국판 뉴딜등의 정책적 수단은 물론 마스크 상시 착용과 불필요한 모임 자제 등 타인의 안전을 적극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 또한 더없이 중요하다. 코로나19 피로감이 높아진 만큼 사회통합 제고를 위한 정부와 국민 모두의 노력이 요구된다.

 

코로나19는 국민 건강과 경제를 위협한다. 나아가 심리적 안정을 무너뜨리며 사회적 활기를 앗아간다. 시작은 있는데 끝이 안 보이는, 백신의 상용화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게 어찌할 수 없는 현실적 조건이다. 이 미증유의 대재난에 맞설 가장 중요한 힘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복합 방역이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연대의식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20.09.22

 

가난 물려받은 싼허청년

중국의 싼허(三和)청년들은 하루 일해서 번 돈으로 사흘간 논다. 싼허청년은 선전시 싼허인력시장에 모이는 2030대 농민공을 뜻한다. 인력시장에서 택배배달, 경비, 건설노동 등 일용직을 구한다. 매일 출근을 싫어하기 때문에 월급 주는 직장을 원치 않는다.

 

적게 벌고 적게 쓴다. 하루에 25000원 정도 벌어 850원짜리 국수로 끼니를 때우고, 2500원짜리 숙소에서 잠을 청한다. 하루 일해서 번 돈으로 며칠씩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며 논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출생한 싼허청년들은 이전 농민공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고도 경제성장시기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농민공들은 악착같이 번 돈으로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하고 내집 마련의 꿈을 꿨다. 그러나 싼허청년들은 철저히 자신을 위한 소비를 한다. 저축 대신 복권을 산다. 개인주의적 성향, 미래보다 현재에 몰두하는 생활 같은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이 드러난다.

 

그러나 싼허청년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중국의 사회 문제가 수십년간 얽히고설키면서 탄생한 괴물이라는 정체가 드러난다. 톈야라는 작가가 6개월간 싼허청년과 합숙하면서 쓴 <어찌 집이 그립지 않겠나 : 싼허청년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착취와 압박, 차별 때문에 정규직을 갖기 싫어한다. 개혁·개방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농민공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와 차별은 심각했다.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면서 하루 12시간씩 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이 제공한 숙소에서 사는 이들에게 출퇴근 경계도 모호했고 개인생활도 없었다.

 

싼허청년들은 공장의 엄격한 관리 속에서 일하는 것을 증오한다. ‘공장 권력이 정한 불공정한 임금, 열악한 근무 환경을 버티지 못한다. 싼허청년들은 부당한 대우에도 적극적으로 항의한다. 인력중개 업소가 수수료를 떼는 행위를 하면 건물 옥상에 올라가 투신 소동을 벌인다고 한다. 실제 투신할 의도보다는 빠른 해결을 위한 방책에 가깝다.

 

밀레니얼 청년들의 노사관계에 대한 인식은 성장했다. 그러나 중국의 법과 제도가 노동자들을 보호할 장치를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일용직의 삶을 택한 것이다.

 

대다수 싼허청년들은 농민공의 자녀들이다. 부모들이 돈 벌러 도시로 나가면서 고향에 홀로 남겨졌다. 조부모 밑에서 성장한 경우도 있고, 방치되다시피 한 이들도 있다. 부모가 일하러 도시로 떠나 농촌에 홀로 남겨진 이른바 유수(留守)아동들은 현재 6102만명을 넘는다. 부모와 떨어져 성장한 이들은 가족에 대한 애착이 적다. 도시에 친척이 있더라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곰팡이 피고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숙소라도 혼자 있는 게 편하다.

 

농민공들이 삶을 바꾸기 위해 도시로 나와 일했지만 이들은 자녀 세대의 삶을 바꾸지는 못했다. 후커우(호적) 제한으로 가로막힌 이들은 도시 밑바닥을 전전했다. 그리고 가난은 대물림 됐다. 이들의 자녀는 어려서는 유수아동, 커서는 싼허청년이 됐다.

 

싼허청년이 탄생한 선전은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 같은 도시다. 가난한 어촌이었던 이곳이 경제특구로 지정된 지 올해로 꼭 40년이다. 40년 동안 경제 규모가 1만배 넘게 성장한 이 도시는 아직도 농민공들은 품지 못하고 있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경향 2020.09.22.

 

이 또한 공정한가

불공정에서 촉발된 촛불혁명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이 지금은 역설적으로 불공정에 발목이 잡혀 있는 형국이다. 불공정의 크기와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입은 상처는 만만치 않다. 조국 전 법무장관 사태가 정점인 줄 알았더니 뒤이어 추미애 법무장관도 자녀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검찰개혁 추진을 저지하려는 세력의 기도된 의혹 제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집요하게 파헤치는 야당과 언론의 흔들기로 그들의 도덕성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거대 여당에 맞설 무기와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야당은 호재를 만난 듯 인사청문회와 그 이후 몇 달째, 국회 대정부질문 내내 열을 올리고 멈춰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언론도 하루 1000개가 넘는 기사를 쏟아내며 정쟁의 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드러내고 있다. 결과적으론 특권과 반칙, 기득권층의 부와 명예의 대물림을 끊어내겠다던 개혁세력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인식 심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다를 것으로 기대했던 진보세력에 대한 상실감이 더 분노하게 만든 것이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 대통령은 출범 당시의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라는 대국민 약속을 소환하며 불공정에 대한 분노를 다독이려 제1회 청년의날 기념식에서 37번이나 공정을 외치기도 했다.

 

다른 불공정 이슈에 대해 언론이나 정치권이 이만큼 관심을 두고 집요했던가. 의혹 관련 기사가 지면과 포털을 채우고 인사청문회부터 지금까지 장기간 무차별 폭로와 무조건 옹호를 반복하면서, 비생산적인 정쟁을 지속했던 적이 있는가. 이 또한 비례성도 잃고 불공정한 방식이다. 기승전 추미애 장관이다. 누구나 공감하고 반감을 불러일으킬 소재인 입시와 군대의 불공정을 들춰냈다. 흙수저 대 금수저의 이분법을 동원해 공분을 자극했다. 입시와 군대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경험했거나 맞닥뜨려야 할 관심사이므로 자신의 처지에서 자기 것과 비교해 본다. 그리고 주관적 경험과 입장에 따라 공정한지, 불공정한지 판단한다. 여기에 바로 함정이 숨어 있다. 극한의 경쟁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이익이라고 느껴지면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공정성을 재단한다. 상대방의 작은 불공정도 엄청나게 커 보이게 마련인데, 작은 불공정으로 우리 사회의 공정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기도 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판결에서 보인 남성들의 거부반응이 그 예다. 정의를 표방하지만, 절차적 공정성을 무시한 디지털교도소도 마찬가지다. 공정성 개념과 기준은 공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우리 사회 전체의 불공정 문제로 치환해버려 공정성의 의미는 모호해진다.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는 의도는 여러 가지다. 사회구조적 불공정 사례를 들춰내 이슈화하고 이를 바꿔보려는 노력이 주를 이룬다. 불공정을 바로잡아 공정과 정의의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 찬 행동들이다. 반면에 정작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부류가 정의와 공정의 화신인 양 분칠하고 방패막이용으로 공정을 입에 올리기도 한다. 지금 야당이 후자의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불공정과 부정의의 총합인 국정농단 사태에 책임이 없지 않은 그들이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고 있다. 겉으로는 혁신을 외치지만 단절을 택하기보다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정당이다. 그들이 공정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입맛에 맞는 것만 문제 삼는 편식적 공정을 탓하는 것이다. 작은 불공정에 눈감으라는 얘기도 더더욱 아니다. 그 이상으로 구조적 불공정 시정에 집요함과 치열함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공정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 기획이 아니라 정쟁에만 활용할 생각에 그치니 불공정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화두가 되었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을 타파하려면 바로 자신의 이익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불공정에도 분노해야 한다. 전관예우와 법조비리, 대기업의 불법 경영승계, 하도급·가맹점·유통 분야 불공정 거래 관행, 노동자의 소득 불공정성과 이익 배분의 불공정성 등등 실현해야 할 공정과 타파해야 할 불공정이 산적해 있다. 선거에서의 승자독식제도는 공정한가. 국회의원의 이해충돌과 사적 이해관계도 불공정 사례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 이것이야말로 공정함의 척도인데, 우리는 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분열과 갈등만 조장하는 개별적이고 작은 불공정 들춰내기가 아니라 분노 게이지를 구조적 불공정에 맞춰야만 공정사회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2020.09.22.

 

자본주의 만세

한세기 전에 콜롬비아의 농민들은 돈에 세례를 주는 은밀한 의식을 행했다. 지주에게 땅을 뺏기고 저임금 노동으로 연명하던 이들은 갓난아기가 신부 앞에서 세례를 받을 때 1페소짜리 지폐를 몰래 움켜쥐고 있었다. 아기를 빙자해 세례를 받은 신비로운 지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더 많은 지폐를 만들어내고, 종국에 더 많은 지폐를 불러들인다는 믿음에서였다. 인류학자 마이클 타우시그는 돈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생각이 비서구 사회의 기이한 믿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돈이 돈을 낳기 때문에 암퇘지 한마리를 죽이는 것이 수천마리 자손을 잃는 것과 같다고 젊은 상인에게 조언했고, 카를 마르크스는 돈이나 다른 상품에 생명을 불어넣으면서 노동과 토지에 대한 착취를 숨기는 물신숭배를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보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이른바 동학개미운동이라 불리는 한국의 주식투자 열풍 역시 돈이 돈을 낳는다는 자본주의 주술의 역사를 이어 쓰고 있다. 개인투자 자금의 증시 유입이 고공행진 중이고, 20~30대가 주요 시중은행에서 신용대출로 빌린 돈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다섯배나 증가했다(920<서울경제>).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소유할 생각이 전혀 없는 튤립 알뿌리를 대상으로 선물거래 붐을 일으켰듯, 기업의 실적을 염두에 두지 않는 단타 매매가 기승을 부린다. 19세기 영국인들이 제 재산보다 더 많은 금액을 들여 철도 주식을 사들였듯, ‘빚투도 마다하지 않는 투자자들은 3년 전 암호화폐 열풍 때처럼 가즈아를 외치고 있다.

 

물론 차이점도 눈에 띈다. 최근에 경기도 청년기본소득 수령자를 인터뷰하면서 놀란 것은 상당수 청년이 주식투자를 라이프스타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실물경제에서 더 이상의 축적을 기대하기 어려운 금융자본주의 세상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임금노동을 부의 유일한 원천으로 생각하지도, 주식투자를 인생을 내건 무모한 도박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세뱃돈으로 받은 돈을 모아 주식 초기자금을 마련하고, 시중은행보다 다소 높은 이자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꾸준하게투자한다며 즐겨 찾는 유튜브 학습채널을 소개해줬다. 온라인 카페에서 본 주식투자 앱을 깔아서 소소하게소액투자를 한다며 인스타 맛집을 소개하듯 나한테 앱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래도 영끌’ ‘영털이란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일상화된 투자에도 영혼의 품이 많이 들긴 하나 보다. 인기 있는 유튜브 채널에는 영혼을 다독이는 감사와 격려의 댓글이 차고 넘친다. 투자 비법을 전수하는 젊은 고수에게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산 당신이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는다. 콘텐츠가 참 좋다며, 내공이 느껴진다며, 값진 말씀 감사하다며, 조급해하지 말자며 상대를 칭찬하고 서로를 응원하는 착한커뮤니티를 최근의 날 선 한국 사회에서 본 적이 있던가.

 

하지만 21세기의 투자자 커뮤니티가 영혼과 대면하는 방식은 100년 전 콜롬비아 농민의 태도와 꽤 차이가 있다. 세례를 돈한테 베푼 바람에 아기가 세계 내 자기 자리를 빼앗겼다는 점에서, 인간의 영혼을 팔아야 이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콜롬비아 농민들은 돈이 돈을 낳는 세계를 부도덕하다고 봤다. 반면 주식 공부에 뛰어든 한국의 젊은이들은 돈이 돈을 낳는 흐름을 시장경제의 자연스러운 이치로 받아들인다. 대신 이들이 겨냥하는 부도덕의 세계란 기관투자자들이 공매도를 일삼는 세계,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금융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는 세계다. 코로나 이후 개미들의 선방이 부도덕한지배세력에 맞선 항거로, “공정한사회를 위한 대동단결로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이 경제위기를 촉발한 월가의 금융 엘리트에 맞서 우리가 99퍼센트라며 대대적 시위를 벌였던 게 고작 10년 전이다. 이제 “99퍼센트는 투자자에 맞서는 대신 스스로 투자자가 됐고, “국가가 납세자의 돈으로 기업을 구제했다는 당시의 비난을 내가 투자하는 기업이 부실해도 국가가 구원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되감았다. 국가가 청년들에게 기본적인 안전망조차 깔아주지 못한 채 창업이니 혁신이니 바람잡이 역할만 한 헬조선에서 저항의 끝판왕이 등장한 걸까. 이 저항이 지배와 동의어 같기도 하니, 그야말로 자본주의 만세다.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겨레 2020-09-23

 

코로나19 재앙을 축복으로 만들 조건

지난주 비대면 토론회를 잇따라 열었다. 집값 폭등에 부동산투기 대책으로 제안한 부동산시장 상설감독기구도입을 위한 토론회 발제를 맡았는데, 갑자기 2단계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발령으로 연기돼 한 달여 만에 화상 대면토론회로 열렸다. 발제자와 패널들 모두 화상으로 연결했고 온라인 객석에 언론을 비롯한 수십명이 참여했다.

 

다른 하나는 국가기후환경회의 주관으로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위기대책에 대한 중장기 국가과제를 만들기 위한 국민토론회다. 전국의 국민참여단 500여명이 이틀 동안 온라인으로 발제를 듣고 분임토의와 질의응답을 거쳐 최종적으로 국민의견을 내는 방식이다. 화상 대면 토론회의 압권은 행사 참여자와 500명이 넘는 국민참여단이 함께 온라인 기념촬영하는 장면이었다.

 

함께 모여야 직성이 풀리고 공론화 절차이기에 비대면 방식은 낯설고 우려가 컸다. 하지만 의제 집중력과 성과도 좋았고 참여자를 크게 늘리면서도 경비까지 절감했다. 신기한 건, 대면 방식 신봉자였던 내게 왜 꼭 모여 행사하는지 의문이 생겼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도리 없이 비현실적인세상에 살게 된 국민들의 삶과 사업현장은 정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뀌고 있다. 평범한 일상조차 힘겨워진 국민들은 기존의 정치와 경제시스템이 아니라 늘 후순위로 밀린 구호들을 당장 실천하라고 요구한다. 경제도 생채기 난 채로 과거 성장경제로의 복귀가 아닌 새 경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시대 새로운 경제질서를 위한 뉴노멀은 무엇일까?

 

먼저는 그린이다. 코로나19는 물론 최근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기후변화에서 왔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그린뉴딜은 이전 정부에서도, 문재인 정부에서의 기후변화와 경제정책으로 채택됐다. 하지만 여전히 규제와 소비 차원에서만 다룰 뿐 블루오션 산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못한다. 예컨대 이번 온택트 토론회에서 발제한 내연기관차에서 친환경차산업으로의 전환 로드맵 마련의제만 해도 그렇다. 세계 7대 자동차 생산국인 만큼 정부와 업계가 함께 경쟁력 있는 친환경차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재생에너지 등 에너지원은 물론 국민생활과 산업 전반에 일자리와 고부가가치가 가능한 그린경제를 중심에 놓아야 한국 경제의 미래가 가능하다.

 

둘째는 공정이다. 보편방식이든 선별방식이든 2차에 걸친 긴급재난지원금을 통해 정부부문도 공정경제를 위한 적극적 역할을 체험했다. 정부도 공정경제를 지향하고 때마침 야당도 경제민주화를 지향하고 있다. 흔들리는 경제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자본가와 기득권계층의 의무와 사회적 책임, 경제적 약자의 적극적 보호, 땀 흘린 노동가치의 존중, 불로소득과 불법행위에 대한 엄격한 환수와 처벌, 국민의 주거권 보호장치 등 공정경제를 위한 입법과 행정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혁신이다. 국회는 78000억원 규모의 4차 추경안을 통과시켜 최근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영업제한을 받은 소상공인과 노동자들에게 명절 전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K방역은 재정 역할과 경제적 기능까지 하는 것이 다시금 입증됐다. 미리 준비한 진단키트처럼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이 경제생태계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행정과 산업혁신에 국가역량을 집중할 때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일주일여 앞으로 다가왔다. 코로나19의 재확산 속에 고향 마을 어귀에 고향 오면 불효자라는 플래카드가 붙을 정도로 마음놓고 고향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산업현장 곳곳에서 폐업과 실업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맞는 명절이 제대로일 리 없다. 그동안 경제활성화라는 미명하에 속절없이 미룬 그린, 공정, 혁신의 포용적 경제를 이제라도 경제중심에 바로 세운다면 코로나19 재앙도 한국 경제에 축복이 될 수 있다 / 구재이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 세무사 경향 2020-09-24

 

대지를 살리고 떠난 아프리카의 여성

 

환경·여성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1940~2011)

 

아프리카, 여성, 최초.” 왕가리 마타이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다. 1971년에 아프리카 동부와 중앙 지역을 통틀어 여성 최초로 박사학위를 땄고 최초로 대학교수에 임용됐다. 2002년에는 케냐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국회의원에 당선. 나중에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환경운동가가 평화상을 받은 일도 최초.

 

평생 주목받은 삶이다. 그 영향력을 좋은 일에 썼다. 독재정권에 맞서고 무분별한 개발에도 항의했다. 1977년에 그린벨트운동을 시작했다. 나무를 심는 시민운동이다. 여성운동이자 빈곤퇴치운동이기도 했다. 아프리카는 식민지 시절 이후 플랜테이션 농업을 한다며 숲을 밀어버렸다. 그 뒤 가뭄과 큰물이 갈마들며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울창한 숲은 남성이 베어냈지만, 황폐한 땅에서 땔감과 마실 물을 구하는 일은 여성이 떠맡았다. 무겁게 이고 지고 몇킬로미터씩 걸어야 했다. 그린벨트운동을 소개하는 2018<한겨레> 기사의 제목은 “‘말라버린 땅의 저주는 여자들에게 퍼부어졌다였다.

 

80년대와 90년대에 나무를 심으며 상황이 나아졌다. 말랐던 우물에 물이 찼고 땔감으로 쓸 나무도 돌아왔다. 비옥해진 땅에 텃밭을 가꾸며 먹을 것도 풍족하다. 묘목이 자라면 그린벨트운동은 그루당 1달러씩을 주었다. “그린벨트운동은 농촌 여성들이 겪는 삶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출발했다.” 지역 책임자의 2005년 인터뷰다. 1999년부터는 지역 여성의 창업을 지원하는 2단계 사업도 전개한다.

 

성과는 대단했다. 2004년에 노벨상을 받을 무렵 3천만그루를 심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심은 나무는 5천만그루가 넘는다. 왕가리 마타이가 세상을 떠난 날이 2011925일이다.

김태권 만화가 한겨레 2020 9.24

 

왜 이성은 감정을 이기지 못할까

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다들 걱정이 커지다 못해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는 메타 근심에 사로잡혔다. 이때 나의 불안은 보다 사적인 것이 되었다. 무감동한 것, 신세 지는 것, 거절하는 것,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아예 귀찮아하는 것, 그 대가로 한없이 편협해지는 것. 혼자 있을 땐 부적응 메커니즘이 자꾸 움직여 내 자신에 대해 최악의 비평가가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을 보면 아예 <지옥의 묵시록> 커크 대령처럼 공포, 공포 그 자체!”라고 읊조리게 된다.

 

얼마 전, 오래 알던 친구와 처음으로 불편해졌다. 그렇게 잘 꾸미고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사람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누가 봐도 명백한 가짜 뉴스를 꺼내며 분개하는데, 조심조심 골목길을 다니다가 급발진으로 전봇대를 들이박은 차를 보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그 주장의 몇가지 오류를 반박하자 그는 전혀 다른 사람 다른 얼굴로 으깨버릴 듯 나를 노려보았다. 어떤 논거를 제시해도 그는 그 망할 신념을 수정하지 않았다.

 

한동안 골치가 아팠다. 그가 원래 양식이 없는 사람이었는지, 편견이란 그렇게 강력한 건지, 일단 방향을 정한 생각은 저렇게까지 끈질긴 것인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서로의 데이터가 일반화되기에는 사고의 지점 자체가 떨어져 있는데다, 주장의 옳고 그름이란 각각의 만족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철학책을 완독한, 어떤 시스템에도 물들지 않은 대학원생에게서 완전히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 사회적으로 추앙받는 어른이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두가 숭상하는 이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믿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반박하는 정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확증 편향비틀린 사고 형태 중 유달리 일목요연하게 정리된은 너무 잦아서 거의 교과서에 실릴 주제 같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매일 쓰는 자물쇠의 원리 하나 모른다. 밥그릇보다 자주 쓰는, 물이 가득한 도자기 볼, 손잡이를 내리면 그 안의 모든 것이 물과 함께 파이프로 빨려간 뒤 다시 하수도로 내려가는 변기의 작동 원리는 말할 것도 없다. 평생 수백만번 들었던 일반 상식, 가을 하늘이 왜 파란지도 모르면서 한번 생각이 꽂히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우리는 부동산 투기에 밝은 신부, 손등에 털이 난 수녀를 상상하지 않는다. 고정관념이란 개인의 경험과 집단의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지고, 우연과 상황의 필터 속에서 합의되는 것. 누가 어느 모임에서 방송국 피디는 다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치자. 스스로 뚜렷한 사회 공개념을 가진 피디가 거기 앉았다면 그 비난으로부터 모든 피디를 엄호할 것이다. 만약 차선을 다투던 상대가 학교 선배였다는 걸 알면 당장 적대감을 철회할 것이다. 판단의 농도는 그렇게 개인의 이해에 달려 있으니까.

 

사실 작동법을 모르고 변기 물을 내리는 것과,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특정 법안에 찬성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누군가의 관점에 뚜렷한 근거가 없다면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의 의견 또한 근거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입증할 수 없는 논리라 해도 지지자가 생기는 순간 기세등등해진다. 숫자는 무기가 되니까. 문제는,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깊은 이해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 믿음을 격려해주는 정보 앞에서만 분출하는 도파민의 기쁨! 결국 세상에는 두 종류의 갈등만 남았다. 나의 이해와 관련된 갈등, 전혀 무관한 죽기 살기 갈등.

 

나라 전체가 누구도 운영하지 않는 방대한 실험실에 던져졌으나 어떤 자료 어떤 문헌도 처음 겪는 불안을 없애주지 않는다. 더 불안한 것은 스마트한 줄 알았던 지식인들이 역병의 잠식 속에서 반쯤 잊힌 사냥개, 도깨비 가발을 쓴 유령, 사상을 매춘하는 복화술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들은 멍청함으로 말을, 제스처로 언어를 삼았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지성의 열매가 아니라 직립보행이나 세가지 색깔을 식별하는 것처럼 진화의 생리적 특징이라서 이성을 되찾고 싶다면 우리가 원숭이로 출발한 아프리카 사바나로 가야 할 것이다. 자연도태가 따라잡기에는 환경이 기절초풍 속도로 변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책을 읽어도 타인들의 이성이 어디서 끝나는지, 나의 이해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건, 사람들은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는 동시에 새로운 무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충걸 에세이스트/ 한겨레 2020 9.13

 

 

코로나 시대, 신은 어디에 있을까

코로나 시대, ()은 어디에 있을까? 철학적 전통에서의 절대자는 인간에게 고통을 허용하고 그저 바라보거나 정죄하고 심판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무력한 인간을 닮은 신의 모습이 기독교 신학자들에게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바로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에서의 유대인 학살경험이 그 촉발제 역할을 했다. 미국 보스턴대학교 엘리 비젤(Ellie Wiesel) 교수는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Night)>을 출간해 크게 주목받았고, 이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소설에서 자신이 있었던 수용소에서는 장대 위에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형벌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마치 예수가 처형된 골고다 언덕을 연상하게끔 세 개의 장대 위에서 사람들을 죽였던 것이다.

 

비젤은 어느 날 중간 장대에 한 어린아이가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목도했다. 안타깝게도 어른보다 더 오랫동안 죽지 않고 장대 위에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매달려 있는 아이를 본 비젤의 일행은 함께 고통스러워했다. 그중 한 명이 외쳤다. “도대체 하느님은 무얼 하시는가?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연이어 외침이 들렸다.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거냐고?” 비젤은 그때 자기 안에서 외치는 분명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바로 여기 계시지. 그는 바로 저 아이와 함께 죽어가고 있다.”

20세기 적잖은 신학자들이 비젤의 글에서 새로운 통찰을 얻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나 희랍철학이 제기하는 신성과는 전혀 다른 신성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제한성과 무력함은 인성의 특징이자, 20세기 이후 현대 기독교가 보여주는 새로운 신성의 신비스러운 속성이 되기 시작했다. 예수의 신적인 본성은 인간의 유한한 인성과 정반대가 아니라, 서로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불안한 인간을 위해 가장 바닥까지 내려와 스스로 유약해진 신과 만나는 장소였다. 신은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모습이 아니라, 함께 고통받고 함께 죽어가는 방식으로 인간과 연합하고 일치감을 경험한다. 내가 보기에 십자가는 반드시 예배당에 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인간 구원의 매개물이 아니다. 십자가는 인간과 신이 고통 가운데 연합하는 치유의 장소다.

 

나치 정권을 반대하고 저항의 목소리를 외치다 39세에 순교한 독일의 신학자가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본회퍼는 당시 시대적 맥락 속에서 고통받는 신의 내재적 속성을 몸소 실천했던 위대한 신학자다. 그는 성서를 진지하게 읽다보면 우리로 하여금 결국 신의 무력함과 신의 고통으로 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에 본회퍼는 당대 대다수 교회 지도자들이 지지한 나치 정권에 대항하여 예수처럼 기꺼이 고통받는 유대인들과 함께 죽어가길 선택했다. 지금도 그는 많은 현대 신학자들에게 고통 가운데 연합하는 신성을 보여준 혁신적인 신학자로 기억된다. 광화문집회 때마다 전광훈 목사가 신학자 본회퍼의 이름을 들먹이며 대통령의 하야를 위해 순교하겠다니 기가 막힌다.

 

신성은 바로 인성과 긴밀하게 연결된 신비한 속성이다. 신성은 절대로 인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 누구나 보유하고 있는 신적인 속성은 우리 자신만 챙기도록 하지 않고 이웃과 연합하고자 하는 영혼의 힘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타인과 함께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를 낮추고 자신을 비워내는 순간 우리는 숨겨진 신성을 회복한다. 티끌 같은 자신의 용돈을 모아 마스크를 기부하는 아이들에게서 이런 거룩한 본성이 빛난다.

 

인류사에 있어서 집단적인 고통의 순간 영혼의 하나 됨을 경험했던 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패배자로 기억되지 않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용감한 혁신가로 기억된다. 그들은 인성과 신체가 비참하게 부서지는 순간에도 신성이 가진 연합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 종교인, 비종교인 모두 이런 거룩한 본성을 회복해야 할 때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경향 2020-09-26

 

 

한국은 가난하다

현 정부의 국방예산은 매년 약 3조원씩 증가하고 있다. 수십조 원을 들여 뉴딜 정책을 추진한다면서 이토록 심각한 가난은 그대로 둘 것인가.

 

한국은 가난하다.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생활수준은 선진국들과 비슷해졌지만 우리 곁의 가난은 여전히 심각하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336만명이나 되고, 소득이 없는 노인들은 폐지를 주워 하루에 겨우 15000원을 번다.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6.7%. 균등화 처분가능 중위소득의 절반보다 소득이 낮은 가구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2017년 기준으로 OECD 빈곤율 평균은 11.6%이고, 한국의 빈곤율은 터키나 멕시코보다 높다. 특히 노동연령층의 빈곤율은 11.8%이지만, 66세 이상 노년층의 빈곤율이 43.4%로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높다. 이는 연금제도가 발달하지 못해서인데 엄청나게 높은 노인자살률과도 관련이 클 것이다.

 

심각한 가난은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한국은 가구의 중위소득과 하위 10%의 소득 경계값의 배율이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은 나라다. 반면 국제적으로 상위 10% 소득 경계값과 중위소득의 격차는 별로 크지 않다. 최근 20년 동안의 변화를 보아도 빈곤층이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져 중위소득과 하위 10% 가구소득의 격차가 크게 확대되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현대의 많은 선진국들은 연금과 사회복지로 가난을 극복해왔다. 우리 정부도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고 국민의 기초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구소득의 중간값인 기준중위소득 30% 이하 가구에 생계급여를, 40% 이하 가구에 의료급여를 지급한다. 그러나 심각한 가난을 해결하기에는 여전히 많이 모자란다.

 

먼저 현재의 기준중위소득은 공식 소득분배지표인 가계금융복지조사의 중위소득보다 상당히 낮다. 또한 그 인상률이 박근혜 정부에서 3%가 넘었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 2020년까지 평균 2.06%에 그쳤다. 얼마 전 정부는 20214인 가구 기준의 기준중위소득을 4877290원으로 2020년에 비해 2.68% 인상했다. 불황으로 인한 가구소득 증가율 하락과 재정 상황을 고려한 것이지만 아쉬움이 크다.

 

가구원 수에 따라 소득을 조정하는 가구균등화지수도 국제적 기준을 사용하는 가계금융복지조사와 다르다. 균등화지수는 보통 가구원 수의 제곱근을 사용하여 4인 가구 대비 1인 가구의 소득이 절반이 되지만, 기준중위소득 계산에서는 그 배율이 더 낮다. 20200.37배에서 20210.4배로 높아진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가뜩이나 노인 1인 가구의 빈곤 문제가 심각한 현실에서 1인 가구의 기준중위소득이 4% 증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맞춘 기준중위소득과 가구균등화지수의 변경을 앞으로 6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시민사회에서 오랫동안 요구해왔고 대선 공약이던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의 폐지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근 정부는 생계급여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을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밝혔지만 의료급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전체 수급자는 203만명인데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 급여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빈곤층이 100만에 달한다. 연락도 하기 힘든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정부가 극빈층 노인들의 생계를 팽개치고 있다는 비판이 높은 이유다.

 

이른바 줬다 뺏는 연금 문제도 여전하다. 현재 기초생활수급자인 가난한 노인들은 기초연금 30만원을 받았다가 다음 달 생계급여에서 같은 금액을 삭감당한다. 이들에게 10만원의 부가급여를 지급하겠다는 안이 합의되었지만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문제는 역시 돈이다.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면 매년 최대 35000억원, 기초생활수급자 노인에게 부가급여를 지급하면 5000억원이 더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정부하에서 국방예산은 매년 약 3조원씩 증가하고 있다. 수십조 원을 들여 뉴딜을 추진한다면서 이토록 심각한 가난은 그대로 둘 것인가. 재난으로 가난과 불평등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포용적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는 정부가 할 일이다./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 시사인 2020.9.26.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의과대학에서 20여년 교수생활 한 이가 의대생들에게 전하는 충심의 조언이다. 현재의 의과대학 교육은 좋은 의사를 양성하는 데 실패했다. 젊은 의사들이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떠나기로 결정하여 응급환자가 거리를 헤매고, 중환자 수술이 미뤄졌을 때, 한국 의학교육은 조종을 울렸다. 의과대학생들의 집단행동 유보선언이 국가시험 응시라는, 선배들의 통역이 그 실패를 다시 확인해주었다. 며칠 전 본과 4학년 학생들이 의사국가시험 재응시를 표명한 이유가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국민건강권이 위협받고있어서라면, 똑같은 이유로 응급실과 중환자실 철수에 동조하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이런 의학교육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기성세대와 그 위 선배들에게 있다. 이들의 주요 죄목은 다음과 같다. 공부만 잘하면 집안일, 학교 청소까지도 면제해 준 죄, 한 반에서 대학 가는 몇 명을 위해 수십 명의 학생들을 엑스트라로 만든 죄, 체육·음악·미술 시간을 빼앗은 죄, 새벽까지 학원 뺑뺑이 돌리고 잠 못 자게 한 죄,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오래 참은 아이가 성공한다고 거짓말 한 죄, 사춘기조차 심하게 앓지 못하게 한 죄, 장편소설 요약본만 읽게 한 죄, 3등급 이하의 아이와는 놀지도 말라고 한 죄, 가고 싶던 수학과·천체물리학과 못 가게 한 죄, 부실한 예과 교육과정 운영한 죄, 편법과 불법으로 큰돈 번 의사들을 성공한 선배로 소개한 죄, 인턴과 전공의를 피교육자가 아니라 임금 싼 노동자로 대한 죄, 괜스레 젊은 전공의와 의대생 부추겨 파업하고 자신들은 쏙 빠진 죄.

 

하지만 정부도 이에 못지않은 잘못이 있다. 학교와 국립병원까지 돈벌이 기관으로 육성한 죄, 규제 프리존, 규제 샌드박스 시행으로 영리유전자 검사 등, 과학적 근거도 없는 각종 검사를 돈 벌라고 허용한 죄, 데이터 3법 개악으로 환자 정보를 영리기관에 넘기는 것을 합법화한 죄, 해외환자는 유인 알선을 독려한 죄, 공공의료 강화하겠다고 하면서 예산은 쥐똥만큼 배정하여 국민을 기만한 죄, 그중에서도 가장 파렴치한 죄는, 자기네들은 이렇게 의료 영리화에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파업한 의사들한테 공공성운운하는 죄일 것이다.

 

하여 의대생들이여, 기성세대를 마음껏 욕하라(하지만 조심하라! 우리도 한때는 당신들처럼 젊었다). 무엇보다 기성세대에 속지 말라. 의사란 직업은 기성세대가 알려준 것과는 전혀 다른 직업이다. 의사란 평생 환자들의 피, 고름, 대소변 속에서 뒹굴어야 하는 직업이다. 종종 허벅지를 꼬집으며 졸음을 참아야 하고, 식사를 하다가도 뛰쳐나가야 하며, 모처럼 떠난 휴가길에서도 입원 환자의 혈압을 틈틈이 확인하고 어쩌면 가족들을 놔두고 먼저 돌아와야 하는 직업이다. 8시간 넘는 대수술을 마치고 탈진해 수술실 바닥에 벌렁 누웠을 때 죽을 듯 밀려오는 피곤 섞인 희열을 반복적으로 즐겨야 하는 이상한직업이기도 하다. 전쟁이 터져도 환자를 두고서는 중환자실을 떠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직업이다. 무엇보다 환자보다 먼저 아프고 더 오래 아파야 하는 직업이다.

 

그러니 그런 직업을 갖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의대를 떠나라. “가만히 있으라는 기성세대의 말에 또 속지 마라. 의대를 떠나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 좋고, 무엇보다 당신들에게 좋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돈이 아니라 힘세고 돈 많은 이들의 돈으로 되라. 떠나기 싫으면 의과대학을 좋은 의사를 키우는 곳으로 바꿔라. 기성세대는 틀렸다. 하지만 여러분이 뭉치면 바꿀 수 있다. 아주 떠날 결심을 하기 어렵다면, 잠시라도 의대를 떠나라. 1, 2년 빨리 의사 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70년 전, 졸업을 6개월 앞둔 한 의대생도 낡은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학교를 떠났다.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국경을 넘으며 그는 마음의 경계를 하나하나 지워 나갔고 마침내 생각이 온 세계만큼 커졌다. 그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진짜 의사가 되어 있었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불렀다. 그를 진짜 의사로 만든 건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 담요 한 장으로 지새운 가장 추운 밤이었고, 손가락이 하나도 없어 손에 막대기를 달고 하는 연주에 맞춰 앞 못 보는 한센병 환자가 부른 노래였다. 당연히 그것은 결코 학교가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의대생은 의대를, 공대생은 공대를, 법대생은 법대를 떠나 용감하게 낡은 오토바이에 올라라. 그 오토바이에 포데로사 II’보다 더 멋진 이름을 붙여도 좋다. 함께할 친구가 있다면 더욱 좋다. 떠나거든 부디 이 위선, 탐욕, 거짓으로 가득 찬 기성세대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말라. 혹시 돌아온다면, ‘진짜가 되어 오라.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로 오라.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한겨레 2020-09-29

 

음모론의 시대

지금 유럽은 코로나19와의 힘겨운 전쟁 중에 이에 못지않은, 또 다른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바로 음모론과의 싸움이다. 유럽연합은 웹사이트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가짜 정보와의 싸움이라는 페이지를 설정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사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하며 온라인 매체에 떠다니는 각종 음모설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은 반드시 그 배후의 비밀스러운 힘으로 조직된다고 믿는 음모론은 우선 세계를 선과 악의 세계로 가려서 본다. 이어서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악의 화신으로 지목하고 이를 집중 공격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세계 지배를 꿈꾸는 중국이 우한에 있는 한 실험실에서 의도적으로 배양해 세계에 퍼뜨렸다거나 빌 게이츠가 자신이 개발한 코로나 백신을 통해 전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게 지금 나도는 대표적 음모설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각종 음모론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사회가 혼란에 휩싸여 미래에 대한 전망이 흐릴 때 지속성을 띠거나 아니면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음모론이 난무한다. 케네디 암살과 9·11 테러는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관여했다거나 아폴로 11의 달 착륙은 실제로는 없었고 조작되었다는 음모론은 아직도 심심찮게 나돈다. 이집트 출신 남성과의 관계로 인해 생길 영국 왕실의 명예 실추를 막기 위해 영국 비밀정보부(MI6)가 파리에서 그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함께 탄 차에 교통사고를 일으켰다는 반이슬람적인 음모론도 입방아거리로 등장한다

 

우리 현대사에도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거론된 사건들이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북한군이 개입되었다거나 불순한 세력에 의한 무장봉기였다는 내용의 음모론이 그렇다. 이 같은 음모론을 펼친 대표적인 극우인사 지만원은 5·18의 가치를 악의적으로 폄훼했다는 이유로 실형 선고를 받았지만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고 들린다.

 

이런저런 음모론의 기저에는 어떤 사건에도 우연은 개입할 수 없고 따라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사건이나 상황을 빈틈없이 조직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힘이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음모론은 신정론(神正論)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전지전능한 신이 악을 이 세상에 남겨둔 것은 바로 이 악을 통해 인간이 선한 세계를 추구하게끔 한다고 주장하는 신정론과는 달리, 음모론은 신 대신에 세계를 지배하려는 권력 엘리트의 세속적인 힘을 전제한다.

 

그러면 음모론을 제기하거나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겐 특별한 표징이 있는가. 일반적으로 음모론은 정치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이 선악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는 새로운 구세적(救世的) 질서를 동경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을 각각 선과 악의 화신으로 설정하고 우리는 중국에서 오는 모든 것을 거의 제거했다고까지 공언하는 트럼프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하다는 정치인도 음모론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본성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긍정적 피드백요소가 있지만, 지나치면 자기중심적인 편집증(偏執症)으로 발전해 쉽게 음모론의 포로가 된다.

 

음모론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가짜뉴스와 대중을 선동하는 포퓰리즘과 한 조()가 되어 정치의 많은 내용을 채우고 있다. 특히 크고 작은 음모론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전파되다 보니 책임의 정치보다는 비난과 핑계의 정치에 날개를 달아준다.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모든 방법을 동원해 상대방을 음모 집단으로 비방하거나 아니면 상대방의 음모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변명으로 정치의 내용을 채운다.

 

편집증 환자나 선동적인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음모론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다는 점을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지적한 적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싶어 한다. 일리아스에서도 트로야의 운명은 신의 음모로 서술되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정체되면 책임은 본인들에게 있지만 먼저 정부를 욕한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음모론을 찾는다.”

 

이 같은 지적은 물론 옳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음모론이 근거 없는 억지 주장만은 아니다. 처음엔 음모론으로 치부되던 내용이 뒤에 사실로 밝혀진 사례도 적지 않다. 1950년대 초반부터 10년 가까이 미국에서 CIA가 생체 실험을 통해 인간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자를 극비에 양성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나돌았다. 너무 황당하게 들려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았지만 197412월 뉴욕타임스가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이같이 실제로 있었던 냉전기의 음모론적인 환경은 유럽연합이 음모론을 경고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과는 상당히 다르다. 얼마 전 홍콩의 한 교수가 음모설을 뒷받침하는 맥락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한의 연구소에서 배양됐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가짜뉴스라는 이유로 그녀의 계정을 일단 정지시켰다. 중국의 압력 때문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학계에서 우선 논문의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음모론은 공론의 장을 피한다. 그렇다면 코로나 거짓말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음모론자와의 대화는 아예 불가능한가. 이들과의 대화에는 마치 항원을 인체에 주입해서 항체를 만드는 백신처럼 감정이입이 먼저다. 위에서 언급된 유럽연합의 웹사이트도 음모론자를 대하는 수칙에서 이들을 비웃거나 너희들 주장이 틀렸으니 포기하도록 강요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되레 강하게 반발하고 이전보다 더 음모론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경향 2020-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