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 보수’와 ‘싸가지 없는 진보’ 경향 2020.09.30.
추미애가 드러낸 문재인 정부의 '정의' 프레시안 2020.10.02.
위대한 숲 -Ⅰ, 폭염 경향 2020.10.16.
뒤틀린 잣대들 전성시대 프레시안 2020 10.26
윤석열 검찰총장의 민주적 통제에 대한 몰이해 한겨레 2020.10.26.
소득 3만 달러 시대,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는가 프레시안 2020 1026
‘신성 가족’의 두 얼굴, 이탄희와 윤석열 한겨레 2020-10-28
미-중 신냉전과 ‘천하삼분지계’ 한겨레 2020-10-29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2019. 10. 29. 김훈 / 소설가
농가 아프리카돼지열병 원인은 멧돼지? 경향 2020.10.30.
탄소중립 선언’ 이후 과제 경향 2020.10.30.
숫자 속에 가려진 죽음, 애도마저 사라졌다 경향 2020.10.31
태도 보수’와 ‘싸가지 없는 진보’
소위 ‘태도 보수’의 저작권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있다. 대선 패배의 암울이 짙게 드리우던 2012년 12월31일 당시 이낙연 의원은 ‘제3세대 민주당을 준비해야 합니다’라는 개인 성명을 발표한다. “민주주의, 인권, 복지 같은 진보적 가치를 충분히 존중하지만, 막말이나 거친 태도, 과격하고 극단적인 접근을 싫어하는 성향을 ‘태도 보수’라고 말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민주당이 ‘태도 보수’의 유탄을 맞지는 않았을까.” ‘태도 보수’로 변주되었지만, ‘싸가지 없는 진보’를 대선 패인으로 꼽은 것이다.
당시 문재인 대선 후보는 “핵심을 찌른다”며 2013년 펴낸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이낙연의 ‘태도 보수론’을 그대로 인용한다. 역시 18대 대선 패인으로 ‘태도’ 문제를 지목한 것이다. 같은 책에서 좀 더 직설적으로 되돌아본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은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다. 이념, 정책, 주장 자체가 아니라 그걸 표현하는 태도 때문에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싸가지 없으면 소용이 없으며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는 성찰은 실제 다음 대선 승리의 동력이 됐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특히 겸손함과 진중함, 진정성을 주는 ‘문재인의 태도’는 전임 권력의 천박함과 대비되며 강렬한 힘을 발휘했다.
‘싸가지 없는 진보’의 귀환일까. 검찰의 일괄 ‘무혐의’ 처분으로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의 군휴가 의혹은 면죄부를 받았다. 함에도 그간 이번 사건을 대하는 추 장관과 집권여당의 ‘태도’는 상흔으로 남는다. 애초 공정과 반칙의 문제 제기에 “낮은 자세로 해명했다면 이토록 논란이 되지 않았을 일이다”(유인태 전 의원). 추 장관은 야당 의원 질의 때 팔짱을 끼고 노려보고, “소설 쓰시네”라고 비아냥대고, “억지와 궤변을 책임질 수 있느냐”고 훈계하고 다그쳤다. 독선과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호통치고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모습, 어딘가 익숙한 광경이다. 여당 의원들의 과격한 대응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야당의 의혹 제기를 “쿠데타 세력의 정치 공작”으로 몰고, 제보자 당번병사를 ‘범죄자’로 공격하고, 급기야 “안중근 의사의 말을 몸소 실천했다”는 대변인 논평까지 등장했다. 내 편을 옹호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는다.
일찍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싸가지 없는 진보’의 특징으로 무례함, 도덕적 우월감, 언행 불일치 등을 꼽은 적이 있다. 총선 압승 후 잇따른 광역단체장의 성추행 사건, 부동산 논란, ‘윤미향 사건’ 등을 대하는 과정에서 그 특징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윤미향 사건’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공격하고, 광역단체장 성추행 사건을 방어하기 위해 피해자를 악마화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민망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단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거나 ‘우리는 더 큰 일을 한 사람이라 작은 흠은 문제될 게 없다’는 독선과 오만이 도드라진다.
한국갤럽이 2018년 9월부터 3개월마다 실시하고 있는 정당별 호감도 조사에서 민주당에 아픈 결과가 나왔다. 9월 넷째주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에 ‘호감이 간다’는 응답은 40%,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응답은 49%를 기록했다. 직전 6월 조사 때보다 호감도는 10%P 하락하고, 비호감도는 11%P 상승했다. 처음 비호감도가 호감도를 앞질렀다. 그새 대형 정책 실패나 권력형 비리 의혹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일련의 불공정 논란에서 내보인 오만한 태도, ‘싸가지 없는’ 언행 등이 쌓여 비호감도를 높였을 터이다. 비호감도야말로 내용보다 태도에서 비롯된다. 과거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에서 보듯, ‘비호감도’가 높은 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할 수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한 직후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면서 ‘유능함’ ‘도덕성’과 함께 ‘태도’를 특별부탁했다. “세 번째로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태도입니다. 세 번째로 말씀드리기 때문에 세 번째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정치와 공직에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민을 대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태도, 사용하는 언어, 표현 방법, 이런 태도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형식이 아닙니다. 이 태도는 거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태도가 본질이다. 집권 4년차, ‘싸가지 없는 진보’의 유령이 어른거리는 지금이야말로 다름 아닌 민주당이 되새겨야 할 금언이다./ 양권모 편집인 경향 2020.09.30
추미애가 드러낸 문재인 정부의 '정의'
법무부장관의 거짓말은 위법보다 가벼운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 말은 보수 진보, 여야와 진영을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이 인용된 말 중의 하나로서 가히 어록에 수록되어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사회에서 기회가 더 평등해졌고, 과정의 공정함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로 가기 시작했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힘이 정의이고,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플라톤의 '대화편' <공화국>에서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로 하여금 내리게 한 정의(正義)의 정의(定義)이다. 또한 '대화편' <골기아스>에서 소피스트인 칼리칼레스는 도덕을 '강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약자의 발명품'이라고 비난한다.
아들 병가 연장 의혹과 관련한 검찰 수사에서 추미애 장관의 국회 답변이 거짓으로 드러났다. 추 장관은 올해 초 인사청문회를 포함한 국회 답변에서 시종일관 '보좌관에게 지시하지 않았고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검찰수사 결과 추 장관이 보좌관에게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결과도 보고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에 대해 추 장관은 "국민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면서도 야당에 대해서는 자신과 아들에 대한 "근거없고 무분별한 정치공세"라고 비판했다. 자신의 거짓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과나 해명도 없다. 야당이 아무 잘못이 없는 자신을 공격의 소재로 삼기 위해서 무리한 주장과 공격을 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추 장관 아들 휴가 관련 의혹은 과도하게 부풀려진 언론 보도가 없지 않았고, 야당이 이 사건을 정치적 공세의 장으로 삼으려 했다는 지적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정당하고 정의롭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지난 1월에 고발된 사건을 뭉개다가 수사를 본격화한지 불과 20여일 만에 수사 결과를 내놓고, 그것도 지난 22일 추 장관 아들 서 씨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이후 불과 6일 만에 결과를 발표한 것 등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지원장교인 김 모 대위가 처음에는 "휴가를 승인했다"고 했다가 나중에 번복한 사실 등에 대해 대검이 보강 조사를 지시했지만, 서울중앙지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등 추 장관 측 검찰 인사가 방향을 정해놓고 맞춤형 수사를 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다.
야당이 특검을 주장하지만 여당이 받을 리도 만무하고 특검을 한다고 진실이 밝혀지겠는가. 정치의 장에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행태는 그 자체로 비판받을 일이지만, '정의부(Ministry of Justice)'라는 법무부의 수장이 보여 준 행태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를 정권의 철학으로 내세운 정부라면 장관의 거짓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법률적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하더라도 '정의'를 관장한다는 부처의 수장이 개인적인 문제에서 국민을 속였다는 사실은 법을 위반한 행태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이는 사회정의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며, 정권의 성격과 도덕성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국회에서 국민들을 향해서 명백하게, 그것도 누차 거짓을 말한 법무부 장관이 어떻게 검찰개혁을 추진할 명분을 가질 수 있는가. 도덕성과 정당성이 담보되어도 쉽지 않은 것이 기득권의 저항이고 개혁이다.
정권이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당사자인 고위공직자의 책임지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대표성과 책임성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라는 당위가 아니더라도 평균적 자연인에도 못 미치는 도적 수준과 정의의 관념을 가진 공직자를 국민은 원하지 않는다.
이를 인식하는 지성과 정의감이 리더십의 용기이고 결단력이다. 강성 지지층과 팬덤의 맹목적 지지는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은 정의와 공정의 잣대를 정확히 적용하고 협애한 법의 영역을 벗어나 시민들의 정의와 도덕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정치철학에 입각하면 된다.
"공직으로부터 무능과 부패를 몰아내고 공공의 복리에 이바지하는 가장 훌륭한 인물을 선발하고 양성하는 방법의 발견 – 이것이 정치철학의 과제이다." 1926년 출판되자마자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단기간 내에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윌 듀렌트의 저서인 <철학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에 나오는 말이다. 한국사회가 곱씹어야 할 말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 프레시안 2020.10.02.
위대한 숲 -Ⅰ, 폭염
인간이 자연에서 얻는 서비스 가치를 최대로 높이는 방법은 자연을 보전하는 것이다. 유엔이 20년 전 전면에 내세운 생태계서비스 개념이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자연의 위대한 능력을 무시하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보전은 소위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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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점점 심해지고 있는 기후위기는 이산화탄소 급증으로 인한 온도 상승에 기인한다. 지구 평균온도가 1도 상승했고, 우리나라는 지구 평균의 두 배씩 뛰고 있다. 극지방 빙하와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는다는 뉴스와, 북미와 호주의 사상 최악 산불뉴스, 아마존의 열대우림 파괴뉴스가 연일 도배되지만 정작 우리나라와는 동떨어진 내용들이다. 과연 우리는 지구 반대편 기후재앙의 피상만 바라보며 남의 집 불구경만 해도 되는 것인가? 우리나라 온도가 이들 나라보다 두 배씩 뛰는 이유는 궁금하지 않나? 단지 북반구 중위도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으로 치부하면 그만인가?
위대한 자연을 단편적 숫자로 표현하긴 불가능하지만, 간단한 산수를 해 보자. 우리나라 연평균 강우량은 1300㎜가 조금 안 된다. 육지에 내린 비는 흘러서 바다로 가거나 증발산한다. 물이 증발산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상온에서 1ℓ의 물이 수증기가 되기 위해서는 약 560㎉가 넘게 필요하다. 숲이 시원한 이유는 나무가 물을 증발시키며 주변 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숲이 지속적으로 발달해왔는데 왜 이렇게 온도가 높아지는 것일까?
산림청은 숲을 자연에 맡기면 쇠퇴한다는 엉뚱한 논리로 지난 수십년간 줄기차게 숲의 나무를 베어내왔다. 최근 20년간 숲가꾸기 사업 면적은 국토 전체 산림면적 대비 112%에 달한다. 어린 나무를 베어내는 등 상대적으로 주변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작은 사업을 제외한다고 해도 간벌사업 면적만 총 산림면적의 60%에 달한다. 산림청이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간벌 후 숲에서 증발하거나 지하로 침투하지 않고 유출되는 물의 양은 사업 전과 비교하여 사업 후 10년간 평균 1.5배나 증가한다고 한다. 산림에서 빗물이 유출되는 양을 대략 50%로 계산한다면 총 강우량의 25%가 증발되지 않고 추가로 유출된다는 말이다. 증발될 수 있는, 연간 320㎜의 물이 간벌지역에서 추가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믿기 어려운 숫자이지만 정부의 연구결과이니 따라가 보자. 최근 20년간 간벌한 산림면적 중 최소 50%에서만 유출량이 증가했다고 가정해보자. 약 2만㎢에서 증발될 수 있었던 물은 총 60억t이 넘는다. 이 물의 기화를 위한 열량은 무려 3500조㎉나 된다. 휘발유 1ℓ의 열량은 약 7500㎉이다. 매년 무려 4600만t의 휘발유가 만들어낸 열을 다시 흡수할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소비된 휘발유 총량의 무려 35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단지 숲가꾸기라는 사업의 중단만으로도 우리나라 대기 중에 떠도는 엄청난 열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온도가 그만큼 낮아지니 폭염재난을 줄일 수 있다는 말이다. 자연의 위대함이다. 과연 과도한 화석에너지 소비로 발생해 떠도는 열을 흡수할 방법이 이것 말고 있는가? 허무한 숫자놀음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위대한 숲을 제대로 활용할 지혜를 논하자./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경향 2020.10.16
뒤틀린 잣대들 전성시대
뒤틀린 잣대를 되살려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쫓기는 범죄용의자가 검찰의 도움을 받아가며 도피생활을 했다는 충격적인 폭로가 나왔다. 이른바 라임 자산운용사태와 관련해 감옥에 가 있는 김봉현씨가 언론에 보낸 ‘옥중서신’을 통해 “내가 붙잡히기 전에 그렇게 도망다녔노라”고 주장한 내용이다.
김씨는 서신을 통해 검거되기 전 자신의 범죄를 무마시키기 위해 룸살롱에서 검찰 쪽 사람들과 1000만원짜리 술판을 벌이기도 했고, 검찰과 줄이 닿는 야권 정치인에게 큰돈을 건네기도 했다고 썼다. 체포된 뒤 조사과정에서 그런 비리를 진술했는데도 검찰은 묵살하고 수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당 쪽 정치인들을 겨냥해 없는 죄 만들어내는 조작 수사에 협조하도록 회유했다고 털어 놓았다.
물론 일부의 주장대로 ‘사기꾼 한사람의 실없는 이야기’(검찰총장도 국회 국정감사에서 그런 투로 말했다)로 치부해 버리면 그냥 그뿐일 수 있으나,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사안은 심각해진다. 더구나 김씨가 말한 ‘술좌석에 있던 검찰사람들’이 법무부 감찰과정에서 특정되는 등 김씨의 폭로가 하나씩 사실로 밝혀져 가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문제는 그게 검찰 일부의 일탈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김봉현씨의 옥중서신 가운데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대목, 수배중인 죄인이 다른 쪽도 아닌 검찰의 보호를 받으며 활개치고 다녔다는 내용이다. 더러 적발되는 정치공작이나 죄 없는 사람 죄인 만드는 것도 용서받지 못할 범죄이지만, 검찰의 수배범죄인 감춰주기는 특히 대담하게 진화한 신종 검찰범죄라는 점에서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이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월급 줘가며 도둑 잡으라고 내보냈더니, 오히려 도둑을 끼고 돌면서 감싸고 숨겨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거다.
검찰은 뭐하는 곳인가. 범죄수사를 통한 형벌권을 행사하고, 법원의 판단에 의해 구체화된 형벌의 내용 실현을 지휘 감독하는 곳이다. 따라서 형벌권 행사와 관련된 검찰의 잣대는 추호도 흔들림 없는 올곧은 공정성과 당당한 투명성이 절대로 보장되어야 한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되 과하지 않게 절제된 권한을 행사해야 맞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2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검찰청 국정감사를 마친 뒤 국감장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권 때 어떤 검찰총장이 다툼이 예상되거나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결재서류를 들고 부하가 사무실에 오면, 내용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어느 쪽이 우리 편이냐”고 먼저 묻곤 했다는 이야기가 보도된 적이 있다. 유명한 이야기다. 그분에게는 옳고 그름이나 타당함 여부가 사안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아군이냐 적군이냐가 중요한 잣대였던 셈이다.
엊그제 검찰 국정감사에서 서슴지 않고 정치 냄새를 뿜어댄 윤석열 검찰총장은 그런 이명박 정권 때가 정치적 중립이 잘 보장된 시기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일시적 착각일수 있으나 그런 윤씨의 잣대를 놓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건 그의 체질 아니냐며 잣대가 망가져 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퍽도 많았다.
근래 들어 검찰 주변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검찰조직의 잣대에 이상이 생겼거나 고장이 났다는 신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그 잣대가 단순 고장이 아니라 망가지거나 뒤틀려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권력이 견제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경지에 도달하면 잣대는 반드시 망가지거나 뒤틀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잣대는 사물을 판단해 가름하는 기준이다. 그래서 잣대는 적용받거나 관계되는 사람 모두가 공동으로 수긍할 수 있도록 공정·타당해야하고, 때문에 그 기준도 움직일 수 없도록 분명·정확해야 할뿐 아니라 관계당사자 모르게 조작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의 잣대가 얼마나 엄격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정교하기 그지없는 절차를 거치면서 털끝만큼의 오차나 빈틈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하나 같이 적용받는 기준으로 도량형(度길이 量부피 衡무게)이 있다. 원래는 동서양이나 나라마다 달랐던 기준이었다. 그중 길이를 재는 기준인 지금의 미터가 실제로 얼마나 철저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정해졌는지 들여다보자.
1793년 프랑스 국민 공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한 1m의 길이는 북극점에서 적도까지 자오선 길이의 1천만분의 1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재보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지구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길이에 오차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 되었다. 여러 차례의 논의와 수정이 이어졌다. 드디어 1983년 제17차 국제도량형 총회에서 지금의 1m 길이가 확정되었다. 진공에서 빛이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달려간’ 거리를 1m로 정의하였다! 그만큼 엄하고 모질기까지 한 과정을 거쳐 기준이 나왔다. 그리고 존중받고 있다.
꼭 도량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무수한 분야에 무수한 잣대와 기준이 만들어져 있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중요한 건 애당초 도량형의 기준 결정과정 같은 치열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지라도 모두가 동의해 만든 하자 없는 잣대와 기준이라면, 장삼이사(張三李四) 할 것 없이 철두철미하게 존중하고 따라줘야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한 나라에서 정해진 가장 큰 잣대와 기준으로, 모든 국민이 하나 같이 지켜야 할 헌법을 놓고서는 두말 할 나위가 있을 수 없다. 헌법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 헌법은 잘 정해져 있는 잣대와 기준이 무수히 학대 받고 훼손되며 유린되어 왔다. 헌법의 잣대가 백안시당하며 망가지고, 기준이 뒤틀림 당하며 패대기쳐진 그게 바로 이 나라 현대사다. 하여 OECD 국가 중 대한민국만큼 구속된 대통령이 많은 나라는 없다.
면면과 상황을 떠올려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사람 모두 헌법 무시하다가 험한 꼴 당했다. 헌법 가운데서도 으뜸 잣대요 으뜸 기준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제 1조를 우습게보고 짓밟은 게 화근이었다. 힘센 기득권층이 박수부대가 되어 맞장구치며 국민 하찮게 보고 충동질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 암울한 시대에서 ‘최후의 인권 보루’라는 사법부의 ‘우두머리 잣대’가 바른 길 외면하고 곁길 걷다가 쇠고랑을 차는 모습도 우리는 보았다. 휘두르는 권력 견제 받기 싫어하는 검찰의 뒤틀린 잣대를 염려하는 사람들도 최근 부쩍 늘었다.
이 울적한 시대에 사회전반을 제대로 감시하면서 건강한 풍토로 이끌 것을 기대하며 사람들은 ‘이른바 언론’에 희망을 걸고 있는 듯하다. 허나 부질없는 생각처럼 보인다. 기자들은 더러 자신들이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있으나 우선 당장 사주들의 주파수에 자신들의 시각을 맞추는데 열과 성을 다해 매달리고 있다.
취재 경험도 물론 없고 기사 한건 써 본적도 물론 없는 사주들은 부모를 잘 만난 이유로 언론 사주가 되어 기자들을 부리며, 세상을 멋대로 쥐락펴락 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명감 있는 언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지 않는 것 같다. 사안의 옳고 그름 보다는 유불리를 철저히 계산한다. 이 한건의 기사가 어느 진영에 더 이익이 되고 그게 내게 이익인지 손해인지를 먼저 따진다. 진영에 따라 ‘미워하거나 예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중무장까지 완료되어있는 상태다. 그건 이미 언론이 아니다. 필자가 이 시대의 언론을 ‘이른바 언론’이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사주들은 기자들이 갖고 있어야 할 언론 자유와 사명감을 일찌감치 압류해 자기들 안 호주머니에 넣어 둔 상태로 기자들을 부린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케이블 체널들도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값싼 해설자들과의 대담프로로 시간을 메우느라 바쁘고, 덩달아 ‘질 낮은 해설’들이 판을 치고 있다. 안타깝다. 언론들의 잣대도 그래서 망가지고 뒤틀린지 오래다. 바야흐로 망가지고 뒤틀린 잣대들의 전성시대다.
모두들 잣대와 기준들을 되살려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검찰도 사법부도 이른바 언론도 정치판도 지금은 그게 절실한 때다. 프레시안 2020 10.26
윤석열 검찰총장의 민주적 통제에 대한 몰이해
얼마 전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의 발언 내용 중 정부 조직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동의하기 어려운 두가지 발언을 지적하고 싶다.
윤 총장은 수사의 중립성 등으로 “법리상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조직 내 검찰과 같이 중립성이 요구되는 청 단위의 조직이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기획재정부 소속 기관인 통계청인데, 통계청도 정치적 간섭 없이 국가의 통계를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수집·작성해야 하는 중립성이 요구되는 조직이다. 이런 이유로 통계청장과 기획재정부 장관을 수평적 관계로 볼 수 있는 것인가? 법률적으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관계는 더욱 명확하다.
정부조직법 제7조 1항은 각 “행정기관의 장은 소관사무를 통할하고 소속공무원을 지휘·감독한다”, 3항에서는 “소속청에 대하여는 중요 정책 수립에 관하여 그 청의 장을 직접 지휘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검찰청법 제8조에 의하면 “법무부 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정부조직법과 검찰청법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관계가 수직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두번째로 윤 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특정 수사에 대한 총장에 대한 수사지휘 배제를 위법·부당한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법무부 장관에 대한 수사권 지휘 부여는 여러 함의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장관과 총장 간 상호견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조국 전 장관 사건에서 경험하였듯이, 법무부 장관이 연루된 수사는 검찰총장의 지휘로 수사가 가능하다. 이와 반대로 검찰총장이 연루된 수사는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여 검찰총장을 배제하고 수사팀이 총장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수사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상호견제는 권력기관인 검찰 조직을 매우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안전장치라 할 수 있다.
현재 윤석열 검찰총장은 그의 가족들이 자신이 이끄는 조직으로부터 수사를 받고 있다. 그의 장모는 사문서 위조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의 아내는 주가조작 혐의 등으로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그의 가족에 대한 수사팀의 독립성과 중립성의 최대 걸림돌은 윤 총장 자신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 발동을 통해 총장의 지휘 영향력을 배제시킴으로써 검사들의 실질적 수사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은 너무 정당한 것 아닌가? 오히려 국감장에서 가족 수사에 대한 부당함을 토로하였는데, 이는 현재 수사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발언이었다.
우리나라 정부조직에는 실적주의에 의해 임용된 직업관료와 엽관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임명된 임명직 공무원이 공존한다. 즉 모든 정부부처는 직업관료와 직업관료를 지휘하고 통제하는 정치적으로 임명된 장관으로 구성된다. 직업공무원제는 관료들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 및 행정의 능률성을 기할 수 있는 반면 국민의 선호를 반영하려는 대응적 유인이 약하고 신분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관료 스스로 권력화될 수 있는 약점이 있다. 따라서 국민의 지지로 선출된 대통령은 장관을 임명하고 정치적으로 임명된 장관은 인사권을 가지고 직업관료를 통제함으로써 직업관료들이 좀 더 국민의 요구에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 엽관주의의 기본적인 정신이다. 현재 대다수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다.
검사라는 직업관료로 구성된 검찰조직도 장관 통제 영역의 예외가 아니다. 검사 출신의 검찰총장과 검사들 간에 검사동일체라는 폐쇄적 문화 속에서 기소와 수사가 편의적, 자의적으로 행사되어도 이에 대한 견제장치가 없다면 ‘리바이어던’의 관료집단 성역이 만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검찰조직은 국민의 신체적 자유를 제약하고 국가형벌권이라는 행정권을 집행한다는 점에서 엽관주의에 의해 임명된 장관의 문민통제가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지난 국감에서 장관에게 부여된 합법적인 통제 수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윤석열 총장의 태도는 검찰조직을 수사의 독립성이라는 미명하에 국민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스스로 ‘리바이어던’이 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한겨레 2020.10.26.
소득 3만 달러 시대,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는가
[좋은나라이슈페이퍼] 객관적 삶의 질과 행복, 그리고 행복정책
지난 반 세기 동안 전 세계 국가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이룬 나라를 꼽으라면 우리나라가 단연 최상위권에 위치한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67에 불과했으나, 2019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3만2111로 이 기간 동안 480배 가까운 성장을 경험하였다. 우리나라가 지난 반 세기 동안 일궈온 성과는 경제적인 측면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PISA 점수나 대학진학율로 대표되는 교육 수준이나 평균수명으로 대표되는 건강 수준도 세계 최상위권이다. 이와 같이 소득, 교육, 건강과 같은 객관적 삶의 조건들은 그 동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이정표로 작동해 왔고, 결과적으로 많은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질적인 면에 대한 성적표는 객관적 지표에서의 성공과는 많이 다르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대표하는 우리 사회의 질적 자화상은 OECD 국가 중 자살율과 노인빈곤율 1위라는 숫자가 잘 보여준다. 특히 행복이라는 측면에서의 평가를 보면, 2019년 UN Happiness Report의 우리나라 행복 순위는 54위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질적 수준이 소득이나 교육, 건강과 같은 객관적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객관적 삶의 질 지표에 나타난 우리 사회의 모습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실제로 느끼는 삶의 주관적인 만족감, 즉 행복 간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현상이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관찰된다. [그림 1]은 1945년에서 2000년까지 미국의 실질소득 수준 변화와 삶의 만족도 조사에서 “매우 행복하다”라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 변화를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소득 수준은 3배 가까이 늘었지만 매우 행복하다고 응답한 응답자의 비율은 거의 일정하였다. 소득 증가가 행복 수준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소득과 행복 간의 괴리는 Easterlin 패러독스라고 불리는 현상인데 미국 뿐 아니라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서도 폭넓게 관찰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득이나 교육, 건강 등과 같은 객관적 삶의 질이 우수한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객관적 삶의 조건과 질적 자화상 간의 괴리나 Easterlin 패러독스 같은 현상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라마다 소득과 같은 삶의 객관적 조건이 행복으로 치환되는 정도가 다르고, 따라서 같은 소득 3만 달러라고 해도 어떤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좀 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객관적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간의 연결고리가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둘 간의 간극을 메우는 새로운 접근으로서 행복정책을 소개하려 한다.
객관적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행복에 대한 고민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행복한 삶을 쾌락적인 삶으로 볼 것인지(hedonism) 혹은 의미 있는 삶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eudaimonism) 아리스티푸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이 시대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그만큼 행복은 인간 삶의 중심에 위치한 핵심적인 가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이 과학이나 정책 담론의 주요 주제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는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과학과 사회과학의 영향을 받은 정책 담론의 전반에 흐르는 실증주의 전통이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상을 주요 논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러다 보니 1930
년대 'good life movement'로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과 정책결정자들은 행복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관적 현상보다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조건, 즉 객관적 삶의 질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추세의 대표적인 예가 1930년대 Gross National Product(GNP)의 등장이다. 행복한 삶이란 결국 경제적인 풍요가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GNP는 국가 정책의 목표함수로 기능하였고, 이후 국내 정책에 적용하기 더 용이하다는 이유로 Gross Domestic Product(GDP)로 변경되어 전 세계 국가에서 지금까지 일종의 정책의 지향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우리 사회 정책 담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 2만 달러 달성, 3만 달러 달성과 같은 구호는 바로 중요한 정책목표로 작동하는 GDP의 활용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GDP로 대표되는 소득과 같은 경제지표 만으로 한 사회의 전반적인 후생수준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경제 이외에 교육, 건강, 환경 등 삶의 다양한 분야의 객관적 조건을 포괄하는 객관적 삶의 질 개념이 대두되었다.
객관적 삶의 질과 행복의 관계를 살펴보면, 객관적 삶의 질은 행복이라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투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행복한 삶을 위해선 경제적 자원과 함께 건강한 신체와 깨끗한 환경, 그리고 이성적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교육 등의 객관적 조건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현재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일종의 정책 길라잡이로 취하고 있는 전략이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영역을 정하고 그곳에 자원을 투입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적절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국민 후생을 높이고 행복한 사회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접근의 이면에는 객관적인 삶의 질이 주관적인 행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는 중요한 가정이 깔려 있다. 이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접근이다. 하지만 정책의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경제, 교육, 건강과 같은 객관적 삶의 조건들이 반드시 행복을 약속해주는 충분조건은 아니며, 객관적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간의 링크가 국가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적이 중요한 이유는 Easterlin의 패러독스에서 관찰된 현상과 유사하게 객관적 삶의 질과 행복과 같은 주관적 심리상태 사이의 상관관계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높지 않다는 실증적인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 2]를 한 번 살펴보자. 우리나라 지도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실제 행복 수준이 건강, 안전, 환경, 경제, 교육, 관계 등 객관적 삶의 질을 고려했을 때 기대되는 행복 수준에 비해 더 높은 지역이고, 푸른 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반대로 실제 행복 수준이 기대 행복 수준 보다 더 낮은 지역이다. 다시 말해 붉은 지역은 객관적 삶의 조건들이 푸른 지역에 비해 행복으로 더 효과적으로 치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행복 수준과 기대 행복 수준을 행복의 갭이라고 정의하면 행복의 갭이 지역적으로 다르게 분포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책에 있어 삶의 객관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노력만큼이나 어떻게 하면 향상된 객관적 조건들이 효과적으로 국민 행복의 증진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 정책이 관심을 가지고 자원을 투입하는 객관적 삶의 질과 이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주관적 행복, 바로 그 사이에 정책 담론의 관심이 좀 더 필요한 빈 공간, 즉 정책 니치가 존재한다.
삶의 선택의 자유와 행복
그렇다면 소득이나 교육, 건강과 같은 객관적인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간의 괴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한다. 행복에 대한 기존 논의들, 그 중에서도 특히 긍정심리학과 Sen(1980)의 역량이론(capability theory)에서 강조하는 행복의 요체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선택이다. 개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행복한 삶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소득과 상관 없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신체조건과 상관 없이 자유로운 이동을 할 수 있으며, 육아를 위해 자유롭게 근로조건을 선택할 수 있고, 생계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에서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은 비로소 행복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삶의 조건이 뛰어나더라도 삶의 자유로운 선택이 어려운 사회라면 객관적인 조건에 버금가는 행복을 느끼기 힘들다.
삶의 선택의 자유와 행복 간의 관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잘 설명해준다. 행복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조사라고 할 수 있는 UN의 World Happiness Report는 행복에 영향을 끼치는 핵심적인 사회적 요인 중의 하나로 자유로운 삶의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019년 조사에서 삶의 선택의 자유 항목에서 전체 조사 대상인 154개국 중 144위로 최하위권에 속하였다. 행복한 사회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개인이 자신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GDP 규모로는 세계 10권이라고 하지만 헬조선이라고 불리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려워진 세상이고, 그런 세상에서 개인은 아무리 교육을 잘 받고 소득이 높더라도 행복할 수 없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는 지금의 암울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키기 위해선 소득이나 건강, 교육수준을 높이는 것과 같이 단순한 객관적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한 정
책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삶의 선택의 자유를 넓혀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정책 패러다임이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풍요 속의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책 담론에서 행복을 목적함수로 한 새로운 시각이 요구된다.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으로서의 행복정책
그렇다면 객관적 삶의 질만큼 혹은 그 이상의 행복 증진을 위한 정책 니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비수도권 지역에서 지방정부들이 지역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흔히 추진하는 문화센터나 도서관 건축 사업의 예를 들어 보자. 문화센터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문화강좌나 도서관 서비스는 지역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분명 주관적 행복의 제고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아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지역의 아이 돌봄 서비스 부족으로 육아에 메인 젊은 가족들의 서비스 사용 가능성이 낮아진다면 이러한 물리적 환경의 개선이 주민의 행복 수준을 높이는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일 것이다. 비수도권 지역의 문화센터나 도서관이 본연의 서비스를 지역주민들에게 제공하고 주민의 행복 증진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이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리적 제도적 인프라가 동시에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교통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고 돌봄서비스가 함께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엔 관련 없어 보이는 문화, 교통, 복지 서비스가 패키지로 연결되어 제공되어야 비로소 문화센터나 도서관이라는 객관적 삶의 질 증진을 위한 투자가 실제 주민의 행복 증진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행복정책은 객관적 삶의 질이 주관적 행복으로 효과적으로 치환될 수 있도록 정책 담론의 중심에 행복을 두는 것이 핵심이다. 다시 말해 GDP 성장이 아닌 국민행복의 증진을 정책의 목적함수로 하여 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려면 정책과 관련된 많이 것이 변화되어야 한다. 우선 정책의 목적함수가 성장이나 소득증대가 아닌 행복으로 바뀌어야 한다. 행복이 정책의 중심이 되면 정책의 내용도 달라지게 된다. 단순히 개인의 소득을 높이려는 노력만으로는 행복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나 근로장려금 제도와 같은 소득 증대를 위한 정책만으로는 우리가 꿈꾸는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데 한참 부족하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소득은 엄청나게 늘었지만 국민의 행복 수준은 소득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언뜻 보기에 이전의 성장 중심 정책과 크게 성격을 달리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넓히는데 그다지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성장 프레임과 궤를 같이 한다. 개인의 소득을 늘리는 정책은 동시에 선택의 자유를 제고해 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탈노동, 탈가족 정책과 결합했을 때 비로소 행복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행복정책은 다분히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다. 앞의 사례에서도 언급했듯이 문화센터와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정책은 교통정책, 가족정책과 적절히 결합되어 개인이 문화소비의 선택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과 연결된다. 전통적인 접근이 이들 정책을 개별적으로 다루었다면, 행복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서로 이질적일 수 있는 정책을 큰 틀에서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객관적 삶의 질을 위한 물리적 환경에 대한 투자는 국민의 주관적 행복을 높이기 위한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빈 공간이 존재하며, 행복정책은 이를 채우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 객관적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간의 괴리는 어떻게 보면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정책의 빈 공간이 적절히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따라서 큰 틀에서 일종의 정책실패라고도 볼 수 있다. 정책 담론의 중심에 행복을 담고 이를 중심으로 삶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목표, 수단, 평가 등이 새롭게 디자인될 때, 우리나라는 비로소 소득 3만 달러에 걸맞은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구교준 고려대 교수/프레시안 2020 1026
‘신성 가족’의 두 얼굴, 이탄희와 윤석열
판사 이탄희가 도전했던 법원의 ‘신성가족’ 구조는 여전히 건재하다. 사법농단 판사들은 모조리 무죄 받고 속속 재판업무에 복귀했다. 검찰총장 윤석열은 ‘가족’들의 수호자다. ‘가족’들 주문에 부응해온 결과가 ‘야권’ 대선 후보감 1위다. 이탄희와 윤석열,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신성가족’의 두 얼굴이다.
대한민국에서 뭐라도 하려면 결과 나오고 나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라. … 법원에서 뭐라도 하려면.”
“저한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도 요즘 너무 힘들어….”
2017년 4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를 위해 대법원이 꾸린 진상조사위 위원장실에서 오간 대화다. 이탄희 당시 판사는 위원장인 이인복 전 대법관의 말을 듣고 참담함에 고개를 떨궜다.(<두 얼굴의 법원>)
이 위원장은 조사 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도, 이탄희 판사 관련 언론 보도도 근거가 없다’는 취지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판사의 ‘저항’은 이후 대법원장 구속까지 불러오며 사법사상 초유의 대형 농단 사건으로 비화했다. 그동안 법원행정처가 앞장서 일선 판사들의 재판에 개입하고 판사 뒷조사까지 해왔음에도 이에 가담한 판사 그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 전 대법관 말처럼 ‘법원에서 뭐라도’ 하려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은’ 판사들과, 그들을 엘리트로 칭송해온 사법부의 민낯은 나중에 검찰의 손을 빌려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사법시험을 통과한 판검사 등 법조인 집단에 ‘불멸의 신성가족’이란 이름을 붙였다.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상부상조의 ‘사법 패밀리’ 구조가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라는 통렬한 은유다.
이 판사가 도전했던 ‘신성가족’ 구조는 여전히 건재하다. 사법농단에 가담했던 전·현직 판사들은 모조리 무죄를 받고 있다. 현직 판사들은 속속 재판업무에 복귀했다. 한때 일부 여당 의원들이 탄핵을 추진했으나 지금은 이마저 흐지부지된 상황이다. 그사이 ‘가족’들은 모두 살아났지만 법원의 신뢰는 추락했다.
법원을 떠나 공익변호사로 활동하던 이 판사는 지난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사법농단 사건의 충격은 그에게 마음의 병을 안겼지만 정계입문 출사표도, 지금의 최고 관심사도 여전히 사법개혁이다. “대법원장이 판사 출신 대형로펌 변호사를 불러 그 로펌 사건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사법농단 관여 판사들은 또 그 로펌으로 몰려간다”며 “이런 구조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수처가 출범한 뒤에는 국민들도 다시 사법개혁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이 사법농단 수사로 ‘윤석열 검찰’이 날개를 단 건 아이러니다.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이 수사를 이유로 특수부를 3개에서 4개로 늘렸다. 검찰의 권한과 특수수사 규모를 줄이겠다는 검찰개혁 대의에 역주행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들에 이어 직전 대법원장까지 잡아들였지만 전임자들처럼 ‘검찰 가족’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았다. 채널에이 ‘검언 유착’ 사건에선 검찰총장이 몸소 ‘측근 사랑’의 가족애를 선보이기도 했다. 감찰에 제동 걸고, 통상의 절차와 달리 수사심의위까지 소집하며 무리수를 감행했다.
라임 사건에서도 검찰 식구들은 절묘하게 칼날을 피했던 모양이다. 피의자가 편지로 로비 전말을 폭로하고 법무장관이 감찰을 지시한 뒤에야 그 흔적이 드러났다. 서울 강남의 술집에서 천만원대 향응을 받았다는 감찰 결과가 공개됐으나 검찰 가족들은 직전까지 ‘중형 범죄자’ 주장이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진위 확인은 거쳐야겠지만 검찰 출신 변호사가 했다는 말은 놀랍다. ‘내가 전직 대통령도 뛰어내리게 했다’. ‘논두렁 시계’ 논란에 “근처에 논두렁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던 선배 검사처럼 이들에겐 그 비극이 여전히 영웅담이었던 걸까.
이런 게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별장에서 속옷 차림에 여성을 끌어안고 춤추는 선배의 선명한 얼굴을 보고도 후배 검사들은 하나같이 모른 체해줬다. 적폐청산 수사가 한창일 때도 전 정권 시절 청와대 수사 상황을 청와대에 속속 보고했다는 검찰 간부는 무사했다. 모두 ‘신성가족’들 뒷담화 자리에선 미담 사례다.
윤 총장은 이런 ‘가족’들의 수호자다. 그가 충성한다는 ‘조직’은 물론 검찰이다. 총장 취임 뒤 정권에 맞서는 그의 행보 역시 ‘가족’이 주문하는 ‘검찰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결과로 ‘야권’ 대선 후보감 1위에 올랐다. 최근엔 “퇴임 뒤 사회 봉사” 발언으로 현직 검찰총장이 정치 공방의 한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개인 윤석열에겐 ‘사회 봉사’일지 몰라도 검찰 조직엔 독이다. 정치인 출신 법무장관과 정치지망생 검찰총장이 맞부딪치면 검찰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신성가족’들은 박수 칠지 몰라도 국민들은 외면할 것이다.
이탄희와 윤석열.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신성가족’의 두 얼굴이다.
김이택 대기자 rikim@hani.co.kr 한겨레 2020-10-28
미-중 신냉전과 ‘천하삼분지계’
다음주 미국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든 변하지 않는 것은 미-중 갈등이 오래도록 치열하게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국의 부상을 억눌러야만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 미국 내에서 초당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에 우위를 보이는 반도체, 금융, 군사력을 활용하고, 동맹국들을 규합해 ‘반중국 동맹’을 만들려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계속 신냉전 사고에 기반해 ‘반중국 동맹’을 만들려 한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소련과 달리 전세계 경제와 깊숙이 얽혀 있는 중국은 경제를 ‘무기’이자 ‘방패’로 활용한다. 미국은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단절하려는 탈동조화(디커플링)를 주장하지만, 미국 내에서도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과 많은 기업들이 고수익을 내는 중국과의 거래를 중단하려 하지 않는다. 국내에선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벌써부터 ‘이기는 편에 서야 한다’며, 미국 편을 선택해 중국과 맞서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현실적이지 않고, 무책임하다.
안보와 규범에선 ‘미국과 함께’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미-중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한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전세계의 주요 국가들이 비슷한 처지다. 미국과 군사협력 관계인 나라는 60여개국, 중국이 1위 교역국인 나라는 110여개국이다. 미국의 가장 주요한 동맹이자 미-일 동맹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일본도, 중국과 관계를 끊으라는 미국의 요구에는 거리를 둔다. 이달 미국이 일본에 ‘아시아판 나토’를 염두에 둔 ‘쿼드 플러스’ 구상, 중국을 배제한 첨단 정보통신 생태계를 만들자는 ‘클린 네트워크’ 전략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한발을 빼며 난색을 표했다.
세계 많은 나라들은 앞으로 수십년 동안 패권을 놓지 않으려는 미국과 도전하는 중국의 갈등 속에서 쉽지 않은 선택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강대국들이 일으키는 파도에 덜 흔들리려면, 같은 고민을 하는 비슷한 처지의 국가들끼리 힘을 모아야 한다. 한국과 일본, 독일·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미-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고 자국의 길을 모색하려 하고 있다. 한국은 이들 국가와 전략적 소통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미·중의 압박에 휘둘리지 않는 ‘제3지대’를 만들려는 외교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미-중 사이에 ‘제3지대’ 국가가 늘어나면 신냉전의 긴장도 낮아지고 평화와 안정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제3지대’ 국가들은 미·중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은 협력하면서도, 강대국의 강압적 행위나 인권 침해, 오만한 외교에는 ‘아니다’라고 말하며 국제규범과 인권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다. 미-중의 패권 경쟁 사이에 완충지대를 형성할 ‘천하삼분지계’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진전시킬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도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미·중 모두 비핵화와 종전체제의 한반도 정세가 자국에 유리하다고 확신하지 못했고, 일본은 방해 세력이 됐고, 유럽 국가들도 회의적이었다. 미-중 갈등이 악화되면서 중국에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협력할 필요가 없다는 강경론이 높아지고 있다. ‘제3지대’를 통해 한국의 입장을 강화하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넓혀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에 대한 미·중 협력의 동력도 다시 만들 수 있다.
한-일의 전략적 협력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한-일 관계도 새 길을 찾을 수 있다. 30일은 일본 기업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도록 한국 대법원이 판결한 지 2년이 되는 날이다. 한·일 지도자가 정치적 의지를 담아 협상을 해야, 일본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자들이 실질적 보상을 받을 해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조건 없이 한·중·일 정상회의에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해야 한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웠지만, 미국에 끌려가면서 중국에 대해서도 분명한 원칙이 없는 모호한 외교에 머물렀다. 한국은 외교 목표와 전략을 분명히 세우고 ‘고민을 공유하는 국가’들과 함께 입체적으로 판을 만들어나가는 외교를 펼쳐야 한다. 세계 9위(2020년 OECD 전망치)의 경제, 민주적 시스템, 케이팝과 케이방역의 소프트파워를 허비하지 말자. 여전히 명·청 교체기와 구한말의 ‘약소국 조선’의 틀로 외교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박민희 ㅣ 논설위원 한겨레 2020-10-29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망팔(望八)이 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의전을 관리하는 절차도 세련되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 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옹기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갔다.
원통하게 비명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는다. 부모를 따라서 화장장에 온 청소년들은 대기실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우리는 호상(好喪)입니다"라며 문상객을 맞는 상주도 있었다.
그날 세 살 난 아기가 소각되었다. 종이로 만든 작은 관이 내려갈 때, 젊은 엄마는 돌아서서 울었다. 아기의 뼛가루는 서너 홉쯤 되었을 터이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체의 먼 흔적이나 그림자였다.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죽으면 말의 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하듯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은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게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 딸아, 잘 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정도면 어떨까 싶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스스로 '광야를 달리는 말(!)'을 자칭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 미안허다.
를 남겼다. 한 생애가 4음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 더 이상 짧을 수는 없었다.
후회와 반성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좋은 유언이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었고, 대책 없이 슬프고 허허로워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퇴계 선생님은 죽음이 임박하자
― 조화를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라는 시문을 남겼고,
임종의 자리에서는
― 매화에 물 줘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제자들이 기록했다.
아름답고 격조 높은 유언이지만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드려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김용택의 어머니 박덕성 여사님한테서 직접 들었다. 몇 년 후에 김용택의 시골집에 가봤더니 그때까지도 연탄보일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퇴계 선생님, 김용택의 아버지, 이 세 분의 유언 중에서 나는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유언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 김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정도 유언이 나오려면, 깊은 내공과 오래고 성실한 노동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죽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한다. 의술의 목표는 생명이고, 죽음이 아니다.
이국종처럼, 깨어진 육체를 맞추고 꿰매서 살려내는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충분히 다 살고 죽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품위 있게 인도해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파이프 꽂아서 붙잡아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2019. 10. 29. 김훈 / 소설가
농가 아프리카돼지열병 원인은 멧돼지?
지난 10월9일과 10일 강원 화천의 양돈 농가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했다. 많은 언론이 이번 ASF 발생 원인을 멧돼지 혹은 멧돼지 관리 소홀에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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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여간 야생멧돼지에서 ASF가 계속 발생해왔고 화천은 감염 개체가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양돈 농가에서의 ASF 발생 원인을 야생멧돼지로 돌리고 멧돼지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점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방목형 돼지 농가를 제외하고는 멧돼지에서 집돼지로 직접 전파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밀폐형 돈사에서 사육하는 우리나라 양돈 형태상 멧돼지가 바이러스를 직접 전파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외부 환경에 있던 바이러스를 돈사 내부로 유입시킨 전달자는 누구일까? 새나 작은 동물들에 의한 가능성도 있지만, 사람에 의한 유입 가능성이 가장 크다. 특히 사람과 가장 접촉이 많은 모돈사의 경우 더욱 그렇다.
외부로부터 돈사 내로 유입을 막는 농가 차단방역이야말로 ASF로부터 양돈 농가를 지켜내는 가장 핵심적 부분이다. 여기에 허점이 있으면 외부의 바이러스가 언제든 농장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이번 화천 사례와 같이 양돈 농가로 ASF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농가의 차단방역을 철저히 하고 허점을 보강해야 한다. 핵심적인 것은 부각하지 않고 멧돼지만 탓하고 있다가는 소 잃고도 외양간을 못 고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코로나19가 삶을 위협하고 있어도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유지 등 방역수칙을 지키면 코로나19 전파를 막을 수 있다. ASF도 방역 사항을 철저히 준수하고 미흡한 부분을 보강하면 이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농가를 보호할 수 있다. 헝가리에서는 2017년 이후 야생멧돼지로부터 5000건 이상 ASF가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가에서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 결국 멧돼지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농장에 대한 철저한 차단방역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영석 대구대 교수 경향 2020.10.30
탄소중립 선언’ 이후 과제
2020년 10월28일 수요일은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까?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 ‘국제사회와 함께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하여, 2050년 탄소 중립을 목표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가장 무거운 약속의 말이 연설문 중간에 한 줄로 기록된 아쉬움은 있지만 고대하던 목표이고, 먼저 선언한 그린뉴딜 정책의 지향점이 명확해졌으니 실행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한다.
탄소중립이란 현재 진행형인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원인 물질인 탄소의 총량을 ‘0’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석유석탄에너지를 자연에너지로 전환해 배출량을 줄이고, 나무를 심어 배출을 상쇄하거나, 아예 탄소를 잡아서 돌아다니지 못하게 뭍어버리거나 탄소를 재활용해 최종 탄소발생 총량을 0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다.
세계 70여개국이 탄소중립 목표를 이미 선언했고,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는 탄소중립 목표 실현을 위한 구체적 감축 계획서까지 유엔에 제출했다. 온실가스 배출 세계 1위인 중국마저 2060 탄소 중립을 선언했기에 환경단체와 국회를 포함한 국내외에서도 한국 정부의 탄소중립 선언을 촉구해 왔다. 따라서 이번 문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이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거듭 환영한다. 이제 석유선탄을 사용하는 발전, 수송, 건물 등 다양한 분야의 구체적 감축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결국 시장의 저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뉴욕타임스는 2015년 3월15일자 사설에서 “석탄과 전쟁이 벌어지지만 그 주체는 정부 규제자들이 아니다. 진짜 전쟁은 시장과 기술이 벌인다”고 했다. 아주 작은 예를 들어보자.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석유석탄의 산물 플라스틱 포장재의 경우 코로나19의 창궐로 인해 더 많이 넘쳐나는 반면 사용규제는 뒷걸음치고 있다. 올해 상반기 플라스틱 쓰레기는 1일 848t으로 전년 동기 733.7t 대비 15.6%나 급증했는데 배달시장은 더 커지고 있어서 늘어날 일만 남았다.
매립지는 줄어들고, 플라스틱 쓰레기 수출길은 막혔고, 재활용 비율은 30%도 안 되고, 쓰레기가 넘쳐 고물 가격이 떨어져서 가져가려는 업체도 줄었다. 그 결과 산야에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가 산처럼 쌓여 세금 먹는 하마가 되고 있다.
플라스틱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원시로 돌아가자면 갈 수 있을까? 유리용기를 갖고 다니자고 하면 그럴 수 있을까? 플라스틱 대체물질은 과연 상용화될 수 있을까? 정부의 정책은 대부분 기업의 자발적 규제를 중심으로 진행되기에 배달업을 줄일 수도, 조금 비싼 대체 용기로 바꾸라고 강제 할 수도 없어 실질적 쓰레기 감축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해야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철학자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쇼핑은 토론을 전제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마음에 드는 것을 사면 된다. 기업은 잘 팔리는 걸 만들어 내면 그만이다. 소비자는 시민이 아니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시민을 시민으로 만든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돈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로 환경같이 허약한 것은 무엇이든지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무방비 상태가 된다’(하비 콕스, <신이 된 시장>에서 재인용)고 걱정했다. 공동체의 미래에 책임감의 방패를 멘 시민들이 앞장서야 할 때다.
이미경 환경재단 상임이사 경향 2020.10.30
숫자 속에 가려진 죽음, 애도마저 사라졌다
2020년 우리의 일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오전 10시 즈음이면 우리는 전날 코로나19 확진자 수를 확인한다. 두 자릿수를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도 있고,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 때면 안도감도 느낀다. 누구나 확진자가 되면 가족은 물론 주변에도 의도치 않은 피해를 주고, 지역사회에는 즉시 이름 없는 n번 확진자로 보고된다.
언제부터인가 방송 화면은 사망자 숫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확진자 숫자와 완치자 숫자만 확인해도 무방한 것처럼 느낀다. 우리 모두 언젠가 확진자와 완치자 숫자 차이가 제로가 되는 날 2020년 이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꿈꾸며 사는지도 모른다. 간혹 사망자 숫자를 뉴스 앵커에게 들어도, 그래도 적은 숫자라고 애써 위로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사망자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고 내심 감탄하기도 한다.
지난 5월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면 1면에 ‘미국 사망자 대략 10만명, 막대한 상실’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이렇게 적었다. ‘그저 사망자 명단에 있는 이름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였다.’ 그리고 사망자 1000명의 이름과 짤막한 부고를 빼곡하게 소개했다. 뉴욕타임스 에디터는 우리 모두가 코로나 데이터에 지쳐가고 있음을 깨닫고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이런 단체 부고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나는 미국 양로원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부친이 사망했는데도,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가족이 모여 장례마저 치르지 못했다는 대학 선배 소식을 듣고서야 단체 부고의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았다. 숫자 속에 가려진 상실의 아픔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아버지요, 친지, 그리고 가까운 이웃일 수 있다.
우리 문화는 개인의 죽음을 공동체가 애도하는 문화였다. 전통적으로 장례는 마을 전체의 행사였고,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함께 아파했다. 함께 모여 곡을 하면서, 유가족들이 애써 슬픔을 감추지 않고 문상객과 함께 충분히 나누도록 배려했다. 이제는 단체로 곡을 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장례식장에 함께 모여 며칠 동안을 머물며 유가족을 위로하는 일은 필수적인 절차다. 미국과 같이 장례식장에 모신 시신을 단 몇 시간 동안만 뷰잉(viewing)이란 행사를 통해 마주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문상과는 사뭇 다르다.
어느 국가든지 지도자가 사망하면 온 국민이 애도하고 곳곳에 추모공간이 생긴다. 우리는 꼭 유명인사가 아니더라도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면, 합동분향소가 생기고 온 국민이 함께 아파하고 나라 전체가 위로하는 추모문화를 가지지 않았던가? 나는 KBS에서 진행했던 천안함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 방송과 세월호 참사 추모방송 등의 패널로 참여해 국가적 애도에 동참했던 적이 기억났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죽음은 달랐다. 어느 방송에서도 추모방송을 기획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죽음 뒤에 가려진 아픔마저 감추는 듯했다.
코로나19 감염병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그 황망한 죽음과 유가족의 슬픔은 전혀 다르지 않다. 아니 갑절로 배가된다. 24시간 이후에 시작되는 입관절차나 조문 행사 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정성껏 준비해둔 수의도 무용지물이 된다. 마치 오염된 짐짝 취급을 당하면서 바로 24시간 안에 화장을 끝내야 한다. 가족마저 감염되면 격리지침에 의해 화장장조차 따라 갈 수 없다. 도대체 코로나19 사망자 유가족들은 언제 울어야 하는가? 시신만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가족과 친지의 애도마저 사라졌다.
최근 미국의 수도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는 사망자가 1000명씩 증가할 때마다 200번의 종을 치면서 애도하는 의식을 시작했다. 대성당 감독관은 의식이 진행되는 30분 내내 가장 비극적인 죽음의 현실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언급했다. 우리도 코로나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국민적인 애도 의식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경향 202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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