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대응, 한국이 좋은 동반자가 되려면 경향 2020.08.01
장마, 때아닌 물난리? 한겨레 2020-08-02
토지공개념 경향 2020-08-02
누구를 위한 그린벨트인가 한겨레 2020-08-02
삼성전자 가신그룹의 말들에 관하여 한겨레 2020-08-02
못 믿을 게 ‘선의’와 ‘사람’이다 경향 2020-08-04
시베리아 산불과 한국판 뉴딜 경향 2020-08-04
전세제도의 역설 경향 2020-08-04
‘민주주의 허울 쓴 독재’라는데…한겨레 2020.08.05
서울은 여전히 만원이다 경향 2020.08.05.
주한미군 감축’ 호들갑 떨 일인가 한겨레 2020.08.11.
기후위기와 진보 언론 한겨레 2020.08.11.
선동가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선명함 경향 2020.08.05.
무지의 세계와 자존심 경향 2020.08.12.
진보정부에서 국방비가 더 늘어나는 까닭 한겨레 2020.08.12
일본 대신 우리가 분단된 까닭 한겨레 2020.08.13.
혁명은 어디에 경향 2020.08.13.
국립공원을 국가공원으로 경향 2020.08.14
기후변화 대응, 한국이 좋은 동반자가 되려면
지난 6월 한국과 유럽연합(EU) 정상들이 코로나19 이후 기후변화 문제에 함께 대응하자고 결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양측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10주년을 기념하는 화상회의 자리였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샤를 미셸 상임의장은 “파리협약의 완전하고, 신속하며, 효과적인 이행을 위한 강한 의지”를 확인했다. 2015년 파리협약 체결 당시 프랑스의 기후변화 대응 최고 특사로서 이를 구상하고 추진한 입장에서 양측이 전 지구적 약속을 공고히 한 이번 회의 결과가 무척 반가웠다.
EU는 파리협약과 유엔의 2030어젠다인 지속가능개발목표(SDGs)를 위한 핵심 요소로 ‘그린딜’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적이고 자원효율적인 경제를 지향하면서 2050년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0)’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담고 있다. 이른바 ‘공정·번영 사회’로의 전환이 EU가 그리는 미래다. 하지만 유럽 그린딜은 나 홀로 달성 가능한 정책이 아니다.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여러 요인은 국경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국가 간 협력과 연대를 필요로 하며, 코로나19 회복에 그린 뉴딜을 추진하는 한국은 최적의 파트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날 믿을 수 없는 뉴스를 접했다. 한국이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2000MW 규모의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계획을 승인했다는 것이다. 석탄발전소 9·10호기가 들어설 칠레곤 지역은 이미 과도한 석탄발전으로 주민들의 건강피해와 환경파괴 문제가 심각하다. 그린피스는 해당 발전소가 들어설 경우 대기오염 여파로 인도네시아의 조기 사망자 수가 연간 157명, 30년 동안 4700명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나는 한국이 국내에선 그린 뉴딜을 추진하면서 해외 석탄화력 투자를 추가 계획하고 있는, 이 모순된 상황을 깊이 우려하고 있다. 유럽 그린딜의 핵심은 탄소배출량의 극적인 저감이다. 그러려면 화석연료 보조금을 없애는 것은 물론 최대 오염원인 화석연료(석탄)를 당장 퇴출해야 한다.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 철회는 그린딜이 내세우는 핵심 공약이다.
이 때문에 그린딜 달성에는 지구 온실가스 배출의 80%를 차지하는 주요 20개국(G20)의 책임 있는 행동이 필수다. 특히 탄소배출 감축 목표가 낮은 타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해 기존 방식으로 경제활동을 하면서 탄소배출 저감은 피하는 꼼수를 경계해야 한다. 한국의 그린 뉴딜도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같은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감염병 공포 앞에 글로벌 리더들은 앞다퉈 녹색 경기부양책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어떤 나라도 코로나19 복구 계획에 석탄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실제 재생에너지는 전력 수요가 크게 감소한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도 성장세를 기록한 유일한 에너지원이다. 저탄소가 환경뿐 아니라 경제 발전을 위한 필수 선택지가 된 것이다.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이 발표하는 ‘디지털뉴스리포트’에 따르면 한국민의 70%는 “기후변화가 아주 혹은 극도로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프랑스, 독일 등 유럽보다 높은 수치다. 한국 시민들은 이미 기후변화 대응에 적합한 행동을 할 준비가 돼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IT 강국인 한국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필수적인 배터리 분야의 최강자다.
이제 정부의 결단만 남았다. 2021년 한국은 유엔기후협약 당사국 총회(COP26)의 초석이 될 P4G(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20을 위한 연대)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한국 정부가 석탄 사용을 극적으로 줄이는 정책을 수립해 기후변화라는 글로벌 위기에서도 선도적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그 시작은 현재 ‘매우 불충분’으로 평가받는 한국의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높이는 일이 돼야 할 것이다.
로렌스 투비아나 유럽기후재단 대표 경향 2020.08.01
장마, 때아닌 물난리?
여름철이면 찾아오는 장마. 장마는 말 그대로 오랫동안 내리는 비다. 올여름 비를 설명하기에 매우 적절한 이름이다. 6월부터 시작된 장마는 8월 중순에야 물러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평소보다 상당히 오랫동안 장마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장마 때 비가 내리는 건 당연지사다. 그런데 항상 비가 많이 왔던 것은 아니다. 작년만 하더라도 ‘마른장마’를 걱정했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물난리가 심하다. 부산, 대전, 서울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도시 홍수가 발생하고 있다.
물난리의 원인은 게릴라성호우 혹은 집중호우 때문이다. 장마 초기부터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발생했다. 굳이 기록을 살펴보자면 6월 말 강릉에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발생한 이후, 7월에는 강원 일부 산간지역에 하루 800㎜ 이상의 집중호우가 내렸다. 시간당 강수량을 보면 집중호우의 심각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부산과 대전에서 시간당 80~90㎜ 이상의 집중호우가 관측되었고, 전라북도 일부 지역에서는 한시간 동안 무려 100㎜ 이상의 비가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진 것이다.
집중호우와 함께 강풍도 빈번했다. 서해안과 동해안을 중심으로 발효된 강풍주의보는 6월 말부터 거의 매 주 발효되었다. 비행기가 연착되고 가로수가 뽑히기도 했다. 말 그대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강풍을 동반한 집중호우, 왜 발생했을까? 물론 장마전선이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장맛비는 한반도 북쪽의 한기와 북태평양 고기압의 가장자리에서 장마전선이 형성되고, 여기서 비구름이 발달하면서 발생한다. 하지만 올해 장맛비는 장마전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부 집중호우 사례는 오히려 저기압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7월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장마전선은 한반도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서해를 통해 한반도로 접근한 저기압이 장마전선을 한반도까지 밀어 올리면서 집중호우를 초래했다. 일부 사례들은 저기압 자체에 의해 발생했다. 저기압은 강한 바람을 동반하기 때문에 올여름 집중호우가 강풍을 동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난리는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중국만 하더라도 대규모 홍수로 양쯔강 하구가 침수되어 수천만명의 수재민이 발생했다. 8월이 되었지만 양쯔강 상류 싼샤댐의 수위는 여전히 전세계 언론의 관심사다. 일본도 오키나와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집중호우가 발생해 수십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이만하면 동아시아 전체가 물난리다. 그것도 지난 몇년 동안 없었던 심각한 물난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과거에 비해 올해 집중호우가 빈번한 원인은 분명치 않다. 전문가들은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지구온난화를 지목한다. 시간당 30㎜ 이상의 집중호우는 1970년대에 비해 2000년대에 들어 발생 빈도가 2배 정도 증가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대기 중 수증기량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온이 1도 상승하면 대기 중 수증기량은 최대 7% 정도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외에도 북태평양 고기압의 이상 변동과 저기압의 발달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급격히 변하는 날씨를 막을 수 없다면, 이에 대한 대비가 충분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설 확충과 더불어, 예보의 정확도 향상이 필수적이다. 지난 십수년 동안 수치 모델과 관측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한반도 집중호우 예측은 미지의 영역이다. 서해상에서 생성된 구름이 수시간 만에 집중호우로 발달하는 과정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서해 상공의 관측 자료가 부족하고 수치 모델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체적인 관측과 수치 모델링을 통한 집중호우 연구 개발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이다.
손석우 ㅣ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한겨레 2020-08-02
토지공개념
서울 남산의 N서울타워 전망대에서 바라본 여의도 63빌딩과 부천, 인천지역 빌딩./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노태우 정부는 군사쿠데타 주역이라는 비판이 무색할 만큼 시대흐름에 부응한 여러 정책들을 추진했다. 공산권 및 북한과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북방정책이 그랬고, 부동산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시도한 ‘토지공개념’도 혁신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으로 시중에 돈이 흘러넘치자 여유자금이 부동산에 몰려들었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풀린 돈들도 땅값을 밀어 올렸다. 부동산 투기에 따른 집값폭등으로 서민들의 불만은 임계점으로 치솟았다. 집권 첫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서 패배해 정국 주도권을 상실한 노태우 정부에 부동산 문제는 정권의 존립을 위협했다. 조순 부총리, 문희갑 경제수석 등 경제관료들은 연일 “개혁이 없으면 혁명이 일어난다”고 경고(경향신문 1989년 9월4일자)했다. 1989년 12월18일 국회를 통과한 택지소유상한법, 토지초과이득세법, 개발이익환수법 등 ‘토지공개념 3법’은 이런 배경 속에 등장했다. 노태우 정부는 1990년 5월8일에는 초법적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매각 명령을 내려 재벌기업의 부동산 사재기에 제동을 걸었다.
토지공개념은 1994년 토지초과이득세법이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고, 택지소유상한법이 1998년 헌재 위헌판정을 받으면서 동력을 상실했다. 당시 헌재는 법 설계가 정밀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을 뿐 공공이익을 위해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취지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지공개념은 국정철학으로 계승되지 못했고, 부동산은 역대 정부에서 경기부양의 ‘밸브’로 동원되었다.
경제학자들은 한국이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룬 주요 배경으로 경자유전 원칙 아래 지주-소작제를 혁파한 농지개혁을 꼽는다. 농지개혁을 통한 소득 불평등 완화와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은 개발도상국의 초기 성장에 훌륭한 자양분임을 한국의 사례가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 뉴노멀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제2의 농지개혁’이 아닐까. 그 원칙이 토지의 공공성을 높이는 방향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토지공개념은 3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유력한 명제다.
서의동 논설위원 경향 2020-08-02
누구를 위한 그린벨트인가
정부가 서울의 부동산 가격 폭등을 잠재우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로 강남의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해제를 띄운 건 7월 중순께였다. 그린벨트가 서초·강남구에 많다는 보도도 나오고 해서 그렇게 가려나 보다 했다. 하지만 여권 내부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언론도 반대로 기울자, 문재인 대통령은 7월20일 “개발제한구역은 미래세대를 위해 계속 보존해야 한다”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문 대통령은 국가 소유 태릉골프장 부지 활용을 대안의 하나로 제시했는데, 태릉골프장 역시 그린벨트였기 때문이다. 왜 강남이 아닌 태릉으로 바뀌었을까? “강북 주택 공급이란 점에서 서울시가 추구했던 강남·북 균형발전 기조에도 들어맞는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게 왜 균형발전이란 건지 이해하긴 어려웠다.
그린벨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건 국민 다수의 믿음이다. 그린벨트 논란이 일던 시점에서 이루어진 리얼미터 조사에서 그린벨트 해제 반대(60.4%)가 찬성(26.5%)의 두 배가 넘었다. 그렇다. 그린벨트는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린벨트의 ‘선택적 수호론’이다. 이 수호론엔 엄격한 위계가 있다. 강남의 그린벨트는 결사적으로 지켜야 할 것인 반면, 같은 서울에서도 강북의 그린벨트는 좀 훼손해도 괜찮고, 서울 외의 수도권 그린벨트는 마구 훼손해도 괜찮고, 비수도권은 아예 논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게 이 위계의 핵심이다.
이런 위계가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찾아야 할까? 전체 면적의 4분의 3에 이르는 지역을 그린벨트로 꽁꽁 묶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카운티의 사례를 보자. 부자들이 많이 사는 몬터레이는 강력한 그린벨트 정책 덕분에 야생 칠면조, 산돼지, 사슴들이 뛰어노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이런 지역들이 미국엔 많다. 부자들은 환호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높은 집세 때문에 죽어난다. 어쩌겠는가. 떠날 수밖에. 그래서 가난한 흑인 인구가 급감한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강력한 그린벨트 정책은 ‘흑인 퇴치용’으로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에 비해선 덜할지 몰라도, 한국에서도 그린벨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해 왔다. 1960년 244만명(전체 인구의 10%)이던 서울 인구는 1970년 543만명(전체 인구의 18%)으로 급증했으며, 증가 추세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1971년 7월30일 건설부 고시 제447호로 태어난 그린벨트의 목적은 서울 변두리에 즐비했던 판자촌을 없애는 동시에 판자촌이 서울 인근 도시들로 뻗어 나가는 것을 막음으로써 수도권 인구 유입을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동안 성공을 거둬 그린벨트는 ‘박정희의 최대 걸작’이라는 평가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 이면엔 잔인한 점도 있었다.
당시 서울로 밀려들던 지방 사람들은 서울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고향에선 먹고살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살던 판자촌은 강제철거 대상이었다. 철거민들을 쓰레기 내버리듯 서울 밖의 지역으로 내팽개치는 일은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그 덕분에 서울은 ‘천박’할망정 겉보기엔 점점 아름다운 도시가 되어 갔다. 어디 그뿐인가. 역대 정권들은 주거 빈민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분산 정책을 통해 이들이 집단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그 덕분에 부동산 가격 폭등을 통해 무주택자들의 지갑을 터는 ‘부동산 약탈 체제’도 평화롭게 지속될 수 있었다.
민주화가 된 세상에서도 일자리의 서울 집중은 달라진 게 전혀 없다. 화를 내는 지방민들이 별로 없다는 게 이상하지만, 서울시민들도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사회·문화·교육적 자원과 특혜가 강남에 집중되는데도 강남에 진입하기 위한 투쟁만 벌일 뿐 “그래도 되느냐”고 화를 내질 않으니 말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의 진앙지가 강남이라면, 강남을 덜 ‘살기 좋은 천국’으로 만드는 게 하나의 해법일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해볼 때도 되지 않았나?
살기 좋고 아름다운 강남의 그린벨트를 지키는 건 정부와 정치권의 사명이요 다수 국민의 희망이다. “나도 언젠간, 정 안 되면 내 자식이라도, 강남에 사는 그날을 위해서” 말이다. 무주택자와 이른바 ‘집 아닌 집’에 사는 주거빈곤층에게 그린벨트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법은 없다. ‘아름다운 강남’과 부모를 잘 둔 미래세대를 위해 잘하는 일이라고 박수를 쳐야 하나?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2020-08-02
삼성전자 가신그룹의 말들에 관하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하기가 도를 넘고 있다. 칼럼과 인터뷰가 넘쳐난다. 그중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삼성전자 전·현직 전문경영인의 활약이다. 김현석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부문장(사장)은 현장점검에서 “전문경영인으로는 불확실한 시대에 필요한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며 “이재용 부회장이 큰 숲을 보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리더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했다.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고문은 사내 인터뷰에서 “저도 전문경영인 출신이지만 굉장한 적자, 불황 상황에서 ‘몇조 투자하자’고 말하기 쉽지 않다”고 이 부회장 역할론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황당하다.
첫째, 이러한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교묘하게 비튼다. 지금 우리는 총수와 전문경영인의 역할에 대해 원론적인 토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재벌 총수가 경영권 승계라는 사적 이익을 위해 주주의 이해를 침해한 범죄 혐의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법원이 재판에서 따져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한 분식회계, 시세조종 등을 재판도 안 해보고 덮어야 하나? 최고경영자(CEO)의 역할 중요하다. 그러나 중요하다고 해서 기업범죄를 저질렀을 때 봐주자는 주장을 펴지는 않는다. 사적 이익 추구는 심각한 기업가치 침해이자 시장질서 교란행위이기 때문이다. 마크 저커버그, 스티브 잡스, 제프 베이조스에게도 면책특권은 주지 않는다.
둘째, 우리는 언제까지 글로벌기업 전문경영인들의 자기부정을 보아야 하나? 윤부근 전임 삼성전자 CE부문장은 2017년 당시 수감 중이던 이 부회장을 위해 “엄청난 변화가 일고 있고 사업 재편과 인수합병을 하고 있는데 일개 배의 선장이 할 수 있겠느냐. 제 사업에 대해서는 제가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이 부회장에 비하면 1000분의 1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권오현 회장은 243억원(2017년, 스톡옵션 제외), 윤부근 전 부문장은 76억(2017년, 스톡옵션 제외), 김현석 부문장은 26억(2019년, 스톡옵션 제외)의 연봉을 받은 경영인이다. 1000분의 1의 미미한 존재가 왜 이리 고액 연봉을 받으시나? 불확실한 시대에 투자 결정하라고, 큰 숲을 보고 방향을 제시하라고 시이오에게 고액 연봉을 주는 것이다. ‘총수 구하기’ 하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
셋째, 이 부회장과 가신 그룹은 여러 모순에 빠져 있다. 이번 검찰과 삼성의 공방 과정에서 2012년 작성된 ‘프로젝트-G(Governance, 지배구조)’ 삼성 내부 문건이 언급되었다. 여기에 인수·합병, 사업 포트폴리오 재구축 등 삼성의 ‘큰 숲’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성 쪽은 이 문건 내용은 이 부회장에게 보고되지 않았고 지시받은 적이 없다는 주장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이 부회장이 커다란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기소하면 안 된단다. 그리고 대체 그 ‘큰 숲’은 왜 이 부회장에게만 보이나? 삼성이 고추장의 비법은 며느리도 모른다는 신당동 떡볶이 집인가? 필자는 이 부회장의 2000년대 초반 이(e)비즈니스 투자 실패 경험에 대해 비판한 적이 없다. 차라리 과감한 투자 경험이 더 쌓여 있고, 실패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카리스마는 잃었을지 몰라도 경영적으로는 더 큰 것을 얻었을 것이다. 무슨 문제만 터지면 잘나가는 삼성전자 뒤에 숨어 있는 지금과는 다르게 말이다.
넷째, 가신 그룹의 총수 찬가는 결국 봉건적 경영 시스템을 만방에 선전하는 꼴이다. 삼성 정도라면 “우리는 총수가 없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위기관리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시장에 말해야 한다. 지난 5월 대국민 사과에서 이 부회장은 경영권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오히려 주변 가신들이 말렸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조선시대 선조의 쇼라 불리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위 파동의 거꾸로 된 버전이 연상된다. 안 물려주겠다는 이 부회장은 진정성이 조금은 보이는데 가신 그룹이 진심을 다해 말리는 것 같다. 백전노장 전문경영인들이 과연 뼛속 깊이 총수 일가의 리더십을 존경할까? 솔직해지자. 그냥 총수가 무서운 거다. 총수의 전방위 인사권을 포함한 무소불위의 권력, 사적 이익을 위해 개별 계열사 이사회, 주주를 무력화시키는 행위가 문제의 본질이다. 지금 상황에서 나머지는 변죽이다. / 이창민 ㅣ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한겨레 2020-08-02
못 믿을 게 ‘선의’와 ‘사람’이다
8월의 첫날, ‘조세저항 국민집회’가 열렸다. 세입자 거주권을 4년으로 늘리고, 전·월세 인상을 5% 내로 묶은 임대차 3법이 화두였다. 비 뿌리는 하늘로 신발을 던졌다. 포털 검색창엔 ‘사유재산 강탈정부’라고 썼다. ‘황구징포(黃口徵布)’란 말도 회자됐다. 조선시대 아이에게까지 군포를 물리던 짓을 비유한 것이다. 다주택자가 약자인가. 되묻는 머릿속에 ‘선의(善意)’라는 글자가 맺힌다.
주변엔 ‘착한 집주인’ 얘기도 많다. 52만명이 된 임대사업자 장려·양성화 정책도 3년 전 선의로 출발했다. 집회엔 세금 혜택받고 임대료 5% 인상 약속을 지킨 ‘억울한 임대인’도 섞였을 게다. 문제는 그 선을 넘은 투기, 선의를 악용한 불로소득에 있다. 등록임대사업자 70%가 규정을 어겼다는 자체 실사결과가 있었다. 서울 신규주택 4채 중 3채는 다주택자가 사들이고, 강남4구와 ‘마용성’ 주택 거래의 60~70%가 전세 끼고 사는 갭투자이다. 임대사업·펀드로 세테크하고 ‘투기의 꽃길’ 걸으며 단물만 챙긴 사람도 많았다는 뜻이다. 뛸수록 수요가 몰리는 게 대한민국 집값이다. 그 투기를 끊지 못하면 실수요자가 흔들린다. 미래통합당이 다주택자가 몰려올 장외집회를 선뜻 못하는 이유도 짐작된다. 과거 트라우마도 있지만 전국에 38%(서울 51%)나 되는 임차인이 무서울 게다. 좌불안석인 세입자 눈높이에 세상이 먼저 부응할 때가 됐다. 법은 공정하되 따뜻해야 한다.
끝까지 가봐야 알 게 또 있다. 검찰개혁이다. 법무검찰개혁위에서 검찰총장 수사지휘권을 고검장에 분산하고, 법무장관이 고검장을 지휘하라고 권고했다. ‘옥상옥’ 권고안이다. 서초동에 ‘TK 아성’을 쌓은 MB 정부의 김경한 법무장관, 채동욱 총장을 찍어낸 박근혜 정부의 황교안 법무장관이 있었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검찰조사실에서 팔짱 끼고 웃던 게 불과 4년 전이다. 제2의 김경한·황교안·우병우가 쥐락펴락하고 “민주적 통제”라 하면 수긍할 건가. 수사 독립을 흔드는 생뚱맞고 근시안적인 권고에 고개가 저어진다.
검찰개혁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 “거악(巨惡)과 싸운다”며 내부의 거악엔 눈감고, 그릇된 치부·독직·성폭력·전관예우에 무딘 칼을 들이민 흑역사는 끊어야 한다. 홍만표(수임탈세), 진경준(스폰서 주식), 김대현(부하 갑질), 김학의(접대 동영상)를 기억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길 정한 대로, 검찰개혁은 직접수사를 줄여 어깨 힘을 빼고 인권옹호를 솔선케 하면 될 일이다. 의정부·6조·3사가 떠받친 조선 왕에 세종도 있고 연산군도 있었다. 추미애·윤석열·한동훈·이성윤을 ‘빈칸’으로 둔 사법수사 설계도를 짜야 한다. 국회 가서 함흥차사 된 공수처도 다를 바 없다. 처장의 덕목은 ‘독립과 균형’이다. 이승만 정부의 경찰,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 1987년 헌법 체제의 검찰은 공통점이 있다. 무소불위 힘으로 군림하고, 내부 적폐에 관대한 ‘괴물’이었다. 공수처도 또 하나의 괴물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고 완성해가야 한다. 어찌보면 권력자에겐 ‘매력 없을 조직’으로.
답은 시스템이다. 집주인이 2년 뒤 ‘4년치 임대료 폭탄’을 물릴 거라는 선동적 예단이 나온다. 정책도 생물이다. 막을 수 있고 막아야 한다. 필요하면 전·월세 신고를 수기(手記)로 앞당기고, 지역·층·방향 따라 기준 삼을 표준임대료도 정할 수 있다. 1989년 임대차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릴 때 혼선은 6개월쯤 지나 잡혔다. 당시 노태우 정부 처방에도 200만호 공급 플랜과 투기 부동산을 포기케 하는 ‘토지공개념 3법’이 있었다. 헌재도 위헌 판결을 내며 부정하지 않은 게 헌법 속의 토지공개념이다. 정책은 방향이고 뚝심이다. 그 날갯짓은 길고 입체적이어야 한다. 공공임대를 늘리고, 공공기관 지방 이전도 속도를 내야 한다. 다주택 고위공직자는 부동산백지신탁으로 막고, 국회 개혁은 ‘상전 법사위’의 자구심사권을 옮겨야 물꼬를 잡을 수 있다. 자의와 정략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를 줄이는 게 시스템이다.
“긍정적으로 구상하고, 비관적으로 계획하고, 낙관적으로 낙관적으로 실행하라.” 2001년 미국 심리학자 가브리엘 외팅겐(뉴욕대 교수)이 한 말이다. 그래야 오류가 줄고, 마지막에 더 웃는 사람과 조직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공부도 여행도 기업경영도 연애도 다이어트도 그렇다. 국정도 다를 바 없다. 멀리 갈 정책에선 선의와 사람의 거품을 빼야 한다. 낙관적으로 호시우행(虎視牛行)하고, 비관적으로 심모원려(深謀遠慮)한 정책만이 지속 가능하고 예측 가능할 수 있다. 그 시스템 위에서 선의와 사람이 춤추게 해야 한다./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2020-08-04
시베리아 산불과 한국판 뉴딜
동영상과 그래픽으로 보는 시베리아 산불은 공포스러웠다. 매일 계속된 산불은 115만㏊의 산림을 태웠다. ‘세계 기후 특성(World Weather Attribution)’ 네트워크의 국제 과학자 팀은 금년 1월에서 6월까지의 지속적 고온은 인간이 유발한 기후변화를 빼고는 “설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6월20일 세계에서 가장 추운 지역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베르호얀스크 마을의 수은주는 38도를 가리켰다. 이 지역 1월에서 6월까지의 평균기온은 예년보다 5도 이상 높았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시베리아에 열풍이 불 가능성을 600배 높였다. 산업시대가 시작된 이래 지구의 평균기온은 1도 높아졌지만 북극 지역은 두배 더 올랐고 시베리아 일부 지방은 4배나 더 상승했다. 북극의 기온 상승은 빠른 속도로 빙하를 사라지게 만들고 메탄을 품고 있는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를 녹인다. 메탄가스는 온실가스의 4.8%에 불과하지만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은 이산화탄소의 80배로 알려져 있다. 툰드라지역에서 대규모의 메탄가스가 방출된다면 현재의 기후위기는 예상보다도 더 심각해질 것이다.
이 연구팀은 2019년에서 2020년에 걸쳐 일어난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의 산불도 인간이 유발한 기후 변화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인류세의 기후 변화는 가장 높은 주간 폭염지수(Fire Weather Index)를 적어도 30% 이상 높였다. 폭염지수는 1979년부터 위험을 키우는 방향으로 뚜렷하게 변화했는데 1900년의 기후와 비교할 때 2019/2020년의 폭염지수 가능성은 4배 이상 높아졌다. 자연은 자기파멸의 모습으로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정부는 지난 7월14일 발표한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대한민국 대전환’ 전략으로 ‘한국판 뉴딜’을 제시했다. 이 전략의 토대는 고용사회안전망 강화이고 두 기둥은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이다. ‘글로벌 기후 변화 대응’이 시급해서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용해서(“그린 뉴딜은 우리가 갈 길이다”) 겨우 끼워 놓은 듯,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2020년 코로나19 위기 이후 발표된 세계의 그린 뉴딜(EU는 ‘그린 딜’)은 예외 없이 2050년 ‘넷제로 선언’으로 시작하지만 이 계획은 ‘탄소중립(Net-Zero)을 지향’할 뿐이다. 말만 다른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정의당과 녹색당의 그린 뉴딜은 2050년 넷제로, 2030년 탄소배출 50% 저감 목표를 향해 정책을 총동원하는 것으로 짜여 있다. 즉 자연과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세계적으로 합의한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그린 뉴딜은 지난 200년(한국은 100여년) 동안의 탄소기반경제를 물리적으로도 완전히 뒤바꿔야 하기 때문에 인프라 투자가 필수적이고, 모든 에너지원의 전기화, 그리고 재생가능발전에 의한 전기 생산이 그 시작이다. 그러나 정부의 저탄소·분산형 에너지 확산은 다른 항목과 달리 목표가 없다. 다만 스마트 그리드를 확대하고 섬 지방의 디젤엔진 발전기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며, 대규모 해상풍력단지를 조성하고 주민참여형 태양광발전을 늘리겠다는 방향만 제시되어 있다(반면 전기차·수소차는 자동차 대수와 충전기 숫자까지 밝혔다).
8월2일 유럽계 에너지 분야 컨설팅업체인 ‘에너데이터’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2019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4.8%로, 조사 대상 44개국 중 40위로 평균 26.6%에 훨씬 못 미친다(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세 나라는 중동 산유국이다). 아시아 8개국 평균도 23.7%일 뿐 아니라 증가 폭도 우리보다 크다(한국의 비중은 10년 동안 3.1%포인트 오른 반면 아시아 평균은 15%포인트 올랐다). 말 그대로 ‘기후악당’이요, 파렴치한 ‘무임승차자’다.
정부의 목표는 성장(과 고용)에, 4차 산업에 맞춰져 있고, 방법은 재벌과의 ‘협치’다. 수소차에 목매달고 비메모리 반도체에 초점을 맞추고 난데없는 원격의료, ‘비대면 산업’을 들먹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고용안전망 강화가 들어 있지만 노동계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한 것은 아니다.
그린 뉴딜에는 ‘그린’이 없고 한국판 뉴딜에는 ‘노딜(no deal)’만 있다. 한마디로 한국판 뉴딜은 신형 재벌주도 녹색성장, 또는 신형 재벌주도 창조경제이다. 세계의 자연은 여기저기서 머지않은 미래의 아마겟돈을 암시하는데 정부는 세계의 탈탄소 노력에 무임승차해서 재벌의 경쟁력만 높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서라, 고용안전망 강화의 첫발만 제대로 내디뎌도, 국토를 많이 파헤치지 않고 4대강 보만 철거해도 나는 만족하련다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경향 2020-08-04
전세제도의 역설
국민들은 이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다. 다주택자만 잡으면 집값이 떨어질 것처럼 얘기하지만 다주택자가 지방의 집을 내놓고 서울의 똘똘한 한 채를 보유하면 지방 집값 폭락만 부채질할 뿐이다. 이제는 전세가도 오른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정부는 우선 매매가를 잡을 것인지, 전세가를 잡을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전세가와 매매가의 상승 원인은 다르다. 전세가 상승은 금리 인하가 주원인이고 일시적 전세 물량 부족이 부차적 원인이다. 금리를 내려놓고 전세가가 오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강아지가 달걀을 낳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반면 서울의 매매가 폭등은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이다. 딱히 갈 곳이 없는 엄청난 양의 유동성이 부동산시장으로 몰린 게 주원인이지만, 현 정부의 잘못된 대응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격폭등을 우려해야 할 시점에 가격폭락과 부동산경기 침체를 걱정해서 정책을 느슨하게 시행한 잘못도 있고, 임대사업자에게 과도한 혜택을 줌으로써 다주택 투자를 용이하게 만들어준 잘못도 있다. 무엇보다 전세제도의 모순된 역할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전세제도는 원래 집을 구매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한 서민들이 집을 얻기 위한 방식 중 하나로 시작됐다. 세입자는 전세보증금을 집주인에게 빌려주는 대신 집을 사용하고,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내야 할 이자와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내야 할 임차료를 서로 ‘퉁’치는 제도이다. 집주인은 세입자로부터 빌린 돈을 고수익의 다른 자산에 투자한다.
전세제도는 사금융제도이다. 이 제도에서는 통상 상대적으로 가난한 실수요 세입자로부터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나 투자자에게 자금이 흘러간다. 신혼부부는 현금 2억원에 은행대출 2억원을 보태 경기도에 4억원짜리 전셋집을 마련한다. 경기도의 집주인은 전세보증금 4억원과 현금 2억원에 은행대출 2억원을 보태 강북에 있는 8억원짜리 전셋집에 들어간다. 강북의 집주인은 전세보증금, 보유현금, 은행대출을 더해 강남의 고가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가거나 전세를 끼고 새로 고가 아파트를 구매한다. 이렇게 하여 자금흐름의 사슬이 형성된다. 통상 이 사슬의 정점에는 부자들과 다주택자들이 있고 아래쪽에는 서민 무주택자들이 있다.
전세제도하에서 세입자는 다 똑같은 ‘을’이 아니며, 집주인도 모두 똑같은 ‘갑’이 아니다. 강북의 세입자는 경기도의 집주인이고 강남의 세입자는 강북의 집주인이다. 사슬의 맨 아래에 존재하는 사람들만 진정한 을이고 사슬의 맨 위에 있는 사람만 진정한 갑일 뿐, 나머지는 모두 갑인 동시에 을이다. 임차료 부담이 과도한 서민들에게는 차라리 임차료에 대한 보조금이나 저금리대출을 지원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모든’ 세입자를 을로 보고 ‘모든’ 집주인을 갑으로 보다 보니 이제는 과도한 임대차보호법까지 입법이 시도되고 있다.
전세제도는 차입을 이용한 고위험투자(레버리지 투자)를 손쉽게 만든다. 첫해에 4000만원을 저축해 전세보증금 3억6000만원을 안고 4억원짜리 집을 사고 2, 3, 4년차에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 3, 4년차엔 1, 2년차에 산 집 두 채의 전세보증금을 5%씩 올려 4000만원을 비축한다. 5년차엔 그해에 저축한 돈 4000만원과 3, 4년차에 비축해둔 4000만원을 이용해 전세를 안고 4억원짜리 집 두 채를 사거나 더 비싼 집을 한 채 산다.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로 금융시장의 위험도는 매우 높아지고 매매가격은 상승하며 부동산시장엔 거품이 낀다.
전세 레버리지 투자는 은행대출을 이용하지 않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은행대출만 규제해서는 전세 레버리지 투자를 막을 수 없다. 은행대출만 강하게 조이면 오히려 실수요자는 집을 못 사고, 비실수요자는 집을 사는 역설도 발생한다. 5억원짜리 집이 있다. 은행의 주택담보인정비율이 50%이면 현금 2억원을 가진 실수요자는 이 집을 살 수가 없다. 반면 비실수요자는 현금이 1억5000만원만 있어도 전세보증금 3억5000만원을 안으면 집을 구매할 수 있다. 결국 과도한 전세 레버리지 투자를 막으려면 은행대출금과 전세보증금을 합한 ‘부채총액’에 대한 규제를 해야 한다. 전세보증금도 금융부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총금융부채한도를 기준으로 이용하고 그 한도를 60%로 늘리면 현금 2억원을 가진 실수요자는 5억원짜리 집을 사지만 현금 1억5000만원을 가진 비실수요자는 집을 살 수 없다.
전세 레버리지 투자가 광범위한 상황에서 보유세 강화는 집값 하락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못 된다. 보유세 강화와 함께 부채총액 규제를 해야만 전세 레버리지 투자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다주택자들이 버티지 못한다./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2020-08-04
‘민주주의 허울 쓴 독재’라는데…
대한민국 70년 세월의 ‘노멀’이야말로 보수, 극우, 독재였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13년은 그 세월에 비하면 ‘뉴노멀’이고 비정상이며 ‘가보지 못한 나라’다. 보수는 13년 동안 색깔론과 독재론으로 딴지걸기를 해왔다. 국민이 선거에서 180석을 준 것은 무난하게 정권을 유지하라는 게 아니라 그에 걸맞은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행사하라는 것이다.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4일 오후 국회 본청 계단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공수처법과 부동산 관련 법 통과를 규탄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민간독재, 파시즘, 전체주의, 광기…. 보수 정치인과 언론이 일제히 나서 현 정권을 몰아붙인다.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할 검찰총장마저 교묘한 언사로 ‘민주주의 허울을 쓴 독재’라는 표현을 들이댄다. 독재 치하에서 이처럼 자유로운 권력 비판이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모두들 ‘독재몰이’에 여념이 없다.
이런 모습은 4·15 총선을 몇달 앞둔 올해 초에도 있었다. 지난해 말 더불어민주당이 정의당 등과 함께 선거법과 검찰개혁 법안을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한 직후다. 그즈음에도 독재니 사회주의니 동물농장이니 하는 험한 말이 넘쳐났다. 독재의 망령이, 파시즘의 망령이 우리 사회를 떠돈다는데, 정말 그런가.
총선을 앞두고 보수 야당이 그렇게 독재라고 외쳤지만 국민들은 집권 여당에 180석 가까운 의석을 몰아줬다. 적어도 독재라는 비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게 총선에서 판명난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중시해온 진보개혁 세력에게 독재 비판은 뼈아프다. 촛불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촛불을 든 시민 위에 군림하는 독재라면 존립 근거가 무너지는 일이다. 하지만 보수 일각의 독재 주장은 번지수가 틀렸다.
현재의 미래통합당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3분의 1을 조금 넘는 의석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개원 협상 과정에서 상임위원장 할당분을 걷어찬 건 최소한의 저지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선 아예 여당에 모든 책임을 떠넘긴 뒤 독재로 몰아붙이는 게 쉬운 선택이다. 그간 우리 정치사로 보면 지금 정국은 분명 ‘뉴노멀’, 비정상이다. 대한민국 70년 세월의 ‘노멀’이야말로 보수, 극우, 독재였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3년은 그 긴 세월에 비춰보면 뉴노멀이고 비정상이며 ‘가보지 못한 나라’인 셈이다. 지난 13년간의 뉴노멀 시대에 보수는 색깔론과 독재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며 딴지걸기를 해왔다.
도대체 무엇이 독재인가. 합법적 독재라는데, 이 정도의 입법 독주를 놓고 파시즘이라는 건 설득력이 없다. 히틀러가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뒤 모든 권력을 차지한 걸 갖다대지만 경우가 다르다. 알다시피 히틀러의 파시즘은 인종 말살, 침략주의 등 반휴머니즘으로 점철됐다.
부동산시장이 시시각각으로 출렁이는 상황에서 임대차 3법, 부동산 3법을 야당 반대를 뚫고 단독 처리했다고 해서 독재라는 건 너무 나갔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충격을 시급히 해소하기 위해 35조원의 3차 추경을 밀어붙인 게 어떻게 독재가 되나. 차라리 미래통합당 윤희숙 의원처럼 “나는 임차인”이라며 정부 정책의 허점을 매섭게 파고드는 게 좋다.
입법 강행에 따른 정책적 성패에 대해선 정부여당이 책임을 질 일이다. 부동산 정책이 잘못됐다면 내년 봄 보궐선거나 내후년 대선에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정책적 문제들을 독재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건 이념의 과잉이고, 과거 ‘민주 대 반민주론’의 보수 버전일 뿐이다.
적어도 노무현 정부 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총선에서 이겨놓고도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주저앉았지만, 이번엔 어찌됐든 의도한 정책들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엔 이념형 정책을 밀어붙이다 실패했지만 지금은 민생형 입법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 감사원장 소신을 둘러싼 논란은 어찌 보면 민주주의 틀 안에서 벌어지는 불필요한 소모전이다. 독재 정부가 눈 밖에 난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을 자리보전 시키면서 불만을 터뜨리는 일은 없다. 검찰총장이 사실상 정권을 상대로 독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지금이 독재와는 거리가 멀다는 반증이다. 대통령 임명직인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의 궤도이탈적 행태는 독재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적인 국정 운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갈등 구조는 어떻게든 하루빨리 정리하는 게 좋다.
국민이 선거에서 180석을 준 것은 그냥 무난하게 정권을 유지하라는 게 아니다. 그 의석에 걸맞은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행사하라는 것이다. 180석을 헌 칼 쓰듯 휘두르는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건 더 큰 문제다.
4·15 총선 이후 시대적 과제는 16년 만에 다시 들어선 진보개혁세력 우위의 권력구도를 토대로 70년 세월의 잔재를 극복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부분적 쏠림과 과속은 오랜 세월 동안 한쪽으로 기울었던 균형추를 바로잡기 위한 불가피한 진통인지도 모른다.
국민이 선거에서 180석을 준 것은 그냥 무난하게 정권을 유지하라는 게 아니다. 그 의석에 걸맞은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행사하라는 것이다. 180석을 헌 칼 쓰듯 휘두르는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건 더 큰 문제다.
4·15 총선 이후 시대적 과제는 16년 만에 다시 들어선 진보개혁세력 우위의 권력구도를 토대로 70년 세월의 잔재를 극복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부분적 쏠림과 과속은 오랜 세월 동안 한쪽으로 기울었던 균형추를 바로잡기 위한 불가피한 진통인지도 모른다.
백기철|편집인 kcbaek@hani.co.kr 한겨레 2020.08.05
서울은 여전히 만원이다
아무리 땅을 넓히고 주택 공급을 늘려도 서울은 만원(滿員)일 수밖에 없다. 사람 나면 서울로 가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시절부터 ‘서울은 만원’이다.
“서울은 넓다. 아홉(현재 스물다섯) 개의 구에 가, 동이 대충 잡아서 380개(현재 522개)나 된다. 굉장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넓은 서울도 370만명(현재 972만명)이 살아 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1966년 이호철 장편 <서울은 만원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은 물론 모든 가치가 비정상적으로 집적된 서울은 쉼없이 사람과 돈, 자원을 빨아들였다. 이미 서울은 만원이던 1966년 370만명이던 인구가 1970년 500만명을 넘어섰고, 1988년에는 1000만명을 돌파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택지를 개발하면서 외연을 확장했으나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곽 찼다. 급기야 경기도에 열서너 개의 신도시를 개발해 밀려드는 인구를 분산했지만 서울은 여전히 만원이다.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95%를 넘어섰지만 1966년 때처럼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집값과 전셋값 때문에 서울 밖으로 이주한 가구들은 기회만 되면 서울로 진입을 준비한다. 특히 서울 부동산은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압도하는 시장이다. 서울 부동산에 대한 잠재 수요가 날로 확대되는 이유다. 역대 정권에서 10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나왔지만 서울의 집과 집값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서울과 수도권 초집중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부동산 모순을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수도권이 더 커졌다. 수도권 인구는 2596만명, 비수도권은 2582만명이다. 국토의 12% 땅에 인구의 52%가 거주한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이 한 도시와 그 주변에 몰려 사는 나라는 없다. 수도권 집중이 가속되는 건 서울이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가치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기업, 의료, 금융, 교육 등의 최고기관이 몰려 있다. 소위 상위권 대학의 80%, 100대 기업 본사 91%가 서울에 있다. 나라 전체 일자리의 54%가 서울과 수도권에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수도권으로 전입 사유는 직업, 교육, 주택 구입 순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자리를 찾으러,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야 하는 세상이다.
수도권 일극 체제를 그냥 두고는 어떤 주택, 인구, 교육, 환경 정책도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부동산 양극화는 피할 수 없다. 결국 장기적으로 수도권 집중 완화와 집값 안정은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인구이동이 발생하지 않고 균형발전이 이루어질 때야 가능하다.
수도권 과밀 억제와 균형발전을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처음 행정수도 건설이 추진된 것은 박정희 정권 때다. “서울의 근본문제가 인구 증가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서울의 인구집중을 억제하는 가장 확실한 방안은 행정수도 이전입니다.”(1977년 2월 박정희)
그 “가장 확실한 방안” 행정수도 건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념에 힘입어 실현 목전까지 갔었다. 2003년 12월 ‘신행정수도건설 특별조치법’은 여야 합의로 통과되었다. 서울에 집중된 가치를 분산시키고 이를 통해 수도권 집중 완화와 균형발전의 주춧돌이 될 행정수도는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에 막혔다. ‘경국대전’ 이래 관습헌법 위배라는 기이한 논리가 동원됐다. 분명 원래 계획대로 행정수도가 건설되었다면 수도권 과밀 해소와 균형발전은 더욱 큰 성과를 냈을 터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건설된 세종시는 어정쩡한 위상이다. 중앙부처의 3분의 2가 옮겨갔지만 정부의 핵심인 청와대와 국회는 서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쪽’ 행정수도로 인한 비효율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심대한 행정 비효율성을 시정하기 위해서도 ‘반쪽’은 해소되어야 한다.
2017년 대선에서 주요 후보들은 모두 세종시에 행정수도를 세우겠다고 공약했다. ‘행정수도 이전’에 여야를 떠나 어느 정도 공감대가 마련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공론화 과정 없이 ‘부동산 사태’ 해결을 앞세워 갑자기 행정수도 이전을 제기함으로써 ‘정쟁화’ 빌미를 제공한 것은 아쉽다. 그렇다고 행정수도의 대의가 부정될 수는 없다. 괴물스러운 ‘수도권공화국’을 해체하고, 헌법이 명한 국토의 균형발전을 이루고, 정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행정수도 문제를 이번에는 매듭지어야 한다.
양권모 편집인 경향 2020.08.05.
주한미군 감축’ 호들갑 떨 일인가
2019년 시작된 주한미군의 주둔비용 분담 문제가 급기야 주한미군 감축 문제로 초점이 옮겨졌다. 독일과의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주독미군의 감축 문제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의 보도가 아니더라도 이 문제가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도 적용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주한미군은 한국의 국방 정책에 있어 중추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국제법으로서의 정전협정 위반자가 범법자가 아닌 영웅으로 대접받는 불안정한 정전체제에서 주한미군의 존재는 한반도에서 전쟁억지력을 위한 수단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 감축론이 나오고 있으니 국내외에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주한미군 감축을 둘러싼 논란은 그다지 크게 새로운 이슈가 아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직후 38선 이남에 주한미군이 처음 주둔했을 때부터 주한미군 철수론이 제기되었다. 1947년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당시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16개 지역 중 한국의 중요성을 13번째로 평가하였다. 그 결과 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38선 분쟁으로 인해 무초 주한미국 대사가 반대했음에도 주한미군은 1949년 6월30일 철수하였다.
정전협정을 맺기 직전인 1953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는 한반도에서 무력행위가 종식된 직후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스위스나 스웨덴처럼 중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가운데, 군 관계자들은 필요 없는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을 지목하였다.
1960년대 말의 안보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닉슨 행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을 추진하였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데도, 한국 정부와 사전 논의 없이 1개 사단을 철수하였고, 1975년까지 주한 미 지상군의 철수 계획을 수립하였다. 워터게이트와 남베트남 정부의 패망이 없었다면, 1975년 주한 미 지상군의 완전한 철수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이는 1970년대 말 카터 행정부의 철군론으로 이어졌다.
탈냉전 이후 부시 행정부는 해외주둔미군 재배치 계획(GPR)을 통해 주한미군 감축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대표를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하였고, 한국군의 평시 작전권을 한국 정부에 이관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주한미군의 규모 감축과 신속기동권으로의 전환, 그리고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 정부에 이양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렇게 지난 70여년간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를 둘러싼 논란이 다양하게 진행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지금 주한미군 감축 논의가 나온다는 점이 그다지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거나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또 다른 논란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주한미군 감축 및 철수를 둘러싼 논란이 이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면, 이는 과거 한국 정부가 근무 태만 했다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두 가지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첫째로 언론의 태도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직후 한·미 정상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다. 한국의 언론들은 닉슨 독트린은 한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정확히 1년 뒤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을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정확히 확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희망적 관측(wishful thinking)만 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둘째로 주한미군에 대한 정책은 미국 정부의 필요성에 의해 나온다는 점이다. 럼스펠드 전 국방부 장관은 한국의 반미시위가 계속되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다. 당시 미국 정부의 전반적인 대외정책과 재정 상황에 고려하여 주한미군 감축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고민하였음에도 말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한미군에 관한 논란 역시 한국이 아닌 미국 정부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문제이다.
문제의 기원과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국내적으로 정치적 논란이 될 수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실현될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의 문제로 그 자체에 대한 논란을 벌일 시간에 그 후에 필요한 전쟁억지력을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박태균 ㅣ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겨레 2020.08.11.
기후위기와 진보 언론
수마가 온 강토를 할퀴었다. 올 장마는 여러모로 ‘역대급’이었다. 기상 전문가는 기후변화가 원인이라 한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염병 코로나19의 대유행, 지난해 9월부터 6개월 동안 대륙을 불태운 오스트레일리아 산불도 기후변화와 관련 있는 재해라는 진단이 나왔다.
기후변화는 날씨, 기온, 바닷물 온도가 달라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지구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때, 사람도 문명도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묵시록’이 기후변화의 경고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노력해 이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길어야 30년이라고 경고한다. 살던 대로 살 것인지, 지금이라도 삶을 바꿀 것인지가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이다.
기후변화는 언론에도 큰 도전을 안겨준다. 환경을 감시하고, 행복한 미래를 그려내는 공론장 역할이 어느 곳보다 절실한 분야가 바로 기후변화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2~3년 사이 기후변화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2018년 10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지구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1.5도 이내로 억제하지 않으면 큰 재앙이 온다고 경고한 것이 분수령이 됐다. 세계 주요 언론이 협업에 나선 것은 상징적이다. 지난해 4월 결성된 ‘커버링 클라이밋 나우’라는 협력 프로젝트에는<블룸버그>,<알자지라>,<아사히신문> 등 세계 470여개 신문, 방송, 통신, 잡지사가 참여했다. ‘클라이밋 데스크’라는 프로젝트에는 <가디언>, <허핑턴포스트> 등 18개 온∙오프라인 매체가 참여했다. 이들은 웹사이트에 기사와 최신 데이터, 기후변화 보도 기법 등을 모아서 공유한다. 협업을 하는 이유는 세계적이고 장기적인 변화여서 체감하기 어려운 기후변화를 독자가 자기 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려는 것이다.
국내 언론의 변화도 눈에 띈다. <한겨레>는 올 4월 국내 종합일간지 가운데 처음으로 편집국에 기후변화팀을 신설했다. 종전과 다른 의지와 관심으로 이 문제를 취재하고 보도하겠다는 다짐이었다. 5월에는 지령 1만호 특집으로 ‘기후변화와 감염병, 자연의 반격’이란 기획을 내보냈다. 한겨레는 또 최근 여론 면 필진을 개편하면서 바람, 햇빛, 습지, 비를 주제로 돌아가며 연재하는 날씨 칼럼을 신설했다. 7월 말부터는 온실가스 수치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그래프를 매주 싣고 있다. <경향신문>도 기후변화를 적극적으로 다루는데, 녹색연합과 공동으로 기후변화가 해녀, 농민, 양봉업자 등 개인의 구체적 삶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 보여주는 ‘기후변화의 증인들’ 이란 기획물을 6월 말부터 연재하기도 했다.
사실 기후변화는 한겨레 같은 진보 언론이 대표 상품화하기 딱 좋은 주제이다. 기후변화는 무한 생산과 소비, 불평등 확대를 특징으로 하는 현 자본주의 경제∙사회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명확히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가 잇따라 약속하는 2050년까지 ‘탄소 제로’(배출과 흡수량을 동일하게 해 전체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를 달성하려면 성장과 분배의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 환경과 사회, 그리고 경제가 공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적정하게 생산하고, 기본소득과 일자리 나누기 등으로 잘 분배하는 것이 기후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습이다.
전기차가 빠르게 화석연료 자동차를 대체할 것이다. 에너지의 중심도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이미 석탄, 석유 같은 화석연료 산업에서 몇십년 안에 수천조원의 ‘좌초자산’이 발생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애플이 전 세계 부품 업체에 100% 재생에너지
전력 사용을 요구하고, 세계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석탄 산업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후변화는 무역장벽이자, 산업경쟁력의 요체가 될 조짐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산업계의 인식과 대응은 소극적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린뉴딜을 표방하면서 2050년 탄소 중립 목표는 제시하지 않았으며, 한국전력은 최근에도 해외 석탄발전 투자를 결정했다.
이런 점에서 기후변화 보도는 기상, 환경 이슈에 머물지 말고 정치, 경제, 사회의 총체적 변화를 꾀하는 새 진보의 핵심 의제로 나아가야 한다. 한겨레도 이에 걸맞은 인식, 인력 및 조직의 체제를 차츰 갖추어가야 한다. 기후변화를 대표적 의제로 삼아 독자와 소통하는 영국 <가디언>의 노력은 눈여겨볼 만하다. 올 1월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로 바꾸어 쓰고, 화석연료 기업의 광고를 싣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가디언은 “기후위기와 연관된 문제들은 체계적이며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요구한다”며 “우리는 미래세대 편에 서고, 인류 보존을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서는 개인과 공동체를 지속해서 보도하겠다”고 밝혔다. 기후위기 대응을 언론사의 중대한 사회적 책무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독자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 선순환 모델을 구축해가려는 것이다. 이봉현 |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한겨레 2020.08.11.
선동가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선명함
종종 미디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거리를 둔다. 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교묘한 논리로 세계를 단칼에 양분하는 선무당들의 굿판이 고통스러워서다. 사실 확인조차 무시하는 조악한 기사의 범람 속에서, 그나마 깊이 있는 논의로 중심을 잡던 SNS 공간마저 흑백논리가 난무할 때는 정상적인 멘털을 유지하기 힘들다. 감각적 선동이 초래하는 비극을 무수히 학습하면서도, 어째서 사람들은 늘 열광적 행위에 빠져드는 것일까.
발터 베냐민, 아도르노, 하버마스 등 20세기 초중반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뛰어난 철학자들 중 하나인 레오 뢰벤탈은, 선동가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첫째는 음모론, 즉 ‘당신은 속고 있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악마 같은 자들의 속임수에 의해 선량한 이들이 바보 취급을 당한다며 억울함과 의혹을 부추기는데, 당시 서양 사회에선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뉴딜주의자 등이 주요 표적이었다. 혁명기 공산국가들은 자본가나 지식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둘째, 진보 정부란 무정부주의나 다름없다는 논리와 함께 세금 강탈에 대한 분노를 고조시키고, 당장 막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라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셋째, 외국인이나 타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타지에서 들어온 흰개미들이 우리의 둥지에서 알을 까고 있는데, 이를 방조하는 정부 역시 신뢰할 수 없다며 음모론을 더한다. 코로나19 초기의 선동가들이 떠오른다. 넷째, 나와 의견이나 출신이 다른 이들은 기생충이나 파충류, 세균같이 응당 사라져야 할 적들이기에, 그들을 박멸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혐오를 부추긴다. 역사의 모든 잔혹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약 100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요즘의 선동가들에 대한 묘사인 듯 생생하다. 종말론 교주처럼 당장 하늘이 무너질 듯 소란을 피워대는 이들이 노리는 것은 무얼까. 뢰벤탈의 또 다른 항목을 보면 이해가 쉽다. “다섯째,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생각은 사치다. 진정한 개혁가이자 순교자인 내가 나서서 쓰레기들을 치워 주겠다. 그러니 어서 나에게 돈과 힘을 다오.”
이들은 포섭 대상의 이성적 사고를 가장 경계한다는 점에서 보이스 피싱 범죄자들과도 비슷해 보인다. 당장 돈을 입금하지 않으면 가족이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정신 줄을 놓게 만든다. 더 나쁜 점은 개인의 피해를 넘어 사회 전체에 증오와 불신을 광범위하게 전파한다는 것이다
SNS에 고양이가 아프다며 올린 사진에, 고양이는 없고 눈물 흘리는 본인의 얼굴만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약자를 걱정하는 듯하지만, 본심은 자신의 선량함을 알리고픈 의도가 우선한다는 이야기다. 정도를 넘어서는 지식이나 부의 자랑과 마찬가지로, 과도한 선량함과 정의감의 표출도 나르시시즘에 가까울 것이다. 선동가들의 시선과 관심이 머무는 최종 소실점에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이 그토록 걱정하는 서민과 약자들 역시 단지 자신의 자기애를 드러내는 소재이자 유무형의 권력을 위한 수단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성숙한 이들도 위기를 경고하거나 의혹을 제기하고 때로는 분노한다. 그러나 공포와 분열의 언어를 쉽게 사용하지 않으며, 나와 다소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를 조장하지 않는다. 부패와 폭력을 비난하고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열한 언행이나 잔혹한 처단을 원하지도 않는다. 미문과 논리로 포장해봤자 미성숙한 자들의 이지메 문화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 혹은 자신과 친밀한 개인이나 집단이라고 해서 흠집 없는 권력을 행사한다고 과신하지 않는다. 어떠한 인간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 빛과 그늘이 공존하지 않는 세계는 없다는 단순한 사실만 깨우쳐도 그토록 선명한 흑백을 추종할 수는 없다./박선화 한신대 교수 경향 2020.08.05.
무지의 세계와 자존심
최근 사흘이라는 단어가 검색엔진의 인기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그 연유가 웃긴데 정부 시책에 ‘사흘’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사흘을 4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아마 사흘을 ‘4흘’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샘 오취리와 의정부고의 블랙페이스 논란이었다. 매해 한국에서 유행한 밈들을 따라 하며 졸업사진을 찍었던 의정부고 학생들이 흑인을 흉내 내려 블랙페이스(blackface)를 한 것이었다.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가 이러한 형상을 지적하고, 그 지적 과정에서 한국인들을 인종차별자로 몰았다며 논쟁이 격해진 것이다. 샘 오취리는 해당 사항에 대해 사과문을 게시했고 인터넷에서는 샘 오취리와 연대하겠다는 해시태그 운동이 퍼졌다.
이 두 사건을 살펴보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종종 목격되는 감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분노다. 사흘이 4일이 아니라 3일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는데 3일이 아니라 사흘이라고 썼냐고, 정부가 잘못한 것이라며 열을 올린다거나 블랙페이스가 왜 인종차별인지 한국에 있는 내가 왜 알아야 하냐고 화를 낸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무지의 자존심’이라고 부른다.
언젠가부터 무언가 배워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이 늘어났다. 사흘을 4일로 착각할 수 있다. 흑인의 인권 문제나 역사 등을 몰랐다면 민스트럴 쇼나 블랙페이스에 대해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과 지적이 일어나면, 그것이 그들의 인생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함에도 마치 자신의 세계를 망가뜨리는 악당을 마주한 것처럼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마치 그 지식을 인정하면 그들의 삶이 지금까지와는 극적으로 변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것은 반지성주의 같은 거창한 이름이 아니다. 그것보다 이 사태는 나의 삶에 필요 없는 잉여 정보들에 대한 극단적 거부에 가깝다. 사람은 누구나 무지한 상태로 태어나 자신의 삶에 필요한 정보를 채워간다. 인간의 삶은 짧고 지식의 양은 유구한 역사와 함께 누적되었다. 내가 경험한 적 없고 체험한 적 없는 걸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것은 마치 타인과의 경쟁에서 내가 지는 것처럼, 내가 모자란 것처럼 여겨진다.
온라인 공간은 불특정 다수의 청자와 화자를 폭력적으로 연결한다. 청자 없이 무작위로 이야기된 ‘지적’은 순식간에 아무 관련 없는 나에게로 도착하고, 마치 자기 자신을 가르치려는 꼰대들이 아무 죄 없는 나를 습격하는 것처럼 여긴다. 이러한 사람들의 히스테리가 터져나오고, 무지의 세계를 지키려는 히스테리는 또다시 다른 청자들에게 불시착한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발작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만 가득해진다.
가끔 팟캐스트나 유튜브, TV 등에서 이루어지는 인문학 강좌 열풍을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든다. 너도나도 ‘무지한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자존심을 내세우고, 지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꼬투리를 잡거나 윤리가 대중문화를 망가뜨린다고 개탄하는 시대에서 남을 가르치고 배우는 프로그램이 유행하다니. 지독한 아이러니의 시대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경향 2020.08.12.
진보정부에서 국방비가 더 늘어나는 까닭
북한 장사정포 요격을 위한 한국형 아이언돔 구축과 경항모 도입. 국방부가 지난 10일 발표한 국방중기계획의 핵심 사업들이다. 이를 위해 향후 5년간 방위력 개선에 100조원 등 총 300조원의 국방비가 투입된다. 미-중 신냉전과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 속에 한국도 ‘자주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엄청난 국민 세금을 투입하는 군비 강화는 분명하게 실질 성과로 연결돼야 하고, 남북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자칫 한반도 평화와 군축이라는 큰 줄기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개발한 아이언돔은 헤즈볼라 같은 민병대 수준의 세력이 간헐적으로 쏘는 로켓과 포탄 공격을 막는 요격시스템이다. 휴전선 부근에 배치된 북한 장사정포에서 분당 수백발씩 쏟아질 포탄을 막는 데 과연 효과적일지 많은 전문가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대기권 밖에서 소련 핵미사일을 요격한다는 전략방위구상(SDI, 일명 스타워즈)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싸고 가장 비현실적인’ 군사계획이란 소리를 들었다.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려 한다는데, 그래도 서울 방어용 아이언돔이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4일 밤 가자지구에서 날아오는 로켓을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요격미사일이 추격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더 중요한 건, 아이언돔을 핵심 사업으로 제시하면서 현 정부 들어 내세운 국방전략 목표가 슬그머니 바뀌었다는 점이다. 2018년 12월 국방부가 청와대에 보고한 ‘국방개혁2.0’의 플랜비(B)는, 전략 목표를 ‘북한 위협 대응’에서 ‘전방위 원거리 위협 대응’으로 수정했다. 그런데 이번 국방중기계획은 다시 ‘북한의 단거리 위협 대응’을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물론 2018년과 지금은 남북관계의 온도가 다르다. 그러나 지금 남북관계가 냉각됐다고 큰돈을 들여 아이언돔을 구축한다면, 현 정부에서 남북간 군축은 후순위로 물리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국방중기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이라 곧바로 예산 투입으로 연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 결재를 받은 계획안을 토대로 국방부는 기획재정부를 압박할 것이고, 2022년 대통령선거 일정을 고려하면 여야 모두 국방비 증액에 인색할 형편은 되지 못한다. 2017년 대선 후보 토론에서 문재인 후보와 유승민 후보가 누가 더 국방비 증액에 적극적이었나를 놓고 설전을 벌인 건 상징적이다. 유승민 후보가 “내가 국회 국방위원장일 때 누구보다 국방 예산을 많이 투입했다”고 하자 문재인 후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노무현 정부 때 국방비 증가율이 더 높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보수정부보다 진보정부에서 국방비는 더 늘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방비는 연평균 8.9% 늘어난 데 비해, 이명박 정부는 6.1%, 박근혜 정부는 4.1% 증가에 그쳤다. 문재인 정부의 지난 3년간 국방비 증가율은 약 7.5%로 역시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높다.
여기엔 ‘진보정부에선 안보가 불안하다’는 보수의 공세에 대응해야 한다는, 그래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오랜 트라우마가 깔려 있는 듯싶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안보에선 보수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 심리는 여전히 진보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니 이낙연 전 국무총리도,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도,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도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비는 더 늘었다”고 자랑한다. 이 틈새를 비집고 전략목표에 어긋나고 효과도 불분명한 사업이 끼어드는 것이다.
현 정부 임기 내에 마무리짓기로 했던 전시작전권 전환이 또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전환조건 검증’을 이유로 늑장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에서 전작권 전환을 공식 제기한 게 벌써 15년 전 일이다. 그때는 미국이 한국군 역량을 높게 평가하며 2009년엔 전시작전권을 넘기겠다고 말했는데, 이제 와서 철저한 검증을 하겠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배경엔 미-중 신냉전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어쩌면 아이언돔이 핵심 방위계획으로 제시되는 것도 전작권과 무관치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작전권을 갖는다는 건 곧 ‘내 의지로 국방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춰 자원을 배치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뜻한다. 수동적인 체제에 익숙하면 어떤 무기체계가 중장기적으로 한국군의 미래에 부합할지 창의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전략목표나 실효성에서 의문이 드는 아이언돔 같은 사업이 국방계획 간판으로 등장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내후년 봄이면 다시 대선이다. 그때는 “효과가 불분명한 국방비를 줄여서 국민의 의료·복지 서비스를 개선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대통령 후보를 볼 수 있을까.
박찬수 선임논설위원 pcs@hani.co.kr한겨레 2020.08.12
일본 대신 우리가 분단된 까닭
왜 패전국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 분단되었을까? 한민족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을 의문이다. 8월15일을 해방의 날로 기념하기에는 바로 그날부터 시작된 분단이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말과 글은 되찾았지만, 천만 가족이 생이별하고 온 나라 땅이 세계적인 전쟁터가 되었던 역사가 억울하고,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긴장과 갈등이 억울하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연이었을까? 최근 연구들은 비밀해제 기록을 통해 당시 정황을 밝히고 있다.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처럼 일본을 분할 점령하기로 했다. 1945년 6월 독일의 분할통치가 시작되었고, 일본이 다음 차례였다. 7월 포츠담 회담에서 미·영·중·소 연합국은 일본 분할점령에 합의했다. 미국이 간토와 간사이, 소련이 홋카이도와 도호쿠, 영국이 규슈와 주고쿠, 중국이 시코쿠를 각각 차지하고 도쿄는 베를린처럼 4개국이 분할통치하는 점령계획이 논의되었다. 8월13일 미 국무부는 “일본 점령을 위한 국가별 무력구성안”을 마련했다.
일본 분할계획이 왜 그대로 시행되지 않고, 엉뚱하게 조선이 대신 분단되었을까? 그 며칠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운다던 일본은 왜 서둘러서 8월15일에 항복했나? 지금까지는 주로 원폭 투하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미 일본학자 하세가와 쓰요시 교수는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소련이 참여하는 일본 분할을 피하고,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원폭 때문에 항복했다는 주장은 미국의 일본 열도 단독 점령을 뒷받침했다(<종전의 설계자들>, 메디치미디어).
다른 한편으로 고시로 유키코 교수는 일본 군부가 미국과 소련의 충돌 지점이 일본 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이나, 만주, 조선이 되도록 유도하려 했다고 한다. 패전 후 일본이 재기하는 데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38도선 부근도 일본군이 꼽은 유력한 미·소 대립 지점 중 하나였다. 소련은 8월9일 개전하자마자 만주와 남사할린으로 진격하고, 하루 만에 함경북도 웅기를 점령했다. 다음날인 10일 일본은 항복 의사를 알려왔다. 미군 소령 딘 러스크는 하룻밤 사이에 조선의 38도선을 분할점령선으로 제안했다. 소련군의 홋카이도 상륙은 시간문제였다. 일본 천황은 8월15일 ‘종전(패전도 항복도 아닌) 선언’을 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소련이 참여한 일본 열도 분할점령은 피할 수 있을 만큼 빠른 항복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소련을 동아시아로 끌어들이고, 원자탄 같은 인류적 재앙을 불러온 너무 늦은 항복이었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연합국 정상이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을 논의하고 있을 때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패전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패전 이후 공산혁명을 피하고 천황제를 유지하려면 조속히 영·미 쪽과 교섭해서 전쟁 종결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쇼와 천황은 그래도 종전 협상을 유리하게 하려면 적에게 확실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4월의 오키나와 전투였다.
“출혈작전”이라고 했다. 목적은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출혈을 최대한 야기해서 항복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출혈’은 맞서 싸우는 일본군과 모든 민간인에게도 요구되었다.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도 투입됐다. 일본 본토를 지키는 ‘방파제’, ‘버리는 돌’이라고 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참혹했다. 직접 전투를 한 양쪽 군인 사상자도 많았지만, 주민 46만명 중 12만명이 죽었다. 긴급 동원된 1만명에 이르는 조선인 ‘군부’와 ‘위안부’도 함께 희생되었다.
무모하고 잔혹한 “출혈작전”과 마주친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재촉하면서 동시에 원자폭탄 개발을 서둘렀다. 폭탄이 만들어지자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수십만 인구의 도시에 두차례나 원폭을 투하했다. 신무기의 위력을 과시해서 전후 패권을 다지려는 목적도 있었다. 소련은 침공 날짜를 앞당겨서 일본 점령의 지분을 챙기려 했다. 천황제를 지키려고 항복을 늦춘 일본과 동아시아 질서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만들려 한 강대국의 전략 때문에 수백만이 희생되고 민족의 운명이 갈렸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김구 선생은 그 교묘한 시점에 한탄했다. 중국에서 오랜 국공내전을 겪으며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지켜본 망명정부 수반은 ‘해방’을 그냥 반기지 못했다. 해방과 함께 온 분단이 어언 75년, 남북 대립과 전쟁 공포는 아직도 이 땅을 억누르고 있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우리는 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문화의 힘’을 쌓아 올렸다. 국제 정세는 다시 이 땅을 미·중 초강대국 충돌의 최전선으로 떠밀고 있다. 자주외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정병호|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겨레 2020.08.13.
혁명은 어디에
유독 추웠던 그 겨울, 그는 광장에서 풍찬노숙을 했다.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항의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텐트를 치고 ‘거리의 가수’가 됐다. 혹독한 바람을 맞으며 밤을 지새웠다. 함께 노숙하는 이들을 위해 수시로 기타를 들고 노래도 했다. 2016년 11월4일 시작된 광장의 겨울, 머잖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말마다 100만명이 모이고 100만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광장의 찬바람 한복판에 선 그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혁명이라고. 감정은 글이 되고 노래가 됐다. 이 노래에 그는 ‘R!’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혁명을 뜻하는 ‘revolution’의 약자다.
이 노래는 2016년 겨울부터 해를 넘어 지속됐던 광장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서툰 말 한마디 주저하며 내민 손”으로 시작할 때, 그는 읊조리듯 저음으로 부른다. 노래가 진행됨에 따라 감정은 점층법으로 고조되고 마침내 그는 한껏 소리지른다. 두 글자 단어를. ‘혁명’이라고. 이전에 발표했던 일곱 장의 앨범에선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단어이자 주제였다. 2016년 촛불혁명의 시작 이전부터 끝을 지켜봐왔기에 쓸 수 있던 거대한 단어를, 손병휘는 자신의 여덟번째 앨범에 내세웠다.
전대협과 한총련의 시대, 그는 노래패 활동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투쟁의 현장이라면 어디든 빠지지 않고 무대에 섰다. 조국과 청춘, 노래마을 등 그 시절 집회현장을 기웃거리기만 했어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들에 몸담았다. 현장의 ‘민중’들은 그의 선창에 맞춰 합창을 하고 손짓에 맞춰 주먹을 흔들었다. 하지만 ‘운동가’가 아닌 ‘음악가’로서의 그에겐 결핍이 있었다. 교회 밖의 찬송가와 제대 후의 군가와 마찬가지로 투쟁현장 바깥의 민중가요는 생명이 없었다.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 데뷔 앨범 <속눈썹>을 시작으로, 노래패 소속이 아닌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이 아닌 ‘대중’을 위한 음악을 시작했다. 그가 만들고 부르고 싶은 노래들을 녹음하고 발매했다. 차곡차곡 쌓인 앨범이 일곱이 되고 여덟이 되는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적은 없다. 그를 찾는 곳은 대체로 전과 같았다. ‘민중’에서 ‘시민’으로, ‘운동권’에서 ‘진보단체’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많은 무명 가수들이 그러하듯, 들인 공에 비해 돌아오는 게 현저히 적으면 음악계를 떠나기 마련이다. 과거에 함몰되어 현재를 잊는다. 손병휘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만든 여덟번째 앨범은 그의 이전 어떤 앨범보다 많은 힘이 들었다. 모던 록 밴드 허클베리핀의 이기용을 프로듀서로 기용했다. 이기용이 자처했다. 촛불의 광장에서 연주했던 두 진영, 민중 가수와 인디 음악가가 손을 잡고 함께 앨범을 만든 첫 사례다. 거리와 광장에서 싹튼 언어가 마음에서 숙성되어 현대의 사운드를 만났다. 손병휘의 힘있는 목소리와 성긴 멜로디가 허클베리핀의 편곡과 연주로 날것과 세련됨이 공존하는 음악으로 재탄생한다. 1990년대의 투쟁현장과 홍대앞 라이브클럽의 공집합을 담아낸다. CD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희귀해진 시대에 맞지 않는 화려한 앨범 아트워크는 음반의 가치를 기억하는 이들을 위한 선물처럼 보인다.
이 앨범에는 총 아홉곡이 담겼다. ‘R!’로 문을 열고 ‘마지막 전사에게’로 문을 닫는다. 첫 곡이 광장의 중심에 있던 이의 감정적 고양감을 반영한다면 마지막 곡은 회한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깃발은 낡아 버렸고/ 구호는 빛바랬네.” 한 시대의 선봉에 섰던 이들이 아파트에 목숨을 거는 모습이 투영된다. 구세대를 몰아내고 주류를 차지했던 세대가 뒷세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버둥대고 있는 현실도 느껴진다. 2016년 겨울에서 시작해서 2020년 여름까지, 한국 사회 흐름의 단면이 이 포크 가수의 앨범 밑바닥에 흐른다. 4년 전의 광장이 40년 전처럼 느껴지는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이 앨범을 듣는다./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경향 2020.08.13.
국립공원을 국가공원으로
일본의 경제도발 강행 후 폭발한 반일정서에 그간 잊혔던 일제강점기 잔재들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광복절을 맞는 오늘 대한민국 자연미를 대표하는 용어인 ‘국립공원(國立公園)’ 또한 청산해야 할 일제잔재임을 알린다.
미국에서 시작된 ‘National Park’ 제도는 미국이 아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일본인 학자 다무라 쓰요시(田村剛) 등이 ‘National Park’를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도입한 후 식민지인 대만으로 확대했고, 이후 금강산까지 일본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 한 것이 한반도 내 국립공원 용어의 시작이다. 금강산이 일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해방 후 별 고민 없이 일본 용어 그대로 국립공원이라 사용한 것이 지금까지 5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국립공원’을 하루빨리 ‘국가공원’으로 바꿔야 하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를 들어본다.
첫째, 용어 자체의 의미다. 국립공원은 ‘국가가 세운 공원’이다. 자연을 국가가 만들지 않았으니 그 의미부터 문제가 된다. 문화재를 보자. 문화재 보관을 위한 건물을 국가에서 만들면 국립박물관이 되지만 국보나 보물 등 문화재는 ‘국립문화재’가 아닌 ‘국가문화재’라 칭한다. 국립이란 단어는 국립공원을 빼고는 ‘세금으로 만든 것’에만 사용하니 이 자체만으로도 국립공원 용어가 심하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단어가 크게 다르지 않으니 그냥 쓰던 대로 쓰자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를 받아들이는 국민의 인식 차이는 너무나 크다. 둘째 이유이다. ‘국가’라는 명칭 부여는 단지 국가가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선택의 영역이다. 문화재로 치자면 국가가 가치를 인정한 것일 뿐 의무적으로 일반에 공개하라거나, 국립박물관에 옮겨야 한다고 강제하지 않는다. 국가 소유면 국립박물관에, 개인 소유면 개인 집에 보관해도 된다. 그런데 ‘국립’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국민이 주인이라는 의미로 묘하게 돌변한다. 세금으로 만든 것이라는 인식이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국립공원이라 칭하는 순간 사유지에 대한, 개인재산에 대한 권한이 사라진다.
그간 국가는 사유지로 자신들의 운영비 보전용 입장료를 받기도 했고, 2007년부터는 주인도 아니면서 무료로 전환했다. 대대로 내려온 가보를 국보로 지정, 국립박물관에 강제 전시토록 하고 돈을 받거나 받지 않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국립공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까? 당시 일본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한 ‘현인신’ 즉, ‘천황’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자연도 당연히 ‘천황’이 만든 것이니 그들의 국가관으로는 ‘국립’이라는 단어가 옳다. 국립공원은 ‘신이 다스리는 국가’인 일제의 자연관을 드러내는 용어다. 국가공원으로 바꿔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다. 일본에 우호적이고 일제강점기 때 국립공원을 지정했던 대만도 지금은 국가공원이라 칭한다.
기후위기시대, 공익을 위한 자연보전 노력은 훨씬 강화되어야만 한다. 다만 국가가 보호한다고 해서 사유재산을 강제로, 무상으로 이용할 권리가 모든 국민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제잔재 용어인 국립공원을 국가공원으로 변경하고 헌법에 따라 국민이건 국가건 공익적 가치제공 대가를 지불해야만 할 것이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경향 202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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