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이 다들 꿈이라는데 경향 202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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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멜로디 경향 2020.07.16
박원순의 공과 경향 2020.07.16.
불로소득 환수가 정답이다 경향 2020.07.16.
성범죄자가 판결에 웃는 나라 국민일보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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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어용지식인들에게 경향신문 2020.07.23.
나쁜 비판의 잉여 쾌락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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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권의 ‘야바위 國政’ 문화일보 2020 07 24
'강남공화국' 변화 못주면 문재인 정부 신뢰의 위기 닥친다 프레시안 2020.07.24.
미·중관계가 틀어지면 안 되는 이유 경향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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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마련’이 다들 꿈이라는데
대표적 재테크 수단인 ‘주식’과 ‘부동산’을 바라보는 감성은 전혀 다르다.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끼고 집을 구입한 사람에게도 “내 집 장만의 꿈을 실현했다”며 부러워하며 덕담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은퇴한 사람이 퇴직금으로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고 하면 다들 걱정하지만, 은행 대출금을 더해 집을 장만했다고 하면 “집이라도 있어 든든하겠다”고 격려한다. 신입사원이 재테크로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고 하면 다들 걱정하는 눈치지만 청약통장을 개설했다고 하면 성실한 친구로 여긴다. 즉, 주식 투자와 비교하면 부동산 투자는 일종의 ‘로망’에 가깝다. 이런 인식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부동산에 남다른 가치를 부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부동산을 취득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토지란 왕이나 귀족만 소유할 수 있는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번 토지를 소유하게 된 귀족은 해당 토지를 계속해서 자손들에게 물려줌으로써 토지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경제적 혜택을 특권화하기 일쑤였다. 또 많은 국가에서 토지 소유권 자체를 불분명하게 만들어 매매를 어렵게 하거나 귀족이 소유한 토지의 매매를 억제해왔다.
주택 내지 토지를 아무나 살 수 없었던 것은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정부의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철저히 백인만을 대상으로 집행되었다. 주로 흑인 내지 흑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좀처럼 대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목상의 이유는 흑인은 신용등급이 낮다는 것과 흑인 거주 지역은 담보물건이 불확실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주택담보대출을 집행하였던 연방은행에서 제작한 당시 지도를 보면, 백인 거주지의 경우 A, B, C등급으로 표시된 반면, 흑인 거주 지역은 D등급으로 표기되었다. 따라서 신용등급이 낮은 지역의 주택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낮은 흑인들에게 원천적으로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많은 이민자들에게 부동산은 여전히 로망이었다. 2002년 10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모든 미국인들이 저마다 집을 소유하는 것을 희망한다”라는 연설과 함께 10년 내로 대출업체를 통해 소수 인종 550만명에게 새로운 주택을 공급하기 위한 아메리칸 드림 지원법(American Dream Downpayment Act)에 서명한다. 이는 저소득 계층의 주택 구입을 보조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이 법안으로 인해 시중 은행은 저신용자들의 대출심사에 필요한 서류들을 충분히 요청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만 활성화되었다. 이로 인해 두 세기 전 미국에 흘러들어왔던 많은 흑인노예의 후손들과 역시 한 세기 전부터 불법이민자로 미국에 흘러들어왔던 많은 라틴계 사람들의 후손들이 집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 소유로 인한 혜택은 경제적인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미권 국가는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소작농에게 지주계층과 동일한 형태의 선거권을 준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다.
이상에서 나열한 바와 같이 부동산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투자를 통한 재산 증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많은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이란 투기 내지 투자 수단이기보다는 자신과 가족의 안정과 행복을 실현시켜 주는 보금자리이며, 자신이 견실한 경제인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일종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다.
불건전한 투기는 억제해야겠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은 실현시켜 주어야 하지 않을까.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경향 2020.07.15
친일·양민학살 백선엽을 미국이 적극 애도하는 까닭은?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역사적 배경이 평가 기준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전쟁영웅과 친일파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는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돼 독립군을 탄압한 뒤, 일본이 패망하면서 군문에 들어와 한국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의 사망과 관련해 미국 백악관, 국무부 등이 공식 애도를 표해 눈길을 끈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12일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백악관은 12일 한국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의 타계에 애도를 표한다.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백선엽 장군과 모든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한국이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이 되었다"라고 밝혔다<미국의소리방송 2020년 7월 15일>.
미 국무부 모건 오테이거스 대변인도 14일(현지시간) 성명에서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이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싸운 점을 강조하며, 그의 죽음에 대해 한국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한다"면서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서 한국 전쟁 중 조국에 대한 그의 봉사는 오늘날까지 미국과 한국 모두 계속 지키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한 싸움의 상징이었다. 백 장군은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일하면서 그의 나라를 위해 매우 탁월하게 봉사했고,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고 덧붙였다<미국의소리방송 2020년 7월 15일>.
백선엽을 극찬하는 미국의 태도는 과거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한민족의 3.1 독립운동, 북간도 등에서의 항일 투쟁, 일본 항복이후 미군정의 친일파의 등용과 4.3 제주 항쟁 및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등에 취했던 미국의 입장에 일관한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뒤, 한민족의 3.1독립운동은 물론 항일 무장에 대해 일본의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대처했다.
1905년 7월 29일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 육군 장관 태프트가 비밀리에 도쿄에서 만났다.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 필리핀 지배권을 각각 인정했다. 일본은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에 이어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배권을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은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인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 미국의 묵인 아래에 조선반도 식민침략을 본격화했다.
3·1독립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여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대 사건이다. 3·1독립운동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기 전인 1918년 1월 발표한 비밀외교의 폐지와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평화원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은 1919년 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열린 파리강화조약 회의에서 일본 등 강국들의 식민지 지배 문제에 입을 다물었다. 특히 미국은 당시 일본이 전승국의 하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해 일본에 강점된 한반도 문제 거론을 부적절하게 여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뿐 아니다.
미 국무부는 1919년 4월 주일 미 대사에게 보낸 공문에서 '서울의 미국 영사관은 미국이 조선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수행을 지원한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미 국무부는 이어 '서울의 미 영사관은 일본 당국이 미국 정부가 조선의 민족주의 운동에 동정적이라고 의심할만한 어떤 일을 해서도 안 된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미국은 파리강화조약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대표로 선출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참가에도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 독립운동 세력의 하와이 대표 이승만, 미서부 지역 대표 민호찬, 중서부 대표 헨리 한경청 등은 비자 문제와 미국 재입국 불허 우려로 회의에 참석치 못했다. 미 정부 당국이 이들의 출국을 실질적으로 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대표로 파리강화조약 회의에 참석키 위해 파리 회의장까지 갔지만 조선의 정식 대표로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중국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조선 독립 문제를 의제로 삼을 것을 요구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미국은 조선 대표 등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파리강화조약 이후 조선의 독립문제는 2차 대전 종전까지 미국을 포함한 서구 진영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이 3·1독립운동 당시 한민족 대신 일본에 기운 태도를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은 1915년 일본이 만주와 몽골, 산둥반도에서 이익을 추구하도록 동의해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일본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은 1918년 11월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이 전승국의 입장에서 독일이 소유하던 중국 내 일부 도서와 재산을 차지하도록 1919년 동의하는 등 일본의 이익을 챙겨주는데 적극적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21년 태평양에서의 해군력 배치 등에 협의하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일본이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지고 결국 태평양전쟁에서 맞붙게 된다.
3·1독립운동 이후인 1920년 6월과 10월 우리 민족이 거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독립운동사의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일본군의 중국 진입을 한국 독립군이 방해하고 저지한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은 1차 대전 전후 처리작업을 놓고 미국과 일본이 동맹국의 입장에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당시 독도의 영유권을 표기치 않아 오늘날에도 일본이 파렴치한 태도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미국은 당시 일본이 1905년 강탈한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언급치 않았는데 이 또한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연장선상에 있다 할 것이다.
한편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의 일본 병합을 인정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맥아더는 일본 본토에서와 동일한 정책을 한반도 남쪽에서 집행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그런 정책에 편승해 미군정에 의해 해방정국의 권력집단으로 변신한 친일세력과 손을 잡는 반민족적 선택을 했다.
미국은 1947년 제주 4.3이 발생하자 소련과 중국을 의식해 조기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친일세력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자비한 학살 자행의 원인을 제공했다. 미군정은 제주 4.3이 발생한 직후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는데, 당시 미군 보고서는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두고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분석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된 뒤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Brown)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토록 하고, 강경 진압 작전을 본격화해 당시 제주도 인구 9분의 1인 2만 5천~3만 명의 소중한 인명이 희생되는 대 참극을 이끌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자료>. 제주에서 백선엽과 연관된 서북청년단이 벌인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은 자심했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군사고문단을 남겨 국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전쟁 과정에서 이승만이 무수한 양민을 학살할 때 미국은 뒷전에서 방관하거나 묵시적 동의를 했다.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가 휴전선 방어 대신 광주로 이동한 배경에 한반도 작전지휘권을 지닌 미국의 동의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데,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이 한반도 현대사에서 보여준 부정적인 역할에 대해 미국은 한 번도 공식 인정하거나 사과 등을 한 적이 없다. 그들이 한반도의 비극적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작태에 대해 국내에서 초보적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고 백선엽 장군의 안장식이 열린 15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과 최병혁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이 헌화 후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이 20세기 초부터 취해온 한반도 정책을 반추해 보면, 굴곡이 심한 경력의 백선엽을 트럼프 행정부가 극찬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미국 역대 정부가 취해왔던 한국에 대한 정책 속에서 백선엽의 친일행각이나 한국전쟁 당시 양민 학살은 부정적으로 평가할 대상이 아니다.
백선엽은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해 일제강점기 독립군 토벌 전문부대였던 간도특설대에 자원해 근무했다. 그는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뒤, 항일군 잡는 특수부대로 명성을 날린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하다 해방 후 잠시 고향에 체류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넘어온 뒤 육군 정보국장이 되고,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친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제거하는 숙군 작업을 전개했다. 백선엽은 생전 이를 사과한 적이 없다.
그는 해방정국 당시 육군 정보국장 시절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가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학살 약탈하는 것을 방치했다.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이 이끄는 백야사라는 특수부대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지리산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는 보병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평양탈환작전, 2군단장으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1군단장으로 설악산 부근 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공으로 전쟁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백선엽은 친일과 양민학살, 전쟁영웅이라는 경력으로 논란을 빚었지만 국내 실정법에 따라 국립묘지에 매장되었다. 이에 관한 국가유공자 관련법은 개정 논란에 휩싸여 있다. 친일 경력이 있다 해도 한국전쟁 전공이 인정되면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게 되어 있어 민족정기 확립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선엽을 극찬하는 미국 태도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심화하는 남남갈등에 대해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백선엽에 대한 미국의 극찬을 계기로 학계, 정계, 언론계는 한반도 문제를 두고도 자국 이기주의만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의 정책을 재평가하고, 그 근거를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 프레시안
인류의 멜로디
20세기를 살았던 이들에게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삶의 순간 곳곳에 새겨진 나이테와 같다. ‘주말의 명화’에서 <석양의 무법자> 주제가를 들으며 총잡이를 꿈꾸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데보라의 테마’, <미션>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듣기 위해 심야 FM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동네 레코드 가게로 뛰어가 테이프나 LP로 이 앨범들을 샀을 것이다. <시네마 천국>을 본 후 짝사랑하던 이에게 고백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있었을지라도 그의 음악은 인생의 어느 지점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영원히 자리 잡았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넘어, 삶의 사운드트랙이 됐다. 영국 출신 감독 에드가 라이트는 모리코네의 업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평범한 영화를 필견의 작품으로, 좋은 영화를 예술로, 위대한 영화를 전설적 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다.”
로마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을 전공한 그는 20대 중반부터 드라마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 전반에 걸쳐 활동하던 그를 처음 알아본 건 동향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세르지오 레오네였다.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석양의 갱들>과 같은 스파게티 웨스턴이 모리코네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주인공은 언제나 정의의 편이었던 정통 서부영화와 달리 스파게티 웨스턴은 잔혹했으며 인간의 욕망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했다. ‘미국의 신화’에 얽매여있지 않던, 이탈리아인들이었기에 가능한 해석이었다. 모리코네 또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들로 스파게티 웨스턴 특유의 분위기를 직조했다. 녹음 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마이크의 거리 조절을 통해 소리의 원근을 표현했다. 이를 통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텍사스의 흙먼지와 함께 황야를 달려오는 주인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머지않아 닥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획일화된 정의가 아닌, 비정한 약육강식의 세계에 엔니오 모리코네는 새벽과 황혼의 색을 칠했다.
그가 이해하여 표현한, 영화의 에센스는 멜로디였다. 그의 음악이 인류의 마음에 각인될 수 있었던 힘이다. 그의 멜로디는 사운드의 빙판에서 춤추는 피겨 선수와 같은 멜로디처럼 우아했다. 안개를 뚫고 등장하는 구도자처럼 신성했다. 스파게티 웨스턴 시절부터 <미션> <시네마 천국>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 2016년 <시크릿 레터>까지 멜로디에 대한 모리코네의 심경은 굳건했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 해도 주연 배우의 호연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창조한 소리의 세계에는 멜로디라고 하는 중심이 있었다. 영화음악가 한스 치머는 “엔니오 모리코네는 가장 심플하고 순수하며 정직한 멜로디야말로 만들기 가장 어려운 것임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들어보지 못했던 영화의, 들어보지 못했던 음악마저도 그의 멜로디는 마음을 파고든다.
그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인물은 주세페 토르나토레다. 1988년 두번째 작품인 <시네마 천국>으로 시작된 둘의 인연은 <피아니스트의 전설> <말레나> 등 토르나토레의 모든 작품에서 이어졌다. 모리코네는 그의 의뢰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였고 토르나토레는 모리코네에게 제작 일정을 맞추곤 했다. 모리코네의 마지막 영화음악 작품이 토르타토레의 <시크릿 레터>였다. 토르나토레는 이 작품 이후 4년 동안 모리코네를 위한 다큐멘터리 <음악의 시선>을 만들어왔다. 오는 8월 공개 예정인 이 작품에는 모리코네 본인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존 윌리엄스, 한스 치머, 팻 메시니, 폴 사이먼, 존 바에즈, 퀸시 존스, 제임스 헷필드,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 대중문화계의 거물들이 바치는 헌사로 구성된다. 세계는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마에스트로를 추억하며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경향 2020.07.16
박원순의 공과
황망함으로 다가왔던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망 소식은 성추행 혐의 내용이 드러날수록 인권변호사의 위선과 이중인격을 목도하는 것 같아 당혹스럽다. 권력형 성범죄 의혹에 대한 여권 인사들의 ‘내로남불’식 태도, 진영 논리가 뒤섞인 정치 공방까지 가열되면서 곳곳에서 정신분열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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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장의 공을 평가하며 추모를 강조하는 쪽과 피해자의 호소에 반응하며 그의 죽음을 비판하는 쪽으로 갈라진 사회. 서울광장에 마련된 박 시장 분향소, 당·정·청 주요 인사들의 조문 행렬, 박 시장의 업적을 되새기는 말들을 보고 듣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혹자는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구분해서 보자고 한다. 그게 가능할까. 사회적 약자와 민주화운동을 대변해온 인권변호사로서의 삶이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한국 사회의 진보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박 시장의 공과를 구분하고 추모와 진상규명을 이원화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성범죄 관련 지원활동을 해온 전문가들은 피해 여성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성추행 혐의가 사실이라면 박 시장이 평생 일궈온 삶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100%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인권운동에 헌신하고,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약자 보호를 외친 사람이었던 만큼 최소한 그 부분에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했다. 박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는 “그분(박 시장)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고 했다. 박 시장이 4년 동안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한 것은 30년간 자신이 쌓아온 업적을 모조리 무너뜨리고도 남을 중대 사건이다. 시민사회를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이미 ‘3선 서울시장’ 타이틀로 평가받았다. CCTV에 포착된 그의 마지막 모습에선 두 얼굴로 살아온 권력자의 모습만 아른거린다.
집권세력은 추모에 집중하며, 피해를 호소하는 한 개인을 사실상 외면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 여성가족부 등은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서울시가 15일 발표한 입장에는 성추행도, 피해자도 없었다. 집권여당 인사들은 박 시장 성추행 의혹 제기를 “사자명예훼손에도 해당할 수 있다”고 겁박하고, 정의당 초선의원들이 박 시장 조문을 거부하는 것을 “정치력 부재” “경험 부족”이라 폄하했다. 뒤늦게 여당 대표와 소속 의원들의 사과 표명이 이어졌지만 진정성이 느껴지기보다는 마지못해 하는 요식 행위로 비친다. 피해자에 대한 신상털기와 비방 등 2차 가해가 심각하고 박 시장의 죽음을 둘러싼 각종 음모론이 무성함에도, 정작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던 사람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누군가 자신이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소리를 지어내는 데는 그러한 신념이 필요 없다. 그는 진리의 편도 아니고 거짓의 편도 아니다.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해리 G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중에서)
이주영 정치부 young78@kyunghyang.com 경향 2020.07.16.
불로소득 환수가 정답이다
현 정부 들어 이번 7·10대책까지 무려 스물두 차례나 부동산 대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매번 대책이 발표될 때만 잠시 관망세를 보일 뿐 시장은 멈추지 않고 오름세를 지속해 왔다. 특히 2018년 말부터는 시장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수도권의 가격 급등이 가팔랐다. 실물경제의 부진, 인구증가세의 정체, 지방 부동산 가격의 하락 등 근본적으로 부동산 호황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부 지역의 부동산 가격 급등은 누가 봐도 저금리로 인한 투기현상이라고 진단할 만하다.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해 시장론자들은 시장 규제로 인한 공급 부족이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이 내놓은 대책이란 투자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공급을 늘리는 것이며 이것이 서민과 실수요자를 위하는 길이라고 포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야기하는 공급이란 적어도 10억원을 훌쩍 넘는 수도권 아파트들이 그 대상이다. 이러한 아파트들의 대다수 구매자들은 서민이 아니며, 이미 주택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현재 주택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볼 수는 없다. 2008년 직후 주택 가격이 하락했던 것은 주택이 남아돌아서가 아니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임차인으로 사는 것에 큰 불안이 없었던 터라 집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기 때문에 매수 수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집이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임차인으로 잘 살고 있던 사람들도 갑자기 집을 사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을까?
일단 우리나라의 부동산 세제가 매우 약하다. 1가구1주택 비과세 원칙으로 인해 고가 주택에 대해 세금이 거의 부과되지 않는다. 부동산 종부세는 가구원들이 각각 주택을 보유하더라도 공시가격 6억원까지는 내지 않는 데다, 공시가격이 시가보다 크게 낮기 때문에 사실 각각 6억원 이하의 집을 보유한다면 전체 가구로는 십몇억원까지도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다. 1가구1주택의 경우 매도 가격이 9억원 이상일 경우에만 양도세를 내는데 이것도 2년 정도의 짧은 거주 기간을 채우고 장기보유하기만 하면 거의 내지 않는다. 이외에도 농가주택 양도세 혜택, 부담부증여를 통한 부동산 증여 절세, 장기경작 농지에 대한 양도세 면제 등 많은 비과세 구멍들이 있다. 약하고 구멍이 많은 세제는 부동산 투기의 큰 유혹거리이다. 여기에 경기침체로 투자처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저금리 정책이 실시되면 소수의 개발호재가 투기광풍으로 이어진다.
복잡한 부동산 세제와 제도들을 공부해야 하고, 규제의 사각지대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거액을 베팅하는 모험을 해야 하므로 고도의 투자활동이나 재테크 활동으로 묘사하고 싶겠지만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집이 그 가격이 두 배가 되었다면 그건 누가 뭐래도 불로소득이다. 그리고 불로소득의 추구를 용인하고 심지어 장려하는 부동산 세제 정책이 현재의 부동산 불패 신화의 바탕이 되었다. 사실 이 시스템은 경제개발 초기에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자본을 축적한다는 핑계로 도입되었는데 장기간 남용됨에 따라 그 부작용이 막대하다.
따라서 실수요자를 보호하고 투기를 막기 위한 가장 실효성 있는 부동산 정책은 불로소득 환수 장치로서의 세제 강화이다. 정부가 여러 차례에 걸쳐 대책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이 왜 안정되지 않는가? 우선 부동산 불로소득 과세체계가 약한 데다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라는 기본조건이 있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의 종부세 무력화,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경기부양 정책이 결합하게 되면서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었는데 현 정부는 뒤늦은 핀셋 정책으로 대응하려 할 뿐 근본적인 결함을 외면해왔다. 특히 전 정부의 주택임대등록 사업자에 대한 막대한 감세 정책을 현 정부가 크게 확대하고 연장하는 실책을 범한 것, 현재는 신규 주택임대등록은 폐지했지만 의무에 비해 과도한 기존 등록사업자들에 대한 혜택을 여전히 유지하는 것은 문제이다.
6·17대책과 7·10대책에서 보유세, 양도세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희망이 보이지만 아직도 매우 부족하다. 단타, 초대형 투기자들이 주된 타깃인 것으로 보인다. “규제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잘못된 믿음을 불식시킬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어정쩡한 규제와 부족한 공공 주거안전망으로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임대차 3법의 조속한 실시, 기존 주택임대등록사업자에 대한 세제혜택 축소뿐 아니라 공시가격 현실화, 보유세, 양도세 등 불로소득 환수 장치 강화라는 근본대책의 실시, 여기에 더해 환수된 불로소득으로 주거안전망, 복지안전망을 제공하는 종합적이고 담대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정세은 충남대 교수 경향 2020.07.16.
성범죄자가 판결에 웃는 나라
한 사람은 그렇게 떠났고, 또 다른 사람은 세상에 남겨졌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듯 보였던 이의 극단적인 선택에 놀랐다. 항상 여성의 편에 선 것처럼 보였던 그가 ‘미투’로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폭로된 내용이 그동안 흔히 봐왔던 전형적인 직장 내 성추행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아서 참담했다. 여권 유력 인사들의 미투 사태 속에서도 그의 성추행은 계속됐다. 피해자가 주변에 도움을 호소했지만 묵살됐다. 미투가 들불처럼 번지고 온 세상이 ‘n번방’에 공분하는 동안에도 우리 사회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고소인이 절대 보안을 요구했던 성추행 고소 사실이 거의 실시간으로 피고소인에게 전달된 정황 앞에 큰 벽을 느낀다. 상대는 인구 약 1000만명의 사령탑인 거대 권력이다. 그 앞에 한 개인은 얼마나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으며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던 그에게 어떤 이들은 무심하게 돌을 던졌다. 겨우 용기를 낸 그 사람만 힘들었던 게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며 비슷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던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 함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6일 한 판결도 이런 종류의 분노 실망 허탈 무력감을 불러일으켰다. 법원이 국제 성범죄자 손정우(24)의 미국 송환을 불허하고 석방한 날이다. 손정우는 2015년 7월부터 2018년 3월까지 ‘웰컴 투 비디오’라는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 사이트를 운영했다. 수법은 악랄했다. 성인 포르노는 취급 안 한다는 문구를 내걸고 15세 이하에게만 집착했다. 생후 6개월 영아까지 범죄 대상으로 삼아 수십만건의 성착취물을 유통했다. 수억원을 챙겼다. 미국 영국 등 32개국이 나서서 수년간 공조수사한 끝에 손정우를 검거했다. 영상을 직접 제작한 영국인은 징역 22년형을 받았다. 미국에서도 관련 범죄자가 징역 5~20년형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 법원은 주범인 손정우에게 고작 1년6개월을 선고했다. 계란 18개를 훔친 생계형 범죄자에게 검찰이 구형한 것과 같은 형량이다.
손정우의 자금세탁 혐의에 대해 한국 검찰은 기소조차 안 했는데, 미국이 이 혐의로 범죄인 인도 요청을 했다. 미국에서 자금세탁은 최고 20년형이다. 불법 동영상 하나만 다운로드해도 5년형이니 그가 미국에 가면 중형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손정우가 미국에서 제대로 된 죗값을 받길 바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지난 10년 동안 법원이 외국의 범죄인 인도 송환 요청을 불허한 경우는 30건 중 단 1건, 정치범 사건이 유일했다. 그렇다 보니 그의 미국 송환을 예상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도 굳이 법원은 손정우가 미국으로 송환되면 관련 수사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며 송환을 불허했다. 판결 직후 손정우의 아버지는 “현명한 판단에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로 성난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성범죄자가 판결에 만족해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피해자는 죽지 못해 살고 있는데, 이미 형량을 채운 손정우는 이날 풀려났다.
우리 사법부가 유독 디지털 성범죄에 관대한 이유는 50대 이상 남성 판사들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야동’을 보는데 그게 뭐가 큰 죄가 되느냐는 시대착오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러니 ‘성범죄는 사법부도 공범’이라는 비난까지 나오는 것이다. 억울하면 사법부가 확 달라져야 한다.
우선 범죄자를 보다 엄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양형기준을 올려야 한다. 그나마 있는 양형기준도 이런저런 사정을 참작해 형량을 깎아준 게 우리 사법부다. 이번 손정우의 석방을 보고 n번방 운영자 조주빈은 희망을 봤을 것이다. 그도 매일같이 반성문을 쓰고 있다는데 유난히 가해자 남성의 인권을 생각하는 판사들의 마음이 또 움직일지 모르겠다. 이러한 관대한 판결이 모여 n번방을 만든다. 이들이 사회에 나가면 미투 가해자가 될 공산이 크다. 손정우, n번방, 미투는 별개가 아닌 유기체로, 우리가 끊어야 할 나쁜 고리다.
합리적인 안이 마련되기 전에는 판사 개개인이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손정우를 석방시킨 이는 강영수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다. 그의 대법관 후보 자격을 박탈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50만명 넘게 동의했다. 대법관 최종 후보자 결정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우리는 지켜볼 것이다./한승주 논설위원 국민일보 2020-07-17
그린 뉴딜 발표에 대한 단상
‘그린 뉴딜’의 적절한 우리말은 ‘녹색성장’이다. 도대체 녹색성장이 뭔지 정의를 좀 알려달라고 하는 요구에 정부가 설명만 몇 년을 했어도 이해할 수 없는, 뜬구름 잡는 답변으로 일관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좋아지나 했더니, 그 무개념의 단어를 영어로 바꿔놓고 마치 혁신이 일어날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녹색’ 포장지가 ‘그린색’으로 바뀌면 혁신이 되는 이 아이러니의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차라리 알려 하지 않는, ‘명약’의 처방이 필요해 보이지만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정보홍수시대에 이 약을 스스로에게 주입하기란 보통사람의 의지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지금은 1년, 아니 불과 몇 개월 만에라도 세상이 개벽하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예측불가’시대에도 우리나라에서 나타날 명백한 것들은 몇 가지가 있다.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확실한 최악의 미래로는 과거에 예측한 가장 심각한 온도상승 시나리오보다 온도가 더 빠르게 올라가는 ‘폭염재난시대’를 마주했다는 것과, 이제는 성장을 이끌 연령대의 인구가 빠르게 줄어드는 ‘인구절벽시대’를 맞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언택트사회’가 고착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린 뉴딜을 발표하려 했다면 이 몇 가지 예측 가능한 명백한 미래상황을 주시하고 최대한 이 상황들을 늦출 수 있는, 그리고 이 상황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방향이 제시되었어야만 했다.
이 몇 가지 확실한 미래상황이 가리키는 핵심은 이제 더 이상 물질만능의 성장주의가 아닌, 안정적 축소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린 뉴딜의 목표는 미래의 인구절벽에 따라 밑그림이 그려져야 했으며 궁극적으로 에너지 절약을 위한 혁신이 따라와야 했다. 폭염재난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에너지의 절대적 사용량을 어떻게, 어디까지 줄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했지만, 목표가 없는 전환사업들로만 채워졌다. 세 가지 경제전환 모델인 그린리모델링과 그린에너지전환, 친환경 모빌리티사업은 어느 정도 용인 가능한 각론 수준의 사업들로는 보인다. 다만 궁극적 목표가 없는 각각의 사업들은 난잡해 보일 뿐이다.
가장 많은 예산이 집행될 친환경 모빌리티사업을 보자. 디지털 뉴딜의 방향과 미래사회는 분명 우리 사회의 이동 자체가 급격히 줄어드는 ‘디지털 근대’사회로의 돌입을 그리고 있다. 편안하고 안전한 집 자체가 휴식공간이자 일터가 되는, 100년 전 도시계획가들이 꿈꾸었던 가장 이상적인 도시구조인 ‘직주근접’의 시대가 미래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미래 모빌리티의 핵심은 폭염재난의 기폭제인 화석에너지와 핵발전의 유지를 전제하고 있다. 화석에너지가 아니면 핵발전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수소자동차가 왜 아직까지 미래산업으로 포장되고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전기에너지로 물을 분해해서 다시 전기에너지를 얻겠다는 이런 약장수 같은 말을 위해, 일자리는커녕 설치비 이자도 감당 못하는 충전소를 위해 수십조원을 투입한다는 데 어떻게 박수를 칠 수 있겠는가? 이번 그린 뉴딜 발표는 순전히 혁신에서 밀린 한 대기업의 연명을 위해 세금을 투입하겠다는 쇼케이스로밖에는 비춰지지 못했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hwan9430@gmail.com /경향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지난해 가을 어설프게 알고 지내던 지인과 밥을 먹었다. 10월치고는 날이 쌀쌀해서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었고,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말들을 이으며, 바람이 부는 언덕길을 걸어 맛집 프로그램에 나온 적 있다는 사람 많은 가게에서 따뜻한 닭 요리를 시켰다. 이 모든 것이 매우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그가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살면 진짜 X 된다는 걸 알았어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곰탕집 성폭력 사건 이야기였다. 그는 정말로 두렵다고 했다.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를 선고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판결을 규탄하는 온라인 카페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당당위)’의 시위에 나갈까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며칠간 지면에서 본 문장을 읊었다. ‘40대 남성이 이별을 통보한 피해자를 찾아가 20여 차례 찔러 살해.’ ‘30대 남성이 헤어지자는 말에 피해자를 145차례 찔러 살해.’ ‘40대 남성이 왜 다른 남자랑 술 마시냐며 사귀던 여성을 흉기로 찌름.’ ‘유명 남성 헤어 디자이너 최종범, 사귀던 여성 연예인에게 성관계 영상을 유포하겠다며 협박·강요·폭행.’ 모두 그달에만 본 기사였다.
여성은 필연적으로 패할 수밖에 없나
나는 2019년 내내 그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여자친구를 주먹으로 때려 숨지게 한 20대 남성에게 “사회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갈 기회를 주고자 한다”라며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했을 때. 스튜디오 성폭력 피해자에게 악성 댓글을 단 누리꾼을 수사 중이던 경찰이 “그저 남들 다는 대로 댓글 한번 달았을 뿐인데 너무하지 않으냐”라며 오히려 가해자를 감쌌을 때. 열 살 초등학생에게 술을 먹이고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보습학원 원장에 대해, 몸을 누른 행위는 “피해자의 반항이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폭행·협박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라며 재판부가 징역 3년으로 감형했을 때. 고 장자연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유일한 한 사람이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 두세 살 영유아까지 포함한 전 세계 아동 대상 성범죄 영상 공유 사이트 ‘웰컴투비디오’의 운영자 손 아무개가 고작 1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여성 스태프를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배우 강지환에게 재판부가 “앞으로 더 노력해서 밝은 삶을 살길 바란다”라며 집행유예를 내렸을 때. 설리와 구하라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을 잃었을 때.
이른바 ‘X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남성은 ‘X 된다’고 말할 때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두려워하고, 여성들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두려워하는가.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살면 ‘X 된다’고 말한다면, 여자로 사는 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이곳의 여성들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서로를 살리기 위해 투사가 된다.
2019년은 그런 해였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해. 보통의 김지은들이 승리한 해. 체육계 미투를 외친 김은희씨의 승소로 성폭력 범죄를 겪은 피해자가 손해배상 청구시한인 10년이 지났더라도 정신적 피해를 비롯한 후유증에 대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온 해. 이토록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한 명이라도 잃으면 모두 잃는 여성들의 싸움은 필연적으로 번번이 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패배에는 어떤 비겁함도 치졸함도 없으니, ‘X 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구하며 2020년으로 갈 것이다. 한 명이라도 더 잃지 않는 새해가 되길 바란다.
박수현 (다큐멘터리 감독) 시사인 2019.12.29.
가해자의 나라
장마가 물러간 며칠 전 하늘이 청명했다. ‘늘 내 마음도 저러면 좋겠네’ 했다가 이내 서글퍼졌다. 이 순간에도 마음에 낮고 까만 먹구름이 끼었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가 떠올라서다. 이 공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사건으로 받은 충격을 한 남자 선배가 이렇게 표현했다. ‘박원순이 그럴 정도면 대한민국 대다수 남자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라고. 그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니 대한민국 여성 대부분은 일생에 걸쳐 성폭력 피해를 보고 산다고. 인지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국회 출입기자로 한 정당의 팀장을 할 때다. 3선 의원과 회사 선후배들이 저녁 식사를 했다. 반주도 곁들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갑자기 의원이 “김 반장은 왜 결혼을 안 했어?” 물었다. 대충 답하니, 돌아온 말. “그럼 나하고 연애나 하지.” 귀를 의심했다. 공교롭게도 여성은 나 혼자.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평온한 동석자들의 표정이 ‘내가 잘못 들었나’ 싶게 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 실언은 둥둥둥 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대화에 끼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왜 바로 받아치지 못했는지 자책했다. 틈을 노렸고 수없이 속으로 되뇐 말을 내뱉었다. “아까 그 말씀, 큰 실수하신 건데요.” 노회한 의원은 정색하고 사과했다. “아이고, 내가 진짜 잘못했어. 용서해요.”
약과인 사례다. 그런 대응을 실행할 수 있게 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길거리에서, 대중교통에서, 지인에게서 당한 성희롱과 성추행이 나를 ‘훈련’한 결과다. 기자 초년 시절, 남자 취재원이 귀엽다는 듯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내 오른쪽 볼을 건드렸을 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대처도 못 한 나를 스스로 얼마나 꾸짖었나. 무슨 대단한 평론가인 듯 TV에 나오는 그를 보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박원순 사건 피해자를 보고 그런다. 왜 4년이나 참았냐고. 고하를 따지자면 나이밖에 없는 관계에서도 심호흡 정도로는 입을 떼기도 어려운 대응을,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지닌 권력자에게 왜 곧장 시행하지 않았냐며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여권의 대선주자이자, 대한민국 선출직 공무원 중 ‘체감서열 넘버2’라는 서울시장에게 그렇게 준엄할 수 있는 부하 직원이 과연 있을까. 그것도 여직원을 그저 시장의 기분을 맞추는 ‘기쁨조’ 취급했다는 그 조직에서 말이다. 여덟 번이나 했다는 피해자의 인사이동 요청은 그래서 살려달라는 호소다.
우리가 피해자에게 해야 할 말은 ‘4년간 얼마나 지옥이었나요’라는 공감, ‘당신은 잘못 없어요’라는 지지, ‘혼자가 아니에요’라는 연대의 메시지다. 그런데도 사회는 가해자의 언어로 피해자를 탓한다. ‘피해자에게 정치적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음해론, ‘피해자가 자초했다’는 꽃뱀론, ‘한 사람 인생 꼭 망쳐야겠느냐’는 동정론이다. 가해자를 감싸는 논리는 이렇게 많다. 정치인뿐 아니라 교수ㆍ목사 같은 권력자가 저지른, 종류 불문의 성폭력 사건에 두루 적용되는 무서운 평행이론이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피해자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 가장 명백한 증거는 피해자니까. 그게 피해자 중심주의다. 재발 방지의 의지는 가해자에게 응당한 가해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데서 싹튼다. 어느 여당 의원 말대로 집무실의 침대가 문제라면 침대를 구속시키면 되나. 고소인을 뭐라고 명명할지도 혼란스러운 이들이 많은가 보다. 앞뒤가 바뀌어서 그렇다.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 최초 3선 서울시장으로서 평생 세운 공을 스스로 뒤엎은 그를 사회가 ‘성폭력 가해자’로 인정하는 게 순서다.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한국 2020 7.17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는데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연일 지구촌 곳곳을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1일에는 미국에서만 하루 확진자 수가 6만 1564명을 기록했다. 브라질과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가파른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4시간 동안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22만 8100여 명 늘어나 신규 환자 일일통계에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이 "진정한 역사적 팬데믹"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작금의 코로나19는 사스나 메르스와는 달리 전파력이 매우 강하고 쉽게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자칫 현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다면 전 세계가 대규모 위기 국면인 '퍼펙트 스톰'에 직면할 수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는 미·중 간의 기술 패권 전쟁은 끝 모를 미궁 속에 빠져있고 최근에 불거진 '홍콩발' 리스크는 가뜩이나 어려운 세계 경제의 앞날에 먹구름을 잔뜩 드리웠다. 특히 홍콩은 2019년 기준으로 중국·미국·베트남에 이은 한국의 4대 수출국으로 최대 무역흑자를 내고 있어 우리 경제에 불어 닥칠 파장이 만만치 않다.
첩첩산중인 국가적 난제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작금은 디지털 기술을 사회 전반에 적용해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혁신하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다. 'FAANG'으로 대변되는 페이스북·아마존·애플·넷플릭스·구글과 같은 '빅테크' 혁신기업이 내로라하는 글로벌 제조업체를 제치고 단숨에 미국 증시의 상단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빅테크의 저력을 가늠할 수 있다. 세계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경제전쟁의 향방도 따지고 보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기반을 둔 빅테크에 사활이 걸려있다. 더욱이 작금의 팬데믹은 비대면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을 강제하고 가속하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어서 디지털 기반의 유니콘기업 육성을 통한 빅테크 확보는 절대적이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올 파괴적 혁신은 반드시 '디커플링(decoupling)' 현상을 수반한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나비가 번데기에 머무르지 않고 우화(羽化)하는 힘겨운 환골탈태의 과정을 거쳐 비상하듯이, 기존 틀을 깨고 새로운 표준을 창조함으로써 전혀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표준이 바뀌면 기존 산업의 틀도 새로운 표준에 맞추어야 한다. 변화의 시대엔 변화에 동참해야 생존할 수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찬란한 인류문명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이어왔으며 거센 변화에 지혜를 발휘하여 효과적으로 응전한 집단과 문명만이 살아남았음을 강조했다. 자연의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하지만 실제로는 먹고 먹히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축장으로 각 개체는 서식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단 한순간도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흘러간 시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변화에 동참할 '운명적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일상이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회자할 만큼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답답한 마스크를 벗었을 때 콧속 깊이 스며드는 상쾌한 공기, 무심코 올려다본 밤하늘의 영롱한 별들, 맑디맑은 푸른 하늘과 실개천에 흘러내리는 냇물 등 전혀 특별할 것 없어 보였던 '늘 그대로의 자연'에 '감사함'은 코로나19가 준 교훈이 아닌가 싶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조타수 없는 작은 돛배는 아닌지 냉철히 곱씹어 볼 일이다
김종욱 한국전기연구원 책임연구원 경남도민일보 2020 7.17
서울과 평양의 공통점은? '금수저'들의 세상
북한의 수도 평양은 북한에서 특권층만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상적으로 무장된 투철한 당성, 즉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충실히 따르는 공산당 간부라야 살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 출신성분도 중요시 한다니 사회주의 천국인 북한 체제의 아이러니다.
인민은 평등하다는 북한에서 출신성분은 일종의 계급장이다. 독립운동가와 전쟁 혹은 혁명 중에 공을 세운 인사의 후손, 그리고 당 간부와 그 가족은 북한에서 특권계급에 속한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다른 지역 주민들은 마음대로 평양에 이주해 살수 없다고 한다.
이들 특권층 평양 시민들은 지방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덜 궁핍하며 우월의식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 지역 주민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자괴심은 당연히 클 수 밖에 없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느닷없이 왠 평양이냐고? 대한민국 수도 서울도 평양 못지않게 마음대로 살 수 없는 도시가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 서울 거주민들은 최근 천정부지로 솟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상대적 박탈감을 맛보고 있다. 서울에서 내 집 마련해 살려면 일단 돈이 많아야 한다. 그것도 현금으로 많이. 서울에서 사는 일은 이제 평양 입성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됐다.
평양이 출신성분과 당성에 기반 한다면 서울 입성은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정부가 대출도 꽁꽁 묶어놨기 때문에 현찰 동원 능력이 없으면 서울에서 집 살 생각은 꿈도 못꾼다. 기자도 20년 전 IMF 직후 일산으로 이주 후 아직까지 서울 입성을 못하고 있다. 경제적 능력 부족이기도 하지만 굳이 일산 살면서 서울살이의 이유와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내도 일산의 주거환경에 만족하면서 굳이 서울행을 고집하지 않았다. 애들 역시 SKY와는 무관한 슬기로운(?) 중고교 학창생활을 보냈기에 가능했다. 단지 가장인 기자의 직장이 강북이어서 출퇴근 시간에만 잘 버틴다면 비 서울지역의 삶은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기자는 스스로에게는 물론 집 식구들에게 얼굴을 못 들고 다닌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20년이 지나 기자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서울시민과 지방 주민으로 갈라놓은 새로운 계급사회에 속하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서울행을 감행하지 못했던 자괴감과 후회스러움에 화가 날 때도 많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부동산 대책을 22번이나 내놨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22번은 언론이 온갖 것들을 다 붙인 것이지 실제로는 네 번 밖에 아니다’며 부동산 대책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우긴다. 22번이든 네 번이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정부 들어 부동산 가격이 이명박이나 박근혜 정부 시절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올랐다는 점이다.
물론 통계자료가 이 같은 사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거늘 오죽하면 노무현 정부 시절 홍보수석까지 나서 현 정부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꼬집었을까? 그런데도 대통령을 위시해 이 정부 인사들은 여전히 부동산 시장을 잡을 수 있다, 아니 안정되고 있다며 큰소리다. 심지어 대통령은 21대 국회 개원연설에서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며 부동산 대책에 대한 의지를 거듭 천명했다.
아니 서울을 비롯 수도권 일부지역은 몇 달 새 수억원씩 올랐는데도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이미 오를 대로 올라 버린 서울 입성은 웬만한 현금 보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해졌다.
현 정부는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투기세력을 잡기보단 무주택자들과 2030세대들의 계층사다리만 빼앗고 있다. 아울러 강남에서 똘똘한 집 한 채 하나 가지고 있는 유주택자들도 거의 두배 가까이 올라버린 재산세 고지서를 받아본 순간 돌아버리겠다고 하소연이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만 믿고 전세 살면서 기다리던 소시민들은 이제 서울 진입은 언감생심이다. 대책은 쉬운 곳에 있는데도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현 정부는 계속 똥 볼만 차고 있다.
자유시장경쟁 체제의 작동원리는 공급과 수요다.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에 공급을 늘리면 된다. 강남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인프라가 잘 갖춰진 생활의 편의성에다 오를 것이라는 기대심리 때문이다 강북에도 강남과 똑같은 생활편의 시설과 교육 환경을 갖추면 된다. 아니면 2기, 3기 신도시에도 서울의 접근성을 높이는 교통망 확충과 강남에 버금가는 인프라를 갖춰주면 된다. 그게 싫다면 강남을 고밀도로 개발해 주택공급량을 늘리면 된다.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 곳곳에 50층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데 왜 서울 그것도 강남에만 유독 고밀도 개발을 주저할 이유는 없다. 고밀도 개발에 따라 환경과 교통 교육 치안 등 각종 사회적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것도 핑계에 불과하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살고 싶은 사람들은 비싼 비용을 치르고 살게 하면 된다.
오죽하면 ‘현 정부 집권세력들 대다수가 강남에 살고 있는데 자기들이 살고 있는 주거지역의 주거환경을 망칠려고 하겠느냐’는 말까지 나올까?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강남 집값 폭등의 수혜자는 바로 현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이다. 그래 놓고도 앞에서는 서민들을 위한다고 새빨간 거짓말이다
서울 강남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노력하면 서울에 괜찮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어야 정상적인 세상이다. 능력도 업고 제구실도 못하는 선무당들이 날뛰는 바람에 애꿋게 서민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 박민수 편집국장 뉴스퀘스트 2020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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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어용지식인들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 유시민은 어용지식인을 자처했다. 어용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자나 권력 기관에 영합해 줏대 없이 행동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유시민은 모욕적 뜻 앞에 ‘진보’를 붙여 진보어용지식인이라는 괴이한 낱말을 탄생시켰다. 이유는 있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만 가졌더니, 재벌, 언론, 검찰, 관료, 야당 등 기존 보수 세력의 반발과 견제에 진보가 무너졌다는 거다. 5년짜리 손님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나. 그는 개혁에 반발하는 적폐로부터 약한 대통령을 지킬 칼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젠 ‘진보’라는 말을 떼도 될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은 청와대는 물론 국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위성정당을 만들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은 ‘기레기’라 욕하는 열성지지층은 물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만난 시민단체 친구들도 있다. 이 막강한 권력을 논리적, 윤리적으로 지키기 위해 지식인이 나선다면 ‘어용지식인’만큼 적절한 표현도 없다. 민주당은 스스로를 개혁세력이라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청와대의 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들은 수십억원의 강남아파트를 가진 채 땅값을 잡겠다 하고, 삼성엔 면죄부를 주고, 약속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자신들이 정한 당헌을 어기면서까지 부산과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공천을 하려 한다. 그들이 명분으로 삼는 미래통합당은 막말만 늘어놓고 있어 국민들의 지지도 받지 못한다. 오죽하면 야당복이 있다 하겠나. 개혁을 가로막는 건 오히려 기득권이 되어버린 여당 내부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특히 안희정·오거돈·박원순으로 이어지는 권력형 성폭력은 민주당의 반성과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를 날카롭게 비판해야 할 지식인의 모습은 어떤가? 역사학자 전우용은 박원순을 가리켜 “그만 한 남자사람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라 했고, 김동춘은 “100조원을 줘도 박원순을 되살릴 수 없다”고 했고, 조희연은 “고매하게 지켜온 삶의 무게에 짓눌려…”라며 안타까워했다. 인플루언서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고 박원순 시장이 비서에게 한 성희롱을 자신도 했다며 이게 뭐가 문제냐는 식의 글을 올린다. 비슷한 행동을 했다면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오피니언 리더들이 되레 가해 사실을 당당히 밝힌다. 고인에 대한 의리와 예의를 지키자고 하지만, 나는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시절 권력자들을 향한 지식인들의 예의와 도를 넘은 비판들을 지켜봤다. 이명박·박근혜와 싸울 당시 우리는 이를 표현의 자유라 불렀고 약자들의 권리도 함께 옹호했다. 그나마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은 지지율이 떨어지자 재빨리 사과했다. 지식인의 가치와 소신이 정치인의 동물적 감각보다 못하다.
아무리 위대해 보이는 인물도, 개인으로 보면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우리가 무오류의 인간을 상정하고 그를 신격화한다면, 그건 팬클럽이지 주권자의 참여행위도 민주주의도 아니다. 안희정 사건은 불륜으로, 오거돈 사건은 공작으로 규정하면서 얻고 싶은 게 있다면, 자신들이 지키고 싶은 정치인에게 오점을 남기지 않는 것, 정치적 피해자로 만들어 복권을 노리는 일일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렇게 권력자의 잘못을 끊임없이 덮다보면, 탄생하는 게 바로 제왕적 권력이다. 그런데 시시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서로 싸우고 논쟁하는 게 민주주의다. 누군가 잘못을 하면 책임지고 사과하고 물러나고, 다른 이가 대표가 되면 된다. 하는 일 없어 보이는 대표가 가장 잘해야 하는 일도 욕먹는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권력자를 향해 비판의 칼을 날려야 할 지식인이 죽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낡고 뒤처진 지식인의 무덤 위에 등장한 새로운 국민의 존재다. 자칭 진보어용지식인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드리고 싶다. 가끔씩은 거울을 보길 바란다. 자신 옆에 박정희와 태극기부대가 있을지도 모른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경향신문 2020.07.23.
나쁜 비판의 잉여 쾌락
어쩌다 작품 합평을 하게 되면 학생들에게 권장한다. ‘한 가지를 비판하고 싶으면 먼저 다섯 가지를 칭찬하라.’ 김연수 작가의 책에서 ‘인간은 긍정적 신호보다 부정적 신호를 다섯 배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물론 기계적 균형을 맞추라는 뜻은 아니다. 동료의 잠재력을 찾아내 보려는 태도의 가치를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인위적으로 상처를 입혀야 누군가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낡은 생각일 수 있다. 성장은 자신을 알게 되는 체험인데, 그가 제 작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자기도 잘 아는’ 단점이 아니라 ‘자기는 잘 모르는’ 장점이다.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단점을 하나씩 없애서 흠 없이 무난한 상태로 변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도 다른 또렷한 장점 하나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합평 대상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만은 아니다. 합평 주체들의 흔한 경향성을 견제해보겠다는 취지가 더 중요하다. 때로 어떤 학생들은 평가란 곧 비판일 뿐이며, 비판은 가혹할수록 솔직하고 용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비판을 수행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낀다. 물론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대상을 위해서지 주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비판은 대상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어야지 주체가 무언가를 가져가버리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잉여 쾌락이라고 할 만한 부산물을 산출해내고 그것을 주체가 향유하는 비판, 그렇기 때문에 대상은 빈곤해지고 주체만 풍요로워지는 비판은 나쁜 비판이다. 강의실 바깥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잉여 쾌락에는 몇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절약의 쾌락. 프로이트의 말대로라면 쾌락은 절약의 결과다. 어떤 대상(사람 혹은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섬세해져야 하는데 거기엔 에너지가 투자될 수밖에 없다. 어떤 비판은 그 투자를 절약함으로써 홀가분한 잉여 쾌락을 가져간다. 근래 나는 어느 선배 문인으로부터 “풍문에 듣자 하니 네가 ‘조빠’라던데 부끄러운 줄 알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으며 그 비판에 전제돼 있는 관심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나 좋은 비판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긴 어려웠다. 나는 검찰의 수사가 비정상적이고 언론의 보도가 병리적이라고 판단한 수많은 시민들 중 하나로 어떤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긴 했으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신도’는 아니다. 나는 잘못 요약되었고 선배는 쾌락을 얻었다.
둘째, 소속의 쾌락. 나쁜 비판은 진실의 복잡성을 훼손하는 데서 나아가 세상을 양분(兩分)한다. 하나의 범주에 ‘그들’을 쓸어 담으면 여집합으로 ‘우리’가 생겨난다. 문제는 이런 나쁜 비판들 주변에도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다. 그 비판에 동참하는 일이 뿌듯한 소속감을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비판한다, 고로 소속된다.’ 안타깝게도 소속감에 대한 이런 갈망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진영 논리를 비판하며 자유자재한 지식인임을 과시하는 칼럼니스트도 제 글에 달린 ‘좋아요’의 개수를 확인하며 자신이 혼자가 아님에 전율할 수 있다. 우리의 이 한심한 본성을, 거스르긴 어려워도 부추겨선 곤란하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셋째, 쌤통(샤덴프로이데)의 쾌락. 정파적인 언론들이 반대 진영 인사를 공격하는 기사를 분별없이 쏟아낼 때 ‘비판’이라는 것은 언론의 사명이 아니라 변명처럼 보인다. 검찰이 선별적으로 흘리는 피의사실을 보도하고, 확인된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의혹이 제기됐다는 사실’을 중계하고, 가족을 뒤쫓고 주거지를 포위하여 나온 기사들의 행간에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자는 권유가 섞여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공인의 잘못을 나무랄 때도 우리들의 비판은 쉽게 조롱과 혐오로 번져 나간다. ‘응보적 정의’를 넘어서는 ‘회복적 정의’를 사유하는 일각의 흐름이 무색하게도, 누군가를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까지 절멸시켜야만 종결될 것처럼 보이는 일부 나쁜 비판의 목소리들은 이미 그들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지 대의나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글도 비판이다. 비판에 대한 비판. 그러므로 위에서 늘어놓은 말들은 고스란히 내게 되돌아온다. 이 글은 대상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무언가를 탈취하는가. 어떤 잉여 쾌락을 누리기 위해 쓰인 글인가. 고백하자면 나는 위의 다섯 단락을 씀으로써 지금 나를 향하는 저 질문들에 ‘지면관계상’ 답할 수 없게 되는 데 성공했다.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꼬집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누군가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 증오가 사라지면 자신의 고통을 상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이 글의 문맥에 맞게 저 문장을 함부로 바꾸면 이렇다. “사람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누군가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 비판을 그만두면 자기 자신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신형철 문학평론가 경향신문 2020.07.23.
김여정과 탈북단체의 말폭탄, 우리는 대화가 가능할까
[창비 주간 논평] "욕설과 폭파를 자행하는 이들과 대화가 가능할까"
욕설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두 사건을 되짚어보며 '욕설이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첫 번째는 하노이회담 노딜 이후에 점점 거세지는 북한의 '말폭탄'(김여정 부부장 담화, 2020년 6월 17일)이고, 두 번째는 대북전단 문제가 불거지며 방송에 노출된 탈북민의 거친 언행이다. 북한은 대외 메시지에서 거친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특히 하노이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고 난 이후에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의적' 표현을 쏟아내고 있다.
2019년 8월 1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에는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을 포함하여 "함부로 뇌까리는가" "사냥총소리만 나도 똥줄을 갈기는 주제에" 같은 낯선 욕설이 등장했다. 2020년 3월,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첫 번째 공식 담화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주제넘은 실없는 처사" "꼴보기 싫은 놀음" "적반하장의 극치" "세살 난 아이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등의 감정적 언설을 통해 한국 정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어 김여정 부부장은 6월 13일 담화를 통해서 남북연락사무소의 폭파를 통보하기도 했고, 며칠 뒤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6·15선언 20주년 기념행사 연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참으로 '거친' 담화를 내놓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외교적이며 정제된 표현보다는 격정적이고 직접적인 언설로 남한 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는 그의 정부 내 위치와 백두혈통이라는 의미를 감안할 때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과거에도 대변인 담화나 <로동신문> 사설에서 감정적이고 노골적인 표현 등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지만, 북한 체제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이가 직접 나서 욕설에 가까운 표현을 쏟아냈으니까 말이다. 거기에 그 경고 이후 남북연락사무소가 순식간에 폭파되자, 한국 사회는 북한 체제와 권력자들을 더욱 이질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욕설과 폭파를 자행하는 이들과 과연 대화가 가능할지 의구심이 점점 짙어지게 된 것이다.
북한 체제의 거친 대응과 맞물려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된 갈등도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지금도 '표현의 자유'와 '접경지역 주민의 안전권'을 두고 치열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법리적 해석 문제를 둘러싼 이견도 그렇지만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대북전단을 살포하려는 탈북민들과 접경지역 주민의 충돌이 그대로 보도되면서, 탈북민들의 거친 언설과 행동이 여과 없이 방송되었다는 점이다. 급기야는 탈북민이 욕설을 하며 취재원을 난폭하게 폭행하고 벽돌을 던지는 모습까지 화면에 잡혔다. 탈북민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급격하게 악화되었으며,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에 대한 긍정적 여론이 우세해졌다. 문제는 북한 체제와 반북 운동에 나선 탈북민 단체의 폭력적 언행이 닮은꼴로 인식되고, 결국 '북한'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굳어진다는 데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사회가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북한 체제와 탈북민 단체를 '위협'보다는 '미개한' 존재로 감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다. 북한 체제가 아무리 '말폭탄'을 던지고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다고 해도 남한 주민들은 이를 직접적인 공격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거기에 대북 인식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북한 체제의 위협적 언행을 '섭섭한 마음'의 표현 정도로 축소 해석하려는 정부의 노력까지 더해지면서 그들의 언설은 그 의도와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욕설과 뒤섞여 폄하되거나 무시되기 쉽기 때문이다.
탈북민 단체도 마찬가지다. 대북전단 살포의 방식과 절차가 변질되면서 이들 운동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북한 인권이라는 커다란 문제에 한국사회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치열한 논의는 사라져버린다.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는 이들을 보며 한국사회는 문제해결을 위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기보다는 대화 불가능한 '타자'로 감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이 왜 이런 표현 방식을 선택했는지를 따져 물을 차례다. 크게는 문화적 차이로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남한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이나 비판을 지양하는 상호작용의 법칙이 안착된 반면, 북한에서는 상대적으로 직설적인 감정 표현을 허용하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법칙 아래 온당하지 않은 취급을 받았다고 느낀 북한 체제와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감정적 힐난을 늘어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
자극적인 표현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시도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현대사회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도덕적 불감증>(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외 지음, 책읽는 수요일 펴냄) 213쪽) 설혹 비난과 편견의 대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관심을 받는 것이 완전히 잊혀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취급받는 것보다는 낫다는 의미이다. 북한 체제가 '말폭탄'을 본격화한 것이 2019년 중반 이후이고, 그래도 별 반응이 없자 2020년에 들어서 김여정 부부장이 직접 원색적 비난에 나섰다는 것은 결국 '존재하는 자'가 되기 위한 자신들만의 방책일 가능성이 높다. 탈북민 단체 또한 무리한 방법을 써가며 대북전단을 보내고, 그것을 만류하는 정부에 폭력을 불사하며 대응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결국 이들의 표현이 이다지도 거친 것은 한국 사회가 그들에게 그만큼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아하고 세련된 말을 하지 못해서가 아닌,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라는 뜻이다. 그들의 거친 언행을 쉽게 비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전략이 한국 사회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 과정을 통해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감정은 더욱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편견은 대화를 주저하게 하며, 배제를 정당화한다. 이것의 파장이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장애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남북이 '여전히' 평화와 공존을 지향한다면, 남한은 북의 욕설 이면의 아우성을 제대로 읽어내야 하며, 북한 또한 자신들의 감정적 언행이 초래할 부작용을 쉬이봐서는 안 될 것이다.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2020.7.23
집’이란 무엇인가
천정부지로 오른 강남 아파트값과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지켜보자니 두서없는 생각이 떠오른다. 대치동의 30평 아파트가 20억원을 호가한다는데 이게 제정신인가? 정부의 다주택 보유세, 양도세 중과는 과연 효과를 발휘할까? 왜 그리고 언제부터 ‘집’이 이렇게 돈 놓고 돈 먹기, 환금성 상품이 되어버린 걸까? 우리 몸을 의탁하고, 가정을 꾸리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주던 이 공간이 그저 소유와 거래의 의미만 갖게 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최근 출간된 이반 일리치의 책에는 ‘파벨라(favela)’라 부르는 브라질 빈민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부와 자본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판자로 지은 빈민촌을 불도저로 싹 밀고 개발하려 하지만, 그때마다 하루저녁이 지나면 판잣집과 천막이 뚝딱 지어지고 사람들이 주섬주섬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집이 삶을 찾아 되돌아온다”고 표현한다. 과연 그러하다. 우리는 들어가 살 집을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집이 아니라 삶을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사람 개개인보다는 집으로 그 사람을 인식했다. 살구나무집, 파란대문집, 703호 아저씨. 따라서 집에서 우리가 사는 게 아니라, 집이 우리의 삶을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말이 ‘어디에서 지낸다’는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만 봐도, 집이 삶을 찾아 되돌아온다는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산 집을 헤아려보니 정확히 열여덟 군데다. 아버지 사업의 부침에 따라 가족이 셋집과 자가를 옮겨 다닌 것이 열두 차례, 결혼 후 전세를 살다가 은행에 꼬박 월세를 바치는 현재 집을 갖기까지 여섯 군데에 살았다. 평균하여 3년에 한 번은 옮겨 다닌 셈이니, 이것은 ‘정주’가 아니라 ‘유목’이라 하는 게 맞겠다.
인간의 문화가 정주를 시작하면서 꽃을 피웠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삶의 기억과 경험이 세대를 통해 전수되고 문화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한곳에 오래 거주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공간이 처음부터 저절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땅에 경계를 그어 안팎을 표시하고 사람이 살면서 공간은 비로소 ‘탄생’했다. 인간이 살면서 공간이 생겨났고 또 그 공간이 인간을 계속 살게 했다. 사람의 자취와 때가 없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며, 살 수 없는 공간이다. 그렇게 문화는 장소와 함께 사람이 숨 쉬는 공기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말에 불과할지언정 아파트와 주택은 거주하는 곳이지 투자하고 거래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가. 정부 자신부터 부동산을 국가 경제의 한 축으로 보고 그로부터 부양될 경제적 효과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집을 사람이 사는 곳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집에서 얻으려는 모든 화폐적 가치를 무산시켜야 한다. 불로소득의 대부분을 환수할 정도로 강력한 대책이 아니면 안 된다. 집은 이미 남아돈다. 그리고 집은 거기 사는 사람의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경제 논리가 아닌 삶의 논리로 집을 바라봐야 한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경향 2020.7.23.
가난의 대물림과 정치
장발장은행으로부터 대출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신청자들 중에는 전화 너머에서 울음을 터뜨려 말을 잇지 못하기도 한다. 그 복받쳐 오르는 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단순 절도 등의 잘못을 저질러 200만~3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는데 그만한 돈이 자기 수중에도 없고 가족이나 친지에게서 빌릴 처지도 못 될 만큼 사회적 관계망도 열악한 사람들이다(장발장은행은 지금까지 863명에게 총 15억2700만여원을 대출해주었다. 재원은 8751명의 개인, 단체, 교회, 성당이 보내준 11억5천여만원의 성금이다). 2년 전부터 집행유예제, 연납제 등이 시행됐음에도 매년 3만명이 넘는 동시대인들이 벌금을 못 내 교도소에 갇힌다. 우리는 21대 국회에서 현행 총액벌금제 대신 수형자의 소득, 재산과 연동되는 일수벌금제로 바뀌어 은행 문을 닫을 수 있기를 바라는데, 현실정치의 주역 대부분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장발장은행은 교도소에서 몸으로 때울 처지도 못 되는 분들, 예컨대 돌봐야 할 어린 자식들이 있는 분들에겐 우선적으로 대출해준다. 그때마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 어린 자식들에게는 어떤 장래가 예정되어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가가 삶을 결정해버리는 사회, 끔찍하지 않습니까”(<진보집권플랜>)라는 말이 반어법이 아니라는 점을, 이 말의 발화자가 ‘기회의 사재기’ ‘스펙 품앗이’ 등을 통해 손수 보여주었던 만큼, 이 사회는 끔찍한 사회다. 가난이 곧 죄인 사회일 뿐만 아니라 대물림되는 사회에서, 그 어린 자식들에게 새벽 4시에 6411번 버스를 타야 하는 투명인간의 처지와 얼마나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을까? 세태를 빗대어 덧붙이자면, 유력 정치인들의 비서 자리도 기대하기 어려운 한편, 가진 자들의 ‘갑질’은 부단히 당해야 할 것이다.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의 기회가 있지 않으냐고? 자주 강조하는 말인데, 한국 사회에 “교육은 재생산을 합리화하는 과정”이라는 비판적인 인식이 결여되어 “기회의 평등”이 그럴듯한 수사가 된 배경 중에는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의 잔영이 아직 남아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일제가 망하고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90년대까지는 사회 상층에 빈자리가 생긴데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괜찮은 일자리가 급격히 늘어 서민 출신도 끼어들 틈새가 컸다. 이른바 ‘586세대’가 특혜 세대가 된 사회경제적 배경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고 앞으로는 더욱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은 그런 시대가 다시 오지 않으리란 점이다. 오히려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부제가 달린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는 한국 사회의 계층(세습)화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질적 발전이 둔화되어 ‘번듯한 일자리’가 줄고 있다. 이 가운데 부모의 경제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네트워크와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명문대 졸업장’과 ‘좋은 일자리’를 독식하고, 근로소득만으로는 살 수 없는 ‘비싼 주택’을 소유한 세습 중산층이 나타났다.” “노력은 실력이 아니라 계층이다!”
앞으로 ‘명문대 졸업장’ ‘좋은 일자리’ ‘비싼 주택’ 소유와 세습에 따른 계층화는 공고해질 것이다. “지배계급의 재생산은 일정 부분 문화자본의 전달에 종속되는데, 문화자본은 병합된 자본이라는 고유성을 가지며, 따라서 십중팔구 타고나는 것”(피에르 부르디외)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정치는 수구세력과 자유주의보수세력 간의 쟁투로 활기를 띤다. 공히 바깥의 적을 상정해 안을 결속시킨, 반북 국가주의자들과 반일 민족주의자들 간의 싸움이기도 한데, 속된 표현으로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 아주 좋았는데 오늘 그런대로 괜찮은 세력과, 어제까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오늘 아주 좋은 세력 간에, 더 좋은 내일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다투는 장이라고. 이 장에서는 ‘올바른 정치’의 경쟁보다 ‘누가 더 나쁜가’를 따지고 폭로하는 일이 주가 된다. 그들의 눈에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질곡 속에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희망 없는 ‘이생망’의 존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 대신 조국 사태로 증폭되면서 함께 동굴에 갇힌 진영과 논리들,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의 저자 마이클 린치가 말한 “지적 오만함은 파벌적일 때 가장 치명적이다”를 시연한 ‘빠’와 ‘양념’의 정치들, 검찰과 언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작 정치의 소음들만 가득하다. 정치 현상의 놀라운 과잉에 비해 정작 정치는 실종된, 그리하여 사회가 보듬어지기는커녕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가난한 자의 자리에서 민생정치의 가능성이나 그 실마리는 청와대나 국회보다 경기도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경기도는 지난 21일 하남·과천·안산에 조성될 수도권 3기 새도시에 역세권을 중심으로 무주택자면 누구나 30년 이상 거주할 수 있는 ‘경기도형 기본주택’을 공급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소득, 자산, 나이의 제한을 두지 않고 무주택자면 누구나 입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이를 보도한 <한겨레> 1면을 보고 떠오른 사례는 프랑스의 알리에 도(道)를 비롯한 곳곳에서 과거 영주가 살던 샤토(성)를 저임대료공공주택(HLM)으로 개조한 일이다. 1만명 이상 주민이 사는 지자체는 20% 이상 공공임대주택을 갖도록 돼 있는 법에 따른 조처였다(한국의 현재 공공임대주택 비율은 6% 수준이다). 그 이튿날인 22일에 이재명 경기지사는 “경기도가 공공부문만이라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에게, 비정규직 중 고용기간이 짧을수록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같은 일을 한다면 직장이 안정적인 노동자와 불안정 노동자 중 누구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어야 할까요?”라고 묻고,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불안정한 노동자에게 보수를 오히려 덜 주어 중복차별을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와 소속 공공기관 직접고용 기간제 노동자 2094명이 수혜 대상이라고 하는데, 관계자는 “최소 5%를 기준으로 프랑스의 불안정 고용 보상 수당 지급 사례를 참고해 최대 10%를 적용하는 방안이 적정하다”고 밝혔다.
계층상승의 길은 막혔고, 양극화가 심해질 뿐 지난날에는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낙수효과도 사라졌다. 대물림되는 이 땅의 가난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신자유주의가 발호하면서 너덜너덜해졌다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유럽의 사민주의 정책의 잔해가 한국 현실정치에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라면 그저 감읍할밖에!
홍세화│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한겨레 2020.7.23.
文정권의 ‘야바위 國政’
어릴 적 길거리에서 탁자 위에 컵 3개를 엎어 놓고 주사위 하나를 컵 밑에 넣고는 이리저리 옮기다가 어느 컵에 있는지 알아맞히게 하는 게임을 하던 ‘야바위꾼’이 있었다. 지켜보다가 돈을 걸지만 판판이 지는 사람이 많았다. 눈속임에 제법 돈을 잃는 사람도 있었는데 경찰의 단속 대상이었다. 요즘 문재인 정권을 보면 딱 이런 생각이 든다.
국정(國政)을 잘하라고 유례없이 176석이나 되는 거대 의석을 몰아줬는데 그 뒤에 들려오는 소리는 “속았다”는 얘기뿐이다. 20∼30대는 대학을 졸업해도 갈 직장이 없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에서 보듯 ‘공정(公正)’은 구호에 불과했다.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 위해 노량진에서 수년째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책과 씨름하면서 시험을 준비하는 청춘들이 즐비하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인 줄 알고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던 여성들은 박원순 전 시장의 성 추문 사태 때 문 대통령이 보여준 태도에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장자연, 김학의 사건 때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도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며 특별 지시까지 했던 문 대통령은 친구 박 전 시장의 성 추문에 아예 입을 닫았다. 여성운동의 대모를 자처하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앞다퉈 얼굴을 내밀다 국회에 진출했던 이들이 이젠 기자들을 피해 다니기 바쁘다. 위선의 극치다. “예뻐서 그런 건데” “참으면 30년이 편해”라며 박 전 시장 피해자의 SOS를 무시했던 이들과 하나 다를 바 없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기와 함께 살 보금자리를 마련하거나 집을 늘려 가려던 꿈에 부풀어 있었던 30∼40대는 하룻밤 자고 나면 ‘억 억’하는 소리에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다. 한 후배는 “나보다 우리 아이들이 어떤 세상을 살아갈지가 더 걱정”이라며 소주만 들이켠다. 이제 은퇴할 때가 됐거나 이미 뒷방 신세가 된 50∼60대는 수입은 없고 재산이라곤 집 한 채인데 투기꾼 취급받고, 세금 폭탄을 감당할 생각을 하니 속이 터진다. 이러니 이번 주말 다시 광화문에 ‘새로운 촛불’이 켜진다고 한다.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여당이 더 믿음직하다며 표를 줬던 이들이 왜 이리 변심했을까. 야바위 판에 속은 것이나 다름없다. 애초 문 정권의 실력이 이 정도였는데 코로나 19 국면과 재난기금 등에 가려 실체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이제야 문 정권의 진짜 실력이 실체를 드러내는 것뿐이다. 부동산 사태가 대표적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서울지역의 25평 아파트 가격 상승을 역대 정권별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노무현 정권 때 30번이나 정책을 발표했음에도 가격으로는 3억7000만 원, 증가율로는 94%가 뛰었다. 그래도 노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는 했다. 그런데 문 정권 3년 동안 집값은 4억5000만 원이나 올랐고 증가율은 53%에 달했다. 한 푼도 쓰지 않고 매년 5000만 원씩 9년을 모아야 인상분을 채울 수 있다. 저축해서 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꿈을 뺏어갔는데도 문 대통령은 사과 한마디 없다. 그린벨트 해제를 놓고 당·정·청 고위인사들이 중구난방 한마디씩 거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레임덕이 오긴 온 모양이다. 여당이 세종시 천도론을 들고나오니 이번엔 세종시 아파트 값이 하루아침에 1억 원 이상 올랐다고 한다. 집값 올리는 기술은 ‘K-집값’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인사문제도 강남에 집이 두 채인데도 처분하지 않은 김조원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교체한다는 얘기가 나오다가, 집을 한 채 팔겠다고 하니 유임시킨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왔다. 민정수석이란 자리가 강남 아파트 한 채 정도 무게밖에 안 된다는 것인가. 부동산 정책을 22번이나 발표했는데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국토교통부 장관, ‘금융·부동산 분리론’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국회의원의 질의엔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라고 고함치는 법무부 장관은 놀랍지도 않다.
차기 대선 주자라고 하는 인사는 불과 이틀 전에 자신의 입으로 내년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당헌에 따라 후보를 내면 안 된다고 해놓고 당 대표의 호통에 “주장이 아닌 의견이었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고 있다. 말을 바꿔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조국류(類)’의 군상이다. 5년이 지나가면 정권이 교체되고 주역들은 무대에서 사라지겠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부채와 실패의 상처, 쓰레기는 모두 국민의 몫이라는 것이 안타깝고 참담할 뿐이다.
이현종 논설위원/ 문화일보 2020 07 24
'강남공화국' 변화 못주면 문재인 정부 신뢰의 위기 닥친다
부동산 문제를 보는 여권의 시각
황석영의 소설, <강남몽>에는 1980년대 서울 잠실, 강남을 중심으로 한 개발시대의 욕망과 치부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강남은 개발독재와 발전국가의 기형적 욕망의 집결지였다. 부조리와 모순이 관료제적 권위주의 전략과 맞물리면서 ‘대도시 강남’이 무르익어 갔고 강남불패의 신화가 완성됐다.
‘똘똘한 한 채’라는 말처럼 한국의 서울, 특정 지역의 상황을 대변하는 말은 없다. 2018년 기준 서울 주택보급률은 95%를 넘었고, 수도권은 100%를 넘겼는데도 아파트로 인한 민심은 폭발 직전이다. 강남의 ‘똘똘한 한 채’를 가진 자도 정부정책이 불만이다. 세금을 징벌적으로 매긴다는 것이다. 지방의 집 값은 하락했다. 무주택자는 말할 것도 없고, 1주택을 가진 비강남 거주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지금처럼 에토스로 와 닿은 적이 있었는가.
수도권의 비대화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통한 방법을 모색할 때가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만큼 수도권의 과밀에 대해 정확한 문제의식을 가진 권력자도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서울 집값, 특히 강남의 아파트 가격은 노무현 정권때 폭등했다. 보수 정권을 지나 문재인 정부 들어 강남 집값과 여타의 지역의 차이는 상식의 선을 넘었고 부동산 정책은 신뢰를 잃었다.
국토의 12%에 인구의 52%가 밀집되어 있고, 상위권 대학의 80%, 100대 기업의 95%가 몰려있는 기형적 구조를 변형하지 않으면 부동산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특히 강남불패라 불리는 지역의 엽기적 부동산 폭등은 실거주 1주택이라하더라도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는 상황까지 왔다.
21번의 대책에도 불구하고 상황 호전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정부는 7월 10일 또 대책을 내놓았지만 가격은 오히려 더 올랐다. 그린벨트 해제는 없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 이전에 그린벨트 해제에 대해 정부를 포함한 여권내에 조율되지 않은 목소리가 나왔다. 태릉 골프장 아파트 부지 활용 대책이 나오자 그 지역의 집값이 또 폭등했다. 대책을 발표하면 무조건 가격은 오른다는 또 하나의 법칙이 생긴 셈이다. 이제는 아무도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신뢰의 위가다.
여권내에 부동산 문제의 해결의 단초를 위해 혁명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느냐도 의문이다. 정책이 시장에 제대로 된 신호를 주기 위해서는 과단성과 의지를 표징할 수 있어야 한다. 부동산 관련 정책 담당자들이 자신의 이해와 충돌하지 않는지부터 살피고 이에 대해 관련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가장 기초적 작업인 이유이다. 이는 정책의 단호함의 시그널이 될 수있고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문제다. 임기응변으로 일관하고 영혼과 철학이 없는 기술관료들의 이해를 배제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와 행정부, 청와대 이전을 주장하고 나섰다. 전 국민적 의제가 되는 문제다. 한국의 구조와 얼개를 바꾸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은 물론 모든 가치가 비정상적인 경로로 집결하는 서울을 옮기는 문제를 검토할 때도 됐다. 그러나 이 방안의 실현 가능성, 시기, 실효성, 파급영향 등이 충분히 연구되고 여권은 물론 정치권과 시민사회와의 사회적 합의 과정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거대담론은 절차와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개헌과 불가분하게 연결되는 문제이고 대한민국의 중심세력의 이동을 수반하는 문제를 여당 원내대표가 대정부질문을 통해서 충격요법의 형식을 통해 제기하는 방식의 절차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여권 지지율의 하락의 중심에 부동산 문제가 있고 이를 호도하기 위한 정치공학이란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수도의 이전은 개헌과 불가분하게 중첩되고 세력의 중심을 이동하는 문제다. 행여 ‘이슈가 이슈를 덮는다’는 정치공학 원론에 충실하게 대응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국면전환의 정치에 능했던 조선 숙종은 결국 왕권 강화는 물론 탕평에도 실패했다. 수도권 이전 문제는 향후 남북통일과도 연결될 수 있는 문제다. 분명 비대한 서울공화국, 더 직접적으로는 강남공화국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지방이 궤멸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도권인들 온전할까. 그러나 이를 대하는 집권연합은 여전히 안일하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프레시안 2020.07.24.
미·중관계가 틀어지면 안 되는 이유
한국은 우호적이고 협력하는 미·중관계를 바랐다. 원만한 미·중관계하에서 한국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安美經中)’으로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중 우호관계하에서는 설사 양국 간 갈등 요인이 나타나더라도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었다.
실제로 미·중 사이 한국의 외교는 각 정권의 특색과 상관없이 본질적으로는 전략적 모호성이 기본 틀이었다. 어떤 정부도 안보와 경제 이익 중 하나가 훼손될 가능성의 발생을 피하려 했다. 민감한 현안을 회피하거나 시간을 끌며 미·중의 합의 또는 상황에 변화가 올 때까지 버티며 어느 한 측과도 갈등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종합국력의 격차를 줄여오고 나아가 추월까지 전망되는 중국의 부상을 앉아서 바라볼 수 없었다. 또한 관여와 포용을 강조했던 전임 오바마 행정부의 대중정책이 중국의 자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은 의회를 포함한 미국 사회 내에서 점차 힘을 얻어나갔다. 미·중 무역협상, 남중국해에서의 대립, 대만관계, 화웨이 사태 등 경제, 군사·안보, 외교, 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의 대중 압박과 이로 인한 양국 간의 갈등은 점차 강도를 더해갔다.
같은 시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안착이라는 당면한 목표를 위해 문재인 정부는 미·중 모두로부터의 협력이 필요했다. 주어진 대외환경에서 전략적 모호성이 통할 공간은 구조적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었지만 이를 견지해왔다. 한국의 국익을 가능한 한 보호해 보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은 기존의 경제와 군사·안보적 갈등에 더하여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 및 ‘체제 우위’의 논쟁을 거치더니 이제 본격적인 ‘이념’ 경쟁으로 치달으며 더욱 격화되고 있다. 미국 백악관이 지난 5월20일 발표한 중국 관련 전략 보고서에서는 중국과 ‘중국 공산당’을 분리하여 호칭하기 시작했다. 이어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5월30일 허드슨 연구소에서의 연설을 통해,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6월15일 기고문에서 중국 공산당을 비판했다. 6월30일에 중국이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킨 후에는 윌버 로스 상무장관까지 공식 성명을 통해 중국 공산당 비판에 가세했다.
미국이 이렇게 이념의 대립을 만들어가는 이유는 중국과의 경쟁 구도를 ‘미국 대 중국’에서 자국에 한층 유리한 ‘자유진영 국가들 대 중국’으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위해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의회와 함께 중국과의 이념 경쟁을 제도적으로 준비해왔다.
미국은 대만, 홍콩,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에서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8년에 ‘타이완 여행법’이, 2019년에는 ‘타이완 보증법’과 ‘홍콩 인권과 민주주의 법’ 등이 발효되었다. 2020년 들어서도 ‘위구르족 인권 정책법’과 ‘홍콩 자치법’이 발효되었으며, ‘티베트 정책과 지지법’이 미 하원을 통과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공산당체제의 정통성이 직접적으로 연계된 주권과 통일에 관한 문제라 물러서기가 어렵다. 중국이 경제적 파장을 각오하면서도 지난 6월30일 전격적으로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키며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최근의 상황은 한국에도 ‘선택’의 압박을 더한다. 미·중 간 이념의 경쟁은 단기적으로 버티면서 상황이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던 호주도, 화웨이 사건 때 중국의 손을 들어줬던 영국도 중국의 보복 조치를 각오하며 미국과 보조를 함께하고 있다.
한국의 더 큰 고민거리는 미·중은 물론 유사한 입장을 가진 다수의 국가들이 모호성을 유지하는 한국의 향후 행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미 입장이 분명한 러시아, 인도, 호주와 함께 G7에 초청된 것은 한국에 독이든 성배가 될 수 있다. 사실상 한국의 입장 표명 자리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미·중 어느 한쪽으로부터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에 휴스턴 주재 총영사관을 72시간 이내에 폐쇄하라고 요구한 상황에서 이제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이 통하는 공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만약 선택을 피할 수 없는 현안이라면 조속히 공론화 과정을 거쳐 국민들과 합의된 가치, 정체성, 국익이 정의된 ‘원칙’을 가지고 대미 및 대중 외교를 새로이 준비해야 한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 경향 2020.07.24.
“집을 잇달아 사들이고, 땅을 잇달아 차지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니 너희가 땅 위에서 홀로 있게 되리라.”(이사야 5장8절)
이것은 그린 뉴딜이 아니다
대한민국 대전환” “새로운 100년의 설계” “160조원.” 거대한 수사와 숫자를 동원했지만 한국판 뉴딜은 여전히 ‘성장’ 패러다임의 착실한 추종자다. 디지털 뉴딜은 물론이고 ‘그린’ 뉴딜도 방점은 성장에 찍혔다.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한국판 뉴딜로서는 자가당착이다. 미증유의 코로나19 재난 뒤에는 기후위기를 비롯한 자연생태계의 훼손, 탈규제 자본주의를 앞세워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찾아 지구를 헤집어 놓은 세계화 경제, 우리에게 군림하는 성장지상주의가 차례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코로나 이후를 제대로 준비하려면 코로나19를 제대로 보아야 한다. 코로나19는 우리가 싸워 극복해야 할 경제성장의 걸림돌이 아니라 산업화 이후 줄곧 진보와 발전으로 여겼던 경제성장 자체에 보내는 긴급 경고음이다. 바이러스 재난의 근본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극복할 대상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며, 싸워야 할 것은 사람과 자연을 철저히 도구화하여 끝없이 이윤과 풍요를 좇는 탐욕의 체제다. 코로나19는 헛된 성장 신화에서 우리를 깨우는 죽비소리다. 죽비소리엔 귀를 막고 죽비만 없애려는 우를 언제까지 범할 건가.
한국판 뉴딜은 ‘선도’를 반복해 강조한다. 선도 자체보다 그 방향과 목표가 중요하다. “선도형 경제”와 “선도 국가”가 미국이나 일본을 따라잡는 것인가? 코로나19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한국판 뉴딜은 성장에서 지속 가능성으로의 전환을 선도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요구되는 “대한민국 대전환”이다. 그러려면 그린 뉴딜은 한국판 뉴딜의 일부가 아니라 중심이 되어 뉴딜 전체를 선도해야 한다. ‘그린’은 모호한 “탄소 중립 지향”이 아니라 명확한 ‘2050년 넷제로’를 가리킨다. 한국판 뉴딜은 애매한 “저탄소 경제”가 아니라 ‘바로 이’ 그린을 원리와 기초로 추진하는 정의롭고 근원적 전환이어야 한다. “160조”라는 돈으로만 될 일이 아니다. 대량 생산, 유통, 소비, 폐기에 기초한 생활양식의 문제다. 다른 길이 없다. 전혀 다른 길을 상상하고 고민하고 결단해야 한다.
그린 뉴딜에 농업이 보이질 않는다. 정부의 농촌 홀대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온실가스 배출에서 산업농의 비중, 기후변화 또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국제적 단절이 초래할 식량위기, 농업과 농촌의 생태적 가치와 기여를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농업이 철저히 홀대당한 그린 뉴딜에서 자동차가 총아로 떠올랐다. 비중이 가장 큰 ‘친환경 미래 모빌리티’ 사업은 전기차와 수소차 133만대를 보급한다. ‘현대차’에 안성맞춤이다.
그린 뉴딜을 장착한 한국판 뉴딜이 성장의 굴레를 벗고 지속 가능한 세상으로 가는 첫걸음이길 바랐던 실낱같은 기대가 사라졌다. 하긴, 그린벨트 해제 논란을 보면 기대 자체가 무리였다. 대통령의 ‘보전’ 결론으로 봉합되었지만, ‘그린’에 대한 이 정권의 인식 수준은 훤히 드러났다. 분위기가 조금만 달랐다면 결론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린벨트의 운명은 그 목적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이 좌우한다. 자본과 정치에 소비되며 ‘녹색’이 그랬듯 ‘그린’도 본연의 의미를 잃고 있다. 정명(正名)이 아니면 실명(失名)한다. ‘그린’을 순환과 공생의 상징으로 ‘보전’하기 위해서 분명히 말해야겠다. “이것은 그린 뉴딜이 아니다.”
조현철 신부 녹색연합 상임대표 /경향 2020.07.24.
언론에 묻다Ⅱ- 곡필아세<曲筆阿世>
지난 1월, ‘아이 캔 스피크 Ⅱ’ 원고를 신문사로 보낼 때, 제법 긴장했습니다. 2018년 2월 윤대진 중앙1차장의 인사거래 제안과 2019년 9월 조국 장관 취임 직후 법무부 고위간부의 인사거래 제안 사실을 폭로한 글이니 떨릴 수밖에요. 언론이 윤대진, 김후곤 검사장, 이용구 법무실장 등을 취재하여 검찰인사 난맥상, 검찰개혁이 더딘 원인 등을 조명하고 비판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윤대진의 제안 자리에 동석했던 정모 부장이 “당시 그런 말은 없었던 것 같고, 덕담이나 허풍 섞인 농담을 회유로 잘못 들은 것”이라고 해명한 글과 “언행에 신중하라”는 동료들의 동조 댓글 릴레이 소동을 생중계하는 기사들이었습니다. 언론의 역할을 망각한 듯한 취재방향과 깊이가 안타깝다 못해 고통스러웠습니다.
2016년 1월, 분란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검사 부적격자로 몰려 잘릴 뻔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았습니다. 옥죄던 신분 박탈의 공포에서 놓여날 때, 제 말과 글도 한결 자유로워졌지요. 정부나 재벌 등 힘 있는 조직을 비판하는 언론이나 시민단체, 학자들이 정작 소속 단체나 학내 비리를 비판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소속 집단 밖 세상을 향한 고담준론과는 달리, 내부 비판은 인사 불이익, 집단따돌림(왕따) 등 보복을 각오해야 하니 누구에게나 부담스럽기 마련이지요. 그럼에도, 다음 검사 적격 심사까지 7년간 검찰공화국 성문을 더욱 열어젖히고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에 힘을 보탠 후 여한 없이 잘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잠든 검찰을 깨우는 파수꾼이 되고 싶었는데, 동료들의 발에 차이는 성가신 소리로 몇 년을 지낸 후 제 한계를 통감했습니다. 파수꾼이 못 된다면, 파수꾼이 머물 망루라도 수리해 놓을 각오로 종종대고 있습니다만, 능력이 부족해 그조차 버겁네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흠을 찾고 관심법을 동원해 의도를 추측하는 이들로 인해 자꾸 움츠러들어, 비판 방향과 수위가 위태로울지언정 글감만은 더욱 단단하고 안전한 것으로 고르려다 보니 신경의 날이 서곤 합니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기왕 작심한 일이니 이어달리기 제 구간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가봐야지요.
박원순 시장이 성폭력으로 피소된 직후 자살하자, 느닷없이 마이크 들이대기식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제 경험담임에도 착각 내지 과장으로 폄훼되어 신중을 요구하는 동료들의 항의소동을 보도하던 매체들이 몇 달 뒤 경찰청에서 수사 중인 고소사건에 대한 과감한 입장 표명을 주문하더군요. 의도가 노골적이라 당황스러웠습니다. ‘검사로서 신중하지 못하다는 비난’과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비난’. 어떤 말도, 심지어 침묵조차 맞춤형 비난이 준비된 덫입니다. 마이크 들이대기식 보도가 앞으로 더 없을까. 그땐 또 어떻게 공격받을까. 펼쳐질 일들이 그려졌습니다.
관심 분야가 제각각이고, 관심 분야라도 어느 정도 알 때 비로소 말하는가, 즉 말의 발화점은 직업별, 성향별 천차만별이지요. 구체적인 사건에서 검사의 발화점이 기자, 정치인, 시사평론가 등과 전혀 다름을 뻔히 알면서, 저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기사들에서 어렴풋이 느꼈던 언론 프레임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았습니다.
급기야 중앙일보 등 몇몇 매체에서 “야당 문제는 비판하다가 여당 문제엔 침묵한다”며 친정부 정치검사로 매도하는 기사들을 쏟아냈습니다. 제가 2012년부터 현재까지 검찰 한 우물만 우직하게 파고 있음을 모르지 않을 터. 검찰과 야당을 구별 못하는 걸까요. 설마. 그렇다면, 거짓으로 독자들을 호도하여 검찰개혁을 진영논리로 끌고 가려는 의도입니까. 사실들을 부분부분 잘라 이어붙이고 특정부분을 강조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전달하는 전형적인 곡필(曲筆)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니 검찰개혁 못지않게 언론개혁 역시 시급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언론이 정론직필을 내세우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굽은 붓이 된 지 오래지요. 부끄러움을 언제까지 독자의 몫으로 미루시겠습니까.
신문윤리강령을 찾아 읽으며, 검사선서문처럼 전시용인가 싶어 씁쓸하더군요. 언론은 권투경기장 공 소리가 아니라 사회를 일깨우는 죽비 소리여야 합니다. 사실을 취재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할 언론이 취재와 책임을 소위 ‘인플루언서’들에게 떠넘기는 기사를 남발하고, 더하여 진영논리로 덧칠까지 하여 호도하고 싸움을 부추겨서야 언론이라 불릴 자격이 있겠습니까. 모래로 만든 프레임으로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워 독자들의 눈을 잠시 가릴 수는 있어도, 역사까지 속일 수는 없지요.
언론의 사명과 책임의 무게를 언론에 묻습니다.
임은정 울산지방검찰청 부장검사 경향 2020.07.27.
집이 없어’ 더 행복한 사회
10년 전, 나는 20년간 거주할 수 있는 서울시 장기전세주택에 1억원 초반대의 보증금으로 입주했다. 당시 친구는 같은 단지 같은 면적(전용 59㎡)의 아파트를 2억3000만원에 분양받았다. 20년간 대출금을 갚을 현실이 캄캄하다고 했지만 낙담은 잠시였다. 이후 집값은 2013년에 4억원, 2017년에 5억원을 넘겼고 2020년 6월에는 8억원이 되었다. 같은 단지의 84㎡ 아파트를 3억8000만원에 매입한 지인은 생활비도 쪼들려 저축을 못했다지만 최근 10억5000만원에 집을 팔았다. 처음에는 여길 꼭 사야 하냐면서 가족끼리 갈등이 있었다는데, 이내 늘 웃음꽃이었다.
세 가정의 세상 보는 눈이 비슷할 리 없다. 건너편 아파트가 재개발되면서 59㎡ 면적이 13억원에 이르자, 나는 미친 세상이라며 욕을 했지만 그들은 ‘우리 아파트는 임대가 많아서 저기처럼 안 오른다’면서 무례한 분석을 일삼았다. 내가 제주의 시골로 이사를 온 이유에는 부동산 광풍을 훈풍이라 여기는 이웃을 마주해야 하는 짜증도 영향을 미쳤다. 인사치레로 부러움을 표하니, “열심히 살았으니 보상받는 거죠”라고 말하는 사람과 어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단 말인가.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다. 내가 세상을 잘 못 산 느낌에 괴로워할 동안, 비슷한 처지의 많은 이들이 영혼까지 끌어서 집을 샀다. 목숨 걸고 내 집을 장만한 이들에게 집값 하락은 호재가 아니라 위기일 뿐이다. ‘반드시 집값을 잡겠다!’고 정부가 다짐할수록, ‘가만히 당하진 않겠다!’는 투지를 불태운다. 집에 인생을 건 사람이 넘쳐나니, 집값을 잡으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한다.
정책의 헛발질 속에 그린벨트 해제, 행정수도 이전의 카드가 등장하지만 또 다른 노른자 땅덩어리의 좌표를 국가가 알려주는 꼴에 불과하다. 서울시는 집값의 40%만 내고 입주해 나머지를 30년간 상환하는 아파트를 선보인다지만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길 기대하는 개인을 양산하는 게 공익사업인지 의문이다. 경기도는 입주자격을 무주택자로만 제한해 30년간 거주할 수 있는 기본주택을 준비 중이라는데, 취지는 좋지만 집 없는 사람 간 복불복 게임에 불과하다. 높은 경쟁률을 체감한 이들은, 가진 돈 1억원에 2억원을 대출받아 3억원에 산 집이 조만간 5억원이 되길 욕망하는 집주인이 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집 따위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는 게 수요를 줄일 유일한 해법이다. 무주택자에게 청약가점을 주면서 내 집을 장만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일평생 무소유를 실천한 이들을 국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마법의 단어 ‘시세차익’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아야 한다. ‘집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동기 부여가 가능해야 한다. 교육비도, 병원비도, 보험료도 무주택자라서 저렴해야 한다. 커피를 한 잔 마셔도, 영화를 보아도, 기차를 타도 할인받아야 한다. 생색내기 수준이 아니라, 결혼하는 자녀에게 “살아보니 그때 집을 안 산 게 신의 한 수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자연스레 집값 잡겠다는 정책을 환영하는 이도 많아질 것이다. 집을 ‘소유하지 않은’ 덕택에 사람의 미래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예측이 가능하다면 꽤 괜찮은 상상력 아닌가?/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경향 2020.07.27.
수도권 집중 못막으면 나라 망한다
부동산 사태는 이 시대 최고의 모순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대부분 부동산 사태에 연결되어 있다. 악마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보유세 강화, 대출 규제, 주식 시장 활성화, 행정수도 이전, 개헌, 지역균형 발전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이른바 보수를 자처하는 기득권 세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몇 가지 허위의 프레임을 뒤집어씌워 땅속에 영원히 가두려 한다. 첫째, 그가 이념적이라는 주장이다. 전혀 아니다. 그는 실용적인 정치인이었다.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둘째, 2002년 대선에서 충청권 표를 얻기 위해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했다는 주장이다. ‘재미 좀 봤다’는 말이 근거다. 전혀 아니다. 재미 좀 본 것은 선거의 결과일 뿐이다. 정치인은 누구나 선거에서 공약을 대가로 표를 얻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재미 좀 보려고 개혁을 공약했을까? 웃기는 얘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재미 좀 보려고 경제 살리기를 공약했을까? 웃기는 얘기다. 공약은 타당성과 실천 여부로 평가해야지, 선거에서 재미 좀 본 것으로 따지면 안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년 동안 지역 분열 정치구도에 맞서 싸웠다. 그동안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살폈다. 서울이 문제였다. 권력과 돈이 집중된 서울을 장악하려고 영남과 호남, 충청까지 가세해 싸우는 것을 지역 분열의 근본 원인으로 그는 파악했다.
처방도 나왔다. 서울의 권력과 돈을 쪼개고, 지역균형 발전을 추진해야 한다는 두 가지였다.
행정수도 이전과 지역균형 발전은 지방분권이라는 2002년 시대정신에 충실한 정책 공약이었다. 당시 선각자들은 지방분권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들은 수도권 집중을 막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외쳤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악을 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방분권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서울 사람’이 아니라 ‘지방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은 중앙집권 세력인 이회창 후보와 지방분권 연합 세력인 노무현 후보의 한판 승부였다. 결과는 지방분권 연합 세력의 승리였다. 서울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 기득권 세력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비열한 수단으로 ‘지방의 반란’을 진압했다. 행정수도 이전이 관습헌법 위반이라는 2004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행정수도 이전은 무산됐다. 대안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만들어졌다. 그마저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무산시키려고 했지만, 다행히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막았다.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 이후 16년이 흘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수도권 인구가 절반을 넘었다. 권력과 돈은 점점 더 서울로 빨려들고 있다. 부동산 사태가 온 나라를 갈기갈기 찢으며 격차를 점점 더 벌이고 있다. 첫째, 지역 격차다. 부동산은 수도권의 문제다. 수도권 집중 심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인 탓이다. 지방에는 부동산 문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세대 격차다. 중장년은 부동산으로 재산을 쌓았지만, 청년의 내 집 마련 꿈은 멀어지고 있다. 청년은 중장년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셋째, 계급 격차다. 대한민국 사람은 서울 강남에 부동산을 소유한 1등 국민, 서울 강북이나 수도권에 부동산을 소유한 2등 국민, 그리고 나머지 3등 국민으로 재편되고 있다.
격차가 더 벌어지면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 기득권 세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2002년 지방분권 선각자들의 예언대로 수도권 집중 때문에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 청와대, 정부 부처 모두 세종시로 내려가자”고 제안했다. 서울‧수도권 과밀과 부동산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다. 국가 중대사를 가볍게 다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부동산 사태가 바로 국가 중대사다.
현실적으로 국회와 청와대, 정부 부처 이전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야당의 반대 때문이다. 정권을 되찾아 오면 되는데 기득권을 왜 놓으려 하겠는가 2년 뒤 야당이 집권하면 부동산 사태가 해결될까? 수도권 집중이 완화될까?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 만년 꼴찌인 대구가 꼴찌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부산이 대한민국 2등 도시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림없다.
부동산 사태는 이 시대 최고의 모순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대부분 부동산 사태에 연결되어 있다. 악마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보유세 강화, 대출 규제, 주식 시장 활성화, 행정수도 이전, 개헌, 지역균형 발전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0.07.27.
어떤 정책이 도시를 천박하게 만드는가?
‘신의 직장’으로도 불리는 국내 모 공기업이 이전한 혁신도시의 한복판에는 고구마가 한창이다. 그런데 이 고구마밭은 시민들에게 경탄이 아니라 탄식이다. “거기는 산학연 클러스터가 들어와야 하는 곳인데 분양 이후로 노는 땅이 돼 버렸어요. 청년들은 직장 때문에 주중에는 있지만 주말 되면 많이들 올라가요. 30분 거리의 대도시에 살며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많죠. 좋은 고등학교를 유치하려고 시도했지만 다른 지역의 견제로 실패했어요. 정책의 의도는 좋았지만 저 고구마밭만 보면 속이 터집니다.” 몇 해 전 학생들과 함께 혁신도시 탐방을 하다 알게 된 이 고구마밭의 사연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초우량 기업의 이전만으로 지방 도시가 재건되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당·정·청이 ‘국토 균형발전’ 플래카드를 일제히 들고 나왔다. 이 와중에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서울을 파리의 센 강변의 풍경과 비교하며 “우리는 한강변에 아파트만 들어서가지고 단가 얼마 얼마라고 하는데, 이런 천박한 도시를 만들면 안 된다”고 했다. 서울을 천박한 도시로 묘사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자 민주당은 “세종시를 품격 있는 도시로 만들자는 취지이며, 서울이 집값 문제 및 재산 가치로만 평가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 시즌2는 이렇게 시작됐다.
서울이 정말 “천박한 도시”인지 아닌지는 논점이 아니다. 여행자에게는 파리가 문화와 낭만의 센 강변이겠지만 힘겨운 도시 노동자에게는 천박한 도시일 수 있듯이, 서울도 누가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의 측면에서 우리 도시들은 기형적이다. 국토균형발전위원회의 김사열 위원장의 지적처럼 “1000대 기업 본사 75%가 수도권에 있고 우리나라 인구의 50% 이상이 수도권에 살고” 있을 정도로 수도권은 이미 “고도비만”이며, 그래서 지방은 소멸 직전이다. 지방 도시에는 좋은 직장이 별로 없고, 있다 해도 청년은 서울로 떠난다.
게다가 통계청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19년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0.92명에 불과한데, 그중에서도 서울시는 0.72명으로 가장 낮다. 총인구의 50.16%가 거주하는 수도권(남한 면적의 11.8%)에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은 까닭에 대한민국은 1등 초저출산 국가다. 지방에선 떠나고 서울에선 애를 안 낳으니, 이런 추세라면 대한민국 소멸은 몇 세기도 안 걸린다. 소멸의 사이클은 다음과 같다. (청년의) 수도권으로의 이주, 지방 소멸, 수도권 인구밀도 증가, 수도권의 저출산, 그리고 다시 수도권으로의 이주….
정부도 나름 발버둥을 쳤다. 2006년부터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만들고 매년 10조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주로 보육 환경 개선과 청년 복지제도 확충에 예산을 집행했는데, 그렇게 복지가 나아지면 이 문제도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0.72! 반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지속된 이유는 무얼까? 정치인과 공무원이 ‘왜?’에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생태학에선 오래전부터 출산율에 영향을 주는 주요 변수로 인구밀도를 지목했다. 어떤 동물이든 주변에 개체수가 많으면 출산을 미룬다. 밀도가 높으면 낳아봤자 자손의 생존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도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애 낳기를 미루고, 적게 낳고 양육에 더 큰 힘을 쏟는데, 이런 현상은 전 세계 공통적이다.
자, 출산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서울시의 신혼부부가 있다고 해보자. 월요일 아침 지옥철 2호선에 겨우 올라타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주말에 내가 미쳤었지. 애를 가질 생각을 다 하다니….’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경쟁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서 번식보다는 자신의 성장에 투자할 동기가 더 많이 생기고, 그로 인해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쪽으로 행동전략을 수정한다. 심지어 웅성대는 소리만 들려줘도 출산 동기는 떨어진다. 따라서 정부가 좋은 의도로 복지 정책을 펼친다 해도, 결과적으로 도시의 인구밀도와 시민의 경쟁 민감도를 낮추는 방식이 아니라면, 효과는 없다.
2015년 9월15일, 당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연방 정부기관은 미국 국민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 행동과학의 통찰을 사용”할 것을 주문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행동과학의
행동과학의 통찰’이란 사람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가에 관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의미한다. 그는 정부의 각종 정책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작동 방식과 무관하게 또는 반대로 집행되고 있기에 적잖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학자들의 지적을 적극 수용했다. 정책의 심리적 작동에 대한 과학적 평가와 제안을 담당하는 ‘사회 및 행동 과학부서(SBST)’가 신설된 것도 그즈음이다. 이 부서의 연차보고서를 보면, 이 행정명령 집행으로 조세, 보험, 복지, 에너지 부문에서 상당한 정도의 성과를 냈다. 그러나 이 부서는 트럼프 정권에서 사라졌다.
만일 천문학적 비용이 걸려 있는 정부의 각종 정책들(저출산, 고령화, 일자리, 국토 균형발전, 부동산 등)을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작동 방식에 비추어 선별할 수 있는 조직이 있다면 우리의 도시는 어떻게 달라질까? 오늘날 정책과 규제상의 혼란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도시 모습이 최적인지에 대해 아직 잘 모른다. 연구와 적용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 도시를 천박하게 만드는지는 안다. 그것은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탐구가 빠진 정책이다. 부동산이든, 수도 이전 정책이든, 인간을 이해해야 도시를 재건할 수 있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경향 2020.07.28.
박원순 사후, 이제 피해자에 귀 기울일 때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이후 많은 명망가들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피해자 A씨 측 기자회견을 보다 “살의”를 느꼈다는 서울시 출연기관장, “고인은 죽음으로 ‘미투 처리 전범’을 실천했다”는 여당 의원, 고인을 가해자라 하면 “사자(死者) 명예훼손”이 된다는 또 다른 여당 의원, “고인 같은 사람은 100조원이 있어도 복원할 수 없다”는 진보 성향 사회학자까지. 그들이 내는 ‘소음’에 귀 기울일 생각은 없다. 지금 그들은 고인을 애도하고 있지 않다. 고인의 부재로 확인된 자신들의 ‘추락’에 패닉 상태일 뿐이다. ‘아무 말 대잔치’가 계속될수록 추락은 더 선명해질 것이다.
대신 나는 ‘피해자의 말’에 집중하려 한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 안전한 법정에서 그분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습니다.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 저와 제 가족의 고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7월13일 A씨 1차 입장문)
“문제의 인식까지도 오래 걸렸고, 문제 제기까지는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린 사건입니다. 피해자로서 보호되고 싶었고, 수사 과정에서 법정에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그 어떠한 편견도 없이 적법하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과정이 밝혀지기를.”(7월22일 A씨 2차 입장문)
세상은 A씨에게 물었다. ①왜 이제야 고소했나 ②의도가 뭔가 ③원하는 게 뭔가.
두 차례 입장문에 모든 답이 들어 있다. ①문제의 인식과 문제 제기까지 시간이 걸렸다(A씨는 4년간 20명에게 피해를 호소했으나 외면당했다고 밝혔다) ②법의 보호 속에 용서하고, 사과받고 싶었다 ③일상과 안전을 회복하고 싶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오거돈 전 부산시장 성추행 사건 때도 세상은 똑같이 물었다. 피해자 B씨는 답했다. “사건 직후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신상털이와 가십성 보도를 예상치 못했던 바 아닙니다.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 전 시장의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처벌받고,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유 때문입니다.”(4월23일 입장문)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씨도 이야기했다. “살아 있는 권력 앞에 ‘진실’을 말하기까지 오랜 시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안희정은 차기 대선주자였고 미래 권력이었습니다. 미투는 가늠할 수 없는 힘과의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죽게 되더라도 그 소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센 권력자라도 자신이 가진 위력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2019년 1월9일 안희정 항소심 최후진술서)
미국 폭스뉴스에서 벌어진 권력형 성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에서 로저 에일스 회장의 성폭력을 폭로한 첫 내부고발자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은 ‘소송으로 뭘 원하느냐’는 변호사 질문에 답한다. “그런 행동(성폭력)을 멈추게 하는 거요. 누군가는 말해야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늘 단호하게 말해왔다. 왜 공론화를 망설였는지, 그럼에도 결국 고소·고발을 선택한 이유는 뭔지, 사법 절차를 통해 무엇을 바라는지. 가해자와 그를 옹호하는 세력이 듣지 않았을 따름이다.
대중의 인식은 달라지고 있다. 리얼미터가 지난 15일 공개한 여론조사(자세한 내용은 리얼미터 홈페이지 참조)를 보면, 64.4%가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에 대해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18~29세(76.1%)와 30대(70.8%)에선 압도적이었다. 여성(64.9%)과 남성(63.9%)의 차이도 거의 없었다.
사법부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대법원은 2018년 “법원이 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판례를 수립했다. 지난해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상고심에선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인정했다. 도도한 변화의 흐름 앞에 소음은 무력하다.
이제 ‘피해자의 말’로 돌아갈 때다. 제3자들은 입을 닫으라. 박 전 시장은 부천서 성고문 피해자(권인숙), 최초의 성희롱 피해자(서울대 조교)의 법률대리인이었다. 피해자를 향한 공격을 고인에 대한 애도로 ‘포장’하지 말라. 당신은 당신의 발밑이 흔들리는 데 당황하고 있을 뿐이다. 발밑이 무너진다면 당신 책임이지 피해자 탓이 아니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경향 2020.07.28.
‘조세 저항’ 선동하는 나쁜 언론
그래픽 김정숙, 사진 연합뉴스
“부동산 세금폭탄, 더는 못참겠다”…25일 ‘조세저항 촛불집회’ 열린다, “문재인 찍었던 내가 신발을 던진다” 부동산 반발 집회 현장, 부동산 규제 반대 촛불 집회…“세금 아니라 벌금”, “나라가 니꺼냐” 폭발한 부동산 민심 등등….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반대하는 4개 온라인 카페가 지난 25일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 앞에서 ‘전국민 조세 저항운동 촛불집회’를 열었는데, <조선일보>가 집회 전후 일주일 동안 예고기사·현장기사·후속기사·사설 등 12건의 기사를 쏟아냈다. 그중 상당수를 네이버에 주요 기사로 내보냈다. 다른 몇몇 언론들도 이 집회를 기사로 다뤘지만, 조선일보가 기사의 양이나 제목의 선정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조선일보는 이 집회에 경찰 추산 1500명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세금 폭탄론’을 내세워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세제 정책을 공격해온 조선일보가 이젠 아예 ‘조세 저항’을 선동하고 있다. 조선일보 정도라면 조세 저항의 위험성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떻게든 부동산 정책을 흔들어 문재인 정부에 타격을 주려고 ‘부동산 정치’를 하는 것 같다. 지난해 하반기엔 일본의 무역보복을 가지고 그랬고, 올봄엔 코로나19 사태를 가지고 그랬다. 그 집요함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조선일보는 ‘7·10 대책’에서 정부가 1주택자는 추가 세금 부담이 없다고 해놓고 1주택자 세금도 올렸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공식 발표와 달리 실제로는 1주택자도 세금 부담이 늘어나도록 제도를 설계해 ‘부동산 증세’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음모론’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1주택자도 세금이 오른다. 정부가 세율을 올려서가 아니라 집값이 올라서다. 세율에 변동이 없더라도 집값이 오르면 자연히 세금도 오른다. 과세의 기본 원칙이다. 직장인이 월급이 오르면 근로소득세를 더 내고, 자영업자가 수익이 늘면 종합소득세를 더 내는 것처럼. 조선일보의 주장은 집값 오르는 것 좋지만 세금 오르는 건 안 된다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어불성설이다. 특히 올해는 정부가 시세 9억원 미만 아파트는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높이지 않아 집값 상승분만 재산세 산정에 반영됐다. 올해 1월 기준 전국 아파트 중 95%가 시가 9억원 미만이다.
공시가격 9억원(시가 13억~14억원) 이상으로 종합부동산세 대상인 고가주택은 1주택도 세율이 소폭 오른다. 비싼 집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보유세를 더 내는 게 조세 형평성에 맞기 때문이다. 다만 은퇴자 등 1주택 장기 보유 고령자에 대해서는 세액공제 확대와 상한제 운영을 통해 세금 부담을 덜어준다. 다주택자와 단기 차익을 노린 투기 거래에 대해서는 세율을 대폭 올렸다. 다주택 보유를 억제하기 위해서다. 다주택이 집값 불안의 주된 원인이기 때문이다. 살지도 않는 집을 2채, 3채씩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집값이 안정되겠는가. 다주택 보유를 차단하지 않으면 주택 공급 물량을 아무리 늘려도 실수요자에게 돌아갈 집은 늘 부족해진다. 다만 이들도 내년 6월까지 집을 팔면 중과세를 피할 수 있다. 정부가 1년 동안 퇴로를 열어준 것이다. 종부세 대상 가구는 전체 가구의 2%다. 대부분의 국민은 상관없다.
국민 다수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분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조선일보 주장처럼 ‘세금 폭탄’ 때문이 아니다. 정부가 투기를 잡지 못하고 집값을 안정시키지 못해서다. 한국갤럽이 지난 1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64%로 ‘잘하고 있다’는 응답(17%)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부정 평가 이유를 보면, ‘집값 상승’(25%) ‘근본적 대책 아님’(9%) ‘일관성 없는 오락가락'(8%) 등이 높게 나온 반면, ‘과도한 규제’(5%)와 ‘보유세 인상’(4%)은 상대적으로 적다. 앞으로 부동산 정책 방향에 대해서도 ‘규제 강화’가 50%로 ‘규제 완화’(30%)보다 훨씬 많다. 부동산 세금도 ‘지금보다 높여야 한다’가 44%로 ‘낮춰야 한다’(33%)를 앞선다.
금액이 크든 작든 세금 더 내라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다. 집값 안정과 조세 정의 등 그때그때 사회적 필요에 따라 정부가 조세 정책을 입안하고 국회가 법으로 확정하면 따르는 것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시적 다주택자가 돼 억울해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또한 정부가 정책 보완을 통해 풀어주면 된다. 그런데도 사회적 영향력이 큰 언론이 세금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을 자극하고 일부 사례를 과장해 조세 저항을 부추기는 것은 옳지 않다. 적어도 책임 있는 언론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안재승 ㅣ 논설위원실장 jsahn@hani.co.kr 한겨레 2020.07.28.
주호영 시세차익 23억원 뉴스는 왜 보이지 않을까
“과거 부동산 3법 통과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이 뉴스에 나왔어요. 굉장한 뉴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속 보도가 한 건도 없어요. 법 통과 이후 시세 차익으로 23억원을 벌었던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문제는 최소한 언론이 다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수화기 너머 독자는 맹렬히 비난했다. “사회지도층이 부동산으로 23억원을 벌었는데, 그게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법 통과로 가능했다면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할 사안 아닌가요. 심지어 이해충돌이라는 말 한마디도 나오지 않네요.”
독자의 지적대로 주호영 원내대표가 23억원 시세 차익을 본 것은 ‘팩트’다. MBC 스트레이트는 지난 26일 박근혜 정부 당시 지난 2014년 12월 강남 발 집값 폭등을 초래한 재건축 특혜법안인 ‘부동산 3법’이 통과된 이후 이후 상황을 집중 조명했다.
민간 주택에 ‘분양가 상한제’를 사실상 폐지시키는 법안, 재건축 초과이익환수를 3년간 유예해 주는 법안, 재건축 조합원에게 최대 3개의 주택을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됐는데 당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찬성표를 던졌던 의원의 재산 현황을 분석했더니 49명이 강남 3구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재건축 대상인 30년 이상 아파트를 소유하던 의원도 21명으로 나타났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소유한 반포주공 1단지는 재건축이 진행 중인데 시세는 45억원에 육박했다. 법 통과 이후 23억원이 오른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임대사업자 등록제가 임대주택 사업자에게 세금 혜택을 주면서 투기를 부추긴 것도 맞지만 박근혜 정부 당시 분양가 상한제 폐지 등이 집값을 폭등시켰다는 점에서 여야 정치권 모두 책임이 있다는 게 MBC 보도의 핵심이다.
주호영 원내대표의 23억원 시세차익은 사실로 드러났지만 MBC 보도를 인용하거나 후속 보도를 이어간 언론은 소수에 그쳤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21일 국회 원내대표 연설에서 “서민들은 열심히 벌어서 내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이 평생의 꿈인데 집값은 급등하고 대출을 막아놓으니”라고 문재인 정부를 비난했다. 연일 집값 문제를 제기하는 그의 발언은 대서특필되고 있다.
지난해 무소속 손혜원 의원이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문화재 등록 여부를 미리 알고 차명으로 부동산을 구매해 4배 이상 시세 차익을 봤다는 언론 보도와도 비교된다. 4배 이상 시세차익은 터무니없고, 투기 의혹도 사실이 아니라는 해당 지역 언론의 보도에도 언론은 ‘공직자가 공익과 부닥치는 사익을 결코 추구해서는 안 된다’며 손 의원이 이해충돌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같은 잣대로 보면 주호영 원내대표는 집값을 폭등시킨 법안에 찬성했고, 실제 수십억원에 이르는 시세차익을 얻었지만 이해충돌이라는 지적은커녕 ‘돈을 벌었다’는 팩트조차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독자의 비난은 언론이 어느 한쪽으로 쏠려 보도함으로써 정작 중요한 뉴스에 눈을 감고 있다는 강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선택적 보도’를 이유로 언론을 혐오하는 목소리가 유독 크다. 선택적 보도의 또 다른 말은 ‘정파적 보도’다. 정치적 문제와 이해관계에 따라 보도 논조를 결정하고 뉴스 밸류 가치를 정하면서 나타난 폐해가 정파적 보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곤 했는데 이제 선택적 보도라는 더 노골적인 말이 유통되고 있는 현실이다.
선택적 보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뉴스 객관성과 공정성을 무시했을 때다. 언론이 이처럼 선택적 보도를 하면 시민의 피해로 돌아온다. 뉴스 가치 판단이 다르고 핵심 이슈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만 한다면 언론도 공범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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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언론이 집값 폭등 책임을 묻기 위한 공세적 성격으로 이번 부동산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주호영 원내대표의 23억원 시세 차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각도로 분석하고, 집값 폭등을 일으킨 여러 요인을 심도 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오늘 2020. 7.29
원전은 반드시 고장나고 위험에 처한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뒤 20년 정도의 기계설계 경험과 그 분야 특허도 보유한 필자는 원전이 늘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더욱 심각하게 보기 시작한 것은 국회의원 재직 시 후쿠시마 사고를 겪고부터였다.
원전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극도로 위험한 시설이어서 국민의 의결권 행사가 요구됨에도 그저 시설 주변의 주민들 의견을 묻는 게 고작이었다. 기실 원전은 그동안 국민 동의를 한 차례도 받은 적이 없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극도의 위험성에 비해 국가전력공급 비중은 4분의 1 수준이다
국가나 사회는 개인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재산의 보호가 존재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안전을 위협하는 핵발전과 같은 초장기 핵심 정책이 결정되면서 국민과 영토의 안위에 관한 국민 주권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은 동의하지 않고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생명과 건강에 대한 침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행정부가 원전에 관한 모든 일을 한다. 건설도 행정부 산하의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이 맡고 감시도 행정부 산하의 원자력안전위원회가 한다. 유럽 선진국들은 원전 위험관리가 엄격해서 의회도 함께 감시하고 있다. 미국의 원자력규제위원회(NRC)도 내부의 감사관실을 의회가 직접 통제한다. 이에 비해 우리는 국회 추천위원 몫도 극소수로 사실상 들러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원안위는 원전을 보호하려는 기구처럼 운영되고 있다. 감시를 제대로 하게 되면 위험도 예방할뿐더러 법률의 미비점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게 된다. 감시에서 도출되는 ‘체계적 대책의 필요성’이야말로 입법의 기초다.
최근 원전 곳곳에서 기계 결함에 따른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소위 ‘주요 언론’의 ‘한국형 원자로가 우수하다’는 주장이 무색하게도 원천적인 기술적 결함에 대한 문제들이다.
기계는 금속 재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힘이나 열이 가해지면 물리적·화학적으로 변형하는 속성이 있다. 내구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내마모성, 내식성, 내열성, 내압응력 등을 고려하여 설계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설계가 완벽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역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재료의 특성이나 제작과정을 모두 고려할 수 없다. 불시에 고장이 다반사로 일어나서 위험에 처하기 마련이다. 즉 그 안전이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하고 그 수명도 당연히 있다. 아무리 정확하게 설계한들 수만 개의 원전 부품 하나하나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란 기적처럼 어렵다. 말썽 없는 상황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원전은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시설이다. 아니 용납할 수도 없다. 공학이란 시행착오를 근간으로 과학원리를 기술적으로 고도화해가는 분야다. 일반 기계는 탈이 나면 들어내고 수리하거나 부품을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할 수 있지만 원전은 그런 시행착오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실수를 겉으로 드러내기보다 감추기 바쁘다. 드러나서 문책당하는 것보다 숨긴 뒤 처리하는 것이 조직의 생리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러다 보면 제대로 짚어야 할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지기 쉽고 그게 우연히 겹치면 큰 사고로 연결되는 것이다.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가 바로 그 이름들이다.
그래서 수많은 기술자·과학자들이 원전의 안전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실정으로 원전기술 문제나 안전 문제는 공개적으로 점검하고 결과를 국민에게 알릴 의무가 정부에게 있다. 지적대로 오류가 있다면 바로잡는 게 의무다. 최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케이(K)방역 관계 공직자들은 자신의 작은 실수도 드러내고 사과를 했다. 너무 차이가 난다.
바이러스는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지만 방사능은 백신도 치료제도 없다는 점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유원일|전 국회의원·원전위험공익제보센터(준) 자문위원 / 한겨레 2020.7.30
핵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1945년 8월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한 발의 원자폭탄 투하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다. 항복한 일본은 대미 외교역량을 발휘하며 1954년 2억5천만엔의 예산을 책정하여 핵개발에 돌입하였고 10년 뒤인 1964년 미국은 일본의 핵개발 능력에 대해 7년 뒤면 핵실험이 가능하다고 자체 평가한다. 이에 사토 총리는 1967년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겠다”는 비핵 3원칙을 수용했고 1980년대엔 평화이용 3원칙(공개·자주·민주)을 제정했지만 사실상 연막일 뿐 이면에서 대미외교에 전력한 결과 1987년 나카소네 총리는 미·일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데 성공하였고, 결국 재처리 및 고속증식로 개발에 성공한다. 아베 신조는 2002년 5월 관방장관 시절 와세다대 강당에서 “일본이 원자탄을 갖는 것은 헌법상 아무 문제가 없으며, 결심하면 1주일 이내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미국의 ‘허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이를 위해 “미국의 푸들”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집요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 결과, 외교적으로 미국에 ‘완전종속’되면서 핵이 자신을 지켜준다는 안전신화 망상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세계를 오염시키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낳았다.
한국은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11월8일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통해 핵무기와 농축·재처리시설 포기를 선언하고 원전사업에 집중한다. 핵개발을 하려면 미국 설득을 위해 ‘푸들’에 견줄 만한 개로 ‘종속’되어야 하는데 역부족이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원전기술을 도입한 우리나라는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을 수출하는 성과(?)를 얻었다. 계약금 200억달러는 경쟁사보다 30% 싼 금액이었지만 지금은 시공 불량에 따른 안전성 문제로 몇 년째 준공이 지연되어 공사금액이 300억달러 전후로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더욱이 작년 9월 드론 공격으로 사우디 정유공장이 대규모 파괴된 적이 있는 위험지역이다. 운영적자와 테러 발생 시 방사능 피해 등등 국제분쟁에 의한 천문학적인 피해는 모조리 국민의 몫이다. 지난 정부에서 시행한 월성1호기 수명연장도 7천억원이 투입되었다지만 안전성을 도외시한 부실한 수명연장으로 경제성마저 미흡하여 가동도 몇 년 못 하고 작년 폐로하기에 이르렀다. 한빛 3·4호기는 가동한 지 20여년 만에 부실시공과 증기발생기 교체 문제로 수년간 정지되어 수천억원 손실 상태다. 사용후핵연료는 전국에 1만5천톤이 허술하게 쌓여 있지만 둘 곳도 없고, 위험정보를 충분히 알리지도 않은 채 일사천리로 공론화를 진행하여 반발을 사고 있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에게서 영원에 가까운 10만년간 핵폐기물을 자연에서 격리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며 아직 장기 저장에 따른 기술적 입증도 제대로 안 된 세계적인 난제이다.
일부 정치인들은 우리도 핵개발이 필요하다고 공언하지만 북핵은 남한 공격에 사용할 이유가 없다. 지난 6월4일 미국 핵비확산정책교육센터(NPEC)는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저장조가 중국·북한의 로켓 사정거리에 있어서 무방비 상태라고 공개했다. 이런 상태인데 핵무기부터 개발하자는 주장은 모순되며 재처리 연구도 미국에 의해 거부되므로 결국 결과 없이 돈만 쓰자는 것이다. 원전 건설이 중단되자 소형원자로, 핵잠수함, 핵융합 등 결과 없이 돈만 쓰는 핵개발 변종들이 등장했다. 개발주의 잔재인 평화적이지 않은 평화적 이용, 적자투성이 원전, 미국 종속만 강화시키는 결과 없는 핵개발, 수출 안 되는 수출 등등은 분명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모두 핵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헛된 망상의 소산들이며 하루빨리 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 망상은 안전신화에 갇히게 해서 지구를 오염시키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며, 대책 없는 원전 핵폐기물은 우리를 핵으로 위협하며 인류의 미래 평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일시적인 용도를 위해 인간이 만든 핵은 이후 10만년간 인간과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영원한 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정윤 | 원자력 안전과 미래 대표/한겨레 2020.7.29.
기후위기가 내 일이 아닌 이유
“오늘 07시 전국 산사태 위기경보 ‘주의’ 단계 발령.”
어제 오전 8시20분쯤, 출근길 지하철에서 휴대전화에 울린 긴급재난문자다. 전국에 뿌려진 메시지였다. 지하철 안이 술렁였다. 차창 밖이 흐릿하긴 했어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 받은 전국 산사태 알람에 긴가민가하면서도 적잖이 놀라거나 걱정된다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산 근처에 얼씬도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무렵 포털 사이트에는 ‘산사태’가 검색어 상위권에 등장했다.
이렇게 기상재해는 일상으로 다가와 있다. 도시 출근길에서 산사태를 걱정하며 살아간다. 일기예보가 기상재해로 채워질 날도 머지않았다. “오늘은 홍수로 몇 명이 사망한 어제보다 강수량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온열 질환자가 급증한 어느 지역에서는 오늘도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질 전망입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0년대부터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해 온실가스 배출을 억제하기로 한 기후협약 등 지구 환경 논의가 이어져 왔다. 그런데도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고 위기는 ‘발등의 불’이 됐다는 게 모두 다 아는 얘기다. 기후위기를 경고하는 용어는 귀에 못이 박혔다. 최악·재앙·종말·파멸·6차 대멸종·회복 불가능…. 아찔하고 숨 막히는 말인데도 어느새 진부한 단어가 됐다.
기후위기의 충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세계 각지의 기상 이변 장면도 익숙해졌다. 한극(寒極) 시베리아의 38도 폭염·알프스의 분홍색 빙하·하루 3만5000명분의 작물을 휩쓰는 아프리카 사막 메뚜기 떼·쓰레기통 뒤지는 북극곰·호주 산불·러시아 영구동토층의 기름 유출 사고에 최근의 아시아 물폭탄까지. 하도 많아 예삿일 같아졌다. 위기는 분명한데 체감이 덜하다. 누구나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하지만 그 정도에 그치기 일쑤다. 그래서 위기를 위기라고 못 느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기후위기를 ‘나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로 여기는 게 원인일 수 있다.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 먼 미래의 일이라는 생각이다. 국제사회의 ‘넷제로’(탄소중립) 목표 기한인 2050년도 먼데, 대재앙이 예측되는 2100년은 더욱 멀다.
<2050 거주불능 지구>를 쓴 데이비드 월러스 웰스는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행동심리학적 요인이 다수 있다고 전했다. 먼저 ‘규모 편향’이다. 기후변화는 너무나 거대하고 심각해서 외면하고 싶은 문제라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 가지고 기후가 온화하다고 안심하거나, 극심한 불안감을 회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결과만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먼저 행동하기를 기다리는 ‘방관자 효과’도 작용한다. 웰스는 인간이 창조한 인공지능(AI)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지칭하는 ‘프랑켄슈타인 딜레마’도 예시했다. 대대로 물려받은 기후 등 자연환경보다 인위적으로 구축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더 견고한 존재로 여겨 건드리기조차 두려워한다는 얘기다.
지난해 10월 영국 런던에 있는 언론사 ‘가디언’을 방문했다. 독자 회원제·후원 모델을 취재하는 자리였는데 거기서 그들은 기후위기를 독자들과 소통하는 대표 어젠다이자 후원 모델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전했다. 기후 섹션을 열고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로, 지구온난화를 지구가열로 바꿔 쓰고 있다고 했다. 기후위기를 내 일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경향신문은 최근 ‘기후변화의 증인들’ 기획시리즈를 5회에 걸쳐 보도했다. 해녀·산지기·농민·건설노동자·쪽방촌 주민 등 지금 일상에서 힘겹게 기후위기와 맞닥뜨리고 있는 증인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들의 목소리는 기후위기가 지금 한국에서 누구에게도 ‘내 일’로 닥칠 수 있음을 일깨운다.
런던에서 기후 운동단체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의 시위 현장을 목격했다. 그들의 구호는 “진실을 말하라, 즉각 행동하라, 정치를 넘어서”이다. 이들은 2050년이 아니라 2025년 ‘넷제로’를 촉구한다. 심각한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행동에 나서는 건 타당하다. 하지만 기후위기를 ‘남 일’로 여기는 다수에게 “행동하라”를 앞세우는 건 공허한 외침일 수 있다. 정부와 시민을 상대로 계몽운동을 펼칠 계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아야 옳다는 공자님 말씀도 안 먹힌다. 그래서 문제는, 정부든 시민이든 기후위기를 오늘 당장 내게 먼저 닥칠 수 있는 ‘내 일’로 여기느냐다./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202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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