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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21 경향 장도리
보수단체 ‘어버이연합’, 세월호 가족 농성장에서 난동 722 환겨레
21일 오후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명운동과 농성을 하는 현장에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려와 책상 등을 뒤엎고 이를 막는 경찰과 뒤엉키며 아수라장이 된 모습.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갈무리
보수성향 단체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회원들이 21일 ‘세월호 가족 단식 농성장’을 찾아와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연행됐다. 어버이연합은 지난 17일에도 “세월호 참사는 거짓 폭력”이라며 농성장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김 노인, 집에 가도 할 거 없는데 집회나 가지?"722 오마이뉴스
[동행 취재] 어버이연합은 어떻게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 난입했나
▲ 자유대한민국을 지킵시다 어버이연합에서 주최하는 연설회를 듣고있는 어버이연합 회원들 머리 위로 어버이 연합의 현수막이 보인다 ⓒ 이윤소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나라사랑실천운동 등 100여명의 보수단체 회원들이 지난 21일 오후 3시 30분께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장에 난입해 횡포를 부렸다. 이들은 유가족을 상대로 고성을 지르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서명을 받던 책상을 발로 차고 뒤엎었다. 광장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어르신들 이러지 마시고 얼른 집에 돌아가세요"라며 이들을 제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들 보수단체의 회원들은 유가족 단식 농성장에 난입하기 직전, KT 광화문지사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머리에 '법과 원칙, 아! 대한민국'이라고 쓰인 빨간색 머리띠를 메고 집회를 시작했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국민들은 반헌법적인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현수막을 들고서 "세월호 유가족 이용하는 선동세력은 하루 빨리 물러나라"고 주장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또 "의사자 지정요구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선동세력에게 이용당하지 마세요" "구원파에겐 찍소리 못하는 세월호 유가족" 등이 적힌 팻말을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수단체 회원들의 거친 행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단식농성을 시작한 지 4일째였던 지난 17일에도 어버이연합 회원 30여 명이 '세월호 가족 단식농성장'에 난입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당시에도 이들은 "세월호 참사에 학부모들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지난 18일 오전에는 '엄마부대봉사단'이라고 적힌 붉은색 조끼를 입은 여성 수십 명이 피켓을 들고 몰려와 막말과 고성을 쏟아냈다. 이들과 함께 온 탈북여성회 등 보수단체 회원들도 세월호특별법의 내용이 부적절하다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앞에서 특별법 제정 반대 기자회견을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에게 보수단체 회원들이 막말과 거친행동을 하는 이유는 뭘까? 스스로 나선 것일까, 아니면 누구의 지시에 따르는 것일까? 이들의 일상을 따라가봤다.
이유도 모르고 집회 참석하는 노인들
어버이연합은 매일 '종묘광장공원 자뎅 커피숍 뒤 공터에서 집회를 하겠다'는 신고를 하고,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연설회를 1년 이상 이어가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 난입했던 21일에도 낮 기온이 30도에 육박했지만 종묘광장공원에는 많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어버이연합이 집회하는 장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종묘공원 입구부터 <휘날리는 태극기> 등 각종 군가가 쩌렁쩌렁 울렸다. 연설회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어버이연합의 강연 차량 앞에는 50여명의 노인들이 의자를 펴고 앉아 있었다. 연신 부채질을 하는 한 노인에게 왜 강연회나 집회에 참여하는지 물었다.
85세의 홍아무개옹은 "우리는 원래 일요일을 제외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종묘공원에 와서 강연회를 듣고 토론을 한다"며 "보통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안보문제, 북한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다. 홍옹은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거의 6.25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인데, 80살을 넘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다들 열심히 참여한다"고 했다.
홍옹도 '어버이연합 알바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좌파들은 우리가 돈 받으며 어버이연합 활동한다더라 등 뭐라고 하는지 우리도 다 알고 있다"며 "회원들이 각자 아침마다 신문이랑 폐지 모아 팔고, 회비도 조금씩 내가면서 활동하는 것이지, 아무도 우리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78세의 김아무개옹은 "어버이연합에서 집회하고, 기자회견하고, 토론하는 게 내 취미생활"이라며 "매일 집회하러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운동 같은 거 안 해도 몸도 건강해지고 좋다"고 말했다.
김옹은 "어버이연합에서 활동하면서 새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며 "젊어서는 먹고 사느라 바빠서 이런 활동을 못했지만 노인이 되어서 이제 할 것도 없고, 시간은 많이 남아서 열심히 활동한다"고 말했다.
옆에서 질문을 듣고 있던 권아무개옹은 갑자기 기자에게 "부모님께 잘하고 사느냐"고 물었다. 권옹은 "부모들이 다 자식 위해서 사느라 고생한 걸 요즘 젊은이들도 알고 효도해야 돼"라고 말했다. 이어 권옹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40, 50대부터 노후대책을 준비하던데, 우리는 자식 하나만 보고 사느라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기초노령연금이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기초노령연금은 받는 조건이 까다로워 해당되는 사람만 받고 아닌 사람은 받지 못 한다"고 했다. 권옹은 참전명예수당으로 보훈처에서 월 15만 원이 나오지만 "담배도 피우고, 소주도 한 잔 해야하는데, 그걸로는 점심값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오후 1시가 되자 어버이연합의 안보강연이 시작됐다. 안보강연에 나선 강사는 탈북난민인권연합 대표 김용화씨였다. 그는 국내 정치 상황을 북한 문제와 연결 짓는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김씨는 풍선에 초코파이를 달아 북한 쪽으로 날리는 행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새정치민주연합 권은희는 대한민국을 사랑해서 출마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북한에 가서 국회의원을 한다고 해라."
"한국에 남아 있는 종북 세력들을 풍선에라도 매달아 북한으로 보내야 한다. 이 놈들이 북한에서 개죽음을 당해봐야 한다. 이들의 시체를 밟고 가야 우리가 대한민국을 바로 세울 수 있다."
▲ 강연회를 듣고있는 어버이연합 회원들 100여명의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더운 날씨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이윤소
의자에 앉아있던 노인들은 박수를 치며 "옳소!" "빨갱이 새끼들 죽어라!"라며 맞장구를 쳤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세월호 사망자를 의사자로 지정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저도 오늘 교통사고를 당해 죽으면 의사자입니까?"라는 잘못된 발언에도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해했다.
"대부분 70~80대... 우린 열심히 한다"
50여분이 지나자, 어버이연합 관계자는 "애국시민 여러분, 오늘 광화문 KT 앞에서 2시(실제는 3시에 개최했음)에 집회를 하니, 끝나고 다른 데 가지 마시고 같이 가서 우리 애국 집회에 참여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안보강연이 끝난 뒤, 대다수의 노인들은 펼쳐놓은 의자를 정리하고 함께 집회장소로 이동했다. 한 노인이 광화문으로 가지 않고 공원 한 편에 자리를 펴고 앉으려 하자, 다른 노인이 "어이, 김 노인! 이따가 집에 가도 할 거 없는데 같이 집회나 가자"고 불렀다.
대다수의 노인들이 광화문으로 이동했지만 이들은 본인들이 지금 어떤 집회에 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모르는 듯했다. 삼삼오오 모여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면서 노인들은 "근데 지금 우리 무슨 집회 하러 가는거여?" "몰라. 이번에 아시안게임에 북한 놈들 와서 가는 거 아니야? 그놈들 못 오게 때려 잡아야지" 등의 대화를 나눴다.
어버이연합의 한 회원이 기자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어버이연합을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어버이연합이 지난번에 광화문에서 김정은 사진 화형식을 해서 신문에도 많이 나오는 등 보도가 많이 됐다. 잘 모르면 <네이버>에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검색보면 나온다. 회원 중에는 101살 할아버지도 있다. 거의 70~80대지만 우린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
하지만 기자가 "지금 어떤 집회에 가느냐"고 물었지만, 이 회원도 자신이 참여하는 집회 목적을 모르고 있었다. 이 노인은 오히려 "인천 아시안게임에 북한 사람들이 와서 그걸 막으러 간다"고 답했다. 오후 3시 KT 광화문지사 앞에서 열린 어버이연합의 집회는 '아시아 경기대회에 오는 북한 응원단을 반대하는 집회'가 아니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는 집회'였다.
▲ 세월호 특별법 반대 집회를 하는 어버이연합 회원들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세월호 특별법 반대 집회를 하고있다. ⓒ 이윤소
서울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에서 한 정거장을 이동해 광화문역에서 내렸다. 노인들은 이용료가 무료라서 주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고 했다. 종로3가역에서 광화문역은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였지만 다수가 고령의 노인들이다보니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리가 불편한 노인들은 벽면의 손잡이를 잡고 계단 한 칸씩 다리를 옮겼다. 비교적 젊은 회원들이 나서 다리가 불편한 회원들 돕기도 했다.
KT 광화문지사 앞에 도착한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집회 시작을 기다리며 30여분 동안 광화문 곳곳에서 대기했다. 오후 3시가 되자 집회 주최자가 호루라기를 불며 어버이연합의 연설차량 앞으로 노인들을 불러 모았다.
"자, 어버이 여러분 모이셨습니까? 세월호 사망자 의사자 지정을 반대한다! 특례 입학을 반대한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반대한다!"
30여분 정도 집회를 하던 이들은 갑자기 길을 건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단식 농성을 하고 있는 광화문광장으로 난입했다.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은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하는 유가족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거기까지 진출했겠느냐"며 "선동가들이 광장을 장악한 지금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느껴 과격한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
현장을 지켜본 시민 유동혁(35)씨는 "세월호 피해자에 대한 의사상자 지정이나, 특례입학 조항을 세월호 특별법에 포함하자는 주장은 유가족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하고 있다"며 "어버이연합은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유가족들이 있는 광장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발표한 검찰, 받아쓴 언론, 의심하는 국민 723미디어오늘
[기자수첩] 일제히 수사당국 비난한 언론…그런데 믿지 못하는 건 검찰 만은 아니다
지난 21일 전남 순천에서 발견된 시신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DNA 감식결과가 나왔다. 과학적인 DNA 감식 결과이니 해당 시신이 유병언 전 회장일 가능성은 높다. 각 언론에서는 해당 시신을 유병언으로 단정 짓고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유 회장 죽음에 대한 의혹이 이어지고 있다. 언뜻 봐도 유병언 회장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이상한 지점이 많다. 도피 18일 만에 주검 대부분이 부패했고, 부패할 때까지 주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 의아하고, 시신을 수습한 경찰이 너무도 쉽게 이를 노숙인으로 단정 짓고 40일 넘게 시신을 방치했다는 점도 그렇다.
그러니 다양한 의혹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비교 대상이 된 DNA 샘플이 유 회장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추정도 있고, 유 회장은 살아있고 해당 시신은 신원불명의 시신이란 주장도 있다. 한 구의 시신을 둘러싸고 이처럼 다양한 의혹이 제기된 사건도 드물 것이다.
언론은 이것이 검찰과 경찰의 헛발질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사건 초기 검·경은 유병언 회장에 대한 각종 의혹을 제기하면서도 체포에 소극적이었다. 언제나 한 발 늦은 ‘급습’에 수사당국이 유병언 회장 그림자라도 본 것이냐는 비아냥이 나왔다. 대대적인 수사인력을 동원해 체포작전에 나섰지만 결과가 이 모양이다.
▲ 조선일보 7월 23일자. 3면.
그런데 언론은? 세월호 참사 초기 구조작업에서 드러난 국가기관의 총체적 문제보다 유병언 개인의 비위사실에 집중했다. 그를 세월호 참사의 ‘알파와 오메가’로 만든 것은 언론이다. 유병언만 잡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준 것도 언론이다.
검찰의 금수원 진입, 대대적 검거작전을 생방송까지 해가며 중계한 것 역시 언론이다. 사고 초기 진도 팽목항 현장에 수백명의 잠수부들이 구조작업에 매진하고 각종 장비가 동원돼 입체적 구조를 벌이고 있다는 정부의 말을 그대로 받아쓴 것도 언론이다. 거짓말은 정부가 했지만 국민들에게 소리친 것은 언론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언론은 이른바 ‘유병언 괴담’을 두고 “검찰과 경찰의 책임이 크다”고 준엄하게 꾸짖는 다. 중앙일보 홍권삼 기자는 23일 <포졸만도 못한 검경수사> 제하의 기자칼럼에서 “상당수는 이를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며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검찰과 경찰의 책임이 크다”고 비판했다.
국민일보 역시 같은 날 <인터넷엔…설설 끓는 음모론>에서 인터넷에서 제기되는 의혹들을 전하면서 “단일사건으로는 최대 인력을 동원한 검·경이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시신이 발견되자 사망 원인과 의문점을 두고 각종 음모론이 쏟아진 것”이라며 “검·경을 믿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 중앙일보 7월 23일자. 29면.
이들 언론의 지적은 옳다. 유병언 사체 발견으로 검찰을 비롯해 수사당국의 무능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수사권이 없는 언론이 수사당국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적 조건도 감안해야 하지만 불신의 책임은 그 수사당국의 얘기를 고스란히 전한 언론에도 있다.
DNA 감식결과가 나왔지만 의혹은 이어지고 있다. 이 의혹을 단순하게 ‘괴담’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의혹을 취재하거나 명백하게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신으로 나온 얘기라면, 그 불신은 향후 검찰과 언론이 풀어야 할 문제다. 그런데, ‘검찰발’ 기사만 쏟아져나오는 현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뉴스타파 보도에 문제는 없었을까? 723 미디어온,f
[이슈분석] 법에서 윤리로 바뀐 보도 프레임
뉴스타파가 23일 권은희 새정치민주연합 광주 광산을 후보에 대한 후속 검증 보도를 공개했다.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권 후보 배우자가 1인 주주인 법인, ‘케이이비앤파트너스’ 소유의 오피스텔에 권 후보 부부가 사실상 거주했다는 사실과 인수된 채권이 7개가 아닌 16개 상가였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은 뜨겁다.
법의 영역에서 시작된 싸움
<뉴스타파>는 앞선 보도에서 ‘배우자 보유 부동산 축소 신고’ 의혹을 제기했다. <뉴스타파>는 비상장 법인의 주식 액면가만 신고하게끔 규정한 현행 법리의 존재를 확인하면서도, “권 후보자가 두 법인이 보유한 수십억 대 부동산의 실질가액을 신고하지 않았다”며 법을 악용해 의도적으로 재산을 축소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모순점이 있다.
법에 따라 재산을 등록했는데, 그 이상을 등록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면 ‘법대로 했다’고 반박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권 후보 말마따나 “뉴스타파의 주장처럼 시장가치를 신고해야 한다면 오히려 재산 과다 신고로 허위사실 공표에 해당할 수 있”기도 하거니와 다른 후보들은 하지 않는데 권 후보만 그렇게 신고를 해야 할 ‘의무’도 없다. 배우자 남모씨가 해당 부동산을 취득한 시점이 2011년이라는 점도 <뉴스타파>가 제기한 ‘의도적 재산 축소’라는 의혹의 타당성을 약화한다. 이 과정에서 <뉴스타파>는 법인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 부채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상가 임대료를 법인 수입으로 연결하면서 보증금 등의 비용은 간과했다. 대형 회계 법인의 회계사 A씨는 지난 21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뉴스타파 보도가 왜곡된 것은 아니지만 ‘부채’를 배제한 채 ‘자본’만 얘기한 것은 사실이다. 자산의 가치는 부채와 자본을 모두 총체적으로 평가해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두 법인의 위법‧탈법 행위를 잡아낸 것이 아닌 상황에서, 또 재무제표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망을 피해 수십 억 원의 재산을 축소·은폐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꺼낸 것에 대해 ‘면밀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일각에서 나왔다. 내놓은 주장에 비해 근거가 부실하다는 지적이었다. 최경영 <뉴스타파> 기자는 지난 21일 미디어오늘과의 전화 통화에서 “재산의 많고 적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재산 형성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검증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보도를 통해 재산의 규모를 문제삼았던 것은 <뉴스타파>였다.<뉴스타파>는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23일 후속보도를 통해 “권 후보 측의 해명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배우자가 대표로 있는 법인의 재무제표 등을 공개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권 후보 측은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부분도 권 후보 측이 직접 공개하지 않는 이상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권 후보가 “제목의 ‘축소 의혹’ 문구는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이 반영돼 후보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며 <뉴스타파>에 정정보도를 요청한 것도 수십 억 상당의 부동산을 소유한 것처럼 비춰진 것에서 비롯할 터, 이런 사실 관계와 관련해 이 보도가 명예훼손인지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 뉴스타파 18일자
도덕·윤리 영역으로 바뀐 프레임
그렇다고 언론이 권 후보 배우자의 부동산임대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없다.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언론은 얼마든 윤리적 차원에서 공직자 후보자의 도덕성을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의 사명이자 역할이다. 이런 측면에서 <뉴스타파>가 권 후보에 대한 검증을 ‘시도’했다는 것은, 여‧야에 구애 받지 않는 독립 언론 본연의 가치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첫 번째 보도에서 ‘프레임’을 잘못 잡았다는 점이다. <뉴스타파>는 첫 보도에서 권 후보를 겨냥한 ‘재산등록 축소 의혹’, 즉 한 개인에 대한 법리 차원의 문제를 던졌다. 그러다 후속 보도에서는 ‘공직 후보자의 부동산 투기’와 같은 윤리적 문제로 치환했다. 23일자 보도에서 재산등록 제도의 문제를 짚기도 했으나 첫 보도에서는 방점을 이것에 두지 않았다. 권은희 후보 재산규모 및 페이퍼컴퍼니에 방점을 두었다.
다시 말해 <뉴스타파>는 ‘의도적인 재산등록 축소’라는 의혹에 대한 시청자의 갈증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재산형성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쟁점을 틀었다. 수많은 공직자들도 받아야 할 윤리적 비난을 권 후보가 홀로 뒤집어쓰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왜 권은희만 그런 잣대로 검증하느냐’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만약 취재 과정에서 법인의 ‘불법성’을 확인됐다면 나오지 않았을 논란이다.
또 하나, 윤리적 차원에서 비판을 할 경우 어떤 기준에 따라서 비윤리와 윤리를 나눌 수 있느냐도 쟁점이 됐다. 이 사안에서는 ‘부동산임대업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공직 후보자가 부동산임대업을 해서는 안 된다’, ‘페이퍼컴퍼니 설립까지 동원하는 것은 투기에 가깝다’ 등과 같은 가치 판단을 전제할 수 있을 것이다. 보도를 통해서는 <뉴스타파>가 어떤 윤리적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진 않다.
부동산 임대업에 대한 가치 판단, 그리고 투기냐 투자냐에 대한 수용자 각자가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미디어오늘이 취재한 회계사들 역시 페이퍼설립을 두고 “부동산 투자에서 투자자들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뒤 관리를 자산관리사에게 맡기는 경우는 흔한 행태”, “남씨와 같은 경우를 그와 같은 범주로 보기 어렵다. 윤리적 문제가 크다” 등으로 사업 형태에 대한 견해가 나뉘었다.
그럼에도 일반에 대한 잣대보다 공직자에 대한 잣대가 더 엄격하다는 점, 대출 및 경매 등 부동산 투기 방식으로 재산을 형성하려 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권 후보 부부의 재산 형성을 곱게만 바라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권 후보 도덕성에 대한 비난과 별개로, <뉴스타파>의 보도가 과연 문제가 없었던 것인지, 또한 공직자의 도덕성 잣대의 기준은 또 어디까지 봐야 할지 등은 여전히 뉴스 수용자들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뉴스타파>가 던져준 숙제다.
유병언 시신과 법곤충학 723 한국
22일 오전 경찰의 DNA 감식결과 유병언으로 추정된 변사체가 지난달 12일 발견된 전남 순천시 서면 신촌리의 모 야산 밑 밭에서 경찰이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있다.연합뉴스
사람이 죽어서 부패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시설을 처음으로 만든 곳은 미국 테네시대학이다. 일명 바디팜(Body-farm). 우리 말로는 ‘시체농장’쯤으로 번역된다. 새들이 지저귀고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야트막한 언덕에는 여기저기 시신들이 놓여져 있다. 기온과 습도 등 자연환경과 몸무게, 나이 등에 따라 부패 속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관찰한다. 관찰 결과는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돼 법의학으로 규명하지 못한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준다.
▦ 시신 부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곤충이다. 시신과 그 주변의 곤충을 관찰해 사망 시점과 장소, 사망 원인을 밝히는 학문이 법곤충학이다. 1980년 6월 4일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18세 소녀의 시신이 발견됐다. 파리 유충(구더기)이 들끓었다. 비슷한 시기 데이트하던 여자를 강간하고 남자친구를 폭행한 범인 2명이 용의자로 지목됐으나 범행을 부인했다. 법곤충학자가 동원돼 검정파리가 맨 처음 알을 낳은 때는 일주일 전으로 사망 날짜는 5월 29일 낮이라고 밝혔다. 이를 근거로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고 자백을 받아냈다. 범인 중 사형이 집행된 한 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데드 맨 워킹이다.
▦ 부패는 신선한 사체, 부풀어 오른 사체, 활발한 부패, 진행된 부패, 건조한 부패, 유해 등 6단계로 진행된다. 곤충들은 부패가 진행되면서 내뿜는 가스의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데 단계별로 모여드는 곤충이 다르다. 맨 처음 달려드는 곤충은 검정파리와 쉬파리다. 이들은 심지어 심장이 박동을 멈추기 전에도 희미한 냄새를 맡고 달려든다. 몇 분만에 시신에 도착해 2주 동안 머물기 때문에 사망시간 측정에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 후 딱정벌레들이 파리의 알과 구더기를 먹기 위해 몰려들고, 다음으로 개미나 말벌 같은 잡식성 곤충들이 달려든다.
▦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종적을 감춘 지 불과 18일 만에 80%이상 백골화가 진행된 것을 놓고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온도와 습도 등에 따라 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이지만 의혹은 여전하다. 한국에서 법곤충학 연구는 걸음마 단계다. 미국은 196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됐지만 우리는 200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발걸음을 뗐다. 연구가 부족해 사체곤충을 법정증거로 채택하지 않고 있다. 바디팜까지는 아니더라도 법곤충학 연구에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구제불능 <조선일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네 7.24 오마이뉴스
[게릴라칼럼] 세월호 참사 100일, 변하지 않은 보수 언론들
"신문과 방송은 여전히 세월호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실상을 말하지 않는다.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한 점에서 100일 전과 똑같다."
뼈아픈 지적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전규찬 대표가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아 한 언론에 기고한 글이 가슴을 후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부분 언론이 진실규명에 관해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하기 때문에 따가운 비판을 들어도 싸다. 하지만 참사 발생 100일이 넘도록 진실과 책임 규명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더욱이 진실 규명에 앞장서야 할 언론은 국가적 재난 앞에서 오보와 왜곡된 속보경쟁, 그것도 모자라 예의에 어긋난 취재와 거짓 인터뷰까지, 심지어 그러한 무례함을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정정하거나 사과조차도 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행태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누구보다 따가운 질책과 비판을 들어 마땅하다.
유족들 두 번 세 번 울리는 <조선일보>
언론 스스로 100일을 돌아봐도 부끄럽고 민망했던지 24일자 조간신문들은 자책과 한숨, 성찰을 다짐하는 기사들로 넘쳐났다. 1면과 사설 등에서 쏟아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팽목항에는 오늘도 변함없이 파도가 밀려왔다 흩어진다', '숨진 채 발견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시신 앞에 넋 놓고 있는 한심한 검찰과 경찰' 등의 제목과 기사들이 눈에 띈다.
그런가 하면 세월호 100일을 맞으면서도 여전히 요지부동, 구제불능의 모습으로 일관하는 보수언론의 견강부회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조선일보>의 이날 1면 '세월호 100일…그들의 희생이 안전의식 깨웠다'란 특집기사는 대표적 케이스다. 차가운 바다 한 가운데서 비명에 숨져 간 자식과 가족들 앞에서 절규하며 참사의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유족들을 두 번 세 번 울리는 기사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3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대 참사다. 그런데 참사의 원인과 책임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더구나 10명의 실종자가 여전히 구조되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그들의 희생 때문에 사회가 달라지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목과 기사를 내보냈을까? 기사의 제목만 봐도 '원인규명이고 뭐고 세월호 참사를 이제 빨리 잊자'는 의미가 함의돼 있음이 절로 읽힌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보도행태는 이날 거의 대부분 일간지들이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우리사회 곳곳은 안전 불감증이 여전하다'고 한 것과는 다르다. 특히 성과를 내지도 못하면서 인사 참극으로 국민을 조롱하는 듯한 박근혜 정부의 국가개조론,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시큰둥한 정치권, 쳇바퀴만 도는 검경 수사 등을 비판한 것과는 대조를 이뤘다. <조선일보>는 기사에서 "안전 불감증이 치유되는 희망적인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며 "상식과 규정, 기본에 충실해지려는 변화"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기사 어디에도 세월호 참사 100일이 되도록 진실규명에 다가서지 못하고 엉뚱한 의제설정과 보도태도를 취해온데 대해 반성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호영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 발언이 '직언'이라니, '황당'
▲ 주호영 의장의 발언을 보도한 조갑제닷컴 화면. ⓒ 조갑제닷컴
더욱 가관인 것은 이날 극우 보수논객인 조갑제씨가 운영하는 <조갑제닷컴>에 '주호영,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 직언'이란 제목의 기사다. 국가적 재난인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한 것도 모자라 언론이 재차 부추겼으니 이를 바라본 유족들은 얼마나 참담하고 비통했을까.
'주호영 '세월호 참사,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라는 <조선닷컴>의 기사와 누리꾼들의 반응을 부각시킨 <조갑제닷컴>은 기사에서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이 24일 '세월호 사건은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라고 말한데 대해 대부분 누리꾼들은 주 의장의 직언에 동감했다"고 썼다. 참으로 황당하고 기가 막힌다.<조선닷컴>이 이날 올린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의 세월호 관련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올린데 대해 맞장구를 치는 보수언론의 황당한 궤변이야말로 보수언론의 저널리즘 기능이 '침몰 상태'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꼴이다. 되돌아보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주일여 만인 지난 4월 23일부터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신문들과 그들의 종합편성채널(종편)들은 '유병언' 프레임에 함몰된 채 언론이 의당 설정해야 할 의제의 핵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특히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신문들은 많은 지면을 할애해 국민의 시선을 '유병언'과 그 주변으로 돌기기 시작했다. 정치적 목적의 징벌적 수사에 갇혀 환경감시와 상관조정 기능을 상실한 보도프레임이 난무했다.'유병언 비리 추가', '정황 포착', '측근 소환', '수사망 좁혀' 등의 기사로 지면을 가득 메웠지만 결국 언론은 죽은 유병언을 사냥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언론이 유령의 포로가 되어 방향을 잃고 헤맨 것이다. 검찰과 경찰이 그랬던 것처럼.
종편, '유병언 추격전' 연일 생중계하더니...'허탈'
▲ 5월 23일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 화면 갈무리 ⓒ TV조선
종편과 지상파 방송사들도 '유병언 추격전'을 연일 생중계식으로 보도해 세월호 참사의 초점에서 시선을 멀리하는데 주력한 꼴이 되고 말았다. TV조선을 비롯한 종편들의 지난 100일은 온통 '유병언'에 관한 의제가 핵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병언'을 세월호 참사의 주범으로 몰았으나 결국 그가 '죽음'으로 나타나자 허탈함과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내 주류 언론들은 '유병언'으로 시작해 '유병언'으로 끝났다고 할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다. 사고 초기 대응과 해경의 구조과정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고 책임소재의 칼끝이 점점 청와대와 박근혜 대통령에게 다가가자 보수언론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유병언' 프레임을 작동시키며 오직 그 길을 고집했다. 다른 언론사들의 속보경쟁까지 부추겼다. 그러나 대부분 기사들은 검찰과 경찰 발 받아쓰기 또는 추측성이 주를 이뤘다. 많은 국민들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지니고 있는 의혹의 시선들을 세월호에서 점점 멀리 하려는 것처럼. 그간의 편집과 보도행태에서 드러난 과다한 집착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보수언론사들은 유병언의 죽음을 향해 '세월호의 정점', '책임의 정점'이란 표현과 함께 세월호 참사에서 서서히 시선을 떼려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사 발생 100일이 지났지만 책임규명은커녕 원인조차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 문제만 나오면 정부와 정치권은 딴짓을 한다. 누구보다 의혹의 실체에 관심을 갖고 진실을 향해 적극 파헤쳐 나가야 할 언론들조차 딴전을 피우고 있으니 국민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족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럴 순 없다. 그럼에도 그들을 바라보는 일부 보수언론인들의 시선은 갈수록 싸늘하기만 하다. 저널리즘의 본령이 정령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것일까. 기레기 소릴 들어도 싸다.
세월호특별법 반대’ 소녀 울음, 어버이연합 “간첩이 시켰냐” 724 미디어오늘
[세월호 100일] 보수단체 24일 세월호 특별법 반대 집회 열어…세월호는 해상교통사고 주장
세월호 참사 발생 100일을 맞은 24일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주최한 집회를 지켜보던 두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두 소녀는 세월호 특별법에 반대하는 어버이연합의 집회를 보고 있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어버이연합 소속 회원들은 소녀들을 둘러싸고 막말을 쏟아냈다.
한 회원은 “세월호 유족들도 아닌 것들이 쇼를 하고 있다”고 윽박 질렀다. 다른 회원은 “뭐하는 짓들이냐. 간첩이 시켰냐, 이정희(통합진보당 대표)가 시켰냐”라고 소녀들을 향해 소리쳤다.
소녀들을 향해 위협적인 말이 쏟아지자 한 시민은 어버이연합 회원을 가로막았고 다른 시민은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이라고 말했다. 어버이연합 측은 회원들이 소녀를 둘러싸자 "대응하지 마라. 정치적으로 이용 당한다"며 제지했다.
두 소녀는 "세월호 특별법이 왜 필요하나"라고 적힌 전단지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집회가 끝나고도 10여분 동안 자리를 지키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서울에서 온 학생들"이라고 전한 두 소녀는 세월호 특별법 반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어버이연합 소속 회원 200여명은 이날 오후 3시 세월호 유족들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광화문 광장 건너편에서 집회를 열고 “세월호 특별법은 정치선동꾼이 유족을 왜곡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의사자 지정과 관련해 유족이 요구한 내용이 아니라면서도 유족들을 질타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의사자 지정을 얘기한 게 아니라고 하는데 유족들은 국회 논의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는 왜 보고만 있느냐”며 “개나 소나 의사자를 지정해달라고 한다. 여태까지 이런 관행도 없었다. 참사를 왜곡하고 악용해 서명받는 선동꾼들을 빨리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냉정히 죽음을 보면 해상 교통사고로 사망한 자들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는 의사자 지정 문제에 대해서 공식 요청을 한 적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범계 의원은 의사자 지정 문제는 당 차원에서 한 차례 논의된 적이 있지만 희생자들을 추념하는 의미 차원에서 의사자 지정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법안을 만드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세월호 특별법 반대 구호는 의사자 지정 문제와 수사권 부여 문제가 섞이면서 유족들이 의사자 지정 등 보상 문제를 강하게 요구한 것처럼 비치게 만들고 있다. 유족이 요구한 세월호 특별법에는 수사권 부여 내용이 핵심이고, 향후 재발방지를 위한 방안에 방점을 찍고 있다. 정치권에서 논의됐던 의사자 지정과 같은 보상 문제는 아예 포함돼 있지 않다.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는 애초 유족이 의사자 지정을 원하는 것처럼 주장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집회에서 “유족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도 “유족들도 의사자 지정을 반대한다고 밝혀야 한다”고 강요하는 모습이다.
▲ 두 소녀가 어버이연합 주최 세월호 특별법 반대 집회를 지켜보다 울음을 터뜨리자 회원들이 몰려와 막말을 쏟아냈다.
어버이연합이 이날 새정치민주연합의 세월호 특별법 내용이라고 밝힌 내용도 사실과 달랐다. 이들은 새정치민주연합 특별법에 “공무원 시험 가산점 주기”라는 항목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공무원 시험 가산점 내용은 정부가 주장한 내용이다. 안전행정부는 세월호 의사자들에게 공무원 시험 가산점을 주는 방안을 마련한 바 있다. 또한 단원고 피해학생 대학특례전형 역시 새정치민주연합 뿐 아니라 새누리당이 논의한 특별법안에도 포함돼 있다.
어버이연합은 특히 유족이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에 수사권이 포함된 것을 두고는 "사법질서 파괴 주장"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앞으로 사건 사고마다 특별법을 만들고 기소권과 수사권을 주라고 요구한다면 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있겠느냐”라고 비난했다.
이날 변호사 1000여명은 국회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은 형사 사법 체계를 흔들지 않는다며 제정을 촉구했다.
어버이연합 추선희 사무총장은 2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세월호와 관련된 분들이냐. 선동가들”이라며 “집회 장소에서 오고 가다 만났던 아이들”이라고 주장했다.추 사무총장은 “세월호 특별법에 동의해 서명한 300만명 시민들도 그럼 선동꾼에 놀아난 것이냐”라는 질문에 “300만장을 갖고 나와라, 직접 확인해서 까보자”라고 주장했다.
집회를 지켜본 유모씨(35)는 “세월호 특별법이 희생자를 두 번 죽이고 야당이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의 주장은 시민들을 설득시키기 보다는 전문선동꾼의 모습을 자신들이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북한 어뢰와 유병언의 공통점 | 단국대 의대 교수 724경향
2010년 5월20일, 천안함 침몰의 원인이 합동조사단에 의해 밝혀졌다. 조사단은 북한이 쏜 어뢰가 천안함을 침몰시켰다고 했다. 참사가 일어난 지 55일 만의 일이었다. 그게 의외였던 건 침몰 초기 청와대가 한사코 북한의 소행임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명박 대통령은 사고 직후 근처에 있던 속초함이 함포사격을 한 이유가 “새떼 때문이다”라고 했고, “처음에는 나도 안 믿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그게 맞더라”는 해설까지 덧붙여줬다. 천안함 침몰의 원인으로 ‘피로골절’이 대두됐을 땐 “내가 배를 만들어봐서 아는데, 파도에도 그리 될 수 있다”고 말해 ‘저분은 대체 못하는 게 뭔가?’라는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고, 국방장관이 국회에 나가 “북한이 그랬을 수도 있다”고 답변했을 때는 쪽지를 보내 발언을 취소시킨 적도 있다.
‘증거가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조사단은 침몰 현장에서 발견된 어뢰 추진부를 높이 들어올렸다. 사람들은 놀랐다. 추진부 뒷부분에 ‘1번’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투박한 글씨체로 보건대 그 문구는 절대로 우리나라 사람이 쓴 것은 아니었다. 조사단은 덧붙였다. “1번이란 글씨는 제조 과정에서 기술자들이 써놓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성매직으로 쓰인 그 글자는 희한하게도 어뢰의 녹 위에 쓰여 있어 좌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들은 몰랐다. 북한의 어뢰 기술이 세계적 수준이라 바닷속에서도 글자가 훼손되지 않고, 녹이 생길수록 더 진해지는 유성매직을 개발해 냈다는 것을. 그 후에도 좌파들은 수많은 의혹을 제기했지만, 국방부는 말없이 가운뎃손가락 하나만 들어올렸다. ‘1번’이란 글자는 그만큼 확실한 증거였다.
2014년 7월21일 밤,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노숙인의 것으로 생각했던 시신이 뒤늦게 유병언의 것으로 밝혀졌으니 말이다. 정부와 여당이 세월호의 진상규명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여서인지, 유병언의 체포야말로 석 달이 다 되도록 대한민국을 침울하게 했던 세월호 침몰사고의 최종판으로 인식되어 왔었다. 그에게 5억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던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전 최고기록이 5000만원이 걸린 신창원이었으니, 유병언을 잡고 싶은 정부의 의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연인원 130만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되고, 현상금을 노린 수많은 사냥꾼들이 순천으로 몰렸지만, 유병언은 잡히지 않았다. 신도들이 목숨 걸고 유병언을 지킨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에게 돈을 받은 정치권 인사들이 그를 비호하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도 떠돌았다. 하지만 정말 허무하게도 유병언은 그보다 훨씬 전에 죽어 있었다.
발견 당시 부패가 심해서 지문 확인도 못할 정도라던 그 시체가 유병언인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시신의 엉덩이뼈에서 추출한 DNA가 유병언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일치했고, 또 구속기소된 친형과도 유사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사람의 DNA가 일치할 확률은 최소한 30억분의 1이니, DNA 한 방이면 유병언이 맞다고 할 수 있겠다. 4년 전처럼 좌파들은 여기에 대해 숱한 반론을 펴고 있다. 유병언은 술을 안 먹는데 왜 가방에 소주병이 들어 있느냐부터, 시체의 키가 유병언과 다르다는 식이다. 아니, 공부 안 하는 학생도 책가방에 책이 들어 있고, 가수 임창정의 키가 프로필에 적힌 대로 171㎝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좌파들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필경 ‘더운데 겨울 파카를 입은 이유’가 뭔지, ‘지문 채취가 불가능하다더니 어떻게 갑자기 지문을 채취한 건지’, ‘2주 만에 시체가 백골이 되는 게 가능한지’ 등등 또 다른 건수를 찾아내 공격을 개시하리라. 하지만 경찰은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된다. “너희가 DNA를 알아?”
1번 어뢰와 유병언 시신 확인은 둘 다 배와 관련이 있다는 점, 과학수사의 개가라는 점, 좌파들이 결정적 증거를 믿지 않는다는 점 등의 공통점이 있지만, 둘 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나왔다는 게 가장 신통하다. 천안함의 진상이 밝혀진 건 6·2 지방선거를 2주 앞뒀을 무렵이고, 이번 시신 확인은 미니총선이라 불리는 7·30 재·보선을 불과 9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4년 전 선거는 여당의 참패로 끝났다. 궁금하다. 7·30 재·보선은 공통점이 될까, 차이점이 될까?
'깡패' 자사고 우수학생 독점 '슬럼화' 일반고 패배감 젖어 722 오마이뉴스
[현장] '자사고 전환 4년' 경문고와 인근 일반고에서는 무슨 일이?
자율형 사립고가 기로에 섰다. 서울시교육청은 내달 13일까지 서울시 자사고 25곳 중에서 2009년에 설립된 14개 고교에 대한 재지정 평가 결과를 내놓는다. 결과에 따라 14곳 모두 일반고로 전환해야 한다. '일반고 슬럼화' 등을 야기한 자사고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인식이 공감대를 얻고 있고, 조희연 서울시교육감도 곧 칼을 빼들 것으로 보인다.
자립형 사립고(자사고) 재지정을 앞두고 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에 있는 자사고인 경문고 교문의 모습이다. ⓒ 선대식
지난 18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경문고. 학교 입구에서부터 '자율형 사립고'(아래 자사고) 표지판이 방문객을 맞는다. 교내에 들어서면, 푸른 인조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 입구에는 대학교수들의 강의 일정이 담긴 '진로진학탐색 멘토링 스쿨' 행사 안내문이 눈에 띈다.
이곳의 학교시설은 인근의 일반 공립고에 비해 좋다. 학생들도 학교에 만족한다. 이 학교의 1학년생은 "중학교 성적 상위 50% 이내의 학생만 자사고에 지원할 수 있다 보니, 중상위권 학생들이 많이 온다, 공부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라고 말했다. "부모님 역시 연 600만 원이 넘는 학비를 크게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데 힘을 쏟는 학부모들에게 경문고는 만족스러운 곳이다. 이 학교의 한 교사는 "학교는 자사고를 신청할 때 인성 교육 등의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강조했다"라면서 "하지만 자사고 전환 이후 주로 영어·수학 등 입시 과목 수업이 늘어나고 강화됐다, 학교는 입시명문을 추구하고 있고, 학생·학부모들이 알고 (학교에) 온다"고 전했다.
문제는 경문고 학생·학부모의 만족감이 일반고 학생·학부모들의 상대적 박탈감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경문고에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다 보니, 인근 일반고는 소위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집합소가 됐다. 이른바 '일반고 슬럼화' 현상이다. 경문고에 다니는 또 다른 1학년생의 말이다.
"중3 때 친했던 친구들은 일반고에 많이 갔어요. 친구들은 공부 못하는 학교에 갔다면서 자책해요. 사실상 1부 학교인 자사고와 2부 학교인 일반고로 나뉘는 분위기예요. 경문고에 오는 학생들 역시 길 건너 서초구의 자사고에 지원했다 떨어진 친구들이 와요. 결국 다들 박탈감을 느끼고….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자사고를 왜 유지하는지 모르겠어요."
무너진 일반고... "한 반에 공부하려는 학생은 5명뿐"
같은 날 낮 서울 동작고를 찾았다. 동작구 내에서 경문고와 가장 가까운 일반 공립고다. 경문고가 있는 동작동·사당2동에 사는 학생이 경문고에 진학하지 못할 경우 20분가량 마을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한다. 한 학부모는 "바로 옆에 있는 학교를 놔두고 왜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는 불편을 겪어야 하느냐"라고 비판했다. 언덕에 위치한 동작고의 운동장은 경문고에 비하면 비좁았다. 좁은 운동장 한쪽에 농구코트를 설치한 탓에, 학생들은 축구를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등교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한 학생은 "늦잠을 자고 지금 나왔다"라면서 "대학에 갈 생각은 없고, 직업교육을 받으려고 한다"라고 밝혔다. 이미 대입 수시전형에 합격했다는 또 다른 학생은 "35~40명가량 되는 한 반에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학생들은 5명 정도에 불과하다"라면서 "나머지는 공부에 큰 뜻을 두지 않고 있다"라고 전했다.
관악구 대학동에 있는 삼성고 역시 경문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인근 중학교 졸업생 중 상위권 학생들은 경문고나 인근의 미림여고 등 자사고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이 학교의 교사는 "자사고가 있기 전에 신입생 중에는 중학교 성적 상위 4% 안에 드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더러 있었고, 중위권이 두터웠다"라면서 "지금은 최상위권 학생은 거의 없고, 하위 80% 학생들이 많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마저도 학기 초 자사고에서 깡패처럼 상위권 학생을 빼가고, 이후 자사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일반고로 보내는 탓에 자사고와 일반고의 격차는 더욱 크다"라고 전했다. 이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부족한 실업고 정원 탓에 일반고에 온다, 각 학교들이 이런 학생들을 분담해야 하는데 일반고가 모두 받아 안고 있어 이 학생들을 가르칠 여력이 되지 않는다, 사실상 이 학생들은 방치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삼성고 1학년 학부모 회장인 장희정(51)씨는 자사고 인한 고교 서열화 강화를 우려했다. 장씨는 "최상위권 아이들은 특목고를 가고, 상위권 학생이나 비싼 등록금을 낼 수 있는 학생은 자사고로 빠진다"라면서 "사립고나 각각 남·여학생만 다니는 공립고에 대한 선호가 일부 있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학생들이 남녀공학 일반고에 간다, 슬럼화될 수밖에 없다"라고 밝혔다.
"자사고 혹은 위장전입해 강남 학교에 자녀 보낸다"
▲ 경문고가 있는 서울 동작구와 관악구 일대에서는 일반고 슬럼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동작구 사당3동에 위치한 사당중학교 전경이다. 사당중학교 졸업생 다수는 인근의 동작고·인헌고 등 일반고가 아닌, 경문고와 같은 자사고나 강남의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 선대식
지역 사회에서 일반고 슬럼화는 고착화된 지 오래다. 중학교 3학년생 사이에서는 자사고 선호현상이 강하다. 동작고 인근에 있는 사당중학교의 한 학부모는 "동작고는 안 좋은 학교로 통한다, 학부모들은 경문고와 같은 자사고에 보내거나 위장전입을 해서라도 강남구·서초구 학교로 아이를 보낸다"면서 "동작고로 진학하는 사당중 학생은 전체의 10%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사당중에서 근무하는 교사는 자사고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반고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졌다, 공부를 잘하면서 일반고에 가는 학생이 있는데 공부 못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내신 성적을 잘 받기 위한 것"이라면서 "교사들도 자신의 자녀를 일반고에 보내는 걸 꺼려한다, 자사고 탓에 일반고가 붕괴됐다"라고 비판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유기홍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서울시교육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경문고 입학생 중에서 중학교 내신 성적 상위 20% 이내 학생의 비율은 38%였다. 반면, 인근의 일반고인 삼성고·당곡고·신림고의 중학교 내신 성적 상위 20% 이내 학생의 비율은 각각 13.9%, 12.0%, 11.5%에 불과했다. 반면, 경문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인근 일반고로 전학을 간다. 2013년 경문고에서 인근 일반고로 전학을 간 학생은 32명에 달한다. 또한 부적응 등의 이유로 자퇴한 학생 수도 12명이었다.
경문고 인근 삼성고의 한 교사는 "같은 지역에서의 전학은 안 되지만, 자사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은 인근 일반고로 전학할 수 있다는 예외규정이 있다"라면서 "이 학생들은 자사고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에 일반고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라고 전했다. 2013년 폭력 행위 등으로 징계를 받은 학생의 비율도 경문고와 주변 일반고의 격차를 보여준다. 경문고에서 1년 동안 단 한 명의 학생도 징계를 받지 않은 동안, 신림고에서는 전체 학생의 22.9%인 222명이 징계를 받았다. 삼성고와 당곡고에서도 징계를 받은 학생의 비율이 각각 5%, 5.3%였다.
경문고, 4년 연속 정원 미달... "급여 못 받을까 걱정"
일반고를 딛고 올라선 경문고 역시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다. 매년 모집 정원 미달로 인해 재정 압박을 받고 있다. 경문고는 2009년 자사고 전환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그 방법은 재단의 돈이 아닌 학생의 학비를 통해서였다. 학생 1인당 한 학기 수업료·입학금·학교운영지원 회비(옛 육성회비) 등 납입금을 178만5900원에서 395만6000원으로 올리겠다고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경문고가 자사고로 전환한 첫해인 2011년 420명의 신입생을 모집하려고 했지만, 지원자 수는 모집정원을 밑돌았다. 경쟁률은 0.77 대 1이었다. 2012년 모집인원을 350명으로 줄였지만, 미달 사태를 피할 수 없었다. 2014년에는 신입생 모집정원의 74.9%만 채웠다. 그 사이 지원자가 적었던 동양고와 용문고는 일반고로 전환했다.
학교 재단(학교법인 경문학원)의 부담이 커졌다. 경문고가 2009년 자사고 신청서를 제출할 당시 연간 법인 전입금 예상액을 최대 4억5200만 원(2012년)으로 잡았다. 하지만 2013년 법인의 전입금은 11억3407만 원에 달했다.
경문고의 한 교사는 "학생들로부터 받는 돈이 부족하니, 재단에서 부족분의 상당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깨진 독에 물 붓기'를 할 수 있겠느냐"라면서 "2015학년도에도 신입생 모집이 어려워지면 급여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교사 대부분 일반고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조대형 경문고 교장은 지난 21일 오후 기자와 만나 "(학교 구성원 중에는) 개별적으로는 다른 생각(일반고 전환)을 가진 분도 있겠지만 다수는 (자사고) 유지를 원한다"라면서 "또한 재단 기본 자산이 튼튼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라고 밝혔다. 또한 "경문고 인근에 사는 학생이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야 하는 경우 불편할 수 있겠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싸구려 인간’을 일부러 키운다고? 시사인 722
교육은 시장과 달리 무한책임의 영역이다. 당장은 성과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주식회사가 되어버린 일본과 한국에서는 학교를 시장으로 여기는 풍토가 형성되고 있다. 우치다 다쓰루는 다시 배움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글처럼 말에서도 박력이 넘쳤다. 우치다 다쓰루(고베 여학원대학 명예교수)는 스스로를 무도인(武道人)이라 소개하곤 한다. 실제로 합기도 7단인 그는 2011년부터 자신의 집 1층을 ‘개풍관(凱風館)’으로 개조해 무도와 공부를 겸한 배움의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다.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부터 영화론·공부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를 대중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온 그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하류지향> <교사를 춤추게 하라> 같은 일련의 교육 관련 저서가 소개되면서다. 그가 책에서 묘사한 일본의 교육 현실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도 판박이로 재연되는 것을 보며, 그의 통찰에 관심을 보이는 이가 부쩍 늘었다. 이를 입증하듯 6월24일과 25일 흥덕고(경기도 용인)와 서울여성프라자(서울 대방동)에서 열린 그의 강연회는 만석 행진을 기록했다. ‘에듀니티’와 ‘참여소통교육모임’이 공동 초청해 이뤄진 강좌를 지상중계한다.
일찍이 본 적 없는 아이들의 출현:교육 관련 글을 쓰면서 내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일본 교육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렸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내 글이 관심을 끈다는 것은 뭔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일 터이다. 한·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이 그렇다. 급속한 글로벌화에 의해 교육 자체가 뒤틀어지는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듯하다.
ⓒ시사IN 조남진
<하류지향><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의 저자인 우치다 다쓰루(오른쪽)가 6월25일 서울여성프라자에서 한국 독자들을 상대로 강연하고 있다.
1980년대 들어 일본 교사들이 놀란 건 ‘일찍이 본 적 없는 아이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의 학력이 낮은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만족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뿐 아니다. 수업 중 실컷 떠들다 교사가 다가가 “왜 떠들지?” 하고 물으면 “안 떠들었는데요”라고 태연하게 답하는 아이들, 담배 피우다 눈앞에서 걸려도 “안 피웠는데요”라고 발뺌하는 아이들도 속출했다. 이런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출현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고민하던 내게 단서를 던져준 것이 스와 데쓰지 선생의 <왕자와 공주가 되어가는 아이들>이다. 이 책에서 스와 선생이 제시한 개념이 ‘등가교환(동일한 가치를 지닌 상품끼리의 교환)’이다. 곧 시장 논리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은 자신이 잘못한 행위와 교사가 내릴 처분을 등가로 만들고자 하며, 이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최대한 축소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내가 관찰한 것도 아이들이 일종의 소비자로서 학교를 대한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학교는 시장이고, 교사는 교육 서비스를 파는 사람이다. 소비자의 관심사는 가장 적은 단가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다. 학생들도 마찬가지. 이들이 지불해야 할 단가는 수업 시간 50분을 인내하며 앉아 있기, 교사에게 경의 표하기, 학교 규칙 지키기 등이다. 그렇다면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것(학점·졸업장)을 끌어내는 게 이들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소비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학교는 시장, 학생은 소비자:등가교환에 충실한 이런 아이들의 행위는 처음에는 학교 규칙을 무시하고 교사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 등 교실 붕괴 현상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접어들면 이것이 학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60점만 받으면 합격하는데 뭐하러 70~80점을 받으려 전심전력해야 해?’ 이런 소비자 마인드를 깊숙이 내면화한 결과 아이들이 배움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대학은 이를 더 부채질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 대학은 교양 과목을 없애고 1학년 때부터 전공만 공부하게끔 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에브리싱(everything)에 대해 섬싱(something)을 알고, 섬싱에 대해 에브리싱을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라는 합의가 있었던 과거와 달리 ‘당장 필요한 지식만을 최소의 비용으로 손에 넣는다’는 시장주의적 사고가 대학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시사IN 한·일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아이들은 배움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 결과는? 실패로 판명되고 있다. 전문가란 다른 분야 사람들과 어떻게 콜라보레이션(협력)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4년간 전공만 공부한 이들은 자기 분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뭘 공부하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가장 심각한 분야가 의학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환자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얘기하는 의사가 흔하다.
‘우리가 뭔가 방향을 잘못 설정했구나’ 하고 다들 느낄 때쯤 교육 행정은 더 나쁜 쪽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국립대 법인화 시도가 그것이다. 모든 대학에 교육 예산을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원칙은 이로써 무너졌다. 대신 외부의 선택, 특히 기업의 선택을 받은 대학만이 살아남는 구조가 됐다. 선택을 받지 못한 대학은 사실상 사라져도 좋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국립대의 주식회사화가 이뤄진 셈이다.
글로벌 인재라는 허상:대학이 주식회사처럼 된 것은 결국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라는 시장의 요구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글로벌 인재의 조건이 뭘까? 한 가지다. 기업의 수익을 올리는 거다. 그러려면 숙련되었으면서도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동성(모빌리티)이다. 글로벌 인재는 내일부터 외국 지점에서 근무하라면 오늘 당장 짐을 쌀 수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이런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족 사회나 지역사회 네트워크의 허브 구실을 하는 사람, “네가 없으면 곤란해” “네가 여기 있어주면 좋겠어”라고 주변 사람들이 붙드는 사람은 이런 명령에 쉽게 응할 수 없다. 결국 기업이 원하는 모빌리티가 뛰어난 인재는 주변과의 연결점이 없는 사람, 뿌리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일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 지금 일본에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라면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고 외국에 집과 친구가 있는 사람’ ‘1년에 절반 정도는 외국에서 체류하는 사람’ 등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일본 내 커뮤니티가 필요 없는 사람, 극단적으로는 당장 일본 열도가 붕괴하고 원전이 재폭발해도 도망가면 그뿐일 사람들이 지금 일본의 권력과 재력을 틀어쥐고 있는 셈이다.
이런 글로벌 인재 외에 일본이 새롭게 육성하고자 하는 계층이 있다고 나는 본다. 힘없고 학력도 낮고 자기평가도 낮은 계층이 그것이다. 이를 만들려니 모든 국민에게 교육 기회를 확대할 필요가 없다는 발상도 나온다. 왜? 글로벌 기업이 판단하기에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인건비가 비싸고 안전 기준이 까다로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데도 한계가 따른다. 중국이건 동남아건 갈수록 인건비가 오르고 있고, 그 나라 정치·사회 시스템에 맞추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느니 일본 내 인건비를 낮추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잘 믿기지 않으시나? 2012년 중의회 선거에서 하시모토 도루(오사카 시장)가 이끈 일본 유신회가 돌풍을 일으켰는데, 그때 하시모토가 내건 것이 최저임금제 철폐였다. 당시 오사카 최저시급이 800엔(약 8000원) 수준이었는데, 이걸 3분의 1로 줄이면 고용을 3배로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시급을 270엔으로 줄이면 하루 8시간씩 한 달 일해서 5만 엔(약 50만 원)가량을 번다는 얘기다. 그걸로 어떻게 결혼을 하고 애를 낳나. 그런데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은 이런 주장을 하는 정당에 일본 노동자와 샐러리맨들이 높은 지지를 보냈다는 거다.
주식회사가 되어가는 일본:결국 핵심은 일본 사회 전반이 주식회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앞장서 이끄는 이가 아베 신조 총리다. 그는 스스로를 주식회사 일본의 CEO라 여기는 듯하다. 그런데 주식회사는 민주주의와 관계가 멀다. 경영 방침을 정하거나 새 제품을 개발하는 데 종업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회사는 없다. 이사회 내용도 전부 공개하지 않는다. 경영에서는 모든 것을 톱다운 방식(top-down:위에서 의사 결정을 내린 다음 아래에 이를 지시하는 방식)으로 결정하며, 경영상 판단 기준은 오직 시장이다. CEO가 아무리 독재적인 판단을 내렸더라도 시장이 반응하면 오케이다. 시장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는 게 비즈니스맨의 신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식회사와 국민국가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각각 유한책임과 무한책임을 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주식회사는 실패할 경우 도산하면 끝이다. 그런데 국민국가는 정책에 실패할 경우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의 책임이 패전했다고 사라지나? 아니다. 식민 지배를 경험했던 분들이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일본은 과거를 책임지려 노력해야 한다. 국가는 무한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국가의 결정에 모든 구성원이 참여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다. 자칫하면 우리가 잘못 결정한 것에 대한 책임을 내 아들, 손자는 물론 증손자까지 져야 한다. 그런 만큼 우리가 민주적 절차를 거치는 것은 이 모든 책임을 나눠지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내가 자민당에 대해 화가 나는 건 정책 그 자체보다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태도 때문이다. 아베 신조가 늘 하는 말이 “내 정책에 반대하면 다음 선거에서 나를 떨어뜨리라”는 것이다. 이건 전형적인 주식회사 마인드다. 나는 아베가 일본을 정말 위험한 길, 망치는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본다.
다시 배움의 본질로:교육은 시장과 달리 무한책임의 영역이다. 학교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길러내는 곳이고, 그것이 교육 목표가 되어야 한다. 취업률·진학률처럼 당해 연도에 결정되는 것으로 교육의 성과를 잴 수는 없다.
스티브 잡스 자서전을 보면, 대학을 중퇴하고 미대 캘리그래피(서체학) 수업을 도강한 얘기가 나온다. 그로부터 10년 뒤 매킨토시를 만들면서 그는 PC에 캘리그래피를 응용한 폰트 개념을 최초로 도입해 선풍적 인기를 끈다. 잡스는 ‘그제야 10년 전 내가 왜 그 수업을 들었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배움이란 그런 것이다. 배우기 시작할 때 목적을 설정하면 안 된다. 대학에서 보면 “난 이런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학생일수록 그 연구를 끝까지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더라(웃음). 그보다는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이것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진짜 연구자가 되곤 한다.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잘 모를 때 오히려 성숙이 일어난다. 자기가 설정한 목표대로만 살아가서는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한참을 앞으로 가다 ‘아, 그땐 내가 참 유치했구나’ 하면서 출발점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 그러면서 자신이 놓인 상황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고쳐 쓰게 되는 것, 그것이 성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숙의 반대말은 미성숙이 아닌 트라우마다.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해도 과거의 자신에 사로잡혀 바뀌지 않는 게 트라우마 아닌가. 그러니 ‘난 ○○대학에 가서 △△기업에 취직한 다음 연봉 얼마를 받고 살아갈 거야’ 하는 식으로 인생 설계도를 만든 다음 그대로 살아가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트라우마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라 볼 수 있다(웃음). 교육은 미래를 내다보며 아이들의 성숙을 이끄는 일이다. 당장은 성과가 나지 않는다. 일본이 50년 뒤 민주주의가 잘 구현되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살만한 곳이 되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교육의 성과가 될 것이다.
박근혜 지지율]역대 대통령 최저 지지율은 07.22ㅣ주간경향 1085호
이명박·노무현·김대중·김영삼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은 주로 집권 4∼5년 차에 최저 지지율과 함께 레임덕이 시작됐다.
레임덕은 국가권력의 최고 정점인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집권세력 내부의 암투가 격화되는 등 권력 누수현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2008∼2013)은 2008년 2월 말 취임 이후 인수위 당시 한반도대운하 사업 등 졸속적인 정책의 남발과 ‘강부자’(강남에 사는 부자), ‘고소영’(고대·소망교회·영남 출신)으로 대표되는 국무위원 및 청와대 참모진의 인사난맥으로 취임 직후 20%대의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 따른 촛불시위가 확산되면서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2008년 1분기에 집권 5년 동안의 최저치인 21%를 기록했으며, 2분기에도 24%에 머물렀다.
이 대통령은 이후 친서민정책 등을 추진하면서 30∼40%의 지지율을 유지해오다 집권 마지막해인 5년차에 다시 20%대로 떨어졌다.(23∼25%) 집권 말기 친형 이상득 의원,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이 구속되면서 지지율은 급락했다.
노무현 대통령(2003∼2008)은 집권 첫 해부터 지지도가 순탄치 않았다. 대북송금특검 실시와 이라크 파병, 분양가 원가 공개 거부 등으로 지지세력이 이탈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3·4분기에 20%대(3분기 29%, 4분기 27%)의 지지율에 머물렀으며, 탄핵이 결정됐던 2003년 1분기에도 지지율이 25%에 그쳤다. 특히 집권 4년차인 2006년에는 부동산정책 실패와 지방선거에서의 대패로 레임덕이 가속화됐다. 이에 따라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에서 줄줄이 탈당하는 등 여권은 걷잡을 수 없이 분열됐다. 2006년 하반기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했으며, 4분기에는 12%로 지지율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명박 집권 초기 20%대에 머물러
김대중 대통령(1998∼2003)은 IMF체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며 집권 초기에는 50% 이상의 안정적인 지지율을 유지했다. 하지만 진승현·정현준·이용호 등 이른바 ‘3대 게이트’를 통해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으면서 지지율이 하락했다. 2001년 상반기에 20%대로 떨어지면서 임기를 20%대(2002년 2분기 26%, 3분기 28%, 4분기 24%)로 마쳤다. 김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화시킨 것은 2002년 차남 홍업씨와 3남 홍걸씨가 나란히 구속수사를 받은 것과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행으로 ‘신용카드 대란’이 일어났던 것이 결정타였다.
역사상 첫 문민정부를 연 김영삼 대통령(1993∼1998)은 1987년 체제 이후 역대 대통령 중 지지율이 가장 낮았던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 대통령은 집권 이후 금융실명제 실시와 함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시키는 등 역사바로세우기 정책으로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1996년 말 노동법 처리를 강행하면서 정권 내부에서조차 반발하는 등 레임덕이 시작됐다.
김 대통령의 지지율 급락은 아들 현철씨와 IMF 구제금융 신청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소통령’으로 불린 현철씨는 1997년 부도난 한보그룹의 특혜대출비리사건에 연루된 것이 확인돼 구속됐다. 또 1997년 말 IMF사태가 이어지면서 김 대통령은 남은 임기 1년 동안 사실상 ‘식물 대통령’으로 지냈다. 마지막 해인 1998년 1분기에 김 대통령의 지지율은 14%를 시작으로 2분기 7%, 3분기 8%, 4분기 6%로 지지율이 9개월 동안 한 자릿수에 머무르는 치욕을 겪었다. 지지율 6%는 역대 대통령 최저치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지지율 반등을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떨어진 지지율을 만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관리가 어려워서…' 조직폭력배는 노역도 면제! 722 노컷뉴스
범죄피해금액 100억 이상 수형자에게도 특별대우도
교도소 내부 모습 (사진=윤성호 기자)
법무부가 범죄피해금액이 100억원 이상으로 죄질이 중한 교도소 수형자에게 특별 대우를 하는가 하면 조직폭력배는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노역을 면제시켜 준 것으로 감사원 감사결과 드러났다. 감사원은 22일 '교정시설 운영 및 수용관리 실태' 감사결과를 공개하고 교정시설 수용 대상자 선정과 작업의무 수형자 관리가 부적절하게 이뤄졌다고 밝혔다. 감사원에 따르면 법무부는 재범위험성이 낮은 수형자를 한 곳에 모아 범죄의 악습감염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취지로 지난 2011년 2월부터 수형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영월교도소를 운영해왔다.
영월교도소에 수용된 수형자들은 수용자 자치토론회 개최와 동아리활동 보장, 개방접견, 일과종료 후 자율활동실시, 가족만남의 날 개최 및 가족만남의 집 운영 등 타 교도소에 비해 자율적인 환경하에 생활할 수 있다. 그런데 감사원 감사결과 영월교도소 수형자 291명 가운데 29명은 범죄피해금액이 100억원 이상으로 피해금액이 거액이거나 죄질이 중한 수형자지만 이곳에서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피해금액이 30억원 이상 100억원 미만은 43명, 10억원 이상 30억원 미만은 58명, 1억 이상 10억 미만은 110명으로 대부분 수형자의 범죄피해금액이 수억에서 수십억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이에따라 법무부장관에게 영월교도소의 설립취지에 맞게 재범가능성이 낮고 죄질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한 수형자를 위주로 수용하도록 수형자 이송기준을 개선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이와함께 징역형이 확정됐거나 벌금.과료를 완납하지 않아 노역장 유치 명령을 받은 수형자 가운데 40% 이상이 작업을 면제받고 있는 것으로 감사결과 드러났다. 감사원에 따르면 작업의무 수형자를 교정시설에 수용하면 노인수형자나 장애인 등 관계법령에서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작업을 부과해야 한다.
하지만 전국 50개 교정시설에 수용된 작업의무 수형자 31,776명 가운데 40.4%에 해당하는 12,829명은 작업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작업을 부과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한 결과 조직폭력사범 등 엄중관리대상자 1,846명은 계호가 어렵다는 이유로 작업을 면제시켜 온 것으로 드러났다.
또, 작업 수행 중 작업을 거부하면 징벌 등 불이익을 주는 반면, 당초부터 작업을 기피하면 징벌을 자제하거나 오히려 작업점수를 부여하는 등 작업거부자 1,853명에 대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실이 이번 감사에서 적발됐다. 그 결과 작업의무 수형자의 미작업비율이 2003년 33%에서 2013년 11월 현재 40.4%로 증가하고 있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이와함께 법무부는 수용자가 자비로 구입하는 물품 중 4개 품목을 교정시설에 독점공급하는 A협회로부터 최근 3년간 예산에 편성․집행해야 할 '교정의 날 행사' 경비 등 5억여 원을 지원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직원 자녀의 대학 입학 격려금' 등 복지 및 업무추진비성 경비로도 29억여 원을 지원받아 집행해왔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유병언 '수사'에서 '변사체 의심' 발견까지 722 노컷뉴스
검찰 수사를 피해 달아났던 유병언(73) 전 세모그룹 회장(청해진해운 회장)이 이미 지난달 변사체로 발견된 것으로 잠정 확인되면서 그동안의 도피 경로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씨는 일흔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두 달 넘게 신출귀몰한 도피 생활을 이어왔다. 유씨는 특히 검찰 추적팀 110, 경찰 추적팀 2500명의 상시적인 검거 활동을 피해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은 채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과 경찰은 5천명을 동원해 구원파 본산인 금수원을 압수수색 하는 등 대대적 검거활동을 벌여왔지만, 유씨의 행적은 지금까지 묘연했다.
유씨는 변사체 의심 인물로 발견됐지만 아직까지 경찰은 문제의 시신이 유병언씨라고 단언하지는 않는 상황이다. 경찰은 국과수를 통해 정밀감식에 들어갔다. 유병언씨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지난 4월 21일 인천지검이 특별수사팀을 구성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검찰은 수사 착수뒤 유병언 일가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유씨를 침몰한 세월호의 운영사인 청해진 해운의 실소유주로 규정했다. 이어 검찰은 장남 유대균씨와 유병언씨에 대한 소환을 통보했지만, 유씨 부자가 소환에 불응하자 지난 5월 18일 검거팀을 구성했다. 또 5월 22일에는 유효기간이 2개월인 유병언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았고 그로부터 사흘 뒤인 25일, 검찰 추적팀은 순천 송치재를 급습했으나 유씨를 검거하는데 실패했다.
이후 검찰은 군병력까지 동원해 해남과 목포 지역의 밀항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순천 일대를 중심으로 수색을 집중해왔다. 하지만 유씨는 검경수사팀을 농락하면서 검찰과 숨바꼭질을 벌여왔고 측근의 도움으로 생필품을 조달하는가 하면 신도들의 집을 옮겨 다녔다. 검찰은 구속영장 유효기간인 두달에 걸쳐 유씨 검거에 실패하자 21일 유효기한이 6개월인 2차 구속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았다. 검찰 고위관계자는 "유병언씨의 꼬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며 유씨 검거는 시간 문제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하지만 검찰은 유씨가 사망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의심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씨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나흘만이자 검찰이 유씨 일가 비리 수사에 착수한 지난 4월 20일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의 본산 금수원에서 빠져나갔다. 지난 1987년 발생했던 오대양사건에서도 배후인물로 지목됐다가 빠져나간 유병언씨의 도주극이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릴 지 국과수의 정밀검사를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법의학자가 보는 유병언 주검 미스터리 722 한겨레
① 뼈로 유전자 검사 하는데
“보통 2,3일” vs “40여일보다 더 걸릴수도”
② 2~3주 만에 반백골화
“1년 이상 야외에 있어야 가능” vs “두차례 큰 비에 무더운 날씨면 충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망과 관련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유 전 회장이 주검으로 확인되기까지 40일이라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 배경을 놓고도 뒷말이 무성하다. 경찰 추정대로 5월 말께 사망했다면, 6월12일 발견 시점까지 불과 2주 만에 백골화가 진행될 정도로 주검이 급속히 부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세월호’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22일 오전 전남 순천시 한 장례식장에서 나와 구급차량에 실리고 있다. 2014.7.22 / 순천=뉴시스
① 유전자 검사 왜 40여일이나 걸렸나?
순천경찰서는 22일 오전 열린 브리핑에서 “뼈로 유전자 검사를 하는 데는 통상 40여일 정도 걸린다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가 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반론이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검사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보통 2~3일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안다”며 “보통은 훼손이 심한 시신이라도 머리카락으로 유전자 검사를 하기 마련인데, 대퇴부 뼈로 조사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형석 전남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는 “40일보다 더 걸릴 수도 있고 덜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대퇴부는 뼈가 굉장히 두껍기 때문에 아주 작게 가루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혈액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유전자 검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다른 신체 조직이 아닌 대퇴부 뼈로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 것과 관련해서도 “머리카락은 두피가 없어져도 모근이 남아있어 유전자 검사에 활용할 수 있지만 다른 머리카락이 섞일 수 있어서 잘 쓰지 않는다”며 “현장이나 사진을 보지 않아서 주검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할 수 없지만 담당 부검의가 유전자 검사 결과를 얻는 데 가장 적절한 부위를 채취했을 것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② 2~3주 만에 반백골화 가능한가?
부패 정도로 미루어 본 사망 시점도 의혹 거리다. 경찰은 검찰이 전남 순천의 송치재 휴게소 인근 별장을 급습한 5월25일 이후 유 전 회장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패한 주검이 발견된 게 그로부터 2~3주 후인 6월12일이라는 점에서 의문을 낳고 있다. 보통 주검은 1년 이상 야외에 노출될 경우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는 반백골화가 진행된다고 보기때문이다. 경찰 내부에서도 “해당 주검은 사망한 지 6개월 이상 된 게 확실하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법의학자 등 전문가들은 2주 만에 부패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6월 초에 비가 20㎜ 이상 온 날이 두 번이나 있었다. 낮에는 굉장히 더운 날씨가 있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겨울옷을 입고 있었던 탓에 부패가 촉진되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김형석 교수는 “지난해 목욕탕에서 발견된 한 주검은 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피부조직이 모두 없어졌다”며 “온도, 습도, 환경, 사망한 사람 신체의 단백질과 지방의 양 등 부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부패의 정도를 공식화할 수가 없다”고 했다.
주검으로 발견된 유병언…풀리지 않은 ‘5대 미스터리’ 한겨레
세월호 침몰 사고 100일을 앞둔 22일 경찰이 지난 6월12일 순천 송치재 휴게소 인근 매실밭에서 발견된 주검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확실시된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유전자 검사와 지문 감식 결과를 토대로 경찰이 사실상 유 전 회장의 사망을 인정한 가운데 여론은 갑작스러운 경찰 발표에 여전히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수사기관이 앞으로 밝혀야 할 의혹을 정리했다
① 유병언 진짜 맞나? 우선 경찰은 유전자 검사 결과와 더불어 주변에서 발견된 구원파 계열사의 스쿠알렌 등 유류품 등의 정황을 근거로 발견된 주검이 유 전 회장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주검의 상태가 키가 작은 것으로 알려진 유 전 회장과 달리 키가 큰 사람의 것으로 보인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유 전 회장은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발견된 주검 주변에서는 막걸리 1병, 지금은 단종된 보해골드 소주 2병 등이 함께 발견됐다는 점도 의문이다
이태종 기독교복음침례회 평신도복음선교회 임시 대변인은 이날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주검이 발견된 시점이 6월 12일로 나오는데, 유 전 회장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신아무개씨가 체포된 게 5월25일이다. 이때까지는 유 전 회장이 적어도 살아있었다는 것인데 2주 만에 시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② 왜 죽었을까? 경찰은 22일 오전 브리핑에서 “칼자국이나 주변의 발자국 등 타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자살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는 “독극물에 대한 검사는 국과수의 2차 부검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도피 행각을 벌일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였던 유 전 회장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소장은 이날 ‘YTN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급하게 도주하는 과정에서 다른 건장한 조력자들은 도주를 하고 유병언은 오래 걷지 못하는 상태에서 밤을 지새웠다면 아마 저체온증 등의 자연적인 이유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했다.
③ 언제 죽었나? 현재 추정되는 유 전 회장의 사망 시점은 5월 말께다. 5월 24일 송치재 휴게소 인근 별장 ‘숲속의 추억’을 급습할 당시 검·경은 유 전 회장의 것으로 추정되는 체액을 발견한 바 있다. 현재로서는 당시 급습을 피해 도주하던 유 전 회장이 주검이 발견된 매실밭에서 변을 당했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사망 시점을 5월 말로 잡는다면 주검이 발견된 6월12일까지 대략 10여 일 가량 방치돼 있었던 셈인데, 짧은 기간 뼈를 드러낼 정도로 시신이 급속히 부패하는 냄새를 비롯해 주검을 발견할만한 상황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도 발견이 늦어진 이유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경찰은 이날 브리핑에서 “사망시점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국과수의 정밀 감식에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④ 경찰 수색 삼엄했던 송치재 주변에서 어떻게? 우형호 순천경찰서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그동안 8116명의 경찰인력을 동원해 도주로를 차단하고 순천의 주택가와 폐가, 창고, 구원파 소유 건물 등을 수색했다”고 밝혔다. 특히 송치재 휴게소는 검·경이 유 전 회장이 은신해 있을 것으로 보고 급습하기도 하는 등 수색을 집중했던 곳이다. 하지만 유 전 회장으로 추정되는 주검은 송치재 휴게소와 불과 2.5㎞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검·경의 수색망에 구멍이 뚫렸던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⑤ 왼손 지문 채취 실패했다더니 오른손에서 발견? 경찰이 주검을 발견한 직후부터 채취를 시도한 지문은 왼손이다. 경찰은 6월12일 주검을 발견한 뒤 왼손의 손가락 지문을 채취하려고 두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은 22일 “오른손 검지의 지문이 유 전 회장의 것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21일 경찰청이 주검의 유전자와 유 전 회장의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결과를 통보해 오자 부랴부랴 오른손 지문을 채취했다는 것이다. 부패 정도가 심해 두 차례 시도에도 발견되지 않던 지문이 오른손에는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인지하게 된 점도 납득되지 않는다. 더구나 훨씬 가능성이 큰 오른손 지문을 놔두고 왜 처음부터 왼손 지문을 채취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일 우익 대변’ 박유하 교수 책 우수도서 선정 경위 조사” 722한겨레
나랏돈 들여 일본 우익 논리 전파”…문체부, 비판 피하기 힘들 듯
문화체육관광부(장관직무대행 김종)는 일본 우익의 논리를 대변하는 책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일어일문학)의 저술이 우수도서 선정된 데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기로 했다.
문체부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2006년 박 교수가 출간한 책 ‘화해를 위해서’(뿌리와이파리)가 문체부 우수도서로 선정된 데 대해 △ 해당 도서의 문제점 △ 선정경위 등을 조사중이며, 문제가 확인되면 선정 취소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밝혔다. 박 교수의 ‘화해를 위해서’는 일본군 위안부와 야스쿠니 신사, 독도, 일본 우익교과서 등 한일 간 현안을 다뤘다. 한반도 식민지화와 제국주의 침략 전쟁과 관련해일본의 1차적 책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을 두둔하는 논리 전개와 독도를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제안하는 등 국민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적지 않다.
이 책의 일본어 번역본은 2007년 일본 아사히신문이 제정한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논단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다. 문체부는 해마다 주로 각 분야 학자나 중고교 교사 등을 위촉해 신간 우수도서 400여종 가량을 선정하고 있다. 우수도서로 선정된 책은 2006년 기준으로 권당 약 400만원의 예산 지원을 받아 공공도서관 등에 비치됐다. 박 교수 책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나올 경우, 정부가 국가예산을 들여 일본 우익의 논리를 전파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당시 우수도서 선정은 대학교수 8명과 고등학교 교사 1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 주관으로 이뤄졌다.
김일성, '가짜'도, '분단의 원흉'도 아니다 722 프레시안
[이재봉의 법정증언] 김일성의 실체, 역사적 사실로 바라봐야
이 글을 연재하면서 분에 넘치는 관심과 지지 그리고 격려를 많이 받고 있다. 한 변호사는 요즘 내 글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며 과장 섞인 서울 분위기를 전해준다. 70대의 국문학자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용기 있는 발언"이 감동적이란다. 미국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는 80대 진짜 노 교수는 "옷깃을 여미는 글,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는 글"이라며, 계속 진실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라 안팎에서 70~80대의 어르신들이 내 글에 감동하거나 긴장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진실'을 갈망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난 어릴 때부터 워낙 소심하게 자라온 겁쟁이라, 아직도 북한에 관해 어디서 누구에게 강의나 강연을 하든 붙잡혀 갈까봐 긴장을 떨치기 어렵다. 글을 쓸 때는 토씨 하나에까지 신경 쓰며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심정으로.
그러나 법정에서 판사들과 검사들 앞에서는 몹시 민감하고 위험한 주제라도 오히려 느긋하게 열강하게 된다. 증인 선서 덕분이다. 증언에 앞서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한다"는 내용의 선서를 하기 때문에. 거짓 증언으로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나 같은 겁쟁이가 남들보다 무슨 용기가 많겠는가. 판사가 양심에 따라 말하라는 선서를 시켜놓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처벌하지는 않을 테니, 맘 놓고 공부한 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법정 밖에서 말하거나 글 쓸 때는 국가보안법을 의식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지만, 법정 안에서는 판사들의 비호 아래 소신껏 진실을 밝힐 수 있는 특혜를 누리는 셈이랄까. 어느 변호사가 어느 법정으로 부르든 기꺼이 달려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지금까지 20년 정도 북한에 관해 공부하고 강의하면서 가장 강조해온 점은 '북한 바로 알기'다. 우리에게 북한은 오랫동안 극심한 편견과 왜곡의 대상이었기에. 그러나 남한에서 '북한 바로 알기'는 아직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북한의 훌륭한 점이나 긍정적 부분을 소개하면 '친북'이나 '종북'으로 매도되기 쉽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한이 아무리 좋고 잘났어도 나쁜 점이나 부정적 측면이 있듯, 북한이 아무리 나쁘고 못났어도 좋은 점이나 긍정적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말이다.
'북한 바로 알기'의 기본 또는 핵심은 김일성과 주체사상이라 생각한다. 북한은 김일성에 의해 세워지고 주체사상에 의해 유지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껴안아야 할 동포로 생각하든 쳐부숴야 할 적으로 간주하든, 평화 통일의 상대로 여기든 전복이나 타도의 대상으로 삼든,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편견과 왜곡 없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싸우더라도 상대를 먼저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김일성은 50대 이상의 세대엔 '가짜'로, 40대 이하의 세대엔 '분단의 원흉'으로 매도되고, 주체사상은 음흉한 대남 적화전략으로 오도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 1953년 7월28일 한국전쟁이 끝난 뒤, 전쟁승리를 경축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주석. ⓒ 연합뉴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김일성, '가짜' 아니다. 진짜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동생까지 독립운동하다 죽었다. 그처럼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목숨 내걸고 총칼로 일제에 맞서 싸운 조선 사람 얼마나 되겠는가. '분단의 원흉'도 아니다. 1945년 8월, 김일성이 조선 땅 밟기도 전에 조선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미국이 38선으로 국토를 갈랐으니 '분단의 원흉'은 미국이지 왜 김일성인가. '6·25 전쟁'을 통해 분단이 굳어지게 한 죄로 '전쟁의 원흉'이나 '분단의 종범'으로 불릴 수는 있어도 '분단의 주범'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1945년 미국에 의한 분단이 없었다면, 1950년 김일성에 의한 '6·25 남침'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김일성이 해방 이후 저지른 '악행'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6·25 전쟁'을 일으키고, '수령 독재'를 실시했으며, '권력 세습'을 이끌었다는 것. 그러나 해방 이전의 '선행'은 앞에서 얘기한 국가 정통성 경쟁 때문에 고의적으로 감춰지고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 박정희의 심복 또는 최측근으로 1960년대 6년간이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회고한대로, "해방 전에 25세 약관의 김일성이 항일 무장게릴라전을 지휘하였고 한때는 중국공산당 만주지역의 동북항일군 소속으로 압록강 및 두만강 연안에서 항일운동에 헌신했다"는 사실이 "친일을 했던 이승만 휘하의 대부분 관리들과, 친일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경력이 있는 박정희에게"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까지 감추어져 왔거나 왜곡된 '분단 이전의 김일성'을 소개한다. 김일성이 진짜 독립운동가였으니 그를 찬양하자는 것은 아니다. 해방 이전의 선행 때문에 분단 이후의 악행에 비판을 삼가자는 것도 아니다. 국가 정통성 경쟁 때문이었든, 반공정신을 드높이기 위해서였든, 터무니없이 심각하게 저질러진 '역사 왜곡'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교양이나 지식, 신념이나 가치관,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주변 환경이나 시대 변화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실 자체는 언제나 누구에게든 같아야 한다. '분단 이전의 김일성'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이유다.
해방 이전까지 김일성의 행적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지금의 평양인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주 (金成柱). 전주 김씨로, 이룰 성, 기둥 주, 아버지가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이란다.아버지 김형직은 1894년생으로 1917년 기독교 계통의 항일운동 조직인 '조선국민회'를 설립해 활동하다 감옥에 갇혔고 1918년 출옥한 뒤 '조국광복회'를 만들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1926년 죽었다. 어머니 강반석은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를 하다 1932년 만주에서 병사했다. 동생 김철주는 1930년대 초부터 항일빨치산에 투신해 1935년 옌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죽었고 삼촌 김형권 역시 1930년대 초부터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6년 죽었다.
김성주는 1926년 아버지의 유언과 아버지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 간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만주에 세운 2년제 정치군사학교"인 화성의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고 1927년 길림 육문중학으로 전학해 반일운동에 참여하다 1929년 일제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1930년 감옥에서 나와 중국공산당과 연계하며 국제공산당과 공조할 필요성을 느껴 만주에서 '조선공산당' 을 세우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조선혁명군'을 조직했다.
그의 말대로 "독립군 출신의 몇몇 동무들과 화성의숙을 다닌 얼마간의 동무들이 있고 몇 자루의 권총이 있을 뿐"인데다, "조선부락에나 숨어있을 뿐 다른 데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밤에만 몇 사람씩 비밀리에 나다니는 형편이었다"고 하니, 이름만 거창하게 '혁명군'이지 기껏해야 수십 명의 '비밀유격대'였을 것이다.
이 무렵 그의 이름이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 바뀌었다. 북한 자료들에 따르면, 그가 '조선혁명군'을 만들 때 동지들이 그에게 별과 같은 지도자가 되라고 '한별 장군'이란 별명을 지어주었단다. '한별'을 한자로 한 일(一), 별 성(星)으로 바꾸어 김일성(金一星)이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이왕이면 별보다는 태양 같은 지도자가 되라는 취지에서 날 일(日), 이룰 성(成)으로 다시 고쳐 김일성 (金日成)이 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에 대해 외부에서는 엇갈린 추정이나 해석을 내놓고 있으니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첫째, 개명 시기에 관해 남한 정보부는 김성주가 1930년 김일성(金一星)으로 바꾸고 1935년 김일성(金日成)으로 고쳤다고 추정한다. 둘째, 개명 이유에 관해 일본의 북한연구 전문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는 그 무렵 항일투쟁을 전개하면 일제가 가족들까지 괴롭히기 마련이었을 테니 이를 염려하여 사려 깊게 가명을 썼으리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간도지역에 떠돌던 '김일성'이라는 '전설적 영웅'의 이름을 빌린 것은 게릴라투쟁의 지도자로서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김일성은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뒤부터 중국공산당 조직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조직은 한 나라에 하나밖에 둘 수 없다는 국제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중국 안에서 '조선공산당'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하부 조직으로 참여했다는 말이다.
1932년 4월 25일에는 비밀유격대같은 '조선혁명군'을 바탕으로 100여 명 규모의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를 만들어 대장이 되었으니, 이때부터 그의 항일무장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북한에서는 이를 '반일 인민유격대'라고 부르는데, 이게 바로 지금 조선인민군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북한에서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해 이 날을 창군기념일로 삼아오다, 1978년부터 4월 25일로 창군기념일을 바꾼 배경이다. 1934년엔 '반일 인민유격대'를 '조선 인민혁명군'으로 바꿨다는데 이게 흔히 '동북항일련군 조선인부대'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주로 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여왔는데, 1936년엔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백두산 곳곳에 밀영을 만들어 조선 안에도 들어와 빨치산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전개한 투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37년 보천보전투다. 이는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가 함경북도 갑산군 보천보의 일제 관공서를 습격하고 잠시 점령한 사건이다.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을 뿌린 뒤 김일성이 주민들에게 연설한 뒤 만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전투라고 할 것도 없이 순식간의 습격이었고 군사적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도 아니지만, 그 무렵 우리 민족에게 사기를 높이면서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사건으로 평가받는 듯하다. 일제가 전쟁 준비에 광분해 조선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탄압하는 가운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나 탄압 또는 회유에 의해 전향함으로써 광복에 대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만들어 김일성을 비롯한 '공비'들이 보천보에서 살인, 방화, 약탈 등을 저질렀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김구는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고, 여운형은 주위 사람들을 불러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 날 보천보 현장으로 직접 달려가 일제의 패배를 확인한 뒤 김일성을 만나려 했다고 한다. 25살 청년 김일성이 "식민지 조선의 영웅"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전투였던 것이다.
이 보천보전투를 계기로 일제는 김일성을 더욱 추적하면서 국내에 잠입해있던 그의 조직을 검거하는 한편 만주지역의 항일유격대를 뿌리 뽑기 위해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했다. 이에 김일성부대는 조선과 만주를 넘나들며 빨치산투쟁을 벌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침략과 약탈이 극도로 심해지자 1940년 말 소련 연해주지역으로 물러가게 되었다. "대부대 활동으로부터 소부대 활동으로 넘어가기 위한 새로운 전략적 방침"을 세우고 소련으로 옮긴 것이다.
그 후 1942년까지 소규모 유격대를 이끌고 소련 연해주, 중국 만주, 조선 백두산 등을 오가며 간헐적으로 투쟁했다고 한다. 그리고 1942년 7월 "쏘련,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조선혁명의 주체적 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해 나가면서 국제 반제 력량과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격멸과 제 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기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확인하고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남한 정보부와 일부 북한전문가들은 김일성부대가 1940년 소련으로 후퇴한 뒤 1945년 평양에 들어올 때까지 항일무장투쟁은 없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 오른쪽 언덕 위의 조형물이 보천보전투 기념탑이다. 북한은 김일성 부대의 항일 보천보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67년 6월 혜산에 이 기념탑을 세웠다. ⓒ황재옥
이렇듯 해방 이전 "식민지 조선의 영웅"이었던 김일성이 분단 이후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노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시며,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로 살다 죽었다. 거의 신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남한에서 김일성이 가짜였던 이유
남한에서는 당연히 정반대였다. 첫째,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었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70년 김 모 씨는 자신의 집을 무너뜨리는 철거반원들에게 화가 나서 "김일성이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울부짖다 구속되었다. 김일성이 철거반원들보다 덜 나쁘다고 말한 셈이 되어 '이적 행위'로 1심과 2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둘째, '때려잡아야 할 놈'이었다. 전두환 정부 때인 1980년, 여고 1년생이던 조카가 "혹보 영감 가짜 김일성 때려잡자"는 주제로 웅변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 원고는 내가 썼음을 고백한다. 대학 2학년 때였다.
셋째, '고이 죽어서는 안 될 놈'이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자 KBS TV 뉴스 진행자는 "우리가 처단하지 못하고 그냥 죽게 해서 원통하다"고 아쉬워했다. '분단의 원흉'이요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라면서.
위에 든 사례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김일성을 아무리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악의적으로 평가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특히 끔찍한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로서는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에 대해 무슨 말인들 못 하고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그러나 그 인식이나 평가가 '가짜'나 '분단의 원흉' 같은 잘못된 세뇌 교육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김일성이 남한에서 '가짜'가 되었던 데는 크게 두 가지 구실이 있었다. 첫째, 이름 때문이었다. 아직도 "소련군 대위 김성주가 1945년 평양에 들어와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 게시판을 도배하고 있으니 과거엔 오죽했겠는가.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바뀐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그의 이름이 1945년에 바뀐 게 아니라는 점만 강조한다. 1930년대 항일 유격대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김일성 장군'이었지, 1945년 평양에 들어와 갑자기 '김일성 장군'이 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 나이 때문이었다. '장군' 치고는 좀 어렸기 때문이다. 1945년 10월 평양에서 '조선 해방 축하 겸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열렸을 때, 백발이 휘날리는 사람이 아니라 30대 젊은이가 연단에 오르자 너무 젊다며 '가짜'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러나 그건 잘못이다. 겨울이면 흔히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만주와 백두산 일대에서 20, 30대의 젊은이들이 아니고 40, 50대의 장년들이나 노인들이 눈 쌓인 산야에서 풍찬노숙하며 빨치산 투쟁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참고로, 요즘 남한 군대에서는 나이 50 안팎에 별을 달게 되겠지만, 1950년엔 정일권이 33살의 나이로 3군총사령관 겸 참모총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대 한 국가의 몇십만 군대를 지휘했던 30대 초반의 대장에 비하면, 1930년대 수백 명 규모의 유격대를 이끌었던 20대 중반의 대장은 전혀 어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김일성의 나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목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스무 살의 김일성이 '장군' 노릇을 할 때부터 6살 위의 친삼촌 김형권이 부하대원이었다. 유격대원들 가운데 김일성보다 나이를 더 먹은 사람들이 많았다는데도 그가 항상 지도자 역할을 했다. 특히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김책은 김일성보다 많이 배웠고 9살이나 많았지만 김일성을 깍듯이 상관으로 받들었다는 일화가 널리 퍼져있다. 나아가 분단 이후 정부를 수립할 때도 30대 중반의 김일성이 수상을 맡을 때 그 보다 나이와 배움이 훨씬 많은 지도자들이 부수상을 맡았다. 경성파 지도자 박헌영은 12살, 옌안파 지도자 김두봉은 22살, 소련파 지도자 허가이는 8살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3대 천재'요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한 홍명희는 지금의 연세대학인 연희전문 교수 출신으로 24살이나 많았는데 중학교 중퇴 학력의 김일성 아래서 부수상을 지낸 것을 보면, 그의 지도력이 꽤 뛰어났던 것 같다.
그런데 김일성이 가짜로 매도되기 시작할 때부터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결정적 인물들이 남한에도 있었다. 두 집안사람들만 소개한다.
최동오-최덕신 집안과 손정도-손원일 집안.
최동오는 1926년 김일성이 만주 화성의숙에 입학했을 때 그 학교장이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친구로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2년간 감옥살이를 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기도 했던 독립운동가다. 해방 후엔 서울에서 좌우 합작 운동을 벌이다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여 화성의숙 제자였던 김일성을 만났다. 그의 아들 최덕신은 1930년대 만주에서 중국군장교로 항일전에 참가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냈는데, 6·25 전쟁 중엔 남한군 사단장으로 북한 인민군과 싸웠고, 휴전회담 때는 남한군 대표를 맡았으며, 군단장을 지내다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56년부터 베트남대사, 외무부장관, 서독주재 대사로 일하다 1967년 천도교 교령 자리에 올라 한국종교협의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몇 차례 북한을 방문한 뒤 1986년부터 평양에 정착했다.
손정도는 1929년 김일성이 일제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옥바라지하며 석방에 큰 힘을 쏟았고 그 뒤에도 꾸준히 그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던 목사다. 그 역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친구로,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기도 했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손원일은 남한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뒤 1950년대에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분단 이전 2대에 걸쳐 우정을 나눈 김일성의 친구들이 해방 이후 남한의 육군과 해군을 이끌었던 셈이다.
남한 권력자, 김일성 실체 정말 몰랐을까?
남한 권력자들이 김일성의 과거를 진짜 몰랐던 것은 아니다. 특히 정보부처에서는 잘 알고 있었다. 반공을 통한 통치의 효율성을 꾀하기 위해 김일성이 '가짜'라고 국민을 세뇌시켰을 뿐이다.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했던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와 김일성을 존경하기까지 했던 전두환의 안전기획부를 소개한다. 앞에서 잠시 소개했듯, 1960년대 중앙정보부를 6년간이나 이끌었던 김형욱은 1983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김일성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전직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이런 발언을 한다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당장은 충격파를 가져올 수 있으나 장구한 민족사의 체계로 보아서는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면 해방 전에 25세 약관의 김일성이 항일 무장게릴라전을 지휘하였고 한때는 중국공산당 만주지역의 동북항일군 소속으로 압록강 및 두만강연안에서 항일운동에 헌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였으나 그가 함남의 길주, 명천 등지의 남삼군에 상당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김일성은 완전한 '가짜'라는 대목이 이승만 정권 이래 한국의 반공전선 교육의 가운데 토막이 돼오고 있었다. 이것은 공화당 정권에 들어서서 더욱 강화되었다. 아마도 친일을 했던 이승만 휘하의 대부분 관리들과, 친일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경력이 있는 박정희에게는 김일성의 그만한 경력도 묵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재직 중에 김일성의 경력을 인정해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식의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반공교육 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김일성이가 완전 '가짜'가 아니고 사실은 '진짜'라고 교정하는데 있어서는 중앙정보부장인 나도 겁을 먹고 조심을 해야 할 만큼 한국의 반공문화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국에서 용공이란 딱지는 천형만큼 잔인한 저주였다."
1980년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안전기획부장을 맡고 있던 장세동은 1985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친서를 지니고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동안 일제하의 항일투쟁을 비롯하여 40년간 김 주석께서 북녘 땅을 이끌어 오시고 그동안 평양의 우뚝 솟은 의지를 보고 이러한 발전을 위하여 심려해 오신 점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다시 드립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비록 체제와 이념은 다르지만 주석님의 조국애와 민족애를 높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장이 한참 뒤에 회고록을 통해 김일성이 진짜라는 사실을 고백했다면, 전두환 정부의 안전기획부장은 현직으로 김일성의 면전에서 그의 항일투쟁에 대해 단순하게 인정한 것을 넘어 존경과 감사까지 드린 것이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2명이 함께 있었는데 박철언과 강재섭이다. 박철언은 1970년대 흔히 공안검사로 불리는 특수부장검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세 번 하고 장관을 두 번 지내는 등 노태우 정부의 '황태자'로 불렸던 사람이고, 강재섭 역시 1970년대 검사 출신으로 2008년까지 국회의원을 다섯 번 하는 동안 한나라당 부총재, 원내대표, 대표최고위원, 대표 등을 맡았던 사람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엔 안전기획부 산하기관이었던 북한 전문 통신사 <내외통신>이 <북한 조감>이라는 책을 펴내며 다음과 같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1930년 김성주 (金成柱)를 김일성 (金日星)으로 개명, 1931년 중국공산당 입당, 1932년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년 김일성 (金日成)으로 재개명, 1936년 조국광복회 조직, 1937년 함경남도 보천보 및 증평리 습격 ....."
참고로, <내외통신>은 1999년 <연합뉴스>에 합병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북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정리하여 남한 언론에 전달하는 일을 해왔다. 당시엔 개별 언론사가 북한에 관해 독자적으로 취재하지 못하고 이곳을 통해 정보를 전달받는 식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접했던 북한에 관한 소식은 거의 모두 <내외통신>을 거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써진 조그만 쪽지가 끼워져 있다. "알림: 북한 주요인물 30인 약력 가운데 항일투쟁 활동 등 일부 내용은 북한 측 주장임."
이 쪽지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가 얼마나 무능했거나 횡포를 일삼았는지 짐작게 한다. 첫째, 막대한 국가 예산을 쓰면서 북한에 관한 정보를 독점해온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가 북한을 반세기 동안이나 통치해온 김일성의 과거 행적을 독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북한 측 주장"을 그대로 옮기기만 했다면, 1960년대 초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30여 년이 지나도록 무슨 일을 했기에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확인하지 못했을까. 둘째, 일반인들은 물론 북한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도 사실로 확인된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소개하거나 알려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기 쉬웠는데, 안전기획부는 "북한 측 주장"을 그대로 널리 공표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내외통신>이 안전기획부의 무능이나 횡포를 드러내면서까지 그 궁색한 내용의 쪽지를 끼워 놓은 까닭이 있다. 안전기획부의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뛰어넘는 보수 언론의 억지와 압력 때문이었다. 1990년대 초 냉전이 끝나고 1991년 북한과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안전기획부와 그 산하기관인 <내외통신>이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밝히고자 했는데, <북한조감>을 미리 받아 본 극우 신문에서 거세게 항의를 했단다. 당시까지 약 50년 동안 모든 국민이 교육과 언론을 통해 김일성이 '가짜'라고 배우고 들어왔는데, 이제 안전기획부와 <내외통신>마저 김일성이 진짜라고 공개하면 여태껏 '김일성 가짜설'을 퍼뜨려온 언론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진실이 밝혀지면 과거의 왜곡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게 아니라, 이처럼 끝까지 진실을 가리려고 억지를 부리는 게 남한 극우 언론의 참모습이랄까. 분단과 전쟁을 핑계로 반공을 앞세워 편견과 왜곡을 일삼았던 교육과 언론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세뇌되어온 것이다. 1994년 이른바 '문민시대'에 그러했을진대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가짜 김일성'의 사례들을 통해 역사 왜곡이 왜 빚어지고 어떻게 유지되며 왜 바로 잡혀지지 않은지 살펴보았는데, 더 이상 역사 왜곡이라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북한이 괴뢰? 국가 정통성 제대로 따져봐야
[이재봉의 법정증언] 북한, 남한 못지않은 국가 정통성 있다
법정에서 증언할 때마다 변호사로부터 가장 많이 또는 먼저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북한이라는 나라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북한이 '단체'인지 '국가'인지.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국가'가 아닌 '단체'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도 남한 못지않은 정통성을 지닌 국가"라는 게 내 답변이다. 더 솔직하게 표현해, 국가 정통성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이냐에 따라, "북한은 남한보다 더 큰 정통성을 가진 국가"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1991년 개정된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다.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는 것이다. 여기엔 북한이 국제 사회에서 정부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주제에 분에 넘치게 스스로를 정부나 국가로 부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북한은 남한이라는 '국가'를 뒤집어엎으려는 목적을 가진 불순한 '단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변란'이란 "큰 재앙이나 사고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일"이란 뜻이기에, "국가를 변란할"이라는 문구가 어색하다. 명사를 동사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이미 폐지되었어야 할 악법이라고 생각해온 터에, 일부 문구가 어법에 어긋난다고 시비 거는 짓이 오히려 그 악법을 인정하는 셈이지만.
앞에서 "북한도 남한 못지않은 정통성을 지닌 국가" 또는 "북한은 남한보다 더 큰 정통성을 가진 국가"라고 했는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몹시 민감하고 정말 위험한 표현이다. 내 답변 자체가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지 모른다. 북한을 "찬양·고무·선전"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테니까. 따라서 국가의 정통성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TV가 지난 2005년 5월31일 시리즈 다큐멘터리 '조국광복을 위하여'를 방영했다. 사진은 다큐멘터리 중 해방직후 만경대 고향집으로 돌아온 김일성(가운데)의 청년시절 모습. ⓒ조선중앙TV=연합뉴스
'국가의 정통성'이란 국민 또는 인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과 합법성이다. 이를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다음과 같이 대략 다섯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 국가를 세운 지도자들의 자질과 경력, (2) 국가가 지향하거나 추구하려는 사상이나 체제, (3) 이전 국가와의 연속성, (4) 정부 수립 과정, (5) 국제 사회의 승인. 차례대로 한 가지씩 짚어본다.
첫째, 북한 건국 지도자들이 이전에 무슨 일을 했던 사람들인가? 대부분 공산주의자들로 1920~30년대 나라 안팎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크게 네 계파로 나뉜다. 첫째, 지금의 서울인 경성에서 조선공산당을 이끌며 항일 운동을 펼친 '경성파' 또는 '남노당파'로 대표적 인물은 박헌영이다. 둘째, 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던 '만주파' 또는 '빨치산파'로 김일성이 주도적 인물이다. 셋째,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옌안 (延安) 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벌이던 '옌안파'로 대표적 인물은 한글학자 김두봉이다. 넷째,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며 소련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소련파'로 허가이가 주도적 인물이다.
이들 대부분은 1920~30년대부터 국내외에서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해방 투쟁을 전개했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이러한 활동과 경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정당하게 뛰어들었다. 남쪽에서는 미군정이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고 탄압했기 때문에 북쪽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 북한의 건국 지도자들은 대부분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던 사람들이란 뜻이다.
둘째, 북한이 지향하거나 추구하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1948년 9월 정부 수립 당시 인민의 신뢰와 지지를 얼마나 받았을까?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남한에서는 1950년 '6·25동란'을 거치면서 '빨갱이'들의 잔인한 폭력을 직접 겪거나 보고 느꼈다며 '공산당'에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한국전쟁 이후 '반공'을 '국시(國是)' 즉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정하면서, 전후 세대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거나 알지도 못한 채 공산주의에 치를 떨게 되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엔, 특히 1948년 남북한 정부 수립 전후로, 한반도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인민들 대부분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길 원했다. 1910년 8월 나라를 잃고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35년간 가혹한 일본 식민통치를 겪으면서 제국주의에 맞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호감을 갖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친일파나 지주 또는 자본가들을 빼고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데 반대하는 민중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일제 하에서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공장 노동자 또는 소작농들이었으니까.
그러기에 '조선공산당'이 1925년 서울에 세워지고,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1935년 폐쇄되지만, 당시 글줄이나 읽으면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 지식인이 아니라는 말이 나돌았던 것이다. 심지어 해방 이후 1946-47년 남쪽에서 공산주의를 탄압하며 자본주의를 앞세운 미 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조차 인민들의 70~80%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길 원했다.
1980년대 말부터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체제 경쟁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남한이 미국으로부터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게 '축복'이라는 말도 들린다. 물론 이 글을 쓰는 2014년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자본주의를 지향하며 세계 15위 안팎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남한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빌어먹고 굶어 죽을' 정도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 사이에 정통성을 따지는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1948년 8~9월 남북한 정부가 세워질 때, 국가 이념이나 정부 체제와 관련해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지본주의보다 인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훨씬 더 많이 받았다는 점을 거듭 밝힌다.
셋째, 북한이 이전 국가인 조선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가? 조선을 계승하지 않았기에 이전 국가와의 연속성이 없다.
남북한이 수립된 1948년 이전의 국가로는 1897년 세워진 대한제국을 들 수 있는데, 이는 1392년 들어선 조선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조선이든 대한제국이든 1905년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 주권을 빼앗기는 등 망해버렸기에 이 국가들은 바로 계승될 수 없었다. 참고로, 남한은 헌법 전문에 1919년 3·1운동 이후 건립된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혀 비록 '망명' 정부지만 이전 국가와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북한은 헌법 서문에 김일성이 북한의 '창건자'이자 '시조'라고 명시함으로써 이전 국가와의 연속성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넷째, 북한 정부가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적으로 세워졌는가? 인민들의 선거로 남한의 국회에 해당되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해, 여기서 헌법을 채택하고 정부 정책을 결정했다. 남쪽에서 1948년 5월 총선거가 실시되고 8월 정부를 수립하자, 북쪽에서는 8월 총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방식은 비밀 투표가 아닌 이른바 '흑백 찬반 투표'였다. 많은 인민들이 글을 읽을 줄 몰라 흑백 투표함을 이용했다고 하지만, 민주적 선거의 기본인 비밀 투표에 분명히 어긋난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에 해당되는 대의원 572명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314명이 노동자와 농민이었다니 최고인민회의가 인민의 대표성은 제대로 지녔던 셈이다.
다섯째, 주변 국가들을 포함한 국제 사회가 북한을 지지하거나 승인했는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지지하고 승인했다. 북한이 1948년 9월 수립되자, 한 달 뒤 소련이 가장 먼저 승인하고, 11월엔 몽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이 승인했다. 이에 북한은 "공화국 정부의 합법성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며 공화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담보"라고 주장하며 국제 사회에 등장했다. 그리고 1949년엔 알바니아, 중국, 동독 등과 국교를 맺었다.
위와 같은 국가 정통성의 요인들 가운데, 북한은 건국 지도자들의 자질과 경력을 가장 중시한다. 그들 대부분 해방 이전에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남한 건국 지도자들 가운데는 식민 통치 아래서 독립운동은커녕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과 비교하기 위한 속셈일 것이다. 한편, 남한은 국가 정통성으로 국제 사회의 승인을 가장 강조한다. 앞에서 얘기했듯, 북한은 1948년 11월까지 기껏해야 7개 사회주의 국가들의 승인을 받았지만, 남한은 1948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미국을 비롯한 48개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국가 정통성 요인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북한도 남한 못지않은 정통성을 지녔거나 오히려 남한보다 더 큰 정통성을 가진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정부를 참칭해온 단체가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한편,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북한을 국가로서의 정통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주성도 없는 단체로 간주해왔다. '북한 괴뢰' 또는 '북괴'라고 불러온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북한은 남한을 '남조선 괴뢰'라고 불러왔다. 남한은 북한이 대한민국의 북쪽 지역을 불법으로 점령하여 소련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는 꼭두각시라 비난하고, 북한은 남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을 불법으로 차지하여 미국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앞잡이라고 헐뜯은 것이다.
그런데 남한이 북한을 어떻게 비하하거나 비난하더라도 자주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 군정에 의존해 수립된 남한 정부가 미국에 대해 지녀온 자주성과 소련군부의 도움으로 세워진 북한 정부가 소련에 대해 지켜온 자주성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남한은 일본과 아울러 "미국의 51번째 주"와 다름없다는 국제 사회의 비웃음도 나오는 터다.
북한과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대치하고 있기에 '주적'으로 삼고 '적국'으로 부를 수 있다. 북한이 빌어먹고 굶어죽으면서도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으니 '거지 국가'나 '깡패 국가'로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 외교적으로 미국에 종속적이다시피 의존적인 남한이 군사적으로든 외교적으로든 자주성만큼은 어느 나라보다 강한 북한을 '괴뢰'라고 욕하는 것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과잉 공급에 빠진 대한민국] (3) 엄습하는 디플레이션 공포
저물가… 저성장… 저투자… 우리도 20년 잃어버리나723 국민
수년째 저성장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물가마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공급이 수요를 압도하는 ‘공급 과잉’ 상태가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일본의 20년을 빼앗아갔던 디플레이션 공포가 엄습해오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물가는 공급과 관련이 깊다. 공급이 넘쳐나면 수요가 이를 따라오지 못한다. 기업이 제품을 생산해도 재고가 쌓이게 된다. 물건을 팔기 위해 가격을 낮추면서 저물가 현상이 발생한다. 기업 이윤은 줄어든다. 이는 고용 감소로 이어진다. 구매력을 상실한 가계는 다시 소비를 줄이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현재 한국 경제는 물가가 오르긴 하되 물가 목표에 못 미치는 저물가 현상이 지속되는 단계다. 물가상승률 둔화가 지속되면 미래의 상품·서비스 가격이 더욱 낮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진다. 이 때문에 가계는 소비를 미루게 되고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연기하는 ‘디플레의 함정’에 빠져 경제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한국 경제는 내수침체로 경기 회복세가 둔화되고 있다. 한국은행과 국내 경제연구기관들은 최근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잇달아 하향조정했다. 이 와중에 물가 오름세마저 변변찮은 것이다. 한은은 올 하반기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당초 2.1%보다 0.2% 포인트 낮은 1.9%로 낮춰 잡았다. 물가안정 중기 목표인 2.5∼3.5%의 하한선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2일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단순한 경기 순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라고 진단했다.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의 덫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경기 침체와 물가 하락이 겹치는 현상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디플레이션을 ‘오거(Ogre·사람을 잡아먹는 도깨비)’에 비유하기도 했다.
디플레이션은 고령화와도 맞닿아 있다.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줄어들면 경제성장률도 하락한다. 통상 생산가능인구 하락은 ‘소비 축소→내수시장 후퇴→설비투자 감소→고용 감소→성장률 둔화→물가 하락’이라는 악순환 고리를 만든다. 일본은 고령화로 인한 디플레이션의 극단적인 예를 보여줬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생산가능인구는 2010년 100을 기준으로 2040년에는 80.2 수준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우리나라 생산가능인구는 2016년부터 꺾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일본을 답습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한꺼번에 노동시장에 쏟아져 나오면서 ‘공급 과잉’ 현상이 심화되기도 했다. 특히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대거 생겨나면서 박리다매식 출혈 경쟁을 부추겼다.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급을 줄이거나 소비를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공급 과잉 업종인 자영업의 무분별한 경쟁을 막기 위해 창업을 준비 중인 이들에게 컨설팅을 제공하려는 것이 대표적이다.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늘려 소비를 활성화시키려는 방안도 예고했다. 기업 투자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과감한 규제 개혁과 인센티브도 마련할 방침이다. 중국이 디플레이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추진했던 정책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률이 하락하자 철강·조선 업종 등에서 과잉 생산시설에 대한 퇴출 작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우투 100세시대연구소 “60대에게 필요한 월 생활비는 285만원”724 파이낸셜
'경계세대'인 60대에게 필요한 월 생활비는 285만원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우리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24일 '경계세대의 3대 부작용과 생활유지 은퇴비용'이란 보고서를 통해 '경계세대'를 정의하고 그 의미를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60대는 은퇴와 노화 등으로 사회·신체·정신적 측면 등에서 급격한 변화가 발생하며 이로 인해 50대와 경계를 이루게 돼 이전의 삶을 최대한 같은 수준에서 유지함으로써 각종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재무적 준비가 필요하다.
이에 필요한 월 생활비는 285만원으로 추산됐다. 285만원은 은퇴 직전인 50대 가계의 평균적인 생활비(354만원)를 기준으로 삼아 각종 감소요인과 증가요인을 고려해서 추산된 것이라고 보고서는 밝혔다.
또 다른 보고서 '30대의 은퇴성향과 100세시대 금융서비스'를 통해서는 떠오르는 세대인 30대를 분석하고, 30대의 니즈에 부합하는 100세시대 금융서비스에 대해 제안했다.
보고서는 "30대는 20대에 비해 안정된 급여생활을 하고 있고, 40대와 비교해 교육비, 양육비 등의 지출부담이 낮은 세대로 당장의 투자여력은 낮지만 다각도의 성향 조사결과 타 연령대 대비 투자 잠재력이 높은 세대"라고 분석했다. 이에 보고서는 30대의 자산축적을 도울 수 있도록, 저렴한 수수료, 목적별 자금운영에 도움이 되는 고객 맞춤형 상품 및 서비스 개발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 지분 10% 초과기업 34곳…대림산업 '톱' 724CEO스코어데일리
작년말 대비 9곳↑…LG그룹 4개사, 삼성·롯데 3개사 순
국민연금공단이 지분 10% 이상을 투자한 500대 기업 상장사가 34곳으로 조사됐다. 이는 지난해 말 24곳에서 9곳이 늘어난 것이다.
기업별로는 대림산업이 14%대 지분율로 가장 높고, CJ제일제당(대표 김철하)·삼성물산(대표 최치훈)·한솔제지(대표 이상훈)도 13%대의 높은 투자 지분율을 기록했다.
그룹별로는 LG 계열사가 4곳(11.8%)으로 가장 많고, 삼성과 롯데 계열사가 각각 3곳(8.8%)으로 그 뒤를 이었다.
24일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대표 박주근)가 국내 500대 기업 내 상장사 261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 투자한 기업은 143곳이었고, 이중 10% 이상 투자 기업은 34곳(23.8%)이었다.10% 이상 투자 기업은 지난해 말 25곳에서 올해 34곳으로 9개 사(36%)가 늘었다. 이지바이오(대표 지원철), SK케미칼(대표 최창원), LS산전(대표 구자균), LG전자(대표 구본준), 국도화학(대표 이삼열), 롯데하이마트(대표 한병희), 현대그린푸드(대표 정지선), 크라운제과(대표 장완수), 호텔신라(대표 이부진) 등 9개사가 그들이다.
10% 이상 투자기업을 그룹별로 보면 LG 계열사가 4곳으로 가장 많았다. LG는 500대 기업에 속한 8개 상장사 중 4개사가 국민연금 투자 10% 이상을 받았다. LG이노텍(대표 이웅범), LG하우시스(대표 오장수), LG상사(대표 송치호), LG전자(대표 구본준)가 그들이다. 2위는 삼성과 롯데로, 각각 3개 사가 포함됐다. 삼성은 500대 기업에 속한 15개 상장사 중 삼성물산(대표 최치훈), 제일기획(대표 임대기), 호텔신라 등 3사가 국민연금 투자 10% 이상을 받았다.
롯데의 경우도 500대 기업에 속한 5개 상장사 중 롯데푸드(대표 이영호), 롯데칠성음료(대표 이재혁), 롯데하이마트(대표 한병희)가 국민연금 투자 10% 이상을 받았다.
이외에 현대자동차, SK그룹, 현대백화점, CJ그룹은 각가 2개 계열사씩을 명단에 올렸다.
기업별로는 대림산업에 대한 국민연금 투자지분율이 14.1%로 가장 높았다.
CJ제일제당(13.4%), 삼성물산, 한솔제지(13%) 등 3사는 13%대, 만도(12.9%), LG이노텍(12.7%), 동양기전(12.7%), 현대건설·이지바이오·대상(각 12.6%), SKC(12.5%) 등 12개 사는 12%대의 높은 지분투자를 이끌어냈다.
다음으로 LG상사(11.86%), 한세실업(11.7%), 유한양행(11.65%) 등 8개사는 11%를 웃돌았고, LG전자, 롯데칠성음료 등 10개사는 10%대를 기록했다.
이들 34곳 가운데 지난해 말 대비 국민연금 지분율이 높아진 곳은 30곳에 달했다. 특히 이지바이오 등 9곳은 10% 미만이었던 투자 지분율이 10% 이상으로 올라갔다.
한국 종교 ‘동불서기’…부천 소사구 100m마다 교회 725 한겨레
밤거리에 켜진 십자가. 한겨레 자료사진
[데이터 한겨레] 통계와 인포그랙픽으로 본 한국의 종교 지형
인천은 기독교, 부산은 불교단체 많아…지역별로 종교색 달라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세계적인 건축가 아론 탄(50)이 3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한 기자가 탄에게 질문을 하자 탄의 답이 이랬다.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도시 야경 속 빛나는 십자가예요. 교회가 정말 많죠. 올 때마다 십자가가 더 늘어나는 것 같아요.”
그의 발언이 전해지자 누리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아이디 @akaji***을 쓰는 트위터리안은 “밤의 도시가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보이게 하는 교회의 빨간 십자가를 규제하거나 자제하도록 할 방법은 없을까?”라는 글을 띄웠고, @mondaystu***라는 트위터리안은 “전국 교회에 와이파이를 설치하면 비싼 통신비를 아낄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실제 구글 검색창에 ‘교회’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지도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빨갛게 나타난다.
구글 검색창에 '교회'라는 단어를 입력했을 때 나타나는 화면/ 구글 사이트 캡쳐
■ 서울엔 ‘교회’가 ‘절’보다 8배 많다
한국의 밤 거리를 걷다보면 교회의 ‘빨간 십자가’를 몇 개나 만날까. 일단 정답은 ‘지역별로 다르다’이다. 서울에선 비교적 많이, 부산에선 비교적 적게 만나게 된다.
<한겨레>가 2012년 통계청이 발표한 ‘전국 사업체 조사 : 시군구별 산업 세세분류 현황’를 근거로 종교단체 분포를 분석했다. 통계청은 등록된 전국의 종교단체를 ‘한국 표준산업 분류’를 기준으로 기독교, 불교, 천주교, 민족종교, 기타 종교 등 5가지로 분류했다. 여기서 기독교단체는 교회·기도원·선교원 등을 말하고, 불교단체는 사찰·불교문화원·선원·암자 등을 말한다.
등록되지 않은 단체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나지만, 통계청이 집계한 2012년 종교단체는 총 7만4712개였다. 이 가운데 기독교단체가 5만6904개로 가장 많았고, 불교단체는 1만3658개, 천주교단체는 2063개, 민족종교단체는 883개, 기타 종교단체는 1204개였다. 등록된 전국의 종교단체 중 기독교단체와 불교단체가 전체 종교단체의 94.4%를 차지했다. <한겨레>는 이들 기독교단체와 불교단체의 전국 분포 상황을 시각화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종교에도 ‘지역 구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및 수도권, 호남 지역에는 기독교가, 부산 및 영남 지역에는 불교단체가 뚜렷하게 많았다.
먼저, 기독교단체 수가 불교단체 수의 몇 배에 이르는지 계산해봤더니(소수점 첫번째 자리 반올림) 광역단체별로 차이가 드러났다.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과 호남에선 기독교단체 수가 불교단체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서울이 8배, 인천은 15배, 경기도는 9배 많았다. 광주는 7배, 전남은 6배, 전북은 7배였다.
반면 부산과 영남에선 기독교단체 수와 불교단체 수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부산, 대구, 울산, 경북에선 기독교단체 수가 불교단체 수의 2배 정도였고, 경남은 그 수가 비슷했다. 한반도 지도를 놓고 기독교단체 수를 하늘색 동그라미, 불교단체 수를 분홍색 동그라미로 그려봤다. 그림과 같이 크기 차이가 두드러졌다.
■불교단체 상위 10곳 중 7곳이 경남·경북
시ㆍ군ㆍ구로 구체화시켜도 결과는 비슷했다. 전국의 시·군·구 중 기독교단체와 불교단체가 가장 많은 지역 10곳을 각각 꼽아봤다. 기독교단체가 많은 곳 1~3위는 인천 부평구와 남동구, 서울 송파구로 나타났다. 기독교단체가 많은 시·군·구를 10곳 추려보니 인천 3곳, 경기 2곳, 서울 1곳, 호남 3곳으로 나왔다.
반면, 불교단체가 많은 시·군·구 상위 10곳을 추리자 경남 5곳, 경북 2곳, 부산·대구·제주가 각각 1곳씩 나왔다. 삼국시대 신라의 수도였던 경북 경주시에 불교단체가 가장 많았다. 그 뒤를 경남 밀양시와 양산시가 이었다.
인구 대비 단체 수를 계산해봤다. 인구 대비 기독교단체 수가 가장 많은 곳은 전남 신안군이었다. 전남 신안군에는 인구 237명당 하나씩 교회가 있었다. 인구 대비 불교단체 수가 가장 많은 곳은 경남 산청군이었다. 산청군에는 인구 430명당 절이 한 곳씩 있었다.
마지막으로, 면적 대비 밀집도를 알아봤다. 기독교단체가 가장 밀착해 붙어있는 지역은 경기 부천시 소사구였다. 이곳에선 반경 104m꼴로 ‘빨간 십자가’를 하나씩 볼 수 있다. 서울 양천구도 비슷하다. 양천구 주민이라면 밤에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면 반경 105m당 하나씩 ‘빨간 십자가’를 볼 수 있다.
불교단체는 부산에 가장 밀집해 있다. 부산 동구에는 반경 170m당 하나씩, 중구에는 반경 183m당 하나씩 절이 있다. 면적 대비 밀집도 분류를 보면, 기독교단체 밀집 지역은 서울, 경기, 인천에 쏠려 있고, 불교단체 밀집 지역은 부산에서 주로 나타났다.
인구 대비 단체 수와 면적 대비 단체 수에서 지역별 차이가 나는 것을 어떤 까닭에서일까. 강인철 한신대 교수(종교문화학)는 “인구 대비 기독교 단체 밀집 1, 2순위를 신안군과 진도군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섬 지역의 특성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인구 밀도가 낮은 도서지역은 작은 마을 단위로 기독교단체가 촘촘히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섬 지역의 특성상 주말마다 배를 타고 교회에 갈 수 없으니 섬마다 교회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고, 이에 따라 인구에 견줘서 많은 수의 교회가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신안군은 72개의 유인도와 932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천사(1004)의 섬’이라고 불린다. 진도군은 유인도 45개와 무인도 211개 등 256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괜히 ‘다도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강 교수는 “인구 밀도가 높은 신도시는 그 반대다. 중소형 주택들이 빼곡히 자리잡아 면적 대비 기독교단체 수가 높게 나올 가능성이 크다. 부천시 소사구가 이런 경우”라고 해석했다. 부천시 소사구의 경우 대도시 서울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면서 중소형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아파트 중심의 신도시와는 또 다른 경우다.
■ 동불서기(東佛西基),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한국의 3대 종교인 천주교, 불교, 개신교 모두 지역별 특징이 확인됐다. 천주교는 수도권과 대도시를 중심으로 우세하며, 불교는 도시보다 농촌에서 강세를 보이고, 개신교는 한반도 동쪽보다 서쪽에서 신자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이 가운데 한반도 지도를 놓고 동쪽에는 불교가, 서쪽에는 기독교가 두드러진 분포를 보이는 것을 학계에선 ‘동불서기(東佛西基) 현상’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오래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이렇다 할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강인철 교수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많은 요인들이 원인으로 작용해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어떤 한가지 원인이 답이라고 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학계에서 확언하는 원인에 대해 뚜렷한 정설은 없지만 유력설 두가지를 추려볼 수 있다. 하나는 선교 방법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설이다. 초창기 기독교가 전파되던 개화기 때 선교사들은 지역별로 구획을 나눠 포교하는 ‘선교지 분할 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 평안도, 경기도, 전라도 지역에서 포교했던 교단이 선교에 성공했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란 설명이다. 김종서 서울대 교수(종교학)는 “초기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할 때 지역을 분할했는데 그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지역마다 유교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의 차이가 종교 분포에 영향을 줬다는 해석도 있다. 유교 문화가 강한 지역일수록 오랜 전통을 가진 불교를, 유교 문화가 약한 지역일수록 새로 유입된 종교인 기독교를 수용했다는 설명이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한국은 유교 사회였다. 유교는 유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부터 일반화됐던 불교에 대해선 관용적이었지만, 조선 후기 유입된 외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선 비관용적이었다. 유교의 영향이 약한 지역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세력을 확장했는데 그 지역이 수도권과 전라도였다는 것이다.
윤원철 서울대 교수(종교학)는 “한반도의 종교 분포에서 동서 구도가 나타난 역사·문화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현재 종교의 동서 구도는 정치 성향의 동서 구도와도 흡사하게 나타나는데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설명했다.
참고자료
국가 통계 포털 http://kosis.kr/ups/ups_01List01.jsp?grp_no=1012&pubcode=ZY&type=F
한국 종교 인구 분포 비율의 변화와 그 특징, 류성민, 한국종교학회, 2009
한국에 있어서 종교 인구 분포의 지역간 차이에 관한 사회학적인 연구, 정창수 외, 한국사회학회, 1993
글 김미향 기자aroma@hani.co.kr 데이터 시각화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
"우리 학교 나온 김소월 시인도 자사고 폐지 반대할 것" 726 오마이뉴스
[인터뷰] 김용복 배재고 교장 (서울시 자사고교장협의회장)
▲ 김용복 배재고 교장(서울시 자사고교장협의회장)은 23일 오후 서울 강동구 고덕동 배재고에서 <오마이뉴스>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자사고를 둘러싼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 선대식
배재고등학교는 최고(最古) 사학이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서울 정동에 이 학교의 전신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우리나라의 첫 근대식 학교다.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은 고종황제가 내려준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 시인 김소월,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는 최근 뜨거운 논란의 한 가운데 섰다. 이 학교의 김용복 교장은 서울시 자율형사립고(자사고) 교장협의회장으로, 자사고 폐지·축소 움직임에 반대 목소리를 부르짖고 있다. 협의회는 지난 21일 발표한 성명에서 "교육감에 대한 불복종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법적 대응도 예고한 상황이다.
반면,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자사고를 일반고 황폐화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6월 1차 평가를 마무리했고, 조희연 교육감 취임 이후 자사고가 공교육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곧 발표할 평가결과에 따라, 올해 평가 대상인 서울시 자사고 14곳이 모두 취소될 수 있다.
김용복 교장은 23일 오후 서울 강동구 고덕동 배재고에서 <오마이뉴스>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자사고를 둘러싼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오래전부터 교실이 무너졌다는 얘기가 나왔다, 교실이 무너진 것은 학업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을 깨워서 국·영·수 공부를 시킨 탓이 크다, 직업 교육 등 이 학생들에 대한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면서 "자사고를 없앤다고 일반고 황폐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목고, 일반고보다 커트라인이 높아진 특성화고(옛 실업계고)도 일반고에 영향을 미친다"면서 "친형제가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처럼, 이런 의미에서 일반고가 자사고를 비판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반고는 잘 뛰는 사람을 끌어다가 같이 걸어가자고 하면 안 된다, 국가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면서 "사학은 평범한 국민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다, 영재 교육을 맡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용복 교장은 자사고의 집값 안정 효과를 주장했다. 그는 "강동구, 성동구, 관악구에 사는 학생도 강남 지역에 있는 자사고에 지원할 수 있다, 강남 지역으로 이사 가지 않아도 된다"면서 "그러다보니 강남 지역의 집값이 안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배재고의 자사고 지정이 취소된다면, 8만 동문과 학부모들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동문들이 집단행동을 할 수 있다"면서 "시인 김소월, 주시경·서재필 선생도 일반고 전환을 반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기자와 김용복 교장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안산동산고 자사고 재지정 취소에 충격... 끝까지 가면 이긴다"
- 경기도교육청은 안산동산고를 자사고로 재지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전국에서 첫 자사고 지정 취소 사례가 나온 것이다.
"충격을 받았다. 배재고가 자사고 지정 신청을 할 때 안산동산고를 벤치마킹했다. 기독교 학교로서 교육을 잘하는 학교다. 안산동산고는 자사고의 모범이 된 곳이다. 전북교육청이 2010년 익산 남성고와 군산 중앙고에 대한 자사고 지정을 취소했지만, 두 학교는 소송에서 이겨 자사고로 남았다. 소송 등을 통해 끝까지 가면 결국 자사고가 이긴다."
- 이르면 이번 주에 서울시교육청이 자사고 재지정 평가를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문용린 전임 서울시교육감 때 실시한 자사고 재지정 평가에 성실히 임했다. 하지만 조희연 교육감이 취임한 이후 진행하는 2차 평가는 급조된 것이다. 특히, 자사고 주변 일반고 학생들에게 '자사고가 좋아요, 나빠요?'라고 묻는 질문은 수용하기 어렵다. 자사고 재지정 평가라면 자사고를 평가해야지, 왜 다른 학교를 평가하나.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마트가 생기면 어떤 영향을 받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다."
- 자사고가 고교평준화의 근간을 깨뜨리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 당시 고교평준화로 인해 사학은 특색없는 '관학'이 됐다. 3%의 인재가 97%의 사람을 먹여 살린다. 사학이 영재 교육을 맡고 있다. 사학은 개성, 다양성, 특수성을 통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 주시경 선생, 서재필 박사, 시인 김소월이 우리 학교 출신이다. 사학은 평범한 국민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다. 사학의 특성을 인정해 달라."
- 자사고가 일반고 슬럼화 현상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교실이 무너졌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나왔다. 교실이 무너진 것은 학업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을 깨워서 국·영·수 공부를 시킨 탓이 크다. 직업 교육 등 다른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일반고 황폐화 문제는 원인 분석을 정확히 해야 한다. 자사고를 없앤다고 일반고 황폐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자사고가 없어지면, 자사고에 다니던 학생 2~3명 가량이 일반고 한 학급에 들어간다. 얼마나 달라지겠나."
- 일반고의 절망에 자사고 책임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자사고의 영향도 일부 있을 것이다. 특목고, 일반고보다 커트라인이 높아진 특성화고(옛 실업계고)도 일반고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고에 특목고가 사촌이면, 자사고는 친형제다. 사촌보다 친형제가 땅을 살 때 배가 더 아프다. 이런 의미에서 일반고가 자사고를 비판한다. 일반고는 잘 뛰는 사람을 끌어다가 같이 걸어가자고 하면 안 된다. 국가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모두 (질이) 떨어진다. 평등도 중요하지만 수월성 교육도 중요하다."
- 일반고에서는 학기 초 자사고가 일반고의 우수한 학생을 빼앗아간다는 비판이 나온다.
"일부 자사고에 그런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단연코 대부분의 자사고는 일반고 학생을 빼가지 않는다. 배재고도 다른 학교의 학생을 빼오지 않는다. 학교가 오란다고 학부모나 학생이 여기에 응하겠나. 오히려 일부 학부모들이 자녀를 원하는 사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자사고를 징검다리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지역 내 고등학교 간의 전학은 불가능하지만, 자사고는 예외 규정을 적용받는다.)
- 자사고가 귀족학교라는 비판도 있다.
"우리 학교 학부모는 일반고 학부모보다 1년에 300만~320만 원 가량의 학비를 더 낸다. 한 달에 25만 원 가량이다. 이 만큼의 돈을 투자해서 교육 여건과 면학분위기가 좋은 학교에 자녀를 보낼 수 있다면, 누가 이 돈을 아끼겠나. 우리 학교는 전교생 1200명 중에서 800~900명이 자율학습실에서 공부를 한다. 방과후 프로그램도 좋다. 그러다보니 학부모들은 학원비가 덜 든다고 한다. 귀족학교라는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다. 교육 열정이 높은 학부모들의 학교가 아니겠나."
- 자사고가 고교다양화라는 취지와 달리, 입시명문을 지향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영·수 수업시수가 전체의 52%로 절반을 넘는 건 맞다. 하지만 비정규 교과과정인 창의적 체험활동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이를 포함하면 50%를 밑돈다. 국·영·수 수업시수가 전체의 50% 이하인 자사고는 한 학교도 없다. 반대로 말하면, 전체가 50%가 이상이라면 타당성을 갖는 것 아니겠나. 배재고는 자사고 전환 이후 서울대 진학률이 1/3로 떨어졌다. 우리가 입시명문을 지향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겠나. 또한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교는 어느 정도 입시교육을 하는 게 맞다."
- 자사고는 우수한 인재를 길러낸다고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자사고에 우수한 학생이 몰리다보니 자연스럽게 좋은 대학에 가는 학생도 많은 것 아닌가.
"올해 2월에 졸업한 학생들이 처음 입학했을 때, 내신 성적 상위 10% 이내의 학생은 전체 학생의 13%였다. 일반고였다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더 많이 올 수 있다. 그리고 재수생을 포함해 올해 3월 서울시내 주요 대학 10곳에 입학한 졸업생은 130명이다. 복수합격이나 지방분교에 간 학생을 빼더라도 최소한 30명은 좋은 대학에 갔다. 입학할 때 이런 대학에 갈 수 있는 학생은 15명 정도였다. 학교효과가 있는 것이다."
- 자사고 주변에 사는 학생들은 자사고에 가지 못할 경우, 멀리 떨어진 일반고로 통학해야 하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있다.
"학교가 많지 않은 일부 지역의 일이다. 자사고로 인해 좋은 점도 많다. 명문학교에 배정받기 위해 굳이 이사 가지 않아도 된다. 강동구, 성동구, 관악구에 사는 학생들도 강남 지역에 있는 자사고에 지원할 수 있다. 강남 지역으로 이사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다보니 강남 지역의 집값이 안정된다. 자사고의 긍정적인 효과를 생각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과 돈 흥정 아냐... 다만, 어려운 자사고 지원해 달라"
-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17일 자사고가 자발적으로 일반고로 전환할 경우, 5년간 최대 14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모집정원을 채우지 못해 재정난을 겪고 있는 일부 자사고 입장에서는 반가운 정책이지만, 서울시 자사고교장협의회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돈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교육청과 돈을 흥정하기 위한 게 결코 아니다. 서울시교육청이 14억 원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이중 시설비 7억 원을 빼면, 운영비 지원은 7억 원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5년 동안 매년 1억~2억 원을 지원한다. 올해 배재고 재단이 학교에 지원한 금액만 13억 원이다. 서울시교육청의 지원은 큰 도움이 안 되는 허구라고 볼 수 있다. 자사고가 알아서하겠다는데 왜 자사고에 지원하려 하나. 그 돈으로 일반고를 지원하고, 자사고를 가만히 놔둬야 한다."
- 하지만 일부 자사고는 모집인원 미충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서울시교육청의 지원을 내심 반기는 학교들도 있다.
"배재고는 지난해 1차 모집 때 미달돼 망신을 당했다. 결국 추가 모집을 통해 모집정원을 채웠다. 끝까지 모집정원을 채우지 못한 학교는 지역 환경이 열악한 곳에 있다. 서울시교육청에 당부를 드리고 싶다. 일부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사고 있을 텐데, 때려잡지 말고 일반고 전환으로 '연착륙'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해 달라."
- 김용복 교장은 지난 21일 기자회견에서 '교육감에 대한 불복종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썼었나…. 정당하지 못한 평가에 의한 반대 의견을 낸 것이다. 조희연 교육감이 자사고를 대거 취소할 경우,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 등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 조희연 교육감이 자사고를 대거 취소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8만 동문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동문들은 100억 원 모금 운동을 벌여 40억 원을 모였다. 1년 치 장학금만 2억5000만 원 가량 된다. 자사고 전환 뒤 공부 열심히 하는 재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큰 것이다. 만약 배재고가 일반고로 전환된다면, 동문들이 집단행동을 할 수 있다. 배재고 동문은 세다. 시인 김소월, 주시경 선생도, 서재필 박사도 일반고 전환에 반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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