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복권운동 경향 2020.06.01.
채널A’ 사건, 사이비 권력들의 ‘진실 은폐’ 야합 한겨레 2020-06-01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30년 운동 시민과 함께 할 방향을 고민하자 한겨레 2020-06-01
메멘토모리 - 죽은 검사들의 사회 경향 2020.06.01
시민운동과 공공지식 한겨레 2020.06.02.
오보의 기억 한겨레 2020.06.02.
2020년 미국의 항의 시위와 한국 언론 미디어오늘 2020.06.02.
반민주적인 ‘사용후핵연료 공론화’를 중단해야 경향 2020.06.03
소녀상 중심주의 한국
인구절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경북도민일보 2020.06.04
그린 뉴딜’의 선행 조건들 경향 2020.06.05.
경험하지 못한 여름’ 경향 2020.06.05.
‘뉴딜’도 ‘그린’도 없는 그린뉴딜 한국 2020. 06.07
이해찬 대표의 마지막 임무 경향 2020. 06.08
탄소 '펑펑' 건물·자동차 놔두고 그린뉴딜? pressian 2020.06.08.
유토피아가 좌절된 시대에, '대변화'의 요청이 도착했습니다 pressian 2020.06.08.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북한이 요즘 왜 이럴까?" pressian 2020.06.08.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소리 한국 2020.06.09.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경향 2020.06.09.
한반도 완충지대 경향 2020.06.09.
슬기로운 여당 생활’ 경향 2020.06.09.
장승은 누가 잘랐을까 한겨레 2020-06-14
국가균형발전 사기극 한겨레 2020-06-14
진중권과 파시즘 한겨레 2020-06-15
6·15선언 20년, 자주와 신뢰를 생각한다 경향 2020-06-15
전작권 전환 이대로는 안 된다 경향 2020-06-15
위안부’ 운동 내전, 우리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경향 2020-06-15
한명숙 복권운동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느 매체에서 느닷없이 10년 전 한명숙 전 총리 수뢰 사건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당시 재판에서 검찰이 증인들의 증언을 조작했다는 것. 증언을 조작당했다는 당사자들이 언론 인터뷰에 나서고, 이를 신호탄으로 여기저기서 사건을 재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한명숙 전 총리에 동병상련”을 느낀다며 그 사건의 “재심운동을 응원”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당시 검찰 수사는 명백히 정치적이었다. 1심에서 무죄가 나오자, 검찰에서 바로 ‘별건 수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눈앞에 닥친 서울시장 선거에 영향을 끼치려는 정치적 기동임에 분명했다. 오죽하면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 소속 김성식 의원마저 적어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라도 수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 수사에서 한 전 총리가 그만 덜컥 덜미가 잡혀버리고 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한명숙 전 총리까지 정치검찰에 희생양이 된 셈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으니 ‘친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을 게다. 2015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을 때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집권 3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번에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데에는 총선 압승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정치적 배경을 가진 수사였지만 한 전 총리에게 적어도 3억원이 전달된 것은 당시 대법관 전원의 일치된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문세력이 한 전 총리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그 정도의 금품수수는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당시 정치권에 널리 퍼진 관행이라고 보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통치권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정도의 비리는 피차 덮어주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게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대선 전에 이른바 ‘김대중 비자금 의혹 사건’의 수사를 중단시킨 바 있다. 그 문제에서는 본인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신사협정(?)을 깨뜨린 사람은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전직 대통령에 대한 그의 공격은 몇 년 후에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왔다. ‘원한과 복수’가 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것이다.
지금 여당과 친여 매체가 손잡고 벌이는 한명숙 구출작전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한 전 총리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주는 것으로, 이는 VIP 관심사안이기도 하다. 일종의 ‘손타쿠’ 운동인 셈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검찰개혁’의 명분으로 검찰을 공격함으로써 선거 뒤로 미뤄뒀던 권력형 비리 수사의 예봉을 꺾는 것이다. 경기도지사까지 숟가락을 얹는 것을 보면, 곧 대대적인 캠페인이 시작될 모양이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은 애매하다. (1) 한 전 총리가 돈을 받은 적 없는데 조작된 증거와 증언 때문에 유죄가 됐다는 얘기인지, (2) 돈은 받았지만, 검찰의 수사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이 애매함은 물론 ‘의도’된 것이다. 당시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부각시켜 현재의 검찰을 공격하고, 내친김에 그의 명예까지 회복시켜 주겠다는 속셈이다. 하지만 이 기획은 실현이 불가능해 보인다.
먼저 지금의 검찰과 당시의 검찰은 별 관계가 없다. 윤석열 총장은 외려 그런 구(舊)검찰의 ‘안티테제’로 자신들이 임명한 인물이다. 당시 수사를 맡은 이들은 지금 검찰에 남아 있지 않고, 윤석열씨가 ‘기수 파괴’로 총장에 임명될 때 구검찰의 고위직들은 줄줄이 옷을 벗었다. 한 전 총리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1억원짜리 수표가 동생의 전세금으로 사용된 사실을 뒤엎을 물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거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당에선 ‘재심’에서 ‘재수사’ 쪽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다. 성동격서식으로 변죽이나 울리며 검찰만 두드리겠다는 얘기인데 이 대목에서 마침 이재명 지사가 ‘재심운동’을 응원하겠다고 귀한 말을 보탰다. 당시 문재인 대표도 ‘재심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오면 인정하겠냐’는 질문에 “그럴 수밖에 방법이 없겠죠”라고 답한 바 있다.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자. 깔끔하게 재심 청구로 가고, 그럴 자신 없으면 입을 다물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경향 2020.06.01.
holee_****-이기사엔 팩트가 하나도 없습니다. 별건수사에서 그만 덜컥 덜미가 잡혀버리고 만다. 한총리에게 적어도 3억원이 전달된 것은 당시 대법관 전원의 일치된 판단. 그래서 3억원의 돈을 누가 어떻게 받았는지 논하지 않고 덜컥 덜미를 잡혔다고?? 자신의 돌직구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올 것이다~~~
yd****-진중권~~~만일 당신이나 당신의 마누라가 이런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살이 하고 명예를 잃었다면 그런 말이 그 주댕이에서 나오겠나???? 생긴건 오소리처럼 가지구서리~~~~
영웅본색-비처맞고 이집저집 돌아다니는 비루먹은 똥개 같은늠 기사를 왜 경향은 자꾸 보도하나? 한때는 이언주를 논객 대우해주더니만 이젠 남자 이언주여? 인간 한순간에 홱가닥 하는것 관종 진중권이 여실히 보여주네,,조중동 나팔수, 검찰 앞잽이, 윤석열 따까리로 변신한 진중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았는데 저늠은 백수되어 실업자 되니 오만데 똥을 싸고 다니는구만. 난 저것이 조중동에서 몇푼 던져주는 돈 받으면서 페이스북 글 퍼가는것 허락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관심받는것만 해도 감지덕지냐? 불쌍한 ㅅ ㄲ
osk**** 한겨레가 요즘 10000호를 계기로 기레기 닮는 점을 반성하던데.. 더 역사가 오랜 경향은?"이 사람의 주장은 우리 경향의 의견과는 관계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계속 판을 깔아줄건지?????
백팔번뇌-멍청한 사람아.. 재심요건이 되야 재심신청을 하지???ㅜㅜ 검찰의 증거 조작이 확인되어야 그걸 빌미로 재심 신청할 수 있다. 목표는 재심신청이고 그걸 위해 검찰의 범죄를 조사하겠다는거고.. 뭘 좀 알고 씨부리시길~~ 더러운 변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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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바보야! 핵심은 한명숙복권이 아니라 검사의 위증교사혐의의 진실을 밝히자는 거자나. 경향은 이런 진중권의 주장에 동의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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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세상에서-진중권씨 의견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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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긴장해라!!!-진중권은 여러 가능성중에 왜 유독 민주당, 진보의 입장이 아닌 반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래야 저쪽에서 불러주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해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이런 진중권에게 이런 코너를 만들어 주면 독자들의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경향도 이해가 안된다. 혹시 진중권의 생각하고 경향하고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이 아닌가 경향에 묻고 싶다. 정론직필을 모토로 하는 경향이 진중권이 종론직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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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긴장해라!!!-진중권이 지금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뻔히 알고 있을 경향이 그에게 지면을 할애해 주고 있는게 신기하다.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경향에서 할 일인가? 혹시 경향에서 하고 싶은 정치적 발언을 진중권을 통해서 하고 싶은 것인가? 진중권의 내용의 팩트체크는 하시고 있나요? 팩트체크 없이 그대로 계속 허용한다면 경향은 진중권과 동일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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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k****-경향은 더이상 이런 쓰레기 의견을 신문에 올리지 마라 구독자를 우롱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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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섭-진중권 씨는 지금 무엇이 두려워서 한명숙 사건에 대해 '재심청구로 갈 자신이 없으면 입을 다물라'고 합니까? 검찰의 위중교사 범죄가 드러날까봐 두려우신가요? 지금 촛점은 한명숙 개인의 유무죄를 논하거나 뒤집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검찰의 잘못된 행태가 있다면 바로 잡아서, 우리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코로나 19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법무부와 검찰 등 법 관련 모든 공무원들이 손을 놓고 경제 극복을 위해 노력하자는 말씀인가요?
증인이 대검찰청에 고발한 검사들의 중대한 불법행위(모해 위증교사)가 있었는지 조사해서, 진실을 밝히고, 응당한 처벌을 하고, 제도와 관행을 바로 세우는 것이 법무부와 정부의 중요하고 고유한 업무가 아닌가요?
진중권 씨는 지금 누구를 두둔하고 도와주는 언행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계신가요? 퇴직한 검사들은 모두 면죄부를 주고 조사하지 말아야하나요? 진중권 씨는 제목을 한명숙 '복권운동'이라고 붙였는데, 그 제목은 진중권 씨가 직접 잘못 지은 제목이 아닌가요? 검찰의 위증교사 혐의 조사'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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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공선연-대체 진중권의 말은 왜 이렇게 실어주는가? 이 자가 무어라도 되는가? 이 자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함부로 하며, 언론은 뭐 모시듯하는가? 적어도 제목 자체가 틀렸다. 한총리 복권운동이라니! 검찰이 멀쩡한 사람에게 죄를 만들어 덮어씌운 것을 벗겨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사건은 모두 재수사해야 한다. 왜냐? 그게 정의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나무-사건의 핵심은 한명숙 비서다. 여기서 비서는 보좌관이나, 수행비서가 아니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한명숙에게는 법에의해 보좌관으로 4급2명 비서관 5급2명 비서(6-9급) 각급수별1명씩 4명이 도합8명이 있었다. 돈을 받았다는 비서는 최하위 직급으로 한명숙과 매일 얼굴을 맞대는 사람이 아닌 지역구에 상주하며 지역민원을 관리보고 하는 일을 하던사람으로 지역구 주민이다. 한만호도 지역주민이고 한명숙여동생 또한 지역구 비서와 친구사이였다. 한만호가 3억 수표를 지역구 비서에게 주었고, 이중 1억이 여동생에게 여동생은 즉시5천을 거슬러주었고, 후에 5천도 갚았다. 비서는 뒤이어 2억을 한만호에 되돌려주었다. 3억을 한명숙에게 준것으로 검찰과 법원은 본것이고, 이것이 인정되므로 6억도 준것으로 인정한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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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ㅂㅅ같은 ㅅㄲ,, 누군 너만큼 정의감이 없어 한명숙 편드는줄아나? 노무현 죽음처럼 그동안 대한민국 개검늠들이 어떤짓을 해왔는지 몰라 혼자 정의의 사도인양 질할 하냐고? 왜 채널A와 검사장 조작사건, 윤석열 장모,나경원에 대해서는 입에 거미줄 치는데? 한명숙을 잡을려고 검사가 어떤짓 했는지 너란 양아치 ㅅㄲ는 아예 관심도 없냐? 왜 많은 사람들이 검사의 행태를 비판하는지 너같은늠은 관심도 없지?
축구시합에서 원정팀에 대해서는 조그만 행동도 잡아내면서 홈팀에 대해선 선수 발모가지 부르터려도 너같은 ㅅㄲ는 원정팀의 행동이 반칙이냐 아니냐만 관심있지? 왜 조국에 대해 그를 두둔하는 사람이 있는지 너같은 ㅅㄲ가 뭘 알겠냐! 법의 정의가 어떤 개별의 진실만 추구한다고 이루어질것같냐? 그저 얄량하고 천박한 값싼 정의감 앞세우며 질할하는 네 모습보면 불쌍할 따름이다.
채널A’ 사건, 사이비 권력들의 ‘진실 은폐’ 야합
진실을 드러내는 건 힘겨운 싸움이다. 힘 있는 자들은 법을 앞세우고 제도의 틈을 파고들어 쉽게 감춘다. 그러나 감추려는 ‘권력’자들 못지않게 ‘진실’ 역시 힘이 세다. 감춘다고 해서 흔적까지 말끔하게 지울 수는 없다.
종합편성채널 ‘채널에이(A) 사건’에서도 권력자들은 진실을 감추려 부단히 애썼으나 흔적까지 없애진 못한 것 같다. 이아무개 기자가 수감 중인 이철 밸류인베스트코리아 전 대표를 회유하려 보냈다는 편지에 이미 이 사건의 ‘전모’가 들어 있다. 검찰에 말해 가족들의 선처를 위해 힘써줄 테니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 유력 인사들 비리를 넘겨달라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기자가 상대를 너무 쉽게 봤던 것 같다. 이씨 대리인으로 나선 지아무개씨의 호주머니까지 뒤졌지만 녹음을 막진 못했다. <채널에이> 보도본부장이 카카오톡 문자에 남겼듯이 이씨의 ‘이중플레이’에 ‘녹아났다’.
지난달 21일 채널에이는 ‘진상조사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물증은 확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편지나 지씨와의 대화 및 통화 녹취록뿐 아니라 채널에이 ‘보고서’와 두 대표가 방송통신위원회에 출석해 밝힌 속기록에도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들은 많다.
지씨가 대화를 몰래 녹음해 <문화방송>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날(3월23일) 아침 채널에이 보도본부 수뇌부는 가장 먼저 외부인, 그것도 ‘검언 유착’ 의혹의 당사자로 주목받는 ‘검사장’에게 연락하도록 했다. 오전 10시 검사장에게 전화해 전달한 내용도 “녹음파일은 없다”였다(보고서 46쪽). 문화방송 보도 8일 전이다. ‘그 일주일(3월23∼31일) 동안 누구도 검사장 목소리를 들어보자고 한 사람이 없었고’(보고서 42쪽), 결국 기자는 문화방송 보도(31일) 직후 휴대폰 2대를 초기화하고 노트북피시를 윈도10으로 업그레이드해 흔적을 지웠다. 채널에이는 보도 다음날에야 진상조사위를 띄웠다. 그사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지 굳이 따질 필요까진 없겠다.
방송통신위 의견청취 과정에서도 채널에이 두 대표가 극구 감추려 했던 것은 ‘검사장’의 존재였다. 속기록을 보면 이 기자가 통화한 상대가 ‘검사장’ 맞느냐는 위원들의 거듭된 추궁에 결국 고개를 끄덕여 시인했다. 그러나 의견청취가 끝나 퇴장했던 두 대표는 다시 정정발언 기회를 요청했다. 시간 관계로 거절당한 뒤 채널에이 대표 명의로 낸 ‘의견 제출’ 서면의 요지도 결국 ‘검사장인지 확인되지 않았다’였다.
그러나 이들이 극구 감추려 했던 검사장의 행적은 미처 없애지 못한 이 기자와 후배 기자의 통화녹취록과 지씨에게 읽어줬다는 통화녹취록에 고스란히 담겼다. 검사장이 ‘수사팀에 얘기해줄 수도 있으니 만나보고 나에게 알려달라. 나를 팔아’라고 했다는 것이다. 두 녹취록 내용이 거의 일치하니 조작이라 보기도 어렵다.
그 ‘검사장’이 바로 핵심 측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윤석열 검찰총장의 움직임은 이례적으로 굼떴다. 4월7일 문자로 감찰 착수 의사를 밝혀온 대검 감찰본부장을 제지했다. 이틀간 휴가를 마치고 8일 출근한 뒤엔 굳이 대검 인권부에 조사를 맡겼다. 결국 감찰본부는 ‘검사장’ 휴대폰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민언련의 고발장이 접수된 지 10일 만인 17일에야 윤 총장은 서울중앙지검에 수사를 지시했다. 문화방송 보도 이후 무려 17일 만이다. 물증을 없애고 진실을 묻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이미 기자 휴대폰의 흔적은 삭제된 뒤였지만…. 수사 착수 뒤에도 ‘균형 수사’를 공개 지시해 적극 수사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런 이례적 행보가 오히려 검찰 안팎에 ‘측근 관련설’의 심증을 굳혀주었다.
‘종편’ 보유 언론들도 거들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는 편지와 녹취록에 나오는 ‘검언 유착’ 대신 ‘친여 브로커’라며 지씨를 공격하는 데 몰두했다. ‘여권의 윤석열 때리기’ 프레임으로 사건의 본말을 뒤집으려 했다.
‘진실’ 규명을 사명으로 하는 언론과 검찰 모두 기자와 검사장의 휴대폰만 확보하면 금방 드러날 ‘진실’이 두려워 뻔한 지름길을 두고 애먼 길을 빙빙 돌았다. 국민한테 위임받은 적 없는 ‘사이비 권력’들이 이렇게 권한을 남용하고 야합했다. 국민 무서운 줄 모르고 진실을 파묻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고 있다.
검찰이 끝내 진실을 덮는다면 공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나설 수밖에 없다. 채널에이나 <티브이조선>에 대해서도 재허가 최종심판을 앞둔 방통위 책임이 무겁다.
김이택 대기자 rikim@hani.co.kr 한겨레 2020-06-01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30년 운동 시민과 함께 할 방향을 고민하자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사건이 티브이의 유명 탐사 프로그램으로 방영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불쑥 걱정이 앞섰다. 사람들은 나눔의 집과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정의연 사건이 터진 상황에서 다시 나눔의 집 비리가 폭로되니 지금까지 애써 일구어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전시 성폭력 고발 운동에 씻지 못할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지진 않을까 걱정이 든 것이다.
그런데 정의연에 대해서는 없는 사실까지 악마의 편집 기술을 동원해 공격해대던 언론과 극우세력들이 너무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나눔의 집 회계부정에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지속적으로 원칙적인 입장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사과를 요구하는 정의연의 운동,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전시 성폭력과 성착취 문제를 공론화하고 국제연대를 펼쳐온 그 운동을 이번 기회에 지우고 싶은 것으로 생각되었다면 너무 심할까? 사실 ‘위안부’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일차적인 책임은 책임을 계속 부인하는 일본 정부에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국회도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모든 책임을 정의연에 뒤집어씌우고 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그리고 인권활동가로 거듭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해온 당사자인 이용수씨는 정의연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할머니를 팔았다, 이용당했다’는 기자회견을 두 차례나 했다. 극우세력들이 ‘위안부’ 운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렇게 이 여성인권 평화운동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회계부정이 있었다면, 그리고 윤미향 의원이 부정한 방법으로 공금을 유용했다면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 너무 성급하고 지나치다. 그 성급함과 지나침 속에서 이 운동을 이끌어온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위안부’ 당사자, 연구자, 전문가들은 씻지 못할 상처를 입고 있다. 활동가들은 지쳐가면서 동시에 두려움에 떨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정부의 밀실합의 책임마저 윤 의원과 정의연에 돌리려는 술책은 정의연의 활동가들을 엄청난 스트레스에 내몰고 있다. 이전부터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활동가들이 하나둘 이 운동을 떠나기도 했다. 그들에겐 이런 문제제기가 30년 동안 이 운동을 해오는 과정에서 당했던 그 어떤 모욕과 비난보다 더 아프고 힘들 것이다.
회계부정 의혹은 검찰에 공이 넘어갔으니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 그리고 이번 기회에 민간법인과 민간단체의 실정에 맞는 표준회계 기준을 만들고 전문성 부족으로 이런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힘든 민간법인과 민간단체의 회계 정리를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자. 선진국들에서는 그렇게 한다. 시민사회가 위축되면 시민들이 기댈 언덕이 하나둘 무너지는 결과로 귀결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앞으로 ‘위안부’ 운동, 전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때다. 윤 의원은 이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고, 이 운동을 대표했다. 이 운동에서 그의 자리는 너무 크다. 그런 그가 충분한 준비 없이 급히 서둘러서 자리를 옮겼다. 윤 의원이 몇몇 의혹에 대한 결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 이 상황이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 건, 30년 동안 이 운동에 책임을 진 자로서 윤 의원이 지고 가야 할 숙명 같은 것이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마지막까지 의혹 해소를 위해 책임 있는 자세를 견지해주기 바란다.
이용수씨도 자신이 인권활동가임을 자각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의 문제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피해 생존자로서, 그리고 인권활동가로서 하는 말은 무게가 다르다. 정의연 운동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면 방법과 형식이 달라야 했다.
정의연은 30년 운동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운동의 원칙과 방향을 점검하고, 그 방향을 실현해갈 사람과 조직이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보면 좋겠다. 피해자 민족주의,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고정화된 이미지와 피해자의 성역화, 여성주의적 관점의 부족, 운동의 독점 현상 등에 대한 비판을 귀 기울여 듣고 겸허히 성찰해야 한다. 외부의 공격에 맞서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내부에 억압으로 작용한 조직 문화는 없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물경 30년이다. 혁신하려는 몸부림이 없는, 관성에 내맡겨온 운동이라면 그 운동의 미래는 없다. 이 운동을 책임지고 끌고 갈 사람을 키우는 일부터 뼈아프게 점검해야 한다.
나는 ‘위안부’ 운동을 30년 동안 이끌어온 정의연이라면 새롭게 거듭나는 해법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대협-정의연의 운동은 새로운 출발선에 놓여 있다. 이 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라면 나는 정의연과 함께 비를 맞는 심정으로 곁에 서겠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한겨레 20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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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모리 - 죽은 검사들의 사회
2016년 5월19일, 황망한 소문이 전국청을 덮쳤습니다. 초임검사가 부장의 폭언·폭행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고. 오전부터 전해지는 흉흉한 말들은 놀라웠고 상가를 다녀온 후배들의 분노는 뜨거웠지요. 가해자가 유족에게 유서를 전달하고 그 곁을 지키는, 지휘책임 있는 검사장이 검사들에게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나누는 상가는 무간지옥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았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떤 조치도 없었습니다. 2015년 4월9일, 그 초임의 첫 회식에서 또 다른 부장이 공연히 저지른 성범죄가 덮였던 것처럼. 검찰에선 그런 범죄들은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하거든요.
저도 죽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2003년 5월 부장에게 성폭행 당할 뻔한 후 사표를 요구했다가, 지청장의 지시 같은 주선으로 합의를 시도하려는 부장을 만나야만 했던 악몽 같던 저녁. 빗길을 달리는데, 가로수를 들이받고 실려갔으면…, 싶었거든요. 가속페달을 밟으려다 말고 정신을 겨우 차렸지요. 후배의 자살은 그때 읊조리던 비명 같은 주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난 아무 잘못이 없는데, 내가 왜? 그리고, 홍영아, 도대체 네가 왜?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았을 한 젊은 영혼이 2년도 채 되지 않아 왜 허무하게 세상 밖으로 떠밀려야 했는지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후배의 비틀거림을 외면했던 못난 선배들의 미안함이 사무쳐 우리는 지금 숨이 막힙니다.” 하릴없이 내부망에 애도글을 올리고, 검사장에게 항의메일도 보냈지만, 가해자에 대한 수사와 감찰 움직임은 전혀 없었지요. 유가족 인터뷰 등으로 외부에 알려져 여론이 들끓던 7월, 비로소 감찰에 착수하여 우여곡절 끝에 해임시켰습니다만, 검찰은 가해자를 끝내 처벌하지 않았고 유족은 아직 사과받지 못했습니다.
무죄구형 강행 후 속칭 ‘검사 블랙리스트’인 집중관리 대상 검사 명단에 올라 검사 부적격자로 몰려 퇴출될 뻔하고 노골적인 감시와 지독한 배제에 숨이 막혔었지요. 징계취소소송을 통해 5년 만에 누명을 벗고 징계권과 인사권을 오남용한 자들에 대한 문책과 사과를 기대했습니다. 그게 제가 배운 정의니까요. 승소 확정 후 상급자가 흐뭇하게 묻더군요. 이젠 괜찮냐고. 단호히 답했지요. “저는 무죄판결을 받았을 뿐 저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문책과 사과를 원합니다.” 가당치 않은 과욕을 부린다는 듯 황당해하더군요. 그 간부를 보며 무죄구형으로 검사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착각했던 지난날의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무죄구형과 판결은 불의를 걷어내는 단초일 뿐 바로 선 정의라 할 수 없고, 사과와 용서, 화해의 완성이 아니라 미약한 시작일 뿐이지요.
처음으로 돌아가 고(故) 김홍영 검사를 다시 부릅니다. 2015년 4월1일 용기 있고 바른 검사가 되겠노라 선서하고 임관한 김 검사는 첫 환영회식에서 경악했을 겁니다. 거침없이 추행하는 부장과 속수무책인 검사들이 만드는 부조리한 풍경은 검사선서문과 너무도 달랐으니까요. 부장의 추행이 그전부터 계속된 것임을, 추행범은 부장만이 아님을 곧 알게 되었고, 검찰이 성폭력 범죄를 덮고 거짓 해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멋져 보였던 선배들이 거짓말 혹은 침묵과 방관으로 협력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던 그때, 그의 영혼은 말라갔을 겁니다. 검사의 혼을 가진 자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하여 ‘죽은 검사들의 사회’에 갇혀버렸음을 알았을 테니까요. 2016년 갑질 피해를 입고 하소연할 데가 없던 김 검사는 결국 죽음으로 검찰에서 도망쳤습니다.
공익의 대변자인 검사는 수사와 기소로 범죄자를 처벌하여 법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합니다. 하여 검찰의 잣대가 고장 나면, 합법과 불법이 뒤집혀 사회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고, 검찰 내부의 정의가 무너지면 대한민국 정의는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지게 되지요.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려면 도미노 첫 칩에 해당하는 검찰의 정의부터 바로 세워야 하고, 검찰의 정의는 검찰 내부 범죄에 대한 엄중한 문책과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서만이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검찰 내부 범죄의 단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이고, 제가 동료들의 성난 비난에도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입니다. 김홍영 검사를 기억합니다. 그는 죽음으로 검찰을 고발했지요. 저는 그의 이름으로 넘어진 정의의 첫 칩을 바로 세우고, 살아있는 체하며 ‘말로만’ 법과 정의를 외치는 죽은 검사들을 향해 계속 외칠 겁니다.
김홍영 검사의 죽음을 기억하라. 검사의 혼과 정의가 이미 죽었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제 깨어나라
임은정 울산지방검찰청 부장검사 경향 2020.06.01
시민운동과 공공지식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의 이름으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를 받았다. 이것은 경제개발에 다급했던 박정희 정권이 미국 주선하에 성사시킨 정치적 결정이었지만,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 강제병합의 불법성은 물론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고, 몇 사람이 끌려가서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지 못했는지 등에 대해서 제대로 된 근거나 자료를 준비하지 못했고, 또 그것을 근거로 일본과 협상을 진행할 능력도 없었다.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일본 관방장관은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 구 일본군이 관여했다고 발표했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일본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실 한국 정부는 일제하 위안부 동원에 대한 기초 사료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일제의 조선인 재산 약탈, 강제동원, 위안부 동원,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독립운동 및 친일파 문제, 그리고 독도문제 등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한국 측이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이 모든 기초 자료와 지식 중 정부가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한 것은 거의 없었다. 대일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미관계에서는 더 심하다.
한국 문제에서도 그렇다. 1990년대 말 <전쟁과 사회>를 집필하던 중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 자료를 찾아보니 그때까지 전쟁을 거친 한국인 상당수의 삶을 고통에 빠트린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해 정부는 물론 학자들 중에서도 연구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후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어 조사를 하다 보니 국방부와 경찰의 공식 역사는 거의 엉터리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굴절된 한국 근현대사, 국가폭력과 전쟁, 군사독재, 돌진적 산업화 과정에서 회복할 수 없는 피해와 상처를 입은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울고 외쳤지만, 김대중 정부 이전의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외면했다. 90년대 이후 시민·인권운동은 그들의 울음을 외면할 수 없었던, 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은 극소수의 청년들이 외롭게 응답한 몸짓이었다. 그리고 극소수의 재야 연구자들이 정부의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은 채 자발적으로 축적한 자료들이 오늘 국가 정책과 외교의 큰 거름이 되었다.
정부나 정치권이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극소수 활동가나 연구자들의 고군분투는 정부 부서의 일상 활동, 그리고 국립대학의 공식 아카이브와 강좌나 공식 연구센터의 중심적인 임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30년이 더 지난 지금 역시 한국 정부 어디에도 여러 식민지 과거사, 전쟁 분단 피해나 인권침해 사실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부서가 없고, 어느 국립대학에도 관련 연구소나 자료 센터, 담당 교수가 없다. 그런데 지난 국회에서 ‘여성인권평화재단’ 설립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법’ 개정안은 미래통합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언론은 문제가 터지면 “어디 전문가 없나” 하며 극소수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을 못살게 군다.
코로나 방역 성공으로 국격이 크게 높아진 한국이 장차 제대로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는 바로 20세기 한국인들이 겪은 고통을 세계화·보편화하고, 아직 한국 정도의 해결 단계에까지 오지 못한 대부분 나라의 활동가, 전문가들을 불러서 함께 연구하고, ‘인권과 평화’라는 가치를 재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
윤미향 의원이 정의기억연대 운영 과정에서 비리를 저질렀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고, 이번 기회를 거울삼아 다른 시민단체도 회원과 기부자의 감시 속에서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수언론들이 이 문제를 들추어 공격하려면 국가의 직무유기 상태에서 외롭게 이 일을 끌어안아온 시민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지금의 무차별적인 폭로는 국가를 대신해서 대일 과거사 문제를 끌어안아온 시민운동가와 이름 없는 공공지식인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공적인 일에 헌신해온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모욕함과 동시에 이런 활동에 감동하여 함께할 의지를 갖는 청년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물론 상징적 활동가 한 사람을 의원으로 발탁하여 대일 과거사 관련 정책 결함을 보완하려 한 여권의 행태도 못마땅하다. 정치권의 임무는 정부가 할 일을 대신 하는 시민운동을 지원하고 공공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학문 인프라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제 ‘의병’이 ‘관군’을 대신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언론의 감시와 비판은 위안부나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삶을 외면해온 정부나 정치권을 향해야 한다.
김동춘 ㅣ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한겨레 2020.06.02.
오보의 기억
“선장 백○○씨 살아있다.” 27년 전 그 일은 바로 전에 일어난 사건인 양 눈앞에 나타났다. 디지털은 과연 ‘영원한 현재’를 빚어내는 기술이었다.
신문 지령 1만호를 맞아 <한겨레>는 인터넷 서비스가 없던 시절의 기사를 디지털로 변환해 지난달 27일부터 서비스하고 있다. 1988년 창간호부터 2004년 말까지의 신문 기사 검색이 가능해졌다. 그 때문에 부끄러움과 고인에 대한 죄송함의 딱지가 내린 필자의 오래전 기억도 더 이상 자료실의 곰팡이 핀 신문 더미에 숨어 있을 수 없게 됐다.
지령 1만호를 맞은 한겨레는 창간호 부터 2004년 말까지의 신문기사를 디지털화해 5월27일 부터 제공하고 있다.
무려 292명의 생명이 스러진 1993년 10월의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참사 5일 뒤 배와 함께 주검으로 인양될 이 배의 선장이 사고 수역에서 빠져나와 “살아있다”고 한 보도는 언론학과 강의실에서 종종 인용되는 오보 사례이다. 4년차 사회부 기자였던 필자는 사고 직후 짜인 특별취재반에 편성돼, 수사본부가 차려진 전주지검 정주지청(현 정읍지청)으로 내려갔다. 사고 이튿날부터 서해훼리호가 향해 가던 전북 부안군 위도 선착장 주변 주민들 사이에는 “백 선장을 목격했다”는 놀라운 소문이 돌았다. 필자는 담당 부장검사를 스토킹하듯 따라다니다 “수사해볼 생각”, “지명 수배할 계획”이란 말을 듣고 득달같이 편집국에 보고했다. 그렇게 오보에 한 발을 담갔고, 그 뒤 사흘간 국내 대부분 언론이 달려들어 온갖 추측성 기사를 쏟아내는 보도 전쟁이 이어진다.
돌이켜 보면 선착장 주변 주민들의 목격담을 시간을 두고 확인했다면 피할 수 있는 오보였다. 주민이 본 사람은 백 선장과 외모가 비슷한 다른 인물이었음이 며칠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기사 제목도 ‘백 선장 봤다는 주민들 목격담 나와’ 정도가 최선인 것을 “살아있다”고 따옴표로 보도해 강렬한 인상을 줬다. 기자보다 나은 정보를 갖고 있지도 않은 검사의 말을 듣고 ‘확인’이라며 스스로 공신력을 부여한 것도 잘못이었다.
자주 잊게 되는 원칙이지만, 언론은 취재원이 어떤 말을 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내용의 진위도 최선을 다해 확인해야 한다. 기자는 미확인 정보를 퍼나르는 사람이 아니라 보도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고 사실을 검증하는 전문 직업인이다. 취재원의 말이 허위로 드러났을 때, 말한 사람이 공인이어서 발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기사가 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보도한 언론사는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취재원이 한 말을 확인하지 못했을 때 언론은 흔히 큰따옴표에 그 말을 넣는다. 이렇게 하면 판단은 독자 몫이란 신호를 주면서도, 읽는 이의 시선은 강하게 끄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뉴욕 타임스> 같은 언론사는 ‘제목에 따옴표를 써서는 안 된다’는 편집 지침을 마련해 두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언론의 따옴표 사랑은 유별난 면이 있다. 지난해 ‘좋은저널리즘연구회’가 2016년 기사를 통해 한국 10대 일간신문과 뉴욕 타임스가 제목에 따옴표(작은따옴표 포함)를 쓰는 비중을 조사해 보니, 한국 일간신문은 10개 가운데 6개꼴인 59.1%인 반면, 뉴욕 타임스는 2.8%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영국의 <더 타임스>는 따옴표 제목이 하나도 없어, 따옴표 사용이 불가피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한겨레는 지난달 말 “윤석열도 별장에서 수차례 접대/ 검찰, ‘윤중천 진술’ 덮었다” 기사(2019년 10월11일치)의 부정확함에 대해 사과했다. 사과문에서 밝혔듯이 취재원이 한 말의 내용 확인이 불충분했고, 인용부호를 써 과장된 제목을 뽑은 것 등이 원칙을 벗어났다. 이번 사과는 취재보도준칙을 전면 개정한 것과 함께, 정정과 사과에 주저하지 않는 신뢰의 언론으로 거듭나겠다는 한겨레의 다짐을 표현한 것이다. 한겨레가 권력에 굴복한 것도, 윤석열 검찰총장에 관한 후속 취재를 그만둔다는 뜻도 아니다. 현직 검찰총장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휘하 조직에 형사고소를 하는 게 타당했냐는 의문도 여전하다. 진실보도에 매진하는 일이 남았다/이봉현 ㅣ <한겨레> 저널리즘책무실장(언론학 박사) 한겨레 2020.06.02.
2020년 미국의 항의 시위와 한국 언론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와 백악관의 대응이 심상치 않다. 사건이 발생한 미니애폴리스에서 촉발된 시위는 이제 약 30여개의 도시로 확산 중이다. 최근 보도된 미국 내 항의시위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보면 흡사 코로나19 확산 지도로 착각할 정도다. 코로나19 감염병과 항의시위라는 두 사회 재난 상황이 중첩되고 있는 형국이다.
며칠 동안 미국의 항의시위를 보도하는 외신과 국내 언론을 보면서 데자뷰처럼 떠오른 사건이 있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폐허가 되었던 뉴올리언스의 악몽이다. 재난 초기 피해 상황의 중계에 집중하던 언론은 시간이 흐르며 약 6만 명에 이르는 이재민이 대피한 슈퍼돔과 대피소를 찾지 못한 시민들이 산재한 시가지로 눈길을 돌렸다. 언론은 기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슈퍼돔에서 들려오는 온갖 풍문과 미확인 전언으로 강간과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나마 재해를 피해간 시가지에서는 상점 약탈과 강도가 자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물론 시민들의 항의시위도 벌어졌다. 피해 지역 뿐 아니라 뉴올리언스의 이주민 계층에 대한 지원 차별과 혐오에 대한 항의가 그것이었다.
이 아비규환의 상황을 보도한 언론의 키워드들은 2020년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다. 폭동, 약탈, 폭력시위, 유혈시위 등의 단어가 기사의 헤드라인에 등장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 외신과 국내 언론의 보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언론이 재미 한국인의 상황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미 폭동 확산에 한국 상인도 피해”라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은 항의시위의 일면만을 보여주고 있다.
15년 전 뉴올리언스 사태와 2020년 인종차별 항의시위의 또 다른 유사점은 바로 정부 대응에 있다. 무엇보다 며칠 전 트위터에서 경고조치를 내린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은 시작된다”(When the looting starts, the shooting starts)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대표적인 예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단지 경찰의 관행적인 과잉진압만의 문제가 아니다. 법과 제도에서는 평등이 명시되었어도 그것이 행정과 집행에서 어떤 차별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성찰과 해법의 요구가 더 중요했다. “Black Lives Matter”는 피케팅 문구일 뿐 아니라 사회운동을 가리키는 명사이기도 하다. 뉴올리언스 사태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슈퍼돔과 시가지에서 약탈과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넘쳐나자 주지사와 시장은 수색과 구조활동을 접고 약탈과의 전쟁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인명을 구하는 대신 사유재산 보호에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트럼프의 발언은 전형적인 ‘엘리트 패닉’을 보여준다. 대규모 시위, 특히 지금처럼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시위는 불특정 다수의 여러 행동이 뒤엉켜 나타난다. 거리 행진, 거리 연설, 경찰서 등 관공서 앞 군중집회, 경찰과의 충돌 등 다양한 항의행동 중 무엇에 주목하고 부각시키는지는 바로 언론의 선택이다. 문제는 이렇게 일부 행동에 집중한 언론 보도가 대통령 뿐 아니라 정부 관료를 ‘시민들이 공황에 빠질 것’이라는 공황 상태로 몰아간다는 점이다. 항의시위의 행동이 아닌 그 동기와 요구에 대한 정보는 이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반대로 대통령의 발언이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한 설명과 분석은 시민에게 부족하고 왜곡된 정보와 상상을 제공하게 된다. 언론의 영향력은 현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도하는가보다 정부와 시민, 국회와 시민, 또는 다양한 인종과 계층 간의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있다.
미국의 항의시위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미국 언론의 시위보도에서 한국 언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부의 발언과 행동을 부각함으로써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를 가르는 사회적 관계의 설정은 전혀 다른 사건에서 만연하고 있다. 바로 정의기억연대 관련 언론보도가 그것이다.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전문위원/ 미디어오늘 2020.06.02.
반민주적인 ‘사용후핵연료 공론화’를 중단해야
체르노빌 사고가 난 지 34년이 지났지만 체르노빌 원전 반경 30㎞ 이내 지역은 지금도 사람이 거주할 수가 없다. 원전 반경 20~30㎞는 원전사고 시 주민 대피와 보호 조치가 이루어져야 할 최소한의 지역으로 방사능방재법에 ‘방사선비상계획구역’으로 규정되어 있다. 원자력안전법에 의해 원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과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에 대해 ‘방사선비상계획구역’ 내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월성원전 방사선비상계획구역 내에는 경주, 포항을 합해 약 5만6000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인근에도 울산 주민 102만명이 산다. 그런데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재검토위원회)는 울산 주민을 배제하고 경주 주민만을 대상으로 월성원전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건설에 대한 의견수렴 절차를 강행하고 있고, 울산 북구 주민들은 6월5~6일 민간 주도로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루어진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와 ‘고준위폐기물 관리정책’에 문제가 많았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문재인 정부에서 이를 백지화하고 전면 재검토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 ‘재검토위원회’다. 그런데 재검토위원회는 위원회 구성에서 지역주민과 시민단체를 배제해 출발부터 공정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1월 재검토위원회 전문가 검토그룹 34명 중 11명이 재검토 과정이 요식행위에 그치고 있다며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중단을 촉구하며 검토그룹 탈퇴를 선언했다.
많은 비판을 외면하고 산업통상자원부와 재검토위원회는 일정을 강행해 4월17일부터 ‘전 국민 대상’으로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시설의 부지 선정에 대해, ‘원전 소재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 추가 확충 여부에 대해 각각 의견수렴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했는데 이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 국민 대상’ 의견수렴을 한다면서 시민참여단 549명을 선정했다. 재검토위원회는 시민참여단에게 ‘조사에 관한 모든 사항을 누설하지 않고 엄격하게 비밀을 준수할 것을 서약한다’는 보안서약서를 요구했다.
재검토위원회는 ‘원전 소재 지역주민’ 대상 의견수렴을 한다면서 고리원전의 경우 원전 소재 지역인 ‘기장군’ 주민만을 대상으로 의견수렴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고리원전 방사선비상계획구역 안의 울산 주민 102만명을 배제한 것이고 해운대구 등과 경남 지역주민도 배제한 것이다. 강정민 전 원자력안전위원장은 국회 강연에서 고리원전 3호기 사용후핵연료 저장조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한반도 절반이 방사성물질에 피폭되고 최대 약 2400만명이 피난해야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용후핵연료는 이렇게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도 한수원 홍보물은 사용후핵연료를 커피를 내리면 나오는 원두 찌꺼기에 비유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고 이해관계 당사자의 참여가 공정하게 보장되지 않은 재검토위원회의 사용후핵연료 엉터리 공론화는 중단돼야 한다.
김영희 | 변호사·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 대표 경향 2020.06.03
소녀상 중심주의
예술가가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실험하는 전위한테 시장은 자리를 주지 않는다. 많이 팔려면 과녁이 크고 확실해야 한다. 도리가 없다. 예술가는 살뜰할 필요가 있다. 창작물 소유권 챙기기는 당연하다. 대인배처럼 굴다 굶어 죽기 십상이다.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저작권이 없을 리 없다. 한복을 입고 맨발 뒤꿈치를 든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 소녀. 어깨에는 새, 옆 자리에는 빈 의자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물 정보에 조각가 부부가 세세하게 등록해 둔 소녀상의 디자인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 하나 둘, 예외가 쌓이다 보면 결국 원칙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줄곧 자비는 없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제1호 소녀상이 세워진 지 근 2년 만인 2013년 여름, 교육용이니 괜찮을 줄 알고 서울 서초고가 허락 없이 원조를 베끼려다 작가의 경고에 포기한 뒤 광주와 전남 나주시 등의 소녀상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윤미향 블랙홀’ 탓이어도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 최근 강원 태백시와의 시비에 새삼 야박하다 힐난하는 사람들이 작가는 오히려 야박할지 모르겠다.
조각은 힘이 셌다. 미학적 평가는 기자에게 주제 넘는 짓이다. 하지만 큰 부분 소녀상의 인기가 반일 민족주의 덕분일 거라는, 편승의 결과인 듯하다는 짐작은 아무래도 사실 같다. 우리 민족은 제국주의 일본에게 농락 당한 피해자이고, 수난사의 증인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라는 게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한국인 일반의 신념이다. 고통의 집단 파토스(정서)에 업혀 물신화한 소녀상은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우리에게는 소녀상밖에 안 보인다. 3년마다 열리는 일본의 대표적 국제 미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지난해 파행한 건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짓밟는’ 소녀상이 출품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가 된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不自由展)’에는 소녀상과 함께 히로히토 전 일왕의 사진을 태우는 영상 전시물도 포함됐고 일본 우익은 그 불온에 더 격앙했다. 유명세 피해자연(然)으로 조각가의 지명도는 더 높아졌고 조각과 민족 간 결속도 단단해졌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 침해로 꾸짖을 일이었다.
‘우리라서 옳다’는 게 진영 논리다. 진실ㆍ정의의 기준이 한갓 편협한 이해관계라니. 국민을 ‘정치 종교’에 빠뜨리기 위해 국가가 동원하는 대표적인 숭배 대상 중 하나가 민족이라는 게 역사학자 임지현의 주장이다. 논객 진중권은 최근 “‘국가주의 남성 권력으로부터 여성과 개인을 보호한다’는 인류 보편 가치를 추구하는 만큼 위안부 운동은 일본인마저 우리 편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며 “일본 증오를 부추기는 민족주의 선동은 퇴행”이라 일갈했다. 한일전(戰) 프레임을 벗어야 한다.
추상은 실존을, 전체는 개인을 소외시키는 법이다. 소녀상이 기억의 수단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청동상에 목도리를 둘러주는 연민이 할머니를 따뜻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외려 망각에 필요한 알리바이를 제공할 따름이다. 현실에서는 구체적ㆍ입체적인 위안부 피해자 개인의 삶과 사정이 정형화한 민족 국가 서사로 환원될 수는 없다.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가상 위안부의 상(像)이나 민족의 이익과 운동 명분에 맞지 않으면 실재 당사자가 잘려 나갔다. 배봉기가 그랬고, 심미자가 그랬다.
그리고, 이용수가 그럴 위기다. 전형화만 문제가 아니다. 스테레오타입 자체도 문제다. 왜 하필 소녀였나. 클리셰였다면 일단 반(反)예술이다. 무의식적이거나 안이한 가부장제 순결 이데올로기의 구현이라면 반(反)페미니즘이다. 끌려가지 않았다면, ‘자발적 매춘부’였다면 피해자가 아닌가. 소녀상 틀에 맞춰 다양한 피해자 목소리를 재단하고 그들을 대상화한다면, 피해자를 주체화하는 피해자 중심주의도 아니다. 소녀상 중심주의일 뿐이다.
권경성 문화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한국
인구절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올 것이 왔지만, 예상보다 더 빨리 왔다. 지난주에 일제히 보도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인구감소 말이다. 통계 사상 최초로 ‘자연감소’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30년경이라던 그동안의 예측에서 10년이나 앞당겨졌다.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는 동안 최대 수백 만 정도에 머무르던 한반도의 인구는 1900년대 초반 공식적으로 1000만을 넘는다. 그리고는 불과 한 세기 지난 2012년에는 다섯 배인 5000만까지 급성장했지만, 폭주하던 추세가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완화되더니 결국 예상보다도 빨리 감소추세로 들어선 것이다.
인구감소는 대부분 선진국들이 겪는 운명(?)이라 생각하며 넘겨보려 해도 그게 쉽지 않다. 정보산업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총인구는 국력의 바탕으로 아직도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총인구 감소도 문제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 최초일지 모를 0점대 출산율이 더 큰 충격이다. 출산율의 저하는 경제활동인구의 감소와 노령사회로 직진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면서 진행되면 충격에 대비라도 하겠건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정확한 인식과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인구문제를 다루어 온 방식이나 자세를 보면 과연 이런 역사적 위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첫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인구증가를 추구하는 정책 관습이다. 특히 지자체의 정책들이 그러하다. 대표적인 것이 각 지역의 밑그림이라 할 수 있는 도시기본계획이다. 개발을 통해 20년 뒤에는 지역 인구를 두 배로 증가시키겠다는 야심찬(?) 구상이 아직도 버젓이 들어가곤 한다. 그러다 보니 전국 인구를 합하면 무려 2억이 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목표를 달성한 지자체가 있다는 소식은 아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인구의 양적 증가에 그토록 집착하는데 현실은 가파른 감소세라니,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구문제를 가지고 실속 없는 정책적 ‘블러핑’이나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둘째는 인구감소에 대한 지나친 센세이셔널리즘이다. 최근에 떠도는 ‘한국인 멸종설’이 그 대표이다. 추세대로 가면 2700년대에 한국인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분석인데 심지어는 국회 보고서에도 인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너무도 뜬금없다. 추세 연장에 의한 인구예측기법이라고 해봤자 고작 몇 십 년 정도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세상이 변해도 몇 번은 변할 몇 세기 이후는 그저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위기론을 넘어 종말론까지 동원하는 것은 현실을 마주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현실감을 앗아가 버릴 뿐이다.
마지막으로는 인구증감을 둘러싸고 있는 뻔한 ‘세대 논리’이다. 말하자면 ‘국력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더 생산(?)에 힘써야한다’는 식이다. 단언컨대 여기에 설득되어 아이를 충분히 낳아 줄 젊은 층은 거의 없다. 그 속에 담긴 일종의 세대 논리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노후를 의탁하기에 충분할만한 숫자로 있어달라는 기성세대의 그런 요구로 들릴 뿐이다. 문제는 한해에도 백만 명 가까이 태어나던 베이비부머 세대, 이 역사적으로 무거운 머리가 역사상 가장 가냘픈 허리 위로 올라가는 형국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결코 강한 허리가 못된다. 숫자도 적지만 이들이 겪을 환경이 생각보다 훨씬 열악하다. 역사상 최초로 아버지보다 아들의 소득이 줄어드는 세대이다. 한 십년 일하면 집 한 칸은 구하던 과거와는 달리, 배울 거 배우고 평생 소득을 모아도 자기 힘으로는 아파트 한 채 장만이 불가능한 세대이다. 기성세대가 ‘나 때는 말이야’라고 운을 떼기 이전에 ‘이 때를 아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아야 할 지경이다. 환경도 다르고 살아가는 문법 자체가 다른데 여전히 성장기의 논리만을 들이대니 감동도 설득력도 없는 ‘꼰대질’ 에 불과하게 되고 만다. 더구나 이런 ‘꼰대질’로 인구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인구는 어떤 면에서 가장 정직한 숫자이다. 늘어날 만하니 늘어나고, 줄어들 만하니 줄어드는 것이다. 그 시대의 사회문화 환경이 제공하는 용량만큼만 증가할 뿐이다. 또한 급하다고 해서 당장 풀리는 문제도 아니다. 이삼십년 전부터 만들어온 사회 환경의 결과가 지금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이삼십년 후를 기약하면서 씨앗을 뿌리는 수밖에는 없다. 숫자로 성과로 다룰 것도 아니고 위기감 고취로 해결할 것도 아니다. 다음 세대들에 대한 공감과 그들이 살아갈 환경에 대한 개선 없이 출산이라는 열매만 쏙 빼먹을 수도 없다. 다시금 기본으로 돌아가 가족, 남녀관계, 공동체, 그리고 교육, 주거와 같은 요소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개선해나가는 것 외에는 어떤 지름길도 있을 수 없다.
김주일 한동대 공간환경 시스템 공학부 교수 경북도민일보 20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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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뉴딜’의 선행 조건들
포스트 코로나와 그린 뉴딜. 뜨겁고 무서운 주제다. 포스트까지 생각할 겨를 없이 코로나19 와중에 모두 어렵다. 그럼에도 지난 12일 국무회의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판 뉴딜’에 “그린 뉴딜이 포함돼야 한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이후 그린 뉴딜이 회자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과연 그 정의가 무엇인지, 대통령의 수사로 끝나지 않게 제대로 이행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통상 뉴딜은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으로 쓰이는데 현재와 같은 경제구조 속에서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생산활동을 줄이는 건 대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후위기도 막고 생산활동도 높이는 묘안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특히 정부의 그린 뉴딜 목소리에 어정쩡한 입장에 있는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2015년 출간한 스톡홀름 대학 요한 록스트룀 교수의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Big World Small Planet)>가 그린 뉴딜의 기초체력을 높이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책에 따르면 2014년 5월에 열린 스톡홀름 식량포럼에서 지속 가능 발전 세계기업위원회(WBCSD) 의장 피터 베커는 “기업의 사회적 책무는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세계 경제의 10%를 좌우하는 200여개 다국적 기업들의 네트워크 수장이 나서서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고 화석연료 탓에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더 이상 지구를 기업 외적인 이슈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2014년 다보스포럼에서 니콜라스 스턴경이 지적한 대로 지속 가능성은 세계 성장의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일한’ 이야기가 되었다. 기후위기의 겨우 한 갈래에 불과한 코로나19로 벌벌 떠는 이 시점에 새길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획재정부가 중심이 되고 환경부도 TF를 꾸리고 있는 그린 뉴딜 정책에 기대와 우려가 함께하고 있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낯설다는 이유로 일단 배척당하고 욕을 먹는다. 피터 드러커 교수는 “모든 사람이 환영하는 프로젝트라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관성의 허들을 깨고 넘어가야 하는 또 다른 과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린 뉴딜을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지구자원을 포함한 환경을 보호의 대상으로 격리시키는 고정관념을 깨는 일일 것이다. 다시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여태 한쪽에는 자연이 다른 한쪽에는 사회가 자리한 세상에서 살아왔다. 환경 대 발전. 그런데 그 두 가지는 결단코 만나는 법이 없다. 지구자원은 외부 효과가 아니다. 모든 부의 원천인 지구 위에서 살아가면서 그것을 어떻게 ‘외부’라고 선언할 수 있겠나!
사족인데, 2018년도 우리나라 기업이 집행한 사회공헌 예산은 1조7000억원 정도 된다. 그중 환경분야는 동물까지 포함하여 겨우 4%에 불과하다. 그린 뉴딜의 큰 물결 속에서 기업이 정부와 함께 지구자원을 지키면서 새로운 부와 일자리를 창출하길 바란다. 손톱만 한 사회공헌 예산이지만 이 또한 지구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전환되길 바란다. 이제 지구는 ‘기업과 한 몸’이다. 최고경영자(CEO)의 E는 ‘Ecology(생태)’여야 한다. 죽은 지구에서 기업은 없다.
이미경 환경재단 상임이사 egreen@greenfund.org 경향 2020.06.05.
경험하지 못한 여름’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고 신영복 선생은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여름 징역’의 고충을 이렇게 묘사했다. 폭염이 열악한 환경 속 가난한 이들에겐 창살 없는 감옥이 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에어컨 등 문명의 이기를 갖춘 공간에서 폭염과 열대야를 보낼 일반 시민들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쪽방촌 주민들에게 여름은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지자체들은 취약계층의 ‘일상 속 여름 징역’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각종 대책을 내놨다. 잠깐이나마 더위를 피하고 잠도 청할 수 있도록 복지관, 경로당 등에 (야간) 무더위쉼터를 만드는가 하면 물을 뿌려 더위를 식히는 쿨링포그, 바닥분수 등도 설치했다. 그런데 올해는 이런 ‘여름 피난처’마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기존 대책들이 거리 두기를 어렵게 하는 데다 바이러스의 온상이 될 수도 있어 지자체마다 전전긍긍하고 있다.
4일 경상도와 전라도 곳곳에 올해 첫 폭염특보가 발령됐다. 올여름 폭염과 열대야 일수는 평년의 2배 이상이 될 것으로 예보됐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이미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맞는 첫 번째 여름으로,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힘든 여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와 폭염은 취약계층에 더욱 가혹하다.
신영복 선생은 이어 말한다.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 그러나 머지않아 조석(朝夕)의 추량(秋凉)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도, 폭염도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이 있어야 이길 수 있다. 이번 여름이 ‘경험해보지 못한 집단지성과 연대의 여름’이 되길 기대해본다. 송현숙 논설위원 song@kyunghyang.com 경향 2020.06.05.
‘뉴딜’도 ‘그린’도 없는 그린뉴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2020년도 제3회 추가경정예산안 사전 상세브리핑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도걸 예산실장, 홍남기 부총리, 안일환 2차관, 최상대 예산총괄심의관. 연합뉴스
어떤 용어가 널리 유행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시대적 상황에 얼마나 부응하는지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이 어느 정도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해석적 유연성은 더 많은 사회 그룹을 이해당사자로 포괄하도록 함으로써 해당 용어의 영향력 확대에 기여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각자 원하는 의미를 멋대로 부여할 수 있음을 뜻하진 않는다. 해석에 차이가 있더라도 공유되는 최소한의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지나치게 벗어나는 활용이 잦아진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용어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지난달 대통령이 ‘그린뉴딜’ 검토를 지시한 후 정부와 여당이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면서 그에 관한 논의들이 쏟아지고 있다. 언론들은 그린뉴딜의 일환으로 어떤 사업에 어떤 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질 것인지를 보도하기에 분주하다. 그런데 정작 오래 전부터 그린뉴딜의 필요성을 주장해 왔던 이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이중 적지 않은 수는 아예 정부와 여당이 제시하고 있는 정책을 그린뉴딜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에 전제된 기본 시각이 앞서 언급한 해석적 유연성의 범위마저 넘어 버린 탓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미국의 루스벨트 정부가 추진한 ‘뉴딜’은 공공투자로 몇몇 분야의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등 공공근로사업을 통한 실업자와 빈곤층 구호 외에도 상업ㆍ투자은행 분리, 증권시장 감시 등 금융규제, 기업의 과당경쟁 억제, 부유층 증세 등 세제개편, 저소득층 주택담보대출 제공, 노동자 단결권ㆍ단체교섭권 보장, 최저임금제, 노동시간 제한 등 노동권의 강화, 실업보험과 노령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의 확대를 아우르는 제도 개혁들이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같은 시기 산업ㆍ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국가 개입, 복지의 대폭 확대와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 운영을 긴밀히 연계한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대응에 비하면 온건한 것이었다. 뉴딜의 경험은 이후 공정 분배와 사회ㆍ경제적 정의를 위해 경제 권력의 정치적 통제가 필요함을 주장하는 미국 진보주의의 성장에 기여하게 되지만, 당시 기업 규제의 강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경기회복의 효과도 제한적이었고, 그나마 흑인ㆍ소작농ㆍ도시빈민을 배제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뉴딜은 사회ㆍ경제구조를 상당 정도 변화시키는 종합적 정책 패키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위기에 직면하여 ‘그린뉴딜’의 명칭이 제기된 것은 이처럼 사회ㆍ경제 전반의 개혁을 추진했던 뉴딜의 상징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린뉴딜의 주창자들은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위기가 요구하는 구조 개혁의 수위가 1930년대 뉴딜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폭이 넓고 깊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경제체제와 점차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양상을 감안하면, 2050년까지 탄소배출을 제로로 감축하는 동시에 구조화된 불평등을 타개해 나가는 것은 사회ㆍ경제구조의 전면적이고도 ‘정의로운 전환’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점들을 고려할 때 그린뉴딜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접근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각 부문별 탈탄소화의 기준이 되어야 할 탄소배출 제로 목표조차 제시되지 않고 있다. 사회ㆍ경제 전 부문의 탈탄소화,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실업과 지역경제 침체에 대한 대응 등이 요구하는 다양한 구조 개혁이 포함되어야 할 그린뉴딜을 ‘한국판 뉴딜’ 내에 디지털 뉴딜과 병렬 배치시킨다는 발상도 희한하다. 그린뉴딜을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녹색산업 정책으로 좁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뉴딜’도 ‘그린’도 없는 그린뉴딜을 충분한 사회적 토론과 의견 수렴 절차도 없이 이렇게 무리하게 추진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김상현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한국 2020. 06.07
이해찬 대표의 마지막 임무
나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한명숙 전 총리를 존경한다.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들이 아닌가. 그분들 및 일각의 시민정치 운동 요청으로 잠시 정당 노선 정립에 관여한 적이 있다. 내가 당시 제안했던 ‘시민 네트워크 정당’ 이론은 오늘날 민주당의 노선에 약간은 스며들어 있다. 그 덕분에 강준만 교수님으로부터 나의 이론이 한국 실정에는 맞지 않는다고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요즘 들어 자꾸만 그가 옳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회한이 든다. 굳이 변명하자면 지금 민주당의 현주소는 아직은 내가 제안했던 정치 모델로부터 거리가 있다. 이해찬 당 대표의 마지막 임무는 일단 ‘시민 네트워크 정당’이라고 하는 민주당 원래의 화두를 다시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어 8월 선출될 다음 당 대표는 그 토대 위에서 ‘K방역’처럼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유주의 미래 정당의 모델을 실험했으면 한다. 열린우리당 시절 혼란의 시대로 퇴행하지 않으면서도 다원성과 절차적 정당성(due process), 공적 책임성이 살아있는 정당 말이다. 지금 민주당은 다음의 4가지 질문을 던지며 미래 가치와 정당 노선 논쟁을 펼칠 때이다.
지금 이해찬의 민주당은 당의 단일한 정체성과 기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진성정당 노선을 추구하는 건가? 내 기억에 민주당 노선은 의원들의 다원성이 존중되는 원내 정당이다. 원내 정당과 강제적 당론은 물과 기름이다. 아니 지금 민주당이 제일 강조하는 상시국회가 작동하려면 개별 의원들이 때로는 강력한 목소리도 내고 교차 투표도 해야 한다. 나는 미국 민주당 내 도전자이자 미래 가치인 코르테스 하원의원을 리더이자 현재 가치인 펠로시 원내 대표가 징계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많은 이들이 당론이 되기에 위험천만하다고 했던, 그러나 결과적으로 옳았던 IMF 재협상론은 김대중이란 도전자의 작품이다. 기존 진보의 관념으로 수용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국제정치의 고뇌가 들어있던 이라크 파병론은 노무현이란 도전자의 작품이다. 물론 열린민주당 트라우마는 이해한다. 나 또한 그 당시 분열적인 태도를 강력히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경선과 본선에서의 유권자의 최종 판단이 아니라 징계에 의한 해결방식은 원내 정당 모델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겐 십년 앞을 내다보는 김대중과 노무현 의원이 아직 없다. 정당 내 다원적 스펙트럼은 오늘날 정당 생명의 백신이다. 이해찬 대표는 원내 정당 모델을 다시 분명히 하고 다음 당 대표는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이해찬의 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의 ‘포용 민주주의론’(Inclusive Democracy) 가치를 기억하는가? 대통령이 이를 천명한 배경은 오늘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담론의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이다. K방역과 포용국가론은 한국의 훌륭한 소프트웨어로 발전시킬 만한 잠재력이 있다. 집권당은 당내의 다양한 견해를 포용하고 당 외부로는 그간 배제된 투명인간과 소수자들을 주체로 포괄하기 위한 가치논쟁을 해야 하지 않는가?
지금 이해찬의 민주당은 외부의 무책임하고 품위 없는 정치평론가들과 단호히 거리를 두며 무게 중심을 잡고 있는가? 시민 네트워크 정당으로의 확대가 곧 품위 없는 자들과의 거리 줄이기는 아니다. 물론 박근혜 정부 시절 그들이 전투적 투쟁을 통해 긍정적 역할을 수행했던 걸 나는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공적 책임 정당과 사적 평론가들 사이에는 분명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미국 시민정치운동의 상징인 무브온이 잘못된 길을 갈 때 오바마는 단호히 비판했다. 엘리자베스 워런이라는 걸출한 대선후보에게 막말하는 전투적 진영론자들에게 샌더스 후보는 그들은 나의 지지자가 아니라고 일갈했다. 현재 당의 리더십이 이런 태도로 전환될 때 이후 당 대표는 당 문화와 제도에서 더 발전적 관계정립으로 도약이 가능하다.
지금 이해찬의 민주당은 청년의 문턱을 대담하게 높이고 있는가? 나는 과거 시민정치 노선 제안 시 청년비례 제도를 밀어붙였다. 오늘날 민주당의 스타인 박용진 의원, 김해영 전 의원 같은 이들 20명만 나와도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 그리고 그다음의 미래는 밝다. 지금 이해찬 대표 체제는 청년과 초선 의원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고 다음 당 대표는 제도적으로 더 대담한 실험을 관철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비록 아쉬움도 많지만 이번 코로나19 정국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럼 다음 과제는 서구 정당보다 더 자유주의적이고 더 미래지향적인 정당의 세계적 모델이다. 민주화 운동의 걸출한 선배이신 이해찬 대표의 마지막 임무는 바로 그 넥스트 어젠다의 정지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경향 2020. 06.08
탄소 '펑펑' 건물·자동차 놔두고 그린뉴딜?
[초록發光] 그린뉴딜이 진짜가 되려면
한국에서도 그린뉴딜이 부상하고 있다. 코로나19 재난으로 침체한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 정부가 한국판 뉴딜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디지털 뉴딜' 뿐이었다. 그러다가 대통령이 직접 그린뉴딜을 언급하고 환경부, 산업부, 국토부, 중기부에 검토 보고를 요구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이 한국판 뉴딜의 초점이 흐려진다며 반대하고 나섰지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결국 한국판 뉴딜에 그린뉴딜도 포함됐다(청와대 김상조 정책실장의 그린뉴딜 반대 입장이 정권 실세들의 태양광 산업에 대한 이익 추구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작년부터 미국에서 거세게 일어난 그린뉴딜의 바람이 지난 총선에 정의당과 녹색당, 그리고 민주당의 정책 공약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이렇게 청와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뜻 환영하고 반길 수가 없다. 그린뉴딜이 태평양을 건너고 청와대까지 들어가면서 거론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해졌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제레미 리프킨과 같이 기술과 시장에 우호적인 개혁주의자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그린뉴딜만을 듣고 있다(민주당이 총선에서 그린뉴딜을 제시하면서 그나마 언급하던 기후위기나 배출제로와 같은 말도 싹 사라졌으니, 리프킨 이야기라도 제대로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로테스(AOC) 하원의원과 민주당 대선후보로 뛰었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주장하던,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을 동시 해결하는 그린뉴딜이라는 급진적 이야기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일자리 정책으로 이해되는 그린뉴딜은 지금까지 해오던 정부의 여러 정책과 사업들을 새롭게 묶는 포장지가 되었다.
한국 정부는 그린뉴딜이 무엇인지 명확한 정의조차 제시하지 못했다. 그린뉴딜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의 말에, 정부 관계자는 '토건산업을 뺀 녹색성장 정책의 업그레이드'라고 답했다. 이명박의 녹색성장에서 4대강 사업을 빼고 이름만 바꾼다고 그린뉴딜일 수 없다. 2008~2009년의 세계 금융위기 시기를 배경으로 처음 제시되었던 그린뉴딜(혹은 한국판 변형인 녹색성장)이 기후위기 인식이 전면화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요구가 분출하는 현재의 그린뉴딜과 같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 재난을 경과하면서 새로운 정상 상태(뉴 노멀)를 찾아가는 와중에 논의 주제로 부상한 게 지금의 그린뉴딜이다. 단순히 토건사업을 빼고 리모델링을 좀 더 열심히 한다고 그린뉴딜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명확한 정의도 없는 상태에서 정부 관계자들은 그린뉴딜 사업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묻기 바쁘다. 정책 기회의 창이 열리니, 여기저기에서 그린뉴딜에 적합한 사업이라며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도 없지 않겠지만, 문제는 제안들을 평가하고 고를 기준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다. 최근 총리가 주관하는 목요 클럽에서 민주당 실세 의원이 '산악 관광'을 그린뉴딜 사업으로 들고 나왔다. 산악 관광을 명분으로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추진하다 큰 사회적 갈등을 경험했던 역사와 교훈은 사라졌다. 뭐든 그린뉴딜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이런 사업이 그린뉴딜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나타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
왜 그린뉴딜이 필요하다고 했는지, 첫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가 삭제한 이야기들을 복원해야 한다. 유엔 사무총장조차 기후위기 상황이며, 1.5도 평균 기온 상승을 막기 위해서 2050년 이전까지 배출제로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 국제적 호소를 환기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한국의 2030년 온실가스 감축이 매우 불충분하며, 한국은 석탄발전 투자를 지속하는 '기후악당'이라고 비판한 사실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
이뿐만 아니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를 해결해야 할 정부의 노력이 얼마나 부실한지도 새삼 강조되어야 한다. 결사의 자유와 아동노동 금지를 위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한국이 국제적인 '노동악당'이라는 부끄러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하는 청와대와 정부가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기후위기 비상선언'이었어야 하며, 그린뉴딜은 배출제로와 사회적 불평등 해결을 목표로 한다고 천명하는 일이었어야 한다. 그린뉴딜의 방향, 규모, 속도 그리고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야 했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지난주에 토론회를 열고 '정의로운 그린뉴딜'의 정의, 목표, 원칙 등을 발표하고,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의 목소리로 아래로부터의 그린뉴딜은 무엇인지를 토론했다(애초에 그린뉴딜 개념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있어야 할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 원칙이 태평양을 건너 청와대에 들어서면서 싹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정의롭다’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토론회의 발표 내용 중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린뉴딜을 위한 수단으로 대규모 재정투자와 함께, 기존 체제를 위한 규제 강화, 그리고 민주적․전환적 역량 강화가 강조되었다. 특히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온실가스 배출을 지속하면서 이익을 얻어왔던 기존 체제를 해체하기 위한 정부의 규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재정을 투자하여 새로운 사업을 한다고만 해서 될 일은 아니다.
잊혔던 일 두 가지를 기억해보도록 하자. 우선 자동차 이야기다. 정부는 2015년에 녹색성장기본법을 개정하여(제47조 2항)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를 도입했다. 일정한 기준을 세워서 그 이상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차를 구입할 때는 돈을 더 내도록 하고, 그 이하로 배출하는 차를 구매할 때는 그 돈으로 지원하는 제도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적은 자동차 생산과 구매로 이행되도록 설계된 제도다. 그러나 정부가 관련 시행령과 시행세칙을 만들지 않아서 아직도 이 제도는 시행되지 않았다.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직무 해태의 이유는 간단하다. 온실가스를 줄이는 정책이 기업에 부담이 된다고 주장하는, 현대기아차와 같은 자동차기업들의 로비와 관료들의 온화한 태도, 그리고 국회의 침묵 때문이다. 이 제도를 시행하는 대신 정부와 협약한 배출 기준에 맞는 자동차를 내놓겠다는 자동차기업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린뉴딜로 뭘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탄소차 협력금제도를 당장 시행하는 것이라고 답해야 한다.
두 번째는 집 혹은 건물에 관한 이야기다. 2012년에 제정된 녹색건축물 조성지원법에는 부동산 거래 시 건축물의 에너지소비를 증명하도록 하는 규정(제18조)이 있었다. 건축물의 소유자 혹은 관리자는 건축물을 매매하거나 임대하려고 할 때 거래계약서에 건축물 에너지효율등급 평가서를 첨부하도록 했으며, 중개업자에게도 같은 의무를 부여했다. 건물의 벽체, 창호 등이 부실해서 에너지 낭비가 심할 경우에 매매 혹은 임대 가격이 높아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건물 사용자가 냉난방 등을 위해서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고 그 만큼 비용을 많이 지불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세입자들이 그렇다.
건축물 에너지소비 증명제는 단열이 잘된 벽체와 창호, 그리고 효율 좋은 보일러와 조명기구 등이 갖추어진 에너지 성능이 좋은 건물인지 아닌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여, 부동산 시장에서 세입자의 힘을 키워줄 있는 제도다. 반면 당연하게도 건물주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제도다. 건물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자신들에게도 부담스러운 규제를 피하려는 중개사업자의 강력한 저항으로 2015년 법이 개정되면서 이 의무가 사라져 약화되었다. 다시 그린뉴딜로 뭘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부동산 거래 시 건축물 에너지효율등급 평가서 첨부를 의무화하는 제도를 되살리는 것이라고 답해야 한다.
그린뉴딜,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처럼 이야기하면 이미 실패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고 사회의 부를 탐하는 기업들과 건물주들을 규제하지 않으면, 그린뉴딜이 아니다. 뉴딜은 '새로운 사회적 협약'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
한재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장/pressian 2020.06.08.
유토피아가 좌절된 시대에, '대변화'의 요청이 도착했습니다
자본주의를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파멸할 것인가
코로나19 시대에 우리에게 과거와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 낱말 가운데에는 '생태'가 있다. 올해 초에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할 때부터 자연과학자들은 이것이 기후 급변 같은 생태계 위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박쥐를 숙주로 삼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건너온 것은 중국인들의 기괴한 음식 문화 탓이 아니라 과도한 도시화로 숲이 줄어들고 야생동물이 인간과의 접촉을 강요당한 결과다. 또한 새로운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것은 기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생태계 위기가 선포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지난 세기 말부터 산업 자본주의와 자연 환경의 모순과 충돌이 지적됐고, 이를 가장 중요한 정치 쟁점으로 제기하려는 생태주의 흐름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골수 생태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인류는 이를 그리 급박한 문제라 여기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결국 지구 생태계의 한계를 넘어서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리라는 진단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늘 이는 다음 세대쯤에 닥칠 재앙이라 여기곤 했다. 생태주의가 대두한 지도 거의 두 세대 가까이 지났는데 지구 자본주의의 팽창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2020년은 이런 시대가 끝나고 미지의 새 시대가 시작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코로나19는 지구 위 거의 모든 곳에서 일상을 중단시켰다. 생태계 위기가 처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절박한 위협으로 다가왔고, 그간 우리 삶을 지배하던 무소불위의 기준과 가치, 목표들조차 이 위협 앞에 갑작스레 힘을 잃고 말았다.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지구 곳곳을 덮친 이상 기후도 일상에 위기의 그림자를 드리우기는 했지만, 코로나19는 이 점에서 특히 유별나다. 코로나19 대유행을 통해 지구 생태계 위기는 처음으로 온 인류에게 '나의 문제'로 엄습했다.
백신은 어쨌든 개발될 것이다. 어쩌면 치료약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1, 2년만 버티면 끝나고 말 사태는 아니다. 사스와 메르스가 코로나19로 돌아왔듯이, 기후 급변 같은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가 인류를 덮칠 것이다. 게다가 기후 급변은 반전의 기회를 벌써 저만치 따돌리며 더욱 가속화하는 중이다. 이런 까닭에, 2020년에 시작된 전 지구적인 일상의 위기감은 아마도 앞으로 계속 인류를 짓누르는 기본 정서가 될 것 같다. 우리는 '생태비상시대'에 진입하고 만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파멸할 것인가
생태비상시대는 인류사에서 처음 맞는 시대이고, 따라서 당연히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전에 없던 국면이다. 이 낯선 시대에는, 300여 년 전 북반구의 한 구석진 곳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후 최초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할 것인가, 끝낼 것인가"가 더는 미룰 수 없는 문제, 당장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로 제기될 것이다.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번영과 함께 항상 더 많은 파괴와 더 심각한 재앙을 수반하는 자본주의의 운명을 판결할 영광이 노동계급에게 있다고 내다봤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무덤 파는 이"라는 잊지 못할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계급에게는 자본주의를 끝낼 이유만큼이나 이 마지막 작별을 뒤로 마냥 미룰 이유 또한 있었다. 자본주의는 몇 차례 회복 불가능한 위기에 몰리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일자리,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마련하며 생명을 이어가는 놀라운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이 능력은 보통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불렸다. 일정한 성장 목표를 달성하기만 한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자본가들의 축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일자리 확대와 소득 개선을 통해 노동계급의 불만을 무마할 수도 있었다. 상황이 좋을 때에는 대다수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동시 성장을 통해 이러한 국면을 이어갈 수 있었고, 상황이 좋지 않은 때에도 몇몇 대규모 경제권(과거에는 미국, 최근까지는 중국)의 성장을 통해 어찌어찌 비슷한 국면을 연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면이 계속되는 한, 노동계급 입장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자본주의 안에서 어떻게든 타협하는 것이었다. 물론 혁명가들은 이것이 일시적인 타협일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고, 실은 자본과 노동의 직접적인 관계 바깥으로 위기 요인을 전가함으로써 지탱되는 불안정한 게임임을 폭로했다.
역사상 계급타협의 최전성기였던 20세기 중반에도 그랬다. 이 무렵 혁명가들은 제3세계 혹은 오늘날의 표현에 따르면 남반구 인민들의 수탈 덕분에 이런 게임이 지속될 수 있으며, 남반구 인민의 각성과 반격으로 판이 엎어질 때가 다가왔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 경고는 기대만큼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위기감은 여전히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의 핵심적인 사회 관계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산업 자본주의의 팽창이 지구 생태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경고 역시 한 동안은 마찬가지였다. 옛 혁명가들이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것만 같은 생태 전환론자들은 지구 행성의 한계 탓에 항구적인 양적 성장을 통한 타협이 더는 계속될 수 없다는 불길한 예언을 반복했다. 지구 자본주의 전체의 평균 성장률을 유지함으로써 계급투쟁을 끊임없이 밖으로, 혹은 훗날로 미루는 이 거대한 연극이 더 이상 상연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점점 실감나게 다가오는 기후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고는 오랫동안 묵살됐다. 혹은 후손들을 위한 경고라거나 새로운 '녹색' 자본주의를 깨워 일으키는 외침이라는 식으로 흐리멍덩하게 변주됐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게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대세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갑자기 전혀 다른 시대 안에 놓였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확산과 함께 세계인들은 더는 위기가 안정된 자본주의 사회 관계 바깥에서 '관리'될 수 없음을, 이를 더 이상 장담할 수 없음을 실감하고 있다. 어느덧 마스크를 쓰는 게 더 익숙해진 육체의 감각, 알게 모르게 온갖 경제 지표의 무게를 능가해버린 확진자와 사망자 통계, 거리두기를 둘러싼 논란의 장이 돼버린 공장과 학교는 위기가 다름 아닌 우리 신체 안으로까지 진입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국면이 장기화한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가는 민중 집단들 사이에서 다른 시대에는 보기 힘들었을 감각과 상식, 각성이 대두하거나 확산될 수 있다. 지구 자본주의가 낳은 모순이 신체 안으로까지 난입한 상황에서 지난 몇 세대 동안 이어온 불안했던 타협을 고집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칼 폴라니의 표현에 따르면, 어떤 '체념'에 도달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안겨주는 번영은 이제 과거의 기억일 뿐이라는 체념.
그러나 폴라니의 말대로, 체념은 또한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거대한 전환>, 홍기빈 옮김, 길, 2009. 604쪽). 우리에게 익숙했던 일상이 이미 붕괴했다는 체념과 함께,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의 눈 먼 질주를 경고한 이들이 그토록 대중 자신에 의해 착수되길 열망했던 새 사회의 건설이 어쩌면 드디어 일정에 오를지 모른다. 느닷없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하게 된 세상에서 새로운 무게로 다가오는 낱말들, '민주', '사회', '생태' 등등이 중심이 되는 사회 말이다.
정말로 그런 각성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일이 결국은 고전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각본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실현될 운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될지 모르겠다. 어쩐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를 연상시키는 발터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우리 시대의 가장 날카로운 예언으로 입증될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발터 벤야민 선집5: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356쪽)
유토피아의 열정이 소진된 시대에 닥친 대변화의 요청
그러나 자주 그렇듯이, 갑자기 닥친 이 역사적 순간은 비극의 분위기를 띠고 있다. 비극이란 더할 나위 없는 덕성을 구비한 주인공에게 모든 가능성이 닫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희귀한 가능성이 열리는데도 주인공이라 할 만한 등장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류의 처지는 후자에 가깝다.
우리 시대는, 적어도 코로나19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우리가 살아온 시기는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이 유토피아의 열정이 소진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자본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금기였고, 한때 그런 꿈을 꾼 많은 이들(가령 68세대 일부)이 지구 자본주의의 최대 승리를 여는 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한국만 해도 최근 역사에서 바로 이런 꿈과 가장 밀접히 연관됐던 세대가 민주주의를 가장 그럴싸한 외관을 지닌 현상유지 방책 정도로 왜소화시키는 주역이 돼 있는 형편이다.
그 정도로 우리는 전혀 준비돼 있지 않다. 그런데도 조상들이 미루고 또 미뤄온 선택과 진지하게 대면해야 하는 근본적 시대가 갑자기 열려 버렸다. 새 에너지 체제에 대해 감도 잡지 못하는 대중에게 '녹색 뉴딜'이라는 암호가 던져졌다. 작업장의 노동자 생존권조차 미래 과제인 나라에서 '기본소득'이 주류 정치 쟁점으로 툭 튀어 나왔다. 대학 서열 체제와 입시 경쟁이 굳건한 상식인 사회에 모든 강의를 온라인으로 하고 입시 준비생들이 시험 보기조차 힘든 상황이 예고 없이 닥쳤다. 넘치는 것은 위기/기회이고, 없는 것은 다만 새 사회를 향한 대담한 열망과 의지다.
나는 현 상황에 대한 이 답답한 진단을 벤야민이 남긴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며 끝맺을 수밖에 없겠다. 인용하기에는 좀 길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에게 꼭 전해져야 할 절박한 메시지다.
"계급투쟁을 사람들은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계급투쟁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인지가 결정될 힘겨루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 결말에 따라 승리자는 잘되고 패배자는 좋지 않게 되는 어떤 씨름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들을 낭만적으로 호도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계급이 투쟁에서 이기든 지든,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내적 모순들로 인해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지 그들이 스스로 몰락하느냐 아니면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의해 몰락하느냐이다. 3천여 년 발전해온 문화가 존속하느냐 아니면 종말을 고하느냐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역사는 끝없이 힘을 겨루며 싸우는 두 사람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악(惡)무한이라는 것을 모른다. 진정한 정치가는 오로지 일정표에 따라서만 계산하는 사람이다. 부르주아계급의 퇴치가 경제와 기술의 발전에서 대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어느 시점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인플레이션과 가스전이 그 신호다), 모든 것이 끝장이다. 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이르기 전에 타고 있는 심지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가가 언제 개입하고, 위험을 감지하며, 어떤 템포를 취하느냐는 것은 기사(騎士)적인 사안이 아니라 기술적인 사안이다. ("화재경보기", <발터 벤야민 선집1: 일방통행로 외>, 김영옥 외 옮김, 길, 2007. 124쪽)
이미 파시즘에 결정적 패배를 당해 나치 정권의 마수를 피해 다니기에 바빴던 벤야민은 그럼에도 여전히 "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이르기 전에 타고 있는 심지를 자르"길 기대했고, 이 기대의 대상은 오직 정치일 뿐이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결국 비극의 반전이란 정치로 시작할 수밖에는 없는 법이다. 마침내 현상유지의 톱니바퀴이길 거부한 자들의 정치 말이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 pressian 2020.06.08.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북한이 요즘 왜 이럴까?"
"사실상의 종전선언" VS "있으나 마나 한"
남한을 향해 북한이 막말과 비아냥거림을 쏟아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북한이 요즘 왜 이럴까?"
혹자는 북한이 2019년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의 '하노이 노딜'에 대한 분풀이를 또다시 쏟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강력한 대북 제재에 이어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경제난이 심해지자 주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체제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범위'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해온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러한 분석이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2018년에 문재인 정부에게 '역대급 환대'를 했던 북한이 2019년 하반기부터 왜 '역대급 냉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치고는 허전하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특히 북한의 대남 비난의 주된 요인을 북미관계나 북한 내부 탓으로 돌리게 되면 정작 우리가 할 수 있는 바가 별로 없어지게 된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최근 집중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해 남한이 실효적인 규제책을 내놓는다면 남북관계 복원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도 한다. 대북 전단 살포 규제가 시급한 과제인 것만은 맞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북한의 누적된 대남 불신과 증오를 풀기에는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다른 악재를 예방하는 데에도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엇박자는 9.19 군사 분야 합의로도 불리는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대한 양극화된 인식 차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최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이 합의를 가리켜 "있으나 마나 한"이라고 표현하면서 파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에 반해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를 가리켜 "사실상의 종전선언"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왔다. 그런데 정부는 9.19 군사 합의에 대해 이렇게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해놓고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에 나서왔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약속했던 한미연합훈련도 계속해왔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북한의 대남 불신과 증오의 결정타는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북한군 수뇌부는 판문점 및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했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능라도 경기장 연설 자리도 마련해주었다. 군사 합의 역행 조짐이 확연해지자, 김정은은 작년 7월에 남한을 향해 최신형 무기 도입과 한미연합훈련 자제를 촉구하는 "권언"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그 이후 정세는 이러한 권언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9.19 군사 합의에 대해 "있으나마나 한"이라고 평가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통일전선부가 "적은 역시 적"이라며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증오어린 막말을 내놓은 것도 이와 연장선상에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대북 전단 살포를 구실로 삼아 남북연락사무소 폐쇄에 이어 군사 분야 합의 파기 수순을 밟아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마도 향후 남북관계의 중대 변수는 대북 전단 살포 규제 여부와 더불어 8월에 예정된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실시 여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전단 살포는 규제하면서도 연합훈련 실시는 강행한다면 남북관계 악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 될 것이다.
대북 전단 살포 규제는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 합의한 바이다. 연합훈련 중단은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약속한 바이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는 것은 결코 '북한 눈치 보기'가 아니다. 북한의 막말이 분명 유감스러운 것이지만, 한미 양국이 북한과의 약속을 얼마나 성실히 지키려고 했는지 자문도 해봐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8월 한미연합훈련 실시 여부는 코로나19 사태로 불분명한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코로나19에 떠밀려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위기관리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안 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롭다. 또한 문 대통령 스스로 '전시 경제'를 표방한 만큼, 국방비를 대폭 감축해 민생에 투입하겠다는 의사를 보다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코로나19가 전화위복이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북관계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하지만 2019년 하반기 이후 남북관계는 질적으로 매우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 문재인 정부의 책임도 있다. 불편하더라도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만 올해 하반기나 내년에 새로운 시작을 도모할 수 있다. 북한의 자제와 더불어 문재인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까닭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 pressian 2020.06.08.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소리
2017년 5월 초 좋은 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토요일 아침 아이 축구 시합이 있어 따스한 봄 햇살 아래서 다른 부모들과 잡담을 나누며 푸른 잔디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100일이 채 안 되었을 때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 당선에 실망하고 있었지만 (내가 사는 매디슨은 70% 이상 클린턴에게 투표했다) 그 오월 아침 미국 백인 중산층들의 삶은 평화롭고 편안하기만 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사회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진단을 내놓았지만, 이런 현상이 한 가지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불만과 위협받는 백인의 지위 때문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저학력 백인 노동자 들을 트럼프 현상의 얼굴로 흔히 떠올리지만, 콘크리트같은 43% 지지율은 대졸 고소득층 백인 다수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실 언제나 선거에서 투표하고 거액의 정치 기부금을 내는 여론 주도층인 그들이 실질적인 트럼프주의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주말이면 교회에 나가고 봉사활동에 활발한 ‘좋은 시민‘인 이들의 상당수는 적어도 겉으로는 트럼프의 인종주의와 반여성주의를 비판하거나 불편해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럼프가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혹은 바꾸지 않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지난 3년간 이들의 세금은 낮아졌고, 집값은 올라갔고, 전례 없는 주식시장 호황으로 은퇴 연금은 두둑해졌다. 이들에게 트럼프의 비도덕성은 낮은 세금과 커지는 부를 위해 치를 만한 대가였고, 풍족하고 평화로운 교외 주택가의 일상에서 그가 일으키는 혼란은 멀리서 들리는 소음이었다.
지난 오월의 마지막 주말, 이번엔 좋은 초여름날이었다. 햇살은 좀 따갑지만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이 상쾌한 토요일, 가족과 근처 수목원에 긴 산책을 갔다. 코로나19 때문에 홈스쿨링과 재택근무를 하지만 인구밀도가 높지 않고 공원과 녹지가 많은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이 산책과 운동으로 답답함을 달랜다. 산책길에는 들꽃이 지천이고 수목원에는 신록이 짙어가고 있었다. 이웃 미네소타에서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고 전국 곳곳에서 전쟁터에나 어울릴 장갑차로 중무장한 경찰이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아대고 이를 보도하는 기자들의 카메라에 곤봉을 휘둘러 대던 주말이었다. 불과 10분 남짓 떨어진 주청사 앞에서도 밤새 시위가 있었지만, 미국 백인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이 동네의 일상은 여전히 평화롭고 편안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였다. 하지만 잔잔한 수면 밑으로 미국 백인 중산층 사회의 깊어가는 불안감을 감지하기 어렵지 않다. 코로나19,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그리고 전국으로 번진 시위는 그들의 번영과 평화로운 일상이 얼마나 취약하고 정의롭지 못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불안감에 미국 백인 중산층, 특히 중도와 온건 보수파 백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주목해 볼 일이다. 군대를 동원해서 거리를 점령하겠다며 시위대에 선전포고를 한 트럼프는 그들이 결국 법과 질서라는 명분으로 자기를 선택할 것이라는 도박을 하는 것 같다. 그가 맞는다면 이번 선거도 예측 불가능한 접전이 될 것이다.
정치학자 레비스키와 지블랏은 대부분의 민주주의는 군인의 총성이 아니라 선거로 뽑힌 지도자에 의해 서서히 죽어 간다고 경고한다. 푸른 잔디밭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는 아이들의 함성, 아름다운 수목원 신록 사이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이게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소리일까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 오래된 민주주의는 시작부터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취약한 민주주의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민주주의가 또 어디 있을까?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 /한국 2020.06.09.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코로나19 사태로 불안한 나날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백인 경찰관들에 의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살해사건은 미국 전역의 격렬한 시위로 이어졌다. 열악한 생활조건 때문에 코로나19로 인한 희생자 비율이 백인의 그것보다 월등히 높은 흑인들의 불만은 1968년 4월 인권운동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로 인해 폭발했던 인종분규 이래 가장 큰 분출구를 찾았다. 이처럼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얼마 전 베를린 지하철에서 한국 유학생 부부가 당한 사례처럼 코로나19 위기와 인종주의가 섞여 내는 파열음은 이제 유럽 여러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
이런 위기 상황은 코로나19 사태를 겪고 난 이 세계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대한 질문을 낳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영위했던 삶의 형식과는 앞으로 과감하게 단절해야만 한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우리 삶은 인류사에서 그래도 최선의 상태라는 반박이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을 지핀 스웨덴 출신의 소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전자, 역시 스웨덴 출신의 의사 한스 로슬링은 후자의 생각을 대표한다고 보면 큰 무리는 아닐 것 같다.
로슬링은 아들 내외와 함께 2018년에 펴낸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서 다양한 데이터를 근거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결코 비관적인 상황에 놓여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재해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 숫자가 1930년대는 연평균 97만명이었는데 2010년에서 2016년 사이에는 매년 7만2000명 정도였고 한 살 난 어린애가 최소 한 가지 접종을 받은 비율은 1980년의 22%에서 2016년에 88%로 상승했다는 것이다.
1972년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지도 근 반세기가 되었지만 미래에 대한 이 같은 낙관론은 여전하다.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사망한 로슬링이 만약 생존했다면 그런 견해를 계속 펼칠지도 궁금하다. 그는 비관적이고 어두운 전망을 펴는 ‘극단적인 세계관’은 인간의 사고가 지니는 여러 부정적 본능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와는 반대로 자신도 경제학자이면서 케네스 볼딩은 “유한한 세계에서 상승적 성장이 지속할 것이라고 믿는 자는 미친 사람이거나 아니면 경제학자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따르면 성장주도에 의존하는 낙관론 역시 로슬링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극단적인 세계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적 차원에서 제기된 이런 여러 가지 위기보다 개인의 구체적 성장배경이 본질적으로 한 개인의 비관적이거나 낙관적 성향을 좌우한다고 심리분석가들은 보고 있다. 큰 재앙이나 사건을 몸소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어떤 사람은 매사를 늘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으로 보지만, 또 어떤 사람은 매사를 아주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대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 삶의 동반자인 불안과 공포의 인지 차이에서 온다는 것이다. 비관주의자들은 불안이나 공포를 간단히 떨쳐버리지 못하지만 낙관주의자들은 이를 쉽게 밀어낼 수 있다. 그래서 전자는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고, 후자는 삶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존재는 자산(資産)이 아니다’라며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비이성적인 본질을 강조했던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재빨리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의 오랜 맞수로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당대 최고의 국가철학자 헤겔은 베를린에서 그만 콜레라로 사망했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의 서로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에피소드라는 생각도 든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를 가르는 경계선은 고정돼 있지 않다. 세상사를 늘 한탄하면서도 천수를 잘 누린 사람도 있고, 일상을 항상 즐긴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불안과 공포를 지속해서 관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면역력이 오히려 생겼는데 후자는 항상 이를 배제하려는 강박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순간에 스스로 통제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이제 말세라는 푸념을 늘 입에 달고 사는 통속적인 비관주의나 아니면 항상 즐겁고 행복해야만 하는 강박에 갇혀있는 낙관주의로써 코로나 시대의 위기를 과연 넘길 수 있을까.
“하지만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란다”는 횔덜린의 <파트모스 찬가>의 구절이 특별히 가슴에 와 닿는 이 시대에 순도(純度) 100%의 낙관주의만으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없다. 그래서 ‘구체적 유토피아’를 주창한 에른스트 블로흐는 강박적 낙관주의를 ‘실험되지 않은’ 낙관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대신에 ‘상장(喪章)이 걸린 낙관주의’를 설파했다. 그저 삶을 즐기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싸워야 하기 때문에 입은 상처 때문에 낙관주의에도 검은 상장이 함께 걸려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당연시되었던 일상생활이 정지되면서 다행히 지금까지의 우리 삶의 양식을 뒤돌아보는 계기도 함께 왔다. 단순히 불편해진 일상생활이 문제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자칫하면 생명도 잃을 수 있다는 집단적인 불안과 공포는 우리가 망각했던 비관과 낙관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1755년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위한 시에서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는 언젠가는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노래하면서도 모든 것이 당장에 잘될 거라는 환상을 경고했다. 절제되고 균형 잡힌 낙관주의는 코로나19로 인한 이 위기의 시대에도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경향 2020.06.09.
한반도 완충지대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북한의 비핵화? 맞다. 빠르게 완료하자. 그런데 동시에 할 일이 있다. 미국 핵도 없애야 한다. 왜 북한 핵만 없애야 하나? 핵확산금지조약(NPT)은 결국 소수 핵보유국의 독점 보장 협약이다.” 이런 글을 누가 썼을까? 이건 북한의 속마음이 아닌가. 하버드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가 그 사람이다. 42세의 나이로 대통령 자문위원을 하면서 폴란드와 러시아에 ‘쇼크요법’을 퍼뜨린 바로 그 사람. 신속한 가격자유화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전격적인 사유화는 자산의 헐값 매각과 매판자본이나 외국자본의 자산탈취로 이어졌다. 대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안정화 정책까지, 이들 나라는 10여년에 걸친 ‘전환 불황’을 겪어야 했다. 그는 말 그대로 자유주의 경제정책 또는 시장 확대의 사명을 띤 선교사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장과 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해야 세계의 번영과 평화가 온다는 자유주의 헤게모니는 20세기 미국 외교의 성경이었다. 삭스는 이 성경의 ‘미국 예외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책(<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까지 썼다. .
미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 논쟁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앞으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로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우뚝 서자 한층 뜨거워졌다. 미국이 헤게모니를 행사하기 위해 세계에 계속 관여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냉전 시대가 끝났으니 이제 그만 후퇴해야 하는가? 아주 거칠게 분류하자면 후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이제 미국의 힘이 예전만큼 압도적이지 못하니까 다른 지역 문제는 그 지역에 맡기자”(역외 균형론)는 현실주의자들과, 원래부터 미국의 모든 군사적 개입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자들이다. 독재를 없애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겠다는 미국의 개입은 곧잘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아름다운 기치와 달리 또 다른 독재 집단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고, 곧잘 종족 간 힘의 균형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삭스는 말하자면 관여론자에서 평화주의 후퇴론자로 변신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는 “21세기판 투키디데스 함정은 이런 거구나”, 한탄하게 만든다. 그 어느 때보다 광범한 국제협력이 필요한 때 두 강대국은 바이러스의 진원지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미국 대통령은 이럴 때 능력을 발휘하라고 만든 세계보건기구(WHO)에 돈을 대지 않겠다고 위협한다. 25% 관세로 미봉한 1차 미·중전쟁은 5G의 주도권 싸움으로 번졌고 급기야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글로벌생산사슬에서 중국을 빼버리자는 주장으로 치달았다. 미국은 아예 탈중국 경제번영네트워크(EPN)를 만들어서 다른 나라에 선택을 강요한다. 중국에 바로 붙어 있는 한국이야말로 이 포위망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일 것이다. 지난 10년 내내 양 대국 사이에 끼여 시달렸으니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갈수록 압력의 강도가 높아지니까 점점 더 괴롭다.
이런 와중에 북핵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관련국 어디든 중재안을 내놓으면 두 나라는 어느 쪽에 이익인가를 따져서 조금이라도 손해다 싶으면 단호하게 반대할 것이다. 제로섬게임이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때처럼 ‘우아하게’ 현재의 교착상태를 방치할지도 모른다. 계속되는 경제제재에 숨쉬기 힘들어진 북한이 눈길이라도 끌려고 도발을 한다면 이번엔 정말 위험해질 것이다. 대륙간 탄도탄, 즉 미국 본토를 확실하게 위협하는 것밖에 별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침 평화연구자, 정욱식이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라는 상세한 지도를 내놓았다. 이미 몇 지역에 선례가 있는 비핵지대 조약은 국제법적 구속력을 지니고 있고 관련국들도 한반도평화에 대한 의무를 지게 된다. 남북한이 모두 검증을 받으니 그 범위와 수단의 선택도 공정해진다. 핵사찰과 핵무기 제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한국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보호막으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도 중국(과 러시아)의 한시적 확장억제라는 방패를 사용할 수 있다. 마침내 한반도가 비핵지대가 되었을 때 미국과 중국, 또는 일본 어느 나라의 공격도 불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공동안보’ 방안도 조약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 완충지대는 정의상, 주변 강대국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면 안 된다.
미국과 중국이 자제하지 않으면 세계는 말 그대로 절단난다. 한반도가 두 나라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어 절단을 막는 것은 둘 모두의 이익이다. 제로섬게임의 해를 찾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선택지를 만들고 상대가 고르게 하면 된다. 물론 그 선택지를 남북이 만들 수도 있다. /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경향 2020.06.09.
슬기로운 여당 생활’
어떻게 걱정했던 건 꼭 현실이 되는가. 더불어민주당 얘기다. 4·15 총선 승리 이후 시민들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을 주문했다. 처음엔 민주당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 각별히 조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말뿐, 시민의 눈엔 그렇게 비치지 않았다. 여당은 총선 후 두 달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일의 순서를 잘 헤아리고 있는가. 21대 총선 지역구 득표율은 민주당 49.9%, 미래통합당 41.5%다. 득표율로만 치면 8.4%포인트 차이에 불과하다. 정당투표에서는 통합당에 뒤졌다. 선거를 2~3월에 치렀다면 민주당은 제1당을 빼앗겼을지 모른다. 유권자가 민주당에 힘을 실어준 건 코로나19 국난을 극복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총선 승리는 민주당에 대한 호평의 결과가 아니다. 민주당이 뭘 하더라도 시민 다수가 찬성해줄 것이란 건 착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수차례 “지금은 전시(戰時)상황”이라고 했다. 정세균 총리는 등교개학을 전시 천막학교에 비유했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국회는 전시 국회다. 모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국난 극복에 쏟아부어야 할 때다. 한데 민주당은 “잘못된 현대사에서 왜곡된 것을 하나씩 바로잡겠다”고 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 KAL 858기 폭파사건 재조사, 국립묘지 친일파 파묘 얘기가 전시 국회에서 맨 먼저 꺼낼 만큼 시급한 현안인가. 현대사를 다시 쓰는 것은 정치의 영역도 아니거니와 국회 의석을 앞세워 밀어붙일 일은 더욱 아니다.
둘째, 시민의 지지에 부응하고 있는가. 전례 없는 위기는 그동안 해오던 관행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위기 극복을 위해선 전 시민의 동참과 협조가 필요하다. 전시 상황에서는 없던 협치도 만들어내는 것이 집권여당의 책무다. 총선 민의도 정부·여당이 책임 있게 국정운영을 하되 야당과 협치하라는 것이다. 21대 국회에선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제3당 세력도 소멸한 상태다. 그럴수록 거대여당엔 절제와 신중함이 필요하다. 힘없는 자의 양보는 굴욕이지만, 힘 있는 자의 양보는 미덕이다. 합의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도저히 안 되겠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을 때 표결해야 시민들도 수긍할 것이다. 한데 민주당은 국회 ‘반쪽개원’을 강행했다. 여당은 시한은 지켰으나 협치를 잃었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정당과 의회가 중심이 되어 일을 풀어가는 것이 당장은 어렵고 복잡해 보여도 결국에는 사회통합에 기여하고 더 오래 지속하는 변화를 만든다”고 했다. 정치는 협상이고 협상은 곧 대화다. 이 틀이 무너지면 결국 정치는 사라진다. 분열과 갈등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결과적으로 더 이득이 된다는 건 자명하다. ‘정치는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若烹小鮮·약팽소선)’고 했다. 이리저리 뒤집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는 게 낫다는 의미다. 여당은 기다리지 못하고 생선을 바짝 태웠다.
셋째,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산업구조부터 국제질서까지 기존 패러다임에 대대적인 변화가 쓰나미처럼 닥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수십년 독과점 구조에 미래세대의 도전이 시작된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혁명적 시기에 국정을 이끌어가려면 새 시대에 걸맞은 국정좌표를 설정하고 담대한 발상,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 젊은 생각, 젊은 정책이 넘쳐흘러야 한다. 반대의견은 다양한 사고를 자극하고, 더 많은 대안을 찾도록 도와준다. 반대의 놀라운 힘이다. 일류기업들은 일부러 사내에 ‘레드 팀’을 두고 반대의견만 내는 역할을 맡기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반대의견을 징계하고, 다른 목소리에 함구령을 내렸다. 항구에 묶인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닐 것이다. 열혈 지지층은 꼭 필요한 자산이지만, 지지층만 바라보며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정치의 전부가 되어선 안 된다. 지지층 결집이나 친정체제 강화 같은 낡은 방식으로는 ‘K정치’를 만들 수도, 미래를 열 수도 없다.
TV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악역도 없고 막장 전개도 없지만 큰 인기를 얻었다. 젊고 유능한 의사들이 소소하지만 진정성 있는 태도로 따뜻한 위로와 힐링을 주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177석 거대 여당이 ‘슬기로운 여당’이기를 바란다. 그건 진심과 신뢰와 겸손과 실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수가 많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박래용 논설위원 경향 2020.06.09.
장승은 누가 잘랐을까
신앙심이 각별한 친구였다. 교문과 학생회관 사이 흰색 화강암 건물 앞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는 한 무리의 학생 틈에 그가 있었다. 입학 직후 무리에 들어간 친구는 도제식으로 진행된다는 성경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문자주의적 성서 해석을 비판하는 노교수를 향해 “구원을 믿느냐”는 질문으로 당혹감을 안겼고, 최루탄 분말과 보도블록 파편이 어지러운 교문 앞을 제 키보다 큰 나무 십자가를 지고 걷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런 그였으니, 도서관 앞 광장 한쪽에 ‘민족해방대장군’ ‘조국통일여장군’이란 이름의 대형 장승 2기를 세우겠다는 총학생회의 계획을 두고만 볼 리 없었다. ‘우상 숭배’ ‘기독신앙에 대한 모욕’이라는 기독학생단체의 거센 반발 속에 비판과 반박 대자보가 도서관 외벽을 채웠다. 친구는 총학생회가 마련한 공청회에 나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상 건립을 결코 두고 보지 않겠다”며 눈을 부라렸다. 표정과 어투가 어찌나 비장했던지 현장을 취재한 <동아일보> 기자가 그의 발언을 기사에 인용할 정도였다. “이날 공청회에서 신학과 한 학생은 ‘장승을 세운 것이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이므로 극단적 행동도 불사할 수밖에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했다.”(1990년 6월6일)
세운 지 열흘 만에 밑동 일부가 훼손되는 수난을 겪은 장승들은 이듬해 1월, 하루 간격으로 잘려나갔다. 목격자도 물증도 없었다. 장승 건립을 주도한 학생들은 분노했으나 학내에서 벌어진 사건에 경찰 수사를 의뢰하는 것은 당시 분위기에선 상상하기 어려웠다. 학교 당국 역시 공연히 수사기관을 끌어들여 문제를 키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사건은 그렇게 유야무야됐다.
30년 전 장승 사건이 다시 화제에 오른 건 최근이다. 입학 30년을 앞둔 동기생들의 모교 방문 행사를 앞두고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이 개설됐다. 대화창에 등장한 그의 이름을 보고 누군가 농반진반으로 추궁했다. “이제 털어놓을 때도 되지 않았어?” 대화창엔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친구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볼 때마다 잘라버리고 싶었지. 그런데 방법이 없는 걸 어떡해? 군에 있을 때 진지공사 하면서 알게 된 건데, 그 정도 통나무를 신속하게 베고 사라지려면 전기톱 숙련 기술자에 조수 한두명은 있어야 해.”
동기 몇과 그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수도권의 한 도시에서 개방직 공무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장승 사건 이후 ‘골수 근본주의자’로 낙인찍어 말도 섞지 않았지만, 세월을 건너뛰어 만난 그의 생각은 우리 세대의 평균치만큼 ‘리버럴’했다. 정치사회적 공통 경험이 누적되면서 세대 내 동질성이 그만큼 뚜렷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불평등과 부정의에 대한 분노는 매한가지였고,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은 그가 나보다 확고해 보였다. “그때 외로웠다.” 친구가 은빛 머리칼을 쓸며 웃었다.
지난해 조국 정국을 거치며 절감한 사실은, 열정과 열정이 부딪치는 대화에서 좁혀질 수 없는 차이가 확인되는 순간 대화는 기피되고 관계는 멀어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소원해진 사이가 주변에 여럿인데, ‘조국 재판’과 ‘윤미향 정국’의 페이스북은 여전히 전쟁터다. ‘팔로 취소’ ‘소식 숨기기’는 단절의 명시적 선언 없이 인간관계의 위기를 넘기려는 페북 이용자들의 자구 수단이 됐다. 열정이 식고 대상과의 거리두기가 수월해질 때쯤이면, 진실의 어렴풋한 그림자와 함께 우리의 우정과 인연도 되살아날까?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가 누구보다 깊었던 시인 김수영은 ‘10년’을 가리켜 “한 사람이 준 상처를 다스리기엔 너무나 짧은 세월”(‘누이야 장하고나’)이라고 썼다. 하물며 1년은 얼마나 더 짧은가. 내가 친구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도 30년이 걸렸다.
(*)덧붙임 : 친구는 장승 절단의 유력 용의자로 학교 당국을 지목했다.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라는 재단과 동문들의 압력은 커지는데 총학생회는 말을 듣지 않으니, 시설부서 직원과 장비를 동원해 ‘처리’하지 않았겠냐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이세영 ㅣ 정치팀장 한겨레 2020-06-14
국가균형발전 사기극
단비뉴스의 활약이 정말 대단하다.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소속 언론사인 단비뉴스는 기성 언론이 소홀히 다루는 분야나 이슈를 심층 취재해 보도하는 등 자주 감탄을 자아낸다. 최근 보도한 ‘승자독식’ 교육재정의 문제는 교육문제를 넘어서 대한민국이 작동하는 기본 방식의 위선과 기만을 우회적으로 폭로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기사에 따르면, 지난 12년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전국 대학에 지원한 재정지원사업비 총 49조6749억원 가운데 서울대에 지원된 금액은 4조6175억원으로 전체의 9.3%를 차지했다. 또 연세대에 지원된 금액은 2조4479억원으로 전체의 4.9%, 고려대는 1조8258억원으로 전체의 3.7%를 차지했다. 세 대학의 재정지원사업비 총합은 8조8912억원으로 전체의 17.9%에 달했다. 매해 대학별 평균 재정지원비 기준으로 살펴보면, 서울대는 평균 3848억원, 연세대는 2040억원, 고려대는 1522억원의 사업비를 각각 지원받았다. 서울대는 전국 대학 평균의 20배 가까이, 연세대·고려대는 7~10배를 지원받은 셈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 중엔 ‘그게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교육만큼은 평등주의보다는 탁월성 기준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는 지원 방식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소득과 재산 수준에서 상위 20% 계층의 자녀들이 명문대에 많이 간다는 게 상식이 된 세상에서, 나머지 80%가 낸 세금까지 그 대학들에 집중 지원해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국익이냐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는 좀 더 따져볼 문제겠지만, 이 글의 논점은 아니다. ‘국가균형발전’은 과연 우리의 주요한 국가적 목표인가, 아니면 적당히 국민을 속이려는 사기극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는 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는 혁신도시의 공공기관 직원들 중엔 이산가족의 불편과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혁신도시로 이사를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교육 문제다. <입시가족: 중산층 가족의 입시사용법>이란 책이 잘 지적했듯이, “중산층 가족 사이에서 자녀교육의 동의어는 ‘인서울 대학’ 진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장서서 인서울 대학에 재정지원을 집중하고 있는 정부가 감히 그들에게 가족 동반 이주를 권할 수 있겠는가? 입으로는 국가균형발전을 외치면서 인구 집중의 강력한 유인인 교육정책은 균형발전에 역행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이건 사기극이다.
그런데 이 사기극의 구조가 간단치 않다. 지방도 ‘공범’으로 적극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은 서울로 학생들을 많이 보내는 걸 ‘인재육성’이라는 미명하에 지역발전전략으로 삼고 있다. 공적인 장학재단을 통해 서울대 진학자에게는 1500만원, 고려대·연세대 진학자에게는 1천만원을 주는 곳까지 있다. 급기야 국가인권위원회가 나서서 이런 장학사업이 ‘학벌에 따라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이라며 개선을 권고했지만, 지방에선 이런 일들이 민관 합동으로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나는 지방에 살망정 내 자식은 인서울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학부모들의 열망은 가족 차원에선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런 열망이 지방정부와 지방민의 공적 태도마저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지난해 ‘3기 수도권 신도시’ 건설에 이어 ‘수도권 광역교통비전 2030’을 발표했다. 일산과 남양주에서 서울역, 송도에서 여의도, 동탄에서 강남역까지 모두 30분대에 도달할 수 있는 꿈같은 비전이다. 지방소멸이 임박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울의 부동산 문제를 수도권 비대화 전략으로 풀겠다는 정부의 근시안적 정략에 대해 지방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교육재정의 서울 집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내심 환영하는 사람도 많다. 자식을 서울로 보냈으니 서울의 주거 여건이 개선되고, 서울에 부와 권력이 더 집중되는 게 좋다는 논리다.
소를 길들이기 위해 소의 코청을 꿰뚫어 끼는 나무 고리를 코뚜레라고 한다. 인서울 대학은 그런 코뚜레 역할을 기가 막히게 잘해내고 있다. 지방 스스로 지방을 죽이게끔 만드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코뚜레는 국민의 평등권을 유린하는 지리적 약탈체제의 수호신이다. 사기극으로 전락한 국가균형발전, 차라리 이걸 쓰레기통에 내던지는 게 집단적 위선과 기만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점에선 국민의 정신 건강에 훨씬 더 좋은 게 아닐까?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2020-06-14
진중권과 파시즘
정치와 종교는 많은 점에서 닮았다. 세계에 대한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소속감을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전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세계관의 관계에, 후자는 지지 정당과 종교 소속의 관계에 해당한다. 그러나 통속적인 논의에서 이 은유가 가장 즐겨 사용되는 예는 정치적·종교적 타자의 이질성과 맹목성을 지적할 때이다. 그럴 때 열정적인 정치적 타자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신도”로 표상된다. 특히 정치인 팬덤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 “이교도”에 대한 증오와 조롱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 시기의 대선은 “살해당한 메시아”인 노무현·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도와 화신들이 치르는 영웅적 각축으로 묘사된다.
최근 이 은유를 가장 즐겨 사용하는 논객은 진중권 전 교수일 것이다. 현 정권을 “신적폐”로 규정하고 연일 맹렬한 비판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강연, 칼럼 등에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 지지자들을 종교 신자들에 빗대기를 서슴지 않는다. 진 전 교수는 과거 박정희를 찬양하는 “구적폐”들을 향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 외치며 우상파괴를 시도했듯이, 오늘날의 문재인·조국 지지자들을 향해서는 “문천지교”, “조순진리회” 등의 표현을 동원해 조롱하고 있다. 종교학자로서는 이 비판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이런 종류의 담론이 가지는 의도와 효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애초에 근대 지성사에서 ‘종교’라는 범주가 등장하고 종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불가해하고 기이한 타자의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등과 같은 제도종교에서 이름을 붙이기 힘든 민속종교나 원시종교까지를 포괄하는 종교 개념이 등장한 것은 이 시점이다. 이전까지 서구인들은 문화적 타자를 “우상숭배자” 혹은 “악마숭배자”와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이 “숭배(컬트)”를 자신들의 “종교”와 같은 범주에 포함함으로써 비로소 타자에 대한 진정한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컬트”라는 용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혹은 이해하기 싫은) 믿음을 가리키는 말로 남아 있다. 신천지와 대순진리회를 끌어들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진 전 교수의 은유는 컬트, 즉 신종교에 대한 대중적인 반감에 기대고 있다. 이들 교단의 신자들로서는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맥락에 끌려 나와 억울하게 두들겨 맞은 셈이다. 정 집권당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자들을 종교인에 비유하고 싶다면, 사실 그들은 주류 교단 내부의 배타적이고 열성적인 그룹과 더 닮았다. 그에 비하면 신종교 비유는 부적절하지만 편리하다. 조롱의 효과는 더 크고, 해당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반발할 가능성은 더 적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그가 즐겨 인용하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에 딱 들어맞는 대상이다.
또 설령 그가 비난하는 대상이 정말 ‘신자들’과 비슷하다 해도 이런 비판의 효과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그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종교 비판이 무신론자들의 환호를 받을 수는 있지만, 실제 종교인들에 대한 ‘계몽적’ 효과는 미미한 것과도 같다. 그의 비판대로, 정치인 팬덤의 자기 진영에 대한 과잉 충성은 근본주의적 종교의 속성과 유사하다.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공격은 그들의 믿음과 결집을 해체하기는커녕 강화한다.
진중권의 정치 비평이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가치는 파시즘 징후에 대한 경종에 있을 것이다. 그는 정치인 팬덤이 대중을 비판적 이성 없는 “좀비”로 만드는 현상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의와 부정을 가르는 가치 기준이 내 편과 적을 가르는 진영논리로 대체되는 현상 또한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파시즘을 비판하면서 정작 그 파시즘의 주무기인 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이용하는 것은 비겁할뿐더러 이율배반적이다. 괴물에 맞서기 위해 악마의 힘을 빌린 신화적 영웅들의 말로는 늘 좋지 못했다.
한승훈 ㅣ 종교학자 한겨레 2020-06-15
6·15선언 20년, 자주와 신뢰를 생각한다
올 6월은 매우 특별한 달이다. 15일은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이고, 25일은 6·25전쟁 발발 70주년이다. 70년 전인 1950년, 강대국들 간의 동서냉전이 그들이 갈라놓은 한반도에서 6·25전쟁으로 터졌다. 우리 민족은 대량 학살당하고 ‘불신과 대결’의 질곡 속에서 반세기를 살아오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화해와 협력’으로의 대전환을 이뤄냈다.
오늘 우리는 6·15 공동선언 20주년을 맞는다. 6·15 공동선언의 의의는 무엇이며,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정책적 시사점은 무엇인가? 올 6월 들어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6·15의 핵심적인 의의는 공동선언 제1, 2항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남북한은 한반도 통일문제의 ‘주인’으로서 서로 협력하여 ‘자주적’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해나가자. 둘째,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이 아닌 ‘평화통일’만이 유일한 통일의 길이고, 통일은 ‘과정’으로 이뤄나가되, 현재의 통일단계는 ‘연합제’ 단계이다. 이러한 공동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나가자는 것이었다.
위의 의의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1945년 남북 분단 이후 고통받아온 ‘한반도 문제’를 남북한이 협력해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호 경쟁자인 남북한 간에 통일의 현주소와 방안에 대해 공동인식과 합의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동인식과 합의 없이는, 민족 화해와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 정착 등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논의하기도 어렵고 합의를 제대로 실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편 한반도 문제는 민족문제와 국제문제가 결합되어 있어 자주성(민족주의)과 국제성(국제주의)의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 지도자들은,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강대국 이익 중심의 질서임을 인식하면서 통일문제 등 우리의 운명은 당사자인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해나간다는 ‘자주’의 원칙에 합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최초로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는 것을 6·15의 가장 중요한 의의와 성과로 꼽기도 했다.
김 대통령에게 있어 자주는 ‘민족 대 외세’라는 기계적인 이분법에 얽매인 ‘배타적 자주’가 아니라, ‘민족 공조를 바탕으로 주도적으로 국제공조를 확보’해나가는 ‘열린 자주’였다. 회담 초기에 배타적 자주를 주장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결국 열린 자주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6·15가 현재 우리에게 주는 정책적 함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6·15 이후 역사상 유례없는 폭과 깊이로 진행된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전쟁 위협 완화와 평화프로세스는 다름 아닌 위에서 설명한 6·15의 ‘약속’ 위에서, 보다 직접적으로는 그러한 약속을 한 상대방에 대한 ‘신뢰’,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믿음’ 위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역사적인 6·15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최근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와 북한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남북관계가 문재인 정부 들어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드는 모습이다. 북한은 대남사업을 철저히 ‘대적사업으로 전환’한다면서, 정상 간 핫라인, 군사통신선 등 남북 간 모든 통신선을 끊었다. 남한 정부에 대한 ‘신뢰’가 산산조각 났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번 대남 적대행동은 총참모부의 군사적 행위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북한은 왜 이렇게 강하게 나오고 있는가? 추측컨대, 북한 지도부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강경파들의 리비아식 비핵화 요구를 보면서 그들이 북한 정권교체의 꿈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지난 4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태양절 참배에 불참하자, 외부 세계가 이를 김정은 사망, 김여정 후계자, 북한의 급변사태, 작계 5029 이행 준비 등으로 이어가면서 상황을 북한 정권교체 쪽으로 몰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탈북민 단체까지 나서 북한 지도자 및 정권교체를 목표로 한 대북전단을 더욱 과감하게 살포했다. 이에 북한은 전단 살포 중지를 약속한 판문점선언의 당사자인 문재인 정부가 전단 살포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고 보고, 그동안 북한 나름대로 쌓였다고 주장해온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북한도 한반도 문제의 해결 당사자이고,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9·19 군사합의서의 당사자라는 점이다. 남한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우선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정반대로 나오고 있어 크게 실망스럽다. 북한이 군사적 강공으로 나온다면, 남한 사회에서 대북 적대감이 어떻게 증폭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현재의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북 정상, 남북 정부 사이에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6·15시대를 열 수 있었던 신뢰, 10·4 정상선언,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9·19 군사합의서를 가능케 했던 그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문점선언에서 합의한 ‘민족 자주의 원칙’을 재인식하고 공유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제대로 진전시키지 못하면 우리 민족이 한반도의 주인인데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교훈의 실천을 주도하고, 북한에도 이 교훈을 실천토록 요구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조속히 비공개 대북 특사를 파견해 남북 지도자 차원에서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나설 것을 기대한다.
백학순 | 세종연구소장 경향 2020-06-15
전작권 전환 이대로는 안 된다
한·미 간 비대칭적 관계가 형성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전작권 때문이다. 한·미의 비대칭적 관계는 대외정책, 특히 중국과 북한 문제에서 도드라진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중국 견제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등을 돌리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결국은 전작권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대북정책에서 독자성을 상실했다. 남북 간의 모든 교류와 협력을 ‘한·미 워킹그룹’이 통제하는 것도,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전작권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현 정권이 대북정책 결정과정에서 역대 어떤 정권보다 미국에 종속적이었다는 비난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전작권을 직접 행사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군사 분야를 넘어 대외정책과 경제 등 우리 삶의 전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의존적 사고방식이 내재화’되면서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지부조화 현상이다. 우리나라 식자층 중에서 우리가 손해라도 미국에 이익이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유독 많은 이유다.
전작권 전환에 가장 반대하는 집단은 예비역 장성들이다. 그들의 반대는 자신의 특권적 삶이 미국의 후원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미국이 전작권을 단독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가 공동행사하고 있다는 주장은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전작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피해를 가장 많이 직접적으로 당하고 있는 곳은 바로 군대다. 군대는 군사력을 양성하고 이를 운용할 수 있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작전지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 군사력은 이미 북한을 압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독자적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미진한 실정이다.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시 참모부를 한·미 동수로 편성한 것은, 언제 떠날지 모르는 미군의 작전지휘능력을 신속하게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30년이 훨씬 넘는 동안 한국군은 미군의 보조적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아직도 작전계획수립과 지휘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북한 장교는 모이면 작전과 전술을 논하는데 남한 장교는 인사 이야기만 한다는 자조 섞인 푸념은 군인으로서의 본질과 핵심에 다가가지 못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인사 이야기밖에 없다는 현실의 반영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초급장교를 보유하고 있지만, 중견급 이상 장교들의 능력이 미군보다 한참 뒤지는 것은 계급과 직책에 합당한 고민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집권기간 내에 전작권 전환을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문제는 지금 같은 방식이라면,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한·미가 각자 자기 군대를 지휘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한·미 합참의 공동 지시를 받는 단일사령부가 유지되는 한 실질적인 전작권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연합사를 해체하고 양국 군을 각자 지휘하되, 한국군과 미군이 상호지원할 수 있는 협조체제를 갖추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보수정권 등장 이후 전작권 전환은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은 전작권 전환을 늦추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제시된 ‘조건’은 미국도 제대로 갖추기 어렵다. 이름만 바꾼 연합사를 유지하고 사령관을 한국군이 맡기로 하면서, 연합사가 존재하면 진정한 전작권 전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참여정부 당시의 고민은 무위로 돌아갔다.
보수정권의 전작권 전환 방식을 비판적인 검토 과정도 없이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문제였다. 한국군 출신이 연합사령관이 되면 전작권이 전환된다는 주장은 틀렸다. 한국군 출신 사령관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미국의 국가급 자산을 운영할 수도, 미군을 제대로 지휘하기도 어렵다. 지금도 주한미공군사령관은 미군인 연합사령관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 한국군 출신이 연합사령관직을 제대로 수행할 것이라는 기대는 중학교 축구선수가 프로축구팀을 감독할 수 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집권기간 내에 전작권 전환을 완료하겠다고 하지만 결과가 걱정스럽다. 지금처럼 하면 명분과 실리 모두 손해보고 오히려 미국 의존성만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방향이 틀리면 열심히 할수록 문제가 커진다. 처음부터 한국군 단독작전 능력이라도 제대로 구비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경향 2020-06-15
위안부’ 운동 내전, 우리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위안부’ 피해자 운동이 흔들리고 있다.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님의 증언 이후 국가(군대)가 위안소를 운영한 역사상 유례없는 중대 범죄에 저항해온 세월만큼이나 강고할 줄 알았는데. 민족주의, 젠더 이슈라는 운동의 개념부터 피해자 중심주의, 대표성이라는 운동의 관계까지 한꺼번에 모든 문제가 분출하고 있다. 특히 전시일본군성노예제(역사적 사실에 대한 국제적 합의내용을 준수하는 표현) 피해 생존자는 활동가와 함께 가해자 응징을 촉구하며 여성인권·평화운동가로 성장했다. 연구가들도 힘을 보탰다. 때로 거리 두기에 실패하기도 했지만 조금씩 운동의 지평을 넓혀왔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이 멈춰 선 느낌이다. 가해자는 분명한데 이용수님과 정의기억연대(정의연)·윤미향 의원은 피해자와 가해자로 등 돌리고 있다. 이 믿기 어려운 관계는 ‘위안부’ 피해자 운동을 역사의 퇴적층 어디까지 몰아가고 있나. 정의연과 윤 의원 의혹은 별개 문제로 밀어둔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범죄’로 드러날 일이 있다면 책임질 일이지 ‘위안부’ 피해자 운동의 공과와는 다른 문제이므로.
정의연·윤 의원과 이용수님·피해 생존자 관계에 피해자 중심주의를 거론하는 자체가 혼란스러웠다. 단초는 이용수님의 “이용했다”는 분노였다. 피해자들을 “전시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가 아니다”라고 했다면 모를까 정의연은 시종일관 일본을 직시했다. 이용수님도 평생 일본의 책임을 강조했다. 이들의 피해자 중심주의는 가해자는 누구인지를 묻는 일이었다. 이용수님 지적은 최봉태 변호사의 말처럼 ‘고부 관계’에서 비롯된 일일 수 있고, 윤 의원이 국회 진출을 서두르느라 벌어진 일일 수 있다. 그런데 “이용했다”는 말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립으로 해석됐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잘못 읽은 것이다. 내부의 소통 부재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외부의 오독이 진짜 가해자를 가려버렸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정의연의 과잉 대표성 문제로 번졌다. 정의연에 대한 대중적 지지여부와 별개로 적어도 외교당국은 이 논란에 낄 자리가 없다. 정의연은 강고하게 일본의 책임을 물었다. 외교당국은 일본과의 협상에서 이런 정의연의 입장을 지렛대로 활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간 정의연이 ‘위안부’ 피해자 운동을 ‘순결한 민족의 딸’이라는 이른바 민족주의 프레임으로 전개했다는 주장도 커지고 있다. 정의연은 1987년 6월항쟁이 촉발한 여성운동 에너지가 집결된 운동체였다. 1990년 창립을 주도한 윤정옥 선생의 말이나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집을 보면 정의연은 보편적 여성운동 관점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달 이용수님은 “여자이기 때문에 위안부라는 누명을 썼다. 세계 여성분들에게 피해를 끼쳐드렸다고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했다. 가장 가슴 아팠던 말이다. 여성인권운동가로 오롯이 태어났다고 했지만 ‘순결’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용수님의 트라우마는 정의연과 윤 의원으로 향했다. 정의연과 윤 의원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내셔널리즘에 동원하느라 정작 여성인 피해 생존자들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비판이다. 일부 학자와 연구가들도 이에 동조했다. 지난 활동을 돌아보면 이 역시 오독이자 오해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윤 의원이 사려 깊지 못했던 측면이 크다. 이용수님은 정의연과 함께했던 시간엔 극단적인 외로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누구라도 고립되면 미처 극복하지 못한 생채기가 터져나올 수 있다. 윤 의원이 ‘위안부’ 피해자 운동을 국가의 일로 만드는 일이 왜 중요한지 설득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윤 의원은 ‘한·일전’ ‘일본 민주화’를 말했다. 이는 여성인권운동이라는 ‘위안부’ 피해자 운동의 중요한 성과를 놓친 과오로 남았다.
며칠 전부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맴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공훈과 무용담으로 기록되는 남성들의 전쟁과 달리 여성들은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일상을 발견했다. 첫 생리혈, 적군에 대한 연민, 사람을 죽인 고통, 포연을 뒤덮은 노래와 사랑. 작가는 당국의 검열을 뚫어내고 여성들의 사라진 목소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전쟁의 공포뿐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지키려 했던 일상, 전쟁 후 일상을 위협하는 상처를 숨겨야 했던 그 모든 이야기를. 그러면서 세상에 묻는다. “우리는 누구의 피해자인가, 왜 우리는 지금도 전쟁 중인가”라고. ‘위안부’ 운동 30년이 지금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구혜영 정치부장 경향 20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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