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팬데믹 ‘스페인 독감의 교훈’ 시사인 2020.06.16.
하인리히 법칙과 북의 도발 가능성 경향 2020.06.16.
정은경이 ‘수도권 대유행’을 말하는 이유 경향 2020.06.16.
도시 숲과 함께 ‘슬기로운 방역생활’ 세계일보 2020-06-16
백선엽 논란’, 지체된 정의 경향 2020-06-17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다 한 것 경향 2020-06-17
약자를 포기하지 않았던 ‘뉴딜 정책’ 시사인 / 2020.06.20
우리나라 공무원은 많은가 적은가 주간경향 2020.06.22
반값 아파트 공급·불로소득 동시 차단, 발상 바꾸면 가능하다 프레시안 2020.06.22
‘볼턴’ ‘부부장 김여정’을 보는 분노와 참담함 한겨레 2020.06.22.
코로나19가 불러온 '대혼란'의 시대 프레시안 2020.06.22
사회적 가치’ 담는 기업이 살아남는다 경향 2020.06.25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 한겨레 2020-06-25
김정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한겨레 2020-06-25
대북전단이 문제가 아니다 한겨레 2020-06-28
'인국공 사태'에 쏟아진 비판을 비판한다 프레시안 2020.06.29
성장’은 힘이 세다 경향 2020.06.29
‘모순의 시대’를 통과하려면 시사인 2020.06.29
최초의 팬데믹 ‘스페인 독감의 교훈’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 제공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스페인 독감으로 군인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지난 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감염병의 연대기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질병의 목록이 빼곡하다. 코로나 이전에 신종플루가 있었고, 그 이전에 메르스 (MERS)가, 사스(SARS)가, 에볼라가, 홍콩 독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서막에는 스페인 독감이 있었다. 1918년 시작되어 1920년 그 기세가 수그러들 때까지, 이 바이러스성 전염병은 당시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억명을 감염시켰고 5000만~1억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작은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프랑스에 주둔하던 영국군의 야전병원을, 혹자는 미국의 군사기지를 지목한다(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은 상대적으로 보도 통제가 느슨했던 스페인에서 이 전염병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면서 붙은 이름일 뿐이다). 이 지점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1차 세계대전에 대비해 군인들이 집결해 있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주둔하던 병사들은 바이러스를 몸에 지닌 채, 바다를 건너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섬들 할 것 없이 환자가 속출했다. 근대적인 방역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한 이후에 기록된 최초의 팬데믹이었다. 당시의 방역 대책은 오늘날과 유사한 것도 많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일터에서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고, 영화관·극장 같은 장소는 폐쇄되었다. 황당한 방역 지침도 많았다. 영국의 일부 공장은 담배가 전염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믿음에 근거해 금연 규칙을 완화하기도 했고, 한 하원의원은 의회에서 하루에 코코아를 석 잔 마시는 것이 스페인 독감에 대한 확실한 예방책인지에 대해 질의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 집단생활, 그리고 대륙에 걸친 장거리 병력 이동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전선을 맞대고 싸우고 있던 프랑스·독일·영국 같은 나라에선 수백만 명씩 환자가 쏟아졌고, 병사자 수는 곧 전투에서 죽은 사람 수를 뛰어넘었다. 스페인에선 아예 국왕을 필두로 공무원이 대거 감염되어 국가 체제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인도에서는 인구의 5%가 넘는 최소 1200만명이 사망했고, 남태평양의 섬나라 사모아에서는 인구의 90%가 감염되어 성인 남성의 30%, 여성의 22%가 목숨을 잃었다. 조선총독부 연감에 따르면 1918년 당시, 국내 인구 759만 명 중 약 38%인 288만4000명이 ‘서반아 감기(스페인 독감)’에 감염되어 14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신종플루는 스페인 독감의 후손
병원체의 정체는 최근까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바이러스를 직접 관찰할 만한 수준의 전자현미경이 발명된 것이 1933년의 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끈질긴 연구 끝에, 알래스카의 얼음 아래에 파묻혀 있던 희생자의 폐 조직에서 얻어낸 바이러스를 현대적인 기술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2005년에 와서야 그 바이러스가 H1N1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였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것이 조류독감 바이러스와 상호작용을 거쳐 치명적인 형태로 변이했던 것이다.
세상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스페인 독감은 1920년에 접어들면서 사그라들었다. 그렇다고 바이러스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2009년 6월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 상황을 선언해야 했던 신종플루의 유행은 바로 이 바이러스의 후손에 의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감염병 바이러스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이동한다. 우리가 20세기 초의 비참한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고, 혁신적인 과학적 대응 수단과 함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후세는 21세기를 ‘감염병의 시대’로 기록하지 않을까.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시사인 2020.06.16
하인리히 법칙과 북의 도발 가능성
통계학적으로 대형사고를 예측하는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대형사고 1건이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된 작은 사고 29건과 경미한 징후 300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남북관계에 적용하면 최근 북한이 내놓은 대남 조치들은 작은 사고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이전부터 여러 징후가 있었으나 우리가 이를 무시했거나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한반도 정세를 뒤흔들 대형사고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300> 북한의 대남, 대미 강경 선회의 조짐은 작년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 이후 나타났다. 작년 4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 결정서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더 이상 제재 해제를 요구하지 않겠다며 한·미 군사연습, 북한탄도미사일 요격시험 등 북한 적대정책을 중단하라면서 연말까지 새로운 셈법을 요구했다.
북측은 블라디보스토크 북·러 정상회담과 평양 북·중 정상회담을 연 데 이어 판문점에서 6·30 남·북·미 정상회동을 갖는 등 여러 가능성을 모색했다. 작년 5월부터 금년 3월까지 17차례 단거리발사체 시험발사를 계속하면서 최소한의 연락채널만 남긴 채 남북대화를 일절 거부하고 10월 초 북·미 실무회담 결렬을 선언하며 북·미 대화도 완전히 중단했다.
북측은 문재인 대통령의 8·15 광복절 경축사를 비난하며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평통은 한·미 군사연습, 첨단무기 도입을 지속하며 ‘남북군사합의’를 위반했다면서 남측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단언했다. 작년 11월 초 우리 측이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 위원장을 초청한 사실을 공개하며 “이치도 모르는 상대”라면서 거부했다.
<29> 김 위원장이 정한 시한이 다 되도록 미국이 ‘새로운 셈법’을 내놓지 않자, 연말에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열고 미국과의 대치가 장기성을 띠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정면돌파전을 선언했다. 이때 이미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파국이 예고됐었다. 코로나19가 극성을 떨던 3월3일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은 청와대가 북한 군사훈련을 문제 삼은 데 대한 불만을 나타냈지만 아직 본격적인 행보는 아니었다.
북한은 코로나19 사태의 진정과 남측의 4·15 총선 결과를 기다리며 대남 비난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4월 하순 한·미 연합공중훈련, 해병대 연례상륙훈련이 실시되자 전염병 사태로 전 세계가 군사훈련을 자제하고 있음에도 공격형 훈련을 실시했다고 맹비난하였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북한당국이 아니라 우리민족끼리, 통일신보 등 선전매체들이 나섰다.
마침내 6월4일 김여정이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며 대남정책의 전환을 선언하였다. 김여정 6·4 담화를 신호탄으로 북측은 남측을 ‘적’으로 규정한다는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 모든 통신연락선을 완전 차단한다는 대남사업부서 사업총화 회의 지시를 잇따라 내놓았다. 김여정의 6·13 담화에서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와 군사행동 가능성을 언급했다.
<1> 여러 징후들과 작은 사고들로 볼 때 한반도 정세를 2017년 상황으로 되돌릴 대형사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측이 예고한 조치들로는 이미 실시한 통신연락선 전면차단 외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 개성공단 철거 및 군부대 배치, 9·19 군사합의서 폐기 등이 있다. ‘대적 행동’을 넘겨받은 북한군 총참모부가 시행할 군사도발로는 해안포 봉인 해제 및 사격훈련,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 복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무기반입,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 등이 예상된다.
이제 북측 화살은 미국을 향하고 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리선권 외무상은 “전략적 목표는 미국의 장기적인 군사적 위협을 관리하기 위한 보다 확실한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정근 미국국장도 “비핵화는 개소리”라며 “힘을 계속 키울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여정이 넘긴 대적 행동권의 주체가 전략군이 아닌 총참모부인 걸로 볼 때 핵실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같은 북·미 합의를 깨는 조치까지는 당장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오는 11월3일 미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북측이 북·미 합의를 넘어선 전략도발을 저지른다면 ‘양치기 소년’이 되어 북·미 대화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대남 압박 수위를 높인다고 우리 정부가 북측에 끌려다닐 걸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대북전단 살포금지법은 정부와 여당이 준비해왔던 것이라 북측 요구에 호응한 것뿐이다. 싱가포르에서 김 위원장이 말한 대로 ‘눈과 귀를 가린 그릇된 관행들’에서 벗어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이제라도 ‘우리 민족끼리’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 경향 2020.06.16.
정은경이 ‘수도권 대유행’을 말하는 이유
지난 1월 말, 출퇴근길에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2월 말, 회사 안에서 쓰기 시작했다. 4월 중순, 투표할 때도 썼다. 4월 말, 하루 신규 확진자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조만간 마스크를 벗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연휴가 시작됐다. 수도권의 클럽, 탁구장, 종교 소모임, 노인요양시설, 방문판매업체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번졌다. 특히 고령층 환자가 늘었다. 감염 경로가 분명하지 않은 사례도 많아졌다. 감염 추이가 현 상태로 이어질 경우 하루 신규 확진자 수가 7월 초 800여명까지 급증할 것이라는 보고서(국립암센터 기모란 교수·최선화 연구원)도 나왔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인 걸까. 지난 11~13일 방역 전문가 3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감염내과 전문의 ㄱ씨.
- 수도권 확산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수도권 대유행 가능성’을 언급했다. 평소의 신중한 화법에 비춰보면 절박한 경고로 봐야 한다. 하루 신규 확진자가 50명대를 유지한다 해도 한 달이면 1500명이다. 코로나19 환자는 평균 한 달 정도 입원한다. 인천은 병상이 거의 다 찼다. 경기도 조금 남은 정도이고….”
- 3~4월의 강력한 ‘사회적(물리적) 거리 두기’로 돌아가야 할까.
“국민에게 강력한 신호를 다시 줘야 할 때다. 최근 2주(5월29일~6월14일)간 수도권에서 시행된 ‘강화된 방역조치’는 실패했다. 만약 (하루 신규) 환자 수가 100명을 넘게 되면 사회적 거리 두기로 갈 수밖에 없다. 계획된 상태에서, 준비하고 들어가는 게 낫다.”
예방의학 전문가 ㄴ씨.
- 정부 대책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나.
“4월 말 환자 수가 줄어들자 경제가 어렵다며 생활방역으로 전환했다. 시민들은 ‘이젠 좀 풀어져도 되겠구나’ 받아들였다. 연휴까지 겹쳤다. 유흥시설이 문을 열고 굉장히 많은 접촉이 이뤄졌다. 신천지 사태 때는 (교인) 리스트라도 있었지만, 클럽 사태에선 처음으로 ‘트레이싱(tracing·접촉자 추적관리)’이 힘든 경우가 발생했다.”
- 수도권 방역은 일단 기존 조치를 연장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더 강화해야 한다. 위험한 곳은 다 문 닫으라 하고 보상해주는 게 가장 바람직하겠으나, 현실적으론 어렵다. 업종별로 위험도 등급을 매기고 있는데 시설·직종·행동별로 세밀하게 해서 효율성을 높이는 부분이 시급하다. 예컨대 학원은 중위험 시설로 분류되지만, 학원 강사는 접촉자가 얼마나 많은가. 공공기관 자체는 위험도가 높지 않다 해도, 민원업무를 맡은 공무원은 다르다.”
역학 전문가 ㄷ씨.
- 최근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수도권의 재생산지수(확진자 1명이 몇 명을 전염시키는지 보여주는 지수)가 1을 넘어 2 가까이까지 나온다. 만약 2라고 하면 한 달만 지나도 환자가 수천명까지 늘 수 있다. 더 우려되는 건 고령 환자 비중의 증가다.”
- 어떤 대책이 시급한가.
“대구의 경우처럼 병상이 없어 집에서 사망하는 ‘시스템 페일리어(system failure)’를 방지하는 게 급선무다. 중환자실에 코로나19 환자가 들어오면 일반 환자를 돌볼 때보다 3배의 의료인력이 필요하다. 병상이 10개 있다 해도 인력이 10명이면 코로나19 환자는 3명밖에 못 본다. 최근 선별진료소에서 보건소 직원이 탈진해 쓰러졌는데, 경고음이 울린 거다. 보건의료 뉴딜을 통해 현장 방역인력을 대폭 충원할 필요가 있다.”
정은경 본부장은 지난 10일 브리핑에서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전파되고 있다. 계속 이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면 대규모 유행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앞서 8일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은 수도권 지역에서 자제하고 각종 모임이나 회의는 비대면, 온라인으로 전환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들에게 부탁한다. 웬만한 행사는 온라인으로 대체해달라. 공개 행사에서 참석자 간 거리를 2m 이상 지켜달라. 발언할 때도 마스크를 벗지 말아달라. 발음이 뭉개져도 괜찮다. 당신들에겐 ‘뉴 노멀’을 보여줄 책무가 있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의 견해를 경청하라. 이를 바탕으로 솔직하고 명확하게 시민과 커뮤니케이션하라. 현실을 인정한다고 ‘K방역’이 지금까지 거둔 성과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는다.
동료 시민들에게도 부탁한다. 마스크를 제대로 씁시다. 그리고 헷갈릴 땐 정은경 본부장 말을 들읍시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경향 2020.06.16.
도시 숲과 함께 ‘슬기로운 방역생활’
은방울꽃, 노랑꽃창포, 쥐똥나무, 소나무, 덩굴장미, 아카시아, 등나무, 이팝나무…. 출근하는 중에 10분 남짓 도시 숲을 지날 때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푯말이 없어 이름을 모르는 풀이나 꽃, 나무도 많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꽃밭이나, 꼬불꼬불한 숲길에서 풍겨오는 흙냄새는 정겹다. 도심에서 숲(혹은 공원)을 걷는 일상이 요즘엔 더욱 소중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가져다준 변화다. 도시 숲은 방역과 일상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주택단지 사이, 산업단지와 생활권 사이, 도로와 주거단지 사이 등에 조성된 숲은 미세먼지 차단, 열섬 완화, 공기정화, 심리적 안정 제공 등으로 도시민의 건강과 면역력을 키워준다.
산림청에 따르면 도시 숲에서 부는 바람은 여름 한낮 평균 기온을 3∼7도 낮춘다. 도시 숲 1㏊는 오염물질 168㎏을 제거한다. 도로 옆에 침엽수를 많이 심으면 자동차 소음을 75% 낮춘다. 나무 한 그루는 연간 이산화탄소 2.5t을 흡수하고 산소 1.8t을 방출한다. 2012년 시화공단과 주거지역 사이에 완충숲을 조성했더니 미세먼지가 12%, 초미세먼지가 17% 낮아졌다고 한다. 도시 바람길 숲의 모델인 독일의 대표적인 공업 도시 슈투트가르트에서 길이 8㎞, 면적 100㏊의 도시 숲을 조성해 미세먼지를 30% 단축했다. ‘숲세권’이란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숲과 공원이 주택을 선택할 때 중요 요인이 되는 이유다. 요즘 도심을 걷다가 인파와 마주하는 게 즐겁지는 않다. 혹여 기침이라도 하면 ‘바이러스 전파자’ 취급을 당하기에 십상이다. 도시 숲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용이하게 하는 생활방역 공간이자, 코로나19로부터의 안전처다. 마스크를 벗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기에도 좋은 곳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도시 숲이 너무 부족한 게 문제다.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에서 살지만, 생활권 도시 숲은 고작 국토의 0.5%이다. 1인당 평균 면적이 서울은 4.38㎡, 경기는 7.69㎡, 인천은 8.23㎡에 불과하다. 뉴욕 23㎡, 런던 27㎡, 파리 13㎡와 비교하면 턱없이 비좁은 규모다. 전문가들이 동물과 인간의 ‘종(種) 간 장벽’을 뛰어넘어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유로 환경 파괴를 지목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규 확진자의 90%가량이 수도권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도 도시 숲 확장은 절실하다.
지난 5월20일 열린 제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도시 숲 등의 조성과 관리에 관한 법률안’이 9년 만에 통과돼 도시 숲 조성 사업에 탄력을 받게 된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환영한다. 앞으로는 지방자치단체장이 도시 숲의 유지와 면적 확대에 노력하고 국가는 이런 지자체에 행정·재정적 지원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도시 숲 법이 공포 후 1년이 지나 차질 없이 시행되도록 당국은 실효성 있는 하위법령 마련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도시 외곽의 맑은 공기를 끌어들이고 도심의 오염된 공기를 배출하는 도시 바람길 숲이나 미세먼지 차단 숲 등 생활권 숲을 대폭 늘리는 데에는 중앙·지방정부는 물론이고 민간(토지·나무 기부 등)도 동참할 때 효과가 더 크다. 다만 도시 숲 조성에만 치중하고 사후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수종 선택도 신중히 해야 한다. 식물이 내뿜는 기체는 다 사람과 환경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생물 유래 휘발성 유기화합물(BVOC)은 대기 중 질소화합물과 반응해 오존을 생성한다. BVOC를 많이 만드는 종류로는 포플러, 참나무, 아까시나무, 플라타너스 등이 있다. 환경정화 효과가 높고, 꽃가루 알레르기를 유발하지 않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소나무, 잣나무, 주목 등은 미세먼지 제거에 뛰어나지만 은행나무는 별로라고 한다.
마침 산림청이 도시 숲 가꾸기는 물론이고 숲 교육, 유아 숲 체험, 숲 유치원 운영으로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K포레스트’ 사업을 마련하는 모양이다. ‘한국형 산림뉴딜’인 K포레스트가 도시 숲과 함께하는 ‘슬기로운 생활방역’이나, 출구 없는 청년 문제 해결 등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최종안을 촘촘하게 도출해내길 기대한다.
박찬준 경제부장 세계일보 2020-06-16
백선엽 논란’, 지체된 정의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에 대한 국립묘지 안장 찬반 논란이 불거졌다. 김병기·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파묘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내용의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다. 현재 서울과 대전 현충원에는 60여명의 친일파가 잠들어 있다. 두 국회의원은 나라에 헌신한 이들을 모시는 현충원에 친일파들은 묻힐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이장해야 한다고 법 개정 취지를 설명한다. 이 내용대로 법 개정이 이뤄지면 백 장군은 사후 국립묘지 안장이 어려워진다.
보수 세력은 격렬하게 반대한다. 전쟁 영웅을 예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 일각의 논리는 도를 넘는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백선엽 장군은 6·25의 이순신인데, 현충원 안장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순신 장군은 반민족적 행위를 한 적이 없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대한민국에 기여한 부분이 더 크다면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반민족 행위자와 전쟁 영웅은 성격이 다르므로 ‘형량비교’ 불가다. “백 장군이 현충원에 못 간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이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분명히 해둘 게 있다. 백 장군은 일제 때 독립군을 탄압한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한 친일파다. 학계의 주장이 아니라 2009년 대통령 직속 정부 기구가 공식 인정한 사실이다. 백 장군이 6·25 때 중요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한 ‘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친일 행각을 덮을 순 없다. 보수 세력은 백 장군의 행적과 관련해 해방 후, 특히 6·25 때의 활약에 초점을 맞춘다. 북한과 싸운 역사만 인정하고 일제에 항거한 역사는 부정하겠다는 식이다. 이는 국가정체성의 문제다. 대한민국 역사는 해방 후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하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과 반식민투쟁이 대한민국의 뿌리임을 명기한 것이다. 헌법을 거스르겠다는 말인가.
백 장군은 흔히 프랑스의 앙리 페탱 원수와 비교된다. 페탱은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을 격퇴해 조국을 구한 ‘국부’로 불렸으나 2차 세계대전 때는 콜라보라시옹 즉 나치 독일에 부역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다. 콜라보라시옹 단죄를 주도한 드골은 “국가는 애국적 국민에게 상을 주고 민족 배반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단순명쾌한 논리가 한국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식민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는 왜곡과 굴절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흑역사의 첫 단추를 끼운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다. 반공주의 정책 기조 속에서 친일파들은 청산은커녕 강력한 권력집단으로 부활했다. 그들은 지배층의 중추 세력이 되었고,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더 고약한 것은 친일파에게 반공주의가 생존의 무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친일 청산을 요구하는 인사들을 ‘역청산’하는 명분이 되었다는 점이다. 친일파 비판자들에게 빨갱이, 종북 모자를 씌우는 색깔론이 이때 등장했고, 지금까지도 보수 세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여권 지지세력이 백 장군을 공격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친일파여서가 아니라 6·25 때 공산군과 싸워 이겼기 때문일 것”이란 보수 언론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 터이다.
친일 문제는 제때 청산되지 못하고 지연되면서 계속 곪아터지는 상처가 되었다. 2004년에야 국가가 청산에 들어가 백 장군 등 1000여명을 선별해 친일반민족 행위 결정을 내리고, 일부 친일 재산을 국고에 환수했다. 그러나 사법적 처벌은 없었다. 인적·제도적 청산보다는 진상규명을 통한 역사적 청산에 그친 것이다.
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호국 영령들의 영면 장소다. 그럼에도 국가가 공인한 친일파들까지 그곳에 안장해왔다. ‘반공 전선’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다. 보수 세력이 현충원을 독점한 채 보수적 이념과 가치 유지, 재생산에 활용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죽하면 임시정부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 선생이 “나를 친일파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잠든 효창공원에 보내달라”고 유언했겠는가.
현충원도 친일 청산이 필요하다. 그곳의 친일파들은 이장하되 더는 친일파를 안장하면 안 된다. ‘백 장군 논란’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맞다. 지체된 정의, 친일 청산은 계속돼야 한다./조호연 논설고문 경향 2020-06-17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다 한 것
정의당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섰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노무현 정부 입법으로 처음 발의돼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됐다. 20개의 차별금지조항이 담겼으나 입법 과정에서 7개 항목이 삭제됐다. 삭제된 조항 중 ‘병력’ ‘학력’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의 경우 한국경영자총연합회를 비롯한 재계에서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막는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성적 지향’에 대해서는 특히 종교계의 반대가 심했다. 삭제되지 않은 13개 영역은 성별, 장애, 나이,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사회적 신분 등이다. 차별금지법은 19대 때에도 발의됐으나 입법 절차에 오르지 못했고, 20대 때는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왜 필요할까. 1789년 프랑스대혁명 직후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 존재한다”고 돼 있다. 1948년 제정돼 국제관습법의 지위를 획득한 세계인권선언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헌법 제11조 1항도 평등권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법률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고 법률 제정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다.
차별의 존재 여부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욕’이다. 욕설은 차별을 넘어 혐오를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욕설에 등장하는 대상은 거의 대부분 그 사회에서 심각한 차별을 받는 존재들이다. 우리말에서 자주 사용되는 욕설은 여성, 성기 및 성행위, 장애인, 이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성기 및 성행위는 남성을 대상으로 했을 때 대부분 지시나 강조의 기능만을 갖고 있다면 여성의 경우 비하, 폄훼, 모욕의 효과가 크다. 따라서 욕설을 통해 절대적으로 차별받아온 대상은 여성과 장애인, 둘로 요약할 수 있다.
여성에 관한 욕설은 매우 폭넓은 데다 성기나 성관계를 지칭하는 좋지 않은 어감의 말과 결합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똑같은 사회활동이라도 여성형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공돌이보다는 공순이가 널리 사용됐고 똑같이 바람을 피워도 자유부인은 있는 반면 자유남편은 없다. 여성에 관한 욕설이 외모, 행동거지, 직업 등 여러 영역에서 변주를 보였다면 장애인의 경우 여성에 비해 수는 많지 않지만 거의 모든 장애 유형이 욕으로 사용돼 왔다. 바보, 병신, 저능아, 불구자, 앉은뱅이, 난쟁이, 봉사 등 정신장애와 지체장애는 물론 사회활동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작은 차이조차도 욕으로 쓰인다. 이를 통해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회 각 부문에서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발생하며 장애인은 존재 자체가 차별의 대상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나머지 항목도 여성이나 장애인만큼은 아니지만 관련 욕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나이’의 경우 ‘새끼’가 대표적이다. ‘출신지역’도 경상도나 전라도 등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비하 단어가 존재하며 ‘사상’과 관련해서도 ‘빨갱이’ 같은 말이 있다. 최근에는 이주노동자나 난민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면서 이들을 비하하는 표현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대응하는 욕설을 찾아보기 어려운 항목도 있다. 위의 삭제 항목 중 ‘범죄 전력’이나 ‘병력’, ‘학력’과 관련된 경우다. ‘전과자’나 ‘미필’, ‘중졸’ 또는 ‘고졸’ 같은 단어에 대응해 통용되는 비칭은 없다. 이들의 경우 혐오에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차별은 존재한다는 얘기다. ‘성적 지향’은 또 다르다.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일컫는 모든 단어가 특별한 변주 없이 그 자체가 욕설로 사용되고 있다. 장애 관련 단어처럼 순화된 말도 없다. 장애인처럼 존재 자체가 차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장애인과 달리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언어에는 사회구조가 반영돼 있다. 욕설도 마찬가지다. 그 사회의 소수자가 욕설의 대상이 된다. 거꾸로 차별금지법의 제정 실패도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2007년 항목 삭제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재계와 보수 기독교계다. 이 두 집단은 실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권력집단이면서 동시에 입법기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올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내용상 실패는 그래서 더욱 애석하다. 차별금지법처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법률의 제정에는 유권자 눈치를 보지 않는 군소 비례정당이 나서줘야 하기 때문이다. 정의당이 포문을 열었지만 발의를 위해서만도 4석이 더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다면 걱정이 없겠지만 말이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경향 2020-06-17
약자를 포기하지 않았던 ‘뉴딜 정책’
ⓒAP Photo 1929년 10월24일 증권시장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뉴욕 월스트리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그 후 시작된 1920년대는 미국의 첫 번째 황금기라 일컫기에 충분했다. 미국의 생산력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어. 한 가구당 자동차 한 대라는 ‘마이카(my car) 시대’가 일찌감치 열렸고, ‘꿈의 공장’ 할리우드는 전 세계 사람들을 넉넉히 매혹시킬 영화를 쏟아냈다. “자유분방한 재즈와 더불어 찰스턴과 같은 광란의 춤이 유행하고 여성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속옷을 벗어던지고 짧은 스커트를 입기 시작했다(케네스 데이비스 〈미국에 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라는 말처럼 당시 미국 시민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풍요를 누리며 인생을 만끽했다. 미국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불러.
이 ‘광란’을 실감하고 싶으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된다. 휘황찬란하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파티와 돈을 흙 내버리듯 쓰는 신흥 부호의 ‘돈질’이 펼쳐지고, 파티의 취흥에 흔들리는 1920년대 미국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지. 이 부의 주요한 원천 중 하나가 뉴욕의 증권거래소 월스트리트였단다. 1920~30년대 월스트리트를 소재로 쓴 〈골콘다〉(존 브룩스)라는 책이 있어. 제목 ‘골콘다’는 인도의 한 전설적인 도시의 이름이야. 지금은 폐허가 돼버렸으나 한때 지나가기만 하면 누구나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지. 1920년대의 월스트리트는 골콘다 같았다. 각종 이슈에 따른 등락은 있었지만 1929년 9월3일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381.17포인트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9년 만에 대략 10배가 상승하는 기염을 토했어. 사람들은 희망의 풍선을 부풀렸지.
그런데 1929년 10월24일 ‘블랙 먼데이’에 시작된 주가 폭락 사태는 화사하게 미국 하늘을 수놓았던 오색풍선들을 처참히 터뜨려버렸어. 이른바 대공황이었지. “중개인들은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서로 머리채를 휘어잡기도 했다. 거래소의 각종 설비들은 말썽을 일으켰다. 주가표시기도 작동을 멈췄다. 통화량 폭증으로 전화는 불통이었다. 장을 마치고 두 시간 만에 겨우 작동된 주가표시기에 나타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시장을 공황으로 내몰았다(에드워드 챈슬러 〈금융투기의 역사〉).”
절망에 빠진 미국 국민들은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를 갈아치울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했다. 당시의 우스갯소리로 이런 게 있어. 한 히치하이커가 기록적으로 짧은 시간에 차를 얻어 타고서 미국 횡단에 성공했는데 그는 이런 팻말을 들었다고 해. “차를 태워주시오. 안 그러면 후버를 찍겠소.” 미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하지.
후버의 뒤를 이어 미합중국 제32대 대통령이 된 사람이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야. 루스벨트는 유명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추진하며 대공황 속에서 침몰해가는 미국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지. 뉴딜 정책의 핵심은 일자리를 창출하여 실업자들을 구하고 그들의 구매력을 되살려 소비를 진작시키며 다시금 산업을 부흥시킨다는 것이었어. 루스벨트는 강력한 경기부양 정책을 폄으로써 미국 자본주의의 모토와도 같았던 ‘자유방임’, 즉 정부는 기업활동과 경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는 기조를 깨버린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사업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실업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농산물과 상품의 과잉생산을 막기 위해 보조금을 주거나 산업별 최대 생산량을 정한 산업부흥법을 제정해 수급을 조절했다. 루스벨트 정부는 국가부흥위원회(NRA) 등 온갖 기구를 만들어 산업 전반에 개입했어. “미국 정부가 전쟁 중이 아닐 때 이 정도까지 경제를 통제하고 법제화한 일은 전무후무했다(스티브 코언 외 〈현실의 경제학, 경제는 실제로 어떻게 성장하는가〉)”라고 할 정도로.
그런데 뉴딜은 거창한 사업과 획기적인 경제정책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었어. 뉴딜 정책의 바탕에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고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겠다는 의지가 짙게 깔려 있었단다. 이렇듯 ‘노동 프렌들리’한 뉴딜을 밀어붙였던 루스벨트 정권의 상징적 존재는 이 정권에서 노동장관을 맡은 프랜시스 퍼킨스였어.
ⓒAP Photo 1933년 ‘노동자 편’이었던 프랜시스 퍼킨스(뒷줄 가운데)는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 각료에 임명되었다.
‘한국판 뉴딜’이 루스벨트에게 배워야 할 것
문이 잠긴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노동자들 146명이 불에 타 죽거나 건물 밖으로 추락사한 사건인 트라이앵글 공장 화재를 현장에서 목격했던 그녀는 노동조건 개선과 산업안전에 매진하고 있었지. 빈민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도시 최악의 갱단 두목까지 찾아갔으며 ‘주 54시간 노동’을 목이 쉬어라 외치고 다녔던 이 강단 넘치는 여성을 루스벨트는 주목했다. 노동장관 물망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퍼킨스는 노동자 출신을 장관으로 임명하라며 사양의 뜻을 밝히지만 루스벨트는 이렇게 단호한 메모를 보낸다. “귀하의 충고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동의하지 않소(데이비드 브룩스 〈인간의 품격〉).”
퍼킨스는 1933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각료에 임명된다. 노동자 편만 드는 장관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기업주들과 “여자는 조언을 하는 존재일 뿐 명령을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반대를 무릅쓴 결론이었지. 퍼킨스는 장관으로 임명된다면 추진할 일거리들을 한아름 들고 가 쏟아놓으며 루스벨트에게 말한다. “저를 장관에 앉히시려면 이런 걸 한다고 약속해주세요.” 광범위한 실업구제, 최저임금법, 노령연금을 위한 사회보장 프로그램, 아동노동 철폐 등이었어. 루스벨트의 답은 매우 시원했지. “앞으로도 계속 이 문제들로 나를 성가시게 할 것 같군(〈인간의 품격〉 중).” 루스벨트는 무려 12년 동안이나 노동장관에 프랜시스 퍼킨스를 못 박아두었어. 퍼킨스 역시 12년간 대통령을 성가시게 하면서 아동노동 제한, 주당 40시간 노동제, 고용보험, 최저임금제를 도입했고 사회보장법을 제정하는 등 당시로서는 꿈같았던 성과를 이룩하게 돼. 그사이 미국이 노조 가입률은 30%까지 올라갔지.
뉴딜은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었고 국가 주도의 취로사업만도 아니었으며 기업 살리기 프로젝트나 경제 회생 플랜에 그치지 않았단다. 뉴딜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적어도 잔인할 만큼 ‘자유로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노동자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제시해주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거야.
루스벨트 정부 아래 국가부흥위원회의 모토는 ‘We do our part’, 즉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한다’였어. 뉴딜의 성과는 복기해야 하고 한계도 인식해야겠으나 ‘한국판 뉴딜’의 목소리가 높은 요즘, 우리가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여성 노동장관을 정권 내내 옆에 두고 ‘성가셔’ 하면서도 ‘할 일을 했던’ 루스벨트의 철학과 리더십이 아닐까? /김형민(SBS CNBC PD) 시사인 / 2020.06.20
우리나라 공무원은 많은가 적은가
통계청 ‘2018 공공부문 일자리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취업자 수 대비 공공부문 일자리는 9.1%, 일반정부 일자리는 7.8%다. 일자리 수로는 전체 2682만 명의 취업자 중 공공부문 245만 개, 일반정부 209만 개다. 일반정부 일자리 가운데 ‘직접 일자리’라고 볼 수 있는 중앙정부, 지방정부, 사회보장기금 관련 일자리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비 중상위 수준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신분상’ 공무원이 많은 편이라는 얘기다. 공무원 수가 적다고 하는 것은 다소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
또 하나 특징은 중앙정부 내 공무원의 비중이 OECD 평균 대비 10.6%포인트나 높다는 점이다. 공공부문에서 직접 사회서비스를 하는 일자리보다 행정을 처리하는 일자리 비중이 높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공무원 간 격차도 따져볼 만하다. 국가별 중앙정부 내 공무원과 비공무원 간 격차를 9가지 기준에서 살펴본 OECD 자료에 따르면, 36개국 중 한국보다 격차가 작은 국가는 28개국, 한국보다 격차가 큰 국가는 7개국이다. 한국은 공무원과 비공무원의 격차가 큰 나라다. 호주 역시 격차가 큰 나라인데, 공무원 임용 개방성 지수가 한국의 2배다. 공무원이 되는 사람과 그만두는 사람의 비중이 우리의 두 배라는 것이다. 한국 공무원이 폐쇄적인 신분 구조라는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통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정부에서 재정을 지원하는 사학연금 가입 교직원, 사회복지 및 어린이집 시설 종사자, 노인일자리 규모는 정부 발표 일반정부 일자리의 67.7%에 달하는 규모다. 의무사병·사회복무요원 등도 공공부문에 종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민간위탁·보조금 등의 형태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정부의 지원으로 재정을 충당하는 직업군 규모도 상당하다. 본격적인 재정확대에 앞서 공공부문의 범위와 기능을 명확히 하고 정확한 통계 산출 및 현황을 파악해야 한다.
한국의 공무원은 다른 나라에 비해 공개 경쟁시험 비중이 월등히 높고, 공무원 임용 개방성 지수는 상당히 낮다. 또 직업안정성이 평균보다 높고, 중앙정부 내 공무원과 비공무원 간 격차가 크다. 공무원과 비공무원 간 격차는 공직 임용 개방성을 저해하고 조직 내 칸막이로 작용해 효율적인 조직 운영을 해친다. 이 같은 구분과 차별적 대우의 합리성 및 효율성에 대해 점검하고, 공공부문 종사자의 정의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신분으로서의 공무원을 역할로서의 공무원, 세금으로 봉사하는 공무원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신분은 권력이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주간경향 2020.06.22
반값 아파트 공급·불로소득 동시 차단, 발상 바꾸면 가능하다
요즘 TV를 보고 있자면, 코로나와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뉴스 중 하나가 '아파트 가격 상승'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지난 한 달 이내 인터넷 기사만 찾아봐도 '강남 급매물·외곽 상승 영향으로 서울 아파트 값이 다시 올랐다', '대전·세종 아파트 매매가 다시 뛴다', '다시 고개 드는 경기·인천 아파트 값' 등 부동산 관련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수도권 중심의 아파트 가격 동향에 대한 기사가 지방으로까지 내려가더니, 급기야 '청주 아파트값 폭등'이라는 뉴스까지 올라왔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6·17 부동산 대책도 발표되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사회개혁을 가로막는 적폐세력 및 코로나와의 싸움에 전력을 집중해야 함에도, 집권 내내 아파트 가격과도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느낌이다.
주변 아파트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말은, 곧 아파트 가격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토지의 가격이 상승하는 것을 의미하고, 토지가격 상승은 신규로 공급되는 분양가의 상승을 견인함에 따라, 이는 다시 기존 아파트 가격을 끌어올리게 만드는 모멘텀(momentum)으로 작용하여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참여연대와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임대주택 비율을 늘리고, 분양가 상한제를 전면 실시하라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그런데 분양가 상한제를 실시하면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이게 자칫 '로또 아파트'가 되어 분양에 당첨된 사람들의 불로소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즉, 현행대로 두면 고분양가 논란이 일게 됨과 동시에 건설사의 폭리와 주변 아파트값 상승을 자극하는 요인이 될 수 있고, 분양가를 묶자니 최초 분양자들에게 수억 원에 이르는 불로소득을 합법적으로 안겨주는 모순을 갖게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이로 인해 정부는 전매제한과 분양 당첨된 아파트에 일정 기간 거주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하고는 있으나, 이를 수단으로 아파트 가격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일각에서는 토지임대부 주택(토지는 공공에서 소유하고, 건물만 분양하되, 분양자가 토지에 대한 임대료를 납부하는 형태)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 또한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토지임대부 주택의 장점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주택가격의 50∼60%에 이르는 토지 가격이 주택 가격에서 제외되기에 반값 아파트로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고, 시간이 지나도 감가 상각되지 않는 토지를 분양자가 소유할 수 없기에 실수요자만 나타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가치가 경감되는 건물분만을 분양자가 소유한다는 점에서 가격이 절대 오르지 않아야 하나, 현실은 또 그렇지 않다. 쉬운 예로, 토지는 국가에서 소유하고, 반면 건물만 민간이 갖되, 토지를 국가로부터 장기 임대하는 형식, 즉 이론적으로 토지임대부 주택과 거의 동일한 제도를 취하는 중국도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또한 토지를 분양자가 소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거형태는 일단 분양시장에서 인기가 없다. 과거 참여정부는 군포시 부곡지구에 토지임대부 주택을 분양해 입주자들의 금전적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의 주택공급을 시도했다가 청약 대기자들로부터 외면받아 실패했던 전례가 있었다.
이 지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에서는 강남·서초 일대 그린벨트를 풀어 택지를 조성하였던 바, 한껏 낮춘 택지조성원가를 기준으로 아주 저렴한 토지임대료(강남 세곡지구 84제곱미터(㎡) 기준 35만 원) 책정과 주변 시세의 반의 반 값인 2억 원 남짓에 아파트를 분양함으로써 분양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매제한 기간이 풀리자 환수되지 않은 토지임대료가 건물가격 상승을 유인함으로써 건물가격이 급등하였고, 2020년 올 초에 이미 10억 원이 훌쩍 넘어버렸다. 이 역시 또 다른 '로또 아파트'가 되었다.
유사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토지임대료를 시장가격과 유사하게 부과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반복적으로 재조정해야 하나, 이렇게 되면 건물 소유만 인정받으면서도 정작 기대되는 메리트(merit)는 거의 사라져, 이러한 분양에 참여할 소비자는 별로 없을 것이며, 이 때문에 또다시 분양에 실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분양가격은 낮추면서 이와 더불어 최초 분양자의 불로소득은 가급적 차단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안은 주택의 반만 분양하는 형태라고 사료된다. 즉, LH(한국토지주택공사)와 분양자 간 절반씩 지분을 갖는 공동명의로 함으로써 시세의 반값 아파트로 분양 공급하되, LH 소유의 지분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임대료를 받아 토지개발비를 가급적 회수하고, 반면 우리나라 국민의 (등기가 이루어진) 내 집 마련에 대한 욕구를 일정부분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시세 차익도 반만 용인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장 현실성 있는 제도가 아닐까 싶다. 다만 이 제도에 참여하고자 할 민간건설사가 거의 없을 것으로 여겨지고, 아파트 지분의 반을 공공이 무기한 보유해야 하는 단점이 존재하는 바, 이는 국민에 대한 주거복지 차원에서 감수해야 할 것이다.
박병일 한국외대 교수/ 프레시안 2020.06.22
‘볼턴’ ‘부부장 김여정’을 보는 분노와 참담함
2018년 5월 유명한 ‘도보다리’ 회담 직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왔다. 남북정상회담 얘기에 이어 곧 열릴 북-미 정상회담 장소가 화제에 올랐다. 두 정상 사이에 잭 니클라우스 골프장이 있는 인천 송도까지 거론하다 문 대통령이 판문점을 권하자 트럼프가 “좋다”며 즉각 공개하려 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참모들과 상의한 뒤 확정하라고 조언했는데 결국 그 과정에서 뒤집혔다. 그래서 결정된 게 싱가포르였다.
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회고록에서 싱가포르 회담 전 한·미 정상의 통화 내용을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라고 적었다. 폼페이오는 ‘심장마비가 올 정도’라고 했다고 썼다.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으나 북-미 협상을 ‘한국의 창조물’이라고 한 볼턴 입장에선 이런 통화 자체를 우리의 ‘통일 어젠다’에 휘둘리는 것으로 봤을 수 있다.
볼턴 회고록은 집필 동기가 의심스럽고 진위 논란도 있지만 간과하기 힘든 대목들이 적잖다. 예상대로 볼턴은 애초 싱가포르 회담 자체가 불발되기를 ‘희망’했고 하노이 회담이 불가피해지자 ‘절망’했다고 스스로 털어놨다.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보국장 주문대로 핵 이외에 생화학무기까지 폐기하라며 북한에 허들을 높인 사실도 자랑스레 적어놓았다. 트럼프는 ‘볼턴이 리비아 모델을 주장하는 바람에 회담을 망쳤다’고 트위트를 날렸으나 여러 정황상 그 역시 이벤트 이상의 진정성을 갖고 협상에 임했는지 의문이다. 하노이 회담 때도 ‘러시아 스캔들 청문회’ 보느라 밤을 새우고, 이를 덮는 데 협상 타결과 결렬 중 어떤 게 ‘더 큰 기사가 될지’ 궁금해했다는 대목도 등장한다. 사실이라면, 한반도 운명이 걸린 협상을 초조하게 지켜봤던 우리로서는 분노할 만한, 참담한 장면들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7일 원로들과 만나 북핵 협상에 대해 미국에선 ‘대통령이 하려 해도 참모들이 반대하니 안 되더라’고 말한 모양이다. 그런데 참모만 문제가 아니다. 고인이 된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는 ‘군산복합체와 이들의 지원을 받는 보수적 학자들, 보수파 의원들’을 ‘한반도 평화를 반기지 않는 비토세력’(<중앙일보> 2018년 4월10일치 ‘시론’)으로 꼽은 적이 있다. 박한식 미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미군 주둔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또 무기 구매를 종용·강요하기 위해 북한을 악마화하고 있다(<한겨레> 2020년 6월8일치 ‘평화에 미치다’)고 분석했다. 이런 구조와 세력이 문제의 본질이다.
북한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는 내부 사정뿐 아니라 교착 상태에 빠진 북핵 협상의 판을 흔들어보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그러나 세계의 관심을 끌었을지는 몰라도 위험한 도박이다. 당장 한국 상황을 보자. <노동신문> 담화문에 등장하는 ‘노동당 제1부부장 김여정’은 우리 국민에게 불과 1년 전까지 정상회담 때마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던 그 김여정이 아니다. 난폭하고 패륜적인 ‘말폭탄’을 앞세운 생경한 ‘김여정’의 등장은 ‘주적’으로 대치해온 냉전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어렵게 협상을 이끌어온 민족화해·평화 세력 입지는 쪼그라들고 그간의 회담·합의를 ‘위장평화쇼’로 매도해온 ‘적대적 공존’의 냉전 세력은 기가 살았다. ‘3일만 참자’는 선제타격론이나 전술핵 도입 등 비현실적인 주장을 펴던 이들이 “거봐라. 내 말 맞지” 하고 있다.
볼턴 회고록은 툭하면 ‘한국 정부 과속에 미국이 분노한다’며 미국에 발맞추라고 정부 발목 잡던 수구보수 언론·야당에도 성찰을 요구한다. 한반도 평화는 ‘트럼프-볼턴’ 패거리의 안중에 없는 게 드러났는데도 ‘동맹’ ‘동맹’ 하며 미국만 따르자는 건 볼턴 편에 서자는 얘기다. ‘폭파’ 이후 수구보수 언론들은 ‘인내’ 표현까지 꼬투리 잡아 ‘환상에서 벗어나라’며 대통령을 성토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시절 북한이 대북전단용 풍선에 고사총을 쐈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북한과 마주 앉아 합의를 일궈내는 것은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긴 호흡으로 남북 대화를 이어갈 원칙과 분명한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조선일보> 2014년 10월16일치 사설)고 조언했다. 때로 응징이 필요해도 결국 ‘인내’와 ‘대화’ 외엔 방법이 없음을 이들도 잘 안다. 그런데도 정권 따라 말을 바꾸니 언론이 욕먹고 기레기 소리 듣는 것이다.
정부는 좀더 적극적으로 상황 관리에 나서야 한다. 북한 역시 선을 넘으면 안 된다. 그래야 남북이 좀더 주도적으로 나설 돌파구가 열린다. 트럼프나 볼턴 수준의 인물들에게 우리 운명을 통째로 맡겨서야 되겠는가./김이택 대기자 rikim@hani.co.kr 한겨레 2020.06.22.
코로나19가 불러온 '대혼란'의 시대
트럼프의 대응은 미국 민주주의와 패권의 쇠퇴를 가속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은 국제질서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과 기존 추세가 가속화될 뿐이라는 입장이 맞서는 가운데 백가쟁명이 진행 중이다.
코로나19가 모든 변화의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와 대봉쇄(the Great Lockdown)와 같은 방역의 필요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이후 대침체(the Great Recession)를 넘어서는, 1930년대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역설은 분명 새롭다. 거의 모든 국가들이 전쟁의 수사를 내세우며 유례없는 재정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점도 그렇다. 백신이 없는 감염병의 공포가 실제 전쟁보다도 훨씬 더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개인의 일상을 무너뜨리면서, 다시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진 점도 단속적인 변화이다.
이와 같은 코로나19 복합위기는 거시적으로 보면 산업화 이후 두 번째 지구화의 위기이다. 영국이 주도한 첫 번째 지구화는 19세기 후반의 공황과 식민지 확장 경쟁, 일차대전의 위기를 겪다가 대공황과 이차대전으로 파국을 맞이하였다. 이차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두 번째 지구화는 탈식민화와 함께 무역과 금융, 생산의 전 분야에서 통합이 심화되고 각 분야를 다루는 국제제도들이 형성된 점이 특징이다.
냉전 초기 미국은 대공황의 역사적 교훈을 내장한, 국가의 거시경제 조정 및 복지 제공으로 시장의 논리를 일정하게 제어하는 ‘내장된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을 거치면서 국가의 보호와 규제 기능을 제거하고 금융 자본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다. 냉전의 종언 이후 세계경제 운영의 독점권을 지니게 된 미국은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전 지구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병폐는 대침체를 초래했다. 대침체는 다시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인종적, 이념적 분열을 심화시켜 미국의 기존 패권과 민주주의의 문법 및 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트럼프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미국의 무능과 분열을 비극적으로 노정하고 있고, 트럼프 정부의 대응은 미국 민주주의와 패권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있다.
코로나19 복합위기는 인류의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일정·과정·시스템이 중단·단절·붕괴되는 ‘대혼란(the Great Disruption)’의 성격을 지닌다. 대혼란에 따른 변화는 세 가지이다.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고 중단시키는 ‘동결’, 기존의 추세를 강화하는 ‘증폭’, 그리고 관행이나 예상을 뒤집는 ‘반전’이 그것들이다.
대혼란은 방역을 위해 기업 활동이나 올림픽, 군사훈련, 선거운동 등을 모두 중단시켰다. 이러한 동결 효과는 생명이 이윤이나 국가안보 등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하는 가치임을 확인하였다.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 ‘코로나 휴전’과 경제재제의 중단 요구가 터져 나왔다.
국가안보가 아니라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여 군비는 감축하고 보건협력은 물론 기후변화에 대한 투자와 국제적 협력을 촉구하는, 글로벌 거버넌스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이러한 흐름은 2017년 유엔총회에서 통과된 핵무기금지조약이 상징하는 지구적 수준에서의 평화체제 요구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며, 9/11 테러 이후 부시 정부의 탄도탄요격유도탄조약(Anti-Ballistic Missile Treaty) 탈퇴, 최근 트럼프 정부의 중거리핵전력조약(Intermediate Range Nuclear Forces Treaty) 및 영공개방조약(Open Skies Treaty) 탈퇴를 통해서 핵무기 군비통제 레짐을 파괴하고 있는 미국의 정책과 반하는 것이다.
대혼란이 연출한 최대의 반전은 ‘우한 폐렴’에 대한 중국 당국의 대응을 비판하던 소위 서구 선진국들이 코로나19 방역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특히 코로나19 사망자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전사자 숫자를 상회하는 10만 명 규모이고 WHO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있는 미국은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하여 대내적으로 실패국가이고 대외적으로는 불량국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은 대만 등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방역에 성공한 모델로 평가받는다. 거시적으로 보면 19세기 서세동점 이후 문명표준의 역전이다. 서구의 일부 논자들은 개방성과 투명성, 민주성을 특징으로 하는 K-방역 모델을 권위주의적 동원체제의 전통과 감시사회의 산물로 비판한다. 이러한 시각은 9/11 테러 이후 테러 방지를 명분으로 한 미국과 서구 전반의 감시체제 확립을 고려하면 서구의 고질적인 오리엔탈리즘이다.
코로나19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병폐와 함께 미국과 중국이 모두 국제적 리더십을 제공하지 못하는 패권의 부재, G-0의 대공위시대(interregnum)의 도래를 확인해주고 있다. 중국은 19세기 영국 주도의 지구화체제에서 서구 열강의 다자적 제국주의에 복속되었지만, 탈냉전기 미국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체제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상하고 비록 지역적 차원이지만 일대일로와 AIIB 등을 통해서 독자적으로 미국 패권의 대안적 질서와 제도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력은 영국과 미국이 다른 제국이나 강대국들을 이념적, 제도적으로 통제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트럼프의 미국은 국제적 리더십을 제공할 패권의 의지가 없고, 대침체 이후 제반 측면의 양극화가 심화된 미국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패권의 대전략을 추진할 능력이 없다.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나 무역보복, 금융제재 등의 ‘대량혼란무기(Weapons of Mass Disruption)’를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이(Jospeh Nye)는 이러한 경제적 상호의존의 ‘오남용’이 장기적으로는 미국 패권으로부터의 탈퇴를 추동하며 미국 패권의 정당성을 침식한다고 비판했다. 중국이 홍콩보안법 입법을 강행하고 미국 전역에서는 백인 경찰의 흑인 용의자 살해에 대한 항의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트럼프는 중국체제에 대한 이념적 비판을 명분으로 내걸고 ‘대량혼란무기’와 동맹을 강압의 수단으로 삼아 중국의 기술 발전을 막고 반중국 공급망을 건설하고자 하는 총공세를 시작하였다.
냉전시기 미국의 핵독점 시도는 실패했다. 미국이 중국의 기술 발전을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업의 해외이전은 시장의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즉각생산(just-in-time production) 등의 보완 시도는 있겠지만 대공황 수준으로의 역지구화는 없을 것이다. 지구적 경제통합의 기본 틀이 보존되는 한 본국 귀환에 대한 제도적 유인이 마련된다고 해도 미국 기업들이 반중국 공급망에 참여할지는 불확실하다. 기술이나 시장의 대안도 없이 동맹에게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요구하는 것은 동맹의 국익을 훼손하는 무책임한 강압이며 나이의 지적처럼 패권으로부터의 탈퇴를 추동하는 자충수이다. 그리고 미국의 인종시위와 중국의 홍콩민주화 시위는 양국이 모두 국제사회의 전범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허쉬먼(Albert O. Hirschman)은 쇠퇴하는 조직에 대한 대응을 ‘이탈, 항의, 충성(Exit, Voice, and Loyalty)’으로 구분했다. 중국의 부상으로 제한적이지만 미국 패권에서의 이탈 옵션이 생겨났다.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는 미국 내부에서 우파 민중주의에 의한 패권의 부정 혹은 이탈을 의미한다. 대혼란의 동결, 증폭, 반전을 둘러싸고, 미국 내부에서 그리고 미국과 전 세계 사이에 진행될 ‘이탈, 항의, 충성’ 게임이 포스트코로나 국제질서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다. /이혜정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프레시안 2020.06.22
사회적 가치’ 담는 기업이 살아남는다
세계 의류산업의 생산기지, 방글라데시 다카 지역에서 2013년 발생한 의류 공장 ‘라나플라자’ 붕괴 사고는 현대 자본주의의 비윤리성을 들춰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수천명이 사망한 이 사고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 지역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이를 악용하는 다국적 의류기업들의 비윤리성에 세계는 분노했다. 지난 반세기, 자본주의의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다국적기업의 비윤리적 경영이 야기한 수많은 문제를 경험했다.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자성이 이어졌고 소비자 의식도 높아져, 기업은 단순히 이윤 추구만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윤리적 책무를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다. 무책임한 기업을 처벌하는 소비자와 시민단체의 활동은 기업의 지속 가능성에도 영향을 주어 기업들도 자발적으로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됐다.
사회적 책임 경영은 이제 자본주의 기업경영의 대세가 되고 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미국의 500대 글로벌 기업 대다수가 독립적 부서를 만들어 사회적 책임 경영을 관리하고 있다. 세계적인 투자회사 블랙록(Black Rock)의 최고경영자(CEO) 래리 핑크는 그가 투자하는 회사들에 보낸 신년 메시지에서 기후변화라는 지구환경 문제의 해결과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협력에 기여하는 책임 경영을 강조했다. 단기적 수익성에만 몰입하기보다는 회사를 둘러싼 사회의 변화와 이에 대한 책임이 기업의 지속 가능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런 글로벌 자본주의의 경험 속에서 사회적 책임으로 대표되는 기업활동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시장에서 매겨지는 가격만으로 기업 활동을 평가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 세상엔 시장이 평가하지 못하는 무수한 사회적 가치들이 있고 그 속에서 코로나19 위기나 기후위기와 같은 충격을 극복하게 하는 힘의 원천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기업들이 살아남으려면 사회적 가치를 기업 성과로 내부화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제활동이 전 지구적으로 일으키는 다양한 환경문제와 사회문제,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국제기구, 민간공익단체들의 노력이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더 높였고, 사회문제 해결을 주목적으로 하는 사회적기업과 소셜벤처의 활약 그리고 사회적 경제의 성장도 가능하게 했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공공기관과 공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기업경영의 중심에 두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규범적 당위성 때문만이 아니라 기업과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 때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적 가치라는 개념에 대해 많은 오해와 편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17년 발의된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은 사회적 가치를 “사회·경제·환경·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라고 잘 규정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는 시장과 가격기구를 통해 발생하는 이윤, 소비자와 생산자 잉여뿐만 아니라 고용복지, 환경보존, 취약계층의 복지, 지역공동체에 대한 기여 등과 같이 기관의 활동이 창출하는 공공의 이익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므로 그 성과를 적절히 평가하려면 경제적 성과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가치도 살펴야 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사회적 가치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번 평가결과에 대해, 사회적 가치를 구실로 적자 낸 공공기관에 성과급을 준다는 비판이 있다. 재무적 성과(적자)만으로 공공기관의 경영성과를 판단할 수 없다. 사회적 가치는 재무적 성과 이외에 공공기관의 경영성과를 평가할 수 있는 포괄적 기준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선 사회적 가치 비중이 높아지면 경영성과와 생산성을 소홀히 하게 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회적 가치가 경영성과, 생산성 등과 무관하거나 독립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사회적 가치가 공공기관 경영평가 지표에 포함된 것은 문재인 정부에 와서다. 그 이전 평가에서 가장 유사한 지표는 ‘사회적 책임’인데 일자리 창출과 채용비리 근절같이 매우 제한적 의미이고 그 배점도 지금 사회적 가치 지표에 할당된 점수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작년과 올해 평가에서 사회적 가치는 일자리 창출, 균등한 기회와 사회통합, 안전 및 환경, 상생협력 및 지역발전, 윤리경영 등으로 평가된다. 과거 강조됐던 조직, 인사, 재무관리를 다 합친 것보다 월등히 높은 점수가 사회적 가치에 배정됐다. 실로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평가방식과 지표들의 가중치 등 향후 개선해야 할 점들이 있으나 매우 의미 있는 발전이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분배정의연구센터장 bgju@snu.ac.kr 경향 2020.06.25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
이명박-박근혜의 보수정권에 대비하려고 문재인 정권을 ‘진보정권’이라고 부르게 된 듯한데, 4·15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한 뒤에는 더 폭넓게 부르고 있다. 1958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조봉암 진보당 당수를 법살한 뒤, 진보는 국가보안법 아래 빨갱이의 언어로 오랫동안 금기시되다시피 했는데, 마침내 진보정권이 성립되었고 장기집권까지 전망되고 있다니 나름 진보 이념을 껴안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로선 감개무량할 수 있겠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그래도 살아 꿈틀대던 국가보안법 폐지나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화 요구의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고,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검찰개혁,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비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했는데, 진보 개념을 빼앗기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묻는다.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
미리 말하지만, 진보 이념과 진보정권(정치)의 현실 사이의 괴리가 문재인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령 한국 언론은 <21세기 자본>에 이어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크게 소개했지만,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를 넘어서서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에 기반한 정의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그의 이념을 한국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모색하는 정치 역량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워낙 그런 역량이 없지 않으냐고? 일면 그럴듯한 변명이지만, <한겨레>처럼 진보를 표방한 언론이라면 다음의 구체적 실천 과정에 개입하고 담지할 정치사회 역량을 키우고 고무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 실천이 있어야 마땅하다. 즉, “이것은 특히 사회적 일시소유체제 확립을 경유하는데 이 체제는 한편으로는 기업 내 임금노동자들과의 의결권 및 권력 분유와 그 상한 설정에,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누진소유세와 보편적 자본지원과 재화의 지속적인 순환에 기초한다. 또한 이것은 누진소득세 및 탄소 배출의 집단적 규제로 이루어진 체계를 내포하는데, 이 체계를 통해 사회보장-기본소득-생태주의적 이행-실질적인 평등주의 교육권의 시행을 위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다.”
오늘날 더욱 격심해지는 불평등주의 체제의 극복이 진보(정치)의 핵심 과제라면, 피케티가 적시한 임금노동자의 의결권 및 권력 분유, 강력한 누진소유세, 기본소득을 넘어선 보편적 자본지원, 탄소 배출의 집단적 규제, 실질적인 평등주의 교육권 등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은 하나도 없다.
지난 6월23일 경실련은 기자회견을 열어 문재인 정부 3년 동안 서울 아파트값이 올라 493조원의 불로소득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서울 아파트 중위값이 이명박 집권기엔 3% 하락했고 박근혜 정부 시기엔 29% 상승했던 것에 비해,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52% 올라 불로소득 불평등 격차가 보수정권 때보다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울 아파트 가격이 치솟은 원인에 대해 경실련은 문재인 정권이 “집권 초부터 부동산 투기를 조장한” 반면, “공시지가를 현실화하지 않고 분양가 상한제 도입을 주저했으며 부동산 부자들에게 감세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권이 가장 뼈아프게 들어야 할 부분은 소득 3분위 가구(5분위별 가처분소득 기준)가 서울 중위가격 아파트를 사는 데 걸리는 기간에 관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 집권기에는 그 기간이 16년에서 13년으로 줄었고 박근혜 정부 집권기에는 13년에서 15년으로 늘어났을 뿐인데, 문재인 정부는 임기 초에 16년이었는데 지금은 22년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진보정권 아래 이렇게 부동산값이 치솟은 것을 “브라만 좌파(학력 엘리트)와 상인 우파의 공모”의 구체적 예로 언급할 수 있을 듯하다.
1990년을 전후하여 현실사회주의권이 무너진 뒤, 서유럽의 사민주의 정치세력(브라만 좌파)은 노동계급에겐 등을 돌리고 세계화에 올라타는 길을 택했다. 이념적으로 왼편에서 끌어당기는 외부 동력이 사라진 터에 우경화는 일국 단위 대의제의 표밭이 넓어진다는 점에서 집권전략의 일환이었고 실제로 주효했다. 영국 노동당은 신노동당(토니 블레어)을, 독일 사민당은 신중도(게르하르트 슈뢰더)를, 프랑스 사회당은 사회적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이런 우경화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또는 학력 엘리트답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체성 정치를 추구하였다. 녹색 가치가 강조되고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해졌다. 서유럽 성소수자들에게 1990년대 프랑스의 사회연대계약(PACS) 등 생활동반자법을 거친 뒤 2001년 네덜란드의 동성결혼권과 함께 21세기가 ‘해방의 세기’로 열리게 된 정치사회적 배경이다.
최근 수원 영광제일교회 이동환 목사가 교회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해 8월31일 인천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들에게 꽃잎을 뿌리며 축복했다는 게 이유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소속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조속 제정 촉구를 위한 오체투지를 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뿐만 아니라 ‘경제적 차별’까지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의 성안을 마치고 공동발의자를 구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올해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진보정권의 여당 국회의원들한테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19대 국회에서 민주당의 김한길·최원식 전 의원이 발의했던 차별금지법 법안을 자진 철회했던 일, 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절,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려 울려 퍼졌던 “나중에!”의 외침 소리, 그리고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김진표 의원 등이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노골적으로 밝혔던 일뿐이다.
안타깝고 분하게도 남북관계가 파탄 난 지금, 문재인 정권에게 진보는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노동 존중이 있지 않으냐고 할 사람이 있겠다. 그렇다, 문재인 정권에서 노동은 ‘1’순위다. 다만 기업이 ‘0’순위인 한에서 1순위다. 코로나19 사태에 문재인 정권은 “기업을 반드시 지키겠다”며 긴급자금 100조원 투입을 결정했던 반면, 이 유행성 질병이 확산되는 동안 노동자들에게 직접 휴업수당을 지급하고 해고를 금지하라는 노동계의 요구는 묵살했다.
오늘 한국의 진보세력은 그 대부분이 이념이든 상상력이든 진영 속에 묻은 채 검찰과 언론 한두 곳을 정조준하고 있다. 만약 윤석열 검찰총장이 물러나기라도 하면 진보세력의 할 일이 거의 끝날 듯한 놀라운 시절 아닌가.
홍세화 ㅣ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한겨레 2020-06-25
김정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쓴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은 여러모로 씁쓸하다. 세 차례 이뤄진 북-미 정상의 만남에서 비핵화와 제재 해제에 대한 양쪽의 인식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를 거듭 보여주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체제의 생존이, 한국에는 한반도 평화가 걸린 절박한 문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는 언론에 얼마나 멋지게 비칠지, 재선에 도움이 될지의 관점에서 주로 다뤄졌다. 더구나 이 과정을 낱낱이 폭로한 이가 2000년대 북-미 제네바 합의를 깨뜨린 뒤 퇴장했던 초강경파 볼턴이라는 점에 또 한 번 씁쓸하다. 북한이 “인간쓰레기”로 부를 정도로 혐오하는 볼턴이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에 ‘훼방꾼’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볼턴의 책에서 남·북·미 정상의 관계가 눈길을 끈다. 우선, 북한 비핵화에 대한 미 행정부 내의 강력한 회의론 속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개인적 친분까지 깨지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2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요구대로 합의하면 선거에 질 수 있다’고 하자,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다치는 일을 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고 볼턴은 회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노 딜’ 이후에는 재무부의 대북제재 관련 발표를 철회하라고 트위터에 올려 혼란을 일으켰는데, 참모들에게 “오직 한 사람(김 위원장)”을 위한 트위트라고 하는 등 김 위원장과의 관계 유지에 신경을 썼다.
북-미 정상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당장 마주 앉을 여건은 못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대선에 여념이 없고, 뚜렷한 비핵화 성과 없이 또 만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진 모습이다. 북한이 기존 태도에서 양보하면서 미국과 대화를 시도한다 해도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에서도 ‘북한의 쇼에 속지 마라’는 비판이 거세질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눈에 띄는 두 번째는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이다. 미국의 금전적 이득과 자신의 재선 유불리를 최우선에 둔 트럼프 대통령, 한반도 평화 노력을 한국 ‘통일 어젠다’로 치부하는 볼턴 같은 강경파, 미국의 귀를 붙들고 끊임없이 ‘최대한의 압박’을 속삭이는 일본 사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그야말로 고군분투한 장면들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지난해 2월 하노이에서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 딜’로 끝난 뒤, 문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제안하면서 그 장소로 판문점이나 미 해군 함정을 예시하며 북-미 대화를 되살리려 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 편에 서 있다고 북한이 보기 때문에 남북 사이에 의미 있는 대화가 그동안 이뤄지지 못했다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제를 돌리는 와중에도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안전보장을 원한다는 점을 집요하게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가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의 중요한 첫걸음이라는 점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통해 백악관에 강조했다.
이런 한국의 노력을 볼턴은 책에서 “사진찍기에 끼어들려는 시도”라거나 “조현병 환자 같은 생각”이라고 비하했다. 백악관 참모한테 이런 냉소를 받으면서까지 문 대통령은 중재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최근 문 대통령을 향해 “자기변명과 책임 회피, 뿌리 깊은 사대주의”라고 비난했다. 볼턴 책은 북한이 존중하며 협력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명확히 보여줬다. 대남 군사행동 보류를 지시한 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황준범 l 워싱턴 특파원 한겨레 2020-06-25
대북전단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평화를 추구하며, 함께 잘 살고자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전쟁 70주년 행사에서 강조했다. “이 오래된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그래서 궁금하다. 왜 이 전쟁은 70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 것일까? 더구나 남북 정상은 2018년 판문점에서 만나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까지 했다. “한반도에서 비정상적인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이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표현에서 양 정상의 절박한 심정이 드러난다. 왜 그토록 절절한 마음으로 합의를 하고도 2년이 지나도록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가?
물론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존 볼턴 전 국가안보좌관의 회고록이 잘 보여준다. 볼턴의 말이 다 진실은 아니더라도 진실의 일단은 보여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애초에 한반도 평화보다는 언론을 타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앞에서만 예스맨이었고 뒤에서는 엑스맨이었다. 볼턴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대놓고 협상에 반대했다. 일본은 한국과 ‘180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에 직접 위협이 되는 중단거리 미사일과 생화학 무기의 폐기를 요구하며,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치 쇼타로 당시 일본 국가안보국장은 북의 핵무기 보유 의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협상을 통한 해결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상수다. 미국과 일본은 1950년부터 한국전쟁의 종식에 관심이 없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는 ‘천우신조’, 하늘이 일본을 도왔다며 전쟁을 반겼다. 일본이 미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며 적대관계를 청산한 것도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이었고 주권을 회복한 것도 한국전쟁 중인 1952년이었다. 패전 후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던 일본은 미군의 군수기지 역할을 하며 극적으로 살아났다. 과거 전범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고 1951년 25만명이 복권됐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이후 첫 선거였던 1952년 총선에서 당선된 중의원 42%가 이렇게 복권된 인사들이었다. 전후 일본 정치와 경제의 초석은 이렇게 한국전쟁 덕분에 놓여졌다. 한국전쟁의 종식은 이들에게 그 초석을 뒤흔드는 사건이다. 한국전쟁으로 덮고 넘어간 ‘제국의 범죄’를 진정으로 대면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도 한국전쟁을 ‘천우신조’라며 반겼다. 경기침체와 실업 증가로 몸살을 앓던 미국 경제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기간에 국방비를 4배 가까이 증액했고 군사물자 생산은 7배로 늘렸다. 서독과 일본이라는 과거의 적국을 재무장시키고 건국 이후 처음으로 외국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국방비를 삭감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있던 미국이 180도 방향 전환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세계 패권을 완성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의 청사진을 담고 있던 국가안보회의 문서(NSC-68) 작성을 주도했던 애치슨이 한국전쟁을 반겼던 이유다. 트럼프 같은 ‘풋내기’는 모를 수 있어도 ‘선수’들은 안다. 한국전쟁이 오늘의 미국을 정초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그 주춧돌이 흔들릴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전쟁특수를 누린 나라들’은 전쟁을 끝내야 할 이유가 없다. 가장 피해를 입었고 오늘도 가장 큰 부담을 안고 사는 남북한만이 전쟁을 끝내야 할 절박함을 안고 있을 뿐이다. 어설픈 ‘혈연주의’가 아니다. 현실주의의 교훈이다. 그 현실주의는 또 보여준다. 정상 간의 회담과 선언만으로 평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난 2년의 현실이 가르쳐준 것은 심지어 종전선언이 채택되더라도 평화는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 각 부처의 일관된 실천과 사회의 깊은 성찰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해서 대북전단 살포를 둘러싼 논란은 평화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고민이 얼마나 천박한지 보여주는 거울이다. 전단 살포를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단 살포를 표현의 자유로 보호해야 하는지가 핵심도 아니다. 한반도에서 종전이 무엇인지, 평화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한국 시민이 북의 정부와 인민들을 적대시하지 않고 ‘사이좋은 이웃’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국방·외교 정책은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언론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우리 하나하나의 시각과 삶은 충분히 평화로운가?
70년이 넘도록 전쟁을 끝내지 못한 것은 남 탓이 아니다. 선언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서재정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겨레 2020-06-28
'인국공 사태'에 쏟아진 비판을 비판한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정규직 전환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인천공항공사에는 9785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근무하는데, 그 중 2143명(공항소방대 211명, 야생동물통제 30명, 여객보안검색 1902명)을 우선 직접 고용한다고 지난 22일 발표하였다. 또한 공항운영(2423명)과 공항시설 및 시스템(3490명), 보안경비(1729명) 분야 7642명은 3개 전문 자회사를 만들어 올해 안에 정규직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문제는 이에 대해 공사의 정규직 노조는 기존 1500여 명인 자신들보다 많은 수가 한꺼번에 직고용되면 조직 내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공항공사를 찾아 '비정규직 제로'를 약속한 2017년 5월 12일 이전 보안검색 요원으로 입사한 1000여 명은 서류전형과 인·적성 등 적격심사만 통과하면 무난히 직고용되는 반면, 방문일 이후 입사자 약 800명은 일반인과 함께 공개채용 절차를 밟게 되고, 이 과정에서 직무적성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직고용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안검색 노동자 당사자들도 반발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던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보안검색 요원들이 향후 직접 고용된 이후 기존 인천공항 정규직과 동일한 수준의 처우를 받는 것으로 오해하여 취준생에 대한 역차별 논란 또한 불거지고 있다.
이쯤에서 비정규직이 제도화된 계기와 그 내용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은 김영삼 정부가 신(新)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하면서 정리해고 합법화, 파견근로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내놓았고,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미래통합당의 전신)이 1996년 12월 26일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게 본격적인 도입의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일자리가 없고 실업률이 폭증하자 비정규직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외환위기의 주범인 대기업과 금융기관 등이 노동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비정규직 제도를 주로 활용하였다.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이유는, 기업의 비정규직 남용으로 인해 2019년 8월 현재 대한민국 노동 활동 인구의 약 40%가량이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이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로 인해 사회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대한민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낮은 임금, 혹독한 근무조건, 과도한 업무, 차별적인 시선, 불안정한 신분으로 대변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참여정부 시절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노동위원회법' 등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관련 3개 법안을 마련하여 2007년 7월 1일부터 시행하였던 바, 이들 법안의 주요 내용은 기간제 혹은 계약직 근로자로 2년 이상 근무하면 기업주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실상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정규직 근로자들과 동일하거나 혹은 유사한 직무를 수행하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임금이나 근로조건에서 차별을 받을 경우, 노동위원회를 통하여 시정을 요구할 수 있게 법제화하였으나 우리나라의 실제 노동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차별받지 않도록 법률로 보장하고 있지만, 만일 비정규직 노동자가 상기에 언급한 대응을 할 경우 현행 제도에 의하면 2년 이내에는 사용주가 언제든 해고할 수 있다. 이에 해고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아름다운 대한민국의 건설>(박병일 지음, 서울경제경영 펴냄)에서 인용)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떠한가?
유럽연합에도 노동현장에서 비정규직 제도는 운영되고 있으나, 역내 노동자의 합리적 취업을 법제화해 모든 기업이 동일 직장에서 동일한 노동을 할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동일한 급여와 근무시간, 휴가, 보험의 제공 등을 의무적으로 이행토록 하고 있다.(<프레시안> 2019년 11월 5일 자)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캐나다에서도 비정규직에 대한 임금차별은 불법이다. 심지어 호주에서는 정규직 근로자들이 기본적으로 누리는 휴가(예를 들어 연차나 유급 병가)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기에 정규직보다 25%가량의 임금을 더 받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회안전망이 잘 준비된 복지국가하면 떠올리게 되는 스웨덴에서는 비정규직에 대한 자의적인 정리해고가 아예 불가능하다. 비정규직을 고용할 수는 있지만, 정규직과 동등하게 처우해야만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임금 안정성을 보장한다. 파견 노동자의 경우엔 파견기업이 정규직으로 고용하도록 하고, 파견 기간에는 이들을 사용하는 기업의 단체협약으로 보호하며, 비파견 대기기간에도 임금을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사회안전망이 잘 구축된 스웨덴마저 이럴진대 제도가 미비된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겨레> 2016년 9월 1일 자 기사에 따르면, OECD 회원국들 중 한국은 유연성 측면에서 최상위 국가군에 속한다. 가령 1년 미만 단기 근속자 비율이 가장 높은 반면, 10년 이상 장기 근속자 비율은 제일 낮다. 임시직 비율은 폴란드, 스페인, 네덜란드에 이어 4위이고(한편 네덜란드는 비정규 노동자 보호를 강화함으로써 비정규직 모범사례로 흔히 언급된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한국이 3위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체 피고용자(2019년 8월 기준)의 36.4%에 이른다. 여기에 자영업자로 분류된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와 협력 업체 정규직으로 분류된 사내 하청 노동자까지를 합치면 1000만 명을 크게 웃돈다는 추정도 나와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는 계속 벌어지더니 2019년 현재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은 시간당 임금총액 약 69.7%만을 수령하고 있다.
이상의 간단한 논의만 살펴보더라도 비정규직에 관한 문제의 해결이 얼마나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며,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서라도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국정 과제임을 이해할 수 있다. 여느 선진국처럼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야 하고, 그러한 점에서도 최근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적극 찬성하고 지지한다/박병일 한국외대 교수 | 프레시안 2020.06.29
성장’은 힘이 세다
모든 것을 바꾼다”는 기후 문제의 본질은 자본주의다(나오미 클라인). 자본의 끝없는 확대재생산에 기초하는 자본주의 문제의 본질은 성장이다. 세계화가 이루어진 자본주의 경제에서 ‘성장’은 가장 힘센 말이 되었다. 경제성장은 ‘언제나’ ‘무조건’ 좋다. 경제가 성장을 못 해도 ‘감소’가 아니라 ‘역성장’이라 부른다. 성장의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은 현실을 반영하기보다 왜곡한다. 생산은 무조건 좋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다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석탄발전은 GDP에는 좋아도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시장 밖에서의 유익한 활동과 거래는 무시된다. 분배를 고려하지 않는 GDP가 증가했다고 우리 삶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GDP에 일희일비한다. 성장은 힘이 세다.
성장은 풍요를 약속했지만, 현실은 빈곤과 불평등의 확대와 자연생태계 훼손으로 나타났다. 성장은 소수의 풍요를 뜻했다. 기후변화는 지금의 성장은 지속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기후변화의 원인인 온실가스는 성장의 보이지 않는 쓰레기다. 성장에 의문을 제기하면, 성장은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변신을 꾀한다. 하지만 발전이 성장을 뜻하는 한, 그건 모순어법에 불과하다. 정부가 포스트 코로나 경제대책으로 내놓은 한국판 뉴딜의 일부인 ‘그린 뉴딜’은 성장에 분칠하여 그 한계를 가릴 뿐이다. 성장은 힘이 세다.
자연은 성장에 한계가 있고 한계가 좋은 것임을 보여준다. 나무는 어느 정도 자라면 자신의 성장을 제한하여 안정성을 확보한다. 덕분에 주위에는 다른 나무들이 자랄 공간이 생겨난다. 우리의 몸 세포는 필요가 충족되면 증식을 멈춘다. 하지만 암세포는 멈출 줄 모른다. 무서운 속도로 계속 증식하여 결국 자신의 모태를 파괴한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암세포처럼 성장해왔다고, 계속 성장하면 파국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여름의 폭염에 시달리면 기후가 확실히 변했다고 호들갑을 떨지언정 성장을 위한 대량 생산과 소비의 삶을 반성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장은 힘이 세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지난 5월8일 ‘기후위기 성명’과 6월5일 ‘세계 환경의 날’ 담화에서 “성장 신화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세상으로” 전환할 것을 호소했다. 진정 지속해야 할 것은 성장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아닌가. 그러려면 성장의 한계를 인정하고 발전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지난 5월 프란치스코 교종은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초의 생태 회칙으로 불리는 <찬미받으소서> 반포 5주년을 맞아 ‘찬미받으소서 주간’을 선포했다. 시기와 내용으로 볼 때, 이 회칙은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염두에 둔 문헌이 분명하다. 하지만 5년이 지나도록 세계의 기후변화 대응에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2018년에 나온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가 기후변화의 위중함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5주년밖에 되지 않은 회칙을, 그것도 본인이 직접 기념한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기후위기에 대한 절박함! 여전히 세상이 무심한 탓일까, 교종은 기념 ‘주간’을 마치며 ‘특별 성찰의 해’를 선포했다. 성장은 아직도 힘이 세다. 부디, ‘성장’ 신화에서 깨어나 교종의 절박한 호소에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특별한 해가 되길 바란다
조현철 신부 녹색연합 상임 대표 / 경향 2020.06.29
‘모순의 시대’를 통과하려면
6월 말 발간된 국제통화기금(IMF)의 보고서 ‘세계경제 전망’은 매우 스산하다. 올해 세계경제의 성장률을 -4.9%로 예측했다. 지난 4월 추정치(-3%)보다 1.9%포인트나 낮아진 수치다. 코로나19 팬데믹의 부정적 경제효과가 4월 시점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심각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IMF는 팬데믹이 올해 하반기에 들어서면 어느 정도 진정될 것이므로 경제적 손실 역시 2분기(4~6월)에 집중될 것으로 가정했다. IMF는 ‘팬데믹 이후(그런 날이 온다면!)’의 경제회복 속도도 당초 기대보다 늦춰질 것으로 내다봤다. 주요국들의 2020년 경제성장률 추정치를 살펴보면, 미국 -8.0%, 일본 -5.8%, 캐나다 -8.4%, 독일 -7.8% 등이다. IMF는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의 성장률이 -12% 이하로 추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의 올해 성장률 추정치는 -2.1%(4월엔 -1.2%)로 선진국 중에서는 가장 우량한 편이다. 다만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시 크게 늘어나거나 해외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한국의 성장률 역시 더 악화될 수 있다. 이번 IMF 보고서의 제목은 ‘전례 없는 위기, 불확실한 회복’이다.
먼저, 경제 규모의 축소에서 전례가 없다. 지난 세계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글로벌 경제의 성장률은 -0.1%였다. 이번 위기와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의 수치. 위기의 원인도 전례가 없다. 주기적 불황, 생산성 하락, 소득불평등 따위의 흔한(?) 문제가 아니라 낯선 바이러스로 인한 ‘거리두기’다. 국가의 경제 개입 강도와 방법도 전례 없다. IMF가 코로나19 대응 경제 구제 프로그램들을 종합·정리한 보고서(〈Fiscal Monitor〉)에 따르면, 각국 정부가 올해 상반기(1~6월)에 배정한 정부지출 규모(실업급여, 임금 보조금, 현금 지급, 감세 등)가 지난 세계 금융위기 3년(2008~2010년) 동안의 그것을 모두 합친 수치와 비슷하다. 올해 하반기에도 대규모 정부지출이 지속적으로 필요하게 되면, 현대 국가에선 사실상 금기인 ‘행정부가 중앙은행으로부터 직접 돈을 빌려 지출하는’ 행태가 ‘노골적’으로 시도될 수도 있다(‘노골적’이란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런 방식이 이미 암묵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활용되어왔기 때문이다). ‘화폐’의 개념이 바뀌는 순간이다.
전례가 있든 없든, 경제위기 때만큼 해당 사회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기는 없다. 그 모순을 직시하고 기존의 생산-분배-소비 제도들을 선순환과 발전이 가능한 방향으로 개혁해야 위기를 생산적으로 통과할 수 있다. 공공부문 정규직이 자타공인 ‘특권’으로 간주되고 이를 둘러싼 민망한 싸움이 전개되는 현재 상황은, 노동시장도 개혁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증거 중 하나다./이종태 편집국장 시사인 202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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