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승리’, 김종철 선생님께 경향 2020.07.01.
차별, 그 흔한 것에 대하여 경향 2020.07.01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 경향 2020.07.02.
절실한 세 사람 경향 2020.07.03.
녹색의 가치 한겨레21 2020-07-03
합법적 약탈 한겨레 2020.07.05.
이 시대에 필요한 언론 모델 미디어오늘 2020.07.05.
저금리 시대, 커지는 이익의 비대칭 경향 2020.07.05.
교육과 부동산 경향 2020.07.05.
이낙연은 이낙연을 넘어설 수 있을까 경향 2020.07.05.
‘이재용의 불공정’은 어찌할 건가 한겨레 :2020-07-07
정치와 언어 경향 2020-07-07
이러면 부동산이 정권을 잡는다 경향 2020.07.08.
부동산이 가져올 분노정치와 비토정치, 둘이 결합한다면? 프레시안 2020.07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열광적 '순결주의'의 테러리즘 고발뉴스닷컴 2020.07.11.
수도권 집값을 잡을 수 없는 두가지 이유 한겨레 2020.7.12.
에너지 전환 시대, 환경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할 때 2020.7.13.
박원순 고소인 기자회견을 본 소감 굿모닝충청 2020.7.13.
산 자의 몫이 된 ‘두 개의 유산’ 경향 2020.07.14.
이제부턴 피해자의 시간 경향 2020.07.14.
권력 저널리즘 혹은 약자 저널리즘 미디어오늘 2020.07.14.
부동산, 정책이 아니라 철학이 없다 부산일보 2020.07.15
무의미의 ‘승리’, 김종철 선생님께
열정에 찬 어느 배우가 대가에게 물었다. “감독님, 인생에 의미가 있나요?” 영화감독은 바로 대답했다. “없지.”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생애는 지구상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 순환의 미미한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미 없이 살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회적 존재와 자연의 일부’ 이 인간의 두 가지 조건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진다. 분명한 한 가지는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 이것이 만악의 근원인 대문자 역사(The History)라는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처럼 “(퇴임 후) 잊혀지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사는 동안 자연을 덜 망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의미다.
지난 25일 김종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아직 ‘고(故)’를 붙일 수가 없다. 선생님과 개인적 인연은 없다. ‘다행히’ 녹색평론 2020년 5월/6월호에, 선생님께서 내게 원고를 의뢰하셨다. 원고 때문에 메일이 오갔다. 김종철 선생님은 내게 ‘한국 사람’ ‘한국 사회’에 대한 행복한 경험을 선사하셨다. 최근 내가 접한 가장 윤리적인 분이셨다. 몇 차례 오간 짧은 메일에서도 문학, 역사, 예술 전반에 대한 논쟁을 원하셨다.
주지하다시피 선생님은 1991년 사재로 녹색평론을 창간하셨다. 2004년에는 녹색평론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셨다. 책을 만들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주변적 이슈’인 생태·인문을 주제로 한 정기간행물을 173호(2020년 7월/8월)까지 냈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경비가 ‘아니다’. 필자가 없다. 정말, 필자 구하기가 어렵다. 녹색평론에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만들지 못한, 만들지 않는, 만들고 싶지 않은 곳이 한국 사회다. 나는 이 이슈가 한국현대사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녹색평론은 한 권 한 권이 단행본이었고, 선생님은 173권의 편저자셨다. 기획, 편집, 엮는 일보다 단독 저서 쓰기가 훨씬 편하다. 당신은 한국 사회의 일방향성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이들을 발굴하고 조직하셨다.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한국 사회에서 드물게 ‘사상가’가 되셨다. 여전히 ‘한·일관계(식민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1950년대 출간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전집(全集)을 읽고 주눅이 든 적이 있다. 내용은 불문하고, 일본에는 전집을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한국 사회에서 일관된 자기 생각을 열 권 이상 책으로 묶어 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김종철 선생님 외에 생각나는 이가 없다.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저를 너무나 왜곡되게 과대히 평가하시는 것은 대단한 실수입니다. 선생님(나)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며 펄쩍 뛰셨다. ‘의미 없음’의 의미를 아시는 듯했다.
선생님의 글이 언제나 선물이었던 것처럼, 당신은 세상과 이별하면서도 선물을 주고 가셨다. 오십이 넘도록 나의 고민은 여전히 ‘진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뭘 먹고살아야 하나. 이것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삶은 언제나 임시방편이었고, 잘못과 민폐를 반복했다. 그러나 김종철 선생님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나는 “세상에 놀라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고 다짐했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돈이든 명예든 타인의 인정이라는 의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염두에서 잃어버린 순간, 타락은 필연이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은 삶과 죽을 운명이라는 두 가지 조건의 길항에서 나왔다. 근대 문명에 이르러서는 이 ‘갈등의 균형(생각하는 능력)’은 박살나고, 죽음은 자연사(自然事)가 아닌 삶의 대척에 서게 되었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이 진실을 의식하면서 살 수는 없으므로, 사람들은 의미라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다. 그런데 물질문명이라는 ‘의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더 큰 재앙을 대비하며 이 여름을 맞는다. 아수라의 한복판을 직시하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세상이 망한 듯 나는 흐느껴 운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2020.07.01
차별, 그 흔한 것에 대하여
국민의 88.5%가 차별금지 법률 제정에 찬성했다는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가 궁금했다. 지난해 3월 국가인권위가 ‘혐오차별 국민인식조사’를 하며 같은 질문을 했을 때 72.9%였던 수치가 1년 만에 15.6%포인트 올랐다는 보도가 믿기지 않았다. 국가인권위 홈페이지에서 조사 결과 원문을 찾아 읽었다. 전국의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4월에 실시한 이 조사의 결과를 읽다보니,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항목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설문응답이 드러내는 수치들은 그대로 ‘한국의 차별 이야기’였다.
조사 대상자 중 지난 1년 동안 어떤 이유로든 차별받았다고 답한 사람이 27.2%였다. 차별 사유를 물으니 성(性)이 48.9%로 1위였다. 여성은 71%가, 남성은 16.4%가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차별받았다고 답했다. 그다음으로 높은 차별 사유는 연령으로 43.4%였다.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차별 이유가 됐다. 나의 성이나 나이는 내가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많이 배우지 못하고(21.3%), 많이 벌지 못하면(23.9%) 차별당했다. 차별을 가장 많이 겪는 장소는 직장(71.0%)이었다. 밥을 벌기 위해 차별을 감당했다는 얘기다.
차별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항했을까? 71.7%의 답은 ‘무대응’이었다. 그중 100% 무대응했다고 답한 사례가 있었다. 전체 응답자 중 0.7%인 성소수자였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고해도 차별이 시정되거나 가해자가 처벌받을 거 같지 않아서’(50%), ‘오히려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어서’(50%)였다.
코로나19 사태는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을 깨웠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나의 시선이나 행위가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생각을 해본 사람이 91.1%였다. “누구도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 그리고 내 가족도 언젠가 차별을 하거나 당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도 90.8%였다. 다행인 것은 “차별은 그 해소를 위해 적극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사회문제”라고 답한 사람이 93.3%라는 것이었다.
차별을 기준으로 마른 땅과 진 땅을 나눈다면, 나는 대개의 경우 마른 땅을 밟으며 살아온 사람인 것 같다. 여자라서, 나이가 많거나 적어서, 비정규직이라서, 차별당한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차별에 대한 감수성은 무디다. 1학기에 만났던 학생을 2학기 수업에서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에 “예뻐졌다”고 했더니, 학생이 웃으면서 “선생님,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현행규정인 국가인권위원회법 2조3호에 열거된 열아홉 가지가 넘는 차별해서는 안 되는 사유에는 용모 등 신체조건에 관한 것도 있다.
차별에 대한 사회적 규정이 촘촘해지면 사는 것이 팍팍해질까. 무릎 통증 때문에 걷는 것이 편하지 않은 팔순의 어머니는 건물을 드나들 때면 계단이 아닌 경사로를 이용하신다. ‘장애인 차별금지법’ 시행령에서는 직무수행 장소까지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경사로를 설치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차별이 적어지면, 차별당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나는 그로부터 예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삶까지 배려받을 수 있다.
정의당이 지난 29일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포괄하는 법안이다.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나 그리고 내 가족도 언젠가 차별을 하거나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차별금지법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차별금지법안’이 처음 발의된 이래, 차별금지법 제정은 여섯 번이나 좌초되었다. 일곱 번째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는 무위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정은령 언론학 박사 경향 2020.07.01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
한 5년 전 시승차로 혼다의 어코드를 몰아봤다. 기대 이상이었다. 3.5ℓ 엔진의 힘이 넉넉했고, 곡선주로에서 몰아쳐도 딱히 차체 쏠림이나 흔들림이 없었다. 앞서 메르세데스 벤츠의 E 클래스 중 최상급 모델을 타본 뒤인데도 오히려 어코드에 감탄했다. 솔직히 차값이 그렇게 차이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국산차 경쟁모델보다 어코드는 확실히 한 수 위였다. 그 뒤 국산차가 어코드 범퍼에 닿을 만큼 바싹 따라붙었다.
도요타의 렉서스는 한때 인기를 끌어 ‘강남 쏘나타’로 불렸다. 2000년대 중반쯤이다. 차를 좀 안다는 사람은 이제 일본차에 열광하지 않는다. 한국닛산은 16년 만에 아예 철수한다. 아사히 아니라도 국산은 물론 동남아 맥주까지 선택지는 많다. 전혀 유니크(unique)하지 않은 유니클로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은 넓고 대체재는 널렸다. 단지 반일감정 때문이 아니라 합리적 소비를 하는 셈이다.
지난해 7월 일본의 ‘느닷없는’ 대한국 수출규제 조치로 촉발된 일제 불매운동의 파고가 1년째인데도 여전히 높다. 사태 초반 “한국인의 불매는 이번에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던 일본 측 예고는 값진 불쏘시개였다.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크게 오판했다. 조선 왕(선조)이 순순히 항복한 뒤 바로 중국 명나라로 들어갈 것으로 봤다. 그러나 선조는 ‘도망’을 가버렸다. 더 충격적인 건 의병 궐기다. 무사 아닌 선비나 일반 백성이 낫, 죽창을 들고 일어서는 것은 순응적인 일본 사회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작금의 불매운동은 제2의 의병 궐기 같다.
혹자는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한국의 3배나 된다며 우습게 봐선 안 된다고 한다. 다만 인구수를 감안해 평가하는 게 합리적이다. 물가와 환율을 반영한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1인당 GDP에서 한국은 일본을 넘어서고 있다. 사상 처음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7년 한국은 4만1001달러, 일본은 4만827달러로 집계했다. 2018년 잠정치는 격차가 634달러로 더 벌어질 것으로 추산됐다. 국제통화기금(IMF) 기준으로도 2023년 일본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1887~1948)의 명저 <국화와 칼>은 일본의 수치(羞恥) 문화를 설파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일본 사회에서는 모욕이다. 청와대 인사가 한국의 G7 확대 가입에 반대한다는 일본을 향해 “몰염치의 극치”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일본은 왜 저렇게 나올까. 베네딕트의 잣대로 보자면 한국을 ‘의리를 모르는 자’로 여기기 때문일 수 있다. 즉 한국을 근대화시킨 은인인 일본의 은혜를 모른다는 식이다. 그러나 일부 친일극우주의자를 제외하면 씨알도 안 먹힐 얘기다.
오늘날 일본이 처한 위기는 역사에 대한 몰인식 탓이란 해석도 나온다. <대변동>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시각도 비슷하다. 결국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참회와 사죄를 한 뒤에나 한국, 중국 등과 공동번영의 길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동북아 갈등과 위기를 타개할 비책이다. ‘그 누구’의 정신적 지주라는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 같은 미몽에선 얼른 깨어나길 빈다./ 전병역 산업부 junby@kyunghyang.com 경향 2020.07.02.
절실한 세 사람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는 언제나 선(善)이다. 북한 비핵화에 회의적인 이들도 ‘그래서 해법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화와 협상 말고 내놓을 방도가 있는가. 북한 체제가 무너져야 핵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면 ‘희망고문’을 하는 격이다. ‘네오콘’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8년 동안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는 회고록에서 ‘북한 문제를 논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제약’이라며 ‘북한 체제 붕괴’와 ‘대북 군사 옵션’을 제시했다. 2005년 북핵 9·19 공동성명을 도출했던 부시 행정부는 막판에 ‘악의적 무시’로 북한을 냉대했지만 이 두 가지는 아예 목록에서 지웠다.
6월 한반도에 회오리가 몰아쳤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내세운 막말 퍼레이드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긴장 수위를 끌어올렸다. 남북화해의 상징이 무너지고 4·27 판문점선언은 껍데기만 남았다. 보수 측에선 북한에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 문재인 대통령의 ‘일방적 사랑’, 아니 그건 너무 점잖은 표현이라며 ‘스토킹 수준’ 대북정책의 결과라고 성토했다. 북한의 의도가 미국도 겨냥한 것이라면 그 기대에 어긋났다. 북한이 ‘화났다’는 메시지는 전달했을지언정,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꾸하지 않고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북한에 실망했다. 외교와 협력으로 돌아오라”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때로는 외교안보에도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남북관계와 북핵 협상의 역사가 그러했다. 서로 부딪쳐 상황을 악화시키기보다는 후일을 도모하는 게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 했다. 사실 남한이 ‘하노이 노딜’ 이후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북한을 움직일 수단은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는 어쩔 수 없이 냉각기에 들어갈 거라고, 차라리 냉각기를 갖는 게 낫다는 진단과 조언이 이어졌다.
문 대통령은 ‘중단 없는 대화’ 입장에 섰다. 6·25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 북한에 ‘종전을 위한 담대한 노력’을 주문한 데 이어 오는 11월 이전 3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미국에 요청했다. 미국 측과 사전에 어느 정도 얘기가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유럽연합(EU) 지도부와의 화상 정상회담에서 언급하고 이튿날 공개한 걸 보면 공론화를 작정한 셈이다. “남북관계 진전과 성과를 뒤로 돌릴 수 없다”는 대목에선 절박함도 느껴진다.
요즘 트럼프 대통령의 처지는 곤궁하다. 코로나19 사태는 수그러들지 않고, 재선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던 경제 호황은 언제 반등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주요 경합주에서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에게 밀리며 대선 전망도 어둡다. 여론조사 상황으로는 과거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과 유사한 흐름이라고 한다. 대선 판도를 뒤바꿀 수 있다면 뭐든 해야 할 판이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제재에,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을 것이다. 선진국들도 코로나19로 경제 악화에 직면했는데 북한은 말한들 뭐하겠는가. 중국이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줄 거라고는 하지만 국경을 틀어막아놨으니 한계도 분명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김 위원장이 당장 노동당 창건 75주년(10월10일)을 맞아 인민들에게 제시할 미래 비전도 마땅치 않다.
급하다는 이유가 만남과 합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조건이 맞아야 하고, 이익이 생겨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 기준은 대선에 미칠 정치적 득실일 텐데 역풍을 맞을 합의를 할 리 만무하다. 북한도 미국의 적대시 정책 철회, 제재 해제가 담보되지 않으면 대화할 가능성이 낮다. 그래서 아직은 북·미 비핵화 협상의 재개 여부가 불투명하고, 3차 정상회담으로 이어지기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북한 외무성 국장이 “남조선이 조미(북·미) 대화 재개를 운운하는 것은 헛소리”라고 말한 터라, 문 대통령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 북한이 올라앉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정부가 일단 북·미 대화 성사에 진력을 기울이더라도, 긴 호흡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넉 달 내 북·미 회담 성사 여부로 한반도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참에 대북정책을 점검하고, 외교안보 라인을 재정비해야 한다. 다음달 한·미연합군사훈련 등 한반도 위기 요인을 꼼꼼히 살펴 불똥이 튀지 않도록 세심한 대응도 요구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실패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에서 질 경우, 조 바이든 행정부는 내년 1월 출범하고, 외교안보정책을 검토해 새 정책을 수립한 뒤 북한과 대화할 시기는 일러야 여름 무렵이다/안홍욱 정치·국제에디터 ahn@kyunghyang.com 2020.07.03.
녹색의 가치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선생님과 가까운 분들부터 나처럼 <녹색평론> 독자였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빛깔의 추모글이 계속 올라왔다. 그 글들을 통해 생전의 놀라운 일화를 알게 되고, 새삼 얼마나 많은 이가 선생님에게 깊은 존경과 애정을 품고 있었는지를 느낀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실천하는 지식인’. 진정 그 말을 붙일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더 평등하게, 더 민주적으로
김종철 선생님이 보여준 녹색의 가치가 왜 그렇게 힘이 있었는지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본다. 물이 더러워지면 누가 가장 고통받는가. 공기가 더러워지면 누가 가장 고통받는가. 깨끗한 물을 제공하는 생수 산업으로 누가 돈을 버는가. 생존에 필요한 물을 돈을 내고 사서 마시는 구조에서 누가 가난해지는가. 공기청정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공기를 마시고 있는가. 김종철 선생님이 말하는 녹색은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게 했다.
인간이 태어나서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평등을 누릴 수 있기 위해 생태주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받아들 때마다 움찔했던 건 그 잡지에 가난, 생활, 공동체의 풍경이 당당하게 함께했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에 가장 전복적인 사상은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든 그 사회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분이 남긴 열 권이 넘는 저서도 우리 사회의 소중한 유산이지만, 그보다는 가장 밑바닥의 삶을 생태주의로 복원해 세상을 실제로 바꾸겠다는 구상, 그리하여 미래 문명의 전환까지 밀어붙였던 그 대담함. 그의 구상에 동의하는 이들이 실제로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가 우리 사회를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고,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던 행동의 힘이 귀하게 남는다.
오늘날 생태주의는 어느 때보다 시대의 정신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의 삶과 만나야 한다는 방향은 잃어가는 듯하다.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의 저자이자 세계생태론을 주장하는 제이슨 W. 무어는 “21세기의 계급투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적잖게 진전될 것이다. 식량이란 무엇인가? 자연이란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가 ‘환경주의’조차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가 어떻게 세련되게 만드는지를 목격해왔다. 이제 생태주의가 마주한 질문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시키는 방식이 얼마나 매끄럽게 자본의 책임을 피해가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생태주의가 의도치 않게 협조하는지를 묻게 될 것이다.
끝까지 전복적이었던 사상
기본소득 논의에 열심이셨던 김종철 선생님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코로나19로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던 올해 봄, 마을버스를 타고 가던 중 작은 횟집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에 눈이 갔다. 물고기의 커다란 눈을 보며 가엽다는 생각을 하다 화들짝 놀랐다. 몇 주째 문을 닫고 임대료도 못 내고 있을 저 횟집 주인과 그 횟집에서 일하던 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부터 생각하지 못한 건, 내가 여유로웠기 때문이 아닌가. 소설가 안재성 선생과 만난 자리에서 김종철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태주의 사상은 이제 꽤 널리 확산되었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시대> 51호) 그의 사상이 어떻게 끝까지 전복적일 수 있었는지를 잊지 않는 것. <녹색평론> 독자로서 고인을 추모하는 법이다. 김보경 출판인 / 한겨레21 2020-07-03
합법적 약탈
부동산 가격 폭등은 ‘합법적 약탈’이다. 내 집 마련해보겠다고 뼈 빠지게 일해 저축한 사람들, 전세·월세가 뛰어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된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폭력으로 뺏어가는 약탈보다 더 나쁜 약탈이다. 폭력적 약탈을 저지른 악한은 그 정체가 분명하고 처벌받을 수 있지만, 합법적 약탈엔 지목할 수 있는 행위 주체마저 없어 ‘피해자 탓하기’라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 합법적 약탈은 시스템의 문제다. 그 시스템의 관리 책임자인 정부를 약탈의 주범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이 주범이 처벌받을 수 있는 상한선은 그저 무능하다는 수준의 비판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이런 합법적 약탈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진보-보수 정권들이 번갈아 가면서 합동으로 발전시켜 온 약탈 체제이기에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질 건 없다. 한국의 정치판과 고위 공직은 주로 이런 약탈 체제의 수혜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약탈의 피해자들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다. 누구 말마따나 “정치는 원칙의 경쟁으로 위장하는 밥그릇 싸움”에 지나지 않으며, 그 싸움의 와중에서 외쳐지는 ‘정의’ ‘공정’ ‘평등’과 같은 아름다운 말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기만적 언어일 뿐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그런 합법적 약탈이 일어날 수 없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으니, 그게 바로 지방이다. 물론 모든 지방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보아 지방에선 부동산 가격 폭등보다는 하락이 주요 이슈가 되는 건 분명하다. 부동산 가격은 일자리 문제와 직결된다. 일자리가 많은 곳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적은 곳의 부동산 가격이 내리는 건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정부의 무능은 이 초등 상식을 위반하면서 서울의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큰소리를 쳐왔다는 점에서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3기 수도권 신도시’ 건설 정책은 국가균형발전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수도권 인구가 비수도권 인구를 넘어섰는데 왜 축포를 터트리면서 자축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빈말이래도 2년 전 국가균형발전 비전 선포식에서 ‘지역이 강한 나라, 균형 잡힌 대한민국’을 외쳤던 것에 감사해야 할까? 차라리 솔직하게 국가균형발전은 없으니 헛꿈 꾸지 말라고 말해주는 게 훨씬 더 나은 게 아닐까? 적어도 기만은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정부만 탓할 일도 아니다. 나는 최근 서울 부동산 가격 폭등에 관한 언론 기사들을 열심히 찾아 읽으면서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맹렬한 비판과 더불어 미시적 분석은 뛰어날망정, 근본적 원인을 규명하는 거시적 분석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일자리와 더불어 한국형 계급투쟁의 최고 관문인 ‘명문대학’을 집중시키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이런 일련의 정책과 서울 부동산 가격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는 건가?
지금 나는, 정부가 문자 그대로의 ‘서울 공화국’을 만들겠다고 나서고, 서울의 언론이 그런 정책 방향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다. 서울 부동산 가격 폭등이 일시적으론 주춤할 수 있어도,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을 외면하는 반쪽짜리 분석과 비판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지, 이에 대해 묻고자 하는 것이다. 정부와 언론이 이런 부동산 약탈 체제를 계속 고수한다 하더라도, 누구건 진실을 알고 살아야 할 권리는 있는 게 아닌가?
시로 파시즘에 맞서 싸웠던 영국 시인 세실 데이루이스는 “정직한 꿈을 꾸며 살았던 우리가 나쁜 사람들을 더욱 나쁜 사람들과 비교하여 옹호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논리다”라고 개탄했다지만,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편 가르기’의 광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선 정치의 목적은 ‘반대편 타도’로 전락하고 만다. 잘못된 모든 것은 ‘반대편 탓’으로 돌리고, 우리 편에 대한 내부 비판은 무조건 ‘배신’과 ‘변절’로 매도하는 광란의 수렁에선 합법적 약탈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설 땅이 없다.
나는 평소 “전주는 천국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걸어서 출퇴근하는 축복을 누리는 등 그만큼 지방의 삶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왜 이런 사적인 이야길 하는가? 나를 생각해 “지방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조언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불평불만이 가득 찬 사람처럼 보인다나. 그럼 어떤가. 불평불만을 할 시간조차 없이 전쟁하듯 고되게 살아가는 합법적 약탈의 피해자들을 위해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말을 누군가는 계속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2020.07.05.
이 시대에 필요한 언론 모델
‘드 코레스폰덴트(De Correspondent)’라는 네덜란드의 언론사가 있다. 2013년 9월, 네 명의 젊은 기자들이 ‘저널리즘의 혁신’을 주창하며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창간한 ‘드 코레스폰덴트’는 당시 새로운 저널리즘 프로젝트로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이후, 뉴스의 새로운 프레임과 모델을 제안하면서 창간 초기 2만6000명이었던 유료독자가 2019년 말에는 6만 명으로 늘었다.
이미 몇 년 전 소개한 적이 있는 ‘드 코레스폰덴트’를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이 매체를 통해 이 시대에 적합한 언론 모델을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제이 로젠(Jay Rosen) 뉴욕대 교수가 자신이 알고 있는, ‘신뢰를 끌어올리기 위해 참조해야 할 유일한 언론 모델’로 선정하기도 한 ‘드 코레스폰덴트’는 독자와 함께 일상의 뉴스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하는 기사를 생산하는 매체다. 즉 뉴스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드 코레스폰덴트(De Correspondent)’ 메인 화면.
이 매체의 대표인 로브 위즌버그(Rob Wijnberg)는 “지금 언론이 뉴스로 간주하는 정보의 유형은 2세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뉴스는 대체로 감각적, 예외적, 부정적이고,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주로 갈등, 사고, 비극, 전쟁 및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이 엄청나게 변화했는데 뉴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뉴스는 점진적인 진화를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이벤트 지향적이고 편향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컨스트럭티브(constructive) 저널리즘’을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컨스트럭티브 저널리즘은 긍정적인 뉴스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진보에 대한 낙관론이 너무 많으면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는 방대하고 체계적인 불의에 눈을 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컨스트럭티브 저널리즘은 체계적인 불의를 깊이 파헤치고 동시에 잠재적인 해결책에 중점을 둔 행동의 관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뉴스다.
‘드 코레스폰덴트’의 웹사이트에는 이런 소개 글이 적혀 있다. “드 코레스폰덴트는 끊임없는 뉴스의 흐름에 대한 장벽 역할을 하며, 선정적이고 눈길을 끌만 한 헤드라인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주제에 대한 건설적인 분석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최근 제기된 불안이나 폭로된 사안들에 대해 추측하지 않고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 언론이 가장 기본적인 책무인 ‘사실 확인’의 규율을 망각하면서 언론 불신 현상이 팽배해진 지는 꽤 오래됐다. 거기다 코로나19 관련 보도마저 신뢰를 주지 못하면서 외신에 눈을 돌리는 독자들이 늘고 있다. 이제 언론의 신뢰 회복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뉴스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언론사만이라도 정파성과 속보 경쟁, 자극적인 뉴스의 인기에 종속되는 상황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 자신들이 생산한 뉴스가 어떤 모습인지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사태를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지 않고 함께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이 휴머니즘을 잃지 않고 연대하도록 돕기 위해 언론은 무엇을 전달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그래서 독자에게 언론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나아가 자괴감에 빠진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언론에 대한 독자의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하지 않던가.
진민정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파리2대학 언론학 박사) 미디어오늘 2020.07.05.
저금리 시대, 커지는 이익의 비대칭
사상 초유의 저금리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금리는 돈의 가치에 다름 아니다. 금리가 상승하는 일반적인 경로는 두 가지이다. 경기가 좋으면 돈에 대한 수요, 특히 기업의 투자 수요가 늘어나면서 금리가 올라간다. 다른 금리 상승의 경로는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은 물건의 가격이 상승함으로써 돈의 상대적 가치가 떨어지는 국면을 의미한다.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위협하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림으로써 돈과 물건의 상대가격을 조절하게 된다. 물론 경제 성장과 인플레이션은 높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 지표들이기도 하다.
글로벌 경제 전반적으로 성장은 둔화되고 있고,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자취를 감춰 장기적으로 금리가 올라갈 일은 만무해 보인다. 한편 정책적으로 금리에 영향을 주는 변수로는 부채가 있다. 빚을 많이 진 경제 주체들은 저금리와 인플레이션을 선호한다. 저금리는 이자 부담을 낮추고, 인플레이션은 돈의 실질가치를 떨어뜨려 돈으로 갚아야 할 부채의 상환 부담을 낮춰주기 때문이다. 저금리가 채무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인플레이션은 중층적인 효과가 있다. 인플레이션이 금리를 끌어올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과 같이 인플레이션이 생기지 않는 환경이라면 일단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는 것이 채무자에게는 중요하다.
최근 가장 빠르게 부채가 늘어나고 있는 경제 주체는 정부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부 부채가 늘어난 상황에서는 인위적인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곤 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급증한 정부 부채가 부담으로 대두됐던 1950~1960년대 미국에서는 경제성장률로 추론될 수 있는 적정금리 수준보다 훨씬 낮은 금리가 고착화됐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240%에 달하는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소위 아베노믹스의 가장 큰 정책 목표 중 하나는 인플레이션 시대의 부활이었다. 늪과 같은 디플레이션 경제에서 벗어나 경제의 활력을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는 일본 정부 입장에서도 인플레이션이 중요했다. 막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을 만드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이니 어쩔 수 없이 금리라도 낮아야 한다. 일본의 장기 금리는 경제적 상식에 반하는 마이너스 수준까지 하락했다.
코로나19 펜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많은 국가의 공공부채가 급증하고 있어 저금리 기조 유지는 필수적인 상황이 돼버렸다. 인위적인 저금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비대칭성을 낳는다. 일단 가계와 기업의 비대칭성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빠르게 늘어난 가계부채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국민 경제 전체적으로 가계는 순예금자이다. 한국의 가계 금융부채는 1800조원대이지만, 금융자산은 3700조원대이다. 한계 차입자들의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잠재적 위험이지만, 가계 전체적으로 보면 금리 상승이 소득을 늘리는 데 훨씬 유리하다. 저금리 기조의 고착화는 최근 한국 가계소득 정체의 핵심적인 이유이다. 반면 기업은 잉여자금보다는 부채를 많이 지고 있는 순차입자이다. 저금리는 가계의 부를 기업으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두 번째 비대칭은 실물경제와 자산시장의 괴리에서 나온다. 저금리의 고착화는 그 자체가 실물경제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저성장과 낮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조합이 낮은 금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자산시장은 낮은 금리를 사랑한다. 더욱이 급증한 정부 부채를 관리하기 위한 목적에서 펀더멘털보다 금리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게 되면 실물경제와 자산시장의 괴리는 더 커진다. 시장 원리주의자에 가까웠던 국제통화기금(IMF)마저도 메인스트리트(실물경제)와 월스트리트(금융시장)의 부조응을 지적하고 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금리가 만들어내는 이익의 비대칭성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속돼온 현상이지만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이런 경향이 더 강화되고 있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주식시장의 강세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주식시장의 장기 전망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저금리가 자산으로서의 주식의 메리트를 높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주식은 경제가 성장해야 오를 수 있는 자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금리가 장기간 하락하면서 마이너스까지 도달했던 일본과 프랑스 주식시장의 장기 성과는 초라하다. 우리나라 역시 사상 초유의 저금리 환경이 이어지고 있지만 코스피는 2011년 이후 장기 박스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기간 주가가 상승하고 있는 종목군은 인터넷과 바이오 등 성장에 대한 기대가 투영될 수 있는 몇몇 종목들에 불과하다. 다수의 종목들은 별 볼일 없어지고, 일부 종목들만이 성장에 대한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니 이들 종목 주가는 자기강화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김학균 |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경향 2020.07.05.
교육과 부동산
교육문제와 부동산문제는 ‘묘하게’ 닮았다. ‘강남8학군’처럼 교육 여건이 부동산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실은 일단 배제하자.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다뤄져온 그간의 흐름과, 거기서 파생되는 현상을 보자는 취지다.
우선 답이 없다. 요즘말로 하자면 그야말로 ‘노(NO)답’이다. 역대 어느 정권을 보건대 교육과 부동산 문제로 난리를 겪지 않은 경우가 없다. 교육의 경우 결국은 ‘평등성’이냐 ‘수월성’이냐를 놓고 지난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부동산은 ‘개발’이냐 ‘규제’냐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한다. 답이 없다보니 누가 잘했나를 평가하기도 어렵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포기했으니 부동산은 중간이라도 가라”고 한 조기숙 전 홍보수석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지적이다.
답이 없다면 방향성이나 철학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수시로 뒤바뀐다. 두번째 공통점이다. ‘3불 정책’을 기조로 공교육 개혁에 나섰던 노무현 정부가 끝나자 이명박 정부는 “100개는 만들고 싶다”며 자사고를 늘렸다. 박근혜 정부는 난데없이 ‘국정교과서’라는 개악을 추진했고, 문재인 정부는 뜬금없이 ‘수능 확대’라는 역주행을 시작했다.
부동산 역시 노무현 정부가 종부세를 신설하며 규제에 나서자 이명박 정부가 여간한 건축 관련 규제를 다 풀었고, 박근혜 정부는 대출 규제도 풀어버렸다. ‘집값 상승기’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현 정부는 어쩔 줄 모른다. 규제는 해야 하는데, 개발(공급)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러다보니 대책을 남발하다가, 지지율을 보니 결국은 규제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내 일이 아니면 별로 관심이 없는 것도 닮은 점이다. 수능과 학종 비율이 얼마인지, 이를 조합해 만들 수 있는 백몇십개의 지원전략이 무엇인지 등은 사실 ‘대입’을 앞둔 학부모와 수험생들의 관심사다. 부동산도 그렇다. 이미 집을 마련했거나(혹은 여러 개 마련했거나), 부모님 등의 덕분으로 거주 문제에 특별히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무주택자나 세입자의 ‘설움’이 남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중에 다주택자가 많다는 게 문제가 되는 이유다. 유능한 공무원들이 맞춤형 ‘핀셋 규제’를 만들었는데도 현실에선 별로 통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린 답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거나, 외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교육의 경우 ‘대학서열화-고교서열화-중학서열화’로 이어지는 학벌 문제를 끊지 않고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최상위의 대학서열화 문제가 가장 핵심이지만 역대 어느 정권도 손을 댄 적이 없다. 자사·특목고를 없애 고교서열화를 끊어보겠다는 게 문재인 정부의 시도인데, 대학을 그대로 두고 성공할지는 의문이다.
부동산은 오히려 더 단순하다. 전 국민이 살 수 있을 만큼 집은 이미 넉넉하게 지었다. 문제는 집을 여러 채 소유한 다주택자들이다. 집을 더 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다주택자들이 가진 집을 내놓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세금을 올리면 되는데도 이 역시 거의 손을 못 댔다. 문 대통령도 최우선 과제로 부동산을 지목했고, 오랜만에 여당은 ‘투기와의 전쟁’을 운운하며 입법에 의지를 보이고 있다. 부동산이 과연 ‘중간’은 될 것인지 지켜보자.
송진식 경제부 경향 2020.07.05.
이낙연은 이낙연을 넘어설 수 있을까
2002년 가을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출입기자가 됐다. 당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상반기 뜨거웠던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정몽준 의원은 월드컵 열기를 등에 업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반노무현 후보’ 성향 의원들은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었다. 집단 탈당 움직임이 가시화했다.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이던 이낙연 의원(이하 호칭 생략)이 10월24일 논평을 냈다.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보라.” 이낙연은 후일 술회했다. “단일화되면 다시 합쳐야 할 정치인들에게 심한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초보운전자를 위한 격언을 빗대어 탈당 움직임을 멈추게 하려 했다.”(<이낙연의 낮은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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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하면 떠오르는 ‘제1 연관 검색어’는 ‘말’일 가능성이 크다. 그의 입에선 농담조차 허투루 나오는 법이 없다. 치열한 조탁(彫琢)을 거친다. 배배 꼬지 않아도, 톤을 높이지 않아도 울림이 있다. 한국갤럽의 차기 정치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10개월째 1위(한국갤럽 홈페이지 참조)를 지키는 데도 그의 말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런 이낙연이 실언을 했다. 지난 1일 국회에서 한 강연에서다. “인생에서 가장 크고 감동적인 변화는 소녀가 엄마로 변하는 그 순간이다. 남자들은 그런 걸 경험 못하기 때문에 나이를 먹어도 철이 안 든다. 중국의 중산층 산모들이 가진 로망 중 하나는 서울 강남에서 산후조리를 받는 거다. 가장 감동적인 변화 순간에 대접받으며 배려받으며 변화를 겪고 싶다는 건 당연한 욕구라 생각한다.” 모성을 상찬하고, 산후조리 산업이 또 하나의 한류로 부상한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을 터다.
공인의 말은 화자의 의도보다 대중의 반응이 중요하다. 대중은, 특히 여성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요즘 비혼 여성이 많고, 결혼해도 아이를 안 낳는 경우도 흔한데…. 모두 철없는 건가요?”(22세 대학생) “산후조리는 로망이 아니에요. 아이를 낳은 여성이 건강을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지요.”(51세 주부) 이낙연은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의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희생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며 사과했다.
이낙연은 지난 5월에도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경기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 참사 유가족을 만난 자리에서다. 한 유족이 '(정부 측의) 대안을 갖고 왔느냐'고 묻자 “국회의원이 아니라 한 조문객으로 왔다"고 했다. 21대 국회의원 당선인 신분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고통과 슬픔에 빠진 유족들에게 지나치게 냉정하게 군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그는 “수양 부족이다.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지난해 4월 강원 동해안 지역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당시 총리로서 현장을 찾은 이낙연은 수첩을 꺼내 ‘깨알 메모’를 했다. 이재민들에게 ‘혈압약을 챙겼느냐’며 살갑게 물었다. 타 버린 볍씨와 농기구도 무상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정치는 말을 매개로 이뤄진다. 정치인의 말은 그 자체로 정치행위다. 시민의 삶에 녹아들었을 때 정치인의 말은 힘이 커진다. 시민의 삶과 동떨어질 때, 정치인의 말은 길을 잃는다. 2020년 여의도의 이낙연과 2019년 강원도의 이낙연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다.
정치인은 대중을 잘 안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행사에 참석하고, 연설하고, 악수하는 일은 대중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다. 열린 정치인이 되는 길은 역설적으로 ‘갇혀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학습을 통해 스스로를 갱신할 때 정치인의 말은 다시 길을 찾고 힘을 얻는다.
지난해 12월 이낙연을 인터뷰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정치지도자로서의 약점을 물었다. “많다. 너무 많아서… 지도자급 정치인에게 필요한 게 두 가지라고 본다. 다수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 그리고 확실한 자기 세력. 제가 전자는 비교적 얻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후자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건 제 약점이다. 그리고 지식인 때를 다 벗지 못했다.”
이낙연이 오늘(7일)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 대표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출마 선언 전날, 그는 권력형 성폭력으로 실형이 확정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모친 빈소를 찾았다. 인간적 정리는 이해하나, 공개 조문이 미칠 파장을 신중히 고려했어야 한다. 과연 그는 달라진 이낙연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낙연은 이낙연을 넘어설 수 있을까.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경향 2020.07.05.
‘이재용의 불공정’은 어찌할 건가
또 공정성이 문제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는 ‘기회의 박탈은 아니지 않으냐’는 반론에도, ‘공정하지 않은 과정이 문제’라는 재반박이 더 거센 듯하다. “비정규직 차별이 더 문제”라고 나선 한 여당 정치인은 “자식 둘을 유학 보낸 사람”이라는 한마디로 발언권 자체가 묵살당했다. 최근에는 불공정의 화살이 부동산·주식으로 번졌다. 정부의 집값 대책엔 ‘서울의 새 아파트에 살고 싶은데, 수도권 외곽이나 가라는 거냐’고 아우성이다. 소액 투자에도 주식양도세를 물리겠다니 ‘당신들은 주식으로 돈 벌어 놓고 이제 와 세금을 걷느냐’고 항변한다. 기성세대와 기득권의 ‘사다리 걷어차기’요,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 공정성은 줄곧 우리 사회의 주된 화두였다. 앞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 조국 부부의 ‘부모 찬스’는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빼앗는다는 공분을 불렀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돈도 실력이야”라는 국정농단 세력을 촛불로 심판한 시민의 힘으로 집권한 세력이 아닌가. 국정 철학인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가 끊임없이 민심의 심판대에 오르는 건 스스로 한 약속을 검증받는 당연한 과정이다.
과연 공정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인간의 비합리적(비경제적) 행위를 연구하는 이들이 ‘불공정을 징벌하는 유인’을 들여다보는 유명한 실험모델이 있다. ‘최후통첩 게임’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1만원을 주고 친구와 나눠 갖되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면 둘 다 한푼도 못 받는다 했다고 가정하자. 경제적 기준으론 단돈 100원이라도 받아야 이익이지만 인간은 그리 행동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3000원 이하를 제안하면 친구는 거부한다. 불공정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푼도 받지 못하는 손해를 감수하고 당신의 불공정을 징벌한다.
상황을 조금 바꾸면 결과는 많이 달라진다. 친구 사이가 아닌 교사와 학생에게 같은 조건을 줬다 치자. 학생은 교사가 1000원만 건네도 순순히 받는다. ‘우월적 지위’에 따라 공정성의 기준이 달라진 때문인데, 교사와 학생 둘 다 불공정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정성이란 균질하지 않으며, 어느 때엔 너무 과도하거나 혹은 과소하게 작동한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지난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12년 만에 성명을 냈다.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기소도 수사도 하지 말라는 권고 결정을 내린 직후다. ‘이재용씨는 욕심을 비우고 양심을 찾으시오’라는 제목의 성명은 삼성과의 긴 싸움을 맨 처음 시작했던 사제단의 호소다. 사제단은 묻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슴들이 내 재산을 불려 대주주로 만들어줬다’는 이 거대한 불공정을 그대로 놔둘 것이냐고. 이재용뿐 아니다. 부자들의 재산권을 천부인권의 반열에 올려놓은 법률가들, 재벌의 개평을 받으며 아첨으로 기생하는 언론들, 기업은 사주의 재산이라는 경제인들을 향해 죽비를 들었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사회적 울림이 별로 없다. 삼성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사회에선 불공정에 대한 징벌 유인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최후통첩 게임의 교사와 학생처럼, 이 정도면 모두 공정하다고 느끼는 걸까.
과연 불공정의 기준은 공정한가? 작금의 공정성 이슈는 결과의 평등보단 과정의 공정을 더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공정한 경쟁이라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도 승복하지만, 경쟁에 뒤처진 이들을 우대하는 건 무임승차라고 본다. 노력한 만큼의 보상, 즉 ‘비례의 원리’는 사실 진일보한 가치다. 과거 권력과 혈연, 돈의 힘이 모든 걸 결정하던 시절 ‘능력주의’는 결과적 불평등을 극복하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났다. 그러나 비례의 원리는 이젠 ‘보편의 원리’(결과의 공정)와 종종 충돌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직접고용하는 데 불공정의 기제가 작동하는 것처럼, 불평등을 바로잡으려는 국가나 사회의 노력을 부정하거나, 노오오오력으로 바꿀 수 없는 구조적 불평등을 외면하게 된다.
공정성은 “한국인의 가슴에 인두로 지진 낙인 같은 가치이며, 온갖 좌절과 부당함, 그래도 남은 희망이 응축된 뜨거운 단추”(장덕진 교수)다. 그래서 때론 직관적이고 모순적일 수 있지만, 결과는 더 정의로워져야 한다./김회승 ㅣ 논설위원 한겨레 :2020-07-07
정치와 언어
막말 정치인’을 다음 국회에서는 반드시 퇴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컸던 선거는 이미 끝났지만 국회는 아직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거대여당을 만들어준 ‘민의’를 내세우며, 야당은 ‘의회독재’라는 논거로 대치상황을 각각 정당화한다. 남북 간에도 그 어느 때보다 비난과 증오를 담은 거친 언어가 오갔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6·15’ 20주년을 맞아 내보낸 담화문을 “본말은 간데없고 책임회피를 위한 변명과 오그랑수(속임수)를 범벅해놓은 화려한 미사여구”라고 직설적으로 비난한 북의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담화문은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협치를 통해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남북이 대화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과 글이 이렇게 어지러워진 것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정보 매체의 다양화와 사회관계망의 확충은 정치적 공론의 장을 과거보다 훨씬 넓히지만 동시에 양산되는 저질의 언어로 정치생활을 오염시킨다. 차별을 조장하는 ‘혐오 표현’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주로 인종주의적 발상에 기인해서 문제 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뿌리 깊은 반공주의, 지역주의, 세대 차이, 성적 차별 등에 기대고 있다. 특히 대중적 이미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인들이 이런 분위기를 앞장서 부추기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모든 정치 행위는 근본적으로 언어를 매개로 해서 이뤄진다. 언어가 정치의 단순한 도구만이 아니라 정치를 정치이게끔 하는 전제라는 뜻이다. 이런 이유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말과 글을 정치의 본령 중 하나로 여겼다.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과 함께 소통의 도구로서 언어의 기능을 문제로 삼았던 플라톤의 <크라틸로스>나 ‘이름을 바르게 세움’(正名)과 더불어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예(禮)를 알지 못하면 몸 둘 곳이 없다. 말(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고 했던 공자의 <논어>도 기본적으로 언어의 이러한 특성을 강조했다.
특히 정치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대중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기 위해 언어구사에서 특수한 기술이나 기법이 요구되었기에 유럽에선 일찍부터 논리학, 문법과 더불어 레토릭(수사학)은 교양의 기본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법의 어린 가지이지만 윤리에 복무하는 정치에 걸맞다’면서 많이 발전시켰다. 그러나 계몽기와 낭만주의의 발흥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수사학은 이내 시들해졌다. 수사학의 굳어버린 규칙이 개인의 감성과 창발성을 억누르고 대중을 오도하는 ‘기술’에 불과하다는 비판 때문이었다. 괴테도 ‘충만한 가슴속으로부터 나온’ 언어만이 윤리적인 호소력을 지녔다고 강조했다.
어떤 의미에서 동양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수사학은 이런 비판을 이미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역>에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말을 닦음으로 성실함을 세운다’는 뜻으로 군자는 말을 할 때 먼저 성실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성실함의 어원도 말로 이루는 것을 뜻하기에 수사학이 그저 말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 또는 본성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럽 문화권에 같이 속하더라도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독일에서는 수사학이 여전히 부정적인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오랜 논쟁문화의 전통, 프랑스에서는 자국 문화와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으로 인해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같은 동양 문화권에 속하더라도 한국의 체면, 중국의 몐쯔(面子), 일본의 속내(本音)와 겉마음(建前)처럼 수사학적 이해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또 수사학이 일반적으로 조작이나 선동을 연상시켜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남한이나 일본과 달리 북한과 중국에선 사회주의 수사학의 전통에 따라 혁명과 건설을 적극 추동하는 선전과 선동 부서를 당 중앙에 두고 있을 정도로 정치적 수사학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종종 반공 웅변대회가 열렸다.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서 보았던 어른들을 흉내 내는 아이들의 말투나 몸짓이 너무나 우스꽝스럽고 싫었다. 주로 청중을 앞에 둔 상황을 전제한 이런 정치적 수사학도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와 같은 다양한 사회관계망서비스를 이용한 지 이미 오래다. 마케팅을 염두에 둔 ‘퍼블릭 리레이션’이 지향하는 것처럼 정치 선전과 홍보도 마치 고객을 끌기 위한 상품 광고처럼 하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치적인 것의 내용 전달보다는 이를 어떻게 그럴듯하게 포장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치적 소통의 주제가 되었고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화자의 영혼이 사라진 말이 여러 가지 현란한 이미지로 포장되어 정치적인 것으로서 대중에게 전달된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 정의, 통일과 같이 자주 사용되는 정치언어도 차분한 의미론적인 검증 없이 진영논리 안에 갇혀 제자리를 돌고 있다.
그러면 정치의 도구로서 언어는 제구실을 할 수 없는가. 정치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의 덕목으로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열,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을 들었다. 나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킨 정치인으로 빌리 브란트를 우선 꼽는다. 그의 정치언어는 먼저 성실성에서 출발한다. 능변도 아니고 쉼도 길어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언어에서는 사람됨 전체를 느끼게 한다. 성공과 실패, 객관성과 도덕성, 권위와 인간성을 함께 담은 그의 언어는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감동을 준다. 정치는 곧 진솔한 언어적 행위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경향 2020-07-07
이러면 부동산이 정권을 잡는다
그때의 기시감이 엄습한다. 참여정부 시절 2004년을 기점으로 집값이 폭등하고 대통령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국정 동력이 급속히 소진한 때다. 민생의 핵심인 부동산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정권은 순식간에 위기에 빠진다. 당시 여당이 2007년 대선에서 500만표 차이의 참패를 당한 데는 분명 ‘부동산 실패’도 자리하고 있다.
급기야 여권에서 참여정부의 ‘부동산 트라우마’가 소환되고, 사과에 인색한 여당 대표가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만큼 작금의 부동산 민심이 사납다.
참여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설계자인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언젠가 ‘부동산 정책은 그 자체가 정치’라고 했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락하며 변곡점을 맞이한 때는 어김없이 ‘부동산’이 있었다. 집값이 폭등할 때 지지율이 급락했다. 80%대까지 오르내린 지지율이 처음 50% 아래로 떨어진 것은 2018년 9월이다. 걷잡을 수 없이 치솟은 집값 문제가 ‘남북 평화’ 성과마저 밀어냈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사상 최저인 40%대 초반으로 내려앉은 지난해 12월도 집값 폭등과 청와대 참모들의 부동산 불로소득이 쟁점화됐던 때다. 4·15 총선 이후 고공행진을 이어오던 국정 지지율이 속절없이 꺾여 다시 50%선을 위협받고 있다. 거래허가제까지 도입된 ‘6·17대책’에도 불구, 집값은 잡히지 않고 전셋값 상승 등 부작용이 도드라지면서 민심이 격동한 결과다.
“부동산 가격 충분히 잡을 수 있다”(취임 100일 기자회견), 3년이 지났다. 부동산 시장은 완전 딴판이다. 문 대통령 취임 당시 6억원이던 서울 아파트 ‘중위 가격’은 9억2500만원으로 올랐다. 중위 전셋값은 4억6192만원으로 상승했다. 서울의 어지간한 아파트는 9억원을 초과하고, 전셋값은 4억원을 넘는다는 얘기다. 21차례의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규제지역을 피한 ‘풍선 효과’가 발생하면서 수도권은 물론 지방 대도시의 아파트값도 역대 최고로 올랐다. 아무리 다른 통계를 들이댄들 역대 정부 중 단기간 내 최고로 집값을 올린 정부, 평가는 바뀌지 않는다.
‘6·17대책’마저 한 달도 되지 않아 효력을 상실했다. 집값 상승은 계속되고 ‘뒷북대책’의 다기한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정부가 부동산을 잡을 능력이 없다’는 인식만 두텁게 했다. 이제라도 ‘집을 사지 않으면 손해’라는 투기심리만 전염시키고 있다. 2017년 ‘8·2대책’ 직후 당시 김수현 사회수석은 “참여정부 기간 크고 작은 대책을 17번이나 발표했음에도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점에서 명백한 실패다”라고 했다. 그 잣대를 대면 21번의 크고 작은 대책을 쏟아냈음에도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여당은 보유세 강화와 공급 확대 등의 22번째 대책을 예고하고 있다. 추가 대책이 발표되기도 전인데, 리얼미터의 3일 조사에서 49.1%가 ‘효과 없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부동산 정책이 신뢰를 잃었다는 방증이다. 실제 쉼없이 부동산 대책이 나오는 게 앞으로 계속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지는 판이다.
청와대 참모들과 고위공직자들의 다주택 실상은 부동산 정책 불신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이들 다주택자의 부동산은 ‘12·16대책’ 이후 6개월 새 평균 2억원 이상 올랐다. 다주택 투기 규제에 집중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내부에서조차 씹히니 국민이 신뢰를 보낼 리 만무하다. 그중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서울 반포 아파트 대신 12년 동안 국회의원을 지낸 청주의 집을 매도하기로 한 것이 발신한 시그널은 최악이다. 3년 새 70%가 오른 반포 아파트를 지키면서, 부동산 정책을 희화화시켰다. 대통령비서실장이 ‘똘똘한 한 채’를 챙기면서 ‘강남 불패’를 보증한 꼴이 됐다. 마침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1주택자의 세부담 완화 기조 유지”를 천명했다. 추가 대책의 핵심으로 거론되는 보유세 강화가 ‘똘똘한 한 채’는 비켜갈 것이란 얘기다.
부동산 대책은 심리전 성격이 강하다. 부동산 정책이 불신의 늪에 빠지면 백약이 무효인 순간이 온다. 경계선에 서 있는 지금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면 고칠 게 없어진다. 실패를 인정해야 ‘부동산 가격을 잡고 주거 안정을 이룰 수 있는’ 정책의 근본적 전환이 가능하다. 한 번 더 집값이 폭등하면 정권재창출이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정권이 부동산 가격을 잡지 못하면, 필시 부동산이 정권을 잡는다./ 양권모 편집인 경향 2020.07.08.
부동산이 가져올 분노정치와 비토정치, 둘이 결합한다면?
부동산 문제, 신뢰 회복 못한다면
자본주의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정치적 해결이라는 것은 빈약한 정부정책이나 의회민주주의의 틀속에서 행해져왔다. 시민사회 내부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것은 시민들의 이익이 전적으로 배제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산 분포의 불균형과 양극화의 정도는 심화되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와 군사력, 정보통신과 제조업 강국 등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 수준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하락하고 있다. 정치에서 헤게모니적 정당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공정한 선거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사실만으로 실질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고, 정당성이 부재한 정치는 본령을 다 할 수 없다. 정당성에 긴요한 토대는 신뢰와 도덕성이며 신뢰와 도덕성의 위기는 정치의 위기로 이어진다.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 정책의 결과는 속단할 수 없으나 남한 전체의 12%에 불과한 면적에 인구의 반 이상이 산다는 사실은 부동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촘촘하게 대책을 내어놓아도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다. 규제를 풀고 시장논리에 따르면 부동산 문제가 잡힐 것이라는 말도 무책임한 말이다.
서울 강남 지역에 고가의 아파트를 지닌 계층은 정부가 징벌적 과세로 부당하게 세금을 많이 징수한다고 불만이고, 2030과 4050간에는 세대갈등이 심각하다. 부동산 관련 정책수단은 차고 넘친다. 정책은 시장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고 역효과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배 엘리트들이 정부의 정책방향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면 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정부나 자신이 선출한 대표에 대한 직접적 비토로 이어질 수 있다.
부동산 투기가 사회적 의제가 되고 정부가 부동산 투기 하지말라고 하는 사이 정부와 국회의 고위공직자들은 집을 사모으고 부동산 폭등을 방치하고 수혜를 만끽했다. 국민들에게 신조화되어 있는 부동산 불패 신화는 단순히 경제원리에 의해 고착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묵시적 연대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경제성의실천연합에 따르면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다주택자는 87명(29%)에 달한다. 민주당을 포함한 범여권은 42명(23%)이다. 통합당은 103명 가운데 41명(40%)이 집을 두 채이상 보유하고 있다. 민주당보다 다주택자 비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보유 부동산 규모는 심각한 정도다. 통합당 의원 103명이 보유한 부동산은 2139억원에 달함으로써 1인당 20억 7669만원이다. 민주당(9억 7777만원)의 두 배를 넘고 국민 평균(3억원)의 두 배를 넘는다. 국회의원 부동산 보유 상위 10명 중 통합당이 7명이다. 부동산 부자당이 부동산 세금인상을 비판한다면 설득력이 없다. 부동산 정책을 직접 다루는 국토교통위원회와 기획재정위 소속 국회의원 56명 가운데 17명(30%)이 다주택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청와대 참모 41명 가운데 12명이, 국토부와 기재부 고위공직자 16명 가운데 5명이 다주택자다. (내일신문 7월7일-8일자)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을 주도해온 김현미 국토부장관이 2017년 8·2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면서 국민을 향해 “자기가 사는 집이 아닌 집들은 좀 파시라”고 요청했으나 정작 청와대와 정부, 국회의 파워있는 공직자의 상당수가 수 년째 안 팔거나 새로 구입하면서 부동산 상승을 부채질하거나 즐긴 것이다.
이해당사자가 정책결정이나 수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제척사유는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부동산 정책을 펴는 것과 별개로 정부와 국회는 우선 이들부터 정책라인에서 배제해야 한다. 정부의 부동산정책을 관장해온 전문가 중 다주택자에 대한 인적교체를 통해 부동산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국회에서도 관련 상임위에서 다주택자는 물론이고 일정 금액 이상의 고가주택 소유자는 교체해야 한다. 어떠한 정책을 내어놓아도 자신들의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고 시민들은 생각할 것이고 실제 이해되지 않는 정책도 허다하다. 양도세와 거래세는 줄이고 보유세를 늘려야 한다는 것은 시민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다. 그러나 정부는 다주택보유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1주택자라해서 20-30억원 넘는 고가주태 보유자에 대해 보유세는 왜 거론하지 않는가.
다주택자들에 대한 과세강화가 마치 문제의 해결책인양 광고하고 호도하는 것은 허위의식에 의한 헤게모니를 통해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자산의 불평등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불가피하다. 더구나 압축성장과 1980년대 강남 투기를 경험한 한국사회에서 이에 대한 동의도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진보정권들의 집권기간동안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부동산 상승, 특히 서울 강남 등 특정지역의 상황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연상하게 한다. 부동산에 대해 별다른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못하던 계층에게마저 분노와 좌절을 경험하게 한다.
역사는 분노의 정치로 발전과 진보를 거듭해왔다. '역사의 종말'이란 논문으로 유명한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비토크라시(vetocracy)는 문자 그대로 거부정치다. 분노정치와 비토크라시가 결합한다면 지금의 민주당 정권은 다음 대선에서 예기치 못한 일격을 당할 수 있다. 다수의 확보라는 무기를 탑재한 정권이 지금 알아야 할 것은 자제의 규범과 신뢰 회복이다.
당장 고위공직자중 다주택자는 관련 업무에서 직무배제해야 한다. 특히 청와대 참모 중 다주택자에 대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조치가 없으면 정부와 정책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지금의 부동산 상황을 일상적 문제로 치부하는 순간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의 인식수준과 실천력이 이를 담보할 것 같지 않다. 이 정부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점차 상실해가고 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프레시안 2020.07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열광적 '순결주의'의 테러리즘
1. '박원순'이라는 고유명사를 지닌 한 사람이, 7월 10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매듭지었다. 그에게 공적으로 붙여진 이름은 '서울시장'이다. 그러나 그는 한 '인간'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가. 그에게 붙여졌던 ‘진보적인 인권 변호사,’ 또는 서울을 ‘세계적 도시’로 만든 시장 등 다양한 표지들은, 그가 무수한 결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한 인간으로서 지닌 다양한 외적, 내적 결들의 한 부분들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의 잠적, 그리고 이어서 죽음이 알려진 후, 지난 이틀 동안 나는 한국과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텍사스에서 착잡한 마음을 깊숙하게 품고 지내야만 했다. 우울한 착잡함의 시간을 지내면서, 내가 느끼고 있는 아픔, 우울함, 절망감 등 추상화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은 단지 고유명사를 지닌 어느 특정한 한 개인의 죽음 자체 때문만이 아님을 보게 된다. 마치 손에 쥐고 있던 ‘생명선’을 순간에 놓기만 하면, 인간의 생명이란 얼마나 한순간에 무화될 수 있는가라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나의 온 존재속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 모두가 이러한 ‘한계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는 칼 야스퍼스의 말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어 신문과 SNS에 쏟아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코멘트’들은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아프게 마주하게 했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언어적 테러리즘(verbal terrorism)”이 난무하는 글들을 읽으며 나는 ‘인간임’에 대하여 절망감까지 들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끔찍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이러한 추상화같은 내적 세계를 담아내고자 할 때, 산문적 글과 말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2. 한국, 독일, 영국, 미국 등 네 나라에서 살아보면서 내가 경험한 것은 어느 사회마다 각기 다른 ‘질병’과 ‘장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한국사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악 (vice)’은 “흑백논리적인 이분법적 사유방식”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유방식이 개별인들의 사유구조나 관계맺는 방식은 물론,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은 물론이고, 한 인물에 대하여 극도의 ‘이상화-악마화’가 끊이지 않고 진행되는 ‘악’이, 한국사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질병중 하나라고 나는 본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비판적 토론이 아닌 ‘내 편-저 편’이라는 편가르기가 먼저 작동하고, 그 중심적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토론은 불가능하게 된다. 멀리 뒤로 갈 필요도 없다. 지금도 진행 중인 소위 ‘조국 사태,’ 정신대/위안부 문제, 그리고 서울 시장의 죽음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흑백 논리적인 이분법적 접근방식에 의해서만 등장할 뿐이다. ‘인간이 누구인가’ 에 대한 복합적 시선이 결여된 채, ‘순수주의(purism)’를 내세우며 단순한 ‘이상화(idealization)’나 ‘악마화(demonization)’ 이외에는 논의거리가 되지 못한다.
3. ‘순수에의 열망 (desire for purity)’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순수주의(purism)’으로 고착되면, 인류 역사에서 무수한 테러리즘과 폭력이 일어났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보존해야한다는 ‘순수성에의 열망’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외국인 박해, 동성애자 학살, 장애인 학살을 정당화했다. 미국에서 백인의 ‘순수성에의 열망’에 따른 ‘한 방울 규정(One-Drop Rule)’은 1967년 까지 백인 아닌 인종과의 결혼을 범죄화했다. 조상 중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만 섞여 있어도 ‘백인’이 될 수 없고 ‘흑인’으로 범주화되는 법이다. 다양한 인종간의 결혼이 지금은 합법화되었지만, 여전히 이 ‘한 방울 규정’이 백인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백인과 흑인의 피가 각기 50%이지만, 그가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 규정되는 배경이다. 이러한 ‘인종적/종족적 순수주의’만큼 폭력적인 것이 바로 ‘도덕적 순수주의’에 대한 열광이다.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복합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으며, 여전히 ‘이상화-악마화’라는 지극히 단순한 흑백논리의 범주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4. 나는 페미니즘이나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책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깊은 딜레마와 씨름했어야 했다. 내 속에 보이지 않는 ‘순수주의에의 열망’이 있었는가보다.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완전한’ 이론가/사상가가 있는가. 없다. 중요한 통찰을 준 특정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에 대하여 다양한 자료들을 읽다보면, 그들의 사적 삶에 이런 저런 ‘오염’을 지니고 있는 경우들을 만날 때 마다 나는 깊은 실망을 했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인종적 또는 지적 우월주의 또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오판과 오역을 생산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와 같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의 부활을 가져온 사상가는 어떤가. 그는 여성은 합리성을 지니지 못한 존재이며, 열대지방에 사는 인종은 지적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한편으로는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지켜야 하는 코즈모폴리턴 권리를 주장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혐오’와 ‘인종주의자(racialist)’인 칸트를 내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이러한 예는 마틴 루터 킹, 폴 틸리히, 마틴 하이데거 등 다양한 이유들에 의해서 '오염'된 무수한 사상가/운동가들속에서 볼 수 있다. 그 어느 한 사람도 소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존재’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순수주의에의 열망’은 또 다른 폭력과 테러로 사용된다는 것을 인류의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 자신속에서 이러한 딜레마와 씨름하면서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은 ‘순수주의의 열망’이 지닌 위험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5. “칸트와 함께 칸트를 넘어서 생각하기 (thinking with Kant against/beyond Kant)” 라는 사유방식은 나 자신의 ‘순수주의에의 열망’을 넘어서서 인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서 만든 나의 학문하기 방식이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인종차별적인 페미니스트나 코즈모폴리턴 사상가, 성차별주의자 또는 성소수자 차별하는 인권운동가 등의 이론을 내가 ‘분석적 도구’로 차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라는 것은 한 인간은 무수한 결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인식구조속에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인간이해를 수용할 때, 한 인물에 대한 ‘이상화’ 또는 ‘악마화’라는 흑백논리적 접근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위험한가를 보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이란 단순한 한 두가지 표지로 드러낼 수 없다. 그러한 ‘표지들(markers)’은 지극히 일 부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뿐, 한 사람의 복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붙여지는 표지들이 고정적인 것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내가 개인적으로는 거부하는 이유들이다.
6. 인간이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은, 동일한 정황에서 누구나가 다 동일한 해석, 결정,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르듯, 우리 각자는 다른 해석과 결정을 내린다. 그렇기에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등의 표현으로 한 고유한 존재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매듭짓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이 쉽사리 ‘용기’라거나 ‘비겁’이라는 단순한 표지로 치부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죽음에 대한 한 사람의 결단은 우리의 '이해-너머 (beyond comprehension)'의 문제이다. 알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자의적 판단/심판을 중지하는 것--인간됨의 실천이다. 그가 스스로 이 삶을 마감하겠다는 결정이 '용기있는 사죄의 몸짓'인지, 아니면 다른 몸짓인지 '그'만이 알 수 있다.
7.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다.” 데리다의 말이다. 자신의 ‘생명선을 놓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에 대하여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애도이다. ‘애도한다’는 것이 그를 전적으로 ‘이상화’하라는 것도 아니다. ‘더불 제스츄어(double gesture)' 를 가지고 ‘박원순과 함께 박원순을 넘어서 생각하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의 말이 담고 있는 바, 한 죽음 앞에서 우리 각자의 ‘인간됨’을 실천하는 애도라고 나는 본다.
한편으로는, 한 공인으로서 그가 한국사회에서 이루어 왔던 소중한 일들을 지켜내고, 아직 이루지 못한 남아있는 일들을 남아있는 사람들이 이어서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순수주의’의 열망으로 그를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 오류와 한계를 지닌 인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지극히 남성중심주의적인 한국사회에서, 그가 공직을 수행하면서 한 개인에게 어떤 종류의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그 역시 한국의 가부장제적 '사회적 산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나 만 택해야 하는 흑백논리를 넘어서서, 한 인간이 지닌 복합적인 면들을 ‘한꺼번에’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8. 그의 죽음의 현장에서 ‘파안대소’하는 몇 얼굴을 담은 사진을 보았다. 그 파안대소하는 얼굴 중에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K' 라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 ‘인간이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침묵속에서 애도하려고 했던 내가, 이렇게 미완의 단상이라도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사진이다. 얼마 전 독일을 여행하면서 가보았던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본 사진이 떠 오른다. 수용되었던 유대인들이 해방되자, 그 ‘피해자’들이 ‘가해자’인 독일 군인들을 발가벗기고 죽여서 그 주검을 수용소 철조망에 걸어놓고 조롱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소위 ‘피해자’들 역시 이러한 끔찍한 ‘가해자’의 모습을 품고 있는 ‘인간’임을 충격적으로 확인했었다. 인간 속에는 ‘피해자-가해자’의 가능성이 언제나 복합적으로 도사리고 있다. 그 어떤 표지가 붙었든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는 것—인간으로서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방식이다. 그 누구의 죽음이라도 ‘조롱받을 죽음’이란 이 세계에 없다. 죽음을 선택한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넘어서’ 보다 인간의 권리가 확장되는 서울, 한국을 만들어가기 위한 과제를 우리 각자의 어깨위에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정치사에서 여러가지 소중한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의 죽음앞에 나는 애도한다. 그가 아무런 흠 없는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닌 여러가지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기 때문이다.
강남순 교수 미국 텍사스 크리스쳔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고발뉴스닷컴 2020.07.11.
수도권 집값을 잡을 수 없는 두가지 이유
또다시 집값이 뜨겁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토교통부 장관을 소환하여 부동산 문제에 대한 긴급보고를 받고 지시 사항을 내렸다. 지시의 요지는 투기를 근절하고 공급을 확대하라는 것이다. 일견 이 지시는 적절하다고 판단이 된다. 다만 어떻게 투기를 근절하고 공급을 확대하는가가 중요하다. 투기 근절에 대해서는 규제지역을 지정해서 다주택자에 대한 세제 강화 방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공급 확대 방안으로는 도시 내 재개발·재건축과 주변 지역에 신도시 건설을 통한 공급이 제시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정책으로는 수도권의 집값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와 제안은 다음 두가지다.
첫째, 도시 내 공급을 하건 주변지역에서 공급을 하건 수요와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집값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건설을 통해 추가로 공급되는 주택들을 지금처럼 다주택자들이 더 많이 사들일 수 있는 구조에서 신규 주택 건설을 통하여 집값을 잡을 수는 없다. 다주택자들이 추가적 주택 구매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에서는 신규 건설을 통한 공급으로는 집값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주택자들이 추가로 주택을 구매하는 것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택을 시장에 내놓게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공급 정책이자 수요관리 정책이다. 이를 실현시킬 방법으로 한 도시 내에서 2주택 이상을 소유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강력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도시에서 두채 소유한 경우보다 한 도시 내에서 두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투기적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주택의 취득, 보유, 처분의 모든 단계에서 세금을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양도소득세는 양도차액의 100% 가깝게 징수함으로써 차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투기를 근절할 수 있다. 현재에도 투기지역, 조정대상지역 등 규제지역으로 지정하면 중과세가 되어 효과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규제지역은 조건이 바뀌면 해제되기 때문에 다주택자들의 ‘소나기만 피하자’는 생각과 함께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한 도시에 2주택 이상 소유하는 경우 훨씬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해야 한다는 것은 규제지역으로 지정되어야 해당되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일반 시민들에게도 정책적 메시지를 쉽게 전달할 수가 있다. 다만, 예측 가능한 정책이 필요하고 현재의 다주택자들이 처분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두어서 시장에 주택 공급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집은 모든 국민에게 꼭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재화다. 이러한 재화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편중되고 이익이 독점되어 많은 국민들이 상실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 헌법에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농지 소유 제한 조항이 있다. 국민 대부분이 농민이고 농지가 국민들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에 비농민이 농지 독점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조항이다. 주택에도 이 헌법 정신을 확대해나가야 한다.
둘째, 서울 및 수도권의 주택 공급 확대는 신규 주택 수요를 만들어낸다. 도시화 이론 중에 ‘토다로의 역설’이 있다. 도시로의 인구집중으로 발생하는 도시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수록 도시문제가 심화된다는 게 요지다. 즉, 도시문제는 농촌 지역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도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비수도권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인구가 이동하는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수도권의 집값 안정화에 대한 노력을 할수록 수도권의 집값 문제는 심화된다. 수도권에 주택 건설을 확대할수록 비수도권 지역에서 수도권으로의 신규 유입인구 증가를 불러와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 주변의 많은 거주자들이 실제로는 서울에 살고 싶어도 서울에 살 수 없기 때문에 머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서울 주변부의 주택 공급 확대는 서울의 주택에 대한 잠재적 수요를 더 확대시키게 된다. 장기적으로 수도권 주택 가격의 안정화는 비수도권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인구이동이 발생되지 않도록 국토 균형 발전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권일 한국교통대 도시교통공학전공 교수 한겨레 2020.7.12.
에너지 전환 시대, 환경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할 때
지난 6월23일 국가기후환경회의는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장기 정책 마련에 착수했다. 분야별 전문가가 참여한 이번 회의에선 ‘자동차연료 가격 조정’ ‘석탄발전 단계적 감축을 통한 전원믹스 조정’ ‘전기요금 합리화’ 등 세 가지 주요 안건에 대해 토의가 진행됐다.
이 중 전기요금 합리화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전기요금 인상이 민심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금 합리화는 왜 필요한 일일까.
과거 전력산업은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목표로 했으나, 오늘날엔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에너지 전환은 친환경적인 에너지원으로 전원믹스를 변화시키고 획기적 에너지 소비 감소, 친환경 산업 육성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미 국내에선 온실가스 감축 노력의 일환으로 2015년부터 탄소배출권거래제가 시행 중이다. 각 사업장이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 양이 할당됨에 따라 매년 탄소를 발생시키는 발전소는 탄소 발생을 줄이거나 배출권을 구입하는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발전회사가 탄소 발생을 줄이면서 전력을 공급하려면 신재생에너지의 확대가 필연적이다.
재생에너지는 연료비가 들어가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경제성을 확보할 때까지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비용은 현재 전력산업의 구조상 모두 한전이 부담하게 돼 있어, 원가가 반영되지 않는 고정 요금제에선 더 이상 한전이 안정적인 전력공급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
원가를 반영한 전기요금 합리화는 사회적 비용, 외부비용을 반영해 국민들의 합리적 소비를 유도하고 에너지 효율 정책을 강화할 수 있는 가장 효용성 있는 방법으로 지속가능한 에너지 전환 시대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에너지 전환 선진국인 덴마크와 독일의 경우, 연료비가 없는 재생에너지 영향으로 발전에 소요되는 비용은 전체 요금의 9~23%에 불과하고 50~70%를 환경부담금 및 세금으로 부과해 외부비용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에너지 전환의 재원으로 사용하고, 전기소비 억제 및 에너지효율 개선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전기요금 합리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 수용성 확대다. 사회관계망서비스의 발달로 국민들의 자료 접근성은 확대됐으나 정작 알아야 할 정보는 찾을 수 없어 신뢰도는 떨어지고 가짜뉴스로 인해 전기요금에 대한 반발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에너지 전환에 원가를 반영한 전기요금 합리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전은 독점 기업으로서 전기요금 부과 체계를 투명하고 명확하게 공개해 소비자 인식 개선 및 전기요금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또한 환경 등 외부비용을 전기요금에 반영할 때 고객별 부담금의 적절성 여부를 면밀히 검토하고 해당 재원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명확히 공개해야 한다.
코로나19 여파로 인류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하지만 인간활동 위축에 의한 자연환경의 회복은 불행 중 다행이다. 인류의 노력으로 지구를 살릴 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전환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 할 때다./ 전영환 | 홍익대 교수에너지전환포럼 공동대표 경향 2020.7.13.
박원순 고소인 기자회견을 본 소감
- 증거 공개 1주일 미루는 '티징(Teasing) 기법' 통한 여론몰이 정략적 의도
- 피해자가 ‘고소인 말고도 여러 명 있다’는 SBS 보도 '가짜뉴스'
- 박원순 피소 사실 청와대 통보 〈중앙일보〉 '가짜뉴스'
- 텔레그램 이미지 '선별적 포렌식' 증거능력 "대단히 미약"
1. 조국 일가의 각종 수사와 기소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는 생략한다. 대부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책으로 남겼다. 한 권으로 부족해서 추가로 썼고 곧 나온다. (우선 책 광고부터 한번 했다. 미안하다)
조국 일가의 재판 과정과 조범동 1심 판결을 통해 당시 언론과 대중들의 광기가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때의 광기에 동참했던 이들 중에 사과 혹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오류의 인정을 하는 이가 있었나?
없다. 대신 그냥 뒷짐지고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도 “그런 의혹이 생기도록 한 조국이 잘못”이라는 마지막 궁시렁을 멈추지 않으면서 말이다.
2. 윤미향과 정의연 관련해서 얼마나 언론과 온라인에서 뜨거웠는지 기억난다. 오래된 일 같지만 아직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검찰이 정의연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것은 지난 5월 20일. 하필 수요집회가 열리던 날 전격적으로 진행했는데, 이 또한 의도적이었다고 판단한다. 수요집회의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의도 말이다.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에는 윤미향만 피고발인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후 안성쉼터를 포함해 온갖 내용들이 언론에 보도되고,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윤미향은 조국 이후 최대의 파렴치한으로 등극했다.
3.그 압수수색을 하고 약 1개월이 지난 6월 22일. 당정청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윤미향이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시절 여성가족부 지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정청의 발표이니 언론과 윤미향을 비난하던 이들은 '셀프조사'라고 비아냥 거렸다.
그로부터 또 20여 일이 지난 현재까지 정의연과 윤미향 관련해서 여전히 나오는 것은 없다.
4 검찰 수사중이니까 언론이 수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 기자들이 어떤 족속들인데... 조금이라도 수상한 것이 있다면, 내부 빨대 통해 듣고 이미 도배를 할 텐데 나오는 것이 없으니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비리의 소굴이라면서 정의연과 윤미향을 비토한 언론과 반대편 진영의 사람들은 지금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검찰 수사의 결과가 원하는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조국 때와 마찬가지로 모른 척 할 것이다.
5.박원순 시장의 죽음과 그 고소인에 대해 나는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다. 현재까지는 중립이라는 뜻이다. 다만 언론(과 정의당)에서는 처음에 ‘피해자’라고 했다가 그게 법리적으로 틀린 말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피해 호소인’이라는 이상한 말을 쓰기 시작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피해 호소인’이라는 말은 법률사전에도 없고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한 마디로 '고소인'이라는 단어로는 전하려는 메시지의 임팩트가 약하니까 ‘피해 호소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쓴 것이다.
당연히 박원순 시장을 파렴치한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용어까지 만들어서 쓴 것이다. 이 '피해 호소인'이라는 말을 민주당과 청와대에서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쿠데타나 살인보다 성 관련 사건이 더 민감하고, 그래서 조심스러워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또한 정상적인 상황 같지는 않다.
6.그 고소인의 기자회견이 오늘 있었다. 원래 '미투'란 서지현 검사, 김지은 씨처럼 실명을 밝히고 하는 것이지만, 사안의 특수성으로 인해 익명으로 그리고 변호인이 대신 기자회견을 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또한 고소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단, 고소인을 보호하기 위해 고인을 추모해서 안 된다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고소인의 법률 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는 오늘 기자회견을 했고, 박원순 시장은 4년 동안 고소인에게 지속적인 성추행을 했으며, 이는 언론이 기정사실화 했다. 이미 여론재판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사실이라면 박 시장이 잘못한 것이고, 지금 법적으로 단죄할 수 없으니 그의 명예가 완벽하게 실추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7.그런데 난 오늘 기자회견을 보고 도리어 이상했다. 기자회견을 하는데 증거를 하나도 내놓지 않은 것이다. 변호인단이 증거라고 제출한 것은 그들이 직접 포렌식한 휴대폰의 일부 내용물이 전부이다. 휴대폰을 통째로 제출한 것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포렌식해서 보여주고 싶은 것만 경찰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을 강제 초대해서 성추행했다는 증거로 제출한 텔레그램 이미지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 부언하자면, 고소인이나 변호인이 이미지를 조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추행의 증거로 텔레그램 이미지를 '선별적으로 포렌식'해서 내는 것은 증거능력으로 대단히 미약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시장님이 텔레그램으로 나를 초대해서 비밀대화방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눴다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얼마든지 대화명도 변경할 수 있는 것이 텔레그램의 기능이다.
8.당사자도 없으니 증인도 없는 것이고, 증거물이라고 보기에 너무 미약한 것을 내 놓고 고인의 발인이 있는 날 기자회견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나로서는 정치적인 목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증거 공개를 1주일 미루는 '티징(Teasing) 기법'까지 선보이는 것은 최대한 여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고가려는 의도이다. 박원순 시장은 이 사건에 대해 해명도 할 수 없고, 오늘 발인까지 했으므로 부관참시 하겠다는 의도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의도가 사실이라면 성공했다.
모르겠다. 다음 주에 새로운 증거로 직접적인 문자 메시지나 확실한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사건에 대해 더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 같다. 하지만 박원순 시장은 그 사이에 이미 여론재판이 끝날 것 같다.
9. 이 과정에서 언론의 행태를 살펴보자.
SBS는 피해자가 ‘고소인 말고도 여러 명 있다’고 피해자가 직접 밝혔다고 보도했다. 가짜뉴스다. 고소인은 한 명이고 다른 피해자는 없다고 변호인이 밝혔다.
〈중앙일보〉는 박원순이 피소인이 된 것을 청와대에서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역시 가짜뉴스다. 청와대에서는 피소사실을 통보한 적이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런 것이 바로 언론의 광기이고, 대중들의 광기를 유발하는 가짜뉴스이다.
10. 끝으로 고소인의 변호사는 김재련인데, 그녀는 화해치유재단의 이사였다. 화해치유재단은 박근혜가 아베와 졸속으로 합의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만든 재단이다. 김재련의 남편은 모 언론사의 간부였는데, 그렇다면 오늘의 기자회견이나 박 시장 사망 당일 수색을 하면서 온갖 이상한 기사들이 미리 보도가 되었던 이유가 이해가 된다.
대신 오늘 함께 나온 '한국성폭력상담소'와 '여성의전화'는 신뢰할 수 있는 단체이다. 그래서 더 헷갈린다. 나 역시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다. 고소인이 정말 성추행 피해자로 고통받고 있었다면 고인의 명예에 대해 더이상 왈가왈부할 내용은 없다. 그저 모르는 피해자를 위로하고 가해자에 대해 실망할 뿐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상기 언급한 내용들처럼 개운치 않은 정황들이 너무 많다. 증거를 공개할 거면 빨리 공개하고, 아니면 조용히 경찰 혹은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맞는데 언론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현 시국에서 가장 분노를 유발하는 것은 '쓰레기 언론들'이다.
나는 이 건은 좀 더 상황을 지켜 보면서 관련한 의견을 내려고 한다.
두일 차이나랩 대표(한중 IP 전문가, '검찰개혁과 조국대전'의 작가) 굿모닝충청 2020.7.13.
산 자의 몫이 된 ‘두 개의 유산’
새벽 3시. 휴대폰엔 박원순 서울시장 주검이 발견됐다는 속보가 떠 있었다. 툭, 한숨이 터졌다. 생전의 그가 주마등처럼 흘렀다. 성폭력으로 피소된 일도 포개졌다. “박원순마저~”로 시작될 격랑의 높이를 그 밤엔 잴 수 없었다. 정신만 말똥말똥해졌다. 동이 튼 세상은 팽팽했다. 고인에겐 긴 추모행렬이 섰고, 피해자 곁엔 연대의 손이 모였다. 조문을 하니마니 정치는 갈라졌다. 미화해선 안 될 삶의 끝, 그렇다고 가벼이 지워질 수 없는 한평생의 헌신과 선 굵은 족적, 사람들은 그 사이를 오가며 힘들어했다. 비보를 접한 그 새벽, 두 글자를 새겼다. ‘균형’이다. 있는 대로 기억하고, 있는 대로 책망하자고….
“이젠 쉬세요.” 서울광장 시민분향소 방명록에 가장 자주 보인 말이다. 서울대 입학 첫해 유신 긴급조치로 제적되고, 검사 생활도 6개월 만에 던진 그의 20대는 질풍노도였다. 1986년 서른에 시작한 역사문제연구소는 민변-참여연대-아름다운재단-희망제작소-서울시장으로 이어졌다. 공적 연표만 34년. 사람들 머릿속에 그는 ‘일하는 사람’이거나 ‘일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구동성으로 쉬라는 말이 앞선 이유일 게다. 스스로는 ‘황태 덕장’ 얘기를 즐겼다. “명태는 겨우내 덕장에서 얼었다 녹기를 되풀이하고 봄 되면 명품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굽이굽이 바다로 흘러가는 강’으로 묘사한 세상사 굴곡과 역사의 진보를 박 시장은 황태 덕장에 빗댔다. 폭우 속에 그가 떠난 날 내 기억 속 세 토막도 띄워 보낸다. 인상 깊은, 그날그날의 그였다.
#2001년 여름. 원주 상지대에서 노무현·김근태·손학규·이부영의 4색 대화가 끝난 밤, 상경하는 참여연대 봉고차에 탔다. 사회를 본 그에게 네 사람의 품평을 물었다. ‘오프(비보도)’로 한마디씩 뽑고는, 대뜸 노무현·이회창이 붙으면 재밌겠다고 했다. 서울법대 대 부산상고, 대법관 대 민변, 주류 대 촌놈. 그는 대척점이 붙어야 세상 문제도 제대로 드러나고 바뀐다고 했다. 곰곰이 창밖을 보다 “소셜 디자이너가 꿈”이라 했고, 솔잎(시민사회)만 먹고 살겠다고 했다.
#2009년 가을. 그렇게 결기서린 표정은 처음이었다. 희망제작소에서 몸소 겪은 국정원 사찰 정황을 알렸다가 ‘원고 대한민국’으로부터 2억원 민사소송을 당했을 때다. “겁주기 소송이다. 잘못 건드렸다”던 그는 1·2·3심을 다 이겼다. “국가는 감정을 가진 명예훼손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첫 판례가 세워졌다. 시련 끝에 “정치해볼까” 물었던 날이다.
#2019년 봄. 서울시장 9년간 잘하고, 못하고, 기분 좋았던 것을 물었다. 수없이 꽂혀 있던 시장실의 ‘아이디어 파일’을 떠올리면서다. ‘메르스 과잉대응’ 소릴 듣고, 서울시 청년정책 설계를 청년들에게 맡긴 걸 좋게 꼽았다. 기분 좋은 건 시립대 반값 등록금과 제주 바다의 제돌이를 볼 때라고 했다. 반값 등록금은 “소 판 돈과 누이들 희생으로 공부했다”는 그의 두 번째 서명이었고, 제돌이는 직권으로 풀어준 남방큰돌고래였다. 못한 것은 “너무 많죠. 그건 다음에”라고 넘어갔다. “정치인 다 됐다”는 말이 나왔다.
그도 스스로 무너졌다. 인생 여정의 마지막에 여비서의 성폭력 피소가 찍혔다. 1999년 첫 성희롱 승소를 변론하고, 젠더 특보도 둔 “사람특별시 시장”의 무참한 일탈이다. 아카시아 뿌리만큼 질긴 권력의 사유화이다. 무죄 추정을 거론하는 게 허허롭다. 2차 가해도 모질다. “모든 분께 죄송하다”는 박 시장 유언에선 피해자를 괴롭히지 말라는 속죄가 읽힌다. 정녕 이 사회가 할 것은 따로 있다. “처음에 울부짖었어야 했다”는 그에게 “그때도 지금도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홀로 힘들었다”는 그에게 ‘성폭력 옴부즈맨’이 제대로 작동하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정에서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용서하고 싶었다”는 그에게 최선을 다한 진상조사 결과를 주는 것이다. 그래야 권력형 성폭력의 흑역사는 끝나고, 그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쪼개진 나흘, 이래도 저래도 사람들은 무겁고 불편했다. 영결(永訣)되지 못한 무엇 때문이다. 박원순을 이을 게 많고, 박원순을 찍고 끊을 게 생겼다. 산 자의 몫이 된 두 개의 유산이다. 경계할 건 이분법이다. 추모하는 맘을 가해로, 피해자와 연대하면 무례로 낙인찍는 독선을 벗어야 한다. 내놓고 “박 시장은 맑다”고 말하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할 시간이다. 그렇게 상처를 보듬으며 공동체는 훌쩍 거듭나야 한다. 박 시장의 명복을 빈다. 그의 유족과 피해자에게도 위로를 전하며 가호(加護)가 있길 빈다.
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2020.07.14.
이제부턴 피해자의 시간
강화길의 단편소설 ‘음복’엔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가 등장한다.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시아버지, 그의 수발을 들며 고생한 시어머니, 성차별을 당했던 시사촌…. 결혼 후 처음으로 참석한 시가의 제사에서 주인공은 단시간에 복잡한 갈등 구도를 간파하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다.
“무지도 권력이다”라는 말이 작동하는 방식을 소설은 서늘하게 그린다. 남편의 맑은 얼굴은 그늘에 잠식당한 다수의 희생 덕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무지한 상태로 괜찮을 수 있을까? 권력자의 ‘무지’는 무해할 수 없다. ‘무지’가 권력의 형태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때, 차별과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안희정, 오거돈, 그리고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고 박원순 시장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부하 직원에게 행한 행위가 ‘범죄’가 될 수 있다고는. 그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을 고발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지자체장으로 누렸던 ‘제왕적 권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무지’다. 묵인과 침묵으로 유지되는 ‘무지’는 진실이 발화되는 순간 깨진다. 무지가 권력이 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끝났다.
박원순 시장의 영결식이 끝났다. 57만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장 5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은 온라인으로 생중계되어 수많은 시민들이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였던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추모됐다. ‘애도’는 충분했다.
‘애도’는 침묵을 요구했다. 여당 대표는 성추행 의혹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예의가 아니다”라고 호통쳤다. “4년 동안 지속된 성폭력”에 시달리다 어렵게 고소를 하고 나선 피해자의 목소리는 지워졌다. 모두가 충격과 혼란에 빠져 있었을 때, 그가 느낀 공포와 고통은 어땠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주디스 버틀러는 <위태로운 삶>에서 말한다. “공적인 애도가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에 대한 공적 논쟁과 비판적 담론을 잠재우는 계기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 어떤 형태의 슬픔은 국가적으로 인정받고 확장되는 반면에 다른 상실은 사유 불가능하고 애도 불가능하게 되는지를 생각해본다.”
미국의 9·11 테러 이후 쓰인 책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어떤 ‘상실’은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되지만, 어떤 개인이 겪은 폭력은 ‘묵살’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고인의 폭력이 ‘공소권 없음’으로 손쉽게 삭제되어 버린다면, 수년간 지속된 고통 끝에 ‘살기 위해’ 고소를 택한 피해자의 삶은 어떻게 복원될 수 있는 것일까. 피해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일상과 안전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고통과 침묵 속에 박제되어 버린 피해자의 시간을 이제 다시 흘러가게 해야 한다.
“상실에 대한 우리의 취약성과 그에 따르는 애도라는 과제, 이런 조건 속에서 공동체를 세울 기반을 찾는 일, 이것 모두와 관련된 차원의 정치적 삶을 고찰해볼 것을 제안한다.”
고인은 영면에 들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거대한 질문과 숙제를 던졌다. 고위 공직자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반복되는 사회구조적 문제점을 찾아내고 응당한 책임을 묻고, 뜯어고쳐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애도다.
이영경 모바일팀 경향 2020.07.14.
권력 저널리즘 혹은 약자 저널리즘
<[단독] 서울시, 박시장 사망 직후 ‘6층’ 비서실 조사했다>, <[단독] 경찰, 고 박원순 시장 고소인 신변보호 중… “요청 받았다”>, <주호영이 말한 “흔적”… 누가 박원순에게 성추행 고소 알렸나>, <홍준표 “박원순 채홍사 있었다는 소문 돈다, 진상규명 해야”>, <민주당 윤준병 “박원순, 피해자 보호하려 극단 선택한 것”>, <과거 안희정 지지 선언도… 박원순 고소인 변호한 김재련 누구>.
처참하다. 박원순 시장의 장례 기간 동안 그마나 신중했던 언론이 발인과 피해자측 기자회견 직후 정치권 발 따옴표 기사와 단독을 남발하고 있다. 이런 언론 보도에 대한 비평에는 늘 “사실을 취재하여 밝혔을 뿐”이라는 항변이 돌아온다. 그 ‘사실’이란 기자가 취재하여 발견한 새로운 정보에서 정치인과 관계자 발언 일부까지 광범위하다. 이런 항변은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규범, 즉 객관성 중 사실성(factuality)에 근거한다. 그러나 사실을 수집하고 전달하는 저널리즘이란 지금과 같은 사태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언론 보도 한 건 한 건이, 기사 단어 하나 하나가 누군가에 비수로 꽂히는 민감한 상황에서는 대화로서의 저널리즘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면기사로 출고하고 포털 메인에 노출되는 단계에서 끝나는 저널리즘이 아니라 그 기사로 누구의 입장에서 어떤 이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 고민할 때다.
▲ 7월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왼쪽부터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 사진=민중의소리
이런 태도는 전통적인 저널리즘 원칙에서 본다면 취재원과의 거리두기(detachment)에 반하는 자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지금 사태에서 거리두기를 해야 할 대상은 취재원이 아니라 기자 자신과 소속된 언론사 및 출입처다. 대화로서의 저널리즘에 필요한 태도는 이입(empahty)이다. 이입은 공감(sympathy)과 다르다. 공감이 피해자의 고통이라는 감정에 동의를 표하는 태도라면, 이입은 피해자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해 보는 태도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시장과 비서라는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위계의 정점에 있는 권력집단과 유사한 성추행을 경험했거나 지금도 밝히지 못하는 이들 간의 오래된 ‘정치적 폭력’의 문제다. 피해자에게 자신을 이입하는 것은 편향이 아니라 철저히 이성적인 태도다. 만약 내가 피해자의 직위와 처지에 있었다면 왜 4년 동안 사실을 밝히지 못했는지,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없었는지,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라는 자문에서 취재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된 저널리즘 관행에서 이입은 전혀 다른 입장에 투사되어 왔다. 권력을 가진 이들, 이번 사태에서는 정치권, 서울시, 경찰과 기자 자신이 속한 언론사가 그들이다. 이들의 입장에 서게 되면 피해자는 철저히 대상화 된다. 민주당과 통합당은 어떻게 이 사태를 대응할 것인지, 시장의 공석 이후 보궐선거를 어떻게 치를지, 소속 언론사는 타사에 비해 어떤 차별성을 보일 등의 질문이 우선된다. 특히 정치권과 경찰, 검찰 같은 출입처의 입장에 서게 되면 기자는 하나의 가설을 세워 조각조각 흩어진 사실들을 선택하고 조합한다. 독자들은 각 언론사의 보도를 단편적으로 읽지만, 해당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는 자신의 가설에 맞추어 연속된 스토리를 구성한다. 음모론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 언론보도의 가장 큰 문제는 기자가 누구의 입장에 자신을 이입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두 가지 정치적 문제로 제기된다는 점이다. 각 정당의 입장, 서울시의 책임과 대응, 경찰 수사의 진행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들의 입장에 기자 자신을 이입한다면 또 다시 피해자는 사라지고 ‘진실 공방’과 같은 정당 간 정치적 이전투구로만 좁혀진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협소한 정당정치가 아니라 위계에 의한 폭력이라는 더 거대한 정치적 문제다. 언론보도의 정파성이 위험한 것은 사실의 왜곡이나 편향에만 있지 않다. 제도 정치의 쟁점으로 더 큰 정치적 문제를 은폐하는 것. 그래서 지금 언론에 필요한 태도는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보다 ‘내가 약자라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라는 정치적 약자에 대한 이입이다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 전문위원/ 미디어오늘 2020.07.14.
부동산, 정책이 아니라 철학이 없다
고려가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개방적인 나라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대로이다. 상업의 발달은 화폐의 사용을 확대시키기 마련이다. 물론 반대로 화폐의 사용이 상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고려는 금속화폐를 자주 주조하면서 적극적으로 사용을 권장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백성들에게는 화폐의 사용을 권장하면서도 정작 정부는 조세를 거둘 때 현물로만 받았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여당의 핵심 인사들이 갑자기 집을 판다고 나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청와대 비서관들은 모두 다주택 가운데 하나를 팔라고 호령했던 비서실장부터 집이 두 채였단다. 그래서 강남의 똘똘한 한 채는 남겨 두고 지방의 집 한 채는 팔겠다고 했다가 오히려 여론의 비판만 받았다. 이런 와중에 어느 비서관은 집 두 채 가진 게 무슨 죄냐며 나는 못 판다고 버티고 있다 한다.
정부 “다주택자 집 팔라” 압박에도
청와대 비서관들도 “못 판다” 버텨
부동산 정책 신뢰성 바닥에 떨어져
종부세 인상으로 투기 잡겠다지만
수억 원대 차익에 비하면 새발의 피
진짜 ‘폭탄’ 떨어져야만 광풍 멈출 듯
부동산 가격을 둘러싼 논란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정부가 대책을 내놓았다. 이 정부 들어서는 모두 스물두 번째라고 한다. 이러니 부동산은 백약이 무효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모든 상품의 가격은 당연히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상품의 가격이 너무 높으면 공급을 늘리든지 수요를 줄이면 된다. 그런데 부동산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복잡하다. 빵이든 자동차든 대부분의 상품들은 소비를 하기 위해 구입한다. 그러나 부동산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격이 더 오를 것을 기대하고 시세차익을 얻기 위해 구입하는 투기적 수요가 있다. 역대 정부들이 자주 사용한 정책은 공급을 늘리자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의 200만 호 공급이 대표적인 예이고, 여러 정부의 신도시 건설이나 뉴타운 건설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공급을 늘려도 부동산 가격을 못 잡은 이유는 공급보다 투기적 수요가 더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나 지금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바로 이런 투기적 수요를 줄여 보자는 것이다. 한때 몇몇 경제전문가라는 분들이 노무현 정부를 향해 경제학의 기본을 아니 모르니 하는 비난도 했지만, 그 결과와 무관하게 정책의 의도나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아파트 분양가 공개는 노무현 후보의 대선 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자마자 노무현 정부는 시장 원리를 이유로 분양가 공개를 거부했다. 동네 식당에서 5000원짜리 점심 한 그릇을 먹어도 재료의 원산지를 공개하는데 5억짜리 아파트의 원가를 공개하지 못하는 게 무슨 시장 원리인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지난 총선에서 몇몇 민주당 후보들이 종부세 인하를 주장한 것이나, 최근 정부 일각에서 주택 공급을 위해 그린벨트에 집을 짓자고 주장하는 것은 이 정부가 부동산 문제에 얼마나 철학이 빈곤한가를 보여 준다.
7·10 대책의 핵심은 종부세를 인상해서 투기적 수요도 억제하고 두 채 세 채씩 가진 이들이 보유한 주택을 시장에 내놓게 하겠다는 것이다. 흔히들 나는 집이 한 채밖에 없으니 투기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투기인가 아닌가는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해야 옳다. 한 채든 두 채든 내가 가진 아파트 값이 몇 년 사이에 10억씩 올랐다면 그것은 투기가 맞고, 그 차익은 내놓아야 옳다. 그래서 종부세가 얼마나 오르나 보았더니, 36억 짜리 주택에 126만 원이 오른단다. 부동산 관련 세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부 언론이나 이런저런 전문가라는 이들이 자주 쓰는 말이 세금폭탄이다. 하지만 10억 오른 아파트의 세금이 100만 원 더 나왔다고 폭탄인가? 종부세는 정말 폭탄이어야 한다. 그래야 너도나도 이 폭탄을 시장에 내놓을 것 아닌가?/ 조준현 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부산일보 202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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