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이간질이 아니라면 한겨레 21 2020-05-15
왜 우린 미국에 '주한미군 주둔 사용료'를 받지 못할까 pressian 2020.05.19
국가채무가 증가하면 위험한가 경향 2020.05.21.
폭염 재난’도 미리 준비하자 경향 2020.05.22
용서한다’는 말 경향 2020.05.23
21대 초선들에게 부치는 편지 경향 2020.05.25.
코너링 한겨레 2020.05.25.
노래를 불렀다가 ‘죄인’이 되는 나라, 대한민국 한겨레
윤미향이 침묵하니 국회도 침묵하나? 프레시안 2020.05.26
코로나19 사태의 다섯 가지 사회적 코드Ⅱ 경향 2020.05.27.
군 위안부 논란, 돈 문제가 아니다 경향 2020.05.27.
민주당은 ‘안개의 나라’를 만들 것인가 경향 2020.05.27.
나의 장례식 남도민일보 2020년 05월 27
헛다리 짚는 CIA의 평양 분석 시사인 2020.05.28
어설픈 채식 경향 2020.05.28.
인간임을 위한 행진곡 경향 2020.05.28.
한명숙 사건’이 재조명돼야 할 이유 한겨레 2020.05.28.
저층민과 지하층민의 정당 경향 2020.05.29
포스트 코로나’ 뭣이 중헌디? 경향 2020.05.30.
법원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경향 2020.05.30
이것이 이간질이 아니라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문제제기로 논란이다. 언론은 모든 문제를 뒤섞어서 보도하지만 진실에 다가서려면 쟁점을 잘 나눠봐야 한다.
정의기억연대 기부금 지출과 관련해선 두 가지 쟁점이 있다. 첫째는 피해자들을 위한 직접 지원이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다. 정의기억연대는 피해자를 위한 구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실질적인 해결을 모색하자는 취지의 단체다. 따라서 피해자 직접 지원에 쓰인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로만 판단할 것은 아니다. 둘째는 기부금 지출이 합법적으로 됐느냐는 의문이다. 당국에 보고한 회계가 공시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더 엄밀한 회계처리에 힘써야 한다. 하지만 이걸 횡령이나 개인적 착복의 증거라고 볼 수는 없다.
이용수 할머니가 제기한 ‘10억엔’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당시 정부가 일본 정부의 일부 책임 인정, 일본 총리의 사죄, 한국 정부의 재단 설립과 일본 정부의 국고 거출이란 큰 틀은 사전에 공유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까지는 일본의 책임 인정이라는 대목에서 진전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나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 비판 자제’, 소녀상 문제에 대한 언급 등은 당일 발표를 통해 공개됐다. 이러면 “우리 책임을 인정하고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게 아니라 “사과도 하고 돈도 줬으니 이제 더는 말하지 마라”가 된다. 사람들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비판한 이유다.
그럼에도 이용수 할머니가 갖고 있는 의심이 있다면 그건 정의기억연대와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였던 윤미향 당선자(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가 해소해야 한다. 앞서 회계 문제에 대해서도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지원 사업이 더 필요하다거나 회계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용수 할머니는 피해 당사자인 동시에 여성인권운동가다. 단체의 운영 방식이나 노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궁극적으로 윤미향 당선자가 국회에 가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해결될 문제다.
그러나 보수세력이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을 활용하는 방식은 고약하다. 보수언론은 윤미향 당선자를 포함한 활동가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자기 정치’ 등 사익 추구를 위해 이용한 것처럼 보도한다. 이런 침소봉대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정치적 복권을 시도하겠다는 거다. 보수세력은 문재인 정권이 ‘나름 괜찮은 성과’였던 당시 합의를 부정하고 사실상 뒤집은 것은 반일의식에 기댄 무리수였고, 강제동원 판결과 수출규제 사태도 이 연장선으로 본다. 하지만 앞에 썼듯 2015년 합의의 문제는 명확하다.
보수언론은 친일 반일의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를 얼마나 잘 대변했느냐의 문제라고도 주장하는데, 결국 진보라는 사람들이 명분을 내세워 개인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를 가로채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활용한다는 주장의 재생산이다. 이 논리는 ‘공정성’이란 외피를 두르고 “명분은 애초에 믿을 게 못 된다”는 세계관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결론은 각자가 능력대로 알아서 살아남자는 건데, 이는 시장원리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수정치의 고전적 패러다임과도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정치다. 보수세력이 지금 하는 일이 이간질이 아니라면, 2015년 합의 말고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김민하 칼럼니스트 한겨레 21 2020-05-15
왜 우린 미국에 '주한미군 주둔 사용료'를 받지 못할까
2013년 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2월과 3월에 북한은 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 수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한 바 있으며, 역시 2월에 3차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올라가 있을 때였다.
나는 그해 4월 영국 버밍햄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 참석을 위해 아스톤 대학을 방문했는데, 마침 영국에서 근무하는 한 중국인 교수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평소 알던 지인이라 부담 없이 "요즘 중국의 북한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마구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하는 걸 보니…"라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이 중국인 교수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남한과 달리, 북한은 독립국이기에 과거부터 중국이 북한에 대해 통제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어라? 이 양반 보게?'라며 "'남한과 달리, 북한이 독립국'이라는 당신 말에 의하면, 남한은 어느 나라의 속국 내지 식민지란 말이오?"라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이 되돌아왔다. "이보시오. 자기 국가에 대한 전시(戰時) 방위를 외국인 손에 맡기는 독립국가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전혀 부당하거나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은 명백한 독립국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군 작전을 통제할 권리를 의미하는 전시작전통제권은 한국군이 아닌 한미연합사가 가지고 있으며,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미연합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다. 혹자들은 이를 두고 전시작전권은 어디까지나 한미연합사에 있지, 주한미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주한미군사령관이 곧 한미연합사령관이라는 사실은 한반도 유사시 한국군은 주한미군의 통솔하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진하다 보수정권에 의해 무기한 연기된 전시작전권을 시급히 반환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한미군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공산권 세력으로부터 자유진영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한국전쟁 이래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으나, 실은 한반도 방위군의 성격을 벗어난 지 오래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목적은 중국을 견제하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데 있다. 특히 과거 한국 정부와 맺어진 불평등한 소파(SOFA)협정, 예컨대 협정 22조 5항에는 주한미군이 국내에서 살인, 강간 등 중대 범죄를 저질러도 현장 체포가 아니면 구속수사를 하지 못 하도록 규정되어있어 주한 미군의 범죄와 일탈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개정될 필요가 있다.
특히 미국 국방부가 매년 편찬하는 연례보고서인 <미군기지 구조 보고서>를 보면, 미국이 해외에 가지고 있는 기지의 3분의 2가 글로벌 군사전략상 핵심지역들로 꼽히는 독일, 일본, 한국에 집중되어 있으나, 방위비 분담 규모와 구조에선 확연한 차이가 두드러진다.
첫째, 미국과 맺은 소파협정과 별개로 거액의 미군 해외 주둔비를 매년 지원하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뿐이다. 두 나라와 달리 독일은 한때 미군 주둔비용 상당의 미국산 무기나 채권을 사준 적은 있지만, 이는 직접 지원과는 성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1975년 이후 미군에 분담금 성격의 돈을 주지는 않으며, 미군에 대한 지원의 대부분은 임대료 및 세금면제 등 간접지원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한겨레> 2017년 7월 12 자 기사 참고) 둘째, 비록 미군 주둔비 총액에 있어서는 일본의 지원액이 한국보다 크다고 할 수 있으나, 국내총생산, 즉 GDP를 기준으로 고려할 때, 한국은 일본대비 직접지원비 비율이 더 높다는 점에서 국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국가의 경제력을 감안하면 한국의 부담금(2019년 1조389억 원)이 전 세계 최고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는 심지어 주한미군의 월급까지 한국 정부에 떠넘기면서 50억 달러(6조 원)의 주둔비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던 바, 이는 한국의 2020년 외교·통일 예산(5.5조 원)보다도 많은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또한 최근 일련의 방위비 협상을 통해서 한국은 방위비 5년 계약을 하되 전년 대비 2020년에 13%를 우선 인상하고, 5년째 마지막 해에 13억 달러(약 1조 5918억 원)를 부담할 것을 제안하였음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마치 시혜하듯 50억 달러에서 깍아주었다며 "2020년부터 당장 13억 달러를 지출하라"는 비이성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필리핀은 1976년부터 미군이 철수를 선언한 1992년 전까진 주둔 비용을 분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군기지의 사용료를 받았다. 한국 입장에서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군의 필리핀 주둔은 미국의 필요와 국익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목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군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한국에서 철수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 내에는 이미 엄청난 규모의 미국 자산이 투자되어 있고, 한반도 전쟁 발발 시에는 미국의 자산도 함께 잿더미가 된다. 둘째, 한국의 공군기지들은 일본 오키나와나 요코타 공군기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베이징과 가깝고, 따라서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이 반드시 필요하다. 셋째,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할 경우, 자국의 방위를 위해서 일본이 핵무장을 추진할 수 있고, 이런 분위기가 주변국으로 도미노처럼 번질 수도 있으며, 일본과 중국의 밀월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주한 미군의 규모가 축소된다고 해도 완전 철수가 아니라면 미국의 핵우산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므로, 트럼프 행정부의 비이성적인 주둔비 인상 요구에 대해 단호하게 거절할 것을 정부에 요청한다./ 박병일 한국외대 교수 | pressian 2020.05.19
국가채무가 증가하면 위험한가
2017년 현 정부 출범 당시 한국 경제는 수출과 내수가 모두 부진할 뿐 아니라 생산인구 감소라는 공급 충격까지 겹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이전 정부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재정지출을 늘리되 국가채무 규모는 집권 말까지 GDP 대비 기준으로 소폭 증가하는 선에서 관리하겠다는 기조로 재정정책을 집행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이러한 계획에 차질을 야기하고 있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원래 전망을 밑돌 것은 확실하고 추경을 통해서는 지출이 더욱 증가할 것이다. 무엇보다 소폭의 추경을 뛰어넘어 현재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고용안전망 확보와 그린뉴딜-디지털뉴딜 추진이 필요하다. 내년 예산은 이를 반영하여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함에 있어 다른 정부지출을 줄여, 즉 윗돌 빼서 아랫돌 막는 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국채를 발행해야 할 것인가? 가령 과감한 적자재정을 시행해 국가채무가 단기간 50%대로 급증하게 되면 국가경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인가? 한편에선 OECD 국가들의 평균 국가채무가 2017년 이미 GDP 110%에 이르렀던 점을 제기하며 현재보다 국가채무가 설령 두 배로 증가하더라도 위험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단기간 급증은 위험하며 고령화 등 자연증가요인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단 노후소득보장 문제는 연금제도 개편을 통해 대응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코로나19 사태 이후 재정정책을 수립함에 있어 고령화 문제는 고려치 않도록 하자.
코로나19 사태 대응에 과감한 국채 발행 여부를 판단키 위해 2008년 국제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들의 재정정책 경험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국제 금융위기 직후 선진국들은 신흥국들의 동참 속에 과감한 확장적 재정정책을 폈다. 2008년 OECD 평균 일반정부 국가채무는 GDP 대비 80%였는데 2009년에 90%가 될 정도였다. 이러한 국제공조를 통한 강력한 확장적 재정정책에 힘입어 경제는 V자형으로 회복했고, 위기를 극복했다고 생각한 선진국들은 당장 재정건전화에 나서야 한다고 입장을 선회하였다. 2009년 말 그리스가 숨겨온 대규모의 국가채무 정도가 밝혀지고 2010년 하버드대학의 라인하트와 로코프 교수가 국가채무가 GDP의 90%를 넘으면 경제성장이 급격히 둔화된다는 분석결과를 내놓은 것이 이러한 분위기에 일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재정건전화’ 분위기하에서 IMF, EU, ECB는 당시 남유럽 재정위기 국가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긴축적인 재정정책을 처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선진국 경제는 더블딥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2011년 OECD 평균 국가채무는 GDP 대비 100%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재정건전화 정책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고, 2013년에 IMF의 수석이코노미스트인 블랑샤르 박사가 경기침체기 재정건전화 정책을 펴는 것은 심각한 위축을 가져온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또한 같은 해 미국 매사추세츠 암허스트대학교의 경제학자 세 명이 라인하트와 로코프의 논문에서 실수가 있었음을 발견하고 실수를 수정한 결과 90%라는 기준이 의미 없다는 것과 국가채무와 경제성장의 관계는 국가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는 사이 OECD 국가들의 평균 국가채무는 2017년에 GDP 대비 110%에 이르게 되었다. 이번 코로나19 대응과정에서 선진국들이 대규모의 재정을 투입하여 경기를 부양하는 것은, GDP 60% 혹은 90%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며 경제의 펀더멘털, 성장잠재력이 중요한 상황에서 경기침체기에는 확장적 재정정책의 성장효과가 더욱 크다는 암묵적 합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코로나19가 야기한 경제위기 속에서의 재정정책은 단기적 국가채무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고용과 산업경쟁력, 경제성장잠재력의 동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국가채무가 증가하더라도 경제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면 국가채무 증가를 오히려 좋은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마침 저금리 상황은 적자재정 정책의 비용도 크게 낮추어줄 것이다. 실제로 작년 국채 이자 비용은 GDP의 1.57%에 불과했다. 단기적으로 적극적 적자재정을 하자는 것이 무한정 국가채무를 증가시키자는 주장으로 읽혀서는 곤란하다. 고령화 대응과 마찬가지로 고용안전망의 확보는 장기적으로는 그에 걸맞은 재원마련방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위기 시기에는 국채 증가가 더욱 바람직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재정건전성을 내세우며 국채발행을 주저하는 것은 정책 지형 변화를 읽지 못한 ‘낡은’ 방식의 방해에 불과하다./정세은 충남대 교수 경향 2020.05.21.
폭염 재난’도 미리 준비하자
폭염재난이란 것도 매년 반복되어 상투적이 되었지만, 그 세어지는 강도에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더 두렵게 만드는 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 사태가 폭염재난과 중첩되는 앞으로의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피서를 위한 이동도, 피서지 개방도, 에너지빈곤층을 위한 공공시설 운영도 어려워 보인다. 재난이 늘 그렇듯 코로나 팬데믹 또한 약자를 힘들게 만들었고, 이중의 재난이 닥칠 가능성이 높아진 지금 사회적 약자의 위험수위 또한 높아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구 어디든 사람이 살 수 있게 된 지금 역설적이게도 기술의 남용으로 맞은 기후위기로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생겨나고 있다. 온도가 너무 높아 체온 조절을 위한 땀조차 배출하지 못하는 곳이 늘어간다는 뉴스는 기후재난시대의 걱정을 공포로 바꾸고 있다. 여기에 더해 매년 그래온 것처럼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더욱 뜨거운 여름이 될 것’이라는 예측 같지 않은 예측도 빈도를 높이고 있다.
지구 전체에 드리운 이 거대한 기후재난은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먼 북극의 얘기로나 치부된다. 우리나라 온도가 지구 평균의 두 배, 해수면은 지구 평균보다 2.5배나 더 가파르게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불편한 진실임에도 언제나 그랬듯 딴 나라 얘기로 치부된다. 한 줌 빙하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굶주린 북극곰 사진과 함께 기후위기를 경고하는 클리셰적 외침은 위기를 타개할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자업자득이라는 석학들의 주장 역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함은 동일하다. 반면 에너지 전환 주장이 마치 경제를 망칠 악마의 외침인 양 주장하는 기득권의 선동은 공고하다. 이 지루한 상황에서 폭염재난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이번 코로나 국면에서 우리나라에선 정말 먼 미래 같았던 기본소득제도 논의의 불꽃이 제대로 지펴졌고, 빠르게 전 국민 재난지원금 교부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소득이 끊긴 긴급한 상황을 맞은 많은 국민에게 한 차례의 응급처치는 말 그대로 순간의 해결일 뿐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최악 상황을 대비해야만 하는 이유다.
이번에 급물살을 탄 기본소득제도는 IT시대와 오버랩될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맞아 우리 사회 최대 화두로 떠오를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전에 당장 설상가상으로 다가올 폭염이라는 재난을 피해갈 방안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 방안 중 하나로 기본소득에 앞서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전 국민 기본공제를 빠르게 고민할 시간이다. 모든 가구에 폭염을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전기와 물 등 공공재를 기본으로 제공하는 공제구간을 두는 방안이다. 절약한다면 비용 없이 전기와 물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필수사용량 기본공제로 발생하는 손실분은 에너지 과소비구간의 누진세 강화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물과 전기의 필수사용공제는 에너지빈곤층을 위한 최소한의 정부지원임과 동시에 기후재난시대를 타개할 에너지 절약의 실천 및 인식전환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재난지원금 교부가 비록 비선별 지원방식을 취했음에도, 나눠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를 위해 걷지 않는 것은 행정력 최소화와 효과 극대화를 위한 최선의 방안이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hwan9430@gmail.com경향 2020.05.22
용서한다’는 말
어제 하루 종일 뉴스매체들을 뒤덮은 말은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와 “용서한 것 없다”였다. 용서라는 말의 쓰임새 하나는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해야 하는 말이다. 가령 전두환이 광주 5·18 희생자들에게, 그리고 n번방 운영자 조주빈이 성착취 피해자에게 해야 할 말이다. 두 번째 쓰임새로는 생살여탈권을 장악당한 약자가 강자에게 구걸하듯 애원할 때 쓰는 말이다. 물론 이 두 경우는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용례일까. 내게 가장 익숙한 표현인데, 신을 대리하는 성직자에게 신자가 종종 사용하는 말이다. 이때 신자는 흔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성직자는 신을 대리하는 자처럼 연기하고, 신자는 간절함을 과시하듯 무릎 꿇는 행위로 그 모든 죄를, 생각나지 않는 것들까지 모두 퉁쳐서 용서를 빈다.
이런 경우인가? 그러려면 몇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용서의 주체가 스스로를 사면권을 가진 자 혹은 위임받은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신적 주체로 자임하거나 절대적인 도덕적 우월감을 가졌다고 확신할 때 그렇게 말한다. 또 그이의 용서라는 말이 일으키는 담론의 효과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그런 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한다.
관련 기사들에 의하면 이용수 할머니와 그이의 측근들이 그런 표현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도 이들이 그런 교주와 신자공동체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한편 윤미향 당선자 자신이 그렇게 말했는지는 기사만으로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도 그런 공동체의 신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그런 공동체가 있다면 그이는 그 외부자다.
하여 내 생각에는 세 번째 쓰임새도 아니다. 물론 우리가 쓰는 말들이 항상 논리정연하지는 않다. 해서 어울리지 않는 말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그런 표현을 하루 종일 실어날랐던 기자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타 공인 언어 전문가들 아닌가. 한데 그들은 왜 이 말이 이상하지 않았을까? 무엇에 대해 용서를 비는지, 무엇 때문에 용서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야 하지 않는가? 왜 당연히 안다는 듯이 그냥 그 말을 그대로 옮겼을까.
어쩌면 그들도 말했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호들갑 떤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평생 글을 써왔던 사람이니,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말들이라면 다른 많은 이들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법하다. 그런데 그 표현이 하루 종일 족히 수천번쯤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옮겨졌다.
신학자의 입장에서 괜한 걱정을 말해보려 한다. 나는 용서라는 말의 세 번째 쓰임새의 위험성에 대해 과민하다.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설명도 없고 번안 작업도 없으며 해석하지도 않은 채 이런 말이 수없이 회자되면 그 말에 취해버리는 이가 생길 수 있다. 사이비 교주가 그리고 독재자가 그렇게 탄생한다. 그들은 홀로 별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그들이 얼떨결에 쓴 말을 마치 무슨 마력을 지닌 것처럼 세상이 폭발적으로 되뇌고 실어나를 때, 그런 담론이 일으키는 광풍의 마력을 감각적으로 체감할 때 스스로를 오인한 자가 사이비 교주이고 독재자가 된다.
어쩌면 정의기억연대 자체가 이런 용서의 종교적 담론화의 위험성을 자초한 장본인일 수도 있다.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처럼 일본제국의 야만적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집을 떠나야 했거나 집에서 내몰렸던 여성들, 그들이 겪었던 조선의 가부장적 폭력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리 눈에 뜨이지 않았다. 또 미군 기지촌의 여성들을 성노예로 팔아버린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식의 운동이, 다른 피해자들과는 구별되는 특권화된 피해자 담론을 전 사회가 소비하도록 조장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래도 기자라면 그런 ‘용서’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kjh55940@ 경향 2020.05.23
21대 초선들에게 부치는 편지
21대 국회 개원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개원을 앞두고 많은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설레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지난 70여 년간 한국정치에서 한 번도 주류의 자리를 빼앗긴 적 없었던 보수의 벽이 처참하게 무너졌고, 진보와 개혁을 표방하는 세력이 과반을 넘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잘해야 한다. 이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300석 중 151석. 전체 의원의 절반이 넘는 초선의원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이 중에는 지방의회와 자치단체, 청와대 등에서 정치 수업을 쌓은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소위 영입인사로 정치에 입문한 신인들도 적지 않다. 이분들께 우선 당부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은, 정치라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을 너무 얕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는 여러분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타고난 재능과 각고의 노력으로 이룬 탁월성만큼이나 고도의 기예와 경험, 신념과 분투가 필요한 영역이다.
국회는 이 세상의 모든 이해관계가 하나의 도가니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곳이라서, 말 그대로 천사부터 악마까지 다 만나보기 전에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천사라고 믿었던 사람이 악마가 되고, 악마처럼 보였던 사람이 실은 천사인 경우도 허다하다. 선한 초심을 잃지 않거나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정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들이 오랜 루틴으로 몸을 만들 듯이 정치에도 정치의 근육이 필요하다. 정치 신인들 역시 다른 종목에서는 최고의 선수였을지 몰라도, 정치라는 종목에서는 초짜나 다름없다. 최고의 수영 선수가 최고의 마라톤 선수가 되려면 시간과 경험, 노력이 필요하다. 간혹 탁월한 변호사나 시민운동가가 처음부터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자기가 그런 행운을 타고 났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자기도 망치고 나라에도 좋지 않다.
그래서 정치 신인이라면 정치적 전문성을 기르는 것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것은, 의회에서 다른 선배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듣고, 의회의 공식적 규칙과 비공식적 관행을 열심히 익히며, 소위 공부모임에 열심히 나가서 견문을 넓히는 것으로 이 과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선배가 있다면 믿지 말라. 그 선배는 그것 말고 다른 필수적 역량을 이미 갖추었든지, 아니면 자기도 그렇게 정치를 잘 못 배운 사람이다. 입법이나 제도개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인 양 조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 정치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세상이 이렇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재벌개혁에 매진했던 분이 해 준 이야기다. 변호사인 이분은 처음에는 자신이 아는 ‘법’과 ‘사법제도’를 믿었다. 잘못을 고발하고 법정에서 다투었고 번번이 졌다. 다음에는 법이라는 그물이 너무 성기다고 생각했고 ‘입법’과 ‘제도’와 ‘기구’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촘촘하게 법을 만들었고, 감독권을 가진 기구를 강화시킨 안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정무위나 기재위를 통과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고, 그렇게 힘들게 진전된 법안은 자유시장 경제를 위협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법사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보수정당이 가진 100개의 의석은 무슨 일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못하게 하는 데는 충분한 권력이다. 상임위원장 말고 작은 소위원회를 장악하는 것만으로도 입법절차를 지연, 중단시키기에는 충분하다. 당 내에도 생각이 다른 의원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현실에 분개하거나 절차적 개혁을 시도하기에는 이미 늦다. 게다가 의원들이 선호하는 이런 기술적인 해결책은 옳은 대안이 아니다.
모든 초선의원들은 호주머니에 국회법을 넣고 다니며 달달 외워야 한다. 그것은 필수다. 그러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치는 암기 잘하는 머리가 아니라 부지런한 손과 발이 한다. 자기가 아는 손바닥만 한 세계의 전문성을 내세우지 말고, 모르는 거대한 세계의 삶을 배워야 한다. 정치는 거리에,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삶 속에 있다. 버스와 지하철, 산업현장, 국방의 최전선에 있다. 그에 비하면 의원들의 공부모임은 사교클럽일 뿐이다. 거기에는 정치가 없다. 정치는 도도한 것이 아니다. 도자기를 구우면서 자기 손에 흙 안 묻히려는 도공이라면 좀 우습지 않은가.
아까 그 변호사 분이 요즘 하는 일은 재벌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돕고 우리 편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게 제일 빠른 길이라는 걸 30년 걸려 깨달았다고 한다. 21대 초선들을, 응원한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향 2020.05.25.
코너링
2년쯤 전에, 어떤 권세 높은 댁 도련님이 경찰에 복무하다가 뛰어난 코너링 실력을 인정받아서 최고지휘관의 운전병으로 발탁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기막혔는데, 이 댁 도련님보다 훨씬 더 코너링을 잘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 선수들은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는 라이더들이다.
도심지 사거리에서 빨간불이 켜지면 라이더들은 신호 대기하는 자동차들의 틈새를 비집고 맨 앞으로 나와서 돌격선상에 대기한다. 신호가 바뀌면 오토바이들은 총알처럼 튀어 나가서 코너링한다. 사람의 몸과 오토바이가 옆으로 기울면서 90도 길모퉁이를 돌아 나가는데, 이때 각도를 오버해서 복원력을 회복하지 못하면 어찌 되는가. 이것은 생사를 넘나드는 코너링이고 백척간두의 코너링이다.
짬뽕, 우동, 설렁탕, 곰탕, 물냉면 같은 국물이 있는 음식을 배달할 때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샌드위치, 햄버거, 통닭, 김밥은 수월한 편이다. 코너링 각도를 잘못 잡아서 국물이 흘러나오면 라이더의 임금은 깎인다. 과속방지턱에서도 국물은 흔들린다.
지난 4월29일 서울 지하철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전국 배달 라이더들의 총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라이더들은 코로나 재난 속에서 국민들에게 생필품을 배달해 방역에 기여한 공로를 자랑했고, 난폭운전으로 ‘불량배’ 취급을 받는 처지를 괴로워했다. 이들의 필사적인 코너링 속에는 자본이 인간을 분산해서 고립시키고, 고립된 개인들을 다시 조직해서 작동시키는 모든 장치가 들어 있다. 이들은 책임과 비용과 위험을 모두 짊어지고서 아무런 생산수단이 없어도 ‘사장’ 대접을 받는다. 플랫폼에는 뿔뿔이 흩어진 노동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김훈 작가 한겨레 2020.05.25.
노래를 불렀다가 ‘죄인’이 되는 나라, 대한민국
나는 지금도 그 책을 뚜렷이 기억한다. 1989~91년에 나온 <국가보안법연구> 세권짜리의 세트였다. 내가 이 책을 27년 전인 학창 시절에 손에 쥔 것은 범상치 않은 인연이었다. 배가 고팠던 시절이라 가이드 알바를 자주 뛰곤 했는데, 어느 날은 운 좋게도 그 당시에 ‘개혁적인 법학자’로 유명했던 안경환 서울대 교수를 내 고향에서 가이드하게 됐다. 그는 나에게 그때 국가보안법 폐지의 필요성을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나중에 한국에 가게 되면 국가보안법에 대해 보다 자세히 공부해보라며 이 두꺼운 책을 건네주었다. 그 책을 지은 박원순이라는 사람은 전도가 유망한 인권 변호사라고 귀띔해 주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그 책을 읽어가면서 한국에서 나온 그 어느 교과서에도 실려 있지 않은 대한민국의 이면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책에서 알게 된 국가보안법의 피해는 각양각색이었다. 당대로서도 ‘상식’의 선을 넘는 기소나 판결이 대부분이었다. 평화통일을 선구적으로 거론한 조봉암은 (조작된) 간첩죄와 함께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됐다. 조봉암이 잡혀갔던 1958년에, 함석헌은 <사상계>에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게재해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갔다. <사상계>의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도 연행되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피해자 중에서는 유명인보다 이름 없는 민초들이 훨씬 더 많았다.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술김에 “김일성은 북괴지만, 박정희보다 인물이 낫다”는 식의 말을 내뱉었다간 감옥을 갈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박원순이 그 책에서 소개한 한 사례를 다시 보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면전에서 철거반원을 향해 ‘김일성보다 더한 놈들’ 운운한 것은 북괴의 학정을 겪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북괴에서는 대한민국보다 나은 행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게 될 것이고 그곳에 가서 살아보겠다는 의사도 내포된 것이라 할 것이어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에 해당된다.”(대법원 1970년 8월31일 선고·70도1486 판결 사건의 검사 상고이유서)집을 빼앗긴 철거민이 철거반원을 향해 ‘김일성보다 더한 놈’이라고 외쳤다가 영어의 몸이 됐다. 박원순의 책은 유명인부터 영세한 철거민들까지 한국인들이 국가보안법의 공포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 책이 아니었다면 나의 한국 현대사 공부는 ‘반쪽짜리 공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27년이나 지나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조봉암·함석헌·장준하 등 과거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은 지금은 현대사의 영웅들로 손꼽힌다. 안경환 교수는 2006~09년에 국가인권위 위원장을 지냈으며, 박원순은 이제는 국가보안법 연구보다는 2011년 이후 서울시장을 역임해온 것으로 더 유명하다. 이외에도 수많은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와 비판자들은 그사이 김대중처럼 대통령이 되거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자치단체장 등 요직을 지냈다. 그런데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 국가보안법의 존재 그 자체다. 1950년대에 함석헌이나 장준하를 감옥에 보낸 법, 1970~80년대에 ‘막걸리 보안법’의 덫에 걸린 수많은 시민들을 고문실로 보낸 법은 지금도 존재한다. 민주화의 모범 사례로 늘 거론되는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며칠 전에 대법원 제2부는 옛 통합진보당 행사에서 ‘혁명동지가’를 불렀다는 혐의 등으로 기소된 과거 당원들 3명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의 반국가단체 등 활동 찬양·동조로 유죄판결을 확정했다.(대법원 2020도2596 판결) 이 판결로 피고인 중 한명인 경기 파주시의회 민중당 소속 3선 안소희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하기도 했다. 나는 이 판결에 대한 뉴스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아예 내 눈을 의심했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막걸리 보안법’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민중가요를 불렀다고 해서 유죄판결을 받는 것은, 술김에 ‘김일성이 멋지더라’라고 하거나, 홧김에 ‘김일성보다 더한 놈’이라고 해서 죄인이 됐던 시절의 일과 뭐가 그리 다를까? 참고로, ‘혁명동지가’는 “동만주를 내달리며 시린 장벽을 넘어”로 시작되지만 김일성의 이름 석자가 직접 거론되지도 않는다. 김일성 부대를 특정한다기보다는, 만주에서 전개된 무장독립투쟁을 낭만적으로 형상화한 민중가요일 뿐이다. 이 가요를 불렀다고 해서 ‘범죄자’가 되는 것은, 김일성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 수인이 됐던 1970~80년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사법 정의의 왜곡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최우방’인 미국의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의 논리상 ‘반국가 단체의 괴수’로 간주돼야 할 김정은 위원장을 “좋은 친구”라고 공개적으로 부르고, 한국 대통령이 바로 그 ‘반국가 단체의 괴수’와 함께 백두산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는 시대다. 이 시대에 “동만주를 내달리며 시린 장벽을 넘어”를 불렀다고 해서 유죄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의 저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1970~80년대와 마찬가지로, ‘북한’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철거반원에게 홧김에 ‘김일성보다 더한 놈’이라고 외친 체제의 피해자가 ‘친북파’가 아님은, 경찰도 법원도 당연히 알았다. 보안법은, 체제의 피해자가 반발에 나서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공포의 도구에 불과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원칙상 약자, 피해자가 반발할 자유가 있어야 하지만, 극단적 착취를 기반으로 했던 체제는 그런 반발을 용인할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무소불위의 보안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은 어떤가? 이번에 불순한(?) 가요 제창으로 ‘죄인’이 된 정치인, 활동가들은 민중당 소속이다. 민중당은 조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좌파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정당이다. 민족주의 정서야 당국자들도 필요할 때에 종종 이용하지만, 민중당의 좌파적 성격이야말로 그들의 눈엔 가시다. 결국 이번과 같은 유죄판결은, 보안법을 무기 삼아 좌파의 ‘기를 죽이려는’, 사법의 가면을 쓴 정치탄압으로 봐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민선 시의회 의원이 ‘노래를 잘못 불러’ 의원직을 잃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이기도 하다. 시의원은, 법원이 아닌 시민들이 뽑는 것 아닌가?
박원순은 서울시장이 됐어도, 그의 옛 책에 나오는 ‘막걸리 보안법’보다 더한 광경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약자를 억눌러 그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이용되어온 악법은, 도대체 언제까지 한국 사회의 목을 조르고 있을까?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윤미향이 침묵하니 국회도 침묵하나?
[기고] 국회는 입법부에 걸맞은 논리와 윤리로 행동하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가 25일 두 번째 기자회견을 열어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전 정의기억연대 대표)을 거듭 비판했다. 이날 회견에서 새로운 폭로가 있었느냐 아니냐 하는 시각에서부터, 이 할머니의 언급 일부가 적절 하냐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진다. 진영논리에 의한 대응도 커지고 있는 양상이다.
이 사건의 폭발력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모은 '위안부' 문제가 사건의 본질인데, 지난 수십 년간 윤 당선인과 정의기억연대 등 시민단체가 거의 전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부각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한 식구 같았던 할머니들과 시민단체가 갈등하는 모습이 노출됨에 따라, 그 후유증과 파장도 클 전망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비판하는 당사자가 국회의원 당선자여서 정치권의 공방에 따라 시민사회도 출렁거릴 개연성이 적지 않다.
사안이 중대하고 혼란할수록 중요한 것은 원칙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위안부' 인권 운동 부분과 그 운동을 주도한 시민단체의 운영 내용을 분리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할머니도 이 점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박정희가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일본과 합의한 문건에 따라 거론하지 않기로 하면서 역사 속에 묻히는 듯했지만, 1992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 전신)가 앞장서서 부각해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억지를 부리면서 위안부 문제는 계속 표류했고, 결과적으로 당사자들인 위안부 할머니들 상당수가 그 사이 사망하거나 고령화했다.
큰 틀에서 사건을 들여다 볼 때 정의연이 일찌감치 할머니들을 운동단체 임원으로 포함시켰다면 이런 문제는 생략될 수 있었지 않느냐는 아쉬움이 크다. 다만 조직 내부 문제를 명확히 알기 어려운 입장에서 이를 속단하기도 쉽지 않다. 검찰 수사 결과가 머잖아 나올 것인 만큼, 이 할머니의 주장 내용에 대한 판단은 일단 보류해야 할 듯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윤 당선인이다. 윤 당선인은 헌법으로 보장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머슴이다. 국민에게 정치적으로 무한 봉사하는 자리다. 따라서 윤 당선인은 이 할머니의 폭로 후, 모든 것을 밝히고 사회적 평가를 받는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러나 그 점은 미흡했다. 검찰 수사 후 관련 행정부의 지휘감독 결과에 대한 공개도 미흡했다. 의혹은 꼬리를 물고 나오는데 윤 당선인은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대부분의 의혹에 침묵했다. 이런 태도는 국회의원의 자질이라는 각도에서 평가를 생략하기 어렵다.
국회는 입법기관으로 3권 분립에 의한 독자성을 갖는다. 행정, 사법과는 그 영역이 다르다. 국회는 행정과 사법과는 다른 논리와 윤리를 지녀야 한다. 지난 국회에서 여야가 검찰에 제소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것을 지금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에 대해 여당은 검찰 수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태도다. 검찰 수사가 시작된 상황이라 일견 적절한 것 같지만, 그늘이 짙다. 윤 당선인이 국민의 입법 머슴으로서 합당한지에 대한 판단은 입법 차원에서 나와야 한다. 국민은 여당에게 개헌 말고 모든 입법이 가능한 거대 정당을 만들어 주었다.
국민의 상식과 눈높이에서 정치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여당 지휘부가 입단속을 하는 것은 대단히 보기 민망한 태도다. 180석에 가까운 당선자가 나온 거대 정당다운 태도, 촛불혁명이 요구한 적폐청산과 개혁을 솔선수범할 자세로 보이지 않는다. 구태의연하다는 비판도 지나치다고 보기 어렵다.
21대 국회의 개원을 앞두고 입법부를 향한 기대와 우려가 윤 당선인 문제에 가려졌다. 입법부가 최소한 지난 수년간 보여준 매우 부적절하고 비생산적인 적폐를 청산하고 새 출발한다는 의지와 결단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여야의 모습은 내로남불이던 과거의 그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국민은 지금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정치권은 명심해야 한다.
어떤 상황이든 원칙이 중요하다. 꼼수는 오래가지 못한다. 검찰수사와 별개로 윤 당선인과 여당은 입법부의 독자적 논리와 윤리로 판단해서 행동해야 한다. 당리당략이나 발밑의 이해관계에 급급해 큰 원칙을 짓밟는 행동은 절대 안 된다.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 프레시안 2020.05.26
코로나19 사태의 다섯 가지 사회적 코드Ⅱ
지난 3월11일자 이 코너에 ‘코로나19 사태의 다섯 가지 사회적 코드’라는 칼럼을 썼다. 코로나 바이러스19가 중국 우한에서 처음 보고된 게 지난해12월31일이었으니 코로나19 사태가 시작한 지 70일쯤 지났을 때였다. 이후 유럽과 미국을 휩쓴 코로나 바이러스19가 최근 라틴아메리카를 강타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19 폭풍은 이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열고 있다. 이 사태가 일어난 지 150일을 앞둔 현재 시점에서 코로나19 사태의 선 자리와 갈 길을 다시금 숙고해 보려고 한다.
첫째, 생태학적 관점. 생태학의 시각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문명의 성찰’을 요청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예견된 비극이다. 코로나19는 자연 파괴의 진행 과정에서 동물과 인간의 접촉이 증가해 발생한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생물학자 최재천은 “예전 같으면 에피데믹(국지적 유행) 수준으로 끝났을 일을 사람이 팬데믹으로 만드는 거다”라고 일갈했다. 바이러스 전문가 네이선 울프는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는 살인자 바이러스들이 비규칙적 폭풍으로 몰아쳐 인류 생존을 위협할 것임을 경고했다. 자연과 공존하는 삶과 실천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생태학’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둘째, 정치학적 관점. 코로나19 사태 이후 많은 정치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국가의 귀환’을 알렸다. 지구화된 위험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할 주체는 역시 일사불란한 관료제에 기반한 국가였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와 확진자 동선 공개 등을 앞세운 우리 정부의 방역 정책은 국가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생히 증거한 사례다. 서구 일각에선 이런 국가의 귀환이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나의 자유 못지않게 우리의 안전을 중시하는,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조화시키는 ‘공화주의적 상상력’이 새삼 소환되고 있다.
셋째, 경제학적 관점. 경제학적 측면에서 코로나19 사태는 ‘케인스주의의 복권’을 가져오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큰 정부로의 전환이 예견됐지만, 이미 공고화된 글로벌 가치 사슬에 일국적 케인스주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팬데믹이 낳고 있는 경제 위기는 전방위적 뉴딜을 요구하고, 이에 각국 정부는 재정 확대로 경제 살리기에 분투하고 있다. 여기에 디지털 전환(DT)이 가속화하는 제4차 산업혁명과 사회 양극화를 고려할 때, 케인스주의적 국가의 강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미래지향적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구조화된 빈부 격차를 완화하는 데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작은 정부가 아니라 ‘강하고 유능한 정부’라 할 수 있다.
넷째, 사회학적 관점. 사회적 차원에서 코로나19는 ‘언택트사회의 도래’를 열었다. 온라인 학습·쇼핑·문화생활 등 정보사회의 만개가 바이러스 폭풍을 통해 예기치 않게 이뤄진 것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대면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대면과 비대면을 바탕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설정할 것인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던지는 중대한 사회적 과제다. 개인적 자율과 협력적 연대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넘나들어 결합하는 ‘연대적 개인주의의 네트워크 문화’를 일구는 것이 그 방향일 것이다.
다섯째, 국제정치학적 관점. 지구적 차원에서 코로나19 사태는 ‘탈세계화의 촉진’에 속도를 더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상호의존성의 증대로 경제적 세계화는 강화돼온 반면, 포퓰리즘의 분출로 정치적 세계화는 후퇴해 왔다. 코로나19 사태는 경제적 세계화에 제동을 걸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중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각국도생(各國圖生)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더욱 무력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글로벌화된 바이러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훼손된 ‘글로벌 거버넌스의 재구축’에 있다는 점이다.
문명의 성찰, 국가의 귀환, 케인스주의의 복권, 언택트사회의 도래, 탈세계화의 촉진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선 자리라면, 생존의 생태학, 공화주의적 상상력, 강하고 유능한 정부, 연대적 개인주의의 네트워크 문화, 글로벌 거버넌스의 재구축은 그 갈 길일 것이다. 이 화두들을 붙들고 대안을 마련하는 데는 전문가들과 집단지성의 노력 모두 중요하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 날아오른다’라고 말한 이는 철학자 헤겔이다. 비록 황혼 무렵에야 난다고 하더라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탐구와 모색을 더욱 경주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20.05.27.
군 위안부 논란, 돈 문제가 아니다
정의기억연대(이사장 이나영)와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인에 관한 기사가 폭주하는 가운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야당은 ‘혐의가 확실한’ 윤 당선인과 여당 공격에 여념이 없고, 범진보 세력은 “보수의 준동”이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그들의 대립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이다. 여당은 “마녀사냥, 윤씨는 억울한 피해자”라고 말하면서도 당혹스러워하고, 야당과 보수 언론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타깃’이 없다. 이 과정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주장은 “정대협 비판은 일본 우익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말이다. 이번 사안은 철저히 진보 진영 ‘내부’,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다.
한편 여당과 어쩌면 정의연 지도부까지도, 상황에 따라서 언제든지 이 사안을 윤 당선인 개인의 비리로 축소하여 자신들과 선을 긋고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피해자와 희생양은 다른 개념이지만, 둘 다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 동원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역할’은 같다. 여야 모두 이번 사태를 ‘개인의 돈 문제’로 국한하려는 이유다. 거듭 말하건대, 젠더 체제를 기반으로 한 한·일관계의 모순이 집약된 군 위안부 운동의 난제는, “회계 부실”이 아니다. 돈 문제는 드러나기 쉽다. 이번 사태에서 ‘돈’은 문제의 시작이 아니라 끝자락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상황을 집약한 말이, “터질 것이 터졌다”이다. 지난 월요일 이용수님의 2차 기자회견 내용대로 ‘돈’ 문제는 검찰이 맡으면 된다.
1990년대 초반, 열악했던 활동 시기를 거쳐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까지 군 위안부 운동은 피해 당사자, 여성운동가의 노력으로 수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 전시 성폭력 피해를 보편적인 인권 문제로 의제화한 모범국이었고, ‘할머니’들은 여성인권운동가로 거듭났다. 운동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것은 2015년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쌍방 간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다는, ‘불가역적 합의’ 이후부터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 제고와 더불어 전후 피해에 대한 한국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식민지 희생자인 ‘군 위안부’의 수치심과 고통을 극복하고 국가의 자존감을 찾자는 의식이 고양되었다. 일명, 젊은 보수 ‘태극기 세대’의 부대가 등장했고, 한편에서는 반일을 넘어 극일을 하자는 쿨한 신민족주의자들이 진보를 자처했다. 이러한 기류는 대중화된 군 위안부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위안부 소재 영화의 선택적 흥행, 전국적인 소녀상 건립 운동 등이 그것이다. 소녀상 건립과 지킴이 운동에는 입시 스펙을 쌓으려는 학생, 학부모도 동참했다.
군 위안부 의제는 국가적 관심사가 되었지만, 정작 정부는 이 사안을 자신의 의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한국에는 비정부기구(NGO)가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많은 NGO들은,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탄압을 받아가며 대신해왔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군 위안부 운동의 국제화, 일본 진보 세력과의 네트워크, 할머니들의 생계와 복지, 장례까지 이 문제를 도맡아온 정대협의 위상은 높아졌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문제’가 ‘남성이 다루어야 할 큰 정치’로 이동하면 돈과 사람, 자원이 모이기 시작하는 법이다. 이전에는 여성인권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각 분야의 남성 연구자들이 몰려들었고 ‘자리’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운동으로서 군 위안부 운동의 변질은 이 지면에서는 생략하겠다.
앞서 말한 대로 돈 문제는 검경이, 비리 보도는 언론이 할 일이다. 다만, 나는 정대협의 독단적 판단에 의해 전시 성폭력 피해자가 ‘훌륭한 할머니’와 ‘그렇지 않은 할머니’로 구분되어,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에게도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 분들의 생애가 가슴 아프다.
운동 초기와는 달리, ‘대중화’ 이후 군 위안부 운동은 후퇴했다. 그 결정적 장면은 윤 당선인의 선거 포스터 구호 “총선은 한·일전이다”처럼, 국가주의 프레임을 여성운동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용수님의 핵심적 문제제기라 생각한다. 이번 일이 단순 횡령 사건을 넘어, 피해자가 진영의 필요에 따라 희생양이나 ‘간판’이 되는 사회운동 방식에 대한 논쟁으로 이동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2020.05.27.
민주당은 ‘안개의 나라’를 만들 것인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발한 상상력의 산물로만 여겼다. 쓰레기봉지로 만든 방호복 말이다. 지난해 여름 재난탈출액션을 표방하며 개봉한 <엑시트>에서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심을 탈출하기 위해 주인공 조정석과 임윤아는 쓰레기봉지로 온몸을 싸맸다. 영화에서 코믹적 요소였을 ‘쓰레기봉지 방호복’이 현실에서, 그것도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코로나19에 맞서는 의료진의 동아줄이 될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미국에서는 방호복이 없어 쓰레기봉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던 간호사가 사망하기도 했다.
근대 이후 줄곧 선망의 대상이던 선진국들이 코로나19에 우왕좌왕하는 사이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 등 한국의 방역 모델을 외신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한국의 프로야구가 미국 TV에 생중계되고, 국내 기업의 진단키트가 120여개국에 수출된다는 뉴스도 나왔다.
그렇게 ‘코로나발(發) 국뽕’ 분위기가 달아오를 즈음 ‘이천 물류센터 화재’ 사고가 터졌다. 38명의 노동자가 한꺼번에 죽었다. 후진적 사고의 전형이다. 공사 기간 단축을 위해 안전수칙은 무시됐고, 값싸다는 이유로 사고에 취약한 건설자재를 사용했다. 2008년 40명이 숨진 이천 냉동창고 사고와 판박이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일용직 노동자였다.
코로나19 방역 성공에 가려졌던 한국의 민낯이 드러났다. 우리의 현실은 과거와 비교해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 사람보다는 이윤이 먼저였다. 아파트 경비원은 ‘갑질’ 피해를 호소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돈도 힘도 없는 노동자들의 죽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잊혀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김광규 시 ‘안개의 나라’ 중)
비극은 우리 가까이서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었다. 코로나19 창궐 이전에도 일자리는 줄어들고 성장동력은 약해졌다. 소득계층 간 불평등은 심해졌고, 집값은 미친 듯이 뛰었다. 코로나19는 그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가혹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임시·일용직이 많은 1분위 가구(소득 하위 20%)는 올해 1~3월 유일하게 소득이 감소한 계층이다.
고단하고 궁색한 현실이지만 민주당은 지난 4·15 총선에서 177석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시민들이 ‘극난 극복’을 앞세운 여당에 힘을 모아준 것이다. 여기에는 해외에서 호평받은 코로나19 방역 활동이 기반이 됐다. 실제로 총선을 앞두고서도 정부가 투명한 방역 활동을 뚜벅뚜벅 수행한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총선 후 민주당이 보여주는 모습은 민심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덩치가 커진 것 빼고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대동소이하다. 승리의 나팔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오거돈 부산시장은 집무실에서 직원을 성추행해 ‘사퇴당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이 불거진 게 불과 2년 전이다. 후보자를 공천할 때 ‘실거주용 1주택 보유’라는 자격 기준을 적용하기로 했지만, 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에서는 4년 만에 재산이 44억원 늘어난 비례대표 후보자의 부동산실명제 위반과 명의신탁 의혹을 검증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회계처리 부실, 힐링센터 고가 매입 등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데도 민주당은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다.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두 번씩이나 열어 문제를 제기했어도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본다는 게 공식 입장이다. 내 숙제를 남이 해주길 바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도적으로는 어떤가. 2016년 서울 ‘구의역 참사’,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사고에도 ‘2인1조 근무’는 정착되지 못했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에 이 같은 내용이 빠졌기 때문이다. 집값 안정을 위해 정부가 지난해 내놓은 ‘12·16 부동산 대책’의 핵심인 종합부동산세 강화는 여전히 입법화하지 못했다.
위에서 인용한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민주당은 시민과 여론을 경청해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미뤄졌던 과제들을 매듭짓는 정치력을 보여줘야 한다. 안개를 몰아내줄 것으로 기대한 거대여당이 벌써부터 제대로 듣지 못할까 우려되는 현실이 씁쓸하다
박재현 미디어전략실장 경향 2020.05.27.
나의 장례식
나의 장례식을 생각할 때가 있다. 남의 장례식에 다녀올 때 나의 장례식을 종종 기획하곤 한다. 고인의 삶이 보이지 않는 장례식. 고인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장례식. 마음보다 조의금을 더 나누는 장례식. 짜인 매뉴얼에 따라 형식적으로 치러지는 장례식. 뻔한 레퍼토리로 흘러가는 남의 장례식을 보면서 나만의 특별한 장례식을 상상한다.
이미 죽은 마당에 장례식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지만 그래도 다짐한다. 죽어서도 나의 장례식은 내가 책임진다고.
먼저, 나는 내가 주인공인 장례식을 원한다. 내가 없는 장례식은 싫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고, 누구와 사랑을 하고, 어떤 친구를 사귀었으며, 어떤 가치를 지향하면서 살았는지, 나의 삶이 닮긴 콘텐츠가 있는 장례식이면 좋겠다. 영상이든 사진이든 책이든 그 종류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재미와 감동이다.
나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울다가 웃는 스펙터클한 스토리가 있는 장례식. 살았을 때 심심한 걸 못 참았던 나의 성격처럼 하품 나지 않는 장례식이길 바란다.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에 나와의 추억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뭉글뭉글 피어난다면 죽어서도 기쁘겠다.
나의 마지막을 친한 사람들만 배웅하길 바란다. 한두 번 인사한 사이, 오직 일로만 만난 사이, 속으로 욕하는 사이,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조의금 품앗이를 위해 찾아오는 조문객은 반갑지 않다. 내가 죽은 뒤 적어도 나를 다섯 번 이상은 그리워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그런 친구들만 나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면 좋겠다.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한평생 까칠하게 살다 죽은 김봉임 인생을 논하며 자기 인생을 겸허히 돌아보는 자리가 된다면 죽어서도 얼마나 보람이 되겠는가.
나의 장례식은 음식도 중요하다. 평소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먹는 것에 집착한 나의 인생이기에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나오는 요즘 장례식장 음식들, 특히 마른 멸치볶음보다 더 마른 무말랭이보다 더 마른안주는 사양한다. 나의 장례식 음식은 절친들과 자주 가는 단골집 음식이면 좋겠다. 창원 '우정아구찜'도 좋고, '제일식당' 된장찌개도 좋겠다. 내 친구들이자 나의 조문객들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인간들의 특징상 음식의 퀄리티는 나의 장례식을 평가하는 데 가장 큰 기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맛있는 김봉임 장례식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
장례식장의 장소도 그늘진 지하가 아닌 햇볕이 잘 드는 야외면 좋겠다. 만약 내가 주택에서 살다 죽는다면 집 앞마당을 추천하고, 아파트에서 죽는다면 시신은 영안실에 두고, 장례식은 정원이 있는 커피숍 같은 곳에서 하길 바란다. 이미 내가 없는 세상에 나에게 절을 하는 조문 절차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 하나 마나 한 형식은 생략하고, 분위기 밝은 곳에서 우중충하지 않은 장례식이면 만족하겠다.
김봉임 묘비명 공모전. 내 장례식의 가장 특별한 이벤트다. 묘비명이야말로 나의 생을 압축해서 표현해주는 말이 아니겠는가.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심플하지만 진솔한 묘비명이면 좋겠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선망해 온 나이기에 익살스러운 묘비명에 점수를 높이 쳐줄 가능성이 높다.
친구들이 말하는 김봉임 묘비명 공모전! 일등으로 뽑힌 자에게 조의금의 절반을 떼어줄 용의가 있다. 그러니, 친구들이여! 기대하고 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시라
김봉임 종합홍보기획 ㈜브레인 이사 경남도민일보 2020년 05월 27
헛다리 짚는 CIA의 평양 분석
30여 년간 미국 중앙정보부(CIA) 공작관으로 일했던 도널드 그레그는 조지 부시 시니어(아버지 부시)의 부통령 시절 안보보좌관과 주한 미국 대사를 역임한 한반도 문제의 베테랑이다. 그는 미국 정부의 만성적인 대북정책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 ‘정보 실패’를 꼽았다. 북한을 악마화하고 붕괴론에 집착하는 CIA 분석관들의 고정관념과 집단사고(group thinking)가 정보 실패를 반복하는 배경이라는 개탄이다.
최근 워싱턴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 가운데는 CIA 분석관 출신들이 두각을 보인다.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수미 테리, 브루킹스연구소의 정 박, 랜드연구소의 수 킴 등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 정 박은 최근 〈김정은 되기-불가사의한 북한 젊은 독재자에 대한 CIA 분석관의 성찰〉이라는 책을 내어 주목을 받고 있다.
북한 배제한 5자 협의체에 중국·러시아 동참 안 해
그의 북한 분석은 두 가지 가정에 기초한다. 하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체제 생존이라는 국내 정치적 이유 때문에 “평화보다는 갈등, 통합보다는 자급자족, 비핵화보다는 핵무기 보유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라는 가정이다. 다른 하나는 김정은 위원장의 핵무기 야망이 미국에 대한 핵억지력 구축이 아니라, 핵무기와 ICBM 보유를 통해 미국을 한반도로부터 떠나게(decoupling) 하고 한국 내에서 남남 갈등을 조장해 ‘남조선 적화통일’ 달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가정이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방어적이 아니라 공세적인 결정이고, 김 위원장이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정에 기초해 정 박은 정책 대안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한·미·일 3국 동맹 체제를 강화하고 북한에 대한 비밀공작과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확대하는 공세적 외교안보 정책을 전개하는 동시에 중국의 훼방을 최소화한다. 둘째, ‘최대한의 압박’ 전략을 통해 대북 제재를 고도화함으로써 김정은 위원장 통치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킨다. 셋째, 미·중·러·한·일 5개국 협의체를 구축함으로써 평양이 선(先)비핵화 조치를 단행할 경우의 유인책을 공동 제안하는 한편 불응할 경우 국제적 고립을 입체화한다. 넷째, 미국의 대북 인권대사를 재임명하고 탈북자는 물론 북한 내부의 군부 인사, 과학자, 기술자 등과 연대를 구축해 김정은 위원장의 국내 정치 비용을 높인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의 정보를 북한 내부에 확산시킨다.
이러한 접근법은 가정의 설정에서부터 한계가 있다. 조선노동당의 규약 서문이 통일전선전술을 당의 기본노선으로 유지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냉전 붕괴 이후 북한 지도층은 적화통일의 야망보다는 흡수통일 가능성에 더 큰 우려를 보여왔다. 표피적인 선전선동 수사를 넘어 북한 지도부의 의도를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정보분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2018년 판문점과 평양에서 전쟁보다 평화를, 경제적 고립보다는 발전을, 조건만 맞는다면 비핵화를 단행할 용의가 있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언술이 선전용 수사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북한은 수령 체제 아닌가.
정 박의 정책 제안 역시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한국은 물론 중국·러시아 정부가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정치공작이나 압박정책에 동조할 가능성은 극히 저조하다. 특히 5자 협의체는 10여 년 전 이명박 정부가 공격적으로 추진했지만 처참하게 실패로 끝나지 않았는가. 북한을 배제한 5자 협의체에 중국·러시아가 참여할 리 만무하다. 그의 제안에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은 북한 내부 주요 인사들을 공작적 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북한과 외부 세계의 접촉이 지금처럼 극도로 제한적인 상황에서 그러한 공작적 접근이 가능할까.
가벼운 비평과 고정관념에 충실한 글들이 미국의 독자들에게는 더 쉽게 읽힐지도 모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담론이 ‘CIA 출신’과 ‘정보분석’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당한 정책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앞으로도 계속 혼돈 속을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시사인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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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채식
손님이 주문한 탕수육 배달을 위해 가게에 들렀다. 사장님은 홀 손님과 밀린 주문으로 정신이 없었다. 바쁜 배달기사를 붙잡아두는 게 미안했던지 사장님은 튀기고 있던 탕수육 한 조각을 빼서 달콤한 소스를 쓱쓱 묻히고는 내 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따뜻한 참사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라이더를 챙기는 아름다운 마음,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결심, 뱉었을 때의 어색한 상황 등 복잡한 감정과 생각이 뒤섞였다.
지난해 가을, 살처분 영상을 본 게 화근이었다. 산 채로 포클레인에 들려 구덩이로 던져지는 돼지들과 살기 위해 흙을 파고 올라온 돼지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즈음 동물해방운동단체 DxE(Direct Action Everywhere) 코리아를 알았다. DxE에 따르면, 돼지들은 서로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꼬리가 잘리고 이빨이 뽑힌다. 인간들이 싫어하는 잡내를 없애기 위해 마취도 없이 거세당한다. 돼지와 닭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사육장에 갇힌 채 자라서 수개월 만에 도살당한다. 수컷 병아리는 그 짧은 삶도 살지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온몸이 찢긴다.
공장식 축산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학살을 보니, 내가 사는 세상이 달리 보였다. 삼겹살이 아니라 돼지의 살점이, 쇠고기가 아니라 소의 몸과 창자가 부위별로 찢겨 도시의 구석구석에 걸려 있었다. 채식은 자신이 없었고, 눈에 보이는 고기라도 먹지 말자는 결심을 했다. 어설프고 위선적인 채식이라도 막상 실천하려니 쉽지 않았다.
김밥집에 가서 햄을 빼달라고 하면, 보란 듯이 햄이 나온다. 게임을 하듯 햄을 일일이 빼내는데 어른들이 보기라도 하면 깨작깨작 먹는다고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하다. 단체 회식은 보통 고깃집으로 가는데, 나 하나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기 힘들다. 고기 없는 식당을 찾기도 어렵다. 마침 연장자와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몸에 밴 습관처럼 고깃덩이를 굽다가 현타가 와서 집게를 놓고 말았다. 버릇없어 보이더라도 사장님을 불러 공깃밥과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된장찌개를 시켜 홀로 먹었다. 모든 순간이 투쟁과 불편함의 연속이다.
과거에 개인적 실천은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고 비난한 적이 있다. 뭐라도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응원은 못할망정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 취급을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렇다고 내가 환경을 위해 열심히 싸운 것도 아닌데, 지구가 들었다면 혀를 끌끌 찼을 것 같다. 막상 해보니 데모보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게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변화도 있다. 자주 가는 식당 사장님은 쇠고깃국을 먹지 않자 따로 된장국을 끓여주셨다. 40~50대 남성들이 주축인 조합원들은 위원장이 고기를 먹지 않자 백반집과 해산물집을 찾는다. 위계에 따른 갑질인지 모르겠으나, 기분 좋은 변화다.
동물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20대 청년노동자가 분쇄기에 몸이 빨려 들어가 사망했다. 휴대폰을 만들다 시력을 잃은 청년이 있는가 하면, 배를 만들다, 아파트를 짓다, 배달하다 매일같이 사람이 죽는다.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우리가 이용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보인다면 우리는 맨 정신으로 소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삼겹살집 간판에 웃음 짓는 돼지가 있듯, 산재 기업의 광고에 웃음 짓는 연예인이 있다.
DxE는 돼지 한 마리를 구조하고 새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근 새벽이가 즐겁게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진흙에서 행복하게 뒹구는 새벽이를 보면서 족발을 떠올리긴 힘들다.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인 동물을 구조해, 그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을 ‘생추어리’라 한다. 생추어리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공장과 일터에서 동물과 사람이 죽고 감염병에 걸리는 이유는 같다. 우리 사회 곳곳에 생추어리가 건설될 수 있도록 불편함의 연대, 비용의 연대가 필요하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경향 2020.05.28.
인간임을 위한 행진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행진곡이다. 역사를 전진하게 하고 그 자신도 거듭나는 노래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서 공개된 정재일 편곡 버전을, 훗날 고전이 될 작품의 초연 현장에 있는 기분으로 들었다. 원곡의 멜로디를 장조로 바꿔 부른 에필로그 파트에서 정훈희의 목소리로 박창학의 가사가 노래될 때는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탁월한 예술가들 덕분에 새삼 이 노래에 대해 생각했다. 한자어 ‘존재’가 ‘있는 자’이면서 ‘있음’ 자체이기도 하듯이, 우리말 ‘임’도 ‘있는 자’로서의 ‘당신’을 뜻하면서 ‘~이다’의 명사형인 ‘임(있음)’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당신’을 위한 것이자 ‘있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리라. ‘어떻게 있을(살) 것인가’에 관한 노래라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노래는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1982년 2월20일)을 기리기 위해 그로부터 몇 달 후 제작된 노래극 <넋풀이>의 마지막 곡이다. 함께 이승을 떠나는 두 영혼이 산 자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의 ‘가나니’가 구전 과정에서 ‘나가니’로 바뀌었다. 한 논문이 지적한 대로 이 변화는 “노래의 주체 변화”를 가져왔다(정근식, ‘임을 위한 행진곡-1980년대 비판적 감성의 대전환’). 이제 이 곡은 ‘가는 자’를 보내며 투쟁의 길로 ‘나가는 자’의 노래,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이들에게 “산 자여 따르라”라고 호소하는 노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세 개의 ‘임(있음)’의 형식이 여기에 담겼다. 가는 자(죽는 자), 나가는 자(싸우는 자), 산 자(따르는 자).
첫째, 가는 자의 삶의 형식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다. 사랑이 사적 영역에서 추구될 만한 행복이라면, 명예는 공적 영역에서의 성공일 것이다. 둘 다 포기했으면 됐지, (명예에 이미 포함돼 있는) 이름은 왜 또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의 완전한 말소까지 각오하겠다는 뜻이었겠으나 이 구절은 훗날 기괴한 방식으로 실현된 예언이기도 했다. 5월의 현장에 있었던 평범한 시민들이 2015년 이후 제 이름 대신 북한군을 가리키는 보통명사 ‘광수’라고 불리는 일도 생겼으니까 말이다. 다른 층위의 사례지만, 1980년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목숨을 걸고 마지막 마이크를 잡았던 박영순씨도 명예는커녕 오해와 낙인을 피하기 위해 본명을 감춘 채 살아온 터다.
둘째, 나가는 자의 삶의 형식은 두 구절에 분산돼 있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나부끼는 깃발 앞은 죽음의 앞이고 내 죽음의 가능성도 지척에 있다. ‘흔들리지 말자’고 말해야만 했던 것은 모두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산천은 역사의 준엄함이고, 역사는 사실의 두려움이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지는 질문이자 압력이 된다. 이때의 깨어남이란 그 질문과 압력을 외면할 수 없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요컨대 저 두 구절에서 나가는(싸우는) 자의 주체성은 흔들림과 깨어남의 반복이다. 수시로 흔들리면서도 매번 깨어나야 하는 삶, 그것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있다.
셋째, 산 자의 삶의 형식은 마지막 구절이 알려준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는 ‘따르는’ 자다. 지난 4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자극한 구절이고, 따라 부를 때마다 ‘싸우는 자’를 ‘따르는 자’라도 되자고 자신을 다그쳐야만 했으리라. 40년이 지난 이제 ‘산 자’들이 따라야 할 것은 새삼 진실이다. 40년 전 광주의 진실과 그 가치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있다. 아는 자는 기억함으로써 살리는 자가 되고, 모르는 자는 왜곡함으로써 죽이는 자가 된다. 광주를 죽이는 자들이 괴물(사이코패스)인지 환자(망상증)인지 나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의 창궐을 막아내는 것이 산 자들의 책무라는 것이다.
5월 광주에서의 자신을 증언하는 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누구라도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자신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말. 제 허물을 용서하기 위해 인간 전체를 용서해버리는 사람도 많은데, 그분들은 자신이 도달한 숭고함을 인간성 그 자체에 헌정하고 있었다. 많은 학자들의 말대로 ‘오월 공동체’는 개별성에서 연대성으로 도약하는 인간성의 한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죽고 싸우고 따르는, 그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지고한 경지 하나를 재현하는 노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인간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를 우리의 국가(國歌)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과분해서다. 이 노래가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격이 없어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경향 2020.05.28.
한명숙 사건’이 재조명돼야 할 이유
“검사를 만나면 그는 언제, 어떻게 당신의 유죄를 입증할지 얘기하지 않아. 어떻게 당신을 죽일지 얘기하지. 그는 당신이 결백한지 아닌지엔 관심도 없어. 당신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 악몽 같은 일이야. 당신은 깨어나고 싶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어.”(미국 다큐멘터리 <가늘고 푸른 선>의 주인공 랜들 애덤스, 그는 이 다큐를 통해 살인 누명을 벗고 12년 만에 풀려났다.)
“내가 무서워서 10만불 주었다고 했는데, 사실은 사실이 아닙니다. … 검사님이 눈을 부릅뜨니까… 무서우니까… 나도 모르게 이야기했어요. … 검사님이 안 되면 없어도 탁 죄를 만들잖아요. … 식구들이 와서 ‘이러다가는 죽게 생겼으니까 다 불어라’고 했습니다. 저도 몸이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고.”(한명숙 전 총리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의 법정 진술)
어느 나라에서건 어떤 혐의로 조사를 받건 검사는 힘있고 두려운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그 힘과 두려움이 진실을 뒤집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고문과 조작이 지배하던 전근대적 형사사법체제를 버린 이유다. 그래도 여전히 막강한 힘에는 남용의 유혹이 따르기 마련이다.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을 재조명할 지점은 이곳이다. 한 전 총리가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1차 사건’(뇌물)에서는 곽영욱 전 사장에 대한 강압 수사가 판결문에 드러나 있다. 이번엔 <뉴스타파>가 ‘2차 사건’(정치자금)에서도 강압·조작 수사가 있었다는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의 비망록 등을 공개했다. 허위 진술조서를 써 외우게 한 게 사실이라면 심각한 범죄다.
과정이야 어떻든 유죄만 받아내면 된다는 식의 수사 행태는 심심찮게 되풀이돼왔다. 논란이 일면 불법과 싸운다는 명분으로 돌파한다. 이런 수사는 대개 검사의 공명심이든 정권이나 검찰 조직의 이해관계든 부적절한 의도가 끼어들었다는 의심을 받는다. 한 전 총리 사건도 그랬다. 검찰은 1차 사건에서 곽 전 사장의 진술 번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무죄 선고가 나기 바로 전날 2차 사건 수사에 돌입했다. 두달 뒤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 전 총리는 0.6%포인트 차이로 낙선했다. 표적 수사, 오기 수사, 선거개입 수사…. 온갖 오명을 붙여도 할 말 없는 수사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검찰에 불신이 쌓이고 이는 수사·재판 결과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검사는 형사사법체제 그 자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배적인 권한과 재량권을 갖지만, 남용을 통제할 장치는 허술한 데 원인이 있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면서도 그 성격상 독립성을 부여받는다. 이런 경우 민주적 정당성과 책임성을 확보할 방안이 반드시 필요하다. 검찰권 행사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외부의 감시·견제를 강화하는 게 그것이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증거 왜곡, 과잉 기소, 선택적 기소 등 검사의 독단이 낳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지방검사장을 선거로 뽑고, 기소 여부를 시민들(대배심)이 결정하는 등 민주적 정당성을 받쳐주는 제도가 있는데도, 추가적인 감시·견제 장치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는 배경이다. 캘리포니아주는 2016년 검사가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숨기거나 증거를 왜곡하는 행위를 중범죄에 포함시켰다. 뉴욕주는 검사의 비윤리적 불법적 행위를 신고받아 조사하는 독립기구를 추진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검찰청과 중대범죄수사청(검찰과 별도의 수사·기소 기관)을 감시·감독하는 검찰감찰청을 따로 두고 있다. 일상적으로 사건 처리의 적절성, 피해자·증인들의 평가, 인권 침해 등을 조사하고 그 결과와 권고사항을 공표한다. 여기에 더해 독립적인 민원심사관을 둬 접수된 불만 사항을 조사한다. 겹겹의 장치를 두는 이유는 “시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리는 검찰권 분산·견제를 위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만든다. 의미있는 첫발이다. 그러나 기소권의 대부분과 상당한 직접수사권을 유지하는 검찰을 촘촘히 감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공수처 역시 감시의 대상이다. 시민 참여를 통한 민주적 정당성 확보 제도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공포와 독단이 지배하지 않는 형사사법체제를 완성하려면 할 일이 아직 많다./박용현 l 논설위원 한겨레 2020.05.28.
저층민과 지하층민의 정당
멸시당하거나 위험하거나 고단한 노동은 늘 우리 주위에 있다. 입주민의 폭언과 폭행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아파트 경비원, 컨베이어 벨트에 머리가 끼여 사망한 삼표시멘트 노동자,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돌연사한 광주의 택배 노동자. 이런 노동은 늘 있지만, 이 노동자들이 처한 곤경은 또 늘 무시된다. 화장실 변기 바로 위 선반에 전자레인지와 주전자를 두는 노동환경은 우리의 추모식 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100층짜리 집이라고 가정하자. 각 층에 인구의 1%를 거주시키되 1층에 가장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을, 층이 높아질수록 소득수준이 높아지는 식으로 거주시킨다. 90층 최고 소득자의 소득을 50층 최고 소득자의 소득으로 나눈 값은 부유한 사람이 얼마나 부유한가를, 50층 최고 소득자의 소득을 10층 최고 소득자의 소득으로 나눈 값은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가난한가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를 대상으로 이 두 개의 지표를 계산하면 한국은, 전자는 8위이고 후자는 1위이다. 즉 한국은 OECD 국가 중 부자에게 경제력이 집중된 정도도 높은 편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정도는 가장 심하다.
부유한 사람이 매우 부유할 때, 정의 문제가 발생한다. 저 사람이 나보다 특별히 더 잘난 것도 없는데 왜 저렇게 부유한가를 우리는 문제 삼게 된다. 가난한 사람이 매우 가난할 때 인권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은 멸시와 위험과 고단함이 지나친 반인권적 노동을 거부할 수 없게 한다. 정의보다는 인권, 또는 기본권이 더 절실한 문제이다.
사람에게 기본권이 절실한 것은 사람이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기본권이 필요하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다른 동물도 기본권이 필요하다. 지금 농장 또는 실험실에 2억마리의 동물이 있다. 가난한 사람이 지상 저층민이라면 그 고통의 정도에 의해 이들은 지하층민이다. 이들의 고통이 당연하지 않음을 ‘새벽이(동물권단체가 구조한 아기 돼지)’가 보여준다. 지하층민에게도 기본권은 절실한 문제이다.
동물보호 활동이나 동물해방 운동을 두고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동물이 중요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3월 OECD가 발표한 구매력평가(PPP) 기준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만1001달러(2017년 기준, 약 4890만원)를 기록했다. 중위소득 60% 이하 소득자를 빈곤계층으로 본다면 한국 국민의 77%는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다. 저층민이 먹고살기 힘든 것은 지하층민을 돕기 때문이 아니라 77%의 사람이 저층과 지하층에 있는 존재의 고통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저층민과 지하층민은 정치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사회구조와 충돌하는 일이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복음).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가 65%나 되는 상황에서 충돌과 분열을 일으킬 정부·여당은 없다. 그렇다면 저층민과 지하층민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반영되어야 할까? 저층민을 반영하고자 하는 정당은 있다. 지하층민을 반영하고자 하는 정당은 곧 나타날 듯하다. 두 정당은 각각 인권과 동물권이라는 기본권을 정말로 실현하고자 한다. 이들의 헌신을 토대로 정의와 녹색을 비롯한 다양한 진보적 정치관을 가진 세력이 힘을 얹는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정치에서 이 길이 유일한지, 최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볼 만한 길이다/ 김영환 동물법비교연구회 연구원 경향 2020.05.29
포스트 코로나’ 뭣이 중헌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 혼란이 줄어들면서 ‘포스트 코로나’ 담론이 활발하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 제발 그러길 빈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는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의 연장선에서 사람들이 타인과 친밀한 접촉을 꺼리고 (카톡이나 페이스북 같은) 비대면 접속 위주로 살 것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온라인 세계와 ‘언택트’가 우리 삶을 점점 많이 지배할 것이라 한다. 눈치 빠른 이들은 비대면, 간접 소통, 온라인 강의, 재택근무 관련 주식 투자의 호기라 한다. 이미 그런 분야의 자본이 호황세다. 또 일부는 그간 한국(인)이 ‘헬조선’의 오명 속에 사회적 자존감이 바닥이었지만, 이번 ‘K-방역’에서 보여준 시민의 성숙함이나 민주 정부의 신속·적절한 대응이 세계적 칭송을 받았다며 자랑스러워한다. 다른 편에선 이제 세계화나 도시화, 미국화와 시장화 시대가 저물고 지역화나 공동체, 자급화가 부각됨을 지적한다. 동시에, 공공성이 강한 병원을 민영화하는 등 그간 신자유주의 정부가 해온 일들이 사람 목숨조차 구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이제라도 온갖 안전망 구축이 절실하다 한다.
생각건대, 코로나 사태가 (비록 인식에서만이라도) 시대적 분기점이 된 건 ‘죽음 공포’ 덕이다. 그간 지구온난화니 멸종위기니 하는 절박한 경고가 나와도 온 세상은 무감각했다. 집단 불감증! 하지만 이번 코로나19는 바로 눈앞에서 이웃이 죽고, 확산 속도까지 빨라 대부분 죽음 공포를 느꼈다. ‘포스트 코로나’ 담론들 역시 대체로 이 죽음 공포와 연결된다. 즉, 개인적 생존을 위한 마스크, 물리적 거리, 비대면 접촉, IT 기술의 유용성은 물론 사회적 생존을 위한 공공의료 확충, 재난지원금, 기본소득 등 사회안전망도 중시된다.
그러나 이런 대처 역시 죽음 공포에의 반사적 대응일 뿐, 그 원인 제거는 아니다. 참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해 근본(뿌리)을 봐야 한다. 그간의 근본 논의는 크게 세 갈래다.
첫째, 개발에 의한 서식지 파괴. 이미 알려진바, 자본은 이윤을 위해 대규모 농장·축산·광산·삼림·아파트·공장 등을 개발, 부단히 자연 생태계와 야생동물 서식지를 파괴해왔다. 터전을 잃은 야생동물, 그를 숙주로 삼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다가온다. 마침내 인간도 감염된다.
둘째, 야생동물 상품화다.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식용, 약용, 군사용, 실험용 등으로 오·남용하면서 그 생명권을 경시했다. 실험실 실수로 바이러스가 유출되기도 한다. 또 못 먹는 게 없다는 중국뿐 아니라, 아프리카 나이로비 등 세계 곳곳엔 야생동물 고급(?) 음식점이 있다. 동서양 부자들에겐 필수 관광코스다. 이 역시 동물 속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는 또 다른 경로다.
셋째, 지구온난화다. 지난 100년 이상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의 자본운동은 대량의 온실가스를 유발하고 성층권 오존층을 파괴했으며 마침내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를 초래, 한편에선 홍수와 광풍, 다른 편에선 가뭄, 폭염, 산불 등 재앙을 부른다.
동물의 서식지도, 바이러스도 변종된다. 또 빙하나 동토층이 녹아 얼어있던 바이러스가 살아난다. 바다엔 미세플라스틱과 중금속 물질이 쌓였고, 이는 생선 등 해산물을 거쳐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핵무기나 핵발전소는 더 무섭다. 결국, 우리는 ‘집단자살체제’를 스스로 만든 셈인데, 코로나19는 그 한 징후일 뿐이다.
이 ‘집단자살체제’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자본이 주범이지만, (자본이 제공한 노동·화폐·상품으로 먹고사는) 우리 역시 공범이다. 따라서 이는 부패한 독재정권을 민주정권으로 바꾼다고 될 문제는 아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오듯, 40년 전 5월의 광주학살은 단순한 신군부의 권력욕망이 아니라, 자본이 군부를 매개로 사회를 순치하는 과정이었다. 1997년 말 ‘IMF 체제’ 역시 그 연장(군부 대신 민주)이었다. 따라서 자본 주도의 집단자살체제를 그대로 둔 채 정부가 기본소득이나 재난지원금으로 시장을 활성화한다고 돌파구가 열릴 리 없다.
오히려 이 ‘불편한 진실’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과 생명 가치가 존중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설익은 희망을 논하기보다 우리가 집단자살체제를 주도해온 자본에 협력·적응함으로써 (임금, 이자, 배당, 지대, 보상, 연금 등 떡고물을 받으며) 동조한 공범 행위에 대해 고해성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친구야, 진짜 문제는 용감하게 마음을 여는 것이야! 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ksd@korea.ac.kr 경향 2020.05.30.
법원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뮌헨의 한 지방법원 법정 앞. 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다. 그는 며칠 전 법원으로부터 자신을 상대로 제기된 민사재판에 참석할 것을 통지받았다. 통지받은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그는 법정 정리에게 자신이 도착하였음을 알리고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법정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가득하였기에 법정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의 사건이 시작되면 당연히 자신을 부르리라 생각했다. 기다림이 두 시간을 훌쩍 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법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이 불출석 처리되었고, 그로 인해 재판이 패소로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주머니는 상소했다. 대법원조차도 1심 법원 판단이 정당하다고 했다. 법정에서 피고를 불렀으므로 불출석 처리를 한 것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1976년 겨울, 헌법재판소가 판단했다. “이는 헌법과 기본권을 명백하게 침해하는 재판이다. 그가 법정 안에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패소 판결하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관료주의적 사법판단이다. 재판을 시작할 때 당사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단지 재판 진행을 위한 절차만이 아니다. 당사자에게 자신의 권리행사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법원이 편의를 위하여 십여 건의 사건을 묶어 하나의 절차에서 재판하는 경우라면 더욱이 법정 밖에 찾아가서 부르고 구내 스피커라도 활용해야 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였다. 법원의 이런 형식적 판단은 스스로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인지를 잊은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변호사를 고용하지 못했지만 성실하게 법원에 출석한 당사자라면 단지 법원의 재판 진행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소 판단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평등 침해, 정의의 원칙 위반인 것이 사법을 운영하는 법관들의 눈에는 소송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다. 이것은 1976년 독일의 법원에서만 발생하는 문제일까?
우리 사법권력은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사법의 편의주의, 권위주의 시대의 판례가 민주공화국의 최고법인 헌법과 기본권을 압도한다. 전관예우라는 부끄러운 폐습, 판결문의 비공개, 법원행정의 관료주의는 이제 전통이 되었다. 권력은 견제받아야 부패하지 않는다. 사법권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법부의 견제는 자칫 사법의 독립을 해칠 수 있다. 사법의 독립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독일에서는 그 역할을 헌법재판소에 맡기고 있다. 헌법과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원의 재판을 헌법재판소가 취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법의 독립과 사법권력의 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균형 잡힌 권력통제장치가 되었다. 우리 사법부는 이 제도를 단연코 거부한다. 대법원의 위상을 헌법재판소 아래에 굴종시키는 제도라는 이유에서다. 시민들은 사법부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법은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법원의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은 어느 기관을 억누르거나 우월하게 만들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사법권을 다시 국민의 품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김진한 헌법전문가·독일 에어랑엔대 방문학자 경향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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