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경향 -5.8 내일
5.10 민중의 소리 -5.11 국민
5.11 내일-민중
5.11 시사인-한겨레
5.12 경향 -국민
5.12 내일-민중
5.12 한겨레-5.13 경향
5.13 국민-내일
5.13 미니어오늘 -민중
513 시사저널-한겨레
513 한국-5.14 경향
5.14 국민-내일
5.14 민중-한겨레
5.15 경향-국민
5.15 내일 -한겨레
6.11~5.15 경향 장도리
"북한 '잠수함 미사일'은 조작, 실제 바지선 발사" 513 프레시안
누리꾼들 "북한 발표만 믿고 호들갑 떤 보수언론들이 종북"
북한이 지난 8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을 시험 발사하는데 성공했다는 발표 이후 국내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사설을 동원해 "더 이상 우리에게 방어대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대 사태"로 규정하고 나섰다.
하지만 점점 북한이 성공했다는 실험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 나온 호들갑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프랑스 AFP 통신이 12일 미국 국방부 관료들을 인용해 "북한이 발사했다는 미사일은 탄도미사일이 아니다"고 보도한 데 이어, 이번에는 저명한 군사전문가들이 실명으로 "잠수함에서 발사한 것이 아니라 바지선에서 발사한 실험"이라는 분석을 내놓아 충격을 주고 있다.
북한 군사체계에 대해 정통한 전문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조지프 버뮤데즈는 12일(현지시간) 북한 전문 웹사이트인 '38노스' 주최로 열린 콘퍼런스 콜(화상회견)에서 "북한 언론이 공개한 사진자료는 포토샵으로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사진에는 연기만 있고 불꽃은 보이지 않는데, 수면에는 '밝고 붉은 그림자'가 비쳐있다는 것이 이런 판단의 근거다.
"바지선에서 발사된 게 틀림없다"
심지어 버뮤데즈는 "북한 언론은 이 미사일이 잠수함에서 발사했다고 발표했는데, 사실인지 상당히 의심스럽다"면서 "이번 발사실험은 바지선에서 이뤄진 것이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일 민간 위성업체인 디지털 글로브가 미사일 발사 실험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 신포 남부 조선소 부두 전경을 촬영한 위성사진을 판독해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위성사진에 따르면 부두에 정박된 잠수함 바로 옆에 가로 10m×세로 22m 크기의 바지선이 계류돼 있다. 잠수함 꼭대기에는 탄도탄 발사에 쓰이는 높이 9.4m, 넓이 1.7m의 수직발사관이 관찰됐지만 실제로 발사실험에 쓰이지 않았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버뮤데즈는 "북한이 지난해 10월에 잠수함을 진수시켰는데, 불과 6~7개월 만에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쏘는 실험을 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북한의 현재 기술 수준으로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실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버뮤데즈는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미사일을 개발하려면, 우선 지상에서 시험 발사를 하고, 바지선이나 물에 잠기는 컨테이너에서 해보고 나서야 잠수함에서 발사해보는 과정을 거친다"면서 "북한은 조작, 은폐, 기만 작전을 반복적으로 수행해왔다"고 말했다.
다만 버뮤데즈는 "북한이 잠수함 능력이 극적으로 증강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관련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38노스의 조엘 위트 소장도 "북한이 외국의 지원을 받아 총력을 기울여도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배치하려면 5년은 걸릴 것"이라면서 "그렇게 해도 미국에 위협이 되기 보다는 지역적 위협이 되는 정도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의 잠수함 탄도미사일 발사가 과장된 것으로 분석한 외신 보도들이 잇따르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덮어놓고 북한의 발표를 믿고 호들갑을 떠는 보수언론들이 종북이 아니냐"거나,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며 안보장사를 하는 보수언론과 정치권이 지겹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조중동, 언제는 그토록 '사드 타령' 하더니… 5.12 프레시안
[정욱식 칼럼] 북한의 SLBM, 호들갑과 경각심 사이에서
한마디로 호들갑이다. 북한의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사출시험에 대한 보수 언론의 반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선>은 11일자 사설에서 "악몽(惡夢)이 현실로 닥쳤다"며 북한이 SLBM을 전력화하면 "킬체인, 한국형미사일방어체제(KAMD), 사드 모두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다가는 어느 순간 이 나라, 이 민족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위기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는 종말론적 예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같은 날 <중앙>도 사설에서 "(북한이) SLBM 보유국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면 북한에 대한 선제적 핵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며 이를 두고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라고 명명했다. 특히 "KAMD와 킬체인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며 새로운 대응책의 "출발점은 한·미·일의 긴밀한 정보 공유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아> 역시 "북한이 SLBM을 실전 배치하면 하늘과 땅은 물론이고 바다에서도 한국이 핵 공격 위협을 받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안으로 "원자력 잠수함 개발에 착수","이지스 구축함을 늘려 동·서·남해에 상시 배치", "소나(음파탐지기) 성능이 우수한 차기 해상초계기를 도입해 대잠(對潛) 조기경보체제를 강화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그토록 사드 타령하던 조중동이
이들 언론 논조의 공통점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의 SLBM 전력화 시기를 1~2년 내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이 SLBM을 전력화하면 한국에겐 '존재론적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킬체인과 사드를 비롯한 MD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상당수 전문가들과 관료들은 북한이 SLBM 전력화를 시도하더라도 5년 안팎은 족히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SLBM를 발사할 수 있는 플랫폼, 즉 3000톤 급 이상의 잠수함 확보인데, 북한이 이 정도 규모의 잠수함 건조에 착수했다는 정보는 아직 없는 상태이다.
실소를 자아내는 부분은 킬체인과 사드를 비롯한 MD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개탄한 점이다. 조중동은 킬체인과 MD의 비효율성과 위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일축하면서 조속한 전력화를 촉구해온 대표적인 매체들이다. 특히 사드가 없으면 대한민국 안보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일체의 반성도 없이 이들 무기는 무용지물이 될 터이니 다른 대안을 내놓으라고 다그치고 있다.
대안이 될 수 없는 대안들
<조선>은 "한·미의 무기력·무대책이 지금껏 북의 핵·미사일 위협을 키워왔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뭐가 무기력하고 대책이 없었다는 것인지는 일체 언급이 없다. 제2의 한국전쟁을 각오하고서라도 북핵을 선제공격했어야 했다는 말인지, 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핵 해결에 나섰어야 했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중앙>과 <동아>의 대안은 더욱 한숨짓게 한다. <중앙>은 한미일의 긴밀한 정보 공유를 강조했다. 그런데 이를 가장 반색할 나라는 일본이 될 것이다. 북한 잠수함 감시를 이유로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 인근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은 북한의 SLBM 동향도 작년에 체결된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 약정의 대상이라며, 일본 자위대의 작전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요구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동아>는 원자력 잠수함 건조, 이지스함 및 해상 초계기 증강 등 대규모의 해상 전력 강화를 주문했다. 이런 전력을 구비하는 데에는 엄청난 돈과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다. 남한이 이런 전력을 갖추더라도 북한은 조중동의 표현처럼 이들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방사포나 단거리 미사일에 소형 핵탄두를 장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동아>는 아마도 해상 전력이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이스라엘의 아이언 돔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경각심은 어디를 향해야 하나?
물론 앞선 글에서 다룬 것처럼 북한의 SLBM 보유 시도는 경각심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한미일 삼각동맹과 대규모의 군비증강으로 대응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자해적이라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일단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한반도의 안보 환경에서 북한의 SLBM은 결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둘 수 있다. 하나는 북한이 SLBM을 포함해 핵과 미사일 능력을 아무리 강화하더라도 한미연합전력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미동맹은 이미 북한의 SLBM 대응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SLBM 그 자체를 무력화할 군사력은 부족하더라도 종합적인 군사력은 북한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현실적으로 북한의 장사정포를 요격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그런데 왜 수십년간 북한은 장사정포로 서울을 공격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북한이 장사정포로 서울을 공격하는 순간 평양도 불바다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북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SLBM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또 하나는 한반도의 지정학이다. 북한이 남한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핵무기로 선제공격하나는 것은 지정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 나라를 포함한 전세계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북한의 SLBM을 대수롭지 않게 보자는 뜻은 아니다. 호들갑을 떨면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이야말로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 말려드는 격이라는 취지의 얘기이다.
북한의 SLBM 전력화 시기를 5년 후라고 가정하면,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지난 7년간 해왔던 것처럼, 대북 협상은 외면하고 대북강경책과 군비증강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패한 정책을 더 위험한 형태로 되풀이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 가지 접근을 융합하는 것이다. 첫째는 단호하면서도 절제력 있는 대북 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해 한반도의 지정학을 한국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끝으로 조속한 대북 협상을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핵 능력이 강해지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일은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동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있다. 핵물질이 늘어날수록 북한은 핵 투발 수단을 다양화, 다종화할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6자회담이 중단된 2009년부터 영변 핵시설이 재가동되고 있고 오늘 이 순간에도 원자로는 돌아가고 있다. 이걸 멈춰 세우는 게 북한의 핵무기 장착 SLBM 전력화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이를 위해서는 한미 양국이 평화적인 '게임 체인저'가 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건 바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기 위한 협상에 착수하는 것이다.
또 유체이탈? “노력없이 세금 걷는 건 염치 없는 일”512 미디어오늘
박 대통령,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상향 불가 입장 밝혀… 정국 급속도로 냉각
박근혜 대통령이 공무원연금법안 처리와 관련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박 대통령은 12일 국무회의에서 "(정치권이) 해야할 일을 안하고 빚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외면하면서 국민한테 세금을 걷으려고 하면 너무나 염치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야가 합의한 공무원연금개혁안 중 공적연금 강화 방안으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상향 조정 문제를 '국민에게 세금을 걷는 일'이라고 규정하며 수치 명기를 요구하는 야당을 향해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청와대는 국민소득 소득대체율 50% 상향 조정 문제를 포함한 여야 합의안에 대해 '월권'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상향 조정시 1천702조원이 드는 '세금폭탄'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데 이어 박 대통령 직접 상향 조정 불가 입장을 밝힌 것이다.
국회 합의 사항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직접 국민 여론에 호소해 공무원연금법안을 별개로 처리하자는 것인데 국회 무시라는 비판은 물론 대국민 협박에 가깝다는 비난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이 "빚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외면"했다고 한 대목도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상향 조정 문제뿐 아니라 공무원연금법안 합의안 자체에 대해서도 반대의 뜻을 반영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여야는 공무원연금 지급률을 2035년까지 1.9%에서 1.7%로 낮추고 기여율을 2020년까지 7%에서 9%로 높이기로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보수 언론에서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상향 조정과 별개로 공무원연금개혁안 처리할 경우엔 2023년에 정부가 공무원보다 보험료를 2배를 내야 한다며 이번에 제대로 된 개혁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조선일보는 지난 7일자 사설을 통해 "당초 정부가 제시한 방안은 현직 공무원에 대해서는 내는 돈을 훨씬 더 늘리고 받는 돈도 훨신 더 줄이는 것"이었다며 "여야는 공무원 노조의 힘에 밀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다음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개편안을 내고 말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차라지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논의하는 편이 낫다"고 밝혔다.
청와대와 박 대통령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상향 조정 불가 입장을 밝힌 것도 공무원연금법안 자체에 대한 불만이 높기 때문에 국민연금 문제를 트집 잡아 원점에서 재논의하자는 입장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박 대통령이 "10년 전에 했다면 훨씬 쉬웠을 건데, 15년 전에 했다면 훨씬 쉬웠을 것인데 그럼 앞으로 이게 점점 쉬워지겠는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번엔 사명감을 갖고 정치권과 정부 모두가 이번에 해내지 않으면 아무도 이것을 손을 못대지 않겠는가. 이 시한폭탄이 터질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도 공무원연금법안 처리를 촉구하면서도 법안 내용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 박근혜 대통령
하지만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은 공무원연금 개혁 특위에서 합의한 대로 통과시키고,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를 제외한 국회 규칙을 만드는 방향으로 협상에 임하자는 것이 지도부 방침"이라고 말해 여야 합의안대로 공무원연금법안을 처리하자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박 대통령의 입장대로 여야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상향 조정 문제를 빼놓고 공무원연금법안을 별도로 처리하는 시나리오는 현실 가능성도 낫다. 여당이 단독 처리를 하면 여야 관계가 극한 갈등 관계로 빠져들고 향후 정국이 급속히 얼어붙게 된다.
이번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여야 협상의 여지를 줄이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도 어렵지 않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입장에서도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새정치민주연합은 합의 정신인 의회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새누리당이 청와대 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가운데 새누리당이 박 대통령의 지침대로 법안 처리를 촉구하는 모양새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대타협 기구에서 합의한 내용인데 박 대통령이 국민 여론 명분으로 국회를 압박하는 모습도 비상식적이다. 여야는 합의안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대타협기구와 실무기구를 구성해 합의안을 도출했다. 청와대는 하지만 '국민 동의'가 필요한 사항이라며 합의한 내용을 뒤집어 버린 모습이다. 앞으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국민 대타협 기구를 조직할 이유가 없는 셈이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상향 조정 불가 입장이 오히려 합의 정신을 깬 대국민 협박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공무원 노조 관계자는 "어렵게 합의한 내용을 박 대통령 입장 하나로 그르친다면 국민 어느 누가 타협기구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박 대통령이 국민연금과 별도로 공무원연금법안을 처리하자는 것도 공무원연금개혁안을 아예 원점에서 시작하려는 의도를 내비친 게 아닌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입법 4대 개혁중 공무원연금법 처리를 최우선으로 제시하며 강력한 의지를 밝혀왔다. 지난 3월 17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회동에서 "대통령으로서 경제를 한 번 살려보겠다는데 그것도 도와줄 수 없느냐"며 "국민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을 못하면 얼마나 한이 맺히겠느냐"고 한 것도 연금법안 처리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직접 표출한 것으로 풀이됐다.
성문종 리스트 의혹, 이완구 총리 사퇴 등 악재가 겹치면서 국정 3년차 4대 입법 개혁안을 관철시키려는 구상이 첫 단추부터 어렵게 되자 박 대통령이 국회 합의정신까지 찍어누르는 방식으로 무리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총기난사 예비군 최모씨 유서
해운대 부촌 일가족의 '비극적 선택' 513 부산
30대男 투신, 가족 넷은 집안서 숨진 채 발견
부산의 대표적 부촌인 해운대 센텀시티의 한 최고급 아파트에서 일가족 5명이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됐다. 겉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이 생활해왔던 이 중산층 가정을 일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참극으로 이끈 것은 뜻밖에도 '생활고'였다.
13일 오전 7시께 해운대구 재송동의 한 아파트 1층 화단에 송 모(37) 씨가 바닥에 떨어져 숨져 있는 것을 아파트 경비원이 발견했다. 숨진 송 씨의 호주머니에서는 아파트 동 호수, 현관문 비밀번호와 함께 '거실에 가족들이 숨져 있으니 수습해 달라'는 내용의 메모가 발견됐다.
현영철 살아있나… 국정원, 처형 첩보 공개 후에도 北 기록영화에 등장515한국
성급한 발표 등 의혹 꼬리 물어
中 외교부도 "전혀 모르는 상황"
與 정보위 간사 "근거 확실" 주장
노동신문이 지난달 26일 보도한 것으로 김 제1위원장이 회의를 진행 중인 가운데 현 전 부장이 눈을 감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조는 듯이 앉아 있어 꼿꼿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는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대조된다. 연합뉴스
국가정보원이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 처형 첩보를 공개했지만 의문 제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과거 고위 인사 숙청, 처형 사례와 달리 북한에서 현영철 기록 삭제가 이뤄지지 않는가 하면 그가 처형까지 될 특별한 사유가 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이례적으로 재빨리 현영철 숙청 사실을 공개한 배경도 의구심을 낳는 대목이다.
국정원은 13일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현영철이 4월 30일경 평양 순안구역 강건종합군관학교 사격장에서 군 간부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됐다고 밝혔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대한 불만 표출, 지시 불이행, 군 훈련일꾼대회에서 졸고 있는 모습 등을 숙청 사유로 들었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선 의문이 여전하다. 과거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나 이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의 경우 숙청 일주일 전후에 이름과 영상이 북한 매체에서 사라졌다. 반면 4월 말 처형됐다는 현영철은 5월 초 북한 TV에 방영된 김정은 기록영화에 여전히 모습이 남아 있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실장은 “만약 현영철이 숙청됐다면 그의 이름도 북한 사이트에서 이미 삭제돼야 하는데 4월 30일자 노동신문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와 얼굴이 들어간 사진이 모두 남아 있다”며 “(노동신문 발행을 관장하는)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부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성급하게 내놓은 것인지 지켜볼 일”이라고 지적했다. 북한 사정에 비교적 밝은 편인 중국 정부도 “관련 보도는 봤지만 전혀 모르는 상황”(13일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이라는 입장이다.
행사 중 졸았다는 이유로 숙청했다는 국정원 분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다수다. 또 숙청이나 처형 첩보가 입수되면 최소 한 달 정도 북한 동향을 살피는 게 과거 국정원의 관례였는데 김정은 정권 흠집내기 차원에서 급히 현영철 숙청 첩보를 공개한 배경을 놓고도 뒷말이 나온다. 그러나 새누리당 정보위 간사인 이철우 의원은 14일 라디오 방송에서 “국정원은 ‘근거는 확실하다, 그렇게 사진으로 확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며 국정원을 옹호했다. 물론 공개 처형을 목격했다는 인사들이 수백 명인 만큼 이들로부터 사실을 확인했을 수도 있다. 북한이 현영철 처형을 공개할 경우 처형 및 총살 관련 국정원 보고와 38노스 보도 등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처형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왔다.
24년 만에 무죄, 그러나 강기훈씨는 현장에 없었다 514 한국
지난해 2월 서울 서초동 법원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인 강기훈씨가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24년 만에 유서대필 사건 무죄를 선고 받은 강기훈(51)씨는 정작 14일 대법원 무죄 확정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그는 3일 전쯤부터 스트레스가 심하다며 “연락을 끊고 어디 가 있겠다”고 주변에 이야기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간암 판정을 받은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다. 1994년 만기 출소한 이후 취직한 적도 있지만 주변의 시선에 부담을 느껴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강씨는 지난해 2월 서울고법에서 재심 무죄를 선고 받은 뒤 “검찰의 유감 표시를 바란다”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기억을 잠깐만 떠올려 어떤 형태로든 유감의 표시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도 법원도 별다른 사과는 없었다.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동료였던 김기설씨가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을 때 유서를 대신 써줬다며 검찰 수사를 받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김씨 유서와 강씨 진술서의 필적(筆跡)이 같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강 씨는 그 해 7월 자살방조죄로 재판에 넘겨져 1992년 징역 3년 확정 판결을 받아 만기 출소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2007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서의 필체가 강씨가 아닌 김씨의 것으로 보인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놨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51)씨가 재심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사건 발생 24년 만이다. 1991년 당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강씨가 필적을 보여주고 있다.
강씨는 재심을 청구한 지 4년여만인 2012년 10월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결정을 받았다. 대법원은 재심을 개시하면서 1991년 국과수 감정인이 혼자서 유서를 감정해놓고도 4명의 감정인이 공동 심의했다고 위증한 점을 지적하며 이를 토대로 한 과거 판결은 재심 사유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국과수는 2013년 12월 유서 필체에 대한 새로운 감정 결과를 내놨고, 2014년 2월 서울고법은 이를 토대로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유죄 선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지난 1991년 5월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김씨와 강기훈씨의 필적. 가운데 붉은 테두리 안이 고 김기설씨 글씨이고 위쪽이 강기훈씨 필적. 한국일보 자료사진
‘보’자를 ‘오’자처럼 보이도록 쓰는 김씨 필체의 특징이 유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지만 강씨의 필체는 이와 전혀 달랐고, 검찰이 제시한 다른 증거만으로는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썼다고 보기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불법' 군사 정권 용인한 미국 413 프레시안
[문학예술 속의 반미]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V.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1980~1992
미국, 80년대 학생운동 세력에 "버릇없는 녀석들"
2. 1980년대 민중운동과 미국
전두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더 강화되었다. 1980년대 초의 몇 가지 사례만 꼽는다. 첫째, 1981년 2월 전두환은 이제 막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에게 초청받은 최초의 외국인 지도자가 되었다. 전두환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뿐만 아니라 <뉴욕타임스>의 표현대로 그의 정권을 '정당화해주는 승인' (legitimizing approval)을 보장받은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전두환이 워싱턴을 방문하는 동안 그가 난처해 하지 않도록 국제 인권 상황에 관한 연례보고서 출판을 늦추는 등 극진하게 배려했다.
둘째, 1981년 7월 이제 막 임명장을 받은 워커 (Richard Walker) 주한미국대사는 한미관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깝다고 선언했다. 전두환의 '철저한 지지자'(staunch supporter)였던 그는 몇 개월 뒤 야권 단체들을 비난하고 학생들을 '버릇없는 녀석들'(spoiled brats)이라고 낙인찍으면서, 전두환과 그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 찬양했다. 나아가 그는 전두환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야권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멀리했다.
셋째, 1983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을 국빈 방문했는데 이는 양국 사이에 '뗄 수 없는 협력'(inseparable partnership)의 새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레이건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굳건한 지지를 거듭 확인하며 전두환의 인권정책까지 찬양했다. 그가 서울을 방문하는 동안 전두환 정권은 40여 명의 야권 인사들을 가택 연금시켰는데도 말이다.
요약하자면, 한국인들은 1979년 10월 박정희가 암살된 뒤 오랫동안 기다려온 민주주의와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기대했다. 특히 광주항쟁 동안 한국인들은 '특별한 나라'로 인식해온 미국의 도움을 더욱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들의 기대와 정반대로 또 다른 군사독재 정권과 이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이나 배신을 얻었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그때야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보다 지역 안보가 미국의 국익에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80년대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급속도로 그리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80년대 초 대표적 징후나 사례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언론 통제 때문에 광주 학살에 관해 알지 못했지만 야권 인사들의 지하 통신망을 통해 이에 관한 얘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뉴욕타임스>는 광주 학살이 알려지면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반미감정이 심각하게 일기 시작했다고 1980년 6월 두 차례나 보도했다.
둘째, 1980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 대학생들은 시위 선언문에 "최초로 거의 똑같이"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비난했다. 예를 들어, 1980년 9월 9일 경희대학교에 뿌려진 유인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즘 미국이 한국인들이 전두환을 지지한다는 취지로 터무니없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우리는 미국의 역할이 통탄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1980년 12월 광주 미국문화원에 불이 일어났다. 건물 주위에 뿌려진 유인물은 미국이 한국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함으로써 군사정권을 촉진한다고 비난하며 미국인들은 한국을 떠나라고 촉구했다. 이에 관한 정보가 당시엔 보도될 수 없었지만, 방화범들은 나중에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미국은 광주항쟁 동안 전두환을 지지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동맹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에 대한 항의로써 우리는 브라운 (Brown) 국무부 장관이 방한하는 시기에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넷째, 1982년 3월 부산의 보수적인 고려신학대학 학생들에 의해 부산 미국문화원이 불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 한 명이 죽은 이 사건에 대해 당시 <뉴욕타임스>는 "한국 역사상 미국의 재외공관에 대한 최초의 공격"이라고 보도했다. 바로 앞에 소개한 1980년 12월의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1년 넘게 지나도록 해외언론에까지 알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주변에 뿌려진 성명서의 제목은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경제수탈을 위한 것으로 일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소위 우방이라는 명목하에 국내독점자본과 결탁하여 매판 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배논리에 순응하도록 강요해왔다. (…)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국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시민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
한편, 광주 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난 1980년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회 현상은 아마 민중운동의 발전이었을 것이다.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외세의 영향 없이 민족통일을 이루며,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사실상 독립을 성취하자는 내용이었다. 민중은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박탈당하며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문화적으로 소외당하는 대중을 일컫는데, 주된 계층은 공장노동자, 소규모 농부, 도시 빈민이다. 그리고 이들과 동조하는 용감한 운동가들과 양심적 지식인들도 민중으로 간주되었다.
민중운동이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하는 과정에 문화는 사람들을 동원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었다. 1980년대 민중 문화운동을 이끈 핵심 조직들 가운데 '민중문화협의회'가 대표적이었다. 1984년 4월 진보적 작가, 예술인, 교수, 언론인, 출판인들이 만든 이 단체는 창립 발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외압과 분단으로 말미암은 질곡에 신음하고 있다. (…)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문화적 식민지화의 압도적 중압에 눌려 정상적 자기 발현을 억제당하고 있다. (…) 그것은 민족의 문화가 아니라 신식민주의의 문화이며, 민중의 절절한 자기표현으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내외의 지배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관제문화이다. (…)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노예화의 문화, 신식민주의 문화, 관제문화, 분단고착의 문화는 결단코 종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회원들은 1986년 5월 인천에서 열린 거대한 반정부 및 반미 데모에 걸개그림, 손 깃발, 만화 전단, 풍물패 등을 포함한 다양한 선전도구들을 앞세워 참여했다. 그리고 1986년 9월엔 양키와 매판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한 집회를 이끌었다.
1988년 12월엔 문인, 미술가, 음악가, 연극인, 무용가, 영화인 등을 포함한 수백 명의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문화인들이 '한국 민족예술인 총연합 (민예총)'을 결성했다. 그 창립 선언의 일부를 옮긴다.
"지나간 '4월(혁명)'과 '5월(항쟁)'에서 '6월(항쟁)'까지 이르는 당대 민족사의 흐름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독재정권을 내세워서 신식민지적 질서를 정착시켜왔고, 그 심화된 기초 위에서 분단 고착화 내지는 예속화 정책을 추진하던 외세와 반민족적 세력에 대한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민중의 항쟁이 시작된 시기를 상징한다. 우리는 군부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할 것과,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벗어나 나라의 자주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며,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해야만 하는 중대한 전환기에 서 있다"
나아가 이 단체는 민족 분단의 상황에서 권리를 박탈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껴안기 위한 공통의 이해에 바탕을 두고 풀뿌리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민족주의적 예술은 제국주의 세력의 패권에 저항하는 대항세력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 1980년대 시와 미국 (1)
1980년대 한국에서 시는 반미투쟁을 포함한 반정부운동의 효과적 도구였다. 상대적으로 창작하기 간편하고 정치적 탄압이 심한 상황에서 배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 초 군사정권의 억압이 극도로 가혹할 때 시는 민족문학 또는 민중문학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저항 시는 문학예술의 다른 분야에도 폭넓게 적용됐다. 예를 들어, 반미 시는 홍보나 선전선동을 위한 다양한 유인물에 자주 실렸다. 또한 항의시위 노랫말이 되기도 했고, 삽화를 곁들인 자료집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반미 시의 내용과 강도는 다양했다. 첫째, 미국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회문화적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비난받았고, 미국인들은 '양놈'을 비롯한 상스러운 용어로 표기되었다. 김남주는 1989년 미군들이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하는 동안 한국 여인들을 무자비하게 강간했다고 폭로하는 <포항 1988년 2월>을 발표했다. 이철송은 1992년 <오리 사냥>에서 먹을 것을 찾아 미군 부대로 접근하는 한국인에게 미군들이 '짐승'이라 여기며 '물오리를 쏘듯' 총질하는 모습을 그렸다.
김솔은 1988년 발표한 <기지촌>을 통해 미국 영화는 오로지 폭력만을 보여주고, 미군들은 부대 주변에서 한국인들은 쉽게 쏴 죽이며, 미국은 한국 전체를 거대한 기지촌이 되도록 이끌어왔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양키들은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양성우는 <이태원에서> (1988)를 통해 미국에 의해 밟히고 찢어지고 토막 난 땅에서 "내 땅은 내 땅인데…. 병신처럼 움츠러들고, 공연히 공연히 사시나무 떨듯"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신세를 한탄했다.
백기완은 <아, 우리의 딸들이여> (1988)에서 "양키놈 휘파람에 말려 비철대는 여인"들에게 "장도칼을 빼들라"며 분개했다. 그는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얼마 전 이태원 거리에서 미국병사에게 웃음을 팔다가 무슨 까닭인지 그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는 한국 여인이 있는데도 이를 모르는 채 웃음을 팔고 있는 다른 여인을 보고는 영 돌아설 수가 없었다" 백기완은 이에 앞서 1981년 <서울에서 남미까지>라는 120행이 넘는 장시에서 "양공주의 쓰라린 경험을 가진 40대의 여자"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원한과 증오를 섞어 털어놓았다.
… 도날드야 / 그날 네 군홧발에 내 옷고름이 찢기던 그날 / 사흘이나 굶어 쓰러진 어머니까지 / 거푸 당하던 그날 /…
…너는 마침내 네 짝을 시켜 / 나를 다시 강제로 그렇게 해버리고는 / 그 놈이 내 허벅지를 지진 담뱃불을 핑계로 / 네놈들이 합세해 나를 허튼년이라고 / 머리채를 박박 깎아버리든 도날드야
아, 나는 그때 눈앞이 캄캄한 너희 부대 / 철조망을 미치게 물어뜯다가 / 다 바랜 나를 너도 경찰도 / 도둑으로 몰아 잡아넣든 도날드야 /…
… 그날 내가 옥에서 나오던 날 / 딴 여자를 다시 끼고 돌아가는 / 너를 이 비수로도 아주 쓰러뜨리지 못하고 / 끌려가던 그날 나는 백번이고 되물었다
도대체 너는 왜 우리 땅에 왔는가 / 먹고 마시고 뺏고 죽이고 / 꼬드기고 등을 돌리고 / 다시 꼬드기다가 끝내 배신하는 / 아리조나의 총잽이야 /짐승보다 더 야비한 너는 / 도대체 왜 여길 왔는가 /
…내가 당한 경험으로 보아 / 너는 다시 남미의 처녀들을 / 얼마나 짓밟아 망쳐 놓을건가 /…
그래서 너같은 놈들에겐 / 지구의 여인이 일어나야 한다고 / 남미의 여인이여 속지말라고 / 이 장도칼을 부치고저 나는 서울가는 / 기차에 몸을 실었다 도날드야 /…
많은 시인들은 또한 미국 문화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분노를 쏟아냈다. 문병란은 코카콜라가 메스껍다며 미국의 문화적 침투를 거부하는 <코카콜라> (1986)를 발표했다. 이하석은 <아메리카>를 통해 미군 부대 주위의 양공주를 묘사하면서 한국에서의 퇴폐 문화를 풍자했다. 노동자 시인으로 유명했던 박노해는 1984년에 쓴 <영어회화>에서 "부유층 아들딸들이 유치원서부터 / 영어회화 교육에다 / 외국인학교 나가고 / 중학생인 네가 잠꼬대로까지 / 영어회화 중얼거리고 / 거리 간판이나 상표까지 / 꼬부랑글씨 천지"가 되어버린 상황을 한탄했다. 그리고 영어 남용이 일본 식민통치 아래서의 '조선어 말살'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이와 비슷하게 해직 교사 김경윤은 <분단 시대의 국사 시간> (1992)에서 "굴종과 침묵만을 강요하는 식민지 교단에서… 아이들은 연습장에 영어 단어만" 외운다며 탄식했다.
둘째, 미국은 광주학살을 방조하고 한국의 '불법' 군사 독재정권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비난당했다. 1990년 "5.18 광주 민중항쟁 10주년 기념시집"으로 출판된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엔 100편이 넘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노동자 시인 백무산은 <오월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광주를 "파쇼의 패악성과 제국주의의 독소를 집중 투하한 곳"이라고 정의했다.
김희수는 400행이 넘는 장시 <오월은 꽃잎으로 누울지라도>에서 "광주에 사는 외국인들은 보따리 싸들고 / 가족과 함께 철수시켰다네"라며, 그리고 김남주는 <학살2>에서 "밤 12시 나는 보았다 /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이라며, 광주학살을 미국 관리들이 사전에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했다. 고규태는 <무명전사의 넋>에서 광주학살에 동원된 무기와 도구들이 모두 미국에서 건너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남주는 위 시집에 실린 <학살>과 <나이롱 박수> 등 10편의 작품을 통해 광주학살을 포함한 한국의 모든 불행은 미국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분노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며, 미국이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방방곡곡을 "아비규환의 아수라로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 "앞으로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 뒷전에서는 원격조종의 끄나풀로 꼭두각시를 앞장세워 / 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민중들을 / 계획적으로 학살하는 아메리카여 / 보아다오, 너희들과 너희들 똘마니들이 저질러 놓은 범죄를…" 나아가 "광주학살 지령한 양키들을 몰아내자"고 외쳤다.
사실 반미 시와 관련해 작품의 양으로든 내용의 강도로든 김남주를 앞지를 시인은 없을 것이다. 그는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반대투쟁을 시작해,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기 직전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되어 1980년 감옥에 갇혔다가, 1988년 풀려났지만 1994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戰士)로 간주했다. 시는 자유와 민주를 위한 그의 무기였던 셈이랄까. 반미 시로 가득 찬 그의 대표시집 <조국은 하나다>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인 1988년 백낙청, 염무웅, 황석영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는데, 여기서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에의 열망을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는 김남주 시인"의 "문학은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의 가장 귀중한 예술적 재보이며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전 인류적 투쟁의 가장 빛나는 무기로 되고 있다"
그리고 가수 안치환은 2000년부터 그의 시에 곡을 붙인 '헌정 음반'을 만들어 발표해왔다. 그는 100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미국에 호통치고 분개하고 저주했는데, 아래에 일부를 소개한다.
<시인의 일>
수천의 시민을 학살하여 / 양키의 이익을 지켜주고 / 그 대가로 세자책봉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 장군인 너의 일이라면 /…/ 홀랑 까진 마빡 위에 지르르 기름기가 흐르고 / 그 위에 학살과 저주의 낙인이 찍힌 채 / 양키의 부름으로 바다를 건너는 것이 / 반역자인 너의 일이라면 /…/ 시인인 나의 일은? / 이 자가 저질러놓은 죄악 / 그 하나하나를 파헤쳐 / 만인에게 만인에게 만인에게 고하고 / 일깨워 민중들 일어나 단결하게 하고 / 자유의 신성한 피의 전투에 / 나아가자 나아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노래하는 일.
<매국노>
피 묻은 칼로 / 제 나라 허리를 잘라 그 아랫도리 반쪽을 / 이민족의 코앞에 발아래 바치고 그 대가로 / 제 동포의 머리 위에 군림한 자 /…/ 이민족의 용병으로 미8군의 고용살이로 노예살이하면서 / 나라의 다른 반쪽 그 독립의 가슴에 괴뢰의 총칼을 들이대는 자 / 그 총구 그 칼로 반공 쿠데타로 일어나 /…/ 백악관에서 입안되고 CIA에서 변조되고 미8군에서 급조되어 / 제국주의의 총구에서 튀어나온 상품의 이름 새 시대의 새 지도자라 불러야 하나 /…/ 신식민지에서 무슨 놈의 대통령이고 독재자냐 괴뢰면 괴뢰고 하수인이면 하수인이지 /…
<희망에 대하여2>
…/ 양키야말로 학살의 숨은 원흉이고 / 양키야말로 이 땅의 모든 악의 근원이고 / 양키가 이 땅에 온 것은 해방군으로서가 아니라 / 점령군으로서 왔다고 /…
"'인공의 깃발'이 '인공기'?…검사의 착각"
7. 1980년대 시와 미국 (2)
셋째, 미국은 노동 시와 농민 시에서 경제적 '착취자'나 '침략자'로 묘사되었다. 김용신은 <거리의 순교자> (1985)를 통해 '식민지 조국'에서 택시를 몰며 '노예의 거리'와 '능욕의 거리' 그리고 '이방인의 거리'를 보여주면서 '움츠린 노예의 삶'을 거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양성우의 <김사장네 신발공장에 가면> (1988)과 백봉석의 <지옥선4> (198?)는 한국의 공장노동자들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한다고 한탄하는 내용이다.
김남주는 세 편의 연작시 <달라> (1988)에서, 그리고 이재무는 <일어서는 나라> (1990)에서 "달러가 들어와 토산품을 다 잡아먹고, 조선놈들의 심장을 다 갉아먹는" 등 미국 자본이 한국 경제를 침탈한다고 분노했다. 문병란의 <농민의 모습> (1986), 김용택의 <소> (1988), 농부시인 홍일선의 <5월에 농민들은 말한다> (1990) 등은 "미국놈들 수입소 때문에 수입담배 때문에 미국놈들 수입과일 때문에" 한국 농민들이 "농약 마시고 죽어야 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1980년대엔 노동자 시인들이 등장해 유명해진 게 주목할 만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노동자 시인으로 1984년 <노동의 새벽>을 펴낸 박노해를 들 수 있는데, <가리봉 시장>을 통해 공장 노동자들이 "물 건너 코큰 나라" 사람들을 위해 희생당하는 것에 안타까워했다. 1993년 펴낸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에서는 미국에 대해 이전보다 더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1988년 <만국의 노동자여>를 펴낸 백무산은 그 무렵 다른 어느 노동자 시인보다 더욱 급진적이고 전투적이었다. 그는 <전진하는 노동전사>에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거부하며 '양키 제국'을 물리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목숨 걸고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김해화의 <인부수첩18> (1986)과 박영근의 <파업> (1988)은 노동자들이 미국 자본을 등에 업은 한국 자본가들에게 속고 혹사당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9년엔 다양한 노동자들이 쓴 노동 시를 묶어 편집한 시집 <통제구역>이 출판되었는데, 여기엔 노동 투쟁에서부터 핵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의 반미 시가 수록되었다. 마산-창원 지역의 노동자들이 조직한 '참글'이라는 문학 동아리는 <현해탄 푸른 물결을 건너> (1990)라는 제목의 서술적 시에서 다국적/초국적 기업들의 모든 악행을 묘사했다. 그리고 미국의 압력 아래서 체결된 한미무역협정에 의해 한국이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 기업들의 낙원이 되었다고 풍자했다.
넷째, 일부 시인들은 한국 현대사의 재해석에 영향을 받아 대개 수천 행에 이르는 장편 서사시를 통해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관해 비판했다. 문병란은 1860년대부터의 한미관계를 서술하면서 미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동소산의 머슴새>를 1983년 발표했다. 이산하는 장편 서사시 <한라산> (1986)에서 1948년 제주 4.3항쟁을 다루며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첫 부분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1945년 불볕 여름 / 한 손엔 '빵'과 또 다른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 발톱까지 무장한 채 당당하게 상륙한 그들은 / 마침내 / 순결한 조선의 하늘과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 ..... / '창살 없는 감옥'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 ... /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 / ..." 그리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1948년 4월 3일 / 미군정 압제에 반대하여 /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외치며 / 제주도 인민은 일제히 봉기했다 / ... / 비전투원의 무차별 공격과 대량학살이 / ... / 아니 오히려 UN의 탈을 쓴 / 그 중심국에 의해 / 저질러졌다"
이 시 때문에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혔는데, 검찰은 공소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 사회로 파악하고, 무장폭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도민항쟁으로 미화하며, 인공기를 찬양하는 등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했다" 여기에 검찰의 무지와 억지가 드러난다.
이 시의 첫 부분에 1948년 4월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이 죽어가면서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의 깃발을"이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공의 깃발'을 북한의 국기인 '인공기'로 착각했던 것이다. 북한은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948년 9월 수립되었는데 말이다. 이산하가 시에서 얘기한 '인공'은 서울의 여운형과 평양의 조만식 등이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바탕으로 수립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을 가리켰다. 당시 검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여운형이 주도했던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을 제주항쟁 이후인 1948년 9월 김일성에 의해 주도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으로 착각하고 공소장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김형수 역시 <지리산> (1988)을 통해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의 빨치산 투쟁을 '양키들이 점령한 식민지'에서 전개한 민족해방 투쟁으로 묘사했다. 오봉옥은 "항일무장투쟁에서 반미항전으로 이어지는 혁명전통의 주류를 복원한 서사시집" <붉은 산 검은 피> (1989)에서 1946년 8월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봉기를 묘사하면서 미 군정을 비난했다. 그는 이 장편의 시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노동자 시인 정해동은 어머니의 비참한 삶을 묘사하면서 한국의 '굴욕적인 식민지 역사'를 끝내겠다고 결의하는 <어머니> (1989)를 발표했다.
다섯째, 시인들은 미국이 한반도 통일을 막고 있다고 비난하며 제3세계에서의 제국주의 활동을 비판했다. 널리 알려진 목사 시인 문익환은 1982년 <땅의 평화>에서 1958년부터 한국에 배치되었던 미국 핵무기를 거부했다. 그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해방 40년 기념 민족시 선집" <민중과 하나 되는 그 날까지> (1985)의 출판을 축하하면서, 시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시를 썼다. "다국적 이빨에서 / 이 겨레를 건져주는 / 용사가 되어주렴 / 남북으로 두 동강난 내 조국을 / 하나로 뭉쳐놓는 / 평화의 역군이 되어주렴"
문병란은 <그 날이 올 때까지>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나라들이 / 저만치 물러나 / 우리 일에 간섭하지 않고 / 자기들의 깃발을 강요하지 않고" 통일이 되기를 기원하며, "핵지뢰 핵미사일 온갖 무기"가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통일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김선웅은 장편 연작시 <물결 저 너머 내 조국> (1988)을 통해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해놓고 대규모 군사훈련 '팀 스피릿'을 실시하며 한국 내정에 간섭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생목숨 꺾어 난자질하는 아메리카의 살육"이 무섭고, "목덜미 찍어 누르는 한반도의 핵무기"가 무서우며, "붉게 물들여 토막 내는 양키의 휴전선"이 무섭다고 했다. 그리고 "성조기 깃발 아래서 / 무슨 무슨 통일회담 부질없습니다 / 성조기 깃발 아래서 / 무슨 무슨 통일행사 거짓입니다"고 단언했다.
유채림은 <핵보라> (1989)에서 '해방염원 42년' (1986년) 4월 반미 시위에서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치며 온몸을 불살라 죽어간 당시 서울대학생 김세진과 이재호를 기리며, 미국의 핵무기 아래 놓여있는 '식민지 조국'에 대해 몹시 괴로워했다. 이 장편의 시 첫 부분에 1945년 8월 '미제'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과 관련해 "살육의 제국주의 일제는 / 그렇게 끝이 났고 / 학살의 제국주의 미제는 / 그렇게 시작했다"는 표현이 재미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듯 그 '왜놈의 땅'엔 '조선의 민중들'이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람직하다.
참고로, 우리는 1945년 8월 역사상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인식 때문인지 당시 핵무기의 피해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심지어 핵무기 사용에 관해 고맙게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원자폭탄 때문에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했고, 이 때문에 조선의 해방이 앞당겨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핵무기에 따른 우리 선조들의 피해 역시 매우 크고 끔찍했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제4권에 따르면, 1945년 8월 핵폭탄의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은 히로시마에서 42만 명, 나가사키에서 27만 명으로 총 69만여 명인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히로시마에서 5만 명, 나가사키에서 2만 명으로 총 7만여 명이라고 한다. 방사능 노출로 죽은 사람 23만여 명 가운데 조선인은 약 4만 명으로 추정된단다. 조선인이 전체 피폭자 가운데서는 약 10%이며 폭사자 중에서는 약 17%를 차지한 것이다.
김남주는 <조국은 하나다> (1988)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자신의 슬로건으로 "조국은 하나다"를 외쳤다. 백기완은 시집 <백두산 천지> (1989) 머리말을 통해 "분단을 틀어쥐고 있는 제국주의와 그 세력의 앞잡이"에 맞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해방통일의 어기찬 물결에 끝까지 따라 붙어 이 민중에 의한 해방통일 민족통일이 완결되는 것을 내 생애의 과업으로 다할 것임을 다시 한 번 맹세"했다. 실로 김남주와 백기완은 미국을 한국의 자주와 한반도 통일에 가장 큰 장애물로 간주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미국이 제3세계에서 전개하는 제국주의 활동 역시 반미 시의 주제가 되었다. 김정환은 <해방 서시> (1985)에서 제3세계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 투쟁으로 피로 물들고 있다고 썼다. 문병란은 <커피를 들며> (1986)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면 아르헨티나와 니카라과 등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을 동정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한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과 경제 침투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1986)를 통해서는 미국의 아르헨티나에 대한 군사 개입을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방조와 연계시켰다.
김남주는 <아메리카여 아메리카여 아메리카여> (1992)에서 미국의 노예무역,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리비아와 파나마 그리고 그레나다와 이라크 등에서의 살상 등을 떠올리며 미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성전'에 야유를 보냈다.
이렇듯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의 시에서 미국은 제국주의와 종속, 억압과 착취, 신식민주의와 민족해방 등과 연계되어 흔히 '미제'나 '외부의 적' 또는 '경제 침략자'나 '착취자' 등으로 묘사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 시인들은 작품에 "양키 고 홈"이란 구호를 직접 삽입했다. 예를 들어, 문병란은 <우리들의 8월> (1986)에서 미국인들은 즉시 자기들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그리고 1988년 6월 전북 군산에서 술에 취한 미군 4명이 운전기사를 집단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린 사건이 터지자 이를 규탄하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때 윤용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양키는 가라> (1988)라는 제목의 시를 <한겨레> 신문에 보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양키는 가라 / 가서 돌아오지 마라 / 절대 돌아오지 마라 / ... / 악마 같은 살인자 양키는 꺼져라"
'美國'이 '米國'으로 불린 사연?
3. 1980년대 노동운동 및 생활문화운동과 미국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공장 노동자들이 다양한 문화 활동에 적극적이고 폭넓게 참여했다는 점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공장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개혁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했다. 앞에서 소개한 1984년 창립된 '민중문화 협의회'가 1987년 2월 '민중문화 운동연합'으로 발전했다가 1989년 9월엔 '노동자 문화예술 운동연합'으로 탈바꿈했다.
이 단체는 창립선언을 통해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노동자 계급에 맡겨진 역사적 사명은 "썩은 냄새가 나는 낡은 사회의 온갖 퇴폐적, 반동적 문화를 척결하고 (…) 투쟁하고 노동하는 미래사회의 창조적 인간상을 이상으로 하는 인류 최고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남한 노동자계급 문예운동은 날로 억압과 착취를 강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신식민적 착취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물질적, 정신적 무기가 되어야 한다(…)
분단과 함께 제국주의의 자본수출 및 종속적 정치군사동맹에 기초하여 수립된 신식민지 군사파쇼정권은 (…) 노동자계급과 전 근로민중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폭력으로 짓누르며 억압과 착취를 강화하고 있다.(…)
남한 노동자계급 문예운동의 역사와 경험은 민중을 억압, 착취하는 지배계급 및 제국주의에 대한 줄기찬 투쟁의 역사였다."
따라서 1980년대 전반기엔 주로 대학생들이 민중문화운동을 이끌었다면 1980년대 후반기엔 공장 노동자들 또는 노동운동계가 이에 적극 동참하는 형국이었다.
1980년대 말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현상은 전국의 대학가에 급속도로 퍼졌던 생활문화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반미 투쟁의 효과적 무기"로서 일상생활을 통해 반미주의를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영어 사용을 될수록 자제하거나 거부하자고 했다. 미국의 팝송을 부르지 말자고 주장했다. 미국 담배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코카콜라를 마시지 말자고 외쳤다. 커피 대신 숭늉을 마시자고 호소했다. 청바지를 입지 말자는 주장도 폈다. 그들은 당연히 한국의 전통문화를 중시했다.
이러한 민중문화운동은 마르크스 문화이론 또는 문학이론에 영향을 받거나 기반을 두었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헝가리 출신 루카치 (Lukacs)가 1970년 주장했듯,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문화이론이나 문학예술이론을 체계적으로 다듬은 적은 없지만, 그들의 다양한 글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미학적 사상을 몇 몇 학자들이 재구성하여 이를 마르크스 문화이론 또는 문학이론이라 부르는 것이다. 마르크스 이론들의 내용과 비슷한 민중문화운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꼽을 수 있다.
첫째, 문학예술 작품에서 루카치가 1963년 소개한 '비판적 현실주의'(critical realism)가 팽배하거나 '과학적 사실'이 강조되었다. 둘째, 전통적 문학 장르가 해체되거나 모호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마르크스 문학에서는 장르나 형태가 내용보다 덜 중요하기 마련인데, 소설이나 시에 덧붙여, 보고 기사 (르포르타주), 메모, 일기, 편지, 청원서, 성명서, 선언문 등도 중요해진 것이다.
셋째, 문학과 예술이 의식을 일깨우는 수단 또는 선전선동의 무기로 활용되었다. 1960년대 문학계에서 벌어진 논쟁에서도 드러났듯, '순수 문학예술'은 '반동적 부르주아'의 기치 아래 놓여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이른바 '경향파 문학예술'은 민중적이며 혁명적 지식인들의 기치 아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넷째, 문화에 대한 그람시 (Gramci)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민중문화가 지배계급의 이념이나 문화에 맞서는 '대항문화' (counter-culture)또는 '대체 패권' (alternative hegemony)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에 따라 많은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작가와 예술가들은 한국이 미국의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며, 문학예술을 제국주의 미국에 맞서는 ‘민족해방 투쟁’의 유용한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 1980년대 한국의 문학예술계에 미국에 대한 강렬한 부정적 인식을 표출한 작품이 무수하게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와 아울러 일부 작가와 예술가들은 미국을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의 '美國'이라는 전통적 한자 표기 사용법을 거부했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쌀의 나라'라는 뜻의 '米國'이나 '꼴찌 또는 꼬리 나라'라는 뜻의 '尾國'이라는 한자 표기를 즐겨 썼다. 그들의 작품에 '미국'이라는 발음은 유지하면서도 뜻은 긍정적이 되지 않는 한자 표기를 선호한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다양한 출판물에 날짜를 표기하면서 서기(西紀)를 쓰지 않고 새로운 기원(紀元)을 사용했다. 여기엔 반미감정이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기 마련이었다. 흔히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된 1945년을 기준으로 삼는 새로운 기원을 정한 것이다. 예들 들어, 서기 1985년은 '신기원' 41년인 셈인데, 신기원의 명칭은 대개 '분단 조국', '해방 투쟁', '나라 찾기', '반미 항전', '통일 진군' 등이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나라 찾기'는 미국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 한국인들이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강한 반미의식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4. . 1980년대 문학과 미국
1980년대엔 '반미 문학'이란 말이 등장했다. 수많은 개인적 반미 문학작품 이외에 이러한 작품을 모아 편집한 책도 나타났다. 김상일이 1988년 편집해 펴낸 <반미 소설선>은 1940년대 발표된 채만식과 최정희의 단편소설부터 1980년대 발표된 유순하와 박석수의 중편소설까지 10편의 소설을 담고 있는데, 1989년 전국 노동자 문화운동단체 협의회에서 노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했다. 시 분야에선 임헌영과 이영진이 편집한 <반외세 민족자주화 시선집: 아메리카 똥바다>가 1988년 출판되었다. 대표적 평론으로는 최완식의 "민족문학과 반미문학" (1988) 및 박덕규의 "80년대 반미문학론" (1989) 등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에 출판된 반미 문학작품은 너무 많기에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운데 대략적으로 네 가지 특징을 들고 싶다. 첫째, 많은 작품들이 다양한 잡지 형태의 책 (무크)을 통해 발표되었다. 무크는 1980년대 독재정권의 통제를 피하기 위한 새로운 출판 형태로 인기를 끌며 자리 잡았다. 둘째, 시가 소설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발표되었다. 소설보다 분량이 적은 데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초엔 혹독한 정치적 탄압 아래서 미묘함도 필요했을 터다. 그래서 일부 시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익명이나 단체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셋째, 작품의 분량이 길어졌다. 소설에서는 중편이 늘고 몇 권짜리 장편이 출현하기도 했으며, 시에서도 수백 행의 장편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다. 넷째, '반미 문학'이 '민족해방 문학' 또는 '노동해방 문학'의 핵심이 되었다. 문학평론가 백진기나 조정환의 주장에 따르면 '신제국주의' 또는 '신식민주의'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반미 보고문학 (르포르타주)의 출판도 주목할 만했다. 오연호는 1989년 <식민지의 아들에게: 발로 찾은 반미 교과서>를 펴냈다. 1945년 이래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와 '미국의 배반'에 관한 역사를 폭로한 내용이다. 다음 해인 1990년엔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 발로 찾은 주한미군 범죄 45년사>를 출판했다. 제목 그대로 주한미군들이 1945년부터 저질러온 다양한 범죄를 보여주고 있다. 2000년 창간된 <오마이 뉴스> 대표를 맡고 있는 오연호는 그 무렵 진보적 월간지였던 <말> 기자로 수많은 반미 기사를 썼으며 1992년 아래에서 소개할 장편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문학동아리 심상은 1988년 <헌법에서>를 발표했다. 한국의 미국에 대한 의존에 대해 분개하는 '낙서 시'로 미국의 헌법 1조에 미국의 영토는 한반도를 포함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은 미국의 51번째 주'라는 해외의 비아냥에 대한 자조 섞인 대응이랄까. 이와 비슷하게 공장 노동자들은 수필이나 웅변 원고, 콩트나 연극대본 등을 통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익살스럽게 표출했다.
반미적 글줄은 민주주의와 한반도 통일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묘비명에까지 새겨졌다. 이철규는 경찰의 수배를 당하다 1989년 5월 시체로 발견되어 광주 망월동에 묻힌 사람인데, 1993년 찾은 그의 묘비석엔 "반미자주 열사, 애국 학생 이철규의 묘"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미국 제국주의에 의한 한반도 분단과 그의 꼭두각시 정권이 모든 민족적 고통과 불행의 근원이므로, 우리가 미국 제국을 쫓아내고 독립된 통일국가를 세우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은 불행과 고통을 영원히 제거할 수 없다"
1990년 5월 광주항쟁 10주년 기념일을 맞아 광주 '성지'를 방문하는 길에 경찰의 심문을 피하려다 죽은 신장호의 묘비에선 아래와 같은 시를 읽을 수 있었다. "여기, 식민지 땅 / 신장호 열사를 죽인 건 미국놈들 / 미국 제국이 이 한반도 땅에 존재하는 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
5. 1980년대 소설 속의 미국
앞에서 얘기했듯 1980년대에 발표된 반미 소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소개한다.
첫째, 이른바 기지촌 소설을 통해 한국인에 대한 주한미군의 오만함이나 범죄 행위를 거부하고 있다. 과거엔 소극적으로 당하기만 했다면 이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또한 1970년대까지의 소설에서는 대부분 흑인 병사들이 한국인에 대한 범죄를 주도했지만, 1980년대 소설에서는 백인들이 더 많이 악역으로 뽑혔다. 아마 1980년대 이전의 기지촌 소설에서 백인 병사를 범죄자로 그린 소설은 1965년 발표된 남정현의 <분지>가 유일할 것이다.
박석수는 <철조망 속 휘파람> (1982)을 통해 5천여 명의 송탄 주민들이 1950년대에 미군 부대에 의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집과 논밭을 빼앗긴 채 쫓겨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54년도 다 저문 12월의 어느 날, 마을엔 미군 18전투 폭격단이 들어서면서 동쪽 어귀 1백 80만 평의 대지를 송두리째 비행장 부지로 징발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졸지에 보상 한 푼 없이 전답과 가옥을 빼앗긴 1천 가구 5천여 주민들은 제대로 항의 한 번 못해보고 트랙터에 밀려 지금의 판자촌인 이곳 철조망 밖으로 밀려나오고 만 것이다.
'수탈을 일삼던 지긋지긋한 일제 시대 때도 우리의 숯막만은 그대로 폐쇄되지 않았었는데, 정말 숯처럼 시커먼 양키들이 들어오면서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흥분하면서 할아버지는 경찰서와 리사무소와 면사무소를 열불나게 쫓아다니면서 하소연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자 그만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서 가슴만 두드리며 끙끙대다가, 미군 비행장에 F86 개량기가 원자폭탄을 싣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나돌던 이듬해 3월 말에 홧병으로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위 이야기는 3년 뒤 <외로운 증언> (1985)으로 이어졌다. 10여 년 뒤 제대한 미군 병사가 미군 부대 창고를 털어 도망치려고 모의한 뒤 위 노인의 아들을 포함한 한국인들을 사악하게 죽이는 내용이다. 작가는 2년 뒤 발표한 <동거인> (1987)을 통해 송탄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겪은 고통의 30년 역사를 그린다.
이 가운데 동네 이름이 바뀐 사연을 통탄스러우면서도 재미있게 묘사한다. 송탄은 예부터 참나무 숯으로 유명한 '숯고개'로 불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은 아군의 후퇴와 적군의 전진 속도를 계산하는 도상 체크의 잘못으로 아직 적군이 들어오기도 전인 엉뚱한 지역에 맹폭을 가해 숯고개를 그야말로 쑥밭으로 만드는 실수를" 저지른 바람에 '쑥고개' (쑥밭)가 되었다. 그 후 "숯처럼 새까만 흑인과 대낮에도 털복숭이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백인들이 함께 마을에 진주하면서부터 기지촌이 형성되고" '술장사, 색시장사, 딸라장사' 등으로 어우러지면서 '씹고개' (씹밭)가 되었다. 그러다 '내 고장 이름 바로 부르기 운동'에 따라 점잖게 '송탄'으로 바뀌었단다.
강석경의 <낮과 꿈> (1983) 그리고 <밤과 요람> (1983)은 기지촌 주변에서 퇴폐적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양공주들의 뒤틀린 심적 상태를 보여준다. 윤정모는 1985년 발표한 <가자, 우리의 둥지로>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한인 동포의 삶을 통해 문화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퇴폐한 미국 사회를 묘사한다.
안정효의 <갈쌈> (1986)은 아들과 딸을 둔 과부가 한국전쟁 중 두 명의 양키 군인들에게 강간당한 뒤 창녀로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린다. 그리고 이 여인이 살았던 마을 전체가 어떻게 황폐해져 가는지 보여준다. 이 소설은 영어로 번역되어 1990년 미국에서 '은색 말'이라는 뜻의 으로 출판되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1990년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새로운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으며, 1991년엔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문순태는 <문신의 땅> (1987)에서 은퇴한 양공주의 온몸에 미군들이 수치스럽게 새겨놓은 문신을 보여주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문화적 침투를 은유적으로 비판한다. 주인공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침략에 대해서도 분개하며, 커피와 우유 그리고 버터와 빵 등을 대신해 숭늉과 된장국 그리고 쌀밥을 먹는 등 미국화한 식습관을 바꾸기도 한다. 앞에서 소개한 1980년대 말 대학생들의 생활문화운동과 연결되는 대목이다. 문순태는 이 단편소설로 1987년 이상 문학상을 받았다.
다섯 권짜리 장편 <공존의 그늘>은 이윤섭이 1988년까지 1-3권을 쓴 뒤 이신현이 이어받아 1990년까지 4-5권을 썼다. 이 소설이 출판될 때까지 9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유명한 저항시인 김남주를 위해 써진 작품이다. 주인공 남주는 카투사로서 미국이 '정의의 사도라는 미명 아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방법과 전술을 종종 사용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리고 미국은 결코 한국의 동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 초까지 발표된 아마 가장 끔찍한 반미 소설은 정도상의 <아메리카 드림> (1990)일 것이다.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 반미 소설 모음집에 실린 단편 소설이다. 한 미국인 부부가 치명적인 심장병을 앓고 있는 자신들의 친아들에게 심장을 이식하기 위해 한국인 고아를 입양한다. 한국인 소년은 미국으로 옮겨져 병원에서 살해당하고, 그의 심장 없는 시신은 검은 비닐 백에 담겨 쓰레기처럼 버려진다는 내용이다.
아무리 '반미'를 강조하기 위한 소설이라도 이러한 끔찍한 주제로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싶겠지만, 실제로 이와 비슷한 소문이 1980년대 말부터 몇 년 동안 전 세계에 퍼졌다고 한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 리퍼블릭 (The New Republic)> 1990년 12월 24일 자에 실린 슈리버그 (David Schrieberg)의 "죽은 아이들"(Dead Babies) 이라는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 어린이들이 일상적으로 유괴되어 미국 국경을 넘어 와 살해된 뒤 그들의 심장이나 폐 등 생명의 중요한 기관들이 부유한 부모를 둔 미국의 병든 어린이들에게 이식된다고 보도되고 있다"
이 믿기 어려운 소문은 1987년 온두라스의 언론에 처음으로 보도된 뒤 1990년까지 적어도 50개 국가로 퍼져나갔다. 예를 들어, 1988년 "파라과이의 한 판사는 7명의 파라과이 어린이들이 유괴되어 살해된 뒤 그들의 중요한 생명 기관들이 부유한 미국인들의 병든 어린이들에게 이식될 수 있도록 미국으로 밀수출되었다고 발표했다" 유럽에서도 런던의 <타임스>를 포함한 권위 있는 신문들이 이 기사를 보도했다. 이에 유럽 의회는 1988년 9월 어린이들의 신체 기관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정도상은 1980년대 가장 활동적인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아메리카 드림> 이외에 적어도 15편 이상의 반미 소설을 발표했다. 그에게 소설이란 '반미 혁명'을 향한 자원을 동원하기 위한 효과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석명이 1989년 펴낸 두 권짜리 <얼 양키들 : 소설로 본 미제 침략사>는 제목 그대로 오로지 반미적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 소개한 오연호는 1992년 <살아나는 임진강>을 발표했다. 1962년 1월의 이른바 '파주 나무꾼 살해 사건'을 소설로 꾸민 것이다. 1960년대 소설에서 다루었듯, 이 실화는 1962년 유주현의 <임진강>을 통해 이미 알려졌다. 그런데 30년 시차를 두고 두 작품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첫째, 1962년 단편으로 발표된 유주현의 소설이 1992년엔 오연호의 장편 소설로 바뀌었다. 둘째, 오연호의 소설엔 반미감정이 훨씬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래서 <살아나는 임진강>은 미군에게 살해된 나무꾼 아버지의 딸이 자신의 고향에 휘날리는 미국 국기를 머지않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어내리겠다고 다짐하면서 끝난다. 이 작품은 1993년 5월 연세대학교에서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는 제목의 마당극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5. 1980년대 소설 속의 미국 (2)
앞에서 얘기했듯 1980년대에 발표된 반미 소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소개한다. 첫째, 이른바 기지촌 소설을 통해 한국인에 대한 주한미군의 오만함이나 범죄 행위를 거부하고 있다.
둘째, 미국은 이른바 '5월 문학'을 통해 광주학살의 공범 및 전두환 독재의 지지자로 비난받았다. 1985년부터 광주항쟁을 그린 소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황석영의 보고문학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985)가 출판된 직후부터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현대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인 황석영은 광주항쟁의 진실을 될수록 즉시 폭로하기 위해 소설이 아닌 르포르타주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이나 걸렸다. 독재정권의 탄압 때문이었다.
윤정모는 1985년 동포애를 바탕으로 미국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넌지시 표출하는 <밤길>을 발표했다. 박호재는 1987년 <다시 그 거리에 서면>에서 데모를 묘사하는 가운데 "양키 고 홈" 등 반미구호를 소개하면서 미국이 광주학살의 방조자였음을 암시했다. 홍희담은 <깃발> (1988)을 통해 인습을 깨고 광주항쟁을 계급투쟁으로 해석하는 시도를 하면서,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민중 특히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묘사했다.
앞에서 '1980년대 가장 활동적인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소개했던 정도상은 많은 작품을 통해 광주항쟁을 다루었다. <발자국 소리> (1986), <십오방 이야기> (1987), <친구는 멀리 갔어도> (1988), <여기 식민의 땅에서> (1988)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여기 식민의 땅에서>는 제목이 암시하듯 '미제'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한국인들을 착취하고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기 위해 광주학살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군사독재의 살인적 야만성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이 활동적인 반미 작가는 1988년 '5월문학상'을 받았다.
셋째, 미국은 다국적 또는 초국적 기업을 통해 한국을 '착취'하는 '제국'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소설은 1987년 가을 내내 전국적으로 분출되었던 노동자 투쟁의 물결에 이어 1988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도상은 한미 공동투자회사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야만적으로 진압하는 것을 그린 <새벽 기차> (1988)를 발표했다. 유순하는 1988년 <내가 그린 내 얼굴 하나>, <내가 그린 네 얼굴 하나>, <생성>이라는 세 편의 소설을 통해 미국인 소유 회사에서의 노동분쟁을 다루며 미국의 경제적 침략을 묘사했다. 이에 그는 1989년 아산 문학상을, 1991년엔 김유정 문학상을 받았다.
아마 이 부류의 소설 가운데 가장 강렬한 반미적 작품은 김인숙이 1988년 발표한 <성조기 앞에 다시 서다>일 것이다. 그녀는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 기업의 자회사에서 일어나는 노동투쟁을 다루면서 주인공의 가족사를 통해 1945년부터 이루어진 미국의 '제국주의적 약탈'의 실상을 그렸다. 그 회사의 한국인 관리자는 그가 어렸을 때인 미 군정 시절 미국인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해 무고한 한국인 수십 명을 어떻게 죽이고 해쳤는지 증언한다. 그는 양키들에 대한 극도의 원한과 증오를 품어왔지만, '더러운 미국 놈들의 앞잡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것이 미국의 깃발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미국은 이른바 '분단문학'을 통해 한반도 분단을 꾀하고 한국의 독립을 방해한 나라로 묘사되었다. 한국 지식인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특히 미 군정 시기 또는 '해방공간'에 대한 한국현대사를 공개적으로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81년 <한국전쟁의 기원>을 펴낸 미국인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를 비롯한 수정주의 학파의 영향으로 베일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금기를 깨는데 소설가들이 합류했다.
강용준은 1985년 한국전쟁 중 한국인 부대를 욕보인 미국의 군사전술에 분노를 표출한 <파도야 파도야>를 펴냈다. 이태는 1988년 두 권짜리 <남부군>을 통해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펼쳐진 빨치산활동을 미군의 점령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극우세력들에 대한 민족해방투쟁으로 특징지었다. 이 빨치산 출신 작가는 1988년 국회의원이 되었고, 이 작품은 1990년대 초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었다.
권운상 역시 1989~1991년 펴낸 9권짜리 대하소설 <녹슬은 해방구>에서 빨치산 활동을 민족해방투쟁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1990년 6월 연세대학교에서 마당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김달수는 1946년 가을의 인민봉기들에 초점을 맞춰, 한반도 분단과 점령을 정당화하는 미 군정의 다양한 책략들을 보여주는 두 권짜리 <태백산맥>을 1988년 출판했다. 재일동포 작가인 그는 외세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을 보여주기 위해 원래 이 작품을 1964년부터 1968년까지 일본의 월간지에 연재했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1989년 전국 노동자 문화운동단체 협의회에 의해 노동자들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되었다.
위 작품과 똑같은 제목의 10권짜리 대하소설이 1986~1989년 출판되었다. 이 분야의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1990년대까지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다. 작가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실제상황을 파헤쳤다.
그는 한국전쟁이 북한에 의한 기습공격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민족해방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암시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한국인들과 미국 사이의 전투라는 결론을 내리며, 미국은 '인디언'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원주민들을 몰살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노예화하면서 현재의 상태로 발전했다고 비판했다. 이 소설 역시 전국 노동자 문화운동단체 협의회가 1989년 노동자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추천하였다.
한림화는 1948년의 제주 4.3항쟁을 소설화한 세 권짜리 <한라산의 노을> (1991)을 통해 이 항쟁은 미군점령에 대한 독립운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 '폭동'이 1948년 38선 이남에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이었다는 1980년대까지의 일반적 인식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역사적 사건은 7살 때 이를 직접 겪었던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이 1979년 <순이 삼촌>을 통해 처음으로 소설화했는데, 그는 미 군정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사이기도 했던 그는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이 소설은 배포금지 처분을 받았다.
다섯째, 미국은 이른바 '통일문학'을 통해 전쟁을 도발하며 한반도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으로 묘사되었다. 소설가들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 전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안정효의 <하얀 전쟁> (1983)과 그것을 영어로 옮긴 (1989), 이상문의 <황색인> (1987), 황석영의 두 권짜리 장편 <무기의 그늘> (1985, 1988), 그리고 홍파의 역시 2권짜리 장편 <지저스 크라이스트 주니어> (1993)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미국에서 출판된 안정효의 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을 얻었다. "실제로 베트남전쟁에서 공포의 하얀 훈장을 받은 한국인 작가의 뛰어난 소설 <하얀 전쟁>은 한국과 베트남에서 자행되는 미국의 신식민주의를 거부하는 민족주의적 면모와 함께 전쟁의 광증과 타락상을 고발한다"
안정효처럼 베트남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에서는 반미감정이 더 많이 드러난다. 전쟁터 베트남에서의 블랙마켓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제침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미국의 달러야말로 제국주의 세계질서를 이끄는 미국의 신분증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은 원래 1975년 연재되기 시작해 정부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가 1980년대 초 다시 시작되다 또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어렵게 출판되었다. 실제로 한국의 독재정권은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소설에서조차 미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1989년 작가는 만해문학상을 받았고, 작품은 전국 노동자 문화운동단체 협의회에 의해 노동자들의 필독서로 추천되었다.
일부 작가들은 미국의 핵정책을 비난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1980년대 말부터 전개된 반전반핵 시민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남정현의 <핵반응> (1988)과 정도상의 <겨울 꽃> (1989)을 들 수 있다. 윤정모는 1988년 <빛>을 통해 1976년 시작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팀스피릿을 비판했다. "미군만도 37만과 두 척의 핵 항공모함까지 참여"한 이 연례훈련은 "안보 강화가 아니라 하와이, 캘리포니아, 워싱턴 등지의 새로 신설된 경보병사단의 훈련장으로 활용된 측면"이 크며,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 군사적 지배의 지렛대로 활용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무렵 이 군사훈련은 미국과 남한이 주장해온 대로 '방어훈련'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공격훈련이며, 한반도 통일에 가장 큰 방해물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윤정모의 <고삐> (1988)는 1980년대 그녀를 가장 유명한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만든 가장 반미적 작품일 것이다. 독특한 이력을 지닌 그녀의 "파란 많은 가족사"를 통해 그야말로 "미국 제국의 모든 악행들"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1945년 한반도를 분단했다. 1945~48년 군정을 펴는 동안 공장을 몰수하고 시위자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1950~53년 한국전쟁 때는 농토를 압류하고 마을을 폭격했으며 여인들을 집단 강간했다. 1980년대에는 광주학살을 공모했고 군사독재를 지원했다. 제국주의적 착취를 일삼으며 한국시장을 개방하라고 커다란 압력을 행사했다. 한반도 통일을 가로막으면서 핵무기를 배치해놓고 있다. 미군들은 한국인들에 대해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한국에 GI(미군 병사들에 의한 저급문화를 속칭하는 표현) 의한 문화를 침투시켰다.
그녀는 책 말미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소설은 거의 자전적이다. 나는 물론 도덕이 뭔지도 모르는 어미를 가졌고 GI와 결혼한 성이 다른 동생도 있다. 또 그 동생의 남편에게 우리 민족을 이해시키려다가 실패하기도 했고 결국은 원수가 되어 헤어지는 파경도 겪었다..... 동생을 친미광으로 고발할 땐 내가 당했던 당시의 일이 떠올라 다시금 분노에 몸을 떨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만약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면, 미국이 조선을 일본 식민지로 넘겨주지 않았다면, 또는 1945년 일본으로부터 이 땅을 되빼앗고 점령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분단 조국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운 부모 형제를 사할린에, 중국에, 일본에, 바로 지척인 북한에 두고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비극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스물다섯 살까지 환락가나 유흥업소 여성들과 매우 가깝게 부대끼면서" 살아오다, "매춘과 윤락은 외세와 깊은 함수관계가 있다는 것을" 마흔 살이 되어서야 겨우 깨달았다며, 이제 미국이라는 "고삐를 끊고 당당히" 나가자고 호소한다. 이 소설은 1990년대 초까지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1991년 <한겨레신문>에 의해 대학 신입생들이 읽어야 할 20권의 책에 뽑히기도 했다.
실제로, 내가 1993년 여름 전국의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대학 1학년 때 <고삐>를 읽고 충격을 받아 활동적인 반미주의자가 되었다는 한 여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한국의 지나친 친미정권 아래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정보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던 학생들에게는 '픽션'조차도 충격적이었고 반미운동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맥과이어와 파파죠지스 (Mcguire and Papageorgis)가 1961년 제시한 이른바 '(예방)접종 효과' (inoculation effect) 가설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이나 언론을 통해 미국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긍정적 모습도 배우고 부정적 측면도 접했다면 맹목적 친미로 흐르거나 갑작스런 반미에 빠지지 않을 텐데, '미국은 세계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나라'라고만 보고 듣고 배워오다가 악하고 추한 일도 많이 저질렀다는 소설책 한 권에 충격을 받아 반미운동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미국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예방접종을 하지 않아 반미에 대한 면역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1980년대 말 '북한 바로 알기 운동'과 함께 전개된 통일운동은 이른바 '통일소설'의 등장을 불러왔다. 김규동을 비롯한 18명의 작가들은 한반도 통일을 염원하는 29편의 콩트를 써서 <임진강 흘러 하나 되리> (1988)라는 소설집을 출판했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미국을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비판했다. 1990년 8월에는 다른 작가들이 통일에 대한 콩트를 일간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한겨레신문> 1990년 8월 26일 자에 실린 마지막 회는 남정현의 <그래도 양코배기>였다. 제목이 풍기듯 미국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세월오월' 홍성담 작가, 30년 전에도…
8. 1980년대 미술 속의 미국 (1)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청년 미술가들을 저항 운동가로 이끌었다. 광주에서 항쟁이 일어나자 '광주 자유미술인협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 미술가들은 다양한 선전활동을 펼쳤다. 사람들에게 전단과 피켓 그리고 현수막 등을 돌리고 자동차, 건물 벽, 전봇대, 길거리 등 조그만 여백이라도 있는 곳엔 반정부 및 반미 구호를 그렸다. 1982년엔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다. 나아가 외세와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봉건잔재에 대한 투쟁에 초점을 맞춘 민중미술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 민중미술 운동을 전개했던 다른 진보적 미술인 모임은 '현실과 발언'이었다. 이 그룹은 1980년부터 한국의 정치와 사회 상황에 초점을 맞춘 전시회를 해마다 열었는데, 1980년 11월 첫 전시회에서부터 반미적 작품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오윤의 '마케팅 I - 지옥도'는 한국이 코카콜라를 비롯한 미국산 소비재들로 가득 찬 생지옥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원동석의 '달러를 쳐다보는 원숭이떼들'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 지배를 암시했다.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이 그룹은 1988년 말 미국에 대한 한국의 종속을 주제로 반미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는 미국의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강연과 토론회도 가졌다. 전시된 작품 가운데 임옥상의 몽타주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 I'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 역사를 보여주고, 박불똥이 미국 국기와 코카콜라병 등 혼합재료로 설치한 '코화카염콜병라 (코카콜라 화염병)'은 미국이 붕괴되길 바라는 뜻을 담았다.
미술평론가 최열에 따르면, 1983년부터 대학생들이 미술운동 동아리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원광대학교 등에 민중미술반, 민화반, 판화반 등이 들어선 것이다. 1984년 7월엔 전주에서 대학생 미술활동가들을 위한 연합수련회가 일주일간 열렸는데 여기서 채택된 그들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민중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미술 활동을 통해 통일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나아가 한국이 신식민주의와 봉건독재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민중미술 운동의 목표를 외세와 봉건독재 그리고 독점자본 등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세력들을 물리치는 데 맞추어야 한다고 했다.
1985년 11월엔 150여 명의 진보적 미술가들이 '민족미술협의회'라는 전국적 단체를 출범시켰다. 그들은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는 제도적 압력과 책동을 극복하고 한반도 통일에 기여할 것을 선언했다. 그들의 미술운동에 획기적 사건은 <그림마당 민>이라는 미술관을 연 것이었다. 1986년 2월 문을 열면서부터 민중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다양한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었으며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미술 활동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자주 확립', '외세 거부', '신식민주의 반대' 등의말을 통해 표출되었다. 민족미술이나 민중미술은 선전선동 차원에서 반미감정을 드러내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미술운동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로부터도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 1984년 8월 30일 자 보도에 따르면, 1980년부터 1984년까지 1980년대 전반기에만 130회 이상의 전시회가 열렸고, 이 운동에 참가한 예술가들은 100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수의 반미적 작품이 전시된 '해방 40년 역사전'은 1984년 8월부터 12월까지 36일 동안 5개 도시에서 4~5만 명의 관중을 기록했다.
반미 미술작품을 그 형태에 따라 일곱 종류, 그리고 내용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어보았다. 첫째, 1980년대 초 새로운 미술운동의 가장 대중적 매체는 판화였다. 비교적 싸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술가들은 1983년부터 민중이 직접 만들며 즐길 수 있도록 대중을 위한 다양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분야의 선도자는 수많은 반미 판화를 만들어낸 홍성담이었다. 1982년 한국 최초로 판화 달력을 제작했던 작가다.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광주항쟁을 연결해 구성한 작품 '세월오월'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묘사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판화를 통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방조를 폭로하고 미국과 일본의 신제국주의 아래 놓여있는 한국을 묘사했다. 한국인이 미국인을 상징하는 엉클 샘을 짓밟고 미국 국기를 찢는 모습을 통해 한국이 미국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판화를 만들기도 했다. 1985년엔 광주항쟁에 관한 200여 점의 작품이 경찰에 압수당하기도 했는데, 그는 1987년부터 몇 권의 판화집을 출판했다.
황재형의 '코카콜라' (1985), 문영태의 '광화문 거리' (1986), 김방죽의 '오뉴월 땡볕 공화국' (1986) 등은 한국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지배를 보여주었다. 유연복은 '미국에 대한 독립투쟁' (1989)을 통해 한국인들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을 거부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했다. 박경훈은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 당신의 조국' (1992)에서 제목이 가리키듯 미국의 통제 아래 있는 한국의 군사독재를 묘사했다.
둘째, 1980년대 후반 정치적 집회가 허용됨에 따라 커다란 걸개그림이 민중미술 운동의 유력한 도구가 되었다. 흔히 여러 미술가들이 집단으로 창작한 거대한 그림은 1980년대 말 학생데모나 노동쟁의 등을 포함한 대규모 집회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유행했다. 많은 미술가들은 걸개그림에 미국을 상징하는 대통령, 엉클 샘, 성조기, 핵무기, 그리고 미국의 공산품이나 농산물 등을 물리치거나 파괴하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반미주의를 드러냈다.
1980년대에 최초로 등장했던 걸개그림은 '민중의 싸움'으로, 1984년 광주의 한 문화행사에 전시된 가로 12미터에 세로 25미터 짜리였다. 한국인들이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미국인들에 대항해 투쟁하는 내용이었다.
1987년까지 아마 가장 반미적인 걸개그림은 전정호와 이상호가 그린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 (1987)였다. 폭 6미터, 높이 3미터의 그림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담고 있었다. 노동자는 성조기를 불태우고, 농부는 성조기를 반으로 찢으며, 미국 핵무기는 한국인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전투경찰이 시민의 목을 조르고, 그 전투경찰의 머리를 쓰다듬는 전두환 대통령의 머리를 레이건 대통령이 쓰다듬는데, 레이건의 머리 위에 젊은이가 남북한의 국화를 들고 오줌을 싼다.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들이 한국의 군사독재를 지원하는 미국을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던 것이다. 이 그림은 광주에서 1987년 8월 광복 42주년을 축하하는 문화행사에 처음 전시되었고, 일주일 뒤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그리고 1987년 9월 제주에서 전시되던 중 경찰에 압수되었고, 작가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미 걸개그림은 1980년대 말까지 주로 대학생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1988년 조선대학교에 걸린 '민족통일 민중해방', 전북대학교에 걸린 '우리는 하나', 1989년 호남대학교의 '미 제국을 처단하자', 한양대학교의 '양키는 미국으로' 등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그들 모두 한국인들이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위해 미국인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87년 가을 노동자들의 '대투쟁'을 거친 뒤에는 대형 그림들이 노동 현장이나 다른 공공장소에도 걸렸다. 여성 미술가들의 모임 '둥지'는 1988년 '맥스텍에서의 투쟁'이란 작품에 여성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초국적 기업을 운영하는 미국 자본가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그렸다. 1988년 부산의 메리놀 병원에 등장한 '우리의 노동조합'엔 미군들이 한국에 에이즈 (AIDS)를 들여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겼다. 1988년 부산 시내 길거리에 내걸린 '아! 양영진'은 그해 10월 부산대학교에서 "양키 고 홈"을 외치며 투신자살했던 양영진이 부활해 반정부 및 반미 데모를 벌이며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을 체포하고 미국 국기를 찢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그는 한국의 군사독재와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다 그에 대한 정부의 보복으로 군대에 강제 징집을 당한 터였다.
1990년대 초까지 가장 크고 가장 주목받았던 걸개그림은 1989년의 '민족해방운동사'였다. 1980년대 말 전개된 통일운동의 영향을 받아 200여 명의 미술가들이 1988년 12월부터 1989년 3월까지 11개의 패널로 창작한 것이었는데, 높이 2.6m에 폭이 무려 77m였다. 이 그림은 1894년부터 1989년까지의 한국 역사를 담고 있는데 이 가운데 미국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드러났다.
1945~48년의 남한 점령, 1950~53년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1961년부터의 군사독재 지원, 1980년 5월의 광주학살 방조, 1987년의 6월항쟁 개입, 그리고 1987년 이후 민족자주 및 통일운동. 나아가 미국 국기를 훼손하는 모습을 통해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힘을 모아 미국을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 그림은 1989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국에 걸쳐 15개 이상의 대학교에서 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 시내와 부산역 광장 등에도 걸렸다.
게다가 이 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이 1989년 6월 평양으로 보내져 북한 미술인들에 의해 다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원본은 경찰에 의해 파괴되고 10여 명의 작가들이 체포되었다. 창작을 주도했던 홍성담이 7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자, 국제 앰네스티 등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다른 미술가들은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1990~91년 '자주 민주 통일'의 기치 아래 전국적으로 '민족자주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하와이는 미국 땅, 한반도도 미국 땅, 독도만 한국 땅?
10. 1980년대 음악 속의 미국
1980년대 독재정권이 정치적 집회를 금지하고 탄압하자 정권에 항의하는 노래가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집회가 열릴 수 있을 때 시위 노래를 부르면 국외자 또는 관중을 끌어들이고, 참가자들 사이의 연대를 강화하며, 전투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항의 노래의 초기 단계에서는 시위자들이 주로 유행가의 노랫말을 바꿔 부르는 이른바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노가바)가 일반적이었다.
시위 노래 만들기는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의식화 또는 지하 문화교육을 위한 필수 프로그램이었다. 노동자들이 바꾼 노랫말 내용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의식화했는지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사를 바꾼 노래들 가운데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깃든 부분을 몇 가지 소개한다.
요즘도 널리 불리고 있는 <독도는 우리 땅>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하와이는 미국 땅, 한반도도 미국 땅, 독도만 한국 땅" 1982년 크게 유행했던 <어쩌다 마주친 그대>라는 곡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붙었다. "어쩌다 빌려 온 양키놈 돈에 우리 공장 문 닫아버렸네. 어쩌다 빌려 온 쪽발이 돈에 우리들은 갈 곳이 없네" 원래 가사는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이 내 마음을 빼앗아버렸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두 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네"였다. <가요 가요 나는 가요>는 다음과 같이 불렸다. "가요 가요 나는 가요 ..... 몸 팔러 가요 / ..... / 쪽발이 양키에게 몸 팔러 가요"
대학생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캠퍼스나 교회 등에 노래 동아리를 만들었다. 1984년엔 민중 가수들이 개인적으로나 그룹을 만들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시위 노래를 창작해 팸플릿, 책자, 테이프, 디스크 등을 통해 유포했다. 이러한 민중 노래는 '투쟁을 위한 도구'에서 '생활가요'로 발전했고, 나아가 유행가를 대체하기도 했다. 민중 음악 또는 민족음악을 통한 노래운동에서 반미적 내용은 다음과 같이 표출되었다.
첫째, 음악 비평가들이나 음악학자들은 기존 유행가를 비판했다. 김창남은 유행가가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왜곡하거나 대중을 조작하는 데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이건용은 한국인들이 일본 가요뿐만 아니라 미국 팝송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본의 노래와 영화는 1945년부터 공식적으로 수입이 금지되었다. 우리를 식민통치했던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이에 반해 미국의 노래와 영화는 아무런 제한 없이 한국에 들어왔다. 이에 이건용은 한국이 미국의 문화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퇴폐적이고 쾌락만 추구하는 미국 팝송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하는 데 대해 비판한 것이다. 김남일은 미국 팝 음악의 문화 제국주의적 특성을 지적했다. 미국이 팝 음악을 통해 제 3세계 대중의 인기를 끈 뒤 음악과 관련된 상품을 강제적으로 수출함으로써, 미국 팝음악이 제 3세계에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무기로 사용되어왔다는 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 전개된 생활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대학생들은 미국 팝송 부르지 않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비슷하게 서울지하철 노동조합 라디오방송국은 1988년 미국 팝송을 방송에 내보내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둘째, 음악 비평가들이나 음악학자들은 한국의 제도적 음악교육을 비판했다. 이영미는 초등학교의 음악 교과서가 어린이들에게 반공, 안보, 근대화 등 국가 이데올로기나 정책을 주입시킨다고 주장했다. 조영주는 중고등학교의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는 국민가요가 반공정신을 주입시키기 위해 한국의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고교 음악책에 미국 민요가 압도적으로 많이 실려 있다며 음악 교과서 저자들의 미국에 대한 노예적 복종을 꼬집었다. 실제로 다섯 종류의 음악책을 조사해보니 미국 민요는 평균 12곡이 실린 데 반해 아시아 민요는 1곡, 라틴아메리카 민요는 2곡, 아프리카 민요는 1곡씩만 실렸다는 것이다.
셋째,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전통음악 부흥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널리 알려진 민중시인 신경림은 40여 명의 문인 및 예술인들과 함께 1984년 6월 '민요연구회'를 조직했다. 민요를 발굴하고 창작하며 유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국 민요의 부흥을 통해 민족의식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발맞춰 문승현은 라틴아메리카의 민요 부흥에 의해 미국의 재즈 음악이 근절되었다고 지적하며 민요가 신식민주의적 음악의 영향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고 주장했다.
'민요연구회'는 많은 반미 노래를 창작했다. 창작곡 <임진강 뱃사공>은 미국인들이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약탈했다며 한국에서 철수하라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해야 솟아라>에서는 외국의 노래와 춤 그리고 언어가 한국을 지배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한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가사를 붙인 <꼭두 아리랑>은 미국인들이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한인 여성들을 강간하며 한국의 군사독재를 지원하는 것을 비난하는 등 강렬한 반미감정을 담았다.
이 연구회는 1990년 <아들아, 이젠 말하리라!>는 제목의 민요 판굿을 열기도 했다.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기업인 피코에서 1989~1990년 전개되었던 노동투쟁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었다. 이 판굿에서 <피코 투쟁가>와 <민족해방가> 같은 반미 민요가 불렸다.
1990년엔 일단의 음악인들이 부르주아 지배문화를 극복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다스름'이란 국악 모임을 만들었다. 이 진보적 국악인들은 노동계급이 미국 제국주의 아래의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선도하라고 촉구했다.
넷째, 1980년대 중반부터 민중 가수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대중가수였던 정태춘이 1980년대에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민중 가수였을 텐데, 그는 몇 곡의 반미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먼저 1983년 발표한 <인사동>에서 "양코쟁이 게다 신사 납신다"며 미국인과 일본인들을 비하했다. 1984년 발표한 <고향집 가세>에서는 "음,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 음, 융단 같은 골프장 잔디와"라고 노래함으로써 미군부대의 '오만한 외모'를 비꼬았다. 이 노래들이 디스크에 삽입되자 검열관들은 미국에 대한 부정적 묘사를 모두 지워버렸다. 미국에 대해 이처럼 완곡한 비판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1990년 발표한 <그대, 행복한가>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미국을 비판했다. 몇 소절을 그대로 아래에 옮긴다.
".../ 그대 행복한가 / 시장 개방 자유 경제 수입 식품에 / 입맛 돋으시는 그대 그대 / 그래 거기에도 칼로리와 땀 / 냄새는 있지 있어 / 그대 행복한가 / 주한 미군 기동 훈련과 / 핵무기에 고무 받으시는 그대 / 그대 그래 거기에도 평화와 / 인도주의의 구호는 있지 있구 말구 /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 우리 중 누가 그것들의 / 희생양이며 표적인지 / 정말 알고 있나 알고 있나 /..."
같은해 1990년 발표한 <아, 대한민국>에서는 "식민 독재와 맞서 싸우다 /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 사라져 간 사람들은 말고"라며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것을 암시했다. 이영미의 조사에 따르면, 이 노래는 1990년대 후반 각종 정치집회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였으며 1980년대 3대 민중가요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민족예술> 1992년 8호에 의하면, 정태춘은 1991년 12월 '민주시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뽑혔다.
정태춘의 음악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에서는 더 강렬한 반미감정이 드러났다. 음악극의 제목은 초등학교 1학년 음악책에 나오는 널리 알려진 동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는 한국의 전통 소는 노란색인데 반해 미국 소가 얼룩무늬를 띠고 있기 때문에, 동요의 '얼룩송아지'는 '누렁송아지'로 바로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음악극을 1989년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미국이 한국의 농업시장을 개방하라고 거센 압력을 가하는 것에 대해 농민들이 반미 시위를 자주 벌일 무렵이었다. 1980년대 한국과 미국 사이에 무역 마찰이 가장 심각한 품목이 미국산 쇠고기와 담배였기에, 농민들이 시위하면서 외친 구호 가운데 하나는 "한국 소 죽이는 미국 소 몰아내자"였다.
정세현은 광주 지역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잘 알려진 민중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87년 노래패를 만들고, 1990년엔 한국 음악에 대한 서양 문화의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 고전음악 연구회를 조직했다. 당연히 그는 많은 반미 노래를 불렀다. <통일은 언제일까>에서 분단을 원망했고, <꿈은 아닐레라>와 <혁명 광주>에서는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고 외쳤다. <통일의 나라로 가자>에서는 미국인들을 제국주의자로 부르며 적으로 간주했는데, 이 노래는 1988년 한반도 통일을 위한 노래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진군가>에서는 미국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민족해방투쟁을 주창했다. 이 밖의 많은 노래에서도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단어 두 개는 '해방'과 '통일'이었으니, 반미 내용을 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는 정세현이 1980년대에 미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그가 1987년 어느 주말 한 라디오 생방송 음악 프로그램에 초대되었다. 사회자와 대담을 나누던 중 그가 갑자기 미국인들이 1945년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던 한인들을 쏴 죽였다고 비난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인 환영인파를 쏴 죽인 건 미군 사령관의 부탁을 받은 일본군들이었지 미군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사회자가 그의 말을 급히 가로막았는데, 그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하던 정보기관원이 나중에 사회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많은 학생 가수들은 미국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을 표출했다. 1980년대엔 거의 모든 대학에 노래패가 들어섰다. 그들은 민중가요를 수집하고 창작했으며 다양한 인쇄물을 통해 보급했다. 캠퍼스 안팎에서 공연도 했다. 내가 1993년 6~7월 전국의 38개 대학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노래 팸플릿과 책자들에 수록된 300여 곡의 노랫말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해방'이었다. 한국이 미국의 신식민지 아래에 있거나 진정한 독립국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몇 곡의 노래들은 제목 자체가 다음과 같이 반미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반미출정가> 시리즈, <반미 민족해방 통일가>, <들어라, 양키>, <반전반핵 양키고홈>, <민족해방가> 시리즈, <자주통일가>, <코카콜라>, <기지촌>.
아마 1990년대 초까지 대학가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널리 알려진 노래패는 1977년 만들어진 서울대학교의 '메아리'였을 것이다. 이 동아리는 유명한 민중 가수를 많이 배출했고 해마다 노래책을 발간해 일반서점을 통해 판매하기도 했다. 특히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출판된 제 7-9집엔 무수한 반미 노래들이 실렸는데, 이 가운데 제9집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배포 금지되었다.
윤민석은 한양대학교 노래패 일원으로 학생들에게 유행했던 노래를 많이 지었다. 1988년 발표한 <반미출정가>에서 그는 미국을 묘사하는 데 "철전지원수 미제" 등 극단적 어휘를 적지 않게 사용했다. 1989년 발표한 <애국의 길>에서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반미투쟁을 벌이라고 촉구했다. 이 반미 노래는 1990년대 초까지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그는 1991년 12월 '민주시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두 번째로 선호하는 작곡가로 뽑혔다.
1987년 가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단체인 <노동자 노래단>이 1988년 창립되었다. 이들은 1992년까지 적어도 네 개의 노래테이프를 제작했고, 100회 이상의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 다른 노래모임 <예울림>과 함께 <꽃다지>라는 이름으로 통합 확대되었다. 이들의 <노동조합가>는 한국의 민족자주, 민주, 한반도 통일을 주창했고, <전노협 진군가>는 노동자들에게 한국에서 날뛰는 외세들에 대항해 투쟁하라고 촉구했다. 이 두 곡은 1990년대 초까지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들이었다.
<꽃다지>는 노동과 관련된 노래만 부른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들은 <1노 2김가>를 만들어 보급했다. 1990년 대통령 노태우와 보수적 야당지도자 김영삼과 김종필이 진보적 야당지도자인 김대중에 대항해 이른바 '3당 통합'을 이룬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3당 통합'이 미국의 정치조작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이 노래는 1991년 12월 '민주시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의 하나로 뽑혔다. 그리고 <한겨레신문> 1991년 2월 3일 자에 따르면, 많은 노동자들이 이 노래를 통해 그들이 왜 정치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를 만든 김호철이 주장했듯 민중가요는 민주화운동의 '훌륭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김호철은 위에 소개한 3곡의 노래를 포함해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 70~80곡을 만들었는데, 그는 1991년 12월 '민주시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지지로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다섯째, 반미 노래는 문화운동이나 정치투쟁 대신 1980년대 말부터 흔히 열렸던 다양한 음악 행사에 자주 등장했다. 1988년부터 대학생들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연례 노래 경연대회를 갖기 시작했다. 대개 전국에 걸쳐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모이는 노래대회에 선보인 거의 모든 노래엔 반미적 가사가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미제놈'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묘사한 정세현의 <통일의 나라로 가자>는 1988년 제1회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한국 민족예술인 총연합'이 주최한 두 가지 음악 행사는 다양한 종류의 비슷한 행사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하나는 1990년부터 매년 봄에 열린 <자, 우리 손을 잡자>는 음악회였다. 다른 하나는 1989년부터 매년 가을에 실시된 <노래 판굿 꽃다지>라는 음악극이었다. 이 두 가지 행사는 매일 수만 명의 관중을 동원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몇 곡의 반미 노래가 불렸다.
노래경연대회, 음악회, 음악극 등을 포함한 음악행사들은 흔히 대규모로 열렸다. 그 이유로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정치적 집회보다 문화 행사를 갖는 게 정부의 허가를 받기 쉬웠다. 둘째, 한국에서 민주화가 서서히 성취되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 행사가 정치적 집회보다 많은 관중을 동원할 수 있었다. 셋째, 노래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지식이나 큰돈 없이 유포되고 감상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가장 유용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넷째, 노래는 주로 연극을 비롯한 다른 예술 장르와 쉽게 통합될 수 있었다.
이렇듯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담은 노래의 형태는 가사를 바꾼 노래들, 행진곡, 민요, 영화주제가, 그리고 심지어 찬송가까지 포함했다. 그리고 가사에 드러난 반미적 내용은 민족 분단, 반전 반핵, 미군 기지촌의 현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등이 포함되었다.
'세상과 어울리기 > 시사만평-주간 쟁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5.22~29 노를 그리워 하다 (0) | 2015.05.30 |
---|---|
5.17~23 사랑도 명예도 남김없이 (0) | 2015.05.22 |
5.4~5.9 이렇게 흐르기만 하는가 (0) | 2015.05.08 |
4.27~5.2 새누리 돈 먹고 표 먹고 (0) | 2015.05.01 |
4. 19~4.25 무능함과 책임 회피를 봐주기에는 국민이 이미 지쳤다 (0) | 2015.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