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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8 걍향 장도리
44년 만에 그린벨트 개발 지자체로… 정부, 환경보호 제어기능 떠넘겼다 5.6 경향
ㆍ제3차 규제개혁 장관회의
ㆍ환경단체 “정부의 직무 유기”
ㆍ“미래 유산 국가가 관리 해야”
정부가 6일 도시의 허파 역할을 해온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의 해제 권한을 44년 만에 지방자치단체에 넘기기로 한 것을 두고 전문가와 환경단체들은 난개발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환경규제 모범사례로 평가돼온 그린벨트 정책 취지가 대폭 퇴색하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토교통부는 30만㎡ 이하 규모의 사업을 할 경우, 시·도지사가 직권으로 그린벨트를 해제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그동안 취락 구역이나 경계선 지역의 해제 권한을 지자체에 준 적은 있지만, 일반 사업에 대한 해제 권한을 준 것은 처음이다. 국토부는 난개발을 방지하기 위해 해제 총량(233.5㎢) 범위 내에서 환경보전 가치가 낮은 지역(그린벨트 환경등급 3~5등급)에 한해 해제 권한을 주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해제 전 관계부처의 사전협의와 주민 의견수렴, 환경영향평가 등도 진행할 계획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열린 규제개혁 장관회의에서 “전에는 그린벨트 하면 도시 주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미래세대가 활용할 토지를 남겨 둔다는 보존적 차원에서 접근을 했는데, 이제는 주민들의 생활 불편을 해소하고 재산권 침해를 해소하는 개발적 가치 차원에서도 접근할 필요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린벨트는 1971년 박정희 정부가 전국의 도시 주변에 5397㎢를 지정한 뒤 운영돼 왔다. 그동안 주택 건설, 주민 재산권 제한 등의 이유로 상당수가 해제되고 3862㎢가 남았지만, 중앙정부의 엄격한 관리하에 운영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그린벨트는 ‘도시의 허파’로 불리며 도시가 무분별하게 확대되는 것을 막고 환경과 상수원을 보호하며, 도시민의 여가 공간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도 한국의 그린벨트를 모범적인 도시관리 모델로 제3세계에 소개할 정도였다.
정부의 이번 조치에 대해 환경단체와 학계는 “지자체의 개발 욕구로 인해 전 국토의 난개발이 우려된다”고 반발했다. 김동언 서울환경연합 생태도시팀장은 “정부가 해제 권한을 갖고 있어서 그나마 난개발을 막아 왔는데, 제어기능을 상실하게 됐다”고 말했다. 선출직인 지자체장은 미래의 환경 피해보다는 눈앞에 닥친 주민들의 개발 요구에 더 민감하다. 김 팀장은 “국토의 훼손을 막아야 할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고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명래 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도 “지자체에 도시계획권 전반을 주지 않고 그린벨트를 해제할 권한만 주면 오히려 남용될 가능성이 많다”면서 “그린벨트는 우리가 미래세대에 남겨줄 유산인 만큼 공익을 생각해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과 환경정의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재검토를 요구했다. 이들은 “정부는 보전가치가 낮은 환경평가 3~5등급만 개발 대상이어서 난개발 우려가 없다고 하지만, 1~2등급은 사실상 산의 정상부가 대부분으로 도시 개발 자체가 어려운 지역”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부는 30만㎡ 이하가 중소 규모 사업이라고 하지만, 그린벨트를 개발하기에 충분히 큰 규모”라고 말했다. 또 “정부가 ‘5년 이상 거주’ 조건을 없애고 거주기간과 상관없이 주택 등 시설을 증축할 수 있게 해 외지인들의 편의를 봐줬다”고 밝혔다.
정부의 그린벨트 규제 완화 방침에 대해 “수도권 그린벨트에 개발이 집중되면서 사실상 수도권 규제 완화 효과를 내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세월호 유족에게 “이제 돈 걱정 없지 않냐”고? 5.5 미디어오늘
[인터뷰] 세월호 희생자 고 남지현 학생 언니 남서현씨 “있는 그대로만 보도해달라 부탁했는데…”
가장 두려운 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라는 질문이에요. 동생이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나이를 물어볼 텐데. 나는 계속 나이가 들어가는데 내 동생은 계속 17살이에요. 사람들이 ‘나이차가 왜 이렇게 많이 나?’ 그러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하죠? 그런 게 무서워요.”
서현씨(23)씨는 지난해 동생을 잃었다. 단원고 2학년 2반 남지현 학생이다. 동생은 작년도 올해도 17살에 멈춰있다. 멈춰있는 건 동생의 나이만이 아니다. 서현씨는 자신의 시간이, 엄마아빠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 그는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1년이 지났는데 제 체감상 지금이 한 (2014년) 5월쯤 된 것 같거든요.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요”라고 말했다.
기억나는 건 장면 장면이다. 전원구조 오보, 단원고에서의 비명들, 팽목항에서 쓰러지던 사람들, 기자들에 둘러싸여 지나가던 대통령, 동생이 나오던 날의 화창한 날씨, 단원고 책상 위에 놓인 무수한 국화다발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매일 밤 울면서 잠드는 거? 언제쯤이면 안 울고 잠들 수 있을까요.” 지난 4일 안산 고잔동에 위치한 형제자매 공간 ‘우리 함께’에서 서현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언론이 할 일인데 지금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보도해달라’고 부탁을 해야하니까요. 사실 1주기 맞춰서 쉴 새 없이 인터뷰를 했어요. 그런데 슬픈 기사들만 나가고 16일이 지나니까 정말 뚝 끊기더라고요. 지금 중요한 건 슬퍼하는 게 아닌데.” 서현씨의 지난 1년은 언론에 대한 불신을 확인하고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돈 걱정 없지 않냐고요? 우리는 지옥이에요”
사고 첫날부터 그랬다. 서현씨는 단원고로 갔다. 엄마는 동생을 데리러 진도로 내려갔다. “구조된 애들은 이름에 형광펜으로 표시가 됐어요. 체육관에서 대형스크린으로 뉴스를 보면서 형광펜이 쳐지기를 기다렸어요. 처음에는 전원구조라고 하다가 잠시 뒤 뉴스 속보가 떴어요. ‘전원 구조 오보, 대부분 배 안에 있는 것으로 추정’ 그게 뜨는 순간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악 소리를 질렀어요. 그 오열소리들, 잊히지가 않아요.“
진도에서 만난 언론의 민낯은 가관이었다.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대는 배려 없는 취재도 문제였지만 남일 보듯이 했다는 게 서현씨 생각이다. “첫 날 언론사 차 때문에 구급차가 팽목항으로 못들어왔어요. 가족들이 항의를 했지만 언론사들은 못들은 척하고 차를 빼지 않았어요.”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대통령한테 할 말이 너무 많고 대통령의 입장을 듣고 싶은데 기자들은 그저 대통령 얼굴 찍는 거에 바빠서 그런 걸 다 무시했어요. 기자들이 대통령을 다 둘러싸고 있어서 제발 기자분들 앉아달라고 앉아달라고 소리를 질렀죠. 가족들을 만나러 온 건지 기자들을 만나러 온 건지. 대통령이 체육관 가운데를 걸어갈 때는 얼굴도 못봤어요.”
1년이 지났지만 서현씨가 느끼는 언론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1년간 아무런 단체행동을 하지 않던 형제자매들이 지난달 5일 나선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당시 이들은 정부 시행령 발표에 대해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정부는 시행령을 발표하고 나흘 뒤인 4월 1일 배·보상 기준 발표했다. 사망한 단원고 학생들이 1인당 8억2000만원을 보상금으로 받는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그때 우리는 지옥이었는데 주변에서는 기사만 보고 ‘이제 돈 걱정은 없지 않냐’ 그런 말을 해요. 부모님께 돈 빌려달라는 연락도 오고 그래요.” 하지만 서현씨 가족은 여행자 보험금 1억 원도 받지 않았다. 보험금을 수령하려면 사망신고를 해야한다. “대체 어느 부모가 사망신고를 하고 싶겠어요? 시행령이 뭐가 문제인지 알려주는 기사는 없는데 가족들이 8억 받는다는 기사가 넘쳐났어요. 시행령은 완전히 묻혔어요.”
“꿈도 학업도 친구도 잃었는데 슬프지가 않아요”
동생은 사고 8일째인 23일에 나왔다. 유난히 화창한 날이었다. 수습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그날 가장 많은 아이들이 수습됐다. 엄마 아빠는 “오늘은 팽목항에 나가봐야겠다”며 팽목항으로 갔고 서현씨는 언니와 함께 진도체육관에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수습된 희생자들의 인상착의가 뜬다. 146번. 회색바지. 양쪽에 덧니. 검은색 시계. 소원팔찌. 맨발로 상황실로 뛰어갔다. 동생임을 확인한 서현씨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 방은 부엌 옆이다. 방문 바로 옆에는 정수기가 있다. 서현씨는 밤에 물을 마실 때면 동생이 잘 자는지 확인하곤 했다. “어느 날 밤에 물을 마시다가 갑자기 혹시 이 모든게 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거에요. 지현이 방문을 한번 열어볼까? 지현이가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방문을 열었는데 지현이가 없는거에요. 내 동생이 없는 거, 이게 정말 현실인거에요.”
사고 이후 서현씨는 막연한 공포를 느낀다. 가족 모두 불면의 밤을 보냈다. 한 동안 가족들은 한 방에 모여 잤다. 매일 새벽 3시가 넘어야 잠들었고 새벽 5시면 잠에서 깨 지현이 영정이 모셔진 합동분향소로 향했다. 서현씨는 갈 때마다 오열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서현씨는 사고 이후 6개월가량 외출도 거의 하지 못했다. 1년쯤 지나니 사람들은 서현씨의 졸업, 직장, 인간관계에 대해 염려한다.
“이전에는 꿈, 학업, 친구, 남자친구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4월 16일에 동생을 잃고 저는 제 모든 것을 잃었어요. 저한테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슬픔이 느껴지지 않아요. 예전에는 취업이 안 되면 초조했을 텐데 이제는 그런 게 없어요. 왜인지 아세요? 그런 건 다 2순위라서. 제가 지금 분향소나 단원고에 더 자주 못가면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아요. 그건 언젠가 없어지잖아요.”
“마음 아파하는 것보다 왜 우리가 이러는지 알아주세요”
서현씨처럼 지내는 단원고 희생자 형제자매는 안산에만 168명이다. 서현씨는 이 숫자가 무섭다. “저처럼 이렇게 지내는 사람이 이 동네에만 200명 가까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들은 지난 해 가을까지만 해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연락할 방법도 몰랐다. 그러다 지난 해 11월께 ‘우리 함께’라는 공간이 생겼다. 세월호 형제자매들을 돕는 사회복지네트워크다. 이제 형제자매들은 이곳에서 모인다. 서현씨가 외출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사람들을 만나면 웃으면 웃는다고 뭐라고 하고 울면 분위기가 다운돼요. 여기서는 그게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웃으면 웃을 수도 있고 갑자기 화를 내도 다들 이해를 해요. 어느 날 갑자기 잠수를 타도 내버려둬요. 죽음이라는 게 어느 순간순간 훅 들어와요. 가령 물을 마시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펑펑 울어요.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어요. 똑같은 아픔을 진도에서부터 지금까지 느끼는거니까.”
이들은 이 싸움이 길어지리라는 걸 안다. 서현씨는 처음에는 지난달 5일 형제자매 기자회견만 끝나면 마음이 후련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기자회견을 했던 날 서현씨는 밤새 울었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하지? 한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어요. 부모님들은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지만 그게 끝난다면 형제자매들은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해야 해요. 이건 저희의 몫이에요.”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세월호를 기록하다’ 저자 오준호 작가는 “시간이 지나면 팩트가 조금씩 망가지고 재구성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서현씨가 또래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알아달라’다. “마음 아파하는 건 이제 끝났다고 생각해요. 왜 우리가 이러는지 알아주세요. 모르기 때문에 행동으로 안 가는 것 같아요. 제가 친구들한테 서운한 것도 그런거에요. ‘슬프지?’라는 말 대신 같이 행동해줬으면 좋겠어요.”
내숭은 아……이제 그만 5.7 한겨레
공연계 ‘19금’ 바람이 분다
“훌리오!!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날 죽여/나의 리듬에 맞춰 크기도 속도도 조절해/내가 원할 때만 곁에 있어/말이 없어도 끝내줘/결정적 순간에 쉬지 않아.”
뮤지컬 <쿠거>의 8번 넘버 ‘훌리오’중 일부다. 여기서 말하는 ‘훌리오’는 과연 무엇일까?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바로 ‘여성용 자위기구’다. 너무 노골적이고 야하다고? 내숭은 집어치울 때가 됐다. 지금 공연계는 ‘19금 공연’으로 들썩이고 있다. 남녀의 성적 판타지를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작품들은 전통적인 공연 팬층인 20~30대를 넘어 40~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공략하며 흥행에도 성공하고 있다.
지난달 충무아트홀 소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쿠거>는 자위기구뿐 아니라 ‘섹스’, ‘오르가슴’, ‘46번 체위’등 성적 용어가 난무한다. ‘쿠거’(Cougar)는 ‘아들뻘 되는 젊은 남자를 후리는 중년 여성’을 의미하는 미국식 은어다. 뮤지컬 <쿠거>는 다소 거친 ‘19금 언어’를 통해 중년 여성들의 사랑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최근 공연계에 남녀의 성적 판타지를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19금 공연’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벗기는 것’에만 집착했던 과거와 달리 작품성과 완성도를 갖춘 예술성 있는 작품들도 늘었다. 사진은 뮤지컬 <쿠거>.
뮤지컬 <크레이지 호스>.
프랑스 파리에서 건너온 ‘아트 누드쇼’ <크레이지 호스>도 지난달 27일부터 워커힐 호텔 시어터에서 정식 공연에 돌입했다. 이 공연에서는 8등신의 미녀들이 100% 나체로 90분 동안 칼 군무를 선보인다. <크레이지 호스>가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기반했다면 오는 29일 롯데카드아트센터에서 재공연에 돌입하는 ‘19금 여성 전용 공연’ <미스터쇼>는 여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무대로 옮긴다. 조각 같은 외모에 완벽한 초콜릿 복근, 섹시한 엉덩이를 가진 8명의 미스터들이 여성 관객을 불러내 랩댄스(부비부비 댄스)와 핍쇼(훔쳐보기 쇼) 등을 선보인다.
뮤지컬 <미스터쇼>.
19금 공연의 향연은 대학로도 예외가 아니다. 오는 28일까지 바탕골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극적인 하룻밤>은 생판 모르는 남녀가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원나잇 스탠드’라는 소재를 다룬다. “우리 술 한 잔 하고 같이 잘래요?”, “너 나랑 정말 자고 싶냐?” 등 아슬아슬한 대사들이 이어지며 관객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한다.
최근 쏟아지는 다양한 장르의 19금 공연은 ‘청소년관람불가’를 전면에 내세운다. 더 많은 잠재 관객을 확보하기 위해 연령 제한을 없앴던 과거와는 다른 양상이다. 뮤지컬 <쿠거>의 경우 애초 ‘15세 관람가’에서 ‘19금’으로 관람 연령을 ‘상향 조정’했다. 노우성 연출은 “원작에 견줘 한국 넘버에 쓰이는 언어들이 훨씬 수위가 높고 직접적이다. 미국식으로 함축된 성적 유머를 한국어로 풀어내다보니 더 센 언어들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크레이지 호스>는 지난 1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등급 분류 및 추천에서 공연 허가를 받지 못했다가 2월 재심의를 통해 ‘19금 등급’을 받은 사실을 홍보에 적극 이용했다.
하지만 ‘19금’ 딱지가 붙었다고 단순히 눈요기에만 초점을 맞춘 질 낮은 공연은 아니다. 그저 ‘벗기는 것’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관객을 유혹했던 예전과 달리, 완성도 높은 작품성으로 승부해야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쿠거>는 소극장 뮤지컬임에도 박해미·김선경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다. 진정한 자아찾기라는 주제 속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만했던 중년 여성들에게 “내 삶의 여왕이 되라”는 메시지도 전달한다. 물랑루즈·리도쇼와 함께 파리 3대 쇼로 불리는 65년 전통의 <크레이지 호스>는 ‘전위 예술’에 가깝다. 여성의 나체를 캔버스 삼아 화려한 조명으로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펼쳐보인다. 크리스찬 루부탱·칼 라커펠트·장 폴 고티에 등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협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미스터쇼> 역시 지난달 일본에 진출해 호평을 받았다.
관객의 반응도 대체로 긍정적이다. 아내와 함께 <크레이지 호스>를 관람한 임영달(31)씨는 “성숙한 성인들이 이런 쇼를 즐기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다. 야하다기보다 공연 예술의 한 종류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쿠거>를 본 이오영(50)씨는 “중년 아줌마에게 딱인 화끈한 입담이 반가웠다. 앞으로도 건강한 19금 공연이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한국사회가 성적으로 점차 개방되고 텔레비전·영화 등 대중 장르에서 ‘19금 콘텐츠’의 노출 빈도가 잦아지니 19금 공연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도 변하고 있다”며 “비싼 티켓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가까운 거리에서 화끈하게 보고 즐기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관객이 늘어나고, 시장도 이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식이 때려도 욕해도 참는다… 학대 숨기는 부모들 5.8 한국
피해 늘지만 자책·공포에 신고 꺼려
이웃 신고에 "아들 없다" 숨기기도
처벌 강화한 특례법은 국회 계류 중
박정순(67ㆍ가명)씨는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는 아들(42)로부터 신체적ㆍ정서적 학대를 받아왔다. 박씨가 종교활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들은 술을 먹고 성경책 등을 불태우고 “엄마도 묻어야겠다” “천국으로 보내줄게”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 아들은 날카로운 집기로 박씨의 손목을 찌르려고 하는 등 학대를 5년간 지속했지만 박씨는 극구 신고를 꺼렸다. 결국 보다 못한 이웃의 신고로 박씨는 노인보호전문기관에 인계됐지만 여전히 아들에 대한 처벌은 원치 않고 있다.
자식에 의한 노인학대가 급증하고 있지만 피해노인이 신고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 제도적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7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8년 2,674건이던 노인학대 건수는 5년 후인 지난 2013년 3,520건으로 급증했다. 이중 가정 안에서 이뤄지는 노인학대 비율은 80%가 넘는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 벌어진 학대 피해노인들은 자책과 공포로 신고상담에 소극적이다. 서울의 한 노인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신고의 대부분은 당사자보다 이웃에 의해 이뤄진다”며 “신고를 받고 상담을 나가도 자식이 없다고 숨기거나, 있어도 학대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또 주변의 신고로 사법기관에 인계된다 하더라도 존속폭행의 경우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처벌할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에 부모가 원치 않으면 처벌할 방법이 없다는 점도 가정 내 노인학대가 끊이지 않는 이유로 지목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근원적인 해법으로 노인학대범죄에 관한 특례법 제정을 꼽고 있다. 특례법이 제정되어야 존속폭행을 가중 처벌하고 노인학대 현장에서 즉각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현행 노인복지법에는 ‘노인학대를 예방하기 위해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을 설치ㆍ운영한다’고 돼 있을 뿐이며, 노인학대 현장에서 이 기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사례분석과 예방교육 등 극히 일부에 국한돼 있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인보호전문기관이 노인학대 현장에서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며 “신고가 접수되면 현장에서 학대방지와 예방조치를 할 수 있도록 권한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회에는 신고의무자 확대와 노인보호전문기관 등의 권한 강화를 골자로 하는 법안이 발의되어 있거나 발의를 준비 중이다. 새누리당 박명재 의원이 대표 발의한 ‘노인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안’은 ▦노인학대범죄 상습범에 대한 가중처벌 ▦노인복지시설 관련 업무 수행자의 신고 의무화 및 미이행시 과태료 부과 등 법적 제재를 강화하는 방침이 담겼다. 인재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발의를 준비하고 있는 관련 법안은 노인학대 현장에 사법경찰관리와 노인보호전문기관 직원이 동행하도록 하는 근거규정을 담을 예정이다. 현행 노인복지법에는 사법경찰관리의 동행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다.
원시연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노인학대를 범죄로 인식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한 현실성 있는 규정을 마련하는 입법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상을 뒤흔든 오보, 반성도 책임도 없었다 5.6 미디어오늘
[미디어오늘 창간20주년 기획] 크로스체크 없는 특종 ‧ 속보 경쟁이 낳은 구조적 오보…정정보도는 ‘쥐꼬리’ 상호비판 없이 ‘쉬쉬’
2009년 12월4일 중앙일보 1면 톱기사는 강렬했다. <파업으로 열차 멈춘 그날, 어느 고교생의 꿈도 멈췄다>. 우등생이던 고교생 이희준 군이 철도파업으로 서울대 면접장에 늦어 진학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중앙은 “파업으로 투입된 대체 기관사가 구로역 지리를 몰라 사고가 발생해 1호선이 40~60분 지연됐다”고 보도했다. 파장은 컸다. 철도공사 사장은 학생에게 격려금을 전달하며 여론전에 나섰다. 파업동력은 힘을 잃었다.
오보였다. 중앙일보는 2011년 11월26일 “이희준 군이 소사역에 도착한 7시 20분경까지 열차는 정상적으로 운행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재판부의 정정보도 판결로 중앙일보가 오보를 인정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오보의 대가는 작은 지면에 할애한 ‘알려왔습니다’, 그 뿐이었다. 당시 파업에 나섰던 최은철씨(전 철도노조 대변인)는 “파업 때마다 보수언론은 국민이 불편하다는 기사를 찾아내 만들었다. 2009년 그 기사가 났을 때도 또 우리를 매도하기 위한 기사구나 싶어 분노가 치밀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오보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도 오보 피해자였다. 조선일보는 2004년 1월12일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2월30일 측근과 송년오찬 자리에서 검찰의 측근 비리 수사에 불만을 표시하며 “내가 (검찰을) 죽이려 했다면 두 번은 갈아 마실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보도는 검찰수사권 독립을 강조했던 노 대통령에게 치명타였다. 1년 뒤인 2005년 2월, 조선일보는 “확인 결과 (갈아 마시겠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바로 잡는다”고 정정 보도했다. 그게 전부였다.
2004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 기사.
2014년 ‘세월호 탑승객 전원구조’라는 참담한 오보 속에 언론인은 고개를 숙였다. 언론은 20년 전에도 서해 훼리호 참사 당시 선장이 살아있다고 호들갑을 떨다 시체를 발견하곤 고개를 숙였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오보가 발생하는 경마식 보도 메커니즘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터넷이 등장하고 기사복제가 초 단위로 이뤄지며 오보는 전보다 더욱 확대‧재생산되는 구조로 바뀌었다. 하지만 오보에 책임지는 이는 없다.
우병동 경성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1996년 <언론과 사회>에서 “부정확한 정보가 사실처럼 보도되면 수용자들의 현실 인식이 잘못되고 거기에 따라 잘못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며 모두가 피해를 입는다”, “단편적 정보를 입수했을 때도 경쟁 심리나 저널리즘적 확대‧과장 의욕에 쫓겨 앞질러 보도함으로써 사실을 일그러뜨리고 조작하는 경우가 나타난다”고 우려했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한 비판이다.
오보에도 반성 없는 사회=오보의 일상화
대중은 오보의 처벌에 둔감하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언론사들이 자사의 오보를 감추는 경향과 오보를 너무 많이 봐온 탓이다.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27일자 1면 기사에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고 보도했다. 모스크바3상 회의에서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조선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오보였다. 훗날 역사는 신탁통치안을 제시한 쪽이 미국이었다고 기록한다. 우익성향의 동아일보 기사 이후 한반도는 찬탁/반탁으로 갈라졌고, 미‧소 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초래했으며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졌다.
편파‧왜곡보도는 대표적인 오보유형이다. 한국 언론은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 5‧18 광주민중항쟁 등 굵직한 사회적 사건마다 정부권력 입장만 받아쓰며 오보를 냈다. 노동자에게 보장된 법적 권리를 주장하던 YH무역 여공들을 좌경세력으로 호도하고 파업은 불법으로 매도했다. 2005년 MBC <PD수첩>이 ‘황우석 신화와 난자의혹’편을 내보냈을 때도 대다수 언론은 사이언스 논문에 대한 검증보다 황우석측 입장을 대변하며 <PD수첩>을 비판했다.
시민들은 지금껏 권력의 부정부패에 눈감고 귀 닫으며 오보를 일삼아온 언론들이 수십 년 간 별다른 처벌 없이 성장해온 과정을 봤다. 책 <보도의 진실, 진실의 오보>(1994)를 펴낸 김창룡 인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국은 오보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왜곡‧조작 등 오보를 아무리 내도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추궁하거나 역사적 심판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우리사회가 오보에 둔감해진 이유다.
오보를 감추는 경향도 문제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표한 2014년 ‘언론수용자의식조사’에 따르면 ‘신문사들은 오보가 많다’는 지적에 응답자의 47.9%가 ‘그렇다’고 동의했다. 방송사의 경우도 44.4%가 ‘오보가 많다’는데 동의했다. 하지만 2013년 언론재단이 실시한 ‘언론인의식조사’에서 최근 1년 간 오보로 인해 정정기사를 쓴 경험이 있다는 기자는 12.8%였다. 오보에 대한 대중인식과 오보 인정에 인색한 언론사의 모습이 대조되는 대목이다.
1984년 언론연구원의 신문보도 정확성보고서에 따르면 표본기사 284건 중 정확한 기사는 60.6%에 불과했으며, 부정확한 기사의 경우 1건당 평균 오류는 1.73건이었다. 김창룡 인제대 교수는 “언론은 오보를 기사화할 생각이 없다. 우리나라는 언론사들이 수도 없이 오보를 하고 있지만 오보를 정정하는 후속보도를 하지 않는다. 오보 피해자의 경우도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에 나서봤자 실익이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언론은 오보를 감추고 싶어 한다. 강원지역에서 언론중재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중재위원회에서 만나는 언론사들은 명백한 오보 앞에서도 어떻게든 사과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보가 나면 기자사회에서 강한 지탄을 받아야 오보가 줄어들 수 있는데, 지금은 서로서로 치부를 덮어주고 쉬쉬 한다”고 지적했다.
오보의 작성자도 할 말은 있다
오보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언론중재위원회에 따르면 마감시간‧상업주의에 의한 경쟁이라는 언론 산업의 속성에서 비롯된 오보가 있다. 오인‧간과‧선입견‧조급성‧단정적 감정 등 기자의 결함과 경험미숙, 전문지식 결여, 취재부족 등에서 비롯되는 언론사 내부적 오보요인도 있다. 보도자료‧권력의 간섭‧광고주의 간섭‧통신사의 잘못된 보도‧취재원의 고의 또는 실수에 의한 오보라는 언론사 외부적 오보요인도 있다.
기자들도 할 말이 많다. 한 통신사 기자는 “취재원에 속아 오보를 낸 적이 있다. 빨리 써야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크로스체크가 어려웠다. 급박한 사건일수록 시간에 쫓겨 사실관계 확인을 충분히 하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이 기자는 “세월호 참사 이후 보도의 정확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장에선 안먹힌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김세은 강원대 교수는 “기사에 다소 문제가 있어도 일단 특종을 터뜨리고 보자는 조직문화와 관행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종합일간지의 한 기자는 “요즘은 연합뉴스도 믿고 받아쓸 수 없다”고 말한 뒤 “인터넷 등장 이후 속보경쟁에 몰리면서 다들 너무 쉽게 베낀다. 기자들이 많은 사안을 커버하면서 날림기사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2013년 언론인의식조사에 따르면 기자들이 꼽은 오보 원인은 사실 미확인 또는 불충분한 취재(60%)였으며 기자의 부주의(18.5%), 언론사간의 경쟁(7.7%)이 뒤를 이었다. 오보를 내고 싶은 기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1990년 전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가 157명의 언론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주관적 오보가 잦은 기사유형을 물은 질문(복수응답가능)에 정치기사가 61.4%로 가장 높았다. 뒤이어 북한관계기사(28.1%), 사회운동기사(28.1%)가 뒤를 이었다. 한 종합일간지 기자는 “신문논조가 정파성을 띄면서 편향된 프레임을 바라는 독자 입맛에 맞춰 한 쪽 입장만 강조하는 기사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기자들은 오보의 원인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다.
1998년 서울지검은 식품업자들이 통조림을 만들면서 포르말린을 방부제로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혐의에 불과한 사안을 단정적으로 받아썼다. 죄인으로 몰렸던 식품업자는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언론사를 상대로 19억 5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자 조선일보‧한국일보‧경향신문 등이 오보 피해자와 앞 다퉈 인터뷰에 나섰다. 기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오보 사건은 이렇듯 특종‧속보 경쟁 속에 정보접근의 어려움과 기자단 문화 등이 섞여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동아일보는 2003년 7월 16일 정치인 로비로 검찰조사를 받고 있던 굿모닝시티 대표가 정치인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했다고 검찰발로 보도했다. 동아는 이해찬 문희상 등 정치인 실명을 공개했다. 이 기사는 일주일 만에 오보로 밝혀졌고 동아일보는 사과문을 실었다. 진술 사실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황당한 오보는 당시 1면 톱기사였다. 오보를 비단 기자 개인의 문제로 돌릴 수 없는 이유다.
▲ 2014년 유병언 관련 보도에 항의하며 구원파 신도들이 집회를 연 모습. ⓒ민중의 소리
오보에 부끄러운 언론, 오보에 솔직해지자
오보는 허위보도다. 부정확한 기사부터 날조된 기사, 과장보도가 모두 포함한다. 오보가 줄어들어야 언론신뢰도가 높아진다. 그래야 언론이 산다. 차배근 전 서울대 신문학과 교수는 1989년 <신문과방송>에서 “우리 언론은 정정기사를 많이 내면 신뢰도가 떨어진다며 이를 기피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1986년 11월 16일자 ‘김일성 사망’ 오보를 냈던 주요 신문사들은 오보가 밝혀지자 오보의 책임을 “북한의 교란과 모략전술”로 돌렸다. 하지만 차배근 교수는 “거짓정보에 속는 것도 언론의 책임이다. 앞질러 추측보도를 하거나 충분한 취재를 게을리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정기사를 많이 낸다고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61년 전 기사를 바로잡았다. 영화 <노예12년>의 실화를 다룬 흑인 남성 납치 사건 관련 기사를 161년만 에 정정했다. 2012년 영국 BBC는 유명정치인을 아동 성학대범으로 잘못 보도한 데 책임을 지고 엔트위슬 사장이 사퇴했다. 사장은 “책임지고 사퇴하는 것이 명예롭다”고 밝혔다. 최고의 신문과 방송이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1983년 독일 잡지사 슈테른(stern)지는 가짜 히틀러 일기장을 보도하며 “나치의 역사는 새로 기술해야 한다”고 보도했다가 일기장이 가짜로 판명된 이후 편집장과 기자가 형사처벌을 받았다. 1989년 일본 아사히신문은 자사 기자가 오키나와 거대 산호초에 ‘KY' 낙서를 새긴 뒤 누군가 낙서를 했다며 거짓기사를 내보내자, 해당 오보 과정을 철저히 규명한 뒤 아사히신문사 사장이 사임했다. 이처럼 언론의 자유는 언론의 책임의식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언론은 오보에 솔직해져야 한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언론이 사실 확인이란 기본에만 충실했더라면, ‘전원 구조’ 오보는 발생하지 않았다. “언론 신뢰의 위기”를 습관적으로 내뱉기 전에, 스스로 신뢰를 떨어트리지 않았는지, 명예로운 행동에 대해 되돌아봐야 한다.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오보를 줄이려면 KBS에서 만든 공정성보도가이드라인 같은 뜬구름 대신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것은 물을 먹더라도 똑같이 따라가지 않겠다는, 그런 선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디어오늘은 창간20주년을 맞아 스페셜사이트(special.mediatoday.co.kr)를 통해 오보사례를 모으고 오보 과정을 추적할 계획이다.
※ 참고문헌=<오보와 정정>(1990,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방송>(1989년 7월호), <무엇이 오보를 만드는가>(1995, 노광선,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저널리즘평론>(2003, 한국언론재단), <언론과 사회>(1996년 11월호), ‘한겨레21’ 796호 <반탁운동, ‘동아’ 오보가 없었다면>(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연금 대타협 찢은 ‘지리멸렬 여권’ 5.7 경향
공무원연금 개혁안의 국회 처리가 무산되는 과정에서 지리멸렬한 여권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야·정과 전문가들이 내놓은 합의안을 뒤늦게 거부하는 무책임을, 친박계는 대통령 ‘지침’에 따라 당 지도부를 공격하는 ‘홍위병’ 행태를 보였다는 평가다. 당 지도부는 ‘당 주도론’과 ‘청와대 눈치 보기’ 사이에서 소신도, 결단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 와중에 청와대에 대한 당 지도부의 불만이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되고, 개혁안 무산 책임을 두고 당·청이 진실공방까지 벌이는 난맥상도 노출했다. 4·29 재·보궐선거 승리로 불안하나마 동거에 들어갔던 당·청이 불과 일주일 만에 갈라서는 모습이다.
지난 6일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 무산은 여권을 후폭풍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간 잠복했던 내부 고질병이 한꺼번에 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연금 정국’을 꼬이게 만들었다는 책임론에 직면했다. 청와대가 합의안에 “국민 기대 미흡” “월권” 등 제동을 걸고 나선 게 결국 처리 무산의 도화선이 됐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강경 기류는 오히려 야당에 불신과 투쟁의 빌미를 줬고, 여당 지도부의 협상 동력을 떨어뜨렸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번 합의안 파탄으로 각종 개혁 과제들이 모두 안갯속에 빠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새누리당 한 재선의원은 7일 “청와대와 야당이 강경하게 갈 거고, 그러면 더 어렵다. 이대로는 노동개혁 등도 다 안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친박계는 청와대 기류를 반영해 지도부 공격에 열중했다. ‘박 대통령 지시→친박계 실행’ 매뉴얼이 재현된 것이다. 친박계는 여야 원내지도부가 마련한 수정안을 거부했고, “비열한 거래” “지도부 사퇴” 등으로 반발했다. 이를 두고 “친박 최고위원 몇 분이 (개혁)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혜훈 전 최고위원)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그간 ‘당 주도론’을 외쳐온 비주류 당 지도부는 이번 과정에서 역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지난 2일 대표·원내대표가 사인한 합의문을 나흘 만에 뒤집은 것이다. 특히 다수 의원들이 개혁안의 임시국회 처리에 찬성했는데도 이를 밀어붙이는 결단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무성 대표는 당내 분란과 청와대와의 충돌을 의식해 소극적이었다.
이런 중에 계파 간, 당·청 간 갈등만 커지고 있다. 당 지도부는 청와대가 제동을 걸고 나선 데 대한 불쾌감을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당 핵심 관계자는 이날 “개혁안을 통과시키든, 통과시키지 못하든 어느 쪽이든 (청와대가) 당을 질타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앞서 김 대표는 6일 “(청와대가) 다 알면서 이럴 수 있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반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7일 “협상 과정에서 청와대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합의가 이뤄졌다”고 반박했다. 당·청이 합의문 내용 인지 여부를 두고 진실공방을 벌이는 격이다. 청와대와 당의 무책임과 무원칙이 드러나고, 계파 갈등과 당·청 갈등까지 겹치면서 여권은 그야말로 자중지란 상황이다.
“학원가기 싫은 날 엄마를…” 초등생 잔혹 동시 논란 5.7 시사인
초등학생이 학원과 엄마를 소재로 쓴 동시가 잔혹성 논란에 휘말렸다. 출판사는 해당 시가 담긴 동시집을 모두 회수해 폐기하기로 했지만 학생의 부모 측이 폐기에 반대해 법적 대응에 나서면서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6일 출판사 가문비에 따르면 지난 3월30일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초등학생 A양(10)의 동시집 '솔로강아지'에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작품이 실렸다.
해당 시에는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 이렇게 // 엄마를 씹어 먹어 / 삶아 먹고 구워 먹어 / 눈깔을 파먹어 / 이빨을 다 뽑아 버려"라는 구절을 비롯해 선정적인 표현이 많이 담겼다.
이 시가 실린 페이지에는 피가 낭자한 상태로 누운 누군가와 함께 입 주변이 피로 물든 채 앉아 있는 여성의 삽화가 그려졌다.
시의 내용이 알려지자 잔인한 표현의 동시를 쓴 아이와 이를 용인한 학부모·출판사, 그리고 삽화를 그린 그림작가가 표적이 돼 누리꾼 사이 논란이 가열됐다.
논란이 확산되자 가문비는 전날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시중에 나간 도서를 모두 회수해 폐기하기로 했다.
김숙분 발행인은 사과문에서 "'솔로강아지'의 일부 내용이 표현 자유의 허용 수위를 넘어섰고 어린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의 항의와 질타를 많은 분들로부터 받았다"며 "이를 수용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도서 전량을 회수하고 갖고 있던 도서도 전량 폐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동시집은 가문비 '어린이 우수 작품집 시리즈'의 7번째 책으로, A양이 직접 쓴 작품만으로 구성된 개인 동시집이다. 출판사는 대회 입상 경력도 있는 A양의 작품 전반에 시적 예술성과 작품성이 있다고 보고 동시집 작가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A양의 부모 측은 책 폐기에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며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솔로강아지' 회수 및 폐기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A양 부모는 책을 회수하더라도 동시집에 수록된 58편의 시 가운데 한 편의 문제만으로 이를 모두 폐기하는 것은 과하다고 지적한다. A양 아버지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시의 내용과 삽화가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라면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볼 수 없도록 주의 문구를 넣거나 비닐 포장을 씌우는 방법이 있다"며 "딸이 쓴 내용이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인데 이것이 논란이 됐다고 해서 폐기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아이의 시를 시로 본 것이고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며 "아이들이 저렇게까지 학원 가는 것을 싫어하는데 보내는 게 맞는지, 아이들의 이야기가 뭔지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비타 500? 에이 그건 ‘약과’지 5.5 시사인
조선을 망친 건 결국 부패였지만 부패의 몸통은 언제나 건재했다. ‘부패 발본색원’을 선포한 총리는 그 자신이 부패의 당사자로 지목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번에는 몸통을 움켜쥘 수 있을까. 아니면 또 깃털만 뽑고 말까.
몇 년 전에 아빠 회사에서 만든 프로그램 중에 <국민고시>라는 게 있었어.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의 어원(語源)이랄까 유래랄까, 말이 쓰이게 된 사연에 대해 알아보는 프로그램이었지. 이를테면 우리가 밥에 싸먹는 김은 김씨가 만들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해. 조선 현종 때 김여익이라는 사람이 김 양식을 창안했고 그 성을 따서 이름이 붙었다는 거지. 하나 더 해보자. 우리가 어떤 기대 이하의 결과물을 볼 때 “에이 그건 약과지!” 그러지 않니? 이 표현은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
여기서 약과란 요즘은 전철역 가판대에서도 1000원에 세 개씩 파는 그 약과야. 하지만 아빠가 어렸을 때 약과는 명절 때 외갓집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고, 감미료가 적었던 조선 시대에는 더 그랬지. 그래서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쓰고 뇌물로 읽자꾸나)로 즐겨 이용되기도 했어.
그런데 산삼이며 녹용이며 기타 등등 워낙 비싸고 진귀한 물건이 줄을 선 터라 세도 가문에 약과는 너무 흔한 품목이 돼버렸던 거야. 뇌물 정리하는 하인들마저 “에이 이건 약과네” 하고 구석방에 처박아둘 만큼 말이야. “그건 약과다!”는 표현은 여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구나. 안동 김씨 가문이 한창 세도를 부리던 조선 말엽, “김 아무개 대감 댁 나귀는 약식(약밥)을 잘 먹고 호판댁(또 다른 안동 김씨) 말은 약과를 물려서 안 먹는다”라는 얘기가 돌았다고 하니 아주 생뚱맞은 이야기는 아닐 거야.
ⓒ시사IN 조남진 4월13일 국회 대정부질문에 출석한 이완구 당시 총리가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해 답변하고 있다.
19세기 조선은 부패라는 이름의 에일리언이 다 파먹은 속 빈 강정이었어. 돈 내고 벼슬을 산 관리들은 본전을 뽑으려 들었고 백성은 악착같은 착취에 지쳐 고향을 떠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절박했지. 결국 인내력의 한계에 도달한 백성은 이전에는 얼굴도 못 쳐다보던 나리들을 향해 칼끝을 돌리기 시작해. 이게 아빠랑 같이 봤던 영화 <군도>의 배경이야. 영화 속 도둑들의 외침 기억나니? “뭉치면 백성이고 흩어지면 도적이다.” 이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기록을 거꾸로 비튼 거야.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거든.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다.” 아마도 <군도>의 감독은 어떻게든 하나로 뭉쳐 부당한 대우에 항거하면 나라의 주인인 백성(民)이지만 뿔뿔이 흩어지면 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실록을 비튼 게 아니었을지.
영화 <군도>의 배경은 철종 13년(1862년), 진주민란을 필두로 온 나라가 백성의 봉기로 뒤덮이던 때야. 진주민란에 불을 붙인 사람은 그 전해 진주에 부임한 경상우병사 백낙신이라는 사람이었어. 그는 왕년에 이순신 장군 자리였던 전라좌수사로 백성을 쥐어짜다가 말썽이 나서 한동안 파직된 후 다시 그 자리를 얻어 온 터였어. 벼슬을 사는 데 돈이 들었는지 백낙신은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가 돼 온 진주를 들쑤신다. 단 1년 만에 그가 모은 것이 쌀 1만5000석. 거기다가 이전의 관리들이 해먹은 몫까지 몽땅 백성에게 뒤집어씌워 수만 냥을 거둬들일 계획을 세우자 분노한 백성이 들고일어나는데, 이게 진주민란이야.
영화 <군도>(위)의 배경은 철종 13년(1862년)이다. 진주민란을 필두로 온 나라가 봉기에 뒤덮였다.
수만명 백성이 횃불을 들고 진주성으로 달려갔어. 어떻게 됐을 것 같니? 원수 같은 백낙신이 영화 <군도>의 못된 양반들처럼 목이 달아나고 백성은 탐관오리의 최후를 보라며 그 앞에서 환호했을 것 같지? 그러나 그러지 못했어. 백낙신 밑에서 못되게 놀았던 아전들은 때려죽이거나 불 속에 던져버렸지만 부패의 원흉이라 할 백낙신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못했어.
조선 왕조 시절 아전들, 향리들은 나라로부터 봉급을 받지 못했단다. 그건 알아서 부정을 저지르고 살라는 뜻이나 다름없었고, 백낙신 같은 이의 명령을 받아 백성을 쥐어짜면서 그 일부를 챙겨 살아야 했다는 뜻이야. 즉 부패라는 괴물의 몸통이 아닌 깃털 같은 존재였지. 하지만 기껏 난을 일으킨 백성들은 그들에게만 분을 풀었어. 아전은 만만했지만 경상우병사 나리는 범접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라에서는 백낙신에게 어떤 벌을 내렸을까. 전국 각지에서 터져 나온 ‘민란의 시대’의 시초라 할 진주민란을 유발한 백낙신은 사약을 받거나 최소한 귀양을 가야 마땅했지만 그는 파직 이상의 벌을 받지 않았어. 그뿐 아니라 이후로도 태연히 벼슬살이를 이어가게 돼.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했던 병인양요 때 경기도 해안 일부의 방어 책임을 맡았고 그 뒤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지.
‘시장판’으로 전락한 대한민국 정치판
세월이 가고 시대도 바뀌어서 1894년 갑오년에 수십만 동학 농민이 봉기했어. 30년 전보다는 훨씬 대담(?)해진 사람들은 폭정을 일삼는 사또들을 죽이기도 하고 서울에 올라가 ‘권귀(權貴)’들을 없애리라 외쳤어. 그런데 “관료 선발을 돈을 벌어들이는 길로 여겨서 과거 보는 시험장을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모두 만들었다”라고 통탄하면서도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이 깊고 자애로우며 신명하시고 총예하시어서” 부패한 관리만 없어지면 잘될 거라고 주장했지.
당시 매관매직, 즉 돈으로 벼슬을 사고파는 행태의 가장 큰 괴수는 바로 임금 고종과 왕비였는데 말이야. “관찰사 자리는 10만원 내지 20만원이었고, 1등 수령은 적어도 5만 냥을 내리지 않았다. 관직에 부임하면 자기 돈으로 빚을 갚지 않고 다투어 공전을 끌어다가 갚고”(황현의 <매천야록> 중) 있었는데도 말이야.
조선과 그 뒤에 짧게 들어섰던 대한제국을 망친 건 결국 부패였어. 온 나라가 썩어들어 갔고 높은 사람들부터 그 시궁창에 뿌리를 박고서 백성의 피와 땀으로 배를 불렸으니 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지. 가끔 임금은 “내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탐관오리를 처벌한다”라고 언성을 높여도 봤지만 메아리 하나 울리지 않았고, 백성의 고충을 덜어주겠노라고 기껏 관청 하나를 만들면 그 수장으로 오는 이들 역시 부패 관리였어. 고양이에게 고등어를 맡긴 어물전이 어찌 무사했겠어.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비장한 표정으로 “부패 발본색원”을 선포하던 대한민국 국무총리의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그분은 “부정부패 척결은 국가 명운이 걸린 과업으로 이번에 실패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각오로 정부의 모든 역량을 결집할 것”이라고 기염을 토하셨지. 얼마나 부패가 심하면 그렇게 결연한 표현을 썼겠어. 그런데 그분은 별로 친분도 없다던 기업인과 1년에 200회가 넘게 통화하는 친화력을 보이시며 ‘비타 500’을 받아 건강(?)을 챙기셨다는 의혹을 받고 결국 총리직을 버리셔야 했다.
총리에, 국회의원에, 대통령 비서실장에, 도지사까지 아주 휘황찬란한 이름들이 ‘돈 받은 리스트’에 올라 있었어. 가히 대한민국 정치판을 “물건 사고파는 시장판”으로 전락시킨 듯한 오늘의 모습에 아빠는 참 궁금한 게 많다. 이번에는 정말 부패의 몸통을 찾아내고 그 목을 움켜쥘 수 있을까? 아니면 항상 그랬듯 깃털만 뽑고 마는 것일까. 그리고 저 사람들은 한때 망신을 당할지언정 백낙신처럼 되살아나 다시 우리 어깨 위에서 호령하며 살아가지는 않을까. 아침에 택시 타고 오는데 택시 기사 아저씨가 뉴스를 듣다가 혼잣말을 하더구나. “총리 3000만원? 에이 약과네.” 총리 공관 강아지도 약과 정도에는 물리지 않았을까.
목숨을 다해 지켜야할 '희망의 약속' 5.1 한겨레21
‘가난이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모아 지난 2월 장발장은행이 문을 열었다. 무이자·무담보로 벌금을 대출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기획연재 - 우리 시대 ‘장발장’들
① 반지하방, 희망은 움튼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쿨럭쿨럭 밭은기침. “1980년 봄, 전두환이 나서서 설칠 때였어요.” 23살 다대오는 가난한 집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갔다. 거리는 열망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욕망을 버린 그는 서늘했다. “나 자신을 버렸어요.” 서울 성북구 삼선동 ‘사랑의 선교 수사회’ 수도원. 새벽 4시에 일어나 침묵의 기도, 5시에 미사를 올리고 돌아와 방을 정갈하게 치웠다. 7시에 아침을 먹고 다시 기도를 했다. 담배를 자주 태우는 그를 보고 동료들이 ‘염소 수사’라며 하하 웃었다. 받아 웃는 다대오도 손에 쥔 담배가 뜨듯했다. 점심때까지 성서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시립동부병원으로 향했다. 행려병자, 가족한테조차 버림받은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면도 도구가 든 가방을 늘 지니고 갔다. 매일같이 삐죽삐죽 불거지는 수염, 그들의 불운한 삶인 듯 거친 수염을 보드랍게 깎아줬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하루하루 깊었다. 행복했다. 그는 3대째 이어진 모태신앙. 낙엽이 거리에 수북이 쌓인 늦가을, 떠나온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지난 4월21일 김영수(57·가명)씨가 경기도 부천의 반지하 월세방을 나서고 있다. 목수일을 하는 그이지만, 이날도 인력사무소에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류우종 기자
볕 좋은 날이었지만 그의 방은 컴컴했다
다대오의 학력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였다. 14살 때부터 공장 시다(작업 보조)를 했다. 털이 부숭부숭한 곰인형을 참 많이 만들었다. 수도사로 일생을 보내겠다고 주먹을 꼭 쥘 때까지 8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가 12살 때 아버지는 일곱 남매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자식 일곱을 죄다 담을 것만 같은 광주리를 머리에 얹고 어머니는 과일 행상을 했다. 옥수동 판자촌 집은 먹을 것 없어 더 어두웠다. 굶주린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그치지 않았다. 못 먹어 더 좁은 그의 어깨처럼 집안 살림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수도사가 되겠다며 집을 나서고 채 1년도 안 된 그해 겨울, 궁핍에 몰린 어머니가 그를 다시 찾았다. 먹고살기 너무 고되다는 홀어머니를 두고 신에 귀의할 수는 없었다. 수도사가 되려던 그는 다시 시다로 돌아왔다. “그때 그 수도원. 거기서 나를 버리니 마음이 차분했어요. 무게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마른 입술로 그는 담배를 다시 꺼냈다.
세례명 다대오(Thaddaeus), 김영수(57·가명)씨. 스물셋 신앙으로 쨍 빛나던 그는 지금 반지하 월세방에 산다. 경기도 부천의 한 주택가 골목. 지난 4월21일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차갑게 식은 목욕탕에 들어선 듯 습기가 코를 찔렀다. 모처럼 볕 좋은 날이었지만 그의 방은 컴컴했다. 싸늘한 방바닥. “겨우내 보일러를 한 번도 안 틀었어요.” “그럼 추워서 어떻게 지내세요?” 깔고 앉은 전기장판을 그가 손으로 가리켰다. ‘1’. 전기장판의 온도 눈금 ‘1’. 스위치를 켰는지 껐는지 알기도 힘든 온기. 그렇게 김씨는 지난겨울을 견뎠다. 가족도 없다.
“하루는 집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작은애 분유 살 돈이 없다고.” 그는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버스를 탔다. 다 버리고 싶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차창 너머로 우연히 아파트 공사장이 보였다. 다음날부터 그곳에서 잡부로 일했다. 목수 보조일을 하면 일당을 1만원이나 더 쳐주는 것을 알고 목수일을 배웠다. 하루 벌이가 1만5천원에서 2만5천원으로 늘었다. 술도 갈수록 늘었다. “1996년 9월13일이에요.” 아침에 깨어보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숙취가 머리를 때렸다. 서울에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낳은 아들과 딸도 없었다. 부인은 더는 못 견디고 집을 버렸다. “그 전날도 술을 많이 먹었어요. 돈도 잘 못 벌고 하니까 아내가 애들 데리고 나가버렸어요.” 마음이 시궁창에 처박혔다. 처자식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다 포기하고 싶었다. 시다를 거쳐 재단사가 되고 기계를 사서 작은 공장을 차리고 살던 시절, 은행 융자를 받아 산 5천만원짜리 집도 있었고 차도 굴렸다. 다 없어져버렸다. 융자를 못 갚은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그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이듬해에는 홧김에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사고까지 냈다. 벌금 300만원. 알음알음 겨우겨우 150만원을 마련해 검찰청에 갔더니 직원이 다정하게 손짓을 했다. “얼른 들어오세요.” 순진하게 들어갔다가 그대로 갇혔다. 1평이나 될까, 좁은 방에 갇힌 그를 누나가 급히 돈을 마련해 꺼내줬다. “거기 좁은 데 갇혀 있으니까 숨도 제대로 못 쉬겠더라고요.” 그는 그 방이 지금도 두렵다. 두려워 술도 끊었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는 공사판 목수일도 다 끊겼다. 마을버스 운전을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석 달 만에 그만두었다. 배차 시각을 맞추려면 신호 위반은 물론 곡예 운전을 서슴지 않아야 했다. “다른 기사들이 다 놀렸어요. 저처럼 곧이곧대로 하는 사람은 배차를 못 맞춰요. 하루는 새벽 첫차를 끌고 나가는데 폐지 줍는 할머니가 어둠 속에서 거의 안 보이는 거예요. 딱 사고 나기 좋겠더라고요. 그날로 관뒀어요.”
하수도처럼 비루한 마음이 온몸에 퍼지고
다시 목수일. 10년 넘게 무덤처럼 엎드려 살았다. 그러던 지난해 봄, 그예 사달이 났다. 집 앞 골목길에 승합차를 세워두던 사람과 시비가 잦았다. 사람이 다니지도 못하도록 주차하는 사람이 꼴같잖았다. 소주를 한 병 사서 마셨다. 취하니 엉망이 됐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수도처럼 비루한 마음이 온몸에 퍼졌다. 빈 소주병을 들고 나가 차 앞유리를 내리치고 말았다. 경찰 조사를 받고 검사 앞에도 불려갔다. 벌금 50만원 약식명령서가 얼마 뒤 날아들었다. 납부 기한은 지난해 12월20일까지.
형틀 목수로 일하는 그의 일당은 15만원. 인력사무소 수수료 10%를 떼면 13만5천원을 쥔다. 일거리가 일주일에 사나흘만 되면 한 달에 돈 100만원은 넘는다. 그러나 김씨가 올해 들어 넉 달 동안 일을 나간 건 13일밖에 안 된다. 일거리가 없다. “중국동포들이 다 가져가요. 부리기도 쉽고 일당도 더 싸서 그렇죠. 인력사무소 세 군데에 얘기를 해놨는데 연락도 잘 안 오고….” 1월에는 단 하루도 일을 못했다. 2월에 엿새, 3월에 나흘. 4월에는 단 사흘밖에 일을 못했다. 설령 일거리가 많아도 예전 사고로 다친 무릎 때문에 사나흘 내리 일을 하기도 버겁다. 일이 없으니 끼니도 형편없다. 비닐에 담긴 1500원짜리 된장 한 봉지조차 세 번에 나눠 먹는다. 아니면 라면. 반찬은 시장에서 사온 김치 3천원어치가 전부. 그것도 없이 그냥 멀건 된장국에 밥을 조금 말아 먹으면 끝이다. 그나마 하루 한 끼다. 정부에서 받는 거라곤 다달이 장애수당 4만원뿐이다. 2012년까지는 기초생활수급자였지만 선정 기준이 강화되면서 그에게는 차례가 오지 않는다. 아끼려야 아낄 돈이 없다. 벌금 50만원이 그의 어깨를 50만 근처럼 내리눌렀다.
지난 2월25일 벌금 미납을 이유로 구치소에 갇히는 서민들을 막기 위해 장발장은행이 문을 열었다. 그동안 99명이 장발장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헌법적 권리인 ‘신체의 자유’를 지켰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검거·압류·불이익’ 그를 옥죄었다
‘벌금 납부 기한이 많이 지났습니다. 현재 집중 검거 및 재산 압류 중입니다. 벌금은 형벌로 납부를 미루거나 면제받을 수 없으니 유념하여 더 불이익 받기 전에 즉시 납부 바랍니다.’
잊을 만하면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검거·압류·불이익, 무서운 낱말들이 그를 옥죄었다. 현행 형법은 벌금을 제때 납부하지 않으면 그 금액만큼을 날짜로 환산해 구치소(노역장)에 수감하는 환형처분제도를 두고 있다. 2014년 벌금 낼 돈이 없어 구치소에 갇히는 처분을 당한 사람은 4만2871명이다. 벌금 미납으로 수배를 당한 지난 몇 개월, 일 없으면 매일같이 가는 서울 동묘 풍물시장 길이 갑자기 불안해졌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경찰관 2명이 자주 불심검문을 했다. 김씨는 멀찍이서 경찰관을 피해다녔다. 뒤를 자주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던 3월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장발장은행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보았다. 김씨처럼 벌금 낼 돈이 없어 구치소에 끌려갈 처지에 몰린 이들에게 벌금을 무이자·무담보로 빌려준다는 것. 동 주민센터 직원의 도움으로 신청서를 적고 필요한 서류를 모아 보냈다. “장발장은행은 정말 잘 태어난 거 같습니다. 저를 살려주셨잖아요. 상환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4월1일 전갈이 왔다.
‘장발장은행에서 벌금 50만원을 대출해드렸습니다. 귀하께서는 4월부터 매월 20일에 대출금을 상환하시기로 했습니다. 꼭! 기일 내에 갚아주셔야 다음 분에게도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납부 영수증 사본도 보내주셔야 합니다. -장발장은행(02-2273-9004).’
벌금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구치소에 곧바로 가두는 게 과연 정당한 국가 형벌권의 행사인가, 장발장은행은 묻고 있다. 개인의 경제적 처지에 따라 벌금 부과 액수를 달리하는 일수벌금제 도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제1054호 현장 ‘장발장들의 마지막 기댈 곳’ ‘형벌에 실질적 평등을!’ 참조). 표준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한때 짜장면이라 읽고 자장면이라 써야 하는 때가 있었다. 어느 학생이 물었다. “그러면 짬뽕은 잠봉이라고 해야 하나요?” 언어학에서는 이를 일러 ‘과잉 교정’(over-correction)이라고 한다. 김씨는 분명 죄를 지었다. 그러나 개인의 처지를 무시한 획일적인 총액벌금제가 교정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권력의 ‘과잉 교정’은 아닌지, 장발장은행은 묻고 있다. 지난 3월2일부터 4월15일까지 장발장은행에서 벌금을 대출받은 이들은 99명, 시민 후원으로 충당한 대출금은 모두 1억7천만원가량이다.
통장에 3만6174원이 남았지만
김씨는 인터뷰 나흘 전 장발장은행에 10만원을 상환했다. 상환 예정일인 4월20일보다 사흘 앞서 돈을 입금했다. “내가 안 먹을망정 꼭 갚을 거예요. 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입니다. 이거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월세 13만원이나 전기요금 따위를 단 한 번도 밀려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장발장은행에 돌려줘야 할 돈이 아직 40만원 남았다. 김씨의 예금통장 잔액은 3만6174원이다.
채널A ‘세월호 폭력집회’ 부각하려…사진 조작 ‘들통’ 5.8 한겨레
채널A ‘김부장의 뉴스통’ 갈무리 화면.
2003년 농민 집회·2008년 광우병 시위 사진을
‘김부장의 뉴스통’, ‘단독 입수’ 사진이라며 보도
제작진 “철저히 검증하지 못한 뼈저린 실수” 사과
4·16연대 “비방위한 조작 방송…법적 책임 묻겠다”
종합편성채널(종편) <채널에이>가 집회 참가자들과 경찰의 충돌 모습이 담긴 12년 전 사진을 최근 ‘세월호 추모 집회’ 사진이라고 내보내며 참가자들의 폭력성을 부각시킨 보도를 해 파문이 일고 있다. 채널에이는 사실을 인정하고 “실수였다”고 사과했지만,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쪽은 “의도된 조작방송”이라며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채널에이의 시사 프로그램인 <김부장의 뉴스통>은 지난 6일치 방송분에서 ‘단독입수: 세월호 시위대 경찰 폭행 사진’이라는 자막을 붙여, 경찰이 시위대에게 폭행을 당하는 장면 등이 담긴 네 장의 사진을 내보냈다. 하지만 이 가운데 한 장은 2003년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을 앞두고 열린 농민집회 때 집회 참가자들과 경찰이 몸싸움을 벌이는 사진이었고, 다른 한 장은 2008년 광우병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 경찰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사진이었다. 2003년 사진은 <오마이뉴스>가, 2008년 사진은 <조선일보>가 찍은 사진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미디어 전문매체인 <미디어오늘>의 7일 보도로 알려졌다.
당시 방송에서 출연자들은 이 사진들을 근거로 삼아 “폭력이 난무한 세월호 시위를 합리화할 수 있나?”는 요지로 토론을 벌였다. 해당 방송분은 현재 채널에이 누리집에 올라와 있지 않은 상태다. 논란이 일자 <김부장의 뉴스통>은 7일 방송에서 진행자인 김광현 <동아일보> 소비자경제부장이 “철저히 검증하지 못한 제작진의 뼈저린 실수였다. 관련자와 시청자께 머리 숙여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2년 전에 다른 언론사에서 찍은 사진을 ‘단독입수’라는 자막까지 붙여 내보낸 것은, 단순한 착오라기보단 의도된 실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4·16연대’는 7일 성명을 내고 “채널에이의 행태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을 폭력 시위대로 매도하고 비방하기 위해 전혀 관계없는 사건의 사진을 ‘단독입수’ 운운하며 사실상 ‘조작방송’을 한 것”이라며 “가능한 모든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채널에이는 세월호 추모 집회가 열렸던 지난달 18일 뉴스에서 앵커가 “일부 시위대들이 차로를 점거하고 불법 행진을 하면서 경찰과 충돌했고, 일부 경찰을 집단 폭행하기도 했습니다”고 전하며 집회 참가자들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보도를 했다.
<김부장의 뉴스통>의 김광현 부장은 지난 2013년 <김광현의 탕탕평평>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을 방송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중동 버리고 亞 잡는다… 美, 동북아 외교 흔들자 '현기증 정세'5.3 한국
[길 잃은 한국 외교] (상) 미국의 '아시아 중시' 속내
이라크ㆍ아프간 전쟁 10년 넘게 해도 지역구도 원하는 대로 안돼 발빼기
아태지역은 2020년까지 고성장, 무역 질서 장악 통해 새 동력 확보
日 대리자 세워 中 견제 노골화, 한일과 더 강한 3자 동맹도 모색
‘중국, 미ㆍ일 정상 회담장을 꽉 채운 코끼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백악관 정상회담 하루 직전인 지난달 27일, 뉴욕타임스의 관련 기사 제목이다. 이 신문은 “정상 회담의 핵심 의제는 회담장(백악관 집무실)에 없는 다른 지도자, 즉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 오바마 대통령이 이날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미국이 TPP를 통해 무역 규칙을 만들지 못하면, 중국이 곧바로 이 지역의 무역규칙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부분도 함께 소개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는 오바마 대통령이 아베 총리의 역사수정주의적 성향을 탐탁해 하지 않으면서도 환대한 까닭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바로 대리자 일본을 내세워 중국을 확실히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미국을 방문한 중국 왕양(汪洋) 부총리가 “미국의 지도적 지위에 도전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두 나라의 국력 격차는 여전하다. 그러나 해마다 그 격차가 축소되고, 안보ㆍ경제ㆍ문화 등 전 분야에서 미ㆍ중 대립 구도가 격화하고 있다.
군사 측면에서 중국이 본토에서 1,000㎞ 떨어진 제1도련(일본 규슈-오키나와-대만-필리핀 서쪽 해역을 잇는 선) 이내로 접근을 저지하는 ‘반접근ㆍ지역거부’ 전략을 펴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공해전투(空海戰鬪) 혹은 원해통제(遠海統制) 개념으로 맞서고 있다. 경제분야에서도 미국이 TPP에 박차를 가하자, 중국은 아세안을 중심으로 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체제 구축에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를 중심으로 ‘아ㆍ태 자유무역지대’(FTAAP) 협정의 체결을 주도하고 있다.
요컨대 미국이 동북아 지역의 안보 구도에서 일본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기로 한 것은 ‘발톱을 감추고 있는’ 중국이 미국 주도의 ‘지역질서’에 도전하는 걸 사전 견제하려는 포석인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동북아 외교지형을 흔들게 된 보다 근원적 이유는 ‘아시아 재균형’ 전략이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 변화에서 ‘부상(浮上)하는 중국’이 겉으로 드러난 외생변수라면, 오바마 대통령의 세계전략인 ‘아시아 재균형’전략은 본질적 내생변수다.
‘아시아 재균형’혹은 ‘아시아 회귀’ ‘아시아 중시’로도 불리는 이 전략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중동을 버리고 아시아를 얻는다’이다. 이는 중동에는 미국이 챙길 이익이 별로 없지만, 아시아에는 넘쳐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10년 넘게 이라크ㆍ아프간 전쟁을 치렀는데도 원하는 지역 구도가 형성되지 않자, 워싱턴의 미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중동은 개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예외적 지역’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셰일 혁명’으로 중동지역 석유에 대한 미국의 의존도가 크게 떨어진 것도 중동의 전략적 가치를 낮춰 볼 수 있게 한 요인이다.
미국이 중동에서 마음이 떠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는 적대국 이란과의 핵 협상이다. 이란을 압박해 미국이 원하는 질서를 실현하려는 기존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이란ㆍ사우디ㆍ이스라엘 등 지역 강국들에게 ‘다자적 관리’ 책임을 맡기는 방법으로, 미국의 개입 비용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 과정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반발 등과 같은 이 지역 동맹국의 불만까지도 일정부분 감내하겠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아ㆍ태지역은 202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이 예상되는 지역이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성장동력이 절실한 미국으로서는 이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아시아 중시’전략을 새로운 세계전략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셈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유럽ㆍ중동을 관리하는 것처럼, 한미동맹이나 기존의 미일동맹보다는 한 단계 진화한 경제ㆍ안보 분야의 한미일 3각 동맹을 대 중국 견제의 핵심 틀로 모색하고 있다. 2011년 첫 등장한 ‘아시아 중시’전략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슬람국가(IS) 반군 등 중동정세 악화로 유명무실한 상태였으나, 올 들어 미 경제가 급속히 회복하면서 ▦이란 핵 협상 진전 ▦한ㆍ중ㆍ일 정상의 연쇄 방미 등으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미-일 신(新) 밀월시대, 한국의 선택은? 5.3 프레시안
[안정식의 북한 포커스]일본 과거사 외면, 외교 카드로 활용해야 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이번 미국 방문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미·일 동맹의 전 세계적 확대·강화를 통해 노골적인 중국 견제를 공식화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방위협력지침 개정을 통해 전 세계적 차원에서 군사협력을 강화하기로 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일본이 분담하기로 했다. 센카쿠(尖角, 중국명 다오위타오·釣魚島)를 상정한 도서(섬) 방어를 위한 공동 대처도 명문화됐다.
미·일 정상회담 이후의 공동성명에서는 ‘힘에 의한 현상변경’에 반대한다며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다시 한 번 천명됐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미·일동맹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중국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미국의 아시아재균형 정책이 일본의 힘을 빌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해졌다.
둘째, 아베 일본 총리는 미국 방문 과정에서 과거사를 직시하라는 주변국의 요구를 끝내 외면했다. 미 의회 연설뿐 아니라 미·일 정상 공동회견, 하버드 케네디스쿨 강연 등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깊은 고통을 느낀다"며 국가의 책임을 비껴갔고, 2차 대전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말로 넘어갔다.
반면, 아베 총리는 "일본과 일본 국민을 대신해 2차 세계대전에서 숨진 모든 미국인의 영혼에 깊은 경의와 함께 영원한 애도를 보낸다"며 미국에게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췄다. 주변국은 무시한 채 미국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 버락 오바마(왼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8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정상 회담을 가진 뒤 기자 회견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도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본에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미국은 아베 총리를 극진히 환대하면서 "일본이 아시아 정책의 중심"이라며 노골적인 러브콜을 보냈다. 미 행정부 관료들이 일본의 과거사 직시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무게중심은 분명히 '과거'보다는 '미래'에 가 있었다.
어찌 보면, 미국이 과거사를 언급하는 주요한 이유는 '올바른 역사인식 자체가 중요하다'는 판단보다는 '일본의 과거사 외면이 한미일 3각 동맹에 해가 되지 않을까'라는 현실적인 우려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도 그러한 미국의 계산법을 정확히 궤뚫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사에 대한 미국내 여론의 압력을 외면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달갑지 않게 돌아가는 동북아 구도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고 싶지 않든 동북아 구도가 우리에게는 썩 달갑지 않게 돌아가면서, 이제 더욱더 냉정하게 지금의 현실을 바라봐야 할 때가 됐다. 일본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접어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부합한 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단 두 가지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앞으로 일본에 올바른 역사인식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더라도 큰 기대를 갖지는 말자는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는 이제 상수가 되었다. 일본 사회의 인식이 전반적으로 우경화된 상황에서 일본이 갑자기 입장변화를 하기도 어렵고, 과거사에 대해 일부 진전된 언급이 나온다고 해서 일본이 진정으로 변화했다고 믿기도 어렵다. 일본이 조금이라도 사과하면 우리 외교의 성공이고 일본이 사과의 뜻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 외교의 실패인 것처럼 인식해, 일본의 사과에 우리가 목매는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제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는 진정성과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국익이라는 측면에서 타산적으로 생각해야 할 외교적 수단으로 바뀌는 양상이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끌어내 한일간의 우호를 진전시키겠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 되었다. 과거사 문제로 일본을 압박하면서 우리가 어떤 국익을 얻을 것이냐를 생각해야지, 과거사를 외면하는 일본에 대해 감정적 반응을 앞세울 때는 지나갔다.
둘째, 미·일 동맹 강화로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미·일의 구도에 우리가 편승할 필요는 없다. 중국에 대한 견제는 우리의 국익과 부합하지 않는다. 일본은 해양세력인 데다가 미국에 편승함으로써 '보통국가'를 이루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일 동맹을 통한 중국 견제에 적극적이지만, 우리의 이해관계가 일본과 같을 수는 없다. 미·일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전 세계적인 미·일 동맹에 편승해 중국과 대치하는 입장에 설 필요는 없다.
한국, 미국 일본과는 다른 새로운 입지 구축해야
결국, 한국은 변화하는 동북아 구도 속에서 미국, 일본과는 다른 새로운 입지를 구축해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됐다. 좋든 싫든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과제가 던져진다. 아베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에서 드러난 '미·일동맹 강화를 통한 중국 견제'와 '일본의 과거사 외면'이라는 상황을 어떻게 우리 국익에 맞게 재해석해낼 것인가?
발상을 바꿔 '일본의 과거사 외면으로 인한 한일 갈등'을 한미일 관계에서 카드로 활용한다는 생각을 가져보자. 일본이 역사를 외면하고 한국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않는 상황에서 한미일 3각 동맹을 통한 중국 견제에는 동참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한미동맹이 우리 안보의 초석이고 한미일 관계의 중요성을 물론 인식하지만, 동북아에는 엄연한 역사적 긴장이 존재하며 우리의 중국에 대한 국익이 미·일과 같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 있어 한일 갈등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미일 3각 군사협력에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한일관계를 긴장관계로만 가져가서는 안 된다. 경제와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은 일본과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다. 비단 이런 이익을 떠나 한일관계가 긴장되면 될수록 일본의 우경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므로 적절한 한일관계 유지를 통해 일본의 우경화를 제어해야 할 정치적인 수요도 우리에게 존재한다. 일본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과거사는 외면하면서 한일관계를 발전시키자고 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해관계에 따라 과거사 문제는 계속 제기하면서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른 분야의 관계는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점차 확연해지고 있는 미·일 대 중국, 혹은 미·일 대 중·러의 구도가 우리의 외교적 선택을 어렵게 하고 있지만, 이러한 대립 구도를 역으로 보자면 지금의 동북아 대립구도를 대화와 협력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만이 미·일, 중·러와 이해관계를 일정 정도 공유하면서 동북아 국가들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 수 있다.
미·일이나 중·러도 대화와 협력의 필요성을 인식할 것이나, 대립 구도의 한 축에서 대화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그 역할을 한국이 맡아준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경제, 사회, 문화 등 비정치적인 분야부터 시작해 정치 나아가 군사적인 분야까지 미·일과 중·러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반도 국가로서의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제고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은 독자적인 위상과 역할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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