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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심판론’이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 한겨레 2020-04-01
토지, 공존과 상생의 토대 국제 2020.4.1.
4·15총선, 누구를 어떻게 심판할까 프레시안 2020.04.02.
'악마' 찾는 사회에서 'n번방'은 되풀이된다 프레시안 2020.04.02.
한 곳의 가난은 모든 곳의 번영을 위협한다 경향 2020.04.02.
마스크와 2차산업의 재발견 경향 2020.04.02.
‘반진영논리’주의자들의 진영논리 한겨레 2020-04-05
역병 이후의 세상 경향 2020-04-05
부정적 감정의 집단전염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경향 2020-04-06
미사일 만들 돈 넘치는 세계, 인류는 정작 코로나에 죽어간다 프레시안 2020.04.07
전국민 재난지원금, 포퓰리즘 맞지만 '용서받을 정치'다 CBS노컷뉴스 2020.04.07
온라인개학이 사회적 격차 드러내는 뇌관 안되어야 CBS노컷뉴스 2020-04-08
죽음의 승리 독서인 한겨레 2020-04-09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사회적 풍경, 그리고 '대전환'의 시작 프레시안 2020.04.14
찍을 놈’이 없으니 투표한다 경향 2020.04.14.
도시 속, 한 그루 나무의 힘 경향 2020.04.14.
재난기본소득인가 뉴딜인가 경향 2020.04.14.
코로나19가 드러낸 시장의 그늘 한겨레 2020.04.14.
청와대, 검찰, 그리고 감찰 한겨레 2020.04.14.
야당 심판론’이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에 실린 각 정당의 10대 총선 공약을 보면서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 공약의 복고성, 퇴행성에 놀랐다. 부동산보유세 대폭 경감, 상속증여세 개선, 법인세 인하, 주택담보대출 완화, 남북군사합의 파기, 공수처법 폐지 등 뭘 없애겠다는 게 아주 많다. 정권심판론이 야당 단골 구호라지만 이 정도면 무턱대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의 총선 콘셉트는 한마디로 ‘못 살겠으니 그냥 옛날로 가자’는 식이다. 미래통합당의 ‘미래’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미래통합당이 과거회귀형 정당으로 방향을 튼 것은 황교안 대표 등장 이후다. 황교안의 당은 안보도, 경제도 모두 수구보수 일색이다. 보수 야당이 합리적 보수로 거듭날 동력을 잃은 것이다.
김종인 영입은 이런 과거 회귀형 콘셉트의 화룡점정과도 같다. 코로나로 선거판이 흔들리자 김종인을 내세워 ‘중도 팔이’ ‘경제민주화 팔이’로 땜질처방을 한 것인데, 김종인이란 인물 자체가 화석화된 과거일 뿐이다. 또 김종인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시대적 좌표, 시대정신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준다. 보수 야당조차 경제는 웬만큼 중도나 진보로 가야 한다는 걸 마지못해 인정한 꼴이기 때문이다.
2016년의 촛불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지만, 뭐라 해도 촛불의 제1 요구는 격차 해소다. 불평등 해소, 갑질 근절, 공정의 확립이었다. 지난 3년간 문재인 정권의 격차 해소 노력이 효율적이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방향을 틀 계제는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말하자면 격차 해소를 위한 더 정교하고 효율적인 방안을 강구하라는 게 촛불의 요구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은 이를 더욱 재촉한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국가나 사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세계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힘없고 덜 가진 이들을 돕고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촛불혁명의 또 다른 요구는 구체제 척결과 정치 쇄신이었다. 이른바 ‘박정희 체제’의 청산과 합리적 보수, 합리적 진보로의 재편이라고 할 수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다당제 합의제 정치, 제왕적 대통령제 혁파 등이 그 목록에 있었다. 하지만 수구보수의 부활, 진보 내부의 난맥상 등으로 정치 쇄신은 난망하다. 퇴행성 공약 일색인 보수 야당 문제가 심각하지만 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 등 친여 비례정당 역시 제대로 된 공약을 내놓지 못하는 등 허둥대고 있다.
이번 총선은 촛불의 주된 요구인 ‘박정희 보수’ 청산을 위한 중대 기로다. 제일의 기준은 되살아나고 있는 구체제 종식에 맞춰져야 한다. 이와 함께 정당들의 행태도 면밀히 따져야 한다. 차선이 아니면 차악, 차차악이라도 택해야 한다. 오랜 세월 풍찬노숙하며 가치를 지키려 노력해온 당이 있는가 하면, 막판에 마지못해 등장한 비례위성정당도 있다. 공당의 공천에서 배제된 이들이 급작스레 모여 만든 당까지 생겼다. 이들 당을 똑같이 볼 수는 없다.
이번 총선은 단적으로 말해 ‘문재인 정권이 잘한 게 없으니 과거로 돌아가자’는 주장과, ‘문재인 정권이 썩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과거로 가는 건 아니다’라는 주장의 싸움이다. 이낙연과 황교안의 맞대결은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지금의 시대 상황은 불평등과 갑질, 수구보수 일색의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다
경제가 움츠러들고 집권 4년차에 치러지는 선거인데다 보수 통합까지 되면서 여당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던 선거가 혼전인 이유는 단지 ‘코로나 역풍’ 때문만은 아니다. 총선 특성상 정권심판 기조가 결국 드러날 가능성이 제법 높지만, 여당이 이만큼 버티는 건 촛불을 지키고 촛불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국민 염원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누가 촛불의 요구를 외면하고 모든 걸 촛불 이전으로 되돌리려 하는지 냉철히 살펴야 한다. 지난해와 올해 정치를 난장판으로 만든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잘 따져봐야 한다. 선거법 패스트트랙을 막겠다고 국회를 싸움판으로 만들고, 선거를 코앞에 두고 가짜 위성정당을 만드는 코미디를 연출한 장본인은 뭐라 해도 보수 야당이다. 그 코미디에 울며 겨자 먹기로 덩달아 뛰어든 집권여당 책임도 작지 않다. 하지만 이 난장판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는 명확하다.
이번 총선에서 정권 심판론 못지않게 이른바 야당 심판론이 거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백기철 ㅣ 편집인 한겨레 2020-04-01
4·15총선, 누구를 어떻게 심판할까
[창비 주간 논평] 민주당·민생당·정의당, 3당이 화해한다면?
제21대 국회가 어떤 모습일지는 예단하기 힘들지만 4.15 총선이 한국 정치의 부끄러운 진면목을 보여주며 출발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양대 정당이 비례대표용 위성정당 만들기 꼼수 경쟁을 벌인 탓이다. 이에 언론매체와 지식인 논객들 사이에는 양당의 행태를 준열하게 꾸짖으면서 총선에서 '유권자의 심판'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하지만 도대체 누구를 어떻게 심판하라는 말씀인지 국민들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허탈하기조차 하다.
총선에서 국민에게 주어진 심판 수단은 유권자 한 사람당 두 표뿐이다. 그나마 그중 한 표는 자기 사는 지역구에 각 정당이 내보낸 후보 중 유력한 두 명, 많아야 세 명 가운데 하나를 찍을 때나 '심판' 효과를 낼 수 있다. 물론 기권을 하거나 투표장에 안 나가는 선택지도 있기는 하다. 어쨌든 이번처럼 복잡하고 심란한 상황에서 적절한 심판을 수행하기에는 유권자에게 주어진 권한이 턱없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한 표밖에 없던 시절, 나아가 한 표마저 거의 무의미하던 독재시대를 기억할 때, 이 정도의 선택권이나마 갖게 된 것이 감사한 일이다. 이만큼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다치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두어 달 전만 해도 심판의 구도가 비교적 간명했다. 20대 국회의 4년 내내, 특히 촛불항쟁으로 정권교체가 된 후로는, 시민들의 개혁 요구를 사사건건 가로막으며 '식물국회'를 만들었다가 한정된 개혁 입법이나마 신속처리법안(패스트트랙)으로 오르자 '동물국회'의 재연을 마다치 않은 세력을 심판해야 하는 과제가 뚜렷했다. 이는 선거전략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건강한 상식에 속했다. 다른 한편으로 '촛불' 이전, 나아가 87년 민주항쟁 이전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주사파 청와대'라느니 '좌파독재 정부'라는 거짓뉴스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소수 세력에도 심판의 구도는 명백했다. 이 대결에서 상식이 승리할 때 '촛불국회'도 기대볼 수 있다는 생각을 나 자신 피력한 바 있다.
이 구도를 흔들어놓은 것이 개정선거법의 무력화를 노린 거대양당의 위성정당 놀음이다. 먼저 시작한 것은 물론 미래통합당(미통당)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미통당의 꼼수를 비난하던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이 저들의 작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면서 완전한 난장판이 되었고, 민심 비례성의 강화를 기대하던 소수정당들은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처지에 놓였다. 양당의 행각과 그간의 세세한 경위를 여기서 되짚어볼 필요는 없다. 한정된 선거제도 개혁조차 기득권 세력에 얼마나 큰 위협인지를 역설적으로 실감케 해준 셈이지만, 유권자로서는 누구를 어떻게 심판할지 곤혹스러워지고 환멸과 혐오감으로 심판의 의욕마저 상실할 법도 하다.
민주당에 우호적이던 인사들이 그렇다고 미통당을 찍는 일은 극히 드물 것이다. 반면에 투표 불참 쪽으로 돌아설 가능성은 무시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환멸은 당연하고 나도 민주당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미처 예상 못 했지만, 민주당 또한 우리 사회 기득권 구조의 일부임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면 그것도 문제다. 2016년 가을 촛불항쟁의 초기에 민주당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탄핵을 선창한 것은 일개 기초단체장이었고 서울시장이 시위군중의 안전과 편의를 적극 돌봐주었을 뿐, 당 지도부 대부분은 촛불시민의 요구에 냉담하거나 역행하려 하지 않았던가. 지난번 선거법개정 때도 민주당은 마지못해 끌려오는 형국이었고, 최종안 마련에서는 결과적으로 자유한국당의 입지를 넓혀주는 방향으로 소수당을 압박하지 않았는가. 양당 기득권 구조를 지키려는 행태가 최근에 도를 넘고 더욱 적나라해졌을 뿐, 민주당이 갑자기 변질했다고 분개할 일은 아닌 것이다.
나 자신은 '지역구 선거에서 민주당의 선전과 비례대표 선거에서 개혁적 소수정당의 약진을 목표로 하는 전략적 분할 투표'를 제안한 바 있는데(페이스북 2020.2.29 및 3.18), 괘씸하고 분한 마음이 들더라도 그 원칙을 고수하고 싶다. 입법부 내 반촛불 세력의 응징이라는 기본구도는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이 땅 주민들의 고통이 길어지고 심해지면서 불행 중 다행으로 희생과 헌신, 창의성과 연대라는 촛불 시민의 미덕이 다시 표면화되고 있다. 이런 선한 기운을 북돋우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본업일 텐데, 직업정치인들이 직무를 유기한다고 해서 참여하는 시민마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최근의 언론보도를 보면 국민들 사이에도 21대 총선의 이런 기본구도가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전략 투표만으로 속 시원한 심판을 이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촛불'이 아직 여기까지밖에 못 온 것이 현실이라면, 일거에 속 시원해지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가능한 최선의 심판을 하고 선거 이후에도 다각적인 분투를 지속하리라 다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투표 이전에도 민주당을 일깨우고 다그칠 일이 있다.
지금 식으로 해서는 설혹 민주당이 제1당이 된다 해도 21대 국회가 20대보다 나아질 가능성이 희박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심지어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종전보다 더 기막힌 '고난의 행군'을 해야 할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대통령 임기 4년 차인 데다, 20대 국회에서 그나마 선거법개정과 검찰 개혁에 시동을 걸 수 있게 해준 '4+1'(현재의 3개당) 연대를 민주당이 배신하고 국민 신뢰라는 정치 자본을 너무 많이 까먹었기 때문에 그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지기 쉬운 것이다.(국회 200석 이상이 필요한 대통령 탄핵이나 180석이 넘어야 결행할 수 있는 공수처법 폐지 등은 애당초 야당의 뻥치기와 여당의 공포 마케팅이 합작한 망상이었으므로 그걸 막았다고 자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개혁의 전진을 바라는 시민들이 민주당에 촉구할 일은 무엇인가?
사실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예컨대 민주당이 국민들과 '패트(패스트트랙)' 연대의 우군이었던 민생당과 정의당을 향해, 이번에 상황에 밀려 그렇게 결정했지만 정말 죄송하다고 진솔하게 사과하고, 이번 선거에 한정된 일회성이니까 더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제의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이해찬 대표는 비례위성정당 참여를 처음 발표하면서 국민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송구스럽다'고 다소 두루뭉술하게나마 이미 사과한 바 있다. 준연동형제 적용에 30석의 '캡'을 씌운 것이 일회성이라는 것은 '4+1'의 합의사항이기도 하다. 그때보다 한결 더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낸 뒤의 사과는 한결 더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사과의 진솔함을 보여주려면 선거법의 추가개정은 물론, 국회법·정당법 개정, 여야 의원 148인의 발의로 3월 6일부터 계류 중인 국민의 헌법 개정의 발의권을 보장하는 '원 포인트' 개헌안의 조속한 통과, 기타 각종 개혁 조치를 위한 협력 체제 구축을 제안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민주당도 크게 보아 기득권 세력의 일부이긴 하지만 미통당과 똑같은 적폐 세력은 아니며 근자의 꼼수 정치도 똑같은 내용은 아니라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민생당이나 정의당이 이에 호응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 판단이다. 민생당은 애초부터 호남지역 민심을 고려해 위성정당에 참여할 의욕이 큰 편이었고, 정의당도 이제까지 어렵사리 고수해온 위성정당에 대한 원칙적 비판을 철회하라는 것이 아니라면 민주당 및 민주당 지지자들과 지나치게 각을 세우는 길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3당의 일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면 이번 지역구 선거에서 선별적 연대조차 가능해질지 모른다.
그럴 때 유권자는 유권자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두 표의 심판권을 한결 편한 마음으로 행사할 수 있을 것이며, 꽤나 의미 있는 심판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프레시안 2020.04.02.
'악마' 찾는 사회에서 'n번방'은 되풀이된다
[창비 주간 논평] "엄벌은 성별화된 성적 규범을 변화시키는 것과 무관하다"
코로나19가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유약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였다면, 많은 여성들에게 디지털 성폭력은 이미 코로나19와도 같았다. 학력, 계층, 인종, 국적과 상관없이 언제든 여성이 성적 도구로서의 몸으로만 환원되어 거래와 교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디지털 네트워크가 그 상태를 영속화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분노는 막강했다. 그저 성인물이라 여기며 성차별적 포르노를 보고 즐기던 이들은 성적 지배와 통제의 쾌감에 점차 무감각해지며 더욱 '리얼한' 방법을 좇아갔다. 하지만 그 피해를 반복해 목도하는 이들의 분노는 무뎌지기는커녕 더욱 커져만 갔다.
그래서인지 텔레그램을 통한 성착취 사건('n번방'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분이 오히려 낯설기도 하다. 한편에서는 이 사건을 신종범죄라 진단하며 기술적 대응과 새로운 입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착취물이 유통되는 경로와 방법이 더욱 은밀해짐에 따라 추적기술을 고도화하고 입법의 공백을 메우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정말 '신종'인가? 채팅앱을 이용한 그루밍과 성매매 강요, '다크웹'을 통한 영상 유포와 비트코인 거래, 여성의 몸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는 것이 실적과 접근 권한이 되는 성구매 후기 웹사이트, '소라넷' 같은 불법 촬영물 유통 사이트, '포르노' 촬영 현장이나 클럽·룸살롱에서 여성의 몸을 갖고 놀고 심지어 강간하는 과정을 공유하는 상황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해왔다. 이 사건은 그러한 젠더화된 폭력과 성 문화가 총체화되어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이에 대한 여성들의 문제 제기가 어제오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가해자가 특정되고 나서야 사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언론사는 '박사'나 텔레그램 방에 참여한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성도착증에 기인한 것인지를 진단해줄 전문가의 발언에 기대며 논의의 프레임을 만들어갔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오늘날 엄벌을 요구하는 사람들 다수의 사고 회로에는 '피해자:가해자=선:악'이라는 이분법이 있다. 가해자 없이 저 등식은 성립하지 않으니 가해자가 특정된 지금에야 공분을 쏟아내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저 등식에는 피해자도 필요하다. 등식이 의미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피해자가 선하고 무고하게 여겨지는 만큼 가해자는 악마화되어 엄벌 요구를 추동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은 피해자가 없다고 여기는 행위, 대표적으로 성매매에 대해서는 공분하지 않는다. '음란물'이 아니라 '성착취물'이라 명명하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 중에도 그 앞에 '아동·청소년 대상'이라는 말을 꼭 덧붙이는 경우가 있다. 이때 아동·청소년은 성적인 것의 의미와 행위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미숙한 존재인 한에서 보호 가치가 있는 피해자가 된다. 아동·청소년의 취약성을 이용한 행위에 대한 규제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무고한 피해자를 찾고 규정하는 데 안주하는 것으로는 여성과 남성에게 차별적으로 작동하는 성적 규범의 변화를 이끄는 데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조두순 사건에 공분했던 한국 사회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떤 모습인지를 보라. 현재 텔레그램 사건에 공분하고 있는 이들조차 자신의 몸을 찍어 올린 어린 여성들의 '왜곡된 성관념'을 한탄하거나 심지어 성인 여성들에게는 돈벌이에 나선 '창녀'라는 비난을 일삼기도 한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한 성착취가 아니라 음란물일 뿐이며 그 소비는 문제 될 것이 아니라는 관점도 여전하다. 보호 가치 있는 여성과 진짜 피해자를 선별하려는 바로 그 관점이 여성들의 피해 발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착취를 지속시켰음에도 말이다.
이와 같이 현재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하나로 볼 수는 없다. 무고한 피해자 찾기, 악마를 찾으며 비난하되 자신과 선 긋기를 지속하고 'not all men'(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을 외치는 이들에게 엄벌은 성별화된 성적 규범을 변화시키는 기획과 무관하다.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은 엄벌에 대한 요구 자체가 아니라 정작 그 엄벌을 제약하는 '피해자:가해자=선:악'의 이분법을 향해 있다. 이러한 관점이 지속되는 한 입법을 강화한다 한들 법 집행과 해석의 관행, 성적인 것이 유독 여성이나 성소수자에게만 비난과 협박의 빌미가 되는 상황은 쉽게 바뀔 수 없다.
젠더 폭력의 핵심 기제이자 성산업 확장을 이끈 주된 요인은 여성을 지배하고 교환하면서 남성됨을 스스로 확인하고 또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다. 지금 많은 여성들은 스스로를 '악마'라 자처하는 조주빈에게 그 명명을 거부하고 있다. 그따위 인정 욕구를 채워주지 않겠다는 뜻이자, 자신은 조주빈과 같은 '악마'가 아니라며 억울함과 분통을 터뜨리는 이들이 과연 그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묻고 있는 것이다. 조두순에 공분했던 한국 사회는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기를 방기했다.
여성들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을 방법을 가르치려 들 것이 아니라 가해를 만들어내는 조건들, 사람을 성별화된 존재로 길러온 방식 자체를 이야기해야 할 때다. 그러한 논의 대신 성매매를 비롯한 여하한 성차별을 단지 개인의 합리적 선택과 노력의 문제로 일축하고, 노력을 통해 미래를 선도할 창의적인 인재가 되라 가르쳐온 한국 사회는 'IT 강국'이 되었고 또한 성착취를 디지털 산업으로 만들었다. 여성화된 존재들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작동하는 동의와 강제의 이분법, 보호가치 있는 피해자의 선별, 피해자라는 낙인과 모순된 성적 규범을 걷어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한국 사회를 진단할 계기로 삼길 바란다.
추지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프레시안 2020.04.02.
한 곳의 가난은 모든 곳의 번영을 위협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에게 중대한 공중보건 대응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경제·사회·발전적 차원을 포함한 우리 미래의 모든 부분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대응은 긴급하고, 치밀하게 계획되어야 하며, 전 세계적 규모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즉시 도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일터로부터 기업, 국가 경제와 세계 경제까지, 이 사태의 극복은 정부와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사회적 대화에 달려 있다. 이를 통해 2020년대에 1930년대의 대공황이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번 팬데믹은 노동시장의 깊은 결함을 무자비하게 드러내고 있다. 기업들은 그 규모와 관계없이 이미 운영을 중단하고 근무시간을 단축시켰으며 직원들을 해고하고 있다. 상점과 식당이 문을 닫고, 항공편과 호텔 예약이 취소되고, 재택근무가 늘어남에 따라 많은 기업이 파산 직전의 위기에 놓여 있다. 가장 먼저 실직하는 사람들은 판매원, 웨이터, 주방 직원, 수하물 담당자, 청소부 등 이미 고용이 불안정했던 사람들이다.
5명 중 1명만이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해고는 수백만 가정의 재앙을 의미한다. 우리가 현재 가장 많이 의존하고 있는 간병인과 택배 배달원은 유급 병가를 쓰기 어렵기 때문에 몸이 아프더라도 계속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도급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비공식 부문 종사자들도 마찬가지로 생계유지를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늘릴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빈곤과 불평등의 사이클을 극적으로 증폭시킬 것이다.
만약 각국 정부가 업무의 지속성을 보장하고 대량 해고를 막으며 취약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단력 있게 행동한다면, 수백만의 일자리와 기업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오늘 정부가 내린 결정이 향후 우리 사회와 경제의 건강 상태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례 없는 규모의 확장적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은 현재의 급격한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정부는 국민들이 한 주 한 주 버틸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하여야 한다. 이는 수백만 노동자의 소득의 원천인 기업들이 급격한 경기 하강에도 파산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하고, 나중에 상황이 개선되면 바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줄 것이다. 특히 자영업자, 시간제 노동자, 임시직 노동자 등 실업급여와 건강보험 혜택을 받기 어려운 노동자들을 포함한 취약계층을 위한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는 감염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매일 자신의 건강을 걸고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는 수백만명의 의료인과 간병인들(대부분 여성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하여야 한다. 또한 의료 장비와 기타 생필품을 운반하는 트럭 운전사와 선원들을 적절히 보호해주어야 한다. 재택근무는 노동자들에게는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사용자들에게는 위기 시에도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재택근무를 하면서 그들의 자녀들과 아픈 사람이나 고령자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돌봐야 하는 다른 책임과 적절히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수의 국가들은 이미 경제와 사회를 보호하고 노동자들과 기업들의 현금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례 없는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도입하고 있다. 이 정책의 실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부는 노사단체와 협력하여 사람들을 안전하게 하면서 일자리를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정책에는 소득 지원, 임금 보조, 휴직급여 및 자영업자 대상 세액공제, 기업들을 위한 재정 지원 등이 포함된다. 또한 강력한 국내 정책과 더불어 결단력 있는 다자간 협력 조치가 전 세계적 과제에 대한 글로벌 대응의 핵심임이 틀림없다.
지금과 같이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 ILO 헌장에 명시된 원칙을 되새겨 본다. “어느 한 곳의 가난은 모든 곳의 번영에 위협이 된다.” 이 원칙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실질적인 위협에 대응하는 여러 정책의 효과는 단지 재정 투입의 규모와 속도, 회복 곡선이 완만한지, 가파른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에 의해 미래에 평가될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 경향 2020.04.02.
마스크와 2차산업의 재발견
EU 회원국 외교관과 오랜만에 만났다. 예정되어 있던 행사가 줄줄이 취소됐지만 본국에 한국의 상황과 대응에 대한 보고를 하느라 정신이 없단다. 국경 봉쇄, 입국 금지, 인도적 지원 등 나라별 코로나19 대응에 따라 외교관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어 불확실성의 연속이라고 했다. 한국처럼 초기부터 증상자 전원을 대상으로 진단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확진자가 집중된 도시를 봉쇄하지 않고 시민 각자가 도시 간 이동을 자제하는 자발성에 감동했다고, 생필품 사재기가 일어나지 않은 점도 놀랍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안에서 의견이 같았는데 마스크에서 달랐다. 많은 전문가가 마스크가 코로나19 예방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며 자국에서도 아픈 사람이 아니면 쓸 필요가 없다고 발표했단다. 유럽에서는 마스크를 쓰면 병에 걸린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라고 들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감염 경로가 침방울인데 마스크 착용이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문가들도 마스크가 침방울을 막는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코로나19는 잠복기 증상이 가벼워 걸린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도 있으니 마스크는 타인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답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마스크 쓰기를 권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 착용이 일상인 한국엔 수백개의 생산업체가 있지만 유럽엔 생산시설 자체가 없는 곳이 많다. 한국처럼 비교적 마스크 공급이 안정적인 곳에서도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는데 구하기도 어려운 곳에서 마스크 착용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간 혼란을 넘어 마스크를 향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벌써 곳곳에서 품귀현상이 일어나 정작 필요한 의료현장에 공급하기 어렵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산업구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유럽은 이미 고부가가치 고차 산업 중심으로 경제구조를 재편해 막상 제조시설이 없는 곳이 많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스웨덴 약국에 해열제 등 비상약이 씨가 말랐다. 스웨덴에는 굴지의 제약회사가 있지만 공장이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명품 그룹사 루이뷔통모에헤네시는 향수 공장을 재빠르게 손소독제 생산라인으로 바꿨지만 여전히 마스크는 중국 공장에 의존해야 했다. 그나마 제조사가 본국에 있는 독일의 폭스바겐은 자동차를 만들 때 사용하는 3D 프린터로 인공호흡기를 제작하고 미국의 랠프로런은 생산라인을 바꿔 마스크와 의료용 가운 공급에 나섰다.
고차 산업을 지향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 여겼는데 각 나라 상황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은 1차부터 4차까지 단계별 산업이 공존하고 있다. 위기상황에서 각각의 산업은 나름의 역할을 한다. 4차산업 덕에 마스크 재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고, 3차산업 덕에 나가지 않고도 배송을 받을 수 있다. 2차산업이 있어 마스크 수급이 원활하다. 더 큰 위기가 닥친다면 1차산업이 가장 중요해질 것이다. BBC는 최근 코로나19로 흔들리기 시작한 식량 주권에 대한 분석을 내놨다. 코로나19가 진정되고 나면 앞으로 더한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무엇이 우선 필요할지, 최악의 경우 일정 기간 나라 전체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어떤 자원과 제조업을 전략적으로 가져갈지 산업의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
스웨덴 뉴스를 보는데 기후변화로 지구온난화가 지속될 경우 기온이 0.5도씩 상승할 때마다 경작지가 얼마나 늘고 그로 인한 식량 생산량이 얼마나 증가하는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있었다. 스웨덴은 기후변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나라인데도 플랜B를 준비하는 게 인상 깊었다. 대한민국도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한 예측과 복안을 갖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기획재정부는 다 계획이 있을 것이다 하수정 | 북유럽연구소 소장 경향 2020.04.02.
토지, 공존과 상생의 토대
사회 양극화의 그늘, 쪽방촌엔 햇빛마저 사치가 됐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불구
- 판잣집·옥탑방·고시원·쪽방 등
- ‘비주택’ 거주 전국 101만여 가구
- 이마저 재개발에 밀려나는 현실
- 헨리 조지 등 정치경제학자들
- “지주들은 자연의 산물인 토지로
- 노동자에 지대 받아 부 축적” 지적
- 빈부격차의 최대 원인으로 꼽아
- 국민 30% 연간 수백조 지대 차지
- 권력된 땅은 사익추구 대상 전락
- 美 도시선 지대를 조세로 받기도
- 정치권, 공존 위한 제도 성찰 필요
빈부격차는 햇빛마저 양극화한다. 눈부시게 밝은 박 사장네 호화주택과 한낮에도 칠흑 같은 기택네 반지하주택의 극명한 대비. 영화 ‘기생충’은 ‘햇빛 양극화’를 상징한다. 정부는 반지하를 쪽방, 옥탑방, 고시원, 판잣집, 비닐하우스 등과 함께 주택 요건을 못 갖춘 ‘비주택’으로 분류한다. 비주택 거주자는 부산 6만9000여 가구를 비롯해 전국에 101만6000여 가구나 된다.
부산 남구 문현동 쪽방촌. 1m 남짓 좁은 골목길 사이로 낡은 건물이 촘촘히 들어선 탓에 햇빛이 진입하기 어려워 낮에도 어두컴컴하다.
반지하 천지인 서울과 달리 부산에는 작은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쪽방이 많다. 쪽방촌은 지상에 있지만, 햇빛 소외지대이긴 마찬가지다. 1m 남짓 좁은 골목길 사이로 낡은 건물들이 빼곡한 쪽방촌에는 햇빛이 진입하기 어렵다. 흐린 동천 좌우에 늘어선 부산진구 범천동과 남구 문현동의 쪽방촌은 낮과 담을 쌓은 듯 어두컴컴하다. 우중충한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낮게 엎드린 동구 좌천·범일동 매축지마을의 쪽방촌에도 햇빛은 인색하다. “50년 살아도 국유지를 불하받지 못해 매년 100만 원의 사용료를 냅니다. 그 흔한 도시가스도 안 들어와 겨울나기가 정말 힘드네요.” 기온이 갑자기 영하로 떨어져 도시철도 1호선에서 동사자까지 발생했던 지난 1월 17일, 매축지마을에서 만난 60대 주민의 얼굴에는 그늘이 짙었다.
동천변과 매축지의 쪽방촌은 재개발 바람에 휩싸였다. 원주민은 대부분 밀려날 처지다. 평균 15%에 불과한 원주민 정착이나 평당 1000만 원을 넘어선지 오래인 부산의 아파트 분양가는 그들에게 복권 당첨만큼 이루기 힘든 꿈이다. 원주민은 그래서 패배할 줄 알면서도 철거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2년 간 버텨 온 연제구 거제2재개발구역의 원주민 9가구는 지난 1월 30일 법원의 강제철거 집행에 결국 밀려났다. 4470가구의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는 드넓은 거제2구역에 그들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도 여전히 가난의 골은 깊다. 미증유의 경제 위기를 몰고 온 코로나 사태는 빈부격차를 증폭시킬 기세다. 부는 증가하는데 왜 가난은 해소되지 않는 걸까?
■진보와 빈곤의 동거
거제2구역 원주민 강제 해산.
150여 년 전 미국에서도 이런 의문을 가진 이가 있었다. 정치경제학자 헨리 조지(1839~1897)다. “생산력이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빈부격차는 더 심해지고 생존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샌프란시스코 헤럴드의 뉴욕 특파원으로 일하던 1868년, 그는 극도의 사치와 지독한 빈곤이 병존하는 것을 목격하곤 원인 규명을 위해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가 1879년 펴낸 명저 ‘진보와 빈곤’이다.
조지는 ‘토지 사유’에서 근본원인을 찾았다. 인류사의 최대 철학적 난제인 소유 문제를 끄집어낸 것이다. “토지의 배타적 소유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합의하여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후세대의 권리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노동이나 자본을 투여한 인위적 생산물이 아닌, 토지 햇빛 물 공기 지하자원 등 자연의 산물은 공유의 대상이라는 시각이다. 그런 토지를 사유함으로써 진보와 빈곤이 병존하게 됐다는 것이다.
부산 동구 좌천·범일동 매축지마을의 쪽방촌.
조지는 지주가 토지를 빌려주고 받는 지대(地代)를 빈부 양극화 작동체계의 핵심으로 꼽았다. 그는 이 체계를 ‘생산량=지대+임금+이자’ ‘생산량-지대=임금+이자’라는 두 정식으로 정리했다. 고전경제학(정치경제학)에선 노동·토지· 자본을 생산의 3요소라고 한다. 노동은 임금, 토지는 지대, 자본은 이자라는 대가를 각각 낳는다. 문제는 두 번째 정식에서 보듯이,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지대가 올라가면 임금과 이자는 줄어들게 된다는 데 있다.
“토지가치가 상승하면 지대로 흡수되어 버리고 임금과 이자는 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토지가치 상승이 생산력을 능가하면 임금과 이자는 오히려 하락한다.” 토지가치 상승은 노동과 자본, 대중교통시설 같은 국가와 지자체가 건설한 사회간접자본 덕분이다. 지주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타인의 피땀을 지대란 불로소득으로 챙긴다는 게 조지의 주장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상위계층 소득의 태반은 지대에서 나온다. 지대는 하위계층으로부터 상위계층으로 돈을 이전시키며, 일부에게는 이익을 주고 나머지에게는 손실을 주는 방향으로 시장을 왜곡한다”고 했다. 지대가 빈부격차의 최대 원인이라는 얘기다.
■한국 불로소득 매년 수백조
연제구 거제2구역 재개발 현장.
우리는 어떨까. 경실련의 분석 자료를 보면, 한국의 토지가격 총액은 2018년 현재 1경1545조 원이다. 이 중 정부 보유분(2055조 원)을 뺀 민간 보유분은 9490조 원이다. 이런 엄청난 부를 국민의 30%인 1500만여 명의 지주가 소유하고 있다. 시가의 60~70%에 불과한 공시지가로 계산한 게 이렇다. 지대도 막대하다. ‘토지+자유연구소’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적게는 연간 264조6000억여 원, 많게는 346조2000억여 원에 달한다. 국내총생산(GDP)의 21.7~27.8%다. 30%의 지주가 토지를 못 가진 70%의 국민에게 땅을 빌려주고 받은 불로소득이다. 두 번째 철학기행 장소를 우리 현실에서 찾은 까닭이다. 가장 절실한 철학적 문제는 ‘지금, 여기’에 있다.
자유시장경제론을 확립한 정치경제학자들도 지대를 부정적으로 봤다. 애담 스미스(1723~ 1790)는 ‘국부론’에서 “어떤 나라의 땅이 모두 사유재산이 되어버리면 그 즉시 지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자신이 결코 씨를 뿌린 적 없는 곳에서 수확하기를 좋아하고, 자연이 만든 생산물에서도 지대를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지주는 아무런 노력도 모험도 절약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권리로 일반적인 사회 진보에서 생기는 부를 차지하는가”라고 꼬집기도 했다.
동래구 명륜동 상가에 걸린 임대료 인하 호소 펼침막.
지대의 원천인 토지 사유는 어떻게 제도화됐을까. 토지 사유는 자본주의 형성과 맥을 같이한다. 공유지에서 농민을 쫓아내는 울타리치기(enclosure)를 통해 이뤄졌다. 카를 마르크스(1818~1883)가 ‘자본론’에서 말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다. ‘인클로저’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이가 철학자 존 로크(1632~1704)다. “자연이 제공한 것에 자신의 노동을 섞으면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노동은 만물의 어머니인 자연보다 더 많은 무엇을 자연에 첨가한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노동’ 개념을 도입해 토지 사유를 정당화했다.
철학자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울타리 말뚝을 뽑아버리고 ‘이 사기꾼 말을 듣지 마시오. 이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고, 여기서 난 과실이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우리는 파멸할 테니’라고 동포들에게 부르짖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가 얼마나 많은 범죄, 전쟁, 살인, 공포, 불행에서 인류를 구해주었겠는가.” 조지도 “자연법은 노동의 권리 외 어떤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며 토지 사유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뿌리내린 토지 사유제의 철폐를 주장하진 않았다. 그럴 경우 혼란이 너무 크다는 이유에서다.
그 대신 지대를 조세로 징수해 국민 복지에 쓰는 ‘지대조세제(토지가치세)’ 도입을 제안했다.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대로 가지게 한다. 매매·증여·상속도 허용한다. 지대만 환수하면 된다.” 그의 지대조세는 다른 모든 세금을 대체하는 단일세다. 이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이는 작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다. 귀족(백작)이었던 톨스토이는 소설 ‘부활’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를 통해 사회학적 실험을 시도했다. 자신의 토지를 농민에게 넘겨주되, 마을에서 공동관리하며 개인에게 임대해주고 받는 대가를 공익에 사용하는 방식이다.
■4·15총선서 지대 문제 공론화를
지대조세제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뉴질랜드 등지에서 시행 중이다. 펜실베니아주에선 20개 도시가 지대조세와 재산세를 혼합한 세금을 거둔다. 지대조세제는 ‘토지공개념’의 대표적 유형이다. 토지공개념은 4·15총선의 쟁점으로 등장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토지공개념을 개헌 주제로 다루자”고 주장하자, 미래통합당 심재철 원내대표는 “사회주의 개헌”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지대조세제는 재산·소득·노동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정기적으로 일정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과도 관련이 있다. 지대조세를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서다. 2018년 지방선거 때 부동산종합세와 재산세를 없애고, 지대조세의 일종인 국토보유세를 거둬 기본소득제를 실시하자는 공약이 나왔다. 기본소득 역시 4·15총선의 민감한 쟁점이 됐다.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부산 기장군과 울산 울주군, 경기도가 전 주민에게 10만 원의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다. 기본소득에 한걸음 다가선 셈이다.
기본소득은 미국의 사상가 토마스 페인(1737~1809)에게서 연원을 볼 수 있다. “토지 재산은 원래 없던 것이다. 인간은 땅을 만들지 않았으며, 설령 땅을 점유할 권리가 있다 해도 영구히 자기 재산으로 삼을 권리는 없다.” 그는 지주로부터 지대를 거둬 60세 이상 노인에게 매년 10파운드를 지급하고, 21세 되는 청년에게 사회진출금으로 15파운드를 주자고 제안했다.
토지는 권력도 낳는다. 조지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 사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고 권력의 원천”이라고 했다. 토지는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렌(1857~1929)이 말한 ‘지위재(地位財·status goods)’인 셈이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토지 투기가 성행하는 연유다. 조지는 지대와 토지 투기를 불황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산업 활황→토지가치 상승→토지 투기→생산 중단→상업 파탄→불황→회복→활황’의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얘기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땀 흘려 일하기보다 땅으로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지대 추구 사회, 심각한 자산 불평등 사회로 전락했다. 이런 ‘부동산 공화국’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2018년 7월, 국내 지식인 323명은 ‘사회·경제개혁 촉구 선언’에서 지대를 적폐의 1순위에 올렸다. “건물주님, 임대료 인하로 상생합시다.” 코로나 생계난을 견디지 못한 자영업자들의 임대료 인하 호소가 전국에서 터져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토지는 공존의 토대인가, 사익 추구의 대상일 뿐인가. 민심은 지대 문제에 대한 철학적, 제도적 성찰을 바란다. 4·15총선 주자들과 정치권이 적극 화답해야 할 때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 국제 2020.4.1.
‘반진영논리’주의자들의 진영논리
문빠가 언론 탄압하는 시대, 조선일보 없었다면 어쩔 뻔’했냐는 서민 단국대 교수의 문자화한 음성을 보는 순간 나는 놀라는 대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난해 펴낸 책 <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에 일종의 복선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이 책에서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규정하면서, 조선일보 방씨 일가를 피해자로 동정한다.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윤지오가 사기꾼이라는 데 동의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소셜미디어에서 벌어진 ‘삼인성호’(三人成虎)에 세뇌된 상태였다. 정치철학자 조정환의 <증언혐오>와 <까판의 문법>이라는 ‘빨간약’을 삼킨 뒤에야 나는 마녀사냥의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자연·윤지오 사건이 품고 있는 각각의 복잡한 사실과 주장을 여기서 다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한 윤지오의 증언은 흔들린 적이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윤지오가 인터폴 ‘적색 수배’를 받게 된 사건인 크라우드펀딩 ‘고펀드미’ 사기 혐의의 경우, 애초에 범죄의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기란 남을 속여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행위인데, 윤지오가 증언한 ‘장자연 리스트’는 분명히 존재했고, 윤지오가 이 리스트를 봤다는 사실이 관련자들의 진술 조서 등을 통해 명백히 드러나 있다. 장자연 사건 초동수사 당시 은폐에 가담했던 경찰이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고, 윤지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편승해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설령 윤지오가 사기꾼이 맞다고 하더라도 <조선일보>가 피해자가 될 수는 없다. 장자연이 목숨과 맞바꿨던 증언이 방씨 일가를 가해자로 지목하고 있다. 윤지오 사건과 관련해서도 방씨 일가는 피해자가 될 수 없다. 경찰과 검찰이 은폐한 진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단지 이름이 불리는 것만으로 그들을 피해자로 명명한다면 역사적인 ‘가해자-피해자 바꿔치기’ 사례로 남을 것이다.
서 교수가 감행하는 ‘정신적 축지법’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그가 ‘문빠’라고 부르는 극단적 온라인 행동주의자들과 만나게 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그들로부터 서 교수가 심각한 공격을 받았고, 그들이 펼치는 ‘진영논리’의 폭력성에 질려, 맞서 싸우겠다고 작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 교수 자신이 또 다른 진영논리에 빠진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영논리의 특징은 팩트에 별 관심이 없으며, 메시지보다는 메신저를 중시하고 편부터 가르는 것인데, 서 교수가 윤지오 사건에 임하는 자세가 그러하다. 서 교수가 책에서 새로 밝혀낸 사실은 거의 없다. ‘까판’이라고 불리는 유명인 비판 계정들이 제기한 윤지오(메신저)의 학력 위조 의혹과 직업 사칭 논란을 비롯해, 과거를 캐는 내용을 정리한 수준에 불과하다. 증언자(피해자)는 결백해야 한다는 순수주의와 주류 기득권의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조정환의 책이 나온 지 한참 됐는데도 언급조차 않는 걸 보면, 팩트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서 교수와 함께 ‘반진영논리’라는 새로운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인물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다. <문화방송>이 보도한 <채널에이> 기자의 협박성 취재가 뭔가 프레임을 걸고 있는 느낌이라며 검찰과 채널에이를 응원한다. 코로나19 방역 등 몇몇 사안에서는 여전히 정확한 진단을 내놓는 그가 검찰 관련 보도에서 이성을 잃는 이유는 검찰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를 무조건 옹호해온 전력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정당성을 유지하려면 검찰을 비호할 수밖에 없게 돼버린 것이다. (여당 쪽이) 프레임을 걸고 있다는 진 전 교수의 말이 일말의 진실이라도 담고 있다면, 그의 시각 또한 (검찰 쪽) 프레임을 걸고 있다는 주장 역시 가능하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르지만, 어둠이 깊어질수록 지혜의 눈은 밝게 빛난다. 사후에(야) 말하는 지식인은 욕망과 정서에 호소하는 정치인과 달리 차가운 이성으로 사회를 ‘리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라쇼몽’의 세계에서 단선적 정의감처럼 위험한 도박은 없다. 반지성주의 집단에 맞서 싸운다는 지식인들이 반지성주의의 얼굴을 하고 열린 사회의 적들에게 달려가 안기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이재성 ㅣ문화부장 한겨레 2020-04-05
죽은1937년 2월의 어느 날, 니콜라이 부하린의 아파트에 세 명의 비밀경찰이 들이닥쳤다. 마침 전화가 울렸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니콜라이?” 스탈린의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와서 저더러 크렘린에서 나가라고 하네요.” 부하린이 대답했다. 스탈린은 착잡했다. 부하린의 전처 나데즈다가 보낸 간절한 편지가 떠올랐다. 이 진실한 혁명가를 반역죄로 기소한다면 자신도 당을 떠나겠다던. “그놈들 악마한테나 보내버리게.” 스탈린은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퇴거는 당분간 유예되었다. 그 자신이 악마라고 해도 좋을 스탈린조차 부하린을 제거할 때는 망설였다. 부하린은 늘 사랑받았다. 스탈린도 그를 좋아했다. 그래도 죽여야 했다.
소련 정치범수용소 출신의 역사가 로만 브랙먼이 쓴 전기 <스탈린의 비밀파일: 숨겨진 인생>이 전하는 부하린 숙청의 한 장면이다. 물론 스탈린은 잠시간의 감상을 거두고 곧 ‘정치’를 재개했다. 부하린은 2월27일 체포됐다. 온갖 반혁명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듬해에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기예에는 절륜한 바가 있다. 트로츠키가 우선 타깃이었다. 인물이 탁월하니 두려워하고 질투하는 이들이 있었다. 됨됨이가 범속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손잡고 실각시켰다. 둘을 제거할 때는 명민하고 인기 많은 부하린과 제휴했다. 이제 혼자 남은 부하린 차례였다.
부하린은 인간적 사회주의 노선으로 소련 인민과 서구의 지지를 받았다. 스탈린이 소련 사회주의의 흑화를 상징한다면, 부하린은 살아남은 희망의 증거였다. 1936년, 부하린은 처와 함께 파리를 방문했다. 곳곳에서 강연하고 인터뷰했다. 망명 권유를 받았지만 물리쳤다. 앙드레 말로에게 말했다. “스탈린은 절 죽일 겁니다.” 이윽고 돌아가 예견된 죽음을 맞았다.
스탈린은 그저 권력에 미친 악마일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그는 검소했다. 부패하지도 않았다. 선입견과는 달리 옛 동지들을 마구 죽이지도 않았다. 트로츠키조차 처음에는 추방에 그쳤다. 정적을 죽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부터였다. 왜 그리 잔혹해졌을까? 그에게 정치는 본디 전쟁이었다. 신생 소련은 제국주의 국가들에 포위되어 있었다. 혁명 직후의 내전 개입 이래 제국주의의 위협은 상수였다. 스탈린은 특히 독일의 소련 침공을 확신했다. 1933년 나치의 집권과 재무장 선언으로 확신이 굳어졌다. 전쟁이 임박했으므로 농민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중공업 건설에 매진해야 했다. 민주주의는 사치였다.
반면 부하린의 노선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래로부터의 소비에트 민주주의, 점진적이고 유연한 경제개혁, 인민의 실생활 향상을 꾀하는 경공업 육성 등등. 스탈린은 가소로웠다. 낫과 괭이, 투표용지 따위로 독일의 전차와 전투기를 막겠다고? 소련은 가난한 농업국이었다. 우방 하나 없이 사방이 적이었다. 그 소련이 독일이 침공해온 1941년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공업국이 되어 있었다. 스탈린이 이끈 기적이었다. 나치가 침략하자 정부와 공업시설을 후방으로 옮겨 무기를 생산하게 하고, 자신은 모스크바에 남아 전선을 지켰다. 잔인하되 용감했다.
스탈린은 진영 테제의 창시자였다. 세상은 공존할 수 없는 적대 진영으로 나뉘어 있으며, 정치는 진영 간의 전쟁이라고 믿었다. 이상을 떠벌리는 지식인 부류를 경멸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의 미친 듯한 중공업 육성이 없었다면 소련은 나치한테 패망했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소련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진영론을 폄하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기적이 된 소련은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괴물이 되었다. 인민이 지킬 이유가 없었다. 진영론을 경계해야 할 이유다.
정치란 결국 진영 간의 전쟁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강력하다. 진보 진영도 다르지 않다. 검찰개혁도 전쟁이라 아군 장수의 허물을 물으면 반역이 된다. 수십년 만에 민주적 대표성을 조금 보강한 새 선거제도는 진영론자들의 편법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처음에는 머뭇대던 위성정당들이 어느덧 당당해졌다. 행동하는 현실주의자들의 시간이 도래했다. 선거에 지면 명분 따위 무슨 소용이냐며 꾸짖는다. 맞다, 정치는 ‘어느 정도’ 전쟁이다. 그래서 묻고 답해야 한다. 피의 대가로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은 어떤 곳인지, 어떤 정의를 약속하는지. 거기 제대로 답할 수 없다면, 이건 ‘그냥’ 전쟁이다. 심지어 지저분한.
조형근 ㅣ 사회학자 한겨레 2020-04-05
역병 이후의 세상
어느 봄, 역병이 다국적 도시 ‘지구촌’을 뒤덮었다. 차이나타운의 어느 시장에서 탄생한 코로나19라는 이 병은 코리아타운을 훑고 유럽타운을 폐허로 만들었다. 도시의 최대 세력으로 오랫동안 군림해온 아메리카타운도 제물이 됐다. 역병은 곧 일본촌에서도 대폭발할 것이다. 사람들은 날씨가 따뜻해지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면서도 ‘역병 이후의 세상’에 대해 불안해한다. 여러 불길한 징후들을 봤기 때문이다.
아무도 수습하지 않는다. 이 도시의 ‘넘버1’ 아메리카타운은 바닥을 드러냈다. 혼란이 발생할 때마다 중심을 잡았던 과거는 옛말이 됐다. 집 장사로 재물을 쌓아온 ‘보스’ 도널드 트럼프는 중소촌락으로부터 ‘보호세’를 뜯는 데만 열중했다. 아메리카타운 사람들에게 “우리는 괜찮다”고 큰소리만 쳤을 뿐이다. 그렇게 보호세를 걷더니, 정작 어려움을 겪는 다른 촌락들을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병은 아메리카타운도 집어삼켰다. 트럼프는 허둥댄다. 독일과 프랑스촌이 구매계약을 맺은 차이나타운 마스크 수백만장을 웃돈을 주고 가로채기까지 했다.
책임지지 않는다. ‘넘버2’ 차이나타운은 역병을 은폐해 화를 키웠음에도, 미안해하기는커녕 큰소리를 친다. 보스 시진핑은 “바이러스의 근원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를 밝히라”고 했고, 행동대장들은 앞다퉈 “우리가 발원지가 아닐 수 있다” “역병과 싸우면서 다른 구역들이 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고 우겨댄다. 위기를 정치적 기회로 삼으려는 욕심도 드러냈다. 어려움을 겪는 촌락들에 의료진과 방역물자를 지원해 역병 발원지 이미지를 세탁하고, 아메리카타운의 부재와 무능을 부각시키려 하는 것이다.
인도주의 따위는 개나 줘버렷! 아메리카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한 일본촌의 얌체 본성도 확인됐다. 보스 아베 신조는 여름 축제 흥행에만 정신을 팔았다. 타 촌락의 유람선이 일본촌 내 항구에 정박하려 했지만, 감염자들이 있다며 하선을 막았다. 오랜 이웃 코리아타운이 어려움을 겪자 사전예고 없이 ‘한국인 출입금지’ 팻말을 내걸었다. 무리수를 남발하던 아베는 축제가 1년 미뤄진 뒤에야 대폭발이 임박했음을 인정했다. 어려울 때마다 기댔던 큰형님 트럼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답이 없다. 나중에 돌아 온 문자메시지. “동생, 내 코가 석자일세.”
남의 불행은 나의 기회다. ‘거리의 파이터’ 출신 블라디미르 푸틴이 오랫동안 보스로 있는 러시아타운은 넘버1, 넘버2의 빈자리를 거칠게 파고들다 구설에 올랐다. 이탈리아촌에 소독, 방역용 장비들을 보냈다고 선전했지만, 이탈리아촌 사람들은 “ ‘정치쇼’ 하지 마. 우리는 산소호흡기와 마스크가 필요하다고”라며 화를 냈다. 러시아타운은 아메리카타운에 산소호흡기와 마스크를 보냈다. 그런데 상표를 뜯어보니, 아메리카타운 제재대상에 오른 회사 제품들이다. “의도가 뭐냐”고 하자, 러시아타운은 “필요 없어? 도로 가져간다”고 큰소리를 친다. 푸틴의 목적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영향력 확대였다.
역병과 맨 앞에서 싸워야 할 WHO는 헛발질을 했다. 바이러스가 무섭게 번질 때도 팬데믹 선언을 할 때가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와 “죽도록 바이러스와 싸워야 한다”고 뒷북을 친다. 사람들은 WHO가 차이나타운 뒷돈을 받고,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수군거린다.
도시 분위기는 험악하다. “XX 때문에”라고 외치는 인종주의자들이 판치고 있다. 프랑스촌에선 위험한 백신 실험을 아프리카촌에서 하자는 말도 나왔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데, 역병으로 멈춰 선 경제는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넘버1, 2는 바이러스 출처를 놓고 멱살잡이를 한다. 고래 싸움으로 새우 등 터질 날도 머지않았다. 트럼프는 ‘보호세’를 더 뜯어내려 할 것이고, 시진핑은 “아메리카냐. 우리냐”며 양자택일을 강요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병 이후를 걱정한다. 누구를 믿어야 하느냐고, 불신은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고.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라”고 했고, 아메리카타운의 저명한 외교전문가 헨리 키신저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정치적·경제적 대격변은 수세대 동안 지속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건 우리 자신뿐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역병과 싸우는 과정에서, 대단치 않아 보였던 우리 주변의 자산과 제도들이 썩 괜찮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하여, 우리의 자산에 단단히 발을 딛고, 우리끼리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역병 이후의 세상과 맞서야 한다. 이용욱 국제부장 경향 2020-04-05
부정적 감정의 집단전염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참으로 밋밋한 행성일세!” 만일 20억년 전쯤에 지구를 둘러본 외계인이 있었다면, 그의 일기장에는 이처럼 씌어있을지 모른다. 그런 그가 타임머신을 타고 10억년 전쯤으로 다시 왔다면? 형형색색의 화려한 지구를 보고는 깜짝 놀랐을 게다. 대체 지구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성(sex)의 출현이다. 생명이 출현하고 23억년이 지나도록 지구에는 무성생식(유전자세트를 자식 세대에 그대로 물려주는 방식)을 하는 생명체밖에 없었다. 복제 오류가 발생해야만 조상과 후손의 유전자세트가 달라지는 세상이었으니 다양성은 미미했다. 이런 밋밋한 지구를 화려한 행성으로 변모시킨 터보 엔진이 바로 성(性)이다.
유성생식(부모의 유전자세트를 섞어 자손을 만드는 방식)이 왜 진화했는가는 진화학계의 가장 흥미로운 질문 중 하나다. 대답은 미생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은 세균, 바이러스, 기생충 등 미생물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생명이 만든 필살기였기 때문이다. 무성생식을 하는 경우 치명적 미생물이 한번 침입하면 후대마저도 멸절에 이를 수 있다. 유전적으로 대항할 무기가 없기 때문이다. 15억년 전쯤 생명은 유전자 칵테일 기법을 통해 조상 세대에는 치명적이었더라도 후대에는 그렇지 않게 만들 비책을 진화시켰다(연애 시 ‘밀당’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성의 탄생을 통한 유전적 다양성 전략이다.
코로나19에 인류의 ‘신체’는 지금 속수무책이다. 이 바이러스의 항체를 만들어내는 유전자가 현재 인류의 유전자 저장고 안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백신이나 치료제가 제때 개발되지 않고, 코로나19의 항체 형성 유전자가 인류의 유전자풀에서 유성생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출현하지 않는다면, 이 바이러스는 77억 인류의 난적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유전적 다양성도 코로나19 면역을 위한 비책이요, 인류의 희망인 셈이다.
그렇다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처하는 우리의 행동 비책은 무엇인가? 여기서도 다양성의 증진이 최고의 진화 전략일까? 언뜻 보면 그 반대인 것 같다. 타집단에 대한 경계는 미덕이 되었고, 타인의 고통은 못 본 척을 해도 되는 분위기다. 학교도, 상점도, 우리의 마음도 문을 닫고 있다. 이것은 분명 다양성을 줄이는 행동이다.
사실 병원체와 감염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는 우리의 본성이다. 썩고 냄새나는 이상한 뭔가를 좋아하던 조상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혐오와 회피 행동이 진화했다는 사실은 우리 몸의 면역 작용만으로는 불충분했음을 말해준다. 신체 면역과 같은 사후 관리 체계와 더불어 사전 관리 체계도 필요했던 것이다. 진화학자들은 이 체계를 ‘행동면역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감염의심 상태와 행동을 감지한 후 자동적 회피 및 혐오 반응을 일으킨다. 따라서 팬데믹 상황에서 각 개인의 행동면역계는 자동적으로 다양성을 차단한다.
이런 자동적 행동면역계에는 잘못이 없다. 이성이라는 수동 모드를 켜고 ‘바이러스가 창궐하니 내게도 이런 부정적 감정이 이는구나’라고 성찰하면 된다. 문제는 공포와 혐오 감정이 빠르게 전염되는 ‘집단적 역동’ 메커니즘에 있다. 진화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전염병 위협 상황에서 사람들은 노인, 외국인, 신체장애인, 심지어 비만인 사람에 대해서까지 혐오감을 드러낸다. 조금 다르게 생기거나 다른 처지에 있거나 다른 집단에 속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원체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문제는 행동면역계의 이런 민감한 작동이 동조 메커니즘을 통해 집단적으로 전염되는 현상인데, 이는 국가주의로 비화되기도 한다. 경제대국이 마스크를 해적질하고 품격 높은 나라의 전문가들이 아프리카를 백신 실험장으로 쓰자고 맞장구를 친다. 평상시 같았으면 서로 조심하고 배려했을 텐데 팬데믹이 오니 행동면역계에 고삐가 풀린 것이다. 중국인을 비하하는 “짱깨”라는 표현이 온라인에 급증한 것도 같은 현상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혐오가 아니라 혐오의 집단적 동조다. 이런 부정적 감정의 집단전염을 ‘이모데믹(emotion+epidemic)’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모데믹은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지구촌 사회에서는 재앙이다.
이모데믹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성 증진이 신체 면역의 최고 전략이듯이 이모데믹의 최고 면역법도 다양성 추구다. 이성을 활용해 ‘역지사지’를 하고 정서적으로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혐오에서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다. 확진자, 의료진, 독거노인, 방치된 아이들, 외국인, 의료체계가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함께 느끼고 돕는 행동을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광주의 의료진이 대구를 지원하고 광주 시민들이 대구에 장어 도시락을 전달한 ‘달빛동맹’ 사례를 보라. 이들의 행동은 다른 집단(가치)을 포용하는 공감이었다. 이러한 다양성 전략은 궁극적으로는 인류애로 이어질 수 있다.
전 세계가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을 강조하고 있다. 모임을 자제하자는 취지에는 이견이 없지만, ‘사회적’이라는 단어 선정이 매우 아쉽다.
사실 ‘사회적 거리’는 원래 관심의 반경을 뜻하는 용어이고 대개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모데믹을 극복하려면 오히려 사회적 거리를 좁혀야만 할 것 같다고 느낀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 더 공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리적 거리는 넓히면서 사회적(심리적) 거리는 좁히는 일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다. 우리는 문명을 이룩할 만큼의 공감력과 과학·의료 기술을 가진 유일한 종이지 않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물리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도 고통을 함께할 수 있고, 방호복을 입고 환자를 가까이서 돌볼 수도 있다. 심지어 뉴스만으로도 독거노인의 외로움을 함께 느낄 수도 있다. 바이러스는 물론이고 침팬지도 흉내조차 못 내는 일이다. 장대익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경향 2020-04-06
미사일 만들 돈 넘치는 세계, 인류는 정작 코로나에 죽어간다
망진자(亡秦者)는 호야(胡也)'라고 했거늘
코로나19 사태가 지구적 위기로 번지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악의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해온 미국의 사정만 보더라도 이러한 평가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망자 수가 10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가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 현실화될 경우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인 사망자 수를 능가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도 성큼 다가오고 있다.
주목할 점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 유럽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 세기 동안 세계 권력을 장악해온 대서양 문명의 중대 위기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세계 권력의 중심축 이동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이러한 지구적 위기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인간 안보'를 도외시하면서 '군사 안보'를 신성시해온 삐뚤어진 안보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전세계 국방비는 약 1조 8000억 달러에 달한다. 군비경쟁이 치열했던 1980년대의 냉전 때보다 약 50% 높은 수치이다.
1조 8000억 달러 가운데 코로나 사태 최대 피해국인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5%, 코로나 발원지이자 초기 방역 실패로 상황을 악화시킨 중국이 약 15%, 대부분의 나라들이 확진자 및 사망자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G20이 차지하는 비중은 82%에 달한다.
이들 나라가 초기 방역 및 확산 저지와 적절한 치료에 실패한 중대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보건·의료 시스템의 미비에 있다. 이와 관련해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0년 동안 서유럽 국가들의 의사 수가 3분의 1이 줄었고, 보건의료 예산도 급감해왔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대표적인 공공 보건의료 후진국이다. 그런데 이들 나라의 국방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중국 역시 사회안전망의 미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빨리 국방비를 높여왔다. 상대적으로 국방비 지출이 낮았던 일본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출범 이후 지속적으로 국방비를 늘리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 평화론"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적극적 평화는 '군사 안보' 지출을 최소화하면서 보건의료와 복지와 같은 '인간 안보'에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국도 지난 20년간 국방비가 3배로 늘어났을 정도로 군사 안보를 신성시한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전염병 예방을 비롯한 인간 안보와 경제 회복이 지구적 과제, 특히 세계 질서를 주도해온 G20의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자원 분배의 군사화를 타파하지 못하면 인간 안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소중한 자원의 확보도 그만큼 어려워진다.
인류사회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길어 올려야 할 교훈 가운데 하나는 중국의 고사에 담겨 있다. '망진자(亡秦者)는 호야(胡也)'라는 고사가 바로 그것이다. 진시황은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오랑캐)라는 예언을 듣고 변방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오랑캐가 아니라 그의 자식인 '호해'였다. 외부의 위협을 과장하고 이에 대한 대비에 치중한 나머지 민생과 내부 모순을 방치한 결과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교훈을 주는 고사이다.
중대 기로에 선 인류사회는 선택적 변화에 나서야 한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면서 기상천외하고 가공할 살상력을 갖춘 무기를 만드는 데에 몰두해온 사이에 정작 안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의 안전과 생명이 위태로워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 선두에는 지구적 군비경쟁을 주도해온 미국과 중국이 나서야 한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군사력 건설로 21세기도 미국의 세기로 만들겠다"며 하늘 높은 줄 모르게 국방비를 끌어올린 미국의 민낯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2020년에 전면적 소강사회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했던 중국도 개혁개방 이래 가장 심각한 민생 위기에 처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많은 이들은 인류의 멸망을 재촉할 수 있는 3대 위협으로 핵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기후 변화 위기를 뽑는다. 그런데 군비경쟁 억제는 이들 세 가지 위협을 대처하는 데에 대단히 실효적이다. 군비경쟁 억제 자체가 핵전쟁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전세계 국방비의 10%만 줄여도 전염병 예방과 치료, 글로벌 그린 뉴딜을 통한 기후 변화 위기 극복에 필요한 예산의 상당 부분을 충당해나갈 수 있다.
기실 코로나 사태는 이들 세 가지 위기의 가장 은밀하면서도 충격적인 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도한 군비 투자와 이에 따른 보건의료 체계의 미비, 그리고 환경 위기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엄중한 경고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 프레시안 2020.04.07
전국민 재난지원금, 포퓰리즘 맞지만 '용서받을 정치'다
여·야 정치권이 코로나를 빌미 삼아 포퓰리즘에 빠졌다.
미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들이 무한정 돈을 살포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도 포퓰리즘이라는 '설탕물'(마시고 나면 갈증도 난다)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대중의 마음을 사는 특효약(돈 살포)을 코로나19가 불러왔으니 지도자들을 탓할 수만도 없지 않은가.
정부는 국제 기축통화인 달러화와 유로화, 엔화, 위안화가 아님에도 발권력을 가진 한국은행으로 하여금 돈을 찍어내고, 기업들과 증권 시장 등에 직접 자금 지원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정치권은 한 술 더 떠 전 국민에게 현금을 나눠주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김경수 경남지사가 전 국민에게 백만원의 현금을 주자는 제안을 한 이후 이재명 경기지사가 동조하더니 다른 지자체장들도 너도나도 현금 살포 대열에 동참했다. 재정자립도가 형편없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모양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정·청 회의 결과를 수용하는 형식을 통해 소득 하위 70% 가구당 백만원을 주기로 한 것도 명분은 코로나 위기 극복 방편이었다지만 크게 보면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형평성 논란이 거세지자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지난 4일 개인마다 재난지원금 50만원을 일괄 지급하자는 역 제안을 들고 나서면서 여당인 민주당이 다급해졌다. 이해찬 대표가 6일 부산을 방문해 소득 구분 없이 모든 가구에 백만원을 주자고 맞장구를 쳤다.
거대 양당이 선거를 앞두고 말을 바꾼 것이다. 민주당은 '70% 재난지원안'을 8일 만에 뒤집었으며, 미래통합당은 정부·여당의 '매표' 행위라며 강력 비판하던 태도를 던져버리고 포퓰리즘 대열에 동참했다. 경제 전문가라는 김종인 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까지도 빨리 지급하라며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발동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여·야 지도부는 7일에도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 경쟁을 벌였다. 이인명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현안점검회의에서 "쇠뿔도 당긴 김에 빼라는 말처럼 총선이 끝나는 즉시 임시국회를 소집해 4월16일부터 추경을 처리하고자 한다. 가능하면 4월 중 지급을 마치도록 속도를 내겠다"며 "통합당에 긴급 여야 원내대표 회동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황 대표의 50만원 지급 제안으로 모처럼 여야가 긴급 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에 뜻을 모은 만큼 추경 처리 속도가 빨라질 전망이다. 원래 민주주의의 선거가 포퓰리즘의 산실이라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코로나 위기 속에서 치러지는 21대 선거는 유난히 심하다. 재난지원금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코로나발 국가 재정 투입은 당장은 아닐지라도 머지않은 미래에 국가 재정 위기를 불러올 공산이 농후하다.
우리 자손들에게 빚만 잔뜩 쌓인 금고를 물려주는 것과 진배없다. 정치권의 포퓰리즘 형태를 보노라면 우리 후손들이 '부모·주부모 세대들이 나라를 망쳐놨다'고 비판하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하다. 그렇지 않아도 국가부채가 급증하고 있다. 정부가 이날 국무회의에서 심의·의결한 '2019회계연도 국가결산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국가부채가 사상 처음으로 1700조원을 훌쩍 넘어 1744조원에 달했다. 1년 새 60조원이 늘어난 것이다.
급격한 경기 둔화에 대응하기 위한 과감한 재정 확대 정책으로 지출이 늘어난 반면, 세수는 크게 줄면서 재정수지가 악화된 탓이다. 이로 인해 통합재정수지는 4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고, 나라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국가부채 증가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는 지적에 대해 정부는 일본과 미국 등 다른 선진국들보다 우리의 재정이 양호하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곤 한다. 미국과 일본, 중국, 유로존 국가들은 달러 등을 찍어낼 수도 있지만 우리는 발권력이 제한돼 있는 국가다.
특히 코로나 위기와 경기 침체기에 대비한 최고의 비책이 재정건전성임을 감안한다면 국가 재정 투입을 내주머니 돈을 쓰는 것처럼 아껴야 한다는 건 국가 운영을 책임진 지도자들에겐 일차적 책무다. 그런데 우리는 2년 전부터 국가 재정을 풀어 경기 침체를 막고 취약계층을 살려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전례 없던 재정주도정책을 폈다.
그러던 중에 터진 코로나바이러스는 국가부채 급증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나 선진국들의 중앙은행 총재들은 무한정 돈을 풀어 침몰하는 경제와 저소득층을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생존권 위기에 내몰린 현실은 포퓰리즘을 개의치 않는다.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나 IMF외환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생존의 위기로 내몰린 계층은 취약계층이다. 국가는 생존의 위기에 처한 그들의 삶을 보듬을 의무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코로나는 어려운 국민뿐 아니라 전 국민의 생활에 제약을 가했고, 전염병 감염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했다. 국민은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정책에 적극 협력했다.
이런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가 땡빚을 내서라도 지원하는 건 포퓰리즘 정책일지라도 면죄부를 받을 만하다.
따라서 여야 지도부가 선거를 의식해 말을 바꾸고 모든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자는 선심성 공약은 '용서받을 정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재앙 수준인 코로나 사태에 한해, 딱 이번만이라면 '정치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어록에도 딱 어울린다.
정약용 선생은 "정치는 국민을 곤궁하게 해서도 안 되며, 나라를 가난하게 해서도 안 된다"고 설파했다. 일단은 국민을 살리는 일에 매진한 뒤 나라의 경제력을 키워 빚을 갚은 게 정치라는 말이다/ 김진오 기자 CBS노컷뉴스 2020.04.07
온라인개학이 사회적 격차 드러내는 뇌관 안되어야
중학교 3학년생과 고등학교 3학년생의 온라인 원격수업이 9일 시작된다. 이후, 초등학교 저학년생까지 순차적으로 온라인 수업이 시작된다. 사실상의 개학이다.
온라인 개학 역시 코로나19라는 역대급 감염병과의 싸움처럼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나서는 것이다. 때문에, 온라인 개학에 어느 정도 시행착오와 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을 최소화해야 하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시간은 최대한 짧아야 한다.
정부는 초중고 온라인 개학을 염두에 두고 한달 전부터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온라인 원격수업을 하루 앞둔 날까지도 수업 준비가 부실한 학교들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교육부가 원격수업 지원사이트 'e학습터'에 3백만명까지 동시접속이 가능하도록 서버를 증설했다고 하지만 수업자료가 삭제되는 사고가 있었다.
학교 현장에서는 실시간 쌍방향 원격수업에 필요한 화상회의 프로그램의 연결과 보안이 불안하다는 지적도 있다. 출결석과 수업집중 여부를 확인할 방안도 보완할 점이 많다.
수업 도중에 해킹과 음란 동영상 침투에 확실하게 대비돼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상태이다.
개학 이후에 등장해서는 안되는 핵심적인 사전 준비사항들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수업방식으로 인한 교육격차 문제이다. 평등한 교육은 국민의 기본권이자 의무이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 스마트 기기가 없는 학생이 무려 22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스마트 기기가 없어 수업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차별이다. 개별 가정과 학교의 상황에 따라 온라인 수업에서 질적 차이가 드러날 수 있다. 조손가정이나 장애학생 가정, 맞벌이 가정, 다문화가정에 대해서는 교육당국의 배려가 필요한 부분이다.
온라인 원격수업이 빈부격차나 교육의 질적 차이로 인한 새로운 사회적 갈등의 요인이 되는 계기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준비와 진행이 요구된다.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EBS 등 원격수업용 공동 프로그램을 당분간 수업에 활용하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검토해볼만 하다. 교육부는 원격수업이 어려운 초등학교1,2학년은 EBS와 가정학습 자료를 활용하도록 했다. 나머지 학년에 대해서도 준비안된 부실한 수업을 감행하는 것 보다 이를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조언이 많다.
코로나19 방역에 이어 온라인 개학은 우리의 역량을 다시 한번 시험할 기회이다. 초유의 사태를 맞아 교육당국은 학교현장과 최대한 접촉하고 문제점이 발견 되는대로 즉각 시정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대한민국의 역량이 교육에서도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김규완 기자 CBS노컷뉴스 2020-04-08
죽음의 승리
정부가 지급을 검토하고 있는 생활지원금 대상에서 ‘외국인’을 제외하라는 의원이 있다. ‘외국인’도 납세자고 사회의 불가결한 구성원인데. 생활보호 수급자도 제외하라고 트위터로 발신하는 ‘작가’가 있고, 이에 대해 10만건이나 되는 ‘좋아요’가 달렸다. 이럴 때는 알기 쉬운 차별일수록 더 많은 지지를 얻는다. 이런 정치,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역병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재앙이다.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 최재혁(예술도서 번역·기획편집)씨 제공
플랑드르 지방(지금의 벨기에)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에게는 <죽음의 승리>라는 제목의 대작이 있다. 제작 연도는 1562년께로 추정된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죽음’의 군세(軍勢·군대 세력)는 용서 없이 인간들을 덮치는데, 그 맹위 앞에는 왕후장상도 고승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멀리서는 화산이 불을 뿜고 탑이 타오르며, 바다에서는 배가 불에 타 침몰하고 있다. 언덕 위에서는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있다. 여기에 그려져 있는 세계는 과연 500년 전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인가. 요즘 내 뇌리에는 이 그림의 영상이 들러붙어 있다. 그리고 인간 사회는 결국 좋아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른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오늘은 4월1일이다. 일본에서는 새 회계연도가 시작되는 날로, 보통은 각급 학교에서는 입학식, 회사에서는 입사식이 열린다. 그러나 올해는 사회 전체를 짓누르는 불안감이 뒤덮고 있다. 내가 일하는 대학에서는 입학식이 취소됐다. 물론 ‘신종 코로나 감염’ 사태 때문이다. 이날 시점에서 전 세계의 감염자 수는 74만명을 넘겼고 사망자 수도 3만6천명이 넘었다. (그 이틀 뒤 감염자 수는 100만명을, 사망자 수는 5만명을 넘겼다-역주) 일본에서는 감염자가 2천명 남짓이고, 사망자는 57명이지만, 이 수치는 앞으로 급속히 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염의 대만연과 의료 붕괴로 인한 집단적 패닉(공황)이 전 세계에서 진행된다. 뉴욕이나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참상은 충격적이다. 로마나 파리의 도시 풍경은 내게는 친숙한 것이지만 지금은 그 어디에도 사람이 없다. 스페인에서는 장례식이 금지됐다. 인터넷에는 뉴욕의 어느 병원에서 다 수용하지 못한 주검을 냉장 설비가 된 대형 트럭으로 운반하는 동영상이 떠 있다. “촬영하고 있는 사람의 손이 떨리고 있다. 그는 울고 있다”는 멘트가 붙었다.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페스트 재난 그것을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14세기 중반에 유럽 전역을 페스트가 뒤덮었다. 유효한 치료법도 없이 현세의 어떤 지위나 무력도 부도 의미를 잃었고, 모든 계급의 사람이 죽어가는 정세 속에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구를 입버릇처럼 되뇌게 됐다. 하지만 브뤼헐의 걸작은 단지 자연재해로서의 역병만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의 은유다. 당시 플랑드르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강국들이 쟁탈전을 벌이던 전장이기도 했다. 늘 그렇지만 재해와 역병은 그 단독으로 사람들을 덮치진 않는다. 그 고통과 비극을 인간 자신이 배가시키는 것이다. 재해에는 전쟁이 뒤따른다.
나는 이번 4, 5, 6월에 각각 한 번씩 심포지엄이나 강연 일로 한국에 다녀올 예정이었으나, 그것도 모두 취소됐다. 그중에서 5월에는 내가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해마다 인천에서 열리는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갈 예정이었다. 영화제를 앞두고 실행위원회의 요청으로 젊은 세대 지식인인 이종찬 선생과 뉴스레터에 공개하는 것을 전제로 서신을 교환했다. 2월 초에 이종찬 선생한테서 받은 제1신의 타이틀은 ‘마스크로 평등해진 사회’였다. 이 흥미로운 타이틀에 자극받아 나는 2월25일에 답장을 썼다.
이종찬 선생의 비유를 흉내내자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지구상의 인류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채 사멸해가는 모습이다. ‘평등화’라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 마스크조차 손에 넣을 수 없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3월31일 마스크를 쓰고 국회 질의에 답변하면서 국민 전체 세대에 재이용할 수 있는 면마스크를 2장씩 배포하겠다고 말했다. 마스크 2장이라니! 이것이 이 위기에 직면한 일본 정부의 “전례 없는” “대담한” 시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농담이라 여기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아니다.
앞으로는 약자들이 치료도 만족스럽게 받을 수 없는 불평등이 점점 확대될 것이다. 손 씻을 물조차 부족한 아프리카 등 발전도상국 사람들에게 닥쳐올 재앙을 상상해보자. 호화 여객선이 침몰할 때 승객들은 평등하게 희생당하는 것이 아니다. 구명보트에 가장 먼저 탈 수 있는 1등선객과 배 밑바닥에 갇혀 있는 3등선객은 불평등하게 희생당한다.
나중에 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뒤돌아볼 날이 올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더 끔찍한 대재앙의 서막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대재앙’이란 전염병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혼란 속에서 자기중심주의와 불관용 정신이 만연하고 파시즘이 대두하는 사태를 가리킨다. 이미 헝가리 등 권위주의적인 정권이 지배하는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그런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민주적인 절차들이나 인권 원칙이 비상시 대처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본말 전도의 주장들이 제기된다. 아베 총리는, 수많은 비리와 부정의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코로나 대책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정권을 버릴 생각이 없다고 답한다. 재해나 역병까지도 권력 연명에 이용하려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정부가 지급을 검토하고 있는 생활지원금 대상에서 ‘외국인’을 제외하라는 국회의원이 있다. ‘외국인’도 납세자고 사회의 불가결한 구성원인데. 생활보호 수급자도 제외하라고 트위터로 발신하는 ‘작가’가 있고, 이에 대해 10만건이나 되는 ‘좋아요’가 달렸다. 이럴 때는 알기 쉬운 차별일수록 더 많은 지지를 얻는다. 이런 정치,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역병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재앙이다.
역병이나 자연재해로 인간은 생활이나 목숨을 빼앗기지만, 실은 인간은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익이나 권력에 홀린 인간들에 의해. 그리고 사고 정지 상태로 그 사태를 방관하는 인간들에 의해. 도쿄올림픽 1년 연장이라는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선택이 일본 사회에서 환영받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좋은 예다.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는 500년도 더 전에, 인간이 진보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죽음’은 승리할 것이며, ‘죽음’에는 저항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에는 저항할 수 없을지라도, 인간의 ‘불의’에는 마지막까지 저항할 작정이다.
서경식ㅣ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ㅣ독서인 한겨레 2020-04-09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사회적 풍경, 그리고 '대전환'의 시작
자본주의 재생산구조에 심대한 변화 올 것
작년 말 우한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팬데믹 수준에 도달하는 데 불과 3달이면 충분했지만, 그것이 남겨놓은 상흔은 상당히 오래갈 듯하다. 아직 유동적이긴 하나 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대처, 의료인의 헌신적인 노력, 국난극복의 유전자가 재가동된 시민들의 헌신적인 희생에 기반을 둔 연대로 국내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일정하게 통제되고 있는 듯하다. 혹자는 이를 ‘유럽식 오리엔탈리즘의 종언’으로까지 격상해서 바라보기도 했다. 질병의 제어에 정부의 노력과 시민의 연대가 기여한 성과에 상찬은커녕 흠집을 낼 이유는 전혀 없으나, 팬데믹을 일국적 현상으로 가두어 보기엔 그 위력이 만만치 않다. 문제는 팬데믹의 현상으로 명명된 만큼 바이러스의 창궐은 질병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전지구적 차원에서 사회경제, 정치, 문화,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총성 없는 전쟁에 비유할 만큼 막강해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가 웬만한 전쟁에서 쓰러진 전사자 수를 넘어섰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이 팬데믹 현상의 발원은 아직까지 불투명하지만, 확산은 공공의료 대신 수익중심의 의료 민영화체계(의료 인력과 환자에 대한 병상배치)라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산물이며, 질병의 통제방식에서 드러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자발적)억압은 더 기이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질서를 재구성하는 사회화(Vergesellschaftung)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이 질병이 초래한 다양한 국내외적 현상을 보자. 국제공동체의 질서보다 자국이익을 앞세우는 트럼프의 신현실주의적 노선은 이전부터 분명했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중국은 물론 트럼프를 비웃던 유럽조차 흡사 중세시대의 성곽도시국가처럼 자기면역적 국가 공동체를 앞 다투어 선언했다. 이점에서 한국은 그와는 다른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었지만 향후 포스트-코로나 세계에서 국제질서의 안보와 공동의 이익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러한 신현실주의적 행태의 선례가 국제무역, 자원외교 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는 과정에서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가 하나의 병기창고로 전환되고,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위생에 대한 수칙 강요를 넘어 각급학교와 공공장소의 폐쇄,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의 이름 아래 스마트폰 감청에 의한 개인 동선의 추적 등은 안전에 대한 기대속에 민주적 자유권을 포기하는데 별다른 저항을 불러오지 않았다. 파시즘이라는 이탈리아의 특수한 정치경험에 기반을 둔 아감벤의 ‘비상국가’ 해석(그가 인용한 기초적인 통계도 엉망진창이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정부의 통치기술에서 유사한 상황의 징후는 발견되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정치적 신체의 안보를 대가로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자유를 희생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러한 자유와 안보의 변증법은 포스트-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행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놀랄 만큼 바이러스가 인간의 심리적 패닉상태를 합리적으로 정상화하는 방식이다. 곳곳에서 목격되는 코로나 사재기(생필품, 마스크),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증가하는 스트레스와 가정폭력, 공장이 멈추고 대중교통 이용은 줄어드는 대신 자가용 이용은 늘어가는 합리화된 패닉행동은 역시 포스트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지불해야할 사회적 비용이다.
근대 이전의 주권자의 권력이 사람을 ‘죽게 하거나 살게 만드는 권력’이었다면 근대의 권력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는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tics) 해석은 노동현장에서 자신의 신체를 규율하고 감시하는 규율권력 개념과 함께 이 현상을 설명하는 사례로 다시 빈번하게 소환되고 있다. 인종적 편견에 기초한 국경폐쇄와 신체에 대한 규율과 통제(자가격리 위반시 가혹한 처벌)라는 기제가 중국만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목격된다는 점에서 일면 타당한 점이 있다. 그러나 푸코가 보지 못한 점은 배제와 내면화, 규율권력이 결합하여 사회 스스로가 패닉 행동을 합리화하는 일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공공주거와 공공의료의 축소(최근 민영화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디지털 기술에 의존한 사회적 소통의 단절(사람과의 접촉에 대한 불안감) 등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사회적 격차의 확산에 적지 않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이후 감염병, 방역전문가들로 구축된 새로운 권력-지식-장치는 기존의 자본주의 질서의 민감한 부분(생산-유통-소비중단)에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일단 자본주의의 야만적 생산방식은 전문가들의 조언에 굴복하여 부분적이나마 세계의 공장을 중단시켰다. 물론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경제위기를 빌미로 거대한 구조조정과 고용유연화, 해고는 불을 보듯 뻔한 수순일 테고, 이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코로나-19의 위기는 대단히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자본주의의 위기와 중첩해서 새로운 ‘대전환’을 예고한다. 이미 현재의 자본주의는 2008년 ‘대침체’ 이후 지속적인 위기국면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며, 코로나-19 발발 이전에도 국제적 규모의 이주민 이동은 노동시장의 필요 때문에 선택적으로 허용되었고 비인권적 탄압과 통제는 점점 더 강화되고 있었다. 나아가서 산업자본의 미래로 개조된 ‘그린뉴딜’의 시대를 합리적 자본가들이 받아들일 만큼 기후환경의 문제도 심각하다. 팬데믹으로 인해 발생한 패닉행동의 합리화와 이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전략은 이 모든 비규범적 선행 위기와 중첩하여 자본주의 재생산구조에 심대한 변화를 초대할 것이다. 물론 독일의 ‘Schwarze Null’(Black Zero)정책의 폐기처럼 경제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의 재정균형의 신화가 깨지는 바람직한 일도 발생하지만, 생산의 측면에서는 더욱 가혹한 일들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케인즈주의적 수요정책에 기댄 재난(기본소득)정책이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인 생산과 소비/분배의 문제를 대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생산방식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방관자가 되지 말고, 기존의 생산관계를 너머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물질대사를 보존하고 새로운 사회안전망을 민주적으로 구축하는 실험을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슈트렉이 ‘사회기반시설의 공산주의’(Infrastrukturkommunismus)를 주장할 만큼 포스트 코로나 이후 시민이 감내해야할 고통의 수준은 심각해 보인다.
국가의 방역전략과 그로부터 감내한 사회적 패닉 행동의 합리화가 일시적으로 올바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미래의 보편적 행동이 되려면 주류경제학자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써먹는 ‘모든 조건이 동일하면’(ceteris paribus) 이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어려운 상황에서 방역에 힘쓴 전문가와 민주정부의 결단, 이를 묵묵히 감내한 민주시민의 희생이 대단하고 칭찬할 일이나 전지구적 차원에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가시밭길을 피할 도리는 없어 보인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대전환의 서막은 이제 막 시작하고 있다고 하겠다
임운택 계명대학교 교수 | 프레시안 2020.04.14
찍을 놈’이 없으니 투표한다
지난 토요일 사전투표를 위해 나섰다가 놀랐다. 기록적인 26.69%의 사전 투표율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모든 사회적 활동이 극도로 위축된 상황에서 치러지는 선거지만 많은 시민들은 ‘거리 두기’의 압박과 필요한 정치행동을 잘 구분하며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이번 사태에서 나타난 ‘K-방역’과 ‘K-시민 민주주의’의 어떤 요체가 모든 방역도구를 갖춘 투표소, 그리고 마스크와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비닐장갑을 낀 유권자들에게 있는 거 같았다. 그리고 현재의 ‘사회적인 것’과 일상의 위기를 뭔가 다른 것으로 전화시키겠다는 집합적 의지가 표출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전까지는 기권하거나 ‘자체 보이콧’하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좀 가진 게 많고 배웠다는 경우에는 약간의 오만도 느껴졌지만 이유는 단순하고 익숙한 것이었다. “찍을 놈(당)이 없다.” 당연히 이해가 된다. 미래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꼼수정치와 위성정당의 헌법·선거법 유린 행태는 사상 최악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배달된 선거 공보(이것 외에 전체 선거판을 볼 수 있는 매체가 별로 없다)는 환멸이 더욱 커지게 한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면면은 여전히 법조인, 교수, 관료, 기업가 출신 50~60대 욕심꾸러기 기득권층이 대다수다. 제대로 된 정책 공약을 공보에 쓴 당도 거의 없었다. 심지어 ‘박근혜’나 교주님을 내세운 팬덤과 정당을 구분하지 못하는 집단과, 문제의 위성정당과 특정 이슈에만 매달린 소위 떴다방형 당들은 한국 대의정치가 수렁에 빠져있음을 확인하게 했다.
거시적 ‘탈정치’ 현상은 단순히 정치적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좌우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리고 실제적인 다양한 민주적 경합의 공간이 축소되어 유권자의 선택지가 줄어들 것이다. 즉 여당이나 야당이나 비슷한 상황이 자주 닥치고 그럴 때 ‘양자택일’은 차라리 강요에 가까울지 모른다. 이를테면 시민단체들의 ‘총선넷’이 선정한 각종 ‘나쁜 후보’ 178명 중 통합당은 96명, 민주당은 49명이다. 통합당이 50%쯤 민주당보다 ‘더’ 나쁘니 다행일까? 특히 양당은 핵심 경제 불평등의 문제, 부동산과 재벌개혁 등에 대해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한다. 이낙연, 이인영은 강남 사람들에게 아부하느라 연달아 종부세 완화를 약속했다. <세습중산층 사회>의 저자 조귀동이 이 시대의 불평등구조를 분석하면서 거대 양당 구도를 “60대 건물주의 정당 vs 50대 부장님의 정당”의 싸움이라 정리한 그대로다. 그 싸움은 이제 진정한 ‘민주 대 반민주’ 대결이 아니며, 한국 사회의 깊은 모순을 제대로 대의(재현)하지 못한다. 이를 놓치면 검찰개혁·언론개혁을 달성해도 한국 민주주의는 반쪽짜리에 머문다.
선택의 다양성과 다수 서민의 대의를 담보해야 할 진보정당들은 ‘지지부진’에 머물러 있음이 이번에 다시 드러났다. 이제껏 정의당은 문재인 정부 지지층과의 갈등을 피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실리를 추구해왔지만, 이제부터 새로운 대중정치를 발명하고 실행해야만 한다. 낡은 리더십은 바꾸고 진짜 노동자, 여성, 청년과 연결되는 당이 되어야 한다. 노동당·민중당·녹색당도 본래적인 자기 한계와 정당운동의 의미에 대해 되물어야 할 상황일 것이다.
이런 모든 일에 투표라는 회초리나 격려가 필요하지 않은가? 아주 오래 그래왔던 것처럼, ‘찍을 놈(당)이 없다’는 바로 그 상황이 또 우리가 투표장에 가야 하는 역설적 이유라는 것을 또 확인하게 된다. 환멸의 바이러스와 목구멍에 딱 걸린 냉소를 KF94 마스크로 막으며, 분노나 (또 배신당할지 모르는) 희망을 안고 투표하러 간다. 586 부장님과 60대 건물주들의 당은 늘 너무 뚱뚱 뻔뻔하고, 정말 찍고 싶은 당은 가냘픈 빈사상태에 있는 이 악순환을 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악순환도 참 오래됐지만, 기실 우리의 정치적 이성도 못지않게 노련하지 않은가.
코로나19 위기도 투표를 잘해야 할 이유다. 닥쳐올 경제위기가 얼마나 깊고 넓게 서민층의 삶을 위협할지, 아직 파악조차 잘 돼있지 않다. 거대한 고용위기와 서민생계의 위협에 대해 과연 정부가 잘 대처하고 있는가? 속도·방향·실행 의지가 믿을 만한가? 힘을 싣거나 회초리를 휘두르거나, 한 표가 할 일이 많다.
사전투표에 나타난 열기는 사그라든 촛불의 잔불과, 미증유의 위기를 이겨내고 싶은 무정형의 열망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 뜨겁거나 냉철하거나, 한 표 한 표가 ‘조국사태’ 이후의 냉소와 환멸을 새로운 버전의 정치적 효능감으로 바뀌게 되기를 바라본다.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경향 2020.04.14.
도시 속, 한 그루 나무의 힘
올해 3월 국내 미세먼지 농도는 작년과 비교해 절반으로 줄었다. 강해진 바람과 잦은 강우 등 기상적 요인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겠지만, 미세먼지를 줄이는 데 배출원 관리가 최우선임이 틀림없다.
국립산림과학원은 나무와 숲의 미세먼지 저감 능력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나무 한 그루 단위의 미세먼지 저감량, 숲과 도시의 미세먼지 농도 실측 자료를 비교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전체 숲 면적과 대기오염물질 흡수량을 단순히 산술계산하여 숲의 기능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국내 대기오염물질 총배출량과 비교했을 때 숲의 저감률은 매우 낮다”라는 의견은 대기오염물질 배출량과 숲의 흡수량을 산정하는 과정이 달라서 생긴 오해다. 발전소, 공장, 도로 등에서 배출되는 대기오염물질은 유입, 이동, 유출 등의 대기화학적 과정을 거쳐 환경부 국가대기오염 측정망에서 측정값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국가 총배출량을 일부 지역의 흡수량과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나무를 식재한 지역에서 발생한 오염물질의 배출량과 그에 따른 흡수량을 산출하는 것이 정확한 계산법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은 미국 산림청과 공동연구를 통해 나무는 일정한 공간 내 미세먼지를 3분의 1가량 감소시킨다는 결과를 얻었다. 60㏊ 면적에 ㏊당 나무 1300그루를 식재할 경우, 미세먼지 농도 ‘나쁨’ 수준의 80㎍/㎥의 도시숲은 대기혼합고(대기가 섞이는 높이) 1500m에서 0.66%, 50m에서 13.2%의 미세먼지 농도 저감률을 보였다. 일반적인 나무의 키 높이인 20m를 적용하면 33.1% 저감률을 보인다.
그렇다면 도심과 숲의 미세먼지 농도는 정말 차이가 있는 걸까? 현재 서울 동대문구의 환경부 측정점인 용두초교와 홍릉숲의 미세먼지 농도는 동일하게 예보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홍릉숲의 미세먼지 농도가 낮게 측정된다. 이와 동일한 연구보고는 중국, 미국, 독일 등에서도 이미 발표된 바 있다. 다만 숲의 크기, 관리 상태, 산지 연결성 등의 변수에 풍속, 습도, 기온이 작용하며 저감률은 다르게 나타난다. 국립산림과학원은 다양한 시험림에서의 연구를 통해 숲 내부에서는 작은 입자의 미세먼지가 큰 입자로 변화하는 속도가 빠르며, 무거워진 미세먼지가 땅으로 가라앉는 침강률이 높다는 자료를 축적해 오고 있다.
최근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수준일 때도 많은 사람들이 공원과 도시숲을 찾는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취약계층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위한 숲으로 만들기 위해 숲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다. ‘숲 가꾸기’보다는 ‘숲 바꾸기’라는 슬로건으로 수종, 구조, 바람길을 만들기 위해 과학적 자료에 기반한 숲 관리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대도시 도로변에 한두 줄 가로수를 심고 녹지를 가꾼다면, 숲은 단지 미세먼지를 잡는 트랩의 역할뿐 아니라 도시의 그린인프라로 다양한 혜택을 제공할 것이다. 안팎으로 모두 힘든 시기지만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우리와 후손을 위해 초록의 미래를 준비하자.
조재형 | 국립산림과학원 도시숲연구센터장 경향 2020.04.14.
재난기본소득인가 뉴딜인가
지난 3월 마음과 몸이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잠도 깊이 들지 못하고 식욕도 떨어졌다. 우리 삶의 터전이 치명적으로 무너지지 않나 하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3월 하순을 지나면서 조금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총선 일정도 치러내고 있다. 이나마 헤쳐 지나온 길에 작은 촛불을 켜고 싶다.
코로나 위기는 전염병이라는 외부충격에 의한 자본주의 순환 위기다. 코로나19에 의해 이동이 제한되고 경제활동의 순환이 멈춰서면서 시스템이 위축되었다. 중국이 우한을 봉쇄할 때는 중국과 연결된 공급망이 교란되는 정도였다. 미국과 유럽에 코로나19 확산이 진행되면서 위기는 전면화되었다. 미국 연준이 ‘빅컷’ 카드를 내놓고 상원이 ‘지원·구제·경제안전법’을 의결하던 때가 중대 고비였다. 이때 한국에서는 시민·의료진·공무원들이 낙동강전선을 지켜내고 있었다.
금융적으로는 2020년 3월 중하순에 붕괴 위기의 저점을 일단 통과했다. 향후 코로나19를 적절히 통제한다면, 6~7월에 산업적 저점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2020년 말~2021년 초에 세계경제는 일상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병원균이 스페인독감처럼 몇 차례 파도로 밀려와 충격이 계속되는 것이다.
미국은 방심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세 차례 긴급조치를 통해 재정자금 투입을 결정했다. 세 번째의 2조달러 프로그램 내용은 기업대출 454억달러, 소기업대출 349억달러, 가계 현금지급 301억달러, 실업보험 250억달러, 세금 연기와 만기연장 221억달러 등이다. 특히 가계 직불금이 부각되었지만, 이는 봉쇄상황을 반영한 구호 프로그램이다.
미국의 현금지급 프로그램을 기본소득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기본소득의 원래 개념은,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평생 규칙적인 현금지급을 보장하는 것이다. 재난은 규칙적 기본소득의 제도화를 어렵게 한다. 미국의 현금지급은 워낙 다급한 상황에 몰린 것을 의미한다. 기본소득이 추구하는 자유·평등의 지향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 미국이 막대한 국채를 발행하는 것은 타국의 자금을 빨아들이고 미래세대에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유럽도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독일 등은 고용유지, 실업지원, 소상공인 보조 등에 재정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유럽에 비해서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편이다. 구호를 넘어 적극적 산업정책에 재정을 투입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먼저 지방정부 차원에서 장기적 투자계획을 공표하고 있다. 3월 들어 7개 성(省) 정부에서만 사회간접자본 중심으로 25조위안(약 4250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투자계획을 공표했는데, 2020년 집행분이 3조5000억위안(595조원)이다. 다른 성 정부의 투자계획도 이어질 것이다. 이와 별도로 중국 국무원은 소비부양책과 IT 분야 투자계획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위기 상황에서 증세는 어렵다. 환율을 방어해야 하니 화폐를 마구 찍어낼 수도 없다. 국채 발행이 재정자금 투입의 주된 수단이 될 수밖에 없지만 한계가 있다. 작년 GDP가 1914조원이었다. 만약 GDP의 5%를 뉴딜 재정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100조원이다. 이는 구호·회복·개혁을 추진하는 뉴딜 프로젝트에 전략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과 기업을 선별해 집중 구조해야 한다. 신산업 분야에 공유자산을 형성하는 데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전 국민에게 100만원씩 현금지급하면 50조원이 든다. 이는 복지와 혁신체제를 확장할 기회에 쓰여야 할 돈이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적 자원배분이 허용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전략적 선택을 포기하면 국가와 정치의 역할도 포기하는 것이다. 정부·기업·시민사회가 새로운 합의·계약을 맺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과연 민주적·공화적 뉴딜의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국은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경향 2020.04.14.
코로나19가 드러낸 시장의 그늘
대면 수업 개강은 늦춰졌지만 투표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투표를 연기해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했지만 투표율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해 일찌감치 사전투표를 하러 갔다. 투표소 입구에서 봉사자들이 체온 측정을 하고 손소독제로 손을 씻게 하고 일회용 비닐장갑을 배부해 착용하도록 했다.
신분 확인을 하던 사람이 살짝 웃더니 조그맣게 말한다. “공무원노조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 수고가 많으시네요”, “늘 그렇죠, 뭐….” 짧은 대화였지만 긴 이야기를 나눈 것만큼 묵직한 공감대가 오갔다.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노동운동에 대한 이해가 척박한 우리 사회에서 온갖 질시와 탄압을 견디고 있다는 뜻이다.
투표를 마치고 돌아오니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방에 홍보물이 하나 올라온다. 투표소에서 배부될 일회용 비닐장갑 분량이 63빌딩 7개 높이나 된다고 하니, 개인이 장갑을 지참해서 자원도 절약하고 환경보호도 하자는 내용이다. 투표하기 전에 봤으면 좋았을걸 싶었다. 잠시 뒤 다른 글이 하나 또 올라온다. 장갑을 지참하고 갔더니 외부 인입 물질이라 그 위에 굳이 일회용 장갑을 다시 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자원절약과 환경보호도 중요하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는 감염 방지가 최우선이어서 그 말이 맞는다 싶기도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다. 고글 등 보호구로 인한 상처에 반창고를 붙인 간호사들 얼굴 사진에 감동하고, 음압병실에 한번 들어가면 교대할 때까지 나올 수 없어 의료진이 기저귀를 착용하고 일한다는 기사를 읽고 존경심마저 느껴졌지만 언론사 기자들이 밀착 취재하느라고 간호사들의 인권을 침해한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노동자 인권을 보호하는 일에 오랜 세월 매진해왔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그러한 짐작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신자들이 치유를 기원하며 선물한 산소호흡기를 낯선 젊은 환자에게 양보하고 병마와 싸우다 숨진 70대 노신부가 존경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며칠 뒤, 훌륭한 성품의 신부가 숨을 거둔 것은 맞지만 기증받은 산소호흡기는 아예 없었고 신부의 관이 거리를 지날 때 주민들이 창가에 나와 찬사를 쏟아냈다는 미담은 사실이 아니라는 기사를 보고는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허전했다. 언론이 미담을 만들어낸 이유는 현대사회 언론의 기능 역시 시장에 맡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느라고 교수들이 진땀을 빼고 있다. 노트북 컴퓨터 내장 카메라 성능이 시원치 않아서 집에 굴러다니던 컴퓨터용 외장 카메라를 사용하니 한결 나아졌다. 좀 더 나은 것을 찾느라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지금 사용하고 있는 외장 카메라 최저가격이 무려 48만원대이다. ‘이렇게 비싸고 좋은 것이었나?’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한달 전만 해도 가격이 5만원대였다. 아, ‘시장’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전국의 교사와 교수들이 온라인 강의를 하느라고 수요가 폭증하니 같은 제품의 가격이 한달 만에 열배로 뛴 것이다.
평소 무상의료를 자랑해온 유럽이 코로나19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현상을 두고 보건의료를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하고 영리병원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다. 우리나라 보건의료 체계의 장점이 물론 있겠지만 지금까지 한국이 코로나19 사태에 잘 대처해온 이면에는 스스로 “갈아 넣는다”고 표현할 만큼 공무원을 포함한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엄청난 초과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코로나19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거나 지역사회 감염을 통해 집단 면역을 획득하는 것 둘 중 하나라는데, 두가지 모두 1년 이상 걸리고 집단 면역 획득까지는 인구의 2%, 곧 100만명 이상이 사망할 것이라고 한다. 그 긴 기간 동안 지금과 같은 초과노동으로 버틸 수는 없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쓰러지면 시민들이 쓰러지고 사회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노동자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코로나19 이후 경제 위기에서 가장 빠르게 반등하며 회복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제적 이윤 추구가 모든 인륜과 도덕적 가치 위에 군림하며 그동안 저비용 고효율을 진리처럼 여겨왔으나 ‘고비용’ 경영을 준비하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부응하는 바람직한 자세다. 노동자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는 것은 현재나 미래를 위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한겨레 2020.04.14.
청와대, 검찰, 그리고 감찰
수사받는 피의자 쪽에 “협조 안 하면 가족들까지 고초를 겪게 될 것”이라고 을러대며 취재해본 적 없다. “검찰과 협의할 수 있고 자리 깔아줄 수 있다”며 취재원을 홀린 적도 없다. <문화방송> 보도로 알려진 <채널에이(A)> 기자의 취재 방식을 접하고 많이 놀랐다. 방송 보도는 한발 더 나아갔다. 이 기자는 ‘윤석열 검찰총장 최측근 검사장’이 자신에게 한 말이라며 “언론에서 때려봐. 당연히 반응이 오고 수사도 도움이 되고 이거는 당연히 해야 되는 거고 양쪽(검찰과 언론)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녹취록을 읽어줬다. 채널에이 기자가 신라젠 전 대주주 이철씨 쪽에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에게 금품을 줬다는 진술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윤 총장의 최측근 검사장과 ‘작전 공유’가 있었다는 의심을 사는 대목이다. 해당 검사장은 “신라젠 수사를 담당하지 않았고 관여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기자와 그런 대화 자체를 나눈 적이 없고, 따라서 녹취가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련 보도에도 해당 검사장의 육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기자가 ‘윤석열 최측근 검사장’의 이름을 팔아 ‘장사’를 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진상을 규명하려면 해당 검사장 주장대로 △기자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고 △그런 녹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면 된다. 채널에이 기자가 해당 검사장과의 대화를 녹음했다고 주장했으니 녹취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기자 쪽을 겨냥한 강제수사가 효과적이긴 하다. 그러나 언론 보도로 국민적 관심사가 돼버렸고 법무부가 철저한 진상조사를 지시했으니 대검에서도 당사자 해명을 듣고 끝낼 일은 아니었다. 대검 감찰본부 조사가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지만, 윤 총장은 감찰본부장의 문자메시지를 통한 ‘감찰 개시’를 반려한 데 이어 검사의 직접적인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는 대검 인권부에 이 사건 조사를 맡겼다. 감찰 전 단계의 사전조사를 대검 기획조정부가 진행하던 전례에도 어긋나는 지시였다. 왜 그랬을까. 한 전직 검사장은 “윤 총장에게 해당 검사장은 ‘자기 사람’이고 자기 때문에 인사 불이익도 받았다고 생각하니 그러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것 말고는 평소의 ‘정면돌파 스타일’과 다른 윤 총장의 이번 선택을 설명할 방법이 딱히 없어 보인다.
검찰 주변에선 선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그동안 미뤄뒀던 여러 중요 수사가 총선이 끝나면 일제히 터져 나올 거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다음달이면 문재인 대통령 임기가 4년차에 접어든다. 정권 말기인데다 청와대 감찰 실패가 드러나는 등 좋지 않은 징후도 존재한다. 유재수 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은 청와대 감찰 과정에서 금품수수 사실이 확인됐지만 사표를 내는 선에서 사건이 덮였다. 그러나 김태우 전 청와대 특별감찰반원의 폭로로 사건은 다시 살아났고 검찰은 유 전 국장을 뇌물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민정수석 당시 감찰을 무마한 혐의(직권남용)로 재판을 받게 됐다. 조 전 장관은 직권남용 무죄를 주장하면서도 “사후적으로 볼 때, 민정수석으로서 정무적 판단에 미흡함도 있었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감찰 무마 과정에서 청와대 내부에선 “피아를 구분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고 한다. 내 편은 봐줘야 한다는, 전형적인 진영 논리다. 내부감찰 실패로 외부(검찰)의 손을 탈 수밖에 없는, 원치 않았던 결과가 앞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 세상이 돼버렸다.”
나라 걱정이 많은 한 지인이 최근에 한 말이다. 총선 뒤 본격 개시될 검찰의 수사가, 이에 대한 응전이, 편을 갈라 주먹질하는 패싸움이 되지 않길 바란다. 누구 편이냐 따지지 말고 무엇이 옳은 건지, 사람은 지우고 사건만으로 판단하면 좋겠다. 그래도 싸워서 이기고 싶다면 내부 단속부터 제대로 하고 링 위에 올라오라. “한솥밥 먹는 식구”라며 내 편은 봐주고, 남의 편만 가혹하게 패는 건 ‘정의’가 아니다.
김태규 dokbul@hani.co.kr 한겨레 2020.04.14.
Kisses Sweeter Than Wine - Jackson Browne And Bonnie Rai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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