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의 삶 경향 2020.03.16.
4·15총선을 기본소득 공론장으로 만들자 국제 2020.03.16.
최고의 방역에 빈곤한 대책 경향 2020.03.16.
개혁 연정’이 더 당당하다 경향 2020.03.16.
두산중공업의 오판, 뒷감당은 누구 몫인가 경향 2020.03.16.
질병에는 국경이 없다 시사인 2020.03.21
민주대연합이 지키려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프레시안 2020.03.18.
재난은 가난을 차별한다 한겨레 2020.03.22.
해월과 경허 그리고 전염병 한겨레 2020.03.22.
코로나19 이후의 세계화 경향 2020.03.22.
반정치주의 음모에 걸려들다 한겨레 2020.03.23.
역병이 지나간 후 남는 것 경향 2020.03.23.
갈라파고스도 뚫은 코로나 경향 2020.03.25.
사이버 ‘강간의 왕국’ 한겨레 :2020-03-26
코로나19 팬데믹과 인류의 질문 한겨레 :2020-03-26
염치없는 두 거대정당을 심판하자 한겨레 2020-03-26
우리 사회와 신천지, 적대적 공생관계 경향 2020-03-27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경향 2020.03.30
코로나19와 아마존 경향 2020.03.31.
코로나19 이후의 이중적 뉴노멀 사회 경향 2020.03.31.
코로나가 무너뜨린 신화들 한겨레 2020.03.31.
한국 사회의 대외 인정결핍증 경향 2020.03.31.
코로나19 시대의 삶
지금까지 코로나19 사태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이곳 포르투갈의 알가르브 지방에 며칠 전 첫 확진자가 발생, 수도 리스본으로 이송되어 격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거의 휴양산업에 의존하는 이 지역의 경제가 심히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추세니 어찌할 수 없고 그래도 이탈리아보다는 상황이 아직 양호하다는 안도감 속에서 이곳 주민들은 스스로를 위로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같이 인간이 자초한 재앙도 잦지만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이 맞닥뜨리는 재해도 많다. 32만명의 사망자를 낸 아이티의 대지진(2010)이나 인도양 전역을 강타해서 23만명의 사망자를 낸 쓰나미(2004)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물론 순전히 자연재해라고만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 스스로가 여러 가지로 재난을 더 키웠던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자연재앙은 그 규모가 큰 만큼 정치나 경제는 물론 사회 심리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남겼다. 1755년 11월1일에 발생한 리스본의 대재앙도 그러한 예로 자주 이야기된다. 당시 쓰나미와 지진이 몰고 온 재난으로 리스본시의 거의 전역이 파괴되고 6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재난은 그러나 지진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인간 이성의 승리를 구가했던 계몽주의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대재앙을 지켜보았던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말년에 남긴 풍자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야말로 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세계라는 견해를 비판했다. 리스본의 대재앙은 주인공 캉디드가 그의 선생 팡글로스가 입버릇처럼 말한 ‘모든 것이 잘될 거야’라는 식의 낙관주의와 결별하게 만들었다.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신이 어떻게 그런 참극을 용인할 수 있느냐는 그의 솔직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리스본의 큰 성당들은 그때 거의 무너졌다. 지금은 관광의 명소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당시 창녀촌이었던 ‘알파마’ 구역은 그러나 무사했다. 그래서 신이 정말 있다면 어떻게 그런 결과를 내버려뒀겠느냐는 질문이 당시에도 나돌았다. 지금 코로나19의 확산지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신천지’에도 해당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떻든 ‘평화의 궁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매개처가 되었으니 말이다.
리스본의 대재앙 못지않게 지금의 코로나19 사태도 여러 차원에서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최초의 글로벌 해양제국이었던 포르투갈은 이 대재앙으로 인해 식민주의적 팽창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지금의 글로벌 체제 안에서는 엄청난 양의 물자와 수많은 사람의 이동 그리고 정보의 빠른 흐름 때문에 모든 국가와 지역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코로나19의 충격은 당시의 재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중국 우한으로부터 시작된 재앙이지만 지금은 지구 상에 이로부터 안전한 지역은 거의 없게 되었고 지구적 범위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 또한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손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루아침에 많은 제약을 받거나, 더는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른 불안과 공포감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팽배하고 있다는 데 있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런 상황은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어려운 숙제를 제시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이 허락되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모든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상황이 되었다. 나 자신도 오래전에 계획한 여행을 취소할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위험을 무릅쓰고 떠날 것인지를 두고 고민 중이다.
이런 상황을 독일 보수주의 철학자 오도 마르크바르드는 ‘무능을 보상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라는 다소 난해한 표현을 사용해서 설명했다. 어떤 뚜렷한 철학적 원칙을 따르는 행동이 불가능하기에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대응하는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원칙과 결별하는 것만이 오늘날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냐는 의문도 뒤따르지만, 경청할 만한 시대진단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리스본의 대재앙이 본격적인 지진 연구를 가속했듯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인간을 항시적으로 위협하는 바이러스와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면역과 치료의 연구에 추동력을 줄 것이다. 지금은 우선 감염의 속도를 더디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지금까지 전염병 하면 으레 가난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병으로 여기고 부자 나라들은 이 지역으로부터 오는 사람들의 입국을 막거나 까다롭게 했지만 이제는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국가 입국이 어려워진 상황도 발생했다.
이번 코로나19 위기는 국가의 기능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도 마련했다. 중국의 초강도 방역전략에 이어 이탈리아도 ‘경찰국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전국을 봉쇄하고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자 비교적 빨리 긴급조치를 취한 북한에 대해서는 독재체제의 유지를 위한 정책이라는 식의 논평이 가끔 보인다. 그러면 보건의료의 조건이 열악한 북한에서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코로나19 위기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너무 무리하게 해석한다.
위기 극복의 열쇠는 결국 시민들의 성숙한 자기책임에 근거한 삶의 방식에 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는 식의 낙관도, 당장 지구의 종말이라도 올 것처럼 불안에 떠는 공황(恐慌)도 답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처럼 연대 속에서 공동체를 지키려는 부단한 노력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 아니겠는가.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경향 2020.03.16.
4·15총선을 기본소득 공론장으로 만들자
코로나 경제위기 타개책, 유효수요 창출서 찾아야
진보·보수 구분 무의미…실용적 입장 견지가 최선
문제는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모양이다. ‘기본소득’ 담론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재산이나 노동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일정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불과 3주 전까지만 해도 비주류의 이상론으로 여겨졌다. 그랬던 기본소득이 코로나 사태에 따른 글로벌 경제위기가 깊어지면서 생존이 걸린 현실론으로 바뀌었다. “코로나로 죽는 것보다 굶어죽는 게 더 빠르겠다”는 절규가 도처에 절절하다. 기본의 부재가 뼈저리다.
월 60만 원의 기본소득 공약을 내건 기본소득당이 “코로나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대구·청도지역에 기본소득을 일시적으로 도입하자”고 제안한 건 지난달 25일이었다. 이어 이재웅 전 쏘카 대표가 “경계에 서 있는 소상공인, 프리랜서, 비정규직, 학생, 실업자 등 1000만 명에게 재난기본소득 50만 원을 지급하자”는 국민청원을 올렸다. 여기에 김경수 경남지사와 이재명 경기지사가 “모든 국민에게 재난기본소득 100만 원을 지급하자”며 힘을 보태고 나서면서 기본소득 담론은 비주류에서 주류로 성큼 발돋움했다. ‘재난’이란 한시적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본질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생존권 확보에 있다.
사실 기본소득은 지구촌 공론장에 중요 논제로 호출된 지 이미 오래다. 마카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뒤 매년 모든 영주권자에게 현금 5000파타카(76만 원), 비영주권자에겐 3000파타카를 지급해온 게 단적인 예다. 기본소득은 국내에서도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꾸준히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저소비→저투자→저생산→저성장→저소득→저소비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탈바꿈하는 요체가 기본소득이라는 공감대다. 반면, 보수 진영은 기본소득을 “국가 재정만 악화시키는 무차별적인 현금 살포”라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경제이론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흐릿해진다. ‘헬리콥터 머니(helicopter money)’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이론은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해 돈을 찍어내 헬리콥터에서 뿌리듯이 시중에 공급하는 방안이다. ‘무차별적 현금 살포’라는 양태도, 전 국민에게 일정액을 계좌로 입금해 주거나 유효기간이 명시된 상품권을 지급해 단기간에 소비토록 한다는 구체적 운용 방식도 기본소득의 특징 그대로다. ‘마카오 연금’과 같은 기본소득이다.
이런 좌파 이론을 우파 자유시장경제론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이 창안했다. 보수주의자가 진보 이론을 주창했으니, 한국의 진보·보수에겐 납득하기 힘든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프리드먼에게 진보·보수의 이념은 무의미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효수요를 창출할 수 있느냐 하는 실용이다. 그런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그는 면세점 이상의 고소득층으로부터 소득세를 거둬 면세점 이하의 저소득층에게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부(負)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창안하기도 했다. 소득 재분배 효과를 높여 총수요를 늘릴 수 있는 혁신적 이론이다. 모든 복지 제도를 부의 소득세로 단일화하면서 관련 조직과 인력 운용에 드는 행정비용도 줄였다.
오늘날에도 미국 경제학계에 실용주의 정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단기 부양책의 목표가 사람들에게 현금을 쥐어주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며 재난기본소득 지급을 주장한 데서 그 정신을 목격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 연말까지 급여세를 면제하겠다고 하자, “근로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밝힌 견해다. 프리드먼과 크루그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이유를 짐작게 한다.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시민권자나 납세자인 모든 성인에게 1인당 1000달러(110만 원), 아동 1인당 500달러를 주는 일회성 지급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의회에 요청했다. 재난기본소득이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총수요 증가 방법이라고 한다.
우리 정치권도 이제 부질없는 진영 논리와 이념 다툼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정치권의 포퓰리즘 논쟁은 코로나에 감염되고서도 먹고살기 위해 못 쉬는 취약계층에 대한 모독으로 다가온다.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우리 경제는 공황 수준에 버금갈 정도로 꽉 막혀 있다. 전시에 준하는 특단의 경제 대책이 필요하다”는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의 말은 옳다. “메르스·사스와 비교가 안 되는 비상경제 시국인 만큼 정부는 전례 없는 대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판단과 상통한다.
지금이 기회다. 4·15총선을 기본소득 공론장으로 만들자. 기본소득 정책 대결이 고용 없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헤쳐갈 묘안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토지 등 공동자산 소득을 공평하게 나누는 기본소득이 필수 제도가 될 시대다. 코로나 위기는 그 시대로 가는 작은 시련일 뿐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국제 2020.03.16.
최고의 방역에 빈곤한 대책
코로나19에 대한 각국의 대응은 가히 ‘방역 다양성(Variety of Disinfection, VoD)’이라고 부를 만한 차이를 보였다. 처음에 서방 언론은 중국과 한국의 차이를 부각시켰다. 최초로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을 알렸다가 서구 ‘허위사실 유포죄’로 체포되어 결국 사망한 중국 의사 리원량, 우한이라는 거대 도시의 봉쇄, 일주일 만의 병원 건설 모두 권위주의 중국의 파탄을 상징했다. 반면 기민하게 최초의 확진자를 발표(1월10일, 30대 중국인)하고 방역체계를 신속하게 작동시킨 한국은 민주주의의 승리로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그래프가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하루 33명의 확진자가 증가하는 세계의 평균 추세에서 중국과 한국은 100명의 환자가 발생한 지 열흘경부터 확실하게 벗어났고 홍콩, 싱가포르는 처음부터 아주 낮은 증가세를 나타냈다. 놀랍게도 대만에서는 15일 현재 겨우 확진자 59명만 나타났을 뿐이다. 가히 ‘동아시아 유형’이라고 부를 만하다. 홍콩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대대적 검사와 동선 추적이라는 적극적 통제(containment) 정책을 사용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훨씬 우수한 의료체계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유럽은 기대 이하의 성과를 보이고 있다. 지금 이탈리아 롬바르디의 의사들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방치할 것인가를 매시간 결정해야 한다. 의료기술이 아닌 의료자원(특히 병상과 의료진)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고령자가 많기로 손꼽히는 이곳에서 나이는 종종 이 비윤리적 결정의 기준이 되었다. 유럽의 오랜 긴축 재정이 이런 비극을 낳았다. 의료시설 축소에 앞장섰던 칭가레티는 이탈리아 정치인 중 첫 번째 확진자가 되었다. 브렉시트의 주역, 영국의 존슨 총리는 ‘지연(delay) 전략’을 택함으로써 사실상 통제를 포기했다. 이제 사람들은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오는 11월3일 대선을 앞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매년 유행하는 독감으로 치부하다가 바이러스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부랴부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급여세(payroll tax) 전원 면제 같은 긴급대책을 발표했다. 유럽과 달리 민간 의료체계를 지닌 미국이 과연 동아시아와 같은 적극적 통제를 할 수 있을까가 관건이다.
방역은 전쟁을 닮았다. 전장에서는 시장에서처럼 시행착오의 실험을 할 수 없다. 과거의 경험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던 방법을 신속하게 실행할 수 있는 당국의 능력 그리고 시민의 적극적 참여능력(동원)이 전략의 성패를 결정한다. 목표와 수단이 확실할 때 국가가 자원을 총동원하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 (경제)모델이었다. 그 원조 격인 일본은 노쇠한 탓인지 이런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고 오히려 상황을 은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확산된 현재의 사태가 어떤 경제적 결과를 낳을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의 마비로 인한 공급쇼크는 곧 해결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유럽과 미국의 생산네트워크는 당분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체제에서 생산이 중단되면 수입도 없고 시차를 두고 수요쇼크가 이어진다. 금융 비대화는 오랫동안 버블을 부풀렸으니 큰 폭의 널뛰기를 하는 현재의 금융시장이 붕괴할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금융쇼크). 더구나 현재의 미국 대통령은 재선이 어렵다 싶으면 제2차 경제전쟁도 일으킬 만한 인물이다.
전장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포연(불확실성)으로 가득한데 정부의 병참계획은 결국 시장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비상한 경제시국”의 “전례없는 대책”을 강조했지만 그의 정책실장은 단기재정정책의 원칙으로 “적시성, 특정성, 한시성”을 내세워, 예컨대 ‘재난기본소득’과 같은 긴급 대책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정책설계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비상시국의 적시성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 특정성은 해당 사항이 없다. 금융 전공의 김상조 실장은 왜 바이러스 감염병엔 보험이 성립되지 않는지 잘 알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영구적 기본소득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딱 한번의 지급을 주장했으니 한시성도 100% 충족시킨다(그래서 원래 의미의 기본소득은 아니다).
그의 ‘원칙’이 관철된 긴급 추경은 ‘경제 활성화 대책’의 재판이다. 3년 동안, 아니 세 정권 내내 효과를 보지 못한 기재부의 정책이 “전례 없는 대책”으로 둔갑한 것이다. 세계 최고의 방역에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 대책이 결합되었다.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경향 2020.03.16.
개혁 연정’이 더 당당하다
사실은 소설보다 기구하다. 김무성·유승민·권성동·김성태·홍준표는 태극기 세력에 ‘탄핵 5적’으로 찍혀 왔다. 미래통합당은 그들을 모두 물갈이했고,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은 “시대의 강을 건넜다”고 자평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옥중에서 보수세력의 대동단결을 지시했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탄핵을 결정한 지 꼭 3년 만이다. 정치권은 ‘탄핵세력 대 촛불세력’ 구도로 재편됐다. 보수야당은 ‘탄핵의 강’을 되돌아갔다. 비례 위성정당을 코미디 같은 정치라고 한다면 희극인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보수야당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막장 드라마는 장인과 사위가 서로 사랑하는 시나리오 빼고는 다 나왔다. 숨이 넘어가던 탄핵 세력은 아무런 반성도 쇄신도 없이 대반격을 시작했다. 막장 드라마 뺨치는 반전이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개혁세력의 위기를 자초했다. 시민들은 촛불혁명에서 분출된 에너지를 융합해 ‘1987 체제’를 뛰어넘는 제도적 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2017 체제’는 만들지 못했다. 시민들은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을 밀어주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새로운 대한민국은 만들지 못했다. 그사이 시민들은 진영으로 나눠 광장에서 부닥쳤다. 진영논리는 팩트(사실)를 녹여 철퇴를 만들었고, 그 철퇴로 반대의견을 척살했다. 정치는 시민의 앞에 서지 못하고 뒤에서 추종했다. 정치는 실패했다.
그런 민주당이 전국선거 4연속 승리에 도전하고 있다. 인물도 정책도 메시지도 없다. 이번엔 문 대통령 탄핵을 막기 위해 표를 달라고 한다. ‘앵벌이 선거’다. 민주당은 상대에겐 가짜, 속임수, 도둑질이라 비난해놓고 똑같이 비례정당 참여를 선언했다. 탄핵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탄핵은 불가능하다. 불의한 권력을 탄핵한 자칭 촛불정당이 거꾸로 ‘탄핵 공포’ 운운하며 징징 우는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총선은 단순한 의석수 계산으로 준비할 게 아니다. 20대 국회는 최악의 동식물 국회였다. 21대 국회마저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보수야당 1호 공약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폐지다. 그렇다면 여당은 탄핵세력의 반격에 맞서 개혁연대를 발전시키는 큰 그림을 내놓는 게 필요하다. 그건 총선 이후 새로운 정치질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담대한 구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21대 국회의 콘셉트는 협치와 통합, 연대여야 한다. 지난 국회에서 어떠한 개혁도 협치 없이는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지겹도록 보아오지 않았는가. 정치적 세력분포로 보면 다음 국회에서도 민주당 혼자서 모든 것을 하기는 힘들다. 그를 위해서는 정의당, 민생당과의 연정 또는 제도화된 연대가 필요하다. 문 대통령은 임기 초반 여러 차례 협치 내각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노회찬 환경부(정의당), 김성식 산자부(안철수계), 이종훈 노동부 장관(유승민계) 같은 제안은 의미 있는 정치적 실험이었다. 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총선 후 야당 인사 가운데서 해당 부처의 정책목표에 공감한다면 함께할 수 있다”고 거듭 확인했다. 협치내각 구상이다. 협치내각은 협치를 위한 야권 인사의 입각을 뜻한다. 범여권에 속하는 야당과의 소연정(小聯政)을 의미하는 것이다. 협치내각은 새로운 길이며 공존의 기회일 수 있다. 선의의 힘을 합쳐 큰 정치를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나.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특정 정당의 지역독식을 깨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다당제에 기반한 연정 등 협치의 제도화를 꿈꿨다. 그 꿈은 미완의 상태다. 문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정치문화가 달라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감이 떨어지길 기다릴 수는 없다. 정치가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뭔가 해야 한다.
총선은 이제 한 달 남았다. 여권은 정치력을 키워야지 숫자로 국회를 지배하려 해서는 안된다. 비례대표를 몇 석 더 얻겠다는 낡은 선거공학이 정치일 수 없다. 개혁세력은 패스트트랙 연대를 성공한 바 있다. 그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다. 여당은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총선 이후 진보정당과의 연정을 선언하고 시민들의 이해를 구하는 편이 낫다. ‘촛불 거버넌스’를 어떻게 구축하겠다고 구체적인 청사진을 내놓는다면 금상첨화다. ‘4+1 연대’, 소연정, 개혁연대…. 명칭은 뭐든 좋다. 21대 국회는 연합정치로 문을 열겠다고 선언해 보라. 그게 탄핵을 막기 위해 표 달라는 것보다 훨씬 당당하다. / 박래용 논설위원 경향 2020.03.16.
두산중공업의 오판, 뒷감당은 누구 몫인가
미세먼지의 계절이 돌아오면서 한국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비상저감조치 시행에 나서고 있다. 눈에 띄는 조치는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중단이다. 석탄화력발전은 대기오염물질과 온실가스의 최대 배출원으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빠른 속도로 퇴출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이러한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을까. 한국의 대표적인 발전설비 제조 기업인 두산중공업은 변화를 거부한 것처럼 보인다. 두산중공업의 이러한 ‘오판’은 주주뿐 아니라 한국 국민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히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매출 하락이 시작된 2013년 이후 한 번도 당기순이익을 기록하지 못했다. 발전설비 시장 트렌드가 달라지면서 수주잔액이 감소했고, 매출액은 지난 6년간 30.6% 감소했다. 지난 5년간 주가는 85% 하락했고, 신용등급은 A+에서 BBB까지 떨어졌다. 두산중공업이 당장 올해 재융자(refinance)해야 할 채권이 7090억원에 이른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산중공업 경영진은 세계 에너지 시장 동향을 진지하게 살펴봐야 한다. 에너지 전환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지난 한 해에만 미국에서 8개 석탄회사가 도산했고, 호주에서는 상장된 4대 석탄회사가 모두 큰 손실을 내면서 주식투자자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반면 석탄 사업을 정리하고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한 회사들은 성장세를 달리고 있다. 스페인 전력기업 이베르드롤라와 미국 넥스테라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두산중공업은 여전히 석탄, 가스 등 화석연료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 자와 9·10호기 석탄화력발전소 사업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중에서도 복합화력 가스터빈 시장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작년 가을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 생산을 시작했지만, 후발주자인 두산중공업이 한국 가스터빈 시장은 확보할 수 있을지라도 지멘스나 GE, 미쓰비시와 같은 전통 강호들과 세계에서 경쟁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설상가상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저장장치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아시아 가스발전 시장의 잠재력은 점차 줄고 있다.
두산중공업과 거래하는 해외 전력회사, 금융기관, 바이어들은 두산중공업의 경쟁력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두산중공업을 통해 한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낼 목적으로 사업을 진행한다. 한국 정부가 거액의 정책금융을 유치한다는 조건하에서만 두산중공업과 거래하려 하는 이유다. 납세자 관점에서 이런 상황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두산중공업의 사업 판단 실패에 대한 대가는 누가 치를까? 대우조선해양의 사례에서 경험했듯 공적 자금으로 기업을 살리려는 시도는 국민 부담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정부 차원의 응원이 단기적으로 두산중공업의 생존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두산중공업이 납세자들의 지원 없이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분명한 것은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가 결코 그 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멜리사 브라운 | 에너지경제·재무분석연구소(IEEFA) 아시아 담당이사 경향 2020.03.16.
질병에는 국경이 없다
인간의 생존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에는 국경이 없다. WHO를 중심으로 각국의 과학자들이 정보를 교환하며 문제를 풀어야 한다. 정치 공세로는 코로나19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이 글을 쓴다. 개인의 위기, 국가의 위기, 세계의 위기의 순간을 잘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가 슬기롭게 이 위기를 극복하기를 기원한다.
질병에는 국경이 없다. 바이러스는 국경·국적·민족·인종·남녀·정치를 알지 못한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침투해 병을 일으킨다.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되면서 하나의 질병이 동시에 전파된다. 지금 코로나19 사태가 전형적인 예이지만 과거 메르스 때도 겪었던 일이다. 중동에서 발생한 메르스가 다음 날 한국에 등장했다.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는 곧바로 한국·일본·이탈리아·이란 등지로 퍼졌다. 사람의 이동속도, 정확하게는 비행기 속도로 퍼지고 있다.
인간의 생존을 결정하는 진짜 중요한 문제에는 국경이 없다. 국가나 민족 단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유발 하라리는 전쟁·환경·과학기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말했다. 모두 인간의 생존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핵전쟁의 위험으로 (단 두 나라의 전쟁으로) 인류가 절멸될 위험에 처해 있다. 환경파괴적인 현대 생활은 인류만이 아니라 지구의 종말도 앞당긴다. 과학기술의 발전 역시 한 국가의 틀을 넘는다. 한국이 인간복제를 금지하더라도 다른 나라가 인간을 복제하면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발병-진행-치료-결과에 대한 통계 공유해야
여기에 몇 가지가 더 부가되어야 한다. 질병·자본·정보·인권이 그것이다. 모두 인간의 생존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고 국제적인 문제이다. 질병은 인간의 육체적 생존을 위협한다. 바이러스에는 국경이 없다. 인간 이외의 모든 생물에게 국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일 뿐이다. 인간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국경에 허구의 중요성을 부여했다. 자본과 정보는 이미 세계화된 지 오래다. 자본과 정보의 집중은 국가라는 틀을 뛰어넘었다. 자본과 정보의 눈으로 보면 국경은 하찮은, 참으로 하찮은 걸림돌일 뿐이다. 국가가 자본과 정보를 규제할 수 없을 정도로 자본과 정보는 유통되고 축적된다. 국제사회의 협력만이 자본과 정보의 집중 및 이에 따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인권 역시 국경과 관계없다. 국경을 넘어가면 사라지는 권리는 인권이 아니다. 인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최후 보루다.
세계적인 문제는 세계적인 협력을 필요로 한다. 상호 비방이 아니라 지혜에 근거한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위기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어리석음·분열·비협조·상호 비방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도 각국이 서로 협력하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과학적 증거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과학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이런 체제를 가지고 있다. 보건에 관한 한 세계보건기구(WHO)가 여기에 해당한다. 국가는 WHO를 중심으로 과학자들의 정보교환을 뒷받침해야 한다. 서로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이에 개인들은 병원과 집에서 죽어가고 있다. 증거에 기반한 대응이 될 수 있도록 각국은 발병-진행-치료-결과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만들고 이를 공유해야 한다. 체면을 위해 숨기면 그것은 자국민뿐만 아니라 타 국민에게도 해가 된다.
국내 상황도 똑같다. 과학과 증거에 근거해 상호 협력하여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 이때를 대비하여 국가는 이미 리더십에 근거한 상호협력 체제를 갖추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질병관리본부가 현재의 리더십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모든 국가기관이 협력해야 한다. 현장에서 코로나19와 싸우는 전문가의 의견에 기초한 리더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방정부, 경찰, 검찰, 여당, 야당도 모두 리더십에 협조해야 한다. 특히 수사나 정치 공세로는 코로나19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수사는 범죄가 발생했을 때 이루어져야 한다. 바이러스를 수사로 잡을 수는 없다. 정치 공세는 더욱 무용지물이다. 증거와 통계를 바탕으로 한 정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과 공무원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한다.
김인회 (변호사·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시사인 2020.03.21
민주대연합이 지키려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이룬 혁신의 의미
결국 거대 양당 모두 비례위성정당 창당을 선택했다. 미래통합당 진영과 달리 그 반대편에서는 비록 수줍게 연합정당이라 자처하기는 하지만, 내용을 보면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에 다름 아니다. 민주당계 위성정당 추진 세력은 준-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망가뜨리는 세력에 맞서려면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준-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시키는 전술을 취해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댄다. 한국 정치에는 양당 독점 구도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말을 고상하게 하려니 이렇게 난해해진다.
또 다른 논리도 있다. 이쪽은 좀 식상하기는 해도 그렇게 난해하지는 않다. 극우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이 제21대 국회를 좌우하지 못하게 막으려면 더불어민주당부터 원외 진보정당들까지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계 위성정당을 굳이 연합정당이라 부르는 이들은 바로 이 논리에 따라 정당 투표용지에서 양대 세력을 제외한 다른 선택지를 모조리 지워버리려 한다. 그리고 정의당처럼 이를 한사코 거부하는 세력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대연합의 방해자로 낙인찍는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민주대연합'론이다.
저마다 여러 근거와 경험을 대며 민주대연합을 강변하며, 거기에는 영미식 양당 정치 추종, 김영삼-김대중 시대 이래의 상식 등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 한데 그 중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1980년대 운동권의 도식적 사회과학 학습의 잔재다. 이 시기에 민족해방파(NL)와 민중민주파(PD)가 갈렸다고 하지만, 둘이 내세우는 혁명론에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것은 '반파시즘 민주혁명'이었다. 그리고 '반파시즘'은 흔히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최대 결집을 요청한다고 이해됐다. 이것이 대중적 관념으로 자리 잡으면 민주대연합 논리가 된다.
그러나 이참에 진지하게 물음을 던져야 한다. 정말 파시즘만 아니면 모든 세력이 다 연합해야 한다는 게 전 세계 반파시즘 투쟁의 핵심 교훈인가? 지금 시점에 굳이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단지 민주당계 위성정당이 내세우는 민주대연합론을 논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늘날 불평등과 기후 재앙, 신종 바이러스 대유행 같은 지구자본주의의 실패 속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면, 100년 전 지구자본주의의 첫 번째 위기 속에 전개된 역사적 경험을 제대로 재구성-재평가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막기는커녕 키운 리버럴-사회민주주의 연합
늘 그렇듯이 역사는 선과 악, 정통과 오류의 단순 도식으로 파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며 역동적이다. 왕년의 운동권이 해외 교과서들을 통해 접한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논리는 지극히 단순 명쾌했지만, 역사를 따져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의회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세력들과 파시즘의 관계는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흔히 파시즘이 1929년 대공황 이후에 급격히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휩쓸고 지나간 유럽 대륙에서는 1920년대부터 숱한 원시-파시즘, 정통-파시즘, 유사-파시즘 세력들이 활개 쳤다. 또한 이들에 맞서 의회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나선 리버럴(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연합도 이미 1920년대에 각국에서 집권하고 있었다.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에도 이런 세력 구성의 연립정부들이 들어섰고, 프랑스에서도 '좌파 카르텔'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정부가 1920-1930년대에 걸쳐 두 차례 등장했다.
프랑스에서 좌파 카르텔을 구성한 양대 세력은 급진사회(주의)당과 사회(주의)당이었다. 급진사회당은 비록 당명은 아주 급진적이지만, 실제 성격은 그다지 급진적이지 않았다. 이 당은 프랑스 리버럴의 결집체로서, 지금 대한민국의 더불어민주당과 아주 유사한 정당이었다. 더불어민주당에 전두환 독재에 맞섰던 86세대가 결집해 있는 것처럼, 급진사회당에는 세기 전환기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에서 왕당파-군부-가톨릭교회-반유대주의 동맹에 맞서 민주주의 수호 투쟁을 벌인 경험이 있는 정치가, 지식인, 중산층이 모여 있었다.
급진사회당은 1923년에 처음으로 사회당과 선거연합을 맺었다. 나날이 강성해지던 우파 블록에 맞선다는 게 명분이었다. 우파 블록은 단지 당세가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점점 해외 파시즘의 영향을 받으며 드레퓌스 사건 이전의 수구 세력으로 회귀하려 했다. 급진사회당과 사회당은 이런 극우파의 집권을 막겠다며 제1차 좌파 카르텔을 결성했다. 당시 프랑스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원의원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실시했고, 좌파 카르텔은 결선투표에서 급진사회당-사회당 후보 단일화를 통해 위력을 발휘했다. 1924년 5월 좌파 카르텔의 총선 승리로 사회당까지 참여한 중도 좌우파 연정이 출범했다.
다음 총선에서는 우파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좌파 카르텔의 힘이 소진된 것은 아니었다. 급진사회당과 사회당이 제2차 좌파 카르텔을 결성해 1932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이런 잇단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오히려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급진사회당이 주도하는 정부가 통치하던 그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이웃 나라 이탈리아와 독일처럼 현대화된 극우 대중운동, 즉 파시즘이 급성장했다. 급기야 1934년 2월 6일에는 파시스트 행동대가 의사당을 급습해 거의 쿠데타 성공 일보 직전까지 가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극우파의 성장을 막겠다며 리버럴-사회민주주의 대연합을 만들어 선거에서 승리하기까지 했는데, 왜 극우 파시스트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됐는가? 우선, 좌파 카르텔을 주도하던 급진사회당의 부패와 위선 때문이었다. 급진사회당 정치가들은 선거 때는 “200대 가문 타도”를 외치며 사회당보다 더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부를 늘려가는 금융 자본(200대 가문)과 대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집권하고 나서는 금융계의 이익에 자기들도 한 발 걸쳐보려고 온갖 모략을 일삼았다. 1934년에 의문사(많이 이들이 자살'당했다'고 믿은)한 금융 브로커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의 배후에는 급진사회당 정치인들이 있었다. 이 추악한 스캔들은 대중을 격앙시켰고, 극우파를 단결시켰으며, 프랑스판 파시즘을 급성장시켰다.
그러나 이런 '민주-좌파' 세력의 부정부패는 단지 더 근본적인 질병의 한 증상일 뿐이었다. 그 질병이란 좌파 카르텔이 지키자고 부르짖는 '민주주의'가 텅 빈 상징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좌파 카르텔은 극우파를 '반민주' 세력이라 규정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자신들을 지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지켜야 할 '민주주의'가 막상 무엇을 뜻하는지 따져보면 아리송하기만 했다. 스타비스키 사건 따위의 추문들로 얼룩진 의회제, 1789년 대혁명의 기억을 닳고 닳을 정도로 반복하는 시민-종교적 의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가톨릭교회와의 문화 투쟁 ... 이런 것들뿐이었다.
좌파 카르텔이 수호하자는 '민주주의'가 이렇게 공허하게 느껴질수록 파시즘의 매력은 커져만 갔다. 파시즘은 바로 그 민주주의라는 수단을 통해 공허하기만 한 이 민주주의를 폐기하자고 외쳤기 때문이다. 대신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안정된 새 체제를 수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옆 나라 독일에서는 새 정권(나치당)이 실업 문제 해결에 성공하고 있었다. 1930년대 어느 시점을 살아가던 대중에게는 이쪽이 훨씬 더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구도에서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할수록 지게 돼 있었다. 그것은 그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대중의 상당수는 파시스트들에게 박수를 치면서 민주-좌파의 '민주주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것이 지구자본주의의 첫 번째 대위기 시대에 리버럴-사회민주주의 대연합이 만들어놓은 필패(必敗)의 대립 구도였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진짜 혁신 – 민주주의에 내용 채우기
그러나 혁신이 나타났다. 1920년대식 리버럴-사회민주주의 연합 대신에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등장했다. 좌파 카르텔이 파시즘의 토양을 만들어준 나라, 프랑스가 그 탄생지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좌파 카르텔과 반파시즘 인민전선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연속의 측면이 더 눈에 띈다. 좌파 카르텔의 두 축인 급진사회당과 사회당이 고스란히 반파시즘 인민전선 구성 세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공산당이 새로운 요소로 추가됐을 뿐이다. 그래서 흔히 급진좌파의 결합을 인민전선의 주된 혁신 지점으로 들기도 한다.
한데 공산당이 참여했다는 것은 더 중요한 혁신의 부수 효과일 따름이었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진정한 민중운동에 바탕을 두고 등장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전에 없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사건이 벌어지자 노동자들이 곧바로 거리로 나왔다. 조합원들은 이미 나치 독일에서 노동조합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치당 집권 몇 달만에 모든 좌파정당과 노동조합들이 금지됐다. 그런 일이 여기에서도 반복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2월 6일 당일에는 노동자들과 파시스트 행동대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1주일 뒤에는 사회당 지지 노총과 공산당 지지 노총이 함께 총파업을 벌였다. 파업 참가자는 500만 명에 육박했다.
좌파 카르텔의 기존 구성 요소에 공산당까지 추가돼 인민전선이 결성된 것은 이런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의 압력 때문이었다. 급진사회당은 좀처럼 공산당과 함께 하려 하지 않았지만, 끝까지 거부했다가는 각 당 지휘부보다 먼저 주도권을 잡은 노동 대중이 급진사회당을 심판할 기세였다. 그래서 1935년에 급진사회당-사회당-공산당 3당 선거연합('반파시즘 인민전선')이 결성됐고, 1년 뒤 총선에서 집권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프랑스 사회는 전쟁으로 나치 독일에 점령되기 전까지 일단 파시즘의 득세를 막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대중운동이라는 요소만으로는 아직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성취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인민전선의 혁신은 좌파 카르텔과는 다른 '민주주의'를 제시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다. 좌파 카르텔은 실체 없는 '민주주의'만을 되뇌었고,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런 유령 같은 상태에 머물길 바랐다. 적어도 급진사회당의 경우는 이쪽이 자신들이 바라는 질서, 즉 주기적으로 “200대 가문 타도”를 복창하면서도 일상적으로는 현 상태 그대로(status quo) 돌아가는 자본주의에 더 어울렸다.
반면에 인민전선은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전면에 내세웠다. 노동권 강화와 구매력 향상을 강령 맨 앞에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국가의 노력을 '민주주의'와 등치시켰다. 이로써 '민주주의'에는 전에 없던 실질적 내용이 담겨지기 시작했다. 3당 협약에 따르면, 이제부터 국가는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완전고용과 경기 활성화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중앙은행도 국유화(지금은 상식이지만)하고 누진소득세와 독점기업 법인세도 강화하며 외환과 무역도 통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럴 때에야 대중은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선택(파시즘)에 더 이상 끌리지 않게 될 것이었다.
사실 프랑스의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이런 '민주주의'를 약속만 했지 실제 실현하지는 못했다. 인민전선의 선거 승리로 들어선 레옹 블룸의 사회당-급진사회당 정부(공산당은 입각하지 못했다)는 (극우파가 아니라) 급진사회당 내 보수파의 반대 때문에 인민전선 강령이 내세운 과제들을 대부분 실현하지 못했다. 다만 총선 승리 직후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대중파업을 벌인 덕분에 프랑스 현대사에 길이 기록될 유급 휴가와 주 40시간 노동, 산업별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활동과 산업별 단체교섭이 처음 제도화될 수 있었다.
텅 빈 '민주주의'라는 상징에 대중이 바라는 사회경제적 내용을 채우려 한 노력은 슬프게도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서야 일정하게 실현됐다. 뉴딜 체제의 미국과 5개년 계획 체제의 소련을 두 축으로 한 군사 동맹이 전 지구적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역할을 했다. 이후 한 동안 지구자본주의의 일부에서나마 '민주주의'는 완전고용과 보편복지를 보장하는 체제와 동일시됐다. 지금의 대혼돈을 낳게 될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말이다.
민주대연합 이전에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내용을 말하라
100년 전 먼 나라 이야기가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급박한 총선 정국에 무슨 세계사 학습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지난 번 지구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민주주의에 닥친 시험이 지금 우리가 처한 시련과 결코 멀어 보이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우리 모습을 너무나 진실에 가깝게 비춰주는 섬뜩한 우화 같기만 하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 한국 사회의 민주대연합 논리는 1920년대 리버럴-사회민주주의 연합을 닮았다. 프랑스 사례와 견준다면, 반파시즘 인민전선보다는 좌파 카르텔을 연상시킨다.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이라는 늑대가 '민주주의'를 빼앗으러 온다고 외치지만, 정작 빼앗길 위험에 놓인 그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는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민주주의'의 내용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다그치고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내놓아야 할 대안은 무엇인가? 불평등을 뒤집기 위해 민주주의가 대결해야 마땅한 상대는 누구인가? 전염병의 지구화 시대에 민주주의가 공허한 이상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100년 전에 완전고용과 보편복지의 임무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가 비로소 실체를 갖추었다면, 오늘날은 어떤 무기로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총선이 한 달 앞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대파국과 대전환의 갈림길을 앞에 둔 시대를 살고 있다.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답부터 내놓으라. 연합은 그 다음이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프레시안 2020.03.18.
재난은 가난을 차별한다
지난 16일 <한겨레> 이재훈 기자가 쓴 ‘코로나 집단감염, 지금 여기의 책임윤리’라는 제목의 칼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코로나19가 확산하는 동안 크게 세차례 집단감염 사례가 있었다며, 이 사례들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가난’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지요. 재난은 빈부격차를 초월해 모든 사람을 덮치기에 우리 모두 ‘공동체적 일체감’과 더불어 ‘희망과 관용과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수렁 속에서도 별은 보인다’(2일치 칼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만,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하인 머레이는 재난이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재난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영원한 허상을 버려라. 그리고 재난은 모든 걸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쓸어간다는 생각도 버려라. 전염병은 쫓겨나서 위험 속에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을 집중 공격한다.”
캐나다 작가 나오미 클라인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얼마 전만 해도 재난은 사회적 단합이 일어나는 시기로 여겨졌다. 즉, 하나로 뭉친 지역사회가 구역을 따지지 않고 합심하는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 그러나 재난은 점차 정반대로 변하면서 계층이 나뉘어 있는 끔찍한 미래를 보여주었다. 경쟁과 돈으로 생존을 사는 세상 말이다.”
코로나19 극복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그 ‘거리’가 없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치명타를 가합니다. 요즘 택시를 타길 꺼립니다만, 택시를 타보시면 실감할 겁니다. 영세 자영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정도 비슷합니다.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그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온 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이지요.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가난을 접하기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재산과 소득 수준에 따른 ‘주거지 분리’가 가장 큰 이유이지요. 이런 문제를 넘어서기 위한 고민은 이른바 ‘소셜믹스’ 정책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겐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를 한 단지에 섞어 짓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만, 소셜믹스엔 다양한 방법이 있지요.
그런데 이게 영 쉽지 않습니다. ‘주거 소셜믹스’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임대 아파트를 차별하는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지요. 최근 <한겨레21>이 서울에 300가구 이상 공급된 공공임대아파트 158개 단지와 서울시 616개 초등학교 통학구역을 한달간 분석한 기사에 따르면, 임대아파트 아이들에게 쏟아진 차별과 혐오의 시선, 분리와 배제의 시도가 매우 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국에 걸쳐 일어나는 이런 차별·혐오·분리·배제는 사실 ‘재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상의 재난이지요. 박영희 시인은 3년간 가난의 현장을 취재한 끝에 출간한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라는 책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지요. “한 발을 빼려 하면 다른 발이 빠져들고 다른 발을 빼려 하면 또 다른 발이 빠져드는 수렁에 빠져 헤매는 이웃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선거 중심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선거 제도 자체가 가난을 차별합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은 투표를 할 시간조차 없지요. 그들의 목소리는 선거판에서 들리지 않습니다. 애써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 제도가 있다곤 합니다만, 그들은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가난하냐’ 죽고 싶을 만큼 묻고 또 묻고는… 죽지 않을 만큼 줘요.” “사실 그렇게 수치스러워 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너무 섭섭해서 지워지지 않아요. 일을 할 수 있는데 놀고먹으려는 사람처럼 취급했습니다.” “누가 기초수급자라고 주변에 말하겠어요. 담당하는 공무원도 무시하는데 일반인들은 속으로 얼마나 더 무시를 하겠어요. 수급자가 아닌 척하고 다니는데 되게 피곤해요. 어려운 사람 아닌 척하는 것이….”(<경향신문>, 2019년 4월1일치)
코로나19와 4·15 총선은 이런 일상의 재난을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코로나19를 두고 정파적 전쟁을 벌이는 것도 자제하면 좋겠습니다. 정파성을 피할 수 없다면, ‘가난과의 전쟁’을 위한 현명한 정책을 내놓는 경쟁을 하면 좋겠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의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2020.03.22.
해월과 경허 그리고 전염병
19세기 서세동점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서쪽에서 들어온 호열자, 곧 콜레라의 대유행이었다. 이 괴질은 100년 가까이 조선 땅을 휩쓸며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수십만 백성이 괴질의 정체가 뭔지도 알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다. 이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오히려 민중의 마음을 얻어 교세를 확장한 것이 바로 동학이었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은 괴질의 유행 경로를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침을 아무 데나 뱉지 말며, 코를 멀리 풀지 말라. 코나 침이 땅에 떨어졌거든 닦아 없애라. 먹던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먹던 국을 새 국에 섞지 말라. (…) 이리하면 연달아 감염되지 않을 것이다.” 해월의 위생학적 통찰은 동학교도들을 콜레라로부터 지켜주었고, 동학에 들어가면 괴질에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퍼져 나갔다.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한 동학은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는 평등 세상을 선포하고 동학농민혁명으로 나아갔다.
해월이 활동하던 시기에 계룡산 동학사에는 경허(1849~1912)라는 걸출한 승려가 나타나 이름을 떨쳤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출가한 경허는 일찍 경전에 달통해 동학사 강백이 됐다. 수많은 승려와 신도가 경허의 <금강경> 강론을 들으려 몰려들었다. 서른한살 때 경허는 처음으로 절간을 나와 속세의 땅을 밟았다. 천안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 경허는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집마다 문을 두드렸으나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겨우 문을 열어주는 집이 있었는데, 노인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 동네 전체가 호열자 귀신에 씌어 집집이 시체요. 빨리 도망가시오.” 도를 닦아 생사를 초탈했다고 자부하던 젊은 승려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자 혼비백산해 줄행랑을 쳤다. 경허는 이 참담한 체험을 통해 진정한 구도자로 거듭났다. 훗날 큰 깨달음을 얻은 경허는 나병에 걸려 손과 발이 뭉개지고 코가 문드러진 여인을 제 방에 들여 전심으로 돌보는 무애의 자비행을 실천했다.(도올 김용옥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해월은 선각자의 통찰력으로 조선 민중을 지켰고, 역병을 통해 대각에 이른 경허는 조선 불교를 새로 일으켜 세웠다. 전염병의 집단 숙주가 된 오늘의 한국 종교와 종교인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삶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한겨레 2020.03.22.
코로나19 이후의 세계화
신뢰는 어제에 바탕한 오늘과 내일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은 이 신뢰로 긴밀하게 연결된 사회적 존재일 때에만 번영할 수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가 이처럼 신뢰에 바탕해 구축한 세계화체제를 전 방위에서 공격한다는 점에서 ‘탈세계화의 바이러스’이다. 코로나19와의 전쟁 이후 세계는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경제의 초연결성은 후퇴할 것으로 보인다. 예로 중국 사업이 각국으로 회귀(리쇼어링)하는 경향이 늘어날 수 있다. 코로나19로 중국 공장들이 멈춰 서며 연쇄적인 생산중단 충격을 겪은 기업들은 중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가 리스크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민에 빠졌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리쇼어링을 검토 중인 다국적기업은 80%에 이른다. 부족한 일자리로 골머리를 앓는 각국 정부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지난달 중국발 리쇼어링 지원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체코 보건부 장관은 유럽시장 의약품 3분의 1을 중국산이 차지하는 현실이 ‘보건안보’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며 공장을 다시 갖고 와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는 대공황 수준의 경제충격이 우려되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사태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의 얘기가 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생산·수요가 글로벌 단위로 동시에 무너지고 금융이 얼어붙는 이 같은 위기를 3개월 이상 버텨낼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며 우려한다. 기업 실적 악화를 우려한 투자자들이 주식과 채권을 팔아 안전자산인 미국 달러화로 교환해 쟁이면서 시장에 돈이 마르고 있다. 정부가 채권시장안정펀드 최소 10조원을 조성할 계획이지만 규모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상황이라면 핵펀치 연타를 버텨낸 대기업만 살아남고 이들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1997년 외환위기 때에도 부실은행들이 통폐합되면서 은행권 지형이 크게 변한 바 있다.
많은 정부들은 ‘큰 정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의 경제대공습으로 일자리가 증발하는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생활비라는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 주체가 현재로서는 정부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기업이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고용을 유지하는 경우 1인당 월급의 80%, 최대 2500파운드(약 370만원)를 정부가 부담하는 정책을 최근 내놨다. 덴마크도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에 월급의 75%, 최대 2만3000크로네(약 425만원)을 3개월간 지원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국내총생산(GDP)의 13%에 해당하는 재원을 석달간 쏟아붓는 것이다. 덴마크 올보르 대학의 플레밍 라슨 교수는 “기업이 노동자와의 관계를 유지할 경우 (코로나19 이후) 더 강한 경기회복을 이룰 것이라는 정부철학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희망퇴직을 비롯한 구조조정에 들어간 국내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업의 구원투수로서 정부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덴마크는 신규 기업대출에 대해 정부가 70%를 보증하기로 했다. 일부 국가들은 위기에 빠진 기업들의 국유화를 검토 중이다. 쓰러진 산업은 일으켜세우면 되지만, 사라진 산업은 다시 세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항공사 알리탈리아, 프랑스의 자동차기업 르노 등이 거론된다. 한국도 이 같은 선택지를 열어놔야 할 수도 있다.
이번 위기는 각국의 ‘각자도생’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 바이러스를 함께 뿌리 뽑아야 위기도 끝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국제적 공조는 경제 측면에서도 매우 필요하다. 경제와 공급 체인의 범세계적 속성 때문에 어느 한 국가가 다른 나라를 도외시하고 행동한다면 그 결과는 혼돈뿐이고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며 “우리는 국제적인 행동 플랜이 필요하고, 매우 빨리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글로벌 리더십은 공백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칭하는가 하면,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 체제에서는 코로나19의 근원이 미국일 수도 있다는 음모론을 흘리며 자국의 방역 성공을 자화자찬하고 있다. 패권국 간 이 같은 설전은 냉전 이후 유례없는 위험 수위다. 코로나19로 인한 인명 및 경제피해가 이제 가시화되기 시작했는데 지도자들의 언행은 무책임하다.
이 위기를 무사히 잘 건널 수 있을까. 바이러스 이후 세계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무엇을 택하느냐에 달렸다. 최민영 경제부장 경향 2020.03.22.
반정치주의 음모에 걸려들다
1948년 5월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는 우리 역사에서 민주적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최초의 선거였다. 정치와 선거는 해방된 나라, 해방된 백성의 꿈과 희망이었다.
여러 정파가 선거에 반대했지만, 유권자의 열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95.5% 투표율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는 정치를 억눌렀다. 투표율은 70%대로 떨어졌다. 민주화 염원이 폭발한 1985년 2·12 총선에서 84.6%로 치솟기도 했지만, 투표율은 계속 떨어졌다.
투표율 하락의 가장 큰 원인은 반정치주의다. 반정치주의는 분단 기득권 세력과 자본 기득권 세력이 만들어 유포하는 이데올로기다.
민주주의를 직접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반정치주의로 정치, 특히 국회와 국회의원을 공격한다. 정치를 마비시켜야 남북 간 긴장을 유지하고 자본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에게 정치와 선거에 대한 실망감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008년 46.1%로 최저치를 기록했던 총선 투표율은 2012년 54.2%, 2016년 58.0%로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2020년 21대 4·15 총선 투표율은 어떻게 될까? 뚝 떨어질 것 같다.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비례 위성정당을 만드는 거대 양당의 추태가 가관이다. 비례대표 의원들을 제명해 의원직을 유지하도록 한 뒤 위성정당에 입당시키는 편법을 ‘파견’이라는 용어로 당연시하고 있다.
정치 혐오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큰일이다. 투표율이 떨어지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거대 양당이 벌이는 추태 경쟁의 이면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기득권 세력의 반정치주의 음모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한 대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려면 처음부터 의원 정수, 특히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야 했다. 석패율제도 원안대로 도입하는 것이 옳았다. 랬다면 지금처럼 비례 위성정당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은 의원 정수를 한명도 늘려줄 수 없다고 버텼다. 기득권 세력에 편승한 이른바 보수 신문이 증원 반대에 앞장섰다. 이를 키우지 않으면 배고픈 사람끼리 싸움을 벌이게 된다. 기득권 세력은 1당과 2당이 비례대표 의석 몇 자리를 놓고 개싸움을 벌이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승리하면 어떻게 될까? 문재인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을까? 황교안 대표 표현대로 좌파 독재를 끝장내고 자유 우파가 정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자유 우파가 영원히 집권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황교안 대표의 적은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다. 다음 대통령 선거에 문재인 대통령은 어차피 출마하지 않는다. 불어민주당이 승리하면 어떻게 될까? 문재인 대통령 임기 안에 개혁 입법을 모두 통과시킬 수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제출했던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킬 수 있을까? 보수 세력에게 다시는 정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적은 황교안 대표가 아니다. 미래통합당이 아니다. 여당한테 야당은 국정의 동반자다.
그렇다면 여당과 야당이 비례대표 10여석을 놓고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4·15 총선에서 여당과 야당 어느 쪽이 승리하든 대화와 타협 없이는 국회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어느 한쪽이 5분의 3 다수 의석을 확보하면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릴 수는 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지금과 달라지는 것이 별로 없는 셈이다.
결국 여당과 야당은 욕만 배가 터지게 먹고 정치 혐오는 확산될 것이다. 투표율은 갈수록 더 떨어지고 국회의 국민 대표성도 점점 더 낮아질 것이다.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반정치주의로 무장한 기득권 세력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그래서다. 여야 모두 정신 차리고 꼼수를 중단해야 한다. 정치를 정상화해야 한다. 21대 국회에서는 의원 정수를 늘리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정치가 다시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성한용 ㅣ 선임기자 한겨레 2020.03.23.
역병이 지나간 후 남는 것
중국 경극의 독특한 얼굴 화장을 화검이나 검보라고 한다. 그런데 화검은 ‘상처 자국 또는 반점이 있는 얼굴’을 뜻하는 화면(花面)이라는 단어와 같이 쓰인다. 화면은 곧이곧대로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러나 반어적으로도 쓰이는데 <임하필기>에 보면 ‘천연두가 심하여 얼굴에 마맛자국이 생긴 것을 일컫는다’고 되어 있다. 원나라 사람들 중 불화(不花)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유난히 많은데 불화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꽃이 피지 않는 장소가 화단이나 정원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이의 얼굴이다. 천연두를 많이 앓았던 원나라와 금나라 사람들이 이름 자체에 부적의 의미를 담아 화면이 되지 않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천연두가 창궐했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역병의 시대를 어떻게 넘겼을까. 당시는 지금처럼 한순간 일어났다가 지나가는 일이 아니라 ‘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잦거나 반복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전국으로 번진 마마는 지금의 ‘코로나19’처럼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사대부들은 우선 발병 지역을 피하고 봤다. 미수 허목은 경기도 연천의 은거당에 머물렀는데 1678년 낭선군 이우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머물던 마을에 역병이 돌아 10여명이 죽으니 하릴없이 궁벽한 산골짜기로 몸을 피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거처를 급히 옮기느라 읽던 책은 물론 필연조차 챙겨오지 못해 심사를 달랠 소일거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그보다 12년 뒤인 1690년 3월에는 전남 나주의 회진마을에 살던 창계 임영이 세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고 10여명의 식솔들과 함께 부랴부랴 마을을 떠났다. 마마가 덮쳤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피한 곳은 둘째 형님인 임정이 살던 영산강 하구의 강마을인 무안군 일로읍 사교마을이었으니 그곳까지 1박2일의 뱃길이었다.
명재 윤증은 1708년 3월 역질이 번지자 충남 예산의 선영과 마주 보는 곳에 있던 사찰인 정수사로 거처를 옮겼다. 정수사는 중종과 문정왕후의 3녀인 인순공주의 원당이었지만 후에 윤증 집안이 분암으로 삼아서 종회를 열기도 하고 가문의 강학 장소로 사용하기도 한 곳이다. 윤증은 몸을 피해 ‘정수사에서 역질을 피하다’라는 시를 지었는데 종일 말 한마디 나눌 사람조차 없는 외로움을 토로했다.
동계 정온은 온 집안이 역병에 걸려 큰아들인 정창시의 장례를 여섯 달이 지나서야 치렀으며, 목재 홍여하는 1664년에 종조숙부인 합강정 홍호약의 제문을 썼는데 홍호약이 숨을 거둔 지 열두 달이 지나서 장례를 치른다며 애통해한다. 홍호약이 역병으로 숨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숨을 거둘 당시 역병이 돌아 누구 하나 모이질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며 너무도 슬프고 죄를 지었다며 글을 시작한다.
성리학자인 녹문 임성주는 1784년 7월, 셋째 아우인 운호 임정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딸의 혼례를 치른 후 잔치에 모였던 손님들이 돌아가자 아들이 갑자기 역병 의심증세를 보였다며 한탄한다. 이에 아들을 기거하던 집에 둔 채 가족들과 자신은 집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또 하나의 집을 구해 형과 어머니가 간호를 했는데 두려움이 컸다고 고백한다. 그런가하면 옥담 이응희는 1623년 4월 처와 자식이 모두 염질에 걸렸다. 이에 함께 살던 어머니를 모시고 집을 떠났다가 석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다고 하니 남거나 떠났던 이 모두 두려움에 떨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 무명자 윤기는 ‘협리한화’라는 글에서 생필품이 동난 것에 대해 말한다. 1815년 지금의 양평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는데 기근과 역병으로 인해 소금·젓갈·땔나무·생선·신발 같은 것들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고 물가가 몇 곱절이나 뛰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역병이 번지면 모두 살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앞에 말한 임성주가 아우에게 보낸 편지의 첫머리에 “목숨을 건지느라 겨를이 없다”고 썼을까.
그 와중에 지금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처럼 역병이 창궐한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중요한 강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대부도 있었다. 그는 대산 이상정으로 1729년 고재 이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 이황을 배향한 여강서원에서의 강회가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묻는다. 그러곤 강회에 참석자들이 모두 역병을 꺼리는데 자신의 거처가 역병 창궐 지역에 있어 강회에 참석한다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고 말 것만 같아 행장을 꾸려 출발하려다 스스로 멈췄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선조들은 나름대로 굳건하게 견디고 이겨냈으며 역병은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삼국유사>의 처용도 그렇거니와 962년인 고려 광종 13년에는 쇠로 만든 당간이 용두사에 세워졌다. 청주의 향리 김예종이 역병인 염질에 걸린 후 쾌차를 바라면서 시주해 건립된 것인데 국보 제41호 용두사지철당간이 그것이다. 조선에서는 역병이 창궐하던 17~18세기에 마을과 사찰 어귀에 역병을 물리치기 위한 장승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길가에 서서 이정표 노릇을 하던 장승이 주로 남도지방 마을과 사찰 어귀의 지킴이로 변신을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려 갖가지 지혜를 짜내기 마련이고 그 결과는 이처럼 하나의 문화로도 남는다.
예로부터 마마를 큰손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결국 돌아갈 손님이지만 그가 어떤 상처와 문화를 남기고 물러갈 것인지는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 그래서 보다 더 현명하고 배려 깊은 대처가 무엇보다 요구되는 지금이다. 모두 강건하고 지혜롭게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며 ‘코로나19’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견디기를 응원한다.
이지누 작가 경향 2020.03.23.
갈라파고스도 뚫은 코로나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에서 태평양 쪽으로 약 1000㎞ 떨어진 곳에 19개의 섬들이 모여 있다. 갈라파고스 제도(Galapagos Islands)다. 1535년 파나마 주교 토마스 데 베를랑가라는 인물이 페루로 가던 중 표류하다 처음 발견했다. 갈라파고스란 이름은 스페인어로 안장을 뜻하는 ‘갈라파고’에서 유래했다. 말안장 모양의 등딱지를 가진 거북이들이 많아서 붙여졌다. 수백만년간 외부와 차단된 무인도였던 갈라파고스는 고유종들이 넘쳐나는 거대한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찰스 다윈은 1835년 탐험선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를 찾아 생물들을 관찰한 후 진화론의 기원이 되는 <종의 기원>을 펴냈다.
갈라파고스는 ‘고립’의 상징으로 통한다. 갈라파고스 증후군(Galapagos syndrome)이란 표현이 대표적 사례다. 국제 표준을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고집하다 세계시장에서 고립되는 현상을 말한다. 뉴욕타임스는 2009년 일본 소니의 휴대폰 사업 부진을 갈라파고스 증후군이라고 보도했다. 이 표현은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처한 상황을 비유할 때도 쓰인다. 국내 보수세력은 문재인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결정 등 외교안보 정책이 고립을 자초할 것이라며 갈라파고스 증후군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거북이의 섬이었던 갈라파고스도 이제는 인간이 초래하는 재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가 됐다. 유명 관광지가 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 탓이다. 2017년 중국 어선은 갈라파고스 인근 해역에서 상어 6000여마리 등 희귀 어류 300t을 불법 조업했다가 에콰도르 당국에 적발됐다. 2018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거북이인 자이언트 거북이 123마리가 한꺼번에 도난당해 이슈가 되기도 했다. 대륙으로부터 매년 해변으로 밀려오는 플라스틱 쓰레기도 수십t이 넘는다. 코로나19도 갈라파고스를 비켜가지 않았다. 갈라파고스 산타크루스섬과 산크리스토발섬에서 4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확인됐다고 에콰도르 언론이 보도했다. 확진자들은 남미 대륙 에콰도르에서 최근 섬으로 들어왔다. 섬 출입 통제도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지는 못했다. 이제 남은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유행) 청정지역은 어디일까.
박영환 논설위원 경향 2020.03.25.
사이버 ‘강간의 왕국’
얼굴을 드러낸 조주빈보다 마이크를 들이민 여성 기자들이 왜 더 눈에 들어왔을까. 대답 없는 ‘박사’를 향해 그들은 끈질기게 “피해자에 죄책감 느끼지 않습니까”를 낮은 목소리로 반복했다.
‘엔(n)번방’ 사건을 둘러싼 정치권과 수사기관 움직임이 숨가쁘다. 반가운 마음이 들지만 씁쓸함도 있다. 그동안 정말 몰랐단 말인가. 설리와 구하라가 떠났다. 연인원 30만명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고 혜화역 시위에 나섰다. 2015년 소라넷아웃 프로젝트부터 디지털성범죄아웃 DSO,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추적단 불꽃과 텔레그램 성착취신고 프로젝트 리셋(ReSET)을 비롯한 수많은 평범한 여성들이 충혈된 눈으로 우울증 약을 삼켜가며 성착취 영상을 찾아내 삭제 요청을 하고 신고했다.
모두가 외면했다는 말이 아니다. 수사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 끝나지 않는 두더지잡기 게임 같았다. 소라넷을 잡고 나니 웹하드 카르텔이 지적됐고, 양진호가 구속되니 정준영의 단톡방이 나오고, 웰컴투비디오가 있더니 텔레그램이 번졌다.
플랫폼은 진화한다. 수초~48시간 내 대화 자동삭제나 수정이 가능한 텔레그램에선 화면 갈무리(캡처)조차 불가능(안드로이드)하거나 상대방에게 알림(iOS)이 간다. 한 채널의 자료는 ‘전달’ 기능을 통해 쉽게 다른 채널로 통째 넘어간다. 외국 가상번호를 이용한 가입법도 친절히 안내된다. 정준영 단톡방이 오프라인 성범죄를 온라인에 옮겼다면 텔레그램은 “온라인이 현실 공간 성범죄로, 다시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양상”(‘리셋’ 보고서)이다. 일베나 소라넷에 비하면 대규모 인원의 실시간 피드백이 가능한 특성이 더해져, 생산-유포-소비-확산의 경계는 한층 모호해졌다. 피해자가 ‘노예’로 강제 초대된 방에서 피해자에게 직접 더 엽기적인 사진을 요구하거나 피해자 집 근처에 가 인증샷을 올리는 회원들도 있었다.
거친 표현이지만, 여성 하나를 광장에 세운 채 조리돌림하듯 추행하거나 강간하는 집단성폭력과 얼마나 다른가. 오프라인 성범죄 피해자의 #미투와 또 달리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를 밝히는 순간 성착취 영상이 ‘음란물’과 ‘포르노’로 무한대로 소비되어버린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대한민국이 강간의 왕국이냐”며 킥을 날렸지만 사이버 세계에서 우리는 이미 ‘강간의 왕국’을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1020 남성 집단문화를 개탄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박사방 ‘입장료’가 최고 200만원이었음을 생각하면 어떤 세대·계층이 포함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들은 피해 영상을 ‘스티커’(이모티콘)로 만들어 낄낄대며 소비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상품으로 여겨온 뿌리 깊은 남성문화와 무관한 일인가. 소수의 ‘극악한 일탈이나 범죄’로만 바라보면 플랫폼을 갈아타고 디지털 성범죄는 또다시 솟아난다.
여성들이 엔번방 사건을 집단성폭력으로 느끼는 공포의 감각을 남성들이 온전히 느낄 순 없다. 그래도 간극은 줄일 수 있다. 디지털 성범죄가 오프라인 성범죄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적어도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 영상에 대해 단호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커졌다. 나아가 성인 피해자 불법 촬영물의 소비·소지도 처벌하는 쪽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사실 법 개정만큼 중요한 게 사법기관의 인식이다. 피해자 스스로 영상을 찍었어도 유포·협박한 가해자를 강제추행 간접정범으로 인정한 2018년 대법원 판례가 있지만, 검찰이나 법원에선 여전히 신체 접촉, 물리적 협박, 남성 시선의 성적 욕망이 주요 기준이다.
우리 사회에 몇년 전부터 스스로를 ‘헬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젊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늘어난 것은 디지털 성범죄의 급증과 떨어뜨려 볼 수 없다. 생물학적 기준을 절대적 잣대로 보는 그들의 ‘폐쇄성’은 안타깝지만, 이런 ‘지옥’을 둔 채 그들만을 비판할 수 있을까 싶다. 얼마 전 ‘지금 여기서 제동을 걸지 않으면 우리 딸들의 미래는 없다’는 문장을 사설에 쓰며 생각했다. 난 두 아들이 부지불식중에 이런 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세상 또한 끔찍하다. 최근 여성들 중 누군가는 텔레그램 계정에서 조용히 탈퇴하는 지인 남성들에게 ‘혹시’라며 의심을 품게 됐을지 모른다. 의심이 억울한가. 그렇다면 남성들이 더 앞장서길. 함께 이 지옥을 끊어내길.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김영희 ㅣ 논설위원 한겨레 :2020-03-26
코로나19 팬데믹과 인류의 질문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덮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경제 팬데믹을 불러들이고, 경제 팬데믹은 모순의 누적으로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자본주의의 몸통을 강타하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인류는 전체주의적 감시체제와 시민적 역량 강화 사이, 민족주의적 고립과 글로벌 연대 사이에서 두가지 힘들고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체주의적 감시체제와 민족주의적 고립에서 벗어나 시민적 역량 강화와 글로벌 연대를 인류에게 호소한 것이다. 이 보편적 호소를 누가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인류가 이런 보편적 호소를 숱하게 들어왔음에도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거나 실천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우슈비츠’를 겪은 후 인류의 통렬한 반성과 성찰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학살과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이 자기들의 국가를 세우고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또 다른 형태의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희생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이 참혹한 순환의 고리가 인류의 숙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창궐할 때 한국인을 비롯한 세계인들은 타자의 시선으로 우한을 바라보았다. 그 바이러스가 한국의 대구에서 급속히 번져나갈 때는 한국 바깥의 세계인들이 타자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았다. 바이러스가 이탈리아를 휩쓸면서 유럽 대륙은 물론 미국도 바이러스 창궐 영역으로 확인되자 세계인들은 비로소 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 혹은 ‘우리’의 시선으로 신종 전염병을 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현상이다. 코로나19가 팬데믹이 되기 전까지 인류는 타자의 시선 안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 속에 내재한 ‘이기적 자아’ 때문이었다. 인간의 이기적 자아는 끔찍한 전쟁 앞에서도 쾌락을 느낄 정도로 기괴하다.
1991년 1월16일에 시작되어 2월28일 종료된 걸프 전쟁에서 미국은 이라크에 8만85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핵폭탄의 일곱배를 일곱배를 웃도는 양으로 44일의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 희생자만 20여만명에 달했다. 세계인들은 티브이(TV)를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폭탄이 연출하는 스펙터클을 감상했다. 적외선으로 촬영한 야간 폭격과 패트리엇 미사일의 격추 장면 등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티브이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폭탄에 장착된 카메라는 보는 이의 시선을 폭탄의 시선으로 변화시켜 하이퍼테크 폭격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적 즐거움을 증폭시켰다. 인간의 시선을 기계의 시선으로 바꾸어버린 놀라운 과학기술은 전세계인을 게이머로 만들었다. 폭격을 수행하는 이들조차 비디오게임에 빠진 아이로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폭탄과 달리 대상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파고들어가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런 미증유의 위기 속에 역설적으로 희망의 씨앗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은 신비롭다. 바이러스 팬데믹이 타자의 시선이라는 이기적 쾌락에 갇힌 인류에게 감옥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문이 열렸다고 해서 그 안에 갇힌 사람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모르는 사람은 문이 열린 사실조차 모를 것이며, 그 안을 편안히 느끼는 사람은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문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시력이 사라지는 전염병이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휩쓸면서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으로 변해가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류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작가가 ‘눈먼 자들’ 속에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는 인물을 만들어 그로 하여금 눈먼 자들이 할 수 없는 역할을 하게 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늘 죽음을 나타내던 상징이 삶의 상징이 되어버렸다”고 말하게 한 것은 암흑에 갇힌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환한 생명체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팬데믹에 갇힌 인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기 시작했을까?”라는 간절하고도 치열한 질문을./정찬 ㅣ 소설가 한겨레 :2020-03-26
염치없는 두 거대정당을 심판하자
4·15 총선이 3주도 남지 않은 오늘, “국민의 수준을 뛰어넘는 정부 없다”고 했던 19세기 유럽의 반동적 보수주의자의 말이 뇌리를 때린다. 우리는 3년 전 촛불을 들어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세력을 몰아냈다. 그랬던 우리의 정치의식은 오늘의 거대 양당 정치세력으로부터 알바니아나 레소토의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독일이나 뉴질랜드라면 감히 저지르지 못할 파렴치한 행위를 거대 양당이 노골적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독일에서 의석수를 늘리기 위해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나 변칙 행위를 벌이는 정당이 있다면 곧바로 유권자들로부터 배척될 것이다. 그들의 정치의식이 그런 반칙행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 그리고 그들의 위성정당들을 심판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초라하고 낮은 정치의식의 소유자임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다.
민주당과 미래통합당(자유한국당)은 오랜 동안 국민의 의사를 과잉 대표해왔다. 적대적인 두 당이지만 대의제에 있어서는 공조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해왔다. 그 결과, 노동자와 서민,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국회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웠다. 이런 역사적 현실 앞에서 비례성 원칙을 지키는 선거제 개혁은 민주주의 성숙을 열망하는 국민의 일반의지에 속했고 촛불 시민의 가열 찬 요구의 하나였다. 실제로 우리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법 개정을 위해 1년의 시간을 보냈다. ‘패스트트랙’이라는 말과 달리, 느리고 답답한 시간이었는데 우여곡절을 거쳐 통과된 개정안은 누더기에 가까웠다. 비례의석을 늘리지 않은 채였고 30석만 연동시키는 지극히 부족한 내용이어서 만족할 수 없었지만, 다음 단계의 성숙을 위한 작은 발판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획득한 비례대표제가 오늘 어떤 모습을 드러내고 있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들의 놀이터가 되었다는 것이다! 민주시민이라면 이들을 심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에 속한다. 최근 민변이 지적했듯이, 위성정당이 단지 꼼수, 반칙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훨씬 심각한 헌법적 문제점, 즉 헌법이 정한 대의제 정당민주주의 질서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미래통합당은 본디 사익 추구를 위해 염치를 내던진 집단에 가까웠다. 촛불의 힘으로 집권한 여당이라면 그들과 달리 꼼수와 변칙에 단호히 맞서고 시민들의 정치의식을 믿고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민주주의 성숙을 도모해야 마땅했는데 적폐세력과 함께 진흙탕에 뛰어드는 편을 택했다. 미래한국당이 뻔뻔한 그들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면, 민주당은 ‘아닌 척하며 할 짓 다 하는’ 야바위꾼을 연출했다. 국회에서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가 대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성된 ‘정치개혁연대’의 기류를 타고 위성정당의 필요성을 띄운 뒤 자기들 입맛에 맞는 ‘친문 친조국’ 세력인 ‘시민을위하여’를 플랫폼 정당으로 선택했다. 후보 중에 성소수자가 있다는 이유로 녹색당을 배제하는 등 다루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정당들은 내치고, ‘기본소득당’과 ‘시대전환’을 양념처럼 곁들였을 뿐이다. 노동당은 정치개혁연대로부터도 초청되지 않았다.
이처럼 거대 양당이 정치의 타락상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먼저 정치지도자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열린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자들이 천명하듯, “지켜”주어야 할 국회의원이 많이 필요한 만큼 어려움에 처해 있어서 발언하지 않는 것인가? 문재인 정권은 지난 3년의 집권기간 동안 개혁의 실적으로 내세울 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 그나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꼽을 수 있겠는데, 그 취지가 여지없이 배반당하고 민주주의의 퇴행을 불러오고 있는데 후보 시절 선거제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던 대통령이 침묵하는 것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납득하기 어렵다. 집권 자체가 목적이었을 뿐, 집권하면 자신의 어떤 정치철학 아래 어떤 정책을 펼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이 없었기 때문일까?
둘째 배경은, 거듭 말하건대 두 정치세력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역사적인 ‘신의 한 수’는 속된 표현으로 “우리 아니면 수구 적폐세력을 찍을 거니?”였다. 그렇지만 수구 적폐세력이 약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민주당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가 자기들보다 “조금만 더 수구적이고 부패한 정치세력의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집권한 민주당이 선거 때마다 강조해온 민생정치를 제대로 편다면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이 떨어질 수 있지만, 민주당으로선 달갑기만 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만큼 민주당의 지지율이 높아질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개혁진보적인 정당이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촛불 시민의 힘으로 3년 전에 10%대까지 지지율이 추락했던 자유한국당은 오늘 미래통합당으로 30% 안팎의 지지율을 회복했다. 그것이 황교안 대표의 정치력 덕일까? 3년 동안 집권세력으로서 자유한국당과 다른 점을 보이지 못한 민주당 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당에 ‘신의 한 수’는 계속 유효하게 되었고 위성정당의 필요성을 강변할 수 있게 되었다.
두 거대정당은 실상 자본친화적, 노동배제적인 점을 비롯해 정책 지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 재벌개혁, 노동개혁은 앞으로도 말만 무성하거나 시늉만 벌일 것이다. 전교조가 여전히 법외노조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나, 교육개혁의 긴요성이나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별 차이가 없다. 금태섭 의원을 낙천시킨 반면, 대법 판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한 이강래 전 사장을 공천하는 민주당이 미래통합당과 얼마나 다르다는 것인가. 오늘도 강남역 철탑 위에서 반노조 삼성재벌에 맞서 300일 가까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용희씨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로 일관하고 있는 두 당은 ‘데이터 3법’과 ‘삼성보호법’이라는 별칭을 가진 산업기술보호법은 일사불란하게 통과시켰다.
위성정당은 염치없는 정치가 연출한 막장 드라마다. 하지만 민주시민에겐 정치혐오와 냉소에 빠질 권리가 없다. 정치적 동물로서 우리는 분노를 적극적 참여로 표출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두 거대정당과 위성정당을 제외한 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주자. 그 득표수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얼마나 성숙한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가늠자가 될 것이다.
홍세화 ㅣ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한겨레 2020-03-26
우리 사회와 신천지, 적대적 공생관계
31번 확진자’의 등장은 코로나19 사태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그이는 영남권에서 발견된 최초의 확진자였는데, 이후 한국 사회에서 코로나19는 만연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압도적 다수가 대구·경북 지역의 감염자들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이로부터 시작해서 이후 계속 발견되는 확진자들은 신천지 대구교회 교인들이었다라는 점이다.
정부의 조치는 신속했고 적절했다. 감염병 대응의 최고 수위인 ‘심각’ 단계를 발령한 이후 한 달이 지난 3월22일 지역 감염은 효과적으로 잡혔고, 현재는 외국에서 입국한 이들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알지 못하는 곳에서 확산되는 사례는 현저히 줄었고, 추적 가능한 확진자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투명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한 한국에서는 진정 추세에 있는 반면, 쉬쉬하며 늑장 대응했던 많은 나라들은 대감염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하여 대감염이 일으키는 파장이 전 지구적인 문제로 부상했다. 진정 추세에 있는 한국도 빠져나갈 수 없는 문제 말이다. 그중 하나가 ‘혐오주의’의 확산이다. 이미 신자유주의 시대에 혐오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만연하고 있는데, 코로나19의 대감염 현상은 그것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발화되고 있는 혐오주의를 분석하는 일이 감염병 방역활동의 주요한 일부가 되었다.
한국에선 31번 확진자의 등장을 기점으로 신천지라는 강성 종말론 성향의 소종파에 혐오의 낙인이 찍혔다. 그들의 종파적 전도 전략은 2000년대 이후 급속한 성공을 거두는 중인데, 그 성공은 주로 개신교 신자들을 개종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연히 개신교의 강력한 반발이 초래되었다. 하여 개신교 교회들의 적극적인 대응이 본격화된 2015년 무렵 이후에는 개신교 신자의 이동은 크게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천지의 성장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경계에 있는 신자들’에 대한 전도가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계에 있는 신자들’이란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거나, 아예 개신교·가톨릭·불교의 경계를 넘나들거나 혹은 종교의 경계 안팎을 넘나드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런 현상이 개신교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는 대략 1990년대 중반경부터다. 개신교의 확산 추세가 거의 멈추었고, 신자들의 수평이동이 교회들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상황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때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심정은 ‘실망’이었다. 나는 그들을 ‘실망신자’라고 부른 바 있다. 이 실망신자들의 떠돌이 생활이 본격화된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성공을 거둔 교회는 강남·분당권의 후발 대형교회들이다. 하여 이 교회들은 주로 중상위계층 신자들의 사회종교적 네트워크의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다른 교회들에도 영향을 미쳐서 많은 교회들이 강남권 대형교회들의 담론과 제도를 모방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 변화는 중하위계층 신자들이 교회의 제도 속에서 주변화되고, 교회의 담론 속에서 종교적 위안을 받지 못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중하위계층 신자들 중 실망신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신천지의 성공은 그것을 푸는 하나의 열쇠다. 신천지를 포함한 여러 강성 종말론 성향의 종교공동체로 흡수되는 이들이 적잖았다는 것이다. 중하위층 신자들이 유난히 많고 특히 빈곤한 여성신자 비율이 매우 높으며 칭찬의 제도가 섬세하게 발전한 종교제도를 가진 신천지에는, 경쟁사회의 칭찬의 제도 속에서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위한 장치들이 잘 발전되어 있다. 문제는 그 속에서 이들은 성숙하기보다는 퇴행적 존재가 된다는 데 있다.
신천지 종단의 퇴행적 종교성이 강성 종말론과 결합되어 장기간 지속되는 것, 거기에는 경쟁사회에서 실패한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오늘 우리 사회의 냉혹함의 제도가 전제되어 있다. 하여 나는 신자유주의의 사회와 교회는 신천지 종파와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다고 추정한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경향 2020-03-27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나는 위생 개선이 그 어떤 사회적 조치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청결과 (위생)예절이 먼저 확립되지 않는다면, 교육과 종교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다.”
1851년, 찰스 디킨스가 런던 보건국 홍보 연설에서 한 말이다. 당시 런던은 그리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5세 이하 어린아이 절반이 감염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관심이 없었다. 어린이는 으레 ‘소아병’에 걸리는 법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는 더럽고 비좁아졌고, 아이들이 쏟아져나왔다. 어린이는 매일 12시간을 공장에서 일했다. 13세 디킨스도 주급 6실링을 받고 구두약 공장에서 온종일 일해야 했다.
형편이 좀 나은 아이는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장의 규율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수백명의 학생이 좁은 곳에서 수업을 받았고, 모진 체벌을 받았다. 19세기 초에야 교사가 학생을 때려죽일 수 없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공장을 따라 교실의 창문을 없앴다. 햇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은 구루병에 걸려 팔다리가 휘어졌다. 당시 18세 청소년의 평균 신장은 152㎝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일자리는 주로 도시에 있었다. 부모는 아이에게 공장 혹은 공장형 학교 중 하나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항아리손님(유행성 이하선염)이 찾아오고 호열자(콜레라)가 도시를 덮쳐도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일부 부유층만이 냄새나고 답답한 도시를 떠나 교외로 향했다. 햇빛이 드는 가정에서 공부하고, 숲과 들판에서 뛰놀 수 있는 어린이는 많지 않았다.
학교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매일매일 출석하여 책상 앉기를 견뎌내는 과정은 미래의 블루칼라나 화이트칼라에게 아주 중요한 훈육이다. 하지만 디킨스는 생각이 달랐다. 실질적 지식 전달이 학교의 목적이며, 사회적 순응을 위한 훈육은 부차적이라고 여겼다. 그의 소설, <어려운 시절>의 첫 문장은 이렇다. “저 아이들에게 사실만 가르치시오. 삶에서 필요한 건 오로지 사실이오. 사실에 근거할 때 비로소 이성적인 인간을 만들 수 있소. 다른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되오.”
개학 연기는 단지 물리적 거리 두기의 일환만은 아니다.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등교를 강요당한다면 산업혁명 당시 영국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감염병을 무릅쓰고 출석한 학생에게 보건과 위생을 가르칠 수는 없다.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과 기만을 배울 것이다. 혹시 맞벌이 부모의 출근을 위해서라면 더 슬픈 일이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도 부모는 일터로, 아이는 학교로 가야 한다면 19세기의 런던보다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디킨스는 공공 보건의 선구자였다. 위생 개선, 병원 설립, 의무적 백신 접종에 앞장섰다. 상이군인 지원과 장애아동 교육도 제안했다. 슬럼가를 개선하자며, 빈민층의 높은 사망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그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까?
올리버 트위스트의 시대에는 어린이가 넘쳐났다. 절반이 감염병으로 죽어 나가도 세상은 무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노인이 넘쳐난다. 코로나19는 노인에게 몇 배나 더 위험하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이 몇 배나 되는 것 같진 않다. 학교는 휴교 중이라지만, 요양원은 그대로 괜찮은 것일까? 노인들이 대거 퇴소하여 가족 곁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인류사를 통틀어 어느 때보다도 오래 산다지만, 이래서는 그 빛이 바랜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하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경향 2020.03.30
코로나19와 아마존
미국 전자상거래 회사 아마존은 지난 17일 10만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뒤이어 코로나19 때문에 미국에서 올 상반기에 일자리 1400만개가 사라질 것이고 2분기 실업률이 30%에 달할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들이 잇달아 나왔다. 10만명 고용은 어마어마한 약속이다. 4월부터는 직원들 최저시급도 이전보다 2달러 올려준다고 했다. ‘맥잡(맥도널드 점원)’이라 불리는 미국의 저임금 노동자들은 시급을 15달러로 올려달라며 몇 년 동안 힘들게 싸워왔다. 코로나19가 아마존 노동자들에게 이를 현실로 만들어준 건 아이러니하다. 임금을 올리고 10만명을 고용한다는 약속을 아마존이 지킨다면 대단한 일이 되겠지만 저 중에는 파트타이머들도 상당히 포함될 것이어서 일자리의 ‘질’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존은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 거래가 폭증하면서 주문 처리와 배송도 밀려 있다고 했다. 경제가 위기로 치닫는데 어느 기업이든 사람을 더 뽑겠다고 하면 찬사를 받을 만하다. 거리의 매장들이 온라인 상점에 밀리기 시작한 지는 오래지만, ‘거리 두기’가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면서 온라인 유통업체들은 더 유리해졌다. 미국 온라인매체 쿼츠는 “바로 이런 때를 위해 아마존이 존재한 것”이라고 적었다.
아마존은 여러 면에서 21세기의 팬데믹을 비추는 거울이다. 고용 한파 속에서도 채용을 늘리는 기업이 전자상거래 업체라는 점에서만은 아니다. 아마존이 자체 브랜드로 파는 물건들 중에는 요즘 미국인들의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화장지와 물티슈도 있었는데 모두 동났다고 한다. 아마존은 코로나19가 퍼지고 나서 100만개가 넘는 아이템을 판매 리스트에서 지웠다. 코로나19와 관련된 거짓 정보를 넣어 광고를 했거나 가격을 대폭 올린 물건들이다. 전염병을 둘러싼 가짜뉴스가 하도 많이 퍼져 ‘인포데믹’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사재기와 상술이 판친다. 아마존은 그런 것들에도 효과적인 플랫폼이 돼준다.
아마존은 또 ‘필수적이지 않은’ 물건의 선적과 배달을 미루고 의료용품과 생필품을 우선 비축하겠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전염병을 무시한 사이에 미국이 감염 중심지가 돼 버렸는데, 정부의 빈틈을 선도적인 기업이 메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탈리아 트렌토의 아르마니 공장에선 재봉사들이 마스크를 만들고 있고 미국 자동차 회사 GM은 트럼프 정부의 ‘국방물자생산법’에 걸려 인공호흡기를 생산한다. 하지만 기업이 정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 공공의료가 무너진 남유럽 나라들의 현재가 그 생생한 증거다.
아마존에 취업할 미국 노동자들은 주문을 받고 배송을 하는 일을 한다. 아마존이 고용계획을 발표할 무렵 미국은 아직 감염증의 핫스폿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그때 역병에 짓눌려가던 이탈리아는 달랐다. 전염병이 맨 먼저 퍼진 밀라노 근교 카스텔산조바니라는 곳의 아마존 물류창고에서는 배송노동자 30%가 도망을 치거나 작업을 거부했다. 앱센티즘(absenteeism)이라 불리는 ‘계획적 무단 결근’이다. 직원들 사이에서 감염자가 나온 탓도 있지만, 일 특성상 전염병이 퍼진 지역들을 돌며 바이러스에 그대로 노출될 게 뻔했다. 하지만 아마존은 창고를 소독하기 위해 잠시 닫아달라는 노동자들 요구를 거부했다. 급기야 이탈리아 아마존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번졌다. 파업과 상관없이 며칠 지나지 않아 나라 전체에서 모든 산업이 중단됐지만.
이탈리아 아마존 직원들의 감염 공포는 고스란히 미국으로 옮겨가고 있다. “직원을 고객처럼 대해달라.” 뉴욕에서 시위에 나선 아마존 직원들의 손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필수적인’ 물건부터 챙기겠다는 회사 방침에 빗대 “우리 건강도 필수적”이라 쓴 글귀도 보인다.
아마존이 특별히 나쁜 회사인 건 아니다. 다른 기업들과 비교해 효율적이고, 경영자는 똑똑하고, 사회적 책임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아마존이 아니었다면 다른 기업이 비슷한 일을 했을 것이고, 전자상거래로 실적을 올렸을 것이고, 전염병 국면의 승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전자상거래든 뭐든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돌아다녀야 한다. 아마존을 보며 느끼는 것은 시대의 패러다임이 ‘비대면’으로 옮겨갔다는 착각에 대한 깨달음, 정부의 진공을 기업이 메울 수는 없다는 깨달음, 물건보다 사람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이다. 구정은 국제부 선임기자 경향 2020.03.31.
코로나19 이후의 이중적 뉴노멀 사회
코로나19 팬데믹의 공포가 서유럽과 미국을 뒤흔들고 있다. 공공의료 수준, 사생활 중시의 개인주의 문화, 정부의 대처 역량에 따라 나라마다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지구적 공포가 최소한 여름까지 계속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정도의 충격이라면 지난 세기 스페인 독감에 필적한다.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인 1918~1919년에 발생했다. 전쟁으로 죽은 이들보다 많은 5000만명까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세 페스트 이후 서구사회에 큰 시련을 안긴 전염병이었다.
지난 100년의 의료기술 발달로 코로나19 팬데믹의 사망자는 스페인 독감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팬데믹이 야기한 사회적 불안은 정보사회가 만개한 현재 외려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지구사회를 규정짓는 일차적 요소는 ‘초연결’이다.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불안과 각자도생은 더욱 확산되며 강화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두 가지다. 먼저, 그렇다면 이 팬데믹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의 의학적 질문이 하나다. 결국 관건은 증상을 완화시키는 항(抗) 바이러스 치료제와 완전히 퇴치시키는 백신의 개발이다. 그런데 백신 개발에 1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때까지 방역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의료와 과학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한편, 이렇게 강력한 바이러스가 나타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의 사회적 질문이 다른 하나다. 팬데믹을 신속히 저지하는 게 일차적 목표이지만, 이 가공할 팬데믹이 가져올 우리 삶과 사회의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 2003년 사스가, 2009년 신종플루가, 2015년 메르스가, 올해 코로나19가 나타났다. 특히 코로나19는 지구적 혼돈을 결과함으로써 이제 인류는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의 문턱 위에 올라서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인류는 ‘이중적 뉴노멀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뉴노멀의 이중성은 경제의 불확실성과 위험의 불확실성이다. 이 두 뉴노멀은 긴밀히 결합돼 있다. 당장 코로나19 팬데믹은 사회적 불안을 넘어 경제적 위기를 낳고 있다. 전염병의 지구적 확산은 실물 경제를 정지시키고, 실물의 위기는 금융시장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취약한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예견되며, 이 구조조정이 실업의 공포를 불러옴으로써 ‘의학적 공포’는 ‘경제적 공포’로 진화할 것이다.
일군의 비관주의자들은 코로나19가 격발하는 위기에 1929년 대공황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위기의 원인이 경제가 아닌 전염병에 있는 만큼 그 누구도 코로나19가 촉발시킬 파장을 예측하긴 어렵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위험의 뉴노멀이 경제의 뉴노멀에 주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과 이 인과과정을 통해 불확실성이 더욱 증가할 경제에 대한 ‘위험의 경제학’의 정책대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국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처에서 우리나라는 서구사회보다 우수한 대응 역량을 선보였다. 정부의 최선을 다한 방역, 의료진의 헌신적 희생, 국민 다수의 높은 공공의식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위험의 세계화에서 글로벌 거버넌스는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더 중요한 것은 국민국가의 대응 역량이다. 의학적·사회적·경제적 위기에 맞서는 국가의 능력과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요구된다.
셋째, 사회의 변화 또한 눈여겨봐야 한다. 코로나19 광풍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 엄격히 말하면 ‘물리적 거리 두기’가 사회생활의 기본 양식이 됐다. 이 과정에서 상품 구매와 학교 수업까지 온라인의 중요성이 한층 커졌다. 이 광풍이 그치면 우리가 돌아갈 자리가 옛날에 있던 그 자리는 아닐 것이다. 가상세계의 연결이 강화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더욱 중첩되는 제3의 자리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초연결 아래 오프라인과 온라인, 개인주의와 협력주의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요컨대, 코로나 이후 사회에서 우리 인류는 사회제도와 의식 모두 적잖이 새롭게 혁신해야 하는 엄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인간이 지니는 가장 위대한 힘인 이성과 과학을 부정하라. 그러면 나는 너를 내 손아귀에 넣게 될 것이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이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성과 과학의 힘에 기대어 이 지구적 위기를 넘어서길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20.03.31.
코로나가 무너뜨린 신화들
나는 지금 이 글을 집에서 쓴다. 오슬로대학 캠퍼스가 당분간 폐쇄되어 직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다행히도 프랑스·이탈리아와 달리 식료품과 약을 구입하는 목적 외에도 단순한, 잠시의 외출은 그나마 아직 허용된다. 1945년 이래 최악의 위기를 겪는 유럽에서 그것도 고마운 ‘사치’로 느껴질 정도다. 한데 가끔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다.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구 대비 확진자 수는 이미 한국의 거의 4배나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의 외출에 대한 규제들도 언제 강화될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절대 불평하지 않는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데다 실직 위기에 몰릴 일 없는 나 같은 공무원들은, 미증유의 참극을 겪고 있는 이 상황에서는 거의 특권층에 해당된다. 특히 집중 타격을 받은 서비스업이나 여행·숙박·항공업 등에서 휴직과 해고가 속출하여 평상시 3%에 불과했던 노르웨이의 실업률은 이제 10%를 넘었다. 하기야 미국에서 머지않아 예상되는 약 30%의 실업률에 비하면 이것도 그나마 괜찮은 수준인지 모른다.
지금 세계 경제의 최상의 시나리오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단기 불황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들은 단순한 불황에 그치지 않고 1929년 이후 대공황이나 그보다 더 큰 규모의 공황이 도래할 것으로 내다본다. 실은 미국의 실업률이 정말로 30%에 이르면 이는 대공황 시절 최악의 실업률이었던 1933년의 24.9%보다 더 높은 것이 된다. 거기에다가 세계 시장 상황을 크게 악화시킬 수 있는 중-미 갈등이라는 지정학적 위험의 지속적 심화도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겪은 일들은 앞으로 전세계에 들이닥칠 연속적 재앙의 서곡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지난 3개월의 코로나 위기만 해도, 적어도 세 가지 신화가 이 위기 속에서 무너지고 말았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귀중한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첫째, ‘선진국’ 신화다. 근대로의 전환이 더 빨랐던 구미권 ‘선진국’들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 여태까지 한국인들의 지배적 집단의식이었지만, 코로나 위기는 이 의식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잘 보여주었다. 구미권이 근대로 먼저 나아갔다고 해도,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공공성을 크게 약화시켜온 구미 국가들은 무조건 선망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선진국’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신종 바이러스와 고전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바람에 제때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귀중한 시간을 잃었다. 특히 만성적인 예산부족 등에 시달리던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공공의료는 상당한 부실함을 드러냈다. 미국의 영리 목적의 민영병원 위주 의료시스템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대응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미국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선진국’ 일본의 경우, 검사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지금까지 드러난 확진자 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 있다고 <시엔엔>(CNN)과 같은 주요 서방 언론사들이 보도하는 판이다. 상당수 전문가들도 조직적 은폐 의혹이 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공공의료시스템에 대한 부족한 예산지원이나 바이러스에 대응하지 못하는 영리의료, 재난 규모의 은폐와 축소 의혹 등을 과연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배울 점을 배워야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선진국’들의 민낯을 본 사람들은 아마도 더 이상 ‘선진국’ 신화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미국’ 신화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미국,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시절의 미국은 정부 주도로 무기 생산을 시급히 확충시키는 등 국가가 산업구조에 개입하여 비교적 능숙하게 재난을 극복했다. 그러나 4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 지배를 거쳐 미국은 이러한 능력을 거의 상실한 듯하다. 의료설비 부족이 드러나도 국가가 처음에는 생산에 개입하기를 주저해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바이러스 위협이 계속 남아 있고 확진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제약업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공공의료시스템으로의 전환은 절실히 필요한데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본격적·장기적 대책을 수립하는 대신에 트럼프는 중국에 책임을 돌리기에 바쁘고, 확진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부활절 이후의 경제활동 재개’를 거론하는 수준이다. 이 무책임, 이 인명 경시는 단기적 이익 본위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는 미국 지도층의 정신상태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지속적인 ‘중국 탓하기’가 중국인과 외관상 식별이 가지 않는 모든 재미 아시아계 소수자들을 정신 나간 인종주의자들의 폭언·폭력에 노출시키고 있는데, 트럼프는 개의치 않는다. 종족적 소수자, 그리고 확진자 수가 가장 많은 노약자층 등의 인명과 인권을 더 이상 보호하지 못하고 보호하려 하지도 않는 국가가 세계의 ‘리더’를 여전히 자처할 수 있을까. 이번 사태를 거치며 진단키트의 수출 등으로 한국의 위상은 국제적으로 크게 올라갔지만, 미국의 위상은 끝 모를 추락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시장’의 신화다. 시장이 마스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마스크를 공급할 수 없음을 우리는 여실히 본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기본소득이나 소비 진작을 위해 주민들에게 국가가 현금을 지원하는 것은 ‘급진적 주장’으로 인식됐지만, 지금 미국같이 비교적 보수적인 나라마저도 주민들에게 현금 지원을 할 예정이다. 상당수 항공사 등이 어차피 부도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 항공업과 같은 사회 필수 시설의 국유화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한다. 아직 위기의 초기지만, 시장만으로는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없음은 이미 명백해졌다. 앞으로 세계 경제의 재가동·회복을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국가 개입과 국가 주도의 재분배 정책이 불가피할 것이다.
시장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다가 공공시스템의 부실을 떠안게 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이제 팬데믹 위기의 ‘약한 고리’가 되었다. 그들을 포함해서 팬데믹 이후의 세계는 과거 신자유주의 시대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불황 내지 공황을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1930년대 미국의 뉴딜을 방불케 할 수준의 국가적 경제 개입이 필요할 것이고, 앞으로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함께 공공부문, 그리고 재분배 장치들이 대대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이 세계적 추세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앞으로 공익·공공성 위주의 경제 모델과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할 것이냐의 여부보다는, 한국형 복지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가 사회적으로 핵심적 화두가 될 것이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0.03.31.
한국 사회의 대외 인정결핍증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대처를 둘러싸고 나온 이슈 중 하나는 한국의 처리과정에 대한 외국의 반응이다. 정부와 여당은 한국의 방역과 치료가 세계 수준으로 해외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고, 야당은 초기 방역 실패를 호도하는 행위라며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외 인정에 대한 갈구는 어제오늘의 문제도 아니고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의 경우 그 뿌리는 역사적으로 항상 주변세력의 영향권 밑에서 신음했던 국제정치적 경험이 크게 자리 잡고 있겠지만, 보다 가깝게는 경제발전 후발 주자로서 산업화의 성공에서 찾을 수 있다.
후발 산업화는 한국뿐 아니라 소련, 독일, 일본 등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 지배엘리트들이 자국의 극심한 상대적 후진성과 이에 기반한 열등의식을 갖는 데에서 출발했다. 러시아는 오랜 기간 서구에 대한 후진성을 안고 있었다. 러시아 공산주의는 서구와 비교한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처방이었다. 일본 메이지유신 역시 마찬가지다. 메이지유신의 리더 중 한 사람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 노동자들의 근로 시간이 서구보다 적고, 독일의 닭들은 일본 닭들보다 많은 달걀을 낳는다”고 일본의 열등성을 표현할 정도였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국 역사에 대한 평가에는 열등의식과 후진성 인식이 가득 차 있다. 역사만 길지 침략의 역사 속에 볏짚으로 새끼를 꼬는 정도라고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5000년 역사 속에 항상 외침만 당했다고 한탄했다.
후발 주자들의 후진성과 열등의식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촉매제로 활용됐다. 한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 등 각국이 연평균 10%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뿌리 깊은 열등의식을 바탕으로 이룬 성공적 산업화는 국제적으로 강한 인정을 요구하게 된다. 스탈린은 대공황에 싸인 서구에 대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웠고,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에 대해 대등한 지위를 요구했다. 일본의 식민지 점령은 서구와의 대등성을 보이려는 열망의 결과였다. 그러나 한국은 성공적 산업화를 바탕으로 일본이 했던 것처럼 대외적인 팽창이 어려웠다. 이미 국제정치가 제국주의 패러다임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일본이 식민지 점령 같은 제국주의적 행위를 통해 대외 인정을 추구했다면 한국이 개진할 수 있는 것은 통일 문제였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시작으로 나타난 적극적인 통일정책은 이의 발현에 불과했다. 그러나 통일 문제는 대외팽창을 통한 인정보다 내부 가슴앓이만 심화시켰다.
한국의 대외인정 결핍증의 극치를 나타낸 사례는 역시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였다. 세계화의 목표는 선진국 진입이었고, 이의 상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었다. 제도적·심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한 세계화 추진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대외인정을 갈구했나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조급한 선진국병은 급기야 나라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오히려 대외 종속성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설을 낳았다. 이 사례는 선진국 대열에 서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 실적에만 있지 않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개인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열등의식에서 출발한 일들은 정상적인 심리상태가 아니고 방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누가 나를, 우리나라를 우습게 혹은 업신여기지 않나 하는 불안감에 싸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나 국가 내부의 문제를 침착하고 계획적으로 성찰하고 해결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가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심리적 불안감은 개인에게서 나타날 때 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국가적으로는 전쟁까지 이르게 된다.
이제 한국은 누구에게 인정받기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충분히 되었다. 남은 과제는 한국인에게 편한 제도와 가치를 창출하여 자족감을 높이는 일이다. 더 이상 서구의 제도나 가치를 지향점으로 놓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아시아에서 어느 국가도 이루지 못한 서구적 제도와 한국적 특성을 잘 조화시켜 모두가 불안하지 않은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일이다. 한국의 코로나19 처리과정은 바로 이런 것의 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이런 과정은 끊임없는 자기 발견과 성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어느 한 정권, 한 세대에서 이뤄질 문제가 아니다. 영화 <기생충>이든, BTS든, 코로나19 방역이든 그저 하나의 벽돌을 쌓는 것뿐이다. 초조한 대외인정 추구는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한국적 근대성이 완성될 때 우리가 기대하지 않아도 세계의 주목 대상이 될 것이다. 이제 대외인정 결핍증에서 벗어날 때다 /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석좌교수 경향 2020.03.31.
A Whiter Shade of Pale / Procol Harum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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