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응, 일본은 한국과 왜 다른가 한겨레 2020-03-01
허경영과 1000명에 육박하는 출마자들 경향 2020.03.02.
그들이 ’문재인 탄핵’을 꺼내든 이유 한겨레 2020.03.02.
과도한 확신에 찬 전문가를 경계해야 한다 경향 2020.03.02.
감염병 시대의 돌봄노동 한겨레 2020.03.02.
2월27일, 광화문 촛불은 꺼지고 인권은 사라졌다 경향 2020.03.03.
나는 한국이 좋다’ 경향 2020.03.03.
천지는 어짊이 없으나 경향 2020.03.03.
팽’당하는 신자유주의와 한국 한겨레 2020.03.03.
누더기 선거법 개정안, 공약으로 걸어라 한겨레 2020.03.03
사회적 면역결핍 경향 2020.03.04
바이러스와 정치 경향 2020.03.04.
신천지와 종교의 자유 한국 2020.03.04.
'짝퉁정당' 미래한국당에 멍석을 깔아 준 선관위 프레시안 2020.03.05.
코로나 사태와 장기 비상상황 한겨레 2020.03.05.
세계경제의 화두, ‘일본화’ 시사인 2020.03.07|
코로나19와 대한민국의 리질리언스 한국 2020.03.07
코로나19와 세계여성의 날 한국 2020.03.07.
코로나19 이후…변화 고민하는 의제 발굴을 경향 2020.03.08.
대구사태와 광주사태 경향 2020.03.08.
조선일보 100년, 그들이 감춘 ‘진실’ 한겨레 2020.03.08.
언론에 묻다 경향 2020.03.08
북한은 왜 이럴까? 프레시안 2020.03.09.
한·중·일 ‘코로나19 삼국지’ 2020.03.10.
기후위기 외면하는 거대 정당 경향 2020.03.12.
촛불정신과 민주당의 자기부정 한겨레 2020.03.15.
지구적 위기, 지구적 협력 한겨레 2020.03.15.
미래세대의 기후소송 경향 2020.03.15.
탄핵 음모와 ‘재난 뉴딜’ 정치연합 경향 2020.03.15.
코로나 대응, 일본은 한국과 왜 다른가 / 야마구치 지로
동아시아 각국이 코로나19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각국의 정부가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본과 한국 양국 정부의 대응은 대조적이다.
한국에서는 감염자 숫자가 급증하고 있지만, 이는 한국 정부가 증상이 있는 사람을 검사하고 감염자를 되도록 정확하게 발견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을 본인도 알게 하고 정도에 맞는 치료를 해서 신종 폐렴을 극복하자는 게 한국 정부의 방침일 것이다. 조만간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만 한다는 사정이 있다고는 해도, 감염이 가장 확산되고 있는 대구에 가서 진두지휘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자세에서 지도자로서의 각오를 느낀다.
이에 비해 일본 정부의 대책을 보고 있으면 일본 정치의 큰 결점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점들을 정리해서 말하면 다음 두 가지 정도이다. 우선,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주관적인 믿음에 근거해서 행동한다. 결론이 먼저 정해져 있고 거기에 맞게 현실의 일부분을 자기 편의대로 잘라내고, 국민에게도 진실을 알리지 않는다. 이런 식의 결정은 80년 전에 일본을 잘못된 전쟁에 빠트렸으며, 2차대전 이후의 공해나 각종 약품으로 인한 피해 사건에서도 반복됐다. 그리고 코로나19 대책에서도 반복되려 하고 있다.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 탑승한 승객의 코로나19 감염이 발견된 직후 배가 요코하마항에 기항했을 때 일본 정부는 배를 부두에 붙들어두고 검역을 한다는 대응 자세를 취했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미즈기와 방어’(미즈기와는 ‘물 가장자리’라는 뜻으로 상륙하는 적을 물가에서 퇴치한다는 의미)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정치계와 관료층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중국에서 일본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한달에 90만명이 넘는 시대에 ‘미즈기와’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결국, 일본 정부는 크루즈선을 붙들어두어 선내 감염 확산을 불렀다. 검역이 끝난 뒤 귀가하는 이들은 대중교통으로 이동했다. 그중에서도 새로 감염자가 발견됐다.
일본 국내에서 감염 확대가 명백해지자, 일본 정부도 대책을 발표했다. 한국과 대조적인 것은 일본 정부는 감염자 또는 감염 우려가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데 대해 지극히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검사에 필요한 ‘유전자 증폭 검사’(PCR)라는 기기와 인력은 여러 대학과 민간 검사기관에 존재한다. 후생노동상은 겨우 2월18일이 돼서야 이러한 기기와 인력을 완전히 가동해 하루 3800명에 대한 검사가 가능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국회 심의 중에 후생노동상은 하루 검사 건수가 100건에 이르지 못하며 지방자치단체가 실시한 검사 건수는 파악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왜 일본 정부는 감염자 발견에 소극적일까. 일본 관료의 병리인 ‘프로크루스테스’ 사고방식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당으로, 여행자를 붙잡아 자기 집 침대에 묶은 뒤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손과 발을 잘라버리는 잔혹한 취미를 갖고 있다. 이는 선입관과 자신이 가진 자원에 맞춰 문제를 적당한 선에서 잘라내버리려고 하는 인간의 인식이 빠지는 덫을 그린 우화다. 좁은 침대가 일본 정부가 가진 치료 자원이라면, 여행자에 해당하는 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다.
더욱이 여름에 도쿄올림픽을 예정대로 개최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향해 일본이 위험하지 않다고 호소해야만 한다는 정치적 고려도 현 단계에서 감염자 숫자를 실제보다 적게 공표하도록 부추긴다고 생각된다.
헌정 사상 최장 총리 재임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 아래에서 총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진실을 보도록 진언하는 측근은 없다. 권력의 엄한 명령은 겁쟁이 부하에게는 효과가 있지만,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사실을 은폐하면 반드시 나중에 뼈아픈 대가를 치르지 않을까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야마구치 지로 ㅣ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한겨레 2020-03-01
허경영과 1000명에 육박하는 출마자들
온갖 기행으로 유명한 허경영씨는 매주 토요일 대중강연을 연다. 위치는 서울 종로3가, 서울지하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주요 환승역이자 노인들의 모임터로 알려진 탑골공원이 있는 곳이다. 허씨는 2009년 7월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이 강연회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가 이번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정당을 하나 만들었다. 이름은 국가혁명배당금당. 그가 만든 당답게 주요 공약들이 허무맹랑하다. 온갖 명목의 현금 지급 공약과 유엔본부를 판문점으로 이전하자는 공약, ‘내수경제를 위축시키는’ 김영란법을 폐지하자는 공약 등이 있다.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는데 ‘복지국가’도 건설하겠다는 해괴한 지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다수의 공약들이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분류된 수혜대상과 수혜조건을 강조하고 있어 현혹되기 좋다는 점은 언급해둘 만하다.
이 당은 제21대 총선 예비후보 등록 기간 동안 제법 화제가 됐다. 우선 출마자 수. 3월1일 기준으로 무려 977명이 예비후보자로 등록했다. 전체 출마자의 약 40% 정도다. 그리고 전과 전력. 출마자의 30% 이상이 전과가 있다. 음주운전과 성범죄, 심지어는 살인 전과자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좀 더 찬찬히 뜯어보면 나이, 학력, 직업도 보인다. 그들 대부분이 50대 이상의 중장년이며 더러 80대 출마자도 있다. 언론 취재에 따르면 출마자 중 절반이 학력 칸을 비워뒀거나 중졸 이하라고 한다. 이들의 직업은 정말로 현실적이다. 요양보호사, 용달화물 운전자, 미화원, 건설노무자, 마트 캐셔, 백화점 아르바이트, 기계청소부, 택배기사, 페인트공이 대거 예비후보자로 나섰다.
나이나 학력, 직업만으로 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다소의 위험성을 감수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해보자. 허경영씨의 강연이 열리는 장소와 국가혁명배당금당의 선심성 공약들이 어필하는 사회적 계층, 예비후보들의 나이와 학력, 직업을 통틀어 보았을 때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부자와 빈자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 것 같은가? 청년 당사자 정치가 유효하다면 이들의 장년 당사자 정치도 유효할 것이며, 노동자 당사자 정치가 유효하다면 이들이야말로 바로 그 노동자 당사자들이다. 이들의 출마는 간단히 농담거리로 삼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국가혁명배당금당은 정상적인 정당이라기엔 문제가 많은 ‘사이비 정당’이다. 공약들은 실현 가능성을 찾기 어려우며 정치적 책임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1인의 사당이라는 느낌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 당 로고부터가 허경영씨를 형상화한 모양일 정도다. 한편으론 ‘사이비 종교’스러운 면모들도 보인다. 허경영씨는 강연에서 스스로를 ‘신인(神人)’이라 자칭하고, 지지자들에게 선거에 출마하면 ‘백궁’이라는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독려하는 식이다.
그래서 국가혁명배당금당의 ‘당사자 천 명의 예비후보 출마’라는 성과를 아프게 주목한다. 이 ‘사이비 정당’이 종로3가에서 10여년간 꾸준히 사람들을 모아오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디서 누구를 모아내고 있었던가. 이 ‘사이비 정당’이 요양보호사, 미화원, 백화점 아르바이트, 페인트공들과 만나길 주저하지 않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디서 누구와 만나고 있었던가. 이 ‘사이비 정당’이 비록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듣기에 구체적인 정책을 피부에 와닿게 제시하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떤 정책을 개발하고 또 알리고 있었던가. 왜 ‘진짜 정당’이 있어야 할 곳에 ‘사이비 정당’만이 있었는가.
정치학에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치한다는 정당들은 늘 이 사실에 당황하며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들의 삶터에서 그들과 꾸준히 만나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물어본 정치인과 정당은 얼마나 있었을까. 허경영과 천 명의 출마자들을 마주하여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경향 2020.03.02.
그들이 ’문재인 탄핵’을 꺼내든 이유
청와대 국민청원 누리집에는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떠 있다. 2일 오후 현재 143만명 이상이 청원에 동의했다.내용은 “이번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있어 문재인 대통령의 대처를 보면 볼수록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닌 중국의 대통령을 보는 듯하다. 중국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입국 금지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원 동의가 갑자기 늘어난 것은 정부의 부실한 ‘코로나19’ 대처에 대한 분노 때문일 것이다. 정서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잘못한 부분은 책임지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 청원은 아무리 봐도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이다.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심재철 의원이 “선거에서 1당을 하거나 숫자가 많아지면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수 있다”고 했다. 국회의원 한번 더 하려고 아무 말이나 던지는 것 같은데, 정도가 너무 심하다.
<중앙일보>는 지난 2월24일치 1면 머리에 ‘중국서 오는 외국인 입국, 전면 금지하라’는 사설을 올렸다. 2월28일치 사설의 제목은 “100만 넘은 ‘대통령 탄핵’ 청원…여권은 민심에 겸허해져야”였다. 왜들 이러는 것일까? ‘문재인 탄핵’은 사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초기부터 서울역과 광화문광장 태극기 부대의 단골 구호였다.
이유가 뭘까?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보수’의 정체는 분단 체제에 기생하는 자본 기득권 세력이다. ‘그들’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을 거치며 ‘영남’과 결합해 공고한 카르텔을 구축했다. 그 시기에 그들은 자신을 ‘주류’(메인스트림)라고 불렀다.
오만은 방심으로 이어졌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고, 정권을 호남 출신 김대중 대통령에게 빼앗겼다. 정부 요직에 호남 출신들이 약진했다. 신문사는 세무조사를 당했다.
2002년 또 한명의 비주류 대통령이 출현한 것은 그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악몽이었을 것이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다. 선거법 위반은 핑계였다. 본질은 정권을 되찾아오려는 그들의 몸부림이었다. 김무성 의원은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 최병렬 의원이었다. 예순여섯살이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내 나이가 칠십이다. 나에게 다음 대선은 기회가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해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의원 193명 찬성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2004년 3월12일 당시 한나라당이 다수당이었던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자 다음날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모여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졸지에 대통령을 빼앗긴 국민의 분노는 무서웠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싹싹 빌지 않았다면 한나라당 의석은 100석 미만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고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전직 대통령’으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비극이 벌어졌고 그들은 또다시 거센 역풍을 맞았다
비주류 출신 대통령에 대한 끝없는 거부감은 그들의 무의식에 각인된 일종의 방어 본능이다. 권력은 자신들의 전유물이어야 하는 것이다. 세월이 꽤 많이 흘렀다. 이제는 좀 달라졌을까? 아닌 것 같다. 그들이 이번에는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집요하게 거론하는 것이 그 증거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하게 탄핵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던 사람이 지금 그들의 가장 강력한 대선주자다. 결국 ‘문재인 탄핵’으로 ‘박근혜 탄핵’을 뒤집으려는 속셈일 것이다.
지난 대선 득표율은 문재인 41.08%, 홍준표 24.03%, 안철수 21.41%, 유승민 6.76%, 심상정 6.17%였다. 홍준표 전 대표가 안철수 전 의원의 반문연대 선언을 환영하며 “대선 2·3·4등이 합치면 황 대표와 함께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런가?
만약 황교안 대표의 미래통합당과 한선교 대표의 미래한국당, 안철수 전 의원의 국민의당 등이 4·15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비주류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다는 그들의 오랜 본능이 되살아날 수 있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아닌가?/ 한용 ㅣ 정치팀 선임기자 한겨레 2020.03.02.
과도한 확신에 찬 전문가를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제 분야를 넘으면 동네 아저씨나 아줌마에 불과하다. 이번 코로나19 난리 속에서 얻은 잠언이다. 전염병 창궐로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있는데, 난리에 소란과 혼란을 더하는 꼰대들이 있다. 책임이 모호한 상대에게 호통을 치고, 철 지난 사정을 꺼내 버럭 꾸짖는다.
사실 우리 인구의 절반은 이런 호통과 꾸짖음, 그리고 ‘아무 말 대잔치’급 예언과 충고에 익숙하다. 초등학교 이후 교육 과정에서 필수 과목을 이수하듯이 권위주의적 소통을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런 일을 당해서 분한 마음이 들더라도 예의치레로 넘어간다. 그러나 전문가라 자처하는 자의 빗나간 예언과 기만적인 충고는 어찌할 것인가.
바이러스보다 빨리 퍼지는 게 ‘가짜뉴스’라 한다. 그런데 가짜뉴스라 불리는 정보 가운데 진짜 메시지가 적지 않으며, 내용도 허위가 아닌 경우가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미워하는 상대가 싫은 내용을 전달할 경우에 가짜뉴스라고 후려쳐서 해당 메시지의 공신력을 깎아내리는 수법이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CNN 기사를 대하는 방식이다.
사실 가짜뉴스라 불리는 것의 대부분은 그저 부실한 뉴스다. 취재가 불완전하거나, 부정확한 묘사가 있거나, 혹은 글쓴이의 의도가 뻔히 보이기에 내용마저 의심스러운 기사들 말이다. 진짜 뉴스에 오명을 붙인 결과라 하겠다. 가짜뉴스란 이렇듯 대체로 정치적이거나 평가적인 동기에 따라 만들어져서 공개적으로 유통한다. 이런 가짜뉴스를 알아보는 능력이 정보전염병(infodemics) 시대를 사는 시민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문해력, 즉 정보수용 능력이다.
가짜뉴스와 무관하게 해로운 정보가 있을 수 있다. 일단 몰라서 당하는 오류정보(misinformation)가 있고, 대조적으로 어떤 상대가 작정하고 기만하기 위해 전파하는 반정보(disinformation)가 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게 필요하다. 전자는 내용의 허위성이 해롭고, 후자는 기만적 의도가 위험한 경우다. 이 둘을 구분하는 능력도 문해력에 속한다.
메시지 내용에 오류 가능성이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짓된 내용을 차근차근 걸러내면 된다. 이는 곧 참된 내용을 확인하는 배움의 과정이기도 하다. 만약 전달자의 의도가 의심스럽다면, 신속히 상대방의 의도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대처해야 한다. 발신자를 속이는 허위통신은 흔히 반정보에 속하는데, 언론사가 아닌데 뉴스를 만들어 선전물을 유포하거나, 의사가 아닌데 의료적 처방을 내리며 행동을 촉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정작 일반 시민이 염려해야 할 대상은 지식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주는 예측과 충고다. 정확히 말하자면, 잘못된 예측과 기만적 충고가 염려스럽다고 해야겠다. 여기에는 근본적 어려움이 개입한다. 그 예측이 오류인지 아닌지 사전에 확인할 방도가 없다. 그 충고가 기만적인지 아닌지 당하기 전에는 알 도리가 없다.
존경받는 지식인의 충고나 많은 전문가의 예측이라도 사전에 확인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지식인이란 결국 스스로 의심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학술사회를 구성해서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각자 주장을 교환하고, 자료를 수집해서 공적 검증절차를 밟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과도한 확신에 찬 전문가를 경계해야 한다. 특히 근거 없이 미래에 대해 예언하는 자를 잘 보아 두어야 한다. 또한 진정성을 과시하는 지식인을 의심해야 한다. 뜨거운 피를 갖고 태어난 지식인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들이 전문성을 발휘하는 순간은 흔히 초연한 태도로 훈련받은 일을 해치우는 상황에서 볼 수 있다. 전문가의 근거 없는 예측과 의심스러운 충고를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정보전염병 시대를 사는 시민이 갖추어야 할 문해력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경향 2020.03.02.
감염병 시대의 돌봄노동
3월로 접어들었지만 모두의 일상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와 모임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학교마저 개학과 개강을 늦췄고 어린이집, 유치원도 문을 닫았으며 정부는 경로당, 사회복지관, 노인복지관, 장애인복지관 등 14종 사회복지시설의 휴관을 권고했다. 기업들도 재택근무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대한감염학회, 대한예방의학회 등 11개 학회가 구성한 ‘범학계 코로나19 대책위원회’는 국민 모두가 사회적 활동과 접촉 수준을 적극 낮춰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민이 방역의 주체가 되어 가능한 한 모임과 외출을 자제하고 사람들과 접촉을 최소화하는 데 공공만이 아니라 민간기업도 동참해야 하며 정부가 이를 위해 각계 주요 단체들과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달라 당부했다. 지역사회 확산 단계로 접어든 코로나19 전파 속도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에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집에 머물고 있지만 혼자서는 거동이 어려운 장애인과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노인들에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10여년 전에 장애인활동지원제도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되어 장애인에게는 활동지원사, 노인에게는 요양보호사가 집으로 찾아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식사를 준비하고, 밥을 떠먹여드리고, 씻겨드리고, 침대에서 일으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병원을 같이 가는 등 집으로 방문하여 이루어지는 서비스의 범위는 사람의 생활 그 자체다. 이렇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장애인활동지원사는 현재 약 8만여명, 요양보호사는 약 32만명이다. 전 국민이 이동과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이들의 활동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필수 공공서비스’다.
지난달 27일 서울 은평구에서 확진자로 추가된 넷 중 세 사람은 한 가족으로 노부부와 며느리였다. 다른 한 명은 할아버지에게 방문요양서비스를 하던 요양보호사였다. 여기서 누가 누구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동과 접촉을 배제할 수 없는 직무 탓에 요양보호사는 바이러스 확산의 위험요인이면서 감염 피해에 취약한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과 같이 바이러스 위험이 높은 시기에 건강이 취약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일하는 요양보호사와 활동지원사의 위생과 안전은 서비스를 받는 노인, 장애인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수십만명에 이르는 방문형 돌봄노동자의 위생과 안전 관리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혹시라도 정부와 건강보험공단에서 ‘위생관리 철저’라는 공문만 내려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해본다. 아마도 요양보호사와 활동지원사에게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안정적으로 제공할 경제적 여력과 책임감을 동시에 갖춘 재가서비스기관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활동지원제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라는 공적 제도에 의해 ‘필수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지만 장애인활동지원사, 요양보호사들의 고용과 임금은 공적 보장과는 거리가 멀다. 40만 돌봄노동자는 대부분 민간기관에 시급제로 고용되어 일하고 있으며 시간당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다. 모두가 장애인활동지원기관, 재가장기요양기관과 고용계약을 맺고 있지만 이용자가 서비스를 줄이면 바로 노동시간이 줄기에 고용이 안정적인 것도 아니고 매달 급여가 일정하게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받기에 일을 중단하고 집에 머물면 소득도 사라지는 셈이다. 건강 위협에 처한 취약층의 안전을 생계보장 자체도 위태로운 노동에 맡기는 현 상황이 과연 얼마나 지속가능할지 의문이다.
현재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매일 수백명 단위로 증가하고 있지만 언젠가 바이러스 확산 추세는 수그러들 것이다. 움츠러들었던 우리의 일상도 다시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이 침잠의 시기에 우리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명과 안전 그리고 돌봄노동자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수명은 늘고 노인은 증가하지만 가구 규모는 지속적으로 줄기에 돌봄의 사회적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다. 돌봄노동을 건강과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필수 공공서비스로 인정하고 직무와 고용지위, 임금, 자격기준에 대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개선이 필요하다. 건강의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 공동체는 사람과 돌봄의 가치를 중심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양난주 ㅣ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한겨레 2020.03.02.
2월27일, 광화문 촛불은 꺼지고 인권은 사라졌다
지난달 27일 한국마사회 비리를 유서에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문중원 기수의 추모공간이 강제로 철거됐다. 고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유족과 시민들은 정부서울청사 앞에 빈소와 추모공간을 마련했다. 매일 저녁 추모 문화제를 열어 마사회, 그리고 마사회를 관리·감독하는 정부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고인이 사망한 지 91일, 고인의 시신이 정부서울청사 앞에 놓여진 지 63일 만에 정부가 답을 했다. 유족과 시민들이 기대했던 답은 아니었다. 700여 명에 이르는 용역과 경찰들을 동원한 추모공간의 강제철거가 그 답이었다. 추모공간을 지키던 시민들은 용역에게 하나둘씩 끌려나갔다. 여성의 웃옷과 바지가 벗겨질 정도였고, 목사님은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을 일으켰다.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님을 비롯한 여러 시민이 병원으로 이송됐다. 천막 안에 있던 고인의 부인이 제발 멈추라고 호소했지만, 용역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비닐을 찢고 기둥을 부수었다. 무너져 내린 천막 기둥에 유족들이 깔렸고, 기둥을 받치던 시민들은 용역에게 끌려나갔다.
현장에 있던 수 백명의 경찰은 용역들의 폭력을 보고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용역이 끌고 나와 내팽개친 시민들을 연행하기에 바빴다. 천막은 강제로 철거되고, 추모공간은 폐허가 되었다. 고인의 부인은 남편의 시신이 실린 운구차를 붙잡고 통곡했고, 기자회견 도중 실신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법 이전에 사람이 있고, 인권과 인륜이 있다. 무슨 법을 들이밀든, 무슨 이유를 내세우든, 남편이나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눈물로 호소하는 유족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공권력은 정의롭게, 필요 최소한도로 행사되어야 한다. 지난달 27일 광화문의 공권력은 마사회 적폐를 감추기 위해 정의롭지 않게 행사되었다. 유족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과도하게 남용되었다. 촛불정부라 자임하던 정부의 그 알량한 가면은 벗겨졌고, 용역에 의해 무너져 내린 천막과 함께 우리 사회의 인권도 무너져 내렸다. 서울시는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추모공간에 머물던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매일 저녁 진행되는 추모 문화제도 수십 명 안팎의 소규모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수십 명이 모이는 추모공간을 700여 명의 경찰과 용역들을 동원해 철거하는 것이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한다는 것인가. 말이면 다 말이 아니고, 이번 추모공간의 강제철거가 오히려 코로나19 확산의 위험을 높였을 뿐이다.
“국민들의 서러운 눈물을 닦아드리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밝힌 일성이다. 눈물을 닦아주는 것까지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이 정부는 너무 멀리 갔다. 그러나 최소한 정부로 인해 더 이상 유족이 눈물을 흘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번 추모공간 강제철거, 폭력사태를 진심으로 사과하고, 고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여 마사회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그것이 이 정부가 약속한 나라다운 나라, 대한민국 헌법이 명시한 정부의 최소한의 책무다./신인수 | 민주노총 법률원·변호사 경향 2020.03.03.
나는 한국이 좋다’
나는 코로나바이러스다. 다들 나를 원망하지만 당치 않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을 숙주 삼아 생존하려고 할 뿐이다. 내가 발이 있나 손이 있나. 인간이 아니면 단 1㎜도 이동할 수 없다. 자기들이 옮겨놓고 내 탓을 하니 어처구니없다. 나더러 인간의 약점과 빈틈을 파고든다고 한다. 그건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생명체가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선호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한국이 참 좋다. 사실 중국은 더 좋았다. 인구가 많은 데다, 여론통제와 진실 은폐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나아가 천적이나 마찬가지인 리원량 같은 의사를 알아서 물리쳐주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다. 도쿄 올림픽 때문인지 방역에 소홀한 일본, 검사 한 번에 100만원씩이나 하는 미국도 나쁘지 않다. 애초 한국은 내가 서식하기에 까다로운 곳이다. 진단이 빠르고 보건 인프라와 행정력이 우수하다. 원래대로라면 뚫고 들어갈 구멍이 없다. 하지만 한 달여간 공격하다보니 허점이 드러났다. 신천지가 주요 통로였다. 초밀접 예배문화와 비밀주의로 신도끼리 서로 감염시키고, 이어 지역사회 전체로 퍼뜨려주니 내게는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보수 야당·언론의 공로 또한 인상적이다. 전방위적 정부 비판으로 여론을 가르고 방역 역량을 약화시켰으니까. 특히 ‘골든 타임’에 비난의 화살을 중국인에게 돌린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물론 나는 중앙 및 지방 정부의 오류와 무능에도 힘입은 바 크다.
나는 인간이 협력하고 연대하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갈라지면 강해진다. 한국은 진보와 보수, 여야로 분열돼 있다. 이들은 협력하고 연대하는 법이 없다. 뭉치면 뭐든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 탓에 기꺼이 함께 망하는 길을 간다. 시민 역시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아산·진천에서 하나가 된 듯하더니 확진자가 쏟아지면서 달라졌다. 각자도생 상황에서는 시민은 서로를 그저 바이러스 전파 매개체로만 보게 된다. 이들이 각성해서 시련을 함께 겪는 공동체 구성원, 동료 시민이라는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기-승-전 중국 때리기’의 근거가 부족한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한국 내 중국 국적 감염자는 10명이 채 안되고, 이들이 직접 감염시킨 사례는 2명뿐이다. 생각해보자. 한국 방문 중국인이 확산 근원이라면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서울에서 환자가 가장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대구·경북에서 환자가 쏟아지고 있다. 한국 방문 중국인이 주요 감염원일 가능성이 낮다는 얘기다. 이 지역에 신천지의 성지가 있고 가장 번성한 곳이란 사실을 외면하면 안된다. 신천지 교인인 31번 확진자 발견 이후 불과 10여일 만에 환자가 수십명에서 5000명 이상으로 솟구친 사실이 주요 전파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해준다.
보수세력은 나를 막는 것보다 정부가 잘하는 게 있을까봐 걱정하는 것 같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신천지 책임론에 “특정 교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해왔다. 최근에야 신천지 측에 “허위보고나 비협조는 절대 안된다”고 말을 바꿨지만 진심은 모르겠다. 이들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준다면 나야 고마운 일이다.
과거 나는 한국에서 여러번 재미를 봤다. 이명박 정부 시절엔 신종플루로 70만명 넘게 감염되고 270명이 숨졌다. 박근혜 정부 때도 ‘그 유명한’ 메르스로 또 한번 한국을 혼내줬다. 그런데 2003년 노무현 정부 때는 단 한 명의 환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보수정권 친화적이다.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그들은 국민의 생명·안전에 관한 분야도 시장에 맡긴다. 시장은 생명·안전보다 돈을 중시한다. 손해가 난다며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게 대표 사례다. 진보정권은 생명·안전 분야만큼은 공공성을 높이는 편이다. 자연히 방역망도 촘촘해진다.
나는 신천지를 응원한다. 그 종교 교주는 코로나 사태가 “신천지의 부흥을 저지하기 위한 마귀의 짓”이라고 했다. ‘최대 도우미’인 그가 최근 방역에 협조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것이 못내 실망스럽다. 본심이 아니기를 빈다. 나는 또한 황교안 대표를 지지한다. 그가 문재인 정권과의 싸움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 덕에 한국에서 잘 지내고, 진화할 수 있었다. 운명공동체이자 동지적 유대를 강하게 느낀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부정할 테지만. /조호연 논설고문 경향 2020.03.03.
천지는 어짊이 없으나
매주 흥미진진한 영화들을 쏟아내던 극장가에는 신작이 사라졌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 <기생충> 흑백판의 개봉은 연기됐다. 공공 미술관과 박물관도 문을 닫았다. 평소 즐겨 들르던 직장 근처 박물관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도 없게 됐다.
최근 인기가 급상승한 여자 배구는 무관중 경기로 치러지다가 결국 리그가 중단됐다. 텔레비전 중계로 본 마지막 경기에서는 따라부르는 이 없는 응원가만이 텅 빈 체육관을 울렸다. 한국 천주교는 전국 1750여개 성당의 주일미사를 온라인, 개별 미사로 봉헌하고 있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중국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래 236년 만의 일이다.
지난해만 해도 광화문과 서초동에 수십만명이 수시로 모이던 사회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낯선 권고안이 들린다. 직장 동료에게 퇴근 후 생맥주 한잔 하자고 제안하던 시절이 전생인 듯 아득하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감염자와 사망자가 나왔지만, 인간은 아직도 코로나19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행히도 이 바이러스의 치명률은 애초 우려보다는 낮아 보인다. 확진자의 80%는 증상이 없거나 있더라도 경미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가슴을 쓸어내릴 일은 아니다. 통계 숫자에 몰입하면 종종 개인의 존재를 잊는다. 0.1%의 치명률이라도 병상에서 신음하는 환자와 그 가족에겐 100%다.
인간이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시기로 들어섰다는 뜻에서 현세를 ‘인류세’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지구의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을 바이러스보다 우위에 두어야 할 이유는 없다.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섬뜩한 말을 남겼다. 자연에는 인간적인 어짊이 없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악의를 품지 않는다. 그저 제사 뒤에 태우는 짚강아지처럼 소중히 여기지 않을 뿐이다. 거대한 맷돌 같은 자연의 섭리 아래 인간의 소소한 일상은 쉽게 갈려나간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 속 악당들은 극단적 환경주의자 행세를 하곤 한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발렌타인, <어벤져스>의 타노스는 인구 폭발에 따른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 그로 인한 공멸을 막으려 한다. 그들은 선제적·강제적으로 인구를 줄이는 무도한 계획을 세운다. 발렌타인은 부유층과 권력자를 남기려 하지만, 타노스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작위로 절반을 죽이려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의 창궐과 함께 중국의 탄소 배출량이 극적으로 감소했고, 대기질도 갑자기 좋아졌다고 한다.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 북>은 시간 여행을 다룬 SF다. 2054년의 역사학도 키브린은 중세 생활상을 관찰하기 위해 14세기 영국 시골마을로 향한다. 키브린은 1320년을 목표로 했으나, 기계 조작 실수 때문에 흑사병이 창궐하던 1348년에 도착한다. 키브린에겐 항체가 있었지만 중세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둠즈데이 북>은 한국 번역본으로 800쪽 이상의 장편이다. 작가가 작품 전반부에 공들여 만들어두었던 캐릭터들이 후반부에 하나둘씩 죽어나간다. 정붙이기 힘든 인간도 죽지만, 무고한 소녀도 죽는다. 비록 라틴어 기도문을 정확히 읽지는 못하지만 누구보다 신실한 사제 로슈는 극도로 쇠약해진 상황에서도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백 성사를 듣고 정해진 시간에 만종을 울린다. 인사불성의 키브린은 안간힘을 다해 마지막 종을 울린 뒤 21세기로 돌아온다.
대구·경북의 최전선에서도 의료진의 분투가 이어지고 있다. 언제 물러날지, 어떻게 치료할지 모르는 질병을 이겨내기 위해 날마다 땀을 흘린다. 불안과 공포의 와중에서도 한국 사회는 조금 느리고 불편하지만 결정적인 장애는 없이 작동하고 있다.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릴지언정, 배달노동자는 주문한 물건을 어김없이 집 앞으로 가져다준다. 마트에 가도 생필품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버스와 지하철은 정해진 시간에 중단 없이 운행된다.
지난 주말 서울 낮 기온이 13도까지 올랐다. 미세먼지 없이 맑은 날이었다. 마스크를 끼고 조심스레 집 주변 한강으로 나가보았다. 꽤나 많은 이들이 마스크를 낀 채 나와 있었다. 연인은 벤치에 앉아 대화하고, 중년 남성은 반려견을 산책시키고, 청년들은 자전거를 타고 질주했다. 뜻하지 않은 자연 재난 속에서도 인간은 묵묵히 살아간다. 인간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봄은 온다. /백승찬 사회부 데스크 경향 2020.03.03.
팽’당하는 신자유주의와 한국
나는 요즘 미국 대선의 상황을 대단히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이야말로 전세계에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강요해온 나라다.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 도입’이라 하지만, 사실 23년 전에 한국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게 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뒤에 숨어 있었던 미국의 대자본이었다. 한국은 국제통화기금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이식당했지만, 주요 국유 기업들의 전면적 민영화를 거부한 유고슬라비아와 이라크는 각각 1999년과 2003년에 이런저런 핑계로 미국의 침공까지 당해야 했다.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1942~2011)가 미국을 맹주로 하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폭격 등으로 그 정권의 몰락을 겪고 살인을 당해야 했던 주요 배경 중의 하나는, 미국이 그를 공개적으로 ‘자원 민족주의자’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카다피가 펴온 자원 국유화와 ‘제3세계형’ 복지 정책은 미국이 주도해온 신자유주의 세계에서는 용서가 불가능한 ‘이단의 죄’였다.
그런데 이제 미국 자국부터 ‘이단’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대놓고 사실상의 신보호주의 정책을 활용한다. 수입 의존을 줄여 자국 생산을 다시 장려하는 것이다. 그 덕에 미국 제조업에서 오래간만에 대규모 일자리 창출이 시작되어 약 50만명이 신규 고용되었다. 고전적 신자유주의는 경쟁 우위 이론대로 저임금 국가에서 가공된 상품을 미국과 같은 고임금 국가가 수입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겼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고용 창출과 ‘국가 안보’를 상대적 경쟁 우위보다 더 우선시하는 것이다. 타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자국 이기주의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비판받아 마땅한 접근이지만, 좌우간 로널드 레이건 이후의 신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트럼프가 보호주의자라면, 그의 대항마로 나서려는 버니 샌더스는 고전적 사민주의자이자 케인스주의자에 가깝다. 그의 ‘그린 뉴딜’ 정책 같으면 환경 위기를 고려한 현대판 케인스주의적 경기 부양책, 구매력 확대 정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호주의자와 사민주의자 사이의 대결에서 신자유주의적 담론들은 거의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금 ‘작은 정부’나 ‘적하(트리클 다운) 이론’을 거론하는 대중적 정치인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신자유주의 이론을 믿어줄 대중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더 이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요람인 미국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가장 빨리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변하고 있지만, 크게 봐서는 유럽의 상황 또한 ‘신자유주의의 점차적 후퇴’라고 규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온건우파 정권이 다소 신자유주의적 색채를 띤 연금제 개혁을 강행하려 하지만 전국적이며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지금 주춤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0여년 동안 프랑스의 역대 정권이 다 복지 지출을 줄이기 위해 이런저런 복지 제도 개악들을 시도해봤지만, 그 결과를 보면 결국 지출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났다. 2008년 공황 당시 복지 지출은 프랑스 국내총생산의 28%였지만 지금은 31%다. 아무리 줄이려고 발악을 한다 해도 과소소비, 과잉생산의 위기에 직면한 후기 자유주의 시대에는 복지 지출을 통해 하층과 중간층의 소비력을 강화시키지 않는 이상 소비자들의 소득이 주도하는 서비스업 위주의 경제를 운영할 수 없다. 그러니 특정 국가, 특정 정부의 이념적 색깔이 무엇이든 간에 복지 지출만큼은 꾸준히 늘어나거나, 적어도 그대로 유지된다. 극우파가 통치해온 폴란드 같은 나라라 해도 2008년 당시 국내총생산의 20%였던 복지 지출은 지금 21%가량 된다. 유럽의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에서는 복지 지출의 비율이 최근 몇년간 큰 변동 없이 25% 안팎이다. 신자유주의가 ‘복지 삭감’을 의미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자유주의 국가는 최근의 유럽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 1990년대 말 이후의 러시아, 그리고 이란 등은 아예 처음부터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해왔지만 최근에는 ‘국가 주도’라는 부분이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국가가 보유하는 국유 자산은 중국에서 2008년 당시에는 국내총생산의 130%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무려 240%나 된다. 2010년만 해도 전체 은행 융자금의 48%가 민간 기업들에 돌아갔지만 이제 그 비율은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은행이 제공하는 자금 흐름의 83%나 국유기업에 흘러들어가는 형국이다. 신자유주의의 교과서와 정반대로 중국에서 국가 부문이 계속 커지고 또 동시에 복지 지출도 꾸준히 늘어난다. 복지 지출을 포함하여, 전체 정부 지출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20년 동안 1.5배나 늘어난 것이다. 1990년대에는 국유기업의 민영화나 정부 지출 삭감 등을 골자로 하는 ‘워싱턴 컨센서스’가 전세계를 호령했다면 이젠 ‘중국 모델’이 카자흐스탄에서 터키까지 수많은 신흥 시장들에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사실 트럼프의 자국 제조업 보호 정책이야말로 어떤 면에서 중국이 고수해온 산업 진흥 정책을 방불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일으킨 미-중 무역분쟁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처럼 보이지만, 미국이 중국과 싸우면서 그대로 중국을 닮아간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의 후퇴는 아직도 ‘종말’ 수준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총임금 억제 정책이 주요 경제에서 완전히 철회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저임금, 불안정 불량 일자리가 양산되고, 여전히 워킹푸어(일하는 빈민) 계층의 규모가 줄지 않는다. 사실 앞으로 구미권의 정치적 투쟁의 중심은 트럼프처럼 보호주의 정책을 통해서 자국 자본의 이윤 저하를 상쇄시키려는 우파 보호주의, 신권위주의 세력과 대중적 구매력의 확충을 통해 위기 국면을 돌파하려는 샌더스와 같은 신사민주의 세력 사이의 대결일 것이다. 서방 블록에 맞서고 있는 중국·러시아·이란 같은 세계체제 준주변부의 경쟁 세력들도 앞으로는 갈수록 ‘시장’보다 ‘국가’의 역할이 더욱더 중심적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세계적으로 대세가 아닌 만큼 한국의 진보세력들도 신자유주의로 기울어져 있는 한국 국가·사회 체제의 전면적 탈신자유주의화를 좀 더 과감하게 주장해야 한다. 샌더스 현상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앞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무상고등교육, 무상의료야말로 세계적 시대정신에 해당될 것이다. 비정규직 고용 사유의 제한을 어떻게 둘 것인가와 등록금 없는 대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100%로 어떻게 올릴 것인가는 진보의 핵심적이고 구체적인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0.03.03.
누더기 선거법 개정안, 공약으로 걸어라
이번 국회 선거는 진흙탕 싸움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정치권은 온갖 푸닥거리 굿을 해왔지만 이번은 정말 유난하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새로운 선거법 때문이다. 이번 선거법이 문제가 많다는 건 모두들 안다. 지금 선거법은 누더기에 그치지 않고 구멍이 너무 커 바람이 횡횡 새니 다시 수선해야 한다. 향후 21대 국회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늠하기 위해선 복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각 정당은 앞으로 선거제를 어떻게 바꿀지를 선거공약으로 지금부터 내놓아야 한다. 특히 미래통합당과 민주당이 그러하다.
전제: 선거법 개정은 아무리 좋은 방안이어도 결국은 국회에서 통과되어야 한다. 다수당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선거제도는 아무리 명분을 내세워 개혁 작업을 기세 좋게 시작해도 결국 막판에 가면 다수당에 끌려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현황: 지난해 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이 개혁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누더기 법안이라고 정치 개혁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비판했다. 그러나 끝까지 방해만 일삼던 당시 자유한국당이 설마 위장 정당을 만드는 무도한 짓까지 할 줄은 그들도 몰랐던 것 같다. 거기에 선거관리위원회마저 가세해서 ‘영구 없다!’를 외치는 바람에 일이 더 꼬였다. 드디어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시민단체들이 선거연합을 종용하고 나섰지만, 지난번 선거법 개정에서 민주당의 일방적 압박에 밀린 정의당은 입이 이만큼 나왔고, 궁지에 몰린 민주당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눈알만 굴리고 있다.
과정: 정치개혁특위가 의결한 원안은 지역구 225석, 비례 75석, 준연동형이었다. 12월27일 본회의를 통과한 ‘4+1 최종 수정안’은 민주당이 관철시킨 방안이다. 최종안에서 무엇이 변했는지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 비례의석이 현행 47석으로 도로 원위치 되어 비례성 개선이 봉쇄되었다. 그러나 내 생각엔 이것을 갖고 민주당만 비난할 일은 아니다. 정치개혁특위 원안에 따르면 지역구를 거의 스무석이나 줄여야 했으니 지역구 의원이 많은 정당에선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정개특위가 너무 의욕이 앞섰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 국회에선 비례의석을 크게 늘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논의를 시작하면 더 생산적일 것이다.
둘째, 민주당은 그 47석의 비례의석 중에서도 연동형이 적용되는 의석을 처음엔 20석, 다음엔 30석으로 한정하여 그만큼 전체 연동률을 떨어뜨렸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각 정당이 얻은 정당투표의 득표율에 총의석과 비례의석을 연동해 배분하여 투표에 나타난 민심대로 국회가 구성되도록 하는 선거제도이다. 예를 들어 지역구에서 민주당 표가 40%인데 지역구 의석수에서 50%를 차지하면 비례대표는 하나도 없게 된다. 이걸 고려해 비례대표 의석수 중 일부에만 연동형을 적용하는 준연동형이 나왔다. 대형 정당이 비례에서 몇 석이라도 얻어가도록 만든 제도다. 궁색하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명분론만 앞세워 민주당만 비난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셋째, 지역구도 완화 차원에서 민주당도 주장했던 석패율 제도 및 권역별 비례대표 제도를 없애버렸다. 민주당이 왜 이걸 갖고 말 바꾸기를 했는지 나 같은 외부자는 모른다. 만약 이게 유지됐으면 소위 ‘미래한국당’ 같은 위장 정당은 나오기 어려웠다.
이와 같이 정치개혁특위의 원안 대비 현 선거법에서 바뀐 세 가지를 돌이켜보면 다음 국회에서 또다시 선거법 개정에 나설 때 무엇은 포기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가 드러난다. 첫째, 또다시 비례의석을 늘리자고 하지 말자. 싸움만 나고 일이 안 된다. 둘째, 연동형 숫자를 갖고 싸우는 건 그만하자. 군소정당이 아무리 명분을 내세워도 민주당도 싫고 미래통합당도 싫어하면 될 리가 없다. 셋째, 대신 정당투표를 없애고, 지역별 비례대표제와 석패율 제도를 되살리자. 전국을 대여섯 지역으로 나누어 지역별로 비례후보를 뽑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비례 모두를 연동형으로 해도 된다. 위장 정당의 폐해도 상당히 막을 수 있다. 미래한국당은 영남 지역에선 어떨지 몰라도 수도권이나 호남지역에선 지역별 비례를 많이 얻을 수 없다. 여기에 위장 정당을 막기 위한 다른 방안을 덧대면 누더기라도 바람은 덜 샌다.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우선 민주당부터, 남 탓만 하지 말고,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앞으로 선거법을 어떻게 고칠지 선거공약으로 발표했으면 좋겠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때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면서까지 얻으려고 했던 것이 선거제도 개혁이었던 것을 기억하자
주진형 ㅣ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한겨레 2020.03.03
사회적 면역결핍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염병의 공포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가장 먼저 중국이 당했고 그리고 한국, 일본, 이란, 이탈리아로 확산되고 있다. 대도시가 발달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번잡하게 얽혀 사는 현대인은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방역체계가 허술하면 전염병은 재앙과 같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진원지로 의심되는 중국의 우한과 후베이성의 상황이 그렇다. 그런데 더 중요한 교훈은 방역체계 못지않게 전염병을 비롯하여 사회를 위협하는 각종 위험 요인들로부터 스스로 방어하는 사회가 가진 면역 기제의 중요성이다. 가장 먼저 신종 바이러스의 위험을 알렸던 안과의사 고 리원량의 경고를 범죄로 취급했던 권위주의체제는 전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적기를 놓치게 한 주요인이었다. 권위주의체제가 만든 면역결핍이 전염병을 재앙으로 키운 셈이다.
전 세계는 한·중·일의 코로나19 확산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세 나라의 대응방식 차이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홍콩과 일본의 크루즈 선박 승객들에 대한 상반된 대응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정부의 불투명성과 허술한 방역에 대한 비판도 잇따랐다. 정치와 언론의 자정기능이 취약한 일본 사회의 고질적인 면역결핍 때문에 문제가 커졌다고 생각한다. 점차 코로나19의 위험 반경은 넓어지고 있다. 전 세계 각국의 방역체계와 각 사회의 면역 기제가 어떻게 대응할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방역체계 역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CNN을 비롯한 서방 미디어들은 연일 한국의 코로나19 확산에 대해 보도하면서 양 극단의 놀라움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최초 발병이 확인된 후 짧은 기간에 500개의 바이러스 검사장을 확보하고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검사해낼 수 있는 역량과 투명한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긍정적인 놀라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감염자 수가 불과 2주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한 사실이 다른 하나다. 부정적인 놀라움이다.
우리의 방역은 과잉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선제적이었고 신속했으며 투명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선제적으로 검사했고 그것이 확진자가 많아진 이유이기도 했다. 이유야 어쨌든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폭발적 확산을 막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종교나 각종 집회에서의 집단 감염 가능성을 초기부터 훨씬 더 경계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랬다고 결과가 달라졌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런 질병의 확산보다 더 놀랍고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시 사회적 면역결핍의 문제다. 누가 봐도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교주의 편협한 교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30만명이 넘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이 많은 사람들이 기생적인 종교에 투신하기까지 우리 사회의 면역 기제는 무슨 역할을 했던가?
서방 언론이 보여준 양극단의 면모가 공존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쟁기질로 농사짓고 우물과 재래식 화장실을 여러 집이 공유했던 경험과 자동화된 첨단산업과 결벽에 가까운 위생관념이 공존하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혹독하고 비정했던 전쟁과 개발독재 그리고 선진국의 풍요와 잉여의 경험이 공존한다. 한편에는 현대사의 굴절 속에 맺혔던 원한과 양극화된 경쟁사회가 남긴 상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기득권의 탐욕과 승자의 향락이 있다. 이런 양면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사회적 질병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면역 기제는 없다.
문제가 된 종교집단이 20대 청년들을 겨냥해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우리 사회 병폐에 가장 취약한 청년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가 이런 종교집단이 기생할 수 있는 터전이 된 것 같다.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특히 선거와 관련된 정치제도의 개혁 이외에 포괄적인 사회개혁의 기회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군사독재와 권위주의체제에서 뿌리내렸던 적폐가 사회 곳곳에 널려있다. 그래서 정부에 대한 신뢰와 사회적 자본이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고, 남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 중국 등과 같은 부패한 사회라는 평가다. 부패한 사회에서 사회적 질병을 자정하는 면역 기제가 작동할 수 없다. 그래서 전염병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군사, 외교 등 다양한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경제발전 단계에 적합한 사회발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제는 공정해져야 하고 사회는 포용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질병을 자정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분배정의연구센터장 경향 2020.03.04
바이러스와 정치
잘 억제되던 코로나19가 막 확산세로 돌아선 지난주 두 일간신문에서 읽은 논설위원들의 칼럼은 야비하고 역겨운 내용들이었다. 감염증 확산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를 이용해 더욱 공포를 부채질하고,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들까지 욕보이는 칼럼이었다. 역겹지만 제목이나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 전체가 세월호다”와 “대구 사람들 참 점잖다”라는 칼럼이다.
이 칼럼들의 논지는 참 비슷하다. 중국인 입국 전면 금지를 주장하는 ‘전문가’나 언론의 말은 듣지 않고 오히려 중국 혐오가 퍼질 것만 우려하며 국민을 방치하는 정부야말로 나라 전체를 세월호로 만들고 있는 정부 아니냐는 것이다. 마스크 수급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대구=신천지=야당의 프레임이나 만들고 있는 정부 앞에서 점잖게 참는 대구 시민들이 감탄스럽다는 것이었다. 과연 혐오와 선동의 부채질은 누가 하고 있는가?
이 글들의 가장 악질적인 점은 기왕의 피해자들을 정치적 선동에 이용하는 데 있는 듯하다. 정부 비난의 정치적 선동에 난데없이 소환된 세월호 희생가족과 감염증 확산의 직접적 피해자인 대구 시민들은 이 글들로 또 한 번 독 묻은 비수에 찔린다. 코로나19의 원천지인 중국에 대해 아양이나 떠는 친중국 좌파 정부, 중국에 줄 마스크는 챙기면서 국내 수급도 못하는 무능 정부라는 프로파간다를 강화하려는 것 외에 이 칼럼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과학과 통계적인 사실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①이번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서 중국 입국 확진자는 단 한 명, 그보다는 국내 전파가 주원인이다. ②국내 확진자 수가 많은 것은 모 변수인 검사수와 검사범위에서 한국이 월등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③국내 확진자수도 신천지 교인과 관련 접촉자가 93%를 차지할 만큼 특정 범위로 한정되어 있다. ④관련학회와 WHO는 마스크 착용이 일반인에게는 필요 없거나 천 마스크로도 충분하다고 권고한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자. 동업자 직능단체에 불과한 대한의사협회와 달리 전문학회인 한국역학회와 대한예방의학회는 중국 봉쇄가 아무 효과도 없는 조치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엄연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공포가 가라앉지 않는다는 데 있을 것이다. 공포의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팬데믹’(전 세계적 유행)이 아닌 ‘인포데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도한 공포를 조장하는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례가 정부 불신을 조장하는 위의 칼럼들이다. 둘째는 이미 이 사회가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라는 시민들의 상호불신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감염을 막아줄 마스크를 사겠다고 감염을 불사하고 약국 앞에 선 긴 줄이 그것을 말해준다.
바이러스, 신천지, 대구, 그리고 중국 등의 의미 연결망은 다시 한번 새로운 불안과 공포가 퍼지는 데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 같다. 그러잖아도 매일처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뉴스 댓글과 광화문의 군중들 사이에서 흉흉하게 퍼지던 소문과 가짜뉴스의 전파 환경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공포가 더 확대된다면 중세의 흑사병처럼 유대인과 마녀를 제물로 요구할 수도 있고, 1923년의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때처럼 조선인의 피를 원할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의 좋은 정치는 공포와 혐오를 부추기는 음습한 정치가 아니라, 이 사회의 무너진 신뢰를 걱정하고 그것을 재건할 방법을 궁리하는 정치일 것이다. 예컨대 당장의 경기 위축과 일거리 단절로 하루를 버티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파격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재난기본소득’(경향신문 3월3일자 1면 보도)을 고민하는 정치일 것이다.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짜 정치이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경향 2020.03.04.
신천지와 종교의 자유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그간 무섭게 세를 확장해 오던 신흥종교 신천지가 새삼 주목 받게됐다. 대구·경북지역 확진자 폭증의 진원지로 신천지 예배가 지목되고 신천지의 비밀스런 행태가 당국의 감염확산방지활동을 크게 저해하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신천지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 일단은 이만희 총회장이 취재진 앞에서 두 번 큰절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마도 이 사태가 진정되면 신천지 측은 자신들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언론이나 정부를 상대로 반격에 나설지도 모른다. 과연 종교의 자유는 무엇이고 그 한계는 무엇일까. 그리고 신천지의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신천지 확진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약 한 달 전인 지난 1월 14일 신천지의 포교활동과 관련하여 내려진 대전지법 서산지원의 판결은 이러한 질문들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판결은 서산지역 신천지 탈퇴자 3명이 신천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민사소송에 대한 판결이다.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신천지는 다른 일반 교회의 신도들을 상대로 하여 처음에는 신천지 소속이라는 것을 전혀 알리지 않은 채 문화체험 프로그램 또는 성경공부라는 명목으로 신천지 교리교육을 받게 했다. 또 만약 피전도자가 신천지라는 것을 의심하면 같이 전도를 받는 사람들로 위장한 신천지 신도들을 통해 더욱 철저하고 교묘하게 피전도자를 관리하여 의심을 배제시키고 어느 정도 교리에 순화될 때가 되어야 신천지 소속임을 밝히는 전도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재판부는 헌법 제20조가 규정하는 종교의 자유에는 선교의 자유도 포함되지만 이러한 선교의 자유는 헌법질서와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질서유지를 위해 제정된 법규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고 전제한 후, 신천지의 전도방법은 종교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즉 신천지의 포교활동은 선교 대상자가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정당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자신들이 신천지 소속이라는 것을 숨긴 채 대상자에게 배려와 친절을 베풀고, 객관적 사실을 알려주는 주위 사람과도 그 관계를 끊게 하거나 악화시키는 행태로 이루어졌고, 대상자가 신도로 포섭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리를 행하였다. 이는 그 대상자로 하여금 포섭행위자들이 베풀던 친절과 호의 등에 이미 익숙해진 상태에서 그러한 친절과 호의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외톨이가 될 수 있다는 불안심리 등을 이용하여, 사실상 자유의지를 박탈한 상태에서 신천지 신도가 되도록 유도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재판부는 이러한 신천지의 선교 행태가 사기범행의 기망이나 협박행위와도 유사하여 우리 사회공동체 질서유지를 위한 법규범과 배치되는 위법한 행위라고 판단하였다.
비록 이 판결에서 신천지 교회에 명한 것은 위자료 500만원 정도의 손해배상이지만, 신천지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신천지 신도가 코로나19 확산의 단초가 되었다거나 신천지의 예배행태가 집단감염을 심각하게 야기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신천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신천지 문제의 본질은 종교의 자유라는 구실하에 오히려 타인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신천지의 포교시스템과, 이로 인하여 야기되는 심각한 공동체 파괴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유익이 하나 있다면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신천지의 실상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당장의 비난과 압박에만 그치지 말고 신천지가 지도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펼치는 포교활동의 불법성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와 조치를 통해 건전한 가정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방책들이 취해져야 할 것이다./김주영 변호사ㆍ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장 한국 2020.03.04.
'짝퉁정당' 미래한국당에 멍석을 깔아 준 선관위
유권자 의사 제대로 반영하는 선거 제도 합의해야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 미래한국당이 출현한 뒤로 민주당과 일부 시민운동가들의 위성정당 논의 움직임도 가시화 되자, 이에 대한 논란이 크게 일고 있다. 총선이 40여일 앞으로 다가온 급박한 시점이라서 이 논란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속단키 어려우나 급할수록 신중하게, 그리고 혼란할수록 원칙에 입각해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위성정당 논의를 여러 방향에서 시작할 수 있겠으나, 우선 이번 선거에 처음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선거에서 발생하는 사표(死票)를 방지하고 소수정당에 의회 진출의 기회를 줌으로 거대 양당 제도가 갖는 폐해를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와는 거리가 먼, 그래서 전문가들도 헷갈릴 정도의 기이한 제도가 출현했다. 그러면서 미래통합당이 위성정당을 만들 경우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민주당이 가만히 앉아서 당해서는 안 된다는 시민사회 일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아쉬운 점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국회 입법 과정에서 정말 신중했어야 한다는 점과 더불어, 선관위가 민의가 정상적으로 반영된다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짝퉁정당에 합법이라는 멍석을 깔아준 사실이다. 선관위는 국민의 소중한 권리인 선거 제도 전반이 국민을 위해 가동되도록 하는 전향적인 유권해석을 내렸어야 했다. 법과 상식이 다르다 하지만, 촛불혁명의 정신과 정면 배치되는 식의 선관위 결정이 나왔다.
4.19 혁명이후 거듭된 민주화 투쟁과 그 이후 제도 정치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혁명적 투쟁이 민주화 정착으로 이어지지 못했었는데 촛불 혁명이후에도 유사한 일이 반복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4월 총선을 위해 반칙의 비판을 무릅쓰고 강행하는 방안과 그것에 반대하는 방안, 제3의 절충안을 만들어 대처하는 방안 등이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이들 방안은 결국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대안이니, 모두가 흔쾌히 합의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제도로 바꾸는 데 모두가 다시 합의해야 한다. 민의가 투표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프레임을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우리의 선거제도는 개편되더라도 유권자 의사를 적극 반영하지 못했다. 유권자들은 자신의 대리인을 뽑는 정치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뒷전에 밀리거나 들러리를 설 뿐이었다. 해방이후 최근까지 이런 과정을 겪다보니 유권자 권익에 대한 중대결정을 할 때 유권자가 직접 나서거나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할 시스템이 등장한 적이 없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만들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정치권 내부에서만 갈등과 협상이 진행돼, 현재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제도가 출현했다. 앞으로는 유권자 의사를 반영해 직접 민주주의 열망을 충족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정치머슴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회의원들은 일단 선거만 끝나면 유권자들과의 거리가 멀어진다. 왜 이럴까. 그 원인의 하나가 정당제도다. 당대표에게 국회의원들이 공천 문제로 코가 꿰인 상태여서 국회의원들은 유권자보다 당대표를 더 의식하게 된다. 많은 경우 군 사단장과 사병과의 관계처럼 일사불란하게 보일 때도 있다. 이 적폐는 뿌리가 깊고 그 독기가 극심하다. 이를 원천적으로 쇄신하면서 유권자의 뜻을 백퍼센트 반영하는 국회의원 선출 방식은 무엇일까? 이런 저런 대안이 나올 수 있겠으나 이스라엘 방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스라엘 크네세트(Knesset, 이스라엘 의회)는 4년마다 실시되는 총선에서 뽑힌 의원 120명으로 구성된다. 총선은 유권자들이 전국을 하나의 선거구로 하는 정당 명부에 투표하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선거 뒤 득표율이 3.25%를 넘는 정당들이 전체 의석을 당 득표율에 따라 배분한다. 정당 득표율은 1988년 1%로 했다가 점차 상향 조정했는데 현행 3.25%면 4개의 의석에 해당한다. 정당은 100명 이상의 성인이 등록하면 만들어질 수 있다.
이스라엘 대통령은 총선 후 과반이 넘는 정당 또는 연립정부 구성 가능성이 가장 큰 정당의 대표를 총리 후보로 지명하고 총리 후보가 다른 정당들과 과반 의석(61석)으로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하면 총리에 오른다.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 정당이 나오지 않으면 총리 후보는 42일 이내에 연립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이 같은 제도로 인해 이스라엘 정부는 최근 일 년 사이에 총선을 3번이나 하는 사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선거 망국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유권자들이 뽑은 정치 대리인인 의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다시 총선을 해서 대표를 뽑으면 되는 만큼, 직접 민주주의 실천이라는 면이 더 중시되기 때문이다.
4월 총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리고 그 이후 어떻게 될지 전망하기 어렵다. 총선 이후 판도 변화는 중요한 것은 유권자가 선택한 결과라는 점이다. 총선을 앞두고 다양한 논의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유권자를 정치공학에 좌우되는 수동적 존재로만 보는 시각은 부적절하다. 유권자들이 마냥 기성 정치권에서 만들어놓은 틀에서 헤매는 식물 유권자의 모습으로 전락할 것 같지만은 않다.
거대 양당제의 폐해가 확인된 이상, 이번 총선은 다당제로 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 등은 이런 취지를 집중 강조해야 할 것이다. 혼란할수록 원칙이 중요하다. 특히 현행 여의도 정당들이 4월 총선이후 그 근본적 체질을 바꾸지 않을 경우 변화에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점이 오늘날 그들의 모습에서 확인되는 듯해서 더욱 그러하다.
총선이후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민의를 제대로 반영되는 국회의원 선거 제도 개혁을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수당 난립이나 선거 망국론 따위가 아닌, 유권자 민의의 제대로 된 반영이다. /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 프레시안 2020.03.05.
코로나 사태와 장기 비상상황
세상 풍경이 너무도 생경하다. 늘 시끌벅적하던 도심에서도, 시장에서도 사람들이 사라졌다. 버스, 지하철의 승객도 현저히 줄었고, 거리의 행인들도 모두 마스크로 얼굴을 꼭꼭 감싼 채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다. 조용한 동네 산책길에서도 사람들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타인의 출현에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식당, 카페, 쇼핑몰, 영화관, 공연장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공장소들이 끔찍하리만치 적막해졌다. 늘 개방돼 있던 학교 운동장들도 일제히 닫혀버렸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라고 소문난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이 이토록 가라앉아버리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하기는 한국만 이런 게 아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이란, 이탈리아,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우려가 있는 곳은 어디서든 비슷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뉴욕에서도 레스토랑에 손님이 끊어졌다는 소식이 들리고, 세계적인 관광 명소들이 폐쇄된 이탈리아에서는 식료품점의 파스타가 동나고, 심지어 마스크 한장을 구하는 데도 50~60유로라는 고액을 치러야 할 형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국은 예외적으로 나쁜 경우가 아닌 모양이다(존스홉킨스대학의 한 연구소가 작년 10월에 발표한 ‘2019년도 세계보건안전성 지표’라는 것을 보면, 195개국 중 한국은 세계적 유행병에 대응할 준비가 가장 잘되어 있는 최상위 10개국에 속해 있다. 이 10개국에 포함된 비서구 국가는 타이(6위)와 한국(9위)뿐이고, 이탈리아도 독일도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의 코로나 사태가 이렇게 악화된 것은 물론 ‘신천지’ 탓이 크다. 하지만 ‘신천지’도 결국은 피해자이다. 이 점을 잊고 그들을 손쉬운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매우 우둔한 짓이다).
돌이켜보면, ‘사스’나 ‘메르스’가 유행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바이러스에 실제로 감염된 사람들은 논외로 하고, 보통의 생활인들이 행하고 있는 이 ‘자가 격리’에는 좀 과도한 측면이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의료계의 견해로는 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감염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치사율도 그리 높지 않고, 대부분은 가벼운 증세를 유발할 뿐이라는데, 왜 우리는 이토록 공포에 질려 있을까. 그러나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일절 중단된 이 상황을 우리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지금은 버티고 있겠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어떻게 될까. 심각한 경기침체로 인한 시련 이외에도, 장기간의 고립에 따른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등, 정신적 고통의 광범한 확산이라는 또 다른 큰 재난을 우리는 겪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번의 코로나 사태는 어떻든 종료되는 날이 오겠지만, 이와 같은 신종 바이러스들은 앞으로 더욱더 빈번히 창궐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사태의 근본적 원인으로 과학자들이 지목하는 현상, 즉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들이 인간사회 가까이로 접근해올 확률은 매우 높고, 그 과정에서 야생동물과 인간의 접촉을 통해서 바이러스들이 인체로 건너오는 현상이 더욱 빈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끊임없이 출현할 신종 병원체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즉 항구적인 비상상황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생태계가 광범하게 파손된 상황에서는 바이러스만 인간을 괴롭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기후변화에 의한 가공할 재난들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갈수록 극성스러워지는 홍수, 태풍, 가뭄, 기근, 물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생물종의 대량 멸종 사태에 따른 재앙 등등, 생각만 해도 끔찍한 지뢰밭들이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아직도 기후위기라고 하면 기껏 에어컨이나 전기 자동차를 떠올리는 도시인들이 적지 않지만, 이제는 자동차의 유리창에 부딪히는 곤충들마저 확연히 줄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면서 막연하게나마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작년 7월 이후 전례 없이 혹심한 산불로 대재난에 봉착했던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최근 쏟아진 대량의 비 덕분에 전면적 참화는 모면했다. 그 산불로 인해 원시림을 포함한 호주의 광대한 삼림지대가 잿더미가 되고, 토착민들의 삶터가 붕괴되고, 10억 마리가 넘는 동물들이 목숨을 잃었다. 생태계의 균형이 돌이킬 수 없이 깨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아름답고 평화로운 경관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 나라의 생존의 자연적 토대는 엄청난 손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의 최근 르포기사에 의하면, 지금 호주인들 중에는 이 끔찍한 사태를 통해서 그동안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던’ 기후변화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는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즉, 화석연료를 그만두고 재생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은 물론, 종래의 온갖 제도와 관행 그리고 생활방식과 사고습관의 근본적 전환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휴가라면 으레 항공여행이나 크루즈 따위를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고,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끔찍한 재난을 겪고 난 호주인들이 지금 생각하는 것은 정치·경제적 변혁과 동시에 더욱 근원적인 변혁, 말하자면 ‘문화혁명’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깨달음은 왜 꼭 처참한 비극을 겪은 다음에야 오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호주인들의 이 통절한 깨달음에 담긴 메시지는 인류사회 전체를 위해 시사해주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쿤슬러라는 미국의 작가가 쓴 <장기 비상상황>(2005, 번역본은 <장기비상시대>·2011)이라는 책이 있다. 이것은 현대문명이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는 한, 급진적인 전환 없이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인류는 적어도 수백년 이상 ‘비상상황’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상세히 논증하고 있는 책이다. 쿤슬러의 예견은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선구적인 생태사상가들이 줄곧 해왔던 이야기다. 다만 이 책은 좀 더 과감하게 발언하고, 종합적인 그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는데, 저자는 우리가 비록 늦었다고 생각될지라도 시골의 작은 공동체들로 돌아가 자립성을 기를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생각에 공감을 하든 않든, 우리가 냉정히 인정해야 할 것은 온갖 정황으로 봐서 우리는 지금 장기적인 비상상황에 이미 들어섰다는 사실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이 갑갑한 상황은 그 신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김종철 ㅣ <녹색평론> 발행인 한겨레 2020.03.05.
세계경제의 화두, ‘일본화’
장기침체와 디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의 어려움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베노믹스가 성공하고 세계경제의 일본화를 피하려면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이고 거시경제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2019년 4분기 일본의 성장률이 -1.6%, 연율로 -6.3%를 기록해 충격을 던져주었다. 올해 1분기도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고 세계경제의 불확실성도 여전하니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으로 경기침체 가능성이 높다. 과연 아베노믹스와 일본 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일까?
지난해 4분기의 쇼크와 더불어 10월에 있었던 2차 소비세 인상으로 민간소비가 2.9%나 줄어들었다. 2014년 4월 1차 소비세 인상 때도 2분기 성장률과 민간소비 증가율이 각각 -1.9%와 -4.8%를 기록한 바 있다. 세금 인상은 재정의 긴축을 의미하므로 확장적 재정정책을 하겠다는 아베노믹스의 두 번째 화살과도 반대되는 방향이다. 아베 정부는 2차 소비세 인상을 두 번이나 연기했고, 그 악영향을 우려해 신용카드 사용에 캐시백 제공 등 보완책을 제시했다. 또한 예상되는 세수의 절반은 무상보육과 사회복지 확충에 쓰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크루그먼과 같은 케인스주의 거시경제학자들은 소비세를 인상하지 말라고 고언하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세금을 올리려면 소비세가 아니라 기업저축을 타깃으로 삼으라고 지적한다. 고령화로 인해 총수요가 부진하고 경기 상황도 좋지 않은데 재정긴축은 정책 실패라는 지적이다. 문제는 다가올 일본의 경기침체가 깊은 구조적 불황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함께 일본 경제의 근본 문제는 거시경제의 불균형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령화 때문에 성장이 둔화되었지만, 일본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1997년 이후 20년 동안 약 28% 상승하여 미국보다는 낮지만 독일이나 영국과 비슷했다. 임금은 20년 동안 증가하지 않았다. 아베노믹스 이후에도 7년 중 5년간 실질임금이 마이너스였고 작년에도 -0.9%를 기록했다.
반면 기업 부문의 이윤은 계속 증가해 기업의 현금보유액은 아베노믹스 이후 3배나 늘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거시경제의 자금 순환을 보면 최근 20년 동안 기업저축이 크게 증가했지만 투자는 정체되었고 정부가 재정적자를 통해 지출을 확대하는 구조가 확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세 인상과 긴축은 총수요에 악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요인과 관련이 있다.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오랫동안 하락했고, 구조조정과 함께 비정규직 비율이 현재 약 38%로 1990년 이후 약 2배로 높아져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강화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기업과 은행들의 상호 주식 보유가 약화되었고, 주식시장
에서 외국인 비중이 증가해 기업지배구조가 변화하고 단기수익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인 정치세력의 목소리가 커지지 못해서 자민당의 집권이 오래 지속되었다. 이렇게 심화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불균형은 거시경제에서 총수요 둔화로 이어졌다.
총수요 확대 위해 지속적인 재정확장이 중요
장기침체와 디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의 어려움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고령화를 배경으로 선진국 경제들의 이른바 ‘일본화’가 세계경제의 화두가 되었다. 올해 전미경제학회의 ‘일본화, 구조적 장기정체, 그리고 재정과 통화정책의 도전’이라는 세션에서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 재닛 옐런 전 미국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 래리 서머스 하버드 대학 교수 등이 일본화의 전망을 둘러싸고 격론을 벌였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새로운 통화정책 수단을 이야기했지만, 다른 이들은 금리가 매우 낮은 현실에서 역시 재정확장이 핵심적인 정책수단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일본의 소비세 인상 충격은 재정 문제와 거시경제 관리의 딜레마 앞에서 총수요 확대를 위해 지속적인 재정확장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단지 재정확장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아베노믹스가 성공하고 다른 국가들이 일본화를 피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이고 거시경제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시사인 2020.03.07
|
코로나19와 대한민국의 리질리언스
코로나19 사태는 한국의 회복능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게 될 중요한 사건이다. 사진은 4일 대구 계명대 동산병원 의료진의 모습. 연합뉴스
외국에 가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 하면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고마워할 때가 많다. BTS와 ‘기생충’과 같은 한류열풍이 아니더라도 한국은 많은 나라 사람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하는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국외여행을 많이 하거나 국제협력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세계 속의 우리나라의 위상을 실감한다.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에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를 이룬 거의 유일한 모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입국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국가가 100여개국으로 늘었다. 일시적 감염병으로 한국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중대한 도전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코로나19에 대한 대응 결과에 따라 다시 평가될 것이다.
재난이 일상화된 시대에 새로 등장한 개념이 리질리언스(Resilience)이다. 우리말로는 회복탄력성, 회복력, 복원력 등으로 번역된다. 딱 맞는 우리말을 아직 찾지 못해 그냥 리질리언스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재난과 같은 예상치 못한 큰 충격을 당했을 때,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코로나19 사태는 한국의 회복능력을 전 세계에 보여 주게 될 중요한 사건이다. 중국 다음으로 심각한 코로나19 위험국가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19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로 대한민국의 리질리언스가 평가받게 될 것이다.
생태계와 자연환경의 교란과 파괴가 야기한 ‘지구의 역습’이라고 불리는 재난이 늘고 있다. 신종 감염병도 그 대표적인 현상 중 하나이다. 기후변화와 생태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신종 감염병과 자연재해가 심각해질 것이라고 오래 전부터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다. 점점 재난의 규모와 빈도도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재난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닥치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측불가능성은 기후위기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차단하거나 예방하는 것이 곤란하고, 완전하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기후위기와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의 재난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제 인류는 이러한 재난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해야 한다. 재난에 대한 리질리언스를 높여야 한다.
사회의 리질리언스는 그 사회의 가장 강한 부분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리질리언스를 높이기 위해서는 취약한 계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이 튼튼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기저질환이 있는 고령자들이었다. 그런데 뼈아픈 사실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취약층에 노약자뿐만 아니라 청년계층까지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의 진원지가 된 신천지가 청년들 속에서 급속하게 세를 확장했다는 사실은 우리 청년들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선진적인 의료시스템으로 빠르게 검사를 하고, 전력을 다해 원인을 추적하여 차단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응은 충분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위기 극복을 위해 자원하여 힘을 보태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리질리언스의 토대이다.
시간문제이지 결국 코로나19는 물러갈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도 그 후유증은 크고 오래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제와 산업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사회의 약한 고리였던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소기업들이 충격에서 회생하기까지는 너무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이들에 대한 안정망의 확보가 리질리언스의 핵심이다.
코로나19 퇴치의 최전선에서 온몸을 바쳐 싸우고 있는 의료진에게, 본업을 팽개치고 나선 자원봉사자들과 수많은 기부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더 큰 힘을 코로나 이후의 재건과 회복을 위해 모아가야 한다. 한국인의 건강함과 회복능력을 세계에 보여 주자./ 최동진 국토환경연구원 대표 / 한국 2020.03.07
코로나19와 세계여성의 날
코로나19가 모든 이슈를 삼켜 버렸다. 봄소식을 대신하는 질병본부 상황 보고를 들으며 ‘갇혀’지내다 보니 일상의 활기가 새삼 그리워진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3월 첫째 주는 ‘3ㆍ8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로 여성 인권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는 축제 분위기였을 것이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모이는 한국여성대회에서 올해의 여성운동상 시상식을 하고, 성평등 디딤돌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성평등 걸림돌에게는 야유와 비난을 보내면서 성차별 사회를 재조명했을 것이다. 보라색 물결을 이루는 여성 행진이나 성별 임금격차에 저항하는 ‘3시 조기 퇴근’ 캠페인도 즐거웠을 텐데. 생기 없는 올해 봄은 너무 춥다.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리는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조차 최소화됐다.
우리나라에는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두 개의 법정 기념일이 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과 여권통문의 날(9월 1일)이다.
세계여성의 날은 1908년 2월 28일 미국 뉴욕 러트거스 광장에서 1만5,0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한다. 1975년 유엔이 공식적인 기념일로 정하면서 지금은 전 세계에서 성평등의 성취를 기리고 과제를 점검하는 글로벌 기념일이 되었다. 유엔은 2020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해시태그 #EachForEqual, #IamGenerationEquality와 함께 양팔을 안쪽으로 나란히 해 등호(=)를 만들어 사진을 공유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여성의 날의 상징은 ‘빵과 장미’다.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제반 기본권을 의미한다. 러트거스 시위 직후 여성 참정권 운동가 헬렌 토드의 연설에 빵과 장미가 등장했고,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이 ‘빵과 장미’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빵과 장미’는 세계여성의 날과 여성운동의 대표 슬로건이 되었다. 존 바에즈, 존 콜린스, 존 덴버 등의 노래와 영화를 통해 대중문화 아이템으로 사랑받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토종’ 여성의 날이라 할 수 있는 9월1일 ‘여권통문의 날’이 있다. 20세기가 아직 시작되기도 전, 1898년 채택된 여권통문은 세계여성의 날 시작보다 20년이나 앞선 여성 선언이다. 여권통문을 만든 서울 북촌 양반가 부인들은 여성의 교육권, 경제권, 정치권을 주장하고 고종황제에게 여학교 설립을 상소했다. 부인들이 자발적으로 갹출하여 여학교를 세우고, 이 학교를 지원할 여성단체를 설립한다. 선교사가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첫 사립 여학교인 순성여학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인 찬양회의 태동이다. 남녀가 유별하던 조선 말기, 양반가 여성들의 이런 적극성은 지금 다시 보아도 놀랍다. 당시 독립신문은 1면에 여권통문 전문을 게재하면서 ‘김 소사 이 소사 하는 부인들이 이런 선언을 했다 해서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왜 남성의 날은 없는데 굳이 ‘여성의 날’이 필요한가?”, “이미 여성의 지위가 충분히 높은데 별도의 ‘여성의 날’이 왜 필요한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다. 유엔에서는 성평등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핵심적인 ‘비즈니스 이슈’이고 사회발전 전략이라고 정의한다. 유엔은 지속 가능 발전을 위한 17개 목표 중 하나로 성평등을 명시했고 선진국에서는 성평등이 이미 국정기조로 자리 잡았다.
2020 대한민국의 ‘빵과 장미’는 안녕하신가? 여성의 날은 여성들만의 축제가 아니다. 작고한 정치인 노회찬 의원은 3월 8일 여성의 날을 기념해 14년 간 여성노동자와 여성운동가들에게 장미 한송이를 보냈다. 올해는 노회찬 재단에서 ‘성평등 장미’를 나눠준다. 3월 8일 하루쯤 주변에서 수고하는 여성들의 ‘피 땀 눈물’ 앞에 장미 한 송이 건네 보면 어떨까?
이번 코로나19 때문에 3월에 못 다한 축제는 9월 1일 여권통문의 날에 더 크게 하기로 하자.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한국 2020.03.07.
코로나19 이후…변화 고민하는 의제 발굴을
사회재난 대응 과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후의제를 발굴하는 작업이다. 이번 코로나19 대유행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사회가 미처 마련하지 못한 사회적 안전망의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현안 문제 해결을 위한 임기응변 방식의 대응이 아닌, 우리 사회의 오래된 문제들과 관련해 좀 더 장기적인 고민과 변화가 필요한 의제들이 존재한다.
사후의제 발굴은 언론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이다. 이때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고 의제를 설정하는 방식이 단순히 부정적이고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는 데 그친다면 ‘재난 이후’의 변화를 논의하기 어려운 환경이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까지의 코로나19 보도들이 그렇다. 포털사이트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유통망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 속에서 언론사들이 주목경쟁을 위해 불안, 분노, 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 반응을 유도하는 기사들을 양산하고, 클릭 수를 늘리는 데 골몰하게 된다는 지적이 많다. 과학적 근거도 없이 인종과 국적만으로 ‘특정 감염원’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언론 보도들이 대표적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과장된 주장을 기본적인 취재도 없이 기사화하여 대중들에게 불안을 투사할 대상을 찾도록 만들기도 한다. 특히 배제와 혐오를 유도하는 보도 방식들이 가장 큰 문제다.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하거나 환경에 대해 알리는 것은 어떤 경우 감염병에 취약해지는지, 그리고 어떤 환경이 문제가 되는지를 파악해서 그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활용하자는 취지이지,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비난하기 위해 사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언론이 이를 주도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언론이 사안의 부정적인 면을 주목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의 사회 감시 기능은 비판에서 출발하는 것도 맞다. 다만 현재의 보도 방식이 주목을 끄는 데만 초점을 맞춰 독자에게 사유의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정제되지 않은 정보를 그저 던지기만 하는 방향으로 쏠려있어 현행 재난대응체계에 대한 평가와 사후 보완에 대한 논의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재난 이후’를 위한 의제 발굴은 대중들의 부정적 반응 유도와 정치적 갈등을 조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위한 과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언론은 어떤 환경, 어떤 집단이 감염병에 취약한지, 또 어떻게 해야 사후에 더 큰 위기에 처하지는 않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 자영업자와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 코로나19 사태로 초래된 공백의 복구가 가장 취약한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시스템의 일시 정지 속에서 고정적 주거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도 원점부터 고민되어야 한다. 의료 인력들의 무한한 헌신을 강제하는 만성적인 인력난,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더욱 취약해지는 장애인 복지 구조, 사회적 돌봄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자녀양육 문제 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안전용품이 정규직과 다를 정도로 노골적인 노동 현장에서의 차별 대우, 편견과 혐오를 특정한 사람과 집단에 투사하여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감정적 움직임이 SNS 등을 통해 확산되는 점, 일부 국민의 이기적 행동이 나타나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자가 원활하게 보급되지 않는 점 등 우리 사회가 같이 해결해 나가야 할 다양하고 오래된 문제들이 이번 사안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정답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답안을 위해 고민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들어가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될 수 있을지를 제시하는 역할을 언론이 담당할 필요가 있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 경향 2020.03.08.
대구사태와 광주사태
바이러스가 발발했을 때 반드시 따라야 할 원칙이 있다. 방역은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까지 정쟁의 소재로 삼을 경우 국가의 방역정책이 정당의 탐욕이나 대중의 공포로 인해 정치적으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는 국민의 생명이 달린 사안을 자신들의 정치적 어젠다를 확산할 기회로 여기는 여러 세력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여야의 구별이 없어 보인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수습의 책임을 진 정부 측에서는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평가절하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경고의 목소리를 묵살하기 위해 코로나바이러스를 철마다 찾아오는 인플루엔자와 동일시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대규모 감염사태가 터지기 직전에 “머잖아 코로나는 종식될 것”이라 말했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 짜파구리 오찬 사진을 홍보용으로 내보내기까지 했다.
반면, 반대편에서는 책임을 정부에 떠넘기기 위해 국가의 방역대책을 싸잡아 비난하기 마련이다. ‘방역에 실패했다’는 이미 내려진 결론을 위해 그들은 인과관계를 왜곡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즉에 ‘중국인의 출입을 봉쇄했어야 한다’는 주장. 확진자가 이미 7000명을 넘었지만 그중에서 중국인에 의한 감염의 사례는 겨우 한두 건에 불과하다. 또 진즉에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한 미국에서도 바이러스는 폭발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그릇된 인과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방역에 혼란을 주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유일하게 중국에서 오는 직항편을 끊었던 이탈리아에서는 중국인들에게만 집중하는 바람에 그보다 더 유동인구가 많은 유럽인들을 시야에서 놓쳐 버렸다. 그들이 의심했던 중국인들은 검사결과 모두 음성으로 밝혀졌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진 후에야 뒤늦게 0번 환자는 유럽인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봉쇄의 논리가 옳다면 같은 논리에 따라 당장 확진자의 90%가 나온 대구·경북부터 봉쇄해야 할 게다. 하지만 그 많은 중국봉쇄론자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대구를 봉쇄하자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이것만 봐도 중국봉쇄설이 본질적으로 정치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와 베네치아까지 봉쇄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극단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도 이럭저럭 사태를 수습해 가고 있다.
한편, 그 반대편에서는 분노한 대중의 시선을 애써 종교와 지역으로 돌리려 한다. 서울시장은 신천지 교주를 ‘살인죄’로 고발했고, 한국의 두테르테 경기도지사는 그를 쫓아 야밤에 신천지 본부로 쳐들어가더니, 급기야 주일예배를 강제로 금지시키는 행정조치까지 검토 중이란다. 방역을 핑계로 대나, 이 오버액션이 대중의 뇌리에 자신을 대선주자로서 확실히 각인시키려는 포퓰리즘 전략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가장 질이 안 좋은 것은 특정 지역에 낙인을 찍어 고립시키는 언동이다. 소설가 공지영은 코로나19 확진자 현황과 2018년 지방선거 결과가 담긴 사진을 올리며 “투표의 중요성 후덜덜”이라 썼다. 더불어민주당 청년위 소속의 한 인사는 “대구는 어차피 미통당 지역”이고 “문재인 대통령 덕분에 다른 지역은 안전하니 TK는 손절해도 된다”고 썼다가 보직에서 해임됐다. <뉴스공장>을 진행하는 김어준은 이번 사태를 “대구사태”라 명명했다.
코로나19 이슈의 정치적 악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네이밍’의 전술이다. 보수언론에서는 여전히 ‘우한폐렴’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사태의 원인이 정권의 친중정책에 있다고 못 박아 두려는 게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것을 ‘대구폐렴’이라 부른다. 문제는 중국이 아니라 대구에 있다는 얘기다. 미래통합당의 어느 예비후보는 “문재인 폐렴 대구시민 다 죽인다”고 외친다. 그냥 ‘코비드19’, 아니면 (일본처럼) ‘신종폐렴’이라 부르면 안되나?
다들 미쳐 돌아가는 가운데 지난 1일 광주시민들은 대구의 경증환자들을 수용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것이 “광주의 길”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머릿속으로 그 옛날 봉쇄된 도시에서 살았던 무서운 체험을 떠올렸음에 틀림없다. 그때 광주를 봉쇄했던 자들은 그 불행한 사건을 ‘광주사태’라 불렀다. 작작들 좀 하자. 다들 알지 않은가. 선동이 아니라 과학, 불신이 아니라 신뢰, 혐오가 아니라 이해, 봉쇄가 아니라 연대만이 해답이라는 것을.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경향 2020.03.08.
조선일보 100년, 그들이 감춘 ‘진실’
조선동아 거짓과배신의 100년청산 시민행동’이 5일 오전 서울 조선일보사 옆 원표공원에서 연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오종선 조각가가 <조선일보>의 반민족 역사를 두루마리 휴지로 형상화한 설치미술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기업이든 단체든 100년을 지속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지난 5일 100주년을 맞은 <조선일보>는 지난해부터 많은 연재기사를 쏟아냈다. ‘불의한 시대와 투쟁’하며 ‘민족과 나라의 발전’을 이끌었고 ‘팩트로 괴담에 맞서’는 100년, 한마디로 ‘진실의 수호자’였다고 자평했다. 주필은 앞으로도 ‘사실’만 붙들고 독자 곁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특별기고에 나선 원로 언론학자는 ‘3·1운동 정신으로 탄생’해 ‘항일운동으로 민족운동본부 역할’을 했고 ‘광복 후엔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산업화에 앞장’섰다고 100년을 정리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나 난개발 현장 고발 시리즈 등 필자가 기억하기에도 언론계 안팎의 주목을 받은 기사들이 적잖다. 조선일보와 대립했던 전직 대통령이 한때 사석에서 부인이 조선일보 문화면을 너무 열심히 읽는다고 넋두리할 정도로 이른바 ‘간지’면은 맛깔난 기사와 편집으로 정평이 나기도 했다. 100년 동안 지면에 실린 기사만 420만여건이었다고 하니 의미있고 좋은 기사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진면목을 이것만으로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지난 100년을 스스로 정리한 기사 자체에 동의하기 어려운 ‘사실’들이 많다. <조선일보 대해부>를 비롯해 조선·동아 해직기자나 언론·시민단체들이 기록해놓은 ‘사실’과도 한참이나 거리가 있다. 조선일보의 표현처럼 ‘암흑기의 오점’ ‘상흔’이나 ‘얼룩진 기록’이 있었다며 한두 마디로 대충 넘어가기엔 얼룩이 너무 크고 짙다. 100년에 한번 맞는 귀한 지면에서 ‘사실’만 붙들겠다고 다짐했으면 오점과 얼룩도 한번쯤은 깔끔하게 인정하고, 독자와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과거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그런 태도가 결국 지금까지 이어져 우리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공론장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 같아 아쉽고 또 찜찜하다.
나라 잃은 시기 이상재·조만식 등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일보 사장을 맡아 한글교육과 문자보급운동, 신간회 운동을 주도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1937년 이후 제호 위에 일장기 올리고 일왕 부부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으며 사설로 충성을 맹세한 매년 1월1일치 1면 또한 조선일보의 숨길 수 없는 역사다.
박정희 시대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설을 실었다고 자랑했지만 5·16 군사쿠데타 3일 만에 ‘찬사와 지지’를 표명하고 민주주의 압살하는 유신체제를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처’라며 환영한 것도 그들이었다.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문명자씨는 회고록에서 정권과의 기사 뒷거래 의혹까지 제기했다. 자신이 송고한 ‘박정희 좌익전력’ 기사가 몰고됐는데 알고 보니 방우영 사주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건넸다는 것이다. ‘진실의 수호자’를 자처하려면 잘 알려지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도 정직하게 드러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최석채·선우휘 등 논객들을 상찬하면서 자사 출신 실천지성 리영희 선생이나 언론자유를 지키려다 해고된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의 32명 양심적 언론인들은 언급조차 않았으니 옹졸하고 비겁하다.
총칼로 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신군부 시절, 조선일보 사주는 군사반란을 옹호하는 어용기구,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고, 언론 자유를 탄압하는 데 적극 가담했다. 그 대가로, 언론 통폐합으로 방송사·신문사를 빼앗긴 경쟁사들의 발을 묶어놓은 채 비약적으로 사세를 키워 매출액 3위에서 1위로 올라섰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을 ‘자상’하고 ‘책임감’ 넘치는 ‘청렴한 지도자’로 찬양한 지면은 ‘진실’을 팔아 ‘영달’을 추구한 상징적인 기록이다.
100주년을 맞아 오보를 바로잡고 사과한다며 숱한 용공 조작과 왜곡·편파 보도는 감춰놓고 극히 일부의 ‘실수’ ‘오류’만 나열한 것이야말로 ‘조선’스럽다. 그러면서 ‘산업화로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된 뒤에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게 신념이라며 궁색한 변명 한마디를 슬쩍 끼워넣었다. 친일과 독재예찬의 전통은 요즘 대놓고 그 후계세력을 편드는 과도한 정파적 보도로 재현되고 있다. 클릭 한번에 모든 기사가 호출되는 시대, 조선일보 100년의 추한 ‘진실’ 역시 민주언론시민연합 아카이브에만 들어가도 다 드러난다. 한 사람을 영원히, 모두를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모두를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격언을 100주년 선물로 전한다
논설위원 rikim@hani.co.kr 한겨레 2020.03.08.
언론에 묻다
지난 수요일, 조선일보 100년 특집기사로 ‘오보를 정정하고, 사과합니다’가 있었습니다. 이제 ‘나’에게도 사과할까 싶어 기사를 클릭하였다가 허탈하게 창을 닫은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지요. 저에게까지 사과할 여력이 없으리라 예상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실망스럽더군요. 법과 원칙에 따라 검사직을 수행했던 저를 얼치기 운동권 검사로 매도했던 2013년 첫 사설과 기사들이 아직 제 심장에 비수처럼 박혀 있으니까요.
저는 역사를 좋아했고,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슈퍼는 신문도 팔았기에, 초등학생 때부터 신문을 즐겨 읽었습니다. 신문별로 색깔이 다르고, 정치권 풍향에 따라 날씨 바뀌듯 변모하는 논조들이 재미있기까지 하더군요. 지식인들의 곡학아세가 정교하지 못했던지, 부조리가 너무 심하여 다 가릴 수 없을 지경이었던지, 어린 저에게까지 유치함을 더러 들키곤 했지만, 신문을 통해 세상과 현실을 배운 저에게는 교과서이자 오늘의 역사서였습니다.
2012년 12월 제가 과거사 재심사건 무죄구형을 강행한 후 관련 보도가 제법 있었지요. 보기 드문 항명사태라, 검찰 수뇌부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기사화하더군요. 고통스러웠지만, 그럼에도 한동안 신문을 꾸역꾸역 읽었습니다. 오래된 습관이니까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공개된 법령을 조금만 찾아보면 수뇌부의 주장이 얼마나 위법한지를 금방 확인할 수 있는데, 검증 없는 받아쓰기 기사를 이렇게 쓸 수 있나 싶어서. 기자들을 한심해하다가, 검찰 간부들도 법을 모르는데 기자들이 어찌 알겠나 싶어 세상을 원망하며 마음이 널뛰던 그때, 언론에 대한 막연한 신뢰를 결국 접었습니다.
보수언론은 속기사인 양 검찰 수뇌부의 말을 그대로 받아쓰며 저를 매도하기 급급했고, 진보언론 역시 법령을 뒤져보는 수고를 게을리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당시 기자들이 형사소송법, 검찰청법 등을 확인하고 제대로 취재했다면 ‘검사는 법에 따라 무죄구형을 해야 하는 것이니 당시 백지구형을 지시하고 검사의 이의제기를 묵살했던 간부들을 중징계해야 한다’고 검찰을 비판했겠지요. 그러나 보수언론은 황당했고, 진보언론은 태만했습니다. 과거사 재심무죄 구형건에 한해 실수로 황당하거나 태만히 보도한 것이라 변명하겠습니까.
가시 돋친 기사들에 고통받는 부모님을 보며 정정보도를 청구할까도 궁리했지만, 휘몰아치는 중징계 광풍에 살아남는 것조차 버거웠고, 무엇보다 부끄러운 기사들 역시 오욕에 찬 역사이기에 이대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내했습니다. 징계취소소송에 승소하면 자연히 정정보도되리라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도에 앞장섰던 매체들이 정작 승소 소식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더군요. 이 또한 오늘의 역사란 생각이 듭니다만, 피해자로서 서글프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언론의 악영향에 우려를 금치 못합니다.
공정이나 불편부당(不偏不黨), 정론직필(正論直筆)을 내세우지 않는 언론사가 없지요. 그 말대로 했다면, 언론 신뢰도가 이리 낮겠습니까. 언론에 대한 막연한 신뢰를 이미 거두었지만, 언론이 오늘의 역사서란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공자가 역사서인 <춘추>를 집필하자,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였다고 하는데, 오늘의 언론에 난신적자들이 과연 두려워할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곡필(曲筆)을 직필인 양 포장하고 목적과 의도를 가진 취재원들과 결탁하여 여론을 호도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기사들이 현실적으로 적지 않으니까요. 곡필은 하늘이 응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굽은 붓들이 이제라도 곧게 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문윤리강령과 윤리실천요강이 있더군요. 금번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감염병 등 질병 재난 등에 대한 취재와 보도 기준을 정한 재난보도준칙도 있습니다. 곡필 언론으로 고통스러울 때 혹시나 싶어 규정들을 찾아보다가 슬펐습니다. 검찰이 법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언론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공익의 대표자여야 할 검찰이나 사회의 공기(公器)인 언론이 부조리의 데칼코마니 같다는 건 비극입니다.
권력자들에 대한 질문은 언론의 권리이자 의무지요. 또한 언론은 시민인 독자들에게 답하고 오보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의무 역시 있습니다. 이에, 언론에 묻습니다. 검증과 확인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부풀리는 등 편파적이거나 불공정하게 취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 감시자인 양하다 권력화되지 않았습니까. /임은정 울산지방검찰청 부장검사 경향 2020.03.08
북한은 왜 이럴까?
문재인 정부 '내로남불'로 한반도 평화 어려워
북한이 9일 단거리 발사체 수발을 또 발사했다. 50km의 고도로 최대 200km를 비행했다는 남한의 합동참모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초대형 방사포나 대구경 방사포로 추정할 수 있다. 이번 발사는 북한이 2일 2발의 초대형 방사포를 발사한 지 일주일만이다. 당시 발사에 대해 청와대는 "강한 유감"을 표하면서 "중단"을 촉구했었다.
그러자 북한은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담화를 통해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며 막말을 쏟아 부었다. 이틀 후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남한에 위로의 뜻을 전달했었다. 그런데 닷새 만에 또 단거리 발사체를 발사했다.
북한의 언행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면서 국내에서도 일희일비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김여정의 담화를 놓곤 올해에도 남북관계 개선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분석이, 김정은의 친서를 놓고는 남북관계 회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왔다. 이 와중에 나온 북한의 발사체 발사는 남북관계가 그리 녹록지 않을 것임을 예고해준다. 동시에 북한의 언행을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북한이 최근 몇 년 사이에 한미동맹의 전력 증강 가운데 가장 예민하게 반응해온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드(THAAD)를 비롯한 미사일 방어체제(MD) 증강이고 또 하나는 한국의 F-35 도입이다. 북한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말에 F-35 도입이 결정되자 단거리 발사체를 집중적으로 시험발사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 안팎에서 이 전투기 도입 목적 가운데 하나가 "참수작전"에 있다는 말이 나오자 북한의 반발 수위는 더욱 높아졌었다. 뒤이어 2016년 7월에 사드 배치가 결정되자 유사시 사드 기지를 타격하겠다며 단거리 지대지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2018년에 남북정상회담에서 군사 분야 합의가 나오고 "단계적 군축"을 추진키로 하면서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도 한동안 자취를 감췄었다. 그러나 2019년 들어 상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사드와 패트리엇 사이의 연동성 강화를 중심으로 한국에 배치한 MD 능력을 대폭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도 '한국형 MD'를 군비증강의 우선순위로 삼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작년 3월부터는 북한이 격렬하게 반발해온 F-35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북한은 5월부터 '단거리 4종 세트'로 불리는 'KN-23' 단거리 미사일, 신형전술미사일, 대구경 방사포 및 초대형 방사포를 잇달아 선보였다. 이들 미사일은 저고도로 비행하면서 남한 대부분을 사거리에 두고 있다. 또한 일부 발사체는 회피 기동이 가능해 MD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사적으로 본다면,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 전력 증강은 한미동맹의 MD 및 F-35를 겨냥한 '맞춤형 억제력'을 보유하겠다는 취지를 품고 있는 것이다. 김여정이 "몰래몰래 끌어다놓는 첨단전투기들이 어느 때든 우리를 치자는데 목적이 있겠지 그것들로 농약이나 뿌리자고 끌어들여왔겠는가"라고 힐난한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군비경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공산이 크다. 미국은 한국에 배치한 MD 자산의 업그레이드를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상황이고, 한국이 작년에 13대 들여온 F-35의 추가 물량 27대도 올해와 내년에 걸쳐 도입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4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임관식에 참석해 "오늘 우리는 최신 F-35A 스텔스전투기가 390도 공중 선회하는 멋진 축하비행을 보았다"며, "우리 공군의 안보 역량을 더욱 강화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역설했다.
그리고 청와대는 9일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에 대해 "한반도에서의 평화 정착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안보든, 평화든 상대가 있는 법이다. 이런 식의 '내로남불'로는 결코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의 돌파구를 만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유념해야 할 것은 또 있다. 이러한 군비경쟁과 남북한의 화해협력이 양립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울뿐더러 설사 일부 남북관계의 복원이 이뤄지더라도 그 리스크가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가령 코로나 19 사태가 진정되어 개별 관광 등 남북한의 독자적인 협력 사업이 성사된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미 군사 훈련 재개, MD 강화, F-35 추가 도입 등이 이뤄지면 북한도 단거리 발사체 발사로 응수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렇게 되면 대북 여론이 악화되면서 어렵게 시작된 개별 관광도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국가전략을 분명히 하면서 정책을 조율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북한에 교류협력을 제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역대급 군비증강을 계속하는 것은 더 이상 양립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 스스로 밝혀온 최상위 국가 전략인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도 이를 수 없다. 정부의 결단이 필요한 이유이다.
우선 F-35 도입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추가 물량 도입 중단부터 도입 시기를 늦추는 것까지 다양한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규모의 국방비 증액도 자제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가 경제에 직격탄이 되면서 매년 7-8%씩 국방비를 늘리는 것도 어려워졌고 민생을 돌봐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연기된 한미군사훈련도 중단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미 세계 7위의 군사력을 갖춘, 그리고 세계 최강의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한국이 이 정도의 선택도 못 내린다면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은 또다시 희망고문으로 끝날 공산이 커진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프레시안 2020.03.09.
한·중·일 ‘코로나19 삼국지’
동북아 한·중·일 세 나라, 내정문제나 양자 간 분쟁 말고 전염병 대처와 경제공황 해소라는 ‘공통문제’를 놓고 지금 자국민과 국제사회에서 함께 평가받는 입장에 놓였다.
3국3색이다. 코로나19 발원국 중국은 ‘봉쇄와 셧다운’을 택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통제시스템으로 도시 봉쇄, 주거 이동 제한, 공장 가동 중지 등 전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무엇보다 발원국의 오명을 씻기 위해 더 치열했다. 한국은 ‘공개와 전수검사’를 택했다. 지역사회 감염이 발생했지만 지치지 않고 매일 1만명씩 20만명이나 검사해 확진자를 찾아내고 동선을 공개해 자율규제를 유도했다.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한국모델’로 전염병 조기 종식까지 과연 가능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일본은 ‘소극과 비밀주의’를 택했다. 크루즈선 집단감염 이후 전국에서 속속 감염 사례가 나왔지만 검사조차 최소화하는 소극적 방역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4개월 앞으로 다가온 올림픽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트라우마를 떨쳐내려는 아베 정부에 전염병 확산은 치명적이다.
동북아 3국이 독특한 방역방식으로 전염병 종식에 성공해도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키는 일이 남았다. 현재까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피해규모가 사스 때보다 4배 이상 큰 1600억달러(약 192조원)에 이르고, 감염피해가 큰 나라들의 연간 성장률도 0.5~1%포인트씩 끌어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자국 내 감염이 본격화되지 않은 미국은 전주 선제적으로 금리를 0.5%포인트 전격 인하했다. 중국은 유동성 공급을 위해 1조2000억위안(약 205조원)을 투입하며 파격적 감세안도 제시했다. 한국도 방역대책과 소상공인 지원을 위해 11조7000억원의 추경예산안을 국회에 냈고 유동성 공급과 세제지원책도 내놓았다.
하지만 위기상황에서 강력한 정책수단의 집행이 가능한 ‘경제면역시스템’이 가동돼야 함에도 ‘호흡곤란’ 경제상황에서 추경 집행과 세제대책에 ‘긴급성’은 찾기 힘들다. 생태계가 일시 붕괴된 자영업과 서비스 분야를 살리고 취약계층을 지킬 재해 복구 보조와 금융지원 등 강력한 심폐소생술에 집중하려면 전례없는 특단의 방책이 필요하고 과거처럼 실기하지 않도록 긴급재정명령권 발동도 검토해야 한다. 일각에서 주장하듯 재난을 맞아 전 국민을 대상으로 50만~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기본소득제의 장점을 살리려면 재정과 효과성 등을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한 후 도입해야지 재난상황에 쓸 처방은 아니다.
20세기까지 열강의 먹잇감이었고 패전국과 식민지였던 동북아 3국은, 지난 50년간 경제성장을 거듭하면서 세계의 찬사를 받아왔지만, 유럽과 북미 등 다른 지역과 달리 각자도생할 뿐 지역공동체로 나아가지 못했다. 코로나19 발생 초기 중국이 어려움에 빠지자 한국은 방역과 구호물품을 보냈고 이번에는 중국이 한국을 돕겠다고 나섰다. 반면 한·일 양국은 작년 수출규제에 이어 또다시 일방적인 입국제한 조치로 골이 더 깊어졌다.
역병은 언젠가 멈춘다. 하지만 성장지향적 국가 목표 속에서 더 강한 전염병과 더 심각한 미세먼지가 또다시 발생해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점점 잦아지는 미세먼지와 전염병, 기후변화 등을 접하며, 성장의 정점에 다다른 동북아 3국이 이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공동목표와 역내 환경에 눈을 뜨고 함께 재난대응 시스템과 공동의 인프라 구축에 나서길 바란다.
지금보다 더 약육강식과 대립의 시대, 안중근은 동양 3국이 각자 자주독립국으로 바로 서되 대립과 경쟁을 버리고 화합하며, 일심협력해 함께 발전하면 동양과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설파했다. 우리는 전염병과 미세먼지와 방사능으로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이 희생된 후에야 그가 꿈꾼 동양평화, 역내 환경과 평화를 위한 한·중·일 ‘동양평화회의’를 보게 될까?/ 구재이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 세무사 2020.03.10.
기후위기 외면하는 거대 정당
날마다 살얼음판이다. 이 전쟁의 주범은 누구인가? 박쥐인가 우한인가 신천지인가.
과거 전 세계를 떨게 했던 에볼라 바이러스, 탄저병 그리고 코로나19 등등 각종 전염병엔 공통점이 있다. 2007년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고 폴 엡스타인 박사는 2011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기후가 사람을 공격한다(Changing planet, changing health)>에서 지금 우리를 떨게 하는 코로나19 같은 역병의 주범이 무엇인가를 방대한 연구와 사례로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소두증을 유발하는 지카 바이러스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의 풍토병인데 주로 모기를 통해 전파된다. 지구가 더워지면서 모기가 급증했고 결국 남미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인간에게 1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기와 해충의 세계에서는 0.1도도 엄청난 변화라서 기후변화 때문에 모기가 ‘좀 더’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박멸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많아진 탓이라고 설명한다.
이뿐만 아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2014년 서아프리카 지역에선 에볼라 바이러스로 1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는데 가뭄 때문이었다. 지독한 가뭄으로 먹을 것을 찾아 야생동물을 사냥했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에볼라 바이러스는 인간을 숙주로 삼았다. 2016년 시베리아 지역에선 75년 만에 탄저병이 발병하였다. 수십년 전 탄저균으로 죽은 순록 사체가 지구 온난화로 해동되면서, 탄저균 포자가 지면 위로 노출된 탓이다. 북극의 동토 아래 어떤 숲속의 마녀가 잠자고 있는지, 언제 깨어나 발톱을 세울지 알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폴 엡스타인은 사람들이 기후로 인한 재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데, 동식물은 고통받지만 사람은 안 그럴 것이고, 피해를 보더라도 가난한 개도국 주민들일 거라고 오해한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 톰 행크스 부부도 코로나19 확진을 받았고 NBA 리그도 전면 중단됐다. 선진국은 우수한 과학기술과 청결한 환경, 넉넉한 자본으로 국민들을 보호할 수 있으며, 한국 역시 그 편에 속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전염병 앞에서는 국경이 없음을 매일 실감하고 있다. 누구도 안전하지 않고 재난이 일상화되어 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환경단체들이 지구온난화, 기후변화를 언급한 건 1990년대부터다. 그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얘기였지만 오늘 우리는 세계 최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지금까지는 가난한 나라와 말 못하는 동식물들만 고통받았지만, 머잖아 우리 모두 희귀 바이러스, 식량부족, 기상이변 같은 기후전쟁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환경단체가 아닌 미국 의학협회마저 “기온이 0.5도만 상승해도 우리에겐 참혹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고, 가장 보수적이라는 과학자들도 함께 나선 마당이다.
코로나19의 창궐 앞에서 모두 애태우고 있다. 병든 뿌리를 두고 이파리에 약 바른들 소용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폴 엡스타인의 책은 절판되었지만, 모든 재난의 뿌리, 기후변화를 더 염려하고 대비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선거가 코앞인데 거대 정당들의 기후정책은 애매하기 짝이 없고 기후리더는 정녕 어디 따로 숨긴 것 같다. <재정의>에서 저자 한근태 박사는 정치인을 ‘표식(票食)주의자’라 재정의하였다. 우리 목숨값, 알고 드시는지….
이미경 환경재단 상임이사 경향 2020.03.12.
촛불정신과 민주당의 자기부정
딱 한달 뒤면 총선이다. 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르는 선거는 어차피 정권심판 선거일 수밖에 없다. 집권세력인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한 정권이고, 촛불혁명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정부다. 그렇다면 정부와 여당에 대한 평가는 촛불혁명의 정신을 얼마나 구현했는가에 따라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
촛불정신이란 무엇인가. 국민은 그 추운 겨울, 무엇을 위해 주말마다 광화문광장을 촛불로 물들였던가. “이게 나라냐.” 이것이 광장의 외침이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라는 것이 촛불의 지상명령이었다. 촛불정신은 곧 이 나라를 비정상적인 기형 국가로 만든 ‘친일-독재 기득권세력’, 즉 수구세력을 청산하라는 역사의 명령이요, 새로운 사회를 위한 근본적 개혁을 감행하라는 시대의 요구였다. 요컨대 수구 종식과 사회 개혁이 촛불정신의 중핵이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과연 지난 3년 촛불정부라는 이름에 걸맞은 성과를 이루었는가. 두가지 점에서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첫째, 민주당 정부는 수구를 종식시키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역사적 시효가 끝나 자연 소멸하던 수구를 부활시켰다. ‘박근혜 편지’는 수구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촛불혁명은 박근혜의 국정농단에 의해 촉발됐지만, 촛불의 명령은 그것을 바로잡는 것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러한 농단을 가능하게 한 심층구조, 즉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규정하는 왜곡된 구조를 변혁하라는 것이었다. 박근혜 탄핵의 역사적 의미는 외세 지배와 군사독재 시대에 기득권을 누려온 친일-독재 세력에 대한 탄핵이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당한 대통령이 친일-독재 전통의 계승자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통령 탄핵과 함께 이 땅의 수구세력도 해방 이후 70년 만에 자연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바로 이 죽어가던 수구가 되살아났다. 수구의 부활은 민주당 정부의 실책과 무능에 힘입은 바 크다. 소멸해가는 수구를 정치 무대에서 영구 퇴장시키지 못하고, 다시 ‘컴백’시킨 것이야말로 민주당의 가장 큰 역사적 과오다.
둘째, 민주당 정부는 우리 사회를 제대로 개혁하지 못했다. 정치개혁, 교육개혁, 노동개혁, 재벌개혁, 복지개혁, 헌법개정 무엇 하나 번듯하게 해낸 것이 없다. 권력기관 개편에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이 전부다. 개혁은 변변히 이루지 못한 반면, 개혁세력의 분열은 심화시켰다. 조국 사태와 비례위성정당 논란으로 민주개혁세력은 전례 없는 분열을 겪으며 서로 적대시하고 있다.
이처럼 민주당은 ‘촛불혁명의 계승 정당’으로서 시대적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독재의 폭압정치와 그 하수인들의 꼼수정치에 맞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올곧게 지켜온 민주개혁세력에게 커다란 실망과 비애를 안겨주었다. 권력과 돈과 명예보다 양심과 도덕과 명분을 중시하며 살아온 평범한 86세대는 최근의 엽기적인 사태들을 보며 자신의 젊은 시절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듯한 정체성의 위기를 절감한다. 양지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86세대 정치 엘리트들은 이들의 쓰라림을 헤아릴 수 없다.
한때 정의를 외쳤던 자들의 정치적 실패와 도덕적 일탈은 더 거센 후폭풍을 불러오는 법이다. 단기적으로는 그것이 초래할 선거 패배가 무섭고, 장기적으로는 그것이 몰고 올 냉소주의와 정치혐오, 거대한 무력감이 두렵다.
민주당의 최근 모습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그것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라는 촛불정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수구의 꼼수에 꼼수로 맞서는 것, 정책 비전이 아니라 ‘공포 마케팅’으로 승부하는 것은 촛불정당의 모습이 아니다.
민주당의 거듭된 실책으로 질 수 없는 선거가 질 수 있는 선거가 되었다. 수구세력은 통합하고, 개혁세력은 분열하고, 지지세력은 실망하고 있다. 위기다. 수구의 승리를 저지하려면, 지금이라도 촛불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민주개혁세력의 무기는 어디까지나 도덕성과 개혁성이지 꼼수와 기회주의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당이 비례정당을 만든 것은 자기부정이자 소탐대실이다.
민주당의 꼼수는 당의 역사에 대한 자기부정이기도 하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승리는 꼼수에 대한 정수의 승리였고,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였다. ‘원칙 없는 승리보다 원칙 있는 패배’를 통해 역사를 바꾼 ‘바보 노무현’에게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
김누리 ㅣ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한겨레 2020.03.15.
지구적 위기, 지구적 협력
아킬레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모순적 영웅이다. 무적의 전사였고 무엇으로도 상처를 입지 않는 ‘강철의 몸’을 갖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테티스가 갓난아기였던 아킬레우스의 온몸을 저승의 스틱스강에 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아킬레스건’, 테티스가 아킬레우스의 몸을 스틱스강에 담그며 붙잡고 있던 발뒤꿈치에는 강물이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 발뒤꿈치에 독화살을 맞아 죽었다.
해서 아킬레우스는 모순적이다. 한편으로는 영원히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몸을 갈망하는 인간의 꿈을 육화했다. 하지만 그 꿈을 자신의 힘만으로 만들어보려는 개인주의, 그 개인주의에 기반한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치명적 한계도 같이 육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티스는 바다의 요정으로서 자신만이 지닌 능력을 발휘해 제 아들만이라도 불사신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바로 그 ‘각자도생’은 아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을 맞아 아킬레우스를 소환하는 이유다.
신자유주의는 건강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건강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었다. 헬스장에 회비를 납부하는 대가로 ‘몸짱’을 사고, 병원과 약국에 비용을 지불하여 건강을 사는 것이었다. 심지어 건강한 모습의 상징인 젊음, 적어도 젊은 모습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땀을 흘리고 근육을 강화하고 심폐기관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건강은 자신의 책임이자 권리라고 사방에서 아우성이었다. 돈이라는 ‘스틱스강’에 몸을 담그면 ‘아킬레우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코로나19는 그런 신자유주의의 아킬레스건을 물었다. 당장 돈이 있어도 마스크를 살 수 없다. 돈이 있어도 면역을 살 수 없고 치료도 살 수 없다. 건강을 사기 위해 찾은 헬스장이나 병원, 약국에 감염자가 있다면 오히려 치명적이다. 자기 혼자서 아무리 땀을 흘리며 근육을 키우고 심폐를 강화해도 바이러스를 막을 수는 없다. 물론 건강하고 기저질환이 없다면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회복될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길고도 고통스러운 투병기간은 피할 수 없다. 감염 검사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개인의 자율과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만 맡겨둔다면 감염의 기하급수적 확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해서 이제 모두 국가의 개입을 청한다. 검사와 방역에도, 환자의 격리와 치료에도 국가가 나서기를 바란다. 물론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국가의 개입이 너무 늦었다, 너무 미온적이다, 정교하지 못하다… 등 개입의 방식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국가의 역할이 사활적이라는 데에는 모두들 동의하는 모습이다. 중국의 시진핑 정부는 초기 대응에 대해 비판을 받았지만 추후 강력한 통제정책을 펼친 결과 감염자의 폭증을 막는 데 성공해, 초기의 예상과는 달리 정권을 공고화하는 모습이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는 변덕스러운 대응정책으로 비판을 받으면서도 특별조치법을 개정해 정부의 각종 통제 권한을 강화하고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입국금지를 선언한 것에서 보듯 이제는 개인별 각자도생을 넘어 ‘국가별 각자도생’을 추구하고 있다. 자국의 건강과 안전만이 최우선이라며 국경에 장벽을 치고,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마스크와 의료장비의 수출을 금지하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등 각 국가가 ‘테티스’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한계를 안고 있는 세계보건기구는 이 와중에 시나브로 더욱 힘을 잃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수십개 나라가 대놓고 국제보건규칙을 어기고 있고, 발병 상황을 공유하라는 의무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지구적 위기에 대응하려는 지구적 협력은 요원하다.
돌이켜보면 국제보건규칙이 만들어진 1969년 이후 세계는 건강이라는 지구적 공공재를 만들기 위해 협력하며 큰 진전을 이뤘었다. 1967년 한해에만도 1500만명을 감염시키고 200만명을 죽일 정도로 위세 등등했던 천연두를 박멸한 것이 1979년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1980년대를 거치며 각국 정부는 건강 및 보건 예산을 크게 삭감했고, 보건 원조가 줄어들며 저개발 국가들의 보건 서비스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 에볼라, 사스, 메르스 등 각종 전염병이 세계를 도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 하나가 된 지구에서 각자도생은 불가능하다. ‘아킬레우스’를 꿈꾸다가는 그의 운명을 맞을 것이다. 건강은 함께 가꿔야 할 지구촌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겨레 2020.03.15.
미래세대의 기후소송
기후변화’가 미국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를 처음 장식한 때가 1988년 6월24일(현지시간)이다. 제목은 ‘지구온난화는 시작됐다, 전문가 상원에서 말하다’였다. 미국 항공우주국의 제임스 핸슨 박사는 전날 미 상원에서 “지구온난화가 이산화탄소와 다른 온실가스에 의해 강화된다고 99% 확신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은 대중들에게 지구온난화·기후변화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그 피해가 미래세대의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경종이었다. 하지만 정부를 움직이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15년은 기후변화의 또 다른 이정표가 세워진 해였다. 그해 12월에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됐다. 195개국이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합의했다. 기후변화 소송에서도 새 역사가 쓰였다. 그해 6월24일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네덜란드 헤이그지방법원은 환경단체 위르헨다와 시민 900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항소법원(2018년 10월)과 대법원(2019년 12월)을 거쳐 확정됐다. 네덜란드 정부는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25% 감축해야 한다.
그해 8월 미국에서도 의미 있는 기후변화 소송이 제기됐다. 눈에 띄는 점은 원고들이다. 원고 21명은 8~19세의 어린이와 청소년이다. 핸슨 박사의 손녀 소피 키블리핸(당시 16세)도 있었다. 이 소송은 뒷날 스웨덴의 10대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미래세대 환경운동가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기후변화로부터 보호받을 헌법적 권리를 주장하며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했지만 제9항소법원은 지난 1월 청구를 기각했다. “원고의 당사자 적격 사유 부족”이 이유였다.
청소년기후행동 소속 청소년 19명이 지난 13일 “정부의 소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정책이 생명권·환경권 등 헌법적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를 헌법재판소에 냈다. 한국 미래세대의 첫 기후소송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지구온난화 위험에 놓여 있는 다음 세대 청소년들”이라고 했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유독 기후변화 대응에 소극적이다. 이 소송의 결말이 궁금하다. /조찬제 논설위원 경향 2020.03.15.
탄핵 음모와 ‘재난 뉴딜’ 정치연합
다들 저마다 과거로의 퇴행을 막기 위해 선거 전망과 다양한 비례위성정당 제안을 내놓았다. 난 이 곤혹스러운 고민이 가지는 절실함과 진정성을 믿는다. 다만 그중 일부 논객들은 과거 조국, 지소미아, 코로나19 사태에서 일관되게 일주일 앞도 못 내다본 걸 기억한다. 이분들이 스스로 가장 자랑하는 게 정치 윤리가 아니라 정치 현실주의라는 게 나에겐 기이한 퍼즐이다. 왜냐하면 자주 현실 예측에 실패하는 현실주의는 금시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떡하든 정치연합을 확대하려 하기보다는 비생산적으로 감정을 건드리고 진보정당의 핵심 지역구 기반을 위협하는 등 정치연합을 축소하는 데 매진하는 건 현실주의가 아니다. 이번엔 이들의 수학적 시뮬레이션 능력이 맞을 것이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의 균열이 선거 이후 복합위기의 비상조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확장된 연합의 걸림돌이 될까 난 두렵기만 하다. 어느덧 현실지형이 되어버린 비례위성정당 추가 논쟁은 비생산적이다. 어떤 선거 참여 형태이든 이제는 시민들의 판단에 과감히 맡기자. 오히려 남은 기간 및 선거 이후엔 다음 공동 행동에 힘을 모으면 어떨까 제안한다.
첫째, 균형예산론 거부 선언과 재난 뉴딜 정치연합을 결성하자.
오늘날 균형예산은 무책임하고 보수의 철 지난 패러다임이다. 이번 행정부가 보수 정부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 ‘재난 자본주의’ 단계는 팽창이 아니라 수축 국면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확장적 재정 정책을 넘어 심지어 ‘현대화폐이론’의 완전 일자리 보장을 위한 국가 책임론까지 논쟁이 되는 세상이다. 이 이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만큼 현 단계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 국면은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한다. 청와대는 그저 전례 없는 대책을 주문하는 곳이 아니라 전례 없는 대책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당장 추가 추경의 폭에 대한 기술적 논쟁을 넘어 균형예산론자들 및 이와 다른 관점의 진보 경제학자들의 근본적 패러다임 토론부터 벌여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당장의 한시적인 재난 안정소득에서부터 총선 직후 기본소득과 청년 사회상속제에 이르기까지 ‘뉴노멀과 (그린) 뉴딜 정치연합’을 성사시켰으면 한다. 그린 뉴딜? 그렇다. 앞으로 더욱 악화될 감염병 시대는 자연 생태계 파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린 뉴딜에 모른 척하는 건 곧 코로나 사태를 악화시키는 행동에 다름 아닌 반(反)생명 행위이다.
둘째, 코로나19 사태 직후 다가올 복합위기 예방 TF를 초당적으로 구성하자.
정부가 해외 체류 시민 한명 한명의 생명까지 철저하게 신경을 쓰는 미국을 보며 부러웠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하나도 부럽지 않다. 질병관리본부 전문가 및 의료진들의 세계적 수준과 민주 정부의 투명성, 지자체의 창의성을 가진 대한민국에 사는 게 얼마나 축복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21세기 정치는 위기를 뒤쫓아 관리하는 곳이 아니라 미리 예방적 개입을 하는 소명을 가진다. 지금 청와대와 정치권이 할 일 중 하나는 감염병, 기후파국, 식량 위기, 경제 대위기 등에 대한 전문가 TF를 통해 코로나19 사태 종료 직후부터 닥쳐올 새롭고 더 비극적인 복합위기 개입 패러다임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상조치가 일상인 시대에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사회적 거리 ‘줄이기’(특히 장애인, 노인, 외국인 노동자 및 취약 직종 노동자 등과의 강한 연결 확대) 사이에 새로운 균형을 발명해야 한다. 때로는 거리두기가 이들의 각자도생과 안전한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및 정치권이 이 거리두기와 거리 줄이기의 동시병행 담론을 주도해야 한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전혀 차원이 달라진 국제 정치경제 맥락에 대한 적응과 새 패러다임을 준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김석현 인텔리전스코 파트너가 지적하듯이 기존 경제 가치사슬 파괴와 새로운 재난 보호주의를 극복할 비전과 리더십 말이다. 과거 메르스 직후 백서의 가장 핵심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정치권과 달리 이번에는 청와대와 뉴노멀 정치연합이 끈질기게 대비책을 만들고 실행을 조기 완료하길 절실히 호소한다.
시간이 없다. 코로나19 사태는 다가올 거대한 복합위기와 파국의 전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제발 이제 남은 에너지는 현재 긴급 과제와 파국적 미래 예방을 위한 넓고 단단하고 안전한 연결망을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으면 한다. 이 과정을 잘 관리하면 음험한 탄핵 음모는 감히 발붙일 틈이 없을 것이다. 영화 <활>의 유명한 대사가 있지 않은가?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는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경향 2020.03.15.
정태춘 & 박은옥 - 01. 시인의 마을
'세상과 어울리기 > 외부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4.14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사회적 풍경, 그리고 '대전환'의 시작 (0) | 2020.04.15 |
---|---|
3.16~31 코르나 시대의 삶 外 (0) | 2020.04.02 |
2.16~2.27 코로나19와 우리 안의 바이러스들 (0) | 2020.03.01 |
2.4~2.13 코로나 바이러스에는 벌벌 떨면서 (0) | 2020.02.15 |
20.1.18~31 (0) | 2020.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