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바이러스와 숲 생태계 국제 : 2020-02-04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 문제다 한겨레 2020-02-04
기후 위급상황, 한국은? 경향 2020.02.05.
‘조금 먼저 온 미래’ 기호 2020.02.06.
70대의 트럼프와 10대의 툰베리 경향 2020.02.07.
감정의 잠복기 투데이신문 2020.02.07
'묻지마' 통합, '떴다방' 창당…심판은 유권자 몫 프레시안 2020.02.07.
보수는 진보를 이길 수 없다" 노우호 목사 NEWS-1
코로나 인종주의를 경계한다 프레시안 2020.02.07.
바이러스는 말한다, 또 온다고” 경향 2020.02.10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 경향 2020.02.11.
전염병만큼 위험한 것 경향 2020.02.11.
전염병’과 전쟁 중인 국민에 총질하는 언론 한겨레 2020.02.11.
투기와 시장가격 경향 2020.02.12.
이성 잃은 조선·중앙의 ‘코로나19’ 보도 한겨레 2020.02.12.
크루즈와 바이러스 경향 2020.2.13.
능력마저 세습되는 사회 한겨레 2020.2.13.
신종 바이러스와 숲 생태계
숲은 신기한 힘을 갖고 있다. 지난 20년간 몽골, 미얀마에서 국제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가 축구장 1500개 면적의 숲을 만들면서 이런 경험을 했다. 처음 기후위기로 황폐해진 마을을 찾아갔을 때 숨 쉬기 힘든 건조한 공기, 바짝 말라 먼지가 된 흙과 만나야 했고, 땅은 쥐들의 천국이었다. 여기서 마을 주민과 함께 나무를 심었다. 그동안 나무들이 자라 숲이 되었는데 정말 신기했다. 어디서 왔는지 생명체들이 나타나 숲을 채워 갔다. 주변에 보이지 않던 개구리, 여우, 뱀, 토끼, 매들이 돌아왔고 땅도 건강하게 살아났다. 특히 오래된 숲들은 병충해도 스스로 해결했다. 숲은 주민에게 식량도 제공했다.
문제는 이런 숲들이 파괴되었을 때다. 1997년 인도네시아는 농사를 위해 숲을 없앴다. 그 숲에 살던 과일박쥐들은 서식지와 먹이가 사라지자, 근처 말레이시아의 과수원으로 이동했다. 박쥐들이 과일을 먹다 땅에 흘렸고, 그것을 먹은 돼지들이 박쥐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1999년, 감염된 돼지들을 통해 주민 265명이 심각한 뇌염에 걸렸다. 그중 105명이 사망했다. 이것이 박쥐가 옮긴 ‘니파 바이러스’의 시작이다.
2016년 2월 미국 예일대 과학자들이 페루의 숲 사례를 발표했다. 1995년 페루는 오래된 숲을 걷어내고 농토와 도로를 만들었다. 그 후 생긴 문제다. 숲이 있을 때 그 지역은 해마다 600명이 말라리아에 감염됐는데, 숲이 베어진 후 매년 12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 사례처럼 숲이 개발로 사라지면서 치명적인 신종 바이러스가 발생한 사례는 무척 많다. 에볼라, 에이즈, 사스, 뎅기, 지카가 그것이다.
숲이 사라지면 왜 이런 신종 바이러스가 발생할까? 그동안 인류와 접촉하지 않던 숲의 닫힌 시스템이 열렸기 때문이다. 오래된 숲에는 인류가 겪지 않은 수많은 바이러스가 있다. 이 바이러스들이 닫힌 숲속에서 동물과 함께 진화해왔다. 그래서 숲에 사는 기존 동물에게는 바이러스가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숲이 사라지면서 그 닫힌 시스템이 열리게 되고, 바이러스와 동물은 인간 사회와 접촉하게 된다. 이때 면역력이 없는 인류는 신종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2003년 ‘사스’이고, 2015년 메르스이고, 지금의 중국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다. 사스 때처럼 빨라도 6개월 뒤에나 지금의 신종 바이러스는 소강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발생하지 않을까? 과연 그럴까?
올해 1월 23일, ‘사이언스 얼러트’는 미중 과학자들이 티베트 굴리야(Guliya) 빙하에서 28종의 고대 바이러스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이 과학자들은 빙하가 녹아 고대 바이러스들이 면역력이 없는 인간 사회와 접촉하는 것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본다. 빙하라는 갇힌 시스템 안에 있던 고대 바이러스들은 지구 온도가 오르면 언제든지 인류와 접촉할 수 있다.
숲과 빙하가 사라지면 신종 바이러스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게 된다. 그 판도라 상자가 우리와 먼 브라질, 티베트에서 열렸다고 안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바이러스가 비행기 속도로 이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결국 인류는 숲을 베고, 기후위기를 만들면서 신종 바이러스라는 난제를 만난 셈이다.
신종 바이러스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신종 바이러스가 발생하면 보건 당국들의 긴밀한 국제협력과 적극적 대응이 시작된다. 마스크, 손 씻기, 격리 외에는 답도 없다. 발생할 때마다 인적, 경제적, 정신적 피해 규모는 계속 늘어난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병원균을 줄이는 것이 먼저다. 그러려면 열어 놓은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야 한다. 사라진 숲을 복원하고, 오래된 숲을 보호하고, 온실가스를 줄여야 판도라 상자는 닫힌다. 숲을 복원하면 숲은 온실가스의 저장고 역할을 할 것이다. 기후위기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된다.
2003년 사스로 지구촌은 45조 원의 비용을 치렀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190조 원이 든다고 한다. 지금부터 숲을 보호한다면 바이러스 발생 때마다 치러야 할 비용의 1/10로도 판도라 상자를 닫을 수 있을 것이다. /오기출 푸른아시아 상임이사 국제 : 2020-02-04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 문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1월에는 꼭 스키를 탔다. 고향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도, 현재 거주하는 오슬로도 북위 60도에 위치하고 있어 1월에는 보통 강설량이 풍부했다. 그러나 올해는 아직 한번도 스키를 타지 못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스키를 탈 만한 눈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멀리 산에 가거나, 아예 비행기를 타고 북부 노르웨이로 가지 않는 한 말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오슬로의 기온은 영상 6도, 가을과 같은 비가 눈 대신 줄줄 내리고 있다. 평년 1월 기온은 영하 2~3도인데, 올해는 기온이 이 정도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겨울이 이번에 취소됐다”고 쓴웃음 섞인 농담을 주고받곤 한다. 줄줄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전 지구를 덮치려는 커다란 재앙의 도래를, 대부분이 감지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이제 가설이 아니고 매일 몸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이다. 사실 노르웨이보다 이 현실 속에서 한국이야말로 훨씬 더 많은 피해를 보고 있고 앞으로는 더욱더 많은 피해를 볼 것이다. 2018년 8월2일처럼 서울의 밤사이 최저 기온이 30.3도 정도 되어 시민들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초열대야 현상만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계속 오르는 해수면은, 2100년쯤 되면 군산이나 목포가 침수 위협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풍은 과거보다 더 파괴적일 가능성이 크고 가뭄은 더 잦아질 것이고 쌀 생산량은 5~10% 정도로 감소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인구가 과밀하고 경작 가능한 면적이 제한된데다가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스칸디나비아에 비해 기후변화에 훨씬 더 취약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스칸디나비아보다 한국에서 기후위기 대책의 문제가 여론의 공간에서 훨씬 덜 의제화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기후 이변의 문제야말로 ‘백년대계’가 절실히 필요한데 말이다.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두 부분은 한국 사회가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 인류의 장기적 생존 자체가 위협에 놓일 이 시점에 여전히 ‘성장 동력’을 논하는 보수 언론들은 과연 어느 행성에서 사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앞으로 이 지구에서는 성장이 아니고 생존이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실 온난화가 가장 심한 타격을 줄 생산 부문의 하나는 아마도 농업일 것이다. 이미 지금도 일부 연구에 의하면 세계 농업이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해마다 치러야 하는 추가 비용은 140억달러 정도 된다. 앞으로 20~30년 동안 이상기온과 한발, 농지 침수 등에 따른 세계적 식량 가격의 비정상적 폭등이 예상되며, 대부분의 연구자가 2050년 이전까지 기후 이변이 세계적으로 평균 5~25% 정도의 실질 식량 가격의 인상을 가져올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 전개에 따라 일부 품목의 가격 폭등 폭은 훨씬 더 클 수도 있다.
지금 성장 동력 운운하기보다는, 이런 비상 상황 속에서 한국의 식량 자급률이 48.9%, 곡물 자급률이 23.4%라는 것부터 마땅히 걱정해야 한다. 한국의 보수 언론들은 걸핏하면 ‘선진국’을 들먹이지만,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미국의 식량 자급률은 124%이며 프랑스는 111%, 독일은 80%, 이탈리아는 63%다. 참고로 북한의 식량 자급률도 90% 정도로 추정된다. 사실 산업화한 나라들 가운데에서는 한국이야말로 온난화가 가져올 식량 문제에 가장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편이다. 젊은이들의 귀농 환경 조성 그리고 도시농업 등의 국가적 장려야말로 현재로서는 가장 시급한 의제가 아닐까?
둘째, 지구온난화는 일부 지역을 더 이상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지금도 방글라데시는 해마다 국가 면적의 약 18%가 홍수로 침수된다. 온난화 속도와 해수면 상승 속도에 따라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존재하지만, 2100년에 이르면 방글라데시 면적의 대부분이 영구적으로 침수될 확률도 있다. 방글라데시의 총인구는 지금 1억6천만명이다. 방글라데시뿐인가? 역시 온난화 시나리오마다 수치가 다르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난민의 총수는 최악의 경우 2060년에 약 14억명, 2100년에는 약 20억명이 될 수 있다. 이 재앙을 인류 전체가 만들어낸 이상, 이 재앙이 발생시킬 이재민에 대한 책임 역시 인류 전체가 짊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도 세계의 일부분인 이상 결코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현재 방글라데시 방직업에 대한 최대의 투자국이다. 방글라데시의 저임금 노동 착취로 큰돈을 벌고 있는 입장에서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할 이재민의 일부에 대해서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아마도 세계 여론일 것이다.
사실 자연재해로 인한 이민의 증가는 재앙이 아니라 ‘기회’이기도 하다. 어차피 2028년부터 인구 감소가 시작될 대한민국에 고령화가 급속히 진전되면 ‘일손’부터가 대단히 많이 필요할 것이다. 2067년에 이르면 한국 총인구의 46.5%가 65살 이상의 노인일 것이다. ‘성장’? 이런 상황에서 현재 생활 수준이라도 유지하고 현재 인프라라도 가동시키려면 매해 상당수 이민자의 유입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식량 위기 대책의 문제처럼, 기후 난민 폭증에 따른 대량 이민의 시대를 준비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장기적 생존의 문제다.
그러나 이민자 대량 유입의 시대에 대비하자면 현재 이민 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현재 같으면 주로 여성인 결혼 이민자들은 사실상 동화시키고, 남성이 비교적 많은 고용허가제 노동자들은 단기 체류만 허용하고 결국 내보내는 것이 이민 정책의 뼈대다. 그러나 대량 이민의 시대에는 여성 이민자들에게 김치 담그기를 가르치고 명절에는 한복을 입혀 시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게 하는 행사들이 상징하는 동화 정책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민자들이 한국의 공공 공간에서는 한국어를 쓰더라도 그들의 소사회 안에서는 각각 그 민족어를 계속 쓰고 고유 풍속들을 지키는,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 사회를 이해하고 용인하는 새로운 세대를 우리는 이제부터 길러내야 한다. 세계사 과목은 선택이고, 그 내용 중에서는 예컨대 많은 이민자를 발생시킬 동남아시아에 대한 부분이 극히 적은 오늘과 같은 교육체계를 가진 사회로서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닐 것이다.
인류 전체를 덮칠 재앙을 한국이라고 해서 결코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 지금부터 ‘백년대계’를 세워 계획적으로 대비하기 시작한다면 현재보다 다양하고 관용적인 사회를 만드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0-02-04
기후 위급상황, 한국은?
이제는 기후 변화가 아니라 기후 위급상황(emergency)이라 한다. 더 손쓸 수 없이 격변으로 이어질 임계점에 가까웠다는 말이다.
대기 중에는 태양에서 오는 빛과 지구 복사열이 지구 밖으로 반사되거나 방출되는 것을 막아주는 온실가스가 있어 평균기온이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된다. 온실가스가 많아지면 더 많은 열이 갇혀 기온이 상승한다. 자연 상태에서 온실가스의 양은 변동하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 있고 그래서 지구 평균기온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유지되었다. 이런 지구환경에서 생태계와 생명체들이 진화를 거듭해 온 역사가 적어도 40만년이라는 사실이 북극 빙하에 저장된 정보다. 과학자들이 이런 연구를 시작할 무렵인 1950년을 기준으로 지난 40만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의 상승은 최대치 약 섭씨 2도 이내에 머물렀다. 최대치의 기온상승은 최대치의 이산화탄소 농도로 발생했고 이런 기온과 이산화탄소 간 관계는 믿고 싶지 않지만 너무 잘 설명된 과학적 사실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된 지구 대기와 기온의 균형은 화석연료에 의존하여 인류의 생산 활동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땅속에 고체와 유체로 갇혀있던 대량의 탄소가 해방되어 300년 가까이 대기 속에 잔존하는 것이다. 지금 상당량의 대기 중 탄소는 산업혁명 이후부터 오래전에 해방된 것들이다. 대부분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이뤄진 일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지난 40만년 동안의 최대치를 넘었고 조만간 그 두 배에 이른다. 이대로 가면, 인류와 지구 생태계는 경험하지 못한 기온 상승을 겪는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모험을 피하자는 것이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이다. 그 실행방안으로 교토의정서 그리고 이어진 파리협약하, 국제사회는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현 배출량의 50%를 감축하고 2050년까지는 100% 감축하는, 이른바 탄소중립의 목표로 가고 있다. 이렇게 하면 평균기온 상승을 섭씨 2도 이내로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선진국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연방정부가 반대 선언했던 미국에서도 상당수의 주 정부들이 적극적이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2005년 대비 80% 배출량 감축 목표를 세웠다.
교토의정서가 올해 만료되고 내년 새 기후체제가 출범하면 국제사회 압력은 강화될 것이다. 주요 선진국과 중국 중심으로 재생에너지 기술개발과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누가 성공적으로 대처하느냐에 글로벌 경제 주도권이 달려있다.
국제사회가 탄소중립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가능한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첫째는 원자력에 의존하지 않고 재생에너지만으로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것이고, 둘째는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다 활용하는 것이다.
나는 첫째가 좋다 생각한다. 단, UNFCCC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재생에너지 기술발전과 온실가스 감축의 혜택이 선진국과 후진국에 ‘공평히’ 나누어진다는 전제하에서. 어느 선진국도 온실가스 협약을 기회 삼아 재생에너지 기술패권을 행사하고 후진국 경제개발 기회의 사다리를 걷어차선 안된다. 원숭이에서 갓 벗어난 인류에게 기대하기 힘든 도덕성이다. 재생에너지 기술발전이 화석연료를 완전 대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불확실성이 크다. 이 때문에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이 원자력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첫째 시나리오는 현실적이지 않고, 결국 둘째 시나리오로 갈 공산이 매우 크다.
정전체제하에서 남한은 에너지 섬이다. 대륙과 에너지 협력망을 형성하기에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제약이 크다. 독자적인 재생에너지 확보도 어려운 여건이다. 원자력을 포기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다. 기후변화 문제와 원자력의 환경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기 어렵다면 우선순위는 전자에 둬야 한다. 그래야 재생에너지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기술경쟁과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시급한 과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에너지 섬이 홀로 탄소중립으로의 폭풍을 이겨내려면 충분한 기저발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저발전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에너지 공기업의 전문성, 독립성, 책임성도 필요하다. 그래야 공급 안정성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분산형·참여형 미래 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 기술개발에 선도적으로 나서야 함은 물론이고, 최고의 정보통신기술과 인프라를 활용하여 적정 에너지 가격을 매개로 수요자와 공급자가 분권화된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탄소중립이란 시대적 과제를 극복하여 기술선도국으로 발전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분배정의연구센터장 경향 2020.02.05.
‘조금 먼저 온 미래’
이번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는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졸업식장 현수막에 적힌 글이다. 인구절벽 이야기는 자주 들어서인지 경각심이 전해진다. 행복하고 안전한 육아를 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던 목소리들이 궁금하다. 웅변대회 나온 초등학생 발표자의 "이 연사 믿어주십시오"라는 말에 더 신뢰가 갈 만큼 현실적이 못한 상황이다. 그분들은 가시적인 숫자로 업적을 강조하고 있지만 아이 키우기가 만만하지 않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한반도에서 단일민족으로 5천 년을 이어온 우리가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누구는 말한다. 얼마간의 과장이 있다 치더라도 긴장감이 온다.
2019년 3월 1일을 기준으로 폐교한 학교가 전국에 3천803개나 된다고 해서 놀랐다. 전남의 824개 학교, 경북 725개 학교 폐교를 선두로 농어촌은 말할 것도 없고, 중소도시 대도시에도 문 닫은 학교 수가 상상 이상이다. 유입 인구가 많은 인천에서도 57개 학교가 문을 닫은 실정이다. 3부제 수업까지 했었던 내 유년기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출생아 수가 줄어들다 보니 올해 초등학교 입학생이 43만6천455명이라고 한다. 10년 뒤인 2030년이면 올해보다 10만9천633명이 줄어들 것이라는 통계청 발표가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절정인 58년 개띠 출생아가 100만 명이라고 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감소 폭이 엄청나 인구절벽이라는 사회학자의 경고가 현실로 다가온다.
인구 감소만큼 심각해지는 노인 문제도 무겁다. 내 또래는 빠르면 10년, 길어도 20~30년 후의 모습을 자주 이야기한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모신 나이가 되어서다. 설 연휴 끝나고 만난 자리에서 서글픈 우리의 미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도 하고, 모시지 못하는 불효를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이미 1인 가구가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전통적 가구 수를 넘어서 전체 가구 중 30%를 육박하는 598만7천 가구라고 한다. 2047년 무렵이면 40%가 1인 가구이고 이 중에서 65세 이상 고령 가구주가 1천105만8천 가구가 돼 고령자 가구 수 비중이 49.6%라는 통계청 발표를 인용하며 우리의 노년을 어떻게 할 것인지 갑론을박 진지했다. 누군가가 여행 중에 선술집에 걸린 글귀에 폭풍 공감을 했다며 들려준 내용이다.
- 사랑에 빠지는 18세, 욕탕에 빠지는 81세. 사랑에 숨 막히는 18세, 떡 먹다 숨 막히는 81세. 학교 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 고혈압 걱정하는 81세. 아무것도 모르는 18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가 찾아나서는 81세.
들어보면 기막힌 대구로 노년으로 가는 우리의 미래를 선행학습하게 한다. 욕실에서 미끄러져 고관절이 골절되고 치매로 기억을 잃고 부정맥이나 심근경색 뇌졸중 고지혈증이나 혈압 당뇨를 앓고 골밀도 퍼석해서 뼈에 바람이 들고. 우리보다 먼저 온 부모님의 노쇠를 경험한 터라 인구 감소 못지않은 노년의 허허로움에 지혜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며 진지해졌다.
짧은 2월은 후딱 지나갈 것이고 이어서 4월 총선으로 마음 급해진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환상적인 공약이 아름다울 것이다. 쓴 약에 반짝 단 것을 입힌 당의정으로 현혹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우리가 우리 땅에서 소수 민족으로 전락해서도 안 되고 백년대계 학교가 줄줄이 폐교해서도 안 되고 아이 웃음소리가 명랑한 집집을 상상하며 평온한 노년을 준비해 한세상 흐뭇하게 돌아보는 노후를 그려본다
신효성 국제PEN한국본부 인천지역부회장/소설가 기호 2020.02.06.
70대의 트럼프와 10대의 툰베리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70대 노인과 10대 청소년. 이들은 2019년 9월 미국 뉴욕의 어색한 첫 만남 이후 2020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또 만났다. 이들의 입장을 재구성해보자. 트럼프가 툰베리에게 말한다.
“잘 알겠네. 우리도 나무 1조 그루 심기에 동참하겠네.”
“아니, 나무 심기로는 불충분해요.” 툰베리가 쏘아댔다.
“지금은 비관이 아니라 낙관할 때란다. 비관론을 퍼뜨리는 예언자나 대재앙에 대한 예언을 거부해야 돼.” 기후위기에 놓인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트럼프가 소리를 높였다.
“나무만 심어선 안 되고, 온실가스 배출을 당장 멈춰야 해요. 우리들 집(지구)이 불타고 있는데, 당신들의 무대책이 불난 집에 부채질이나 하잖아욧!” 툰베리가 기후위기에 진지하게 대처하라며 목청을 높였다.
트럼프와 툰베리는 몇몇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단순히 나이 차이나 세대 차이 문제가 아닌 셈이다.
첫째, 트럼프의 문제의식과 툰베리의 문제의식은 깊이에서 차이가 크다. 트럼프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뭐~? 지구온난화, 기후위기? 하도 떠들어대니 좀 귀찮지만 뭔가 시늉은 해야겠다, 이런 식! 2020년 다보스포럼에서 ‘나무 1조 그루 심기’ 제안이 나왔으니 동참하면 크게 손해 볼 것도 없지 않나, 하는 계산. 그러나 툰베리의 문제의식은 다르다. 최근 남한보다 큰 면적을 태우고 캥거루와 코알라 10억마리의 터전을 앗아간 호주산불 사태에서 보듯, 인류의 집인 지구에 대형 화재가 났다. 그 불을 끌 생각은 않고 왜 다들 모른 척할까? 게다가 이 기후위기를 초래한 온실가스 배출을 당장 중단해도 모자라는데, 왜 모두 아무 일 없다는 듯 살고 있나? 이런 생각. 70대 노인이 10대 아이에게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
둘째, 트럼프의 실천과 툰베리의 실천은 그 진정성에서 차이가 크다. 트럼프는 나무를 많이 심으면 온실가스의 주범 이산화탄소를 잘 흡수해 문제가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 본다. 그래서 나무심기 실천에 동참하겠다는 것. 그러나 진정성은 없다. 진정성이 있다면, 나무심기와 동시에 온실가스 배출 중단 조치도 해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 중단은 마치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유입과 확산을 차단하는 조치처럼 단호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당장 미국 대도시의 ‘트럼프 빌딩’부터 문 닫아야 한다. 아니, 미국 전체, 나아가 자본주의 세계가 멈춰야 할 것이다. 실은 그렇게 해도 이미 때늦은 감이 있다. 반면, 툰베리의 실천엔 진정성이 있다. 초등 시절에 지구온난화 문제를 배운 뒤, 집이나 학교에서 나름 실천하려고 애썼다. 주변에 진정성 있게 반응하는 이가 없자 말문을 닫기도 했다. 미국 뉴욕에 초청되어 갈 때도 비행기 대신 요트로 4800㎞를 건넜다. 그의 진정성을 일찍 알아본 세계의 청소년들이 툰베리와 함께 행동한다. 구미 각국의 정치경제 지도자들이 가진 위선적 태도까지 날카롭게 비판한다.
셋째, 이러한 트럼프와 툰베리의 의식과 실천에 큰 차이가 생긴 근거는 뭘까? 나는 그 기저에 흐르는 세계관에 주목한다. 트럼프의 세계관은 자본의 논리다. 부단히 가치 증식을 하려는 것. 상품과 화폐의 원리로 표현된다. 자본의 돈벌이를 위해 군사전쟁이나 무역전쟁도 불사하고, 한반도 문제 역시 분단 극복과 평화의 시각이 아니라 무기장사와 세금약탈 방식으로 접근한다. 트럼프가 두려워하는 건 지구 공멸이 아닌 사업 실패! 반면, 툰베리의 세계관은 생명과 공생의 원리다. 지구라는 공동의 집이 지속 가능하기를 소망한다. 불편함과 귀찮음도 감수한다. 충분함을 아는 태도. 그러나 거짓과 위선에 대해선 단호하다. ‘강자 동일시’도 않는다. 그 눈빛에 비굴이나 굴종은 없다.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어떤 길을 가겠냐고 묻는다면, 우리의 답은? 돈벌이 중독에 빠진 정치경제의 지도자들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른바 ‘환경운동’ 등 시민사회 진영조차 이런 문제에 일관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못해 안타깝다. 이미 ‘환경’이란 말부터가 사람과 자연을 분리하는 이분법의 시각이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 삶의 방식(소유, 생산, 소비, 유통, 분배, 폐기 등)이 무한한 가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 상품, 화폐, 노동이라는 범주에 갇혀 있는 한, 지구 생태계의 파국이 불가피하다는 것. 이런 의미에서 환경운동은 노동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등과 굳세게 연대해 지구를 구하기 위한 반자본, 탈상품, 반개발 운동에 나서야 한다. 바보야, 문제는 나무가 아니야. 우리에겐 ‘비상 브레이크’가 필요해!
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경향 2020.02.07.
감정의 잠복기
대상포진에 걸렸던 적이 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4학년 때 일이다. 나는 전공이 도예였고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해 여름방학엔 학교에서 졸업전시회 준비를 하느라 집에 가지 않고 지냈다. 선배가 차린 회사에 취업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방학 때 미리 바짝 작업을 해 두면 가을엔 취업계를 내고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마지막 학기엔 돈을 벌면서 학비 외에 드는 하숙비나 생활비 등을 아낄 심산이었다.
내가 살던 하숙집은 원래 학기 중에만 학생을 받고 방학 땐 하숙을 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나갔는데 양해를 구하고 홀로 남은 입장이라 방학 동안 방 값만 내고 식사는 알아서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주방기구는 전기 주전자가 유일했다. 처음 며칠은 식당에서 밥을 사 먹었지만, 이내 돈도 아낄 겸 식사를 부실하게 하다가 결국 하루 두 끼를 모두 컵라면으로만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젊음을 방패삼아 먹는 걸 대충 넘긴 탓도 있다. 그러나 넉넉치 못한 집안 형편에 부모님께 손 내밀기 뭐해서 주머니가 얄팍한 이유가 가장 컸다. 식당에서 한끼 식사에 지불할 돈이면 인스턴트 라면으로는 며칠을 지낼 수 있었다. 물론 부모님께는 잘 먹고 잘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두어 달이 지나자 몸이 시름시름 안 좋아졌다. 심한 몸살 감기처럼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데 막상 기침은 안 나왔다. 대상포진이었다. 대상포진은 어렸을 때 들어온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 속에 남아있다가 훗날 몸이 약해지거나 면역력이 떨어지면 다시 활동하는 병이다. 신경계를 따라 몸 여기저기에서 작은 수포 알갱이가 띄엄띄엄 줄을 지어 올라왔다. 다행히 초기라 치료받고 약을 먹어서 금세 회복했다. 몸이 건강하면 대상포진에 잘 걸리지 않는다. 돈 아끼려다가 몸만 상하고 계획에 없던 약값을 들인 셈인데, 나는 그나마 뭘 사 먹을 돈이라도 있었으니 그 정도에 그친 것 같다. 돈이 부족하다곤 해도 내 경우엔 정 상황이 안 좋으면 도움을 요청할 가족이 있었다. 생존이 절박한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하숙집 주인에게 그저 숟가락 하나만 더 놓아주시면 안되겠냐고 간청하지 않아도 됐다.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않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나보다 더 가난했던 친구,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과 학생들은 전공이 도예이니 늘 흙과 씨름을 하느라 육체노동 상태에 있었고, 작업의 특성상 들이는 시간도 일정치 않아 들쭉날쭉 했다. 그런데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면 아르바이트업무와 전공작업 가운데 잠시 제쳐 두어야 할 것을 하나 선택해야 한다. 삶이 빈한하면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자주 놓인다. 그럴 땐 어느 것을 선택하든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일부 중에 포기할 것이 생긴다. 당사자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족 중 누군가가 대신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환경조차 뚫고 나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의지와 능력을 가진 건 아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망자가 나오고 우리나라에서도 확진자가 생겨나자 여러 소란이 일었다.
그 중 내 눈길을 끈 것은 한 배달직종 노조가 중국인 밀집 지역에 배달업무를 금해 주거나 위험수당을 지급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을 향한 여론의 반응이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은 배달노조에게 비판적이었다. 특정한 나라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바탕에 있는 것 아니냐는 쓴 소리들이 빗발쳤다. 해당 노조의 상급 조직에서도 반대성명을 냈다. 당연히 혐오와 차별을 타파하자는 건 백번 해도 모자람이 없는 옳은 소리다. 그러나 혐오와 차별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잠복해 있던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피부 위로 수포를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의 신체든 사람이 모인 사회든 건강할 땐 병증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로든 건강을 잃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가장 허약한 부위부터 증세가 발현된다. 그곳은 대개 그 증세의 원인이 되는 무언가가 잠복해 있던 곳이다.
시대의 변화로 인해 배달업이 정보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달업 일선 종사자들이 다른 직군들에 비해 안정적인 일을 하는 건 아니다. 감정도 비용으로 불리는 시대에 사람들의 귀찮음을 비용으로 치환하는 직종에서 일한다는 건 자기감정의 충족을 제쳐 두는 일이다. 상시적인 생존위협으로부터 받는 불안감을 자신의 정서적 충족감과 맞바꿔 수익을 얻는 것이다. 갈수록 각박해져가는 사회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평소 이런 감정을 묻어두고들 산다. 그건 내부든 외부든 위험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하다. 언제든 위험이 현실화되면 불안과 직면해 있는 가장 허약한 계통을 따라 증세가 올라온다. 신경계를 따라 올라온 대상포진 수포처럼. 배달노조의 요구는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잠재해 있던 혐오 정서의 일부분을 보여준 게 맞다. 그러나 그 요구는 생존의 전장에선 언제나 적대적인 환경을 상징하는 대상을 찾으려는 감정이 웅크리고 있음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들은 그것을 단지 수면 위로 올려냈을 뿐이다. 대중의 감정은 잠복해 있다가 허약할 때 수포를 밀어 올린다. 그럴 때 사회는 유무형의 대가를 치러야 하고 누군가는 직접 몸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개 사람들이 견딜 만하다고 말하는 건 몸으로 견딜 수 있는 저지선까지다. 물질적 손해를 몸으로 대신 때우는 것이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심리적인 방어선이다. 그 즈음에 닿으면 견디는 게 아니라 생존의 갈급함과 비교해 덜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건 두려움과 삶의 일부를 맞교환 해가며 버티는 것이지 자의적인 선택으로 하는 도전이 아니다. 이미 패배한 상황에 시나브로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런 삶이 지속되면 포기의 체화는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올바름을 위해 그것을 누군가에게 강요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럼에도 올바름의 대가를 다는 저울의 추는 왜 늘 쫄리는 기분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기울어져야 하는지, 그 질문마저 올바름을 이유로 묻어두는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인지 의문이 생긴다.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2020.02.07
'묻지마' 통합, '떴다방' 창당…심판은 유권자 몫
정당이 위기에 처하면 통합을 모색하는 건 하등 이상한 사실이 아니다. '위기와 통합'은 한국정당사를 관통해 온 패턴이며 선거 전후의 연합정치는 정치현상으로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기 마련이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나타나는 정당들의 탈당, 통합, 창당 등은 비단 이번 선거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난 2016년 20대 총선 때 선거를 불과 두 달 여 앞두고 창당한 국민의당이 호남을 석권하고 정당지지율 26.7%로서 더불어민주당을 앞선 사례에서 보듯이 정당의 이합집산을 폄하할 일은 아니다.
이전에도 정치적 성장 배경과 가치의 지향이 다른 정파의 결합을 무수히 보아왔다. 1997년 15대 대선 때의 DJP연합이 그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 이념보다 정치공학을 앞세운 통합의 대표적 예이며, 결국 정권 창출에 성공한 사례로 남았다. 정치에는 규범적 측면과 현실적 측면이 있기 마련이다. 명분과 실리는 정치의 양면이고 정치행위자의 입지에 따른 정당의 분열과 통합은 정치의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 행위가 최소한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보편적 상식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명분 없는 탈당과 분당, 합당은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오직 표의 향배를 쫓는 선거공학에 갇히고 말았다. 투표 행위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표시해야 하는 유권자들의 선택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이 의외로 낮게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의 근거이기도 하다. 바른미래당에서 분화한 유승민 의원은 새보수당을 만들었다. 불과 2년 전 안철수의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합쳐서 만든 정당이 바른미래당이다. 안철수 귀국 이후 바른미래당 기반으로 중도정당을 시도할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은 빗나갔다.
자유한국당과 새보수당의 통합이 모색되고 있지만 유승민의 한국당 탈당의 원인이었던 박근혜 탄핵에 대한 입장 정리는 없다. 선거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 주권자의 의지와 헌법절차에 따른 탄핵을 반대했던 세력은 결국 아무 반성도 사과도 없고 보수 진영의 통합이라는 정치공학만 남았다. 불과 1년 반 전에 바른미래당의 손학규 대표는 안철수 당시 바른미래당 서울시장 후보를 도왔으나 이후 외국에 체류하다 귀국한 안철수 전 대표는 바른미래당을 탈당했다. 이유는 실용적 중도정치를 위한 중도정당의 창당을 위함이다. 바른미래당으로는 왜 중도정치가 안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안철수 탈당은 정당의 통합을 촉발하는 유인으로 이어지면서 손학규 대표는 과거 국민의당의 구성인자들이던 민주평화당, 대안신당과의 통합을 선언했다. 한국당은 누구나 다 아는 '떴다방' 정당인 미래한국당을 급조해서 비례의석 확보를 노리고 있다. 정치에서의 최소한의 명분과 염치도 사라졌다.
유권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갈등 관계에 따라 갈라지고 다시 표를 얻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통합하면서 유권자에게는 무슨 염치로 지지를 호소하는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정치를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하려해도 모든 일에는 정도(程度)가 있는 법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시키려는 한국당의 반정치주의와 이를 애당초 예상 못했던 이른바 '4+1 협의체'의 정치력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저래 유권자는 정치를 통해 입신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선거일에 한 표를 행사하는 도구에 불과한 '봉'일 뿐이다. 그래도 세상을 바꾸는 건 유권자의 몫이다. 형해화되다시피한 정당정치를 바로잡는 것도 유권자의 역할이다. 선거민주주의에서 정당정치와 선거를 우회할 길은 없다. 연합정치라는 명분으로 유권자가 결정한 정당구도를 유권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탈당과 분당, 통합을 통해 빈번하게 변경하는 정치 행태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유권자를 가벼이 여기는 일이다. 이에 대한 심판도 역시 유권자의 몫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위기와 통합'이라는 한국정치 문법이 통할지 지켜볼 일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프레시안 2020.02.07.
보수는 진보를 이길 수 없다"
역사는 진보를 향해 달려가는데, 보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문재인 정부가 시작된 후 우리 나라 정치인들 대부분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여당이라는 더불어민주당과 현정부의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야당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유 한국당은 아직도 자신들이 여당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공수처와 같은 기구는 야당에서 주장해야 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여당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적인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지금 공직에 있으면서 기득권을 지켜 내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말하고 있다. 반면에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이 추진한 공수처에 의하여 자신들이 먼저 수사의 대상이 될 것을 알면서도 기어히 관철 시키려는 모습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수구, 보수, 친일파, 꼴통, 꼰대들 보다는 진보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고 70세가 넘었지만 보수적인 사람보다는 진보적인 사람들을 좋아한다. 우리 나라 민주주의는 수구, 보수, 극우, 친일파 보다는 언제나 진보적인 사람들과 개혁주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 만큼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라! 수구, 보수, 극우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소위 이 나라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라 해 봐야 대개 다음과 같은 일 뿐이다.
01. 역사의 진보를 반대하는 일,
02. 범사에 생 트집을 잡는 일,
03. 자나깨나 미국 숭배하는 일,
04. 한결같이 일본 편드는 일,
05.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
06. 허구헌 날 빨갱이 사냥하는 일,
07. 정치자금을 차 떼기로 해 먹는 일
08. 북한을 고립시켜서 고사하게 하는 일
09, 생 사람을 잡아서 간첩으로 만드는 일
10.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는 일
11. 정치, 경제, 언론, 군부, 법조, 카르텔을 지키는 일
수구 보수 극우파 사람들이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들이 하려는 일들은 대개 좋은 일이 아니고 국민을 위한 일들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혹 옛날이 그리워 보수를 자처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젊은 이들이 보수를 자처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진보적인 사고 없이 어떻게 역사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성경과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시대에 앞서가는 선견자들이요 선각자들이요 선구자들이었으며 선지자들이었다. 작금에 우리 사회에서 전광훈 씨와 같은 자를 따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일부 목사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좌파 우파할 때는 유연한 중립이 옳다. 그러나 진보와 유보와 퇴보가 갈등할 때는 당당하게 진보적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역사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발전하지 않을 것 같지만 어느 사회든 조금씩 발전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간단없이 진보하고 발전하는데 보수적인 사고와 사상을 가지고 지키려는 그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21세기에 접어든지도 이미 20년이 넘어서고 있는데 여전히 19세기적 혹은 20세기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들이 역사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잠 1: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게 될 것이다. / 노우호 목사 NEWS-1
코로나 인종주의를 경계한다
[시민정치시평] 혐오가 아닌 연대를 통해 전염병과 싸워야
독일에 유학 중인 지인이 전달해준 내용이다. 그가 학교에 가기 위해 트램을 타자 옆자리에 앉은 독일인이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 날엔 10대 소년들이 그를 쳐다보며 "중국인들이 미개하게 박쥐와 들쥐를 잡아먹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말을 자기들끼리 주고받았다. 또 하루에는 마트의 계산대 직원이 이 학생의 물건들을 계산해준 뒤 보란 듯이 손소독제를 꺼내 손을 박박 문지르기도 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지친 이 학생은 페이스북 계정에 영어로 "그래, 나는 바이러스다. 그러니까 제발 꺼져" 하고 적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Spiegel)> 표지.
독일의 공영 국제방송국 도이체 벨레(DW)는 아시아인을 바이러스의 숙주로 여기는 "코로나 인종주의(corona-racism)"가 최근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시선이 중국인이 이번 바이러스의 최대 피해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힘겹게 전염병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프랑스의 지역신문 <Courrier Picard>는 마스크를 쓴 중국 여성의 사진 옆에 "황색 경계령(Yellow Alert)"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CNN은 이것이 "황색 위험(Yellow Peril)"이라는 단어를 통해 아시아인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오래된 스테레오타입을 떠올리게 만든다고 보도했다. 또 이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정부의 프로파간다와 대중문화가 결합돼, 중국인들을 "불결하고 미개하며 비도덕적인 사회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경향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전했다. 전염병에 대한 패닉이 퍼져나갈수록, 인종주의 역시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독일 정통 주간지 <슈피겔(Spiegel)> 역시 표지사진에 전신 방역복을 쓴 사람 아래에 "코로나 바이러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라는 문구를 사용해 이 병과 '중국'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기사 논조와 무관하게, 이러한 표지사진은 중국 내지 아시아인에 대한 제노포비아(Xenophobia)에 악용될 수 있다.
▲프랑스의 지역신문 <Courrier Picard>표지.
그러나 이러한 '코로나 인종주의'는 비단 서구 백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국 내에서도 우한 내지 후베이성 출신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표현이 만개하고 있으며, 인근 국가인 한국과 일본에서는 중국인 전체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조장되고 있다. 말하자면, 중국인들은 우한 출신자들을, 아시아인들은 중국인들을, 서구 백인들은 아시아인 전체를 '잠재적 바이러스'로 취급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널리 퍼진 '박쥐를 잡아먹는 중국인'에 관한 동영상은 이러한 제노포비아를 조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는 중국이 아닌 남태평양의 어느 섬나라에서 촬영된 이 영상은 '미개한 중국인'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이미지는 국내에서도 '반(反)중국인' 정서를 낳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청와대 게시판의 '중국인 입국금지' 청원은 65만 이상의 청원 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사람간의 교류 자체를 금지하지 못하게 한 WHO의 권고와 전문가들의 조언이 있었음에도, 공포감을 부추기는 언론과 정치권의 프로파간다가 더해진 이러한 여론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반중국인 정서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식당에는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안내문이 걸리고, 네티즌들 사이에는 '노 차이나' 로고가 그려져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사실 질병의 대규모 유행이 낳는 공포가 타자에 대한 조직적 혐오로 번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5년 메르스가 확산되자, 최초 확진자가 여성이라거나, 홍콩에서 한국 여성 두 명이 격리를 거부했다는 잘못된 뉴스가 전파되면서 '김치녀'가 메르스 확산의 주범이라는 여성혐오 댓글이 무수하게 자라났다. 이 일은 분노한 여성들이 소위 '메갈리아' 사이트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80년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자, 동성애자들이 병의 원인이라는 가짜뉴스가 전파되었고, 이 이데올로기는 아직까지도 동성애자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유통되고 있는 '노 차이나' 포스터.
그러한 혐오는 타자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실제로 최근 베를린에서 20대 중국 여성이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욕설과 발길질을 비롯한 폭행을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중세 말 흑사병 창궐기의 마녀사냥, 그리고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살해를 기억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공포는 예속을 낳는 정념인 것이다. 공포는 합리적 사고를 마비시키며, 공동체를 파괴하고 '적'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로 전이되기도 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체는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타자에게 투사한다. 전염병의 공포라는 이 '예외상태'는 중국인, 국내 거주 조선족 동포, 우한 거주 교민들, 나아가 아시아인 전체에 대한 제노포비아의 확산으로 이어지고, '미개한 식습관'을 가진 '바이러스의 숙주'로 규정된 타자를 법의 테두리 밖의 '호모 사케르'로 만들 위험마저 제기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염병 혹은 재난의 공포는 한 사회의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측정할 척도인 셈이다. 침착하게 질병을 예방할 체계들을 실행해나갈 것인가, 아니면 공포에 질려 눈앞에 보이는 타자에 대한 온갖 원한과 증오를 쏟아낼 것인가. 그러나 공포가 일상이 되었듯이, 혐오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민주주의적 인민주권의 토대가 되어야 할 '집단지성'은 아직은 '집단적 정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집단적 공포를 이겨낼 민주적 집단지성의 출현에 대해 나는 비관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겐 공포로 인한 과도한 억측과 편견을 넘어,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지식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예민한 생명정치적 감수성 역시 필요하다. 전염병에 단호하게 맞서되, 바이러스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마저 파괴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혐오가 아니라 연대를 통해 바이러스와 싸워야 한다. 한상원 충북대 철학과 교수 프레시안 2020.02.07.
바이러스는 말한다, 또 온다고”
7만4000년 전 인도네시아의 토바(Toba) 화산이 폭발한 이후로 개체수가 2000까지 줄어든 종이 있었다. 그런데 그 종은 그 이후로 6만2000년 동안 전 세계로 확산되어 1만2000년 전쯤에는 개체수가 400만까지 늘었고, 2000년 전쯤에는 1억9000만에 이르렀다. 그리고 1804년에는 10억이 되더니 거의 10년마다 10억 개체씩 늘어 현재는 무려 77억이다. 7만4000년 전에는 멸절을 걱정하던 종이 지금은 말 그대로 지구를 뒤덮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종에 대한 이야기일까?
호모 사피엔스! 물론 개체수 면에서 77억이 최고라고는 할 수 없다. 가령 소, 돼지, 닭, 양처럼 덩치도 좀 있으면서 엄청난 개체수를 자랑하는 가축들이 있다. 그들의 개체수를 다 더하면 인구의 3배 정도(225억마리) 된다. 어쩌다 이렇게 많아졌을까? 모두 우리 때문이다. 우리가 고기로 먹기 위해 육종하고 길렀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도 치맥을 위해 도살된 치느님은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마리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인류는 적어도 지난 300만년 동안의 생명의 역사에서 진화적으로 가장 성공한 종이다. 여하튼 지구를 뒤덮었으니 말이다. 감히 사피엔스의 독주를 견제할 자 누구랴?
사실, 없었던 것은 아니다. 38억년 전쯤에 시작된 세균의 세계는 아직도 가장 크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의 얼굴에도 득시글하다. 생물량으로 치면 1등을 내준 적이 없다. 한편 세균에서 나온 바이러스도 지구를 뒤덮었다. 지난 20만년 동안 인류의 생존에 가장 위협적 존재가 이들이다. 6세기 남아메리카 인구의 90%를 죽인 천연두,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에 이르게 한 흑사병, 20세기 초 유럽인 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 2012년에 발발해 유럽질병통제본부 통계 기준 528명(한국인 39명)을 사망하게 한 메르스, 그리고 지금 전 세계를 얼어붙게 만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2019-nCoV)가 그 도전장들이다.
이 도전에 대한 인류의 응전은 한동안 고작 회피 전략이었다. 인류 진화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수렵채집기의 우리 조상들은 상한 음식, 썩는 냄새, 피부의 발진 등에 혐오(역겨움) 반응을 일으키는 식으로 그 위협에서 벗어났다. 게다가 전염병은 모든 구성원이 회피 행동에 동참해야만 피해갈 수 있는 위협이다. 즉, 주변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뇌는 병원체에 대한 회피 본능과 집단의 규범을 강조하는 본능이 발동된다.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규범을 중시하고, 규범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고 처벌하려는 경향은 사람들을 집단주의자로 만든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일수록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진화심리학 연구들이 있다.
1만2000년 전쯤에 시작된 농경사회는 인간과 바이러스의 생존에 분수령이 된 시기였다. 그 시대에 인류는 야생동물을 본격적으로 가축화했는데 이는 바이러스에게도 엄청난 호재였다. 야생동물을 보유 숙주로 삼던 바이러스가 농경으로 늘어난 가축들 속으로 침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야생에서 박쥐나 쥐에만 기생하다가 말, 소, 돼지, 낙타처럼 다양한 가축에게까지 자신의 집을 확장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게다가 인류가 음식과 노동을 위해 가축의 수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니 바이러스는 갑자기 늘어난 부동산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폭발적 증가만큼이나 바이러스의 부동산 탐욕도 큰 문제다. 산업화로 인해 조성된 대도시는 바이러스에게도 허브 공항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제는 225억마리 가축과 77억의 인류가 다 그들의 터전이다. 숲을 없애고 야생동물을 몰아내고 공장식 축산을 대규모로 시행하고 대도시에 몰려 사는 한, 인류는 늘 바이러스의 밥이 될 것이다. 인류의 이런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수년 내에, 아니 내년에도 비슷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요즘처럼 일상을 접고 비상상황으로 살아가야만 할까?
‘비상사태’를 넘어 바이러스 감염을 ‘일상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그것을 책임감 있게 잘 지키는 것만이 모두가 살길이다. 수렵채집기와 농경시대 때 잘 통했던 회피 전략이 바이러스와의 현대전에서는 최고 전략이 아니다. 이제는 감이 아니라 똑똑함으로 승부해야 한다. 감염률과 치사율을 모두 고려하여 해당 바이러스의 특성에 적합한 확산 방지책을 합리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우리 뇌는 확률적 사고를 잘하게끔 진화하지는 않았으므로 사망자 수만 보고 과도한 걱정을 하기 쉽다. 하지만 사망률을 고려하면 별것 아닌 바이러스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백신과 치료법도 신속히 개발해야 한다. ‘자연주의’라는 미명하에 검증된 백신을 거부하여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의 아이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사이비단체는 바이러스만큼이나 위험하다. 길게 보면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 발생 및 확산을 감지하고 예보하는 글로벌 예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대유행을 조기에 막을 수 있다. 이런 데에 데이터 사이언스와 AI 기술이 활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근본적으로는 바이러스와 우리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가축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단지 맛에 대한 욕망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량의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육류 생산 시스템이 가동 중이다. 전 세계 곡물의 3분의 1이 가축 사료를 위해 재배된다. 축산업은 농지보다 더 큰 규모의 삼림 벌채를 유발한다. 맛을 버릴 수 없다면 대체육 개발을 통해 가축의 수를 줄일 수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전쟁에는 메타인지와 새로운 기술을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이러스는 곧 다시 우리를 찾을 것이고 더 크게 반격할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경향 2020.02.10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은 옳은가. 만일 그렇다면 아픈 사람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이가 될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이 통념은 건강하지 않은 이들의 사회적 성원권을 박탈하고 우리의 일상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다.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재개념화가 필요한 시대다.
정신질환 환자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진짜 아픈 사람은 저 사람(대개 ‘가해자’)인데, 병원은 왜 내가 다니지?” 건강 상태는 ‘전문가’의 진단, 개인의 감각에 따라 다르다. 육체적 건강에서 정신적 부분을 분리하는 사고방식부터 논쟁적이다. 어떤 상태가 건강한 것일까. 전두환씨의 건강이 ‘불편한’ 사람은 나뿐일까.
건강한 상태는 일상생활의 어려움과 사망의 연속선에 있는 몸의 일생을 계량하는 문제다. 정의하기 어려운 인간의 조건일 수밖에 없다. 건강이 개인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주관적, 경험적이다. 지구상에는 인구수만큼의 면역력과 내성(耐性)의 개수가 있다. 질병도 자신의 행방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몸, 환경, 질병의 삼라만상을 진단할 수 있는 명의는 없다.
누구나 쉽게 아프고 대개 만성 질환이다. 가장 난센스인 것은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가 아닐까. 감기도 우울증도 가볍지 않다. 고통스럽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건강함과 그렇지 않은 상태, 양쪽의 범위가 모두 확대되어야 한다. 건강한 공동체는 건강의 구분이 흐릿한, 즉 ‘아픈’ 몸들이 가시화되는 사회다.
주변을 둘러보면 안 아픈 사람이 없는데도 아픈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안도감’과 피해 의식이 우리를 지배한다. 아픈 사람은 낙오자가 된다. 고령화 시대의 보험산업은 간병의 노동을 위로하기보다 공포를 조장하는 듯하다. 질병이 완치보다 평생 관리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암에 걸리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암 환자도, 장애인도, 질병과 장애의 경계에 있는 이들도 본인의 의사에 따라 ‘건강한’ 이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일상이 최상의 민주주의다.
건강도 경쟁 시대인지라 사람들은 자기 건강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육체적 고통은 타인과 소통이 가장 어려운 영역이자 인간이 두려워하는 최고의 권력이다. 의사의 권력은 그들의 실력, 명예 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의사든 수많은 ‘유사(類似) 의사’든, 그들의 권력은 아픈 사람의 고통에서 나온다. 고문이 최고의 ‘극적(劇的’인 정치인 이유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범주는 빈부 격차로만 한정할 수 없다. 성별, 성정체성, 장애, 이주민, 인종, 외모, 지역 차별까지 다양한 약자가 가시화되고 있다. 하지만 ‘건강 약자’ 개념은 생소하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도, 여전히 개인적 과제로 여겨진다. 건강도 계급에 따라 양극화한다. 사회·경제·심리적 약자는 건강 약자가 되기 쉽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기후 이상을 초래하고, 산불과 사막화는 생명의 멸종과 ‘건강 난민’을 양산하고 있다. 건강이 불가능한 시대에 건강 숭배가 강화되니 더욱 스트레스다.
안전, 안전 보장(그 유명한 안보)의 ‘본뜻(se/cure)’은 완벽한 준비로 근심이 없는 상태(free from care)가 아니라 상호 보살핌이 없는 상황(without care)을 뜻한다. 전자는 “물샐 틈 없는” 언설로 상징되는 기존 국제정치에서의 의미고, 후자는 여성주의를 비롯한 대안적 평화학 개념이다.
‘건강한 젊은이’가 ‘병든 어른’을 싫어하는 현상을 나는 이해한다. 타인의 앓는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누구나 나이 들고 병든다. 고령화 시대, 인간의 평균 투병 기간은 10년이다. 질병 사회는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무서운 팩트다. 시름을 나눌 수밖에 없다. 동병상련과 연대 외에는 대안이 없지만, 마스크 대란 같은 사태는 동병의 처지에도 상련하지 않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준다.
건강을 잃는다고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상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건강을 잃는 것보다 건강과 젊음에 대한 지나친 찬양과 욕망으로 잃는 것이 더 많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마음의 평화’가 대표적이다./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2020.02.11.
전염병만큼 위험한 것
#1. “폭넓게 모으고 있다는 인식으로, 모집하고 있다는 인식은 없었다.”
지난달 28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정부 주최 ‘벚꽃을 보는 모임’을 ‘사유화’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일본공산당 미야모토 도루(宮本徹) 의원이 “(총리 지역사무소의) 참가자 모집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원래 ‘공적·공로’가 있는 이들을 초대하는 모임 참가자를 사무소가 대거 모집해도 괜찮냐는 지적에 이런 기상천외한 답변을 한 것이다. 미야모토 의원은 “48년 일본어를 사용해왔지만, ‘모으다’와 ‘모집하다’는 같다”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20일 시작된 정기국회에서 벚꽃 모임 등 각종 의혹에 대해 “자료가 없다”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2. “중대 또는 복잡·곤란한 사건의 수사와 공판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지난 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모리 마사코(森雅子) 법무상은 지난달 31일 각의(국무회의)에서 이달 7일 정년퇴임 예정이던 구라카와 히로무(黑川弘務) 도쿄고검 검사장의 정년을 8월까지 연장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검사장의 정년 연장은 전례가 없는 일로, 검사 정년을 만 63세로 규정한 검찰청법 위반 의혹까지 제기된 터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결정이 오는 8월 물러나는 이나다 노부오(稻田伸夫) 검사총장(검찰총장) 후임으로 구로카와 검사장을 지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로카와 검사장은 아베 정권과 가까운 인물. 일본 검찰은 복합리조트(IR) 사업과 선거부정 의혹 등으로 자민당 의원들을 수사하고 있다. 결국 정권에 대한 검찰 수사를 무디게 하려는 포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무리수들은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문제가 다른 문제를 압도하고 있는 탓이다. 각종 스캔들로 궁지에 몰렸던 아베 정권으로선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아베 총리는 야당의 추궁에 장기인 ‘밥 논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침밥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쌀밥’에 대해 질문받은 것처럼 ‘먹지 않았다’고 논점을 흐리는 식이다. 야당에 대해선 “이 시국에 ‘벚꽃’만 하고 있다”고 역공하고 있다.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은 지난달 29일 질문에 나선 입헌민주당 렌호(蓮舫) 의원을 두고 “이 상황에서 감염증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는 감각에 놀라고 있다”고 트위터에 올려 물의를 빚었다. 자민당은 심지어 신종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재해 발생 시 내각 권한을 강화하는 ‘긴급사태 대응’ 신설 논의 등을 해야 한다며 ‘개헌론’ 군불을 땠다.
이런 안하무인식 태도는 신종 코로나 정국으로 각종 스캔들이 지지율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판단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전례가 없는 ‘나쁜 사례’를 남발하는 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아베 정권의 각종 스캔들에서 드러났듯 공사를 혼동하고, 공금을 유용하는 것은 국정의 사유화다. 입맛에 따라 검찰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검찰의 사유화다. 어쩌면 전염병만큼이나 위험한 것일지 모른다./도쿄 | 김진우 특파원 경향 2020.02.11.
전염병’과 전쟁 중인 국민에 총질하는 언론
“이러다 다 죽겠다. ‘신종 코로나’에 걸려 죽는 게 아니라, 굶어 죽게 생겼다.”
최근 신문사로 걸려온 독자전화다. 서울에서 자영업을 한다는 그는 벼랑 끝에 몰린 절박한 상황을 호소했다. 거리에는 사람이나 차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식당과 상가는 손님이 없어 한산하다. 모임과 행사도 잇따라 취소된다. 감염자가 다녀간 것으로 알려진 업소는 즉시 문을 닫는다. ‘신종 코로나’가 아니라 불안과 공포 때문에 모두 망하겠다는 얘기가 과장이 아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복병을 만난 한국 경제에 과도한 불안·공포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수출과 생산이 차질을 빚는 가운데 소비심리까지 얼어붙어 내수도 울상이다. 정부도 비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9일 우한 교민 임시거처인 아산·진천을 방문하고, 1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며 “과도한 불안과 공포는 오히려 경제에 해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종 코로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없애는 1차 책임은 당연히 정부에 있다. 방역에 허점이 없도록 해서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다행히 신종 코로나가 아직은 중증이 아니고, 사망자도 없다. 의료계가 꾸린 신종 코로나 대책위원회도 “과도한 불안이나 과잉대응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런데도 과도한 불안·공포가 확산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신종 코로나를 정략의 도구로 이용하는 자유한국당을 빼놓을 수 없다. 우한 교민의 임시거처로 아산·진천이 정해지자, 정부가 총선을 고려해 여당 지역구인 천안 대신 야당 지역구인 아산·진천으로 바꾸었다는 억지 주장을 편 게 대표적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보수언론이다. ‘천안은 지역구 3곳 모두 여당…한국당 “야당지역 골라 바꾼 것 아니냐”’(조선일보) 불안과 공포를 키우는 확성기 노릇을 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천안 간다더니 우리가 호구냐”…아산·진천 주민, 트랙터로 도로 봉쇄’(한국경제) 보수언론은 아산·진천 주민의 반발도 집중 부각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우한 형제님들, 생거 진천에서 편히 쉬어가시오”라는 환영 펼침막을 내걸어, 큰 감동을 선사했다. 같은 언론인이라는 게 부끄러울 정도다.
제3국 감염자가 처음 발생하자 ‘광주 모녀환자 272명 접촉…병원발 제2메르스 우려’(중앙일보)라고 보도했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38명이 숨진 메르스 사태와 아직 사망자가 한명도 없는 신종 코로나를 직접 연관짓는 게 언론의 신중한 태도일까?
언론이 정부의 미비점을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연일 정부 방역에 대해 “우왕좌왕” “혼선” “구멍” 기사로 도배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가짜·과장 뉴스로 정부 불신을 부추기고 불안을 조장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가 엿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시황제의 노예가 돼도 좋은가’(중앙일보) ‘우한 폐렴…국가란 무엇인가’(한국경제) 정부가 중국 후베이성에만 입국제한 조처를 내린 것을 공격한 칼럼은 그 속셈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중국 입국제한 지역 결정은 어려운 문제다. 방역 효과와 함께 중국과의 밀접한 경제·외교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정부가 국민의 안전 보장을 등한시한다고 몰아붙이고, 심지어 대통령을 시진핑 노예로 비하하는 게 정상일까?
‘커지는 중국발 경제쇼크…정책 대전환해 전화위복 삼아야’(한국경제) ‘경제 기조 전환으로 전화위복 절박하다’(조선일보) 보수언론이 위기 극복을 내세워 뜬금없이 경제정책 기조 전환을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단서다. 보수언론은 그동안 정부의 혁신적 포용성장 정책을 반기업·반시장·친노조라고 맹공격했지만, 대통령의 개혁 방침 고수로 성공하지 못했다.
‘4·15는 ‘오기 경제’ 심판의 날’(문화일보)은 보수언론의 의도를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총선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을 심판하자는 주장이다. 결국 ‘신종 코로나’의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는 목적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경제를 어렵게 해서, 총선에서 자유한국당에 승리를 안겨주려는 것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보수언론이 이런 짓을 하는데, 나라와 경제가 잘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보수언론의 행태는 전염병과 힘든 전쟁을 하는 정부와 국민의 등을 향해 총질을 하는 것과 같다. 전시라면 즉시 처형감이다. 언론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기레기’ 취급을 받는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 곽정수 ㅣ 논설위원 한겨레 2020.02.11.
투기와 시장가격
연암 박지원이 쓴 <허생전>을 보면 허생이 투기로 큰돈을 버는 이야기가 나온다. 허생은 한양의 부자에게 1만냥을 빌린 뒤 안성으로 내려가 두 배 값을 주고 과일을 싹쓸이하는데, 이러자 시중에는 제사상에 올릴 과일조차 모자라게 된다. 이때 허생은 열 배 값으로 과일을 되팔아 5개월 만에 1만냥을 100만냥으로 불린다. 요즘말로 투자의 귀재이다. 하지만 허생은 마지막에 “훗날 이런 방법을 쓰는 자가 생기면 나라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투기의 문제점을 경고한다.
최근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보건용 마스크 가격이 급등하였다. 점잖게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수요 급증’ 때문이지만 상식적으로 말하면 ‘투기’ 때문이다. 부동산뿐 아니라 마스크도 이제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그다지 많지 않던 2월 초에 하루 800만장(KF80 이상) 이상의 마스크가 생산되고 있었고 재고는 3000만장이 넘었는데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현재 인구 대비로 보아 결코 마스크 공급이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근 중간도매상들의 싹쓸이로 마스크 가격은 폭등하였다. 급기야 정부는 1인당 구매수량을 제한(수량할당)하였다.
이를 보면 시세차익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면 어떤 상품에 대해서도 투기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시장에 투기재와 투기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투기에 시대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튤립을 둘러싸고 투기광풍이 일어난 바 있고, 조선후기에는 도고상인들의 투기로 각종 물류에 대한 물가가 치솟은 적이 많다.
마스크에 대한 투기로 온 국민이 분노하는 이 시점에 마스크 가격에 거품이 없다고 하면 얼마나 황당할까? 그런데 이런 주장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시장근본주의자들이다. 그들에 따르면 마스크를 다량으로 사들이는 것은 시장의 흐름을 남보다 먼저 읽은 현명한 투자이다. 시장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수요와 공급이니 시장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높은 가격이라 하더라도 불공정한 가격이라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시장가격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거래는 사회 전체의 복리를 증진시킨다. 따라서 마스크가 품귀현상을 보일 때에는 수량할당과 같은 정부규제를 할 것이 아니라 공급을 더 늘려야 한다. 공급이 부족한 현재의 마스크 시장에는 여전히 ‘가격상승 여력’이 있다.
투기와 시장가격, 그리고 시장근본주의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시장근본주의는 마스크시장뿐 아니라 부동산시장 등 도처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경쟁시장에서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시장근본주의자들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니 나는 이 점을 크게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나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두 가지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수요가 가격상승에 대한 기대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공급이 늘 때 가격은 하락한다. 하지만 투기붐이 형성된 시장에서는 생산자들의 생산증가를 보고 구매자들이 미래에 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고 예측한다. 생산자들이 생산량을 늘리는 것 자체가 추가적인 가격상승에 대한 신호 아니겠는가라고 해석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시세차익을 노리는 구매자들은 공급증가에 따라 구매를 더 증가시키게 되고 따라서 공급이 늘었음에도 가격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오르게 된다. 늘어난 공급을 자금동원력이 있는 사람들만 ‘줍줍’할 뿐이다.
둘째, 경쟁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에 따른 배분이 사회적 편익을 가장 크게 만드는 경우는 제품의 수요곡선이 그 제품에 대한 소비로부터의 편익을 적절히 반영하고 공급곡선은 생산비용을 적절히 반영하는 때이다. 그런데 이는 모든 소비자들의 자금여력이 충분한 경우에만 적용된다. 자금여력이 없는 사람들의 수요곡선은 소비로부터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대편익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 경제학의 상식이다. 이 경우 경쟁시장의 가격에 따른 배분은 사회적 편익을 증진시키지 못한다. 이런 때에는 차라리 경쟁시장의 가격에 따른 배분이 사회적 편익을 증진시키지 못한다. 이런 때에는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수량할당을 하는 것이 가격원리에 따른 배분보다 사회적 편익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다.
시장근본주의자들은 허생을 경제학의 근본원리도 모르는 무식꾼이라 비웃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허생은 아마도 이들 주장의 순진함에 혀를 차고 있을지 모른다.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2020.02.12.
이성 잃은 조선·중앙의 ‘코로나19’ 보도
지난 일요일 오후 스마트폰으로 포털에서 기사들을 보다가 눈을 의심했다. “서울이 유령도시가 됐다”는 자극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의 온라인 경제매체 <조선비즈>가 9일 오후 5시34분 “우한폐렴 공포에 ‘유령도시’ 된 서울…휴일에도 쇼핑몰·영화관 텅텅 비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린 것이다. 서울 강북과 강남의 백화점, 음식점, 영화관 등에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두고 ‘유령도시’가 됐다고 과장한 것이다. ‘공포 마케팅’이다. 이 기사에는 문재인 정부를 원색적으로 욕하는 댓글이 200개 넘게 달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조선일보가 한시간쯤 뒤인 6시42분 “발길 끊긴 쇼핑몰·영화관…우한폐렴 공포에 유령도시로 변한 서울 상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포털에 ‘주요 뉴스’로 내보냈다. 조선비즈 기사를 제목 앞뒤만 바꿔 또 올린 것이다. 자신들도 민망했던지 조선비즈 기사에선 앞에 있던 강북 사례를 뒤로 보내고 강남 사례를 앞으로 가져왔다. 이 ‘어뷰징 기사’엔 문재인 정부를 욕하는 댓글이 2천개 가까이 달렸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언론이 공포심을 부추기는 선동적 표현을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국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은 “가짜뉴스 퇴치가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이들의 절절한 호소가 조선일보엔 소 귀에 경 읽기인 셈이다.
<중앙일보>는 7일 “정부의 우왕좌왕·뒷북·눈치보기가 신종 코로나 사태 키워”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문재인 정부의 컨트롤타워 혼선, 안이한 대응, 중국 눈치보기가 사태를 심화시켰다고 주장하면서 “6일 오전 일본은 요코하마항에 들어온 크루즈선 전체를 봉쇄했다. 배 안에서 확진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3700여명의 탑승객 전원을 열흘간 해상 격리했다. “예방조치는 과하다 싶을 만큼 강력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말은 이럴 때나 쓰는 것이다”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골때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것 같다.
일본 크루즈선의 확진환자가 6일 20명에서 12일 174명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검역관까지 감염됐다. 아베 정부의 뒷북 대응과 부처 간 엇박자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중앙일보 사설이 나오기 전인 6일 오전부터 아베 정부의 부실한 초동 대처를 비판하는 보도들이 나왔다. 일본 정부가 크루즈선에 탑승했다가 홍콩에서 하선한 남성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통보를 홍콩 당국으로부터 받은 게 2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흘이 지난 5일에야 승객들의 식당·극장·수영장 등 공용시설 이용을 제한했다. 이를 모르고 사설을 썼다면 게으른 것이고 알고 썼다면 양심 불량이다.
그동안 ‘기승전-최저임금’ ‘기승전-소득주도성장’으로 재미를 본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코로나 사태를 두고 ‘기승전-문재인’ 식의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모든 문제를 정부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문재인 정부를 흔들어 국민 불신을 조장하려는 정파적 프레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 사태를 4·15 총선의 전초전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 사태는 국민 생명·건강과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다. 언론은 시민들이 지나친 불안에 빠지지 않도록 신중한 보도 태도를 보여야 마땅하다. 또 가짜뉴스가 나돌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시민들의 공포심을 부추기고 정부 불신을 조장하는 보도는 위기 극복의 발목을 잡는 짓이다.
다행히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의도가 이번에는 일부 댓글 전문 누리꾼 등을 제외하면 먹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팀이 한국리서치에 맡겨 전국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7일 공개한 결과를 보면, 2015년 ‘메르스 사태’와 비교해 정부가 대응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이 44.1%로 “못하고 있다”는 응답 27%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갤럽과 리얼미터가 각각 7일과 5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긍정적 평가가 높게 나왔다.
감염병에 대한 우리 사회 전체의 대응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무엇보다 코로나 확산 방지와 환자 치료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하는 방역당국,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의 노고가 크다. 성숙한 시민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괜한 헛심 쓰지 말고 기자협회의 ‘재난 보도 준칙’을 지키기 바란다.
안재승 ㅣ 논설위원 한겨레 2020.02.12.
크루즈와 바이러스
세계 최초의 크루즈 여행은 1844년으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P&O사가 사우샘프턴에서 출발해 지브롤터와 몰타, 아테네 등 지중해의 여러 도시로 항해하는 여행상품을 판 것이다. 이 성공에 힘입어 회사는 이후 알렉산드리아와 이스탄불을 왕복하는 크루즈 상품도 선보였다. 이보다 10년 앞선 1833년 이탈리아의 ‘프란시스코 1세’를 크루즈의 효시로 꼽는 연구도 있다. 유럽 각국의 왕족과 귀족들을 태운 이 배는 나폴리를 떠나 3개월 동안 시러큐스, 몰타, 아테네, 이스탄불 등을 여행했다. 오늘날 크루즈 여행의 상징이 된, 샴페인을 든 채 우아하게 선상 파티를 즐기는 장면은 바로 이 배에서 시작됐다.
오늘날 크루즈 관광의 성장세는 놀랍다. 미국의 한 회사는 아시아를 비롯해 지중해, 북유럽, 카리브해, 호주·뉴질랜드, 남미 등 세계 7대륙 80개국 490여 도시로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크루즈 관광은 먼 나라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호황을 누리던 크루즈 여행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일본 요코하마항에 격리돼 있는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서만 13일 현재 218명의 감염자가 발생해 전 세계의 우려 섞인 시선이 쏠리고 있다. 중국 밖 감염자가 440여명, 그리고 이 배를 제외한 일본 내 감염자가 29명인 점과 비교하면 엄청난 숫자다. 그런가 하면 승객과 승무원 2300여명을 태운 또 다른 크루즈 선박 ‘웨스테르담’호는 일본과 대만, 필리핀, 태국 등 5개국으로부터 입항을 거부당해 보름간 해상을 헤맸다. ‘꿈의 여행’을 기대했던 승객들로서는 ‘선상 감옥’이 따로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본 정부의 대응이다. 상당 기간 전원검사를 미룬 채 선내 공공시설 이용을 제한하지 않았다. 당초에는 19일까지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도록 했다 뒤늦게 방침을 바꿨다. 배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세균 배양접시’ 역할을 하면서 감염을 촉진할 가능성을 무시한 것이다. 올림픽 안전을 염려해 감염자를 육지로 들이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무모하기 짝이 없다. 지진이 나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을 세계는 경이롭게 보았다. 일본인들의 그 ‘냉정 대응’이 달리 보인다. 이중근 논설위원 경향 2020.2.12.
브렉시트가 던지는 화두
21세기 세계질서는 어느 지역이 선도해 갈까? 1990년대를 관통했던 화두 중 하나다. 당시 상당수 학자들은 유럽연합(EU)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지난 1월 말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서 이런 전망이 무색해졌다. 그렇다면 브렉시트, 나아가 EU의 오늘은 우리에게 어떤 화두를 다시 던지는 걸까?
경제적으로만 보면 영국이 더 잃는 선택이다. EU의 역내 무역규모는 영국의 10배에 달하고, 영국은 무역의 50%가량을 EU시장에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도 최악의 경우 경제규모가 8% 이상 축소될 수도 있다고 본다. EU 잔류를 원하는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분리 독립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면 왜 떠나는 걸까? 핵심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EU에 남을 경우 자신들의 처지가 더 나빠지리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이민자 및 불법체류자 문제를 빌미로 정치적 반격을 가한 것이다.
영국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2018년 당시 EU 출신자 360만명과 비EU 출신자 574만명이 영국에 거주 중이다. 인구 대비 각각 5.5%와 8.8%에 해당하는 수치다. 한국으로 치자면 665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EU 출신자 중에서는 폴란드 및 루마니아 출신이 폭증해서 각각 83만명과 40만명에 달했다. 문제는 증가 속도였다. 2008년 이후로 연평균 30만명 이상이 쏟아져 들어왔다.
배경 원인은 EU의 회원국 확대 조치였다. EU는 2004년에 폴란드, 헝가리를 포함해 동유럽국가 10개국, 그리고 2007년에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인다. 유럽시민권자가 확 늘어난 것이다.
이런 결정의 기저엔 새로운 세계질서를 주도하겠다는 EU 지도자들의 섣부른 자신감이 내재해 있다. 실제 2000년대 초반까지 EU는 세계 최대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고 단일통화 도입 등으로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를 주도했다. 동유럽까지 합칠 경우 미국도 능가하는 세계 최대 경제권이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시장확대 과정에서 노동자의 초국적 이동은 자본이나 재화의 이동과 달리 더 세심한 제도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했다. 시장만능주의 사고가 EU 지도자들의 전략적 결정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와 2010~2012년의 ‘아랍의 봄’을 거치면서 동유럽 인구이동 및 난민 유입이 맞물리며 유럽 전역에 걸쳐 극우정치세력이 창궐하는 원인이 된다. 특히 유럽 전역에 걸쳐 불법체류자가 400만명 규모로 급증했고, 이들 가운데 4명 중 1명 정도가 영국으로 몰려들었다. 브렉시트는 그 연장선상에서 촉발된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EU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두 갈래 상반된 길에 직면해 있지 않나 싶다. 하나는 정치통합의 수준을 높이는 길이다. 현재 EU의 장기침체나 지역 및 국가 간 불균형 발전 문제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연방정부가 필요하다. 현재와 같은 느슨한 국가연합으로는 힘들다. 그 상징적 예가 EU의 1년치 예산규모다. 회원국 정부들 총예산의 5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금융정책을 제외한 주요 거시경제 및 사회복지 정책들도 여전히 회원국 정부들이 주요 권한을 갖고 있다.
다른 길은 시장통합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다. 특히 자본과 노동에 대한 초국적 이동 제한과 유로화의 폐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 유로화 도입 이후 환율 위험이 사라지면서 역내 초국적 자본의 이동 양과 속도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유로권 전체가 거대한 부채연결망으로 구조화되어 왔다. 장기침체에 시달리는 핵심 이유다.
두 길 모두 결코 간단치 않다. 시장통합을 제한하는 조치들은 EU의 존립근거 자체를 허무는 격이고, 정치통합은 회원국들이 주권을 더 양도해야 하는 일이다. 진퇴양난이다. 상당기간 혼란과 정체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초국적 시장통합은 그에 걸맞은 정치사회적 통합과 상보적으로 추진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장래 동북아 자유무역지대 창설이나 남북한 간 경제협력을 통해 시장통합을 도모한다고 할 경우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문제다.
특히 노동자의 초국적 이동에 대해선 면밀한 제도적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에도 2018년 말 기준 체류 외국인이 약 236만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4.6%, 불법체류자는 36만명에 달한다. 다문화주의가 필요하다는 당위적 주장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단계를 넘어서지 않았나 싶다.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국판 극우정치와 사회·정치 분열의 또 다른 원인이 되기 전에. /강명구 뉴욕시립대 바룩칼리지 정치경제학 종신교수 경향 2020.2.13.
능력마저 세습되는 사회
지난 주말 20대를 함께 보낸 지인들이 십여년 만에 모였다. 고3 학부모 노릇에서 해방된 이들이 여럿이라 자축을 겸한 자리였다. 역시나 화제는 교육으로 모였다. 아이 둘을 의대에 보낸 친구에게는 축하와 부러움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던 아이를 이른바 스카이대에 보낸 친구에게는 비법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특목고, 의대와 스카이 진학, 사교육, 강남 이사, 미국 유학 등 중상층 학부모들에게 어울릴 법한 화제가 한참 오갔다. 지인들은 대부분 명문대를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대학 때는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고 그 뒤에도 나름 진보적으로 살아온 이들이었다.
나 자신 무자식이 상팔자라서인지 자녀 교육에 과몰입하는 세태가 불편하다. 밖에서는 불평등을 비판하고 빈곤의 대물림을 가슴 아파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면 제 자식은 일류로 키우려다 결과적으로 불평등에 일조하는 86세대, ‘강남좌파’의 이중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중성을 나무라기는 쉽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이 시대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쏟는 과도한 투자에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률이 70%가 넘고 경제는 구조적 저성장에 처했다. 고용과 소득이 안정된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수록 그중 명문대 출신의 비중은 는다.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으로 출발해서 대기업, 정규직으로 상향 이동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첫 일자리가 평생을 좌우하는 사회, 고용이 신분이 된 사회에서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온갖 투자와 노력을 다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일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는 지식기반경제 구축을 명분으로 교육에 대한 투자가 지고의 가치로 부상했다. 아이엠에프(IMF) 시기와 겹친다. 사람을 노동이 아니라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으로 보는 인적자본론의 관점이 보수는 물론 진보 정권도 사로잡았다. “사람에게 투자하자”는 슬로건이 진보적 개인들도 사로잡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무한 투자가 사회적 정당성도 얻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부모의 열망은 존중할 만하다. 그 열망은 자녀를 안정된 지위와 교양을 갖춘 ‘좋은 시민’으로 키우기 위해 어릴 때부터 독서와 예술, 여행 등 다양한 경험을 지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런 노력과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투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결과 물적 자본처럼 인적 자본도 세습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학력에 따라 교육 투자가 달라지고 자녀의 대학, 일자리도 영향을 받는다. 자산은 물론 재능마저 세습된다. 이제 교육은 계층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계급고착화의 기제가 되고 있다. 수많은 실증연구들이 이를 입증해왔다. 미국의 진보적 연구자 리처드 리브스는 <20 vs 80의 사회>에서 시장에서 인정되는 능력이 계급에 따라 불평등하게 육성되고 있으며, 학력과 경제력을 갖춘 상위 20%가 ‘기회를 사재기’한다고 꼬집었다. ‘부모 찬스’ 없이 좋은 인턴 자리 구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중상층 자녀들이 교육을 매개로 안정적으로 계층을 잇게 되는 사회에서는 설령 진보적인 부모들일지라도 재분배와 사회안전망 정책에 절실할 이유가 없다. 가난한 아이들이 경험하는 직업의 불안정성, 비정규직과 파견을 전전하는 삶은 다른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중상층 부모들의 교육 투자는 이렇게 나름의 합리적 명분과 근거 위에서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사회적 합리성과 충돌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출발부터 핸디캡을 씌우는 불공정한 사회, 패자 부활의 기회도 없고 상향이동의 가능성도 낮은 사회의 미래는 음울하다.
두달 뒤면 총선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기회의 공정함과 출발의 평등을 내세워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압승했다. 하지만 작년 가을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이 약속은 심각하게 의심받고 있다. 청년들은 자유한국당이 상위 1% ‘건물주의 정당’이라면, 민주당은 상위 20% ‘부장님의 정당’이라며 비아냥댄다. 개인의 합리성을 제어해 사회적 합리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고 진보를 표방한 정당의 소명이다. 부모가 누구든 출발만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가치다. 이번 총선은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전과 정책을 위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 절박함이 있는가.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한겨레 2020.2.13.
Pablo de Sarasate (1844 - 1908)
Zigeunerweisen (Gypsy Airs) (arr. for trumpet and orchestra) 집시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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