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괜찮은 詩

3월26일 간만에 본 달

by 이성근 2021. 3. 27.

아프지 마라 제발/ 조미하

하루밖에 살수 없다면 울리퍼 샤퍼

첫눈에 반한 사랑ㅡ비스와바 쉼보르카

눈사람-정유경

파도의 시 -고형렬

반감기- 김언희

강물에 띄운 편지- 이 학성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41- 오태환

상사화- 도종환

사랑하는 여인- 폴 엘뤼아르

사람하나/이사라

너에게 쓴다- 천양희

아카시아- 이 지연

물속까지 벚꽃이 피어- 오창렬

사랑하는 별 하나- 이 성선

이별노래- 박시교

봄비- 이재무

-박철

아직도 가야할 길 / 안경라

좋은 풍경- 정현종

여일(餘日) / 김제현

 

 

아프지 마라 제발/ 조미하

 

표시 내지 않으려

더 크게 웃고 밝은 표정을 짓는

너의 모습에 맞장구를 치지만

가슴에 알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온다

 

들키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

대책 없이 눈치만 빨라서

표정 하나 말투만 들어도

네 속이 어떻다는 걸 아는데

 

어떤 위로도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한 채

고작 네 곁에 있어주는 게 최선임을...

아프지 마라 제발

그만하면 평생 느낄 고통 모두 앓았다

이젠 속으로만 곪아 있지 말고

한 번씩 터트리며 살아가보자

 

너의 소중한 인생

한 번뿐인 이 삶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잖아

다음 생을 기약하지 말고

남은 이 생을 바꿔봐

늦지 않았어 늦지 않았어

 

 

 

하루밖에 살수 없다면 울리퍼 샤퍼

 

하루는 한 생애의 축소판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의 생애가 시작되고

피로한 몸을 뉘여 잠자리에 들면

또 하나의 생애가 마감됩니다

 

우리가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눈을 뜰 때 태어나

잠들면 죽는다는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나는 당신에게

투정부리지 않을 겁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에게 좀더 부드럽게 대할 겁니다

 

아무리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불평하지 않을 거구요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더 열심히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모두 사랑하기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나는 당신만은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죽어서도 버리지 못할 그리움

그 엄청난 고통이 두려워

당신 등뒤에서

그저 울고만 있을 겁니다

 

바보처럼.

 

 

첫눈에 반한 사랑ㅡ비스와바 쉼보르카

 

갑작스런 열정이 자신들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도 아름답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은 더 아름답다.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에

자신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에서 복도에서 떠들며 지나가던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수백 번 스쳐 지났던 것은 아닐까?

 

그때 일이 기억나지 않는지

두 사람에게 묻고 싶다.

언젠가 회전문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지 않았나?

붐비는 인파 속에서"죄송합니다"라고 중얼거린 적은?

전화기에 대고"잘못거셨다"라고 퉁명하게 내뱉은 적은?

하지만 나는 그들이 뭐라 대답할지를 안다.

아뇨, 그런 적 없는데요.

이미 오래전부터

우연을 가장하여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런 운명이

단박에 이루어진 건 아니니,

우연이 그들을 가까이 끌어당기기도,멀리 떼어놓기도 하고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서로 엇갈려놓기도 했다.

 

두 사람이 미처 알아챘지 못했으나

무수한 신호가 있었다.

아마도 삼 년 전,

아니 지난 화요일

자신의 어깨를 스친 나뭇잎 하나가

다른 한 사람의 어깨에 닿았을지

자신이 떨어뜨린 걸 그가 주웠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린 시절 덤불 속에서

잃어버린 공을 그가 주웠을지

 

자신의 손길이 지나간

문고리와 초인종을

바로 그가 와서 만졌을지.

비행기 수하물 칸에 트렁크가

나란히 놓여 있었을지.

아침에는 희미해져버렸지만

간밤에 비슷한 꿈을 꾸었을지

모든 시작은 결국

끝없는 이어짐일 뿐이며,

삶이라는 두꺼운 책은

언제나 중간쯤 펼쳐져 있다

 

 

 

눈사람-정유경

 

!

끌어안으면

눈사람은 녹고

망가질거야.

 

사랑하는 방법이

모두 한가지는 아니야.

 

 

 

파도의 시 -고형렬

 

그래 그러니까 알았다

울지 마, 울지 마

내가 너를 지켜줄게

너의 목마가 되어줄게

너의 눈이 되어줄게

 

너의 꿈 나의 별

나의 아픔 너의 절망

나도 너를 따라가는

하얀 파도란다

작은 물결이란다

다시 오는 파도란다

 

파도야 파도야

 

 

 

반감기- 김언희

 

나는 불어 젖혔어, 사랑을, 색소폰처럼

 

불어 젖혔지, 불멸의

색소폰을

 

온몸의 뼈다귀들이 필라멘트처럼 빛을 낼 때까지

 

불어젖혔어

당신을

 

불다 불다 내 머리통까지

불어 날렸어

 

사랑은 방사성

폐기 물질

 

반감기가 오기까지

45억 년이

걸리지

 

 

 

강물에 띄운 편지- 이 학성

 

흐르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달무리가 곱게 피어났다고 첫줄을 쓴

.

어디선가 요정들의 아름다운 군무가

그치지 않으리니

이런 밤은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

고 쓴다.

저 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도무지 당신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쓴다.

이곳에 나와 앉은 지 백 년,

저 강물은 당신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쓴다.

이곳에 나와 앉은 지 백 년,

저 강물은 백 년 전의 그것이 아니라

고 쓴다.

마음을 뱉 듯하던 격렬한 상처는

어느때인가는 모두 다 아물어 잊히리

라 쓴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잊히지 않으니

몇날며칠 같은 꿈을 꾸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쓴다.

알 수 없는 게 그것뿐이 아니지만

어떤 하나의 물음이

꼭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기에

저물어 어두워가는 물 위에 편지를 쓴

.

그러나 강물에 띄운 편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41- 오태환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흰 눈발로 차마

붐비는 사랑이 있었네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차마 흰 눈발의

무릿매 맞는 사랑이 있었네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차마 흰 눈발의

유성우 속에 잠드는 사랑이 있었네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흰 눈발의 고요

에 차마 가슴 데는 사랑이

 

흰 눈발처럼 쉬지 못하고 차마 에도는 사랑

,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상사화- 도종환

 

남쪽에선 태풍이 올라오는데

상사화 꽃대 하나가 쑥 올라왔다

자줏빛 꽃봉오리 두개도 따라 올라왔다

겁도 없다

 

숲은 어떤 예감으로 부르르 떨고 있는데

어떤 폭우 어떤 강풍 앞에서도

꽃 피우는 일 멈출 수 없다는

저 무모한

저 뜨거운

 

 

 

사랑하는 여인- 폴 엘뤼아르

 

그녀는 내 눈꺼풀 위에 있고

그녀의 머리칼은 내 머리칼 속에 있고

그녀는 내 손의 모양을 하고

그녀는 내 눈과 같은 빛깔,

하늘 위로 사라진 조약돌처럼

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잠겨간다

 

그녀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대낮에 꾸는 그녀의 꿈은

햇빛을 증발시키고

나를 웃게 하고, 울고, 웃게 하고

할 말이 없어도 말하게 한다

 

 

 

나의 밥-오봉옥

 

밥이라고 쓴다 울컥, 해진다

한때는 밥에 지기 싫어

체 게바라의 삶을 꿈꾸기도 했었다

체를 흉내 내며 농성도 하고 연설도 했다

수배를 당해 떠돌거나 옥밥도 먹었다

결혼을 하고 밥그릇의 비애를 깨달았다

으스대는 갑 앞에서 마음이 상하다가도

어느새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굴욕은 잠시,

모든 것은 지 나 간 다,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비굴하게 몇 마디 비위를 맞추고 돌아오다가

괜히 길가의 동멩이를 걷어차기도 했다

혼자서 걷다보면

손가락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쓰자는

젊은 날의 초심이 떠올라 목이 또 메어온다

 

 

 

 

사람하나/이사라

 

단 한 사람이면

되는 일이었지요

 

그대가 살아가는 오늘

겹겹이 쌓이는 구름 사이로

언뜻

사람 하나가 어른거립니다

 

마치 천만 년을 기다린 듯이

 

달콤한 기운으로

빙하가 녹듯이

 

사람 따라서

사람이 그렇게 오나보네요

 

 

 

너에게 쓴다-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풍화되었다.

 

 

아카시아- 이 지연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그 사람이 온다

오지 않는다

온다

 

시린 오월

아카시 저 홀로

봄을 앓고 있다

 

이젠 잊었다

잊지 않았다

잊었다

 

아프다

아프지 않다

오래 아프다

 

 

 

물속까지 벚꽃이 피어- 오창렬

 

물속이 들여다보여 봄이 온 줄 알았다

저녁엔 강으로 나가 물속까지 자라는 벚나무를 보았다

물속까지 핀 벚꽃을 보았다

물속까지 벚꽃 피어 봄도 절정인 줄 알았다

 

자꾸 눈길이 가서 네가 온 줄 알았다

내 안에서 밤낮없이 피어나는 너를 보았다

벚꽃 눈부신 봄날 내내

네 안에도 벚꽃을 피우고 싶어 사랑인 줄 알았다

 

 

 

사랑하는 별 하나- 이 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둔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이별노래- 박시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그대 뒷모습 닮은 지는 꽃잎의 실루엣

사랑은 순간일지라도 그 상처는 깊다

가슴에 피어나는 그리움의 아지랑이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까마득 지워질 것인가

눈물에 번져 보이는 수묵빛 네 그림자

가거라, 그래 가거라 너 떠나보내는 슬픔

어디 봄산인들 다 알고 푸르겠느냐

저렇듯 울어쌓는 뻐꾸긴들 다 알고 옳겠느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하르르하르르 무너져 내리는 꽃잎처럼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

 

 

 

봄비- 이재무

 

1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한다

빗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2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에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 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젖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3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어린 묘목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봄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 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늦봄 싸돌아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박철

 

귀신도 모르게 사랑을,

이진명 시인이 그렇게 건배사를 하자

위하여! 하고 우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주저앉으며 자발머리없게 내가 중얼거렸다

귀신만 모르고 다 아네

 

그래도 그런 사랑 한번 하고 싶다

정말 세상 다 아는 사랑

아는 사랑 더 채울 곳이 없는 세상

빙산의 일각이란 무슨 소용인가

태양빛에 반짝이며

나 그 큰 산

다 녹이고 가고 싶네

 

 

 

아직도 가야할 길 / 안경라

 

새벽 두시 잠에서 깨어보니 혼자다

잠은 불 켜진 가로등처럼 생각에 잠기고

인적 끊긴 거리 끝이 바다에 가 닿는,

 

몸에서 걸어 나온 잠이

검은 붓으로 화장을 한다

여름 끝자락으로 끌리는 샌들을 신고

발가락 사이 잠든 햇빛을 채워

빈 침대처럼 누워있는 밤거리를 질주하는,

 

나는 화살이다 아침이 되도록

수평선을 향한 촉 출렁이며 잠수하는,

나는 천년 그리움이다

출발하지 않고도 태평양 너머 너를 만나는,

 

나는 한없이 짠 눈물 속을 걷는

길이다.

 

 

 

좋은 풍경- 정현종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여일(餘日) / 김제현

 

그리하여 모든 것은 지나가고 남은 자리.

잔잔한 감동이 수묵 속에 번지고

한 소절 비가 내렸다. 눈부신 목련의 오후.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런 거다  (0) 2021.07.03
봄날 이런 저런 시  (0) 2021.03.28
참, 좆같은 풍경  (1) 2021.03.10
발효라는 방식으로  (0) 2021.03.09
다시 봄이 오고 있는데  (0) 2021.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