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桃花) 한가지― 박목월
우도― 심재휘
너도바람꽃― 황구하
보리― 문인수
별― 정진규
빈 화분― 김점용
징검다리― 원무현
연탄불을 갈며― 홍신선
늙은 애인― 문모근
얼레지― 김선우
부레옥잠― 신미나
춘방다방― 노향림
고바우집 소금구이― 김선우
참, 좆같은 풍경― 송경동
가정식 백반― 윤제림
탁주-권선희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이규리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유홍준
봄비― 정소진
능소화는 또 피어서― 김은령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김용락
눈썹과 눈꺼풀― 문동만
애기똥풀꽃― 권달웅
거룩한 식사― 황지우
곡비(哭婢)― 손택수
오랜 친구- 박수호
그 나무― 김명인
나무의 다비식― 이태관
아버지의 겨울― 임길택
구두― 장인수
물 가둔 논 / 송진권
단 두 줄― 조정권
엄마와 곤란― 박후기
북한산 도라지― 고명자
통도사 배롱나무― 박수현
새벽 우시장— 박후기
영수증— 최영미
자기장을 읽다 / 길상호
벽에 대한 기억 / 이승하
금지된 대낮 / 조율
최근에 만난 분 중에 가장 희망적이셨습니다* / 허연
듬돌이라는 국숫집 / 민왕기
-곁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손택수
짜증론 / 이희중
그림자를 밟다 / 위선환
이물감 / 이해존
나이 / 박성우
미장센 / 윤의섭
붉은 립스틱 / 이산하
상추 / 박소란
동해에는 고래가 / 정복선
늙음에게 / 이대흠
음악은 흐릅니다 / 김충규
도화(桃花) 한 가지― 박목월
물을 청(請)하니
팔모반상(飯床)에 받쳐들고 나오네
물그릇에
외면(外面)한 낭자(娘子)의 모습.
반(半)은 어둑한 산봉우리가 잠기고
다만 은은한 도화(桃花) 한그루
한 가지만 울넘으로
령(嶺)으로 뻗쳤네.
우도― 심재휘
객선의 잦은 접안이 짧았고 이별은 가벼웠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섬사람의 귀가와
바다를 등지고 구부정한 집들이 모여
칼이 빠져나간 자리인 듯 골목이 깊었다
그러니까 심장을 깊게 찌를 칼을 뽑으며
누군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날이 있었다
배를 타고 섬을 떠나며 바다에 칼을 버린 날이 있었다
가을볕에 말라가는 백일홍부터
나무가 나무에게 건네는 흔들림까지도 모두 골목인 섬
아무나 마을 가운데로 쉽게 들어갈 수가 없고
찔린 마음이 쉽게 흘러나올 수도 없는 섬
한나절 머물렀던 우도를 떠나며
아물지 않는 골목들에게 미안했다 사람들은
제 심장 한 편에 우도가 자라고 있는 줄 몰랐다
너도바람꽃― 황구하
겨우내 잠복해 있다가 불쑥
꽃대궁 밀어 올리는 건
땅속 어둠 때문만은 아니리
은밀히 점령한 추운 기억들
그만 버리고 싶은 것
이렇게 먼 길 걸어오기까지
부은 발 따뜻이 씻어주지 못하리
자꾸만 욱신거리는 몸
결국은 스스로 제 살 찢고
신음소리 내는 것이리
전 생애를 다 바쳐
꽃숭어리 하나 펼쳐 보이는 길
얼마나 처절했기에
저리 환하게 맺혔단 말인가
세상살이 자주 꺾이던
바람은 연둣빛이었으리
무너지는 담장에 기댄
붉은 종양덩어리
너 사는 날까지만 살으리
보리― 문인수
어느 아파트에 갔다가 그 노인을 보았습니다. 팔순도 넘었다는 할아버지였는데, 두어 해 전부터 치매를 앓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노인은 가동과 나동 사이 아스팔트 마당을 골똘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고개 숙이고 무릎 굽히고 뒷집 지고 하염없이 왕복 계속하였습니다. 발끝에 힘을 주는 듯 잘근잘근 밟아나갔습니다 밟아나갔습니다 밟아나갔습니다 아,
보리밟기였습니다. 마침내 저 힘 센 보리가 무수히, 겨울 지난 보릿골이 꿈틀꿈틀 일어나더니 꿈틀꿈틀 길게 이어졌습니다. 유월 참 좋은 바람, 그런 풀비린내의 초록의 길을 고집불통의 한 사내가 오래 가고 있었습니다.
별―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빈 화분― 김점용
베란다에 빈 화분이 하나
오래 전부터 놓여 있다
언젠가 분재에 열중인 사람에게
어린 나무를 너무 학대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자
화분에 옮겨진 자체가 모든 식물의 비극 아니겠냐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빈 화분
그동안 실어 나른 목숨이 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생각하면 마흔 넘게 나를 옮겨 담은 화분도 아득하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던
가족, 학교, 군대, 사랑, 일터, 오 대~한민국!
결국엔 우리 모두 지구 위에 심어졌다는 생각
목숨 붙은 걸 함부로 맡는 법 아니라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겁도 없이 생을 물려받고 또 물려주는지
빈 화분
그 오랜 공명이 오늘
아직 씨 뿌리지 못한
빈 몸을 울리고 지나간다
어찌하여 화분은
화분이 되었는지
징검다리― 원무현
이듬해는 유급을 해야 할 처지였던
그해 겨울 돼지가 새끼를 낳았다
그중 젖을 찾아먹지 못하는 약골 두 마리 있었다
아버지는 끼니때마다 그것들을 품에 안아
학교에서 배급받아온 전지분유를 풀어먹이곤 했다
젖을 뗀 녀석들을 내다 판 이듬해
상급반 교실에 무사히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시냇물이 흐르는 풍경을 그리던 미술시간
징검돌과 징검돌 사이에 징검돌을 놓았다
까맣게 웅크린 새끼돼지 두 마리
거친 물살을 견디고 있었다
연탄불을 갈며― 홍신선
컨테이너 간이함바집 뒤 공터에서
연소 막 끝난 헌 연탄재 치석 떼듯 떼어버리고
윗 것 밑으로 내려놓고
십구공탄 새 것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하나하나 생식기 맞춰 넣고 아궁이 불문 열어두면
머지않아
자웅이체가 서로 받아주고 스며들어
한통속으로 엉겨 붙듯
연탄 두 장 골격으로 활활 타오르리라
둥근 몸피 속속들이 푸른 불길 기어 나와
단세포 목숨처럼 탄구멍마다 솟구치리라 꿈틀대리라
왜 통합이고 통일인가
연탄불 신새벽녘 갈아보면 모처럼 너희도 안다
후끈후끈 단 무솥 안에서
더 요란스럽게 끓어 넘치는
뭇 사설의 뒷모습들.
늙은 애인― 문모근
81세 된 할머니가
호계장 칼국수 집 아주머니에게
조심조심 낮은 목소리로
넥타이 가게를 묻는다
할매, 영감님 안계시잖소
넥타이 가게는 신천에 가믄 있는데요
할매는 힘들어 못가요
다음 장에 사소
근데 누 줄라꼬예?
말하지 마라
애인 줄끼요?
어허, 말하지 말라카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 할머니가
눈을 흘기며 문을 나선다
가을 하늘이 파랗다
얼레지― 김선우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 한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부레옥잠― 신미나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하여 물 위에 空房(공방)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솜털 뻗는 거라 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불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 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 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맨낯을 보겠네
춘방다방― 노향림
단양군 별방리엔 옛날 다방이 있다.
함석지붕보다 높이 걸린 춘방다방 낡은 간판
춘방이란 70을 바라본다는 늙은 누이 같은 마담
향기 없이 봄꽃 지듯 깊게 주름 팬 얼굴에서
그래도 진홍 립스틱이 돋보인다.
단강에 뿌옇게 물안개 핀 날 강을 건너지 못한
떠돌이 장돌뱅이들이나 길모퉁이 복덕방 김씨
지팡이 짚고 허리 꼬부라진 동네 노인들만
계란 노른자 띄운 모닝커피 한 잔 시켜놓고
종일 하릴없이 오종종 모여앉아 있다.
한참 신나게 떠들다가 오가는 사소한 잡담들이
열정과 불꽃도 없이 스르르 꺼져
구석의 연탄재처럼 식어서 서걱거린다.
네 평의 홀엔 다탁도 네 개, 탁자 사이로
추억의 '빨간 구두 아가씨'가 아직도 흐르는 곳
행운목과 대만 벤자민이 큰 키로 서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본다.
장부 없이 외상으로 긋고 가는 커피 값
시간도 외상으로 달아놓고 허드레 것처럼 쓴다.
판자문에 매달린 딸랑종이 결재하듯 딸랑거린다.
이 바닥에선 유일하게 한 자락하는 춘방다방
고바우집 소금구이― 김선우
이상하지? 신촌 고바우집 연탄 불판 위에서 생고깃덩어리 익어갈 때, 두꺼운 비곗살로 불판을 쓱쓱 닦아가며 남루한 얼굴 몇이 맛나게 소금구이 먹고 있을 때
엉치뼈나 갈비뼈 안짝 어디쯤서 내밀하게 움직이던 살들과 육체의 건너편에 밀접했던 비곗살, 살아서는 절대로 서로의 살을 만져줄 수 없던 것들이, 참 이상하지?
새끼의 등짝을 핥아주고 암내도 풍기곤 했을 처형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자기 살로 자기 살을 닦아주면서, 그리웠어 어쩌구 하는 것처럼 다정스레 냄새를 풍기더라니깐
환한 알전구 주방의 큰 도마에선 붉게 상기된 아줌마들이 뭉청 뭉청 돼지 한 마리 썰고 있었는데 내 살이 내 살을 닦아줄 그때처럼 신명나게 생고기를 썰고 있었는데
축제의 무희처럼 상추를 활짝 펼쳐들고 방울, 단검, 고기 몇 점 맛나게 싸서 삼키는 중에 이상하지? 산다는 게 갑자기 단순하게 경쾌해지고 화르륵 밝아지는, 안 보이던 나의 얼굴이 그때 갑자기 보이는 것이었거든.
참, 좆같은 풍경― 송경동
새벽 대포항
밤샘 물질 마친
저인망 어선들이
줄지어 포구로 들어선다
대여섯 명이 타고 오는 배에
선장은 하나같이 사십대고
사람들을 부리는 이는
삼십대 새파란 치들이다
그들 아래에서
바삐 닻줄을 내리고
고기상자를 나르는 이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석회처럼 센 노인네들뿐
그 짭짤한 풍경에 어디 사진기자들인지
부지런히 찰칵거리는 소리들
그런데 말이에요
이거 참, 좆같은 풍경 아닙니까
부자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시인들은
나이 먹을수록 대접받는데
우리 노동자들은
왜 늙을수록 더 천대받는 것입니까
가정식 백반― 윤제림
아침 됩니다 한밭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탁주-권선희
제수씨요, 내는 말이시더. 대보 저 짝 끄트머리 골짝 팔남매 오골오골 부잡시럽던 집 막내요. 우리 큰 시야가 내캉 스무 살 차이 나는데요. 한 날은 내를 구룡포, 인자 가마보이 거가 장안동쯤 되는 갑디더. 글로 데불고 가가 생전 처음으로 짜장면 안 사줬능교. 내 거그 앉아가 거무티티한 국수 나온 거 보고는 마 바로 오바이트 할라 했니더. 희안티더. 그 마이 촌놈이 뭐시 배 타고 스페인꺼정 안 갔능교. 가가 그 노무 나라 음식 죽지 몬해 묵으면서 내 구룡포 동화루 짜장면 생각 마이 했니더. 생각해 보믄 울행님이 내 보고 샐쭉이 웃던 이유 빤한데 내는 그 촌시럽던 때가 우예 이리 그립겠능교. 마 살믄 살수록 자꾸 그리운기라요. 그기 첫사랑 고 문디가시나 그리운 것에 비할라요. 내 품은 가시나들 암만 이뻐도 울 행님 그 웃음 맨키야 하겠능교. 뭐시 이리도 급히 살았는지 내도 모르요. 참말로 문디 같은 세월이니더. 제수씨요, 무심한 기 마 세월이니더. 우예든동 한 잔 하시더…….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이규리
여섯 살 때 내 남자친구, 소꿉놀이 하다가
쭈르르 달려가 함석판 위로
기세 좋게 갈기던 오줌발에서
예쁜 타악기 소리가 났다
셈여림이 있고 박자가 있고 늘임표까지 있던,
그 소리가 좋아, 그 소릴 내고 싶어
그 아이 것 빤히 들여다보며 흉내 냈지만
어떤 방법, 어떤 자세로도 불가능했던 나의
서서 오줌 누기는
목내의를 다섯 번 적시고 난 뒤
축축하고 허망하게 끝났다
도구나 장애를 한번 거쳐야 가능한
앉아서 오줌 누기는 몸에 난 길이
서로 다른 때문이라 해도
젖은 사타구니처럼 녹녹한 열등 스며있었을까
그 아득한 날의 타악기 소리는 지금도 간혹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듣지만
비는 오줌보다 따습지 않다
서서 오줌 누는 사람들 뒷모습 구부정하고 텅 비어있지만,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선득한 한 방울까지 탈탈 털고 싶다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유홍준
내 친구 재운이 마누라 정문순 씨가 낀 여성문화 동인 살류쥬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어이쿠, 했다 나도 앉아서 오줌 눈지 벌써 몇 년, 제발 변기 밖으로 소변 좀 떨구지 말아요 아내의 지청구에, 제기럴 앉아서 오줌 싸는 거 습관이 된 지 벌써 수삼 년, 날마다 변기에 걸터앉아서 나는 진화론을 곱씹는다. 이게 퇴화인가 진화인가 퇴행인가 진행인가 언젠가 여자들이 더 많은 모임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서영은 배를 잡고 웃고 강현덕은 그것이야말로 진화라고 웃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되받았다 역시 여자는 새침데기들이 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강정구 교수 전화번호라도 알아내어서 수다 좀 떨까 난 앉아서 오줌 싸니까 방귀가 잘 뀌어지던데, 낄낄낄 캑캑캑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끼리
봄비― 정소진
너를 능가할 연애 선수 아마 없지 싶다
경직된 여인의 몸을 안심시키듯
요란하게도 아니고 강하게도 아니고
낮은 목소리로 불러내는 맑은 환희
굳은 마음 푸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속속들이 놓치지 않는 달달한 애무로
얼어붙어 쌩한 고집마저 녹이는 솜씨 좀 보라지
네가 일으켜 세우는 저, 저 상큼한 연애세포들
너 다녀간 곳곳마다 새 생명 파릇하다
능소화는 또 피어서― 김은령
저것 봐라
화냥화냥 색을 흘리며
슬쩍 담 타넘는 품새라니
눌러 죽인 전생의 내 본색이
살아서 예까지 또 왔다
능소凌宵
능소凌宵,
아무리 우겨보아도
결국
담장 아래로 헛헛이 지고 말
운명이면서
다시 염천을 겁탈하는 꽃
눈멀어 낭자히 통곡하는
누대의 습생
‘능소(凌霄)’는 ‘하늘을 능멸하는’ 이란 뜻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김용락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기적소리가 듣고 싶다
가을비에 젖어 다소 처량하게
비극적 음색으로 나를 때리는
그 새벽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방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있던
단풍이 비에 젖은 채로 이마에 달라붙는
시골 역전 싸구려 여인숙에서
낡은 카시미론 이불 밑에 발을 파묻고
밤새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시던
20대의 어느 날 바로 그날 밤
양철지붕을 쉬지 않고 두들기던 바람
아, 그 바람소리와 빗줄기를 다시 안아보고 싶다
인생에 대하여, 혹은 문학에 대하여
내용조차 불분명하던 거대 담론으로
불을 밝히기라도 할양이면
다음날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하던가
그날은 가고 기적을 울리며 낯선 곳을 향해
이미 떠난 기차처럼 청춘은 가고
낯선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나무처럼
빈 들판에 혼자 서서
아아 나는 오늘밤 슬픈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눈썹과 눈꺼풀― 문동만
우연히 아는 사내를 만났다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소방관
칠월의 타는 햇살 아래 그의 눈썹은
무엇에든 달관한 노인의 눈썹처럼
몇 가닥 허옇게 새어 뻗쳐 있었다.
그는 보여줄 순 없지만 아래의 털들도
허옇게 새어가고 있다고 웃었다
우리가 털에 대한 이야기로 날밤을 샌다면
흰 털들이 몇 가닥 일어나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얀 밤이란 털이 새는 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는 늙은 태를 나에게 남기고 주름진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밤낮을 바꿔 사는 사람들의
눈꺼풀에겐 다른 이름이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교대해주지 않는 시간
무너지지 말아야 할 스물네 시간을 더듬다 보면
자잘한 저 눈주름이라는 지친 원심력의 외상,
저 눈썹이라는 지붕이자 처마 아래서
까만 눈동자들이 입을 벌렸고……
쉼 없이 어둠의 시간을 물어 바쳤으니
우리는 저렇게 늙어만 늘어만 간다
싱싱했던 검정을 잃고 흰빛의 가여움을 얻으며
털들만 분연히 자신의 생에 항거한다
애기똥풀꽃― 권달웅
꽉 막힌 추석 귀향길이었다
참아온 뒤를 보지 못해
다급해진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골 외진 숲 속에 뛰어들었다
벌건 엉덩이를 까내리자
숲 속에 숨었던 청개구리가 뛰어 올랐다
향기로운 풀내음 속에서
다급한 근심거리를 풀기 위해
혼자 안간힘 쓰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조용해, 저기 사람이 왔어
살다보면 삼라만상의 복잡한 일 중
더러운 일 한두 가지가 아닌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처럼
참으로 어려운 건 똥 참는 일이다
참으로 시원한 건 똥 싸는 일이다
숲 속의 노란 애기똥풀꽃이 웃었다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곡비(哭婢)― 손택수
눈이 많이 내린 한겨울이면 새들에게 모이를 줘서 아들 내외에게 자주 잔소리를 듣던 함평쌀집 할머니
세상 버리던 날 새들은 오지 않았다 밥 달라고, 밥 달라고,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양철문을 바지런히 쪼아대던 새들
등쌀에 이놈의 장사도 집어치워야겠다, 그 아드님 허구헌 날 술만 푸고 있더니
쌀집 앞 평상마루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려준다 장지의 소나무 위에서 울던 새울음 소리가 어째 영 낯설지만은 않더라고
울 어매가 주는 마지막 모이를 받으러 왔나 싶어 고수레 고수레 한 상 걸게 차려주었더니, 구성진 곡비 소리 해종일 끊이질 않더라고
오랜 친구- 박수호
불쑥 찾아가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그냥 온다
그 나무― 김명인
한 해의 꽃잎을 며칠 만에 활짝 피웠다 지운
벚꽃 가로 따라가다가
미처 제 꽃 한 송이 펼쳐 들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늦된 그 나무를 발견했지요.
들킨 게 부끄러운지, 그 나무
시멘트 개울 한 구석으로 비틀린 뿌리 감춰놓고
앞줄 아름드리 그늘 속에 반쯤 숨어 있었지요.
봄은 그 나무에게만 더디고 더뎌서
꽃철 이미 지난 줄도 모르는지,
그래도 여느 꽃나무와 다름없이
가지 가득 매달고 있는 멍울 어딘가 안쓰러웠지요.
늦된 나무가 비로소 밝혀드는 꽃불 성화,
환하게 타오를 것이므로 나도 이미 길이 끝난 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거기 멈춰 서있었지요.
산에서 내려 두 달거리나 제자릴 찾지 못해
헤매고 다녔던 더 난만한 봄길 어디,
늦깎이 깨달음 함께 얻으려고 한나절
나도 병든 그 나무 곁에서 서성거렸지요.
이 봄 가기 전 더 나무도 푸릇한 잎새 매달까요?
무거운 청록으로 여름도 지치고 말면
불타는 소신공양 틈새 가난한 소지(燒紙),
저 나무도 가지가지마다 지펴 올릴 수 있을까요?
나무의 다비식― 이태관
물소리 와글와글 끓어오르는 밤이었다
비는 내리고, 어디선가
배고픈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려왔을 것이다
개울가 물고기는 아직도 눈을 치뜨고 있는지
갈참나무 잎사귀들이 묵묵히 눈 희번덕거리며
불침번 서고 있는 저물녘,
마을 앞 느티나무의 한 생이 어느덧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 있었다
어느 생도 시간의 매를 감내할 수 없는 것인지
재개발을 위해 옛 마을이 허물어져 가는 밤
가로등도 떠날 이들의 마음을 아는지 잠들지 못하고
끝내, 그 밤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건넛말 달수네
한밤에 떠나나 보다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차의 불빛이
바람벽에 제 유언 하나 새겨놓는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말들이 사라진다
길 잃은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려왔을 것이다
신열을 앓듯 선잠에서 깨어난 아침,
마을 앞 당산나무가 제일 먼저 몸을 허물었다
잘렸던 시야가 텅 비었다
공(空)을 이룬 하늘, 눈에 시리다.
아버지의 겨울― 임길택
부엌에서
아버지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탄 묻은 판자쪽을
주워다 놓고
온 집안 울리도록
바람구멍을 막고 있었다
산 너머 어디쯤에
겨울이 오고 있었다
구두― 장인수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어쩌다가 운 나쁘게 광화문에서 잡혀가
구류 5일 먹고 구치소를 나설 때
허겁지겁 시골서 올라온
아버지와 엄마는 구두를 신고 계셨다
“이놈의 나라가 아주 잘못됐어.”
“나랏님보다는 우리 애가 잘못이지유.”
아버지와 엄마는 식당까지 가면서도 계속 싸웠다
두부를 먹을 때도
고개를 숙이고 뒤따라갈 때도
아버지와 엄마의 까만 구두가 자꾸 눈에 밟혔다
애경사처럼 중요한 나들이가 있을 때만 신는 구두였다
“망종에는 부지깽이도 일을 거든다든디.”
“소밥은 줬나 모르겠네.”
“개밥은 줬겠지유?”
아들 걱정을 하면서도
대화는 소밥 걱정, 개밥 걱정이었다
두 분의 구두에게 너무 미안했다.
물 가둔 논 / 송진권
싸리 꽃잎 날려
물 가둔 논에 점점 내리는 밤입니다
밥풀처럼 싸리꽃 둥둥 뜬 밤입니다
대가리며 입술이며 포르족족한 뺨이며에
꽃잎 묻은 개구리들 와글와글대는 밤입니다
무엇이든 가둔다는 것은 얽매고 속박하는 일이라 꺼렸지만
물 가둔 논 보니 알겠습니다
낮 동안 데워진 물이 미지근해져서
파르르르 꽃잎 흩은 물속에서
두 서너 놈이 서로 끌어안고
쫓아내고 쫓아가고
울음주머니 부풀리며
우리가 온밤 내 찾아 헤맨 곳이 여기였음을
그 열락의 정점에서 행위 끝낸 몸뚱이처럼 늘어져
머리카락 쓸어 올리며 맺힘 땀을 닦고
괜찮아 할 때의 그 쓸쓸하던 눈망울처럼
차르르 별들은 뿌려져
꼬리 치며 춤추며 저 어두운 속으로 헤엄쳐 가서
물 가둔 논에 맘껏 알을 슬어놓는 밤입니다
물꼬 터놓는 밤입니다
단 두 줄― 조정권
본에 도착한 첫날
본 대학 한국학연구소를 방문하고
부비에 서점에 들려 시집 한권 구했다.
라인강이 내다보이는
호텔 베토벤하우스에서 넘치는 뢰벤 브로이
시간의 거품을 높이 들어올리고
새벽 새소리에 깨었다.
시비가 있다는
말을 따라
잠 든 대학건물 앞 공원 산책로를 걸어
언덕 위로 한참을 올라갔다.
겨울인데도 파랗게 솟은 잔디에 수없이 맺힌
이슬 만져보며
그 광활한 푸름 속에서 그러나 홀로 무성한
이슬들의 生沒,
시든 채 커 갔던 보랏빛 풀꽃들의 生沒을 생각하며
시든 채 살다간 시인의 生沒 사이를 오가다 마음 갇힌 채
한없이 남겨질 날을 생각해 보았다.
내게도 그런 날들이 있을 것이다.
안개는 언덕을 지우고 무덤을 지우며 무덤 한 채를 또 지울 것이다.
언덕 위에는 세상으로부터 감금된 채 지워졌던 시인이
누워 있다.
나는 세 개의 거대한 화강암덩어리를 자연스럽게 잘라
ㄷ字形으로 엮어 일으켜 세워놓은 거대한 시비 앞으로
다가간다. 거친 화강암 표면에는 아무런 꽃장식이나 수식도 없이
시 한 줄커녕, 다만
조그맣게 새겨놓은
이름이 보였다.
Heinrich Heine
1797~1856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
간명하게, 단 두 줄.
※ 이 시를 쓰고 얼마 후 조 시인도 세상을 떠나고, 세상을 떠나기 전 ‘나는 한 낱말만 더해 단 두 줄을 적고 싶다’고 했다. 그의 바람대로 묘비에는 단 두 줄만 적혔다. ‘시인 조정권 / 1949~2017.
엄마와 곤란― 박후기
엄마가 나를 낳을 때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나를 낳은 후의 기쁨도
나는 모른다
아픈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내가 퇴원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울다가 웃던 엄마의 기쁨을 나는 모른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고통이거나 기쁨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나는 그것을
아주 곤란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북한산 도라지― 고명자
왜
분단의 냄새는 없는 거야
바락바락
왕소금으로 치대어도
왜 이념의 냄새는 나지 않는 거야
명절 제사 수십 년
먼 조상님 냄새
북한산 나물 한 접시, 아프다
일제 징용 피해
함경도 두메산골 어디
젊어 한때 숨어 살았다는 아버지
도라지꽃 같은 아이 두엇 떨궈 놓았을지 몰라
사람이 도라지만 못하나
넘어왔다 넘어갔다 지금도 큰일나잖아
도라지는 도라지
이산 저들에 그냥 백도라지
원산지를 증명하라고
뼛속까지 내보이라고
방방곡곡 시장의 도라지들아 미안하다
가시철조망 너머
아득히
상처투성이 도라지꽃들아
통도사 배롱나무― 박수현
아버지 기제사 다음날
도라지꽃보다 더 흰 어머니와
영취산 통도사에 갔다
홍예반월교 지나 일주문 앞
배롱나무 한 그루 허리 뒤틀린 채 서 있다
천왕문 빠져나와 불이문 거쳐
금강계단 오르게 해 준다는
부처님 말씀을 굳게 믿었을까
아흔아홉 날에 또 하루,
대두 말가웃의 피와 열두 관의 살을
한 뒷박거리 마음에 실은
무심한 배롱나무
붉디붉게 산문을 물들인다
달구비 잦던 올 장마에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끝내 젖은 아궁이에서
후림불을 지펴낸 저 고집불통!
팔남매 걱정 혼자 다 받쳐 들고 또 한 生을
건너가실 어머니처럼
펄펄 끓는 화엄 한 솥 머리에 이고 있다
어머니 굽은 등으로
배롱꽃 그늘이 환하게 스며든다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 야들아, 꽃상여인 것 같데이
새벽 우시장— 박후기
무심한 발길에
노랗게 핀 달맞이꽃이
이슬에 젖은 몸을 툭툭 턴다
달은 기울고
함평 기산천 긴 방죽 위로
소 울음소리 가득 실은 트럭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에 코를 꿰인 체
죽음을 향하여 이끌려 가는 것
어둠 속 보이지 않는 손들이
코뚜레를 잡아당긴다
새끼를 잃은 어미 소가
왕소금 같은 눈물을 흘리고
소매를 걷어붙인 수의사의 긴 팔이
암소의 자궁 속,
수렁처럼 깊은 곳을 더듬는다
팔려가는 소들의 서글픈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머리 국밥을 먹는 우시장의 아침
죽어가던 소의 눈물이 배어 있는지
국밥의 국물이 짜디짜다
영수증— 최영미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당신이 불러주지 않아도
이렇게 와 섰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마지막 셈을 마쳤으니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시죠
제 것이 아닌 시간도 가끔씩 넘보며 훔치며
짐을 쌌다 풀었다
한세월 놀다 갑니다
지상에서 제가 일용한 양식
일용한 몸, 일용한 이름
날마다의 고독과 욕망과 죄, 한꺼번에 돌려드리니
부디 거둬주시죠.
당신이 보여주신 세상이 제 맘에 들지 않아
한번 바꿔보려 했습니다
그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아
당신이 지어내고 엮으신 하루가 밤과 낮 나뉘듯
취했을 때와 깰 때
세상은
이토록
달라 보일 수 있다니
앞으로 보여주실 세상은 또 얼마나 놀라울까요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숙제 끝낸 어린애처럼 이렇게 손들고 섰습니다.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세요
자기장을 읽다 / 길상호
밝혀도 꿈틀, 움직일 수 없다
마른 흙바닥 위에
지렁이는 죽고 말았다
자성 강한 죽음이
반대 극의 식욕을 불러들인다
쇳가루처럼 시커멓게
달라붙은 개미 떼
자기장이 참 길기도 하다
식은 국밥 대신
제 몸 한 조각씩 대접하는
한낮의 뜨거운 장례
꼬마들도 뭔가에 이끌린 듯
눈을 떼지 못한다
자기장을 유유히 벗어나는 건
배가 없는 바람뿐이다
그날 방바닥에 떨어진 먼지 한 움큼이 내겐 가장 진실했다 - 조영란
유통기간 지난 추억들이 쏟아져버린 편지함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차마 버리지 못한 편지들이 먼지와 함께 떨어져 내린다
쓸데없이 아름다웠던 한 시절이
먼지와 함께 방바닥에 나뒹군다
반쯤 뜯겨나간 수취인은 아직도 불명이다
마음속 우체국은 너무 멀다
먼지를 아껴야 할 때가 있다
오래된 먼지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함부로 건드리면 푸른 비밀이 드러난다
편지봉투의 입이 무거운 이유는 그 때문이다
깊이 닫아두었던 문장들이
손끝에서 눈을 뜬다
이 오래된 편지들을 어떻게 다 읽어야 할까
버리지 않는 한 스스로 저를 지우는 기억은 없다
추억은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날 방바닥에 떨어진 먼지 한 움큼이 내겐 가장 진실했다
벽에 대한 기억 / 이승하
머리를 깎였다
이곳에서 나를 내보내달라고
식판을 집어던지며 날뛰자 간호사는
사흘 사지를 묶는 징벌을 가하는 대신
내 머리를 밀었다 스님처럼 면벽
참선해야 한다 밤에
벽을 더듬으며 방을 돌아본 자는 알 것이다
벽이 왜 있는지를 왜 만들어 왔는지를
얼마나 많은 벽이 들판과 사람을,
하늘과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아왔는가를
독방에서
내가 지금 조롱당하고 있는가 무시당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곰곰이, 여러 날
웬걸, 나는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열 명 중의 한 명
백 명 중의 한 환자가 아니라
한 명이었던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체조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는
교도소에 수감된 자가
정신질환자로 판명되어 석방된다
그는 두 가지 자유를 한꺼번에 얻는 것이다
스스로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정신질환자로 간주되어 격리된다
그는 두 가지 고통을 한꺼번에 얻은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드물지만
후자의 경우는 흔하다
금지된 대낮 / 조율
대낮이 금지되었습니다
민방위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이렌이 울리면 우리는 이제 성장하러 갑니다
적막에게 방어 자세를 배우러 갑니다
하늘, 망망대로에 일제히 줄선 벚나무들의 여린 꽃잎들은 두드러기처럼 번져나가고, 사차선 도로가 팔차선이 되도록 옹알이만 반복합니다 물렁한 잇몸 속 숨겨진 이빨이 돋아날 때를 이제야 몸으로 알아챌 때쯤 주류 배달 트럭이 지나갔어요 우리는 참 얄궂게도 방지턱을 씹었죠 공단 지나는 버스 안에서, 옛날 다리 고가도로를 오르는 택시 안에서, 혹은 저 멀리 멜라스치나에나공화국에 남겨둔 망루에서 그렇게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척 알아가고, 우리는 사이렌이 우회하는 계약직 찜통 버스 안에 서로 모르는 척 또 모여, 하얀 티셔츠 속 겨드랑이에 비집고 돋아나는 어린 털은 비밀을 모르고, 데구루루, 우리는 제자리걸음으로 아스팔트 둘둘 말아 요지로 꽂고선 전진 또 전진! 애석하게도 부딪치는데 돌아선 빗물, 우리는 무엇을 수습하고 있나요
공습경보, 우리는 이제 잠시 금지되었습니다
15분의 적막을 따라갑니다 대낮은 우리를 키웠지만
우리는 금지될 필요가 있습니다 온 동네 모퉁이란
모퉁이는 모조리 모아 기어이 파고드는
우리에게는 대낮을 꺼둘 스위치가 필요합니다
뒤죽박죽을 관통하는 사이렌
정당방위입니다 그러나 적막이 풀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최근에 만난 분 중에 가장 희망적이셨습니다* / 허연
차가운 문고리에 손을 가져갈 땐 항상 혼자였습니다. 죄송하게도 난 아무것도 갖지 못했고, 슬픈 집에서 가지고 나온 연민과 내가 서 있는 샛길이 전부였습니다. 들키지 않은 채 절반도 감기기 전에 끊어진 청춘
내 사랑은 나를 넘어뜨리고 달려가 버린 것들 중에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이제 그것들은 내 눈에서 흐르지 않습니다. 지겹게 내뱉었던 인사말,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팔꿈치가 져렸습니다.
간직하기에 너무 힘든 나는 섬이었고, 결국 섬은 내 마음 밖으로 나가주질 않습니다. 무덤덤하게 몰아쳤던 시퍼런 파도야 잘 있거라. 허전한 기억들아, 당신에게조차 가기 힘들었던 겨울이었습니다. 잊기 힘든.
고맙습니다.
최근에 만난 분 중에 가장 희망적이었습니다.
* 권진규의 편지 중
듬돌이라는 국숫집 / 민왕기
협재에는 듬돌이라는 국수집이 있고
면이 당신 머리칼처럼 아름다워
거기서 당신과 나는 고기국수를 시켜 반씩 덜어 먹고 있지
해변은 빠져 죽기 힘들 만큼 얕아서 밤에 죽으러 왔던 사람들이
결국엔 물을 걷다 지쳐, 백사장으로 걸어 나와 하룻밤씩 자고 간대
다음날은 신비롭겠지, 바닥까지 보이는 물속에
물고기가 놀고
바다 너머에는 이 세상이 아닐 것 같은 비양도가 보일 테니까
구름은 이상하지, 죽으러 왔는데 더 있고 싶을 만큼 희어서
아, 눈부시다 그 말이 나오면 눈물이이 텨저서
못된 것 다 털어낼 수 있대
그러니까 죽으러 가지 말고 여기에 와 숨어 살면 돼
고기국수가 모자라면 한 그릇 더 부탁해 반씩 나눠 먹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눈물 나는 하품이나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돔돌이라는 국수집에 다녀가, 갈 수 없는 비양도처럼 작은 집이야
곁 / 민왕기
곁을 준다 줄 것이 없어서 오늘은 곁을 주고 그저 머문다
구름 곁에서 자보고 싶은 날들도 있지만
내일은 그냥 걷다 옆을 주는 꽃에게 바람이 마음 준 적 있는지 묻겠다
곁이 겨드랑이 어느 쪽인지, 옆구리 어떤 쪽인지
자꾸 사람에게 가 온기를 찾아보는 쓸쓸이 있어
나는 간혹 몸 한 켠을 더듬어볼 텐데
야윈 몸에 곁이 돋으면 너에게 가겠다고 편지하겠다
곁이라는 게 나물처럼 자라는 것인지
그리하여 내가 내 곁을 쓸어 보는 날엔
나무가 잎사귀로 돋는 곁이 있고 별이 빛으로 오는 곁도 있다고 믿어 보겠다
가령 어느 언덕배기 세상에 단 둘이 곁으로 사는 집, 비추는 달빛도 있다고 생각하겠다
고작해야 이 삶이 누군가의 곁을 맴돌다 가는 것일지라도
곁을 준다 할 것이 없어서 곁을 주고 세상의 모든 곁이 다 그렇다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손택수
멀리 여행을 갈 처지도 못 되고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디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 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 생을 함께 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에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고 있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짜증론 / 이희중
모름지기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것이 아니다 짜증은 아주 만만한 사람한테나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짜증을 받아줄 마지막 사람은 제 엄마다 엄마들은 보통 자식의 마음과 제 마음속을 분간 못하는 불구, 자식들은 엄마에게 어떤 원죄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빚이 있음을 본능으로 안다 짜증이 심한 사람은 엄마만 아니라 다른 식구들한테도 짜증을 낸다 필시 이 사람은 제 식구를 아주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달리 보면 식구를 예사롭지 않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더 심한 사람은 남한테도 짜증을 낸다 이 사람은 아주 힘있는 놈 아니면 망나니임에 틀림없다 짜증낼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저 자신한테 짜증을 부린다 이 사람은 저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니면 저 말고는 아무도 못 믿는 사람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이 사람은 필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그림자를 밟다 / 위선환
앞서거니 뒤서거니 또는 옆서거니 했는데, 발바닥을 서로 밟는 일이야 당연하고 발뒤꿈치를 차거나 발등을 밟아도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무릎뼈를, 다음에는 아랫배를, 그다음에는 갈비뼈를 차례로 밟아서 부수고 이제는 목줄기를 밟아서 부순다. 삭정이 같구나. 갈수록 경사가 위험해지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한낮, 밟힐 듯, 조심해서 발을 내려딛지만 아차, 그만, 고작 남은 정수리께를 디디고 만다. 발밑이 푹 꺼지고, 나도 무너져 내린다.
이물감 / 이해존
원숭이가 털을 고르듯
쭈그려 앉아 바닥에 놓인 신문을 읽듯
쌀알을 휘저어 돌을 골라낸 적이 있다
고르는 것과 골라낸 것을 갈라놓고
같은 색깔이 될 때까지
쌀알이 나를 집중할 때까지
촉감이 파고든다
모래사장에 깔아놓은 은박지
앉은 자리를 향해 오므라드는 바닥
흘러 들어온 모래 몇 알이
모래사장보다 따갑다
옷에 달라붙은 고양이 털을 떼어내다
고양이 털로 짠 스웨터를 생각한다
가장 가까웠던 사이가 핏기를 잃어가는 순간
나를 본뜬 차가운 손을 만질 때
낟알 껍질이 목에 걸린 것처럼
몸속에 돋아나는 촉감
밥을 먹다 돌을 깨문다
무방비 상태에서 불현듯 솟아나는 것
온통 나를 골라내는 순간
남겨지는 것
식탁에 앉아 잠시 선명해진다
나이 / 박성우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중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
먼 기억을 중심에 두고
둥글둥글 살아간다는 것
무심히 젖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
미장센 / 윤의섭
꿈속에서
공원 벤치에 앉은 아이의 뒷머리가 있었다
꿈에서 벌어진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였는데
왜 거기 앉아있었을까
허름한 골목
폐타이어 화분에 핀 채송화를 슬쩍 스쳐가는 바람은
불어야만 했던 것이다 단역배우처럼
서툰 벽화는 꼭 서툴러야 했고
담장 위를 걷던 고양이에겐 기억나지도 않을 오후겠지만
그래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잊을 수 있다는 기적으로
밥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토록 사소한 종말들
악몽을 꿨는데 아이의 뒷머리가 또 놓여있었다
채송화는 시들어 죽었고
그 곁으로 바름은 여전히 불어야만 했다
산 너머에선 천둥치며 비구름이 몰려오고
나는 얼마나 잠깐 화창했던 생물이었던 걸까
비가 오기까지 나는 벤치에 앉아 있다
붉은 립스틱 / 이산하
1945년 봄 유럽의 나치수용소들이 해방되었다.
수용소마다 오물과 시체들이 썩어 흘러넘쳤다.
연합군의 확성기가 “You are Freedom”이라고 외쳤다.
전투기들이 공중에서 수용소 위로 구호품을 투하했다.
구호품 중에는 다량의 붉은 립스틱이 들어 있었다.
남자 죄수들이 배고프고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지금 이런 게 무슨 소용이냐며 혀를 찼다.
그런데 립스틱은 식품과 의약품보다 먼저 동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마침내 수용소 철문이 활짝 열렸다.
팔에 새겨진 죄수 번호를 립스틱으로 지운 여자들이
한껏 턱을 치켜들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녀들의 붉은 입술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상추 / 박소란
퇴근길에 상추를 산다
야채를 먹어보려고
좀 건강해지려고
슈퍼에서 한봉지 천오백원
회원 가입을 하고 포인트를 적립한다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
어떤 이는 화분에 상추를 기른다는데
아 예뻐라 정성으로 물을 주면서
때가 되면 그것을 솎아 먹겠지
상추를 먹으면
단잠에 들 수 있다는데
상추가 피를 맑게 한다는데
나는 건강해질 것인가
상추로 인해
행복해질 것인가
밥을 데운다
냉장고에서 묵은 쌈장을 끄집어낸다
상추가 포장된 비닐을 사정없이 찢는다
찢은 비닐을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는 나는
행복해질 것인가
상추는 나를 사랑할 것인가
동해에는 고래가 / 정복선
동해에는 고래가 뛰게 내비두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을 때
느린 기차를 타고 명경明鏡바다에 이르러
참돌고래, 낫돌고래, 밍크고래 떼가
떠오르는 해와 대천세계를 향해 온몸 던지는
수상장애물경주를 지켜보려오
수평선을 함께 지우며,
그들 주파수에 맞추어 노래 부를 때까지
성큼,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돌아올 때까지
고래와 동해와 나를 거기 들끓게 내비두오
(2018년 12월 26일, 일본은 국제포경위원회를 탈퇴하고 상업용 고래잡이를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늙음에게 / 이대흠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눈이 가려 봅니다
귀가 먼 것이 아니라
귀도 제 생각이 있어서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다 내 것이라 여겼던 손발인데
손은 손대로 하고 싶은 것 하게 하고
발도 제 뜻대로 하라고 그냥 둡니다
내 맘대로 이리저리 부리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눈이 보여준 것만 보고
귀가 들려준 것만 듣고 삽니다
다만 꽃이 지는 소리를
눈으로 듣습니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보고
손으로는 마음을 만집니다
발은 또 천리 밖을 다녀와
걸음이 무겁습니다
음악은 흐릅니다 / 김충규
들어봐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으로 걸어가는 총 맞은 짐승의 뒷모습에서
흘러나오는 숨찬 음악을
당신이 쏜 화살이 내 심장에 꽂혔을 때 하늘에서 태양이 지워졌어요
육체에서 영혼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것을 내가 느끼듯
그 짐승도 느꼈을 거예요
사후의 세계로 안내하는 벌레들이 육체를 해체하러 오는 소리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을 다 태워도 그러나
뼈는 잿더미 속에서도 희게 빛날 거예요
통영에서 진주에서 부천에서 혹은 대륙 너머에서
소나기처럼 퍼붓는 광휘들을 다 모아서
죽은 짐승의 영혼에게 바칩니다
죽어가는 내가 바칩니다
당신은 그러므로 음악의 피를 유족들에게 나눠주세요
죽은 자도 음악 없이는 살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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