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 호 승
상사 想思/ 김 남 조
먼 곳에서부터/김수영
그리움의 시 / 김선굉
호구(糊口) / 권혁웅
사랑이 거짓말/김상용
은포역-강은교
-막다른 골목
월장(月葬)/ 김준태
-12월의 연가
연애/ 복효근
-수선화에게 묻다
-눈 오는 날
-여울이라는 말
"응"/ 문정희
소름/ 김주대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이별의 노래 / 최병무
-그리움
너무 아픈 사랑/ 류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Alfred D. Souza
눈오는 저녁 / 김소월
-초혼
목마르다— 구재기
번짐의 속성― 김문배
벚— 임현정
유실물 보관소— 전윤호
탁본(拓本)— 서대선
여행- 조성순
점쟁이맹키로— 김청미
해돋이 해넘이— 이혜선
나에게 주는 시— 류 근
존재의 이유― 김종환
간통(姦通)― 신종호
홍시― 문숙
너를 보내고― 권옥희
백일홍― 심재휘
채석강― 주영중
전화― 마종기
호칭― 서영식
진달래 꽃— 최문자
벚꽃 지다 / 방민호
밤눈 / 전윤호
사랑, 허벅지라는 말 / 석연경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순간들 / 박지영
먼 데서 온 택배 같은 것 / 송종규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 호 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상사 想思/ 김 남 조
언젠가 물어 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삿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 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골수에 전화電話 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 보리
죽기 전에 단 한 번 물어 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먼 곳에서부터/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1961. 9. 30.)
그리움의 시 / 김선굉
널 위하여 한 채의 섬을 사고 싶었다.
파도에 흰 발목을 묻을 수 있는 해안이 낮은 섬을 사고 싶었다.
널 위하여 오늘은 눈이 내리고, 그속을 내가 걷고 있다.
옛날엔 내 어깨가 아름다워서 흰 달빛을 무겁게 얹을수 있었고,
머리채에 푸른 바람을 잉잉 머물게 할 수도 있었다.
온몸으로 눈을 받으며 눈길을 걷는 것은 참 쉬운 일이었다.
마른 풀잎과 잔가지에 내리는 눈발을 보며, 나는 지금 서툴게 걷고 있다
흰눈 속에서 홀로 붉고 붉어서, 부끄러워라, 천천히 멈추어 서서 천천히
눈을 감는다.
잠시 후 눈이 그치면 금오산은 한 채의 희디흰 섬으로 떠오를 것이고,
내 눈은 아름다운 섬을 아름답게 볼 수 있으리라.
그걸 네게 주겠다.
아아, 너무 작은 내가 너무 큰 그리움을 너에게 주리라.
호구(糊口) / 권혁웅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은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사랑이 거짓말/김상용
사랑이 거짓말 님 날 사랑 거짖말
꿈에 와 보인단 말 그 더욱 거짓말
나같이 잠 아니오면 어느 꿈에 뵈오리
▶김상용(1561~1637)=조선 중기 문신으로 승지, 판돈녕부사, 이조판서, 우의정 등 관직을 지냈다. 문집으로 '선원유고' 7권, 시조로 '오륜가' '훈계자손가
은포역-강은교
그날 부산역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지, 바람은 낮게 불고, 지붕들은 끊임없이 안개를 게워내고 있었어, 전광판들은 일회용 타이어처럼 반짝반짝 영혼의 불을 켜대고, 의자들은 목을 한껏 늘이고 있었다, 혜성약국, 은하커피숍, 발이 긴 에스컬레이터 걷고 또 걸어,
전광판 반짝이는 붉은 글씨 사이로 한 천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천사의 날개는 희고도 검었으며, 천사의 눈까풀은 검고도 붉었다, 천사의 심장은 붉고도 붉었다, 천사의 붉은 심장에 도착의 입구가 가파르게 매달렸다
사랑하는 네가 걸어 나오는 저 도착의 출구
사랑하는 네가 걸어 나오는 저 출발의 입구
도착은 아름다워
도착의 출발은 아름다워
나는 나아간다, 사랑하는 너를 찾아 출발의 입구로 나아간다, 레일을 붙들고, 인생은 기차 바퀴 위에서 가끔 길게 퍼져, 인생의 이불은 무지개 숨빛 혹은 5월 모란빛으로 너울거리고, 소망우체통엔 지상에서 가장 긴 편지 달랑거리고,
막다른 골목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사는 나의 애인을 지독히 사랑했네
막다른 골목에서 늘 헤어지던 인사
막다른 골목에서 만져보던 애인의 손
끝없는 미로의
미래의 단추를 사랑했네
오늘 밤은 미로에 갇힌 애인의 꿈을 불러보네
애인의 꿈속을 뛰어다니네
풀처럼 풀떡풀떡 뛰어다니네
사랑하는 나의 애인 사라진 벼랑
아, 숨 막히는 삶
너에게
너에게 밥을 먹이고 싶네
내 뜨끈뜨끈한 혈관으로 덮인 밥 한 그릇
월장(月葬)/ 김준태(1948~ )
달에 묻었네
서녘 초승달 속에
그대를 묻어 보냈네
옛 노래처럼
달에 묻었네
만장도
꽃상여도 없이
울음소리도 없이
달에 보냈네
떠오르는 달에
그대를 묻어
보냈네 꽃처럼
옛노래처럼!
12월의 연가
겨울이 온다 해도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
멀리서 밀려오는 찬바람이
꽃과 나무와 세상의 모든 향기를 거두어 가도
그대여. 나는 오히려 가슴 뜨거워지리.
더 멀리서 불어오는 12월 끝의 바람이
그 무성했던 그림자마저 거두어 가버릴지라도
사랑이여, 나는 끝끝내 가슴 뜨거워 설레이리
저 벌판의 논고랑에 고인 조그마한 물방울 속에서도
때로는 살얼음 밑에서도 숨쉬며 반짝이는 송사리떼들
그 송사리떼들의 반짝임 속이라도 내 마음을 부벼 넣으리
어쩌면 상수리나무 몇 그루처럼 산등성이에 머무는
우리 시대 그대여. 겨울의 그 끝은....
오히려 사랑의 처절한 불꽃으로 타오르리.
지금은 두 손뿐인 그대여
연애/ 복효근
한 여자가 깜깜한 흐느낌에서 일어나 불을 환히 켰으므로
때마침 그 창가에 뛰어내리던 빗물은 빛물이 되었으므로
스스로 길 밝혀 밤새 강에 이르렀으므로
저물도록 흘러가다가 가파른 한 구비에서
몸을 뒤틀 때 강물에선 한 무리 빛떼가 반짝였으므로
그 때 강 언덕에서 눈물 찍어대던 한 사내 그 빛무리 보았으므로
일어나 어둠 속으로 그 사내 돌아갔으므로
내일은 다시 해가 뜰 것이므로
수선화에게 묻다
말라비틀어진 수선화 알뿌리를 다듬어
다시 묻고 나니
비 내리고 어김없이 촉을 틔운다
한 생의 매듭 뒤에도 또 시작은 있다는 것인지
어떻게 잎사귀 몇 개로
저 계절을 건너겠다는 것인지
이 무모한 여행 다음에
기어이 다다를 그 어디 마련이나 있는지
귀 기울이면
알뿌리, 겹겹 상처가 서로를 끌어안는 소리
다시 실뿌리 내려 먼 강물을 끌어오는 소리
어머니 자궁 속에서 듣던 그 모음 같은 것 자음 같은 것
살아야 함에 이유를 찾는 것은 사치라는 듯
말없이 꽃몽오리는 맺히고
무에 그리 목마르게 그리운 것 있어
또 한 세상 도모하며
잎은 잎대로 꽃대궁은 또 꽃대궁대로 일어서는데
이제 피어날 수선화는 뿌리가 입은 상처의 총화라면
오늘 안간힘으로 일어서는 내 생이,
내생에 피울 꽃이
수선화처럼은 아름다워야 되지 않겠는가
꽃, 다음 생을 엿듣기 위한 귀는 아닐까
눈 오는 날
눈 · 이 · 온 · 다
이렇게 오래된 풍경 앞에서도
살아있음이 두근두근 설레는 날이 있거니
참으로 진부한 이 설레임으로
불러보고 싶은 이름 있어
세상은 그 진창을 잠시 숨겨놓았을 뿐이지만
눈이 내리는 동안만이라도 눈이 쌓여있는 동안만이라도
그 빛깔로 기억하고 싶은 시간은 있어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나* 잊어버릴
이루지 못한 약속처럼 귀하고 또 가슴 애리게
슬픔 같은 것 부끄럼 같은 것들이
눈으로 내리는가
이제는 오지 않을 날들 위로
이제는 갈 수 없는 길들 위로
아주 옛 것인 듯 처음인 듯 가슴 후비며
눈 · 이 · 온 · 다
사 랑 했 노 라 사 랑 했 노 라 고
진부한 그 설레임으로
살아있음을 편지 쓰고 싶은 날
* 소월의 「먼 후일」에서
여울이라는 말
여울이란 말 예쁘지 않나요? 내 애인의 이름이 여울이었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여울져간다는 말 휘늘어진 버들가지처럼 느릿느릿 여유 있어 보이지 않나요? 강여울 여울여울 기복도 결도 보여주지 않는 그 한가로운 표정이 넉넉해 보이지 않나요? 그러나 물살이 거세게 흐르는 곳이라는 강퍅한 뜻을 가진 말이란 것도 아시나요? 내 애인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단박에 그 빠른 물길에 휩쓸어 가버리면서도 그 표정은 여울이란 말처럼이나 끄떡없어서 내가 여울에 빠져 허우적댄다 해도 남들이 듣기에 춤처럼은 느껴지지 않을래나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는* 그 능갈맞은, 그래서 천만번은 더 빠져나 보고 싶은 여울 여울이란 말 참 예쁘지 않나요?
* 소월의 「개여울」에서
"응"/ 문정희
햇빛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소름/ 김주대
언제나 마음속 깊이 있겠다던 그녀가
살갗을 빠져나와
고주망태 길바닥에 잠든 나를 깨운다
추운 살갗을 비빌 때마다 오톨오톨 묻어나오는 목소리
자기야, 얼른 집에 들어가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김주대
산정의 어떤 나무는 바람 부는 쪽으로 모든 가지가 뻗어 있다. 근육과 뼈를 비틀어 제 몸에 바람을 새겨놓은 것이다.
이별의 노래 / 최병무
더 이상 알기를 원하지 않네
빛 속으로 사라질 우리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려 하네
시간 속으로 사라질 우리
더 이상 기다리지 않으려 하네
우리는 꿈을 꾸었네
철없는 방랑자는
집 떠나기 원하였으나
길에서 우네
우리의 관계를 잊으려 하네,
우리의 관계를 잠시 잊으려 하네
그리움 / 최병무
(당신은) 내가 아직도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처럼 진부하고 아무 기준없이
쓰여지고 있음으로해서 나는 이 말의 사용을
주저하지만, 세상이 온통 사랑타령이고
그만큼 허전해서가 아니라 다른 내 말들까지
그 격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그리움은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그리움을 가지고 있으니까
시간을 버티게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는
이것은 눈먼 사랑 앞에 결점이 보이지 않는
바람이었다 나는 유심론을 버리지 못하여
화려한 것에 낯설어하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관계의 理想이 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가,
오늘 당신이 건재함이 그리움인 당신을
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Alfred D. Souza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눈오는 저녁 / 김소월
바람 자는 이 저녁
흰 눈은 퍼붓는데
무얼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은
꿈이라도 뀌면은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 눈 타고 오시네
저녁때 흰 눈은 퍼부어라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목마르다— 구재기
우물이 깊을수록
두레박의 끈은 길다
심한 목마름에
한 두레박의 물을 길어 올려도
목마름을 위해서는
한 모금의 물만 필요할 뿐
하늘의 구름 사이
밝은 달이 우물에 빠지면
그때마다 나는 급히 목마르다
서둘러 두레박을 내리지만
끈이 긴 두레박의 물은
쉽게 내 입술에 닿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가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들려주어도, 쉽게
나의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다
차라리 깊이 빠져드는
한 덩이 달이 되고 싶다
번짐의 속성― 김문배
시작은 언제나
작은 스침이었다
유입된 감정은
경계를 벗어난 번짐으로
방향과 속도를 잃은 채
촉촉이 젖어 간다
체온을 공유하지 않고도
뜨거워진 심장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는
림프액처럼
무너진 담장을 넘어
몸속 깊숙이 파고 든다
수묵화는
경계를 벗어난 번짐이요
사랑은
기다림과 갈증의 미학이다
벚— 임현정
목이 잘린 후에도
아주 잠깐 볼 수 있다고 해
광어는 봤을까
동강 난 몸이 명랑하게 팔딱이는 걸
네가 떠난 후에도
내 사랑은 아주 잠깐 팔딱이는 걸
벚 아래 서면
가장 환한 가지를 잘라
목에 꽂고 싶다
말 대신 꽃잎이 날아갔음 해
잘린 너도 아주 잠깐 꽃을 피우겠지
유실물 보관소— 전윤호
그 이름을 잃어 버렸다
못 잊을 줄 알았는데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는다
우주에 사라지는 건 없어서
여기 아니면 다른 데 나타난다는데
당신은 누구의 뜰에 꽃피었을까
어느 햇볕 어떤 바람에
허리를 살랑이며 웃고 있을까
지붕을 두들기는 소낙비
나는 어디서 잃어버린
누구의 애인일까
탁본(拓本)— 서대선
네
위로
나를 포개어 보는
먹물에 흠씬 젖어
네 위에 엎어져 보는
팔만대장경
혹은
월인천강지곡 같은
사람.
여행- 조성순
끝나서
집에 왔는데
마음이 오지 않는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
하루
또
하루
오늘이
어제가 되어 가는데
몸이 오지 않는다.
점쟁이맹키로— 김청미
어째 그라고 내 맘을 잘 아시오
어디가 똑각 부러지거나 터지거나,
그러먼 여기가 아프다 헐 건디
꼭 집어 입원할 만치 아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아픈 것도 아니어서
참말로 뭐라고 말도 못 허고
눈치만 보고 있는디
점쟁이맹키로 내 맘을 딱 알아준께
병도 바로 나슬 거 같은디요
해돋이 해넘이— 이혜선
1. 해돋이
그 여자
눈동자에 불이 화라락
젖가슴이 탱탱해졌다
온몸에 새싹 돋아났다
그 남자의 눈짓 한 번에,
2. 해넘이
그 남자
중심축이 기우뚱
얼이 빠져
세상이 캄캄해졌다
그녀의 한숨 한 번에,
나에게 주는 시— 류 근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존재의 이유― 김종환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지금은 헤어져 있어도
네가 보고 싶어도 참고 있을 뿐이지
언젠간 다시 만날 테니까
그리 오래 헤어지진 않아
너에게 나는 돌아갈 거야
모든 걸 포기하고 네게 가고 싶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지만
네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네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조금 늦는다고 바뀌는 건 없겠지. 남자란 때로 그 무엇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때도 있는 거야. 넌 이해 할 수 있겠지? 정말 미안해. 널 힘들게 해서. 하지만 너무 슬퍼는 하지마. 너의 곁엔 항상 내가 있을 테니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슬퍼도 조금만 참아줘.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야. 널 사랑해.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가고
내손엔 작은 너의 사진뿐
너를 다시 만나면 꼭 안고 놓지 않으리
헤어져 있던 시간만큼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지만
네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네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가수 김종환은 2018년 10월, 월간 종합문예지 <문학세계>의 신인문학상 공모에 <사랑하는 일>, <서리꽃>, <지우개 같은 추억은 없네> 세 편의 시가 당선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간통(姦通)― 신종호
- 어떤 죄는 아름답다
저기 빈 뜰과 바람의 눈짓. 갈라져 금 간 회색 담벼락 아래, 열쇠처럼 웅크리고 있는, 유월 목단의 묘한 얼굴. 나는 권태의 팔목이고, 너는 향기 없는 침묵의 혀, 분홍 바람이 일어섰다 앉은 자리, 꽃으로부터 십리는 멀어져 있는, 나의 붉은 맨발. 꽃과 나와 바람의 허튼 수작(手作). 서로의 하초(下焦)가 잠시 간지럽다. 아, 가볍다 여기 이곳.
홍시― 문숙
너를 사랑하는 일이
떫은맛을 버려야 하는 일이네
물렁해져 중심마저 버려야 하는 일이네
긴 시간 네 그림자에 갇혀
어둠을 견뎌야만 하는 일이네
모든 감각을 닫고 먹먹해져야 하는 일이네
겉은 두고 속만 허물어야 하는 일이네
붉은 울음을 안으로 쟁이는 일이네
사랑이란
일생 심지도 없이 살아야 하는 일이네
결국 네 허기진 속을 나로 채우는 일이네
너를 보내고― 권옥희
누가 먼저 빌고 간 돌탑 위에
네 이름을 묻으며
시누대 숲을 오가는 바람처럼 잊으라 했다
밀어도 밀어내도 떨치지 못할
몹쓸 연(緣)의 사람아
아, 사람아
두 손 안에 감싸 쥔 그리움 한줌으로
너도 어디엔가
내 여자의 돌탑을 쌓고 있겠지
백일홍― 심재휘
창가의 화분에 꽃을 피운
백일홍 한 송이가 저물고 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면
유리창에 어깨를 한없이 기댄 꽃
석 달 열흘 기한으로 붉은 꽃
가을볕에 말라가며 이제
제 빛을 물리고 있다
나는 쓰고 있던 긴 편지를 버린다
소리 없이 마르는 꽃 한 송이로
그대를 묻는 나의 안부여
오늘은 시계 소리가 창 안에서 유독 맑고
서성이는 그림자 하나 산그늘에 들듯
겹겹으로 외롭던 목숨 하나가
끝끝내 희미해지고 있다
지지도 못하고 서서 마르는 백일홍 저는
되돌려 받을 길 없는 마음들을
지금도 멀리 떠나보내고 있는 꽃
채석강― 주영중
붕 뜬 도끼처럼
다녀왔습니다, 허공을 찍으며
당신을 보내고 왔습니다
침묵으로 말을 감싸며 왔습니다
돌아오는 도로는 온통 칠흑이었습니다
배후와 한 뼘을 두고
내내 도망쳐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찍은
깊은 영혼이
자꾸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 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호칭― 서영식
저기요
너는 나를 이렇게 불렀다
네 곁에서 나는
저-어-기
먼 풍경이 되다가
무관심이 되다가
우주만 한
배경이 되다가, 저기
까마득한 별이 되었다
저기, 너는
너는 나를 이렇게 멀리 보내두고
갔다
진달래 꽃— 최문자
괜찮아, 괜찮아 뒷산에 불 지른 것 불이 나를 지나 내 푸른 노트 다 태워 버린 것 가장 찬란한 사랑은 언제나 다 타고 난 가루에서 빛나는 것 한 번의 뜨거움으로 죽도록 꽃은 가루가 되겠지 한 사나흘 비 뿌리는 동안 꽃이 물이 되는 거 그 물이 불을 끄고 돌아서서 다시 푸른 노트가 되는 것 괜찮아, 괜찮아 뒷산에 불 지른 것 불 지르고 돌아서서 진분홍 물이 되는 거 알 수 없는 그 고단했던 사랑
꽃잎 날리는 모든 이별
괜찮아
벚꽃 지다 / 방민호
날이 흐리다 어제보다 흐린 오늘 꽃이 떠나고 있다 네 슬픈 눈시울처럼 붉어진 흰 꽃잎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있다 나 여기 레테의 강 건너 네 곁으로 왔단다 함께 있는 때만이라도 즐겁기로 했었지 약속을 어긴 건 당신이에요 너는 말하는데 꽃나무는 말이 없다 책을 읽어야겠지 상처 다스리는 법이 페이지마다 씌어 있지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 들어가 비밀스레 나의 모더니즘을 읽는다 꽃잎처럼 흩어진 시간 끝에 선다 벼랑 끝에 바람이 분다 생은 스러지기 전에 크게 한 번 빛나는 법 꽃잎 떠난 자리에 황토비 내리겠지 너 떠난 자리에 칠흑이 서겠지
밤눈 / 전윤호
오래 참아온 말들이 굳어
화석이 되는 밤
추억도 공소시효가 있어
사랑한다고 언제까지 잡아둘 순 없겠지
포승줄에 묶여 실려 가는 시간들
변호인도 없이 유죄가 되고
종신형 받을 후회는 어쩔까
불타는 겨울 여윈 눈 내리네
사랑, 허벅지라는 말 / 석연경
가끔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 날이 있다
누군가의 허벅지를 베고
눕고 싶을 때가 있다
봄물 드는 꽃봉오리 보고 앉아
종일 네 생각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너만도 나만도 못한
너보다도 나보다도 잘난
사람의 살냄새를 맡고 싶다
생각해보니 나는 세상이
거대한 곳이라는 생각을 한 적 없다
누군가의 허벅지
거기에 기대어보는 그 편안함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더 깊게 느껴질 때가 있다
허벅지는 다 가지지 않는 사랑이다
거기서 멈춤과 그러고도 깊은 나눔의 마음이다
허벅지에서 멈춘 우리의 사랑.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순간들 / 박지영
괴로움도 싹이 트고 잎이 나는가
꽃피기 전에 이 괴로움
징검다리 건너보낼 수 있다면
빗물에 씻어버릴 수 있다면
이 괴로움
손 탁탁 털고 제 갈 길 갈 텐데
정작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꽃피는지
제안에서 제 살을 깎아 먹고 자라는
저것들 때문에 오래 어두워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는데
봄볕에 내어놓고
얼굴 씻어주고 옷깃 여며줄 수 있다면
괴로움이 극진하게 안으로 차오를 때면
그게 기쁨인지 슬픔인지
슬픔인지 기쁨인지
정말 모르겠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괴로워하는지
괴로움을 괴로워하는지
먼 데서 온 택배 같은 것 / 송종규
내가 당신에게 집중하는 동안 당신은
태산처럼 커졌지만
다행이다
이제 나는 당신에 대해 아무 짓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행이다
당신을 떠올려도 나는 이제 목이 메이지 않는다
우주 저편에서부터
기적처럼 저녁이 당도했고 그 봄날
나비처럼 사뿐히 당신은 사라졌다
사실, 이별은 아주 먼 데서 온 택배 같은 것이지만
오래 전부터 꽃들에게 이별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다만 암묵적인 규칙이 있을 뿐이었다
어떤 경이로움이 엄습해 올 때 이를테면, 천둥과 우래 운무 같은 것까지
그들은 그것들을 꽃의 안쪽으로 들여놓았다
바닷가 언덕을 하루 종일 걸었다
세월은 충분히 깊어졌다, 무릎이 다 젖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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