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世上)에 대단한 것은 없다 / 한병진(韓秉珍)
삶을 원망하지 마라/ 한병진
시(詩)를 읽는다/ 박완서
러브호텔 / 문정희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랜트 윌슨 스미스
거룩한 독서/ 배영옥
이 맘 알까/ 황 창 남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문향란
시(詩) 파는 사람 /이상국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힘들고 어렵다/ 권 선 옥
개와 늑대의 시간/ 이 광 소
거짓말/ 공 광 규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정 용 철
나의 여자관계/홍사성
그 한 마디를 못한다 / 김철현
걸림돌/공광규
햇살의 말씀 /공광규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박 노 해
진실/ 박 노 해
새해에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박노해
새벽에 용서를/김 재 진
잃어버린 것들/박노해
티비를 보다가/ 문 장 수
나는 살아있다/이 기 철
텅 빈 나 /오세영
목에 걸리는 말/강인한
세상에 생명 있는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게 없다/김종철
오래 말하는 사이
다보탑을 줍다/신 달 자
어떤 발견/ 문 장 수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 정호승
그러려니 하세요/박노해
연애편지/안도현-
이런 날, 할머니 말씀/ 박노해
늙은 꽃-문정희
팬티와 빤쓰/손현숙
팔월/김 정 원
눈물 흘려도 돼/ 양광모
오늘 밤 비 내리고/ 도종환
인연(因緣) / 복효근
불안도 꽃인 것을/이규리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 / 이기철
아버님 말씀/정희성
그런 거다 /정명순
사람 사는 일이/강세화
괜찮아 /한강(1970~ )
그런 저녁/ 박제영
동행(同行)/권영오
거시기/ 박 제 영
세상의 중심은/ 백 무 산
오늘을 사랑하라 / 토마스 칼라일
수상록 읽는 밤/ 이기철
다산(茶山)의 말/ 이해인 수녀
히말라야에서/ 백무산
무무소유(無無所有)/ 백 무 산
살아남은 자의 기쁨/박상천
세상의 눈들이 무섭다/ 유승도
아무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 /무스타파 달랩
장작불/백 무 산
목련- 조 정
목련 - 정병근
목련 – 박주택
넌 참 ㄸㄸ해/ 강 희 복
문득, 생각나서 /윤이산
나무 생각/ 안도현
세상(世上)에 대단한 것은 없다 / 한병진(韓秉珍)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 소리가 다르고
입고 먹고 자는 것마저
조상이 남긴 대로 제각각 일 것이다
여호와만 받아들이고
부처님의 자비만 빌고
알라신을 위해 경배하지만
사람보다 죄많은 짐승은 없을 것이다.
글 쓰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목소리 울림으로 사는 사람
논밭에서 평생을 다한 자들도 있다
막걸리가 좋다고
포도주가 좋다고
위스키가 좋다고
별것도 아닌 것에 입맛의 허영이 부질없다
홍도가 멋지다고
울릉도가 더 좋다고
제주도가 최고라고
차라리 방 안에서 뒹굴어도 좋은 날이다
육고기를 먹고
바닷고기를 먹고
굼벵이 달팽이 지렁이를 먹고
백 년 넘기겠다 욕심 많은 자도 많다
한 끼만 먹으랴
두 끼만 먹으랴
세 끼만 먹으랴
힘없이 쓰러진 채 굶은 사람도 있다
어렵사리 한번
세상에 왔을 뿐
쉽사리 세상을 버리는 게 아쉽지만
어느 날 이별은 너를 외면할 것이다
지폐 뭉치를 매만지고
호령 소리로 세상을 놀래키고
천년을 남길 이름을 지녔을지언정
마지막 눈물로 세상을 돌아보지 말아다오
백 년을 살면
천년을 살고 싶을 테지만
천년을 살면
만년을 살고 싶은 욕심도 있을 것 같다
하늘과 땅에
잠시 머물러 있다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월이 너를 위해 흘러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삶을 원망하지 마라/ 한병진 -
머지않은 시간에
생명의 끈을 놓아야 할 여인이
자신의 삶을 들춰 보이며 눈물을 흘리셨다
“살아온 것이 아무것도 아니여!
가는 것이 무섭지는 않지만
놓고 가야 할 모든 것이 허망하당께”
위세를 부리고
교만을 떨고
경망스런 추태와
허영으로 세상을 살았던들...
밀알이 되겠노라고
아낌없는 사랑과 헌신을 쏟고
맑은 영혼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 살았을지라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아름다운 것일까?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삶을
자식들을 위한 여인의 희생뿐인 삶을
온몸을 가누지 못한
중병으로 몸져눕게 만든
몰염치의 작태는 누구의 소관일까?
덧없음의 눈물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해야 할 만큼
신의 방관이 온전할 것일까?
사는 것이 스스로의 기만이었음을
매달리고 의지했던
세상의 끝에서야 깨닫게 되는 우둔(愚鈍)이
영적 동물의 통과의례로 방치되고 마는 것일까
“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였는디
뭣땜시 한을 쌓고 살았는지 어리석었단 말이시!”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시(詩)를 읽는다/ 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러브호텔 / 문정희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랜트 윌슨 스미스 (미국,시인1856~1939)
(This, too, shall pass away.)
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네 삶에 밀려와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네 눈에서 영원히 앗아갈 때면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끝없이 힘든 일들이
네 감사의 노래를 멈추게 하고
기도하기에도 너무 지칠 때면
이 진실의 말로 하여금 네 마음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고
힘겨운 하루의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네게 미소 짓고
하루하루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근심 걱정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의 기쁨에 젖어 안식하지 않도록
이 말을 깊이 생각하고 가슴에 품어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너의 진실한 노력이 명예와 영광
그리고 지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네게 가져와 웃음을 선사할 때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일도,
가장 웅대한 일도
지상에서 잠깐 스쳐가는 한순간에 불과함을 기억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거룩한 독서/ 배영옥
비석(碑石)은
한 줄로 읽는 망자(亡者)의 자서전(自敍傳)
이름과 문중(門中)
그리고 매장(埋葬) 연도(年度)만으로도
일대기(一代記)를 알 수 있다
자간(字間)은 좁고
행간(行間)은 넓다
짧은 주석(注釋) 하나 없이
한 생애(生涯)가
저리 일목요연(一目瞭然) 할 수 있다니
저 두껍고 무거운 책 앞에선
누구도
비평(批評)을 달지 못하리라.
적당히라는 말 / 박선미
틈과 틈 사이
그늘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 건너가 있다.
건너오고 건너가는
벌어지지 않고 바라보는
건너를 그리워하는 동안
한 계절을 건넜고
씨앗처럼 흩뿌리는 비
언 땅 비집고 꽃이 피어났다.
또 한 계절 건너기 전
사람과 사람 사이 건널 수 없는
건너의 틈을 메우자.
무너져 건너가 더 깊어져도
끝없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거리의 정도에 가 닿자.
이 맘 알까/ 황 창 남
기다린다고
봄이 빨리 오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지 않는다고
봄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봄볕이 그리운 날이면
기다려 진다
니가,
그렇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문향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사랑을 하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내일은 없습니다.
위험한 하루에 나를 던져 사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은
내게 갑작스레 불어닥친 바람을 힘들이지 않고
막는 것과도 같으니까요.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내게는 뒤로 미루는 것 또한 없습니다.
온 힘을 다해 오늘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내 生의 마지막 일입니다.
시(詩) 파는 사람 /이상국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
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 데다
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
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
일 년에 열 편쯤 팔면 잘 판다
그것도 더러는 외상이어서
아내는 공공 근로나 다니는 게 낫다고 하지만
사람이란 저마다 품격이 있는 법.
이 장사에도 때로는 유행이 있어
요즘은 절간 이야기나 물푸레나무 혹은
하늘의 별을 섞어내기도 하는데
어떤 날은 서울에서 주문 오기도 한다
보통은 시골보다 값을 조금 더 쳐주긴 해도
말이 그렇지 떼이기 일쑤다
그래도 그것으로 자동차의 기름도 사고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는데
가끔 장부를 펴놓고 수지를 따져보는 날이면
세상이 허술한 게 고마워서 혼자 웃기도 한다
사람들은 내 시의 원가가 만만찮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우주에서 원료를 그냥 퍼다 쓰기 때문에
팔면 파는 대로 남는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시 파는 집 간판을 내리지 않을 작정이다.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1902~1963 터키 혁명 시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힘들고 어렵다/ 권 선 옥
먹고살기 힘들지만
바르게 먹고살기는 더 힘들다
사람대접받기 힘들지만
사람 구실하기가 더 힘들다
부모 노릇하기 어려운데
자식 노릇하기는 더 어렵다
욕 안 먹고 살기 어렵다는데
죽어서 욕 안 듣기 더욱 어렵다.
개와 늑대의 시간/ 이 광 소
어둠이 내릴 무렵
저기, 마을로 들어오는 것이 개인가 늑대인가
분별할 수 없는 시간
우리는 무엇인가 준비하는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거리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수십 명이 쓰러질지 모르는 거다
한때 사거리 편의점 입구에 모인 사람들,
커피를 마신 종이컵들이 쌓였던 때를 기억한다
언젠가 큰 거리에서 내뿜던 최루탄 가스에 쫓겨
학생들은 골목으로 도망치다 쓰러졌고
꿈 속인지 생시인지
나는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날아간 적도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았다
퇴근 후 집으로 일찍 들어가는 길을 잃어버렸으며
우리 함께 연접된 끈을 잃어버렸다
이제 무엇을 맞이할 것인가
더 이상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할 시간
잃은 것들을 그리워하며
거리를 서성이는 자들은 의지가 필요하리
장례차가 급히 지나가고
사거리를 지나간 사람들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일
주인을 잃은 개 한 마리 어슬렁거린다.
거짓말/ 공 광 규
대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을 더 크게 비워가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썩히며 텅텅 비워간다
혼자 남은 시골 흙집도 텅 비어 있다가
머지않아 쓰러질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머리에 글자를 구겨 박으려고 애쓴다
살림집 평수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친구를 얻으려고 술집을 전전하고
거시기를 한 번 더 해보려고 정력식품을 찾는다
대나무를 느티나무를 시골집을 사랑한다는 내가
늘 생각하거나 하는 짓이 이렇다
사는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내가 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다
나를 얼른 패 죽여야 한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정 용 철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합니다
정말 멋있고 예쁜 모습의 나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나는 지금보다 더 교만하고 외모에 치중하여
겸손과 소박함의
아름다운 삶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집의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더 잘 살고 여유 있는 가족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지금 우리 가족은
화목과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우리 가족 이대로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나의 직장생활에 만족합니다
환경이 더 좋고 보수가 높은 직장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노동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모른 채
안일에 젖어 나태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직장생활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만족합니다
더 쉽고 빠른 길로 가게 되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지금의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한 채
외롭고 지친 몸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걷고 있는 나의 길에 대하여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내가 소유한 물질에 만족합니다
더 많은 물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지만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마음의 아름다움보다
물질의 풍요가 더 귀한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만큼의 내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나의 여자관계/홍사성
고백건대 나는 여자관계가 좀 복잡하다
할머니에게는 손자 외할머니에게는 외손자 어머니에게는 아들
백모 숙모 고모 이모에게는 조카 누나에게는 남동생
여동생에게는 오라비 아내에게는 남편 딸에게는 아빠 손녀에게는 할아버지
선생님에게는 제자 동창에게는 친구 후배에게는 선배 첫사랑 그녀에게는 애인
은행 창구 여직원에게는 고객님 술집 주모에게는 아저씨다.
나를 여자 없이 못 사는 사내라는데 사실이다
나는 이날 입때껏 뭇 여자의 치마폭에서 살았다
누가 여자의 웃음과 은애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알아봤더니 우리 집안 내력이 할아버지 아버지 형님 사촌들도 그렇다고 한다.
그 한 마디를 못한다 / 김철현
한 마디면 되는 것을
그 한마디를 못하고 산다.
"미안하다".
마음에 담아 두고 병들어 하면서도
그 한 마디를 못하고 산다
"보고 싶다".
숱한 말들을 쏟아내며 살지만
정작 그 한마디를 못하고 산다.
"사랑한다".
걸림돌/공광규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되 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햇살의 말씀 /공광규
세상에 사람과 집이 하도 많아서
하느님께서 모두 들르시기가 어려운지라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거실 깊숙이 햇살을 넣어주시는데
베란다 화초를 반짝반짝 만지시고
난초 입에 앉아 휘청 몸무게를 재어보시고
기어가는 쌀벌레 옆구리를 간지럼 태워 데굴데굴 구르게 하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도 환하게 만지시고
컴퓨터와 펼친 책을 자상하게 훑어보시고는
연필을 쥐고 백지에 사각사각 무슨 말씀을 써보라고 하시는지라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귀를 세우고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햇살도 함께 누워서 볼과 코와 이마를 만져주시는지라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을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규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박 노 해
그 사람 詩밖에 몰라
그 사람 꽃밖에 몰라
넌 전문성이 모자라
넌 현실감이 모자라
그래,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그래야 서로 기대고 나눌 수 있지
그래야 서로 모자란 구석을 채워줄 수 있지
그래야 덕분에 산다는 것도 알게 되지
그게 사람 사는 세상 아닌가
잘난 사람끼리 사는 게 어디 삶인가
서로 돕고 함께 사는 게 좋은 세상 아닌가
그래,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진실/ 박 노 해
큰 사람이 되고자 까치발 서지 않았지
키 큰 나무숲을 걷다 보니 내 키가 커졌지
행복을 찾아서 길을 걷지 않았지
옳은 길을 걷다 보니 행복이 깃들었지
사랑을 구하려고 두리번거리지 않았지
사랑으로 살다 보니 사랑이 찾아왔지
좋은 시를 쓰려고 고뇌하지 않았지
시대를 고뇌하다 보니 시가 울려왔지
가슴 뛰는 삶을 찾아 헤매지 않았지
가슴 아픈 이들과 함께하니 가슴이 떨려왔지.
새해에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박노해
새해에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은
그 집에 살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그 물건을 두고두고 쓸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일을 잘해보려는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사람도 좋아지겠다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사람을 중심에 두는
한 해였으면 좋겠습니다
밥을 먹어도 이 밥을 기르고 지어낸
사람들을 생각하고
옷을 입고 차를 타고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그것을 생산하고 땀 흘린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우리 사회와 역사와 인류를 생각하되
사람을 중심에 두는 운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일도 밥도 꿈도 중요하지만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용서를/김 재 진
그대에게 보낸 말들이
그대를 다치게 했음을
그대에게 보낸 침묵이
서로를 문 닫게 했음을
내 안에 숨죽인 그 힘든 세월이
한 번도 그대를 어루만지지 못했음을
잃어버린 것들/박노해
노래방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은 방문을 벗어나면
노래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고 나서
택시 기사들마저 모니터를 벗어나면
길눈이 어두워져 버렸다
컴퓨터가 나오고 나서
아이들은 귀 기울여 듣고 기억하고
가만히 얼굴을 마주 보는 법을 잃어버렸다
자동차 바퀴에 내 두 발로 걷는 능력을 내주고
대학 자격증에 스스로 배우는 능력을 내주고
의료 시스템에 내 몸 안의 치유 능력을 내주고
국가 권력에 내 삶의 자율 권력을 내주고
하나뿐인 삶으로 내몰리면서
나는 삶을 잃어버렸다.
티비를 보다가/ 문 장 수
역병(疫病)은 어떤 목적을 가진듯하다
잦아들 시점(時点)은 더 멀어질 수도 있고
그것은 사피엔스의 태도에 달린듯하다
탄소(炭素)가 넘쳐 기후(氣候)는 재앙(災殃)으로 오고
점점 더워지는 행성(行星)은 임계(臨界)에 다다랐다
봄이 오고 아침이 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민주주의는 패당(牌黨)과 이익 아래 남루(襤褸) 해 지고
세상의 모든 정치(政治)들은 같은 계산으로 바쁘다
대의(大義)는 없고 비굴한 영달(榮達)만 남았다
불안한 아이들이 빚을 내어 주식(株式)을 하고
여자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집을 사러 다닌다
노동(勞動)은 바보고 탐욕(貪慾)은 난장(亂場)이 되었다
함부로는 대가(代價)를 치른다
멈추지 않으면 멈추어진다
어디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근원적(根源的) 혁명(革命)과 리셋에 대한 생각을 한다
지상파(地上波)에서 전태일 열사가 나온다
오십 년 전 그의 분신(焚身)을 본다
티브이를 보다가 낮술을 하고 만다.
네 영혼의 계좌번호/ 이복희
나는 오늘 너에게
사랑을 무통장으로 입금시켰다.
온라인으로 전산 처리되는
나의 사랑은 몇 자리의 숫자로
너의 통장에 찍힐 것이다.
오늘 날짜는 생략하기로 하자.
의뢰인이 나였고 수취인이 너였다는
사실만 기억했으면 한다.
통장에 사랑이 무수히 송금되면
너는 전국 어디서나
필요한 만큼 인출하여 유용할 수 있고,
너의 비밀 구좌에 다만 사랑을 적립하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서는
사랑하지 말자.
오늘도 나는 은행으로 들어간다.
무통장 입금증에
네 영혼의 계좌번호를 적어 넣고
내가 가진 마지막의 사랑을 송금시킨다.
나는 살아있다/이 기 철
누구든 아침에는
신성(神聖) 해지고 밤에는 한번 씩 악마(惡魔)가 된다
나는 선(善)의 얼굴도 악(惡)의 얼굴도 만난 적 없기에
선과 악은 하나라는 믿음을 갖는다
악마(惡魔)의 지갑에도 돈이 들어있고
성직자(聖職者)의 지갑에도 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나를 경악(驚愕) 케 한다
불상(佛像) 앞에서는 누구나 어린아이가 된다
성모상(聖母像) 앞에서는 누구나 경건(敬虔) 해진다
그 사실이 나를 안심(安心) 케 한다
새 노래가 무엇을 전하는지를
나는 예순이 되어서야 조금은 깨달았다
풀벌레가 무슨 마음을 전하는지를
나는 머리카락이 반백(半白)이 되어서야 조금은 터득했다
내 마음속에 부침(浮沈) 하는 사유(思惟)들
미안하지만. 내 마음속 한 시간 안에 일어나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한 권의 장편(長篇)을 쓰리라
그러나 나의 앳된 서정(抒情)은 어린 순결(純潔) 이어서
인간의 삶 곁에선 늘 눈물 난다
나는 오늘,
햇볕 아래서는 새로운 일이란 없다고 단호(斷乎) 히 말한 뒤에도
그 말을 다시 한 번 부정(否定) 한다
그대여, 사람 사랑하는 일 외에 이 세상 무엇이 진실(眞實)이란 말인가
그러나, 들 가운데서 죽은 고기를 발견한 까마귀처럼
십만 권의 책 속에서 한 권의 책을 찾아낸다 한들.
십만 행의 글 가운데서 진리라는 말 하날 찾아낸다 한들
그것이 겨운 우리네 하루치의 노동의 대가(代價)가 된단 말인가
삶을 위해서는 어떤 위기(危機)에도 꽃을 바쳐야 한다
살아간다는 일보다 더 신성(神聖) 한 것은 없다
밥 먹고 글 쓰고 팽이를 잡는 일보다 무엇이 더 신성(神聖) 할 것인가
나는 오늘 노동(勞動) 하고 밥 먹고 사유(思惟) 하고 배설(排泄) 한다
나는 살아있다.
텅 빈 나 /오세영
나는 참 수많은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널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들을 내주었습니다.
헤엄쳐 건너면서 옷을 벗어주었습니다.
뗏목으로 건너면서 보석들을 주었습니다.
배로 건너면서 마지막 남은 동전조차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들을 넘었습니다.
산을 넘을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들을 건네주었습니다.
벼랑에 매달리면서 슬픔을 주었습니다.
비탈에 오르면서 기쁨을 주었습니다.
고개를 넘으면서 마침내
당신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건너왔기에
내겐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더불어 당신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나는 텅 비어 있으므로
지금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나를
당신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텅 빈 나를 더 반기실 줄 아는 까닭에...
목에 걸리는 말/강인한
인간을 믿으세요?
쓸쓸히 묻는 당신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다.
밤이 깊어지면 나는 그것을 안다.
까마귀 떼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이 는개 속에서
당신 말의 뼈가 목에 걸린다.
희디흰 당신의 외로움을
등 뒤에서 나는 찌를 수가 없다.
당신의 말은
타오르는 석윳불,
밤이 깊어지면 나의 말은
그 불에도 타지 않는 씨가 된다.
인간을 믿으세요?
내 말의 씨는 떨구어진다.
불꽃 속에, 당신의 슬픈 영혼 위에
광물질의 뿌리를 내린다.
자욱한 바람이 분다.
세상에 생명 있는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게 없다/김종철
무엇이 진리(眞理)이고 무엇이 공평(公平) 한가.
생명(生命)이 있고 호흡(呼吸) 하는 자에게
진리(眞理)와 공평(公平)은 없다.
다만
나름대로 잣대를 만들어 셈을 하는 것이다.
세월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상황도 변한다.
지구가 자전(自轉) 하듯
세상은 제모습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설령 세상이 돈에 미쳐 돌아가고
위정자가 권력에 미쳐 돌아가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혹(眩惑)에 미쳐 돌아간다.
우리는 비우는 연습을 하자.
빈 깡통이 소리가 나듯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마음에 여유(餘裕)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겠지
험하고 힘든 세상
우리 각박(刻薄) 하게 살지 말자.
헐렁한 마음 구석 하나 비워 두자.
깔깔 허허 웃을 수 있는 마음 하나 비워 두자.
사람은
죽음 앞에
가장 무기력(無氣力) 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거든.
여보게
세상 그리 각박하게 살지 마시게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고
먼 산도 쳐다보며 살아가세
가득 찬 마음에 짐 내려놓고.
마음 비우면 여유가 오고
여유 속에 달콤한 행복도 온다네.
오래 말하는 사이
너와 나의 깊은 왕래를 말로 해왔다
오래 말 주고받았지만
아직 목이 마르고
오늘도 우리의 말은 지붕을 지나 바다를 지나
바람 속을 오가며 진행 중이다
종일 말 주고 준 만큼 더 말을 받는다
말과 말이 섞여 비가 되고 바람이 되고
때때로 계절 없이 눈 내리기도 한다
말로 살림을 차린 우리
말로 고층 집을 지은 우리
말로 예닐곱 아이를 낳은 우리
그럼에도 우리 사이 왠지 너무 가볍고 헐렁하다
가슴에선 가끔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말할수록 간절한 것들
뭉쳐 돌이 되어 서로 부딪친다
돌밭 넓다
살은 달아나고 뼈는 우두둑 일어서는
우리들의 고단한 대화
허방을 꽉 메우는 진정한 말의
비밀번호를 우리는 서로 모른다
진정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은폐의 늪 그 위에
침묵의 연꽃 개화를 볼 수 있을까
단 한 마디만 피게 할 수 있을까
단 한마디의 독을 마시고
나란히 누울 수 있을까.
다보탑을 줍다/신 달 자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어떤 발견/ 문 장 수
지하철 타고 자리에 앉았는데
앞에 앉은 남학생이 책을 보고 있었다
폰이 아니라 책을 말이다
그것도 정호승 시인의 시집(詩集)을 말이다
나는 신대륙(新大陸)을 발견한 눈이 되어
그 빛나는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게임을 하거나 까똑을 하거나
너 튜브를 보며 키득거리거나
얼굴 책에 좋아요 품앗이를 하거나
하지 않고
낯설게도 놀랍게도 눈물 나게도
그 젊은 친구는 詩를 읽고 있었다
저 아이 손에 시집(詩集)을 들리게 한
귀한 인연(因緣) 들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 정호승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 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들을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 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라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간밤에 흘리신 하느님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 있다.
그러려니 하세요/박노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지만
삶의 대지에선
그런 것만이 아니지요
콩밭에는 잡초가 나고
벼논에는 피가 돋고
밀밭에는 가라지가 나지요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이웃 때문에 속상해도
그러려니 하세요
잡초가 나고 가라지가 나도
콩이 자기를 잃어버리나요
밀이 자기를 포기하는가요
그러려니 하세요
시달리면서도 나를 잃지만 마세요
부대끼면서도 한번 웃어 버리세요
웃는 놈이 이깁니다
질긴 놈이 이깁니다
잡초와 가라지는
선과 정의의 도약대이니까요
연애편지/안도현-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이런 날, 할머니 말씀/ 박노해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있어도 별일 아닌 걸 가지고
무슨 대단한 사태인 양
호들갑을 떨고 악소문을 퍼뜨리고
불안과 불신과 공포의 공기를 전하며
동네와 장터를 흉흉하게 만드는
근본 없는 자들을 향해서
할머니가 하는 말
염병하네, 엠병하네, 엠병하네
저 이가 염병을 퍼뜨리고 있다는
저 이가 전염병과 다름없다는
할머니의 단호한 일갈
염병하네, 엠병하네, 엠병하네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어린 내 손을 잡고
계곡 물가에서 귀를 씻기고 눈을 씻기고
마당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드린 후
호미를 들고 자기 할 일을 했다
마음 밭에 쳐들어오는
염병할 잡초 뿌리를 캐며.
늙은 꽃-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팬티와 빤쓰/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팔월/김 정 원
할아버지가 대인시장에서 수박을 고르신다
가운뎃손가락으로 수박을 툭툭 두드려 보고
"잘 익었다" 하시고
노점상 널조각 곁에 바짝 쪼그려 앉은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려 보고는
"아직 멀었다" 하신다.
눈물 흘려도 돼/ 양광모
비 좀 맞으면 어때
햇볕에 옷 말리면 되지.
길 가다 넘어지면 좀 어때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 되지.
사랑했던 사람 떠나면 좀 어때
가슴 좀 아프면 되지.
살아가는 게 슬프면 좀 어때
눈물 좀 흘리면 되지.
눈물 좀 흘리면 어때
어차피 울며 태어났잖아.
기쁠 때는 좀 활짝 웃어.
슬플 때는 좀 실컷 울어.
누가 뭐라 하면 좀 어때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이잖아.
오늘 밤 비 내리고/ 도종환
오늘 밤 비 내리고
몸 어디인가 소리 없이 아프다.
빗물은 꽃잎을 싣고 여울로 가고
세월은 육신(肉身)을 싣고 서천(西天)으로 기운다.
꽃지고 세월 지면 또 무엇이 남으리
비 내리는 밤에는 마음 기댈 곳 없어라.
인연(因緣) / 복효근
저 강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면
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텐데
바다로 흘러간다고도 하고 하늘로 간다고도 하지만
시방 듣는 이 물소리는 무엇인가
흘러간다면
저기 아직 먹이 잡는 새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은빛 배를 뒤채는 저 물고기들은
또 어디로 흘러간 물의 노래인가
공(空)이라 부를 건가
색(色)이라 부를 건가
물은 거기 서서 가지 않고 흐르는데
내 마음속으로도 흐르는데
저 나무와 새와 나와는 또 어디에 흘러
있는 것인가.
불안도 꽃인 것을/이규리
누가 알기나 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것을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죽고 싶다 할 때마다 조마조마 꽃이 피었던 걸
불안으로 한 아이를 낳고
불안으로 젖을 먹이고 몸을 씻기는 동안
불안 속에서 꽃이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 오래 있으면
기막히게 불안에도 쾌감이 있다는 걸
아이가 젖꼭지를 깨물었을 때라 할까
아니면 불륜, 불법, 불신, 불가능의 한때라 할까
불안으로 시험을 치고 낙방을 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고
그때마다 불안의 꽃이 피었던 걸
그다음 시절이 일러주었네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말해도 될까
초경 때처럼 깜빡 죽고 싶었던 걸 말해도 될까
눈부신 구름 꽃바람 꽃
비가 되었던 물의 꽃
꽃은 불안을 알지 못하지만 불안은 꽃을 알아보더군
천날 만날 내일이 불안하고 휴일이 불안하고
지나온 길
그 불안으로 꽃을 피웠으니
여기 이 꽃 무덤들, 이 불안의 무게들.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 / 이기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본가(本家)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住所)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本籍)에 실었다
우리 사는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아버님 말씀/정희성
학생들은 돌은 던지고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옥신각신 밀리다가 관악에서도
안암동에서도 신촌에서도 광주에서도
수백 명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 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
술 취해 돌아온 너를 보고 애비는
말 못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만 뜨겁구나
반갑고 서럽구나
평생을 발붙이고 살아온 터전에서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 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
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
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이렇게 하게 사는 애비 친구들도
평생을 살 붙이고 살아온 늙은 네 에미까지도
이젠 이 애비의 무능한 경제를
대놓고 비웃을 줄 알고 더 이상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구나
그렇다 아들아, 실패한 애비로서
다 늙어 여기저기 공사판은 기웃대며
자식새끼들 벌어 먹이느라 눈치 보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으로서
그래도 나는 할 말을 해야겠다
아들아, 행여 가난에 주눅 들지 말고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부디 네 불행을 운명으로 알지 마라
가난하고 떳떳하게 사는 이웃과
네가 언제나 한 몸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힘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나라임을 잊지 말아라
아직도 돌을 들고
피 흘리는 내 아들아.
그런 거다 /정명순
생각이 비워지지 않아
배를 비우기로 했다
산에 오르기로 했다
굶고 또 굶고
오르고 또 오르면
생각 같은 건 물러서겠지
배가 불러 잡생각 한다던
엄마의 말은 기가 막히다
다 먹고 살만하니 생긴 투정이다
뱃속을 비우니 먹을 것 생각뿐이다
몸을 괴롭히니 눕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런 거다 사는 게
그런 거다 사람이
사람 사는 일이/강세화
사람 사는 일이
강물처럼 흘러가서 멀어지는 것이라면
한때는 즐겁고 한때는 서럽거나
외롭고 막막해도 때로는 그립기도 할 것이다.
멀어져서 사라지는 그리움이지만
마음이 깊으면
영영 멀어지기만 하겠는가.
살면서 마음도 잃고
허무하게 무너져 보기도 하면서
여울에 혹하여 주춤거려보지 않은 사람은
찬란한 근심도
으리으리한 두려움도 어떻게 알겠는가.
살아온 날을 돌아보니
마음이 잠잠했던 적에도
감당하기 버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던 날에도
줄타기하듯이 아슬아슬하게
어느새 저만치 떠나가는 강물이었다.
살면서 느낀 것이
무던한 생각을 하고 보면
흘러가는 것이 다만 절망이 아니라
나날이 새롭게 열어가는
물길이 되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쓸쓸하고 안쓰러운 추억으로 남더라도
살다가 때로는 빛나는 날
바라지 않은 이자라도 생긴 듯이
어눌하게 고마운 내색을 밝히기도 하는 것이다.
괜찮아 /한강(1970~ )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 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 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젠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그런 저녁/ 박제영
1
바람이 지나간 후에도
시누 대가 저리 흔들립니다
새가 날아간 후에도
시누 대가 저리 흐느낍니다
내 생애 전부를 흔든 그 사람
내 생애 전부를 울린 그 사람
대숲 사이로 옛사랑이, 옛 문장이 스미어
붉은 노을로 번지는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2
둘이서 산책을 하고 돌아와
모처럼 시를 한 편 쓴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며
옛사랑이 도대체 누구냐며
그 사람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옛사랑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아내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지는
그런 저녁이 있다
동행(同行)/권영오
시간이 흘러 흘러 당신이 늙어지면
손끝이 마르고 씨방이 마르고
나 또한 늙어 늙어서 남은 시간 빤히 보이는 날
씨주머니 다 비우고 쏟아놓은 말뿐인데
그 말 단물 다 빠지고
찐득찐득 질긴 사랑만이 남아
최후의 발끝에 달라붙을 때
이 먼 길 오느라 수고했노라
마주 잡으면 다시 불꽃이 일 것 같은
마른 손으로 서걱서걱 볼 비비며
토닥토닥 삭정이 같은 등 두드리며
우리가 함께 늙어
가까운 곳도 먼 곳도 분간하지 못하고
오로지 마주 보는 얼굴만 그렁그렁 넘칠 때
꽃조차 힘이 세져 좀처럼 꺾이지 않고
천신만고 끝에 꽃을 꺾어
그대 귀 뒤에 꽂아주리라
청춘의 기억 같은 꽃을 덮고 함께 누워
인생도 좀 쉬고 사랑도 좀 쉬고
두 손에 풀기 말라도 꼭 잡은 그날까지.
거시기/ 박 제 영
거시기한 맛이 업서브러야
긍께 머랄까 맥업시 맴이 짠~해지는, 거시기 말이여
느그 詩는 그거시 업당께로
이 고들빼기 맹키로 싸한 구석이나 있으믄 쪼매 봐줄라나
그것도 업잔여
한마디로 맹탕이랑께
워따 가스내 맹키로 삐지기는
다 농잉께 얼굴 피고 술이나 마시뿌자
내 야그가 그로코롬 거시기 하면 서안나가 쓴 동백아가씨란 시가 있어야
낸중에 함 보라고 겁나게 거시기 할텡께
장사이기가 오늘은 내 서방이여
이 대목에선 워매, 가심이 칵!
환장해분당께
아지매, 무다요 술이 업서야
지금 거시기해부렸응께 싸게 갖구 와야.
세상의 중심은/ 백 무 산
숲으로 가는 길은 세상을 등지는 일이 아니다
산에 오르는 일은 세상을 벗어나는 길이 아니다
세상을 벗어날 생각으로 그곳에 간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상한 세상 하나 더 만들고
세상에 그냥 묻혀 살자고 사는 사람들은
틈만 나면 세상 벗어날 궁리나 하고
세상을 집요하게 붙들고 살자는 사람들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이 마침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세상 한가운데로 이르는 길을 가고자 하나
욕심에 흐려진 눈으로는 길을 밝힐 수 없고
나의 중심을 만나러 가고자 하나
맑은 거울 하나 없고
내 눈을 씻는 물결은 산에서 일어나고
내 중심을 깨우는 바람은 숲에서 분다
그러나 세상은 가운데가 따로 없다.
오늘을 사랑하라 / 토마스 칼라일
어제는 이미 과거 속에 묻혀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네
우리가 살고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
오늘을 사랑하라
오늘에 정성을 쏟아라
오늘 만나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라
오늘은 영원 속의 오늘
오늘처럼 중요한 날도 없다
오늘처럼 소중한 시간도 없다
오늘을 사랑하라
어제의 미련을 버려라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우리의 삶은 오늘의 연속이다
오늘이 30번 모여 한 달이 되고
오늘이 365번 모여 일 년이 되고
오늘이 3만 번 모여 일생이 된다.
수상록 읽는 밤/ 이기철
그들도 이 세상을 아프게 살다 갔구나
다 무사하지 않았구나
울퉁불퉁했구나 비뚤비뚤했구나
평범하지 않았구나
아슬아슬했구나 알록달록했구나
그만 눕고 싶어도 서 있는 첨탑들
허물어지고 싶어도 견디는 교각들
피뢰침만큼 소낙비에 항거하면서도
패랭이꽃 새 움 돋는 것 보고 갔구나
휘파람새 소릴 듣고 갔구나
길들지 않고 야생화처럼 피고 졌구나
강물처럼 긴 글 남겼구나
불빛 아래 수상록 읽는 밤.
다산(茶山)의 말/ 이해인 수녀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의 오만한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벼운 농담일망정
‘나는 전번에 이리저리 도와주었는데
저들은 이렇게 하는구나!’ 하는 소리를 한마디라도
입 밖에 내뱉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말이 한 번이라도
입 밖에 나오면 지난날 쌓아놓은 공덕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속의 이 말을
하루에 한 번씩 되새김하면
다산 초당의 청정한 바람 소리도
가까이 들려오는 기쁨
기껏 좋은 일 선한 일하고도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여
향기를 달아나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라고 고백하는 사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푸른 기침 소리
히말라야에서/ 백무산
죄 없는 자 들일수록 더 많이 참회(懺悔)하고
적게 먹는 자들이 더 많이 감사(感謝)하고
타락(墮落)하지 않는 자들이 더 많이 뉘우치고
힘들여 사는 자 들일수록 고행(苦行)의 순례길을 떠나고
적게 살생(殺生)한 자들이 더 많이 속죄(贖罪)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러한 감사와 참회가 낡아빠진 문화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하여 이곳에 감사와 참회 따위가 입에 오르는 일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래전에 그 낡은 체제를 혁명하고
또 혁명에 혁명을 거듭했기 때문에
더 혁명할 것이 없을 즈음에
마침내
어떤 진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많이 누리고 가질수록 죄가 줄어든다는
무무소유(無無所有)/ 백 무 산
굶주리는 사람이 건강 단식을 어떻게 이해하나
없는 사람이 무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나
잃을 것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잃을 것은 사슬뿐인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날 거라지만
그들도 잃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거지는 동냥 구역을 잃을 게 있지
없을수록 집착할 수밖에
거액의 자산가가 방송에 나와 무소유의 자유로움에 대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할 때 그건 분명 진심이었을 거다
무소유의 청빈함을 제대로 글로 쓰는 작가는 좀 살 만한 자다
어디 가나 밥과 집이 넉넉한 스님이라야
무소유를 제대로 설법할 수 있다
무소유는 가진 뒤의 자유다
무소유는 소유라는 단어가 있은 뒤 조합된 낱말이다
다 내려놓은 사람의 무소유는 이미 그 낱말이 아니다
가진 것이 넉넉해야 무소유를 맘껏 가질 수 있다.
살아남은 자의 기쁨/박상천
한 영혼이 먼 길을 떠났다.
까만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봉투를 내밀고
영전에 꽃을 바치고
머리 숙여 인사를 하고
유족들을 위로하고
영정을 뒤로 하고 나오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웃으며 반갑게 악수를 하고
함께 모여 담배를 피우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명함을 나누고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먼저 간 그에 대한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주고받고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은 혀를 차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지만
아, 먼저 간 그가 마련해준
이 기쁨의 자리,
기쁨의 자리.
세상의 눈들이 무섭다/ 유승도
고기를 상추에 양념과 함께 싸서 '아' 하세요 하고는
입에 쏙 넣어주는 여자가 있다
나는 맛있게 받아먹곤 했다
어떤 사람은 그게 뭐 하는 짓이냐며 핀잔을 줬다
그렇지만 나는 괜찮다
먹여주고 싶어서 먹여주고 받아먹고 싶어서 받아먹는데
뭐가 어쨌다는 건가
거기에 남녀평등이니 성 같은 걸 들이댈 필요가 있는가?
몇 번 받아먹은 뒤론 나도 먹여주면서 술을 나눈다
재미가 쏠쏠하니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당신도 한번 해보길 권한다
그런데 나도 참 용기가 없긴 없다
그런 말을 몇 번 들으니 여자가 건넨 고기를 손으로 받아서 먹게 되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입을 가까이하여 '아' 벌리지 못하니,
눈들이 무섭긴 무섭다
아무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 /무스타파 달랩의 시(차드 시인)
아무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에 의해 흔들리는 인류, 그리고 무너지는 사회..
코로나 바이러스라 불리우는 작은 미생물이 지구를 뒤집고 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인가가 나타나서는 자신의 법칙을 고집한다.
그것은 모든 것에 새로운 의문을 던지고 이미 안착된 규칙들을 다시 재배치한다.
다르게, 새롭게, 서방의 강국들이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얻어내지 못한
(휴전. 전투 중지) 것들을 이 조그만 미생물은 해내었다.
알제리 군대가 못 막아내던 리프 지역 시위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기업들이 못해내던 일도 해냈다.
세금 낮추기 혹은 면제, 무이자, 투자 기금 끌어오기,전략적 원료가격 낮추기 등..
시위대와 조합들이 못 얻어낸 유류 가격 낮추기,
사회보장 강화 등등도 (프랑스 경우) 이 작은 미생물이 성취해 내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매연, 공기오염이 줄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이 갑자기 생겨 뭘 할지 모르는 정도가 되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으며
일은 이제 더 이상 삶에서 우선이 아니고, 여행, 여가도 성공한 삶의
척도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곧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으며
'약함'과 '연대성'이란 단어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두 한 배에 타고 있음을..
시장의 모든 물건들을 맘껏 살 수도 없으며 병원은 만 원으로 들어차 있고
더 이상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는 우린 모두 똑같이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도..
외출할 수 없는 주인들 때문에 차고 안에서 최고급 차들이 잠자고 있으며
그런식으로 단 며칠만으로 세상에는 사회적 평등(이전에는 실현 불가능해 보였던)이
이루어졌다.
공포가 모든 사람을 사로잡았다
가난한 이들에게서부터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에게로 공포는 자기 자리를 옮겼다.
우리에게 인류임을 자각시키고 우리의 휴머니즘을 일깨우며..
화성에 가서 살고, 복제인간을 만들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던 우리 인류에게
그 한계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늘의 힘 앞에 맞서려 했던 인간의 지식 또한 덧없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확신이 불확실로, 힘이 연약함으로, 권력이 연대감과 협조로 변하는 데에는
아프리카가 (코로나에) 안전한 대륙이 되는 것,
많은 헛된 꿈들이 거짓말들로 변하는 데에는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인간은 그저 숨 하나, 먼지일 뿐임을 깨닫는 것도..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섭리가 우리에게 드리울 때를 기다리면서 스스로를 직시하자.
이 전 세계가 하나같이 직면한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에서
우리의 휴머니티가 무엇인지 질문해보자.
집에 들어앉아 이 유행병이 주는 여러 가지를 묵상해보고
살아있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자.
장작불/백 무 산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는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른 놈은 단단한 놈을 도와야 해
단단한 놈일수록 늦게 붙으나
옮겨붙기만 하면 불의 중심이 되어
탈 거야 그때는 젖은 놈도 타기 시작하지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몇 개 장작만으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장작은 장작끼리 여러 몸을 맞대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여러 놈이 엉겨 붙지 않으면
쓸모없는 그을음만 날 뿐이야
죽어서도 잿더미만 클뿐이야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목련- 조 정
늙은 여승이 나뭇가지 끝에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겨울을 한 해 더 넘겼으니 달라져야겠다
주름이 더 많아져야겠다
급히 잠 깨어 일어났으나
물이 차
손을 맑게 씻기 어려웠다
고양이 그림자에 놀란
봄이 급정거하다
한껏 당겨 쥔 우윳빛 바랑 줄을 끊었다
나무 밑이 축축하다
쏟아져 내리니 검붉게 썩어가는 생리대뿐이다
귀가 질긴
봄이 불가불 눈썹 사이로 걸어 들어올 때
가진 등 모조리 밝혀 얼굴을 비춰본 적 있다
목련 - 정병근
빤스만 주렁주렁 널어놓고
흔적도 없네
담 너머 다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 다 본다
한 접도 넘고 두 접도
빨랫거리 내놓아라 할 땐
문 처닫고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겨우내 빤스만 사 모았나
저 미친년, 白晝에
낯이 환해 어쩔 거나
오살 맞을 년
목련꽃/ 맹문재
잠자리에 들었는데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린다
비도 제법 내리는 것 같다
택시에 받혀 나가떨어진 엊저녁 퇴근길에 본 사내가 떠오른다
그의 아내도 저 천둥소리를 듣고 있을까
정비공으로 일하는 작은 동생의 운전 길이 미끄러울 텐데
쇠를 만들어 밥 먹는 제철소 친구들의 안전화가 젖을 텐데
자전거를 타고 건너다가 넘어졌던 그곳 철길이 여전히 미끄러워
나는 이불 속으로 움츠러든다
이사를 다녔던 거미줄 같은 길들이 질펀하다
시골집의 낡은 전선과 형광등이 괜찮을까
할머니의 산소가 허물어지지 않을까
잠자다가 일본 광산에 끌려간 조선인들, 그들이 탄 열차가 흔들린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고향을 바라보았을까
그날도 저렇게 비가 내리지 않았을까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나의 길을 내기 위해 목련 꽃들이
천둥소리를 잡아먹고 널브러진 채 죽어 있는 것이다
목련 - 박주택
한 알의 모래 속에 누가 살고 있을까
한 알의 모래 속에 우주가 있다 하나
우주 속엔 누가 살고 있을까
처음 소양강 댐의 물을 바라보며 가슴이 뻥 뚫리던 기억
동해 망상 앞바다에서 일출을 보며 가슴이 무너지던 기억
태평양을 건너며 저 물을 대체 누가 다 마실 것인가
코끝이 찡해지며 살아갈수록 세상은 넓어지고
그만큼 가슴은 미어지는데 나는 또 오늘 목련 꽃그늘 아래서
한 알의 모래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한 알의 모래 속에 우주가 있다 하나
우주 속엔 또 어떤 가슴 무너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목련꽃 뚝뚝 떨어트리며 그렇게 앉아 있다
넌 참 ㄸㄸ해/ 강 희 복
살다보면
가슴속에서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
보내온 짧은 문자가 장난기가 가득합니다
넌 참 ㄸㄸ해
나더러
뚱뚱하다고
쌀 세 포대도 채 안 되는 걸
똑똑해
글쎄 그다지
띨띨해
그렇게 보였나
떳떳해
그 건 생뚱맞고
딱딱해
물러 터졌다는 소리 많이 듣는데
이도 저도 아니다 싶어
그냥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살기로 했습니다.
문득, 생각나서 /윤이산
침침한 눈으로
노선 안내판을 더듬고 있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득, 생각나서 전화해 봤다는
반쯤 열린 문을 왈칵, 열어젖히며
맨발로 뛰어나오는
옛집의 불빛 같은 그 말
흐릿해진 기억에 불이 켜지고
먼 거리를 성큼 당기며
지하철이 들어온다.
나무 생각/ 안도현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복사꽃을 흩뿌리며 물 위에 점점이 우표를 붙이는 날은
나도 양면괘지에다 긴 편지를 스고 싶다
벼랑에 기를 쓰고 붙어 있는, 허리 뒤틀린
조선 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멀리 보내는
밤나무 아레에서는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나도 관계를 맺고 싶다
나 외로운 날은 외변산 호랑가시나무숲에 들어
호랑가시나무한테 내 등 좀 긁어달라고, 엎드려 상처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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