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 박서영
희망 / 송찬호
뺄셈의 춤 / 임성미
걸레 / 구광렬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 신동호
모나드 / 정원숙
밤의 그림책 / 박서영
차르륵! 차르륵! / 김수열
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 / 이영광
가위잠 / 이민하
애련 동백 / 강정숙
노이로제 / 신종호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으로 / 윤성택
자문자답 / 이희은
위독※ / 김왕노
까마귀 소년 / 현택훈
시인 것 / 김선우
캉캉 / 최인호
랜섬박스 / 류휘석
닮은 사람 / 길상호
금동아미타불 / 문혜진
동파 / 이규리
특별한 일 / 이규리
그 얼마나 –이원규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눈물- 이종섶
가지 않은 길 / 문정희
자동판매기 / 최승호
내가 비상할 때 / 웬델 베리
풀씨창고 쉭쉭 / 이주송
신성한 식사― 이지엽
실언― 고증식
눈물 샘- 정찬열
할머니 /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1700년대)
소낙비 /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 년대)
뙤약볕-나석중
여름날 -신경림
눈풀꽃-Louise Glück
시-파블로 네루다
말의 힘-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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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 박서영
꽃잎들은 긴 바닥과 찰나의 허공이라는 계절을 지나는 중이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왜 그리 짧게 살다 떠나는지. 변하고 돌아서는지. 무덤 속에서 튀어올라오는 사랑과 입맞춤한다. 나는 북쪽에 살아. 피부는 들판의 풀들처럼 자라면서 늙어가고, 가끔은 잠적하지. 그러곤 튀어오르지. 무덤위에 피는 꽃처럼 잠시 아름다워지기도 해. 생일(生日)과 기일(忌日)이여. 점점 더 멀어져라. 나의 울음과 너의 울음이 다르다. 저녁과 아침 사이 밤이여. 점점 더 캄캄해져라. 나는 남쪽에도 살고 북쪽에도 산다. 꽃 피고 지고. 밤하늘이 바닥까지 내려와 있다. 바닥에 흐르는 은하수. 바닥의 애벌레 좌. 얼룩진 한쪽 벽 구석의 거미 좌. 이젠 천천히 걸어 너에게 간다. 길의 점막에 달라붙은 꽃잎들. 바닥을 물고 빠는 저 불쌍한 입술들. 벚꽃나무가 핀 너의 가슴은 백야의 시간을 지나는 중이다
희망 / 송찬호
쇳덩어리는 망치질 횟수를 기억하고 있을까
망치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내게 그런 조그만 권력이 주어진다면
희망은 국가와 법을 만들 수 있다
원한다면 어디든 희망 구역으로 선포할 수 있다
희망 구역에서 아지랑이처럼 나른하게 솟아오르는 지하 생활자들
희망은 도처에 우글거린다 사제가 뚱뚱한 식당 주인으로 보이고
그 식당의 밥찌꺼기를 핥으며
희망이 어떻게 사육되는가를 보았다
개새끼, 하고 대들어도 판사는 절망에게 희망을 선고하고
의사는 절망에게 희망의 진단서를 송부하고
긴 복도를 걸어오는 희망의 발자국 소리
문을 노크하는 희망의 인기척 소리
그 고문 기술자의 가방 속에는 얼마나 많은 희망이 들어 있던가
한쪽에서는 기계를 세우고 공장을 점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식수와 전기를 끊고 통신마저 차단시켜도
그래도 희망은 인형 공장 송 사장 편에 있다
그는 오늘도 모처에 예쁜 인형들을 팔아넘겼다
이제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예비군복을 갖고 있다)
그 많은 산업예비군 중에서 내게 통지서가 날라왔다
나는 오늘 전선으로 떠난다 아직 오지 않은 열차를 기다리며
역 한구석에서 나는 오래 보지 못할,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 지금 한때 직업과 계급을 혼동해도 좋을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래도 이 거대한 도시에서 먹고 자고 일도 할 수 있는
이런 방이라도 하나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여자는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하며 가랑이를 벌렸다
하루 일을 마친 사내들이 어둠처럼 그 거리를 향해 몰려갔다
뺄셈의 춤 / 임성미
뺄셈을 계속하니 나만 남았어요.
혼자 먹는 식탁.
연필심처럼 뾰족해지는 저녁.
옛날 고독한 왕이 식탁 위로 올라가 춤을 추었죠. 구두를 따가닥거리면
많은 발이 있는 것 같았죠.
식탁이 부서졌지만 계속해서 춤을. 단일한 밤이여, 단일한 공기여.
밤에는 검푸른 고등어와 까치만 돌아다녀요.
사과나무에 빨간 전구를 가득 켰어요.
버찌를 먹고 까매진 이빨은 빼버릴래요.
뺄셈. 마이너스 부호만 남을 때까지.
뺄셈. 리듬이 태어날 때까지.
달은 다시 나타나 나를 내려다보았죠.
하얀 밤도 풋사과도 없이
삼만 개의 밤을 건너가려고?
뺄셈을 그만두면 잇몸이 근지러웠죠.
고집스러운 뺄셈. 나를 뺄 때까지.
고독해진 나는 자전거에 올라 바퀴를 돌렸어요. 미세한 오르막과 미세한 내리막이 다리로 전해질 때,
눈을 감고 달려.
사람들의 말소리가 햇빛 속에서
부서져 귀를 스쳐갔어요.
까만 개미들
까만 이빨들
뺄셈의 춤을 느끼는 까만 밤에는 책을 읽었어요.
까만 글자들이 방 안을 떠다니며 내게 물었죠.
당신, 어때요?
나는 아직 흑백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밤을 끄덕끄덕 건너가보려고요.
걸레 / 구광렬
지금은 부도 난 모 중소기업 창립 기념품으로 받은 수건. 얼핏 툇마루에 뭉쳐져 있는 그 모양새,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뒤 곤해하는 예수 같다 터진 실밥 뭉치는 움푹 들어간 눈, 희미해진 ‘축 창립 10주년……’은 덥수룩 턱수염
빨려고 집어 드니 안쓰럽다 잡범들과 나란히 십자가에 못 박혔던 神. 제 손으로 못 하나 베대로 못 빼던 神. 부활해야 하나 한 5백 년 푹 쉬고 싶은, 발등에 고비의 황사가 쌓이어도 다시는 제자들 발을 씻겨 주지 않을
하지만 천생 예수, 두드릴 문도 없이 사시는 칠곡 황토 초가의 외당숙 같은, 궂은 일 도맡아 젖은 손 마를 길 없는 머슴 출신의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 신동호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면 늘 고민이다.
늘 고민인데 억지로 보내고 만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나는 진보적이다.
보수 언론에 분노하고 아주 가끔 레닌을 떠올린다.
점심을 먹을 무렵 나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배고플 땐 순댓국이, 속 쓰릴 땐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난다.
주식 같은 건 해본 일 없으니 체제 반항적인 것도 같은데,
과태료나 세금이 밀리면 걱정이 앞서니 체제 순응적인 것도 같다.
오후 두 시쯤 나는 또 오락가락한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통합진보당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새누리당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 김주대 시인의 글을 읽으며 킥킥
그 고운 눈매를 떠올리다 보면 진보, 보수 잘 모르겠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그 일도양단이 참 대단하고 신기하다.
주대가 좋아하는 큰 엉덩이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을까? 싶다.
오후 다섯시가 되면 나는 존다.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술 먹자는 전화가 온다.
열 중 아홉은 진보적인 친구들이고 하나는 그냥 친구다.
보수적인 친구가 나에겐 없구나, 생각한다.
오후 여덟 시 나는 대부분 나쁜 남자다.
가끔은 세상을 다 바꿔놓을 듯 떠든다.
후배들은 들은 얘길 또 들으면서도 마냥 웃어준다.
집에 갈 시간을 자주 잊는다.
오후 열한 시 무렵이 되면 나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다.
어느새 민주주의와 역사적 책무를 잊는다.
번번이 실패하지만 논을 벌고 싶고, 일탈을 꿈꾼다.
자정이 다가오자 세상은 고요하다.
개구리는 진보적으로 울어대고 뻐꾸기는 보수적으로 우짖는다.
뭐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사상보다 삶이 먼저라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진보적일지 몰라, 하면서
대충 잔다.
모나드 / 정원숙
검은 구름이 몰려옵니다. 창문이 없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닙니다. 세상엔 창문 같은 건 없었나 봅니다. 이 글쓰기를 지연해야 할까요? 온종일 검은 흙을 토해내는 천장, 날개 잃은 새들의 노래 소리, 밤하늘의 별들이 떨어져 이마에 핏물이 흐르는 소리 들립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 거기가 어디냐고 따지든, 난 뿌리째 가득합니다. 주머니가 없는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세상엔 주머니 같은 건 없었나 봅니다. 이 텍스트를 포기해야 할까요? 보세요. 주머니가 없어도 나는 상상으로 아기를 낳고 상상으로 아기를 사산합니다. 완전한 복화술을 익히면서 완전한 식물성을 탐구하면서 정의도 사상도 검은 흙 속에서 골라냅니다. 손톱으로 짓이겨 없애버립니다. 손목에 돋아나는 정맥들의 인사,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깨끗하게 지워질 날이 가까워옵니다. 죽어서 사는 것보다 살아서 죽는 것이 찬란하다고 썼던 걸 지워야 할까요? 아닙니다. 고백은 텅 빈 것입니다. 고백 같은 건 기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무섭지 않아요. 두렵지 않아요. 창문은 원래 없었고 깨진 유리 조각도 애초에 없었습니다. 구속하고 인내하고 굶으면서 골똘히 생각이라는 물질을 만집니다. 마음의 창문을 부숴야 할까요? 어디로 나가야 할지 나에게 묻지 마세요. 나는 온통 젖어 있고 뿌리째 아득합니다. 주머니가 없는 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고백 같은 건 기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밤의 그림책 / 박서영
지구라는 머나먼 별에서 헐레벌떡 뛰어 너에게 갔다
한쪽 발이 없는 비둘기. 한쪽 날개가 없는 나방. 한쪽 눈알이 없는 개. 꼬리가 반쯤 잘린 고양이. 견우와 직녀. 당신과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책을 쓰기 위하여
연립빌라 옥상 물탱크 옆에 앉아서
은하수 동창회라도 열어야 할 판이다, 추웠지만
웅크리고 앉아 밤의 삽화를 그렸다
시간이 약탈해 간 아름다운 별들을 모았다
어떻게 그 수많은 순간들을 버릴 수 있겠는가
멸종 위기에 처한 침묵이 도착하였소
마른 멸치 몇 개 놓고 소주 한잔하면서
우주의 샅을 다 뒤져서 도도새. 바바리사자. 분홍머리오리. 여행비둘기. 크바다쇠오리. 알바트로스. 황금박지와 키위새가 주인공인 이야기책을 쓰기 위하여
나처럼 당신을 잘 이해해 주는 애인은 없을 거예요
지구에서 바로 유턴하자마자
우주의 옥상보호구역 노란 물탱크 옆에서 반짝이게 되었다
그러나 저 반짝거림들
애틋함은 얼마나 빨리 사라져버리는가
밤의 그림책을 쓴다
침묵으로 가득 차 있고, 깨어나 보면 이곳은
이상한 물속의 세계
넌, 아직도 나 때문에 울고 있구나
투명한 해파리들이 쏟아져 그림책을 완성하고 있다
차르륵! 차르륵! / 김수열
학교 창고 닮은 덴데 조그만 방이 하나 이섰수다
물애긴 안고 세 살 난 건 없고 방에 들어간 전기 취조를 받아십주
양 손목에 전깃줄 감고 파시식! 파시식!
안 당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전기를 손으로 이래 확 돌리면 차르륵! 저래 확 돌리면 차르륵!
하도 여러 번 돌리니까 나중엔 안 돌려도 몸이 차르륵!차르륵!
그때 숨통 안 끊어지난 살암십주
근데 이젠 바람이 불젠 해도 차르륵! 차르륵!
비가 오젠 해도 차르륵! 차르륵!
침을 맞아도 단지를 붙여도 차르륵! 차르륵!
순경만 봐도 차르륵! 차르륵!
꿈에서도 차르륵! 차르륵!
차르륵! 차르륵!
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 / 이영광
봉선사 범종 소리는
범종을 버리고
절을 버리고
세상 끝 지평선을 무너뜨리고 있는데
사자후는 멀어라
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
찬물을 벌겋게 데우는
이 세상 군불
홍조를 띄우고 그대 내 곁에서
갱년기(更年期)로 웃을 때
가위잠 / 이민하
수술만 잘되었다면
고장 난 엄마라도 가질 수 있었겠지
엄마의 똥을 닦으면 휴지에
박하 향 웃음이 묻을까 먹물 같은 눈물이 묻을까
할머니의 똥을 치우고 손을 씻다가 죽은 엄마처럼
나도 엄마가 되었겠지 할머니가 되었겠지
마려운 줄도 모르고 내지른 줄도 모르고
실밥이 자꾸 비어져 나오는
항문이 꿰매진 인형이 되어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끝도 없는 자장가를 듣게 될까 부르게 될까
빈집 같은 몸 속에 누워
잠이 마려울 때마다 뒤척뒤척
머리를 열고 닫으며 혼자 누는 자장가
변기 뚜껑을 열고 닫듯
관 뚜껑을 열고 닫듯
애련 동백 / 강정숙
아직은 조금 오래 그리워해도 좋을
그때 그 동백들 서둘러 지고 있다
슬픔을 꺼내놓기에
더없이 좋은 날
덧없는 애련일랑 파랑에나 얹어주고
날리는 꽃잎꽃잎을 온몸으로 받는 바다
그 바다 흰 이랑에도 붉은 물이 드는 시간
무엇이 긋고 갔나 곡진한 너의 내부
잎들은 잎들끼리 서로를 적시는데
봄보다 먼저 온 이별에
숨이 붉다, 저 바다
노이로제 / 신종호
얼음의 숲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는 굵고 선명했다. 푸른 늑대는 달빛을 따라 울고, 아무도 깃들지 않는 설원의 등짝은 제 속의 순결로 단단해져 가고, 바싹 마른 나의 귀와 입만 곧 떨어질 고드름처럼 위태롭다. 저 멀리, 협곡의 버려진 길을 되찾아가는 붉은 사람의 발소리는 낯선 방언처럼 아름다웠고, 그들을 노리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눈빛은 날카로운 음향처럼 감미로웠다. 죽은 심장이 뛰고, 사슴과 호랑이가 한 몸으로 뒤엉켜 야생의 붉은 관능을 뿜어댄다. 아무도 죄를 묻지 않는, 가학과 피학의 거친 숨소리가 시간의 자궁을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설원의 깊은 숲에서, 이제 막 돋아난 별이 비린 풍경을 앙앙댄다. 그리하여 그 별이 나에게로 왔을 때, 나는 도덕으로 빛나는 명함을 한 장 건넸고, 건강하게 멸균된 영혼의 우울한 껍질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제발, 나의 결핍에만 몰두해줘! 아침은 일어나지 못했다. 나의 꿈이 썩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으로 / 윤성택
눈은 도시를 배회하다가 어느 불 꺼진 창문 앞에서
주르륵 흘러내린다, 같은 영화를
또 볼 수 있는 사람은 영화가 그에게서
살아 본 적 있어서가 아닐까
사람이 그리울 때는 눈발이 가로등 불빛을
은은하게 어루만지는 새벽이다, 느낌은
훗날 어느 날을 꺼내와 잠시
여기에 나부끼는 것이다
추위는 몇 겹 추억으로 번들거리는
빙점에서 어두워진다, 겨울이
내게 와서 그렇게 녹는다
손이 따뜻한 이는 서늘해지는 자신에게 한 번쯤 울어본 적 있는 사람
카메라를 쥐고 있는 이는 제 시력을 천천히 순간으로 잃어가는 사람
시를 쓰는 이는 단 한 번 만난 자신에게 고요히 늙어버린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으로 사랑하는 밤,
한 사람이
네게 와서 상영되는 것이어서
오늘 밤 그 사람에게 눈이 내리는 것이다
자문자답 / 이희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폐인이 되었을 거라고 답할 것 같네요
어쩌다 운이 좋았다면
아파트 부녀회장이라도 되었을까요
명절이면 구청에서 보내온 사과 박스나
한 되짜리 정종병에 기뻐하며 아마
지금보다 좀 바쁘게 살았겠지요
가끔 무슨 회의에도 참석해야 하니까요
우리 엄마가 그렇게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거든요
근데 웬 폐인이냐구요
이시겠지만
시인과 폐인은 깻잎 한 장 차이죠
아슬아슬 과녁을 비껴간 안타까운 화살을
깻잎이라고 해요
간 크게도 시인은
지구나 우주 그 사이 포진한 어둠
그 엄청난 과녁을 향해 시를 쏘아대지만
늘 깻잎이죠
밤낮으로 시위를 당기는 소리 천지간에 자욱한데
달도 별도 다 멀쩡해요
미농지 같은 어둠엔 실금 하나 가지 않았구요
가끔 조롱하듯 똥별이
헛손질하는 시인의 높은 이마 위에
멋진 한 획을 긋기도 하지만요
그러나 아무도 묻지 않네요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당신이 묻지 않으니
나는 부녀회장도 폐인도 될 수 없어요
찬밥에 물 말아 깻잎장아찌로 점심을 때우는
한없이 심심한 시인이지요
위독※ / 김왕노
위독은 거대한 짐승입니다
위독한 사이 철학자가 되고 울부짖는 얼굴도 됩니다. 숨겼던 진실을 각혈하듯 게워냅니다. 위독한 자는 심연에 가라앉은 고래가 되어 잠들지 않는 뇌로 우주를 명상하기도 합니다. 위독하다는 소식이 짐승 한 마리로 먼 길을 밤새워 왔을 때 나는 날간 같은 영혼을 던져주려 했습니다. 살 몇 근 거뜬히 베어주려 했습니다.
일생에 몇 번 위독이란 짐승이 되었을 때
스스로의 살점을 녹여 뼈마디까지 드러나게 합니다.
무엇을 지탱하기 위해 살가죽을 밀며 드러나는 뼈마디들인지
죄마저 끝까지 버티게 해주는 뼈마디의 의도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결국 죽음 속으로 무너져가면서 왜 쉬 삭아 내리지 않고
마지막 까치 관 속의 어둠을 견디려는 뼈인지
후략의 말 뒤에 무엇을 덧보태고 싶은지 스스로 묻기도 합니다.
멀리서 그대 위독이란 짐승이 되어 누워 있습니다.
그대에게 철철 쏟아져 내리는 마지막 말들이 자귀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미루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창밖의 계절은 독 오른 듯 푸른데
그대 이제 이승의 살점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해진 위독이란 짐승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다 말라가 피골이 상접한 짐승
그라나 지금은 본성이 살아나 밤하늘을 향해 우우 울부짖는
지상의 마지막 순결한 한 마리 짐승
나마저 화답해 우우 우는 밤에 산맥을 넘어 강을 건너
저렇게 성큼성큼 옵니다.
까마귀 소년 / 현택훈
내가 잘하는 건 올챙이 잡는 거였다 두 손을 물속에 담가 올챙이보다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면 손우물 고인 물에서 헤엄치는 올챙이 여남은 마리 그렇다고 올챙이를 죽이지는 않았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어야 하니까 올챙이를 잡아달라고 하는 친구는 없었지만 별도천 따뜻한 바위에 누워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물에 앉은 햇빛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일 때는 뱀이 다리 사이로 지나가도 상관없었다
내가 또 잘하는 건 딱지 날리기였다 왼손으로 딱지를 잡고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 딸지를 날린다 딱지는 정말 멀리 날아갔는데 한 번은 내가 날린 딱지가 원당봉 너머 구름까지 날아갔다 본 사람이 없어서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게 안타까워 뭐라 말할 수 없어서 학교에 가면 온종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또 잘하는 건 정글짐에 숨기였다 내가 정글짐 속에 들어가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다 나는 풀숲 속에 숨은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다 해가 저물면 나를 찾는 엄마는 없었고, 저녁별은 내가 본 UFO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정글짐에서 빠져나와 구름사다리로 기어올라 다락방에 들어가 잠들곤 했다
시인 것 / 김선우
어느 새벽 시를 두 편 썼다 “이게 시가 되는가?” 한 사흘 골똘히 들여다보다 한 편을 골라 들고 한 편은 버렸다
시가 되겠다 판단한 시 한 편, 한 문장 한 구절 한 글자씩 뜯어보며 한 이틀 매만지다 벼락, 회의가 든다 “대체 시란 무엇인가?”
시가 시에 갇혀버린 느낌 ‘시가 된다’는 느낌이 다시 감옥이 되어버린 느낌, 시가, ‘시가 된다’는 느낌을 깨고 나올 때까지 나는 아직 기다려야 한다
시가 아니려고 하는데 결국 시인 것 시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끝내 시인 것 파닥파닥한 시의 지느러미에 경계와 심부를 동시에 베인 듯한 여기를 베고 저리로 이미 흘러가는
그런 시를 기다린다 영원을 부정하자 사랑이 오듯이 영원을 부정해야 사랑 비슷한 것이라도 오듯이
캉캉 / 최인호
발목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불란서 댄서들은 하이힐에 올라야 비로소
태어나지
발끝을 모으지
분란은 구두 속에도 있고
탁아소에도 있고 어쩌면
내리는 눈의 결정 속에서도 자라고
오후 세시에는 캉캉이 없다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려면 쓸데없는 말들이 필요해요
식탁 아래서 발을 흔들고
유쾌해졌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몰래 휘파람 부는 것 같아서
뉴스를 튼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가십을 만들었죠
상반신만 보이는 아나운서의 팔을 믿으며
캉캉은 감춰지는 중
양말 속에 주머니 속에
불란서 댄서들의 스포티한
팬티 속에
빨간 주름치마가 되어
덤블링이 되어
지구가 돌아간다
구세군 냄비에 눈이 쌓이고 내년에는
내년의 근심이 기다리겠지 고향이 어디입니까 묻는다면
제왕절개 했습니다 답하겠지 아무 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은 캉캉.
발끝을 들어 올릴 때마다
불거지는 중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랜섬박스 / 류휘석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쉴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 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 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들어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 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 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작은 구멍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 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질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닮은 사람 / 길상호
물속의 그가 말을 건넨 적 있지
입술을 떠나자마자 물결이 되어
심장을 조금씩 적시던 말
나는 그날 한없이 파동을 그리는 목소리를 지우려고
웅덩이를 메우고 돌아서고 말았지
하지만 그 후로 움푹한 것들은 모두
그가 숨어 있는 웅덩이가 되었지
어느 날은 술잔 속에서
또 어느 날은 때 낀 배꼽 속에서
우물우물 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지
너와 나는 울음까지 닮았구나,
빗방울처럼 시리고 비린 말
이제는 숨소리까지 다 말라버린 사람
아버지의 말을 다시 받아보려고
가슴 한쪽을 밤새 파내는 날이 있지
금동아미타불 / 문혜진
그가 보스톤 미술관에서 보낸 사진에는
금동아미타불이
어둠에 뭉개져 있었다
중국의 절을 통째로 뜯어 온 것이라 한다
적막의 아미타불
희미한 미소가 뭉개진 불상
불상은 조상이 없다
불안이 없다
불면증이 없다
없다, 없다, 없다
없다는 것은 있었던 것을 지워 나가는 것
그것도 아니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허공에 황금 근육을 입히는 것
한 자루의 칼과
거푸집 속에서 끓어오르는 금쇳물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터를 닦고
절간을 통째로 뜯어 와 다시,
누각을 세우고
연못에 잉어를 푼다
그리고는 금불상 앞에 엎드려
백팔 배, 천 배, 만 배
있었던 일들이 없던 일로 지워질 때까지
아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 위해
허공에 황금 근육을 벗겨 나간다
동파 / 이규리
바깥 수도가 얼어터졌다
참았던 말,
들어주지 않으니 손목을 그었다
혹한을 흘러내린 흰 피, 빙판이 되었으니
너무 오래 혼자 두었구나
울다 끈을 놓았구나
발목을 덮는 두께
차디찬 통곡이었을 것이다
그 위에 누워본다
등딱지가 얼음을 알 때까지 너는
용서하지 마라
차고 투명한 부적(符籍)
효험은 몸의 고난을 지나신다
특별한 일 / 이규리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 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하루밖에 살수 없다면 –울리퍼 샤퍼
하루는 한 생애의 축소판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의 생애가 시작되고
피로한 몸을 뉘여 잠자리에 들면
또 하나의 생애가 마감됩니다
우리가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눈을 뜰 때 태어나
잠들면 죽는다는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나는 당신에게
투정부리지 않을 겁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에게 좀더 부드럽게 대할 겁니다
아무리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불평하지 않을 거구요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더 열심히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모두 사랑하기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나는 당신만은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죽어서도 버리지 못할 그리움
그 엄청난 고통이 두려워
당신 등뒤에서
그저 울고만 있을 겁니다
바보처럼.
그 얼마나 -이원규
병원에서 폐암 말기를 선고받아봐야
아프지 않은 날들이 그 얼마나 다행인지
지리산 어느 골짜기로 사라질까 홀로 고민한다
폐암 말기가 아니라 결행성 늑막염
아홉 달만 약 먹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어봐야
치료 가능한 병은 병도 아니라고는 것을 절감하고
댓글 하나로 선거법 위반 고소를 당해봐야
법 없이 살아온 날들이 그 얼마나 한심했는지
벌금을 내고 전과자가 되거나
문인간첩 기자 간첩단으로 엮일 뻔해봐야
옥사하거나 무기징역 사형선고를 받은
독립투사 민주열사들의 어금니를 겨우 알게 되고
먼저 죽은 친구의 문상을 가봐야
아직 살아남은 날들이 그 얼마나 복에 겨운지
언제나 행복의 바탕화면은 불행이지만
눈보라 속에 핀 복수초 꽃을 직접 봐야
군불 지피는 저녁이 그 얼마나 눈물겨운지.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가을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눈물- 이종섶
어린 연어가 먼바다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짓는 어미,
그 물이 1급수인 것은 어미가 흘린 눈물 때문이다
새끼들이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목숨을 걸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미의 눈물이 그리워서다
가지 않은 길 / 문정희
무심히 저녁 신문을 보던
내 손이 비명을 질렀다.
그 이름,
부음난에 박힌
만난 지 20년도 더 넘은 그 남자가
오늘 새벽 별세했다 한다.
어느 봄날, 나하고 선본 적이 있는 남자
우리 집 거실에서 오빠와 바둑을 두다가
찻잔을 들고 들어간 나의 종아리를
슬쩍 쳐다보고는
이마에 송알송알 땀이 배던 남자
끝내 가지 않은 길, 저쪽에 서 있던
이제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수줍은 흑백사진
나는 말없이 석간신문을 옆으로 밀쳤지만
밤하늘 같은 나의 추억 속으로
새로이 과부의 별자리 하나가
자리잡는 소리를 깊고 서늘하게 듣고 있었지.
자동판매기 / 최승호
오렌지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 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 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賣春婦 매춘부라 불러도 되겠다
黃金황금 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權能권능을 미리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賣淫매음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神신의 오렌지주스를 줄 것인가
내가 비상할 때 / 웬델 베리
내가 비상할 때는
기쁘게 날아오르게 하소서
한 마리 새처럼
내가 떨어질 때는
후회가 없게 하소서
낙엽과 같이
풀씨창고 쉭쉭 / 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꺼칠한 털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있다
노루발, 뻐꾹채, 지징게,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몸이 가려워
멧돼지는 온 몸을 부르르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 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 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 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이 움튼다
[202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신성한 식사― 이지엽
―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른 무 쪼가리, 콩자반에 김치
할머니 진지를 드시네
나물 싸주던 흙손으로
돈을 세던 갈퀴손으로 김치를 쭉 찢어
눈 감고 한입 어 넣으시네
눈곱 낀, 한쪽은 반 쯤 감긴 눈
두 개 남은 앞니로
오물오물 꿀~꺽
식사를 하시네
낮술 취한 망나니 아들이 건들건들
이 할망구 뒈져 죽어 버려라 해도
할머니 꾸도 않고 콧물 쓰윽
검지 손께로 훔치며 식사를 하시네
남은 좌판에는 머위, 헝클어진 돌나물, 고들빼기
오가는 행인들의 투박한 발걸음마다
보풀거리며 일어나는 먼지 속에서
할머니, 웃뜸 마실 가듯 천천히 늦은 점심을 드시네
* 마태복음 15장 11절.
실언― 고증식
촌에서 이발소 하는
어떤 형한테 들은 이야기 한 토막
바야흐로 설 단 목에
오줌 누고 뭐 볼 새도 없이 바쁜데
엊그제 새로 들인
머리나 감기는 아이놈 하나가
세상 둘도 없는 뺀질이더라고
그 녀석 그날따라 더 뺀들거려
보다 못한 그 형
버럭 한 소리 질렀다는데
야 이놈 자식아,
그만 좀 뺀질거리고 얼릉 여 와
손님 가리나 감겨!
순간, 멋모르고 엎드려 있던 손님
문제의 가리 번쩍 치켜들고
한참이나 뻥하게 쳐다보더라고
눈물 샘- 정찬열
두만강 발원지는
양강도 삼지연군 북동계곡 작은 샘
낙동강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시 황지못이고
섬진강 발원지는
전라북도 진안군 데미샘
영산강 발원지는
전라남도 담양군 용소폭포란다
아니다
모든 강의
발원지는
어머니의 눈물샘이다
할머니 /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1700년대)
성전 안의
흰 촛불인 듯
늙은 얼굴이
아름답구나
겨울날의
쇠잔한 햇빛처럼
자기 구실을 다한
여인
자식들은 품에서 떠났지만
황폐한 방앗간 아래
괴어 있는 물 모양
그녀는 여전히 자식들 생각에 잠겨 있다.
소낙비 /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 년대)
비 오는 소리 같았는데, 이윽고
휘어져 들려오니 바람인 줄 알았다
그 바람은 파도처럼 젖어서 걷다가
모래처럼 말라서 날아간다
그 바람이 어딘가 아득히 먼
들판으로 밀려간 후
군대들이 쳐 들어 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참말로 비다
그 비는 우물을 채우고 연못을 기쁘게 하고
한길을 재잘거리며 간다
그 비는 산중턱의 마개를 뽑아서
부근 일대에 물사태를 일게 한다
그 비는 흙 땅을 느슨하게 하고 바다를 부풀게 하고
거리의 한복판을 휘저어 놓는다
그리고 구름의 수레를 타고
예언자 엘리아처럼 사라졌다
뙤약볕-나석중
야탑역 3번 출구
뙤약볕에 나와 아주머니가 내미는 전단지를 왜 당신은
뿌리쳐 민망하게 하는지
그럼 뿌리친 당신의 마음은 편한지
그거 보지 않고 바로 쓰레기통에 버릴망정
좀 받아 주어서
저 아주머니가 뙤약볕 아래에서
어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면 서로 서로 좋지 않겠는지
허둥지둥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오늘의 뙤약볕보다 더욱,
뙤약볕인 당신은
여름날 -신경림
- 마천에서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 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눈풀꽃-Louise Glück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루이스 글릭: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시-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말의 힘-황인숙
기분좋은 말을 생각해보저.
파랗다.하얗다.깨끗하다.싱그럽다.
산선하다.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달톰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트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