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로병사 6 조 용 숙
발효라는 방식으로— 권영희
봄의 정석— 임내영
바위의 족보— 박용섭
볕 좋은 날— 이재무
壽岩里 磨崖三尊佛像— 임영석
일회용 라이터— 기명숙
객짓밥— 마경덕
-신발論
집착― 문숙
ㄱ의 감정- 방수진
산벚나무— 박경희
고부— 김수열
한점 해봐, 언니— 김언희
훗날의 장례식― 배영옥
어머니를 씻기며― 유은희
봄— 반칠환
흘린 술이 반이다- 이혜선
바람편지― 천양희
치자꽃― 양진건
잠을 자야- 이생진
곶감- 강경주
계란 한 판- 고영민
저무는 시간- 손 영
-폐가의 공식
바짝 붙어서다―김사인
대근 엽채 일급― 김연대
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 최금녀
띠포리― 이상규
할머니의 봄날― 장철문
머리끄락― 마경덕
성적표― 한우진
골목― 전순복
밥 먹었니?― 황미라
다음에― 박소란
사모곡― 김석수
탁!― 최재경
빈집― 윤제림
셋방살이 다섯 식구― 박영희
산에 와 심심하니― 강경호
압력솥― 전순복
국수― 이재무
깊이 묻다― 김사인
어머니― 이경
유방― 문정희
밭― 정우영
구르메 달 가드키― 박이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호
나무 다비(茶毘)― 박방희
오이― 허수경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금강송― 정수자
복사꽃 모텔― 박이화
봄날 오후― 김선우
시골버스― 손택수
불륜을 꿈꾸다― 김순영
가족력― 이화은
문주란― 고진하
제비꽃 사설― 곽재구
운주사 와불― 조성국
팬티와 빤쓰― 손현숙
멸치쌈밥집― 이상개
신규방가― 박이화
어떤 통화― 서안나
갈퀴― 이재무
흘레― 고성만
아픈 역사― 김원중
고구마를 삶으며― 서안나
매화민박의 평상(平床)― 백상웅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생로병사 6 조 용 숙
공범―
한밤중에 아들 내외 자는
방문 앞 서성이다
화장실 가는 아들 바짓가랑이 붙잡고
저기 혼자 사남유? 그럼 저랑 같이 살아유?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라
어느새 육순 바라보는 아들은
여보 어디 갔다 이제 왔남유
묻는 치매 걸린 어미 말에
지아비 먼저 보낸 젊은 아낙의
긴긴 독수공방을 상상하다가
늦어서 미안햐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져놓고는
어미 방 화목보일러에 애매한 장작만
미어터지게 밀어넣는다
발효라는 방식으로— 권영희
고두밥과 누룩이 부글부글 치고받다가
언젠가는 조금씩 서로를 내어주듯
몇 십 년
끊임없이 숙성중인
부부라는
이름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빵처럼
길고도 짧은 인생 반전을 거듭하며
오늘도
익어가는 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봄의 정석— 임내영
봄,
쑥을 밀가루에 버무려 기름 친 번철에 부치면 쑥 향기와 곁들여지는 빗소리
빗소리는 가볍게 너울 치며 고향 집 대청마루 올라가 옹기종기 가족과 만난다
비가 내리면 전 부치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빈대떡 생각나고 먹다 보면 비가 와
소식 궁금해지고
그 소리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와
전을 부친다
오감을 깨우는 봄, 어머니다
바위의 족보— 박용섭
절대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직하게
지키다 보면
주인이 된다
볕 좋은 날— 이재무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발톱을 깎아주리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부은 발등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리
갈퀴처럼 거칠어진 발톱을
알뜰, 살뜰하게 깎다가
뜨락에 내리는 햇살에
잠시 잠깐 눈을 주리
발톱을 깎는 동안
말을 아끼리
눈 들어 그대 이마의 그늘을
그윽하게 바라다보리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근심을 깎아주리
壽岩里 磨崖三尊佛像— 임영석
무는 무를 닮고 배추는 배추를 닮아
어디에 내놓아도 척 알아보는 얼굴인데
수암리 마애삼존불 눈도 없고 귀도 없다
어쩌면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자
천년 세월 돌 속에서 눈도 귀도 다 버리고
첩첩 산 넘는 구름을 法門처럼 읽고 있다
저 오기가 무릎관절 바람에게 다 내주고
남은 건 깊은 허공 껴안은 표정인데
무엇을 歸依시키려 無言으로 經을 읽나?
* 강원 유형문화재 제 118호로 지정된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 마애삼존불상은
고려시대 선각으로 새겨진 불상이다
일회용 라이터— 기명숙
가끔 나는 맥주병의 모가지를 딴다 퍼엉! 하는 한 발의 총성과 함께 폭죽 같은 거품이 흘러내리곤 했다 룰렛 게임에서 남겨진 일회용 총알이 저렇게 내 삶을 관통할지도 모르겠다 볼이 움푹 팰 때까지 세상의 발목을 말아 피우는 사내를 본 적도 있다 살의를 품은 얼굴이 나를 주머니에 찔러 놓고 세상의 한 귀퉁이를 태우고 있었다 덩달아 몸이 단 나는 태우는 자와 태워지는 자 사이의 팽팽한 구도를 놓칠 뻔도 했다 담배의 생을 점화할 뿐, 나는 미래를 위한 설계 따윈 하지 않는다 귀한 몸으로 대접 받는 일 꿈꾸지 않는다 잔량으로만 평가 받으며 금간 그릇과 깨진 술잔에 부딪쳐 속절없이 사라질 뿐, 쓰레기통으로 이어지는 늙은 당나귀 힘줄 같은 내리막길이 저 아래 있다 폐활량이 다할 때까지 당신, 부디 점화하시라
객짓밥— 마경덕
하나님은
저 소금쟁이 한 마리를 물 위에 띄우려고
다리에 촘촘히 털을 붙이고 기름칠을 하고
수면에 표면장력을 만들고
소금쟁이를 먹이려고
죽은 곤충을 연못에 던져주고
물 위에서 넘어지지 말라고 쩍 벌어진 다리를
네 개나 달아주셨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연못이 마르면
다른 데 가서 살라고 날개까지 주셨다
우리 엄마도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힘들면 편지하라고
취직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
그냥 집으로 내려오라고
기차표 한 장 살 돈을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그 한마디에
객짓밥에 넘어져도 나는 벌떡 일어섰다
신발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집착― 문숙
그물망 속에 든 양파
서로 맞닿은 부분이 짓물러 있다
간격을 무시한 탓이다
속이 무른 것일수록 홀로 견뎌야하는 것을
상처란 때로 외로움을 참지 못해 생긴다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상해서 냄새를 피운다
누군가를 늘 가슴에 붙이고 사는 일
자신을 부패시키는 일이다
ㄱ의 감정- 방수진
곡선의 아름다움은 직선의 외도에 있다. 걸어온 것들을 그 자리에서 추락시키고 뼈를 꺾고 살을 베어 처음과 끝 그 태생적 외로움을 안으로 안으로만 품어 주는 일. 직선이 제 팔을 꺾어 곡선이 될 때 수만 개의 관절이 부서지고 뒤틀린다. 차마 둥글어지지 못한 것들은 각이란 허공을 가지지. 어둠을 낳고 어둠으로 깊어진다. 품을 수 없는 것들은 가두어 내려앉아 버리고 밑으로만 밑으로만 아득해지지. 하이힐이 섹시한 이유는 곧고 날렵해지는 다리 곡선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의 무게를 버티려 최대한 몸을 웅크린 삼각의 감정 때문이다. 발뒤꿈치의 동동거림, 그 허공의 눈빛 때문이다. 그래서 견디는 것들은 모두 슬프지. 버티는 것들은 간절하다. 평생을 고개 숙여 허공을 받아내는 저 ㄱ처럼
산벚나무— 박경희
법당 언저리 잎 진 산벚나무로 서 있는 내게 주지 스님이 삭발하자, 말씀하시고는 길 따라 내려가신 지 여러 달 캄캄이다 달도 차서 참나무 숲으로 기운 게 여러 번 눈길 밟아 마음도 득달같이 속세로 달아나버렸다가 미끄러져 돌아오는 날이 돌마당 갈잎으로 뒹굴었다 긴 머리 질끈 묶고 모과나무 그늘에 서서 시린 산 아래 읍내 그림자만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놓고 온 것들에 대한 서글픔이 눈앞을 가리는데 어질어질 산벚꽃 핀 자리로 돌아오신 스님 내 눈을 깊이깊이 들여다보고는 오늘은 안되겠다, 하시며 바랑에 내 설움까지 넣고 또 휘청휘청 고갯길 넘어가셨다
고부— 김수열
예순 살짝 넘긴 며느리가 여든 훌쩍 넘긴 시어매한테 어무이, 나, 오도바이 멘허시험 볼라요 허락해주소 하니 그 시어매, 거 무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얼릉 가서 밭일이나 혀!
요번만큼은 뜻대로 허것소 그리 아소, 방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떠듬떠듬 연필에 침 발라 공부를 허는데, 멀찌감치 앉아 시래기 손질하며 며느리 꼬라지 쏘아보던 시어매 몸뻬 차림으로 버스에 올라 읍내 나가 물어물어 안경집 찾아 만 원짜리 만지작거리다 만오천 원짜리 돋보기 사 들고 며느리 앞에 툭 던지며 허는 말, 거 눈에 뵈도 못 따는 기 멘허라는디 뵈도 않으믄서 워찌 멘헐 딴댜? 아나 멘허!
한점 해봐, 언니— 김언희
한점 해봐, 언니, 고등어회는 여기가 아니고는 못 먹어, 산 놈도 썩거든, 퍼덩퍼덩 살아 있어도 썩는 게 고등어야, 언니, 살이 깊어 그래, 사람도 그렇더라, 언니,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썩는 게 사람이더라, 나도 내 살 썩는 냄새에 미쳐, 언니, 이불 속 내 가랑이 냄새에 미쳐, 마스크 속 내 입 냄새에 아주 미쳐, 언니, 그 냄샐 잊으려고 남의 살에 살을 섞어도 봤어, 이 살 저 살 냄새만 맡아도 살 것 같던 살이 냄새만 맡아도 돌 것 같은 살이 되는 건 금세 금방이더라, 온 김에 맛이나 한번 봐, 봐, 지금 딱 한철이야, 언니, 지금 아님 평생 먹기 힘들어, 왜 그러고 섰어, 언니, 여태 설탕만 먹고 살았어?
훗날의 장례식― 배영옥
주인공인
나만 없을 것이다
벅찬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떠났으므로
엉킨 실타래 같은
검은 부재의 바람이 불고
태극기 휘날리고
잿빛 비둘기들만 구구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이제 진짜 안녕이라며
작별을 고할 것이다
새 없는 공중으로 검은 비가 내릴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인 나만 홀로
슬플 것이다
어머니를 씻기며― 유은희
구순의 어머니는 부쩍 밥알을 흘리고
기억을 흘리고 여자를 흘린다
몸의 괄호를 다 열어젖혀도
단춧구멍 열리듯 속이 훤히 열린다
이제는 그 흔한 비밀 하나도 간직하지 않는 여자다
목에서 다리까지 훌렁 벗겨져 내리는
이 뻔한 몸을 가지마다 벌목해 살아왔다
옹이마다 손 짚어 오르기만 했던 날들이 부끄러워져서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닌 여자로 만나
염을 하듯 어둠을 열어 닦는다
뼈마디 하나하나 닦아내고 문지르다 문득
저 삶으로의 이장인 듯 여겨져서
그만 비누 거품으로 눈 비비고 만다
봄— 반칠환
저 요리사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흘린 술이 반이다- 이혜선
그 인사동 포장마차 술자리의 화두는
‘흘린 술이 반이다’
연속극 보며 훌쩍이는 내 눈, 턱 밑에 와서
‘우리 애기 또 우네’ 일삼아 놀리던 그이
요즘 들어 누가 슬픈 얘기만 해도 눈물 그렁그렁
오늘도 퇴근길에 라디오 들으며 한참 울다가 서둘러 왔다는 그이
새끼제비 날아간 저녁밥상, 마주앉은 희끗한 머리칼
둘이 서로 측은히 건네다 본다
흘린 술이 반이기 때문일까
함께 마셔야 할 술이
아직은
술병에 반쯤 남았다고 믿고 싶은 눈짓일까
속을 알 수 없는 안 보이는 생명의 술병 속에.
바람편지― 천양희
잠시 눈감고
바람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바라건대
너무 헐렁한 바람구두는 신지 마라
그 바람에 걸려 사람들이 넘어진다
두고 봐라
곧은 나무도
바람 앞에서 떤다, 떨린다.
치자꽃― 양진건
올 장마에도 치자는 피어
내음은 거침없이 사방을 공략하고
그 절대적인 설득력으로
숨 끊어놓고 이어놓고
몇 번이고 진저리치게 하는
검버섯 그림자 같은 꽃.
죽은 사람은 없는 것이라고
죽은 사람의 엄연한 부재를 지적할 때
심지어 헤쳐진 묏자리 속에서도
농밀하게 농밀하게
수작하는 꽃.
상여가 도착하고 비는 내려
산 이나 죽은 이나
구별조차 없이 모두를 적실 무렵
죽은 이는 영혼부터 썩어가고
뗏장은 뿌리부터 썩어가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우리의 묵계조차 썩어갈 때
의욕하고 또 의욕하고
풍자하고 또 풍자하며
우리를 문제시하는 꽃.
이아, 지랄 같은 예언적 내음.
잠을 자야- 이생진
잠을 자야
먼 거리도 좁아지는 거다
잠을 자야
물에 빠진 척척한 운명을
건질 수 있는 거다
잠을 자야
너와 내가 이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다
곶감- 강경주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른다
가죽이 다 벗겨진
알몸뚱이
한 가닥 실에 꿰인 채
줄줄이 능욕을 당하고 있다.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며
잠도 재우지 않은 채
혼쭐을 빼는
육탈의 긴 시간
뼈마디 마디 다 녹아내린 다음
얼굴 몰골 다 허물어지고 난 다음
쭉쭉 찢어서 씹어먹는
저 혼비백산魂飛魄散의
반성문 한 줄
꿀맛이다
계란 한 판- 고영민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짧은 침묵)
계란 한 판.……(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저무는 시간- 손 영
낮이 반원을 그리며 사라지는 시간
산등성이가 무거워지고
새들의 울음이 저무는 산을 넘어올 때
숲은 남아 있는 온기를 나누어 가진다
분꽃이 입을 여는 소리에
어머니가 밥 안치는 소리
방죽에 묶인 염소 울음이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둥지 떠난 새들이 날개를 접을 때
나무들도 잠자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시장골목 국밥집
훈김이 오르고 웃음이 둘러앉는 시간
여미었던 옷깃 헐렁해지고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 시간
윤슬로 반짝이는 저녁 강 건너
떠났던 소리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
오후가 마감되고 저녁이 열리는 소리
하루의 노동을 끝낸 지친 발걸음 소리
아버지는 어제보다 더 저물어 돌아왔다
폐가의 공식- 손 영
이 빠진 바람이 괜스레 문고리를 흔든다
금세 햇볕마저 식어버리는
폐가의 공식은
어둠으로 지은 고양이 울음과 먼지로 얽힌 거미줄이다
난해한 행간 사이로 짐승의 울음이 다녀간다
떠돌아다니는 것은 늘 오답이다
마당에 물음표로 서 있는 잡초들
이 공식에 뛰어든 풀벌레 소리도 사라지고
흘러가는 구름을 ( )로 묶어 봐도
그 괄호는 금방 풀리고 만다
기침소리를 지우고
손님처럼 왔다 가는 이 계절은
척추가 한 자(尺)나 기울었다
처마 밑 빗물의 발자국들, 바람이 주저앉았던 자리
어느 한 개라도 빠질 수 없는
빤한 정답이 손에 잡힌다
폐가는 완벽한 공식을 완성하려고
흘러내리는 뼈를 그대로 방치중이다
바짝 붙어서다―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대근 엽채 일급― 김연대
이순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 사촌 아우가
버려두었던 옛집을 털고 중수하는데,
육십 년 전 백부님이 쓰신 부조기가 나왔다.
이태 간격으로
조모님과 조부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추강댁 죽 한 동이, 지례 큰집 양동댁 보리 한 말,
자암댁 무 열 개, 포현댁 간장 한 그릇,
손달댁 홍시 여섯 개,
대강 이렇게 이어져가고 있었는데,
거동댁 大根葉菜一級이 나왔다.
대근엽채일급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나는 그만 핑 눈물이 났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내 아버지, 할아버지와
이웃들 모두의 처절한 삶의 흔적,
그건 거동댁에서
무 시래기 한 타래를 보내왔다는 게 아닌가.
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 최금녀
나무들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잠시도 너희들 잊지 않았다
강물들아, 울지 마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좋은 시절이 오고 말 것이다
바람아, 우리 언제 모여
밥 먹으러 가자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
한솥밥
우리들 함께 먹는 밥
먹으러 가자
압록강아,
그날까지
뒤돌아보지 말고
흘러 흘러만 가다오.
띠포리― 이상규
띠포리가 납작하게 누워 있다
은빛 비늘을 윤슬처럼 반짝이며
날렵하게 잔바다를 누비던 띠포리가
모로 누워 혼미하게 가라앉고 있다
발라먹을 살도 없어 생선 축에도 들지 못하고
만만하다고 으레 가짓수에도 끼지 못하던
그래도 국물맛 내는 데는 띠포리만 한 게 없다며
끓는 물에 집어넣고 우려먹던 그 띠포리가.
고열에 한기까지 갈마들어 몸살이거니 미적거리다가
척추염증이라고 듣기에도 어쭙잖은 병명으로
벌써 한 달 보름이나 병상에 누워 있다
무른 등에 새끼에 새끼까지 태우고
지느러미짓이 그리 힘든 줄 나만 몰랐다
띠포리 한 줌 넣고 된장 한 숟가락 풀어서
김치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한 끼는 먹을 거야
입에 걸러 넣을 게 없을 거라며 내 걱정을 하는
아내는 척추 마디마디가 물러 누워 있는데
밴댕이 소갈머리처럼 연득없는 나는
연하디연한 띠포리 등뼈까지 우려내어
혼자 살겠다고 후룩이며 밥 말아먹고 있다
할머니의 봄날― 장철문
볕 아깝다
아이고야 고마운 이 볕 아깝다 하시던
말씀 이제사 조금은 알겠네
그 귀영탱이나마 조금은 엿보겠네
없는 가을고추도 내다 널고 싶어하시고
오줌장군 이고 가
밭 가생이 호박 몇구덩이 묻으시고
고랫재 이고 가
정구지 밭에 뿌리시고
그예는
마당에 노는 닭들 몰아 가두시고
문이란 문은 다 열고
먹감나무 장롱도
오동나무 반닫이도 다 열어젖히시고
옷이란 옷은 마루에
나무널에 뽕나무 가지에 즐비하게 내다 너시고
묵은 빨래 처덕처덕 치대
빨랫줄에 너시고
그예는
가마솥에 물 절절 끓여
코흘리개 손주놈들 쥐어박으며 끌어다가
까마귀가 아재, 아재! 하고 덤빈다고
시커먼 손등 탁탁 때려가며
비트는 등짝 퍽퍽 쳐대며
겨드랑이 민둥머리 사타구니 옆구리 쇠때 다 벗기시고
저물녘 쇠죽솥에 불 넣으시던 당신
당신의 봄볕이
여기 절 마당에 내렸네
당신 산소에서 내려다보이는 기슭에는
가을에 흘린 비닐 쪼가리들 지줏대들 태우는 연기 길게 오르고
이따금 괭잇날에 돌멩이 부딪는 소리 들리겠네
당신의 아까운 봄볕이
여기 절 마당에 내려 저 혼자 마르고 있네
머리끄락― 마경덕
그렁께 니 아부지, 아부지가……
아녀, 그만 들어가
딸깍
전화는 끊겼다 또 꿈에 아버지를 보신 게지 나는 잠깐 혼자 남겨진 엄마를 생각했고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설거지를 마쳤다
그렁께 그 머시냐, 머리끄락이,
머리카락이 뭐어?
거시기 말이여
딸깍
사흘 후에 온 전화도 싱거웠다 나는 새우깡 한 봉지를 아작내며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
엄마, 울어?
금메 밥 묵는디, 밥을 묵는디……
천리 밖에서 울음이 건너왔다 늦은 저녁을 먹는데 흰 머리카락이 밥에서 나왔단다 울음이 목에 걸려 밥을 삼킬 수가 없단다 지난번은 장롱 밑, 지지난번엔 서랍에서 아버지를 보았단다 아무 데나 머리끄락 흘린다고 타박을 줬는디…… 니 아부지 세상 버린 지 석 달인데 아직도 구석구석 살아 있당께 우리 엄마 우신다 늙은 여자가 아이처럼 운다
성적표― 한우진
1956년 딸을 낳았다
1958년 둘째 딸을 낳았다
1959년 셋째 딸을 낳았다
1961년 넷째 딸을 낳았다
1962년 다섯째 딸을 낳았다
1964년 여슷째 딸을 낳았다
1966년 아들을! 낳았다
1969년 막내딸을 낳았다
살얼음이 지핀 돌 더미에
멀리 떨어진 자식들 아궁이에
예배당에
불을 지피며
그 어떤 것에든
그을리며
팽나무가 덮친 집에서 여자는 혼자 산다
골목― 전순복
술에 먹힌 젊은이가 두 다리 뻗고 앉아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낳셨나요
한도 많은 세상길에 눈물만 흐릅니다”
노래와 통곡이 버무려지던 길
대보름날이면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는 아이들이
반딧불처럼 날아다니던 길
용케 집을 찾아왔으나 골목 입구에 쓰러진
아무개 아비를 발견한 아무개 어미가
“저기 아무개 아비가 쓰러져있네” 알려주어
치마폭에 한숨을 닦은 어미가 큰 자식을 데리고 내려가
술에 먹힌 아비가 양 날개에 식솔을 걸치고
비첩비척 올라오면
쌀독보다 그득한 별을 거느린 눈 밝은 달이
빙그레 웃어주던 길
가난을 등에 진 남자들의 헛기침 소리와
고물장수, 엿장수 재첩국 장수, 찹쌀떡 메밀묵 장수들이
머리에 어깨에, 가난의 방물을 지고 흘러가던 길
숨 가쁘게 먹이 물어 나르던 어머니 돌아가신 이듬해
소방도로에 입적되어
사리하나 남기지 않은 길
밥 먹었니?― 황미라
고작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말
-밥 먹었니?
달이 가고 해가 가도 바뀌지 않는 그 말 한 마디
새털처럼 가벼우면서 무게를 지니고
더없이 잔잔하면서 순간 파문인
-밥 먹었니?
먹었다고 대답해도
먹긴 무얼 먹었겠냐 끼니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라
그렇게 똑같은 당부를, 그렇게 오래,
환한 햇살이기도
젖어오는 빗물이기도 한
그 말,
다른 것 하나 묻지 않으면서
사는 일을 다 물어오는
-밥 먹었니?
다음에―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 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사모곡― 김석수
어무이요,
웅굴재 봄보리도 푸르고
홍골 샛골에는
땔감나무도 많은데
갈밭골 등천에는 우예 누웠능교
재 너머 서낭디
물 좋은 방뜰 논 사서
이밥 실컷 해 줄 거라며
몸빼 고기비린내 끊일 날 없이
그리도 알뜰하시더니만
우예면 좋능교
어무이요.
탁!― 최재경
달랑 두 노인네 사시는 오두막에
겁도 없이 하얀 눈이 폭폭 쌓여갑니다
초저녁잠이 깬 노인네들
얼굴만 내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안노인네 가슴으로 손이 슬그머니 갑니다
밖에 누가 오는 소리
불을 껐다가 다시 켜보고는, 이 시간에
누가 올까나?, 그러다가는
마당에 나가 개운하게 오줌을 갈기다가
"별일이네! 이 나이에"
추적거리고 들어와 잠을 청해도
그냥 자려다가
손이 또 무안하여 더듬다가
“탁!”
“왜이랴 이냥반이 누가 오면 어짤라구?”
.
.
.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고
마당에 눈은 사정없이 푹푹 쌓여가고.
빈집― 윤제림
울타리에 호박꽃 피었고
사립문 거적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안 갔다는 표시였다.
금방 돌아온다는 표시였다.
옛날엔.
그런 날이면,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대청마루에 누웠다 가곤 했다.
뒤꼍엔 말나리 피었고
방문 창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갔다는 표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시다.
지금은.
오늘 아침엔, 억수장마를 따라온
황토물이 사흘을 묵고 떠났다
셋방살이 다섯 식구― 박영희
사람이 잠들면
코에서 찬바람이 나는 것인디
아이 글씨
자는 줄 알았던 마누라 코에
살짜그니 손을 대본께
더운 바람이 나더란 말이시
가운데에는
자식놈 셋이 잠들어 있제
통통배 엔진처럼 가슴은 요동을 치제
암만 더듬어도
마누라가 있는 곳은 섬이더란 말이시
마누라는 그 섬에서
애타게 통통배를 기다리는디
그것이 워디 쉬운 일이여야제
산에 와 심심하니― 강경호
오랜만에 산 속에 오니 심심하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 사라지고
나는 길을 잃어 즐겁다
그 산에 오니 심심하다
텔레비젼이 없고 전화가 불통이고
신호등이 없고 노래방이 없어
심심하다 책이 없어
정말 심심하다
그 산에 와 심심해지니
가만가만 나무들 속삭이는 소리
바람이 책장 넘기는 소리
새들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
지금껏 보이지 않던 낯선 별
꽃들이 제 입술에 연지 바르는 모습
더 심심해지면
새끼들과 둘러앉은
오소리 식구네 즐거운 저녁답이 보이는
그 산에 와 心深해지면
나는 마침내 길을 잃어 즐겁다
압력솥― 전순복
몸을 내어줄 때마다 번번이 소리를 질러대는
저 여자
펑퍼짐한 엉덩이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칙칙!
절정을 치닫는 여자가 교성(嬌聲)을 쏟아낸다
포르테, 포르테!
포르티시모!
저러다가 여자의 뚜껑이 열릴 것 같다
옹골찬 강성이 말랑말랑해지는 그곳
발아되지 못한 싹들이 폭죽처럼 명멸하는
궁은 맹렬하다
치익, 치익
정적을 분무하는 신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든다
물풀처럼 순해진 그것들이
혼곤히 갈아앉는다
칭얼대던 여자가 잠잠해져
파편처럼 부서진 침묵들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
국수― 이재무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동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순결들!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발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양념을 넣고
코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친정 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깊이 묻다― 김사인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어머니― 이경
어머니 몸에선 언제나 생선 비린내가 났다
등록금 봉투에서도 났다
포마드 향내를 풍기는 선생님 책상 위에
어머니의 눅눅한 돈이 든 봉투를 올려놓고
얼굴이 빨개져서 돌아왔다
밤늦게
녹초가 된 어머니 곁에 누우면
살아서 튀어 오르는 싱싱한 갯비린내가
우리 육남매
홑이불이 되어 덮였다
유방― 문정희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드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을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겊 속에
꼭꼭 싸매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놨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밭― 정우영
암시랑토 않다. 니얼 내리갈란다. 내 몸은 나가 더 잘 안디, 이거는 병이 아녀. 내리오라는 신호제. 암먼, 신호여. 왜 나가 요새 어깨가 욱씬욱씬 쑤신다고 잘허제? 고거는 말이여, 마늘 눈이 깨어나는 거여. 고놈이 뿌릴 내리고 잪으면 꼭 고로코롬 못된 짓거리를 헌단다. 온 삭신이 저리고 아픈 것은 참깨, 들깨 짓이여. 고놈들이 온몸을 두들김서 돌아댕기는 것이제. 가심이 뭣이 얹힌 것 맹키로 답답헌 것은 무시나 배추가 눌르기 땜시 그려. 웃배가 더부룩하고 속이 쓰린 것은 틀림없이 고추여. 고추라는 놈은 성깔이 쪼깨 사납잖여. 가끔씩 까끌허니 셋바닥이 돋는디 나락이여, 나락이 숨통을 틔우고 잪은 게 냅다 문대는 것이제. 등허리가 똑 뿐질러진 것맨치 콕콕 쏘아대는 것은 이놈들이 한테 모여 거름을 달라고 보채는 거여. 밍그적거리면 부아를 내고 난리를 피우제. 그려, 내 몸이 곧 밭이랑게. 근디 말여, 나가 여기 있다가 집에 내리가잖냐. 흙냄새만 맡아도 통증이 싹 사라져뿐진다. 신통허제? 약이 따로 필요 없당게. 하이고, 먼 지랄로 여태까장 그 복잡헌 디서 뀌대고 있었다냐 후회 막심허지. 인자 내 말 알아들었제? 긍게로 나를 짠하게 생각허덜 말그라. 너그 어매는 땅심으로 사는 사람이여. 나가 땅을 버리면 아매도 내 몸뚱이가 피를 토할 거이다. 그러니 내 말 꼭 명심히야 써. 어매 편히 모시겠다는 말은 당최 꺼내지도 마라. 너그 어매 죽으라는 소린게로. 알겄제?
구르메 달 가드키― 박이화
봄이었던 거라
국화주, 매화주, 이화주
꽃이 술을 마셨는지 술이 꽃을 마셨는지
좌우당간 꽃도 술이 되는 세상에
억조중생 구제를 위해 면벽수도 하던 지족선사님
그 십년불와에 주화입마되셨는지
상기병통에 정신이 혼미해지셨는지
그만 술 중의 술 방중술에
십년 염불 도로아미타불 공염불이 되었던 거라
어즈버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졌던 거라 말발타살발타
허나 알고 보면 그는 이미
만중운산 구름처럼
몸과 마음의 경계가 없었던 거라
천지불인 무위하는 자연처럼
별유천지비인간계의 선정에 노닐었던 거라
그리하여 무주강산 달밤에 빈 배의 노를 젓듯
유유히 여인의 뱃전에 노를 저었던 거라
유유자적 구만리 뱃길을 열었던 거라
아무렴, 그에게는 해탈도 열반도
이화에 월백하는 것이고 보면
구르메 달 가드키 가는 것이고 보면
더욱이 때는 봄밤임에랴
소쩍새 만공산 좆죠좆죠 울어쌓는
달빛 질퍽한 봄밤임에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호
이 세상이, 이 삶이
못마땅할 때도 있지만
견딜 만한 것은
바라볼 하늘이 있고
아직 맨발로 밟을 땅이 있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한 번 웃으면 잊어버릴
이웃들의 사소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며
낮은 곳으로 향해서 흐르는 냇가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건져 올리는 일입니다
그래도 세상은 괜찮은 곳이라고
맞장구치고 싶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믿는 일이며
그것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나무 다비(茶毘)― 박방희
나무는 태생적으로 선골(仙骨)이다
줄기 하나로 시작한
나무의 길은 하늘로 가고
천수관음의 손으로 우주를 만진다
절망을 움켜잡으며
땅속 어둠에 박은 뿌리는
지구를 들고 있다
나무는 태생적으로 선풍(仙風)이다
나고
성장하고
노쇠하여
고사목이 되고
마침내 한 짐 화목으로
스스로 다비 한다
오이― 허수경
어라,
아직 여름길은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오이넝쿨의 손은 하늘을 더듬더라
그때 노란 꽃은 후두둑 피기 시작하더라
아직 여름길은 나지 않았는데
바다로 산책을 나간 새들은
오이 향을 데리고 저녁이 닫히기 전 마을로 돌아오더라
오이꽃에서는 바다의 향기가 나더라
바다에 빠진 태양빛 같은 새들의 수다 속에서
꽃은 지고 오이 멍울이 화반에서 돋아나더라
여름길이 열리고 그 노란 꽃 가녘에
흰 나비는 스르르 속옷을 열더니 쪼그리고 앉더라
먼 사랑처럼 기어이 휘어지면서 오이가 열리든 말든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適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중 큰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제(四宜齊)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며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금강송― 정수자
군말이나 수사 따위 버린 지 오래인 듯
뼛속까지 곧게 섰는 서슬 푸른 직립들
하늘의 깊이를 잴 뿐 곁을 두지 않는다
꽃다발 같은 것은 너럭바위나 받는 것
눈꽃 그 가벼움의 무거움을 안 뒤부터
설봉의 흰 이마들과 오직 깊게 마주설 뿐
조락 이후 충천하는 개골의 결기 같은
팔을 다 잘라낸 후 건져 올린 골법 같은
붉은 저! 금강 직필들! 허공이 움찔 솟는다
복사꽃 모텔― 박이화
어떤 사랑받던 왕후는 사후 타지마할묘에 잠들었다는데 이 땅의 산천에는 화이트 캐슬이니 파라다이스니 고대왕가의 석묘 같은 모텔들이 즐비해 있다 그렇다면 실내 또한 죽음처럼 깊은 잠을 위해 킹싸이즈의 제단이 구비되어 있을 테지 후대의 도굴꾼들이 마르지 않는 <샘>*이라 경탄해 마지않을 변기에는 항시 신성한 성수가 반쯤 차올라 있을 테지 생과 사의 경계처럼 안과 밖의 경계가 삼엄한 모텔 입구에는 언제나 울긋불긋한 호위병차림의 비닐커튼이 들락이는 차량 번호를 일일이 가려주고 있는데…… 이렇듯 영생불멸의 사랑을 위해 밤낮없이 성업 중인 모텔을 지나노라면 봄날은 또 인정사정없는 포주 같아서 이 꽃 저 꽃 닥치는 대로 거리로 내몰기 바쁜데 그럴 때, 당신은 어쩌자고 내 옆구리 쿡쿡 찌르며 저 둥근 지붕 아래 가자가자 하는지 백주대낮 벌 나비 정신없이 잉잉 대는 저 붉은 복사꽃 모텔로
봄날 오후―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ㆍ그ㆍ러ㆍ바ㆍ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 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시골버스― 손택수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
억새 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러대는 시골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투덜투덜 한참을 지나쳤다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 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 올린 포플러나무와 내가
어쩌면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불륜을 꿈꾸다― 김순영
나는 가끔 불륜을 꿈꾼다
넓디넓은 밭고랑에서 하늘 한 번 쳐다보며 허리 펴는
수염 텁수룩한 사내의 그 맑은 눈빛과
투박한 손 언저리에 간간히 굳은 살 박혀
꺼끌꺼끌한 세상 꼭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는 속 넓은 사내와
리프트 언저리에 서성이다 손톱밑에 기름때가
지워지지 않은 사내의 따뜻함과
술집 모퉁이에 서서 거품 많은 맥주 한잔을
거침없이 들이키는 배포 큰 사내와
세상 이야기 안주삼아 내일의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그런 사내와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새워도 좋겠다는
빈 껍데기 같은 생각을 하면서
불륜을 꿈꾸고 싶은 것이다
끼리끼리라는 말이 얼마나 행복하고 끈끈한 사랑인지
남몰래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책임진다는 말 허투루 하지 않는
그런 사내와 만나고 싶은 것이다
가족력― 이화은
독사는 새끼에게 유산으로 독을 물려주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부를 대물림하는 재벌 아버지처럼
또는
물려줄 건 빚 밖에 없다는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 같았을까
지 에미를 닮아서 독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독하지 않은 독사는 이미 독사가 아닌 것을
돈이 독이 되기도 하고
가난이 돈이 되기도 하니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는데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당뇨로 고생하셨던 어머니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매일 아침 점호 하듯
핑크와 화이트의 알약을 꿀꺽 노래처럼 삼키는데
물려준다는 것
이 수직의 흐름을 아무도 꺾을 수는 없다
독사가 곡기를 끊고 동안거에 들었을 때
누대에 걸쳐 대물림해온 지겨운 독을
거역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해마다 허물을 벗어보지만
허물은 허물일 뿐
피는 신의도 낭만도 뭣도 아니다
냉정한 돈이며 빚이며 병일 뿐
결국 독이다
우리는 모두 독사의 자식들이다
라고 한다면
도덕 동네의 군자님들에게 돌 맞아 죽으려나?
죄 없는 자만, 아니 독 없는 자만 내게 돌을 던질 것이다
문주란― 고진하
뜨락에 핀 꽃들을 보며 벌건 대낮부터 곡차 한 사발씩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두들 벌게진 눈길로 길쭉길쭉한 푸른 잎새들 사이에서 말좆 같은 긴 꽃대를 하늘로 쑥 뽑아 올린 문주란을 감상하고 있는데, 훌떡 머리 벗겨진 중늙은이 거사(居士)가 문주란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이년 저년 찝쩍거리지 말고
저 문주란처럼
좆대를
하늘에다 박아,
하늘에다 말이야!
대머리 거사의 일갈 때문일까. 문주란이 놓여 있는 뜨락 위의 하늘이 더 깊고 쨍쨍해 보였다.
제비꽃 사설― 곽재구
네 이름이 뭐냐
땅끝 가는 완행버스 길
바랑 걸치고 걷다
풀 언덕에 앉아 물어보면
솜털 보송보송한
자주색 꽃들이 입을 모아
사 랑 부 리 꽃
우리나라 사람들
싸우지 말고 용서하여
맑고 고운 희망 나라 통일 나라
얼른 세우라고 입모아
사 랑 부 리 꽃
네 이름이 뭐냐
귤동 가는 도암만 시오리 길
개울물에 보리 미숫가루
풀다 물어보면
솜털 보송보송한
자주색 꽃들이 입을 모아
도 끼 꽃
우리나라 사람들
가슴의 슬픔들 몽땅 털어 버리고
아름답고 빛나는 세상
들판 곳곳에 세우라고 입모아
도 끼 꽃.
운주사 와불― 조성국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걷고 있는 거다 저문 하늘에
빛나는 북극성 좌표 삼아
천지간을 사분사분 밟으며 오르고 있다
등명(燈明)의 눈빛 치켜뜬 연인과
나란히 맞댄 어깻죽지가 욱신거리도록
이 세상 짊어지고
저 광활한 우주로 내딛는 중이다
무릇 당신도 등짐 속의 한 짐!
팬티와 빤쓰―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멸치쌈밥집― 이상개
입안이 깔깔하거나
속이 텁텁한 술 마신 다음날이면
중앙동 2가와 인접한 동광동
백산기념관 뒤에 있는
중앙대구탕 집으로 간다.
이 집의 별미 멸치쌈밥을 먹으려 간다.
몸집이 뚱뚱하고 후덕하게 생긴
아줌마가 끓여내는
멸치 된장찌개와 쌈
입맛을 돋우는 보글보글 끓는 된장
구수한 된장냄새에 군침이 돌지만,
보라! 뜨거운 뚝배기 속에 와글거리는
저 싱싱한 멸치떼들을.
푸른 상추로 후리질하여 싸먹을 때
잎사귀에 푸들거리는 심해의 맥박은
중앙동 가로등 불빛처럼 출렁거린다
외지에서 친구라도 오는 날이면
멸치쌈밥을 먹으려 간다.
대구탕은 비실비실 자리를 뜨고
뚝배기 속에 멸치 떼가 팔딱거리며
우르르 몰려나와 반겨준다.
신규방가― 박이화
- 백목련
차타리 부인도 그렇고 보바리 부인도 그렇고 수로 부인도 그렇고 왜 동서고금의 부인들은 모다 에로틱 할까? 그럼 외로울 사 이내 몸도 목련 부인이라 고쳐 보면 꽃 중에 가장 농염한 꽃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슬픈 건 어째도 나는 그리 될 수 없다는 것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그리 될 수 없다는 것 나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꽃! 청상의 꽃 이화에 월백하는 저 운우지정을 그리워할 수 있으랴? 싱싱한 푸른 잎에 안겨 피는 동백이면 몰라도 불끈한 꽃대 위에 흐드러진 모란이면 몰라도 나는 일생 꽃이 잎을 보지 못하는 꽃! 수절하는 꽃! 그렇거늘 내 어찌 언감생심 꽃 중이 꽃이 될 수 있을까
어떤 통화― 서안나
지하철 안에서 사내가 목청을 높인다.
아 환장해 불겄네. 뭣이라고요. 사기꾼이라고야.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것네. 내가 세금 꼬박꼬박 내고 착하게 살아 불고 나쁜 짓은 안 해봤는디 사기꾼이라고요. 아따 선상 아무리 세상이 각박혀다고 혀도 내가 신용불량자가 되었기로서니 말씀이 너무 심허시오. 나도 처자가 있는 사람인디. 다음주엔 꼭 보내준다고 허지 않소. 나도 거짓말은 싫어하는 사람인디. 세상이 날 거짓부렁하게 맹근다 안 하요. 그 머시냐 문어 대가리 같은 김 사장이 부도만 안 내부렀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소. 기다려 달라고 암 생각 없이 그 말을 믿은 게, 신용 사회를 믿은 게 내 잘못이구만. 뭣이라고요. 내일까지 갚아야한다는 말이요.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겄네. 내 말을 콧구멍으로 들은 거요. 발가락으로 들은 거요. 이보쇼. 아 이보쇼. 긍께 내일까지는 힘들당게요. 내가 돈을 맹글러 서울까지 왔응께 다음주까지만 기다려 주라고요. 아, 이보쇼… 이보쇼…
얼굴이 시뻘겋게 목청을 높이던 사내가 한숨을 쉬며 끄는 핸드폰. 지하철이 사내 얼굴만큼 벌겋게 달아올라 달리고 있다.
갈퀴― 이재무
흙도 가려울 때가 있다
씨앗이 썩어 싹이 되어 솟고
여린 뿌리 칭얼대며 품속 파고들 때
흙은 못 견디게 가려워 실실 웃으며
떡고물 같은 먼지 피워 올리는 것이다
눈 밝은 농부라면 그걸 금세 알아차리고
헛청에서 낮잠이나 퍼질러 자는 갈퀴 깨워
흙의 등이고 겨드랑이고 아랫도리고 장딴지고
슬슬 제 살처럼 긁어주고 있을 것이다
또 그걸 알고 으쓱으쓱 우쭐우쭐 맨머리 새싹들은
갓 입학한 어린애들처럼 재잘대며 자랄 것이다
가려울 때를 알아 긁어주는 마음처럼
애틋한 사랑 어디 있을까
갈퀴를 만나 진저리치는 저 살들의 환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가려워서 갈퀴를 부른다
흘레― 고성만
우리 마을에서는 씹할 놈 씹도 못할 놈과 같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 대신 흘레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교미처럼 점잖은 말과는 달리 하다보다는 붙다를 결합시키는 게 보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돌아보면 붕어는 강물을 흘려 수정하고 닭은 벼슬을 쥐어뜯으며 잠자리는 공중전을, 사람은 방구석에서 일을 치른다
열일곱 겨울, 그애와 내가 눈 내려 구죽죽 물 녹아 흐르는 강변 제방에서 행여 빨아 신은 운동화를 더럽히지 않을까 조바심치다가 발견한 개 샴쌍둥이처럼 뒤로 붙어 있는 몸과 몸 사이 막대기가 걸쳐 있었다 얼굴이 붉어져 멀리 돌아가는 그애를 따라 걷던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바람 마르는 소리 들리는 늦가을 오후
사촌누이와 나는 뒤안 장독간에 박혀서 흘레붙는 뱀을 보았다
친친 뒤엉킨 얼룩무늬를 뚫고 유난히 빨갛게 부풀어 오른 부위
사랑은 그렇게 춥고 외로운 일인가
아픈 역사― 김원중
뇌졸중 환자가 된 지
어언 3년에 들어섰다
일 년이 지나니
친척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2년이 지나니
친구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이제 가끔 찾아오는
한두 사람 제자들에 힘입어
오늘도 지팡이 짚고
산책길에 나선다
이것이 인생인 것을
고희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고구마를 삶으며― 서안나
고구마를 삶다 보면 제대로 익는지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쿡쿡 찔러보게 된다
나의 어머니도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워
세상에 내놓은 잎사귀도 덜떨어진 딸년
잘 익고 있는지를
항시 쿡쿡 찔러보곤 하신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느냐?
차 조심해라 겸손해라 감사해라
고구마 푸른 줄기처럼
휴대폰 밖으로 넝쿨져 뻗어 나오는 어머니
세상에 사나운 일 벌릴까 봐
40이 넘어도 설익은 딸년
마음과 영혼 병들지 말고 제대로 익으라고
핸드폰 속에서 쿡쿡 찔러보는 어머니
뜨거운 아랫목에서 뒹굴 거리며
알았다고요 귀찮은 듯 대답하는
뜨뜻하게 잘 익어가는 딸년
매화민박의 평상(平床)― 백상웅
네모난 짐승이 매화나무 그늘을 등에 업고 기어간다.
부러진 한쪽 다리를 벽돌로 괴고도 절뚝이지 않는다.
마당에 네 개의 발자국을 천천히 찍고 있다.
나도 짐승의 널따란 등에 그늘보다 무겁게 엎드린다.
짐승은 매화나무 그늘을 담벼락 쪽으로 밀어낸다.
틀림없이 한곳에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지 못해
나처럼 숲 속에서 도망쳐 매화민박에 묵었을 짐승.
평상이 되는 줄도 모르고 납작 엎드려 단잠에 들었다.
등허리에 문신처럼 박힌 나이테가 성장을 멈춘 것은
놀러 온, 도망치는 연애하는, 슬픈, 엉덩이 때문은 아니다.
숲을 떠난 나무가 뿌리를 찾기 위해 남겨놓은 증거다.
네모난 짐승이 햇볕을 향해 남몰래 발자국을 뗀다.
네모난 황소 같은 평상이, 평상이 될 것만 같은 나를
단단히 업고 숲 속으로 돌아갈 것 같은 매화민박이다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이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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