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니 모레티의 새 영화 ‘찬란한 내일로’ 2. 대통령이 누군지 모르고도 잘 사는 나라 3. ‘더 빡센’ 효율성 추구…뒤따를 붕괴사회를 준비하자 4. 종부세 폐지 논의는 '부동산 아편'의 음습한 모습 5. 동물에게도 필요한 기후정의 6. ‘큰 북한’으로 변해가는 러시아 7. 가야 할 길, 가지 말아야 할 길 8. 이념도 없는 시대 9. 신자유주의와 ‘잔혹한 사실’의 역설 10. ‘중독 행위자’들의 끈질긴 거짓말, 정보 조작과 은폐
11. 학살 위의 무지개, 핑크워싱 12. 민주당, 윤석열과 '내가 더 부자 잘 지키겠다' 경쟁하나? 13. '제국주의 행위자'가 된 러시아, 혼돈의 지구 정치 지형이 확정되었다 14. AI, 인문학, 역사학 15. 풍선·드론·감청…용산은 탈탈 털리고 있다 16. 대북전단 왜 막지 않는가 17. '아줌마 출입금지'라는 혐오의 자유 18. 자유로운 몸의 문화 19.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20. 아부의 저주
21.‘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정권이 존립할 수 없다’ 22.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 23. 학살이 돈이 되는 세계 24. 불통과 불신, ‘윤석열식 의료개혁’의 끝은? 25.지역쇠퇴 극복을 위한 지역정치 26. 오판이 부른 한국전쟁…비극 되풀이 말아야 27. 정규직-비정규직-사용자, 삼체 계급을 넘어 28. 몸의 일기를 쓴다 29. 고문당했다, 다들 날 멀리했다, 시 쓸 때만 난 살아있구나 30. AI와 제조업, 그리고 노동의 미래
31.‘따르면 기사’를 보이콧하라 32.노동을 탄소중립동맹의 주체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33. 출산율과 독서율의 ‘기묘한’ 평행이론 34. 종부세와 상속세와 저출생 35. 물에 날아든 에너지 부메랑 36. 여성 배제하면서, 저출생 ‘전환’? 37. 오늘, 김구 암살당한 날…<건국전쟁>의 총질은 여전히 계속된다 38. 트럼프보다 르펜? 미 대선 넘어 인류사 중대 순간 될 프랑스 총선 39.어떤 자유주의자의 자기 착취에 관한 고백 40 간판이 말해주는 도시의 실체
41.딱딱하고 강해지는 한국어 42.스카이캐슬과 기생충의 나라 43. 베드로의 거짓말, 언론의 거짓말 44.돈 없어 감옥에 끌려간 5만7267명 45. 가시로 막고 막대로 치려 해도 46. 공화국을 허무는 지도자의 분노 47. 친자본 언론 업고 노조 '자제론' 선동하면 '일터의 민주주의'만 후퇴시킬 뿐이다 48. 오래 같이 가기엔 너무 다른 러시아와 북한의 국익 49. 인구 비상사태가 아니라 사회 비상사태다 50 감각이 권력이 될 때
난니 모레티의 새 영화 ‘찬란한 내일로’
이탈리아의 저명한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는 매력이 철철 넘친다. 무엇보다 감독치고 잘 생겼으며, 그것도 지적으로 잘 생겼는데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물로 뽑힌다. 모레티는 공산주의자이고, 그것도 가장 순수한 시절의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인물이다. 아마도 안토니오 그람시주의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주의적 신념을 가진 인물임에도 그의 영화가 늘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유머가 ‘철철’ 넘치고, 눈물까지 ‘철철’ 흘리게 할 만큼 따뜻하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면 그건 모레티의 영화를 생각하면 된다.
그가 내놓은 새 영화 <찬란한 내일로>는 바로 그런 내용의 작품이다. 보면서 중간중간 한참 깔깔대게 하는데 결국은 울게 만든다. 마음을 움직인다. 이런 게 바로 영화가 말하고, 영화가 행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감독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찍는 감독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감독 조반니(감독 모레티 자신)이다. 그는 지금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5년 만에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화 제목이 바로 <찬란한 내일로>이다. 영화 속 영화의 배경은 1956년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소련식 공산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소련이 탱크를 몰고 침략, 진압하던 때였다. 헝가리 서커스단 ‘부다바리’는 이를 피해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콰르디촐로’라는 마을로 공연을 온다. 초청 공연을 기획한 인물은 공산당 기관지 루니타의 편집장 엔니오 마스트로얀니(실비오 올란도)이고 그는 그람시 지부의 지부장이기도 하다. 엔니오 옆에는 늘 베라(바보라 보불로바)라는 이름의 충실한 공산주의 여성이 따라다닌다.
영화는 영화와 ‘영화 속 영화’를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이런 식이다. 콰르디촐로 마을 얘기가 나올 때 그 인물들을 연기할 배우 중 한 명, 특히 역사의식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이는 젊은 남자 배우 한 명은 조반니 감독에게 이탈리아에 무슨 공산당원이 200만 명이나 있느냐는 식으로, “대본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항의를 한다. 조반니 감독은 그에게 그때는 그랬었다며, 이탈리아에 공산당원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며 그 배우에게 짜증을 낸다. 조반니의 영화는 이렇게 시작부터 난항이다. 배우들에게 역사 교육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조반니 감독은 이해 불가일 만큼 정신세계가 복잡한 인물이다. 40년 된 아내이자 파트너로서 그의 영화만 프로듀서를 한 파올라(마르게리타 부이)는 이제 그와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려 한다. 그가 주는 정신적 부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이다. 파올라는 조반니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한국 영화인들과 소주 한잔 건배하는 착한 지식인의 영화
조반니의 영화 <찬란한 내일로>는 중간에 투자자인 피에르(마티유 아말릭)가 돈 사고를 쳐서 촬영이 중단된다. 피에르는 경찰에 잡혀가면서 조반니 감독에게 영화를 살리려면 넷플릭스를 꼭 만나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파올라와 함께 조반니를 만나는 이탈리아 넷플릭스 관계자들은 말할 때마다 자신들 채널이 전 세계 190개국에 방영된다는 점만 세 번씩 반복한다. 게다가 당신 영화는 발화점이 너무 늦다며, 모든 영화는 2분 안에 그걸 보여줘야 한다고 말해 조반니를 질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다행스럽게도 중단 위기의 영화는 한국 영화제작자들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다. 그들은 조반니의 영화가 ‘예술과 공산주의의 죽음’ ‘사랑과 윤리의 죽음’을 얘기하는 작품이어서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한국 영화인들은 파올라가 처음으로 남편 아닌 다른 감독과 제작하는 폭력적인 갱스터 영화에도 투자한다. 감독은 이전에 <괴물>이란 영화를 만들어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아마도 이건 모레티가 봉준호와 박찬욱을 합쳐서 설정한 인물로 보이며 한국 영화의 상당수가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 대목으로 보인다) 조반니 감독은 이 폭력 영화의 감독과 8시간 동안 한 장면의 유해성, 무의미성을 놓고 설전을 벌인다. 어쨌든 조반니 감독은 한국 영화제작자들과 자신의 영화 마지막 장면 촬영을 앞두고 소주로 건배를 하기도 한다. 조반니는 한국말로 “건배”를 외치며 한국식으로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영화 속 영화를 두고 영화 속 영화의 한국 제작자들이 ‘예술과 공산주의의 죽음’을 그린 작품이라고 품평하듯이 모레티의 이번 영화 <찬란한 내일로>는 현대예술, 현대영화가 어떤 의미를 잃었으며, 현대사회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상실했는지를 묻는다. 지적인 모레티는 늘 그랬듯이 이번 영화에서도 친절하고 따뜻하게 자신만의 답을 내놓는다. 그 점이 좋다. 결론을 열어 놓는 척하면서도 사실 아무런 답을 내지 못하는 다른 영화 작가들과는 달리 비록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허상일 뿐이라도 답을 내려고 노력한다. 모레티의 이번 영화는 한 마디로 노력이 만들어 내는 희망의 영화이다. <찬란한 내일로>는 곧 ‘더 나은 미래로’를 갈망하는, 착한 지식인의 영화이다.
혁명이나 변혁은 영화 한 편 만드는 것 같은 '소동의 미학'
모레티의 영화가 늘 그렇듯이 이번 작품 역시 유머가 넘쳐서 좋다. 이탈리아어 특유의 리듬감과 어우러지면서 장면 하나하나에 코믹함이 느껴지고 그래서 영화 전체적으로는 소동극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 속 영화에 서커스단이 나오는 만큼 서커스단에는 코끼리와 호랑이 불곰 등이 나와야 하는데 조반니 감독은 코끼리가 두 마리가 아니고 네 마리여야 한다고 고집, 스태프들을 애먹인다. 호랑이는 헝가리에서, 불곰은 파리에서, 코끼리는 베를린에서 데려와야 하는 식이어서 제작진은 정말 골머리를 싸안는다.
조반니 감독은 영화 속 영화의 베라 역을 맡은 여배우가 감독의 디렉션을 넘어서서 자기만의 연기와 대사를 해댈 때마다 “돌아 버리겠다”고 한탄한다. 디테일이 너무 강해 미술팀 소품팀을 달달 볶는다. 그람시 지부에 스탈린 초상화가 걸려 있으면 안 된다고 하는가 하면, 당시 지부 사무실 벽에 걸린 기관지의 머리기사(한 컷 스치듯 나오는)의 제목이 길다, 짧다를 반복한다. 뭐 하나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다. 영화 음악을 맡고 있는 딸이 자신보다 그녀의 애인(폴란드 대사로 늙은 남자다)에게 사운드트랙을 먼저 들려주는 것도 못내 섭섭하다.
영화 속 영화 <찬란한 내일로>의 조반니 감독은 모든 소동을 겪으며 어쨌든 영화를 완성해 낸다. 그 과정을 그린 영화로 역시 세상일이란 마치 영화 한 편을 만들 듯, 그렇게 소동의 미학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혁명이란, 그리고 세상의 변화란, 선언적이고 이념적인 게 아니라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겪는 일상의 디테일 같은 것들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헝가리 사회주의가 침략당하는 와중에도 베라 당원과 엔니오 지부장 사이에서는 로맨스가 싹트는 식이다
영화를 완성해야 하는(사회를 변혁시켜야 하는) 영화감독(정치가 혹은 혁명가) 조반니도 아내 파올라의 이별 통보와 딸아이의 느닷없는 연애와 결혼, 배우와 스태프들과의 수많은 이견과 충돌, 심지어 코끼리 수를 맞추는 것 하나하나까지 그 갈등을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며 세상이 바뀌어져야 영화가 좋아진다. 모레티의 영화는 하나의 변증법적 사회과학 교과서이다.
순결한 이성의 공산주의자가 영화를 만났을 때
영화 속 조반니 감독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부르는 칸초네 가사가 가슴에 남는다.
“난 항상 출발점에만 머무르는 느낌이야 / 당신의 방 밖 세상에서 문을 닫고 도망쳤지 / 당신이 내 삶의 이유란 건 잊지 않고 있어 / 이것이 정녕 사랑일까 / 대화할 때마다 놓치는 평정심을 갈구하고 /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삶에서 행복한 척해 / 그리고는 그리움을 그저 흘려보내면서 / 당신의 손을 붙잡고 또 한 번 말하지만 / 그건 그저 말일 뿐 / 그건 그저 말일 뿐 / 그건 그저 말일 뿐 우리가 한 말일 뿐 / 어서 내일이 다가와 모든 걱정이 사라지길 / 시간이 흐르게 두면 모든 게 분명해지길 /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인생이란 결국 / 영원히 순간일 뿐이니까 / 나와 당신에게 / 그건 그저 말일 뿐 /그건 그저 말일 뿐 우리가 한 말일 뿐 / 그건 그저 말일 뿐 말일 뿐, 말일 뿐, 말일 뿐”
순결한 이성의 공산주의자가 영화를 만났을 때란 어떠한 때인가. 찬란한 내일을 위하여,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그리하여 더 위대해질 미래를 위하여.
오동진 영화평론가 시민언론 민들레 2024.06.01
대통령이 누군지 모르고도 잘 사는 나라
촛불시민들의 꿈과 열망!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2016년 12월로 거슬러 올라 가보자. 당시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의 당면 요구는 대통령탄핵이었다. 그러면 그 이면에 존재하는 촛불시민들의 본질적 열망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대통령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국정이 좌지우지 되지않고, 국민 스스로의 자기통치(자치)에 의해 운영되는 더불어 함께 잘 사는 행복한 나라가 아닐까? 그러면 그러한 유토피아의 나라가 가능할 수 있을까?
유사 이래 존재해온 자치와 분권의 유토피아 열망
그러한 유토피아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꿈과 열망은 유사 이래 존재해 왔다. 그러한 유토피아적 국가나 이상사회를 하느님 나라(기독교), 불국 정토(불교), 대동사회 또는 태평성대사회(유교)라 일컬었다.
노자는 그러한 유토피아 국가론적 기초로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야기했고, 마하트마 간디는 스와라지(마을공화국)를, 다산 정약용은 여전제 마을을, 그리고 말년의 마르크스는 꼬뮨(COMMUNE)을 이야기했다. 모두 분권과 자치의 이상을 펼쳤다. 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담대한 혁신사회 플랜: 마을공화국 지구연방”이라는 저서에서 마을공화국-마을연방공화국-마을공화국 지구연방의 삼중체제로 지구질서를 재편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대통령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게 하는 하지유지(下知有之) 리더쉽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론을 전개하면서 지도자론도 전개했다.노자의 도덕경 17장에 보면, 지도자를 국민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하며 지도자를 4종류로 나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太上)는 그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백성이 잘 모르는(下知有之) 지도자이고, 그 다음은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 몸에 받는(親而譽之) 지도자이며, 세번째로는 아랫사람이나 국민들을 두려워서 복종케 하는(畏之) 지도자다. 마지막으로는 국민들에게 경멸받으며 조롱당하는(侮之) 지도자이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고, 그 다음은 친근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다음은 두려워하며, 그 다음은 업신여기고 경멸한다.”(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우리나라 근 현대사를 통하여 지도자라는 사람들을 평가해 본다면 어떨까?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 그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백성이 잘 모를 정도로 훌륭하기 그지없는 하지유지(下知有之)에 해당하는 지도자가 있었을까? 해방 이후 역대 대통령을 평가해 본다면? 하지유지(下知有之)형 지도자는커녕 친이예지(親而譽之)에 해당하는 지도자라도 있었을까? 존재했다면 몇이나 될까? 외지(畏之)나 모지(侮之)한 지도자가 대부분이었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행한 세월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21세기 세계광장 민주주의의 전범을 만들어낸 촛불시민은 그 장엄한 꿈과 열망으로 하지유지(下知有之)형 지도자를 세울수 있을까?
있을 것이다. 다음의 노자 도덕경 17장은 그것이 가능함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진실함이 부족하면 신뢰를 얻지 못한다.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말이 그럴 듯할수록 염려스럽다. 공을 이루고 일이 성취되어도 백성들이 모두 ‘내가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해야 한다.”(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사회적 신뢰자본을 촘촘하게 형성하고 자치(自治)를 하게 되면, “그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백성이 잘 모를 정도의 하지유지(下知有之)의 리더쉽”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더쉽이 되려면 “공을 이루고 일이 성취되어도 백성들이 모두 ‘내가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도생 모래알사회 넘어설 직접민주주의 자치분권체제
그런데 리더쉽과 시스템의 상관관계에서 보면, 태평성대의 이상사회를 이루는데 있어서 하지유지(下知有之)의 리더쉽은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태평성대의 이상사회가 이루어지려면 그러한 리더쉽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충분조건으로서의 시스템과 제도가 받쳐 주어야 한다. 그 시스템과 제도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직접민주주의 제도와 자치분권 시스템이라고 본다.
현재 한국은 직접민주주의 제도와 자치분권 시스템이 거의 전무한, 대의민주주의 중앙집권 통치체제라고 불리우는 87년체제하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살하는 대한민국>의 저자 김현성은 그의 책에서 “한국의 극단적인 저출산 지역소멸 현상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경쟁’의 매운맛을 보게 하며, 파국과 소멸을 향해 질주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진단한다. 자본과 결탁한 중앙집권체제는 사람도 마을도 생명의 그물망도 사정없이 해체시키고, 시쳇말로 아작을 내어버림으로써 삭막하기 그지없는 각자도생 모래알사회를 만들어버렸다. 대한민국은 생명을 죽이는 정치경제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하는 대한민국이 생명을 죽이는 체제라면, 여기서 대한민국이 살길은 생명을 살리고 고양시키면서 풍요롭게 하며 자연과 더불어 대통령이 누군지 모르고 잘 사는 태평성대체제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러한 체제를 가능케 하는 시스템은 무엇일까? 생명평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생명력이 고양되고 존재하는 것들간에 상호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져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공화주의적 시스템이다. 생명평화 시스템은 직접민주주의 자치분권체제 속에서 꽃을 피운다. 자치분권체제를 만들어야 마을도 회복되고 생명의 그물망도 살아난다.
스위스 정치와 대비되는 좀비민주주의 정치체제 한국
대통령이 누군지 모르고 잘 사는 태평성대체제를 운영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스위스다.
스위스는 국민소득과 행복지수에서 세계 최상위권이며 빈부 격차가 가장 적은 나라다. 그리고 핵공격도 끄떡없이 방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세계최강의 안보 강국으로 알려져 있다. 스위스가 자랑하는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최고의 자랑거리는 정치다. 스위스의 정치는 직접민주주의 자치분권 시스템과 제대로된 공화정에 의해 운영되는 마을연방 민주공화국 체제다. 세금부담과 복지수준을 풀뿌리 꼬뮨 단위에서 주민들이 모여 직접민주제로 결정하고, 전국 단위의 의제에 대해서는 국민발안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스위스는 보충성의 원리와 연방제 원리를 통해서 아래로부터 읍면동 단위의 꼬뮨과 칸톤(지방정부), 그리고 연방정부라는 3중 연방 체제와 직접민주제 및 대의민주제의 협치체제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니 중앙정치에서 정당간에 치고 받으며 싸울 일이 별로 없다. 재정 분권도 잘되어 있어서 국가예산의 30%를 꼬뮨이 쓰고 칸톤이 40%를, 그리고 연방정부가 30%를 쓴다. 중앙정부는 7개 부처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장관 할당을 받으며, 대통령은 일곱명의 장관이 돌아가며 맡는다. 그러니 스위스 국민들은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뿐 대통령이 누구인지를 잘 모른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하지유지의 리더쉽에 대한 묘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현재 한국의 87년체제는 위와 같은 스위스의 정치체제와 비교해 보면 너무 크나 큰 간극을 느낀다. 직접-대의 융합체제인 제대로 된 민주주의와 민치시스템(직접민주주의 자치분권)과 통치시스템(대의민주주의 중앙집권)의 협치체제로서의 공화주의에 훨씬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87년체제는 개발도상 중진국가에나 걸맞은, 국민의 직접민주주의적 통제가 전무하여 엘리트 카르텔 부패가 서식하기에 딱 좋은 대의민주주의 중앙집권 통치체제다. 그러기에 이 체제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웅비를 앞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성장동력과 잠재력을 갉아먹으며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증상이 거대 보수 양당의 적대적 공생체제. 숙의토론을 무력화하는 땃벌떼 팬덤정치. 증오 상업주의의 진영정치. 재벌과 언론의 야합에 의한 선거의 정치 경마장화 등과 같은 현상이다. 영혼과 생명력이 빠져버린 산송장과도 같은 좀비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맨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제7 공화국 건설 핵심문제는 직접민주주의와 자치분권제도 도입 여부
개헌 공론화의 계절이 오고 있다.
필자도 참여하고 있는 ‘국민주도 개헌 만민공동회’참여단체 대표들과 더불어민주당 김영배 의원은 5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국민주도 개헌을 통한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있었음을 <연합뉴스는 전했다.
만민공동회는 기자회견에서 개헌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해 먹어 온 정치권을 질타하고, 지금과 같은 퇴행적 정치 시스템을 혁파할 직접민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 망국적인 수도권 일극 중앙집권제와 이로 인한 저출산 지방소멸을 극복할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이 담긴 개헌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주의 생명력은 직접민주주의와 자치분권에 있다. 생명력이 고갈되어버린 좀비민주주의 정치체제에 활기를 불어 넣는 것은 직접민주주의 제도와 자치분권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문제가 개헌과 제7공화국 건설의 핵심문제일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개헌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해 먹어 왔던 정치권에 농락당하며 여전히 87년체제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넘어설 것인지 말이다. 넘어설 것이면 대통령이 누군지도 모르며 잘사는 직접민주주의 자치분권 마을연방 민주공화국인 스위스 모델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하향 조정된 프랑스 모델, 자치분권 시스템과 중앙집권 시스템의 융합체제로 나아갈 것인지 국민공론화를 통해 결정할 때인 것이다.
임진철 직접민주마을자치전국민회 상임의장 시민언론 민들레 2024.06.1.
‘더 빡센’ 효율성 추구…뒤따를 붕괴사회를 준비하자
출산율이 역대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붕괴나 소멸, 국가 비상사태 같은 단어들로 우리의 미래 모습을 까맣게 덧칠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병적으로 ‘성장’ 아니면 ‘붕괴’라는 매우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미래를 전망하는 독특한 사회다. 절충적 중간도 없고 창조적 변형도 없다.
사실, 우리 사회는 붕괴하는 미래도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없다. 레토릭으로서 붕괴라는 단어만 사용하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사회가 어떻게 바뀌고 개인의 삶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 내용이 없다. 그저 성장의 반대말 정도로만 쓰여 정작 붕괴를 전망하면서 얻는 전략적 이점도 놓친다. 많은 기업에서는 자사의 주력 제품과 서비스가 사라진다면 다른 어떤 대안이 있는지 탐색하는 활동을 시시때때로 벌인다. 새로운 사업의 씨앗을 찾으려면 기존의 사업이 정점을 지나 기울고 있음을 가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존의 사업을 유지하려고 하지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미래를 전망한 책 중에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책이 로마클럽에서 1972년 발간한 ‘성장의 한계’다. 끝없이 성장할 것으로 믿었던 인류가 성장의 정점을 지나 인구, 경제, 자원, 환경 등의 붕괴로 치닫는다는 예측은 당대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 성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인식 덕분에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새로운 지향점을 찾지 않았는가.
붕괴사회를 제대로 전망하지 못하니까 우리는 성장이라는 감옥에 갇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오래된, 약효도 없는 그래서 대한민국의 병증을 더 악화시키는 성장론만 붙들고 있다. 그러니 해결책은 ‘더 빡센’ 효율성 추구밖에 내세울 것이 없고 이를 위해 비용을 줄이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기업과 창업 활동이 벌어지고 인공지능 로봇을 더 많이 만들어 인간 없는 공장을 더 많이 세우는 미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사회든 기업이든 붕괴를 눈앞에 둔 처지여서 당장 경제적 이익에 집착하게 되고, 기후변화 대응이나 환경보존은 의제에도 오르지 못한다. 멀리 보는 눈은 퇴화하고 근시안적 정책만 난무한다.
이제는 붕괴사회를 진지하게 상상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경로로 붕괴하는지 긴 안목에서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예컨대, 2025년부터 35살 이하 청년들이 인구에서 23%를 차지하다가 10년 만인 2035년 16%로 줄어든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가파른 청년 인구의 하락이다. 청년들이 줄면 기업은 인재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기존 노동자들의 정년 제도를 손봐야 함은 물론이고 임금 체계도 바뀌어야 한다. 그러자면 전 사회 구성원들이 모여 깊이 토론하고 적절한 대안을 선택해야 한다.
조만간 전세계가 약속한 탄소 감축의 성적표도 공개된다. 2030년부터 각 나라가 약속한 대로 탄소 감축이 이뤄진다면 지구 온도는 상당 기간 1.5℃ 상승에 머물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2040년이 되기도 전에 2℃ 상승을 각오해야 한다. 2℃가 올라간 지구 환경에 대해 기후변화행동연구소는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환경 문제가 사회, 경제적 파국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한다. 극한 기상 현상이 경제적 불평등 악화, 기후이주민 증가, 국가별 갈등과 분쟁의 증가, 매개 감염병 증가, 사망률 증가, 생태계 서비스 마비, 식량과 연료, 물 부족으로 이어져 인간의 문명은 붕괴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을 줄이고, 소비를 줄이고, 생산을 줄여야 생존하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 사회의 성장론이 버틸 수 있을까.
붕괴를 준비해야 붕괴를 피할 수 있는 대안이 나온다.
박성원 |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한겨레 2024.06.2.
종부세 폐지 논의는 '부동산 아편'의 음습한 모습
과거 미·일 경제 몰락 불러온 부동산거품
금융은 약탈적 대출, 정부는 종부세 폐지
곧 닥칠 위기에도 나라 망칠 정부와 언론
한국 경제가 부동산 거품 때문에 무너지리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한국의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는 OECD 평균을 넘어 위험한 수준에 달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계부채가 급증한 이유는 주택담보대출 때문이며 기업부채 중에서 자영업자의 사업자 대출도 대부분 부동산 담보대출이다. 또한 기업부채 중에서 최근 5년간 부동산업 비중이 급격히 늘어났고, 부동산 PF 대출 부실은 한국 경제 위기의 뇌관이 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아편보다 더 무서운 부동산 거품
청나라는 아편 때문에 무너졌다. 부동산 거품은 아편보다 더 무섭게 한 나라의 경제를 무너뜨린다. 미국에서는 플로리다 부동산 거품이 꺼진 것이 대공황의 전조였고, 금융이 발전했다며 부동산 거품 통제에 자신만만했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기도 했다. 제조업과 첨단 기술에서의 괄목할 만한 발전으로 세계의 공장으로 성장한 중국 경제조차도 국내총생산 중 30%가 넘어가는 과다한 부동산 투자가 부실화되면서 흔들리고 있다. 일본은 부동산 거품 붕괴로 인해 시작된 잃어버린 30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거품은 어떤 국가든지 한번 시작되면 큰 경제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아편보다 더 무서운 경제의 질병이다.
경기가 좋을 때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고수익 산업이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가 나빠질 때는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에 신중하게 투자해야 하는데, 한국처럼 재벌, 관료, 학자, 언론, 정치권을 망라한 부동산 카르텔의 규모가 커지고 정부와 정치권이 투기를 부추기며 부동산 경기 부양을 하게 되면 위험부담 없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투자 대상이 된다. 언론은 끝없이 공급부족론과 부동산 불패론을 반복하고, 정부는 빚내서 집사라는 정책을 반복하고, 재벌그룹마다 건설회사를 차려 과잉투자를 한 결과 부실화된 부동산 PF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데이터센터 대신 아파트 지으며 무너지는 다이내믹 코리아
부동산 산업은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는 산업이다. 이에 반해 현재 각광을 받고 있는 인공지능과 같은 범용기술은 전반적인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기대감에 미국에서는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은 수백조 원 대의 인공지능을 위한 데이터센터 구축에 열을 내고 있는 반면, 한국은 막대한 돈을 들여 멀쩡한 아파트를 헐고 새로운 아파트를 짓고 있으며 텅빈 상가 옆에 지식산업센터를 짓는 과잉 투자가 일상화되고 있다. 부동산만 비대한 국가는 곧 생산성이 높은 국가에 종속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직간접적인 지원 덕분에 한국경제에서 건설업 비중은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했고, 최근에도 OECD국가 평균보다 훨씬 높은 15% 내외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생산성은 저하되고 국가 경쟁력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있다. 성공하기 어려운 혁신산업에 뛰어드느니 손쉬운 부동산 투자가 소득을 높이는데 훨씬 좋다. 자본과 인재가 부동산업에 몰리니 생산성을 높이는 혁신산업은 시간이 갈수록 살아남기 어려운 경제가 되었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기업부채 현황 및 시사점 분석’)는 이러한 실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이내믹 코리아, 모험적 사업에 대한 투자가 일상이었던 한국경제는 부동산 거품에 덮여 무너져 왔다.
서울 영등포구 63스퀘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의 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자본과 인재를 쫓아내는 국가 젠트리피케이션
젠트리피케이션은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라 수익을 내지 못하는 가게들이 쫓겨나면서 지역 전체가 쇠락하는 현상을 말한다. 경제학에서 지대로 불리는 높은 집세와 건물 임대료 때문에 소비자의 소비는 줄고 기업은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 부동산 가격의 하방 경직성 때문에 지대가 떨어지지 않는데, 한국처럼 정부가 나서서 부동산 경기 부양을 하게 되면 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비싼 임대료는 고정비용이 되어 투자 수익률을 낮춘다. 당연히 모험적인 투자를 줄인다.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은 마땅한 사무실이나 공장을 구하기 어렵다. 투자와 고용의 기회가 줄다보니 자본과 인재가 떠나기 쉽다. 경제 전체에서 부동산 거품으로 인한 지대의 상승이라는 국가 젠트리피케이션이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한국 경제는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곧 닥쳐올 장기 경기 침체와 자본 도피, 인재 도피를 걱정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모두 부동산 거품 때문이다.
부동산 거품은 약탈적 대출이 키우는 금융 현상
관료들과 사이비 전문가들이 아무리 옹호해도 한국의 부동산에는 잔뜩 거품이 끼어있다. 평생소득으로 구입할 수 없는 주택가격은 정상 가격이 아니다. 평생소득으로 갚을 수 없는 대출은 약탈적 대출이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맞추지 못하니 40년 짜리 대출이나 이런저런 명목의 특례 대출을 만들어낸 후 이를 정상 대출이라고 용인하는 정부에서 부동산 거품을 잡을 리 없다. 여전히 집 사라고 권하고 PF대출 부실이 드러날까봐 규제를 완화하는 정부는 자신의 임기 중에 사고가 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사태를 키우는 정책을 펴고 있는 셈이다.
약탈적 대출이 없다면 부동산 거품은 크게 커지지 못한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경제 위기가 오는 이유는 금융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는 대출로 인해 연체율이 높아지고 부동산 PF대출로 인한 파국이 예고되고 있다. 정부가 부양책을 통해 거품을 더 조장할 수 있지만, 결국 자산보유자들의 지대가 커지면 임대료와 대출이자를 감당할 수 없어 경제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나날이 출산율 기록을 깨고 있는 경제에서 부동산 거품을 무한정 유지할 수는 없다. 한국 경제 앞날에는 일본을 따라 잃어버릴 시기가 몇십 년이 될지의 여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종부세 폐지 주장 하려면 부동산 거품 해소 방안도 함께 내놓아야
경제 위기의 목전에 있는 한국 경제에서 종부세 폐지 논의가 슬그머니 머리를 내미는 것은 아편보다 더 무서운 부동산 거품의 음습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선거 기간 중에 지역 주민들로부터 종부세를 없애달라는 요청을 수없이 들은 부자 동네 국회의원이 종부세 완화론을 주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었다면 종부세와 함께 부동산 거품 해소 방안도 주장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부동산 카르텔의 일원임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종부세가 성역이 아니라는 주장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보유세를 높여 비생산적인 부동산 지대를 낮춰 혁신적인 투자를 촉진하는 것은 경제를 살리는 기본 원칙이다. 원래 부동산 거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임대주택의 공급과 약탈적 대출의 규제가 더 중요하다. 보유세는 점진적으로 강화하되 부동산 폭등기에는 오히려 장기 보유자의 부담을 줄여주는 보완책은 필요하다. 금융을 풀어주고 임대주택 공급은 주저하면서 종부세만 강화하면 부동산 거품은 거품대로 커지면서 저항만 키우는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장기 보유자의 부담을 줄이면서, 보유세율을 점진적으로 높이는 대안은 도입할 만하다.
민주당 정부의 부동산 정책 역시 성역이 될 수 없다. 정책 실패의 핵심은 부동산 정책에 금융정책이 수반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임대주택 공급이 부족해서 시간이 지나도 공급 부족론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종부세의 재원으로 임대주택을 공급하지 않은 것은 큰 실책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여전히 금융정책이나 임대주택 공급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서민들의 주택 불안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경제 위기를 맞고 난 이후에나 정책을 수정할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산더미 같은 기업과 가계 부채, 경제 위기를 피할 길 없다
그래도 민주당 정부에서는 거품을 억제하기 위해서 노력이라도 했다면, 아예 부동산 거품을 더 조장하려는 듯 종부세를 없애자는 지금의 정부, 여당은 반드시 기억해 두었다가 심판해야 한다. 한국 경제에서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경제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은 이제 불가피하다. 현재의 국제적인 경제 환경에서 과다한 기업과 가계의 부채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찾기 힘들다. 시간문제일 뿐 한국 경제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얼마나 오래 일본과 같은 장기침체를 겪어야 하는 지가 관건일 뿐이다. 곧 들이닥칠 위기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를 망치는 정책을 펼치는 정부, 그를 옹호하는 언론을 보면 눈앞이 캄캄하다.
홍종학 전 국회의원 · 중소벤처부 장관 시민언론 민들레 2024.06.03.
동물에게도 필요한 기후정의
나는 지구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는 ‘기후 약자’는 닭이라고 생각한다.
2022년 한 통계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소속 어기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낸 보도자료였는데, 2017년부터 5년 반 동안 가축 2천만 마리가 폭염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최대 피해자는 폐사 가축의 91%를 차지한 닭이었다. 산란계는 에이(A)4 용지 한 장 남짓한 공간에서 1년 반을 알 낳다 죽고, 육계는 두어 달 몸을 불리다 치킨이 된다. 차라리 빨리 죽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후 약자를 말할 때는 사람을 일컫는다. ‘탄소중립·녹색성장법’은 ‘기후위기에 취약한 계층’, ‘탄소중립 사회로 이행 과정에서 취약한 계층’을 기후 약자로 보고 보호하도록 한다. 하지만 동물이라고 기후 약자가 아니란 법이 있는가? 가축은 보안, 탐지, 반려 등 개인과 공공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육류 산업에 자신의 몸을 내놓는다. 야생동물은 생태계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제 몫을 함으로써 지구 환경에 기여한다. 고래의 똥은 온실가스를 바다 밑에 저장하고, 아프리카의 누(영양의 한 종)는 똥을 싸고 적당히 땅을 밟아 토양의 탄소 흡수 능력을 향상시킨다.
캐나다의 정치철학자 수 도널드슨은 이런 동물에게 ‘정치공동체’의 문을 열어주지 못할 법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이런 주장이 담긴 책 ‘주폴리스’가 2011년 출판된 이후 많은 정치학자와 법학자들이 현실 정치와 법체계에 동물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자고 했다. 이 시대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인 마사 누스바움은 지난해 각 동물종의 유전자와 사회적 본능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 목록이 담긴 세계적인 ‘가상 헌법’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 재난에 취약한 동물이 닭이라면, 탄소중립 사회로 이행하는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가장 취약한 동물이 바닷새다. 앞으로 인류는 엄청난 수의 풍력 발전단지를 지어야 한다. 2050년 탄소중립을 위해서 세계적으로 20만 개의 해상풍력 발전기가 필요하다는 추정도 있다. 해상풍력 발전단지를 짓기에 가장 좋은 곳은 바람이 센 ‘바람길’이다. 이 바람길을 옛날부터 철새와 바닷새들이 이용해왔다. 그 곳에 해상풍력단지를 짓는 것은 반대로 새들이 밥 먹고 사랑하고 여행하는 길을 빼앗는 일이기도 하다.
해상풍력단지로 바닷새가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대한 날개가 만드는 와류에 비행 중인 바닷새가 자석처럼 끌려와 부딪혀 죽어 떨어져도 별다른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 풍력발전기 아래는 망망대해다. 과학자들은 해상풍력단지 건설 때 바닷새의 생태 영향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처럼 인공 구조물의 조류 충돌(버드 스트라이크) 관점에서만 접근할 게 아니라 바닷새의 먹이 활동, 번식, 이주 등 생태 영향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환경부 의뢰로 한국환경연구원과 국립생태원이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다른 멸종위기종 바닷새와 번식지를 공유하는 괭이갈매기의 핵심 서식지를 집계·분석해 보았더니, 한국 바다의 5분의 1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핵심 서식지는 새들의 번식지, 먹이터 그리고 둘을 왔다 갔다 하는 새들의 통로다. 이 연구 결과는 해상풍력 발전단지를 지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면밀한 검토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풍력발전소를 지어야 하는 것 그리고 야생동물을 보전하는 것 둘 다 환경운동의 영역이었다는 점에서, 혹자는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녹녹 갈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건 참 인간 편한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동물을 희생양 삼아 기후위기에서 혼자만 탈출하려는 인간’과 ‘근대화에 이어 에너지 전환 시대에도 희생을 강요받는 동물’의 대립이라고 해야 옳다.
환경운동가조차 기후정의를 말할 때 동물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기후의 부정의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바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대전환의 시대에는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 나타나지만, 가난해지는 이들도 있고, 삶터를 빼앗기는 이들도 있다. 원인을 무시하는 탄소중립은 대증요법이다.
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한겨레 2024.06.5.
‘큰 북한’으로 변해가는 러시아
페이스북은 북한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차단돼 있지만, 주북 러시아 대사관은 여전히 페이스북 계정을 운영한다. 이 계정을 오랫동안 열심히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요즘 들어 북-러 관계가 여태까지 전혀 관찰된 적이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유례없는 활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2~3주 동안만 보더라도 러시아 국회의 상원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했고, 북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이 모스크바에 가서 여러 협정을 맺었다. 이제 상당수의 북한 유학생이나 학자들은 유학이나 연구처로 다시 러시아를 찾게 되었고, 러시아 관광객들도 북한을 찾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북한 매체들은 거의 매일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러시아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푸틴의 입장을 따르는 기사들을 내보낸다. 심지어 북한 매체들은 남한의 역대 정권을 대개 ‘괴뢰도당’이라고 지칭해왔던 것처럼, 최근에 우크라이나 정부를 ‘젤렌스키 괴뢰도당’이라고 부른다. 즉, 그들은 러-우 관계를 남북 관계와 성질이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자신들의 입장과 러시아의 입장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푸틴 집권기 내내 북-러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지만, 이 정도의 밀착은 1980년대 초반 아니면 아예 1950년대 초반을 방불케 한다.
물론 이와 같은 밀착의 현실적 배경으로 북한산 포탄·미사일의 러시아 수출이 있다는 추측이 유력하다. 한데 푸틴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보도하고, 푸틴의 방산 복합체에 대한 국가적 집중 투자 같은 국가 주도, 군수 기업 우선의 경제 발전 정책을 매우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북한 매체의 태도로 봐서는, 지금의 북·러 밀착은 단순히 일회성의 무기 거래 문제는 절대 아니다. 북한은 푸틴의 리더십이나 경제 정책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인 반응을 보일 뿐만 아니라, 푸틴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요 개념, 예컨대 러시아의 독자적 영향권 구축 등을 “다극 세계의 건설을 위한 집단 서방과의 세계적 다수의 투쟁”의 일환으로 보려는 크렘린의 시각 역시 대체로 공유한다. 러시아가 내세우는 ‘다극 체제론’, 즉 중·러 블록이 서방 블록을 견제할 수 있다는 새로운 세계 질서 구축론은, ‘반미 코드’ 차원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자주론 등과 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북·러 밀착은 당장의 금전적 이익이나 거래 차원을 넘어, 가면 갈수록 북·러의 발전 노선과 체제, 이념 등이 서로 닮아간다는 차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2022년 이후의 푸틴주의 경제 정책과 이념 등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일단 이 부분은, 19세기 말부터 추격형 발전을 이루어온 후발 산업 국가로서의 러시아의 전반적인 근현대사 궤도 속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크게 봐서는, 러시아에 근대 공업이 정착된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에는 두가지 개발 모델이 가능했다. 하나는 한국의 발전 궤적을 방불케 하는 외자, 선진권 기술 유치 본위의 모델이었다. 러시아는 1890년대부터 1914년까지 이 모델을 적용하여 상당히 높은 성장률을 보였으며, 러시아혁명 직후의 신경제 정책 시대인 1921~1929년,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 시기(1980년대 말)부터 2022년까지 활용했다. 대개 비교적 유연한 연성 권위주의적 통치를 수반했던 이 모델은, 한가지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 이 모델은 전란기에 원활한 전쟁 수행을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모델을 계속 운영했던 제정 러시아 정권은 제1차 세계대전 와중인 1917년에 붕괴되었다. 이후 1929년 대공황과 함께 새로운 세계대전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스탈린 지도부는 그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이 모델을 폐기하고 공업의 완전한 국유화를 전제로 한 동원형 전쟁 경제 모델을 채택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이 모델은 정보통신 부문에서 선진권에 뒤지고 전반적으로 한국 같은 신흥 자본주의 국가의 재벌 경제를 더 이상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다시 외자 유치 본위의 개발 모델이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세계적 패권 질서가 재편되는 혼란기인 2020년대에 접어들자, 푸틴 지도부는 좀 더 국가 주도적이고 전쟁 수행에 맞춰진 경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스탈린의 모델과 달리 푸틴의 전쟁 경제는 완전한 국유화나 전체적 수입 대체를 꼭 지향하지는 않는다. 한데 푸틴의 러시아에서는 국영 및 국가가 대주주로 있는 기업들이 국민총생산의 70% 이상을 차지하며, 외자가 아닌 내자 본위로 개발이 이루어지며, 모든 사기업들도 국가의 지휘·통제를 받아 국가의 정치적 우선순위에 따라 투자를 결정한다.
연성 권위주의도 아닌 초강경 권위주의 통치를 수반하는 이 국영 부문 주도의 전쟁 경제 모델이, 사실 러시아와 북한에서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지금 공유되고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2022년 이후 러시아는 하나의 ‘큰 북한’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차이를 찾아보자면, 북한의 부자 세습 시스템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같은 정치집단 안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정권을 물러주는 방식으로 정권이 지속된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물론 ‘큰 북한’의 사회는 한반도의 북한보다 훨씬 더 다원적이며 외국과의 연계성도, 그리고 외부적 영향에의 노출도도 훨씬 높지만, 지속되는 전쟁 속에서 이 차이도 점차 상대화되어간다는 느낌마저 든다. 경제 노선이 대략 일치하는데다 이념적으로까지 극단의 반자유주의와 반서방 지향, 총동원 사회 모델 등을 대체로 공유하는 ‘큰 북한’으로서의 러시아와 한반도의 북한은, 자연스럽게 앞으로도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장기간, 하나의 전략적 선택으로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에서 한국 외교의 급선무는, 이 북·러 밀착이 한국을 가상의 적으로 여기지 않는 쪽으로 대러 관계와 대북 관계를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관리하는 데에 있다. 남북한 사이에는 유엔 제재가 막지 않는 인도적 교류나 일부분의 경제 협력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가 하면, 한·러는 사실 경제적으로 상호 보완적인 구조다. 북한도 러시아도 한국을 필요로 한다면 적어도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것은 더 쉬워질 것이다. 세계적 전란기인 현재 상황에서 그 이상의 중요한 과제도 없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4.06.5.
가야 할 길, 가지 말아야 할 길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고 연두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그해 가을, 훗날 로키마운틴연구소를 창립하는 미국의 에너지 물리학자 에이머리 러빈스는 미국외교협회가 발행하는 잡지 ‘포린 어페어스’에 32쪽짜리 논문을 발표했다. ‘Energy Strategy: The Road Not Taken?(에너지 전략: 가지 않은 길?)’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이 제목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유명한 시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프로스트의 이 시는 오역과 견강부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시의 내용은 프로스트가 산책 중 두 갈래의 길을 만나자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이 적은 길을 택했고 나중에 그 선택을 회고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더 어려운 길을 택한 결심을 칭송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프로스트 자신은 그렇게 심각한 의미가 아니라고 밝혔다.
어쨌든 러빈스가 논문에서 활용하는 비유는 에너지 정책에도 두 개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당시의 선진국 정부와 기업들이 선호했던 것과 같이 화석에너지와 핵에너지의 중앙집중식 공급에 치중하는 ‘경성’ 경로이며, 다른 하나는 에너지 효율화와 재생에너지의 유연하고 지역분산적인 수급과 민주적 논의를 중심으로 하는 ‘연성’ 경로다. 러빈스는 프로스트와 달리 하나의 길이 좋은 선택일 뿐 아니라, 우리는 두 길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화석연료와 핵발전을 유지 또는 확대하면서 재생에너지도 늘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연성 에너지 경로가 전 세계의 정치적 스트레스를 경감시키며 기술적으로 재생에너지의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생각이 너무 이르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했지만, 현실은 그의 길에 많은 연구자뿐 아니라 정부와 기업들도 함께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또는 내년을 전후로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석탄화력 발전량을 초과해 최대 발전원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고, 원전은 몇몇 정부와 산업계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전소 숫자와 발전량 모두 답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뿐 아니라 특히 중국과 중남미 국가들의 재생에너지 증가세는 놀라울 정도다.
러빈스의 50년 전 생각이 시나브로 실현되고 있지만 그가 희망했던 연성 경로가 잘 조율되어 추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여전히 화석 및 핵 에너지 체제의 관성이 크고, 다가온 기후위기 앞에서 더욱 많은 도전을 헤쳐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성 경로가 더욱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동해에 대량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또 떠들썩하다. 개발의 경제성 시비는 차치하고라도, 2035년에도 계속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하는 화석연료를 캐서 태울 수 있다는 윤석열 정부의 ‘경성’ 사고와 욕망이 뚫고 갈 수 있는 길은 닫히고 있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에 굳이 3기의 신규 원전과 소형모듈원전(SMR)을 추가하려는 정부의 집착 역시 사라져가는 길을 개척하려는 패기로 봐주기엔 무모하기만 하다. 훗날 지금의 선택을 가벼운 한숨과 함께 후회하며 돌아볼 여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현우 탈성장과 대안 연구소 소장| 경향 2024.06.6.
이념도 없는 시대
내가 아직 현직 교수이던 시절, 한 오년쯤 전인지 십년쯤 전인지 기억이 흐리기는 한데, 학생들끼리 학사 정보를 공유하는 교내 게시판에 국어교육과 김아무개 교수 강의의 주 내용은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취지의 글이 올라와 있더라고 동료 교수가 귀띔을 해준 적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름지기 사범대는 예비 교사를 키우는 곳인데 김아무개 교수는 불공정하게도(!) 매우 좌편향적 현대사 인식을 가르치는 것 같다는 글도 게시된 적이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허허 웃곤 했다. 또 한번은 어떤 학생이 한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나를 두고 페미니즘 편향의 강의를 한다고 볼멘소리를 했고 나는 그런 대응이 기특해 보여 그 학생과 조금 긴 온라인 토론을 한 적도 있었다.
나는 내 생각이 어떠하든 강의할 때는 특정 이념이나 사상을 소개하기는 해도 이를 주입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매우 애썼다. 다만 근대문학론이나 소설론을 가르칠 때 사회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사회와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마르크시즘과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국 현대문학사를 가르칠 때 한국현대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인데 그런 이야기를 처음 접한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인상 깊게(?) 들렸던 모양이고, 그런 학생 중 일부가 그런 내용을 강의 중에 거론하는 것 자체만으로 나를 좌파 교수 혹은 페미 교수라고 확증한 모양이다. 물론 그런 일부 학생들에 대해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다만 왜 저 교수가 저런 강의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대신 다짜고짜 낙인을 찍거나 불만을 표시하는 그 학생들이 좀 딱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공산주의나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벌써 긴장 모드가 작동되는 한국 사회의 지식-학문-사상 지형도 한심하고 이런 것들이 질문과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풍문과 매도의 대상이 되는 오늘날 대학의 변화된 풍토가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마르크시즘)와 여성주의(페미니즘)에 친화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자도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평판이 두려워 서둘러 변명하거나 방어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마르크시스트도 페미니스트도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못 된 사람이다. 청년 시절에 박정희나 전두환의 군사독재체제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싸울 때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 아래 절대다수의 빈곤과 불평등을 토대로 독버섯처럼 유지되던 한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너무 싫어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상상력에 깊이 경도되었고,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때로 급진적 혁명투쟁의 규율도 적극적으로 감수해야 했지만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이념의 영역 속에서 살기에는 세상도 나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여덟 시간 자고 여덟 시간 일하고 여덟 시간 여가를 즐기는 삶을 누리는 세상이 와야 하고, 그런 세상이 오려면 이 지옥 같은 자본주의 체제는 어떻게든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원론적 마르크시스트라고 할 수는 있겠다.
그리고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사실은 남근주의와 가부장제와 성적 불평등이 만연한 젠더적 계급사회였다는 것이며, 그 세상에서 여성들은 마치 노예들처럼 착취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나는 페미니즘의 지지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이라는 문제는 오랜 사회구조와 관습과 제도라는 보편적 역사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족이나 직장 등 매우 일상적 영역에서 존재하는 미시생활적 문제이고 그 안에서 지배자, 혹은 수혜자 남성인 나 자신의 입장과 태도, 언어를 늘 성찰해야 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나는 지금도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가 못 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마르크시스트 여부의 문제는 그렇게 되거나 되지 못하거나 하는 신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페미니스트 여부의 문제는 그렇게 살거나 살지 못하거나 하는 윤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다른 것에 우선해서 페미니스트이고 싶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솔직히 말해 어떤 ‘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특히 어떤 도그마(교의)를 정해 놓고 덮어놓고 믿어야 하고 이대로 따라야 한다는 식의 순혈주의적 이념 추종은 내 체질과 맞지 않는다. 그것은 또다른 노예의 삶이다. 마르크시즘도 페미니즘도 노동자와 여성이라는 소수자들의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빚어진 이념이고 어떤 소수자라도 억압과 착취와 차별 속에서 사는 세상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 그 이념들을 지지하고 기꺼이 ‘고무 찬양’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종교화되어서 그런 이념들이 모든 생각과 삶 위에 군림하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적 세상이 오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대체로 모든 이념들은 다른 이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자기 자신에게는 들이대지 않는다. 나는 내가 공감하는 이념이라면 오히려 더 그 단점에 대해서, 아킬레스건에 대해서 냉혹한 성찰과 비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러니 ‘주의자’가 되기는 글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불가의 말은 내가 오래도록 좋아하는 경구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어떤 이념이든 발붙이기 힘든 요즘에는 이런 걱정도 한가해 보인다.
한 사람이 어떤 이념을 가지거나 좋아하게 되는 것은 매우 엄숙한 일이다. 그러자면 매우 많은 생각의 품이 들기 때문이다. 이념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지식 정보들과 고금의 인류의 정신적 축적물들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이것들을 공공선이라는 관점에서 체계화하고 내 삶의 지표로 만들어야 하는 매우 높은 지적 내공을 요하는 일이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저 자기 발밑만 바라보고 살 뿐 이런 생각의 품을 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도 황폐하고 사람들의 내면도 황폐하기만 하다. 이념 과잉의 시대는 그래도 희망이 있던 시대지만 이념의 과소 혹은 부재를 더 걱정해야 하는 시대는 희망의 여지도 없는 시대가 아니겠는가.
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한겨레 2024.06.6.
신자유주의와 ‘잔혹한 사실’의 역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너무 익숙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쓰이는 대표적인 개념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이 개념을 쓰는 저자들에게 명확한 개념 정의를 요청하곤 했다. 이미 합의한 개념에 대해 굳이 정의해줘야 하느냐는 귀찮은 냉소 뒤로, 내 질문은 답을 얻지 못하고 흩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들을 통해 미욱하나마 스스로 정의를 내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란 사적 경제 주체들이 자신의 자본을 국경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동시켜 이익을 실현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사실상 ‘시장 자본주의’라는 고전적 개념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이 형식적 정의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야기하는 문제들 때문이다. 초국적 자본의 수탈로 인한 국가 경제의 종속과 몰락, 자본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개인들의 우울과 자살, 같은 이유로 점점 더 심해지는 경제사회적 불평등까지, 실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현재 한국 사회가 가진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개념과 이에 따른 현실 진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 내가 대학 생활을 시작한 1990년대에도 이름만 달랐지 실질적으로 같은 개념과 진단이 통용되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자본이 강제하는 종속과 불평등의 굴레 속에서 살고 있다는 대자보를 커뮤니티 게시판보다 더 자주 읽으며 살았다. 책 속엔 더 오래된 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유시장체제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1944년의 칼 폴라니가 있다. 그보다 100년을 더 거스르면 ‘1844년 경제철학수고’를 쓰던 카를 마르크스가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개념을 이대로 받아들이면, 200년 가까이 세계와 우리 사회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해야 하는 곤란함이 생긴다. 1995년 이후 세계무역기구(WTO)와 국제통화기금(IMF), 코소보 전쟁이 만들어낸 역사적으로 특수한 변화들을 이해할 수 없고 ‘자고 일어나니 선진국’이 된 우리의 현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국제 교역 체제 내에서 종속적 지위, 높은 우울증과 자살률, 심각해지는 불평등 양극화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선진국이란 말인가.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에겐 상상한 것을 ‘사회적 사실’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신화와 이에 기반한 부족 사회이다. 그런데 부족 사회가 국가로 성장하면서, 신화는 예측 가능성과 신뢰성이 좀 더 높은 이성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이성은 ‘제도적 사실’을 만들었고 국가의 근간이 됐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대’는 제3의 사실로부터 촉발됐다. 사회적 사실과 제도적 사실이 인간 사이의 합의에 따른 것이라면, 인간의 선택과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사실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이를 ‘잔혹한 사실’(brute fact)이라고 불렀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잔혹한 사실이었다. 당시 종교와 국가의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사실은 천동설이었다. 잔혹한 사실이 이 두가지 사실들과 경합하여 이겨내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적 사실과 제도적 사실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를 역사적 진보라고 부른다.
21세기 한국의 잔혹한 사실들은, 관습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론과 충돌한다. 한국은 세계무역기구 세계화의 최대 수혜국이다. 글로벌 공급 사슬의 상층으로 이동하면서 종속적 지위를 벗어난 극히 드문 경우이고, 예방·처치 가능한 원인에 의한 사망률이 가장 낮은 국가에 속하며,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오히려 개선되고 있는 중이다.
우리에게 문제와 위기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문제보다, 권위주의적 자국중심주의의 부상으로 생긴 문제가 더 심각하다. 이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습적인 사회적 사실부터 극복해야 한다. 우리 내부의 잔혹한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이념이라는 사회적 사실에 의지할 때, 정책이라는 제도적 사실이 대개 실패한다는 경험을 이미 절절히 하지 않았나.
우리의 세계화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로부터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경로를 따라왔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 또는 미국과 유럽 사이 어딘가에서보다 높은 수준의 접합을 달성할지, 아니면 관성만 남은 일본의 현재를 답습할지는 우리가 잔혹한 사실을 얼마만큼 직시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이원재 |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한겨레 2024.06.6.
‘중독 행위자’들의 끈질긴 거짓말, 정보 조작과 은폐
“(박종철 군) 고문치사 가담자들이 3명 더 있음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도 알고 있었으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신군부 정권에 대한 총체적 공분이 폭발…”(1987년 전두환 정부 때)
“국민에게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청와대 방문 사실을 감추려다 그 숱한 루머가 난무했고, 그럼에도 속수무책이었고, 그래서 일파만파로 일이 커진 게 아닌가…”(2016년 박근혜 정부 때)
“왜 윤 대통령은 하필 탄핵과 비선, 은폐를 연상시키는 정호성을 대통령실에 들인 것인가 (…) 채 상병의 불행한 죽음을 규명하는 일은 기실 이렇게까지 온 나라의 에너지를 잡아먹을 일은 아니었다. 대통령(실)의 수사 방해 및 은폐가 의심되지 않았다면….”(2024년 윤석열 정부)
우연히 본 <동아일보>의 김순덕 칼럼(6월 1일)에 눈이 멈췄다.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친화적인 보수 언론조차 “국민은 권력자의 비리 그 자체 못지않게 비리 은폐에 무섭게 분노한다”며 앞의 글처럼 지난 40년간 은폐의 흑역사를 간략히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국민은 분노한다. 비리도 문제지만 은폐는 더 문제다.
중독 행위자를 더 중독시키는 동반 중독자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중독 행위 이론’을 떠올린다. A. W. 섀프 박사가 <중독조직> 또는 <중독사회>에서 제시한 ‘중독 행위’란 마치 알코올 중독자의 생각이나 행동처럼 본인의 알코올 중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현실 부정이나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정보 조작과 은폐를 반복하는 행위 패턴이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하면 타인의 느낌, 생각, 행동까지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섀프 박사에 따르면 이러한 개인의 중독 행위 패턴은 다양한 조직이나 심지어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조직 전체가 고유의 사명에 충실하기보다는 우두머리나 실권자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거짓말, 정보 조작과 은폐, 통제 환상 등의 행위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전형적인 중독 조직! 또, 한 사회 전체가 무한한 경제성장이라는 허구적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가운데 그 구성원들의 심신이 소진되거나 사회적 불평등과 분열이 강화되며 자원 고갈, 생태 파괴, 기후 위기 등 삶의 위기가 고조됨에도 마치 그런 문제는 시간이 가면 자동 해결될 것처럼 믿고 따르기도 한다. 전형적인 중독 사회!
새프 박사의 이론에는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게 있다. 그것은 개인, 조직, 사회 등 그 어느 경우에도 끈질긴 중독 행위(자) 곁에는 반드시 ‘동반중독자’가 있다는 점이다. 만일 동반중독자가 중독 행위자 곁에서 적극 옹호하고 변호하며 호응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 중독 행위자는 자신의 중독 행위를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동반 중독자가 중독 행위자에게 “항상 잘하고 계십니다” 또는 “누가 뭐래도, 옳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라고 맞장구를 치기에 그 중독 행위는 중단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그게 아니오!”라며 비판 또는 저항을 하면 이들은 ‘입틀막’ 식으로 대응한다. 내부 고발자나 온갖 비판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무시‧귀양), 또는 실제로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투옥‧살해)이 그들의 전형적인 대처법이다. 물론, 매수나 감투 씌우기를 통해 (약간 고급스럽게) ‘존재 변형’을 시키기도 한다. 더욱 ‘폼’ 나게는, ‘협치’의 형식을 빌려 공동 결정과 공동 집행을 하는 것처럼 가장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권력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속 모든 나라가 중독 조직
이런 이론적 논의를 염두에 두고 앞의 비리 내지 은폐 정권의 모습들을 다시 보면, 대한민국 정부나 검찰은 전형적인 중독 조직의 사례를 보여준다. 또 그 조직의 우두머리나 유력자들은 전형적인 중독 행위자의 패턴을 재현한다. 일례로, 김순덕의 칼럼처럼 “채 상병 사건 처리 과정에 대통령실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정황과 추측을 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가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대통령[실]이) 감히 입을 놀렸”던 모습이 바로 전형적인 중독 행위다. 이렇게 뻔한 거짓말로 거짓과 비리를 덮으려 한 것은 “국민이 개돼지로 보이는 모양”이라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은 개한테도 그렇게는 안 하며, 그렇다 해도 먹히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중독 행위를 하는 개인, 조직, 사회의 모습은 결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크게 보면, 무한한 이윤 추구를 위해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을 흡혈귀처럼 부단히 빨아들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중독 행위자 아닌가?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낮은 도수의 술에 쾌락을 느끼다가 갈수록 도수 높은 술을 마셔야 일시적이나마 만족하듯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인간적 필요가 아닌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기에 영원한 불만족, 무한한 허기의 늪에 빠진다. 그 와중에 사람과 자연이 파괴되는 줄도 모르고 무감각, 무능력, 무책임하게 ‘꼼수’만 부리다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만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생태, 심리 등의 복합위기가 바로 그 증거 아닌가?
자본주의 시스템 속의 각 나라들 역시 중독 사회 내지 중독 조직의 모습을 드러낸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은 2017년 6월에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하고 2020년에 공식 탈퇴했다. 도널드 트럼프(공화당) 미국 대통령은 심지어 지구 온난화나 기후위기 같은 ‘팩트’ 자체도 부정했다. “비과학적이고 미국 이익에 반한다”라는 것이 파리협약 탈퇴의 근거다.
원래 파리기후협약은 (1997년 12월, 37개국에 의해 채택되어 2005년 2월부터 발효, 2020년 만료된) ‘교토의정서’(6대 온실가스 감축 권고)의 뒤를 잇는 국제 환경 협정으로,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195개국 서명으로 체결됐다. ‘2030년까지 서명국들이 감축할 ‘온실가스 목표량’과 ‘이행 강제성’을 담았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면이 있다.
기후위기 간과하는 미 대법원도 중독 행위자
반면, 트럼프 이후 대통령이 된 조 바이든(민주당)은 2021년 1월 취임 직후에 전임 정부의 파리협약 탈퇴를 공식 사과하고 재가입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미 연방대법원은 2022년 6월 말, 연방정부 기관인 환경보호청(EPA)이 미 전역의 석탄·화력발전소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했다. 웨스트버지니아 등 공화당 우세 주들이 EPA의 규제가 주 정부의 권한을 넘어선다며 제기한 소송에 연방대법원이 6대 3의 다수 의견으로 원고의 손을 들어준 것! 미 대법의 판결문은 “의회가 EPA에 모든 발전소의 배출량을 제한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라고 그 근거를 들었다. 이렇게 미국의 연방대법원조차 기후위기나 삶의 질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형적인 중독 행위자의 모습을 보인다.
이는 미국의 많은 주들이 주헌법에서 ‘환경권’ 개념을 명시하거나 실제 환경 소송에서 시민의 편을 드는 것과 상반된다. 일례로, 2023년 8월, 미국 서부 몬태나주에서 미래 세대가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와 주 정부의 화석연료 정책 책임을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최초로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고는 5~22세 청소년 16명으로, ‘깨끗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규정한 주헌법에 의거, 주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캐시 시엘리 판사는 “주 정부의 지속적인 화석연료 개발은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주헌법의 조항을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중독 조직 아닌 건강 조직의 사례다.
최근 한국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헌법재판소(소장 이종석)는 2024년 4월 23일, 사상 처음으로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 제42조 제1항 제1호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의 공개변론을 시작했다. 원고는 청소년 및 환경단체 회원들로, 2020년 3월에 정부의 미온적 정책이 헌법 35조의 환경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같은 취지로 접수된 3개 사건과 함께 4개 사건이 병합되었다. 이종석 헌재소장은 “이른바 ‘기후소송’인 이 사건의 주된 쟁점은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불충분해 청구인들의 환경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여부”라고 전제하고 “미국과 독일,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기후소송 관련 다양한 결론이 나왔고 지금도 (소송이) 진행 중에 있다”며 “최근 유럽인권재판소는 스위스 정부 기후변화 대응책이 불충분해 국민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결정을 선고했고, 이는 국내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는데 재판부도 이 사건의 중요성과 국민적 관심을 인식해 충실히 심리하겠다”고 했다. 물론 최종 결과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이 소장의 발언을 보면 그나마 헌법재판소가 (최소한 이 건과 관련해서는) 기존 정부 기관이나 검찰 조직에 비해 (중독 조직이 아닌) ‘건강 조직’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피고에 해당하는 정부 측) 환경부나 국무총리실은 여전히 ‘정부 정책엔 별 문제가 없다’는 식의 중독 행위(현실 부정)를 보이고 있어 헌재의 최종 결정이 주목된다.
회피나 부인 아닌 직시와 응답이 ‘책임의 윤리’의 밑바탕
미국 몬태나주 법원이나 한국 헌법재판소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듯 개인이나 조직, 사회나 세계가 중독 행위를 벗어나 건강한 회복력을 보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전제조건들을 관통하는 것은 ‘책임의 윤리’다. 더 이상 ‘꼼수 정치’가 아닌, ‘책임 정치’가 절실한 까닭이다. 여기서 ‘책임’(responsibility)이란 말의 라틴어 뿌리가 ‘응답’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회피나 부인이 아닌 직시와 응답이 ‘책임의 윤리’를 구현하는 밑바탕이다.
첫째, 현실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일들(예, 각종 비리, 사회 불평등, 구조적 폭력과 살인, 기후위기 등)을 부정, 은폐, 왜곡, 조작하지 않고, 사실과 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공개할 것.
둘째, 그 잘못을 저지른 개인과 조직이 상응하는 책임을 지고 합당한 절차를 거쳐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며,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각도의 예방 체계를 구축할 것.
셋째,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긴요한데,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더 나은 삶’을 공동 목표로 세우고 정보 공유, 열린 대화, 상호 치유, 집단 지성을 통해 꾸준히 ‘시스템 전환’을 할 것.
앞의 칼럼에서 김순덕은 “윤 대통령이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통화한 사실과 내용을 진솔하게 밝혀준다면(그리고 앞으론 격노하는 버릇도 고치겠다고 덧붙인다면), 대통령 편에 서겠다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했다. 그러나 사태의 해결책은 윤 대통령의 개인적 자백이나 반성보다 훨씬 먼 곳에 있다. 왜냐하면 그를 둘러싼 개인들, 조직들, 사회가 여전히 ‘동반중독자’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단호하게 ‘헤어질 결심’이 책임 정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동반중독자란 그 부인만 일컫는 게 아님이 자명하다.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6.7.
오물 풍선은 반가운 단비? 웃고 있는 보수언론들
오물 풍선과 대북 확성기 대결로 남북간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오물 풍선이 남한 곳곳에 불안과 불편을 초래하고 있지만 오물풍선에 오히려 신나 보이는 곳도 있다. 다름 아닌 한국의 이른바 '보수'언론들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계열 언론들은 이를 관전하는 것을 넘어서 응원하고 부추기고 있다. 남쪽은 북쪽에 비방 전단을 날려보내고, 북쪽은 남쪽에 오물 풍선을 내려보내는 치졸하고 위험한 대결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으로 치닫고 있지만 보수 언론들은 마치 운동 경기 구경처럼 이를 전하고 있다. “남북관계가 상호 중상·비방을 강화하는 지금 상태를 이어가며 물러서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에는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것이 쓰레기 풍선이 아니라 총알과 포탄이 될 수 있다”는 경고는 이들 언론에는 들리지 않는다. 정확히는 듣지 않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다음 단계'가 되는 것을 바라는 듯하는 보도 양상이다.
남북 대결을 중계하듯 보도하면서 오히려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총탄 없는 전투’를 축구나 야구 경기 보듯이 보도하는 이들 언론의 지면에서는 더욱 '극적인' 장면까지 벌어지기를 바라는 기색까지 보인다. 전단과 풍선의 대결 정도가 아닌, 확전돼서 실제 총탄이 오가는 것을 바라는 듯하다.
이들에게 북한으로부터 날아오는 오물풍선은 오물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물품' '구호물품'에 가깝다. 악취를 풍기는 오물이 아닌 낭보이며 선물이다. 가뭄의 단비와도 같이 여기는 표정이 역력하다. 자신들이 처한 궁지를 벗어나게 하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북한발 '복음'으로 여기는 듯하다.
조선일보 10일자 1면 머릿기사는 <북 오물에 대북 확성기 6년 만에 가동>이라고 제목을 내걸고 있다. 기다렸던 대북 확성기가 드디어 가동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이 신문의 지면에서는 득의의 표정이 엿보인다. 대북 확성기 재개 소식 밑에 큼지막하게 실린 사진 한 장이 이 희소식을 뒷받침하는 조선일보의 내심을 전하고 있다. ‘미국은 단결할 때 가장 강해’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진은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 작전 80주년 기념으로 미국 여야 의원들이 수송기 안에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다. 이 웃는 얼굴이 바로 조선일보의 표정처럼 보인다. 조선일보의 '희색 만면'이다.
중앙일보는 1면에 <대북 확성기 6년 만에 재개>라고 전하면서 <'북 감내하기 힘든 조치' 행동 착수>라고 제목을 붙였다. 동아일보가 그나마 ‘남북 강대강'으로 단서를 단 것이 이채로울 정도다.
이들 언론은 총선 참패 이후로 한동안 회색조의 지면이었던 것이 오물 풍선 사태 이후로 분홍색으로 채색되는 듯하다. 보수 언론에는 늘 호재였던 북한의 대남 도발이지만, 특히 지금의 오물 풍선 사태는 보수 언론들에게 어느 때보다 바랐던 상황이다. 북한의 도발은 다른 사안과 이슈를 덮는 효과가 있으며 안보 국면으로 몰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지만 이번에는 특히 북한의 도발이 더욱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조선 중앙일보 등 보수 세력에게는 어느 때보다 궁지에 몰리고 있는 국면이었다. 총선 참패에다 채상병 특검법 등 문제가 겹치면서 설상가상의 상황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북한의 '오물풍선 공격'은 조선일보 등 극우 보수 세력들을 구해주는 선물과도 같다. 북한을 규탄하고 비난하지만 북한에 감사라도 보내고 싶은 내심이 엿보인다.
대통령실은 오물풍선에 대응해 "북한이 감내하기 힘든 모든 조치에 착수하겠다"고 주문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감내하기 힘든 것은 북한이 아닌 남한이다. 그러나이들 보수 언론에는 그같은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단과 오물이 오가는 대결에서 어느 쪽이 더 유리하고 승산이 있는가를 묻는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우문이다. '눈에는 눈으로' 식의 대응은 남한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무엇이 먼저냐고 따지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경기 강원도의 연천이나 철원 등 접경지역의 주민들은 오물 풍선이 마치 포탄이 날아다니는 상황처럼 여겨질 만큼 공포가 커지고 있지만 불안과 위협은 이들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사실상 '전국의 접경지화'가 벌어지고 있다. 피해의 범위와 수준에서 북한과 남한은 비교 자체가 되기 힘들다. 북한에선 확성기 피해가 접경지 일대에 한정되지만 오물풍선의 남한에 대한 피해는 접경지를 지나서 서울을 비롯해 인구밀집 지역인 수도권에 미치고 있다. ‘북 대남전단 추정 오물로 서초구 방배동 일대 피해 발생. 야외활동 자제 및 미상불체 발견시 접촉하지마시고 군부대나 경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람’이라는 서울 서초구청 발 문자 메시지가 서울의 피해 상황을 보여주고 있지만 피해 지역은 경상도와 전라도 등 남부 지방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오물 풍선 낙하 피해는 오히려 작은 부분이다. 전 국민의 일상이 위축되고 있는 것이야말로 더욱 큰 문제다. 북한은 “백배의 휴지와 오물량을 다시 집중 살포하는 것으로 대응하겠다"고 경고했지만 백 배의 휴지와 오물량까지 필요하지도 않다. 남한이 북한에 비해 경제와 사회의 개방에서 월등히 앞서 있는 현실이 치러야 할 댓가다.
오물풍선을 규탄하면서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부추기는 보수 언론들은 전단 살포 단체들에 대해 소개하면서 이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더욱 조장하고 있다. 탈북자 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이 대북 전단 30만 장과 K팝, 드라마 동영상 등을 저장한 USB 2000개를 애드벌룬 20개에 띄워 보냈다고 주장하는 내용 등을 중계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 비판과 우려도 하지만 슬쩍 끼워넣는 정도다. 무엇보다 언론의 관심은 이들 극단적인 반북 단체들이 원하는 바다. 주목받기 바라는 이들에게 보수 언론들은 '확성기'를 내주고 지면을 내주고 있다. 국민의 불편과 불안이 커질수록,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질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보는 점에서 이들은 목표와 이해관계가 거의 일치한다.
일부 반북 단체에서 대북 전단을 날려 보내고 있다면 보수 언론들의 지면 기사들은 북한이 아닌 남한의 국민들을 상대로 한 '대남 삐라'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보수 언론들이 날마다 뿌리는 '대남 전단'이 남북 관계와 남한 국민들의 일상을 오물처럼 오염시키고 있다.
이명재 에디터 시민언론 민들레 2024.06.10.
학살 위의 무지개, 핑크워싱
2023년 11월, 한 이스라엘 군인이 폐허가 된 가자를 배경으로 무지개 깃발을 펼치고 사진을 찍어 SNS 계정에 게시했다. 곧장 파문이 일었다. 그 군인은 커밍아웃한 게이였다. 가자로 진격하는 장갑차에도 무지개 깃발을 꽂고 다녔다. 학살 위의 무지개, 완벽한 핑크워싱(pinkwashing)이었다.
핑크워싱이란 말은 2011년 뉴욕타임즈 칼럼에 처음 등장했다. 이스라엘의 식민지 억압을 가리기 위해 성소수자 이슈를 교묘히 이용하는 전략을 일컫는다. 2005년부터 이스라엘은 동성애 마케팅을 펼치며 국가 이미지를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것처럼 세탁해왔다. 2010년에는 전 세계 LGBT 인사들을 초청하느라 무려 9천만 달러를 지출했다. 또 외곽 조직들을 운영해 팔레스타인이 성소수자를 살해한다는 내용을 대량으로 유포하고, 이스라엘을 ‘중동 인권의 보루’로 자찬하는 정보를 흘려보낸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는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이 없었다. 단지 1930년대 위임 통치 기간에 영국이 자국의 소도미법을 이식해 동성애를 불법화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시오니스트들은 인종청소를 세탁하느라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성소수자를 구하자며 잘못된 정보를 지금 이 시간에도 살포한다. 이런 악의적 위선은 정작 팔레스타인 성소수자들의 실제 목소리를 지운다. ‘집단학살에는 자긍심이 없다’는 구호 아래 팔레스타인 성소수자들과 전 세계 성소수자 운동의 연대도 감쪽같이 삭제한다.
근자에 들어, 핑크워싱 개념이 보다 확장됐다. 국가와 기업이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성소수자 친화적 이미지를 도구화하는 모든 전략을 지칭한다. 2019년 세르비아에서 최초의 레즈비언 총리가 탄생해 화제가 됐는데, 이것 역시 핑크워싱으로 비판받았다. 집권 우익 세력이 민주주의를 퇴행시킨다는 비판을 받자 레즈비언을 명목상 총리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스페인에서도 핑크워싱 논쟁이 한창이다. 2026년 발렌시아에서 개최되는 게이 올림픽에 극우 세력이 끼어들면서 심각한 내홍을 겪는 중이다. 지난달에는 유럽 최대 문화 행사이자 성소수자 친화적인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보이콧하느라 스웨덴 말뫼에서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스라엘 참가자를 용인했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과의 연대 표현을 금지했다는 게 이유였다. 2024년 2월에는 미국 최대 성소수자 옹호 단체인 인권 캠페인(Human Rights Campaign)이 무기 제조업체 노스롭 그루먼(Northrop Grumman)과 후원 관계를 맺고 있는 위선이 폭로되며 반대 시위에 직면해야 했다.
문제적인 영리 행위로 비판받는 기업들이 이미지를 세탁하느라 성소수자 행사를 후원하는 경우도 갈수록 비판이 가해지는 형국이다. 화석연료 기업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2017년 워싱턴 DC 퀴어 퍼레이드의 차량 행렬이 농성자들에 의해 처음 점거됐다. 뒤이어 2023년 영국의 ‘성소수자 어워드’는 화석연료 기업 후원 때문에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슬그머니 후원 관계를 정리했다. 같은 해 런던 퀴어 퍼레이드도 보이콧 시위로 행진이 중단됐다. 코카콜라와 유나이티드 항공 등 오염 기업들의 후원을 받은 까닭이다. 기후위기가 심화될수록 이런 반발은 더욱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6월1일 개최되는 퀴어 퍼레이드를 경유하며 핑크워싱 논란이 벌어졌다. 가자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미국, 영국, 독일의 대사관 퍼레이드 참여, 그리고 특허권 독점으로 의약품접근권을 침해하는 초국적 제약회사 길리어드와 GSK의 퍼레이드 후원이 문제가 됐다.
오늘날 퀴어 퍼레이드는 양날의 칼을 쥐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부상하는 극우 물결 속에서 퍼레이드 원산지인 미국은 물론,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에서 퍼레이드가 위협당하는가 하면, 다른 측면에선 그 동안 성소수자들의 눈물과 땀으로 구축한 퍼레이드의 성과, 즉 가시화 운동의 성취가 기업과 지배 엘리트, 또는 출세주의자들에게 이용되는 핑크워싱의 위험 속에 놓여져 있다. 심지어 우익의 위협 때문에 기업과 지배 세력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적대적 공존이 발생하기도 한다.
어떻게 무지개 깃발을 지킬 수 있을까? 그중 하나는 퍼레이드가 출발한 시초의 풍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식민주의, 가부장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저항 주체들과 연대하고 그것으로부터 확장의 힘을 얻고 보편의 평등을 일구려던 급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시원의 풍경 말이다. 애초의 무지개 의미 말이다.
“모두가 자유롭지 않으면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이 슬로건은 팔레스타인 연대 구호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퍼레이드가 탄생한 스톤월 봉기의 구호이기도 하다. 곤궁에 처한 이웃들의 사정을 두루 살피며 연대하는 것, 거기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이웃을 살피지 않으면 끝내 자신도 살필 수 없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 미디어오늘 2024.06.10
민주당, 윤석열과 '내가 더 부자 잘 지키겠다' 경쟁하나?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종부세 폐지 앞장서다니
청년, 서민 정책을 포기한 민주당, 1% 부자를 대변하는 정당이라고 선언하라!!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부자 감세 불 지피는 민주당은 과반 의석을 몰아준 국민을 무시하나)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9일 오전 KBS <일요진단>에 출연하여 종합부동산세 폐지에 찬성, 재건축초과이익 환수제도 폐지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종부세 감세와 관련하여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이나 윤석열 정부가 아니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신임원내대표 박찬대 의원이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지난달 9일 실거주 1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폐지 방침을 밝혔다. 뒤이어 민주당 최고위원인 고민정 의원 또한 종부세 폐지를 공개 제안했고, 민주당 장경태 의원 또한 한 라디오에서 종부세 완화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야당에서 선제적으로 종부세 폐지를 들고 나오니,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여당과 대통령실은 종부세 개편 논의를 구체화하고 있다. 여당은 오히려 야당이 주장하는 '1주택자 종부세 폐지'는 이른바 똘똘한 한 채인 고가 아파트로의 쏠림 현상을 심화해 특정지역의 집값만 띄울수 있고, 세수 감소가 우려된다면서 종부세 폐지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누가 야당인지 여당인지 이름을 지우고 보면 헷갈릴 지경이다.
종부세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로 장관과 야당의원들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박상우 장관은 종부세는 수익이 많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한 징벌적 과세라 말했다(KBS 일요진단, 2024. 6. 9.).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아무리 비싼 집이라도 1주택이고 실제 거주한다면 과세 대상에서 빠져야 한다면서, 국민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 커졌으며 주택을 보유한 중산층 비중이 커졌으므로, 주택을 보유한 국민 대다수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한다고 말했다(한국경제, 2024. 5. 8.). 민주당 고민정 의원은 종부세를 유지할 때 얻는 것과 종부세를 폐지할 때 얻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집 가지고 부자인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처럼 되었다, 집을 갖고 싶은 마음을 욕망으로 치부한 것은 큰 잘못이다, 민주당에 고소득층을 대변할 사람도 있어야한다(신동아, 2024. 5. 24.)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그런데 종부세를 완화 또는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과연 근거가 있을까?
2023년 주택분 종부세 납세 대상자는 22년 128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전년대비 대상자가 66% 대폭 감소했다. 특히 중과세 납세대상자가 1년 만에 99% 넘게 감소했다. 결정세액 또한 6.7조에서 2.5조 원이 줄어 37.6%가 감소했다. 이중 1세대 1주택자 납세인원 및 결정세액 또한 전년과 비교할 때 52.7%, 64.4%가 감소하는 등 큰 폭으로 감소하였다. 부동산 시장 침체로 공시가격이 하락했고 공시가격에 적용하는 공정시장가액 비율까지 60%로 낮아졌으며, 기본공제금 상향, 세율인하까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윤석열 정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종부세 납세 대상자를 대폭 축소하고, 세액도 큰폭으로 낮췄다. 이같은 종부세 세수감소로 지방자치단체로 배분되는 부동산교부세가 크게 줄어 지역균형발전과 지방재정 확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주택분 종부세 상위 30%까지 분위가 전체 세액에서 차지하는 점유비율이 85.3%, 전체 종부세 최상위 구간인 상위 10%가 전체 종부세 88.5%를 차지했다. 윤석열 정부 이전, 2020년의 경우에도 종부세 고지기준 상위 1%가 전체 종부세 총액의 73%를 납부하였고, 종부세 납부 하위 50%의 평균 세부담액은 24만 원에 불과(2020년 고지기준 종합부동산세 백분위 자료, 고용진 의원)했다. 이것이 종부세의 실체다.
종부세는 극소수의 부동산 부자만 납부하는 세금이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부자감세를 내세운 정부 기조에 맞춰 그 대상자와 세액이 대폭 감소하였다. 원래부터 납부금액이 크지않았던 대다수 1주택자의 감소폭도 컸다. 절반의 국민은 집이 없는 무주택자다. 30대 미만 청년의 88%는 무주택자다(2022년 생애단계별 행정통계, 통계청). 2022년 주택소유가구의 평균주택 자산가격은 3억1500만 원이다. 한국 국민 절반의 무주택자는 물론이고, 나머지 절반의 유주택자라고 하더더라도 극소수의 부동산 부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1주택자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세금이다. 헌법재판소도 '주택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 조건이 되는 생활공간인 만큼 주택과 토지를 다른 재산권의 대상과 달리 취급해 종부세를 부과하는 데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며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국민 재산 중 부동산 비중이 커진 것은 단시간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영향이다. 국민 소득과 괴리된 비정상적인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종부세, 상속세 등 세금이 늘어난 것으로 보아야한다. 그렇다면 최대한 부작용을 완화하면서 시장질서에 따라 이를 정상화하고, 부동산 자산쏠림과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정치권의 역할이 아닌가.
윤석열 정부의 어설프고 독단적인 국정운영을 지켜보는 국민의 답답함과 분노는 목까지 차오르고 있다. 고물가, 고금리로 코로나 때보다도 어렵다는 자영업자들의 아우성이 크다. 전세사기로 고통받는 청년, 서민이 맞은 민생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러나 취약계층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세금은 크게 줄어들었다.
작년 2023년, 59조 원에 달하는 역대급 세수펑크 중 법인세 감소분이 40%를 넘고, 감세혜택은 대기업이 집중적으로 받았다. 작년에 이어 올해 4월까지의 법인세는 작년보다도 35.9% 급감했다. 윤석열 정부는 대기업, 부동산 자산 보유층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감세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다. 반면 전국민에게 전가되는 세금인 부가세만이 전년대비 4조 원 늘었다. 고물가 상황이 국민 전체에게 고통을 주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 부자 대상 세금인 종부세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22대 국회 개원하자마자 거대 야당에서 나온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것도 모자라 민주당은 종부세 완화와 함께 상속세 감세까지 검토하겠다고 한다.
민주당이 포문을 연 종부세 완화, 폐지 논쟁은 절반 이상의 무주택자, 유주택자 중 85%에 달하는 1주택자, 특히 무주택자가 90%에 달하는 청년과 주거약자의 편에 서기를 포기했다는 선언이다. 앞으로 민주당이 부자감세, 서민증세에 나서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된다. 국회의원 선거가 이제 막 끝나고 민주당에는 새로운 원내 집행부가 꾸려졌다. 이제 민주당은 상위 1% 부동산 부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인가.
유권자들은 윤석열 정부의 폭주를 견제하고 99% 서민을 위한 민생정당으로서의 강한 야당을 기대하고 180석을 만들어줬건만, 그 정당이 이제는 소수 부자의 이권을 지키기 위하여 윤석열 정부, 국민의 힘과 감세 경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하는 우리 국민의 처지가 딱하다.
조정흔 감정평가사 | 프레시안 2024.06.11.
'제국주의 행위자'가 된 러시아, 혼돈의 지구 정치 지형이 확정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을 연상시키는 세계 정세
정확히 1년 전에 나는 이 지면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반대하며 러시아 안에서 푸틴 독재에 맞서 싸우는 사회주의자들, 그 가운데에서 국내에도 상당히 알려진 저술가 보리스 카갈리츠키를 소개했다(☞관련기사 : "'부패한 독재체제서 살고 싶지 않다', 러시아 저항세력의 절박한 외침"). 전쟁을 끝내려면 푸틴 정권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카갈리츠키의 외침을 전하면서 나는 그의 신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반전운동가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중형을 선고하고 있던 푸틴 정부가 아무래도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글이 나오고 불과 한 달 뒤인 작년 7월 26일에 KGB의 후신 격인 연방보안국이 "테러리즘을 옹호"했다는 명목으로 카갈리츠키를 전격 체포했다. 그 즈음에 전쟁은 러시아 측 예상과 달리 1년 넘게 장기화하고 있었고, 그래서 푸틴 정권은 9월에 끝내 국내 여론 악화를 감수하면서 부분 동원령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런 국면에 벌어진 카갈리츠키 체포는 누가 보더라도 반전 여론의 구심을 선제공격하여 고립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탄압이 합법의 외양을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푸틴 정부가 그나마 세계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 브릭스(BRICS)의 참가국들 중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등의 좌파 인사들이 카갈리츠키 구명 서명에 나섰고, 그 덕택인지 작년 말 재판에서는 구속은 면한 벌금형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올해 3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선 한 달 전인 2월에 돌연 카갈리츠키는 벌금형이 아닌 5년형을 선고받았다. 푸틴의 최고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가 북극해에 인접한 죽음의 교도소에서 의문사한 바로 그때에 카갈리츠키는 66세의 나이에 그 북극권 교도소에서 5년 동안 갇혀 지내라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카갈리츠키 말고도 반전운동에 나선 수많은 이들이 현재 중형을 받아 감옥에 갇히거나 국외로 추방되거나 망명자가 되어 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침공 2년째인, 그리고 푸틴 정권 24년차를 맞이한 지금 러시아의 현실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을 연상시키는 세계 정세
그러나 푸틴 정권은 오판했다. 카갈리츠키 같은 이들의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탄압에 나섰겠지만, 목소리는 제압당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우렁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실 러시아 바깥에서는, 심지어 좌파조차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의 이야기에 그다지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말로 번역된 카갈리츠키 저서 목록만 봐도 이를 실감할 수 있다. 모스크바 발 뉴스가 뜨거운 관심거리이던 1990년대 초에 집중 번역된 다음에는 소개된 책이 거의 없다.
한데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반전운동과 카갈리츠키 체포 등을 계기로 뒤늦게나마 러시아 내부의 치열한 노력에 관심과 연대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장 뤽 멜랑숑, 제러미 코빈, 슬라보이 지젝 등이 함께 한 카갈리츠키 구명 서명운동은 이런 분위기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다. 푸틴 정권의 의도와 정반대로 러시아 내 반체제 좌파에 대한 탄압은 러시아 좌파, 사회운동에게 오랜만에 국제연대의 숨통을 열어주고 있다.
어쩌면 그 일환일까. 최근 카갈리츠키의 새 책 영어판이 영국 좌파 출판사 플루토(Pluto)에서 나왔다. <오랜 후퇴: 좌파의 쇠퇴를 뒤집을 전략(The Long Retreat: Strategies to Reverse the Decline of the Left)>이 그 책이다.
제목인 '오랜 후퇴'는 단지 러시아 좌파의 후퇴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전 세계 좌파가 예외 없이 겪은 침체와 퇴행을 말한다. 마치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한민국을 연상시키는 나라의 저자가 썼으니 자기 나라의 참혹한 사정을 고발하는 책이겠거니 넘겨짚는다면 오산이라는 이야기다. 한참 전에 우리말로 소개된 책들에서도 그랬듯이, 카갈리츠키의 시야는 러시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러시아와 상관없는 붕 뜬 시각에서 남의 나라 이야기만 읊는 것도 아니다. 조국이 포함된 세계 전체를 시야에 담고, 다시 그 세계의 맥락에서 조국을 짚는다.
<오랜 후퇴> 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상황을 직접적으로 다룬 대목은 "제8장. 전쟁, 기아와 경제적 구조재편"이다. 이 장에서 카갈리츠키는 푸틴 독재의 패악과 실정을 늘어놓거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을 시시콜콜 따지지 않는다. 좀 당황스러울 만큼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꺼낸다. 그가 보기에 지금 세계 정세를 살피는 데 가장 적절한 거울이 100년 전 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강대국들이 모조리 참여하는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높게 본 이는 거의 없었다. 설령 유럽 대륙의 몇몇 국가들이 그런 전쟁에 뛰어들 수는 있어도, 당시 세계체제 안에서 가장 안온한 위치에 있던 대영제국의 리버럴 성향 정치가들이 참전 결정을 내리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1914년 여름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졌다! 2022년 유럽 대륙에서 돌연 발발한 전면전 역시 비슷했다. 국지적 충돌이 느닷없이 총력전으로 폭발했고, 은행가들과 노닥거리는 데나 익숙하던 유럽 정치가들이 전시 지도자로 돌변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의 이러한 선택은 변덕스러워 보이기만 한다. 그러나 카갈리츠키는 이것이 결코 우발적인 것은 아니며 이유가 없지도 않다고 지적한다. 그 이면에는 바로 점점 더 절박해지는 경제-사회적 상황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 열강 집권자들은 적대국들 탓에 해외에서 수익을 뽑아내는 데 한계에 부딪혔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국내에서 노동계급과 여성 같은 '몫 없는 이들'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마찬가지로 푸틴 정권 역시 팬데믹 이후 경제적 긴장과 장기 독재가 낳은 정치적 긴장을 풀 출구가 필요했다. 두 경우 모두 마침내 '전쟁'이 최고위층의 '합리적'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오랜 후퇴> 제8장에서 카갈리츠키가 펼치는 논의는 현 상황과 제1차 세계대전 사이의 이러한 유비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권력자들이 겁 없이 선택한 총력전 상황이 당대 자본주의 구조를 심각하게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제1차 세계대전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전쟁 수행과 경제 봉쇄 대응 등의 명분 아래 국유화나 경제 계획이 당연하다는 듯이 집행되는 러시아(그리고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을 의심심장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엘리트들이 무의식적으로 연 이 새 국면에서 민주주의와 평화, 전 지구적 복합위기 극복을 지향하는 혁명이 어떤 모습을 취할지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카갈리츠키의 논의에는 흥미로운 쟁점이 많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반전평화를 즉각적인 과제로 삼는 러시아 내부 좌파가 현 세계 정세를 제1차 세계대전 당시와 비슷한 지형과 구조로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 구조는 로자 룩셈부르크나 V. I. 레닌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주로 분석됐고, 이런 분석의 대강은 오늘날 좌우를 떠나 역사가라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상식이 되어 있다. 그 골자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대립이다.
신냉전, 다극화가 아닌 제국주의 국가 간 경쟁의 부활
현 세계 정세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또 다른 러시아 좌파 사회과학자 일리야 마트베예프가 최근 미국 저널 <자코뱅>에 발표한 글 "우리는 제국주의 경쟁이 심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Ilya Matveev, "We Live in a World of Growing Imperialist Rivalry", Jacobin, 2024. 5. 28)에 보다 깔끔히 정리돼 있다. 젊은 지구정치경제 연구자인 마트베예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부터 푸틴 정권을 신랄히 비판했고, 현재는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
마트베예프 역시 카갈리츠키처럼 현 정세가 제국주의 열강 간 경쟁과 갈등이 극대화되는 형국이라 진단한다. 단, 열강의 숫자와 영향력의 상대적 격차 등은 100년 전과 크게 다르다. 이번에는 제국주의 경쟁자가 셋으로 압축되며, 선두 주자와 도전자 그리고 나머지 하나 사이에 힘의 격차가 제법 크다. 그 세 열강이란 미국, 중국 그리고 러시아다. 물론 구 제국주의의 잔재인 서유럽 국가들이 있지만, 이들은 군사력 등에서 철저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기에 이 셋과 동등한 행위자라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규정은 현재 지구상의 가장 뜨거운 현안인 미국-중국 대립이 20세기 냉전의 반복, 즉 신냉전이 아니라는 판단을 깔고 있다. 이 점에서 마트베예프는, 중국이 고전적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를 판별하는 근본 지표인 자본수출국으로 부상했다는 훙호펑의 진단(<제국의 충돌: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하남석 옮김, 글항아리, 2022)에 동의한다. 상품시장뿐만 아니라 금융투자 무대를 놓고 미국과 중국은 경제적 이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고, 100년 전 제국주의 충돌과 마찬가지로 이런 경제적 이해 갈등이 미-중 대립의 핵심 토대라는 것이다.
문제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중국과 대등하게 취급될만한 도전자는 아니다. 자원수출국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추고 있고 최근에는 이 나라에서도 투자처를 찾아 헤매는 유휴 자본이 늘어났지만, 그렇다고 중국처럼 미국을 추월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지는 못하며 그럴 역량도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드러나듯이, 재래식 전력 역시 허점이 많다. 미국,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핵 전력이다.
마트베예프는 이 세 번째 주인공을 움직이는 힘이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경제적이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다고 주장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구 소련의 공식 이념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달리 세상의 진보를 약속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푸틴 치하 러시아에 대한 외부의 위협을 최대한 과장하면서 러시아가 힘에 겨운 제국주의 경쟁의 세 번째 주자로 나서도록 부추길 뿐이다.
가령 우크라이나 민병대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나치 부역자였던 극우 민족주의자 스테판 반데라를 숭배한다면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파시즘 성전'이라 둘러대는 푸틴 대통령의 사표(師表)는 정작 레닌도, 스탈린도 아닌 이반 일린이다. 일린은 구 러시아 제국의 향수와 20세기 파시즘을 잇는 독특한 극우 사상가다. 구 제국의 반혁명 귀족 출신인 그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과 독일 히틀러 정권을 열렬히 찬양하면서 소비에트연방 타도 이후에 러시아 사회가 추구할 미래가 이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이런 사상의 추종자들이 '반파시즘 전쟁'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마트베예프는 이런 도발적 이데올로기 이면에 실은 지배 엘리트의 공포가 있다고 본다. 2010년대에 우크라이나의 마이단 혁명을 비롯해 구 소비에트연방 소속 국가들을 휩쓴 대중의 직접행동은 푸틴 정권에게 NATO 확장이나 우크라이나 친서방파의 도발보다 더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마치 20세기 벽두에 서유럽 보수 지배층이 그랬던 것처럼, 푸틴 정권은 이런 내부로부터의 위협을 선제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자기 역량을 넘어서는 제국주의적 대외 공세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로서는 힘에 부치는 모험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가 세상에 끼친 영향만큼은 결정적이다. 러시아가 제국주의 행위자로 뛰어듦으로써 2020년대에 혼돈을 거듭하던 지구 정치 지형이 돌이킬 수 없이 확정되었다. 미국의 점진적인 패권 약화 혹은 후퇴를 통해 열린 국면은 어쩌면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궤도가 정해졌다. 그것은 미-중 신냉전도 아니고 남반구가 주도하는 다극화도 아닌 제국주의 열강 간 경쟁과 대립의 복귀다. 다만 한 세기 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번에는 '인류를 몇 번이나 절멸시킬 수 있는 대량 핵무기로 무장한' 세 제국주의 국가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행위자를 찾아서
2022년 러시아의 전격적인 전면전 감행 이후 세계 여론은 양분됐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면서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일본까지 포함하여)의 군사동맹에 무턱대고 박수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러시아를 미 제국의 희생양으로만 바라보며 침략자를 편드는 이들도 있었다. 전 세계 좌파도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수많은 분파와 경향으로 어지럽게 나뉘어 있던 각국 좌파는 2022년 이후 더욱 심각하게 분열했다.
한국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기회 삼아 미국의 대중, 대러 포위 정책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자신은 예전부터 '자유주의자'였다고 커밍아웃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반대편에서는 푸틴 정권을 미국 단일지배체제를 깨뜨리고 다극화 세상을 여는 선구자로 치켜세우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1년 전 카갈리츠키의 반전론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러한 두 입장 모두 현재 지구를 관통하는 대립의 실체를 온전히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카갈리츠키나 마트베예프 같은 러시아 반체제 좌파가 내놓는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라는 진단은, 비록 아직 분석의 출발 정도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극단론들보다는 훨씬 냉철한 그림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지금 진정한 대안은 "현대 자유주의의 개인주의 논리"(미국)와 "새로운 보수주의의 전체주의적 공세"(중국, 러시아)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이 둘 다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카갈리츠키의 호소는 커다란 설득력을 지닌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제국주의 주역들이 늘 불안하게 그 존재를 의식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존재를 제대로 드러냈다고 할 수 없는 현 정세의 네 번째 행위자가 실체를 확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의 반전평화 시민들 그리고 이들과 소통, 연대하려는 이곳의 우리가 바로 그 네 번째 주인공의 씨앗들이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4.06.11.
AI, 인문학, 역사학
인공지능(AI)이 촉발한 변화가 여러 방면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AI가 그려주는 그림 때문에 웹툰 그리던 일을 하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말이 들리고, 여러 나라말을 유창하게 통역하는 기능 때문에 일부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폐지했다는 뉴스도 전해진다. 챗GPT가 등장한 지 불과 1년 반이 지났을 뿐이다. 최근에 나온 더 높은 버전의 챗GPT는 미국 변호사 시험(Uniform Bar Exam)을 상위 10%로 통과했고, SAT 수학시험에서 800점 만점에 700점을 얻었단다. 인간의 총체적 지능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경제학에 장기, 중기, 단기 경제변동 이론이 있듯이, 역사학에도 시간에 관한 비슷한 이론이 있다.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은 세 차원의 역사적 시간을 말했다. 기후적, 지리적, 생물학적, 정신적 구조같이 거의 변하지 않는 장기지속, 인구나 사회계층처럼 어느 정도 변동하는 구조로서의 콩종튀르(conjoncture), 마지막으로 사건 같은 단기지속이다. 현실에서 우리 귀와 눈을 채우는 것들은 거의 셋째 차원, 그리고 일부 둘째 차원의 시간 영역에서 만들어진다. 제일 소란스러운 것이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인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 브로델이 ‘장기지속’ 영역이라 말한 것들이 변하고 있다. AI 등장도 그중 하나이다.
역사학을 공부해서 그렇겠지만, AI와 역사 연구의 공통점도 눈에 띈다. 역사학은 철학, 문학과 더불어 인문학의 대표적 학문이다. ‘人文’이라는 말은 ‘天文’과 함께 가장 오래된 유교 경전 <주역(周易)>에 처음 나온다. “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천문을 관찰하여 때의 변천을 살피고,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교화하여 이룬다).” 여기서 ‘人文’ ‘天文’의 文은 문장(sentence)이 아닌 ‘무늬’를 뜻한다. 현대어로 풀면 그것은 일정한 패턴(pattern)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개인·집단적 행위에서 인간 특성의 패턴을 발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AI가 하는 일도 ‘잠재된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독립적 요인들의 반복되는 상호작용 양상을 찾는 것이 AI가 발휘하는 여러 기능들의 핵심이란 뜻이다.
숨은 패턴을 찾는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AI와 역사 연구 사이에 차이점도 명확하다. 역사 연구자는 몇 가지 독립변수(AI에서는 이것을 매개변수라고 한다)만으로 패턴을 찾는 반면, AI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립변수를 가지고 패턴을 찾는다. 독립변수의 이런 양적 차이 때문에 챗GPT와 역사 연구 결과에 다시 차이가 발생한다. 역사 연구의 결과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AI가 찾아낸 결과는 결과 도출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AI가 제시한 결과는 반문이 불가능한, 종교적 신탁(神託)이나 정치적 독재와 비슷해 보인다. 설명할 수 없다면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 연구와 챗GPT 사이에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이른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에 AI는 상당한 비율로 전혀 사실이 아닌 정보를 제공하는데, 이를 할루시네이션이라고 한다.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에 기반하여 인공신경망으로 구성되는 AI에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반면 역사 연구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은 ‘사실’이 정확히 뭔지 확인하는 일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AI가 인간과 사회에 가져올 변화에 대한 의견 차가 크다. 다만 그 변화를 막을 수 없고,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것이리란 데엔 모두 의견을 같이한다. 이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정신적 존재’로 규정했던 인간들에게 AI는 새로운 규정을 요구하는 듯하다. AI를 이용한 더 높은 수준의 인문학이 등장할지, 아니면 인문학 자체가 종언을 고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경향 2024.06.12.
풍선·드론·감청…용산은 탈탈 털리고 있다
북한이 남쪽으로 내려보낸 풍선에 오물이 묻어 있느냐, 아니면 휴지만 들어 있느냐 문제다. 우리 군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 지난 9일 이후 북한은 또다시 풍선을 대량으로 내려보냈다. 이번에는 지난달 말에 내려보낸 풍선과 달리 오물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이에 군당국은 북한의 풍선 도발 수위가 낮아졌다고 보고 대북 확성기 방송을 하지 않았다. 9일에 나온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에는 남한에 대한 거친 정치적 표현이 들어 있지 않았고, 오물이 아니라 7.5톤의 휴지라고 말한 점에 주목하며 우리 군은 대응하지 않았다. 지난달 말에 군이 북의 풍선에 대해 “반인도적이며 국제법을 위반한 행위”라며 강력히 규탄하고 철거했던 확성기를 다시 설치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북한이 날려 보낸 풍선에 오물이 묻어 있으면 나쁜 풍선이어서 대응하고, 휴지만 들어 있으면 착한 풍선이어서 대응하지 않는 건가. 게다가 이번의 그 착한 풍선은 용산 대통령실 바로 근처에 최소 3개나 떨어졌다. 떨어진 위치가 대통령 출퇴근 길목이다. 용산을 휘젓고 지나간 풍선까지 고려한다면 대통령실 상공의 비행금지구역이 완전히 유린당했다고 보아야 한다. 풍선을 제대로 탐지조차 못 하다가 낙하 뒤에 그나마 시민 신고로 그 존재를 파악했다. 풍선에 대해 탐지와 식별이 되지 않았을뿐더러 어떻게 대응한다는 매뉴얼이나 지침도 없다. 재작년 연말에 북한 무인기가 용산을 침범했던 사태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의 안보 실패다.
당시에는 북한 무인기를 제압하기 위한 노력이라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대량의 풍선을 눈으로 목격하고도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이런 안보 무능과 대통령실 용산 이전의 문제점을 적당히 은폐하려니까 오물의 유무로 풍선의 심각성을 판단하고 군사적 대응 수준을 결정하는 해괴한 군의 교전규칙이 출현했다. 풍선에 대한 표기가 오물, 분변, 대변, 휴지냐에 따라 군의 대응이 달라진다면 애초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 기준과 원칙도 혼란스럽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풍선의 오물이 사람의 것이냐 또는 동물의 것이냐를 따져서 분변이 아닌 거름으로 표기하는 일부 언론의 분별력에는 감탄이 나온다.
대통령 머리 위에서 북한의 드론과 풍선이 둥둥 떠다니는 한국의 참혹한 안보 상황은 재작년 3월에 대통령직 인수위가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이미 예견되었다. 자연 방어물 없이 민가의 한복판이고 사방이 뚫려 있는 용산에서는 군의 대공 방어무기가 사용될 수 없다. 그 뒤에 이어진 비행금지구역(P-73) 축소와 무리한 청사 이전으로 빚어진 혼란은 아직도 수습이 곤란하다. 게다가 공용 비화폰이 아닌 일반 휴대폰을 주로 사용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강대국의 통신 감청 위성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미국 국가안보국의 최첨단 신호정보 수집 시스템, 일명 에셜론이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의 미군기지에서 여전히 정보 수집을 활성화하고 있다. 작년 봄에 미국 국가안보국의 기밀정보가 폭로되었을 당시 우리 대통령 안보실의 회의 내용이 고스란히 감청되었음이 드러났다. 아직도 동맹국이 어떤 방법으로 용산을 감청하였는지, 그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거꾸로 미국은 용산 일대 일부 통신회사의 기지국에 화웨이 통신장비가 내장돼 중국의 감청에 취약하다고 본다. 여기에다 북한의 헬륨 풍선은 배터리와 프로펠러만 장착하면 지상 20~30㎞ 상공 궤도를 안정적으로 비행하다가 대통령실이나 관저 부근에서 정찰용 풍선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북한의 기술력을 고려한다면 이 풍선은 평시에는 심리전의 수단으로 활용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정찰이나 공격 목적의 군사적 용도로 전환될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실과 경호처는 새로운 위협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한 채 무방비로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다가 적당히 문제의 심각성을 은폐하는 이 정부는 겉으로는 강해 보일지 모르나 북한을 효과적으로 억지할 수 있는 지략이 없다. 이로 인해 주변국과 북한에 이런저런 정보를 탈탈 털리는 가장 무능하고 위험한 정부라는 걸 스스로 드러내지만 정작 그들은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무리한 집무실 이전으로 대책 없이 호랑이 입속에 들어간 결과다.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한겨레 2024.06.14.
대북전단 왜 막지 않는가
북한을 비판할 자유는 보장받아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민족 대결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북한이 날려보낸 오물풍선의 발단이 된 대북전단은 그저 단순한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1991년에 유엔에 정식 가입한 회원국이다. 유엔헌장에 따라 북한은 모든 나라로부터 평등한 주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국제법 관점에서 보면, 대북전단은 국가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전복 활동이다. 적대적 심리전이다. 더욱이 풍선에 달러 지폐, 식품 등 물건마저 실어 보내는 것은 북한의 통화 질서와 국경 관리에 대한 직접적 침해다. 그러므로 유엔 회원국인 나라가 민간 단체가 북한에 전단을 보내는 것임을 알면서도 재정 지원을 하는 행위는 유엔헌장 위반이다.
국내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제평화의 유지를 대한민국의 과제로 삼는다. 공중 비행 풍선에 정식 통관절차를 거치지 않는 물건과 유인물을 넣어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행위는 국제평화유지가 아니다.
대북전단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만 기본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접경지 국민에게도 기본권이 있다. 평화롭게 행복을 추구할 자유가 있다.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자유가 있다.
헌법은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따라 경찰관은 위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조치를 할 권한이 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2016년과 2023년에 이 조항을 근거로 대북 전단 살포를 경찰이 제지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런데도 왜 대북전단 살포를 막지 않는가? 경찰은 범죄의 예방, 진압 및 수사와 함께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의 보호, 공공의 안녕을 직무로 하고 있다. 경찰권을 적절하게 행사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국가가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대법원은 2017년에 현저하게 불합리한 경우에는 직무상의 의무 위반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에 따른 피해는 국가가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북한을 비판할 자유는 허용해야 하지만, 대북전단 살포는 다르다. 헌법 절차에 따라 제한해야 한다.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경찰청장과 강화 파주 등 접경지 관할 경찰서장은 즉각 저지에 나서야 한다. 이를 하지 않을 경우 직무상 의무 위반이다. 피해가 발생할 경우 경찰청장과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도 중단해야 한다. 30년 전부터, 남북은 군사분계선에서 확성기 방송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1992년, 정원식 국무총리와 연형묵 정무원 총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표하여 부속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어 2004년의 합의에서도, 2018년의 4·27 판문점 선언 합의와 9·19 평양 선언 합의에서도 확성기 방송을 명백하게 금지했다.
확성기 방송은 남북관계발전법 위반이다. 왜냐하면 남북관계발전법은 남북 사이에 문서로 된 ‘모든’ 합의를 남북합의서로 정의했다. 그리고 남북합의서를 위반하여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북한에 대해 확성기 방송을 하는 행위를 금지했다(제24조 제1항 제1호).
윤석열 대통령이 9·19 평양 선언을 전부 종료시켰지만, 대북방송을 금지한 4·27 판문점 선언은 아직 유효하다. 그 이전의 합의서들도 유효하다. 그러므로 대북 확성기 방송은 남북관계발전법 위반이다.
국민들의 하루하루 삶이 살얼음판이다. 대북전단에 이은 확성기 방송은 국민이 원하는 평화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당장 경찰청장과 강화 파주 등 관할 경찰서장에게 대북전단에 대한 경찰권 발동을 공식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산다.
송기호 변호사 : 경향 2024.06.17.
'아줌마 출입금지'라는 혐오의 자유
인천의 한 헬스장이 출입구에 붙인 '아줌마 출입금지' 안내문.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아줌마들 텃세 조심해.” 5년 전, 수영을 시작한다는 내 말에 지인이 한 말이다. “여자들 조심해.” 그즈음 이런 말도 들었다. 업무로 만난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50대 남성은 친구가 ‘억울하게’ 성추행 가해자가 됐다며 옆에 있던 젊은 남성에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내가 현실에서 마주한 여성에 대한 멸시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중년 여성은 수영장 신입 회원을 괴롭히고, 젊은 여성은 무고한 남성을 음해한다고 낙인찍고 싶지만 대놓고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라”는 조언을 빙자해 경멸했다.
이젠 허술한 위장조차 필요 없어진 걸까. 인천의 한 헬스장은 입구에 ‘아줌마 출입금지’라는 안내문을 붙였다. 공짜를 좋아하거나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면 ‘아줌마’라는, ‘아줌마와 여자 구별법’도 함께였다. 아줌마들이 1, 2시간 동안 빨래를 해서 수도요금이 많이 나오고 젊은 여성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해 고객이 빠져나간다는 게 사장의 주장이다.
성별을 떠나 공중 도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음에도 중년 여성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아줌마’로 판명난 여성은 징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겁박하는, 전형적인 여성 혐오다. 상대를 망신 주고 굴복시키기 위해 동원된 혐오이며 기저에는 “맞을 짓을 했으니 맞는 것”이라는 폭력적인 시선도 깔려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였다면 온라인에 넘쳐나는 여성 혐오가 잠시 공중시설에 등장한 해프닝으로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장은 당당했다. 한바탕 논란 후 한 방송사가 헬스장에 가보니 안내문은 그대로였고,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거(안내문) 보고 화내시는 분들이 저는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봐요.” 그에겐 이 혐오가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노 키즈존’ ‘노 시니어존’ 등 연령 차별 업소의 영향도 적지 않았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간 진행돼 온 ‘혐오의 제도화’가 한 헬스장에서 ‘자연스럽게’ 재현된 것이라고 본다.
‘일베’ 등 남초 커뮤니티에서 소수가 공유하던 반인륜적 여성·약자 혐오는 지난 10년간 공적 공간으로 확장됐다. ‘이대남’(20대 남성)의 대변자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여성의 보행 안전에 대한 공포를 “과대망상”,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을 “비문명”이라 조롱하며 이를 주도했다. 책 ‘보통 일베들의 시대’는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산발적으로 분출되던 혐오와 불만이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정치인에 의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았고, 이준석이라는 표상은 일베적 멘털리티가 정당성을 확보하고 승리의 경험을 축적하며 조직화되고 주류화되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가 공공 정치에 끌어들인 혐오는 윤석열 대통령의 후보 시절 1호 단문 공약인 ‘여성가족부 폐지’로 완벽히 제도화됐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를 내면화했다. “(사장이)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수많은 댓글은 ‘아줌마에게 고통받는 소상공인’으로서의 사장의 피해자 서사를 완성해줬고, 찬성과 반대 의견을 중계한 언론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찬반의 문제로 둔갑시켜 “차별에 찬성해도 된다”고 믿게 만들었다.
누군가 사회 규범을 어겼을 때 특정 집단 전체를 죄인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망상’에 가까우며, 이런 행동을 용인하는 사회가 ‘비문명’이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까지 이 사건을 조명한 것 역시 '혐오의 자유'가 횡행하는 비문명성 때문일 것이다.
남보라 기자 한국 2024.06.18.
자유로운 몸의 문화
독일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는 나체가 그 자체로 성적인 함의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우나가 남녀공용으로 운영되고 수영장·탈의실 등은 성별로 공간이 나뉘어 있지 않아 모두 섞여 옷을 갈아입는다.
이것은 ‘자유로운 몸의 문화’를 뜻하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독일의 나체주의 운동 에프카카(FKK; Frei-korper-kultur)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세기 말 레벤스레폼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FKK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자연과 멀어진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벗은 몸으로 만나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자는 반권위주의 운동이었다. 아무래도 벌거벗은 몸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뽐내기는 어려울 테니까. 지금도 독일 전역에는 국가가 지정한 FKK 해변과 공원, 사우나 등이 많다.
몇주 전 나는 2박3일 동안 열린 나체 축제에 다녀왔다. 평소 다니던 요가원에서 우연히 이 행사를 알게 되었는데 순전히 호기심이 발동하여 혼자 가보기로 한 거였다. 축제는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아름다운 호숫가 근처에서 열렸다. 축제 이름이 ‘나체-차-축제’였던 만큼 우리는 2박3일 동안 자주 차를 마실 예정이고 사람들은 예쁜 찻잔에 자기 이름을 써서 맨몸에 목걸이처럼 매고 다녔다. 곳곳에서 각종 요가와 명상 워크숍, 댄스 파티가 열렸다.
행사를 시작하며 주최 측은 사람들에게 축제가 열리는 동안 공개된 곳에서, 그리고 숙소에서 성적인 행위를 하지 말아달라고 강조했다. 벗은 몸이 너무나 오랫동안 과잉성애화되었기 때문에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이 공간을 탈성애화(desexualized)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이 말이 내게 미친 파장은 컸다. 그 얘기를 듣자 나의 몸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초등학생의 몸일 때부터 타인에 의해 성적인 대상으로 여겨졌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나조차도 나의 나체를 중립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참가자의 절반은 남성이었고 나는 그곳의 유일한 아시아 여성이었다. 덩치 큰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벗고 있으니 몸이 계속 떨렸다. 벗은 몸으로 남자들 사이에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낀 적이 아기 때를 빼놓고는 없었으니 몸이 끊임없이 경계 신호를 보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나는 내 마음을 정직하게 털어놓았고 그 덕분에 여러 생각과 감정을 통과하며 몸의 자유를 되찾고 싶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지속된 축제에서 나는 만 하루를 우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와 슬픔을 지켜보면서. 나중에는 내가 우는 것이 나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 번은 호숫가 옆 작은 정자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옆에는 스위스에서 온 부부가 앉아 있었다. 둘이 잘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와이프인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조용히 다독였다. 나는 벗은 몸과,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기억을 애도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의 슬픔은 나에게도 옮아서 나도 같이 울었다. 그러자 차를 따라주던 내 앞의 독일 여자도 같이 울었다.
토요일 오후쯤 되자 다 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축제를 즐길 시간이었다. 요가, 명상 등 신비롭고 이국적인 ‘동양’ 문화를 가져와 풍요롭게 살아가는 백인 유러피안을 미워하는 것도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었다. 지구상에 상처 없는 곳은 없고 내 몸에는 행복한 기억도 많으니까. 나는 호수로 뛰어들었다. 맨몸 구석구석을 감싸는 물의 느낌이 몹시 관능적이었다. 호수에서 충분히 수영하다가 올라와 따뜻한 햇살 아래에 누워 몸을 말렸다. 아침 숲속 들리는 새소리가 오케스트라 같았다. 너무나 편안하고, 너무나 자유로웠다.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 2024.06.18.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을 하나 소개하겠다. 아풀레이우스(서기 2세기)가 쓴 <황금 당나귀>라는 소설이다. 루키우스라는 젊은이가 마법을 좋아하다가 실수로 당나귀로 변신하여 고생하다 사람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느 술집에서 들을 수 있는 온갖 음담패설들을 모아 놓은 이야기다. 서양 고대의 로마식 ‘야동물의 끝판왕’이다. 온갖 애정 행각이 나열되어 있음에도 작품의 밑바탕에는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숨은 생각이 깔려 있다.
작품은 사랑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목적임을 강조한다. 작품은 육욕에 봉사하는 사랑은 채워지면 곧 비워지는 욕구이고, 사랑을 이용해서 재물을 획득하는 것은 결핍의 가련한 욕심이며, 사랑을 이용해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것도 망가진 허영에 뿌리내린 욕망의 허망한 끝자락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특히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사랑을 이용해서 재물을 얻으려고 했던 프시케의 언니들 이야기는 욕심의 올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아들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베누스의 사랑도 흥미롭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근친상간까지 시도했던 여신의 경우는 막장 드라마의 원조이다. 결정적으로 큐피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사랑했던 프시케의 경우도 사랑이 욕망의 노예에 불과했음을 잘 보여준다.
욕구, 욕심, 욕망! 사랑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사랑을 불순한 관계로 변질시키는 힘의 실체들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순수성을 상실한 사랑을 ‘범속의 사랑(eros pandemos, <향연> 180d)’이라 부른다. 이런 범속의 사랑에 맞서 아풀레이우스는 ‘사랑은 사랑일 뿐’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이런 순수한 사랑을 ‘천상의 사랑(eros ouranios, <향연> 180e)’으로 부른다. 사랑 그 자체의 고유한(auto kath’ auto) 목적에 충실해야 순수한 사랑이라는 소리다. 모든 것은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대개는 어떤 것이 그 목적에서 벗어날 때에 사달이 나기 마련인데, 사랑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는 작품이 <황금 당나귀>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 2024.06.18.
아부의 저주
“아부의 친구는 자기만족이고 그 시녀는 자기기만이다.” 이탈리아 사상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1513)에서 한 말이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부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면 군주는 아부의 먹이가 되고 만다. 궁정에 아부꾼이 가득하다면 매우 위험한 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 사람이란 자신의 일에 몰입해서 만족하게 되면, 그것에 미혹되어 해충 같은 아부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꼭 아부를 해야겠다면, 이탈리아 외교관이자 작가인 발다사레 카스티글리오네가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 처세서 중 최고로 꼽히는 <조신론>(1528)에서 제시한 다음 원칙을 따르는 게 좋겠다. “아부를 하려거든 우아하게 하라. 진짜 재주는 기술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렇게 하는 걸 자연스럽게 숨기는 일이다.”
하긴 아부를 비판했던 마키아벨리도 ‘우아한 아부’엔 능한 인물이었다. 미국 언론인 리처드 스텐걸의 <아부의 기술>(2006)이란 책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군주론>을 헌정했던 당대 권력자 로렌조 디 피에로 데 메디치에게 “최고의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고(보통 아부꾼도 그 정도의 발언은 할 줄 안다), ‘시대가 위인을 찾고 있는데, 오직 로렌조만이 시대의 공백을 채울 수 있을 뿐’이라고 아부했다”고 한다.
권력자들은 짐짓 자신이 아부를 싫어한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런 말은 믿지 않는 게 좋다. 미국 철학자 랠프 왈도 에머슨이 “아부에 현혹당하지는 않을지라도 아부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사람들이 아부를 좋아하는 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군가 비위를 맞춰줘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임을 실감케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인물임을 실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부하의 절대적 충성을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아부에 약하다. 그 어떤 경우이건 아부는 꼭 그 내용이 중요한 건 아니다. 우아하지 않은 아부일수록 아부를 하는 쪽의 충성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환영을 받을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다.
한국 정치판은 어떤가? 더불어민주당부터 살펴보자. 2021년 11~12월 대선 캠페인의 일환으로 민주당이 기획하고 조장한 ‘재명학’ 열풍은 보기에 따라선 ‘아부 신파극’을 방불케 했다. 강성 팬덤이 “SNS 활동이 저조한 의원 하위 80%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겁을 준 탓인지는 몰라도, 의원들은 ‘재명학’의 교재인 <인간 이재명>을 읽은 독후감을 SNS에 올리기 바빴는데, 다음 독후감에 1등상을 주어도 무방할 것이다.
“인간 이재명 책을 단숨에 읽었다. 이토록 처절한 서사가 있을까? 이토록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가 또 있을까? 유능한 소설가라도 이 같은 삶을 엮어낼 수 있을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인간 이재명과 심리적 일체감을 느끼며 아니 흐느끼며 읽었다.”(정청래)
정치판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50대 후반의 정치인을 이토록 흐느끼게 만들 수 있는 이재명의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게 흐느낀 건 아니었으며, 민주당 내의 아부 문화가 매우 심각하다고 본 이들도 있었다. 특히 지난 4·10 총선을 앞두고 공천 문제가 불거졌을 땐 환멸을 느낀 의원들이 많았다. 예컨대, 설훈은 “저는 40여년 동안 몸담고 일궈왔던 민주당을 떠나고자 이 자리에 섰다”며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어떻게 아부해야 이재명 대표에게 인정받고 공천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만 고민하는 정당이 되어버렸다”고 개탄했다.
최근엔 이재명 맞춤형 당헌·당규 개정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민주당 원내대표 박찬대는 지난 12일 당무위원회에서 당헌·당규 개정안의 의결이 이뤄졌다고 밝히며 “이재명 대표가 너무 반대를 많이 해서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이 대표가) 반대했고 오늘 또 반대했다”며 “개정안이 대표를 위한 것이 아니고 보완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개정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이 대표가 너무 착하다. 나보다 더 착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번 개정은 이 대표를 위한 게 아니다. 해당 조항에는 예외가 없기에 보완이 필요한 것”이라면서 “이 대표가 너무 반대하길래 ‘그냥 욕먹으시라, 욕을 먹더라도 일찍 먹는 게 낫다’고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이건 아부인가, 아닌가? 그냥 웃음만 나온다. 표현 방식이 너무도 현란해 어지럽다.
올 2월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던 한동훈은 “민주당은 아첨꾼만 살아남는 정글이 됐다”는 독설을 퍼부었지만, 국민의힘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특히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한 윤석열이 지난해 2월 대선주자급 당내 인사들의 침묵을 강요했던 거친 고압적 방식이 시사하듯이, 그는 사실상 자신에 대한 고언의 통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고언자들을 박해하는 자해를 저지르지 않았던가.
윤석열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2년 1월 “정치에 아부하는 공무원은 새 정부서 솎아내겠다”고 큰소리쳤다. 대통령 당선 직후인 3월엔 “일부 참모가 당시 후보이던 윤 당선인에게 듣기에 좋은 말만 하자 ‘아부하지 말라’며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통령이 된 후 영 다른 모습을 보인 건 분명했다.
취임 100일 성적이 영 신통치 않자 전 의원 유승민은 윤석열을 향해 “아부만 하는 주변인들을 바꾸고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할 사람을 가까이 둬야 한다”고 했다. 피가 되고 살이 될 좋은 조언이었지만, 윤석열은 따르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아내 김건희를 절대 성역화하면서 그러면 안 된다는 고언에 핏대를 올렸다는 기사들이 나왔지만 반론은 없었다. 여권 인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상 “아부 이외엔 어떤 말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었기에, 고언이 사라졌다. 윤석열은 그게 국정운영에 미칠 가공할 악영향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때 ‘보수의 희망’이었던 자신이 ‘보수의 악몽’으로 전락해가는 걸 깨닫지 못했다.
지난 10일 국민권익위원회가 김건희의 비위(명품 가방 수수) 신고 사건을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 처리했다고 발표한 ‘사건’을 보자. 권익위는 청탁금지법에 공직자 배우자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에 사건을 종결한다고 밝혔다. 여론은 들끓었다. 신문들은 일제히 사설을 통해 비판했다. 두 개만 감상해보자.
“국민을 배반하고 권력자에게 굴종하는 권익위는 존재 이유가 없다. 김 여사를 둘러싼 각종 의혹은 특검을 통해 밝혀야 한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됐다.”(경향신문) “영부인이 대통령인 남편을 이용해 금품을 챙겼다면 국가적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수사 의뢰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면죄부를 주다니, 권익위는 대통령 부부를 위한 권익위인가.”(한겨레)
‘권력자에게 굴종하는 권익위’ ‘대통령 부부를 위한 권익위’라면, 권익위가 그들에게 아부를 했다는 것일 텐데, 일단 넓은 의미의 아부로 간주하기로 하자. 개인과 기관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이재명을 향한 아부엔 나름의 적극성과 창의성이 살아 있는 반면, 윤석열을 향한 아부엔 그게 없다. 수동적인 시늉에 가깝다. 아니 아부라기보다는 대통령의 격노를 두려워하는 ‘면피용 방어기제’만 발달한 느낌이다. 언론이 지적한 것처럼, 법적인 미비점이 문제라면 어떻게 고치자는 이야기라도 하고, 공직자의 배우자가 그런 선물을 받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과 판단을 제시하는 게 도리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걸 몰라서 그랬을까? 그럴 리 없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이었을 게다.
“대통령 부부의 안전은 물론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고난도의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김건희를 호되게 꾸짖는 동시에 좋은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다. 특검을 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건 너무도 위험한 모험이다. 대통령은 격노와 어퍼컷의 달인으로서 대한민국 최고의 불통이며 이해 수준은 매우 낮고 공감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건 말건 신경쓰지 않으면서 대통령의 수준과 눈높이에 맞게끔 구는 게 대통령에 대한 예의다. 정부 부처와 공적 기관은 대통령을 닮는 법이다. 우리는 일심동체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 경향 2024.06.18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정권이 존립할 수 없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이 동해 석유가스전을 발표했을 때 엄청난(?) 내용보다 그 발표에 대한 시민들의 차가운 반응에 더 놀랐다. 아마도 지지율 상승과 국면 전환을 기대, 대통령이 직접 ‘동해 석유가스’ 국정브리핑을 했을 터이다. ‘매장량 최대 140억배럴’, ‘2200조원 가치’라는 어마한 장밋빛 발표는 잠시 주식시장을 격동시켰을 뿐 지지율에는 외려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지난주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동해 석유가스전 발표’가 대통령 직무수행의, 긍정이 아닌 부정 평가 요인으로 지목됐다. 물리탐사 자료 분석을 수행한 미국 업체의 석연찮은 정체, 호주 에너지 대기업이 ‘장래성이 없다’고 철수한 사실 등이 드러나 대통령 발표 내용의 신뢰성에 의문이 커진 때문이다.
애초 윤 대통령이 예고도 없이 국정브리핑을 자처해 ‘동해 석유가스 대량 매장’을 발표했을 때부터 반향은, 대통령실의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세계 15위 산유국이 될 수 있다’는데 환호와 설렘보다 불신과 냉소의 반응이 태반이었다. 시추 확인 없이 물리탐사 자료 분석에 기반한 ‘추정치’, ‘실패 확률 80%’ 같은 한계 때문만이 아니다. 대통령 발표가 나오자마자 내용을 따져보기도 전에 “뭔 헛소리냐”, “무슨 꿍꿍이냐”, “또 설레발친다”는 격한 반응이 온라인을 도배했다. 윤 대통령을 ‘양치기 소년’으로 만든 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가 소환되기도 했다. 발표 내용에 앞서 메신저인 윤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깊다. 애초 동해 석유가스전 발표를 담당 부처와 해당 분야 전문가에게 맡겼다면 이런 소동은 없었을 터이다. 최종적인 성공 여부와 별개로 ‘동해 석유’ 소동이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윤 대통령이 봉착한 도저한 ‘신뢰의 위기’다.
윤 대통령의 ‘동해 석유가스전’ 발표 당일 온라인에 역술인 천공의 유튜브 영상이 빠르게 퍼졌다. 지난달 16일 “우리는 산유국이 안 될 것 같나. 앞으로 산유국이 된다”, “이 나라 밑에 가스고 석유고 많다”, “예전에는 손댈 수 있는 기술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다 있다”고 말한 영상이다. 대통령의 깜짝 발표를 의아해하는 사람들은 천공의 영상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대통령의 중대 발표가 천공의 해괴한 영상 하나로 희화화되는 현실, 이것만큼 윤석열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가 바닥임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윤 대통령이 처한 ‘신뢰의 위기’가 심각하다. 무신불립(無信不立), 공자는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고 했다. 극한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신뢰의 위기까지 겹치면 윤 대통령은 국정을 온전히 이끌어갈 수 없게 된다.
이미 윤 대통령은 “거의 식물 대통령”이 됐다. 야당의 협조 없인 입법과 예산, 인사, 주요 정책 등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연금개혁 등 ‘3대 개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야당과의 적극적인 협치로 돌파구를 모색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엇가고 있다. ‘거부권’과 ‘시행령 통치’로 돌파하겠다는 기세다. 입법과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은 시행령으로는 곁가지 정책만 추진할 수 있다. 한편에선 윤 대통령이 야당의 견제로부터 자유로운(?) 외교안보 분야에서 출구를 찾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근래 활발한 외교 행보가 예고편으로 읽힌다. 여하튼 어느 쪽도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라고 할 수 없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대통령의 국정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은 국민 신뢰와 지지밖에 없다. 갤럽 여론조사에서 총선 후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20%대에 고착되어 있다. 총선에서 혹독하게 심판당했는데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와 쇄신을 거부한 때문이다.
이제 윤 대통령은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여소야대의 위력, 국민 신뢰와 지지를 회복하지 못하면 정말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엄혹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동해 석유가스전 발표 같은 ‘한방’으로 역전을 고대했을 터이다. 앞으로도 국정이나 정책 등에서 깜짝 놀랄 ‘한방’ 어퍼컷이 계속될 공산이 크다. 혹여 그게 대북정책 등 국가 안위와 관련된 것에서 나오면 큰일이다.
하지만 신뢰가 바닥인 상황에서 아무리 큰 거 ‘한방’을 날려도 그게 지지율을 구하지는 못한다. ‘대박’ 이슈인 동해 석유가스전 발표가 반면교사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달리 길이 없다. 총선 직후 약속한 대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고, 오만·독선·불통의 윤 대통령이 진짜 바뀌어야 한다.
양권모 칼럼니스트 : 경향 2024.06.18.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
독일 건국 75년을 맞아 지난달 18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발행한 표지로 ‘독일 건국 75년,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슈피겔 누리집
흑적황 삼색의 독일 국기가 덮고 있는 하켄크로이츠(나치의 상징·갈고리 십자가)가 불길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독일 건국 75년,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nichts gelernt?)’ 상단 검은 배경색 위에 쓰여 있는 문구다. 지난달 발간된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파격적인 표지다.
독일에선 25년 주기를 각별히 기념한다. 2020년엔 2차대전 종전 75주년 행사를 특별하게 치렀다. 이번엔 독일 건국 75주년이다. 1949년 5월23일 기본법(헌법)이 제정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건국된 지 75년이 흐른 것이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기본법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이 헌법은 독일이 만들어낸 최고의 것 중 하나입니다.” 수상 관저와 연방의회가 있는 부지에선 ‘기본법 75년, 민주주의를 즐기자’는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기본법의 틀 안에서 독일은 20세기 ‘세계 최악의 전범 국가’에서 21세기 ‘세계 최고의 모범 국가’로 기적적인 변신을 이뤘기 때문이다. 아데나워의 ‘라인강의 기적’에서 브란트의 ‘복지국가’를 거쳐, 헬무트 콜의 ‘독일 통일’까지 현대 독일이 일궈낸 이 모든 성취는 바로 기본법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슈피겔의 지극히 부정적인 표지는 실로 충격적이다. 독일 건국 75년의 의미를 그들은 ‘성취’보다는 ‘위기’의 관점에서 살핀다. 사실 독일만큼 ‘역사로부터 잘 배운 나라’도 많지 않다. 독일은 철저한 과거 청산을 통해 도덕적 권위를 회복한 국가다. 그런 독일에서 극우 성향 정당의 부상을 경고하며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거센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신랄한 자기비판이야말로 오늘의 독일을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슈피겔은 독일 건국 이후 줄곧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의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하여 독일 사회의 ‘도덕적 심급’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오늘날 독일이 이룬 거대한 성취를 상찬하기보다는 그 배후에서 꿈틀거리는 불길한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 언론의 일차적 사명이라고 본다.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은 오늘날 독일에서 하나의 문화로 정착된 것 같다. 연구 학기를 맞아 방문한 함부르크대학과 주변의 지식인 사회는 이런 점에서 참으로 인상적이다.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의 지성적 문화가 폭넓게 뿌리내리고 있다. ‘자유지상주의적 권위주의’라는 난해한 제목을 단 대학 공개강연의 강의실이 미어졌다. 절반 이상이 중년과 노년의 청중이었다. 함부르크 시내 ‘탈리아 극장’에서 진행된 북 콘서트 ‘슈트라이트바’에서는 자본주의 비판을 주제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는데, 여기서도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함부르크 사회연구소에서 개최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 강연회 역시 인산인해였다. 이런 전문적, 이론적 성격의 강연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기이했다. 이러한 지적 성찰의 문화야말로 독일이 지닌 힘의 진정한 원천일 것이다.
성찰적 자기비판은 유럽의회 선거 직후 만난 교수들의 모습에서도 확연했다. 극우 정당이 1위를 차지한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보다는 나은 결과라지만, 독일에서도 극우적 성향의 ‘독일대안당’(AfD)이 2위를 차지한 선거 결과에 대해 교수들은 한결같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재앙’, ‘파탄’, ‘충격’, ‘경악’ 등의 용어를 써가며 격렬한 비판과 깊은 절망감을 토로했다. 나는 독일 지식인의 이러한 비관주의와 절망 의식에서 오히려 왠지 모를 희망을 느꼈다.
이처럼 자기비판에 가차 없는 독일인들이 놀랍게도 타인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했다. 함부르크 거리에서 피부로 느낀 것은 1990년대 초 귄터 그라스가 주장했던 대로 독일이 정말 ‘망명자와 난민의 조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버스에서건 전철에서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동유럽 등지에서 온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대학 캠퍼스에서 히잡을 쓴 학생들을 이렇게 자주 볼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2015년 시리아 난민 사태 이후 지난 10년간 독일은 약 40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였고, 실제로 연평균 60만명 이상의 난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인구의 5%가 난민인 나라가 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나라가 독일이다.
자기비판과 관용의 정신이 독일을 성숙한 민주사회로 만들었다. 특히 비판적인 언론과 깨어 있는 대학이 위기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다. 그들은 역사에서 배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비극적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 한겨레 2024.06.19.
학살이 돈이 되는 세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뼈만 남은 유대인, 사악한 나치, 혹은 단 한 명의 유대인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독일인 쉰들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유대인 강제수용소 바로 옆에 위치한 나치 친위대 관사에서 자신이 꿈꿔온 중산층 정상 가족을 이루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회스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다.
영화 속 회스 가족의 가장인 루돌프 회스는 실존 인물이다. 4년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소장으로 일하면서 1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했고, 전후에 전범 재판을 통해 교수형을 당했다.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누렸던 “낙원과도 같은 삶”은 정확하게 나치의 유대인 학살 덕분에 가능했다. ‘인종청소’라는 정치적 명분 뒤에 놓여 있던 현실적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 재산 약탈이었다. 그 재산에는 유대인이 사용하던 치약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대인의 모든 것을 싹싹 긁어다 독일인의 배를 불렸던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 즉 ‘이익의 지대’다. 전쟁으로부터, 인간의 죽음으로부터, 그 생명의 갈취로부터 이득을 얻는 인간과 전쟁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혜를 누리는 건 그저 몇몇의 힘 있는 권력자들만은 아니다. 나치를 위해 유대인 소각장을 디자인하고 건설한 업자나 남편이 강제수용소에서 거둬들인 유대인의 모피를 챙기는 회스의 아내 역시 덕분에 풍족함을 누린다.
시체를 쌓아 이익을 얻는 건 새삼스럽지 않다. 자랑스러운 ‘K방산’도 그렇다. 한국인 역시 분단만 아니라면 전쟁과 무관할 것 같지만 의외로 가까이 얽혀 있다. 예컨대 매해 한강에서 개최되는 서울세계불꽃축제는 폭약과 화공품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방산기업이 “안전한 발사기술과 불꽃기술을 알리는 홍보의 장”이다. “아름다운 불꽃은 정교한 폭약에 대한 호감도를 높여주는 스텔스 마케팅”(문아영)이고, 불꽃쇼를 즐기는 ‘평범한 시민’들을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전쟁 산업으로 연루시킨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을 그 ‘이익의 지대’에 조용히 남겨 두진 않는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치밀한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그 이익의 지대를 가득 채운 죽음과 고통의 공기를 2024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회스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 흐르는 동안에도 관객들은 계속해서 아우슈비츠 철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절규, 그리고 소각장의 화염이 인간을 태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관객들이 ‘돈이 되는 죽음’이 발산하는, 신경을 긁는 메스꺼운 공기에 포획되는 동안에도 회스 가족은 그 앰비언스를 감각하지 못한다.
2024년 연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 소식이 들려오는 지금, 아우슈비츠에서 나치가 누린 일상을 관람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물론 홀로코스트를 기억하자는 뜨거운 요청이 스크린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지금 진행 중인 학살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경고도 놓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자지구에서 들려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비명을 그저 백색소음으로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 역시 피해가기 어렵다.
나는 요즘 페미니스트 비평가 그룹인 프로젝트38 동료들과 함께 ‘제2회 전쟁과여성영화제’를 준비 중이다. 이번 영화제 캐치프레이즈는 “전쟁의 일상화, 일상의 전쟁화”다.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에 질문을 던지고 전쟁을 영속하는 외교 정치가 어떻게 생명을 갈취하는가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려 마련한 자리다. 오는 6월28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가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 2024.06.19.
불통과 불신, ‘윤석열식 의료개혁’의 끝은?
의사들의 대규모 휴진에 정부는 업무개시명령, 면허 정지, 구상권 청구 검토 등 또다시 강수를 빼들었다.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추가 휴진을 예고하자 정부는 의협 해체까지 거론했다. 정부의 의대 증원 규모 발표(2월6일) 이후, 전공의들의 집단사직(2월19일)으로 촉발된 소위 ‘의료대란’ 사태가 만 4개월을 지나고 있다. 극한 대치가 이어지면서, 환자와 가족들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불신, 불통, 절망, 분노… 지켜보는 시민들도 함께 ‘집단 울화병’을 앓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암담함이다.
이 모든 사태는 느닷없는 정부의 ‘2000명’ 증원 밀어붙이기에서 시작됐다. 정부는 향후 5년간 2000명씩 의대 정원(현재 정원 3058명)을 늘려 1만명을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은 총선 직전까지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조정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러 번 시사했다. 그러나 총선 이후 정부는 2025학년도 의대 정원 증원분 2000명을 각 대학이 50~100% 사이에서 자율 결정하도록 방침을 바꿨고, 2025학년도 증원 규모는 1509명으로 정해졌다. 일거에 대폭 늘어나는 의대 증원 규모를 결정하고 변경하는 과정에서 어떤 설명이나 사과, 의료전문가들과의 진지한 의견 교환은 없었다. 의료계의 자료 공개 요구에 정부가 공개한 수많은 회의록 속에도 2000명 증원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
4월25일엔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출범했다. 정부는 의료계가 이 안에 들어와 의료개혁 방안을 논의하고 의견을 개진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의료개혁특위는 20명의 민간위원 중 의사 몫이 3명뿐으로, 의료계는 제대로 된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며 참여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은 정부가 저질러 놓고, 고통은 현장에 떠넘기고, 당사자들이 알아서 대안을 마련하라니 이런 무책임이 어디 있나. 그것도 잘못된 방향과 추진 순서, 잘못된 풀이법을 내놓고 그 안에서 해결하라고 한다. 일방통행으로 대규모 증원을 해 놓고 나선, 증원이 다 정해진 마당에 의사들이 의료개혁을 발목 잡고 환자들을 볼모 삼고 있다고 정부는 되레 의사들에게 호통치고 있다. 의대 정원을 늘린 것으로 정부는 할 일을 다 했으니, 이후 현장에서 벌어질 일들은 알아서 하라는 태도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고, 반대하는 세력들은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는 사회, 합리적 근거를 토대로 한 설득과 사회적 합의 과정은 사라지고, 여론과 힘으로 반대파를 굴복시켜 원하는 결론을 단시간 내에 얻어내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런 사회인가.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람이어도 법과 절차에 따라 재판해야 하고, 아무리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또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끝까지 설득하고 토론하고 중간 어느 지점에서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여론몰이로 정책이 통과된다면 법과 절차, 시스템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현 정부 들어 사교육, 연구·개발(R&D), 의사 증원 등 대통령의 한마디로 들쑤셔 놓은 난장판이 한두 곳이 아니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여러 분야를 초토화시키기도 쉽지 않을 정도다.
현재 의료 현장은 아우성이다. 전공의와 학생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필수의료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의료진의 피로도 누적되고 있다. 당장 내년엔 3000명의 의사 배출이 줄어들 판이다. 진짜 의료개혁은 시작하기도 전인데 멀쩡한 의료시스템만 쑥대밭이 됐다. 10년 후 의사 1만명을 늘리겠다는 목표보다 현재의 생사를 가르는 의료공백이 더 무섭다는 호소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는 스스로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 한 학년이 통째 유급될까 다급해진 정부는 의대생은 F학점을 받아도 유급시키지 않는다는 꼼수 특례규정을 내놨다. 애초에 대입 정원의 10% 이상 변동이 있으면 1년10개월 전에 공지하고 협의해야 하는데 이 같은 원칙을 스스로 허물었다. 누가 누구에게 법과 원칙을 얘기할 수 있나.
현 상황에서 시급한 것은 신뢰 회복과 소통이다. 서로를 믿어야 뭐라도 얘기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할 것 아닌가. 현 정부가 꿈꾸는 의료개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의사들의 자발적 의지와 협조 없이 의료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의료개혁의 화두를 던진 윤석열 대통령이 현재의 총체적 난국을 책임지고 풀어야 한다.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 : 2024.06.19.
지역쇠퇴 극복을 위한 지역정치
지역쇠퇴와 관련된 여러 말이 있다. 노인과 바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세간에 퍼져 있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지역거점대학이 학생 1인당 교육비와 연구·개발(R&D) 역량이 서울 중상위권 대학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입시생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최근 10여년 동안 더 가속해왔다는 점이다. ‘균형발전특별회계’나 ‘자치분권위원회’ 활동 등 정부의 가용 자원을 적지 않게 투자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역쇠퇴가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단극체제에서 나온 결과이다. 단극체제하의 중앙집중과 지방 특성화가 한때는 효과를 발휘하여 고속성장을 이루는 데 기여했지만 시대는 변했다. 선진국 대비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가 수도에 집중해 있고 이제 그 부작용이 다방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동산, 인구절벽, 지역소멸 문제 등 초고밀도 서울 집중은 여러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틀에 갇힌 지가 7년이나 되는 드문 사례도 지역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데서 온 것으로 짐작된다.
단극체제에서 작동되는 중앙 중심의 정치는 향앙(向央)정치로 고착화됐다. 해만 쳐다보는 해바라기처럼 지역은 중앙만 쳐다보고 있다. 중앙이 기획과 의사결정을 독점하면서 지역은 중앙의 재원에서 내려오는 떡고물을 받아먹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있다. 지역의 자립적인 역량은 위축되고 재원이 없으니 지역의 창의적인 의제와 실천은 바로 한계에 부딪힌다
중앙 대비 지역 예산의 경우 주요 7개국(G7) 평균이 6:4인 데 비해 우리는 아직 8:2이다. 그러면서 선거 때마다 중앙 정당들의 편가르기에 기만당하며 대한민국을 좌우로 각각 절반씩 나누고 있다. 지역주의가 문제라고 하면서도 정작 지역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전술한 분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지역이 중앙의 종속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 중앙의 재원을 배분받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지역 스스로 기획과 실천이 가능한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 지난 20여년간 지방분권 지역자치 의제를 시민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제시했지만 선거 때만 관심을 가질 뿐 선거 종료와 동시에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반복돼왔다. 흔히 대한민국에서는 지역정치가 선거만 있고 자치는 없다고 한다. 지역의 정치가 중앙 중심의 피라미드 정치 구조 속에서 선거용으로 전락한 데서 벗어나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지역자치로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실천 방안은 지역정당(local party)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스페인, 일본, 영국, 미국, 스위스 등 국가에서 자연스러운 지역정당이 우리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정당법에서 지역정당을 못하도록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현 정당법에 따르되 서울을 포함한 지역에 거점을 둔 정치결사체들이 연합하여 지역정당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정당 지원형 전국정당은 보충성의 원리에 따라 시군구와 광역시도 단위의 지역정당을 지원할 수 있다. 즉각적인 지역정당 활동이 가능하며 동시에 정당법 개정과 준연방 방식의 제도화를 위한 헌법과 법률 개정 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대안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이룰 수 있다면, 한국 정치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것이며 세계 정치사에 의미 있는 모델을 제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구호를 외칠 시점은 지났다. 오직 정치적 헌신만이 남아 있다. K팝, K컬처에서 나아가 한국 정치도 지구촌에 내놓을 수 있도록 K폴리틱스(K-politics)를 현실화하는 유쾌한 상상을 해보자.
안현식 부산경남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 회장·동명대 교수 : 2024.06.19.
오판이 부른 한국전쟁…비극 되풀이 말아야
며칠 뒤인 6월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4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전쟁은 20세기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자, 세계사에서는 동서 냉전을 심화시킨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과정에는 이 전쟁과 관련된 각국 지도자들의 심각한 오산과 오판이 있었다.
우선 북한의 경우를 보자. 북한 정권 수립 직후부터 ‘국토완정’을 앞세우며 전쟁을 통한 통일을 꿈꾸어온 김일성은 1949년과 1950년 봄에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 전쟁 지원을 요청했다. 1949년 봄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거부하던 스탈린은 1950년 봄에는 이 요청을 받아주었다. 이때 스탈린은 전쟁이 나면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냐고 김일성에게 물었다. 김일성은 중국의 국공내전에도 개입하지 않던 미국이 그보다 작은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할 리가 없다고 주장하고, 혹시 미국이 개입한다 해도 그 전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낼 계획이라고 스탈린을 설득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이 나자마자 즉각 개입을 결정하고, 유엔군을 조직해 한국전쟁의 주역으로 나섰다. 김일성의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
또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의 남로당 잔여 세력 20만여명이 봉기해 남한 정부를 전복시킬 것이고, 북한군은 한달 이내에 남해안까지 진격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좌익 세력의 봉기는 없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해 3개월가량을 버텼다. 그리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전쟁은 그 뒤로도 3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를 보면, 한국군은 사망자 13만여명, 부상자 45만여명, 북한군은 사망자와 부상자 52만여명, 유엔군은 사망자 3만여명, 부상자 10만여명, 중국군은 사망자 13만여명, 부상자 20만여명 등이었다. 민간인 피해도 커 남한에서는 사망자가 24만여명, 학살된 민간인이 12만여명이고, 북한에서는 28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 결과적으로 북한은 엄청난 희생자를 낸, 불필요한 전쟁을 도발했다는 비난만 받게 되었다.
소련의 경우를 보자.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하자 스탈린은 미-소 냉전 대결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1949년 9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우자, 동아시아의 정세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 정권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면, 소련의 영향력이 한반도 남단까지 미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소련이 한반도 전쟁에 직접 군대를 보내기는 어렵다고 보고, 전쟁이 일어나 만일 북한이 불리하게 될 경우엔 소련 대신 중국이 나서서 군대를 지원하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의 개입을 가장 우려한 스탈린은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연설과 맥아더 전문 등 여러 정보를 분석해,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이 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한국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판단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김일성의 전쟁 개시를 용인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이 나자마자, 이를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미국에 도전한 행위로 받아들였다. 미국은 일본에 있던 극동사령부의 미군을 바로 한국에 보내고, 대만에도 7함대를 파견했다. 미-소 냉전이 고조되던 시점에 미국은 소련의 도전에 강력히 대응한 것이다. 스탈린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중국의 경우를 보자. 스탈린은 4월 모스크바에 온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마오쩌둥의 동의를 조건으로 걸고 북한의 전쟁 개시를 허락했다. 이에 김일성은 5월에 베이징으로 가 ‘스탈린은 이미 전쟁 개시에 동의했다’며 마오에게 동의를 요청했다. 이때 마오가 스탈린에게 전문으로 동의 사실 여부를 문의하자, 스탈린은 회답 전문에서 자신은 동의했지만, “만일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다시 토론해서 정해야 한다”고 했다. 마오도 전쟁 개시의 책임을 같이 지자는 말이었다. 결국 마오는 미군의 개입을 우려하면서도 전쟁 개시에 동의했다. 마오가 동의한 것은 스탈린이 이 전쟁을 하기로 이미 결심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여러모로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던 신생 중국의 지도자로서 마오는 스탈린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마오가 동의했기 때문에, 그해 10월 북한에 26만명의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휴전 때까지 13만여명의 중국군이 사망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은 1949년 6월 한국에서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모든 미군을 철수시켰다. 이는 북한에서 소련군이 철수한 것에 대응한 것이긴 했지만,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간과한 것이기도 했다. 미군 철수 후에도 설마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남침하겠느냐고 생각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보다는 경제원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애치슨라인 같은 것을 발표해 소련과 북한을 고무시켰다. 그 결과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었다.
한국의 경우를 보자. 한국은 1949년 이후 북한과 잦은 국경선 충돌을 벌였고, 북한의 전면 남침에 대해서도 우려해 미국에 군사원조를 대폭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낮게 보았고, 오히려 군사원조를 늘려주면 남한이 북침을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북한의 전면 남침에 제대로 대비하지도 못하면서 ‘북진통일’을 외치며 허세만 부리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남긴 교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미국·러시아·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한다. 둘째, 한반도의 통일은 한쪽이 다른 쪽을 굴복시키는 전쟁으로는 불가능하며, 전쟁은 남북한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만을 남길 뿐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은 평화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추진되어야 한다. 셋째, 한반도의 통일은 미국·중국·러시아 등 아직도 한반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주변 강국의 협조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 전쟁에 관계한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이라면 한국전쟁이 남긴 이러한 교훈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만 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 한겨레 2024.0620
정규직-비정규직-사용자, 삼체 계급을 넘어
이게 없으면 재미가 있을까. 드라마나 소설에는 자주 등장한다. 엇갈린 감정으로 예상 못 한 사건을 만드는 삼각관계 얘기다. 현실에서 닥치면 아프다. 사회적 차원의 삼각관계도 있다. ‘정비사’가 그렇다. 고장 난 것을 고치는 정비사가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사용자’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정비사’는 우리가 마주해온 삼각관계다.
물체에도 삼각관계가 있다. 오티티(OTT) 시리즈로 나온 소설 ‘삼체’로 인해 널리 알려진 삼체 문제는 고전물리학의 난제였다. 우주에 떠 있는 두 별처럼 두개의 물체 사이에 작동하는 힘과 그에 따른 움직임은 예측 가능하다. 여기에 물체 하나만 추가해 삼체(three-body)가 되면 물체가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이 어렵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삼체 문제의 일반 해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한다.
연인의 삼각관계 결과는 대략 몇가지로 예측할 수 있다. 삼각관계를 벗어나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쌍방관계, 물체로 보면 이체관계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삼각관계에 빠져 셋 모두 파멸할 수도 있고 셋 모두 관계를 벗어나거나 극히 어렵지만 동시에 여럿을 사랑하는 ‘폴리아모리’에 이를 수도 있다.
‘정비사’ 삼각관계는 정규·비정규직이 단결하여 사용자에게 맞서거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분열해 사용자가 이익을 얻거나, 서로 얽혀 셋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거나, 삼체가 역동적 균형을 이루는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전통적 노동운동은 첫번째의 노동 단결, 사용자는 두번째의 분열 유형을 좋아했다.
물체 사이에 수학적 계산이 가능한 힘이 작동한다면, 계급 관계에는 수치로 나타내기 어려운 감정이 작용한다. 물체에 끌어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이 작용한다면, 노사 관계에는 같은 기업과 산업에서 일하는 동질감과 서로 이해가 엇갈리는 이질감이 작동한다. 정비사 삼체에 작동하는 감정은 더 복잡하다. 비정규직은 사용자만이 아니라 정규직을 향한 감정을 갖는다. 엇갈리는 감정이다. 같은 노동자로서 선망도 있지만 원망도 있다. 때때로 비정규직은 사용자보다 정규직을 더 미워한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향한 연민과 연대감만이 아니라 우월감도 있다. 사용자와 거리감보다 비정규직에 대한 우월감이 크면 비정규직에게 사용자처럼 갑질한다.
때때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물리적으로 충돌했고, 정규직이 시험능력주의를 앞세워 차별에 앞장서거나, 극한 갈등과 소송을 통해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거나, 직접 계약직이나 자회사를 거쳐 차별이 줄어드는 사례가 있다. 사례가 다양할 뿐 ‘정비사’ 삼체 문제의 일반 해법은 등장하지 않았다.
시민의 다수가 삼체 중 하나에 속한 당사자다. ‘정비사 삼체’는 사회를 바꿨다. 한국은 산업화-민주화-세계화-양극화를 경험했다. 노동시장이 나뉘면서 양극화는 심해졌다. 사회에 떠도는 능력주의-우월감-약자에 대한 갑질, 불안정 노동-박탈감-분노와 혐오, 보편적 가치보다 자기 이익에 붙들린 진영논리, 일터의 권리를 바라지만 노조를 싫어하는 모순된 생각은 ‘정비사 삼체’를 둘러싼 감정을 반영하거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치명타를 입은 것은 거대 양당을 넘어서려던 진보세력이다. 날아오르려면 탄탄한 활주로는 아니더라도 박차고 오를 기반이 필요하다.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이라는 양 날개로 날아오르려는 진보세력의 전략이 있었다. 그러나 핵심 기반으로 여긴 노동계급이 삼체의 덫에 빠지면서 망상이 되었다.
상황은 또 달라졌다. 노동시장은 비정규직 이름으로 담을 수 없는 단기계약직, 플랫폼 프리랜서, 독립계약자, 자영업자를 만든다. 노동시민은 일체도 이체도 삼체도 아닌 다체(multi-body)다. 독재라는 일체에 맞서 ‘민주 대 독재’의 이체 구도로 넘었던 민주노조운동은 ‘정비사’ 삼체 문제를 풀지 못했고, 컨베이어 대신 플랫폼이 깔린 사회공장에서 다체가 된 노동시민에게 해법이 되기 어렵다.
노동시장 분화에 따른 다양한 특성을 디테일하게 이해하는 ‘차이 사랑’, 각각의 특성에 맞게 권리를 찾아가는 ‘경로 다양성’, 이익을 다투는 삼체관계에서 호혜적 다체관계로 ‘차원 이동’ 등 새로운 해법이 절실하다.
조건준 | 아무나유니온 대표 : 한겨레 2024.0620
몸의 일기를 쓴다
얼마 전 후배가 74세의 딩크족 노부부에 대한 다큐 한 편을 소개했다. 핵심은 ‘느림’이었다. 70대가 되면 ‘후다닥’ 밥을 차리는 게 불가능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노년 코하우징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나에게 후배는 “그냥 넓은 집에서 친구들과 다 같이 사세요. 70, 80대가 되어서 각자 공간을 갖는 게 의미가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사실 그 프로젝트에서 비용이나 건축법 못지않게 고민이 된 것은 ‘늙은 몸’에 대한 구체성이었다. 건물 안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할까? 몇살까지 운전할 수 있을까? 늙은 몸이 도통 가늠되지 않을 때 나는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를 다시 읽는다.
51세 때는 “날렵한 걸음걸이, 유연한 발목, 견고한 무릎, 탄탄한 장딴지, 튼튼한 엉덩이”를 가진 자기 몸에 우쭐한다. 그러나 딱 1년 후에는 논쟁을 하던 중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극도로 낙담한다. 55세에는 검버섯이 돋았고, 59세에는 스스로 가려운 곳을 정확히 찾아 긁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 60대에는 어지럼증, 사라진 성적 욕망, 심해진 건망증, 70대에는 이명,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방귀, 전립선비대증, 휴대용 소변 주머니와 더불어 산다. 80대에는 바지 앞 지퍼를 잊고 잠그질 않는 일과 낮잠이 일상이 된다.
이 소설의 시작점. 보이스카우트에 참가한 열세 살 주인공은 친구들 장난으로 나무에 묶여 숲에 버려졌고 겁에 질려 똥을 쌌다. 극도의 수치심 속에서 주인공은 결심한다, 두려움에 지지 않기 위해 ‘몸의 일기’를 쓰겠다고. 몸이 무엇을 할지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몸의 모든 것에 대해 기록한다면, 몸에 휘둘리는 일은 없지 않을까?
열일곱이 되어서도 주인공의 생각은 변함없다. 아직도 몸 속속들이 익숙하지 않았고, 발전된 의학이 자기 몸에 대한 낯선 느낌을 없애주진 못했기 때문에 “루소가 산책길에 식물채집을 했던 것처럼” 자기 몸을 관찰하고 채집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열셋부터 여든여덟까지 몸이 벌이는 사건, 몸이 보내오는 온갖 신호를 기록한다.
알다시피 몸은 인식의 근거이고 권력관계의 현장이다. 따라서 두려운 몸, 뻐기는 몸, 유능한 몸, 늙고 병난 몸, 심지어 잊힌 몸까지 오로지 몸이 겪는 몸의 생애사를 기록한 이 소설은, 다른 한편으로는 훌륭한 정치적 에세이이자 인류학적 자기 관찰지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것이 남성 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세상은 온통 건강과 ‘피지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여성의 몸, 늙은 몸, 장애인의 몸, 성소수자의 몸에 대해서는 여전히 지나치게 적게 말한다. 세상 n개의 몸에 대한 디테일에 우리는 무지하다.
나도 몸에 대해 생각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릴 때 음식을 씹지 않고 물고 있었고, 청소년기에 첫 생리와 더불어 관능적 쾌락에 눈을 떴고, 청년 시절 고문으로 온몸이 단풍나무처럼 변한 적도 있지만, 그 어느 때도 몸이 탐구 주제였던 적은 없다. 나는 언제나 몸이 아니라 정신, 이념, 의지가 나인 것처럼 살았다. 하지만 틀렸다. 몸이 나에게 협조하지 않는 순간이 벼락처럼 온 후 나는 비로소 몸이 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이제 몸의 일기를 쓴다.
시네필을 자처하는 내가 영화관에서 까무룩 졸았을 때의 당혹감, 여권 사진에 포토샵은 필요 없다고 ‘보디 포지티브’를 흉내 내지만 깊어져가는 M자 탈모 앞에서의 속수무책 두려움, 임플란트라는 이물질에 적응하는 고통,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아이고’라는 곡소리를 나는 쓴다. 나는 매일매일 내 몸과 경합하고 복종하고 분노하고 화해한다. 나는 내 몸과 분투 중이다.
<몸의 일기> 주인공은 일기를 딸에게 남겼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나는 그것을 내가 몸을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몸이 나를 끌고 가게 하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쓴다. 저자의 말처럼 “흐릿함에서 벗어나기, 몸과 정신을 같은 축에 유지하기” 위해 나는 쓴다. 자기 배려의 기술로서 몸의 일기. 아직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경향 : 2024.06.20.
고문당했다, 다들 날 멀리했다, 시 쓸 때만 난 살아있구나
시인은 오송회 사건으로 1년을 복역하고 출소한다.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시요? 빨갱이 낙인이 찍힌 그날 이후, 사람들이 나를 멀리합디다. 나는 혼자, 살기위해 시를 썼어요. 오직 시를 쓰는 순간 아! 내가 살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시인 강상기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잔솔밭에 타오르는 연기/ 억새며/ 가시덤불이며/ 저 모조리 타버리고 남은 잿바닥을 갈아/ 나는 새 씨앗을 뿌리러 왔다’
불에 델 듯이 강렬하다. 동학 접주의 격문 같고, 조태일의 ‘식칼’ 혹은 ‘시는 압제자의 가슴에 꽂는 창’이라 했던 김남주의 ‘창’ 같기도 하다. 불을 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화전민이기는 하나, 이 시, ‘화전민’의 불길은 산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있다. 겉으로야 비탈을 개간하여 연명하는 화전민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 나라 백성으로 살기를 거부한 은자(隱者), 아니 세상을 불 질러 갈아버리려는 자욱한 혁명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렇게 쓰면 탈이 나는데, 탈이 나던데, 이 시를 쓴 때는 5·18이 나던 해, 1980년 가을이다. 시인은 뒷날 이로 인해 엄청난 ‘화상’(火傷)을 입게 된다.
시인 강상기, 1946년 전북임실 태생이다. 어려서 신석정의 시를 읽으며 자랐다. 고3 때 습작 10편의 시를 들고 신석정이 근무하던 전주상고를 찾아간다. 그가 자리를 비워 ‘나와/ 밤과/ 슬픈 별뿐이로다/…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그의 ‘슬픈 구도’를 필사한 것, 그리고 습작을 좀 봐주십사 여쭈는 편지를 두고 왔다. 다시 찾아갔을 때, 시인은 학생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올백으로 넘긴 희끗한 머리, 파이프를 물고, 내가 꿈꾸던 시인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시누대가 심어진 한옥마루에 앉아 ‘애란아, 애란아, 술 좀 가져오너라’ 하십디다. 은주전자에 매실주를 마셨어요. 달짝지근한 첫 술 맛. 통 말이 없으셔서 내가 학생이 술 마셔도 되냐고 했더니, 시 쓸라면 술을 마셔야지, 하셔서 두 주전자를 비웠어요. 그리고는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를 그리워하네’, 딱 두 줄, 시가 이런 것이라고 장 콕토의 시를 얘기합디다. 술과 시를 그렇게 배웠어요.”
시인은 시를 써보라고 했다. ‘짧게 써라, 한자 쓰지 마라, 산만하게 쓰지 마라’고 했다. 학생은 그 말을 평생 자경(自警)으로 삼았다. “어린 내가 그날 시인이 돼버린 거요, 술이 불콰하여 집에 가는 길에 벌써 시인이 돼버린 거라. 그 봄날을 잊을 수가 없지.” 그날 이후 학생은 매일 한편의 시를 썼고, 좀 모아지면 그것을 들고 시인의 집으로 갔다. “선생님 생신이 1907년 음력 칠월칠석, 양력은 광복절입니다. 내가 키운 닭을 들고 인사드리러 갔더니, 백석시집 ‘사슴’을 건네주면서 읽어보라 해요. 몇 편 보다가 집에 가서 읽고 돌려드리겠다 했더니, “책은 여행을 싫어해”하면서 안 빌려주는 거요. 할 수 없이 나는 토방에 앉아 소리 내어 시를 읽고, 선생은 술잔을 들고 했지요. 백석이 당시 금서여서 뒤탈 날까봐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강상기는 전주교대 재학 중이던 1966년 잡지 ‘세대’에 시 ‘이천이백만헥터의 딸기밭’으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천이백만헥터는 남북한의 면적이고, 딸기밭은 딸기가 뭉개져 피범벅처럼 보이는 밭, 전쟁과 살육과 분단을 상징한다. 이어 1971년 동아일보에 시 ‘편력’이 당선됐다.
1981년 군산제일고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4·19를 맞아 동료교사들과 학교 뒷산 소나무 아래 모였다. 4·19가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된 것을 한탄하고, 5·18희생자를 위한 묵념도 하면서 막걸리를 마셨다.
“전두환이가 말이야, 미국서 영어로 차를 시키는데 ‘아이 엠 커피’라고 했다는 거야. 전두환이 허벅지가 퍼렇게 멍들었는데 왜 그런지 알아? 이순자가 하도 기뻐서 ‘여보 이게 꿈이여, 생시여’하면서 쥐어뜯어 그렇게 됐다는 거라, 그런 우스갯소리들. 이 무서운 세상, 농민은 저곡가에 시달리는데 우리가 일상에 연연하여 우물쭈물 살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 아닌가, 그런 얘기들을 나누었어요.” 그리고 오장환 시집 ‘병든 서울’을 복사 한 것, 돌려 볼 책 몇 권을 나누고 헤어졌다. 이것이 5공의 대표적 공안조작사건 중의 하나인 ‘오송회’ 사건의 진실이다.
강상기는 그해 11월4일, 수업도중 군산경찰 정보과 형사에 의해 강제 연행된다. 한 제자가 시집사본을 버스에 놓고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종점에 이르러 버스차장이 그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해방을 병상에서 맞은 오장환은 이 시를 쓴 이듬해 월북했다.
‘병든 서울’은 금서였다. 시에 나오는 ‘인민’이라는 말을 고리로 오송회는 엮인다. 인민은 불온이며, 용공이고 이적이니, 시집을 소장한 교사 5명은 보안법 위반, 즉 빨갱이가 된다. 소나무 아래 5명, 그래서 경찰의 작명이 ‘오송회’(五松會)다. “대공 분실로 옮겨지더니 눈자위에 칼자국이 있는 사람이 들어왔어요. 옷을 벗기고 물고문 전기고문, 몸을 철봉에 매다는 통닭구이 등 온갖 고문을 당했지요. 그래도 인정을 안 하니까 내 시 ‘화전민’을 들이대면서 이 간첩새끼 하고 두들겨 팹디다.”
오송회는 5명에 불고지죄를 더해 9명이다. 전원 구속된 오송회는 광주교도소에서 항소심을 기다리다 ‘남민전’을 만난다. ‘오송회’ 채규구 엄택수 이옥렬 강상기, ‘남민전’ 안재구 이수일 김남주 노재창 김영옥. 시인 강상기와 전사 김남주는 그렇게 조우한다.
“미결수라 그랬는지 남민전 사람들하고 옥살이를 같이했어요. 안재구 선생 주재로 매일 토론하고. 남주는 나와 동갑에 시인이라 친하게 지냈지요. 일본어판 ‘프랑스혁명사’를 읽으면서 어떤 대목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거기서 ‘진혼가’, 칫솔대를 갈아 우유팩에 눌러 첫 시집을 썼다는데 같이 지내면서도 감쪽같이 몰랐어요.” 강상기는 훗날 투병중인 김남주를 위해 시 ‘한 나무에 핀 꽃, 남주에게’를 쓴다.
오송회 사건은 1983년 대법원에서 고등법원 형량 징역 7~1년, 그대로 확정됐다. 시인은 1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 ‘…응답하라/ 나에게 국가는 무엇인가를/ 대낮도 캄캄한 저녁이어서/ 분노가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고 시 ‘1인 시위’를 썼다. 사법부가 권력의 장단에 춤을 추던 당시, ‘공산주의 찬양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전원 법정구속에 전원 실형을 때린 뒤 승승장구한 광주고법 재판장은 이재화이다. 이 사건은 2008년 재심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는다. 재심재판장은 “처절한 고통을 받았던 점에 대하여 깊은 사과”의 말을 짤막하게 전했다. 소나무 아래 모인지 26년만의 일이었다.
저녁에, 그의 단골 해장국집에서 시인을 만났다. 지팡이 두 개를 짚고 들어온 그의 걸음걸이는 휘청휘청 위태로웠다. 눈빛은 총총하되 50㎏이 안된 몸은 허깨비처럼 말랐다. 나는 소주를, 그는 가져온 허브차를 마셨다. 고문과 해직과 이혼(뒤에 재결합), 막노동판을 거쳐 학원 강사로 살아온 그 모진 세월이 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시요? 빨갱이 낙인이 찍힌 그날 이후, 사람들이 나를 멀리합디다. 나는 혼자, 살기위해 시를 썼어요. 오직 시를 쓰는 순간 아! 내가 살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첫 시집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이후 ‘민박촌’ ‘와와 쏴쏴’ ‘콩의 변증법’ 등 시집과 산문집 10여권을 펴냈다.
그의 근작 ‘조국연가’의 전문이다. 이 세상에 불을 지르는 ‘화전민’에서, 대낮도 캄캄한 ‘1인 시위’의 분노를 넘어, 다시 새 씨앗을 뿌리지 않을 수 없는 ‘조국연가’에 이르러, 샛별과 달빛과 햇빛 같은 시어들이 등장한다.
‘강물에 달빛이 고기비늘처럼 하얗게 빛날 때면/ 벗이여, 나는 조국의 숭고한 정신을 꿈꾸었다/ 바다에 비친 햇빛이 너울너울 출렁일 때면/ 벗이여, 나는 조국의 뛰는 심장을 생각했다/ 유리창 칸칸이 불을 켜고 달리는 야간열차를 볼 때면/ 벗이여, 나는 조국의 아련한 모습을 보았다/ 고요한 숲 속 소쩍새 울음이 어둠만큼 깊어질 때면/ 벗이여, 나는 갈라진 조국의 아픔에 귀 기울였다/ 해 저물어 어둠 와 맨 처음 샛별이 나타날 때면/ 벗이여, 나는 하나 된 조국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노을 물든 하늘에 노란 은행잎 아슬아슬 나부낄 때면/ 벗이여, 나는 조국의 이름을 내 심장에 새겼다’
이광이 :한겨레 2024.6.21
AI와 제조업, 그리고 노동의 미래
인간이 하는 일을 로봇이 대체하고, 그 결과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가 인공지능(AI) 기술 발달로 고조되고 있다. 2022년 11월 말 오픈AI가 대화형 AI 챗봇 챗GPT를 공개한 이후 챗GPT3 버전이 나오면서 기계가 인간의 손과 근육뿐 아니라 두뇌마저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자동화로 은행 업무 일자리 66%가 사라질 수도
국제통화기금(IMF)이 17일(현지시간) AI 확산이 대규모 실업을 부를 가능성을 심각히 경고했다. 생성형AI가 생산성 향상을 촉진하고 공공서비스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지만 대규모 노동 혼란과 불평등 심화 등 심각한 우려를 초래한다고 전망했다. 특히 AI로 인해 고숙련 직종에서도 일자리 감소가 발생할 수 있으며, AI를 장착한 지능적인 로봇이 등장하면 블루칼라 일자리의 자동화로 이어져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씨티그룹은 19일(현지시각) AI 확산에 따른 금융분야 변화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를 냈다. 씨티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 분야 중 은행이 AI로 인한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분야로 꼽혔다. 은행 업무 자동화로 최대 66%가량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AI로 인한 업종별 자동화 비율 전망은 보험이 48%로 은행 다음으로 높았다. 그 뒤를 이어 에너지(43%), 자본시장(40%), 여행(38%), 소프트웨어·플랫폼(36%) 등의 순이었다. 소매(34%), 커뮤니케이션·미디어(33%), 공공서비스(30%), 자동차(30%) 업종도 AI에 의해 사무자동화가 이뤄질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 주요 은행은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험을 하고 있다. JP모건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도이체방크 등은 AI에 기반한 고객 자산 관리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BofA는 금융 자문 애플리케이션인 ‘에리카’를 도입했고 JP모건은 오픈AI 모델을 활용한 투자상품 추천 서비스인 ‘인덱스 GPT’를 출시했다. 도이체방크는 AI로 부유층 고객들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관리한다. 골드만삭스는 금융계약서를 작성할 때 AI를 활용해 금융규제를 자동으로 반영한다. ING그룹은 잠재적 부실을 조사하는 데 AI를 이용한다.
과거 자동화의 담론들은 주로 육체노동(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술들에 관한 것이었지만 챗GPT3 이후로는 법조인 회계사 금융인 교사 리포터 저널리스트 등이 속한 화이트칼라 일자리 등이 위협받으면서 AI 미래에 대한 전문직들의 두려움이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산업혁명 이후 자동화는 계속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일자리가 대량으로 사라진 일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기존 일자리가 사라지기도 하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칩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 기업 엔비디아가 생성형AI 붐을 타고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 거대 기술기업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3대기업’으로 등극하면서 AI산업을 대거 재편하고 있는 것을 보면 4차산업혁명형 제조업의 미래를 낙관해볼 수도 있다. 엔비디아 총마진은 2023년 60%에 이어 2024년 74%, 2025년 76%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AI 애플리케이션은 향후 2028년까지 데이터센터 51%, 헬스케어 13%, 금융 10% 등에 적용되면서 산업의 지형을 새롭게 바꿀 것이다. 빅테크의 거대한 데이터센터에 이어 글로벌 전력 관련 산업에 새로운 붐을 형성하고, 구리를 비롯 원자재산업에 신르네상스를 불러왔다. 아울러 나노단위 반도체 파운드리와 패키징, 고대역폭 메모리(HBM) 기술을 발전시켰다.
제조업은 여전히 기술혁신의 근원지
제조업은 아직까지 가술혁신의 가장 주된 근원지이고 노동의 미래이기도 하다. 금융 운송 경영 서비스 등 제조업을 대체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고생산성 서비스 부문은 제조업 부문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공산품을 경쟁적인 가격과 품질로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한 나라의 고용과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일자리에 끼치는 AI 자동화의 영향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새로운 미래를 재설계하자는 것이다. 실업보험 제도를 강화하고, 노동자들에게 평생교육을 제공하며, 이같은 완충장치 마련을 위한 재원은 AI 적용과 생산성 향상에 따른 주가상승, 기업 이윤 증가 등에 따른 새로운 부의 확대를 통해 조달할 수 있지 않을까.
안찬수 오피니언실장 내일 2024-06-21
‘따르면 기사’를 보이콧하라
‘따르면’에 따르면 쓰지 못할 기사란 없다. 기자 입장에선 ‘그런 일이 있었다’거나 ‘그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며 사실 검증 주체를 발화자에 돌려 검증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언론사의 온라인부, 24시팀 등으로 불리는 ‘이슈대응팀’에서는 ‘따르면’ 기사를 집중 양산해낸다. 이들 기사는 소셜 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나 유튜브 채널 등을 출처로 둔다. 물론 이들 기사에만 ‘따르면’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자가 직접 묻고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기사들에도 정부 기관이나 특정 업계의 이름을 빌린 ‘따르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별도의 취재 과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양산형 ‘따르면 기사’와는 차별화된다.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몇몇 유튜버의 ‘사적 제재’는 피해자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피해자와 사전 협의를 거쳤다”며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했고, 그 사이 엉뚱한 이가 가해자의 연인으로 지목돼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를 통해 월 수천만 원의 수익을 거둔 이들의 행태는 ‘사이버렉카’로 볼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언론사가 ‘따르면’ 기사의 문법에 따라 이를 받아썼다는 점이다. 기사에 해당 유튜브의 채널명이나 영상 제목이 언급됐고 누리꾼들은 이들 유튜브로 몰려가 원본 영상을 시청했다. 언론 보도가 곧 시청자 유입의 마중물이 됐다.
이러한 보도 행태가 계속 되는 까닭은 뉴스룸이 ‘선 출고, 후 데스킹’이라는 시스템 하에서 페이지뷰 올리기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실에서는 이른바 ‘경마 저널리즘’을 피할 길이 없다. 애당초 경마 저널리즘이란 선거전에서 후보자의 공약‧정책에 관한 분석보다는 경마장 말들의 경주를 보도하듯 판세 위주로 보도하는 행태를 비판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주목 경제 시대의 뉴스 보도는 그 자체로 ‘경마’가 됐다. 개별 기자, 언론사들이 경마장의 말 혹은 기수가 되어 ‘더 빨리, 더 많이’를 목표로 말 달리듯 기사를 써내기 때문이다. ‘페이지뷰 올리기’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가장 쉽고, 빠른 기사 형태가 ‘따르면 기사’다.
20년 만에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재조명하는 대다수 언론의 보도 방식은 사이버렉카를 중계하듯 쓰는 일련의 스트레이트 기사 또는 여기에 세간의 반응을 덧붙인 박스 기사 정도였다. 소수 언론만 사이버렉카의 해악, 사람들이 ‘사적 제재’에 몰입하는 이유와 문제점 등을 기획 기사로 짚고 ‘스트’나 ‘박스’ 형태의 흥미 위주 기사는 쓰지 않았다.
이것은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한 뉴스룸과 아닌 곳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따르면 기사’에서 기자는 ‘이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전달만 하는 역할로 축소된다. 그러나 한 줄 바이라인에 뜨는 엄연히 기자의 이름과 언론의 사명, 기사가 초래할 피해 등을 고려하면 기자는 엄연히 해당 사실을 검증해야 하는 주체다. 기사의 언급만으로도 공신력을 획득하는 사이버렉카의 위상을 감안해서도 그렇다.
20년 전, 사건 발생 당시에도 언론은 2차 가해 논란에 휩싸였다. 언론사들은 보호자 동의 없이 수사 장면을 촬영하거나, 모자이크 처리를 했어도 지인들은 알아 볼 법한 피해자의 얼굴 등을 그대로 내보냈다. 당시 피해자를 최초로 상담했던 김옥수 전 울산생명의전화 가정·성폭력상담소장은 지난 13일 기자간담회에서 “상담자가 보호자를 대신해 각 언론사에 항의했으나 정정 보도를 올리고 사과한 곳은 CBS 한 곳 뿐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20년 뒤,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다시 목도하고 있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됐을지도 모른다. 20년 새 온라인 뉴스 시장은 비대하게 성장했고, 소셜 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버렉카 등을 무분별하게 따라 쓰는 기사는 일상화됐다. 미확인 보도에 대한 죄책감과 일말의 위기감은 페이지뷰로 세탁됐다. 그러는 새 사이버렉카와 이에 공생한 언론들에 의해 심각한 정서적‧물질적 피해를 입거나, 때로는 생의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희생양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그간 언론사 내에 ‘돈을 이렇게 벌어도 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과 함께 치열한 숙의가 부재한 탓이다. 온라인 부서에서는 사이버렉카를 중계해 페이지뷰를 올리면서도, 지면 부서 등에서는 사적 제재를 비판하고, 칼럼‧사설 등을 통해서는 준엄하게 심판하는 것이 뉴스룸의 현실이다. 언론사 전체로 보면 이것은 유체이탈이지, 각자가 할 일에 충실하다는 말로 덮어둘 수 없는 부분이다.
가장 명료한 해결책은 ‘따르면 기사’의 보이콧이다. ‘돈벌이가 없다’는 현실론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가해가 되는 방식은 지속 가능한 수익원이 될 수 없다. 각 언론사들이 ‘밀양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자사의 보도를 두고 구성원들끼리 머리를 맞대는 장을 마련하길 바란다. 이것은 저널리즘 윤리에 관한 것이기도 하면서, 언론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중차대한 질문이다. 이슬기 전 서울신문 기자 미디어오늘 2024.06.22.
노동을 탄소중립동맹의 주체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유정길 운영위원(60+기후행동)이 ‘생태적 문명전환을 위한 실천 전략들’이라는 글(6월 4일 ‘시민언론 민들레’)을 실었다. ‘탈성장론, 불평등 해소와 노동전환의 담론 담아야’라는 나의 글(6월 1일 ‘시민언론 민들레’)에 대한 반론이다. 이글에서 유 위원은 환경운동의 관점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적고 있다.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은 연대하여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노동운동을 ‘자본-노동중심의 산업사회’를 유지해 온 세력’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은근 연대의 어려움을 내비친다.
또한 노동운동이 주장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일자리만 강조하는, 이념·조직의 비전이 없는 왜소한 운동이라고 지적하며 노동계의 ‘창조적이고 깊은 논의’를 촉구한다. 현상유지 전략을 넘어 기후위기 해결에 적극 나서라는 이야기겠다. 그러면서 노동조합도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라이트(Eric Wright)가 제안한 사회주의를 향한 세 가지 이행전략(단절, 공생, 틈새)을 ‘난잡할 정도로’ 실현해 볼 것을 제안한다.
노동이 앞장 서 기후위기 조장하는 걸까?
유정길 위원이 바라보는 한국 노동운동의 기후대응, 특히 ‘정의로운 전환’이 일자리에 갇혀있다는 인식이 딱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선뜻 “그렇다”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정의로운 전환이 일자리에 갇혀있다는 것은 노동자는 임금의 인상과 고용의 안정을 위해 성장을 지지하고 자본과 협력한다는 뜻을 안고 있다. 낯선 지적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노동을 자본, 국가와 함께 ‘경제성장동맹’(economic growth alliance)의 일원이자 생산의 수레바퀴(treadmill of production)를 밀고 가는 주역이라고 말한다(Gunderson, 2019). 노동이 성장에 헌신함으로써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기후위기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노동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노동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청바지를 예로 들어보자. 자본가는 청바지에 대한 수요 예측을 기반으로 생산을 준비한다. 기계설비를 들여오고 원단을 구매(수입)하는 한편 노동자를 고용해 생산을 개시한다. 제품의 종류나 생산량, 심지어 생산방식은 자본가가 결정하고 노동자는 ‘지시된 노동’을 수행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교섭을 한다고 해서 노동의 종속성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럼 ‘성장’의 지표랄 수 있는 생산량은 어떻게 결정될까. 노동자가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본가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생산량은 시장에서의 수요가 결정한다. 면화를 생산하고 실을 잣고 원단을 짜고 재단·봉제를 거쳐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한 줄로 묶어 끌어당기는 기관차는 수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토양착취 못지않게 베트남의 면화 노동자, 중국의 원단 노동자, 방글라데시의 봉제 노동자, 그리고 한국의 물류센터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벌어진다. 기후 발자국과 함께 노동착취도 국경을 넘어 지구 차원에서 이뤄진다. 달리 말해 노동자는 성장동맹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자연과 함께 자본가의 착취 대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의 원로 노사관계 학자인 하이만(R. Hyman)은 “자연에 대한 착취와 노동에 대한 착취는 자본주의 동학의 두 측면이다”라고 말하며 양자 사이의 연대를 강조한다.
성장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가 이끈다
경제학에서 세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것이다. 19세기 초에 제시된 이 주장은 200여 년에 걸친 경제학의 역사에서 고전파와 신고전파 경제학의 주춧돌이었다. 이 말을 뒤집은 게 1930년대에 케인즈(J. Keynes)가 제시한 유효수요이론이다. 유효수요, 즉 구매의사가 있고 지불능력이 있는 수요가 경기는 물론 생산량과 고용량을 결정한다는 것이다(수요는 소비와 정부 지출, 자본 투자, 그리고 수출에서 수입을 뺀 순수출로 구성된다). 노동에 대한 수요를 파생수요(derived demand)라고 부르는 이유다. 파생수요란 다른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수요에서 파생되는 수요를 말한다. 청바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청바지 생산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비밀의 정원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에 있다는 말을 하는 참이다. 코로나 19 시절에 정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 것은 소비를 늘려 경기를 되살리려는 정책이었다. 강원도 산불이 났을 때 강원도 관광이 복구지원이라고 홍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미국에서 9·11 테러가 났을 때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소비뿐이라며 돈을 주머니 속에 넣어두지 말라고 호소했다.
생산과정에서 탄소를 배출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탄소배출을 줄이려면 먼저 소비를 줄여야 한다. 탈소비가 탈성장·탈자본주의의 지름길이다.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조직의 차원에서 1.5℃ 라이프스타일을 집단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생산과정에서는 물론 소비과정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는 지름길은 정부가 규제와 지원을 섞어 개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잖아도 ‘축소되는 세계’(앨런 말라흐, 2024)에서 정부는 성장을 되살리느라 용을 쓰느니 차라리 제로성장을 관리하는 ‘보이는 손’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경제민주주의가 노동자를 기후위기 해결의 주체로 세운다
소비가 생산량과 생산방식을 결정하는 핵심이라는 사실, 그리고 노동자는 종속적인 노동을 수행할 뿐이라는 사실이 노동자의 탄소중립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함께 탄소배출의 공동정범은 아니라 하더라도 종범 혹은 방조범 정도의 공동 책임은 걸머져야 한다.
생산과 경영에 대한 노동조합의 개입 정도는 경제민주주의의 수준에 달려있다. 경제민주주의는 경제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받는 이해당사자가 그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탄소배출을 줄이려면 노동자가 기업 안에서, 그리고 기업을 뛰어넘어 국가의 기후·산업·노동정책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대화와 함께 단체교섭, 공동결정, 그리고 노동이사제의 도입과 같은 탄소중립 거버넌스의 구축이 중요한 이유다. 물론 경제민주주의는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가입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조직되지 않으면 발언권도 없다.
생산과정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노동조합의 노력은 중요하다. 물론 노동조합을 향해 “당신들은 왜 일자리에만 매달리느냐?”라거나 “왜 탈성장에 나서지 않느냐?”라고 윽박지를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기업별 체제로 조직되어 있는데다 아직은 기후운동에 낯선 것이 현실이라면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 역할과 의미를 제시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것이 노동자에게 혜택이 되면서 동시에 노동의 사회적인 의미를 부각하는 것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노동과 기후의 연대는 공생의 연대가 되어야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 노조(지부) 간부와 다른 일로 통화하는 김에 내민 제안이다. 노조 교육시간(연간 12시간)에 기후교육을 배치하면 어떨까. 월 2회 정도 지역에서 기른 유기농으로 점심을 제공하면?(현대차의 임직원은 7만 명이다) 그리고 집행부를 뛰어넘어 범계파적으로 기후정책팀을 구성하면?(집행부의 임기는 2년이다) 특히 노조의 기후정책팀은 전기차 전환이나 RE100 이행에 따른 단체교섭의 의제를 발굴하고 회사의 정책결정에 개입하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에너지정책이나 친환경 교통정책에 접근하는 입구가 되기도 한다.
소비자집단으로서 노동조합의 역할도 존재한다.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만드는 윤활유가 소비라면 자본주의의 속도를 늦추는 열쇠는 소비를 줄이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노동자는 기후위기의 해결과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갖는다. 그런데 노동자가 소비를 줄이면 그 부담이 노동자에게 부메랑처럼 닥칠 수 있다는 건 역설이다. 소비감축은 수요감소, 생산감소, 임금동결, 실업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는 탓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개념이 빛을 발한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되 기후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사회적으로 분담하는 일이 그것이다.
미국에서 1980년대에 ‘정의로운 전환’의 개념이 만들어질 당시 노동자는 공해공장의 폐쇄에 동의하는 한편 노동자와 지역주민을 위한 기금(슈퍼펀드)의 조성을 요구했다. 이를 이어받아 국제노총(ITUC)은 죽은 행성에선 일자리도 없으며 전환의 과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뒤처져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노동자가 전환의 거부자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전환이 노동자나 기후 약자의 희생에 바탕을 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도 국제노총에 가맹하고 있다. 노동과 기후가 연대해야 한다면 그것은 희생의 연대가 아니라 공생의 연대가 되어야 한다.
그린 뉴딜이야말로 탈성장정책의 출발점 아닐까?
노동계가 기후가 노동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주목했다면 환경운동은 노동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에 렌즈를 들이댔다. 서로 만나 입을 맞추기보다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제 할 말만 해온 셈이다. 이런 점에서 유정길 위원이 제안하는 구체적인 전략은 고무적이다.
“석탄화력발전을 재생에너지 사업으로 전환할 때, 비슷한 관련 분야로 수평 이동하게 하거나, 새로운 기술교육을 통해 전환된 일자리에 적응하게 하고 취업 때까지 일정 기간 급료를 지급하도록 하는 것, 녹색사업을 새롭게 창출하고 그것을 지원해 주는 것, 또한 개별 사업장이 아니라 전력노조 차원에서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을 노조가 협동조합 방식으로 직접 운영하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대화의 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의미가 크다. 이러한 내용을 한 마디로 뭉뚱그리면 그린 뉴딜이다. 유 위원이 그런 용어를 쓰지 않았을 뿐이다.
그린 뉴딜과 탈성장 사이에는 극명한 대립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유사하고 중복되는 지점도 많다. 특히 탈성장정책이 현실의 출발점을 구한다면 그린 뉴딜을 우회하기는 어렵다. 또한 탈성장과 그린 뉴딜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비전을 달리한다지만 최근 그린 뉴딜이 ‘성장없는 그린뉴딜’(green new deal without growth)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면 둘 사이의 거리가 겉보기만큼 먼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은 에릭 라이트의 변혁전략을 함께, 그리고 ‘난잡할 정도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박태주 60+기후행동 운영위원 시민언론 민들레 2024. 6.22
4.10 총선에서 ‘전환정치’는 어떻게 실패했을까?
오는 7월 12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지리산 연찬’이라는 이름으로 정치토론회가 열린다. 주제는 "4.10 총선에서 전환정치는 어떻게 실패했을까?"이다. "성찰과 다시 전환정치의 모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지리산 연찬 참가신청 주소: https://forms.gle/u4QNSw19thzDw3sS9)
절집에서 열리는 정치토론: 전환정치는 어떻게 실패했을까?
절집에서 정치토론이라니? 그런데, 이미 실상사는 정치학교의 장이었다. 2021년 여름부터 3년간 ‘문명전환의 정치’를 내걸고 ‘지리산 정치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치교육이 이루어졌다. 6회에 걸쳐 80여 명이 참석했다. 계절마다 ‘지리산 연찬’이 열린 지도 벌서 7-8년이 되었다. 때문에 주최 측에서는 이번에 열리는 정치토론이 "지난 4년 전 봄부터 4.10 총선을 향해 열었던 문명전환정치 연찬(硏鑽)의 장을 마무리하는 자리"라고 밝히고 있다. 지리산 산중에서 일군의 무리들이 ‘전환정치’, 정확히 말하면, ‘문명전환의 정치’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전환정치’는 ‘문명전환 정치’와 ‘체제전환 정치’를 포함하는 중층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양대 정당 중심의 정치판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실패’란 바로 양당 지배질서 흔들기의 실패를 의미한다. 주최 측의 취지문을 빌자면, 이번 4.10 총선이 "중층적 위기 속에서 배제하고 독점하는 정치를 뒤바꿔야 할 절박함에도 4.10 총선은 아무런 의제 없이 더 깊은 양당체제의 고착화로 끝난 것"이다. "양당체제를 가로지르려 했던 제 3지대 정치와 기후정치는 큰 울림 없이 사그러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토론회는, 전환정치의 ‘모색’이나 ‘비전’ 이전에 ‘실패’에 대한 성찰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다. 4.10 총선에서 전환정치를 꿈꿨던 스스로를 성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성찰을 통해 "우리 안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펼쳐 다시 전환정치를 상상하는 자리를 갖게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려는 것이다. 문명전환 정치의 꿈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총선이 끝난 지 얼마 안 돼 우리는 또 하나의 정치적 실패, 이를테면, 유럽판 ‘전환정치’의 실패를 전해 듣고 있다. 6월 6일~9일에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그것이다.
유럽의회 선거: 녹색정치는 어떻게 실패했을까?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두 가지 점에서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의 면에는 녹색정당이, 다른 한 면에는 극우정당이 있다. 중도우파가 일정한 세력을 유지한 가운데, 극우정당은 약진하고 녹색정당은 추락하는 정반대의 자리바꿈이 일어난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 각국의 녹색당과 진보 성향 정당들이 연대해 꾸린 정치 그룹인 ‘녹색당-유럽자유동맹’은 기존 71석에서 19석이나 적은 52석을 얻는 데 그쳤다(2024년 유럽의회의 전체 의석수는 720석이다.). 강경 우파 정치 그룹인 ‘유럽보수와 개혁’(ECR·76석), 극우 성향의 ‘정체성과 민주주의’(ID·58석)에 밀리면서 원내 4당에서 6당으로 떨어졌다. 직전 2019년 선거에서 역대 최다 의석수를 얻으면서 당시 선거의 주인공이 되었던 점에 비추어보면, 추락에 가까운 실패다.
특히 유럽정치, 특히 녹색당을 대표하는 독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실패가 더욱 또렷해 보인다. 유럽의회 선거 결과 ‘기민/기사연합’이 득표율 30%(‘19년 대비 +1.1%p)로 압승을 거두었고,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대안당‘이 15.9%(+4.9%p)로 2위를 기록했으며, 신호등 연정을 구성하는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 3당은 각각 13.9%(-1.1%p), 11.9%(-8.6%p), 5.2%(-0.2%p)를 기록하여 참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독일대안당'이라니, '대안'이라는 말 역시 더 이상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독일대안당의 독일어 명칭은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난 걸까? 녹색정치의 약진이 5년만에 꺾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분석이 뒤따르고 있지만,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이른바 '그린래시(green-lash)'이다. '그린래시'는 친환경을 뜻하는 '그린(Green)'과 반발을 뜻하는 '백래시(Backlash)'의 합성어이다. 기후위기 정책에 앞장섰던 유럽 곳곳에서 친환경에 대한 반발이 그만큼 거세다는 말이다. 이른바 그린래시의 조짐은 이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물가 상승과 환경규제에 항의하는 강력한 농민시위 등을 통해서 드러난 바 있다.(한국에서는 녹색정치가 본격화되기도 전에 강력한 '그린래시'를 경험하고 있다.)
요컨대, 극우정당의 득세와 녹색정치의 추락의 배후에는 난민문제와 함께 환경정책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도 중도파가 어느 정도 중심을 잡고 있으므로 이번 실패가 그린딜 등 환경정책의 결정적인 후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환경정책에 대한 반발과 부분적인 후퇴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것은 곧 기후목표의 실행 불가능성과 기후파국의 현실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백래시에 백래시로 응전해야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해법이 있을까?
백래시와 생존주의, 그리고 사회의 성찰 능력
사실 백래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정치적 논리 이전에 일종의 물리법칙이다. '작용과 반작용'이 그것이다. 최근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적 결속도 한국과 미국의 군사적 결속에 대한 백래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백래시는 대전환의 증후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수천 수만 년 동안 지속되어온 가부장적 지배질서를 일거에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도 성장시대에서 포스트 성장시대로의 전환과정이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국제질서에서 포스트 일극체제로의 전환과정에서 일어나는 반발과 혼란 역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백래시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그것은 부족적 생존주의로 조직화되기도 한다. 유럽의 극우도 그것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유권자인 인간생명들의 생존 본능을 격발하며 생존주의 이데올로기의 '자기생산체계'를 구축한다.
‘생존주의’는 한국의 사회학자 김홍중이 만든 말로, “생명의 충동과 힘의 영역”을 지칭하는 ‘생존’과 달리 “생존이 조직된 주의(主義)와 지향된 가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생존’ 투쟁 그 자체가 하나의 이념이 되고, 세계관이자 믿음체계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리’의 움직임이나 ‘부족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태극기부대나 유럽의 농민시위, 반환경·반이민의 정치화도 넓게 보아 집합적 생존주의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유럽 의회선거에서의 극우의 승리는 ‘백래시’와 ‘생존주의’에 힘입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존주의’는 사회 붕괴의 신호다. 생존주의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명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생존 투쟁’을 넘어서 공존의 규칙과 규범을 제도화하는 것이라면, 생존주의의 창궐은 문명 붕괴의 위기를 반증한다. 특히 서유럽은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나름의 공존의 규범과 체계를 구축해왔다. 그런데, 21세기의 1/4분기에 즈음한 2024년 현재 서구 문명의 본고장에서 생존주의와 사회 붕괴의 위태로운 징후가 관찰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생존주의적 쟁투는 나라마다 조금씩 양상은 다르지만, 전 지구적 현상으로 읽힌다. 국내정치의 현장에서도, 국제정치의 무대에서도 동시에 나타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그리고 트럼프와 바이든의 정치투쟁에서 우리는 부족적 생존주의, 정치적 생존주의를 목격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존주의’와 ‘생존’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점이 중요하다. 인간 생명은 살기 위해 ‘굴신(屈身)’하고, 또한 살기 위해 ‘저항’하지만, 동시에 굴신하고 저항하는 자신을 자각하는 마음의 능력이 있다.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보고, 생각을 생각하는 인간의 성찰능력이 그것이다.
사회에도 그와 같은 성찰능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체계들이 존재한다. 언론과 학문체계와 종교와 정치적 다양성 등이 그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선진조국’이나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가 집합적 생존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장치임을 자각하는 능력이 있다. 핵무기에 대해 핵무기로 맞서는 생존주의 국제정치에 굴복한다면 위태로운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한국사회는 잘 알고 있다.
실상사라는 절집에서 열리는 ‘지리산 연찬’도 인간과 사회의 성찰능력을 지지하고 고무하는 장으로 마련된 것이리라. ‘생존’의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생존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차원변화의 비전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해결의 정치’와 ‘꿈의 정치’-유럽에서 배우기
그러나, 성찰만으로 정치를 전환시킬 수 없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자각적 꿈꾸기’가 그것이다. 꿈이 꿈인 것을 스스로 아는 ‘사회적 자각몽’을 발명해야 한다. 새로운 삶과 사회의 문법을 창발해야 한다. ‘근대화의 꿈’이나 ‘민주화의 꿈’에 비견되는 새로운 ‘꿈의 공생체’를 구성해야 한다. 현재의 문제 구도를 뛰어넘어 차원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꿈꾸기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유럽 녹색당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성공의 실패’이다. ‘반(反)정치의 정치’를 꿈꾸던 독일녹색당은 어느 때부터 집권세력의 일원이 되었고, 이제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녹색정치에게 제1의 문제는 ‘기후변화’였다. 유럽의 녹색당은 기후라는 ‘문제/문제해결’의 구도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했다. 숙명이다. 그러나 꿈이 없다면 정치적 미래도 없다. 더욱이 차원변화는 없다.(투 트랙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문제해결 정치’와 ‘꿈의 정치’의 분담.).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4.10 총선에서 전환정치가 실패한 원인 역시 '꿈의 부재', 즉 유권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없는 것,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느끼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극우가 '생존주의' 이데올로기의 격발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성공을 기획했다면, 이를테면 우리는 '꿈의 정치'를 통해 생명의 활력과 열망을 격발할 수 있을 것이다.대한민국의 문제는 인구소멸과 국가소멸의 함정만이 아니다. 기후격변과 경제사회적 불평등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와 근대문명은 ‘문제들의 늪’에 빠져있다. 문제들의 무한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문제를 재생산한다. 문제해결은 더욱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확대 재생산한다. 사회는 꿈을 꾸고 서사를 창안하며, 동시에 ‘문제/문제해결’들의 함수들(fuctions)을 생산한다. 오늘날 관찰자들에게 한국 사회는 어디를 보아도 문제들이다. 우리는 이미 초복합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주의의 함정을 피하면서, 동시에 ‘문제들의 늪’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을까? 그렇다. 꿈꾸기도 하나의 탈출방법이 될 수 있다. 일단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을 구분해본다. 이를테면, 생명의 욕망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필요(욕구)’와 ‘열망(꿈)’이 그것이다. 전자가 ‘유기체적 신체’의 욕망이라면, 후자는 ‘정동적 신체’의 욕망이다. ‘관찰하는 생명’에게 욕망은 ‘문제’로 인식되고, ‘감응하는 생명’에게 욕망은 ‘꿈’으로 표현된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협동조합의 정의’를 보면, 협동조합의 사명은 “공동의 필요와 ‘열망의 충족과 실현”으로 되어 있다.
요컨대, 꿈과 비전이 없이는 정치적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문제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피한다고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꿈이 없이는 문제해결도 불가능하다. 사실 50년 전의 독일녹색당은 꿈을 파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문제해결을 위한 정당이 되었고, 오늘날 극우정당들은 생존주의를 격발하며, (문제해결 능력은 검증되지 않은 채) 꿈을 파는 정당을 흉내내고 있다.
파국과 종말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시대, 꿈꾸기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절박한 과제이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되, ‘살아남기’에 머무르지 않는 ‘도약의 꿈’을 열렬히 응원한다. ‘자유의 나라’나 ‘평등의 나라’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욕구와 열망을 대체할 수 있는, 혹은 기술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테크노피아’와 경합할 수 있는 새로운 꿈과 열망이 그것이다. ‘평화 생명의 나라’도 좋고, ‘한살림의 꿈’도 좋다. 그리고, 당장 ‘몽상 구성체(dream formation)’의 형성을 공모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유럽에는 무지개정치의 아름다움이 있다
유럽의 녹색정치가 그린래시로 휘청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 녹색정치가 더욱 깊어지고 넒어지는 계기, 혹은 차원변화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특별히 한국의 생명정치와 교감하기를 기대한다). 유럽의 녹색정치는 실패가 아니다. 이미 빛나는 성공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 빨강에서 회색에 이르는 무지개정치의 한 색깔을 당당하게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무지개정치가 아름답다. 생명-미학의 관점에서 정치의 미래는 아름다움에 있다. 유럽정치의 다채로움은 유럽정치의 잠재력이다. 양당이 지배하는 고착화된 양극체제의 한국정치는 기계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아름답지 않다. 변화의 잠재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다시, 유럽을 배워야겠다. ‘지리산 연찬’의 기운과 문법을 통해 더욱 그윽하게, 더욱 풍부하게.
주요섭 밝은마을생명사상연구소 대표 시민언론 민들레 2024 6,23
출산율과 독서율의 ‘기묘한’ 평행이론
최근 한 유튜브 채널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주제가 ‘출산율 저하와 인문학의 위기’였는데, 처음엔 좀 뜨악했다. 저출산이 심각한 건 알겠는데 그게 인문학의 위기랑 어떻게 연결되지? 한데, 토론 과정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발표한 자료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묻는 질문에 서방국가 대부분은 ‘가족’을 꼽은 데 반해, 한국은 첫째가 ‘물질적 풍요’였다. ‘인생에서 친구나 공동체적 유대가 지니는 중요성’을 묻는 질문에는 겨우 3%만 응답했고, 세계 최하였다. 직업의 가치를 묻는 항목 역시 마찬가지. 이 자료들을 하나로 엮어보면, 관계나 활동은 됐고, 오직 ‘한방’으로 큰돈을 챙겨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로 정리될 수 있겠다. 대략 감은 잡았지만 막상 수치로 확인을 하니 좀 당혹스러웠다.
한데, 인터뷰 말미에 부각된 또 하나의 통계가 있었다. 다름 아닌 독서율.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은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것. 이건 진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때까지는 불교, 조선은 유학의 나라였다. 일본의 사무라이, 유럽의 기사도, 몽골과 이슬람의 정복전쟁 등 거의 모든 문명이 ‘칼과 피’로 점철될 때 한반도에선 문치가 대세였다. 하여,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삶의 최고 가치는 독서였다. 또 지금은 세계 최강의 학력을 자랑하는 나라 아닌가. 한데, 독서율이 저 지경이라고?
여기에 이르자 문득 ‘출산율과 인문학’이라는 테마가 한 큐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1960년대생, 즉 베이비부머 세대다. 나라에서 ‘둘만 나아 잘 기르라’고 강요할 때도 기본은 대여섯을 낳았다. 그리고 당시는 책의 시대였다. 책에 대한 갈망, 그것이 교육열로 이어졌고, 이 세대는 자라서 87년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 된다. 당시 대학의 학생회관은 혁명의 열기 못지않게 에로스가 충만했다. 혁명과 에로스, 양극단에 있는 두 항목을 매개한 것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세상을 바꾸려면 책을 읽어야 했다.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되어야 했다. 대화와 토론, 즉 로고스의 향연이 도처에 흘러넘쳤다. 그것은 에로스의 강력한 동력이기도 했다.
지금은 먹방과 노래, 춤과 피지컬의 시대다. 한때 생각했다. 이제야말로 대학은 ‘에로스와 로고스의 광장’이 될 거라고. 최루탄도 짭새도 없으니 말이다. 한데, 보다시피 아니었다. 연애 자체를 포기한 청춘이 수두룩하다. 단군 이래 청춘의 연애가 이토록 힘겨웠던 시절이 있을까? 하여, 이젠 확실히 알겠다. 감각적 즐거움이 에로스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사랑은 하룻밤의 열기가 아니라 창조와 교감의 열정에서 비롯한다. 출산은 그 절정에 속한다. 그러므로 청춘남녀를 연결해주는 핵심고리는 지성과 스토리이고, 그 원천은 당연히 책이다. 낯선 존재들끼리의 케미가 일어나려면 무엇보다 읽고 쓰고 말하고, 이 ‘삼단콤보’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장이 문득 사라진 것이다. 대학에서도. 광장에서도. 그러자 연애 또한 일종의 게임 혹은 배틀이 되어 버렸다. 이제 연애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다. 이런 마당에 웬 결혼, 웬 출산? 결국 출산율 저하와 독서율의 하락은 심층의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었던 것. 오, 이 ‘기묘한’ 평행이론이라니!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앞으로도 출산율 회복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더 시급한 건 출산율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이 아니라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다. 그들의 푸르른 청춘이 활짝 피어나야 한다. 청춘의 특권, 즉 ‘에로스와 로고스의 향연’을 포기한 채 ‘자기만의 방’에 갇혀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건 너무 서글픈 일 아닌가? 청춘이 쇠락한 시대를 중년과 노년은 또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하지만 상황은 나날이 나빠지고 있다. 각종 정책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대학의 지성은 몰락을 향해 치닫고, 대학 바깥의 ‘책의 광장’ 역시 거의 초토화된 실정이다. 한 책방지기의 말을 빌리면, 지금의 정책은 국민들에게 ‘제발 책 읽지 말라’고 당부하는 수준이란다. 창조와 교감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감각의 제국’에 갇혀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난세다. 특히 청년들에겐 가혹한 시절이다. 이 난세를 명랑하고 슬기롭게 건너가려면?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이 곧 길이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경향 : 2024.06.23.
종부세와 상속세와 저출생
정부와 국회가 종합부동산세·상속세 개편에 시동을 걸었다. 오랜 시간 이들 조세제도를 개편하지 않아 당초 도입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중산층’이 과도하게 세 부담을 지게 됐다는 이유에서다. ‘투기 목적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온 집인데 그저 집값이 올라 종부세 폭탄을 맞았다’거나 ‘상속세가 가업 승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여론이 군불을 땠다. 대통령실과 여당에서 나오는 논의를 보면 종부세는 초고가 1주택자와 보유 주택의 가액 총합이 아주 높은 다주택자만 내도록 하고 사실상 전면 폐지하는 방안, 상속세는 먼저 공제한도를 확대한 뒤 추후 세율을 대폭 낮추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종부세·상속세 개편을 둘러싼 주된 논쟁은 이것이 세수를 줄이고 조세 형평에 어긋나는 부자 감세인지, 아니면 현재의 가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징벌적 과세인지 하는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더 엄중하고 면밀하게 봐야 할 것은 종부세와 상속세 부담 완화가 사회적으로 어떤 신호를 주는가 하는 점이다. ‘누구’를 대상으로 ‘얼마나’ 거둬들이는가 하는 조세제도는 그 사회가 운영되는 방향성을 어느 정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재 얘기가 나오는 종부세 폐지와 상속세 완화는 결국 ‘자산의 보유’와 ‘부의 대물림’을 유리하게, 쉽게 해주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역시 정부가 주장하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까지 넓혀 보면 부동산이든 가업이든 주식이든 이미 자산을 가진 계층에 매우 유리한 조세제도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종부세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일부 공개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정치권에서 한강벨트를 사수하고 수도권의 표심을 확보하기 위해 ‘중산층’ 이상 유권자들의 민심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과거 고성장기와 몇 차례의 집값 급등기를 거치며 현재 중산층이 자산을 불려온 반면, 이제는 청년층이 근로소득을 바탕으로 중산층에 새롭게 진입하기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산층 진입 벽은 높아진 반면, 저변은 더 이상 넓어지지 않는 게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조귀동 경제칼럼니스트는 저서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자녀의 대학 진학→전문직 또는 괜찮은 일자리로 이어지는 교육을 통한 계층 세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하고, “한국의 1990년대생들은 부모가 확보한 경제력과 사회적 네트워크,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명문대 졸업장과 괜찮은 일자리를 독식하는 ‘세습 중산층의 자녀 세대’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집단”이라고 했다.
한국의 세습 중산층화는 정부가 최근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저출생 문제와도 밀접하게 닿아 있다.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해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대책들은 주로 육아휴직을 더 편리하게 쓰게 하고, 결혼·출산할 경우 주택 대출의 소득 기준을 더 낮춰주고, 일하는 부모를 위해 돌봄 공백을 줄이는 것 등이다. 결혼과 출산 의향을 높이는 데에 주거와 일자리, 일·가정의 양립 등 경제적 조건이 중요하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한국의 저출생은 혼인율이 줄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늘면서 가속화됐다. 2011년 처음 나온 말인 ‘3포 세대’ 안에 이미 결혼과 출산 포기가 포함됐다. 결혼 건수는 2013년 32만3000건에서 지난해 19만4000건으로 급락했고,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기준 0.7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였다.
이윤주 정책사회부장 경향 : 2024.06.23.
물에 날아든 에너지 부메랑
인류는 에너지 생산을 위해 매년 370억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전체 배출량의 무려 70%에 달하는 양인데, 그중 130억톤가량은 발전 부문에서 발생한다. 신재생 에너지로의 빠른 전환과 보다 넓은 분야에서의 전기화가 기후변화 완화에서 가장 시급하게 이루어져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세계적으로 연간 2만7000테라와트시(TWh)의 전기가 생산된다. 70% 이상은 석탄, 천연가스, 석유, 원자력과 같이 열에너지를 전기로 전환하는 화력발전 방식을 이용한다. 화력발전은 물을 끓여 발생시킨 증기로 터빈을 돌린 후 증기를 냉각시켜 다시 물로 되돌리는 과정을 거친다. 냉각에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는데, 취수된 냉각수를 사용한 후 다시 취수원으로 방류하는 ‘일회 냉각 방식’을 주로 이용한다. 즉, 막대한 양의 물을 끊임없이 공급해야 한다. 이처럼 발전 부문에서 냉각수로 이용하는 물의 양은 전 세계 연간 담수 이용의 10%에 가깝다.
전기를 생산하며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기후변화를 가속시킨다. 이는 부메랑이 되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에너지 공급에 악영향을 미친다. 우선 기온 상승은 발전소의 냉각 효율을 떨어뜨린다. 증기와 냉각수의 온도 차이가 작아지는 만큼 더 많은 냉각수가 필요해진다. 고온의 방류수, 즉 온배수는 주변 수생 생태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수생 생물은 1~2도의 수온 차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어떤 지역의 화력발전소 온배수는 원래 수온보다 무려 10도 이상 높기도 하다. 그 지역의 수생 생태계는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궤멸적 피해를 입게 된다.
이와 같은 온배수에 의한 ‘열 오염’에 대해 세계 각국은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대개 온도 상승치가 최대 4도를 넘지 않게 한다. 폭염이 닥치면 강물의 온도가 올라 가열된 냉각수를 방류할 수 없게 되고 발전소는 가동을 멈추게 된다.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온난화 진행과 함께 더 강해지고 더 자주 발생하게 될 폭염은 에너지 공급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다.
물을 퍼 올리는데 이용되는 전기는 전체 사용량의 7%에 달한다. 역설적이게도 물을 이용하기 위해 물을 사용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는 전체 물 이용의 절반 가량을 지하수에 의존한다. 특히 센트럴밸리에 자리한 광대한 농장들은 관개를 위해 오랫동안 지하수를 무분별하게 이용해 왔다. 게다가 2000년대에 들어 수차례 발생한 ‘메가가뭄’(mega-drought)은 농업 생산의 지하수 의존도를 더욱 높였다. 이처럼 제한된 수자원의 편중된 이용은 발전 냉각수 확보에 악영향을 주었고 결국 수력과 원자력 발전의 감소로 이어졌다.
2010년대에 접어들며 물 문제는 캘리포니아의 주요한 미래 위협 중 하나로 대두되었다. 수많은 연구와 매체를 통해 조망되었고 주정부 차원에서 다양한 대응 방법들이 논의되었다. 그 결과, 2014년 9월에는 지속가능 지하수관리법이 제정되었고 지하수 양수 또한 지속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따르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미항공우주국의 그레이스 위성은 우주로부터 지구 중력 변화를 감지해 지하수 변화를 관측하는데, 인공위성이 발사된 2002년 이래 오늘날까지 캘리포니아의 지하수 수위는 꾸준히 낮아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기후변화 위협에 대해 전 세계가 공감하고 함께 대응해 나아가기 시작했음에도 속절없이 상승하고 있는 지구의 온도를 바라보자니 불현듯 기시감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김형준 |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 한겨레 2024.06.23
창조과학의 신성모독
나는 종교가 사람을 멍청하게 한다는 주장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멍청한 사람들이 때때로 종교를 핑계로 멍청한 일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멀쩡한 타인들까지 자기네 수준으로 멍청해지도록 강요하는 것은 심히 모욕적인 일이다. 지난 6월20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의 서울신학대학교는 박영식 교수의 해임을 확정했다. 연구 실적이 부족하거나 윤리적인 비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서울신대는 박 교수가 교단이 지지하는 ‘창조과학’을 인정하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와 같은 중징계를 결정했다.
이 이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신학, 창조과학, 창조론 등 비슷비슷해 보이는 개념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종교 교리가 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이른바 아브라함계 종교들에서는 핵심적인 믿음이다. 그러나 ‘창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세계가 창조되는 순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신의 활동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이나 이해 범위를 벗어난 무언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창조라는 신비한 사건을 설명하고 교리화하기 위한 ‘창조신학’이라는 분야가 만들어졌다. 박영식 교수는 바로 이 영역의 전문가로 그의 주저서는 2018년에 초판이 발간된 ‘창조의 신학: 나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습니다’다.
한편 ‘창조과학’의 동조자들은 대단히 기이한 방식으로 창조의 신비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창조에 있어서 신비하거나 불가해한 것이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세계의 모든 진실을 담고 있는 성경에 우주와 생물의 창조에 대한 확실한 사실이 남김없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는 신에 의해 6일 동안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고, 이때 모든 동식물도 함께 창조되었기 때문에 한때 인간은 공룡과 공존했다. 오늘날 우리가 공룡을 화석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가 세상을 휩쓸었기 때문이고, 현존하는 생물들은 노아가 방주에 데리고 간 동물들의 후손들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시기 또한 성경의 연대 기록을 통해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데, 가장 급진적인 창조과학 신봉자들은 세계의 창조로부터 지금까지 6천년 정도가 지났다고 믿는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이런 믿음은 결코 ‘중세적’인 것이 아니다. 창조과학은 근대 이후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의 발전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위협한다고 믿는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20세기 초에 시작된 운동이다. 그들은 과학을 지식을 확장하기 위한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수호하고자 하는 교리와 대립하는 ‘신념’으로 이해한다. 자연과학의 여러 영역에 개입하여 성경의 기록이 문자 그대로 사실임을 입증하려고 하지만, 과학적 방법에는 관심이 없다. 따라서 학술이 아닌 대중교육 영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주된 수단이 된다. 세계 각지의 창조과학 지지자들은 공교육에서 진화생물학만이 아니라 창조과학도 가르쳐야 한다며 법적 투쟁을 벌여 왔으며 놀랍게도 몇몇 지역에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일부 대학이 창조과학 강좌 개설을 시도하는 일이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은 서울신대, 그리고 일부 언론 보도에서 말하는 것 같은 교단의 ‘창조론’과 박 교수의 ‘유신진화론’ 사이의 대립이 아니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을 받아들이되 진화 과정에서 신의 개입을 인정하는 입장을 말하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부터가 창조과학이 설정한 틀이다. 박 교수의 창조신학은 신학과 과학이 서로 다른 영역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자연과학적 지식은 세계와 삶 속에서 신의 섭리를 통찰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에 가깝다. 반면 자연과학의 외형만을 흉내 내며 자신들이 승인한 교리 밖의 지식은 믿지 말라는 반지성주의를 퍼뜨리는 창조과학은 그런 진지한 신학적 고민과는 별 관련이 없다.
신에 대한 이해는 인간 지식의 확대와 함께 성장해 왔다. 고대인들에게 6천년 남짓의 시간은 창조세계의 경이를 묘사하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넘어선 무한한 시공간조차 초월하는, ‘있음’과 ‘없음’ 따위의 이분법적 언어의 한계 너머에 있는 신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창조과학의 폐해는 신자들의 지적 발달을 방해하고 공교육 시스템을 교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참람하게도 신을 자신들의 낡고 빈곤한 언어 속에 끼워맞춤으로써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치명적인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다.
한승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종교학) | 한겨레 2024.06.24.
여성 배제하면서, 저출생 ‘전환’?
어딜 가나 저출생이다. 총선 때부터 거대 양당은 ‘저출생’ 대책을 1번 공약으로 내세웠다. 22대 국회 개원 뒤 저출생 관련 법 개정안이 제일 먼저 발의되어 있기도 하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지난 19일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요즘 저출생과 저출산 관련 발언을 하는 이들은 대개 남성-비청년들이다. 여성의 얼굴, 청년의 얼굴, 아동청소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저출생’ 구호가 난무한다.
저출생 관련 대책 논의기구 중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일·생활 균형 위원회가 6월21일 13명 전원 남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소식이다. 경사노위 대변인은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고 추천받아보니 그렇게 되었지, 차별 등의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이 말은 여성이 배제되는 지금 한국 정치를 표현한 한 문장 같다. 아무도 차별을 의도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또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모두(또는 대부분) 남성이 대표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일·생활 균형의 현실을 살펴보자. 2023년 8월 설문조사(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19~49살 남녀 2천명에게 아이를 낳을지 물었더니 ‘낳지 않을 생각’이라는 응답이 46.0%였다. 아이가 없는 기혼자도 그 비율이 24.7%에 이른다. 저출산 원인으로는 ‘일과 육아의 병행이 어려운 구조’를 제일 많이 꼽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 2023년 영유아 부모 대상 설문조사를 보면 그 실태가 드러난다. 맞벌이 가구 아동(0~7살) 어머니의 하루 평균 돌봄 시간은 11.69시간이다. 반면 아버지는 4.71시간, 돌봄기관에선 7.76시간, 조부모는 3.87시간에 그친다. 맞벌이 가구가 아닌 경우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하루 평균 아이 돌봄 시간이 각각 15.63시간, 4.40시간이었다.
자녀를 둔 양육자의 일·생활 균형이 가능하게 하려면, 단기 육아휴직이나 아빠 출산휴가를 며칠 더 늘리는 식의 땜질이 아닌 성평등한 돌봄사회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고용이 성평등하게 이뤄져야 하고 비정규 과다노동, 초단기 노동, 법 외 사각지대 고용시장을 줄여야 ‘함께 돌봄’이 가능해진다. 이런 고용 환경에 처한 이들에게 가계의 빚 부담을 늘리는 ‘신생아 대출 확대’ 방식의 저출생 대책은 결국 열악한 노동 시간을 늘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곧 인구전략기획부를 신설하고 여성가족부를 없애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낼 예정이라고 한다. ‘여성’은 배제하고 저출생을 단순히 ‘인구’ 문제로 규정하는 정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6월3일 한국 정부 대상 9차 권고에서 “가족 가치와 페미니즘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데 대해 우려를 표했다. 또 가족과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과 책임에 관한 고정관념이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해서는 “여성 발전을 위한 법·정책 체계의 파편화와 우선순위 하락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여성가족부 폐지와 인구전략기획부 신설은 여성을 삭제하고 출산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역행’이 아닐 수 없다.
출생과 양육이 단지 ‘인구’ 문제이기만 할까? 참여연대는 6월19일 논평에서 저출생 핵심 원인이 ‘불평등과 양극화 심화, 기후위기, 사교육, 지역 격차’ 등 ‘현재와 미래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 짚었다. “출산과 양육 중심의 단편적 접근에서 벗어나 삶의 질 제고, 가족다양성 존중, 비용 보장만이 아닌 시간 보장, 돌봄 노동에 대한 존중과 사회적 인정, 공공인프라 확충 등과 같은 다차원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삶이 피곤하고, 노동 시간이 과중하고, 기후위기가 심화하고, 주거비가 비싸고, 차별과 혐오와 폭력이 만연하고, 국회와 정부가 정쟁을 일삼는데 정부가 출생률 목표치를 높인다고 해서 아이를 낳게 될까? “0~4세 인구가 북한보다 적습니다”(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정책홍보자료)에서 보듯 출산율에도 남북 대결을 부추기는 정치적 편협함, 보수적 결혼·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끝내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대통령과 현 정부의 아집은 되레 인구위기를 심화할 뿐이다. 저출생 대책의 패러다임 전환은 배제된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 한겨레 2024.06.25.
오늘, 김구 암살당한 날…<건국전쟁>의 총질은 여전히 계속된다
백범 암살 75주기를 맞으며
<건국전쟁>의 백범에 대한 총질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 당한지 75년, 그 어느 해보다도 백범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남북관계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다는 것만도,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위아래 할 것 없이 통일을 외쳐오던 북한이 최근 남과 북은 서로 상관없는 다른 나라라고 선언한 탓만도 아니다. 올해 초 <건국전쟁>이라는 이승만 선전물에서 백범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음해를 일삼는 등 75년이 지난 지금도 이승만의 추종세력들이 백범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전쟁> 측은 성격과 신뢰도가 의심스러운 <유어만(劉馭萬) 비망록>이라는 자료를 토대로, 자료에 나오지도 않는 말("북한이 내려오면 그냥 남한은 끝이다. 근데 내가 왜 이승만을 도와주느냐 이렇게 얘기해요", 류석춘 발언)을 백범이 했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백범을 이중적인 위선자(류석춘)로, 나아가 반역자(정안기)로 몰고 있다. <조선일보>(온라인판 '유석재의 돌발史전', 2024.01.25)조차 "이승만 영화에서 과연 이 얘기까지 꺼낼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할 정도로, 매우 무리한 주장과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과연 <유어만 비망록>이라는 자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기에 <건국전쟁> 측에서 마치 백범의 결정적인 약점을 잡은 듯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건국전쟁>이 인용한 <유어만 비망록> 중 문제의 김구 발언 원문을 살펴보자. 지면 관계상 영어 원문은 생략하고 우리말로 번역했다.
"내가 남북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동기 중 하나는 이북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북 군대의 증강을 앞으로 3년간 멈춘다 하더라도, 그 사이 이남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현재의 공산군 수준에 달하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북 군대를 동원하여 비난 받을 틈도 없이 손쉽게 남한을 급습할 것이며, (전쟁이 발발하면) 지금 여기에 잠정적으로 서있는 정부는 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될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범이 남북협상에 나선 것은 동족상잔의 비극만큼은 피해야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더욱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백범은 해방 후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이북이 군사력 포함 전 분야에서 미군정 하 이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전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백범으로서는 동족상잔을 피해야한다는 절대절명의 과제에 더하여,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북과는 상대도 안 될 남쪽이 무력대결이 불가피한 분단정권 수립의 길로 달려가는 것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독해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런 오해가 없을 내용을,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저급한 상상력을 발동하여 억지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건국전쟁 다큐 포스터
수상한 자료에 근거한 괴이한 주장
<건국전쟁> 측의 백범에 대한 음해도 황당하지만 그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자료도 매우 수상하다. 이 자료를 <월간조선>에 처음 공개한 조갑제는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대표인 류위완 공사는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김구를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유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영문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이 문서는 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라고 주장했다. 즉 이 비망록은 유어만 본인이 작성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건국전쟁> 측도 이 문건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윌슨센터나 이승만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유어만 비망록>을 꼼꼼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자료가 유어만 본인이 작성한 자료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자료에서 유어만의 영문 표기가 유어만 본인이 쓰는 방식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유어만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영문으로 Liu Yuwan으로 쓰고 있는데, 이는 20세기 중엽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Wade–Giles 방식이나, 현재 널리 통용되는 pinyin 방식이나 동일하다. 그런데 이 문서에는 이도저도 아닌 Liu Yu-man으로 표기하고 있다. 노련한 외교관이 자신의 이름을 잘못쓸 수 있을까? 또한 이 문서에서는 유어만의 경교장 방문을 "surprise visit made by the Minister"라고 하여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유어만 자신이 작성한 문서라면 그저 "my surprise visit"이라 했을 것이다.
또 중일전쟁 시기 중국국민당 중앙비서장으로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여 한국에도 잘 알려진 우티쳥(吳鐵城, 한국어 발음 오철성)의 영문표기를 Wu Tieh-cheng이 아니라 O Chul-sung이라는 한국어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국어를 모르는 유어만이 Wu Tieh-cheng의 한국어 발음이 O Chul-sung이라는 것을 알았을 리도 없고, 설혹 알았다 하더라도 O Chul-sung으로 표기할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또 이 문건은 유어만이 직속상사인 당시 중국외교부장 Wang Shijie(王世杰, 한국어 발음 왕세걸) 역시, Wang Sish-gul이라는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 문건의 작성자는 유어만이 아니라 유어만을 만난 이화장 측 인사임이 분명하다.
▲<유어만 비망록> 내용, 이름 표기 등이 잘못됐거나, 한국식으로 표기돼 있다. ⓒ이승만연구원
<건국전쟁>에서 백범을 강력히 비난한 정안기는 "유어만은 경교장 밀담에서 김구의 불궤지심(不軌之心: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이나 도리에 어긋나는 마음, 모반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이 "중대한 사실을 알리고자 별도로 '비망록'을 작성해서 이승만에게 전달"했고, 이 비망록은 이승만이 7월 20일 '김구와 합작 불가'를 선언하는 "단호한 결단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아시아투데이, 2024.3.11) 이는 엄청난 사실왜곡이다.
백범과 장개석과 유어만
유어만이 백범 찾아간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유어만이 1948년 7월 11일 백범을 만난 이유는 정안기 등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김구가 소련의 대변인, 공산당의 제5열(스파이)이 되었다는 세평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에 참여하여 부통령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유어만은 이승만을 위해 백범의 속내를 염탐하기 위해 백범을 만난 것이 아니라, 백범이 마음을 돌려 새 정부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당시의 언론을 봐도 유어만이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이승만과 김구를 각각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확인된다. (한성일보 1948.7.22) 이승만 추종자들은 유어만이 김구와 이승만과 왜 만났는지 그 이유부터 왜곡하고 있다.
▲유어만 중국총영사 김구와 요담. 한성일보 漢城日報 1948년07월13일
사실 유어만과 백범, 또는 유어만의 상사인 장개석과 백범의 관계는 이승만과 유어만, 장개석과의 관계와는 비할 바 없이 훨씬 깊고 돈독한 사이였다. 냉전의 심화, 점점 국민당에 불리하게 진행되는 국공내전의 전황 때문에 국민당의 미국 의존은 심해졌다. 그래서 미국의 한반도 분단 정책을 지지하게 되었을 뿐이지, 유어만이 이승만을 위해 김구를 염탐하고 보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경교장이 사용한 2대의 승용차 중 1대는 서울 주재 중화민국공사로 있던 유어만이 제공한 것이었다. 또 장개석은 해방 후 김구가 귀국할 때 전별금으로 20만 달러를 주었는데 이 중 10만 달러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이 사용하고 나머지 10만 달러는 미군정의 반대로 국내로 들여오지 못한 채 주미 중국대사관에 보관 중이었다.
이승만은 이 돈에 눈독을 들였고, 김구는 이승만에게 이 돈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함께 유어만을 찾아가 이 돈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승만이 1946년 하반기 미국을 방문하고 중국을 거쳐 귀국한 중요한 목적들 중에는 이 돈을 받아내기 위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의 집요한 요청에도 장개석은 이 돈을 이승만에게 주지 않았고, 유어만은 10만달러를 백범의 아들 김신에게 주어 백범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활비와 <백범일지>의 출간비용으로 사용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614-618쪽)
장개석과 중국정부가 이승만보다 김구를 중시했던 이유는 김구와의 오랜 인연 이외에도 다급한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중국 국공내전의 승패는 만주에서 결정되는 상황이었는데, 많은 재만한인들이 중국공산당 편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장개석 입장에서 큰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백범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덕수 암살사건이 발생하고, 수사책임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김구가 장덕수의 암살에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보이자, 유어만은 이승만에게 '장택상을 수도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설득한 바 있다. (G-2 W/S No.126 (1948.2.13), <백범 전집> 9, 436) 그만큼 중국과 유어만은 백범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려 노력했다.
남북협상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의 긴밀한 협의 속에 추진
백범과 우사 김규식이 1948년 2월 남북협상에 나서려 할 때 이승만을 포함한 우익 3영수 회동을 주선한 사람은 바로 유어만이었다. 소련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추진해야하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주요성원이기도 했던 유어만이 2월 10일 중국대사관으로 우익 3영수를 초치한 것은, 남북협상이라는 명분을 거스를 수 없었고, 이승만으로 하여금 남북협상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미국의 원조 하에 국공내전을 힘겹게 치르고 있던 중화민국은 미국의 뜻대로 남북협상보다 남한단독정부 수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엄청난 명분을 지닌 남북협상에 대해 '실패할 기회'를 정중하게 제공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남북협상은 <건국전쟁> 류가 생각하듯이 "북한의 김일성이 당신을 통일 정부의 대통령으로 모시겠다고 그런다. 한번 우리가 만나보자 그렇게 해서 김구는 거기에 넘어가게"(정안기)된 것이 아니다. 북한은 이런 주장을 한 적도 없고, 백범은 자리에 연연하는 분도 아니었다. 남북협상은 백범이나 우사의 개인생각만이 아니었다. UN한국임시위원단의 공식적인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냉전에 대한 입장이 미국과 달랐던 영국 블럭 국가(호주, 캐나다, 인도) 대표들은 백범과 우사에게 남북협상에 나설 것을 종용했다. 또 백범과 우사가 공동명의로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는 UN한국임시위원단에 의해 영국정부의 공식 외교 경로를 통해 평양에 전해진 것이었다.
유어만 비망록의 진실
유어만이 김구를 방문한 진짜 목적은 김구로 하여금 대한민국 정부의 부통령 직을 수락하라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어만은 당연히 김구와의 만남에 대해 본국정부에 보고했다.(국사편찬위원회, '중국․대만 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Ⅱ, 211-213쪽) 이 보고의 내용은, 유어만이 비망록을 작성해 김구의 반역적 태도를 이승만에게 알려서 이승만이 김구와의 합작 불가를 선언하는 "단호한 결단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는 <건국전쟁> 측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르다.
유어만은 이승만과 여러 차례 의견을 교환한 결과, 김구가 "공개적으로 정부에 반대하지 않고 북한과 타협하지 않을 것임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이승만이 김구에게 부통령 자리를 제안하는데 동의했다면서, "이승만은 곧 국회에 김구를 부통령으로 제안할 것"이라고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김구에 대한 부통령 제안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첫째, 김구 자신이 단호하게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둘째, 뿐만 아니라, 장개석의 압박을 받은 이승만도 겉으론 '전제조건'을 달아 김구에게 부통령직을 제안하겠다고는 했지만, 속마음은 김구와의 합작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전문은 백범이 "어떠한 경우에도 풍옥상(馮玉祥)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공산당과 합작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1948년 8월 6일 이승만이 유어만을 통해 장개석에게 보낸 전보에 따르면, 이승만은 김구가 자신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지 않지만, 장개석의 바람대로 김구와의 합작을 최단 기간 내에 실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국편, 218쪽) 이를 보면 중화민국 정부는 김구에 대한 부통령직 제안이 무산된 뒤에도 여전히 이승만에게 김구와 손잡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실 중국국민당 정권은 김구와 임시정부에 대해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투자를 해 온 처지였기 때문에 김구를 '손절'하고 의심 많고 중국을 신뢰하지 않는 인물인 이승만(유어만 보고)으로 쉽게 '환승'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유어만은 본국정부로부터 백범을 새로 출범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부통령으로 만들라는 강력한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지, 백범을 비방하여 부통령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입장을 가진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유어만이 만난 이화장 측 인사는 김구가 부통령이 되거나, 김구 휘하의 인물들이 신정부의 요직에 기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유어만과의 대화를 이승만에게 보고할 때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평가대로 "백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갖고 왜곡한 것이다. 이승만 비서정치의 폐해는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70여 년 전의 추종자들이 왜곡해 놓은 자료를 무지의 소산인지, 사악한 의도로 알면서 그랬는지, 유어만 자신이 작성한 자료로 왜곡하여 백범에게 또다시 총질을 한 것이다.
▲1950년, 대구에서 유어만. TAEGU, KOREA, 1950. DR LIU YU-WAN (CHINA DELEGATE FOR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 UNCOK) ..https://www.awm.gov.au/collection/C43468.
▲유어만 신임 주한중화민국대사 내외가 1950년 2월 17일 오전 민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입국했다. Chen Yongkui 기자, 1950년 2월 16일 (新任駐韓國劉馭萬大使赴任中華民國新任駐大韓民國大使劉馭萬夫婦,於二月十七日上午搭乘民航班機飛往漢城任所)
사족
백범의 남북협상은 비록 5·10총선과 단독정부 수립을 당장 막지는 못했지만,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반도의 남북한에서는 미소 양군이 철수하면서 남북 간의 통일논의가 활성화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남쪽 내에서도 이를 위해 정부수립 과정에서 갈라선 우익 3영수의 합작이 필요하다는 기운이 일고 있었다. 이는 친일세력에게는 재앙이었고, 이들은 국방장관 신성모의 지휘 하에 국회프락치 사건(국회에서 김구를 지지하는 소장파들의 대량 검거), 반민특위 습격, 그리고 백범 암살로 이어지는 '6월공세'를 추진했다. 백범의 암살은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장벽이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놓고도 백범 암살의 배후 국방장관 신성모는 전쟁이 터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백범이 가시고 딱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전쟁에 휩싸였고, 백범의 묘소 뒤로 수백만의 이름도 알 길 없는 무덤이 늘어섰다. 이승만이 "외교에는 귀신이지만,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속설에서 최악의 인사는 단연 신성모였고, 백범암살, 국회 프락치 사건, 한국전쟁 초기 참패,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학살 등 이승만 정권 초기의 대표적인 실정은 대부분 신성모가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할 일들이었다.
<건국전쟁>은 이승만이 1960년 대통령 선거에 또다시 나선 것은 권력욕이 아니라 재일교포 북송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소가 웃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북송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공작 책임자가 바로 안두희였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에서 단순히 비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암흑의 정보세계의 핵심요인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이 공작의 현지 책임자로 안두희의 파트너가 된 위혜림은 1935년 상해 일본총영사관이 백범 암살을 시도할 때 핵심분자였다.
안두희와 함께 일본에 파견된 공작원들을 훈련시킨 자는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 당시 대공경찰의 대부였던 치안감 박처원이었다. 백범 암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 한국현대사의 악의 축은 이렇게 이어져 왔고, 우리는 아직 그 축을 끊어내지 못한 채 백범 서거 75주년을 보내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 프레시안 2024.06.26.
트럼프보다 르펜? 미 대선 넘어 인류사 중대 순간 될 프랑스 총선
인민전선 대 파시즘
프랑스가 때 이른 총선거로 뜨겁다. 6월 9일 밤 9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돌연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날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에서 마크롱 정부를 지지하는 선거연합 '르네상스'는 14.60%를 득표해 2위에 머문 반면 극우 국민행진(RN)은 31.37%를 얻으며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프랑스 유럽의원단 선거는 국내 선거들과는 달리 전면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따르기에 선거 결과가 당일 저녁에 곧바로 나온다. 성적표를 받아든 대통령은 전광석화처럼 조기 총선 카드를 꺼냈다.
이 발표에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국민행진은 누가 봐도 상승세였다. 그런데 조기 총선의 1차 투표(프랑스 의회 선거는 소선거구제이지만,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투표를 한 차례 더 실시하여 당선자를 가린다) 예정일인 6월 30일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20여 일이었다(현재는 1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이 기간 중에 국민행진의 승승장구를 막기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실제로 지금까지 모든 여론조사에서 국민행진이 1위를 달리는 중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젊은 대통령의 도박 탓에 이제 프랑스는 극우 내각 출범만 기다려야 하는 운명인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변수는 있다. 역시 모든 여론조사에서 국민행진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 2위 주자가 바로 그 변수인데, 뜻밖에도 이 도전 세력은 마크롱 대통령을 지지하는 선거연합 '앙상블'이 아니다. 프랑스의 거의 모든 좌파 정치-사회 세력이 총집결한 '신인민전선(NFP)'이다.
마크롱의 신자유주의가 극우파에게 집권의 길을 깔아주다
국민행진은 국민전선(FN)이 2018년에 새로 채택한 당명이다. 1972년에 장-마리 르펜이 창당한 국민전선은 지난 50여 년간 꾸준히 반이민, 반무슬림 선동을 펼치며 하위 중간계급과 전통적 노동계급에 파고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극우 포퓰리즘 바람이 분 2010년대에는 장-마리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이 국민전선을 이끌며 이 당을 유럽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현대적인' 면모의 극우정당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2015년에는 '낡은 극우' 이미지가 강한 아버지를 당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마린 르펜이 대선 결선투표에서 40% 넘는 득표를 한 2022년에는 국민행진의 '현대화'가 한 단계 더 진전되었다. 대선 직후 치른 총선에서 국민행진 의석이 8석에서 89석으로 10배 이상 늘어나자 마린 르펜은 의원단을 이끄는 데 주력하고자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대표 자리를 물려받은 이는 부대표 조르당 바르델라였다. 파리-소르본 대학을 중퇴한 바르델라는 1995년생으로 아직 서른이 안 된 멀끔한 청년이다. 더구나 이민 반대와 더불어 가장 관심을 갖는 사안이 환경 문제 대응이라니,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를 국수주의와 접합하는 희대의 곡예를 벌여온 마린 르펜에게는 최상의 후계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민행진이 21세기형 파시즘의 가장 유력한 예비주자라는 진실이 감춰지지는 않는다. 당명을 바꾼 뒤에도 계속 로고로 사용하는 빨간 색과 파란 색의 불꽃 무늬는 단순히 프랑스 삼색기에서 두 가지 색깔을 따온 게 아니다.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파시스트 정당 '이탈리아 사회운동'의 로고를 본뜬 것이다. 이탈리아의 원조 파시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행진은 검은색 제복을 차려입은 준군사조직을 유지했고, 이 조직은 지금도 복장만 바꾼 채 활동 중이다. 여러 탐사보도에 따르면, 이런 국민행진 조직원들이 현재 경찰과 군대, 사법부에서 암약 중이다.
사실 현 대통령 마크롱은 국민행진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단 한 가지 명분에 의지해 대통령 후보로 추천되고 두 차례나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마린 르펜이 대통령이 되는 걸 막으려면 좌, 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 성향('신자유주의 정책 합의'의 다른 표현)을 순수하게 대변하는 선택지가 필요하다는 것이 마크롱이 프랑스 주류 사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이유였다. 겉으로만 보면, 이 전략이 먹혀든 것 같기도 하다. '마크롱'이라는 카드 덕분에 전통적 우파(드골주의자들)와 좌파(사회당)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르펜 정부 출범을 지금까지 지연시켰으니 말이다.
그러나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마크롱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때늦은 남발을 통해 극우 포퓰리즘 선동이 먹혀들 기반만 넓혀주었다. 1기 집권 때는 부유세를 철폐하는 바람에 부족해진 세수를 탄소세라는 미명 아래 영세 자영업자들로부터 거둬들이려다 '노란 조끼 운동'을 불러왔다. 격렬한 시위에 나섰던 중소도시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급진좌파 지지자가 되기도 했지만, 더 많은 수는 국민행진에 투표함으로써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오래 전부터 미국이나 영국에서 신자유주의가 극우파 득세의 연료가 되어온 과정이 프랑스에서는 최근 들어 더욱 집약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더 나아가 2기 마크롱 정부는 아예 국민행진과 극우화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2022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마린 르펜이 무려 1300만 명이 넘는 유권자의 지지를 받는 것을 본 마크롱 세력은 르펜 노선을 자기네가 더 잘 실행할 수 있다고 인정받아야 르펜 바람을 저지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극우파'가 되기로 했다. 마크롱 정부는 이민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입법에 앞장섰고, 대통령 자신은 '이슬람 좌파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무슬림 시민과 좌파를 싸잡아 비판하며 이 방면에서 르펜을 앞서려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정치 지형이다. 국민행진과 마크롱 정부의 극우화 경쟁을 통해 극우 이념-정책은 어느덧 프랑스 정치의 '정상적' 담론이자 '중심' 의제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국민행진 의원단이 마크롱의 감세나 사회복지 축소 법안에 동의하는 모습을 본 자본가계급과 부유층은 르펜 정부를 받아들일, 아니 적극적으로 지지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조기 총선 발표 직후에 드골주의 우파정당 '공화파'의 에릭 치오티 대표는 국민행진과 함께 '반좌파 연합'을 결성하겠다고 나섰고, 이에 반발한 공화파 집행부 다수가 치오티를 대표직에서 축출했지만 법원은 이 결정이 무효라 판결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정통 우파'의 거물급 정치인, 지식인이 속속 국민행진에 합류하고 있다.
인민전선의 후예들, 반격에 나서다
마크롱 대통령이 호기롭게 조기 총선 실시를 결단한 것은 국민행진과 1, 2위를 놓고 경쟁할 세력은 어차피 자기 당밖에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2차 투표까지 가면, 살아남은 친마크롱 후보들이 다시 '반파시즘' 여론을 자극해 현 지지율을 훨씬 상회하는 의석을 차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22년 대선에서 마크롱 세력, 국민행진과 3강 구도를 형성했던 좌파는 작년부터 계속 사분오열 상태였다.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좌파정당들은 선거연합을 결성하지 못한 채 따로 나와 서로를 공격하느라 바빴다.
2022년 총선 때만 해도 분위기는 사뭇 달랐었다. 그해 대선에서 사회당, 녹색당 같은 기존 주류 좌파정당의 후보들은 지지율이 모두 5% 아래였지만, 급진좌파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FI)'의 장-뤽 멜랑숑 후보는 21.95%를 얻으며 기염을 토했다. 비록 결선투표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2위 르펜 후보와 격차가 1.2%에 불과했다.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두 달 뒤 총선에서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을 자신들이 주도하는 선거연합에 합류시켰다. '신생태사회인민연합(NUPES)'이라 이름 붙은 이 정당연합은 131석을 획득하며, 앙상블(244석)에 이은 원내(총 577석) 제2세력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작년 10월 하마스의 테러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이 프랑스 좌파를 다시 익숙한 분열과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사회당은 곧바로 이스라엘을 편들고 나선 반면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을 '테러'라 부르길 한사코 거부했다. 이후에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략과 학살을 규탄하는 데 앞장섰지만, 사회당은 애초에 표명한 친이스라엘 입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결국 NUPES는 사실상 와해됐고, 이에 속했던 모든 정당은 유럽의회 선거에 독자적으로 대응했다.
마크롱은 좌파가 이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리라 확신했던 것 같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대다수 논평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9일 조기 총선 발표가 있자마자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내에서 멜랑숑에 필적할 만큼 명망이 높으면서 멜랑숑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았던 프랑수아 루팽이 NUPES의 재건을 촉구하고 나섰고,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 안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불과 하루 뒤인 10일에 네 좌파정당이 '신인민전선'이라는 이름 아래 선거연합을 복원하기 위해 협상에 나서겠다고 공표했다. 마크롱의 기습적 의회 해산만큼이나 발 빠른 대응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좌파 성향 대중운동의 절박하고 열띤 분위기 덕분이었다. 새 선거연합 결성을 위해 네 정당 대표들이 협상을 벌이던 건물은 극우파와 마크롱 정부에 맞서 좌파 단결을 촉구하는 젊은이들로 둘러싸였다.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악에 저항하던 제1노총 노동총연맹(CGT)은 새 선거연합에는 정당만이 아니라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많은 프랑스인에게 이것은 결코 낯선 장면이 아니다. 1934년에 이웃나라 독일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극우 파시스트 세력이 집권 일보직전까지 약진하자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독일에서 나치 정부가 야당과 노동조합을 모조리 해산시키는 것을 목격한 프랑스 노동자들은 가두에서 극우정당 지지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한편 양대 좌파정당인 사회당과 공산당에게 파시스트에 맞선 연합전선 결성을 촉구했다.
이 대중운동을 바탕으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결성됐고, 1936년 집권에 성공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극우정당들이 더 성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프랑스 노동운동의 자랑인 최초의 여름 유급 휴가를 비롯한 노동권 확대 입법을 단행했다. 물론 더 깊이 들어가면, 좌파의 영광과 함께 한계와 오류, 비극을 수반한 복잡한 역사가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아래로부터' 건설됐던 인민전선 경험 덕분에 프랑스 민주주의의 역사가 독일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은 것만큼은 분명하다.
지금, 프랑스인들 자신이 이 역사를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새 선거연합의 이름부터가 '신인민전선'이다. 1930년대에 저지했던 역사의 '가장 나쁜' 경로를 이번에도 다시 막아내겠다는 결의가 담긴 이름이다. 주요 네 좌파정당만이 아니라 서른 개가 넘는 좌파 정치조직들이 총출동했다는 점, CGT만이 아니라 제2노총인 프랑스민주노동연합(CFDT)이나 급진적 노총인 연대노동조합연맹(SUD)도 지지를 선언했다는 점, 사회당이 포함된 선거연합을 매번 거부했던 급진좌파 성향 반자본주의신당(NPA)조차 이번에는 긍정적 입장을 냈다는 점, 금융거래과세시민행동연합(ATTAC) 같은 시민운동 조직도 합류했다는 점 등이 하나같이 이런 결기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신인민전선이 마치 마크롱의 좌익 버전인 양 '반파시즘'만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마크롱 정부의 정책 기조와 명확히 단절하고 기존 경제사회 모델을 뿌리째 흔드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모든 '반국민행진'은 지난 수십 년처럼 '시간 벌기'에 그칠 따름이다. 신인민전선은 이런 정책 전환을 '집권 후 첫 15일 계획', '집권 후 첫 100일 계획', '장기 변혁 계획'으로 나눠 발표했다(Harrison Steller, "France's New Popular Front Has a Plan to Govern", Jacobin, 2024년 6월 15일).
우선 집권 후 첫 15일 동안 펼칠 긴급 대책은, 월 1600유로(약 240만원)에 맞춘 최저임금 인상, 필수재와 에너지 가격 동결, 사회주택에 대한 긴급 재원 투입, 유럽연합 재정준칙에 긴박되지 않는 재정 운용이다. 다음으로 집권 후 첫 100일 동안 시행할 정책은, 가계 구매력 증진, 교육 개혁, 보건의료 시스템 개혁, "생태적 계획" 도입, 부자 증세의 5대 입법이다. 몇 년에 걸쳐 실시할 장기 변혁 계획에는, 공공서비스 강화, 사회주택 확대, 녹색 산업혁명, 경찰 개혁, 제헌회의 소집에 의한 개헌을 통해 '제6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것 등이 포함된다. '제6공화국'의 핵심으로는, 내각제 요소 강화를 통한 현행 대통령제 개혁, 의회 선거에서 전면적 정당명부비례대표제 실시 등을 제시한다.
한편 NUPES 와해의 도화선이 된 대외정책 분야에서는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을 명확히 '테러'로 규정하되 네타냐후 정부에게 즉각적 휴전을 촉구하며 국제 제재를 가한다는 타협안이 채택됐다.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관련해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조건 지지 입장을 확인했다.
미국 대선 이상으로, 인류사의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 될 프랑스 총선
신인민전선의 총선 전망이 장밋빛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론조사에서 신인민전선은 국민행진과 3-5%의 격차를 보이며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 유럽의회 선거에서 투표율이 51.85%에 머물렀고 따라서 투표장에 나오지 않는 정치 실망층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면 신인민전선의 극적인 역전도 가능하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1차 투표, 2차 투표로 나눠 복잡하게 치러지는 프랑스 총선이기에 단순 지지율만으로 승자를 점치기 힘든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여론조사에서 국민행진이 선두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만만히 볼 문제가 있다.
신인민전선 자체의 불안 요소도 적지 않다. 급박한 정치 일정에 맞춰 신속하게 연대를 복원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하겠지만, 그만큼 채 해소하지 못하고 넘긴 문제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에서는 일부 반-멜랑숑 성향 현역 의원들이 후보 명부에서 탈락하는 공천 잡음이 있었다. 급진좌파에 우호적인 이들조차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당내 민주주의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이 사태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런가 하면 사회당에서는 마크롱 정부 등장에 가장 커다란 책임이 있는 전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지역구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신인민전선에서 사회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 인사들은 이를 "올랑드조차 우리 편"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하필 왜 올랑드가 우리 쪽에"라며 탄식해야 할지 착잡해 하고 있다. 아마도 2차 투표에 가서 상당수 지역구에서 마크롱 진영 후보와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면, 긴장과 고민, 내부 충돌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21세기형 파시즘의 돌이킬 수 없는 성장에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려는 프랑스 좌파의 새로운 흐름과 시도는 세계인의 뜨거운 주목과 응원을 받을만하다. 비록 단기적으로 이번 선거에서는 극우파 집권을 저지하고 좌파 내각을 수립하는 데 실패할지라도, 일단 신인민전선이 NUPES보다 더 확대된 지반을 확보하기만 한다면, 장기전의 승산은 열려 있다. 진지하게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이들의 반격은, 이제 시작이다.
이 점에서, 갑작스럽게 열린 이번 프랑스 총선은 올해 말에 있을 미국 대선만큼이나 인류 전체에게 중대한 선택의 기로가 될 것이다. 아니, 트럼프를 어떻게든 저지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누가 르펜과 맞대결하는가가 이후 세계사의 전개에 더 의미심장한 결과를 끼칠지 모른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4.06.26
어떤 자유주의자의 자기 착취에 관한 고백
올 것이 왔다. 공황장애. 처음 겪는 일이다. 예고 없이 공포감이 밀려든다. 일순간 가슴이 막히고 숨이 조여온다. 두려움에 대해 생각할 겨를만 줘도 좋겠다. 하지만 공황장애는 그런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기습 공략할 뿐이다. 그럴 만도 했다. 주변에서 내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던질 때 이런 너스레를 떨었다. “만성 피로를 새로운 과로로 덮고 살죠, 뭐.” “어차피 죽으면 썩을 몸, 아껴서 뭐 하리.” 이러면서 주말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응분의 벌을 받은 거다.
철학자 현병철의 ‘피로사회’를 읽었다. 전문가가 내게 혼쭐내는 것 같았다. 현대사회는 사람을 ‘긍정성 폭력’에 시달리도록 한단다. 박탈보다는 포화, 배제보다는 고갈 작전을 펼친다. 당하는 이는 적대감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이 폭력인지도 알아차리기 힘든 탓이다. 현병철은 소진증후군도 콕 집어 언급했다. 그것은 긍정성이 넘쳐날 때 일어나는 징후란다. 다른 말로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로 타버리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동질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는 규율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넘어왔다. “금지, 명령, 법률이 차지하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의식이 누구에게나 균질하게 팽배한 사회. 바로 그 현상을 ‘동질적인 것의 과잉’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그럼 내게 약간이라도 면죄부를 줘야 하는 게 아닐까? 나 혼자 돈 많이 벌어서 잘살아 보자며 이렇게 발버둥 친 것은 아니잖나. 내 과로에는 최소한의 ‘공익적 요소’가 있노라 항변하고 싶었다. 억하심정을 누른 채 계속 읽어나갔다. 그러다 결국 다음 구절에서 마음이 무너졌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다른 이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현병철은 더 나아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착취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다.” 성과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마음의 병은 이 같은 ‘역설적 자유’가 병리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라 규정했다.
자유주의 성향이 있는 허무주의자. 나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이렇게 바라보았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되 결과나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나.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이같이 어설픈 자유주의 기질이 결국 내 몸과 영혼을 무리하게 갉아먹은 셈이다. 핑계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마다 다가오는 제천간디학교 신입생 모집. 정원 미달이란 상상하기 싫다. 만약 그런 사태를 맞이하면 학교의 정체성과 근간이 흔들린다. 예비 입학생 부모 연령대가 모인 단체에서 강연 요청이 오면 거부하지 못했다. 전국 어디든 불려 나갔다. 신문 연재 칼럼. 내가 가진 의식 수준보다 다섯배는 더 낫게 잘 쓰고 싶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늘 무리해서 마감한다. 대학원 강의. 대안교육학과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참신한 접근과 지적 자극이 넘쳐나는 수업을 이끌고 싶다.
잘하고 싶은 욕망의 리스트는 줄줄이 이어진다. 아, 내가 방금, ‘욕망’이라 했던가? 앞서 방패막이로 세웠던 ‘공익적 요소’는 다 어디로 갔지? 능력 있는 교육실천가, 혹은 매력적인 교육연구자 이미지 속에 감춰둔 내 과도한 인정욕구가 결국 나를 착취한 범인이었다. ‘나는 영업 실적을 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회사원이 아니다.’ 마음속으로 이러면서 빠져나갈 구석을 찾았다. 곱씹어보니 내가 ‘어떤 대의를 위해’ 나를 남용하는가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다. 나를 조금 덜 유능한 사람으로 놓아둔 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했다. 어쩌면 공황장애는 내 거대한 착각과 욕망에 균열을 내고, 자신을 돌아보라 조언하기 위해 불쑥 찾아들었는지 모른다.
학교라는 제도를 생각해본다. 그곳은 여전히 규율사회이면서 성과사회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네모 상자 교실에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자신을 소진한다. “아이들 25% 정도는 신경정신과, 또는 정서 행동장애 관련 약을 먹고 있다”는 초등 교사들 증언이 떠오른다. 탈출구는 하나다. ‘느긋하게 최선을 다하자’는 정도 제안으로는 모자라다. 당분간 일이나 학습노동에 손대지 않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다. 그게 정책 구현으로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우선은 당장 나부터라도 숨을 좀 쉬어야겠다. 불청객으로 다가온 이 공황장애 사태가 훗날 썩 괜찮은 후일담 소재로 남길 바랄 뿐이다.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 한겨레 2024.06.26.
간판이 말해주는 도시의 실체
여행 작가들 사이 유명한 말이 있다. “로마에 일주일 가보고는 몇 권의 책이라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서 산다면 한 페이지의 글도 쓸 수 없다!” 한곳에 오래 살면서 겪는 일상의 반복과 인습의 축적은 그 장소 본연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지속적 질문을 방해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습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어보면 의외로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시내 유흥가와 아파트단지 상가를 뒤덮은 간판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홍콩, 뉴욕, 라스베이거스 등의 이국적인 간판 풍경에는 카메라를 들이댄다. 나는 유학을 떠났다 몇년 만에 돌아와 오랜만에 다시 만난 고향 서울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다. 도시를 뒤덮은 간판이 화려함이 아니라 절규라는 사실이 그제야 보였기 때문이다.
현대도시와 도시간판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한 것은 간판의 종주국 미국의 건축학자였다.(‘라스베이거스의 교훈’, 로버트 벤투리) 전통적인 도시에는 눈에 띄는 간판이 필요 없었다. 시민 대부분 그곳에 오래 살아온 거주민들이라 굳이 큰 간판을 건물에 붙이지 않아도 그곳이 은행인지 관공서인지 알게 마련이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처럼 자동차로 들른 외지인이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 도시 맥락은 와해된다. 각각의 건물은 자신의 상업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시각적 상징성’을 가지려 할 것이고, 과장되게 장식된 간판으로 건물의 용도를 직접 ‘말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로 지나며 길가의 건물이 어떤 곳인지 인지하는 것은 겨우 몇 초 정도이고, 그것도 비슷비슷한 풍경이 무한반복되는 상황이다. 잠시 주어진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오지 않을 ‘뜨내기’를 자기 건물로 끌어들이려면 멀리서도 잘 보이게 간판을 크게 하고, 무엇을 파는 곳인지, 그것이 지금 당사자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몇 초 만에 설득해야 하는 그야말로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간판이 커지다 결국, 건물이 몸소 조형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시내나 국도변에서 흔히 보는 대형 엠(M)자 조형물이나 바닷게 형태의 건물이 이런 생존경쟁의 절박함에서 잉태된 것들이다. 도시는 생존과 경쟁을 위한 상징물로 채워졌고, 그것들은 시민을 유혹해야 할 소비의 대상으로 바꿔 버렸다. ‘이웃’이 아니라 ‘소비체’가 된 시민은 그 자신 또한 도시를 오직 소비를 위해서만 사용하게 된다. 누구를 만나는 것도, 잠시 앉아서 쉬는 것도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불가능해졌지만, 더 중요한 점은 아무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시 상징물은 소수가 주도하는 경쟁 논리와 전략에 의해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내일이면 다른 상징으로 대치될 것이고, 도시는 잠시 들렀다 가는 이방인과 한시적 광고판이 짧은 시간 공존하는 하루살이의 생을 이어간다. 소위 트렌드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도시 상징들은 도시 공동체의 시간과 기억을 ‘휘발성’으로 변질시켜, 세대가 달라도 같은 장소를 서로 공유하는 것 같은 도시적 경험의 축적을 말살한다. 그 많은 서울의 식당 중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맛을 공유하는 곳이 도대체 몇 군데나 될까. 거리를 점령한 화려한 간판은 강렬한 자극을 주며 시민을 집단적 기억상실증으로 이끄는 머릿속 지우개인 셈이다. 그것이 화려한 간판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우리 사회와 도시의 실체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 끝없는 환각 상태의 경쟁을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 한겨레 2024.06.26.
딱딱하고 강해지는 한국어
최근 서울의 1970~1980년대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옛 모습도 흥미로웠지만 말의 변화가 매우 크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 영상 속 서울 사람들 말투는 억양이 비교적 평탄하고 부드러운 것이 인상적이었다. 내 기억에 그때만 해도 서울 시민들 가운데는 지역 출신들이 많았고, 따라서 표준어와 여러 지역 방언이 동시에 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정제된 표준어에 맞춰 촬영한 영상과 오늘날을 단순 비교하는 건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뚜렷한 변화들은 흥미로웠다.
가장 큰 변화는 모음이 대체로 짧아졌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짧은 모음과 장음이 많이 들린다. 강조할 때나 문장 끝에 모음이 오는 경우 길어지기도 하지만 단어 사이 모음은 확실히 매우 짧아졌다. 장음을 주로 사용하고, 속도가 빨라지면서 덩달아 말이 빨라져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장음이 몇 개씩 나란히 있는 경우가 많은 영어나 독일어 같은 게르만어를 멀리서 들으면 딱딱하고 강한 느낌을 받곤 하는데 한국어 역시 ‘장음화’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 딱딱하고 강하게 들린다.
된소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빠질 수 없다. ‘자장면’ 표기 논쟁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짜장면’으로 발음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꽤 오랫동안 ‘자장면’만 표준어 표기로 인정했다. 지난 2011년 국립국어원이 둘 다 표준어 표기로 인정한 뒤 이제는 대부분 ‘짜장면’으로 쓰고 있다. 이와 비슷한, 된소리 증가 사례는 많다. 2000년대 이후 ‘선생님’을 ‘샘’으로 줄여 부르더니 언젠가부터는 ‘쌤’이 되었다. 텍스트 기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세계 안에서도 된소리 사용은 부쩍 늘어났다. 사용 빈도가 그리 높지 않아 텍스트에서 사용하면 직관적으로 어감의 세기를 드러내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연결 어미의 톤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도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고’이다. 특히 뭔가를 설명할 때, 모음은 짧게, 톤은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의 말투가 어미나 한 문장 안에 두세 번 연달아 나오면 문장 톤의 고저가 마치 높은 파도가 있는 것처럼 매우 두드러지게 들린다. ‘~하고’를 예로 들면 ‘하’를 길게 발음할 때 억양은 비교적 덜 올라가지만, 문장 안에서 독특한 파도가 일어나는 것처럼 들려, 40여 년 전의 평탄한 억양과는 매우 큰 변화가 느껴진다.
언어 변화는 매우 천천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쉽게 느끼기도 어렵고 그 원인을 분석하기도 어렵다. 사회언어학의 고전적 이론에 따르면 상류층에서 시작한 말의 유행은 이른바 위에서 아래로 퍼져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간다고 한다. 이에 비해 일반 대중, 특히 젊은 세대 안에서 시작한 말의 유행은 옆으로 퍼진 뒤 위로 향하곤 한다. 이런 이론의 핵심은 특정 사회 계층이 특징적인 말을 사용함으로써 차별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다른 계층 또는 다른 사회와의 거리를 만들어냄으로써 내부 연대감을 강화한다는 데 있다. 이른바 상류층은 우월한 위치를 드러내고, 서민들은 심리적 단결을 꾀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불과 40여 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처럼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왜일까. 에스엔에스와 새로운 인터넷 매체를 주로 소비하는 젊은 층으로부터 나온 것은 확실하다. 이들 사이에 유행은 대면과 비대면의 소통에서 시작하고 여러 수단을 통해 빠른 속도로 보급된다. 이러한 유행이 젊은 세대 안에서 정착된 뒤 점차 위아래 세대로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 전반의 언어 변화를 견인한다. 그렇게 보면 윗세대들은 ‘젊어 보이기’ 위해 젊은 세대의 말투를 무조건 따라 한다기보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새로운 언어 유행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언어에 변화를 준다. 그렇게 차츰 변화해온 것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낸 셈이다. 이를 두고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대 흐름에 맞춰 변화하는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또 자연스러운 언중의 태도이기도 하니 그러하다. 다만 영상 속 그 시절 그때의 서울의 말씨를 다시 듣기 어려워졌다 생각하니 그리운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 한겨레 2024.06.26.
스카이캐슬과 기생충의 나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쏘아올린 종합부동산세 재검토 신호탄이 총선 뒤 캄캄했던 용산 하늘을 환히 밝혀주자, 대통령실과 보수언론들은 이참에 상류층의 숙원을 다 풀고자 종부세 완전 폐지, 다주택자 중과세 폐지, 고액 상속자 세율 대폭 인하, 근로자 소득세 감면 축소 등 노골적인 ‘부자 감세-서민 증세’ 구상을 쏟아내고 있다.
이 같은 풍경은 특정 세제를 둘러싼 논란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소수 상류층의 관심사가 정치권의 최우선 관심사가 되며, 어떻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걸인,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되는지, 어떻게 자산과 자가를 갖지 못한 광범위한 계층이 정치와 공론장에서 지워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현장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종부세는 중산층의 문제가 됐다’는 말이 있다. 기망이다. 문재인 정부가 종부세를 강화하고 집값이 폭등했을 때도 납부가구는 총가구의 2.67%였고, 윤석열 정부가 과표기준을 하향한 뒤 현재 종부세 납부가구 비율은 1.75%(조세재정연구원 재정패널)다. 이것이 17%, 27%처럼 보이게 만드는 게 바로 지배계급의 담론 권력, 의식조작 권력이다. 종부세를 없애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납부자 비율을 부풀린다. 분모를 전체 가구가 아닌 ‘주택 소유자’로, ‘아파트 소유자’로, ‘서울 아파트 소유자’로 좁힐수록 종부세 납부자 비율은 점점 높아진다. 이런 부풀리기 끝에 ‘4집 중 1집이 종부세’라는 어이없는 계산이 나온다.
현실을 직시하자. 지금 한국은 자산 상위 5%가 전 국민 보유자산의 약 30%를, 상위 20%가 65%를 갖고 있다. 자산 축적이 시작되는 30대에 상위 30%가 전체의 83%를 갖고 있다. 즉 ‘자산 기반 복지’를 실현할 수 있는 계층은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에선 자산이 복지이므로 감세해야 한다’는 논리는 일부 계층의 이해관심을 허위 일반화한 것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은 과세할 자산이 없다. 청년층의 자산 상위 20%는 자산의 77%가 부동산이지만 하위 20%는 고작 11%(보건사회연구원 2022년 보고서)다. 서울 청년 1인 가구의 62.7%가 자산 빈곤(서울연구원 2023년 보고서)이고, 노인들은 자산을 모두 연금화한다고 가정해도 빈곤율이 26.7%(한국개발연구원 2023년 보고서)에 달한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은 이러한 국민의 삶에 ‘부자 세금’의 100분의 1만큼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가? 3주택, 30억원 상속, 가업 승계 같은 얘기에 장차관과 국회의원들이 열을 올리는 모습은, 마치 바깥에선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쓰러지고 있는데 거실에선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카드놀이나 하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이하다. 더 충격적인 것은 공적 책임이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관심은커녕, 마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부자들한테 세금을 뜯어 기생하는 존재인 듯이 취급하는 차별적, 반인권적 담론들을 공공연히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감세 논쟁에서 그런 차별 담론의 중심 상징은 ‘과세 미달자’다. ‘소득세 과세 미달자가 37%나 된다’, ‘상위 20%가 90%의 세금을 낸다’는 말이 수많은 텍스트에 등장한다. 이 같은 ‘가난의 범죄화’와 ‘부자 억울 담론’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부터 반복되는 패턴으로 제도화된 지배담론이며, 또한 지배계급의 이익을 제도화하는 담론이다.
과세 미달자는 납세 거부자나 세금 미납자가 아니다. 소득 신고자 중 과세할 만큼의 소득에 미달하는 저소득층이며, 중소기업 근로자나 비정규직 청년들이 다수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는 소득 신고자의 50%에 이른 해도 많다. 이 같은 조세감면 제도는 한국의 복지제도가 취약하기 때문에 일종의 대체 제도로 활용됐다. 임금이나 복지 향상 없이 근로자 세금 감면을 축소하면 이 계층의 경제 상황은 파탄 난다.
저소득층을 ‘무임승차자’로 몰아 부도덕한 존재로 묘사하는 담론도 흔하다. 복지는 원하면서 세금은 안 내려 한다거나, 자기 세금은 싫지만 남의 증세는 찬성한다는 식인데, 이 역시 계급적 편견이다. 관련된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소득 변수는 세금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약하며, 이념적 진보이거나 임금생활자들이 세금을 가장 기꺼이 낸다.
‘부자 억울 담론’은 정작 그들이 얼마나 많은 세금 혜택을 받는지는 은폐한다. 기획재정부 자료로 올해 연 소득 7800만원 이상 소득자가 혜택받는 비과세와 세금 감면은 15조4천억원, 대기업을 위한 조세지출도 6조6천억원에 이른다. 그동안 복지 목적의 조세지출이 늘었는데, 윤 정부 들어 고소득층과 대기업 대상 조세지출이 급증했다. 이 같은 자산, 주택, 조세 관련 정책들은 오늘날 한국 정치의 가장 첨예한 갈등의 대상이다. 민주화 직후에 한국에 계급정치란 없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계급 균열이 점차 선명해졌는데, 특히 자산과 주택의 영향은 일관되고 강력하다.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대략 2006년부터 대선, 총선, 지선(지방선거) 모두 자산 상층과 자가보유자는 보수 투표로, 자산이 적거나 세입자는 민주당 투표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세입자와 자산 중하층의 이익을 분명히 대변하지 못하고 고자산층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종부세는 정권교체 촉진세’라는 주술 때문이다. 그러나 자산 상층 다수는 어차피 보수를 찍는다. 관건은 민주당을 찍으려던 유권자 중 종부세 때문에 보수로 돌아선 유권자가 정권교체의 주요 원인이 될 만큼 많았느냐다. 실제 2022년 대선에서 종부세가 과중하다고 생각한 유권자, 종부세 대상자가 확대된 지역의 경우 ‘문재인→윤석열’로 이탈이 많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민주당에 실망한 자산 중하층과 세입자들의 투표율 하락과 이탈이다. 지지층을 배신하는 정당에 힘이 붙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최근 종부세 파동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는 철저히 반성하고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라는 이론을 나는 수용한 적이 없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가가 지배계급에 의해 포획되면 정치는 부유층의 민원 청취와 해결 기관으로 타락한다는 사실을 요즘 목격하고 있다. 과연 스카이캐슬과 기생충의 나라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상실한 정부 관료들과 정치인, 언론은 부끄러운 줄 알라.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한겨레 2024.06.26.
베드로의 거짓말, 언론의 거짓말
수백 년 동안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빛을 주겠다며 나타난 인물 가운데 예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을 잘못 뽑았던 탓에, 결국 로마군대에게 처형 당하고 말았다. 예수가 직접 뽑은 열두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배신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배신에 앞장섰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은 왜 예수를 배신했을까. 그들 중에는 밀정도 있었고, 배신자도 있었고, 도망자도 있었다. 예수가 사람 마음도 훤히 꿰뚫어 보았다고? 예수는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인사는 만사인데도…
예수운동 예루살렘 공동체 이끌다 로마로 간 수제자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에게 맨 처음 선택된 제자 중 하나였다.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예수가 베드로를 불렀다.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예수의 열두 제자에 속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물었을 때, 베드로가 열두 제자들을 대표하여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백했다. 바위라는 뜻의 이름 베드로, “당신은 베드로입니다. 내가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예수 말씀 덕분에 베드로는 예수운동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예수운동 공동체에서 존중받았다.
구스타프 도레 '예수를 부인하는 성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의 열두 제자 목록에서 언제나 맨 처음 언급되었다. 부활한 예수가 맨 처음 모습을 보인 제자도 다름 아닌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부활한 예수의 첫째 증인으로서, 다른 제자들과 분명히 구분되었다. 예루살렘 공동체 초기에 베드로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성서 구절이 있다. "시몬, 시몬, 들으시오. 사탄이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여러분을 제멋대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주시오."
배신했던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뽑는 데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예수운동의 방향에 중요한 오순절 설교를 하였고, 예수 부활 이후 제자들 중에 처음으로 기적을 행했던 사람도 베드로였다. 예수운동 예루살렘 공동체의 선포 내용을 요약한 사람도 그였다. 베드로는 공통년 30년부터 예수운동 예루살렘 공동체를 이끌었다. 그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 지역에서 기적을 행하고, 유다교에 호감을 가졌던 로마군 고위 장교 고르넬리오에게 세례를 주었고, 유다인 아닌 사람들에게 선교하도록 예루살렘 공동체를 잘 설득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통치자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예루살렘 공동체를 박해하던 43년 무렵,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유다인 아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유다인 아닌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고, 예수운동이 로마제국 서쪽 지역으로 확장될 때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서 순교한 믿음과 겸손과 인내의 모범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여 예수 뒤를 따랐다. 예수운동 초기의 위대한 세 인물이었던 야고보, 베드로, 바울은 스승 예수처럼 역사 너머로 쓸쓸히 사라졌다. 예수운동의 보수파 대표 야고보, 진보파 대표 바울, 중도파 대표 베드로는 각각 걸었던 길은 달랐지만, 예수와 똑같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
공통년 100년 무렵 로마와 연관된 베드로 순교 이야기가 퍼졌다. 2세기 중반부터 로마에 있다는 베드로와 바울 무덤을 존중하는 풍습이 공동체에 생겼다. 정치적 이유나 종교적 목적에서 시작된 관행은 아니었다. 죽은 자를 기리는 풍습이 로마 문화에서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운동 공동체에서도 베드로와 바울 무덤을 존중하는 풍습이 곧 자연스럽게 생겼다.
베드로는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지만, 역사의 예수를 직접 접촉했을 뿐 아니라 예수 전승을 담보하는 인물로서 예수운동의 여러 신학 흐름에서 존중받았다. 고통 중에도 믿음을 지킨 인물이며 최초의 순교자중 하나로 예수운동에서 널리 존경받았다. 마태복음 저자는 마태복음 전승을 담보하는 인물이며 제자들과 공동체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의 모범으로 베드로를 내세웠다. 박해받던 그리스 지역 예수운동 공동체들이 믿음과 겸손과 인내의 모범으로서 로마제국 서쪽 지역에서 주로 선교하던 베드로를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가복음이 그대로 적은 위대한 인물 베드로의 배신
그렇게 위대한 인물 베드로가 예수를 배신했다니? 예수 죽음 이후 예수를 널리 전파하는 놀라운 공적을 남긴 베드로는 예수 죽음 당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모른다고 잡아뗀 사람이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예수가 직접 뽑은 열 두 제자 중에 예수에게 충성을 다짐하지 않은 제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예수 곁에 남아 있던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알지 못하노라 부인했고, 유다는 예수의 반대자들에게 예수를 밀고하고 체포하는 데 앞장섰으며, 다른 열 제자는 예수가 체포될 때 모조리 도망쳤다.
베드로는 공통년 64년 로마제국에게 처형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베드로의 배신이 마가복음에 담긴 사실은 당시 예수운동 공동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예수운동이 가장 자랑하던 위대한 인물 베드로의 치부를 마가복음 저자는 전혀 감추지 않고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성서는 그토록 정직한 책이다.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배신과 회개는 오늘도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예수의 행동과 말씀을 직접 보고 듣고,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따르던 사람들도 얼마든지 예수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수를 직접 보고 듣고 따르던 베드로 같은 수제자도 예수를 배신했다면, 예수 떠난 2000년 후 지금의 우리야 얼마나 더 예수를 배신하기 쉽겠는가.
둘째, 우리가 베드로처럼 회개하기는 쉽지 않다. 배신한 사람이 언젠가 회개한다는 보장이 없다. 배신한 사람은 배신을 자꾸 반복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배신은 아주 사악한 사람들만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닌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배신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배신, 배신의 일상화와 평범성이 종교나 정치에서나 큰 문제를 일으킨다.
조국 법무부 장관 및 가족과 관련된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23일 조 장관 자택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하면서 조 장관 부인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에 대한 소환 조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입구 바닥에 설치된 포토라인. 2019.9.24. 연합뉴스
진실 외면하고 중립을 가장한 자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에 가리라
베드로의 죄는 무엇이었을까. 진실을 말하지 않은 죄, 거짓말을 한 죄였다. 베드로가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도 죄요, 거짓말을 한 것도 죄다. “예” 할 것을 “예”라고 말하지 않아도 죄요, “아니오” 할 것을 “아니오” 말하지 않아도 죄다. “예” 할 것을 “아니오” 말해도 죄요, “아니오” 할 것을 “예” 말해도 죄다.
언론과 종교에게 물을 차례다. 언론과 종교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언론과 종교는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론인과 종교인은 “예” 할 것을 “예”라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는가. 언론인과 종교인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여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언론이 가짜뉴스의 폐해를 비판한다고 하자. 그 언론은 거짓말 생산업체에 불과하다. 그런 언론이 시민들에게 신뢰받을 수 있을까. 거짓말은 정치도, 언론도, 종교도 뿌리까지 다 망가뜨린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요, 불의 앞에서 침묵도 거짓말이요,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에 속한다. 거짓은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하느님이 지금 대한민국 언론인들과 종교인들에게 묻고 있다. “내 백성들이 고통 당할 때, 너희들은 어디 있었느냐? 내 백성들이 울부짖을 때, 너희들은 진실을 말하였는가?”
단테 신곡에 유명한 말이 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언론인들과 종교인들의 운명에 대한 나의 아주 개인적인 생각은, 그들 대부분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슬픈 예감이다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6.26.
돈 없어 감옥에 끌려간 5만7267명
정권 교체가 누군가에겐 공포를 뜻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돈이 없어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끌려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다. 문재인 정부 5년차였던 2021년 한 해 동안 벌금미납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은 2만1868명이었다. 문재인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에는 2만5975명으로 늘었다. 윤석열 정부 2년차인 2023년에는 두 배 이상인 5만7267명으로 급증했다. 부자 감세로 줄어든 곳간을 벌금으로라도 채우려고 무리했던 것 같다. 벌금 때문에 잡혀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벌금 납부도 늘어난다.
벌금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은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가벼운 범죄를 저질렀다는 거다. 가벼운 범죄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노출된다. 얼마라도 급전이 필요한데, 돈을 융통할 방법은 꽉 막혀 있을 때, 이 곤란한 상황을 파고드는 악질 범죄자들이 있다. 마치 은행이라도 되는 양 불쑥 문자를 보낸다. 통장을 보내면 대출이 가능한지 살펴보겠다는 거다. 통장을 보낸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유혹과 달리, 대출 운운하는 것은 미끼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진화한 수법이다.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기 통장은 대포통장으로 악용된다. ‘전자금융거래법’은 통장을 넘겨주는 행위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고 있다. 이런 경우엔 집행유예를 통해 따끔한 교훈을 주면 그만이지만, 경찰-검찰-법원으로 이어지는 형사시스템은 기계적인 처벌을 반복한다. 피도 눈물도 없다.
200만원쯤 빌려볼까 하다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으로 전과자가 되고 500만원 정도의 벌금을 맞는 처지가 된다. “가난이 죄”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상황이다. 500만원이면 50일을 갇혀야 하는데, 생계를 내팽개치거나 돌봐야 할 가족을 두고 감옥에 가서 몸으로 때울 수도 없다. 격리해야 할 만큼 위험하거나 죄질이 나빠서 감옥에 가두는 벌을 받은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이렇게 감옥에 갇힌 사람이 지난해에만 5만7267명이었다. 올해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돈 때문에 감옥에 끌려갈지 모르겠다. 냉방장치도 없는 좁은 감옥에서 구금의 고통만 몸에 새기며 가난의 설움을 곱씹어야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당장 500만원쯤 되는 벌금을 한꺼번에 마련하는 건 어렵지만, 50만원씩 10개월에 걸쳐 나눠 낼 수 있다면? 그만큼 감옥 가는 사람들은 부쩍 줄어들 거다. 인권연대의 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빌려주고 나눠 갚도록 하는 것만으로 가난한 사람의 감옥행을 막고 있다. 검찰이 스스로 마련한 ‘검찰집행사무규칙’도 6개월에서 최장 12개월까지 분할납부(분납)나 납부연기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수급권자와 차상위계층, 한부모가족, 자활사업 참여자, 장애인, 본인 외에는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 가족이 아프거나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 실업급여를 받거나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사람이 대상이다. 당사자가 신청해도 되고, 검사 직권으로 분납을 결정할 수도 있다. 현황은 어떨까?
정보공개를 청구하니, 검찰은 신청자 대부분이 분납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2023년에는 2만9787명 신청, 2만9777명 허가였다. 3만명 가까운 사람 중에 딱 10명만 빼고 모두 허가받았다. 놀라운 확률이다. 5만7267명이 감옥에 끌려간 2023년의 벌금 납부 대상자는 51만209명이었다. 이 중 겨우 5.8%만이 분납 신청을 했다. 왜일까. 제도를 몰라서일까.
검찰은 분납 신청 자체를 잘 받아주지 않는다. 분납을 허가받으려면 벌금의 절반이나 적어도 30% 정도를 미리 내야 한다. 500만원이라면 200만원 정도는 선납하고, 나머지 300만원을 2개월로 나눠 내게 하는 식이다. 규정대로 6개월이나 12개월에 나눠 내게 하는 일은 전혀 없다. 분납의 장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하는 완고한 운영이다.
검찰이 열심인 것은 벌금 징수다. 지청별로 ‘특별검거반’을 만들고, 당장 벌금을 내지 않으면 OO빌라인 집에 쫓아가겠다. 식품인 당신 직장에도 쳐들어갈 거란 협박을 일삼고 있다. 말로만 그치지 않고, 진짜 잡으러 가는 경우도 많다.
검찰은 2022년 8월에 “빈곤 취약계층 벌금미납자 형집행 제도개선”을 천명했고, 이를 통해 감옥 대신 사회봉사를 활성화하고, 검사 직권으로 분납을 허가하는 등의 노력을 한다고 밝혔지만, 검찰의 ‘제도개선’ 이후 가난한 사람의 감옥행은 두 배 이상 늘었다.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선 꿈쩍도 못하는 검찰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엄정한 법집행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냉혈한들에게 형집행권을 계속 맡겨둬야 할지도 검찰개혁의 과제로 따져봐야겠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 경향 2024.06.27.
가시로 막고 막대로 치려 해도
자신에게 불리한 일은 숨기거나 뭉개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반면 유리하다 싶은 일은 떠벌리거나 부풀린다.
윤석열 대통령의 첫 ‘국정브리핑’은 그런 속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주무 부서도 파악 못했고, 시작 8분 전에야 공지된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 탐사 결과가 나왔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발표 내용을 보면 석유와 가스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구조가 확인됐다는 수준이다. 아프리카 정상들과 연쇄 회담이 예정돼 있던 윤 대통령이 굳이 나서서 브리핑 할 일이었나 싶다. 게다가 호주 석유개발회사가 이 사업을 ‘가망 없다’고 결론 낸 사실이 알려지고, 석유가스 매장 가능성을 분석한 액트지오의 신뢰성에 의구심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잇따랐다. 결국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이슈를 부풀리려 했다는 의심이 짙다. 상시화하고 있는 레임덕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국면 전환용 카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부의 정치공학적 시도 대부분이 안 하느니 못한 것으로 귀결됐던 것처럼 이번 일도 비슷한 궤적이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파는 식의 사기가 아니라고 설명하느라 정부가 진땀을 빼는 상황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지 않는 민심에 직면한 것이다. 실제 민심은 냉담하다. 윤 대통령 지지율은 20%대를 헤매고 있다. 이런 게 레임덕 아니면 무엇일까.
민심의 저변을 흐르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다. 총선 민심은 윤 대통령의 독선과 오만에 경종을 울렸다. 대통령이 변화와 쇄신의 길로 가길 바랐다. 윤 대통령의 행보는 이와 동떨어진 것이었다. 민정수석을 부활시켜 검찰 2년 후배를 앉혔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고리 3인방’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을 시민사회수석실 비서관에 기용했다. 국민의힘 워크숍에선 “제가 대신 욕먹겠다”면서 술을 돌렸고, “지나간 것은 다 잊자”고 했다. 민심은 “이제 됐다”고 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대통령 스스로 뛰쳐나가는 격이다.
공직자는 자신의 결정과 행동을 주권자인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 이런 ‘설명책임’은 민주주의 근간이자 권력 사유화나 부패를 막는 중요한 기제다.
이 정부는 되레 숨기거나 뭉개려는 속성을 노골화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에 대한 ‘격노설’에 동문서답했다. ‘격노’ 자체가 없었다던 대통령실은 ‘채 상병 관련은 아니다’, ‘수사 권한 문제로 야단쳤다’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채 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에 나온 관련 인물들은 증인 선서를 거부하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 국방부 관계자들 간 전화통화 등 외압 의혹이 속속 나오는 상황에서 특검 필요성만 키우는 행태다.
설명책임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김건희 여사 리스크’ 대응이다. 대선 때 허위 이력 논란 등으로 최소한의 역할만 하겠다던 김 여사는 해외 순방 시 지인 동행 등 각종 논란에도 활발하게 행보를 해오다 명품백 수수 의혹이 불거지자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6개월 만에 공개 행보를 재개했다. 윤 대통령이 김 여사 수사를 무력화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검찰 인사를 강행한 시점이었다. 그 과정에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었다.
권익위도 6개월간 끌어온 김 여사 명품백 수수 사건을 ‘종결’ 처리하면서 명품백 수수의 직무 관련성이나 신고 의무 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반부패총괄기구가 배우자는 명품백을 받아도 된다는 논리만 제공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같은 날 윤 대통령과 6개월 만에 순방에 나선 김 여사는 에코백을 들어 입길에 올랐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할수록 코끼리가 더 떠오르는 법이다. 뭉개려고 할수록 악수(惡手)가 된다.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옛 시가는 세월의 흐름처럼 세상에 막을 수 없는 일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상식과 순리를 따라야 한다. 타조처럼 머리를 처박거나 엎어져서 버틸 상황은 지났다. 보드게임 ‘젠가’처럼 신뢰라는 블록들을 하나씩 빼먹다가 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대통령의 독선과 오만에 원투 스트레이트로 따끔한 맛을 보여준 민심이 언제 카운터펀치를 날릴지 모른다. 그 전에 결단해야 한다. 대통령 권한이든, 특검이든 팔 한쪽을 내주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길은 열리지 않는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 경향 2024.06.27.
공화국을 허무는 지도자의 분노
분노는 상반된 성격을 가진 난해한 감정이다. 하나는 자신과 주위를 해치는 화염, 다른 하나는 진보적인 역사를 창출하는 힘이다. 대표적으로 전자는 인간을 극한의 고통에 몰아넣는 전쟁이며, 후자는 억압된 자들이 새 질서를 세우는 혁명이다. 같은 분노인데도 어째서 반대의 현상이 일어날까. 대개 종교는 이를 해로운 감정으로 본다. 불교에선 열반과 해탈을 방해하는 3독심, 즉 탐욕과 성냄과 무명에 속할 정도로 중대한 번뇌다. 자신의 참된 심성을 가리고,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기독교의 7대 죄악에도 분노가 들어 있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 또한 <화에 대하여>에서 이성의 통제를 떠난, 보복하고 싶은 욕망인 악덕으로 보았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과불급이 없는 중용에 따른 분노의 표출은 온화한 인격과 통한다고 보았다. 연구자들은 위협적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진화의 본능으로 보기도 한다.
나는 분노의 발생 원인과 대상에 따라 그 가치가 정반대가 된다고 본다. 욕망 추구를 위해 적으로 삼은 상대를 지배나 제거 대상으로 본다면, 업의 악순환에 갇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욕망을 뿌리로 한 분노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자신의 덕성을 파괴하고 역으로 분노의 노예가 된다. 반대로 공공선을 지향하거나 이웃의 고통에 차마 참지 못하고 폭발한 분노는 그 업의 선순환으로 인해 더 큰 복덕을 얻게 될 것이다. 인류와 연계된 심층의식에서 나온 연민과 자비의 마음은 희생적 정열을 불러일으킨다. 이웃의 고통을 내 것으로 삼겠다는 개아를 초월한 강인한 의지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분노하라>(임희근 옮김)의 저자 스테판 에셀은 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경험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외쳤다. 그는 부정하고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사르트르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것에 감명을 받고 현실에 뛰어들어 사선을 넘나들기도 했다. 지금이야말로 레지스탕스가 필요한 때다. 자본 권력은 여전히 인간을 도구로 삼아 이윤을 극대화한다. 화재로 23명이 숨진 화성 리튬전지 공장의 참상은 자본에 포획된 인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분노는 닥쳐올 위기적 상황을 자각하고 우리 모두를 구제하는 이타심으로 무장한 연대의 감정이다. 인간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불평등한 사회, 지구온난화로 오지 않을 후손들의 미래, 자원 약탈을 위한 자연 파괴, 수십 번의 집단 자살을 향한 핵무기,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원전 건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 소수자들에 대한 각종 형태의 폭력 등은 일상적인 위협을 우리에게 가하고 있다.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길거리로 나와 분노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지도자들의 분노는 피눈물로 쌓아올린 신뢰의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들이 국가 지도자로 등극한 것은 정의를 갈망한 자신의 분노에 찬동한 대중들의 공감에 의한 것. 그러나 막상 권력을 잡은 뒤엔 공공(公共)의 분노가 사적인 분노로 뒤바뀌는 일들이 일어난다. 리더의 분노는 구성원들 간의 공정성을 훼손시키고 조직의 불확실성을 배가시킨다. 아래로 분노의 연쇄반응이 일어나 조직을 붕괴시킨다. 하여 지도자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분노의 독을 내뿜지 않아야 한다.
분노를 부정적으로 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분노와 용서>에서 이를 특정 대상을 목표로 믿음에 종속된 가치를 실현하는 선택적 수단으로 본다. 편향성에 사로잡힌 지도자의 분노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자기 합리화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인적·물적 환경을 소진시킨다.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후, 자신만의 우월한 도덕적 분노를 뿜어댄 지도자들이 득세했기에 숱한 백성의 희생이 따랐던 것이다. 그들과 다름없는 현 대통령의 선택적 분노가 고 채 상병 사건의 투명한 처리를 방해했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민주공화국이 깊은 수렁에 빠지기 전에 대통령은 솔직하게 결자해지해야 한다.
원익선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 | 경향 2024.06.27.
친자본 언론 업고 노조 '자제론' 선동하면 '일터의 민주주의'만 후퇴시킬 뿐이다
<조선일보-전태일재단 공동기획>에 대한 비판
지난 3월 조선일보는 '12 대 88의 사회를 넘자'라는 제목으로 노동 현안에 대한 특집 기획기사들을 내놨다. 3월 5일부터 22일까지 36편의 기사가 게재됐다. 해당 기획은 '조선일보-전태일재단 공동기획'이라는 명의를 달고 있는데, 많은 이들은 노동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기억하고 이 과정에서 현재적 의의를 찾는 역할을 맡아야 할 전태일재단이 대체 왜 조선일보와 함께 이런 공동 기획을 하는지 의문을 표했다. 이는 결코 노동운동의 자기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조선일보가 노동 문제를 보도해온 지극히 편향적이고 친자본적인 포지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본고에서 나는 이 기획의 '명의'를 당연시하지 않으려 한다. 5월 17일에 게시된 전태일재단 성명에 따르면, 해당 기획은 전 사무총장 한석호가 "독단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추진"했다. 재단 측은 "그동안 한 전 총장의 독단적 행동과 비민주적 운영이 되풀이"됐으며, 2월 23일에서야 한석호 전 총장이 조선일보와 협업해 해당 보도를 기획하고 있음을 인지했다고 한다. 즉, 한 전 총장이 자신이 속한 단체 성원들의 동의 없이 단체 명의를 걸고 해당 기사를 기획한 것이다. 해당 성명에 따르면, 전태일재단은 첫 보도 이틀 후인 3월 7일 "(이 기획이) 재단 이사회에서 논의·결정한 사업이 아니"며, "최소한 재단 이사장이 확인하고 승인"하지 않은 사업임이 명시된 공문을 조선일보에 발송했다. 한 전 총장은 이 공문 발송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이번 사안은 한석호 개인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진 기행(奇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여정에서 이견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의 방향에 대한 논쟁을 건강하게 진행하려면 의사결정과정의 기본부터 지켜야 할 것이다.
현실 굴절 : 노동 불평등 원인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의 오류
주지하다시피 판매부수 1위 신문 조선일보는 어떤 노동 문제이건 평범한 노동자들의 시선을 통해 보도하지 않았고, 심각한 수준의 왜곡보도도 지속해왔다. 민주적 노동운동의 파괴가 마치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노동조합 혹은 노동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절박한 몸부림들을 힐난하고 왜곡하는 펜대를 굴렸다. 가령 2014년 5월 조선일보는 당시 삼성전자서비스 양산센터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중 삼성의 무노조 전략에 의해 탄압받다가 자결한 고 염호석 열사에 대해선 아무 보도도 하지 않았고, 경찰에 의한 시신 침탈이라는 초유의 사건에 대해서도 단 한 글자도 보도하지 않았다.(☞관련기사 : 경찰,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간부 시신 강제 탈취) 대신 조선일보는 합법적으로 신고된 서초 사옥 앞 시위 자체를 비난하는 기사만 냈다. 2014년 5월 23일 보도에서 조선일보는 "마이크를 든 남성이 '투쟁'이라고 외치자 바닥에 앉아 있던 400여 명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들은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의 직원들로 구성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입니다. '임금 인상'과 '삼성의 노조 탄압 중단'등을 요구하며 사옥 앞 2개 차선까지 점거한 채 19일부터 무기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이 삼성 측의 일방적인 노조 탄압과 조합원들의 자결, 시신 탈취 등으로 인해 벌어진 것임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조선일보는 자신의 악의적 보도들에 대해 아무런 사과와 반성도 하지 않았다. 2018년 9월 28일자 사설에서도 조선일보는 <민노총 강성 노조 있었다면 삼성·포스코 신화 가능했을까>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는데,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노동3권마저 부정하는 자칭 '1등 신문'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런 반노동 보도 사례는 무수히 많다. 사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악의적 선동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을 지킬 역량이 있다. 반면, 노조라는 울타리가 없는 저임금·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악선동에 더 크게 흔들린다. 노총들이 저임금 노동자들을 조직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오늘날 저임금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가입을 머뭇거리는 이유는 이런 악의적 선동 때문이다.
노동운동 안팎에서 조선일보의 이번 기획기사를 비판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 이 기획의 의도가 기만적이고, 심지어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언론의 영향력은 매우 지대하고, 평범한 노동자들의 소박한 바람조차 손쉽게 뭉갤 수 있다. 친자본·신자유주의 언론들은 착취받고 억압받는 이들의 집단적 저항을 왜곡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적인 통념을 강화하고 수호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평소에 이들은 노동조합운동의 이미지를 '대기업·정규직 중심'으로 만드는데 열중하는 반면 지난 십수년동안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조합원 비율이 크게 상승한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동시에 저임금·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결집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헐뜯는 일에 집중한다. 건설 노동자나 택배 노동자들의 집회, 화물연대 파업 등에서 이들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이를 잘 보여준다. 조선일보는 복지나 빈곤의 문제를 각자의 책임으로 돌리고 사회서비스를 시장화하여 금융자본에게 이윤 창출의 길을 열고, 노동조합을 공격함으로써 기업 권력을 강화하고, 개인간의 경쟁을 심화해 임금 상승 요인을 억압하고 자본이 보다 자유롭게 착취 전략을 구사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선전하고 확대하는 데 복무한다. 이런 의도를 외면한 채 '활용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기만적이다.
둘째, 이 기획기사가 제시하는 '불평등 노조 책임론'은 실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이 기획이 노동 현안을 인식하는 틀은 "전체 임금 근로자 중 12%인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 근로자 등 나머지 88%"를 노동시장 이중구조론에 기반한 대립적 집단으로 인식하는 것에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상위 0.1%, 상위 1%의 존재는 소거된다. 한종석 아주대 교수의 연구 '20년간 한국의 소득 불평등과 이동성'(2024)에 따르면, 지난 20년(2002~22년) 저소득층 소득이 65.9% 증가한데 비해, 중위소득 증가율은 약 17%, 상위 25%의 소득증가율은 약 12%였다. 이에 반해 상위 1%의 소득은 약 47%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중위소득과 상위 1%의 소득 비율(P99/P50)은 4.2배에서 5.3배로 악화됐다.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이나 조선일보 같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이 결과에서 일부 사실만 취합해 "2005년부터 불평등 감소세가 뚜렷"하다고 자의적으로 결론내고, "헬조선 타령과 양극화 선동을 멈추라"고 역(逆)선동한다.
그러나 상위 1%의 소득증가율이 중위소득 증가율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을 보면, 양극화가 나아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순 없다. 2005년부터 2022년 사이 법정 최저임금 인상이 저소득층 소득을 늘려온 점, 최근 한국 사회 내 여러 불만들이 중상층의 불만에 집중돼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지난해 통계청에 발표한 '소득불균등도와 소득이동성의 변화추이'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에서 2021년 사이 "소득재분배 효과가 증가한 것이 빈곤율 하락에 기여"하여, "총소득 지니계수는 소폭 감소"했고, 절대빈곤율(16.2% → 9.8%)과 상대빈곤율(14.2% → 11.5%) 모두 감소했다. 전체 소득분배구조를 보면, "1990년대 후반부터 소득불균등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다가 2010년을 전후하여 안정화되는 듯하였으나, 2010년대 중반 분배격차가 다시 확대"되고 있으며, "총소득 단계의 소득불균등도는 하향 안정화" 추세에 있다. 즉, 한국경제신문의 해석이나 한석호의 해석 모두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결과적으로 한 전 사무총장 등이 보수언론들과 함께 내세우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론'은 편의적인 체리피킹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감춘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론'은 오늘날 불안정 노동의 양산을 야기한 자본의 책임을 겨누지 않고, 대신 조직노동을 공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노동권연구소의 김철식 연구위원이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념에 대해 "오늘날 노동시장 모순을 노동시장 내 노동자 간의 관계 문제로 축소한다"고 비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분석대로 한국 노동시장은 "직접적 고용과 정규직 고용이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단지 비정규직이나 중소하청기업 노동자로 환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노동형태가 등장하여 고용형식이 모호"해졌는데, '이중구조'란 개념은 "무수한 분할과 비가시적 노자관계 영역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노동의 분할과 노동자-자본가 관계의 비가시화 속에 기업들은 노동에 대한 통제는 확장하고, 책임은 축소·회피할 수 있게 됐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김혜진 활동가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지적했듯, 진짜 문제는 "노동자 전체를 불안정화해 분할 통치하는 기업과 불안정화를 뒷받침하는 제도의 문제"에 있다.
무노조 노동자에게 더 나쁜 '이중구조론'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에 가입된 노동자들은 노조라는 제도를 통해 집단적으로 단결해 노동조건을 개선할 힘을 갖기 때문에 무노조 사업장 노동자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높은 임금을 받는다. 이를 근거로 적지 않은 논자들은 무노조 비조합원 노동자의 저임금을 (노조 가입의 장벽을 높이는 제도나 사측이 아니라) 장벽을 뚫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동조합 탓으로 돌린다. 한데 최근의 연구들(황선웅, 2017)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비조합원 평균 임금에 대해서도 유의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가령 특정 지역 내 노조 조직률이 10%포인트 상승하면 같은 지역 비조합원 평균 임금은 4.94% 증가한다. 이러한 효과는 여성, 청년, 저학력, 비정규직, 서비스업, 중소기업 노동자 등에 폭넓게 파급된다. 반대로 노조 조직률이 큰 폭으로 하락한 지역들에서는 조합원과 비조합원 간의 임금 격차(불평등)가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따라서 기업규모에 따른 임금격차의 확대를 결과론적으로만 해석해 '노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 현실과 다른 '왜곡'이다.
물론 이를 기업규모 수준으로 좁혀 분석한 유경준·강창희(2014)의 연구에 따르면, 100인 이상 중·대규모 사업장에서는 노동조합이 임금을 높이는 역할을 하지만, 30인 미만 기업에서는 노조 조직 여부가 임금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즉, 노조 조직률의 상승을 높이려는 모든 운동적 시도(노조할 권리)는 노동자계급 내 평등을 회복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노조 바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불안정한 조건에 있느냐에 따라 임금 효과에서도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노조의 임금효과는 기업이 일정한 경제적 지대를 취득할 때 나타날 수 있다. 재벌 대기업들은 수직계열화된 산업 구조에서 아웃소싱을 통해 불안정한 노동력을 활용하며, 원하청 불공정 거래에 의해 상대적으로 지대 확보의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실제 아웃소싱이 활발한 기업일수록 저임금이고, 노조의 임금 효과는 원하청구조에서 아래쪽에 위치할수록 작다. 따라서 이처럼 노동자들이 조직된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로 분할되고, 노동자계급 전반이 기존의 권리 보호로부터 벌거벗겨지면, 불안정한 노동자들은 보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안은 소득분위상에서 가장 큰 임금 하락을 겪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깎는 게 아니라, 저임금 노동자들이 노조로 조직되고 노동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시키는 것에 있다.
우리는 노동의 분할이 단지 제도의 미비에서 기인한다고 단정할 수 없고,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가 임금 문제에 대한 불만에서 촉발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노동을 둘러싼 모순들은 매우 다양하며,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들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사회운동 전반은 직무급제 관련 논쟁이나 관성적인 최저임금 투쟁, 장시간 중심의 노동시간 문제 등에 대해 일정한 혼돈을 경과했다. 노동시장의 불평등과 불안정성을 진정으로 우려한다면, 자신들이 나서서 "금기를 넘어" 뭔가 대신해주겠다는 영웅주의적인 발상 대신, '몫 없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어떻게 신장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익명의 헌신자들과 함께 그 실천에 함께 해야 한다.
파업에 대한 통치자들의 흔한 통념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노동자-자본가 간의 '산업평화'에 위해를 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 파업은 노동자 다수가 참여함으로써 힘을 갖고, 이 때문에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조는 파업 참여를 독려하고, 노동자들은 파업 참여를 통해 일터에서의 자율성과 동료들에 대한 연대, 투쟁의 효능감을 경험한다. 실제 동시기 노조 조직률 하락을 경험한 해외 사례들과 비교할 때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사례들의 중요한 전술적 특징 중 하나는 파업 전술을 적극적으로 구사해왔다는 점이었다. 노동권을 지키거나 쟁취하려는 과정에서 파업을 비롯한 실질적 쟁의의 비중이 감소하고, 기업을 대상으로 한 캠페인이나 정치권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노동조합에게는 조합원 참여나 주체성이 줄어드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노조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의존적으로 만든다.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이 대기업-정규직 노조들이 아닌 보다 불안정한 노동자들에 의해 상징화되고 단결의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투적 노조주의가 만사형통은 아니지만,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친자본 언론을 등에 업어 허수아비를 때리며 노동조합을 향해 '쟁의 자제론'을 펼치는 선동은 일터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데 기여할 뿐이다.
왕년에 운동 좀 한 지식인 대신 '대중'이 주역 돼야
한석호나 일부 1세대 운동가들이 자의적으로 주장하거나 잘못 짐작하는 것과 다르게, 한국 노조의 역사적 전투성은 이미 '조직된'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에게 넘어갔다. 실제 현대차 노조 등 대기업 노조는 더 이상 노동운동의 중심에 있지 않다. 그 대신, 건설 노동자와 화물 노동자, 학교 비정규직, 서비스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나 플랫폼 노동자 등 이제 막 조직화되고 집단적인 행동에 나선 불안정 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 전투적 노조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의도와는 다르게 조직된 저임금·불안정 노동자에 대한 공격, 무노조 노동자들의 비관을 부추기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다. 한 사회단체가 잘못 주장하듯, 노동조합이 기업의 생산성을 우려하며 이것의 대책까지 대신 짜줘야 한다면 노조 지도부는 중국의 어용 공회들이 그러하듯 노동 통제의 대리자 구실까지 해야 할 것이다. 망상으로 가득한 '붕괴론'에 기대어 노조 지도부가 자본의 생산성 하락을 우려해 노동력 통제의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보면 노동해방의 주체를 조직해야 할 노동운동 자신의 장기적 비전과는 정반대로 향할 수밖에 없다.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선심이나 양보, 이들 정규직 노조를 탄압한 대가로 주어지는 작은 떡고물이 아니라, 불안정 노동자 자신이 단결하고 싸울 수 있는 역량과 기회이다. 대기업·정규직 노조들은 자신의 역량을 모아 불안정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이들의 투쟁을 조력할 수 있는 자원으로 삼아야 한다. 즉, 경기침체 시기에 노동조합이 할 일은 기업들의 이윤 보존을 위해 양보하고 임금을 동결·삭감하는 게 아니라,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에게로 노동권이 확장되고 이를 통해 풀뿌리로부터 사회적 안정망을 만들 수 있는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노력을 하는 것에 있다. 이 과정에서 노총들은 초기업교섭 및 단협 효력의 확대를 위해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기업별 노동조건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직무급제나 임금 동결이 아니라, 기업별 단체교섭의 조율이 무노조 기업에도 확산되도록 하고, 근본적으로 초기업적 노동기준(임금률)의 설정으로 기업을 넘어 산업이나 업종 수준에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즉, 시장원리가 아닌 초기업적·사회적 제도가 노동시장을 규제함으로써, 노동체제를 개혁하고 노동권을 확장해야 한다. 이런 식의 초기업교섭 사례는 지난 10여년 동안 이미 여럿 있는데, 이 성취들을 상기하고 이것을 어떻게 전면화할 것인지,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조합 및 시민사회의 자원과 역량을 집중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 프레시안 2024.06.27.
오래 같이 가기엔 너무 다른 러시아와 북한의 국익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이번이 두번째다. 첫 방문은 2000년 7월 그의 첫 임기 때에 이루어졌고 지난 6월 19일 24년 만에 두번째 방문한 것이다. 두 정상회담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 24년 전에 북한은 몰라도 러시아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그때의 방북 목적도, 목표도, 결과도, 분위기도 이번 방북과는 180도 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지난 24년간 러시아는 어떤 여정을 밟아 왔을까?
서방과 북한의 중간에서 평화중재자 꿈꿨던 푸틴
푸틴은 2000년 5월에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첫 임기 임무 수행에 착수했다. 그 당시 러시아 분위기는 어두웠다. 2차 체첸 전쟁이 한창이었고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도시에서 여기저기 극우 이슬람 단체들이 테러를 저지르고 있었다. 1998년 금융위기 후폭풍도 여전히 경제를 괴롭혔다. 이런 상황에서, 관저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술꾼 엘친 대신 젊고 말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는 KGB 출신자가 통수권자가 된 것이다. 기대가 컸다. 전 세계가 러시아에 시선을 돌려 지켜 보고 있었다. 구 소련에서도 가장 크고 전 세계에서 탑10에 들어가는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에 민주화가 계속 되면 국제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중요한 세계 일원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 푸틴은 이를 잘 인지했다. 그래서 서방과 친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지속적인 미국과의 회담, 끊임 없는 유럽 방문 등 임기 초부터 매우 활발하게 외교를 펼쳤다.
취임 후 석달도 안 된 2000년 7월에는 중국, 북한, 일본을 각각 이틀씩 일정으로 차례대로 방문했다. 중국과 일본 방문은 러시아의 새 외교 컨셉트에 잘 맞았고 전문가들에게 별다른 의문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북한은 조금 의외였다. 그 이전에는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적도 없었고 북한 지도자가 러시아를 방문한 적도 없었다. 두 나라 정상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86년 김일성 위원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였다.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 러시아와 북한 관계가 악화되면서 두 나라는 서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나마 연해주 쪽에서 40킬로미터에 가까운 국경을 맞닿고 있어 단교를 안 한 것뿐이지,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서구와 친하게 지내겠다는 러시아는 북한을 아예 관심사에서 지워버렸다. 1992년에 있었던 엘친 전 대통령의 서울 방문은 그것을 더욱 확인시켰다.
하지만 러시아를 완전히 개방하고 모든 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푸틴은 중국과 일본에 가는 길에 북한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북한 방문 후 유럽 지도자와의 회동에서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자기에게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 프로젝트를 완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노라고 과감하게 전했다. 푸틴은 이제 새 친구가 된 서방과 왕따인 북한 사이에 자신이 위치하게 된 것을 엄청 좋아했다. 전 세계의 악동(Enfant terrible 앙팡 테리블)인 북한과 친근감을 과시하면서 평화중재자(peace maker) 역할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거짓말’로 소원해진 두 나라 관계
하지만 김일성이 푸틴에게 건넨 말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그때 단순한 통역 실수였는지, 푸틴이 상대방의 말을 잘못 이해했는지, 아니면 정말 김일성 위원장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는지 우리가 지금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푸틴이 북한에 대해 화가 났다는 것이다. 비밀경찰 출신인 푸틴은 법과 원칙보다 범죄조직에서 흔한 비공식적인 구두 약속을 더 믿는 사람이다. 법은 얼마든지 위반해도 되지만 구두로 한 약속을 안 지키면 사람 사이의 신뢰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다. 마음 속에서 원한을 품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두 정상의 관계가 거의 끊어진 듯한 정도로 멀어졌고, 유엔에서도 러시아가 항상 북한에 대한 모든 제재를 지지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됐다. 2020년대까지만 해도 러시아와 북한 간 경제적 인간적 교류는 매우 미미했고 별다른 관계를 유지한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2022년 2월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전 세계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나라는 북한뿐이다. 한순간에 세계로부터 고립된 푸틴은 이를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전에 북한을 향해 가졌던 모든 적대적인 감정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잊고 방북을 한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3년차 들어 자신의 군사 창고가 텅 비게됐다. 물론 국내 생산에 박차를 가하지만 당장 무기 공급이 시급한 상황이다. 소련식 무기를 아직 많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은 러시아 입장에서 당연히 첫 손가락 꼽는 대화 상대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핵개발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북한 노동자를 안 받겠다던 푸틴이 이번에 평양에 가서 태연하게 김정은을 만나 무기를 구걸하는 모습은 러시아 진보 언론들의 비꼼과 조롱 대상이 되어 버렸다.
다급해진 러시아, ‘무기 달라’ 손 내밀었으나…
2000년 방북 때의 푸틴은 서방의 대사였다. 러시아가 소련의 족쇄를 버린 것처럼 북한도 그렇게 하면 훨씬 더 높은 이득을 볼 수 있다고 말했던 푸틴은 24년 후에 김정은보다 더 고립된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과 같은 테이블에서 세계 문제를 푸는 나라, 전 세계가 함께 사업 하기를 원하는 나라, 20세기 냉전시대의 막을 걷어내린 나라의 대통령은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가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위선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정세판이 이렇게 180도로 바뀐 것은 장차 외교 교과서에 들어갈 만하지 않은가. 러시아 국영 언론에서는 푸틴의 현명함과 위대함에 대한 칭찬을 끝도 안 보일 정도로 늘어놓지만 인터넷은 조롱과 비꼬는 글들로 가득 찼다.
러시아 내 전문가나 러시아 전문 싱크탱크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한결같이 이 ‘동맹’의 수명이 길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당분간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양쪽이 서로에 대한 무한 칭찬과 보여주기식 교류를 계속할 것이다. 최소 현 러시아 정부가 국가 고립 정책을 포기하기까지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가 더 이상 무기가 필요 없는 상황이 되면 바로 북한과 관계를 끊을 거라고 예견하고 있다. 지금 러시아와 북한의 상대방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당장의 필요 때문인 것이지, 기본적으로는 러시아와 북한의 국익이 전혀 다른 데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6.28
인구 비상사태가 아니라 사회 비상사태다
19세기 북미의 흑인 여자 노예들은 목화 뿌리를 씹었다. 카리브해의 노예들은 약초를 씹었다. 민간 피임법이었다.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흑인 노예의 재생산에 관심이 없었다. 노예가 부족해지면 서아프리카에서 끌고 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초 노예 무역이 금지되면서 농장주들이 흑인 노예의 감소에 대해 각별히 주위를 기울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성인 노예보다 아이 노예가 두 배의 가치가 있다고 공공연히 떠들 정도였다.
농장주 입장에서 노예의 피임은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곧이어 ‘영아 살해’가 등장하자 농장자들이 공포에 휩싸인 채 노예들을 부랴부랴 단속했다. 비참한 영양과 위생 때문에 영아가 죽어간 것을 영아 살해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산모와 흑인 산파가 영아를 살해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요컨대, 처절한 재생산 저항이었다. 출산 파업이었다. 자식에게 고통스러운 노예의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목화 뿌리를 질겅질겅 씹었던 것이다. 농장주는 인구 감소를 걱정했지만, 노예들은 삶의 추락에 절망했다. 삶이 절망일 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삶의 재생산 중단이었다.
최근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와 언론이 인구 감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고 해괴한 저출생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그때마다 목화 뿌리를 씹던 여자 노예들의 마음을 떠올리곤 한다. 그 허다한 대책들 어디에도 사람과 우리의 삶을 걱정하는 소리가 없다. 노예 노동력 감소에 당황하던 농장주들의 비명만이 존재한다.
케겔 강화 댄스로 괄약근을 조이고, 정관 수술비를 지원하며, 여학생 조기 입학을 권장하는 괴이한 인구 대책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여 인간으로 변신시키는 게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겠다. 급기야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초등생들에게 야간자율학습을 시키고 부부들의 성생활을 독려하자는 윤석열 정부의 강구책은 B급 코미디의 정점을 찍는다.
시민들은 ‘사람’을 낳고 싶지만, 지배 권력과 자본은 ‘인구’를 낳기를 바란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못 받으니 아이를 안 낳는 것이다. 아무리 그럴 듯한 말과 갖은 공포의 언어로 치장해보았자 단순히 사람을 인구로 수단화하고, 그저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 납세 의무자, 소비자로만 대상화하면 시민들은 출산 파업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데 한쪽에선 아동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대 아동 수출국이다. 한쪽에선 아이를 낳으라 극성을 피우는데, 다른 한쪽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하루에 35명꼴,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다. 통렬한 위선이 아닐 수 없다.
아이를 낳으면 뭣할까. 초등학생부터 무한경쟁에 시달려야 하고, 그러다 남자는 조금 자라면 군대 가서 얼차려 받다 죽고, 여자들은 데이트하다가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심지어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속에서 평생 노동을 착취당하는 세상에서, 미친 부동산 가격에 자기 집 하나 건사하기 힘든 세상에서, 그런데도 여야가 합심해 종부세 완화로 뻔뻔하게 불평등을 조장하는 세상에서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지옥에서 이윤을 추출하려는 자본과 지배 권력자들일 뿐이다.
우리는 통치 기제인 ‘인구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사회의 방향타를 인구가 아니라 피와 살갗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이 아니라 돌봄과 삶의 재생산으로 돌려야 한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고 사는 것, 그것이 유일한 인구 해법이다. 다시 말해 가장 좋은 인구 정책은 더 이상 인구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사람들이 어떻게 어울려 다정하게 살아갈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토양이 풍요로워지면, 자연스레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죽은 땅에서 열매를 맺으라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꽃은 피지 않는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 미디어오늘 2024.06.29.
감각이 권력이 될 때
대부분 국민이 그럴 텐데 나도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에게 관심이 많다. 그가 나오거나 관련된 뉴스에는 어김없이 눈길이 간다. 그 뉴스는 비단 학위논문 표절이나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 명품 핸드백 수수, 나아가 국정농단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남용 등만은 아니다. 김 여사가 연출하는 자신의 이미지와 그 내용 사이의 불협화음이 갈수록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는 미술 전공자이자 전시기획자, 문화사업가였다. 무엇이 첨단이고 멋지게 보이는지 감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감각이 권력이 될 때, 그것은 진정성이 사라진 빈 껍데기이자 겉치레로 변질된다.
김건희법
최근 대통령실은 “별칭 ‘김건희법’으로 불리는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개 식용 종식법)이 제정된 이후 윤석열 대통령에게 매년 2000여 통 이상 오던 외국인들의 민원 편지가 완전히 사라졌다”라고 발표해 빈축을 샀다. 개 식용 종식법을 ‘김건희법’으로 부르는 것이 지난해 문제가 됐음에도 또다시 의도적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개 식용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기 시작한 것은 40여 년 전인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맹렬히 비난한 사실이 외신에 보도되면서 국내 여론도 높아졌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먹는 ‘미개한 문화’를 벗어나자는 차원을 넘어 반려견 문화가 정착되고 여기에 동물권, 탈육식 등의 인식이 공감을 얻으면서 마침내 개 식용 종식법이라는 성과를 낳은 것이다. 수많은 동물보호 및 동물권 단체들의 노력이 숨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것이 김 여사의 치적이 됐다.
대통령 부부가 여러 마리의 반려견을 키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개 사과’(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전두환을 옹호했다가 문제가 되자 사과의 의미로 애완견 토리와 사과 사진을 SNS에 올린 것)를 비롯해 산책로, 집무실, 용산 대통령실 앞 잔디밭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애완견과의 동반 사진을 빈번하게 노출했다. 해외 순방에서도 개를 사랑하는 영부인 이미지를 종종 활용하는 김 여사는 지난해 8월 동물단체들의 개 식용 종식 촉구 기자회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물단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 식용 종식법에 ‘김건희법’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많은 이들의 노력을 가로채는 일일 뿐 아니라 정치적 이미지 전략에 불과하다. 그토록 개를 사랑하는 김 여사가 다른 생명에 대한 공감을 드러내는 것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에서 죽은 159명의 희생자에 대해서도, 수해현장에서 희생된 채 상병에 대해서도 제대로 애도하기는커녕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돌덩이 같은 마음으로 법적 책임만을 따지고 있다. 두 사람을 동일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원팀’으로 활동하는 대통령 부부의 상반된 행동과 이미지 전략은 불신과 냉소를 낳을 뿐이다. 다정하게 개를 안고 있는 영부인의 모습이 따뜻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개만 사랑하는 것은 개를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점점 늘어나는 ‘애니멀 피플’의 진정한 모습은 반려견과 사진을 찍는 멋진 사람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생명에의 끌림을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바이 바이 플라스틱
김 여사가 해외 순방에 들고 다니는 에코백과 ‘바이 바이 플라스틱’이라는 문구도 뜬금없이 느껴지기는 매한가지다. 에코백은 그저 패션이 아니며 ‘나는 명품백을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물건은 더더욱 아니다. 에코백은 일회용 비닐백을 대체하는 도구이며 생태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취향의 표현이다. 더구나 ‘바이 바이 플라스틱’은 윤석열 정부의 거꾸로 가는 기후환경 정책과는 굉장히 맞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매장 내 일회용 컵 사용 규제 과태료 유예, 대형 마트 포장재 재도입 등 자원순환 정책을 퇴보시켰다.
이런 정부를 여러 차례 강력히 규탄해온 환경단체들은 최근에도 기자회견을 열어 조속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들에 따르면 2022년 6월 10일은 일회용 컵 보증금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어야 했던 날이지만 현재 제주와 세종에서만 축소 시행되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9월 환경부가 2025년까지 전국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던 계획을 지자체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변경하면서 제도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 국제플라스틱협약 체결을 위한 마지막(5차) 회의가 올 11월 부산에서 열린다. 이 협약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플라스틱 오염 대응을 위한 세계 첫 협약으로 2022년 제5차 유엔환경총회(UNEA)에서 결의되었으며 2015년 파리기후협약 이후 지구 온난화 대응 및 환경보호를 위한 가장 중요한 협약으로 꼽힌다.
유엔환경계획(UNEP)이 최근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제4차 회의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2000년 2억 3400만 톤에서 2019년 4억 6000만 톤으로 두 배 증가했다. 이에 따라 2019년 한 해에만 3억6000만 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이 발생했으나 이 가운데 재활용은 9%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매립 또는 소각 처리되어 토양과 대기를 오염시킨다. 막상 협약 체결이 다가오자 참가국들이 발을 빼는 바람에 주최국인 한국이 ‘협상개최국 연합’을 제안하고 나섰지만, 정작 우리의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량은 일인당 연간 133 킬로그램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정이 이쯤 되면 영부인의 에코백에 쓰인 ‘바이 바이 플라스틱’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비록 부산 엑스포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부산에서 열리는 대규모 국제행사를 세계에 홍보하고 잘 치르겠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플라스틱을 줄이자는 진정성이 담겼다고 보기에는 정부의 정책 퇴행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순환경제를 구축한다고 하면서도 플라스틱 감축 방안으로 생산과 소비를 줄이기보다 재활용을 늘린다는 방침인데 이는 낮은 재활용 비율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없다. 국제플라스틱협약을 앞두고 그린피스가 19개국의 시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민의 82%가 플라스틱 생산을 감축해야 한다고 답변했는데도 말이다.
파울 클레, 마크 로스코
숙명여대 총장선거에서 ‘김건희 논문 검증 진상 규명’을 약속한 문시연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가 당선됐다. 문 교수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격언이 있다. 내가 당선되면 왜 논문 검증이 안 되는지 진상 파악부터 해보겠다.”라고 했는데 이런 공약이 학생들의 압도적인 지지(96%)를 받았다. 김 여사가 1999년에 제출한 숙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학 석사 논문 ‘파울 클레의 회화의 특성에 관한 연구’에 대한 표절 논란이 일자 학교 측은 2022년 2월 예비조사에 들어갔으나 2년이 넘도록 결론을 못 내고 있다. 그 사이 민주동문회와 일부 교수들이 자체 검증을 실시해 표절률이 48~55%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대학이 결론을 못 내는 이유는 당연히 검찰수사와 대학 지원 중단 등 각종 보복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남다른 기개를 보여준 신임 총장이 석사 논문 표절에 대한 결론을 내서 학위 수여가 취소된다면 김 여사가 2007년 국민대에서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받은 박사 학위도 취소될 수밖에 없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의 딸 조민 씨의 선례에서 보듯 부정한 석사 학위를 이용해 박사 과정에 입학했으므로 논문의 표절 여부나 수준에 상관없이 논문 제출 자체가 무효가 된다. 김 여사의 최종 학력은 박사에서 학사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숙명여대 석사 논문의 주제가 파울 클레였다는 데 새삼 눈길이 갔다.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1879~1940)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문명의 폐허를 직시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사살된 문학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은 클레의 대표작 ‘새로운 천사’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림의 천사는 자기가 줄곧 보던 것들로부터 떠나려는 것 같다.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이런 모습일 게다. 그의 얼굴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그는 온갖 난파된 잔해를 쌓아 올리며, 그의 발 앞에 내던져진 대참사를 목격한다. (…)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런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 여사가 전시업체 코바나컨텐츠를 운영하면서 기획자로서 이름을 알린 전시가 마크 로스코 전(2015)이었다는 점도 특별하다. 미국의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는 스티브 잡스가 가장 사랑했던 작가이며 현대미술 사상 최고 경매가를 여러 차례 기록했다. 가장 단순한 사각형으로 화면을 분할하고 캔버스 안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듯한 색의 묘사만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는 색면회화를 제작했다.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의 화면을 보고 자살한 관객의 에피소드는 작가의 명성을 더해주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이 전시는 3개월간 25만 명의 관람객을 모아서 화제가 되었다.
파울 클레, 마크 로스코를 선택한 김 여사의 안목이나 취향은 상당히 높다. 이들은 역사의 비극과 인간의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대가들이다. 그러나 파울 클레에 대한 논문을 쓰고 마크 로스코 전시를 기획한 김 여사가 이들의 예술세계로부터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배움이나 교훈을 얻은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김 여사는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는 길을 택했는지 모른다. 대통령실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연출 사진으로부터 권력의 주인공, 나아가 회화 속의 아름다운 피사체가 되고 싶은 욕망이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구도 속에 동물이나 에코백이 등장할 때 생태·환경·기후 문제는 주인공의 식견과 취향을 돋보이게 해주는 소품으로서 무척이나 가볍게 보인다.
한윤정 한신대 생태문명원 공동대표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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