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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사과 한 알에도 손 떨리는 사회, 왜 ‘윤석열 타도’를 외치는가?

by 이성근 2024. 3. 31.

1. 정부, ·일 이익 위해 'SK 설득' 혈안됐다? 언론에 또 놀아나는가 2.지방 필수의료 인력이 바라본 의료대란’ 3.스스로 가죽 벗은 민주, 미래 팔아 과거 덮은 국힘 4. 논리적 추론-데이터 충돌 땐 둘 다 의심해야 5.저출산은 해결되지 않는다 6. 유인촌 장관님. 원고료와 강사료 좀 올려 주십시오 7. 선대인을 탓하지 말자 8.민주당이 고전하는 진짜 이유 8. 사과 한 알에도 손 떨리는 사회 9. 역사 퇴행시키는 이승만의 소환 10. [부동산][입시] ··· [] 건드린 이재명, [] 누른 조국과 손잡다

11. 의사들이 왜 이럴까? 12. 옆집 '총선 불구경' 재미, 그런데 우리집은? 12.기생충 언론 13. 노동이 ESG에 참여할 발판은 거버넌스(G)14. 우리, 정치할래요? 15. 유럽인들과 올해의 나무 16.선거 파노라마 17. 진보정당의 새 역사적 소명 18. 신성가족간 기득권 수호 전쟁과 국민의 삶 19. ‘신당의 역사 20. ‘역대급선거와 어쩔 건데정치

21. 이승만 되살리기의 반()역사성 22. ‘500명 증원이었으면 환자 곁에 남았을까 23.상식을 파괴하는 정치 24. 의로노불, 윤로민불, 명로문불    25.1565년 유생 상소와 야당 공천투표   26.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27.조국 사태조국혁신당 현상사이 28.윤석열 타도를 외치는가? 29.공감의 반경 30.젊은 비대위원장의 종북타령북풍의 유혹

31. 만악의 근원 불평등’ 31.날뛰는 말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32.‘875원 대파라는 방아쇠 33. 의료 개혁본질 왜곡하는 정부  34.

정부, ·일 이익 위해 'SK 설득' 혈안됐다? 언론에 또 놀아나는가

윤석열 정부, '미일 반도체 동맹'에 들러리 서지 말라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에 진심이다. 미국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한 걸 KBS 신년 대담에서 무용담처럼 얘기할 정도다. 지난해 윤 대통령은 미국에 무려 113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입이 귀에 걸렸다. 일본에도 진심이다. 지난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윤 대통령과 정상회담이 올해 벌써 7차례로 문자 그대로 신기록"이라며 "우리의 공통점은 맛있는 식사와 술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저와 가장 가까운 기시다 총리님"이라고 했다.

그런 가운데 그냥 지나칠 수 는 기사가 나왔다. 일본 <아사히> 신문의 지난 23일자 "키옥시아(Kioxia)와 웨스턴 디지털(Western Digital) 통합 협상 결렬 뒤 SK설득을 위해 한미일이 혈안이 되다"라는 제목의 기사다. 이 신문은 키옥시아 측 인사의 말을 빌려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 한국 정부 등 관계자 일동이 혈안이 돼 설득했지만, SK(키옥시아와 WD 합병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라고 썼다.

쉽게 말해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회사 합병 과정에서, 일본 반도체 회사에 투자한 한국 회사가 한국 정부의 설득에도 '반대' 의사를 고집해 합병이 무산됐다는 내용이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의 키옥시아, 미국의 웨스턴디지털은 전세계 1위 삼성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현재 합병을 논의중이다. 헌데 이상하다. 미일이 혈안이 된 것은 이해하겠는데, 여기에 '한국'은 왜 혈안이 된 걸까.

한국 정부가 '미일 반도체 회사 합병'을 바라고 있다는, 이 혼란스러운 이야기의 구조는 이렇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메모리 반도체는 핵심 전략 산업이다. 키옥시아는 일본 낸드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다. 메모리(기억) 뜻하는 일본말 '키오코''가치'를 의미하는 라틴어 '악시아'의 합성어다. 전신은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부. 낸드 플래시 메모리 칩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곳이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경쟁자다.

키옥시아는 한국의 경쟁사들에 눌려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키옥시아의 지분 49%180억 달러에 미국의 사모펀드 베인캐피탈에 넘겼다. 한국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일본은 '경쟁자' 한국에 '세계 최초 메모리 반도체 개발' 기업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SK하이닉스가 베인캐피탈 컨소시엄에 35억 불(4조 원가량)을 투자한 건 선구안이었다. SK하이닉스는 키옥시아의 간접 투자자가 됐다.

키옥시아를 인수한 베인캐피탈은 회사를 상장시켜 수익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여파, 그리고 미중 관계의 악화로, 지난 2020년에 베인캐피탈은 상장 계획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가 키옥시아의 수익에 영향을 미친 탓도 있었다.

베인캐피탈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의 낸드 플래시 반도체 기업 웨스턴디지털과 키옥시아를 합병해 기업 가치를 올리겠다는 계획이었다. 반도체 패권을 두고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미국 입장에서 두 회사의 합병은 '미일 반도체 동맹'의 상징과 실리를 동시에 취하는 빅 이벤트였다. 일본 언론 등에 보도된 최초 합병 제안서를 보면 웨스턴디지털은 메모리 칩 사업을 분사해 키옥시아와 통합하고, 최종적으로 웨스턴디지털이 50.1%, 키옥시아가 49.9%의 주식을 소유한다. 새로 탄생할 회사는 미국에 등록되고 본사는 일본에 위치한다. 말 그대로 미일 합작 공룡 기업의 탄생이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규모의 경제'가 작동한다. 대량 생산 기업이 무조건 유리하다. 시장 점유율에 목을 매는 이유다.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은 현재 세계 시장 점유율 3위와 4위를 달리고 있다. 두 기업이 합병에 성공하면 2위인 SK하이닉스의 시장 점유율을 가뿐히 넘어설 뿐아니라 1위를 달리는 삼성전자까지 위협한다. 1위와 2위인 삼성과 SK하이닉스는, 각각 2위와 3위로 쪼그라들게 된다.

지난해 1025<파이낸셜타임스>SK의 반대로 두 회사 합병이 무산됐다는 소식을 전 세계에 타전하며 "미국-일본 반도체 챔피언을 만들려는 베인캐피탈의 야망에 타격을 입혔다"고 썼다. 지금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 합병 이슈는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전쟁'의 최전선이다. 베인캐피탈은 미국 대선에도 나선 바 있던 미 정계 거물 미트 롬니가 설립한 사모펀드다. <FT>"베인캐피탈의 야망"이라고 썼듯, 국가 핵심 전략 산업으로서 반도체 이슈는 정치의 영역과 교집합을 늘린지 오래다.

<아사이> 신문의 기사가 사실이라면 한국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위협할 수 있는 미국과 일본 합작의 '거대 낸드 플래시 반도체 기업'의 탄생에 기여하려고 한 셈이 된다. 산업통산자원부는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미-일 반도체 합병에 SK하이닉스가 동의하도록 압박했다는 보도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일본 언론이 오보를 낸 것인가? 하지만 '바이든-날리면' 사태처럼, 한국 언론을 상대로 법정 제재와 소송을 남발하고 있는 정부가 일본 언론의 이런 중차대한 보도에 정정보도를 요구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잘못된 팩트를 시정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29일 페이스북 모회사인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를 만나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AI 경쟁이 본격화하고 특히 글로벌 빅테크 중심으로 AI 반도체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AI 시스템에 필수적인 메모리에서 세계 1, 2위를 차지하는 등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한 한국 기업들과 긴밀히 협력해달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 말대로 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AI 산업의 핵심이다. 그런데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산업 재편을 시도하고 있는 미국, 일본과 '함께' 우리 정부가 SK하이닉스를 상대로 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윤 대통령은 "최근 늘어나고 있는 AI를 악용한 가짜뉴스와 허위 선동 조작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당장 일본의 잘못된 보도를 시정하는 조치에 나서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한국 정부가 미국 일본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오해를 살 수밖에 없다.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의 합병 작업이 재개된 것은 지난 127일 일본 <교도통신>의 보도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SK 설득에 '혈안'이 돼 있다는 보도는 양사 합병 작업 과정에서 돌출됐다. 독도 문제라든지,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갈등을 빚을 때 한국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일본 언론에 보도된 것들을 기억한다. 그때마다 윤석열 정부의 신뢰도는 타격을 입었다.

일본 언론은 또 다시 한국 정부를 언급하며 '미일 반도체 동맹' 구축에 한국을 들러리 세우려 할지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의 '아마추어식 외교'가 여기에서 또 다시 리스크 요인으로 부각될까 매우 걱정이다. 앞으로 우리는 일본발 반도체 뉴스들에 집중해야 할 것 같다. 벌써부터 피곤하다./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4.03.02.

 

지방 필수의료 인력이 바라본 의료대란

솔직히 말하자면, 지방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외과 교수, 그것도 외과 내에서도 삶의 질이 가장 떨어진다는 이식외과 교수로서, 의대생이 2000명이 더 들어온다 해서, 내 삶에 미칠 영향은 미미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학교 일이 좀 바빠지겠지만 혹시 아는가? 정말 정부 말대로 10년 뒤 2000명 중 일부라도 외과를 지원하면 나에게는 이득일지도. 또 필수의료 패키지의 내용도 다 지방과 필수의료를 살리자는 내용인데, 이게 과연 나에게 불리할까? 미래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도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그래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소위 기피과라는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전공의들이 파업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교수들이 그들의 사직을 종용한 것이 아니듯,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판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환자를 놔두고 병원을 나간 것에 대해 국민께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의사를 싸잡아 욕하기를 서슴지 않고 있다. N번방 사건의 범죄자를 빗대어 의주빈’, 이스라엘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하마스를 빗대어 의마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은 바로 의사가 환자 곁을 떠났으며, 환자를 인질로 삼아 정부와 투쟁하려 한다는 생각이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바로 정부가 현재 상황을 바로 의료대란이라 명명함으로써 촉발됐다. 언론은 앞다퉈 환자의 불편이 길어지고 있으며, 곧 일촉즉발의 사태가 벌어질 것처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반응에 기름을 붓는 듯한 의협 등이 보여주는 선민의식의 극치적 망언 의사에 대한 정면 도전’, ‘전공의 사직을 지지등도 여론을 악화시키는 데 어쩌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은 바로 정부의 태도다. 정부가 공개한 2000명 증원의 근거로 내세운 3개의 논문 어디에서도 한꺼번에 2000명을 뽑으란 말은 없다고 한다.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500~700명으로 합의하는 과정에서 장관이 용산의 질책을 받고 갑자기 2000명으로 늘었다는 루머도 있다. 의대정원 증가에 맞춰 보건복지부 차관은 사직서를 제출한 전공의들에게 협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처음부터 이 사태는 의사들의 반발과 집단행동을 유도한 기획이라고 판단했다. 이 전략은 120% 성공해서 국민의 80%는 의대 증원에 찬성하고 여당과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전공의 이탈=의료대란사실 호도

그런데 한번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전공의는 의사 중에서 가장 초보 단계의 의사다. 실제 환자를 보다가 전공의에게 책임이 막중한 의료행위를 시키는 경우도 없고, 또 전공의의 잘못된 행위로 환자가 피해를 보게 될 때 책임을 지는 것은 그 환자의 주치의인 교수다. 전공의가 없다고 의료대란이 일어난다? 그리고 전공의가 자리를 이탈해서 환자가 잘못됐을 때 복지부 차관의 말처럼 전공의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 수련병원의 시스템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저것이 얼마나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상당히 기계적인 법 적용으로 파업에 참여한 전공의들의 면허를 정지하거나 취소한다고 하는데, 미래에 나올 2000명의 추가 의사를 위해 현재 수련 과정에 있는 수많은 전공의를 없앤다는 건 심각한 사회적 손실이다.

 

또한 지금 이 정부의 현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정책 패키지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는 김윤 교수의 말에 의하면, 현재 상급종합병원과 대학병원은 실제 그 병원의 수준에 맞는 중증 환자를 40%밖에 보지 않고 있으므로, 상급종합병원은 평소의 40% 환자를 보고 나머지 환자를 2차 병원급 수련 병원이 아닌 종합병원에서 보면 6개월도 문제없이 버틸 수 있다고 했다. 6개월을 버틸 수 있는데 심각단계의 의료대란인가? 의료대란이 맞는다면, 전체 의사 수의 8%밖에 안 되는 가장 초보적인 의사 없이는 의료체계가 돌아가지 않도록 만든 보건복지부는 책임이 없는가? 그리고 지금 현 상황에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1, 2, 3차 병원의 의료 전달체계가 조정되고 있다. 김윤 교수의 큰 그림대로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만일 보건복지부에 슈퍼컴퓨터와 AI가 있어 전국 모든 환자의 데이터를 가지고 가장 알맞은 전국의 병원으로 보낼 수 있다면, 어쩌면 의사가 지금보다 더 적어도 될지 모른다.

 

총선 전 공공의 적이 필요하진 않았나

또 하나 재미있는 지점은 이미 흉부외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은 전공의가 없거나 극도로 부족한 병원이 많아 전공의가 없다고 해서 평소 하던 업무가 증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취과 전공의가 없어 수술이 줄어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편하다. 당직? 거의 맨날 서던 건데 뭘 새삼스럽게. 우리 외과 주니어 교수가 그런 말을 했다. 우리가 뭔 그리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인터넷으로 욕을 먹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수술하고 환자 보고 밤새우고 그것만 했는데.

 

현시점에서 환자들의 가장 불편한 부분은 바로 내가 원하는 병원을 원하는 때에 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내 몸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병원에 예약했는데 여기에 가지 못한다고? 억울할 만하다. 그것도 대통령이 취임사에 35번이나 자유를 외친 정권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니. 그러나 앞으로는 국가가 정해주는 가이드라인 안에서 갈 수 있는 병원을 택해야 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현 사단은 총선을 코앞에 두고 이슈를 이슈로 덮으면서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공공의 적이 필요했던 정부·여당과 그것에 맞게 스파이보다 더 스파이처럼 의사들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의협, 그리고 평소 사회주의적 의료체계를 이상향으로 삼고 있던 일부 의료관리학자들의 공동의 이득이 맞아떨어져 생긴 일이라고 분석해 본다. 이번 일로 많은 고통을 받았던 우리 외과 전공의들이 1명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병원에 복귀하기를 기원해 본다. 마음의 상처는 평생 씻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최병현 양산부산대병원 간담췌외과 교수 | 프레시안 2024.03.02.

 

스스로 가죽 벗은 민주, 미래 팔아 과거 덮은 국힘

22대 총선을 40여 일 앞둔 지난달 29일까지의 국민의힘 공천은 김건희 방탄 공천이라고 일컬어졌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것으로 예상됐던 김건희 (여사님) 특검법재의결에서 자당 의원들의 이탈을 최대한 방지할 목적으로 공천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의원이 281, 법안이 가결되려면 그중 188명이 찬성했어야 했는데 결과는 찬성 171, 반대 109, 무효 1. 현재 국힘당 의원이 113명이므로 불참과 기권, 무효를 전부 반란으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국힘당의 반란 의원은 고작 4~5명에 불과한 것이다.

 

김건희 방탄 공천대성공일까, 독약일까

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통과됐을 때와 비교하면 국힘당은 민주당이 감히 넘보지 못할 대단한 결속력을 과시한 것이다. 정치평론가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선거 때는 당내 갈등과 잡음을 최소화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까지 국힘당은 착착 승리의 길을 다져온 것이 틀림없다. 민주당 공천 과정에서 우직끈 뚝딱’ ‘와그르르’ ‘와장창소리가 난무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 친윤 보수언론에서는 유명 여론조사 전문가 혹은 정치비평가들을 동원해 벌써부터 국힘당의 압승, 따라서 민주당의 참패를 열심히 예언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3대 중요 요소는 구도와 바람 혹은 이슈, 그리고 인물이라고들 한다. 인물이 바람을 이길 수 없고, 바람이나 이슈가 구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도 있다. 나는 이번 국힘당이 일사불란하게 김건희 특검 재의결을 부결시켜, 대통령 부인과 그 가족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에 대한 수사를 방해한 것이야말로 치명적인 패착이라고 본다. ‘김건희 방탄 공천과정에서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을 막았고, 국힘당은 대통령 일가의 사당(私黨)이라는 것, 한동훈은 그 집안의 집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윤석열 정권 심판이라는 구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강화했기 때문이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 비리 의혹에 대한 특검을 거부한 대통령, 국민의 대표라면서 국민 70% 이상이 요구하는 특검을 무산시키는 데 앞장선 국회의원들과 그 정당을 과연 국민들이 그냥 놓아둘까?

 

한동훈의 국힘당은 TK와 서울 강남 3구를 제외한 지역의 공천을 진행하며 80% 이상 현역의원들을 단수 공천하면서 여성과 신인들의 등용을 막았다. 잔치를 앞두고 새 술을 담기 위한 새 부대를 만들겠다고 요란을 떨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아예 새 술을 빚을 생각도 안 한 것이다. 오히려 경남 지역에서는 쉰내가 풀풀 나는 다선 중진의원들을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구에 옮겨 박는 해괴한 행태를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악할 만한 것은 상임위 활동을 패밀리 비즈니스로 여기는 박덕흠, 허위사실 명예훼손으로 징역형 선고를 받고 2심 계류 중인 정진석, ‘땅기현이라고도 불리는 김기현, 부친의 이름을 빌려 부동산 투기를 했다가 의원직을 사퇴하기도 한 윤희숙, 태영호 등을 공천한 것이다.

 

폐기물 재활용급 국힘당, 시스템으로 먼지 털어낸 민주당

국힘당이 이런 폐기물 재활용급의 공천을 하는 동안 민주당은 차질없이 착착 시스템 공천을 진행해 온 것으로 보인다. 다선 중진의원들이 여럿 자진 불출마로 물꼬를 열었고, 추미애 이광재 양승조 등 원외의 다른 중진들은 당의 요구에 군소리 없이 험지 출마를 받아들였다. 민주당의 본산 광주에서는 당원들이 앞장서 대대적인 현역 물갈이를 이룸으로써 감탄을 자아냈고 신인들이 치열한 경선을 통해 빈자리를 채우는 동안 특히 과거와 달리 영입 인재들이 비례에 머물지 않고 대거 지역구 출마를 자처해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당 상층부와 기반 조직의 공조로 대대적인 당내 개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불출마나 정계 은퇴는 아니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 이상민 이낙연 김종민 이원욱 조응천 김영주 이수진 설훈 홍영표 등과 결별한 것도 신인들 수혈 못지않게 민주당에 새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그동안 민주당 지지자들이 민주당의 정체성에 맞지 않다고 지목해 온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진짜 훌륭한 민주당 의원들이었다면 지지자들이 이들과의 결별을 아쉬워해야 마땅함에도 오히려 환호작약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SNS에는 이들로 인해 선거에서 어느 정도 손해가 불가피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반응이 봇물을 이룬다.

다만 좀 더 신중하게 되새겨봐야 할 것은 임종석과 그를 감싸고 두둔하는 일부 민주당 내 인사들의 행태다. 이들이 이른바 친문이라는 외피를 쓰고 의리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의리란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지만 그 의리란 사적 이해관계의 유불리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지켜야만 할 정치신념에 대한 의리, 소속 정당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의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친문이란 정치이념이 따로 있는가. 한때 대통령을 함께 모셨다는 인연 하나로 소속 정당의 중요한 결정에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정파는커녕 계파도 아닌 그저 패거리의 의리도 아닌 소동에 불과한 것이다.

 

양당 당내 갈등으로 바꿀 수 없는 정권 심판구도

또한 친노 친문 친명이란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민주당의 역사 속에서 그때그때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지도자 중심으로 뭉쳤다가 흩어지고 다시 뭉치는 정치세력을 뜻하는 단어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친노는 문재인 정권 등장과 함께 친문으로 변화한 것이 맞고, 지금 당장 윤석열 정권 심판이라는 시대정신에 맞추어 친문은 친명으로 바뀌는 것이 도리에 맞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친노를 반대하는 동교동계, 계속해서 친명을 공격하는 친문·친노는 그저 화석화된 민주당 기득권일 뿐이다. 자칫 윤석열 정권 심판.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시대정신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오해받을 우려가 크다.

 

그동안 친윤·반민주 매체들이 요란한 확성기 노릇을 한 바람에 민주당 공천에서는 갈등과 분열만 요란했고 국힘당 공천은 평화롭기 그지없이 진행됐다. 국힘당도 이제부터 TK와 강남 3구 공천에서 만만치 않은 파열음이 날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민주당의 내홍과 마찬가지로 총선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양당 공천 과정에서의 그러한 잡음과 갈등이 이번 총선에서 가장 중요한 윤석열 정권 심판이라는 구도를 바꿀 만큼 강력한 것이냐 여부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전혀 바꾸지 못한다. 그저 각 당의 간판으로 나올 인물들을 결정한 것일 뿐이다.

 

정치공학자들은 선거에서 인물이 미치는 영향은 5% 내지는 10%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적으로 계량된 수치일 리 없다. 어떤 역량 있는 후보자는 20% 뒤지는 당세를 뒤집고 당선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후보자는 반대로 훨씬 앞선 당세를 말아먹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국힘당은 열심히 검사 공천, 측근 공천에 몰두하며 인물에서 밀리고 심판 구도를 강화해 나아갈 것이다. 오로지 믿을 것은 친윤·친국힘 언론사들의 총력 지원과 여론조사 업체들을 동원한 여론조작일 뿐인데 여차하면 북풍 바람이 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역대 선거 사상 이처럼 강력한 1 1 정권심판 구도를 본 적이 없다. 후보 인물들도 역대급으로 좋다.

강기석 사단법인 시민언론 보루 이사장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3.02.

 

 

논리적 추론-데이터 충돌 땐 둘 다 의심해야

오늘은 글이 길다. 평소의 두 배 넘는다. 칼럼이라기보다는 보고서에 가깝다. 주제가 여론조사라 여러 데이터를 소개하고 해석해야 해서 짧게 쓰기가 어려웠다. 미리 독자들의 양해를 청한다. 어렵지는 않으니 안심하시라. 술술 읽을 수 있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수수께끼로 가득한 2월 총선 여론조사

총선 여론조사 흐름이 달라졌다. 2월 첫 주가 시작이었다. 대통령 국정수행 긍정 평가와 국힘당 지지율이 꾸준히 상승했다. 정부를 지원하려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되어야 한다는 응답 비율도 함께 높아졌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데, 데이터는 분명 그랬다.

 

평론가들은 여러 설명을 내놓았다. ‘한동훈 현상’?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있다 해도 왜 2월 첫 주부터 나타났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의대 정원 확대와 전공의 파업에 대한 강력 대처? 그건 무조건 윤석열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들고 나온 새로운 명분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민주당 공천 파동? 2월 여론조사의 핵심은 민주당 지지율 하락이 아니라 대통령과 국힘당 지지율 상승이라서 적절한 설명이라 하기 어렵다. 2월 여론조사는 수수께끼 같다.

 

그래서인지 도처에 문어가 출몰한다. 어떤 평론가는 국힘당이 지난 총선의 민주당과 비슷한 압승을 거둘 것이라고 한다. 친윤 언론은 앞을 다투어 그 주장을 전파하면서 그가 4년 전 민주당 180석을 정확하게 맞췄다고 강조한다. 지난번에 맞췄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그런데 그가 4년 전 언제 어디에서 누구한테 그런 예측을 했는지 나는 들은 바 없다. 언론보도를 뒤졌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그가 김태우 후보의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당선을 예측했다는 사실을 친윤 언론은 모른 척한다.

 

국힘당의 어떤 총선 후보는 자기네가 160석을 얻는다고 말했다가 비대위원장한테 지청구를 들었다. 나는 그를 좀 안다.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민주당 소속이었던 그가 2004년 총선 직전 방송 카메라 앞에서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폭락하는 중이라고 외치던 장면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얼마 전에는 한국이 사우디를 역전해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는 잘못이 없다. 그런 사람의 주장을 받아쓴 기자들이 잘못했다.

 

극소수밖에 없는 진보 성향 신문들은 다른 문어를 띄운다.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지낸 사람이다. 1월에는 아무 맥락이 없는 시뮬레이션 결과라는 걸 보여주면서 비례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으면 국힘당에 과반 의석을 빼앗긴다고 주장하더니 요즘은 주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들어 민주당의 참패를 단언한다. 진보 진영과 민주당 일각의 이재명 비토 정서를 그런 방식으로 표출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문어들의 삿된 예언 불구 논리적 추론은 여당 패배

미디어에서 활약하는 문어들은 2월 여론조사가 총선 민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전제한다. 그걸 의심하는 사람을 진영논리에 갇혀 사실을 부정하는 멍청이로 여긴다. 정말 그럴까? 여론조사 데이터를 절대 신봉한다면 그렇게 말해도 된다. 그런데 데이터가 스스로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적절하게 해석해야 들리는 것도 있다.

 

만약 데이터가 경험적 논리적 추론과 충돌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둘 모두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넉 달 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때 보지 않았는가? 국힘당 후보의 참패와 득표율 격차를 제대로 맞춘 여론조사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 시기 전화면접 조사를 하는 NBS 전국여론조사의 서울 지지율은 국힘:민주가 31:23이었다. 한국갤럽 조사의 서울 지지율은 32:36으로 오차범위에 있었다. 언론이 보도한 강서구 여론조사는 리얼미터의 ARS 조사 두 개뿐이었는데 각각 7퍼센트와 10퍼센트 정도 진교훈 후보가 앞섰다. 언론이 진보편향 여론조사를 한다고 비웃었던 여론조사꽃은 실제 격차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했다. 한편 이준석 전 국힘당 대표는 21대 총선 강서구 득표율 격차만큼 진교훈 후보가 이길 것이라고 했다. 경험적 논리적 추론이 데이터를 제압한 셈이다.

 

금년 2월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가 올랐다고 하지만 일부 여론조사에서 40퍼센트 선에 턱걸이했을 뿐이다. 이것이 총선 민심의 가장 중요한 지표다. 국정수행 지지율이 낮은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보다 경제성적표가 참혹하다. 경제성장률이 반 토막 났고 무역적자는 세계 최악 수준에 근접했다. 물가상승률은 두 배가 되었고 모든 소득계층의 실질소득과 순자산이 감소했다. 이태원 참사와 청주 지하도 참사 등에서 보듯 안전 관리와 재난 대처에 극도로 무능했다. 도이치 모터스 사건 공범 재판에서 대통령 부인의 주가 조작 가담 혐의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고 디올 백 추문까지 불거졌는데도 검찰과 경찰은 수사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김건희 특검법을 거부했고 국힘당은 국회 재의결에서 반대표를 행사해 특검법을 폐기했다. 대통령은 야당과 단 1초도 대화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검찰권을 동원해 흠집을 내는 데만 열을 올렸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국가운영 비전을 밝히는 집권당 대표의 책무를 팽개치고 악플러 수준으로 야당을 비방하는 일에만 몰두해 왔다.

 

경험적 논리적 추론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는 집권당이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여론조사 데이터는 여당이 이긴다고 말한다. 국힘당 지지율이 오차범위를 벗어난 수준에서 민주당을 앞섰다는 최근 일부 여론조사 데이터가 그렇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말했다. 둘 모두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어느 하나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 둘 다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모두 잘못된 것이 없는데 우리가 데이터가 하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어느 경우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2월 여론조사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여론조사 데이터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 부문 여당 호전나타난 여론M’ 2월 통합 여론지표

그 많은 여론조사를 다 보라고? 겁먹지 마시라. MBC의 선거방송기획단이 번거로운 일을 다 처리해준다. 관심 있는 독자는 여론M’(https://poll-mbc.co.kr)에 접속하시라. MBC와 서울대학교 국제정치데이터센터가 샘플 수와 수치가 제각각인 여론조사 결과를 독자들이 굳이 알 필요는 없는 통계학적 수학적 처리법으로 종합한다. 그렇게 산출한 데이터를 단순한 형태의 시계열 그래프로 보여준다. 여기에 몇 가지 다른 데이터를 얹어 2월 여론조사를 분석하면 정당 지지율의 배후에 놓인 그림을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다. 총선 때까지 여론조사가 궁금하면 매주 업데이트하는 여론M’의 데이터를 보는 게 가장 편리할 것이다.

 

여론조사는 기법이 매우 다양하다. 전화면접과 ARS, 백퍼센트 무선전화 조사와 유선 혼합 조사, RDD(무작위 생성 번호 전화걸기)와 가상번호 조사 등 방법이 제각각이다. 조사 기간과 시간, 설문 문항과 샘플수도 저마다 다르다. ‘여론M’은 기술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그런 차이를 최대한 반영해서 여론 흐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수치를 추출한다. 전화면접 조사와 ARS 조사 결과를 따로 내는 항목도 있지만 오늘 칼럼에서는 주로 통합 데이터를 인용하겠다. 소수점 이하는 반올림해서 독자의 편의를 도모했다.

 

첫 번째로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 데이터를 보자. 간단히 잘함과 못함으로만 나누어 긍정:부정 비율로 정리했다. 취임 시점인 202252주에 51:42로 출발한 국정수행 지지도는 지방선거를 치른 6152:38로 정점에 올랐다가 곧바로 하락해 7142:51로 긍부정 비율이 뒤집혔다. 최악은 202281주의 28:67, 그 후 가장 좋았던 기록은 202371주의 39:55였다. 20241435:61을 기록할 때까지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35:60 선에서 큰 의미 없는 수준의 등락을 반복했다. 그런데 21주부터 24주까지 계속 상승해 39:57까지 올랐다. 국정수행 지지율 상승을 주도한 지역은 영남과 서울이었고 연령대는 60대 이상이었다.

 

두 번째는 정당 지지율이다. 다른 정당은 빼고 국힘:민주 지지율만 보겠다. 20225144:33의 우위로 시작한 국힘당의 강세는 지방선거 직전이던 5547:34로 정점에 올랐다. 민주당 지지율은 63주에 30퍼센트로 바닥을 쳤고 양당 지지율 격차는 15퍼센트로 최대를 기록했다. 7435:39로 민주당이 대선 이후 첫 우세를 잡았으나 검찰이 이재명 대표를 본격 수사한 202212월부터 20232월까지는 다시 국힘당이 약간 우세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32주에 우위를 탈환해 20241월까지 열 달 넘게 5퍼센트 안팎의 안정적 우세를 지켰다. 그랬던 정당 지지율이 202422주에 역전되었고 24주에는 국힘당이 41:36으로 앞섰다. 격차는 전화면접과 ARS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격차가 생긴 양상이 특이하다. 민주당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았고 국힘당 지지율이 올랐다. 지지정당 없음 비율이 줄어든 만큼 국힘당 지지율이 상승했다. 세부 데이터가 없어서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국힘당 지지율 상승세도 국정수행 지지율처럼 영남과 60대 이상 유권자가 주도했으리라 추정한다.

 

세 번째 데이터는 총선 성격에 대한 의견이다. 올해 들어 이 질문을 한 조사는 전화면접 30개와 ARS 조사 13개뿐이어서, ‘여론M’은 특별한 처리과정 없이 시간 순으로 시계열 그래프를 만들었다. 정부지원:정부견제 응답 비율은 20241641:51로 시작해 11439:52로 최대 격차가 났으며 21844:49로 최소격차를 기록했다가 225일에는 42:50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시계열 데이터가 아니지만 43개의 여론조사 모두 정부견제 응답이 정부지원 응답보다 많았다는 점은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국힘당이 정당 지지율에서 앞서고도 총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을 내포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보수 과표집속 여전히 높은 중도층 국정수행 부정평가

여론M’의 시계열 데이터는 논리적 추론과 충돌하지 않는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과 정당 지지율과 총선 성격 평가 여론 등 모든 데이터는 여당 패배라는 경험적 논리적 추론을 뒷받침한다. 문제는 20242월의 정당 지지율 데이터다.

 

국힘당이 예비후보 적합도 평가 여론조사를 2월에 했기 때문에 당원과 지지자들이 적극 전화를 받아서 그런 데이터가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전화면접과 ARS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2월 여론조사에서 주관적 정치성향이 보수라고 밝힌 응답자 비율이 진보 응답자 비율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근거로 든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민주당도 같은 조사를 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공천이 끝난 3월 중순 이후 여론조사 결과를 봐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기다려야만 하는 건 아니다. 오늘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나는 2월 정당 지지율 데이터만으로는 국힘당의 총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본다. 국힘당 지지율이 민주당을 앞선 24주 여론조사에서도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39:57로 부정 평가가 압도했다. 그 주에 실시했던 두 개의 조사를 합치면 총선 성격과 관련한 정부지원:정부견제 응답 비율이 42:50이었다. 중도층 또는 무당층의 국정수행 부정평가 비율은 긍정평가 비율의 두 배가 넘었다. 예컨대 225일부터 27일까지 실시한 KBS3천 샘플 여론조사의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도는 36:60이었고 중도층의 부정평가 비율은 69퍼센트나 되었다. 2월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간 수준이다.

 

무당층 또는 중도층 유권자들이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주면 국힘당은 지역구 선거에서 불리하다. 정당 지지율이 박빙인 선거구는 대부분 민주당으로 넘어간다. 현재까지 여론조사 데이터는 이번 총선에서 그런 현상이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2월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여당의 정당 지지율 우세가 실제 여론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에도 그럴진대, 만약 정당 지지율 우세가 여론조사의 보수 과표집으로 인한 착시 현상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나는 샘플이 1000개인 최근의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수 응답자가 진보 응답자보다 적은 경우를 보지 못했다. 적어도 50명 이상 보수 응답자가 많았다. 차이가 200명에 육박한 여론조사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조사에서도 국힘당의 지지율 우세는 오차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국힘당이 환호할 일도 아니고 민주당이 좌절할 이유도 없다. ‘보수 과표집으로 인한 여론조사의 왜곡은 사실로 단정할 수 없지만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2월에도 변하지 않은 MBC 패널 여론조사 흐름

어떤 데이터가 의심스러울 때는 관련 있는 다른 데이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이 있는가? 그렇다. 충분하지는 않아도 있기는 있다. MBC의 패널 여론조사 데이터다. ‘여론M’의 라는 아이콘을 클릭하면 그 데이터를 볼 수 있다. 일반 여론조사와 달리 패널 여론조사는 반복 조사에 동의한 유권자를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의견을 묻는다. ‘여론M’의 패널은 1500명이고 3-4주 간격으로 휴대전화 조사와 웹 조사를 병행한다. 나는 지난해 12월부터 MBC에서 이 데이터를 두고 유승민 의원과 세 차례 토론했다. 35일 밤 10시 백분토론에서 네 번째 패널 여론조사를 참고해 토론할 예정이다.

 

2023123주의 첫 패널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는 35:63이었다. 국힘당:민주당 지지율은 한 번 물었을 때 28:31, 두 번 물었을 때 34:43이었다. 지역구 투표 의향은 국힘:민주가 30:41, 다른 정당이 8, 없음/모름 21이었다. 총선 성격은 정부지원:정부견제가 38:59였다. 모든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한 여론M’의 같은 주 국정수행 평가는 33:62였고 정당 지지율 32:34였다. 패널 조사에서 두 번 물었을 때 정당 지지율 격차가 커진 것은 무당층이 민주당을 더 많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지역구 후보 투표 의향도 민주당이 비슷한 수준으로 앞섰다.

 

패널조사는 일반 여론조사에 비해 정치적 의사를 적극 표현하는 정치 고관여층비중이 높아서 편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어떤 시기에 어느 쪽으로 판단을 바꾸었는지 보여주는 장점만 살리면 된다. 패널조사 흐름과 일반 여론조사 결과가 잘 들어맞으면 두 데이터 모두 믿을 수 있다. 첫 패널조사의 정당 지지율이 일반 여론조사와 달라도 괜찮다. 어느 정당이 유리한 쪽으로 흐름이 바뀌어 가는지 파악할 수만 있으면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렇지만 첫 패널 여론조사의 데이터는 같은 기간 다른 여론조사를 합한 여론M’의 데이터와 차이가 없었다. MBC의 패널 선정에 특별한 편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알기에 MBC 말고는 패널 여론조사 시계열 데이터를 제공하는 언론사가 없다.

 

MBC 패널 여론조사는 적어도 2월 첫 주까지는 여론이 여당에 더 불리해졌다고 말했다. 2차 패널조사는 12주였고 3차는 21주였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35:63에서 30:6730:68로 더 나빠졌다. 한 번 물었을 때의 정당 지지율은 28:31에서 28:3830:41로 격차가 커졌다. 두 번 물었을 때도 34:43에서 30:4231:44로 더 나빠졌다. 지역구 투표 의향도 30:41에서 30:4030:44로 큰 차이가 없었다. 총선 성격에 대해서도 1차에서 38:59였던 정부지원:정부견제 비율이 3차에서는 35:61로 악화했다. 21주까지는 여당의 승리 가능성을 예고하는 어떤 조짐도 없었다.

 

25주에 4차 패널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나는 결과를 받았지만 MBC보다 먼저 공개할 수 없어서 말하지 않겠다. 궁금하신 분은 5일 밤 백분토론을 보시기 바란다. 나는 패널조사 결과가 4주 전의 3차 조사 결과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리라고 예측했다. 예측이 빗나가지는 않았다고만 하겠다.

 

보수적 국민 많으면 보수 응답자 많은 것이 정상

MBC 네 차례 패널조사 결과는 2월 일반 여론조사의 정당 지지율 흐름과 충돌한다. 논리적 추론과 데이터만 충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데이터끼리도 충돌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두 데이터 중 어느 하나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 둘 모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다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 그런가? 국힘당 지지자들이 민주당 지지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여론조사 전화를 받았을 때다.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럴 경우 완성된 여론조사 샘플 가운데 주관적 정치성향이 보수인 응답자 비율이 대폭 늘어난다. 보수 응답자 비율이 높아지면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과 국힘당 지지율은 자동적으로 올라간다. 총선 성격 관련 정부지원 응답 비율도 높아진다. 22주부터 4주까지 나온 여론조사 중에는 1000 샘플 중에서 보수 응답자 수가 진보 응답자 수보다 100개 넘게 많은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조심하자. 보수 응답자가 많다고 해서 여론조사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보수:중도/모름:진보 비율이 30:40:30이 되어야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꼭 맞는 건 아니다. 보수적인 국민이 많으면 여론조사 보수 응답자가 많아야 정상이다. 선거결과와 일치했던 여론조사꽃의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여론조사 응답자 중에는 주관적 정치성향이 진보인 응답자가 더 많았다. 강서구에 진보 성향 시민이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의 주관적 정치성향은 달라질 수 있다. 당연히 국민 전체의 정치성향도 변화한다. 그렇다면 현재 시점에서 우리 국민의 정치성향이 어떤지를 알려주는 데이터가 있는가? 없다. 그런 것을 전수 조사하는 국가기관이나 여론조사 회사는 없다. 국민의 주관적 정치성향에 대해서도 여론조사 데이터가 있을 뿐이다. 2016년부터 20242월까지 한국갤럽의 데이터를 소개하겠다.

 

국민 정치성향 보수 우위격차 범위 넘은 한국갤럽 2월 표본

한국갤럽은 매월 4000명의 주관적 정치성향을 전화면접 조사한다. 따로 하는 게 아니라 정기 여론조사를 할 때 응답자의 주관적 정치 성향을 물어보는 것 같다. 간단히 보수:진보 비율만 말하겠다. 100에서 둘을 합친 수를 빼면 중도/답변유보 비율이 된다. 우리 국민의 보수:진보 비율은 전통적으로 보수가 우세했다. 한국갤럽 자료로는 20167월에 30:25였다. 그런데 20171월 조사에서는 27:37로 드라마틱하게 뒤집혔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촛불집회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시기였다. 20187월에는 22:34로 보수 진보의 격차가 최대를 기록했다. 남북미 연쇄 정상회담으로 문재인 대통령 지지도가 정점을 찍었던 시점이다. 그러나 21대 총선을 석 달 앞둔 20201월에는 26:29로 격차가 줄었고 그해 726:26으로 균형을 회복했으며, 2022년 초부터 지금까지 보수 우위가 점차 강해져 20241월과 2월은 31:26으로 5퍼센트 격차가 났다.

 

이런 변화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주관적 정치성향은 정치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보수 정치세력이 지탄받는 상황에서는 진보 쪽으로 넘어오는 사람이 생긴다. 물론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런 사람들의 정치성향이 바뀌었다는 객관적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 둘째, 여론조사 전화를 대하는 태도 차이가 원인일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기에는 보수가 전화를 덜 받아서 진보 비율이 늘었고, 언론이 여당과 한 몸이 된 것처럼 민주당만 물어뜯는 요즘에는 진보가 짜증이 나서 전화를 받지 않아 보수 비율이 늘었다는 이야기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요인만으로 2월 여론조사 결과를 다 해석하기는 어렵다. 주관적 정치성향은 바뀔 수 있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한 달 사이에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전화면접 조사가 대부분 그렇지만 한국갤럽 조사만 예를 들어보겠다. 최근 한국갤럽의 1000 샘플 여론조사는 보수 응답자가 진보 응답자보다 100명 넘게 많았다. ‘가중치 보정을 통해 80명 정도 차이로 조정하기는 했지만 한국갤럽 자체 조사에서 산출한 평균 격차를 크게 넘어섰다. 당연히 국힘당 지지율이 크게 올랐다. 비슷한 시기에 실시한 수준이 의심스러운회사의 ARS 1000 샘플 여론조사에서는 보수 응답자가 진보 응답자보다 200명이나 많았다.

 

2월 여론조사가 조작되었거나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MBC의 패널 여론조사 흐름이나 한국갤럽의 주관적 정치성향 비율 등 관련 데이터에 비추어 보면서 조사 결과를 해석하는 게 좋다는 말이다. 유권자로서 정치 뉴스 소비자로서 이런 점을 염두에 두는 게 현명하지 않겠는가.

 

정당 지지율 여론조사만으로 우리 미래 결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한다. 경험적 논리적 추론의 결론은 여당의 총선 패배다. 반면 2월 여론조사의 정당 지지율 데이터는 여당의 승리를 예고한다. 언론시장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한 친윤 언론은 그 데이터를 대서특필하고 민주당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만든다. 친명횡재니 비명횡사니 하는 극언까지 동원해서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를 비난하고 공격한다. 진보를 자처하는 신문의 비평가와 기자들도 민주당 위기론을 퍼뜨리면서 이재명 대표 사퇴론을 들먹인다.

 

민주당이 이긴다고 우길 생각은 없다.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2월 여론조사에 환호작약하는 언론 보도에 휘둘릴 이유 또한 없다.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칼럼을 썼다. 검찰정권의 무능과 횡포를 심판하고 싶은 시민들은 여당 지지율과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이 오르고 민주당이 위기에 빠졌다는 보도를 보면서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정치적 고립감을 느낀다. 저런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이리도 많다니, 차라리 정치에 관심을 끊는 게 낫지 않을지 고민한다. 이 나라를 떠날 생각도 한다. 투표를 하면 뭐하나 싶다. 나는 그런 분들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다. “2월 여론조사는 실제 민심이 아닌 착시일지 모릅니다. 그 때문에 대통령과 여당이 선거를 더 크게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투표하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4년 전 총선을 기억하시는가? 그때 보수언론은 샤이 보수가 보수정당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총선에 임박해서도 보수의 승리를 점친 평론가와 언론인이 부지기수였다. 한동수 전 대검 감찰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윤석열 사단 검사들은 지난 총선 당시 야당의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샤이 보수는 없었다. ‘여론M’20201월 초부터 48일까지 실시한 658개의 여론조사를 종합해 산출한 정당 비례대표 지지율 그래프를 보여준다. 국힘당(당시 자유한국당과 위성정당)1월 말부터 2월 중순 사이에 2퍼센트 격차까지 민주당을 추격했지만 넉 달 내내 한 번도 앞서지 못했다. 마지막 여론조사의 거대 양당 위성정당 지지율은 30:28이었다.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열린민주당과 정의당이 각각 1312였다.

 

결과는 어땠는가. 양당 위성정당의 득표율은 34:33으로 비슷했다. 정의당은 10, 열린민주당은 5, 국민의당은 7퍼센트를 얻었다. 정의당은 지역구 후보가 적었고 열린민주당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 두 정당에 비례표를 준 유권자 일부가 지역구 표를 민주당 후보에게 던졌다. 국힘당은 지역구에서 84:163으로 참패했다. 정당 지지율만으로는 총선 승패를 가늠할 수 없다.

 

보수편향 여론조사가 어지럽히는 선거판 실제상황

여론M’에는 2년 전 대선 여론조사 데이터도 있다. 2022112일 이후 이재명은 하루도 윤석열을 앞서지 못했다. 선거를 5주 앞둔 21주에는 윤석열이 5퍼센트 넘게 앞섰고 32일 마지막 여론조사일에는 안철수와 심상정이 각각 7.2퍼센트와 2.6퍼센트를 얻는 가운데 윤석열이 이재명을 43.6:41.2로 앞섰다. 격차는 겨우 2.4퍼센트였지만 여론조사가 워낙 많아서 샘플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오차범위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여론조사만 보면 승패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바로 다음날 안철수가 윤석열을 지지하면서 전격 사퇴했다. 그 이후 여론조사 데이터가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안철수 표가 이재명한테 더 많이 갔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윤석열은 겨우 0.7퍼센트 이겼다. 마지막 여론조사를 했던 32일 현재, 이재명은 여론조사와 달리 앞서고 있었던 것이다.

 

윤석열은 야당 후보였는데도 여론조사는 윤석열 쪽으로 편향되었다. 여론조사에 여당 프리미엄이 있다는 말이 반드시 맞는 건 아니다. 2020년 총선 전화면접 여론조사에는 여당 프리미엄이 있었다. 내가 출연했던 KBS의 선거방송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 지지율이 실제 선거 결과보다 높게 나왔다. 지난 대선 여론조사 보수편향의 원인은 무엇일까? 조사시간이 평일 낮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0시간 근로시간제를 도입한 후 여론조사 회사들은 인건비 부담 때문에 주로 평일 낮에만 조사한다.

 

평일 저녁과 주말 조사와 평일 낮 시간 조사 결과가 얼마나 다른지 여론조사 전문가와 정치인들은 잘 안다. 평일 낮 조사는 무조건 국힘당 지지율이 높게 나온다. 보정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한 편향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국갤럽의 주관적 정치성향 데이터의 현재 시점 5퍼센트 보수 우위도 그로 인해 생긴 것일 수 있다.

 

여론조사 아닌, 여론조사에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중요

지금은 2020년이나 2022년과 달리 국힘당이 여당이다. 윤석열 정권은 항의하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다. KBS땡윤방송으로 개조했고 방심위를 동원해 언론을 탄압한다. 전화면접 여론조사에서는 평일 낮 조사로 인한 편향에다 여당 프리미엄까지 작용한다. 여기에 경선 여론조사 경험이 많은 국힘당 당원과 열성 지지자들의 전화 대기를 더해 보라. 이런 요소를 제외하고는 1000 샘플 여론조사에서 보수 응답자 비율이 40퍼센트를 넘기는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데이터가 나오기 전까지는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경험적 논리적 추론을 견지하려고 한다. 2월 여론조사의 여당 지지율 상승 말고는 어떤 데이터도 이 추론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이런 생각을 견지하는 데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 유권자들이 여론조사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에 따라 적극 투표한다. 둘째, 민주당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대오를 잘 유지하면서 선거를 치른다. 둘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국힘당이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

 

친윤 언론은 2월 여론조사 데이터를 이용해 이 전제들을 깨뜨리려 한다. 이재명 대표 체제가 무너지면 민주당은 오합지졸로 전락할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권은 집요한 태도로 검찰을 동원해 이재명을 제거하려고 했다. 친윤언론은 펜으로 그 일을 한다. 민주당이 이런 공격을 견디고 튼튼하게 대오를 유지해도 지지자들이 투표를 포기하면 총선 결과는 2월 여론조사대로 나올 수 있다. 국힘 우위라는 여론조사에 기운이 빠진 진보 유권자가 투표장을 외면하는 가운데 보수 유권자는 필사적으로 투표한다고 하자. 2월 여론조사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된다. 여론조사로 선거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친윤언론 기자들은 이렇게 외칠 것이다. “봐라. 여론조사가 맞았지 않은가. 진영논리에 빠져 과학적 여론조사까지 불신한 민주당이 민심의 철퇴를 맞았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을 민주당 패배의 원인 제공자로 몰아 조리돌림할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친윤언론의 선거 개입에 맞서 싸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친윤언론과 다를 것 없는 진보 계열 언론의 게으름

극소수에 불과한 진보 계열 신문들까지 여론조사에 휘둘리는 현실을 보면 앞날이 암담하다. 그 신문의 기자와 비평가들한테 말하고 싶다. “자신의 주장에 분명한 실증적 논리적 근거가 있는지를 점검하시오.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를 훈계하는 문장을 쓰는 시간에 데이터를 연구하시오. 여론조사 데이터의 꽁무니를 따라다니지 말고 진보의 프레임과 자신의 언어로 데이터를 분석하시오. 그대들을 보면 대한민국이 정조 임금 이후 조선처럼, 혁신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미래를 맞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이러나저러나 욕먹을 것임을 알면서 이 글을 썼다.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살 만큼 살았는데, 욕 먹으면 어때!”

유시민 작가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3.04.

 

 

저출산은 해결되지 않는다

작년 한국의 출생아 숫자는 23만명이다. 그중 4분기 합계출산율이 사상 처음으로 0.6명대를 기록했다. 0.5명대도 가능하다고 본다. 언제부터인가 저출산 관련 뉴스를 접하지 않는 날이 없다. 어딜 가도 저출산, 저출산이다.

 

최근에는 저출산이 문제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로 저출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인식에 반대한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저출산은 여성의 진화생물학적 적응이자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마리아 델라 코스타의 용어대로 파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은 시민의 정당한 권리로 파업을 행사한 것이다. 저출산은 정치적 행위자로서 여성들의 한국 사회에 대한 발본적(拔本的) 문제제기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국가와 사회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출산은 극복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저출산을 해결한답시고 엉뚱한 방향으로 인력과 비용을 쓰고 있으니 안타깝다. 젠더 문해력이 제로인 결과다.

 

나는 건국 이래 국방비용과 4대강 사업을 제외하고, 저출산만큼 어리석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한 경우를 알지 못한다. 그나마 국방비나 4대강 사업보다 저출산 대책 비용은 환경 파괴가 덜하다는 점에서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에서 출산하지 않는 것은 생명체의 자기 보존 원리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혼 여성이 몇명 이상의 자녀를 낳으면 현금을 주는 정책은 돈으로 여성의 출산력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 현금이 제대로 지급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보상을 한다 해도 저출산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저출산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는 근대국가 초기의 인식, 즉 인구가 국력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17세기가 아니고 북유럽 국가 중에는 인구가 서울시 인구의 반, 수도권 인구의 4분의 1500~600만명인데도 선진국이 많다. ‘노동력의 고령화도 청년 실업을 고려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한편 저출산을 해결하려는 시도보다는 태어난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자는 의견도 많다.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18세에 보육원을 나와 독립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대 자살을 예방하는 것 역시 중요한 저출산 대책이다. 동성혼 합법화와 그들의 출산이나 입양을 장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누구나 아는 저출산 이유

나는 출산율 제고를 바라는 이들을 위해 저출산의 가장 실제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주고싶다. 원인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모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성 인지적 관점(gender perspective)에서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에서 각자도생이 아니더라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시민으로서 경제적 독립은 필수적이다. 요즘 현모양처가 꿈인 여성은 없다. 문제는 여성이 경제활동과 결혼생활의 병행이 매우 어렵다는 우리가 다 아는사실이다. 남성도 어려운 형편이고, 남성의 비혼과 만혼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예전 여성들은 이중노동 현실에,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대처했다. 첫 번째는 노동자임을 포기하고 결혼 후 집에 들어앉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업주부의 지위는 높지 않고, 전업주부의 노동도 만만치 않다. 두 번째 방식은 규범적인 기혼 여성이 되기를 포기하고 비혼을 선택, 자기 커리어를 중심으로 삶을 기획하는 명예 남성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평판은 좋지 않았고, 아내의 내조를 받는 남성들과 본격적으로 경쟁해야 했다. 세 번째 경우는 직장생활과 결혼생활 공·사 영역 양쪽을 오가는 슈퍼우먼이 되는 것이었다. 한국의 기혼 여성 노동자는 슈퍼우먼이 아니다. 울트라 하이퍼 메가톤급 슈퍼우먼이었고, 2~3배로 일하면서도 죄의식에 시달렸다.

 

여성노동자가 양립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여성들은 위 세 가지 방법 중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성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비난을 뚫고 혹은 경제력이 있는 여성에 대한 호감을 이용해 비혼을 선택했다. 그 결과가 당대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저출산이다.

 

직장생활에서의 성차별, 결혼생활에서의 성차별(남성이 육아와 가사노동을 동등하게 분담하지 않는 상황)이 저출산의 원인인데, 이 구조는 기후위기만큼이나 개선되기 어려운 문제다. 직장 내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고, 남성 개인의 변화는 본인이 대오각성하고 노력해도 어려운 일이다(인구의 수도권 집중도 큰 원인인데,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최근 영국 공영방송 BBC는 한국의 독특한 저출산 현상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긴 노동시간, 직장 내 불이익, 주거비, 사교육비 등 총체적인 문제가 지적되었다. BBC 서울 특파원은 1년간 전국을 돌며 여성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한다. 일종의 필드워크(현장 연구)를 한 것이다(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이마저도 하지 않는다). 다음은 연합뉴스 런던 특파원이 전한 내용이다.

 

집안일과 육아를 똑같이 분담할 남자를 찾기 어렵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 대한 평가는 친절하지 않다.” “서울 외곽에 살면서 저녁 8시에 퇴근하니 아이를 키울 시간이 나지 않는다. 자기 계발을 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크다. 월요일에 출근할 힘을 얻기 위해 주말에 링거를 맞는 것이 일상이다.” “아이를 낳으면 직장을 떠나야 한다는 암묵적 압박이 있다. 여동생과 뉴스 진행자 두 명이 퇴사하는 걸 봤다.” “기업 인사팀에서 근무하는데 여성은 육아휴직 후 해고되거나 승진에서 누락된 경우가 많다.” “아이를 좋아하지만 일하고 즐기다 보니 너무 바빴고 이젠 자신의 생활 방식으론 출산·육아가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남편에게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눈빛으로 답을 대신하며, 설거지를 시키면 항상 조금씩 빠뜨린다. 믿을 수가 없다.”

 

이 같은 여성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는 저출산 대책은 백약이 무효다. 여성들은 늘 과로와 분노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고 이를 지켜보는 남성 가족 구성원 역시 뭔가 불편하고 억울하다.

 

여성의 삶은 공·사 영역에 걸쳐 있다. 남성의 삶은 여성의 경험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고 폭이 좁다. 여성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수시로 오간다. 가사노동을 분담한다고 해도, 성별에 따라 눈에 보이는 일거리가 다르다. 남성에게는 일이 아닌데 여성에게는 일이 된다.

 

맞벌이 부부들과 함께 살면서 가사노동, 육아 분담을 조사한 미국의 여성학자 알리 혹쉴드는 자신이 연구를 이렇게 요약했다. “여성은 온갖 감정노동을 다해 남성에게 가사노동을 가르쳤다. 그 결과 각자 할 일이 정해졌다. 아내는 가족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은 반려견에게 먹을 것을 준다. 아내는 매일 집안 청소를 하고 남편은 1년에 두 번 지하실 청소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저출산은 자본주의에 대한 대응

직장생활도 경쟁이고, 육아도 경쟁인 시대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말을 재인용해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말고, 물고기(기본소득)를 주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저출산 정책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이 없다. 저출산은 후대에 비인간적인 경쟁 사회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슈퍼우먼으로 살면서 가족과 직장 동료의 눈치를 보고, 모두에게 욕먹고 늘 죄의식에 시달리며 매일 실수를 하고 과로사하고 싶은 여성은 없다. 아니,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런 삶을 왜 여성에게만 강요하는가. 사회는 전업주부를 어떻게 보는가. 무능하거나 유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집에서 논다고 한다. 아이를 낳은 여성을 맘충이라고 부른다. 자녀를 낳아도 욕먹고 안 낳아도 욕을 먹는다. 안 낳으면 이기적이고, 낳으면 벌레다.

 

이런 사회에서 출산 독려는 인권 침해다. 여성들은 최소한의 자구책을 찾았을 뿐이고, 이는 여성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사람의 소중함, 지구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실천이 되었다.

 

이번 총선에서 저출산 대책 공약을 내놓는 후보나 지역 발전(환경 파괴)을 외치는 후보보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는 후보에게 투표하자. 진정,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면 말이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편집장 | 경향 2024.03.05.

 

유인촌 장관님. 원고료와 강사료 좀 올려 주십시오

유인촌 장관님. 저는 영화평론가 오동진이라고 합니다. 프리랜서 라이터입니다. 프리랜서 생활을 한 지는 20년쯤 됩니다. 생면부지(라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장관께 이렇게 글을 올리는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원고료 좀 올려 주십시오. 원고료가 너무 낮아 프리랜서들의 생계를 이어 가기가 너무 힘든 지경입니다. 프리랜서 원고료 만이 아닙니다. 대학 강사들의 강의료도 좀 올려 주십시오. 여기도 굉장히 열악한 조건으로 일하고 있는 분야 중 한 곳입니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값이 너무 쌉니다. 지식의 가격이 너무 낮게 책정돼 있습니다. 프리랜서들이 받는 원고료는 제가 이 일을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200자 원고지 장당 8000~1만 원 수준에서 요지부동, 고착화 된지 오랩니다. 원고 청탁은 대체로 원고지 10, A4 용지로 한 장 반, 자수로는 2000자를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0만원을 받을 때 3.3% 심지어는 8.8%까지 세금을 원천 징수 합니다. 결국 9만 원 남짓을 받는다는 얘깁니다. 한달에 원고지 300, A4 17, 글자 수로 6만 자 정도를 써야 300만원을 벌까 말까 합니다. 도시 노동자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 가는 사람이라면 아주 부족한 돈입니다. 한국 평균 임금은 월 520만원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턱도 없이 못 미치는 돈입니다.

 

300만원도 안되는 돈으로는 성장한 자녀들의 학비를 댈 수 없습니다. 프리랜서들은 4대 보험의 혜택도 받기 힘듭니다. 국민연금의 노후 보장의 꿈 같은 것은 프리랜서들에겐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이건 대학의 시간 강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간 강사들은 대체로 주 3시간, 12시간 강의에 시간당 4만 원~6만 원, 48만 원에서 72만 원을 받습니다. 소위 명문대학이라 불리는 학교에서, 그것도 대학원 강의를 하면 수령액이 64만 원 정도입니다. 매주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자료를 뒤지고, PPT를 만드는 노동량에 비하면 매우 낮은 생산성입니다.

 

대부분 강사들이 이런 비천한노동을 감수하는 이유는 그 과정을 거쳐 전임교수가 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제 전임교수가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니다. 이 과정에서 비리도 많습니다. 대체로 지도교수와 연이 닿아 있는 인물이 사전에 낙점이 됩니다. 공채는 들러리라는 소문이 많습니다. 학교는 학교 대로 전임의 수를 극도로 줄여 놓고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강사와 허울 좋은 겸임교수 수만 늘려 놓는 실정입니다.

 

유인촌 장관님 이건 착취입니다. 그것도 심각한 노동착취 행위이죠. 정부가 나서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한국에서 전업으로 평론 활동을 한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아르바이트 없이는 생계가 불가능하지요. 오로지 연구와 취재,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정부가 나서 주십시오. 이제 정말 그럴 때입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 경기신문 2024.02.21.

 

 

선대인을 탓하지 말자

주변 친구들 중에 선대인 때문에 그때 집을 못 샀다고 말하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 40대에 들어선 지금도 집값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부동산을 키워드로 놓고 검색해도 그때 선대인 때문에 집 못 샀다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차피 개인 책임이지만 시계추를 12년 전으로 돌려서 따져보자. 선대인은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아파트 가격이 거품이라며 집값의 대세 하락을 외친 대표 주자다. 부동산 전망 기사를 쓸 때 하락한다는 관점을 찾기 위해서는 그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선대인, 미친 부동산을 말하다> 등 여러 책에 담긴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소득이 오르지 않는데 아파트 가격만 오른다. 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이 커진다. 저출생으로 인구가 줄어든다. 공급이 늘어난 아파트를 감당할 인구가 없다. 가격은 떨어진다는 논리였다. 핵심 키워드는 아파트 거품, 저출생과 인구 감소였다. 그때는 너도나도 그의 말에 밑줄을 그었다. 요즘으로 치면 그의 말에 좋아요버튼을 꾹 눌렀을 테다(최근 주식 관련 그의 행보는 논외로 치자).

 

아파트 대세 하락은 적어도 그 직후엔 틀렸다. 모두가 알다시피 전 세계적으로 저금리 정책으로 유동성이 흘러넘쳤으며, 박근혜 정부에선 대출 규제가 완화됐다. 1인 가구 비중은 200015%대였다가 201527%까지 올랐다. 일부는 수도권에 신규 아파트 공급이 부족했다고도 한다.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그 시절 부동산은 바람을 탔다. 순풍에 돛을 달았어야 했다. ‘부채도 자산이라는 말에 수긍하고 대출을 일으켰더라면, ‘1가구 2주택이 되기란 하늘의 별을 딸 정도 일은 아니었을 거다. 당시 부동산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선대인의 책을 전설의 오답노트라며 공부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급격하게 달라졌다. 은행 대출 금리는 지난 1월 평균 연 3%대로 내려왔지만 대체로 4%대를 넘나들고, 중앙은행들은 유동성을 조이고 있다. 부동산 가격도 고점 대비 하락했고, 사고파는 거래도 이뤄지지 않는다.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경매로 넘어간 물량도 늘었다. 부동산 침체기다. 예전처럼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줄었다. 최근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부동산 전문가 172, 공인중개사 523, 은행 프라이빗뱅커 73명에게 물었더니 10명 중 7명 이상이 올해도 집값이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럼에도 이 시국에 다시금 선대인을 꺼내는 이유는 혼자 사니까 더더욱 오를 가치가 있는 곳에 집을 사야 하는 것 아니냐1인 가구 후배, 결혼을 앞두고 전세와 매매 사이에서 고민하는 예비 부부, 학령기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학군지의 구축 아파트로 이사 가 재건축을 기대할지 고민하는 친구의 질문을 마주하면서다. 아이가 있든 없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나이가 많든 적든 무게중심은 하나다. 인구 감소 시대에 노후 대비 자산으로 아파트가 여전히 유효한가.

 

두 개의 주장이 맞붙는다. 하나는 인구가 줄어도 똘똘한 한 채’, 즉 오를 수 있는 아파트를 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부동산 양극화다. 일부에선 학교와 학원이 몰려 있는 몇몇 지역을 꼽기도 한다. 여기에는 부동산을 향한 절대적 믿음이 깔려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자산의 70%를 차지하는 아파트는 욕망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아예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사람들의 심리도 시장을 움직이는 한 축이다.

 

다른 하나는, 부동산은 장기적으로 하락한다는 주장이다. 부동산 업계에 있으면서도 부정적 전망을 내놓는 채상욱 애널리스트(커넥티드그라운드 대표)와 통화해봤다. 그는 올해, 내년 등 단기적 흐름 말고, 저출생을 고려해 장기적 전망을 본다면, 인구가 줄어드니 실질성장률이 내려갈 수밖에 없다. 성장률이 마이너스면 자산시장도 마이너스라고 했다. 그는 부동산이 아니어도 투자할 곳은 많다고도 했다. 이를테면 재건축을 바라보며 오래된 아파트를 매매하는 소위 몸테크10, 20년 뒤의 관점에서 추천할 만하지 않다는 뜻이다.

 

사실 당장 예측하기 힘든 금리를 제외하면 선대인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은 0.65. 돈을 벌어서 소비에 쓸 수 있는 생산가능인구는 선대인이 예측했던 때보다 더 빠르게 감소한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아파트를 구매하면 언젠가 되팔 수 있어야 한다. 인구가 줄었는데 고가의 아파트를 사줄 사람이 있을까.

 

결국 결정은 자기 몫이다. 이젠 선대인을 탓하진 말자.

임지선 경제부 차장 | 경향 2024.03.06.

 

 

민주당이 고전하는 진짜 이유

대통령님은 언제 오시려나.”

전국을 돌며 민생토론회를 열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방문을 기다리는 어느 지역 신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신문은 총선을 앞에 둔 선거용 행보라는 비판도 있지만, 지역을 방문하면서 풀어놓는 선물 보따리에 지자체와 도민들의 관심이 많다고 썼다. 오죽하면 강기정 광주시장이 영남·충청에서만 할 게 아니라 광주·전남의 어려움도 살펴야 한다고 공개 초청까지 했을까.

 

용산 대통령실은 민생을 챙기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건 대통령의 의무다. 선거에 관계없이 총선 이후에도 계속해 나가겠다고 말한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대통령이 지역에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는 게 선거와 관계없을 리 없다. 경기 고양에선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를, 의정부에선 수도권 광역교통철도(GTX), 부산에선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 제정을, 대전에선 충청권 광역급행철도 조기 착공 문제를 언급했다. 지금까지 17차례나 했는데 호남에선 아직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점도 의미심장하다. 선물을 줘도 효과가 없으리란 판단에서일까.

 

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대통령으로서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했다. 그에 비하면 윤 대통령은 일주일에 두세번 꼴로 여당 득표에 도움이 되는, 말이 아닌 행동을 거리낌 없이 실행하고 있다. 정치적 중립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민주당의 갑작스러운 위기의 본질은 이것과 연결돼 있다. 최근 선거 판세가 흔들린다는 얘기가 많다. 공천 논란이 불거지고, 중도층에 소구력 있는 후보를 전략적으로 살려내지 못한 건 이재명 대표로선 할 말이 없는 지점이다. 하지만 공천 논란 자체보다, 이번 총선이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과 경제 실정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사실이 가려지는 게 훨씬 뼈아프다.

 

이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온 평소의 윤 대통령이라면 영화 건국전쟁흥행에 한마디 보탤 법도 한데, 조용하다. 김건희 여사와 함께 가기로 했던 독일 국빈방문은 취소했고, 대통령실에서 공개해온 김 여사 관련 사진도 요즘은 보기 어렵다. 그 대신에 지역에서 숙원사업 해결을 약속하고 다니니,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분명 도움이 될 터이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경험했던 지난 2년의 정책 난맥과 처참한 경제 성적표를 그런 식으로 지울 수는 없다. 의사 파업에 오직 압수수색과 출국금지로 대응하는 걸 보면, 앞으로 국정운영 방식이 달라지리라 믿을 구석도 없다.

 

공무원 중 유일하게 당적을 가진 이가 대통령이다. 국정 수행과 정치 활동을 무 자르듯 자를 수 없는 이유다. 다만, 야당에도 같은 기회를 주는 게 공정하다. 미국은 대통령이 의회에서 국정연설을 하면, 그와 똑같은 시간의 라디오 연설 기회를 야당 대표에게 준다. 7일 열리는 조지프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대응해, 공화당에선 케이티 브릿 상원의원이 반대연설을 한다. 윤 대통령이 굳이 평소엔 듣지 않던 현장 목소리를 선거 임박해서 들어야겠다면, 야당 대표에게도 같은 기회를 주는 게 옳다. 전례도 있다. 200810월 이명박 대통령이 주례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정을 홍보하자,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야당의 반론권을 요구해 비슷한 분량으로 라디오 연설을 했다. 이런 문제 제기는 지금 공천 논란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1.4%였다. 석유파동과 외환위기,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곤 가장 낮다. 이 수치는 집권세력이 지난 2년간 국민 삶의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개선을 위해 정치·사회적 역량을 하나로 끌어모으는 데 성공하지 못했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야당이 집권세력보다 이걸 더 잘해낼 수 있으리란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굳이 야당에 표를 던질 이유가 없다.

 

국회부의장인 중진 의원이 탈당해 상대 당으로 간다고 해서 선거 구도가 움직이진 않는다. 진정 선거판을 흔드는 건, 집권세력의 국정 운영을 도저히 계속 두고 볼 수 없다는 유권자 절망감의 깊이다. 또한 침체한 대한민국의 활력을 어떻게 다시 끌어낼 건지 설득력 있는 대안을 야당이 제시할 수 있는가이다. 한두 사람 공천의 문제보다 이것이 훨씬 중요하고 근본적이다.

 

누군가는 민주당의 공천 파동에 실망하고, 누군가는 그래도 윤석열 정부를 심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갈래갈래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건 결국 국민 삶의 문제다. ‘정권심판론이란 다른 게 아니다. 잘 짜인 각본의 대통령 토론회에 가려진 경제·민생 현안을 어떻게 제대로 드러내느냐에 민주당 운명은 달려 있다.

박찬수 | 대기자 한겨레 2024.03.06.

 

 

사과 한 알에도 손 떨리는 사회

어떤 나라가 선진국이고, 어떤 나라가 개도국일까. 여러 판단 기준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민물가를 본다. 아무리 살인적인 물가의 나라라고 해도, 통상 선진국에서는 농축산물과 가공식품, 공산품 등 서민들이 소비하는 생활필수품은 저렴하다.

 

요즘 마트에서 파는 사과 한 알 가격이 5000원쯤 한다. 이게 사과야 수박이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원체 가격이 세다 보니 사과 한 알을 포장한 상품도 나온다. 어릴 적 겨울을 앞두면 부모님은 나무 궤짝에 담긴 사과 한 상자를 다락방에 넣어주시곤 했다. 입이 심심할 때마다 꺼내 베어물던 아삭했던 그 사과가 이렇게 비싼 과일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과만 그런 게 아니다. 귤도 딸기도 토마토와 배도 과일처럼 생긴 것들은 죄다 비싸다. 연봉 1억원이 넘는 가구도 과일을 사먹으려면 부담스럽다고 한다. 이쯤되면 과일은 들었다 놨다가 아니라 그냥 외면하게 된다. 체감만 그런 게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월 사과 가격은 1년 전보다 71%나 올랐다. 귤은 78.1%, 배는 61.1%, 토마토는 56.3% 올랐다. 신선식품 전체로는 32년 만에 가격이 최대 폭을 뛰었다.

 

정부는 과일값 폭등의 주범으로 이상기후를 꼽고 있다. 지난해 봄철엔 냉해로 착과(열매가 매달리는 것)가 안 됐고, 여름엔 집중호우와 고온이, 가을에는 병충해와 잦은 우박이 겹치면서 생산량이 급감했다는 것이다. 절반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절반은 틀렸다.

 

과일값이 비싼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과일을 생산할 땅이 줄어들고 있다. 재정당국을 출입할 때 흔히 들은 말이 비싼 땅에 웬 농사냐. 한국의 높은 땅값을 감안하면 그 땅에 부가가치가 낮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얘기였다. “농촌에 지원할 돈으로 차라리 농산물을 전부 수입해 오는 게 낫다는 말도 들어봤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재정관료 생리상 농촌 지원은 투자가 아니라 지출에 가까웠다. 양곡관리법을 재정당국이 기를 쓰고 반대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 같은 시각은 땅에 대한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사 대신 공장을 짓자는 논리로 이어진다. 대규모 농토가 훼손되고 산업단지들이 들어서는 논리적 배경이다. 개발을 통한 성장을 강조하는 보수정권에선 이런 움직임이 더 노골적이 된다. 정부는 최근 그린벨트를 대폭 해제하겠다고 했다. 산업단지 규제는 완화하겠다고 했다. 그 결과 농지는 훼손되고, 규제도 덩달아 완화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경지면적은 2013년 이후 11년째 감소하고 있다. 통계청의 ‘2023년 경지면적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전국 경지면적은 전년보다 1.1%(16092) 감소했다. 여의도 55개에 달하는 면적이다. 경지가 사라진 땅에는 주택, 공장 등 건물과 도로 등을 건설했다. 화성, 용인, 김포, 평택, 남양주, 파주 등 경기지역의 논 감소는 지도를 바꿀 정도다. 그 많던 경북 경산의 포도밭, 울산 서생의 배밭, 부산 대저의 파밭도 눈에 띄게 줄었다. 사과만 해도 향후 10년간 매년 1%씩 경지면적이 줄 것이라고 농촌경제연구원은 전망했다. 공급이 준다면 가격이 내려가기 힘들다. 식당에서 후식으로 사과가 나오던 일은 머지않아 전설처럼 들릴 날이 올 수도 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농축산물 할인지원에 역대 최대수준인 6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돈이 없다며 과학기술계, 교육계에 대한 예산도 대폭 삭감한 정부지만 총선을 앞두고 과일값 폭등에 화난 민심, 다시 뛰기 시작한 물가를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촌에 돈 쓰기 싫어하지만, 결국은 쓸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다.

 

()사과 현상이 어쩌다 발생한 올해 한 해의 일이라고 치부하다 보면 큰코다칠 수 있다. 금사과 현상은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 차제에 농산물에 대한 생각, 농촌에 대한 정책을 정부는 바꿀 필요가 있다. 일회성 재정지원, 수입확대는 장기적 대안이 될 수 없다.

 

월급이 좀 올랐다 한들 먹거리값이 더 뛰면 서민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한국은행은 지난 5일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소득(GNI)33745달러로 1년 전보다 2.6% 증가해 1년 만에 상승반전했다고 밝혔다. 소득이 오른 만큼 내 삶도 그만큼이라도 나아졌을까? 전년보다 71% 올랐다는 사과 가격 기사에 2.6% 증가한 국민소득 소식이 더없이 공허하게 느껴졌던 이유다. 사과 한 알에도 손 떨리는 사회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박병률 콘텐츠랩 부문장 | 경향 2024.03.07.

 

역사 퇴행시키는 이승만의 소환

최근 이승만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의 흥행과 열린송현광장의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둘러싼 논쟁 소식에 아연실색했다. 수구세력은 기회가 되면 언제든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다. 헌법은 명백히 이 나라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숱한 민중의 피와 눈물을 뿌리며 여기까지 왔음에도 그들은 정의의 역사를 왜곡, 전복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 삶을 옥죄는 환경은 이승만 독재 권력이 켜켜이 쌓아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의 정신적 퇴행성은 이 나라를 기독교민족주의로 재건하고자 했던 점이다. 경성감옥에서 기독교를 믿게 된 그는 1904년에 쓴 <독립정신>에서 한국인들을 기독교로 교화시키고, 한국이 영국·미국처럼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 구국론과 신국 건설이 그의 존재 이유이자 필생의 사명이 되었다. 미군정의 친기독교 정책을 계승한 그는 성탄절 공휴일화·기독교 군목제도·국영방송국의 선교 등을 통해 신정국가를 지향했다. 1952, 1960년 대선 때 조직적 선거운동을 한 기독교는 권력 유지 기반이었다. 이는 제헌헌법’ 12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는 정교분리 원칙 위반이다.

 

다음은 반공을 국시로 삼아 남북 및 남남으로 백성을 분열시켰다. 남북 분단은 외세 탓인데도 미국의 반공노선을 추종, 남한만의 반쪽 정부를 구성했다. 그가 등용한 친일파들은 반공주의로 전향, 면죄부를 받았다. 제주 4·3과 여수·순천항쟁 때 빨갱이를 몰살시키도록 하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1959년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조봉암을 법살(法殺)했다. 국민보도연맹원과 양민 학살 수는 100여만명. 한국전쟁 중 백성을 내팽개친 이승만은 1953년 군사주권을 미국에 무조건적으로 양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 이 땅을 미군의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이자 백성들을 훈육하고 인도하는 종교 지도자, 즉 메시아였다. 그의 언설을 추종한 기독교는 반공 신학을 창안했다. 이후 군인정치가들의 권력 토대도 반공에 의한 흑주술이었다. 그의 북진통일론은 전시국가를 연장하고, 반공 교육과 훈련으로 백성들이 자기검열을 하게 했다. 권력은 독점되었다. 나아가 친미를 통해 미국은 성스러운 땅이며, 그곳에서 문명의 세례를 받는 것이야말로 구원임을 믿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들을 교육시켜 충량한 일왕의 신하로 만들고자 했던 전략을 미국은 거저 얻었다. 미국행은 지배계급을 향한 사다리이며, 학위는 계층상승의 보증수표다. 미국식 정치·교육·의료·사회시스템은 신국의 문명이다. 미국의 가치는 세계 보편적 진리다.

 

자유민주주의의 원조는 이승만의 자유론이다. 조선인이 미개해서 식민강권통치와 분단을 맞게 되었다. 그러니 부패한 전통에서 해방되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는 영국·미국의 민주제를 심자고 했다. 하지만 대영제국은 퇴락했고, 군사력으로 세계 모든 곳에 이권 개입을 해온 미국의 야만적 실체는 벗겨지고 있다. 미국식 자유는 욕망의 자유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이승만의 죄는 반민특위가 그에게 짓밟혀 민족반역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한국의 주류로 탈바꿈하게 한 사실이라고 한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와이로 도망가기 전, 미국 대사가 대통령직을 내려놓으라 종용한 사실을. 그는 미국이 쓰다버린 소모품에 불과했다. 독재자의 말로는 하야는커녕 추방이었다.

 

열린송현광장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본거지인 식산은행 사택, 해방 후엔 점령군인 미군 숙소, 그리고 내정간섭을 해온 미대사관 직원 숙소 터였다. 여기는 이승만이 희생시킨 애달픈 영혼들의 안식처가 되도록 나무를 심어 산 자들과 함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기념관 건립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기념관을 그 나라의 수도에 세우는 것과 다름 없다. 다시는 이승만 망령이 이 땅을 배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원익선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 | 경향 2024.03.07.

 

[부동산][입시] ··· [] 건드린 이재명, [] 누른 조국과 손잡다

급소가 있다. 급소란 눌리면 숨을 못 쉬고 자지러지는 곳이다. 한국 사회도 급소가 있다.

하나는 [입시], 다른 하나는 [부동산]이다. 급소는 방어기제와 함께 집착으로 이어진다.

한국인 특유의 정신세계다.

 

한국은 한 지점(극점)을 중심으로 소용돌이(vortex)치며 도는 나선형의 사회다.

그 극점은 서울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국을 회전시키는 동력이 바로 [입시][부동산]이다.

 

그 과정에서 비정상적 에너지가 발생된다.바로 입시 [] 과 투기 [] 이다. 한국은 [과열] 사회다.

 

 

[][], 그리고 [][]

나선의 외곽 끝에서 그 극점으로 곧장 통하는 지름길이 있디. 바로 [][]이다. []을 쥐려면 [학위증] 소위, []이 필요하디. []을 쥐려면 []이 필요하다. [][]이 바로 한국 평민들의 [로망]이자 [와일드 카드].

 

한국에서 [입시]는 모든 것이다. 입시 때만 되면 온 나라가 긴장하고, 때 아닌 한파가 몰아치기도 하며, 교통도 통제된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수능시험 걱정부터 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자산 증식의 마술이다.누군가는 몇 억으로 몇 천억을 만든다.모두가 강렬히 원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동시에 보유할 수 없다. 부러워하면서 증오하고, 증오하면서 부러워하는 이유다.

 

급소 찌른 두 사람, 조국과 이재명

[입시][부동산], [][]은 한국의 급소다. 그 둘 중에 하나만 눌리면, 한국 사회 전체가 자지러진다. 조국 은 그 첫 번째인 []을 건드렸다. 이재명 은 그 두 번째인 []을 건드렸다.

 

급소 눌린 민심은 비명을 질러댔다. [][]이 없는 사람들의 급소였다.

급소 눌린 이들에게 이성은 없다. 고통을 호소하는 절규만 있을 뿐이다. 그 결과 180석 거대 [공룡 여당] 이었던 민주당은 정권을 내놓고 말았다.

 

한국인들 다수는 항상 억울하다 느낌을 갖고 았다. 열심히 싸우지만, 판정패 당하는 기분이 든다. TV를 보다가 갑자기 분통 터지고 왠지 불안하다.

그럴수록 [입시][부동산]에 매진한다. 그들에게 [입시][부동산][와일드 카드]이다.

 

계획된 오심

프로스포츠 리그엔 [와일드 카드]가 있다. 때로는 결승전보다 [와일드 카드] 결정전이 더 박진감 넘친다. 탈락한 팀들이 패자부활 기회를 놓고 격돌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와일드]하다.

이때 중요한 건 [게임의 규칙]이다.

 

한국은 교육 체계에도 [와일드 카드]가 있다. 바로 편입과 전문대학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터프한 와일드 카드 경쟁이 바로 [의대 편입][의전원 입학]이다. 흙수저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사다리가 되기에 [와일드 카드]인 것이다.

 

그 경우 심판의 오심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심판도 사람인 이상 오심이 없을 수 없다.

[와일드 카드] 약탈자들

그런데 그 오심이 계획됐다고 해보자. [조국 사태] 의 본질이다. 본질은 []이 아니다.

 

조국 은 부자다. 절박함이 전혀 없는 재산가 조국 이 [절박한 흙수저에게 돌아갈 와일드카드를 가로채 자기 딸에게 챙겨준 격] 이어서 민심이 요동쳤던 것이다.

[와일드카드 약탈]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교수들 중에 [조국] 처럼 제 자식에게 [와일드 카드]를 쥐어준 이들은 매우 많다.

전수조사 해보라. 그렇기에 조국 은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남들 하는 대로 했을 뿐인데, 자신에게 들이댄 잣대가 너무 가혹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강남좌파 조국과 조민

[강남좌파] 조국 은 누구보다 입시경쟁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청년들이 꼭 용이 되려 하지 말고, 가재·개구리·붕어로 살아도 좋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딸 만큼은 [예외] 였다. 자신의 딸은 소중하고, 남의 자식들은 소중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부자 아빠를 둔 조민 은 의사 []이 없어도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리고 영원히 부유층이다.

하지만 어느 흙수저 청년에게 의전원 입학 기회는 너무나 소중했을 것이다.

그 흙수저는 그 기회를 잃었다.

 

조국, 윤석열과 이재명 운명 갈랐다

이재명 도 성남에서 한국의 급소를 눌렀다. [부동산]이다. 지난 대선 때 조국 이 한 급소()를 누른 것에 더해, 이재명 이 또 다시 다른 급소()를 눌렀다. 그 결과 민심이반이 나타났다. 그 후 조국 은 민주당에서 분리된 듯 했다.

 

총선이 다가오자 이재명 이 조국 과 다시 손을 잡았다. 하지하책이다. 가장 멀리해야 할 이와 연대한 격이다. 지금 이재명 을 버티게 해준 건 [소년공] 스토리다. 이재명 과 조국 은 성장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 소년이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잃고, 어둠의 세월을 견디다 검정고시를 치러 대학에 입학,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런 이가 시장이 되었고, 도지사가 되었고, 1당 대선후보가 되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였다. 이재명 에게 견고한 콘크리트 지지율이 있는 이유다.

 

이제 끝났으니 하는 소리다. 조국 사태가 없었다면, 이재명 이 더 선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국 사태 때 국민들이 분노했던 건 조국 부부가 어긴 []보다 조선시대 [음서] 의 기억 때문이었다. 국민 대부분은 조국 부부가 무슨 법을 어겼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반면, 조민 이 [무시험 전형]으로 부산대 [의전원]에 입학했음을 분명히 기억한다.

 

선동으로 흥한 당, 선동으로 망한다

그런데 이재명 은 조국 과 손잡았다.최악의 선택이다. 흙수저들 시각에서, 조국 은 사치스러운 퇴폐적 낭만주의자이다.이재명 과 조국 조합은 부자연스럽다.

민주당은 선동으로 흥한 당이다. 선동을 위해 가장 좋은 연료는 감정이다.가장 강한 감정이 바로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증오이다. 이재명 의 콘크리트 지지는 그 증오심으로부터 나온다.

 

이재명-조국 은 급소 조합이다. 이재명 지지자들과 조국 지지자들은 합집합이 될 수 없다.

조국 을 향한 콘크리트 분노는 가지지 못한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조국 은 잃을 게 없다. 반면 이재명 은 잃을 게 많다.

 

조국 의 선동이 자신의 지지자들과 이재명 지지자들 사이에 상호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 조국 을 향한 비명과 원성, 그리고 분노를 이재명 이 나눠 갖게 된다.선동으로 흥한 당, 선동으로 망할 일만 남은 것이다.

이양승 객원 논설위원 / 군산대 무역학과 교수 | 뉴데일리 2024.03.07.

 

의사들이 왜 이럴까?

기대권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오만

전공의들의 집단 파업 상태가 끝날 기미를 안 보인다. 매일 뉴스를 틀 때마다 나의 가족·친지 중에 아픈 사람이 없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2000년도 초에 사법시험 폐지·로스쿨 도입·변호사 증원으로 이어진 변호사 직역에서의 지각변동에 대한 기억이 몇 번이고 소환된다. “아니, 변호사들은 그때 가만히 있었는데 의사들은 왜 저러는 거야?”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런 질문을 던지니 그 이유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글로 한번 써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권은 무슨~

지난 4일 세계의사회(WMA)의 회장인 루자인 알 코드마니의 성명 발표가 있었다. 한국 정부의 조치가 의사들에 대한 잠재적 인권 침해(potential violation of human right)’라며 한국 의사들과 연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그녀는 쿠웨이트 출신이다. 쿠웨이트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그녀가 만약 권리인권의 개념에 대해 어려서부터 충실한 교육을 받아온 서구권 출신이었다면 이런 사안에 인권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갖다 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인권이라는 단어를 여기저기 남발하여 그 단어의 당위적이고 절대적인 뉘앙스를 폄훼하는 행위를 지극히 꺼린다.

 

대한민국 의사들의 인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제법상·헌법상 누릴 수 있는 만큼 잘 보장되고 있다. 정작 이번 사태에서 인권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로 인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중증·위급 환자들의 인권이다. 그런 측면에서 파업 중인 의사들은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다기보다는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자들에 가깝다.

 

권리·기대·반사적 이익

의대 정원을 확대하겠다는데 의사들은 왜 반발할까? 그들의 (어떤) ‘권리가 침해당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파업에 동참한 전공의 아무나 붙들고 한번 구체적으로 당신의 어떤 권리가 침해당했습니까?’라고 물어보라. 우습게도 그들은 뭐라 딱히 대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떠한 권리도 침해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변호사들과 의사들의 대응방식이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변호사들은 변호사 숫자를 매년 1000, 2000명씩 확대한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침해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20여 년 전 변호사 수를 늘리고자 하는 정부 정책이 발표되고도 거의 무대응에 가까울 정도로 침묵할 수밖에.

 

의사들도 알아야 한다. 의대 정원 확대로 그들이 침해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만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 좋다는 머리로 5분만 냉철하게 생각해 보라. 세상 그 어떤 직업에도 정원수를 고정시켜 평균 연봉과 기득권을 보장받을 권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변호사들도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 당연히 변호사 자격을 소지하고 향후 벌어들이게 될 수입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대개 선배 변호사들이 지난 세월 얼마를 벌어왔는지를 기준으로 형성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기대인 것이지 결코 권리로서 보장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회는 변화하고, 제도는 바뀐다. 어떤 직업을 가지기 위해 준비하는 자가 향후 자신이 가지게 될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대한 기대는 이미 법률상·계약상의 권리로 확정된 근로조건의 변경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의사들은 이 기대권리를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변호사나 의사 같은 일부 전문직종들은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그 숫자와 자격 요건을 통제한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 전체의 권익을 위한 것이지, 결코 그 직종에 속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특권을 보장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국가가 너무 급격하게 숫자를 늘리고 자격 요건을 완화한다면 그 직업군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할 위험성은 존재하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해당 직업군의 수준 유지는 또 다른 정책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

 

의사들이 고액연봉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그 연봉을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의사 자격과 숫자를 엄격히 통제하는 국가적 제도 때문이다. 법률 용어로는 반사적 이익이라 부른다. 그들의 기득권은 제도에 따른 반사적 이익이기 때문에 제도가 바뀌면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것이고, 또 국가는 제도적 목적에 따라 반드시 그것을 변경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 그들만 착각에 빠지는가

의사들은 왜 기대권리와 혼동하는 걸까? 근본적으로는 의사라는 직업을 다른 직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그래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자신들은 다른 국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소수에게만 보장된 본질적으로 다른 권리특권이라고 부른다. 또 한 가지 궁금증이 머리를 치켜든다. 그들의 이런 지독한 특권 의식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문득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저서가 떠오른다. 샌델의 표현을 빌어 설명해보자면,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엘리트 계층인 의사 집단은 자신들이 누려온 모든 것들이 오롯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의사가 되기까지 이루어낸 그 모든 것들의 적지 않은 부분이 행운에 의존한 것이었고, 의사가 된 이후 누리는 모든 것들은 국가가 국민 보건이라는 큰 제도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덕이었다.

 

운 좋게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나고 자라, 우연히도 대한민국의 공교육 시스템이 찰떡같이 그들의 뇌 구조와 맞아떨어졌고, 또 어쩌다 보니 그들의 조국은 의료보험 체계가 매우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OECD 국가 중 국민 평균 연봉에 비해 의사의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이 모든 우연적·환경적 요소들을 배제한 채 자신들이 누릴 것으로 기대하는 모든 것들이 오롯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일구어낸 일종의 권리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 때문일까 아니면 인문학적 교양의 부족 때문일까?

 

대한민국은 국민 대다수가 의료보험에 가입하여 매달 준조세에 가까운 보험료를 내면서 의사집단을 떠받치고 있는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의사들이 자신들의 권리 아닌 권리가 침해당한다고 생떼를 쓰며 환자들을 내팽개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현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이 어딘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조금 더 근본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공교육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김태현 변호사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3.07.

 

 

옆집 '총선 불구경' 재미, 그런데 우리집은?

언제까지 깜깜이 선거를 되풀이 할 건가?

22대 총선이 딱 한 달 남았다. 각 정당과 언론은 연일 공천 파동과 당내 갈등을 속보로 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평소 같으면 몇 달에 한 번 있어도 큰 충격을 줄 만한 뉴스들이 거의 매일 터져 나오니, 우리도 스포츠 중계를 하이라이트로 몰아 보듯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뭔지는 모르지만 한바탕 난리법석이 일어나서 온 나라가 들썩들썩하고, 뭔지는 몰라도 볼거리가 많아진 시즌이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정치인들이 이런 쇼라도 해서 국민들에게 이야깃거리, 눈요깃거리를 주니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한번 차분히 이 '사태'를 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이 선거판의 결과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의 삶에 어떤 미칠 영향 말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볼거리가 잔치판인지 싸움판인지 아니면 불구경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항간에 흘러 다니는 농담으로 '옆집 불구경 갔다 왔더니 우리 집이 다 탔어요' 하는 꼴을 당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지금 보는 이 난리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부터 생각해보자. 사실 이 난리의 핵심은 한 달 뒤에 있을 선거에서, 어느 정당에서 누가 후보자로 나오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뽑을지 안 뽑을지를 결정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이 '이제서야' 정해지고, '정신없이' 정해지기 때문에 난리법석이 난 것이다. 그런데 이게 맞는 걸까?

 

모든 일은 1년 전에 일어나야 했다

기실 우리가 합의해 좋은 정치적 일정이나 법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정말로 비정상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일들은 실은 1년 전에 일어났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의 순서를 따져보면 이렇다. 정당들이 중심이 된 현대 민주주의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투표의 변수는 후보 공천이다. 그런데 공천을 하려면 먼저 선거구와 선거법이 확정이 되어야 한다. 선거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구 변동에 따라, 또 선거제도의 변화에 따라 바뀐다. 따라서 선거구의 범위를 변경하기도 하고, 또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수를 조정하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 선거법과 선거구가 정해져야 모든 민주적 절차들이 시작될 수 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법에 그 시한을 정해 좋은 것이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국회는 선거법을 선거일로부터 총선 12개월 전에 정하도록 되어 있다. 또 선거구획정위원회는 그 획정 내용을 선거 13개월 전에 국회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법정 시한을 정해놓은 취지는 분명하다. 선거 1년 전에는 모든 제도적인 완비를 끝내서, 그때부터는 각 당이 후보자들을 정하는 절차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래야 민주적 선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그러면 선거 코앞에 닥쳐서 후보도 잘 모르고 정책도 모르는 깜깜이 선거를 해야 하는데, 이런 겉만 공정한 형식적인 선거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선거법이 사실상 최종 확정된 것은 선거를 약 2달 앞둔 지난 25일에서였다. 이날 이재명 국회 다수당 대표가 현행 연동형 선거법을 유지하겠다고 밝히면서야 비로소 선거법 개정의 가능성이 없어졌다. 사실 정상적인 프로세스가 진행되었다면, 2022년 하반기에 정개특위에서 선거법 논의가 진행되고, 법정시한인 작년 4월에 선거법 논의가 끝나야 했다. 그런데도 무책임하게 선거법 논의를 1년 동안 끌어오면서 국회와 당내외에 불필요한 논란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의 획정안은 지난해 말 125일에 국회에 제출되었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지난 229일 본회의에서였다. 외부위원들로 구성된 선거구획정위원회의 획정안이 늦어진 것은 선거법에 대한 국회의 결정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4·10 총선을 불과 41일 앞둔 상황에서야 선거구가 정해졌고, 그제서야 각 당이 후보를 정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선거법이나 선거구 획정 모두 선거 직전에 정해지는 것이 아주 관례화되고 있다 선거구 획정은 지난 20년 동안 법정기한을 지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번에는 41일 전이었는데, 지난 21대 총선 때도 선거일 39일 전에 선거구가 결정됐다. 물론 국회가 법으로 정해놓은 시한을 어기는 것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그에 따른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괜찮다. 겉으로만 보면 선거법이나 선거구획정도 그런 종류의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늘이 선거일 한 달 전인데, 아직도 많은 지역구에서 후보들이 확정되지 않았다. 지난 달 말에야 선거구가 획정되었고, 불과 열흘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각 당의 비례대표도 아직 하나도 확정되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비례후보도 없는 상황에서 정당 지지율에 따라 의석수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도 하지만, 이것을 과연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것은 겨우 인기투표

선거를 한 달 앞두고도 유력 정당의 후보가 누가 될지 알 수 없는 이런 상황을 놓고, 우리는 마치 경마 경주나 로또 당첨 방송을 보듯이 결과 발표에 열중하고 있다. '친윤 공천'이니 '비명횡사'니 하는 말들은 흥미롭지만, 이런 난리법석 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인기 투표'. 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후보 경선에 여념이 없으니, 각 정당의 정책은 더욱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내놓는 사람도 없고, 따지는 사람도 없다.

 

각 정당의 소위 '인재영입'도 이런 추세의 반영이다. 선거를 겨우 두어 달 앞두고 새로운 인물들이 정치권에 수십 명씩 새로 등장한다. 며칠 간격으로 여러 정당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나오니, 그에 대한 검증도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대선 때 상대 정당의 캠프에서 핵심적인 일을 맡았던 사람을 인재라고 영입하기도 하고, 방송에서 얼굴이 잘 알려진 기자나 아나운서, 앵커, 출연자들이 인지도와 호감도가 높아서 당선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출마 러시를 이루기도 한다. 이들이 도대체 국가의 운영과 법을 제정하는데 어떤 대표성과 전문성이 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선거 직전에야 선거법이 정해지고 후보 확정이 이루어지니, 이때 정당들의 창당과 분당도 급격하게 일어난다. 흔히 '한국 정치에서 6개월은 긴 시간이다'라는 말을 한다. 선거 2~3개월 전에도 '선거 구도' 자체를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에다. 지금 우리 상황을 보자. 과연 몇 달 전에 지금의 정당 구도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

 

좋은 정치인도 좋은 정치하기 어려운 구조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굽듯 하는 선거를 우리는 민주화 이후 지속해 왔다. 처음에는 민주주의가 익숙치 않아서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선거를 30년째 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창피한 수준을 넘어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구조적 조건 속에서는 괜찮은 정당이나 괜찮은 정치인이 있어도 좋은 정치를 하기 어렵다. 언론이나 시민들이 정책 경쟁을 하라고 아무리 요구해도 다 공염불이다. 이 피비린내 나는 쇼가 한 달 전에 벌어지는데, 누가 정책 같은 한가한 일에 관심을 갖겠는가? 내 집이 불타는 것도 모르고 보는 게 옆집 불구경인데 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할까? 미국에서는 현직 재선율이 89~90%에 달하기 때문에 우선 후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변이 없는 한 현직자의 재출마가 이미 확정적이고, 상대 정당의 주요 후보들을 일찌감치 정해놓고 선거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 후보 공천을 위해 각 주가 정하는 예비선거 일정도 선거일로부터 10개월 전부터 최소 4개월 전에는 완료된다.

 

의회제가 대부분인 유럽에서는 선거가 비정기적으로 자주 있고 선거운동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지역위원장에 해당하는 잠재후보들이 늘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고 상시적으로 선거운동을 한다. 후보가 바뀌는 경우에도 선거가 공고되면 곧바로 후보를 선정하는 절차가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다. 이렇게 후보가 정해져야, 유권자들도 누구를 선택할지 알 수 있고, 선거일에 임박해서는 각 정당이 정책경쟁에 집중할 수 있다.

 

예산안처럼 선거법 법정시한을 정하자

법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지금 우리 국회에서는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심의가 법정시한을 지키지 못하면 정부안이 그대로 통과되도록 해 놓고 있다. 한편에서는 정부여당에 너무 유리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국회 심의를 거치다 보면 여당도 정부안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제도는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정부나 특정 정당에게 유리하기 보다는 법정시한을 지키게 되는 비교적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선거법도 이렇게 하자. 선거법 개정의 법정 기한을 준수하지 못하면, 선거가 기존의 선거법대로 선거가 치러지도록 하는 것이다. 선거구의 획정도 법정 시한을 두고 그 전에 여야가 합의하지 못하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구획정 제안이 그대로 확정되도록 하자. 이렇게 해두지 않으면,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 이 정도는 해 놓아야, 여야가 선거의 룰에 빨리 합의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또 다시 선거 코앞에서 불구경이나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지금처럼 인구소멸이나 지방소멸, 기후위기 같은 국가적 중대사는 총선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런 선거를 더 이상 민주적 선거라고 할 수도 없다.

 

30년 전, 민주화 직후에는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이 '형식적' 민주주의다. 그러나 겉으로만 공정한 선거는 실은 민주주의의 한 조건에 불과하다. 이 형식적 민주주의가 단단해지는 동안, 나쁜 정치인들은 그 약점을 야금야금 파고들었다. 이제 내용을 바꾸어야 할 때다. 그 첫발은 선거라는 룰이 법정시한을 잘 지키도록 하고, 각 지역구의 후보들이 최소 6개월 전에는 확정되도록 해야 한다. 다음 국회의 정치개혁은 여기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이관후 정치학자 | 프레시안 2024.03.09.

 

 

기생충 언론

자기 소신 없는 '무척추 기자들' 사주이익만 추구

이재명·조국 증오에 확증편향 빠진 조선일보 기자

거두절미·침소봉대·아전인수·견강부회·곡학아세

 

숙주 위해 일하는 기생충 기자 아닌지 돌아보길

칼럼 참 거시기허게쓴다. 왕년의 동교동계 국회의원들은 기생충이었고, DJ는 정치 기생충들에게 양분을 공급하던 숙주였단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이재명이 싫으면 그냥 솔직하게 이재명 싫다고 해라. 억지 주장을 합리화하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려다 ‘DJ와 동교동계까지 싸잡아 기생충 집단으로 매도하지 말고. DJ가 싫었는데 이재명도 싫다고 더 솔직하게 말하거나.

 

조선일보 황대진 논설위원의 칼럼을 읽는데 구역질이 올라오는 듯했다. 참 비루하게 사는구나. 곡학아세란 게 이런 거로구나. 절필이란 말이 이래서 나오는구나.

 

얼마 전 동교동계 원로 정치인을 만났단다. 정치를 떠난 지 10년이 넘고 나이도 여든이 지난 분이란다. 그 원로가 이런 말을 하더란다. 평생 공천 걱정, 당선 걱정을 해본 적이 없는데, “나는 김대중의 기생충이었다. 그 말을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힘주어 하더란다. 고해 성사처럼 들리더란다.

 

첫 번째 의문. 정치를 떠난 지 10년이 넘고 나이도 여든이 지난 동교동계 원로라면, 이름을 대지 않아도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인데 왜 실명이 아닌 익명으로 말을 전하는 걸까? 논설위원쯤 되는 기자라면 실명 보도가 원칙 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DJ를 따르던 '진짜' 동교동 사람이 조선일보 기자를 만나 평생 공천 걱정, 당선 걱정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김대중의 기생충이었다는 말을 했을까? DJ와 호남 유권자들을 동시에 욕보이는 건데? 황대진 논설위원의 귀에는 고해성사로 들렸다는데, 거두절미로 앞뒤 잘라먹고 그 말의 취지를 왜곡하는 건 아닐까?

 

두 번째 의문. ‘이재명 대표가 5000만 국민을 제치고 혼자서 결정한 준연동형이라는데, 사실이 아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난 2000년 총선부터 도입됐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준연동형와 병립형에 대한 찬반 여론이 비슷하다.

 

도입 당시에는 찬성여론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랬으니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이 야당이던 미래통합당(지금의 국민의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겠지? 막무가내 기득권 정당의 묻지마 반대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던 민주당이 여론의 지지 없이 준연동형을 도입할 수 있었을까.

 

기자는 기사든 칼럼이든 사실에 근거하여 써야 한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재명이 만든 기생충 생태계에 조국도 합류했다니, 이재명도 싫고 조국도 싫다고 사실과 근거와 논리를 초월하여 아무 말이나 쏟아내서야 되겠는가.

 

그건 기사가 아니다. 배배 꼬인 속내를 악담과 저주로 배설하는 것이고, 그래서 조선일보는 보도가 아닌 선동을 하고 사실이 아닌 적개심과 증오의 바이러스를 퍼뜨린다고 하는 거다. 그렇지 아니한가.

 

세 번째 의문. 황대진 논설위원은 누구를 위해 이 칼럼을 썼을까. 기자는 월급 주는 사주를 위해서 또는 사주와 유착되었거나 사주가 눈치를 보는 권력을 위해서 기사를 써서는 안 된다. 언론의 첫번째 임무는 권력 감시이고 기자는 오로지 시민과 시민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다.

 

칼럼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기생충은 모두 무척추동물이다. 정치 기생충도 자기 소신을 지탱하는 척추가 없다. 있으면 숙주가 다칠 수 있으니 곤란하다. 기생충 정치는 숙주인 보스의 이익을 우선하여 그의 지시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 보스가 시키는 일이라면 상식과 이치, 정의에 어긋나도 일단 하고 본다.”

 

그걸 이렇게 바꾸면 글이 더 깔끔해진다. “기생충은 모두 무척추동물이다. 기생충 기자도 자기 소신을 지탱하는 척추가 없다. 있으면 사주가 다칠 수 있으니 곤란하다. 기생충 기자는 숙주인 사주의 이익을 우선하여 그의 지시에 따라 기사를 쓴다. 사주가 시키는 일이라면 상식과 이치, 정의에 어긋나도 일단 하고 본다.”

 

명색이 기자인데 쪽팔리게이러지는 말자며 기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몇 가지 금기어가 있었다. 거두절미, 침소봉대, 아전인수, 견강부회, 곡학아세가 그런 거다.

 

남의 말을 거두절미로 앞뒤 잘라먹지 말고, 내 입맛에 맞는 일부만 발췌하여 침소봉대로 과장하지 말고, 내 의도에 맞춰 아전인수로 왜곡하지도 말고, 견강부회의 억지 논리로 포장하여 권력에 아부하는 곡학아세를 하지 말라는 거다.

 

궁금하다. 조선일보 황대진 논설위원은 DJ도 이재명도 기생충 먹여 살리는 숙주로 매도하면서 한동훈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고 자기를 숙주 삼아 기생하는 정치인을 허용할 사람 같지도 않다는데, 대체 무슨 근거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곡학아세의 주장을 하는 건가?

 

설마 깐족이고 촐랑대며 비아냥거리는 행태를 보아하니 다른 정치인들을 품을 만한 그릇으로 보이지 않아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다는 걸 아부로 위장하여 비꼬는 건 아닐 테고, 참과 거짓이 뒤바뀐 세상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 걸까?

 

조선일보가 권하는 가짜뉴스 감별법에는 내가 확증편향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해본다는 것도 있는데, 그건 독자들이 아니라 기사나 칼럼을 쓰는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꼭 필요한 금언이다. 자기합리화에 함몰되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이 확증편향인데, 중증이 되면 무엇이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제 맘대로 판단하고 태연하게 억지 주장을 늘어놓는다.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권한다. 기사 쓰기 전에는 나는 왜 이 기사를 쓰는가?’ 스스로 물어보고, 기사를 탈고하기 전에는 혹시 내가 확증편향에 빠진 건 아닌가?’ 하는 질문에 당당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하나 더. 그래도 명색이 언론이고 기자인데, 제발 사실과 논리는 물론이고 제발 저잣거리 양아치만도 못한 저급한 언어가 아닌 기자답고 언론다운 언어를 구사하기 바란다. 배배 꼬인 속내를 저주와 악담으로 배설한다고 그게 기사가 되고 칼럼이 되는 게 아니다.

송요훈 전 MBC 기자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3.09.

 

노동이 ESG에 참여할 발판은 거버넌스(G)

ESG 경영에 노동기준 제대로 자리 못 잡아

얼렁뚱땅 경영 들러리, 구경꾼 될 가능성

노동이사, 노사협 통해 환경·사회 목소리내야

지난 글(ESG 선풍 속 노동(L)이 제대로 자리잡을 곳: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218 )에서는 노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ESG(L-ESG)가 노동기준의 개선에 머물지 말고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 의제를 폭넓게 포괄할 필요가 있겠다고 제안했다. 자본의 선의나 정부의 온정주의에 기댈 일이 아니라 노동이 주체가 되어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자본이 지속가능한 사회를 명분으로 ESG 경영을 내세우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ESG가 이윤의 자장(磁場)을 벗어날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ESG 경영에서 노동기준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배경에는 노동배제의 ESG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노동의 관점에서 ESG 경영을 실현하려면 노동의 개입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ESG 가운데서 G, 즉 거버넌스가 그것이다. ESGG를 하부구조(infrastructure)로 삼아 E(환경)S(사회)가 배치되는 입체적인 건축물이다.

 

ES가 실질적인 가치(substantive value)라면 G는 절차적인 가치(procedural value)에 해당한다. 민주주의가 절차적·형식적 차원에서 정의되듯이 ESG에서도 절차(G)가 실질(ES)을 정의한다. 거버넌스는 E(환경)S(사회)의 추진과 이행력 확보를 위한 의사결정체계라는 점에서 ESG의 원동력이다.

 

그렇다면 노동 ESG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결과 못지않게 절차로서의 거버넌스다. 거버넌스에 참여함으로써 노동에 의한 목소리노동을 위한 목소리로 바뀐다. L-ESG가 지금까지 사회적 가치(S)에 주목해왔다면 이제 강조점을 거버넌스(G)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ESG를 통해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경영권에 막혀 경영 주변부 맴도는 노사협의회

거버넌스 관점에서 바라보면 ESG 경영은 이해관계자 경영과 동의어를 이룬다. 2020년대에 들어서서 주주 자본주의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되면서 거버넌스의 개념은 이해관계자의 권리 또는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의사결정체계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ESG는 주주만이 기업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주주우선주의(shareholder primary)에 도전한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김상봉, 2012; 이관휘, 2022)를 묻지 않더라도 ESG는 기업의 의사결정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경제민주주의의 일환이다.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노동자의 집단적인 목소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일터를 민주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서는 회사를 주주집단의 이해추구단체에서 주주, 경영자, 노동자로 구성된 이해관계자의 생산공동체로 파악한다.

 

그렇다면 ESG 경영에서 이해관계자이자 생산공동체의 파트너로서 노동자의 목소리는 들리고 있을까? ESG 경영이 노동자의 참여를 강조한다면서 기껏해야 직원과의 소통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직된 노동의 참여에 대해 침묵한다면 이해관계자와의 소통과 참여는 한낱 구색 갖추기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실제로 ESG란 계급적 속성을 감춘 노동배제의 기획이 아닐까?

 

ESG 경영에서 노동이 주체적인 위상을 확보해 개입하지 못하면 L-ESG는 자칫 자본투자의 리스크 관리에 봉사하는 들러리에 머물 수 있다. 노동이 기업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제도적인 수단으로는 크게 두 가지, 단체교섭과 경영참여가 있다. 단체교섭은 노동조합이 파업권을 바탕으로 사용자와 임금 및 근로조건을 교섭하는 것이라면 경영참여는 노동이사나 노사협의회를 통해 기업의 경영활동에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단체교섭은 여전히 기업의 담벼락 안에서 경제적 이해 다툼을 다룰 뿐이고 노사협의회는 경영권이라는 방어막에 막혀 경영의 주변부를 맴돌고 있다. 노동이사제는 공공기관 일부에만 도입되어 있다. 기업지배구조에 노동의 참여가 제한적일 때 기업은 민주주의의 사각지대에서 그 자체로 권력을 휘두르는 일종의 사적 정부가 된 사적 사업체”(마조리 켈리, 2013)로 머문다. ESG가 지향하는 일터 민주주의는 깃발로만 남는다.

 

노동이사제에 집중해 노동참여의 거버넌스 구축해야

여기서 관심사의 하나는 노동이사제의 도입이다. 해당 기업의 노동자가 사외이사로서 이사회에 참가하는 것을 말한다. 기업지배구조에서 핵심이 이사회라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경영진에 대한 감시와 견제는 물론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최고의 의사결정기구가 이사회다. 노동이 기업의 ESG 경영을 감시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도 이사회 참가는 중요하다.

 

세계적으로 ESG 경영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이사회의 구성과 역할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과 사외이사의 독립성 보장, 지배주주에 대한 견제, 이사회 내에 ESG 관련 내부위원회의 설치 등이 제안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사회의 구성에서는 여성이나 소수 인종의 참여를 말할 뿐 노동자의 이사회 참가를 제시하는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 사외이사의 선임은 여전히 지배주주의 입김을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이사제가 낯선 용어는 아니다. OECD 33개 회원국 가운데 21개 나라가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고 있다. 특히 독일은 2000명 이상 기업의 경우 감사이사회의 절반을 노동이사가 차지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이사회의 1/3을 노동이사가 차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228월부터 공공기관(공기업 및 준정부기관)에 한해 한 명의 노동이사를 선출한다.

 

노동이사제의 민간 확산은 ESG 경영에서 유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제껴 놓을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하지 못하면서 ESG 경영을 주장하는 건 배도 없이 강을 건너려는 노력만큼이나 무용할 수 있다. 노동조합을 뒷배로 삼아 노동이사가 이사회에 참가해 ESG 경영을 다룰 때 노사는 기업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파트너로 바뀐다,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하여 노동연구원의 이정희·이상준박사(2022)황금삼각형 노사관계를 제안한다. 노동이사제를 통한 전략적 의사결정 참여의 확대와 노사협의회의 강화를 통한 일상적 의사결정 참여의 확대, 그리고 초기업별·산업별 층위에서 진행되는 단체교섭이 결합한 구조가 그것이다. 실제로 노동이사제는 노사협의회는 물론 산별교섭체제에 상응하는 제도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노동이사제는 노사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발화점이 될 수 있다.

 

노동이 어떻게 ESG 기준 강화에 개입할 것인가라는 과제

노동운동이 ESG에 침묵하기에는 ESG가 기업이나 사회는 물론 노동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ESG 경영에 개입하면서 노동조합운동의 영역은 기후 및 사회문제로 확장되고 노동조합은 사회적 주체(social actors)로 자리매김된다. 노동조합이 기업의 지속가능성은 물론 탄소중립을 통해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은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하는 기초가 된다. ESG를 가교로 삼아 노동과 기후가 만나는 것이다.

 

그간 ESG, 특히 L-ESG에 관한 논의가 무엇을실현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 글에서는 어떻게실현하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바로 이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이 거버넌스(G). 물론 노동참여가 기업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그리고 ESG 경영이 개별기업의 선택만으로 가동되는 시스템은 아닌 탓이다. 더욱이 기후위기의 해결은 글로벌 의제에 속한다. 노동이 국가나 글로벌 기관투자자 차원에서 진행되는 ESG 기준의 강화 내지 법제화 과정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는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다. L-ESG에 대한 논의는 노동참여의 거버넌스(G)를 구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장황했다.

박태주 60+기후행동 운영위원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3.10.

 

 

우리, 정치할래요?

친척 어른들이 나중에 정치할 거냐고 묻곤 했다. 예상되던 직업과 동떨어진, 인권운동이라는 것을 한다길래 궁금하셨을 게다. ‘운동권정치권에 들어가는 일이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던 시절이다.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손사래를 쳤다. 정치가 아니라 운동을 계속할 거라고. 시간이 흘러 나는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작년 가을부터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서로 헐뜯으며 진영 대립을 반복할 것은 뻔했다. 냉소가 아니다. 한국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 대선만 봐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극한의 대치는 판박이다.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하고 돈 벌고 집 구하고 가족을 꾸리고 등등, 살아가는 방식이라 여겼던 구조가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곳곳에 불만이 쌓이니 정치인들도 해법을 찾는다. 하지만 위기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사는 일이 고된 사람들에게 적을 만들어주기 바쁘다. 상대 정당이든, 이주민이든, 다른 국가든, 세상이 엉망인 이유를 엉뚱한 데로 돌린다. 신자유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정치의 위기를 심화시킨 방식이다.

 

이런 세계를 바꾸려고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무슨 마법인 듯 선거를 지날 때마다 운동이 쇠진했다. 진보정당들도, 사회단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말이다. 운동하던 이들이 제 이름을 걸고 더불어민주연합을 창당하는 모습까지 보게 되니 참담하다. ‘위성정당이 아니라는 주장에 내가 다 민망하고 시민사회의 후보라니 당혹스럽다. 의석수가 목표라면 성공한 연합이겠지만 그 의석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기 어렵다. 정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치대회 준비를 시작한 게, 다행이었다. 익숙한 방식으로 넘어설 수 있는 위기가 아니었다.

 

운동과 정치를 비교하는 익숙한 구도가 있다. 순수하거나 진흙탕이거나, 제도 밖이거나 안이거나. 나도 다르지 않았다. 정치의 한계가 운동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듯 게으른 수사에 기대왔다. 현실에는 그런 운동도 정치도 없는데. 원칙만 고집하는 것이 운동일 수 없고 원칙도 없는 것이 정치일 수 없다. 제도 밖에서는 요구만, 제도 안에서는 협상만 하는 식으로 법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국회라는 무대에 무언가 올리고 내리는 일이 정치의 운동이라면, 우리가 겪는 위기의 한가운데로 무대를 옮기는 일이 운동의 정치다. 무대를 쫓아다니는 일과 옮기는 일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으니 어디로 어떻게 갈지 서로 살피는 일이 중요한데, 운동이 너무 흩어져 있었다. 선거와 선거 사이에 힘이 쌓이지 않으니 선거를 지나며 쇠진했던 것이다.

 

지금 정치에 한계를 짓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세계다. 위험한 정치인들은 우연히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 정치의 문제도 윤석열이나 윤석열 대 이재명의 문제 이상이다. 제도 안이냐 밖이냐보다 누구를 대표하는 어떤 세력이냐가 중요하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2차 가해자를 공천하는 정당과 연합하여 평등을 이룰 수 없고, 민주노총 총선방침(진보정당은 지지하고 친자본 보수 양당지지는 금지)을 어그러뜨리며 노동의 권리를 지킬 수 없다. 다른 세계로 나아갈 전망을 함께 그리며 다른 세력을 만들어가자. 운동이자 정치다.

 

정치대회라는 낯선 이름에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 삶과 세계를 감싸는 위기에 정직하게 응답하려는 이들이 만나는 자리다. 서로 가진 퍼즐조각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계를 그려보는 자리다. 모둠토론의 결과를 모아 다음을 약속하는 숙제를 나눌 것이다. 323일 만나게 될 얼굴들이 궁금하다. 얼굴을 모르던 이들이 서로를 동료로 만들어가는 시간이 정치가 시작되는 시간이 아닐까. 궁금하다면 당신도, 정치할래요?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경향 2024.03.11.

 

유럽인들과 올해의 나무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19세기 말까지, 유럽인들의 탐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정복의 역사는 환경재앙으로까지 번져갔다. 뒤늦은 후회라도 하는 것인지, 그들은 자연환경에 관심이 높다. <대영식물백과사전>을 집필한 영국 식물학자 리처드 메이비는 나무가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라는 말로 문화의 뿌리가 자연임을 강조했다.

 

매년 2월 한 달간, 유럽에서는 올해의 나무(European Tree of the Year)’ 선정 온라인 투표가 있다. 우승목은 3월 말 브뤼셀에서 열리는 유럽의회 시상식에서 발표된다. 2011년부터 시작된 유럽 올해의 나무는 현재 15개 국가가 참여하여 특정 나무(개체)를 선정한다. 기준은 나무 크기나 형상, 수령 등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얽힌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무가 사람을 만나 그 의미가 더욱 부각되는 사례에 주목했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그에 걸맞게 올해의 나무 엠블럼은 나무의 수관(樹冠) 모습이 사람의 지문(指紋)을 닮았다. 매년 어떤 나무를 참가시킬 것인지, 각국에서 여론조사도 실시한다. 예비경선까지 치르는 모습이 흡사 유럽연합(EU) 의장 선거를 방불케 한다. 후보 나무에 대한 투어와 어린이 사생대회가 열리고 나무를 주제로 지역 축제까지 개최된다.

 

첫해인 2011년에는 루마니아의 수령 500년 된 피나무가 선정되었다. 교회 옆에 자라는 이 피나무는 오래전부터 마을의 중대 사안을 논의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종의 마을 법정이나 회관과 같은 기능을 한 셈이다. 2023년에 선정된 올해의 나무는 폴란드 우치의 대학 인근 공원에 자라는 로부르참나무인데, 마치 팔 벌려 사람을 껴안으려는 듯 커다란 줄기가 낮게 옆으로 퍼져 자란다. 이 나무는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헝가리, 스페인, 체코 등에서 벚나무, 느릅나무, 소나무 등이 유럽 올해의 나무로 선정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이미 1989년부터 자국 내에서 올해의 나무(Baum des Jahres) 선정 행사를 시작했다. 자타공인 환경국가답게 이 분야에 앞장서 있다. 이 행사에서는 특정 개체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생태학적 가치와 희귀성 등을 기준으로 하나의 수종을 선정한다.

 

노거수에 대한 사랑은 아시아도 뒤지지 않는다. 한국·중국·일본 3국이 함께하는 이런 행사가 있었으면,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끼리, 그리고 사람과 나무 사이가 더욱 친밀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 경향 2024.03.11.

 

 

선거 파노라마

한국이 총선을 한 달 앞둔 310, 포르투갈에서 총선이 있었다. 2년 전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던, 안토니우 코스타가 이끈 중도 좌파 사회당 내각의 몇몇 장관을 비롯한 일부 고위관리들을 수뢰와 독직 혐의로 작년 말 검찰이 전격적으로 수사한 것을 계기로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에 따른 조기 총선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해변 마을은 총선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선거 벽보와 현수막으로 뒤덮인 서울 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선거 결과 예상대로 사회당이 많은 의석을 잃고, 중도 우파 사민당의 선거연합인 민주동맹은 신승했다. 충격적인 사실은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포르투갈에서 2019년 창당한 그만해라는 이름의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 셰가(CHEGA)’18%의 득표율을 얻어 대약진한 것이다. 3당인 이 극우정당이 이제 국정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40여년에 걸친 살라자르 독재체제를 종식한 청년 장교단이 1974425카네이션 혁명을 일으킨 이후 나름대로 안착되었던 진보와 보수의 양강 구도에 균열이 생기면서 이 틈새를 극우 정치 세력이 메운 셈이다.

 

물론 여야를 막론한 기성 정치권의 부정부패도 원인이었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에 따른 주거환경의 심각한 문제가 큰 요인이었다. 2008년 포르투갈을 강타한 재정위기 때문에 정부는 외국인 투자자를 위한 골든 비자를 도입, 소득세를 10년간 면제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그런데 이 투자가 주로 리스본 수도권과 남부 해변 휴양지에 집중돼, 다른 나라에 비해 낮았던 부동산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면서 저소득층은 벼랑에 몰렸다. 바로 이 주택 문제를 중점 공략하면서, 이와 함께 일기 시작한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와 앙골라나 모잠비크 등 과거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건너온 이주자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를 뒤섞은 극우 포퓰리즘의 선거 전략이 먹혀들었다.

 

선거다운 분위기도 없는 속에서 이렇게 진행된 포르투갈의 정치적 변화를 보면서 반세기 이상 살았던 독일의 선거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선거 때 조용하기는 독일도 마찬가지다. 주로 지하철역 앞에서 몇몇이 자기 당의 홍보물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건네주는 것이 흔한 선거운동 풍경이다.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찢어질 듯한 금속성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당의 유니폼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연신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혀 인사하는 입후보자나 선거운동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동맥경화한국 정당정치 위기

한국과 다른, 선거 분위기의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선 정당 가입자 숫자는 한국과 비교하면 아주 적다. 포르투갈과 독일의 인구 대비 정당 가입자 비율은 2~3% 수준을 유지하는데 한국은 이의 10배 수준으로 국민 5명 가운데 1명 정도가 당원인 가히 1000만 당원의 시대를 맞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정당에 쏟는 관심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입당은 주로 선거 주기에 따라 나타나고 정치인의 단기적인 이합집산에 따른 입당이기에 대체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조건에서 가입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과연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도 당연히 나오게 된다. 하루아침에 당적을 바꾸어 어제까지도 비판했던 상대편 당 소속이 되어 총선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198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엘리아스 카네티(1905~1994)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군중과 권력>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군중 속에 있을 때 안도감을 갖게 된다고 했다. 공포야말로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신의 심장박동이라고도 주장한다.

 

이어서 그는 계속 성장하는 열린군중과 외부적으로 닫힌군중을 구별한다.

 

전자는 지속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의 존재 의미를 발현하지만, 후자는 빨리 성장하지 못하지만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진단한다.

 

이 같은 관찰에 따른다면 정당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한국은 당원 숫자가 계속 불어 세를 유지해야만 하는 열린 군중이, 정당정치의 오랜 역사를 지닌 서유럽의 경우 현재 닫힌 군중이 움직이는 정치적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특정한 계층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 성원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국민 정당이나 전천후 정당이라는 개념에도 열린 군중 개념이 담겼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산업구조 변화와 탈교회현상과 같은 생활세계의 급격한 변화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국민 정당 당원 수를 격감시켰다.

 

여기에다가 국민 정당이 추구하는 폭넓은 과제가 주로 중간지대를 겨냥하고 선거 전략상 유리한 어젠다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진보나 보수 거대 정당의 정강과 정책적인 차이도 점차 사라졌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가 줄 수 있는 신선한 매력도 사라지고 적지 않은 유권자들은 아예 투표장을 찾지도 않게 되었다.

 

한마디로 성장은 정지되었지만,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는 닫힌 군중의 정치 공간이 된 것이다.

 

나라에 따라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회 주변부로 추방된 계층은 극우 포퓰리즘에 적극 동의를 표하게 된다. 얼마 전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는 국민 정당은 이제 당원 수가 아니라 국민을 편 가르지 않고 사회 통합을 지향하는 의지의 여부가 본질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2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기록해 제3당 입지를 굳히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을 염두에 두고 그 나름으로 내린 국민 정당에 대한 정의로 보인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보수와 진보라는 양강 구도에 갇혀 동력을 잃는 정당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등이 켜진 상황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지역주의까지 더해서 동맥경화증을 보이는 한국 정당정치 위기에 관해서는 그동안 진단도 많았고 해법도 많았다. 총선과 더불어 병립형, 연동형, 권역별 비례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도 한 예다.

 

공정과 상식의미 보여줄 계기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같거나 또는 비슷한 선거제도도 사회구조와 정치문화의 차이에서 비롯한 심한 편차와 굴절이 생긴다. 연동형 비례제도의 모범인 독일의 선거제도를 어느 정도 참고했다지만 독일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위성정당의 출현이 바로 그렇다. 거대 양당 구조 속에 다양한 정치 세력의 운신 폭을 넓혀주기 위해 조성한 정치적 공간을 거대 양당이 다시 뒷문으로 들어와서 차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거대 양당이 다시 첨예하게 격돌하는 구도 속에서 치러지는 한국의 이번 4·10 총선이 뿜어내는 열기는 50%를 겨우 넘긴 투표율을 보이는 이곳의 총선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멀리서도 느낄 수 있다.

 

한편에서는 검찰 독재와 민생 파탄의 책임을 묻고, 다른 편에서는 정치 안정과 종북 좌파 척결을 내세운 혐오와 증오에 찬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언어가 인간 사이 소통의 수단이라는 견해처럼 큰 환상은 없다는 카네티의 경고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군중 또는 대중이라는 단어에서 무리를 뜻하는 중()은 본디 여러 사람이 모여 구경하는 형상을 묘사하였다. ‘매스미디어매스게임같은 단어처럼, 대중이나 군중을 의미하는 매스(mass)의 어원은 빵을 굽기 위해 여러 재료를 미리 짓이겨놓은 상태에 있는 반죽 덩어리라는 라틴어다. 행위자로서 주체가 없고 독립적인 구성 요소들도 이미 사라진 상태를 묘사하는 이 두 단어는 문화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보여준다. 단순한 집합체로 보편적인 규범을 창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무리로서 군중이나 대중을 대하는 부정적인 시각이다.

 

이와 달리 현대사회 구성원으로서 국민은 무엇보다 선거를 통해서 정치 공동체의 운명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변화를 스스로 주도하는 주체이지 구경꾼 무리거나 반죽 덩어리처럼 이미 빚어진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는 총선은 단순히 현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가 아니라 깨어 있고 행동하는 시민이 지금 쉽게 이야기되는 공정과 상식이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경향 2024.03.12.

 

 

진보정당의 새 역사적 소명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단순히 좌파정당의 동의어만은 아니었다. ‘진보정당정치개혁 추진세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1988년 총선에 처음 도전할 때부터 정치개혁은 진보정당 운동과 한몸이라 할 만큼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과제였다.

 

1988년이면, 6공화국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치열한 투쟁 끝에 대통령 직선제를 부활시키며 대의민주주의의 안착을 기대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진보정당 운동에 나서게 될 이들이 보기에 제6공화국은 처음부터 문제가 많고 한계가 컸다. 결선투표제 없는 대통령선거, 승자 독식을 보장하는 소선거구제 일색 국회의원선거는 군부독재 잔당과 3김씨를 제외한 세력의 성장을 막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처음부터 진보정당 운동은 이런 제도를 발판 삼아 기성세력만의 질서가 굳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안간힘이었다.

 

2000년대에 민주노동당을 출범시킨 진보정당 운동은 정치개혁 비전 역시보다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2004년 총선에서 낡은 불판을 갈자고 정치개혁을 설득하며 바람을 일으킨 노회찬이 특히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낯설었던 독일, 뉴질랜드의 지역구-비례대표 연동형 선거제도가 노회찬의 열정적인 소개와 설득을 통해 진보정당 운동의 공통 주장이자 핵심 요구로 자리 잡았다.

 

촛불항쟁의 여파로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법 개정 가능성이 커지자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은 수십 년 만에 드디어 정치개혁의 한 단계가 완성된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었다. 비록 실제로는 기이한 준연동형방식이 채택됐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정치 질서를 꿈꿔볼 만했다. 그러나 단꿈은 며칠 가지 못했다. 양대 정당은 곧바로 비례위성정당을 창당해, 새 선거제도에서도 양당 독점 정치를 충분히 이어갈 수 있음을 과시했다.

 

한때는 이것이 과도기의 해프닝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금 준연동형 방식에 따라 총선을 치르려 하는 지금, 양대 정당은 전보다 더 당당히 비례위성정당을 만들고 있고, 한때 이를 비판했던 인사들이 이제는 그 전도사로 활약한다. 이쯤 되면, 양대 정당과 그 비례위성정당이 한국형 정치제도로 뿌리내렸다고 봐야 한다. 달리 말하면, 양당 독점 정치를 깨려던 진보정당 운동의 정치개혁 시도는 일단 처참히 실패했다. 이렇게 한 시대가 끝나 버렸다.

 

그러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더라도, 패배 이후의 미래까지 닫힌 것은 아니다. 물론 비례위성정당에 기꺼이 합류함으로써 정치개혁이라는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적 소명을 미련 없이 털어버린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제6공화국 정치체제는 복합위기와 다중재난의 시대에 점점 더 정치 엘리트 간 권력 다툼에만 몰두하며 말기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치개혁 운동의 한 주기가 끝났다고 하여 정치개혁 자체를 포기해도 좋을 상황이 전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 운동의 새로운 출발이다.

 

정치개혁 운동 제1기의 패배 이후 우리에게 남은 수단은 마치 19876월의 거리에서 그랬듯이 정치체제 바깥으로부터 시민의 힘으로 낡은 질서에 충격을 주는 것이다. 아마도 법안 국민발의권, 국민투표 국민발의권 도입처럼 국민주권을 강화하는 원 포인트개헌을 요구하는 운동이 정치개혁 운동 제2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진보정당은 이렇게 시민주권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세력의 다른 이름이 되어야만 한다.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한겨레 2024.03.13

 

 

신성가족간 기득권 수호 전쟁과 국민의 삶

자기집단 외엔 모두 하등인간으로 보는 검사 의사

두 집단의 강 대 강 대치에 국민들은 '터진 새우등

우리 사회에는 자기 직업집단 구성원 외의 모든 사람을 하등 인간으로 취급하는 두 직업군이 있다. 검사와 의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선망을 온 몸에 받아왔고, 자신들이 사회에서 받는 대우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이 누리는 권력과 지위는 바로 능력에 대한 보상이므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이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우러러보고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험 합격이 지위 보장을 해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라 생각하는 시험형 인간의 전형이 바로 그들이다.

 

인정투쟁에 몰두하는 시험형 인간들

이들은 자신의 특권이 약간이라도 위협받을 때는 격하게 저항하거나 자신이 독점하고 있는 무기를 최대한 휘둘러 오히려 더 많은 권한과 권력을 획득하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 이것은 강자의 인정투쟁이라고 할만하다. 선출 권력인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보인 검사들의 오만한 모습과, 조국 전 법무장관 가족에 대한 융단폭격에 가까운 수사와 기소, 자신들의 적이라고 표적을 삼은 정치인들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가 그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의약분업 실시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 한의사나 간호사들의 의사들 진료 영역 침범에 대한 거부, 문재인 정부의 지방 공공의대 설립에 대한 의사들의 사보타지 모두 강자의 기득권 수호 투쟁이었다.

 

강자들의 인정투쟁 앞에 국민들은 전전긍긍한다. 멀쩡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고도 처벌받지 않는 검찰 권력이 무섭고, 삶과 죽음을 좌우할 수도 있는 의사들의 처방과 진료를 절대자의 정언명령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들 93%가 병원을 떠났다고 하는데, 이들이 응급실까지 비우는 의료인의 윤리 위반에 대해 환자와 그 가족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그들에게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의사들의 시위나 전공의들의 사직 사태에 대한 비판 여론은 노동자들 파업에 대한 험악한 비판과 공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 검사들의 캐비넷 안에 자신이 숨겨온 과거 범죄 사실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정치인들은 검찰의 극히 편향적 수사에 대해 침묵한다.

 

우리 사회의 두 자격증, 즉 변호사 시험 합격증과 의사 면허증을 가진 이들은 설사 그들이 전문가로서 자신의 직업윤리를 노골적으로 위배하더라도 그 자격증을 박탈하기가 쉽지 않다. 판검사와 변호사의 길은 분명히 다르건만, 어제까지 재벌 총수를 기소한 검사가 오늘 갑자기 그의 변호사가 되어도 사람들은 별로 분노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정부가 의사들의 행동에 대해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면허증이 있으면 그냥 빨리 병원을 사직하고 돈 잘 버는 쪽으로 개업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전공의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검사와 의사는 가히 국가공인, 사회공인 신성가족이라 불러도 좋다. 그래서 이 두 신성가족의 인정투쟁에 대해 온 국민은 물론 정치권조차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총선 앞두고 의대 정원 증원 카드 꺼내든 이유 뭔가

이번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은 사실 장차 필요한 의료수요 충족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고, 너무 늦은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윤석열 검찰정권은 총선을 앞두고 이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이미 의사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과시함으로써 의사 증원을 찬성하는 국민들로부터 지지율 상승의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에게 이번 총선의 승리는 다음 대선으로 가는 교두보이고, 다음 대선에서의 승리는 검찰 권력, 부자들의 이익을 계속 보장해 주는 안전판이다.

 

사실 지금 한국에서는 의료와 관련해서도 의대 정원 증원보다 더 중요한 국가적 의제가 따로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모두 의대로 진학하고, 이공계나 자연계에는 잘 가지 않는 심각한 사태를 겪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제 10, 20년 후 한국 과학기술과 경제의 미래가 암울해진다. 한국의 건강보험 체계가 비교적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의료 시장화, 병원 영리화가 지금보다 더 진척되면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대형병원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최우수 의사를 채용하여 부유층 고객만을 위한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국민 의료비 부담은 늘어나고 건강 불평등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나 의사협회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이번 의대 정원 증원문제를 제기한 윤석열 정권은 장차 의사들이 어떤 경로로 필수의료, 공공의료로 진출할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석열 대통령은 의대 정원 확대는 의료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라는 의료 시장화의 기조 위에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의대 정원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들 역시 열악한 병원 근무 환경에 대한 불만은 크지만, 그들이 장차 누리게 될 높은 보상을 줄여서라도 국민의 의료복지를 향상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사표를 던진 전공의들 역시 정부의 밀어붙이기식의 의대 정원 증원안에 대해서는 강력 반발하지만 한국의 개업의들이 누리는 높은 보상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국민 안중에 없는 그들만의 싸움

정부의 증원 논리나 의사들의 반대 논리 어디에서 그들의 존재나 행동 자체가 정말로 다수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의료 시장화와 병원 기업화를 더 확대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기조는 실제로는 의사들의 이익과 부합한다. 즉 정부와 의사들의 대결, 강자의 인정투쟁에는 자신들 아래의 인간들, 능력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거의 들어있지 않다. 말로라도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국민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의대는 거의 부유층의 독점물이 되어 가난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려나 의식이 없는 의사들을 배출할 가능성이 커졌다. 사실 자식을 의대에 진학시키는 부모들이나 의대 진학 당사자들이나, 의사에게 보장되는 경제적 보상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서울의 5대 대형병원, 심지어 국립대학 병원과 종교기관이 운영하는 병원이 과연 영리추구와 무관하게 운영되고 있는가.

 

이처럼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 정부 요직을 장악한 검사 출신들이나 그들이 시행하고자 하는 정책에 반발하는 의사들에게도 모두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인 국민들은 안중에 없다. 가난하거나 공부 못해서 좋은 학교에 가지 못했고, 자신과 같은 지위에 올라서지 못한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은 무시해도 좋은 것이라고 암암리에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모든 문과생은 고시를 준비하고, 모든 이과생은 의사가 되려 한다는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이렇게 잘못되어도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들만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 평생 살다보니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능력주의 신화는 복종 요구하는 선망권력

송사에 휘말려 보거나 의사의 진료를 받아 본 보통의 국민들이 이들의 비뚤어진 특권의식을 겪고서도 비판하지 않는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 신성가족이 갖고 있는 신화, 즉 능력주의라는 신화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신앙과 미신은 오늘날에는 능력이라는 신화로 변형되어 건재한다. 이 신화는 사람의 목숨과 운명과 처지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복종을 요구하는 권력이다. 그런데 이 권력은 법의 뒷받침을 받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선망, 즉 능력주의의 신화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선망권력이기도 하다. 이 권력은 권력 없는 사람들의 욕망의 집약체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 능력의 화신들에게 불만과 분노를 표시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자녀가 그렇게 되기를 선망하기 때문에, 이런 전문가들의 포로가 되어 있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지배와 복종의 특징이다. 능력이라는 신화는 무능력과 짝을 이루어 사람들을 복종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한국의 의사, 특히 개원의의 소득이 근로자 평균임금의 무려 7배에 달하는 등 OECD 국가 중 가장 큰 격차를 보이는 현실에서도 그러한 격차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지 못한다. 능력주의라는 신화는 분명히 대다수 국민들의 경험, 특히 학교생활의 경험에 기초한 점에서 현실적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능력주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다. 과연 그들의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의 보수, 세계 최고 수준의 막강한 권력을 무한대로 보장해 줘야 하는,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자격증인가? 그리고 그런 특권이나 자격을 갖지 못한 보통사람인 내가 갖는 다른 재능과 노력은 무시되거나 천대받아도 되는 것인가? 사람들은 극히 경쟁적 시험을 거쳐 획득할 수 있는 전문적 기능을 최고의 능력으로 공인하고, 생산 현장에서 땀 흘려 노동하는 사람들을 무능력자라고 가르치는 한국의 비뚤어진 교육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의사들이 응급실을 비우고 나온 병원 밖에서는 검사 출신 대통령과 여당 선대위원장이 공중파의 화면을 온통 독차지하고, 검사 변호사 출신들이 이제 능력없는국민을 대표하겠다고 거리의 선거 현수막을 온통 도배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의 불평등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바로 능력주의가 가져온 권력관계와 불평등, 사람들의 선망과 욕망에 기초한 불평등을 비판할 무기가 사회적으로 제거된 점도 그 중 하나다. 그런 질문과 비판의 무기를 일상적으로 박탈하는 현장이 바로 한국의 학교, 사교육기관이다. 학교나 교사가 공부 잘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고, 성적과 입시에서 탈락한 학생들, 가난 때문에 학습 의욕을 갖지 못하는 학생을 버리는 한 이러한 승리자의 특권의식과 패배자의 침묵 속의 복종은 계속될 것이다. 이 현대판 신성가족의 지위 독점과 특권 유지를 막아야만 우리는 보다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좋은세상연구소 대표| 시민언론 민들레 2024.03.14.

 

 

신당의 역사

조국혁신당이 최근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이준석 대표의 개혁신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온 선거에서는 어떤 종류의 신당들이 있었으며, 이 정당들의 역할은 무엇일까?

 

민주화 이후 역대 총선에서 후보를 내거나 정당 명부를 낸 정당들의 수를 기준으로 할 때, 분기점이 된 선거는 198813대 총선, 200417대 총선과 202021대 총선이었다. 13대 총선은 1987년 민주헌법 채택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국회의원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후보를 낸 정당의 수는 모두 14개였다.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박정희-전두환 체제에서 집권당과 야당을 했던 정치인들이 모였던 익숙한 정당들이었던 반면, 13대 총선에서 처음 유권자들에게 이름을 알린 신당들도 있었다. 한겨레민주당, 사회민주당, 민중의당, 기독성민당이었다. 앞의 세개 정당은 박정희-전두환 체제에서 사회운동을 했던 세력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었고, 기독성민당은 기독교인들의 정치화를 표방했던 정당이었다.

 

199214대 총선에 후보를 낸 정당은 6, 13대 총선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13대 국회에서 원내 의석을 차지했던 정당들인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만들면서 정당의 수를 줄였고, 13대 총선에 등장했던 신당들은 14대 총선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14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신당도 있었다. 199212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현대그룹 총수 정주영씨가 만든 통일국민당이었다.

 

200016대 총선에 후보를 낸 정당은 8개였고, 이 중에 새로운 세력들이 만든 신당으로는 민주노동당을 들 수 있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 앞서 국민승리21’로 출발했던 이 당은, 노동조합과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을 했던 세력들이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을 표방하며 등장했다. 민주노동당은 16대 총선에서 원내 진입에 실패했지만 17대 총선에서 10석의 의석을 얻으며 원내정당이 되었다.

 

17대 총선은 12표제가 처음 도입된 선거로, 이 선거에 후보를 낸 정당은 14개로 늘어났다. 새로 등장했던 신당 가운데 이후 연속성을 가졌던 정당으로는 기독당, 녹색사민당을 들 수 있다. 기독교 계열의 정당화 시도는 13대 기독성민당 이후 17대에 다시 등장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총선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정당 명칭 가운데 녹색을 최초로 표방했던 녹색사민당은 17대 총선에서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하지만 19대 총선에서 녹색당이 새로 등장했고 20~21대 총선을 거쳐 22대 총선에서도 녹색당을 유지하면서 정의당과 선거연합으로 참여하고 있다.

 

202021대 총선은 현행 제도인 준연동형 비례제가 최초 적용되었던 선거로, 이 선거에 참여했던 정당의 수는 41, 직전 20대 총선 참여 정당 수보다 16개가 늘었다. 의석을 얻은 원내정당도 20대 국회 4개에서 21대 국회 7개로 늘어났다. 21대 새로 진입한 원내정당 가운데 시대전환, 열린민주당은 사라졌지만 기본소득당은 아직 당명을 유지하며 22대 총선에 참여하고 있다.

 

22대 총선에 몇개의 정당이 참여할지, 그 가운데 몇개가 원내에 진입할지는 알 수 없다. 선거 참여 정당들에 대한 호불호는 당연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유권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선거에 참여하는 작은 정당들에 대해 난립’ ‘자원 낭비라는 비난을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세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참여하는 건 민주주의에서 시민이 참정권을 행사하는 헌법적 권리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 둘째, 정당의 수가 늘어난다는 건 어쨌든 유권자들의 선택지를 넓혀주기 때문에 공공적 기능을 인정해야 한다. 21대 총선에서 원내 진입에 실패한 정당들을 지지했던 유권자 총수는 299만명, 전체 유효투표수의 11%였다. 셋째, 어떤 작은 정당들은 선거 경쟁 과정에서 큰 정당들의 정책 방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의제를 원내로 끌어들이는 순기능을 한다. 개별 정당 차원에서 작은 정당들은 명멸을 거듭하지만, 그 정당들이 내세운 의제나 정책은 족적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작은 정당들의 자극이 꼭 필요한 이유다.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 한겨레 2024.03.14.

 

 

역대급선거와 어쩔 건데정치

역대급’. 몇 년 전부터 자주 쓰이는 인터넷 신조어다. 단어 구조상 역대(그동안)에 준하는정도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역대 최고 수준의 의미로 쓰인다.

 

2년 전 이 역대급때문에 머리를 싸맨 기억이 있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란 표현이 그랬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안 쓸 수도 없었다. 한국 정치의 실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 전 고민은 사소한 것이었다. 최근 정치권에 역대급들이 넘쳐나서다.

 

지난 11일 대표적인 비이재명계 박용진 의원의 탈락과 막말 논란의 정봉주 전 의원 공천으로 정점을 찍은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파동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대표는 공천혁명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일반 시민들은 이번 공천에 사심이 개입했으며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이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파로 찍힌 이들은 어김없이 잘려나간 반면, 이 대표 호위무사를 자처한 이들은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면서 비명횡사 친명횡재논란을 키웠다. 민주당 주변에선 이 대표가 이럴 줄 몰랐냐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냐는 반응이 혼재했다.

 

그 여파는 잡음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의석수 과반 확보를 장담하던 민주당은 지지자와 무당파들의 이탈표를 걱정하게 됐다. 야권 대표주자로서의 이 대표 리더십도 훼손됐다. 정권심판 여론에는 큰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생긴 일이다. “국민들께서 수긍하고 무릎 칠 때가 올 것”(안규백 민주당 전략공천관리위원장)이라고 했지만, 무릎 대신 가슴을 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민주당 공천 파동에 가렸지만, 국민의힘 공천도 그 못지않다. 현역 중진들의 불패 신화가 이어졌고, 친윤석열계가 공천에서 배제된 사례는 드물었다. 인요한 혁신위원장의 윤핵관·중진 희생요구는 정치쇼로 끝났다.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안 재투표에서 이탈표를 막기 위해 현역 물갈이를 최소화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퇴행적 모습도 나타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들을 공천해놓고 탄핵의 강은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라고 했다.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도태우 후보의 공천을 유지하기로 하면서 국민 눈높이에 맞는 결정” “다양성 존중이라고 했다.

 

여야 모두 감동도, 비전도, 인물도 없다는 점에서도 역대급이다. 이번 총선이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설명이 없다. 이번처럼 정책이 안 보이는 선거도 없다. 참신한 인물은커녕 막말과 비리 후보들이 즐비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스템 공천, 너희는 막장 공천공방만 벌이고 있다. ‘구정물 공천’ ‘섞은 물 공천’ ‘패륜 공천등 서로에게 내뱉는 말들도 갈수록 태산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식이다.

 

여야만 그런 게 아니다. 윤 대통령은 올 들어 20차례에 걸친 전국 순회 민생토론회에서 감세·규제완화·지역개발 등 정책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언제는 좌파 포퓰리즘을 비판하더니 한술 더 뜬다. “대통령이 여당 총선의 1호 영업사원이냐는 비판도, 공정한 선거관리를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 삼가야 한다는 보수언론의 조언도 귓등으로 듣는다.

 

한편에선 윤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경호실에서 국회의원, 카이스트 졸업생, 의사를 입틀막했다. 정부·여당은 김건희 특검법여사님호칭을 안 붙였다고, 미세먼지 농도를 나타낸 파란색 1’이 민주당을 연상시킨다고 언론을 겁박한다.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사건의 피의자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도피성 출국을 한 데선 기가 찬다. 그야말로 어쩔 건데통치를 대놓고 시연하고 있다.

 

극단과 대결의 정치를 끊어내지 못한 후과는 역대급을 단 그로테스크한 상황들로 나타나고 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부터 시작해 정치권에 대화와 통합, 토론과 숙의라는 정치 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상대를 죽이려는 정치적 쟁투만 난무한다. 그 과정에서 민생과 양극화, 저출생과 저성장, 기후 위기와 한반도 위기 등 현안들은 뒤로 밀렸다.

 

어떻게 해야 역대급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총선까지 4주가 채 안 남았다.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에 그나마 덜 나쁜 놈을 고르는 게, 아니 더 나쁜 놈을 떨어뜨리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 분명한 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가짜 감별사들의 정치를 끝내는 것도 유권자들 몫이라는 사실이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 경향 2024.03.14.

 

이승만 되살리기의 반()역사성

윤석열 정권의 극단적 역사퇴행성에 올라탄 이승만 되살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영상시대를 맞아 건국전쟁이라는 영화를 통한 역사 되짚기의 경박한 움직임 또한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여기에 편승하여 송현동에 이승만 찬양소를 만들겠다는 정치인의 포퓰리즘적 발 빠름 역시 개탄스럽다.

 

이에 이승만에 관한 역사적, 더 엄밀히는 민족사적 평가를 체계적으로 내릴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미 19953<한국사연구 88>이승만에 대한 민족사적 평가를 내린 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짧은 글에서는 축약적인 평가를 내리고자 한

 

이승만의 생애는 조선조 말 일제의 조선침략이 본격화하는 시점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 한국전쟁, 전후복구기, 4월혁명, 하와이 망명기간에까지 걸친다. 이 가운데 우리들과 민족의 삶과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한 시기는 해방공간과 남북분단이 실현되는 제1공화국 수립기다. 그 다음으로는 분단정부 수립 이후 나라의 기틀을 갖춰나가는 이승만의 집권기다. 이 세 기간에 그는 가장 선봉에 선 장본인이다. 그 외의 기간 그의 족적은 미미한 것으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 세 시기는 우리 민족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사행보를 하는 역사 갈림길 또는 민족사적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는 그 이후 수십 년 또는 백여 년의 역사방향을 거의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곧 운명을 가른다는 점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기이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할 뿐 아니라 제대로 된 평가가 요구된다.

 

먼저 해방공간을 보자. 해방은 조선 사람에 의한, 조선 사람을 위한, 조선의, 사회를 새로 만드는 새판짜기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일제 식민지잔재 청산을 이뤄야 한다. 왜냐면 해방이전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는 조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를 위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를 조선 사람을 위한 새 구조로 탈바꿈 시켜야 한다. 또한 그 구조 속에 제국주의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자행한 부일(附日)협력자들을 청산하고,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정의롭고 유능한 조선 사람으로 완전 교체해야 한다.

 

, 완전히 새로운 집을 짓고 또 그 집주인도 완전히 바꿔야 하는, 사회개벽(開闢)을 일구어야 하는 시기가 바로 해방공간이다. 그에다 미국이 주도하여 조선을 38도선에서 두 동강 낸 지리적 분단을 타파하여 민족통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여기에다 나라의 주권을 외세에 의해 무력으로 탈취 당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새로운 나라를 철저히 민족자주적인 나라로 건설하여야 한다. 또한 당시의 인류사적 보편 규범이었던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아울러 도탄(塗炭)이 난 민생의 삶을 구제하는 민생민중경제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바로 이 길이 당시 해방공간의 우리 민족사가 요구하는 당위적 역사행보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추구한 길은 이러한 우리 민족사의 올바른 길을 완전히 배반한 반역(叛逆)의 행로였다.

 

첫째, 친일청산에서 이승만은 부일협력자에 대한 청산은커녕 이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했다. 국내 권력기반이 없던 그는 귀국하자마자 부일협력자 집산체인 한민당과 손잡고 친일파를 옹호하며 자신의 권력을 키워나갔고,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과 이에 따라 설치된 반민특위를 해체시켜 친일파 청산을 좌절시켰다. 더 나아가 이들을 중용하여 친일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정착화하였다. 새판 짜기가 아니라 옛 판을 더욱 친일파 중심으로 공고히 한 것이다.

 

악명 높은 일제 고등계 형사인 노덕술 석방을 대통령이 직접 강요하고, 반민특위 부위원장인 김상돈 의원 해임 동의안을 내고,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일으키는 등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와해 작전을 펴 결국은 친일파 청산을 무산시켰다. 더 나아가 한승주가 밝힌 것처럼 장경근·한희석·이익흥·임철호·김익중·최인규 등 일제치하 사법부와 경찰 등에 근무한 부일협력자들을 중용하여, 이들이 3·15부정선거를 일선에서 주조(鑄造)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친일파가 권력행사 기관, 특히 공안기관의 고위직을 압도적으로 장악하였다. 치안국장은 1대 이호에서 7대 윤후경까지, 서울시경찰국장은 2대 김태선에서 7대 변종현까지, 합참의장은 1대 이형근에서 14대 노재현까지, 육군참모총장은 1대 이응준에서 21대 이세호까지, 대법원장은 2대 조용순에서 7대 이영섭까지 모두 친일파들이 잇따라 장악했다.

 

특히 내무부장관은 1대 윤치영에서 7, 9, 11, 12, 13, 14, 15, 17, 18, 19, 20, 22, 23, 24, 25, 26, 27, 28, 30, 31, 32, 36, 37대 김치열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거의 독식했다(한겨레신문 1995.2.25.). 참고로 북의 경우 일제의 경찰·사법·검찰 등 공안 관련 친일파는 재생의 기회를 절대 허용하지 않고 사회 격리시켰다. 단지 기술직에만 재생의 길을 허용했을 뿐이다.

 

둘째, 친일 물적 및 제도적 구조청산에서도 이승만은 인적 구조청산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실행하지 않았고 또 지연시켰다.

 

이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대() 조선 군사정부에 있다. 그렇지만 그 이후 국가 주권을 장악한 이승만 또한 이에 못지않게 책임질 일이다.

 

물적 구조청산은 무엇보다 일본인과 친일파 재산을 몰수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민생도탄을 덜어주고, 치안유지법 등 일제의 잔악한 악법 철폐 등을 서둘러야 했었다. 그러나 친일파재산은 제대로 몰수된 적이 없고, 민생을 위한 토지개혁은 미루다가 해방된 지 5년 뒤에서야 늑장으로 또 비() 철저하게 이뤄졌고, 치안유지법 등 악법은 국가보안법 등으로 재활용 및 강화되었다.

 

대조적으로 북측은 19463월 혁명적인 토지개혁을 완료했고, 810일자 산업,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으로 기존 일본인 소유는 물론 민족반역자 소유의 모든 산업·상업·문화 시설들을 몰수했고, 모든 일제의 악법을 일소했다. 남측의 늑장부린 토지개혁도 당시 조선민중이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현재 소작지 중 남측은 37.5%만 분배했고 북측은 99%를 몰수·분배했다. 남측의 경우 토지개혁을 5년 동안 지연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지주의 강매 등으로 거의 20% 넘게 소작지가 토지개혁 이전에 이미 사라졌다. 또 토지개혁 중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 일가처럼 용도변경이나 범법행위로 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기존 소작지 60% 이상이 토지개혁의 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 결과 전체 인민의 65% 가까이를 차지했던 농민, 곧 소작농민과 자영농의 삶이 향상될 조건을 제대로 갖출 수가 없었다.

 

셋째, 민족통일정부수립에서도 마찬가지다.

해방과 동시에 이뤄진 38선을 경계로 한 지리적 분단이 남북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적 분단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으로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그렇지만 유아독존적인 이승만은 분단을 고착화하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독립청원기부터 무장투쟁을 배격했고, 중국 주재 임시정부의 김구·김원봉을 테러노선이라고 비난했고, 해방공간 압도적 우세를 점유했던 좌익을 친일분자처럼 대하겠다면서 좌·우 연합정권 가능성을 봉쇄했다. 더 나아가 19466월 이른바 정읍발언 등으로 분단 실행의 앞잡이였고 주역이었다.

 

여운형·김규식 주도의 좌우합작이 탄력을 받자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좌우합작 와해와 단독정부 조기수립을 위한 청원외교를 벌였다. 1948년 초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망설이자 친일파 무리인 모윤숙, 박순천, 김활란 등을 동원한 미인계로 이들을 포섭하는 파렴치(破廉恥)를 자행했다. 모든 좌익과 김구 중심의 우익, 김규식 중심의 중도세력까지 보이콧한 5·10단독선거를 축하하는 축하국민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민족분단을 통한 권력 장악에 혈안이었고, 그의 이러한 반()민족성과 반()통일성은 1공화국까지 지속되었다. 무력 북진통일론을 정착시켰고, 진보당사건으로 조봉암을 사형시켜 자주적 평화통일논의 자체를 원천봉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넷째, 민족자주 구현도 마찬가지다.

해방은 외세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적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서는, 민족의 자주를 절대규범으로 올려놓고, 그 구현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해방된 뒤에도 더욱더 외세 의존적이었고, 권력 장악 후에도 민족자주 국가의 구현을 배반했다.

 

그의 외세의존성은 일관된 독선적 외교제일주의에서 두드러진다. 우리의 문제를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을 중심에 두고 이를 근거로 삼아 외세활용을 꾀하는 것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그는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감히 독단적으로 제안하였고, 194612월 미국을 방문해 독립에 대한 유일한 가능 방도는 미국 국민의 호의에 호소하는 데 있다면서 철저히 외세인 미국의 예속하에 분단정부수립을 꾀했다.

 

그의 반() 민족자주의 극치는 195411월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그 부속문서인 한미합의의사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군사주권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대미예속을 구조화 한 것이다.

 

이는 정전협정 460(평화협정과 외국군 문제 해결 조항)을 위배했을 뿐 아니라 미국 자의에 의해 언제든지 무력행위나 전쟁이 가능하고(2), 한국의 사전 동의 없이 미국 헌법 절차만 지키면 선전포고나 무력행위 가능하고(3), 한국 영토 어디든 한국 사전 동의·협의 없이 미국 임의로 군사기지화, 군사배치, 이동 등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해방 80년이 되려는 지금까지도 글자 하나 변경되지 않고 있다.

 

이의 부속문서인 한미합의의사록 또한 포괄적으로 국가주권을 제약하고 미국에 예속되는 합의다. “국토통일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미국과 협조한다로 민족통일까지도 외세인 미국과 사전 협의하도록 했다. “국제연합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국제연합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 둔다로 작전지휘권을 넘겨 군사주권도 제대로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투자기업의 사유제도를 계속 장려한다로 자본주의를 강요당했다. ”부록 B에 규정된 바의 국군병력기준과 원칙을 수락한다로 국군의 병력 수까지 통제당했다. 이는 그토록 우리가 갈구했던 민족자주와는 180도 어긋난 길이다.

 

다섯째, 민주주의 기틀 다지기에서 이승만은 반()민주의 극치를 달렸다.

1948121일 반()민주 대표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1949년 한 해 동안에 118620명이 투옥되었다. 또한 시민사회를 국가의 들러리조직으로 묶어 관제 대중동원이라는 전체주의적 통치유형으로 나아갔다(이호재, 1988). 이 관제 대중조직은 그의 사조직이었던 독립촉성회를 확대한 국민회(관제 데모와 관제 국민대회 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 여러 청년단체를 통합한 2백만의 대한청년단, 중고등에서 대학까지 모든 학생을 묶은 학도호국단이었다.

 

이러한 반()민주 파시즘적 통치는 미국의 ECA 경제고문이었던 번즈박사가 "현재의 경찰국가적 경향은 530일로 예정된 선거가 경찰과 청년단체에 의해 지배될 것이기 때문에 위원단으로 하여금 선거를 감시할 것을 장려하는 게 바람직스럽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번즈가 예측한 대로 19505·30선거에서 불법·탄압·관권이 판을 쳤다. 옥중 당선된 근로인민당 부당수였던 장건상의 증언은 이를 입증한다. “경찰이 간섭하였고 평양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모략도 있었다. ‘장건상은 공산당이니 국회의원으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나의 선거운동을 하던 30여 명의 동지와 친지들이 잡혀갔음을 알았다. ... 선거 후 전국에서 제2의 득표수로 당선된 내가 감옥에 수감된 것을 안 미국 영사와 유엔측 대표는 이 대통령을 찾아가 내가 수감된 죄목과 정확한 증거를 요구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나는 원내에서 발언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불법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집권 2년 뒤 실시된 19505·30선거에서 이승만은 엄정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 권력상실은 시간문제였다. 전체의석 210석 가운데 집권여당인 대한국민당은 24, 국민회 등 친여세력을 합쳐도 겨우 57석이었고, 무소속이 무려 126석으로 60%를 차지했다.

 

또한 서울의 성북구에서는 상해임정의 조소앙과 미군정의 대명사였던 조병옥이 대결해, 조소앙이 전국 최다득표를 했고, 전국 제2의 득표는 여운형 직계인 위의 장건상이 부산에서 차지했다. 이는 한국전쟁 이전인 1950년 당시의 유권자가 보수보다는 진보세력을 전폭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이렇게 권력상실이 가시화하자 이승만은 1952년 전쟁 중에 친일파 군인 원용덕을 동원해 계엄령을 선포하고는 군과 경찰로 국회를 위협해 불법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과시킨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에 <런던 타임즈>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개탄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195411월 사사(四死) 오입(五入)이라는 반올림 셈법을 악용한 억지논리로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규정을 철폐시켜 종신 독재집권의 길을 열었다. 그렇지만 유례없는 3·15불법·부정선거로 드디어 4월혁명에 의해 축출되었다.

 

여섯째, 이승만은 수없이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러 인간의 절대적 인권인 생명권을 앗아간 반()인권의 대명사였다.

 

인권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부여받을 권리이다. 여기에는 생존권, 평등권, 자유권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그렇지만 남녀노소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은 생명이다. 그래서 지구촌 어디든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은 가장 엄격히 다뤄지는 범죄이고 생명지상주의와 같이 절대적 인권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절대적 인권인 생명권을 무수히 많이 짓밟은 자가 바로 그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집권 3개월째인 194811월부터 제주에서, 해안선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무조건 적성(敵性)지역으로 지정하여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미군정에서부터 이승만정권에 이르기까지 무려 3만여의 제주도민이 이 4·3항쟁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다.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당시 19485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된 5·10선거에서,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무효화되어 선거자체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었다. 제주 4·3항쟁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대한민국 수립 2개월째인 19481019일 여순항쟁이 발발하여, 이승만정권의 생존가능성이 국제적으로 의문시되었다.

 

유엔의 5·10선거 승인에 즈음하여 미()선거 상태인 제주도의 선거구가 걸림돌이 되었고, 김구나 김규식 등의 지도하에 통일운동이 활성화되는 등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 상실과 생존위험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에 초토화 작전을 통하여 긴급히 4·3항쟁을 평정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여 정권기반을 강화하고 분단을 고착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19481019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여순항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이승만정권은 22일 법제화도 되지 않았던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 달여 동안 육··공 합동 진압작전과 2개월간의 관련자 색출작업을 진행했다. 이 색출과정에서 보복적인 테러, 학살, 약탈, 방화가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전체 주민을 학교 등 공공장소에 집결시켜 놓고 주로 머리가 짧은 자,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외모에 의하여 부역자를 골라내었다. 일부는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되거나 또는 총살을 면치 못하였으며” “백두산 호랑이로 소문난 제5연대 김종완 대대장이 교정의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즉결 참수처분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식으로 최소한 1만 이상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7월 초부터 감행한 보도연맹원 약 20-30만의 학살도 있었다. 이 보도연맹원에 대한 초기의 집단적이고 대대적인 학살은 그 이후 연쇄적 학살의 고리를 형성했다. ,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학살된 유가족이 그 이후 진주한 북한인민군에 힘입어 남한의 공무원, 경찰, 지주계급 등에 대한 보복살인을 자행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수복 후 국군과 우익 측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와 더욱 더 동족상잔(同族相殘)을 부추겼다.

 

이러한 보도연맹회원 외에도 한국전쟁 초기에 형무소에 있던 좌익세력 등이 수없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 기자가 쓴 책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에서 다룬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저질러진 대전 형무소 수감 좌익세력 학살사건이 대표적이다. 1950628~7173차에 걸쳐 7천여 명이 집단 사살된 사건으로 지금도 유해발굴이 진행되고 위령비 건립 문제가 논의 중이다.

 

이러한 민간인학살은 고양, 함평, 영광, 문경, 대구, 경산,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등 전국적, 조직적, 체계적 현상이었다. 4월혁명 이후 거의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 등으로 그 역사적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고 정희상·이태섭 등은 약 1백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5·16쿠데타 이후 이들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침묵을 강요당해왔고 역사적 진실 또한 은폐되어왔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하에서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 발족을 계기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지금 윤석열 정부에서는 극우인 김광동의 위원장 부임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 선택적으로 살펴본 데서도 확인되지만, 이승만은 우리의 민족사를 반()민족, ()민주, ()통일, ()민중, ()자주, 친일친미의 친()외세, ()인권으로 이끌어 왔던 반()역사의 주인공이다. 이러한 이승만으로부터 비롯된 민족사의 훼손을 치유하기는커녕 윤석열 정권의 무도함은 이미 역사적으로 사장(死藏)된 이승만을 다시 끄집어내어 미화운동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응당 우리 모두가 나서서 이승만이 우리 민족사에 남겨놓은 오욕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고, 그 뼈아픈 상처를 치유하여, 우리 민족사를 청아하게 일구는 역사바로세우기와 겨레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할 때이다.

강정구 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3.15.

 

‘500명 증원이었으면 환자 곁에 남았을까

전국에서 수능을 제일 잘 치른 3058명이 의대에 왔는데, 정원이 5058명으로 늘어나면 나보다 공부를 더 못하는 애들도 들어오게 된다고 보더라고요. 앞으로 25학번부터는 3천명 입학정원 기수와 동창회도 따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 진료 거부가 3주를 훌쩍 넘긴 가운데, 전공의 ㄱ씨가 한겨레에 전해준 내부 분위기는 살벌했다. 1970년대 고교 평준화 정책 시행 이후 일부 명문고 졸업생들이 비평준화 세대와 평준화 세대를 분리해 동창회를 따로 열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거의 반세기가 지난 2024년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기시감이 들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 매진한 의사가 아닌 반에서 20~30등 하던 의사를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공공의대와 지역의사제를 깎아내렸던 전력 말이다.

 

의사집단의 이런 특권의식과 폐쇄성은 장기전으로 접어든 전공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힌트를 주는 열쇳말이다. 전국 수련병원 100곳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는 전공의 12천명(전체의 93%)은 지난달 20일 병원을 비운 뒤로 여태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발단은 정부의 의대 증원 규모, 2천명이었다. 일반 국민들이 보기엔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전세계 어디에도 의사 수를 늘린다고 의사가 진료를 거부하는 나라가 없기도 하지만, 응급실과 중환자실마저 아무런 말미도 주지 않고 비웠다. 정부와의 협상이나 최후통첩과 같은 과정도 생략됐다. 누군가의 생명권을 위협할 수 있는 극단적 방법을 동원하면서 환자들이나 병원에 남은 다른 직역 동료들에게 최소한의 양해를 구하는 과정도 없었다. 집단행동에 들어간 뒤에야 누리집에 증원 계획 전면 백지화를 포함한 요구안만 게시한 채, 정부 대화 요청에도 묵묵부답이다. 일단 요구안을 수용하라는 엄포다. 소통 방식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집단행동의 효능감은 젊은 의사들에게도 내면화돼 있다. 필수·응급 의료의 최전선인 상급종합병원 전체 의사의 37.8%가 전공의다. 배우는 신분인 전공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기형적 구조로 인해, 집단행동이 벌어질 때마다 병원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환자들은 볼모로 잡힌다. 정부 의료정책 추진전공의 진료 거부의료공백에 따른 환자 피해정책 추진 중단이라는 악순환이 지난 20여년간 반복됐다. 도제식 교육으로 교수와 선배가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치는 폐쇄적 구조에서 의사들의 응집력은 남다르다. 제자(전공의)가 진료를 거부하더라도 스승(교수)은 말리는 대신 응원을 한다. 기명투표·블랙리스트 등 다른 생각이 나올 수 있는 통로 자체가 봉쇄되는 정황도 여럿 보인다. 2020년 의대 증원에 반발한 장기간 집단휴진에도 불이익은 없었다. 업무개시명령 불응으로 고발 당한 전공의들도, 정부를 무릎 꿇린 뒤에도 정책 철회 명문화를 고집하며 의사 국가시험을 거부한 의대생들도 모두 구제 받았다.

물론 총선 두달 전에 ‘2천명 증원을 깜짝 발표한 정부도 마냥 박수 받을 처지는 아니다. 국정 지지율 상승을 위한 노림수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지난 1년여간 의협과 28차례나 만났다고 강변하지만, 애초 예상보다 훨씬 늘어난 증원 숫자는 최근에야 내놓지 않았나. 그럼에도 일부 의대 교수와 전문가가 제안하는 점진적 증원론(500~1천명)이 타협책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숫자가 아닌 것 같아서다.

 

500명 증원이었으면 집단사직이 없었을까. 의사들은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해 증원 여부를 정하자는 입장인데, 정부가 의사 수급 전망의 근거로 삼은 국책연구기관(KDI·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서울대 의대 교수들은 공신력있는 해외 기관에 분석을 맡기자는 황당한 제안까지 내놨다. 의사집단 전체가 수긍할 만한 과학적 데이터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고만 되뇌며, 고령화에 따른 의료 수요 증가나 은퇴하는 의사들을 고려하지 않은 추계를 내미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전문 분야 중에서도 의료는 유독 정보 비대칭성이 크다. 생사가 오가는 진료실의 최종 결정권자인 의사들의 독점적 권한이 의사 수를 정하는 정책 결정 과정에도 그대로 행사되길 바라는 오만함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얼떨결에 의료개혁의 칼자루를 쥔 정부가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병원 전문의 확충과 국립의대 교수 충원, 환자 쏠림을 막기 위한 의료자원의 효율적 운영, 필수의료 강화를 위한 진료수가 인상 등을 쏟아내고 있다. 정략적 의도인지 의심하기 전에, 의사들도 적극적인 의견 개진에 나서는 것은 어떤가. 80~100시간 근무로 과중한 업무를 떠안고 있는 전공의들이 정부의 전문의 확충 방침에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정부도 의사도 필요한 곳에 의사가 배분돼야 한다는 원칙엔 동의한다. 소아청소년과와 같은 필수의료 전공의에게 월 수련 비용 100만원을 주는 식의 임기응변식 정부 대책만으로는, 비급여 진료로 손쉽게 많은 돈을 버는 개원의로 의사들이 쏠리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더 이상 몽니만 부려선 안 된다. 그래야 전공의 집단행동이 미래의 밥그릇 걱정에서 나온 것이란 의심을 불식시킬 수 있다.

황보연 | 논설위원 | 한겨레 2024.03.15.

 

 

상식을 파괴하는 정치

우리는 지금 도덕의 총체적 파괴를 목도하고 있다. 이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니 많은 사람에게 근심 많은 학자의 과장으로 들릴 수 있다. 과장이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절대적 가치를 신뢰하지 않는 허무주의 시대에 우리 사회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상식이라는 게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도덕의 붕괴는 지나치게 불린 말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도덕 운운하느냐고 쿨한’(cool) 태도를 보일지도 모른다. 필요 이상의 감정 소비는 바보짓이라고 생각하는 쿨하다의 사고방식은 도덕에 대한 무관심을 오히려 멋으로 여긴다. “이야기 장단에 도낏자루 썩는다는 말처럼 도덕 냉소주의에 빠져 우리는 도덕이 침식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막장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정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막장 드라마가 보통 사람의 상식과 도덕 기준으로는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면, 막장 정치는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던 상식적 도덕 기준을 부패시킨다. 언론은 연일 조국혁신당이 심상치 않다고 보도한다. 이름부터 우리의 상식을 깬다.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특정 정당의 이름에 명시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정당 민주주의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서 조국이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를 가리킨다면 사용할 수 있다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 해석이 있지만, 이 당명을 보고 조국이라는 개인 정치인이 아닌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자녀 입시비리와 관련하여 1,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신당을 창당하고 비례대표 출마를 선언한 것도 우리의 상식에 어긋난다. 공정과 정의를 말할 자격이 의심되는 사람이 정권 심판의 이름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공정과 정의에 대한 비웃음이다. ‘공정은 무슨 공정, 중요한 것은 권력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상식 파괴의 예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가치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지속할 수 있는 근본 조건이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깨진 오늘날 양당제는 권위주의의 온상이 되고 있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거대 정당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다당제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존재하는 명목상의 정당이 바로 위성정당이다. 위성정당은 정치적 이념과 정책도 필요 없다. 국민의 표를 얻어 권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게 유일한 목표이다. 이러한 위성정당은 우리의 민주 정당에 관한 우리의 상식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는 제도에 대한 불신을 부추긴다.

 

이 땅에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중앙윤리위원회를 열어 비례대표 의원 등 8명에 대한 제명 징계를 의결했다고 한다.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로 의원을 꿔주기 위한 꼼수다. 징계는 본래 부정이나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징계 사유가 없는데도 징계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의원들이 소속된 국민의힘이 아니라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에서 활동하는 게 제명 사유라고 한다. 이런 궤변이 어디 있는가? 당에 해로운 행위를 했을 때 징계하는 것인데 당의 발전을 위한 희생정신으로 위성정당에 참여하기 때문에 징계하였다고 한다. 희생정신을 발휘하면 징계당한다는 궤변은 상식을 파괴한다. 이러한 궤변을 아무렇지 않게 듣다 보면 우리는 상식이라는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마저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화와 토론과 협상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할 정당들이 권력 게임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는 상식을 파괴하는 전대미문의 현상을 겪고 있다. 전공의가 파업하고, 의대생들이 동맹 휴학하고, 의대 교수마저 사직한다고 한다. 의료 현장의 붕괴로 고통받고 생명을 위협받는 것은 환자와 국민이다.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린다고 의사가 환자를 떠나야 하는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의약분업을 위시하여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될 때마다 파업이라는 극단적 수단으로 대응해온 의사 집단이 생명윤리를 입에 올리는 게 가식처럼 들릴까 두렵다. 자신들을 스스로 노동자라 칭하고 직업 선택의 자유를 논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이다. 비급여 진료로 큰 수익을 내는 개원의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윤리와 책임을 비웃고 돈과 경제적 부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쿨한 것으로 평가된다. 민주화 시대의 마지막 귀족 신분처럼 군림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 보여주는 도덕 냉소주의가 우리의 마지막 상식을 허물어뜨린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이 모든 게 정치 탓이라고 말하면, 그것도 과장일까? 우리가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를 동시에 발전시켰다는 믿음은 이제까지 우리의 자긍심을 북돋웠다. 산업화는 의 문제고, 민주화는 가치품위의 문제다. 돈은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물질적 여유를 제공하고, 민주화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을 만든다. 물질적 부를 축적하고 확대하려는 우리의 이기심은 사회를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두 집단으로 양극화한다. 반면에 민주주의는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를 완화하여 다양성이 존립할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한다. 민주적 가치는 절대적 가치를 신뢰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상식이다. 무엇이 공정하고, 무엇이 부당한가에 관해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공유하는 공통 규범이 바로 상식이다. 상식은 글자 그대로 공통 감각’(common sense)이다. 사람들이 타인에 관심하는 대신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져 사적인 공간에 갇혀 있다면, 공통 감각은 사라지고 상식은 붕괴한다.

 

도덕적 자산 더 파괴될까 우려

상식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최소의 사회 규범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나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게 상식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황금률은 인류의 모든 종교와 문화에서 나타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하거나 상해를 가함으로써 나의 인격을 훼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철에 난무하는 정치인의 말과 수사는 이러한 상식을 파괴한다. 정치인은 누가 더 선명하게 선정적으로 욕을 잘하는지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여당이 패륜공천을 했다고 주장하면,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형수 욕설, 검사 사칭, 대장동 비리 등을 소환하는 식이다. 비전과 정책 대신 상대 당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것이 정치가 되었다. 권력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는 왜곡된 정치의식은 결국 민주적 상식을 파괴한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 경향 2024.03.19.

 

 

의로노불, 윤로민불, 명로문불

탈진실사회와 정치적 양극화.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키워드다. 언제부터인가 가짜뉴스가 범람하며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사라져버렸다. 그 결과, 정치적 적대와 대립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해지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은 진영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이고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우리 편이 누구인가 하는 진영일 뿐이다. 이 같은 진영논리는 결국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과 이중잣대로 나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생각이 진보적일 수도, 보수적일 수도, 관대할 수도, 엄격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일관성이다. 생각이 관대할 수도, 엄격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나와 우리 진영에는 무한대로 관대하고, 남과 반대진영에는 추상같은 이중잣대다. 조국사태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중잣대의 결과로 우리 편은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할 절대선, 반대편은 목숨을 걸고 척결해야 할 절대악이 되고 만다.

 

의과대학 정원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방침에 따라 벌어진 의사들의 의료파업은 이중잣대의 대표적인 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평균 의사 수가 가장 적은 나라 중 하나라든가, 의사가 다른 직업과 달리 생명을 다루는 신성한 직업이라든가 하는 기본적인 사실들을 반복하지 않겠다. 정원 확대에 대해 의사가 많으면 고통스러운 삶이 연장될 뿐이라느니, “반에서 20~30등 하는 학생도 의대에 가고 의무근무를 하는 것을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느니, 국민들이 최소한의 지성이 있어야 의료가 무너졌음을 깨달을 텐데 깨닫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느니 하는 의사들의 충격적인 엘리트의식과 망발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김영삼·김대중 정부가 사법고시 합격자 수를 2배로 늘리고 이후 정부가 법학대학원 정원을 확대할 때 의사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의사들이 노동자들의 절박한 생존권 투쟁 파업에 대해, 가깝게는 간호사들의 파업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줬느냐는 것이다. 간호사들에게는 환자들을 생각해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호소했고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파업은 로맨스고 무식하고 공부 못했던노동자들의 파업은 불륜이라는 의로노불의 이중잣대다.

 

윤석열 대통령과 윤 정권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은 박근혜·문재인 정권에서 수사외압에 저항하며 공정과 법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윤 정권의 검찰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부인 김혜경 여사의 법카 사용 등에 대해 성역 없는 수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여러 의혹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다루고 있다. 결혼 전 있었던 도이치모터스 사건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명품백 스캔들은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가 명품백을 받은 것에 대해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좀 문제라면 문제라고 변명했다. 김혜경씨가 명품백을 받았어도 인정상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그냥 넘어갔을까? 세상을 향해 추상같던 법의 칼날이 자기 아내에 대해서는 태평양을 품을 것 같은 관대함 속에 녹아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해병대원 사망사건의 외압 의혹 핵심피의자인 이종섭 전 국방장관을 호주대사로 임명하고 출국금지까지 풀어 출국시켜 해외도피논란이 일고 있다. 윤 대통령 쪽에서 하면 로맨스이고 민주당이 하면 불륜이라는 윤로민불이다.

 

민주당 주류세력인 친명과 이재명 대표도 매한가지다. 이들은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당직자의 직무를 정지하도록 한 당헌에도 불구하고 예외조항을 만들어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이 대표에게 면죄부를 줬다. 총선 공천과정에서도 부정부패 의혹으로 기소된 노웅래, 기동민 의원은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비슷한 혐의로 기소된 이 대표와 비례 이수진 의원은 별문제 없이 공천을 받았다. 기 의원은 지난해 당무위원회는 이재명 대표, 자신, 이수진 의원에 대한 기소가 정치탄압이라는 결정을 내렸지만 결국 자신만 공천을 못 받았다며 형평성과 공정성, 일관성 또한 무너져내렸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이중잣대로 친명횡재, 비명횡사가 현실로 나타났다. 친이재명계가 하면 로맨스이고 친문재인계가 하면 불륜인 명로문불이다. 하긴 내로남불의 상징으로 항소심에서까지 유죄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이 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이 높은 지지를 받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의사, 대통령, 야당 대표 등 지도층마저 도덕불감증에 빠져 있으니,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노블레스 후안무치.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 경향 2024.03.20.

 

 

1565년 유생 상소와 야당 공천투표

15654, 20년간 최고권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가 사망했다. 그 직후 시작되어 그해 10월까지 이어진 지방 유생들의 전국적 상소는 조선의 정치 및 언론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 양상은 작금의 한국 정치 및 언론 상황에 기시감을 준다.

 

조선은 고려 말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건국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정치는 처음부터 공적 이념성을 강하게 띠었다. 이것은 현실 권력 못지않게 공론(公論)’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조정에서 공론을 담당하는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통칭하는 언관(言官)이 존중되었다. 그런데 언관이 처음부터 실제로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시작했어도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선의 공론 중시 지향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성종대(1457~1494)에 언관이 공론을 담당하는 주체로 확립되었고 조정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대략 세 번째 세대가 등장할 무렵이다.

 

조선왕조의 공론 중시 경향은 언관 권한 강화에 그치지 않았다. ‘공론이 있는 곳’, <조선왕조실록> 표현으로 공론소재(公論所在)”는 더 아래로 확산되었다. 이는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중단시키고 시작된 중종대(1506~1544)에 분명해졌다. 중종대에 공론이 더욱 중시되고, 공론에 참여하는 모집단이 확대되었다. 그 핵심은 성균관 유생이었다. 성균관 유생은 주로 문과 급제 이전의 10대 후반~20대의 젊은이었다. 건국 당시에는 누구도 그들에게 국정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종대에 그 인식이 달라졌다. 오히려 아무 이해관계가 없기에 바른말 하는 존재가 성균관 유생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중종 말년에는 성균관 유생의 공론이 언관의 언론과 다름없다고 생각되었다.

 

문정왕후 사망 직후 전개된 상황은 지방 유생들이 새롭게 공론 형성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정왕후 사망 직후부터 지방 유생의 상소가 조정에 쇄도했다. 모두 문정왕후의 불교 진흥에 큰 역할을 한 보우를 죽이라는 내용이었다. 조정의 언관이 유생과 연대하여 공론을 형성했다. 명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나와버리는 공관(空館)’으로 맞섰다. 당황한 명종이 성균관에 돌아올 것, 취관(就館)’을 수십차례나 종용했지만 그들은 전혀 듣지 않았다. 결국 명종은 보우를 제주로 유배보내야 했다.

 

지방 유생의 전국적 상소운동과 짝하여 조정에서는 문정왕후 친동생인 영의정 윤원형에 대한 탄핵이 시작되었다. 결국 명종이 이에 굴복해서 영의정을 바꾼다. 그리고 1565년이 가기 전에 보우와 윤원형은 살해되거나 자살했다. 이로써 수십년 이어진 정치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유생들의 조직적 상소운동이 조선 정치의 주도 세력 교체에 동력을 제공한 셈이다. 이로써 지방 유생들은 언관, 성균관 유생과 함께 공론 형성층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이렇게 확립된 지방 유생들의 정치적 지위가 조선 후기에 영남만인소를 가능하게 했다. 지방에 있는 모든 유생들도 국정에 대해 발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공천을 거의 완료했다. 그런데 유독 제1야당의 공천을 두고 논란이 많다. 현역 의원이 대거 탈락하고 신인이 공천을 받기도 하고, 다선 의원이 낙천에 반발하여 탈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1야당 당원과 시민들 투표의 결과이다. 기성 정치권과 언론은 이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한다. 하지만 이것이 20일 뒤 선거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시민과 당원에 의한 직접민주주의의 경향은 2017촛불집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촛불이후에 낀 거품을 제거하고 국정의 일탈을 바로잡으라는 요구인 것 같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 경향 2024.03.20.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이웃에 사는 농부들과 ‘7일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하기 한 달 전부터 육식을 하지 않고 음식도 조금씩 줄여 나갔다. 3일 전부터는 죽을 먹었고, 단식하는 날부터는 물과 죽염만 먹었다. 먹을 양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단식을 하느냐고? 바쁜 농사철이 되기 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길이 단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식을 하는 방법이나 까닭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이가 다르고 몸과 마음 상태가 다르므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단식하기 전에 이런 다짐을 했다.

 

누군가의 덕으로 여태 먹고살았으니 작고 하찮은 일에 날을 세우지 말아야지. 알게 모르게 남한테 상처를 주었으니 남한테 받은 상처를 되갚지 말아야지. 단 하루도 죄짓지 않고 산 날이 없으니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해 아픈 사람 위로할 수 있게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아야지. 마음 여리고 어진 사람 주눅 들지 않게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지 말아야지. 가는 곳마다 여유와 낭만이 찾아올 수 있게 잘난 척 어깨 힘주지 말아야지. 나를 잃어버리지 않게 바쁘거나 부지런하게 살지 말아야지.’

 

아내와 나는 혼인 20주년과 30주년 되던 해에 7일 단식을 해 본 경험이 있어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더구나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료사협) 이사장인 화목한의원 김명철 한의사가 안심하고 단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 마음 놓고 하게 되었다.

 

지역에 의료사협이 있어 참 좋다. 의료사협 조합원들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이웃과 함께, 아플 때 믿고 치료받을 수 있고, 건강이 더 나빠지지 않고 좋아지며, 설령 아프더라도 나답게 살다가 좋은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다. 함께 만드는 건강, 더불어 만드는 행복한 삶,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꿈꾸는 의료사협이 있어 삶과 죽음이 두렵지 않고 든든하기만 하다.

 

단식을 같이하는 농부들과 날마다 산길을 걸으면서 여태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먹은 게 없으니 힘이 빠지고 조금은 어지러웠지만, 언제 우리가 이렇게까지 가까워졌나 싶을 만큼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낭만이란 이렇게 하던 일을 멈추면 아니, 멈추기만 하면 그저 찾아오는 것인데 여태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살았구나 싶었다.

 

7일 단식이 끝나고 한 달 동안 보식기간(회복기간)에 들어갔다. 보식기간 동안 육식은 물론 달걀과 우유와 생선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 술과 커피와 빵과 과자와 같은 가공식품은 아예 먹을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죽과 나물과 현미잡곡밥은 100번 이상 천천히 천천히 씹어서 먹어야 한다. 음식을 꼭꼭 씹지 않고 먹으면 없던 병도 생기고, 50번 씹으면 있던 병을 낫게 하고, 100번 씹으면 다가올 병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어느덧 3월 중순이다. 오늘 아침에 아내랑 300평쯤 되는 산밭에 씨감자를 심고 점심밥을 먹었다. 단식하는 동안 얼마나 먹고 싶었던 밥인가! 이 밥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여태 돈과 권력과 명예 따위에 기대어 산 게 아니라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살았구나!’ 싶다. 예순여섯, 이제야 조금 철이 들어간다.

서정홍 산골 농부 | 경향 2024.03.24.

 

 

조국 사태조국혁신당 현상사이

정치사에 남을 기막힌 반전이다. ‘조국 사태에서 조국(혁신당) 현상까지, 가로놓인 시간은 4년여다. 그새 202021대 총선이 있었고, 2022년 대선을 치렀다. 조국 사태에도 불구(?), 더불어민주당은 그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조국 사태가 내로남불심판의 씨를 뿌린 덕(?)에 그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했다. ‘조국 사태의 주인공은 사법처리가 진행되어 2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상식의 시선에선 조국의 정치는 끝나 보였다. 그간 조국의 강을 건넜다는 민주당은 이재명당으로 재편을 가속해왔다. 공천 과정에서 윤석열 정권 탄생 책임론까지 내세워 비명에 이어 친문 세력까지 배제하면서 이재명의 민주당을 사실상 완성했다.

 

친명으로 단일대오를 구축한 이재명(민주당 대표)은 윤석열(대통령), 그 대타로 나선 한동훈(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총선 일합을 겨루고 있다. 정권심판론 대 야당심판론, 심판 대상은 다시 윤석열이재명이다. 이런 총선 구도에 제3지대, 3인물의 입지는 애초 비좁았다.

 

그 협소한 공간을 뚫고 나와 총선판을 격동시키는 고래, 개혁신당이나 새로운미래도 아닌, 조국혁신당이 될 줄은 미처 예상 못했다. 현 야권이 5년 만에 정권을 교체당하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한 조국 사태의 옹이가 여전히 커 보였다. 더욱이 항소심에서 2년 실형을 선고받은 상태에서 창당과 총선 참여로 비법률적 명예회복을 바라는 것이 무리(無理)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규범적 예상을 비웃듯, ‘범죄자 정당이란 조롱에도 족히 현상이라 할 만큼 조국혁신당의 기세가 등등하다. 비례대표 정당투표에서 조국혁신당이 민주당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 앞서고,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와 선두를 다툰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다. 호남에서는 아예 일반 정당 지지율에서 조국혁신당이 민주당을 앞서는 경우도 있다. ‘조국 사태의 주인공 이름으로 급조된 조국혁신당이 선거 지형을 객토하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의 헛발질로 흔들리던 정권심판론을 복원시킨 것도 조국혁신당이다.

 

조국의 강을 건너는 것이 야권의 정치적 과제로 주어진 게 얼마 전인데, 기이하기까지 한 이 반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국혁신당 현상은 악성으로 진화해온 극한 진영 정치의 궁극적 증상으로 읽힌다. 조국혁신당을 추동하는 일차 동력은 윤석열 정권에 대한 야권 지지층의 응축된 분노와 적대다. 윤석열 검찰로부터 가장 핍박받은조국(조국혁신당 대표)이 가장 선명한 대여 투쟁을 할 거란 바람이 조국혁신당 지지로 표출되고 있다. 이들 지지층에겐 항소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은 것은 치명적 하자가 아니다. 윤석열 정권만 타격할 수 있다면 정치 윤리 등은 문제 되지 않는다. 극한 진영 정치에 상식과 규범의 잣대를 대는 것은 언제나 무력하다.

 

조국혁신당의 파죽지세는 윤석열이 너무 싫은강성 야당 지지층의 지지만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정권심판만 바란다면 제1야당인 이재명 민주당을 선택해도 된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를 찍은 사람 중 이번 총선 정당투표에서 조국혁신당을 찍겠다는 응답은 40%, 더불어민주연합을 찍겠다는 응답은 36%이다(JTBC·메타보이스). 특히 공천 파동 등으로 이재명 민주당에 실망해 돌아선 야권 지지층, ‘정권에 비판적이지만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중도층에서 동시에 조국혁신당 지지가 늘어났다. 조국혁신당의 가파른 상승을 단순히 민주당 지지층의 분할투표로만 풀이할 수 없는 이유다.

 

결국 크게는 윤석열 정권에 대한 강한 분노 민심, 적게는 대안세력으로서 미덥지 않은 이재명 민주당이 조국혁신당 현상을 부양하고 있다. ‘반윤석열 비이재명유권자들이 조국혁신당으로 모아지고 있다.

 

예서 국민의힘이 고대하는, 다시 흐르기 시작한 조국의 강이 야권의 내로남불을 재소환해 역심판론이 일어나기에는 윤석열 정권의 내로남불이 더 악성이다. 공정을 기치로 집권해놓고 막상 너무도 공정하지 않은 윤석열 정권이 조국이 돌아올 다리를 놓았다.

 

조국 사태가 윤석열 검찰총장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면, ‘조국(혁신당) 현상을 일으킨 건 불공정한 윤석열 정권이다. 정녕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되는 것일까. 이번에는 누가 희극이고, 누가 비극인가. 15일 뒤면 주권자의 심판(審判)으로 그 막이 열린다.

양권모 칼럼니스트 | 경향 2024.03.25.

 

 

윤석열 타도를 외치는가?

윤석열 퇴진’ ‘윤석열 해고’ ‘윤석열 탄핵’ ‘윤석열 검찰독재 정권타도’ ‘윤석열 정권 타도’ ‘윤석열 타도등등. 지난 1년간 가장 많이 외쳐진 정치 구호들일 게다. 대통령 윤석열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민주화 이전에 자주 듣거나 생각했던 타도라는 단어를 역주행 유행을 시킨 원인 제공자라는 점에서 말이다. 타도의 국어사전 정의는 어떤 대상이나 세력을 쳐서 거꾸러뜨림이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야권과 야권 지지자들은 출범한 지 만 2년도 안 된 정권 또는 대통령을 쳐서 거꾸러뜨리겠다는 걸까? 이들의 주요 주장을 살펴보자.

 

“‘2기 촛불정부를 누가 만드느냐했을 때 지금 이재명 말고는 누가 만들겠어요. 괜히 돌려가면서 말할 필요가 없어요. 까놓고 얘기하면 2기 촛불정부의 조기 수립이라는 이야기는 윤석열을 빨리 끌어내리고 이재명을 대안으로 다음 정부를 빨리 만들자는 얘기거든요.”

 

314일 서울대 명예교수 백낙청이 오마이TV오연호가 묻다인터뷰에 출연해 ‘2기 촛불정부의 조기 수립을 역설하면서 한 말이다. 백낙청이 지난 대선 패배 직후부터 해온 주장인데,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모든 명예를 건 위험한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적극 후원했던 문재인 정권이 왜 정권을 빼앗겼는지 그 이유에 대한 분석은 제대로 하고서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그게 없다.

 

어쩌다가 이런 (윤석열) 정권이 나왔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내놓은 답이 흥미롭다. 그는 “2022년 대선 때 저쪽(국민의힘)(촛불혁명의 위력을) 알게 돼서 한 번만 더 지면 우리는 끝장이라는 간절함이 생겼고, 그래서 윤석열과 이준석,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까지 (보수세력이) 총집결을 했다면서 그런데 당시 민주당 안에는 이번에 져도 우리는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고 했다. , ‘간절함의 차이가 지난 대선의 승패를 갈랐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란 말인가? 문 정권과 자신을 포함한 강성 지지자들이 잘못한 건 전혀 없었단 말인가? 단지 간절함만 강해진 ‘2기 촛불정부라면 더욱 거친 독선과 오만과 내로남불로 일관할 텐데, 그게 윤 정권보다 나을 게 뭐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정권이 바뀌어 재미를 보는 건 자신과 같은 정파적 엘리트 계급일 뿐, 평범한 보통사람들은 늘 양쪽으로부터 돌아가면서 기만을 당한다고 보는 게 진실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316일 조국혁신당 대표 조국은 비례대표 후보자로 나서 지지자들을 향해 저를 압도적 1위로 만들어달라고 호소하면서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선명하게 가장 뜨거운 파란 불꽃이 돼 검찰독재 정권을 하얗게 불태우겠다고 했다. 이에 국민의힘은 자신을 정치 탄압을 받는 투사로 둔갑시킨 그 뻔뻔함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라고 비판했다지만, 조국의 호소에 열광한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호남인들이 열광했다.

 

경향신문의 광주 르포기사(탁지영 기자)에 따르면, 어느 60대 광주시민은 조국혁신당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전부 윤석열이 반대했던 사람들이잖아요. 한이 맺힌 사람들인데 한풀이는 제대로 하겠죠라면서 윤석열 정부와 잘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호평했다. 어느 50대 광주시민은 조국혁신당을 지지하는 광주 민심 기저엔 민주당이 못했던 것들 조국 네가 한 번 사정없이 그냥 짖어불고 한번 뒤집어부러라. 너 당한 거 있잖아. 당하고만 있지 말고 똑같이 되빠꾸(되치기)해라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319일 조국은 “1차적으로 윤석열 정권의 레임덕을, 두 번째는 데드덕으로 만드는 게 조국혁신당의 목표라며 윤석열 정권 조기 종식을 탄핵으로 한정하지 않고, 권력 오남용을 하지 못하도록 힘을 빼놓을 것이라고 했다. 조국혁신당의 약진에 위협을 느낀 민주당도 윤석열 때리기를 넘어 윤석열 죽이기를 위한 선명성 경쟁에 본격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민주당 대표 이재명은 이날 강원도 총선 지원 유세에서 서슬 퍼런 박근혜 정권도 우리가 힘을 모아서 권좌에서 내쫓지 않았나라며 이제는 권력을 회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320, 가상자산(암호화폐) 투기 의혹이 불거져 민주당을 탈당했던 무소속 의원 김남국이 민주당이 주도하는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 입당했다. 아니 그래도 되나? 무슨 명분과 이유로? “아무리 곱씹어도 윤석열 정부의 독주와 폭거를 가만히 손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러다간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려도 윤석열 정부의 독주와 폭거에 너무 분노한 나머지라는 핑계를 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321일 전 국가정보원장 박지원은 라디오에서 범야권이 200석을 만들면 윤 대통령 탄핵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200석 타령에 동참하는 민주당 후보들이 늘어가자 지도부는 행여 유권자들에게 오만하게 보일까봐 ‘151이라는 소박한 목표를 강조하는 경계령을 내렸지만, 이재명의 언어는 날이 갈수록 거칠고 과격해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게다. 이번 총선은 자신의 정치생명, 아니 전 인생의 성패가 달려 있는 선거니까 말이다. 지난해 927일 새벽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 유창훈이 이재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을 때 내세운 사유 중 하나는 피의자의 방어권보장이었다. 지난 28일 조국은 항소심에서도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2심 재판부도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법정구속하지 않았다. 판사들이 말한 방어권은 법적 방어권이었지만, 이재명과 조국은 지금 정치적 방어권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판사들은 그걸 예상하지 못했나?

 

참 이상한 일이다. 3년여 전 현 야권이 주장했던 건 사법쿠데타에 의한 민주주의의 전복이었기 때문이다. 20201223일 조국의 부인 정경심이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고, 다음날 법무부의 검찰총장 윤석열 정직 2개월 중징계에 대해 법원이 집행 정지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그 다음날 고려대 명예교수 임혁백은 한겨레에 사법쿠데타에 의한 브라질 민주주의의 전복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이 칼럼에서 브라질 민주주의 위기의 특징은 검찰과 사법부의 법 기술자들이 법적 수단과 장치를 동원하여, 보이지도 않고 의식할 수 없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야금야금 민주적 제도와 규범을 침식하여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사법쿠데타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칼럼은 브라질 이야기만 했을 뿐이지만, 독자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이 칼럼에 달린 베스트댓글이 말해주듯이 브라질의 정치현실은 여기 한국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여권은 이후 걸핏하면 사법쿠데타를 주장하고 나섰는데, 그건 연작 형식의 코미디였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법원 판결이 나오면 판사들을 극찬하고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판사들을 욕하는 치졸한 작태를 반복하곤 했다. 임혁백에게 묻고 싶다. 당시 선구적으로 제시한 사법쿠데타론은 지금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한가?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 경향 2024.03.26.

 

 

공감의 반경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들. 상투어가 되어버린 말들. 당연하게 받아 누려 온 역사들. 이것들이 낯설고 새롭게 다가와 마음을 때리는 일은 언제, 왜 일어나는 것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한국을 떠난 사람들을 향한 약간의 미움이 있었다. 나를 버리고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난 당신. 막상 나가보니 실상은 달랐다. 오래전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고 광부로 또 간호사로 독일에 도착한 이들은 민주화 운동을 다방면으로 도운 사람들이었다. 국내에 있을 때는 해외로 떠난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는데 밖에서 보니 이들의 발자취가 형형히 빛난다.

 

최돈미 시인이 그렇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작년 3월 베를린에서였다. 비무장지대(DMZ)를 소재로 한 그의 책 <DMZ 콜로니>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이를 소개하는 행사였다. 최돈미 시인은 1972년 당시 10세의 나이로 한국을 떠났는데 기자였던 아버지가 당시 시대적 상황에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혜순 시인의 시를 번역해 영어권 독자에 소개해왔다. 그가 번역한 김혜순 시인의 <날개환상통>은 올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DMZ 콜로니>2020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그는 스스로 추방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추방당한 사람. 다른 언어나 문화로 들어가보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이들 덕분에 나는 세계를 또 다른 관점에서 볼 기회를 얻는다.

 

삼일절에는 영어로 번역된 3·1 독립선언서를 레바논 친구와 나눴다. 삶의 경로에서 레바논 내전을 그대로 통과하고 현재는 베를린에 머무는, 모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희망이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친구였다. 독립선언서에는 일제강점기 한복판에서 스스로 독립을 선언한, 총칼 앞에서도 비폭력 평화운동을 한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친구는 선언문이 지금의 세계와, 또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실제로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와 이집트, 튀르키예 등에 영향을 주었다.

 

38일 베를린에서 여성의날을 맞아 1만여명이 거리로 모인 시위 역시 초국가적이었다. 시위를 주최한 국제 페미니스트 동맹의 구성원은 다양하다. 정작 독일인은 소수이고, 각 국가를 대변하는 단체가 있는데 국가와 상관없이 로힝야 난민과 쿠르드족처럼 난민과 소수민족을 대변하는 단체도 있다. 한국 협회 산하 기관인 액션 그룹 위안부’(AG ‘Trostfrauen’) 역시 한국뿐 아니라 독일, 일본, 콩고, 필리핀 등의 구성원과 함께한다.

 

사람들이 들고온 팻말에는 이런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모두가 자유로울 때까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팔레스타인 여성 곁에 서는 중국 페미니스트들” “과거, 현재, 그리고 언제나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아시안들” “우리 몸에서 손 떼, 우리 땅에서 손 떼” “가자에서 25000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죽었다. 분노는 어디에 있는가?”

 

내게 가장 낯선 행렬은 라틴 아메리카 여성들이 모인 행렬이었다. 팻말에 붙은 이름들은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찾아보니 많은 수가 환경, 인권, 평화를 위해 싸우다 암살당한 여성 활동가였다. 브라질의 인권 운동가 마리엘 프랑코, 온두라스의 환경 운동가 베르타 카세레스, 과테말라의 여권운동가 리고베르타 멘추, 페루의 환경운동가 막시마 아쿠냐.

 

한국어로 쓰인 적이 많지 않았을 이름들. 이러한 이름을 배워가며 나는 겸허해진다. 누군가는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해 전 생애를 걸고 싸운다. 그걸 알아차릴 때마다 세상은 증오뿐 아니라 어쩌면 더 큰 사랑으로 세워졌음을 배운다.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이 흐름 안에 있으며, 이 흐름은 국경을 넘어 이어진다. 그걸 기억하자면 누구도 어떤 상황에서도 감히 혼자라고 말할 수 없을 듯하다.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 경향 2024.03.26.

 

 

젊은 비대위원장의 종북타령북풍의 유혹

선거 판세가 어려워지고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드디어 여당이 종북타령을 시작했다. 지난 19일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번 선거에서 지면 종북세력이 이 나라의 진정한 주류를 장악하게 될 것이라며 해묵은 색깔론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보수 집권 세력이 야당을 향해 양치기 소년처럼 선거 때마다 종북타령을 하다 보니 이제는 국민 대다수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여권의 종북타령이 안보에 민감한 국민 정서를 이용한 혹세무민의 선거 전술이라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과거 보수세력은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의 개선을 주장하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후보에 친북’ ‘빨갱이’ ‘용공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매도하였다. 그들은 이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안보가 위험해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고 선동하며, 마치 나라를 북한 김정일에 바치기라도 할 것처럼 위기의식을 조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김대중, 노무현 시대는 전혀 달랐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힘 정권의 전신인 김영삼 정부가 저질러 놓은 미증유의 IMF 외환위기에서 한국경제를 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화외교를 주도하면서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중국 장쩌민 주석으로부터 동시에 존경을 받으며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끌어올렸다. 노무현 정부는 탈냉전 후 지난 30여년간 역대 한국 정부 가운데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룩하였으며, 안보 중시의 척도라 할 수 있는 국방비 증가율도 가장 높았다. 국민은 이러한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에, 여권의 종북타령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젊은 비대위원장의 목소리에서 늙은 세대의 막가파 레퍼토리인 종북타령이 흘러나오니, 나이가 젊다고 하여 다 젊은 정치인은 아니라는 경구가 실감이 난다.

 

그런데도 이번 종북타령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판세가 여권에 극히 불리해지면 이것이 단순히 색깔론을 동원한 말 공격에 그치지 않고 북풍으로 커질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북풍은 특정 정치세력이 선거 판세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선거에 북한 요소를 직접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역대 선거에서 색깔론 공세가 북풍으로 이어지는 것을 빈번히 경험하였다. ‘북풍은 북한의 의도적 도발로 인해 발생하기도 하고, 때로는 북한이 원천적으로 요인을 제공하고 남한의 공안 기관이 선거에 맞추어 그것을 각색하여 터뜨리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러한 형태의 북풍보다 조금 다른 형태의 북풍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다가올지도 모를 북풍의 유형을 가상하기는 어려우나, 다음의 두 가지 형태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먼저 휴전선이나 북방한계선(NLL)에서의 무력충돌 가능성이다. 과거 선거 기간에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적은 없었지만, 현재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인지라 북풍을 의도한 충돌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사이버 방면에서의 북풍가능성이다. 이것을 상상케 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일이던 20111026,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비서가 주도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DDoS) 공격이 발생했다. 투표율을 낮추기 위한 투표방해가 목적이었다. 이 사건이 한나라당 인사의 소행으로 밝혀지기 전까지 우리 사회에 북한 소행이라는 주장이 광범하게 유포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북풍을 가상할 수 있다. ‘총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주요기관이 대형 사이버 테러를 당하고, 그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 수사당국이 중간수사 발표, 언론 릴리스 등을 통해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을 퍼뜨린다.’ 이렇게 되면 여권의 종북타령은 자연스럽게 야당과 북한을 연계시키며 선거판을 흔들 것이다. 대명천지 민주국가에서 이런 북풍이 가능하겠느냐고 하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나 판세가 기울어가는 지금 우리의 경험적 감각은 북풍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느낀다. 여당의 선거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기세인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서 그 감각이 더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다.

 

북풍은 선거 과정에 간섭하고 선거결과를 왜곡하여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흔드는 검은 바람이다. 그것은 정파의 이익을 위해 국가 안보체계를 무너뜨리고 국민을 우롱하는 반헌법적·반국가적 행위이다. 따라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믿지만, 그래도 공무원을 포함한 우리 주권자는 북풍이 발생하지 않도록 눈을 크게 뜨고 살펴야 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 경향 2024.03.26.

 

 

만악의 근원 불평등

 

선진국들의 소득 불평등(가로축)과 건강 사회 및 환경 문제 지수(세로축)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래프로 비례관계임을 알 수 있다.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불평등을 줄이면 의료 수요도 어느 정도 줄어들지 않을까. ‘네이처제공

 

한달 넘게 이어지는 의대 증원 사태를 보면서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이라 방향은 맞지만, 실험·실습이 많은 의대에서 한꺼번에 지금 정원의 3분의 22천명을 늘린다는 건 (서울은 동결이므로 사실상 1.9배가 된다) 전쟁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지나친 것 아닐까.

 

그런데도 많은 국민이 동의하는 건 의사 평균소득에 충격을 받은 게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2000년 의약분업 사태로 의대 정원이 10% 줄면서 의료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심해졌고, 결국 의사 평균소득이 급증해 임금근로자의 6.7배에 이르게 됐다. 다른 선진국이 2~3배인 것에 비하면 너무 심하다.

 

지난 14일 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한 기고문을 읽다가 현 사태를 해결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먼저 쟁점인 의대 증원은 의학교육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대학이 수용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재조정돼야 할 것이다. 공급 증가 폭은 줄겠지만 대신 수요 증가 폭을 줄이면 된다.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는 것이다.

 

역학자(질병연구자)인 영국 요크대의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은 기고문에서 소득 불평등이 사람들의 건강은 물론 지구 환경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비교의 동물이기 때문에 불평등 심화는 우월감과 열등감을 증폭시키고, 이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부정적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울증과 섭식 장애, 약물중독이 늘어나고 따돌림(왕따)에서 살인까지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 급증하는 것이 그런 사례다.

 

이런 현상이 소득 불평등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분석 결과는 놀랍다. 선진국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는 미국이고 덜한 곳은 북·서유럽 국가들이다. 미국의 살인율과 수감률은 노르웨이의 각각 11배와 10배나 되고, 유아사망률과 비만율도 각각 2배에 이른다. 이렇다 보니 사회적 비용도 막대하다. 서유럽에서는 불평등이 큰 편인 영국의 경우 하위 5개국(덴마크, 핀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네덜란드) 수준으로 불평등을 줄이면 정부 지출을 연간 1천억파운드(170조원) 이상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소득 불평등은 환경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지구촌 상위 1%8천만명이 내놓는 온실가스양이, 하위 50%40억명이 내놓는 양의 2배다. 1인당 100배다.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과소비도 늘어난다. 물건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무리해서라도 더 큰 차를 사고 최신 유행에 맞춰 옷을 차려입고 빚을 내서라도 해외여행을 다녀와야 한다. 또 나를 챙기는 데 급급해 남에게는 인색하다. 국민총소득 대비 국외 원조 금액 비율을 보면, 선진국에서 불평등이 작은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1% 수준이고 중간인 영국은 0.5%지만 불평등이 심한 미국은 0.2%에 불과하다.

 

1985년 마이클 잭슨 등 팝스타들이 굶주리는 아프리카인을 돕자며 의기투합해 노래를 불렀다. 바로 위 아 더 월드. 이들이 모인 곳이 이런 마음이 일어나기 어려운 나라인 미국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 한겨레 2024.03.26.

 

 

날뛰는 말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선조가 등극하고 2년째 되던 1568년 퇴계 이황(1501~1570)이 열일곱 살 왕에게 책 한 권을 지어 올렸다. 조선 성리학의 독창성이 깃든 성학십도. 이 책의 서문에서 퇴계는 절실한 마음을 담아 왕에게 주는 고언을 적었다.

 

군주의 마음은 만 가지 결정이 나오고 백 가지 책임이 모이는 곳이어서 사방의 온갖 욕구들이 다투어 치받고 온갖 사악이 번갈아 침투하니, 한번 태만하여 소홀하고 거기에 방종이 겹치게 되면, 산이 무너지듯 바다가 들끓듯 할 것이니 누가 막아줄 수 있겠습니까?”

퇴계는 옛 군주들의 실패를 사례로 들어 거듭 어린 왕에게 충언한다.

 

후세의 군주들은 천명을 받고 천위에 올라 그 책임이 그토록 막중한데도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조금도 엄중하지 않았습니다. 억조의 신민들 꼭대기에서 스스로 위대한 척 거만을 떨고 방종을 일삼다가 마침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자신을 망치고 말았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성학십도성인들이 가르친 학문’(聖學)열 가지 그림’(十圖)에 집약한 책이라는 뜻이다. 퇴계는 자신이 올린 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왕의 거처에 펼쳐두어 어느 때나 읽고 마음에 새기기를 당부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퇴계의 철학적 사유가 응집된 곳이 제6심통성정’(心統性情)이다. 여기에 퇴계는 후배 고봉 기대승과 오랜 기간 벌인 사단칠정 논쟁의 결론을 요약해 놓았다.

 

12세기 주자가 종합해 세운 신유학은 ’()’()를 형이상학적 세계 이해의 골격으로 삼았다. ‘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근본 범주다. 이 두 가지 범주가 어떻게 작용해 사람의 마음을 일으키느냐를 두고 퇴계와 고봉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벌인 것이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논쟁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칠정(기쁨·노여움·슬픔·두려움·사랑·미움·욕망)이라는 기의 작용이의 원리가 어떻게 관여하느냐를 밝히는 것이다. 퇴계는 칠정을 기발이승’(氣發理乘), 기가 발하고 이가 기에 올라탄다고 해석했다. 이 말의 뜻을 더 명확히 설명하려고 퇴계는 고봉에게 보낸 두 번째 답글에서 기와 이의 관계말과 말 탄 사람에 비유했다.

 

이가 기를 타고 움직이는 것을 두고, 옛사람들이 인승마’(人乘馬), 곧 사람이 말을 타고 드나드는 것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무릇 사람은 말이 아니면 드나들지 못하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길을 잃게 되니, 사람과 말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퇴계의 이기’(理氣) 해석이 출발점이 돼 조선 유학의 300년 대논쟁이 벌어졌다. 먼저 고봉이 퇴계의 주장을 비판했고, 고봉의 비판을 이어받아 율곡 이이가 퇴계의 주장을 공박함으로써 논쟁의 구도가 확고해졌다.

 

퇴계나 율곡이나 모두 칠정을 기발이승으로 설명한 것은 다르지 않다. 문제는 다음이다. 같은 표현을 두고 퇴계와 율곡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퇴계는 기발이승기가 발하면 이가 거기에 올라탄다는 의미로 썼다. ‘는 날뛰는 말과 같아서 가 올라타 제어하지 않으면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내달린다. ‘가 마음에서 표출되는 감정의 격동이라면, ‘는 마음속에 자리 잡은 순수한 이성이다. 퇴계는 순수한 이성으로써 날뛰는 말의 고삐를 잡고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는 야생마고 는 야생마를 길들이는 사람이다.

 

반면에 율곡은 기발이승기가 발하는 데 이가 본디 함께한다는 뜻으로 읽었다. ‘가 분리돼 있지 않고, ‘안에 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 율곡의 생각이었다. ‘는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는 작용의 원리로서 에 실려 있다. 여기서 차이가 분명해진다. 율곡이 기의 능동성을 강조한다면, 퇴계는 이의 능동성에 주목한다. ‘가 능동적으로 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칠정의 격동이 절도를 잃고 만다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다.

 

 

그래서 퇴계는 말한다. “만일 기가 발함에 이가 올라타지 않는다면 사람은 이욕에 함몰돼 금수가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칠정이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것이어서 그 감정의 격발을 이성의 힘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인간 세상이 짐승의 세상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다. 퇴계가 성학십도를 지어 올린 것은 임금이 이성, 곧 하늘이 내려준 참된 본성의 힘으로 칠정을 다스리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 달라는 뜻이었다.

 

퇴계는 말을 탄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옛사람들이 그런 비유를 썼다고 했는데, 그 옛사람 중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있었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의 영혼 곧 마음을 말과 말을 끄는 사람으로, 더 정확히 그리면 날개 달린 말 두 필이 이끄는 마차와 그 마차에 올라타 말을 모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말 두 필 가운데 오른쪽의 흰말은 혈통도 좋고 본성도 훌륭하지만, 왼쪽의 검은 말은 혈통도 본성도 흰말과는 반대다. 플라톤은 두 말의 특성을 이렇게 열거한다.

 

둘 중 오른쪽 말은 명예와 자제와 겸손을 사랑하며 진정한 영광의 친구이며 채찍이 필요 없고 명령을 그대로 따른다. 반면에 왼쪽 말은 방종과 자만의 친구이며 귓가에 털이 많아 귀가 어두우며 채찍과 가시 막대기를 함께 써도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인간의 영혼은 마부와 백마와 흑마라는 세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셋이 한 조를 이루어 천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니 우리의 여행은 어렵고도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마부는 이성을, 백마는 기개를, 흑마는 욕망을 상징한다. 플라톤은 이성이 탁월하게 구현된 상태를 지혜라고 부르고, 기개의 탁월한 상태를 용기라고 부른다. 또 욕망은 이성의 통제에 잘 따를 때 절제라는 올바른 상태에 이른다. 인간의 영혼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가 조화를 이룬 상태를 지향한다.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이끌어 영혼의 탁월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영혼 삼분설을 다른 대화편 국가에서 폴리스의 조직 원리로 삼았다. 인간의 영혼이 세 가지 성질로 이루어져 있듯이, 나라도 세 가지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성의 지혜를 갖춘 철인이 왕으로서 통치자가 되고, 기개를 지닌 전사가 수호자가 되며,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생산자가 된다. 통치자가 지혜를 발휘해 전사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생산자의 욕망을 다스려 절제에 이르게 할 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가 실현될 수 있다. 정의로운 나라는 지혜와 용기와 절제의 탁월함이 조화를 이룬 나라다.

 

플라톤이나 퇴계나 사유의 근본 구조는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이성의 힘으로 욕망이라는 날뛰는 말을 다스리는 데 우리 삶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최종 목표도 다르지 않다. 이성이 욕망을 다스릴 때 만인이 행복하게 사는 조화로운 나라를 이룰 수 있다. 그런 나라를 만드는 일의 정점에 플라톤은 철인을 놓았고 퇴계는 임금을 놓았다. 플라톤은 철인왕을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서 가려내야 한다고 보았고, 퇴계가 신봉한 유학은 임금을 성학으로 가르쳐 철인이 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나라에서 지혜를 담당하는 철인왕은 사적인 욕망에 빠져서는 안 되고, 그러므로 가족이나 재산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철인왕은 공공선에 헌신하는 수도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퇴계도 임금에게 칠정을 다스려 사욕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금은 사회적 이성의 구현자가 돼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을 배반한다. 퇴계가 가르친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재앙을 불러들인 무능한 임금이었던 데다 이기적이고 교활하기까지 했다. 나라를 구한 이순신을 질투해 죄를 뒤집어씌우고 박해했다. 선조는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무책임한 왕이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불신했고, 퇴계는 민주주의를 알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철인왕의 자리에 국민이 들어선 체제, 그래서 말과 마부의 관계가 역전된 체제다. 국민이 말을 다스리는 마부 노릇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 체제다. 그러므로 이 체제에서 이성적 통제력을 발휘해 통치자의 일탈을 막는 것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일이다. 국민이 이성적 판단을 그르쳐 기운이나 자랑하고 사욕에 젖어 날뛰는 말을 지도자로 세워 놓고 방치하면, 마차는 엉뚱한 곳으로 내달리다 진창에 처박힌다.

고명섭 책지성팀 선임기자| 한겨레 2024.03.26.

 

 

‘875원 대파라는 방아쇠

지난달 중순 보수 성향 지인들은 총선 기류가 확 바뀌었다며 여권 내부의 전망치를 전했다. 그러면서도 김건희 여사가 자중하니 다행이지만 안심할 수 없다. 또 언제 나설지 몰라라고들 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들도 윤석열 대통령 본인이 이 정도 리스크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지금 여권은 초비상 분위기다. 이종섭 주오스트레일리아(호주) 대사의 조기 귀국이 상당 부분 반영된 33주차 갤럽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서울지역 지지율은 다시 올랐지만 대전·세종·충청에서 큰 폭으로 빠졌다. 군대에 간 청춘을 지키지 못한 국가의 문제, 수사 과정에 대한 외압·은폐 의혹은 그 자체로 폭발력이 크다. 망명도 아니요, 대통령이 중대 사건의 피의자를 특명 전권대사로 내보내며 공정과 상식을 뒤엎은 초유의 사태는 사람들 뇌리에서 쉽게 지워질 순 없다.

 

지난주 보수지들 지면에선 연일 탄식이 흘렀다. 권력에 대한 감시견이 아니라 기득권화된 미디어가 지배시스템이 흔들릴 땐 위협이 되는 존재를 향해 짖는 경비견역할을 한다는 지적(‘장면들’, 손석희)을 떠올린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5년에도 그랬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류의 변화를 이 대사 건만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국민들의 인내가 이미 임계치 가까이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조국혁신당의 약진 또한 그 결과지, 원인은 아니다.

 

요동치는 민심은 ‘875원 대파파장에서 분명히 읽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권에서나 대통령 방문에 과잉의전이나 보여주기식 홍보는 있어왔다. 할인에 할인에 할인을 거듭해 그렇지 아예 없는 가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특별히 지지 당이 없는 사람들까지 분통을 터뜨리는 사안이 됐다. 보수 진영에서도 총선 이후 재개하라고 할 정도로 노골적 선거개입이 뻔한 민생토론회를 22차례 강행하며 개발 공약을 남발하지만 정작 국민들 형편은 모르는 대통령. 가끔 해맑게 아이들과 술래잡기하는 모습의 대통령실발 사진까지 더해지니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심정이 되는 건 당연하다. 33주차 갤럽 조사에서 정부 견제론은 정부 지원론보다 15%포인트 높았는데, 중도층에선 그 차이가 더 컸다.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의 경우 든든한 지지층이던 60대에서조차 지난달 초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논란이 최고조일 때에 이어 다시 긍정과 부정이 엇비슷해졌다.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 세력을 꺼내든 지난해 8·15 경축사를 기점으로 홍범도 장군 동상 이전 등 국민 갈라치기와 이념 전쟁을 본격화하는 사이, 생활 물가는 치솟고 과학기술계 연구개발 예산 삭감, 출판계 예산 축소 같은 일이 줄줄이 벌어졌다. 뒤늦게 민생토론회를 돌고 당이 민생특위를 설치한다고 진정성이 전해질까. 의료계 파업에 대한 국민들 불안감이 커지자 일요일 저녁 불쑥 의사와의 대화를 꺼냈지만 지뢰밭이다. 무엇보다 이미 구조화·고질화된 윤 대통령의 리스크가 사라질 가능성은 낮다. 비례 후보에서 뒤 순위를 배정받자 사퇴한 검찰수사관 출신 20년 지기를 보란 듯이 바로 대통령실 특보에 임명했다. 누구나 사과와 제2부속실 설치 정도는 최소한의 조처로 예상한 김건희 여사 명품 백수수는 애당초 뭉갰다. 리더의 고집은 때론 돌파력과 추진력이 되지만, 법치와 상식을 뒤집을 땐 아집과 독단일 뿐이다.

 

민주당이 잘해서 나타난 기류의 변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결과는 두고 봐야 한다.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막말을 한 후보 논란에 정치인에 대한 공격은 문제되지 않는다면서도 이재명 대표는 당내 비판적 의원 하나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후보가 줄줄이 바뀐 지역구 유권자에게 사과도 없다. 나라를 책임지는 대통령 자리의 무게를 야당 대표의 그것에 비할 순 없다. 하지만 민주당의 이런 모습에 앞으로 어떤 정치와 어떤 개혁을, 누구를 대상으로 하려는 건지 의문을 품게 된 이들이 적잖다는 점을 뼈아프게 여겨야 한다. “이념 기준으로 선을 그어볼 때 단기전인 선거는 적극 지지층을 기반으로 중도층의 일부를 끌어와 한 표라도 상대보다 더 얻으면 이긴다. 장기적인 개혁은 다르다. 적극 지지층에 너무 집착하면 이념 공방만 벌어지며 승부가 나지 않는다.”(‘개혁의 정석’, 전주성)

 

얼마 전 연세대 복지국가연구센터와 랩(LAB)205021대 국회에서 통과된 2877건의 법안을 분석하며 삶의 질 관점에서 입법 활동 및 정당을 평가하자고 제안한 데 눈길이 갔다. 지난 23, 한겨레 뉴스레터팀이 우리 동네 국회의원 제대로 뽑는 법을 주제로 연 유료 행사는 참석자들이 예상인원을 훌쩍 넘고 진지한 열기로 가득했다. 대담자로 나온 이철희 전 의원은 투표장에 갈 때만 유권자 역할을 하지 말고, 4년 내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정치인들이 무서워하는 듯하지만 사실 그걸 제일 원한다고 말했다. 내 삶을 바꾸는 정치를 끈질기게 묻는 이들이 늘 때, 정치가 민심을 두려워한다. 그것만이 희망 아니겠는가.

김영희 | 편집인 | 한겨레 2024.03.26.

 

 

의료 개혁본질 왜곡하는 정부

대학별 의대 정원 배정 발표에 따라 의대 교수들까지 집단 행동에 나서기로 하면서 정부와 의료계 대립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양상은 마치 충돌 직전의 두 폭주기관차처럼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의료체계가 마비될 수 있다는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의대 정원 확대는 전 정부에서부터 시도되어온 묵은 숙제이고, 의료개혁에 대한 필요성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그런데도 왜 사태가 이 지경에 다다른 것일까?

 

정부는 의사집단의 이기주의와 무책임을 탓하고, 의료계는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따른 강압적인 시행을 비판한다. 실제로 의사집단의 기득권 구조가 의대 증원 문제를 비롯한 의료개혁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거니와, 증원 규모를 못박고 뭔가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밀어붙인 정부 태도에서도 총선을 겨냥한 정치적의도가 엿보인다. 이런 양비론과 2천명 증원을 둘러싼 극한 대립이 부각되면서 정작 더 본질적인 문제는 묻히고 있다. 하나는 의료체계의 공공성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국민적·사회적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 구조조정의 교육적·공공적 성격에 대한 고려다. 필수의료 부문의 태부족과 수도권과 지방의 의료서비스 불균형이 이윤 추구 중심의 시장주의 풍토에서 기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 구조조정 역시 경쟁적 시장주의가 지배함으로써 교육 불평등을 더 악화시켜왔다.

 

의대 정원 확대는 보건의료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대학 구조조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 구조조정에는 학령인구 감소로 축소 중인 대학 전체의 규모와 전공별 적정 인원에 대한 고려, 대학 내의 교육 여건에 대한 객관적 판단과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의 등의 절차가 수반된다. 정부의 2천명 증원은 그동안의 논의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정부는 총선을 목전에 두고, 정원 확대 규모부터 대학별 배분까지를 불과 한달 반 사이에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였다. 그 기간 내내 2천명이라는 숫자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는 대통령의 목소리만 크게 울릴 뿐, 교육의 관점에서 대학 정원 조정의 책임을 진 교육부 장관은 존재감을 찾아볼 수 없다. 의대 증원 추진이 한편에서 총선용급조 정책이라는 혐의를 받는 이유다.

 

교육 차원에서, 의대 정원의 급작스러운 대폭 증원이 불러올 부작용은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망국병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국 대학의 일류대 중심입시 풍토에서 현재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막론하고 의대는 실질적인 서열 상위를 점하고 있다. 향후 대학입시에서 최상위권 학생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확대·심화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는 구조조정 중인 대학 전반의 운영에 부정적 여파를 미치겠거니와 좀 더 직접적으로는 자연과학 계통의 전문교육에서 인적 자원의 심각한 결핍을 초래할 것이 예상된다. 최근 교육부는 타 전공의 정원 축소를 통한 첨단 분야 학과의 신설이나 증원을 대학에 요구했는데, 의대 증원이 대폭 이뤄지면 입시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곳은 이 신설학과들이다.

 

미래 사회에 필요한 의료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의대 정원을 늘리자는 취지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증원 계획은 현재의 불균형한 의료체계에 대한 공공적 개입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면서, 대학의 교육 여건에 대한 고려와 해당 분야 교수 및 연구자들과의 협의를 통해 세우는 것이 옳다. 당장 2천명을 증원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밀고 나가는 독단적인 정책 시행은 의료개혁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정부는 의료계의 반발이나 주장을 묵살하다시피 하면서 대학별 정원 배정을 완료함으로써 의대 대폭 증원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확대한 정원을 올해 입시부터 곧바로 적용하겠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이겠으나, 그것이 과연 장기적인 의료개혁을 위한 유일한, 아니 적어도 유효한 길인지조차 매우 의심스럽다.

 

정부가 대학별 정원 배정을 강행했지만 2025년도 대입전형 요강 확정 시한인 5월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폭주하는 정부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의료계의 충돌은 의료대란이라는 국가적 재난을 초래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 치킨게임을 멈추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의료계는 증원 규모 재조정까지 포함한 전제 없는 대화를 시작해야 하고, 우리 사회는 이 위기를 올바른 의료개혁을 위한 계기로 전환해나가야 할 것이다.

윤지관 | 대학문제연구소장·덕성여대 명예교수 | 한겨레 2024.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