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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4.5.1~31

by 이성근 2024. 5. 30.

1.총선 참패 여당이 뻔뻔할 수 있는 이유 2.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73. 얼 쇼리스가 가르쳐준 희망의 인문학 4.바보야, 문제는 단지야! 5. 타인의 업적을 인정하는 사회 6. 우리 숲에 딱따구리가 살아요! 7.러시아와 미국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한국의 저출산 8. 윤석열 통치의 비밀, 하이에크 9. '민정수석실'이라 쓰고 '법무법인 윤석열'이라 읽는다? 10. 30년 전 공산주의 버린 러시아에 '멸공'? 전쟁 끝나면 한·러 관계 복원되나?

11. 부실정부 대한민국 12. 시대정신 찾아보기 13. 20년 진보정치 역사의 한 시대가 저문다 14. 격동의 한 시대 15. 아무도 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16. 선주권 인정과 과거 청산 17.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18. 마을이 키우는 아이 18. 44년 만에 피해자에서 증언자19. 노인을 위한 집은 없다? 20. 가치외교의 탈을 쓴 이념외교

21. ‘()유대주의라는 형틀로 미래세대 옥죄는 미국 22. 윤 대통령, 불행한 퇴장을 향한 빌드업을 하고 있다 23. 밀양이 알려준 연대의 힘’ 24. 애착 넘어 혐오로 나아가는 정치팬덤 25. '노인 지옥' 한국이 맞는 초고령사회 26. ‘빠순이’, 사랑 그리고 하이브 vs 어도어 사태 27. 기후위기와 어린이들의 안부 28. 무위당 장일순에 길을 묻다 29. 그 하나의 이름 30. 한러 관계, 저절로 회복될까

31. 또 다른 5월과 팔레스타인 32. 착한 사람이 지닌 힘 33. 경청의 기술과 정치 34.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거야?” 35. 대자보 하나 붙지 않는, 침묵의 캠퍼스 36. 다시 광야에 선 진보정치’ 37. 채 상병, 홍범도, 그리고 보수의 정체성’ 38. 남녀의 다름을 아는 일 39. 금투세 폐지, 좀비가 살아났다 40. 고독한 깃발만 나부껴!

41. 3년은 너무 짧다 42.한국 종교에 진보는 둘째치고, 영성이나 제대로 있나 43. 특검·탄핵 총공세, 대통령 '소용돌이' 피하려면 44. ‘대통령 놀이의 막장 보여준 검찰 인사 45. 약자가 뉴스를 회피하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46. 언론자유 위해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 47. 영국의 파킨슨 법칙이 한국에서 파계승 법칙된 사연 48. 군인 김오랑, 그리고 박정훈정부는 국민에 '모욕감'을 줘선 안된다 49. 부자가되면 안 되는 까닭 2 50. 전쟁에 반대할 자유

51.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연금개혁 52, 노무현의 꿈, 이재명의 길 53. 2023년 북반구 여름, 역사상 가장 더웠다 54. 민주주의가 공기처럼 일상화됐다고? 55.용기에 대하여 56. 캄보디아인 통역사 킴 렉카나, “나는 오늘도 울어요 57. ‘직구 파동에 날아온 돌직구어떻게 이렇게 서민 못살게 하는 데 진심인지” 58. 헌정주의에 도전하는 대통령 59. 식탁의 뉴노멀, ‘금값농수산물 60. 바보 같은 미국 대학생들

61. 윤 대통령, 잘못 드러누웠다 62. 나라 망치는 한국 지배층의 광신적 사대주의 63. 박정희 향수가 낳은 박근혜 팬덤, 노무현 애수가 낳은 문재인 팬덤 64. 시인의 마음 65.미래가 없으면 아이들도 없다 65. 바보야, 문제는 인복이라니까! 66.이제 시민의회다  67. 마음은 민주주의의 집이다” 68. ‘부끄러움을 모르면 못할 짓이 없다’ 69. ‘악성민원 방지명분, 국민 알권리 위협 말라 70. 논란의 불협화음 유로비전

71. 평등 구현을 위한 차별과 불평등 72. 부동산 침체에 '흔들' 전세제도, 곡예 벌이는 이들에게 대안은? 73. 이미 도래한 디스토피아, 어떤 실천도 저 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74. 잠적 153일만에 등장한 김건희,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75. 신경림의 당부 76. 고층 경쟁어쩌다 게임이 됐나 77. 마동석·탕웨이 머쓱하게 만든 윤석열 정부 78. 헌법을 지키겠다는 대통령과 검사들 79. 오래된 미래를 가져올 마법 같은 연대를 기대하며 80. 동아시아, 탈자본주의 대안은 어디에?

총선 참패 여당이 뻔뻔할 수 있는 이유

보름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국민의힘이 4·10 총선 참패를 잊고 원점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도 충분했다. 덩달아 여의도 정치도 총선 이전의 팍팍한 대결로 회귀했다. 너도나도 총선 민심을 말하지만 언제 총선의 충격이 있었느냐 싶은 풍경이다. 보수언론조차 과거엔 혁신 쇼라도 하더니라며 질책하고, “만년 2등의 체질화라고 탄식도 쏟아내지만 소용이 없다. 집권여당의 기이한 이 평온은 총선의 최대 미스터리가 될 판이다.

역대급 참패를 수습할 비상대책위원회는 당선자보다 많은 낙선자들의 혁신형절규를 뿌리치고 관리형으로 결론내더니, 너도나도 위원장을 고사했다. 전당대회 준비 외에 권한도 없는데 희생할 중진은 드물었다. 돌고 돌아 8년 전 은퇴한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가 책임을 맡았다. 이런 판에 총선 인재영입위원장·공천관리위원이던 핵관 중 핵관이 원내대표를 하겠다고 나서고, ‘윤심인가 싶어 모두 꼬리를 내리니 경선이 미뤄지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이 정당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변화에 둔감한 초식공룡” “해변에 놀러 온 사람들의 종합판이다.

국민의힘의 이런 뻔뻔함에도 이유는 있다. 심리적·공학적·정치적 요인 몇가지가 이렇게 만들었다. 우선은 책임감의 결여. 총선 패배 책임이 당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실패도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실패이지 국민의힘의 실패는 아니라는 생각이 집단적 무의식 속에 가득하다. ‘대파 875원 파동등 재를 뿌린 대통령실을 향해 눈을 흘기고, 뒤늦게 여당이 심판론이 말이 되느냐는 한 위원장 탓은 그래서 가능하다. 친윤과 친한으로 패를 나눠 험구는 쏟아내도 일부 수도권 낙선자들을 빼고 성찰하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이런 의식 밑바닥에는 윤 대통령도, 한 위원장도 국민의힘이란 플랫폼에 이식된 타인일 뿐 당 본류로 생각지는 않는 심리가 깔려 있다. 이런 심리적 구도에선 당은 윤·한에게 권한을 주고 지원한 주체이니 평가는 해도 평가받을 대상은 아니게 된다.

두번째는 정치 감각의 부재. 총선 참패를 당 기조나 소위 국민의힘식 보수의 실패로 보지 않는다. 단지 조금 소통에 서툴렀을 뿐이다. 그것도 어수룩하고 고집스러운 정부가 말이다. 그러니 바꿀 것도 달라질 것도 없다. 고물가·고금리의 민생고에도 균형재정을 읊조리며 감세를 감행하는 건 이 정당의 오랜 신조이고, 낡은 성장론으로 개발만 남발하는 것은 박정희 신화이후 전통이 됐다. 원칙 있는 남북관계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위대한 대한민국을 위해 역사를 뒤집는 건 당 이념이 됐다. 영남으로 쪼그라든 당선자들이 지역에서 듣는 핀잔이래야 대통령이 왜 그리 옹고집이냐는 정도고, 주변 지인들이 감세·성장의 직간접적 수혜자들이니 윤 대통령처럼 국정 방향은 옳다고 강변할밖에. 서민의 고통이 체감되지 않으니 수도권 낙선자들 말이 귀에 들어올 리도 없다.

마지막은 공학적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터다. 이번엔 졌지만 다음 대선은 이길 수 있고, 이기면 된다고 손쉽게 생각한다. 지난 대선이 그랬듯 프로젝트하나 잘 띄우면 된다는 떴다방 정당의 체질화다. 총선을 앞두고 선선히 한 위원장에게 전권을 맡기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 언제든 불변의 30%’라는 믿는 언덕이 있고, 어차피 대선은 일대일 양당 싸움이니 더불어민주당과만 잘 싸우면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프로젝트에 올라탈 조건은 오직 팬덤이다. 행동력 있는 지지층에 어필하고 그들의 인기를 얻는 게 중요하다. ‘새 보수따뜻한 보수건 굳이 새로운 가치나 비전을 만들고 미리 사람을 키울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내부 노선

분란만 만들까 경계한다. 국민의힘 정치가 쉽게 유튜버 등 시장논객들에게 포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변화 없는 국민의힘이 다시 선택받기는 정말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는 걸 그들만 모른다. 한국 사회 인구 구성은 확연히 변했다. 그들의 화양연화를 만든 산업화 세대는 점점 퇴장하고, 이제 민주화 세대가 인구의 주축이다. 혹 어쩌다 민주당의 엄청난 실패 덕에 프로젝트 대선이 성공한다 해도 잘해야 2년 재미 보다 남은 3년 역사와 대화하는 권력의 운명이 되기 쉽다.

보수는 지키는 것이라고 하지만, 보수주의를 정립한 에드먼드 버크의 충고처럼 신중하게 필요한 혁신을 할 때야 지키는 것도 가능하다. 지금 국민의힘은 죽는 줄 모르고 그저 안주하는 초식공룡일 뿐이다. 가치와 비전은 없는, 권력만이 목적인 붕당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걸 구리다고 한다.

김광호 논설위원 경향 : 2024.05.01.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7

인터넷에서 서울 사람이 생각하는 시골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지도가 있다. 한반도는 절반 남짓 그렸는데, 서울은 빨간색으로 크게 그렸다. 휴전선 이북 조금은 북한이고, 남쪽에서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시골이라고 퉁쳐버리며 모두 파랗게 색칠을 했다. 그래도 제주도는 귤이요,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표시했는데, 이 엉성한 와중에도 독도 옆에는 울릉도도 표현되어 있는, 제 딴에는 섬세한(?) 지도다. 보통 지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정확성 따위는 무시한 이런 지도도 분석의 가치가 있다. 이런 것을 심상지도(Mental map)라고 하는데, 그린 이의 심상을 반영한다.

이 지도는 북한에 대한 무관심이나 독도 문제에 대한 강렬한 인식 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울 사람들이 얼마나 서울 중심으로 사고하는지를 보여준다. 전자가 무심결에 드러난 심상이라면 후자인 서울 중심 사고는 이 지도가 그려진 이유다. 서울 사람이 얼마나 오만하게 서울 중심의 사고를 하는지, 그들이 견문으로 아는 세상이 얼마나 편협한지 풍자한 것이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7조는 인간의 이런 좁은 견문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살아봤다고 그 시대를 다 아는 게 아니다가 바로 이것이다.

얼마 전 ‘1990년대 해외여행 자율화로 대학생 사이에 배낭여행, 어학연수 등이 보편화됐다고 글을 쓰려다 멈칫한 적이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보편화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경험적으로 따져만 봐도 내 고등학교 친구들의 어학연수 비율과 대학교 동기들의 어학연수 비율, 해외 배낭여행 비율이 상당히 차이가 났다. 여기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군미필자의 출국이 까다롭던 상황이라든가 집안의 분위기, 경제적 상황 등이 작용했다. 문호가 열리면서 그 이전에 비하면 해외 경험을 한 사람들이 괄목할 정도로 늘기는 했지만, 대학생 중에서도 다수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거기에 당시 대학 진학률이 20%대였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꼴랑 대학생 일부의 경험을 가지고 그 시대의 보편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이를 깨달으며 조용히 문장을 다시 다듬었다.

한국사를 공부하신 어떤 교수님은 하필 5·18민주화항쟁이 일어난 바로 그때 광주 인근에서 장교 교육을 받으셨다고 했다. 한창 교육 중에 부대가 술렁술렁하더니 폭도들이 실려 왔다고 한다. 연병장에 떨궈진 폭도들에 대한 구타가 난무하고,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들이 무장을 했고 어쩌고저쩌고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도 분노와 적대감이 치솟아 올랐다고 했다. 자기 부대가 투입이라도 될까봐 무서웠다고도 하셨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으면, 5·18은 그때 보고 들은 이야기가 다인 줄 알았겠지라고.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의 한계가 이런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폭은 매우 좁다. 다녀본 데도 얼마 없고, 만나는 사람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여행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 견문이 넓어진다?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받아들이는 그릇이 유연하고 커야 견문도 확장되는 법이다. 그릇이 작은데, 거기에 뭘 부어봤자 넘치기나 하지 별 소용이 없다. 역사학 공부는 일단 당대 수많은 사실들이 나름의 진정성을 가지고 경쟁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하다못해 부부싸움도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 하는데, 역사학은 안 그렇겠는가? 그 사실들을 저울질하며 전체 판도와 흐름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역사학 공부다. 그런 공부를 통해, 한 시대를 산 사람들의 개별 경험을 존중하지만, 그 시대의 전체적인 상은 개인의 경험을 초월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역사학이다. 항상 자기 경험이 협소할 수밖에 없음을 겸허히 통찰하며, 다른 이의 경험을 존중하는 것,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공감은 여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 경향 2024.05.01.

 

얼 쇼리스가 가르쳐준 희망의 인문학

노동한테 이겨먹기 위해/ 내가 제일 가엾다는 생각 하나로/ 누구 하나 미워할 필요 없이도// 간신히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날’(전욱진, ‘휴일중에서)

 

유튜브에서는 쇼츠가 강자라 한다. 나의 대학원 강의 쇼츠는 시다. 늘 시를 앞세워 시작한다. ‘휴일은 노동절에 맞춰 골랐다. 내친김에 인터내셔널가도 들려줬다. 켄 로치 감독이 만든 1995년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서 힘차고 비장하게 흘렀던 곡을 선택했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당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결집한 유럽 청년 민병대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다.

 

얼 쇼리스(1936~2012) 선생이 가끔 떠오른다. 교도소 재소자, 거리의 노숙인들이 인문학 공부로 새 삶을 펼쳐가도록 도움 준 미국의 작가이자 사회비평가였다. 20061. 그를 한국으로 초청해 학술대회, 인문학 토론 워크숍 등을 일주일 동안 열었다. 70살 고령에 혈액암 투병 중임에도 자기 생애 첫 아시아 국가 방문을 감행했다. 이유는 단 하나.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려는 한국의 노숙인 지원단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뉴욕시에서 80떨어진 베드퍼드힐스 교도소. 교육 자원봉사를 하러 나갔던 얼 쇼리스는 한 수감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 같나요?” 재소자 비니스 워커가 답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얼 쇼리스는 충격을 받았다. 워커의 대답을 곱씹어 생각한다. 가난에서 벗어나려 할 때 일자리나 돈보다 중요한 것이 뭘까? 자율성과 자치이다. 정신적 삶이란 스스로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그런 행동은 자율적 인간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가난한 이들이 자율적 삶을 누린다는 의미는 공적 세계에 참여하여 정치에 관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는 반드시 참여자의 성찰을 요구한다. 얼 쇼리스는 결론에 이른다. 가난한 이들에게 성찰적 사고능력을 나눠 주자. 이게 바로 비니스 워커가 요청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일 것이다.

 

이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긴다. 사재를 털고, 후원자를 모아 클레멘테 코스를 마련한 것이다. 거리의 부랑아, 노숙자들과 함께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이 과정을 마친 참여자들은 놀라울 만큼 진지한 학습 집중도를 보여주었고, 삶의 의지도 강해지는 변화를 목격한다. 얼 쇼리스 선생은 자신의 통찰과 클레멘테 코스 진행 과정을 기록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보물들’(Riches for the Poor)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나는 동료들과 이 책을 우리말로 옮겨 2006년 가을,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얼 쇼리스에 따르면 가난한 이들은 여러 종류의 무력’(武力)에 포위되어 있다. 비싼 집세, 굶주림, 마약, 인종차별, 학대, 가정폭력, 비열함, 질병 등 서른가지 이상이 거론된다. 그래서 바쁘다. 발버둥 쳐야 살아남는다 생각한다. 하지만 포위망을 벗어날 길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무력에 에워싸인 사람은 절망에 빠져 외로워하거나 격노의 몸짓을 보이거나 자포자기 심정을 드러낸다.

 

강의에서 만났던 숱한 청중들을 떠올려본다. 청소년, 대학생, 학부모, 교사, 부모, 성인 학습자들 상당수는 불안하고 답답하고 고립된 심리상태를 내비쳤다. 교사 지원 이력서에 빼곡히 적혀 있던 각종 자격증 취득 목록을 떠올린다. 살기 위해 청년들이 얼마나 바둥거리는지 짐작이 간다. 우리는 미국 빈곤층처럼 절망적 가난을 겪지는 않는다 해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신적으로 황량하고 피폐하다.

 

아침마다 항암 치료제를 한주먹씩 입에 털어 넣던 그 사람,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에서는 계단 다섯개 오를 때마다 한번씩 숨을 돌려야 겨우 2층까지 오르던 그 사람. 노숙인을 만나 대화하는 자리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열띤 대화를 이어가던 그 사람이 생각난다. 미국으로 귀국하기 직전, 선생이 내게 물었다. “정말로 한국형 클레멘테 코스가 생겨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 같은가?” 지금 나로서는 대답이 궁색하다. 하지만 대한성공회 성직자들과 뜻있는 인문학자들이 힘을 모아 설립한 성프란시스대학이 노숙인들을 위한 인문학 과정을 20년째 지속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몇주 지나면 그가 떠난 이후 12주기. ‘누구 하나 미워할 필요 없이도// 간신히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날’, 얼 쇼리스 선생의 명복을 빈다.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 한겨레 2024.05.01.

 

 

바보야, 문제는 단지야!

2024년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51.5%는 아파트에 거주한다. 아파트는 전 세계에 통용되는 적층식 공동주택방식이지만 한국의 아파트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단지식으로 개발됐다는 점이다(다른 나라는 공공도로에 면한 개별 건물식이 일반적이다). 아파트 단지는 1960~70년대 도시팽창기 급격히 유입되는 인구를 수용할 방책이 다급했지만, 인프라 구축을 위한 여력과 재정이 부족했던 주택 당국이 생각해 낸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자기 집값뿐 아니라 단지 내부의 도로, 공원, 놀이터, 편의시설 공사비와 유지관리비를 정부 대신 떠안은 구매자도 몇 년 있으면 올라있는 집값 때문에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정부와 소비자(그리고 모델하우스와 청약으로 쉽게 아파트를 지었던 건설회사까지)의 암묵적 합의 속에 강남이 개발되었고 위성 신도시가 탄생했으며 서울은 4배나 몸집을 불렸다. 이것이 한국형 아파트 단지의 실체다.

 

개발 초창기에는 산발적인 중소규모 단지 위주였지만, 2000년대를 기점으로 주요 건설사가 저마다의 브랜드를 내걸고 단지별로 환경 요소나 인테리어 요소 등을 특화해 체계적으로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피트니스 클럽이나 수영장, 골프 연습장 같은 고급 커뮤니티 시설이 마련되는 단지도 등장했다. 단지별로 특화된 시설이 만들어지자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각기 단지마다 담을 쌓고 타단지 주민의 출입을 제한하는 식으로 서로 단절되더니, 결국 집값 경쟁 구도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모두에게(특히 당국에게) 용이했던 단지 개발방식이 동네끼리 단절되고 이웃끼리 서로 담을 쌓고 경쟁하게 만든 숨은 원인이었던 것이다(‘아파트 한국사회’. 박인석).

 

공공이 책임을 방기한 대가는 한세대가 지나서야 드러났고 그것도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초창기 단지들의 재개발 주기가 돌아오자 단절과 경쟁의 메커니즘은 몸집을 눈덩이처럼 불리기 시작한다. 사업 부지가 넓어지면 용적률이 증가해 건설가능 면적이 늘어나는 구조이니, 사업성을 높이기 위해 주변 단지와 인근 부지까지 흡수해 몸집을 불린 대규모 조합이 탄생했다. 서로 적대적으로 변한 거대 단지가 도시 곳곳에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게임의 규칙이 바뀐다. 겨우 삼년전만 해도 고이자 시대가 도래할지 예상한 사람은 드물다. 아파트단지 재개발은 장기간 지속된 저이자·저물가 시대의 산물이다. 기존 아파트를 부수고 새 건물을 더 크게 지어 잉여세대를 일반(외부인)에게 분양(판매)하면 조합원(기존 주민)이 헌집을 새집으로 바꾸는 효과와 더불어 자산증대 효과까지 얻는다는 점에서 지난 20년간 한국인을 열광시켰다. 이 공식이 고이자·고물가 시대를 만나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기존 세대수보다 더 많이 지어봐야 기대한 금액에 일반분양이 될 거란 보장이 사라지니 사업성의 기본 전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한 건설현장마저 자재비 상승으로 건설업체가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면서 조합과의 갈등 끝에 취소되는 곳도 속출한다.

 

이 마당에 (새집을 바라고 내준) 자기 집과 (배당금을 기대하고 선지불한) 건설비 부담을 오롯이 떠안은, 조합원이라 불리는 시민은 (주식처럼 이익을 바라고 취한 개인 선택이었으니) 손해를 감당하는 게 당연한 걸까. 왜 많은 시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합이라 불리는 이익단체의 일원이 된 걸까. 왜 이 와중에도 원인 제공자이자 설계자인 당국은 언제나 그랬듯 책임에서 비켜나 있는 걸까. 이 모든 답은 바로 이 문장 속에 있다. 바보야, 문제는 단지야!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한겨레 2024.05.01.

 

 

타인의 업적을 인정하는 사회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주제를 주도적으로 탐구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이 풀어야 할 문제들을 명료하게 파악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익히고 적용하면서 답을 찾아 나간다. 찾은 답들은 연구 성과로 발표되며, 이어지는 또 다른 연구와 개발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이때 자신의 연구가 다른 사람에게 인용되고 인정되는 것은 고생 끝에 얻게 되는 뿌듯한 보람일 뿐 아니라 향후 자신의 경력에 큰 자산이 된다.

 

업적에 대한 인정은 경력을 중요시하는 모든 분야에서 필수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내 업적의 토대가 되는 다른 사람의 업적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거나, 은연중에 축소하는 잘못을 범할 때가 많다. 대학원생이나 예비 연구자들을 지도할 때 제일 강조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도, 다른 사람의 업적을 제대로 인용하거나 인정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이 부실해지면, 표절에 빠지거나 남의 업적을 가로채는 불상사도 일어나게 되고, 종국에는 지식의 네트워크에서 소외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세계적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에서는 2023년 과학계에서 주목할 10명을 선정하면서 미국 록펠러대학의 스베틀라나 모이소프의 이야기를 부각했다.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생화학자인 모이소프 박사는 198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단백질을 합성하는 센터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는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는 호르몬(GLP-1)을 합성했고, 의과대학의 조엘 해브너 교수 연구실과 협력해 그 호르몬의 생성 기작을 알아냈다. 이 호르몬은 이후에 당뇨병 치료제와 비만 치료제로 개발되며 블록버스터 신약들의 모체가 되었다.

 

신약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대규모 연구실을 운영하며 리더 역할을 했던 해브너 교수와 달리, 모이소프 교수는 록펠러대학으로 옮겨 소규모 연구실에서 자신의 연구를 이어 갔다. 그러다가 당연히 자신이 발명자로 포함되어 있어야 할 이 특허에 해브너 교수만 등재되어 있음을 발견했고,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을 상대로 이의를 제기했다. 수년간의 외로운 법적 투쟁을 이어 간 끝에 그는 4건의 관련 특허에서 모두 발명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 사연을 뒤늦게 알게 된 그의 동료들이 합세해 지엘피-1의 발견을 다룬 논문과 기사들에 모이소프 교수의 공헌을 언급할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누락 오류가 일부 바로잡히게 되었다. 지엘피-1이 인류의 건강에 끼친 획기적인 효과를 감안하면, 최초와 최고를 중요시하는 노벨상 수상의 대상으로 그의 업적이 고려될지는 향후 지켜볼 일이다.

 

모이소프의 이야기를 보면, 과학계에서 여성이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편견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편견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과학기술과 공학 분야에 여성 교수가 진입하고 활약하며 여학생들을 유인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실제로 교수 임용을 위한 면접을 할 때, 숨겨져 있던 편견이 드러나는 사례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구미 선진국의 저명한 연구실에서 일하면서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한 동등한 경력의 남녀 후보가 지원했을 때, 남자 후보에 대해서는 지도교수의 인맥을 활용해 앞으로 훌륭한 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반면, 여자 후보에 대해서는 지도교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구를 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는 이중 잣대가 여전히 존재한다. 서울대학을 비롯한 국내 유수 공과대학에서 여교수가 10%를 넘지 못하며 여학생의 비율이 여전히 답보 상태인 현실은 여성의 리더십과 역량에 대한 보이지 않는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올해 초 여러 매체를 통해 카이스트 전산학부 차미영 교수가 독일의 세계적인 연구기관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연구단 단장이 된다는 쾌거가 소개되었다. 보안과 프라이버시 연구단을 맡게 될 차 교수는 전산과학과 사회과학의 융합 그룹을 이끌면서 대규모 데이터를 분석해 각종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일을 선도하게 된다. 인류를 위한 데이터사이언스 연구의 세계적 리더로 커갈 그의 장도를 축하하는 많은 기사들 가운데, 그를 길러낸 토대에 대한 언급은 카이스트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거친 토종 박사라는 것이 유일한 정보였다.

 

문득 그를 길러낸 카이스트 공대의 전산학부가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그의 박사학위 논문과 경력을 코치해주었던 지도교수는 카이스트 공과대학 최초의 여성 정교수인 문수복 교수였다. 2003년 카이스트에 부임한 문 교수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의 폭발적 성장을 논문으로 예견했던 정보기술(IT) 분야 국제 전문가지만, 부임 당시 카이스트 공대의 첫 여교수가 앞으로 보여줄 역량을 크게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카이스트 전산학부에는 아시아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길남 교수를 비롯한 선배들이 여교수와 여학생들의 능력을 믿어주며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그 토대 위에서 문 교수를 비롯한 출중한 여교수들이 활개를 펴고, 여학생들이 그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화려한 성과에 환호하지만 그 열매를 이루어낸 토대는 간과하기 일쑤다. 17세기 과학혁명의 선구자인 아이작 뉴턴이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업적을 기반으로 발전하는 과학의 작동 원리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성과는 그것을 얻은 주체가 저명한 대가이든 낮은 직급의 연구원이든, 아니면 갓 입문한 신참이든 관계없이 업적 자체로서 그 가치를 공정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또한 어떤 성과든 그것을 가능케 한 토대를 학술적, 기술적, 문화적 측면을 망라한 다양한 관점에서 광범위하게 인정해야 한다.

 

4·10 총선을 지나면서, 우리는 남의 업적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약점과 결점 잡기만이 난무하는 선거판에 낙담하면서, 사회 모든 영역에서 그런 부정적 문화가 득세하고 고착될까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의 업적을 나의 발판으로 인정하면서 새 업적 쌓기가 시작되는 건전한 과학의 문화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확산된다면, 전임자의 성과를 애써 무시하고 폄훼하는 폐습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 한겨레 2024.05.02.

 

 

우리 숲에 딱따구리가 살아요!

1887년 뉴욕의 쇼핑 구역에서 20대 남성이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길거리를 걷는 여성들의 화려한 모자에 맞추어져 있었다. 모자에 하는 깃털 장식이 얼마나 유행하는지 통계를 내고 싶어서였다.

 

모두 700개의 모자를 봤고, 542개 모자에 깃털 장식이 있었다. 깃털은 딱따구리, 파랑새, 딱새, 올빼미, 왜가리 등 40종의 것이었다. 죽은 새 한 마리를 얹은 듯 모자를 식탁으로 사용한 이도 있었다. 당시 유행은 죽은 까마귀의 부리, 발톱, 다리를 얹은 모자였다. (필립 후즈의 사라진 숲의 왕을 찾아서참고)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수억 마리의 새가 살해됐다. 새들의 멸종은 유럽과 미국 사교계에서 중산층까지 번진 깃털 열풍이 초래했다. 20세기 초반, 오듀본협회 같은 단체가 창설되면서 잔인한 패션은 사라졌지만, 새들의 삶터인 숲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위력을 미치고 있다. 존중과 휴식과 하나 됨의 욕망이 아니라 파헤치고 짓고 세우고 돈을 버는 욕망.

 

미국 멸종사에서 흰부리딱따구리를 빼놓을 수 없다. 상아처럼 하얀 부리와 큰 몸집을 가진 이 딱따구리는 1944년 관찰된 이후 국가적인 수색 작업에도 불구하고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미국 정부는 2021년 흰부리딱따구리를 멸종위기종에서 제외하는 안을 발표했다. 마치, 우리 열심히 찾았잖아, 노력할 만큼 했으니, 멸종을 받아들이자고 속삭이듯. 하지만 민간 학계에서 또 다른 정황 증거를 대며 반대했다. 멸종을 인정하는 순간 다른 새들도 위험해질지 몰라!

 

왠지 천연기념물 같은 귀한 몸이신 거 같은데, 우리 숲에서 비교적 쉽게 마주치는 새가 있다. 눈을 감고 숲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통통통. 어딘가에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망치질하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새알못’(새를 알지 못하는 사람)인 한 지인도 여의도공원에서 오색딱따구리가 통통거리는 영상을 찍었다며 신나 했다. 국내에서는 쇠딱따구리, 아물쇠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그리고 멸종위기종인 까막딱따구리 등 6종이 산다. 크낙새는 1980년대 멸종했다.

 

지난달 27딱다구리보전회가 창립했다. 과학자와 탐조가, 작가와 시민 40명은 딱따구리는 ○○○이다라고 손팻말을 써서 우리 숲에 딱따구리가 살아요하고 외쳤다. 건축가, 나무 의사, 사회복지사별칭이 다양했다.

 

딱따구리는 나무를 쪼아 벌레를 잡고, 나무를 망치질해 구멍을 뚫고 집을 짓는다. 이때 나무 조각들이 땅에 떨어진다. 흙의 양분이 되어 숲을 우거지게 한다. 광합성량이 늘어나고 온실가스가 줄어든다. 김성호 공동대표(전 서남대 교수)가 말했다.

 

딱따구리 집이 있는 나무는 태풍이 불면 쉽게 쓰러져 숲의 순환을 돕습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딱따구리와 바람과 비와 눈이 숲 가꾸기를 해왔죠.”

 

딱따구리 집은 다른 동물도 사용하는 게 포인트다. 하늘다람쥐, 소쩍새, 솔부엉이, 호반새 등이 차례로 깃든다. 딱따구리 집은 난개발로 숲에서 힘겹게 사는 생명들의 삶의 힘을 북돋는다. 그래서 딱따구리는 건축가이자 나무 의사이자, 사회복지사다. 숲의 건강함을 돕고 기후위기를 헤쳐 나가는 핵심 일꾼이다.

 

빔 벤더스가 제작하고, 마르텐 페르시엘이 연출한 2021년 영화 에브리띵 윌 체인지2054년의 첨단 기술 유토피아를 다룬다. 대형 태양광 단지와 풍력 단지가 모든 땅을 점령한 것으로 보아 기후위기는 어느 정도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야생동물은 전면 멸종해, 목이 긴 기린이 나오는 영상을 보고도 젊은이들이 믿지 못한다.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술 혁신에 인류의 판돈을 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디지만 생태계를 복원해 자연의 힘을 믿어보는 것이다. 이 영화는 첫 번째 방식이 성공한 미래를 다룬다. 태양에너지를 각각 반사, 흡수하는 우주거울과 인공구름, 바다의 염분과 해류를 조정하는 극지의 빙하 댐, 대기 중 온실가스를 직접 흡수하는 기계, 북극 바다 얼음을 다시 얼리는 장치 등의 기술이 요행히 통했을 미래다. 반대급부로 기상이변과 서식지 파괴 등 기후공학이 만든 혼란에 숲과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적응력 높은 부자 인간만 살아남을 것이다. 두 가지 미래 중 당신은 무엇을 택하겠는가?

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 한겨레 2024.05.02.

 

 

러시아와 미국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한국의 저출산

얼마 전에 러시아와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 준 일이 있었다. 3040대가 대부분인 이 사람들은 한국에 아주 높은 관심이 있어서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 중에서도 몇몇 인상에 남는 대화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가 저출산 문제가 자연스럽게 주제로 등장했다. 그 분들은 한국 출산율이 전 세계 최하위라고 들었다면서 왜 그러는지 궁금해 했다. 내가 아는 선에서 설명을 했다. 부동산 문제도 있고 사교육 비용이 많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인데다 부모 형편도 좋지 않은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겠느냐는, 나라 전체적인 분위기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가 안 되는 눈빛이었다.

 

돈 없고 집 없으면 아이 못 갖는다고?

한국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것과 금전적인 문제를 왜 엮느냐는 것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의 핵심이다. 아이는 아이, 돈은 돈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부동산 가격도, 교육비용도 한국보다 훨씬 높은 미국에서도 출산율이 그렇게 많이 낮지 않고 한국보다 훨씬 어려운 경제 수준인 러시아에서도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대화였다.

 

나도 한국 저출산 뉴스를 접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는 왜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걸까? 얼핏 봤을 때 한국은 아이를 키우는 데에 매우 적합하고 완벽에 가까운 환경을 갖춘 나라라고 이분들은 지적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도 깨끗하고 놀이터 시설이 많으며 백화점, 공항, 카페 등에도 아동 시설이 매우 잘 갖춰져 있으며 치안도 좋다. 어린이방이나 초중고 교육 시설이 풍부하며 동남아나 아프리카 국가들 같이 아이가 몇 킬로미터를 걸어서 강을 건너 어렵게 등하교 해야 하는 상황도 전혀 아니다. 미국도 러시아도 부러워할 수준이다. 여행객들이 볼 때는 아이들의 천국이라고 할 만하다.

 

저출산 문제는 거의 전 세계가 부딪치는 문제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정부의 모든 정책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러시아는 국가의 강요와 함께 돈을 상상 이상으로 많이 쏟아부어서 급한 불을 끄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워낙 다양한 문화권에서 오는 이민자가 많아서 그나마 잘 버티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문제의 근본적인 이유는 국가 정책이 아닌 사회적 분위기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아이 안 낳는 것이 코미디 조롱 대상이 되는 러시아

러시아에서 아이를 갖는 것은 옵션이 아닌 필수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젊은 사람이 20대 후반으로 넘어가면 결혼과 출산에 대한 친척, 친구, 동료 등의 압박을 강하게 느낀다. 사회의 압박이 아니더라도 결혼한 남녀는 아이를 최대한 빨리 가지려고 한다. 갓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때가 가장 힘들기 때문에 부모가 젊을수록 좋다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가진 돈, 나라 정세, 부동산 문제 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아이를 가질 때 자기 집이 없으면 세를 내서 살면 되고 계약이 만료돼서 이사 가게 된다면 아이와 함께 이사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일자리를 잃게 되면 다른 일자리를 찾으면 되고 그것마저도 안 되면 부모들이 도와 줄 거라고 생각한다. 왜 주거 문제와 수입 문제를 아이 양육과 연결을 짓는지 러시아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한다. 내가 돈 없으면 아이의 양육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질문에 그럼 평생 돈을 많이 안 벌면 평생 아이를 안 가질 거냐고 바로 되묻는다. 오히려 아이를 안 낳겠다는 사람에게 그건 매우 부자연스러운 짓이라고 비판을 하면서 왜 자기 부모를 무시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느냐고 따진다. 한국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 부모의 허락을 받는 효자들이지만 그렇게 존경하는 부모에게 손자를 안 드리는 것은 극히 이기적인 행동이며 역설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는 늦게 임신하거나 아예 ‘child-free’ (평생 아이를 안 가지겠다는 의지)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방송에서도 부정적으로 보도되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조롱의 대상이 되며 사석에서도 비난에 가까운 말을 견뎌야만 한다. 한국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세대를 앞선 고민들로 멍든 한국의 청춘들

미국인 친구들은 한국의 심한 경쟁 분위기와 한국만의 인생 매뉴얼을 언급하면서 비판한다. 청년들이 한참 즐겁게 놀아야 할 한국 10대는 이미 취직 생각으로 온통 부담을 안고 있고 20대 젊은이들은 결혼과 아이 양육 문제로 우울해지며 30대부터 벌써 노후를 고민하고 있다는 현상이 말도 안 된다고 한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고민, 남들과 인생 속도를 맞춰야 하는 압박감, 때에 해당되지도 않는 걱정, 이 모든 틀이 사람을 비관적인 사고로 떨어뜨린다고 말한다.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평가다.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은 나의 한 친구가 자기 미래 아들의 대학교 등록금 때문에 걱정하는 것을 보면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수십 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당장 지금 고민하는 것은 좀 과한 반응이 아닐까 싶다. 미국인도 러시아인도 이해가 안 되는 사고방식이다.

 

사람들이 결혼해도 아이를 안 낳는 이유가 다양하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사회 분위기를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정부가 좋은 복지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는 부분은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한 것 같다. 회사에서 여직원이 임신 때문에 불이익을 안 보게 시스템을 개선해야 하고 남녀 다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금전적인 문제와 별도로 아이를 좋아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바로 그게 참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5.03.

 

One○○ (on**) 한국 저출산현상을 미국과 러시아와 비교? Absurd.. 경제적인 이유가 표면적으로 보일수 있으나, 그건 한국사회의 저출산 스트레스를 단순히 돈과 연결시키는 오래된 변명이라고 본다ㆍ사회복지를 자랑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저출산 현상을 경제적 이유로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저출산 현상도 마찬기지로 한국여성의 높은 교육과 사회적 성공으로 인해, 사회고급인력으로 대체됨에 따라 자아실현의 기회가 높아진게 사실아닌가ㆍ

한국저출산 현상을 오직 "" 때문이라는 원시적인 주장은, 한 러시아인의 한국사회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부족과 동시에, 한국사회를 개발도상국정도로 취급하는 태도로부터 이 글을 쓴게 아닌가 판단한다ㆍ 당신주장의 근거가 너무 저급해서 댓글단다ㆍ

손지(so**)구구절절 공감합니다. 나 혼자 벌어서 혼자 쓰기도 부족하다는 이기심을 미래의 아이가 불행할까봐 안 낳는다는 식으로 포장하는 건 제발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박주(iv**) 출산은 무슨 ㅋㅋㅋ 만남단계가 없는데

 

윤석열 통치의 비밀, 하이에크

무엇을 위한 법치,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윤석열 정부는 어떻게 통치되고 있는 것일까

윤석열 정권이 탄생하고 2년이 지났다. 윤 대통령은 정권 교체를 이뤘고 지방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총선에서 역대 보수정부 중에 가장 큰 패배를 당했다. 그럼에도 '국정 방향은 옳았다'고 자평하고 있다. 변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정진석 비서실장 임명, 황우여 비대위원장 임명 등도 그런 태도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 원내대표까지 이철규 의원이 차지하게 된다면, 총선 이후에도 윤 대통령의 스타일은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점점 더 하락하고 있다.

 

대통령은 지난 2년간 그토록 낮은 지지율을 거듭하고 선거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변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왜 국정 방향 자체는 옳다고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왜 대통령은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자유를 그렇게 많이 말하는데, 민주주의는 점점 후퇴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윤석열 정부는 아무렇게나 통치되거나, 아예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태원 참사, 잼버리 사태, 엑스포 유치 실패 등에서 보듯이 국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일들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에서 실패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운이 없는 일이거나, 전 정부가 잘못 세팅해 놓은 일이거나, 공무원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생긴 문제라고 여긴다.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한 태도도 비슷하다. 그래서 이것은 '부주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일관성 있는 국정 기조이자 통치 신념이다. 이것은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통치되었던 박근혜 시기와는 또 다른 형태의 국가 관리다.

 

박근혜 정부가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라면, 윤석열 정부는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적어도 국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들에서 그러하다. 윤 정부에는 적극적인 경제정책도, 재정정책도, 산업정책도, 복지정책도 없다. 할 줄 몰라서 안 한다기 보다는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의외의 곳에서 적극성을 보인다. 당내의 이견을 배제하고, 의회주의를 배격하고, 사법권력으로 야당과 노조를 공격하고, 정부가 지원한 사업들에서 조그만 부정이라도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왜 그러는 것일까?

 

왜 박정희가 아니라 이승만이었나

한 가지 실마리는 윤석열 정부가 앞선 두 번의 보수정부와는 달리 박정희 신화를 폐기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보수의 복고적 비전은 박정희였다. 그런데 이 정부는 박정희를 버리고 보수의 상징으로 이승만을 앞세웠다. 그것은 이 정부의 여러 정책 기조와 사실 잘 맞아 떨어진다.

 

박정희는 미국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미국도 박정희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달랐다. 그는 때로 미국의 뜻을 어겨가면서까지 미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이것은 이승만의 전기 작가이자 미국의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의 견해다). 박정희는 불과 4년 전에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북한과 7.4 남북공동성명을 추진하면서 적대적 공존을 추진했다. 이승만은 달랐다. 그는 '공산·전체주의'와의 타협 없는 대결을 선호했다. 윤 대통령도 그러하다. 이 세계는 자유진영과 공산전체주의 진영과의 전쟁터다. 미국의 편에 단호히 서야한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국가주도의 성장 정책이라는 점에서는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모독이었다. 기본적으로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개인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때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국가란 그 선택이 공정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일 이외에 다른 할 것이 없다.

 

만약 국가가 기업의 일을 대신하려고 한다면 거기서는 비효율과 부정부패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박정희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정경유착이 발생했는가) 이런 부정부패를 일소할 의무가 법을 집행하는 엘리트들, 곧 검사들에게 있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자유시장의 질서를 해치는 행위에 대한 엄단을 약속했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자유'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통치는 아무렇게나 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나라는 윤 대통령이 경제학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인생의 책'으로 27년이나 끼고 다녔다는 프리드만의 <선택할 자유>에 따라 통치되고 있다. 부자들의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최소화하며, 카르텔을 척결할 것, 모두 신자유주의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프리드만의 요구 사항들이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는 80년대에 한국에 이식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최종 버전, 혹은 세계적으로는 이미 폐기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후진적 재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프리드만은 최소한의 소득보장제도인 음의 소득세를 주장했다(사실 모든 복지를 폐지하고, 이것으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김종인과 유승민은 이점을 언급하며 윤 대통령이 프리드만을 반만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스승은 프리드만 뿐은 아니다. 프리드만은 시장의 자유에는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국가의 통치에 대한 많은 부분은 사실 그의 스승격인 하이에크가 제시한 바가 있다.

하이에크는 <, 입법 그리고 자유>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 곧 사적 권리 대한 침해를 일삼는 행위를 막기 위해 의회주권에 맞서는 '법 주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이에크의 '법치주의'는 국가가 자유(사적 권리)를 해치는 일체의 세력을 물리침으로써, 자유를 수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법치는 공식적으로는 '정치적 부패와 모든 형태의 경제 범죄를 척결하고, 경제적 교환 과정에 안정적인 틀과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어디서 많이 본 말과 풍경이 아닌가?

 

선택할 자유는 누구에게 있나

윤석열 대통령은 사법고시 9수를 했다. 그 나이 또래의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에 가는 것까지는 '타고난 머리''개인의 노력'에 따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9수를 할 수 있으려면 집안의 도움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이 9수를 하게 된 이유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느라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 이야기에 따르면 후배들을 이끌고 산으로, 술집으로 다니며 호연지기를 기르느라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

 

결국 윤 대통령이 9수를 '선택'할 수 있었던 자유는 그의 의지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만큼 머리 좋은 사람도 아버지가 대학교수가 아니었다면, 9수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윤 대통령의 사시 9수는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 8번 실패해도 9번째 일어날 수 있는 넉넉한 집안 사정을 증명한다.

물론 어떤 이들과 조금의 차이는 있다. 3루에서 홈으로 들어 올 때, 누군가는 천천히 걸어 들어오지만, 누군가는 희생플라이에 전력질주를 하기도 한다. 윤 대통령도 전력질주로 홈 플레이트를 밟았을 것이다. 그래서 노력할 자유란 이렇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 윤석열이 2루나 3루에 도착할 때까지, 아웃카운트를 8번이나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누구의 자유이고, 누구의 공정일까?

이관후 정치학자 | 프레시안  2024.05.04.

 

 

'민정수석실'이라 쓰고 '법무법인 윤석열'이라 읽는다?

한동훈·이상민의 퇴조와 민정수석실의 갑작스런 부활

대선에서 승리한 윤석열 대통령은 2022314일 통의동 집무실 첫 출근 날 민정수석 폐지를 선언한다. 그는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세평 검증을 위장해 정적과 정치적 반대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일명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라진 지 22년 된 '사직동팀'이 언급된 건 생뚱맞은 일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민정수석실'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 했지, 전직 대통령 네 명을 뛰어 넘고 김대중 정부를 거론한 이유는, 과거 민간인 사찰 '흑역사'의 상징인 '사직동팀'을 민정수석 폐지의 명분으로 삼은 건 왜일까. 그로부터 2년 후 총선에서 대패한 대통령은 다시 김대중 정부를 거론한다. 대통령은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영수회담에서 "정책이 현장에서 어떤 문제점과 개선점이 있을지 정보가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김대중 정부에서 민정수석실을 없앴다가 2년 뒤 다시 만들었는데 이해 가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뜬금없이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내걸은 건 역설적으로 대통령이 민정수석실 업무를 '사정 정보 수집' 쯤으로 여기고, 민정수석실을 '사정 기관 통제 기구' 정도로 여겼다는 방증이다. 본인이 검사 출신이니 민정수석이 검찰 및 사정 기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행사하는 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에게 구태여 '민정수석' 같은 거추장스러운 중간 단계는 필요 없었을 터였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조국 민정수석 보좌관을 지낸 황현선 씨의 책 <조국 그리고 민정수석실>에는 흥미로운 분석이 나온다. '민정수석'을 폐지하면서 동시에 정부 부처 안에 신설한 두 개의 조직에 주목한다. 하나는 행안부 내 경찰국 신설이고, 다른 하나는 법무부 산하 인사정보관리단 신설이다. 두 조직 모두 정부조직법에서 정하는 직무 범위를 벗어났다는 논란이 일었지만, 정권 초 힘이 센 대통령은 전국 총경들을 제압하고, 야당의 반대를 누르며 무리하게 신설안을 밀어붙였다. "윤석열 정부의 이러한 조치들이 윤석열의 최측근인 한동훈과 이상민을 위한 설계라고 의심했다"는 황 씨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윤석열 정부는 '민정수석 폐지'라는 기만술을 펴는 한편에서 역대 어느 정권보다 사정기관을 장악력을 강화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오른팔을 법무부장관에 두고 민정수석실의 인사 정보 검증 업무를 밀어 넣었다. 자신의 왼팔에 해당하는 이상민 행안부장관은 "경찰 수사의 민주적 통제" 운운하며 경찰 조직 직할 통제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대통령은 과거 민정수석 기능을 정부 부처로 확장해, 정부 자체를 거대한 검찰로 재편했다. (여기에서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김대중 정부는 민정수석 기능을 없앤 게 아니고, 민정수석(차관급)을 민정비서관으로 격을 낮췄다. 지금처럼 아예 민정수석 기능을 자신의 측근이 포진한 정부 부처에 나눠준 게 아니다.)

 

총선 참패 후 민정수석 부활을 두고 많은 이들이 '민심 청취'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대통령실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 전달한다. 이런 게으른 분석엔 동의하지 않는다. 민심 청취가 목적이라면 굳이 검찰 출신이자 대통령의 서울 법대 후배가 민정수석에 유력하게 거론되는 배경이 설명되지 않는다. 김건희 영부인과 그 주변인들이 문제라면, 2부속실 설치도 아니고, 특별감찰관 임명도 아니고 굳이 민정수석이어야 하는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참고'했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민정수석을 부활시키면서 초대 민정수석에 검찰과 관계 없는 사회운동가 출신 김성재 한신대 교수를 임명했다.

 

결국 민정수석실 부활은 대통령의 양팔, 한동훈과 이상민의 퇴조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집권 2년차 막바지에 한동훈은 '윤석열 정부'에서 떨어져 나갔다. 정치적 독립을 위해 기지개를 켰다. '정권 2인자'를 통해 관할했던 법무부와 검찰 조직에 대한 장악력은 약해졌다. 시스템 구축 대신 '측근'을 보내 조직을 장악한 손쉬운 결정의 후과다. 하필 서초동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김건희 영부인 소환 여부를 두고 서울중앙지검장이 정권 핵심부와 견해차를 보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경찰 쪽은 어떤가. 지난 18일 행안부 경찰국은 조달청 나라장터에 '경찰행정의 발전 방안' 연구용역을 발주하면서 '행안부와 경찰의 바람직한 지휘관계를 정립하고 정부조직법, 경찰법 등 관련 법령 개정에 필요한 학술자료와 쟁점, 찬반 논거' 등의 수집에 나섰다. (424일자 한국일보 "경찰국, 행안부 장관 '지휘권 확대' 착수... 경찰 장악 논란 재점화") 행안부의 경찰 통제를 강화하려는 일환인데, 총선에서 참패하고도 이런 식의 경찰 개혁(?)이 제대로 될 거라 보는 사람들은 없다. 이미 '식물 장관'이 된 이상민 행안부 장관을 겨냥해선 '이태원 특조위'가 곧 활동을 개시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 그 자신'이다. 민심 청취 기능이 생긴다 한들 '59분 대통령'이란 비아냥을 떨치지 못한다면 그 기능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용산 대통령실의 모든 수석이 대통령 면전에서 제대로된 쓴소리를 하지 못해 총선 참패와 레임덕 위기에 처했는데, 갑자기 민정수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대통령에게 안 하던 '아니오'를 할 수 있다는 걸 믿으라는 말인가.

 

민정수석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대통령 친인척 및 특수관계인 관리다. 문제는 영부인과 그 가족들이 연루된 의혹은 '관리'란 걸 하기도 전에 '이미' 발생해 있는 상태다. '친인척 관리'가 아니라, '친인척 비리 의혹 처리'를 관리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심은 필연적이다. 2부속실도 안 만들고 특별감찰관도 두지 않겠다면서 갑자기 '민정수석'을 새로 만든다면 그걸 "민심 청취 기능"을 위한 것이라고 믿어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유권자는 바보가 아니다.

 

민정수석을 정권 중간에 부활시키로 한 건 최악의 선택이다. 애초에 폐지하지 말았어야 했거나, 다음 정부가 부활시키는 게 맞는 일이다. 결국 한동훈도, 이상민도 없는 정부를 끌고 갈 자신 없는 '레임덕 대통령'의 고육지책이 '민정수석 신설'이다. 온갖 '특검 위기'를 앞두고 대선 때 확언한 공약을 스스로 뒤집는 일이다. 참으로 궁색하다.

 

이 정부는 불리한 이슈만 있으면 김대중 정부를 팔았다. 굴욕적 한일 정상회담에서 갑자기 '김대중 오부치 정신'을 찾고, 남북 대결 정책 기조를 내놓으며 뜬금없이 "국민의힘이 김대중 정신에 더 가깝다"는 궤변을 붙인다. 23년전, 지금 상황과 맞지도 않게 '김대중 정부'를 팔아가며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키려 하는지, 수많은 합리적 의심들에 대해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 곳곳에 포진한 '윤석열 사단'이 이제 아예 대통령실에 통째로 들어가 '윤석열 로펌'이 될 거라는 세평이 더 힘을 얻을 것이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4.05.04.

 

 

30년 전 공산주의 버린 러시아에 '멸공'? 전쟁 끝나면 한·러 관계 복원되나?

전쟁 끝나도 양국 관계 바로 복원은 요원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7KBS <남북의 창> 1000회 특집에 출연한 자리에서 "새로운 외생변수가 아주 심각하게 생기지 않으면,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으로 정상화되면 한·러 관계도 복원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비록 반년 남짓이지만 주러시아 대사로 근무했고 이어 외교부 1차관으로 임명되어 일했으므로 한·러 관계의 진행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전망을 단순히 희망으로 치부하기도 어렵겠으나 필자로서는 그러한 전망에 동의하기 어렵다.

 

우선 한·러 관계는 지난 하반기부터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고 본다. 그 이전까지는 한국이 집단서방의 대러시아 제재 캠페인에 적극 참여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한국에 '살상 무기의 우크라이나 직접 지원 가능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한 데 대해 한국이 '지원 자제' 방침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양국이 충돌하는 양상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12월 초 푸틴 대통령은 주러 한국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에서 한국과의 관계 복원에 대해 유화적인 발언을 하였는데 직후 한국은 기존 대러 수출통제 품목에 무려 682개를 추가하는 고시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러 측은 '보복할 것이며 보복은 비대칭적일 수 있다'라고 경고하였다. 그 여파인지 올 1월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탈북자들을 도와온 것으로 여겨지는 한국인 선교사가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어서 러 측은 윤 대통령의 대북 발언에 시비를 걸었고 한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러시아 외교 차관의 방한은 이렇다 할 만한 성과 없이 끝났다. 한편 우리 국방부 장관은 개인적인 견해라고 하였지만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상황은 악화되었다. 현재 양국 관계는 매우 나빠진 상태인데 필자는 악화된 정도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더라도 양국 관계가 바로 복원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정도라고 본다.

 

장 실장은 "새로운 외생변수가 아주 심각하게 생기지 않으면"이라고 단서를 붙였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국은 2022년 캠프 데이비드 한··일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와 중국을 겨냥한 3국 군사 협력에 참여를 선언하였고 대통령은 2022, 2023년 연속으로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집단서방의 '반러시아 전선'에 동참하였으며 후속조치로서 나토 주재 대표부를 개설하였다. 이처럼 한국정부는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서방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새로운 외생변수"란 한국이 서방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러시아가 강력히 반발할 만한 조치를 취하게 되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가?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으로 정상화되면"이라는 단서도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국제정치에서 말하는 '전쟁 이전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러시아가 점령지를 포기하고 철수한다는 것인데 러시아가 그렇게 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러시아가 하기 어려운 일을 양국 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상화의 의지가 있는 것인가? 물론 정부 내부적으로 한·러 관계 정상화의 조건에 대해 심도있는 토론이 진행되고 있고 향후 한러 양국 간 협상이 있겠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으로 정상화되면'이라는 단서는 러시아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바 외교정책이 여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런데 지난 몇 개월 사이 우리 사회에서 표출된 러소포비아(Russophobia) 현상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도 러시아에 대한 상당한 무지와 어느 정도의 편견이 있었지만, 러시아에 대한 반감 내지 혐오가 현재와 같은 수준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최근의 일을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러시아 발레리나 그리고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이 취소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사회의 러시아에 대한 지나친 오해와 혐오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이 일단락된 후 한·러 관계가 정상화되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 국민의 한국에 대한 인식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내 러소포비아 현상이 정부 탓은 아닐지라도 우리 정부는 이런 점에 대해서도 세심한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러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는데 한·러 관계 복원에 있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은 주요한 전제조건이나 전부는 아니다.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서 러시아가 북한과 밀착하고 있는 것을 갖고 러시아에 대해 '멸공(滅共)'을 외치기도 하는데 러시아는 30여 년 전에 공산주의를 버린 국가이다. 우리 정부, 그리고 언론과 학계가 우리 국민 상당수가 갖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다소 황당한, 우리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인식을 바로 잡는 노력을 좀 더 기울일 것을 당부하고 싶다.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 프레시안 2024.05.05.

 

김민기 그리고 세상의 모든 뒷것

지난달 암으로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그에게 미리엘이라는 세례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해 12월 홍세화 친척의 요청으로 성공회 이대용 신부가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인 그를 찾았다. 세례를 받겠냐는 물음에 한참 망설이던 홍세화는 레미제라블에서 은촛대를 훔쳐 도망간 장발장을 감쌌던 미리엘 주교의 관용의 정신이 자신을 이끈 신념이었다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노동자나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 했던 그의 삶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영구 목사 또한 인상적이었다. 해외여행이 흔치않던 시절, 자수성가한 서울대 출신 사업가로 출장이 잦던 그는 친구 박호성(전 서강대 교수)으로부터 프랑스 파리의 홍세화를 한번 찾아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1986년 센강변에서의 운명적 만남이후 그는 평생의 벗이 됐다. 홍세화가 해외에서 근무 중이던 197910월 내무부가 발표한 남민전 사건으로 망명객이 된 뒤 생계를 위해 야간 택시운전을 할 때, 이영구 부부는 해마다 두차례씩 한국 음식을 싸들고 고립된 생활을 하던 홍세화 가족을 찾았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나오는 데는 임진택·유홍준 같은 벗들의 권유와 출간 알선과 함께, 몇년간 운전을 멈추고 글을 쓰도록 생활비를 대준 이영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그런 이영구지만 자신을 내세우지도, 자신의 신앙을 권유하지도 않았다. 발인날 아침 가족과 몇몇 지인에게 이 신부를 소개하며 그는 수십년을 곁에 있었는데도 거절당할까봐 한번도 종교를 권하지 못했는데라며 웃었다. 이영구는 40대 후반 잘 나가던 사업을 접고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목사가 되어 살아오고 있다.

 

홍세화 가족이 망명객 생활을 하던 당시, 이영구 목사 부부가 파리를 찾으면 택시운전을 멈추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 이영구 목사 아내 임경자, 홍세화 아내 박일선, 홍세화(왼쪽부터)가 함께 찍은 사진. 뒤에 홍세화가 몰던 택시가 보인다. 이영구 목사 제공

홍세화 가족이 망명객 생활을 하던 당시, 이영구 목사 부부가 파리를 찾으면 택시운전을 멈추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 이영구 목사 아내 임경자, 홍세화 아내 박일선, 홍세화(왼쪽부터)가 함께 찍은 사진. 뒤에 홍세화가 몰던 택시가 보인다. 이영구 목사 제공

1970년대 홍세화 부부의 집을 드나들던 이들 가운데엔 김민기도 있었다. 에스비에스(SBS)가 최근 방영한 다큐멘터리 3부작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보면서 이 세상의 많은 뒷것들을 떠올렸다. 홍세화도, 이영구도 그런 존재이리라.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후반은 행진곡풍의 전투적민중가요 신곡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런데 왠지 난 이 세상 어딘가에’ ‘강변에서같은 노래가 좋았다. 김민기 노래는 당시 민중가요와 다른 결이 있었다. 다큐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앞것이 아니라 뒷것을 자처한 그는 권력에겐 반정부 좌익이었지만 그 바탕엔 사람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2015년 이진순과 했던 한겨레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70년대 보안사 취조실에서 죽도록맞던 당시,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싶어...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운동권 후배들에게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게 된다고 말했다고도 했다.

 

다큐를 통해 새삼 알게 된 사실도 적잖다. 1979년 전두환의 12.12 쿠데타가 나던 날, 그는 달동네 아이들의 공공어린이집 설립 모금공연을 위해 정권의 탄압 속에 아예 몇년간 손에서 놓았던 기타를 다시 잡았다. 암울했던 1978년 송창식이 노래굿 공장의 불빛녹음실을 빌려주고 녹음까지 해줬다는 이야기엔 많은 사람들이 놀랬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과로에 연탄가스중독 사고로 숨졌던 전남대 학생 박기순의 영결식에 김민기가 나타나 상록수를 불렀다는 것도 그랬다. 나중에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했던 윤상원은 서울에서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위해 내려와 들불야학에 참여했다. 박기순도, 오월 광주 당시 죽음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시민군대변인 윤상원도 편하게 사는 앞것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뒷것이다.

 

70년대 유신의 입틀막시대에 대학과 공장, 탄광에서 김민기가 만든 노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입길을 틔웠다. 90년대 이후 학전의 실험을 통해선 연극을 하거나 인디음악을 하면 밥굶는 게 당연시되던 시스템을 바꿔냈다. 가수, 배우뿐 아니다.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90년대 운동판에서 내 강연을 다 헐값이나 공짜로 불러댈 때 처음 제대로 계약서를 쓰고 정산을 해준 게 김민기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김민기는 2008년 장기흥행 중이던 지하철 1호선공연을 중단하고 아동극을 시작한 이유를 돈되는 일만 하다보면 돈 안되는 일을 못할 것 같아서라고 말하곤 했다.

 

김민기라고 왜 단점이 없겠는가.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 치열함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누구나 앞것이 되고 싶어하고 앞것에 환호하는 시대이지만 우리 사회 한 구석엔 그런 이들이 있다. 홍세화가 마지막 한겨레 칼럼에서 쓴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스스로 말하듯 김민기는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가 이런 뒷것이 아닐까.

 

많은 자료영상을 사용한 다큐인데도 그의 최근 모습이 나오는 장면에선 카메라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민기는 끝까지 뒷것이다.

김영희 | 편집인 | 한겨레 2024.05.06.

 

부실정부 대한민국

2023715일 오전, 연일 내린 폭우로 하천이 범람하고 제방이 무너져 지하차도가 물에 잠겼고, 버스 승객을 포함해 14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송지하차도 참사는 갑자기 쏟아진 비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 많은 비가 내리고 홍수경보가 이미 발령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올여름에도 많은 비가 내릴 거라 예고되는데, 정부는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제대로 대책을 세우고 있을까?

 

지난 424일 오송참사 시민진상조사위원회는 넉 달 동안의 조사를 거쳐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선 가장 먼저 정부 조사의 한계가 지적됐다. 기본적으로 정부 조사는 당시 제방이 붕괴된 현상에만 집중하고 담당자의 행적과 조치, 감시·감독 권한만을 따진다. 그래서 기관의 책임은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정도로 축소되고 관련자들의 위법행위를 따져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런 결론으로는 대책이 마련되기 어렵다.

 

시민진상조사위원회는 정부 조사의 한계를 넘어 참사가 발생한 원인을 체계적으로 밝히려 노력했다. 지하차도 침수와 관련된 충북도나 청주시의 예방 대책, 매뉴얼, 순찰 확인 과정, 침수 기준을 점검했고, 당일 대응의 문제점과 행정의 실패, 피해자 지원의 문제점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왜 참사는 반복되는가

보고서를 살펴보면 대다수 참사에서 반복되는 세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먼저, 예방 차원에서 금강유역청, 행복청, 충북도청, 청주시청 중 어느 한 기관이라도 하천이나 지하차도를 제대로 관리하고 통제했다면 참사를 예방하거나 규모를 줄일 수 있었다. 몇시간 전에라도 보수 작업을 했다면 제방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고, 미리 차량을 통제했다면 사고는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행정기관은 기준을 잘 세우지도 점검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서로의 권한만 따져서 예방의 기회를 놓쳤다.

 

둘째, 참사가 일어나기 몇시간 전부터 접수된 시민들의 신고와 소방대원들의 보고에 민감하게 대응했더라면, 제방이 무너지고 지하차도가 침수되기까지의 30분을 정부가 제대로 썼다면 어땠을까? 재난대책본부나 상황실 같은 기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평상시에 사고를 대비한 훈련을 하며 일상적인 대응체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었다. 시민들은 중앙정부와 광역지자체, 기초지자체, 경찰, 소방 같은 기관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곳곳에서 소통은 끊어지고 서로 대응을 미룬다. 골든타임을 관리할 컨트롤타워는 문서에만 존재하고 현실에 없다.

 

셋째, 사고가 발생한 후에도 정부의 부실한 대응은 계속 이어진다. 구급차가 오갈 경로가 확보되지 않아 응급실 이송이 지체되었다. 생존자들은 도움을 받기는커녕 각 기관의 반복되는 조사에 시달렸고 심지어 응급실 진료비까지 내고 각자 귀가했다. 버스에 함께 탔던 동료의 안위에 대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환자복을 입은 채 현장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그 이후에도 알아서 살아야 했다. 유가족들 역시 경찰이나 소방, 행정 그 어느 쪽에서도 정보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현장과 병원을 뛰어다니며 직접 확인해야 했다. 언론사를 위한 브리핑은 있었지만 유가족을 위한 브리핑은 없었고, 수사나 조사 과정에서도 유가족은 배제되었다. 그러다가 여론의 관심이 진상규명보다 보상으로 쏠리면 정부는 슬그머니 발을 뺀다.

 

구사일생의 사회

이처럼 참사의 예방과 대응, 사후관리 그 어디에서도 정부의 역할과 책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참사 때마다 반복되는 요구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이다. 그런데 진상규명마저 시민의 손에 맡길 만큼 정부는 부실하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증언을 기록한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창비, 2024)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작가기록단이 강조했던 안전 컨트롤타워의 기능 강화, 사람·인권·피해자 중심의 지원, 의사결정 과정에 피해자 참여, 재난 원인 조사의 독립성 보장은 여전히 요구사항이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어렵게 국회를 통과했지만 정부에 대한 기대감은 커지지 않는다.

 

참사의 관점으로 보면 한국은 각자도생의 사회일 뿐만 아니라 구사일생의 사회이다. 부실정부를 어떻게 정리해야 안전한 사회가 될까.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 경향 2024.05.06.

 

 

 

시대정신 찾아보기

1876년의 개항, 1910년의 망국과 1945년의 해방은 한국 근대사의 결정적 전환 국면을 만든 역사인 데다,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현대사이기도 하다. 개항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과 국가가 자본주의 세계에 편입되는 신호탄이었고, 망국은 그 편입의 귀결이었다. 해방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동시에 주어진 시작점이었고, 현재 진행형인 분단은 그 길의 귀결 지점이다. 개항, 망국, 해방은 외부의 요소가 급속한 전환을 추동한 결과라는 점에서 공통된 경험이다.

 

반대로 내부의 잠재된 힘이 결정적 전환을 이끈 경험도 있었다. 3·1운동과 이후의 여진이 여기에 해당한다. 실제 3·1운동 직후 세계와 조선의 변화를 목도한 사람들은 신시대(新時代)’라는 말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만큼 인생의 행로에서 이 대사건과 연관된 조선인, 특히 청소년기 조선인이었다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해방 후 남한과 북한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며 각자의 길을 갔던 사람들 다수는 청소년기에 이때를 겪었음을 고려하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어떤 점이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당시는 그것을 시대사조(時代思潮)’라는 말로 주로 설명했지만, 오늘날에도 익숙한 단어인 시대정신(時代精神)’이란 말로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제시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신시대의 시대정신이란 무엇이었을까.

 

3·1운동에서의 시대정신

1차 세계대전이 끝남에 따라, 사람들은 군국주의와 침략정책이 소멸한 대신 세계가 정의와 인도를 표준으로 삼고 세계평화를 나서서 주장하는 시대가 열렸다고 보았다. 그래서 ‘3·1독립선언서는 조선이 독립하고 조선인이 자주민으로 살아가는 길이 조선 민족의 자유 발전을 오래도록 변함없게 하는 길이면서 동시에, “세계 개조의 대()기운과 함께 나아감으로써 전 인류가 함께 생존하는 권리를 행사하는 길임을 밝혔다. 달리 말하면 이천만 민중의 성충(誠忠)”을 합하여 조선이 독립국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 행위는 조선인의 복수심 때문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만세 시위 3개월은 1910년 이후 강요된 침묵 속에 익명의 타자들끼리 확인하지 못했던 사실, 곧 같은 공동체의 존재라는 사실을 한순간에 공유한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3개월은 부정해야 할 지난 과거를 압축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대개조의 시대정신에 편승해 혁신의 기운을 예지(豫知)한 시간이기도 했다. 만세 시위의 공간에서 활약한 청년학생들은 두 가지 시간을 조정할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

 

근대의 주체로 등장한 청년학생들은 성리학의 가치보다는 서구의 근대 가치에 더 가까이 있던 존재였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청년의 과거는 피가 업섯나니라. 피가 잇서도 랭혈이엇나니라” “살겟다는 욕망도 업섯섯고 엇더케할가의 관념도 업섯던 터였으며, “사상계도 사상계러니와 지식열은 엇지 그리 박약하얏던지” “학교에 보내기를 실혀하얏고 강당에 들기를 조와안이 하얏다면서 우리의 과거는 실르 무도덕이엇스며 무애정이엇다.”(‘개벽2)

 

하지만 세계대전이 끝나고 3·1운동을 겪은 청년학생들에게 세계는 보수의 시대가 아니고 진취의 시대였고, 속박의 시대가 아니고 자유의 시대였다. 그래서 청년학생들은 각자의 능력을 자유로이 개발하고 양성하여 사회의 진보를 촉진해야 한다고 보았다. 3·1운동 이후 문화를 개선하고 사상을 전파하려는 청년회, 구락부가 각지에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들에게 이러한 활동은 사회봉공(社會奉貢)이란 시대정신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본성을 발휘하고 자기의 신생(新生)을 창조하는 수양, 달리 말하면 내적 개조의 일환이었다. 이는 어떤 역사적 계통이 있는 활동이 아니었고, 각자 분산적이고 자발적인 의지와 사상에 기초한 활동으로 그때까지 한국사에서 볼 수 없던 사회현상이었다.

 

특히 그러한 현상의 절정은 1920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결성이었다. 연합회는 개조의 기운에 순응하고 민족의 고유한 생영(生榮)을 발휘하고자 결성된 단체였다. 이 조직은 청년학생들이 만세 시위의 전국성과 민족적 동질성을 체감하고 연대의식을 드러낸 진취적인 결과물이었다. 종교단체를 제외하고, 일시적이지 않으면서도 비정치적인 단체로는 최초의 전국 네트워크였다.

 

그러나 세계 개조의 시대정신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개인이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개인이 민족을 매개하지 않고 인류나 세계와 만나 대개조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개인주의라는 시선보다는 사회에 봉공하는 개인, 곧 집단의 주체로 상상되는 개인이어서 새로운 자기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민족의 자유 발전이 가로막힌 현실에서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된 개인의 인격 가치는 더욱이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조는 고립된 개인의 도덕 수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국민주권 지향의 신시대

그런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은 이와 달랐다. 공공연하게 민족을 매개하며 세계나 인류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여전히 독립 만세 시위가 한창이던 19194, 상해의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헌장을 제정했다. 국회를 설치하고 선거제를 실시하며, 남녀, 귀천, 빈부의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일절 평등하게 대우하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9년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가치전환인 것이다.

 

국민주권 원칙은 1917대동단결선언을 계승한 비전이다. 그때 독립운동가들은 한인끼리 주권을 주고받은 것이지 한인이 아닌 사람에게 주권을 양도하는 행위는 근본 무효라면서 융희황제가 포기한 인민, 토지, 정치를 계승한 상속자가 자신이라고 명확히 했다. 그러면서 합법 상속자인 자신들이 물려받은 주권이란 소멸한 황제권이 아니라 새로 발생한 민권이라 밝혔다. 이는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 보장, 곧 인격적 가치가 있는 개인의 존재를 보호하는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함의다. 결국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실현키 위한 활동은 일본의 지배를 부정하는 항일운동일 수밖에 없고, 장기 지속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 민주주의운동사의 일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권재민의 원리는 세계 흐름과도 맞물린 방향성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폴란드 등 유럽의 8개 국가는 모두 공화제를 채택했다. 패전국 독일도 독일국은 공화국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제1조에 명시한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결국 임시정부의 지향은 민족의 자유 발전과 인류가 함께 생존하기 위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맞는 방향성인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세계를 개조하는 기관인 국제연맹에 가입하겠다는 임시정부의 입장도 성립 가능하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의 평등만이 아니라 민족, 국가, 인류의 평등을 강조한 정강1조의 정신과도 연결된다.

 

평등을 강조하는 흐름은 민중론이 확산하면서 더욱 힘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민중이란 말은 ‘3·1독립선언서이천만 민중에서도 나왔듯이 3·1운동 이후 확산한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소수 귀족 계급이나 자본계급을 떠나서 절대다수의 무산대중을 칭하는 말로 사용했다. 여기서 말하는 무산자란 “‘나는 돈 없는 놈이오하는 말, “빈민, 노동자, 소작인 등을 총대표한 말이다. 19231월 민중직접혁명을 강조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192442대 강령 중 하나로 조선 민중해방운동의 선구가 되겠다고 내세운 조선청년총동맹에서 말하는 민중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는 동안 신시대, 개조라는 말 대신 신사회라는 말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사회 개조에 방점을 둔 계급의 시선이 더 강조되어 갔다. 시대사조가 바뀌게 된 데는 19216월의 자유시참변과 11월부터 열린 워싱턴회의 때 독립운동가들이 문전박대를 당한 일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정의와 인도의 세계를 구현하는 국제사회의 지원이란 외부 사조가 설득력을 잃은 것이다.

 

3·1운동 때처럼 주체의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최근의 경험은 촛불항쟁일 것이다. 이때가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분단 극복의 핵심 지렛대를 더 튼튼히 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촛불난동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되치기당했고, 그렇게 힘썼던 분단 문제는 단 1도 현상을 변경하지 못했다. 이제 다시, 민주주의 확대와 분단 극복을 아우르는 시대정신을 찾아내 두 과제를 풀어가는 해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신주백 역사학자 | 경향 2024.05.06.

 

 

20년 진보정치 역사의 한 시대가 저문다

22대 총선 뒤풀이가 요란한 가운데 무감하게 잊히는 정당이 있다. 진보정당 운동의 본령인 정의당이다. 지난주 리얼미터 정기여론조사에서 정의당은 이름 없는 기타 정당으로 분류될 만큼 미미한 지지율을 기록했다. ‘진보 집권을 꿈꾼 게 엊그제인데, 믿기지 않는 반전이다. 총선 일주일 전 117명의 지식인들이 녹색정의당 지지를 선언하면서 녹색정의당이 없는 한국 정치는 상상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여기서 녹색정의당을 진보정당으로 대체해도 무방할 터이다. 그 상상할 수 없던 것이 현실이 됐다.

 

22대 총선에서 녹색정의당이 의석 확보에 실패해 원외정당으로 밀려났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을 기점으로 하면, 진보정당 운동이 20년에 걸친 여정 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20년 진보정치 역사의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양경규 정의당 의원). 저무는 한 시대를 되짚고, 정의당의 실패를 복기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씨앗을 찾을 수 있다.

 

2004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10석을 확보해 단숨에 제3당으로 원내에 진입했다. 보수 일변의 국회에 노동자 정치세력화 기수인 민주노동당이 입성한 것이다. “당사에서 국회까지 걸어오는 데 5분이 걸렸지만 노동자의 국회 입성에는 50년이 걸렸다”(당시 노회찬 의원). 반세기에 걸쳐 굳어져온 좌파 부재의 한국 정치 지형을 민주노동당이 전복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국회 입성을 역사적 사건으로 매김하는 이유이다.

 

원내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상급식, 무상의료, 비정규직 문제,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부유세 등 원내 진보정당의 의제와 제안이 시대정신이 되었다. 이렇게 진보정당을 통해 한국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모아져 한때 국회 의석 13, 당 지지율 20%, 대선 득표 200만표에 달하던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 진보적 의제를 정치권에 투영하기 위해 분투할 때,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그들의 권리 옹호를 위해 헌신할 때 이룩할 수 있었던 성취다.

 

그 빛나던 시절을 아득한 과거로 밀어내는, 참담한 좌절이 너무 빨리 왔다. 22대 총선에서 녹색정의당은 의석을 단 1석도 얻지 못해 원외로 밀려났다. 비례 정당득표율은 정당 해산 기준을 간신히 넘은 2.14%에 머물러 의석을 배정받지 못했다. 진보정당의 얼굴인 심상정 의원은 지역구에서 2등도 아닌 3등으로 낙선했다. 진보 유권자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받은 최악의 결과다. 22대 총선에서 진짜 망한 정당은 녹색정의당이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내외(內外)의 여러 가지 패인이 거론된다. 우선 정체성 혼란, 민주당과의 관계에서 ‘2중대’ ‘배신자프레임 사이 갈팡질팡한 태도, 선거 노선을 둘러싼 분열, 노회찬·심상정 이후 인물 부재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외인(外因)으로는 모든 의제를 집어삼킨 압도적 정권심판론, 위성정당, ‘지민비조를 내세운 조국혁신당 돌풍 등이 지목된다.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0석 사태를 초래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진보정당으로서 선명하지 못한 정체성이 치명적이었다. 언제부턴가 노동 중심성과 현장을 방기하고, 과도한 정체성 정치와 여의도 고공정치에 치중하면서 노선이 흐리멍덩해졌다. 오죽하면 민주당보다 덜 진보정당이란 소리를 들었을까 싶다. 선거를 앞두고 비례 1번 국회의원이 탈당해 반페미니즘 보수정당으로 넘어갔다. ‘못 믿을 정당이란 이미지가 두텁게 쌓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조국혁신당이 정의당을 대체할 순 없다. 정의당이 원외로 밀려났지만, 진보정치의 가치와 필요성이 사라진 건 아니다.

 

총선 기간에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단체로 녹색정의당에 입당했다. “우리가 어려울 때 누군가는 들어줘야 하잖아요. 녹색정의당은 꼭 필요한 정당입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처럼 정의당이 필요한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여전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대변자 역할을 할 진보정당이 필요하다.

 

광야로 나온 정의당 앞에 놓인 환경은 척박하다. 몰락에 가까운 총선 득표율이 가리키는 바가 있다. 재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고 노회찬 의원의 ‘6411번 버스 연설에 답이 들어 있다. 이제 여의도를 벗어나 밑으로, 현장으로, 민중 속으로 내려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양권모 칼럼니스트 | 경향 2024.05.06.

 

 

격동의 한 시대

특별히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을 기억하고 기리는 일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가능하지만, 대개는 집단으로 수행된다. 이 집단적인 기억은 또 종합적이고 적확한 기록을 지향하는 역사와는 달리 어떤 특정한 사회 집단이 지닌 가치나 서사에 근거해서 진행하는 특성을 지닌다.

개인들이 지난날 있었던 특별한 사건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자기가 속한 집단의 목적, 행위나 정체성 수립에서 중요한 기억을 보존한다. 개인이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것처럼 집단적 기억도 수시로, 또 기억의 선호도나 경중에 따라 선별적으로 저장하고 불러모을 수 있다.

 

특히 전쟁, 정변, 위험, 재앙, 추방 등과 같은 극히 중요하고 절박하다고 판단된 사건은 어떤 특정한 집단만의 기억이 아니라 전 사회적인 기억으로, 이른바 기억 문화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이 기억 문화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교정되기도 하고, 기념 동상이나 기념물이 철거되는 것처럼 폐기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최근 지구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진 집단적 기억으로 코로나 팬데믹의 경험을 우리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인류가 함께 경험한 최대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제로부터 조선이 해방되자 부모 품에 안겨 귀국한 어린 나에게 한국전쟁은 우리 땅에서 처음 경험한 집단적인 기억이었다. 그 후로 청소년기를 거쳐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경험한 4·195·16은 정치적 혼란과 정변으로 채워진 집단적인 체험이었다.

 

이른바 ‘68혁명의 사상적 진원지 중 하나였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대학 강단에 섰던 1970년대 - 물론 남한 사회가 겪고 있었던 갈등에 비하면 심한 것도 아니었지만 - 서독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했다.

 

197431, 서독 수도 본에서 유신정권에 반대해서 집회와 시위를 벌이고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발족시켜 반동의 시대에 저항하는 데 멀리서나마 동참했던 일은 그래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이 집단적 체험을 상기해서 금년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자리를 빌려 조촐한 모임이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반동의 시대저항은 소중한 기억

지난 425일은 또 내가 5년 가까이 사는 포르투갈이 1974년에 있었던 카네이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날을 맞아 포르투갈은 물론, 여러 나라의 매체들은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이때의 집단적인 기억과 50년이 지난 오늘의 포르투갈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35년 동안 철권을 휘두르며 통치했던 살라자르가 1968년부터 건강이 악화되면서 점차 실권을 잃게 되었고 1970년에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 케이타누 역시 반공과 국가 예산의 절반을 삼킨 앙골라·모잠비크 등지에 대한 식민지 유지정책에 매달렸다. 이에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청년 장교단이 무혈 쿠데타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거의 같은 기간에 걸쳐 스페인을 통치했던 독재자 프랑코도 1975년 사망했다. 20만명으로 추산되는 희생자를 낳은 스페인 내전(1936~1939)을 통해 집권한 그의 철권통치는 군의 무혈정변에 의해 종식된 포르투갈과 달리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왕정 복귀와 연결되었다. 포르투갈의 독재 종식 방식이 급진 사회주의적인 데 비하여 스페인의 그것은 점진적이고 보수적이었다.

 

독재체제의 종식에 이은 과도기를 거쳐 정치적으로 점차 안정되는 두 나라의 민주적인 정치 지형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회당을 적극 후원했던 빌리 브란트의 역할은 특기할 만하다. 독재체제하에서 정치활동이 불법화되었기에 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의 많은 지원을 받았다.

 

포르투갈의 사회당(PS)19734월 서독 본 근처에 있는 바드 뮌스터펠트에서 재창당했는데 마리오 소아레스가 이끈 이 당은 1976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35%를 득표하면서 제1당이 되었다. 빌리 브란트의 양자로 불렸던 스페인의 사회노동당’(PSOE)의 펠리페 곤살레스도 1982년부터 무려 14년 동안이나 총리를 지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타난 이 같은 정치적 변화는 나에게도 큰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1969년 가입까지 했던 통일사회당의 김철은 1980년 신군부의 국보위위원이 되었다. 비록 엄혹한 국내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남한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지평을 찾는 일은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했다.

 

서유럽에서 전후에도 오래 지속된 두 독재국가의 이런 변화와 함께 19754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끝난 베트남 전쟁은 이 시대의 강렬한 집단적 기억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와 8년에 걸친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후 다시 미국과 장장 20년에 걸친,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투쟁은 결국 베트남의 승리로 귀착했다.

 

반제와 민족해방 투쟁의 역사에 한 장을 기록한 이 베트남 전쟁에 연인원 32만명의 한국군이 참전했다. 당시 외신에 간간이 보도되었던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수치와 곤혹스러움을 심히 느낀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소련과 중국 사회주의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소련이 강력히 지원했던 베트남이 폴 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캄보디아 후원국이던 중국은 1979년 초에 베트남의 국경지방을 한때 점령했다. ·소 분쟁은 반제투쟁과 민족해방전쟁 중에도 여전히 지속됐다.

 

변혁 열기·실존적 해명 공존 시대

1970년대 있었던 또 다른 큰 비극적 사태는 남미에서 발생했다.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수립된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군부의 유혈 쿠데타로 무너지고 아옌데 대통령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1970년대 지구촌의 주변부와 관련된 집단적 기억의 줄거리는 이른바 중심부서유럽과 동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도시 게릴라라는 표현처럼 주변부의 해방전략을 중심부의 해방전략의 본보기로 삼은 적군파는 정치적 수단으로 테러도 선택했다.

 

이런 상황을 통치 불능으로 정의하고 공세를 펴기 시작했던 신보수주의는 복지국가의 재정적 토대를 흔들었던 1973~1974년의 1, 그리고 1979년의 2차 유류파동을 거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이때 속도 제한이 없는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전후 고도성장 경제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처방이 바로 1980년대 시작과 더불어 등장한 대처리즘레이거노믹스로 표현된 신자유주의였다.

 

격동의 1970년대가 이렇게 마감하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서독의 비판적 지성 32명이 시도한 시대진단을 담은 <‘현대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항목들>1979년 발간되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하버마스는 개인의 자유가 너무 많아 사회적 갈등이 심해졌다고 주장하는 신보수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시대진단의 전형은 놀랍게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1970년대를 풍미했던 좌파의 철학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실존철학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카를 야스퍼스의 <현대의 정신적 상황>1970년대의 시대진단을 위한 본보기였다. 나치 집권 직전인 1931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야스퍼스는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고, 일상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지배하는 상황을 비판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희망의 원칙을 설파한 마르크스주의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진솔한 후기 부르주아라고 칭했던 야스퍼스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적인 언술 체계를 빌리지 않고도 자연 파괴, 거대 기술, 에너지와 자원 고갈, 심지어 가족정책과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현존재의 질서 안에 도사린 위기에 대해 진단했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대안적 사회 운동에 대한 모색을 담은 시대진단이었다.

 

밖으로 분출된 변혁의 혁명적 열기와 실존적 해명이 함께하면서 격동의 1970년대는 이렇게 끝났다. 이 시대를 함께 보냈던 독일과 국내외의 동지와 지인들이 하나둘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반세기 전의 집단적 기억을 내 나름대로 불러모아 본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경향 2024.05.07.

 

 

 

아무도 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꽃을 드렸습니다. 불효자의 꽃을 받고도 어머니는 그저 웃습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자식은 머리로 이해할 뿐 가슴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시대가 어머니들을 버렸습니다. 아버지들은 먼저 세상을 뜨고, 홀로 남은 어머니들은 쫓겨다닙니다. 시대의 난민들입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지아비 무덤과 고향을 지키다가 결국 새끼들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 집 작은 방에 갇혀있습니다. 밤마다 생각은 천리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온 마을, 앉으나 서나 정겨운 이웃, 손때 묻어 더 번쩍거렸던 장독대, 눈물마저 거름이 됐던 텃밭. 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되어 달을 보며 눈물지을 것입니다.”

 

지난해 어버이날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린 글이다. 다시 어버이날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설 쇠고 며칠 후 낙상하여 고관절이 골절되었다. 결국 며느리와 아들이 갈아주는 기저귀를 차야만 했다. 누구의 손길도 마다하고 혼자 죽을힘을 다해 당신의 몸을 씻었건만 이제 움직일 수 없다. “왜 이리 안 죽냐. 무슨 죄가 많길래참말로 이런 날이 올지는 몰랐다.” 마른 몸에도 욕창이 생겼다.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병이 우선하면 모셔오겠다는 말에 표정을 바꿨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공포이다. 시골집을 떠나올 때도 막막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자식들을 떠나보냈지만 정작 자신이 떠날 때가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웃이 죽거나 도시로 떠나가면 그때마다 가슴이 떨렸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프면 집에도 검버섯이 피었다. 어머니들을 잃은 마을은 여기저기 움푹움푹 꺼졌다. 그렇게 마을공동체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떠나간 피붙이들이 돌아오지 않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별수 없이 도시로 나와 자식들에게 얹혀살아야 했다. 어머니들은 도시 어딘가에서 더듬더듬 길을 묻고 가만가만 숨을 쉴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그때마다 죽음을 떠올릴 것이다.

 

고통 없이 홀연 이승의 옷을 벗으면 죽은 자는 물론이고 남은 자에게도 복이다. 누구든 고통 없이 오래 살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싶어 한다. 옛사람이 이른 다섯 가지 복 중에서 마지막은 고종명(考終命)이다. 제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음을 맞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미소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이다. 하지만 연명 치료가 발달한 요즘은 정든 공간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기가 어려워졌다.

 

우리는 오늘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살아있는 모두에게 초행길이다. 끝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100세 시대라지만 부모들은 자신의 늙고 병듦이 자식들에게 짐이라는 생각을 깊이 하고 있다. “자다가 죽는 게 소원이다.” 빈말 같지만 빈말이 아니다. 하지만 육신을 고통 없이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늘의 보살핌이 있어야 가능하다. 인간의 죽음이지만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슬프다.

 

노부모를 모시고 한 시대를 건너가는 자식들 또한 힘들다. 무엇보다 죄책감에 시달린다. 고향집에 계시면 유배당한 것 같고, 요양병원에 계시면 시커먼 동굴에 유폐된 것 같다. 논밭을 휘저으며 어떤 복선도 없이 땅에 힘을 풀었던, 부모들의 싱싱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하지만 음흉하고 위험한 도시에 그들을 모셔야 한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말수가 줄어들고 도회지의 노년은 적막하다. 그 적막을 깨는 힘과 지혜가 자식들에게는 부족하다. 별수 없이 불효자가 되어간다. 그런 자식의 마음을 어머니도 헤아린다. 그래서 다시 적막하다.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꽃을 드렸다. 그저 웃는 어머니에게 할 말이 없다. 어머니는 꽉 찬 100세이다. 세상 어디에도 머리를 들 수 없는 불효자지만 삼가 지난 세월에 두 손을 모은다. 둘러보면 아무도 효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효가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다. 불효자를 양산하는 시대이다. (하늘이 내린 효자들께는 미안하다.) 어디에 계시든 (하늘에 계실지라도)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짓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주 가까이에 있지만 멀어져간 어머니들, 시대에 버림받은 박복한 양반들. 거칠고 치열했지만 정직하고 고왔던 삶에 삼가 꽃을 바친다. 이렇듯 푸른 세상, 고향의 녹색바람이 어머니들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김택근 시인 | 경향 2024.05.07.

 

 

선주권 인정과 과거 청산

사죄 그리고 기각. 아이누를 보는 두 가지 시선이 충돌하고 있다.

 

내가 선주민족 아이누를 처음 만난 건 일본 최북단 마을 홋카이도 사루후쓰무라(猿払村)에서다. 2006년의 일이다. 1942년부터 이 지역에 일본군 아사지노 비행장이 건설되었고, 한반도에서 수천명의 노동자가 강제 연행되었다. 가혹한 환경에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다. 이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사루후쓰에 모였다. 이 발굴엔 아이누 민족도 참가했다. 아이누는 자신의 땅에 묻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유골의 영혼을 달래는 제사를 올려주기도 했다고, 학문의 자유라는 명목하에 수천구의 유골을 빼앗긴 아픈 역사도 들려줬다. 한국과 아이누는 유골로 상징되는 아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최근 선주민족 아이누와 관련된 움직임이 주목을 받았다. “아이누 민족에 관한 과거의 연구 자세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진심 어린 사죄를 표명한다.”(41)

 

일본문화인류학회가 식민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과거의 연구 자세를 반성하고 아이누 민족에게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국내외의 학회가 아이누에게 사죄하는 것은 처음이다. 왜 사죄한 것일까?

 

일본 정부는 아이누가 선주민족임을 부정하고 전통적인 어업 등의 문화를 금지하는 동화정책으로 오랫동안 차별해 왔다. ‘학문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차별과 인권 유린은 더욱 잔인했다. 문화와 DNA 연구를 한다는 이유로 유족의 동의 없이 무덤을 도굴해 유골을 수집했다. 아직도 1800여구가 반환되지 않고 있다. 문화인류학회는 이러한 과거의 폭력적인 연구 자세를 반성하고 사죄한 것이다.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학회의 사죄만으로는 아픈 역사를 청산할 수 없다. 권리 회복이 필요하다.

 

아이누는 선주권(先住權)을 인정받기 위해 3년이 넘는 법정 싸움을 하고 있다.

아이누 관련 단체는 신의 물고기라는 아이누 전통의 연어잡이를 허가 없이 할 수 있는 선주권을 인정해 달라고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4월 중순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현행법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 개정이 필요하다.

 

2019년 일본 정부는 아이누를 선주민족으로 인정하는 아이누시책추진법을 만들었지만 선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엔에서 일본도 찬성한 원주민권리선언(Declaration on the Rights of Indigenous Peoples·2007)’이 채택된 이후 세계 각국에서 선주권을 인정하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 정부의 자세는 매우 소극적이다.

 

학회의 사죄와 선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 이것은 일본 사회가 과거사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관한 과제를 남겼다. ‘아이누시책추진법5년간의 실시 상황을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 올해가 바로 그해이다. 기시다 총리는 5월 이후 이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까? 과거의 국가폭력을 대하는 일본 정부의 인식과 자세를 확인할 기회이다. 아이누 민족의 선주권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사회가 민족 차별 없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가 되지 않을까? 일본이 청산해야 할 과거는 이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진환 일본 방송PD | 경향 2024.05.07.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가정의달, 우리는 지금 행복할까? 5월에 집중된 온갖 가족 관련 기념일들은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행복을,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더 불행함을 안겨준다. 이 불행함이 안타깝게도 우울과 연결되고, 그 우울감이 치유되지 않고 쌓이면 우울증이 된다. 우울증 환자가 2023년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 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모두 어떻게 발병하는 것일까?

 

코로나19 시기 급증한 우울증 환자는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기회를 얻지 못한 10대와 청년들이었고, 이들의 우울증 진료 비율은 2019년에 비해 202230% 늘었다고 보고되었다. 반면 코로나19가 끝나고 증가한 우울증 환자는 경제적 여파를 견뎌내다 지친 중장년들이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와 자살에 관한 경찰청 추정치를 보면 중장년 우울과 자살이 작년에 20% 가깝게 늘었다. 더욱이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초까지 늘어난 20대 남성들의 자살은 전세 사기를 포함한 코인, 주식 등의 이슈와 그 시기를 같이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자료들은 이런 우울증 환자의 증가와 사회적 사건들의 연관을 증명하고 있다. 개인의 의지나 조건, 환경에 따른 발병만큼이나 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여 우울증이 발생하고 있다.

 

작가 마크 맨슨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한국을 여행했다고 유튜브를 통해 알렸고, 본인이 탐색한 한국 우울증의 원인은 가부장적 유교제와 자본주의의 나쁜 점들이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캘리포니아 법대 조앤 윌리엄스 교수는 한국의 초저출생 현상을 보고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라고 교육방송(EBS)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옥스퍼드대학 데이비드 콜먼 명예교수는 한국은 가장 빨리 소멸될 민족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기존의 가치를 버려야만 소멸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세계보건기구 국장, 다트머스대 총장 그리고 세계은행 총재를 역임한 김용은 “K멘털에 빨간 신호가 왔다는 큰 우려와 함께 자살, 우울 그리고 초저출생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처럼 나라 밖에서 여러 통계와 구성원들의 행동과 관련한 다양한 현상들을 관찰한 학자와 작가들은 한국사회가 위험한 길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해외 언론은 한국 정부와 정치인, 전문가들이 시민들의 회복탄력성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타임지의 한 기자는 한국 정부의 우울과 자살에 대한 인식 부족과 부실한 대책에 놀라며, 예산 부족과 중앙집권적 운영에 큰 우려를 표했다. 뉴욕 타임스 기자 또한 한국사회의 우울, 자살, 저출생에 대한 이슈를 사회가 아닌 개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긴다는 점에 놀랐다고 했다. 한국의 우울과 자살, 저출생, 4b(비혼, 비연애, 비섹스, 비출산) 행동, 은둔과 고립 등은 이제 국제적 관심사인데, 정작 우리 정부와 정치, 그리고 건강 이슈에서는 핵심적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자기 객관화의 고등지식, 즉 자신의 모습을 보는 데 실패하고, 프로이트가 말한 부정의 상태, 즉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방어기제로 눈을 가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말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지 우려된다. 전쟁 사망자보다 더 많은 자살자 수, 무기력, 은둔, 고립, 그리고 결혼·출산·사랑마저 포기한 수십만 청년들이 정책의 중심에서 보이지 않는 나라. 위험한 순간,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처럼 행동하지 않고, 각자도생의 경쟁적 야만에서 벗어나 행복의 길로 우리는 갈 수 있을까?

 

지금은 불행해도 미래가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면, 5월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버틸 수 있을 텐데, 마침 새 국회가 5월 말 문을 연다. 우울, 자살, 저출생, 은둔과 고립 등 경계선에 서 있는 많은 국민들의 사회적 우울증을 치유하는 국회로 시작하길 바란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경향 2024.05.07.

 

 

 

마을이 키우는 아이

마냥 아기일 것만 같던 첫째가 두달 전 초등학생이 됐다. 그래도 제법 컸는지 아이는 많은 일을 스스로 해내지만 여전히 마음이 안 놓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부모의 동행 없이 하는 모든 일이 아이에겐 새로운 도전이다.

초반에 아찔한 상황도 몇번 있었다. 한번은 아내가 아이를 학교 정문까지 잘 데려다 놓았는데, 아이가 무슨 걱정이 생겼는지 신발장 앞에서 돌아 나왔나 보다. 이미 집에 가버린 엄마를 찾으며 우는 아이를, 아랫집에서 사는 친구의 엄마가 발견하고 전화를 줘서 다시 찾으러 나갔다. 다른 날엔 학원 선생님과 의사소통 문제로 정해진 장소에서 못 만나게 되면서 아이가 또 헤맸다. 울면서 학교를 방황하던 아이를 이번엔 윗집 형네 엄마가 발견했다. 그날은 학원을 쉬고 놀란 아이를 집으로 불러 달래줬다.

 

자립도 좋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걱정이 앞선다. 혼자 내버려뒀다가 사고라도 나면, 사고가 아니어도 트라우마로 남으면 어쩌나 불안하다. 언젠가 아이가 부모를 떠나겠지만 지금이 그때인지 확신이 없다. 아이가 스스로 서길 도우면서도,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계속 지니게 할 순 없을지 묻게 된다. 부모의 힘만으론 역부족이다.

 

우리가 경험했듯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이웃이라는 안전망이다. 방황하던 첫째를 발견해준 이웃들 외에도 도움의 손길은 도처에 있다. 또 다른 아랫집의 어르신은 매일 등굣길에 교통지도로 도와주시며, 동네 밥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부모들 식사하는 동안 아이를 대신 봐주시기도 한다. 시장에서 화폐로 거래되지도 않고 국가가 나서서 복지정책을 펴는 것도 아니지만, 돌봄이라는 필수 공공서비스가 마을에서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돌봄 공동체는 인류 역사에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한디디 작가는 커먼즈(commons)란 무엇인가라는 신간에서 다양한 국가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온 공동체에 주목한다. 근대 이전 아시아와 유럽에선 피붙이를 넘어 이웃과 손님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의 가족-마을 공동체가 보편적이었다. 노동과 분배, 돌봄과 재생산은 숲이나 목초지 같은 공통의 생활기반 위에서 조직되었다. 산업화를 거치며 가족의 단위가 좁아지고 공공의 자원을 나누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지만, 지금도 사람은 생애 모든 주기에서 타인의 존재와 돌봄이 필요하다. 존재론적 위태로움의 상당 부분은 시장에서 해소되지만, 때론 국가의 개입이, 때론 협동조합 같은 조직이, 때론 전통이나 관습이 시장을 보완하기도 한다.

 

최근 심각한 저출생에 대한 대책으로 공동체의 복원이 거론된다. 공동체의 최소 단위인 가족이 첫번째로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며, 이 가족의 범위는 종종 조부모까지 확장된다. 맞벌이 부부가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데 친정엄마(또는 시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함은 이미 경험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만으로 양육을 감당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조부모 역시 돌봄의 대상이며, 조부모의 거주지에 따라 부부의 직장 선택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 일 때문에 세종에 내려와 있는 우리에게도 조부모의 상시적 도움은 선택지가 아니다.

 

따라서 가족을 넘어서는 더 넓은 마을 공동체를 구상할 필요가 있다. 마을 어른들이 아이들 돌봄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공식·비공식 제도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 아랫집 어르신의 등하원 교통지도가 좋은 예이며, 비슷한 나이 부모들 사이 공동육아를 활성화해보는 것도 좋다. 학교를 중심으로 장시간 돌봄을 제공하는 늘봄학교 같은 시도도 의미는 있지만 꼭 국가가 다 하려 할 필요는 없다. 지역의 자치공동체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비용을 줄일 뿐 아니라 아이가 더 풍성한 삶을 경험할 길을 열어준다.

 

물론 새로운 형태의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시장이나 국가에 모든 걸 맡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다. ‘옛날이 좋았지하며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도 아니다. 근대가 발견한 개인의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서로의 위태로움을 돌봐줄 수 있는 공동체의 가치를 복원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 깊다. 한디디 작가의 표현을 한번 더 빌리면, “다양한 존재들과의 만남, 찬란하게 변화하는 풍경을 엮으며 이어지는 열린 길 위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 더욱 충만하고 풍요로운 사건이 될 것이다. 저출생 해결은 삶의 터전으로서 마을을 회복하면서 주어질 덤이다.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 한겨레 2024.05.07.

 

 

 

44년 만에 피해자에서 증언자

아따 참 오래 걸렸네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이 진상규명됐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일부 계엄군이 자행한 강제추행·강간·성고문 등 피해 사건 중 16건에 대해 진상규명결정을 내렸다. 조사를 위한 법적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과거사 성폭력 사건의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규명한 것은 처음이다. 지난해 12월 한 피해자는 위원회로부터 국가가 당신의 피해가 사실이라 인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숨 푹 놓이고 가벼워진 기분이었어요. 위안부 할머니들 심정이 이해됐어요. 피해를 인정받고 사과받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예요.”

 

이들이 국가로부터 피해를 인정받는 데는 43년이나 걸렸다. 1990년대만 해도 5·18민주화운동은 폭도에 의한 것으로 오도된 데다, 성폭력에 대한 가부장적 통념은 피해자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2018년 초 미투 운동으로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그해 5월 김선옥씨가 공개 증언을 했다. 김씨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석방 전 수사관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고 그의 증언은 정부가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을 발족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김씨는 증언 이후 더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2020년까지 세상에 자신의 피해를 알리기 위해 애썼지만 인터넷상의 악성 댓글은 자녀들에게까지 상처를 줬다. 그는 광주를 떠났고 현재 암 투병 중이다.

 

회복되지 않은 피해는 이들 생애 전반에 신체적·정신적·사회관계적 2차 피해가 지속되게 했다. 진상규명된 피해자 대부분이 사건 후 자살 충동을 느꼈고, 1회 이상 자살 시도를 한 경우도 많았다. 강간 피해를 입은 ‘6번 피해자는 일부러 배움이 짧은 남자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아들 둘을 낳았지만 양육도 벅찼다. 둘째 아들이 술을 안 먹으면 그렇게 좋은 엄마가 왜 이렇게 다혈질적으로 변하냐고 했지만 해줄 말이 없었다.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던 그는 언제든 갈 사람이라 정을 주지 않으려 아들들을 보듬지 못한 매정한 엄마였다고 술회했다. 강제추행을 당한 ‘7번 피해자는 모유 수유 과정에서 젖가슴이 더러워졌다는 자기혐오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현재 은둔형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의 정서적 문제가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애착을 형성해야 하는 시기에 딸을 밀어냈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죽지 않았기에 자신의 피해는 작은 것이라 달래왔다. “총상 입은 사람들과 행방불명자, 유족들을 생각하면 저희 피해는 작다고 느낍니다. 미안하고 빚진 마음도 여전합니다.”

 

40여년간 피해를 줄이고 감춰야 했던 이들에게 국가는 어떤 책임 있는 조치를 내놓아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위원회가 정리한 것처럼 국가가 5·18 당시 성폭력 피해와 그들의 생애사를 관통해온 후유증에 대해 온전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너무 늦은 인정에 대한 사죄다. 마지막으로 발화하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16건은 시작일 뿐이다. 위원회는 조사 대상 사건 52건을 파악했지만 조사 거부로 중단된 사건이 24, 피해자의 사망·자살·정신병 발병 등으로 진술을 들을 수 없는 사건이 10건이었다.

 

지난달 285·18 성폭력 피해자 10명이 처음 만났다. 이들은 44년 만에 피해자에서 증언자로 세상에 나와 집단으로 첫발을 내디디려 한다. 이들은 앞으로 자조모임을 만들고 정신적 손해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소송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위원회가 말하듯 3명이 증언했다면진상을 규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 피해자의 증언이 첫 진상규명 조사를 이끌어냈고 조사에 응한 19명의 피해자들이 40여년이 지난 사건에 대해 또 다른 증언자가 됐다. 이제 나머지 숙제는 우리의 몫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가 되겠다고 나선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44년 동안 자신의 피해를 감춰야 했던 이들의 아픔에 진심을 다해 손 내밀어야 한다. “당신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이제야 손 내밀어 미안합니다라고 말이다.

임아영 젠더데스크 | 경향 2024.05.08.

 

 

노인을 위한 집은 없다?

어디서 늙어갈 것인가가 고령화된 우리 사회의 큰 관심사가 된 게 맞나보다. 교양 다큐나 시사 프로에서 간간이 나오던 소재가 이제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진출했다. 십년 전만 해도 티브이 토크쇼에서 수다를 떨던 인기 연예인들이 다양한 실버타운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이 내일(10)부터 방영된단다.

 

몇달 전 건설 붐이 일어난 고급 실버타운 이야기를 쓰면서 그림의 떡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향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앞 동 뷰라고 해도 내 집에서 늙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게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집 앞에 화분을 잔뜩 키우며 해 질 녘 집 앞 평상에 앉아 같이 수다를 떠는 이웃이 없는 세대다. 없으면 못살 절친들이 있지만 종일 수다를 떨면서도 얼굴 보는 건 분기별로 한 번도 힘든 랜선친구들이다. 현실적으로는 제2 베이비붐 세대인 내 또래 인구비율을 고려하면 돌봄이 필요해졌을 때 가족이나 큰돈에 의지하지 않고 집에서 공공서비스에만 의지하기는 무리다. 게다가 지금 내 집의 내세울 거리라고는 서울에서 매연이 가장 심하다는 정도? 문화생활은 이미 넷플릭스와 유튜브에 의탁한 지 오래다. 값비싼 수도권의 실버타운을 열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서울보다는 훨씬 저렴한 마을 규모의 전북 고창 실버타운에 부모님이 입주해 만족스러운 삶을 꾸려간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보니, 꽤 괜찮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버타운 입주가 내키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곳 역시 여생을 보내는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실버타운이 돌봄이 본격적으로 필요해지면 퇴소해야 한다. 치매가 오거나 거동이 불편해지면 다른 시설로 옮겨야 한다는 점에서 실버타운도 집이 아니라 시설처럼 느껴진다.

 

맘 편하게 여생을 보낼 내 집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돌봄이 필요한 노인 주거시설에 최대한 집과 같은 자립적 일상을 유지하도록 돕는 어시스턴트 리빙의 개념을 도입한 케런 브라운 윌슨은 기존 시설들이 그곳에 사는 노인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시설 입소를 대부분 노인이 아니라 자식들이기 결정하기 때문이다. 부모와 함께 또는 따로 시설을 둘러보는 자식들에게 어필하는 건 안전과 위생이다. 걷다가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지거나 샤워도 못하고 용변도 처리하지 못하는 사태를 막는 게 자식들의 최대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걸음이 위태로운 노인은 휠체어가 강요되는 시설에 들어가 자력보행을 포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고립감 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는 돌봄 시설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 미친 자가 등장한다. 위생이 가장 중요한 요양시설에 개와 고양이, 새를 들여온 의사 빌 토마스다. 삶을 이어가기 위한 시설에 대기된 죽음만이 가득하다는 사실에 고심한 그는 요양원 경영진과 개, 고양이까지 돌봐야 한다는 것에 난색을 표하는 돌봄 인력들을 설득하고 밀어붙여 동물들을 들였다. 무모하게도 잉꼬 백 마리를 한날 배달해 복도에 새 백 마리가 날아다니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을 겪은 뒤에도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했다. 하지만 하나씩 해결해나가면서 노인들이 변해가는 과정, 개를 보살피고 새를 기르며 다시 삶이라고 할 만한 것을 되찾아오는 것을 목도했다. 저자는 이를 초월이라는 심리학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에게는 매슬로의 욕구 위계 중 자아실현 단계보다 더 위에 초월단계가 존재하는 데 다른 존재가 잠재력을 성취하도록 돕고자 하는 초월적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삶의 황혼에 다다른 노인들에게도 동물이나 아이를 돌보고, 이웃에게 도움을 주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있다는 의미다. 실버타운이 노인들만의 성채가 되는 것을 벗어나 이웃들과 교류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실제 국외에서 마을 융합형 단지들이 늘고 있는 건 이런 문제의식의 발로다.

 

최근 서울시가 서울의 노년층을 지역으로 옮겨살 수 있게 하는 골드시티구상을 발표했다. 서울의 주택부족과 지역의 소멸위기를 함께 해결한다는 취지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나오는 기사마다 명품 주거라는 표현이 요란한 디자인의 한강의 세빛둥둥섬을 떠올리게 한다. 고급 시설보다 노년의 욕구와 의지가 반영되는 거처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건 나만이 아닐 것 같다.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 한겨레 2024.05.08

 

 

가치외교의 탈을 쓴 이념외교

2021년 여름 학술지 신아세아에 글이 한 편 실렸다. ‘·중 신냉전 시대 한국의 국가전략이란 제목의 이 글은 ·중 대결 속에 한국의 헤징 외교는 불가능하며 한국은 미국의 진영 대결 승리에 전력을 다해 힘을 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저자는 구냉전과 신냉전의 유사성에 주목하며 미·중 간 안보와 경제 문제 전반에 걸친 전면전와중에 다른 나라들이 어느 진영에 가담할 것인지 가늠하는 기준은 어떠한 이념과 가치를 표방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 주도 자유민주주의 연대에 참여해야 미래의 권력과 부를 나눠 갖게 될 것이라고 한다. 기존 남북 대화는 북한에 이로울 뿐이어서 대화보다 북한 인권 문제에 방점을 두고 한·미 확장억제 강화에 힘써야 한다고 제안한다. 글은 20223월 대선을 대한민국세력 대 반국가세력으로 구도화하며 국민의 선택이 향후 수십년 동안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맺는다.

 

학술 논문이라기엔 짧고 거친 이 글을 읽다보면, 이듬해 집권한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 기조를 점쟁이처럼 예견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름 아니라, 저자는 윤석열 정부의 국가안보실 1차장이 된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이다. “자유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의 블록화” “자유민주주의,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끼리의 연대가 지난 2년 동안 대통령뿐만 아니라 외교장관 입에서도 앵무새처럼 되풀이된 시작은 여기에 있었다.

 

지난 2년 윤석열 외교의 중요한 결과물은 한··일 군사협력 강화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미·일과의 관계 강화에 진력했다. ·미 연합군사훈련에 일본의 빈번한 참여를 수용했고, 미국의 대중국 포위책인 인도·태평양 전략과 유사한 한국판 인·태 전략을 내놨다. 미국의 독려 속에 일본의 과거사 책임에 면죄부를 주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용인했고, 급기야 캠프 데이비드 한··일 회담에서 3국 동맹 수준의 합의를 했다.

 

그 후과는 북·러관계의 밀착, 최악의 한·중관계로 돌아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 다른 요인들도 있지만 한국이 한··일 협력에 온몸을 실은 데 따른 반작용 성격이 분명히 있다. 윤 대통령의 대만 관련 언급, 우크라이나 방문 등 불필요한 행보도 중·러를 자극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년은 한국이 동북아 신냉전 촉진자 역할을 해온 시간이었다.

 

일각에선 이를 가치외교라고 의미부여한다. 물론 한국 같은 중견국 외교 정책에 자유, 인권 등 가치를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지금 정부가 하는 것은 가치외교라고 하기도 어렵다. 자유, 인권을 내세우면서도 국내외적으로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연출됐다. 더 큰 문제는 외교에서 진영 대결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비우호국과의 관계에서 비타협성이 두드러졌고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은 마치 과거에 소련에 했던 것처럼 중국이 미국 앞에 완전히 굴복하고 쓰러질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김태효 교수의 진단이 맞는지도 의문이다. ·중 경쟁이 오래 이어질 수 있지만, 중국이 굴복할 때가 조만간 올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미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에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확인하며 경쟁과 공존을 함께 모색하려고 한다. 독일, 프랑스, 호주 같은 나라들은 최근 몇년간 경제적 실리를 위해 중국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 교수가 글을 쓴 2021년에 중국 국력이 정점을 찍었다는 피크차이나론이 미국 내에서 제기됐지만 최근엔 그런 전망이 허상일 수 있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중국의 부상이 동북아에 초래할 지정학적 불안정성을 고려하면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일 협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한국이 그 협력에 뛰어든 동기가 미국의 진영 대결 승리를 위한 것이라면 위험하다. 한국은 미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까지 대중국 정책이라 할 만한 것을 보여준 적이 없다. 한국이 강하게 나가면 중국이 태도를 바꿀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만 표출해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미·중 경쟁 속에 실종되다시피 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중국과의 협력 공간이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과 솔직한 대화를 통해 한··일 협력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하고 미국의 기대를 낮출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이 이념의 색안경을 벗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손제민 논설위원 | 경향 2024.05.08.

 

 

()유대주의라는 형틀로 미래세대 옥죄는 미국

지난 4월 중순 이래, 팔레스타인 반전·평화, 이스라엘 보이콧 운동이 더 크고 빠르게 미국 대학가에 확산하고 있다.(관련 자료 그림 참조). 대학 당국과 경찰의 강경진압에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가장 직접적인 도화선은 418일 컬럼비아 대학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생 체포·연행 사태. 이후 시위와 농성 3주째 들어서는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동부 뉴욕, 남부의 텍사스와 플로리다에서 북부 미시간과 미네소타에 이르기까지, 참여대학이 급격하게 늘었다. 그리고 대학 농성은 이제 국경을 넘어 캐나다, 호주, 프랑스, 영국, 스페인, 멕시코, 터키, 튀니지, 그리고 일본까지 퍼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반전 농성과 집회는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경찰이 오기 전까지는이라는 대목이다. 427일자 댈러스 신문이 전한 텍사스 주립대 오스틴 캠퍼스 상황이다. 하버드대 신문 크림슨 기자들의 430일 농성장 취재기도 같았다. 53일자 보스턴글로브 신문도 경찰이 오기 전까지 농성은 평화적이었다고 강조한 뉴햄프셔대 명예교수의 발언을 기사화했다.

 

상황이 그러함에도 대부분 대학은 농성이 시작되면 즉각 경찰투입을 요청하고, 경찰 역시 폭동진압 장비를 갖추고, 기마부대를 앞세우기도 하면서, 전투에 임하는 진압군처럼, 공격적으로 학생들을 몰아붙인다.(사진 참조). 에모리 대학에서 현장을 목격한 한 교수는 마치 전쟁터 같다라고 탄식했다. 미국의 대학과 경찰은 왜 이러는 것일까?

 

417, 학생들이 천막농성을 시작하자마자 컬럼비아대 총장은 경찰력 동원을 요청했다. 캠퍼스에 진입한 경찰은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더 많은 학생이 모였다. 학교는 29일까지 농성 중지와 농성장 철거를 요구했다. 학교의 징계가 시작됐고, 일부 학생들은 농성장을 해밀턴 홀이라는 건물로 옮겼다. 그곳은 68년 베트남 전쟁부터 85년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항의농성이 이어졌던, 대학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알려진 건물이다. 다음날 새벽, 경찰 특수부대가 투입됐고, 농성 학생들은 쫓겨났으며, 200여 명 가까운 학생들이 체포됐다. 이후 총장은 15일로 예정된 졸업식을 포함, 교내 질서유지를 위해 17일까지 경찰의 계속 주둔을 요청했다.

 

427, 몬트리올 소재 맥길 대학에서도 학생들의 천막농성이 시작됐다. 학교 측은 경찰에 해산과 진압을 요청했다. 학생들의 반유대주의 언사와 공격적 행위가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몬트리올 경찰은 아직 아무 범죄도 일어나지 않은 곳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라며 대학의 요청을 거부했다. 기다렸다는 듯 즉각 진입한 미국 경찰과는 전혀 달랐다. 한편 51, 퀘벡 법원은 일부 학생들이 제기한 천막농성 금지처분 신청을 각하했다. 소송에 참여한 학생과 교수들은 농성 참가 학생들의 행동과 천막이 교내 불안감을 조성한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에서는 사정이 긴박하다고 볼 이유가 없고, 학생들의 평화적 집회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라고 판결한 것.

 

물론 캐나다 대학의 상황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대학과 주 당국, 연방 정부 트뤼도 수상까지 나서서 캠퍼스 안전과 질서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나는 차이는 명백하다.

 

미국 주류사회 지배하는 친이스라엘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학생 농성에 대해 미국의 대학과 경찰은 과도하게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다. 지난 12, 같은 사태로 쫓겨난 하버드, 펜실베이나 총장 사례가 교훈(?)이 됐을 수도 있고, 대학 지원 중단을 협박(?)하는 정치권에 몸을 사린 점도 있었을 것이다. 또 폭력적 대응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고 무질서한 사태라는 점을 부각하면, 학생들에게 비난 여론이 쏠릴 것이라는 학교와 경찰의 계산도 있었음직하다.

 

그러나 좀 더 큰 틀에서 보면 이는 미국 주류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스라엘주의(Israelism)’라 불리는 친이스라엘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친이스라엘 국가다. 공화당, 민주당 가릴 것 없이 정부와 의회는 이스라엘과 궤를 같이한다. 주류언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미국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의 개별 정치인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찬·반이 있고,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지지율도 출렁일 수 있지만, 친이스라엘 이데올로기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미국은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과 행태, 역사적 정통성을 문제 삼는 국내외 운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확산을 통제한다.

 

이번 농성과 시위에서 학생들이 대학에 요구하는 핵심 사항은 이스라엘 BDS. BDSBoycott, Divestment, Sanctions의 약자, 즉 이스라엘에 대한 투자 중지, 기존 투자철회, 그리고 여러 형태의 제재(: 학교 협력관계 중단)를 의미한다. , 대학의 이스라엘 관련 투자 포트폴리오를 투명하게 밝힐 것과 무기 생산을 포함, 전쟁으로 수익을 올리는 기업에 투자하지 말 것, 기존 투자를 철회할 것, 이스라엘 교육기관과의 협력을 취소 또는 중단할 것 등이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벌이는 죽임에 대한 학교의 투자를 중단하라!(Divest from death!)’는 것이다. 이스라엘주의 입장에서 BDS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전쟁’(2017년 하원의장 P. 라이언)이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당성을 부정하는(delegitimize) 반유대주의 행위다.

 

한 외교 전문가가 지적하듯, 지금 의회와 바이든 정부가 취하는 닥치고 이스라엘 지원 정책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반유대주의라는 명분으로 억압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민주주의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지금 우리는 대학 캠퍼스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과 주류매체는 이스라엘의 보호막

이를 정치권과 주류매체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통령 바이든은 대학가 농성사태가 확산하자 22, 이를 반유대주의행태라고 비난했다. 하원의장은 24일 컬럼비아 대학을 방문, “선동가들과 급진파들이 대학을 점령했다. 반유대주의라는 바이러스가 대학에 퍼지고 있다라며 학생들을 비난했다. 함께 한 동료 공화당 의원은 하마스의 지지를 받고 있다니, 여러분들 퍽 자랑스럽겠다라며 농성 참여 학생들을 조롱하듯 비난했다. 의장은 나아가 대통령에게 군을 투입, 대학의 법과 질서를 바로잡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이라이트는 하원이 작년 12, ‘반시온주의는 반유대주의라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 그리고 지난 51, ‘반유대주의 금지법(Anti-semitism awareness act)’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비판 금지법,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을 위한 국가보안법이다. 사실, 주 단위에서는 이미 이스라엘 보이콧 금지법, 반유대주의 금지법이 시행 중이다. 이제 그 금지를 연방 차원으로 올리겠다는 뜻이다. ‘의회는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법을 만들 수 없다라고 규정한 헌법도 이스라엘주의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주류매체 역시 이런 정치권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경찰이 오기 전까지 대학농성이 평화적이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유대인에 대한 차별 발언이나 안전 문제, 외부인들의 참가나 활동 여부에 주목한다. 팔레스타인과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 발언이나 안전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해당 학교 학생 이외의 사람들은 외부 선동가(outside agitators)’로 규정한다. 협박이나 공격, 증오 발언에 대한 사실 검증보다 주장을 더 열심히 전달한다. 시위나 농성 참여자가 대부분 학생인데도 외부의 선동을 계속 의심한다. 뜻을 같이하는 시민이 있을 수 있다는 상식적 판단보다는 농성사태가 불순분자의 작전일 수 있다는 음모설(?)을 부각한다. 폭력 주장에 대한 진실은 주류매체가 아니라 소셜 미디어가 드러낸다.

 

이는 이미 예정된 일이기도 하다. 미국 주류매체의 이스라엘 편향성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올해 초 드러난 뉴욕타임스나 CNN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보도지침(coverage guidance)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팔레스타인 기사에서 학살(genocide),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점령지(occupied territory)라는 용어를 피하라는 것이 타임스의 지침이라면, ‘하마스의 대량 살상, 인질 납치 공격을 항상 강조하고 사상자 규모를 언급할 때도, ‘이 수치는 하마스 보건부의 발표라는 점을 반드시 곁들이라고 한 것은 CNN의 지침이다. 이런 친이스라엘 편향성은 농성사태 보도에도 그대로 이입된다. 젊은 대학생들이 기성 언론을 의회, 군과 함께 가장 불신하는 세 기관 중 하나로 인식하는 배경이다.

 

반유대주의라는 형틀

대학과 경찰, 정치권과 언론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희들은 반유대주의자라는 것이다. 한국식으로 하면 너희들은 빨갱이라고 낙인찍는 일이다.

 

419, 유대인 단체 Anti-defamation League 대표 J. 그린블랫 MSNBC 방송: ‘대학 농성 주도단체는 헤즈볼라와 같은 이란의 대리조직’. 429, 폭스뉴스 진행자 M. 레빈: ‘대학 농성 참가자는 히틀러 유겐트’. 430, 클린턴 정부 재무장관 L. 서머스 X(트위터) 멘션: ‘대학 내의 팔레스타인 깃발 그 자체가 반유대주의 테러를 의미’. 같은 날, 공화당 의원 N. 말리오타키스: ‘반유대주의 행위를 막지 못하는 대학에 정부 지원 중단법 만들 것’.

 

더 적나라한 것도 있다. 농성을 주도하거나 참여하는 학생들에 대한 신상털기,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의 연락처까지 온라인으로 공개하기, 그렇게 해서 온갖 협박 유도하기. 이들을 취업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공유하기 등등. 심지어 해당 리스트에 오른 학생들에게 고용금지 조처를 공언하는 기업도 있고, 학생들 움직임에 강경하게 대응치 않는다면 약정 후원금을 내지 않겠다고 대학에 통보하는 부호들도 있다.

 

반유대주의라는 형틀로 미래의 주역인 청년들을 옥죄는 미국. 미국은 지금 자신의 미래를 옥죄고 있다.

김평호 저술가·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5.09.

 

 

윤 대통령, 불행한 퇴장을 향한 빌드업을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2개월 즈음 두 달 남은 듯 두 달 지난 윤석열 정부라는 칼럼을 통해 대통령의 어퍼컷 세리머니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국정을 만만히 보다가는 남는 것은 임기 말 윤 대통령 본인의 늘어난 몸무게밖에 없을 것이며, 자기관리에 실패한 흘러간 복서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당시 칼럼은 크게 틀리지 않은 듯하다. 집권 2년을 맞은 윤 대통령은 덩치만 컸을 뿐 기초체력과 실력은 형편없는 복서임이 드러났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로 등을 보였고, 엑스포 유치 실패로 다리가 풀렸으며, 총선 참패로 그로기 상태가 됐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현실을 외면한다. 집권여당이 총선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한 것은 더는 못 봐주겠다. 너희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민심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지만, 대통령이 총선 민의를 왜곡해서 받아들이고 있음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확인됐다. 여론이 압도적으로 찬성하는 김건희·채 상병 특검은 거부했다.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에 대해 박절하지 못해서라고 했다가 현명하지 못해서라고 표현만 바꿨을 뿐이다. 각종 의혹과 정책 실패에 대한 변명은 장황했고, 국민들이 바라는 사과는 찔끔 수준이었다. 고구마 10개는 먹은 듯 속을 답답하게 하는 회견이었다.

 

윤 대통령의 회견과 최근 민정수석실 부활 등을 지켜보면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윤 대통령이 버티기, 이른바 침대축구에 돌입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긴 것이다. 예컨대 민정수석실 부활은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고 느슨해진 사정기관과 공직사회를 통제하겠다는 의도라고 여야 모두에서 의심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과 김건희 특검은 검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수사를 지켜본 뒤 논의하자고 했다. 시간을 끌면서 민정수석을 통해 검찰과 공수처 수사를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제어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 아닌가.

 

그러나 특검은 뭉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채 상병 순직사건수사 외압에 윤 대통령이 관여했다고 대다수가 생각한다. 주가조작 가담 혐의, 양평고속도로, 명품백 수수 등 여러 논란을 해소하려면 김건희 종합 특검이 필요하다는 야당 주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윤 대통령은 경제공동체 논리로 최순실의 각종 비행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엮었다. 경제공동체로 탄핵을 끌어냈는데, 운명공동체인 김 여사 문제는 어떻게 대응할 건가.

 

 

무엇보다 침대축구도 기초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갤럽 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2주 연속 25% 밑으로 나타났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직전 지지율과 비슷하다. 이런 체력으로 뭘 할 수 있겠나. 공직사회는 슬금슬금 등을 돌리고 있고, 보수언론도 대통령 태도를 비판한다. 아무리 격노하고 격앙해봐야 대통령의 고함은 이제 용산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심판이고 관객이기도 한 국민들은 침대축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한국 축구 보는 것도 속 터지는데 대통령의 침대축구까지 볼 순 없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이 방탄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여당의 108석은 성긴 그물이다. 제 코가 석 자인 여당이 언제까지 대통령 보호를 자처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여론에서 고립된 국정운영을 지속할 경우 성긴 그물 여기저기 구멍이 날 것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는 빌드업을 하고 있다.

 

<카사블랑카>의 명배우 험프리 보가트의 유작인 <하더 데이 폴>(The Harder They Fall·1956)에는 덩치만 컸지 실력은 형편없는 권투선수 토로 모리노가 등장한다. 토로는 유리턱에 솜방망이 주먹을 가진 가망 없는 선수였지만, 자신의 프로모터가 상대 선수를 매수하는 덕분에 KO 연승을 거둔다. 토로는 자신을 실력자로 착각하지만, 매수가 통하지 않는 챔피언과 만나 패한다. 간신들의 아부에 속아 민심과 유리됐다가 총선에서 두들겨 맞은 대통령 모습이 겹쳐졌다.

 

그래도 영화 속 토로는 챔피언의 펀치를 맞으면 무조건 쓰러져 일어나지 말라는 주변 권유에도 정면으로 싸우는 식으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킨다. 윤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국정기조 바꾸겠다고 무조건 사과하고, 생살을 자르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 말고 현 상황을 대처할 방법은 없다. 권투에선 패자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통치의 세계에서 패배는 훨씬 비정하다. 여론을 나몰라라 한 대통령의 말로는 항상 참담했다. 회견을 보면서 대통령의 불행한 퇴장이 그려졌

이용욱 정치에디터 | 경향 2024.05.09.

 

 

밀양이 알려준 연대의 힘

2014611, 동이 터올 무렵에 밀양의 산등성이 곳곳에서 아픈 비명과 허탈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국전력이 추진하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대한 반대 투쟁이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수백명의 경찰에 의해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2005년부터 10년 가까이 이어온 저항이었지만 농성 대오와 천막이 해체되는 데에는 몇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러니까 농성장을 지켜왔던 주민들과 이른바 연대자들로 불렸던 외부 세력들은 천막에서 끌려 나와 도리 없이 흩어졌다. 그리고 또 10년이 흘렀다.

 

이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밀양을 찾았고 밀양의 친구들을 자처했다. 투쟁에 직접 함께하지는 못하더라도 더욱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보냈다. 그들은 지금 밀양이 어떤 상태인지 궁금할 것이다.

 

농성장이 철거된 후 송전탑은 금세 완공되었고 신고리 원전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그 위로 흐르고 있다. 투쟁에 나섰던 주민들은 몸과 마음을 다쳤고 마을에서 고립되었다. 그러나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매년 밀양 투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가 열렸고 주민들을 돕는 농활과 장터 같은 후속 연대 사업이 벌어졌으며 여전히 143가구는 보상 합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것은 공짜로 쓸 수 있는 편한 에너지는 없다는 사실, 누군가의 피해와 희생을 도시의 소비자들은 망각하곤 한다는 사실, 송전선로의 끄트머리에는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소가 있다는 사실, 물리적 세계와 사람의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따로 떼어서 손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깨우침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이어짐을 인식하고 이어진 존재들이 만난다면 에너지 전환과 기후위기 해결 방법은 전혀 다른 지반에서 토론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 민주주의와 기후 정치의 실체는 바로 그런 사람과 관계의 연결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밀양 투쟁 이후 에너지 정책은 다시 협소한 전문성으로 무장한 관료와 기술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밀양의 교훈은 그들에게 보상 범위의 확대와 공법의 개선 필요성으로만 남았다. 홍천 등지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는 송전탑 갈등, 삼척 맹방의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 처리 시도 같은 사례들은 에너지 문제를 더 크고 넓게 보고 토론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역량이 우리에게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너지의 생산이 있으면 폐기물 처리의 부담과 책임이 있고, 화석에너지에 미련을 두면 그 후과는 더욱 커진다.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연결은 자신의 임기 중에만 골치 아픈 일이 없으면 되고 더욱 많은 개발이 표가 된다고 여기는 현실 정치인들에게 외면당한다.

 

다가오는 68, 행정대집행 10주년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밀양의 친구들이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밀양으로 향한다. 행사가 예정된 송전탑 현장과 영남루 앞은 우리가 상기해야 할 수많은 이어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연결의 자리가 될 것이다.

김현우 탈성장과 대안 연구소 소장| 경향 2024.05.09.

130년 전 농민전쟁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내일, 5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1894년의 대대적인 농민항쟁을 기리는 기념식을 비로소 5년 전부터 정부 주관으로 거행해오고 있다. 19세기 들어 조선은 역사적 한계에 다다랐고 백성들은 가혹한 탐학으로 연명하기조차 어려웠다. 내내 혼란이 이어졌지만, 지배층은 이를 수습하고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급기야 전국적으로 수많은 고을의 농민들은 민란이라 일컬어진 항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1894년에 대대적인 반정부 봉기에 나선 것이다.

 

이른바 농민전쟁이며 중세 봉건사회 해체를 추동하는 역사변혁 운동이었다. 또 이 농민전쟁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일대 사변이었다. 그동안 학계의 연구 성과가 미흡한 상태에서 이 농민봉기를 두고 사용하는 명칭만 살펴보더라도, 동학란에서부터 갑오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제각각이어서, 만일 그 명칭에 따라 역사를 서술한다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이는 연구 결과에 따른 역사인식의 차이라기보단 각기 관심사에 얽매인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야겠다.

 

1989년에 한국역사연구회는 이 농민전쟁의 역사를 5년에 걸쳐 협동작업으로 연구할 계획을 세웠다. 그해는 마침 프랑스혁명 200주년이기도 했는데 이를 기념해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대대적인 학술연구와 국제적인 학술행사를 준비해 진행했다.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던 우리 형편을 생각할 때 프랑스의 대응은 참으로 부럽고 한편으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처구니없게도 군사정권의 쿠데타를 치장하고 호도하는 방편으로 오용됐다.

 

1963년 황토현전적지의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건립 제막식에 참석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전봉준 선생이 이 정읍 고을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서 징을 울려 농민을 동원하던 심정이나, 나 자신이 2년 전 5·16에 한강 다리를 넘어설 당시의 심정은 동일하다고 했다.(최광승,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동학과 천도교를 활용했는가) 그뿐 아니라 1973년 공주 우금치에 건립된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박정희가 건립 명예회장을 맡아 제자(題字)를 썼으며 탑명에 “5·16 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돐을 보내게 된 만큼이라고 새겨 유신체제 명분 찾기에 이용했다.(손호철, 키워드 한국 현대사 기행)

 

1894년 농민전쟁 연구는 곧 한국의 근현대 역사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이 연구를 추진한 한국역사연구회는 1970~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희생을 무릅쓴 민주화운동에서 형성된 역사의식으로 역사 연구에 나선 신진 학자들이 조직한 학회였다. 연부역강해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5년에 걸쳐 매년 개최할 학술대회 장소 사용료나 행사 경비 등에는 외부 도움이 필요했다. 당시 정부로부터 연구비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해 한겨레신문 창간 기념으로 3·1운동 70주년 학술행사를 진행하여 대성황을 이룬 것을 기화로 또 한차례 후원을 요청하던 참이었다. 마침 연구계획의 의의를 잘 알고 있던 유홍준이 중간에서 대학 친구인 장두환에게 이를 설명하고 후원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장두환은 직원 몇 명의 작은 사업에서 얻은 이익금을 값지게 지원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장두환이 5년에 걸쳐 지원한 연구비로 50개 분야의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이룩해, 다섯 차례 큰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1894년 농민전쟁 연구’ 5(역사비평사)으로 엮어 냈다. 그는 안타깝게도 3년 전에 작고했는데 생전에 남긴 회고록에서 그토록 중요한 사건이 100년이 되도록 관도 민도 그 누구도 제대로 연구하고 정리하지 못하던 차에 우리가 그걸 해냈다는 자부심을 지금도 강렬하게 갖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도 ‘1894년 농민전쟁 연구지원은 보람 있고 뿌듯한 일이었다. 참으로 뜻깊은 선각자였다.

 

농민전쟁 연구를 선도하면서 학술대회 등을 통해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때문인지 이후 여러 연구·관계기관의 100주년 행사가 추진되었다. 나아가 2004년에는 농민군유족회, 천도교, 관련 지방자치단체들의 노력으로 동학농민명예회복법’(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기념재단을 설립하고 기념사업들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기념재단은 그사이 많은 자료를 수집·간행하여 연구자들에게 제공해오고 있다.

 

갖가지 기념시설들이 유관 지자체들에 의해 조성됐지만, 어떤 것들은 역사적 의미의 계승보다는 일종의 과시적 토건 사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2004년 특별법이 통과된 뒤 국가기념일 선정을 두고서도 정부 지원을 염두에 둔 탓인지 관계기관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14년이나 지체했다. 뒤늦게 동학 기념재단, 국사편찬위원회 등 유관기관 대표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결정에 따르겠다는 각서까지 첨부해서 기념일 선정을 위임한 뒤 비로소 황토현 전승일인 511일을 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일로 제정할 수 있었다. 1894년 봉기에 나선 농민군들의 숭고한 뜻이 무엇인지 새삼 다시 되돌아본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동학의 종교적 이상과 포교 조직에 적절히 유도됨으로써 일거에 의식화된 대중의 전국적 조직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이들 농민군은 중앙정부를 상대로 무력투쟁을 전개해 봉건 지배체제의 전면적 혁파를 요구했다. 농민군은 전주성을 함락하여 봉건권력을 무력화시킨 다음 집강소를 설치해 스스로 통치의 주체로 나섰다. 집강소를 통해 신분제의 철폐와 토지의 평균분작(平均分作) 등 혁명적인 조치를 직접 실행하고자 했다. 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의 많은 부분이 정책으로 수용되고 법제화에 이르렀지만, 무능한 위정자들의 배신으로 성취되지 못하고 말았다.

 

지난해 말 임진택의 창작 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공연을 감동 속에 관람했다. 세 시간에 걸쳐 장엄하게 펼쳐진 무대에서 임 명창은 그대들이 지른 들불은 결코 꺼질 수 없는/ 우리 민족사의 절정이요 모든 민중들의 희망이니/ 이제 우리 스스로 활~~ 타오르겠네/ 도도한 역사의 들불 되겠네라고 130년 전 농민군의 결의를 형형한 전봉준 장군의 눈빛에 담아 오늘 우리 폐부에 아로새겼다. 임 명창의 판소리가 세계 무대에서 레미제라블공연과 겨루면서 높게 펼쳐질 날을 꿈꾼다. 학술연구와 예술창작이 어우러지는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를 새긴다.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 한겨레 2024.05.09.

 

 

애착 넘어 혐오로 나아가는 정치팬덤

팬덤은 팬(fan)과 덤(dom)을 합친 말이다. 덤이 세력, 영지, 범위 등을 말하니 팬덤은 팬의 무리를 뜻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팬심이라고 하고, 좋아하는 행위를 팬질이라고 하듯이 팬이라는 단어는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산업사회, 대중문화의 산물이다. 전자 미디어의 영향도 컸다. 라디오, 영화, 티브이(TV) 그리고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팬현상은 일상화가 됐다. 우리는 누구를 좋아하며, 그 좋아함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팬현상으로 인해 생겨난 단어도 있다. 옥스퍼드사전이 2023년 올해의 단어로 ‘rizz’를 선택했는데, 거대팬덤을 거느린 한 인터넷 방송인이 사용하면서 알려졌다. 그의 팔로어는 개인방송 650만 명, 유튜브 400만 명, 인스타그램 500만 명이다. 참고로 rizz는 이성을 끌어당기는 숨겨진 매력이란 뜻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팬덤이 문제라는 걸까? 팬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적 힘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워낙 팬현상이 일반화되다 보니 시장에서도 이제는 이를 의식하고 있다. 오죽하면 팬경영(fanagement)이란 말까지 생겼으랴. 아이돌 그룹의 경우에도 팬덤의 영향은 압도적이다. 비티에스(BTS)의 아미(ARMY), 스위프트의 스위프티(swiftie)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된다. 아미는 시위에, 스위프티는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 팬덤의 시대다.

 

지금의 정치를 이해하려면 작금의 팬덤을 이해해야 한다.” 트럼프 현상을 팬덤 개념으로 파악한 복스(VOX)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를 작성한 로마노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트럼프 팬덤으로 불렀다. 최근 셀럽, 즉 유명인에 대한 팬덤을 말할 때 덕질(stan)이란 표현까지 등장했는데, 스토커(stalker)와 팬의 합성어다. 가수 에미넴의 동명 노래 제목에서 유래했다니 이 또한 팬덤의 힘을 말해주는 실례다. 이런 덕질을 추동하기 위해 트럼프는 전략적으로 자신을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하는 셀럽으로 유형화했다. “정치적 변화를 원한다면 단지 트럼프에 표를 주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 감정투사의 대상을 정치 일반에서 트럼프 개인으로 옮겨야 한다. 그를 덕질해야만 한다.”

 

이처럼 팬덤이 정치에 미치는 강력한 힘 때문에 등장한 개념이 정치팬덤, 팬덤정치다. 팬덤정당, 팬덤민주주의, 팬덤민족주의라는 말도 쓰인다. 윌리엄스와 베넷에 따르면,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강력한 정서적 반응과 동일시를 토대로 한 네트워크화된 팬의 행동주의 권력이 정치팬덤이다. 이 정치팬덤이 차이와 이견을 혐오하고 배제하면서 정당과 의회 등 정치를 짓누르는 현상, 또는 정치인이 팬덤을 만들고 이를 권력수단으로 활용하는 정치양식이 팬덤정치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유권자는 정당과 후보에 대해 주로 투표를 통해 지지를 표명한다. 이게 보통의 대중정치, 민주정치다. 그런데 팬덤정치는 단순히 지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넘어선다. 총공(문자총공격)이라고 불리는 문자 공세, 시위 등 퍼포먼스, 댓글 달기 등을 통해 일상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심지어 선호 정치인에 대한 순위까지 매겨 발표한다. 이런 개입 행위들을 통해 정치인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강제한다. 어지간한 정치인은 이들의 표적질에 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게 된다. 지지-보터(voter)에서 개입-팬덤으로 정치참여의 방식과 주체가 바뀌었다. 가히 팬덤의 권력화라 부를 만하다.

 

정치팬덤은 스포츠팬덤에 비유된다. “스포츠는 경쟁이 주가 되고, 특히 확연하게 일대일로 적대적인 대결 구도를 형성하기 때문에 상대 팀에 대한 경외와 동시에 상대 팀이 자신의 팀을 이겨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안티팬 활동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 팀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하고 대항하려는 것이 팬 정체성의 구성 조건이 되며, 상대방을 재미로 조롱하거나 비하하는 행위를 통해 팬 정체성을 확보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테오도로폴루) 요컨대, 스포츠에서는 팬덤이 안티 팬덤으로 나타나는데, 정치에서도 그렇다는 얘기다.

 

정치팬덤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를 열렬히 응원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거침없이, 당당하게 누군가에 대한 혐오와 배제에 나선다. 다르게 행동하거나 딴소리를 내면 욕설을 퍼붓고 혐오를 쏟아내고 심지어 배제에 나서기도 한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타도의 대상, 즉 적으로 규정된다. 같은 당에 속해 있으면 이런 편가름이 순화될 것 같지만 정반대다. 다른 당에 있는 적보다 더 미워하고 증오한다. 게다가 내 편인지 아닌지는 팬덤이 결정한다. 이쯤 되면 권력화가 아니라 폭력화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팬덤정치는 사랑의 표출이 아니라 미움의 배설이다.

 

정치에서는 경쟁이 불가피하다. 후보직, 의원직, 대통령직 등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게다가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가진다. 승자독식의 제도 탓이다. 뿐인가. 승패가 갈린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승자가 패자에게 온갖 멍에를 씌우고, 심지어 죽이려고 달려든다. 검찰 등 국가기관을 동원해 물리적으로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려고 한다. 정의구현이나 적폐청산 등 명분을 뭐로 내세우든 정치보복이고 패자 절멸로 비친다. 정치나 선거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 죽고 사는 전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절제와 관용은 사치다. 이처럼 전시상태이니 군법 적용하듯 이견은 명령불복종을 넘어 전쟁 중에 아군에게 총을 거꾸로 겨누는내부총질로 간주된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의 승리를 위해 방해되는 모든 행위는 이적행위,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타도의 빌런(악당)으로 규정된다. 본말이 전도되듯, 좋아함에서 시작됐지만 사랑은 말이 되고 혐오가 본이 된다. 안티 팬덤이 팬덤정치의 숨은 본성인 셈이다.

 

정치팬덤이 등장한 역사적 맥락을 추적해 보면 이해되는 측면이 없는 건 아니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데 따른 반작용이기 때문이다. 정당이나 의회가 민의를 대변하는 데 소홀하고, 정치인들은 무능한데다 부패하니 당연히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가 늘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길은 사실상 투표 외에 없었다. 정 아니다 싶을 때는 거리로 나가서 시위를 벌이는 직접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당이 대선 후보를 뽑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하도록 문을 열었다. 김대중 정부가 위기에 빠지고 정권교체의 분위기가 역력하자 국민경선제를 그 반전의 돌파구로 삼았다.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2002년 대선후보 선출방식을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정치를 바꾸고 싶은 시민들이 이 국민경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당연했다. 3% 지지율의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됐다. 노무현 승리의 일등공신이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였다.

 

 

이 때문에 노사모를 정치팬덤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노사모는 팬덤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들은 일상정치에 개입하거나 팬질을 통해 경쟁자들을 악마화하거나 퇴출시키는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지지’, 그것도 비판적 지지에 충실했다. 노사모가 정당보다 내러티브가 있는 인물을 선택하고, 그를 통해 사회변화를 일궈내는 학습경험을 만들어냈기에 정치의 개인화(personalization)를 자극한 것은 맞으나 팬덤정치가 득세하게 된 시점은 그 이후다. 팬덤정치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그의 죽음, 나꼼수의 등장, 국회선진화법 통과, 박근혜 정부의 출범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때 그 일들이 어떻게 팬덤정치를 부추겼을까?

이철희 전국회의원 문정부 정무수석 | 한겨레 2024.05.10.

 

 

'노인 지옥' 한국이 맞는 초고령사회

초고령사회의 '사회권 선진국'을 위한 과제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 참여자격이 있는 총 44251919명의 유권자(재외국민 포함) 50대 이상이 사상 처음으로 절반을 넘었다고 발표했다. 60세 이상 유권자 비중은 210만 명 가량 증가한 31.89%20~30(28.64%)를 합친 비중보다 높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민심은 천심"이라며 지지를 호소한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정작 민()이 직면한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여러모로 많은 논란과 고민거리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노인의 삶은 "정권심판" 구호에 가려져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한국사회의 중대한 문제이다.

 

초고령사회라는 터널

국제연합(UN)65세 고령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7% 이상 차지하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본다. 한국은 2018년에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14.3%에 달해 고령사회로 진입했으며, 그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예정이다.

 

초고령사회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도 같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들이 초고령사회 국가이기는 하지만, 각자 다른 모습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헤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들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국제사회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인권 관점에 기반하여 노인의 삶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이루어져왔지만, 사실 여성, 아동, 장애인, 이주민 등 다른 사회집단과 달리 노인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제협약은 없다.

 

사람은 당연히 늙기 때문에, 그동안 '노인'을 독자적인 사회집단으로 간주할 필요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이 점점 증가하면서 2022년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ANHRI)에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노인권리협약'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 국가인권위원회도 '노인인권포럼'을 개최하여 노인인권협약의 필요성과 찬반의견에 대해 청취한 자리가 열었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권 선진국'을 만들겠다는 공약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오늘 우리 사회의 사회권 보장 상황이 어떠한지, 사회권을 보호 및 증진하기 위해 어떤 구조적 전환과 입법적 노력이 필요한지, 어떤 기준으로 '선진국'을 결정할 수 있는지 등 심도 있는 논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특히나 인권침해에 취약한 집단이다. 2020년 기준 한국의 만 65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40%를 기록하여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서 1위를 기록했다. OECD가 처음 노인빈곤율 순위를 공개한 2009년 이래 이 순위는 대한민국은 1등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다. OECD 평균 노인빈곤율은 14.2%이며, 앞서 언급한 다른 초고령사회 국가들의 노인빈곤율은 4%~20%대 사이였다.

 

낮은 노인고용율, 낮은 사회복지지출 등 여러 노인의 삶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들을 살펴볼수록 한국이 진입한 초고령사회라는 터널을 지나 '노인의 지옥'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노인의 사회적 돌봄 문제

고령화사회에서 노인 돌봄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가족 단위 빈곤층의 극단적 선택 기사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고령의 부모를 부양하던 가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노인 인구 부양에 대한 책임이 개인 또는 개별 가구에게 전가될수록 이러한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노인 장기요양보험 및 맞춤형 돌봄 서비스를 도입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가정 내 돌봄 부담을 줄이고 노인들에게 필요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동시에 민간 사업자의 참여 확대, 사회화된 돌봄 서비스의 확대, 노인 장기요양보험 제도화 등과 관련하여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고려하여 신중하게 논의해야 할 과제도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 가족 구성원이 노인 돌봄을 담당해 왔다. 하지만 최근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와 더불어 가정 내 돌봄 부담이 심각해지고 있다. 송인재 연구자는 노인 장기요양보험 및 맞춤형 돌봄 서비스가 전문적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가정 내 돌봄 부담을 줄이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촉진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노인들에게 필요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노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장점이 있다.

 

한편 노인 장기요양보험 및 맞춤형 돌봄 서비스 시장에 민간 사업자의 참여가 확대되고 있다. 민간 사업자의 참여는 서비스의 질 향상과 경쟁 심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윤 추구를 위한 서비스 저하나 노인 권리 침해 가능성도 존재한다.

 

따라서 정부는 민간 사업자의 적절한 참여를 유도하고, 서비스의 질을 관리하며, 노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의무로써 적극적인 감독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노인들이 수동적인 서비스 수혜자 위치가 아니라 적극적인 서비스 '공동생산 (co-production)' 참여자로 행동할 수 있도록 역량강화를 지원해야 한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사회권 선진국'을 향하여

'사회화된 돌봄 서비스'는 가족 내 돌봄에 의존하지 않고 전문적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화된 돌봄 서비스의 확대는 노인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고, 서비스의 질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화된 돌봄 서비스의 비용 부담이 증가하고, 가족 간 소통이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따라서 정부는 사회화된 돌봄 서비스의 확대를 위한 재정적 지원을 확대하는 동시에, 가족 간 소통을 유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와 맞물려 재정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인들의 인권을 보호 및 증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장기요양보험의 유지 방안을 마련하고, 서비스 이용자들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황준서 함부르크대학교 지속가능성미래센터 연구원 | 프레시안 2024.05.11.

 

 

빠순이’, 사랑 그리고 하이브 vs 어도어 사태

산업이 된 사랑,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생각 없이 열었다가 속절없이 붙들렸다. 지난달 25일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되었던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아마도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녀와 소주 3병을 마신 것 같다든가 이런 콘텐츠를 공짜로 봐서 미안하다든가 하는 댓글이 상위권에 링크되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후 쏟아진 미디어상의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이 사태를 케이팝의 산업적 이해관계와 연결해 해석하는 시각이다. 4월 말부터 시작된 하이브의 민희진/어도어에 대한 언론 플레이와 이에 대한 설명 혹은 항변 형식으로 기획된 민 대표의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 갈등의 노출이 하이브와 어도어의 시가 총액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런저런 입방아라든지 케이팝의 미래에 대한 염려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이 사태가 한국 기업의 가부장적 구조와 문화를 보여준다고 보는 시각이다. 민 대표는 남성 경영진을 개저씨라고 지칭하며 내가 니네같이 기사를 두고 차를 모냐, 술을 마시냐, 골프를 치냐항변했는데 이에 대한 공감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업계는 다르지만 일하는 여성으로서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다며 밈을 전파하고 어록을 공유하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나 또한 처음에는 민 대표의 노골적일 정도로 솔직한 표현들에 귀를 의심하며 볼륨을 높였지만 이후 두 시간을 넘긴 기자회견의 말미에 이르러서 든 생각은 아이돌이라는 인간 상품을 기획, 생산, 판매하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뉴진스 멤버들과 영혼을 나누는 깊은 사이이며, 하이브의 다른 레이블 소속 걸그룹이 뉴진스의 이미지와 댄스를 베낀 것은 뉴진스를 기성품으로 만드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모든 아이돌 또한 기성품으로 만들어버리기에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살아있는 인간 소녀들에 대한 애정과 그 소녀들이 자신의 모든 창조적 능력을 갈아넣어만든 노동 생산물이기도 하다는 자부심을 오가는 민 대표의 언어는 케이팝이 당면한 딜레마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문화 산업의 자양분인 여성 팬덤

아이돌은 사랑으로 지탱되는 존재들이다. 아이돌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지만 그게 주업은 아니다. 그들의 주업은 팬들로 하여금 사랑과 애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팬들은 아이돌의 퍼포먼스와 퍼포먼스가 담긴 앨범 등의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증명한다.

 

흔히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찬미되지만 모든 사랑이 그렇지는 않다. 아이돌 팬들의 사랑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애초 광신자(fanatic)’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 팬들의 사랑은 이해되지 않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는데 아이돌 그룹을 대상으로 한 십대 여성들의 사랑은 더 그랬다. 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빠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빠들을 쫓아다니는 어린 여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멸칭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이돌 팬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쓰였다. 그렇지만 흔히 3대 메인 기획사로 불린 SM, JYP, YG를 중심으로 아이돌 아티스트 인하우스 시스템(아이돌 그룹의 멤버 선발, 훈련, 데뷔, 활동을 한 기획사 내에서 모두 소화하는 시스템)이 갖춰지고, 이제는 전설이 된 여러 아이돌 그룹을 배출하고, 아시아 지역에 한정되었던 한류를 글로벌 문화상품으로 변모시킨 자양분은 팬들의 사랑, 그리고 그에 기반한 구매와 팬 활동이었다.

 

팬들의 사랑이 멸칭으로 불리지 않게 된 것은 아이돌이 무시 못 할 수출 상품이 되면서부터였다. 특히 서구권에서의 인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0년대 중반부터 미국을 위시한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은 BTS의 팬들을 일컫는 아미(ARMY)’는 케이팝 팬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떠올랐다. BTS의 글로벌 팬 집단인 아미에는 빠순이에 부여된 비하와 경멸의 감정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글로벌 문화산업이 미국 중심의 서구에서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로 확장, 이동하는 현재를 포착한, 열정적이고 세련된 새로운 문화 소비 집단으로 여겨진다.

 

국내에서는 빠순이들이 성장해 다른 장르의 문화에도 기꺼이 지갑을 열게 되면서 그 문화가 산업으로 몸집을 불려나가게 되었다. 뮤지컬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출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팬덤의 확보는 도대체 어느 정도가 팔릴지를 예측하기 어려운 문화 상품의 성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사랑만이, 화폐를 통해, 문화를 구원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아이돌 산업의 사랑 노동자들

어떤 빠순이들은 화폐를 통해서 사랑을 입증하는 데 만족하지 못 했다. 이들은 자신이 사랑한 바로 그 장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노동으로 사랑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 아니었던가. tvN 초기 대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이런 사례를 서사화해 인기를 끌었다. 아이돌 1세대 보이그룹 H.O.T.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여주인공 성시원은 팬픽으로 대학을 가고 이후 방송작가로 일하게 된다. 최근에는 지상파 및 케이블 방송사에서 신입 직원을 거의 채용하지 않게 되면서 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복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꿈의 직장이 되었다. 자신의 취향과 사랑과 노동을 일치시킬 수 있는 직업이 어디 흔한가 말이다.

 

아이돌을 사랑한 팬이었던 이들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진입할 때 가장 큰 스펙은 팬덤 경험이다. 팬 활동을 노동자로서 갖춰야 할 자원으로 이전시킬 때 이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일을 단순한 일이 아니라 사랑과 꿈의 실현으로 대하는 자세다. 아이돌을 사랑했듯이 아이돌과 함께하는 이 일을 사랑으로 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사랑은 보다 미묘한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아이돌 제작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관련 타 산업으로의 확장이 보다 중요해질수록, 개인 인간으로서 아이돌들이 갖는 고유성은 그 아우라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아이돌과의 차별성 속에서 소비 가능한 개성이 되어야 한다. 독특해야 하면서도 너무 독특해서는 (소비되지 않으므로) 안 되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케이팝에서 유행한 세계관이니 서사니 캐릭터니 하는 것들은 바로 이를 위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적극적이고도 광범위한 활용은 이를 더욱 북돋운다. 그러니 이제 아이돌 산업 종사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은 어떤 아이돌의 고유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그 고유성을 특정한 모드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에너지인 것이다.

 

민희진 대표는 자신이 아이돌 팬이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뉴진스 데뷔 과정을 출산의 산고에 비유하고 멤버들을 내 새끼들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이것이 다른 상품과 아이돌 상품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상품화된다고 하더라도 아이돌은 원래 인간이다. 피와 살과 감정이 있는. 기획자와 아이돌 간에 서로가 어떤 감정을 갖게 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빠순이산업에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산업으로의 변모?

민 대표의 기자회견을 지켜본 뒤 하이브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글로벌 복합 엔터테인먼트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기업이 하이브의 비전이라고 한다. 다양한 전시판매대(platform!) 규격에 맞게 모드화한 케이팝 아이돌들과 관련 산업들이 우리의 생활양식(lifestyle!)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 하이브가 그리는 미래인 셈이다. 한때 비하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빠순이들의 사랑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환상적인 순간이 도래하려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고유성에 대한 감정이며, 그렇기에 모든 가치를 숫자로 환원하는 시가 총액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 한국 2024.05.12.

 

 

이것이 왜 반전시위가 아닌가

미국사회를 분열시키는 의제의 목록에 총기 소지, 임신 중지 등 고전적인 갈등 외에 가자지구 전쟁이 추가됐다. 지난달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가자지구 전쟁을 규탄하는 학생 시위가 시작되면서, 미국사회는 이 시위를 반유대주의 운동으로 보는 그룹과 반전 운동으로 보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이번 사태를 보는 미국사회 시선은 주요 언론의 명명에서도 감지된다. 자유주의 논조의 뉴욕타임스조차 반전(anti-war)’ 시위대란 표현을 거의 안 쓴다. 학생들은 친팔레스타인(pro-Palestinian)’ 시위대로 규정된다.

 

학생들의 시위는 418일 경찰이 컬럼비아대 캠퍼스에 진입해 100여명을 연행한 것을 계기로 미 전역으로 확산했다. 컬럼비아대 당국은 430일 경찰에 다시 전화를 걸었고, 경찰 수백명이 캠퍼스에 진입해 100여명을 추가 연행했다. 백악관은 평화적인 시위가 아니었다고 했고 뉴욕시장은 외부 선동가가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시위대의 요구는 명쾌하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가자지구의 무고한 민간인이 숨지고 있으므로, 대학당국은 이스라엘 관련 기업에 투자한 돈을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자지구 전쟁의 시작은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지난해 10월 이스라엘을 기습해 1200여명을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응징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34000명 이상이 사망해 이스라엘을 피해자로만 보기 어려워졌고, 국제사회도 휴전을 촉구하고 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학생들의 분노는 정당했다.

 

하지만 유대계 미국인 공동체의 힘을 의식한 대학 총장과 정치인들의 출세욕, 권력욕은 꺾이지 않았다. 네마트 샤피크 컬럼비아대 총장은 시위 초기 의회 의원들이 반유대주의 시위를 막지 못했으니 물러나라고 요구하자 서둘러 경찰을 불러들였다. 조지타운대 로스쿨의 한 교수는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한 샤피크 총장이 한심하다고 썼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UCLA)에선 친이스라엘 학생들이 반전 시위대를 급습해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차는 일이 벌어졌으나, 출동한 경찰은 개입하지 않았고 아무도 체포하지 않았다.

 

공권력은 학생들을 보호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외롭지 않았다. 레바논, 쿠웨이트 등 중동국가를 비롯해 프랑스, 독일, 멕시코 등지의 대학생들도 시위를 하며 휴전을 요구했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팔레스타인 피란민들에게 닿았고, 가자지구에 고립된 피란민들은 자신들이 세계와 연결돼 있다고 느꼈다. 피란민들은 외신 기자들이 볼 수 있도록 피란촌 텐트의 바깥 면에 영어로 가자지구와 연대해준 학생들 고맙습니다라고 적었다. 팔레스타인 언론인 비산 오우다(25)는 외신 인터뷰에서 가자지구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지금처럼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대다수 학생이 집으로 돌아가고 캠퍼스는 한산해질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오는 8월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번 시위의 불씨가 되살아날 수 있다고 예상한다. 베트남전에 반대한 학생들이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들이닥쳐 반전 구호를 외쳤던 것처럼 말이다. 1968년에도 올해처럼 컬럼비아대에서 반전 시위가 불붙었고 시카고에서 전당대회가 열렸다.

 

중동 전문가인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경향신문 인터뷰(425일자 보도)에서 젊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우리가 인권과 자유를 내세우면서 왜 이스라엘을 계속 지원해야 하느냐는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면서 민주당 지지층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금 학생 시위대는 월가를 점령하라’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등 미 전역을 흔들었던 시위를 배경으로 성장했다. 불의를 보면 항거해야 한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터득한 세대다. 하버드 케네디스쿨 정치연구소가 지난달 발표한 ‘18~29세 청년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51%가 가자지구의 영구 휴전을 지지했고, 반대는 10%에 그쳤다.

 

이스라엘의 공격과 봉쇄로 가자지구 주민들은 가족과 집을 잃고 아사할 위험에 몰려 있다. 뼈만 남은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보는 일은 참담하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반전 시위 학생들을 향해 ‘1930년대 독일 나치가 떠오른다고 막말을 했는데, 가자지구에서 3만명 이상을 숨지게 한 그에게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네타냐후 총리가 세계사에 아름답게 기록되기는 이미 글렀지만 이스라엘은 이제라도 가자지구 공격을 멈춰야 한다.

최희진 국제부장 | 경향 2024.05.12.

 

 

기후위기와 어린이들의 안부

지난 2월 과학학술지 네이처 기후변화(Nature Climate Change)’에 어린이들의 안부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논문이 게재되었다. 그동안 기후위기를 주시해온 이들은 2030년까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상 상승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논문에 따르면 이미 1.7도를 넘어섰고 현재 추이대로 간다면 2030년이 되면 3도까지 상승할 것이라 한다. 이토록 뜨거워진 지표면에서 지금의 어린이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미안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간 기성세대가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해봤자다. 1962, <침묵의 봄>을 통해 레이첼 카슨은 인류가 화학독극물로 풀을 죽이고 벌레를 죽이면서 대량생산, 대량소비하는 삶의 방식을 지속한다면 그 죽음의 사슬로 새들도 멸종해 새의 노래소리 한마디 없는 봄을 맞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1972, 많은 연구자들이 <성장의 한계(The Limits of Growth)>란 보고서를 통해 경제성장주의의 한계와 폐해를 알렸다. 이런 흐름하에서 1970년대 초, 산업주의와 상품시장 중심의 삶의 방식을 전환하자는 목소리가 부상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주류 체제가 선택한 길은 또 개발이었다. ‘지속 가능이라는 말로 포장은 했지만 기조는 여전했다. 1992, 유엔도 이 흐름에 동참해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생각은 마치 그런 것이 실재하고 그렇게 하면 기후위기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을 퍼뜨려 왔다. 한편, 2014, 유엔 산하 정부 간 기후위기 논의체인 IPCC가 발표한 5차보고서는 지구온난화가 1980년 이후 급속히 전개되었고 그 원인은 무엇보다 경제성장이었음을 재차 확인했다. 1980년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시기와 겹친다. 이에 앞선 2004년 발간된 <성장의 한계: 발간 30년차 보고서>는 경제성장주의를 의문시하지 않는 모든 대안적 시나리오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문명붕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2030년경엔 재생불가능한 자원으로, 2040년경엔 환경오염으로, 2070년경에는 식량위기로 인한 인류문명이 붕괴할 것이라는 경고다. 소위 산업화된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과개발국들은 세계 에너지의 75%를 사용하고 기후위기를 불러온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80%를 발생시키고 있다. 예외가 아닌 한국은 2018년까지 탄소 배출 증가율 1위였으며 2020년에는 온실가스 배출량 8위의 나라였다.

 

1970년대 이후에도 끊임없이 경제성장을 해온 선진국들의 복지지수는 내내 정체상태에 있다. 한국사회는 현재 치료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도 여전히 증가일로인 암 발생률, 언젠가부터 평범한 질병이 되어버린 우울증의 만연, 극도로 높은 자살률, 사회 양극화와 빈곤층 급증 등 경제성장만을 맹신해온 끝에 받아들게 된 사회적 폐해가 심각한 수준이다.

 

심각한 산불, 폭염, 폭우, 산사태, 폭설, 냉해가 번갈아 반복되면서 이미 봄이 와도 벌과 나비를 보기 힘들어졌다. 그런 가운데, 지난 4, 2020년 시작된 청소년 기후소송20225세 이하 영유아 40명 등이 참여한 아기 기후소송4건의 기후소송이 공동으로 41개월 만에 헌법재판소에서 공개변론을 가졌다. 가정의달 5, 어린이를 식구로 둔 이들은 어떤 식으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옳을까?

박이은실 여성학자 | 경향 2024.05.12.

 

 

무위당 장일순에 길을 묻다

우리는 덫에 걸렸다. 우리나라의 극도로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은 여기가 얼마나 살기 힘든 곳인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연말에 나온 한국은행 보고서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에 따르면 초저출산의 근원은 청년이 느끼는 높은 경쟁압력불안에 있다. 경쟁과 불안은 동전의 양면이다. 낮은 출산율은 높은 자살률과 관계된다. 실제로 1992~2005년 자살자 수는 3.3배 늘었고 출산율은 1.76명에서 1.08명으로 줄었다. 자살이 많은 나라에서 아이를 많이 낳을 리 없다.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경쟁은 자연의 질서와 같다는 거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본격적인 등장에서 보듯이 경제 여건이 어려울수록 경쟁은 더 심해진다. 그래서 국가 소멸 위기라며 호들갑을 떨지만, 정부나 정치권은 과도한 경쟁을 해소하는 노력보다는 에 치중한다. 아이 하나에 이런저런 현금성 혜택을 주겠다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답다.

 

우리는 길을 잃었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에서 첫 기후소송 공개 변론이 열렸다. 정부는 경제성장과 산업구조 등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정했다고, 청구인 측은 탄소중립기본법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불충분해서 헌법상 생명권, 환경권, 건강권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생산과 소비의 증가를 뜻하는 경제성장은 에너지 사용을 늘려 온실가스 배출을 적기에 필요한 만큼 줄일 수 없게 한다.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성장은 불문율과 같다는 거다. 어디엔가 감당 못할 재앙이 도사리고 있지만, 정부와 기업은 성장에 몰두한다. 다른 길을 모르니 그저 가던 길을 꾸역꾸역 갈 뿐이다.

 

사람도 자본의 먹잇감인 시대

덫에 걸리고 길을 잃은 오늘, ‘무위당(无爲堂) 장일순을 생각한다. 오는 2230주기를 맞는 장일순 선생은 고향인 원주에서 교육, 신용협동조합,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 1970년대 후반 운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농약 중독으로 땅과 농민이 죽는 당시 현실에서 부의 분배를 넘어 자연과 공생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을 깨달았다. 문제의 근원은 산업문명과 자본주의에 있었다. 그는 땅의 죽음을 대전환을 요구하는 시대의 징표로 읽었다. 성장 지상주의에 빠진 자본주의는 오늘도 땅이야 죽든 말든 생산과 소비를 늘리기에 바쁘다. 비정규노동과 플랫폼노동 등 갈수록 착취의 강도가 높아지는 노동 환경에서 사람 또한 자본의 먹잇감으로 떨어졌다. 이 거대한 죽음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지금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장일순은 생명사상을 가야 할 길로 제시했다. 생명은 하나. 하나인 생명이 온 우주에 스며들고 모든 것이 이 생명에 참여하여 생명을 얻고 하나를 이룬다는 생명사상의 자양분은 동학과 불교와 노자 등의 가르침에서 왔다. 천지만물이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으니, 하늘과 사람과 사물을 공경하는 삼경(三敬)’이 삶의 도리다.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다. ‘나락 한 알속에도 우주가 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고유한 존재 이유가 있다고 보는 생태학도 생명사상과 동일한 세계를 전망한다. ‘인위(人爲)’는 위(), 곧 거짓을 뜻하니 장일순의 호 무위당은 온갖 거짓에서 벗어나 자연의 이치를 따르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장일순은 자본주의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경쟁을 단호히 거부했다. “경쟁과 효율을 따지면서 일체가 이용의 대상이 되고 생명이 무시되는 탓이다. 하나인 생명에 기반한 세계에 상응하는 삶의 원리는 경쟁이 아닌 협동, 효율이 아닌 절제다. 우리는 승자독식의 경쟁 지상주의 세계에서 살지만, 패자가 없으면 승자도 없는 법이다. 삶은 함께 기대며 걸어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출생률과 자살률, 기후위기에서 보듯이 삶의 이치에 반하는 행동 양식인 경쟁이 심해질수록 하나인 생명 공동체는 더 위험해진다. 경쟁은 남이 아닌 오늘의 와 하는 경쟁, 곧 본연의 삶의 원리인 협동과 절제의 능력을 기르는 노력이어야 한다.

 

주판도 잘못 놓게 되면 털고 다시 가야한다. 지금껏 해왔다고 잘못된 걸 고집하면 열심히 할수록 잘못만 커진다. 생명사상은 산업문명과 자본주의 체제가 잘못이라는 선언이다. 잘못된 길을 버리고 가야 할 길로 가자는 제안이다. 서로를 죽이는 경쟁을 서로를 살리는 협동으로 바꿔야 한다는 각성이다. 1985년 원주에서 시작된 한살림운동은 생명사상을 땅과 농사에 적용한 생명운동이다. 장일순은 한살림운동으로 그저 몸에 좋은 농산물을 먹자고 한 게 아니라 생명의 근본적 존재 양식인 협동과 공생의 삶을 확산하고자 했다. ‘장일순이 너무 이상적이고 급진적인가? 하지만 덫에 걸리고 길을 잃은 오늘, 문제의 뿌리에 닿지 않는 대책은 모두 미봉책이다. 당장 편한 길이 아닌 가야 할 길을 가야 한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명예교수 | 경향 2024.05.12.

 

 

그 하나의 이름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 끝날 때 흐르는 카나타 하루카’(저편 아득히)라는 곡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몇천년 후의 인류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따위보다 누구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웃는 네가 보고 싶어.”

 

경세가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 가사는 어쩌면 조금 불편할지도 모른다. 대의냐 한 인간이냐라는 프레임은 많은 서사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진다. 어떤 영화에서 주인공은 기계의 침공 앞에서 한 줌 남은 인류를 구할지 자신이 사랑하는 한 사람을 구할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병사 한 명을 구하다가 해병대 분대원이 전부 전사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무려 5억달러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식 사고에 익숙하고, 그런 정책에 의해 삶이 이리저리 휩쓸리는 데에도 익숙한 우리는 당연히 대의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말이 멋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 사람을 살리는 낭만적인 선택 같은 것은 지위가 높고 대단한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나 통용되는 말일 뿐, 전세사기를 당한, 탈시설했는데 정부 지원이 끊긴, 졸지에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린, 줄어들지 않는 공공임대주택 대기번호를 들고 있는 들판의 풀 같은, 도무지 최대 다수가 될 수 없는 이들에겐 그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경제살리기에 집중하고, 기득권 개혁을 완수하고,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척결하는 등의 대의는 언제나 누군가에게는 옳다. 이러한 대의는 도무지 부정할 방법이 없어서 어떤 대의를 편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입법이란 이 나라의 가장 평균적인 사람들을 지향하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를 설계함을 목적으로 한다. 법이란, 정부란, 공직자란 한 사람의, 하나의 삶에 매몰되어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대의로 충분한 것인가. 추상적인 대의는 그 안에 무심함과 잔인함을 품고 있기도 하다. 대의가 사람을 살릴 때는 그 안에 논리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이 있을 때이다. 사람들이 대의에 집중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서사는 한 인간의 삶의 역동을 중심으로 한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지, 추상적인 가치와 법칙들의 연결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지 않는다.

 

지난 47일 안산 화랑유원지의 4·16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0주기 예배에서는 304명의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시간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라는 효율적인 언어를 거부하고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는 장면은 장엄했다. 최근 사회 연구에서는 한 사람의 삶, 예를 들면 50대에 접어든 한 여성 중증장애인의 삶의 이력을 어린 시절부터 추적하고, 그로부터 사회적 맥락을 읽어냄으로써 한 인간과 그가 살아온 사회 및 역사를 함께 보고자 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구체성에 주목하는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고위 공직자의 책임 회피와 탁상공론의 근원에는 구체성의 부재가 있다. 규범의 추상성이 구체적인 한 명의 삶을 소환하는 데 실패할 경우 그 규범은 작동을 멈춘다. 입법자가 위임입법으로 떠넘긴 삶의 구체성은 관료들이 떠안게 되지만, 관료들 역시 관료제의 개성 없음이라는 규범에 짓눌려 삶의 구체성을 다루고 싶어도 다룰 수 없거나, 그것을 핑계로 삶의 구체성을 무시한다. 삶의 구체성은 뜨거운 감자처럼 아래로 전달되고 전달되어 결국 일선 경찰관, 군인, 교사, 사회복지사, 활동지원사 등 직면한 상황은 복잡하고 구체적인데 재량은 없는 젊은 시민들이 짊어지고 간다. 그 짐이 무거워 현장에서 사람이 사람을 놓아버리거나 미워하거나 곤봉으로 내려칠 때, 구체성을 다룰 필요가 없는 지위에 있는 이들은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자위한다.

 

어떤 정책의 대의를 판단할 때는 그 정책에 영향을 받을 이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알고 부를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정책을 말로 설명할 자신이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들이 희망을 품는 눈빛을 하는지, 한숨과 눈물을 내비치는지, 일선 담당자가 책무의 무게에 짓눌린 표정을 짓지는 않는지 직면해보아야 한다. 정책을 결정하는 공직자라면 대의 안에 과연 구체적인 사람이 있는지 돌아보고, 그 이름을 먼저 소환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추상성과 합리성은 그다음이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 경향 2024.05.13.

 

 

한러 관계, 저절로 회복될까

석열 정부 출범 이래 한-러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미국-러시아 사이의 강대국 정치와 북-러 관계 밀착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9월 극동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렸던 푸틴-김정은 정상회담 이후 북한과 러시아 사이에 군사협력이 가시화되고 있고 고위급 인적 교류 또한 활성화되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 진전이다.

 

-러 관계의 불편한 현주소는 2월 초 양국 외교부 대변인의 설전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북한은 선제적 핵 공격을 법제화한 세계 유일 국가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자,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이는 북한을 겨냥한 공격적 계획을 흐리려는 목적에서 나온 발언으로 혐오스럽고 편향됐다고 논평했다. 이에 한국 외교부도 수준 이하의 무례하고 혐오스러운 궤변이라고 맞받았다. 32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전체회의에서는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패널의 임기 연장 결의안이 부결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최근의 한-러 관계 악화가 윤석열 정부의 과도한 친서방 편중 외교에 기인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하지만, 427일 케이비에스(KBS) 대담에서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이를 단호히 부인했다. “국제규범에 기반해 한-러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국제정세 블록화 가속 등 새로운 외생 변수가 없다면 한-러 관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복원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내비쳤다.

 

비슷한 시기 ‘2024 모스크바 핵확산 방지회의에서 필자가 만났던 러시아 정부 관료들이나 한반도 전문가들도 장 실장과 같은 견해였다. 우선 한국과의 경제 협력은 러시아의 경제 발전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므로 한-러 관계가 조속히 정상화돼야 한다는 주문이 이어졌다. 러시아 시장에서 현대차, 기아 등 한국 자동차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고, 필자가 묵었던 롯데호텔은 모스크바 최고의 호텔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한국을 비우호국 명단에 올려놓았지만, 현지인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여전히 높았다.

 

그러나 이들은 추후 한-러 관계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첫째,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살상용 무기를 지원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러시아도 한국을 적대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둘째, 러시아의 대북 협력은 생필품과 에너지 등에 국한될 것이므로 한국은 러-북 관계 개선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첨단 군사기술의 대북 공여 등 한국 정부가 우려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강조했다.

 

셋째, 한국의 대러 제재 동참에 대해서는 러시아도 상응하는 조치를 할 수밖에 없다. 일본처럼 대러 제재에 유연한 태도를 보일 수 없느냐는 반문을 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의 독자 제재와, 아직 계약이 정식으로 취소되지는 않았지만, 삼성중공업이 러시아 조선소와 계약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15척 중 10척의 선박 블록과 기자재 제작을 중단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특히 볼쇼이발레단의 내한공연 취소에 대해서는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사회, 문화, 인적 교류는 지속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강변이었다.

 

사실 살상무기 제공 여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사그라질 이슈겠지만, -러 관계 밀착과 군사협력 문제는 전쟁 종료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다. 러시아 쪽의 구두 약속을 그대로 수용할 만큼 두 나라 사이에 신뢰 수준이 높지 않다. 더욱이 이 사안에는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 현격한 시각 차이가 얽혀 있다. 러시아 정부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빈도와 강도, 미국 전략무기의 한반도 전개, 한국 정부의 킬체인 구축 등에 관해 비판적이고, ··일 세 나라의 군사공조 강화에 대해서도 극도의 경계심을 감추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이 주도해온 기존 대북제재 체제에 대해서도 비협조적이다. 러시아가 대북 제재와 대러 제재를 한바구니 안에서 사고하다 보니 한국 정부의 운신 폭은 더욱 줄어든다.

 

결론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료되면 한-러 관계 또한 복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이미 남북 관계와 미-러 관계 악화가 커다란 악재로 부상했고 그 반전 가능성도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 중심의 친서방 정책만으로 이러한 외교적 난제가 저절로 풀리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큰 틀의 외교정책 방향과는 별개로 개별 국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상대하는 섬세한 외교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그러한 정밀성이 결합할 때에라야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 지향점 또한 더욱 큰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정인 | 연세대 명예교수 | 한겨레 2024.05.13.

 

 

 

또 다른 5월과 팔레스타인

옛날에 사격장은 유일하게 구타가 허용되는 곳이었다.” 갓 입소한 훈련병이라면 지금도 접하게 되는 풍문이다. 첫 사격훈련을 위해 총을 쥐고 제 차례를 기다리는 훈련병들에게 그 풍문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혹시 무언가 일이 잘못돼 누군가가 다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훈련병들을 휘감아 잔뜩 긴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사격의 경험은 허탈할 만큼 별것 없었다. 한번 쏴보면 마치 신기루처럼 긴장이 사라지고, 이내 사격은 일상적인 군 생활의 일부가 된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날의 훈련소에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향해 쏘는 것도 처음이 힘들 뿐 익숙해지지 않을까. 남자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인간이 폭력에 길들여지는 걸 보았다. 등교 첫날부터 휘둘러진 빠따소리. 공기를 가르며 몸에 착 달라붙는 소리에 다들 질겁했지만, 한 달이 지나자 엉덩이의 피멍은 보통의 일상이 됐고, 인간이 폭력과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다.

 

하지만 폭력에 익숙해진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805월 광주에 투입됐던 군인들을 대상으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조사한 활동을 보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군인 중에 오랫동안 괴로움을 안고 살았던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분명 학살을 실행한 가해자였으며 동시에 거부하기 어려운 명령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사실 한국군에게 광주시민은 처음이 아니었다. 광주 학살을 다룬 미국 국방정보국의 기밀문서는 광주 시민은 베트콩이었다고 평가했다. 베트남에서 학살 경험이 광주시민을 향한 학살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지원과 경제적 보상을 얻고자 베트남 파병을 적극 추진했다. 피와 총탄에 얼룩진 베트남 특수는 산업화의 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한국사회를 폭력에 길들였다.

 

베트남의 전쟁과 학살에 연루되는 걸 거부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당시 한국사회는 가해자의 편에 섰지만, 1968년 여름 미국에선 반전운동이 거세게 타올랐다. 미국의 청년들은 가해자가 되기를 거절했다. 베트남 땅에 폭격을 가하던 미군 폭격기가 동아시아의 작은 섬 오키나와에 배치되자, 베트남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이라 불렀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가 되기를 거부하며 격렬한 반전·반기지 운동을 전개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직장인 기지의 철거를 주장하며 파업을 벌였다.

 

지금, 베트남 반전운동의 기억이 소환되고 있다. 지난달 미 컬럼비아대학 학생들이 텐트를 치고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에 돌입한 뒤로 미국 전역과 유럽의 대학들로 반전운동이 확산하고 있다. 그들의 구체적 요구는 대학 당국이 이스라엘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라는 것이다. 이는 2005년부터 시작된 비폭력 운동인 BDS(보이콧, 투자철회, 제재) 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베트남이 흘린 피로 특수를 이룬 과거처럼, 가자지구의 집단학살도 한국에 돈을 벌어다 주고 있다. 작년 10월 이후 한국은 이스라엘에 128만달러(176000만원) 이상의 무기를 수출했다. 경제신문들은 방산주에 주목하라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베트남 전쟁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은 용병을 보내는 대신 무기를 팔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에게 또 다른 5월은 가능하다. 시민단체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열군)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열군의 창립일은 426. 19915월 항쟁이 촉발하는 계기가 된, 대학생 강경대가 전투경찰의 폭력에 사망한 날이다. 당시 소위 백골단이었던 열군의 활동가 박석진은 시민을 향한 폭력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며 전경 양심선언을 했다. 20245월 현재, 열군은 팔레스타인에 가해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평화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경향 2024.05.13.

 

 

착한 사람이 지닌 힘

착하면 손해 본다는 게 통념이다. ‘착하다는 말이 자기주장 없이 남의 마음에 드는 행동만 한다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착한 아이 콤플렉스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면의 욕구를 무시한 채 부모의 기대에만 부합하려고 애쓰다 보면 성인이 되어 병리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더해져서, ‘착함은 더 이상 추구할 덕목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어휘사 연구에 의하면, ‘질서정연한 모양이나 동작을 가리키는 이라는 만주어가 17세기 후반 우리말에 유입되어 분명하고 바람직한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형태소로 쓰이기 시작했다. ‘착하다18세기 중엽 <주해 천자문> 등에서 ()’의 풀이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라는 한자가 말다툼의 옳고 그름을 판정해 주는 양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처럼 착하다의 본디 의미 역시 옳다, 훌륭하다등이었다. 현대의 국어사전에 착하다의 뜻에 바르다가 들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얼마 전 방영된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다른 내용들에 비해 사소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김민기씨가 연천 지역에 농사지으러 갔을 때 함께했던 동네분들의 회고담이 나에게는 유독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참 착하고 좋았지. 여기 사람들이 다 좋아했어, 김민기씨를.” 알량한 지식으로 판단하고 가르치려 들었다면 듣지 못했을 표현이다. 그저 말없이 같이 일하고 같이 먹으면서 따뜻하게 함께했기에, 농사라곤 지어보지 못한 서생이 그들과 그렇게 어울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들 능력을 내세우고 높은 봉우리에 오르려 애쓰는 세상에서,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를 향해 묵묵히 걸어온 뒷것의 삶.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았기에 견지할 수 있었던 착함, 그것이 지닌 무한한 힘을 떠올린다.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정말 착한 건 바른 거라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게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의 삶에서 본다. 한없이 착해서 진정으로 강한 분, 김민기님의 건강을 기원한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경향 2024.05.14.

 

 

경청의 기술과 정치

사람들은 자기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엄청나게 말을 많이 하지만 정작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불평을 한다. 구텐베르크 문자 혁명 이후 글로 소통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제대로 듣는 능력이 쇠퇴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읽을 때 집중해서 읽지 않는 것처럼 들을 때도 건성으로 듣는 일이 흔하다. 실제로 듣는 것은 사람의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그 어느 때보다 올바른 청취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부부싸움도 서로 제대로 듣지 않아서 일어나며, 정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정당들이 상대방의 말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 극단적 갈등과 대립으로 이어진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느 곳에서도 더 많은 경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얼마 전 꽉 막힌 정국을 풀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영수회담을 했다. 서로의 말을 듣고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에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이재명 대표는 퇴장하려는 취재진을 불러 세우고 미리 준비한 원고를 주머니에서 꺼내 본격적인 발언을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을 향한 비판과 요구가 담긴 이재명 대표의 작심 발언을 묵묵히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발언을 예상했을 윤석열 대통령이 정말 제대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할 말은 다 했다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준 이재명 대표가 이후 이어진 대담에서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후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두 사람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은 제대로 듣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듣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다른 사람에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더 성공적이고 행복하며 세상을 더 잘 이해한다는 연구가 많이 있다.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7대륙의 최고봉에 오른 최초의 등반가이자 한동안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가장 나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진 텍사스 석유 기업가 딕 배스에 관한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어느 날 그가 비행기를 타고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데 그의 옆에는 모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말을 걸고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그 낯선 사람에게 자신과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가 아직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착륙 직전이었다. 낯선 남자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제 이름은 닐 암스트롱입니다.” 딕 배스가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옆의 사람에 관심을 가졌다면 달 탐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경청의 핵심은 신뢰 구축

주의 깊게 듣는 것이 꼭 멋진 경험을 한 주요 인사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와 자녀, 파트너, 판매원과 고객, 의사와 환자, 정치인과 시민 등 다양한 소통 상황에서 제대로 듣기는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듣는 경청(傾聽)은 본래 머리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듣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 낱말 리스닝’(listening)에는 듣는 것과 귀여겨듣는 것의 차이가 없다. 이에 반해 독일어로 경청하다는 낱말은 듣다에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가 앞에 붙는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을 향해 머리를 돌리지 않는다면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경청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면 일을 더 잘 기억하고, 더 잘 처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경청할 때 점점 더 신뢰하게 된다.

 

경청의 핵심은 신뢰 구축이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뇌과학자 유리 해슨(Uri Hasson)은 경청할 때 우리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실험 대상자에게 TV 시리즈에서 발췌한 내용 중 일부를 보여주고 다른 청취자에게 전달하게 하고 나서 내레이터와 청취자의 자기공명영상을 촬영했다. 스캔 결과,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의 뇌 활동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청취자의 신경 반응이 서로 고정되고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이런 현상을 신경 동조라고 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경청하여 실제로 서로를 이해했을 때 그들의 뇌 반응은 결합되어 유사해진다는 것이다.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좋은 의사소통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공통 기반을 갖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불신의 악순환 깨려면 잘 들어야

듣는 일은 사실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일상 활동 중 하나이다. 그래서 건성으로 들을 경향이 크다. 이에 반해 주의를 기울여 제대로 듣는 경청은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경청은 세 가지를 전제한다.

 

첫째, 경청은 깨어 있는 내면의 태도를 전제한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는 생각이 분산되지 않고 말하는 사람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화자의 표정, 눈빛, 몸짓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한다.

 

둘째, 잘 듣는 것은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상대방이 말을 하는 데 반응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것은 전혀 듣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듣는 것은 수동적이지만, 잘 듣는 것은 능동적이다. 대화는 어쩌면 상대방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경쟁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반응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교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말을 듣고 나도 이런저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교대로 반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경청하는 사람은 아마 어떤 고통인지 공감하고 물으며 상대방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것이다.

 

셋째, 경청은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한다. 대화가 관심을 끌기 위한 경쟁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방식을 바꾸려 노력한다. 그도 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도록 유도하거나 강요한다. 대화 상대자가 왜 그런 방식, 내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이해하려는 자세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수 없다. 그는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만큼 우리와는 다른 믿음과 행동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이에 반해 좋은 경청자는 가능한 한 편견을 버리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개방성을 보여준다. 자신을 신뢰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이런 개방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경청하면 우리 사회에는 갈등보다 화해가 더 많아질까?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다. 우리 국민은 정치인들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한탄하지만, 국민의 요구와 이해관계는 다를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는 상충해서 정치적으로 중재되어야 한다. 모든 요구를 경청할 수는 없지만 듣기만 하고 충족시키지 않는다면, 정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듣기만을 강요하는 사회는 충족할 수 없는 요구만 지속적으로 생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는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고 우선순위를 합리적으로 결정하여 사람들이 이 우선순위에 동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듣는 횟수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의 문제이고, 경청의 결과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 문제이다. 국정을 설명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별로 없다면, 우리는 대통령이 국민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는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결정적인 것은 듣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이다. 경청의 목표는 신뢰 구축이다. 기자회견을 했는데도 무언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가 경청하였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듣기는 물론 양과 질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문제이다. 듣는 횟수가 늘어나 많이 듣다 보면 저절로 소통이 잘되어 신뢰가 증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대립하다 보니 서로 경청하기보다는 자기 말만 내뱉는 청각 장애를 겪고 있다. 신뢰의 부재가 서로의 말을 듣지 못하게 만들고, 이것이 다시 상호 불신을 초래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이 악순환을 깨려면 우리는 우선 서로 자주 만나고, 잘 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 경향 2024.05.14.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거야?”

“2023113일 오후, 가자시티의 알시파 병원에서 라파로 환자를 이송시키던 구급차가 병원 근처에서 세 차례 공격을 받아 13명이 사망했습니다. 같은 날부터 4일까지 자발리야에 있는 난민캠프 학교 건물이 두 차례 공습을 받아 7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습니다.”

 

“20231110일 오후 5, 피난민들의 보호소로 사용하던 알부라크 학교에 이스라엘군이 공습해 50명이 사망했습니다.”

 

한국 시민단체들은 4월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시민 고발인 모집활동을 진행했다. 국회의원, 국제정치학자, 평화운동가, 한국 체류 중인 팔레스타인 난민 그리고 무엇보다 동시대 학살을 목도하며 절망하고 있던 시민들까지 총 5천여명이 고발인으로 모였다. 필자는 이 고발인들의 대리인 중 한명으로, 지난 9일 대한민국 국가수사본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앞선 두 단락은 그 고발장에 기재된 범죄 내용 중 일부다.

 

사망이라는 단어가 635, ‘살해117번 기재된 140여쪽의 고발장 중 30장에는 2023107일 하마스의 공격 이후 지난 430일까지 이스라엘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내용이 일자별로 전수조사 되어 담겨 있다. 고발장을 작성하며 끝도 없이 계속되는 집을 포격하여 10명이 사망”, “초등학교를 포격하여 2명이 사망과 같은 활자를 마주했다. 아득했고,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예전 폭력을 연구하며 읽었던 책들이 떠올랐다.

 

엘리 위젤의 ’. 아우슈비츠 내부 발전소를 폭파하는 데 가담했다는 이유로 어린 소년이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거야?” 교수형을 지켜보던, 수용된 유대인 중 한명이 읊조린다. 소년이 딛고 있던 의자가 넘어졌지만, 소년 목에 걸린 줄은 계속 움직인다.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소년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몸부림쳤다. 책의 저자인 엘리 위젤은 15살 나이에 그 장면을 모두 지켜봤다. 그러곤 속으로 말한다.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여기에 있다. 그는 저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폭력에 대한 절망.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여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은 자신의 이웃들이 파괴되는 동안, 자신의 자유가 얼마큼 가치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거짓말로 살 것인지, 자신이 얼마만큼 묵인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폭력에 대한 외면.

 

고발장에 적힌 피고발인 7명은 이스라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를 비롯한 이스라엘 최고 권력자 7명이다. 가자지구 학살 초기부터 전기, 식량, , 연료가 없는 완전한 포위를 선언했고, “우리는 인간 동물과 싸우는 중이라며 집단살해를 선동했다. 대한민국 수사기관이 이들을 수사할 수 있을까? 집단살해나 전쟁범죄와 같은 범죄는 보편적 관할권이 원칙이다. 범죄자 국적, 범죄가 발생한 지역에 상관없이 모든 국가가 수사하고 재판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그러한 보편적 관할권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제한을 두었다. ‘범죄자가 국내에 있을 것.’ 현재 피고발인은 대한민국에 없기에 이번 고발은 실질적인 수사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무슨 소용일까?

 

법률가로서 답변은 이렇다. 그들이 대한민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언제든 고발장을 다시 제출할 것이다. 최소한 고발된 이스라엘 전쟁범죄자 7명은 대한민국에 들어올 수 없다. 대한민국의 고발운동이 훨씬 더 많은 국가에서 확산되고, 결국 전쟁범죄자들이 체포되고 처벌되는 운동의 시작이길 바란다.

 

동시대인으로서 답변은 이렇다. 6개월 만에 35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최소 추정치로도 과반이 여성과 아동이다.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다. 유엔도 미국도 학살을 멈출 방법이 없는 시대. 고발장 중 최소한 가자지구에서 매일의 죽음을 기록한 30장을 읽어달라. 이웃의 파괴를 얼마큼 외면할지 결정해야 한다면, 묵인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자.

 

고발장이 접수된 이후 우상호 국회의원이 고발인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알려왔다.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으로서 타국의 정상을 고발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저어된다고 거절했지만, 고민 끝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거야를 물을 만큼의 참혹이지만, 절망이 아니라 뭐라도 하겠다는 마음이 번질 수 있다고 믿는다.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 한겨레 2024.05.14.

 

 

원영적 사고라는 새로운 밈

’(meme)이란 유전이 아닌 모방을 통해 습득하는 문화적 요소를 의미한다. 1976년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에 등장한 말로, 문화가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다. 도킨스는 유전자가 자가 복제를 통해 생물학적 정보를 전달하듯, 밈은 모방을 거쳐 개인의 생각·신념을 전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밈은 도킨스의 본래 정의와는 달리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용어·이미지·영상등을 의미하게 됐다.

요 몇년 사이 엠제트(MZ)세대 사이에 유행한 가운데 하나는 누칼협이다.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의 줄임말로, ‘누군가의 협박 때문이 아니라 네 스스로 한 선택이니 그 책임도 네 몫이라는 뜻이다. , 불합리한 사회적 환경이나 구조를 탓하는 호소에 공감을 거부하고 냉소와 조롱을 퍼붓는 것이다. 누칼협과 쌍을 이루는 알빠노도 있다. ‘내가 알 바 아니다의 줄임말로, ‘나만 아니면 된다는 방관자적 태도다.

 

누칼협·알빠노와 함께 유행한 밈은 중꺾마.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줄임말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다져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강조하는 셈이다.

 

최근엔 원영적 사고가 대세란다. ‘원영적 사고는 아이돌 그룹 아이브멤버인 장원영의 초긍정 마인드에서 기인한 밈이다. 예를 들어 사려던 빵을 앞사람이 전부 사 갔을 때, 기다림을 불평하는 대신 앞사람이 전부 사 가서 갓 나온 빵을 받게 됐다. 역시 행운은 나의 편!”이라고 기뻐하는 식이다. ‘오히려 좋아라는 긍정적 사고는 엠제트가 본받고 싶어 하는 덕목이 됐다.

 

사실 이러한 밈들은 2030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외국어 능력, 좋은 학점, 다양한 경험을 쌓아도 취업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취업해도 방 한칸 구하기 어려운 박봉에 시달리며,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사치가 돼 버린 청춘의 현실. 이들은 누칼협·알빠노라며 냉소와 방관을 하다가도 중꺾마를 외치며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버틴다. 갈팡질팡하다 도달한 결론이 초긍정적인 원영적 사고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아니면 이조차 힘겨운 현실을 포기한 초탈적 태도는 아닌지 걱정해야 할까? 기성세대로서 인터넷에 떠도는 그렇고 그런 유행이라며 무심히 지나치기 어려운 이유다.

유선희 산업팀 기자 duck@hani.co.k | 한겨레 2024.05.14.5.14

 

 

대자보 하나 붙지 않는, 침묵의 캠퍼스

대학이 시끄럽다. 학생들이 친팔레스타인 항의시위를 위해 대학의 강의실, 건물, 광장을 점거하고 있다.”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이번 주 메인 칼럼(Leitartikel)의 첫 문장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과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세계 대학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작금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지금 내가 연구 학기를 맞아 방문교수로 와 있는 함부르크대학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최근 이스라엘군의 학살에 항의하고 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크고 작은 시위가 잦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국제적인 연대 시위의 열기보다도 내게 더 큰 감동과 충격을 준 것은 대학 게시판에 빽빽하게 붙은 각양각색의 포스터와 전단들이다. 강연회와 토론회, 집회와 시위를 알리는 전단들이 독일의 성숙한 민주주의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포스터가 유독 많았다. “직업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생존을 위한 보수가 아니라 생활을 위한 보수를”, “인종주의와 분열에 반대한다. 공동 결정과 국제 연대를 위하여라는 제목을 단 두 포스터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모든 대학의 종사자여, 단결하라! 조교와 강사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하여 거리로 나서자!”는 포스터도 보였다.

 

인상적인 것은 함부르크대학 총학생회의 맹렬한 활동을 보여주는 포스터들이다. 총학은 각종 사회적 현안에 개입해 강연회나 집회를 조직했다. “기후운동을 위해 자동차 산업을 사회화하라!”는 주제하에 연속 강연을 개최하는가 하면, 함부르크 지역 문제에도 적극 개입하여, 예컨대 함부르크의 항만 관련 공기업이 사기업에 인수될 위험에 처하자 이를 저지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나아가 함부르크 재산몰수’(Hamburg Enteignet)라는 시민단체와 손잡고 악화되는 주거 문제에 대한 혁명적 해법을 내놓았다. 그것은 함부르크에 있는 주택 500채 이상을 소유한 부동산 사기업의 재산 몰수와 사회화를 위한 주민투표이다.

 

국제적인 문제, 특히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전쟁에 대해 비판하는 포스터도 여럿이었다. “평화의 외침이 왜곡되고 있다는 제목을 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독일 정부의 태도를 성토하는 토론회를 알리는 전단, 이스라엘군의 즉각 철수와 독일 정부의 무기 제공 중단을 촉구하는 항의 캠프를 세운다는 전단도 보였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군사 쿠데타 50주년을 추념하는 음악회 홍보물도 흥미로웠고, 억압받는 이란 여성들을 위한 연대 시위에 동참을 호소하는 전단의 문구 이란 여성들과 연대하자. 신정정치에 반대한다. 파시즘에 반대한다에 가슴이 뭉클했다.

 

강연회도 대부분 사회 비판적인 것이었다. “유럽중심주의 이후의 정치이론”, “토지와 땅에 대해 누가 결정하는가”, “야생의 민주주의. 항의할 권리등의 강연회가 열렸고, 독일의 과거청산 문제를 다룬 식민지배 기억의 빈자리라는 연속 강좌도 진행됐다. 특히 나미비아와 독일. 독일의 식민주의를 누가, 어떻게 기억하는가?”라는 강연이 눈길을 끌었다. “비판적 자연과학도를 위한 강좌도 흥미로웠다. 자연과학도의 비판적 사회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개설된 이 연속 강좌에서는 파시즘의 지주로서의 지리학”, “범죄의 통계학”, “사회 비판을 했다고 직업 금지?”, “정보학의 사례에서 본 전쟁과 평화의 사이에 선 학문등 다양한 사회 비판적 주제를 다루었다. 그 밖에도 생태, 젠더 문제 등과 관련된 강연과 토론, 집회와 시위도 부지기수였다.

 

독일 대학의 게시판을 보며 나는 대학이란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소우주라는 훔볼트의 말을 떠올렸다. 이곳에선 유토피아를 선취하려는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독일 대학이 세계의 모든 고통과 억압에 항의하며 시끄러운반면, 한국 대학은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조용하다’. 독일 캠퍼스가 뜨거운 정치적 공론장이라면, 한국 캠퍼스는 적막한 정치의 무풍지대다. 거기선 세상에 무슨 비극이 벌어져도 대자보 하나 붙는 일이 없다. 오히려 사회적 문제가 제기되면, 예컨대 대학의 청소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면, 시끄럽다고 수업을 방해한다고 고발하고 심지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곳이 한국 대학이다.

 

새가 지저귀지 않는 침묵의 봄은 생태 위기의 도래를 경고한다. 새가 침묵하면 다음엔 인간이 침묵한다.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침묵의 캠퍼스는 정치적 파국의 도래를 경고한다. 대학이 침묵하면 민주공화국은 사망한다. 민주주의는 숨을 죽이고, 공화주의는 숨을 거둔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 한겨레 2024.05.14.

 

 

다시 광야에 선 진보정치

미국 예외주의.’ 미국정치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다.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진보보수의 대립구도를 가지고 있는 대다수 선진국과 달리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고 보수양당이 경쟁하는 미국의 특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의미 있는 진보정당의 부재라는 한국 예외주의.

 

이에 대해 일부는, 아니 대다수 언론 등은 이 땅에는 1950년대 민주당으로부터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져온 강력한 진보야당이 있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아니 일부 극우세력은 민주당이 진보정당을 넘어 친북 빨갱이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진보·보수를 단순히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미국의 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은 공화당이나 국민의힘보다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대주의는 히틀러에 비해 덜 극우라는 이유로 무솔리니를 진보라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올바른 기준은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태도로, 이를 지지하면 보수, 비판적이면 진보다. 다시 말해,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이 진보(프로그래시브)이고, 미국의 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좁은 의미의 보수(컨서버티브)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보수의 일부인 자유주의’(리버럴)정당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2007년 대선에서 한 유명 페미니스트가 박근혜를 지지해 논쟁이 됐다. 페미니즘 입장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남성후보보다 가장 보수적인 여성후보가 더 진보적이라는 주장이었다. ‘21세기의 진보란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중심에 있지만 여성, 생태, 소수자 등의 문제에 대한 태도가 결합한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의미 있는 진보정당은 이 땅에 없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세 시기를 통해 발전해 왔다.

1기는 일제에서 해방정국으로 이어진 시기로 일제와 봉건적 수탈에 저항했던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등의 흐름이다. 이는 한국전쟁과 이승만 독재에 의해 압살됐다.

 

2기는 1950년대 후반 조봉암이 이끈 진보당 실험에 기반해 19604·19혁명 뒤 폭발적으로 생겨난 진보정당들이다. 이들은 7% 정도의 지지를 얻고 7명이 국회에 진출했지만 5·16 쿠데타에 의해 또다시 압살됐다.

 

3기는 1987년 민주화 이후로 1960~1970년대 산업화의 결과로 성장한 노동자계급 등에 기초한 민주노동당의 실험이다. 이는 10석의 강소정당으로 자리 잡지만 반미자주화와 통일문제를 중시하는 자주파와 사회적 양극화 등 우리의 내부모순을 중시하는 평등파의 갈등 등으로 괴멸하고 말았다. 이후 평등파를 대표하는 노회찬, 심상정과 자주파 온건세력이 손을 잡고 정의당을 만들었고 이는 2020년 총선에서 9.67%의 지지율을 얻었다. 하지만 조국사태에 대한 침묵과 도덕적 추락 등으로 위기에 처했다(이에 대해서는 이 지면 2022419일자에 쓴 칼럼 정의당은 어디로참조). 설상가상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으로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변형인 윤 정권 심판론이 급부상하고 총선이 기후위기 등 정책경쟁이 사라진 최악의 선거로 변하면서 정의당은 참패하고 말았다. 20045·16 쿠데타 이후 40여년 만에 어렵게 원내 진출한 진보정당이 다시 20년 만에 광야로 내몰린 것이다. 자주파가 만든 진보당은 원내 진출했지만 이는 민주당의 위성정당참여 등을 통해 이룬 것으로 독자적 진보정당운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확실할 것은 이번 총선으로 제3기 진보정당운동은 끝났고 제4기 진보정치운동, 21세기 진보정당은 낡은 자주파·평등파 논쟁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당이 제4기의 시작인 줄 알았지만 3기의 끝물이었던 것 같다. 정의당의 실험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의당이 추구한 길, 즉 노동(생태(여성(보라)이라는 적녹보연합, 아니 모든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끌어안는 무지개연합21세기 한국 진보정당, 4기 진보정당이 나아가야 할 길임은 확실하다.

 

문제는 비판적인 이성이 사라진 포퓰리즘과 팬덤정치 시대에 어떻게 진보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새롭게 구성해낼 것이냐 하는 지난한 과제다. 신좌파의 효시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위기를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낡은 진보정당은 죽어가는데, 아니 죽었지만, 새로운 진보정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 경향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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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홍범도, 그리고 보수의 정체성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가 새 지도부의 진용을 갖췄다. 황우여 비대위원장은 지난 3일 취임 일성으로 보수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후 연일 보수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말하는 보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 채 상병 순직 10개월

구명조끼가 그렇게 비싼가요. 얼마나 한다고 구명조끼도 안 입히고 수색을 시키냐고. 이건 살인 아닌가요.” 부모의 절규에 온 국민의 가슴이 미어졌다. 지난해 719일 폭우가 쏟아진 경북 예천에서 민간인 수색에 나섰다가 변을 당한 해병대 채모 상병(당시 일병·사망 후 추서 진급). 사건 발생 10개월이 지나도록 아직도 수사는 제자리다. 오히려 의혹만 더 커졌다.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초동 수사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은 항명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말부터 재판이 진행 중이데,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고발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은 채 상병 순직 299일 만인 지난 13일에야 처음으로 소환됐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진행 중인 수사와 사법 절차를 좀 믿고 지켜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동안 제대로 수사가 진행됐으면 애초에 특검법 같은 건 필요도 없었다. 의혹만 커지고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없는데 뭘 어떻게 믿고 더 기다리라는 말인가.

 

지난 14일 시민사회 주최로 열린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 촉구 국민동의청원 개시 선포 기자회견에서는 채 상병과 함께 급류에 휩쓸렸다 생존한 해병의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가 대독되었다. 어머니는 지난 10개월 동안 대체 무엇이 진행되었나. 언제까지 기약 없이 고통받아야 한단 말인가. 높은 분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젊음을 바친 아들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공감하길 바랐는데 대한민국은 그러지 못했다. 국회의원들이 특검법을 꼭 통과시켜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소방당국은 수중 수색을 만류했다는데, 급류에 장갑차도 철수한 상태에서 티셔츠만 입히고 물속에 들어가라고 지시한 사람은 누구인가, 왜 구조훈련도 해본 적이 없는 포병 병력을 배치했나, 이 같은 순직 경위와 함께 초동 수사 이후의 수사 외압 의혹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보수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것 아닌가. 특검법 반대 주장은 외칠수록 군색하다.

 

# 홍범도 흉상 논란 재점화

한쪽에선 한동안 잠잠했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는 최근 내부적으로 홍 장군 등 육사 충무관 앞에 설치한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을 육사 내부의 다른 장소에서 영구 전시한다는 계획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육사는 지난해 홍 장군 흉상을 외부로 이전하겠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공산당 가입 이력이 있는 홍 장군의 흉상이 생도 교육시설 충무관 입구에 설치돼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홍 장군에게 처음 서훈한 것이 박정희 정부였고, 노태우 정부가 유해 봉환을 시도했으며, 박근혜 정부가 해군 잠수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하는 등 보수·진보의 이견 없는 독립전쟁의 영웅을 색깔론으로 홀대한다는 역풍이 불었다.

 

독립유공자 단체들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육사가 홍범도·지청천·이범석·김좌진 장군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충무관 앞에서 옮긴다는 것은 빛나는 독립전쟁의 주역들을 역사의 뒷방으로 치우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광복회는 성명을 내고 육사 내 독립영웅들의 흉상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이전시키려 한다면 차라리 폭파해 없애버리라고 일갈했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만큼 국군의 토대는 광복군, 독립군에 있다고 봐야 한다. 독립전쟁의 주역들을 지우겠다는 육사의 흉상 재배치는 광복군, 독립군의 오랜 전통 대신, 해방 이후로 좁힌 분절적 역사를 강조하겠다는 의미다. 진정한 보수라면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운 역사를 자랑스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현 정부는 오히려 그 맥을 끊으려 한다. ‘반공친일에 갇힐 수밖에 없는 협소한 인식이다.

 

채 상병 순직의 경위와 수사 외압 의혹은 반드시 밝혀야 하고, 독립전쟁의 영웅들은 앞장서서 기려야 한다. 상식적인 국민이 기대하는 보수의 정체성은 이런 것이다. 보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해병대 예비역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 않은가. 다시 묻는다. 보수를 자처하는 현 정부와 국민의힘이 지키고자 하는 보수의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 | 경향 2024.05.15.

 

 

남녀의 다름을 아는 일

두발잡이인간의 진화적 본성은 걷는 쪽일까, 아니면 뛰는 쪽일까?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 포유동물보다 훌륭한 냉장용 땀샘을 진화시킨 인간은 오래 걸을 수 있다. 과거 시험에 응시하고자 길을 나선 선비는 하루 100리를 걸었다고 한다. 40. 현대 인간은 많은 시간을 앉아 지낸다. 그러다 불현듯 한 치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러닝머신 위에서 쳇바퀴 돌 듯 뛰면서 땀을 흘리고 만족스러워한다.

 

야생에 사는 그 어떤 동물도 따로 시간을 내 운동하진 않는다. 우리 조상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인간 역사의 최근 발명품일 수밖에 없다. 좌식 생활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운동하면 우리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우리 몸에서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기관인 근육을 주로 쓰는 운동을 하면 근육의 미토콘드리아 양이 늘어난다.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 생산 공장이니 당연한 결과이다. 아마 산소를 들이켜는 폐의 용량도 커질 것이다. 근육에 공급할 혈액의 양도 늘어야 하므로 심장도 더 힘차게 뛰어야 한다. 운동은 이렇듯 신체 모든 기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정말 그럴까?

 

미국 대학과 병원 공동 연구팀을 이끄는 스탠퍼드대 말레네 린드홀름은 암컷과 수컷 쥐를 8주 동안 트레드밀 위에서 운동시킨 후 19가지 조직에서 이뤄진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의 활성을 조사했다. 근육이나 심장에서의 변화는 예상한 대로였다. 우리 몸 가운데 자리한 간은 여러 조직에 포도당과 케톤, 지방산 등 영양소를 운반하는 대사의 핵심 장소다. 운동 시간이 길어질수록 간에서도 미토콘드리아 활성이 늘었다.

 

하지만 린드홀름은 예상치 못한 기관인 대장과 지방 그리고 부신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대장에서 신진대사에 관여하는 미토콘드리아 단백질이 늘어난 일은 놀랍지만 정작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장내 세균과 관련되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지방과 부신의 동태는 성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8주 운동 후 피하지방 무게는 수컷 쥐에서만 줄었다. 반면 암컷의 지방 조직은 완고했다. 일반 포유동물뿐만 아니라 대형 영장류 동물들과 비교해도 인간은 지방을 상당히 많이 저장하는 편이고 여성은 더욱 그렇다. 생식이나 수유 활동하는 데 쓰도록 지방을 저장해온 인간 여성의 진화적 역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반대로 부신의 경우에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체 발현이 여성에서만 줄었다. 그건 또 무슨 뜻일까?

 

부신은 2크기의 콩팥 위 조직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주도한다. 진화학자들이 투쟁-도피(fight-flight)라 이름한 이 스트레스 반응은 동물의 생존에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으슥한 산길에서 늑대만 한 개를 만났다고 생각해보자. 뇌에서 내려온 신호에 즉각 반응하여 부신은 호르몬을 내보낸다. 부신 겉쪽은 아드레날린을, 안쪽은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만들어 혈액으로 내보낸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동자가 커지고 근육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깨서 포도당을 만들 채비를 마쳐야 한다.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 숲에서 살 때는 이런 반응이 꼭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그때만 한 긴박성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질문은 남는다. 왜 이런 반응은 암컷 쥐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났을까? 임신과 출산에 뒤따르는 스트레스의 크기가 암컷에게 과도한 것일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지레짐작할 일은 아니다.

 

이런 남녀의 성 차이는 운동뿐 아니라 약물 효능에서도 나타난다. 남성보다 지방 저장 비율이 높아 지방에 잘 녹는 약물은 여성의 몸에 더 오래 남는다. 졸피뎀 같은 수면제가 바로 그런 약물이다. 그러므로 같은 조건이라면 여성의 졸피뎀 투여량을 줄여야 한다. 자궁을 수축하는 약물 또는 임신한 여성의 입덧을 줄이는 약물은 특히 한쪽 성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므로 동물 실험을 할 때는 수컷뿐만 아니라 암컷도 포함해야 하고 호르몬의 종류와 양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약물 정보를 축적해야 한다. 지금은 국내 시장에서 시판이 중단된 위장관 치료제 시사프라이드를 예로 들어보자. 심장이 수축한 다음 이완을 마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나타내는 QT 간격은 대개 여성에게서 더 길다. 그래서 시사프라이드처럼 QT 간격을 늘리는 약물은 여성의 심장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감기약이나 위장약처럼 처방 없이 얻을 수 있는 약물에 그런 부작용이 있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녀는 다르다. 그 다름을 아는 일이 곧 과학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 경향 2024.05.15.

 

 

금투세 폐지, 좀비가 살아났다

감세는 머릿속에 한 번 박히면 끝까지 지워지지 않는 최악의 좀비 아이디어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을 보면서 폴 크루그먼의 이 같은 주장이 떠올랐다. 윤 대통령은 이날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를 거듭 밝혔다. 윤 대통령은 금투세를 폐지하지 않으면 우리 증시에서 엄청난 자금이 이탈하고, 1400만 개인투자자에게 막대한 타격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낙수효과론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루그먼은 낙수효과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부유층에 세금을 물리면 경제 전반에 해악을 입히고, 고소득층에 세금을 낮추면 경제성장이 된다는 주장에 대해 절대 죽지 않는 좀비 아이디어라고 단언했다.

 

금투세는 주식으로 5000만원 이상 수익을 내면 과세한다는 게 핵심이다. 투자자의 1%가 부담하는 전형적인 부자세금이다. 하지만 정부는 낙수효과를 근거로 개미투자자도 피해를 볼 수 있는 만큼 부자세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 금투세를 도입하면 정말 주가가 폭락할까? 정답은 알 수 없다. 경제활동은 세금정책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 세금 외에 미치는 국내외 변수가 너무 많다. 세금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된다. 예컨대 하반기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기준금리 인하를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강한 산타랠리에서라면 금투세 부과는 시장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증시는 250만원만 수익을 내도 22%의 세금을 매기지만, 국내 투자자들은 투자를 멈추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올 하반기 금리 인하가 예상된 만큼 내년이 금투세 도입의 적기일 수 있다.

 

금투세뿐만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자산소득 감세에 무척 후했다. 앞서 부동산 재산세와 보유세를 큰 폭으로 낮췄다. 지금은 상속·증여세 감세도 추진 중이다. 기초연금도 인상하고 출생아에 대한 지원금도 확대하겠다는 윤석열 정부가 우직스럽도록 감세를 고집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정부는 재정건전성을 신봉해 국채 발행도 하지 않겠다는 정부다. 세금 안 걷고 국채도 발행하지 않으면서 비용을 마련할 도깨비방망이가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정부 자체 지출을 아껴 재원을 마련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대통령실은 지난해 해외순방비로 249억원을 쓰고, 이도 모자라 일반예비비로 532억원을 더 지출했다. 대통령실 이전으로도 예비비 650억원을 썼다. 해외순방과 대통령실 이전을 위해 국가비상금에서 꺼내 쓴 돈이 1100억원이 넘는다. 국가재정을 쥐락펴락하는 기획재정부는 1시간 남짓한 추경호 전 부총리 겸 장관 이임식 경비로 495만원을 지출했다. 대형 현수막을 제작하는 데만 230만원을 썼다고 한다. 전직 홍남기 부총리(17만원),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126000)과 비교해보면 크게 대조된다. 대통령도 기재부도 돈을 쓴 이유는 있겠지만, 국민들에게 허리띠 졸라맬 것을 강요했던 것을 감안하면 면목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민간에서는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연구원을 자르고, 문화예술 예산 삭감으로 도서관에서 도서구입비와 각종 행사를 줄이고 있다.

 

누구나 세금은 내기 싫다. 세금은 어떤 식으로든 기존 경제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인기도 없고, 경제에도 부담을 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걷어야 하는 것은 써야 할 데가 많기 때문이다. 저출생·고령화 시대를 맞아 돈을 써야 할 곳이 천지에 널렸다. 세금을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 짜낼 수는 없다. 그래서 나온 게 소득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라는 원칙이다. 이 원칙 아래 세금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담세력이 있는 사람이 부담하는 것이 그나마 차선책이다. 또 가급적 노동과 거리가 먼 불로소득에 세금을 매기는 것이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이 세 가지 원칙에 부합하는 세금을 찾아보면 금투세만 한 게 없다.

 

금투세는 지난해 시행되어야 했다. 이를 2년 연기해 내년 시행하기로 한 제도다. 금투세 시행을 믿고 증권거래세는 이미 내렸다. 금투세 폐지는 법적 안정성에도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금투세를 폐지해야겠다면 정부는 이에 상응하는 다른 세수 방안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금투세 폐지는 나라곳간을 좀비화시킨 최악의 좀비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포퓰리즘이 별게 아니다.

박병률 콘텐츠랩부문장 | 경향 2024.05.16.

 

 

고독한 깃발만 나부껴!

최근 갤럽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20%대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불통이 종종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외교·안보 분야가 긍정 평가 30% 비율로 높은 축에 속한다는 것이다. 총선 참패 직후 윤 대통령은 국정 쇄신을 언급했지만, 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분야는 전환이나 인사를 쇄신할 어떠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만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윤석열 정부는 그간 보수가 염원해 온 한·미 동맹과 한··일 안보협력 강화를 그 어느 정부보다 더 제고하였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선 갈등과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기존 정부들의 대외정책이 지닌 미묘한 금기들을 과감히 깬 것이다.

 

외교는 폭풍의 바다에서 배를 뒤집을 수도 있고, 쾌속항해를 하게 할 수도 있다. 관찰컨대, 여야 정치지도자들에게 외교·안보 분야는 쉬운 영역이자 무시해도 되는 분야로 보인다. 이 분야는 총선이나 대선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 거의 모든 대통령은 이 분야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대소 실책이나 무지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에 의존하기만 하면 되는 만병통치약이 있었다. 외교·안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이 분야에서 검증도 채 받기 전에 전문성과 자질보다는 충성도와 친밀도가 역대 정권의 인재 선발 기준이 되었다. 그간 북한 혐오와 한·미 동맹 강화를 소리 높여 외칠수록 보수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최근엔 중국 때리기가 그 리트머스 테스트지 역할을 한다.

 

미국에 의탁한 윤석열표 외교

근대적 국제정치는 그 구조가 아나키, 즉 혼돈이라 불리는 영역이다. 주권국가에 대한 상위의 심판자가 없고, 각자는 스스로 선()이다.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따진다. 강대국일수록 더 집요하다. 국제정치에서 선과 악의 궁극적인 심판 수단은 전쟁이다. 생존을 위해 강대국은 강대국스럽고, 약소국은 약소국다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나마 자유주의 기치를 표방한 미국 덕에 안정과 규범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실험하였다. 그리고 국가를 넘어선 탈근대적 복합질서를 모색하였다. 한국은 이 무대에서 성공적인 연기자였다. 그러나 미·중 전략경쟁의 시기 미국 스스로 여유를 잃었다. 제이크 설리번이 잘 지적했듯이 자국의 내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해졌다. 미국에 철저히 편승하면서 강대국의 언어를 거침없이 내뱉은 윤석열표 가치외교는 이제 당혹감을 넘어 위기다.

 

윤석열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의 양대 진영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권위주의 체제인 중국과 러시아는 모두 미국과 적대적 모순관계로 상정한다. 그러나 현 질서는 냉전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합적이다. 게다가 급격히 진화·변환 중이다. 냉전적 세계관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곳이 한반도이다. 북한은 현 질서를 공식적으로 신냉전이라 규정하였다. 윤석열 정부는 실제 외교원칙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적용하였다. 그 덕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안보리의 압박을 벗어났고, 러시아라는 강력한 경제적 후견인을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민주진영의 최전선에서 깃발만 나부끼면서 고독히 선 돌격대의 양상이다. ·러를 긴밀히 결합하게 한 것은 뼈아프다. 일본은 윤석열 정부를 지원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일본은 탈윤석열, 탈한국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다. ·러와는 최악의 상황으로 점점 커질 비용을 걱정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대중 및 대북 정책을 놓고 미국 바이든 정부와도 점차 미묘한 긴장이 커지고 있다. ·미 동맹은 굳건하다는 윤 대통령의 목소리는 어쩐지 공허하고, 절박한 위기의식은 없어 보인다.

 

미국은 더 이상 가치나 이념을 강조한 외교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미·중 전략경쟁에서 중간지대로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향배가 중요하고, 세계화된 국가 간 관계는 적대적 모순보다는 비적대적 모순으로 협력이 필요한 영역으로 가득 차 있다. 바이든 정부 내 분위기는 중국은 물론 북한과도 대화할 수 있다는 태도로 전환하고 있다. ·러관계는 더욱 미묘하다. 러시아는 북한, 베트남, 인도와의 관계에 공들이고 있다. 중국에는 모두 아킬레스건이다. 미국이 북한을 포함한 이들과 연대할 수 있다면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전략적 공간은 가장 커진다. 미국의 전략은 변화 중이다. 일본도 발 빠르게 북한과 접촉 중이다.

 

구한말 고종의 뒤 밟을 텐가

글로벌 중추국가라는 거창한 슬로건과 달리, 궁극적 승자가 될 것이라 믿은 미국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전형적 약소국 외교를 택한 윤석열표 외교는 3중 편중성으로 스스로의 발목을 묶었다. 첫째는 미국에 대한 편중성이다. 그러나 미국의 일방적 승리는 불가능하다. 둘째는 안보에 대한 편중성이다. 경제는 이제 안보다. 셋째는 가치·이념에 대한 편중성이다. 이는 결국 수단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는 근대적·과거의존적인 외교전략에 집착한 나머지 탈근대적이고 복합적인 변화에 대한 이해를 놓치고, 경직되어 있다. 위기도 여전히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라면, 보다 유연한 정책을 채택하려는 바이든 정부와의 엇박자는 강화될 것이다. 만약 트럼프가 거래주의적 관점에서 외교를 추진한다면, 한국은 자율성이 부재한 가운데 그 높은 비용을 고스란히 다 치러야 할 판이다. ·미 동맹은 절대선이라 변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운 복합 경제·안보·외교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 보수의 구태의연하고 무지각적인 해법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눈과 귀를 열고 명민하게 시세의 변화를 살피고, 여야, 보수와 진보 모두의 지혜를 모으고, 최상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대처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보수의 질과 건강성이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보수는 그 나라의 운명을 지켜내는 근본이다. 진보는 그 나라의 미래에 희망을 던져주는 동력이다. 근본이 흔들리고, 동력이 무능하다면, 그 나라는 암담하다. 국민들은 누가 권력을 잡는가보다는 나라의 근간을 바로 세우고,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여야가 모두 권력욕에만 집착한다면 구한말 고종의 뒤를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오호통재라!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 | 경향 2024.05.16.

 

 

3년은 너무 짧다

“3년은 너무 길다.” 지난 총선 판도를 바꾼 조국혁신당의 선거구호다. 너무 길어 보이는 3년은 윤석열 대통령의 남은 임기다. 이 구호 덕분에 조국혁신당은 창당 두 달도 못 되어 1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고, 대통령 탄핵과 개헌저지선에 겨우 8석이 모자란 압도적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대통령 심판 선거로 치러진 탓이다.

 

이제 국회와의 협치를 전제로 하는 한국형 대통령제의 본질상 분점정부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주권자 국민의 심판을 받았음이 분명한 윤 대통령은 심판의 내용에 있어 남다른 해석을 내놓은 듯하다. 국정기조는 옳은데 국민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무지한 국민을 깨우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단다. 대통령의 참모들을 총선에서 떨어진 심복들로 다시 채운 것도 모자라 민심을 청취하겠다며 민정수석직을 부활해서 검찰의 인사기획통을 모셨다. 이후 전격 단행한 검찰의 인사는 친윤친위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수사에도 성역이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묻지마지지를 보내던 이른바 보수언론마저도 비판하는 안하무인의 불통 기조가 계속되고 있다. 2년이나 걸린 야당대표와의 회담이나 기자회견, 선거개입 논란을 빚다 중단된 민생토론회의 속개도 무늬만 소통마이 웨이의 복사판이다. 그 결과 대통령에 대한 국정지지도는 비슷한 시기 역대 최저치에 머무르고 있다.

 

헌법이 명령하는 협치와는 거리가 먼 윤 대통령의 불통행보는 결국 주권자 국민들의 불행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변할 리 없는 한 사람만을 어르고 달래느라 허송세월할 수만은 없다. 기후위기와 AI시대의 도래와 같은 전지구적 전환과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나 단절된 남북관계는 물론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고현상으로 상징되는 민생경제의 위기는 우리에게 최선만을 고집할 수 있는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주권자 뜻에 따르도록 설득하는 한편 이제 국민끼리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헌법은 최선만이 아니라 차선의 길도 열어두고 있다. 절대왕정의 독재체제를 민주공화정의 협치체제로 전환시킨 인류의 지혜는 의회민주주의에 있다. 근대민주국가로의 체제전환은 의회중심의 민주화로 진행되어왔다. 대통령제라는 정부형태를 채택하는 경우에도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일 수 없다. 흔히들 대통령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행정권을 입법권자의 신임관계로부터 분리하고 행정권 행사의 정치적 기초를 국민이 직선하는 대통령에 두는 것일 뿐이지 의회의 입법으로부터 행정권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법치주의에 따라 민주공화제에서 행정권이란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집행하는 2차적 권력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행정권은 오로지 법률의 한계 범위 안에서 재량을 가질 뿐이다.

 

한마디로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법치국가에서 국정의 중심은 어떤 정부형태이건 의회일 수밖에 없다. 행정권의 수반인 대통령이 협치를 외면하는 반헌법적 국정기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국정의 중심이어야 할 국회만이라도 대전환기에 걸맞게 국정운영체계의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 우리에겐 민주화 이후에도 반복되는 민주적 법치의 위기와 비생산적 국가운영체계를 개혁해야 할 제2차 민주화의 과제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국회·정부·사법 개혁의 전방위적 과제 가운데 국회 주도의 국정운영을 위해 당장 두 가지 대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 우선 시민참여 공론과정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미 선거제와 연금제의 개혁에 대해 부분적으로 시행되었으나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한 바 있지만 시민참여 공론과정의 확대는 여야 극한대립구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주권자의 공론을 정치 동력으로 삼아 시급한 국정현안을 돌파할 수 있는 제3의 길이 될 수 있다.

 

한편 야당이 그림자 내각을 구성하여 행정각부별 중요정책과제에 대하여 다변화된 정책논의를 일상화한다면 대통령과 야당 대표로 집중화된 집권적 대결구도를 완화하여 다양한 민생과제들을 진영논리가 아니라 실사구시적 기준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정치환경이 마련될 수 있다.

 

대통령의 불통행보로 남은 3년이 허송세월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다. 그러나 이 위기를 국회 주도로 국정난맥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국정개혁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2의 민주화를 위한 국정개혁의 관점에서 앞으로 3년은 길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짧을 수도 있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2024.05.16.

 

 

한국 종교에 진보는 둘째치고, 영성이나 제대로 있나

철이 든 뒤에는,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평생을 살아온철학자 김상봉 교수가 자기비판으로 쓴 책 <영성 없는 진보>를 내놓았다. 소제목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이다.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온 예수처럼, 김상봉은 진보 진영에 폭탄 같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이하 칼럼에 나오는 괄호 안의 숫자는 김상봉 교수 저서 <영성 없는 진보>의 해당 페이지임)

 

우리 역사 살린 것은 공동선을 위한 자기희생 덕분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7). 대다수 한국인은 한편에서 과도하게 정치적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한국의 정치가 위기 상황이라는 것에는 의외로 둔감하다(8).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기에, 아시아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순식간에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일까?(8).

 

한국 정치의 파행은 영성의 부재에서 비롯된다(9). 하지만 정치와 영성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 이전에 영성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영성이 정치와 어떤 식으로든 상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왜 보수가 아니라 진보 진영의 문제인가?(9).

 

영성은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을 의미한다(10). 짧게는 해방 이후, 길게는 동학농민혁명 이래, 이 나라의 진보적 정치활동이란 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이었다(11). 해방 이후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만 놓고 보더라도, 독재 권력의 철권통치에도 불구하고 끝내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독재에 맞서 싸운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12). 우리의 역사가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고 의미 있는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응답하고, 우리 모두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12).

 

80년대 이후 맥 끊긴 신앙과 혁명적 진보운동의 결합

한국인이라면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광주 5.18까지 이 땅에서 정치적 실천이 종종 종교적 운동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15). 19세기 이래 다른 나라에서는 진보적 정치행위가 세속주의에 의거하고 있었던 데 반해, 이 나라에서는 종교적 신앙이 혁명적 진보운동의 토양이 되었던 것은 한국 근현대 민중운동 역사의 특별한 개성이다(16).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이 전통은 끊어진다(16).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도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도, 그 믿음에 근거하여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16).

 

이 나라의 보수 정치에는 전체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정신 자체가 없으므로 믿음이나 영성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18). 그들은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18). 우리가 사는 나라를 바로 우리 자신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들어,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집단적 자살을 향해 치닫고 있는 지금, 이성의 언어만으로는 결코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20).

 

조선 왕조가 썩은 흙담처럼 무너져 가던 시절, 동학이라는 새로운 믿음의 언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국가가 아니라 민족 자체가 소멸의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절망적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믿음이다(20). 새로운 믿음은 우리가 지금까지 형성해온 역사의 의미를 믿음의 관점에서 해명할 때 우리에게 도래할 것이다. 그 역사는 우리가 수난과 저항과 투쟁 속에서 형성해온 우리 자신의 역사이다(118).

 

전태일과 서준식을 채운 것은 이념 아닌 종교적 영성

한국의 진보적 민중운동이 다시 대중적 참여를 견인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74-75). 그를 분신으로 이끌었던 것은 계급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사랑이었다(75). 전태일에게서 그 믿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신앙이었다(77). 전태일을 전태일 되게 만든 것은 자기 개인의 가난과 고통이 아니라 세계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75).

 

그에게 타인은 자기와 관계없는 타자가 아니라 나의 전체의 일부였으며, ‘나의 또다른 나였다. 그는 배고픈 어린 여공들에게, 자신이 버스비로 써야 할 돈으로 붕어빵을 사 주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도봉산 기슭 집까지 걸어갔다. 차비를 털어서는 여공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자기의 한쪽 눈을 판 돈으로 착취 없는 공장을 만들려 했다. 그 시도조차 좌절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어두운 세상을 밝혔다(13-14).

 

역사의 진보를 위한 투쟁의 가장 치열한 전선에서 싸우면서도, 지난날 안중근이나 백범 김구 같은 위대한 정신이 보여 준 영성을 가장 탁월한 전범으로 보여 준 이가 서준식이다(80).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7년 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유물론자에게 종교가 왜 중요한 문제였던 것일까?(81). 그가 천착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삶이었다(80). “특히 복음서 부분은 소외되고 신음하는 세상 사람들의 인간적 해방을 바라는 자가 몸에 지녀야 할 고귀한 윤리의 보고이다라고 서준식은 옥중 서한에서 고백한다.

 

보수는 문제만 일으키고 해답은 내놓을 생각도 없고, 진보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해답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고 김상봉은 말하고 싶은 것일까.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진보운동의 변질이나 타락을 비판한다 하더라도, 불의에 대항하여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싸웠던 사람들과 그들의 시대에 대한 감사와 존중의 감정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87). 김상봉은 진보를 단순히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가 진정한 희망을 제시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직 때 이른 말이다. 지금은 아직 밤이니, 우리는 아직 깨어 기다려야만 하리라. 머지 않아 새벽이 올 때까지”(118).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오늘날의 한국 종교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 사랑이라면(66), 한국 종교에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은 있는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 있다면, 한국 종교는 윤석열 검찰독재 정권에 왜 저항하지 않는가. 고통받는 사람들과 일치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종교인들이 언젠가 진보 흐름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90년대 이전 한국의 진보적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종교인들은 어느새 구경꾼 신세로 추락하고 말았다.

 

갈릴래아 예수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웠다면, 예루살렘 예수는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했다. 예수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철이 든 것이다. 예수는 자비 영성에서 출발하여 저항 영성에 도달했다. 예수 영성은 자비 영성과 저항 영성이다. 자비 없이 저항 없고, 저항 없이 자비 없다.

 

나는 김상봉 책 소제목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에서 한국 종교의 위기를 생각하고, <영성 없는 진보> 책 제목에서 진보 없는 영성을 떠올린다. 한국 종교의 위기는 영성 없는 진보 때문이 아니라 진보 없는 영성 때문에 생겼다는 말이다. 지금 한국 종교에, 진보는 둘째치고, 영성이나 제대로 있기는 있을까. 내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 종교에 영성은 있는가.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4.16.

 

 

특검·탄핵 총공세, 대통령 '소용돌이' 피하려면

민심 순응 첫 단추는 국정방향 전환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을 보유하고, 이재명 대표가 민주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과 이 대표·조국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맞물리는 22대 국회는 여야 모두에게 사활적 상황이 될 것이다. 야당 대표들만에게만 사법문제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해병대원 순직 외압 의혹과 김건희 여사 특검의 향배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 부부에게도 사법리스크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여야 수장들의 사법리스크가 한국정치를 최대의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 야권연합은 압도적 의석을 바탕으로 특검 정국으로 여권을 최대로 압박할 태세다. 총선 기간 중 명시적으로 대통령 탄핵과 임기 단축 개헌을 언급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대표들의 발언은 상황에 따라 구호에 그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오로지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 등 여권이 하기 나름이다. 이의 객관적 지표는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다.

 

야권이 입법부를 장악했지만 사법부까지 장악한 것은 아니다. 물론 '사법의 정치화'란 용어로 함축되듯이 여야 통틀어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와 이와 연대하고 있는 조국 대표에 대해 사법부가 순도 100%로 헌법에 명시된 법관의 양심과 법리에 따라서만 판단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이 대표의 여러 혐의 중 하나라도 1심에서 유죄가 나오는 판결이 있다면 야당 대표의 도덕적 흠결이 급부상 할 것이므로 정국은 요동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22대 총선 참패 이후 윤 대통령과 여당이 정치 기조를 바꾸고 있다는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여당의 총선 참패,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영수회담, 윤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기자회견, 대통령실 참모들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임명, 검찰 인사 등. 최근 한 달여 주목받는 여권발 뉴스들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총선 민심을 겸허히 수용하고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을 뒷받침한다고 보기 어렵다. 여전히 친윤 중심의 인사의 색채가 강하다. 해병대원 관련 특검에 대해서도 여권의 입장은 분명하다. 수사기관의 수사를 지켜보고 결정하겠다는 진부한 논리만 반복하고 있다. 법리적·형식논리의 측면에서 수긍할 부분이 없지 않지만 특검에 대한 과반 이상의 찬성 여론을 무시하고 있다. 선거에서 왜 참패를 면치 못했는지에 대한 상식적·합리적·이성적 판단이 결여되어 있다. 정무적 판단의 부재는 더 이상 거론할 것도 없다.

 

여권의 인식이 요지부동이라면 야당의 탄핵 의지가 실제 행동에 옮겨질 수도 있다. 여권이 이를 헤쳐 나갈 방도는 국민적 지지를 끌어올리는 길이 유일하다. 의석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려도 지지율이 반등하고 국정운영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는 시그널이 명징해진다면, 그리고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이 각각 다른 이원적 정통성(dual legitimacy)에 근거하는 여소야대에서 국민적 지지가 전제될 때 여권은 국정을 주도할 동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분할정부의 여소야대에서 향후 국민의 지지가 20-30%에서 정체된다면 사법리스크를 정치적으로 돌파하려고 작정한 야권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결국은 국민의 보편적이고 상식적 여론이 정국의 향배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여권은 총선 민심과 현 단계를 보는 인식이 한심하리만큼 안이하다. 과거 행태의 인식과 틀에 얽매여서 한 치의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화석화된 정치가 아니고서야, 총선 이후의 여권의 행태는 독해가 불가능하다.

 

파죽지세의 야당을 견제할 수 있는 무기는 국민의 지지다. 여권이 요지부동인 40~50세대의 인식을 바꾸고 지지율의 반등을 가져오려면 지금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중도층의 인식이 여권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쇄신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선거 이후의 변화라곤 이재명 대표와의 영수회담과 기자회견이다. 그것도 윤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얘기만 했다.

 

총선 대참패에도 불구하고 여권이 기존의 틀을 고수한다면 22대 정국은 선출권력으로서의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의 균형이 아닌 대충돌을 야기하게 될 것이고, 양측의 사활을 건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피하기 어렵다. 바야흐로 소용돌이의 정치가 도래하고 있다. 윤 대통령과 여당의 변화, 일반의 예상을 뒤엎을 여권의 발상의 전환만이 파국을 막을 수 있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 프레시안 2024.05.17.

 

 

대통령 놀이의 막장 보여준 검찰 인사

대통령을 풍자하는 여러 표현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대통령 놀이가 아닐까.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대통령의 권한과 특혜만 누리려고 하니 말이다. 대통령이 책임은 지지 않고 즐기기만 하면 국민이 힘들어진다. 그의 대통령 놀이202210이태원 참사때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자신의 고교 후배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감싸고돌면서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소홀한 공직자의 책임을 묻는 여론에 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일축했다고 전해진다. “책임이라는 게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지 아무한테나 물으면 되겠나.” 하지만 공직자의 책임 여부는 법에 따라 공정한 조사를 통해 가리는 게 국가 운영의 기본 원칙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 바로 사법 시스템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공적 시스템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판단해서 국민에게 받아들이길 강요한다. 마치 짐이 곧 국가라는 전제군주처럼 말이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한 것에 브이아이피(대통령)가 격노했다는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진술이 공개됐을 때 언론들은 임 전 사단장이 윤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방부 장관이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의 초동 수사결과를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뒤집을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을 보면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 게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럼, 윤 대통령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냥 자기가 볼 때는 그게 맞는 것 같으니 그랬을 것이다.

 

지난 13일 발표된 검찰 고위 간부 인사는 그의 대통령 놀이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자기가 이 되는 데 아무리 큰 공헌을 한 측근이라도 딴마음을 먹으면 언제든지 숙청해버리는 과거 전제군주의 모습을 재현했다. 그 모습이 홍준표 대구시장에겐 자기 여자를 보호하는 상남자로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국민에겐 공인 의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무개념 대통령일 뿐이다. 이번 검찰 인사는 윤 대통령이 그동안 보여준 내로남불의 하이라이트다. 4년 전 검찰총장일 때 윤석열 사단해체 인사에 반발해 총장 패싱 인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장면을 역할만 뒤바꿔서 그대로 재현했다.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며 주먹을 불끈 쥐고 여당 의원들에게 맞서는 모습에 환호했던 검찰 후배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당시 연판장을 돌리고 성명서를 내가며 윤 총장을 응원했던 검사들은 지금 인지부조화 상태가 아닐까. 인사에서 패싱당한 이원석 총장을 비롯해 한직으로 쫓겨난 친윤검사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이번 인사의 또 다른 포인트는 차기 검찰총장 후보군을 윤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할 검사들로 채운 것이다. 남은 임기 동안 자신과 부인에게 칼을 겨누지 않을 뿐 아니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정적 제거에 신명을 다할 검사들만 추려냈다. 대표적인 인사가 서울고검장에 임명된 임관혁이다. 그는 박근혜 정권 몰락의 서막이었던 정윤회 문건수사의 주임검사였다. 2015년 이른바 정윤회 국정 개입 문건을 사설 정보지(지라시) 수준의 허위라고 결론 냈던 바로 그 수사다. 당시 검찰은 문건의 실체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전 경정과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을 공무상 비밀누설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문건 유출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다. 한점 의혹 없이 철저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한 것을 충직하게 따랐다. 임 고검장은 검사 위증 강요 의혹이 제기된 한명숙 전 총리 사건도 주임검사를 맡았고, ‘세월호 참사특별수사단장을 맡았을 때는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대표와 김주현 민정수석의 수사 외압 의혹에 면죄부를 줬다. 그의 이름엔 항상 당대 최고의 정치검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임 고검장의 존재는 윤 대통령의 신임을 듬뿍 받는 이창수 신임 서울중앙지검장의 충성심을 자극할 것이다. 벌써부터 이 지검장이 전주지검에서 지휘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전 사위 관련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첩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김건희 여사 수사에 대한 맞불 성격이다. 검찰은 국민으로부터 더욱 불신받게 될 것이다. ‘대통령 놀이에 빠진 대통령이 이젠 검찰도 힘들게 한다.

이춘재 | 논설위원 | 한겨레 2024.05.17.

 

 

약자가 뉴스를 회피하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소위 잘 나가는이들은 뉴스 소비에도 적극적이다. 본인이 열심히 뉴스를 찾아보기도 하지만 정치와 사회, 경제에 대한 뉴스를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회사와 동문 모임 등 공동체에 소속돼 있다. 중요 기사를 놓칠세라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심지어 언론에 나오지 않은 뒷이야기까지 소개하는 정보지’(일명 지라시)까지 구독한다. 반면 권력과 자본, 시간이 부족한 여성과 서민, 젊은이 등 사회적 약자일수록 상대적으로 뉴스를 회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소수자의 뉴스 회피 현상은 무지와 냉소, 궁극적으로 불평등과 사회적 고립을 고착화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결국 뉴스 회피는 양극화의 다른 이름이다.

 

저널리즘 연구자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언론이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고품질의 뉴스를 생산하고 있다고 본다. 기술의 진보로 이런 뉴스는 과거보다 훨씬 저렴하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언론은 왜 약자들의 뉴스 회피를 극복하지 못할까? 최근 미국 미네소타대 벤자민 토프와 스페인 마드리드/세고비아 아이이(IE)대 루스 파머, 옥스퍼드대 라스무스 클라이스 닐센이 공저한 연구서 뉴스 회피: 저널리즘을 꺼리는 독자들100여명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한다.

 

언론은 통상 열성 독자‘, 즉 편집국에 전화를 걸고 댓글을 열심히 남기는 이들에게 귀 기울인다. 하지만 저자들은 뉴스 회피자들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이들의 입장에서도 이해해 볼 것을 제안한다. 이들이 만난 미국과 영국, 스페인의 뉴스 회피자들은 뉴스가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으며, 읽어봐야 바뀌는 게 없다고 말한다. 이는 본인이 만나는 한국 대학생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정치의 계절, 신문에는 오랫동안 국내 정치라는 스포츠를 관전해온 열성팬용 기사로 가득하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이 스포츠 입문에는 장벽이 높다. 팬이 아니라도 이해하기 쉬운 기사, 사회적 약자에게 친절하고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뉴스 생산이 우민화 내지 대중 추수주의라고 폄훼하는 이들에게 저자들은 쐐기를 놓는다. “주류 언론은 항상 부자들에게 친절하고, 희망을 불어넣어 줬다. 고급 부동산과 금융 투자, 명품 소비재 관련 기사와 광고가 그것 아니고 무엇인가?”

 

뉴스를 회피하는 젊은이와 전업 주부에게 뉴스 소비는 힙하고, 한국 사회의 건강에 직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유발하는 묘수가 있을까? 저자들의 제안 중 뉴스 시사 상식 오락물이나 경진대회, 뉴스 소비와 지식을 뽐낼 수 있는 브랜딩, 알고리즘에 의존해 고도로 개인화한 뉴스 배달 등이 눈에 띈다.

 

자부심과 홍보도 중요하다. 한국 언론인들은 자신들 평가에 박한 편이다. 일반인들은 언론이 정확하고 깊이 있으며 균형 잡힌 보도를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지 못한다. 사건 기사 하나에 사회부 경찰 기자와 팀장, 차장과 부장뿐만 아니라 사진, 편집, 교열 기자와 그래픽 디자이너 등 얼마나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지를 지인들에게 설명하면 대부분 깜짝 놀란다. 뉴스 생산 과정에 대한 이해가 뉴스 소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가르쳤던 커뮤니케이션 학자 제임스 캐리는 뉴스가 주는 효용이 단순한 정보 전달에 머물지 않는다며, 저널리즘을 식전 기도와 같은 의례로 설명했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들과 뉴스를 읽고 논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공유하고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연결성 역시 강화되는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뉴스 회피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파편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이들에게 뉴스 소비 습관의 형성이란 공동체 재건을 뜻한다. 젊은이들이, 서민들이 뉴스를 회피하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서수민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한겨레 2024.04.17.

 

 

언론자유 위해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

국경없는기자회2024년 전 세계 언론자유지수가 많이 안 좋아졌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언론자유지수는 전 세계 국가 중 62위에 그쳤다. 작년보다 15계단이 하락했다. 20091년 만에 역대급으로 19계단을 추락한 사례 다음의 하락폭이다. 두세 자리 정도 변동했으면 다른 나라들이 잘 해서 그렇거니 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15계단이나 떨어진 것은 외부에서 볼 때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나는 바로 이 추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62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년보다 매우 크게 떨어진 사실이 중요하다.

 

정권 성격 따라 유독 등락폭 큰 한국 언론자유지수

이웃나라 일본을 보면 대체로 한국보다 언론자유지수가 낮은 편이다. 2010년에 전 세계 11위라는 최고치를 찍은 이래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중이다. 2013년에 하락폭이 가장 컸고 (201222: 201353) 그 이후는 매우 안정적이다. 10년 가까이 50위대와 60위대 안에서 왔다 갔다 한다. 이 지수가 전 세계 180개의 나라에서 측정이 된다고 생각해 보면 일본은 대략 높은 중위권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북유럽 정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정권교체가 잘 안 되는 일본이어서 같은 성격의 정권이 계속 들어서지만 언론을 그렇게 세게 탄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정권이 바뀌자 1년 만에 15단계나 하락한 한국과 대조가 되는 형국이다.

 

표현의 자유를 최우선시 하는 미국에서도 지수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2002년에 17위였던 미국은 2024년에 55위까지 하락했다. 큰 폭이긴 하지만 20년이나 걸렸다. 대체적으로 한국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대만의 언론자유지수 변동폭도 큰 굴곡 없이 합리적인 틀 안에서 왔다 갔다 한다. 올해는 오히려 27위로 올라갔다. 아시아에서는 1위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언론의 자유 지수가 크게 변동되는 것은 한국의 특징 중 하나다. 민주주의가 아직 덜 완성되었고 제도나 법률보다 특정한 인물이 영향을 더 미친다는 신호다. 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된 지 얼마 안 되거나 아직 제대로 작동 못 하고 있는 나라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례도 흥미롭다. 작년에 79위였던 우크라이나는 올해 한국보다 1단계 높은 61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큰 상승은 전문가들도 놀랄 만한 결과다. 전쟁 중에 있는 나라인데 말이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전쟁이 오히려 언론의 자유를 개선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스마트폰 사용의 보편화, 필터링이 없는 현장 즉각 보도, 매체 관리보다 더 급한 과제가 많은 정부, 이런 여러 요인들이 오히려 우크라이나 미디어를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다. 전쟁 중이기 때문에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더 높은 압박을 받으면서 고위공직자 교체, 부정부패사건 조사, 사법부 개혁 등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환경이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역설이다. 아무튼 전쟁 중인 나라의 언론자유지수가 평화를 구가하는 한국보다 더 높다는 사실이 웃프다.

 

같은 전쟁 당사국이면서 사뭇 다른 러·우크라 언론자유

반면에 러시아의 형편은 정반대다. 전쟁 가해자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반대 목소리를 전면 막아 버린다. 오로지 정부의 입장을 24시간 동안 방송하는 매체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정부 공식 입장과 반대되는 보도는 물론 조금이라도 다른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는 전면 폐쇄하고 이런 미디어와 사람을 가짜 뉴스로 낙인 찍는다. 인터넷 자체를 통제하지는 않지만 인터넷을 통한 정보 전달 과정을 기술적으로 매우 번거롭게 만들거나 제한하는 등의 정책은 러시아를 매년 랭킹의 맨 밑으로 내몬다. 올해는 작년보다 2계단이 높은 162위로 올라갔으나 큰 의미가 있겠는가. 러시아가 잘 해서가 아니라 다른 주변 나라들이 더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국가 자체가 불안한 상태에 빠진 161위인 지부티 (Djibouti, 아프리카의 동부에 위치한 작은 나라)와 전체주의에 가까운 독재국가인 163위 니카라과 사이에 위치한다. 중국이나 북한처럼 미국산 SNS (facebook, Instagram ) 전면 통제, 반정부 성격이 보이는 책, 음악, 영화, 공연, 뮤지컬, 전시회 등 전면 폐지 상황에서 언론의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우크라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든 나라들의 언론자유지수 랭킹이 줄줄이 하락한 것도 흥미롭다. 오래전부터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친러 성향이 강한 세르비아는 7계단이 하락해서 98위를 차지했다. 이유는 러시아를 빠져나와 세르비아로 도망간 러시아 기자들이 세르비아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거나 러시아로 송환까지 된 사례 때문이다. 26단계나 추락해서 103위에 머문 조지아가 랭킹에서 내려가기 시작한 시기는 친러 정당이 집권하면서부터다. 514일에 해외 언론 영향 제한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등 러시아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한국과 비슷하게 랭킹에서 크게 왔다 갔다 하는 나라가 아르헨티나다. 이번에는 26계단이나 추락해서 66위에서 머물렀다. 이유는 작년에 이뤄진 정권교체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현 대통령은 남미 트럼프라고 자주 불린다. 반노동, 친미, 반중국 감성이 매우 강하다. 정부에 불리한 보도가 많다면서, 국가예산이 많이 들어간다면서 지난 3월에 텔람’ (Telam) 국영방송 폐지 지시를 내렸고 현재 방송사 운명은 불투명하다. 한국으로 따지면 KBS 같은 공영 방송이다. 지난 정권이 돈을 많이 써서 국가 채무가 급증했다고 비판하며 국가 소유인 항공사, 수도공사 등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뭔가 한국 닮은 것 같기도 한 아르헨티나의 언론자유

그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이 오컬트 마니아라는 것이다. 2017년에 죽은 강아지의 유전자를 복사한 강아지 4마리를 키우고 있다. 그뿐 아니라 2017년에 죽은 강아지와 아직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하면서 가끔씩 조언을 구한다고 진지하게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자신이 아르헨티나를 구하기 위해 내려온 구세주라고 믿고 정신적 멘토(무속인)도 자주 만난다고 한다. 비슷한 케이스를 어디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국경없는 기자회가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지만 눈 여겨 볼 만한 보고서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이나 아르헨티나처럼 연 단위로 크게 오르거나 추락하는 것은 분명한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현 정부는 국제기구 의견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은데, 시민인 우리는 언론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뭔가 우리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4.17.

 

 

영국의 파킨슨 법칙이 한국에서 파계승 법칙된 사연

경영학이나 행정학 이론 중에 파킨슨의 법칙이란 게 있다. 주로 인사(人事)관리와 연관된 내용인데, 인사관리란 말 그대로 일과 사람, 조직 간 관계를 다룬다. 여기에 나오는 파킨슨의 법칙이란, 관리를 해야 하는 대상은 줄어드는데 관리자의 수는 늘어나는 역설적인 현상을 지적한다. 한마디로, 관료화한 거대조직의 비효율이 문제의 핵심이다. ‘말도 안 되는소리 같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제법 많다. 일례로, 군대에서 병사들의 숫자는 줄어드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장교의 수가 이상하게 늘어난다든지, 아니면 사회복지 수혜 대상은 줄어드는데, 복지 담당 공무원의 수만 증가하는 경우가 있다.

 

관리 대상은 줄어드는데 관리자는 늘어나는 웃기는법칙

실제로 파킨슨의 법칙1958년에 책(Parkinson's Law: The Pursuit of Progress, London: John Murray)을 통해 처음 제시한 영국의 시릴 노스코트 파킨슨(Cyril Northcote Parkinson, 1909~1993) 박사는 1930년대 자신의 해군 근무 경험을 그 근거로 삼았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기원이 된 영국 해군의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중엔 영국 해군 장교 생활도 했다. 심지어 그 분야의 교관 내지 교수 생활도 했다. 그러던 중 파킨슨은 특히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영국 해군 조직을 살피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1914년부터 1928년까지 해군 함정의 수는 67%, 장병의 수는 31.5%나 감소했으나, 행정인력이 오히려 78%나 증가한 사실이 실제 자료로 확인된 것이다. 즉 영국해군의 조직 크기나 업무량이 줄어든 것에 비해 관리 인력은 매년 평균 5.75%씩 증가했던 것!

 

웃기는현실을 비꼬듯 고발하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이 이상한 법칙을 1955년에 저명 잡지 <이코노미스트>에 짧은 글로 발표했다. 이 글에 많은 이들이 주목했고 그는 이를 기반으로 3년 뒤에 앞의 저서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오늘날까지 학계에서는 상당히 많이 읽힌다. 파킨슨의 법칙을 일명 치솟는 피라미드 법칙(the law of rising pyramid)’이라 하는 것도, 일과 조직은 줄어드는 데 관리 인력만 피라미드처럼 불어나는 역설적 현상을 비꼬기 때문이다.

 

물론, 현상을 서술하는 것만으로는 법칙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 현상이 나오게 된 원인과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크게 두 가지가 주효했다. 첫째, ‘부하 배증의 원리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어떤 (고위) 공무원은 업무량이 급증할 때 유능한 인력을 보충하기보다 말 잘 듣는순종형의 부하들로만 자리를 채우다 보니 전체 인력만 증가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동료나 더 유능한 사람을 채용하면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작동한 결과다. 둘째, ‘업무 배증의 원리라 불리는 것으로, (의도와 무관하게) 갈수록 무능한 인력이 늘어남에 따라 지시, 감시, 통제, 보고 등 관리 업무가 부수적으로 더 늘어나게 되어 있다. 게다가 조직 전체의 무능이나 하는 일 없음이 폭로될까 두려워 조직 구성원들끼리 서로 앞을 다투듯 쓸데없는일거리를 만들어내는 경향성까지 생긴다. 결과적으로 업무량이 배증하니 조직이 비대해진다. 부하 배증과 업무 배증이 상호 상승 작용을 하면서 조직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만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 같으면 엄청난 수술을 해야 할 판이다.

 

수백 조 국민 세금을 눈먼 돈취급하는 허가받은 도둑놈들

물론 이 이론은 치열한 경쟁과 효율을 지상명령으로 여기는 자본주의 민간기업보다는 국민의 세금(‘눈먼 돈’)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공공 관료조직에 더 잘 들어맞는다. 가난한 나라 인도 출신으로 영국 유학까지 해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해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던 비폭력 불복종운동의 선구자, “인도의 미래를 위해서는 70만 개의 마을공화국이 필요하다고 주창한 마하트마 간디(1869~1948)의 철학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각국의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행정 공무원들은 (수억 내지 수천 만 국민의) 혈세만 축내고 있는지 모른다. 파킨슨 박사보다 10년 뒤에 태어나 초등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던 내 아버지는 아무 학식이 없이도 막걸리만 몇 잔 걸치면 허가받은 도둑놈들이 나랏돈을 다 빼먹는다고 한탄하시기도 했다. 아버지의 공인절도사이론이라 해야 할까? 오늘날 수천 억에 이르는 특수활동비만이 아니라 수백 조에 이르는 국민 세금 전체(심지어 국가 부채까지)눈먼 돈아니던가?

 

그러나 설사 그 정도(간디 식의 무용지물내지 내 아버지 식의 공인절도사’)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파킨슨 박사는 영국 해군 조직의 예를 통해 사람이 만든 조직이 그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현실을 정직하게 비판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일부 이론적 한계나 모순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파킨슨 법칙은 오늘날에도 거대 정부나 공공 조직, 대기업병, 관료 조직이나 역기능 조직, 중독 조직 등의 비효율과 내부 문제를 비판할 때 종종 인용된다.

 

역사적 실증에 따르면, 10명 이하로 출발한 오늘의 영국 상원 조직도 1600년경에는 50명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그와 더불어 오히려 힘이 약해졌고 170명이 넘자 오히려 회의조차 열리지 않는 조직이 되었다. 물론, 조직의 규모는 그 임무의 성격이나 상황의 복잡성 등을 반영,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그 어떤 경우에도 통용되는 단일 해법이란 없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 그 중에서도 검찰 조직을 보면, ‘파킨슨의 법칙을 그저 영국 해군이나 정부 조직의 현상이라고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님을 느낀다. 특히 한국의 검찰 조직은 부하 배증의 원리업무 배증의 원리라는 파킨슨 법칙의 기본을 훨씬 넘어 조직 배신의 원리까지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이렇다.

 

허가받은 도둑놈넘어 조직 배신의 원리까지 장착한 검찰 조직

첫째, 검찰 조직의 존재 이유, 그것도 그 직업윤리의 기초인 검사 선서마저 배신했다. 모든 검사가 첫 출발할 때 태극기 앞에 엄숙히 맹세하는 검사 선서를 보자. 모든 검사들이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설 때 하는 진지한 다짐이다.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공직자다. 검사의 지향점은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 이런 이가 모범 검사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하는 것이 검사 선서다. 과연 현재 대한민국 검사 약 2천 명 중 이 선서 앞에 떳떳한 이가 몇이나 될까? ‘검사 동일체 원칙이라는 기괴한 논리 아래 강자 동일시를 하면서 비굴한 생존과 출세를 도모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물론, 좀도둑이나 단순 폭행범 같은 사건이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잘 처리하겠지만,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란 가뭄에 콩 나듯한다.

 

둘째, 검찰의 사회적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지하세계에서 헤맨다. 한국행정연구원 주관의 사회통합실태조사 결과(KOSIS 참고),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지에 대해 약간 믿는다매우 믿는다고 응답한 자의 비율 총합)는 최근 10년 이상(2013년부터 2023년까지) 50%를 넘지 못했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에만 50.1%였지,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엔 27.5%, 현 윤석열 정부 때인 2023년엔 44.5%에 불과했다. 역으로 말하면, 검찰에 대한 불신도가 60%에서 70% 이상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솔직히, 이것조차 과대평가의 결과로 보인다. 원래 신뢰도(Reliability)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위 검사 선서에 나오듯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고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을 지켜 공익의 대표자라는 본연의 사명에 타당성(Validity)을 지닐 것, 다른 하나는 (내 편은 봐주고 아니면 먼지까지 탈탈 터는이중잣대 없이)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와 함께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모습을 보일 정도로 일관성(Consistency)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숱한 특수부사건(정치경제적 큰 이슈)들에서 보듯, 검찰은 내로남불의 전형이었고, 공익의 대표자 내지 정의의 수호자라는 국민적 기대를 철저히 저버렸다. 2014년 세월호 직후에 보인 박근혜 정부 대처법(해경 해체) 식으로 말하면 당장 검찰을 해체해야 할 판이다.

 

균형과 견제의 정치를 잡아먹은 검찰 쿠데타

셋째, 검찰은 국민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데, 검찰이 스스로 국가 경영에 나섬으로써 사실상 본분을 망각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검찰 쿠데타라 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검찰은 법원이나 경찰과 함께 사법 정의를 세움으로써 진실과 거짓을 가리고, 벌을 줄 자에게 벌 주는 일을 해야 한다. 또 국민들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그 억울함을 폭력 없이 합법적으로 해결하는 마지막 통로가 검찰과 법원이 아니던가? 그래서 모든 검사는 처음에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하지 않던가? 그런데 비록 합법적인 형식의 절차를 밟았지만 검사가 직접 국가 통치에 나선 것은 본분 망각이자 조직 배신이다. 그 결과 정부와 국회 간 균형과 견제의 정치가 사라지고 편법적인 시행령 정치만 난무한다. 원래 정치란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절하면서도 바람직한 국정 운영을 하는 것이다. 모두, 국민의 행복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검찰공화국은 검찰의 논리, 검찰 출신 대통령의 논리, 그리고 그 가족들의 이해관계(, 300억 이상의 가짜 은행잔고증명서, 22억 이상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 이득, 수백 만 원 상당의 디올백 등 수수 의혹, 처갓집 명의의 땅 인근으로 고속도로를 끌어당긴 양평 고속도로건 등)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의 종합이 지난 4월의 총선 결과로 나타난 게 아니던가?

 

바로 이런 이유들로 인해 나는 원래 영국 해군 조직에서 출발했던 파킨슨의 법칙이 대한민국 검찰 조직으로 건너와서는 파계승의 법칙이 되었다고 본다. 이것은 이태 전에 유행했던, ‘바이든’=‘날리면현상, 그리고 최근의 위례 신도시’=‘윗 어르신현상을 빗대어 하는 소리다. 어째 파킨슨의 법칙’=‘파계승의 법칙이 비슷하게 들리지 않는가? 자꾸 반복해서 들어 보시라. 특히, ‘바이든’=‘날리면이라 했던 자들이나 일부 음성 분석가들, 그리고 위례 신도시’=‘윗 어르신이라 했던 검사들에게 파계승의 법칙을 반복해 들려주고 어떻게 들리는지 물어보고 싶다.

 

22대 국회에서는 정의가 반드시 이루어지는 날기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앞서 말한 세 가지 근거에서 영국의 파킨슨의 법칙이 한국에 와서는 파계승의 법칙으로 변질되었다고 하는 것이니, 단순한 착각(환청)이나 억지, 속임수가 아니다. 게다가 파계승이란 속세를 떠나 부처의 길을 걷던 스님이 (무슨 이유에서건) 다시 속세로 내려온 것에 불과하니, 뭐가 그리 문제인가? 차라리 파계승으로 정직하게 산다면 아무 문제없다. 그러나 원래의 파킨슨의 법칙이 한국의 검찰 조직에 와서 여러모로 조직 배반을 한 결과 (초등생도 아는 바이든=날리면식으로) ‘파계승의 법칙이 된 것이라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어디, 내 얘기에 합리적으로 또는 법리적으로 반박할 자 있으면 나서보시라! 그러나 이런 쓸데없는언쟁에서 이기면 뭐하고 지면 뭐하랴? 이겨도 지독히 서글플 것이고, 지면 서글프다 못해 슬프기까지 할 텐데!

 

그러니, 오호 통재라,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고 외쳤던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목소리는 과연 언제쯤 이 땅에서 거침없이 구현될 것인가? 오는 22대 국회부터는 신바람 나는 정치가 실현되어, 법과 정의, 진실이 바로 서기를 바란다. 죄 지은 자 벌 받고, 죄 없는 자, 저 푸른 숲을 노니는 샛노란 꾀꼬리들처럼 훌훌 나는 새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빌고 또 빌 뿐이다.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4.17.

 

 

군인 김오랑, 그리고 박정훈정부는 국민에 '모욕감'을 줘선 안된다

아직도 계속되는 이 '모욕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1995년 검찰이 내놓은 논리다. 당시 이 논리를 내세웠던 검찰에 따르면 내란 미수는 처벌할 수 있지만 내란이 기수(행위 완료)되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윤석 검사(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이 법리를 설명하며 이성계가 쿠데타로 이씨 조선을 세웠는데, 조선이 이성계의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검사들은 그런 족속들이다. 이 발언이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되자 검사들은 새로운 논리인 '사정변경의 원칙'을 내걸고 수사에 돌입한다. 법률 행위의 기초가 된 사정이 '예견치 못한' 중대한 변경을 받게 되어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뒤집게 됐다는 말이다. '예견치 못한' 중대한 변경이란 김영삼 정권의 등장이 되겠다.

 

'모욕감'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에 온 국민은 집단적 모욕감을 느꼈다. 그렇게 검찰은 '전두환 신군부'를 위한 '완벽한 형법 논리'를 내세웠지만, 정작 국가가 국민이 모여 이뤄진 것이란 사실은 망각했다. '성공한 쿠데타'라는 집단 기억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 검찰 집단이 간과한 건 국민들이 겪을 모욕감이었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김오랑 소령이나 정선엽 병장 같은, 신군부의 군사 반란에 저항한 '제복 입은 영웅들'이 있어서였다. 그들은 죽음을 통해 반란의 '증거'를 남겼고, 역사는 일부나마 바로 세워질 수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아 서울 마포구 웨스트브릿지 라이브홀에서 음악인, 연극인, 역사가들의 자발적 참여로 열린 '오픈콘서트-기억록'16일 저녁에 찾았다. '사랑 많은 세상'이라는 단체가 주관해 '기억'을 주제로 한 이 콘서트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키워드로 1979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의 하나회에 맞서다 전사한 고() 김오랑 소령(후에 중령으로 추서)을 선정했다. 작곡가 윤일상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했고 박학기, 김장훈, 이정렬, 손병희, 배우 이기영, 이원종 등이 참여해 제각각의 재능을 녹여 김오랑을 기렸다.

 

최근 영화 <서울의봄>에서 많은 이들이 배우 정해인이 연기한 김오랑(극중 이름은 오진호)의 마지막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잊혀져 가던 김오랑을 불러낸 건 1000만 영화였지만, 매해 5월이 되면 제각각의 기억을 더듬어 온 사람들은 늘 있어왔다. 개울이 모여 강을 이루듯, 기억은 개인적이지만 또한 집단적인 것이다. 콘서트장을 꽉 메운 사람들과 함께 앉아 하나의 기억을 위해 집단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기억의 원동력은 저마다 다를 터다. 내가 김오랑을 떠올리며 내내 떨치지 못한 감정은 '모욕감'이었다. 정부는 국민에게 모욕감을 줘선 안된다.

 

김오랑은 같은 관사에 사는 '절친' 박종규 중령에 의해 교전 중 전사했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김오랑을 특전사령부 뒷산에 마치 "죽은 강아지(김오랑의 조카 김영진의 말)" 마냥 묻어버렸다. 국가를 지키려 한 군인을 암매장해버린 것은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남겼고, 아직도 그 모욕감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김오랑의 모친은 홧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의 부인은 눈이 먼 채로 남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백방을 뛰어다니다 실족사했다. 온 가족이 멸문의 화를 당했는데, 대한민국 군은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김오랑 동상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다. 좋다. 이 모욕감은 기억의 집단화를 자극한다.

 

군사 반란은 전두환이 주도했지만, 그걸 완료해 '성공한 쿠데타'로 만든 사람은 노태우다. 노태우는 전두환이 위기에 빠지자 국가 안보의 대의를 땅바닥에 팽개치고 전방을 지키던 9사단을 출동시켜 서울 광화문을 점령했다. 김오랑과 같은 군인들의 죽음을 기어이 '개죽음'으로 만들어 모욕감을 줬다. 노태우는 2021년 죽었는데 그가 속죄 했는지 안했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나라는 그를 국가장으로 예우했다. 내란죄로 처벌받은 사람도 국가장을 치를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얘기다. 노태우에 대한 예우는 국민들에게 모욕감을 줬다. 윤석열 정부라고 다를 게 없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수석비서관이 노태우 정권의 언론인 회칼 테러를 기자들 앞에서 농담이랍시고 내뱉어 또 다른 모욕감을 주고 떠났다.

 

그 노태우의 딸 노소영 씨 측은 최근 이혼 소송 과정에서 재산 분할을 요구하면서 "아버지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1년경 비자금 300억원을 사돈인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건넨 뒤 어음을 담보로 받았다"고 했다. 자신이 기여해 일궈낸 '''노태우 비자금'에 근거하고 있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그 모습에 국민들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순수한 '탐욕'은 얼굴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군사 반란의 후손들이 군인 김오랑을 모욕하고 있고, 그 모욕감은 197912월과 19805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단단하게 벼려지고 있다.

 

총선에 패배한 집권 세력은 "방향은 옳았지만, 국민이 체감하기에 부족했다"고 강변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2주년 기자회견 모두 발언을 통해 지난 2년의 국정 추진 상황을 보고한다면서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대한민국의 외교 지평을 넓혔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렇게 잘 하고 있다. 국민들은 왜 몰라주고 있나'라는 식이다. 국가를 잘 운영한다고 (실제 잘 운영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많다) 해서 선거를 이길 순 없다. 정치란 국가를 이루는 '유권자'들의 복합적인 감성을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자존감'을 건드리는 순간 모욕을 느낀다.

 

그런 모욕감들이 이번 총선을 윤석열 대통령의 심판으로 이끌었다. 이를테면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에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머나먼 이국 땅에서 쓸쓸히 죽은지 80년만에, 그의 흉상이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철거당할 상황에 처했다. 집단 기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런 인식들이 국민들에게 모욕감을 줬다. 스스로 '우월적 지위에 있다'고 착각한 자들은 타인에게 '모욕'을 주면서도 그것이 '모욕'인지 모른다. 해병대 채상병 사건 외압 의혹이 특히 그렇다. 채상병 사망 진상 규명을 위해 초동 조사를 맡은 해병대 박정훈 대령이 조사 결과를 보고한 후에 갑자기 '항명 수괴죄(후에 항명죄)'로 입건됐다. 그가 조사해 국방부장관 결재를 거친 서류에 적혀 있던 채상병 사망의 책임자 리스트는 '윗선'의 개입으로 갑자기 쪼그라들었고, 채상병 죽음에 책임을 느껴야 할 ''들은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느라 급급하다.

 

부당한 지시에 항의했다가 졸지에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혀 재판을 받고 있는 군인 박정훈의 모습을 보고 있는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이란 게 대체 뭐겠나? 군인 김오랑을 야산에 묻어버리고, '성공한 쿠데타'를 위해 '불의'에 저항한 그의 행동을 역사에서 지우려 한 것들과 같은 모욕감을 주는 일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면서 '집단 기억'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모욕 주지 않는 사회는 우리가 품격 있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합의다. 거듭 말하지만 정부는 국민에게 모욕감을 줘선 안 된다. 박정훈 대령에게 국가가 행하고 있는 일들이 그걸 지켜보는 국민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위라는 걸 깨지 못하는 한 윤석열 정부에는 희망이 없다.

 

아직도 명예회복이 요원한 김오랑 소령을 5월에 떠올리며 든 생각이다. 그는 군의 본보기같은 인물이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김오랑의 명예를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모욕감'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4.05.18.

 

 

부자가되면 안 되는 까닭 2

부자란 재산이 많은 사람이다. 얼마나 재산이 많으면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것은 있다는 속담까지 있을까?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살기도 아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빠듯한 사람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더구나 요즘 부자는 3년이 아니라 30, 300년을 일하지 않고도 먹을 것이 남아돈다고 한다.

 

오늘 아침 TV 뉴스를 보던 마을 어르신이 푸념을 늘어놓으신다. “아이고, 저 썩을 놈은 큰 죄를 짓고 감옥에 가도 무신 걱정이 있겠노.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은행에 넣어둔 이자가 불어난다 안 카나.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아이가. 그라이 우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겠노.”

 

한낮에 장터에서 만난 어르신이 푸념을 늘어놓으신다. “남들은 내가 농사 많이 지으니까 부잔 줄 알겠제. 껍데기뿐이여. 농기계 빚 갚느라고 세월 다 보냈네그려. 오늘도 트랙터가 고장 나서 수리점에 갔더니 말일세. 고치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게 좋겠다는구먼. 또 은행 빚을 얻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이 태산 같네그려.”

 

해질 무렵에 들녘에서 만난 선배 농부가 푸념을 늘어놓는다. “농사꾼은 빚도 재산이라지. 내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농사짓고 산 건 아니잖아. 다 함께 먹고살자고 한 짓이지. 그러니까 빚도 재산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니까. 하하하. 그건 그렇고 지구온난화 탓으로 논밭에 병해충이 득실거려 독한 농약 치느라 이젠 몸도 다 망가졌다네.”

 

선배의 쓴웃음 소리가 저녁 밥상머리까지 따라 들어왔다. ‘농촌 어르신들과 선배들이 부자로 살지는 않아도, 빚에 쪼들리지는 말아야 청년들이 농부가 될 꿈을 꾸고 살 텐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저녁밥을 먹었다. 어쩐지 오늘 하루는 참 고달프기만 하다. 농사일로 지친 몸이야 자고 일어나면 풀리지만, 지친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 뒷산에 참꽃(진달래)이 피었다 지고, 황매산에 개꽃(철쭉)도 피었다 졌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개꽃을 보려고 주말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떼를 지어 산으로 올라갔다. 도시에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찾아왔는지 차를 타고 천천히 20분이면 올라갈 수 있는 산인데, 200분을 기다려도 갈 수가 없어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산골 어르신들은 애가 탔다. “아이고, 우짜모 좋노. 먼 데서 짬을 내서 왔는데.” “야야, 요즘 개꽃 볼 짬이 오데 있노. 농사일이 얼매나 바쁜데. 밥 묵을라 카모 논 갈아야제. 고추 모종 심어야제. 오이고 가지고 옥수수고 지금 심지 않으모 사람 입에 들어갈 끼 하나도 없다 아이가.” “그래도 사람이 많이 찾아오니까 사람 사는 거 같구먼.” “어릴 때는 묵을 끼 없어 참꽃을 따 묵으며 핵교 다녔는데. 요즘은 오데로 가나 묵는 기 천지삐까리라, 온 산에 묵지도 못하는 개꽃이 피어 난리법석이구먼.”

 

농촌 지역에서도 가끔 부자가 눈에 띈다. 농사지어 부자가 된 사람은 거의 없다. 대도시로 나간 자녀들이 출세한 덕에 저절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부자들은 여행을 가도 비행기를 타고 부자 나라로 간다. 옷을 입어도, 음식을 먹어도, 부자 나라에서 나온 것을 입고 즐겨 먹는다. 부자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바쁜 농사철엔 꽃구경도 여행도 티 내지 않고 다녔으면 좋겠다.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

서정홍 산골 농부 | 프레시안 2024.05.19

 

 

전쟁에 반대할 자유

유학 시절에 강의 조교 월급만으로 부족해 기숙사 부사감을 한 적이 있다. 다양한 사건을 경험했지만 지금도 생생한 것은 누군가가 어떤 유대계 학생 방문에 나치 문양’(Hakenkreuz)을 붙여놓고 달아난 일이다. 소문은 몇 시간 만에 대학 전체로 퍼졌다. 학교 당국에서는 절차에 따라 그것을 붙인 학생을 찾아내 바로 정학시켰다. 표현의 자유가 잘 보장되는 미국 사회지만 학교는 유럽의 프로축구에서처럼 인종차별적인 일에 대해서는 좀 엄격한 편이다. 그래도 그 학생은 감옥에 가지는 않았다. ‘히틀러 경례를 형사 처벌하는 독일에서라면 최소한 벌금형은 받았을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전쟁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와 캠핑 농성이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 캠퍼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소란스러운 것은 오래간만이다. ‘반유대주의외부세력프레임으로 학생들의 행동을 제어해보려 하지만 적지 않은 유대계 학생들도 집회에 가담하고 있다. ‘1968의 생생한 에너지가 다시 살아난 느낌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은 레이건의 8년 통치하에 자라난 공화당 키즈가 다수여서 국제적 이슈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를 1960년대의 민권 및 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진보적 부모에 대해 자녀들이 갖는 특유의 반항심리에서 찾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진보적인 학생들은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개입에 항의하는 집회를 자주 열기는 했지만, 대다수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에 미국 대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차별 및 분리정책)에 대한 항의 집회였다.

 

최근 미국 캠퍼스 집회에서 이스라엘과 군수업체로부터의 투자 회수’(divest)라는 구호를 접할 수 있는데 그 원조는 남아공에 대해 미국 정부나 기업은 손을 떼라는 외침이었다. 27년을 복역한 넬슨 만델라와 동료들은 결국 1990년에 석방되었고 우여곡절을 거쳐 만델라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다이베스트운동도 남아공의 민주화와 극단적 인종 차별 폐지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번의 대학생 시위는 갑작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960년대 후반부터 저변에 축적된 저항의 에너지 덕에 가능한 듯하다. (한국의 캠퍼스는 왜 이리 조용할까?)

 

내가 이번 일에서 특히 관심을 두는 것은 학생들의 정치적 의사 표출 문제다. 평화적 집회를 경찰력으로 진압하고 학생들을 체포한 것은, 망설이던 학교 당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교칙과 법률에 근거했으리라 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은 집회의 권리와 의사 표현의 자유를 무시한 헌법 위배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미국 헌법 제1 수정안은 언론 및 출판의 자유, ()이 평화적으로 집회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구속력은 없지만, 유엔에서 1948년에 기적적으로 통과된 세계인권선언모든 인간은 의사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19), “모든 인간은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20)라고 명시하고 있다.

 

문제가 많긴 하지만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미국은 여전히 배울 게 많은 나라다. 가령 이미 연방대법원은 1943웨스트버지니아 교육위원회 대 바네트소송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충성맹세를 강요하는 것은 헌법 제1 수정안에 위반된다고 보았다. “다를 수 있는 자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유의 본질을 가늠하는 것은 기존 질서의 핵심을 건드리는 일에 대해 다를 수 있는 자유다.” 전쟁 와중에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미국의 저력을 보여준다. 국기 소각 등 유사한 행위를 처벌하려는 시도는 1984, 1989년에도 있었지만 대법원은 표현의 자유 쪽에 손을 들어줬다.

 

평화적 집회 및 표현의 자유는, 인종·종교·성별·성적 지향 등에 의거해 증오를 표출하며 폭력을 선동하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의 범죄화와 모순될까? 세계적인 추세는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면서도 동시에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특정한 집단, 특히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증오 발언은 규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에서도 폭력을 선동하는 혐오 발언은 처벌받을 가능성이 크다. 의사 표현의 자유가 폭력적 증오까지 포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 경향 2024.05.20.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연금개혁

연금개혁, 노동개혁, 교육개혁, 그리고 의료개혁은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며, 연금개혁이 그 물꼬를 트려 하고 있다. 최근 연금개혁 공론화위원회는 숙의 과정을 거쳐 2개의 안을 국회 연금개혁특위에 전달했다. 1안은 보험료율을 13%로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50%로 확대하는 것이며, 2안은 보험료율은 12%로 높이지만, 소득대체율은 현행 40%를 유지하는 것이다. 공론화위원회 시민대표단 과반수는 1안을 찬성했다. 국회 특위는 보험료율 13%에는 합의했지만, 소득대체율에 대해서는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공적 연금제도는 낮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넓은 사각지대 등으로 인해 안정적인 노후 생활을 보장하지 못한다. 국민연금의 경우 보험료율 9%를 종업원과 고용주가 각각 4.5%씩 부담하지만, OECD 회원국의 공적연금은 평균 15.4%를 종업원과 고용주가 각각 6.3%9.1%씩 부담하고 있다. 전체 근로자 평균임금의 배수로 측정한 연금보험료 적용 상한 1.33배는 OECD 회원국 가운데 6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국민연금의 이론적 소득대체율 31.2%OECD 평균 42.3%EU 평균 49.5%보다 크게 낮다. 실제 가입 기간을 적용하면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더 낮아진다. 저급한 소득대체율은 노인의 높은 빈곤율과 고용률의 원인이기도 하다.

 

연금개혁의 시급성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이해 당사자들의 실리적 판단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연금개혁에 대한 시도가 기업 측 반대로 불발된 경험이 있다. 이번에도 노조와 시민단체는 소득보장 강화안에 찬성했지만, 기업은 비용증가를 이유로 반대하고, 민간주도 성장과 재정안정을 중시하는 정부 여당 역시 시민대표단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연금개혁의 평가는 노후소득보장이 출생률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 분배구조의 개선과 내수기반 확충으로 잠재성장률을 개선하는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 안정적인 노후 생활로 형성되는 세대 간 연대와 공존의 기류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사회자본으로 발전할 것이다.

 

한편 연금개혁은 노동개혁, 교육개혁, 의료개혁과 연계하여 추진할 때, 노후생활 보장은 물론 저출생·고령화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20232월 윤석열 대통령은 노동개혁 3대 과제로 노사법치 확립, 노동유연성 확대, 노동시장의 공정성 확보를 제시했고, 최근 민생토론회에서는 노동약자보호법제정을 언급했지만, 노동개혁의 핵심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에 따른 격차 해소에 있다. 특히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상태에서 노동유연성의 강화는 고용불안과 소득불평등 확대로 이어져 연금개혁의 기반을 흔들 수 있다. 2023년에 비정규직(특수형태 제외) 평균임금은 정규직의 43.8%이고, 국민연금과 고용보험, 건강보험 가입률은 각각 68.5%81.4%, 71.7%에 불과하다. 비정규직과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사회보험 가입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전 국민 고용보험제도를 확대하고, 궁극적으로는 소득기반 사회보험체계로 전환하여 사회보험의 사각지대를 축소해야 한다.

 

교육개혁의 경우 저출생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를 고려하여 현재 내국세의 20.79%로 고정된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고등교육 및 평생교육 재정을 통합적으로 운용하고, 교육 불평등이 소득불평등으로 전화되는 연결고리를 차단해야 한다. 소득불평등이 확대되는 상황에선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높여도 안정적인 노후 생활의 보장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의료개혁은 지역에서 돌봄서비스와 의료서비스가 완결적으로 연계되는 지역밀착형으로 개편하고, 지역 간 의료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령화 시대 노인의료비 증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여 출생률 제고에도 기여할 수 있다.

 

연금개혁을 소득보장 대 재정안정의 구도로 몰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노후소득보장은 출생률 제고와 내수기반의 확충, 사회자본의 형성으로 잠재성장률의 하락을 막고 연금재정의 안정화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소득보장과 재정안정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는 소득대체율을 50%로 확대하고 보험료율을 15%까지 높이는 방안을 대안으로 검토해야 한다. 영세자영업자 등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보험료를 지원하고, 보험료 부과 대상 기반의 확대와 고용주의 보험료 부담비율 상향조정 등 재정안정을 위한 보완적 조치도 필요하다. 노후소득 보장으로 형성된 사회자본에 대해서 경제주체들은 합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 경향 2024.05.21.

 

 

노무현의 꿈, 이재명의 길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5주기가 되었다.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2009523일 표표히 떠나간 이 시대의 풍운아 노무현. 차별과 소외, 특권과 반칙으로 얼룩진 세상을 바꿔 보자고 온몸으로 절규했던 그의 웅변이 아직도 가슴을 때리는 듯하다.

 

노무현이 열망한 비전은 유러피언드림이다. 유러피언드림은 자유경쟁보다는 연대, 효율성보다는 형평성, 배제보다는 포용을 지향하는 가치 패키지다. 노르딕·게르만 국가들의 사회경제와 정치에는 이런 가치들이 녹아 있다. 즉 사회경제 이해관계자 간 사회적 대화와 정당 간 연합정치가 맞물려 작동하며 보육·교육·의료·요양 등 사회공공 서비스로 차별과 소외 없는 사회통합을 제도화했다.

 

노사정연합과 정당연합 간 연동은 유러피언드림의 백미(白眉). 노사정연합은 자본이 원하는 유연성과 노동이 원하는 사회안전망이라는 갈등적 정책의 맞교환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 협약을 끌어냈고, 좌우 초()블록 정당연합은 행정부·의회 협치로 이를 입법화했다. 유러피언드림의 정수(精髓)는 정책 콘텐츠 그 자체가 아니라 포용적 공동통치(inclusive co-governance)’에 있다.

 

유러피언드림의 정치경제 다이내믹스야말로 노무현에게 21세기 인간의 얼굴을 가진대한민국을 창조하는 나침반이었다. 실제 그의 국정 운영의 전략과 지향점은 노동, 공교육, 의료, 저출생·고령화, 차별, 빈곤, 양성평등, 국가균형발전 등 다양한 국가 어젠다에 관해 이해관계자·전문가·시민단체·정부가 참여한 사회적 협의 시스템이었고, 동반성장 담론과 함께 사회공공 서비스를 집대성한 비전 2030’이었다. 그 정치적 인프라는 권력 분점·공유다. 이를 위해 그는 고()비례성 선거제, 다당 연합정치, 분권형 대통령제를 원했고, 거대 야당에 이를 설득하기 위해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유러피언드림은 전전반측 고뇌한 노무현의 꿈이었다.

 

꿈이 절절하면 현실이 된다고 했을진대, 더불어민주당은 노무현의 꿈과 멀어져간다. 언필칭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는 민주당엔 윤석열 정권과 차별화하는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반노동·반북한·반야당 극우 포퓰리즘적 양극화 통치 행태를 드러내는 윤석열 정권에 맞서, 민주당은 극도의 복수심에 불타 정권 타도를 겨냥한 당파적 양극화 정치에 익숙해 있을 뿐이다. 상극상살(相剋相殺)의 형국이다. 22대 국회는 민주당 입법 독재와 대통령 거부권 독재가 충돌하는 역대급 최악의 막장 국회가 될 공산이 크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재앙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단언컨대 승자독식 선거제, 국회 권력 독점 양당제, 제왕적 대통령제를 잇는 제도적 매트릭스를 내장한 ‘87년 헌정체제하에선 민주당이 정권 탈환에 성공해도 오늘의 정치판을 바꿀 순 없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윤석열 정권과는 다른 차별화 전략에 나서야 한다. 청컨대 초당파적 연합정치와 포용적 국정 거버넌스의 제도화를 유인하는 포스트 87년 헌정체제의 창출 프로젝트에 천착하라. 그래야 한국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향한 변혁적 탈()양극화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이재명 대표도 팬덤 정치에 영합하는 정치공학적 진영 정치에서 손을 떼고, 세상을 바꿀 포스트 87년 헌정체제를 디자인하는 국가 비전을 탐색하는 데 지혜와 열정을 바쳐야 한다. 노무현의 유러피언드림은 차기 대권을 욕망하는 이재명이 가는 길에, 국민 가슴을 뛰게 하는 국가 비전의 창의적 영감을 줄 것이다.

 

이제 민주당은 명실공히 이재명에 의한, 이재명을 위한, 이재명의 유일(唯一)체제다. ‘이재명은 민주당을 위하여, 민주당은 이재명을 위하여구호가 낯설지 않다. 이재명이 결단하면 민주당은 행동할 것이다.

선학태 전남대 명예교수 | 경향 2024.05.21.

 

2023년 북반구 여름, 역사상 가장 더웠다

독일 요하네스구텐베르크대를 비롯한 공동연구자들은 지난 북반구 비열대(북위 30~90°) 지역의 나무 나이테를 분석해 지난 2천년의 여름(6, 7, 8) 기온을 추정했다. 그 결과 2023년이 가장 더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래는 1850~1900년 평균기온을 기준(0)으로 온도 차이 분포를 보여주는 그래프로, 노란 선은 나이테에서 추측한 기온이고 빨간 선은 온도계로 측정한 기온의 분포다. ‘네이처제공

2023년은 최고 기온으로 다채로운 기록을 세운 해다. 먼저 한해 평균기온으로 기존 기록인 2016년보다 0.17나 더 높은 14.98에 이르렀다. 이는 기준이 되는 1850~1900(산업혁명 초기) 평균기온보다 1.54나 더 높은 온도다. 2023년 육지 평균기온도 기준보다 2.1더 높았고 바다 평균기온도 기준보다 1.1더 높아 둘 다 기록을 세웠다. 2023년 북반구 여름(6, 7, 8월을 이렇게 부른다) 평균기온 역시 16.77로 기존 최고인 2019년을 0.29차이로 가볍게 제쳤다.

 

그런데 최근 2023년의 또 다른 기록이 나왔다. 지난 14일 학술지 네이처에서 게재를 결정했다며 미리 공개한 논문에 따르면 2023년 북반구 비열대(북위 30~90°) 육지의 여름 평균기온이 지난 2천년 동안 가장 더웠던 것으로 나타났다. ‘비열대 육지라는 조건이 붙은 건 온도 측정 데이터가 없는 1794년 이전 기온을 추측해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지역에서 자라거나 땅에 묻힌 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하면 여름 기온을 추측할 수 있다. 온도가 높을수록 잘 자라 테 사이의 폭이 넓다. 반면 열대(저위도) 지역의 나무는 온도보다 토양 습도 등 다른 요인이 성장에 더 큰 영향을 주므로 나이테 정보로 과거 기온을 추측할 수 없다.

 

2023년 북반구 비열대 육지의 여름 평균기온은 기준인 1850~1900년 평균보다 2.07더 높았다. 이는 2023년 육지 평균기온이 2.1더 높은 것과 같은 수준이다. 한편 산업혁명 이전 최고 기록은 246년으로 기준보다 0.88더 높았고 지난 2천년 동안 최저 온도는 536년으로 기준보다 1.86나 낮았다. 따라서 2023년 기온은 역대 최저인 536년보다 3.93나 더 높고 산업혁명 이전 최고인 246년보다도 1.19더 높다.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이 피부에 닿는 수치다.

 

기후연구 비영리단체인 미국 버클리 어스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평균기온이 지난해보다 높을 확률이 58%라고 한다. 2023년이 1년 만에 1위 자리를 내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올여름 더위는 지난해를 넘어서지 않을 것 같다고 하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지난해는 5월까지 기온이 평균보다 좀 높은 수준이었다가 동태평양에서 발생한 강력한 엘니뇨가 영향을 미친 6월부터 12월까지 기록을 깨며 역대 최고 평균기온을 기록했다. 엘니뇨는 올해 상반기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4월까지 기온이 지난해보다 0.29나 더 높다. 엘니뇨의 영향이 사라지는 하반기에는 기온이 지난해보다 낮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주말 전국 대부분 지역의 최고 온도가 30가까이 오르며 올여름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앞으로 넉달, 그 가운데서도 한달 정도 이어질 찜통더위를 생각하면 걱정이다. 그래도 지난해보다는 덜할 것 같다는 예상에서 위안을 찾아야 할까.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 한겨레 2024.05.21.

 

 

민주주의가 공기처럼 일상화됐다고?

지방에 가는 기차 옆자리에 훤칠한 인상의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내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교육 자료를 흘깃 보더니 혹시 하종강 교수님이세요?”라고 묻는다. 오래전 조종사노조 활동할 때 만난 적이 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군대 생활 하면서 세뇌됐던 생각들이 노조 활동 하면서 교육 몇번 받으니까 바로 깨지더군요라며 말문을 연다. 사연을 들어보니 듣기 좋으라고 인사치레로 하는 말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으레 묻는 안부를 몇마디 주고받았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떨치던 무렵 휴직 상태가 길어지면서 고생했던 이야기도 했다. “지난 몇년 동안 택배 상하차, 노가다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식구들이랑 굶고 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조종사가 비행기를 못 타니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더군요. 조종사만큼 다른 분야에 무능한 직업도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말하다가 문득 목이 잠긴다.

 

항공 수요가 다시 폭증해서 항공사들이 조종사들을 대부분 복귀시켰는데, 조종사노조 간부들만 아직 복귀시키지 않고 있는 항공사도 있다고 한다. “노조위원장 맡았던 ○○ 선배님 아시죠? 우리 조종사들 위해서 정말 고생 많이 하셨던 분인데, 아직 회사가 복귀시키지 않고 있어요.” 듣고 있던 나의 목젖이 묵직해졌다.

 

조종사노조 간부가 그 정도의 불이익을 받으니 다른 직종은 말할 것도 없다. 민주노총 소속 많은 노동조합들에서는 대기업 정규직이라 해도 노동조합 간부를 맡는다는 것은 정년퇴직할 때까지 진급을 포기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다. 비정규직은 더할 나위도 없다. 그러니 얼마 전 한 보수언론이 전태일재단과 공동기획으로 연재하는 기사에서, 전태일재단은 전태일 정신이 시대 변화에 맞게 확장돼야 한다고 밝혔다청년 전태일을 분신이나 투사란 단어와 함께 호명하던 시기는 민주화 이전이었고, 노동조합을 한다는 것만으로 탄압받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 민주주의는 공기처럼 일상화됐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할 권리도 보장되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기사 내용은 사실 오인이거나 의도적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 아직도 민주주의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많고 노동조합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탄압받는 일은 대한민국 사회 도처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널렸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언론이 그러한 논조를 펴는 것은 노동조합이 마치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낡은 방식의 노동운동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비난함으로써 연성화시키기 위한 포석일 수 있다.

 

소박한 노동조합 활동을 위해서조차 피눈물 나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노동자들을 거의 매일 만나며 미안해하는 것이 내가 겪는 일상이다. 홍세화 선생님이 활동가들을 대하는 마음 역시 그랬다. 선생님 장례식장 방명록에 보니 절친이었던 유홍준 교수가 잘 가라 세화야!!”라고 쓴 글이 보였다. 입구에서 안내하는 이가 하종강 선생님도 한마디 쓰세요라고 권해서 용기를 내 그 밑에 몇자 적었다. “‘프랑스에서 홍세화처럼 사는 것보다 대한민국에서 하종강처럼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그 말씀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두고 가신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돌이켜보니 홍세화 선생님과 같이 쓴 책이 꽤 여러권이다. 출판기념회에 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실제로는 프랑스에서 홍세화처럼 사는 것보다 대한민국에서 하종강·정태인처럼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정태인도 같이 참여한 8020에게 지배당하는가?’ 출판기념회 자리였을 것이다.

 

그 무렵 어느 해고 노동자가 영화 라디오 스타포스터를 패러디해 만들어준 홍보물이 화제가 됐다.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그 포스터에 나온 모습대로 모여서 사진을 찍었다. 나를 목말 태웠던 정태인이 목 부러질 뻔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홍세화 선생님의 그 말씀을 들은 뒤부터 나 역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며칠 전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났을 때도 “70, 80년대에 하종강처럼 사는 것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민주노조 간부로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말했고, 3 학생들을 만났을 때도 “70, 80년대에 하종강처럼 사는 것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고3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나의 라떼는 말이야의 화두다. 민주주의는 아직 공기처럼 일상화되지 못했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할 권리는 여전히 보장되지 않고 있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다.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 한겨레 2024.05.21.

 

 

용기에 대하여

용기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최근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시작은 BBC 다큐멘터리 <버닝썬 -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다큐는 일군의 남성 K팝 스타들이 여성을 강간하고, 불법 촬영물을 돌려보며, 심지어 성상납을 했던 사건이 밝혀질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바로 이 다큐에 용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2019년 버닝썬 관련 단톡방을 처음으로 기사화했던 강경윤 SBS 기자의 인터뷰 내용에서다.

 

강 기자는 경찰유착, 성폭행, 불법촬영 등 총체적인 범죄 정황이 기록되어 있던 단톡방 내용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대화에 언급되는 고위 경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고리를 풀어준 사람이 고() 구하라였다. 그는 강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단톡방에 있었던 최종훈을 설득해 그 경찰 인사가 누군지 밝히도록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며 강 기자가 말한다. “구하라씨는 정말 용기 있는 여성이에요.” , 용기.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채로 그 말 앞에 머물렀다.

 

용기는 구하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정준영이 성범죄로 피소된 사실을 가장 먼저 보도한 스포츠서울의 박효실 기자도 용기를 낸 사람이다. 버닝썬 사건의 출발점이 된 기사를 쓰고 난 뒤 박 기자는 정준영의 팬들과 안티 페미니스트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 이 괴롭힘은 온·오프라인으로 수개월간 계속되었다. 두 번의 유산을 겪으면서도 버텼던 이유 중 하나는 내 뒤에 많은 여기자들이 동일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본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역시 용기를 말하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전설적인 사진작가 낸 골딘의 삶과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세계가 강요하는 정상성과의 불화를 이미지로 승화해낸 작품의 도발적인 아름다움도 인상적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지금 벌이고 있는 투쟁의 급진성이 발산하는 미()에는 숭고함마저 있었다.

 

골딘과 동료 활동가들은 마약성 진통제를 팔아 거부가 된 새클러 가문과 4년이 넘는 싸움을 벌였다. 5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지만, 국가나 시장은 물론 사법체계조차 새클러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골딘과 동료들은 새클러의 후원을 받아 그들이 피로 번 돈을 세탁해주었던 대학, 박물관 등과 끝까지 싸워 새클러라는 이름에 둘러진 우아한 권력의 망토를 끌어내린다.

 

이 투쟁의 용기는 그저 잘나가는 아티스트가 자신의 커리어를 걸었다는 것 혹은 활동가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에 저항하면서 각종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약물 중독자에 대한 낙인 그 자체와 싸우기 위해 이름과 얼굴을 걸고 거리로 나섰다. 몸에 새겨진 중독의 기억을 안고서 말이다. 그야말로 두려운 일이었을 터다.

 

저도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잖아요.” 구하라는 강 기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다른 여성들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이건 버닝썬 성폭력 피해자가 BBC 인터뷰에 응하며 한 말이다. 버닝썬은 K팝 스타들의 일탈이라는 표면을 뚫고 들어가 한국 사회 남성연대의 노골적인 얼굴을 폭로했다. 박효실의 용기에 강경윤의 용기, 구하라의 용기,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의 용기가 더해진 자리에서 비로소 그 심층까지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일이 그들을 용감하게 만들었다. 골딘과 약물 중독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경험이란, 그런데, 나를 해치고 더 움츠러들게 만드는 경험이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걸? 내 무릎을 꺾는 일들 안에서 나는 과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답이 쉽지가 않아 괴롭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 경향 2024.05.22.

 

 

캄보디아인 통역사 킴 렉카나, “나는 오늘도 울어요

모르는 사람이 죽었어요. 모르는 사람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

 

202012월 어느 날. 그녀는 모르는 여자의 영정을 들고 안산의 어느 농장으로 향한다.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온 캄보디아 여자가 살았던 숙소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영정 속 여자의 이름은 속헹. 간경화를 앓던 속헹은 1220일 혹한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식도정맥류 파열로 숨진 채 발견됐다. 곰팡이로 뒤덮여 있던 숙소로 들어서기 전부터 그녀는 흐느껴 운다. 눈물이 그냥 마구 쏟아진다. 그녀는 무섭다. 슬프다. 소름 끼친다. 처음 경험하는 무서움이고 슬픔이다. 밤에 되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소름이 바늘처럼 온몸에 꽂혀 있어서, 찌르고 찔러서 잠들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20244, 그녀는 또 모르는 여자(이주노동자)’의 사연을 통역하며 운다. 모르는 여자의 사연이 너무 가슴 아파서 눈물이 흐른다. 그녀는 울고, 울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통역을 계속한다. 캄보디아어 통번역사 킴 렉카나. 지구인의 정류장(이주노동자들의 인권 보호와 회복을 돕는 비영리단체)에서 상담 겸 통역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모르는 여자(속헹)’가 사망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또 들려온 모르는 여자 혹은 모르는 남자의 죽음, 모르는 사람의 병에 걸림’, 모르는 사람의 임금 체불’, 모르는 사람이 당한 성추행’ ‘성폭행’.

 

나는 잘 웃어요, 나는 잘 울어요.”

통번역사로 상담을 맡은 그녀는, 결혼이민자로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ㄱ ㄴ ㄷ밖에 몰랐다. 그때는 잘 울지 않았다. 두 아이를 출산하면서도 열심히 한국어를 익힌 덕분에 통역 일을 하다 잘 우는 사람이 됐다. 자신의 고향 사람 사연이어서, 그래서 더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우는 게 아니다.

 

캄보디아 사람, 한국 사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인 게 중요해요.”

그녀는 한국 사람의 힘든 사연을 들어도 눈물이 난다. 아픈 아기, 외롭게 사는 할머니들을 보면 울컥한다.

 

사람인 게 중요한 그녀에게 사람은 알 수 없는 존재. 그래도 대답을 해야 한다면 무지개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캄보디아 노동자들도 그래서 그녀에게 모르는 존재이다. 언어는 통하지만 다들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 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그 말을 한국어로 통역해 한국인들에게 전할 수 있다.

 

소통하는 데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녀는 그것이 감정이라고 말한다. 같은 언어를 쓰지만, 같은 고향 사람이지만, 말이 안 통하는 경우도 있다. “같이 지내려면 말(대화)도 중요하지만, 감정을 주고받는 것도 중요해요.” 그녀는 그냥 언니처럼, 동생처럼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준다. 곁에 머물러준다. 처음에는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했다. 농장주들의 항의 전화도 많이 받고 욕도 다반사로 들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들과 같이 어울려 지내며 재미있는 순간들이 오고, 기쁨이 왔다. (당장 머물 곳 없는 캄보디아 노동자들 머무는 쉼터)에 숨어 있듯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려는 친구들(이주노동자들)이 있다. 그럼 그녀는 방문을 두드리고 말한다. “같이 밥 먹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들과 가족이 돼 같이 음식을 만들고, 같이 그 음식을 먹는다.

 

그녀는 캄보디아 농업노동자 119’ 상담원이기도 하다. “새벽 4, 5시에도 제게 전화해요. 불안해서요. 무서워서요. 그런데 한국에서 전화할 데가 또 없으니까, 들어줄 사람이 또 없으니까.” 그녀는 새벽에 불쑥 걸려오는 전화 받기를, 곁에 머물기를, 듣기를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대개 한국에 몇년 있어도 한국말을 잘 못한다. 배울 시간이 없어서다. 하루에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두 번 쉬는 게 보통이고, 그보다 더 일하는 경우도 많아 한국어를 배울 시간이 없어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그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녀는 필요한 곳에 있어주려 한다. 급히 수술을 받아야 하는 노동자에겐 보호자가 돼 수술동의서에 사인도 하고, 수술 전과 후 내내 보호자로 있어줬다.

 

그녀가 한국어 중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사랑해요. 캄보디아어 중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감사해요)”. 말하는 동안에도 듣기를 계속하는 그녀의 입에서 두 말이 합쳐진다. “사랑해요, .”

김숨 소설가 | 경향 2024.05.22.

 

 

직구 파동에 날아온 돌직구어떻게 이렇게 서민 못살게 하는 데 진심인지

국민들이 화가 났다. 이번엔 대파가 아니다. 유아차다. 전자제품이다.

 

구독자가 254만명인 유튜버 잇섭이 올린 동영상 사상 초유의 해외직구 금지를 보면 200만회 조회(21일 오전 기준)에 댓글이 23천여개나 달렸다. 가장 인기 댓글은 어떻게 이렇게 서민들 못살게 하기 위해 진심인지였다. 유아차나 분유를 해외 직접구매(직구)하는 집이나, 전자제품 등을 직구하는 이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는 정부 발표 뒤 뒤집어진 상태였다.

 

화들짝 놀란 정부는 발표 사흘 만에 이를 주워담았다. 용산 대통령실도 20일 예정에 없던 브리핑을 자청해 사과했다. 사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국무조정실이 주관하고 14개 부처가 참여해 만든 정책인데 대통령실 관계자는 부처에서 이뤄지는 모든 정책을 대통령실에서 다 관할해 결정하지 않고 있다고 발뺌했다. 이전 청와대 시절엔 정책실에서 각종 정책을 조율하고 점검했는데, 대통령실은 일을 안 하는 것인가, 무능하다고 고백한 것인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향할 화살을 피하기에 급급할 따름이다.

 

지난해 한국의 직구 시장 규모는 675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10년 전인 201416400억원 규모였는데 그동안 역성장 한번 없이 직구 구매액은 증가했다. 온라인 쇼핑이 간편해지면서 미국 아마존, 중국 알리익스프레스(알리)에 접속해 클릭한번 하면 국경 장벽이 허물어졌다. 특히 블랙프라이데이나 광군제 같은 대폭 할인 쇼핑 시즌은 국내 소비자들을 전세계 가격 정보에 눈뜨게 만들었다. ‘에누리 없이 판다는 게 이런 거지!’

 

정부가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참에 직구를 하는 이들에게 물으니 모두가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주로 캠핑용품을 알리에서 산다는 30대 여성 권씨는 직구로 사는 건 싼 이유가 있겠거니 감안하고 사는 거고, 안전성이 염려되는 아이 관련 제품은 직구로 사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트북 배터리를 직구로 교체했던 30대 남성 채씨는 전자기기나 관련 부품 쪽에서는 직구를 이용하는 게 훨씬 저렴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고물가에 대응하기 위해 소비자들이 품을 팔아 자발적으로 지구촌 곳곳을 뒤졌는데 정부가 일률적인 규제로 발목을 잡은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가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소비자 안전 확보를 내세웠지만 정책 배경으론 기업 경쟁력 제고를 꼽을 수 있다. 중소 유통·상공인도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소액 수입물품 면세제도를 개편해 한번에 살 수 있는 직구 물품을 줄이고, 케이시(KC) 인증을 의무화하는 등의 정책 방향은 정부가 안전보다 유통업자들의 시장을 지켜주려는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오죽했으면 이정원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은 19일 브리핑에서 유통업자 배 불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 (하는데),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해명까지 했을까.

 

정부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과거엔 국민의 안전과 산업을 지킨다는 취지라면 이해해줬으니까. 최근 전세계가 안보를 이유로 산업정책 시대로 회귀하는 것도 정부의 역할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소비자는 회귀하지 않았다. 세계화의 단맛을 본 소비자에게 저가 공산품뿐만 아니라 가격경쟁력이 높은 중국산 전기차와 스마트폰의 유입을 막아야 한다고 하면 쉽게 동의를 받을 수 있을까. 과거처럼 한국 기업이 국외 시장에 진출할 체력을 만들어주기 위해 상대적으로 더 비싼 값을 내고 제품을 사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한푼이라도 아끼려는 소비자는 세계의 공장중국에서 들여오는 제품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정부가 만든 안전 인증에 대한 불신도 확인했다. 수출형 통상국가인 우리가 미국처럼 관세를 높여 기업을 보호할 수도 없다. 결국 다 아는 정답이지만 한국 기업이 기술력뿐만 아니라 노동, 환경, 기업 지배구조에 있어 차별화된 제품으로 소비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정공법이 우선이다.

이완 | 산업팀장 | 한겨레 2024.05.22.

 

 

헌정주의에 도전하는 대통령

법에 명시된 권한은 아무 때나 해도 되는 것일까? 대통령의 거부권은 법에 명시된 권리이니, 형식적 요건만 충족된다면 행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법을 지킨다는 합법성(legality)은 통치 행위의 정당성(legitimacy)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일까?

 

이것은 답하기에 간단한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정치학자와 법학자들은 이하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 같다. 특정한 행위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단지 그것을 허용하는 법의 존재뿐 아니라 그 합법적 행위의 필연성이나 불가피성, 당위성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이다. 법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법적 해석에 문제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통치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적으로 제정된 헌법을 가진 나라에서 더욱 그렇다.

 

대통령의 합법적 정치 행위는 얼마든지 비판 가능할 뿐 아니라, 중대한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는 일이다. 합법적인 정치적 행위도 얼마든지 국가의 운영에 대한 원리, 곧 헌정주의적 원리와 충돌할 수 있다. 합법성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는 관례와 전통을 무시한 정치적 행위들은 헌정주의의 기반을 갉아먹는다.

 

헌정주의란 단지 헌법이 존재하는 나라의 통치를 말하지 않는다. 헌정주의란 말 그대로 통치의 권위가 헌법이 설정한 질서 안에서만 정당하다는 뜻이며, 그 핵심 원리는 제한 정부에 있다. 제한 정부는 통치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정치적 근대성의 요체다. 이것은 단순히 통치자가 법률을 지킨다는 것을 넘어서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포함된 헌법적 원리를 존중하고 따른다는 의미를 갖는다.

 

현대 정치에서 권력자의 통치를 제한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다. 만약 그것을 기다리기 어려운 비상한 상황이 발생하면, 시민들은 직접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우리는 민주화나 탄핵의 과정에서 이미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권력 통제의 기준이 단순히 그때그때 달라지는 여론뿐이라면 이 민주주의는 항구적인 불안정 속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헌법을 만들었다.

 

헌법에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사항도 들어 있지만, 주요하게는 국가를 운영해 나가는 권력자(기구)의 통치 행위에 대한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 요컨대, 헌정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자의적인 통치를 제한하는 것에 그 주요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통치가 아무리 합법적으로 행해지더라도, 그것이 점점 자의적인 방향으로, 심지어 빈번하고 무차별적으로 행사되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된다. 합법적 통치 행위가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분명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우리 헌정질서의 핵심 원리는 민주공화정’, 그리고 견제와 균형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통치는 공적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입법부·사법부·행정부 간의 균형 잡힌 견제 관계다. 대통령은 형식적으로 행정부의 수장이자 국가원수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에서 주권의 핵심은 입법권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주권 기관도 의회가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합법적으로 의회의 입법권을 견제할 수 있지만, 그것은 주권기관으로서 입법부에 대한 존중이 먼저 전제가 될 때 가능한 일이다. 견제권이 입법권이라는 본질을 침해할 수는 없다.

 

헌법이 있다고 항상 헌법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헌법은 법을 왜 지켜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한 사회가 도달한 답을 담고 있지만, 그 경우에도 헌법이 헌법을 지켜야 할 이유까지 제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정치와 민주주의의 영역이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견제의 목적을 가진 합법적 권한이 남발될 때, 이것은 헌정주의적 원리에 대한 도전에 해당한다고 말이다.

 

정치이론 분야의 저작에 대해 아마도 가장 권위있는 상을 받은 리처드 벨라미는 <정치적 헌정주의(Political Constitutionalism)>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의적 통치를 극복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달성하는 것은 법 자체보다는 정치에 달려 있다. 법은 정치적 상황을 넘어서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운용된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 구절은 거부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 같다. 불이 안 나는 게 가장 좋으나, 불이 날 때를 대비해 소방차도 필요하다. 대통령의 거부권이나 입법부의 탄핵권은 그런 비상 수단이다. 그러나 소방차가 있다 해서 자주 불을 내도 좋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건 정치적 실수나 월권을 넘어 헌정주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선거라는 제한 정부의 수단이 이미 발동된 바 있다. 대통령이 헌정주의 원칙과 민주주의를 존중할 때다.

이관후 정치학자 | 경향 2024.05.23.

 

 

식탁의 뉴노멀, ‘금값농수산물

토마토, 배추, 사과, , 양배추, .’

작년 7월부터 올해 5월 현재까지 가격 변동폭이 컸던 농수산물들이다. 재배 기술이 발달한 요즘 농수산물의 가격이 출렁이는 것은 대부분 이상기후 때문이다.

 

작년 7월 말까지 지속된 장마로 서울 근교 채소 농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토마토는 그중 하나였다. 생활협동조합의 완숙 토마토와 채소로 아침을 해결해온 나는 9월 초까지 대체품을 못 찾아 고생했다. 토마토와 채소가 아예 매대에 없는 날도 많았다. 작년 장마는 일평균 강수량 역대 1, 누적 강수량 역대 3위 기록을 남겼다. 서울에는 20일 내내 비가 쏟아지기도 했다. 내가 경험한 최악의 장마였다.

 

10월에는 고랭지 배추 작황 악화로 배추값이 뛰기 시작했다. 고랭지 배추는 한여름에도 기온이 26도 이상 오르지 않는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주로 재배한다. 그런데 작년 여름 강원도 산간까지 덮친 폭염 탓에 배추 작황이 좋지 않았다. 고랭지 배추는 이미 2022년에 가을 이상저온으로 금배추가 된 바 있었다. 한 해는 이상고온으로, 한 해는 이상저온으로 가격이 오른 셈이다.

 

국민 과일인 사과는 지난 4월 총선 이슈가 되기도 했다. 작년 3월 개화 시기에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데다 장마철 집중 호우로 수확량이 30%나 줄었다. 정부가 추석과 설날을 맞아 비축물량을 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제 제사상에 사과 대신 바나나를 놓아야 하냐는 탄식이 나왔다. 정치권에서 부랴부랴 총선을 앞두고 설익은 사과 수입 카드를 들고나왔다가 땜질 처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일 수입에 꼭 필요한 병해충 검역 등 수입위험분석 절차에 평균 8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양배추 파동도 있었다. 지난겨울 잦은 비로 양배추 수확량이 줄면서 가격이 급등했다. SNS에는 양배추 한 통에 1만원에 거래되는 사진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KAMIS) 자료를 보면, 4월 말 기준 양배추 1통의 소매가격은 5977원으로 전년(4041)보다 50%가 올랐다.

 

애그플레이션(농산물+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은 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검은 반도체로 불릴 만큼 수출량 많은 김은 사상 최고가를 경신 중이다. 우리나라 다음으로 세계 2위 김생산국인 일본의 김 가격이 이상기후에 의해 상승한 탓이었다. 바다 수온이 오르면서 김이 누렇게 변하는 황백화로 일본의 김 생산량이 50%나 줄었다. 일본이 감소량을 우리나라 김 수입으로 대체하면서 국내 김값이 2배가량 뛰었다. 바닷물 온도가 오르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해수 온도가 상승한 국가다. 이래저래 김값은 금값될 가능성이 높다.

 

농수산물 가격 파동은 해마다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작년과 올해처럼 다양한 농수산물 가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금값 대열에 합류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무엇보다 가격 파동의 원인이 기후위기 탓인 경우가 많아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 더 답답하다. 다음달 시작될 장마로 또 얼마나 많은 농수산물 앞에 자가 붙을지 벌써부터 우려된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 경향 2024.05.23.

 

바보 같은 미국 대학생들

미국에는 중앙정보국(CIA) ‘과거사 3종 세트가 있다. 1953년 이란, 1954년 과테말라, 1973년 칠레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조종해 성공시킨 것을 말한다. 미국 대외 정책의 대표적 오점이고 그야말로 교과서적 사례들이다.

 

외교·안보 관리나 전문가들 강연에서는 명문대생들이 이에 관한 질문을 종종 던진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겠냐는 것이다. 나는 그런 장면에 약간 냉소를 품기도 했다. ‘지금은 정의감이 충만하겠지만 당신들 중 저 연단에 올라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능수능란하게 답하는 사람이 나올 거야라는 생각 때문이다.

 

가자지구 학살에 대한 시위를 지켜보며 그런 생각을 고쳐먹었다. 우선 학생들의 저항은 불의를 들추고 바로잡는 데 미미하나마 기여한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저항하니까 미국 정부가 움찔은 한다.

 

또 다른 깨달음은 그들을 꾸짖는 기성세대, 특히 조 바이든 대통령을 보면서 얻게 됐다. 즉 젊어서 정의로운 사람 모두가 늙어서도 정의로울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젊어서 기회주의적인 사람은 계속 기회주의적일 것이라는 점이다. 바이든은 시러큐스대 로스쿨에 다닐 때 베트남전에 반대하며 총장실을 점거한 학생들에 대해 친구들과 저 머저리들 좀 보라며 흉봤다고 자서전에 썼다. 천막농성 학생들을 철부지 취급하는 지금의 바이든은 그때도 그랬다.

 

11월 대선에서 재대결하는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는 젊을 때 운동을 잘했다지만 건강을 이유로 베트남전 징집을 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세대 미국인들이 정글에서 쓰러져갈 때 무심했던 이들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의 죽음에 대해 공감을 요구하는 게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바이든은 미국이 대 준 1t 가까운 무게의 대형 폭탄이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는데도 전쟁 발발 뒤 7개월이나 지나 이 폭탄 공급을 보류시켰다. 미군이 교량이나 군사시설 파괴용으로 규정한 이런 폭탄은 가자지구 민간인 거주지를 콘크리트 가루로 바꿔놨다. 트럼프는 정치적 궁지에 몰린 바이든이 이 폭탄 공급을 보류시키자 바이든이 이스라엘을 버렸다며 한술 더 떴다. 2016년 민주당 후보로 트럼프와 대결한 힐러리 클린턴까지 시위 학생들은 중동 역사를 모른다꾸짖는 어른대열에 섰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또 다른 대선 후보 출신인 존 케리 기후변화특사 같은 사람이 이번 위기를 다루는 위치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2004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힐러리에 이어 국무장관을 한 그는 베트남전 때 해군 중위로 복무하며 훈장을 여러개 받았다. 그러나 퇴역 뒤 참전 군인들의 반전 운동을 이끌었다. 1971년 의회 청문회에서 정치 지도자들의 욕심과 무책임이 미군을 양민을 도살하는 괴물로 만들었다며 유명한 연설을 했다. 지금은 변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일과 무관해서인지 별말이 없다.

 

결론은 사람이 한결같이 정의로우면 더 좋겠지만 젊을 때만이라도 정의로우면 그 사회와 인류를 위해 다행이라는 것이다. 바보, 머저리, 무식쟁이라는 소리를 듣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그만 죽이라고 외치는 학생들이 그들을 꾸짖는 노회한 이들보다 훨씬 나은 인간들이다.

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 한겨레 2024.05.23.

 

 

윤 대통령, 잘못 드러누웠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미지는 노빠꾸로 요약된다. 무조건 직진이다. 축구로 치면 닥공’(닥치고 공격)이다. 대선 홍보 영상에서 했던 좋아, 빠르게 가(좋빠가)”는 그의 국정운영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그 출발점이 검사 윤석열임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201310월 국회의 검찰 국정감사에서 했던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발언은 그가 별의 순간을 잡은 동력이 됐다. 부당한 외압에 물러서지 않는 검사 이미지는 정치적 자산이 별반 없던 그가 빼들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카드였다. 대선 유세 과정에서 팔뚝을 휘둘러 어퍼컷을 날리거나 공정과 상식을 슬로건으로 내건 것은 다 이 같은 이미지를 부각하려는 전략이었을 게다.

 

그러나 대통령 윤석열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갔다. 그의 집권 2년은 검사 윤석열이미지에 가려진 밑천들이 하나둘씩 드러난 시간이었다. 결단력이나 뚝심으로 포장됐던 리더십은 무데뽀와 독선과 불통으로 나타났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은 이권 카르텔등으로 낙인찍고 검찰이 피의자 대하듯 한 반면, 정부 요직을 검찰 출신들로 채워 검찰공화국비판을 자초했다. 5세 취학, 69시간 노동,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해외 직구의 국내 안전 인증(KC) 등 설익은 정책을 내놓았다가 주워담는 일이 반복됐다. 국정은 갈피를 잡지 못했고, 뭘 하려는지 청사진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윤 대통령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도 함께 허물어졌다. 그 누구도 아닌 대통령 자신에 의해서다.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 책임자인 박정훈 대령이 제기한 대통령실과 국방부의 수사 외압 의혹은 국정원 댓글 사건수사 책임자로서 수사 외압을 폭로했던 10년 전 검사 윤석열을 소환했다. 채 상병 사건 피의자인 이종섭 전 국방장관의 호주대사 임명 및 도피 논란은 윤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이 선택적임을 보여줬다. 윤 대통령은 지난 9일 기자회견에서 채 상병 사건 수사에 대한 ‘VIP 격노설질문에 동문서답함으로써 정작 중요한 것은 회피하고 뭉개는 국정 최고책임자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김건희 여사 의혹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특검 요구에 일단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고 해놓고선 4일 뒤 검찰 수뇌부를 갈아치웠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에게 인사를 미뤄달라고 했으나 사실상 묵살당했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 법무부 장관이 자신을 패싱하고 검찰 인사를 했다며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들이받았다. 이 부조화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김 여사 특검법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태세다. 결국 윤 대통령이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키고 검찰 수뇌부를 갈아치운 건 검찰을 틀어쥐고 김 여사 수사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김 여사가 공개 외부 행보를 재개한 게 이런 흐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이 여당 당선자, 낙천·낙선자들과 잇따라 식사하는 것도 방탄 단속용일 것이다.

 

총선 참패 이후 윤 대통령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한 것 같다. 임기가 3년 남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조기 레임덕(권력누수)을 막아 대통령 윤석열의 시간을 연장하려는 것이다. 침대축구를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기회를 엿보겠다는 심산인 모양이다.

 

그런데 시간을 끌어 될 일이 따로 있다. 윤 대통령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매 국면에서 도돌이표처럼 돌아올 것이다. 당장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김 여사 의혹은 특검법을 필두로 제2, 3의 모습으로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때마다 회피하고 뭉갤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기 여자 보호하는 건 상남자의 도리”(홍준표 대구시장)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VIP 격노설추가 증언을 확보했다는 소식에 대통령이 격노하면 안 되느냐”(신동욱 국민의힘 당선인) 같은 대응은 역효과만 낼 뿐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한다. 이준석 전 개혁신당 대표 말대로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T익스프레스’(에버랜드에 있는 롤러코스터)를 탈 게 아니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자신과 가족에 대해선 공정과 상식을 저버리는 상황을 국민들이 언제까지 봐줄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이 침대축구에 몰두하면 나라가 어디로 가겠나. 윤 대통령은 잘못 드러누웠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 경향 2024.05.24.

 

 

나라 망치는 한국 지배층의 광신적 사대주의

사대주의와 동전 앞뒷면인 민족허무주의

사대주의란 강대국을 떠받들고 숭배하는 굴종 사상이다. 사대주의에 물들면 강대국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이 신자유주의를 하면 한국도 신자유주의를 하고 미국이 가치 외교를 하면 한국도 가치 외교를 하는 식이다.

 

사대주의는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불신하고 깔보는 민족허무주의 사상과 통한다. 사대주의는 자기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배반하는 매국배족 행위로 귀결된다는 말이다. 민족허무주의에 물들면 스스로를 불신하면서 강대국만 쳐다보는 무력하고 의존적인 인간으로 전락한다. 임진왜란 시기에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던 조선의 지배층은 자기 민족의 힘을 믿지 못하여 자력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면서 명나라만 쳐다봤다.

 

사대주의는 일반 백성들의 것이 아니라 반민중적 정치를 하는 지배층의 전유물이다. 백성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반민중적 지배층은 백성들로부터는 정권 안보를 보장받을 수 없다. 백성을 믿기는커녕 두려워하니 강대국으로부터 정권 안보를 보장받으려고 한다. 쉽게 말해 백성들이 봉기나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강대국에게 자기들을 지켜달라고 매달린다는 것이다. 원래 사대주의는 반민중적 지배층에게 고유한 것이지만 그들의 지배가 장기화될 경우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사대주의에 물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제외하더라도 해방 이후부터 7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을 떠받드는 사대주의자들이 한국을 지배해 왔기에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는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널리 퍼져 있다.

 

자기를 믿지 못하는 의존성이 사대주의 부른다

특정한 사회집단만이 아니라 개인들도 사대에 물들 수 있는데, 그것을 의존성이라고 한다. 개인심리 차원에서의 의존성은 대체로 어린 시절에 자신감을 발달시키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의 훈육으로 인해 아이가 자기를 믿지 못하게 되어 부모나 타인들에게 의존하게 되고 그것이 체질화하는 것이다. 자기를 믿지 못하는 의존적인 사람은 자기 머리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매사를 의존 대상에게 물어보고 그의 지시를 받아 행동해야만 안심하며, 어려운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의존 대상에게 조르르 달려가 매달린다.

 

개인이 사대주의를 하면 단지 그 개인의 정신과 삶만 망가지지만 국가의 지배층이 사대주의를 하면 국민들의 정신이 파괴되고 나라가 망하는 등의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 사대주의적 지배층의 유일한 관심사는 정권 안보와 부귀영화이기에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거리낌 없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거나 배신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극우사대주의는 일제와 미군이 만든 기형적 괴물

한국의 지배층은 극우 파시스트 집단인 동시에 지독한 사대주의 집단이다. 전통적으로 서구 사회에서 극우세력은 사대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와 한몸이었다.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층인 독점자본가계급은 당연히 자기 나라 독점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독점자본가계급은 영국의 독점자본을 대변하고 독일의 독점자본가계급은 독일의 자본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독점자본가계급은 이윤 추구가 어려워지면 사회를 파쇼화하면서 이념적으로 극우화한다. 극우화한 독점자본가계급은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다른 국가나 민족을 배척하고 침략한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독일과 일본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처럼 각국의 독점자본가계급은 자국의 독점자본을 대변하기 때문에 사대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이런 독점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민족주의를 올바른 민족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부르조아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성향이 강하다.

 

한국의 극우세력은 왜 서구 나라들과는 달리 민족주의가 아닌 사대주의에 물들었을까? 한국은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가장 힘 있고 돈 있는 사회집단이 된 독점자본가계급이 국가를 장악하는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발전경로를 밟아오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로 인해 아예 독점자본가계급이 형성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독점자본가계급이 아닌 미군이 국가를 장악했다. 한국을 점령한 미군은 한국 땅에 한국의 독점자본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아닌 미국의 이익,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독점자본을 대변하는 하수인으로 써먹기 위해서 매국적 정치세력을 키웠다. 이런 비극적인 역사는 한국에서의 정치엘리트의 탄생이 민족주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반면 사대주의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위 적폐세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한국의 지배층은 극우 집단인 동시에 사대주의 집단이다. 원래는 대척점에 있어야 마땅한 극우와 사대주의를 한몸에 품고 있는 한국의 극우사대주의 세력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미완의 해방이 만들어낸 기형적 괴물이다.

 

영화 <박하사탕> 주인공 자살케 만든 죄의식과 자기혐오

원칙적으로 사대주의자는 개인적 이익 때문에 사대주의를 한다.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사대주의를 한다는 점에서 사대주의자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처음에 등장한 사대주의자들은 거의 다 합리적 사대주의자들이었다. 즉 애초에 그들은 정권 안보나 부귀영화를 위해 일본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을 떠받들고 숭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주의는 단순히 강대국을 떠받들고 숭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깔보고 멸시하는 자기혐오 심리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신건강에 매우 해롭다. 사대주의자는 또한 매국배족의 삶을 살기 때문에 죄의식을 피할 방법이 없으며 이로 인해 자기혐오 심리는 극단적일 정도로 심각해진다.

 

자기혐오는 사람들을 자기처벌, 자기파괴의 길로 무자비하게 밀어붙인다.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는 원래 착하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80년의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다가 오발 사고로 한 여고생을 죽이게 된다. 영호는 끔찍한 죄를 지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고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술집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영호의 모습은 그의 자기혐오 심리를 잘 보여준다. 자기혐오는 영호를 자기처벌, 자기파괴의 길로 질주하게 만들었다. 영호는 점점 더 나쁜 짓을 하면서 망가져갔고 결국에는 자살한다. 죄의식을 제때 청산하지 못하면 사람은 정신적 파탄과 자기파괴를 면할 수 없다.

 

반성과 처벌 없이 마지막 자기파괴 단계 이른 광신적 사대주의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반성과 처벌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며, 죄값만큼의 처벌을 받아야만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검거되어 옥살이를 한 살인범들과는 달리 검거되지 않은 살인범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의 사대주의 세력은 반성이나 처벌 없이 긴 시간 동안 한국을 지배해왔다. 무려 7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죄의식을 청산하지 못했기에 그들의 정신은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즉 사대주의 세력의 정신과 행동은 죄의식에 시달리던 초기 단계, 자기혐오의 중기 단계를 넘어서서 자기파괴로 치닫는 마지막 단계에까지 접어든 것이다.(후쿠시마 오염수나 라인 강탈 사건을 대하는 윤석열 정권의 모습은 이 단계에 도달해야만 가능하다)

 

한국의 사대주의 세력이 합리적 사대주의에서 광신적 사대주의로 변질된 것에는 죄의식으로 인한 정신건강의 파탄이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 이익과는 상관없이, 심지어는 손해를 보면서까지, 맹목적으로 강대국을 떠받들고 숭배하는 사대주의를 합리성을 결여했다는 의미에서 광신적 사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은 광신적 사대주의의 표본이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광신적 사대주의가 합리적 사대주의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합리적 사대주의자들은 시대가 달라지고 대세가 바뀌면 재빠르게 주인을 갈아탄다. 반면에 광신적 사대주의자들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기에 주인을 바꿔야만 하는 타이밍조차 포착하지 못한다. 광신적 사대주의 집단인 윤석열 정권은 몰락하고 있는 미국과 낡은 제국주의 질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반면 러시아, 중국, 브릭스 진영과 다극화 질서를 적대시함으로써 한국을 망국의 길로 이끌고 있다. 시급히 광신적 사대주의 정권을 청산해야만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시민언론 민들레 2024.05.24.

 

박정희 향수가 낳은 박근혜 팬덤, 노무현 애수가 낳은 문재인 팬덤

정치팬덤에는 대상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 있어야 하고, 팬덤이 공감하는 내러티브가 있어야 한다. 아이돌 팬덤을 설명할 때 한을 먹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심금을 울릴만하는 스토리나 영욕의 드라마가 있어야 하는 얘기다. “자신이 팬질하는 대상이 겪는 악재를 뜻하는 한 먹음은 아이돌판에서 진정으로 강력한 힘과 끈끈한 결속력을 발휘하는 팬덤으로 거듭나기 위한 의식이나 다름없다.”(임명묵) 비유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의 하나로 거론한 파토스가 있어야 강력한 팬덤이 형성될 수 있다. 그래야 내러티브 몰입이 이뤄진다. 몰입은 안으로 열광을 낳고, 밖으로 혐오를 낳는다.

 

박근혜는 양친을 모두 총탄으로 잃었다. 9살부터 27살까지 대통령의 딸로 지냈고, 어머니를 잃은 뒤에는 영부인의 역할을 대신했다. 10·26 사태 후 20년 가까이 독신으로 잊혀지내다 1997년의 외환위기 후 “(아버지가) 어떻게 일으킨 나라인데하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보수의 영웅 박정희에 대한 향수에 고난의 인생 스토리까지 더해진 비장한 내러티브는 정치팬덤을 낳는 상징자본으로 작용했다. 박근혜는 당을 두 번이나 구해냈다. 한 번은 2004년 총선 때다. “박근혜 대표는 한나라당의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차떼기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이 20044·15 총선에서 그나마 명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박 대표의 대중적 인기 덕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2005년 조선일보 기사의 한 대목이다. 2012년 총선 때도 그는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승리의 매직을 보여줬다.

 

정치 셀럽 박근혜의 대중적 인기는 어느 신문기사 제목처럼 아버지 후광, 알맹이 없는 연예인식 인기라고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허나 그것은 정치팬덤이었다. 그는 근혜님’, ‘박짱으로 불리곤 했다. 애정어린 호칭이다. 20043월 개설된 팬 커뮤니티 박사모6만 명의 회원(2011)을 두었고, 게시글에는 가슴 떨린다’ ‘그립다등 숭배와 친밀감의 애정 표출로 넘쳐난다. 경쟁세력에 대해서는 철면피 인간’, ‘배신자’, ‘비열한 망나니’, ‘가증스런 위선자등 적개심을 드러내는 팬덤언어를 사용했다. 지금의 팬질 그대로다.

 

박근혜에게는 팬덤 감수성이 있었다. “미니홈피 개설 초기에 미공개 가족사진을 올리고, 100만 번째 방문자와 ‘1일 데이트를 예고해 방문자 수를 늘리는 등 만만찮은 솜씨을 보여왔다. 박사모는 결성 1년 만에 회원 수 4만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했으며, 이들은 책임당원제를 도입하는 한나라당에 집단 입당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강준만) 이렇게 구축된 팬덤의 힘은 놀라웠다. 2008년 총선, 친박 후보가 출마하지도 않은 한나라당 텃밭에서 당 사무총장이던 친이 의원이 평소 박근혜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허무하게 떨어졌다. 또 당의 공천을 못받은 친박 후보들, 즉 친박연대 소속 14명과 친박 무소속 12명이 친박 돌풍으로 당선됐다.

 

박근혜 팬덤은 박정희에 대한 향수, 보수정서에 맞는 페르소나와 행태, 혼자 남겨진 대통령의 딸이나 커터칼 피습과 같은 감성 요인, 보수 미디어의 팬덤적지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지만 그는 집권 후 팬덤정치를 통치전략으로 활용했다. 박근혜는 대선에서 과반 득표로 승리했고, 의회에서도 다수의석을 확보하고 있었다. 취임 초를 제외하곤 2년차 중반까지 50%를 넘는 지지율을 누렸다. 종편의 출범으로 언론지형도 더 유리해졌다. 비록 집권 초의 국정원 댓글사건, 세월호 참사 등 불안요인이 없진 않았지만 집권기반은 안정적이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6월 지방선거에서도 사실상 승리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야당에게 1석 뒤졌지만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117석 대 80석으로 크게 앞섰다.

 

그럼에도 그는 팬덤정치를 가동했다. 정당과 의회 때문이었다. 유승민 원내대표와 갈등을 빚은 탓에 당을, 국회선진화법에 따른 입법교착(gridlock) 탓에 국회를 걸림돌로 여겼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이른바 동물 국회에 대한 반성으로 만들어진 국회선진화법으로 박근혜 정부는 발이 묶였다. 일방적인 강행 처리가 어려운 터에 여당도 거수기 역할을 거부했다. 결국 박대통령은 정당과 의회를 우회·압박하는 팬덤정치에 나섰다. 팬덤을 동원해 유승민을 원내대표직에서 몰아냈고, 국회개혁청원에 서명하는 등 대중 속으로 들어갔고’(going public), 2012년 총선에서는 진박 감별 논란을 빚으면서까지 공천을 전횡했다.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던 강한 팬덤을 믿고 펼친 포퓰리즘 정치였다.

 

문재인 팬덤은 노무현 애수에서 비롯됐다. 그에 대한 보수정부·언론의 핍박과 죽음으로 인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지못미정서, 애잔한 내러티브가 생겨났다. 민주화 특히 정권교체 이후 보수 언론의 힘이 강해지면서 정치의 미디어화가 진행됐고, 종편의 등장으로 더 깊어졌다. 이런 열세 속에서 기성 미디어를 대체하는 에스엔에스(SNS), 소셜 미디어가 대항언론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스마트폰과 팟캐스트, 에스엔에스 플랫폼 기술의 발달과 기술 간 상호작용이 대안적 혹은 대항적 공론장을 만듦으로써 플랫폼 정치혹은 네트워크 정치가 보수화된 매스미디어 중심의 미디어 정치와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백욱인) 이 때 등장한 나꼼수가 판을 바꿨다. 나꼼수는 정치의 개인화, 사사화, 감정화 흐름을 강화했다. 이준형에 따르면, 보수세력의 권력남용과 비리에 대한 나꼼수의 찰진 조롱과 질펀한 풍자가 대중의 새로운 정치참여를 이끌어 내고, 노무현 죽음 이후 진보 진영에 퍼져있는 애도의 감정을 결집시켰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문재인이고, 그의 팬덤이다.

 

문팬덤의 기세는 맹렬했다. “투철한 팬심과 비상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모바일 전사들이 민주당의 당원 게시판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휩쓸며 당의 여론을 움직였다. 2012년 문재인의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의 친문-비문 계파 갈등, 문재인과 박지원이 당권을 두고 격돌한 2015년 전당대회와 2016년 분당에 이르는 중대 고비마다 이들이 펼친 활약은 눈부셨다. 온라인 좌표 찍기, 게시판 댓글 도배, 특정인을 겨냥한 문자 폭탄이 무기였다.”(이세영) 문자폭탄에 대해 문재인은 적어도 정치인이라면 그런 문자를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거나 경쟁을 흥미롭게 해주는 양념같은 것이라며 감쌌다. 집권 후 문재인은 촛불집회에서 제기되고, 대통령 탄핵으로 표출된 적폐청산의 요청에 적극 호응했다. 여소야대인 걸 감안하면 이 선택은 탄핵연합을 이어가는 연합정치가 아니라 팬덤정치를 통한 정면돌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팬덤은 전위대를 자처했고, 내편에겐 수호천사 네편에겐 기동타격대로 행동했다.

 

문팬덤은 박팬덤에서 더 진화했다. ‘우리 이니(문재인의 애칭) 하고 싶은 거 다해라는 말이나 이니 굿즈 등에서 알 수 있듯 감성 브랜드화했다. 자발적 모금으로 문재인 생일 축하 광고를 2018년엔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2019년에는 서울역 옥외전광판에, 그리고 2020년에는 광주의 지하철역 광고판에 내걸었다. “당신을 지켜드리기로 맹세합니다. 우리를 믿으세요.” “그대와 함께 만드는 미래에 단 한 번도 등 돌린 적 없음을.”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그들은 한겨레·경향신문, 오마이뉴스를 한경오로 호칭하며 언론적폐로 규정해 집단공격하기도 했다. 한겨레21 문재인 표지사진과 영부인 호칭을 문제삼아 그 신문에 대한 절독·불매 운동도 전개했다. 추앙과 적대의 배타적 팬덤이었다.

 

팬덤정치는 2022년 대선과 2024년 총선을 거치면서 이제 절정에 달한 듯하다. 그 실상과 향후 전망이 궁금하다.

이철희 전국회의원 한겨레 2024-05-24

 

시인의 마음

소크라테스는 죽음 직전에 시를 썼다. 스스로를 아테네의 쇠파리라고 부를 정도로 논리적인 변증술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이 시를 쓴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소크라테스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과 가족이 찾아오는데, 이때 있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케베스는 이솝의 우화를 시로 쓴 적이 있는지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꾼 꿈들이 시를 지으라고 명한 듯해서 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시를 썼다고 대답해 준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가장 위대한 시가로 덧붙이지만 죽음 직전에 시를 썼다는 <파이돈>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아테네 시민들을 말(로고스)로써 성가시게 하던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내면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시인들이 모종의 본성에 따라서시를 지을 뿐이지 지혜가 있어서는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결국 그 자신도 시의 힘을 어쩌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을 이성이나 정신으로만 환원할 수 없음을 죽음 앞에서 인정한 것일까. 시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모종의 본성”(본능)으로 쓰는 것인지는 오늘날에도 되물을 문제지만, 소크라테스에게 당대의 시인들은 민중의 감성과 현실적 삶에 대한 바람에만 머물러 있다는 인식을 주었거나, 아니면 아리스토파네스가 자신을 작품에 등장시켜 희화화시키는 등 비합리적인 것에 몰두한다는 반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건 고대 아테네 사회에서 시가 민중의 것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인데, 우리는 그것을 대()디오니소스 축제 때 벌어진 비극 경연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니체의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시를 시민의 덕목에서 삭제하려고 했고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비극을 몰락시킨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소크라테스적 전환이 서구 근대의 정신적 뿌리였다고 본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는 민중의 것

고대 아테네에서 비극(의 본질을 차지하는 시)의 융성은 민주주의와 관계가 깊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에 발맞추어 비극 양식도 꽃피기 시작했지만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그 패배로 인한 사회적 후유증 속에서 생명력을 잃어갔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귀족주의자로 알려진 니체가 아테네 민중이 함께참여한 대()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경연을 벌인 비극을 찬양하는 반면에 민중 장르인 비극을 현실의 지적/사회적 엘리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신 철학으로 대체한 소크라테스를 비난한 것은 아이러니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 자체를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민중 장르인 신화적 비극이 엘리트 장르인 철학으로 대체되던 시기에 아테네 민중 법정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실은 우리의 사유를 자극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민중시의 지평을 본격적으로 연 것은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였다. <농무>를 빼놓고는 그 이후에 형성된 민중시 전통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농무>는 무엇보다도 민중 언어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시가 지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입증했다. 쉽게 말해 민중 스스로 자신의 삶과 꿈과 욕망을 시로 지을 수 있는 징검돌을 놓은 것이다. <농무>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본격화된 점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민중이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언어로 민중 자신의 삶과 내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 민주주의의 살아 있음을 가리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 10여년이 지나서 노동자들이 직접 시를 짓기 시작한 것도 <농무>의 등장이 가져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민중시가 나타난 사실을 문학사의 테두리에서만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지하에 면면이 흐르던 거대한 뿌리’(김수영)가 피워 낸 꽃잎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 새 지평 열어준 신경림

소크라테스의 예에서 보았듯 시의 마음이라는 것은 삶에 있어서 근원적인 것이다. 그리고 신경림 시인은 그 시의 마음이 엘리트들의 부족함 없는 교육이나 윤택한 생활이 아니라 민중의 구체적 삶에서 생기하는 것임을 보여줬으며, 동시에 시인 스스로 민주주의를 향한 물길에 삶을 실었다. ‘시의 마음이 사람에게 근원적인 것이듯 민주주의도 공동체적 삶에서 근원적인 것이다. 그리스 비극이 아테네 민주주의와 역사적 궤를 같이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적인 삶과 시가 생각보다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 아닐까?

 

2024522, 신경림 시인이 돌아가셨다. 그간 민주주의의 퇴행과 시의 지리멸렬이 한 쌍이 아닌가 의심 중이었는데, 신경림 시인의 죽음은 시의 자리가 어디여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시가 민중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시인의 죽음이 다른 물음의 시작인 경우도 그리 흔치는 않다.

황규관 시인 경향 : 2024.05.26.

 

미래가 없으면 아이들도 없다

비판과 대안을 위한 사회복지학회의 춘계학술대회가 510일 열렸다. 대전환의 시기에 복지국가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분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특히 대학원생들이 70명 이상 참여해 밤늦은 시간까지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청년 연구자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저출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기후위기’, ‘디지털화’, ‘다양성등이 핵심 키워드였다.

 

학회 개최 전날 윤석열 대통령은 저출산 극복을 위해 역량을 총동원하기 위해 저출생대응기획부를 신설할 계획을 발표했다. 흥미롭게도 학회 내내 이 계획은 전혀 화제가 되지 못했다. 대통령과 우리 청년 및 연구자들의 상당한 인식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대통령은 저출산·고령화로 대표되는 인구 전환이 다른 중요한 전환들과 독립적으로 발생한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하지만 인구 전환만큼 중요한 기후 전환과 디지털 전환은 상호 긴밀히 연결돼 있다. 2주 전 영국 가디언지는 최고의 기후과학자들 380명에게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 중 단 6%만이 산업화 이전보다 지구 온도가 1.5도 이내로 상승할 것이라 응답했다. 반면, 77%는 최소 2.5도 이상 상승해 인류가 극단적인 기후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기후학자들은 희망이 없음을 호소했다.

 

만일 우리 아이들이 극단적 기후변화와 식량 위기를 경험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정말 저출산국가비상사태가 될 수 있을까? 실제 최근 연구들은 기후 불안이 청년들의 출산 의도를 낮춘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10개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 연구에서 대부분이 기후 불안을 응답했고, 기후 불안을 가진 청년의 40% 정도가 아이 갖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고 응답했다. 기후위기의 과학적 증거가 넘쳐나고, 실제 그 결과가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달러가 되면뭐든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대통령과 여당이라니. 그렇다면 지난 30년 동안 세 배 이상의 경제성장은 무엇을 해결해주었는가?

 

미래에 대한 불안은 기후 전환에 그치지 않는다. 디지털 전환 역시 청년들에게 희망보다는 불안을 더 주고 있다. 지난해 발간된 골드만삭스나 오픈에이아이(AI)의 보고서들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좋은 일자리부터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보고하고 있다. 최근 나온 지피티-포오’(GPT-4o)를 사용했거나 지피티를 장착한 휴머노이드 영상을 본 청년이라면 노동의 미래에 대해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최영준의 지피티는 나와 달리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학습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이슈들에 대해서 나를 빙의해 답변한다.

 

인구 전환 과정에서 노동력이 줄어들 것이라 하지만, 디지털 전환으로 좋은 일자리에 대한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고용·소득 불안정의 증가가 출산 의도를 낮춘다는 증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구글 전 시이오(CEO)였던 에릭 슈밋은 줄어드는 노동력은 에이아이가 대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저출산 대응의 본질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출산 대응의 본질은 다음 세대에게 미래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미래가 없으면, 아이들도 없다. 지구가 더 이상 살기 어려운 곳이 되어가고, 불안정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은데 아이들이 안 태어나서 걱정? 우리 아이들은 누군가의 부품이 아니다. 저출산 대응은 인구 전환만을 감안하는 좁은 관점을 벗어나 기후 전환과 디지털 전환까지 삼중 전환의 유기적 상호 관계를 감안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낳게 할 것인가, 인구를 유지할 것이냐는 관점을 넘어 어떻게 아이들에게 미래를 줄 수 있을 것이냐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성공적인 디지털 전환은 인구 전환이 위기가 되지 않게 할 수 있으며, 기후위기를 경감시키는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디지털 전환은 승자독식 구조를 만들어낼 뿐이며, 탄소 배출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적극적인 기후 전환은 개인과 지역에 새로운 기회와 일자리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기후 불안만 높일 경우 인구 위기는 가속화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미래를 만들어 주는 이 삼중 전환의 프로젝트는 경제, 교육, 복지, 재분배 등이 총망라된 프로젝트여야 한다. 기후소송 최종 진술에서 우리의 미래가 물에 잠긴다는 한제아 학생의 말을 기억하자.

최영준 |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한겨레 : 2024.05.26.

 

바보야, 문제는 인복이라니까!

고전평론가로 오랫동안 전국 곳곳에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덕분에 시대의 변화상을 다방면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예컨대, 20세기엔 노동자들이 야학을 했지만, 요즘은 CEO들이 새벽에 인문학을 한다. 또 이전엔 남성들이 지식을 독점했지만 요즘 모든 인문학 강연장의 90%는 여성이다. 여성의 뇌는 감성편향이라 이성적 사유는 좀 어렵다고 했던 담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가장 놀라운 변화는 청년들의 무기력이다. 중고생들은 허리를 곧추세우기가 어려울 지경이고, 대학생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 짓눌려 있다. 이 청년들을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해온 부모와 교육당국자들은 이런 광경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좋은 나이에, 그 멋진 캠퍼스에서, 대체 왜?

 

하긴 안다고 한들 그다음에 나올 반응은 뻔하다. 과도한 경쟁과 개인주의, 제도와 시스템의 보완 등등. 이미 그런 진단하에 천문학적 자본과 공력을 들여왔건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출산율 세계 최하등의 치명적인 타이틀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가히 시대적 이슈라 할 만하다.

 

무릇 모든 사건의 키는 현장에 있는 법, 난제일수록 현장을 주시해야 한다. 교실을 휘감고 있는 저 무기력, 무표정의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친구가 없어서다. 친구랑 같이 있으면 누구든 생기발랄해진다. 소리, 눈빛, 손짓 등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여, 청춘과 우정은 그 자체로 동의어다. 읽고 쓰고 말하고, 만남과 이별, 동경과 추앙 등 성장에 필요한 모든 활동은 친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리 시대 청년들은 친구가 거의 없다. 친구가 없는 청춘, 이게 가능한가? 아마 단군 이래 처음일 것이다.

 

그럼, 어쩌다 이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을까? 스마트폰 때문에? 코로나19 때문에? 역시 지루한 동어반복이다. 인터넷과 줌은 우리가 접속하고 교감할 공간을 대폭 확장해주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디지털 혁명의 핵심 아닌가. 한데 그 마법의 테크닉을 고립과 단절을 위해 쓴다고? 대체 왜?

 

, 여기부터가 진짜다. 이 세대는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산다는 건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는 것임을. 운명의 키는 결국 인복에 달려 있음을. 집에서도 또 학교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대중문화야 말할 나위도 없다. 거기는 화폐의 제국 아닌가. 자본은 모든 존재들을 분절한다. 그래야 무한증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장 화려한 판타지물인 광고를 보라. 혼자 먹고, 혼자 춤추고, 혼자 여행 가고, 그야말로 홀로이즘의 극치다! 영끌의 대상인 아파트 광고는 더 심하다. 화려한 뷰와 인테리어, 온갖 쾌적함을 갖춘 그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건 역시 혼자다. 이건 개인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집단적 예속에서 벗어난 개체들의 자유로운 연대를 뜻하지만, ‘홀로이즘은 세상의 좋은 건 오직 나만즐겨야 한다는 전도망상의 산물이다.

 

그게 다 자본 탓이라고? 맞다. 그렇다면 그 파상적 공세에 과감하게 맞서야 하지 않나? 왜 가정과 학교조차 열렬히 맞장구를 치고 있는가 말이다. 그러니 청년들은 일찌감치 친구 따윈 필요 없다고 굳게 믿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이들은 민주화 세대의 후예들이다. 가장 역동적인 청년기를 보낸 5060세대의 후예들이 무기력의 블랙홀에 빠져 있다니, 참 기막힌 아이러니다. 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듣고 또 들었을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돈이라니까!’라는 흑마술의 진언을. 이 대목에서 진짜 궁금해진다. 오직 공감과 연대의 힘으로 그 험난한 시대를 통과해온 민주화 세대가 어쩌다 이렇게 자본의 아바타가 되었을까. 독재보다 더 무섭고 센 게 돈맛이라는 뜻인가. 아무튼 그 결과가 바로 무기력한 청춘의 탄생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우주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생명은 그 자체로 플랫폼이다.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영혼의 바다. 온갖 존재들이 쉼 없이 교차하는! 하여, 바다에서 떨어져 나간 물방울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

 

그러니 이제라도 청년들에게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 활기찬 신체와 명랑한 일상, 심오한 지혜와 멋들어진 유머,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오직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그렇다.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 인복이라니까!’

고미숙 고전평론가 경향 : 2024.05.26.

 

위법한 사람 사냥을 멈춰라

지난 22일 점심시간 경남 김해의 한 식당에 법무부 부산출입국사무소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평소 외국인노동자들이 자주 찾는 식당이었다. ‘법무부라는 글씨가 적힌 옷을 입은 단속반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식당 안으로 들어와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무조건 붙잡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3년 전 한국국적을 취득한 베트남 출신 A씨는 한국 사람이라고 설명했지만 함께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에 따르면 마치 살인용의자를 체포하는 것처럼출입국 단속반들이 사람을 잡아갔다고 말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법무부가 지난 4월부터 약 77일간 불법체류 외국인 정부합동단속을 실시한 이후 단속 사례를 보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 법무부는 태국 최대의 전통축제인 쏭크란 축제에 맞춰 태국인 식당을 단속했고, 베트남 결혼식 피로연장을 급습했다. 교회 앞에서 종교행사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외국인을 단속하거나 심지어 임금을 받지 못해 고용노동부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가 노동부 건물 앞에서 단속되는 일도 있었다. 공권력에 의해 사람을 사냥하듯 이루어지는 출입국단속은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확산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정폭력이다.

 

법과 절차의 측면에서만 살펴본다. 헌법 제123항은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서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꼭 제시하도록 하고 있다. 한 번이라도 붙잡혀본 사람은 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폭력적인 과정인지. 헌법에서 영장주의를 선언한 것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법의 통제에 따라 체포하여 인권침해를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출입국단속은 영장주의의 예외로 허용되는 행정조사행위에 불과하다. 출입국관리공무원은 출입국관리법 제81조에 따라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하였다고 의심되는 외국인에게 정지를 요청하고 질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처럼 특정한 장소에 있는 외국인을 무조건 잡아갈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특히 대법원은 2009년 출입국공무원이 제3자 주거 또는 일반인의 자유로운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사업장에 들어가 외국인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그 주거권자 또는 관리자의 사전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사전동의란 시간적으로 단속이 이루어지기 전을 의미하고, 동의하지 않는 관리자의 의사가 실질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밀고 들어온 뒤 관리자에게 단속을 통보하는 지금의 절차는 대법원 판결에 따른 사전동의에 해당되지 않는 위법한 행정이다. 법무부가 스스로 정한 출입국사범 단속과정의 적법절차 및 인권보호 준칙에도 어긋난다. 준칙에 따르면 출입국공무원은 단속업무를 행할 때 외국인의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직무를 수행할 때는 공무원증을 제시하여, 직무수행의 목적을 설명하도록 하고 있다. 이번 단속과정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과 같은 단속방식은 위법하고 행정기관이나 외국인 모두에게 심각한 위험이 초래될 수 있지만 미등록이주민 감소정책목표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미등록이주민은 무사증제도사업장변경제한등 출입국 제도적 요소에 의해 발생한다. 비인간적 단속이 아닌 제도개선과 합법화 경로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센터장 경향 : 2024.05.26.

 

 

이제 시민의회다

캐나다,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선거제도 개혁, 헌법 개정, 기후위기 대응 등 주요 이슈에 대해 일정 기간 숙의를 통해 결정한 사항을 정부나 의회에 권고하는 시민의회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의회는 시민사회단체가 자발적으로 구성한 제도권 밖 조직이 아니라, 정부나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비용을 들여 장기간 운영한 공적 기구였다.

 

필자도 참여하고 있는 시민의회입법추진 100인위원회는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시민의회를 도입했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당시 주지사를 비롯해 외국 사례 연구자들을 초청해 국제 심포지엄을 최근 개최했다. 한국에서도 추첨을 통한 시민참여단 구성 및 숙의 보장 형태로 2017년 신고리 원전 공사 재개와 최근 연금개혁 공론화위원회와 같은 시민참여형 숙의 기구가 있었지만, 시민의회와 같은 체계적인 사례가 실질적으로 없다 보니 사회적 이해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시민의회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총선에서도 보았듯이 선거구 획정이나 선거제도 같은 문제를 당리당략에 매몰된 정당에 맡기는 것보다, , 연령, 지역 등을 고려해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숙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임신중지나 프랑스의 안락사 문제처럼 격렬한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안도 시민의회에서 다룰 수 있다.

 

여론조사는 사전 정보 없이 단순 의견만 묻지만, 시민의회는 충분한 정보 제공과 학습을 바탕으로 찬반 입장을 경청하고 토론을 거쳐 결정하기 때문에 진정한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다. 시민의회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부나 의회에 권고하고, 국민투표나 국회 본회의에서의 찬반 투표 등 정해진 절차에 따르게 하면 입법권 침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시민의회 구성을 추첨으로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원하는 사람들로 구성한다면 정파성이 강하거나 이익집단 중심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있고, 선거 방식은 기존 의회처럼 정당과 긴밀히 연결된 사람들 위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원이나 선거의 가장 큰 폐단은 편향된시민들로만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통계적 대표성을 보장하는 추첨이 필요하며, 외국의 시민의회들도 추첨을 전제로 했다.

 

시민의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2년 후 실시되는 지방의회 선거제도 개혁부터 시민의회 방식으로 운용하고, 국회의원 선거제도로 확대할 수 있다. 공론화위원회처럼 단기간이 아니라, 캐나다 주정부 사례처럼 충분한 기간을 두고 학습, 공청회, 토론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6공화국 헌법을 개정하는 논의도 시민의회에서 시작할 수 있다. 권력구조와 같은 핵심 이슈에 대해 주요 정당과 일정 수 이상의 서명을 받은 시민단체가 제출한 안건 중심으로 논의해 국민투표에 넘기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외국 사례들이 있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헌법 개정 시 양원제를 도입해 선거로 구성되는 국회와 추첨으로 선발되는 시민의회가 서로 역할을 나누게 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7공화국 헌법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라는 헌법 정신을 시민의회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지문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연구교수 경향 : 2024.05.26.

 

마음은 민주주의의 집이다

감정은 추상적이다. 흰 종이 위에 분노라고 적어보자. 단어 하나에 그칠 뿐이다. 그 앞에 일제의 폭압적 수탈에 대한또는 해병대 사병의 억울한 순직에 대한이라고 적는다면? 분노라는 감정에 맥락과 구체성이 부여된다.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폭발력 강한 흡착력, 이것이 감정의 본질이다. 핵심은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고도의 추상성을 지닌 감정에 구체성이라는 성냥불을 효과적으로 긋느냐 하는 점이다.

대안학교를 운영하면서 그리고 대안교육 관련 단체들에 소속하면서 숱한 회의에 참여해봤다. 짐작하겠지만 이들 학교나 단체는 우리 사회 일반보다 조직 민주화 수준이 상당히 높다. 그럼에도 회의 과정이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다.

 

예컨대 학교의 중요한 축제 행사를 이끌어가야 하는 학생 ㄱ이 있다고 가정하자. 공교롭게 그날 학교 외부에서 열리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와 겹쳤다. ㄱ은 그 콘서트에 반드시 가야 한다며 학교 쪽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냈다. 교사회는 토론을 시작한다. 이내 혼란에 빠진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자. 우리 대안학교 맞냐. 보내주자. 주말 아이돌 그룹 공연이 한두개냐. 한번 예외를 만들면 앞으로 주말 학교 행사는 아예 문 닫아야 할 거다. ㄱ은 선배로서 책임을 더 의식해야 할 고학년인데 학생 자치에 대한 배려심 부족이 아쉽다.’

 

논쟁의 겉면만 보면 논리와 논리가 부딪친 토론 같다. 속 깊은 층위가 하나 더 있다. 오랜 세월 ㄱ과 함께 학교생활을 해온 교사들은 그 아이에 대해 호오의 감정을 저마다 달리 가진다. 교사회 내부에 자유주의 기질을 가진 분파와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분파가 나뉠 수도 있다. 여기에 세대와 성별 차이에 따른 변수가 사안마다 더 얹혀간다. 그리되면 쟁점 사안은 그 주제가 다를지라도 회의 때마다 부딪히는 지점이나 갈등을 드러내는 인물군은 비슷하다. 기질이나 감정이 개입될 경우 이성과 논리의 영역은 축소된다. 민주주의는 이성적 논리가 부딪히기에 불안정한 체제라기보다 마음의 덫에 걸려 엎어지기 더 쉬운 감정 취약지대다. 갈림길에서 고민하며 헤매다가 최근 이 문장과 마주쳤다.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번째 집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공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너그러울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생각만이 아니라 전 존재로 경청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견보다 관심을 줄 수 있는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용기 있게, 끊임없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신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

 

미국의 야생 지역 보존주의자이자 여성주의 작가인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언명이다. 최태현 교수의 책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읽다 발견했다. 40년 전쯤 진보운동 세력이 한국 사회의 정치 의제를 설정할 만큼 힘을 가졌을 당시 품성론이 반짝 등장한 때가 있었다. 진보운동이 대중적 정당성과 확산을 꾀하려면 조직활동가들이 솔직함, 소박함, 겸손함, 성실성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숱한 정파 가운데 어느 한쪽의 제안이었고, 운동의 몰지성화를 촉발한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한동안 울림이 컸던 말로 기억한다.

 

최근 들어 자주 이런 질문을 떠올린다. 민주주의자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나는 민주주의자인가?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해 어떤 공부와 훈련을 거쳤던가? 스스로 확신이 없으면서 왜 나는, 또는 내가 속한 조직은 그나마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논리적으로 정당할 뿐만 아니라, 다수가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만한 그런 결정을 민주적으로 해왔노라 의식한 적이 많았다. 정말 그랬을까? 윌리엄스 작가가 던진 첫마디에 명치 끝이 아렸다. 민주주의의 첫번째 집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만 번지르르했지, 누군가의 발언을 전 존재로 경청해본적도 없을 만큼 나는 오만했다.

 

사람의 생각을 교환하고, 그것을 통해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해나가는 공론장에는 민주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뤄야 한다. 좋은 판단과 결정은 거기에서 나온다. 나는 교육의 마당에서 시민적 덕성과 마음의 정치학을 더 긴밀히 탐구해야 한다고 본다. 마음을 정치적으로 내버려두면 그 빈자리를 혐오와 독재가 날름 차지한다. 미국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왜 정의를 위해 사랑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는지 그 이유를 깊이 사유해봐야겠다.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 2024.05.27

 

 

부끄러움을 모르면 못할 짓이 없다

지난 주말 용산 대통령실의 일개 비서관인사에 두 번 놀랐다. 시민사회수석실 비서관에 박근혜 청와대 문고리 권력이었던 정호성(당시 부속실 비서관)이 기용된 기괴한 모양에 경악했고, 그가 맡은 업무가 국민 공감과 국민 소통이라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검사 윤석열이 구속 수사해 엄벌했던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을, ‘대통령 윤석열이 다시 대통령실 참모로 불러들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체성마저 의심케 하는 이 지독한 자기부정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그러니 탄핵 과정 예습용이란 조롱이 반향을 얻는 것이다.

 

시민사회수석실 비서관은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대통령에게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자리다. ‘국정농단 방조자’(법원 판결문)의 어떤 능력이 그에 적합하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대통령실에선 윤 대통령이 정씨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는 말이 나온다. 박근혜 정권을 망친 그 맹목적 충성심은, 여론 청취 담당 비서관의 덕목이 될 수 없다. 차라리 태극기 부대’ ‘아스팔트 보수달래기 차원이라면 이해는 된다.

 

너무도 퇴행적인 정호성 비서관인사는 심판해도 심판당한 줄 모르는 대통령의 역주행이 가속될 것임을 알리는 예령 같다.

 

4·10 총선 참패 직후 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겠다저와 정부부터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그간 걸어온 길은 쇄신, 변화와는 너무 멀다. 쇄신 의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조치가 인사다. 국정의 중심인 대통령실은 총선에서 떨어졌거나 공천을 받지 못한 인사들로 채워지고 있다. 총선 출마를 위해 퇴임했던 참모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이만큼 국정 쇄신전도를 감감하게 하는 시그널도 없을 터이다. 국정 쇄신과 변화를 상징하는 국무총리 교체도 하염없이 늘어지고 있다.

 

총선 후의 변화라고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과 기자회견이다. 2년 내내 거부하던 영수회담을 하고, 21개월 만에 기자회견을 했지만 본질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수회담이 협치의 최고 통로로 자리를 잡으려면 지속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429일 영수회담은 서로의 필요와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이루어진 일회성 이벤트에 가까웠다. 이재명 대표의 연금개혁 관련 영수회담 제안을 대통령실이 단번에 거절했다. 애초 협치의 진정성이 없었다는 방증이다.

 

돌이켜보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국정 기조는 옳았다며 사과를 거부했을 때 예견됐던 일이다. 윤 대통령은 국정 기조를 바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나마 더욱 소통하는 정부가 되겠다고 했지만, 소통 강화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민심 청취를 내세워 민정수석실을 부활했지만, 수석(검사 출신 김주현)과 비서관(측근 이원모) 인선을 보면 여론 청취보다는 대통령실 방어막을 강화하는 데 초점이 두어져 있다. 국민 소통을 담당하는 시민사회수석실 3비서관에는 국정농단 사건의 주역이 발탁됐다.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 거부, ‘김건희 사건수사팀을 와해시킨 검찰 인사 등이 가리키는 바가 있다. 윤 대통령은 국정 기조 전환은커녕 아예 민심에 맞서기로 작정한 듯싶다. 그간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김건희 여사 의혹에 대해 수사를 해보지도 않고 권력의 힘으로 덮으려는 행태가 민심을 격동시켰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지시로 김 여사 명품백 사건수사가 본격화되자 검찰 인사권을 동원해 수사 지휘부를 통째로 갈아치웠다. 대놓고 여사님을 건드리지 말라고 방탄 인사를 감행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래 역대 어느 대통령도 본인, 가족과 관련된 특검이나 검찰 수사를 막무가내로 막은 적이 없다. ‘가족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수사팀을 흔들지도 않았다. 윤 대통령처럼 가족 안위를 위해 국가 권력을 사용(私用)할 만큼 염치없는, 무도한 대통령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태원 참사, 채 상병 순직 사건 등에서 보듯 국민 지키기엔 무감하고, ‘자기 여자 보호에만 진심인 상남자대통령을 지켜보는 건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무참한 검찰 인사 직전, 한 검사장이 검찰 내부망에 올린 사직의 변이 회자됐다. “청렴하지 않으면 못 받는 것이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면 못할 짓이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통령, 이제 못할 짓이 없을 것 같다. 정말 상상 이상의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양권모 칼럼니스트 경향 : 2024.05.28.

 

 

 

악성민원 방지명분, 국민 알권리 위협 말라

정부가 악성민원 방지를 명분으로 정보공개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오히려 국민의 알권리를 크게 위축시킬 수 있어 우려스럽다.

 

최근 정부는 악성민원 방지와 민원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해 부당하거나 과다한 정보공개청구는 심의회를 거쳐 종결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명분과 달리 이미 현행 법 내에서도 이 문제는 해소할 수 있다. 정보공개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반복되는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종결할 수 있는 조항을 두고 있다. 과다 청구를 할 경우에는 정보를 나눠서 공개하는 방식으로 탄력적인 대응도 가능하다. 민원성 내용은 정보공개가 아닌 민원으로 처리할 수 있는 근거 규정도 있다.

 

그런데도 부당하거나 과다한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기준으로 각 공공기관에 설치된 정보공개심의회에 광범위한 재량을 부여해 청구를 쉽게 종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런 대책은 악성민원 방지라는 본연의 목적과 달리, 정부의 자의적 청구권 통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우선 부당하거나 과다한청구의 기준이 불명확하다. 이를 심의회의 주관적 판단에 맡긴다면 공개 원칙은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 심의회에 외부 전문가가 포함되더라도 위원회 구성을 공공기관이 주도하는 한 중립성 확보가 어렵다. 엄밀히 말하면, 결정권자는 기관장이기에 심의회 판단을 따를 필요도 없다. 이 때문에 정부에 불리하거나 민감한 청구가 반복될수록 종결처리는 악용될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부 공공기관에서는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청구권 거부를 남발하고 있다. 대법원은 수감자의 강제노역 회피 목적 등 악의적인 청구에 대해 청구권 행사를 제한한 바 있는데, 공공기관이 이를 확대해석해 다량 청구자의 청구권을 임의로 제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막연히 청구가 부당하거나 과다하다는 이유로 종결할 수 있는 법적 근거까지 마련된다면, 국민의 알권리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자의적 기준에 따라 종결 처리가 남발될 경우 알권리 침해에 대한 구제가 어렵다는 점이다. 부당한 처분에 불복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요하는 행정심판이나 소송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시민들이 하기에는 시간적·경제적 부담이 커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행정심판은 종결처리에 대해 접수조차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정부 대책은 악성민원을 차단하겠다는 명목하에 국민 전체의 정보접근권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현 정부가 정보공개청구를 대하는 태도다. 법원의 공개 판결에도 불구하고 검찰 특수활동비는 계속 비공개되고 있고, 대통령실의 직원 명단조차 비공개되어 소송 중이다. 이는 권력기관의 비공개 관행과 이번 개정 추진이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악성민원 방지라는 명분 뒤에 정부에 불리하거나 민감한 사안에 대한 국민 접근을 사전 차단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론 악성민원에 대한 통제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그 해법은 소수 문제 사례의 선별적 대응에 있지, 청구권을 광범위하게 제한하는 데 있지 않다. 무엇보다 알권리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가치다. 이를 짓밟는 어떤 시도도 결코 용인될 수 없다. 악성민원을 차단한다는 미명하에 정부가 국민의 기본권을 봉쇄하려 든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훼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정보공개법은 제도의 취지에 맞게 투명한 정부 구현과 국민의 알권리 실현의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축시키는 정부 주도의 법 개정은 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조민지 정보공개위원회 위원 경향 : 2024.05.28.

 

 

논란의 불협화음 유로비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유럽방송연합 소속 30여개국의 대표 가수를 출전시켜 우승자를 뽑는 음악 경연대회다. 1956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열리는 이 경연은 아바, 셀린 디옹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를 배출하였고, 결승전 시청자는 약 2억명에 달할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해왔다. 또한 참여국 대부분이 유럽연합 소속 국가라서 유럽연합의 연대를 강화했다는 연구도 있을 만큼 이 경연이 끼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나도 해마다 열리는 이 대회를 즐겨 보곤 했다. 현대 대중음악이 추구하는 완성도나 세련됨을 내세우기보다는 각국의 전통 악기와 자국 언어를 활용하고, 문화를 강조한 음악으로 경쟁하는 모습이 신선했고, 보기 좋았다.

 

하지만 올해 511일 스웨덴 말뫼에서 열린 2024년 유로비전은 보이콧, 시위, 실격 등 논란으로 점철된 행사로 기록되었다. 논란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가수 에딘 골란의 경연 참가에서부터였다. 팔레스타인 민간인 희생자를 다수 양산한 이스라엘의 유로비전 참가를 불편해한 핀란드, 스웨덴 등의 국가들과 개별 아티스트, 팬들이 이스라엘의 경연 참가 금지를 요구하고, 대회 보이콧을 논의하는 등 논란이 이어졌다. 다수의 음악업계 관계자와 언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경연에서 제외된 2022년의 상황을 비교하며 이스라엘의 참가 제외를 예상했으나 주최 측인 유럽방송연합은 유로비전은 가수들 간 경쟁이지, 국가 간 경쟁이 아니라며 골란의 출전을 허용했다. 일관성 없는 결정에 비판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이를 둘러싼 긴장 상태는 경연 당일까지 이어져 개최도시인 말뫼뿐 아니라 유럽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반이스라엘 시위가 벌어지는 등 불안이 고조되기도 했다. 특히 말뫼는 스웨덴에서 무슬림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인지라 지역 경찰당국은 경연 몇달 전부터 시위 및 충돌을 대비한 치안 강화에 나섰다. 이밖에도 경연을 앞두고 네덜란드 참가자가 스웨덴 제작진에 부적절한 행동을 하여 실격을 당하기도 했으며, 아일랜드 참가자는 팔레스타인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는 이유로 리허설 도중 이스라엘 해설자, 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고 밝혀 경연 전 혼란이 가중되었다.

 

논란 속에 펼쳐진 올해 유로비전의 우승자는 스위스의 논바이너리 가수, 니모(Nemo)에게 돌아갔다. 니모는 더 코드(The Code)라는 경연곡으로 자신의 비이분법적 성 정체성을 매력적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으며 유로비전 역사상 첫 논바이너리 우승자가 됐다. 한편 니모는 경연 이후 가진 인터뷰에서 스위스 법무부 장관을 만나 남성, 여성이 아닌 제3의 성에 대한 인정과 권리를 요구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동안 지나친 정치화를 경계해왔던 유로비전이지만 최근 들어 참가자들이 이와 같은 사회적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고 있어 경연의 의도가 퇴색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결국 올해 유로비전은 음악으로 하나 된’(United By Music)이라는 슬로건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긴장과 대중의 불만으로 인해 음악을 중심에 두지 못한 논란의 경연으로 남게 되었다. 우승자를 배출하여 내년 유로비전을 개최하게 될 스위스는 음악으로 세계 평화와 연대를 꿈꾸던 경연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내년에는 음악으로 하나 된 유로비전을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송지원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 경향 : 2024.05.28.

 

 

평등 구현을 위한 차별과 불평등

한국조세재정연구원(조세연)이 최근 현행 누진세 제도만으로는 양극화 해소에 한계가 있으니 11표 선거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젊은층 또는 저소득층에 더 많은 투표권을 주는 차등투표제를 제시했다. 가난한 사람과 미래 세대 등 사회적 소수에게 정책결정 권한을 더 주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시민 투표권은 프랑스의 1789년 헌법에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 결과로 만들어진 이 헌법의 참정권은 11표이기는 했지만 차등선거였다. 유권자를 25세 이상이면서 일정한 재산을 소유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이른바 능동 시민으로 제한했다.

 

이후 뉴질랜드가 1893년에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고, 영국과 미국은 각각 1918, 1920년 여성 참정권을 법으로 인정했다. 프랑스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헌법 제정 후 150여년이 지난 1944년이었다. 한국은 1948년 제헌 헌법에서 남녀의 평등한 참정권을 보장했는데, 실제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1952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부터였다.

 

현대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선거의 4대 원칙은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이다. 이 가운데 평등은 시민의 투표가치를 평등하게 취급해 모든 유권자가 11표의 투표권을 갖는다는 원칙이다.

 

투표권을 차등화하자는 움직임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은 남은 기대수명에 따라 표에 대한 권리를 차등하는 여명비례투표제가 합리적일 수 있다고 했다가 노인 폄훼와 차별이라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여명비례대표제와 달리 조세연의 차등투표제에 대해선 생각보다 큰 논란이 발생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는 발상이라며 노인들이 발끈하고 나설 만하다. 보수 성향의 언론사 기사에는 미친 소리” “좌파의 헛소리등 비난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다만 차등의 취지가 분배 정의 실현과 불평등 완화에 있다는 측면에서 고려해볼 만한 아이디어라는 반응이 나온다. 보고서를 작성한 이는 조세연에서 32년간 근무한 뒤 퇴직한 홍범교 명예선임연구위원이다. 국책연구기관 소속이라는 한계 탓에 재직 중 드러내지 못했던 소신을 마지막에 펼친 것 같다. 홍 연구위원은 고소득층으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거둬 취약계층을 지원해야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자 증세가 필요하다. 누진세제를 강화하거나 부유세, 횡재세 등을 신설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이 곧 권력인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취약계층 뜻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수인 젊은이와 저소득층에 더 많은 투표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홍 연구위원은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차등원칙을 빌려 사회구성원 가운데 어려운 사람에게 유리한 불평등이 바람직한 불평등이라고 소개한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는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실질적으로 평등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불평등의 대물림을 끊는 재분배 정책도 필요하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과도 싸워야 하며, 개인들의 다양성을 고려한 제도를 만드는 등 다른 조치들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조치차등투표제가 포함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견 조세연 보고서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차별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지하철의 노약자나 임산부 보호석, 노인이나 장애인에게 지급하는 연금 등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어려운 사람에게 유리한 선한 차별을 만들고 있다. 투표 차등제 발상도 사회적 소수에 유리한 차별의 일환이다. 차별 대신 우대라고 칭해도 좋다. 투표 차등제 구상은 평등을 향해 민주주의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마이너 필링스>는 이민자 2세대인 캐시 박홍 미국 UC버클리대 교수가 겪은 차별과 감정을 담아낸 자전적 에세이다. 박홍 교수는 책에서 우리가 살면서 겪는 구조적 차별은 그들이 착각하는 현실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감정은 과잉반응이라고 했다. 차별을 가하는 입장, 즉 다수자 또는 결정 위치에 있는 이들은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느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김 교수와 박홍 교수가 다음달 26일 열리는 <2024 경향포럼>에서 다양성이 민주주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눈다. 선한 차별과 다양성, 포용, 민주주의의 가치를 일깨울 두 사람의 만남을 기대한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경향 : 2024.05.28.

 

부동산 침체에 '흔들' 전세제도, 곡예 벌이는 이들에게 대안은?

<어쩌면, 사회 주택>을 읽고

연초부터 아파트 전세 가격이 급상승한다는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특히 총선 끝나고는 서울 아파트 전세가 몇 억 원씩 올랐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본다. 그러더니 요 며칠 새에 아파트 매매 가격이 드디어 반등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부동산 가격 동향에 목매달던 윤석열 정권과 여당은 총선 이후 죽을 맛이라는데, 부동산 시장은 오히려 때를 만난 것만 같다.

 

기이한 일이기는 하다.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예상치를 두 배나 웃돈다고 정부는 반색하지만, 그렇다고 경기 회복을 실감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인하한 것도 아니고, 미국 쪽에서 금리 인하 소식이 들리기 전에는 그럴 조짐도 없다. 그런데도 부동산 시장이 꿈틀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부동산 시장은 아무래도 고전 물리학 정도로는 설명 불가능한 양자 역학의 세계인가 보다.

 

이 모두가, 자기 집 없이 대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고난도의 곡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같은 이들에게는 씁쓸하기만 하다. 머릿속에 늘 가계부를 떠올리며 매일을 살아도 월세 임대료나 전세 보증금 상승을 따라잡기 벅찬 이들에게 한 평생이란 부동산 시장이라는 거대한 언덕에서 벌이는 시지포스의 노동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풍문에 따르면, 젊은 세대로 갈수록 이런 삶에 갇혀야 할 이들이 더욱 늘어만 갈 것이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커지는 것은 이 모든 시름에서 벗어날 도피의 꿈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10여 년 전이 떠오른다. 한창 집값이 다시 치솟아 오르던 그때 서점에서는 일본식 단독주택이나 땅콩집 짓기, 억 원에 내 집 짓기 같은 제목을 단 책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서서 그런 책에 실린 사진을 넋 놓고 봤던 기억이 있다. 거기에는, 대도시 아파트를 둘러싼 한국인의 온갖 악몽에서 홀연히 벗어난 것만 같은 삶이 있었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있던 형태의 집을 스스로 짓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쳇바퀴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른 방향과 내용을 담은 책을 손에 들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10여 년 전 눈길을 주었던 책들과 다르지 않다고 하겠으나, 이 책은 '도피'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현실에 관한 차분한 분석을 바탕으로, 많은 이들이 함께 시도해볼만한 구체적 제안을 내놓는 책이다. 오랫동안 주거 문제 해법을 고민해온 건축 전문가이자 주거'운동가' 최경호가 쓴 <어쩌면, 사회주택: 당신의 주거권은 안녕하십니까?>(자음과모음, 2024).

전세가 흔들리고 사라져가는 사회의 중요한 출구 - 사회주택

 

최경호는 네덜란드에서 사회주택의 이론과 실제를 공부했고, 정당과 사회운동, 지방자치단체를 넘나들며 사회주택을 중심에 둔 주거 문제 해결을 모색해왔다. <어쩌면, 사회주택>은 그 활동의 결실인데,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주택이 무엇인지부터 차근차근 쉽게 설명해주면서 꼬이고 꼬인 한국의 주거 문제를 풀 실마리가 사회주택에 있음을 역설한다.

 

그런데 '사회주택'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이라면, '민간주택'이나 '공공주택'이라는 말에는 익숙해도 '사회주택'은 낯설어 할 것이다. <어쩌면, 사회주택>은 이 말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가장 도식적인 설명은 우리 입에 붙은 '민간주택', '공공주택'과 대비해 정의 내리는 것이다. 민간주택이란 개인이 소유하고 시장에서 매매되는 주택이다. 반면 공공주택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투자하여 건설하고 소유 주체도 공공이며, 따라서 시장에서 상품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사회주택은 어쩌면 이 둘 사이 어딘가에 해당하는 주택 형태들을 아우르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시장 거래보다는 안정적 주거를 목적으로 개인이나 국가가 아니라 결사체(협동조합 등)나 사회적기업이 소유, 관리하는 주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일면적인 정의다. <어쩌면, 사회주택>은 한국에서도 2010년대부터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 사회주택 사례를 소개하면서 현실의 사회주택이 이런 단순한 정의가 연상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역동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가령 노후 지역 빈집이나 고시원을 사회적기업들이 리모델링하여 셰어하우스로 운영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매입하여 공공화한 주택을 위탁 받아 관리하는 사례가 있고, 협동조합이 공공으로부터 금융이나 토지를 지원받아(임대나 지분 공유) 아예 새 건물을 짓고 입주하는 사례도 있다.

 

이렇듯, '사회주택'이라고 하여 공공 당국이나 시장의 존재나 역할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나 시장과 구별되는 제3의 주체들, 즉 결사체나 사회적기업이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국가나 시장과 교차하며 다양한 실험을 전개한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부문, 공공부문, 시장부문의 협력을 전제로 '사회주택'을 다음 같이 새롭게 정의한다. "호혜성을 바탕으로 공공의 지원을 활용하여 주거 선택권을 확장하는 주택."(<어쩌면, 사회주택> 66)

 

여기에서 눈길이 가는 말은 무엇보다 "주거 선택권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서민들이 느끼는 주거 문제의 핵심은 주거 선택권이 '없다' 혹은 '좁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2019년 현재 58%인 자가 보유 가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민간주택을 전세로 임차하거나 월세 임차인이 돼 매달 임대료를 내야 한다(전체 가구의 34%). 민간임대주택의 대안이 되어야 할 공공임대주택은 물량이 한정돼 거주 가구가 8% 정도밖에 안 된다(2020년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 '자가', '(민간)전세', '(민간)월세', '공공임대', 이 네 범주가 한국에서 주거 선택지의 거의 전부다.

 

물론 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는 자가 소유일 것이다. 그러나 분주히 이동하는 현대인의 삶을 생각한다면, 자가를 보유하는 게 꼭 최적의 선택은 아니다. 게다가 최경호가 명쾌히 지적하듯이, 집은 애당초 '비싼' 물건이다. 부동산 가격은 유례없이 상승한 반면 소득은 정체, 하락하거나 불안정해진 신자유주의-이후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모름지기 살만한 사회라면, 이런 현실과 주거권 사이의 간극을 메울 다양한 대안을 구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껏 한국 사회에서는 그 대안이 민간 전세나 월세 그리고 빈약한 공공임대주택뿐이었다. 그나마도 전세는 1995년에 30%였던 비중이 2019년에 15%로 반 토막 났다(<어쩌면, 사회주택> 16). 그리고 그만큼 월세 비중이 늘어났다. 전세와 월세의 이런 교대가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아닌지에 관한 평가는 제쳐두더라도, 30여 년간 전세 물량과 가격이 끊임없이 요동치면서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집을 둘러싼 한국인의 고통과 긴장이 가중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사회주택>이 소개하는 사회주택의 현재진행형 실험들은 결코 겉만 번드르르한 유토피아적 사례로 다가오지 않는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덴마크처럼 한때 대도시 주거 문제로 고통 받던 땅 좁은 유럽 나라들이 사회주택 형태의 대안들로 우리가 성취하지 못한 주거 안정 수준을 달성했다 한들, 당장 우리 현실과 거리가 있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민간임대주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전세제도가 급격히 변화하는 와중에 있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격동하면서 사라져가는 전세의 몫을 대신할 새로운 주거 형태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어쩌면, 사회주택>'어쩌면'보다는 '확실히'라는 부사가 더 어울릴 힘찬 어조로, 사회주택이야말로 바로 그 답이라 제안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과거와 미래를 응축한 '전세''사회주택'

한데 내가 보기에 <어쩌면, 사회주택>은 단지 사회주택에 관한 훌륭한 입문서나 소개서만은 아니다. 저자는 사회주택이 필요한 한국 사회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제1"익숙하고도 낯선 주거 이야기"에서 전세제도 문제를 짚는다. 길지 않은 분량이고 간명한 문장인데도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한국만의 묘한 제도인 전세 임대를 참으로 쉽고도 탁월하게 정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세제도에 관한 이 책의 설명을 내 나름대로 요약하면, "집값이 계속 오르기만 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주택 수요자인 임차인이 조달해주는 자금을 바탕으로" "민간 임대인이 주택 공급에 따르는 리스크와 불로소득을 동시에 떠안는" 제도다. 이 문장만 봐도 이미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가령 "집값이 계속 오르기만 한다"는 것은 2008년 이후 세계 어느 곳에서든 의심 받는 명제이며, <어쩌면, 사회주택>이 지적하듯이 누구보다 전세 임차인 자신이 "집값이 계속 오르기만 하면" 고통 받을 당사자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모순을 실감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순 덩어리인 제도가 어쨌든 한 세대 넘게 유지되며 이 나라 주거제도의 기둥 노릇을 해왔다. 여기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비밀이라고나 할 중요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당대의 상위 중간계급일 전세 임대인과 바로 그 밑 계층일 전세 임차인이 대도시 주택 공급 문제를 나눠 짊어짐으로써 모종의 동맹(동시에 갈등) 관계를 구축하는 가운데, 무대 뒤로 숨어 버린 주체가 있다. 그것은 전세제도가 왕성한 활약을 펼치던 그 시기에 자본주의 발전을 채근하느라 여념이 없던 '국가'.

 

발전자본주의를 진두지휘하던 한국의 국가기구는 대도시 주택 공급이라는 성가신 난제를 전세제도를 통해 각 개인과 가구에 떠안긴 덕분에 다른 곳에 더 많은 자원과 역량을 쏟아 부을 수 있었다. 토지와 주거를 둘러싼 공공성(공개념)은 애당초 국가의 당연한 기능이라는 헌법상의 약속은 사문화됐고, 공공임대주택은 단지 특수한 집단만을 위해 최소한으로 공급하면 되는 물건으로 굳어졌다. 뒤늦게 전세보증금대출제도를 통해 공공이 전세제도에 개입했지만, 이는 전세 임대인의 투자(투기)를 도움으로써 임차인의 주거권을 실현한다는 전세제도의 모순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만 낳았다.

 

이런 양상은 비단 주거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영역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마침내 도달한 최종 지점이기도 하다. 국가는 끝없는 성장만이 답이라 부르짖으면서, 시민의 권리들을 보장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을 방기한다. 시민들은 온갖 부조리한 계약 관계를 통해 자기 권리를 알아서 챙겨야 하며, 오랫동안 이에 익숙해진 탓에 다른 대안이 있다는, 혹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낯설어 한다. 이런 국가와 시민 개인 사이에는 사실상 사회라는 매개 영역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각자도생의 싸움터일 뿐이다.

 

<어쩌면, 사회 주택>'사회'주택의 의미를 해명하고 설득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사회'를 실감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애써 '사회'주택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주택을 만들고, 주택이 사회를 만든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저자의 도저한 낙관주의에 가슴을 열게 된다. "에필로그"는 다음 같은, 단순하지만 인상적인 문구로 시작한다. "사회가 주택을 만들고, 주택이 사회를 만든다." '사회'를 실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회'주택을 설파하는 게 난제이기는 해도, 돌려 생각해보면 이런 동료시민들 사이에서 '사회'를 복구할 길은 다름 아닌 '사회'주택 같은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뿐이다. 사회주택을 짓고 나누고 가꾸는 과정에서 한국인은 개인이 아니라 결사체의 일원으로 국가나 시장과 관계 맺을 수 있음을 경험하고, 참여와 숙의, 협상과 합의라는 낯선 과정에 좀 더 익숙해질 것이다. 한 마디로, '사회'를 실감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사회주택>은 이런 과제를 단지 당위로만 제시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당면한 크나큰 위기, 즉 기후급변과 고령화나 감염병 빈발에 따른 돌봄위기에서, 사회주택에 대한 관심과 필요, 의지와 행동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기회와 가능성을 본다. 좁은 의미의 주거 문제, 아니 '부동산' 문제에만 시야를 좁히고 기존 가격과 물량의 숫자들 속에서만 헤맨다면, 이런 기회와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 시야를 주거 영역을 넘어 더 넓혀야만 비로소 주거 영역에 필요한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사회주택>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손에 들고 상쾌하게 완독할 수 있을 그 분량과 문장, 접근법의 미덕에 어울리지 않게, 어쩌면 상당히 무거운 답을 숨겨놓은 책일지 모르겠다. "사회 같은 것은 없다"던 마거릿 대처의 저 유명한 말에 대한 자신감 넘치는 답 말이다. 이 책을 읽은 이들에게 떠오를 그 답은, "그렇다면 사회는 '발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집을 지으며 사회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마치 사회를 다시 세우는 것처럼 집을 짓고, 그렇게 집을 짓듯이 사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4.05.28.

 

 

이미 도래한 디스토피아, 어떤 실천도 저 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진보정당의 총선 실패는 문제의 '원인'이 아닌 '결과'

앙드레 바쟁이나 마틴 스콜세지 같은 거장들은 영화가 현실을 재현하거나 반영한다고 말했지만, 2024년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오스카 와일드의 잠언을 더 많이 상기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예술을 모방한다."

 

워쇼스키 자매를 세계적인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린 SF영화 <매트릭스> 속 가상 현실에 갇혀 살아가는 인류는 끔찍하리만치 착취적인 진실을 외면하고 가상 현실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길 원한다. 가령 '네오''모피어스'를 배신하고 매트릭스의 관리자들에게 밀고한 '사이퍼'는 가짜 스테이크를 뜯어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무지야말로 축복이라고." 그러고 보니 한때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었다는 소설 <태백산맥> 속 반공주의자 염상구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어. 다 아는 게 무슨 소용이야?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면 그만이지." 어쩌면 우리는 부박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사이퍼나 염상구처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테리 길리엄이 연출한 고전 영화 <브라질>에서 주인공 샘 로리는 관료주의적이고 억압적인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종종 꿈과 환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꿈속에서 그는 용감하고 기백이 넘치는 전사이지만, 현실에서는 무의미한 서류 작업을 끝없이 반복하는 관료사회의 작은 부품일 뿐이다.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려 해도 이 비극적인 유비로 이뤄진 꿈-현실의 대립은 끝나지 않는다. 영국에서 제작된 SF시리즈 <블랙미러> 시즌1'핫 샷' 에피소드가 묘사한 미래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창문도 없는 방에 살면서 일상의 거의 모든 시간을 가상 현실에서 보낸다. 근미래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광고를 시청해야 하고, 광고를 피하려면 자전거 노동을 통해 번 돈을 써야 한다. 이 비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승리하는 것 뿐이지만, 권력자들은 이 시스템에 맞선 저항마저 콘텐츠로 활용한다. 마치 지독한 경쟁 사회에서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성행하고, 헐리우드에서 가장 빼어난 저항 서사를 지닌 영화 상품들이 수천억 달러 규모의 독과점적 블록버스터로 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 권력은 이미 이런 디스토피아적 풍경들을 모두 흡수하고 있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현대 사회를 포스트 포드주의적(post-fordist) 자본주의로 규정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지배하는 "종말론적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피셔는 정신질환과 관료주의가 그것의 문화적 증상이라고 보는데, 최근 들어 사회적 논란이 됐던 여러 쟁점들을 떠올려보면 실로 그렇다. 이 체제는 사람들을 정신질환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옥죄고, 우리가 맺는 관계맺음은 이것의 근본적인 원인이나 모순에 대해 성찰하기 어렵도록 파편화되어 있다.

 

왜 사람들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는가. 사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는 대한민국의 오명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1988년 이 나라의 자살률은 당시 OECD 평균의 절반 미만인 8.4%에 불과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의 점화와 함께 급증해 2003년부터는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체제에 기생하는 권력자들이나 엘리트들 모두가 높은 자살률을 걱정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만든 체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치적 부족주의에 매몰된 이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수구독재 때문'이라거나, '빨갱이 민주당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틀렸다. 두 세력이 표면적으로는 쟁투를 멈추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일관되게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전략 때문이다. 고의적으로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노조 없는 노동자들의 가입마저 어렵게 만드는데 어찌 일터의 경쟁과 억압이 심화되지 않고 견디겠는가. 공공성을 파괴하고 시장에 모든 걸 내맡기는 방향을 밀어붙이는데 어찌 재분배나 불평등 완화가 가능하겠는가. 이제는 노동조합마저 양당 체제에 종속되어가니 이 괴물같은 시스템을 단순히 도덕적인 대립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명력을 잃었다.

 

물론 신자유주의자들이라고 해서 A부터 Z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내전, 대중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피에르 소베트르, 오 게강 공저)의 저자들은 최근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등장을 통해 드러난 신자유주의의 변화를 '권위주의적 일탈'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새로운 전략은 두 가지 현상에 의존하는데, 하나는 그것이 다소 진보적인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와 반동적인 내셔널리즘 신자유주의로 나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두 가지 버전의 신자유주의가 상호간의 가치 전쟁 속에서 마치 "무한한 거울 반사처럼" 서로에게 시대적 악의 책임을 돌린다는 것이다. 윤석열만 몰아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IMF 외환위기 이래 노무현 정권 시기까지 10년 내내 노동자운동을 공격했고, 반대로 국민의힘은 반동적인 민족주의를 선동하며 사회를 분열시키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장화를 정당화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평범한 사람들의 편에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한데 지난 총선에서 확인했듯, 두 세력에 맞선 대안을 자처했던 진보정당들은 크게 후퇴했다. 정치평론가들이 말하는 총선 전략이나 정무 감각 등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따름이다. 요컨대 이는 지난 10여 년 간 지속된 위기가 반영된 결과이지, 단기간 누적된 사건들의 결과가 아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뀄고, 도중에 그것을 정정하려 한 시도는 계속해서 실패했다. 이는 시민사회운동이 공히 공유하는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 중요한 것은 비관에 빠지지 않고, 역사적 사회운동이 갖고 있는 누적된 모순을 혁신함으로써 대안을 재조직화에 하는 것에 있다.

 

물론 우리는 사회운동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자본주의의 무지막지한 능력을 간과해선 안 된다. <블랙미러> '핫 샷' 에피소드가 묘사한 디스토피아가 체제에 맞선 저항마저 콘텐츠화하는 것처럼, 이 체제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의 주체성마저 함락하고 있다. 그 누구도 자본주의 이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기후위기를 우려하고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일부 진보주의자들조차 시장주의적인 탄소배출권 거래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하듯이 말이다.

 

몇몇 엘리트들의 선각자적 결단 따위로 체제를 넘어선 길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고한 것처럼 보이는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것은 결국 그것에 맞선 집단적인 도전이 선명하게 가시화되고 연쇄적인 사건으로 이어질 때이다. 따라서 더 나쁜 신자유주의와 덜 나쁜 신자유주의 대립에 함몰되지 않는 세번째 항을 가시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상정하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 급진적 상상력을 활성화시키는 것에 있다. 지금의 위기는 섣부르게 정당을 다시 만든다거나, 훈고학적인 구좌파 교리에 충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이 문제여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 지금, 신자유주의 국가의 지배에 맞서 공통의 것을 수호하고 강화하려는 개인들과 움직임들은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기 위해 시야를 울타리 밖으로 확장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의지만으로 되지 않으며, '우리 조직', '우리 노조', '우리 공동체'를 그렇게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의식적이고 상시적으로 위치시켜야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진보적인 군소정당과 사회단체, 노동조합, 협동조합, 주민모임, 진보적 북클럽, 자조회 등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 조심스럽지만 너무 늦지 않게 광범위한 연합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에 귀를 기울이기를 희망한다. 지난 323일 열린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는 지금부터 이런 노력이 필요하고 기꺼이 귀 기울일만 하다고 여기는 적지 않은 이들이 주목한 토론과 외침의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사회운동들이 가로지르는 접점을 넓히며 관계가 단단해지는 과정을 만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맞춰가며 체제전환의 전망을 구체화하며, 체제전환운동의 전략과 방향을 함께 모색하자고 결의했다. , 구체적으로 지역과 현장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물론 과제도 산적하다. 향후 연합체를 어떻게 만들지, 그 성격은 무엇이고 구성원리는 뭐고 진보정당들과 어떻게 관계맺을지 등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과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너무 무거운 과제이기에 머뭇거릴 수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이 너무 시시하게 여겨져 발을 담그지 않을 수 있다. 그만큼 고립분산의 시간이 길었고, 각 운동이나 단체들은 자신과는 다른 운동들의 처지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런 상태가 저절로 해소되기만을 기다려서는 영원히 어떤 연합된 힘도 구축할 수 없고,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갈등들을 가로지르는 계급투쟁을 접합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 없이는 새로운 주체를 모아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어떤 운동도 저 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옥죄는 이 시스템은 결코 어느 하루 갑작스레 폭발하는 봉기로 무너지지도, 다른 아름다운 무엇으로 대체되지도 않는다. 오직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배 시스템에 맞서 집단적으로 실천하고 자신의 대안을 실험해 나갈 때에만 다른 세계로 대체될 수 있다. 그것은 개별화되고 분리된 운동들이나 개인들의 독자적인 실천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브라질>의 관료주의 체제나 <블랙미러>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맞선 개별적 저항이 쉽사리 체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대안은 체제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전략을 통해 공동으로 구상해야 하고, 시민불복종은 동시다발적인 연합으로 이뤄져야 한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 프레시안 2024.05.28.

 

 

잠적 153일만에 등장한 김건희,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통째로 날아간 이유는?

지난 3일 금요일 이원석 검찰총장은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 의혹 관련하여 전담 수사팀 구성을 지시했다. 그러자 7일 화요일 대통령실은 민정수석실을 부활하고 이 자리에 김주현 전 법무부 차관을 앉힌다. 13일 월요일 법무부는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 의혹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장과 수사 실무를 지휘하는 1~4차장검사를 전원 교체했다. 13일은 김 여사에게 명품가방을 건넨 최재영 목사가 중앙지검에서 첫 조사를 받은 날이기도 하다.

 

검찰이 정리(?)되자 김건희 여사가 등장한다. 사흘 뒤인 16일 대통령실은 한-캄보디아 정상 부부 오찬에 참석한 사진을 공개했다. 작년 12월 명품 가방 수수 논란이 불거지자 잠적(?)한지 153일 만이다. 사흘 뒤 19일엔 불교계 사리 반환 행사에 윤 대통령과 함께 169일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틀 뒤 21일엔 첫 단독 일정으로 우크라이나 아동미술 전시행사에 참석했다.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통째로 날아간 이유는?

많은 이들은 김건희 여사 관련 수사 지휘부가 전격 교체되자 김 여사가 등장했다고 한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김 여사의 등장을 위해 서울중앙지검 지휘부를 교체한 것 아닌가?

 

국가의 주요 권력기관인 검찰의 인사는 주말도 없이, 긴박하게, 전격적으로 군사작전 하듯 이루어졌다. 김 여사 명품가방 수수 의혹 수사에 착수한 지 열흘 만에, 또 민정수석실 부활 6일 만에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몽땅 잘려 나갔고 검찰총장의 참모들도 교체됐다. 송경호 지검장은 원래 '라인'으로 알려졌지만 '여사님'을 중심에 놓고 보면 네 편, 내 편도 새로 짜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최우선 과제는 '김건희 지키기'라는 이야기가 헛말이 아닌 듯 싶다.

 

지금 정치는 특검 정국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국회 본회의에서 채상병 특검법 재표결을 앞두고 여당인 국민의힘 지도부는 이탈표를 막기 위해 '올코트프레싱'에 나섰다. 이미 네 명의 소속 의원이 찬성 의사를 공개한 상황에서 이변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채상병 특검 저지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바로 뒤에 김건희 여사 특검이 대기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은 김건희 특검을 총선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한 갈등의 이유는?

윤 대통령에게 특검 저지가 '급한 불'이라면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골치 아픈 불'이다.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출마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후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서로 건너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간 상태다. ? 자기가 비대위원장에 앉혀줬는데 비대위원장으로서 자신의 아내를 보호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동훈 당대표'가 현실이 되면 레임덕이 가속화될 거라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동훈도 옛날 한동훈이 아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추미애 장관에게 들이받았듯 한동훈도 "나는 당신의 부하가 아니다"라며 맞먹으려 할 것이다. 윤석열의 과거는 곧 한동훈의 미래다.

 

제 기능 못하는 검찰과 집권 여당

이원석 검찰총장이 지난해 양평 공흥지구 개발 의혹 사건으로 대통령의 처남을 검찰에 송치하고 올 초 김건희 여사에 대한 소환조사 필요성을 대통령실에 전달해 못마땅하던 차 명품 가방 수사에 들어가자 지체 없이 진압에 나섰다. 인사는 메시지다. 국가기관이 '여사님' 때문에 홍역을 치르고 해야 할 수사를 하지 못할 지경에 처했다.

 

집권 여당은 국정을 논하기도 바쁜 와중에 '여사님' 눈치 보며 '김건희 수호'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경제도 민생도 엉망인 지금 지난 정부 대통령 배우자의 해외 방문을 가지고 특검을 하자며 물타기 나서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여사님' 문제를 가지고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 격인 사람이 갈등을 빚고 너 나가라, 나 못 나간다 공방을 벌이고 결국 사이가 틀어지는 모습을 온 국민이 계속 지켜봐야 하나. 국민 눈치는 안중에 없는 듯하다.

 

2부속실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은 '2부속실 폐지'를 공약했지만 국민의힘 내부는 물론 민주당도 대통령실에 제2부속실 설치를 권했다. 아마도 21대 국회에서 보기 힘든 양당 의견 일치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2부속실을 만들지 않는다. 빗발치는 여론에도 꿈쩍 않더니 오히려 '김건희 여사 방탄용'이라 의심받는 민정수석실을 부활시켰다. 2부속실에 무슨 악귀신이라도 씌였는가. 도대체 왜 안 만드는 것일까.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이전한 후 2층과 5층의 집무실을 부부가 함께 사용한다는 대통령실 발표가 있었는데 이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제2부속실을 만들지 않고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니 한편 이해가 간다. 대통령실 전체를 쓰겠다는 의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대통령 취임 초기 만5세 입학 논란부터 잼보리, 부산엑스포를 거쳐 최근의 대파, 직구, 연금 논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실은 관리능력, 판단력은 고사하고 정보력마저 의심케 한다. 역대 최약체 비서실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집권 여당은 지난 총선에서 또다시 참패했다. 레임덕은 국민의힘 내부에서 시작될 거라는 예상이 많다.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검찰은 권력자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국정 난맥의 한 가운데 여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 그가 다시 공개 행보에 나섰고. 정말 묻고 싶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정희준 문화연대 집행위원 | 프레시안 2024.05.28

 

신경림의 당부

 

문단의 원로 신경림 시인이 지난 22일 오전 817분쯤 별세했다. 그는 농무’ ‘파장’ ‘가난한 사랑노래등 민중의 애환과 고단한 시대를 담은 수많은 시를 통해 한국 대표시인으로 평가 받았다 . 연합뉴스

 

격변기 세계사의 위대한 정치인 중엔 시인들이 많다. 유럽의 대혁명기, 중남미의 반독재 저항사엔 파블로 네루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체 게바라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불의·부조리에 누구보다 예리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가 시인이다. 시와 정치가 가까웠던 것엔 언어로 시대정신을 만들었던 유사성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최초의 예언자, 공적 발화자로 불렸다. 차이가 있다면 시는 인간의 내면을, 정치는 공동체의 내면을 향한다는 점이다. 광주정신이 지배하던 우리의 1980년대도 시의 시대였다. 김남주, 김지하, 박노해, 백무산 등이 기수였다. 이들은 군사독재의 질곡 최전선에서 자유, 민주주의, 노동해방의 깃발을 들고 영혼이 아픈 이들을 어루만졌다. 당시 국문학과 출신의 학생운동 리더들이 많았던 것도 당대의 사회적 요구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지닌”(마야콥스키) 시의 과업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니 시인을 어찌 정치인, 전사가 아니라 할 수 있으랴.

 

시인 신경림도 전사였다. 그러나 그는 전투적이어야만 시의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1990년대 말 신경림 선생이 쓴 <시인을 찾아서>를 도왔던 귀한 경험이 있다. <시인을 찾아서>45명의 한국 대표 시인들의 흔적을 기록한, 시의 경관(景觀)에 가까운 책이다. 작고 시인 22명을 소개한 1권 마무리 작업에 바빴던 어느 날, 그는 들뜬 목소리로 백석 이야기를 꺼냈다. 서도 사투리로 장날 풍경을 그린 주막을 가리키며 백석은 내 시의 스승이라고 했다. 토속적 언어로 삶에 뿌리를 내린 시, 민중이라는 레토릭을 직접 그들의 육성으로 들려주는 시. 그의 시 정신은 이런 것이란 고백이었다. ‘농무’ ‘장터’ ‘길음시장’ ‘목계장터시 곳곳에 이런 정신이 배어 있다. 그가 호명한 민중은 사납지도 않았고 이데올로기라는 갑옷도 필요 없었다. 착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으면서 시대의 그늘을 묵묵히 견뎌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는 이 한 구절로 민중과 민중시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시의 정신이고 그 정신이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걸음이 되어야 한단 것. 이것이 혁명(전사)에 대한 그의 동료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시인 신경림의 소명은 민중을 호명하고 들여다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군사독재는 민중이 행복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민중의 삶을 더 낫게 하는 것이 민중시라 했던 그에게 시란 독재와 싸우는 무기였다. 무기가 필요한 역사의 현장을 그는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2009년 시인 김근은 그와 제주 강정마을을 찾았다. 구럼비 해안가에 핀 돌찔레를 안쓰럽게 보던 그의 모습을 후배 시인은 아직도 기억한다. 제주의 평화는 다른 곳에서 그것이 지닌 무게와 같지 않음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가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하는 부모를 낯설게 보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할아버지가 위로하듯 너희들의 부모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대를 고민하는 게 시의 정신이고, 그 정신이 더 좋은 공동체의 배후여야 한다는 것. 정치()에 대한 그의 동반자 의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인 신경림이 지난 22일 세상을 떠났다. 허망한 마음을 가눌 새도 없이 그의 죽음을 통해 시가 죽은 시대를 목도해야 하는 현실이 버겁기만 하다. 정치가 역사의 한 부분이고 그래서 정치인에겐 역사인식이 중요하다는 걸 안다면 앞선 이들의 헌신과 희생은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그저 눈앞의 권력투쟁이 정치의 전부라면 누군가 헌신하고 희생했던 역사는 정치와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시와 정치가 세상의 변화를 위해 함께 싸울 때 시인 신경림이 정치에 건넨 용기는 얼마나 고귀한 것이었나.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그의 죽음에 애도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여권의 이런 태도는 그와 그의 시가 위로했던 지난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가난한 사랑노래는 지독한 가난에 사랑마저 등져야 했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한 시다. 불우한 시대에 제자리를 찾지 못한 건 사랑만이 아니었다. 두려움, 외로움, 그리움도 있었다. 인간의 심연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인간의 심연을 이해하는 정치인이 많아져야 한다고 했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채 상병 특검법은 인간의 심연을 헤아려야 하는 정치의 기본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28일 대통령의 거부권에 국민의힘이 힘자랑으로 동조하면서 끝내 부결됐다. 사람을 놓아버린 정치는 그 자체로 자격 상실이다.

 

그래도 그는 시와 정치가 한길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지 모르겠다. 가끔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면서도 저 세상에 가서도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떠도는 자의 노래’) 했던 것처럼 지금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만 같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운세상에서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구혜영 정치부문장 경향 : 2024.05.29.

 

고층 경쟁어쩌다 게임이 됐나

1970년 주변 건물보다도 3배나 높았던 31빌딩이 완공됐을 때 국가 차원의 축제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198563빌딩이 여의도에 세워지자 한강에 터졌던 불꽃놀이는 많은 이가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2016년 잠실에 123층 롯데월드타워가 준공됐을 때, 레이저 불꽃쇼를 보면서 많은 한국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 우리도 이제 선진국이 됐구나.” 이렇게 고층빌딩은 알게 모르게 번영, 성취 같은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뉴욕 맨해튼의 야경은 지금도 많은 이에게 환상을 준다. 그런데 이런 질문 자체가 낯설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걸까?

17~18세기 유럽에서 건너온 아메리카 이주자들은 본국에 대한 문화적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유럽은 왕과 교회만이 높은 건물을 지어왔고 그것은 곧 권력의 동의어였다. 그런데 19세기가 되자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수천년 돌과 벽돌로 쌓아올리던 서구의 건설 방식이 콘크리트와 철골로 건물을 조립하는 식으로 바뀐 것이다. 풍요로운 유산을 지닌 유럽이 이 신기술을 간과하는 사이, 과거 역사의 무게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왔던 신대륙 이민자들은 건물을 쉽게, 높이 지을 수 있는 새로운 방식에 열광한다. 그동안의 자격지심을 일거에 반전시킬 기회라 여긴 것이다. 이 욕망과 기술이 만나면서, 인류 최초의 고층현대도시 맨해튼이 탄생한다.

 

189010층 정도였던 건물 높이가 경쟁이 본격화되자 191050층으로 급격히 늘어나더니 1931년 드디어 100층 고지에 다다른다. 세계 최고층이라는 기술적 패권자의 명예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아르데코 양식을 외관에 입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이때 세워진다.

 

대부분의 문서들은 이 짧은 기간에 올린 건물 높이를 인류가 중력과 기술의 한계를 극복한 승리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경쟁이 편법과 선동으로 가득한 비열한 역사이기도 했다는 점을 처음 밝힌 것은 1978년에 와서였다.(‘정신착란증의 뉴욕’, 램쿨하스) 경쟁 건물보다 얼마라도 높이기 위해 사람 못 사는 첨탑이나 송신탑을 올려 높이에 더하기도 했고, 건설 중인 다른 타워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설계 변경을 해 조금 더 높게 완공하는 눈치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뉴욕의 건축가와 개발업자는 도시의 적정한 밀도나 지속 가능한 규모 같은 문제는 침묵한 채, 시민의 집합적 욕망을 부채질하는 이론과 전략을 제공해 일거리를 보장받았고, 마천루들끼리 강박적인 경쟁에 매몰되도록 갖가지 유인 요소들을 개발하여, 투자자와 대중을 높이 경쟁에 몰두한, 이른바 미인대회의 심사위원과 관중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고층건물비교표의 실체는, 바로 건물끼리 높이 경쟁을 부추기고, 시민을 게임에 몰두하는 관객으로 유인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고안해 낸 업계의 상업전략이었다.

 

맨해튼식 게임의 틀은 이런 식으로 설정되었고, 몇십년 후 아시아인과 아랍인을 게임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고향 유럽에 대한 미국인의 열등감이 높이로 만회하려는 내적 동기로 작동한 것처럼, 세계 최부국의 상징인 맨해튼보다 더 높은 마천루 도시를 짓는 것이 발전의 유일한 규칙이라 믿은 아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은 푸동과 두바이에 고층건물을 경쟁하듯 올리는 중이다. 지금도 대만에서, 사우디에서, 싱가포르에서 몇층짜리 빌딩이 준공되었다는 소식이 매일매일 들려온다. 대한민국의 청라와 용산이 그렇게 끼고자 하는 게임의 규칙은 그렇게 설정되었다.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한겨레 : 2024.05.29.

 

 

 

마동석·탕웨이 머쓱하게 만든 윤석열 정부

중독성 있다.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실물은 허망하기 일쑤다.

 

100원짜리 단추부터 32만원짜리 자전거 카본휠까지. 한번 빠지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또 하나의 대륙의 실수인가. 알리익스프레스 쇼핑 얘기다. 사실 알리 제품을 받아보면 화학약품 냄새 진동하는 것들도 왕왕 있다. 보다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 다만 애초 ‘KC인증 전 해외직구 금지방침은 현실을 도외시한 무리수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려던 윤석열 정부다. 아마추어같이 왜 그랬을까.

 

사실 이번 소동 전부터 정부는 중국 e커머스 플랫폼 단속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다. 국내 유통업체 보호 의도가 엿보인다. 글로벌 개방경제 시대라지만 보호무역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흔히 달달한 것만 삼키고, 쓴 건 뱉어버릴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보호무역의 열매는 당장 달지만, 더 큰 실익을 잃어버리곤 한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미·중 무역분쟁으로 세계 국내총생산(GDP)7%가 증발했다고 진단했다. 대체 누굴 위한 무역갈등인지, 누구의 파이가 줄어드는지 잘 따져봐야 한다. ‘천조국미국은 초호황을 누리며 세상의 돈을 다 빨아들인다. 그 결과는? 우리 서민들의 얇아진 지갑이다. 마냥 아메리칸 파이불러줄 때가 아니다.

 

중국의 수입에서 한국 비중이 2016년까지 10%를 넘었다가 최근 6%대로 추락했다. 마침내 지난해에는 대중 무역수지가 수교 후 31년 만에 처음으로 175억달러 적자를 내고 말았다. 반면 20년 만에 대미 수출이 대중 수출을 넘었다. 지난해 우리에게 미국은 445억달러의 최대 흑자 대상국이 됐다. , 그럼 이제 탈중입미(脫中入美)’만 하면 우리네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맨큐의 경제학> 저자 그레고리 맨큐 미 하버드대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를 이렇게 비판했다. “무역을 통해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이론까지 증명됐다. 개방경제는 폐쇄경제보다 더 빨리 성장한다.” 이는 미·중 분쟁의 올가미에 갇힌 세상이 허덕대는 꼴만 봐도 쉽게 납득되는 명제다. 멀리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까지 불러오지 않더라도.

 

중국과의 갈등은 조 바이든 정부에서 점입가경이다. 그에 발 맞춘 윤석열 정부는 아예 탈중국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고 사수대를 자처해왔다. 미국이 짜놓은 판도대로 정말 세상이 나누어질까. 그러나 2의 냉전이니 하는 말 자체가 정치용 허상이다.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시진핑을 초청해 융숭하게 대접했다. ‘바이든의 푸들이 돼선 별로 이문이 남는 게 없어서다.

 

윤석열 정부의 알리, 테무 옥죄기는 섣부른 보호무역주의에 바탕을 둔 것일 공산이 농후하다. 중국 e커머스 플랫폼의 공세는 신세계나 쿠팡 등 국내 업계를 생각하면 썩 달가울 리 없다. 그러나 개방경제 아래 호미로 막을 수 있는 물길이 아니다. 가뜩이나 고물가 시대에 서민들이 저렴한 물품을 구할 수 있는 선택권을 억지로 막는 셈이다. 정부는 알리보다는 정작 보호주의화하고 있는 ‘RE’에나 신경 써라. 주요 기업들은 RE100(재생에너지 100%)을 못 지켜 해외에 납품을 제한당하거나 추가 비용을 낼 판이다.

 

지금 경제에 큰 숙제가 안으론 내수 회복이며, 밖으론 중국과의 관계다. 윤 대통령은 입만 열면 경제를 중시한답시고 말하지만, 기업들에 가장 시급한 건 대중관계 회복이다. 기업 총수들을 떼로 몰고 다니며 떡볶이, 폭탄주 먹인다고 경제가 나아질 리 없다.

 

고래로 한반도의 혼돈기에는 이쪽저쪽 눈치껏 외줄타기, 이른바 균형외교를 해야 했다. 윤 대통령은 얼른 시진핑 주석을 초청하거나 방중해서 만나야 할 때다. 안미경중(安美經中)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과 최소한 경제적으론 확고히 관계를 붙들어매야 한다. 미국에 끌려가며 대중 견제에만 올인하다가는 자칫 닭 쫓다가 지붕만 쳐다보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바닥난 요소수를 바이든은 단 1도 채워주지 않는다.

 

·중 갈등 와중에 정작 웃는 이가 일본이다. 우리가 장기판에 말로 끌려다니는 건 아닌지 냉정히 보자. 다시 균형을 잡든가, 안 되면 마부라도 갈아치우든가 해야 할 판이다.

 

해외직구 규제 소동으로 정부가 확실히 한 역할은 있다. 일반인은 있는 줄도 몰랐던 알리, 테무를 대대적으로 홍보해줬다는 사실이다. 배우 마동석과 탕웨이를 굳이 광고모델로 안 써도 될 뻔했다. 당국의 뻘짓탓에 국내 업체들 피해만 커지게 생겼다, 마침내.

전병역 경제에디터 경향 : 2024.05.30.

 

 

헌법을 지키겠다는 대통령과 검사들

채 상병 특검법을 거부한 까닭은 놀랍게도 헌법 수호였다.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도 재의결을 부결시킨 국민의힘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 정권의 세 가지 축, 대통령과 여당, 그리고 검찰은 매번 헌법과 법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헌법과 법률마저 지키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구체적인 사안을 따져보자.

 

검찰이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를 검찰청에 불러 향응을 받게 하고, 진술 회유를 했다는 의혹에 대해 법무부와 검찰은 손사래를 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번 내가 이 지면(53일자)에 쓴 칼럼 형사사법체제 붕괴시키는 검찰을 두고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법무부는 담배·술 등 금지된 물품의 제공을 금지하는 수용 관리 및 계호업무 지침도 철저히 준수되고 있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구속되면 감옥에 갇혔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자유를 제한당한다. 전화 통화, 문자 전송부터 술, 담배 등 기호를 충족하는 모든 걸 차단당한다. 그저 좁은 감방에서 세 끼 밥을 먹으며 지내는 게 전부다. 그러니 사회에서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구금시설 수용자에게는 엄청난 특혜가 되기도 한다. , 담배, 연어회, 탕수육 같은 음식이 그렇고, 전화 통화가 그렇다. 그래서 검찰청에서의 조사는 구속피의자를 회유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 되기도 한다.

 

법무부가 구속피의자에 대한 수용관리지침을 철저하게 준수한다니 반갑기는 하지만, 이번 사태의 핵심, 곧 구속피의자를 검찰청에 불러 조사하는 행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찰관이 구금시설을 방문해 조사하는 것과 달리 검사는 자기 사무실로 구속피의자를 부른다. 오래된, 그리고 못된 관행이다. 법무부 교정본부 직원에게는 아주 부담스러운 멍에다. 검사가 부르면 언제라도 구속피의자를 보내줘야 하는데, 구금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다시 데려올 때까지 적지 않은 계호인력을 배치하고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야 한다. 게다가 검찰 조사는 미리 약속한 시간 같은 것도 없다. 조사가 늦은 밤에 끝날지, 아니면 밤샘을 할지도 모른다. 검찰청으로 계호를 나갔던 교도관들은 퇴근도 못하고 공적 역할과 사생활 모두를 포기하고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 오직 검사의 편의만을 위한 고역이다.

 

검사가 구속피의자를 불러 조사하는 것은 헌법 제12조의 영장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반헌법 행위다. 누군가를 구속하려면 반드시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 필요하다. 영장엔 구속 이유, 일시, 구속 장소를 적어 구속하려는 사람과 그 가족에게 알려줘야 한다. 영장엔 영장을 청구한 검사 이름, 영장을 발부한 법관 이름도 적는다. 책임을 분명히 하자는 거다. 구금 장소는 대개 경찰서 유치장이나 서울구치소 등의 구금시설이 되는데, 영장에 굳이 구금 장소를 적어두는 까닭은 단순하다. 그곳에만 가두라는 거다. 검사가 조사를 위해 구금장소 아닌 곳으로 구속피의자를 부르는 것은 영장주의 원칙을 위반하는 위법부당한 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범죄, 곧 직권남용죄다. 형법 제123조에 따르면, 직권남용죄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나쁜 범죄다. 다만 형법 제126조의 피의사실공표죄처럼 검사의 범죄를 실제로 처벌하는 사례가 없을 뿐이다.

 

경찰은 구속피의자를 조사하기 위해 구금시설을 방문한다. 특별한 사정 때문에 경찰서로 부를 일이 있다면, 별도의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이를 집행한다. 이렇게 경찰은 헌법상 영장주의 원칙을 준수하지만, 검찰은 영장주의 원칙을 외면하고 있다. 만약 법무부에서 뭔가 반박하고 싶다면, 엉뚱한 변죽만 울리지 말고, 바로 이 대목에 대해 집중하기 바란다. 검사는 헌법과 법률 위에서 군림하듯 자기 편의만 챙겨도 된다는 건지, 구속피의자가 당하는 고통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지 따져주기 바란다. 구속피의자가 검찰청에 불려가기 위해 구금시설을 오가려면 반복적으로 몸수색을 당하고 운동시간이나 가족, 변호사와의 접견도 금지당한다. 이래도 되는지, 검사를 위해서라면 교도관의 번잡한 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살펴보길 바란다.

 

검사와 검사 출신 대통령이 헌법을 파괴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해병대원의 죽음을 두고 외압을 넣어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는 의혹도 그렇다. 대통령이 범죄를 의심받는 상황인데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특검을 막아버렸다. 편법과 불법에 익숙해진 사람들일수록 큰 목소리로 법치주의를 외치고 있다. 더는 그냥 봐주기 어렵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경향 : 2024.05.30.

 

 

오래된 미래를 가져올 마법 같은 연대를 기대하며

정말 사람을 죽일 작정입니까?” 우리는 목이 터져라 경찰과 행정대집행을 나온 공무원들에게 외쳤다. 농성장에 있던 사람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쇠사슬을 건 목에 직접 절단기를 들이대고 막무가내 가위와 칼로 천막을 뜯어냈다. “밀양할매라 불리던 60대의 밀양 주민들은 목에 끈을 매고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결사 항전했으나 많은 인원과 장비로 무장한 국가의 물리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모습은 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2014년 당시 나는 인권침해감시단으로 일상적인 통행 방해와 감시, 신체의 자유 침해, 공동체 파괴 등을 감시하러 밀양에 갔지만 매번 법과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는 공권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뿐이었다. 국가폭력을 인권 규범으로 지적하는 것에 머물 뿐이었다. 그 잔인성을 사회에 증언할 뿐이어서 무력했다.

 

또한 우리는 밀양주민들이 맨몸으로 문명과 국가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의 어둠을 밀어내는 저항자였는지를 본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밀양주민들을 단순히 피해자나 전사로만 납작하게 보는 것이 아쉬워서 밀양 주민들을 만나 기록하기도 했다.

 

싸움을 막는 전경들에게조차 먹을 것을 건네는 온기, 새벽에 한국전력 직원들을 피해 익숙한 산길을 걸어 농성하러 산을 타는 마음, 경찰과 한전 직원과 한바탕 싸우고 난 후 힘들어도 나눠 먹을 음식을 준비하며 잔치하는 이유를 더듬어보았다. 넓고 든든한 땅 같은 모습이 화악산 자락에서 길고 긴 세월을 나며 만들어진 것임을, 그래서 물러날 수 없는 다양한 생애 맥락을 듣고 기록했다.

 

생각해보면 어쩌면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먼저 온 미래의 저항자였는지 모른다. 지금은 보수언론조차 기후위기를 말하는 시대에, 기후위기에 대처할 방법을 말하고 보여줬기 때문이다. 타임슬립 드라마처럼, 밀양 투쟁은 질문으로 안내했다. 왜 그 많은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 왜 피해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도시와 공단이 아니라 시골이어야 하는지, 왜 평생을 농사지으며 몸뚱이로 일군 삶과 삶터가 망가져야 하는지 물었다.

 

그리고 밀양에 다녀왔던 사람들은 조금씩 변했다. 집을 나올 땐 전기 코드를 뽑았고, 화려하게 켜진 한밤중의 도시의 불빛을 부끄러워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로봇처럼 산 위를 점거한 송전탑을 마주할 때면,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떠올렸다. 고압송전탑을 만드는 핵발전소가 사람들과 마을공동체를 깨뜨리며 지구의 절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사유하게 됐으며, 에너지 생산과 소비가 정의롭게 바뀌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송전탑은 건설됐어도 내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주민들은 농성장이 철거된 후에도 싸움을 끝내지 않는 것으로 보여줬다. 신고리 원전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마을 위로, 주민들의 삶 위로 흐르며, 마을 사람들을 가르고 고립시켰지만, 주민들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밀양주민들은 포기할 수 없지예. 우리 싸움이 끝은 아닐 테니까라고 했던 말처럼 밀양송전탑이 핵에너지 욕망의 끝이 아니므로, 아직도 143가구는 보상 합의를 거부하고 매년 투쟁의 의미를 되새기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밀양 주민들이 여전히 탈핵탈송전탑운동의 동그란 언덕으로 남아 있은 지 올해로 10,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핵발전을 더 부흥시키려 하고 있다. 올해부터 시작되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핵발전소 2~4기를 추가 건설하고 노후 핵발전소 수명 연장하겠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러면 또 고압송전탑이 만들어질 것이고, 근처 마을주민들의 삶을 망가뜨릴 것이다. 무지막지한 국가폭력이 주민들의 삶을 물어뜯고 할퀴는 소리가, 신음이 들릴 것이다.

 

그래서 밀양 행정대집행 10년을 앞두고 68일 전국에서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으로 모이기로 했다. 사람들이 밀양에 와서 고맙다고, 이어지는 싸움에 함께하겠다고 다짐과 고마움의 말을 건네면 좋겠다. 못 오는 사람들은 후원으로 마음을 건네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의 연대는 마법처럼 오래된 미래를 가져오지 않을까? 핵에 의존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바람과 태양으로 만드는 오래된 미래에너지로 당겨올 것이다. 마법처럼 10년 전 그날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흘린 눈물이 우애와 존경의 흔적으로 메워질 것이다. 무엇보다 화악산에 있는 765kV 송전탑도 뽑히는 미래가 당겨지지 않을까? 10년 전 어둠이 밀려나던 새벽까지 손을 잡았던 것처럼 손을 잡는다면 마법 같은 일이 시작될 것이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경향 : 2024.05.30.

 

 

동아시아, 탈자본주의 대안은 어디에?

516일과 17, 진주 경상국립대에서 국제학술행사가 열렸다. 정확한 제목은 동아시아에서의 포스트자본주의적 대안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다. 2001년부터 총 20차례 국제회의와 연구팀을 이끈 정성진 교수는 인사말에서 일본, 한국, 중국 등 아시아 나라들이 20세기 경제 개발의 선도 모델이기도 했지만,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의 복합 위기에선 오히려 약한 고리내지 진원지가 됐기에, 향후 마르크스주의 관점이나 학제적 방법론을 통해 21세기 동아시아를 위한 포스트자본주의적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행사엔 한··일은 물론, 인도, 독일, 노르웨이 등 6개국 학자 35명이 발표와 토론에 적극 참여했다. 모든 내용을 다 소개할 순 없어, 사회적 토론이 꼭 필요한 몇가지만 본다.

 

첫째, 행사 제목이기도 한 포스트자본주의적 대안에 대해서다. 흔히 학술 용어에서 포스트후기라는 뜻이 있다. 일례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결합을 통해 자본 축적을 해온 포디즘에 대비, 다품종 소량생산과 소비의 다양화를 유연하게 결합한 축적 양식을 포스트포디즘이라 한다. 그런데 포스트자본주의적 대안에서 포스트는 단지 후기가 아닌, ‘탈피내지 지양의 의미를 띤다. 차라리 탈자본주의 대안이 나았을 뻔했다. 왜냐면, 현재 우리가 직면한 복합 위기(경제, 정치, 금융, 사회, 심리, 교육, 문화, 기후, 생태, 평화 등)의 근저엔 자본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 놓고 돈(이윤) 먹는시스템이다. 더 큰 가치를 얻고자 경쟁한다. 그래서 자연을 자원화, 인간(노동력)을 상품화한다. 인간 노동은 한편으로 원료나 기계 속 가치를 상품에 이전하며, 다른 편으로 자기 노동력 이상의 가치를 상품에 구현한다. 가치와 비가치는 함께자본주의를 구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잉여가치를 만드는 노동인데, 최근 한국 정부가 주당 노동시간을 40시간에서 52시간이나 최대 68시간으로 늘리려 한 건 절대적 잉여가치때문! 동일한 시간이라도 돌봄 노동에 이주 여성을 투입하거나 사회 전반의 생산성 향상으로 노동력 가치가 내려가면 상대적 잉여가치가 커진다. 게다가 특정 기업이 기술·조직 혁신으로 월등한 생산성을 내면 특별 잉여가치까지 챙긴다. 여기서 밀리는 기업은 망하고 노동자도 실업한다. 살벌한 생존경쟁! 최근 코로나 사태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물가 폭등까지 불렀다. 이렇게 모든 기업이 이윤 경쟁을 하는 가운데, 일부 자본가나 투자자만 돈 잔치를 벌인다. 대다수 노동자는 노동과 소비, 부채의 덫에 갇혀 병들고 지치며, 그사이 지구 오염과 온실가스, 기후위기가 심화돼 인류를 벼랑으로 내몬다. 한국은 물론, 세계의 현실이다. 이제 탈자본이 시대정신(Zeitgeist)이다.

 

둘째, 일본 자본주의와 관련해 2012년 이후 아베노믹스(금융 완화, 재정 지출, 성장 촉진)2021년 이래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자본주의정책(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강조)이 과연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30회복을 넘어 탈자본의 가능성을 지닐까 하는 의문이 있다. 솔직히,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는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의 종말일 뿐 아니라 사실상 세계 자본주의의 파산선고였다. 만일 미국 정부가 1조달러 이상, 유럽연합이 2천억유로 이상의 구제금융을 긴급 투입하지 않았다면 세계경제는 도미노처럼 붕괴했을 터!

 

현 세계경제는 마치 병원에서 중환자가 산소 호흡기를 끼고 억지로 수명 연장을 하는 것처럼 인위적 경기부양책이나 부채 경제 촉진(“빚내서 집 사라”)을 통해 연명 중이다.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묘수가 없다. 자연은 고갈되고 인구는 저출산, 고령화로 치닫는다. 이젠 발상의 전환이 답이다. ‘많이 먹고 많이 싸는기존의 성장주의를 버리고 조금 먹고 조금 싸는대안 구조가 돌파구다. 이 맥락에서 릿쿄대 사사키 류지 교수가 강조한 공유지 탈환이나 오사카대 스미다 소이치로 교수가 제창한 인종차별을 넘은 초국적 아시아 연대가 눈길을 끈다. 이렇게 공유와 연대가 탈자본에 중요하나, 막상 그 주체들의 의지가 문제다.

 

셋째, 동아시아 중 최다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은 어떤가? 우선, 중국의 경제 시스템에 대해 사회주의 시장경제’ vs ‘국가 자본주의란 질문은 유효하다. 전 난징대 총장 장이빈 교수는 국가 자본주의라는 일부 학자의 비판적 규정에 난색을 표하며 중국식 사회주의란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메가(MEGA) 연구는 물론, 청년-후기 마르크스 비교, 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 탐구를 지속한다.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란 책에서 중국식 사회주의의 혁신을 촉구한다. 시진핑 주석도 201719차 당대회에서 생태문명 체제를 통한 아름다운 중국건설을 강조했다. 중국이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 이론이나 일상성 비판, 나아가 비물질 노동이나 플랫폼 노동에도 관심을 갖는 배경이다. 한편 중국식 플랫폼 사회주의”, “플랫폼 협동조합의 가능성이나 도가주의 에코페미니즘역시 일부 한계에도 불구, 새 대안 모색에 중요한 실마리를 준다.

 

그러나 중국이 아무리 사회주의생태문명을 강조해도 폭스콘내지 알리·테무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구조적 모순은 여전하다. 국가적 통제로 자율적·민주적 노조는 부재하고, 노동 과정은 저임금, 장시간, 무권리 등이 특징이다. 농촌에서 몰려든 농민공의 생활환경은 열악하고, 빈부 격차는 한국이나 미국을 뺨친다. 아무리 미국 패권주의의 압력과 위협이 강해도 이런 문제를 정당화하긴 어렵다.

 

하루도 버티기 힘든 현실인데, ‘탈자본의 대안이라니, 시대착오적인 탁상공론? 그러나 오늘날 복합위기를 부른 뿌리가 자본주의라면? 자본이란 결국 왜곡된 사회관계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제대로 통찰하는 주체의 변화가 필수다. 19세기를 치열하게 산 마르크스를 21세기에도 읽는 이유다. “반들반들한 이마는 둔감함을 의미하고 웃는 사람은 아직 끔찍한 소식을 접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가 가슴을 저민다.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한겨레 : 2024.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