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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4.8.1~22 사람들은 왜 '격노 정부'에 격노하지 않을까?

by 이성근 2024. 9. 2.

1. 바이든 사퇴와 윤 대통령의 선택 2. 상속세와 기업 밸류업 3. 플랫폼이 증폭시킨 불안정 노동자의 건강·소득 위험 4. 사람들은 왜 '격노 정부'에 격노하지 않을까? 5. 이진숙이라는 징후 6. 반지하방의 추억그리고 공급폭탄 7. 상속세가 만든 어떤 격차 8. ‘먹사니즘에 진심이라면, 성장방식 바꿔라 9.일본 노래 부르는 TV조선 곱게 볼 수 없는 이유 10. 파리 친환경 올림픽의 이유

11.‘윤석열의 1000대한민국은 감당할 수 있나 12. 위험한 음모론 전성시대 13. ‘이재명의 민주당’, 14. 이 지독한 균열 앞에서 15. 기업 가치를 훼손하는 대기업 지속가능보고서 16. 방통위 사태의 재구성 17. 야비한 권력자들의 아레나, 대한민국 18. 반복되는 단독처리거부권 행사그들이 사생결단 하는 까닭 19. "대통령 부부가 둘 다 너무 이상해요" 20. 윤석열 정권은 왜 뉴라이트를 편애하는가

21 왜 지식인들은 국민의 90%를 외면하는가 23. 줬다 뺏는 기초연금’ 1024. 조지 오웰의 ‘1984’, 윤석열의 ‘2024’ 25.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속삭였던가식민지의 국어 시간 26. 안락사 캡슐어떻게 생각하십니까?(“말기환자들 존엄한 죽음 선택할 권리”/“사회적 약자들 생명 포기내몰릴 위험”) 27. 윤석열 정권의 연이은 역사 퇴행 28. 어느 러시아 출신 한국인의 씁쓸한 군함도 순례 29. 시골 없는 도시라는 디스토피아 30. 장준하, 그를 몇 번이나 더 죽이려는가

31. 탈중국·신자유주의로 경제 망친 자들 32. 알권리후퇴시킬 행안부의 입법예고 33. 부산시 에코델타동탄생기 34. 세 공직자 수난 부른 국정농단 그림자 35. 상속세 감세, 어떻게 볼 것인가 36 신뢰 상실한 정부의 부동산 정책 37 패전, 오키나와에서는 진행형 38.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39. 강북의 냄새, 강남의 냄새 40. 뉴라이트 원조들이 본 윤 정부의 뉴라이트 소동

41 마지막 집은 어디에 42 자궁의 불평등 43. '국부' 이승만을 기린다? '국부'를 부정한 순간이 대한민국의 진짜 시작점 44. ·, 헤어지는 중입니다 45. 세 단어 경제학 : 공짜 점심은 없다 46. 정의의 역사는 결코 지배될 수 없다 47. ‘대통령님 몰라봬서 죄송합니다태극기의 반성 48. 올림픽 메달' 가면의 뒤, K스포츠 붕괴는 시작됐다

 

 

바이든 사퇴와 윤 대통령의 선택

미국 대선 구도를 극적으로 바꾼 조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는 정치 지도자의 자질과 책임의식, 권력의 속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대선 후보 첫 TV토론 후 불거진 고령 리스크로 당 안팎의 압박을 받다가 재선을 포기하기까지 25일간은 바이든에게 당혹과 분노, 고심과 결단의 시간이었을 테다. 미국 현직 대통령이 투표일을 100일 남짓 앞두고 재선 도전을 포기한 건 사상 초유의 일이다.

바이든은 3수 끝에 대통령에 오르는 등 50년 넘게 정치인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막을 수 있는 건 4년 전 그를 제압한 자신밖에 없다는 사명감이 강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자신의 정체성과 경력을 부정하는 선택을 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이번 사퇴극은 폐쇄적이고 자기도취적인 권력의 속성도 함께 드러내 보였다. 바이든은 재선 포기 압력이 갈수록 커지는데도 최측근이나 가족의 의견에만 의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선 포기 직전까지도 트럼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선거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기객관화를 결여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 것이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은 바이든의 고령 리스크가 재발하기 전까지 민주당 내에서 이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제기하는 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바이든의 고령 실태를 쉬쉬하기는 백악관 참모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다 잘될 거라고 믿거나 사고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기보신과 무사안일주의인 셈이다.

권력은 잡기도 어렵지만 내려놓기는 더 어렵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존경받는 이유는 종신 대통령으로 계속 군림할 수 있었지만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미련 없이 대통령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신생 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행동이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책임감과 권력 행사를 절제하는 리더십을 보인 것이다.

한국 정치에도 권력에 취해 초심을 잃고 아집에 빠져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놓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갑자기 출세한 이들일수록 권력이 주는 위세에 포획돼 자기배신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지난 2년여간의 국정운영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때 내건 공정과 정의, 상식을 스스로 배신했다. 여당의 총선 참패로 민심의 심판을 받았지만 국정쇄신이나 통합은 말로 그쳤다. 채 상병 사망사건과 김건희 여사 의혹에 대한 특검 필요성을 키운 오만과 독선의 국정운영은 그대로였다. ‘윤심개입 논란이 일었던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친윤을 내세운 원희룡 후보를 꺾고 절윤’(윤 대통령과 절연)으로 평가받던 한동훈 후보가 압승했다. 또 한 번 윤심의 패배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전당대회 다음날 한 대표를 비롯한 신임 지도부와 낙선자들을 대통령실로 불러 삼겹살 만찬을 했다. “선거 때 일은 다 잊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30일엔 한 대표와 별도로 만나 애정 어린 조언”(대통령실 관계자)을 했다고 한다. 당정 화합을 연출하면서 ‘20년 넘은 우리 사이에, 알지?’라고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찔끔찔끔 변화하는 척하면서 위기를 모면해보려는 건 안이한 대처 방식이다. 20%대 후반(갤럽 기준) 지지율로 레임덕 위기는 상시화했다. 야권을 중심으로 나오는 대통령 임기 단축을 전제로 한 4년 중임제 개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만큼 민심은 싸늘하다. 정부·여당과 야당의 대치 국면이 이어지면서 정치와 민생은 길을 잃고 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야 할 책임은 결국 국정 최고지도자에게 있다. ‘너 죽고 나 죽자식의 막무가내가 아니라면 격노와 즉흥, 독선과 아집으로 점철된 국정운영의 방향타를 돌리고, 내줄 것은 과감하게 내줘야 한다.

바이든의 사퇴는 이대로는 공멸한다는 위기의식 아래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을 떨쳐낸 바이든과 그 같은 결단을 이끌어낸 민주당이 만들어낸 결과다. 물론 평가는 아직 이르다. 트럼프가 승리한다면 바이든의 결단이 너무 늦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바이든 대신 나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이긴다면 바이든은 자신보다 국가를 우선한 지도자로 기억될지 모른다. 바이든은 “(후보에서) 물러나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 직무를 다하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 당과 국가에 최선의 이익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틈만 나면 한·미 공조를 강조해온 윤 대통령은 바이든의 결단을 어떻게 생각할까.

김진우 정치에디터 | 경향 2024.08.01

 

상속세와 기업 밸류업

725일 발표된 ‘2024년 세법개정안은 윤석열 정부의 세 번째 감세안이다. 윤 정부는 출범 첫해인 2022년 법인세율 인하와 다주택자 중과 완화 등 13조원에 달하는 재벌·부자 감세를 단행했다. 올해 세법개정안의 세수 감소 효과는 약 44000억원으로 추정되는데, 상속·증여세 개편이 세수 감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대규모 상속세 감면을 추진하는 이유로, 2016년에 자녀공제액을 1인당 3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인상한 것을 제외하고 상속세제가 지난 25년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든다. 그동안 물가상승이나 경제성장을 고려해 개편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런데 물가상승이나 경제성장을 고려해야 한다면, 왜 근로소득세율은 조정하지 않는가? 이번 세법개정안에서 10%의 세율이 적용되는 상속세 최저 구간을 1억원 이하에서 2억원 이하로 상향한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속세 최고 구간인 30억원 초과 구간을 없애 이 구간에 적용되는 부자들의 세율 부담을 10%포인트 깎아줬다. 물가상승 등을 고려한다면 상속세율 구간을 조정하면 될 것이지, 최고 세율을 없앨 이유는 없다.

이는 명백한 부자 감세이고, 필시 우리 사회의 계급화를 가속화하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자녀공제를 1인당 5000만원에서 5억원으로 대폭 상향한 것과 기초공제 2억원까지 고려하면, 앞으로 부모가 강남에 아파트를 갖고 있지 않으면 강남에 자기 힘으로 아파트를 마련하는 게 불가능한 세대가 올 수 있다. 금수저·흙수저 격차는 더 확고히 벌어질 것이다.

여기에 더해, 최대주주 보유주식 할증평가도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최대주주 보유주식 20% 할증평가는 경영권 프리미엄이라는 무형자산에 대한 과세다. 2018년 한국지배구조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경영권 프리미엄은 평균 50% 내외에서 형성되고 있다. 기존 할증평가 역시 이미 최대주주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다.

정부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일부 기업인이 최대주주 보유주식 할증평가 때문에 자녀에게 회사 지분을 상속·증여하지 않고, 외국계 사모펀드 등에 매각한 후 현금으로 상속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 정부는 이미 2022년과 2023년 세법 개정을 통해 가업상속공제 및 가업승계 증여세 과세특례 등의 적용 대상·공제한도를 대폭 확대했고 사후관리 요건을 완화했다. 따라서 최대주주 보유주식 할증평가 폐지의 혜택을 볼 사람은 재벌 총수일가일 뿐이다. 중소·중견 기업주가 회사를 상속하지 않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녀가 기업 경영을 물려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상속세 부담으로 경영자가 기업 주가를 찍어 누르게 되므로, 상속세 개편은 기업의 주가를 높이는 기업 밸류업 조치의 하나라는 궤변도 있다. 기업 밸류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말이다. 저평가된 기업의 주가를 끌어올리도록 유인하거나 강제하는 정책을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증권거래소나 정부가 주도하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하자면, 경영자가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충분히 노력하는 대신에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미국식 기업 지배구조가 왜 작동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다.

한국 재벌 총수일가는 기업집단 전체 지분의 3% 정도로 계열사 간 출자를 활용해 기업집단 전체를 사실상 지배하고 경영을 좌지우지한다. 이런 기업 소유구조하에서 재벌 총수가 사실상 계열사의 사외이사를 선택하고, 따라서 사외이사 제도라는 기업 지배구조는 작동하지 않게 된다. 재벌 대기업에선 전문경영인의 사익편취가 아니라 지배주주인 총수일가의 사익편취가 문제인 것이다. 주요 계열사에만 높은 지분을 지닌 총수일가는 계열사 간 일감몰아주기나 상표권 거래, 개별 계열사에서 높은 보수와 자사주 활용 등으로 사익을 편취하고 있다. 또 최근 두산로보틱스의 두산밥캣 인수·합병 건처럼 계열사 간 합병을 통한 사익편취 사례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20233월에 도쿄증권거래소가 주당 순자산가치가 1배 미만인 상장기업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2014년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진 기업 소유지배구조 개혁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개혁으로 일본 기업들의 상호출자가 상당히 해소되었고, 미국식 기업 지배구조가 작동할 여건이 마련되고 있다.

상속세를 깎아주면 재벌 총수일가의 사익편취가 없어질 것이라고 윤 정부가 믿고 있을까? 소도 웃을 노릇이다. 기업 밸류업의 핵심은 소유지배구조 개혁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 경향 2024.08.01

플랫폼이 증폭시킨 불안정 노동자의 건강·소득 위험

코로나19 시기, 비대면 업무 불가능했던 디지털 노동자의 건강

코로나19의 전 세계적인 유행 속에서 유행 초기에 많은 사회들이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적절한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고, 마스크와 같은 개인보호장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와중에, 이 새로운 바이러스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대처 방법은 '물리적 거리두기'였다. 이에 세계 곳곳에서 도시 봉쇄(lock down)가 이루어졌고, 외출과 모임을 삼가고 집에 머물 것이 요구되었다. 그 일환으로 개학 연기와 온라인 개학 그리고 재택근무도 추진되었다. 팬데믹은 소위 '플랫폼 자본주의'의 시기에 시작되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노동과 서비스 공급을 가속화했다.

디지털 기술이 재택근무를 통해 감염의 위기로부터 우리를 보호한 것 같지만, 이것이 꼭 모두에게 긍적적인 요인으로만 작동한 것은 아니었음을 밝힌 연구가 있다. 투바로와 카실리 연구팀은 선행연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디지털 기술 매개 노동, 특히 다양한 종류의 플랫폼 노동에서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커졌다고 주장한다(논문 바로가기: 팬데믹의 부담은 누가 지는가? 코로나19와 디지털 플랫폼 노동자에게로 위기 전가). 노동의 개인화와 고용 관계의 불안정 및 불평등으로 이미 노동자들은 취약한 조건에 처해있었지만, 코로나19 시기 플랫폼을 통해 조직된 디지털 노동은 이들의 건강(감염) 리스크와 경제(소득) 리스크를 더욱 증폭시켰다.

연구진은 플랫폼 노동을 '수요 기반 플랫폼', '온라인 노동 플랫폼',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에서의 노동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일자리에 종사한 이들이 코로나19 시기에 건강과 관련해 어떠한 직간접적인 위기를 겪었는지 살펴보았다.

첫 번째로, '수요 기반 플랫폼'은 플랫폼을 매개로 하여 소비자의 요청에 대해 노동자들이 그때마다 적시에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우버와 같은 운전 서비스 플랫폼과 음식이나 제품을 전달하는 배달 서비스 플랫폼이 존재한다. 이 두 종류의 플랫폼 노동은 모두 노동자들에게 특정한 물리적 공간으로의 이동과 접촉을 요구한다.

운전 노동자들의 경우 도시 봉쇄나 거리두기 정책으로 인해 경제 활동이 방해받게 되면서, 간접적인 경로로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수입 감소 요인에 노출되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소득 상실의 수준이 너무 크고, 또 정부나 플랫폼으로부터의 지원 수준이 불충분한 탓에 감염 위기에도 불구하고 일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건강 위기 수준도 높아지게 되었다. 배달 서비스는 거리두기 정책에 힘입어 그 수요가 폭증해 음식, 재료, 각종 물품 배송이 일상화되었다. 배달 노동자들은 마스크 등의 보호장구가 부족한 와중에도 지역을 돌아다닐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에 감염 위기가 커졌다. 비대면 배달이라고 해서 문 앞이나 지정장소에 물품을 두고 가는 방식으로 변화도 있었지만, 이들은 식당 직원들을 만나고 초인종이나 문고리 등을 만지는 등 각종 공공장소를 돌아다녀야 했다는 점에서 완전한 비대면 노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위생 및 감염 예방의 책임은 모두 개인 노동자들에게 떠넘겨졌다.

두 번째로, '온라인 노동 플랫폼'은 크게 독립 계약자(프리랜서) 매칭 플랫폼과 데이터 처리를 위한 미세 노동 플랫폼으로 나뉜다. 프리랜서 매칭 플랫폼은 온라인 컨설팅이나 과외, 디자인, 개발, 집필 등 디지털 기기가 있으면 원격으로도 일할 수 있는 작업에 대해 수요자와 공급자를 매칭해주는 플랫폼이다. '미세 노동(micro work)'은 대규모 데이터나 각종 미디어에 대해 분류, 범주화, 재부호화(리코딩), 녹취록 전사 등의 작업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코로나19 시기에는 바이러스와 그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소프트웨어나 AI 도구를 학습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기계의 학습을 위한 '가장 질 좋은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직접 인체 각 부위의 이미지에 대해 수작업으로 '', '심장', 이런 식으로 분류해주는 작업이 필요했다.

온라인 노동과 미세 노동은 재택근무의 가능성이 있어 감염 위기는 비교적 낮았을 수 있다. 다만, 팬데믹으로 인해 실직이나 다른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미세 노동의 경우에는 높은 숙련도가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온라인 노동자 풀(pool)이 커져 약간 소득이 감소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지는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 리스크의 차원에서도 다른 플랫폼 노동자들에 비해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는 것이 연구진의 분석이다. 그러나 수주를 받아 일하는 독립 계약자의 특성상 일과 수입이 일정치 않다는 점, 노동자 지위와 권리를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 이로 인해 고용주와 플랫폼에 의해 이중의 약자 위치에 처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연구진은 유튜브, 엑스(옛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의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에서의 콘텐츠 관리(검열) 노동에 관해 논한다. 콘텐츠 관리는 자동화가 어렵고 지속적으로 인간의 개입이 필요한 영역이다. 페이스북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페이스북은 2010년대 중반에 가짜뉴스가 확산하는 문제를 겪었다. 당시 콘텐츠 관리는 완전히 자동화되지 않고 외주화된 상태였는데, 문제가 심각해지자 2016년에 인공지능 시스템을 도입해 허위 정보를 가려내도록 했다. 하지만 이후 곧 조작과 오용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페이스북은 다시금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외부 하청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콘텐츠 관리는 이 업무의 수요가 줄어들지 않고 있는 점, 그리고 보통은 회사나 하청업체에 고용되어 일한다는 점에서 다른 플랫폼 노동자들보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완전히 디지털 기술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작업임에도, 비밀 보장과 법적 문제로 인해 코로나19 시기 마스크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중에도 사무실에 출근할 것을 요구받았다. 또한, 콘텐츠 관리 노동자들은 유해한 컨텐츠에 여과없이 노출되어 정신건강 상의 문제를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연구진은 디지털 기술이 일부 특권적 직업에서만 원격근무를 가능하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디지털 매개 노동자, 즉 플랫폼 노동자들은 고용주와 플랫폼에 의한 이중의 착취 및 저임금불안정 노동을 지속하게 하는 구조 속에서 플랫폼의 종류가 다르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직업군에 비해 더 높은 감염 위기와 소득 감소의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이다. 우리가 건강을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고 집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이 건강 위기는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짐 지워진 것이었음을, 즉 누군가의 안전이 다른 사람의 안전을 볼모로 해 이루어졌다는 이 착취적인 구조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나의 안전이 다른 사람의 안전의 밑거름이 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 서지사항

Tubaro, P., & Casilli, A. A. (2024). Who bears the burden of a pandemic? COVID-19 and the transfer of risk to digital platform workers. American Behavioral Scientist, 68(8), 961-982.

김지민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 프레시안 2024.08.01

 

사람들은 왜 '격노 정부'에 격노하지 않을까?

이재명 '전투적' 리더십에 도사린 불안감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해 쓰고 말하기가 어려운 때다. 무엇을 쓰고 말해야 할지 주저된다. 글은 힘을 잃은 지 오래고 말은 공중에 흩날린다. 요즘 말과 글이 소용 있을 때는, 사람들을 열광시키거나, 볼거리·웃을거리·싸울거리를 제공하거나, 권력에게 아부하거나, 돈을 끌어모을 때다. 아무 말이라도 그런 소용이 있으면 쓸모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별 효용이 없다.

정치에 대해 쓰는 일은 심지어 자기 위안조차 주지 못한다. 잘해야 무력감을 각인시켜 더욱 깊게 하고, 밖으로는 양비론이나 펴는 '씹선비'라는 조롱을 피하기 어렵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도자기 미술관에 들어간 코끼리를 일단 끌어내야지, 거기서 이것저것 따지고 있는 태도가 무엇이냐는 호통을 듣기가 십상이다. 오죽하면 '씹선비라는 말이 나오자 절제하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겠는가. 쓸만한 말을 할 만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사태를 관망할 뿐이다.

왜 사람들은 광장에 나오지 않는가

사실 요즘 나라의 꼴은 실로 '사태'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형편없다. 사태란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사건이 진행되는 상황을 뜻한다. 보통은 대규모의 인명 피해, 물적 손실이 발생하거나, 이를 유발할 만한 국가나 사회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일컫는다.

현 정부 이후 발생한 거의 모든 사건들은 제대로 수습되기보다는 더 비정상적인 사건의 발단이 되는 것이 상례였으니, 지금의 비정상적인 국정운영을 장기적 '윤석열 정부 사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왜 사람들은 전처럼 광장에 나와서 코끼리를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가?

코끼리 끌어내기가 불가능한 이유

우선 이 '사태'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자. 지난 총선 이전에 있었던 여러 일들은 재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능을 넘어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2년이 이어졌다. 총선의 결과를 어렵게 해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국민들은 정부 심판을 원했다.

총선 이후 대통령은 사과를 하는 척하더니, 그냥 지나갔다. 국정지지율은 역대 2년차 정부에서 최저를 기록했다. 사실 20%대 국정지지율이라면 의회제 국가에서는 총리가 사임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다시 치러서 새로 정부를 구성하는 게 맞다. 그 정도의 국정지지율로는 국가가 운영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후의 행보는 선거 전보다 더 일방통행이다. 채상병 특검법을 거부하고, 방통통신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의 면면은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무능은 보통 선거로 심판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무능이 지속되면 정권이 교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정권교체가 꼭 정당의 교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충분히 지지를 얻지 못하면, 정권교체는 단지 리더십의 교체로 나타날 수도 있다. 노태우-김영삼 때가 그랬고, 이명박-박근혜 때가 그랬다.

그런 가능성은 위에서 던진 질문과도 연계되어 있다. 사태가 이 정도라면 누가 선동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코끼리를 붙잡으러 나와야 한다. 이전에 그런 경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조짐이 없다. 사실 불가능하다.

최근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30%대다. 그런데 제1야당의 지지율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정당 지지율에서는 오히려 국민의힘보다 뒤지는 경우도 흔하다. 이래서는 코끼리를 끌어내기 어렵다. 3년은 너무 길고, 석 달도 너무 길다고 하지만, 지금 봐서는 야당과 일부 지지자들의 공연한 바람일 뿐이다. 당위가 아니라 가능성과 현실의 차원에서 냉정하게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반민주적이라 탄핵되었다

혹자는 말할 수 있다. 아직 심지에 불이 붙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최순실 사태 같은 모종의 비리가 폭로되기만 하면 급격한 레임덕이 올 것이고, 내부 제보가 쏟아질 것이라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정부에는 그런 약점이 너무 많아 보인다. 인사와 관련해서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고 소문도 흉흉하다.

이 지점에서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이게 나라냐'의 기준이 무능과 부패를 넘어서 '민주주의'였다는 것은 중요하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 선출된 권력으로부터 정당한 절차를 통해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권력이 국정을 좌우했을 때, 민주 국가의 시민은 기본권과 존엄성을 훼손당했다고 생각한다. 무능과 반민주가 겹쳤을 때, 국민은 모욕감을 느낀다. 모욕감은 인간을 행동하게 한다.

'격노'는 반민주적이다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이 정부에서 가장 위험한 지점은 바로 '격노'. 이 정부는 말 그대로 '격노 정부'. 이준석에 대해 격노하자 여당 대표가 날아갔고, 화물연대에 대해 격노하자 파업이 진압되었다. 채상병 사건에서도 격노가 발단이 되었다. 격노가 문제인 이유는 이것은 자의적 통치를 통해서 유사 독재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이 일로 격노하셨다'고 하면, 정상적인 민주정부에서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격노를 해도 절차상 바뀌는 건 없다'고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큰 동력이 되는 것은 '격노'. 통치철학과 법과 제도와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기분'이 중요한 것이다.

격노란 대체로 지나치게 화가 나서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에서 내게 마련이다. 백번 양보해서 어떤 잘못이 너무나 심대해서 정당한 화를 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격노 상태에서 내리는 지시가 적절하고 타당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해야 할 지시가 있다면 격노 상태가 지나고 차분히 내리는 것이 맞다.

하물며 국가의 사무에 대해 대통령이 내리는 지시다. 어떤 사안에 대한 대통령실의 의사가 행정부로 전달될 때는 '격노'했다는 사실 자체는 전달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국가에서의 행정이자 통치다.

만약 그러한 지시의 내용에 대통령의 '격노'가 포함되어 전달되었다면, 이 통치행위는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봉건적·왕조적 통치문화에 더 가깝다. 대통령실이 그런 용어 쓰기를 자제하기는커녕 즐겨한다는 것은, 이 통치조직의 문화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검찰에서 '총장님이 격노하셨다'는 말을 자주 썼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민주주의는 다른 방향에 서 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격노'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물론이고 국민의힘에서조차 이런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한다는 것은, 이들이 탄핵 불감증에 걸린 반민주적 세력임을 자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당장은 포퓰리즘과 팬덤에 시달리고 있고, 정당정치는 형편없는 수준이고 정치효능감은 크게 낮아졌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신뢰의 근본이 흔들린다고는 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인기영합주의에 휘둘린다는 것과, 그래서 독재적이고 자의적인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 정부에서 대통령과 그 배우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선출된 공직자보다는 봉건적 지도자에 가깝다. 아슬아슬한 이유다.

이재명은 격노하지 않을 것인가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처음 이 글에서 제기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야당의 지도자인 이재명 대표는 충분히 민주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는가? 이재명 대표는 사람의 기분에 따른 통치보다는 제도와 절차에 따른 통치를 할 것인가? 이 대표는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에 대해 다양성과 포용성을 보여주는가? 이 대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잘 되어 있는가?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들은 격노 같은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인가? 이런 질문은 모두 민주적 리더십과 관련되어 있다.

이재명 대표는 지지자들이 보기에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불의와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문제는 지금 대통령도 우리가 그런 줄 알고 뽑았다는 데에 있다. 이재명은 윤석열 같은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싸우는 데 적절한 리더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국민들은 이 싸움에서는 이재명이 유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안으로서는 민주적·포용적 리더십을 생각할 수도 있다.

윈스턴 처칠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냉철한 판단으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런 처칠에게 영국 국민은 전쟁 직후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를 안겼다. 어떻게 보면 배신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민주 국가에서 국민들이 지도자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2월 당시 처칠 내각의 지지율은 무려 83%였지만, 7월 총선에서 처칠은 처절한 패배를 맛보고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그가 전시에 훌륭한 지도자이긴 하지만 평시에도 좋은 지도자는 아니라는 노동당의 주장이 먹혔던 것이다.

지난 몇 년 간의 여론조사와 선거의 결과 등을 보면, 많은 국민들은 이재명이 억울하고 야당지도자로서 정당성이 있고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당장 탄핵이나 임기단축을 통해서 윤석열을 대체할 만한 지도자로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민주당에서 나타나는 이재명 일극체제는 '당원 민주주의'로는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들이 보기에 한국 민주주의 전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총선 이후 현 정부의 일방적인 태도에도 민주당 지지율이 이렇게 답보상태일리 만무하다.

방향이 아니라 총이 문제 아닐까

전당대회가 격화되자 이재명 대표는 '총구를 밖으로 향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밖에는 국민의힘 지지자도 있겠지만 일반 국민들도 있다. 그럼 이런 생각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총구의 방향이 문제인가, 아니면 손에 들고 있는 총이 문제인가. 안과 밖이 문제가 아니라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닐까. 총을 막 휘두르다 보면 적도 놀라 도망가겠지만, 이를 지켜보려던 사람들도 모두 달아난다.

최근 한 정치인에게 김근태가 그립다는 말을 들었다. 김근태는 독재와 싸울 때도 너무 민주적이어서, '우리의 전략전술이 충분히 민주적인 것이냐를 끊임없이 따지는 바람에 피곤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그 김근태의 태도가 아니었다면 당시의 우리는 불의와 싸운다는 정의감에 불타서 우쭐대고 함부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회상했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폄하되고 있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가 구분되지 않고, 팬덤정치와 민주적 절차가 뒤섞였다. 포퓰리즘과 팬덤정치가 민주주의의 산물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유사민주주의일 뿐, 민주주의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누군가는 당장 코끼리를 몰아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코끼리 다음에는 어떤 동물이 이 민주주의의 미술관에 적당한지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아직 답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이관후 정치학자 | 프레시안 2024.08.02.

이진숙이라는 징후

10년 전인 2014, 나는 기자로 일할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방송 뉴스나 신문은 거의 보지 않았다. 당연히 미디어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해 416, 가라앉는 배에 탄 승객이 모두 구조됐다는 속보를 덜컥 믿어버린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많은 방송사가 한꺼번에 실수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승객이 모두 안전하다는 이야기에 마음을 놓고 친구를 만나 놀았다. 그날따라 술집에 사람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 뉴스를 보고서야 온몸이 아찔해졌다. 오래 남을 죄책감을 얻은 채 손에 잡히는 대로 기사를 읽었다. 필사적으로 사실을 파헤치는 보도들 틈에 사망자들의 사망보험금을 계산한 기사가 껴 있었다. 이진숙 보도본부장의 MBC였다. 그때의 MBC는 그 외에도 모두의 상처를 헤집는 보도를 여럿 내보냈다.

10년이 더 지난 20247월 이진숙은 방송통신위원장으로 돌아왔다. 그가 ‘MBC 세월호 보도 참사의 주요 책임자였다는 걸 알게 되자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세월호 참사는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공직자 검증 취재 과정에서 그의 생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229월 그는 페이스북에 세월호 추모 물결을 두고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세력들이 노란 리본으로 온 나라를 뒤덮었다나라 앞날이 노랗다라고 썼다. 이를 지적하는 질문에는 공직자 임명 전 자연인으로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한 것이라고만 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폄훼하는 데 앞장섰던 극우 단체 뉴라이트관련 인사로부터 정치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청문회에 나온 세월호 유가족은 보도 참사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그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청문회를 지켜본 많은 이들도 유가족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진숙의 불성실한 답변 자체가 놀랄 일은 아니다. 그가 공영방송 이사 교체라는 특수임무만 처리하고 떠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보다는 세월호 추모를 헐뜯고, 보도 참사를 깊이 반성한 적도 없어 보이는 이가 방통위원장으로 임명된 현실이야말로 가장 큰 참담이다.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에 사회적 참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우리 모두의 문제로 떠안자고 합의했다. 이진숙 임명은 그 공동체적 합의가 훼손되고 있다는 징후로 읽힌다. 징후는 이진숙뿐만이 아니었다. 인사청문이 한창 진행되던 지난 725, KBS는 생방송 뉴스를 진행하는 기자의 노트북에 붙어 있던 노란 리본 스티커를 편집했다. 석 달 전에는 KBS PD들이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준비한 다큐멘터리가 무기한 제작 중단됐다.

하인리히의 법칙은 큰 사고가 나기 전 수십 번의 징후가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우리는 공동체적 비극을 바라보는 관점의 붕괴를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난 10년 동안 지겹다’, ‘그만하라고 말해 온 이들에게 묻고 싶다. 이런데 어떻게 세월호를 지우냐고.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 주간경향 2024.08.04.

 

사도광산과 잡배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사실을 알리는 지난달 27일 보도자료를 보며 장이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사도광산은 한국의 동의가 없으면 애초 등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협상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끌고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에겐 20157월 군함도(하시마) 메이지 시기 산업유산등재 과정에서 얻어낸 좋은 선례도 있었다. 일본은 9년 전 군함도 등의 등재를 위해 수많은 조선인 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끌려가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들을 잘 활용한다면 최소 당시와 엇비슷한 성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결과는 모두가 알 듯 예상을 크게 어긋난 외교 참패였다. 일본은 사도광산에서 이뤄진 조선인 강제노동과 관련해 그 어떤 강제성도 인정하지 않은 채 이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돌이켜 보면,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벌써 2년째 비슷한 일이 거듭되고 있다. 양국 간 주요 현안에서 일본은 가만히 있는데 한국 홀로 물러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국가 정체성과 직결되는 역사 문제, 거듭 신중하게 생각하며 결정해야 할 안보협력 문제, ‘라인 사태같은 경제 문제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1년 반쯤 전 이 정부 외교·안보 라인의 그야말로 핵심 당국자로부터 묘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윤 대통령은 이 무렵 한-일 간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제3자 변제라는 일방적 양보안을 내놓은 뒤 방일(2023316~17)을 예정해 두고 있었다. 한국이 통 큰 양보를 한 만큼 일본도 뭔가 상응 조처를 내놓을 것이란 기대가 커지던 상황이었다. 일본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이 당국자는 뜻밖에도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한국이 먼저 뭔가를 요구해야 일본이 고민할 것 아닙니까. 대통령님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외교부 역시 기존 한-일 관계의 박스에 갇혀 있다고 보시는 듯합니다. 한국이 요구를 안 하는데, 그쪽에서 뭔가를 자발적으로 내놓을 리가 없죠.”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통해 한-일의 근대 외교관계가 시작된 뒤,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선 일본과 협력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믿는 이들이 꾸준히 존재해왔다. 이 사람들을 매국노와는 다른 중립적 의미의 친일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친일파들을 잡아끈 매력은 한국에 앞선 일본의 선진성이었다. 동아일보 193014일치 2면 왼쪽 상단 기사를 보면, 이 무렵엔 망국의 원로 정객으로 전락하고 만 박영효(1861~1939)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임오년(1882) 사건(임오군란)의 사죄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보니 일본의 문물이 조선과 비교하여 천양지차가 있음을 발견하고 우리나라가 강하게 되자면 우선 일본을 본받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가지게 되었소.”

명문 히토쓰바시대에서 1년간 공부하게 된 부친 등 가족과 함께 1967년 우에노역에 도착한 소년 윤석열의 눈에 비친 일본의 모습도 그와 비슷했다. 그는 방일 전 요미우리신문 2023315일치 39면 인터뷰에서 지금도 대학이 있는 구니타치시가 눈앞에 떠오른다. (일본은) 선진국답게 깨끗했다. 사람들도 솔직하고 정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을 바꿔보려 했던 초기 친일파들 가운데 1910년 강제병합 이후까지 살아남아 매국노소리를 피한 이는 유길준·김윤식·김가진 셋에 불과하다. 이들은 조선과 일본이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이익이 온전히 일치할 리 없으니 협력하면서도 꾸준히 갈등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유길준은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큰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김윤식은 병합의 마지막 순간 홀로 불가”(不可)를 외쳤으며, 김가진은 조선 고관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청일전쟁 개전 때 주조선 일본공사였던 오토리 게이스케의 눈에 비친 그밖의 친일파는 기회를 타 사리(私利)을 도모하려는 잡배에 불과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고, 그래서 복잡하고 두려운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제발 자중해야 한다.

길윤형 | 논설위원 | 한겨레 2024.08.04.

 

반지하방의 추억그리고 공급폭탄

창밖으로 행인의 발목만 보인 적이 있는가.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집은 사실 경기 고양의 세트장인 데다, 행인 얼굴이라도 보이니 차라리 낫다. 문득 대학생 때 살던 반지하방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니, 언덕배기 빌라 반지하 맞은편 단칸방에는 애 하나 딸린 신혼부부도 살았다. 물 내리는 손잡이 달린 구식 화장실은 심지어 공용이었다.

한번은 위층 배관이 터졌는지,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라때는 그랬다. 요즘 세상에 이런 데서 애 낳고 살라 하면 다들 고무신 거꾸로 신을지도 모르겠다. 저출생 해결을 향한 제1차 관문은 역시 집이다.

과연 집이 얼마나 부족할까. 집값이 꿈틀대자 세간에 공급을 놓고 말들이 많다. 국내 주택보급률은 진작에 100%를 넘었다. 이른바 살고 싶은 곳괜찮은 집이 모자라다는 게 갈등의 본질이다.

이번 ‘8·8 공급대책8만가구의 아파트를 신규 택지에 짓고, 11만가구는 비아파트, 즉 빌라 등으로 공급한다는 것이다. 아파트보다 빨리 뚝딱 짓는 다세대 공급 확대가 눈에 띈다. 최근 빌라 전세사기 참극 탓에 공급이 너무 줄어서 일단 이해는 된다.

그러나 살기 괜찮은 빌라를 공급할까. 벽간소음 탓에 옆 사람에게 물었더니, 옆집 사람이 대답하더라는 농담까지 나올 지경이다. 이런데도 구청은 버젓이 준공허가를 내주고, 나 몰라라 한다. 이런 빌라에서 일단 애부터 만들라는 속보이는 계산이 아니고 뭔가. ‘빌거라는 험한 말까지 아이들이 서슴지 않고 엄마 따라 내뱉고, 옆 동네 친구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지도 못하게 막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끝판왕에 우리는 살고 있다.

커뮤니티센터와 주차시설, 놀이터 같은 걸 소단위로 묶어서 마련해주면 빌라도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다 비용이다. 과연 정부가 어디까지 지갑을 열까 싶다. 몇만 가구 확보했다고 숫자 땜질에 그칠 공산이 농후하다.

또한 윤석열 정부는 첫 공급대책인 김포한강2 주택지구 공급에도 힘을 쏟을 모양이다. 그러면서 서울 여의도까지 30분 내로 갈 수 있는 철도 중심 대중교통체계 구축을 강조했다. 이는 GTX D를 깔고, 송도에서 올라오는 GTX B와 연계해 바로 여의도까지 가도록 하겠다는 구상일 텐데, 어느 세월에 될까 싶다. 김포한강 신도시 통근자들은 가쁜 숨을 몰아쉰 채 10년 가까이 운명을 지옥철 GGL’에 밀어넣어야 할 수도 있다. 세간에선 벌써 김포한강2를 가리켜 베드타운의 대명사 미래의 일산이라고들 한다.

중요한 건 신도시를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핵심은 역시나 일자리다. 수도권도 판교나 용인·화성 일대를 제외하곤 일자리 없이 거의 다 닭장 같은 잠자리만 지어대는 상황이다. 정부가 틈만 나면 자족시설 강화를 외쳐대지만, 현실은 우후죽순 같은 텅 빈 지식산업센터들이다.

그러고선 전가의 보도처럼 툭하면 GTX를 꺼내든다. 김동연 경기지사까지 가세해 이제 GTXF, G, H까지 거의 안드로메다 종착역으로 향한다. GTX가 끝내는 은하철도 999’가 될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나돈다.

이런 와중에 대출금을 못 갚아 경매로 넘어간 집합건물이 138개월 만에 최대가 됐다. 서울은 달아올랐지만 경기도만 해도 미분양 아파트 규모가 7년 만에 최대다. 특히 준공 후에도 안 팔린 악성 미분양11개월 연속 늘어 15000가구에 육박한다. 그런데 정부는 3기 신도시 빈틈에 2만가구를 최대한 더 밀어넣으라는 테트리스 주문과 함께 추가로 경기도에 8만가구 공급안까지 내놨다.

애초에 서울 중심 공급폭탄으로 집값을 낮췄더라면 오히려 약자에게 더 도움이 됐을 테다. 낡은 비현실적 규제는 풀고 분양가상한제, ‘토지임대부반값 아파트를 비롯해 물량 공세를 퍼부었어야 했다. 세금 강화로 집값이 잡힐 거라는 건 순진한 착각이다. 게다가 중산층도 새 아파트를 원하기에 주택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세계 도시·국가 비교통계 사이트인 넘베오(NUMBEO)에 따르면 한국은 2023년 기준 가구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PIR)’26.0배다. 26년간 봉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니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서 툭하면 진풍경이 빚어진다. 로또 청약이다. 당첨되면 ‘20억 돈방석에 앉는 나라. 부동산 투기인지, 재테크인지에 미쳐 돌아가는 한국 사회는 거대한 폰지사기집단같다. 돌려막기 끝에 폭탄을 떠안을 당사자들이 바로 2030이니, 큰일이다.

전병역 경제에디터 | 경향 2024.08.04.

 

상속세가 만든 어떤 격차

최근 대만을 찾는 투자자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대만 경제가 순풍에 돛단배처럼 질주하기 시작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긴 하다.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대만 증시가 한국을 확실히 앞지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양국 상장기업의 시가총액이 몇백조원 단위로 그 격차가 벌어지는 형국이다. 대만 경제의 약진을 티에스엠시(TSMC) 독주체제, 다양성 부재 등으로 평가절하하는 이들도 있다.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얘기다. 하지만 티에스엠시만 독야청청하는 게 아니라, 반도체 설계부터 파운드리, 다운스트림 서버 제조 분야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에이아이(AI) 반도체 공급망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는 시장의 평가가 지배적이다. 여기에 이 생태계에서 여러 강소기업이 약진하며 젊고 도전적인 기업가들이 글로벌 시장의 여러 분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현장의 얘기까지 더해지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만 정부와 업계는 티에스엠시 성공 모델을 바이오 분야로 확대, 재현하는 도전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반도체, 전자부품 일색이라는 산업 포트폴리오의 한계를 정면 돌파하기 위한 시도다. 반도체(Semi-conductor)를 바이오(Biomedical)로만 바꾼 티비엠시(TBMC)40여년 전 모델 그대로 지난해 설립됐다. 1980년대 말 대만 국가개발기금의 초기 투자,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TRI)의 시설 및 인재, 글로벌 전자기업 필립스의 파트너십이라는 삼각체제로 티에스엠시가 설립되었듯이, 이번에는 필립스 대신 미국 샌디에이고의 첨단 바이오 의약품 기업 내셔널 리질리언스로 해당 분야 선수 교체만 이뤄졌을 뿐이다. 올해 초 모집을 시작한 시리즈에이(a) 투자유치에는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 전세계에서 애초 모집액수를 훨씬 웃도는 2천억원의 자금이 몰렸다.

반도체에서의 성공 모델을 바이오 분야로 이식한다는 티비엠시의 기획은 낯설지 않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이미 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발걸음을 떼고 앞서가고 있지만 과연 삼바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티비엠시를 저만치 따돌리며 격차를 유지할 수 있을까.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회계부정 의혹에 휘말렸던 지난 몇년의 시간을 생각하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시작했던 삼성전자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집단의 가장 유능한 인재들을 승계 작업에 매달리게 하는 사이, 티에스엠시는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본업에 매달리게 하며 새로운 시장과 기회를 포착하고 앞서간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대만에는 없고 한국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으로 위력을 떨치는 상속세가 만들어낸 차이다.

한국의 재벌 기업은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승계기술자로 만들며 사실상 자신들이 내야 할 엄청난 상속세를 수많은 개미들이 분담하도록 만들어 왔다. 한국의 상속세가 징벌하는 대상은 재벌 일가가 아닌 애먼 개미투자자들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이라는 걸 남들은 다 아는데 우리만 외면한다. 대만은 기업들이 개미 등골을 뽑아 상속세를 납부하며 생색내는 거대한 역할극 무대를 만드는 데 골몰하지 않고 본업에 집중할 수 있게 했고 그것이 기업가 정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상속세 세율을 얼마로 조정하고, 조세 정의가 어떠니 논박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본질을 회피하는 일이다. 큰 물고기들은 빠져나가고 잔챙이들만 걸려드는 불공정한 상속세 게임 대신, 기업가 정신을 흘러넘치게 하고, 기업을 통해 만들어진 성과가 소액주주들에게까지 투명하고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게 훨씬 더 정의롭고 미래지향적이다. 상속세 따로, 밸류업 따로, 산업정책 따로 식이어선 곤란하다. 상속세 납부를 면죄부 삼아 온갖 방식으로 개미들을 착취하는 행태, 인재들을 편법기술자로 전락시키는 기업문화가 일소되지 않는다면 대만과의 거리는 머잖아 초격차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김진화 | 연쇄창업가 | 한겨레 2024.08.04.

 

먹사니즘에 진심이라면, 성장방식 바꿔라

평범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민생 문제가 원내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표 경선에서 화두로 떠오른 것은 정말환영할 만한 일이다. 민주당 대표 경선에 나선 이재명 후보는 출마 선언문에서 지금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며,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했다. 그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먹사니즘이 유일한 이데올로기여야 하며, 성장의 회복과 지속 성장이 곧 민생이자 먹사니즘의 핵심이다라고 단언했다. 백번을 들어도 맞는 말이다. 민생은 모든 것에 우선해 정치인이 풀어야 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먹사니즘, 민생을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로 치부해선 안 된다.

2023년 한국의 일인당 국민총소득(GNI)36194달러로 일본을 앞섰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통계청에서 발표한 각종 지표를 보면 국민의 삶의 수준은 지난 10년간 지속적으로 개선됐다. 중위소득 50%를 기준으로 측정한 상대적 빈곤율도 201118.6%에서 202214.9%로 낮아졌다. 소득불평등을 측정하는 처분가능소득 기준 지니계수도 20130.372에서 20220.324로 낮아졌다. 주관적 삶의 만족도 지표도 대부분 개선되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경제지표가 눈에 보이게 좋아졌는데도, 삶의 어려움에 고통받는 사람이 여전히 다수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합계출산율은 계속 낮아져 학술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0.7대까지 떨어졌고, 0.6대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자살률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일부에서는 한국인이 너무 비관적이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를 보면, 지난 10년간 조사 시점 기준으로 어제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긍정 정서의 비율은 높아졌고 어제 얼마나 걱정, 우울감을 느꼈는지에 대한 부정 정서의 비율은 감소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낮은 성장률인가? 성장률을 높여 소득이 더 높아지면 우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위기가 완화될까? ‘전국민 25만원 지원법은 긴 가뭄에 단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다음은? 한국 사회를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 앞서 언급한 사회·경제적 위기의 대부분은 한국이 중간소득 함정에 빠지지 않고 고소득 국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지니계수가 경향적으로 높아진 것도, 합계출산율이 초저출산대로 진입한 것도,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것도, 부와 사회·경제적 지위가 학벌을 통해 세습되기 시작한 것도 모두 우리가 고소득 국가에 진입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박정희·전두환 권위주의 정권은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했다. 민주화 이후 지난 40여년은 글로벌 경쟁에서 이겨야 우리가 먹고살 수 있다며 국민을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았다. ‘먹사니즘이 중요하지만, ‘먹사니즘이 단순히 더 높은 성장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이재명 후보가 출마 선언문에서 밝혔듯이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제대로 된 질문만이 민생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꼭 필요한 민생 대안을 내올 수 있다. 왜 한국 사회를 고소득 국가로 이끈 놀라운 성장이 초저출산, 높은 자살률, 부의 세습으로 대표되는 사회·경제적 위기를 심화시켰는지, 제대로 질문해야 한다. ‘나쁜 일자리를 늘리는 성장이라도, 일자리만 늘리면 좋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지난 40년간 우리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질문해야 한다.

왜 대기업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국민의 90%가 일하는 중소기업은 점점 더 경쟁력을 잃고 있는지. 왜 우리 대기업은 독일, 일본 등과 같은 제조업 강국과 비교해 숙련노동자의 고용을 줄이고 자동화 기계를 3배 가까이 많이 쓰는지. 세계화의 기조가 재편되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해외 수요에 의존한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지. 이 후보가 말하는 먹사니즘을 위한 성장이 누구를 위한 어떤 성장인지. 지금 논쟁에선 이런 질문들이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이 먹사니즘에 진심이라면, 성장 방식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을 내와야 한다.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 한겨레 2024.08.05.

일본 노래 부르는 TV조선 곱게 볼 수 없는 이유

조선일보가 신바람이 났다. 최보윤 기자가 하루에 연속해서 기사를 써내고 있다. 제목도 자극적이고 도전적이다. “국내방송서 히토리 사카바데~K팝 시대에 뭐 어때” “예전엔 왜색손가락질이젠 일상이 된 일본 노래가 그것이다. 국내 방송에서 일본 노래에 대한 금단의 벽이 무너졌다면서 더 이상 문화적 경계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최보윤 기자가 흥분해서인지 일본 노래가 안방극장을 들썩이고 있다고도 썼다. “한일 교류의 새 지평을 열 수 있다는 김연자씨의 말도 인용했다.

한국에서 뽕짝이라고 불리는 트로트를 퍼뜨리는데 앞장서 온 TV조선의 쾌거로 읽힌다.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 로또에서 한 가수가 일본 노래를 부를 때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지고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고 친절하게 현장 모습까지 중계한다. 가히 감동적이긴 하지만 국내 예능 프로그램이 제작되는 과정을 보면 그리 별난 일도 아니기에 최보윤 족벌 기업 조선일보 기자의 호들갑이 천박하게 들린다.

아직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방송 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감성에 반했다” “신선하다등의 댓글이 이어졌단다. 이어서 일본 노래가 방송에 왜 나오느냐 같은 반응은 거의 찾기 어려웠다고도 전한다. 전혀 없다고 쓰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이른바 전문가의 힘을 빌리는 것이 조선일보의 전형적인 보도 방식이다. 물론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드러내면 그는 전문가 대열에서 탈락이다. 그가 원하는 먹이가 아닌 것이다. 이번에도 전문가라는 대중문화 평론가를 동원했다. 다행히 그의 진단은 기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남음이 있다.

노재팬 운동 등 일방적인 반대로 억눌렸다가 오히려 반발로 소비가 폭증한 것도 있다는 참으로 신선한 분석까지 해주니 그러잖아도 입이 근질근질하던 기자로서는 감읍이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앞지르는 등 경제적 자신감이 그 배경에 있다는 진단은 도발적이다.

노재팬(No Japan) 운동까지 한꺼번에 몰아치는 조선일보의 꼼꼼한 전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K컬처의 세계적 인기로 보아 왜색 문화에 우리 문화가 잠식당할 것이라는 식의 인식은 설 자리는 없다는 다른 관계자의 말까지 인용했다. 일본대중문화개방 역사에 김대중 대통령의 역할을 인용하는 치밀함으로 이 기사는 최고 완결성을 갖게 된다.

조선일보는 과거 살인마 전두환의 집권 시절 사형수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하여 “10.26 이후에 그의 무리한 집권 기도가 빚어낸 결과였다라 비난하며 전두환의 폭압을 합리화하던 자들이다. 후안무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2019년에 폭발했던 노재팬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근성을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경제 전쟁을 선포한 아베에 대한 자연스러운 분노의 표시였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래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정리를 바탕으로 한 한일관계의 정립보다 일본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굴복하며 일본의 선처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에 노재팬 운동이 잠시 물밑에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후쿠시마 핵 오염수 투기를 비롯해 동해 표기,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조선일보는 철저히 애완견 노릇을 해왔음은 모두 알고 있다. 최근에는 사도 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인 강제 징용 노동자의 존재조차도 부정하는 현실이 되어 있다. 이 문제는 결국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점령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데까지 연결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일본은 과거사 부정에 대해 치밀하게 준비하여 착착 계획대로 진행하는 데 반해 윤석열 정부는 그들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굴복하는 모습에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조선일보가 앞잡이가 되어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 역할을 충실히 하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필 이런 상황에 조선일보가 일본 노래가 방송에 나오는 것이 마땅히 환영해야 할 일인 듯 보도하는 저의가 궁금하다. 탄핵안이 발의돼 직무정지 상태인 이진숙 방통위원장이 전 국민 앞에서 말한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 여부는 논쟁적이라는 주장과 윤석열 정부의 일본 편향적인 입장에서 조선일보 최보윤 기자는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1919년 조선 민중의 뜨거운 투쟁의 산물로 조선일보가 생겼다는 사실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일제는 조선일보를 통해 철저하게 조선 민중을 문화적으로 조종하려 했고 방응모 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래 자발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는 창씨개명이나 한글사용 금지를 통해 문화적 침탈을 꾀했다. 현재 TV조선을 앞세운 일본 노래의 방송을 곱게 볼 수 없는 이유다. 더 나아가 일제가 우리에게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벌인 범죄적 행위를 다시 저지를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최보윤 종업원이 지상파에서도 일본 노래가 자연스레 방송되는 날이 머지않을 것이라는 선견지명을 발휘하려 했다면 당장 걷어치우기 바란다.

이득우 언소주 정책위원(조선일보폐간시민실천단 단장) | 시민언론민들레 2024.08.05.

 

파리 친환경 올림픽의 이유

선수들의 연이은 선전과 기록 경신, 팬들의 응원과 함께 2024 파리 올림픽 열기가 뜨겁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은 다른 의미에서 말 그대로 뜨거운 올림픽이기도 하다. 올림픽이 개막한 주는 역대 가장 더운 날을 기록했으며, 개최지 파리는 기후 변화 여파로 폭우와 숨 막히는 더위의 격렬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는 선수들 경기력과 올림픽을 관전하는 관중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사실 이번 파리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친환경적인 올림픽이자 파리 기후 협약을 준수하는 최초의 올림픽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파리 올림픽 주최 측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자 선제적으로 노력해왔다. 이전 2012 런던 올림픽과 2016 리우 올림픽은 350t 이상의 탄소를 배출한 가장 환경 친화적이지 않은 올림픽이었고, 2020 도쿄 올림픽은 200t을 약간 밑돌았지만,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인 2021년에 관중 없이 치러진 대회였다. 이번 파리 올림픽 주최 측은 158t 배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 올림픽 예상 관람객은 1300~1600만명 정도로, 이들은 1인당 100~125의 탄소를 배출할 것으로 보인다. 주최 측에 따르면 이는 소고기 버거 31개 또는 와인 83병을 소비할 때 배출되는 양에 해당한다. 이렇게 버거와 와인으로 탄소 배출량을 제시한 것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이 수치를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파리 올림픽은 어떻게 이전 대회보다 더 적은 탄소 배출을 달성할 수 있을까?

보통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에서 가장 큰 탄소 배출원은 참가자 수송 및 건물, 인프라 건설이다. 이를 조절하기 위해 파리 올림픽 조직위는 경기장, 숙소 등 건설을 제한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26개 경기장 중 95%는 이미 존재했거나 임시 시설로 운영되고 있으며, 모든 신축 건물은 일반 건물보다 탄소 배출량이 적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모든 경기장을 대중교통으로 접근 가능하게 하여 관람객의 대중교통 이용을 장려하고, 선수단과 대회 관계자가 이동할 때에는 친환경 차량을 사용하게 했다. 이밖에도 주최 측은 에너지 사용량과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선수촌 내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기로 했으나, 파리의 극심한 더위가 선수들의 경기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와 에어컨을 설치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올림픽 선수촌에서 제공되는 음식 역시 식물성 식품 사용을 늘려 평균 식사 대비 50%의 탄소 배출량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포츠가 기후 변화와 지속 가능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기후 변화는 선수와 팬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일부 스포츠의 미래마저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사회학 연구자들은 올림픽 같은 이벤트 규모를 줄이고, 새로운 인프라 건설을 피하기 위해 여러 도시에서 분산 개최하거나, 올림픽만의 독립적인 지속 가능성 기준을 설정하고 평가를 외부 기관에 맡기는 등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친환경 올림픽이라는 대전환기를 맞은 올림픽이 앞으로도 전 세계 관객에게 지속 가능성을 위한 스포츠의 역할을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송지원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 | 경향 2024.08.06.

 

윤석열의 1000대한민국은 감당할 수 있나

윤석열 대통령 임기가 이제 33개월 남았다. 날짜로는 1천일 어간이다. ‘3년은 너무 길다고 한 게 틀리지 않는다. 총선 뒤 야금야금 넉달이 흘렀는데, 아직 반환점도 안 돌았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말도 있다. 윤 대통령의 지난 120일을 보면, 이 또한 틀림이 없다. 지난 총선 민심은 윤 대통령의 무능과 전횡을 심판했다. 그러면서도 이른바 절대 의석’(200)을 범야권에 내주진 않았다. 윤 대통령에겐 대오각성과 환골탈태를 전제로 국정 운영의 시간을 더 준 셈이다.

실망스럽게도 윤 대통령은 이런 방향으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국민은 윤 정권의 국정 전반을 호되게 심판했는데, 윤 대통령은 국정 기조를 바꿀 기미조차 없다. 정치와 경제, 외교·안보 등 국정의 세 기둥 모두에서 오히려 수구 꼴통의 색채를 더욱 짙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오기와 불통의 국정 행태를 바꾼 것도 아니다. 19개월 만에 연 기자회견에선 국민이 가장 궁금해하는 채 상병 관련 격노설에 대해 동문서답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답변을 회피했다. 민심을 청취하겠다고 민정수석실을 신설하더니, 제일 먼저 한 건 김건희 여사 소환 조사 필요성을 주장하던 검찰 지휘 라인을 싹 걷어낸 일이었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변인을 지낸 후임 서울중앙지검장은 검사 핸드폰마저 반납한 채 출장 조사에 들어가는 검찰 치욕의 날을 연출했다. “예외도, 성역도 없게 조사하라는 현 검찰총장의 지시는 대놓고 무시했다. 김 여사 법률대리인은 검사 휴대전화에 폭발물이 설치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반납하는 게 맞았다고 했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임명 등 인사 행태에선 말기적 증상이 더 뚜렷해졌다. 이 위원장은 대전문화방송(MBC) 사장 시절 사표를 낸 당일 서울 강남구 단골 빵집에서 법인카드로 44만원을 결제하고, 2시간30분 뒤엔 대전 관사 인근 빵집에서 53만원을 또 결제했다. “회사 환경미화원들에게 줬다고 해명했지만, 실제 전달 여부는 불확실하다. 무엇보다 대전 직원 줄 빵을 왜 서울 자택 인근 빵집에서 사나. 일부에선 퇴직 뒤 회삿돈으로 두고두고 먹으려고 선결제해둔 게 아니냐고 의심한다. 이런 게 한둘이 아니다. 이 정도 의혹에도 해명이 불감당이면, 과거 보수 정권들은 대개 임명을 철회했다.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지금은 더 악다구니로 밀어붙인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지명과 민영삼 코바코(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임명도 마찬가지다. 둘 다 유튜브에서 극단적 막말을 퍼부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수층에서도 윤 대통령은 극우 유튜브 좀 그만 보라는 말이 나오지만, 마이동풍이다. 총선 참패 뒤 민심” “국민운운한 건 역시나 또 빈말이었다.

고집불통 국정을 하루하루 지켜보는 것도 괴롭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다 정말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니냐는 불길한 우려가 커진다는 사실이다. 하반기 세계 경제는 본격적 침체로 가는 기색이 역력하다. 가뜩이나 저조한 국내 주가는 직격탄을 맞고 요동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힘겨운데, 5차 중동전쟁 발발 가능성도 크다.

지난해 이미 최다 폐업 신기록을 세운 자영업자를 시작으로 국민 대다수의 삶이 휘청댈 수 있는 위기다. 이럴 때 국민이 기댈 건 정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자 감세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빼면 보여준 게 없는 윤 대통령이 폭풍우를 헤쳐나갈 능력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보수층조차 그렇게 믿는 비율은 극히 낮을 것이다.

국가 존망의 근간인 외교·안보 분야의 격동 가능성은 천일의 윤에 대한 불안을 더욱 증폭시킨다.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되면 동맹 외교는 파국을 맞을 수 있다. 카멀라 해리스가 되면 미·일 편중과 종속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어느 때보다 돌고래의 유연한 몸놀림이 요구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조선 후기 숭명사대도그마를 방불케 하는 원리주의 가치 외교에 포박돼 있다.

지금 박근혜 탄핵트라우마에 빠진 보수는 윤석열 보위만을 고집스레 외친다. 보수의 진짜 가치를 뒤로한 채 채 상병 수사 외압의혹마저 모른 체한다. 이제라도 뭐가 우선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무능한 대통령인가, 나라의 미래인가. 과연 남은 윤석열의 천일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손원제 | 논설위원 | 한겨레 2024.08.06.

 

위험한 음모론 전성시대

코로나19는 인종적으로 겨냥된 것이다. 코로나19에 백인과 흑인은 취약하고 유태인과 중국인들은 강하다.” ‘미국식 진보를 상징하는 존 F 케네디의 조카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는 세계를 공포로 몰고 갔던 코로나19가 백인과 흑인을 공격하기 위해 유포된 것이라는 충격적 음모론을 주장한다.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9·11 테러가 미국 정부가 계획한 것이라는 주장부터 드루킹 사건으로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진보정치의 아이콘 노회찬 의원이 타살당한 것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음모론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건으로 득을 본 사람이 그 사건을 몰래 일으킨 것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총선에서 이승만은 참패해 정치생명이 끝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전쟁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이 같은 사실에 기초해 생겨난 것이 이승만이 정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북을 선제공격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북침설’ ‘남침 유도설이다.

최근 우리가 음모론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 때문이다. 김 전 의장은 회고록에서 이태원 참사 두 달 뒤인 202212월 국가조찬기도회를 계기로 윤석열 대통령과 독대했는데 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가 특정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이 그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반발했다. 그러자 당시 원내대표였던 박홍근 의원이 김 전 국회의장이 윤 대통령 독대 후 자신에게 윤 대통령의 말을 전했는데 그 내용이 하도 충격적이라 메모 해뒀다고 폭로했다. 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KBS, MBC, JTBC 등 좌파언론들이 사고 2~3일 전부터 사람들이 몰리도록 유도한 방송을 내보낸 이유도 의혹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실 비판처럼, 김 전 의장이 윤 대통령과 독대를 요청해 나눈 이야기를 공개하는 게 올바른 일인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국민 일반의 눈높이가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극단적인 소수의견이 보고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전하려는 취지였다는 김 전 의장의 해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또 국회의장까지 지낸 사람이 윤 대통령이 전혀 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 원내대표에게 이야기하고 회고록에 썼겠는가?

파장이 커지자, 김 전 의장은 회고록 2쇄본에서 윤 대통령이 그 같은 극단적 주장까지 있다고 전해들었다고 말한 것으로 수정했다. 대통령 자신이 음모론에 경도된 것 같은 뉘앙스에서 한발 후퇴한 것이다. 설사 수정된 내용처럼 윤 대통령 자신이 음모론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 그 같은 극단적 견해까지 있다고 보고를 받은 것에 불과하더라도, 대통령 주변에 이 같은 황당한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심각한 문제다.

음모론은 언제나 있어왔다. 하지만 요즘처럼 음모론이 기승을 부린 적은 없다. 예를 들어, 미국 유권자 3명 중 한 명이 부정투표 덕으로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를 이겼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왜 최근 들어 음모론이 이처럼 기승을 부리느냐는 것이다. 음모론 전문가들은 현대사회의 두 가지 특징에 주목한다. 첫째, 정치적 양극화다. 정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상대방에 대한 공격은 그것이 아무리 황당한 음모론이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추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화당 지지자일수록 2020년 대선에서 부정선거로 바이든이 이겼다는 음모론을 믿는다. 또 다른 특징은 인터넷,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이다. 전통적인 매체에서는 당연히 걸러질 황당한 주장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는 별 제재 없이 제멋대로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선정적일수록 구독자들이 늘어나는 유튜브의 상업성도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는 원인이다.

무서운 것은 이 같은 음모론이 지지자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잘 보여주듯이, 많은 정치인들이나 정치세력들이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지지자 동원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음모론 전문가인 캐서린 옴스테드의 책 제목처럼, ‘현대 민주주의의 진짜 적은 음모론과 가짜뉴스.

음모론을 규제한다고 그 주요 통로인 인터넷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정치권이 음모론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통합의 정치를 통해 정치적 양극화를 줄이는 것이 음모론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을 막는 길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 경향 2024.08.07.

 

사도광산 굴욕, 윤석열 정부는 역사를 포기했다

세계유산 문제는 역사전쟁이나 마찬가지.’ 일본 우익 정치단체가 2022년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로 추천하라며 기시다 정부를 압박할 때 썼던 표현이다. 식민지 시기 1500여명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고통의 장소인 사도광산이 피해국 한국의 동의 없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가해의 역사를 인정할 여지도 크지 않았다. 이 모순 속 일본 내부에서도 안 될 텐데 왜 하냐?’는 회의론이 상당했다. 그러나 사도광산은 지난달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가해국이 역사전쟁에서 이긴 과정은 피해국, 정확히는 윤석열 정부가 외교와 역사를 포기한 과정이었다.

사도광산 쟁점은 한·일 과거사 쟁점 전체를 통틀어 한국이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했던 사건이었다.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한국은 피해국 지위를 넘어 투표권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일본은 2007년 이후 근대산업 시설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는데, 그중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던 시설이 있었다. 첫번째가 2015년에 등재된 군함도(하시마섬)였다. 일본은 등재 과정에서 한국인 등이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가혹한 조건 속 강제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했고, ‘희생자 추모 시설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겨우 등재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기 중요한 성과였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등재 이후 5년이 지난 2020년이 되어서야 산업유산정보센터라는 이름의 전시시설이 겨우 설치됐다. 사전 신청 없이는 입장할 수 없고, 내부 촬영도 금지된 폐쇄적인 시설이었다. 무엇보다 전시 내용에 노골적인 역사 왜곡이 가득했다. 유네스코는 일본이 약속을 어긴 것에 강한 유감을 반복적으로 표명했다. 반면 한국은 2023년 만장일치로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되는 구조 속 투표권을 가진 위원국이 되었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바탕으로 한국은 역사에 눈감고 있는 일본에 그러지 마시라며 설득하고, ‘고통의 역사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보편적 가치를 세계에 상기시킬 수 있었다. 결과는? 2015년 군함도 때보다 훨씬 후퇴해, 사실상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실은 일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얻어냈다고 말하지만, 거짓말에 가깝다. 외교를 포기해놓고, 외교를 했다는 거짓말 말이다.

윤석열 정부는 역사를 포기했다. 사도광산 등재 과정에서 한국은 세가지를 요구했어야 한다. 첫번째는 2015년의 약속을 온전히, 제대로 이행하겠다는 약속이다. 두번째로는 사도광산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입장 표명이다. ‘조선반도에서 온 근로자들이 여기서 고생했다와 같이 맥락을 삭제한 교묘한 왜곡이 아니라, 2015년 군함도 등재 시 한국 정부가 요구해 일본 정부가 확인한 강제동원(강제노동) 사실이 분명히 포함된 입장 표명이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군함도의 뒤통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세계유산 지역 내부, ‘강제동원사실이 명시된 전시시설의, ‘즉각적인 설치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세가지 중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첫번째, 두번째는 전혀 없었다. ‘일본 정부 기존 약속들 명심’, ‘한국인 노동자 추모와 같은 힘없는 수사들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세번째의 경우 얕은 속임수로 본질을 가렸다. 윤석열 정부는 희생자 전시 조치가 사전에 이행되었다 목소리를 높인다. 성과라는 거다. 그런가? 세계유산 지역에서 2떨어진, 이미 존재하던 향토박물관 한구석에 강제동원 관련 명시적 표현은 단 한 단어도 없는 전시물이 급조되었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사도광산 유산 지역 내에 최신식 전시공간이 신설되었지만, 정작 그 시설에는 조선인 강제동원 내용이 없다. 군함도 때는 모르고 속았다면, 사도광산 때는 알고도 속고 있다.

피해국이 외교와 역사를 포기했을 때 비극은 피해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심사의 핵심적 기준 중 하나는 전체 역사이다. 긍정의 역사뿐만 아니라 부정과 반성의 역사까지 온전히 담겨야만 세계인들과 나눌 유산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기억해야만 인류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이 보편적 가치가 사도광산에서 훼손되었다. 피해국이 역사전쟁에서 지는 것은, 그래서 모두의 비극이다.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 한겨레 2024.08.07.

 

이재명의 민주당’, 이 지독한 균열 앞에서

처음에서 다음으로 가는 길엔 균열이 있게 마련이다. 다음, 그 다음은 진화와 후퇴를 거듭해야 다다르게 된다. 진화하기 보다 때로 바닥으로 가거나 후퇴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바닥은 뭐든 받아내고 힘이 세다. 넘어지면 바닥을 짚고 일어서야 하고, 씨앗도 바닥에서부터 자란다. 진화의 역행이라는 균열을 이겨내기 위해선 성찰이 필요하다. 이 때 성찰은 바닥의 힘을 믿는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송기원 만큼 균열과 성찰에 한 생애를 던진 이가 있을까. 특히 시는 그 인생의 가장 뜨거운 불길이었다.

청춘의 한때 그의 첫 시집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를 끼고 다녔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유신잔당 장례식을 주도했고, 그 때문에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그였다. 군부독재의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체중 30를 앗아간 고문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적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시는 김남주와 같은 투사의 언어가 아니었다. 탐미적이었다. “어머니 동이 트는 능선마다 달려오는 눈부신 새벽의 사람들을 위하여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편지’)라고 한 것처럼. 그의 동료들은 그의 절규를 굴절된 역사를 사는 사람의 도리, 어떤 순간엔 시인도 들고일어나야 한다는 걸 아는 순수함이라고 했다. 그는 격정과 섬세함 사이의 균열을 딛고 우리에게 첫 말을 건넸다.

두 번째 시집 <마음 속 붉은 꽃잎>은 낯설었다. 뒷골목 인생들과 함께 한 술 때 묻은 시가 많았다. 민중의 울타리에서조차 배제된 그들에게 말하기 보다 그들의 말을 듣는 데 집중했다. “징허제만 겔국은 여그가 바로 나를 밥 믹에 살레준 덴께. 이 나이가 된께 손님들도 모다 남 같지가 않어라우.” 남도 항구 한 늙은 성매매 여성의 말에서 그는 자신을 만났다고 했다. 세상 아랫단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았고, 그토록 저주했던 자기 운명도 위로받았다는 고백이다. 혐오와 화해의 균열 속에서 자기 구원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균열은 끝나지 않았다. 짦은 시어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서사 때문일지 모르겠다. 4번의 옥고, 빨갱이 아들을 뒀다는 낙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 백혈병으로 먼저 떠난 딸. 그래서 그는 소설을 썼다. 그의 문학이 어머니의 무덤으로부터 시작됐음을 알린 <다시 월문리에서>, 죽은 딸의 유골을 안고 49일을 떠돌다 딸의 영혼과 화해하는 <>을 통해 그는 그토록 혐오했던 자신의 삶과 화해할 수 있었다.

막바지 전당대회에 이른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전 대표를 보며 균열과 성찰의 길을 생각한다. 이재명의 처음은 생존과 인정 투쟁이었다. 민주당은 이재명적인 것보다 민주당적인 것이 더 강했다. 하지만 총선 전후 달라졌다. 사당화, 패권주의, 팬덤 정치, 당심·민심 괴리와 같은 어두운 균열이 민주당을 휘젓고 있다. 민주당이 민주당답게 강해지려면 통합, 열린 리더십, 다원주의, 당심·민심 동행이 더 낫단 걸 이 전 대표도 민주당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발길은 이재명의 민주당을 향하는 것 같다. 최근 만난 인사들의 말을 대충만 추려 봐도 당내에서 이런 징후가 현실화하는 분위기다. “처음 보는 이 전 대표 측 젊은 친구가 내 거주지를 묻더니 지방선거에서 OO시장 나갈 생각 없냐고 묻더라”(전직 고위 당직자), “지도부가 최근 총선기여도 평가위원회를 만들었다. 지방선거에 내보낼 복당 결격 사유자가 있는 것 같다”(고참 보좌관)라고 했다.

전대는 당 간판뿐 아니라 당 깃발을 확정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강령이 당 깃발이다. 예년 전대에선 신강령기초위원회 같은 기구에서 개정할 강령을 논의·확정한 뒤 지역 전대 때마다 소개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번엔 이런 절차를 생략하고 논란이 가라앉지 않은 이재명 어젠다를 막판에 부랴부랴 강령으로 채택했다.

성공한 야당 대표들은 미래를 말하면서 국민과 함께 갔고, 국민은 야당 대표의 이런 리더십을 보며 차기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4대 강국 안보 통일외교론을 설파하며 수권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 전 대표는이재명의 민주당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서민과 중산층 정당의 품을 얼마나 넓힐 건지, 민주당답게 강해지는 길이 무엇인지, 이를 위해 스스로 어떻게 변할 건지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있다. 최고위원 후보군 낙점에서 보듯 오히려 당권 강화에 신경 쓰고 있다. 일부에선 이 전 대표를 대통령이 되면 잘할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력 대선주자인 이상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잘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 전 대표는 헤아려야 한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결코 민주당의 균열을 치유하는 성찰이 될 수 없다. 대선에 특화된 국민의힘을 이길 수도 없다.

송기원은 격동의 시대를 서정의 힘으로 견뎠고 가장 낮은 사람들을 품으며 고통스런 개인사를 치유했다. 생전 입버릇처럼 아직 가깝고도 먼 세상길을 헤맨다고 했지만 스스로를 괴롭혔던 균열의 본질을 알았고, 성찰의 노력을 다했기에 지상의 마지막 인간으로 설 수 있었다. 이 춥고 긴 겨울을 뒤척이는 정치의 균열을, 언살이 터지도록 성찰한 이재명과 민주당의 다음을 기다린다.

구혜영 정치부문장 | 경향 2024.08.07.

 

기업 가치를 훼손하는 대기업 지속가능보고서

기업이 이해관계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외부에 공개하는 자료는 재무제표와 지속가능보고서 두 가지다. 재무제표는 사업 활동의 사후 결과를 숫자로 환산해서 발표하는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 같은 자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 활동은 사전 대비가 중요해졌다. 대표적인 게 기후변화로 인한 예측 불가능한 피해와 양극화 심화로 인한 공급망 리스크다. 이러한 위기를 사전에 대비하기 위해 유엔은 2015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제정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이 환경(E), 사회(S), 지배구조(G) 사항을 포함한 리스크 대비 현황을 알려주는 게 지속가능보고서다.

경영 리스크가 심해짐에 따라 이해관계자들은 의사 결정 시 재무제표보다 지속가능보고서를 중시하게 됐다. 보고서의 많은 내용 중 핵심은 기후위기 대응과 협력사와의 상생 데이터다. 이런 데이터는 최소한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트렌드 분석이 가능토록 10년 이상 장기 시계열 자료를 제공하고, 협력회사와의 비교 데이터를 세부자료(fact book)로 공개하고, 계획 연도에 달성할 목표(Goal)와 현재 수준의 차이를 보여줘야 한다.

이러한 기준으로 최근에 발표한 우리나라 5대 그룹 대표 회사의 2023(실적) 지속가능보고서를 전년도와 비교·분석했다. 결과적으로 세 가지 요건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상대적으로 데이터 공개에 성의를 보이고 있다. 주요 항목에 대해 모바일·가전(DX) 부문과 반도체(DS) 부문을 구분했다. 재생에너지 사용 실적은 DX부문이 93.4%를 달성했다. 한국의 수원 사업장은 2022년에 100% 달성했다. 해외도 미국과 유럽은 2020년에 100%, 인도·베트남·중국은 2022년에 100% 달성했다. DS 부문의 경우 미국과 중국은 2020년에 100% 달성했으나, 한국은 20232.8GWh를 사용했다고 표기하면서 구체적인 달성도(%)는 공개하지 않았다. 문제는 국내외 이해관계자가 삼성전자 한국반도체공장의 재생에너지 달성률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부의 전력산업 정책에 크게 좌우되지만, 먼저 현실의 장애 요인을 공개해서 정부와 이해관계자의 협조를 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데이터 공개도 삼성전자가 비교적 앞서고 있다. 장애인 고용률이 법적 기준(3.1%)에는 미달하지만 2022년보다 200명을 추가 고용하여 1.6%에서 1.8%로 개선했다고 표기했다. 2022년 보고서에서 약속한 발달장애인 특성에 적합한 자회사형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세워서 지속 가능한 일자리 창출을 꾸준히 하겠다는 점이 실천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협력회사 관련 데이터도 1, 2·3차 협력회사로 세분해 발표하고 있다. 특히 2023년에는 근로시간, 임금 및 복리후생을 포함한 36개 주요 항목에 대해서는 1, 2차 협력회사로 세분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정도나마 협력회사 관련 자료를 공개한 곳은 삼성전자뿐이다.

반면 10년 이상 장기 시계열 데이터의 경우, 2022년 삼성전자가 유일하게 국내 사업장 남녀 성별 임금 격차가 좁혀지고 있음을 제시했다. 그러나 2023년에는 이를 전년보다 소폭 늘어난 24.2%라는 표기로 갈음했다. 이와 별도로 2013·2018·2023년 여성 리더 증가 현황을 소개하고, 2030년까지 여성 임원 비중을 2022년 대비 2배 이상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공개했다.

현대자동차는 사업 특성상 자동차 대당각종 지표는 비교적 충실히 발표하고 있다. 장애인 고용률도 2.5%라고 성실히 공개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들이 걱정하는 공급망 관리의 핵심인 협력회사 관련 구체적 데이터가 없다. 기후·환경 관련 데이터도 걱정이다.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RE100)이 체코·인도네시아 공장은 100%, 튀르키예 68%, 인도 59%, 브라질 41%라고 공개했다. 그러나 자동차 생산의 45%를 차지하는 국내 공장은 데이터 공개를 못하고 있다. 또한 온실가스 감축량은 자동차 사업장의 경우 203045%, 203560% 감축 목표를 제시했다. 이보다 배출량이 10배나 되는 공급망 감축203010% 이상 감축, 203540% 감축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로드맵은 아직 공개가 안 되고 있다. 이 또한 정부의 전력산업 정책 변화와 철강산업 지원 의지가 중요하므로 장애 요인을 이해관계자와 공유할 필요가 있다.

SK하이닉스는 유일하게 28개 항목에 대해 2020년 대비 2030년 개선 목표를 제시한 후, 매년 달성도를 점검하고 다음해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속가능보고서가 갖춰야 할 매우 중요한 요건이다. 그러나 국내 사업장 RE100 달성은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SK그룹 차원에서 상생과 사회적 가치 창출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도 협력회사 관련 데이터는 없다.

포스코(철강)는 비전으로 그린스틸로 세상의 가치를 더합니다를 제시했다. 그린스틸을 향한 다양한 계획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데이터는 의문을 갖게 하거나 공개가 안 되고 있다. 쇳물 생산 t당 이산화탄소 배출량(tCOe/ton)20222.05에서 20232.02로 개선됐다. 그러나 총에너지 집약도(GJ/ton)20229.8에서 20239.9로 악화됐다.

LG화학도 2022년 보고서보다 개선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장애인 고용도 최근 3년 변화가 없고 고용률(1.7%)은 여전히 표기를 하지 않고 있다. 여기도 협력회사 관련 데이터는 없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위기와 공급망 리스크가 대두되는데, 대다수 기업들이 관련 데이터 공개를 못하고 있다. 보고서에 비전과 미래 약속은 장밋빛으로 해놓고 관련 데이터는 너무 빈약하다. 침소봉대가 심하고 교묘히 단위를 바꾸기도 한다. 일부 기업은 그린워싱으로 망신을 자초하기도 한다. 이해관계자들이 정보 비대칭에 갇힐수록 그 기업의 장기적인 변화 대응 능력과 자정 능력은 상실된다. 이런 게 기업 가치 훼손이고 코리안 디스카운트다.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 | 경향 2024.08.08.

 

방통위 사태의 재구성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사실상 무법천지로 전락하였다. 방통위원장 국무회의 배제를 시작으로 장기간의 표적 감사와 수사가 이어지는 한편 위원장과 위원의 해임과 임명이 오로지 대통령의 자의적 인사권 행사로 점철되면서 헌법과 법률에 따른 정상적 조직 구성을 갖춘 적이 없다. 방통위원 정원이 자의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채, 위원장 대행체제나 2인 체제라는 위법적 조건에서 YTN의 민영화나 KBS·MBC의 지배구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처분이 적법절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전 치르듯 이루어져 왔다. 현재는 세 번째 임명된 이진숙 위원장이 국회의 탄핵소추를 받아 권한행사가 중지된 2인체제이며, 이 사태를 제도적으로 개선할 방통위법 개정안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표류하고 있다.

방통위법의 입법목적은 방송의 자유와 공공성 및 공익성을 높이고 방통위의 독립적 운영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실 방송의 자유와 공공성 및 공익성의 보장은 헌법이 국가의 존립 이유로 설정한 기본권 보장 의무의 핵심요소다. 헌법상 방송의 자유는 개인의 의사표현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 민주적 정치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공론장을 형성하는 특별한 역할이 있다. 거대복합사회에서 방송 없는 표현의 자유는 파편적이고 공허한 기본권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성과 공정성이 최대한 확보될 수 있는 공론장을 형성할 수 있도록 방송을 비롯한 언론매체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적극적으로 보장할 헌법적 의무를 진다.

방통위법은 이러한 헌법적 역할을 수행할 기관으로 방통위를 설립하고 그 독립적운영을 최고 가치로 설정하였다. 헌법이 국가에 명령한 방송 자유의 실질적 보장 조건인 방송의 다양성 원칙과 공정성 의무를 실현하기 위해선 방송규제기관 자체가 대통령 등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되는 게 필수이기 때문이다. 방통위법은 방송 기본계획 수립과 KBS 및 방문진 임원 임명 등 방송사 지배구조 구성에 관한 사항 등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행정감독을 받지 않도록 방송행정의 독립성 보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독립성 원칙이 무색하게 대통령의 인사권이 오남용되었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안다. 대통령과 유착된 사람들을 차례로 위원장과 위원으로 임명하고 야당 추천은 무시하면서 오직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정파화하는 데 몰두해온 것은 헌법과 법률을 반복적으로 중대하게 위반한 것이다.

또한 방통위법은 독립성을 실현할 최적의 방식으로 합의제 기관의 조직형태를 채택하였다. 독임제의 방식으로는 다양성과 공정성 및 독립성의 원칙을 감당하기에 취약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비교법적 연구들은 수평적 지위에서 의결의 권한을 가지는 최소 3인 이상의 위원으로 구성되고 운영되는 것이 로마법 이래 합의제조직의 본질적인 특성임을 확인하고 있다. 방통위법에서 위원회 의결정족수를 재적 과반수로 정하고 있는 의미는 이러한 합의제 기관구성의 일반원칙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5인 중 3인을 채우지 못한 위원회의 행정처분은 명백한 위법이다.

나아가 방통위법은 합의제 기관의 구성을 철저히 정당 중심 다원주의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결단하였다. 위원 5인 중 위원장을 포함한 2인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되, 국회 추천은 여당 1, 야당 2인이 추천하는 방식이다. 대통령의 독자적 임명권은 재량이지만 정당 추천의 경우는 재량이 인정되지 않는 형식적 권한이므로 대통령은 이러한 방통위법을 지킬 법적 의무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러한 법적 의무를 다하지 않고 야당추천위원의 임명을 악의적으로 지체하면서 인사권을 선택적으로 행사함으로써 방통위의 위법사태를 유도하였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현재 방통위법 개정안이 표류하면서 야당이 추천권을 행사하지 않아 결원이 생긴 경우라도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별론으로 하고 야당 추천위원을 포함하여 최소 3인을 채우지 못한 방통위의 결정은 그 자체로 위법하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탄핵소추 직전 MBC 감독권을 가진 방문진 이사를 임명한 방통위원장의 처분에 대한 집행정지신청이 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속보가 전해졌다. 향후 본안에서도 방통위의 무법천지가 사법적 통제를 받을 것이다. 계류 중인 탄핵심판에서도 악의적으로 위헌·위법의 공권력을 행사한 방통위원장에게 헌법과 법률에 따른 지배가 이 땅에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준엄한 심판이 내려질 것으로 믿는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경향 2024.08.08.

 

야비한 권력자들의 아레나, 대한민국

8일 새벽 올림픽 태권도 58결승전에서 박태준은 부상당한 상대 선수가 고통스러워할 때마다 다가가 살폈고 승리가 확정되자 기뻐하기 전에 위로부터 건넸다. 신유빈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하고도 상대 선수를 먼저 안아줬다. 피 말리는 결승전에서 패한 미국 양궁 선수가 승자 김우진의 손을 번쩍 들어올린 장면도 인상 깊었다. 이런 행동은 경기 규칙에 규정된 게 아니라 선수의 스포츠맨십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더 품격 있다. 규칙 너머 규칙인 스포츠맨십이야말로 스포츠를 완성한다.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도 다르지 않다.

정치인, 언론인, 일반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통신조회한 게 드러나자 검찰은 적법한 수사라고 반박한다. ‘적법이란 단어를 명문상 법 규정을 위반하지 않음으로 해석한다면 맞는 말이다(, 30일 이내에 당사자에게 통보해줘야 한다는 규정을 어긴 부분은 불법 여지가 커 보인다). 통신조회는 법에서 허용한 수사 방식이다. 그러나 이를 너무도 잘 아는 윤석열 대통령은 왜 후보 시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통신조회에 대해 미친 사람들”, “게슈타포나 할 일이라며 흥분했을까.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형사사법절차는 비례성이라는 대원칙이 지배한다. 수사로 달성하려는 공익적 가치와 수사로 침해되는 시민의 권리를 저울에 올렸을 때 최소한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번 통신조회는 윤 대통령 명예훼손 수사가 목적인데, 이것이 시민 수천명의 통신조회를 정당화할 만한 사안이라고 여길 사람이 윤 대통령 말고 몇이나 되겠나. 아니, 윤 대통령조차도 자신의 과거 발언을 기억한다면 차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검찰이 형식적으로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핑계로 이를 정당화하려 한다면, 대안은 통신조회를 엄격히 제한하는 규정을 명문화하는 것뿐이다.

규칙 너머 규칙을 위반한 더 극명한 사례는 김건희 여사 황제조사.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제반 규정에 따라 진행한 것이라고 했다. 조사 방식, 시기, 장소 등은 검찰의 재량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너무도 잘 아는 이원석 검찰총장이 법 앞에 예외도 특혜도 성역도 없다고 말씀드렸으나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사과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공정성이라는 형사사법절차의 대원칙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검사 출신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특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이런 식의 수사를 규정을 따랐다는 이유로 정당화하려 한다면, 대안은 초등학생 지도하듯 비공개 출장조사를 하지 말라거나 검사가 휴대전화를 뺏긴 채 조사해서는 안 된다는 따위의 규정을 일일이 명문화하는 것이다.

법은 이렇게 하라는 의무와 이런 건 하지 말라는 금지를 규정하지만, 그 사이에는 규정되지 않는 무한대의 여백이 남기 마련이다. 재량의 영역이다. 그러나 마냥 회색의 지대는 아니다. 공정성·비례성 같은 더 큰 원칙들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원칙을 내던지고 회색 지대의 허점을 틈타 잇속을 챙기는 건 모사꾼들이 하는 짓이다. 그런데 국가기관마저 그런 행태를 대수롭지 않게 따라 하는 게 현 정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법상 방송통신위원회는 5명의 상임위원으로 구성되며, 이 가운데 2명은 야당이 추천한다. 방송의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방통위는 대통령이 임명한 2명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법은 의결정족수를 출석위원이 아닌 재적위원 과반수로 정하고 있다. 소수의 독단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재적위원을 아예 2명으로 줄여놓고 독단적 운영을 법에 맞춰하고 있다. 의결정족수를 숫자로 못박지 않은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꼼수를 막도록 의결정족수를 4명으로 명시한 방통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다. ‘김건희 특검법을 포함해 역대 가장 많은 15건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헌법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체적 사유를 명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입법부·행정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리가 이 여백을 지배한다. 입법부가 명백히 부당한 법률을 제정하려는 경우에만 거부권을 사용해야 한다. 특히 김건희 특검법의 경우 죄지었으니까 특검 거부하는 것이라던 자신의 말에 비춰보면 윤 대통령은 거부할 명분이 전혀 없었다. 헌법에 제한 사유가 없으니 내키는 대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것만큼 천박하고 반민주적인 사고도 없다. 헌법에 대통령 부인 특검법은 거부권의 예외로 한다는 조항이라도 넣어야 한단 말인가.

법의 회색 지대에 숨어 법의 본령인 민주주의와 정의, 인권을 유린하는 야비한 권력의 아레나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박용현 | 논설위원 | 한겨레 2024.08.08.

 

반복되는 단독처리거부권 행사그들이 사생결단 하는 까닭

우리 정치의 부끄러운 자화상들

여야의 기약 없는 쟁투는 이미 건강한 여야의 긴장, 반대가 아니다. 지방선거는 2, 대선은 아직도 3년 가까이 남았는데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검투장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적대를 넘는 적개, 상습화된 반목, 일상이 된 인신공격과 매도가 한국정치의 현주소다.

이건 정치가 아니다. 정치의 허울을 쓴 사적이익 탐닉의 장()에 다름 아니다. 정치에는 최소한의 금도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정치의 질이 낮다고 비판을 받아왔지만 그래도 타협이 있었고 배려도 있었다.

'적과의 동침'이 살아있었던 게 한국정치다. 상호관용과 존중이라는 거창한 원칙이 아니더라도, 제도의 자제와 상호 배려의 규범을 준수하자는 도덕 교과서 같은 말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정치를 운용하는 상도(常道)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러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야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다. '적대적 공생'이라는 한국정치의 공식이 이제 편하고 안온하게 느껴질 뿐이다.

상대에 대한 극한의 발언과 극단적 인식을 드러내는 게 공천에도 유리하고 언론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도 유리하다. 품격 있는 발언은 짐이 될 뿐이다. 국회의원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구조가 되고 전설이 된 한국정치이기 때문이다.

적대 정치가 국회의원 개개인의 안위에 별 영향도 주지 않는다. 당 지도부에 잘 보이고 지역구에 부지런히 얼굴 알리면 될 일이다. 역사의식과 이래선 안 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 따위는 별로 득이 되지 않는다. 강성 지지층에게 욕만 먹고 문자폭탄 받기 일쑤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보수와 각종 특혜, 9명의 비서들, 보장된 4년 임기.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의 상층으로 발돋움한다. 이쯤되면 국회의원은 사생결단하고 쟁취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라디오, TV, 유튜브, SNS 등 자신을 알릴 무수히 많은 매체들을 통하여 특정 정파에 대해 가시 돋친 독설과 저급한 엽기적 발언을 하면 주목을 받고, 또 그래서 방송 섭외 1순위가 된다. 좋든 나쁘든 인지도가 치솟고, 선거 때가 되면 특정 정파의 '인재영입 1순위'가 된다. 지역구가 아니라도 비례대표라는 안락한 자리가 기다린다.

배지를 달면 보은해야 한다. 원내 입성 전에는 나름 품격을 갖췄던 인사가, 국회의원이 되면 어울리지 않는 비난과 혐오를 쏟아낸다. 그러다 정치 입문 한 달 만에 일약 지도부가 될 수도 있다. 강성 지지층이 주목하기 때문이다.

나름 염치와 양식이 있어서 극단적 발언은 삼가고, 논리와 합리, 이성과 품위를 갖추려하면 여지없이 뒷방 신세가 된다. 중도층은 없다. 양극단에 위치해야 생존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다.

이슈는 수도 없이 쏟아진다. 이 중 얼마나 시민의 생활과 관련이 있을까. 이를 위해 그 많은 세비를 받고 9명의 보좌를 받는 건가.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 좋은 의원회관에서 4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반정치'를 강화시킨다. 그 베이스캠프가 여의도에 똬리 틀고 있다. 매일이 바쁘다. 각자의 인생과 삶을 위해 모두는 바쁘다. 그러나 선출된 자들은 조금은 공적인 업무로 바쁘고 고민해야 한다.

사법리스크, 해병대원 순직 사건 외압 의혹과 특검, 여사 특검, 여당 대표 특검, 방송관련법 들. 하나같이 사활적(fatal)이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당사자들이 아닌 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자신의 충성과 실력을 보일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민생은 어차피 이들에게 영역 밖이다. 민생을 논하고 자기성찰을 보이면 오히려 차기 공천이 위험해 질 수 있는 역설이 작동하는 게 한국정치 아니었던가.

독재 대 반독재의 권위주의 시절 때도 이러진 않았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가. 여당과 협의 없는 야당 단독 법안 통과,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 양당의 비난 성명, 그리도 국회 재표결, 다시 부결. 전범(典範)이 되다시피 한 '정치'라고 일컫는 행태의 작위들.

누군가는 이 고리를 끊는 과감한 행동과 선언을 해야 한다. 자기를 버리는 자가 이긴다. 이순신 장군의 말이다. 장부생세 용즉효사이충 불용즉 경야족의 약미요인 절부영 오치야(丈夫生世 用則效死以忠 不用則耕野足矣 若媚要人 竊浮榮 吾恥也. 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임을 받으면 충성을 다 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를 지어도 족하다. 만약 힘 있는 자에게 아부하여 뜬 영화를 탐낸다면 부끄러울 뿐이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 프레시안 2024.08.09.

 

"대통령 부부가 둘 다 너무 이상해요"

이상함을 넘어 '기이함'으로 진화하는 부부

윤석열 대통령 부부는 참 이상하다.

지난 4월 국민의힘 여의도연구원이 주최한 총선 패배 원인 분석 토론회에서 김종혁 당 조직부총장(현 국민의힘 최고위원)"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의 PI가 완전히 망했다""대통령이 격노한다고 나가면 그걸 보는 국민이 행복하겠나"라고 말했다.

지난 총선 패배의 제 1요인이 윤석열 대통령이라는 데에는, 이른바 '친윤' 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 PI(President Identity, 최고경영자 정체성)는 정치인, 기업CEO 등 인물에 초점을 맞춰 회사나 단체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긍정적인 최고 지도자 이미지를 통해 기업 이미지를 개선하고 소비자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켜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등 유명 CEO들은 자신의 캐릭터나 메시지, 활동을 통해 기업 이미지를 구축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스스로 평생 구축한 PI를 통해 미국 대통령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종합 엔터테이너다. '리더'들의 이미지가 마케팅이 되고 그 마케팅은 조직 홍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 투자자의 77.7%CEO를 보고 투자를 결정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최악의 PI 실패 사례는 이마트의 오너 정용진의 '멸공' PI가 아닐까 싶다. 유통업계의 큰손인 그가 감자밭을 방문하거나 백종원과 같은 셀럽들과 관계를 과시할 땐 호감도가 상승할 수 있지만, 갑자기 SNS로 중국 공산당을 비난하면 PI를 담당하는 참모들은 물론, 이마트 종사자들이나 주주들, 중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신세계그룹 담당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제대로 된 참모라면 옆에서 말렸겠지만, 스스로 '전문가'라고 생각하거나, 본인 스타일이 '안하무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완전히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 정치인은 그 메시지와 상징성의 총합으로 자신이 이끄는 정당이나 국가의 브랜드 가치를 홍보한다. PI 전략에서 중요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은 긍정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보완하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가 넘친다 싶으면 덜어내고, 장점이 묻힌다 싶으면 보강해야 한다. 일관성'도 중요하다.

윤 대통령의 PI가 완전히 망했다고 한다. '윤석열'이라는 리더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가 자주 쓰는 말, 손짓 하나, 옷차림, 걸음걸이, 먹는 음식, 시선처리, 목소리, 사소한 습관들은 메시지가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행동이다. 리더는 어떤 결정과 행동을 함으로써 메시지를 전하고 그것을 유권자들의 동의와 지지로 이어지도록 만든다. 특히 참모들은 리더의 PI 구축을 위해 방문 장소(장소에 담긴 메시지)와 그 장소에 적합한 메시지를 고려해야 하고, 어떤 메시지를 부각시킬지, 어떤 메시지를 감출지 정교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완전히 망한' PI 마케팅 사례는 셀 수가 없다. '격노'의 아이콘이랄지, '술꾼'의 이미지랄지 하는 것들이다. 특히 유수의 언론인들이 점잖은 칼럼으로 수차례 '술을 멀리하라' 조언해도 듣지 않고 여당 행사장에서 맥주를 돌리면서 스스로 강화하는 '술꾼'의 이미지는 국정 운영 모든 사안에 ''으로 들러붙는 고약한 PI 실패 사례로 꼽힌다.

이런 PI는 그나마 개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이상하긴 해도 우리 주변에 있는 친근(?)한 이미지들이어서다. 그런데 개선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PI들이 있다. 이른바 '내로남불의 덫'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들인데, 대중은 공정하다 믿은 리더가 공정하지 않다는 걸 발견했을 때 두 배로 실망하게 된다. 이럴 땐 리더도, 대중도 '인지 부조화' 현상에 빠져든다.

PI 전략은 정교해야 한다. 기계처럼 '긍정적 이미지'를 쫓다간 또 망할 수가 있다. 소위 '미담으로 망하는' 사례다. 이를테면 윤석열 검사가 '국정원 댓글 사건'의 부당한 수사 개입에 항의하고,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할 때 일선 검찰청을 방문해 검사들을 격려하면 '정의와 공정'PI가 강화되지만, '채상병 사건'의 부당한 수사 개입의 주요 용의자가 된 후 해병대 부대를 찾아 사진을 찍으면 "거기가 어디라고 감히"라는 반응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이명박이 '가훈이 정직'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나, 박근혜가 최순실과의 우정을 '순수한 마음'으로 포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다음 사례는 '미담으로 망하는' 전형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대통령실은 7"대통령, 진해 해군기지서 휴가보내며 해군·해병 장병 격려"라는 제목의 브리핑 자료를 배포했다.

"대통령은 오늘(7) 오후 해군 및 해병대 장병들과 농구, 족구 등 다양한 체육 활동을 하며 단합을 다졌습니다. 대통령이 진해기지사령부 체육관에 들어서자 해군 장병 30여 명이 "필승"을 외치며 환영했고, 대통령은 장병 한명 한명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수고가 많다"고 격려했습니다.

대통령의 점프볼로 장병들의 농구 경기가 시작됐고, 경기를 관람하던 대통령은 경기 쉬는 시간 동안 자유투 라인에서 슛에 도전했습니다. 대통령이 첫 슛에 실패하자 장병들은 "한번 더!"를 외쳤고, 그 응원에 힘입어 다시 한번 슛에 도전했습니다. 대통령이 세 번째에 슛을 성공한 데 이어, 5번째, 마지막인 6번째 슛도 연달아 성공하자 다 함께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했습니다."

'대대 축구대회에서 대대장이 해트트릭을 기록하시었다'는 느낌의 이런 브리핑 자료는 참모들의 '과잉 충성'의 발로인지 모르겠으나, 대통령의 PI 구축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예시 자료로 소중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런데 브리핑 자료의 다음 부분에서는 '이상함'을 넘어 '기괴함'을 느끼게 된다.

"(해군 관계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해병대 장교는 "지난 20년 군 생활 동안 지금처럼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제복 입은 군인을 기억하고 대우해 준 점에 깊이 감사드린다""나가자, 해병대. 나가자, 대한민국!" 구호를 외쳤습니다."

해군 관계자들과 식사를 하는데 해병대가 빠질 순 없겠다. 하지만 맥락이 중요하다. 윤 대통령은 해병대 채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수사 대상으로 적시된 특검법안에 두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해당 의혹에 대해 대통령은 단 한마디도 해명한 적이 없다. 일부 예비역해병대 전우들은 대통령에게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으며, 채상병 사망 사건을 수사한 해병대 박정훈 대령은 전시에서나 볼 법한 '항명수괴죄(후에 항명죄)'로 입건된 상황이다. 해병대 채상병 사건의 진상 규명을 원하는 대략 70% 이상의 사람들이 보기에 이 브리핑 자료는 '기괴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해병 대원 사망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이런 내용을 굳이 브리핑 자료에 포함시킨 것은 몇가지 이유로 설명될 수 있겠다.

표층과 심층의 문제다. 표층에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은 채상병 사건 수사 외압과 무관하다. 고로 해병대원들과 '화이팅'을 외치는 장면을 브리핑에서 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심층에서 많은 시민들은 윤 대통령이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대통령이 해병대원들과 '화이팅'을 외치는 모습을 보는 건 곤욕이다. 대통령이 즐겨 입는 해군 마크 티셔츠는 평시엔 '미담거리'지만, '채상병 사건'의 불편한 맥락이 개입된 현재엔 누군가에게 모욕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해병대만 빼고 해군 인사들만 격려할 순 없다. 딜레마다.

애초에 대통령이 '격노'를 부인하지 않고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면, PI가 꼬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불쾌한 상황이 계속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채상병 수사 외압 사건은 공식적으로 윤 대통령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이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군과 관련된 대통령의 PI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대통령은 채상병 사건에 대한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배려할 필요따위도 없다. 대통령의 PI를 담당하는 참모들이 "그래도 해병대원들은 만나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건의할 수도 없다. 참모들도 극한 직업이다.

대통령과 '세트'로 대통령의 지지율에 영향을 미치는 영부인의 PI는 더욱 심각한 상태다. 디올백을 받는 장면을 전국민이 지켜본 상황에서, 영부인은 '바이바이 플래스틱백'이라 적힌 에코백을 계속 메고 다녀야만 하는 운명에 빠졌다. 에코백을 맨 장면이 노출될 수록 사람들은 '디올백'을 떠올리며 '이상하다'는 심성에 사로잡히겠지만, '디올백'을 받은 행위가 문제 없다는 '논리적 일관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영부인은 공식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어떤 ''이든 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에코백'을 들지 않게 된다면 사람들은 더 궁금해 할 것이다. 이렇게 영부인은 영원히 '가방'을 들어야 하는 운명에 빠지게 되고, 그걸 보는 사람들은 점점 불쾌감이 커지는 운명에 빠져드는 것이다.

요컨대 군 통수권자가 해병대를 만나는 게 어색하다고 해도, 영부인이 평범한 가방을 는 게 어색하다고 해도, 공식적으로 그걸 안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럴수록 대통령과 영부인의 PI는 더 '망하는' 악순환의 길로 간다. 그리하여 대중들은 대통령이 해병대를 격려하는 모습을 매번 봐야 하고, 영부인이 에코백을 메는 모습을 매번 봐야만 한다. 이를테면 윤 대통령은 '바이든'이라고 하지 않고 '날리면'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영원히 안고 가야 한다. 그 모습을 보는 대중의 '기괴한 심성'도 아마 영원히 평행선을 이루며 갈 것이다.

대통령과 영부인이 일부러 사람들을 괴롭히려 하는 '악인'들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 부부는 참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그 이상함이 점점 일상화되면서 간혹 '언캐니(uncanny, 섬뜩함)'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지식과 상식에 의한 인식의 국경을 넘어서 갑자기 낯선 영역에 도달할 때, 우린 섬뜩함을 느끼곤 한다. 이런 건 PI로 해결할 수 없다. 진실을 말하고, 이해를 구하는 방법만이 유일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영원히 '해병대''명품백'의 잔상에 갇혀 지내야 한다. 마치 윤석열 부부가 있는 채팅방에 강제 초청됐는데, 아무도 모르게 2년 째 관전하다보니, 눈치가 보여 막상 채팅방을 나갈 수 없게 된 상황에 처한 묘한 기분이다. 다행히 카카오톡엔 '조용히 나가기' 버튼이 있지만, 현실에는 그런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 부부의 모습이, 참으로 이상하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4.08.10

윤석열 정권은 왜 뉴라이트를 편애하는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독립기념관, 동북아역사재단. 이 네 기관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윤석열 정권에 의해 뉴라이트 계열의 학계 인사가 기관장에 최근 임명된 것이다. 독립운동을 연구·기념해야 하는 독립기념관 관장까지 독립운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뉴라이트 인사를 임명한 정부에 광복회가 강하게 항의한 데에 이어 보수 일간지인 동아일보마저 정부의 이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윤석열 정권의 뉴라이트 편애는, 상당수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위화감을 줄 정도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번 홍범도 장군 격하에 이어 최근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에 찬성했다. 그 전시에 강제 연행과 노역을 명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진보적 색채의 독립운동을 격하·부정하고, 일제 강점기에 노동자와 농민들이 당했던 고통보다 일부 토착 엘리트의 화려한 출세 가도와 조선의 문명화를 강조하는 것은 뉴라이트 사관의 중요한 요지다. 이런 뉴라이트를, 보수 일간지의 지적을 받으면서까지 윤 정권이 편애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뉴라이트의 역사 운동이 결집한 것은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2006년이었다. 본질상 이 운동은, 다수 시민들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요구에 의해 노무현 정권이 추진해온 친일 진상 규명에 대한 보수 기득권층의 조직적 대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기득권 세력의 물리적 내지 제도적 선조들의 상당수는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 직접 부역했거나 적어도 식민지 권력과의 갈등을 피하면서 재산 증식이나 권위 구축에 바빴다. 친일 진상 규명은 족벌언론이나 주요 재벌, 종교계, 학계 등에 존재하는 식민지적 뿌리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한국 기득권 세력의 명분을 위협했다. 기득권 세력들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친일을 문제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미화하는 새로운 논리로 한국 사회 전체를 포획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논리를 제공할 수 있는 학자들 중에는 비극적이게도 일부 전향한 과거의 마르크시스트들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극복됐지만, 과거 일부 구미권과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서구 중심주의적 편향에 사로잡혀 서구와 일본 이외의 지역들이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정체에 빠져 있어, 식민화가 아니면 스스로 근대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국내의 마르크스주의 경향의 사학자 중에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보기 드물게 조선 시대를 이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관점에서 연구해왔다. 그가 1990년대 이후 극우파로 전향하면서 과거 그의 마르크스주의적인 서구 중심주의는 아예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더더욱 변질됐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기본적인 사유재산제도조차 확립되지 못한, ‘정체에 빠진노비 왕국 조선에 근대 자본주의를 이식하고 문명화시킬 수 있었던 세력은 일제 이외에 없었다. 따라서 친일은 조국 문명화를 위한 애국으로 쉽게 둔갑한다.

한데 이 사관의 세계사판은 윤 정권에 더욱더 이용가치가 높다. 뉴라이트의 일제 합리화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긍정 일변도의 태도와 직결된다. 일제만 정당화되는 게 아니고 사기업과 사유재산에 뿌리를 박은 근대 자본주의 문명 자체가 인류에게 축복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반대로 사유재산을 부정한 혁명에 정권의 유래를 두고, 사기업을 국가에 복속시키는 중국이나 북한은 문명의 적으로 치부된다. 이런 이분법과 세계 체제의 패권 국가와 그 지역적 동맹 세력들에 대한 무조건적 미화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적 구상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 초강경 대결 노선이나 중국과의 무리하고 다분히 인위적인 탈동조화는 중국과 북한을 악마화하는 사관으로 너무나 잘 합리화된다. 나아가 일본과의 사실상 군사 동맹 체결 노선과 대미 맹종 노선은 미국과 일본을 자본주의 문명의 전도사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사관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뉴라이트 사관은 윤석열 정권 국정 철학의 기본정신에 가깝다.

사실 일제의 비호 밑에서 재산을 늘린 자본가나 지주가 아닌, 수탈의 대상이었던 농민·노동자를 조상으로 둔 다수의 한국인에게 뉴라이트 사관은 체질적인 거부감만 자극할 뿐이다. 극우들은 이런 거부감을 민족주의라고 혹평하지만, 이는 결코 민족주의 문제만은 아니다. 예컨대 기후 문제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입장에서는, 역사적으로 기후 파괴에 앞장서온 자본주의 열강에 대한 뉴라이트들의 무제한적 찬사는 민족주의이상으로 고루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인다. 국가 자본주의 모델에 힘입은 중국이 점차 미국과 같은 비중으로 양극의 세계질서를 구축해 나가는 현시점에서, 오로지 구미권의 역사적 경험만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뉴라이트 사관은 서구 중심주의가 통했던 과거의 낡은 유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뉴라이트와 그 세계관을 편애해온 윤석열 정권은, 보수 언론의 비판적인 지적까지 무시하면서 계속해서 뉴라이트 사관에 입각한 기억의 정치를 펼쳐 나가면서 뉴라이트들을 억지로 역사의 기억을 관리하는 기관의 기관장으로 앉히는 폭거를 저질렀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로 본격화된 지정학적인 대립, 그리고 남북한 긴장 속에서 이와 같은 역사 정책이 결국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그래도 믿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 믿음이 궁극적으로 허구로 밝혀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저성장과 물가 대란, 실질 임금의 감소, 자영업자들의 도산 속에서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그 어떤 반대급부도 얻어내지 못하면서 오로지 일본 통치자들의 의제만을 챙겨준다는 것은 다수의 국내인들에게 굴종과 치욕으로 다가올 뿐이다. 자본주의가 국내외적으로 다중 복합 위기에 처해 있는 이 순간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은 그저 비상식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뉴라이트들을 편애하고 무분별하게 기용한 것은, 이 정권에서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지뢰이자, 부메랑이 되어 이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게 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프레시안 2024.08.13.

 

왜 지식인들은 국민의 90%를 외면하는가

(1) 201910월 구인·구직 매칭플랫폼 사람인이 성인남녀 354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의 63%(2233)유튜버에 도전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20대는 그 비율이 70.7%에 달했다.

(2) 유튜브 통계분석 전문업체인 플레이보드에 따르면 2020년 말 기준 국내 광고수익 유튜브 채널은 인구 529명당 1개꼴로 세계 1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우리나라 인구 5178만명을 수익창출 채널 97934개로 나눈 수치다.

(3) 20239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행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23 한국>에 의하면 한국 응답자의 53%는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전년에 비해 9%포인트 증가한 수치이며, 46개 조사대상국 평균(30%)보다 23%포인트나 높은 결과였다.

(4) 모바일 분석 업체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20241월 기준 유튜브 앱의 국내 총사용 시간은 약 195000만시간으로 2위 카카오톡(55000만시간)3, 3위 네이버(37000만시간)5배에 달했다. 국민 한 사람이 한 달에 43시간을 유튜브 앱을 보는 데 쓴 셈이다. 이는 유튜브 종주국인 미국(24시간)을 크게 앞선 수치다.

4개의 통계 정도면 한국을 유튜브 공화국으로 불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과학철학자라지만 미래학자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가천대학교 창업대학 석좌교수 장대익은 최근 조선일보 칼럼에서 인류의 역사는 유튜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집단의 성취가 축적되고 변형되는 과정에서 문명이 진화하는 것이라면, 유튜브는 문명 진화의 엔진이라 할 만하다고 했다. “유튜브에서 쓰레기를 치우려면이란 칼럼 제목이 시사하듯이, 그의 논지는 지식인들의 유튜브 활용을 독려하는 데에 있다. 그는 한국인의 94%가 유튜브를 통해 정보와 지식을 수집한다고 답한 조사 결과를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지금 우리는 좋든 싫든 유튜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현실을 무시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조금 과장을 하면, 유튜브 생태계가 쓰레기 같다고 비난만 하거나 무시하고 꺼리는 지식인들은 우리 국민의 90%를 만날 의향이 없는 분들이다. 이제 오프라인 지식생태계의 진짜 고수들이 유튜브의 세계로 이주해 활약해 주길 바란다. 유튜브 이후의 지식 플랫폼을 당장 건설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 공간에 쌓여 있는 가짜 뉴스, 음모론, 팬덤정치, 댓글부대의 쓰레기 더미 위에서 좀 더 건강한 지식 생태계를 가꾸어야 한다.”

지식인에 진입장벽낮춰줄 필요

장대익의 그런 문제의식에 지지를 보낸다. 그의 칼럼을 읽으면서 올봄 국내에 번역·출간된 <유튜브, 제국의 탄생>이란 책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미국 언론인 마크 버겐이 유튜브 20년사를 발로 뛰어 정리한 책인데, 유튜브 창업자 중 한 명인 채드 헐리가 한 콘퍼런스에서 했다는 말이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금전적 보상이 동기가 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약 3인의 창업자가 창업 20개월 만인 200610월 유튜브를 구글에 팔아넘기지 않고, 헐리가 원한 시스템을 고수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오늘날의 유튜브는 없었을 것이다!

장삿속에선 역시 구글이 한 수 위였다. 구글 CEO 에릭 슈미트는 당시엔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거액인 165000만달러(15800억원)를 유튜브 인수에 써놓고도 유튜브를 계속 운영하게 될 창업자들에게 시스템에 대해선 아무런 요구 없이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이 전적으로 알아서 운영하면 됩니다. 여기 체크 박스 하나에만 합의한다면요.” 그 체크 박스 요구는 간단했다. “이용자와 영상, 조회 수를 성장시킨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시스템이건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었지만, 금전적 보상이 동기가 되지 않는 시스템으로 그게 가능했을까? 사람들에게 영상을 업로드할 동기를 주는 게 성장의 핵심일 텐데, 업로더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데도 그들이 계속 영상을 올리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유튜브 CEO로서 책임을 진 헐리는 자신의 이전 소신과는 다르게 애플 파이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유튜버들에게 자금을 지원할 방법을 마련했다. ‘애플 파이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그렇게 하는 게 지극히 미국적인(as American as Apple pie)’ 방식이라는 의미였다.

플랫폼이 사회를 반영한 적 있던가

돈을 버는 일에 관한 한, 그게 미국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방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이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순 없을망정 시장의 작동 방식과 친화적이라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다. 장대익이 역설한, 좀 더 건강한 지식 생태계를 가꾸는 일도 그렇지 않을까? 이른바 공공 지식인의 소멸이 선포된 지 이미 한 세대가 더 지난 상황에서 지식인 개개인의 문제의식과 각성에 기대를 거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장대익이 몸담고 있는 창업대학의 역할이 바로 그런 일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건 어떨까?

지식인들에게 돈다발을 흔들면서 유튜브의 바다에 첨벙 뛰어들라고 유혹해보자는 게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건 뛰어들겠다고 마음먹은 지식인에게 유튜브 진입 장벽을 낮춰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좋은 창업 아이템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건 다 제쳐 놓더라도 장대익이 지적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해소해주는 서비스를 창업대학 차원에서 전담해보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유튜브 콘텐츠 제작에는 영상 촬영, 편집, 마케팅 등의 기술적 지식과 경력이 필요한데, 이는 학문적 연구와 강의에 집중해온 지식인들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지속적인 콘텐츠 생산과 관리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유튜브 채널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유튜브의 성공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사람들에게 영상을 업로드할 동기를 준 게 가장 중요했다. 업로더를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유저(user)’유튜버는 정확하지 않은 용어였기에 무언가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그것도 잠재 고객을 유인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이름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크리에이터였다. 2021년 유튜브의 파트너 프로그램에 속한 크리에이터는 200만명이 넘었으며, 지난 3년간 자사의 크리에이터에게 지급한 돈은 300억달러 이상이었다. 유튜브는 크리에이터를 유튜브의 심장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마크 버겐의 말처럼, “유튜브는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믿음직스러웠고 바다처럼 광활했다.” 1분에 500시간 분량의 영상이 업로드되고 있으니, 어찌 그런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게다가 정교하지 않은 검색 기능을 제공하는 소셜 네트워크와는 달리 유튜브는 무엇이든 대단히 쉽게 찾을 수 있는 플랫폼이었으니,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졌을 게다.

그렇다. 중요한 건 느낌이었다. 20205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경찰이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짓눌러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하자 베트남전 항의 시위 이후 전국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집단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한 유튜브는 홈페이지에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를 내걸었고, 블랙 크리에이터들에게 1억달러의 지원금을 배정했다. 대부분 그 돈을 수령했지만, 유력 크리에이터인 아킬라 휴스는 지원금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튜브가 백인 지상주의자들과 그 커뮤니티를 사이트에서 완전히 정리하지 않는 한 백인은 계속해서 아무렇지 않게 우리를 죽일 겁니다. 유튜브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만든 데 완벽히연루되어 있습니다.”

사실 바로 그게 진짜 문제였다. 유튜브는 느낌을 관리하는 데엔 능하지만, ‘증오·혐오 선동이라는 근본 문제엔 눈을 감는다. 아니 늘 할 말은 있다. ‘표현의 자유검열을 대비시킨다. 아니면 실리콘밸리의 플랫폼 업체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을 한다. “거울을 탓하지 마세요!” 플랫폼들은 그저 사회를 반영할 뿐이라는 의미지만,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모든 것을 반영한 적이 있었던가? 그런 반영의 균형성을 위해서라도 장대익의 창업 프로젝트가 부디 성공하길 바란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 경향 2024.08.13.

 

줬다 뺏는 기초연금’ 10

생계급여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형편이 어려운 분들을 위한 최저보장이다. 2022년 기준 157만명이 생계급여를 받고 있다. 이 중 65세 이상 노인이 71만명으로 45%에 이르니, 수급자 거의 절반이 노인이다. 이분들은 가난하면서 노인이기에 매달 20일에 생계급여를, 25일에는 기초연금을 받는다.

그래서 기초생활수급 노인은 두 급여를 누릴까? 아니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때문이다. 매달 25일 기초연금 335000원이 통장 계좌에 입금되지만, 다음달 20일 생계급여 산정에서 지난달 기초연금 금액만큼 삭감된다. 먼저 기초연금을 줬다가 다시 생계급여에서 뺏는 방식이다. 보건복지부 안에서 기초연금과는 335000원을 지급하고 기초생활보장과는 그 금액을 생계급여에서 빼는 행정이다.

이 문제가 세상에 본격 알려진 지 10년이다. 20147, 기초연금이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올랐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른 결과로, 당시 노인들에게 상당한 희소식이었다. 그런데 기초연금 시행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황당한 사실이 알려졌다. 생계급여를 산정할 때 기초연금을 전액 소득으로 계산하므로 기초연금이 10만원 오르면, 다음달 생계급여에서 인상분 10만원도 삭감되는 것이다. 이러면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은 기초연금이 아무리 올라도 혜택을 받지 못한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차상위 이상 노인들은 기초연금 인상 효과를 누리는 데 반해, 생계급여 수급 노인은 그렇지 못하니 기초연금이 오를수록 기초생활수급 노인과 차상위 이상 노인 사이에 가처분소득의 격차가 커지는 형평성 문제마저 생긴다.

정부는 복지급여에서 보충성원리에 따라 어쩔 수 없다고 설명했다. 생계급여는 개별 가구가 얻는 소득을 모두 합산한 후 그 금액이 일정 기준선(2024년 기준중위소득 32%)에 미달하면 부족액을 보충해 주는 현금복지이므로, 기초연금이 올라 소득이 늘면 기초연금 인상분도 생계급여에서 깎아야 한다는 논리다.

선별적으로 운영되는 현금급여에서 보충성이 기본 원리인 건 맞다. 하지만 그것이 늘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절대 원칙은 아니다. 양육수당, 장애인연금, 중고대학생 장학금, 국가유공자 수당 등은 가구특성을 감안해 생계급여에서 삭감되지 않는다. 근로·사업소득도 노동 동기를 존중해 30%는 소득산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처럼 보충성 원리 안에서도 가구특성, 근로동기 등을 감안해 다양한 예외가 인정된다. 기초연금 역시 그래야 한다. 한국의 노인 빈곤과 턱없이 낮은 생계급여 현실에서 기초생활수급 노인에게 기초연금 혜택이 배제되는 상황은 개선돼야 한다.

해법은 간단하다. 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의 소득인정액 예외 급여 사례에 기초연금을 추가하면 된다.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시행할 수 있는 민생이다. 그래서 빈곤노인들과 복지단체들은 2014년 박근혜 정부부터 지금까지 시행령을 개정해 줬다 뺏는 기초연금을 해결하라고 요구해 왔다. 만약 기초연금 전액을 제외하는 게 곤란하다면, 근로소득의 일부를 소득인정액 산정에서 제외하듯, 기초연금에도 공제율을 도입하자는 절충안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10년째 그대로다. 빈곤 노인들이 청와대 앞에 가서 기초연금을 줬다 뺏을 거면 차라리 저희 목을 치라는 도끼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박근혜, 문재인 정부는 응답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대선 공약으로 심각한 노인빈곤 문제 완화를 위해 기초연금을 현행 30만원에서 40만원으로 인상하고, “기초생활수급자 노인에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내에서 10만원 추가급여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금껏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이달 20일에도 기초생활수급 노인에게 기초연금액만큼 줄어든 생계급여가 지급될 것이다. 이제는 해결하자. 빈곤노인 당사자 요구만이 아니다. 기초연금법에 따라 5년마다 기초연금 제도를 평가하는 기초연금적정성위원회는 작년에 기초생활수급 노인의 기초연금 보장을 위해 생계급여 소득인정액 산정에서 기초연금을 부분 공제할 것으로 제안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기초생활보장 급여 산정 시 기초연금 수급액을 소득으로 산입함에 따라 극빈층 노인이 기초연금제도를 향유하지 못하는 불합리를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

윤석열 정부, 약자복지를 주창하고 있지 않는가, 어차피 받아도 빼앗길 거, 아예 기초연금을 신청하지 않는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이 점점 늘어나 이제 9만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더 이상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의 설움을 외면해선 안 된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 10년을 넘기지는 말자.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 경향 2024.08.14.

 

조지 오웰의 ‘1984’, 윤석열의 ‘2024’

암울한 미래를 그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주인공 윈스턴이 사는 오세아니아에는 이름과 하는 일이 완전히 다른 정부 부서들이 있다. 진리부는 뉴스, 역사 등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게 임무다. 애정부는 사상범을 고문하고 가혹하게 법 집행을 하는 곳이다. 평화부는 전쟁을 관장하고, 풍요부는 주로 배급량을 줄인다는 발표를 하는 곳이다. 거리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당의 슬로건이 펄럭인다.

이런 반어적 표현은 당이 강조하는 이중사고의 덕목이다. 모순인 줄 알면서 두가지를 동시에 진짜라 믿는 걸 말한다. 이를 위해 과거는 끊임없이 지워지고, 지워진 사실마저 잊혀 거짓이 진실이 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와 미래를 지배한다는 당의 슬로건은 이중사고를 통해 실현된다. 오웰은 여기서 기억을 조작하고 정체성을 흩트리는 게 전체주의 폭압의 기본 통치술임을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의 인사에서 점점 노골화하는 흐름이 있다. 바로 해당 기관의 설립 취지나 존재 이유와 정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인물을 책임자로 앉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직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고 무력화한다.

그는 최근 인권 보호의 최전선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에 인권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을 지명했다. 안창호 후보자는 성소수자를 향해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해왔고, 차별금지법에 대해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는 긴 행진의 수단이 될 우려도 있다는 말도 했다. 헌법재판관 시절 낙태죄, 양심적 병역거부, 사형제 등 주요 인권 쟁점에 대해 국제인권기구나 국가인권위가 견지한 입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의견을 내왔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는 소셜미디어에 그동안 대통령들이 전문성이 부족한 인물을 위원장에 지명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정반대 입장을 가진 인물을 지명한 적은 없었다고 썼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김광동 위원장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보상하는 것을 두고 이런 부정의는 대한민국에서 처음 봤다고 했다. 그는 또 유족들이 보상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도 했다. “전시엔 재판 없이 죽일 수 있다” “노근리 사건은 불법 희생이 아니다. 부수적 피해다”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했다. 국가에 의한 인권 유린과 폭력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 명예회복을 책임지는 기관의 수장이 설립 취지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교육위원회 등 역사·교육 관련 기관에는 민족주의를 반일종족주의로 헐뜯고 일제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뉴라이트 성향 인사가 단체장으로 대거 진입했다. 독립정신을 기려야 할 독립기념관도 백선엽, 안익태 같은 친일경력자를 두둔하는 인사가 관장 자리에 앉았다. 정치적 독립성이 중요한 국민권익위원회에는 윤석열 대선 캠프 출신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포진했다. 고용노동부 장관에 유튜브에서 노조 혐오를 부추겨온 김문수씨를 지명한 것이나, 방송의 독립성을 지켜야 할 방송통신위원회에 방송 장악 의지를 숨기지 않는 이진숙씨를 위원장으로 앉힌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다 보니 이 정부에서 인권은 반인권, 진실·화해는 왜곡과 분란, 식민지배는 근대화, 노동은 반노동으로 의미가 물구나무섰다. 이런 가치를 고양할 임무를 띤 해당 기관들은 만신창이가 되고 직원들의 반발도 이어진다. 숨진 권익위 국장도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해야 하는 괴로움을 주변에 토로해왔다.

윤 대통령은 왜 이런 인사를 할까? 그가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를 만큼 무능하다거나, 덕망 있고 능력 있는 인물은 모두 정권 곁에 가기를 거절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국정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한 만큼, 이념전쟁과 역사전쟁으로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이든 이대로 가면 나라는 닻줄 끈긴 배처럼 표류할 것이다. 공자는 정치의 첫출발이 명실상부, 정명’(正名)이라 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흐려지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이 여러 정책에 무능해도 대한민국은 3년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말을 흩트려놓으면 안 그래도 심각한 분열과 갈등은 불치병이 될 것이다.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 이리 폭주를 하는가?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 한겨레 2024.08.14.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속삭였던가식민지의 국어 시간

말의 뒤꽁무니나 쫓는 처지인지라, 광복절을 맞아 분한 마음으로 문병란의 식민지의 국어 시간을 다시 읽는다.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일장기)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더러운 놈)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선생)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 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 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 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 시간이여.”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 한겨레 2024.08.15.

 

안락사 캡슐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위스 안락사 관련 인권단체 라스트 리조트의 피오나 슈트어트 자문위원이 지난달 17(현지시각) 취리히 기자회견에서 안락사 캡슐 사르코를 선보이고 있다. 취리히/AFP 연합뉴스

 

스위스 안락사 캡슐’ 28천원버튼 한 번이면 5분 만에 사망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이른바 안락사 캡슐이 사상 처음 스위스에서 사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캡슐 내 산소를 질소로 바꿔 저산소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방식으로 비용도 매우 저렴합니다. 안락사 캡슐은 조력 사망에 대한 오랜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행복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다는 찬성론과 인위적으로 생명을 끊는 것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반대론이 팽팽

말기환자들 존엄한 죽음 선택할 권리

스위스가 안락사 단체인 더 라스트 리조트의 안락사캡슐 사르코(Sarco)’의 첫 사용을 공식화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우리 사회에 다시 한번 안락사에 관한 이슈를 중대한 논쟁거리로 부각시키고 있다. 자발적 의사에만 한해 질소투여 방식으로 생의 마감을 선택케하는 이 기구의 사용료가 불과 18스위스프랑(28천원)이라는 점은 특히 논란을 낳고 있다. 이런 지엽적인 내용이 자극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안락사 찬반에 대한 지점을 다시 한번 정확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2022년에 이어 이번 2024년 국회에서 일명 조력존엄사 법을 다시 한번 발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는 안락사 논쟁을 다시 가열시키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6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안일명 웰다잉법이 국회를 통과해 2018년도부터 시행 중이다. ‘웰다잉법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자신이 더 살기 위한 치료를 계속할지 또는 중단할지에 관해 환자 스스로 또는 가족의 동의에 의해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법을 의미한다. 이는 엄격한 기준 하에서 임종환자에 한해 연명치료 연장 여부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안락사 영역에서는 가장 소극적인 단계의 법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소극적인 형태의 안락사 관련법의 단계를 지나, 죽음에 임박한 말기환자에 대해 약물투약이나 캡슐 이용에 의한 자발적인 조력존엄사망을 허용케 하는 적극적 안락사의 필요성은 우리 사회에서도 더는 논쟁을 외면해선 안될 것이다.

조력존엄사법에 대한 국회 재발의 시기여서인지 미디어를 통해 등장하는 안락사에 관한 다양한 논쟁거리들은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75살의 나이에 이르러 국가적으로 안락사를 권장하는 가상의 캠페인을 다룬 일본 영화 플랜 75’, 네덜란드의 전 총리였던 판 아흐트 부부나 프랑스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의 안락사 소식들은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안락사와 관련된 고민들이다.

웰다잉법뒤 적극적 존엄사 필요성 대두

미국 8개주·유럽 일부 조력존엄사허용

가족들이 겪는 간병 등 현실적 문제 넘어

고통에서 해방될 환자의 권리 논의 필요

실제로 안락사에 대한 논쟁들에 수많은 나라들이 취하고 있는 방식들은 눈여겨 볼 만 하다. 미국에서는 오리건 주와 버몬트 주를 비롯한 총 8개 주에서 엄격한 기준 하에 적극적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독일 등이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다. 또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국가들과 캐나다, 콜롬비아, 호주, 뉴질랜드 등 기타 지역들에서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인간생명의 존엄함은 환자의 가족들이 겪는 간병 부담이나 비용 지출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가장 고귀한 가치임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 평균 기대수명이 73.4살로 계속 고령화가 가중되는 환경 속에서 돌봄 복지에 관한 정책을 꾸준히 고민하는 우리나라도 조력존엄사의 영역에 관한 각 나라의 정책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말기 질환으로부터 오는 극도의 고통에서 스스로 해방되게끔 하는 결심, 단지 이를 윤리적 테두리로만 구속시키는 관점에서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 노력 또한 조심스럽지만 필요한 국면이다. 조력존엄사법 발의에 찬성한 국회위원들의 비율이 87%라는 정량적 수치가 아니어도 분명히 필요한 시대적 고민임에는 틀림없다.

2005년 아카데미상 4개 부문 수상작인 미국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는 조력사망에 대한 중요한 대목이 등장한다. 링 위에서 당한 큰 사고로 전신마비와 욕창으로 생사를 오가는 여자복서 매기의 운명을 놓고 그녀의 매니저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 연기)는 생명연장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 중단한 매기의 선택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조력존엄사의 선택은 영화의 후반부를 숙연하게 만들었지만, 평온한 생의 마감에 대한 성숙된 해답으로서 영화의 존엄함을 배가시켰다.

조력존엄사를 받아들인 주인공 프랭키가 생전의 애제자 매기에게 선사했던 게일어(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쓰이는 켈트계 언어) 애칭을 풀이하며 영화는 차분히 마무리한다. “모쿠슈라, 나의 사랑, 나의 혈육이라는 의미야”.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싸우다 추한 모습으로 죽느니 편안하고 깨끗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안락사, 사회의 성숙함으로 이 문제를 다시 바라보자./이준상

 

사회적 약자들 생명 포기내몰릴 위험

안락사란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이나 동물을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의도적 행위를 말한다. 국내에 안락사 캡슐로 알려진 사르코는 해외에선 대체로 자살기구조력자살캡슐로 소개된다. 장치를 발명한 니취케씨가 안락사 운동가이며 그가 장치에 붙인 이름이 돌널(석관)을 의미하는 사르코파구스에서 따왔다는 걸 감안하면 사르코는 이미 죽은거나 다름 없는 사람을 위한 것이니 안락사 캡슐로 통일시켜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럼에도 이번 주제처럼 민감한 토론에서 용어 사용은 신중해야 한다. 안락, 존엄, 자살 등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표현이 의제에 포함된다면 그 자체로 논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타인의 안락과 존엄을 반대할 수 있겠나. 하물며 그가 영화 밀리언달러베이비속 비운의 복서 매기처럼 끔찍한 불행과 고통을 겪고 있다면, 내 가족이나 연인이라면, 본인이라면. 한편 좋은 죽음이라는 어원을 가진 안락사, 존엄사, 조력자살 등의 표현은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으며 더러는 조력사망을 총칭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조력사망 허용의 범위로 논점을 한정하고 이를 다양한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법적-의료적 차원에선 조력사망의 판단과 행위에 개입한 이해관계자들의 법적 면책과 그 범위를 검토해야 한다. ‘김할머니 사건의 판례는 연명치료 결정에 있어 의료진과 가족의 면책을 보장한 바 있으며 이는 웰다잉법등 법적 진전을 가져왔다. 필자 역시 양친을 여읜 경험을 통해 임종 단계의 연명치료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의료적 프로토콜 수립에 법적 면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결국 법적 차원에선 국민적 공감대를 당국이 얼마나 신속, 적절하게 법제도에 반영하냐의 과제만 있을 뿐 논란의 여지는 딱히 없다.

노인·소수자에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 속

포기 권하는 사회적 타살로 변질 가능성

조력사망은 법적·의료적 차원 국한해야

지금은 존엄한 죽음보다 존엄한 삶 시급

둘째, 윤리적 차원에서 조력사망은 조력 자체가 정당한지가 쟁점이 되는데 이 경우엔 소모적 논쟁을 경계해야 한다. 사형제도, 낙태, 자살, 동물권리 등 생명과 관련된 논쟁은 대체로 양쪽의 가치관을 변화, 성숙시키기보단 도리어 고착시킨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당위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서로를 배척하거나 존중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생명은 인간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정의하기도 모호할 뿐더러, 장차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 로봇 기술의 융합은 이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 게 분명하다.

끝으로 사회적 차원의 논의는 국소적, 개별적, 경제학적인 것에서 구조적, 사회적, 정치경제학적인 것으로 관점을 이동시켜 조력사망의 합법화 혹은 유연화가 미칠 사회적 영향에 초점을 맞춘다. “플랜75가 오늘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노인 혐오범죄가 전국에서 이어지는 한편, 심각해지는 고령화 문제에 대처할 방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플랜75는 일본의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묘수가 될 것입니다최근 개봉한 영화 플랜 75’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플랜75’75살 이상 고령자의 자발적 죽음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영화 후반 플랜65’로 확대 시행되기에 이른다. 고령의 노인과 소수자들을 짐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들에게 은근히 죽음을 권하는 가까운 미래의 풍경이다. 다소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조력사망의 유연화가 지독한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악용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경고를 담고 있는 것이다.

조력사망의 합법화가 유연화로 이어질 경우 이는 자칫 저소득자, 미성년자, 장애인, 정신질환자, 이주노동자, 초고령자 등 각종 사회적 약자들에게 포기를 권하는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조력사망의 허용 범위가 말기 혹은 임종단계의 환자로 제한되지 않고 느슨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결코 용인해선 안된다. 조력사망은 철저히 법적-의료적 차원에 한해서만 지원해야 한다. 최근 생을 마감한 고다르 감독이나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처럼 존엄한 삶을 살다 스스로 안락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죽도록 힘들게 살다가 선택지 없는 벼랑 앞에 선 이들도 있다. 누군가 죽고 싶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살고 싶다의 간절한 반어일 수 있다. 기괴하리만치 높은 자살률과 양극화 지표가 말해주는 바, 존엄한 죽음보다는 존엄한 삶이 우리에겐 더 긴급한 의제이다.

권오성ㅣ서울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 | 한겨레 2024.08.15.

 

윤석열 정권의 연이은 역사 퇴행

참담하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3년이 되지 않는 동안 벌어진 일련의 역사 퇴행이!

최근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이던 일본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과정에서 강제동원 역사를 은폐하려는 일본정부에 한국정부는 적극 협력했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에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 기시다 내각이 자국 역사를 세탁하는 데 발견한 완벽한 공범이라는 내용의 글이 실렸겠는가. 사도광산 문제는 윤석열 정권의 망국적 대일외교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이 5년 뒤 나라의 주권마저 빼앗긴 비극의 역사가 연상되기도 한다.

일본 극우세력이 일제의 식민지배나 침략전쟁과 관련된 각종 범죄를 부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려 내세우는 역사수정주의는 더 이상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는 역사부정세력이 발호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다. 이들은 뉴라이트라 자처했다. 우리말로 옮기면 신우익 정도일 텐데 사실은 친일극우세력에 지나지 않는다.

친일극우세력은 이명박 정권 이후 조금씩 세를 넓혀나가다가 윤석열 정권에서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대통령실과 정부 곳곳에 친일극우세력이 똬리를 틀고 역사쿠데타를 벌이는 중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이어 며칠 전에는 독립기념관 관장 자리마저 친일파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인물이 꿰찼다.

사람들은 독립기념관이 친일기념관이 됐고, 3·1절과 광복절은 친일절이 됐다고 탄식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0대 조선총독이고 대통령실과 정부는 용산총독부라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다.

윤석열 정권 이전만 하더라도 역대 대통령은 3·1절과 광복절 기념사에서 늘 과거사에 관한 일본정부의 반성과 사과를 촉구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22년 광복절 기념사 이래 한·일 두 나라 사이의 과거사 현안을 외면했다. 식민지배는 합법적이었고 조선인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강변하는, 따라서 반성과 사과도 거부하는 일본정부에 면죄부를 주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은 자초한 것이며 가해자인 일본에겐 책임이 없다는, 일제가 식민지배의 논리로 내세운 식민사관과 다를 바 없는 인식을 드러냈다.

윤석열 정권은 일본과의 협력을 위한 명분으로 보편적 가치의 공유를 내세웠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 역사를 진정으로 반성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일본이 어떻게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되레 일본은 지금 군국주의 부활에 혈안이 돼 있다. 아베 정권 때부터 평화헌법 개정을 시도했으며 이것이 여의치 않자 헌법해석과 집단자위권 도입을 통해 사실상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본을 선언했다. 독도를 놓고 영토분쟁을 끊임없이 유발하는가 하면 북한을 향한 선제공격마저 공식화했다. 그런 일본과 가치를 공유한다는 건 결국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어 일본이 북한이나 중국을 공격할 때 일본 자위대 지휘 아래 전쟁에 참여하겠단 말과 같다.

윤석열 정권은 식민지배는 불법이라는 헌법의 근본정신을 훼손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정권 내부는 물론이고 제도권 언론에서 제대로 된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독도는 일본 영토가 맞고 동해는 일본해로 부르는 게 바르다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제국이 그랬듯이 고유의 영토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나라, 주권을 포기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로 돌아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 글을 마무리하려는 데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다.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집권여당의 전략기획부총장인 신지호가 이번 독립기념관 관장 사태를 놓고 윤석열 정권을 비판하는 이종찬 광복회장을 일본 극우의 기쁨조라고 힐난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다. 정작 일본 극우의 기쁨조로 불려 마땅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양식 있는 국민이라면 잘 알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다시 밟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두 눈 부릅뜨고 윤석열 정권과 역사부정세력의 행태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불의의 정권이 역사의 심판을 받고 역사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는 그날까지 싸우고 또 싸워야 한다. 2024년을 제2의 독립운동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해로 만들어야 한다.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경향 : 2024.08.15

 

어느 러시아 출신 한국인의 씁쓸한 군함도 순례

강제노역 현장 둘러보며 든 의문, 한국 정부는 왜?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해외여행 갈 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즐겨 찾는 편이다. 그래서 작년에 일본 나가사키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도 핵 박물관이나 평화공원 등 역사적 의미가 있는 주요 명소들을 둘러보았다. 1945년에 일본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서 꼭 가 보고 싶은 목적지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군함도(일본어로 하시마’)였다.

러시아에서 한국학을 전공 했을 때, 한국 역사 수업에서 일제강점기에 대해 배웠지만 그 때는 공감도도 낮았고 군함도 이야기라고 해서 특히 내 시선을 사로잡지도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 오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배우다시피 했고 사람들과 여러 다양한 이야기도 하면서 복잡하게 얽힌 한일 관계에 대해 깊이 알게 됐다. 그래도 군함도라는 지명을 다시 떠올리지는 않고 지냈는데 2017년에 갑자기 군함도에 시선이 쏠리게 됐다. 그 해에 개봉한 군함도영화 때문이었다.

조선인 강제노동한 줄도 언급 없는 군함도 관광 안내문

실화 배경으로 한 영화를 엄청 좋아하는 나는 자연스럽게 군함도에 대한 관심이 갔다. 영화가 잘 됐다, 안 됐다, 평가를 떠나서 그 영화 속에 나오는 역사 사건 자체를 더 자세히 알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것저것 알아보면서 일본이 군함도를 유네스코에 등재해서 현재 관광지로 내세웠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다가 작년에 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미리 갈 방법을 다 알아 봤기 때문에 배가 출발하는 시간에 맞춰 부두에 도착해서 티켓을 구매했다. 그리고 출발을 기다리면서 가이드가 건네 준 안내 전단지를 살펴 봤다. 몇 페이지에 걸쳐 일본의 간단한 역사와 일본의 근현대사 속 군함도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일본어와 영어로 적혀 있었다. 꼼꼼히 다 읽었는데 바로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그 어디에도 조선과 조선 노동자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군함도에서 일한 노동자 중에 외국 출신 노동자도 있었다는 언급은 있었으나 그들의 출신지는 물론 그들이 강제로 노동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찝찝한 심정으로 배를 탔다.

군함도는 바다에서 보면 좀 무섭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섬, 분위기가 매우 으스스했다. 섬에서 육지가 보이기는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여기 갇혀 있던 사람들이 탈출할 생각도 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섬 자체가 크지 않아서, 안내 전단지가 소개하는 ‘20세기 초반의 일본 산업화 상징이라기 보다는 그저 혹독한 감옥만 같았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역사를 모르면 그냥 버려진 광산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역사를 알고 보니 죽은 괴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나가사키 항에서 출발할 때부터 군함도 도착까지, 그리고 섬 몇 바퀴를 돌아서 다시 항구로 돌아올 때도 관광선에서는 군함도에 대한 안내방송이 일본어와 영어로 계속 나오고 있었다. 안내 전단지보다 더 자세한 내용이었지만 역시 조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외국 출신자 포함한 수많은 일본 노동자’ ‘20세기 초반 산업화의 살아있는 역사’, ‘혹독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나라를 위한 힘든 노동 (hard labor)’ 등등, 나는 그 정도 이상의 난이도가 있는 일본어를 들을 실력이 안 돼서 확언할 수 없지만, 최소 영어에는 조선에서 온 강제 노동자에 대한 내용이 아예 없었다.

사도광산 역사 왜곡에 협조하는 한국 정부, 참 창피하다

이번에 사도광산 관련 뉴스를 보니 바로 그 때의 군함도 생각이 났다. 비슷하게 찝찝한 마음. 이 세상에는 역사를 왜곡하는 나라가 많다. 일본이 역사왜곡의 유일한 케이스가 아니다. 나도 러시아가 얼마나 많이, 그것도 얼마나 난폭하게 역사를 왜곡하는지를 다 봤기 때문에 일본의 경우가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 불편한 에피소드를 자기 역사에서 삭제하려는 일본의 노력은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해자의 역사 왜곡에 그렇게 기꺼이 협조하는 피해자는 참 보기 창피하다. 사도광산과 관련 일본측 보도자료를 왜곡해서, 일본이 하지 않은 말을 한 것처럼, 우리 국민이 거부감이 들지 않게 거짓 번역을 할 만큼, 그런 행위가 한국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가해자의 입장은 알겠는데, 피해자가 가해자의 이런 역사 왜곡에 협조하는 것은 과연 어떤 논리인가. 미래를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범죄행위까지 협조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미래를 위하는 것일까. 내가 물컵 반을 채웠으니 상대가 알아서 나머지 반을 채울 거라는 기대는 문제의 근본을 해결 못 하고 외면하는 태도일 뿐이다. 성공한 외교가 아니라 자기 국익을 포기하는 행위에 더 가깝지 않은가.

독일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 철거 위기에 놓여 있다는 뉴스가 얼마 전에 보도되었다. 일본의 지속적인 철거 요구에 독일 베를린 카이 베그너 시장이 움직이면서 관할 구청인 미테구청에서 올 9월까지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이 뉴스를 보긴 한 건가. 아니면 보고도 그냥 내 버려 두겠다는 건가. 참 답답하다.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8.17.

 

시골 없는 도시라는 디스토피아

지난달부터 한 달에 1~2회씩 삼례에 있는 그림책미술관에서 시민들과 함께 시 읽기를 하게 되었다. 전라도 시골 소읍에서 시를 읽는 시간을 갖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공소해질 위험도 있는 일이다.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가 어느새 자연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삼례도 나 어릴 적에 비해 인구가 많이 줄어든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근에서 가장 큰 장이 열렸던 때에 비하면 어림없을 것이다. 그렇다. 삼례는 내가 11세 때 이사 와서 자란 고향이며 아직도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곳이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그의 주저 <시골과 도시>에서 영국의 문학 작품들에 그려진 목가적 전통을 거슬러 올라간다. 베르길리우스로부터 시작해 헤시오도스, 테오크리토스와 모스쿠스까지 목가적 시가 은폐한 농촌 민중의 실상을 환기시킨다. 한마디로 말해 시인들이 노래하는 황금시대, 노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산하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훗날 나타난 기독교적 자선 개념은 소비의 자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실제로 노동과 생산을 하고, 그 결과물을 생산비율과 상관없이 모두 나눠 갖는” ‘생산의 자선을 강조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이런 주장이 자신의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나왔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시골에 와서 잠시 목가적인 서정에 잠기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는 것 같다. 영국의 시인들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는 너무도 숨 막히게 팽창하고 지나치게 빽빽하고 따라가기 벅찰 만큼 속도가 빠르다. 혹자들은 에너지 효율 면에서 도리어 도시가 시골보다 생태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도시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다. 생태효율이라는 언어는 서로 상극에 가깝다.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잘 알겠으나 그의 시각도 부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왜냐면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이 모두 노동의 생산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 흘러가는 강물이 노동 생산물인가, 아니면 길가에 핀 들꽃이 그런가. 사실 농업의 생산물마저 노자가 말한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physis)이라는 근간 없이 불가능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진리이다.

완주군민은 안중에 없었던 공약

그런데 삼례에 시를 읽으러 갔다가 나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삼례에서 접한 민심은 전주시와의 통합 문제로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보고 또 찾아보니 전주시는 인구 감소와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완주군과 통합하겠다는 것이고, 완주군은 상반된 이유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내가 좀 의아했던 것은 현 전주시장이 완주군과 통합을 지난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걸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그런 무례한 선거 공약이 가능한지 이해가 안 됐다. 완주군과 군민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는 공약이기 때문이다.

도농통합으로 농촌이 잃는 것들

전주와 완주뿐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통합 문제는 본질적으로 도시의 문제를 농촌 지역에 떠넘기는 결과를 언제나 남기고는 했다. 도시의 밀집 공간에 들어서기 까다로운 도시를 위한시설을 농촌 지역이 부담하라고 강요하는 게 한결 쉬워지기 때문이다. 이때 농촌에서 사라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기후위기 시대에 한 뼘도 아쉬운 녹지를 잃을 텐데 그것은 올여름 같은 무더위에 일조하면 일조했지 절대 덜어주지 않는다. 민주주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큰 도시의 행정에 농촌 지역과 농민들이 편입되면 분권의 정도와 수준은 심각하게 훼손되며 거대 행정 시스템 안에서 주민 목소리는 약화되기 마련이다. 이는 완주군민에게나 전주시민에게나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물론 비수도권 지역의 도시가 처한 현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함께 고민할 문제인데, 이른바 삶의 질을 언제까지 물질적 지표로만 판단하고 사고해야 하는가 문제다. 우리에게 좋은 삶이란 것이 돈과 물질이 많으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경제성장이라는 멍에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전주나 완주나 오래전에는 같은 동학의 땅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 후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에 대도소를 두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삼례에 집결해 2차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동학의 이념 중에는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돕고 살자는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신은 있었어도 힘센 자가 약한 자의 것을 취하라는 말은 없었다. 이런 농민군을 두고 당대 일본의 평화사상가이자 활동가인 다나카 쇼조는 동학당은 문명적이라 평하기도 했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30년이 되는 해이다. 1차 봉기가 내부의 질곡을 혁파하자는 것이었다면 2차 봉기는 내부의 질곡을 강제하는 외부를 향한 싸움이었다.

황규관 시인 | 경향 2024.08.18

 

장준하, 그를 몇 번이나 더 죽이려는가

너무도 급작스러운 통한의 죽음, 산봉우리에서의 의문의 실족사지만 그것은 독재권력에 의해 가격을 당한 피살이었음이 분명한 이의 반백 년이 돼 가는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식이 엊그제(17) 열렸다. 49년 전 이날 홀로 산행을 하다가 포천의 약사봉 벼랑에서 추락해 이승을 떠난 이, 일본군을 탈출해 6000리 길 사투를 벌이며 맨발로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에 가담한 이래 항일과 민주와 통일에 온몸을 내던진 사람, 반유신독재의 선봉에 섰으며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이, 그 사람 장준하다.

그가 세상을 누린 햇수 57년이었으니 결코 짧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생애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일들, 많은 이들이 그의 앞에 놓은 일들을 생각할 때 그 노년에 가까워진 나이조차 요절이라고 해야 할, 너무도 때 이른 죽음이었다. 그의 앞에 놓인 과업을 생각할 때도 그렇지만 그 자신이 사실 '청년'이란 점에서도 그러했다.

급히 수습돼 매장됐던 그의 유골을 2011년 이장하면서 기념공원이 마련된 파주 통일동산에 모인 100여 명의 추모객들은 "떠났던 것이 아니라 빼앗겼던" 이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추모의 시간에 이제 통곡과 오열은 없었다. 50년 다 돼가는 세월은 눈물과 비탄을 마르게 할 시간인 듯했다.

그러나 애도의 마음은 말랐다기보다 다른 감정이 돼 이들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 그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는 진혼곡과 초혼무가 아니라도 그가 그 부름에 응답해 무덤에서 일어나 걸어오는 듯했다. 장준하의 죽음을 신문에서 보고 울었던 고등학생이 이제 백발의 노인이 돼 부르는 것에 손 흔들며 살아 있는 이들에게로 걸어 나오는 듯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의 죽음은 사실 예고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유신 독재권력이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시키려 했던 것이 그의 죽음보다 불과 2년 전이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변사하고 인혁당으로 날조된 8명의 사형이 집행되던 때였다. 긴급조치로 구속 수감됐다 죽기 전년의 12월 말에 병환으로 출옥한 그는 나오자마자 대통령 박정희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으로 국헌 준수 선서를 헌신짝처럼 버린 것, 일인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을 규탄했다. 거국적인 민주항쟁을 준비하던 그의 앞에 죽음의 위협은 항상 따라다녔다. 주변에서 신변을 걱정했으나 그는 산정으로 오르겠다며 홀로 나섰다.

그의 죽음은 또한 증언이며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죽음이 8월에 찾아온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건 한국 현실에 대한 증언이었다. 일본군으로 징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 6천 리 장정에 나섰으며, 1945년 광복 사흘 뒤인 818일 광복군 대위로 국내 진공 작전에 나서 여의도 공항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던 그다. 그런 그가 광복 30년이 된 해의 8월에, 광복절 이틀 뒤에 죽음을 맞았다. 광복군 출신의 지식인이 일본군 출신이 지배하는 조국에서 설 땅을 찾지 못한 현실이었다. 죽음 1년 전 74년 그가 정보기관에 연행됐었던 것도 다른 날도 아닌 광복절에 일어난 일이었다. 8월의 광복절의 그 ''이 아닌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듯 스스로 저벅저벅 들어섰듯 그는 자신의 몸을 봉우리 위로, 그 암흑의 끝과 같은 약사봉 위를 향해 홀로 올라갔던 것이다.

장준하의 8월의 죽음, 그리고 빛을 찾은 광복(光復)’8월에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지금 20248월에 벌어지고 있는 해괴한 일들과 겹친다. '장준하의 8'로 돌아간 듯, 50년 전의 날, 70년 전의 시절을 다시 사는 듯한 회귀가 펼쳐지고 있는 2024년의 대한민국이다. 수십 년 전 그의 죽음을 지금 현재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2024년의 8월의 풍경이다.

그같은 풍경이 장준하의 죽음을 그때로 종결지은 것이 아니라 지금 다시 죽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쓰고 있는 장준하에 대한 '잔혹극'인 것이다. 그는 대체 몇 번의 죽음을 겪어야 비로소 그 죽음이 종결될 것인가, 이것이 추모식에 모인 이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창간하면서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것은 돌베개를 벨지언정 못난 조상이 될 순 없다는 청년 장준하의 결의로 품게 된 이래 남은 생애를 지탱해 준 것이기도 했다.

그의 그 말이 새삼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그 말은 이제 다른 의미로 울려온다. 그에 대해 못난 후배가 되지 않기 위하여, 라는 말로 우리 자신을 향해 울린다.

누군가를 추모한다는 것은 실은 두 번 기억하는 것이다. 한 번은 고인을 위해서, 한 번은 자신을 위해서, 그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추모는 곧 생일이다. 남은 이들의 생일인 것이다.

37년이 지난 뒤에야 그의 유골을 이장할 때 머리 뒷부분에서 발견된 망치로 가격당한 함몰은 광복군 시절 미군 특수부대 훈련으로 단련된 신체로도 피할 수 없었던 불의의 습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피살임은 많은 이들의 증언과 증거들이 확신하게 한다. 그의 죽음의 진상은 아직 미궁이며 미제의 상태지만 한사코 진실을 봉인시키려 하는 그 시도야말로 역설적으로 죽음의 진상을 말해주고 있다.

그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분명 필요한 과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의 진상을 억누르는 현실의 진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장에 일제강점을 미화하고 항일 역사를 부정하는 인물을 앉힌 것에 대해 광복회장은 괜히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오히려 그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면하게 하고 응시하게끔 하고 있다. 실제를 구체적으로 보게끔, 그 실체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크기와 완강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제대로 정산되지 않은 역사는 언제고 청구서를 내밀게 돼 있다. 그 청산과 정리 없이는 역사는 한없이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해방과 광복을 진정한 광복으로 만드는 것은 일직선으로, 한순간의 해결로 종료될 수 없는 지난한 과정임을 우리는 지금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그것이 완료됐다는 생각을 품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미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미완이야말로 장준하를 거듭 죽이는 것이다. 장준하는 몇 번이나 더 죽음을, 추락을 맞아야 할 것인가. 장준하 죽음 50년을 앞둔 올해 그에게 올릴 추모의 말은 이것이다. 그 추모사는 우리 자신에게 올리는 조사이기도 하며 또한 각성과 결의이기도 하다.

이명재 에디터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8.19.

 

탈중국·신자유주의로 경제 망친 자들

이게 웬일인가. 동아일보가 민주당 진성준 정책위의장의 816일 기자간담회 발언을 제목으로 뽑아 보도하다니! 진성준 의장은 국회의 2023년도 결산안 심사를 앞두고 56조 원의 세수 결손 문제를 거론하면서 정부가 한국은행뿐만 아니라 민간 자금도 빌려 썼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세수 결손 규모 56조 원이었다는 것은 정부가 넉 달 전 발표했으니 새로운(new) 정보가 아니다. 하지만 정부가 우체국보험 적립금 2500억 원을 연리 4.04퍼센트에 빌렸다는 것은 새로운 정보다.

국가가 돈이 없다는 뉴스가 왜 조선일보눈에는 띄지 않았을까?

그 사실을 뉴스(news)로 인정한 언론사는 많지 않았다. MBC전자신문같은 중도성향 언론사들이 제목에 우체국보험 적립금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동아일보」 「뉴스1」 「머니투데이등 몇몇 보수신문이 그렇게 한 것은 평소와 다른 행동이었다. 어떤 신문은 기사 본문에만 그 사실을 넣어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했다. 조선일보중앙일보를 포함한 대다수 신문과 방송은 입꾹닫방침을 견지하고 있다. 뉴스 가치가 없는 사실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보도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관점에 따라서는 뉴스 가치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민주당은 우체국보험 적립금을 빌려 세수 결손을 땜질한 것이 국가재정법 위반일 수 있다고 했지만 다툼의 소지가 있는 주장이다. 형식 논리로 법률 위반이 된다고 해도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은 없다. 국가는 조세징수권이 있어서 파산하지 않는다. 우체국보험이 이자를 받지 못하거나 원금을 떼일 위험은 없다. 4.04퍼센트 금리도 적당한 수준이다. 국민에게 알려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뉴스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중에 현금이 없어서 한국은행뿐 아니라 민간 금융기관에서까지 돈을 꾸었다는 것은 큰 문제다. 정부가 나라살림을 제대로 꾸리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당장 이런 의문이 떠오르지 않는가. 정부는 왜 돈이 없나? 이유는 자명하다. 세금을 계획한 만큼 걷지 못해서다. 이것을 세수 결손이라고 한다. 정부는 해마다 국회가 의결한 예산의 세입 액수만큼 세금을 걷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세금이 그만큼 걷히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다.

세수 결손이 나면 정부는 금융기관의 돈을 빌려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초단기 또는 단기 대응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은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그러면 그만큼 국가채무가 늘어난다. 정부가 자금이 부족해 계획한 대로 예산을 집행하지 않으면 국민들 가운데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부가 우체국보험 적립금을 빌려 썼다는 사실은 국민에게 알릴 가치가 있는 뉴스가 된다. 국민의 삶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야 이 사실의 뉴스 가치를 부정할 수 있다.

온통 마이너스 기록한 낙제 수준의 2023년도 경제성적표

국회의 결산안 심사는 언제나 중요하지만, 2023년도 결산안 심사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윤석열 정부의 나라살림 운영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첫 회계년이기 때문이다.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통치 않은 정도가 아니다. 낙제 수준이라고 하는 게 맞다. 지난 411일 국무회의가 의결한 <2023년도 국가결산보고서>에 따르면 중앙정부의 총수입은 세입예산보다 52조 원 적은 574조 원이었다. 총수입이 전년보다 무려 44조 원 줄었다. 총지출도 예산 639조 원보다 28조 원 적은 611조 원에 그쳤다. 지방재정교부금과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비롯해 지방정부에 주어야 할 돈을 법이 정한 대로 지급하지 않아 지방정부와 지방교육청 살림까지 엉망으로 만들었다. 정부가 편성하고 국회가 수정 의결한 2023년도 예산에 따르면 사회보장성기금을 포함한 통합재정수지는 13조 원 정도만 적자를 내야 했지만 실제 적자는 37조 원이었다. 사회보장성기금수지 흑자 50조원을 뺀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87조 원이나 되었다. 이것이 언론에서 말하는 재정적자. 여기에 다른 요인도 일부 작용해, 2023년 국가채무는 113조 원 늘어났다.

윤석열 대통령은 언제나 국가재정을 건전하게 운영했다고 자랑한다.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몰라서 틀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는 경제통계에 전적으로 무지한 듯하다. 2023년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의 3.9퍼센트를 넘겼는데도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뭐가 뭔지 전혀 모른다는 분명한 증거다. 세수 결손은 심각한 문제다. 정부가 예산보다 28조 원이나 적게 지출했는데도 87조 원의 재정적자가 난 것은 국세 수입이 줄어든 탓이었다. 국세 수입은 왜 줄었는가? 첫째 이유는 부자 감세다. 윤석열 정부와 국힘당은 법인세 최고세율을 낮추고 감면 제도를 확대했으며 종부세 실효세율을 폐지에 가까울 정도로 인하했다. 그러나 이것은 세입 감소의 원인이지 엄격한 의미의 세수 결손 이유는 아니다. 세율 인하로 인한 세수 감소 효과는 2023년도 예산 세입에 이미 반영했다. 세수 결손은 조세 수입이 예산안 편성 당시 예측했던 것보다 더 많이 줄어서 생긴 현상이다.

그렇다면 세입 예측은 왜 틀렸는가? 2023년도 경제성장률이 정부가 예산안을 편성한 2022년 여름에 예측했던 것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 기업의 순수익이 감소해 법인세 납부액이 줄어든다. 고용이 악화하고 임금인상률이 하락하면 근로소득세 납부액도 증가세가 멈추거나 줄어든다. 불황이 깊어져 장사가 되지 않으면 자영업자의 종합소득세 납부액도 줄어든다. 민간 소비가 침체하면 소매 판매가 줄어 부가가치세 세입도 감소한다. 한마디로 세수 결손은 20222분기부터 나타난 불황의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조세 수입을 늘리려고 세율을 올리면 경기가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세수 결손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해소해야 한다. 경기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역수지, 소매판매, 민간투자, 정부지출의 하향 나선형 악순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생각해 보려면 머리가 아프더라도 데이터를 봐야 한다. 한국경제가 직면한 불황의 양상과 심각성을 직시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데이터만 더 이야기하겠다. 2023년 한국 경제성장률은 1.4퍼센트로 세계 평균의 절반 수준을 기록했다. 세계경제가 호황이면 수출이 늘어야 정상인데 한국은 거꾸로 갔다. 20224월부터 수출이 부진해져 연간 472억 달러 무역적자를 냈다. 2023년 무역수지도 100억 달러 적자였다. 올해 수출이 작년보다 호조라는 언론 보도가 줄을 이었지만 상반기 수출액은 3348억 달러로 2022년 상반기보다 157억 달러 적었다. 언론이 떠드는 수출 호조보도는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2022년과 2023년 상황이 너무 나빴기 때문에 지금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20222분기 이후의 수출 감소와 무역수지 적자 발생 과정을 주도한 것은 중국 수출 부진과 대중 무역적자였다. 중국 수출은 20224월부터 급감해 5월부터 적자를 냈고 지금까지 그런 상황이 이어져 왔다. 러시아 수출 감소도 수출 부진에 한 몫을 했다.

내수 상황도 수출 못지않게 심각했다. 20222분기에 처음으로 전년 대비 감소세를 기록했던 소매 판매액이 올해 2분기까지 9분기 연속 전년 대비 하락했다. 올해 2분기 소매판매액은 140.4조 원으로 2년 전 2분기보다 6조 원 적었다. 최근의 정부 통계에 따르면 거의 모든 소득계층의 실질소득과 실질가처분소득이 2년 연속 하락했다. 최저임금을 포함한 임금인상률이 물가인상률을 밑돌았고 불경기로 인해 자영업자의 소득이 줄어든 탓이다. 부동산 경기 침체와 주가 하락으로 인해 실질자산 가치도 모든 계층에서 하락했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내려 150여 개의 대기업에 집중 혜택을 주었지만 그것이 투자를 촉진했다는 증거는 없다. 종부세 인하로 고가주택과 다주택 보유자의 가처분소득을 늘려주었지만 소비 진작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판국에 정부의 재정지출까지 줄였다. 중앙정부의 2023년 총지출은 611조 원으로 2022년 추경 포함 총지출보다 70조 원이나 적었다.

이것은 경제학 교과서에서 본 하향 나선형 악순환의 전형이다. 사회의 총수요는 순수출(수출-수입), 민간 소비, 기업 투자, 정부 지출 네 가지로 구성된다. 국민소득의 크기를 결정하는 총수요의 네 요소가 모두 하락세를 보이면서 서로 악영향을 주었다. 모든 경제지표는 이 악순환이 20222분기에 시작해 20248월 현재까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제학자는 무얼 하느냐고 질책하지 마시라. 경제학은 원시적인 수준의 학문이다. 경제학자들은 불황을 불황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지하는 경우에도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한다. 드물게 원인을 파악한 경우에도 약효가 바로 나는 처방을 찾는 것은 아니다.

한국 경제는 선장이 문 잠그고 술 취한 채 잠만 자는 함선 꼴

하지만 경제학자가 효과 있는 정책을 내놓는 경우가 가끔은 있다.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는 없지만, 경제학과 경제학자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 그렇지만 오늘 한국 상황에서는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가 없다. 의사의 처방은 환자가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효과를 낼 수 있다. 국정 운영 최고책임자가 귀를 닫고 눈을 감는 경우에는 경제학자가 괜찮은 처방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보기에,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경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한국 경제는 선장이 문을 걸어 잠근 채 술을 마시고 잠만 자는 함선과 비슷하다. 정한 목표와 항로 없이, 조류에 실려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떠내려간다.

나는 젊은 시절 경제학을 배운 경제학도일 뿐이다. 한국 경제 불황의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릴 능력이 없다. 기껏해야 가설(假說) 수준의 견해를 가졌을 따름이다. 그럴듯하다고 믿지만 논리와 데이터로 정밀하게 입증할 능력이 없으니 가설이라고 하는 게 맞다.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이념외교가 불러들인 대중 수출 급감이라는 외부 충격이 신자유주의 긴축 정책과 결합해 한국경제를 하향 나선형 악순환에 가두었다는 가설이다. 정통 케인즈주의 거시이론과 신고전파종합경제학자들의 가속도원리 등으로 이 가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무역수지, 소매판매, 민간투자, 정부지출 등 모든 경제지표가 20222분기를 기점으로 하향 추세를 보였다는 사실은 이 가설에 약간의 설득력을 부여한다.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다. 중국 수출의 급감이라는 외부 충격이 부자 감세, 긴축재정, 임금인상 억제 등 중산층과 서민의 가처분소득을 줄이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과 결합해 내수를 위축시킴으로써 한국 경제를 장기 불황에 빠뜨렸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우울하지만 없다. 대중 수출 급감이라는 외부 충격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다. 운석열 대통령이 자초했다. 그는 한미일 군사동맹 또는 안보협력으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추종하면서 당선인 시절부터 공공연하게 탈중국 또는 반중 노선을 내세웠다.

경제학자 아닌 나도 이론과 헛소리를 구별할 정도는 된다만

중국은 공산당과 정부가 명령하고 규제하는 통제형 시장경제체제다. 정부가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한국 상품의 수입을 억누를 수 있다. 윤석열은 실리와 국익을 도외시하고 가치와 이념을 추종한 자신의 외교정책이 외부충격을 불러들였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외교노선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긴축정책을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바람직한 외부 충격이 찾아와 상향 나선형 선순환을 만들어주는 행운이 찾아들지 않는 한, 한국 경제는 앞으로도 긴 시간 불황의 어두운 골짜기를 헤맬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다. 경제학 공부를 그만둔 지 십 년이 넘었다. 경제학 연구의 최근 동향을 모른다.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 데이터를 면밀하게 살피지도 않는다. 경제학과 무관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래도 최소한 말이 되는 경제이론과 헛소리를 구별할 정도의 능력은 아직 지니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 참모들과 경제부처 고위 관료들이 한국 경제에 대해서 하는 말은 대부분 헛소리다. 경제학자와 경제전문가는 다 어디에 갔는가? 왜 헛소리를 헛소리라 말하는 이가 손꼽을 정도로 적은가? 누가 내 가설이 틀렸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최소한 말이 되는 수준에서라도 윤석열 정부가 한국 경제를 회생의 길에 올려놓을 것이라고 논리와 데이터로 주장해 주면 고맙겠다. 합의는 하지 못해도 토론은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유시민 작가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8.19.

 

알권리후퇴시킬 행안부의 입법예고

1998년 정보공개법이 시행된 이후 26년이 지났다. 그동안 긍정적인 변화들도 있었지만, 비밀주의의 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검찰, 법무부, 대통령비서실, 감사원 같은 기관들은 국민 세금을 쓰면서도 정보는 공개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건의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 소송이 진행 중이다.

공공기관이 정보공개를 거부하면 국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의신청, 행정심판, 행정소송이다. 그런데 이의신청은 정보공개를 거부한 기관이 스스로 재심사를 하는 제도다.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행정심판을 해도, 기각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행정부 소속인 행정심판위원회도 정보공개에는 소극적인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행정소송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일반 시민이 인지대·송달료까지 납부해가면서 행정소송을 하기란 쉽지 않다. 대법원까지 가게 된다면 3년 안팎의 시간이 걸리고,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만약 시민이 행정소송에서 패소하게 되면, 공공기관 쪽 변호사비용까지 물어줘야 한다. 실제로 1심에선 시민이 승소했지만, 2심과 3심에서 패소해 1320만원의 변호사비용을 물어내게 된 사례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익소송에 대해선 원고인 시민이 패소하더라도 소송비용을 부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관련된 법 개정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게다가 대법원까지 승소 판결을 받아도 동일한 사안에 대해 다시 정보공개를 거부하는 경우까지 있다. 지금 검찰이 특수활동비와 관련해서 그런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 다시 행정소송을 하는 수밖에 없다. 몇년이 걸리는 과정을 또 밟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흔치는 않지만, 공공기관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까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정보가 존재하는데도 정보 부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검찰은 특수활동비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 소송에서 그런 행태를 보였다. 무려 6805쪽의 특수활동비 지출 관련 자료가 존재하는데도 소송 과정에서 자료가 없다고 허위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정보공개법은 허점이 많다. 실효성 강화를 위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으면, 동일 사안에 대해선 정보공개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정보가 존재하는데도 공공기관이 정보 부존재라고 허위 주장을 한 경우엔 형사처벌도 해야 한다. 정보공개법상의 기본적 의무 사항을 지키지 않는 공공기관에 대해선 제재도 가해야 한다. 심지어 아직도 팩스로 정보공개청구서를 접수하는 공공기관이 있을 정도다.

정보공개와 관련된 특별행정심판 제도의 도입도 필요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행정소송보다는 행정심판을 통해서 신속하게 정보가 공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보는 시의성이 생명인데, 몇년이나 시간이 걸리고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행정소송을 통해서는 국민의 알권리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의 행정심판 제도는 행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이 부족해 정보공개와 관련해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세사건을 담당하는 조세심판원이 따로 있는 것처럼, 정보공개심판원을 별도로 두는 게 필요하다. 투명성 확보는 공공기관 개혁의 핵심이므로, 특별행정심판 기구를 설치해서라도 관료주의와 비밀주의의 폐해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현 정부는 거꾸로 가고 있다. 정보공개제도의 실효성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후퇴시키려 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731부당하거나 사회 통념상 과도한 정보공개청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정보공개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이런 경우에는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답하지 않고 종결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당이나 사회통념상 과도한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국민의 정보공개청구권을 제한하겠다는 발상은 반()헌법적이고 반()민주적인 것이다. 국민의 알권리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고, 투명한 정보공개는 민주주의의 기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는 극소수의 청구인들이 1인당 연간 수천건 이상의 정보공개청구를 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을 법 개정 추진의 근거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온라인 정보공개시스템(www.open.go.kr)의 이용을 제한할 수 있도록 약관을 개정해도 되는 일이다. 몇몇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서 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접근법이다. 더구나 검찰과 대통령비서실 등이 정보공개를 회피하기 위해 온갖 잔꾀를 쓰고 있는 마당에 이런 식의 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 경향 2024.08.19.

 

부산시 에코델타동탄생기

1986년 겨울쯤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강서구 명지동으로 이사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인 나에게 그곳은 낙동강 하구와 바다가 보이는 곳이자, 파밭과 논이 끝없이 펼쳐진 정말 낯선 동네였다. 동네 터줏대감은 60대 강아무개 할아버지였다. 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그를, 동네 아이들은 강 짝지(지팡이의 경상도 방언)’라고 불렀다. 항상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말썽을 피우는 아이들에게 훈계를 일삼던 엄격한 분으로 기억한다. 쭈뼛거리며 처음 인사한 나에게 어르신은 대뜸 나에게 동네를 설명했다.

명지라고 이름이 붙은 것에는 유래가 있다.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여기 어딘가에서 먼저 변을 예고하는 북소리와 종소리 같은 소리가 지역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한자로는 울 명뜻 지. 이사를 왔으니, 니가 사는 곳의 지명 뜻은 알아야제.” 명지동 지명과 관련해 조선시대 중종 때(1550)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지도 기록이 있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명지도라고 표시돼 있다고 한다.

부산시는 2012년부터 명지동·대저2·강동동에 걸쳐 면적 11.7, 입주자 8만여명 규모의 친환경 스마트 신도시인 에코델타시티조성에 나섰다. 환경을 뜻하는 에코(eco)와 낙동강 삼각주를 뜻하는 델타(delta)를 합성한 이름이다. 친구들 집은 헐렸고, 드넓었던 파밭도 사라졌다.

그렇게 에코델타시티를 잊고 지내던 지난해 12, 관할 지자체인 강서구가 명지동 등에 걸쳐 있는 에코델타시티의 새 법정동 이름으로 에코델타동을 선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로 다른 3개 동에 걸쳐 있다 보니 신분증과 재산권 등에 쓰이는 법정동 명칭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고, 지난해 10월 에코델타시티 아파트 입주 예정자 등을 대상으로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라고 했다. 이름이 확정되면, 전국 3600여개 법정동 가운데 외국어를 법정동으로 사용하는 첫 사례가 될 터였다.

곧바로 한글학회에서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우리말로 지어야 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강서구의회도 외국어 사용을 납득하기 어렵고, 한글 사용을 규정한 국어진행조례에도 반한다며 반대했다. 명지동 원주민들은 마을 역사가 쌓여 만들어진 지명을 근본도 없는 영어 단어 조합으로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에코델타시티에 입주하는 주민 일부는 대부분의 입주민이나 입주 예정자들이 원하는 이름이라며 맞섰다. 지난 5월 지명 결정권이 있는 행정안전부는 법정동 신설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외국어 명칭이 국어기본법 등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에코델타동을 승인하지 않았다.

한바탕 소동이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강서구는 이번에는 행정동 이름을 에코델타동으로 바꿀 방침이다. 법정동이 법적 주소라면, 행정동은 행정기관이 편의상 설정하는 것으로 법정동과 이름이 다른 경우도 왕왕 있다. 강서구는 도로명 주소에 외래어를 사용하고 있고, 주민이 원하는 이름이라 행정동 이름을 바꾸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부연한다. 하지만 강서구가 행정동 이름을 에코델타동으로 지은 뒤 몇년 지나 법정동 승인에 다시 도전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박상준 강서구의원은 지난 6월 열린 강서구의회 정례회 본회의에서 지역의 역사적 가치 등을 반영하지 못한 에코델타동으로 결론을 내놓고, 끼워 맞추기식 행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주민과 반대 주민 의견은 묵살한 채 전국 최초 외래어 법정동 타이틀에만 집착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주민 불편 해소에 앞장서진 못할망정 주민 갈등만 조장하는 노이즈 마케팅은 이제 멈춰야 한다고 비판했다.

동네 이름은 백년을, 천년을 가는 거여. 동네 정체성이자 역사지. 절대로 잊거나 까먹으면 안 된데이.” 강 짝지 어르신의 말씀이 떠오른다. 강서구가 에코델타라는 이름만 고집하지 말고, 전체 주민 의견을 경청한 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름으로 정했으면 한다.

김영동 | 영남데스크 | 한겨레 2024.08.20.

 

세 공직자 수난 부른 국정농단 그림자

경찰이 역대급 마약 밀수 사건을 수사하다 세관 직원들의 조직적 연루 혐의로 수사를 확대하던 중, 높은 곳으로부터 외압이 시작되고, 수사팀 해체와 형사과장의 좌천으로 이어진 인천세관 마약 수사 외압의혹 사건은 영화로 만들면 식상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익숙한 클리셰로 가득 차 있다. 사건 자체에 흥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외압의 방식과 사후 처리가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극적인 변수가 거의 없고 내부고발자인 백해룡 경정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다.

100만회 가까이 투여할 수 있는 엄청난 양(27.8)의 필로폰을 압수했고, 추가로 100의 국내 밀반입을 막는 성과를 냈는데도, 백 경정은 감찰 조사를 두번이나 받고 지구대장으로 좌천됐다. 현장 수사까지 지휘하며 적극 독려하던 영등포경찰서장은 용산에서 괘씸하게 보고 있다는 말을 전한 뒤 태도가 돌변하더니 대통령실로 영전했고, ‘보도자료에서 세관 관련 내용을 삭제하라고 지시한 서울경찰청 형사과장은 영등포경찰서장이 되어 직접 내려왔다. 대체 관세청이 얼마나 세길래 경찰 인사까지 좌지우지하는 것일까? ‘용산은 갑자기 왜 등장하는 것일까?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던 정부에서 최고의 포상을 해도 부족한 경찰 간부가 어쩌다 징계와 좌천의 대상이 된 것일까?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줄 인물이 조병노 경무관이다. 관세청에서 근무하다 경찰로 옮긴 그는 인천(공항본부)세관장과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당시 서울경찰청 생활안전부장으로 마약 수사와 전혀 관련이 없던 그는 일면식도 없는 백 경정에게 연락해 세관 관련 내용을 삭제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으로 김건희 여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이종호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 녹취록에서 승진시켜줄 대상으로 이름이 거론되는 당사자다. 인천세관장-조병노-이종호-김건희로 이어지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의 경찰판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아직은 의혹 차원이지만, 박정훈 대령이 항명죄로 기소된 것도, 백 경정이 좌천된 것도 이종호-김건희 라인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굳이 대통령이 격노까지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일개사단장 구하기에 나설 필요가 없듯이, 인사혁신처에 올라간 조 경무관 징계 건이 경찰청장 의사와 달리 불문처리될 이유도 없다. 영등포서의 마약 수사 성과를 치하했던 윤희근 당시 경찰청장보다 윗선의 권력이 움직였다고 볼 근거가 충분하다. 세관과 범죄조직의 연계는 나라가 들썩일 만큼 큰 사건인데,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는 이유가 권력의 은폐와 비호 때문이라면, 채 상병 사망 수사 외압 못지않은 중대한 비리가 발생한 것이다.

백해룡 경정과 박정훈 대령의 좌천 및 기소의 경우 김 여사가 배후로 의심된다면, 국민권익위원회 김 국장 사망 사건은 김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사건 처리 과정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정의로운 공무원 세명이 법과 양심에 따라 맡은 바 직무를 수행했거나 하려 했지만, 외압으로 좌천되거나 항명 수괴로 몰리거나 죽음에 이르게 됐는데, 김 여사라는 열쇳말이 교집합으로 떠오른 것이다. “내가 정권 잡으면 거기 무사하지 못할 거야라는 김 여사의 음성이 자동 지원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비단 이 세명뿐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경찰과 군과 권익위의 또 다른 공직자가 윗선의 압박과 양심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도 수사를 가로막는 세력의 방해로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 분명히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일 뒤에는 반드시 음습한 비선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세 공직자의 수난 뒤에도 비선권력의 국정농단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안으로 민주주의와 경제가 무너져 내리고(소매판매액지수가 9분기 연속 감소해 외환위기 때보다도 내수침체가 심각하다), 밖으로 제국주의 침략 역사 세탁의 완벽한 공범”(미국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이 되어 국제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 무더위가 언젠가 끝나듯 권력의 무도한 여름도 끝날 것이다. 아직 법적인 절차가 시작되려면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이지만, 국민의 마음속에서 윤석열 정부는 오늘도 착실하게 탄핵 포인트를 적립하고 있다

이재성논설위원 | 한겨레 2024.08.20.

 

상속세 감세, 어떻게 볼 것인가

철학자 존 롤스는 사회 전체 이익을 위한 정의의 원칙은 누구도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해 알 수 없는 상태를 전제해야만 합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무지의 베일상태에서는 자신이 금수저가 될지 흙수저가 될지 전혀 알 수 없다. 그 경우 누구도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세습되는 것을 정의롭다고 보지 않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불운의 책임을 개인이 짊어지는 것이 정의일 수는 없어서다. 사적 소유의 기한을 개인의 일생으로 제한하고 상속재산은 공동체로 되돌려주자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미드의 문제의식도 맥락이 다르지 않았다.

상속세는 부의 무상이전을 과세의 계기로 삼는 재산과세다. 상속세와 소득세는 부의 집중을 완화한다는 이념을 역사적으로 공유해 왔으며, 소득세를 통한 재분배의 한계 탓에 형성된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에 대해 상속세가 과세되는 점에서 상속세에는 소득세를 보완하는 기능이 있다. 사망한 피상속인의 생전 소득에 대해 과세가 부족했다면 유산 상속인이 낼 상속세를 낮춰서는 안 된다. 한국은 상속세 부담이 큰 편이지만 소득세까지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 증여세 포함 상속세는 2021년 기준 OECD 평균(GDP0.2%)이 우리(GDP0.7%)보다 부담이 작지만 소득세를 더하면 OECD 평균(GDP8.5%)보다 우리(GDP6.8%)가 부담이 작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2024년 세법개정안에서 상속세 과세표준(이하 과표’) 구간과 세율 변화만 따지면 과표 3억원부터 30억원까지는 감세액이 1000만원에 그치는 데 반해 과표 30억원을 초과하면서 감세액이 누적적으로 커져 과표 50억원은 약 2억원, 과표 500억원은 약 47억원이 감세된다. 자녀공제도 상속재산이 많을수록 유리해진다. 예컨대 상속재산 60억원, 배우자 법정상속분 5억원, 자녀가 2명이라면 현행 규정보다 개정안에서 49000만원이 감세되지만, 다른 조건은 같고 상속재산이 10억원 이하라면 감세 혜택이 없다.

전체 사망자 가운데 상속세 대상 비율이 오르고는 있다. 하지만 2023년 비율은 여전히 5.7%에 그친다. 5.7% 중에 과표 30억원 초과인 피상속인은 6.3%. 5.7%6.3%를 곱하면 0.36%. 이번 상속세 개정안의 혜택은 최상위 0.36% ‘초부자에게 집중된 셈이다. 그런데 그 0.36%가 한 해 정부 상속세 수입의 80.7%를 부담했다. 그러니 개정안 그대로라면 줄어들 세수가 만만치 않다. 극소수 초부자들에게 혜택을 몰아주다가 조세국가의 역할이 더욱 위축될 판이다. 초부자들의 상속세 부담이 확대된 가장 큰 원인은 그간에 부의 집중이 심화된 데에서 찾아야 합당하다. 세제의 누진구조는 부가 집중될수록 세 부담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원래 그렇게 설계된 제도인데 제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갈아치울 일인가.

다만 기존 상속세제가 물가상승을 반영하지 않는 점을 감안해 지나치게 복잡해진 상속공제 항목들을 정리하면서 공제금액은 상향하고, 대신에 완전포괄주의’(과세요건을 열거하지 않고 경제적 실질에 따라 포괄적으로 증여를 규정)를 실현함으로써 실효세율을 2021년 기준 8.7%로부터 끌어올리는 제도 개선이 바람직하다. 미세 조정은 하더라도 재정의 재분배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성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상속세에 대한 부유층의 작금의 거센 조세저항에는 조세의 사회적 효익과 증세정치의 비전을 여태껏 한국의 정부가 보여준 적 없는 탓도 있다. 흥정하듯 세금 얼마 깎아줄지부터 고민하지는 말자. 제대로 된 조세국가의 미래상부터 제시해야 순서가 맞다. 늦었지만 복지국가로 향하는 로드맵과 그 여정에서 재정총량 증가율, 사회지출비율, 조세부담률, 국가채무비율의 각 목표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부유층을 설득해 납세의 방식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명분을 주려면 최소한 그래야 한다.

상속세에는 더 큰 비전이 필요하다. 향후 상속세는 소득세와의 관계를 고려해 조세체계의 정합성을 개선하는 전체 계획 속에서 개편하되 목적세로 발전시켜 미래세대를 위한 기금에 투자하는 방안이 좋은 대안일 수 있다. 어쩌면 그 길은 하버드대학 법학자 로베르토 웅거가 제안했던 사회상속계좌의 사상을 오늘 한국에서 구현할 소중한 기회인지도 모른다. 미래세대는 인생의 출발선에서만큼은 빈부 격차가 적어도 지금보다는 줄어야 옳다. 1900년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 그대로 상속권은 기본권이 아니며 국가가 그것을 인정해준 덕에 비로소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 경향 2024.08.20.

 

신뢰 상실한 정부의 부동산 정책

집은 먹고 자고 쉬는 곳이며, 투자의 대상이자 노후 대비 자산이기도 하다. 이미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은 더 오르길 바라고, 아직 내집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정체하거나 떨어지기를 바란다. 집값이 급등락하면 모든 시민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는 가격이 오르면 낮추기 위한, 떨어지면 올리기 위한 대책을 내놓기 마련이다.

정부가 지난 8국민 주거안정을 위한 주택공급 확대 방안’(8·8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최근 집값 상승세를 잡기 위해 주택공급을 늘리겠다고 밝힌 것이다. 국토교통부 장관은 “2029년까지 6년간 서울·수도권 우수 입지에 427000가구 이상의 우량 주택이 공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대책이 나온 지 열흘이 넘도록 집값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일부 지역에 투기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부동산 대책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 경우는 흔하다.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때 역효과가 나는 게 보통이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정책도 시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8·8 대책은 재건축·재개발 촉진과 빌라·오피스텔 등 비아파트 시장 정상화 등을 담았지만, 핵심은 수도권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해제였다. 서울과 인접 지역 그린벨트를 풀어 8만가구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이다.

대책을 발표한 날 서울과 경기 하남시의 그린벨트 135.75가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됐다. 그린벨트 해제 발표가 나오자마자 강남권 공인중개사무소에는 그린벨트 인근 토지에 대한 문의가 이어졌다. 그린벨트 인근 기존 아파트와 빌라는 급매물이 사라지고 있다. 그린벨트에 아파트가 신축되면 그만큼 기반시설이 개선돼 인근 기존 주택의 가격도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대책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시장은 거꾸로 반응하고 있다. 8월 둘째주 서울 아파트값은 21주 연속 강세를 나타내며 약 6년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한국은행이 20일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8월 주택가격전망지수는 전달보다 3포인트 오른 118이었다. 지수가 100을 웃돌면 집값 상승을 예상하는 소비자가 많다는 뜻이다. 118은 문재인 정부 시절 집값이 미쳤다고 했던 202110(125)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린벨트는 도심의 허파로 불린다. 공기질을 개선하고 도심 온도를 낮추며, 미세먼지 차단 효과도 있다. 국토의 70%였던 한국의 산지는 각종 개발 탓에 지금은 60%를 겨우 넘을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녹지가 점차 사라지는 상황에서 그린벨트는 후대를 위해 보전하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는 그런 그린벨트에 집을 짓겠다고 했다. 뛰는 집값을 잡기 위한 초강수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린벨트 해제와 관련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궁금하다. 그린벨트 보전을 주장하는 환경 부처나 시민사회단체, 전문가 집단이 있지만 협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정책은 신뢰가 생명인데, 추진 과정이 불투명하니 효과를 낼 수 없다. 경향신문 기사 <정책 만들면서 기록 남기지 않는 정부, ?>(2024819일자 11)를 보면 정부 각 부처는 의대 정원 증원 등 주요 정책 현안을 결정하면서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정책 결정이 협의와 토론, 숙의를 거치지 않고 이뤄진다.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듯하다. ‘채 해병 사건도 최고 결정권자의 몇마디 호통이 진실을 가리고 있다.

그린벨트 해제는 누군가에게 특혜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향한 의혹의 시선이 적지 않다. 국민의 이익보다 본인들과 가까운 특정 세력의 이익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비판에 근거한 의혹이다. 이미 서울~양평 고속도로 종점 변경 특혜 의혹이 불거진 바 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려워졌다. 불신이 팽배해서는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실효를 거둘 수 없다.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부동산 정책 실패 책임을 뒤집어쓰고 있는 김수현 전 정책실장은 책 <부동산과 정치>이 책에 비사(秘史)는 없다. 대한민국은 이미 자연인 누군가가 결단하거나 지시해서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몇몇 자연인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듯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현 정권은 임기의 절반 이상을 남겨두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대다수 시민이 불행한 시대를 살 수밖에 없다. 정책 추진 과정을 투명하게 밝히고 시민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 경향 2024.08.20.

 

패전, 오키나와에서는 진행형

8월 중순이 되면 일본은 추석과 비슷한 오봉() 연휴를 맞이한다. 전국 각지는 귀성객과 여행객으로 붐빈다. 패전이라는 과거를 직시하는 연휴이기도 하다. 815일은 종전의 날이기 때문이다. 정부 주최로 추도식이 열리고 다시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어온다. 아쉽게도 가해국의 책임과 반성은 빠져 있다. 일본인들이 경험한 전쟁의 참상, 즉 피해자로서의 기억만이 전승된다. 하지만 전쟁이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인 곳도 있다. 오키나와가 바로 그곳이다.

지난 13, 오키나와국제대학에서 집회가 열렸다. 올해는 이 대학에 미군 헬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발언에 나선 한 대학생은 미군에 의한 사건·사고가 일어나면 미군기지 문제에 주목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기지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부담을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미군기지로 고통받는 오키나와의 현실을 지적했다.

최근 오키나와가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미군 범죄 때문이다. 작년 12, 미군 병사가 16세가 채 되지 않은 소녀를 납치해 성폭행하는 범죄가 발생했다. 미군 범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상황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일본 정부가 범죄 사실을 감추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시민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이 사실은 해당 미군 병사가 기소된 지 3개월이나 지난 6월에 세상에 알려졌다. 언론 보도를 통해 상황을 파악한 오키나와현 당국이 일본 정부에 확인을 요청하자 그제야 범죄 사실을 확인해준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5월에도 미군에 의한 성폭행 미수 사건이 발생했지만, 이 역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997년 미·일 양국은 미군에 의한 사건이 발생하면 주일미군은 일본 정부에 통보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오키나와현에 전달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고 오키나와는 배제되었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항변했지만, 일본 정부가 지키려고 한 것은 미·일 동맹과 주일미군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키나와는 미군의 군사요충지이다. 일본 전체 토지 면적의 0.6%에 지나지 않는 오키나와에는 주일미군 시설의 70.3%가 집중되어 있다. 지난해 오키나와에서는 최근 20년간 가장 많은 72건의 미군 관련 형사사건이 발생했다. 이처럼 오키나와에서 미군 범죄가 끊이지 않는 현실을 패전의 산물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1972년 일본에 반환되기까지 오키나와는 일본의 법률이 적용되지 않아 미군 범죄를 처벌할 수 없는 불평등한 지역이었다. 반환 이후에도 미군은 주둔하고 있고 현재도 불평등은 계속되고 있다. 공무수행 중에 행해진 행위라고 판단될 때는 일본 당국은 미군을 체포, 기소할 수 없다.

이를 규정하고 있는 미·일 지위협정은 1960년 이후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오키나와에 대한 본토의 무관심과 구조적인 차별은 패전 79년을 맞이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키나와에 있어 전쟁은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주변국의 고통은 물론 오키나와의 고통을 이해하고 분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과거 반성이 아닐까.

박진환 일본방송PD | 경향 2024.08.20.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위안부운동은 일본의 역사 부정 속에서 피해자의 증언에 의존하여 진행되어온 사회운동이다. 피해자의 말하기와 듣기의 전 과정은 투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간 피해자의 말을 각자가 필요한 방식으로 전유했다.

이 글의 제목은 평소 나의 생각이자 최근 출간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휴머니스트, 2024)의 편저자 김은실은 위안부에 대한 새로운 논의 방식을 제안한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확인하는 도구적인 말하기와 듣기가 아니라 새로운 앎의 형식을 만날 수 있는 개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듣기는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다른 질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된다.

1991년 고 김학순의 일본군 위안부피해 증언 이후 33년이 지났다. 그간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이 문제의 정확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성으로 남성을 위안(慰安)한다는 말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 표현이고, ‘위안소제도는 전시든 평시든 용인될 수 없는 폭력이다.

위안부는 전시 성노예(sexual slavery) 제도의 피해자지만, ‘성노예라는 단어를 차마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 사회는 가해자의 언어인 위안부(comfort women)’를 임시방편으로 사용해왔다. 그래서 언제나 위안부에는 작음 따옴표가 붙는다. 문제 해결은커녕 명명부터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위안부라는 말을 버리고 이 문제에 대한 본래의 정명(正名)’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여성계의 이슈가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이 있다.

한국 사회가 위안부용어를 계속 사용해 온 배경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둘러싼 여성주의적, 탈식민주의적 논쟁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즉 젠더 폭력에 대한 남성 중심적(민족주의적) 해석이 지배적이어서 다른 목소리가 드러나기 어려웠다. 이 문제를 보편적인 전시 성폭력과 인권 의제가 아니라, 식민지배하의 억압으로만 국한할 때 위안부논쟁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일본 측의 끊임없는 역사 부정(망언들)과 이에 대응하는 데 힘을 쏟는 피해자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존이다. 이 때문에 위안부운동은 반()성폭력 운동이라기보다는 반일 운동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일본의 진보 진영은 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휘말려 제대로 된 논의를 하지 못하고,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망언·민족주의의 적대적 공존 넘어

이러한 상황은 왜 위안부운동을 하는가와 맞닿아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위안부운동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방지하기 위함이지, 과거 자체에 매달려 극일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서, 보다 성숙한 한국 사회를 위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간 군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큰 안타까움을 낳은 세 가지 사건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199384일 일본의 관방장관(한국의 국무총리에 해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의 일명 고노 담화이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가해국임을 인정한 정부 차원의 첫 공식 발표문이었다. 고노 담화는 당시 일본 시민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 정치권의 보수화와 우익 세력의 반발로 일본 내부에서 힘을 잃어갔다.

당시 한국 사회의 대응도 고노 담화의 의미를 살리고 일본 내 양심 세력과 연대하기보다는 담화 자체에 분노했다. 고노 담화 중에 “(일본 정부의)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 그리고 광범위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됐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 또한 전지(戰地)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하면’(작은 따옴표는 필자) 한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한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 아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일본의 이러한 전향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의 여성운동은 일본을 별도로 하면이라는 문구를 문제 삼았다. 여성운동은 공창 출신이 많은 자발적인 일본인 위안부강제로 끌려간 우리는 다르다며, 일본인 위안부를 이 보고서에 집어넣은 것은 강제 종군 위안부의 성격을 흐리기 위함이라고 반박했다.

위안부가 국적, 계급, 지역 등에 따라 개인의 고통이 달랐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전후 모두 일본인 위안부와 한국인 위안부의 자국에서 지위는 전자가 훨씬 가혹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위안부제도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강제와 자발성 여부로 구분하는 일제의 논리를 한국 사회도 답습했다는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의 기본 지배 원리인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여성을 이분화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돈을 벌러 자원한 매춘 여성’(일본인 위안부)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간 순진한 피해 여성’(조선인 위안부)이라는 이분법은 실제 역사적 사실도 아니다. 무엇보다, 당시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을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위안부를 대변하는가

두 번째 문제는 일본 측이 위안부해결 방식의 하나로 고안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이다. 국민기금은 자민당·일본사회당·사회민주당 연립 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한 19957월 발족하여, 같은 해 12월에 총리부와 외무성이 공동 관리하는 법인으로 설립되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 대한 보상 사업과 여성의 명예와 존엄 등과 관련된 당대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재단이다. 민간 반, 정부 반으로 구성된 이 기금에 대해, 한국 사회는 전적인 국가 보상이 아니라 일본 민간인의 성금이 동원되고, 피해자가 이 기금을 받는 것은 일본 측 논리인 위안부 제도=성매매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기금 수령을 보상이나 배상으로 생각하기보다 매춘 인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나 역시 당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공식적 차원에서 운동단체가 이 기금에 반대할 수는 있어도 극한의 빈곤 속에 있던 피해 여성이 개별적으로 수령한 것에 대한 비난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기금 수령 거부에는 운동단체 혹은 한국 사회가 모든 피해자를 대변한다는 논리가 전제된 것으로, 사회운동과 피해자와의 관계 전반에 대한 많은 논쟁거리를 요구한다.

세 번째 사건은 2020525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대협)의 불투명한 회계 의혹과 기존의 운동 방식을 비판적으로 증언한 인권운동가이자 당사자인 이용수님의 기자회견이다. ‘위안부운동 주변에서는 터질 것이 터졌다는 위기감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솔직하지 않았다. 이용수님의 말에 대한 진보진영의 반응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동의 음모다” “조직에 문제가 있더라도 사회운동이 타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 “갈등을 극복하고 다시 뭉치자”, 심지어 치매다라는 언설까지 등장했다.

당사자, 피해자의 말에 대한 경청과 존중보다는 진영논리가 앞섰고, 이용수님의 문제제기를 다룬 논쟁보다는 사회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위안부는 과거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 ·일관계, 피해와 가해를 둘러싼 윤리, 식민지배 이후에도 지속되는 식민주의, 일상의 성폭력 등 인간 문명 전반의 주제다. 따라서 위안부문제는 여성 문제, 일제강점기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 보편적인 논쟁거리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운동을 되돌아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요, 어떤 면에서는 아픈 일이다. 아쉬움을 넘어 새로운 논의의 장이 열리기를 희망한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편집장 | 경향 2024.08.20.

 

강북의 냄새, 강남의 냄새

며칠 전부터 스레드라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 보고 있다. 소셜 미디어마다 올라오는 글의 특성, 소통 방식이 다르다. 스레드에서는 서로 반말로 소통한다. 격의 없이, 수평적으로 연결한다는 취지로 보인다. 그런 점이 흥미롭고, 연구에 도움이 되기에 써보고 있다. 그러다가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요 며칠 새 스레드에서 높은 관심을 받는 글이다. 올린 지 이틀 만에 조회 수가 28만회를 넘어섰다. 글은 짧다. ‘강북구나 노원구에서는 빈민 냄새가 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본인은 강남으로 오고 싶었다는 글이다.

좋아요 171, 댓글은 무려 692개가 달렸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통상 좋아요 개수가 댓글 개수보다 높다. 그런데 이 글은 댓글 개수가 좋아요 개수보다 네배에 가깝다. 사람들이 그만큼 이 글에 관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는 뜻이다.

원글을 읽고 독자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올랐을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지 궁금하다. 필자는 냄새라는 단어에 마음이 쓰였다. 냄새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깊게 각인되는 감각이다. 냄새는 공간, 사람, 사건에 관한 기억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논란이 되는 면도 있으나, 냄새를 활용한 후각 요법을 쓰는 경우가 있다. 오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노인에게 잊어버린 시절에 관련된 냄새를 맡게 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전쟁을 겪은 이에게 화약 냄새를 맡게 하면, 과거 기억을 자극하여 뇌 활동이 증진된다는 접근이다.

원글을 쓴 이가 강북에서 실제로 어떤 냄새를 맡지는 않았을 테다. 이는 그저 은유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냄새라는 단어를 쓸 정도였다면, 그에게 강북에 관한 경험, 기억의 넓은 바탕은 빈민으로 채색되어 있을 듯하다. 이점이 몹시 씁쓸했다.

원글을 비판하는 댓글에는 강북에도 부자 동네가 적잖다. 강북에 부자 기업이 더 많다. 강북 쪽의 자가 비율이 더 높으니, 세입자의 거주비율이 높은 강남보다 강북이 더 부유한 셈이다. 강남에도 거주환경이 열악한 곳이 많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지역이 더 부유한지 가려내기는 중요하지 않다. 논의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각각의 특색을 품고 있다. 그 공간을 흘러간 시간, 살아간 사람에 의해 축적된 이야기와 문화가 특색을 형성한다. 숲에 비유하면, 나무는 각자 뿌리 내린 자리에서 묵묵히 시간을 견디면서 수많은 생명체, 자연의 변화와 상호작용한다. 그 결과 서로 다른 가지, 이파리를 피워내며 나무마다 다른 정체성을 품는다. 그렇게 각기 다른 나무가 어우러져 있기에 숲은 아름답다. 숲길을 걸어가는 이마다 그 숲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그런데 만약 숲길을 걸으며 각 나무의 값어치만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기억한다면, 그 여정은 너무 메마르고 재미없지 않을까?

우리가 발을 딛는 공간을 돈의 잣대, 건조한 숫자를 중심으로 나누고, 기억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풍성하게 경험하기 어렵다. 공간과 사람이 품은 서로 다른 삶의 냄새를 맡았으면 좋겠다. 그 냄새를 통해 우리는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관계 맺을 수 있다. 나는 스레드에 원글을 올린 이를 비난할 마음은 없다. 다만, 그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더 다양한 냄새를 맡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와 다층적 가치를 발견하기를 희망한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더욱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리라 믿는다.

김상균 | 인지과학자·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 한겨레 2024.08.21.

 

뉴라이트 원조들이 본 윤 정부의 뉴라이트 소동

뉴라이트가 처음 출현한 건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4년 무렵이다. 그해 11월 서울 명동에서 운동권 출신 70여명이 모여 자유주의연대라는 단체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의 진보적 지향, 특히 대북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선언문에서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구체적 대안이 결여된 섣부른 자주외교는 한-미 동맹의 표류와 대북 안보 불감증의 확산을 초래했다고 출범 이유를 밝혔다.

이 단체의 핵심 중 다수는 엔엘(NL·민족해방) 전향파들이었다.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던 강철김영환씨가 주도한 잡지 시대정신이 뉴라이트 탄생의 이념적 기반이 됐다.

북한을 추종하다가 반북(북한 민주화)으로 돌아선 뉴라이트는 보수 진영엔 매우 유용한 무기였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게 두번이나 정권을 뺏긴 기존 보수세력은 이들에게 뉴라이트’(신보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보수 부활의 전사가 되길 기대했다.

뉴라이트는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박근혜 의원을 꺾고 대선 후보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이명박은 뉴라이트, 박근혜는 올드 라이트(old right)’라는 구분은, 아버지 유산에 기반을 뒀던 박근혜에겐 불리한 프레임이었다.

하지만 뉴라이트의 화려한 날은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대선 과정에서 뉴라이트에 기대 정치적 출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참신함은 사라지고 정치적 욕망만 분출했던 탓이다.

또 하나는, 일부 전향파 경제학자들이 일본 우익 시각과 맞닿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공공연히 주장해 국민적 비판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을 주도했던 ㄱ씨는 이런저런 이유로 뉴라이트 운동은 이명박 정부 초기나 중기에는 사실상 소멸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유주의연대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인 ㄴ씨도 그때 뉴라이트 운동은 끝났다. ‘엠비(MB·이명박 대통령의 애칭) 2중대이면서 친일파라는 비판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십수년이 흐른 지금, 다시 뉴라이트 소동이 불거졌다. 불을 지피고 키운 건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은 우리의 파트너라고 말하더니, 올해 광복절엔 일제 침략과 만행에 대해선 언급 없이 북한 주민들이 자유 통일을 강력히 열망하도록 변화시키겠다고 밝혔다.

19일 열린 국무회의에선 북한은 개전 초기부터 반국가세력을 동원해 국론 분열을 꾀할 것이다. 혼란과 분열을 차단하고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높일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북·친일은 뉴라이트에 찍힌 낙인과 같다. 그런데 정작 뉴라이트 인사들은 윤 대통령의 언행이 당혹스럽다고 말한다. ㄱ씨는 우리의 처음 목표는 북한 민주화였는데, 지금은 실체도 없는 뉴라이트가 오직 친일·극우로만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광복절 경축사인데, 일제 침략과 항일 독립운동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 게 맞는 건가. 조선을 합병하는 조약이 무효라고 하면서 1948년에 건국했다고 말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ㄴ씨는 윤석열 대통령 발언은 오히려 과거 개발독재 시절의 올드 라이트와 흡사하다고 말했다. ㄴ씨는 오래전부터 건국절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극우 성향의 올드 라이트들이었다. 이들이 새로운 이미지를 위해 뉴라이트라는 머리띠를 둘렀을 뿐이다. 지금 뉴라이트라는 어휘엔 정치적으로 한자리하기 위한 방편 외엔 남아 있는 게 없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요즘 윤 대통령 발언은 새로운 보수라는 말로 치장하기엔 너무 거칠고 원색적이다. 친일과 개발독재에 뿌리를 둔 한국의 강경 보수세력이 김대중·노무현 집권 이후 가졌을 분노와 증오의 그림자를, 윤 대통령 발언에서 느낄 수 있다. 정부를 비판하면 손쉽게 반국가세력으로 몰고, 전쟁이 발발하면 암약하던 이들이 들고일어나 북한군에 협력할 거란 겁박을 했던 게 거의 반세기 전 일이 아닌가. 시대정신과 자유주의연대에 참여했던 ㄷ씨는 윤 대통령 발언을 보면, 부정선거와 5·18 북한군 개입만 빼고는 태극기 부대주장과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뉴라이트든 네오콘(neo-conservative)이든 명칭이 중요한 건 아니고, 지금 윤석열 정부 인사들이 뉴라이트인지 아닌지 엄밀히 따질 필요도 없다. 진짜 문제는 뉴라이트 원년 멤버들조차 우려할 정도로 윤 대통령이 자기만의 성에 갇혀 역사를 거꾸로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찬수 | 대기자 | 한겨레 2024.08.21.

 

마지막 집은 어디에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두려운 세상에서 과연 나의 마지막 집은 어디일까? 이 시대 적지 않은 노인들이 이 아닌 요양시설에 머물고 계시며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고령자주거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마지막 집 또한 요양시설이거나 시설 입소조차도 쉽지 않을 수 있다. 그 미래가 원치 않는 모습이라면 아파트만 끝없이 지어 올리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 집에 신경 써야 한다.

723일 정부는 시니어 레지던스 활성화 방안정책을 발표했다. 시니어 레지던스? 고리타분한 노인주택이 아니라 그럴듯한 신상품을 소개하는 느낌이다. 초고령사회를 맞아 고령자 주거의 선택지와 공급을 늘린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시니어 레지던스가 아파트 시장의 정체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부동산 개발사업을 일으키기 위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앞뒤 없이 고령자주택이 부족하니 규제를 확 풀어서 공급을 늘리겠다는 결정 이전에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고령자주택이 왜 필요한가? 요양시설을 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 다수의 생각이다. 요양시설에 거주하시는 많은 어르신은 오늘도 에 가기를 원한다. 그렇게 노인들이 원치 않는 요양시설에 머무는 이유는 노인들이 집에서 지내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을 집에서 지내며 해결할 수는 없을까? 실버타운은 어떤가? 실버타운은 노년기 필요한 다양한 일상생활 지원이 포함된 주거서비스 상품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이다. 그 일상생활 지원의 핵심은 식사와 커뮤니티 활동이다. 그 정도의 일상생활 지원이라면 꼭 실버타운이 아니어도 다른 형태로 가능하지 않을까? 아파트 또는 지역의 커뮤니티시설을 이용한 주거서비스, 충분히 가능하다. 과거 노인복지주택(실버타운)은 무슨 문제가 있어 분양이 금지되고 많은 규제가 생겼을까? 규제를 확 푼다고 하는데 정말 풀어도 괜찮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서 고령자주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공동체가 사라지고 이웃을 잃어버린 공동주택(아파트, 다세대주택, 다가구주택 등)은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의 격리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의 주거문화는 노인이 살기에 불편하고 위험하다. 돌봄이 필요한 노인은 집에서 시설로 분리해 내고 있다. 급격히 늘어나는 노인인구로 인하여 더 이상 노인요양 및 주거복지 시설로 감당하기 힘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어울려 살 수 있는 세대통합적 주거, 사회적으로 계급화된 주택이 아니라 각자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적정 비용으로 모두가 어울려 살 수 있는 포용적 주거문화, 그리고 의료·요양·일상돌봄이 가능한 지역사회다. 그게 기본이다. 기본이 갖춰진 후에 또 다른 형태의 가치를 추구하는 노인주택이든 요양시설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시니어 레지던스, 실버타운도 좋지만, 노인이 돼도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은 마을과 집이 우선이다. 노인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머물 수 있는 마지막 집을 찾아야 한다. 그 집이 있다면 우리는 시설에 의지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거나 시설에 가지 않고도 내 집에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다. 오로지 부동산개발이 답은 아니다.

김수동 탄탄주택협동조합 이사장 | 경향 2024.08.21.

 

자궁의 불평등

원치 않은 임신은 두려운 일이었다. 두 아이를 기르는 지금도 그렇다. ‘원치 않은 임신은 자궁이 몸 안에 자리한다는 이유로 여성이 겪어야 하는 근원적 불안일지 모르겠다. 초경 때 엄마는 말했다. “몸을 잘 간수해야 해.” 13세 초등학생은 조심하지 않으면 임신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산술적으로 30년간 원치 않은 임신을 걱정하며 살아왔다면 과장일까. 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던 기간은 2이었다. 두 아이를 품었던 시간이다. 안전한 남자와 사회가 용인하는 결혼제도 안에서 임신을 계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자궁은 불평등의 근원이었다. 임신과 출산만큼 여성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은 없다. 혼자 임신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안전한 임신 기간에도 남편에게는 자궁이 없다는 사실에 가끔 당혹스럽게 화가 났다. 함께 아이를 낳기로 했지만 입덧도, 출산도 자궁이 있는 몸에서만 가능했다. 괴로운 건 혼자인데 부모는 함께 된다는 것이 불공평하다 느꼈다. 자궁이 있는 몸을 거룩한 모성으로 추앙하는 시선에 이질감을 오래 느꼈다.

16일 세종시의 저수지에서 영아 시신이 발견됐고 20대 무직 여성이 자수했다. 아이 엄마는 경찰 조사에서 집에서 혼자 낳던 중 숨을 쉬지 않아 겁이 나 유기했다고 진술했다. 아이가 출산 후에 사망했다면 여성은 아동학대 살해 혐의를 적용받게 된다. 이 여성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끔찍한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게 전부라면 서글프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질문은 임신 후 혼자서 택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지를 고른 20대 여성에게는 무엇이 부족했을까아닐까. 한국 사회에서 계획 가능한 임신이 되기 위해선 안전한 남자, 사회가 인정하는 제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제 상황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남자가 사라진 이 여성에게는 이 조건이 다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생명은 소중하지만 인간은 보호자의 조력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여성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면 생명은 더욱 위태로워진다. 낙태죄가 폐지된 마당에도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대립하는 구도 이상의 논의를 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가 깨달아야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아이는 태어날 때뿐 아니라 자랄 때도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엄마가 안전해야 아이도 안전하다는 당연한 사실 말이다.

보건복지부는 출산 사실을 주변에 알리기를 꺼리는 위기 임신부들이 의료기관에서 가명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보호출산제를 한 달 시행한 결과 14명의 임신부가 보호출산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아동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임신부들의 노력과 정부의 고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피임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학교 성교육, ‘포괄적 성교육을 터부시하는 종교계, 해외 출판상을 수상한 성교육 도서도 도서관에서 뺀 경기도교육청, 낙태죄가 폐지됐는데도 임신중지 시스템을 보건의료 시스템으로 어떻게 들여올지 고민하지 않는 복지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입법을 고민하지 않는 국회, 88년 전 도입돼 세계보건기구(WHO)의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되고 현재 99개국에서 안전하게 쓰고 있는 유산유도제 사용 허가를 미루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미혼모에 대한 낙인이 여전하고 한부모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사회에서 제도 시행 전이었다면 놓쳤을 수 있는 소중한 생명들을 살릴 수 있었다는 복지부 차관의 말은 공허하다.

자궁이 있는 몸은 여전히 전쟁터다. 그 결과가 위기 임신부라면 원인부터 살펴보는 게 순리다. 재생산권으로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단순히 피임할지 말지, 임신중지를 할지 말지가 아니라 여성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그 삶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는지 살펴보자는 관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재생산권은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조건 때문에 사회적 제약을 받을 수 있기에 기회의 평등, 건강권의 관점에서 베이스라인을 맞춰줘야 한다는 논리로 커져왔다. 스웨덴은 모든 아이가 원하는 때에 환영받으며 태어나는 것을 보건 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다. 모든 아이가 환영받으며 태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여성의 몸을 전쟁터로 남길 것이냐,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의 열쇠는 우리가 쥐고 있다.

임아영 젠더데스크 | 경향 2024.08.21.

 

'국부' 이승만을 기린다? '국부'를 부정한 순간이 대한민국의 진짜 시작점

8월과 4, 남북의 갈림길

올해 광복절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취임 이후 줄곧 대한민국 대통령이기보다는 뉴라이트 역사관 전도사로 분주한 윤석열 대통령 탓이다. 대통령의 언행이며 인사(人事), 외교며 대북정책이 모두 다 헌법 정신의 테두리와 사회적 합의의 큰 줄기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다. 그래서 기후변화로 인해 더 길어지고 더 뜨거워진 여름 날씨만큼이나 환멸과 분노도 끓어오르고 있다.

윤 대통령과 주위 뉴라이트 아첨꾼들이 항일독립운동의 기억을 폄훼하면서까지 떠받드는 것은 이른바 한미일 연대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지키겠다는 궁극의 가치는 자유민주주의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세계관-역사관을 응축한 인물로 이승만을 떠받든다. 3.8선 이남이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걷도록 만들어준 '국부' 이승만을 제대로 기려야 하며 이승만으로부터 윤석열로 이어지는 계보와 어긋나고 상반되는 요소들은 모조리 쳐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에 기승을 부리다 한풀 꺾였던 흐름인데다 21세기에 '국부' 운운하는 게 너무 시대착오적이어서 이런 논리, 아니 비논리를 굳이 반박하려고 노력까지 해야 하나 싶다. 그러나 이런 논리 아닌 논리가 대통령의 행정권 남용을 통해 감히 사회 위에 군림하려 하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러니 논란의 지형 자체가 퇴행적임을 알면서도 반격의 수고를 마다할 수 없다.

더구나 이 여름에 선보인 현대사 연구의 역작 한 권을 읽고 나니 그런 감회와 결의가 더욱 짙어진다. 이 책의 독서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거울에 대한민국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었고, 거울에 드러난 그 면모가 뉴라이트 역사관이 설파하는 서사와는 도무지 닮은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고된 쿠데타>가 전하는 '8월 종파사건'의 진실

언급한 책은 북한사를 다룬 굵직한 저서를 발표해온 역사학자 김재웅의 <예고된 쿠데타, 8월 종파사건>(푸른역사, 2024)이다. 무려 650쪽에 달하는 이 대작은 흔히 '8월 종파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1956년 북한 내부의 정치적 충돌을 다룬다. 이 사건은 북한 현대사에 관한 책에는 빠짐없이 등장할 만큼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다. 그러나 이 사건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은 의외로 없었다. 이런 배경만 놓고 봐도 <예고된 쿠데타>는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한데 19568월 사건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저작이기만 한 게 아니다. 이 책을 접한 독자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예고된 쿠데타>는 해당 사건의 '결정적' 분석이자 정리라는 인상을 준다. 엄청난 공을 들여 구소련 1차 자료들을 섭렵하지 않고는 찾아낼 수 없었을 생생한 증언과 희귀한 기록으로 600여 쪽이 꽉 채워져 있다. 다른 관련 서적에는 그저 이름만 소개되고 문장 몇 줄로 정리되던 인물들이 이 책에서는 마치 지금 여기에 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인처럼 저마다의 고뇌와 사연을 짊어지고 다가온다. 이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긴장감 넘치는 정치 드라마이자 한반도와 세계를 넘나드는 대하소설이고 가슴을 옥죄는 비극이다.

<예고된 쿠데타>는 이제껏 조선노동당 내 '연안파'가 김일성 중심의 당권파와 충돌한 분파 투쟁 정도로 이해되던 19568월 사건의 배경과 전개, 내막을 소상히 펼쳐 보인다. 거기에서 마주하는 것은 한국전쟁 후 북한 민생경제의 일상적 위기, 1956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이후 불어 닥친 탈스탈린화 바람, 스탈린주의 체제의 북한판인 김일성 주도 체제에 대한 자생적 반성과 문제제기가 서로 급박하게 교차하던 당시 정황이다. 그리고 이 정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주소대사 이상조를 비롯한 노동당의 40대 간부들이다.

<예고된 쿠데타>는 이러한 당 내 비판세력의 인적 구성을 상세히 밝힌다. 그 중 핵심인 이상조, 윤공흠, 서휘 등은 물론 일제 말에 중국 연안에서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운 화북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출신, 즉 연안파다. 그러나 연안파만이 아니라, 더 일찍부터 김일성 세력의 견제를 받던 재소 고려인 출신, 즉 소련파 간부들도 가담했다. 또한 연안파 전부가 함께 한 것도 아니어서, 독립동맹 계열 중진 중에는 최창익만 정변의 구상과 실행에 적극 참여했다. 뿌리 깊은 당 내 분파 갈등이라기보다는 북한 사회의 진로를 둘러싼 새로운 개혁파의 대두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들이 노동당 공식회의를 통해 관철하려 한 것은 김일성 개인숭배 중단, 사당(私黨)화된 노동당의 민주적 운영 회복, 농업 및 경공업과 중공업의 균형 발전을 지향하는 경제계획 등이었다. 하나같이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 이후에 현실사회주의권에서 새로운 상식처럼 부상한 내용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소련과 중국 모두 노동당 내 김일성 비판세력에 동정적이었고, 몇몇 경로를 통해 지원 의사까지 밝혔다. 그러나 당 회의 석상에서 쏟아지는 비판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김일성 그룹의 당 장악력을 확인한 뒤에는 두 나라 다 입장을 바꿨다. 게다가 동유럽의 탈스탈린화 흐름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두 '형제국'은 기존 노동당 당권파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고 나섰다.

모처럼 등장한 당 내 개혁파의 시도는 삽시간에 무참히 좌절됐다. '8월의 대전환'이 될 수도 있었을 사건은 결국 '8월 종파사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북한 사회 전체가 전보다 더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정변 기획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던 연안파 인사들도, 심지어는 형식적 국가원수였던 김두봉까지 숙청당했다. 중경 임시정부의 좌우합작 체제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연안파 인사들의 옛 지도자였던 김원봉은 덩달아 탄압을 받다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정부가 홀로 도망가는 바람에 납북당하고 만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들 역시 대숙청 대상에 포함됐고, 조소앙은 이에 자결로 항의했다.

어쩌면 현재 북한 사회의 원형이 이때 확립됐다고 할 수 있다. 나라 밖 사회주의권의 동향에 잔뜩 주눅 들었던 처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주체"라는 말이 새로운 깃발이 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할 '주체사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조선노동당은 이견 따위는 존재할 수 없는 김일성 유일체제의 조직적 수단이 됐고, 20년쯤 흐르고 난 뒤에는 더 나아가 '세습'을 통해 이 체제의 연속성을 유지하려 하게 된다.

저자도 강조하듯이, 바로 이 점에서 <예고된 쿠데타>는 수십 년 전의 망각된 사건을 끄집어내려는 시도만은 아니다. 이 책은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현재가 시작된 원점으로 돌아감으로써, 북한 사회가 '가지 않은' ,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제 가야 할' 길의 방향을 확인한다.

북한의 8월과는 달랐던 남한의 4

1950년대 후반이라는 비슷한 시간대 탓인지 나는 '8월 종파사건'에서 늘 남한의 진보당 사건을 떠올리곤 했다. 1956년에 휴전선 북쪽에서 노동당 내 개혁파의 시도가 좌절되면서 대숙청의 파도가 일 무렵, 휴전선 남쪽에서는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뜻밖의 바람을 일으킨 진보당 대선 후보 조봉암이 2년 뒤에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19597월 조봉암은 끝내 사형을 당했다. 마치 데칼코마니마냥 한쪽에서 체제에 가장 진지하게 문제제기한 이들이 청소당할 때에 다른 쪽에서도 체제에 가장 근본적으로 도전한 이들이 제거된 것이다

그러나 <예고된 쿠데타>를 읽으면서 계속 떠오른 것은 조봉암과 진보당 탄압이 아니었다. 조봉암이 희생되고 1년도 안 돼 폭발한 민주혁명이었다.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으로 새겨진 19604월 혁명이었다.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는 요즘 일각의 복고 풍조에 따르면,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기원'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을 반공과 친미,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로 점지했다는 시작점이고, 이 기원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계보로부터 이탈하는 현실의 모든 존재는 그 이탈의 정도만큼 철퇴를 맞아야 할 운명이다. 이승만 외의 독립운동가들이나 해방정국 지도자들을 애써 공식 역사에서 지워 버리려 하고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을 기리자고 하는 현재 뉴라이트 주도의 소란은 이 "이승만=기원"론의 변주인 셈이다.

한데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계승해야 할 두 전통 혹은 기억(또 하나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중 하나로 명기된 4월 혁명이란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원'이라는 그 이승만의 부정이고 전복이다.

그 해 봄,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부정선거에 맞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수많은 시민이 총알이 빗발치는 경무대로 돌진했다. 국민을 학살하는 경찰에 맞서 급기야 시민이 무장하기 시작했고, 절체절명의 그 순간에 이승만은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였다. 분노한 시민들이 남산에 서 있던 25m 높이의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리는 장면이야말로 이 혁명의 절정이자 축도(縮圖)였다. 195610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혁명 군중이 똑같이 25m 높이였던 스탈린 동상을 무너뜨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가장 치열한 상징 행위이자 상징 그 이상의 행위였다.

<예고된 쿠데타>가 다루는 북한의 '8'을 마주하며 4년 뒤 남한의 '4'을 떠올린 이유는 이러한 '기원'의 부정과 극복이라는 4월 혁명의 의의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기원'이 이승만이라는 사고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그대로 대입한다면, 이 경우의 '기원'은 당연히 김일성이다. 1950년대, 즉 한국전쟁 직후의 시간 속에서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자신이 '기원' 노릇을 한 한반도의 양쪽 지역에 나름대로 견고한 독재 체제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서 1960년대로 넘어가는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남한과 북한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이 갈라졌다. 1956년 북한의 '8'은 실패한 반면 1960년 남한의 '4'은 성공했다. 아니, 이렇게만 말해서는 안 된다. '실패''성공'을 나누는 그 결정적 기준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한다면, 이렇게 다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95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신의 '기원'을 부인하지 못한다는 점을 통렬히 확인했으나, 1960년 대한민국은 그 '기원'을 과감히 부정했다.

사회의 모든 복잡다단한 소통과 교섭, 결정 과정이 일당 체제의 집권당 내 구조에 말도 안 되게 집중된 상황(스탈린주의=국가사회주의 체제)에서 몇몇 당 간부들은 참으로 진지하게 체제의 모순과 한계에 손을 대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체제가 시작되면서 받아들인 근본 전제들을 뒤집기는커녕 철저하게 그 틀 안에서 궤도 수정을 시도했다. 몇 겹의 장벽을 통해 대중과 분리된 당=국가의 공식 회의에서 정변을 시도했고, 건국의 후견 세력이었던 '형제국'들의 개입으로 정치적 실력을 대신하려 했다. 이런 극도로 제한된 도전 앞에서 김일성 그룹은 권력을 오히려 더 확고히 다졌고, 정말로 '기원'이 철두철미 지배하는 국가, 세습 수령의 나라를 만들었다.

반면에 1960년 봄에 거리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거침이 없었다. 잇단 부정선거를 통해 선거정치의 잠정적 무용성을 확인하자 정치의 더 근본적인 통로, 즉 거리의 정치를 스스로 열었다. 남한 쪽 후견 세력인 미국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거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 결과, 김일성 체제와는 달리 이승만 체제는 일단 무너지고 말았다. 4월의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의 '기원'이 이승만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 '기원'은 곧 그날의 그들 자신이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심오한 진리가 토착화하는 경이로운 역사적 순간이었다.

물론 불과 1년 뒤에 다시 세상이 뒤집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그토록 찬란한 산업화의 성과를 냈어도 그것이 독재자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된다고 믿는 국민은 늘 압도적 다수에 미달했다. 그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수가 그러길 거부했다. 4월의 긴 그림자가 거기에 있었다. 무법천지가 된 1980년 광주에서 시민군이 조직될 때에도, 대한민국의 다른 도시들이 무려 7년이나 지나고 나서 이에 화답했을 때에도 4월의 기억이 지표면 저 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헌법 전문에 괜히 "4.19"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니다.

'국부'를 부정한 그 순간이 대한민국의 진짜 시작점이다

그러고 보면 '국부'란 말도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승만을 사무치게 기억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아니, 이승만 동상을 25m보다 더 높게 다시 세우는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매년 4월 시민들이 동상을 쓰러뜨리는 유쾌한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용도라면 말이다. 프랑스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목 잘린 옛 왕비의 모습을 자랑처럼 전시하는데, 또 다른 민주공화국에 비슷한 미풍양속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고 이게 과시용 의례일 뿐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국부'를 부정한 그 순간이 대한민국의 진짜 시작점이라는 기억의 반복적 환기는 '자유민주주의'의 의미를 더욱 심오하게 되새기게 만들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 궁극의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기원'에 속박당하지 않는 국가, 언제든 자신이 '기원'임을 선언할 수 있는 주체인 제헌적 시민들이 그 권력을 일상의 시간 속에서 녹슬지 않게 살려 나가는 사회, 어느 때든 새로운 '기원'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경로를 과감히 전환할 수 있는 공동체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집단적 각성이야말로, 휴전선이 가른 양쪽 중에서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자부심을 갖고 전파할만한 무엇일 것이다. 이미 60여 년 전에 동상을 쓰러뜨려본 기억이 소실되도록 놔두지 않고 마침내 양쪽 모두에서 '공동'의 기억으로 모아지도록 만드는 일. <예고된 쿠데타>가 전하는 '8'의 진실과 혼란한 세월 속에 되새기는 '4'의 기억을 서로 거울삼아 비춰보면서 새삼 이 일이 우리 앞의 숙명적 과제임을 절감한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4.08.21.

 

·, 헤어지는 중입니다

지난 6월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한 중국 대학입시 가오카오에 응시한 학생은 1342만명이다. 이들은 점수에 맞춰 서열화된 2900여개 대학에 차례대로 입학한다. 중국의 대학 서열화가 한국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고, 그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중국 최고 대학으로 꼽히는 베이징대학이 있다.

지난달 2024학년도 신입생 모집을 진행한 베이징대에 이례적인 현상이 발생했다. 한국어학과(조선어학과)와 러시아어학과 등 2개 과에 지원자가 미달한 것이다. 두 과는 매년 각각 10명 안팎의 본과 신입생을 뽑는데, 1300만명이 넘는 수험생 중 두 과에 지원한 학생이 1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러시아는 전쟁 중이라 그렇다 치고, 한국어학과는 왜 이렇게 인기가 없었을까. 중국 지인 여럿에게 물은 결과 취업 때문일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한국어를 전공해서는 먹고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으리라는 것이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중국에서 한국의 위상은 빠르게 낮아졌다. 자동차, 가전, 화장품, 의류 등 분야에서 한국산이 환영받는 것은 옛말이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사태와 코로나19 사태 등을 거치며 양국은 급속히 멀어졌다. 2022년 집권한 윤석열 정부의 대미국 편향 외교와 중국에 대한 강경 발언은 양국 관계를 더욱 얼어붙게 하였다. 요즘 한국 교민이 모여 사는 베이징 왕징에서 한국인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현상은 거울을 보듯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한때 영어 학원을 위협했던 대형 중국어 학원이 2010년대 말부터 대거 문을 닫았고, 대학들도 중문과나 중국어학과를 없애거나 다른 과와 통폐합하는 분위기이다. 한국 학생과 학부모들도 중국어를 배워서는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잘 아는 것이다.

-중 교류가 줄고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한국어와 중국어에 대한 전공 수요가 감소하는 것인데, 베이징대 한국어학과의 신입생 모집 미달은 좀 다른 충격으로 다가온다. 중국 최상위 엘리트층의 한국에 대한 무관심이 이런 상황으로 나타난 것 아닌가 하는 우려이다.

다행인 것은 중국에서 전공으로서의 한국어 인기가 바닥인 것과 달리, 취미로서 한국어 학습은 꽤 인기가 높다는 것이다. 1990년대 시작돼 3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드라마, 노래, 영화 등 한류의 영향 때문이다. 특히 한국 정부가 개설한 베이징 한국문화원의 한국어 강좌는 20~30대 중국 학생·직장인에게 인기가 많아, 수강 신청 몇시간 만에 수백명의 인원이 마감되곤 한다.

그러나 한국문화원은 중국인이 갖는 만큼 한국어 교육에 큰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문화원은 지난 2월 새 학기를 시작하며 기존 한국어 강좌 20개를 12개로 줄였다. 한국에서 파견받는 한국어 강사가 2명에서 1명으로 줄었다는 이유였다. 이례적인 상황에 대한 질문에 문화원장은 무료로 가르쳐주는 건데, 수업을 줄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2000년대 전후 뜨거웠던 한-중 관계가 불과 20여년 만에 이렇게 차갑게 식을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없었다. 20~30년 뒤 한-중 관계가 어떨지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때 양국이 대화해야 할 때, 이를 통역하고 번역할 사람이 너무 적지 않을지 우려된다.

최현준 | 베이징 특파원 | 한겨레 2024.08.22

세 단어 경제학 : 공짜 점심은 없다

공짜 점심은 없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까닭 없이 베푸는 호의를 경계하라는 경구로 삼을 수도 있다. 이 말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선술집에서 술을 한 잔만 마셔도 공짜로 점심을 제공한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한가한 낮 시간대 손님을 끌기 위한 미끼상품이었겠지만, 주당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점심은 먹어야 하는데, 술 한 잔이면 밥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반겼을 법하다. 비록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다시 석 잔으로 이어지긴 했어도 말이다.

효율적인 시장경제의 기본 전제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은 세상사 온갖 분야에 두루 통용되는 격언이지만, 아무래도 경제학에서 가장 널리 쓰인다. 많은 경제학자가, 이 말을 자유주의 경제학의 태두인 프리드먼 교수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 이전부터 쓰였던 말이다. SF 마니아라면 거장 하인라인의 소설 <달은 무자비한 여왕>에서 이 말이 인용됐음을 기억할 수도 있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 말이 등장한 첫 공식 문건은 텍사스 지역 신문의 1938627일자 칼럼 여덟 단어 경제학이다. 칼럼 내용은 우화였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다.

옛날 바빌론의 왕이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안타까워하다가, 왕국의 경제학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해결책을 제시하게 했다. 2010명의 학자들이 1년을 연구한 끝에 온갖 차트와 그래프가 난무하는 분량이 600쪽인 87권의 책을 저술해 바쳤다. 왕은 너무 길다고 화를 내며 병사들을 시켜 절반의 경제학자를 활로 쏘아 죽였다. 그리고 남은 1005명의 경제학자에게 내용을 줄여오라고 명했다. 다시 1년 뒤 이들은 차트와 그래프를 삭제하고 67권으로 줄인 책을 바쳤다. 왕은 대로하며 다시 절반의 학자들을 죽였다. 1년마다 내용을 줄인 책을 바치고 왕은 화를 내며 절반을 죽이는 행위가 반복됐다. 세월이 흘러서 최후의 1인이 남았고, 그는 왕에게 87권 책 내용의 정수를 담은 한 문장을 말했으니, 그게 바로 공짜 점심은 없다(우리말로는 세 단어이지만 영어로는 여덟 단어이다)’였다.”

경제 원리를 이보다 더 극명하게 압축해서 표현한 문장을 찾기는 어렵다. 경제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를 담은 이 문장은, 시장경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므로, 한정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해 성과를 극대화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에 시장경제 참여자들, 가령 새내기 직장인이나 신규 자영업자에게 이를 명심하라고 주지시킬 필요도 없다. 이를 신신당부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정부 부문 종사자이다.

정부라고 해서 공짜 점심이 가능할 리 없다. 정부지출은 국민이 낸 세금을 재원으로 한다. 전혀 공짜가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구매하는 것과 달리 비용과 혜택이 직접 연결돼 있지는 않다. 점심으로 남산 왕돈가스를 먹으려면 13000원을 내야 한다.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기에, 몰려 있는 자칭 원조집 4곳 중 가장 맛집을 골라 간다. 정부지출은 다르다. 결국에는 누군가 부담하겠지만, 당장 내가 보는 혜택에 대한 비용을 내가 지불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무조건 누리고 보는 게 좋다. 내 돈 나가는 게 아니니 가성비 따질 이유도 없다. 비용과 혜택이 직접 연결되지 않은 탓에 공짜 점심인 양 착시를 일으킨다는 것이 정부를 시장보다 비효율적이게 하는 근본 이유다.

개별 사업의 비용 지불과 편익 수혜가 1 1로 매칭되는 대신 뭉뚱그려 총지출을 세금으로 충당하면, 확실히 개별 정책의 결정과 실행에서는 비용에 덜 신경 쓸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어쨌든 총지출은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라는 제약마저 없다면?

트릴레마라는 단어가 있다. 딜레마가 둘 사이에서 하나를 택하기 어려운 상황을 의미하듯, 트릴레마는 셋 사이에서 둘만 택해야 할 때의 어려움을 의미한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정부 정책 결정에서도 종종 맞닥뜨리는 상황이다. 정부 재정에서 트릴레마는 큰 지출, 작은 세금, 적은 채무라는 셋을 모두 달성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황에서는 잘해야 둘만 달성할 수 있으니,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정치가와 관료들은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따져봐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만 현실의 재정 운용에서는 취사선택에 그다지 심사숙고하지 않는다. 정책 결정자가 피부로 느끼는 셋의 중요도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큰 지출과 작은 세금은 현재 국민에게 좋은 것이지만, 적은 채무는 미래 국민에게 좋은 것이다. 과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자식 세대에게 빚 떠넘길 텐가

전 국민에게 25만원어치 상품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별도의 재원 대책은 마련하지 않으니 채무만 늘어난다. 법인세와 상속세를 감면할 수 있다. 하지만 쓸 데는 계속 늘어나는데 들어오는 세금마저 줄이니 역시 채무만 늘어난다. 낸 것보다 많이 받는 국민연금 구조를 뜯어고치는 게 늦어질수록 미래세대의 부담은 계속 커지지만, 여전히 변죽만 울린 채 그대로다. 덕분에 대규모 재정적자는 만성이 되어, 2020년부터 올 상반기까지의 적자만 더해도 500조원이 넘는다(그나마 하루하루 급속히 불어나는 연금부채는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쯤 되면 셋 중 선택을 두고 고민해야 하는 트릴레마가 아니다. 그냥 현세대는 공짜로 호화로운 점심을 즐기고, 청구서는 뒷세대에게 넘기는 셈이다. 예전부터 의아한 게 있었다. 대한민국처럼 자기 자식을 끔찍이 위하는 부모들은 달리 찾기 어렵다. 그런데 어찌 사회 전체로는 자식 세대에게 빚 떠넘기는 데 이다지도 거리낌이 없을까.

사족) 그렇다면 해결책이 뭐냐고 궁금해할 독자를 위해 첨언하자. 구체적인 방법은 다양하지만, 기본은 동일하다. 미래세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으니, 아예 미래세대 부담은 일정 규모 이하로 묶어 놓은 다음, 재정지출과 세금규모를 놓고 고민하게 하는 것, 트릴레마 상황을 딜레마 상황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김태일|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 경향 2024.08.22.

 

정의의 역사는 결코 지배될 수 없다

2000년대 초반 김대중에서 노무현 정권으로 진보세력이 계승되는 와중에 등장한 것이 뉴라이트다. 그들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2008<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발간을 통해서였다. 학문의 자유를 빙자한 식민지근대화론의 등장이었다. 반역사적인 뉴라이트 언설의 근원지다.

대한민국 성립의 역사적 의의의 장에서 그들은 1948년 건국 이후의 역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난 60년간 세계사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존중하고, 그것을 국가체제의 기본 원리로 채택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체제가, 인간의 물질적 복지와 정신적 행복을 증진하는 올바른 방향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모두가 골고루 잘산다는 공산주의 이상은 자유와 합리적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나라의 약진은 1960년대 박정희 개발독재의 혜택이며, 근대화 기반은 일제에 의해 축적된 자본과 기술에 있었다. 경제와 군사력은 세계 5%에 속하고, 한류로 문화의 세계화도 이뤘으니, ‘일본의 마음을 헤아려 식민지 지배의 사과 요구도 그만하자고 한다. 그때는 우리가 일본국 국민이었으므로 식민지 모국에 저항한 김구는 테러범이다.

눈 밝은 시민들에 의해 뉴라이트의 퇴행하는 역사 인식은 파탄 났다. 이승만이 주도한 제헌헌법에는 1919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과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는 국부가 아니라 부산 발췌개헌파동에서 보듯 자유민주주의의 파괴범이다. 박정희는 미국이 제3세계에 제공한 근대화론과 반공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반독재와 노동운동 탄압에 의한 인권유린이 판을 쳤다.

터무니없는 뉴라이트 주장 이면엔 힘에 대한 우상과 이념의 과잉이 있다. 1·2차 세계 대전을 이용해 단기간에 제국이 된 미국의 힘과 자유의 이념이다. 미국은 광복 후 3년간 식민통치나 다름없는 점령기에 친일부역자들을 등용하고, 소련·중국에 대항하는 반공이념을 심었으며, 미국식 기독교를 후원해 훗날 그들이 자신을 대변하도록 했다. 뉴라이트가 다시 준동하는 배경은 수구적 현 정권이 토양을 제공하고, 몰락하는 자유지상주의 국가 미국의 패권 강화에 들러리를 자처해서다. ··일 동맹을 요구하는 미국의 그까짓 한·일 역사문제가 뭐 그리 중한가라는 물음에 뉴라이트가 마름처럼 응답한다.

그들은 1990년대에 등장한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회를 본받아 자학사관의 극복 방식을 도입한다. 또한 일본 우익의 식민지 당위론을 받아들여 우리가 남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이론의 주창자인 스즈키 다케오는 문부성 용역으로 쓴 1946<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에서 내선일체의 정책은 이상주의적 식민지정책이며, 일왕의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한반도 백성을 차별 없이 대했다고 한다. 스즈키가 자기 민족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는 일본 국민으로서 살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운명공동체 의식에 도달하였던 것”(박찬승,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의 식민지조선근대화론>)이라고 한 것처럼 일제의 한국 식민지지배는 축복이라고까지 한다. 식민강권통치에 대한 반성과 사과 요구를 심지어 콤플렉스라고 한다. 강도를 강도라고 하는 것을 열등감이라고 하면 기가 막힐 뿐이다. 결국 식민지근대화론은 한·일군사동맹의 길을 터 줄 것이다. 그들은 과거사를 지배함으로써 현재를 지배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정의의 역사는 결코 지배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병리현상이다. 전쟁과 쿠데타를 견디며 민주화와 노동운동을 이끌고 마침내 무혈혁명을 이뤄낸 백성들의 높은 의식을 백안시하는 작태다. 무상한 금권과 권력을 탐하는 눈먼 자들의 소멸은 순리 자연한 이치다. 지혜로운 시민들은 그들의 후안무치한 궤변의 역사관에 속지 않는다. 뉴라이트는 친일파의 복권이란 역리를 꾀하지 말고, 경제와 힘의 다극화로 넘어가는 세계적 추세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한반도에 영구 평화를 가져오고, 이 나라가 세계인들의 참된 리더가 될 수 있는가를 성찰하는 게 정도(正道)일 것이다.

원익선 |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 | 경향 2024.08.22.

 

대통령님 몰라봬서 죄송합니다태극기의 반성

우리는 태극기세력입니다. 고백건대 윤석열 대통령님을 오랫동안 가짜 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는 등 보수진영을 초토화시킨 대통령님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 윤석열 검찰총장이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과 부딪친 것은 약속대련으로 봤습니다. 검찰총장 윤석열이 문재인 정부와 결별한 것으로 꾸미고 국민의힘에 위장취업해 보수의 남은 뿌리마저 뽑으려 한다는 것이 우리 쪽 다수의 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말씀과 인사 등을 보면서 대통령님이야말로 진정한 태극기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동안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사실 총선 때도 대통령님을 의심했습니다. 태극기 독자세력화 차원에서 신당도 만들어봤습니다. 대통령님이 총선 참패 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총리를 추천해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많은 태극기들이 등을 돌리려 했습니다. 좌파세력과 국정을 논하다니요. 그러나 대통령님이 즉각 야당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고 국정을 제 궤도로 돌려놓으려는 여러 시도를 하는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대통령님이 뉴라이트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우리 편이라며 무릎을 쳤답니다. 죽마고우의 아버지이자, 멘토였다는 이종찬 광복회장은 용산에 밀정이 있다고 비판하고, 정부 주최 광복절 경축식에도 불참했지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 사사로운 정마저 끊어내려는 결단을 평가합니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발탁도 신의 한 수입니다. 야당은 막말을 일삼았다고 비판하지만 김 후보자의 주옥같은 어록 중 틀린 말이 있던가요. 좌파방송 MBC 정상화에는 이진숙 위원장만 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노래주점과 골프장에서 법인카드를 남발한 막무가내 정신이야말로 종북좌파 방송인들을 뿌리 뽑는 데 꼭 필요한 자질 아니겠습니까.

대통령님이 광복절을 맞아 단행한 사면·복권을 보고도 진심을 느꼈습니다. 일각에선 친문재인계 김경수 전 경남지사 복권을 비판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핵심은 국정농단 관계자들 거의 모두가 면죄부를 받은 것이지요. 태극기로 개심한 대통령님에게 국정농단 수사를 주도했다는 꼬리표는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대통령님이 잡아넣었던 인사들을 모두 풀어주는 무리수를 둔 것 자체가 태극기에 보내는 러브레터 아닐까요. 김경수 복권은 물타기이자, 야권 분열을 노린 곁가지였을 뿐이죠.

이런 식의 막무가내 인사와 사면·복권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도 엄두를 내기 힘들었을 겁니다. 태극기를 향해 직진하시는 대통령님의 용기와 결단에 박수를 보냅니다. 한때나마 대통령님을 의심했던 우리의 짧은 안목, 얕은 인내심도 반성합니다.

대통령님에게도 태극기가 필요합니다. 국민 10명 중 7명은 대통령님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비호감도가 2배가 넘은 지 아주 오래됐습니다. 모 평론가는 대통령님의 반국가세력 암약발언을 두고 현실을 떠나 가신들을 데리고 극우 판타지의 세계로 집단이주한 것 같다고 했지요. 야속하고 불쾌하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도 이렇습니다. 대통령님이 성공한 대통령을 아직도 꿈꾸고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판타지가 있을까요.

그러니 우리라도 믿으세요. 대통령님 앞날에 대해 흉흉한 말들이 많습니다만 굳건한 20%를 가진 우리가 대통령님의 침대축구, 방탄에 몰빵한 국정, 극우 판타지 세계관을 응원하겠습니다. 영화 <신세계>의 명대사가 떠오르는군요. “살려는 드릴게.”

다만 좀 더 성의를 보여주세요. 더 많은 태극기 인사를 요직에 기용해주십시오.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하신 검은 선동세력에 대한 이념전쟁을 선포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국정, 기성 언론에 삼겹살이 아니라 꽃등심을 구워줘도 좋은 기사가 나올 리 없습니다. 대통령님이 즐겨 보신다는 극우 유튜버들을 용산에 초청해 오찬이나 만찬을 갖는 게 가성비 측면에서 낫습니다.

무엇보다 대통령님이 태극기 집회를 찾는다면 이보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험한 여론에 마음껏 하지 못했던 어퍼컷 세리머니를 광화문 한복판에서 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태극기의 환호로 대통령님의 축 처진 어깨를 펴드리겠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광화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용욱 정치에디터| 경향 2024.08.22.

 

올림픽 메달' 가면의 뒤, K스포츠 붕괴는 시작됐다

K스포츠 몰락의 주범은 바로 체육계

파리올림픽 폐막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엘리트 체육의 붕괴로 선수단 규모도 적었다""2012 런던 때는 무려 380명이 출전"했다고 말했다. 이번 올림픽 출전선수는 고작 144명이었다. 단체 구기종목은 전멸했는데 여자핸드볼을 제외하면 출전도 못했다. 그는 또 엘리트스포츠에 대한 기업들의 지원이 절실하다고도 했다. 선수도 없고 재정상태도 열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14일 문원재 한국체육대학교 총장은 메달리스트 기자간담회에서 "정부,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이 모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까지 들먹이며 관심을 강요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반복 강조한다. 이쯤 되면 부탁인지 겁박인지 헷갈린다.

그런데 대한민국 스포츠 최고책임자라는 자가, 체육대학 총장이라는 자가 기껏 하는 소리가 "우리를 지원해달라," "돈 더 달라" 수준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인가. 이 회장은 '엘리트 체육의 붕괴'가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점을 아직도 모르는가. 하긴 '정신력이 문제'라며 대표선수들을 한겨울 해병대 극기훈련 입소시킬 때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인물인지 알아보긴 했다.

이미 구조적으로 붕괴했다

파리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소속을 살펴보자. 한국체대, 용인대 등 극소수 대학과 삼성생명, 대한항공, 코오롱 등 역시 극소수 민간기업을 제외하면 절대 다수는 각지의 군청, 시청, 도청과 시도체육회 소속이다. 그러니까 한국 스포츠는 재벌기업과 중앙 및 지방정부의 도움이 없으면 스스로 생존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처박혔다.

외국은 어떤가. 지난 12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Which College Won Olympics?(어느 대학이 올림픽에서 이겼나?)'라는 기사에서 미국 대학들의 올림픽 메달 순위를 매겼다. 1위는 39개의 메달을 가져간 스탠포드대였다. 2위는 23개의 캘리포니아대, 3위는 15개를 가져간 텍사스대, 남가주대, 버지니아대였다.

국가 순위에 대입하면 10위에 해당하는 스탠포드대는 육상, 수영, 조정, 펜싱, 체조, 축구 등 기초종목에서 구기까지 고른 분포를 보였다. 스포츠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하버드대도 메달을 7개나 가져갔다. 영국의 여자 조정 금메달리스트 이모겐 그랜트(27)가 올림픽이 끝난지 3일만에 의사로 첫 출근한 사연이 뉴스로 알려지기도 했다. 외국은 이렇듯 대학생과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등 전문인들이 올림픽에 출전한다. 이들은 우리나라처럼 합숙을 강요당하고 맞아가며 하루 종일 운동만 하는 선수들이 아니다.

스포츠의 핵심은 대표팀이 아니라 성장기 학원스포츠

일본 고교야구 고시엔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한국계 교토국제고가 화제다. 4000개 고교팀 중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학교 3학년 학생 중 몇 명이나 프로에 갈까. 아마도 없거나 기껏해야 한두 명일 것이다. 대부분은 공부해서 대학 가고 그 대학 야구부에 들어가 야구를 계속한다. 그러다 프로에 가기도 하고. 그래서 일본은 아시안게임 출전팀 전원을 사회인야구선수로 구성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전원 프로선수인 한국대표팀과 엎치락뒤치락이다. 몇 년 전 한국으로 여행 온 (동아리 수준의) 하버드대 축구팀은 어려서부터 운동기계로 자란 고려대 축구부를 친선경기에서 20으로 가볍게 눌렀다.

우리 스포츠의 문제는 다른 거 따질 것 없다. 선수가 없다. 그냥 없는 게 아니고 대회 출전이 불가능할 정도다. 예를 들어 한국 여고 배구팀은 18개다. 그런데 선수는 200명 남짓이다. 대회 참가엔트리 12명을 채운 팀이 고작 5개 정도. 일본은 여자 고교팀만 3850여 개, 선수는 57천여 명. 한국과 일본의 여고 농구 현실도 그냥 똑같다고 보면 된다. 한국스포츠는 이미 기반이 다 허물어졌다. 어느 정도? 이미 오래전부터 일부 종목은 고아원에서 선수 수급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아원에서 선수 수급하는 K스포츠

요즘 자식 운동시키는 부모들의 직업을 보자. 변호사, 교수처럼 지식으로 성공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대부분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지식으로 성공한 부모들이 보기에 자식이 운동부에 들어간다는 것은 미래 리스크가 너무 크다.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운동만 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반면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랬듯 사업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다. 자기 사업 물려줘도 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선수 수가 계속 줄 수밖에 없는데 우리 체육계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협회의 어른들도 못 믿겠고 감독, 코치도 미덥지 않다. 축구아카데미, 태권도장, 복싱도장에서 지도자들이 네 살, 다섯 살 아이를 폭행했다는 뉴스는 하루걸러 나오는 듯하고 성인선수들도 폭력의 도가니에서 결국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 (어쩌다 자식 운동시키게 된 부모들은 그래서 아이 옷 갈아입히며 신체검사(?)를 한다.) 누가 이런 곳에 자식을 맡기겠는가.

전폭적 지원? 누가 메달 따오라고 등 떠밀었나?

이제 국민은 자신이 즐기는 스포츠 외에 관심 없다. 올림픽? 중계하니 시간 있을 때 볼 뿐이다. 극소수의 선수들을 합숙소에 가둬놓고 가혹하게 운동만 시키는 스포츠가 과연 지속가능할까. 어린 선수들을 혹사, 착취하고, 이들의 땀과 희생으로 협회 어른들이 공짜 해외여행하는 협회에 무슨 지원이 필요할까.

대한체육회와 체육계는 당장 혁신하라.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 스포츠 몰락의 주범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정희준 문화연대 집행위원 | 프레시안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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