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한국 미술판 뒤흔들고 흩어진 불온한 ‘힘’을 추적하다
80년대 민중미술 주축 ‘두렁’ 자료집 출간
‘두어라 가자 몹쓸 세상/설운 거리여 두어라 가자/언 땅에 움터 모질게 돋아/봄은 아직도 아련하게 멀은데…’
일요일이던 지난달 24일 저녁나절 서울 인사동 문화거리 골목길 어귀의 관훈갤러리 3층에서는 김민기(1951~2024)의 1980년대 노래극 ‘공장의 불빛’ 말미에 나오는 언니의 노래 ‘두어라 가자’가 울려 퍼졌다. 양평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라원식(66)씨가 비장한 목소리로 선창하자 그 앞에 모여든 생활한복 질경이 우리옷 대표 이기연(68)씨와 저명한 그림책 작가 이억배(64)씨 등 비슷한 연배의 남녀 작가 10여명도 눈을 빛내며 나지막하게 곡조를 따라 불렀다. 이들은 한국현대미술사에 고유명사로 아로새겨진, 지금도 시위 현장에 나오는 걸개그림과 사회 비판적 시사만화와 대중용 목판화, 그리고 생활한복을 창안한 주역들이다. 30~40년 전 군사독재정권 시절 제도권 미술계와는 틀거지가 다른 민족적 형식과 행동주의 미술을 부르짖으며 한국 리얼리즘 미술판에 새 지평을 열었던 현실참여 미술 동인 ‘두렁’의 예술가들이었다.
지난 11월24일 미술동인 두렁 창립 40주년 기념전 ‘두렁, 지금’이 열린 관훈갤러리 3층에서 펼쳐진 자료집 출판 기념회 광경. 축하 케이크의 불을 끈 뒤 정정엽, 라원식, 이기연, 성효숙씨 등 두렁 동인 작가들과 자료집을 만든 김종길 기획자가 박수를 치고 있다. 노형석 기자
두렁 작가들이 모인 건 이들의 40여년 활동사를 담은 808쪽 분량의 자료집 ‘두렁, 앞뒤’(수류산방)의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김종길, 양정애, 조민우, 이정주, 심세중씨 등 후대 연구자와 출판기획자들이 모임을 결성해 10년간의 구술조사와 취재를 거듭한 끝에 기록, 편집한 이 자료집은 ‘한국 민중 미술사의 재구성’이란 부제를 달았다. 공단과 빈민촌, 농촌 곳곳에서 노동자 농민과 연대해 현장 미술작업과 공방 활동을 벌이면서 탈춤·민화·불화·풍속화 등의 전통 시각예술을 계승한 민족적 민중적 형식을 쉼 없이 탐색했던 ‘두렁’ 작가 16명(라원식·김노마·김명심·김봉준·김주형·김진수·박홍규·성효숙·양은희·이기연·이억배·이은홍·이정임·이춘호·장진영·정정엽)의 활동상에 대한 구술증언과 수백여점의 주요 작품, 아카이브 등이 집대성되었다. 이제 70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작가들은 느꺼운 감회를 쏟아냈다. 라원식 비평가는 “오늘은 두렁이 한국 미술의 역사에 자리 잡게 되는 한 매듭의 자리인 것 같다”면서 “저희가 지나온 과정들이 한국 미술사에 어떤 자양분으로 썩어 거름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후배들의 노력 덕분에 해왔던 작업을 묶어 한국 미술계가 공유할 자산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렁은 논밭을 둘러쌓은 둔덕으로 일하고 놀고 쉬는 삶의 현장을 뜻하는 순우리말. 걸개그림 대가로 꼽히는 김봉준 작가와 훗날 생활한복 장르를 만든 이기연 작가 등 네 명이 1982년 두렁 이름으로 준비 모임을 결성했다. 홍익대와 이화여대, 경희대 등의 대학 탈춤반과 민화동아리들을 중심으로 세를 규합한 ‘두렁’은 1983년 서울 애오개 소극장에서 창립 예행 전, 1984년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창립전을 치른 뒤 노동자, 농민 등의 현장으로 흩어져 들어간 ‘산개(散開)’ 방식으로 작업을 확장했다. 당시 제도권 미술을 상품화된 ‘죽은 그림’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야기를 전하는 그림의 본래 구실을 되살리고 민중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산 미술’을 강조했다. 걸개그림, 판화, 벽화 등 민족적 양식으로 공동체적 삶을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현장에서 이뤄졌다. 장르 영역에 얽매이지 않은 작업은 2000년대 이후 한국미술의 탈장르 탈매체 흐름의 선구가 되었다.
이제는 책그림 작가로 이름 날리고 있는 이억배 작가가 1988년 천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걸개그림 ‘떨쳐 일어나’. 두렁 40주년 기념전에서 보기 드물게 나온 실물 걸개그림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출판기념회가 열린 전시장 풍경도 예사롭지 않았다. 자료집 발간을 맞아 강성은 기획자가 자료집에 수록된 작품들과 아카이브들을 중심으로 꾸려 준비한 기념전 ‘두렁, 지금’(11월9~29일)이 펼쳐진 현장이었다. 1984년 창립전 뒤 40년만에 차린 두렁의 두번째 전시회이기도 했다. 사방 벽에는 40여 년 전부터 최근까지 작가들이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현장에서 작업했던 숱한 그림과 출판물, 사진들을 빼곡하게 붙였고 작가들이 앉은 자리 옆에도 출판물과 달력, 판화, 만화를 늘어놓은 진열대를 배치해 놓았다. 두렁 동인의 결성과 창립, 이후 동인들의 운동이 각기 현장으로 흩어지고 다른 방식으로 전화되기까지의 양상을 담은 ‘두렁, 지금’ 전은 거칠고 강렬한 판화와 그림, 걸개그림, 풍자만화 연작 등으로 채워져 군사독재 아래의 시국을 비판하고 선전선동에 주력했던 당대 현장 미술의 열기가 와 닿았다.
두렁’의 주축으로 활동했던 이기연 작가의 1985년 작 ‘목동아줌마’. 노형석 기자
1983년 창립예행전과 1984년 창립전 당시 탈춤연희와 김봉준 작가 등이 작업한 걸개그림 도판들은 사진으로만 실렸지만, 80년대 중반 이후 작업은 실물들이 상당수 발굴돼 자료집과 전시에 두루 선보였다. 경찰이 전시장에 들어가 그림을 끌어내리고 작가를 연행한 초유의 사건으로 ‘민중미술’이란 용어가 탄생한 계기가 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관련 아카이브는 자료집과 전시의 핵심 콘텐츠로 꼽혔다. 당시 전시 포스터와, 경찰이 압수했던 대우어패럴 노동자 투쟁 현장을 담은 두렁 동인들의 종이 패널화, 이기연·김봉준 등 주요 동인들의 대표적인 판화작품들이 시기별로 망라되었다. 1980년작 판화 ‘지게꾼’이나 1985년작 판화 ‘목동아줌마’ 등을 통해 당대 서민의 전형적인 풍모를 담은 이기연 작가의 작품들은 두렁 초창기 시절의 수작들이다. ‘세상에서 제일 억센 수탉’ 등 그림책 삽화로 유명한 이억배 작가의 1988년작 걸개그림 ‘떨쳐 일어나’도 눈길을 끄는 대작으로 기층민중과의 연대의식을 개성적인 얼굴과 몸짓 묘사로 드러낸 회화적 역량이 도저하게 느껴진다. 90년대 이후 작업판 위에 쓰러져 자는 여공의 모습을 핍진하게 그린 성효숙 작가의 ‘꿀잠’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경찰 형사들이 전시장에 들이닥쳐 작품을 끌어내리고 무단압수해갔던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 당시 전시포스터도 40주년 전에 나왔다. 당시 ‘…힘’ 전 출품작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두렁’의 작가들이었다. 노형석 기자
두렁은 1979년 결성한 선배 동인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의 현실비판 리얼리즘 계보를 이어나간 80년대 민중미술운동 주축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엘리트 작가 중심의 ‘현발’이 민중미술의 대명사처럼 과포장되면서 잊혀졌다. 자의식과 현시욕이 강했던 현발 동인들보다 소그룹 현장 활동을 했던 두렁 동인들은 공동체 집단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주력해 작가들의 개별적인 활동들은 기록되지 않고 묻히는 난점이 있었다. 이번에 나온 자료집 ‘두렁, 앞뒤’는 그런 공백을 메우면서 민중미술사 연구의 새 지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책을 만든 주역인 김종길 기획자는 전시장에서 고무된 표정으로 말했다. “10년 전 라원식 선배의 권유로 작업을 시작한 뒤 두렁 작가들 증언을 기록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작품과 아카이브를 발굴하는 힘겨운 작업이 되풀이됐지만, 많은 이들의 울력으로 결국 자료집을 냈습니다. 80년대 두렁과 함께 현장 활동을 했던 서울미술공동체도 최근 아카이브 전시를 했고, 다른 민중미술 단체들의 자료들도 계속 나오고 있어요. 이제야 민중미술 역사가 균형 잡힌 시각 아래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 듯해요. 후학들에게 선물 내놓는 기분입니다.”
전시장에 나왔던 대형 집단창작그림인 ‘그린힐 노동참사 여성노동자 22인 영정도’. 140X124cm의 종이에 단청안료로 그린 대작이다. 1988년 ‘두렁’ 동인작가였던 이억배씨가 우리그림이란 모임을 만들어 이억배, 정유정, 권윤덕, 홍대봉 작가와 같이 그렸다. 노형석 기자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학살기계였던 독일군, '죽이고, 태우고, 뺏으라'는 일본과 똑같다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24
"먼 남의 나라 이야기 그만 하고, 731부대와 '위안부' 성노예를 비롯한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다뤄야 하는 것 아니냐." 이즈음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관련 연재 글들을 보고 독자 한 분이 이런 메일을 보내주셨다. 연재 글 아래 댓글 창에서도 이와 비슷한 제안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 독자분들은 앞서 실린 글들을 놓치신 듯하다. 731부대를 비롯한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선 이미 본 연재 전반부에서 50회쯤 다루었다.
돌이켜보면, 731부대의 잔학성은 나치 독일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특수기동대, 이동학살부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시이 시로(石井四郎)를 비롯한 731부대원들은 세균무기를 개발한답시고 조선인 독립투사들마저 '마루타' 실험용으로 삼았던 지옥의 악귀들이었다. 문제는 일본 패전 뒤 이들이 전쟁범죄자로 벌을 받기는커녕 노후를 편안히 보냈다는 점이다. '피 묻은' 세균전 정보를 미 세균부대에 고스란히 넘겨주고 면죄부를 받은 '더러운 거래' 덕이었다(연재 60~63 참조).
얘기가 나온 김에 독자분들의 양해를 구하며 책을 하나 소개한다. 위안부' 성노예, 강제동원, 731부대, 난징학살 등을 다룬 <프레시안> 연재 글들을 큰 틀에서 다시 가다듬어 <일본의 전쟁범죄>를 냈다. 책 분량이 거의 670쪽으로 좀 두꺼운 편이다. 2024년 세월호 침몰 10주년을 맞아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을 내는 등 공익 재단법인의 성격을 지닌 '진실의 힘' 출판팀에서 펴냈다. 관심 있는 독자분들의 열독을 바란다.(바로가기 ☞ https://www.truthfoundation.or.kr/)
만슈타인 장군, "유대인에게 혹독한 죗값 받아내야"
"유대 볼셰비즘 체제는 발본색원해야 한다. 두 번 다시 유럽인의 생활공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독일군의 임무는 이 체제를 유지하는 군사적 수단을 파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독일군은 민족 이념의 수호자로서 모든 만행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아군은 볼셰비즘 테러의 정신적 지주인 유대인에게 혹독한 죗값을 받아내야 한다는 데 공감해야 한다"(이안 커쇼, <히틀러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573쪽).
위의 글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육군원수)가 1941년 11월20일 독일정규군(국방군) 남부집단군에 속한 11군 최고사령관을 맡으면서 동부전선의 병사들에게 지시했던 내용이다. 훗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이에 대해 검찰이 묻자,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징역 19년을 선고받았던 만슈타인은 동서냉전의 바람을 타고 4년의 짧은 복역 뒤 풀려났다. 그 뒤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Verlorene Siege, 1955)을 펴내 자신의 전공(戰功)을 부풀리면서, "독일국방군은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른바 '흠 없는 방패로서의 깨끗한 독일군 신화'를 퍼트린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영국 역사가 이언 커쇼에 따르면, 만슈타인은 "볼셰비키 테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유대인들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신념을 지닌 골수 나치였다. 그는 부하 장병들에게 "이번 전쟁의 책임은 소련 체제를 장악한 유대인에 있다"면서 "유대인은 붉은 군대 및 붉은 군대 수뇌부 잔당과 후방의 적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1941년 6월22일 바르바로사 작전(Unternehmen Barbarossa)에 따라 소련 영토를 침공하면서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유대인과 러시아인'을 결합한 기묘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폈다. 이른바 '유대 볼셰비즘'과의 투쟁을 통한 인종말살전쟁이다. 히틀러의 시각에서는, 세계를 금융으로 지배하려는 '음흉하고 교활한 유대인'과 '더럽고 위험한 공산주의자 볼셰비키'가 손을 잡고 독일 아리안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다. 따라서 히틀러는 예방전쟁의 차원에서 유대인과 러시아인을 궤멸시켜야 했다.
그런 현실인식의 바탕에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깔려 있었다.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비롯한 베를린의 정치인들은 독일인들이 아리안 혈통을 지닌 우수한 민족인 만큼 유대인이나 러시아인 같은 열등 민족을 다스릴 자격이 있는 '지배 민족'(Herrenvolk)이라 주장을 되풀이 했다. 독일군 지휘부도 병사들에게 '지배 민족'의 구성원인 '우등 인간'(Herrenmensch)이란 자부심을 불어넣었다. 그럼으로써 살인에 대한 죄책감 없이 유대인과 적군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길 바랐다.
▲ 동부전선에서 죽은 독일군 소지품에서 발견된 바비 야르 집단학살 사진. 1941년 9월말 바비 야르 계곡에서 유대인 3만 명이 집단 학살됐다. ⓒ위키미디어
젊은 병사를 학살기계로 바꾼 '히틀러의 장군들'
'히틀러의 장군들'은 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가 '병사들이 민간인을 죽여도 군사법원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이는 다름 아닌 히틀러의 뜻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연재 93, 94 참조). 소련군과 민간인에 대해 독일국방군 장병들이 저지르게 될 범죄에 면죄부를 준다는 최고사령부의 결정은 전쟁범죄를 부추기는 데 한몫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독일 역사가 볼프람 베테(프라이부르크대, 전쟁사)는 독일국방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른바 '독일군 무오류 신화'를 비판적으로 살펴본 연구자다. 그의 글에서 남동유럽에 투입된 6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육군원수)가 (만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병사들에게 전쟁범죄를 부추긴 기록들을 보자.
"우리 장병은 전쟁의 규칙에 따른 전투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라 인종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로서, 우리에게 가해진 야만적 행위를 가차 없이 응징해야 할 것이다. 우리 장병은 유대계 하등인간이 가혹하지만 정당한 죗값을 치러야 할 필요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징벌은 독일 전선의 배후에 있는 폭동을, 경험상 언제나 유대인에 의해 촉발되는 폭동을 제지할 목적에 도움이 된다"(볼프람 베테, <독일국방군>, 미지북스, 2011, 136쪽).
독일군 지휘부가 거듭 유대인에 대한 멸시와 더불어 '혹독한 죗값을 받아내야 한다'는 식으로 집단살해를 부추긴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베테의 분석에 따르면, 전쟁터의 독일 젊은이들이 유대인을 비롯한 적대세력에게 자칫 자비나 관용을 베풀지 못하도록 막고, 아울러 사람을 죽이는 데 따르는 죄책감을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젊은 병사들이 '우리와 다른 타자'를 열등인간으로 낮춰본다면, 망설임 없는 학살기계가 되기 십상이다.
독일국방군이 뒤 받쳐준 바비 야르 학살
독일국방군의 일부 고위 장성들은 유대인 절멸에 대한 히틀러와 나치당의 확고한 의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쟁 초기만 해도 유대인 학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했다. 이른바 '명예'를 중시하는 군의 오랜 전통이 깨지고, 장병들의 군율이 흐트러져 전쟁범죄 집단으로 손가락질 받는 상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전쟁의 광풍과 혼란 속에서 독일국방군은 곧바로 전쟁범죄의 공범집단이 됐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바비 야르(Babi Yar) 집단학살이다. 소련 침공 3개월 뒤인 1941년 9월19일,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이끄는 독일국방군 제6군 소속 29군단이 우크라이나 중심도시 키예프(키이우)를 점령했다. 전쟁 전 그곳엔 유대인 16만 명이 살고 있었다. 후퇴하는 소련군을 따라 피란을 간 10만 명을 뺀 나머지 6만의 유대인이 독일인의 손아귀에 잡혔다. 피난을 떠나기 어려운 여성, 어린이, 노약자들이 많았다.
이들 유대인 절멸작전은 (지난 주에 살펴봤던) A,B,C,D 4개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이동학살부대) 가운데 하나인 아인자츠그루펜 C부대에 속한 4a팀이 맡았다. 학살 장소는 키이우에서 10km쯤 떨어진 바비 야르 계곡이었다. 유대인들을 집합시키는 역할은 독일국방군 몫이었다. 한국의 홀로코스트 연구자 최호근(고려대, 독일근현대사)의 글을 보자.
[1941년 9월28일, 제637 선전중대가 제6군 인쇄창에서 제작한 벽보를 키예프 시내 곳곳에 붙였다. 이 벽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키예프와 그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은 29일 오전 8시까지 멜리니코바 가(街)와 도크투로프스카 가가 만나는 지점에 집결해야 한다. 신분증, 돈, 귀중품, 의복 등을 반드시 지참하라.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유대인은 모두 사살될 것이다. 유대인이 떠난 거주지를 뒤져 도둑질하려는 시민도 모두 사살될 것이다] (최호근, '나치 독일 정규군의 유대인 학살과 과거사 극복',『제노사이드연구』제2호, 2007).
독일군은 모든 유대인이 노동수용소로 이송될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집결장소가 역 에 가까웠기에 의심이 많은 유대인들조차 그 소문을 쉽게 믿었다. 운명의 그날 아침 모인 유대인은 3만 명을 넘었다. 유대인들은 수백 명씩 나뉘어 바비 야르 계곡 근처에 있는 유대인 공동묘지로 이동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와 이송은 독일 정규군이 맡았고, 우크라이나 보조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계곡 입구에서 유대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든 옷을 벗어야 했다. 돈과 보석을 비롯한 소지품도 내놓았다. 그런 다음 수십 명 씩 나뉘어 계곡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독일군 공병대가 미리 파놓은 거대한 구덩이(길이 150미터, 넓이 30미터, 깊이 15미터)가 있었다. 구덩이 아래로 떠밀려간 유대인들은 앞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 위에 엎드렸고, 아인자츠그루펜 대원들이 3개조로 나뉘어 잇달아 총을 쏴댔다.
이틀에 걸친 학살이 끝난 뒤 아인자츠그루펜이 상부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바비 야르에서 죽은 유대인은 모두 3만 3,771명이었다. 마무리는 독일국방군 소속 공병대가 맡았다. 공병들은 구덩이 바깥의 흙벽을 무너트렸다. 소련군 포로들이 무덤을 메우는 고된 작업에 동원됐다. 대량학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풍광을 지녔던 계곡엔 볼썽사나운 거대한 무덤이 생겨났다. 최호근 교수는 바비 야르 학살에서 독일정규군(국방군)이 맡았던 역할을 이렇게 요약한다(다른 지역에서의 학살도 아래와 거의 같은 방식이라 보면 틀림없다).
[첫째, 정규군은 키예프의 치안유지와 작전성공을 위해 유대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의 마련을 친위대 및 살인특무부(아인자츠그루펜)에게 촉구함으로써, 학살이라는 결과를 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둘째, 학살전담부인 살인특무부는 독자적인 병참 수행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정규군이 이 부대에 대한 병참지원 업무를 전적으로 담당했다. 셋째, 유대인 집결에서부터 학살에 이르기까지 정규군의 통제관리 협조가 없었다면, 바비야르에서의 학살은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넷째, 공병대 인원과 장비 투입을 통해 정규군은 학살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협조했다](최호근, 위 논문).
소련군 포로 학살이 독일국방군(육군)과 친위대의 협력 작업으로 이뤄졌듯이, 유대인 학살도 마찬가지로 둘 사이의 합작으로 벌어졌다. 보통의 경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거 대상'이 뽑혔다. 독일 역사학자 볼프람 베테의 글을 보자.
[먼저 군 사령관은 (한 지역을 점령한 뒤) 명부 작성을 핑계로 그 지역 유대인들을 모이도록 한다. 이런 명령은 보안경찰과 제국보안대 부대들이 유대인을 가려내어 체포하는 데 좋은 조건을 만들어준다.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아채고 산으로 도주하거나 지하로 잠적하지 않은 유대인의 운명은 곧 죽음이었다. 잔혹성과 야만성을 극단으로 몰아갔던 일종말살정책을 벌이면서 나치 친위대와 국방군은 형식상의 구분을 지킬 필요가 없는 인위적인 것으로 보게 되었다](볼프람 베테, 170-171쪽).
▲ 1942년 뙤약볕 아래서 마실 물도 없이 방치된 소련군 포로들. 독일군에 붙잡힌 570만 명의 포로 가운데 230만 명이 죽었고, 대부분이 굶어 죽었다. ⓒ위키미디어
소련군 전쟁포로 굶겨 죽도록 방치
독일국방군이 저지른 전쟁범죄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소련군 포로 학대다. 나치 독일은 (영국군 포로나 프랑스군 포로들과는 달리) 소련군 포로들을 '열등 인간집단'으로 업신여기면서 일부러 식량 배급을 끊어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독일군에 포로가 된 소련군 570만 명 가운데 40% 가량(약 230만 명)이 포로로 붙잡혀 있는 동안 죽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467쪽 참조).
소련의 전쟁 희생자는 독일군 침공(1941년 6월22일) 뒤 1년 사이에 집중됐다. 1941년 말까지 소련군 포로는 335만 명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사망자의 대부분은 굶주림이었다(추위와 전염병은 굶주림에 견주면 무시할만한 요인이다). 포로에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 배급을 의도적으로 끊어 끝내 죽도록 만들었다면, 그것은 곧 전쟁범죄다. 독일군으로선 총알을 아끼고 사살조가 받게 될 스트레스도 피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의 전쟁으로 비롯된 소련인 사망자 규모는 엄청나다. 6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 규모를 훨씬 웃돈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에 따르면, 소련 민간인 사망자는 약 1,600만 명에서 1,700만 명으로 추산되고, 군 전사자는 866만 8,400명에 이른다. 또한 전투 중에 입은 부상, 질병, 동상, 정신쇠약 등 여러 의학적 전상자는 1,800만 명 쯤이다(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2008, 730쪽, 733쪽 참조).
나치 친위대와 국방군의 협력
또한 독일군은 전쟁규범을 어기고 포로들을 사살했다. 소련군을 포로들을 잡으면, 가장 먼저 군 정치위원과 보안요원, 그리고 유대인 출신 장병을 처형했다. 이는 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원칙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임무였다. 따라서 독일군은 살인에 대해선 면죄부를 쥔 상태였다.
[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가 1941년 6월6일에 공포한 '정치위원들의 처리에 관한 지침'은 전투 중에 잡히거나 저항하다 잡힌 정치위원들은 '원칙적으로 무기를 사용하여 죽여야 한다'고 명령했다. 다만 육군 최고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정치위원들을 죽일 때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게 죽여야 한다고 이 명령에 덧붙였다](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교양인, 2008, 717쪽).
소련 침공 1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941년 7월16일, 친위대(SS)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심복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국가보안본부(RSHA) 본부장이 독일군 총참모부 총무국의 라이네케 장군을 만났다. 둘은 소련군 정치위원과 더불어 유대인을 이른바 '유대 볼셰비즘'의 핵심으로 보고 이들을 제거함으로써 '스스로를 해방시키기로' 합의했다. 독일국방군이 지키는 포로수용소에 포로가 들어오면, 친위대 보안국 요원들이 낀 심사팀이 '유대 볼셰비스트'들을 골라내 친위대 특공대로 하여금 죽이도록 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전 버몬트대 교수, 1926-2007)의 글을 보자.
[군대(독일국방군)는 대체로 협조적이었다. 이를테면 보리스폴 포로수용소장은 친위대 특공대(아인자츠그르펜) 4a에게 심사팀을 수용소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친위대원은 두 번의 심사를 거쳐 1,109명의 유대인 포로를 가려내 사살했다. 희생자 중에는 수용소 의사가 넘겨준 부상자 78명이 포함돼 있었다. 다른 곳도 (처리 상황은) 비슷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469쪽).
희생자 가운데는 소련군 정치위원과 '광신적' 공산주의자, 지식인도 들어 있었다. 1941년 12월21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나온 집계에 따르면, 그때까지 소련군 포로(유대인과 비유대인 포함) 2만 2,000명이 선별되어 그 가운데 1만 6,000명쯤이 사살됐다(라울 힐베르크, 473쪽). 그 뒤로 얼마나 많은 포로들이 살해됐는지는 알 수 없다. 1945년 패망을 앞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막판에 전쟁범죄 증거가 될 자료들을 폐기․소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나치의 또다른 전범조직, 무장친위대
독일군 전쟁범죄의 주역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장친위대(Waffen-Schutzstaffel)다. 친위대(SS)는 1925년 나치당의 준군사조직으로 만들어졌고 하인리히 힘러(계급은 원수)가1929년부터 사령관을 맡았다. 힘러는 그 자신과 친위대의 세력을 키울 요량으로 1933년 일반친위대(Algemeine SS)에 더해 무장친위대를 만들었다. 전쟁 전에 작은 규모였지만 전쟁이 격화되면서 38개 사단에 90만 병력 규모를 지닌, 그야말로 '나치 독일의 정예부대'로 몸집이 커졌다.
하지만 힘러가 가진 것은 군사행정적인 의미의 군정권뿐이었다. 무장친위대의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권한(군령권)은 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OKW)에 있었다. 이런 이중구조는 히틀러가 만든 것이다. 무장친위대가 OKW의 전투 지휘를 받게 함으로써 (친위대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독일국방군의 반발을 누르려는 히틀러 나름의 교활한 결정으로 알려진다.
여러 기록들은 무장친위대가 민간인 살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구잡이 학살 범죄를 저질렀던 동유럽(폴란드와 러시아)에서와는 달리 서유럽 점령지의 독일군은 되도록 가혹행위를 삼갔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6일)을 막는 데 실패하고 독일 본토로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서 민간인 살해가 크게 늘어났다.
사례 하나를 꼽으면 이렇다. 1944년 6월 10일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으로 알려진제2SS기갑사단은 프랑스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막는다"는 구실 아래 주민 642명을 학살했다. 희생자 가운데는 여성 247명과 어린이 205명이 들어 있었다. 그해 6월 제2SS기갑사단은 모두 4,000명의 민간인을 살해했고, 다른 독일군 부대에서도 3,900명의 민간인을 죽였다(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책과함께, 2024, 1239쪽 참조).
▲ 리투아니아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이동학살부대)이 유대인들을 처형하는 모습. 독일국방군은 아인자츠그루펜의 병참을 대고 학살을 거든 전쟁범죄의 공범자였다. ⓒ위키미디어
"독일군이 메뚜기처럼 덮쳤다"
바로 위 민간인 희생자 통계를 옮긴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엑서터대 명예교수)는 20세기 전쟁사 분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연구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19세기 중반부터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 경쟁에서 비롯된 갈등이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았고, 그에 이어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제국주의적 영토 야망이 우리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을 낳았다고 본다.
오버리의 최근작(Bood and Ruins, 2021)에 따르면, 나치 독일이 1939년 9월1일 폴란드를 침공해 항복을 받아내자 말자, 독일국방군 군인들은 저마다 폴란드인의 재산을 빼앗아 가져갔다. 관련 대목을 보자.
[폴란드 의사 지그문트 클루코프스카는 매일 일어나는 약탈을 일기에 기록했다. "상점들을 온통 파괴하고 약탈한다." "독일군은 특히 좋은 음식, 술, 연초, 담배, 은그룻을 찾는다." "오늘 독일군 장료들마저 유대인 가택을 수색하기 시작해 현금과 보석류를 모두 가져갔다." 그는 독일 군인들이 가톨릭교회들에서 보물을 훔쳐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헌병대는 뒷짐을 진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책과함께, 2024, 1235쪽).
독일군이 발칸 반도를 점령했을 때도 폴란드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인들의 약탈이 일상적으로 되풀이됐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문명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리스 도시들이 특히 약탈의 목표가 됐다. 오버리의 글을 더 보자.
[그리스 도시들에서는 독일군 장교나 사병이나 박물관 보물부터 (골동품처럼 보이는) 가재도구까지 무엇이든 싹 쓸어갔다. 아테네에서 충격을 받은 한 구경꾼은 '독일군이 도둑이 된' 이유가 무엇일지 골똘히 생각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주택을 탈탈 털었다. 그 지역 빈민가에서조차 이불과 담요...심지어 문의 금속제 손잡이까지 몽땅 빼앗았다"](리처드 오버리, 1235-1236쪽).
서기 410년 로마제국의 심장부로 쳐들어와 약탈극을 벌인 고트족을 떠올릴 만한 모습이다. 윗글 속의 한 구경꾼은 '독일군이 왜 그토록 약탈을 서슴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 했다. 독일군의 약탈행위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독일국방군 사령부는 점령지에서 식량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기본 물자들을 최대한 확보해 자급하도록 했다. 그런 까닭에 독일군은 가는 곳마다 쓸 만한 물건이면 탈탈 털어갔다. 오죽하면 현지 사람들로부터 "독일군은 마치 메뚜기처럼 주민들을 덮쳤다"는 비난마저 들었을까(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쳐들어간 일본군의 약탈상은 독일군보다 더 심했다).
일본군의 삼광(三光) 작전 닮은 야만
발칸반도의 세르비아를 점령한 독일국방군은 약탈뿐 아니라 학살에도 직접 뛰어들었다. 1941년 가을부터 그곳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프란츠 뵈메 장군의 지휘 아래) 수천 명의 유대인을 죽이고는 '인질을 죽였을 뿐'이라 했다. 뵈메 장군은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히틀러에게 과잉 충성을 바쳤다. 그의 지휘 아래 독일군은 세르비아 점령 1년이 지나지 않아 그곳 유대인을 모두 '제거'했다. 나치 친위대의 도움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작전을 통해서였다.
일부 독일군은 재산뿐 아니라 성폭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폭행 하면 일본군을 따라가긴 어려울 듯하다. 중국 난징(1937년)을 비롯해 일본군이 전쟁이 벌이면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빼앗으라"는 이른바 삼광(三光) 작전은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침략자 독일군의 만행은 보복을 불렀다. 소련군 병사들은 전쟁 후반부에 후퇴하는 독일군을 쫓아가면서 소련 서부 일대를 지나갈 때 거의 모든 마을들이 불타고 폐허로 바뀐 것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련군 부대마다 있던 군 정치위원들이 병사들에게 "독일인을 짐승으로 여기고 중오하라"고 정훈교육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마침내 1945년 독일 국경을 넘어서자, 소련군 병사들은 마구잡이 살인과 집단 강간, 약탈로 '보복'을 했다. 소련군 지휘관들도 부하들의 분노를 이해하기에 그저 바라만 봤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전쟁규범과는 거리가 먼 도덕적 일탈은 독일이나 소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최종적 책임은 병사들에게 정치적․종족적 편견을 심어주고 극한 폭력을 부추긴 히틀러를 비롯한 전쟁 지도자들에게 묻게 되지만, 전쟁 자체가 우리 인간을 그토록 잔인하게 만드는 괴물 같은 속성을 지녔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프레시안
대참사 부른 4.3왜곡보도는 계속되고 있다
4.3 관련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
끈질긴 '역사왜곡'의 뿌리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이 제주4.3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 나오는 대화이다. 지난 11월 29일 찾아간 제주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실에는 이름 없는 위패가 여럿 있었다. 상당수는 이름도 짓기 전, 또는 출생신고도 하기 전에 학살된 영유아들이라 누구네 몇째 아들이나 딸로 기록돼 있다.
'빨갱이'를 절멸하겠다고 '젖먹이 아기'를 포함해 약 3만 명을 학살한 '제주4.3'은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며 제주4.3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국가폭력이라는 진실이 밝혀진 지 11년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피해자와 유족들을 '빨갱이'로 싸잡아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이름 없는 자와 이름을 감추어야 했던 자, 그리고 오명을 뒤집어쓴 자의 고통스러운 삶들은 뒤늦게 국가로부터 위로받았지만 극우세력에 의한 가해는 멈출 줄 모른다.
지난 4월 2일 쓴 기사 ''4.3 대학살' 동아일보에 '상당한 책임'을 묻는다'에서도 정리한 적 있지만, 제주4.3 때 일어난 학살은 중앙언론의 왜곡보도가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3.1시위와 4.3항쟁의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북한 또는 소련 선박 출현설 ▲오라리 방화 폭도 소행설이 대표적이다.
왜곡보도는 1948년 11월 중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경 토벌대가 제주 주민을 대량 학살한 '초토화작전'으로 이어졌다.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은 아직도 4.3 역사왜곡 유형 중 하나로 남아있다. 주류 언론이 만든 가짜뉴스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가짜뉴스가 거대한 폭력으로 이어진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드물지 않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을 받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도 일부 신문의 왜곡보도 때문이었다. 미국이 경고성으로 쿠바에 보낸 메인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하자 퓰리처계와 허스트계 족벌신문들은 조사도 하기 전에 스페인 소행이라고 몰아갔다. 전쟁을 원하는 여론이 확산됐고, 매킨리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 개전하고 끝내 영토를 빼앗았다.
민언련과 4.3평화재단의 왜곡보도 모니터링
희생자와 유족을 괴롭히는 가짜뉴스와 댓글은 주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퍼뜨리는 걸까? 지난 11월 29일 민주언론시민연합과 제주4.3평화재단이 '제주4.3 역사왜곡 미디어 모니터링 결과 보고회'를 열었다.
2015년부터 5.18민주화운동 관련 보도를 모니터링해 온 민언련은 올해부터 4.3 관련 미디어 환경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번 보고회에서는 4.3사건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미디어의 사례와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중앙지 8개, 방송·통신 10개, 경제지 9개와 제주지역 언론 4개를 포함해 총 31개 언론사를 모니터링한 결과이다.
"4.3 관련 보도 태도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입니다. 그런데 실제 사용된 단어는 굉장히 자극적이죠."
유승현 민언련 정책위원은 언론이 객관적인 서술인 것처럼 정치인의 막말을 그대로 싣는 보도 관행을 지적했다. 그는 "이런 보도는 조회수와 관련 있는 것"이라며 언론이 혐오 표현을 방치하는 이유를 짚었다.
특히 유튜브 플랫폼에서는 조회수가 곧 수익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자극적인 표현이 빈번히 사용된다. 언론사가 운영하는 뉴스 채널은 4.3사건을 보도하면서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했다. 5년 치 유튜브 콘텐츠를 모니터링한 결과, 4.3 관련 부적절 단어가 포함된 126개 영상 중 42.1%가 뉴스 채널이었다.
유 위원은 "레거시 미디어조차 아무런 의식 없이 단어를 사용한다"며 시청자를 끌어들이려고 자극적인 용어를 남발하는 언론의 역사의식에 우려를 표했다.
가짜뉴스가 뿌리내리는 우리 언론 풍토
'클릭 장사'에 치우친 4.3 보도는 댓글창을 혐오표현과 허위정보의 장으로 방치했다. 특히 정치인의 4.3 관련 막말을 제목에 인용한 기사에 댓글이 많이 달렸다. 김수정 민언련 공동대표는 '4.3 관련 3년간 언론보도 및 댓글 분석 결과'를 발표하면서 댓글로 드러난 제주4.3 사건 관련 왜곡 허위정보 유형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① 남로당 중앙 지시설, ② 4.3 공산 폭동, ③ 진상 규명과 보상 왜곡, ④ 북한 및 반공주의, ⑤ 지역주의와 차별이다. 김 대표의 분석에 따르면 기사 댓글 가운데 '4.3 공산 폭동' 이 전체 댓글의 54.2%, '남로당 중앙 지시'가 22.2%를 차지했다. 그가 댓글들을 PPT에 띄우자 청중석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① 남로당 중앙 지시설 / "4.3이 김일성 지시로 시작됐음은 태영호가 북에 있을 때부터 알았던 사실. 진실을 말해도 왜곡해서 믿지 못하게 선동질 하니 이게 사람인가?"
기사 / <조선일보> '이재명, 눈 쫙 찢어보이며 "4.3 폄훼한 사람들 얼굴에 나타난다"' 2024.04.03
② 4.3 공산 폭동 / "솔까(솔직히 말해서) 4.3항쟁 때 죄 없이 희생된 분들을 기리자는 것이지 4.3항쟁 자체는 종북무장봉기 사건 아닌가? 이걸 왜 기념해야 하지? 이건 규탄해야지…"
기사 / <JTBC> '이재명 "국힘, 4.3 사건 후예 정치집단…폄훼인사 공천 취소해야" 2024.04.03
③ 진상 규명과 보상 왜곡 / "진짜 민간인 희생자뿐 아니라 좌익 가짜도 구분 없이 희생자로 둔갑되어 있음. 좌우 구분 없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기사 / <KBS> '장난감이 폭발해 아이들이 숨졌다 [취재후]' 2024.04.03
④ 북한 및 반공주의 / "북한군 개입했다고 안 하냐? 모지리 왜구똘들"
기사 / <YTN> '한 총리 "4.3 유족 위로는 국가 책무…내년 진상조사 마무리"' 2024.04.04
⑤ 지역주의와 차별 / "정확한 팩트입니다. 제주 4.3사건은 북한 남로당 사건을 좌파 세력들이 무고하게 돌아가신 주민들 등에 업고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사건입니다.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나쁜 간첩 새끼들입니다."
기사 / <연합뉴스> '김문수, "4.3은 명백한 남로당 폭동…대한민국 건국 자체 부정"' 2024.08.26
댓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4.3은 좌파세력이 무고한 시민을 죽인 사건이다. ② 4.3은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 지시로 일어났고, 4.3에 북한군이 개입했다. ③ 4.3항쟁을 일으킨 남로당의 무장봉기는 규탄대상이다.
②번과 관련해서는 2003년 발표된 정부 공식 보고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남로당 지령설의 근원을 부정하는 내용이 실렸지만, 허위보도로 시작된 '가짜뉴스'는 아직도 대중의 의식에 뿌리박혀 있다.
제주4.3은 명백한 국가폭력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4.3특별법이 정의한 4.3이다. 이에 따르면 4.3이 1948년 4월 3일 일어난 남로당 제주도당(좌파세력)의 무장봉기를 포함하고 있는 건 맞다. 무장대가 일부 주민을 학살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4.3을 좌파세력이 무고한 시민을 죽인 거라고 주장하는 건 극히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4.3 전개과정에서 가장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건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경 토벌대가 주도한 '초토화작전' 때문이었다.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는 초토화작전의 책임이 당시 이승만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 있다고 밝혔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군통수권자이며,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이는 1949년 1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도 잘 나와있다. 그는 미국의 적극적인 원조를 위해서 '제주도 사건' 연루자를 '악당'으로 규정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했다.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펼쳐 중간산 마을 가옥을 모두 불 지르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민을 학살했다. <제주4.3사건 추가진상보고서>에 따르면 4.3에서 15세 이하 어린이 1087명이 희생됐고, 이중에서 약 76%인 826명이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학살됐다. 60세 이상 희생자 1002명 중에서도 이 기간에 76.6%가 희생됐다.
초토화작전에 관해서는 <4.3은 말한다> 4권과 5권에 마을별로 잘 묘사돼 있다. 11월 13일 새벽 2시, 토벌대에 의해 어린 아들을 잃은 조천면 교래리 출신 양복천 할머니는 당시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무조건 살려달라고 빌었지요.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습니다. (...)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 발을 쏘았습니다. (...)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 등에서 아기를 내려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딸의 왼쪽 무릎이 뻥 뚫려 있었습니다."
인근 마을에서 토벌대는 또 학살극을 벌였고, 남은 주민을 대상으로 해변마을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이곳에서 토벌대는 이른바 '자수사건'을 벌인다. 토벌대는 "털끝만큼이라도 가책이 되는 점이 있으면 자수하라"며 "자수하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간산에서 살면서 '식량을 제공하라', '집회에 참석하라'는 무장대의 요구를 피할 수 없었던 주민들은 자수 아닌 자수를 했다. 하지만 약속과는 다르게 토벌대는 이들 중 150명을 버스에 태우고 냇가에 끌고 가 학살했다.
1960년 국회조사단에 제출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에는 실제 사망자 숫자 10%에도 훨씬 못 미치는 1917명의 사망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름과 사망일자(행방불명자의 경우 잡혀간 날) 옆에는 군경이 주도한 토벌대가 죽였는지, 남로당 제주도당이 꾸린 무장대가 죽였는지 적혀 있다. 1917명 가운데 무장대 혹은 미상이 죽인 제주도민은 12명이었다.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총 사망자 9688명 중 토벌대에 의해 78.7%(7624), 무장대에 의해 15.7%(1528)가 사망했다.
토벌대보다 적게 사람을 죽였다고 무장대에게 면죄부가 주어진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4.3을 남로당의 무장봉기에만 주목해서 해석한다면, 국가가 주도해 제주도민 약 3만 명을 학살한 사실이 가려진다는 점을 지적하는 거다.
이런 민간인 학살에는 뚜렷한 이유도 없었다. 신고자가 밝힌 사망 경위는 '소개중 본적지가 산간마을이라는 이유로 총살', '보초근무 중 근무태만이라며 무조건 학살', '만취한 경찰이 몇몇 집을 방화하다 총살', '발음이 좋지 않아 우물거리자 끌고가 학살', '아들이 피신했다고 어머니를 수감해 총살' 등이었다. 모두 어처구니없는 이유다.
'빨갱이'를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진 초토화작전이었지만, 명분의 정당성을 떠나서, 명분조차 지키지 못한 무차별 주민학살이 이승만 정권과 미군이 함께 주도한 국가폭력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중앙당 지시설'로 숨기려 한 것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군정청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군중들이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했다"고 단정했다. 언론이 이를 퍼 나르자 한반도에 '좌익세력은 북조선의 사주를 받은 적색분자'라는 논리가 자리 잡았다.
1권은 '조병옥 경무부장이 무슨 근거로 '4.3'도 발생하기 훨씬 이전인 그 시점에서 이 같은 북조선 연계설을 규정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며 북한 연계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4.3 발발 직후인 1948년 4월 20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도 제주도 사건은 언급되지 않았다.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낸 박갑동씨가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지령에 의해 4.3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한 것은 '남로당 중앙 지시설'에 힘을 실었다. 그의 발언은 1973년 <중앙일보> 연재기사에서 처음 다뤄졌다. 그러나 2권은 박갑동씨와 한 인터뷰 전문을 실으며 그의 증언은 사실과 다르게 서술됐다고 밝힌다.
"신문사에서 연재할 때 외부에서 개입해 고쳐 쓴 겁니다."
박씨는 일본 도쿄까지 찾아간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문제가 된 내용은 "신문에 연재할 때 다 수정된 것"이라며 "기관에서 간섭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자기 의도와 다르게 증언이 서술됐다고 시인한 것이다.
4.3은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추후 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졌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을 실었다. 세계 최초로 4.3 연구 논문을 발표한 존 메릴 박사는 1990년 <제민일보> 인터뷰에서 연구 결과 "중앙당의 지령이 없었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
그는 주한미군과 국무부 정보조사국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데, 이 논문으로 하버드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김점곤 교수는 저서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에서 섬으로 격리된 제주도에서 북상을 시도할 물리적 능력이나 정치적 여건이 중앙당에 없었다는 점 등을 들며 지령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북한함' '소련함'은 유령선이었나?
외부 지령설이 거짓으로 밝혀졌는데도 무장대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가짜뉴스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북한군 유입설'은 1948년 5월 6일 미군정장관인 딘 소장이 "북조선 군인이 무전으로 지도하고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시작됐다. 제주도에 주둔했던 최경록 제11연대장 등의 증언으로 낭설임이 밝혀지지만, 여론은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거짓 소문에 크게 휘둘렸다.
풍문은 '북한 선박 출현설'이나 '소련 잠수함 출현설'로 이어졌다. 1948년 10월에 터져 나온 '괴선박 출현설'은 미군의 보고로 시작됐다. 미6사단 정보보고서가 잠수함의 국적을 확인하지 못했다면서도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언급하자 중앙언론은 10월 8일 일제히 제주 해상에 잠수함이 출몰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이라는 사실마저 '인민공화국기'로 수정해 보도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괴선박 출현설은 여러 번 반복됐는데, 특히 4.3 전개과정의 중요한 고비가 되는 시점마다 터져 나왔다. 같은 해 8월 17일 미군은 스스로 신뢰도가 낮은 정보라 밝히면서도 '소련 선박이 출현해 경비선에 기관총을 발사했다'고 보고했다. 며칠 후 제주비상경비사령부는 괴선박이 출현했다는 이유를 들며 '최대의 토벌전'을 예고했다.
제주 해안에서 북한 또는 소련의 선박은 확인된 적 없지만 미군 구축함은 볼 수 있었다. 5.10 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제주 근해에 함정을 급파했다. 구축함 '크레이그'는 일주일 이상 정찰 활동을 벌였고 초토화작전 때도 미군 함정들이 해안봉쇄를 했다.
괴선박 출현설은 초토화작전이 끝난 1949년 4월에 가서야 근거 없는 사실로 밝혀진다. 미군이 4월 1일 괴선박 출현설을 정정한다고 보고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초토화작전이 마무리되자 미군이 '더 이상의 괴선박 출현설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추측했다. 메릴 박사도 <제민일보> 인터뷰에서 "4.3 발발의 남로당 지령설은 물론 소련 잠수함 출현설도 근거가 없다"고 단언했다.
4.3은 왜 그토록 잔혹하게 진행됐을까?
남로당의 무장봉기가 규탄 대상인지 여부는 역사의 맥락과 가치 판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반도를 반공의 보루로 삼고 제주도에 본때를 보이고자 한 미군정과 정부의 방침과 가혹한 탄압이 극렬한 대립과 참극의 요인이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47년 3.1발포사건, 3.10민관합동 총파업이 연달아 일어나고, 제주도를 지배하던 미군정의 실정에 항의가 빗발치자, 육지에서 조사단이 왔다. 조병옥 경무부장과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도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해,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았다. 군경의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도 1년 내내 계속됐다.
그러던 중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치사로 잇따라 사망하며 제주도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제주도당이 내건 슬로건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남한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실현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요구들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4.3 발발 당시 제주도를 시찰했던 군정관리들조차 이 사건의 원인으로 관공리의 부패와 경찰의 가혹행위, 서청의 만행도 지적했다는 것이다. 미군정 검찰총장 이인은 시정방침에 신축성이 없었고 관공리들이 부패한 것이 제주도 사태를 악화시켰다면서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규정했다.
4.3 발발 이후 9연대와 무장대 지휘부 간에 어렵게 맺어진 평화협상합의마저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난 뒤, 미군정이 9연대를 포함한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깨졌다. 김익렬 9연대장은 현장조사를 벌여 서청, 대청 등 우익청년단체가 방화를 했다고 미군정에 보고했지만, 미군정은 이 보고를 묵살하고 '폭도들이 자행했다'는 경찰 보고를 선택했다.
이 가운데 <동아일보>도 오라리 방화를 폭도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제주에 파견돼 연재기사를 쓴 정준수 기자는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제주도에서는 노동자, 농민의 집을 불살라버리고 노동자를 학살했다고 보도했다. 평화협상합의가 맺어진 상황에서, 언론의 허위보도와 미군정의 오판은 끝내 대학살극인 '초토화작전'으로 이어졌다.
무장대에 관해 부풀려지고 왜곡된 것들이 많다. 토벌대는 강경작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 숫자를 과장했고, "무장대는 남한 각지에서 모집한 백정", "중국 팔로군 출신"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딘 군정장관은 "무장대는 북한 공산군"이라고 언론에 왜곡 발언하는 등 여론을 어지럽혔다. 사실, 무장대의 초기 병력은 350명이었고, 전 기간 통틀어 500명 선을 넘지 못했다. 4.3봉기 당시 무기는 일제 99식 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이고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미군 장비로 무장한 토벌대에 견줄 수도 없는 전력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장대에 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이들의 정치 성향이 좌익이니 규탄대상이라는 논리는 당시 소련과 힘겨루기를 해야 했던 미국의 '반공논리'를 비판의식 없이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을 천명한 미국은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려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악으로 규정했다.
김익렬 9연대장의 회고에 따르면, 1948년 4월 UN 무대에서 소련이 제주4.3 문제를 비유하며 미군정의 실정을 질책하는 목소리를 높이자 미국 정부는 발끈해 한국에 파견된 군정장관 딘을 문책하고 조속한 진압을 명령했다. 미국은 소련의 선전공세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4.3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하라는 지시를 했다. 김익렬의 유고집은 4.3의 본질을 왜곡하고 그 성격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하는 이면에 미국의 전략적인 입김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중앙지와 지역지의 차이
민언련 모니터링 결과, 여전히 언론 댓글에서는 폭동, 북한, 빨갱이와 같은 단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제주의소리>를 비롯한 제주지역매체는 댓글의 양상이 중앙언론과 달랐다. 단어빈도분석 상위에 빠짐없이 폭동, 남로당, 북한, 빨갱이 등이 들어간 중앙언론과 달리 지역매체에는 폭동을 제외하고는 모욕적인 단어가 상위에 올라와 있지 않았다. 김 대표는 이런 현상이 앞서 짚은 중앙지와 지역지의 다른 보도 양상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중앙지는 대개 특정한 시기와 특정한 의제에 한해서만 제주4.3을 조명합니다. 4월에 관련 기획보도를 하거나, 정부의 보상 정책, 정치인의 발언을 싣는 식이죠. 꾸준히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반면 지역지는 4.3이 중요한 지역사회 현안인 만큼, 새로운 유골 발굴, 유족에 대한 보상, 4.3 역사왜곡 현수막 등을 꾸준히 보도해요. 중앙지와 지역지의 의제 설정 방향에 차이가 있는 거죠. 지역지가 필요한 이유예요."
실제로 중앙언론과 지역언론의 기사량에는 차이가 있었다. 올해 제주지역지는 월마다 비교적 균등하게 제주4.3 관련 기사를 내보냈지만, 중앙언론은 4월과 10월에 유독 기사량이 많았다. 4월은 제주4.3이 일어난 때이고, 10월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때문이다. 토론에 참여한 김익태 KBS제주 기자도 "낯선 게 좋은 것"이라며 다른 지역 사람들도 제주4.3을 포함한 역사를 공유하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 고통을 유족이 감당하라고?
4.3은 긴 세월 철저히 은폐됐다. 국민이 제주도민을 위로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4.3사건은 민중항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가의 4.3사건 관련자 탄압은 계속되었다. 1987년 이산하 시인은 4.3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폭도'와 '빨갱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희생자와 유족들은 연좌제를 우려해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1992년 제주도 다랑쉬굴에서 11구 유해가 발견되면서 4.3사건의 참상이 전국에 드러나는 듯했지만, 희생자의 시신은 한 유족의 말처럼 '콩 볶듯이 해치워졌다'.
미흡하나마 김대중 정부 이후 4.3 진상 규명이 시작됐다. 55년 만인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사건과 관련해 사과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공식 사과가 이뤄졌다. 그러나 여전히 피해자들은 국가 폭력의 상흔을 홀로 감내하고 있다. 기사와 댓글에서 치욕스러운 고통을 다시금 마주한다. 과연 4.3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폭도라는 말은 70년 전의 그 기억이 고스란히 오는 거거든요. 언론이나 유튜브에서 말하는 게 우리한테 폭력이 된다는 걸 현대 사람들은 모르세요."
4.3유족회 외무부회장을 맡고 있는 양성주씨는 보고회에 참석해 그간 느꼈던 설움을 토로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유족들한테 감당하라고 하는 건 가슴이 아프다"며 "혐오 표현 하나로 희생자의 상처가 곪는다"고 말했다. 언론 보도와 댓글에 사용된 몇 마디가 희생자와 유족이 어렵게 지켜온 4.3의 진실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4.3을 왜곡하는 보도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이용성 민언련 정책자문위원장은 4.3 역사왜곡이 반복되는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역사왜곡의 배경에 사회적 갈등이 얽혀 있다고 지적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4.3특별법에서 규정하는 허위 사실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는 4.3특별법 제정을 두고 "여야가 입장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며 법과 진상조사보고서의 간극을 해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고은경 4.3평화재단 연구원은 혐오 표현이 죄의식 없이 남발되는 사회에 아쉬움을 표했다. 언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과거 4.3을 '폭동'과 '빨갱이'로 내몬 언론의 가짜뉴스는 국가 폭력을 합리화했고, 희생자를 침묵 속에 가두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는 많아졌지만, 여전히 '폭동'과 '빨갱이' 낙인은 끊임없이 재생산돼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다.
역사가 소비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클릭 장사와 받아쓰기 관행에 익숙한 우리 언론은 진실을 왜곡한다. 독자와 광고주가 호응하면 진실은 뒷전으로 밀린다. 최근 우크라이나발 가짜뉴스에 놀아난 언론이 많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지역을 공격해 북한군 500명이 숨졌다고 보도하자, 우리 언론은 사실 검증 없이 일제히 받아쓰기에 나섰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할지 결정하는 건 지식체계다. 지식체계가 누적될수록 배제는 점점 쌓인다. 이 과정에서 동일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만, 타자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동일자는 드러나 있어 알기 쉽지만, 배제된 타자는 숨겨져 눈에 띄지 않는다. 동일자 중심의 역사가 반쪽에 불과한 이유다. 총체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침묵한 타자의 목소리를 드러내야 한다.
오마이뉴스 이혜현·전선정·이봉수(hibongsoo)
"역대 최악의 감세 정권, 다음 정부는 100조 적자로 시작"
재정전문가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의 직설
국회에서는 여야가 정부 예산안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올해 정부가 내놓은 내년 예산안은 677조 원 규모다. 17개 상임위별로 예비심사를 거쳐 올라온 예산안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넘겨졌다. 여당과 정부, 야당 사이에 치열한 '예산 2라운드'가 이어지고 있다. (한편 민주당은 11월 29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고 내년도 정부 예산안(677조 4000억 원)에서 4조 1000억 원을 감액한 수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수정안에는 대통령비서실, 검찰, 감사원, 경찰청 특활비가 전액 삭감돼 반영됐다. 정부가 4조8000억 규모로 편성한 예비비는 2조4000억 원으로 절반 감액됐다.)
- 국회 법사위 등에서 검찰 특별활동비 삭감을 두고, 공방이 치열하더군요.
"(웃으면서) 사실 상임위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금액들은 큰 의미가 없어요. 형식적인 측면이 강하고요. 국회 예결위로 넘어가서, 다시 여야간 협의를 하게 돼요. 물론 국회법상 상임위에서 감액된 예산을 예결위에서 그대로 증액할 수는 없지만…"
- 정부와 여당에선 어떻게든 깎인 예산을 살리려고 하지 않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본격적인 '주고받기'가 시작되겠죠. 매년 그래왔어요. 예외없이… 물론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여야간 입장을 발표하는 것은 정치적인 수사에 불과하고요. 예결산 소위원회에서 본격적인 심사를 하는데, 15명 정도에요. 정부에서 내놓은 예산 세부 항목이 9000여개인데, 이 가운데 각 상임위에서 논의된 것과 예결위에서 미리 하기로 했던 것 등 1000개 이내 사업만 논의를 하죠. 나머지 8000개는 정부 원안대로 가는 거예요."."
진짜 예산 심사는… 권한도, 기록도 없는 국회 예결위의 '소(小)소위'
"그렇다고 봐야죠. 물론 소위에서 항목 1번부터 1000번까지 논의는 해요. 이것을 '1회독'이라고 하는데, 여야간 합의가 되는 것은 바로 통과시키고, 안 되는 것을 '보류'로 추려서 다시 논의를 하죠. '2회독'으로."
- 몇회까지 논의를 하나요.
"2회, 3회까지 할 것 같죠? (웃으면서) 하지 않아요. '1회독'으로 끝나요. '보류'된 사업 안건들은 대체로 여야가 정치적으로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들인데, 쉽게 합의가 되지 않죠. 자연스레 예산안 처리가 미뤄지고, 파행으로 분위기를 잡아가면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그는 "이제부터 진짜 예산심사가 시작된다"고 했다. 또 "국회 예결위 심사소위도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대신 "예결위 간사협의체에서 논의를 이어간다"고 했다. 그의 말을 옮겨 본다.
"이것을 '소(小)소위'라고 해요. 심사소위에 '또 다른' 소위를 만들어서 여야간 협상을 하는 거예요. 이 소(小)소위가 진짜예요. 이 회의에는 예결위원장(민주)과 여야 간사, 기획재정부 관계자, 국회 예결위 직원 등 5명이 들어가요. 회의 자체가 비공개이고, 회의록도 남기지 않아요. 전형적인 '밀실 심사'죠."
예결위 '소(小)소위'에서 다뤄지는 보류 예산 규모는 43조 원 정도로 알려졌다. 용산 대통령실 예비비 4조8000억 원을 비롯해, 검찰과 경찰, 감사원의 특수활동비 등이 포함돼 있다. 또 요즘은 거의 사라진 '쪽지예산' 거래나 구체적인 예산 증액심의를 비롯한 여야간 정치적 타협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 연구위원은 "법적 근거도 없는 협의체에서 수백, 수천억 원짜리 사업이 여야간 주고받기식으로 결정되고 있다"면서 "회의 자체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회의 내용에 대한 기록만이라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참혹한 윤석열 정부... 감세와 '약자복지'의 민낯
- 윤석열 정부가 반환점을 돌았는데, 지난 2년반 정부 살림살이를 평가하신다면.
"한마디로 참혹하죠. 암울하기도 했고… 오로지 '감세'라는 단어만 남는데, 과거 보수정권의 '감세'와 다른 차원으로 문제가 심각해요. 세금 깎아준다면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정부가) 감세를 하면, 복지나 연구개발에 투자할 돈이 줄어들고, 나라 빚은 늘어요."
- 그런데, 현 정부는 감세를 외치면서도 '약자복지'와 '재정건전성'을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웃으면서) 그러니까요. 얼마나 비상식적이에요. 말이 안되는 것을 무리하게 하다보니까 곳곳에서 문제가 터지고 있잖아요. '약자복지'를 말하면서, '긴급복지예산'을 줄여요. 이 정부는… 긴급복지는 옛 '송파 세 모녀 사건'처럼 정말 갈 곳 없는 약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건데, 보건복지부가 내년 예산에서 줄였어요."
- 얼마나?
"85억 원을 줄여요. 그런데, 삭감 이유가 더 가관이에요. 복지부 이야기로는 긴급복지 예산 연간 불용액(사용하지 않고 남은 돈)이 200억 원이어서 줄였다는 거예요."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복지부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불용액 숫자도 틀렸어요. 2023년 불용액 규모는 148억 원이에요. 이 돈이 남은 이유도 처음에 편성한 돈 자체가 부족해서, 다른 사업에서 239억 원을 가져다 쓰고 남은 거예요. 그리고 긴급복지 사업 특성상 돈이 남아야 되는 것이 정상이죠. 왜냐면 (긴급복지) 예산을 다 써버리면, 12월 31일날 갑자기 긴급복지가 필요한 분을 지원할 수 없잖아요."
- '약자 복지'라는 말이 무색하군요.
"(목소리를 높이며) 예산을 줄이는 것도 문제지만,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진짜 문제라고 봐요. '불용액'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국민을 속일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국민을 무시하는 거죠."
연구개발예산 복원? 총액만 회복, 중소기업 대신 원자력 예산 늘려
- 작년에 과학계 연구개발 예산 줄인 것으로 시끄러웠는데요. 이번에는 복원했다고 하던데요.
"전체 금액으로만 따지면 2023년 수준으로 살아났죠.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어요. 2023년 수준으로 회복됐다는 것인데, 그 사이 경제규모나 지출규모가 증가했으니 그만큼 더 올려주는 것이 상식적이죠. 또 내용으로도 중소기업과 탄소중립 등의 연구개발예산은 그대로거나 줄었어요. 대신 원자력과 우주관련 연구개발 예산이 늘었죠."
그는 "글로벌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을 대비해서 각 나라마다 예산을 집중적으로 늘려가는 추세"라며 "현 정부는 오히려 기후변화 대응 관련 예산을 매년 줄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뿐만 아니다. 윤 정부의 감세 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곳이 지방자치단체라고 했다. 다시 그의 이야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때부터 얼마전 자치단체장과 함께 '지방시대'를 강조하던데요. 현 정부들어 지방 교부세가 크게 줄었어요. 2022년에 75조 원이던 것이, 올해는 64조 원 수준으로 깎였어요. '감세 정책'이라면 떠오르는 이명박 정부도 지방 재원 대책을 마련해줬거든요. 국민의힘이 단체장인 지방정부는 대놓고 말도 못하고…"
- 현 정부는 세수가 부족하다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 재정건전성도 계속 말하고 있고요.
"세수가 왜 부족할까요?"
- 경기가 사실 안 좋은 것도 있죠.
"물론이죠. 정말 중요한 것은 지난 문재인 정부가 마지막으로 예산을 편성한 2022년 국세 수입 규모가 396조 원이었어요. 그런데 올해 정부가 예측한 세수규모가 338조 원이에요. 윤석열 정부 2년 만에 무려 58조 원의 세수가 줄어든 거예요. 무려 58조 원요. 보수적으로 추산하는 기획재정부 방식으로 했는데도…"
- 과거 정부에도 이렇게 줄어든 예가 있습니까?
"(고개를 저으며) 역사상 유례가 없죠. 정부 출범 2년 만에 국세 수입이 무려 14.7%(58조원)나 감소한 것은... 자료를 찾아보니까, 코로나 위기 때도 2.7% 줄었고, 2008년 금융 위기 때는 2.8%, 더 멀리 1998년 외환 위기 때도 3% 국세가 줄었어요. 외환위기 당시 세수 감소 폭에 비교하면 무려 5배 가까이 세수가 줄어든 거예요."
"역대 최악의 정권... 다음 정부는 '마이너스 100조 통지서'"
"계산을 해보니, 윤 정부 감세정책이 앞으로 2년 반 남은 임기까지 계속된다는 가정 아래 5년 동안 83조7000억 원의 세수가 줄어들어요. 이 숫자도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감세 효과를 기본으로 해서 추정한 거예요. 기재부는 세수 결손과 감세는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는 단호했다. 기획재정부가 이상한 셈법으로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감세의 효과를 본 예산에 제대로 반영하면 세수결손이 이처럼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며 "(감세 효과를) 본 예산에 충실히 반영하지 않으니까, 매년 막대한 세수결손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례없고, 기준도 모호한 감세의 효과는 막대한 세수 감소로 이어진다. 나라 곳간으로 들어오는 돈이 줄어드니, 나가는 돈도 줄이게 된다. 그 피해는 중소 서민과 소상공인 등 약자와 지방 정부가 떠안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다. 이 연구위원이 최근 조국혁신당 정책위에 내놓은 '정부별 세법 개정이 현 정부 및 차기 정부에 미치는 세수 효과'를 보면, 더욱 암담하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감세로 인해 박근혜 정부는 재정이 어려워지자, 복지국가를 내세우며 증세를 했다"면서 "국정농단으로 5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4년 동안 10조6000억 원의 재정 여력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위원은 박근혜 정부의 증세 혜택이 문재인 정부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문재인 정부에 준 증세 효과가 무려 21조8000억 원"이라며 "문재인 정부도 임기 첫해에 소득세 최고세율과 종합부동산세 강화 등 증세를 했지만, 남은 4년 동안 감세를 했다"고 덧붙였다.
그와의 대화는 이렇게 꼬리를 물고 들어간다. 1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목소리 톤은 높지 않지만, 그의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그의 시선은 윤석열 정부 이후로 넘어간다. 그는 스스로 "낙관주의자"라고 했다. 하지만 걱정과 우려가 어났다.
"윤석열 정부는 아직까지도 경제이야기를 하면서 '문재인 정부 탓'을 하죠.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자신들이 늘려놓은 재정 여력을 활용하고, 윤석열 정부에게 6조8000억 원의 세수 선물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정부 출범부터 말도 안되는 감세정책을 펴면서, 세수는 역대급으로 줄었고 재정도 크게 악화되고 있어요.
문제는 이대로 가면 다음 정부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수도 있어요. 차기 정부에선 세수가 100조 원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와요. 앞서 말했지만, 현 정부 내내 83조 넘게 재정을 날리고, 다음 정권은 '마이너스 100조 통지서' 날리고... 지금이라도, 국회에서 상속세법 등 감세 정부안을 막아야죠. 다음 정권에서 제대로 일하려면..."
오마이뉴스
쥐꼬리 연금에 생계형 일자리 내몰리는 시니어
20일 매일경제가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에 의뢰해 통계청 ‘2023년 가계금융복지조사’를 기반으로 연령대별 소득 5분위 배율을 분석한 결과, 70대 상위 20%의 소득은 하위 20% 대비 10.6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불평등 지표인 소득 5분위 배율은 30대 6.1배에서 40대 6.8배, 50대 8.7배, 60대 9.9배로 나이가 들수록 격차가 벌어졌다.
소득과 자산이 많은 경우 연금 투자나 임대 수입 등으로 나이가 들어도 소득이 어느 정도 유지된다. 반면 젊은 시절 소득이 많지 않았거나 자산 축적에 신경을 덜 쓴 경우, 나이가 들어 청소 등 단순노동이나 폐지 수집으로 내몰릴 정도로 빈부 격차가 커지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선진국에 비해 아직 복지 체계가 취약하기 때문에 저소득 노인들의 어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연령대별 소득5분위배율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0.4%로 OECD 회원국 중 1위다. OECD 평균 수치는 14.2%다. 빈곤과 고립으로 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한국 시니어 사회의 특징 중 하나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인구 10만명당 만 65세 이상 자살률)은 42.2명으로 OECD 회원국 중 1위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인이 많은 이유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짧고, 사회적 안전망인 연금은 적기 때문이다. 현재 법적으로 한국의 정년은 만 60세다. 그나마도 공공기관과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정년이 지켜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별도의 정년이 없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직무에 적합한 능력, 의사 판단 능력만 있다면 계속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은 법적 정년은 60세지만, 최근 70세까지 일할 수 있도록 정년 연장 의무를 기업들에 부여하고 있다.
한국 시니어들은 조기 은퇴에 내몰리지만 연금은 부족하다. 한국의 만 65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연금 수급액(2022년 기준)은 65만원에 불과하다. 4인 가구 이하 매월 최저생계비가 307만원인 걸 고려하면, 연금의 소득대체율이 턱없이 낮은 셈이다.
미국 인구조사국과 일본 통계국에 따르면 미국의 월평균 공적연금 수급액은 1657달러(약 228만원)으로, 한국의 3배를 웃돈다. 일본의 공적연금 수급액도 21만1145엔(약 191만원)이다. 여기에 퇴직연금 수급액까지 더하면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시니어 수입에서 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시니어 가구의 소득 구성 비중에서 근로·사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53.8%로, 연금·수당을 포함한 공적이전소득(25.9%)의 두 배에 달했다. 근로·사업소득은 12년 전 대비 15.9%포인트 늘었지만, 공적이전소득 비중은 0.7%포인트 증가에 그쳤다.
시니어 대상 사회보장제도가 부실하다 보니 시니어들이 생계형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70대 이상의 경우 폐지 수집으로 부족한 생계비를 메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폐지를 줍는 노인은 전국적으로 4만2000여 명에 달한다.
가난한 노인은 결국 사회적 부담을 키운다. 한국의 올해 추정 노년부양비는 27.4명이다. 노년부양비는 생산가능인구(만 15~64세) 100명에 대한 만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다. 이는 고령인구에 대한 경제적 부담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활용된다.
올해 한국의 노년부양비는 일본(50.7명) 대비 약 절반 수준에 불과한 수치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통계청 시나리오에 따르면 2047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노년부양비는 72.9명으로, 한국은 일본(71.6명)을 넘어 세계에서 시니어 부양 부담을 가장 큰 국가가 될 전망이다. 2070년엔 한국의 노년부양비가 세계 최초로 100명을 초과할 전망이다. 생산가능인구 1명당 노인 1명을 전담해 부양해야 한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60대와 70대는 건강이나 인지 능력이 대체로 좋은 만큼, 이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정부와 기업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진웅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장은 “마땅한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노후 빈곤이 심해지는 것”이라면서 “시니어들이 일을 통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인 적합형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공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니어 복지제도 확충도 필수다. 황남희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초연금 등 소득안전망 내실화와 국민기초생활보장급여 수준 상향 등 다각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차창희 기자 charming91@mk.co.kr
3000억 원 포기하고 대한민국은 무엇을 얻었나
과세유예 아닌 중과세 대상인 가상자산
결국 가상자산 과세도 금융투자소득세의 전철을 밟는 모습이다. 정부·여당은 일찌감치 정부 세법개정안을 통해 가상자산 소득 과세 2년 유예 입장을 밝혔다. 과세 추진 입장이던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일 박찬대 원내대표의 입장 발표를 통해 "추가적인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며 정부의 유예 방침에 합의함으로써 백기를 들었다.
'추가적인 제도 정비 필요',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다. 2020년 법이 통과된 지 4년이 지났는데도 가상자산 소득에 과세할 준비를 하지 못했단 말인가? 미국·영국·독일·일본·호주 등 주요국 대부분이 이미 과세하는 소득에 대한민국만 세금을 못 매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실이라면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담당자들을 모조리 문책하고, 제도 정비를 위한 입법을 게을리한 21대 국회의원들을 청문회에 불러세워 호되게 꾸짖을 일이다.
정부와 양당의 국민 기만행위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2년 전 이 시점에 양당이 2년 과세 유예안을 통과시킬 때도 명분은 '제도 정비'였다. 2021년 기재부와 국세청이 여러 차례 가상자산 과세가 가능했다고 밝혔음에도 말이다.
당시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국정감사에서 "내년부터 과세가 불가피하다"며 "국회에서 특금법을 개정해 거래소별로 과세할 수 있는 기반도 갖춰져 내년부터 과세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해 추경호 기재부는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며 과세가 불가능하다고 했고 민주당도 동조했다. 2년이 지난 지금, 기재부와 양당은 여전히 제도가 미비해서 과세할 수 없다고 한다. 해외 거래소 도피 우려? 2년 전에도 다 나왔던 얘기다.
이뿐만이 아니다. 2년 전 과세 유예의 또 다른 주요 논거는 '투자자 보호 조치 없이 과세부터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투자자를 보호하는 법률 같은 것이 없다 해도 과세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건 투자자의 논리일 뿐 복권·뇌물 같은 보호하지 않는 불법 소득이나 상금 등의 소득에도 국가는 잘만 과세하고 있다.
그래도 백번 양보해 투자자 보호 조치가 선결 조건이라고 인정할 경우, 지난해 7월 18일 국회는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시행령도 만들었고 올해 7월부터는 본격 시행되고 있다. 보호조치까지 다 한 것이다. 그런데도 과세는 안 된다고 한다.
금투세처럼 하락장에서도 상승장에서도 과세하면 안 된다는 마법의 논리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2년 전 코인 시장이 한참 하락장이었던 시절에는 절망 속에 빠진 투자자들을 더욱 힘들게 할 것이라며 과세는 안 된다고 하더니, 모처럼 상승장인 요즘에는 좋을 때 정부가 찬물을 끼얹으려 한다고 힐난한다. 이해관계에 따라 했던 말도 뒤집으며 무슨 논리든지 만들어내는 코인 투자자들과 양당 조세 정치의 생리를 조소하지 않을 수 없다. 2026년에는 또 무슨 논리를 만들어 낼지 자못 궁금해진다.
황폐해진 가상자산 시장
이렇게 과세 무풍지대로 방치되면서 국내 가상자산 시장은 투전판마냥 부풀어 올랐다. 금융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2022년 상반기 가상자산 시가총액은 23조 원이었는데, 2024년 상반기 시가총액은 55조 원으로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2020년 100만 명을 넘어선 이용자 수는 2024년 상반기 778만 명까지 늘어났다. 일평균 거래대금은 6조 원으로 코스피의 3분의 1 수준에 도달했다.
체이널리시스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코인 투자자 실현이익은 1.4조 원으로, 과세를 했다면 3000억 원 정도의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이 세금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은 무엇을 얻었나? 확실히 하나 얻은 것은, 도박판과 다름없는 시장 질서와 '김치코인'의 난립 속에서 황폐해진 코인 시장과 늘어난 범죄피해자다.
21대 국민의힘 정우택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2022년 가상화폐 불법행위 피해 금액은 5.3조 원에 달했고 불법 행위 건수는 841건에 이르렀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5대 거래소에서 2017년 4월부터 2023년 5월까지 상장 폐지된 코인은 315개에 달했다. 규제 부재가 사기 범죄를 창궐하게 만들고, 과세 부재가 이러한 사기행위에 투자금을 불러 모으는 데 한몫을 했다.
또 하나 얻은 것은 시한폭탄과 같은 금융위기 위험이다.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지만, 루나-테라 폭락 사태가 일어난 게 불과 2년 전이다. 피해액은 50조 원을 넘어섰고 국내 피해자만 해도 28만 명에 이르렀다. 암호화폐 시장 전반에 파급한 피해액은 3000억 달러(420조 원)로 추정되었다.
시총 10위 안에 드는 대형 코인, 다른 자산에 의해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된 스테이블 코인조차도 한 방에 붕괴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이어 전 세계 3위권 코인거래소 FTX도 유동성 부족으로 파산했고, 창업자 샘 뱅크먼 프리드가 고객의 투자금 수십억 달러를 빼돌린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이러한 대형 코인이나 거래소의 파산 위험이 상존한다는 점은 전체 금융시스템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피해의 범위가 투자자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과 국가 및 투자은행과 국부펀드들도 코인 투자를 늘려나가면서 기존의 금융 영역 및 실물경제와의 연계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변동성이 높고 투명성이 부족한 코인 시장은 '일부의 재앙'이 아닌 '모두의 재앙'이 될 우려를 안고 있다.
인구의 15%가 코인에 투자할 때까지 느슨한 규제와 비과세로 방치한 세계 3위 코인 시장 대한민국은 더더욱 그러하다. 현재 개당 1억 3500만 원까지 치솟은 비트코인 가격은 거품일까 아닐까. 2년 전 가격은 2000만 원 남짓이었다.
가상자산이 인류에게 무슨 이익을 줬나
가상자산의 범람은 기후위기 대응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가격상승에 따라 채굴 수요가 올라가면서 전기 소비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대안금융센터(CCAF)는 비트코인 채굴이 2023년 전 세계 전기 수요의 0.2~0.9%를 차지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그리스나 호주 전체의 전기 소비량과 같은 수준이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은 가상자산 채굴이 연간 미국 전기 소비량의 0.6~2.3%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러시아에서도 시베리아 지역의 채굴이 폭증하면서 전체 소비량의 1.5%까지 차지하는 데 이르자 채굴 금지 조치와 같은 규제책을 내놓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가상자산 채굴 전기료에 대해 소비세 30%를 추가 부과하는 세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렇게 코인을 둘러싼 온갖 사회경제적 해악은 떠올라도, 인류에게 어떤 이익을 주고 있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끌 블록체인 기술? 코인 시장에 흘러 들어간 수천조 원의 돈이 블록체인 기술을 얼마나 발전시켰는가. 우리 삶을 무엇 하나 향상시킨 기술적 혁신이 있었는가. 탈중앙적 화폐? 피자 하나 사기 힘든 거래 수단이, 1년 사이에 가치가 10배씩 널뛰기를 하는 코인이, 돈세탁과 재산 은닉 수단으로나 활용되는 자산이, 온갖 협잡과 투기로 얼룩져 극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체제가 어떻게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설령 블록체인 혁신이 가능할지라도 '가상자산 도박장'을 통해 투자금을 모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만한 돈이 재생에너지에 투자될 수 있었다면, 교육에 투자될 수 있었다면, 의료에 투자될 수 있었다면, 과학기술에 투자될 수 있었다면 인류 공통의 삶과 미래가 훨씬 나은 방향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조세정책의 핵심 기능은 어떤 경제활동을 우대하고 제한할지 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일이다. 정부가 세금을 깎아 준다는 것은 사회가 해당 경제활동을 장려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아예 한 푼도 걷지 않겠다는 건 정부가 전적으로 밀어주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지금의 가상자산이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할 합리적 이유가 있는가? 5년 전 코인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처럼 말했던 이들의 비전 중 하나라도 실현된 것이 있는가? 결국 지난 5년 동안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자산 소유자의 이해와 조세정책은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나라다. 최기원(loisesprit)오마이뉴스
당장 6억을 어떻게 구해요"…초유의 사태에 '날벼락'
서울·수도권에 주택 42만7000호를 공급하겠다는 정부의 ‘8·8 공급대책’ 실현이 불가능해졌다는 지적이 건설업계에서 나왔다. 공사비가 치솟으면서 대부분 지역에서 주택 공급이 불가능해졌다는 주장이다.
2일 건설주택포럼과 한국건설관리학회가 주관한 '공사비 안정을 통한 건설산업 활성화 전략 세미나'에서 이윤홍 한양대 겸임교수는 "정부가 노후계획도시 재정비와 택지개발 등을 통해 42만7000호를 공급하겠다고 (8·8 공급대책을 통해) 발표했지만, 현재는 공사비 때문에 모두 멈췄다"며 "공사비가 치솟으면서 사업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부산시에서 895실 규모 오피스텔을 짓는 한 사업은 2019년만 하더라도 건물을 짓고 분양해 1631억원의 수익을 낼 것으로 기대됐지만, 공사비가 3.3㎡당 650만원에서 930만원으로 뛰면서 사업성이 크게 악화했다. 당초 3.3㎡당 1140만원으로 계산한 토지비를 전액 포기해 0원으로 바꿔도 821억원의 적자를 보게 됐다.
경기 성남시의 한 재건축 사업지도 당초 비례율이 132%에 달하던 비례율이 최근 78%로 하락해 사업이 불가능해졌다. 당초 조합원마다 평균 1억2600만원을 환급받을 수 있었지만, 3.3㎡당 490만원이던 공사비가 850만원으로 두 배 가까이 오르면서 추가 분담금이 5억7800만원 수준으로 늘어났다.
이 겸임교수는 "일반적인 조합원은 6억원에 육박하는 분담금을 낼 능력이 없다"며 "늘어난 공사비로 인해 조합원 동의를 얻기 어려워졌고, 이에 따라 공사 기간이 길어지면서 금융비용도 증가해 분담금이 더 치솟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대부분 정비사업장에서 발생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공사비로 인해 사업성이 악화하면서 브리지론(택지 구입 자금)에서 본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크게 늘었다"며 "브리지론은 2금융권에서 많이 사용했는데, 본 PF로 넘어가질 못해 금융비용이 불어나면서 전체 사업비의 20%를 금융비용이 차지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공사비가 급증한 가장 큰 원인은 인건비다. 이 겸임교수는 "주 52시간제가 도입됐고 오후 5시 이후로는 콘크리트 타설이 금지됐다"며 "과거엔 근로자들이 저녁 6시까지 일했지만, 현재는 규제에 맞추다 보니 오후 4시가 넘으면 일을 마무리한다. 이에 따라 공사 기간이 평균 8개월 늘어났다"고 말했다. 인건비를 낮추고 공사 기간을 줄여야 공사비도 하락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인건비가 한없이 오르고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며 "주 52시간 근무제와 주휴수당 지급보장, 법정휴일의 유급휴일 의무화, 휴일 노동 가산 수당 등으로 인해 공사 기간이 길어졌고 이는 인건비와 공사비 증가로 이어진다"고 진단했다.
그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비롯한 규제를 합리적으로 개편해 공사 기간과 인건비를 줄여야 공사비를 낮출 수 있다고 제언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주 52시간 근무제는 건설 산업 특성을 고려해 유연한 적용 기반을 마련하고 중대재해처벌법도 명확한 적용 기준을 마련해 모호성을 개선해야 한다"며 "공사 기간에 영향을 주는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감사원의 정치 중립성과 독립성, 훼손한 자 누구인가?
차이의 발견 # 감사원장 탄핵 이후
- 오늘 더불어민주당이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안을 국회 본회의에 보고합니다. 지난 금요일(11.29) ‘감사원장 탄핵’이 알려지면서, 대통령실과 감사원이 강하게 반발하며, 감사원 간부회의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회의 뒤 감사원은 그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입장문을 내려 하다가 내부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 감사원장 탄핵
- 지난 28일(목) 오후 민주당은 의원총회에서 오늘(12.2) 열리는 본회의에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안을 보고한다고 밝혔습니다. 대통령 관저 이전 의혹 감사 미비, 국정감사 자료 미제출 등 국회 증언감정법 위반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 민주당의 입장입니다. 감사원장 탄핵소추 추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입니다.
2. 탄핵 이유
- 이전 정부에서도 때때로 감사원이 전임 정부 감사에 치중한다는 논란은 왕왕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윤석열 정부처럼 감사원이 노골적으로 대놓고 전임 정부 감사에만 열을 올리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온갖 무리수를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대통령 관저 이전 의혹 부실·봐주기 감사
- 감사원은 ‘대통령 관저 이전 불법 의혹’을 감사하며 무자격업체인 21그램의 공사 착수와 준공검사도 하지 않는 등 국가계약 법령 위반이 있었다고 밝히면서도 문제를 지적하거나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문제가 된 21그램 등 관저공사 업체 선정 경위에 대해선 “기억이 안 난다”는 대통령실 김오진 전 관리비서관의 말만 듣고서 더 이상 감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 국회에서 최 원장은 야당의 공세에 “감사원은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원 기관”이라고 말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 결국 국회 법사위가 관저 이전 의혹을 밝히기 위해 감사위원 회의록 현장검증을 의결했지만,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최 원장과 최달영 감사원 사무총장은 국회증언감정법 위반 혐의로 고발 의결됐습니다.
- 앞서 참여연대도 관저 이전 의혹 감사 범위 축소를 이유로 최 원장을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 또 이후 관저 이전 의혹 감사에서 70㎡짜리 신축 건물이 통째로 감사에서 빠진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증거은폐 의혹 등이 추가될 수 있다는 게 민주당의 지적입니다.
2) 전임 정부 감사에만 집중
- 감사원은 지난해부터 문재인 정부 부동산·소득·고용 통계조작 의혹, 사드 정식 배치 고의 지연 및 정보 유출 의혹, 북한 최전방 초소(GP) 철수 부실 검증,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 등 문재인 정부 감사에 집중했습니다.
-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정책적 판단에 대해 무리한 감사를 진행했다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또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에 대해선 감사위원회의에서 ‘불문’(무혐의) 처리됐는데도 검찰에 수사 의뢰하기도 하는 등 극단적인 편파성을 보여줬습니다. 최 원장은 ‘전현희 표적 감사’와 관련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피의자로 입건된 상태이기도 합니다.
3. 감사원 탄핵 반응
- 1) 감사원 : “감사원장 탄핵은 감사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려는 부당한 압박”(29일, 공식입장)
- 2) 최재해 원장 : “헌법질서의 근간을 훼손하는 정치적 탄핵으로, 자진사퇴할 뜻이 없다. (관저 부실감사 지적에 대해) 조사한 대로, 있는 그대로 전부 감사 보고서에 담았다. (감사에서 김 여사의) 연관성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저희들에게 주어진 법과 원칙에 따른 감사라고 생각한다”(29일 국회 출석하면서) => 감사원은 관저 현장을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 3) 대통령실 : “직무 독립성이 있는 감사원에 대해 야당 입맛대로 감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감사원장을 탄핵하겠다는 것은 정치적 탄핵으로밖에 볼 수 없다”(29일, 대변인 브리핑)
=> 감사원과 대통령실이 ‘정치적 중립성’, ‘독립성’을 얘기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4. 전직 감사원장 성명(29일)
- 전직 감사원장 5명이 감사원장 탄핵소추 추진을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 전윤철(19·20대)·김황식(21대)·양건(22대)·황찬현(23대)·최재형(24대) 전 원장 등입니다.
- “감사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헌법적 가치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헌정질서의 근간이 흔들려서는 안되고, 감사원의 헌법적 임무 수행이 중단되어서도 안된다”
=> 그런데 의구심이 입니다. 감사원은 지금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제대로 지키고 있으며,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계속 잘 지켜 나가는 것일까요.
=> 그리고 이들 5명의 전직 감사원장 가운데 최재형 전 원장은 2021년 임기가 6개월 남은 상황에서 대선 출마를 위해 중도 사퇴한 뒤, 17일 만에 국민의힘에 입당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 참여했으나, 2차 컷오프로 탈락하고, 2022년 재보궐 선거에 국민의힘 후보로 나가 당선된 바 있습니다. 최 전 원장은 이번 성명에서 감사원장 탄핵으로 업무가 정지돼 ‘감사원의 헌법적 임무 수행이 중단돼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그러는 본인은 왜 감사원 업무중단을 불사하면서 원장직에서 남이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물러난 것인지 의문입니다. 최재형 원장은 없어도 감사원 업무가 중단되지 않고, 최재해 원장은 없으면 감사원 업무가 중단되는 것인가요.
또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황찬현 전 원장은 자신이 대표변호사로 있는 법무법인이 현재 표적 감사 의혹으로 공수처 수사를 받는 최재해 원장과 유병호 전 감사원 사무총장 등의 변호를 맡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감사원장·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 전 원장은 이후 새누리당에 입당해 2014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감사원장 출신도 정치에 입문할 수 있습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대표적인 케이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재형 전 원장처럼 임기 중에 대선 출마하겠다고 감사원장 자리를 내놓고 정당에 가입하는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과연 ‘정치적 독립성, 중립성’이라는 언급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또 자신이 변호사로 변호를 하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전직 감사원장 자격으로 자신의 의뢰인을 방어하는 정치적 성명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도 의문입니다.
5. 감사원 간부회의 소집(29일)
- 그런데 29일 감사원이 4급 과장급 이상 간부 100여명을 소집해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애초에는 앞서 서울지검장 탄핵이 알려지자 검찰 내부통신망에 간부 성명을 낸 서울지검처럼 일종의 ‘집단행동’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28일 감사원 기획조정실이 참석자들에게 회의 소집 문자메시지를 일괄 발송해, 29일 오후에 2시간30분간 회의가 열렸습니다.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 총무비서관실에 파견됐던 신치환 감사원 1사무차장이 회의를 주재했는데, 각 국장과 선임과장들을 지명해 탄핵 관련 의견을 밝히도록 했다고 합니다.
- 애초 탄핵에 반대하는 공동입장문에 서명을 받으려고 했던 것인데, 내부 반발로 무산됐다는 게 한겨레 취재결과, 확인된 내용입니다.
- 회의 전에 이런 사실이 알려졌고, 일부 직원이 ‘왜 강제로 연서명을 받느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반발해 없던 일이 됐다는 것입니다.
- 감사원은 회의 소집은 알리면서도, 정작 회의 결과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 감사원은 오늘(2일) 오전에 최달영 사무총장이 긴급 브리핑을 연다고 합니다.
6. 감사원 내부 분위기
- 감사원은 국세청과 함께 특히 취재가 어려운 곳으로 기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습니다.
- 그런데 감사원 직원들의 내부 반발이나 불만 또는 감사원 내부 상황 등이 윤석열 정부 들어 왕왕 전해지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감사원 외부인사인 감사위원을 통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괴감을 느끼게 만드는 최재해 감사원에 대한 내부 불만도 쌓인 결과로 추정됩니다.
- “중하위직에서는 최재해 원장이 본인 탄핵과 감사관 특수활동비 삭감을 자초했다는 말도 나온다. 특히 예산 삭감 원인을 제공했다며 부글부글하는 분위기”(감사원 한 관계자)
- (대통령 관저 감사 봐주기 논란에 대해) “유병호 라인 때문에 나머지 감사관 전체가 매도당한다”(한 감사관)
- 서울지검과 감사원이 대비되는 장면입니다.
7. 감사원은 사헌부인가, 승정원인가?
- 조선시대에 삼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입니다. 사간원은 국왕에게 조언과 간언을 통해 올바른 정책을 펼 수 있도록 하는 곳으로, 현대의 언론기관과 비슷한 역할이라 하겠습니다. 홍문관은 국왕의 학문연구와 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지금의 국책 연구기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비리, 부패 등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지금의 감사원이 이에 해당합니다.
-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승정원이라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수행하는 왕명 출납기관이 있었습니다. 요즘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것이겠지요. 그 수장을 도승지라 불렀고, 그 아래 좌승지와 우승지가 있었습니다.
- 지금 최재해 감사원은 사헌부가 아니라, ‘용산’의 오른쪽에 있는 우승지 정도 아닌가요.
8. 사설
- 토요일치와 월요일에 관련 사설이 실렸는데, 한겨레와 경향은 감사원을 비판하고, 조선일보는 민주당을 비판합니다. 한국일보는 양쪽을 다 비판하긴 하지만, 비판의 무게는 감사원장 쪽에 더 실려 있습니다.
한겨레 = 전직 감사원장들의 한심한 '감사원장 탄핵 반대' 성명
경향 = 사상 첫 탄핵 대상 된 감사원장, ‘정권 돌격대’ 자처한 결과 아닌가
한국 = ‘정치탄핵’ 도 넘은 巨野, '편파 감사' 자성없는 감사원장
조선 = 감사원장까지 18명째 탄핵, 민주당의 '윤 정부' 존재 부정
대한민국 안보 최대 리스크는 ‘윤석열’이다
1. 밤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나?
- 혹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드신 분이라면, 아침에 일어나 어리둥절 했을 수 있습니다.
1) 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3일 밤 10:28)
- 22건의 정부 관료 탄핵소추발의와 예산 감액을 ‘비상계엄 선포’ 이유로 들어
-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
2) 국방장관,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지시(밤 10:49)
3)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반대(밤 10:49)
- “비상계엄 선포 잘못...국민과 함께 막겠다”
4)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반대(밤 10:56)
- “무너지는 민주주의 지켜달라...국회 와달라”
5) 우원식 국회의장, 의원들에게 공지(밤 11시께)
- “모든 국회의원은 지금 즉시 국회 본회의장으로 모여달라”
6) 계엄사령관 임명(밤 11:25)
- 계엄사령부 설치,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임명
7) 계엄사령부 포고령 1호 발표
-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 각급 부처에 ‘비상 대기’와 ‘긴급 소집령’
8) 의원들, 국회로 집결(밤 11시~새벽 1시)
- 경찰이 국회의사당 정문과 측문을 막아, 의원들이 담을 넘어 본청에 진입
9) 계엄군, 국회 진입(밤 12시7분)
- 국회 경내 진입. 일부 계엄군, 국회 본청 유리창까지 깨고 건물에 진입
- 이후 계엄군과 국회 직원·보좌관 대치
10) 국회 표결(새벽 1:01)
- 190명 의원 참석, 190명 찬성(국민의힘 의원 18명 포함)
- 우원식 국회의장, “계엄해제 결의안 가결 따라 계엄령 선포 무효”
11) 국회, 국방부에 계엄해제 요구 통지(새벽 2:01)
12) 윤 대통령, 2차 담화(새벽 4:27)
- 비상계엄 선포 해제
- “즉시 국무회의를 소집했지만, 새벽인 관계로 아직 의결정족수가 충족되지 못해서 오는대로 바로 계엄을 해제하겠다”
13) 국무회의(새벽 4:30)
- 계엄 해제안 의결
2. 도대체 왜?
- 윤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요.
- 표면적인 이유는 야당의 정부 관료 탄핵과 예산안 감액입니다.
- 그러나 이와 함께 오는 10일 예정된 ‘김건희 특검법’ 재표결을 앞두고, 국민의힘 지도부에서 반대 입장이 분명하지 않아 윤 대통령 부부를 불안하게 한 건 아닌지, 그리고 이것이 ‘계엄 선포’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 ‘김건희 특검법’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과 ‘명태균 의혹’을 수사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윤 대통령이 늘 그렇듯 이번 계엄선포도 너무나 즉흥적이고 준비(?)가 없어, 계엄선포도 야당의 공세에 대해 홧김(?)에 즉흥적으로 이뤄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3. 계엄선포, 법적 절차는 지켰나?
1) 계엄 사유 해당되나?
- 일단 기본적으로 야당의 정부 관료 탄핵소추와 예산 감액은 정부·여당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어도, 이는 국회의 고유 권한입니다. 따라서 비상계엄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 헌법이 명시한 비상계엄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한정됩니다.
2) 국무회의 심의는?
- 계엄 선포 직전인 오후 9시께 국무회의가 열렸다고 전해집니다.
- 국무위원 절반 가량이 대통령실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대부분 왜 회의를 하는지 모른 채 왔고, 계엄 선포에 대해 대부분 반대했다고 합니다.
- 계엄 선포는 김용현 국방장관이 건의했다고 합니다.
- 그런데 대통령실은 계엄 해제를 할 때, 대통령은 ‘새벽이라 국무회의를 소집하지 못해 늦춰졌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밤 10시30분에 국무회의 열어 계엄선포하고, 국무위원들은 귀가했다는 말입니까. 이 기간동안 대통령실은 무슨 논의를 한 것일까요.
- 대통령은 국방장관 등 극소수 측근들과만 결정해 ‘계엄’을 선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 제대로 된 심의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3) 국회 통고는?
- 계엄을 선포하면,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해야 한다. 그러나 국회의장에게 이런 계엄 선포는 통고되지 않았습니다.
4) 계엄 해제는 왜 그렇게 시간을 끌었나?
- 헌법 77조는 “국회가 재적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 그러나 새벽 1시에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이 가결된 이후에도 한동안 대통령실은 아무런 입장도 내지 않다가 4시30분이 되어서야 계엄 해제 입장을 밝혔습니다.
4. 윤 대통령은 어떻게 하려 했던 것인가?
- 계엄 선포는 즉흥적으로 이뤄져 치밀함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름의 계획은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계엄은 ‘국회 과반이 반대하면, 해제해야’ 합니다. 야당이 절대 과반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를 물리적으로 막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 어제부터 국회 주변에 경찰병력이 크게 배치됐습니다.
- 그리고 계엄 선포 직후에 계엄군은 국회를 향했습니다. 헬기가 국회 상공을 날았고, 계엄군이 국회 경내로 진입했습니다.
- 아직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지만, 야당은 일종의 ‘체포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유리창을 깨고 국회 본당 건물 안으로 진입한 계엄군들은 우원식 국회의장,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현장의 군에까지 이런 의도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또한 현장의 군인들도 더 이상의 무리수를 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또 의원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계엄 해제를 의결했습니다.
5. 앞으로 어떻게 되나?
1) 대통령, 하야 또는 탄핵
- 민주당과 개혁신당은 ‘대통령 하야’를 요구했습니다.
-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국가를 비상사태로 만든 사람은 윤 대통령이고 이는 내란이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고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현재 진행중인 ‘김건희 특검법’과 별도로, 야당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표결에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 그리고 윤 대통령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입니다. 야당의 공세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이제 탄핵과 사법처리에 부딪치면, 그 다음에는 전시상황으로 나라를 끌고 가려하는 건 아닌지 불안감이 듭니다. 당장 대통령 지지율이 한 자리수로 떨어질 것이고, 시민들의 ‘사퇴’ 요구가 거셀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이 가장 큰 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계엄선포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은 ‘친위 쿠데타’입니다. 당장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이미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의 마지막 5항을 보면,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고 돼 있습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정상적인 판단을 못하고 있습니다.
2) 특검법 통과
- 오는 10일로 예정된 김건희 특검법 통과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 이전까지 ‘윤 대통령’이라는 위험요소에 대한 조치를 해야 합니다.
3) 국민의힘 내부 분란
- 오늘(4일) 아침 7시에 열린 국민의힘 의총에서는 온갖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내각 총사퇴, 대통령 탈당, 하야’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 심지어 친윤계도 윤 대통령을 계속 지지하고 방어할 지 의문입니다.
4) 시민들
- 윤 대통령이 3일 밤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시민들이 국회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 처음에는 “계엄을 해제하라”는 구호가 나오더니, 이내 “윤석열을 체포하라”로 바뀌었습니다.
- 국회 앞에서 “계엄해제 독재 타도!”를 외치는데, ‘독재 타도’라는 구호를 얼마만에 듣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 시민들은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려 하자 그들을 가로막았습니다. 일부 계엄군은 시민을 뚫고 국회에 진입했지만 일부는 우회하며 후퇴하기도 했습니다.
- 윤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적 자해행위를 했습니다.
- 국민의힘은 또 ‘탄핵’을 당하게 되면 당이 절단난다는 불안감이 적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시민의 거대한 흐름에 맞선다면 그건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6. 언론
- 진보·보수 언론이 같은 목소리입니다.
1) 1면
- 각 언론의 1면 톱 기사 제목
경향 = 윤 대통령, 한밤중 비상계엄 선포
동아 = 尹 한밤 비상계엄… 국회, 2시간만에 해제
조선 = 尹, 비상계엄 선포… 국회, 150분 후 해제
중앙 = 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 국회서 해제 가결
한겨레 = 시민·국회가 막은 계엄령…탄핵 여론 거세진다
한국 = 尹 불법 계엄, 국회 150분 만에 해제
2) 사설
한겨레 = 윤 대통령 계엄령, 국민에 대한 반역이다
경향 = 윤석열 대통령은 명분 없는 비상계엄 선포 즉각 해제하라
한국 = 반헌법적인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해제해야
동아 = 국민 철렁케 한 한밤 계엄선포… 혼란과 불안 빨리 끝내야
중앙 = 느닷없는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무슨 일인가
조선 = 국민 당혹시킨 계엄 선포, 윤 대통령은 어떻게 책임질 건가
“전국서 “윤석열 퇴진” 촛불 활활…야6당 ‘탄핵 열차’ 시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민주노총이 4일 저녁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 대개혁! 퇴진광장을 열자! 시민 촛불’ 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과 내란죄 체포 등을 촉구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윤석열 대통령의 기습적인 비상계엄 시도가 국회에 가로막힌 4일, ‘윤석열 퇴진’ 요구가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번지기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 6당은 윤 대통령이 ‘국헌 문란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고, 이날 공동으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하며 탄핵 열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날 밤 서울 광화문 등에선 윤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촛불이 타올랐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사회민주당, 기본소득당은 이날 윤 대통령 탄핵안을 공동 발의하며 탄핵소추 절차에 착수했다. 이들은 요건도, 절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비상계엄 선포 자체가 위헌이자 내란 행위라고 보고 있다. 그동안 민심보다 반 발자국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고 봐온 민주당과, 탄핵에는 거리를 뒀던 개혁신당은 이날 윤 대통령 탄핵 추진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야 6당은 5일 새벽 본회의에 탄핵소추안을 보고해 이르면 6일 새벽 본회의에서 이를 의결하기로 했다. 다만, 상황에 따라 7일로 표결이 넘어갈 수도 있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문턱을 넘으려면 여당 이탈표 최소 8개가 필요한데, 이들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자해’로 여론이 급격히 악화한 만큼 국민의힘을 최대한 설득할 방침이다.
민주당은 이날, 윤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건의한 김용현 국방부 장관의 탄핵소추안도 발의했다. 민주당은 애초 이날로 예고한 최재해 감사원장과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등의 탄핵안 처리를 미루고, 윤 대통령 등의 탄핵에 집중하기로 했다.
개혁신당을 제외한 야 5당은 이날 오후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사퇴 촉구, 탄핵 추진 비상시국대회’를 열어 탄핵 여론전을 이어갔다. 야당이 숨 돌릴 틈도 없이 탄핵소추를 서두르는 건, 윤 대통령이 2차 계엄 시도에 나설 수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이 자리에서 “계엄은 상황이 정비되고 호전되면 (윤 대통령이) 또 시도할 것이다. 북한을 자극하고, 휴전선을 교란시키고, 결국에 무력 충돌로 이끌어갈 위험이 상당히 높다”며 “경각심을 가지고 함께 싸우자”고 말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윤석열은 내란과 군사반란은 물론 계엄법 위반 등 위헌과 위법 행위를 통해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며 “이제 우리는 윤석열을 대통령 자리에 잠시라도 놔둘 수 없다. 탄핵소추로 윤석열의 대통령 직무를 즉각 정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왼쪽부터), 천하람 원내대표, 조국혁신당 신장식 의원, 진보당 윤종오 원내대표,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 사회민주당 한창민 대표,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의원이 야6당이 공동발의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제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은 4일 오후 탄핵안 발의 → 5일 0시1분 본회의 보고 → 6일 0시 본회의 의결까지 빠르게 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의결은 보고 뒤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 이뤄져야 하고, 국회의원 200명 이상이 찬성해야 가결된다.
한편, 이날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참여연대, 민주노총 등 주요 시민단체와 노조가 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 대개혁! 퇴진광장을 열자! 시민촛불’ 집회엔 시민 1만여명(주최 쪽 추산)이 모였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제1조)라고 불리는 노래 가사에 맞춰 ‘내란죄 윤석열 퇴진’이 적힌 손팻말을 연신 흔들었다. 집회에서 한상희 참여연대 공동대표는 “(윤 대통령이) 계엄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역사를 부정하고 헌법을 우롱하는 범죄”라고 말했다.
이날 집회를 찾은 이들 가운데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기 이후 7년 만에 촛불을 들었다는 이들이 적잖았다. 고교생 이아무개(18)씨는 “김건희 여사의 의혹이 끊이지 않아 실망했고 어제 기점으로 완전히 돌아섰다”고 말했다.
한겨레 엄지원,고경주,박고은기자
과거엔 全 무기징역·朴 30년 구형? '윤-한' 과거 소환한 이준석
이번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탄핵을 여당이 막기로 한 것과 관련해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의 과거 발언과 검사 시절 형량 등을 언급하며 비난했습니다.
이 의원은 자신의 SNS에 "학창 시절 전두환 대통령에게 모의재판에서 사형을 구형했다고 하던 윤석열 검사는 '내란죄는 사형'이라는 법대생 시절의 생각에서 어떻게 바뀌었나"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1980년 5월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교정에서 열린 12·12 군사 반란 모의재판 현장에서 재판장 역할을 맡아 전두환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인 2021년 9월 한 방송에서 "학교에 가보니 장갑차와 총 든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외가가 있던 강릉으로 피신했다"며 "나중에 내가 집을 떠나고 난 뒤 우리 집에도 계엄군이 왔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준석 의원은 그때만 해도 전두환 중형 선고 이력을 과시하던 윤 대통령이, 이번엔 야당의 폭거를 핑계로 계엄을 선포했다며 이율배반을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의원은 한동훈 대표에 대해서도 "박근혜 대통령에게 결심공판에서 직권남용 등으로 징역 30년을 선고해달라고 구형문을 직접 읽었지 않았냐"며 "그러면 군인과 경찰을 투입해 내란을 일으키고 헌정질서를 중단시키려고 한 행동에, 검사라면 형량을 어떻게 구형하겠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탄핵을 막고 사과로 퉁치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면서 "군과 경찰을 움직여서 내란죄를 범한 사람에게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으로 분위기 잡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직권남용'으로 감옥 보냈던 당신들의 커리어를 부정하는 행동 아니냐"고 지적했습니다.
ⓒ MBC
"내란 수괴는 최고 사형"‥'사표' 법무부 감찰관 직격
류혁/법무부 감찰관(전 검사)]
Q. 비상계엄 당일 상황은?
"계엄 선포에 따른 법무부 공무원 비상소집령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지금 이 회의가 혹시 계엄과 관련된 회의냐 여쭤봤더니 장관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생각한 대로 그렇다면은 저는 계엄과 관련된 회의에 참석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계엄과 관련된 명령이나 지시는 이행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직서를 바로 제출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고 장관님께서는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씀하셔서 바로 그냥 그 말 듣고 회의장을 나와서 바깥에서 준비되어 있는 법무부 용지에다가 제 사직서 작성해서 장관님께 제출하고 바로 퇴근했습니다."
Q. 비상계엄 얘기 들었을 때 어떠셨는지?
"오늘 만우절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고요. 저는 어렸을 때 계엄을 한번 경험해 본 적이 있죠 12·12 사태라는 것. 12·12 사태는 이미 반란으로 규정된 반역적 행동입니다. 국군통수권자이고 국가원수의 자리에 있다는 것도 위험한 상황인데 그걸 주변에 있는 참모들이 제대로 말릴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고 그런 과정에서 이게 제대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수록 옆에서 조언하는 역할이 과연 이루어졌는지 그것도 의문이고요. 그다음에 이런 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실행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게, 그게 일부인지 얼마에 지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건 너무 시대착오적이지 않습니까? 전두환 시대에나 있었을 일이고 이런데…"
Q. 법무부 감찰관 자리를 내려놓으신 이유는?
"감찰관이라는 직무상의 특성상 제가 보기에는 계속 감찰관 자리에 있다 그러면 오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법무부든 뭐든 조금이라도 이 계엄 지금 해제된 계엄과 관련된 부화뇌동하는 발언이라든가 그에 대한 찬동하는 발언을 한 사람에 대해서 일체 다 조사를 해야 될 텐데요. 법무부 감찰관이 장관의 직속 기관으로서 제가 보기에는 장관님 입장이 어떤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제가 그 직을 유지하는 거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Q. 감찰관이 감시하는 역할인데…
"대한민국 공무원이라면 헌법과 법률을 수호해야 될 대한민국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그런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출발 자체가 위법한 계엄에서 출발한 명령이라면 그 뒤에 부분이 공무원으로서의 통상적인 직무 수행에 해당하는 경우라도 그걸 따르는 거는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운영하는 간수 같은 입장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원래 이런 거대한 악의라든가 거대한 불법 행위는 말이죠. 그냥 따라가고 있는 조용히 침묵하는 그런 사람들 그리고 조용히 그냥 뭐 나는 내 임무를 수행했노라 이런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악이 저지르는 거지 그리고 저는 그런 것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Q. 법률가로서 비상계엄에 대한 평가는?
"내란죄에 해당한다는 건 12·12 판결문을 한 번만 정독해 봐도 알 수 있는 당연한 법률가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록 계엄이 해제가 됐고 지금 사태가 마치 어젯밤 꿈을 꾼 것처럼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흘러가려고 하는 것 같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하고요. 이거는 전두환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는 데까지 97년, 98년, 99년 이 무렵에 세웠죠. 그런 데까지 십수 년이 걸렸듯이 이거는 얼마가 걸리든 간에 이거는 뭐 내란죄로서 각 가담 정도에 맞는 상응하는 처벌을 반드시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법률가로서 탄핵은 물론이고 당연히 처벌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담한 사람 전원입니다. 군인들의 경우에도 단순하게 부화뇌동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죄책을 면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서야 군인들이 명령을 따른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선처가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원 반란죄, 내란죄에 가담한 것으로 책임을 물어야 되고 그걸 방관하는 사람들 역시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Q. 내란죄란?
"우두머리, 두목에 해당하는 사람, 그리고 중간 간부에 해당하는 사람 그리고 단순 가담자가 있거든요. 전원 다 중형에 처하게 되어 있고 특히 수괴의 경우에는 예전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형 또는 무기 이런 중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란죄라는 거는 예전에는 이제 말을 순화시키기 전에는 제가 공부할 때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는데 국토를 참절한다는 거는 대한민국의 일부를 차지해가지고 반란을 일으켜서 이게 자기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이게 보통 분들이 생각하는 통상적인 내란이고요. 지금 이런 위기 상황도 아닌데 혼자만의 위기 상황이라고 주장하는 이런 착각 속에서 그리고 개인의 안위를 국가의 안위와 혼동하는 이런 정신 착란에 가까운 이런 판단하에서 이 계엄을 선포한 건데요. 이게 국헌 문란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이거는 12·12 판결문을 한 번만 읽어보시면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Q. 12·12 판결문 중에 좀 기억나는 부분은?
"국회의 기능을 군인을 보내서 국회의 기능을 무력화했다는 부분. 이런 부분들이죠. 12·12 같은 경우에는 국무회의라든가 이런 형식적인 절차는 다 거쳤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내란죄로 처벌받지 않았습니까? 이미 국회에 난입한 순간 이거는 반란죄 내란죄 '기수'라고 합니다. 이미 내란죄가 완성이 된 겁니다. 계엄사령관이 국민을 상대로 체포 영장 없이 앞으로 구금 재판 그다음에 처단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걸 보고 이거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국민을 상대로 한 협박 행위 이런 거에 대해서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MBC
‘처단’ 반복한 역대급 포고문…과거 계엄 포고문과 비교
어제(3일) 벌어진 윤석열 비상계엄 사태(‘12·3 윤석열 내란사건’)에서 나온 계엄사 포고문 1호에는 ‘처단’이란 단어가 2번 등장한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헌정사에 몇 차례 비상계엄이 발동됐지만, “반국가세력 척결”을 내세운 비상계엄이 발동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특정 직업군(의료)에 대한 언급이 계엄사 포고문에 나온 것도 처음이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 활동 금지”를 못 박은 계엄 포고문이 나온 것도 최초다.
군부독재 시절이었던 5·16 쿠데타, 1972년 박정희 유신, 1980년 광주학살 직전 계엄사 포고문에도 이런 내용은 없었다.
뉴스타파는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나온 6번의 비상계엄 포고문을 비교, 분석했다. (기사 아래 과거 ‘계엄사 포고문’ 참조)
어제(3일) 밤 10시 30분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박정희 전두환보다 폭력적”...5·16쿠데타 이후 6번 포고령 비교, 분석
어제(3일) 밤 10시 30분 대통령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종북 반국가세력 척결’을 주요 이유로 들었다.
저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담화문 중 일부 (2024.12.3.)
30분 뒤인 밤 11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6개 조항으로 구성된 계엄사 포고문 제1호를 발표했다. 아래는 포고문 전문.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 세력의 대한민국 체제 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 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 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 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 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 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
계엄사 포고문 (2024.12.3.)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에는 총 17번의 계엄령이 발동됐다. 13번이 비상계엄이었고, 3번이 경비계엄이었다. 뉴스타파는 이 중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총 6번의 비상계엄 당시 나온 계엄사 포고문을 살펴 봤다. 여러가지 특징과 차이가 확인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내놓은 계엄사 포고령보다 훨씬 강도가 세고 폭력적이었다.
‘윤석열 내란’ 포고문 1호에 ‘처단’만 2번 등장
‘12·3 윤석열 내란사건’ 계엄사 포고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처단’이다. 총 2번 등장한다. 포고문의 마지막에 “포고문 위반자를 엄중 처단한다”는 표현이 등장한 사례는 2번(1979년 10월, 1980년 5월) 있었지만, 특정 직업군(의료진)을 상대로 “포고문 위반시 처단”을 명시한 것은 처음이다. 하나의 포고문에 ‘처단’이란 단어가 두 번 들어간 것도 처음이다.
‘처단’의 사전적 의미는 “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이다. ‘말을 안 들으면 죽이겠다’는 뜻이다.
과거 계엄령은 대한민국이 내외부적인 위험에 처하거나 정권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발령됐고, 매번 끝이 좋지 않았다. 박정희가 발동한 1961년 5·16 쿠데타 비상계엄, 1964년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진압과정에서 발동된 비상계엄, 1972년 유신 비상계엄, 전두환이 주도한 1980년 5월 비상계엄 확대 등은 모두 역사적 단죄를 받았다.
이번 ‘12·3 윤석열 내란사건’은 과거 비상계엄과는 많이 다르다. 대한민국이 내외부적인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나온 것도, 정권이 존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윤석열은 이번 비상계엄 발동의 이유를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밝혔는데, 전례가 없고 실체도 분명하지 않기에 ‘친위 쿠데타’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 활동 금지”한 첫 계엄령
이번 계엄사 포고문의 1항은 ‘모든 정치활동 금지’다. 정확히 하면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 활동 금지”다. 그런데 이렇게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을 콕 집어 ‘정치활동 금지’를 밝힌 조항은 5·16 쿠데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진압, 1979년 박정희 사망 다음날 나온 계엄사 포고문에도 없었다.
지난 5번의 계엄사 포고문에서 ‘정치활동 금지’를 못 박은 경우는 2번 있었다. 1972년 박정희 유신 당시 포고문과 1980년 5월 전두환이 광주학살을 벌이기 직전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내놓은 계엄사 포고문이다. 하지만 이 2번의 포고문에도 ‘정치활동’의 구체적인 대상은 지목되지 않았다.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하며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한다”, “모든 정치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는 정도였다.
언론, 출판 검열은 복붙, 휴교령은 빠져
과거 계엄령과 똑같은 것들도 많았다. 언론, 출판, 보도의 계엄사 통제다. 과거 계엄령 포고문에는 통상 “(사전)검열을 받는다”고 돼 있었는데, 이번에는 “통제를 받는다”로 바뀐 게 차이라면 차이다.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 금지” 조항도 이번에는 조금 더 길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고 돼 있다. 윤석열이 집권기간 내내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해 온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계엄사 포고문에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가짜뉴스’의 개념에 대한 설명은 없다.
1961년 5.16쿠데타부터 1980년 광주학살 직전 계엄령(확대)까지 매번 등장하던 각급 학교, 특히 대학교(전문대 포함) 휴교령이 빠진 것도 차이라면 차이다.
아래는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 때 비상계엄 포고령부터 1980년 전두환의 5·17 비상계엄 확대까지 5번의 계엄령 포고문 전문이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포고령 10호>
1. 1979년 10월 27일에 선포한 비상계엄이 계엄법 규정에 의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그 시행지역을 대한민국 전지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현재 발효중인 포고를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2.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며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한다. 정치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신고를 하여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순수 종교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하되 정치적 발언은 일체 불허한다.
나.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다. 각 대학(전문대 포함)은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
라. 정당한 이유없이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체 금한다.
마.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1) 전현직 국가 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2) 북괴와 동일한 주장 및 용어를 사용, 선동하는 행위
3. 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는 일체 불허한다.
1) 국민의 일상생활과 정상적 경제활동의 자유는 보장한다.
사. 외국인의 출입국과 국내 여행 등 활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한다.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며 엄중처단한다.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1979년 10월 27일 계엄포고 1호>
국가의 안전과 공공의 안녕 질서를 확립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음 사항을 포고한다.(제주도 제외)
1. 일체의 옥외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하며, 시위 등의 단체활동은 금한다.
2. 언론, 출판, 보도는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한다.
3. 야간통행금지는 22시부터 익일 4시까지로 한다.
4. 정당한 이유없이 직장이탈 및 태업행위를 금한다.
5.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행위를 금한다.
6. 항만 및 공항의 출입은 검열을 받아야 한다.
7. 모든 대학(전문대 포함)은 별명이 있을 때까지 휴교조치한다.
8. 일체의 집단적 난동, 소요 및 기타 범법행위를 금한다.
9. 주한 외교관의 활동은 이를 보장한다. 상기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정승화
<1972년 10월 17일 계엄포고 1호>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하기 사항을 포고함.
1. 모든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정치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종교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
2.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3. 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
4. 정당한 이유없는 직장이탈이나 태업행위를 금한다.
5.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6. 야간통행금지는 종전대로 시행한다.
7. 정상적 경제활동과 국민의 일상 생업의 자유는 이를 보장한다.
8. 외국인의 출입국과 국내여행 등 활동의 자유는 이를 최대한 보장한다.
이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없이 수색, 구속한다.
전국계엄사령관 노재현 육참총장
<1964년 6월 3일 계엄사 포고 제1호>
1.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금한다. 단 관혼상제 및 극장 상영은 제외한다.
2. 언론출판 보도는 사전검열을 받아야 한다.
3.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한다.
4. 직장을 이탈하지 못한다.5.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지 못한다.
6. 서울특별시내의 각급 대학교와 중고등학교 및 국민학교는 1964년 6월 4일을 기하여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일제히 휴교한다.
7. 통금시간을 엄수하여야 한다. 통금시간은 하오 9시부터 익일 상오 4시까지로 한다.
이상 포고 위반자는 영장없이 압수, 수색, 체포, 구속한다.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민기식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령 제1호 비상계엄령>
군사혁명위원회는 위원회령 제1호로서 대한민국 전역에 긍(亘)하여 단기 4294년 5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선포 실시하였음. 본관은 계엄법에 정하는 바에 따라 국내질서의 유지와 치안확보상 필요한 한도내에서 엄정하게 이를 운영할 것임. 국민 제위는 군을 신뢰하고 국가재건을 위한 혁명과업수행에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면서 다음 사항을 포고함.
1. 일절의 옥내외 집회를 금한다. 단 종교관계는 제외한다.
2. 수하(誰何)를 막론하고 국외여행을 불허한다.
3. 언론, 출판, 보도 등은 사전검열을 받으라. 이에 대해서는 치안확보상 유해로운 시사해설, 만화, 사설, 논설, 사진 등으로 본 혁명에 관련하여 선동, 왜곡, 과장, 비판하는 내용을 공개하여서는 안된다. 본 혁명에 관련된 일체 기사는 사전에 검열을 받으며 외국통신의 전재도 이에 준한다.
사. 일절의 보복행위를 불허한다.
5. 수하(誰何)를 막론하고 직장을 무단히 포기하거나 파괴, 태업을 금한다.
6. 유언비어의 날조 유포를 금한다.
7. 야간통행금지시간은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5시까지 이상의 위반자 및 위법행위자는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 구금하고 극형에 처한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계엄사령관 육군중장 장도영
뉴스타파 한상진
'계엄령 해제' 놓고 계엄군-국회 촌각 다툼, 민주주의 역사 바꾼 2시간
윤석열 대통령의 기습적인 계엄령 발표 이후, 국회가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은 2시간 남짓이었다. 국회를 통제하기 위해 280여 명 계엄군이 국회 내부로 강제 진입하는 가운데,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 지도부의 발 빠른 대처와 일선 보좌진들의 저지가 최악의 상황을 막았다. 하지만 일부 여당 의원들이 원외에 머물며 표결을 지체시키는 등 위기의 순간이 끊임없이 연출됐다.
'계엄령 해제' 국회 vs '국회 무력화' 포고령
대한민국 헌법 77조 5항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라고 되어있다. 15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찬성해 계엄령 해제 요구 건의안을 통과시킬 경우, 대통령이 발표한 비상계엄령이 효력을 잃는다는 의미다.
지난 3일 오후 11시 발표된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국회가 계엄령을 해제하기 앞서 국회의 활동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계엄사령부의 조치다.
실제 지난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 작성된 국군 기무사령부의 기밀 문건은 국회의 계엄 해제 시도를 사전에 통제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요 조치방안'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바 있다. 다수 야당이 계엄령 해제 요구 건의안을 직권상정하기 전에 정치 활동 금지 포고령을 선포하고, 포고령 위반 국회의원을 현행범으로 사법처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 2017년 국군 기무사령부가 작성한 '대비계획 세부자료' 기밀문건의 일부. 정치활동 금지 포고령과 현행범 체포를 통해 국회의 계엄 해제 시도를 무력화할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계엄령을 무력화할 수 있는 국회, 국회의 활동을 무력화할 수 있는 계엄령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계엄군과 국회는 국회 본회의장을 차지하기 위한 촌각의 다툼을 벌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표 직후, 국회의장은 즉시 국회의원들을 본회의장으로 소집했다. 여야 지도부도 윤 대통령의 계엄 발표를 반위헌적·반국민적 행위로 규정하며 결의안 표결을 통해 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경찰들의 출입 통제 등으로 인해 국회의원과 보좌진의 출입은 한동안 제한됐다.
3일 밤 11시 40분경, 군용 헬기를 탄 계엄군들이 국회 경내로 진입했다. 일부는 직접 국회 담장을 넘어 합류했다. 국회 사무처는 280여 명의 계엄군이 투입됐다고 밝혔다. 이들 무장 계엄군은 망치와 소총 등을 이용해 건물 유리창을 깨고 의사당 안에 난입한 뒤, 의원들이 모여있는 국회 본회의장으로 향했다.
국회의원 보좌진과 국회 방호과 직원들은 계엄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쌓고 저지에 나섰다. 한 보좌진은 당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며 보좌진 다수가 부상을 입고, 기물이 파손됐다고 전했다.
계엄군 들이닥치는데 밖에서 지켜본 여당 원내대표
우원식 국회의장은 12시경 기자회견을 열고 헌법적 절차에 따라 대응 조치 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의원들은 계엄군 진입에 앞서 서둘러 본회의를 개의하고 안건을 상정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충분히 의원이 모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탈표 등의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절차는 지연됐다.
이러한 가운데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여당 의원들을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원외 당사로 소집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단체 메시지를 통해 소집 장소를 여러 차례 바꾸는 등 혼선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상당수 의원이 국회 밖 당사에 머물며 사태를 지켜보는 상황이 빚어졌다. 이에 대해 추 원내대표는 "물리적으로 여당 의원들이 국회로 갈 수 없으니 상황이 되면 표결과 관련된 절차를 진행해달라고 국회의장에게 말했지만, 의장은 여러 상황 때문에 빨리해야 한다고 해서 표결이 진행된 것"이라고 말했다.
△ r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가 4일 새벽 여의도 당사에서 의원총회를 마친 뒤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새벽 1시, 이른바 '친한계'로 분류되는 여당 의원 18명까지 국회 본회의장에 참석하며 본회의장의 재석의원은 총 190명이 됐다. 국회의장은 곧바로 개의와 표결을 진행했고, 190명 전원 찬성으로 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됐다. 이후 국회의장의 요청에 따라 계엄군은 본회의장 인근에서 물러났고, 1시간 뒤인 2시경 국회 경내에서 전원 철수했다.
결의안 가결 이후에도 의원들과 보좌진들은 본회의장 주변에 머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새벽 4시 반, 국무회의에서 계엄 해제안을 의결하면서 6시간에 걸친 비상계엄 상황이 종료됐다. 여야 지도부는 일제히 계엄령 해제로 끝나선 안되고 관련자가 책임져야 한다고 규탄했다.
6개 야당의 의원 191명 전원은 4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 제출했다. 야당은 5일 탄핵소추안을 본회의 보고한 후, 6~7일에 표결한다는 계획이다.
뉴스타파 오대양
12·3 계엄은 왜 위헌인가, 어째서 내란인가
12·3 쿠데타는 대통령이 헌법을 뒤엎으려는 시도였다. 법학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법이 허용하지 않는 폭거라고 입을 모았다. 국회를 겁박한 대목은 내란죄와 맞닿아 있다.
12월5일 시민단체 촛불행동 관계자들이 서울 서대문구 국가수사본부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즉각 체포를 촉구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12월3일 밤부터 431분간 벌어진 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법학자들의 평가는 어느 정도 일치한다. 에두른 표현은 “법의 영역에서 벗어난 행위”다. 더 직접적으로는 “반헌법적 일탈”이라고 한다. 헌법 수호 책무를 지는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계엄 선포 요건과 절차를 무시했다. 계엄사령관은 헌법에 반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실제로 군이 국회에 투입되었고 물리력을 행사했다. 헌법과 법률은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렸다. 국회의원이 국회 담을 넘고 시민들이 군경과 대치하지 않았다면 무슨 상황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상당수 학자는 윤 대통령의 행위가 형법상 가장 무거운 범죄에 해당한다고 본다. 내란죄다.
계엄은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막강한 권한이다.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행정부 수반 한 사람의 결단으로 국민 다수의 핵심 기본권을 한 번에 제한하는 조치는 비상계엄 외에 없다. 객관적 요건은 있다.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다(헌법 제77조 1항). 그런데 전시라고 해도 무작정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엄법상 요건이 헌법보다 더 엄격하다.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시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어 행정 및 사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라고 되어 있다. 법제처가 2010년 발간한 〈헌법주석서〉 제3권은 이렇게 풀이한다. “행정만 현저히 수행이 곤란한 경우 비상계엄을 선포하지 못하고 (중략) 전시라 해도 행정 및 사법기능이 정상적으로 수행되는 이상 당연히 비상계엄 요건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계엄 지속을 판단하는 건 국회 몫
법학자들이 이번 계엄을 두고 가장 먼저 꺼내는 말도 “지금이 전시·사변 상황인가?”이다. 명백하게도 12월3일 밤 대한민국은 외국과 교전 상태(전시)가 아니었고, 무장 반란 집단의 폭동 행위(사변)도 일어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문에서 ‘22건의 정부 관료 탄핵소추’와 국회의 정부 예산 삭감 등을 계엄의 이유로 들었지만, 이것이 ‘전시·사변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해당한다고 보는 법학자는 없다. 국회 활동과 별개로, 계엄 선포문에서 윤 대통령이 언급한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이나 “체제 전복을 노리는 반국가 세력의 준동”이 따로 예견된다고 해도 비상계엄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가능성만을 토대로 한 ‘예방적 계엄’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법학계 통설이다.
국민 대다수와 법학자, 여야 정치인들과 전혀 다른 인식을 가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상황. 그럼에도 이미 선포된 계엄이 즉각 법적 효력을 잃지는 않는다. 헌법상 계엄 선포 권한은 (‘실제 상황’과 무관하게) 오롯이 대통령에게 있으며, 계엄법에 따라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면 일단 효력은 유지된다. 헌법학자인 임지봉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만약 국회가 계엄 해제 의결을 못했다면 비상계엄은 잠정적으로 적용되었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대통령 조치가 위헌·위법한 계엄 선포’라는 유권해석을 누가 내릴 수 있나? 헌법재판소도 사건 청구에 따라 판단하는 기관일 뿐 먼저 나서서 ‘위헌이다’라고 밝힐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연구원 원장을 지낸 이헌환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특정 비상사태에서 어떤 비상적 수단을 취할지는 기본적으로 행정부 수장의 권한”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독점한 판단 권한은 어디까지나 ‘선포’까지에 머무른다. 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헌법은 ‘비상사태 여부’에 관한 판단을 국회가 재차 내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뜬금없이 무슨 비상계엄인가?’라며 곧장 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기관이 국회다.”
풀이하면 이렇다. 계엄을 선포할 상황인지 판단할 권한은 대통령에게 속하지만, 이를 해제할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국회 판단이 우선한다.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고 공고해야 한다(계엄법 제11조 1항). 계엄을 해제할 때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계엄법 제11조 2항). ‘지체 없이 해제’해야 하는데 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할까? 임지봉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일견 1, 2항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계엄이란 행위는 발동도 해제도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국무회의 심의 결과와 무관하게, 국회 해제안이 가결되면 계엄을 유지할 권한이 대통령에게는 없다.” 이 맥락에서 임 교수는 국무회의 의결까지 걸린 시간도 법적 쟁점이라고 했다. “(국회의 계엄 해제 가결 시점부터) 4시30분경 국무회의 의결까지 3시간 반이 흘렀다. ‘지체 없이’ 국무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면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계엄 국면에서 법률은, 국회의 판단을 ‘존중’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대통령에게 제동을 걸 유일한 통로인 국회의 이견을 적극 장려하고 국회의원들을 특별히 보호한다. 계엄 선포 후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하고, 만약 국회가 폐회 중이라면 지체 없이 집회를 요구하여야 한다(계엄법 제4조). 사실상 대통령이 앞장서 계엄의 정당성에 대한 국회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계엄 선포 후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은 평소보다 더 확장된다. 계엄 시행 중 국회의원은 현행범이 아니라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다(계엄법 제13조). 평상시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은 ‘회기 중’ ‘국회의 동의’가 없는 경우에만 보장된다(헌법 제44조). 계엄은 대통령 1인의 독점적 조치처럼 보이지만, 그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기관은 국회다.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이라는 계엄 해제 요건은 1972년 유신헌법의 잔재다. 그 이전에는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정족수가 따로 명시되지 않으면 ‘일반정족수’로 해석한다. 일반정족수는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과반수 찬성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네 차례 선포했다. 군사독재 정권이 국회 권한을 약화하기 위해 삽입한 조항이 52년 만에 또다시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법학계에서는 추후 개헌을 통해 이 조항을 원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계엄은 비상사태에 이루어지는 통치행위인 만큼, 헌법에 정해진 절차 일부를, 예컨대 국회의 판단을 배제해도 되는 상황이 있지 않을까? 법학자들의 답변은 단호하다. ‘그런 상황은 없다.’ 헌법은 초헌법적 결단을 통한 문제 해결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상사태가 닥쳤을 때 국가공동체가 허용하는 예외적 조치의 한계가 바로 헌법과 법률의 계엄 관련 조항이다. 방승주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계엄령을 선포하면 헌법이 정지된다’는 생각은 틀렸다. 어떤 민주주의 국가도 헌법의 효력을 정지하는 상황은 허용하지 않는다. 계엄 관련 모든 조치는 헌법 제77조에서 이미 예정해놓은 대로 가야 한다. 그 외에는 효력이 없고, 모두 헌정 문란으로 보아야 한다.”
헌법 제77조 3항은 비상계엄 시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정한다. 여기 열거된 조치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방 교수를 비롯한 법학계 전반의 통설이다. 헌법과 법률 어디에도 ‘계엄을 통해 국회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은 없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국방부, 계엄사령부는 국회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군을 투입해 계엄 해제안 논의를 방해했다. 이 대목에서 사건은 ‘전시·사변 여부’ 등 헌법과 계엄법상 절차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형법상 내란죄의 논리다.
12월3일 계엄을 곧 내란과 연관 짓는 시각이 낯설 수 있다. 대규모 유혈 사태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적 탄압, 군부의 사회 전반 통제가 내란의 ‘요건’이라고 여기기 쉽다. 내란죄라는 사례 자체가 접하기 어려운 데다, 내란을 일으킨 군부독재 정권 인사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극단적 조치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법이 규정하는 내란죄의 요건은 그보다 간략하고 명확하다. 내란이란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형법 제87조).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부터 따져보자. 이어지는 형법 제91조는 국헌문란을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혹은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번 사태에서 학자들이 주로 언급하는 것은 이 중 2호에 관한 것이다. 국회(‘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를 강압해 계엄 해제안 논의(‘권능 행사’)를 막았다는 것.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를 장악해서 그 기능을 마비시키려 했다. 내란에 해당한다. 대통령은 당연히 (내란죄상) 수괴다. 매우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방승주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당수 학자들이 국헌문란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경찰이 국회의원들의 국회 진입을 막았고 계엄군이 들어갔다. 미리 준비된 상황이었다. 위헌적·불법적 계엄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계엄 상태를 지속할 의도가 엿보인다”라고 말했다.
‘폭동’이라는 요건은 어떨까. 내란죄에서 폭동이란 다수의 물리력으로 사람을 다치게 만들거나 대규모 유혈 사태를 일으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1997년 4월17일 대법원 판결(96도3376)을 살펴보자.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의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에 대한 재판이다.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 폭행 또는 협박은 일체의 유형력 행사나 외포심을 생기게 하는 해악의 고지를 의미하는 최광의의 폭행·협박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광의의 폭행·협박’이란 가장 넓은 의미의 폭행이나 협박을 말한다. 강도죄나 강요죄와 달리 내란죄에서는 실제 상대를 때리거나, 사람이 현실적 공포심을 느끼지 않아도 폭동일 수 있다는 의미다. 대법원은 1980년 당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는 “국민에게 기본권이 제약될 수 있다는 위협을 주는 측면이 있”기에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유혈 사태’는 내란죄의 요건이 아니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계엄 조치는 내란죄에 해당하며 대통령은 수괴”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일각에서는 는 대통령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내란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2월5일 〈아주경제〉 기고에서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를 곧바로 수용하여 계엄을 해제한 것을 국회의 무력화로 볼 수 없으며, 따라서 국헌문란이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썼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여기지만 “국회 장악은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내란죄) 기수(旣遂)라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내란죄는 미수범도 처벌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접한 뒤 이에 반대해 곧장 사직서를 제출한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은 12월4일 MBC 인터뷰에서 “결국 (계엄이) 해제가 됐다 하더라도 이미 국회에 (군·경이) 난입한 순간 내란죄 기수다. 스스로 의사로 중단했을 땐 중지미수라고 한다. 해제된 다음 철수했기 때문에 정상 참작 사유는 될지언정 중지미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몹시 까다로운 쟁점이 될 수도 있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계엄 선포 관련자들이 만약 ‘질서 유지를 위해 일시적으로 국회에 병력을 투입했을 뿐, 그 기능을 정지시킬(국헌문란) 의도는 없었다’고 항변한다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그 ‘범의’를 입증해야 한다. 앞서 199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판결(96도3376)에는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행위와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및 그 행위의 결과 등을 종합하여 판단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신군부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었다고 강변한 데 대한 판단이었다.
물론 ‘외부적으로 드러난 행위’만 봐도 내란죄 성립 가능성은 낮지 않다. 계엄군은 우원식 국회의장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를 체포하려 했다.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이 사실을 적시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체포조 투입을 항의하고 12월5일 국민의힘은 경찰에 한 대표의 신변 보호 강화를 요청했다. 그런데 국헌문란 범의는 의외로 핵심 주체의 ‘자백’으로도 드러났다. 12월5일 SBS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에게 비상계엄을 건의했다고 알려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 계엄군을 보낸 건 계엄 해제 표결을 막기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최소한의 필요 조치였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후 〈한겨레〉에 김 장관은 “표결을 막기 위함이라기보다, (국회 정치활동을 금한) 포고령에 따른 최소한의 조치였다”라고 말했다. 내란죄 성립에 동의할 수 없다며 “국민 안전 최우선, 유혈 사태 없도록, 이것이 대통령 지침” “경찰을 우선 배치하고, 군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1시간 후 투입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 ‘유혈 사태’는 내란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내란죄의 요건은 아니다. 계엄사령부의 포고령 1호는 이론의 여지 없이 위헌이었고, 단 한 명의 경찰이 수행했더라도 12월3일 밤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막은 것은 국헌문란이다.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26일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했다. ⓒ연합뉴스
계엄을 정당화하고 내란죄를 피해갈 길로 제시된 또 다른 논리가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비상계엄이라는 건 고도의 통치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고도의 통치행위는) 사법심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게 전통적 학설”이라고 말했다. 고도의 통치행위 이론이란 대통령이나 국회의 특정 행위는 고도의 정치성을 갖기에 사법부가 판단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사법의 정치화를 막기 위하여, 혹은 행정·입법부의 권한을 사법부가 침해하지 않기 위하여 인정해야 한다는 게 학계 다수설은 맞다. 그러나 판례의 태도는 사안에 따라 나뉜다. 1979년 대법원은 “대통령의 계엄 선포 행위는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성격을 띠는 행위라 할 것이어서 당, 부당을 판단할 권한은 (중략) 국회만 가지고 있다”라며, 사법부 심사 대상이 아니라고 판결했다(79초70 재정). 반면 1997년에는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가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해진 경우 법원은 그 자체가 범죄행위에 해당하는지 심사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대법원 96도3376).
무엇이 계엄 선포라는 파괴적 행위의 피해를 최소화했을까? 국방부 장관은 “최소한의 조치”만 취한 제 결단을 강조하고, 행안부 장관은 “국회를 제대로 봉쇄했으면 해제 의결이 가능했겠나?”라고 비꼰다. 학자들의 답변은 헌법으로 대표되는 ‘1987년 체제’이다. 방승주 교수는 “1987년 개정된 우리 헌법이 작동했다. 이전에 계엄이 선포된 때와 달리 헌법과 법률이 대통령의 계엄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군인들이 옛날 방식을 모델로 삼아 일을 벌이면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12월3일 밤 정치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한 한 개인의 독단은 헌정 체제 붕괴를 꾀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의 피로 간신히 써내려간 이 헌법은 그와 몇몇 하수인이 농단하기에는 너무 견고했다.
이상원 기자
〈시사IN〉 기자들의 시국선언문 “12·3 쿠데타 주범 윤석열을 처벌하라!”
1. 12·3 쿠데타는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 행위다.
12월3일 늦은 밤(오후 10시29분), 44년 전의 악몽이 우리를 다시 엄습했다. 윤석열 대통령(이하 직위 생략)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비상계엄은 전시나 외국의 침략, 내란 등 국가 존립의 중대 위기에만 선포할 수 있다.
곧이어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정당의 모든 활동과 집회를 금지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의료 현장을 벗어난 의료인은 “처단”하겠다고 했다. 계엄사는 유사시 북한 수뇌부 처단을 목적으로 훈련된 최정예 ‘참수 부대’인 707특수임무단을 헬기로 국회에 투입했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계엄군은 입법부의 계엄 해제 논의 자체를 차단할 목적으로 움직였다. 계엄군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주요 기관 점거에 나서는 한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등에 대한 체포조를 결성했다.
우리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시민들의 선거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합법적 권력구조를 폭력적으로 전복하기 위한, 반(反)대한민국적이고 반(反)자유민주주의적인 반란이자 반역으로 규정하며 ‘12·3 쿠데타’라 부르기로 한다.
2. 시민들이 윤석열의 반역 행위를 ‘진압’했다.
〈시사IN〉 편집국은 포고령 가운데 특히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부분에 주목한다. 〈시사IN〉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창간 정신을 지향하고 엄격하게 준수해왔다. 위헌적 불법 조직인 계엄사 따위의 통제를 받아 기사라는 것을 쓸 용의는 조금도 없다. 우리는 계엄사가 보도 검열을 실시할 경우 이를 기꺼이 위반하기로 결의하고, 비상 연락망과 기사의 생산·유통 네트워크를 점검했다. 기자들은 현장으로 달려가고 〈시사IN〉 유튜브는 즉각 심야 방송을 편성해 국회 상황을 전파했다.
가장 최근의 계엄령 선포일(전국 확대 기준)은 44년 전인 1980년 5월17일이다. 다음 날부터 광주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한국인에게 계엄령은 ‘민간인 학살’의 다른 말이다. 이와 연관되는 단어는 곤봉과 총탄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회 주변에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있을 줄 몰랐다. 그들은 국회가 계엄을 해제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경찰이 출입구를 통제해서 국회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담을 넘는 동안, 시민들은 헌법 수호를 위해 손과 어깨를 제공했다. 아직 어두운 밤이었지만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면 끔찍한 아침을 맞게 될 것이었다.
우리는 완전무장한 계엄군이 헬기로 국회에 투입되는 순간을 똑똑히 지켜봤다. 불길한 예감으로 몸을 떨었다. 계엄군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들이 시민들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의원들을 질질 끌고 나오는 순간, 대한민국 전역을 무대로 펼쳐질 지옥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국가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다. 그러나 쿠데타에 동원된 계엄군은 반군(叛軍)이며 윤석열 집단의 사병(私兵)일 뿐이다. 시민들은 그것도 알고 있다. 폭력엔 불복종으로 맞설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그러나 계엄군은 40여 년 전과 달랐다. 창문을 깨고 본관으로 진입했으나 곤봉을 휘두르거나 본회의장에서 의원들을 끌어내지 않았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은 비상계엄의 실패에 대해 “중과부적(衆寡不敵,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이기지 못함)”이었다고 말했다. 계엄군이 국회 본관과 그 주변을 시민들의 피로 칠갑하며 ‘계엄 해제’ 가결을 막았다면 ‘성공’이라는 의미였을까? 그러기엔 현장에 시민들이 많았고 계엄군의 행태 하나하나가 촬영되어 SNS로 공유되었다. 더욱이 계엄군 역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 중 하나로 평가받는 대한민국에서 성장한 청년들이다.
계엄군의 국회 본관 진입에 저항한 보좌진과 시민들, 신속히 회의를 진행한 국회의원들, 늦은 밤까지 가슴을 죄며 국회 상황을 지켜본 국민들이 윤석열 반란 세력을 진압했다.
3. 윤석열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다.
계엄 선포로부터 2시간30분 뒤인 12월4일 오전 1시2분, 국회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190표 중 찬성 190표로 계엄 해제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는 본회의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의도 당사에 모여 국가 위기 사태를 방조했다.
윤석열은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를 외쳐왔지만, 그의 언행은 자유민주주의나 그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법치주의와 거리가 멀다. 법치주의는 ‘법을 활용한 권력자의 통치’가 아니라 ‘법률의 통치(rule of law)’다. 자유 민주사회의 개인은 권력자의 원념이나 정치적 이익이 아니라 오로지 법률과 합법적 수사·재판 절차에 의해서만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할 수 있다. 윤석열은 취임 직후 “미국 같은 선진국에선 정부를 대변하는 법조인(government attorney)들이 정관계에 아주 폭넓게 진출하고 있”는데 “그게 법치국가”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어리석은 생각을 고스란히 실천으로 옮겼다. 친한 검사 선후배를 법무부 장관과 금융감독원장 등 다수 요직에 배치했다. 배우자인 김건희씨의 비위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반면 윤석열의 정적들은 거듭해서 수사를 받았다. 권력자에게 ‘법의 지배’가 의미하는 것은 철저한 공사(公私) 구분이다. 윤석열의 흠결로 가장 많이 지적받는 항목은 ‘공사 구분 못함’이다. 수사기관들이 윤석열과 배우자, 친지, 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갖고 노는 사이, 수사권의 권위는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윤석열은 12·3 쿠데타로 자신의 반(反)법치주의적 기질을 폭발시켰다. 자유민주주의자라면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고 해서, 시민들의 기본권을 군부에게 갖다 바치는 ‘비상계엄’ 같은 조치를 감행할 수 없다.
4. 윤석열의 직무는 하루라도 빨리 중단되어야 한다.
지난 총선 이후 ‘3년은 너무 길다’ ‘2년 반은 너무 길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우리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윤석열은 합법적 선거로 취임한 대통령이다. 더욱이 대통령 탄핵이 되풀이되다 보면 한국의 헌정 체제에 어떤 흠집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12·3 쿠데타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박근혜는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는 이유로 탄핵당했다. 윤석열은 ‘헌법 수호 의지’는커녕 헌정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국가 반역 행위를 감행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범죄의 무게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쿠데타가 실패로 그친 날(12월4일) 오후, 정부·여당의 중진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비상계엄 선포는 민주당의 폭거를 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야당을 압박하기 위해 나라와 국민을 인질로 잡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반헌법적 인질극을 벌인 범인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치를 떨며 분노한다.
극우집단들은 쿠데타 실패 이후 광화문에서 대형 집회를 열며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라’고 외치는 중이다. 이 목소리와 윤석열 특유의 기질이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본인과 배우자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까지 선포할 수 있는 자라면 같은 일을 다시 시도하거나 심지어 외환(外患)을 불러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윤석열 리스크’는 이미 ‘정치’의 차원을 벗어나 우리 국민의 ‘생존’과 ‘안녕’의 문제로 나아갔다.
〈시사IN〉은 다시 거리 편집국을 준비하고 있다. 〈시사IN〉 창간으로 이어진 2007년 시사저널 파업,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에 반대하는 2008년 촛불시위,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낸 2016년 탄핵 촛불집회 때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광화문에서, 여의도에서, 용산에서, 전국 각지에서 국민의 분노한 목소리가 쌓여 흘러넘치고 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현장과 사실에 바탕한 기록,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을 지향하는 우리는,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섞여 언론의 본분을 지키고자 한다. 그리고 외칠 수밖에 없다.
윤석열의 대통령 직무는 한시라도 빨리 중단되어야 한다!
12·3 쿠데타를 일으킨 윤석열과 그 공범들을 엄정히 수사하고 처벌하라!
2024년 12월5일〈시사IN〉 기자협회
미 의회,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연일 미국 국무부가 윤석열 대통령의 기습 계엄령 선포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가는 가운데, 미국 의회에서도 강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브래드 셔먼 미 연방 하원의원(민주당, 캘리포니아)은 한국 시간 7일 새벽 워싱턴DC의 미 의회 의사당 하원 본회의장에서 열린 회의에서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었다며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이자,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한 전 세계의 노력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윤 대통령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계엄령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도 터무니없었다”면서 “다행히 몇 시간 만에 중단되긴 했지만 계엄령은 한국의 국가 안보를 강화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화시켰다”고 꼬집었다.
셔먼 하원의원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헌신하는 한국 국민의 단합'과 '양국의 국민들의 관계를 포함한 한미관계'가 한국의 국가 안보를 지탱하는 두 가지 기둥"이라며 윤 대통령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훼손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셔먼 의원은 “한국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1950년대에 함께 싸웠다는 사실의 잔재가 아니라 한국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공동의 헌신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실패하게 만든 한국 국민과 국회의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셔먼 의원은 “터무니없는 계엄령 선포에 직면했을 때 한국 국민들의 행보는 전 세계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특히 “윤 대통령을 감쌀 수도 있었던 여당 의원들을 포함한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을 봉쇄한 경력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190대 0으로 표를 던져 계엄령을 중단시켰다”며 본회의장으로 향한 18명의 여당 의원들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윤 대통령의 3일 밤의 기습 계엄령 선포는 미 의회에 큰 충격을 줬다.
앞서 미국 현지시각 3일 일한 오마르 하원의원(민주당, 미네소타)은 긴급 성명을 내고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을 희생시켜 권력에 매달리기 위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며, 이는 “인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며 반대 세력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려는 시도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5일 미 하원의 초당파적 조직인 ‘코리아 코커스’ 소속 아미 베라(민주당, 캘리포니아), 조 윌슨(공화당,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4명의 하원의원도 이번 사태에 대한 성명을 냈다. 지한파로 알려진 이들 의원들은 “한미관계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공동의 헌신을 바탕으로 구축되었다”며, “우리는 평온과 평화, 민주적 헌법 질서로의 복귀를 촉구”를 주장했다.
7일 오전 브래드 셔먼 미 연방 하원의원의 하원 본회의장 연설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의장님, 저는 대한민국 국민과 국회의원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터무니없는 계엄령 선포에 직면했을 때 그들의 행보는 전 세계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사당(을 봉쇄한 경력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190대 0으로 표를 던져 계엄령을 중단시켰습니다. 심지어 윤 대통령을 감쌀 수도 있었던 여당 의원들까지도 말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이자,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한 전 세계의 노력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또한 국가 안보를 이유로 계엄령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도 터무니없었습니다. 다행히 몇 시간 만에 중단되긴 했지만, 계엄령은 한국의 국가 안보를 강화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국가 안보의 두 가지 기둥이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헌신하는 한국 국민의 단합입니다. 윤 대통령은 이를 훼손했습니다. 둘째는 한미관계와 양국 국민 간의 관계입니다. 한국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1950년대에 함께 싸웠다는 사실의 잔재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지만, 그보다 한국에 대한 헌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의 헌신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윤 대통령은 이것도 훼손하려 했습니다.
저는 그의 시도를 실패하게 만든 한국 국민과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 2024. 12. 6. (현지시각) 브래드 셔먼 미 의회 하원의원 (민주당, 캘리포니아) 연설문 전문
'세상과 어울리기 > 시사만평-주간 쟁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12.9~ (0) | 2024.12.09 |
---|---|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0) | 2024.12.04 |
24.11.25~ (0) | 2024.11.24 |
24.11.18~ (0) | 2024.11.18 |
24.11.11~ (0) | 2024.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