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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시사만평-주간 쟁점

24.11.25~

by 이성근 2024. 11. 24.

"이태원참사, 분노 분출시켜라" 북한 이메일 지령법원 중형

1심 징역 15년 선고"북한 단 하나의 목표,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에 동조" 질타

민주노총 전 간부 '간첩 혐의'어려워진 대공수사, 유관기관 공조·증거능력 핵심

지난해 51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검찰청에서 박광현 수원지검 인권보호관이 '노동단체 침투 지하조직'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중간수사 결과 브리핑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번 특대형참사를 계기로 사회 내부에 2014년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투쟁과 같은 정세국면을 조성하는데 중심을 두고 각계각층의 분노를 최대로 분출시키기 위한 조직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으면 합니다."

모두 159명이 목숨을 잃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고 2주 정도 지난 20221115일께 당시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 석모(53)씨는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이 보낸 이와 같은 지령문을 이메일 등으로 받았다.북한 지령을 받아 노조 활동을 빙자해 간첩 활동을 하거나 중국과 캄보디아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한 혐의로 1심에서 중형이 선고된 민주노총 전 간부 재판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년간 100여차례에 걸쳐 북한 지령문을 받아 움직인 혐의로 작년 5월 구속기소 된 석씨에게 지난 6일 수원지법 형사14(고권홍 부장판사)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지령문 수신·보고문 발송뿐 아니라 평택 미군기지·오산 공군기지 내 시설·활주로·미사일 포대 등을 촬영한 영상·사진이 포함된 파일 등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한 사실 등이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북한 공작원이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크나큰 고통에 함께 슬퍼하면서 애도의 심정에서 지령을 내렸을 리 만무하다""지령문과 보고문의 내용들은 모두 단 하나의 목표인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으로 귀결되고, 피고인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장기간 이에 동조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1심 법원이 이 같은 결론을 내리기까지 법정에서는 수사 과정에서 모인 방대한 분량의 디지털 증거의 적법성 여부가 다퉈졌다.특히 간첩 의혹 사건은 피고인 측에서 모든 진술을 거부하면서 증거가 조작되거나 위법한 방식으로 수집됐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아 증거의 효력이 유무죄를 가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이 때문에 이러한 사건에서는 수사 단계에 참여해 증거 수집 경위 등을 잘 아는 검사가 공판에도 참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들은 만약 수사검사의 직무대리 발령을 통한 공판 참여가 불가능해지면 간첩 의혹 사건 재판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았다.

판결문 증거목록만 30"위법수집증거 아니다"

재판부는 239쪽에 이르는 1심 판결문 중 약 30쪽을 검찰이 제출한 증거를 나열하는 데 할애했다.증거에는 각종 내밀한 자료가 담겼다. 2017년부터 석씨 등이 캄보디아와 베트남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모습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촬영한 채증 영상이 포함됐고, 2018년부터 공작원 등과 주고받은 지령문과 보고문, 스마트폰에서 포렌식으로 선별한 파일도 담겼다.

이처럼 많은 증거가 제출되는 이유는 간첩 사건에서는 피고인과 관련자들의 진술을 기반으로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피고인이 수사 단계부터 진술을 거부하거나 참고인도 해외에 있는 등의 이유로 수사 협조가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련 동영상: 국회서 이태원참사 2주기 추모제..."특조위 지원에 최선" / YTN (Dailymotion)

공안 수사에 정통한 검사는 "간첩 사건은 진술에 기댈 수 없어서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증거를 토대로 유죄를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특히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받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재판부도 증거가 조작됐다거나,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나온 게 아니라거나, 수집 과정이 위법해 증거로 쓸 수 없다는 주장을 하나하나 검토한 뒤 위법수집증거가 아니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국정원 수사관들이 국제 형사사법 공조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해외에서 촬영한 영상·사진을 증거로 쓸 수 없다는 주장에는 "공개된 장소에서의 촬영을 강제수사라고 단정할 수 없고 촬영으로 얻은 증거의 증거능력을 부정할 사유는 되지 못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사진 파일 등이 조작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를 제출했을 뿐 아니라 실제 위변조 여부를 검증한 국과수 직원들을 법정에 증인으로 불렀다.

지난해 828일 공판에서는 국정원 수사관이 증인으로 나와 석씨의 SD카드에 은닉된 프로그램을 법정에서 직접 구동하기도 했다.

석씨의 다른 외장하드에서 발견된 암호 '1rntmfdltjakfdlfkehRnpdjdiqhqoek7'('1구슬이서말이라도꿰어야보배다7'를 영자로 친 것)과 수사기관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자 석씨가 북한으로부터 받은 202057일 자 지령문이 해독됐다.이 지령문에는 민주노총 임원 선거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석씨는 지령에 따라 계파별 선거 전략 등을 취합해 보고한 것으로 파악됐고, 법원은 이 부분 혐의가 사실이라고 보고 간첩죄를 인정했다.

석씨가 수시로 공작 진행 상황을 북한에 보고하고 "남조선 혁명운동에 대한 김정은 동지의 유일적 영도", "모든 것을 다 바쳐나갈 것" 등을 언급하며 보낸 '충성맹세'도 드러났다.

검찰-수사기관, 수사·재판서 유기적 협력

이번처럼 증거의 증거능력이 집요하게 다퉈지는 사건에서는 첩보 수집과 내사, 영장 신청과 압수수색, 송치와 기소 및 재판까지 전 단계에서 일선 검찰청의 공공수사부와 경찰 안보수사대, 국정원의 협의가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형사소송법 등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어렵게 얻은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됐다는 이유로 휴지조각이 될 수 있어서 증거 수집 단계부터 형사법 전문가인 검사들이 참여해 자문을 제공한다. 재판 단계에서도 국정원 수사관이나 경찰, 국과수 직원을 직접 증인으로 부르는 경우가 잦아서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1심 재판에 16개월이 걸린 석씨 사건뿐 아니라 최근 2심에서 국보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2~5년이 선고된 충북동지회 사건도 25개월이 걸린 1심 공판 기일의 대부분이 증거능력을 다투는 데 쓰였다. 단계별로 경찰이나 검찰이 분절돼 업무를 수행하며 증거능력보다는 사실관계를 다투는 일반 형사 사건과 다른 점이다.

현직 검사들은 대공 수사의 이 같은 특성 탓에 수년간 해당 사건을 다룬 수사 검사들이 재판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주요 간첩 사건의 재판을 맡았던 한 검사는 "간첩 사건은 수사 검사의 공소 유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공판에서 증거능력 관련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아는 수사 검사가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 검사는 "(수사에 관여하지 않은 공판 검사는) 방대한 기록을 숙지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전달받기는 어렵고 어느 측면이 쟁점인지도 알 수가 없다", 각 검찰청의 공판 검사가 공소 유지를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재판에 더욱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안 분야를 담당하는 한 검찰 간부도 "압수수색이나 증거 확보 과정을 가장 잘 아는 수사관들과 접촉해 재판에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수사 검사가 공판에 참여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은 대공 수사권이 국정원에서 경찰로 넘어간 이후 간첩 사건 추적과 수사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나온 결과다. 최근 보기 드문 중형이 선고됐다. 북한의 대남 선전 선동 전술은 여전하고 더욱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적 차원의 대공 수사력 '총량'을 유지하기 위해 기관 간 협력이 더욱 긴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water@yna.co.kr연합뉴스) 황윤기 기자

[윤석열 퇴진 지도] 1024786, 전국 시국선언·대자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gp.aspx?CNTN_CD=A0003081104&PAGE_CD=N0002&CMPT_CD=M0118

판결 전 알아야 할 '이재명 위증교사 사건' 세가지 맥락

[1심 판결 D-2] 22년 묵은 재판 플리바게닝 논란 객관적 증거의 해석

25() 오후 2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위증교사 혐의 1심 판결이 예정된 서울중앙지방법원 311호는 공교롭게도 일주일 전 공직선거법 1심 판결이 나온 바로 그 곳이다. 일주일 전에는 징역 1-집행유예 2년이라는 중형이 나왔다. 이번엔 다를까?

위증교사 사건 1심 판결을 코앞에 두고, <오마이뉴스>는 이 사건을 둘러싼 세가지 맥락을 짚어봤다.

[22년간 끝나지 않는 재판] 시작은 2002... 2023년 별건 사건 통해 부활

이번 사건의 발단은 22년 전인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성남 지역에서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던 이 대표는 KBS 최아무개 PD와 함께 김병량 성남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검사를 사칭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1번 사건). '분당 백궁 정자지구 파크뷰 용도변경 및 특혜분양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 대표는 20037월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았고, 200412월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됐다.

그러나 이 대표는 당시 재판 과정에서도 "지방선거를 앞둔 김병량 시장과 검사 사칭 관련 책임을 덜고 싶은 KBS 측이 이재명을 주범으로 몰기 위해 일종의 야합이 있었다. 김 시장이 최 PD KBS 취재진에게 이재명 가담 부분에 관해 허위진술을 하도록 사주했다"라고 주장하며 억울함을 주장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변호사 이재명은 성남시장을 거쳐 경기도지사에 도전하게 된다. 20185, 경기지사 후보 초청 방송 토론회에서 이 대표는 "저는 검사를 사칭해 전화를 한 일이 없다. () PD가 한 거를 옆에서 인터뷰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제가 도와준 걸로 누명을 썼다"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경기지사에 당선됐으나, 이 발언으로 인해 20181211일 공직선거법상 허위 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됐다(2번 사건).

이때 김병량 전 성남시장의 비서였던 김진성씨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이 대표의 주장에 부합하는 증언을 한다. 20195월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이 대표에게 "허위 사실의 주장 없이 누명을 썼다는 내용이 있는 표현은 확정판결에 대한 구체적 사실의 공표까지는 되지 못하고 피고인의 입장표명 내지는 평가 정도"라고 무죄를 선고했고, 20207월 대법원도 이 판결을 확정했다. 18년을 끈 사건은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난해 초, 검찰은 별개 사건인 백현동 개발 관련 알선수재 혐의(3번 사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증언을 했던 김진성씨가 백현동 개발사업자 중 한명이었는데, 검찰은 김씨의 휴대전화에서 2018년 이 대표와 통화한 녹음파일을 발견한다. 이 통화 내용을 바탕으로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 이 대표가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 위증을 교사했다고 판단하고 기소했다(4번 사건). 윤석열 정부 출범 2년차인 202310월의 일이다.

종합하면, 이 사건은 22년동안 4개 사건으로 변주되며 지속되고 있다. 2002년 검사 사칭 건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2018년 경기도지사 방송 토론회 발언을 바탕으로 공직선거법상 허위 사실 공표 사건으로 전환돼 대법까지 결론이 났다. 하지만 2023년 백현동 사건 수사 과정에서 되살아나 별건으로 기소돼 현재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끝나지 않는 재판251심 선고가 예정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위증교사 혐의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약 22년간 변주된 오래 묵은 사건이다. 사진은 지난 2020716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대한 상고심 선고 공판 뉴스를 시청하는 모습이다. 이때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이 되면서 이 사건은 끝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또 부활했다. 연합뉴스관련사진보기

[플리바게닝 논란] 중단된 김진성 개인비리 수사

지난 1014일 공수처 국정감사 현장.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오동운 공수처장을 향해 "김진성을 아냐"면서 아래와 같이 질문한다.

- 박균택 의원 : "이재명 대표가 위증교사 혐의로 기소됐다. 위증죄로 기소된 건 김진성씨다. 그런데 김진성씨는 처음 검찰조사에서 '위증을 안했다', '이재명도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다'고 했다. 위증이나 위증교사를 부인했다. 나중에 자기가 위증을 했고, 이재명 대표가 위증을 교사했다고 말을 바꾼다. 그런데 위증교사 수사 당시 김진성씨에게는 3가지 사건이 있었다. 백현동 관련해 74억 알선수재 사건, 독자적으로 진행한 도감청 탐지장치 납품 관련 알선수재 사건, 마지막으로 골프장을 상대로 납품 관련 사기 사건이다.

검찰이 김진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백현동 알선수재 혐의에 대해 기소를 안하고 공범 김인섭씨만 공소를 제기해서 유죄를 받게 만들었다. 1심과 2심 모두 징역 5년을 받았다. 김진성씨는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독자적인 알선수재 사건도 기소를 안했다. 마지막 사기 사건도 경찰이 기소의견으로 보냈는데 검찰이 조사도 안하고 무혐의 처리했다. 결국 이재명을 잡기 위해 협조하는 이유로 회유와 협박을 했다고 보인다. 플리바게닝을 넘어 (검찰의) 직무유기 직권남용 강요범죄에 해당된다고 판단된다. 공수처에서 수사할 용의가 있나?"- 오동운 공수처장 : "범죄가 되는지 검토는 해보겠다."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은 피고인이 자신의 형량을 낮추거나 가벼운 죄목을 적용받기 위해 검찰 측과 협상하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다. 박 의원의 지적처럼 김씨가 먼저 수사를 받던 백현동 건을 비롯해 세 가지 사건에 대해 무혐의 처리되거나 아직 기소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 사이 백현동 개발업자 김인섭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는데, 판결문에는 아래와 같이 김씨의 역할이 명시됐다.

김진성은 김인섭과 정바울 사이를 중간에서 연결·조율하면서 피고인이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알선수재)죄 등으로 구속된 20154월 이후에도 피고인을 자주 면회하거나 피고인과 서신을 주고받는 방법으로 피고인의 지시를 받아 지구단위계획 등 이 사건 사업의 추진 상황을 점검하여 보고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략) 김인섭은 정바울로부터 받는 지분 25% 4%를 김진성의 몫으로 하기로 약속하였다.

[같은 통화, 다른 해석] 한명이 '난 위증했다' 인정하는 상황...핵심은 통화 파일

김진성씨는 재판 초기부터 자신의 위증 혐의를 인정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위증 교사 혐의를 받는 이 대표의 유무죄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고의성'이다. 위증을 지시한 사람이 거짓을 인지하고, 위증할 의사가 없는 상대에게 이를 실행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 사건은 위증 교사의 증거로 객관적인 물증이 제시되어 있다. 201812월 말 이재명-김진성 통화 파일(1222, 24)이다. 양쪽 모두 통화 자체를 부정하거나, 조작을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전화통화를 두고 검찰과 이 대표 측은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검찰은 법정에서 "이재명은 잘 알지 못한다는 김진성에게 '그런 상황만 얘기해 주면 된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주장에 부합한 증언을 해달라고 했다""20181224일자 통화 녹취를 보면 이재명은 '하여튼 이 사건에 대해 증언을 한다면 그렇게 가는 수밖에 없는 거 같다. 꼭 좀 부탁드리겠다. 당시 분위기가 그랬다'는 취지로 말했고 김진성이 '잘 수시로 말씀하시면 잘 인지해서'라고 말하자 이재명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한 게 확인이 된다"라고 강조했다. 또 검찰은 "통화에서 김진성이 '모른다'고 하니까 이재명이 '들었다고 하면 되지 뭐'라고 자신이 말한 내용에 부합하게 말해달라 했다"라고 지적했다.

반면 이 대표는 재판 내내 2002년 당시 KBS와 김병량 전 시장 사이에 자신을 주범으로 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번 위증교사 재판을 넘어 2002년 검사 사칭 재판부터 22년간 일관된 이 대표의 입장이다. 이 대표 측은 201812월 통화에서 이 대표가 김씨에게 "김 비서관(김진성)이 안 본 거, 뭐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고, 그쪽이 어떤 입장이었는지 그런 거나 좀 한번 상기해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한 부분을 강조했다. 즉 거짓을 말하라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난 930일 결심공판에서 이 대표 측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201918일 이 대표 측 변호인과 김씨와의 통화를 법정에서 공개했다. 해당 통화에서 김씨는 "제 기억으로는 KBS하고 우리 캠프 관계자하고 또 (김병량) 시장님이 교감을 갖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아마 그 분위기를 그렇게 계속 몰아갔던 거는 있었던 거 같다"라고 했다.

하지만 검찰은 "해당 녹취내용은 이재명 대표의 위증교사 행위 후에 김진성이 이재명 대표 측에서 증언을 원하는 허위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대화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거짓을 증언하라고 한 것이냐, 사실대로 증언하라고 한 것이냐. 결국 객관적인 통화 내용을 놓고 재판부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재판의 결론이 달라지는 상황이다.

김종훈(moviekjh)오마이뉴스

 

어무이 부르면, 오이야 오이야국어 교과서 실리는 할머니 시

“80이 너머도(넘어도) 어무이(어머니)가 조타(좋다). 나이가 드러도(들어도) 어무이가 보고 씨따(싶다). 어무이 카고(하고) 부르마(부르면) 아이고 오이야(오냐) 오이야 이래 방가따(방갑다).”

경북 칠곡군에 사는 이원순(87) 할머니의 시 어무이의 일부다. 여든이 넘어 한글을 깨우친 칠곡 할머니들이 생을 꼭꼭 눌러 담아 쓴 시가 내년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다.

경북 칠곡군은 박월선, 이원순, 고 강금연, 고 김두선 할머니가 창작한 시 4편이 내년에 사용될 천재교과서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다25일 밝혔다.

교과서에는 고 강금연 할머니의 처음 손잡던 날’, 고 김두선 할머니 도래꽃 마당’, 이원순(87) 할머니의 어무이’, 박월선(96) 할머니의 이뿌고 귀하다등 시 4편이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수록된다.

이들 할머니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었다. 지독한 가난, ‘여자를 가르쳐서 뭐하냐는 견고한 성차별 탓에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읽고 쓰는 삶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여든 넘어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익히고 삶을 써내려갔다. 칠곡군은 할머니들의 시를 모아 시가 뭐고’(2015)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2016) 등 다수의 시집을 발간했다.

발음 나는 대로 적어 맞춤법엔 어긋나지만, 삶이 생생하게 담겨 저절로 음성지원되는 것이 할머니들이 쓴 시의 장점이다.

이뿌고 귀하다(박월선 할머니)

우리 손녀 다 중3이다.

할매 건강하게 약 잘 챙겨 드세요.

맨날 내한테 신경 쓴다.

노다지 따라 댕기면서 신경 쓴다.

이뿌고 귀하다.

 

이원순 할머니는 교과서 수록을 누구보다 기뻐할 언니들이 고인이 되거나 거동이 불편해 안타깝다어린 학생들이 우리 할머니들의 시를 읽으며 부모님께 효도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란다고 했다.

한편, 칠곡군은 이날 할머니들의 시와 그림이 소개된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도시재생구역 벽화거리에 교과서 수록을 알리는 현수막을 내걸고 교과서 거리스토리를 입혀 약목면 도시재생구역 정비에 나서겠다고 했다.

김재욱 칠곡군수은 칠곡군에는 호랑이는 가죽을, 칠곡할매들은 시를 남긴다는 말이 있다. 칠곡 어르신들의 열정을 알리고 초고령화 시대 주류 문화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실버 문화를 선도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최윤아 김규현 기자 ah@hani.co.kr

북한 조망김포 애기봉에 높이 40m 국기게양대 추진 논란

김포시, 1억 들여 애국심 고취

시민단체, ‘북한 자극철회 촉구

김포 애기봉생태평화공원 전경. 김포시 제공

경기 김포시가 북한 들녘을 조망할 수 있는 애기봉에 높이 30~40m의 국기게양대 설치를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다.앞서 지난 6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광화문광장에 110억원을 들여 태극기 게양대를 세우겠다고 했다가 논란이 되자 백지화한 바 있다.

김포시는 월곶면 민간인 통제지역에 있는 애기봉평화생태공원에 1억원을 들여 내년 상반기 중 높이 30~40m의 국기게양대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고 26일 밝혔다.김포시는 애기봉평화생태공원에 국기게양대를 설치하면 국가 자부심과 애국심이 고취되고, 통일을 희망하는 상징성 있는 구조물로 관광 명소화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높이 155m의 애기봉생태평화공원에서는 1.4거리에 있는 북한 황해북도 개퐁면 들녘을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는 1971년부터 2014년까지 매년 연말이면 높이 18m의 등탑이 불을 밝히기도 했다.김포시 관계자는 국기게양대 설치 예산 1억원이 김포시의회를 통과하면, 내년 상반기에 착공할 예정이라며 김병수 김포시장의 지시가 아닌,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의 관광 명소화를 위해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포시민단체인 시민의힘은 이날 논평을 내고 북한을 조망할 수 있는 애기봉에 국기게양대를 설치해 애국심을 고취하겠다는 발상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사뭇 궁금하다고 꼬집었다.논평에서는 또 애기봉생태평화공원은 김포시민단체들이 애기봉 등탑 반대와 대북전단 살포 저지를 위해 10년 넘게 싸워 온 평화의 상징물이라며 김포시가 애국심 고취 목적으로 설치한다는 국기게양대는 전쟁 심리전의 수단이고, 남북간 긴장, 갈등, 공포만 키우고 확산하는 존재 의미가 없는 구조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최근 대북 방송과 오물풍선 등으로 남북관계가 긴장국면으로 전환된 상황에서 북한을 자극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시민의힘 관계자는 최근 북한의 확성기 소음으로 접경지 김포 시민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있다김포시민들을 생각해서라도 김포시는 애기봉 국기게양대 설치 계획을 철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6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광화문광장에 110억원을 들여 애국심을 고취한다며 태극기 게양대를 세우겠다고 했지만, 국가주의를 강요한다는 지적 등의 논란이 일자 이를 철회했다./경향

 

미국 노동자 서민은 왜 트럼프를 뽑았나 [데이터로 읽는 미국 대선]

모든 유권자 그룹에서 트럼프 지지율이 증가했다. 민주당으로서는 유색인종과 저소득층 이탈이 특히 뼈아프다. 30년 사이 처음으로 저소득층이 공화당에 더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1019일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가 펜실베이니아 유세에 철강 노조원과 함께 연단에 올랐다. REUTERS

115일 오후 10, 조금씩 해리스 후보의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가슴 한 곳을 때리는 느낌이었다. 해리스가 패해서가 아니라 여론조사의 문제점이 또다시 드러나서였다. 데이터를 분석함으로써 정치를 연구하는 필자의 생업이 부정당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선거 결과를 복기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여론조사가 예측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선거 후 민심 이해에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과 데이터는 미국 정치와 유권자의 냉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 현실을 하나씩 짚어보자.

그림 1은 이번 대선을 하나로 정확히 요약한다. 올해 전 세계 모든 선거에서 집권당은 예외 없이 득표율이 떨어졌다. 1950년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도, 1980년대 인플레이션 위기 때도, 집권당들이 이렇게 참패해본 적은 없다. 올해 미국 선거 결과의 붉은 점을 보면, 그나마 전 세계 집권당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보여준다. ()트럼프 진영이 최대 결집했지만, 전 세계적 인플레에 따른 집권당에 대한 불만을 이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 선거가 여러 사람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트럼프 지지세 확대가 전국 모든 곳에서 골고루 모든 유권자 그룹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인종, 성별, 교육수준, 소득수준, 종교, 이념, 도시·농촌 거주 여부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유권자 그룹에서 트럼프 지지율이 증가했다. 민주당을 승리로 견인할 거라 여겨졌던 대학 교육을 받은 여성, 유색인종 여성, 젊은 여성 모두 2020년에 비해 민주당 이탈 현상이 뚜렷했다. 민주당 텃밭인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 트럼프 지지 증가세는 다른 지역보다 더 가파른 모양새다. 전국 50개 주에서 유타와 워싱턴주를 제외하고 모두 트럼프 지지율이 올랐다.

민주당에서 가장 뼈아파 하는 부분은 유색인종과 저소득층의 이탈이다. 가장 큰 이탈은 라틴계에서 나타났다. 라틴계 유권자 사이에서 바이든의 득표율은 트럼프보다 28%포인트 높았지만, 해리스의 승리 폭은 13%포인트로 반토막 났다. 8년 전 트럼프를 지지하던 라틴계 유권자는 29%에 불과했지만 올해 42%까지 성장했다. 흑인 유권자 사이에서 해리스의 압도적 우위는 여전했지만, 각론을 보면 다르다. 4년 전 흑인의 트럼프 지지율은 8%였지만, 올해는 16%이다. 두 배로 늘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인종 재정렬이라고 평하기까지 한다.

저소득층의 이탈은 더 드라마틱하다. 최근 30년 사이 처음으로 저소득층이 공화당에 더 높은 지지율을 보여줬다. 그림 2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서로 자리를 바꾼 모습을 명확히 보여준다. 1996년만 하더라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저소득층과 교육수준이 낮은 유권자에게 지지를 받았고, 밥 돌 후보는 고소득층과 교육수준이 높은 유권자의 지지를 받았다. 28년 후, 트럼프와 해리스는 전혀 다른 위치에 서 있다. 민주당이 대학 교육을 받은 유권자의 지지를 더 받게 된 건 2016년부터라 하더라도, 저소득층의 지지를 빼앗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권자는 정책만 보고 투표하지 않았다

이런 패배를 두고 민주당 정치인들과 진보 성향 언론인들은 민주당이 노동자 지지를 받는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파한다. 심지어 한국 내 진보 성향의 언론인이나 교수들도 미국 민주당이 엘리트 정당이라며 노동자 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고 엄준하게 꾸짖는다. 그러나 이런 노동자·서민을 강조해야 한다는 구호에는 어떻게가 빠져 있다. 노동자 계층을 돕는 정책을 추진하면 그들이 자연스레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부터 검토하지 않는 이상 똑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좋은 정책이 지지를 불러오지 않는다. 현대 미국 정치의 네 가지 장면을 검토하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첫 번째, 미국 최대 운수노조인 팀스터스 노조가 해리스 지지를 포기했다. 노조 지도부는 기층 노조원들의 트럼프 지지가 뚜렷하다는 이유로 해리스를 지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의 노조 친화적 기조가 그저 구호에 달했다면 기층 노조원들과 지도부의 선택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위기에 빠진 팀스터스 노조의 연금펀드에 공적자금 50조원을 투입했다. 굉장히 큰돈을 팀스터스 노조원을 위해 투자했음에도, 팀스터스 노조원도 지도부도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결론 내렸다. 노조를 위한 정책은 표로 이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장면은 테네시주 서부에 위치한 헤이우드카운티에서 펼쳐진다. 한국에서 IRA로 알려진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미국의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전기자동차 공장 설립을 위한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포드는 헤이우드카운티의 스탠턴에 78000억원을 투자해 6000명을 새로 고용할 수 있는 전기자동차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인구 17000여 명인 헤이우드카운티에는 상당히 큰 투자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4년 전에 비해 얼마나 지지율이 올랐을까?

민주당의 지지율은 오히려 예전에 비해 감소했다. 그것도 큰 폭으로 줄었다. 2020년 바이든은 8.9%포인트 차이로 승리했지만, 이번 선거에서 해리스는 0.4%포인트로 겨우 이겼다. 민주당이 700여 표를 잃는 사이, 공화당은 50여 표를 추가했다. 일자리 창출로 노동자들에게 표를 얻으려던 정책은 지지율 감소라는 결과로 끝났다. 테네시 상황을 잘 아는 지인의 말에 따르면, 이 지역 공화당 정치인들이 전기자동차 공장의 부정적 면모만 강조했다. 지역 주민들은 전기자동차 공장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며 민주당이 표를 벌기 위한 흉내만 낸다고 믿었다고 한다. 공화당이 백악관과 상하원 승리를 거머쥠에 따라 결과적으로 IRA의 운명은 불투명해졌다.

세 번째 장면은 오바마케어와 농촌 병원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한국의 지방 병원처럼 미국의 농촌 병원도 경영난에 시달린다. 2010년 이후 농촌 병원 136개가 문을 닫았고, 추가로 700개 병원이 폐원 위기에 처해 있다. 오바마케어는 저소득층의 건강보험 접근성을 늘려주는 메디케이드 확대 정책을 담고 있어서 농촌 병원의 경영 상황을 돕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화당이 집권하는 여러 주들이 이념적 이유로 오바마케어 정책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런 주들은 오바마케어 정책을 수용한 주에 비해 농촌 병원 폐업률이 3.3배 이상 높았다. 주지사와 주의회의 잘못된 선택이 농촌 지역 주민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농촌 병원 폐업을 겪은 유권자들은 주지사와 주의회를 심판했을까? 아니다. 민주당을 심판했다. 미시간 대학 마이클 셰퍼드 교수 연구에 따르면, 농촌 폐업 병원이 있는 주변 지역에서 민주당은 1%포인트 정도 지지율을 잃고 그 지지율은 트럼프에게 갔다. 공화당이 장악한 주지사와 주의회는 지지율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주정부의 잘못된 선택의 책임을 연방정부에 떠안긴 모양새다.

마지막 장면은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와 해리스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평가 결과에서 볼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가 여론조사로 트럼프와 해리스의 정책을 블라인드 테스트했다. 후보 이름 없이 정책만 놓고 어느 정책이 더 인기 있는지 시험했다. 결과는? 그림 3에 따르면, 해리스의 정책 대부분은 과반 지지를 받은 데 비해, 트럼프는 절반 가까이가 과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해리스 정책의 16개가 75% 이상 지지를 받은 데 비해, 트럼프는 겨우 4개 정책만 75% 이상 지지를 받았다. 블라인드 테스트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들도 해리스 정책의 절반 이상을 50% 넘게 지지했다. 정책만 놓고 본다면 민주당이 승리해야 하는 선거였다. 그렇지만 유권자들은 정책만 보고 투표하지 않았다.

노동자 계층을 위한 정책이 지지를 이끌어내지 않는다면 무엇이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이끌어내는가? 정치학자와 언론인이 오래 물어온 질문이다. 토머스 프랭크라는 언론인은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책을 통해 문화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백인 노동자 계층은 문화적 이슈에서는 보수적 입장을 선호하고 이에 따라 보수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정치학자들도 미국 유권자의 투표 행태는 자기 이익보다 상징적인 것들에 대한 입장에 좌우된다고 분석했다. 흑인·불법이민자·여성·부자·기업과 같은 추상화된 상징에 대해 유권자가 평소 어떤 성향을 갖느냐에 따라 투표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서민 대변하는 정당이 되려면

트럼프 이후 미국 정치는 정체성 그리고 상징을 둘러싼 정치가 더욱더 극대화되었다. 필자가 3년 전 기고(시사IN697바보야,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인종주의야기사 참조)에서 트럼프 지지 요인을 분석한 것처럼 인종에 대한 태도가 트럼프 지지자와 비지지자를 구분하는 예측력이 가장 높은 변수다. 미국의 20대 남성을 분석한 기고(시사IN889‘20대 남자 현상, 미국에도 있다기사 참조)에서 밝힌 것처럼 적대적 성차별주의도 트럼프 지지자에 대한 예측력이 높은 변수다. 정책 지지는 트럼프 지지에 큰 예측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와 같은 분석이 트럼프 지지자를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로 명명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 지지자와 비지지자를 구분하는 것은 인종이나 젠더와 같은 문화적 요인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봐야 한다.

이런 현실은 미국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 큰 숙제를 안겨준다. 노동자 계층은 전통적으로 인종, 젠더, LGBTQ(성소수자) 이슈 등에서 보수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노동자 계층이 민주당을 꾸준히 지지하던 1990년대에도, 아니 시간을 더 거슬러 미국 내전 이전에도 이들은 문화적 이슈에 보수적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진보적 이해집단을 아우르는 연합정당 성격을 띠는 민주당이 이러한 이슈에 보수적 입장을 갖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트럼프는 이민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이슈에 선명한 보수 색깔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자의 지지를 결집할 수 있었다. 인종, 젠더 같은 이슈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유권자들은 트럼프의 이런 행보에 반발하면서 민주당으로 결집해 오늘날 미국 정치의 구도가 형성됐다.

2020년 바이든은 대선에 임하면서 나름의 이론을 제시했다. 미국 노동자들이 원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제조업 고용을 늘린다면 노동자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4년 후 민주당은 노동자 지지 이탈이 더 가속화한 모습을 보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2008년 오바마 캠프와 같이 백인 노동자와 유색인종의 연합을 회복한다는 목표만 있지, 구체적인 실행법은 아무도 제시하지 못했다.

1025일 미시간주 체리 캐피털 공항에 지지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트럼프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AP Photo

미국 정치학의 대가 래리 바텔스(벤더빌트 대학)와 크리스토퍼 에이큰(프린스턴 대학)현실주의자를 위한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잘못됐음을 지적한다. 현직 대통령의 정책과 실적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집권당이 책임을 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나이브하며, 대부분의 유권자는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기 때문에 많은 민주주의 정부들이 대중의 선호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번 대선을 인플레이션에 대한 심판 성격으로 봤을 때는 이 책의 주장이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의 지난 4년간 정책적 노력에 유권자들이 보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유권자가 정체성을 따라 투표한다고 민주주의를 회의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정치인들이 노동자·서민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고장 난 것과 같은 대의민주주의의 미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가 정치인이 아니라 기업인이라는 사실을 높게 친다. 정치 불신이 바로 트럼프 지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불신이 바로 오늘날 미국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였던 것이다. 미국 민주당이 노동자·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정책이 아닌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4년 뒤 그 정체성을 이해하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오바마 연합의 회복도 가능할 것이다.

국승민 (미시간 주립대학 정치학과 교수)/ 시사인

 

9502차 은퇴러시소득절벽길어진다[정년 연장, 공존의 조건을 묻다

중견기업 간부였던 정지훈(59)씨는 202156세에 퇴직했다. 정년을 채우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회사 사정이 여의찮았다. 정씨 같은 사무직 출신에게 선택지는 자영업뿐이었다. 2022년 서울 외곽 주택가에 편의점을 차렸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있어 낮에는 아내와 일하고 야간 알바를 쓰면 그럭저럭 벌이가 됐어요. 그런데 2분 거리에 편의점이 또 들어왔습니다. 알바를 안 쓰고 12시간씩 맞교대로 버티고 있어요. 연금 받고 쉴 형편은 아니어서 편의점을 옮겨야 할지, 업종을 갈아탈지 고민입니다.”

1965년생 정씨가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는 64세다. 자녀가 취업하지 않은 데다 노모도 부양하고 있어 앞으로도 4~5년을 이 악물고 버텨야 한다. 정씨는 26재취업하기 위해 노력해 봤지만 안 됐다. 편의점에서 적자가 나면 내년부터 (최대 30%가량 손해를 보는) 조기노령연금을 받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2차 베이비붐 세대(1964~74년생)의 첫 주자인 1964년생이 정년을 맞고, 내년부터 954만명 규모의 베이비부머들이 10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은퇴한다. 지금과 차원이 다른 소득 절벽’(은퇴~연금 수령까지의 공백)이 시작된다는 의미다. 2차 베이비붐 세대는 앞서 은퇴한 1차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705만명)보다 250만명가량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2025년 초 한국은 초고령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비중이 20% 이상)에 진입하게 된다. 정년 연장에 대한 논의를 진척시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일이 현 정부의 어떤 구조개혁 과제보다도 절실한 이유다.

1965년생은 칼바람 부는 소득 절벽을 맞는 실질적인 첫 세대다. 올해 60세 법정 정년을 맞은 1964년생 퇴직자는 연금을 받을 때까지 3년만 버티면 되지만, 1965년생부터는 연금 수급까지 4~5년을 버텨야 한다.

1차 베이비붐 세대는 그래도 괜찮았다. 대부분 연금 수급 연령(61~62)에 진입했다. 1953~56년생은 61, 1957~60년생은 62세에 연금을 탈 수 있었다. 하지만 1961~64년생은 63세부터, 1965~68년생은 64, 69년생 이후부터는 65세가 돼야 연금을 받는다. 연금 수급 나이가 65세가 되는 시점은 2033년이다. 정부는 19981차 연금개혁 당시 연금 지급 개시 나이를 5년마다 한 살씩 올리기로 했지만 역대 어느 정권도 소득 절벽의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정년 연장이 되지 않으면 소득 절벽이 길어진다. 60세가 넘으면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할 순 있지만 연금이 매년 6%씩 깎여 최대 30% 손해를 보기 때문에 노후를 생각하면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며 계속 고용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반드시 이뤄야 하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지난해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61세인 1956년생과 62세인 1957년생을 비교·분석한 결과 빈곤율에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64~65세로 수급 연령이 높아져도 같은 추세를 보이리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한국 경제의 역동성이 빠르게 떨어지면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잠재성장률 밑으로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고령일수록 재취업이 어려워 연금을 받을 때까지 소득 공백기를 근로 소득으로 메울 능력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고령자 취업도 녹록지 않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취업 인구 중 고령층(55~79) 임시 일용직 비중이 2022년 기준 27.8%, 자영업자나 무급 종사자 비중은 37.1%.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 상시 근로자 1인 이상 기업 중 정년 퇴직자를 재고용한 비율은 31.3%(20226월 기준)였다. 권기섭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은 정년 퇴직 연령과 국민연금 수급 연령 차가 벌어지고 있는 데다 고령자 재취업이 열악해 단기 계약직이나 단순 노무직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어렵다초고령사회 진입(2025) 5~6년 전부터 고령자 계속 고용 문제가 논의됐어야 했는데 우린 지금도 늦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부모를 부양하는 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음 세대란 의미에서 마처 세대로 불린다. 재단법인 돌봄과미래1960년대생(55~64) 980명을 대상으로 지난 5월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15%가 부모와 자녀 양쪽 모두를 이중 부양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월평균 164만원을 지출하고 있다고 답했다.

정년 연장이 되지 않은 채 은퇴 후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만 올라가게 되는 2차 베이비붐 세대는 나가는 돈은 많은데 일은 못하고 연금마저 늦게 받는 삼중고를 겪게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최악인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40.4%)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통계청의 ‘2023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노후를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응답이 30.3%에 달했고, 주된 노후 준비 수단이 국민연금이란 응답이 10명 중 6명꼴(59.1%)이었다.

방송·통신업에 종사하다 58세에 퇴직한 이모(60)씨는 모든 사람이 노후 준비를 잘하는 건 아니다. 정신없이 일하고 부모, 자녀를 부양하다 준비 없이 퇴직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라고 말했다. KDI는 소득 절벽의 대안으로 부분연금제도도입을 제안했다. 연금 일부를 조기에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지금도 조기노령연금 수급 제도가 있지만 전체 금액을 삭감된 형태로 끌어다 써야 한다. 김도헌 KDI 연구위원은 부분연금제도를 활용하면 은퇴할 때까지 점진적으로 근로 시간을 줄여 가거나 다른 직업으로 이동할 때 부족한 소득을 보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는 부분연금제도를 검토해 봤지만 실효성이 크지 않았다고 했다.

세종 이현정·한지은 기자

"가상자산 과세 '유예하자'는 국민의힘이나, '0.03%만 내자'는 민주당이나"

진보정당·시민사회 "금투세 이어 가상자산 과세도 또 유예? 조세정의 무너뜨릴 무책임 행보"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의 '가상자산 과세 유예' 주장과, 더불어민주당의 '면세한도 5000만 원으로 상향' 주장에 대해 원외 진보정당과 시민사회가 "유예론과 공제한도 상향론 모두 부자감세이고 과세 무력화"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정의당·노동당·녹색당 등 진보정당 3당과 경실련·금융정의연대·민변 복지재정위원회·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는 27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2511일 시행, 공제한도 250만원의 가상자산 과세안을 원안대로 정상 시행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정부·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더 이상 조세원칙과 정치 신뢰를 무너뜨리지 말라""금투세 폐기 다음은 가상자산 과세 폐기인가?"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2024년 상반기 기준 가상자산 이용자가 778만 명에 육박한다. 시장 규모로 따지면 미국·일본에 이은 세계 3위 수준"이라며 "과세체계가 없는 것이 이상한 수준의 규모인데도 정부는 매번 유예 때마다 '과세체계 정비가 덜 됐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부를 향해 "수십조 원에 달하는 '세수 펑크'2년 연속 낸 정부가 과세체계 허물기엔 왜 이렇게 열심인가"라며 "예산 없어서 지방교부세 삭감하고 유보통합, 늘봄학교, 고교 무상교육 예산까지 삭감하는 정부가 무슨 생각으로 입만 열면 '부자 감세'"고 따졌다.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한동훈 대표는 '청년들의 희망' 운운하는데, 20대의 86%, 30대의 75%100만 원 미만을 보유하고 있거나 아예 갖고있지 않다. 대다수는 내지도 못할 세금"이라며 "정부·여당이 청년에게 줄 희망이 고작 가상자산 과세 유예뿐이라니 부끄럽진 않은가"라고 꼬집었다.

민주당을 향해서도 이들은 "공제 한도를 5000만 원으로 20배 상향해서 실시하자는 입장을 내놨지만 이재명 대표가 비공개 회의에서 우려를 표했다는 언론 보도도 나오고 있다""확고한 '이재명 일극체제'에서 민주당 정부가 추진하고 관철한 정책이 어떻게 단숨에 뒤집히는지 우리는 이미 금투세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5000만 원으로 한도를 높이면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0.03%만 세금을 낼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언급하며, 여야를 싸잡아 "0.03%만 내는 세금을 '유예하자'는 국민의힘도 무책임하지만 '0.03%만 내게 하자'는 민주당도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 정의를 형해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리고 비판했다.

27일 국회 앞에서 열린 '가상자산 과세 정상시행 촉구 정당-시민사회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정의당

권영국 정의당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근로소득에 대해서는 유리지갑처럼 과세를 하고 금융투자·자산소득에 대해 과세를 유예하는 조세행정은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심어주는 것"이라며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국가재정 거덜내는 감세 포퓰리즘을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백윤 노동당 대표는 "경쟁적인 감세정책 남발하는 보수양당에 우리의 미래를 맡겨둘 수 없다"고 일갈했고, 김지윤 녹색당 사무처장도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불로소득 감세' 짬짜미가 정말 놀랍다""수십조 원 세수 결손을 걱정하면서도 감세에 있어서만큼은 이렇게나 여야 협치가 잘 된다니 참 한탄스럽다"고 비꼬았다.

곽재훈 기자 | 프레시안

사회학과 문을 닫게 만드는 사회의 수수방관

대구대 사회학과가 더 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 한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방대가 가장 먼저 타격을 받고 있고, 인문사회 계열 폐과와 통폐합이 가장 많다.

117일 대구대 사회학과 학술제 메모리얼 파티가 열렸다. 한 학생이 사회학 책에 국화꽃을 올렸다. 시사IN 박미소

책 앞에 흰 국화꽃이 놓였다. 방송사 카메라를 의식한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근데 책이 너무 재미없어 보이면 어떡하지?” 책 표지에는 노동사회학〉 〈신경제사회학〉 〈비판사회학의 계보학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하나씩 도착한 근조 화환에 적힌 문구는 추모라기보다 다짐에 가까웠다. “사회학은 살아 있다(한국문화사회학회).” “사회가 있다면 사회학도 계속된다(한국문화사회학회장 최샛별).” “그럼에도 불구하고···(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굵은 글씨로 대구대학교 사회학과라고 쓴 종이가 영정 사진을 대신했다.

2025년부터 대구대학교 사회학과는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 올해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할 수 있도록 2030년까지 유예기간을 두지만, 그 뒤로는 문을 닫는다. 1979년 문을 열었으니 폐과가 결정된 올해 향년 45가 되는 셈이다. 대신 웹툰전공과 게임학과, 스포츠헬스케어학과 등이 새롭게 신입생을 받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졸업생들은 가만히 사라지지 말고 뭐라도 하고 헤어지자라고 뜻을 모았다. 외부와 언론에는 장례식으로 알려졌지만, 엄밀히 말하면 2024년도 사회학과 학술제 주제가 메모리얼 파티. 117~8일 치러진 이 행사를 준비한 졸업생 중 한 명인 권민조씨(2015년 입학)는 기획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장례식이라는 단어를 쓴 적은 없다. 전국의 쇠퇴하는 인문학과를 대변하겠다는 거창한 의도도 전혀 없었다. 단지 우리가 배웠던 사회학의 방식으로 지난 시간을 기리려 했는데 소문이 나면서 일파만파 일이 커졌다.”

한국 사회가 어느 지역 대학에서 일어난 일을 장례식이라고까지 이름 붙이며 주목한 이유가 있다. 폐과 혹은 학과 통폐합이 한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0229월 도종환 당시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20213년 동안 전국 4년제 대학 학과 폐과·통폐합은 700건에 달했다. 2019130, 2020242, 2021328건으로 그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 자료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 경향이 보인다. 하나는 지방대가 먼저 타격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700건 중 비수도권 지역 소재 대학에서 일어난 폐과·통폐합은 539건으로 77.0%나 됐다. 또 다른 하나는 인문사회계열의 폐과·통폐합이 가장 많다는 점(700건 중 284, 40.6%)이다. 통계적 흐름으로 봤을 때, 대구대 사회학과의 폐과 결정은 사실 그다지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급격히 줄고 있는 학령인구는 대학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4년 현재 만 6~21세에 해당하는 학령인구는 7147000명이다. 대구대 사회학과가 첫 신입생을 받은 1979년의 학령인구가 14395000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절반 수준이다. 통계청이 제공하는 가장 먼 미래 예측치인 2072년 학령인구는 2783000명으로 현재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대학으로서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수치다. 11월 초 남녀공학 전환 검토 소식이 알려진 동덕여자대학교 논란의 배경에도 학령인구 감소가 있다. 동덕여대 총학생회는 학교가 학령인구 감소라는 이유로 (여대의) 설립 이념을 부정하고 있다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에 남아 있는 사회학과 37곳뿐

문제는 학령인구 감소에 대응하는 교육부의 방식이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 비수도권 대학들은 글로컬대학 30’에 선정되기 위해 해마다 고군분투 중이다. 글로컬대학 302023년부터 2026년까지 교육부가 비수도권 대학 서른 곳을 지정해 재정을 지원하는 정책 사업인데, 사실상 지역 대학별 통폐합 혹은 대학 구조조정을 부추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육부의 대학 지원 권한을 지자체에 위임해 지역과 대학의 동반성장을 이끌어내겠다는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egional Innovation System&Education, RISE·라이즈)’ 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재정난을 겪고 있는 지역 대학을 지역의 산학협력 사업에 종속시킬 뿐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글로컬대학 30에 선정되는 조건 중 하나는 무전공 학과(2학년 이후 전공을 선택하는 학과) 확대다. 교육부는 2025년부터 무전공 학과 신입생 선발을 늘리는 대학에 인센티브를 차등 지급하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학과에 얽매이지 않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의도이지만, 현실에서는 가뜩이나 심각한 전공 쏠림 현상을 더욱 부추길 거라는 우려가 나왔다. 실제로 529일 한국교육정책연구원이 주최한 현 정부의 고등교육 정책 평가와 개선 방향포럼에서 발표된 2011~2023년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입학생들의 추후 전공 선택 결과를 살펴보면, 사회과학대를 선택한 학생은 2011~2015년 전체의 41%에서 2021~2023년에는 29%로 줄었다. 대신 공학을 선택한 비율이 2011~20159%에서 2021~202331%로 크게 뛰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맞부딪힌다. 대학도 결국 돈을 벌어야 지속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과, 대구대 사회학과 근조 화환에 적혀 있던 문구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대학 교육을 돈으로만 환산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다. 고등교육법 제28조에 따르면 대학은 인격을 도야하고 국가와 인류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그 응용 방법을 교수·연구하며, 국가와 인류 사회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학을 전공한 양승훈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대학 진학률이 76%에 이르는 대한민국에서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 갖춰야 하는 기초적인 역량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고등교육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정의해야 한다. 공과대학을 나온 사람이 있어도 기업에서는 역학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데려다 쓸 수가 없다고 푸념하는 상황이다. 지금 교육부가 대학을 평가하는 방식으로는 인문사회학이나 이학이 살아남기 쉽지 않은데, 그조차 정말 산학협력이 되는 방식인지 의문이다.” 정책과 지원을 통해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정부가 오히려 시장 논리를 핑계로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양승훈 교수가 몸담고 있는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역시 2023년부터 신입생 모집이 중단된 상태다. 한국사회학회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사회학과는 37곳에 불과하고, 여기서 최근 폐과가 결정된 대구대·경남대·청주대 등을 빼면 향후 34곳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이 가운데 수도권이 아닌 지방대 사회학과는 15곳뿐이다.

117일 학술제를 마친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학생회 간부들이 눈물을 참으며 강의실을 나가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이런 추세 속에서 대학은 어떤 공간으로 남아야 할까. 마지막 졸업생으로 남게 될 대구대 사회학과 학생들은 다양하게 응답했다. 117메모리얼 파티를 주제로 열린 학술제에서 이동현씨(2020년 입학)학과 폐지 경험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신입생 모집이 중단된 이후 사회학과 학생들을 한 명씩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질적 연구 결과였다. 소식을 듣고 다음 날 너무 심란해서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학생, 20대 기억을 담고 있는 고향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다는 학생회 간부, 후배들에게 해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할 뿐이라는 선배, “사회학이라는 게 듣다 보니까 그래도 배울 만하다 싶어가지고여전히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신입생 등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발표를 듣던 학생들은 미소를 짓기도, 얼굴을 양손에 묻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대학이 단지 취업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없이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시사인 경산·나경희 기자

 

호주서 16살 미만 SNS 금지법 통과"괴롭힘 방지 vs 고립 심화" 논쟁 계속

온라인 괴롭힘 뒤 아동 연이은 자살로 경각심 커져고립 청소년 온라인 통한 도움 차단 우려도

온라인 괴롭힘으로 아동들이 연이어 목숨을 끊은 호주에서 16살 미만 아동·청소년의 소셜미디어(SNS)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이 통과됐다. 찬성 여론이 압도적인 반면 시행 방법과 더불어 전면 금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도움을 요청해 온 아동의 고립을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8(현지시간) 호주 ABC 방송, <AP> 통신 등을 보면 지난 21일 의회에 제출된 해당 법안은 일주일 만에 양원을 빠르게 통과했다. 이 법안은 내년 1월 시범 시행을 시작해 1년 뒤 발효될 예정이며, 발효 뒤엔 16살 미만 미성년자들의 틱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 이용이 전면 금지된다. 도입 기간 동안 소셜미디어 기업들은 이 연령대 아동·청소년의 플랫폼 이용을 차단하기 위한 "합리적 조치"를 마련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최대 약 5000만 호주달러(450억원)의 벌금을 물 수 있다. 규정을 위반하는 아동·청소년이나 부모에 대한 처벌은 없다.

온라인 게임 서비스, 건강 및 교육 지원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서비스, 이용을 위해 로그인을 요구하지 않는 유튜브와 같은 서비스는 이 법에서 정한 이용 금지 대상에서 제외된다.

법안이 신속히 통과된 배경엔 호주인들의 압도적 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26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호주인 77%가 이 법 도입에 찬성했다. 87%는 이 법을 포함해 소셜미디어 기업이 호주 이용자들의 안전 보장 조치를 규정한 법을 준수하지 않았을 때 더 무거운 처벌을 도입하는 것에 찬성했다.

호주에선 최근 온라인 괴롭힘으로 아동이 목숨을 끊는 사례가 이어지며 관련 경각심이 크게 치솟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괴롭힘으로 지난 9월 시드니에서 학교를 다니던 12살 소녀 샬럿 오브라이언이, 지난달엔 브리즈번의 한 학교에 재학 중이던 12살 소녀 엘라 캐틀리크로포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엘라의 가족은 온라인에 올린 추모 기금 모금을 위한 글에서 "소셜미디어 괴롭힘은 실재한다"며 위험성을 강조한 바 있다. 샬럿의 부모는 샬럿이 유서에서 자신의 사례를 알려 경각심을 키워주길 요청했다며 정치권에 소셜미디어 이용 연령 제한을 적극 요구해 왔다.

미성년자에 대한 소셜미디어 내 성적 학대, 괴롭힘 등이 사회 문제로 부상하며 각국에서 규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통과된 호주의 법안은 관련해 현재까지 나온 가장 강력한 규제에 속한다. 프랑스에선 지난해 15살 미만의 소셜미디어 계정 생성 때 부모 동의를 받도록 하는 법이 통과됐고 독일에선 플랫폼에 따라 13~16살 사이 이용자에게 부모의 동의를 요구한다. 영국에선 지난해 소셜미디어 기업이 아동에 대한 성적 착취, 극단적 성폭력, 테러 등과 관련된 유해 콘텐츠를 막도록 하는 온라인안전법이 도입됐다.

미국에선 지난 6월 비벡 머시 의무총감이 소셜미디어가 젊은층의 정신건강 위기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며 소셜미디어에 담배처럼 경고 문구를 표시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CNN 방송을 보면 호주 임상 심리학자 다니엘 아인슈타인은 소셜미디어가 대면 상호작용을 대체해 아이들이 소통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게 하기 때문에 금지 조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소셜미디어 내부에선 아이들의 작은 실수가 "갑자기 모두에게 전달된다"며 아이들에게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많은 소셜미디어 괴롭힘이 학교 폭력의 일환으로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학교가 사실상 이를 통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ABC에 따르면 호주 시드니대 임상심리학과장 캐롤라인 헌트는 통상 괴롭힘은 반복된 공격적 행동을 통해 성립하지만 온라인 괴롭힘은 "단 하나의 괴롭힘 게시물이 소셜미디어나 인터넷을 통해 또래 집단에 퍼짐으로써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퍼진 온라인 게시물은 오래 남아 대면 괴롭힘보다 "훨씬 더 지속적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다만 금지 조치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도움을 구하는 고립된 아이들을 더욱 고립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ABC에 따르면 호주 청소년 정신 건강 지원을 위한 비영리기구 헤드스페이스의 니콜 팔프리는 소셜미디어의 해악과 특히 외딴 지역 아이들을 위한 온라인을 통한 "도움 구하기" 및 소통의 이점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호주 청소년 괴롭힘 방지 단체 프로젝트 로킷의 공동 창립자 루시 토마스도 심리학자 및 부모들이 제기하는 소셜미디어의 해악이 "타당하다"면서도 "우리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청소년들의 권리를 되돌리고 그들을 더 고립되고 지원이 적은 곳으로 밀어낼 위험이 있다"고 걱정했다.

법안의 실행 방법도 분명치 않은 상태다. <로이터> 통신은 법안이 소셜미디어 기업에 16살 미만 이용자를 차단할 조치를 마련하라고 했지만 그 조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연령대의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신분 확인에 사용되는 운전면허증이나 신용카드도 소지하고 있지 않다. 신체 촬영 이미지를 통한 연령 추정, 이메일 주소를 다른 계정과 교차 확인하는 방법 등이 거론되지만 개인 정보 침해 우려도 함께 제기되는 중이다.

소셜미디어 업체들도 법안 통과에 반발했다. ABC에 따르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모회사 메타는 성명을 통해 "호주 의회가 결정한 법안을 존중한다"면서도 호주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소셜미디어가 미치는 영향 관련 "증거가 부족"한 상태로 법안이 "서둘러" 처리됐다고 주장했다. 메타는 소셜미디어 업체가 법안 시행을 위한 조치 마련을 요구 받는 상황에서 "운영 체제와 앱스토어 수준에서의 연령 확인"을 제안하기도 했다. 스냅챗의 모회사 스냅 대변인도 "호주의 모든 법과 규정을 준수한다"면서도 "우린 이 법안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해 왔다""이 법이 실제로 어떻게 이행될 것인지에 대한 수많은 답이 없는 질문이 있다"고 지적했다.

ABC는 제이슨 클레어 호주 교육장관이 법안 통과 뒤 현지 방송에 금지 조치가 "완벽할 순 없다""(주류 판매가 금지된) 18살 미만 청소년이 술에 접근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그는 "어떤 조치도 16살 미만 모든 아동이 틱톡에 접속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법안이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할 것이고 이는 부모들의 압박을 덜어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효진 기자 | 프레시안

 

쿠팡의 '혁신'이 망쳐놓은 세계를 보라

쿠팡 청문회, 노동자 쥐어짜는 기업에 대한 책임 확인해야

지난 9, 쿠팡 사망 노동자의 유가족들이 시작한 쿠팡 국회 청문회 국민동의청원이 5만 명을 달성했다. 끊이지 않는 쿠팡의 산재 사망 사고에도 사과는커녕 여전히 살인적인 노동 강도,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강요하고 있는 쿠팡의 문제를 제대로 알리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청문회 요구였다. 하지만 청원을 달성하기 불과 며칠 전 국감 현장에서 나타난 쿠팡의 자회사 쿠팡CLS 대표는 다회전 배송의 폐지도 야간 노동 규제에 관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쿠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 청문회가 던져야 하는 질문의 방향과 모색해야 할 변화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로켓배송'이 변화시키고 있는 일의 세계

쿠팡은 2010년에 설립된 전자상거래 플랫폼 기업이다. 10여 년 사이에 쿠팡은 전국 30여 개 지역에 100개에 달하는 물류센터를 보유하고, 국내 대기업 중 삼성전자 다음으로 고용 노동자 수가 많은 기업이 되었다. 쿠팡의 성공은 수백만 종에 달하는 품목을 주문한 당일 혹은 익일 내로 배송해주는 '로켓배송'으로 대표된다. 쿠팡은 이를 '물류 혁신'이라 말하며 인공지능을 활용한 상품 관리 시스템과 맞춤형 로봇 등의 첨단 자동화 기술과 전국 규모의 자체 물류망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하루 수백만 건의 주문이 아무리 늦어도 다음날 배송되는 이 '혁신'은 쿠팡의 급진적으로 유연한 고용구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쿠팡의 필수적이고 상시적인 노동을 담당하는 물류창고나 배송노동자들은 기간제, 하청노동, 일용직, 계약직, 무기계약직 등의 다양한 계약형태로 일하는 불안정노동자다. 4만여 명에 달하는 물류창고 노동자의 경우, 절반이 일용직이고, 일용직과 계약직을 합친 비중은 90%에 달한다. 이것이 가능한 데는 물류 공급망의 모든 공정을 쪼개고 단순화하여 누구나 알고리즘에 기반한 '노동의 일용직화'를 구축한 덕분이다. 매일 같이 24시간 쉬지 않고 쿠팡물류센터는 수만 명의 노동자의 노동으로 돌아가지만 동시에 개별 노동자에겐 오늘은 일해도 내일은 일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래서 미래를 그릴 수 없는 불안정한 일자리 환경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 노동법을 회피하기 위한 풀필먼트나 CLS같은 자회사 설립과 개인사업자로 위장한 간접고용 방식의 꼼수까지 더해진 결과가 퇴사율 추정치 76%(2021년 기준) 달하는 결과다. 쿠팡은 기존의 근로계약관계가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회사가 보장할 것이란 노동자의 기대를 꺾고, 고용주의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는 노동의 '혁신'을 이룬 것이다.

쿠팡이 고용의 책임은 회피하면서도 생계가 달린 불안정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방식은 성과지표다. 노동의 불안정성을 강도 높은 노동을 강제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한다. 단적으로 새벽배송 기한 아침 7시는 밤을 새우는 배송기사에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철칙이다. 이를 수행하지 못해 쌓이는 감점이 곧 배당받은 지역의 회수로 연결될 수 있으니,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 고용관계가 불안할수록 다치거나 아파도 노동해야 하는 구조는 강화된다. 배송기사만이 아니다 물류센터 노동자들 역시 일용직부터 계약직에 이르기까지 공개되지 않는 평가 지표 속에서 계약의 연장 유무가 좌우된다. 여기에 쿠팡이 관리한다는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강도 높은 노동을 강제적으로 수용하도록 만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불안정한 고용구조 안에서 위험한 노동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힘을 모아내는 일은 점점 요원하게 만들고 있다. 쿠팡이 만든 혁신은 노동자의 권리는 보장하지 않으면서 노동력은 강도 높게 쥐어짜면서 만들어낸 결과다.

쿠팡이 무너뜨리고 있는 세계

쿠팡이 이렇게 노동자를 쥐어짜면서 기업을 경영해 온 이유는 결국 쿠팡이 이윤을 내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공격적 투자로 쿠팡은 수년간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쿠팡은 이를 "계획된 적자"라고 부르며 전자상거래(이커머스)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에 사활을 걸어왔다. 전국적으로 물류센터를 건설하여 그 어떤 경쟁사보다 빠른 배송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구매 장벽을 낮추기 위해 결제 시스템을 간소화해왔다. 누구든 한번 써보게 유인책을 만들고, 쿠팡을 통한 구매가 빠르고 편리하다는 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적자를 감수하는 투자는 물론 노동자를 쥐어짜는 로켓배송을 중심으로 이커머스 시장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쿠팡 앱을 사용하는 사용자는 3000만 명을 넘어섰고, 유로 멤버십 가입자는 21900만 명에서 올해 1400만 명이 되었다. 쿠팡은 지금도 '전국 인구 100% 무료 로켓배송'을 목표로 투자계획을 내놓고 있다.

문제는 쿠팡이 이커머스 업계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질수록 쿠팡을 경유해야만 상품을 사고파는 거래행위가 원활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이야기하면 상품의 판매자도 소비자도 로켓배송의 사용을 강요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쿠팡은 로켓상품이 잘 팔리도록 만들기 위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납품 업체들에 납품가를 낮추라는 갑질을 하기도 하고, 로켓 상품 판매 랭킹 순위를 조작하는 불공정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검색순위 조작으로 공정위 처벌까지 받았지만 이미 독점적 지위를 가진 쿠팡은 이런 식의 처분이라면 더이상 로켓배송 서비스를 이어갈 수 없다는 배짱을 부린다. 수많은 판매자는 울며 겨자먹기라도 쿠팡의 로켓배송 상품 리스트에 본인들의 상품을 등록하기 위해 쿠팡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처럼 소비자 역시 내가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쿠팡을 통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도록 만든다. 그리고 쿠팡을 통한 구매 행위는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로켓 배송서비스의 이용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지만 가능한 것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온라인 상거래는 애초에 배송을 전제하는 조건에서 쿠팡의 로켓배송만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켓배송 시스템은 기존 배송 방식과 달리 쿠팡이 정한 로켓배송이 가능한 금액에 맞추도록 하는 낭비적인 소비를 수반하게 만든다. 로켓배송 가능 물품으로 등록된 물건은 일정 금액이 도달해야 배송이 시작되기 때문에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까지 장바구니에 채워 넣도록 만들며 소비를 부추긴다. 이 방식이 싫으면 정기 결제 유료 서비스를 이용하길 권하며 천원짜리 상품도 추가 배송료 없이 로켓으로 배송해준다고 홍보한다. 고객의 편의를 제공하듯 말하지만,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하는 일이 유료 서비스의 소위 '본전을 찾는 일'이 되면서 구매를 부추기기는 매한가지다. 이런 낭비적 소비는 불필요한 생산, 포장 쓰레기 양산, 끊이지 않는 유통-배송과정으로 이어져 기후위기 심화를 앞당기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으며 온라인 구매행위가 쿠팡의 노동자 쥐어짜기에 연루될 수밖에 없도록 과정이다. 하지만 이는 쿠팡의 관심사가 아니다. 쿠팡의 성공을 물류의 혁신, 한국의 아마존이 성공한 사례로만 둘 수 없는 이유다.

쿠팡 청문회에 거는 기대

쿠팡의 성공은 온라인 유통 방식의 표준을 바꾸며 쿠팡식 빠른 배송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두의 구매행위가 이런 배송 시스템에 가담하도록 만들고 있다. 쿠팡의 방식이 쿠팡만의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전자상거래 업계는 물론 오프라인 유통업계까지 물류창고를 세우고, 불안정 노동을 수반하는 배송 시스템을 갖추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더는 빠른 배송으로 노동자를 쥐어짜면서 동시에 더 많은 쓰레기를 양산하는 배송 방식을 이용하고 싶지 않더라도 유사한 방식의 유통업 경쟁이 이루어지는 세계 속에서 이는 쿠팡이라는 회사만 피한다고 가능하지 않은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던 쿠팡의 CEO의 말이 현실화할수록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점차 황폐해질 뿐이다.

쿠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점적 지위를 활용해 기존의 제도를 비틀며 이윤을 획득하고 노동자를 쥐어짜는 이커머스 플랫폼 기업에 어떻게 다시 합당한 책임을 확인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쿠팡 청문회라는 자리는 그저 쿠팡의 고위급 인사 몇몇을 질책하고 추궁하고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독점적 지위를 남용하는 플랫폼 기업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고, 쿠팡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 쿠팡의 문제를 그저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 문제가 아닌,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모양을 만들어 나가는 계기이자 과정으로 살펴야 한다. 쿠팡 청문회는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가원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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