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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3.8.1~31 이명박 박근혜도 이렇지는 않았다

by 이성근 2023. 9. 1.

깨어진 균형의 한국사회 주간경향 : 2023.08.01.

팬데믹의 상처가 미래를 바꾸려면 한겨레 : 2023.08.01.

특권층 카르텔의 커밍아웃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01

교권을 넘어 정치적 시민권으로 경향 : 2023.08.02

책의 죽음을 재촉하는 나라 한겨레 : 2023.08.02.

넘치는 식탁, 위기의 식량 한겨레 : 2023.08.02.

기후급변에서 교실현장까지붕괴하는 한국사회, K-민주주의도 공범 | 프레시안 2023.08.02.

지구의 뜨거운 경고, 기본소득 정치가 응답해야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02.

돌아오는 농촌, 돌아버릴 농촌 경향 : 2023.08.03.

학습된 무기력을 떨쳐버리고 경향 2023.08.04.

노인이 부끄럽다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05.

사모펀드에 발목잡힌 녹색전환 경향 : 2023.08.06.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회 경향 : 2023.08.06.

 

기재부, 이러다 우리 다 죽어! 경향 : 2023.08.13.

묻지마 범죄'의 원인과 '쾌지나 칭칭 나네' 시민언론 민들레 21.0.13

윤석열 정권, 무능보다 더 무서운 퇴행 경향 : 2023.08.14.

공룡조직 노인회를 향한 불편한 시선 한국 : 2023.08.14.

박정훈 대령은 10년 전 검사 윤석열이다 한겨레 : 2023.08.14.

윤석열의 만용, 역사까지 날조 미디어오늘 2023.08.14.

반복되는 건설 붕괴현장, 무너진 것은 짓다만 건물뿐인가? 프레시안 2023.08.15.

맨주먹 100억 부동산 자산가의 욕망이 가족을 망쳤다 | 프레시안 2023.06.09.

현타’ - 눈떠보니 후진국 6 한겨레 : 2023.08.15

윤석열 정부에 법치주의를 묻는다 미디어오늘 2023.08.15

사람 대신 돈·권력에 눈먼 무속 정치의 끝은 한겨레 2023.08.16.

윤송합니다 한겨레 2023.08.17

스톱! 무너지는 얼음의 강 한국 2023.08.17.

쉽게 사고 버리는 세상, 수리하죠 경향 2023.08.17.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자 경향 2023.08.17.

아직도 갈 길 먼 대기업 ESG 보고서 경향 2023.08.18

한일관계의 미래와 역사성찰의 전제 조건 헌겨레 2023.08.18

세계 속의 한류와 삼류의 한국 정치 경향 : 2023.08.18.

치안 불안은 어디서 온 것일까 : 2023.08.18.

생활비 위기, 사회적 경제로 구조적 경제 혁신이 필요하다 | 프레시안 2023.08.19.

멸종 위기, 멈출 줄 알아야 비로소 생존한다 | 프레시안 2023.08.19.

취약한 대통령의 위태로운 질주’ | 한겨레 2023.08.20.

전체주의 싫어하는 대통령님께 | 경향 2023.08.20.

교육운동, ‘교권을 넘어서자 | 경향 2023.08.20.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 한겨레 2023.08.21.

지옥, 도덕이 무너진 사회 | 경향 2023.08.21.

지방의 실패는 누가 책임지나 | 경향 2023.08.21.

숙의 민주주의와 선거제 개혁| 경향 2023.08.21.

이해 못할 SPCESG 등급 | 경향 2023.08.21.

하와이 산불, 식민주의와 물의 문제 | 경향 2023.08.21.

이승만기념관 돕겠다는 이종찬 광복회장, 진심인가? | 한겨레 2023.08.22.

택배상자 손잡이 구멍과 인공지능 인권 원칙의 상관관계 경향 : 2020.10.29.

이용마의 죽음과 이동관의 부활 한겨레 2023-08-22

필리핀 이모님들의 불안한 미래 한겨레 2023-08-22

가난한 개미, 부자 베짱이 경향 2023-08-23

이럴 줄 몰랐다 경향 2023-08-23

‘2023 한국언론 대학살과 그 부역자들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23

일본 오염수를 대하는 한·중의 아찔한 차이 한겨레 2023-08-24

각자도생과 모럴 아포리아(Moral Aporia) 사회 민중의 소리 2023-08-23

디케가 울고 있다 한겨레 2010-04-01

'공산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용산전체주의 세력'에 관한 고찰 | 프레시안 2023.08.26.

캠프 데이비드가 부를 후쿠시마 핵오염수 재앙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26

우리가 찌르고 우리가 피 흘리다 | 한겨레 2023.08.27.

윤석열 정권의 초현실적 무능 | 한겨레 2023.08.27.

벌거벗은 권력 앞의 호모 사케르 시민언론 민들레 23.08.27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이해관계 | 경향 2023.08.27.

21세기 한국에 공산주의유령이 떠돈다 | 한겨레 2023.08.28.

윤석열의 일본관과 친일 윤똑똑이들 미디어오늘 2023.08.28.

과학, 의심스러울 땐 피해자 편에 서길 경향 : 2023.08.28

야당의 비판이 힘을 잃는 이유 경향 : 2023.08.28.

시진핑의 길따라가는 윤석열 대통령 한겨레 : 2023.08.29.

한동훈 장관의 이민철학이 우려스러운 이유 한겨레 : 2023.08.29.

대통령적 제왕의 시대착오적 언어 한겨레 : 2023.08.29.

공멸의 줄타기, 지대추구 국민 : 2023-08-29

도시라는 회집체 경향 : 2023.08.30.

그건 정치가 아니다 경향 : 2023.08.30.

선거는 괴벨스를 원한다 경향 : 2023.08.30.

이명박 박근혜도 이렇지는 않았다 한겨레 : 2023.08.30.

똘이 장군 나가신다. 홍범도는 길을 비켜라 프레시안 : 2023.08.30.

이 모든 친일 소동의 끝은 어디인가 경향 : 2023.08.31.

클래머스강에서 사라진 것은 경향 : 2023.08.31.

문재인 정부, 세금으로 부동산 잡으려다 실패했다 | 프레시안 2023.08.31.

'비례대표 확대'에 스스로 재 뿌리는 비례 국회의원들 | 프레시안 2023.08.31.

 

깨어진 균형의 한국사회

 

주거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822일 서울시의회 앞 광화문시민분향소에서 폭우참사 희생자 추모 기자회견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사회가 불평등해지면 사회갈등이 증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회 경제성장의 속도도 늦어진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이후 사람들이 공유하게 된 신지식이다. 여야의 보수정치인과 경제관료들 그리고 많은 이의 두뇌 속에는 그러나 경제성장과 분배가 서로 상충되는 개념인 것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한 정도에 대한 국가 비교에서 한국은 미국과 함께 최고 상층부에 속한다. 우리 사회의 심한 불평등은 어디에서 연유된 걸까.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가난한 나라에서 자산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던 토지가 사람들에게 분배됐으니 불평등의 기원을 그 시기나 그 이전에서 찾기는 어렵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빠른 성장을 위해 자본축적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불평등이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과도한 수도권 집중과 사교육 투자

한국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경제 수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경제발전과 함께 자본축적도 이뤘다. 수출을 통한 경상수지 흑자가 누적돼 순자본수출국에 속한 지도 오래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2년 말 대외금융자산은 21271억달러, 대외금융부채는 13805억달러로 해외에 투자된 국내자본이 국내에 투자된 해외자본을 능가하는 수준이 7466억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규모의 자본을 해외에 순수출하는 나라라면 자본축적이 더 이상 경제발전의 관건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자본이 희소한 생산요소가 아닌 이상 그에 대한 가격인 자본재 비용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부족하고 더 희소한 자원인 노동력에 대한 대가는 반대로 높아지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사회 불평등이 완만하게나마 해소돼 가는 것이 경제 이치로도 자연스럽다. 꽤 오래된 자본수출국이므로 지나간 시기 자본축적의 필요성에 의해 방치됐던 불평등은 이미 어느 정도 해소됐어야 한다. 왜 그렇지 못했을까. 경제의 불평등을 줄여주는 움직임이 한국의 경제체계 내에서는 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한번 형성된 세력은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습성이 있다. 초기에 형성된 자본에 대한 정부의 엄청난 지원과 노동자들의 희생은 한국에 공고한 재벌세력을 만들었다. 이들은 시간이 흐르며 선거에 의해 교체되는 정치권력을 자연스럽게 능가하기 시작했다. 경제권력은 기존의 발전방식과 성장으로부터의 독점적 혜택을 유지하고자 했고, 경제정책을 움직이는 정치권력은 이에 봉사하는 위치로 전락했다. 언론과 학계조차 기생세력화됐다. 재벌에게만 유리한 경제정책을 투입하고, 기업과 자본계층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조세와 재정정책을 채택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유지되는 불평등은 많은 이들의 고통, 경제발전에서 중하위계층의 차별과 제외, 전체 경제에는 성장의 저해를 의미한다.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다. 이를 위해선 긴 여정의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하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열정과 집단지성을 필요로 한다.

 

한국사회에는 불평등 구조가 공고해지면서 병행해 고착화한 두 가지 사회현상이 있다. 과다한 수도권 집중과 병적인 사교육 투자가 그것이다. 두 가지 사회현상과 관련해 개인들이 처한 상황과 이해관계도 상이하기에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좀처럼 한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해결책에 대한 소통을 어렵게 하는 배경이다. 한국사회의 깨져버린 균형이다.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기이한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국토 대부분이 저발전 단계에 방치된 상태에서 인구의 역동적인 절반이 좁은 수도권 영역에서 주거와 생업의 고비용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국민은 또한 교통혼잡비용과 제한적 여가생활의 고통을 감내하며 어렵게 지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과 정체가 오래 유지된다는 건 거대한 비용을 초래하므로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인구 및 경제력의 수도권 집중은 국민의 자산(부동산) 쏠림현상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비생산적인 부동산투자로의 자원 쏠림은 효율성을 심하게 훼손한다. 결과적으로 전체 경제의 성장과 개인의 평균적인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최근 국가전략산업이 강조되자 국가가 용인 반도체단지 조성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다. 이미 국제경쟁력을 갖췄고, 수십조원의 현금성 자산을 가진 업계에 국가가 나서서 더 특혜를 주겠다는 것도 논리가 없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반도체에 대한 지원이 왜 꼭 수도권이어야 하는가 말이다. 업계에서 인력수급의 문제, 외국인 투자의 문제 등을 거론하겠지만 정부는 파주, 마곡단지 등에서도 (국가균형발전 측면에서) 이미 많은 후퇴를 했다. 용인까지도 반도체산업에 필요한 팹리스 인력이 가기는 어렵다고 혹자는 말한다. 무엇이 과연 더 중요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반도체단지 조성도 중요한 경제적 목표이겠으나, 국토의 장기적 균형발전이 더 중요하다. 이를 후순위로 두는 건 사안의 경중에 대한 심각한 판단의 오류에 해당한다.

 

개인 삶을 궁핍하게 하는 것

과다한 사교육비 지출 문제도 심각하다. 부모들의 소득에서 자녀 사교육비로 나가는 비중이 매우 높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저출생의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노후소득보장을 어렵게 해 부동산투자에 목을 매달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문제는 이 나라에서 행해지는 사교육이 개인의 인적자원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개선한다는 측면에서 투자효율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다. 사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지 못하는 저소득계층의 자녀들을 입시에서 배제하는 단기적인 목적에서 효율성이 존재할 뿐이다.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중에서 서울 강남구에 소재한 고교 출신 비중이 현저하게 높아졌다. 이는 불평등한 방향으로의 사회변화가 오히려 가속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특정 대학에서 수학한 연고를 가진 집단이 끌어주기를 통해 사회적 세력을 더 공고히 한다. 그만큼 학력 사회의 병폐는 뿌리가 깊다. 대학입시제도는 2~3년을 가지 못하고 바뀌며, 제도 시행의 기술적인 실수가 정권에 대한 민심의 평가까지 큰 폭으로 좌우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수도권 집중과 과다한 사교육비 지출의 근저에는 개인들의 경쟁심리와 욕구도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개인들의 선택은 대체로 방어적으로 이뤄진다. 수도권에 거주하거나 투자하지 않으면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뒤처지게 된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실제로 과거 수십 년 한국사회의 변화가 충분한 경험적 근거를 제공한 상황이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면 취업 등에서 불리하다는 점도 현실이다. 이에 따른 방어기제로 발휘되는 개인의 선택이 불균형을 더 심화시키면서 다시 부메랑이 돼 개인들을 삶을 어렵고 궁핍하게 만들고 있다. 속히 빠져나가야 하는 국가 사회적 함정이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휴가철엔 책을 읽자. 한동안 화제였던 어느 칼럼에선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하여책을 읽어야 한단다. 중년으로 불리기까지 아직 몇년은 남았지만, 그때 가서 시작하면 이미 늦은 거란 말도 있음을 기억하자. 평소엔 바빠서 짬이 잘 안 나니 휴가 기간에라도 책을 읽기로 한다.

 

그렇게 집어 든 책이 우리의 상처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김승섭, 김사강, 김새롬, 김지환, 김희진, 변재원 여섯명의 눈 밝은 연구자들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가장 취약했던 분야를 조명했다. 이들이 주목한 대상은 이주민,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아동, 여성이다.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대응은 평균적으로 훌륭했지만, 그 이면의 고통과 고립, 차별과 배제는 충분히 얘기되지 못했다.

 

이 책은 논문, 보고서, 신문 기사,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19 유행 중 취약계층의 경험을 갈무리했다. 예컨대 이주민 노동자는 정보와 지원에서 배제된 채 감염과 동시에 처벌과 추방을 두려워해야 했다. 발달장애인은 생활양식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기존에 누리던 일상의 루틴을 훼손당했다. 잦은 격리는 장애인 자신과 가족들에게 오랜 기간 트라우마로 남았다. 여성은 사회의 돌봄 대부분을 담당하며 감염 위험 속에 과중한 업무를 수행해야 했고, 동시에 가정의 돌봄 대부분을 담당하며 실직과 경력 단절을 겪어야 했다.

 

책의 3장에 따르면 2020년 한국 노동자의 연간 병결 일수는 1.4일로, 스페인(9.7)과 핀란드(9.1)에 비해 한참 적다. 한국인들이 유독 튼튼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10만명당 산재사망률은 스페인(2.1), 핀란드(0.7)보다 한국(4.7)이 도리어 더 많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죽기 전까진 쉬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그나마 있는 아프면 쉴 권리조차 불균형하게 적용된다. 유급병가를 주는 사업장은 전체 21%에 불과했다. 대기업보단 중소기업이, 원청보단 하청업체가, 정규직보단 비정규직 노동자가 더 못 쉬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조적 불평등은 단시간에 바뀌지 않는다. 코로나19 관련 각종 의무와 지원이 사라지는 가운데 유행이 계속되고 있다. 감염의 위험이 예전보다 감소했고, 언제까지 대규모 재정을 들여 긴급대응을 유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준비도 안 된 채 모든 지원이 사라지면 취약계층의 피해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유행이 확산하면서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 아파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란 우려는 기우에 불과할까.

 

더구나 코로나19 유행이 끝이 아니다. 팬데믹보다 더 오래, 더 깊은 상처를 남길 또 다른 재난은 바로 기후위기다. 7월 지구의 평균기온은 역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오며 전 세계적으로 막심한 피해를 주고 있다. 이번에도 재난의 상흔은 아래쪽에 쌓인다. 극한기후는 비닐하우스의 이주 노동자와, 뜨거운 불 앞의 급식 노동자와, 보호막 없이 뙤약볕을 누비는 배달 기사들을 직격했다. 고용이 불안정한 이들에게 더워도 아파도 작업을 중지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휴가철에 나 같은 사람은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하지만, 누군가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한다.

 

앞으로의 과제는 명확하다. 다가올 재난에 대비한 사회안전망 확충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져 있던 북유럽 국가에선 추가로 재정을 많이 쓰지 않고도 팬데믹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고, 그 덕에 물가 상승, 국가부채 증가 등의 부작용도 비켜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까지 유급병가를 쓸 수 있게 제도를 정비하고, 시범 적용 중인 상병수당 제도를 조속히 안착시키며, 실직 뒤 재취업이 용이하도록 고용보험 적용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아프면 쉴 수 있도록, 그리고 가족이 아플 때 돌봐줄 수 있도록 돌봄지원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팬데믹의 상처가 미래를 더 낫게바꾸려면,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복기하고 그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와 인식을 고쳐나가야 한다. 마침 실업급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는데, 부디 전대미문의 위기 중 상처 입은 사람들을 보듬는 방식으로 제도의 개선이 이뤄지길 바란다. 휴가철에 책을 읽든, 명품 선글라스를 끼고 해외여행을 가든, 한 인간으로서 온전해지는 삶의 양식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는 모두에게 고루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공동체의 역할이 작지 않다.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한겨레 : 2023.08.01.

 

특권층 카르텔의 커밍아웃

한국은행의 2분기 성장률(속보치)에서 우리 사회 특권층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속살을 보여주었다. 성장률은 소비와 투자 그리고 (수출과 수입으로 구성하는) 무역의 세 부문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다시 소비와 투자는 민간 부문과 정부 부문으로 나누어진다. 윤석열 정권 1년 만의 경제 성적표는 한국은행이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이래 지난 60년 넘는 기간 중 최악이었다. 올해 2분기는 소비와 투자와 무역, 그리고 이를 다시 민간과 정부 부문으로 살펴볼 때 모든 항목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유일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올 마이너스(-) 기록한 2분기 성장률 구성

아래 표에서 보듯이 한국 경제의 역사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는 70년대 초 1차 석유파동 때, 70년대 말 2차 석유파동으로 시작해 박정희 사망과 80년대 초 이른바 대침체로 이어진 시기, 외환위기 때, 2000년 초 닷컴버블 붕괴 때, 노무현 정부 초기의 카드사태 때, 2008년 금융위기 때,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때 등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어려운 시기에도 소비와 투자와 수출입, 그리고 민간 부문과 정부 부문 모두가 동시에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한 적은 없었다.

 

민간과 정부 부문을 합쳐 소비와 투자 그리고 수출입 거의 대부분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금융위기가 발발해 세계 금융시스템이 붕괴하고 그 여파로 대공황 이후 세계가 최대 경기침체를 겪었던 20084분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시에도 정부 소비(+0.4%p)와 정부 투자(+0.1%p)로 정부가 성장률을 0.5%p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고, 그 결과 민간 소비와 투자 그리고 수출입의 감소에 따른 경제 붕괴를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정부가 성장률을 0.5%p나 끌어내렸다. 민간 부문이 모두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치는 가운데 정부가 성장률 후퇴를 막기보다는 오히려 앞장서 끌어내린 것이다.

 

윤석열 정부 1년을 맞는 20232분기, 소비·투자·수출입 등 모든 분야의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어려운 시기에도 이처럼 모든 부분의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은 없었다. 2023.7.31. 그래픽 민들레

 

모피아 나라 만들기가 초래한 참담한 인재(人災)

많은 사람들이 이 결과에 의아해할 것이다. 경제가 나빠지면 정부와 여당에 불리할 텐데 왜 정부가 성장률 추락을 자초할까? 더구나 총선을 앞에 둔 상황이 아닌가? 윤석열 정권이 아무리 최악이라도 성장률을 고의로 끌어내릴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이 결과는 (우리 사회 특권층 카르텔의 핵심 고리를 차지하는) 모피아의 탐욕과 (과학이 아닌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재정 운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인재(人災)’ 자체였다. IMFOECD 등이 지난 1년간 한국만유일하게 성장률을 계속 하향 조정해왔다는 것은 국제 사회가 한국 경제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한국 경제의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내 부패 언론이 한국 경제의 심각성을 외면하다 보니 우리 국민만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IMFOECD는 지난 1년간 한국만유일하게 성장률을 계속 하향 조정해왔다. 2023.7.31. 그래픽 민들레

 

결론부터 말해 한국 경제사에서 전무후무한 올 2분기 경제 성적표는 (우리 경제를 미국 안보의 하위개념으로 편입한) 윤석열 정권의 시대착오적 외교와 국가 경영에서 비롯한 수출 파탄 및 산업 위기 등과 더불어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모피아 나라 만들기의 결과로 빚어진 재정 파탄에서 비롯한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했듯이 추경호는 정부 수입 급감을 대규모 정부 지출 축소로 대응하였다. 그 결과 (현재 집계된) 5월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교해 정부의 지출을 55.1조 원이나 줄였다.(6월치는 8월 중순께 집계 예정) 올해 1~3월 세 달간 지난해와 비교해 16.7조 원을 줄였던 정부 지출은 2분기 기간인 4~5월에는 두 달간에만 38.4조 원을 줄였다. 4~5월 지출 축소가 1분기 지출 축소의 2.3배로 급증한 것이다.

 

따라서 19.2조 원은 1분기 명목 GDP(547.2)7%가 넘는 규모라는 점에서 2분기 성장률에서 정부 지출이 0.5%p를 끌어내린 효과를 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건전 재정을 정부 지출의 최소화와 동의어로 규정하고 정부 재정 운용의 법제화를 통해 공공 금융’(재정)의 역할에 족쇄를 채우기 위한 모피아의 재정준칙 법제화욕심이 경제 운용에 족쇄가 된 것이다. 국가 경제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다준 공공 금융의 축소는 산업경쟁력 약화부터 민생경제의 파탄으로까지 이어진다. 일례로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의 대규모 삭감부터 (의료기관부터 요양원 등 취약시설까지) 코로나19 검사비 지원 축소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5월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교해 정부의 지출을 55.1조 원이나 줄였다. 그중 2분기 기간인 4~5월에는 두 달간에만 38.4조 원을 줄였다. 4~5월 지출 축소가 1분기 지출 축소의 2.3배로 급증한 것이다. 2023.7.31. 그래픽 민들레

 

막대한 비용 치르고 드러낸 특권층의 실체

이 과정에서 일반 국민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한국 사회에서 (부패언론에 의해 은폐되었던) 특권층의 실체를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특권층 카르텔은 일반 국민보다 특권을 누리고 싶어 하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후손까지 그 특권을 세습하는, 이른바 사실상 신분사회의 복원을 꿈꾼다. 특권층의 일반적 속성은 공적 자원의 사유화로 사적 축재를 추구하는 집단이다. 양평 고속도로 의혹을 통해 많은 국민은 권력 집단이 국가 권력을 어떻게 사적 축재에 이용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2분기 성장률의 내용을 통해 모피아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국가나 민생경제조차 희생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권층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이들에게 정부의 존재 이유는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그것과 다른 것이다. 씁쓸하지만 윤석열 정권에서 특권층의 커밍아웃은 이처럼 커다란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결과물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특권층은 전근대적 사고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반사회적 집단이다. 한국 사회 특권층이 갖는 또 하나의 주요 속성이 매판성이다. 권력 장악과 사적 이익을 위해서는 국가 이익조차 내팽개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이 속성은 한국의 역사성에서 비롯한다.

 

모피아의 또 하나 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한국은행이다. 지난주 27일 아침에는 추경호가 주관한 비상거시금융경제회의가 있었다. 회의 참석 후 한국은행으로 돌아가 금통위를 개최한 이창용은 지난해 11월에 개편한 대출제도를 또다시 개편하였다. 지난해 개편은 김진태 사태로 자금난을 겪었던 금융기관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담보물을 확대하였다면, 이번 개편에서는 저축은행이나 새마을금고 등의 중앙회에도 자금지원을 하기 위해 (영리기업에 대한 대출 조건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는) ‘한은법 80에 대한 사실상의 확대 해석을 도모하고 있다.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중대한 애로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로 제한하고 있는 80조는 사실상 (금융시스템 전체가 부실화될 위험을 의미하는) ‘시스템 리스크상황에 가깝다. 예를 들어, 글로벌 금융위기나 팬데믹 등 금융 생태계나 경제 생태계가 와해할 수 있는 상황에 가깝다. 지금 상황이 이런 상황이란 말인가?

 

한국은행은 이번 대출제도 개편의 배경으로 3월에 있었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를 거론했지만, SVB 사태 이후 연준은 기존 적격 담보물을 기준으로가치 평가 방식과 대출 기간 연장 정도를 도입하여 예금인출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상업은행에 대한 자금을 지원했을 뿐이다. ‘시스템 리스크와 관련이 없는 부실 지역은행은 통폐합 방식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PF대출 부실 등 과도한 탐욕을 추구하다 만들어진 일부비은행 금융기관의 부실을 왜 한국은행이 지원하는가? 이들이 고위험 사업을 통해 만든 수익을 국민과 공유한 적이 있는가? 왜 한국은행이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는 비은행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스스로 부추기는가?

 

모피아의 또 다른 한 축, 한국은행의 커밍아웃

사실 한국은행은 탐욕을 추구하다 만든 부실을 사회에 전가하려는 금융기관보다, 은행시스템에서 배제되어 국민의 금융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서민을 챙기는 것이 할 일이다. 최대한 양보하더라도 일부 비은행 금융기관들의 부실이 (한은법 80조를 적용할) ‘시스템 리스크라도 된다는 말인가? 적어도 한국은행이 개입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금융시스템이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연준도 하는데 한국은행이 뭐가 문제냐는 말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연준이 전방위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지원한 것은 금융위기 때였다. 한국의 상황이 금융위기 때와 비교될 수 있는 상황이란 말인가? 게다가 금융위기 때 연준의 개입 방식은 월가나 전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한 것이었다. 실제로 금융위기 때 연준이 투입한 자금 중 경기 부양을 위한 자금은 1.4%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부실 채권 매입에 투입되었다. 그 결과가 월가를 점령하라!’는 반발을 초래한 것 아닌가? 1989~2021년까지 영란은행에서 일했던 앤드류 할데인(Andrew Haldane)“‘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이 금융 부문을 비판한 것은 정당했고, 궁극적으로 은행가들과 정치인들이 보다 도적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했다고 평가한 배경이 아닌가? 한국은행의 금통위원 중에는 왜 할데인 같은 사고를 가진 이가 없는가?

 

무엇보다 탐욕 추구로 부실화된 금융기관에 대한 자금지원으로 이창용과 금통위가 말하는 완만한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은 사실상 물 건너간 셈이 되었다. 사실 한은, 금통위에게 디레버리지나 부실 축소 등은 예의상(?) 발언일 뿐 실제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말과 행동의 일관성이 없으면 신뢰를 잃고, 심지어 사적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모피아 수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시중 소문이 찌라시 수준의 얘기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다. 사실, 정치적 셈법으로 내린 결정이라면 너무 '쪽팔리지' 않는가?

 

대한민국 경쟁력 평가에서 다른 부문에 비해 금융 부문이 대한민국 경제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후진국 수준의 점수를 받는 이유가 금통위의 무책임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직시하기를 바란다. 평소에 정치가 금융을 후진적으로 만들고 있다며 성토하던 당신들의 무책임한 선택이 (당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대한민국 정치의 후진성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

최배근 건국대 교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01

 

 

교권을 넘어 정치적 시민권으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교사들이 지난 729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7·29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집회에서 안전한 교육환경 조성 등을 요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교육 지옥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참혹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살인적인 불볕더위 속에 모인 수만명 교사들의 절박한 심정을 알겠다. 23, 젊은 교사의 죽음 앞에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어떻게 학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사건을 계기로 교육이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교권 붕괴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붕괴의 실상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교사의 99%가 교권 침해를 경험했다고 하고, 93%가 학생 지도 중에 학대 신고를 두려워한다고 한다. 교사의 87%가 최근 1년간 사직이나 이직을 고민했다고 하고, 27%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 교사들은 학부모 갑질과 악성 민원, 아동학대법 신고를 두려워하며 전시 간호사 수준의 스트레스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교사의 자살이 보여주는 것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교권의 붕괴만도 아니다. 그것은 곧 교육의 죽음이다. 한국 교육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부고다.

 

교사의 자살이 드러낸 것은 교권의 붕괴를 넘어 교육의 총체적 난맥상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교사에 대한 보호 강화라는 소극적 정책이나, 학생인권조례 폐지 따위의 퇴행적 조치로 해결될 수 없다. 이제 사태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 교권 붕괴의 뿌리를 더듬어야 한다.

교권이 바닥에 떨어진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교사들이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없고,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으며, 피선거권도 없는 정치적 금치산자라는 사실이것이 핵심 문제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민주주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등불이자,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한국의 교사만은 민주주의의 변방에서 여전히 정치적 천민상태에 놓여 있다. 시민의 가장 중요한 기본권인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무권리 상태는 사회적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교육적 무력감으로 전이된다. 사실 교권의 붕괴는 지난 수십년간 교육계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무력감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대다수 국가에서 교사들은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서 막강한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국회 내 영향력이 상당하다. 국회의원 중 교사 비중이 핀란드의 경우 20%나 된다. 독일도 15%이며 오이시디 평균은 10% 정도이다. 대체로 국가의 선진성과 교사의 대표성은 비례한다. 선진국일수록 의회에 많은 교사가 앉아 있는 것이다. 한국의 의회에 교사가 한 명도 없다는 과거의 교사가 2명 있을 뿐이다사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왜 선진국에서는 교사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대규모의 지식인 집단이고, 그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윤리성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가치와 의미, 윤리와 도덕이 실종된 시대에 교사 집단의 지성과 윤리성은 더욱 크게 요구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교사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초라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박정희 군사정권 때문이다. 1963년 박정희가 박탈해버린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이승만 독재의 정치적 동원으로부터 교사(와 공무원)를 보호하기 위해 1960년 민주당 정부가 만든 정치적 중립 의무조항을 박정희는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 박탈의 빌미로 악용한 것이다. ‘중립 의무를 내세워 참여 권리를 빼앗았다. 이후 한국의 교사들은 무려 60년 동안 정치적 중립 의무의 덫에 걸려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세계가 경탄하는 케이(K)민주주의의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서성대는 마지막 정치 천민이 되었다.

 

교사는 국가의 보호 대상이 아니고, 정치적 금치산자도 아니다. 교사는 교육의 주체로서 국가 발전을 견인하고 사회 진보를 주도하는 지식인이다. 교사는 또한 교육개혁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제 정치적 중립 의무라는 낡은 굴레를 떨치고 나와, 성숙한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의무를 자각해야 한다. 요컨대, 교권 회복을 넘어 정치적 시민권을 복원해야 한다.

 

교사의 교권 회복이 교육의 무너진 육신을 추스르는 것이라면, 교사의 시민권 복원은 교육의 빼앗긴 영혼을 되찾는 것이다. 교권 회복을 넘어 시민권 회복을 이룸으로써 죽은 교육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경향 : 2023.08.02

 

 

책의 죽음을 재촉하는 나라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한 출판사 대표의 글을 읽었다. 이름이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저의 직업은 출판제조업입니다. 고백하자면 실패한 제조업자입니다. 쌓여 있는 것은 파주 도서 물류회사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책이 전부입니다. 출판사 이름을 논형이라 명명하고 300여종을 펴냈습니다. 이름값에도 미치지 못한 점이 많습니다만 일독으로 응원을 청합니다. 추신: 페친님의 너른 이해를 바랍니다.”

 

십수년차 실력 있는 편집자로 출판동네에 알려졌던 소재두씨는 2003논리의 저울’, 즉 균형 잡힌 문장을 뜻하는 이름을 붙인 출판사를 냈다. ‘건건록등 깊이 있는 일본 역사 관련 분야나 한-일 관계 서적을 다수 출간하며 작지만 전문성 있는 학술 출판사로 알려져왔다.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20년을 버텨왔을 그의 쓸쓸한 글이 요즘 출판계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달 24케이-, 케이-출판 재도약 실천의 진행상황 및 계획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제목만 보면 출판계 지원 방향 발표인가 싶겠지만, 핵심은 정부 보조금이 투여되는 서울국제도서전의 운영 문제와 주최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에 대한 공격이었다. 두쪽짜리 장관 발언 요지에는 한심한 탈선 형태” “이권 카르텔” “충격적 의혹같은 자극적 단어가 가득했다. 규칙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고 아직 감사 중인 사안인데 장관이 느닷없이 간담회를 자청해 의혹을 기정사실화한 건 분명 이례적이다. 출협이 성명서를 내며 강력하게 반발하자 민간단체 회장 이름을 콕 찍어 맹비난하는 보도자료를 내는 모양새도 정부 부처답지 않은 대응이다. 설사 문제가 있더라도 감사 뒤 개선안을 마련해 밝히면 될 일이다.

 

지난 6월 초 케이-북 비전 선포식을 열었던 문화행정 수장의 최우선 과제가 고작 출판계 몰아세우기인가. 대통령의 발언 이후 각 분야 이권 카르텔발굴 경쟁이 치열하다더니 이젠 장관이 존재감을 높이려 출판계까지 끌어들이냐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이 그럴 땐가. 지표가 심상찮다. 출협에 납본하는 출간 종수는 지난해 61천종으로 그 전해에 비해 4천종 줄어들며 2018년 수준으로 퇴보했다. 평균 초판부수는 2018년의 절반을 조금 웃돈다. 독자 관심의 다양화에 따라 다품종 소량생산추세가 나타난 지는 오래지만, 이젠 부수도 종수도 다 줄고, 밀려난 편집자가 출판사를 차려 출판사 숫자만 늘어나는 이상 동향”(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이 정착하고 있다.

 

중소규모의 학술·과학, 대학교재 출판사들은 특히 직격탄을 맞고 있다. 2022년 현재 한국의 일반 공공도서관이 1100여곳인데 마땅히 주목할 학술서가 나와도 도서관이 구입하는 분량은 100~200권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출판사들에 그나마 단비 같던 국가의 세종도서선정·구입지원 사업을 비롯해 문학나눔 사업 등을 문체부는 올 들어 잇달아 흔들었다. ‘블랙리스트의 기억이 생생한 출판계에선 정부가 출판사들을 진보 담론의 생산기지로 보며 이 기회에 고사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올 정도다. 오는 17일 출협 주최로 출판 위기 타개를 위한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는 범출판계 집회가 예고된 가운데, 또 다른 단체인 출판인회의도 정부의 콘텐츠 사업 지원에서 출판만 배제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출판인들과의 간담회를 요구했다. 출판사·단체의 성향이나 규모와 관련 없이 위기의식이 팽배하다는 방증이다.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겠다. 종이책을 읽지 않는 시대 아니냐고. 여전히 베스트셀러도 나오는데 독자들 니즈를 맞추지 못한 출판사가 문제지 왜 정부가 지원해야 하냐고. 하지만 한 나라의 지식산업의 수준은 그 나라의 국력과 그 사회의 민주주의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좌든 우든 책은 사상의 거처이고 한 사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척도다. 책이 단순히 시장소비재라면, 문체부가 1947년부터 출협이 열어온 도서전을 지금까지 후원해올 이유가 없다.

 

얼마 전 통화한 소재두 대표는 자신의 경영 능력 탓을 하면서도 한국 사회에 대한 절망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고민을 토론하는 게 30년 정도는 축적이 되어야 뿌리를 내릴 수 있는데, 모든 게 끊겼다. 대학에서 교양 강의가 죽고, 학문 후속세대 연결엔 실패했고, 지식인은 파편화됐다.” 인쇄소·제본소에 돈을 제때 주지 못하는 게 민폐같아 올해 한권의 책도 내지 않았다는 그는 요즘 완성된 원고를 들고도 선뜻 인쇄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입시경쟁과 서열화된 사회 구조, 대학 연구환경의 몰락 등이 구조적으로 얽혀있는 출판계 위기를 단칼에 해결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출판인들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도 편집자들의 구조조정과 이직이 한창이다. 한 편집자는 이렇게 2~3년만 지나면 한국 철학자의 책을 낼 수 있는 출판사가 아예 소멸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이 죽어가고 있다. 지식산업의 실핏줄이 끊겨가고 있다. 문체부가 이권 카르텔때려잡기나 할 때가 아니다.

김영희 | 편집인 한겨레 : 2023.08.02.

 

 

넘치는 식탁, 위기의 식량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아버지가 육지로 나가 먹을 수 있는 잡초를 캐 오고는 했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육지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늘 얘기하셨어. 육지에는 언제나 대형 산불이나 홍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도 했고, 특히나 굶주린 사람들과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그중 위험하다고 하셨어. 육지에도 공동체들이 몇개 있는데, 외부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공동체도 많아. 반면에 우리 타워는 아이들은 무조건 받아준다고 해서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이곳으로 온 거지. 우리 타워도 늘 태풍이나 해일에 위협받지만 그래도 육지에 비하면 비교적 안전한 곳이 맞아. 그래서 우리는 이 정도라도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글방에 나온 지아 글의 일부다. 이 말을 하는 등장인물 9E15는 기후변화로 살기 어려워진 육지를 떠나, 바다에 지어진 타워로 이주난민이다. 그곳에서 그는 무쓸모인간을 죽여 식량으로 만드는 일을 맡아 하고 있다. 그 묘사가 리얼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불편함을 토로했지만 한편으론 그래서 작가에게 신뢰가 간다는 이야기도 했다. 식량위기에 처한 인류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에스에프(SF)지만 예술이란 종종 사회에 대한 경고이며 경종이기도 해서 의미 있는 글이라는 평이 주를 이뤘다. 지아의 글은 식량위기에 관한 토론을 촉발했다. 이야기는 크게 세 축으로 흘렀다. 인구 증가와 기후위기 그리고 농사.

 

현재 지구에 사는 인류의 수가 80억명이라는 말에 참가자 중 한명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언제 인구가 그렇게 늘었지? 나는 60억으로 알고 있었는데. 두어명도 그러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0억에서 20억이 되는 데 100년이 걸렸다면 60억에서 70억으로 느는 데는 12, 70억에서 80억으로 증가하는 데는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단다. 경작지가 그대로라면 식량 부족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고 농경지를 확대하는 것이 대안은 될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과 야생동물의 사이가 줄면서 발생한 전염병이라는 것은 중론이다. 게다가 농사는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산업이다. 극한 기상이 빈번히 발생하면 어떤 첨단기술도 통하지 않는 게 농사다. 12천년 전 사피엔스가 농경을 시작하고 정착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경작이 가능한 기후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폭염과 고온은 새로운 기후 표준이 되고 있다. 가뭄과 폭우가 계속된다면 수확량은 해마다 줄어들 것이다. 문제는 지금까지는 식량 수출국 한 곳에 흉년이 들어도 다른 수출국의 생산량으로 부족분을 보완할 수 있었다면, 앞으로는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에서 동시에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경고에 따르면 식량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취약한 국가 순위 1위다. 2위는 일본이다. 한국은 곡물의 80%를 수입에 의지하고 있다. 사실 전세계 85%의 국가는 식량 순수입국이다. 식량을 수출하는 나라는 미국·프랑스·독일·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캐나다·우크라이나·러시아 등 몇 나라 되지 않는다. 석유가 중동을 비롯해 몇몇 나라에서만 생산되는 것처럼 식량도 마찬가지다. 극한 기상으로 이들 국가에 문제가 생기면 식량 대란은 기정사실이 된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인 일본은 식량자급력을 높이는 국가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식량자급이 아니라 식량자급을 강화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비상시를 대비해 농지 면적을 유지하고 농업기술을 개발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해두는 게 식량자급력 강화의 핵심 내용이다.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식량 공급망을 극단적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산이 전 국토의 70%인 한국은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지금이야 저녁에 주문하면 다음날 아침 싱싱하고 다양한 먹거리들이 현관 앞에 놓여 있지만, 그 상황은 전세계의 식량 생산지와 유통망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만 가능하다.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우리는 자꾸 다가올 미래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좋은 한 편의 글은 사피엔스라는 종의 현재와 과거, 미래를 톺아보게 한다.

 

토론 도중 우리는 종종 딜레마에 부딪혔는데 이를테면 출생률 같은 문제를 얘기하면서다. 한국의 출생률은 2022년 현재 0.78명이다. 전세계에서 압도적인 최저 출생률이다. ‘침몰하는 대한민국같은 표현을 써가며 언론은 출생률에 대해 걱정하고, 국가는 출생률을 높이는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 역시 개별 국가의 인구수를 유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나라별로 따로따로 적정인구 수준을 유지하려 든다면 20년 안에 세계 인구수는 100억명을 돌파할 것이다.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스마트 농경도 마찬가지다. 스마트 팜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도심의 빌딩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을 때, 농민들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고 사회는 큰 갈등에 휩싸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겪는 내적 갈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화력발전소 폐쇄는 동의하지만 전기요금이 오르는 것은 반대하는 자신, 기후위기는 걱정되지만 에어컨과 건조기를 안 돌릴 수 없는 상황, 전 지구적인 자각과 연대를 외치지만 자국의 이익 앞에 속수무책으로 깨지는 국제적 약속에 대한 무력감.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를 앞에 두고 조금 암울해졌을 때 여름이 말했다.

 

사피엔스는 공기로 빵을 만들어낸 종이잖아요. 무슨 말인가, 우리는 여름을 쳐다보았다.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식량난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두 가지 주요한 혁명이 인류를 식량난에서 구했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공기의 78%를 차지하는 질소로부터 암모니아 합성법을 만들어낸 프리츠 하버. 그는 질소 정제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인공 비료의 개발을 가능케 했고 이로 인해 식량 생산은 획기적으로 늘 수 있었다. 물론 명암은 있지만. 다른 하나는 키 작은 밀의 육종에 성공한 것. 키 작은 밀은 제3세계에 보급되어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니 우리도 뭐라도 해 볼 일이라고 여름은 말했다. 수직 농업, 배양 단백질, 정밀 농업, 농업 스타트업 회사 등 우리는 각자 알고 있는 농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더했다. 가장 유망한 미래산업이 농사일 수 있겠는데, 누군가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안보가 국가의 주요 어젠다가 되어야 하는가, 국가 간 경계 따위 훌쩍 넘어 사피엔스의 어젠다가 되어야 하는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글방 모임을 마무리했다.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한겨레 : 2023.08.02.

 

 

기후급변에서 교실현장까지붕괴하는 한국사회, K-민주주의도 공범

'전능한 대리인 선출' 넘어 시민이 권리·의무 조율 주역인 '일상의 민주주의'

작년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수많은 대사를 유행시켰다. 그 중에서도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자 주인공인 형사 해준의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대사다. '붕괴'는 어쩌면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원전 완전 안전"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는 대한민국의 한 핵발전소 소재 도시에서 벌어지는 '붕괴'의 이야기다.

 

'붕괴' 지금 한국 사회에서만 관심을 끄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나라 밖에서 더 떠들썩하다. 기후 급변 때문이다. 매년 북반구에 여름이 닥칠 때마다 기온 상승 신기록이 깨지고, 날씨의 변덕이 더욱 극심해진다. 급기야 UN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 대신 이제 '지구 열대화'라 불러야 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기후 재앙으로 인한 문명의 붕괴가 이미 시작된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곳곳에서 들린다.

 

물론 한반도 역시 이런 전 지구적 기후 재앙에서 예외일 리 없다. 한데 대한민국에서는 붕괴하는 게 이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지난주에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비극이 있고 나서 우리는 새삼 이 나라의 학교가 붕괴 중임을 확인했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 학교 당국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우리의 '학교'라는 쓰라린 진실에 뒤늦게 눈떴다.

 

학교는 사회 전체에서도 특히 그 미래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부위다. 그런데 바로 이 부위가 이런 형편이다. 가뜩이나 기록적인 출생률 저하로 고민하는 사회가 그나마 있는 후세대를 미래 시민으로 키우는 과정에서도 이미 실패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렇게 미래를 스스로 잡아먹는 사회에 '붕괴'라는 말 외에 다른 어떤 진단을 내릴 수 있을까.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다. '붕괴'라는 진단을 받는 이 사회는 또한 최근까지 곳곳에 'K'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세상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나라가 됐다고 자축하던 그 사회다. 특히 'K-민주주의'라는 말에는 미국이나 일본을 능가하는 민주주의 수준을 달성했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한데 그런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나라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배양지인 학교를 이토록 처참한 상황에 빠뜨릴 수 있다는 말인가? 붕괴의 와중에 K-민주주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K-민주주의는 붕괴의 공범

이 대목에서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K-민주주의는 붕괴에 맞서는 처방이 될 수 없다. 붕괴의 원인을 해결하기는커녕 이를 늦추거나 피해를 줄일 수도 없다. 오히려 K-민주주의야말로 우리 사회를 이 지경에 빠뜨린 몇 가지 중대한 요인 중 하나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붕괴의 유일한 원인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이를 더 부추기고 복잡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K-민주주의라지만, 결국은 1987년에 틀을 갖추어 지금껏 이어지는 민주주의, 1987년형 민주주의다. 이 무렵, 대다수 한국 시민에게는 특정한 형태의 민주주의 이해가 뿌리를 내렸다. 거리의 시민들 사이에서 '대통령 직선제''민주주의'와 등치되고 이후에 정치적 관심과 열정이 대통령 직접선거에 쏠리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독특한 민주주의관이 단단히 자리 잡았다. 또한 이 민주주의관은 민주노동조합이나 대학교 총학생회처럼 민주주의를 앞장서서 실천하는 시민사회 조직을 통해 한국 사회에 깊이 스며들었다.

 

나는 지금 이 민주주의의 공백과 한계, 오점과 결함이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이 민주주의는 한 마디로, 선출된 대리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민주주의다. 직접선거로 선출된 대리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민주주의 자체와 동일시하는 민주주의 이것이 87년형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다.

 

이런 선출된 대리인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은 물론 대통령이다. 다수 대중의 의지는 대통령 한 사람에 집약돼 표출되며, 이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가 곧 한국 민주주의의 성취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그리고 이런 메커니즘이 직접선거로 대표를 뽑는 모든 민주적 결사체로 확산돼 재생산된다. 지방자치단체, 정당, 노동조합, 학생회 등등으로 말이다.

 

한 동안은 이런 민주주의관이 실제로 역사적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현재의 헌정 체제를 기획한 장본인들인 양 김씨가 대통령을 역임하던 때에는 그랬다. 대중의 개혁 열망과 의지를 대변하는 유능한 대리인이 온갖 난국을 헤치고 개혁을 실현한다는 서사가 실물로 전개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를 겪으면서, 그리고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쳐본 경험이 있는 세대가 어느덧 중장년이 되면서, 87년형 민주주의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거의 유일한 버전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나올 법한 가장 비극적인 배역이었다. 그는 87년형 민주주의 서사의 완벽한 본보기로서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양 김씨에게 쏟아졌던 것 이상의 높은 기대가 그 한 사람에게 향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민감하게 정치의 본질을 꿰뚫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서사가 더는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87년형 민주주의의 틀(혹은 함정)에서 벗어나려고 거듭 시도했다. 선거제도 개혁, 연립정부 구상,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의 뼈아픈 성찰 등등.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냉철히 직시한 이 문제적 상황을 그의 지지자들은 그만큼 뚜렷이 이해하지 못했다. 대선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의 50% 50%의 대결 구도와 이것이 반영된 행정부-입법부 대립 관계가 어떤 영웅적 대리인도 지지자의 요구를 관철할 수 없게 가로막는다는 것을 직시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제6공화국에서 87년형 민주주의 서사는 이제 현실과 만나는 지점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선출된 대리인에 대한 권력 위임이 민주주의라는 생각만은 끈질기게 남았다. 대선 때마다 더욱 강력히 재생산되는 '신화'로서 말이다.

 

촛불항쟁 직후인 문재인 정부 초기는 어쩌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동의한 여러 색깔의 정당을 바탕으로 다양한 의견과 입장, 세력 사이의 잠정적 합의를 통한 정치를 실험할 기회였다.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87년형 민주주의 이해가 새로운 이해에 길을 내줄 가능성이 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선출된 한 사람의 대리인에 대한 환상적 기대 대신 토론과 협상의 지난한 과정을 '민주주의'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이 기회는 유실됐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던 세력은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 아래 의도적으로 87년형 민주주의 서사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신화'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치러진 대선에서 우리는 윤석열 정부를 그 결과로 받아들게 됐다. 학교 이전에 정치는 벌써 한참 전부터 붕괴하는 중이었다.

 

사회가 사회의 문제들을 스스로 대면하는 민주주의

여기까지만 말하면, 한국의 교육만큼이나 정치도 붕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될지언정 87년형 민주주의가 학교 붕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해서는 답이 될 수 없다. 도대체 둘 사이에는 어떤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는가?

 

나의 답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87년형 민주주의의 틀에 갇힌 탓에 제대로 된 민주적 훈련을 거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삶의 여러 장소와 순간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권리와 의무를 조율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시민에게 전보다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시민 자신이 권리와 의무의 복잡한 조율 과정의 주역이 되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조율 과정에서 결정권을 함께 나누면서 동시에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숱한 충돌과 시행착오를 겪고 난 뒤에야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합의에라도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이다. 이 과정의 어려움을 덜어줄 이론이나 공식 따위는 없으며, 이 과정을 겪지 않고 그 결실만 누릴 수 있는 비법 역시 없다. 따라서 어떤 사회든 이런 힘든 수련 기간을 몸소 체험하는 수밖에는 없으며, 이를 인내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성숙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마지막 결정적 요소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리자에 대한 전권 위임을 민주주의라 이해해 온 한국 사회는 이제껏 이런 도제 기간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민주적 권리 확대에 우호적인 시민들조차 단지 자신들이 지지한 선출직 공직자가 과감하게 그런 개혁에 나서길 기대하고 기다릴 뿐이었다. 투표가 끝나고 난 뒤에는 결실을 기다리는 시간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시간은 그렇게 허비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이렇게 허비될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쟁점들, 저 모든 '붕괴'의 사안들(기후 급변부터 한국의 교실 현장까지)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 대면해야만 풀어나갈 수 있는 것들이다. 독재 잔재를 뒤집는 일은 양 김씨 같은 특출한 대리인에게 맡길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탄소 배출을 줄여나가거나 학교에서 학생, 교사, 학부모, 교육 당국의 관계를 새롭게 짜는 일은 그렇지 않다. 시민들의 토론과 합의 과정을 통해서만 그나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이야말로 87년형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사회가 자신의 문제들을 스스로 대면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할 때다.

 

이것은 물론 87년형 민주주의의 기둥 노릇을 하는 대통령제의 개혁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출발점에 불과하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전능한 대리인의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소 조치일 뿐이며, 이 환상은 사회 각 부분이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논쟁과 협상, 잠정 합의들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모든 선출직 공직자의 과제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런 민주적 과정을 여는 일이 되어야 한다.

 

한시 바삐 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미래는 이와 정반대되는 쪽으로 기울고 말 것이다. 전능한 대리인의 환상을 바탕으로 난마처럼 얽힌 위기들의 해결을 약속하는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부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런 권력이 들어서고 난 뒤의 상황은 87년형 민주주의의 기준으로도 더는 '민주주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민사회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한다며 시민사회를 해산시키는 정치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에 이런 정치는 '파시즘'이라 불렸다. 그때에도 이것은 붕괴와 쌍을 이루며 힘을 얻은 선택지였다. 우리는 지금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3.08.02.

 

지구의 뜨거운 경고, 기본소득 정치가 응답해야

인류는 사상 가장 뜨거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겨울의 남극에서 비가 내리고 기록적인 폭염에 선인장도 말라 죽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올해 7월이 관측 사상 가장 더운 달로 기록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UN은 지구 '온난화'를 넘어,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 또한 지구 열대화를 직면하고 있다. 50여 명의 국민의 목숨을 앗아간 극한 호우, 주말 새 15명의 국민의 목숨을 앗아간 극한 폭염 모두 기후 재앙의 순간이었다. 지난 몇 주 간의 기후재앙으로 우리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대응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한 국가적 과제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낡고 퇴행적 정치로 눈앞의 기후재앙 막을 수 없어

전 세계 온실가스의 80%는 대한민국이 포함된 주요 20개국(G20)이 배출하지만, 기후위기 피해의 약 75%는 가난한 나라에서 발생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극심한 더위가 이주노동자 및 개발도상국 노동자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우리는 기후재앙의 피해가 불평등하다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윤석열 정부는 기후위기라는 범인류적 사안에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재생에너지 목표를 줄이고, 재생에너지산업을 위축시키고 있다. '핵발전'만을 기후위기 대응의 요술봉처럼 휘두르며 국민의 삶과 지구의 생태적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다.

 

위기에 무감한 낡고 퇴행적인 정치에 맞서, 사회적 생태적 전환을 위한 정치가 시급하다. 필자는 끓는 지구에 땔감을 넣는 정치가 아니라, 어떻게든 이를 멈추기 위한 정치를 우리 모두가 함께 모색해 나가자고 제안한다. 이를 위한 핵심적인 열쇠는 기후위기와 사회·경제적 위기 모두를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한 기본소득의 도입이다.

 

가장 먼저, 탄소 배출에 세금을 당장 부과하여 비생태적인 생산과 소비를 빠르게 축소시켜 나가자. 이미 201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27명을 비롯해 3500여 명의 미국 경제학자들 또한 탄소세가 탄소배출을 줄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탄소세 도입의 역진성의 문제(탄소세가 생필품 가격에 반영되기 때문에 저소득층에 타격이 간다는 것)는 탄소세로 걷힌 세수를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기본소득으로 나누는 것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 탄소세 도입은 각 기업들에게는 탈탄소 산업전환을 강제할 것이고, 시민들에게는 탈탄소 소비의 길을 열어주는 분명한 길이다.

 

나아가 공공 재정을 마련하여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생산과 서비스에 대한 공공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긴축 재정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 에너지 전환을 위한 과감한 재정 조달이 필요한 때이다. 나아가 모두의 생존을 위한 대규모 공공 투자는 당연히 그 권한과 성과 또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으로 누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기후재앙의 극복이 더 극심한 불평등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생산과 서비스의 민주적 설계 또한 촉진될 것이다.

 

성장주의가 벗어날 수 있는 실질적 기반인 기본소득

마지막으로 생태적으로 재앙적일지라도 경제를 성장시켜서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정치적 압박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들에게 충분한 기본소득이 지급되어야 한다.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와 삶의 기반은 성장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실질적 기반을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보장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전환과 기후재앙이 중첩되어 위기로 도래하는 시대, 충분한 기본소득 도입 논의를 본격화하자.

 

다가오는 8,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전세계 기본소득 지지자가 모인다. 기본소득당은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를 맞아, 기후위기에 공감하는 전 세계 시민들의 의지를 담아 <기후정의와 기본소득 선언>을 공포할 것이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시대, 사회·생태적 전환을 목표로 한 기본소득 도입 운동을 펼쳐나가자는 이번 선언에 공동 선언자로 동참해줄 것을 호소한다.

 

단언컨대 우리가 이 세상을 정의롭게 바꾸지 않는다면, 기후위기가 이 세상을 파국으로 몰아갈 것이다. 위기에 맞서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 뚜렷한 대안, 기본소득으로 기후정의를 실현하자.

용혜인 기본소득당 상임대표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02.

 

 

돌아오는 농촌, 돌아버릴 농촌

응애응애, 30년 만에 아기 울음소리! 온 마을 들썩.” 농어촌 지역 언론에는 이런 기사가 대서특필되곤 한다. 면사무소 공무원은 사망신고에는 이력이 났어도 출생신고를 해본 적이 없어 물어물어 업무를 처리했다는 후일담도 붙는다. ‘돌아오는 농촌이란 구호는 닳아빠진 선거 컨설팅 회사도 밀쳐둘 진부한 구호지만 농촌에선 생존의 외침이다. 도시가 고령화를 고민할 때 초초고령화문제에 직면한 농촌에선 인구문제를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사람을 끌어오느라 애를 먹는다. 한때는 농촌 총각들 장가를 보낸다며 군수가 비혼 남성들을 외국으로 데려가 단체 맞선을 주선하는 일도 있었으나 이제 그 총각들도 노년이 돼 농촌 혼인건수 자체가 없다시피 한다.

 

그래서 귀농·귀촌 정책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귀농이 아니라 귀촌이어도 농촌 주민으로 살면서 지역 유지에 기여하므로 귀촌도 환영이다. 실제로 귀촌하러 왔다가 농업에 관심이 생겨 농사를 짓는 사례가 많아 일단 한번 살아보시라니까요!’를 외치는 살아보기 프로젝트도 지자체마다 열심히 굴리고 있다.

 

도시의 삶이 지쳐서 농산업의 비전을 점치며 농촌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어왔다. 10년 전인 2013422700명이 농촌으로 돌아왔고, 50만명 정도씩 해마다 농어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2022년에는 처음으로 귀농·귀촌 인구가 줄었다. 2022년 귀농·귀촌인 통계 조사를 보면 귀농·귀촌 인구는 438012명으로 2021년보다 77422명 줄었다. 정부는 고금리로 나라 전체의 주택거래량이 줄고 인구 이동 자체가 줄어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래도 77000여명이면 작은 군 단위 농어촌 두어 곳을 합친 인구이기에 이런 현상을 가벼이 넘길 수는 없다.

 

일단 농촌에서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는 이유가 크다. 농산물을 팔아 얻은 농업소득이 연 949만원, 그나마 유지하던 1000만원선이 무너졌다. 농약값, 종자값, 기름값, 품값 모두 올라도 농산물값만 종종걸음이다. 여기에 날씨까지 독해져 내다 팔 만한 농산물 수확이 어려워 소득 압박으로 이어진다. 나머지 생활비는 투잡, 스리잡을 뛰어 메우는 현실에서 베테랑 농민도 버티기 힘든 마당에 농지 규모도, 기술도 부족한 귀농인이 버틸 재간이 없다.

 

현재 귀농가구주의 평균 연령은 56.4. 5060세대가 70% 정도로 40대 이하의 귀농·귀촌 인구는 50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결혼이나 출산 가능성이 있는 청년세대의 귀농·귀촌은 많지 않은 데다 가족단위가 아니라 1인 가구의 귀농·귀촌이 79.3%에 달해 인구증가에는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여기에 도시에서 누릴 삶은 다 누리다 와서 조금 있으면 노령연금을 탈 나이에 농촌에 들어와 돌봐야 할 대상만 늘어나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 시선도 있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 5060세대는 신중년세대로 농촌에서는 청년세대이자 지역 활성화의 주체이니 활성화될수록 좋은 일이다. 다만 귀농가구주의 성별을 보면 67.1%가 남성이다. 혹자는 <나는 자연인이다>에 꽂힌 남성들이 전원생활을 철없이 꿈꾼 것 아니냐고도 하지만 귀농·귀촌 준비기간은 평균 2. 욱해서 삶의 자리를 옮기지는 않는다. 결국 농촌은 여성들이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어서다. 의료, 교육, 문화 시설과 같은 인프라도 부족하지만 농촌은 원래 그렇다며 오래도록 손놓았던 성불평등 문제가 여성들의 귀농·귀촌을 막는 주요 요인이다.

 

농사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은 소득이 보장되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가끔 영화도 한 편 볼 수 있으며 성별과 나이로 차별받지 않고 주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할 수 있는 평등 문화가 자리 잡아야 돌아오는 농촌이 된다. 이 기본 세 가지가 받쳐주질 않으니 돌아버릴 농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짚어야 한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경향 : 2023.08.03.

 

 

학습된 무기력을 떨쳐버리고

세상이 펄펄 끓고 있다. 기후위기는 징후가 아니라 전면적 현실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 만기가 도래한 약속어음처럼. 집중호우에 제방은 무너지고, 편리를 위해 만든 터널이 무덤으로 변한다. 벌목과 택지 개발이 이루어졌던 산은 흘러내린다. 흔히 재앙은 무차별적이라 말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해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떠오르고, 비도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그 결과는 공평하지 않다. 재난의 1차적 희생자들은 늘 안전의 취약지대에 사는 이들이니 말이다.

 

우리의 살림살이를 위협하는 것은 자연재해만이 아니다. 철근을 빼먹고 지은 아파트가 곳곳에 서 있다. 순살 아파트라는 신조어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우리 시대의 슬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책임을 져야 할 당국자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남 탓하기에 분주하다. 무엇이든 정치화하는 순간 책임 소재는 불분명해지고 거친 싸움판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비관주의가 스멀스멀 우리 의식을 파고든다. 공공성에 대한 의식의 쇠퇴를 차가운 미소로 반기는 이들이 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이다.

 

역사의 과정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속속 귀환하고 있다. 숨 죽여 살아왔던 시간에 대한 복수심 때문인지 그들은 이전보다 더 독한 말로 무장하고 있다. 그들의 입에서 가르는 말, 조롱하는 말, 격동하는 말이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일단의 사람들은 시원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이를 간다.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가름의 대상이 된 이들은 처음에는 분노하지만 똑같은 일이 뻔뻔할 정도로 반복되면 실소를 터뜨리고 만다. 학습된 무기력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에 포획되는 순간 역사의 퇴행은 기정사실이 된다.

 

열여섯 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난 에디트 에바는 한동안 과거로부터 숨기 위해 몸부림쳤다. 과거에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자기 고통을 계속 감추는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것들은 고통을 줄여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고한 감옥이 되어 우리를 가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과거의 중력을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라는 책에서 그는 희생되는 것(victimization)’희생자 의식(victimhood)’을 구분한다. 희생되는 것은 나의 의지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발생한다. 희생자 의식은 내면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우리를 희생자로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일이 닥쳐오든 우리 앞에는 언제나 선택의 가능성이 주어진다. 절망의 심연에 속절없이 끌려 들어갈 것인가,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명랑하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인가?

 

수해 복구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분들을 본다. 토사와 탁류가 밀려와 안온했던 삶의 자리를 파괴한 현장에서 그들은 피눈물을 흘렸지만, 절망감을 딛고 일어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는 모습이 내게는 차라리 성스럽게 보인다. 자기 삶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희생자 의식에 삼켜지지 않을 묘책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가 창조한 인물 돈키호테는 자신을 편력기사로 생각하는 일종의 광인이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여 돌진하고, 양 떼를 무도한 군인으로 생각하고 칼을 휘두른다. 객줏집을 성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는 정상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섬기는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를 꿍심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본다. 그가 사방에서 두들겨 맞고 불운한 일을 겪으면서도 차마 주인 곁을 떠날 수 없는 것은 돈키호테가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할 줄 모르고,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순박한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돈키호테 또한 자기가 겪는 불운이 마법사들의 농간이라고 굳게 믿지만 그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진정한 용기를 이길 마법이 있겠는가? 마법사들이 내게서 행운을 앗아갈 수는 있을지 몰라도 노력과 용기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야.” 이 담대한 희망이 그를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학습된 무기력에서 벗어나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도래할 수 있는 조그마한 틈을 만들어야 한다.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김지하)지 않던가.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경향 2023.08.04.

 

 

노인이 부끄럽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게 부끄럽다는 것을 모르는 대통령의 온갖 우행과 기행, 만행으로 인해 국민으로서 내가 대신 부끄러웠는데, 이젠 노인회 회장 김호일이란 인물의 언행으로 인해 노인으로서 내가 대신 부끄럽다. 남이 일부러 나를 화나게 하려고 격한 말을 쏟아부었다면 또 모를까, 정치적인 행사에서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추고 공개적으로 한 발언에 무얼 그리 벼락같이 화를 내는 퍼포먼스를 펼쳐야만 했을까. 더구나 그 퍼포먼스란 것이, 사과하러 온 인물의 사진을 준비했다가 그 사진을 때리는 폭력적이고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나름 민주시민의 양식을 잃지 않고 너그럽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늙어가려고 노력 중인 노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보상과 기대가 엇나갈 때 파탄 나는 갑을 권력관계

나는 웬만한 인간관계는 권력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본다. 부부간 관계, 자식과 부모 간의 관계, 아주 가까운 친구 관계 등을 제외한 일반적인 사람 관계는 누가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느냐는 갑-을 관계라 보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갑과 을이 서로 무엇을 주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내 취미의 하나다. 때때로 부부간, 자식 부모 간에도 그런 권력관계가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갑은 을에게 돈과 안전(보호)을 주고 을의 충성과 헌신을 기대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늘 엇박자가 난다는 것이다. 즉 갑이나 을이나 때때로 자기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적다는 느낌을 갖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한계점에 이를 때 갑을 관계가 바뀌거나 파탄이 나는 것이다.

 

(개똥) 권력관은 개인 간 관계를 관찰하는 데에 머물고 있지만 이를 사회 모든 조직 간, 혹은 세대 간에도 연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즉 노인세대와 청년세대를 갑을 권력관계로 분석해 보면 어떨까? 나는 민주당 혁신위원회 김은경 위원장의 둘째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인지, 2학년 때 왜 나이 드신 분들이 우리 미래를 결정해?”라고 엄마에게 질문하고, 자기가 생각할 때는 평균 여명을 얼마라고 보았을 때 자기 나이부터 평균 여명까지 비례적으로 투표하게 해야 한다고 부연 설명한 것이 바로 그 갑을 권력관계에 근접한 논지라고 본다.

 

2000218일 당시 한나라당 김호일 의원이 당무회의 직후 서둘러 집무실로 향하는 하순봉 사무총장을 주먹과 발길질로 난타하고 있다. 김 의원이 청년당원의 제지를 뚫고 달아나는 하 총장을 붙잡아 목을 조르고 왼손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한 뒤 오른발로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있다. 한국일보 손용석 기자 "공천장 내놔" 낙천 분풀이 폭력기사에서 인용.

 

3일 용산 대한노인회 중앙회에서 김호일 회장이 노인폄하 발언 사과를 위해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장과 면담 중 위원장의 뺨 대신 사진을 때리고 있다. 2023.8.3 [국회사진기자단] 연합뉴스

 

그러나 나는 그 아이의 말이 되게 합리적이라는 김은경 위원장의 평가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박사 학위자에겐 100표를 더 주고 석사 학위자에겐 10표를 더 줘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자산 10억 단위로 1표씩 더 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봇물이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학 2년생의 논지와는 정반대로, 노인들은 경험이 많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표를 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11표제가 확립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 문제는 결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그저 중학 2년짜리 철부지의 궁금증일 뿐이다. 나 역시 중학 2년짜리 아이와 다른 식으로 동조하는 심정이었는지, 한 사석에서 “18세까지 투표권을 안 주는 똑같은 논리로 100-18, 82세부터는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과감한 농담을 던져 비난과 웃음을 동시에 산 적이 있다.

 

수구언론이 부추긴 노인세대의 갑질

그렇게 받아들이면 될 이야기였다. 더구나 김 위원장은 11표제 아래에서 미래세대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투표장에 젊은 분들이 나와야 의사가 표시된다는 탁월한 결론으로 자신의 발언을 마무리 짓지 않았는가. 노인의 선거권을 차별하자고 한 적도 없고 노인 폄하를 의도하는 취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김호일 회장이 발끈한 것이야말로 노인세대의 대표적 갑질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수구언론이 그들과 같이 늙어가는 노인세대의 갑질을 부추긴 결과이기도 하다. 갑을 관계의 또 하나 특징은 어떤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늘 갑이 그 의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을을 위협하고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상수(장유유서)로 노인세대는 나이를 먹었다는 것 자체로 늘 갑 행세를 했고 변화에 저항해 왔다.

 

문득 지난 2월 칠순을 맞아 내 SNS에 올린 글이 떠오른다.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이란 제목의 글에서 나는 오늘은 내 칠순 생일이다. 회갑 때도, 지공(65) 때도 별로 세월을 의식하지 않았는데 칠순의 감회는 확실히 다르다면서 사실 칠순이 별 기념하거나 축하할 일도 아니다. 그저 이젠 진짜 늙었다는 증명인 것이다. 요즘처럼 칠십대가 통으로 욕먹는 세태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토로했다.

 

이어 칠십대는 어느 정도 세상일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從心) 점점 더 너그러워질 나이인데 오히려 강퍅하고 욕심부리고 아집만 내세우는 세대가 돼버렸다. 욕먹어도 싸다.() 앞으로 십 년을 살든 이십 년(?)을 살든 () 죽을 때까지 정신건강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말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또한 탐욕 아집 오만 뻔뻔함내 주변의 숱한 칠십대처럼 살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이 자들은 변할 가능성도 거의 없고, 내가 그들을 감화시켜 새사람 만들 힘도 없으므로 그저 이런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가급적 건강한 후배들과만 히히덕거리며 욜드(Young Old)족으로 살고자 한다.

 

말하자면 칠순에 새삼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인데 그것이 가능할까? 만사 잘난 척하지 말고 겸손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고개 바짝 치켜들면 망하는 건 골프와 선거뿐이 아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입이 근질거려도 겸손, 또 겸손해야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죽음 앞에서도 겸손해져 이젠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도 들겠지'라고 내 남은 인생의 방향을 정리한 바 있다.

 

절대로 노인회에 가입해서는 안 되겠다, 탐욕 아집 오만 뻔뻔함에 폭력성까지 겸비했으니

강기석 민들레 상임고문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05.

 

 

사모펀드에 발목잡힌 녹색전환

기후정의 활동가들 시위에서 표적이 되는 나쁜 기관목록에는 은행과 함께 사모펀드를 비롯해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의 이름이 꼭 들어간다. 무슨 까닭일까?

 

각종 희소자산의 소유와 독점적 통제, 여기서 얻는 지대가 불로소득 자본주의의 핵심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소유자 자본주의로부터 소유와 통제가 분리 또는 반분리된 법인 자본주의로 변모했듯 불로소득 자본주의에도 비슷한 전개가 보인다. 가계와 기업 투자를 대신하고 자기자산도 굴리는 전문적 자산운용업과 각종 투자펀드가 발전한 것은 이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경제주체의 자산 선호와 투자가 유례없이 중요 변수가 된 자산·부채경제시대, 그리하여 자본주의 방정식이 판이하게 달라진 것과 궤를 같이한다.

 

글로벌 자산운용업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차이가 있다. 벤자민 브라운은 금융자산 투자 중심으로 보면서 자산운용자의 수동성을 강조한다. 반면 주택·에너지·사회 인프라 등 실물 자산투자를 중시하고 적극적 통제가 자산운용업의 특징이라 보는 이도 있는데 브렛 크리스토퍼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런 특징 때문에 자산운용업이 대중의 살림살이와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면서 자산운용업자가 우리의 가장 필수적인 물리적 시스템과 프레임을 점점 더 많이 소유·통제하며 사회적 기능의 작동과 재생산의 가장 기초적 수단을 제공하는 사회를 자산운용자사회로 정의한다.

 

주목되는 것은 거대 자산운용사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PRI(책임투자 원칙) 경영 등 기업의 녹색전환, 나아가 유럽과 미국의 그린뉴딜 과정에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돈벌이 기회인 까닭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녹색전환을 역사적 투자 기회로 보며 유럽연합의 그린딜에 관여했다. 블랙록은 미국 기후정책에는 더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수석 경제고문과 재무부 차관보가 모두 블랙록 출신이다. 이에 따라 조 바이든 대통령의 기후정책 방향은 금융자본의 돈벌이 위험을 제거하는 쪽으로 말랑해졌는데 이는 미국 기후정책의 블랙록화라고 불릴 만하다.

 

하지만 사모펀드가 녹색투자만 선호하는 건 아니다. 돈벌이만 되면 왜 회색투자를 꺼리겠는가. 사모펀드 업계가 2010년 이후 에너지사업에 투자한 금액 중 재생에너지 분야 비중은 12%, 나머지 88%는 화석연료 분야였다고 한다. 세계 10대 사모펀드의 에너지 분야 투자 포트폴리오의 80%는 화석연료사업이다. 칼라일은 투자한 에너지회사의 90%가 화석연료 기업이라는 보도도 있다. 사모펀드는 녹색전환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발목을 잡고 있다.

 

녹색전환과 그린뉴딜에서 재생에너지 및 신생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필수적이며, 국가 책임이 막중하다. 중대 문제는 회색자산의 전환뿐만 아니라 새로 창출될 녹색 기초자산을 어떤 형태로 소유하고 운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모펀드에 칼자루를 넘겨주고 그들의 돈벌이판이 되게 하는 사유화 또는 블랙록화의 길이냐, 지속 가능한 살림살이를 위한 공공화와 탈상품화의 길이냐. 기후금융, 필수 인프라를 포함해 녹색자산 소유권 구조의 새판을 짜는 일은 경제문제일뿐더러 권력과 정치의 문제다. 지배체제를 아래로부터 흔들어 녹색체제 전환 또는 사회생태 국가의 새 길을 열려는 희망 앞에 이런 난관이 놓여 있다.

 

강 건너 남 얘기가 아니다. 제조업이 강해 생산주의형 신자유주의라는 특성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 겹쳐 투자자 사회로 압축성장한 한국도 사모펀드 놀이판이 됐다. 소득 주도 성장을 짓밟은 윤석열 정부의 기조는 자산 투자 주도 성장이라 할 만하다. 론스타·엘리엇·맥쿼리 사태뿐만 아니라 사모펀드는 회색투자, 녹색투자 각지에 양다리를 걸치며 녹색전환 길을 뒤틀고 있다. 그들은 김용균이 죽어나간 화력발전 정비시장에도 들어와 있다. 태양광발전 사업에는 국내 10대 자산운용사 보유 사모펀드 수가 50, 설정액이 3조원이다.

 

최근 블랙록은 국내 산업가스 제조업체 에어퍼스트 지분 30%(1조원)를 인수했다. 준공영제 버스가 사모펀드 먹잇감이 됐고 국내 기관투자가와 금융사들이 떡고물을 얻어먹으려 공공성을 저버리고 사모펀드와 손잡았다는 소식은 빙산의 일각이다. 사모펀드의 지지기반은 넓게 퍼져 있으며 녹색체제 전환의 장애물이 어떤 것인지 일러준다.

 

한국은 사모펀드에 발목잡힌 녹색전환의 길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의 전환 역량으로는 미래가 어둡다. 끊임없는 비리와 부실사태, 자기 안의 이권 카르텔을 볼 때 더 나쁜 길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경향 : 2023.08.06.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회

중국의 마오쩌둥에 대해 ()7이고, ()3”이란 말이 있다. 후대의 평가든, 마오 자신이 그 정도 평가면 만족한다는 말이든, 그런 실용적 관점은 중요하다. 선과 악의 스펙트럼에서 한 극단에는 천사가, 반대편 극단에는 악마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중간 어디쯤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를 영웅이나 천사로 또는 역적이나 악마로 보려는 경향을 피하지 못한다.

 

이 사회는 증명에 소홀하다. 누가 어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대의 목소리나 다른 가능성을 따져 볼 여유 없이 공격성을 드러낸다. 멀쩡하게 살아가던 유명인이나 평범한 사람이 한순간에 죽일 놈이 된다. 그런 성향은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인지라 동서고금에 흔한 일이기는 하다. 더 신중한 사람과 덜 신중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차피 평균적인 사람들은 남의 일을 쉽게 말하고, 군중심리에 휩싸이며, 책임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현상이 사적 영역을 넘어 공적 영역에 장애를 일으키고, 이성적 대화를 통한 평가와 해결책 마련을 좌절시킨다. 한국의 뛰어난 인터넷 인프라, 성급한 문화, 비인간적인 사회구조가 그런 경향을 극대화시켰다. 세계 문화를 선도한다는 나라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하나를 놓고도 이성적 토론이 불가능하다.

 

마이크와 스피커는 소리를 잘 전달하려고 고안한 장치다. 마이크와 스피커가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면, 고막이 찢어질 듯한 하울링 현상이 발생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의사소통은 인터넷을 매개로 끝없이 하울링을 일으키고 있다. 먼저 책임을 통감해야 할 곳은 언론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언론이 균형감각과 철저한 사실확인이라는 임무를 다하지 않은 지 오래다. 언론사와 기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언론은 하울링을 막기는커녕 증폭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지경이 된 것에는 언론사나 기자도 어쩌지 못하는 속도주의, 성과주의, 생존경쟁의 문제가 있겠지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지금도 인터넷에 올라온 매체들의 기사 제목을 살펴보면, 선정성·낚시질·편향성으로 도배돼 있다. ‘약 탄 음료’ ‘엉덩이’ ‘대박’ ‘섬뜩’ ‘거지’ ‘와르르’ ‘발칵’ ‘변기’ ‘박살’ ‘’ ‘찌르겠다. 이것이 종합일간지 기사 제목에서 지금 몇 초 만에 찾은 단어들이다. 언어가 아니라 불을 지를 때 쓰는 불쏘시개다.

 

책임을 져야 할 다른 곳은 당연히 정치다. 공적 의사소통의 체계를 시대에 맞게 정립하고 운용할 책임은 정치인들에게 있는데, 그러기는커녕 시류에 편승한 천둥벌거숭이 같은 정치인이 허다하고, 양식 있는 정치인들은 거대한 부조리를 어쩌지 못하고 있다.

 

누리꾼들을 욕할 것인가? 악성 댓글의 폐해가 지적된 지 오래지만, 인류 중 일정한 비율은 어차피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이 익명성에 기대어 자신들의 부정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그들이 어떤 이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하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들은 주어진 토양에서 번성하는 것이지 그런 토양을 일군 책임자는 아니다. 개인의 목소리를 억압하지 않고 존중하되, 사회의 의사소통을 지나치게 교란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의사소통 방식을 설계하고 운영할 책임과 능력은 정치와 언론, 그리고 거대 커뮤니케이션 회사에 있다.

 

매주 몇명의 사람이 여론의 심판대에 끌려 온다. 패턴은 일정하다. 최초의 사건 보도, 죽일 놈 만들기, 해명, 후속 보도, 이 틈바구니에 참전하는 관종들, 거듭되는 논란에 지쳐가는 사람들,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기사의 등장, 그리고 새로운 죄인의 등장과 함께 망각의 세계로. 한국의 뉴스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의사소통을 위한 장이 아니라, 원님 재판의 현대적 판본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준엄한 호통과 함께 형틀에 올려진 사람을 고문하고 취조하다가, 마침내 옥에 가두거나 들판에 버린다.

 

인터넷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발언의 길을 열어 주었으나 사회의 의사소통 능력을 하향평준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SNS는 이분법, 진영논리, 희생양 만들기를 구사하는 사람에게 금전적으로 보상하고 인지도를 높여주는 시스템이다. 언론과 정치는 손을 놓고 있거나 편승하고 있다. 이 불통의 시스템과 문화는 미래로 나아가려는 한국 사회의 뒷덜미를 계속 잡을 것이며, 어느 순간 현대 사회가 직면한 극도로 복잡한 문제와 대결할 능력을 빼앗음으로써 사회를 후퇴시킬 것이다. 우리는 그 심판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망연히 기다리고 있다.

조광희 변호사 경향 : 2023.08.06.

 

 

기재부, 이러다 우리 다 죽어!

윤석열 정부가 못하는 게 많지만 그중에서 제일 못하는 게 예산 관리 아닐까 한다. 제대로 쓰는 돈도 없는데, 세수에 문제가 생겨서 여기저기 칼질하느라고 난리도 아니다. 칼자루를 쥔 기획재정부의 칼질이 전례 없이 투박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국가 설계 및 운영 전반에 경제만 아는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완장질을 하는 중이다. 대통령의 검사 시절 별명이 칼잡이였다더니, 요즘 경제 당국이 칼잡이처럼 예산을 난도질하고 있다. 이번에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크게 떼돈 버는 일도 아닌 연구·개발(R&D)을 오랫동안 했던 사람들은 단지 정부 연구를 했다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카르텔이 되었다. 앞에서는 예산 당국이 칼질을 하고, 뒤에서는 감사 당국이 몇년 치 영수증을 탈탈 털며 실정법을 들이대고 있다. 만약 어느 엔지니어가 백지에 가까운 영수증을 제출하면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처럼 잉크가 휘발돼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수년째 진행되던 연구 과제들이 결실을 못 보고 칼질 앞에 휴지 조각이 되고, 새로운 과제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야 하는 형국이다.

 

올해 3월 정부는 제1차 국가연구개발 중장기 투자전략을 수립하면서 “5년간 170조원의 R&D 예산을 투자하여 정부 총지출 대비 5%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였다. 아직 반년도 안 지났는데 신규 연구는 물론 진행 중인 연구사업 예산도 일괄 삭제하려고 한다. 하던 과제는 줄이고 새로운 과제는 못하게 하는 것도 큰일인데, 국책 연구소 예산도 대폭 줄이는 기관 예산 삭감 계획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R&D 예산을 곶감 빼 먹듯이

한국 정부의 R&D 투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늘었다.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때에도 민간 R&D 투자는 줄었지만 정부 투자는 증가했다. 199733000억원, 199835000억원을 투입했다. 군사정권이라고 욕은 하지만, 박정희 시절에는 개도국으로서는 전례 없이 공격적으로 과학기술에 투자했다. 그동안 정권교체가 여러 번 있었지만 지금처럼 무턱대고 R&D 예산을 삭감하는 정권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일찍이 없었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에게는 지금이 지난 세기 IMF 경제위기 때보다 더 가혹한 보릿고개가 되었다.

 

정부의 R&D가 이렇게 중요해진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기존 각종 수출 보조금 등 수출 관련 지원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미국 등 많은 나라는 수출 예산을 R&D로 돌렸고, 그 결과물을 공공 기술이전 등으로 민간에 지원하는 것을 산업 정책 중심축으로 삼았다. 우리도 그렇게 했다. 연구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금처럼 아예 예산 자체를 일괄 삭감하는 것은 예산 갑질일 뿐이다. 일부 부정한 연구팀에 벌을 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연구비와 기관운영비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산업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갉아먹는 일이다.

 

 

R&D 예산에서 공공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016%에 불과했다. IMF 경제위기 한가운데인 1998년에 처음으로 30%를 넘어섰고,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에도 29%로 많이 늘었다. 요즘은 23~24% 수준이다. 역대 정권은 경제위기 때면 위축된 민간 R&D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우리가 그렇게 기술선도국이 된 거지, 정부가 뒷짐 지고 빨간펜 노릇이나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경제가 어려우면 다른 것을 줄이고 R&D에 더 돈을 들여서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글로벌 금융위기도 넘어온 건데, 윤석열 정부는 경제가 어렵다고 R&D 예산부터 곶감 빼 먹듯이 빼 먹을 생각이다.

 

삼성, LG 등 한국 대기업들이 요즘 이래저래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R&D 예산을 윤 정부처럼 줄이려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늘리거나 그게 정 어려우면 현재 수준을 유지라도 하겠다는 게 주요 기업들 입장이다. 정권이야 망하면 그만이지만 기업은 그럴 수가 없다. 민간에서는 R&D에 공격적으로 투자해서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려고 하는 게 기본 전략인데, 정권은 예산·감사 당국을 동원해 R&D 예산을 빼서 세수 부족을 막으려고 한다. 과학자들 눈으로 보면 IMF 경제위기보다 더 큰 예산위기가 온 셈이다.

 

상후하박 경제, 윤석열 경제가 가는 길

이렇게 1~2년만 더 하면 한국 경제는 진짜 망한다. 안 그래도 척박한 연구 생태계가 산불 난 것처럼 대규모로 초토화되는 중이다. 윤 정부가 지금 펼치는 과학기술 정책에는 <오징어 게임>의 저 유명한 대사가 딱 들어맞는다. “이러다 우리 다 죽어!”

 

R&D 투자는 금액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고 질적인 측면도 중요한 건 맞다. 그렇지만 기술 로드맵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연구 예산 일괄 삭감이라는 칼을 휘두르는 것은 공업 입국을 목표로 여기까지 온 이 나라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우석훈 경제학자 경향 : 2023.08.13.

 

묻지마 범죄'의 원인과 '쾌지나 칭칭 나네'

201348일 영국 마거릿 대처 전 수상이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죽음을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샴페인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딩동, 마녀가 죽었다( Ding-Dong, The Witch Is Dead)'는 경쾌한 노래가 영국 거리마다 울려 퍼졌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나쁜 마녀가 죽었을 때 나오는 신나는 노래다. 이 오래된 노래는 유행을 한참 역주행하며 결국 영국 음원 차트 1위까지 올랐다.

 

'딩동, 영국산 신자유주의의 마녀가 죽었다'

1980년 이후 약 30년간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쳤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1981~89년 재직)과 함께 마거릿 대처(1979~90년 재직)가 신자유주의 빗장을 열었다. 교육부 장관 시절 7살 아이들의 우유 급식까지 중단했던 그녀는 총리가 되자마자 노조를 탄압했고,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했다.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다.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대대적인 감세 정책을 폈다. 감세 정책으로 돈이 부족해지자 복지 재정마저 대폭 줄였다.

 

결국, 영국 경제는 성장을 멈췄고 중산층은 몰락했고 경제적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상위 10%를 제외한 90% 영국 시민들의 삶이 완전 박살이 났다. 심지어 이혼율이 크게 증가하고 가족이 해체되는 등 사회 전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대처가 퇴임했던 1990년에는 영국 어린이 중 무려 28%가 빈곤선 이하의 가난에 시달렸다. 영국이 자랑했던 복지 시스템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어느 순간에 복지가 아닌 가난이 그 자릴 대신했다. 그런 마거릿 대처가 죽자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샴페인을 터트리며 환호했던 것이다. 당시 영국의 가디언지는 '마거릿 대처의 유산은 인간 정신을 파괴한 사회 분열, 이기심, 탐욕뿐이었다'고 일갈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201348일 사망하자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몰려나온 시민들이 샴페인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우리나라도 전 세계를 강타한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피하진 못했다. IMF 외환위기와 함께 강제로 수입된 신자유주의는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것처럼 우리나라 곳곳에 큰 상처를 남겼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었으며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졌다.

 

세습 자본주의 시대 연 '한국산' 신자유주의

우리나라 노동자 3명 중 1명은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OECD 국가 평균의 2배가 넘는다.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오늘 이 순간에도 일터에서 누군가는 떨어져서, 끼여서, 깔려서 주검으로 퇴근한다. 이들 대부분은 비정규직이다.

 

상위 20%가 가진 자산이 하위 20%에 비해 무려 64배에 달한다(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 상위 20%의 월평균 소득은 1100만 원이 넘는 반면 하위 20%의 소득은 110만 원이 채 되질 않는다. 상위 100명이 보유한 주택 수가 28000채가 넘는 반면에 우리 국민의 45%는 여전히 집이 없다. 아랫목은 펄펄 끓고 있는데, 윗목은 냉골도 이런 냉골이 없다.

 

부모가 소득 하위 10% 또는 상위 10%인 경우, 그 자녀들도 같은 계층에 머물 가능성이 90% 이상 높아졌다. 출생이 계급을 결정짓는 사실상 세습 자본주의 시대가 왔다. 오늘도 명품가게는 긴 줄이 늘어서 있지만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갈수록 늘어만 간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은 여전히 압도적인 1위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남긴 상흔은 깊고 참담했다. 왜곡된 성장과 경제적 불평등은 재앙에 가까웠다.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전 세계 경제학계, 정치학계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통렬한 반성과 함께 미련 없이 사망 선고를 내렸다. 자본주의 본산이라 일컫는 IMF(국제통화기금)조차 신자유주의는 틀렸다며 파산을 선언했다. 사실상 마거릿 대처의 죽음과 함께 신자유주의도 사망한 것이다.

 

마녀의 망령을 좇는 무리들의 사이비 행태

그런데 이미 사망한 신자유주의 무덤을 파헤치려는 사람들이 있다. 마거릿 대처의 망령을 좇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국민의힘 윤석열 정부다. 사망한 신자유주의 시체를 끌어안고 무섭게 질주 중이다. 기어이 부자는 더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낙수효과'를 맹신하며 부자 감세를 적극 추진 중이다. 올해 이미 부자들 세금은 왕창 줄어들었다. 덕분에 올 상반기에만 세수 펑크가 40조 원이나 터졌다. 그런데도 추가로 신혼 부부에게 3억 원까지 증여세를 면제해 주겠다고 한다. 나라 세수가 구멍이 크게 났는데도 부자 감세에는 여전히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서 입만 열면 재정건전성을 외친다. 사이비도 이런 사이비가 없다.

 

재정이 부족하니 공공요금을 계속 올린다. 전기요금, 가스요금이 폭탄 수준으로 올랐다. 이젠 대중교통 요금까지 무섭게 올린다. 인플레 고물가에 서민들 허리가 휘는데 정부가 오히려 서민 물가를 더욱 부추기는 꼴이다. 반면에 서민들 복지 예산은 줄였다. 너무 걱정 마시라. 자비로운 정부가 함부로 죽지 않게 무려 100만 원을 빌려준다. 이자는 겨우, 겨우 15.9%. 이것이 악덕 사채업자 행태인지 아니면 자비로운 정부의 베품인지는 알아서들 판단하시라. 만백성의 피와 만백성의 기름으로 부자들 뱃속은 오늘도 끝 모르고 차오른다.

 

노조는 악마화하며 때려잡기 바쁘다. 건설노조의 파업에는 '건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노조를 조직폭력배 취급을 했다. 대대적 압수수색에 많은 사람을 구속했다. 건설노조 간부 양회동 씨의 극단적 선택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동료가 분신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패륜도 이런 패륜이 없다. 화물연대의 파업에는 '북핵의 위협'과도 같다는 표현까지 서슴치 않았다. 노동조합도 결국 국민인데 '북한의 핵'만큼 위험하게 본 것이다. 노동조합이 북한의 핵과 같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한반도 전술핵 배치는 걱정하지 마시라.

 

대한민국에 마치 마거릿 대처가 귀신이 되어 떠도는 듯하다. 정말 치밀하고 꼼꼼하게 부자는 더 부자로, 없는 사람들은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다. 잔인한 '()격차의 시대'.

 

흉기 난동과 살인 예고 온라인 게시물로 국민 불안감이 커지는 가운데 6일 오후 서울 강남역 인근에 경찰특공대원과 전술 장갑차가 배치돼 있다. 2023.8.6. 연합뉴스

'()격차의 시대'가 불러 온 '묻지마 범죄'

 

격차가 벌어지는 사이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벌건 대낮에 불특정 다수를 향해 무차별 흉기를 휘둘러 많은 사람이 다치고 사망하는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묻지마 범죄'들이다. 이젠 대놓고 특정 장소에서 또 다른 '묻지마 범죄'를 예고하는 글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온다. 어제는 불특정 다수 누군가가 희생을 당했지만 오늘은 나를 덮칠지도 모른다.

 

사실 '묻지마 범죄'라는 것은 없다. 동기 없는 범죄는 없다는 소리다. 그래서 '묻지마 범죄'20221월부터 '이상동기 범죄'로 분류했다. '이상동기 범죄'는 대부분 '사회적 삶에서의 상대적 박탈감', '사회 단절로 인한 소외감'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중산층 붕괴가 '묻지마 범죄'의 주요 원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장갑차를 세우고 총을 든 무장특공대를 배치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도입한다고 '묻지마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사망한 '신자유주의' 시체를 끌어안고 무섭게 질주 중인, 이 광란의 질주를 멈춰야 '묻지마 범죄'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쾌지나 칭칭 나네'가 대한민국 음원 차트 1위 되는 날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키스 페인 교수는 "악은 '가난'이 아니라 '불평등'에서 나온다"고 했다. 제발 부탁이다. 부자 감세를 즉시 중단하시라. 무너지고 있는 중산층을 살려내시라. 긴축이 아닌 적극적 재정정책을 펴시라. 그래서 불평등을 줄여 주시라. 그것만이 '묻지마 범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 민요 '쾌지나 칭칭 나네'는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가등청정이 우리 조선군에 패해 도망가는 것을 보고 우리 백성들이 기쁨에 넘쳐 부른 노래로 전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언을 드린다. 마치 '묻지마 정부'처럼 이 광란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끝나는 그 어느 날, 모든 사람이 길거리로 나와 꽹과리를 치며 '쾌지나 칭칭 나네'를 함께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쾌지나 칭칭 나네'가 우리 음원 차트 1위를 달성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주영 경제칼럼니스트 : 시민언론 민들레 21.0.13

 

 

 

윤석열 정권, 무능보다 더 무서운 퇴행

지난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K팝 슈퍼 라이브에서 그룹 마마무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980년대 중반, 청와대 바로 옆 고등학교에 다녔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국제사회 인정에 목말랐다. 끊임없이 해외 정상을 초청했고, 김포공항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도로변에 시민과 학생들을 도열시켰다(당시 정상들이 이용하던 마포대로는 귀빈로로 불렸다). 나는 청와대 앞길에서 환영인파의 맨 마지막 배역을 수행하곤 했다.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 앞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박수를 쳤다.

 

멤버가 4인이고 소속사도 서로 다른 마마무가 완전체로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K팝 슈퍼 라이브(K팝 콘서트)’에 등장했다. 한 멤버는 팬 커뮤니티 사이트에 ‘(국가의) 부름을 받고라는 표현을 썼다. 폭우 속에서 하이힐을 신고 춤추는 마마무를 보며 아득해졌다.

 

방탄소년단(BTS) 차출 압력에 시달리던 하이브는 걸그룹 뉴진스를 무대에 올렸다. 8억원어치 BTS 포토카드 세트도 기부했다. 카카오 역시 10억원 상당의 캐릭터 상품을 제공했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압수수색당한 다음날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자발적이라고 했다.

 

기획재정부는 산하 공공기관에서 1000명을 차출해 K팝 콘서트에 오고가는 잼버리 참가자들의 인솔자 노릇을 떠안겼다. 기재부 역시 자발성을 강조했다. 일부 기관 직원들은 자발성이란 외피를 위해 사다리 타기로 차출 인원을 정했다고 한다. 만약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나.

 

국민의힘은 금 모으기 운동을 소환하며 국민 총동원령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잼버리 파행은 외환위기 같은 국난이 아니다. SBS의 한 기자가 사이비 국가주의라는 표현을 썼는데, 공감한다. “무난한 마무리로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지켰다”(윤석열 대통령) “한숨으로 시작해 환호로 끝났다”(조선일보) 같은 인식도 거부한다. K팝 콘서트를 스카우트 대원들이 즐겼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부와 잼버리 조직위원회, 전라북도의 실패가 가려질 수는 없다. 외려 자발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관제 동원의 그림자만 짙어졌을 뿐이다.

 

퇴행이란 표현은 이제 클리셰 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써야겠다. 퇴행은 곳곳에 만연하고, 부인할 수 없이 선명하다. 무차별 흉기 난동과 살인 예고가 잇따르자 서울·부산·경기 성남 등에 장갑차가 배치됐다. 총기로 무장한 경찰특공대 요원들이 순찰에 나섰다. 불심검문도 강화했다. 달리기 하던 중학생이 흉기 소지자로 오인, 연행되는 과정에서 다친 사건은 징후적이다. 시민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민의 안전을 헌신짝 취급한 것이다. 앞의 시민은 누구이고, 뒤의 시민은 또 누구인가.

 

장갑차 배치나 불심검문 강화를 두고 치안 포퓰리즘이란 말이 나온다. 과대평가다. 윤석열 정권은 그냥 게으를 뿐이다. 불안에 떠는 시민을 안심시키긴 해야겠는데, 원인을 분석하기는 꺼려진다. 파헤치다보면 불평등·무한경쟁·각자도생에 대한 분노로 결론날 게 뻔해서다. 이를 돌파할 만한 정치적 상상력은 결핍 상태다. 예산을 더 쓰는 일도 싫다. 그러니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이 대학가에 세워두었던 장갑차를 도심으로 다시 끌고나온 것이다. 도대체 장갑차로 뭘 할 수 있나.

 

무능과 퇴행은 둘이 아니다. 유능하면 새롭고 창의적인 솔루션을 고민하고, 숙의하고, 결국 만들어낸다. 무능하면 옛날 대책, 그것도 수십년 전 것을 보여주기 식으로 재탕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권의 퇴행이 정책적 퇴행에 그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구명조끼조차 없이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가 순직한 채수근 상병 사건은 그 자체로 가슴아픈 일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실의 수사 개입의혹까지 불거지니 기막히다. 정책적 퇴행을 넘어 도덕적 퇴행의 징후다. 대통령실에선 가짜뉴스라 일축했지만 일방적 해명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퇴행의 징후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잼버리 참가자들의 안전을 강조하고, 윤희근 경찰청장이 사상 첫 특별 치안활동을 선포할 때 더욱 뚜렷해졌다. 이태원 참사 직후 책임지고 물러났어야 할 이들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공복(公僕)’ 흉내를 내는 풍경은 우스꽝스러운 부조리극 같다.

 

무능과 퇴행에 무책임까지 겸비한 정권에서 인권이나 안전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나는 불심검문을 당하게 되면, 신분증을 제시하는 대신 경찰관의 공무원증을 요구하겠다. 기어코 신분증을 내놓으라면 차라리 경찰서까지 동행하고 말겠다. 1980년대가 아니라 2023년의 시민이기에.

김민아 칼럼니스트 경향 : 2023.08.14.

 

공룡조직 노인회를 향한 불편한 시선

우산이 뒤집힐 정도로 비바람이 거센 날 대한노인회 은평지회를 찾아갔다. 김호일 대한노인회 회장이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에게 '사진 따귀'를 때린 사건을 어떻게든 가공·처리해서 나로부터 떼어내야 했다. 계속 분노와 모멸감, 불쾌감에 휘둘릴 수는 없었다. 도대체 왜 대한노인회가 한국 사회의 '모든' 노년을 대표하는지? 나는 그에게 나를 대리해서 김은경 위원장에게 폭력을 행사하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내가 저런 노인이라고? 내가 저걸 원했다고? 그럴 리가!

 

그래서 나는 현장에 가보기로 했다. 중앙이 아닌 지역, 표가 아니라 살아온 인생이 중요한 곳 말이다. 은평지회는 23년 전 서대문지회에서 독립해 나왔고, 실무를 책임지는 김경희 사무국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내 앞에 은평지회의 역사가 앉아있다!

 

"은평지회는 어떤 일을 하나요?" "경로당을 지킵니다." "경로당을 지킨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경로당에 오시는 어르신들에게 제대로 된 점심을 드리는 겁니다." "은평구엔 경로당이 모두 몇 개인가요?" "161개입니다."

 

 

23년간 이 은평지회에서 161개 경로당 어르신들의 '' 챙기는 일에 전념했던 그는 자존심과 자긍심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눈을 감으면 각 경로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며 입구며 실내며, 거기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이며 다 또렷이 떠오릅니다."

 

그에게 은평구는 161개의 경로당이 있는 지역이고, 그의 머릿속에는 이 161개 경로당의 상세 지도가 있다. 은평구는 선주민 비율이 매우 높은 지역이고, 이 선주민 중에는 소위 산동네에 사는 빈곤한 이들도 꽤 많(). 그래서 지금도 은평구 경로당의 핵심 이슈는 ''이다. 초고령화 시대 경로당의 낙후성을 벗어나고자 다양한 세대의 교류를 지향하는 개방형 경로당과 특성화 프로그램 등 혁신안이 제시되곤 한다. 현 은평지회장이 재선에 성공했을 때의 공약도 그랬다. 그러나 현장을 지키는 김경희 사무국장은 점심 식사가 어르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밥이 먼저고 프로그램은 다음이다. "어르신 중에는 혼자 살지 않아도, 그리고 꼭 빈곤하지 않아도 자식들 눈치 보여서 아침을 거르고 오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심 식사는 11~11시 반 사이에 시작하죠."

 

대한노인회는 1969년 전국노인정 회장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다. 노인정, 즉 경로당이 대한노인회의 근간이고,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표를 앞세워 세를 잡으려는 중앙회의 누가 과연 이 사실을 몸의 감각으로 새기고 있을까. 더 이상 시장의 주력 멤버가 아닌 노년들에게, 국가나 시민사회 대상으로 협상력을 발휘하는 노인회는 의미심장하다. ··동 분회와 해외지부까지 합쳐 68,000여 경로당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전국조직을 자랑하지 않는가. 그러나 세대 간 대화가 아니라 '라떼는' 방송을 일삼고, '더 나은 논쟁'이 아니라 폭력을 선호한다면 그저 부정적으로 의미심장한 조직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거대한 조직이 얼마나 피라미드식으로 성별화되어 있는지 잊지 말자. 중앙회나 연합회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지회의 회장은 남자이고(중구지회만 예외), 실무를 책임지는 건 여자다. 전체 회원 중에는 여성이 더 많다. 경로당에 등록해 다니는 사람이 노인회의 회원이기 때문이다. 돌봄을 주고받으며 노인회의 생명을 지키는 건 여성이고, 그 몸체 위에서 권력 게임을 하는 건 남성인 셈이다. 이런 성별화된 조직형태로는 초고령사회 노년 인권 지키기 어렵다는 거,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한국 : 2023.08.14.

 

 

박정훈 대령은 10년 전 검사 윤석열이다

국방부 법무관리관으로부터 수차례 수사 외압과 부당한 지시를 받았고 저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제가 오늘 왜 이 자리에까지 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겁니다.”(2023811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저와 후배들이 한 수사가 완전히 규정을 위반하고 법령을 어기고 국가공무원법, 검찰청법, 그런 것들을 위반했다고 하면서 () 앞으로 계속 진행되어야 할 수사와 재판이 이런 식으로 오도된다는 것에 대해, ‘이것은 항명이 아니다라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20131021일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

 

지난 811일 국방부 청사 앞에 선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의 모습은 10년 전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섰던 검사 윤석열과 정확하게 오버랩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유명해진 그 국정감사다. ‘채수근 상병 사건수사책임자인 박 대령은 대통령실과 국방부의 수사 외압 의혹을, ‘국정원 댓글 사건수사책임자였던 검사 윤석열은 당시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수사 외압을 폭로했다. ‘항명에 대한 동기만 해병대 정신조직(검찰)에 대한 사랑으로 차이가 날 뿐, 폭로 내용은 데칼코마니를 보듯 똑같다.

 

박 대령은 수사 외압의 배후로 대통령 국가안보실과 신범철 국방부 차관을 지목한다. 해병대 수사단은 지난 730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을 포함한 간부 8명의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된다는 내용의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이 장관은 이 수사보고서를 결재하고 박 대령에게 수고했다고 격려까지 했다. 그런데 이튿날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박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적인 과실이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라’, ‘수사기록에 혐의자, 혐의 내용, 죄명 다 빼라등의 요구를 했다. 박 대령이 굉장히 외압으로 느껴진다. 이미 장관 결재까지 끝났다며 거부하자, 이번에는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나서서 장관 귀국 시 (보고서를) 수정해 다시 보고해라. 혐의자 및 혐의 사실을 빼라. 죄명을 빼라. 해병대는 왜 말을 하면 안 듣냐는 신 차관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압박했다. 박 대령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개정된 군사법원법에 따라 82일 사건을 경찰에 넘겼다. 그러자 국방부는 박 대령을 항명 사유로 보직 해임하고, 경찰에 넘긴 사건을 강제로 회수했다.

 

대통령실과 국방부는 박 대령에게 외압을 행사한 적이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검사 윤석열10년 전 국회 국정감사에서 지금의 박 대령에게 가해진 일들을 가리켜 수사 외압이라고 했다. “수사팀을 힘들게 하고, 수사팀이 수사를 앞으로 자꾸 치고 나가게 해줘야 되는데, 이렇게 자꾸 뭔가를 따지고, 수사하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이것이 정당하고 합당하지 않고 좀 도가 지나쳤다고 한다면 수사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외압이라고 느낍니다.” 당시 국정원 댓글 사건수사팀이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려고 하자, 황교안 장관이 이런저런 이유로 방해한 것을 겨냥한 말이다. 그는 수사 외풍을 막아주던 검찰총장이 쫓겨난 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처럼 수사 외압에 당당히 맞선 모습은 유권자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9년 뒤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된다. 그의 지지자들은 검사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수사 외압같은 말을 다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지 않았을까.

 

박 대령은 사건 발생 초기 윤 대통령께서 엄정하고 철저하게 수사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셨고, 저는 대통령의 지시를 적극 받들었다고 했다. 국방부는 그런 그를 집단항명 수괴로 처벌하려고 한다. 박 대령이 대통령의 지시를 잘못 알아들었다고 보는 모양이다. 박 대령은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를 거부하며 윤 대통령에게 제3의 수사기관에서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받도록 해달라고 청원했다. 윤 대통령은 10년 전 자신과 꼭 닮은 그의 손을 잡아줄까, 아니면 신 차관을 비롯한 수사 외압 배후의 손을 들어줄까. ‘이태원 참사오송 지하차도 참사의 수습 과정을 보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이긴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비극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하면 비슷한 사건이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반복된다는 말이다. 선택은 윤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이춘재 | 논설위원 한겨레 : 2023.08.14.

 

 

윤석열의 만용, 역사까지 날조

저들에게 역사 앞에 겸손하길 촉구한 것은 과연 과대평가였다. 윤석열 정권은 역사 날조까지 서슴지 않는다. 대통령과 국가보훈부장관 손발이 척척 맞는다.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대통령은 우리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일제로부터 빼앗긴 주권을 찾는 것만이 아니었다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독립운동은 빼앗긴 주권을 회복한 이후에도 공산 침략에 맞서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독립운동을 반공과 연계하려는 깜냥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은 장관 박민식이다.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이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 그는 우리 국민한테 자유를 주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다고 해야 이야기가 되는 것이라 언구럭부리며 자유도 없는 전체주의 국가를 위해 독립운동은 인정할 수 없단다. 한시적인 장관 자리에 덥석 앉으니 무슨 역사의 심판관이라도 된 양 착각하는 오만이다.

 

대체 어떤 독립운동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려하지 않았단 말인가. 더 큰 문제는 독립운동을 자유민주주의로 치환하는 윤석열의 역사 날조다. 31혁명으로 왕정에 마침표를 찍은 대한민국임시헌장(1919.4.11)을 보자.

 

임시정부법령 제1호인 헌장은 제1(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에 이어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을 밝힌다. 헌장 1조에서 3조까지 강조되는 것은 공화제와 평등이다. 그해 9월에 다듬어진 대한민국임시헌법도 대한민국의 인민은 일체 평등함을 강조한다.

 

1948717일 제정된 대한민국헌법은 어떤가. 전문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밖으로는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한다. 자유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균등을 중시한다.

 

5조에서도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고 했듯이 자유와 함께 평등, 공공복리를 부각했다. 경제를 담은 제6장의 첫 조문인 제84조는 더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이다.

 

, 어떤가. 독립운동의 정통이라 할 임시정부 헌장이든, 저들이 강조하는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든 결코 자유만 다짐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를 결의하지도 않았다.

 

오해 없도록 명토박아두자. 21세기 들어 학계에선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딱히 구분하여 따따부따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특수하다.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내걸 때마다 노동운동을 탄압하거나 마녀사냥을 벌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나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혼용해서 쓸 수 있지만, 전자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평등을 경시하거나 외면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지 살필 필요가 있다.

 

무릇 민주주의의 기본 철학은 자유와 평등이다. 캠브리지 사전을 보더라도 민주주의를 사람들 사이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믿음에 기반 한 정부로 풀이한다.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은 더욱 그렇다. 공화국은 공공선과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공화국 영어 리퍼블릭공공의 것을 뜻하는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에서 왔다.

 

민주주의 개념으로 보든 공화국 개념으로 보든 자유만 부르대는 것은 불순한 권력논리다. 저들이 부르짖는 우리 독립운동사든 정부수립 과정으로 보든 자유만 내세우는 것은 역사 날조다. 그 불순한 언행에 민중운동을 배제하거나 탄압하려는 기득권세력의 의도가 깔려 있다면 역사 날조는 더욱 용납할 수 없는 만용이다.

손석춘 철학자·우주철학서설저자 미디어오늘 2023.08.14.

 

 

반복되는 건설 붕괴현장, 무너진 것은 짓다만 건물뿐인가?

감정평가가 부동산 투기를 낳지 않으려면?

지난 4월 인천검단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주차장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올해 10월 완공 예정이었던 1600세대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를 전면 철거하고 재시공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건설현장 외벽 붕괴사고로 6명의 현장근로자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 불과 1년여 전인 20221월이었다. 20216월에는 광주 학동 재개발사업 철거현장에서 철거 중이던 건물이 무너지며 지나던 시내버스를 덮쳐서 17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도 있었다. 20204월에는 이천 물류창고 건설현장에서 화재 사고가 발생하여 현장근로자 38명이 사망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설계, 시공, 감리, 다단계 하도급, 안전관리 등 건설공사 과정의 총체적 부실이 누적되어 연속적으로 대형사건·사고로 터져 나오고 있는데, 문제의 원인이 해소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해소되었다면 유사한 성격의 사고가 반복될 리 없다.

 

문제의 원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돈이다. 이익을 키우고 무리하게 비용을 줄이려하다 발생한 사고다. 건축비를 줄이기 위해서 가장 낮은 비용을 제시한 곳이 입찰하는 하도급 공사 관행으로 기업은 숙련된 건설기술자를 육성하기 어려워졌다. 비용을 줄여야하니 노동자 처우는 열악하고 일터는 위험천만하다. 건설현장에는 젊은 사람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 자리를 미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하도급업체는 건설비용을 줄이기 위해 철근과 같은 자재를 누락하였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인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건설 현장 감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시공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감리를 시공사나 발주처가 직접 선정한다. 그러니 발주처로부터 일을 수주해야하는 감리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 어렵다. 발주처 또는 시공사가 감리를 선정하고 감리 비용을 지급하다보니 꼼꼼하고 엄격하게 관리 감독을 하면 신속하게 공사를 완료하고자 하는 발주처의 이익에 반하게 된다. 감시 감독기능인 건설감리 본래의 업무보다 LH공사 출신의 퇴직 직원들을 영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LH공사로부터 업무수주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된다.

 

감정평가사 독립, 쉽지 않다

부동산 가격을 감정평가하는 감정평가사 또한 어떤 면에서는 건설감리의 역할과 비슷한 면이 있다. 감정평가사는 의뢰인(발주자)의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고 감정평가해야 한다. 최대한 적은 보상금을 지급하고 강제수용하려는 사업시행자, 많은 보상금을 받으려는 토지소유자, 많은 대출을 일으키려는 금융기관, 세금을 적게 내려는 상속인 등 특정 목적을 위하여 감정평가가 필요한 이들에게 매우 불편하고 성가신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의뢰인이 국가와 같은 공공기관이든, 은행과 같은 사기업이든, 토지소유자이든 관계없이 가격지표, 데이터를 통하여 시장을 분석하고 자산가치를 평가하여,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 본연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뢰인이 감정평가사를 선정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에 있다 보니, 독립적인 지위에서 공정한 감정평가를 하기 어려운 여건에 있다.

 

때로는 업무수주를 위하여 무리하게 높은 가격을 제시하거나, 특정 목적을 위하여 가격 쇼핑을 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줄타기를 해야 한다. 한 감정평가법인의 대표이사는 자신이 책임질 테니 시세보다 20% 더 높은 가격으로 담보감정평가금액을 결정하라며, 소속 평가사들에게 업무유치를 독려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한 감정법인에서 이런 일을 시작하면 먹고살기 위해 모두 다 그를 따라야한다. 감정평가사간 업무유치를 위한 가격경쟁을 하다 보니, 감정평가전례를 살피다보면 담보감정평가금액이 시세를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정평가가 부동산 이해관계자의 뜻을 반영하면 결국 부동산 투기를 낳는다. 퇴직이 목전인 은행 지점장들은 지점의 실적을 채우기 위해 우량한 고객을 한명이라도 더 확보하고 우량한 부동산을 담보로 한건의 대출이라도 더 취급해야한다. 많은 대출을 받거나 은행을 이용하는 자산가들은 금리에 민감하다. 높게 평가된 부동산 가격은 부동산 소유자들이 많은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하거나 낮은 금리로 대출받을 수 있게 해준다. 고금리의 브릿지론과 PF대출을 취급하는 증권회사는 높은 담보평가를 받을수록 우량한 시행사와 시공현장을 확보하기에 유리하다. 결과적으로 부동산 가격은 이해관계인들 간 수익을 정점으로 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오른다.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은 부동산 소유자에게 현금지급기 역할을 해왔다.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서 대출이 많이 나온 게 아니라, 자산 소유자들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금융기관과 감정평가사가 서로 경쟁하면서 감정가가 높아졌고 그 결과 대출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올랐던 것이다.

 

그로 인해 국민 모두가 부동산 불패신화에 빠져 건물주의 꿈을 꾸게 되었다. 부동산만 소유하면 부자가 된다는 환상에 빠져 있으나 실상 부동산을 소유함으로 인해 따라오는 책임과 위험을 제대로 알고 분석할 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업감정'의 피해, 서민에게로 향했다

감정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 폐해는 서민에게로 향한다. 지난 7월 감정가를 높여 전세사기에 가담한 브로커일당과 전세사기 일당이 요구하는 금액대로 부동산을 평가한 '업감정' 감정평가사 42명이 검찰에 송치됐다. 업감정의 실체는 이런 것이다. 2억 원짜리 빌라가 갑자기 100억 원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25000만 원이 되거나 3억에서 4억 원까지 오르는 일은 왕왕 일어난다. 전체 주택 중 1%도 되지 않는 강남의 20~30억짜리 아파트 뉴스만 줄곧 나오다보니 2억 정도 되는 빌라 가격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안 그래도 부동산 지식과 정보에 어두운 청년과 서민들은 다세대주택가격 3억이 적정한 지 도무지 감이 없다. 2억과 4억은 두 배의 차이가 난다. 20~30억 매매가를 찍는 고가 아파트에, 10억을 훌쩍 넘는 아파트 전세가격 정보만 쏟아지다보니 상대적으로 2~3억의 가격은 하찮게 느껴지는 것이다.

 

멋모르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전세사기 주택에 입주한 임차인들이 많다보니, 부동산 가격은 전세대출과 전세보증, 감정평가 과정을 거쳐서 쉽고 빠르게 오른다. 2억 빌라와 4억 빌라의 차이는 제품의 품질과 부동산의 입지에 따른 이유 있는 격차라기보다는 제도를 통해 가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에 가깝다. 구분소유건물은 거래사례비교법에 따라 평가하는데 유사 부동산의 거래사례 가격과 개별요인의 우열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평가한다. 그러다보니 큰 대출에 의존한 높은 전세가격이 높은 거래가격을 만들고, 높은 거래가격이 다시 더 높은 거래가격을 만드는 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감정평가사는 전세사기집단이나 높은 전세가에 들어가 놓고 보증보험에 가입하겠다고 찾아오는 임차인 의뢰자의 이익에 충실하게 가격을 만들어낸다.

 

전세사기만 업감정이 되었을까. 감정수수료 50~60만 원에 불과한 2~3억짜리 빌라 업감정에 브로커들과 결탁한 평가사들은 대부분 거래처도 경력도 없는 저연차 젊은 펑가사들이다. 전세사기 대상 주택 평가는 여러 감정평가업무 중에서 가장 수익이 적고 위험이 큰 기피업무에 가깝다. 청년들이 전세사기에 내몰렸듯이 감정평가시장에서도 청년 감정평가사들이 전세사기 대상 주택 평가를 많이 했을 것이다. 직업윤리를 잊은 채, 업무실적을 올리겠다는 욕심과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어떤 로직이든 만들어 가격을 맞춰주겠다며 브로커들과 결탁한 젊은 평가사들은 모두 자기들의 선배로부터 이를 보고 배웠다.

 

업감정 문제는 수십 년 누적되어온 감정평가업계의 고질적인 병폐다. 부동산 시장분석과 최유효이용분석, 수익분석을 통하여 공정하고 신뢰성 있는 가치를 산출해야하는 감정평가사가 부동산 가격 올리기 경쟁을 통하여 자본과 자산가들의 이익에 복무해온 결과다.

 

감정평가사가 자산가 이익에 복무한다면

토지보상법은 보상평가 시에 소유자가 직접 감정평가사를 사업시행자에게 추천하는 소유자추천제도를 두고 있다. 보상절차에서 국가에 강제로 토지 등을 빼앗겨야하는 토지 등 소유자들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김대중 정부 당시에 도입되었다. 사업시행자가 일방적으로 보상가격을 결정하여 제시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보상지역 주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시작된 제도이다. 그러나 신도시 개발을 위한 토지보상과 강제수용제도는 무분별하게 도시를 확장하여 구도심을 퇴락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사실상 대토지 소유자들의 자금조달 수단이 되어 자산 양극화를 더욱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도 감정평가사가 자산소유자들의 이익에 복무해 부동산 가격을 더 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보상지역에 소유자추천을 받기위해 영업하러 다니는 평가사들이 많다. 소유자추천 평가사들 중 일부는 터무니없이 가격을 높여 사업시행자 추천 평가사와의 가격 차이를 크게 벌리고 보상감정서가 쓰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한다. 소유자들 중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대부분 많은 토지를 소유한 토지 소유자이거나 자기부동산에 대한 애착과 적극성이 가장 큰 그룹이다. 소유자추천제도 도입 초기만 해도 평가사들 사이에서는 평가사가 소유자들이 원하는 가격을 만들어주기 위한 가격장사꾼이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와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20년 세월 제도가 유지되면서, 결국 감정평가사는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토지소유자 권리보호와 적정한 보상 간 균형을 찾기 위해 감정평가사협회 심사제도 등을 통하여 조정하고 있지만, 책임과 권한의 문제, 비용의 문제가 있어 보완할 점이 많다. 결국 소유자추천제는 소규모 토지소유자나 주택임차인, 상가임차인 권리를 뒷전에 두고,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대지주에게만 유리한 제도로 변질되었다.

 

소유자추천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업시행자가 추천했든 토지소유자가 추천했든, 일방의 이익에 치우치지 않고 면밀하고 정교하게 시장을 분석하고, 데이터를 통하여 공정하고 신뢰성 있는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힘을 감정평가사 스스로 키우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감정평가 과정을 통하여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당사자를 설득하는 과정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갖는 것이다. 개발사업에서 시간은 비용이기 때문에 감정평가절차는 당사자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설득하는 과정 없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된다. 신속하고 편리한 보상이나 대출을 위해서 하루 만에, 심지어 몇 분 만에 평가결과가 나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에는 일부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극소수의 실거래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클릭 한번으로 가격정보를 제공해주는 프롭테크업체들까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진위를 알 수 없는 실거래가, 가격 경쟁으로 높아진 감정가격에 기반한 많은 대출, 이로 인하여 다시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은 가계부채 폭발직전의 사상누각으로 우리 앞에 있다. 우리가 목표와 기준으로 삼아야하는 부동산 가격은 이런 방식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감정평가사는 실거래가와 평가전례만을 기준으로 삼아 감정평가할 것이 아니라, 부동산 시장과 수익을 분석하여 가치를 평가하는 진정한 전문가로 거듭나야한다. 그러나 의뢰인의 이익을 배제하고 평가사가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한다면, 업무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일부 평가사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견제할지, 어떻게 하면 평가사들이 조금 더 충실하고 좋은 감정서를 쓰기 위해 노력하게 만들지에 관한 답이 되는 좋은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기존의 이권카르텔 하에서 촘촘하게 짜여 있는 생태계를 뒤집는 일이기에 기존의 질서 하에서 이익을 누리던 기득권 집단은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쉽고 빠르고 편한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일까?

짓던 건물이 무너지는 참사가 발생하여 귀한 생명을 잃고,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무너지면 무너진 건물이 존재하는 현장만의 문제이지만, 부실한 시스템 하에서 높이 쌓아올려진 부동산가격이 무너지는 것은 국가의 기반을 뒤흔들 재앙을 부른다. 이때 가장 하층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다치기 때문이다.

 

광주 재개발 철거 건물 붕괴 현장에서 구속된 사람은 27세 여성 현장소장과 크레인 기사였다. 발주자인 현대산업개발은 46000여만 원 남짓하는 과징금을 내는 것이 다였다. 부동산 가격 붕괴가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큰 피해에 직면하는 집단 또한 전세사기 대상 주택의 임차인들이었다. 부동산(자산) 가격이 사상누각이 된 데에는 감정평가사가 자산 소유자들과 이를 둘러싼 산업구조, 부동산 이권카르텔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며 이를 감시하고 견제해야하는 본연의 역할을 상실한 것 또한 원인을 제공한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구조가 돈과 이익을 최우선 가치에 두고 적은 비용으로 쉽고 빠르게 건물을 짓고, 부동산 가격을 간편하고 쉽게 쌓아올리는 데만 충실했다면, 최근 나타나는 부실 공사로 인한 사고처럼 반드시 그 후과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후 짧은 기간에 도시와 산업 기반을 만들어야 했고, 급속히 경제 발전을 이뤄야만 했던 당시에는 공정과 신뢰, 안전을 일부 포기하더라도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공정과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탄탄한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위한 비용을 지불해야할 때가 되었다. 이는 부동산 감정평가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뤄야 할 목표다.

조정흔 감정평가사 | 프레시안 2023.08.15.

 

 

맨주먹 100억 부동산 자산가의 욕망이 가족을 망쳤다

이제 앞선 세대가 얻은 부동산 이익을 환수해야할 때

맨주먹으로 출발하여 100억대의 자산가가 된 70대 아버지를 둔 40대 중년 한분이 찾아오셨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건설업과 부동산 투자 등으로 재산을 일구었다. 세 명의 자녀에게 강남, 용산 등 주요 지역의 투자가치 있는 아파트를 한 채씩 사주었다고 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아버지는 역세권의 주요 주택지에 토지를 사서 다세대주택을 올리는 방법으로 임대주택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20~30개호 다세대주택이 있는 건물 몇 개 동을 소유하는 임대주택사업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부동산 투자는 잘 하였는지 몰라도 투자 과정에서 가족의 의견을 묻고, 대화하는 일에는 매우 서툴렀던 모양이다. 30, 40대 중년의 자녀에게 아파트를 사주면서도 투자 내용과 투자 여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였고, 그 대가로 자신에 대한 복종과 효도를 강요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의 부동산 투자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했다. 아버지 덕분에 수십억 대 아파트를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취득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은 독불장군 아버지가 마음대로 결정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주택과 부동산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성인으로서 알아야 할 부동산, 경제 상식이 없이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산에 애착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최근 문제가 생겼다. 최근 금리 상승, 전셋값 하락으로 인해 아버지가 보유한 주택에 들어올 신규 전세 임차인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법 위반 사례도 적발됐다. 신축한 다세대주택은 주차장 규제를 최소화하고, 용적률과 층수 규제를 완화하기 위해 건물별로 몇 개 호수를 '근린생활시설'로 허가받고, 실제로는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위반건축물로 등재됐단다.

 

임차인의 전세금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재투자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간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도 다 한다는 이유로 편법과 불법을 뒤섞어 수익을 극대화했다. 부동산을 늘려갈 때만 해도 아버지는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러나 최근 부동산 시장이 하락 국면에 들자 일부 주택에서 새로운 임차인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이내 자금 경색이 왔다. 계약 만료된 임차인의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게 되고, 위반건축물로 인한 이행강제금까지 부담하게 됐으니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부동산이나 투자에 관심이 없었던 40대 중년의 자녀는 이렇게 골치 아프고 위험한 투자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으나, 그 집은 명목상 자신의 명의로 남아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자녀는 이 상황에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체결한 복잡한 증여, 매매계약서와 공정증서, 임대사업자등록증 등을 들고 와서는 해결 방법을 물었다. 자신의 다른 재산을 처분하거나 새로운 대출을 받아서 임차인 채권자에게 돈을 돌려주는 것 외에는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40대 자녀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한 원망을 쏟아놓고는 갖고 있는 아파트를 매각하여 채무를 해결해야겠다며 돌아갔다. 상담자 가족의 자산 100억 원 중 부채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부동산투자와 소비심리

대한민국의 고도성장기인 1970~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낸 노년층 중에 부동산으로 자산을 축적한 자산가가 많다. 이 시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이들이 수도권에 몰렸다. 급격히 팽창한 수도권은 도시화로 인하여 심각한 주택 부족 문제에 처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주택 건설 붐이 일었다. 이때 부동산 투기도 기승을 부렸다. 당시는 국민소득도 함께 증가하였으므로 좋은 입지의 주택 갈아타기 등을 통하여 자산을 형성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이 시대를 몸소 체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부동산 불패 신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시대를 살아오며 몸소 체득하고, 통용되었던 방법으로 자산을 축적해 부를 대물림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투자에 있어서 자신의 탁월함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이 몹시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자녀에 대한 인정욕구 결핍이 그의 욕망을 멈추지 못하고, 더 많은 투자와 재투자를 유발하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족과 자녀들을 위한다는 신념에 벌인 일이 가족 전체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생겼으니 아마도 아버지와 가족의 사이는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자녀들 자신이 결정한 일도 아닌데 그 책임은 직접 부담할 처지에 놓이게 됐으니, 자녀들의 아버지를 향한 신뢰가 두터워질 리 없다.

 

멈출 수 없는 부동산 등 자산에 대한 투자 욕구, 과시 욕망은 소비 심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투자란 미래에 더 큰 구매력을 얻기 위해 현재의 구매력 일부를 포기하는 행위다. 통상 예금,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실물, 금융자산을 구입하여 보유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소비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유형, 무형의 재화를 소모하는 것이다. , 상품, 서비스, 시간, 노력 따위를 들이거나 써서 없애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투자와 소비는 반대의 의미로 통용되지만, 현재의 소득(구매력)이 미래로 이연되거나 소멸한다는 점에서 둘은 유사하다. 부동산 등에 대한 투자행위를 위해서는 현재의 소득뿐만 아니라 대출을 통한 미래의 소득까지 당겨야 한다. 그런데 이연된 미래의 소득은 불확실성이 크다. 항상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투자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요인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조절할 수 없고, 늘 변동한다. 그러나 고도성장기에 자산을 축적한 노인 세대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경험한 부동산 불패 신화를 신념이자 종교로 신봉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 시기에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과 부딪히고 소통하면서 의견을 수렴해 가고 이에 합의하는, 신뢰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산의 크기를 자신과 남을 비교할 기준으로 삼아, 자산의 크기가 곧 자신의 권위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결국 자신의 존재 이유를 오직 돈으로 증명하려 하니, 경제적 곤경에 처한 이후에는 가족들에게도 외면당해 홀로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EBS 다큐프라임>'자본주의' 편을 보면, 과도한 소비는 불안과 소외감, 슬픈 감정 등으로부터 유발한다고 한다. 과잉 투자(투기)심리도 불안과 소외감, 슬픔 등에 따른 보상 욕구 등으로부터 유발한다.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에 불었던 부동산 투기 광풍의 실체는 더 큰 돈을 벌고 싶은 욕망, 지금이라도 당장 사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 이 투자대열에서 이탈하면 영원히 낙오할 것만 같은 소외감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도 소비심리와 유사하다. 상담자의 아버지는 가족 구성원 간 소통과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일방적이고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부동산 자산을 투자(투기, 소비)하였고, 부동산 자산을 늘려가는 투자(투기)행위를 통하여 소외감과 불안감을 해소해 왔다.

 

부동산은 오랜 기간 한국에서 '불패'의 자산으로 대접 받아왔다. 사진은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토지거래허가제 폐지 촉구 현수막이 걸려있는 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자산기득권의 지대추구 강화와 부동산 불패의 가스라이팅

지금은 철거되어 재건축이 진행 중인 서울 서초구 반포동 32평 재건축아파트의 2022년 실거래 가격 최고가는 59억 원이며, 2023년 최고가는 53억 원이다. 이 아파트 32평형의 1971년 사전 분양가는 500~600만 원이다. 1987년 매매가격은 7000만 원 정도였다. 이 아파트 조합원의 평균연령은 70대라고 한다. 강남권 주요 노후 재건축단지의 소유자(조합원) 연령대 또한 대체로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주거 형태의 중심이 70년대 이후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급속히 변화했다. 특히 이 시기 서울 강남에는 대규모 택지개발이 이뤄졌다. 그 결과 경제성장의 과실이 강남 등 일부 지역의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응집됐다. 지금 강남권 아파트의 소유자들은 이 같은 개발을 통하여 쾌적한 주거환경을 누렸고 자산 증가를 경험했다. 이는 부동산의 위치 선점을 통한 지대추구행위라 할 수 있다.

 

결국 경험적으로 그간 한국은 극단적인 지대추구가 합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대추구를 동경하고,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유지해 왔다. 정치권 또한 앞다투어 사람들의 욕망에 충실한 정책 만들기에 골몰했다. 그 결과가 재건축 규제 완화, 1주택자 양도세 감면 확대, 종합부동산세 및 재산세 감면 등 주택투기로 올릴 소득의 크기를 더 키우는 제도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에서 재건축, 재개발 사업이 지속되는 원리는 기존 토지소유자들의 위치 독점에 따른 지대를 기반으로 부동산 투자(투기) 소비심리를 최대한 끌어올린 뒤 신규진입자에게 최대한 높은 가격으로 이를 팔아 사업성을 확보하는 방식에 있다.

 

부동산 소유자들과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권, 건설자본, 금융자본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끊임없이 부동산 투자 꿈과 환상을 소비하고 있다. 지난 유동성 과잉 시대에 부동산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분석에 기반하지 않은 과잉 투자(투기)가 만연했다. 탐욕과 과잉투자(과소비)가 판을 칠 때 경제는 잠시 활기차게 돌아가는 것처럼보인다.

 

그간 투자 행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산 기득권이 아닌 대부분의 청년, 서민층은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투자를 소비한다.' 소비는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무의식과 감정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지난 수년간 2030들의 영끌 주택 투자, 상가·분양형 호텔·개발지 인근 임야 지분 투자 등 노후 자금을 털어가는 부동산 투자 실패가 이런 사례다. 자산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부동산 공화국의 부동산 불패 신화는 대한민국 다수 구성원의 무의식을 지배해 손쉬운 투자의 그늘에서 가계부채를 부풀려 왔다. 결국 투자에 실패한 이는 자신 또는 가족의 일생을 대부자의 노예로 만드는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리게 됐다.

 

장기 저성장 시대의 시대적 과제

지난 525,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미 우리나라는 장기 저성장 구조로 와 있다""이 문제를 재정, 통화 등 단기정책을 통해서 해결하라는 것은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이라고 지적했다. 이 총재는 투자 대신 저출산, 고령화, 노후 빈곤 문제에 대한 사회적 타협을 강조했다.

 

고도·집약적 경제성장기의 부동산 투자를 향한 시각과 장기 저성장 구조가 고착하는 시기의 부동산 투자에 관한 관점은 달라야 함이 마땅하다.

 

한국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수출 제조산업에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시대에서 벗어나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이후 가계의 소비와 대출에 의존한 부동산 경기부양의 시대를 지나왔고, 이제 그 끝자락에 와 있다. 대한민국 가계부채는 세계 주요 36개국 중 1위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104%에 달해 비교 대상 국가 중 유일하게 부채 규모가 GDP를 넘어선다.

 

그 와중에 인구 감소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고, 잠재 성장력이 고갈되는 장기 저성장 국면에 이미 진입했다. 금리 인상과 긴축의 외부적인 금융환경 변화가 지속될 것으로 예견된다. 돈값이 비싸지니 자연히 국제금융협회 등 여러 금융기관이 심각한 가계부채 문제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부동산 가치가 앞으로 계속 상승할 수 있을까?

 

이창용 한은 총재의 말을 빌려 "장기 저성장 구조를 부동산 경기 부양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이라 말하고 싶다. 저출산과 양극화 문제는 가계부채를 더 키우는 부동산 투자와 개발이 아니라 그간 토지 및 자산소유자가 누려온 편익의 가치를 적절히 평가하고 철저히 환수해 이를 재원으로 삼아 해결해야 한다. 반발이 불가피한 만큼 차분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불평등 해소, 사회적 타협을 위한 합의와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경제 압축 성장기 부동산 투자를 통하여 자산을 축적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음을 명확히 하고 새로운 길을 닦아야 한다.

 

그간 소수의 부모 세대는 부동산 투자를 통하여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녀의 자녀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 빈곤해지는 역설에 처했다. 결국 한정된 재화로 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 그들이 불공평하게 축적한 부동산 자산을 정상화하는 시기다. 부동산에 과도하게 낀 거품을 걷어내고, 우리 사회를 기초부터 다시 다져야 할 때다.

조정흔 감정평가사 | 프레시안 2023.06.09.

 

 

현타’ - 눈떠보니 후진국 6

온 국민이 마음 졸이던 ‘2023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끝났다. 잼버리에서 드러난 윤석열 정부의 무계획·무능·무책임은 이젠 놀랍지도 않다. 다만 내심 이젠 우리도 선진국이라며 자긍심을 갖던 국민들이 하루아침에 시시포스가 된 듯, 과거로 되돌아간 듯 허망한 느낌을 갖게 됐다. 길에서 잼버리 대원들을 만난 시민들이 미안하다며 생수와 아이스크림을 선물하는 것도 이런 심사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후진성은 사태 수습 과정에서 더 도드라졌다.

 

전시 국가 동원령을 연상시킬 만큼 기업·대학 등 민간 부문이 자산과 서비스를 집중 투입해야 했다. 과정도 전격의 연속이다. 갑자기 콘서트 날짜와 장소를 바꾸고, 출연을 취소했던 아이브가 잼버리 대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예정된 다른 일정을 접고 출연하고, 콘서트 날짜에 열릴 예정이던 한국방송(KBS) ‘뮤직뱅크가 취소되면서 애초 참가 예정에 없던 뉴진스도 이 콘서트에 참가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예정에도 없던 대규모 행사를 치르기 위해, 태풍의 북상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행사 전날에도 무대를 준비했다. 국난 극복을 위해 온 국민이 총화단결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분투하는 모습이었다. 문체부는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상품과 방탄소년단 포토카드 등이 들어 있는 콘서트 리멤버 키트를 스카우트 대원 43천여명 전원에게 선물했다. 하이브가 8억원, 카카오가 10억원을 지원했다 한다. 문체부는 자발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동등하게 비교할 차원은 아니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도 미르재단과 케이(K)스포츠재단에 국내 40여개 기업이 774억원을 자발적으로출연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런 상황을 두고 위기관리 대응 능력을 보여줬다고 했다. ‘위기를 만든 건 정부고, ‘대응 능력은 온 국민이 보여줬다. 참 손이 많이 가는 정부다. 정부가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부를 걱정해야 한다.

 

어떤 나라 정부를 후진적이라 평가할 때는 해당국 경제 수준 외에도 국가 운영이 체계적이지 않고, 주요 결정이 독단에 의해 즉흥적·비공식적으로 내려지고, 과정이 불투명하고,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 때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후진성은 호우 피해 실종자 수색 명령을 수행하다 숨진 채수근 상병 사건 수사 과정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해병대 수사단은 구명조끼도 없이 급류에 병사들을 투입한 데 대해 임성근 해병대 제1사단장 이하 8명에게 과실치사 혐의 결론을 내리고, 730일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뒤집어졌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장관 지시라며 보류하라고 했는데, 수사단이 이를 어기고 82일 경북경찰청에 수사 결과를 이첩했고, 이에 군검찰이 박정훈 수사단장을 집단항명 수괴혐의로 입건했다는 게 국방부의 주장이다. 박 수사단장 말은 다르다. 사령관에게 이미 (7)28일 유족에게도 설명된 상태라 유족들이 반발할 수 있다며 경찰이 판단하도록 하는 게 낫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사령관은 어떡하지, 어떡하지라며 결정을 못 내렸다고 주장한다. 또 박 수사단장은 국방부가 직접적 과실이 있는 사람’(대대장 이하)으로 (혐의를) 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방부는 초급 간부에게까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건 과하다며 정반대 얘기를 한다. ‘대대장 이하이상중 어느 쪽이 처벌받는지를 보면, 누구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부 8명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과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결재 단계에서 언급할 일이다. 또 현장과 마찰이 빚어진다면 문서로 근거를 남겨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게 옳다. 그런데 구두로, 전화 통화로만 한다. 진실 공방을 벌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장에서 알아서 처리해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총체적 비겁이다. 박 수사단장의 항명이 아니라, ‘외압 의혹을 수사해야 한다. 그게 선진적이고, 그 반대가 후진적이다.

 

마지막으로, 14일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 특별사면은 후진성의 정점이다. 대법원의 유죄 확정판결 3개월 만에 행정부가 뒤엎었다. 사법부 판단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행정부가 법원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대놓고 무효화하는 건 민주주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허무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총통제를 원하는가.

 

눈 떠보니 후진국이다. 국민들이 정부 말을 잘 안 듣고, 법원이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언론이 정부가 원하는 대로 기사를 쓰지 않는 것. 그게 선진국이고, 그게 자유.

권태호 | 논설위원실장 한겨레 : 2023.08.15

 

 

윤석열 정부에 법치주의를 묻는다

198587일 영국에서 모든 방송 뉴스가 블랙아웃이 됐다. 전 세계 시청자를 가진 BBC뿐 아니라 독립방송기구(IBA) 소속 지역방송 매체와 라디오 뉴스 전부 중단됐다. 검정색 화면엔 노란 활자의 문구가 떴다. 전국의 신문과 방송 조합에 속한 회원의 파업으로 인해 예정된 프로그램을 보내드릴 수 없어 사과드린다는 메시지였다.

 

당시 영국 미디어 종사자들 파업은 BBC 보도 독립성이 침해당한 일에서 비롯됐다. BBC TV는 북아일랜드 지역 분쟁을 다루는 45분짜리 다큐멘터리 방영을 앞두고 있었다. 방송 내용 중 아일랜드 공화군 간부의 인터뷰가 문제가 됐다. BBC는 갈등 당사자 인터뷰 통해 분쟁의 배경을 다루려고 했지만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공화군의 테러를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고 반발했다. 이에 레온 브리튼 내무장관은 BBC 이사장에게 해당 프로그램 방영을 우회적으로 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BBC 이사회는 회의를 열어 내무부장관 요청을 수용했다.

 

하지만 BBC 운영위원회는 이사회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을 냈고, 이에 동조한 기자 노조 등이 파업에 돌입했다. BBC 이사회를 운영위원회가 견제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기에 가능했다. BBC 이사회는 방송 운영과 편성, 사업 정책 등을 관리 감독하지만 실질적인 집행 책임자는 총국장이다. 총국장 산하엔 각 분야별 운영위원회가 있다. 다큐멘터리 방송 내용에 대한 편집은 전적으로 총국장의 권한에 속하는데 정부 고위 관료가 방송 내용을 사전 심사한 것은 편집권 침해에 해당된다는 것이 운영위원회 의견이었고 이사회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한 것이다.(참고-박권상 언론학_공영방송의 모범생 BBC)

 

결국 내무부장관은 검열은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24시간 파업은 마무리됐다. 영국 BBC 사례의 교훈은 방송의 관리 감독 권한이 있는 이사회가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한을 행사할지라도 BBC 구성원의 뜻에 반하고 특히 그 뜻이 방송 독립성에 관한 것이라면 그 결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데 있다.

 

한국의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있는 법마저도 지키지 않는다. 방송장악 논란의 장본인인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는 법 해석에 따라 자격 시비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설치법 10(결격사유) 16호에 따르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의 신분을 상실한 날로부터 3년이 지나지 아니한 사람에 대해선 위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동관 후보자는 불과 1년 전 인수위 활동을 한 사람이다. 인수위 고문이었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해당 조항은 방송통신 정책 수립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배제해야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인수위 활동이 방통위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으니 그 활동을 한 사람을 배제하라고 했는데 버젓이 그 사람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것이다.

 

KBSMBC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에 대한 해임도 법률을 위반하거나 절차를 건너뛰고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를 하고 있다. 한달 전 일사천리로 해임 처리된 윤석년 KBS 이사의 경우부터 잘못 꼬였다. 방통위는 윤 이사가 TV조선 재승인 심사 점수 조작 의혹 혐의로 구속기소된 것에 대해 국민 신뢰를 저하시켰다고 해임 사유를 밝혔는데 방송법은 방통위의 권한으로 KBS 이사 추천을 규정하고 있지만 해임 규정은 나오지 않는다. 이사 결격사유 규정으로 보면 국가공무원법상 결격 사유, 즉 금고 이상 형 집행유예를 받거나 형이 확정된 경우이지만 윤 이사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권태선 MBC 방문진 이사장 역시 여러 해임 사유를 들고 있는데 방통위의 방문진 감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방통위가 방문진을 감사할 수 있다는 권한도 있기 어렵다는 유권해석이 나온 바 있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법치주의는 무기로 휘둘렸을 때만 한정된다. 최근 이동관 후보자가 YTN 방송사고에 대응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흉기난동범이 유가족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는 리포트 배경화면에 이동관 후보자를 내보낸 건 분명 잘못이다. 그런데 이 후보자는 실수가 아닌 고의이며 흠집내기성 보도의 연장이라고 주장하면서 민형사상 고소 고발을 예고했다.

 

YTN이 고의로 생방송 방송사고를 일으켜 얻을 게 뭐가 있나. 이동관 후보자가 방송사고를 빌미로 YTN를 길들이려고 하는 목적이 뻔히 보인다. 앞으로 YTN의 공적 검증 보도까지도 방송사고를 일으킨 불순한 의도의 횡포로 규정하고 YTN를 악마화하려는 프레임의 기술을 건 것이다. ‘역대급 방송사고라고 YTN를 몰아세웠지만 그 주장은 이동관 후보자에 역대급 방송장악 기술자라는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방송 독립성 훼손 문제 그리고 법과 원칙 문제는 이동관 방통위원장 후보자를 끝까지 따라다니는 족쇄가 될 것이다. 언론을 찍어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역대급 방통위원장이 치러야 할 대가는 클 수밖에 없다.

사설 미디어오늘 2023.08.15

 

 

사람 대신 돈·권력에 눈먼 무속 정치의 끝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말년의 자서전 첫 문장에서 자신의 일생을 한마디로 규정했다. “내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융은 스승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무의식 해석을 놓고 견해가 갈려 결별했다. 융이 본 무의식의 심층엔 집단무의식이 있었다. 그 집단무의식의 핵을 이루는 것이 인류의 원형적 자아인 자기. 표면의 자아가 집단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자기와 만나 합일하는 것을 두고 융은 자기실현이라고 불렀다. 융의 분석심리학을 떠받치는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융은 그 자서전에서 대학 3학년 때 겪은 일을 소개한다. 가까운 외가 사람들이 15살쯤 된 소녀를 영매로 삼아 여는 강령술 모임에 융을 초대했다는 얘기다. 그 모임에서 융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벽이나 탁자를 두들기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영매가 혼령의 목소리로 전하는 기이한 말을 듣기도 했다. 강령술 모임은 2년쯤 이어졌는데 융은 거기서 벌어진 일을 자세히 관찰해 뒤에 의학박사 학위 논문(‘이른바 신비주의 현상의 심리학과 병리학에 관하여’)으로 제출했다.

 

융은 자서전에서 그 일을 아주 간략히 소개하고 영매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기술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영매는 융과 가깝게 지내던 여섯살 아래 외사촌 여동생 헬레네 프라이스베르크였다. 강령술 모임도 융이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 시작돼 대학 시절 내내 계속됐다. 융은 그 모임의 핵심 참여자였다. 강령술 모임이 열릴 때마다 헬레네는 망아 상태에서 죽은 할아버지(융의 외할아버지) 자무엘 프라이스베르크의 목소리로 말했다. 히브리어 학자였던 할아버지처럼 히브리어를 쓰기도 했다. 브라질로 이민 간 언니가 피부가 검은 아이를 낳는 환상을 보기도 했는데, 이 환상은 나중에 사실로 확인됐다. 다른 언니가 곧 기형아를 낳을 것인데 아기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도 했다. 영매 말대로 두달 뒤 언니가 기형아를 낳았고 아기는 곧 죽었다.

 

혼령을 만나는 일은 융의 외가에서 흔한 일이었다. 융의 어머니 에밀리도 자주 혼령과 대화했고 여동생 트루디도 가끔 헬레네를 대신해 영매 노릇을 했다. 헬레네는 집안 여성들 가운데 특별히 뛰어난 영매였을 뿐이다. 프라이스베르크 집안에 영매 전통을 끌어들인 사람은 융의 외할머니 구스텔레였다. 18살 때 구스텔레는 성홍열을 앓던 오빠를 간호하다가 기이한 일을 겪었다. 당시 성홍열은 전염력이 강한 치명적인 병이었다. 구스텔레는 오빠를 돌보던 중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 왕진 온 의사는 구스텔레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집안사람들은 구스텔레가 죽었다고 생각해 관에 넣고 장례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머니가 뜨거운 인두로 목덜미를 지져대자 관 속에 누워 있던 딸이 눈을 떴다. 죽을 뻔하다 되살아난 것인데, 그때부터 구스텔레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미래의 일을 예언했다. 융은 영매 헬레네의 사례만이 아니라 외할머니에게서 시작된 집안의 모든 신비 현상을 자료로 삼아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개인의 의식 심층에 자리 잡은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은 이 박사 학위 논문의 원천이 된, 융 집안의 특이한 경험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융 집안의 이 신비 현상은 더 넓은 종교사의 시야에서 보면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다. 20세기 종교학의 거두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샤머니즘 연구서에서 샤머니즘의 핵심을 엑스터시, 곧 망아 상태에서 겪는 접신 체험이라고 설명했다. 샤머니즘 현상은 유라시아·남북아메리카·오세아니아를 포함해 세계 전역에서 발견된다. 라스코 동굴 벽화에도 접신 체험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최소 25000년 전 구석기시대에 샤머니즘 전통이 확립됐음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샤머니즘이 가장 강력하게 그리고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일대다. 샤먼이라는 말도 이 시베리아 퉁구스족의 강신무를 가리키는 말에서 나왔다.

 

퉁구스족·브리야트족·야쿠트족 같은 부족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샤머니즘은 죽음과 재생의 입문 의례(initiation cult)’를 핵심으로 한다. 강신무, 곧 샤먼이 될 사람은 청소년기를 전후해 심대한 정신적·육체적 위기를 겪는다. 요컨대 지독한 신병(무병)을 앓는다. 환영을 보고 숲과 들을 헤매고 히스테리와 정신착란을 겪다가 나중에는 앓아눕게 된다. 신에게 선택당한 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시험이고 시련이다. 신이 들린 자는 짧으면 사흘, 길면 아흐레 동안 죽음과 같은 혼수상태에 빠진다. 아예 숨을 쉬지 않아 장례를 치르는 경우도 있다.

 

그 몽환 상태에서 접신자는 자신의 몸이 해체돼 합쳐지는 절단 체험을 하고 신령과 함께 천상과 지옥을 다녀온 뒤에야 깨어난다. 신병이라는 시험 속에서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겪고 ()의 인간에서 ()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신에게서 특별한 능력을 받은 샤먼은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의 혼을 저승으로 안내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린다. 샤먼은 신과 인간 사이 중개자가 된다. 엘리아데는 그렇게 태어난 샤먼이 공동체의 통합을 이끄는 구심점 노릇을 하며 죽음·질병·불모·흉사에 맞서 생명·건강·다산·풍요를 지킨다고 말한다.

 

한반도의 무교는 이 고대 샤머니즘의 변형이다.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속인이 바로 옛 샤머니즘의 유구한 전통을 잇는 오늘의 샤먼이다. 무속인들 사이에 전해 오는 바리데기 신화시련-죽음-재생의 고전적인 샤머니즘 드라마를 보여준다. 오구대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나 버려진 바리는 열다섯살이 돼 부모를 만나고, 저승세계로 가 온갖 고난을 겪고 생명수를 구해 돌아와 죽을병 걸린 부모를 살려낸다. 바리데기 신화는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샤머니즘 신화의 변형이다. 타타르족의 용감한 소녀 쿠바이코는 괴물에게 목이 베인 동생의 머리를 찾아 지옥으로 간다. 지옥의 왕 앞에 선 쿠바이코는 왕이 내린 시험을 이겨내고 동생의 머리를 되찾아 돌아온다.

 

흔히 무속 신앙을 두고 윤리성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순전한 기복 신앙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고도로 조직된 윤리적 체계가 없을 뿐 무속에도 엄연히 윤리학이 있다. 바리데기 신화에서 부모를 살려낸 바리는 오구대왕에게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아니면 재산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말을 듣는다. 바리는 부와 권력을 뿌리치고 믿었던 부모와 세상에 크게 실망했으니 상처 입은 영혼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치료자의 삶을 살겠다고 답한다. 세속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영혼을 구제하는 만신 곧 무당이 된다는 결말이야말로 이 신화의 윤리성을 보여준다.

 

우리 샤머니즘의 원류인 풍류도 마찬가지다. 신라 말기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고 쓴 뒤, 이 풍류가 ··3교의 가르침을 모두 포함하고 있고 이 풍류의 가르침으로 민중을 교화한다고 했다. 유교·불교·도교의 고등한 윤리적 체계가 들어오기 전에도 풍류의 도가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적 기둥 노릇을 했다는 얘기다. 우리 시대의 만신 김금화(1931~2019)는 생전에 낸 자서전을 만신이 된다는 것은 뭇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고통을 숱하게 참아내는 것이다는 말로 시작했다. 김금화는 이런 말도 했다. “사람도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듯이 무당도 좋은 무당과 나쁜 무당이 있다.” “큰무당이 되려면 나를 버려야 한다. 가슴 속의 아픔, 시련, 연민을 내버리고 다른 이의 고통을 살피고 위로하는 데 정성을 쏟아야 한다.” 김금화는 자신의 삶을 후려친 고통과 고난의 기억을 삭여 뭇사람의 상처를 돌보았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실향민으로 산 김금화는 분단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여겨 북녘땅이 내다보이는 임진각에서 통일맞이굿을 하기도 했다.

 

무속 정치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종교가 정치에 관심을 두듯 무속도 정치에 관심을 둘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심의 내용이다. 다른 종교가 그렇듯이 무속은 사람의 얼을 정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혼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150명이 넘는 목숨이 원령이 된 이태원참사를 두고 한국 외교에 큰 기회가 왔다고 말하는 무속인은 얼을 살리는 무속인이라고 할 수 없다. 무속 정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과 권력에 눈이 먼 무속 정치가 문제다. 정치에 기웃거리는 무속이 사람을 돌보지 않고 재물을 돌보면 나라를 망친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한겨레 2023.08.16.

 

 

윤송합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훌륭하게 치러낸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국민과 외신의 질문에 우리가 찾는 답의 절반이 숨어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도 치렀는데, 애들이 와서 텐트 치고 노는 잼버리쯤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오만과 복지부동, 불통과 이기주의가 중앙과 지방 가릴 것 없이 전국의 공직 사회에 퍼져 있는 것이다. 책임있는 사람들은 사과하지 않고 국민들이 대신 잼버리 대원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사태의 정점에 사과와 반성을 모르는 윤석열 대통령의 무오류주의 리더십이 있다. 윤 대통령의 무오류주의는 권한(수사권과 기소권)을 행사하되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 한국의 기형적인 검찰 제도가 만들어낸 신념 체계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시정하지 않고, 시정하지 않으니 반복된다. 그의 사전에는 책임이나 의무라는 단어는 없고 권한과 명령만 있다. 본인이 이러니 부하들한테도 책임지라고 요구하지 못한(않는). 이태원 참사의 행정적 책임자 이상민과 윤희근이 여전히 행정안전부 장관과 경찰청장이고, 빨간 옷이 잘 보이게 입수하라고 지시한 해병대 사단장은 수사 대상에서 제외하는 이유다. 현장에 가보지도 않았던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폭염과 태풍 대책도 다 세워놨다고 당당하게 말해놓고, 행사가 이렇게 망가졌는데도 위기 대응 역량을 보여줬다며, 정신승리할 수 있게 하는 든든한 백이 대통령이다. 검찰의 고질병인 제 식구 봐주기의 행정부 확장판이다.

 

편가르기 좋아하는 윤 대통령은 우리 편의 결백을 상대 편의 유죄로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전라북도와 전 정권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정부여당의 행태로 보아, 잼버리 사태에 대한 감사와 수사도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한다. 사법의 정치화로 정권을 잡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정치의 사법화는 절정에 이르렀다. 직무에 관한 결정조차 수사의 대상이 되면서 공직 사회의 복지부동은 일상이 됐다. 잼버리 사태의 저 깊은 곳에, 사후 책임에 대한 공무원의 공포가 똬리를 틀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해봤자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불통과 불신의 문화도 한몫 했을 것이다.

 

잼버리 파행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폭염과 배수 대책 미비의 책임도 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윤 대통령에 이르게 된다. 행사 두 달 전 잼버리 조직위원회가 100억원에 가까운 긴급예산을 요청했으나 대부분 묵살된 배경에 윤석열 정부의 부자감세와 긴축재정이라는 이념적 경제정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건전재정이란 세출이 세입을 초과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데, 무리한 감세로 세입을 줄여놓고 건전재정을 지키려니 지출도 줄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경제정책도 양두구육이다. 올해 들어 6월까지 정부 총수입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381천억원 줄었는데, 같은 기간 총지출은 577천억원이나 감소했다. 세수 펑크 사태에 놀라 수입보다 지출을 더 크게 줄이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때도 늘렸던 연구개발(R&D) 예산을 20~30% 삭감하겠다는 정부의 통보를 받았다고 과학기술계는 말한다.

 

지지세력에 대한 보은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위한 감세인지 이 정부는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세금을 줄여 경제를 살린다는 낙수이론의 허구성은 세계적으로 증명된 지 오래다. 그러는 사이 올해 경제성장률은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보다도 낮아질 가능성이 커 보이고, 경제규모는 2021년 세계 10위에서 지난해 13위로 내려앉았다. ‘고의에 의한 무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창피를 당한 행사를 수습하려고 케이팝을 동원한 임기응변도 윤 정부다웠다. 수출이 9개월 연속 줄고 있는데도 반도체만 쳐다보는 정부의 안이한 태도는 마치 반도체를 경제의 케이팝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국 반도체가 세계 최고라는 생각도 오만이고 착시다. 한국이 세계 1위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는 전체 반도체 시장의 3분의 1도 안 되고,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인공지능(AI) 산업과 함께 시스템(비메모리)반도체의 비중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민간이 알아서 키운 케이팝과 달리 반도체 산업의 성과는 정부와 기업, 학계의 공동 노력으로 이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3의 반도체를 발굴하기 위해서라도 연구개발 예산을 줄이면 안 된다.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희망하지만, 만약 우리가 여기서 중진국으로 주저앉게 된다면, 그것은 대통령과 여당이 저주하는 강성노조망국적 복지병도 아닌 축소지향의 경제정책에서 비롯했음을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대통령 입만 쳐다보는 아부형 관료들로 가득 찬 이 정부에 이런 쓴소리를 전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보수가 갈수록 무능해지는 건, 커지는 욕심에 반비례하여 열정과 애국심은 작아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부패했지만,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은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적어도 국민 눈치를 보고 사과할 줄은 알았다. 이렇게 뻔뻔하고 애국심 없고 무능한 보수는 처음이다. 잼버리 대원들에게 국민들이 대신 사과했듯이, 쪼그라든 경제를 이어받을 후손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윤송합니다(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아 죄송합니다).’

이재성ㅣ 논설위원 한겨레 2023.08.17

 

 

스톱! 무너지는 얼음의 강

 

아르헨티나 페리토 모레노 빙하. 게티이미지뱅크

 

후끈하게 달궈진 여름 공기에 갇혀 머릿속까지 엉키는 기분이 들 때면, 커다란 빙하를 스쳐 오던 그 차갑고 냉랭한 바람을 상상한다. 적도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지구 반대쪽, 남반구를 널찍하게 차지한 아르헨티나는 색다른 것을 보고 싶다는 여행의 1차적인 욕망을 가장 크게 충족시키는 나라다. 우리와는 정반대의 계절, 정반대의 자연. 특히나 남극을 향해 뻗어가는 아메리카 대륙의 끄트머리, 펭귄을 볼 수 있는 아르헨티나 최남단의 마을 '우수아니아'와 살아 움직이는 대륙빙하의 탐험지 '엘 칼라파테'(El Calafate)가 자리 잡은 파타고니아 지역은 '지구의 끝'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크나큰 빙하를 품고 있어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듯한 황량한 도시 엘 칼라파테. 거센 바람과 잔뜩 찌푸린 날씨 때문이었을까?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러 가는 버스에는 왠지 모를 비장함마저 흘렀다. 빙하를 움직이지 않는 얼음 산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많지만, 빙하(氷河)는 천천히 움직이는 '얼음의 강'이다. 먼 옛날 바다 아래 땅이 치솟아 4,000m 높이의 안데스 산맥이 되고, 그 고원으로 태평양의 습기가 눈이 되어 내리고, 녹지 않고 한없이 쌓인 눈덩이는 얼음으로 바뀌어, 주체할 수 없이 무거워진 얼음덩이가 점점 아래로 이동하는 것이 페리토 모레노 빙하다.

 

 

이렇게 매일매일 자라는 얼음이 하루에 2m 정도. 그 길이만큼 고원 아래 호수 쪽으로 밀려난 빙하 가장자리는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바다의 물이 산의 눈이 되고 빙하의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호수의 물로 돌아가는 거대한 물의 순환. 수만 년에 걸쳐 이어지는 자연의 흐름이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갈 수 있는 빙하와 가장 가까운 곳, 빙하를 마주 보는 전망대 난간에는 이미 사람들이 대롱대롱 일렬로 섰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높고도 광대한 빙하는 빛에 따라 무한한 흰색이었다가 깊은 푸른색이었다가 번쩍하고 에메랄드 빛을 머금는다. 호수 건너인데도 고개를 들어 올려봐야 하는 수십 미터 높이의 얼음 장벽이 끝도 없이 이어지니 스멀스멀 전망대를 덮칠 듯 압도적이다.

 

 

아르헨티나 페리토 모레노 빙하. 게티이미지뱅크

 

크르르르릉! 하염없이 빙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시간이다. 수만 년 전 생겨난 얼음이 마침내 사람들 눈앞까지 밀려나 무너져 내리는 순간,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는 천둥 치듯 호수에 울려 퍼진다. 장엄하다는 말이 더 맞아 보였던 빙하 얼음으로서의 마지막 순간. 숨죽여 이때만 기다리던 여행자들은 또 다음의 수만 년 전 얼음을 기다리는 무언의 명상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내내 더웠던 이번 여름, 지나온 기억만으로도 콧속 깊이 찬바람을 일으키던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무서운 속도로 녹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 2년 동안 줄어든 길이가 무려 700m. 1998년부터 2019년까지는 연평균 1m가량 줄었으니 녹는 속도가 350배나 빨라진 셈이다. 스위스 알프스에서도 눈과 얼음 밑에서 보이지 않던 실종자들의 유해가 나오는 사례가 잦아졌다. 1986년 실종된 독일인 등반가도, 1968년 추락한 경비행기 잔해도 얼마 전 빙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기후변화에 빙하가 녹아내린 탓이다. 이렇게 자연이 애써 가려주던 인간의 어둠이 낱낱이 드러난다. 슬프게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또 사라져 간다.

전혜진 여행작가 한국 2023.08.17.

 

 

쉽게 사고 버리는 세상, 수리하죠

칼이 잘 들어서 삶의 질이 높아졌다. 토마토를 썰다 말고 벼려진 칼날에 감탄한다. 나 지금껏 토마토도 안 썰리는 무딘 칼로 어떻게 밥해 먹고 살았니? 칼 갈아 쓰는 일은 고물 주면 엿 바꿔주는 시대에나 하는 줄 알았다. 그런 내가 칼 갈 결심을 한 이유는 동네에 칼 갈아요업체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칼 가는 시간은 고작 1분이었으나 소독약 트럭 뒤꽁무니를 쫓는 동네 아이들처럼 온갖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옆 정자에는 대여섯 명이 모여 구멍 난 양말을 프랑스 자수로 수선하는 중이었다. 전 애인이 사줬는데 같은 동네라 당근할 수도 없어 한동안 방치했던 자전거도 등장했다. 휴대전화의 깨진 액정과 배터리 교체까지 최첨단 수리도 진행됐다. 몇년 전 망원시장에서 비닐봉지 없이 장보기를 시작한 알맹이만 찾는 자(알짜)’들은 양말·선풍기·자전거·휴대전화 등을 고쳐보자며 수리수리다수리를 선보였다.

 

보통 수리라 하면 전자제품을 서비스센터에 맡기는 일로만 생각한다. 수리는 보증기간 내 업체가 물건을 고쳐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리권은 애초 제품을 쉽게 수리할 수 있게 만들고, 사용 기한과 수리하는 방법을 제공하고, 관련 부품을 구비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리할 권리를 내놓고 대신 싸게 사고 쉽게 버리는 길에 들어섰다.

 

물건은 원료 생산부터 유통과 폐기까지 지구에서 원료를 취하고 지구에 쓰레기를 남긴다. 쌀 한 톨에 온 우주가 들어 있듯 물건 하나에도 온 지구가 들어 있는 셈이다. 유럽환경국(EEB) 조사에 따르면 휴대전화를 1년 더 사용하면 2030년까지 매년 210t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든다. 이는 해마다 약 100만대의 자동차가 내뿜는 이산화탄소 양과 맞먹는다. 국내에서 발생하는 연간 전자폐기물 양은 1인당 약 15.8인데 이는 세계 평균보다 2배 이상 많은 양이다. 반면 재활용되는 전자제품은 17.4%에 불과하다.

 

얼마 전 프랑스에 다녀온 알짜가 판매 중인 전자제품 사진을 보내왔다. 제품 아래 빨간색 혹은 녹색 톱니바퀴와 10점 만점에 몇 점인지 숫자가 있었다. 수리가 쉬운 제품은 녹색에 높은 점수를, 어려운 제품은 빨간색에 낮은 점수를 받는다. 프랑스는 5년 내 수리가 가능한 제품을 60%까지 높인다는 목표를 세우고 수리 등급을 의무적으로 표시하게 했다. 전자제품·장난감·가구·의류 등에 부담금을 부과해 이를 제품 수리비로 지원한다. 제품 사용 기간이 길수록 쓰레기와 온실가스도 줄지만 새 상품보다 수리비가 비싼 경우가 많아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호주에선 사설업체에 수리를 맡긴 적 있어도 공식 대리점에서 수리를 해줘야 한다. 반면 자가 수리 시 아이폰은 정품 부품을 사용해도 확인되지 않는 부품이란 경고가 뜨고, 삼성은 무상 수리 서비스에서 제외한다.

 

하지만 기업이 나서 새 모델을 만들기도 한다. 조명회사 오스람은 소비자가 조명을 사용하는 시간을 측정해 그 시간만큼 이용료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미국 발명가 버크민스터 풀러는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면 기존 모델을 구식으로 바꿀 새 모델을 만들라고 했다. 기업이 물건을 빨리, 많이 팔아치우는 것보다 물건을 오래 쓸수록 돈을 버는 사회라면 얼마나 좋을까. 쉽게 사고 버리는 세상을 얼른 수리하지 않으면, 우리 자체가 수리가 안 되는 멸종한 종이 될지도 모르겠다

고금숙 플라스틱프리 활동가 경향 2023.08.17.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자

학창 시절 영어 수업이 그나마 덜 지루했다. 팝송 가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가 공부의 따분함을 덜어줬다. 한덕수 국무총리만큼의 영어 학습 의욕은 없었던지 성적은 그냥저냥이었다. 그 시절 내가 만난 영어 선생님들은 좋은 분들이었지만 영어 발음은 안 좋았다. 독일어 시간으로 혼동할 만큼 경직된 영어 발음으로 학우들을 절망케 한 선생님을 기억한다. 고약한 발음이었음에도 정확한 억양을 중시하며 큰소리로 따라 읽게 했다. 선생님의 문법 설명은 탁월해 발음 장애를 상쇄할 만했다.

 

급진적으로 풀이되는 형용사 ‘radical’ 어원은 뿌리에 있다. 뿌리의 다른 말은 근본이다. 본원적인 것에 매달리면 유연성을 잃는다. 그리하여 근본주의자들은 급진적이다. 근본과 급진은 트윈스다. 두 유 언더스탠드?

 

선생님은 인문학적 해석 말고도 수량형용사 ‘a few’‘few’의 차이를 설명할 때는 심리학을 동원했다. 같은 수를 셈하면서도 화자에 따라 몇 개 있다거의 없다로 표현될 수 있다. 없어진 것에 불만인 사람보다는 남은 것에 주목하는 사람이 속 편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한 학생이 어 퓨이기를 바란다며 수업을 마쳤다.

 

운 좋게 영어를 쓸 기회 없이 세월이 흘렀다. <어 퓨 굿맨>은 잊었던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 영화였다. 헷갈리던 수량형용사의 용법을 정리해준 선생님 덕에 영화가 몇명의 좋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예측할 수 있었다. ‘어 퓨 굿맨소수 정예군을 선발한다는 미 해병의 모병 선전 문구에서 따온 제목이다.

 

영화는 쿠바 관타나모만의 미 해병 기지에서 발생한 사병 살해 사건을 다룬 법정 드라마다. 해병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병사가 동료의 불법행위를 상부에 고발한 후 살해당한다. 피고 병사들을 변호하던 군법무관들은 윗선이 관여한 심증을 굳힌다. 최고 윗선은 기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제섭 대령(잭 니컬슨)이다. 군기 강화를 목적으로 해이한 병사를 체벌하는 음성적 관례법 코드 레드가 용인되고 있었다. 살해당한 사병은 내부의 적으로 응징된 것이다.

 

<어 퓨 굿맨>의 절정은 제섭 대령과 군법무관 캐피 중위(톰 크루즈)와의 법정 설전 시퀀스다. 셰익스피어가 시나리오를 쓴다면 <어 퓨 굿맨> 원작자인 소킨처럼 쓸 것 같다. 무엄한 비유라면 적어도 소킨은 셰익스피어 수준에 근접했거나 모방에 성공했다. 정밀히 구축된 갈등이 아슬하게 비등점을 향하고, 인물의 내면을 칼날 같은 대사로 시각화한다. 펀치라인의 빈도는 잦고 울림은 둔중하다.

 

제섭 대령은 베테랑 장교의 위엄으로 법정을 압도한다. 불굴의 상무정신과 불타는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애송이 중위 등 재판장에 모인 군인들을 훈도한다. 대령은 법무관 캐피에게 목숨을 맡기거나 맡은 적이 있냐고 묻고는 해병대는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국민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타이른다. 최전방의 긴장을 감내하는 자신 같은 군인이 있어 너희들이 단잠을 이룬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물러가라 명령한다. 제섭의 서슬에 잠시 주눅이 들었던 법무관 캐피는 용기를 내 진실을 요구하지만 제섭은 너는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라 포효한다. 국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급 병사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지휘관의 통절한 웅변. 대령이 펼치는 논리와 절규에 잠시 설득된다. 삼엄한 전방 기지에서 미 해병대가 원한 굿맨(정예 군인)’은 제섭 대령일지도 모르겠다. 소킨은 굿맨을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본분에 철저히 복무하는 자,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감당해내는 자가 정예 군인이고, 다행히 몇명은 있다는 긍정이 영화의 주제다.

 

귀신 대신 생사람 잡는 해병대라는 불명예로부터 해병대를 지키려는 박정훈 대령. 이 정예 해병이 외압을 견디고 끝까지 진실을 감당해주기를 바란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경향 2023.08.17.

 

 

아직도 갈 길 먼 대기업 ESG 보고서

ESG 보고서란 기업의 경영활동 중 환경(E), 사회(S), 거버넌스(G) 등 비재무적 활동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보고서다. 기업의 일상적인 사업활동은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같은 재무제표상의 숫자로 사후에 사업보고서를 통해 공개된다.

 

최근 들어 기업의 경영환경은 갈수록 예측 불가성이 심화되고 있다. 수익을 잘 내기 위해서는 위험 요인을 사전에 파악하고 대비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증식적 DNA를 가진 자본의 탐욕에 대응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강조하고, 공유가치창출(CSV)을 홍보했지만 심화되는 양극화는 해소시키지 못했다. 여기에다 그동안 인류의 번영을 뒷받침해 주었던 화석연료 사용이 지구 온난화라는 통제 불능의 재앙을 불러오고 있다.

 

따라서 경영의 사전 예방 활동이 시급해졌다. 무엇보다 온난화 대책(E)이 중요해졌고,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양극화 해소(S)가 중요해졌다. 그리고 기업이 이러한 이슈에 미리미리 준비를 할 수 있는 지배구조(G) 또한 중요해졌다. 이러한 배경으로 ESG 보고서는 MRV(측정·보고·검증)가 핵심이 됐다. , 경영활동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요소를 측정 가능하고(Measurable), 보고 가능하고(Reportable), 검증 가능한(Verifiable) 방식으로 작성해야 한다.

 

ESG 보고서는 크게 세 파트로 구성돼 있다. E·S·G 각 부문별 기업의 철학과 의지를 밝히고 실증을 보여주는 본문 부문, 이와 관련된 정량 데이터를 보여주는 자료 부문, 보고서 작성 표준 준수 등을 검증해주는 부록 부문으로 돼 있다. 이 중 MRV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 부문이다. 본문에서 미사여구로 설명된 ESG 활동을 실제 수치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업보고서 측정·보고·검증 불능

그러나 ESG 보고서가 도입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모든 기업들의 보고서는 MRV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보니 현실적으로 각 금융자본가들은 별도로 다양한 부속 자료를 요구하거나 면담을 통해서 평가를 하고 있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SK하이닉스·포스코·LG화학 등 세계적 명성을 가진 우리나라 대표 제조 기업 5개사의 ESG 보고서를 살펴봤다. 이해관계자들이 보고서의 자료 부문에서 기대하는 것은 본문에서 주장한 주요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다. 그러나 현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기업의 지속 가능 경영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선 최소한 10년 이상의 장기 시계열 트렌드를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외부 평가기관이 요구하는 3, 4년치에 불과하다. 또한 향후 일정 시점별로 회사의 목표치를 제시하고 현재 달성도, 차이 원인, 대책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숫자의 의미가 바로 이해되도록 원단위(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기준량) 표시를 해주어야 한다. 자동차 대당, 철강 t당처럼 원단위 환산 분모가 일정해야 한다. 많은 회사들이 원료 투입(제품 구성)이 다양한 관계로 매출액(억원)당 원단위를 표기하는데 이는 오히려 혼선만 줄 뿐이다. 특히 온실가스의 경우 배출권 할당 기준에 대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다음으로 데이터 간의 인과관계를 보여줘야 한다. 인건비의 경우 각 회사의 성별, 정규·비정규직과 협력회사의 데이터가 비교 표기되어야 한다. 그 차이를 줄이는 것이 ESG경영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다른 회사에 비해 자료가 좀 상세하다. 일부 데이터는 반도체(DS) 부문과 가전(DX) 부문도 구분했다. 성별 임금 격차의 경우 10년치 데이터를 보여주고 있다. 임금 격차가 201334.8%에서 202223.1%로 좁아졌지만 앞으로 고직급 여성 비율을 높여서 개선하겠다고 선언했다. 장애인 고용률은 법적 기준(3.1%)보다 낮은 1.6%임을 공개하면서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설립해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온실가스 감축률(%)은 자료가 없고, 배출전망치(BAU) 대비 감축량을 밝혔다. 이는 넷 제로관점에서 의미가 없다.

 

현대차의 경우 제품이 단일한 관계로 자동차 대당 다양한 환경지표를 표시하고 있다. 많은 데이터들이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일부 악화되는 원단위에 대해서는 주석으로 설명을 해줘야 한다. 장애인 고용률의 경우 20213.13%에서 2022년에는 2.82%로 후퇴했으나 본문이나 자료에서 설명이 없다.

 

SK하이닉스의 가장 큰 특징은 주요 항목별로 2030년 목표를 설정하고 현재 진도율과 차년도 목표를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기업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아쉬운 점은 이천공장의 황산화물(SOx) 발생량이 과거 3년 평균 7.7t에서 2022년에는 25.9t으로 236%나 증가했는데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서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했지만 장애인 고용률(%)은 표기를 안 하고 인원만 표기를 했다. 계산을 해보니 매년 0.6% 수준에 머물고 있다. 다만, 자회사형 표준사업장 장애인을 합하면 3.4%수준이 된다.

 

포스코의 경우 이미 1995년부터 환경보고서, 2004년부터 지속가능보고서를 발표해 온 관계로 ESG 보고서의 환경 관련 자료는 나름대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장애인 고용률도 3.1%로 법적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 다만, 2030년까지 온실가스 10% 감축을 선언했는데 자료상으로는 진도율이 보이지 않고 있다.

 

10년 이상 시계열 정보 못 보여줘

LG화학 보고서는 우선 용어의 혼선이 눈에 뛴다. 환경 용어 명사(Environment)와 형용사(Environmental)가 혼용되고 있다. 대표이사가 특별히 인권·노동 등 유엔 글로벌 임팩트 10대 원칙을 지지한다고 별도로 선언을 하고(49), 본문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며 포용하는 문화를 중시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장애인 고용률(%)은 밝히지 않아 계산을 해보니 1.7%에 불과했다. 질소산화물(NOx)의 발생량이 2020867t에서 20214134t으로 377%나 증가했는데 설명이 없다.

 

5개 기업의 ESG 보고서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다른 기업들의 모델이 된다. 불리한 데이터라도 10년 이상 시계열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목표치를 제시하고, 중간 점검이 되도록 해야 한다. 평가기관을 설득할 수 있도록 이해관계자들과 상생하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정보화해야 한다. 대기업이 앞장서야 한다.

김경식 SG네트워크 대표·<착한 자본의 탄생> 저자 경향 2023.08.18

 

한일관계의 미래와 역사성찰의 전제 조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된 한국통감 관저. 남산에 있었는데 현재는 일본군 위안부기억의 터가 자리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며칠 뒤면 822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1910822일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 오전 10시 궁내부 대신(민종석)과 시종원경(윤덕영)을 불러 협약의 부득이함과 향후 왕실의 대우에 대해 말해주었다. 두 사람은 이에 수긍하고 돌아갔다. 12, 고쿠분 참여관으로부터 궁중에서의 일이 모두 제안한 대로 잘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중략) 오후 4시 한국병합조약의 조인을 통감관저에서 마쳤다. 참석자는 이완용, 조중응, 부통감, 그리고 나였다. 또 오는 29일에 이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대의를 통지해두었다. 합병문제는 이와 같이 용이하게 조인을 마쳤다. 하하.”

 

데라우치의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한국병합 문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 득의양양하여 하하소리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물론 병합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데라우치는 이날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는 먼저 위수령을 내려 정치집회를 금지했다. 지방에 있던 일본군 기병과 보병 일부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또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빼앗아 일본군 헌병의 지휘권 아래 두었다. 그러고는 통감부·창덕궁·덕수궁 등 서울의 주요 지점을 무장한 일본군 2600명이 경비하도록 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와 같은 군사적 강압의 분위기에서 이완용 등 한국의 내각과 궁중의 주요 인물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병합조약에 도장을 찍게 한 것이다. 이처럼 이는 강제적인 조약이었고, 게다가 한국 황제의 비준도 없었기 때문에 불법·무효라고 보는 것이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은 오늘날까지도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상수이다. 일본 쪽은 당시가 제국주의 시대였고, 따라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만들었지(그렇다고 이것이 잘한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유럽 내에서 이웃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지는 않았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지배한 것이 비슷한 사례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영국은 16·17세기에 아일랜드를 정복하여 지배했고, 1801년 아일랜드를 아예 병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어 지배했지 식민지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바로 이웃 나라, 그것도 임진왜란 이후에 통신사 등으로 비교적 평화롭게 교류해오던 나라인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은 전라감영에 제출한 소장에서 임진년의 원수와 병자년의 치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이들은 300년 전 임진왜란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불과 7년간의 전쟁이었지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는 35년에 걸친 것이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좋지 않은 감정이 앞으로 얼마나 오래갈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일 관계에서 볼 때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은 일본이 가장 잘못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은 한국을 통치하면서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일본은 병합 당시 일시동인’(一視同仁·모든 사람을 하나로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함)이라며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치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여 발전시켜줄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해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에게도 참정권을 주고, 의무교육도 실시하고, 군대에 갈 수 있도록 징병제도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중앙정치와 안보를 위협할 수 있고, 비용도 많이 들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우선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한국인들을 일본인들과 문화적으로 동화시키고, 일본 국민으로서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갖도록 만들고자 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동화정책이었다. 1910년대부터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국어, 일본 역사를 국사로 가르쳤다. 1930년대부터는 전국의 면 단위에까지 신사를 지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애국일이라는 것을 만들어 일본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를 했다. 나아가 일본식으로 성씨와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까지 하도록 했다.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치욕과 분노를 느끼게 한 폭력적인 일들이었다.

 

같은 시기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는 아시아의 식민지이던 인도, 베트남, 필리핀, 자바에서 그렇게까지 무리한 동화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또 현지 주민들을 관료로 다수 채용하고, 식민지의회나 지방의회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등 어느 정도 행정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대만에서 상·중급(칙임관·주임관)은 물론 하급(판임관) 관리, 심지어 군청 직원들까지도 다수를 일본인으로 채용하였고, 식민지의회 같은 것은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과 대만에서 허용된 것은 1930년대의 매우 제한된 권리를 갖는 지방자치 의회뿐이었다.

 

서구 열강은 아시아의 원거리 식민지에 본국 인력을 보내기 어려워 현지 주민들을 교육해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근거리 식민지인 한국과 대만에 본국 잉여인력을 대거 보내 관리·교사·경찰 등으로 만들어 직접 통치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인과 대만인의 불만은 높았고, 이를 누르기 위해 총독부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극도로 통제하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지배 아래 있던 한국과 대만은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들에 비해 훨씬 열악한 조건에 있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병합과 식민지배는 한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수난과 고통의 역사였다. 그런데도 일본인 상당수는(심지어 일부 한국인까지)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를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미래의 한-일 관계가 진정한 우호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고 성찰할 것이 있다면 성찰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헌겨레 2023.08.18

 

 

세계 속의 한류와 삼류의 한국 정치

한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전문가들은 미국·프랑스·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이 문화의 제국을 구축하고 있다고 본다. 창과 칼이 아닌 한국의 감성이 세계인들의 심장을 뛰게 한다. 갖은 수난을 극복한 이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던 선각자들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할리우드를 넘어 한류우드를 건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류를 낳은 정신은 무엇인가.

 

한국철학 연구자인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류의 마중물이 된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이 최지우에게 폴라리스 목걸이를 건네며, “앞으로 길을 잃었을 땐 제일 먼저 폴라리스를 찾아 봐.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라는 대사를 핵심으로 꼽았다. 지구의 자전축 위에 선 부동의 별인 북극성은 예전엔 천문학이나 항해의 중심이었다. 오구라 교수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조성환 옮김)에서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라고 말한다. 조선 오백 년 동안, 북극성처럼 성리학의 ()’가 한국인들의 심성을 형성했으며, 그것의 발현인 도덕이 한국인의 삶을 관통하고 역동적인 한류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반도는 대륙에서 해양으로 연결된 문명의 통로 역할을 하면서 한국적 철학을 형성했다. 유불선 삼교를 포용하는 최치원의 풍류나 성속을 넘나드는 원효의 일심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서구 기독교의 정착도 무소부재의 하느님이라는 초월적인 세계관으로 인민을 하나로 묶어주었기 때문이다. 한류의 개방성과 포용성, 그리고 휴머니즘은 잦은 외침으로 한()이 쌓인 한반도인들의 정신적 지혜다. 세계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방탄소년단(BTS)다이너마이트(Dynamite)’에서 난 다이아몬드, 빛나는 걸 알잖니. 오늘 밤 난 별들 속에 있으니 내가 불꽃으로 이 밤을 찬란히 밝히는 걸 지켜봐”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에서는 멈춰 있지만 어둠에 숨지 마. 빛은 또 떠오르니깐이라며 희망의 철학을 노래한다.

 

한류는 외환위기 시기에 겪은 절망을 뛰어넘어 아예 세계를 무대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더 이상 뚫고 나갈 수 없는 벽에 부딪혔을 때, 땀과 눈물로써 세계를 향해 비상한 것이다. 이제는 한식, 스포츠, 언어, 그리고 정신세계까지 세계인들은 관심을 갖고 한국 문화에서 삶의 영감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삼류에 머문 한국 정치는 한류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잼버리 참가자들을 위해 벌인 K팝 콘서트를 보며, 한류를 그저 자신들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 이 정부의 한심한 모습에 실망했다. 정치 또한 한류처럼 지구촌 리더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하지 않는가.

 

더욱이 정치가들의 퇴행적인 언설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버겁다. 윤석열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왔다고 했다. 독재정권이 써먹던 철 지난 이념논쟁으로 백성을 분열시키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살신성인의 자세야말로 모두 승자가 되도록 하는 정치의 예술이다. 넓게 보면 한류는 폐쇄적인 한국정치에 대한 반동, 즉 분열과 증오의 난장판을 뛰어넘은 저항정신의 산물인 것이다.

 

한국정치의 후진성은 외세에 의한 분단, 자본주의의 책동, 이익을 앞세운 소인배들의 준동에 연유한다. 일신의 안일을 위해서는 부끄러움도 없는 표변과 변절로 정의의 역사에 대한 반동을 보여준다. 그 절정은 법가의 지배다. 힘 없는 자에겐 무용지물인 법은 권력의 욕망을 채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피고와 원고로 나누는 형법을 다루는 검사들의 위상은 패가 나뉜 백성들이 서로 삿대질할 때만 서게 된다. 법가의 정치가 통합이 아니라 분열을 먹이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도 한류의 주인공들처럼 실력을 갖춰야 한다. 실력이 없으면 오욕만 쌓일 뿐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를 한집안 삼아 통합해 내는 것이 진정한 실력이다. 국민은 대립과 갈등, 그리고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정치가들은 어떤 아수라의 환경에서도 모두를 끌어안는 국량이 있어야 한다. 번뇌는 보리(깨달음). 모두 한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한류로 세계인들이 한 가족이 되고 있듯 이 땅의 정치가들 또한 한마음으로 도()의 정치를 펼치기를 바랄 뿐이다.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경향 : 2023.08.18.

 

 

치안 불안은 어디서 온 것일까

길거리가 무섭다는 사람들이 늘었다. 신림동·서현동의 범죄 때문이겠지만, 불안과 공포는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때론 평범해야 할 일상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지난해 1029일 이태원의 밤이 그랬다. 젊은이들이 축제를 즐기던 곳이 참혹한 거리가 되었다. 수학여행이라는 일상적인 일이 참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정부는 언제나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

 

신림동·서현동 사건이 일어난 뒤 경찰·검찰·법무부 등에서 대책을 쏟아냈다. 간단한 검색만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전에 나왔던 이런저런 방안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서울 강남역에 장갑차를 배치하고 주요 역사에 경찰특공대를 배치한 정도일 것이다. 대책이기보다 경찰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치중하는 것 같았다.

 

한국의 치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찰의 인력, 예산, 권한은 꾸준히 늘었고, 과학수사 기법 등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경찰개혁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주요 범죄 발생 건수는 주목할 만큼 줄었고, 범인 검거율은 세계 최고다. 이런 객관적 지표들과 관계없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많다. 피부로 느끼는 체감 치안이 불안하다는 거다.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언론의 호들갑스러운 경쟁 보도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할 때, 믿고 의지할 곳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공권력을 믿기 어렵다는 사람들, 자기 안전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며 각자도생을 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경찰은 많이 발전했지만, 경찰을 믿을 수 있다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태원 참사 당시, 다급한 구조 요청이 빗발쳤지만, 시민의 목숨을 챙겨야 할 경찰은 대통령 집무실 주변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퇴근한 다음이라 대통령이 없는데도 경찰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태도로 열심이었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건 그저 듣기 좋은 소리일 뿐, 경찰 활동의 핵심은 대통령이었다.

 

복지처럼 적극적인 역할이 없는 국가의 최소한을 경찰국가라 부르듯, 치안은 국가 작용의 기본이고 기초다. 그러니 치안을 믿기 어려운 상황은 국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로까지 연결되는 비상 상황이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불안은 증폭되고, 마침내 공포까지 불러왔다. 경찰 등 공권력이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은 공권력을 지휘하는 사람들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경찰은 예전의 권위주의 시절로 완전히 돌아간 것 같다. 민생치안은 외면하고 시국치안에만 골몰하는 경우가 너무 잦다.

 

기자회견이나 관혼상제, 문화행사, 종교행사 등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을 적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자유의 영역이었다. 혹자는 기자회견, 문화제 등을 집시법을 피해 가기 위한 꼼수로 여기기도 했지만, 자유국가에서 그 정도의 자유는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일관된 판단이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경찰은 노동자들의 문화제에 대해서는 야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탄압을 반복했다. 문화제를 시작하자마자 강제로 중단시키고, 참석자들을 해산시키고, 심지어 체포하기도 했다. 헌법과 법률로 보장되던 자유로운 행사가 경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유의 실체를 보여주는 비극적 장면이기도 하다. 이런 야간문화제100명쯤의 노동자가 참여하면, 경찰은 600~700명의 경찰관을 동원한다. 민생치안 현장에서의 공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통령이 관심 있는 곳에만 잔뜩 인력을 투입하는 형국이다.

 

경찰의 이런 불법적 행태는 모두 대통령의 한마디에 기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 정부가 불법집회, 시위에 경찰권 발동을 사실상 포기한 결과 불편을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말하면, 윤희근 경찰청장은 기존의 집회 대응에 관대한 측면이 있었다며 일선에 강도 높은 대응을 촉구하는 식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경찰은 시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통령의 말이나 의중만 좇는 일이 반복되면 민생치안엔 공백이 생기고, 시민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이태원 참사 때도 그랬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치안 공백에 대해서도 잇단 묻지마 범죄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새만금 잼버리는 무책임이란 측면에서 예고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면 정말 심각한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 2023.08.18.

 

 

생활비 위기, 사회적 경제로 구조적 경제 혁신이 필요하다

지역 경제 내에서 안정성과 회복력 촉진 필요

지난 7월 미국과 영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대비 각각 3.2%6.8% 상승했다. 한국의 경우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1년 전보다 2.3% 올랐다. 소비자물가지수는 우리가 사용하는 재화나 서비스들을 종합하여 만든 가격 지표로서 주의깊게 관찰해야하는 인플레이션의 핵심지표다.

 

소비자물가지수가 안정되기위해서는 주택가격의 안정화가 가장 중요하고, 이외에도 식품, 교육, 의료 등 생활비가 절대적으로 안정되어야한다. 소비자물가지수가 상승한다는 의미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곧 중앙은행이 금리를 높여 수요를 낮출것을 의미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폭염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인플레이션을 야기시키는 근원적인 원인도 있다. 비용 인상의 인플레이션은 금리를 올린다고 치유되는것이 아니다. 오히려 금리 인상으로 인해 더 극심한 경기 침체가 올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공평하고 포용적인 성장을 촉진하고 소득 격차를 완화하는 지속가능한 경제 회복을 보장해야한다. 인플레이션 시기에 사회적 경제는 다음과 같은 여러 메커니즘을 통해 경제적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

 

먼저 이들 기업은 종종 단기 이익 극대화보다는 장기적인 사회적 또는 환경적 영향을 우선시하는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채택한다. 이는 경제성과 안정적인 가격 책정에 중점을 두어 인플레이션이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 이들 대부분은 지역 사회 내에서 운영되며 지역 소싱, 생산 및 고용을 우선시한다. 지역 내 기업을 지원하고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지역 사회의 경제적 안정에 기여한다. 따라서 글로벌 시장에 대한 취약성을 줄이고 특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가격 변동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수입품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 이들은 종종 보조금, 임팩트 투자, 제품 판매 등 다양한 출처에서 수익을 창출한다. 다양한 소득 구조는 인플레이션 기간 동안 탄력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는 투입 비용의 가격 상승을 탐색하고 재정적 안정성을 유지하여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넷째, 지속가능한 지역 공급망을 우선시한다. 탄력적이고 포용적인 가치 사슬을 촉진함으로써 이들 조직은 공정 무역 관행에 참여하거나 소작농을 지원하거나 현지 생산자와 협력하여 인플레이션 문제를 더 잘 견딜 수 있는 강력한 공급망을 구축하고있다.

 

다섯째, 지역 사회와 직접 관계를 맺고 지역 사회를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시키고 경제적으로 권한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이들 기업은 공동체 주인의식과 참여를 촉진함으로써 경제적 안정과 탄력성을 창출하도록 돕는다. 커뮤니티 구성원이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소비 패턴을 조정하며 가격 상승의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혁신적인 솔루션을 모색한다.

 

여섯째, 이들은 특히 소외되거나 취약한 집단을 위한 고용 기회를 창출하는 이니셔티브를 우선시한다. 안정적이고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개인과 가계의 경제 안정에 기여한다. 인플레이션 시대에 안정적인 고용이 개인이 물가 상승의 영향을 완화하고 구매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고용 안정이 더욱 중요해진다.

 

마지막으로 이들 기업은 비영리 단체, 정부 기관 및 기업을 포함한 다른 조직과 협력하여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파트너십과 집단 행동을 통해 사회적 경제는 자원을 모으고, 지식을 공유하고, 인플레이션에 기여하는 시스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조정한다. 이런 공동 노력을 통해 더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보다 효과적인 솔루션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사회적 경제가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는 있지만 인플레이션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려면 거시 경제 정책, 재정 규율, 정부와 중앙은행이 시행하는 통화 정책을 포함한 포괄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풀뿌리 수준에서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완화하고 지속가능하고 포용적인 경제 개발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부는 사회적 경제가 경제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해결함으로써 지역 경제 내에서 안정성과 회복력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용승 우석대학교 교수 | 프레시안 2023.08.19.

 

 

멸종 위기, 멈출 줄 알아야 비로소 생존한다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지금 세계를 몰아치고 있는 이 기후위기가 정말 심각하다는 점을. 하와이의 산불은 오늘 우리에게 닥친 이러한 위기의 분명한 징후이다. 우리나라 역시 사상 유례없는 수해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여름은 1년 전 2년 전의 그 여름이 이미 아니다.

 

우리는 결정적인 멸종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 해결에 단 한치의 기대도 걸 수 없는 나라 안팎의 정치

정상적인 세계, 올바른 사회라면 오늘의 이 기후위기는 마땅히 정치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오늘날 세계 정치가 너무나 엉망이다. 날이 갈수록 더욱 엉망으로 되어간다. 미국에는 도무지 젊은 정치인들이 아예 씨가 말라버렸나 보다. 노쇠한, 그러면서 무능하거나 혹은 탐욕의 망나니 두 명의 재대결을 다시 목격해야만 할 상황이다. 세계 정치가 모두 탄식을 자아내는 중에서도 가장 가관인 것은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다. 도대체 언제 적 독재자가 다시 부활해 큰소리를 치는 형국인가!

 

나라 안 정치는 차마 말하기도 겁난다. 계속 남탓만 하더니 이제 비판세력을 공산세력으로 몰아붙이며 소탕할 기세다. 아니, 우리 사회에 도대체 무슨 공산세력이 있기나 하다는 말인가? 수십 년 전에나 나올 법한 시대착오적 극우 시각에는 차라리 어이가 없지만, 법을 적용하는 최고 책임자였던 그가 어떠한 잣대로 법을 처리해왔는지... 섬뜩하다.

 

권력욕과 탐욕만으로 무장된 나라 안팎의 권력자들에게서 어떻게 오늘의 심각한 기후위기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멈춰야 비로소 우리는 생존할 수 있다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는 불가피하게 마지막, 끝이 명백하게 존재한다. 사람들은 내심 불안해 하면서도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어라고 스스로 안위해보고자 한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보내면서 그 끝을 보았다. 오늘의 심각한 이 기후위기, 아니 멸종 위기, 과연 인류는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 솔직히 비관적이다. 어느 곳에서도 희망의 빛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이번 여름에도 에어컨은커녕 선풍기 한번 돌리지 않았다. 운전면허증이 없으니 당연히 자동차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전기밥솥도 없고, 전자렌지도 없으며 전기청소기도 없다. 남비밥에 걸레질에 그저 부채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닌다. 이번 달 가스요금은 2,340, 수도요금은 5,410원 나왔다. 물론 모두 이렇게 살아가라고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이 있다. 우리 모두 당장 지금부터 멈추지 않고서는 오늘의 이 기후위기를 해결책이 없다는 점,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제다. 그 마지막, 끝은 많이 남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탐욕과 과소비에 젖은 지금의 소비습관을 절반 정도로 줄여야 비로소 해결의 기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천천히 가려는 노력을 해나가지 않으면, 불과 10년 혹은 20년 안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 이미 임계점을 뛰어넘은 이 기후위기는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더욱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그야말로 생지옥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일 것이다.

 

멈출 줄 알아야 생존한다. 천천히 갈 줄 알아야 비로소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 프레시안 2023.08.19.

 

 

취약한 대통령의 위태로운 질주

윤석열 대통령이 본인의 기존 발언과 모순된 행태를 보일 때, ‘윤적윤’(윤석열의 적은 윤석열)이라는 지적이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대책을 겨냥해 국민을 어떻게 보호하느냐에 정부의 존재 이유가 있다”(20218)더니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에서 국민들이 국가는 어디에 있었나를 되묻게 했다. “참모 뒤에 숨지 않고 정부의 잘못은 솔직히 고백하겠다”(20223), “언론의 자유를 훼손시키려고 하는 시도에 강력히 반대한다”(20222)는 약속이 어떻게 변질됐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어록이 만들어질 정도로 다양한 윤적윤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언급인 것 같다. “그동안 대통령들이 보여준 제왕적 이미지를 탈피”(20223)하겠다며 대통령실 이전을 제왕적으로 강행한 이후,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결단을 주요 의사결정의 우선 순위에 놓으며 자신을 군주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특히 올해 8·15 광복절 경축사와 특별사면 등은 윤 대통령이 그간 간헐적으로 내비친 제왕적 세계관의 종합판이라 할 만하다.

역대 대통령들은 8·15 경축사를 국정 전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국민에게 알리는 기회로 활용해왔다. 대일 메시지와 남북 화해, 국민 통합 등을 강조하며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자리다. 윤 대통령의 취임 후 두번째 8·15 경축사는 이런 통상적 관행을 뛰어넘었다.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로 추어올린 반면, 연설의 상당 부분을 야권 등 비판 세력을 향한 선전포고로 채웠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했고, 이들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해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았다고 했다.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운동가와 그렇지 않은 이들을 감별한 방법도 궁금하거니와, ‘반국가세력이 그토록 활개치고 있었다면 집권 1년이 넘도록 왜 방치했는지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저 말을 듣지 않는, 상명하복하지 않는 비판 세력을 향한 적개심만 노골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8·15를 앞두고 단행한 특별사면은 삼권분립 원칙마저 짓밟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과 석달 전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을 공익 신고자라는 명분으로 사면·복권시켰다. 법원은 일관되게 그의 무차별 폭로에 공익성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간단히 무시됐다. 세월호 유가족을 불법 사찰한 소강원 전 기무사령관 등 전 국군기무사령부 간부 6명도 모두 사면 대상에 올랐다. 정권 차원에서 세월호 유족 사찰에 대한 면죄부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지만 법 앞의 평등원칙을 훼손하는 만큼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이번 사면은 통상적으로 내세우는 국민 통합의 명분도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윤 대통령이 선택적으로 죄를 사해주는심판자를 자처한 모양새다. 8·15 사면 성격이 봉건 군주의 시혜”(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윤 대통령은 취임 15개월 동안 고독한 결단을 주요 통치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대통령 한마디에 국가 중대사가 결정되고 집행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즉흥적 판단으로 정책 혼선이 빚어진 것이 여러 차례고, 거대 야당을 적으로 돌리는 바람에 입법을 통한 정책 추진은 불가능하다. 자신만의 의제를 설정해 성과를 낸 경험이 없고, 지지 기반도 뚜렷하지 않다. 객관적으로 취약한대통령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역사 앞에 책임을 지겠다는 공허한 발언을 앞세워 입법·사법권까지 통제하려 들고, 국민 공감대가 필수적인 외교·안보 영역마저 결단의 영역에 끌어다놓았다. 신냉전의 첨병으로 나선 윤 대통령의 원맨쇼에 국가의 운명이 맡겨진 모양새다.

 

윤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이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매도하고 초법적 결단 정치로 대한민국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8·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라는 신조어를 내놓았지만, 국민은 되레 ‘2023 스카우트 잼버리수습 과정을 보며 국가주의의 퇴행적 잔상을 목격했다. 집권 2년차 권력은 기세등등하나 시간은 흐르고 임기는 끝날 것이다. 그때 역사 앞에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최혜정 | 논설위원 | 한겨레 2023.08.20.

 

전체주의 싫어하는 대통령님께

존경하는 대통령님. 지금, 자유전체주의를 맹종하며 공동체를 교란하는 반인권세력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차별할 자유도 있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저는 한국 사회의 혐오 문제를 한 아파트에서 임대아파트와 같은 학군 배정을 반대하는 게시물을 올린 사례로 언급한 후 어떤 항의를 받았을까요? “내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게 왜 차별이냐! 내 자유지.”

 

존경하는 대통령님. 지금, 자유전체주의를 추종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반민주주의 담론이 곳곳에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보편적 인권을 누리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군부독재 시절 빈번했던 인권유린의 실상을 짚을 수밖에 없죠. 어떤 e메일을 받았을까요? “왜 전직 대통령을 나쁘게 묘사하냐! 빨갱이 잡은 게 인권탄압이냐! 당신의 사상이 수상하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사상검열이 늘어난 듯한 느낌, 기우겠죠? 사실을 제대로 말하고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글 쓸 자유가 상당히 위축된 기분입니다. 과민반응이 아니라 지난 시절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의 희생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요. 용공조작은 위장, 잠입, 교란이란 단어를 나열한 후 저 인간은 공산주의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짐승 취급한 사건인데 한국 현대사의 핵심이죠. 제주4·3 사건이 학살인 건, 숨어 있는 공산전체주의 세력 찾겠다고 전체를쑥대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수십년이 지나서도 같은 이유로 광주가 피바다로 물들었죠. 그러니 한국 사회에서 자유전체주의 세력들의 준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사회는 좋은체계는 유지(보수)하고 나쁜관성은 방향을 틀어야지만(진보) 좋아지는데, 요즘에는 조금이라도 진보 냄새가 나면 내용 불문 정치적이라면서 비난을 받습니다. 사회를 비판했을 뿐인데, 사회를 분열시킨다며 욕을 먹고 특정 정당에 유리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날카로운 칼 앞에 서야 합니다. 아무리 진보가 좌익, 용공세력, 친북·종북좌파로 오랫동안 불렸지만 2023년에도 그런 오해를 받는다는 게 과연 상식적일까요?

 

존경하는 대통령님. 자유주의 전파자로 위장한 전체주의 세력을 꼭 발본색원해 주세요. 이들은 민주주의 사회가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충분히 활용하여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인권의 범위를 축소하고, 권력에 저항하며 만들어간 민주주의의 맥락을 왜곡하고, 일상 속 차별과 혐오의 씨앗을 찾자는 진보적 가치를 이념의 굴레로 재단합니다. 우리가 절대 속거나 굴복하지 않게 해 주세요. 자유전체주의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믿음과 확신을 주세요.

 

인권·진보·민주주의는 언제나 색깔론의 희생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습니다. 달라진 건, 어느 순간 더 가혹해졌다는 것이죠. 공격하는 쪽은 갑자기 믿는 구석이 생긴 건지 더 확신에 차서 더 강하게 난도질을 합니다. 조롱과 빈정거림의 수위도 끔찍할 정도로 높아졌죠. 그 신호탄, 아무리 생각해도 대통령님의 광복절 경축사 외에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요. 설마 이런 칼럼 하나에 기분 나쁘신 건 아니시죠? 공산전체주의를 싫어하시니까,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를 분명 존중해 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 경향 2023.08.20.

 

 

교육운동, ‘교권을 넘어서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처음 생겼을 때를 기억한다. 전교조가 내세운 참교육이념의 구체적 체감은 돈 받지 않는 교사, 때리지 않는 교사, 차별하지 않는 교사였다. 정권의 탄압에도 학생과 학부모,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전교조는 교육운동의 상징적 대표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교사들 사이에서 전교조 교사들은 동료를 비방하는 내부고발자로 여겨졌고, 교사의 권위와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그중 가장 큰 불만은 어떻게 교사가 노동자냐는 것이었는데, 그 부끄럽게 여기던 교사의 노동자성과 노동권은 1990년대 이후 교사의 임금과 처우를 개선시킨 핵심 조건이었다.

 

지금 교사들은 교권을 위해 싸운다. 전교조와 한국교총도 교권 앞에서는 한목소리로 단결하고, 교육감과 교장도 교권 보호를 외치며, 여야 정치인들도 한목소리로 교권을 옹호한다. 그런 가운데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은 교권 강화를 학생인권 탄압의 구실로 삼고 있다. 이런 양상에 우려를 표하면 많은 교사들이 그 교권이 교권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 교권은 권력, 권위, 특권이고, 이 교권은 교육할 권리’ ‘교육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 권위, 특권으로부터 분리된 권리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학교에는 힘 있는 교사, 힘없는 교사가 있고, 힘 있는 학부모와 그렇지 못한 학부모가 있다. 이런 힘의 서열은 사회적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서울 서초동 같은 곳에서 교사의 사회계급적 지위는 자신이 상대하는 일반 학부모 평균보다 낮을지 모르지만, 내가 사는 강원 인제라면 교사의 지역사회 내 지위는 서초동의 변호사급 정도는 될 것이다. 어떤 지역에선 학교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학부모가 교육을 방해한다지만, 다른 곳에선 학교에 너무나 무관심한 학부모들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다.

 

교사 집단 내부에 존재하는 지위 격차와 차별의 구조도 눈감을 수 없는 문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사, 나이 많은 교사와 초임 발령자, 교사와 교육공무원, 교사와 돌봄전담사, 일반 교사와 보건·영양교사 등 특수교사의 관계는 수평적이지 않다. 일터를 지옥으로 만드는 일의 대부분이 이 구조 안에서 일어난다. 가해와 피해의 구조는 학부모와 교사 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이런 학교에서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지, 강자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매일매일 보고 있다.

 

이처럼 학교는 권력, 권위, 특권이 충돌하는 장이며, 교권 역시 그 자장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권력의 장 안에서 교권을 분리할 수 없을뿐더러, 정말로 그런 교권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교권개념을 재구성하고자 한다면, 교사운동은 우선 부당한 권위와 권력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그 교권을 해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것부터 해야 한다.

 

 

학교 외부의 노동체제와 사회체제 변화가 교사 집단의 계급성과 지위 변동에 미치는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교사 인기가 떨어졌다고 해도 한국 사회에서 교사는 그렇게 낮은 계층이 아니었다. 교대는 고등학교에서 성적 상위권이 돼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교사 되었나라는 말은 대학까지 을 지켜온 나름 엘리트들이 바늘구멍 같은 임용 관문을 통과한 후에 갑자기 갑질 소비자를 응대해야 하는 하층 서비스 노동현장에 떨어진 상황을 압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날 교사들이 느끼는 불안의 기저에는 신자유주의 이후 중간계급이 직면한 전문직 일자리 박탈과 지위·소득의 하락이라는 하강의 공포가 있다. 학부모의 불안에도 중간계급의 계급 재생산 위기가 깊숙이 자리한다. 교직은 점점 축소, 악화되고 있는 중간계급 일자리의 최전선이다. 이 속에서 학교는 격렬한 계급투쟁의 장이 된다.

 

모두를 경쟁의 굴레에 밀어 넣어 옆자리 동료도 적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모두가 힘겨워하면서도 결국 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죽음의 교실을 만든 것이 학부모 민원 탓일까? 문제 학생과 학부모를 분리하면 교실은 안전해질까? 교육 위기의 진짜 주범인 신자유주의 교육체제와 노동체제에 맞서는 것을 회피한 채 교권 문제로 축소하는 한, 어떤 교권 보호 대책도 교사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며, 서로를 향해 분노하고 증오하게 만드는 을들의 싸움으로 분열시키는 교사 대 학생·학부모구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진보적 교육운동이라면 조합주의에 갇힌 교사운동을 넘어서, ‘교육운동으로서의 교사운동과 정치사회적 운동으로서의 교육운동을 다시 모색하기를 호소하고 부탁한다. 지금 교사를 포함해 학교 구성원 모두를 지켜줄 수 있는 건, ‘더 많은 인권과 더 많은 민주주의.

채효정 오늘의 교육편집위원장 | 경향 2023.08.20.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왕자 퍼디낸드가 폭풍우 속에서 외친 말이다 . 하지만 이제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돼야 한다 . “여기가 지옥이다 .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은 음욕, 식탐, 탐욕, 분노, 이단, 폭력, 사기, 배신을 저지른 이들로 가득 차 있다 . 벌레 , 폭력 , 폭염이 만연한다 . 이 지옥의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일까?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악마뿐만 아니라 착한 이들도 있다. ‘ 신곡의 이단 지옥에선 죄가 중할수록 화염 온도도 올라가지만, 이곳에선 힘이 약한 사람일수록 더 뜨거운 폭염 속에서 오래 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다.

 

근린공원에서 작업하던 ㄱ 씨는 35 에 육박한 폭염에도 그늘 없는 곳에서 일하다 쓰러졌고 , 이른 아침부터 고온 작업을 하다 쓰러진 ㄴ 씨에게 주어졌던 휴식 공간은 바람이 통하지 않아 바깥보다 더 뜨거운 컨테이너였다. 한해 매출액 25조원이 넘는 한 대기업은 체감온도가 33일 때 매시간 15, 35일 때 20 분씩 줘야 하는 최소 휴식시간 기준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고 한다. 2년 전 소방관 1명이 순직한 경기도 이천시 쿠팡 덕평물류센터 대형 화재 때에는 소방시설 관리 업체 직원들이 고의로 화재 비상벨 작동을 여섯 번이나 정지시킨 게 드러났다 . 허허벌판 한낮 기온이 40에 육박하고, 엄청난 습도로 찜통 같았던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행사장에선 첫날에만 400명 넘는 어린 스카우트 대원들이 온열질환으로 쓰러졌다.

 

이 지옥에선 직원들에게 비상근무를 명령하고 자신은 골프장에서 나이스 샷을 외치는 이가 도지사를 하고, 국민 대부분이 반대하는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지지하는 이가 대통령을 한다 .

이런 장면은 우리나라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7일 유엔아동기금은 전세계의 많은 어린이가 폭염으로 고통받고 있고, 남아시아에선 어린이 46천만명이 연중 80일 넘게 35이상 고온에 시달리고 있다고 발표했다.]

 

불길은 점점 거세져, 지구 기온이 계속 오르고 있다. 지난 7 월 중국 북서부 싼바오 지역은 52.2 를 기록했고 지표 온도는 80에 달했다. 미국 서부 데스밸리 지역은 53.3 까지 올라갔다. 세계기상기구는 올해 7 월이 역대 가장 더운 달로 기록될 것이라고 발표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온난화 시대가 끝나고 지구가 들끓는 시대가 시작됐다 고 말했다.

 

이 지옥을 어떡할 것인가? 지난달 24 규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며 화석연료 사용 반대 시위를 하던 기후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20) 가 체포됐다 .

과학은 이미 악마 편에 선 것 같다. 과학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는 이들이 많지만 화석연료 엔진이 개발된 지 200 년도 안 돼 작금의 기후, 오염, 전쟁 지옥을 만든 것도 과학이다. 더욱이 과학은 갈수록 거대화되고 있다. 이제 이 거대과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권력자와 대자본뿐이다. 그 앞에서 시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초라해지고 있다.

 

지구 전체 인구의 2 배가 먹을 만큼 식량이 생산되지만, 매일 최소 약 1 4 천명, 매년 약 500 만명이 굶어 죽는 건 식량이나 첨단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해 그 과학이 만든전쟁무기로 사망한 사람이 43천 명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어느새 무기 수출 세계 8 , 성장률 1 위 국가가 됐다. 무기산업이 부진하면 국가 경제가 흔들리고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선 어떤 나라처럼 없는 전쟁도 만들어야 하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 무기생산 기업의 주가 상승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무기를 녹여 만든 쟁기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도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40 여년 전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주인공 가족도 지옥에 살았다 .

서늘한 바람이 불면, 이 폭염과 폭염 속 시원한 물 한잔, 작은 그늘 한점 가지지 못해 죽어간 이들은 쉽게 잊힐 것이다. ‘ 망각 둔감 은 지옥의 단어다. 잊으라 용서를 강요하는 자가 악마다.

 

신곡의 지옥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 모든 희망을 버려라,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이 지옥이란 말이다. “ 지금 이곳이 지옥이다. 악마는 모두 여기에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왕자 퍼디낸드가 폭풍우 속에서 외친 말이다 . 하지만 이제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돼야 한다 . “여기가 지옥이다 .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은 음욕, 식탐, 탐욕, 분노, 이단, 폭력, 사기, 배신을 저지른 이들로 가득 차 있다 . 벌레 , 폭력 , 폭염이 만연한다 . 이 지옥의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일까?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악마뿐만 아니라 착한 이들도 있다. ‘ 신곡의 이단 지옥에선 죄가 중할수록 화염 온도도 올라가지만, 이곳에선 힘이 약한 사람일수록 더 뜨거운 폭염 속에서 오래 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다.

 

근린공원에서 작업하던 ㄱ 씨는 35 에 육박한 폭염에도 그늘 없는 곳에서 일하다 쓰러졌고 , 이른 아침부터 고온 작업을 하다 쓰러진 ㄴ 씨에게 주어졌던 휴식 공간은 바람이 통하지 않아 바깥보다 더 뜨거운 컨테이너였다. 한해 매출액 25조원이 넘는 한 대기업은 체감온도가 33일 때 매시간 15, 35일 때 20 분씩 줘야 하는 최소 휴식시간 기준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고 한다. 2년 전 소방관 1명이 순직한 경기도 이천시 쿠팡 덕평물류센터 대형 화재 때에는 소방시설 관리 업체 직원들이 고의로 화재 비상벨 작동을 여섯 번이나 정지시킨 게 드러났다 . 허허벌판 한낮 기온이 40에 육박하고, 엄청난 습도로 찜통 같았던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행사장에선 첫날에만 400명 넘는 어린 스카우트 대원들이 온열질환으로 쓰러졌다.

 

이 지옥에선 직원들에게 비상근무를 명령하고 자신은 골프장에서 나이스 샷을 외치는 이가 도지사를 하고, 국민 대부분이 반대하는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지지하는 이가 대통령을 한다 .

이런 장면은 우리나라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7일 유엔아동기금은 전세계의 많은 어린이가 폭염으로 고통받고 있고, 남아시아에선 어린이 46천만명이 연중 80일 넘게 35이상 고온에 시달리고 있다고 발표했다.

 

불길은 점점 거세져, 지구 기온이 계속 오르고 있다. 지난 7 월 중국 북서부 싼바오 지역은 52.2 를 기록했고 지표 온도는 80에 달했다. 미국 서부 데스밸리 지역은 53.3 까지 올라갔다. 세계기상기구는 올해 7 월이 역대 가장 더운 달로 기록될 것이라고 발표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온난화 시대가 끝나고 지구가 들끓는 시대가 시작됐다 고 말했다.

 

이 지옥을 어떡할 것인가? 지난달 24 규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며 화석연료 사용 반대 시위를 하던 기후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20) 가 체포됐다 .

과학은 이미 악마 편에 선 것 같다. 과학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는 이들이 많지만 화석연료 엔진이 개발된 지 200 년도 안 돼 작금의 기후, 오염, 전쟁 지옥을 만든 것도 과학이다. 더욱이 과학은 갈수록 거대화되고 있다. 이제 이 거대과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권력자와 대자본뿐이다. 그 앞에서 시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초라해지고 있다.

 

지구 전체 인구의 2 배가 먹을 만큼 식량이 생산되지만, 매일 최소 약 1 4 천명, 매년 약 500 만명이 굶어 죽는 건 식량이나 첨단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해 그 과학이 만든전쟁무기로 사망한 사람이 43천 명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어느새 무기 수출 세계 8 , 성장률 1 위 국가가 됐다. 무기산업이 부진하면 국가 경제가 흔들리고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선 어떤 나라처럼 없는 전쟁도 만들어야 하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 무기생산 기업의 주가 상승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무기를 녹여 만든 쟁기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도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40 여년 전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주인공 가족도 지옥에 살았다 .

서늘한 바람이 불면, 이 폭염과 폭염 속 시원한 물 한잔, 작은 그늘 한점 가지지 못해 죽어간 이들은 쉽게 잊힐 것이다. ‘ 망각 둔감 은 지옥의 단어다. 잊으라 용서를 강요하는 자가 악마다.

신곡의 지옥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 모든 희망을 버려라,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이 지옥이란 말이다. “ 지금 이곳이 지옥이다. 악마는 모두 여기에 있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 한겨레 2023.08.21.

 

 

지옥, 도덕이 무너진 사회

과거 강남좌파론이 유행할 때 그에 대한 반박 논리로 도덕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진보적이라고 해서 강남에 살면 안 되냐, 그것은 개인에 대한 과도한 도덕적 요구라는 것이었다. 이런 도덕주의 비판론은 진보도 개인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고, 진보라고 해서 그런 욕망을 억압받아서는 안 된다며, 보수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금욕을 진보에게 요구하는 이중잣대를 비판했다.

 

이 도덕주의 비판론은 고삐 풀린 욕망과 도덕에 대한 냉소를 배양하는 효과를 낳았다. 조국 사태는 교수로서의 지위와 자원을 활용해 사적 욕망을 추구했던 조국 일가의 면모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를 지적하면 과도한 도덕주의라는 반론을 받고는 했는데, 그런 논리는 이 사회의 엘리트들에게 공적으로 부여된 권위와 권한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을 면제해 주는 효과를 낳았다. 도덕이라는 최소한의 책임조차 지지 않아도 된다면 엘리트는 더 무거운 책임 대신 더 달콤한 특권을 누리는 자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소위 일베로부터 출현한 도덕에 대한 냉소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의 정서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들은 민주진영이 보수진영을 비판하는 건 내로남불이라고 말했다. 민주진영 스스로가 도덕주의라고 비판했던 그 도덕적 상식을 근거로 보수진영을 비판하는 건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집단은 한국 사회가 그간 만들고 지켜온 도덕적 규범들을 허물어뜨리는 데 함께 일조했다.

 

지금 들려오는 참담한 소식들은 양당 정치가 앞장서 도덕을 해체해 온 것의 결과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적으로 불안정했던 프랑스 제3공화정 시기에 한 사회의 바탕이 되는 도덕적 기초를 탐구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그 사회가 상식으로 공유하는 도덕적 규범을 필요로 한다. 사회 구성원들 다수가 그 도덕적 규범을 지킬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기에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상식으로 여겨졌던 도덕적 규범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이 될 때 시민들은 혼란에 빠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인 사회에서 시민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도덕은 무력할 따름이다. 교사를 믿지 못하는 학부모는 자식을 볼모로 잡힌 것처럼 느끼며 교사를 통제해 자식이 어떤 불이익도 겪지 않도록 악다구니를 쓴다. 이런 사태를 해결해야 할 엘리트들은 공적인 책임을 지는 대신 그 책임을 아래로 전가하고 있다. 새만금 잼버리 사태는 엘리트들의 무책임이 어떻게 시스템을 마비시키는지 보여준다. 나아가 끊이지 않는 흉기난동사건과 살인예고는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규범인 살인의 금지까지도 의문에 부치고 있다.

 

막말에 가까운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는 도덕 붕괴의 정점을 찍었다. ‘민주주의, 인권, 진보라는 단어에는 식민지와 독재라는 이름의 야만과 폭력의 역사에 대항해 시민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몸부림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는 한국 사회가 성취해 온 도덕’, 그 자체다. 윤 대통령은 민주주의, 인권, 진보공산전체주의라 운운한 것은 이 도덕의 부정이다. 도덕이라는 단어가 고리타분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도덕은 낯설고 생소한 단어가 돼버렸다. 그런 사회에선 SPC 노동자가 또 사망해도 노동운동이 문제고, 여성이 거리에서 또 죽어도 여성가족부는 폐지돼야 한다.

 

도덕을 지키는 것이 정치의 핵심 의제이지만 도덕을 포기한 것이 오늘날 정치의 핵심 문제다. 그 결과 시민들은 억울한 죽음들을 애도하고자 포스트잇을 붙이는 대신 스프레이와 삼단봉을 구매하고 있다. 사회적 애도를 통해 비극적 사건이 앞으로 일어나선 안 된다며 도덕적 기준을 재확인하는 대신, 이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도 믿을 수 없으므로 자력구제만이 유일한 방책이 되었다

최성용 청년연구자 | 경향 2023.08.21.

 

 

지방의 실패는 누가 책임지나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끝났다. 이제 그 과정에서 드러났던 문제들을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텐데,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실패가 처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파행을 거듭했던 전라남도의 포뮬러1(F1) 경기, 1000억원대의 소송에 휘말린 경상남도의 마산로봇랜드, 수천억원을 들였지만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경상북도의 3대 문화권(유교·가야·신라)사업, 채권시장을 뒤흔들었던 강원도의 레고랜드 등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왜 지방정부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형사업을 벌이지 못해 안달일까? 임기 내 대표사업을 만들려는 정치인들의 욕심, 끊임없이 기획서를 들이미는 기업들의 이해관계, 무사안일하지만 승진은 하고 싶은 관료들, 뭐라도 해야 돈이 돈다며 여론을 주도하는 지역토호들, 별 이득 없이 들러리만 서는 지역주민들, 이들이 뒤섞여서 계속 실패작들을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비슷하게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비수도권의 경우는 강도가 조금 더 세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재정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2023년 전국의 평균 통합 재정자립도는 50.1%, 특별시·광역시·특별자치도 평균은 61.2%, ·특별자치도 평균은 39.2%, 시 평균은 32.3%, 군 평균은 16.6%이다. , 수도권과 지방의 중심지에서 멀어질수록 지방정부의 재정능력은 줄어든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교부세와 보조금 등으로 지방정부의 재정을 지원한다. 정부의 총지출에서 지방으로 이전되는 재원의 비중은 매년 늘어나 2023년의 경우 37.2%2379000억원에 달한다. 2017년의 경우 1339000억원이었으니 6년 동안 104조원이 늘어난 셈이고, 이런 재원을 보태면 지방정부의 재정능력(재정자주도)은 군 평균이 65%로 훌쩍 뛰어오른다. 특별히 가난한 곳은 없고, 있는 예산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지방정부가 태반이다. 그래서 지방정부가 무모하게 국제행사나 대형사업에 뛰어드는 이유를 예산 부족에서 찾는 건 잘못된 진단이다.

 

그러면 지역주민들이 원해서일까? 지방정부는 툭하면 지역주민들의 숙원, 염원이란 말을 쓰지만 정작 미리 의견을 수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형사업일수록 주민들에게는 정보가 없고, 사업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조차 첫 삽을 뜨고 나서야 듣는 경우가 많다. 대형사업들은 주민들의 삶과 연관이 없다.

 

실패가 반복되는 주된 원인은 끈끈한 이권동맹과 체계화된 무책임 때문이다. 대형사업을 해야 지역 소식이 중앙언론에도 나오고, 중앙/지방 정치인과 관료, 기업, 토호들이 나눠 가질 이권도 생긴다. 막대한 예산, 비자금, 승진, 광고, 사회적 영향력 등 이권의 형태는 다양하다.

 

더구나 사업이 실패해도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한 구조이다. 정치인들은 임기가 끝나면 모르쇠로 일관하면 되고, 기업들은 시설이 완공되거나 사업기간이 끝나면 돈 챙겨서 떠나면 되고, 관료들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우기면 된다. 동네에서 행세하는 눈치 빠른 사람들은 보조금만 챙긴 뒤 재빨리 다른 사업으로 갈아탄다. 실패는 이미 기획단계에서부터 예견되고, 실패하면 또 다른 사업으로 돌려막으면 된다.

 

책임은 이권과는 거리가 먼 주민들에게 떠넘겨진다. 골프장과 같은 난개발을 막는 일조차도 주민들이 직접 멸종위기종을 찾아 보존의 근거를 만들어야 할 만큼 행정은 무책임해졌다. 예전 같으면 행정과 싸워도 보겠지만 이제는 주민들의 수도 부족하고 고령화되었다. 더 문제는 지킬 마음조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려올 자식들은 없고, 내가 마지막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굳이 싸울 이유가 없다. 죽기 전에 팔리면 좋고, 도시의 자식들에게도 부모가 남긴 농촌의 집은 팔아야 할 자산일 뿐 지켜야 할 고향이 아니다.

 

개발과 이권의 다툼은 어디서나 벌어지지만 책임의 상실은 지방에서 두드러진다. 실패는 누구라도 할 수 있기에 그 과정을 잘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은 이권의 흐름도, 책임의 소재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실패가 누적될수록 이권은 늘어나고 책임은 사라진다.

 

중앙정부가 지방을 더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은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다. 끈끈한 이권동맹을 해체하는 일은 혁명을 일으키는 일만큼이나 어려움이 예상된다. 지역을 지키자고 외치기엔 자신이 없다. 이 난관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 경향 2023.08.21.

 

 

숙의 민주주의와 선거제 개혁

민심과 역사. 정말 어려운 화두다. 1년 전 이 지면에 쓴 민심과 역사라는 글에서 지적했듯이, 윤석열 대통령처럼 나는 역사적 소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여론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소명주의에 빠지면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여러 문제에도 민심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민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대중이 중요 사안에 대한 필요한 정보들을 습득하고, 이에 기초해 올바른 판단을 하기에는 여유와 시간이 없고 감정적 판단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단기적으로 그러하다. 따라서 민심 지상주의’ ‘대중 추수주의도 소명주의만큼 위험하다.

 

요즘 같은 포퓰리즘 시대에는 특히 그러하다. 국민의힘이 주장하고 있는 국회의원 수 축소가 그 예다. 이는 국민들의 정치혐오에 기생하는 대표적인 대중 추수주의 정책으로 한국 정치를 고민한 사람이라면 들고 나오면 안 되는 정책이다.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미국을 예로 들어 한국 국회의원 수가 너무 많다고 주장했는데, 연방제인 미국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국 국회의원 수는 인구 비례로 볼 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네 번째로 적다. 인구가 비슷한 나라들과 비교할 때도 의원 수가 절반 이하다.

 

주목할 것은 숙의 민주주의. 이는 대중들이 정책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충분한 숙의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으로, 민심에 기초하되 대중 추수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다. 국회가 선거제 개편에 대해 지난 5월에 실시한 숙의 민주주의 실험은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주목해야 한다. 국회는 권역별·성별·연령별 비례에 따라 유권자 대표를 뽑아 선거제도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뒤 패널 토의, 전문가 질의응답, 분임토의, 재숙의 과정을 거쳐 다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대중에게 충분한 정보와 숙의과정을 제공하는 경우 전문가들과 같은 올바른판단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대중들은 국회의원 수 확대와 비례대표 확대에 비판적이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습득하고 숙의과정을 거치자 대다수의 전문가처럼 국회의원 수와 비례대표 확대에 우호적이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비례대표를 확대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숙의절차 전에는 27%에 불과했지만 숙의과정을 거친 뒤 70%43%포인트 늘어났다. 10명 중 7명이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11표제에 기초해 있지만, 승자가 독식하는 단순다수결제인 우리 선거제도 때문에 수많은 사표가 발생하고 있다. 표의 가치가 2배 이상 벌어지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사표 때문에 소수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표와 거대 양당에 투표하는 표의 가치 차이가 7배까지 확대돼 있다. 이 같은 현실을 안다면, 비례의석 확대를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회의원 수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 수를 늘어야 한다는 사람은 숙의 전 13%에 불과했던 것이 숙의 후에는 33%, 국회의원 수를 현상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18%에서 29%로 늘어났다. 반면에 정치혐오에 기초해 국민적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원 수 축소는 65%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37%로 크게 줄었다.

 

정치권은 자신들이 실시한 숙의 민주주의 결과를 수용해 비례대표 확대, 가능하다면 국회의원 수 확대에 나서야 한다. 핵심은 비례의석 확대이다. 다만 현역 의원 지역구를 생각할 때 국회의원 수 확대 없는 비례대표 확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관련 예산이 늘어나지 않도록 국회의원의 보수와 특권 축소를 전제로 국회의원 수 확대도 추진해야 한다. 위성정당도 금지해야 한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패스트트랙까지 동원해 준연동제를 관철시켜놓고도 이를 주도해 그 정신을 짓밟은 것에 대해 오죽했으면 동료였던 유인태 전 의원이 공개적으로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힐난했고 헌법재판소도 통제가 필요하다고 했겠는가?

 

문제는 정치권이다. 국민의힘은 함께 추진한 숙의 민주주의 결과에 대해 말도 되지 않는 시비를 걸고 있다. 다행히 더불어민주당은 이에 우호적이다. 다만 대선에서 정치교체를 역설했던 이재명 대표가 선거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선거제 개혁에 침묵하고 있고 절대 다수 의석을 갖고도 준연동제 때처럼 힘을 싣지 않고 있다. 기대할 것은 선거제 개혁을 자신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밝힌 김진표 국회의장이다. 그가 정치력을 발휘해 숙의 민주주의 결과를 입법화하기를 기원한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 경향 2023.08.21.

 

 

이해 못할 SPCESG 등급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이제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말이 되어가고 있다. 2005년 유엔에서 문서 돌볼 줄 아는 이가 이긴다(Who Cares Wins)’를 출간한 때를 전후해 블랙록 등 지구적 규모의 굴지 투자기관들이 지속 가능한 투자를 외치기 시작했다. 기업도 투자자도 또 그들이 만나는 장()인 자본시장도 모두 사회, 더 넓게는 지구적 생태계에 안겨 있는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예측 불능의 여러 차원에서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해 더욱 안정적인 가치창출 경영을 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요컨대 기업만이 아니라 사회와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이 곧 투자와 경영의 지속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에 기업들은 기업 정보의 공시에 있어 기존 재무제표뿐만 아니라 환경(E) 문제에 대해, 사회적 책임(S)에 대해, 또 기업 지배구조(G)에 대해 어떻게 지속 가능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의 정보도 함께 밝혀야 한다. ‘지속 가능한투자를 지향하는 투자자들은 기업 가치를 평가할 때 이러한 정보들을 중요하게 참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환경, 사회, 기업 지배구조 등에 있어서의 공동선을 자본시장 작동 논리에 내재화하자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제 ESG는 현실에서도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지구적 제도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미국, 유럽, 전 세계적 차원에서 회계 기준을 정하는 핵심 기관들이 ESG 평가의 기준과 지침을 계속해서 새롭게 발전시켜가고 있으며, 많은 나라에서 ESG 관련 정보의 공시는 자본시장의 당연한 요건으로 확립되고 있다. 따라서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들은 ESG 부문들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열리게 됐다.

 

그러자 한국에서도 ‘ESG 담론이 요란할 정도로 활짝 피어나게 되었다. 주요 기업들은 모두 ESG 평가서를 내놓기 시작했다. 컨설팅 업체, 로펌, 심지어 자본시장과 별로 관련이 없는 사회적 경제와 사회운동 진영의 일각에서까지도 저마다 ‘ESG의 바른길을 인도하겠다고 나서는 데 줄을 잇고 있고, 서점에는 ESG 관련 서적들이 넘쳐난다. 바야흐로 ‘ESG 전성시대가 만개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겉모습의 뒤편에서는 ESG에 대한 우려와 냉소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실제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투자자, 기업, 평가기관, 관련 업계가 자기들끼리 자화자찬만 벌이는 수영장 파티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유엔의 연구기관인 사회발전연구소(UNRISD)에서는 자체적인 평가 기준을 마련해 ESG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활동이란 것이 현실과 빗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선 ESG에 대한 적대감이 냉소를 넘어 폐지론까지 거세지고 있다. 문제는 특히 ‘S’, 사회영역에 있다. 사회 성원들이 필요하다고 공감하는 쟁점들은 도외시하면서 되레 기업들이 큰돈은 들지 않으면서 자기들 마케팅에 이익이 되는 일들만 하면서 이를 ESG로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반감이 많은 미국인들에게 확산되면서, ‘사회영역에서의 ESG 평가를 의식해 일방적인 행태를 벌이던 기업들은 거센 불매운동을 맞아 기업의 수익 흐름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S’ 항목 오명 기업들 여론의 뭇매

미국의 대표 맥주라 할 버드와이저는 올 들어 시장 점유율 1위를 빼앗겼고, 블루칩 중의 블루칩이라 불리던 디즈니도 지난 3년간 수익과 주가 모두 하락세를 맞고 있다. 공화당이 집권한 주정부에선 ESG를 표방하는 투자기관들이 자기들 연기금을 빼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번 대선의 주요 주자로 떠오른 비벡 라마스와미 같은 이는 ESG에 대한 공격을 중심 구호로 내걸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로 돌아와보자. 한국의 ESG 평가 현실은 과연 얼마나 적실성을 갖고 있을까? 최근 식품기업 SPC에서 또다시 50대 여성 노동자가 끼임사고로 참혹한 죽음을 맞는 비극이 있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SPC의 산업재해로 노동자들이 끔찍한 죽음을 맞는 사고는 이미 누차 반복됐다. 산재 사고 횟수 자체가 2022년까지 ‘5년간 759이라는 충격적인 숫자를 보여 지난해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집중적인 질타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기에 더해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악명을 날린 바 있다. 한마디로 ESG‘S’로 보면 최악의 성적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법하다.

 

그렇다면 SPC가 내놓은 ESG 공시의 평가는 어떨까?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2019년부터 2021년까지 행한 ESG 평가에서 SPC3년 내리 ‘B+’를 받았고, 특히 ‘S’ 항목에선 계속 ‘A’를 받았다. KCGSESG 평가 등급이 A+에서 D까지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거의 최고 평가를 받아온 셈이다. 2022년 들어 반복되는 사건과 사고로 인해 SPC의 사회적 평판, 특히 호감도01 사이를 기준으로 0.7에서 0.2로 대폭락했지만(트리플라잇 이슈엔임팩트데이터 연구소), ESG 평가에서 ‘S’ 항목 등급은 B+를 지켜냈다.

 

SPC가 공시한 ‘S’ 평가 항목에는 분명히 임직원에 대한 보상 및 평가안전과 보건이 포함돼 있다. 나 같은 보통의 사회 성원들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SPC‘S’의 다른 항목들에서 무슨 신묘한 재주를 피웠길래 A를 받은 것일까? 그러면 A 등급을 받은 다른 기업들도 알고 보면 노동조건이나 산업안전이 SPC 수준이라는 걸까? 아닌 게 아니라 지난 17SPC가 국회 환노위에 제출한 변명을 보자면, 자신들의 산업재해율은 0.98%로 식품제조업계의 평균 수준이라고 한다. 분명히 그 등급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것이며, 나름대로 모종의 절차와 혹은 계산식을 거쳐 나온 것일 터이니. 무슨 논리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SPC, 이중 중대성 의미 새겨들어야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 성원들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나라 식품제조업계 전체에 철퇴를 내리는 조치를 하든가 아예 문을 닫든가 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바의 사회적 상식이다. 이러한 엄청난 인식의 괴리가 바로 ESG 담론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쏟아지는 냉소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매년 국회 환노위에서 문제로 불거지며 전 국민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기업이 어떻게 ESG 세계에서는 최우량 사회적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한우 등급 평가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긴 고기에 최우량 등급을 찍어주는 식이라면 그 등급 체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SG 담론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쏟아지는 냉소의 증후를 우리나라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ESG의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지구적 산업문명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가장 강력한 주체의 하나가 기업과 투자자들이다. 어떻게든 이들이 ESG로 불리는 공동선을 자신들의 행동 원리로 내재화시키려는 노력은 소중할 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방향에 맞도록 평가 기준과 지침을 현실화하고 구체화하려는 소중한 노력이 모아지면서 지금도 계속 진화해나가고 있기도 하다.

 

한 예로 유럽연합(EU)에서 ESG 기업 공시의 기준으로 의무화한 이중 중대성(double materiality)’을 들 수 있다. 기업의 활동과 그 결과를 평가함에 있어 기업과 투자자 입장에서의 중대성만이 아니라 사회와 자연의 입장에서 본 중대성도 함께 고려해야 하며, 나아가 양자 간의 연결 관계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SPC 같은 기업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이다. 연매출 3조원의 대기업이 고작 180억원의 산업안전 예산 집행을 뭉갰다는 혐의를 받다가 어떤 사회적 충격을 가져왔는지, 거기서 비롯된 반동이 기업 이미지와 실제 매출에 얼마나 큰 손해로 연결돼 돌아올 것인지를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내년에 나올 SPCESG 공시, 특히 ‘S’에서의 등급 평가를 반드시 찾아볼 것이다. 이는 SPC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온갖 미사여구와 뜬구름 잡는 소리가 횡행하고 있는 한국 ESG 담론 전체에 대한 평가가 될 터이니까.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 경향 2023.08.21.

 

 

하와이 산불, 식민주의와 물의 문제

한국이 수재로 난리를 겪는 동안 세계 곳곳이 불타고 있다. 미국 하와이에 이어 캐나다와 스페인에서도 대규모 산불 소식이 들린다. 그 가운데서도 하와이에서 발생한 산불은 하와이가 미국 본토에 복속되기 이전까지 하와이 왕국의 수도였던 마우이섬 북서쪽의 해안 도시 라하이나에서 일어났기에 피해가 더 컸다. 지금까지 사망자 114, 실종자는 최대 1300여명에 달해 지난 100년 동안 미국에서 최대 인명피해를 낸 산불로 기록되게 되었다.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잦은 산불이 기후변화의 결과임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하와이 산불의 경우에는 하와이라는 지역과 라하이나라는 도시가 갖는 상징성 때문인지 식민주의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논의가 눈에 띈다. 화재를 빌미로 토지를 매입하려는 외지 부동산업자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다. 실제 조시 그린 주지사는 산불 발생 지역에서 토지거래를 일시 정지하도록 지시했다.

 

산불 참사 직후부터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게 된 것은 지역에서 오래 연구하고 활동해 온 하와이 원주민 활동가들 덕분에 가능했다. 하지만 식민주의의 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자칫 너무 빠른 진단은 식민주의 역사가 남긴 현실의 복잡성에 눈감게 할 우려가 있다. 하와이에서 식민주의 역사와 산불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물을 둘러싼 싸움이다. 페루나 브라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원주민들의 광산 반대 운동에서나,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어난 송유관 반대 운동에서나 물은 언제나 가장 뜨거운 쟁점이다.

 

하와이 말로 물은 와이(wai)’라고 한다. 이를 두 번 반복한 와이와이(waiwai)’라는 말이 풍요, 물이 있으면 삶이 있다를 의미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하와이 사람들에게 물은 신성한 자원이었고, 지금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와이에서 물이 크게 부족했던 건 아니었다. 라하이나 지역은 19세기 초까지도 습지였고, 원래 지명인 말루울루 오렐레(Malu’ulu o Lele)’는 울루(ulu) , ‘빵나무로 뒤덮인 땅을 의미했다. 백인들은 그 빵나무를 베어버린 자리에 사탕수수 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을 만들었다. 습지에서 뽑아 올린 담수는 이들 작물을 재배하는 데도 필요했지만, 사탕수수를 정제 설탕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또 그 설탕을 당밀로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물과 땔감이 소요됐다. 그렇게 하와이는 점차 건조하고 황량한 땅으로 변했고, 물 부족이 심화됐다.

 

하와이인들이 이런 현실을 순순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결행하면서 저항했고 늘어난 비용이 부담스러워진 기업가들은 점차 사탕수수 농장을 해외로 이전했다. 문제는 당시 관개수로와 저수지를 규제 없이 사용하면서 물을 독점하던 플랜테이션 농장이 사라졌다고 해서, 물에 대한 권리가 주민들에게 돌아온 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떠나는 농장주들은 수로와 저수지의 권리를 민간 기업과 개발업자들에게 넘겼다. 원주민들이 전통 농업에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1970년대 이후에야 인정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조금씩 확대되는 중이다.

 

그렇다면 물에 대한 원주민들의 권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식민주의가 기후위기를 가져왔다는 비판 여론이 더욱 거세진다면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원주민들의 권리도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소방용수 확보라는 명분이 원주민들이 어렵게 확보한 물의 권리를 제약할 수 있는 명분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와이 전역에 빼곡하게 들어찬 호화주택이나 리조트들은 화재라는 응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더 많은 물을 소방용수로 저수할 수 있도록 원주민들의 권리를 제한해달라는 청원을 내고 있다. 원주민들은 화재 이후 라하이나 재건 과정에서 새로운 주택들이 건설된다면 물 부족 현상은 더욱 심화하고, 건설과 방재를 명분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는 더욱 제약될 것이라 걱정한다.

 

더욱 뜨거워지고 건조해지는 지구에서 물을 둘러싼 싸움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물은 생명이라는 대전제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도 제한된 물을 불 끄는 데 써야 할지, 농사짓는 데 써야 할지, 마실 물을 사람부터 가축까지 어떻게 배분할지를 둘러싸고 어려운 씨름을 해야 할 판이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일수록 중요한 건 지금 누가 물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공개하고 그 쓰임의 우선순위를 토의하는 일이다. 이는 가뭄에 모내기가 어려워도 골프장에는 농업용수를 헐값에 보낸다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백영경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 경향 2023.08.21.

 

 

이승만기념관 돕겠다는 이종찬 광복회장, 진심인가?

이종찬 광복회장은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이회영 선생은 풍찬노숙 고난의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초창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지만 임시정부에 실망해 떠났다. 아나키스트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였고 일본 제국주의를 내쫓고 독립을 이루기 위한 활동을 하다가 피체돼 중국 뤼순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이종찬 회장이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지난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협력을 요청하자 이종찬 회장은 팔 걷어붙이고 돕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기 때문이고 광복회장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유지를 저버리는 일이자 독립선열을 욕보이는 일이다.

 

이종찬 회장은 전두환 정권에 협력했던 지난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독립운동가의 가풍을 잇는 사람이라면 군사 반란세력의 수괴이자 국민학살자들이 이끄는 국가보위입법회의와 민주정의당(민정당)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승만은 기념관을 지어 기릴 만한 인물이 못 된다. 사적으로 기념관을 짓는 것도 문제가 될 인물인데, 하물며 국민 세금을 들여 기념관을 짓는다는 것은 더더욱 안될 일이다.

 

임시정부가 모든 독립운동 세력의 임시정부가 되지 못하고 분열하고 지리멸렬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맡은 이승만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았고 임시정부에서 논의도 하지 않은 채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국제연맹 이름으로 위임 통치를 해달라고 청원하는 독선적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임시정부에서 탄핵되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이후 미국에 거주하면서 개인적 치적을 쌓는 데는 열심인 반면에 독립운동의 족적은 희미하기 이를 데 없다. 오히려 미주 독립운동을 분열시킨 장본인이다. 해방 뒤 귀국한 이승만은 민족세력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뭉치라는 독선을 부렸고 급기야는 단독 정부론을 꺼내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을 초래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방해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는 얼마나 심했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 깡패 세력의 뒷배가 이승만 정권이다.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국민 대량 학살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최소한 10만명에 이른다는 보도연맹원 학살, 기결수 포함 재소자 대량 학살, ‘부역자대량 학살, 3만명 이상의 제주 도민 대량 학살, 4·19 혁명 때의 대량 학살, 국민방위군 역대급 사망 사건, 함양·산청과 거창 민간인 학살, 반인권의 국가보안법 제정과 집행을 통한 국민 생명권 박탈과 부당한 공안사건 조작을 통한 정적 살해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희대의 독재자가 바로 이승만이다. 이런 자를 기린다면 역사 정의는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이승만을 숭모하는 집단에서 볼 때는 건국 대통령인지 모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학살자 내지 학살 책임자다.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한 인물이자 민주공화국 파괴자다. 오직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역사를 거꾸로 돌린 반역사적 인물이고 수십만 국민의 목숨을 빼앗은 자다. 이승만 기념관 건립은 히틀러 기념관 건립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히틀러 기념관을 세웠다는 말을 필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임시정부에서 탄핵되고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국민에게 총질하다 쫓겨난 인물을 기리는 것은 헌법 위반이고 역사 역주행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기념관 건립 시도를 즉시 멈춰야 한다.

최창우 |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 한겨레 2023.08.22.

 

 

택배상자 손잡이 구멍과 인공지능 인권 원칙의 상관관계

약자의 기술정치학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코로나19 국면은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물리적 대면보단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물리적) 거리 두기가 바이러스 감염을 막는 필수 조건이 되었다. 이제는 언택트(비접촉)’ 관계를 새로운 일상, 즉 뉴노멀로 받아들이게끔 하고 있다. 어쩌면 바이러스 감염의 재앙 시대 이른바 비대면 자동사회로의 국가 미래 전망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재난형 자본주의 모델로써 한국판 (디지털) 뉴딜은 비대면 자동사회로 나아가는 추진 동력이 됐다. 물론 그것이 우리에게 선사할 미래는 플랫폼과 인공지능(AI) 기술에 기댄 경제 선도국가의 위상이다.

 

항상 그렇지만 미래는 현실 안에 이미 존재한다. 오늘의 노동 현실은 미래를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바이러스에 면역되고 청정의 매끈하고 편리한 일상을 얻기 위해, 약한 고리로부터 시작된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희생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플랫폼과 앱의 편리한 비대면 시장이 열릴수록, 자본주의 야만은 거세진다. 플랫폼 장치에 연결되어 택배, 돌봄, 배달, 퀵배송, 물류 등 물리적 신체 노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그림자’·‘유령노동자들의 과로사와 사고사가 급증하고 있다. 비대면 소비시장을 위해 노동 약자는 사회의 가시권 밖으로 사라지고 사회적 돌봄의 외부로 밀려났다. 위태로운 죽임들이 잠깐이나마 단신 뉴스로 언급돼야 그나마 공적 시선에 노출된다. 그도 시간이 지나면 텅 빈 숫자로 기록되어 잊힌다.

 

택배상자 손잡이와 불량인공지능

지난해 택배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내는 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과다 적재된 택배상자들의 분류나 배달 일이 잦고 가중되는 허리 통증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나 과로 상황을 완화하자는 취지였다. 상자 손잡이 마련 논의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주목을 받고 노동부 장관의 약속까지 있어 개선이 쉬 이뤄질 것이라 다들 믿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바뀐 것은 없다. 다들 잊은 미완의 택배상자 손잡이 구멍은 우리 사회가 노동을 대하는 누적된 시선을 반영한다. 박스에 작은 구멍을 하나 내는 데도 그동안 관련 업계들이 비용, 위생, 안전 등 이런저런 이유로 거센 반대를 거듭해왔다. 하찮아 보이지만 이 작은 구멍 내는 일의 어려움은 우리 사회의 노동에 대한 존중과 신뢰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주 단순한 택배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내는 일도 이럴진대, 일상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 밀착된 첨단 기술의 설계 문제는 더욱 정치적이다. 시장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서 플랫폼과 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이 범용 인프라가 되는 우리 현실을 보자. 가령, 알고리즘 기술을 통해 배달 라이더들의 플랫폼노동 과정과 성과를 통제하더라도 노동자 스스로 그 전체 기술 맥락을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암흑상자와 같은 디지털 통제 기제에 쉽게 저항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특정한 지능 설계가 한번 굳어져 익숙해지면 문제가 있더라도 택배상자에 구멍을 내는 것 이상으로 개선이 더 어려울 수 있다.

 

우리 현실을 비웃듯 갈수록 인공지능 알고리즘 자동 설계가 일상이 돼간다. 포털과 소셜미디어, 면접, 구인 및 구직, 배달, 주문, 추천, 예측, 판결, 관리 시스템 등에 두루 착근돼간다. 자동 알고리즘 설계들은 일과 일상 모두에서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각광을 받는다. 지난해 정부가 인공지능 국가전략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던 일은 실제 지능형 자동화 기술을 통해 성장에 올인하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미 그를 훨씬 능가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고 한다. 지능형 기술의 가속화 국면이다. 하지만 우리 피부로 직접 느끼는 기술은 ‘B불량의 인공지능과 플랫폼 기술 정도가 아닌가 싶다. 포털의 뉴스 랭킹은 매번 신뢰성에 대한 의심으로 번지고, 광고주에 의해 자동 추천은 늘 바뀐다. 자극적 가짜뉴스들은 늘 우리 시선을 배회하고, 플랫폼에 매달린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점점 알고리즘 노동 통제에 맞닥뜨려야 하며, 데이터 레이블링 등 신종 공공근로사업에 동원된 뉴딜 청년들은 단기 허드렛일인 ‘AI 눈알 붙이기에 동원된다. 이들 인공지능 기술의 리얼리즘은 생각보다 불량하고 후진적이다.

 

착한’ AI에서 사람 중심’ AI

혹자는 기술 혁신이 거듭되면 이 모든 문제들이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 단언한다. ‘성긴자동 알고리즘의 기계학습 오류를 잡아나가면 자동화 기술이 저지를 수 있는 학습 오류는 물론이고 사회적 편향이나 편견 또한 개선되는 효과를 거둔다고 보는 낙관론이 우세하다. 가령 시각 이미지 식별 능력과 관련해 개와 고양이, 돌과 음식, 흑인과 고릴라 등 인공지능의 오인을 야기했던 적대적 사례들은 지능 기계의 학습량이 늘면서 이미 해결됐고, 대부분의 사물 식별 정확도가 99% 이상 향상됐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흑인을 고릴라로 오인했던 구글 인공지능의 오류는 기술 체제 밖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기술적으로 충분한 다인종 데이터 세트를 고려하지 못한 기계학습 오류이기도 했지만, 바로 그 자동 알고리즘을 짰던 백인 남성 개발자의 인종적 편견과 감수성 부재의 소산이기도 했다.

 

지능 기계의 기술 디자인은 택배상자와 달리 마치 밖에서 보면 암흑상자와 같아 이에 각인된 사회문화적 편견이나 오류는 사안이 크게 문제시되기 전까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구글의 사례처럼 인종 등 사회 문제로 불거지는 경우에나 오류가 잡힐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보다 더 깊게 박힌 사회문화적 맥락의 2차적 의미로부터 발생하는 인공지능의 편향과 왜곡이다. 이는 기술적 버그처럼 잡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기술의 사회적 형성과 관계에 기인한다.

 

인공지능 자동 기술이 우리 판단과 취향, 노동과 생존을 규정하는 경향을 보라. 늘 기술은 그 기능적 효과와 더불어 사회문화적 층위와 씨줄·날줄처럼 긴밀히 엮여 있다. 긍정적인 상황은 국제사회에서 인공지능 윤리나 가이드라인 혹은 원칙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는 데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져가는 것에 대한 우려를 담아 각국 정부, 닷컴 기업, 국제기구, 학계 연구소, 시민사회 등이 관련 윤리 장전이나 원칙을 속속 마련하고 있다.

 

올해 1월 하버드대학 버크먼 클라인 센터에서 발행한 인공지능 원칙들이란 보고서는 전 세계에서 발표된 40여개의 중요한 인공지능의 윤리, 가이드라인, 선언, 전략, 원칙 등을 모아 소개하고 있다. 버크먼 센터는 이들 선언에서 몇 가지 공통 테마 혹은 최소 원칙을 확인했다. 즉 그들 대부분은 프라이버시 보호, 책임성, 안전과 보안, 알고리즘 투명성과 설명 가능성, 공정과 비차별, 기술의 인간통제, 직업적 책무, 인본적 가치의 진흥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이들 인공지능 원칙은 한 사회에 지능형 기술을 도입할 때 일반 규범 차원에서 따라야 할 내용 정도로 볼 수 있다. 버크먼 보고서는 최소한의 인공지능 도입에 대한 공통 세부 원칙들이 필요하나, 국가나 지역 혹은 주체(기업·정부·시민) 등에 따라 각 원칙에 대한 강조나 비중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해줬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11인공지능 윤리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방송통신위원회와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주도해 해외에서의 흐름과 유사한 입장에 기초해 자체 안을 내놓았다.

 

해외 인공지능 가이드라인이나 국내 윤리 원칙 마련은 단순히 착한시스템 개선을 통한 공학적 해결에 의지하던 오랜 태도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 말하자면 기술 그 자체의 논리에서 인간 중심혹은 인간 주도의 알고리즘 접근으로 논의를 틀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사람 중심인공지능 또한 본질적 한계를 보인다. 우선 알고리즘 편견의 원인을 개발자 인성이나 기업 윤리의식 문제로 보고 접근하는 제한적 시각이 여전히 우세하다. 게다가 주요 닷컴 기업들의 경우 실상 사람 중심윤리 원칙을 마련하는 일에 꽤 적극적인데, 정부의 알고리즘 규제나 시민사회의 비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이를 적극 활용하는 까닭이다.

 

사람 중심인공지능 접근은 여전히 기술을 구조적 억압의 문제로 바라보는 심층 감각이 부족하다. ‘사람 중심’, ‘참여포용이란 정책 개념어들이 우리 사회에서 진즉에 텅 빈 미사여구처럼 된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 외려 인공지능의 특정 설계에 연결된 첨예한 구조적 양극화와 이에 저항할 기술정치학의 관점을 기입할 필요가 있다. ‘사람 중심인공지능 시각만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이 관여해 어떤 목소리를 내거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경로란 택배상자에 손잡이 구멍 내는 일 이상으로 어렵다.

 

약자 인권의 기술정치학

인공지능의 기술 원칙에 처음부터 약자 인권 존중의 관점과 태도가 각인돼야 함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단순히 착한인공지능이란 공학적 기대나 개발자 윤리·덕목으로 취급하기에는 인공지능이란 기술은 구조적 성격이 너무 강하고 자본주의적 권력 연결망이 촘촘하다. 이런 구조적 기술 현실에서 사람 중심의 인공지능 원칙은 현실감 없는 맥 빠진 수사학이 되거나 기실 어떤 사회적 약자도 대변하지 못하는 빈말이 될 공산이 크다. 오히려 전후 세계인권선언에서 일찌감치 제기된 모든 인간의 차별 없는 존엄적 삶의 권리와 기본적 인간 자유에 대한 강조처럼, 이를 계승하는 인공지능의 민주적인 설계 원칙이 적극 마련될 필요가 있다.

 

가령 독일 알고리즘 와치의 자동화 사회 보고서’, 액서스 나우의 인공지능 시대 인권보고서, 국제인권그룹 앰네스티의 토론토 선언’, 퍼블릭 보이스 연합의 ‘AI 일반 가이드라인’, 국제노동기구(ILO)일의 미래보고서, 그리고 뉴질랜드의 알고리즘 헌장’, 유네스코 국제전문가그룹의 ‘AI 윤리 권고안등이 함께 강조하는 대목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 중심의 인공지능이란 모호한 정의 대신 미래 인공지능과 플랫폼 시대 약자 보호와 인권 지향의 기술 민주주의적 설계 원칙을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는 데 있다.

 

K방역의 성공에 대한 조급증은 우리 사회에 인공지능 자동화란 기술 해법을 더욱 강제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일 명분을 줄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인간 의식은 알고리즘 판단에 의존하며 기술 예속의 길을 걸을 위험성이 크고, 지능 자동화와 만성 경기침체로 단기 유령노동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며, 플랫폼 알고리즘 장치로 매개된 일상의 소비와 노동 활동에 대한 기술 통제가 더 내밀해질 것이다. 이들 지능형 기술에 다치고 강제 예속되는 약자와 타자를 위한 인공지능의 인권 원칙을 우리 현실에 구체화하기 위한 범사회적 숙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에 더해 인공지능의 사회 대안적 윤리 원칙을 찾으려는 국제 시민사회의 기술인권 모델 모색은 우리에게도 긍정적 시사점을 줄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인공지능의 인권 원칙을 세우는 일은 택배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내는 일과 그리 다르지 않고, 기실 맞닿아 있다. 둘 다 일상의 야만에 맞서 약자의 기술정치학을 도모하는 일이지 않은가?

이광석 교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 전공 교수 경향 : 2020.10.29.

 

 

이용마의 죽음과 이동관의 부활

4년 전 오늘(823), 문화방송 앞에서 노상 장례식이 있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복막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이용마 기자가 젊은 아내와 쌍둥이 아들을 남기고 세상과 작별하는 날이었다. 삼성 비리를 끈질기게 파헤친 근성 있는 기자였고 권력 엘리트의 횡포를 고발하는 데 한 치의 양보도 없던 언론인이었다. 그는 노조 홍보국장으로 2012년 공정방송을 위한 파업을 이끌다가 사내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해고 기간 병을 얻은 그는 59개월 만에 복직할 때 이미 손쓸 수 없는 말기암 환자였다. 그의 소망은 엠비시(MBC) 뉴스 이용마입니다를 다시 힘차게 외치는 것이었으나 그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이용마 기자를 사지로 내몬 것은 치밀하고 조직적인 언론 와해 공작이었다. 2010년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은 엠비시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이란 문건을 작성했는데, ‘(1) 인적 쇄신과 프로그램 퇴출 (2) 노조 무력화 (3) 엠비시 민영화라는 3단계 방송 장악 전략이 담겨 있다. 이 문건을 작성하도록 지시한 자가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사자인 이동관은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한다. “제가 만약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서 어떤 지시, 실행 그리고 분명한 결과가 나왔었다면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는 그의 표정엔 자못 여유가 넘친다.

 

실은 나도 그게 궁금하다. 어떻게 이동관은 다시 공직에 호명될 수 있었을까? 2017, 홍보수석의 지휘 아래 국정원 기획안대로 언론 장악 프로젝트가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곳이 서울중앙지검이다. 당시 지검장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그를 방통위원장에 지명했으니 이동관의 언론 장악 전력은 범죄적 흠결이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전문성이었다고 봐야 할까?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를 체포하고 고문하던 노덕술이 해방 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발탁되고 이승만 정부 아래서 승승장구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이승만은 권력 안정을 위해서 빨갱이 사냥이 필요했고 그 일을 믿고 맡길 기술자를 원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조차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 뺨을 맞고 곤욕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이승만의 충견으로 총애받던 노덕술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나라에 요긴하게 쓰일 기술자라는 이유로 풀려났고 서훈의 근거도 미상인 채로 화랑 및 충무무공훈장을 3개나 받았다. 화려한 부활이다. 처벌해 마땅한 구시대 인사를 요직에 발탁해 그 전문성을 재활용하는 지도자의 식견이 놀라울 뿐이다.

 

막장 드라마 같은 정치는 복고풍 레퍼토리를 무한 반복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는다고 맹공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논하거나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면 공산당, 전체주의자, 심지어 패륜아가 된다. 윤석열의 자유주의 안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의견만 자유롭다. ‘이 정부의 모든 것은 완벽하다!’

 

이동관은 대통령의 사상적 동반자로서 손색이 없다. 동아일보 정치부장 시절 뉴라이트특집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 바람을 일으킨 자칭 스핀 닥터답게 이동관은 낡은 반공주의 뼈대에 자유주의 액세서리를 달아 옛 물건을 리모델링하는 데 명수다. 문제는 그 논리가 실제와 맞지 않아 자가당착으로 종종 스텝이 꼬인다는 데 있다.

 

이동관은 검증하고 의심하고 확인해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진실을 전달하는 게 언론의 본령이고, 정파적 논리를 무책임하게 퍼 나르는 게 공산당 기관지라고 말했는데, 그게 진심이라면 그는 조선·중앙·동아일보를 공산당 기관지로 선포해야 마땅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이동관 지명부터 인사청문회 직전까지의 언론 보도를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동관 관련 보도량이 가장 적은 매체가 조중동이고 검증, 의심, 확인하는 절차 없이 후보자 입장만 그대로 퍼 나른 비율이 제일 높은 매체 역시 조중동이다. 이동관이 말하는 공산당 기관지란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언론에만 해당하는 말인가? 그건 자유주의가 아니라 매카시즘이다.

 

다시 이용마 기자를 생각한다. 그의 어린 두 아들이 성인이 되어 읽기를 바라며 투병 기간 마지막 혼을 담아 쓴 책 제목은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이다. 이용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방송 장악의 총사령관 이동관이 다시 컴백하는 요지경 세상, 그래도 낙담하진 말자. 그의 아들들에게 네 아버지가 한 말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정신 차리고 잘 버텨야 한다.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한겨레 2023-08-22

 

 

필리핀 이모님들의 불안한 미래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판결문도 쓰는, 똑똑한 인공지능(AI)이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 노동은 무엇일까. 최근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인공지능 노출도를 따져봤더니, 이발·미용사와 보육·가사노동자, 소방관, 배관공 등은 상대적으로 인공지능에 덜 노출된 직업으로 분석됐다. 반면 대학 교육이나 분석 기술이 필요할수록, 고임금을 받는 직업일수록 인공지능에 대체되기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육아·간병을 비롯한 돌봄노동은 다른 인공지능 연구에서도 자동화가 어려운 영역으로 꼽히곤 한다. 돌봄노동에서 필수인 공감 능력은 인공지능이 흉내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갈수록 돌봄노동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관련 직업도 세분화되는 추세이지만 윤석열 정부의 돌봄 정책은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모양새다. 정부가 연내 필리핀 국적 노동자 100명을 가사·육아도우미로 데려온다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내국인과 재외동포(F-4)·결혼이민자(F-6)와 같은 장기체류자, 방문취업동포(H-2)만 취업할 수 있는 가사·육아 돌봄서비스 분야에 비전문취업(E-9) 비자를 추가하기 위한 시범사업의 일환이다. -가정 양립 정책에 힘을 싣고 있지 않은 정부가 이를 저출생 대책으로 앞세운 것도 문제지만 그것 말고도 따져볼 대목이 적지 않다.

 

우선 고용허가제의 근간을 이루는 비전문취업 비자는 내국인을 구하지 못한 중소기업에 인력을 공급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정부는 가사·돌봄 인력의 공급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하지만, 이는 절대적 인력의 수가 부족하다기보다 낮은 처우로 인해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문제다. 거슬러 올라가면 가사노동은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대표적 비공식 노동이었다.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될 당시부터 가사사용인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11조 적용범위)이 따라붙었다. ‘허드렛일이라거나 여성(엄마)의 임무라는 전근대적 인식 때문이다. 그나마 2021년 가사근로자법 제정으로 노동자성 인정과 처우 개선이 겨우 첫걸음을 뗀 상황인데, 다시 값싼 노동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실제로 고용노동부는 최저임금(시급 9620)을 적용한다고 했지만, 시범사업에 쓰일 예산(숙소비 등 15천만원)을 쥐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공공연하게 더 낮은 임금을 요구한다. 현재 가사·육아도우미 시급은 15천원 안팎으로 형성돼 있다. 오 시장은 지난해 9월 국무회의에서 38~76만원의 싱가포르식 외국인 육아도우미 도입을 건의하며 논의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기도 하다. 비전문취업 비자가 개방되면 업계의 전반적인 임금 수준 하락을 초래할 소지도 크다. 열악한 일자리가 될수록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오래 일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이는 질 낮은 돌봄서비스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전 정부에서도 검토했다가 중단한 이유는 무엇인지, 왜 가사·육아 분야는 정주 기반 외국 인력에게만 허용해왔는지를 제대로 들여다본 것인지도 의문이다. 앞서 기획재정부는 2016년 경제정책방향으로 외국인 가사도우미 도입여부를 검토했지만 정부 부처 내에서도 저임금으로 인한 불법체류, 인권침해, 내국인 일자리 침해 등에 대한 우려가 나오면서 논의가 중단됐다. 노동 전문가들은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가 과연 개인의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김양숙 사회학자)이라고 지적한다. 현행 고용허가제가 사실상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노동자에게는) 월급 100만원만 줘도 자국 임금의 몇배 수준’(오세훈 시장)이라며 낙관하는 것도 섣부르다. 우리는 농촌 일손 부족에 투입된 외국 인력들이 하나둘씩 사업장을 이탈하는 과정을 지켜본 바 있다.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고 잔업·특근으로 수당을 더 챙길 수 있는 제조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돌봄노동 시장이 또 다른 불법체류를 양산하는 관문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는 말이다. 육아와 단순 가사가 엄격하게 분리되는 추세인데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면 필리핀 노동자에게 주로 어떤 업무가 주어질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단순히 외국인 가사도우미로 퉁치고 시작할 문제가 아니다. ‘필리핀 이모님들의 불안한 미래가 벌써 떠오르는 건 과도한 우려인가.

황보연 | 논설위원 한겨레 2023-08-22

 

 

가난한 개미, 부자 베짱이

더운 날씨에도 개미는 쉬지 않고 일한다. 베짱이는 그런 개미를 비웃으며 나무 그늘에서 노래를 부르고 낮잠을 잔다. 겨울이 되자 개미는 쌓아둔 식량 덕에 풍족하게 살지만 베짱이는 쫄쫄 굶는다.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는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사람은 잘살고, 당장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게으르며 소비에 열을 올린 사람은 가난하게 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현실은 개미처럼 사는 사람이 가난한 경우가 많다. 땡볕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농민들,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새벽 버스에 몸을 싣는 사람들, 모두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일을 많이 해야 하는 처지인지도 모른다. 반면 베짱이는 놀아도 계속 잘살기만 한다. 남들이 일하는 평일에 골프를 쳐도 통장에는 매달 이자가 쌓이고 임대료와 주식 배당금이 들어온다.

 

()를 축적하는 방법은 두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노동을 통한 저축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이다. 일제 수탈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1950년대까지 한국은 대부분의 사람이 가난했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던 시절에는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 자수성가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은 경제성장률이 1%대로 하락했다. 선대에서 물려받은 부동산이나 주식 등의 자산이 저축으로 만들어진 자산보다 더욱 빠르게 성장하는 시대가 됐다. 10년치 월급을 모아도 수도권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하기 어렵다. 아파트 가격이 그사이 더 많이 오르기 때문이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는 자본 수익률이 현저하고 지속적으로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경우, 거의 필연적으로 과거에 축적된 자산의 상속이 현재 축적되는 자산인 저축을 압도한다고 했다.

 

자본주의의 전제는 사유재산 인정이다. 합법적인 부의 축적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부모가 피땀 흘려 일군 논밭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당연하고,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소득이 있는 곳에는 세금이 있다. 부모가 재산 50억원을 자녀 2명에게 남겼을 때 상속세를 매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50억원에 세금을 매기고 이를 자녀가 절반씩 나눠 내게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두 자녀가 각각 물려받은 25억원에 세금을 물리는 것이다. 앞의 방식이 유산세, 뒤의 방식이 유산취득세다. 한국은 유산세 방식이다. 누진세율이 적용되고 과세표준이 30억원을 넘으면 최고세율 50%가 적용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은 유산세를 유산취득세로 바꾸고 세율을 낮춰 상속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산취득세로 바꾸면 세수가 당장 수조원 줄어든다. ‘부자 감세논란이 일고 재정 악화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인지 올해 세법개정안에서 유산취득세 전환이 빠지고 대신 출생률 제고 대책이라며 결혼자금 세액공제(최대 15000만원)가 등장했다. 자녀 등 직계비속에 대한 증여세 공제 한도가 5000만원인데 결혼하면 여기에 1억원을 추가해주겠다는 것이다.

 

비과세 유산 15000만원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신혼부부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책이라는 찬성 의견과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박탈감만 주는 정책이라는 반대 의견이 있다. 하지만 상속은 부모의 재산이 대를 이어 자녀에게 전달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 사회의 상속제도는 권력과 부를 분배하는 일종의 시스템이다. 사회의 정치·경제가 변하면 상속제도가 달라지고, 상속제도가 변하면 그 사회의 정치·경제가 달라진다.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부와 지위의 대물림 여부다. <상속의 역사>를 쓴 역사가 백승종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서구 유럽에서 상속의 초점은 상속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구제될 전망이 있는가에 맞춰졌다고 한다. 상속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흡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들도 유능한 인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의 분배는 언제나 정치적이다. 거대한 부가 주로 상속의 결과인지 아니면 자수성가의 결과인지에 따라 불평등에 관한 관점과 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불평등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기회가 균등한 상태에서 자수성가로 이뤄진 결과라면 이것은 공정하고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젊은 연령에서 불평등이 심하고 그 불평등이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면 이는 사회 구성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평등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핵심은 그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을 용인할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창민 논설위원 경향 2023-08-23

 

 

이럴 줄 몰랐다

바야흐로 1990년대.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작으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하나둘 무너졌다. 빨갱이 국가 중공과 수교도 했고 그 무렵 해외여행도 완전 자유화됐다. 대학가에는 해외 배낭여행이란 이름의 여행상품 광고가 곳곳에 붙었고, ‘어학연수란 것도 유행했다. 아직도 촌스러운 구석이 없진 않았지만 세계화의 흐름을 빠르게 좇아가고 있다는 느낌의 시대였다.

 

그런 어느 날, 지도교수님을 찾아뵀다. 학부 때인지 석사과정 때인지도 까물까물한 꼬마 시절, 무슨 심부름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 교수님 방문을 노크하며 들어왔다. 일본 T대의 한국사 교수님이, 사전 약속은 없었으나 한국 방문 김에 인사드리겠다고 온 것이었다. T대 교수님이라니, 당연히 자리를 비켜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터, 예상치 않게 지도교수님께서 지금 학생이랑 상담 중이니 다음에 들러달라며 문전 박대를 하시는 게 아닌가! 나 같은 학생이 뭐라고 T대 교수님을 박대하시나 싶은 데다, 그 교수님이 가신 후 내게 하신 말씀이 더 이상했다. 지도교수님은 어깨를 으쓱하시며 요샌 T대 사람들도 한국사를 공부하려면 우리 과 학술지부터 챙겨 봐요라고 하셨다.

 

그땐 이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한국사 공부를 하려면 당연히 우리 과 학술지를 보겠지, 그게 뭐라고 저렇게 말씀을 하신 것일까? 이게 이해가 된 건 몇달 전 1960년대 나온 논문 한 편을 읽으면서였다. 그 글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경성제대 교수 출신인 일본인 학자가 해방 후 한국에서 처음 나온 한국학 학술지를 읽어보고선 자기들이 깔아놓은 레일위를 달리고 있으니 일제강점기 자기들이 한 연구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평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30년 전 지도교수님의 뜬금없는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지도교수님이 막 공부를 시작했던 1960년대, 식민지배를 한 일본인 학자가 해방했어도 한국 연구 별거 없네라고 평한 걸 보고 분기탱천하셨을 그 마음을, 그래서 그사이 성취하신 것에 대해 어린 제자 앞에서 힘주어 말씀하고 싶으셨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시절엔 솔직히 지도교수님이 좀 촌스러워 보였다. 학생 앞에서 센 척하고 싶으셨던 걸까 싶어서 말이다. 1990년대는 식민지 지배 책임을 나름 인정한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도 나온 시대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식의 망언이 툭툭 나오긴 했어도 그러다 말겠지 싶었다. 막 공론화되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문제도 여전히 갈등이 있긴 했지만 점차 해결될 것이라 낙관했다. 과거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정리되는 게 역사의 순리처럼 보였고, 세계화의 긍정성을 의심치 않던 그런 시대, 지도교수님의 태도는 여전히 과거에 얽매인 구닥다리 같아 보였다.

 

지금 와서 그렇게 낙관했던 마음을 돌이켜보니 어안이 벙벙하다. 도대체 그 후 3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도교수님이 공부를 시작한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그 30년 동안 일어난 일들과 일궈내신 성취들은, 그 후 30년 사이에 어떻게 된 것인가? 세계 곳곳에서 몇백년 전 노예무역을 한 인물들의 동상들도 철거되는 마당에, 피해자도 버젓이 살아 있는 80년도 안 된 우리의 식민지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룬다니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반면에 망한 지 30년 된 공산주의가 새로운 적인 것처럼 언급되는 것도 어리둥절할 뿐이다.

 

우리는 너무 당혹스럽지만, 이런 시대는 역사학자에게 너무 매력적이다. 아마도 먼 훗날 이 30년에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달라붙을 것이다. 결과를 아는 후손에 의해 예리하게 난도질당할 것을 생각하니 머리털이 쭈뼛 선다. 어떻게 분투해야 후손에게 욕 얻어먹지 않을까. 대충 살아도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시대도 있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젠장.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경향 2023-08-23

 

 

‘2023 한국언론 대학살과 그 부역자들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75년의 일입니다.

 

박 정권이 폭압을 가하면 가할수록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들의 저항도 더욱더 거세졌습니다. 위협을 느낀 박 정권은 이를 억누르려고 간첩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바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적색 공포증(레드 콤플렉스)’을 이용해 민주화 요구를 잠재우려는 악랄한 음모였습니다.

 

민복기 대법원장이 이끌던 당시 대법원은 그해 48,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조작한 기소장을 바탕으로 도예종 씨 등 8명에 대해 사형 확정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박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다음 날 새벽, 사형 집행을 했습니다. 가족에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 집행 다음 날, 이를 사법 살인이라 규정하고 사형 집행일인 ‘197549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사형 집행 32년 만인 2007, 무고한 희생자 8명은 비로소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필귀정이지만 이미 앗긴 목숨은 되돌려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히려 사법 살인사법 암흑의 날이라는 말의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지 절감했습니다.

 

하수인김효재 직무대행의 언론 학살맹활약

박정희 독재정권은 법 전문가와 법을 앞세워 사법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지금 윤석열 정권도 법을 악용해 언론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2023 언론 대학살이라고 부를 만한 만행입니다.

 

윤 정권의 언론 학살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역자는, 김효재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입니다, 사법 살인 당시 수사 및 재판의 책임자였던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민복기 대법원장, 이용택 중정 제6국장 같은 인물이 환생한 듯합니다. 신직수, 민복기, 이용택 등이 정권에 충성한 덕에 사건 이후에도 떵떵거리며 잘 살았으니, 그런 전례를 따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김 직무대행은 23일 임기를 마치면 곧바로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직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언론계에 자자했었습니다. 이에 멍석을 깔아주려는 듯, 윤 정권 들어 임명된 친윤 이사 3인방16, 전 정권에서 임명된 표완수 이사장 몰아내기 쿠데타를 꾀했습니다. 비상임이사들의 반대와 기권으로 쿠데타는 미수에 그쳤지만, 그가 언론 학살을 한 대가로 앞으로 어떤 포상을 챙길지 지켜볼 일입니다.

 

그가 여권 추천의 이상인 방통위원과 이인삼각이 돼 최근 한 달 사이에 해임했거나 해임하려는 공영방송 이사만 해도 무려 5명입니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공영방송 이사들을 강제 추방한 것은, 언론사에 없던 일입니다. 814일에 남영진 한국방송 이사장 해임 건의안과 정미정 교육방송 이사의 해임안을 처리하더니, 임기 만료를 이틀 앞둔 21일에는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도 몰아냈습니다. 지난달에는 윤석년 한국방송 이사를 쫓아냈습니다. 다음 달엔 김기중 방문진 이사도 목을 날리겠다고 예고했습니다. 그가 몰아내거나 사퇴한 공영방송 이사 자리는 이명박근혜정권 때 정권 앞잡이로 악명을 떨쳤던 황근(이상 한국방송), 차기환(방송문화진흥회) 씨를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모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식의 엉터리 법 적용과, ‘억울하면 법정에서 따지라라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폭거입니다.

 

김 직무대행의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윤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기 직전인 17, 정연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쥐도 새도 모르게 기습적으로 해촉했습니다. 이때 밑밥을 깔아준 이도 그입니다. 방통위의 방심위 감사를 통해 업무추진비 집행과 출퇴근 시간 관리 등에서 사소한 문제를 겨우 찾아냈는데, 이것이 해촉 사유가 됐습니다. 국민의 혈세에서 나온 특수활동비 중 수십억 원을 증빙자료도 없이 주머니 속 쌈짓돈처럼 마구 써온 윤석열 검찰의 행태를 생각하면 헛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하도 엄청난 일이 매일 같이 일어나는 바람에 가물가물해졌지만, 대통령실의 지시에 따라 법률을 위반하면서 처리한 한국방송 수신료 분리 징수도 그의 빼놓을 수 없는 폭거입니다.

 

한국언론의 목숨이 걸린 절체절명의 시기

530, 한상혁 방통위원장 면직으로 본격화한 윤 정권의 언론 학살극은, 모든 방송과 신문이 땡윤 뉴스로 도배질 될 때까지 부역자들의 협조 아래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눈치코치 보지 않고 대량 언론 학살을 저지르고 있는 목적입니다.

 

임무를 마치고 물러나는 김효재 씨 뒤에는, 그보다 훨씬 교활한 언론 파괴 및 장악 전문가이동관 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방통위원장 자리를 이어받자마자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의 사장 교체를 진두지휘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공영방송의 힘을 빼고 사영 방송에 힘을 실어주는 작업에 본격 착수할 것입니다. 그는 국회 청문회에서 이미 이런 음흉한 생각을 털어놨습니다. 그래야 보수 기득권 세력이 일본의 자민당처럼 연년세세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겠죠.

 

그와 발을 맞춰 언론 장악 작전을 수행할 과거의 언론 탄압 기술자들도 속속 집결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 때 문화방송 노조 탄압의 선봉장이었던 이진숙 전 대전문화방송 사장이 김 씨의 후임으로 국민의힘 추천을 받아 출동대기 중입니다. 기습 해촉된 정연주 방심위원장 자리엔 와이티엔 재직 때 자신이 관할하는 방송에 가족 사업을 홍보하고, 노조 비방에 앞장섰던 류희림 씨가 즉각 지명됐습니다. 연합뉴스 사장 재임 때 불공정 편파보도로 사원 대다수로부터 퇴진 요구를 받았던 박노황 씨도 교통방송 이시장으로 복귀했습니다.

 

한국언론사에서 지금만큼 한국언론이 사느냐, 죽느냐’, 아니 한국의 민주주의가 사느냐, 죽느냐하는 절체절명의 시기는 없었습니다. 반면, 정권의 전횡에 이렇게 무력한 언론계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타산을 따지기에 급급한 모습마저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부역 세력은 뻔뻔하게 학살극에 가담하면서 사익 챙기기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누가 저에게 지금 한국언론은 어디에 서 있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2차 인혁당 사건 때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 살인사법 암흑의 날이라고 했듯이, “무자비한 언론 살인과 함께 한국언론은 암흑의 시기에 들어갔다라고 말입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절대다수의 현장 기자가 윤 정권의 언론정책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한국기자협회가 창립 59주년을 맞아 벌인 여론 조사(727~87일 조사)를 보면, 85.1%의 기자가 윤 정권이 대언론 소통을 잘못하고 있다’, 63.2%언론 활동이 자유롭지 않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입만 열면 자유를 되뇌는 윤 정권이 자유의 핵심인 언론자유를 압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뜻을 무시하는 정권은 잠시 승리할지 모르지만 길게 갈 수 없습니다. 당시엔 묘수처럼 보였던 사법 살인도 끝내 그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부역자들은 역사의 법정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역대 정권이 벌여온 언론 탄압도 마찬가지였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 착착 진행되고 있는 전대미문의 언론 학살극을 보면서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서 성긴 듯하지만,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라는 말을 그들에게 들려주고자 합니다.

오태규 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실장 :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23

 

 

일본 오염수를 대하는 한·중의 아찔한 차이

한국 정부는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는 것을 정말 찬성하는 거야?”

한 중국인 친구가 물었다. “그런 것 같다고 하자, “왜 그러냐고 다시 물었다. 간단하게 답하기 힘들었다. -, -일 관계 등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최근 정책 등을 설명했다. 중국 친구는 좀처럼 납득하지 못했다. 복잡한 정치·외교적 사정이 있다고 해도, 국민 건강과 직결된 오염수 방류 문제를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국가인 한국이 찬성하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중국인에게 한국의 정치·사회 문제를 설명하는 게 쉽지 않지만,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는 특히 어려운 주제다. 정부가 주장하는 과학적인 근거 외에, 미국과 관계를 최우선시하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중국 봉쇄의 최일선에 서려 하는 윤석열 정부의 복잡한 외교적 입장을 함께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설명을 미주알고주알 한다고 해서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중국 친구의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은 이 문제를 대하는 한국과 중국 정부의 태도가 아찔할 만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일본이 지난 22일 후쿠시마 오염수를 곧 바다에 방류하겠다고 결정하자, 시종일관 반대 입장을 취해온 중국 정부는 주중 일본대사를 초치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외교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인류 복지보다 자국 이익을 중시한 이기적인 결정이라며 해양환경과 식품안전, 공중보건을 지키기 위한 모든 조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수입 장벽을 더 높이는 것을 포함해 더 많은 조처를 하겠다는 것이다. 홍콩도 이날 “24일부터 일본 10개 현으로부터의 수산물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한국 정부의 태도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국가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수산업이 주요 산업 중 하나인 국가 정부의 반응이라고는 믿기 힘든 것이었다. 정부는 이날 브리핑에서 방류 계획상의 과학·기술적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사실상 일본 정부의 오염수 방류를 찬성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오염수 방류를) 찬성하거나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오염수 방류를 사실상 찬성하면서도 찬성한다고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반대 여론을 의식한 비겁한 태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수 국민과 야당이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것이다. 전국에서 187만명 시민이 오염수 방류에 반대한다고 서명했다. 중국 친구에게는 한국 국민까지 오염수 방류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2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반대 서명을 했다고 말해줬다. 오염수 방류 문제가 여론보다 과학적 근거를 더 따져야 할 문제라는 주장에 동의하지만, 한국 정부는 과학적 근거를 제대로 따져 묻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중국 정치와 한국 정치 중 어디가 더 나을까.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질문이 윤석열 정부 들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여론에 역행하는 행동을 곧잘 한다는 점에서 두 나라 정부가 겹쳐지는 것도 최근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도 중국보다 한국이 나은 점은 지금 당장 여론에 역행하는 정부를 막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크다는 점일 것이다.

최현준 | 베이징 특파원 한겨레 2023-08-24

 

 

각자도생과 모럴 아포리아(Moral Aporia) 사회

최근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한자어지만 중국의 고사성어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선시대 일본군이 침략했을 때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제 한 몸 숨기기에 바빴다. 대기근, 질병 등 사회적 재난이 닥쳤는데도 조정의 어느 누구도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 백성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강했고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나온 말이 바로 각자도생인 것이다. 서양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항해술이 발달했던 그리스에서 배가 좌초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 길 없음’, ‘막다른 지경에 도달함이라는 의미로 쓰였던 아포리아(Aporia)’이다.

 

현재 우리는 모럴 아포리아사회에서 각자도생으로 생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국민의 안전과 생존이 절대적 위기에 빠졌는데도 정부는 실정법만 운운할 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연민과 수용의 태도도 없다. 공공장소에 대놓고 사람들을 살해하겠다는 공언을 하고 묻지 마 살인과 폭행을 저질러도 공권력은 무력하다. 양평고속도로의 궤도를 바꾸는 권력 스캔들부터 해병대원의 희생을 묻는 조사에서도 정부 책임자는 밝혀진 사실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은닉하려 들 뿐 제대로 된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청년들은 현실에 좌절하고, 중년들은 각자도생을 외치며, 노년들은 무력함에 빠져 있다. 세대를 불문하고 고독사 또한 늘어나는 추세다. 시대정신은 실종된 채 과거 군사독재 때나 나왔던 전쟁, 빨갱이, 도발과 같은 말들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시대, 이권동맹과 카르텔은 작동하되 건강한 상식과 민주주의의 질서는 작동하지 않는 시대, 사회 정의와 평등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앞으로 어떤 방향성을 생각하며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할까. 정치권과 야당은 구시대의 패러다임에 갇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자신들이 할 일마저 망각한 듯 보인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도 없는 양육강식의 시대로 빠르게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과 두려움이 커진다.

 

각자도생이나 아포리아는 우리 사회의 혼돈과 혼란을 말하는 상징어이다. 문제는 이럴 때 가장 피해를 받는 이들이 대다수 국민들이라는 사실이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다. 믿을 것이라곤 오직 각자의 이권 패밀리,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직 이권과 이익만 최고라고 여기는 관점 앞에 부모형제라고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갈등관계가 되면 서로 물고 뜯으며 치고받고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는 오히려 가족주의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도덕적 자율성과 합리적 이성을 가진 존재가 핏줄과 이권의 패밀리에 갇혔다면 그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각자도생이 심화될수록 사회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믿음과 신뢰, 우리라는 개념을 파괴하여 지금까지 지켜왔던 사회적 자원을 갉아먹게 될 것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최근에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런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기만 살겠다고 너와 나를 분리하고 국민들을 이간질하며 네 편 내 편을 갈라치기한 결과, 궁극적으로 공도동망(共倒同亡)을 빚었다는 것을. 아포리아의 사회에선 지금까지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 것을 깨달아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각자도생이 아니라 공존동생(共存同生)의 관점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현재의 위기와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양치기 기게스는 우연히 자신의 종적을 감출 수 있는 불가사의한 반지를 손에 넣고 그 힘으로 왕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종적을 감출 수 있어도 존재를 감출 수는 없다. 자신의 종적을 감출 수 있다는 착각이 지금의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통령의 전력이나 종적을 감출 수 있는 시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참다운 삶과 행복은 정의와 평등을 지키고 나서야 가능해진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새겨봐야 할 때이다.

양준석 마음치유 활동가 민중의 소라 2023-08-23

 

 

 

디케가 울고 있다

눈을 가린 채 검과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의 형상은 고대 그리스의 여신 디케에서 연원한다. 디케는 이후 로마시대에 유스티치아로 바뀌고, 이것이 정의를 뜻하는 영어 저스티스가 된다. 서양의 법 관련 기관은 물론 우리나라의 대법원, 사법연수원, 대한변협 건물에도 디케의 상을 세워 놓았다. 그렇다면 디케로 의인화된 가치는 무엇일까?

 

먼저 디케와 구별해야 할 두 여신이 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적이나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용서없는 복수를 의인화한 것으로, 로마시대에는 장군이나 검투사의 수호여신으로 숭배되었다. 그의 손에는 저울이 들려 있지 않으며, 검과 채찍이 들려 있을 뿐이다. 그에게 권력과 실정법에 대한 성찰, 사용되는 수단과 방법의 비례성등은 애초에 결여되어 있다. 이 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집권세력은 네메시스의 추종자들이다. 이들의 눈에 반대파나 일탈자는 대화와 소통의 파트너가 아니라, ‘조인트를 까서 대청소해야 할 대상, ‘척결하고 적출해야 할 암적 존재일 뿐이다.

 

다음으로 디케는 자신의 생모인 신법(神法) 또는 자연법의 여신 테미스와 구별된다. 지상의 법과 질서를 뛰어넘는 그의 혜안과 예지력은 매우 소중하며, 이는 지상의 법과 질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테미스는 자신의 판단을 세상에 강요하지 않는바, 그는 디케가 들고 있는 칼도 저울도 들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친정부 성향의 특정 종교인들은 준정치인행세를 하며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에 임하려 하고 있고, 게다가 성과 속을 구분하지 않으며 자신의 교리를 국가와 사회 속에 강제주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디케의 형상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첫째, 디케의 상 중 다수는 눈이 가려진 모습이다. 이는 법과 정의를 실현할 때 사건 관련자의 계급, 지위, 신분, 개인적 연고 등과 거리를 두는 객관성과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함을 말한다. 특히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눈치를 보는 법이란 그 자체로 부정의를 잉태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디케는 저울을 들고 있다. 심판을 내리기 전에 특정 사안에서 상반되는 두 개의 입장을 충실히 듣고 엄밀히 형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울은 불법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상쇄하는 사정은 없는지 살필 것을, 그리고 불법을 저지른 사람을 제재하더라도 과도한 수단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디케는 양날의 검을 들고 있다. 이는 형벌권을 남용하는 자는 언젠가는 자신이 휘두르는 칼날에 다치게 될 것임을, 시민이 모든 문제를 형벌권을 동원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에 동조한다면 이는 시민 자신의 자유를 제약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됨을 상징한다.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한 뒤 권력을 잡은 군부가 5공화국을 출범시킨 뒤 내세운 구호가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비통한 역설이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십년을 회복하겠다고 선전하며 집권한 이명박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금압하고, 반대파에 대한 무리한 형사처벌을 시도하고, 게다가 사형집행 재개, 보호감호 부활까지 추진하는 것을 보니, 정치적 민주주의의 수준을 십년 전이 아니라 5공화국시절로 돌리려는 것이 아닌지 염려될 지경이다.

 

디케의 눈가리개가 풀리고, 저울의 추는 편중되고, 검의 한쪽 날만 번득거릴 때, 디케는 권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정의와 형평을 추구하는 여신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함을 명심해야 한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겨레 2010-04-01

 

'공산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용산전체주의 세력'에 관한 고찰

용산전체주의 세력이 있느냐고? 그건 본인들이 알 것이다

공산전체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전체주의'의 합성어일 것이다. 이 말을 쓴 윤석열 대통령이 개념 정립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의 추론을 할 수밖에 없다. 말이 나온김에 전체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언어는 생물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언어의 쓰임새도 변화해 왔다. 과거 전체주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 체제의 주요 특성으로 연구됐다. 이후 정치학에서는 민주주의 체제나 권위주의 체제 등 체제 특성을 구별짓는 방법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특히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발달한 체제에서는) '전체주의''전체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세력에 대한 비유적 의미로 많이 쓰인다.

 

'공산전체주의'는 진짜 스탈린주의자와 같은, 공산당원이면서 전체주의자가 현존하고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는 말은 너무 섬뜩하고,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 및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는 말은 '음모론'처럼 들린다. 반국가 세력, 즉 국가 전복 세력이 위장침투해 대한민국을 뒤엎으려는 모종의 '진지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걸로 읽힌다.

 

'전체주의'라는 말을 '자유'롭게 해석해 활용하는 건 '표현의 자유' 영역이겠지만, 너무나 자유분방한 해석은 어떤 임계점을 건드린다.

 

반대파를 '전체주의자'로 몰고 숙청했던 이야기는 70년 전 냉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 때 반공주의자들은 반공 이외의 모든 것을 '전체주의'로 규정하며 '전체주의'라는 말을 남용했는데, 역사학자 월터 라퀘르는 "공산주의 및 국민의 복리증진을 요구하고 달성하려는 사상을 유럽에서 발생한 '야만의 정치' 파시즘(전체주의)과 억지로 엮어 이 두 사상을 등치하려는 우익 권위주의자들의 고질적인 선동 방식"이라고 했다. 적대 세력을 '전체주의자'라고 규정하는 역사는 꽤 오래됐다.

 

공산 전체주의에서 '공산'은 북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북한 김정은을 '공산전체주의 지도자'라고 평하는 건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남한에 있는 '민주주의 운동가''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 등을 싸잡아 '공산전체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매카시즘 광풍을 닮았다. 6.25 전쟁은 '공산전체주의 세력'에 맞선 전쟁일 수 있겠지만, 70년 후 세계 10위 안팎의 경제대국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위장 암약하며 국가를 전복시키려 한다는 건 '음모론' 수준에서 더 나갈 수 없다. 이를테면 박정희 같은 전체주의자가 운동권 학생들을 '전체주의자'라고 규정하거나 조선총독부가 독립운동가를 '전체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도 넌센스에 가깝다. 하긴 독립운동이 '자유민주주의 건국'을 위한 운동이었다는 주장도 나오는 판국에 이런 '커먼 센스'를 논하는 게 다 무슨 의미랴.

 

'공산전체주의'라는 신조어가 '표현의 자유''해석의 자유'를 업고 등장하니까 내친김에 '용산전체주의'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해석을 가미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유의 의미로 전체주의를 강조했다고 하면, '용산전체주의'도 비유의 의미라는 걸 전제해 둔다.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용산전체주의[Yongsan totalitarianism, 龍山全體主義]라는 유령. 용산전체주의의 핵심은 '자유'. 다만 '자유'를 부정하는 자는 '자유'를 가질 수 없다. 즉 여기에서 자유는 어떤 '가치'가 아니라 특수한 이념이 된다. 물론 공산전체주의자들도 그들만의 의미를 부여한 '자유'를 자신들의 핵심으로 여긴다. 용산전체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둘 다 '자유'의 해석을 소유하고자 한다. 내가 규정한 '자유' 이외에는 '자유'를 위장한 '체제 전복 이념 무기'가 돼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자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사상의 자유를 제한한다. 허락된 자유만 자유가 된다.

 

용산전체주의 세력은 자유주의 운동가로 종종 위장한다. '공산주의 세력이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한 목사와 같은 경우는 집권 여당 공천권을 대놓고 차지하려 한다.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목사가 요구한 공천권이) 십 수개보다 훨씬 많다. 말도 안 되는 요구에 같이 할 수 없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 목사는 "윤석열 대통령을 대통령 만들어서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이 그동안 우리가 해온 모든 일의 가장 큰 일이 이뤄진 것"이라며 정권 수립의 지분이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국민의힘 당원 가입 운동을 통해 공천권을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했다. '자유주의 운동가'로 위장한 용산전체주의 세력은 집권 여당의 공천과 정책 수립에 집요하게 관여하려 해 온 것이다.

 

용산전체주의 세력도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시도한다. '교육자'로 알려진 한 유튜버는 윤석열 정부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이 됐는데, 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코로나가 극성이던 202184일 청와대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문 전 대통령이) 군인들의 마스크를 벗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군 통수권자가 군인을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사용하라는 지시를 내린 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 그는 노무현의 죽음은 공작의 의혹이 있으며 좌파 세력이 그의 죽음을 '교사'했다는 괴담을 퍼트리기도 했다. 이 유튜버 기용과 관련해 용산 대통령실은 "소통에 능한 분"이라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기무사령부 참모장을 지낸 누군가는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단행한 사면의 수혜를 입었다. 그는 군인 신분임에도 세월호 유가족을 사찰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민간인 사찰은 자유의 무수한 반댓말 중 하나다. 그는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공문서를 작성했다는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이라는 공산전체주의 세력처럼, 마찬가지로 민간인 사찰하고 계엄령을 검토한 자를 사면해 준 용산전체주의 세력에도 같은 말이 돌아갈 수 있겠다.

 

용산전체주의 세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방송 장악''방송 정상화'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산당 기관지 같은 언론'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합리적이고 일반적인, 상식적인 사람이 (방송통신위원장으로) 가면 오히려 어렵다(이용호 국민의힘 의원)"는 논리로 누군가를 방송통신위원장에 내정했다. 그리고 KBS 이사들과 MBC 대주주 방문진 이사장을 해임하고 있다. 언론을 탄압하는 것은 '공산전체주의 세력' 뿐 아니라 '용산전체주의 세력'도 마찬가지다.

 

국민통합위원회 2기 출범식에서 "자유, 평화, 번영 그리고 인권과 법치를 지향하는 사회로서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완벽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애쓰고 고민하는 위원회가 되기를 바라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말은 거꾸로 '완벽한 자유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제거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자유론으로 읽힌다. 섬뜩한 말이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투쟁과 혁명과 그런 사기적 이념에 우리가 굴복하거나 거기에 휩쓸리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고 우리 한쪽의 날개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런 날개는 떼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국익(국가 전체의 이익)을 저해하는 자들은 전체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제거 대상이다. 용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자유주의 운동가', '우파 운동가', '보수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 및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 용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 용산전체주의 세력이 실제로 있느냐고? 글쎄, 그건 국민들이 판단하시고 본인들이 잘 알 것이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3.08.26.

 

 

캠프 데이비드가 부를 후쿠시마 핵오염수 재앙

결국 일본은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를 강행했다. 막상 방류 시점이 다가오면서 일본 정부에는 2011년에 노심이 용융된 원자로를 폐로할 계획이 없음이 밝혀졌다. 12년째 불타고 있는 원자로의 핵분열을 멈출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 원자로는 핵 오염수를 영구적으로 방출하는 기계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보다 핵 재앙의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가까스로 벗어난 일본 최후의 날

20113월에 쓰나미가 강타한 후쿠시마 원전에서 수소 탱크가 폭발하고 원자로는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원자로의 압력과 온도가 치솟자 간 나오토 총리는 일본 최후의 날을 준비했다. 원자로가 폭발하면 반경 170km 범위의 주민을 철수시켜야 하는데, 이는 5천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다. 열도의 중간이 사라지고 일본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총리에게 보고되었다. 그 최후의 날에 대한 예감이 현실화할 상황에서 원자로 폭발은 극적으로 멈췄다. 현장에서 복구인력의 목숨을 건 헌신도 있었지만 지금도 원자로 폭발이 멈춘 진짜 이유는 모른다. 단지 현장의 사고 수습을 책임진 요시다 본부장이 총리실과 도쿄전력이 승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수를 원자로에 대량으로 투입하는 도박을 감행한 것이 대폭발을 막은 이유로 추정될 뿐이다.

 

공중에서 촬영된 이 사진은 일본의 후쿠시마 다이이치 원자력발전소에서 해수로 희석된 핵오염처리수를 해저터널을 통해 바다로 방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2023.8.24. AP 연합뉴스

지금도 핵연료봉이 녹아내린 원자로 내부는 누구도 접근하거나 들여다본 적이 없다. 로봇을 투입해도 노심에 접근하는 순간 강한 방사선의 영향으로 작동을 멈춘다. 어떤 카메라도 내부를 촬영할 수 없는 블랙홀이다. 그러니 왜 원자로는 폭발하지 않았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2011년 원전 사고와 관련하여 그동안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거짓말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간 나오토 당시 총리는 도쿄전력이 수소 폭발 가능성을 자신에게 숨기며 재앙을 키웠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일본 원자력위원회는 나오토 총리에게 "폭발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했는데, 그 직후에 수소 폭발이 발생했다. 이는 원자로가 통제 불능 상황으로 갈 위험을 사건 초기부터 과소평가했다는 뜻이다.

 

거짓말, 또 거짓말

2015년에 일본 정부는 어민들에게 이해관계자의 합의 없이 오염수를 방류하는 일은 없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그 당시에도 이 원자로는 통제 불능이라는 걸 일본 정부는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폐로작업이 가능한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올해도 기시다 정부는 오염수 방류와 동시에 원자로 폐로화가 추진될 것처럼 세계 언론에 또 거짓말을 했다. 막상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자 이 방류가 언제까지 계속될지에 대해 "모른다"고 처음으로 정직한 말을 했다. 앞으로 30년이 지나도 사태는 전혀 호전될 수 없다는 걸 처음 인정한 셈이다. 이 오염수 방류는 무한정 계속되기 때문에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게 엄연한 진실이다. 일본 정부는 이런 사실을 주변국이 알게 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외부의 어떤 사찰단도 들어오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오직 도쿄전력만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한다. 12년 전 거짓말을 하면서 재앙을 키우고 책임 회피에 급급하던 그 회사 말이다.

 

오염수 방류와 관련하여 가장 치명적인 거짓말은, 과학이 마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처럼 말하는 데 있다. 지금까지 과학이 이 원전 사고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었나? 이 원자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얼마나 오래 오염수를 방류해야 할지, 방류로 인한 생태적 영향이 무엇인지, 과학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애초 과학적 기준에 따른 오염수 정화를 검증하고 투명한 방식으로 방류한다는 말은 헛소리였다.

 

우리는 현대 과학이 마치 핵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착각부터 버려야 한다. 우리는 플루토늄의 성질에 대해 2%도 알지 못한다. 해양 심층수 깊은 해류에 플루토늄이 조금씩 축적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아직도 과학이 파악하지 못한 플루토늄의 98% 성질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유일한 과학은 우리가 모른다는 걸 아는 데 있다. 즉 겸손해지라는 뜻이다. 과학으로 안전을 검증했다는 그 오만부터 버리는 게 과학적 태도다.

 

자고 일어나 보니 냉전

윤석열 정부는 인류 최대의 재앙이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오염수 방류 사태에 눈을 감았다. 일본에 한마디도 못하고 사실상 핵 오염수 방류를 용인한 한국 정부는 존재하지도 않는 과학을 말하며 방류를 정당화했다. 이런 무기력의 기원은 무엇인가.

 

미국의 공격적 현실주의자인 존 미어샤이머는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중반에 "우리는 냉전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냉전은 어떤 시대인가. 적과 동지가 확실한 시대였다. 그런데 냉전이 붕괴한 후에는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 헷갈리게 됐다. 세상은 온통 회색지대가 되고 말았는데, 이런 상태는 위험하다는 거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패권을 추구하고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는 본성이 있다. 미국이 중국과 잘 지낼 것이라는 예측은 잘못된 것이다. 미국과 체제가 다른 중국은 반드시 미국에 도전하며 패권을 추구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지라고 믿었던 중국으로부터 도전에 직면하면 미국은 차라리 적과 동지가 확실했던 냉전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소련이 해체되고 자유주의 전망이 팽배하던 1990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간 김태효는 1997년에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 당시 시카고 대학에서 석좌교수로 근무하던 미어샤이머에게 사사하면서 김태효는 냉전의 감각을 내면화 했다. 미어샤이머가 말하는 국제질서의 본질은 힘에 의한 지배. 이명박 정부 시절에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으로 근무하던 김태효가 미어샤이머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이명박 대통령과의 만남도 주선했다. 이명박을 만난 자리에서 미어샤이머가 "한국은 중국을 버리고 확실하게 미국 편에 붙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중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010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이 참석하도록 배려하기 위해 이명박은 6월 서해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한미연합훈련도 취소했다. 원래 이 훈련에는 미국의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가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6월에 중국은 만일 항공모함이 서해에 들어오면 "중국군의 살아 있는 표적이 될 것"이며 "후진타오 주석은 정상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보해 왔다. 이미 항공모함이 미국에서 출발한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태풍이 온다"는 이유를 들어 한미연합훈련을 취소하겠다고 미국에 통보했다. 이에 미국은 격분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그해 11월의 정상회의는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2010년에 유례없는 미중 간의 긴장이 조성되던 시절에 이명박은 중국 편을 들었고 이로 인해 김태효는 좌절하게 된다. 2012년에 김태효는 일본과 몰래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추진하려다 들통이 나자 청와대를 떠나게 된다. 이명박은 김태효를 지키지 않았다.

 

바로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2022년이 되어서야 김태효는 제대로 주인을 만났다. 이웃을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확실하게 구분하고, 나쁜 놈을 두들겨 패는 호전적 지도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지속될 나라와 망할 나라, 자유 국가와 독재 국가로 가르는 김태효의 냉전식 사고는 윤석열과 딱 들어맞았다.

 

신중세주의 대두와 주술의 세계

윤석열 정부에서는 공격적 현실주의가 학문의 경계를 넘어 세상을 선과 악으로 양분하는 도덕적 이원론으로 비화한다. 적어도 미어샤이머가 중국을 견제는 하되, 중국의 세력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현상 유지의 정치사상이었던 데 반해 윤석열과 김태효는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를 악마화하고 적대시하는 급진적 이데올로기로 경도되었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왜곡하고 자신만의 믿음을 만든다. 일본은 믿을 수 있는 나라,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라고 믿는 순간 이 오염수 방류 사태는 안이함이라는 더 큰 재앙을 잉태한다.

 

세상을 양분하는 단순한 사고 체계는 다면적이고 풍부한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지적 장애를 형성한다. 지난 300년 동안 과학자들은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를 두고 격렬하게 대립해 왔다. 빛이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해괴하면서도 모순된 주장이었다. 양자역학에 이르러서야 빛은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과학자들에게 매우 불편하며 설명이 불가능한 새로운 인식체계였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좋은 놈은 좋은 놈이고 나쁜 놈은 나쁜 놈인데 이걸 뒤섞어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는 주장은 도덕적 이원론을 흐트러뜨리는 매우 불편한 주장이다. 윤 대통령에게는 이런 복합적 현실을 인식하는 데 내적 장애가 형성되어 있다.

 

적과 동지를 분명하게 가르고, 반드시 충돌한다는 믿음의 창문으로 바라본 세상은 다분히 종교적인 망상의 세계였다. 중국이라는 악마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이를 반대하는 내부의 반국가세력과 일전을 불사하려는 충동은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같은 편이라면 무너진 핵 발전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염수마저 청정 1급수처럼 보이는 일종의 환각도 불러일으킨다. 818일의 캠프 데이비드에서 윤 대통령은 한미일 삼국의 사실상 동맹을 형성하려는 열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했다. 이 과정에서 오염수 방류에 대한 무한 면허권을 일본 정부의 손에 쥐어주었다.

 

얼빠진 정부가 핵 오염의 위험에 직면한 재앙의 실상을 외면하면서 대륙과 높은 장벽을 세우려는 흐름은 이 지역에 중세 시대와 유사한 질서를 추구하게 된다.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분리되는 질서처럼 말이다. 산업화 이전의 오래된 특성들이 현대에 와서 부활하면서 윤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적 제왕이 된다. 중국과 북한과 러시아를 문명 바깥으로 추방하면서 스스로 재앙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김종대 연세대 통일교육원 객원교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2023.08.26.

 

 

우리가 찌르고 우리가 피 흘리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공공부문과 시민 사이에 일종의 위계가 있었다.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교사들은 교사대로 권력을 행사했고, 시민들은 때로 뇌물이나 촌지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실현시키곤 했다. 민주주의가 본격화되며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서비스 제공이 국가의 의무가 되었다. 동시에 시민은 소비자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민주사회의 소비자들은 민원이라는 창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마치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지 못한 이들이 민원을 통해 무언가를 더 얻어내지 못하면 부족한 소비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연대의식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갑질이나 진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드라마에서 보는 당신 윗사람 나오라고 해혹은 너 내가 누군지 알아등은 실제 현실이다. 민간뿐 아니라 공공부문에서도 발견된다. 일선에서 일하는 이들은 소비자의 정체성을 가진 일부 시민들에 의해서 계속 멍이 들고, 위로부터는 고객을 제대로 응대하라는 요구에 시달리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교사와 공무원의 자살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들 모두가 우리다. 우리는 이들이 태어났을 때 함께 기뻐해주었을 수 있고, 함께 학교에 다녔을 수도 있다. 이들은 지하철에서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을 수 있고, 우리 아이의 고충을 경청해주었을 수도 있다. 또한 우리 아이들은 미래에 그 자리에서 일을 할 수도 있다. 내가 그고, 그가 곧 나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원인 제공자를 찾아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선생님의 죽음이 학생 때문이라고 하면, 언젠가 있을 수 있는 학생의 죽음은 선생님 때문이라고 우리는 비난하게 될 것이다. 일련의 사건으로 더욱 냉가슴을 앓고 있을 장애 아동의 부모님 때문도 아니다. 매일 가슴을 졸이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이들 역시 우리다. 그럼에도 우리가 찌르고, 우리가 피 흘리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불안해지고, 또한 약해져 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무한경쟁 자본주의 사회와, 연대적 공동체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김성아의 연구에 따르면 2019년 우리나라는 곤란한 일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나 친지가 없다고 응답한 사례의 비율이 약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 가장 높았다. 50대 고독사가 늘고, 20대의 고립과 은둔이 심화하는 외로운사회이기도 하다. 자살률이 오이시디 국가에서 가장 높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들은 나의자녀들이 무시당하지 않도록 더 좋은 대학에 보내려 하고, 경제력을 물려주려고 한다. 하지만, 성공이라 여겨지는 직업들인 선생님과 공무원도 안전하지 않다. 결국, 너무도 소수만이 그들만의 성공에 이르고, 남은 대다수는 다시 각자도생 사회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이 사회는 그대로 두고 청년들에게 출산하라고 장려하는 우리는 정상인가.

 

이제 우리를 죽이는 낡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관료제와 소비자주의 사회를 넘어, 시민이 주도하면서 상호호혜적으로 서로의 역할을 공감하고 돌보는 공동생산 사회로 가야 한다. 세금은 우리를 소비자가 아닌 공공을 만드는 공동생산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가 아니라 우리가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행복한 선생님 없이 행복한 학생이 있을 수 없듯이, 존엄한 시민 없이 존엄한 국가가 가능하지 않고, 안정된 노동자 없이 안정된 고용주가 있을 수 없다. 상대방을 누르고 희생시켜서 나의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단견이다. 상대방이 잘되고 행복해야 한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와 구성원들의 규범과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리더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당신들의 모습은 이렇다.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피 흘리고 복종할 때까지 찌른다. 사과하는 것을 약한 모습으로 생각하고, 또 그것을 이용하여 넘어뜨리려 한다. 함께 숙의하는 모습보다는 비난하고 조롱하는 모습이 일상이 되고 있다. 당신들의 모습이 우리가 되고, 우리 아이가 되어간다.

우리가 자해하며 소멸해가는 지금을 변화시키는 힘은 우리에게 있고, 당신들에게 있다. 모두가 존엄한 사회, 우리가 만들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최영준 I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 한겨레 2023.08.27.

 

 

벌거벗은 권력 앞의 호모 사케르

일찍이 이런 정권은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75, 민주화 36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역대 최악의 정권이 탄생했다. 어떤 독재정권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선거로 선출된 정권이 왕의 권력을 행사한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 국가의 모든 활동은 오직 집권 보수세력의 이해와 관심,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덮을 수 있는 억지 정책과 논리 반복, 내년 총선 승리와 보수의 영구집권을 위한 언론 장악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 편 아니면 모두가 적이다. 법치와 정의가 완전히 실종됐다. 오늘과 미래의 국민들에게 실로 심대한 영향을 미칠 외교 안보 정책 결정을 하고도 국민의 비판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도 없이 뭉개고 넘어가는 이런 권력을 나는 벌거벗은 권력이라고 부르겠다.

 

이 벌거벗은 권력 앞에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의 삶은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된다. 조국 가족, 윤미향 의원처럼 으로 지목된 인물에 대한 무자비한 압수 수색과, 비례성의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비상식적인 형벌 부과는 지금이 대역죄인의 시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대통령실, 검찰로 대표되는 권력은 행사되기만 할 뿐 책임을 지지 않으니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이 속출한다. 이태원 참사처럼 160여 명의 죽음에 대해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장관이나 경찰 지휘부가 책임을 지지 않고, 죽은 청년들은 애도와 동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국가가 사라진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급기야 민족의 독립을 기념하는 8.15 축사에서는 민주, 인권과 국가 발전을 위해 애쓴 사람들을 공산 전체주의자들이라는 역사나 이론에도 나오지 않는 용어를 동원하여 적으로 모는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어떤 대통령도 이런 8.15 경축사를 한 적은 없다.

 

지난 1년 동안 윤석열 대통령 임기 중 발생한 거의 모든 것이 벌거벗은 권력 행사의 양상을 갖고 있지만, 검찰 국방부 기무사 대기업 등 그들이 내 편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의 범죄는 그 아무리 국가의 기강과 법치의 기초를 뭉갠 심각한 것이라도 수사 기피, 사면복권 등의 방식으로 봐주고, 자신의 정적인 야당 대표, 시민운동가들의 범법 의혹이나 회계 처리 상의 약점에 대해서는 수백 명의 검사들을 총동원하여 기어코 죄를 밝혀내고 망신을 주겠다는 의지를 발동하였다. 그리하여 온 사회가 뒤죽박죽이 되고 언어가 타락했다. 친일이 애국이 되고, 전체주의가 자유가 되었으며, 주권상실이 동맹이 되었다.

 

응답(response) 없는 권력의 난폭한 질주

외교권, 인사권,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 사항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의 헌법상 책무를 위반하는 결정을 하는 것까지 용납되지는 않는다. 특히 대통령의 헌법상의 책무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무시하는 대북 전쟁 불사 발언,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심각하게 위배한 일방적인 대미·대일 굴종 외교, 특히 동해의 일본해 표기에 대한 침묵,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이 정부가 항의를 하기는커녕 일본 대변인 역할을 한 일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대통령이 헌법상의 책무인 평화통일,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장, 그리고 법치에 부합하지 않는 결정을 했을 때는 반드시 국민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모든 어민의 생계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과 생명이 달려 있을 수도 있는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오히려 국내 정치적 이유로 방류 시기를 앞당길 것을 요청했다는 믿기 어려운 일본 언론의 보도는 지금 한국이 주권국가인지, 정부가 국민들이 선출한 정부인지 정말 헷갈리게 만드는 사태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의 정당한 질문,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국민들의 유족이나 상식적 시민들의 질문에 대해 대통령은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에서 권력이란 누리기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후대에까지 연결되는 막중한 책임까지도 져야 한다. 책임이란 영어로 응답 가능성(responsibility)이다. 국민들의 정당하고 합당한 질문을 아예 뭉개버리고, 지금처럼 국민들이 일본 오염수 문제에 대해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는 이런 상황에서 아예 언론에 나타나지도, 상황을 해명하지도 않는 것은 공화국 대통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과거 조선시대의 왕들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던 무책임한 모습이다. 5년 단임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장차 국가와 국민의 백년의 운명이 달린 문제는 단임 대통령이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안보상 국가의 중대 기밀일 경우 대통령이 그 내용을 모든 국민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비밀리에 추진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방사능 오염수가 사람의 생명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현재 과학 수준으로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장차 심각한 피해를 줄 위험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일본이 처리비용을 줄인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원전 오염수를 방류해 일본 주변 바다와 한국과 중국의 바다, 나아가 태평양까지 오염시키려는 행위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심각한 범죄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한국이 오직 일본의 이익만을 위한 이런 결정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 어민들을 위한 생계 대책, 향후 방출수에 대한 인근 국가 중국과의 공동 조사 등을 당연히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정부는 그 반대로 간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으로 이미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관련 배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승만도 이렇게까지 한국의 주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평화선을 긋는 등 엄포를 놓는 정치쇼라도 했고, 통일을 해야겠다고 휴전을 반대하고 반공포로 석방까지 하면서 미국을 압박하는 벼랑 끝 전술이라도 폈다. 국가 경제발전이라는 명분 하에 한국 청년들의 목숨을 베트남 전쟁에 바친 박정희도 미국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국 병사의 월급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지속적인 협상을 했다. 이들 독재자들은 비록 국민의 생명은 우습게 여겼지만,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인지하고서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정치의 틀 속에서 나름대로 몸부림 친 흔적은 있다. 그런데 이 윤석열 정부는 협상은커녕 애초부터 줄 것은 알아서 다 주자는 입장인 것 같다.

 

벌거벗은 권력은 국민주권 이전 시대의 권력이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에는 미국과 일본의 이익이 곧 우리의 이익이라는 근거 없는 전제 아래 행동하는 것 외에 국가와 국민의 개념 자체가 없다. 사실 이 정권에게는 힘 있는 사람들만 국민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국민이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돈이 있기 때문에 보호를 받고, 권력과 돈이 없으면 보호받지 못한다. 죽는 놈만 불쌍하다.

 

국가 부재, 주권 부재를 넘어서려면

대외적 주권 부재는 대내적 국민주권 상실이다. 즉 대통령의 자의적인 인사권과 사면권 행사, 정치검찰의 압수수색과 구속기소에 국민들의 인권, 알 권리, 언론 자유는 압살된다. 고 채수근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는 수사단장을 항명죄로 기소하고, 이 병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단장은 아예 수사선상에서 빼버렸다. 세월호 유가족을 사찰하고 기무사의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계엄령 문건 작성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소강원 기무사 참모장을 8.15 특사에 포함시켰다. 채수근 상병의 죽음은 원인 모를 죽음으로 덮여질 가능성이 커졌고, 세월호 유족은 두 번 죽게 생겼다. 그래서 국민의 생명은 자연적 사회적 위험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왜 한국은 갑자기 이런 주권 이전의 상태가 되었을까? 국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도 있고, 언론도 있고, 시민단체도 있는 지금,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정권이 교체된 지 1년이 겨우 지난 시점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우리의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취임 후 단 한 번도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일, 국민을 향해 협박성 8.15 기념사를 할 수 있는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당 내부에서도 어떤 이견이나 견제도 없고, 언론의 견제도 없는 이 전체주의 상황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것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 도발로 12만 명의 자국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도 그것을 종식시키는 투쟁이 일어나지 않는 러시아 상황과 다를 바 없고,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여 자국의 군인 5천 명이 목숨을 잃어도 그 전쟁을 끝내자는 집단적 항의가 없었던 미국 상황과 다를 바 없다. 결국 민주주의의 실종, 독재자나 권력자의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교정하지 못하는 기성 정당이나 정치가들의 기회주의와 언론의 타락이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양, 즉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권력자의 결정을 견제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는 보통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에도 책임이 있다. 근본적으로는 선거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지금과 같은 선거 민주주의와 과거의 국민주권 부재의 전제군주 시절과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지 모른다. 민주화가 되고 국민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이러한 주권 상실의 초유의 사태는 110여 년 전 일제가 총칼을 들고 조선의 주권을 유린하고 헌병경찰 통치를 시작했을 때 조선 사람들이 그런 폭력적 질서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한 이유와 별로 다르지 않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오늘의 한국인이나 110여 년 전의 한국인들이나 생존의 압박, 즉 먹고 살기 위해 너무 바쁘고 정치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그러다가 전쟁이 나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는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닥쳤는가 나중에 탄식하면서 울부짖는다.

 

민주당 다선 의원들 대다수는 내년 총선 당선을 위해 주판알을 튕기는 것 같고, 몇몇 초선 의원들만 정권 비판에 바쁘다. 그런데 이 벌거벗은 권력의 행사를 중단시키지 않는 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기도 어렵지만, 아예 그 전에 국가가 무너질 수도 있다. 각자 가진 권력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가, 언론인, 지식인, 그리고 일반 시민 모두가 이 주권 부재 상태에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버려지지 않기 위해 소리를 질러야 한다. 헌법상의 민주공화국을 다시 세우는 일을 모두가 시작해야 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23.08.27

 

 

윤석열 정권의 초현실적 무능

윤석열 정권 무능의 삼각형이 완성 단계다. 쌩쌩하던 선박과 항공기가 갑자기 사라진다는 버뮤다 삼각지대만큼이나 등골 서늘하다. 우리 공동체가 광복 이후 쌓아온 성취와 진보가 일거에 무력화되고 있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구시대의 낡고 추레한 침전물들이다.

 

경제·민생 추락은 무능의 삼각형의 밑변을 이룬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공인한 게 2021년이다. 1964년 기구 창설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된 유일한 사례다. 2년 만에 한국 경제는 활력을 잃고 있다.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에서 지난해 13위로 떨어졌고, 올해 경제성장률(국제통화기금 추정 1.4%)은 정치 위기와 국제 경제 위기, 코로나 위기를 겪던 때를 빼면 역대 최저 수준이 될 모양이다.

 

민생은 이미 위기다. 만원 한 장으론 밖에서 점심 먹기 힘들 정도가 됐다. 교통비, 전기료, 가스비도 치솟았다. 에어컨 틀기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올해 2분기 가구 실질소득은 지난해 같은 분기보다 3.9% 줄었다. 관련 통계가 집계된 2006년 이후 최대 감소다. 정부는 코로나 지원금이 사라진 기저효과 탓이 크다며 별일 아니라는 투다. 쪼그라든 소득과 폭등한 물가만큼 깊어진 취약계층의 고통은 안 보이나 보다. 온갖 부자 감세로 위축된 재정 탓에 벼랑 끝 민생에 쓸 돈부터 줄이고 보자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잼버리 파행이 드러낸 행정 무능, ‘전 정권 탓반국가 세력몰이가 낳은 정치 무능은 삼각형의 두 윗변에 해당한다. 잼버리 사태는 두번의 올림픽과 월드컵을 성공시킨 나라의 국격과 국민 자부심에 큰 생채기를 냈다. 문제는 불과 5년 전 평창 올림픽을 세계인의 축제로 만들어냈던 국가적 역량이 어쩌다 이 정도로 처참하게 붕괴했느냐이다. 그사이에 달라진 건 대통령과 정권이 교체됐다는 사실 말고는 없다.

 

윤 대통령은 잼버리 개막식에서 김건희 여사와 함께 스카우트 대원들의 장문례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폼만 쟀을 뿐, 실제 행사 준비와 진행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번이라도 대통령실에서 관련 부처와 전북도 등을 모아 폭염 대책 등을 강구한 적이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평창 올림픽 땐 청와대가 직접 태스크포스를 꾸려 현장 체험까지 하면서 혹한 대책을 세웠다. 대통령이 무관심하니 관련 부처가 빠릿빠릿 돌아갈 리 없다.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 장관은 현장에 머물라는 국무총리의 뒤늦은 지시도 무시하고 18떨어진 국립공원공단 변산반도생태탐방원의 에어컨 빵빵한 숙소에 머물렀다. 일반 국민의 인터넷 예약을 모두 막고 공짜로 탐방원을 독점 사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 기가 찬 건 이번에도 지휘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사과도 문책도 나 몰라라다. 총리·장관들은 유종의 미’ ‘위기 대응 역량운운하며 피할 구멍만 찾고 있다. 여당은 오로지 전 정권 탓, 전북도 탓으로 몰아가면서, 장관을 불러 따질 국회 상임위는 계속 무산시키고 있다. 무능에 이은 무책임의 향연이다.

 

국민 반발과 원성은 야권 탓, 편가르기로 덮고 가려는 모양새다. 윤 대통령은 광복절 날 민주화·인권·진보 세력에 공산 전체주의딱지를 붙였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그러나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번이다. 에이스리서치·국민리서치그룹의 최근 여론조사에선 잼버리 파행 책임이 윤석열 정부(54.4%)와 여성가족부(6.7%)에 있다는 응답이 60%를 넘었다.

 

삼각형의 꼭짓점은 외교·안보 무능이 찍었다. 캠프 데이비드 한··일 정상회의 결과는 중국·러시아와 척지고 일본에 찰싹 달라붙는 윤석열표 가치 외교의 결정판이었다. 윤 대통령은 매우 특별한 회의였다고 자화자찬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얻은 게 많은 미·일과 달리, 한국은 얻은 건 없으면서 미-중 충돌 최전선에 서는 위험만 떠안게 됐다는 냉정한 평가가 잇따른다. ·러를 북한 쪽으로 떠밀어 북핵 문제를 더 꼬이게 할 수도 있다. 실제 북-러 군사협력 강화로, 북핵 고도화 위험성은 더 커진 셈이 됐다. 외교에선 국익이 지상 가치다. 이를 외면한 채 원리주의 가치를 앞세운 정권의 행태는 숭명 사대도그마에 빠졌던 조선조 후기를 방불케 한다.

 

무능 수위와 퇴행 속도 공히 초현실적이다. 지켜보는 국민들의 슬픔의 삼각형’(스트레스나 노화로 깊게 팬 미간 주름)도 빠르게 짙어지고 있다.

손원제 | 논설위원 | 한겨레 2023.08.27.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이해관계

자녀가 결혼할 때 증여세 면세 한도를 5000만원에서 15000만원으로 올리는 정책이 추진된다는 뉴스를 읽는다. 내 아이들의 머릿수에 15000을 곱해보는 계산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섯 집 중 네 집, 자녀 결혼 때 1.5억 증여해줄 여력 된다는 제목의 기사가 여러 일간지에 등장한다. 통계청의 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를 해석한 것이라는데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문구로 보아 어느 공무원이 만든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겨 실었으리라 짐작한다. 계산인즉슨 25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자녀가 있는 가구의 순자산은 평균 65000만원 정도, 그중에서 당장 증여하기 어려운 실물자산(아마도 대부분이 부동산일 것이다)을 뺀 나머지, 즉 돈으로 쉽게 바꿔 증여할 수 있는 금융자산 등이 16000만원을 약간 넘는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평균의 함정이 존재하므로 딱히 의미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1인당 국민소득을 3만달러로 잡고 어림 계산해도 4인 가구의 평균 재산이 11억원을 넘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면 상위 10% 안에 들고도 남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66일자 필자의 칼럼 성장률과 사라져가는 평균참조). 그런데 바로 그다음에, 순자산이 15000만원 이상인 가구가 전체의 80% 정도 되니 이론상 결혼적령기의 미혼 자녀가 있는 다섯 가구 중 네 가구는 증여세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산 수준이라는 어이없는 계산이 뒤따른다. ‘결혼적령기의 자녀가 오직 한 명뿐이라는 가정, 순자산 1억원대의 가구가 2023년 한국 사회에서 누릴 수 있을 생활수준에 대한 사회과학적 상상력의 결여, 더구나 그 순자산을 자녀에게 모조리 증여해준다는 가정(대체 부모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엉성한 논리에다 심지어 위험한 이데올로기 조작의 혐의까지 지니고 있다.

 

요컨대 결혼하는 자녀에게 15000만원 정도를 증여할 수 있는 가구, 그 면세한도의 인상을 통해 몇 천만원의 세금을 아낄 수 있는 가구가 정책의 직접적 수혜대상이자 아마도 선거에서 우리를 지지해줄 수 있는 세력이기도 한 것이다. 인식했건 아니건 간에 그 우리안에는 어떻게든 정책효과를 강조해보려고 머리를 쥐어짰을 예의 공무원도, 그 기사를 퍼날랐을 기자들도 속해야 한다. 양가에서 15000만원씩 3억원이 초부자냐 아니냐를 두고 공방하는 동안, 추상적 평균에서 멀어진 보통사람들의 삶은 잊힌다. 다름 아닌 그 공방의 주역들, 즉 국회의원들의 2022년 기준 평균 재산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몇 명을 제외하고도) 20억원이 넘는다는 통계는 출산장려정책이 이른바 민중으로부터 괴리될 수밖에 없는 까닭 중의 하나를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이 많은 것은 죄가 아니다. 너무 적은 재산이 당사자의 무능력이나 게으름의 결과이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 다양한 계층의 관점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칙만은 분명히 지켜져야 한다.

 

선거결과는 얼핏 생각하듯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바뀌는 것뿐이라는 어느 진보지식인의 지적이 회자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에서도 그 말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양극화한 정치지형에서 죽기 살기로 지지하는 우리 편이 집권한다 한들, 구조 그 자체는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1928년 독일노동조합총동맹이 출간한 경제민주주의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문건은 국가경제정책기구가 사적 이익이 아닌 보편적 이익을 위해 움직이도록 바뀌어야 함을 지적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영향받는 경제정책 결정에 있어 바로 그 다양한 계층의 이해가 대변되고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원칙이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무시되고 있다. 그것이 비열한 의도를 지닌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의 물질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난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구조만을 논하는 것은 현실의 단기적 모순에 눈감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럼에도 절망적인 현실은 오히려 우리가 구조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탁구공이 테이블 이 편 저편을 어지러이 넘나드는 순간에도 경기의 규칙은 그대로 유지될 뿐이라는 인식, 그러므로 우리는 규칙을 설정하는 이들에 맞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그 힘을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 동시에 어이없는 논리에 쉽게 설득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 경향 2023.08.27.

 

 

21세기 한국에 공산주의유령이 떠돈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을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이라 배우며 자랐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 시절이었다. 보수 본산이랄 수 있는 박정희 대통령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던 홍범도 장군이, 그로부터 반세기 지난 지금 새로운 보수 집권세력에 의해 부정당하는 현실은 낯설기 짝이 없다. 역사란 항상 앞으로 나가지는 않는 법이라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퇴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놀라운 일이다.

 

국방부는 육사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이전하기로 한 이유를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 논란이 있는 분을 생도 교육의 상징적 장소에 기념하는 것은 적절치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홍 장군 흉상을 없애기 위해서, 옆에 함께 세운 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마저 철거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 가관인 건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발언이다. 이 장관은 홍범도 장군 흉상과 관련해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육사에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느냐는 지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가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군 간부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니.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를 내건 국가나 정당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21세기 한국 육사는 여전히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인재를 양성한다니, 이런 시대착오가 어디 있을까 싶다.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1848년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무려 180년을 뛰어넘어 한국에서 부활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을 두렵게 하리라고는 마르크스를 비롯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패륜적 공작을 일삼아왔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이런 상황 전개는 이미 예견됐던 것처럼 느껴진다. 진보가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은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2023년에 사회주의도 아닌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대통령 육성으로 듣는 건 뜻밖의 경험이다. 1970년대 유신 시절엔 무찌르자 공산당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친숙했지만, 소련 붕괴와 한국-동구권 수교를 거치면서는 거의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한때 위세를 떨쳤던 유럽과 일본의 공산당도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정부는 1920~30년대 항일 투쟁을 위해 소련 볼셰비키에 잠시 가담했던 경력을 친일 행위보다 훨씬 위험하고 용납할 수 없는 행동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일본제국주의가 볼셰비키 혁명세력(적군)에 맞선 백군을 지원하며 시베리아 진출을 꾀했던 건 역사적 사실이다. 그 시절 만주와 연해주에서 일제와 싸우는 독립군이 볼셰비키와 손을 잡는 건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 아니었을까. 일제에 부역한 건 이해해도 조국 독립을 위해 볼셰비키와 손잡은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윤석열 정부는 생각하는 것일까.

 

진보·보수를 떠나서 역대 어느 정권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계열이라도 북한 정권에 직접 협력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라면 공로를 인정하는 게 맞는다는 나름의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그런 오랜 노력을 윤 정부는 뿌리째 흔들고 있다. 한국 사회를 철 지난 이념 전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고 있다. 풍차를 거인이라 착각하고 돌진하는 돈키호테 정부를 지금 대한민국에서 보고 있는 셈이다. 윤 대통령은 시대착오적 투쟁과 사기적 이념에 휩쓸린 진보를 맹비난했지만, 정말 무모하게 시대를 거스르는 건 대통령 자신이다.

 

19615월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 세력이 혁명공약 1조에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다는 구절을 넣은 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남로당 가입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때는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으로 그럴 수 있다 쳐도, 60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 반공산주의를 다시 전면에 꺼내 드는 현 정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도대체 뭔지 궁금하다. 지난주 국무조정실 1차장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일본의 방류 방식이 과학적 선례나 안전성 측면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가 빈축을 샀다. 일본정부 대변인을 연상케 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게 이 정부의 목표는 아니리라 믿는다.

박찬수 대기자 | 한겨레 2023.08.28.

 

 

윤석열의 일본관과 친일 윤똑똑이들

다시 국치일을 맞는다. 참담한 과거를 기억하는 뜻은 윤똑똑이들이 주장하듯 무슨 콤플렉스 따위가 아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무리가 하도 많은지라 경계하기 위함이다.

 

국치를 당한 1910829, 윤똑똑이 대표는 당시 민중의 무지몽매를 꾸짖던 윤치호다. 그는 10대 시절 일본에 가서 근대화된 모습에 주눅 들었다. 서른 살을 앞두고는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1893111)라고 일기에 썼다. 조선을 멸시했던 그는 정작 민중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나서자 총독부 기관지에 칼럼을 썼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라며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된단다.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아니라고 훈계했다(191937). 그 뒤에도 심지어 독립운동에 자금을 댄 사람들까지 비난하며 일제에 꼬리쳤고 그 대가로 내내 호의호식했다.

 

국치일에 새삼 윤똑똑이를 소환하는 까닭은 윤석열의 광복절 경축사에 있다. 그는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케케묵은 빨간 색깔을 칠하며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비난을 늘어놓더니 일본은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라고 추어올렸다. 강자와 약자론을 펴며 독립운동을 혐오하던 윤치호가 떠오르는 것은 나뿐일까. 일본 오염수 방출이 위험할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는 우리 민중들의 우려는 비과학적이라 무시하고 일본의 주장은 정직하다고 믿는 모습과 윤치호는 또 어떤가.

 

윤석열의 일본관도 소년 시절에 형성된 듯하다. 일본 신문과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의 국비유학생이던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를 회고하며 선진국답게 아름다웠다했고 일본인들이 무슨 일이든 정직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은 과연 무슨 일이든 정직할까. 마침 100주기를 맞는 간토대학살을 짚어보자. 192391일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내무대신은 경찰을 통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분노를 풀어줄 깜냥이었다.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했다. , 죽창, 철봉을 휘둘렀다.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최소 6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서로 피한 조선인들까지 쫓아 들어갔다. 야만적으로 학살했다. 경찰은 방조했다. 일본 정부는 학살을 모두 은폐했다.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렸다. 일부 자경단원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물론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일본 정부나 민간인이던 자경단원 그 누구도 정직하지 않았다. 아니,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까닭도 기실 일본이 정직하지 않아서였다. 조선을 돕겠다고 약속하곤 미국과 쏙닥쏙닥 밀약을 맺지 않았던가.

 

오해 없도록 다시 명토박아둔다. 나는 21세기 일본 민중들에게 전혀 유감이 없다. 내 소설이 일어로 번역되어 도쿄와 오사카에서 출판기념 강연을 했을 때 뒤풀이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겸손했다. 아사히 논설위원과는 노래방까지 가서 어깨 잡고 노래 불렀다. 내 강의에 들어오는 일본 유학생들의 학구적 자세도 사랑스럽다. 하지만 일본 민중과 지배세력인 자민당은 많이 다르다. 보라. 윤석열은 광복절에도 일본과 가치 공유공동이익이니 부르댔지만 일본 총리 기시다는 태평양전쟁 일급 전범들이 묻힌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했다.

 

일본이 정직하다는 소년 윤석열의 무지는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통령 의 윤똑똑이 언행은 용서할 수 없다. 국치일과 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여러 행사가 열린다. 829일에서 91일까지 윤석열과 21세기 윤똑똑이들에게 역사적 성찰을 촉구한다. 미국과 일본을 맹종만 하면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손석춘 철학자·우주철학서설저자 미디어오늘 2023.08.28.

 

 

과학, 의심스러울 땐 피해자 편에 서길

역사는 2023824일 벌어진 일을 또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할지 모른다. 이날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제1원전 부지 탱크에 보관 중인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피폭국이다. 또한 일본은 19932월 러시아가 1960년대부터 1993년까지 핵폐기물을 오래된 관행처럼 동해에 버렸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해 11월 앞장서서 핵폐기물 해양투기를 전면 금지시키는 국제협약(런던협약)을 끌어냈다. 그랬던 일본 정부가 오염수 방류는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아닌 과학의 문제이며 국제사회에서 과학적으로 국제 안전기준에 따른 것으로 문제가 없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방사능 오염수가 미래에 어떤 피해를 초래할 것인지 과학적으로 100%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건 가해자를 감별해 낼 수 없는 일종의 느린 폭력이다. 인류학자 오은정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사회에서 방사선 피폭을 우려하는 자국민들에게 피해망상에 걸린 이기주의자라는 딱지를 부쳤다고 지적한다. , 합리적 의심의 내용이 아닌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또한, 202185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무려 75년이 되어서야 일본 정부는 당시 원자폭탄의 검은 비’(폭탄 구름에서 생긴 비)를 맞은 생존자들을 피폭자로 인정했다. 과학적으로 검은 비를 맞은 지역은 방사선량 노출이 극히 적다며 국가는 오랜 기간 이들을 외면해 왔다. 당시 원자폭탄 피해자들의 생애 수명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하물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그리고 오염수 방류로 인한) 인체의 피폭 영향을 과학적으로입증하는 일은 수세대에 걸쳐 이루어져야 할지 모른다.

 

일본이 이처럼 각종 재난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을 포기하지 않는 배후에는 도쿄전력, 즉 원자력산업계가 있다. 핵산업은 아직 손실보다 이윤이 더 많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윤의 대상이 누구이고, 손실의 대상이 누구일까. 확실한 건 손실의 대상이 피해자이고, 이윤의 대상이 피고가 되었을 때 법은 과학(적 입증)을 빌미로 피고의 편에 서 왔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지난 68일 서울고등법원에서는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의 가습기살균제 항소심이 진행됐다. 피고인(세 기업의 전직 임원 13) 모두 2021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유는 가습기살균제와 폐질환·천식 간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인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들(60명의 대형로펌 소속)은 모든 연구조사의 한계를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그 속에서 피고인은 항상 반증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과학과 합리적 의심이 완전히 제거되어야만 확정판결을 내릴 수 있는 의 차이로 인해 법의 보호를 받아 왔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재해의 심판 과정에서 수없이 반복됐다. 최근 광반도체 제조업체에서 2년간 일했던 30대 노동자가 퇴직 6년 만에 파킨슨병이 발병했고, 뒤늦게 산재 신청을 했지만 사용했던 화학물질에 대한 자료조차 남아 있지 않아 산재를 인정받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피고인 업체가 항소를 제기했다. 한편, 2014년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18개월 근무한 노동자 역시 퇴직 5년 후 급성 백혈병에 걸렸고, 산재 신청을 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근무환경이 개선되었다며 불승인했고 2년간의 소송 끝에 승소했다. 하지만 이미 그가 사망한 뒤였고, 공단은 항소를 제기했다.

 

완벽히 통제된 실험실이 아닌 이상 방사능 및 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해로움을 완벽히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잘 알려진 법 격언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일 테다. 그런데, 만일 피고인이 거대한 권력과 부를 지닌 대상이고, 원고가 이들의 이익 때문에 질병을 얻은 피해자라면, 과연 법은 누구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할까. 더욱이 원고가 과학적 입증 가능성의 난제 앞에 불리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법은 이럴 때 과학을 피고인의 이익이 아닌 피해자의 이익으로우선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 정부도,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와 반도체 제조업체 그 누구도 지금껏 피해가 아닌 이윤만을 얻지 않았던가. 이것이 진정 법이 추구하는 합리적 의심이라 생각한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경향 : 2023.08.28

 

 

야당의 비판이 힘을 잃는 이유

최근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행보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었다. 공식 논평만 보더라도 미국을 대신해 중국 때리기 최전선에 내몰리면서 얻은 것은 대중국 수출 감소와 경제위기뿐이라든가, 한국이 외교의 먹잇감이 됐다든가, 나라의 미래를 시계제로에 빠뜨리고 안보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든가, 심지어 한반도 핵전쟁의 공포를 조장한다고까지 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출 문제에 이르면 말은 더욱 거칠어진다. 민주당 의원 몇몇은 후쿠시마로 건너가 일본 시민들과 함께 항의 집회도 했고, 이재명 대표는 2의 태평양전쟁이라고까지 했다. 본인이 임명한 장관들이 국회에서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는 잠잠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뜬금없이 소셜미디어(SNS)에 방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태평양전쟁과 비슷한 점을 굳이 찾으려면 없지는 않다. 후쿠시마에서 방류된 오염수가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한국과는 정반대 방향인 캘리포니아를 향해 가는 길에 진주만 근처를 지날지도 모르니 말이다. 차이점은 넘쳐난다. 태평양전쟁 때 미국의 인명피해가 약 20만명, 일본의 인명피해가 약 1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번 방류로 예상되는 인명피해는 아마 없을 것이라는 게 과학계의 중론이다.

 

또 하나의 차이는 태평양전쟁 때 서로를 말살시키는 데 골몰했던 미국과 일본이 이번엔 같은 편에 서 있다는 점이다. 방류가 시작된 후 미 국무부는 성명을 내고 미국은 안전하고 투명하며 과학에 기반한 일본의 방류 절차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또한 자연재해로 큰 고통을 겪고 복구 과정에서 용기와 탄력성을 보여준 일본 국민과 함께 애도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은 방류수가 해류를 타고 가장 먼저 도착할 핵심 당사국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멜트다운으로 일본에서 2만명이 사망했다. 그런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방류 이외의 다른 방법을 찾으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안전하면 일본 국민들이 식수로 마시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일본이 방류를 시작하기 이전까지 과학계와 국제사회의 여론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 편으로 기울어 있었다. 과학적 연구의 결과들이 압도적으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일본이 여러 해에 걸쳐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려는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방류 안 한다고 해서 무조건 안전한 것도 아니고, 1000개 넘는 탱크에 보관하고 있다가 또 한 번 쓰나미라도 온다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고려사항도 있었다.

 

세계 각국 언론의 보도를 두루 살펴봐도 한국과 중국을 빼고는 비판적 보도를 찾기 어렵다. 대부분은 그간의 절차와 과학적 연구결과 등을 설명하고 방류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담백하게 보도하고 있었고, 반대 여론을 언급하는 경우엔 한국과 중국에서 반대 여론이 강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린피스 같은 국제환경단체들은 비판적 성명을 내놓았지만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일본의 입김에 좌우된다는 음모론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사이 북한은 동창리에서 석 달 만에 위성발사체를 쏘아올렸다. ‘한반도 핵전쟁의 공포란 이런 것 아닐까. ··일 정상회담이 없었다면 북한은 핵 도발을 멈췄을까. 지난 30년 북한 핵 도발의 역사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증언해주고 있다. 지난 23일에는 남아공에서 브릭스(BRICS) 정상회의가 열렸다. 기존의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에 더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랍에미리트연합, 아르헨티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 6개국이 새로 가입했다.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경쟁마로 거론될 수 있는 유일한 경제블록이다. 동맹을 기반으로 뭉친 인도·태평양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비해 결속력은 약하지만 기존 5개국만 해도 전 세계 GDP25%와 인구의 42%를 차지하는 연합체이다. 가입에 관심을 보이는 국가만 40여개에 달하고 한국의 가입을 원하고 있기도 하다. 외교안보가 미국으로 치우치는 것이 그리도 걱정된다면 미국의 유일한 대항마인 브릭스 정상회의에 대해 한마디 언급이라도 있어야 앞뒤가 맞는 것 아닐까.

 

정부·여당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야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과학적 발견에 정면으로 반하고 국제사회에서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비판은 오히려 의제의 동력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총선을 의식해 강성 지지층에만 호소한다든가, 더 나아가 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비판 앞에 무력하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 2023.08.28

pppsy****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애덜이나 잘 가르쳐라. 솔직히.

 

시진핑의 길따라가는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위대한 투사로 여기고 있다. 북한·중국·러시아의 권위주의 진영에 맞서 한··일 자유민주주의 준동맹의 최전선에 섰고, 국내에서는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가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인 시진핑 노선과 놀랄 만큼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첫째, 2012년 집권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부패와의 전쟁을 내세워 대중의 인기를 모으면서 동시에 당··군에서 반대 세력을 쉼 없이 숙청하면서 권력을 급속도로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당내 검찰 역할을 하는 기율검사위원회와 공안기구를 총동원했다. 201579일 인권변호사와 노동운동가 300여명을 한꺼번에 체포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 조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정치적 기반이 없던 윤석열 대통령도 검찰 조직과 감사원을 동원해 전임 정부 공직자와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를 집중하고 카르텔과의 전쟁을 벌이면서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국정원을 내세워 간첩 사건들을 잇따라 발표하고,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화물연대 노동자, 건설노조 등을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둘째, 권력이 역사 해석을 독점하려 하고, 비판 세력을 적으로 삼는 역사·이념 전쟁이 거칠어진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서구 보편주의’ ‘역사 허무주의로 규정해 공격하고 있다. ‘역사결의를 통과시켜 공산당과 시진핑의 무오류를 주장하고 장기집권을 정당화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진보 진영 전체를 공산주의자·빨갱이로 낙인 찍으려는 이념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8.15 경축사) “시대착오적인 투쟁과 혁명, 그런 사기적 이념”(국민통합위원회 2기 출범식) 등의 선전포고가 계속된다. 대통령의 이런 신호에 맞춰, 육군사관학교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를 비롯해 사회 곳곳이 역사 전쟁에 휘말리고 있다.

 

셋째, 언론 통제를 강화한다. 중국 당국이 언론인들의 사상을 검증해 기자 자격 여부를 심사하고, 관영언론에서는 시진핑 사상찬양이 가득하고, 비판적 언론인들과 학자들을 선동죄나 간첩법 등으로 처벌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을 가짜뉴스” “공산당 신문과 방송으로 몰며, 언론 자유의 목을 조르려 한다.

 

모든 연설에서 자유를 외치는 윤 대통령과 ‘21세기 마르크스라고 자부하는 시진핑 주석이 우파와 좌파의 서로 다른 깃발을 들고 있지만, 그 길이 겹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진핑 시대 중국의 퇴행은 중국공산당 보수 세력의 불안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 경제의 급성장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국유기업과 자본과 엘리트 등 특권층의 당으로 변했다. 노동자, 농민 등은 주변으로 밀려났고, 빈부 격차는 급속도로 커져 공산당의 정체성을 무색하게 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수출과 투자에만 의존하는 성장모델은 더이상 지속가능하지 않고, 노동자·농민의 임금 인상과 연금·교육·보건 등 복지를 확대해 내수 중심 성장모델로 전환하는 개혁이 절실하다는 경고가 나왔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과 중국공산당 기득권층은 이런 길을 거부했다. 시 주석은 대신 공산당과 국유기업에 권력과 자원을 집중시키고, 약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애국주의와 안보 논리를 강조하는 동안, 국제사회와 갈등이 커지고 경제와 사회는 활력을 잃고 위기는 깊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을 집권하게 한 한국 상황은 얼마나 다른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성장의 과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지만, 특권계층의 기득권 지키기 저항은 강력하다. 보수와 극우세력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을 영입했다. 한평생 검사였던 윤 대통령은 통치에 대한 고민도,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외교는 미국의 설계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내치는 익숙한 검사 공안통치에 극우 세력이 원하는 반공주의와 냉전 이념을 자유로 포장해 들고 왔다. 역사와 이념을 내세워 편을 갈라 상대편을 공산전체주의로 몰아붙이지만, 본질은 부자 감세, 재벌규제 완화, 노동 탄압, 전 정권에 대한 복수와 보수세력의 장기 집권 프로젝트다.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적 내전에 몰두하는 동안 사회적 합의에 기초해 차근차근 진행해야 할 개혁은 방치되고 있고, 약자들의 절망은 깊어지고, 경제 위기의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중국 경제 침체 속에 시진핑 주석의 마오쩌둥 흉내와 반미’·‘반간첩공안 통치가 요란해지는 것처럼, 윤 대통령의 반공 냉전 구호가 거칠어지는 것은 정치·경제의 위기와 무능을 덮으려는 것 아닌가.

 

윤 대통령이 즐겨 거론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기준으로 진단하면, 대통령은 편가르기와 약자 억압의 포퓰리즘, 권위주의 정치로 빠르게 퇴행하고 있다. 민주화를

박민희 논설위원 한겨레 : 2023.08.29.

 

 

한동훈 장관의 이민철학이 우려스러운 이유

나는 일종의 이중 이민자다. 한국에서는 귀화인이면서 노르웨이에서는 이민 노동자다. 그래서인지 이민정책에 관한 일간지 기사들은 빠짐없이 챙겨 읽는다.

그 일환으로 지난 71546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현 정부의 이민정책을 강연한 내용도 꼼꼼히 읽어봤다. 이 강연에서 내가 동의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내용은, 이민 없이 한국의 미래가 없다는 말이었다.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는 이 나라에서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강연에서 한 장관이 드러낸 이민 문제에 대한 몰이해·몰상식이 한국 이민정책의 기조로 남아 있는 한 우리 미래를 담보할 이민자들의 사회통합은 영영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 장관은 외국인이 들어왔을 때 자기들끼리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면 결국 통합은 이뤄지지 않는다한국어 잘하는 분이 들어오는 것이, 용접을 잘하는 분 들어오는 것보다 더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연 이민 오면서 새 나라의 언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까? 한때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공부했던 한 장관은, 아마도 뉴욕의 한인타운 등 재미 한인들의 집거지들을 직접 봤을 것이다. 한인들이 이민 초창기에 그런 집거지부터 찾아 터를 잡는 이유는, 재중국동포들이 서울에 오면 대림동에 먼저 가서 정착하는 이유와 똑같다. 그나마 익숙한 언어, 문화 환경 속에서 타국에서의 삶에 적응해 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그래도 낫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많은 나라에서 이민자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과정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민자들에게 몇년 뒤에 집거지를 떠나도 될 만큼 한국어 학습이 왜 이뤄지지 않느냐는 부분이다.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최근 몇년 광주시 월곡동 고려인마을과 인천시 함박마을의 고려인타운 등 고려인 동포들의 집거지를 답사해 왔다.

 

내가 거기에 들었던 대답은 딱 한가지였다. 국내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거의 70%가 극도로 힘든 장시간 단순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다수는 비싼 집세를 낼 돈부터 급해 잔업, 특근도 밥 먹듯 해야 한다. 매일 파김치가 돼 늦게 집에 돌아오고, 주말에도 종종 일해야 하므로 한국어를 배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만약 한국 정부가 이 이민자들에게 예컨대 싼 임대료에 영구임대주택을 제공해준다면, 이들은 일을 덜 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공공임대주택을 위한 예산은 22.7%로 줄기도 했지만, 일차적으로 이민자들을 주거복지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국어 학습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순 아닐까?

 

한 장관은 나아가 현재 E-9 비자로 들어온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이 10년 후에는 나가야 하므로 불법체류로 머물려고하는데, “우리나라에서 10년간 성실히 일하고 봉사한 노동자는 정주권이 있고 가족을 초청할 수 있는 숙련인력 비자 E-7-4를 얻을 기회를 주겠다며 강연장에 모인 기업인들에게 약속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자.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는 숙련인력 비자(E-7-4)를 얻을 기회를 획득하기에 앞서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곁에 가족도 없이 “10년 동안 성실히 일하고 봉사하는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닌가. 한 장관이 언급한 E-9 비자로는 가족을 초청할 수 없으며, 실제 일부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족을 동반하고 있지만 이는 불법이나 편법의 영역에 속한다.

 

나는 한 장관에게 본인은 배우자, 미성년 자녀와 생이별하며 외국에서 10년 동안 혼자 지내면서 일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본인이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면 남에게 이토록 쉽게 혈육들과 이별하는 고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사실 외국인 노동자의 자유를 크게 제한하는 고용허가제를 철폐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정주권과 가족 동반의 권리를 부여하는 노동비자를 발급해주면 될 일이다. 한데 한 장관을 포함한 보수 관료들은, 인권단체들이 현대판 노예제라고 비판하는 고용허가제를 계속 붙들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성실히 일하고 봉사하는 노동자들의 인권보다는, 그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의 권한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한 장관의 발상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통제의 대상인 반면 그들을 고용하는 기업인들은 통제망의 일부다. 한 장관은, ‘제주포럼에 모인 기업인들에게 기업인 여러분들이 현장에서 10년간 지켜보고 숙련인력 비자로 전환해줄 만한그런 분들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만약 외국인 노동자의 비자 전환이 고용주의 추천에 달려 있다면, 이는 과연 직장에서의 역학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외국인 노동자 대부분은 노조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 필요할 때 노조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사업장 이동도 근로계약 기간 만료나 근로계약 해지 이외에 아주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만 가능하다. , 기업주에게 강력하게 예속된 처지이다. 여기에 비자 전환 후보자들을 추천할 권한까지 기업주에게 준다면 과연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업주들의 갑질은 어느 정도로 심해질까? 한 장관은 해외에서 벌어지는 인재쟁탈전까지 언급했지만, 과연 무한 갑질이 가능한 한국의 직장에 남고 싶어 할 외국 인재들이 얼마나 될까.

 

인재 유치와 이민자들의 사회통합을 원한다면 먼저 이민통제 완화, 고용허가제 철폐와 노동권, 가족 동반, 직장 이동의 권리 등을 보장해주는 노동비자 도입, 이민자들에 대한 주거 등 복지혜택 적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외국인을 단순히 인력으로 보는 한 장관과 달리 한국에 오는 이민자들을 그들의 출신 국가·종교·혈통과 관계없이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자 모든 사회적 권리들을 갖춘 이웃으로 봐야 한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 2023.08.29.

 

 

대통령적 제왕의 시대착오적 언어

지금 우리나라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대통령적 제왕제다.”

얼마 전 한 토론회에서 이 말을 듣고 나는 무릎을 쳤다. 이보다 현재 이 나라의 상황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있겠는가.

 

지금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공화국의 수장이 아니라, 중세시대 절대군주처럼 행동한다. 누구도 대통령을 막을 수 없고, 어떤 기구도 대통령을 제어할 수 없다. 민주공화국의 기본원리인 삼권 분립이 이리도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검찰과 경찰, 감사원 등 사정기관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웠으며, 야당이 180석으로 다수인 입법부조차 대통령의 폭주를 막아내지 못한다. 세계가 경탄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대통령의 허울을 쓴 제왕에 의해 하릴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행태만 시대에 역행하는 제왕스러운것이 아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도 고색창연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지난 815일 광복절 기념사를 보라.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왔다.” ‘위장’, ‘허위 선동’, ‘공작등 냉전 시대의 폭력적 언어를 한 문장에 담아내는 재주도 놀랍지만,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는 공산전체주의라는 말을 발명한 데에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산전체주의라니, 이런 말이 어디에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보면, ‘공산전체주의자유민주주의와 대구를 이루는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새로이 형성된 신냉전체제, 그러니까 한국-미국-일본과 북한-중국-러시아의 대립 구도를 염두에 두고, 전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후자는 공산전체주의 체제라고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지금 공산주의 체제가 지구상 어디에 있는가. 중국이 과연 공산주의 체제인가. 몇해 전 베이징 대학에서 직접 경험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체제를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정의한다. 당시 학술심포지엄 자리에서 중국 학자들은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참다못해 내가 반박했다. “대중들을 상대로 쓰는 프로파간다의 언어를 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모독이다. 냉정하게 학문적 관점에서 볼 때, 중국 체제가 어떻게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중국 특색 자본주의체제가 아닌가.” 이 말이 끝나자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의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외국 학자가 대신 해준 것에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러시아는 다른가.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될 때 공산주의 체제도 함께 붕괴했다. 당시 인민 소유 국영기업들을 민영화,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주요 정보를 독점한 소련 정보기관(KGB) 요원들이 막대한 부를 쌓아 신흥 자본가로 변신했다. 이 새로운 특권계급 올리가키의 우두머리가 바로 푸틴이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김정은이 소망하는 미래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은 국가적 비전으로서 오래전부터 베트남 모델중국 모델을 연구해왔다.

이 세상 어디에도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공산주의는 없다. 그렇다면 공산전체주의는 존재하는가. 이것 또한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전체주의는 알다시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고안한 개념이다. 아렌트는 소련의 스탈린주의나 독일의 나치즘이 개인보다는 전체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체제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테러적 지배 형태인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공포적 지배체제인 스탈리니즘은 전체주의라는 동일한 특성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라는 말에는 이처럼 공산주의 비판과 함께 자본주의 비판이 내장되어 있다. 그러니 공산전체주의라는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윤 대통령의 아무 말 잔치는 특히 교육자들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자 시련이다. 제왕처럼 군림하는 막강한 권력자가 이처럼 말도 되지 않는 용어를 수시로 내뱉는다면, 도대체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란 말인가.

 

19세기 중반 카를 마르크스는 유럽에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다라고 공산당선언에서 천명했다. 21세기에 대한민국의 제왕은 제2의 공산당선언을 설파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공산주의의 유령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절대권력자처럼 행세하는 대통령적 제왕의 시대착오적 언사가 총체적 난국에 빠진 나라를 더욱 깊은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걱정이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한겨레 : 2023.08.29.

 

공멸의 줄타기, 지대추구

타다밟고 오르거나 그것을 따라 지나가다이다. 반면 줄 타다힘 있는 사람과 관계 맺어 그 힘을 이용하다, 부정적 뉘앙스도 풍긴다. 힘이 공권력이면 더욱 그렇다. 거간꾼들이 나라 공복과 한통속이 돼 남 것을 가로채거나 뺏으니 그런 줄타기는 기껏해야 제로섬 게임이다. 그 전형이 지대추구(地代追求). 처음에는 편법의 영역에 머물다가 줄곧 개발 비리, 입찰 비위, 채용 특혜 같은 부패 범죄로 타락한다.

 

토지처럼 공급이 제한된 정부 인허가 등으로 짜낸 초과이득’(지대)을 겨냥한 야합이 지대추구다. 경제의 독소라고들 한다. 정치인 책 출판기념회가 작은 예다. 은밀한 기대와 후원금이 주로 교환될 뿐인데 대필작가 인쇄 화환 진행 등의 비용 낭비가 지나치다. 이어 귀띔 무마 면제 선정 등 대가성 특혜들이 경제를 옴팡지게 좀먹고 혈세도 마구 축낸다. 물론 이런 기념회보다 한층 악랄한 줄타기들이 넘친다. 근데 강탈에만 죄다 골몰하면 누가 땀 흘려 생산하겠는가. 그러니 지대추구의 끝은 경제 공멸이다.

 

금융위기, 불평등, 패권 다툼에 팬데믹을 겪으며 시장 통제의 글로벌 기류가 일었다. 온건 보호(미국) 전략적 자치(유럽연합) 공동 부유(중국) 같은 구호로 강력한 산업정책 및 확대 재정과 더불어 전방위 규제 강화론이 재등장했다. 하지만 이 신개입주의가 위태하다. 들입다 압박을 늘리니 정책 목표들 사이의 충돌이 잦다. 설계와 집행의 명백한 과실도 교묘히 얼버무린다. 작위적 승자 뽑기에 취해 도덕적 해이와 망국병인 지대추구가 심해진다. 기업과 협회들 줄 세우다 결국 더 끈끈히 유착하므로.

 

지대추구의 폐해는 광범위하다. 자고로 야합에 빠진 공복들은 폐쇄 먹이사슬 밖의 국민은 철저히 괄시한다. 국정 효율성을 들먹이며 규범과 절차적 정당성을 뭉갠다. 툭하면 겁박하고 악이라 낙인찍으니 애먼 가슴에 치도곤을 먹인다. 위법은 아니라고 강변하나 인권을 밟는 작태들이다. 영국 경제분석기관 EIU‘2022 민주주의지수에서 한국은 167개국 중 24위로 1년간 8단계 떨어졌고, 국경없는기자회의 ‘2023 언론자유지수47위로 4단계 하락했다는 뉴스에 그래서 지레 움찔한다. 어떻게 일궈온 민주주의인가.

 

지대추구를 척결하자던 대통령 신년사. 맞는 말인데도 그의 타깃 설정에 당황했다. 지대를 만들어 향유하는 선봉대는 잇속 빠른 공복군()이다. 대장동 태양광 LH 비리를 보라. 또 낙하산 인사는? 막무가내 논공행상에 더해 피아 차원의 전관들 내리꽂기, 그들이 얽힌 협잡이 줄짓는다. 여타 짬짜미들도 끔찍하다. 같이 줄 타느라 혁신은 한참 뒷전이다. 대외 여건만 개선되면 지금의 고된 경제가 한결 나아질까? 연일 이권 카르텔을 깨부수자는 대통령. 턱밑 행정부와 공공기관의 지대 사냥꾼들이 그 영순위다. 괄목할 성과를 낸 후 정치권의 수탈 구조까지 깨면 좋으련만.

 

적발과 징계만으론 어림없다. 우선 비대화를 막자. 전 정권에서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이 각 13만명과 11만명 이상 파격 증가했다. 1년 전 행정안전부는 공무원 정원(1163000)을 매년 1%, 이후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 총정원(449000)3년간 2.8% 줄인다고 공언했다. 정보시스템에서 어제 확인하니 후자는 줄었고 전자는 되레 늘었다. 작은 정부 공약을 지키자. 한편 성과측정법 정보기술 인공지능의 혁명으로 기업들은 살고자 다시 몸부림치고 있다. 로널드 코즈 교수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안긴 논문(‘기업의 본질’)의 주장처럼 이른바 시장 거래비용이 줄면서 가령 인적 구성, 아웃소싱, 상품 번들에서 변혁 중이다. 그래야 정부도 산다. 높아진 투명과 효율에 지대추구가 강하게 억제되리라. 미루던 공공개혁을 서두르자.

김일중(성균관대 교수·경제학과)국민 : 2023-08-29 04:02

 

 

도시라는 회집체

우리 아파트엔 주민들끼리 소통하는 단톡방이 있다. 아파트 개·보수 등 정보 공유는 물론이고 그 안에서 무료 나눔도 이루어진다. 어느날 아파트 화재경보가 울렸을 때 경보 발원지를 찾는 데에도 단톡방이 한몫 톡톡히 했다. 단순한 단톡방 하나만으로도 도시를 살아가는 재미가 느껴진다.

 

최근 스마트 도시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스마트 도시란 정보시스템 연결망을 통해 네트워크화된 도시를 일컫는다. 주로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교통 흐름, 공기 오염, 에너지 사용 등의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그로부터 산출되는 데이터를 통해 시민 생활의 편의성을 높인다는 개념으로 출발한 정책 사업이다. 이 사업의 핵심에는 도시의 문제테크놀로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문제를 기술이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일종의 테크노피아적 믿음에 근거한다.

 

이런 발상 뒤에 자본과 비즈니스적 구상이 숨어 있음은 당연하다. 민간 거대 정보통신 업체들이 지자체의 도시 설계 과정에 깊숙하게 결합해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투자 시장을 창출한다. 그 안에서 기업과 비즈니스는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상품시장이자 고용시장으로 만들어간다. 물론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도시 전체를 각종 센서, 디지털 키오스크, 사물인터넷, 공공 와이파이, 감시카메라 등으로 채워가는 것이 과연 도시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인지는 불분명하다. 투자 대비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도시는 테크놀로지 팩터중심이 되었고, 반대로 휴먼 팩터는 오히려 간과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사람 중심의 거버넌스가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라 2010년 이후 시민 거버넌스 개념으로서 스마트 시티즌개념이 등장했지만, 그 비중은 여전히 미약하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테크놀로지 중심으로 전개되는 반면, 왠지 모르게 인간은 늘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이거나 혹은 버그를 일으키는 존재로 인식된다. 테크놀로지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휴먼 에러를 최소화하는 해결자를 자처한다. 예컨대 IBM, CISCO 또는 Siemens 등이 도시를 살리는 슈퍼맨이 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단지 데이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원자화된 개별자들로 인식된다. 살아가는 시민들의 참여나 집합지성은 점차적으로 후경화된다.

 

나는 스마트 도시의 테크놀로지 집중 모형이 정말로 도시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지금까지 세계의 스마트 도시들이 주목해온 문제들은 주로 도시 행정, 교통, 환경, 에너지 등의 부문에 집중돼 있었다. 반면 도시가 진정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또 다른 중핵적 문제들, 예컨대 지방도시 소멸, 부동산 가격급등(), 계층 양극화, 청소년 일탈과 마약, 과잉 교육경쟁과 사교육,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 등은 회피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들은 센서와 데이터 혹은 인공지능(AI)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란 일종의 집합적 지능을 가진 생명체 같은 것일 수 있으며, 그러한 도시 전체가 감각과 신경망, 지능을 가진 회집체(assemblage)처럼 작동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이때 기술이 도시 문제를 모니터링할 수는 있지만 해결을 위한 결단은 시민들의 몫이다.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휴먼 팩터가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플랫폼과 프로토콜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민들의 집단지성을 성장시키고, 그것과 스마트인공지능의 연결을 통한 공진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답은 연결소통’ ‘학습에 있을지 모른다. ‘스마트테크놀로지가 연결성을 통해 현실을 감지하고 학습하는 것처럼, 도시의 시민들도 서로 연결되고 토론하며 집합적 생각을 진화시켜 갈 수 있는 기회와 플랫폼이 적극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갈라진 이해관계를 이어 붙이고 공존할 수 있는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도시 플랫폼이 요청된다.

 

최근 포스트 휴먼적 관점에서 도시는 생명과 물질, 인간과 비인간이 공생하며 공진화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 기억체이며 학습하는 체계이다. 도시라는 회집체는 인간을 가르치는 학습공간이 된다. 예컨대 독일 베를린에 가면 유대인 묘지, 나치 박물관이 도시 한가운데 있으며, 베를린 장벽의 유적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도시 전체가 역사성과 미래적 가치를 가르치는 커다란 학교이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기껏 세워놓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치워버리지 못해 저리도 난리를 치고 있지 않는가?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경향 : 2023.08.30.

 

 

그건 정치가 아니다

우리 애들은 간판과 현수막으로 한글을 깨쳤다. ‘탕후루같은 단어는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면서도 귀신같이 찾아낸다. 당황스러운 순간도 종종 있다. 성인 PC방 간판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바둑이가 뭐냐고 물었을 때는 아마 강아지는 아닐 거라 대답했다.

 

문장을 잘 읽게 되자 더 난감해졌다.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 우리 어민 다 죽는다!’ ‘이게 나라냐!’ ‘청년 일자리 뺏는 부패노조 OUT!’ ‘Hi~ 윤틀러!’ ‘독도까지 바칠 텐가!’ ‘친일본색 매국정권’ ‘법치부정 범죄옹호등 거리를 뒤덮은 정치 현수막 때문이다.

 

온갖 창의적인 욕설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정치인들끼리 싸우는 거라 대답했다. 우리 애들에게 정치인은 싸우는 사람들이고, 정치는 싸우는 일이 돼버렸다. 아빠는 정치학을 공부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싸움을 좋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 정치라는 단어 자체가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정치질은 권력, 지위, 이권 등을 획득하기 위해 선동, 날조, 분탕 등을 하는 행위 혹은 자신과 자신의 파벌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편 가르기를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회사, 학교, 게임에서 벌어지는 정치질사내 정치와 같은 별도의 표현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정치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상황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611116일자 더 타임스머리기사에 실린 살라자르의 말은 마치 우리의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요란하고 일관성 없는 약속들, 실현 불가능한 요구들, 근거 없는 생각들의 잡탕, 현실성 없는 계획들. 진리나 정의라고는 전혀 괘념치 않는 기회주의, 분에 넘치는 명성을 뻔뻔하게 추구하는 것, 통제 불가능한 욕망의 부추김, 가장 저급한 본능의 이용, 사실의 왜곡. 이 모든 과열되고 무익한 호들갑들로 이루어진 정치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혐오한다.”

 

사이다 발언의 주인공인 살라자르는 사실 포르투갈의 독재자다. 자신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에 대한 혐오를 활용했던 것이다. 과거의 이데올로그들이나 현대의 포퓰리스트들 역시 같은 전략을 사용한다. 정치를 정치질로, 정치인을 정치꾼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결국에는 정치통치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버나드 크릭은 <정치를 옹호함: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에서 정치의 의미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이작 디즈레일리가 말한 것처럼 정치가 사람들을 속여서 통치하는 기예인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정의돼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통치에는 정치적 방식과 그렇지 않은 방식이 있다. 정치는 서로 상이한 이해관계들을 조정(conciliation)하는 활동이며, 정치적 통치 방식의 핵심은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가능한 한 달래어 설득하는 것에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이관후 교수(건국대 상허교양대학)는 크릭이 말하는 정치가 통치의 기술, 공적 업무 혹은 권력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타협과 합의로서의 정치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권력투쟁과 편 가르기에 정치라는 표현을 붙이는 건 정치를 모욕하는 짓이다. 그리고 타협과 합의를 통한 조정이 실종된 우리 정치는 나쁜 정치가 아니라, 애초에 정치가 아닌 것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치가 아니라 정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치가 그렇지 뭐라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그건 정치가 아니야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송경호 연세대 정치학과 BK21교육연구단 박사후연구원 경향 : 2023.08.30.

 

 

선거는 괴벨스를 원한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은 기자의 80%가 반대한 여론조사 결과도 깔아뭉개면서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임명을 강행했다. 이 위원장은 “MB정권 괴벨스라고 불리기까지 한 인물이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 독일 시절 언론장악을 통한 유대인 척결 선동으로 악명이 높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 위원장이 가짜뉴스 척결과 언론 공정화의 적임자라는 옹호와 내년 총선을 위한 언론장악 노림수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옹호와 비판 중 비판이 논리적으로 더 견고하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경제학 특유의 우울한연구 결과에 근거하면 선거는 괴벨스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치시대 라디오에 대한 실증연구를 보면 미디어는 선거에서의 영향력이 제법 크다. 괴벨스가 주도한 반유대인 선동은 나치의 득표율을 높였다. 또 나치체제가 들어선 이후 지속적인 선동은 원래 반유대인 정서가 강했던 지역의 반유대인 정서를 더욱 강화시켰으나 그렇지 않았던 곳에서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정권의 지지층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울한 것은 이게 단지 1930년대에 벌어진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선 조작 가짜뉴스로 유명한 미국 폭스뉴스는 조지 부시와 앨 고어의 재검표 소동이 벌어졌던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득표율을 올리는 데 기여했다. 공화당의 지지층을 응집시키는 쪽으로 말이다.

 

이런 고도의 정치논리는 제쳐두고라도 이 위원장이 내세우는 가짜뉴스 척결과 언론 공정화라는 명분은 그럴듯한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위원장 스스로 언급한 공정한 미디어 생태계의 난센스다.

 

언론의 편향(bias)은 대부분 정치적 편향과 연관되는데 사설·칼럼 등 논조의 편향, 특정 정치집단에 유리 또는 불리한 기사의 숫자, 사실의 악의적 왜곡 등이다. 논조와 기사 등에 기초한 여러 실증 연구들은 미국 언론에 편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뉴욕타임스는 민주당 편향, 워싱턴타임스는 공화당 편향이다.

 

그럼 한국 언론은 어떤가? 당연히 편향이 존재한다. 이 위원장의 모순은 여기에 있다. 그의 공산당 기관지발언은 화살이 진보 언론을 향해 있음을 보여주는 데 반해 보수 언론은 중립적·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가짜뉴스의 정점인 사실의 왜곡에 대한 태도이다. 기존 진보 언론도 사실의 왜곡은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속보-이준석, 조국 딸 조민 11월 결혼!! 난리 났네요라는 제목의 한 유튜브 영상은 조민이 정치인 이준석의 아기 임신 8개월 차라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유튜브 세상에서는 악의적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데 윤석열 정권은 오히려 보수 유튜버를 요직에 기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위원장은 언론의 편향이 왜 생기는가에 대한 관점이 없다. 여러 경제학 연구들은 두 가지를 주목한다. 하나는 수요 측면, 즉 독자의 정치적 성향에 언론이 영합(pandering)’하기 때문에 편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주요 독자가 보수면 보수 편향, 진보면 진보 편향인데 이는 돈을 벌어야 하는 언론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독자가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논조와 기사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국내에선 독자 대신 광고를 주목해왔다. 언론사 매출의 대부분이 광고여서 광고주인 재벌과 재벌 총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단순히 총수 개인을 언론이 도와주는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경제 현안에 대한 언론의 관점이 재벌이라는 경제권력의 보수적 선호에 수렴하는 결과가 나온다.

 

또 하나는 공급 측면인데, 언론사의 소유구조가 언론의 편향을 만든다. 예를 들어 언론사 사주, 그리고 언론사 사주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데스크의 정치적 성향이 논조와 기사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결국 언론사의 지배주주가 경제권력 또는 정치권력이라면 각각 그에 따르는 편향이 생기고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즉 공영방송의 지배주주가 정부여서 친정부적이 된다고 해서 민영화하는 것이 공정한 미디어 생태계 구축이라고 여기는 것은 단선적인 발상이다.

 

총선 승리가 목적인 권력은 언론 장악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이는 언론 정상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냥 정권의 사익 추구일 뿐이다. 나치 독일 시절 언론은 민주주의 붕괴와 극우 파시즘 체제로의 전환에 일조했고, 정치적 양극화를 강화했다.

 

언론의 사실 왜곡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언론의 진보와 보수로의 적당한 편향, 공영과 민영 언론의 적절한 조합은 일종의 균형이다. 윤석열 정권에선 괴벨스의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상대방을 괴벨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래봤자 결국은 괴벨스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 경향 : 2023.08.30.

 

 

이명박 박근혜도 이렇지는 않았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으로 최적화된 사람인 것 같다. 매사에 거침이 없고 용감무쌍하다.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환하게 빛났다.

여러분 이렇게 오래간만에 다 같이 뵈니까 정말 제가 신이 난다고 했다. 겁이 났다.

국정 운영권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아찔한 생각이 많이 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많이 든다.

“(문재인 정부는) 그야말로 나라가 거덜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했다. 지금 나라가 거덜이 나기 일보 직전 아닌가 걱정이다. 무섭다.

 

말꼬리를 잡으려는 게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두 가지 이유다.

첫째, 이념이다. “우리 당은 이념보다 실용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분명한 철학과 방향성 없는 실용은 없다고 했다. 실용 보수의 종식, 이념 보수의 부활 선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념이 뭘까? 자유민주주의로 포장한 반공주의다. 자유민주주의는 야당을 반국가세력으로 몰아서 말살하려 하지 않는다. 공산당 가입을 이유로 독립운동가 흉상을 치우지도 않는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에 보수 신문들이 사설과 칼럼으로 반대 의견을 냈다. 홍준표 대구시장, 김병민 최고위원, 김태흠 충남지사도 반대다. 그런데도 밀어붙인다.

윤석열 검사는 본래 이념형 인간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된 뒤 이념형 인간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더 무섭다.

둘째, 적대다. “국회 여소야대에다가 언론도 전부 야당 지지세력들이 잡고 있어서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했다. “1+1100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통령과 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이 기본 책무인 국회와 언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걱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증오와 적대감을 드러냈다.

 

대통령은 권력자다. 권력자가 야당과 언론과 국민을 때려잡으려 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무섭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촛불집회가 계속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관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들었다. 2008610일 대규모 집회를 명박산성을 쌓아서 막았다. 명박산성은 불통의 이미지로 각인됐지만, 인명 피해를 막으려는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과 추가 협상을 벌여 30개월령 이상 수입을 금지했다. 류우익 대통령실장, 이종찬 민정수석 등 청와대 참모 6명을 사퇴시켰다.

이명박 대통령은 눈이 작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성난 민심과 싸우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눈이 크고 겁이 없다. 민심과 맞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섭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자리를 늘리고 복지를 확대하기 위해 재정을 투입했다. 조세저항을 무릅쓰고 증세를 추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한 일도 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그 연장이었다.

 

주변국과의 관계 설정에도 많은 고민을 했다. 임기 초 아펙(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싸늘하게 외면했다. 아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2015년 시진핑 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천안문 망루에 올라 열병식을 참관한 적도 있다. 오락가락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국익을 위해 노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다르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그치지 않고 아예 한··일 동맹을 추진하려는 것 같다. 한반도를 한··일과 북··러의 대결장으로 몰아가고 있다. 전쟁도 불사할 것 같다. 무섭다.

 

이른바 보수 성향 신문들도 걱정이 많아졌다. “중국·러시아와의 정상적 관계를 관리해야 한다거나 자유만 있는 윤석열 대통령은 위험하다는 사설이나 칼럼이 등장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폭주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앞이 캄캄하다. 이른바 보수가 책임져야 한다. 보수 세력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을 징발해서 자기들의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문재인 정부에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복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 대한민국의 미래, 보수의 미래는 밝아졌나? 입이 있으면 대답해 보기 바란다.

성한용 | 정치부 선임기자 한겨레 : 2023.08.30.

 

똘이 장군 나가신다. 홍범도는 길을 비켜라

조악한 '반공물' 속 악당으로 변신한 홍범도의 항일투쟁

만화가 허영만의 '각시탈'1985년 반공장편만화영화로 재탄생했다. 각시탈은 원래 주인공이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각시탈을 쓰고 복수하는 내용이다. 일종의 독립투사인 셈인데, 전두환 정권 시절 만화영화로 재탄생한 각시탈은 배경이 북한으로 바뀌고 각시탈은 공산당을 물리친다.

 

유명한 반공 만화영화 중엔 '똘이장군'도 있다. 이 애니메이션의 모티브는 해외에서 인기 있던 외화 시리즈 '타잔'이다.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던 타잔의 이미지를 입은 똘이장군이 공산당과 김일성을 부수는 이야기다. 이 만화영화는 어린이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서 봤다기보다 학교와 당국에서 반공 캠페인을 위해 어린이 단체관람을 장려했기 때문에 수익성이 좋았다고 보는 게 맞다. '해돌이의 대모험'도 있었다. 외화 시리즈 헐크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인데 해돌이가 북한 공산당을 보고 분노해 녹색 장사로 변신하고 공산당을 무찌른다는 서사다.

 

일제시대에 활동한 각시탈이 갑자기 북한에서 공산당을 무찌르거나, 미국 작가가 쓴 정글의 타잔 캐릭터가 북한의 숲속에서 소년 장군이 되어 공산당을 무찌르거나, 마블 히어로 헐크가 갑자기 북한에서 공산당을 무찌르는 것은 일종의 조악한 '반공 번안물'인 셈이다. 인기 캐릭터를 저작권 무시하고 가져다가 '공산당을 무찌르는' 캐릭터로 변모시키는 것은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에나 있던 일이다.

 

반공 만화 똘이장군 이미지

 

뜬금없이 반공 애니메이션 얘기를 꺼낸 것은, 지금 한국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묘하게 많아서다. 21세기 하고도 23년이 지난 요즈음에도 이런 번안물이 판을 친다. 주인공은 국방부다. 국방부에 홍범도 장군은 한때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무시무시한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변모해 있다. 일제 독립군에서 군의 뿌리를 찾던 국방부는 갑자기 '반공 영웅 서사물'로 방향을 틀고 홍범도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부 청사에서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 홍범도를 때려잡고 있다. 최근 '이념 전쟁'을 선포한 군통수권자는 국군의 서사를 독립운동에서 반공영웅으로 급변침한다.

 

요즘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건국'을 위한 운동이라고 한다. 대통령의 창조적인 식견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과정인 독립운동에 감히 '소련 공산당'을 끌어들인 셈이다. 이 새로운 역사적 해석에서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선사(先史)가 독립운동에 투영돼 완성되기 위해선 '공산당'과 같은 불순한 사상은 제거돼야 한다.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완벽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윤석열 대통령)" 대한민국을 세탁하기 위해선 낙오된 공산주의자를 육사 교정에서 삭제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 교과서도 많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번안물은 또 있다. 갑자기 윤석열 대통령은 구국의 지도자이자 빛나는 태양으로 변모한다. "시커먼 먹구름 위에는 언제나 빛나는 태양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먹구름을 걷어내고 혼란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구국의 지도자, 우리 민주평통 의장이신 바로 윤석열 대통령(김관용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29일 발언)"이라는 찬사가 대낮에 읊어진다. '민족의 태양'을 우린 알고 있다. 그건 한반도 이남엔 없고 이북에만 유일신으로 존재했었다. 빛나는 태양, 구국 지도자의 뜨거운 찬양은, 이를테면 북한의 서사를 남한 식으로 각색한 번안물이다.

 

홍범도 장군과 우크라이나의 공통점이 있다. 소련 공산당에 소속된 적이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지난 7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방문해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70년 전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소련 소속으로 6.25 전쟁 때 북한을 도운 이력이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갑자기 폐허가 된 한국을 상상하더니, 급기야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 정신을 강조한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 출신이라 안되고, 우크라이나는 소련 공산당 출신이라도 괜찮다. 윤석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방문해 올해에만 1900억 원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육사 교정과 국방부 청사에서 제거되고,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은 개명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우린 어디까지 소련 공산당을 용서해 줘야 하는가?

 

80년대 반공물은 아무데나 '반공 서사'를 갖다 붙여 새로운 콘텐츠로 재탄생시킨 것들이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딱 그렇다. 봉오동 전투가 있던 1920년은 김일성 8살 때 벌어졌다. 그런데 이 전투는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빨치산 활동'이 되고, 1948년에 창군했다는 대한민국 국군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20년대 '공산당원'까지 색출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이순신 장군의 항일 투쟁이 자유민주주의 건설과 공산당 토벌 정신이라는 번안물이 나올 수도 있겠다.

 

1980년대 반공 판타지라면 황당함이 허용될 수 있겠지만, 2023년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웃고 넘길 일이 아니게 된다.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육사 교정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다. 1차대전 승전국이었던 일본은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했을 때 미국 등 서구 모든 나라들로부터 '식민지배'를 인정받고 있었다. 독립군 홍범도가 누구와 손을 잡고 싸워야할지 명백한 상황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일한 잘못은 돌아가신 2년 후에 북한 정권이 수립될 것을 미리 예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겠다고 하기보단, 간도특설대 같은 곳을 알아봤어야 맞았을 거다. 그랬으면 돌아가신지 80년 후에 이런 푸대접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우린 지금 반공과 독립운동의 조악한 크로스오버물을 강제시청하고 있다.

박세열 기자 프레시안 : 2023.08.30.

 

 

이 모든 친일 소동의 끝은 어디인가

815일부터 이상한 일이 잇따랐다. 짧은 시간에 어찌 그런 일들이 이어지는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날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로 규정했다. 같은 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공물을 바쳤다. 사흘 뒤 한··일 정상들이 만나 3국 관계를 준군사동맹수준으로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다졌다. 24일엔 일본 원전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나왔다. 한국 정부는 일본을 편들었다. 곧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부의 홍범도 장군 흉상 논란도 벌어졌다. 91일은 수천명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당한 간토대학살 100돌이다.

 

정상적이라면 이 보름여간은 자주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고, 침략주의를 경계하고, 동포들의 무참한 희생을 추모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런 면에서 이 비정상적 시간은 나라가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일련의 소동을 관통하는 핵심이 있을 것이다. ‘캠프데이비드 선언이 약속한 한··일 연합훈련 본격화가 그것 같다. ·미 정부는 이 합의는 3국 군사동맹을 뜻하지 않고, 그것을 추진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3국의 군사적 밀착이 차근차근 진행돼 여기까지 온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발전가능성이 커 보인다.

 

뭐가 남았을까? 일본의 한반도 출병 근거를 마련하는 것도 그중 하나일까? 앞서 일본은 적기지 공격능력 보유를 선언했다.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는 위기 때 3국 협의와 연합훈련 전면화를 공약했다. 함께 협의하고 함께 훈련하는 것은 실전에 써먹기 위해서다. ··공을 망라하는 연합훈련은 이미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가능성을 시야에 넣는 것일 수 있다. 공해상에서 항로 안전 확보나 해적 퇴치를 목적으로 하는 해상 연합훈련과는 차원이 다르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온갖 구실로 한반도 출병의 근거를 마련하고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고 요구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제물포조약으로 일본공사관 경비병력 주둔 근거를 만들었다. 1884년 갑신정변 뒤 청나라와 맺은 톈진조약으로는 한쪽이 조선에 출병하면 다른 쪽에 알리도록 했다. 이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일본이 출병하는 구실이 됐고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한반도를 제집처럼 여기게 된 일본군은 1904년 러일전쟁 때는 대한제국이 중립을 선언했는데도 밀고 들어와 한성을 점령했다.

 

21세기에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식민화 말고도 타국을 부려먹고 희생시키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 140여년 전부터 큰 나라들끼리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했고, 한민족은 아직도 거기에 속박돼 있다.

 

지난 7월 퇴임한 웬디 셔먼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차관 때인 2015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는 건 어렵지 않다고 했다. 미국 뜻대로 일본과 밀착하지 않는 한국에 오만한 표현까지 써가며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이제 미국은 윤 대통령을 편협한 여론에 맞서는 용감한 지도자로 평가한다. 하지만 민주국가 지도자가 같은 일로 밖에서 칭찬받고 안에서 비판받는다면 그거야말로 문제 아닐까.

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경향 : 2023.08.31.

 

 

클래머스강에서 사라진 것은

댐 철거는 당파적인 이슈가 아니다.” 2019년 미국 오리건주 지역 신문에 실린 기고문 제목이다. 기고자는 14년 동안 오리건주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던 정치인 출신 영화감독이다.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클래머스강에 위치한 4개의 댐을 철거하는 클래머스 댐 철거 사업이 합의되어 추진되다가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반대에 부딪히자 공화당 출신 정치인이 직접 중재하고 나선 것이다.

 

클래머스강 복원 사업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댐 철거 프로젝트다. 클래머스강에 있는 4개의 댐은 수질이 악화돼 독성 남조류가 자라고, 연어 등에 기생충이 번성해 어업에 악영향을 끼쳐왔다. 4개의 대형 댐을 철거하기 위한 초당적 노력은 부시 행정부 시절 성사돼 오바마 행정부로 이어지며 2018년에 철거될 예정이었다. 이해관계자가 걸려 있는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 강 복원 역시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자 한국의 상황이 겹쳐보인다.

 

한국에서 은 미국보다도 훨씬 더 치열한 정치적 이슈다. 한강 개발과 청계천 복원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한 이명박 대통령이 대대적으로 4대강 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전쟁 폐허 위에서 사회적 인프라를 건설하고 초고속 성장을 이어오다가 저성장 국면에 들어선 시점에서 국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은 성장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담아낸 마지막 한 방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정치적 명운을 걸다시피 하면서 무리하게 추진한 사업이다보니 시행과정에서도, 사업이 끝나고 정권이 바뀐 후 복원 논의과정에서도 진통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4대강 사업은 최근까지 다섯 번의 감사원 감사를 받았고, 감사 결과가 발표되자 국가물관리위원회는 4대강 보 해체 계획을 국가물관리기본계획에서 삭제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신규댐 건설과 준설을 추진해야 한다는 정치적 메시지는 강력해졌고, 2024년 예산안에도 반영됐다.

 

하지만 한국의 댐 건설은 이미 포화상태라 건설 적지도 거의 없지만, 당장 댐을 몇개 더 짓고 준설사업을 추진하더라도 이 같은 기조는 지속될 수 없다. 담수생태계 붕괴를 막고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용도가 상실되거나 노후되어 편익보다 비용이 큰 댐을 철거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설득하고 보상해야 할 구체적인 이해관계자는 존재하겠지만 강 복원 그 자체는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다. 한국도 잠시 주춤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은 세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강 복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미국의 클래머스강 복원 사업의 첫 번째 대상지인 콥코2댐의 철거가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나머지 3개의 댐도 내년까지 철거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지역사회는 클래머스강 복원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환경 복원은 원주민 부족에게 혜택이 될 것이라며 기대하고 있다. 클래머스강에서 사라진 것은 댐뿐만은 아닐 것이다. 댐 철거에 대한 지역사회의 불안과 편견을 과학과 소통을 통해서 넘어서는 과정이었다. 오랜 시간 지난했지만 드디어 결실을 맺고 있다. 시민의 지지가 있다면 시간이 걸려도 강은 흐른다.

신재은 풀씨행동연구소 캠페이너 경향 : 2023.08.31.

 

 

문재인 정부, 세금으로 부동산 잡으려다 실패했다

실패한 부동산 정책, 을지로위원회는 제대로 평가했나

민주당 정부는 왜 지난 대선에서 패배했는가?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위원장 박주민)가 최근 발간한 <민주당 재집권전략보고서>(이하 보고서)는 그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한다.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 보고서는 민생 개혁, 공정 경제, 주거 보장, 노동 존중, 산업 전환, 돌봄을 다룬다. 이 보고서의 발간위원장인 우원식 의원은 발간사에서 대선 패배의 원인으로 '부동산·자산 등 부의 양극화'를 맨 먼저 꼽는다. 여러 의견을 담은 보고서 내에서 대선 패배의 원인이 부동산 가격 상승에 있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가 이뤄진 듯하다. 그런 면에서 부동산 가격 상승 문제를 살펴보는 주거 보장 부분은 대선 패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보고서의 핵심을 이룬다.

 

그렇다면 보고서는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면서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보고서의 내용이 가진 특징은 한마디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 원인과 그에 대한 대책을 모두 세금에서 찾는다는 데에서 나타난다. 정말 부동산 정책 실패의 원인이 세금 문제에 있을까? 만약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의 원인이 세금 문제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면, 보고서의 진단과 대안은 헛다리를 짚는 셈이 된다. 안타깝게도 보고서의 내용은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지 못한 원인을 정확히 짚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세금은 부동산 가격 안정을 이루는 데에서 그저 일부 역할을 맡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 일차적인 근거이다.

 

먼저 주택 가격에 대해 보자. 보고서는 주택 가격이 세금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주택에 보유세를 부과하면 주택에서 발생하는 장래 편익이 감소하므로 주택의 가격이 하락하고 거꾸로 보유세를 감면해주면 주택가격은 상승한다는 것이다. 당장 드는 의문은 지난해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부동산 가격은 세금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최근의 부동산 가격 하락을 세금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하고 있듯이 최근의 부동산 가격 하락을 이끈 요인은 미국 연방준비은행(Fed)이 주도한 세계적인 금리 상승이지 세금 인상이 아니다.

 

보고서는 또한 2007년부터 부동산 가격이 안정세를 보인 것이 2006년부터 부과된 종합부동산세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2009년까지 가파르게 증가하도록 설계된 종합부동산세가 투기 의욕을 꺾어 시장이 진정되고 거기에 LTVDTI 규제까지 더해지면서 이후 부동산 안정세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심한 논리 비약이다. 2007년 이후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 상승세가 꺾이기 시작한 것은 20078월의 베어스턴스 파산에서 시작해서 20089월 리먼브라더스 사태까지 이어진 국제 금융시장의 동요, 그에 따른 글로벌 수준의 유동성 감소와 금리 상승 때문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 나라들에서 부동산 가격이 10~30%씩 하락하는 것은 드문 현상이 아니었고 우리나라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보고서는 부동산 가격 안정 대책도 세금을 높이는 쪽에서 찾는다.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유세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고서는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높게 평가한다.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철학과 원칙을 저버리지 않고 보유세를 도입한 것을 그 근거로 든다. 그에 비해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낮게 평가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보고서는 문재인 정부의 경우 처음부터 부동산 보유세를 높이겠다는 의지가 별로 강하지 않았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든 문재인 정부든 부동산 정책에서 실패해서 정권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 우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 아닌가? 두 정부 모두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과녁을 잘못 설정했다면, 그 과녁에서 점수 계산을 한들 그게 무슨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보고서에는 금리와 통화량 변동이 주택 가격 상승의 주요한 원인이고 따라서 현재의 주택시장이 중앙은행 정책 결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에 대한 대안이 원인 진단과 전혀 관련성을 맺고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예를 들어 낮은 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이 집값 상승의 원인이라면 낮은 금리가 지속된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집값 상승으로 이어지는지, 유동성은 왜 대량으로 만들어지는지, 그 유동성이 어떻게 부동산 시장으로 몰려 들어가는지를 따져서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고서는 그런 설명 없이 통화정책을 인위적으로 강화하거나 완화해서는 안 된다는 대안을 내놓고 있다. 통화정책을 전문가에게 맡겨놓아야 한다는 의미로 읽히는데, 이 부문이야말로 보고서의 한계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통화정책을 인위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는 통화정책이 모든 계급에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작용한다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통화정책은 결코 계급 중립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주류 이론은 사심 없는 전문가가 국민경제 전체의 이익을 위해 중립적으로 금융정책을 수행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고 현실에서는 여러 계급·계층의 이해 대립의 각축을 통해, 또는 금융자본가 계급에 유리한 쪽으로 금융정책이 결정된다. 금융자본가들은 자산 가격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통화정책을 이끌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금융정책의 결정은 여러 계급·계층의 이해가 가장 날카롭게 부딪히는 곳이다. 거기에서 금리와 화폐량 수준이 결정된다. 이렇게 본다면 집값 안정을 바라는 계급·계층의 이해를 정치 과정을 통해 통화정책에 반영시키지 못한다면 부동산 가격 안정은 절대로 이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보고서는 부동산 가격 안정 정책의 핵심을 세금에서 찾는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민주당 부동산 정책 담당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동의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나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한 대책으로 주로 논의된 사항은 세금 인상이었다. 그렇지만 세금 인상을 통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러한 정책은 이미 실패할 운명이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내리는 이유는 따로 있는데, 세금을 통해 가격 안정을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부동산 보유세를 인상하면 안 된다는 의미로 잘못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회 전체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서는 부동산 보유세를 반드시 높여야 한다. 다만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부동산 세금이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 매우 작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세금 인상이라는 것은 관철해내기가 쉽지 않은 대안이다. 세금 인상은 그 영향이 누구의 눈에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해하기 쉬운 정책이다. 그래서 정책 담당자는 세금 인상 정책을 제시하여 쉽게 설명할 수 있고 지지 세력을 끌어 모을 수도 있다. 거꾸로, 바로 그 때문에, 세금 부담을 지는 세력은 세금 인상에 즉각적으로 반발하고 나선다. 세금 인상을 두고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이해하기 쉬운 정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책 당국자는 세금을 인상하기 위해서 매우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세금 인상의 당위성을 설득해야 하고 지지 세력을 끌어모아야 하며 반대자들의 의견을 소수파로 만들어야 한다. 만약 세력 관계를 계산하지 않고, 준비 정도도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금 인상을 밀어붙인다면 어느 순간에 되치기를 당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자는 주장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정치적일 수는 없다. 진정한 정치적인 대안은 세금을 인상하자는 주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준비 정도와 현재의 힘 관계가 어느 수준인지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에서 나온다. 세금은 정책의 영역이라기보다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새겨야 한다.

임수강 금융평론가 | 프레시안 2023.08.31.

 

 

비례대표 확대'에 스스로 재 뿌리는 비례 국회의원들

래도 비례대표제 확대가 옳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이 되고자 한다면 두 가지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역구 선거에 출마하거나,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되는 것입니다.

 

현재 총 298명인 제21대 국회의 지역구 의원은 251명이고, 비례대표 의원은 47명입니다. 이런 선거제도를 '혼합형'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방식입니다만, OECD 38개 회원국 중 우리나라처럼 혼합형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는 일본, 독일, 뉴질랜드, 이탈리아 등 8개국에 불과합니다.

 

지역구 국회의원만을 선출하는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6개국으로 더 적습니다. 나머지 24개국은 비례대표제만을 채택합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스위스, 네델란드 등이 여기 해당합니다.

 

비례대표제의 가장 큰 장점은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의 의견 분포가 국회 의석에 최대한 반영되는 것입니다. 소선거구제에서는 필연적으로 다수의 사표(死票)가 발생하는데, 이로 인한 대표성의 불균형을 보완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지역구 의석이 의원정수의 84%나 되는 우리 현실로 볼 때, 비례대표제가 승자독식의 문제를 어느 정도나 해소할 수 있는 걸까요? 혼합형 선거제도를 채택한 다른 나라들의 의석 비율은 어떤 수준일까요?

 

일본의 중의원은 총 465명의 의석 중 지역구 289, 비례대표 176명으로 구성됩니다. 비례대표가 전체의 38%입니다. 독일은 법정 의원정수가 598명인데 정당 득표율과 원내 의석 점유 비율을 최대한 일치시키기 위해 초과·보정 의석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2021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지역구 299, 비례대표 437석으로 736명이 당선됐습니다. 비례대표 비율이 59%에 이릅니다. 뉴질랜드는 총 120석의 의석을 지역구 72, 비례대표 48(+ 초과의석)으로 배분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의 의석수는 상원 200, 하원 400석인데 상원의 경우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각 74, 126, 하원은 각 147, 253석으로 구성됩니다.

 

우리나라가 채택한 혼합형의 비례대표 의석수는 전체의 16%에 불과해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보완하기에는 턱없이 적습니다. 게다가 비례대표제도가 가지는 또 다른 순기능, 가령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 전문가 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측면에서 볼 때도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북유럽의 주요 국가 의회는 2030 세대 청년 국회의원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데요, 노르웨이 34.3%, 덴마크 30.7%, 스웨덴 31.4%, 핀란드 29% 등입니다(IPU, 2021). 우리나라는 3.7%에 불과해 100개 국가 중 107위이니 차이가 상당합니다. 문화나 교육 등의 측면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들 나라가 모두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렇다면 대표성, 비례성을 강화하고 청년 정치인 육성 등 새로운 정치문화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비례대표 의석수를 늘리는 게 좋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이런 고민에 이르게 됩니다. 선거제도 개편 논의에서 비례대표 확대가 늘 쟁점이 돼 온 건 이런 문제의식에서입니다. 다만 명분이 있다고 해서 간단히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례대표를 확대하려면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거나, 국회의원 정수를 유지한 채 지역구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합니다. 그런데 정수를 늘리기에는, 우리 정치가 자초한 일입니다만,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국민 신뢰가 너무 낮습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지난 214일 공개한 '정치개혁 국민 인식조사결과에 따르면 국민 57.7%가 정수 확대에 반대했습니다. 그렇다면 지역구 수를 축소하고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는 방안은요? 81.7%의 국민이 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선거제도 전문가도 다수가 '지역구 축소, 비례대표 확대'에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며칠 전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된 전문가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는데(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2023.8.29.), 전체 응답자 489명 중 찬성자가 57%였습니다. 그러나 이 방안은 현재 의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최대 관건입니다. 딱 봐도 쉽지 않겠죠.

 

'지도부 마음대로 공천한다라는 인식도 비례대표 확대의 걸림돌입니다. 1963'전국구 선거라는 이름으로 처음 도입된 비례대표제는 당시 전체 의석의 1/4에 적용됐는데요, 군부 세력이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한 인사들을 배려하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지역구에 비하면 비례대표 공천은 지도부의 몫으로 더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거수기라는 꼬리표를 갖게 된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현재와 같은 비례대표 제도는 1990년대 이후부터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지역구 선거에서 5석 이상, 유효투표 총수의 3% 이상의 정당을 기준으로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 적용된 건 1996년 국회의원 선거부터입니다. 2000년 총선에서 후보자의 30%를 여성으로 할당하게 되었고, 2004년에는 그 비율을 50%로 상향하면서 1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습니다. 우리 정치에서 소수정당이나 여성의 원내 진출 기회가 확대되어 온 과정입니다.

 

"비례대표제는 합의를 이뤄내는 문화를 조성하고, 정당들이 국가 전체의 복지를 위해 이념적 경계를 넘어 협력하도록 장려합니다."

 

- 저신다 아던(Jacinda Kate Laurell Ardern) 뉴질랜드 총리, 2021년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저는 전체 의석수를 늘리든 지역구를 없애든, 우리나라 정치의 양극화와 이념대결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로 비례대표 확대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펼칠 때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 이야기입니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역구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혜택이 많은 편입니다. 유권자들에게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지역 활동을 안 해도 되니 사무실이나 사람을 구하는 데 돈이 들 일도 거의 없습니다. 선거인단 투표 등 제한적인 경쟁이 있더라도 연설이나 토론 등 준비과정이 단순한 편입니다. 전문가 출신이라면 '영입케이스에 해당하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일부 비례대표 의원들이 보이는 행태가 몹시 못마땅합니다. '명분 없는 지역구 사냥(2023.5.22. 동아일보)’, '지역구 출마 준비에비례 의원 후원금 펑펑(2023.5.23. 채널A)’, '전략공천 지역구서 깃발 꽂는 비례 의원(2023.6.8. 서울신문)’ '꽃길만 걸으려는 비례 의원들(2023.8.24. 한국일보)’ 등 관련 기사의 제목만 보아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비례대표 의원들이 지역구에 출마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의정활동 경험을 살려 더 많은 공익적 활동을 위해 다시 선거에 나서려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다만, 특정 지역의 선거를 준비하는 데 의정활동 후원금을 마구 쓴다든지, 당선 가능성이 큰 선거구에 출마하기 위해 지역 연고를 급조한다든지, 지도부와의 친분을 내세우며 비주류 의원의 지역구를 고른다든지, 경선이 없는 전략공천 선거구를 노린다든지 하는 치사한 일들만은 자제했으면 합니다.

 

선당후사까지 바라지는 않겠지만, '지역구의 손쉬운 우회경로라며 비례대표 무용론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그 근거로 지목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박해성 티브릿지 대표 | 프레시안 력 2023.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