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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3.6.1~30 대통령 한마디에 시스템이 무너지는 나라

by 이성근 2023. 7. 2.

군사적 재앙을 자초할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시민언론 민들레 2023.06.01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억', 그리고 김귀정의 오열 시민언론 민들레 2023.06.01.

대형교회 목사의 도 넘은 거짓 선동 시민언론 민들레 2023.06.01.

공포와 야만의 경보음이 울린 아침에 한겨레 2023.06.02.

한국엔 왜 젠슨 황 같은 기업인이 없을까? 한겨레 2023.06.02.

법치를 오독한 대통령이 포퓰리즘과 만날 때 프레시안 2023.06.02.

남 탓의 심리학 경향 2023.06.03.

가계발 금융위기, 위기의식 없는 정부 시민언론 민들레 2023.06.03

덜 나쁜 놈고르는 선거에서 벗어나야 경향 2023.06.04.

모든 힘을 상상력으로! 한겨레 2023-06-04

성장률과 사라져가는 평균 경향 2023.06.05

대통령 지지도 공식과 미디어 이벤트 경향 2023.06.05

광우병 광기, 방사능 방기 미디오오늘 2023.06.05.

자제력 잃은 공권력이 가져올 비극 한겨레 2023.06.05

35분 이어진 장광설윤 대통령 복지관이 위험한 이유 한겨레 2023.06.05.

총체적 난국, 길 잃은 한국경제 경향 2023.06.06.

만만한 게 노동자 임금인가 경향 2023.06.06.

아무도 모른다경향 2023.06.06.

비나이다 비나이다거짓 선동경향 2023.06.06.

초등 의대반과 부모 해방일지 경향 2023.06.06.

신념과 아집의 혼동 경향 2023.06.07.

대화에 열려 있는 팬덤은 가능한가 경향 2023.06.07.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모호한 말 한겨레 2023.06.07.

윤 대통령의 법치주의가 수상한 이유 한겨레 2023.06.07.

인구절벽과 비수도권 대학 구조조정 경향 2023.06.08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경향 2023.06.08.

진보는 보조금으로 오지 않는다 한겨레 2023.06.08.

'개딸', '전광훈'에 끌려가는 한국정치, 무당층의 선택은? 프레시안 2023.06.08.

6월항쟁, 87년헌법, 대법관 인사권 경향 2023.06.09.

도덕적 피로감의 쓸모 한겨레 2023.06.09.

그런 저녁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한겨레 2023.06.09.

대학 평준화의 두 가지 의미 경향 2023.06.10.

닫힌 도시와 열린 도시 경향 2023.06.10.

칼럼 쓰지 맙시다 미디어오늘 2023.06.10

 

국익을 포기하면서 가치에 몰두하는 나라 한겨레 2023.06.11.

회식비 윤석열’, ‘출장비 한동훈의 앙상블 민중의소리 2023.06.11.

우리 대통령과 저런 인간 한국 2023.06.12.

무책임한 극단주의, 프리드먼과 윤석열 경향 2023.06.12.

뒤끝윤석열 정부, 자유도 보수도 아니다 한겨레 2023.06.12.

이상하기 짝이 없는 정치논리 경향 2023.06.13.

붕 떠버린 복지국가 한겨레 2023.06.14.

중국을 껌으로 보던 시절 한겨레 2023.06.15

진영공화국의 고착 막아, 나라의 살 길 틔워야 한다 경향 2023.06.15

대통령제의 위험’ 30년 전 경고, 현실화하다 한겨레 2023.06.15.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전하는 언론 미디어오늘 2023.06.17

윤석열 나팔수들에 피울음 호소 미디어오늘 2023.06.19

세계 최대 규모 영재교육 제도의 허와 실 경향 2023.06.20.

균형 잃은 사회복지와 국민연금 경향 2023.06.20.

북한 인권을 걱정한다면 남북교류부터 재개를 한겨레 2023.06.20.

 

일본의 처리수 환경영향평가 보고서경향 2023.06.21.

평행선 위에서 경향 2023.06.21.

대통령 한마디에 시스템이 무너지는 나라 한겨레 2023.06.21.

극단적 중도파들의 시대 경향 : 2023.06.22.

김밥말이 패션'은 그만, 헬멧 없으면 자전거도 없다 프레시안 2023.06.23.

검찰수사로 대입 전문성 키워온 대통령이걱정스러운이유 프레시안 2023.06.24.

공교육의 가치를 물어야 할 시간 경향 : 2023.06.24.

주식으로 100% 돈을 버는 법 프레시안 : 2023.06.24.

70년 전 일이 아닙니다, 도종환 의원님 한겨레 : 2023.06.25

어떻게 자유는 무너지는가 경향 : 2023.06.26.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경향 : 2023.06.28.

재벌 영업사원 1'에 맞선 ''들의 저항 프레시안 2023.06.28.

인생 후반기의 도전이란 한겨레 2023.06.28.

우리 바다 지키기해산물 '먹방 릴레이'가 해답인가 토요경제 2023.06.28.

이권 카르텔 낙인찍기 해괴한 굿판 한겨레 2023.06.28.

하루 만에 한 달치 비가 쏟아지는 나라 경향 2023.06.30.

 

 

 

 

군사적 재앙을 자초할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누리호 성공, 러시아 기술이 결정적 역할

어느 날 눈 떠보니 한국이 방산강국 및 우주강국이 되어 있었다? 지난 525일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KSLV-2)의 발사 성공으로 한국은 우주발사체 분야에서도 강국으로 떠올랐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적인 방산강국과 우주강국으로 성장하게 되기까지 러시아와의 불곰사업을 통한 군사기술 도움이 없었다면 단기간에 적은 비용으로 이러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로켓기술의 도입으로 한국의 우주개발을 30년 정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형발사체(KSLV-2) 누리호에는 75t 다단연소 사이클의 앙가라(Angara) 로켓엔진이 사용되었는데, 2008년에 도입한 러시아의 액체로켓을 역공학(Reverse Engineering)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다. 역공학 방식은 쉽게 말하면 분해 재조립하면서 분석하는 방식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과 같은 일부 우주발사체 선진국들만이 보유하고 있는 최첨단 엔진 기술을 한국이 보유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첨단기술 덕분에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75t짜리 액체로켓 엔진의 개발에 들어가 3년여 만인 201811월 누리호 시험발사체(KSLV-2 TLV)를 성공적으로 쏘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621일 제2차 발사에 이어 올해 525일 마침내 차세대소형위성 2와 큐브위성 7기를 탑재한 제3차 발사에 성공한 것이다.

 

조광래 항공우주연구원 전 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짧은 기간 안에 독자 액체로켓과 발사체 체계종합 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항우연 연구원들의 피와 땀의 결과이긴 하지만, 러시아 우주기술의 기여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의 자체 힘으로 개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우주 분야에서 러시아의 도움으로 자금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KF-21, KAMD, K-2에도 러시아 기술 활용

러시아 군사기술을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는 누리호 우주로켓 외에도 4.5세대 전투기 KF-21의 초음속 미사일용 램젯 엔진, 능동전자주사배열 AESA 레이더의 개발이 있다. 또한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KAMD)의 핵심으로 이미 실전 배치된 지대공 미사일 천궁과 개발중에 있는 L-SAM은 러시아의 S-300S-400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K-2 흑표 전차의 주요 기술도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다.

 

한국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초음속 공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KF-21 전투기를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최대 난제는 초음속 공대함 미사일용 램젯엔진 핵심기술과 공기흡입구(DUCK) 구조설계였다. 일본은 2000년대 초부터 2조 원을 투자해 2017ASM-3 초음속 공대함 미사일의 개발 완료를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국내 연구진들은 기술 장벽에 막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다가 2007년부터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초음속 공대함 미사일의 개발에 성공해 KF-21 전투기에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초음속 대함 미사일을 개발하면서 얻은 파생기술을 이용해 국산 미티어급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과 타우러스급 장거리 공대지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었다. 또한 KF-21 핵심기술의 하나인 능동전자주사배열 AESA 레이더도 그 이전에 러시아의 핵심기술을 도입하지 못했다면 타이밍을 맞춘 개발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수십 년에 걸쳐 수조원의 비용을 들여 개발한 첨단기술을 한-러 불곰사업을 통해 수백분의 1의 적은 돈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한국의 독자적인 미사일방어시스템 KAMD도 러시아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KAMD 사업의 핵심을 이루는 지대공 미사일 천궁’(M-SAM)과 한국판 사드로서 2020년대 후반 실전배치를 목표로 개발 중인 L-SAM은 모두 러시아의 S-300S-400을 기술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사드와 같은 미국제 방공미사일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개발하면 비용 절감은 물론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반발을 막을 수 있다. 주한미군이 미국산 사드를 도입했을 때 중국이 크게 반발했지만, 한국이 방공미사일을 자체 개발해 배치한다면 중국도 반대할 명분이 없다.

 

러시아의 첨단 군사기술은 K-2 흑표 전차나 장갑차의 대공 미사일 등에도 활용되었다. 튀르키예 기술수출과 폴란드 직수출 및 현지생산으로 잘 알려진 K-2 흑표 전차의 특징 중 하나는 도하 장비 없이 1.2m까지 도하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타워 형태로 설계된 스노클(snorkel)을 장착할 경우 최대 4.2m까지 잠수 도하가 가능하다. 이 기술은 1990년대 말 불곰사업으로 도입된 러시아제 T-80U 전차를 통해 습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불곰사업은 노태우 정부가 옛소련에 빌려줬다가 못 받은 경협차관 147000만 달러를 회수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돈 대신에 군사장비를 받아온 사업으로 제3차까지 진행되었다. 불곰사업으로 들여온 러시아제 장비들이 모두 유용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과학기술자들이 몇몇 군사 장비들을 통해 첨단기술을 습득해 후발주자로서 방위산업과 우주산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러의 대북 무기지원 땐 북한 군사력 도약

그 동안 한국이 러시아와의 불곰사업으로 방위산업과 우주산업을 키워오는 등 한-러 양국관계가 비교적 우호적으로 전개되어왔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국이 러시아를 겨냥해 무기를 제공하는 문제로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현재 한국은 총탄·포탄·폭탄과 같은 한반도 전쟁예비탄약(WRSA-K)을 다량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해 11월 이미 미국에 155mm 포탄 10만 발을 수출한 바 있다.

 

지난 4월 미 언론이 폭로한 미국의 한국 대통령실 도감청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정부에게 우크라이나에 직접 포탄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이문희 외교비서관이 정부의 살상무기 제공 금지 원칙을 공식 파기하고 한국이 직접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자고 제안하자,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무기를 폴란드에 수출하고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우회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등 무기 제공 자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인 올레나 젤렌스카는 한국 정부에게 인도적 지원, 군수물자 지원에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비살상무기 외에 보다 파격적인 무엇이 필요하다면서 사실상 살상무기의 지원을 요청했다. 윤 대통령은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확대정상회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났다. 구체적인 면담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살상무기의 지원을 요청했을 것으로 보인다. 7월로 예정된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구체화될 수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419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의 조건으로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 민간인 대량학살, 전쟁법규에 대한 심각한 위반을 제시했다. 그런데, '·미 동맹 70주년 기념 한·미 정상 공동성명'에서 민간인과 핵심 기반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러시아의 행위를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규탄하며 러시아의 명백한 국제법 위반에 단호히 대응한다고 밝혀 이미 위의 조건을 충족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미 작년 1027일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할 경우 한-러 관계가 파탄 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러시아가 북한에 무기를 지원하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반문했다. 지난 419일에는 러시아 대통령을 역임했던 메드베데프 연방 안전보장이사회 부의장이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면, 러시아 무기를 북한에 공급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동안 러시아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유엔 결의에 따라 북한에 대한 무기 제공을 자제해 왔지만,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한다면 공언한 대로 북한의 재래식무기 현대화를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어느 나라보다도 역공학 방식의 무기 제조에 능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국제사회의 각종 제재 속에서도 북한은 국가의 명운을 걸고 핵탄두는 물론 각종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초음속미사일, 심지어 군사정찰위성까지도 역공학 방식으로 제조해 왔다. 만약 러시아가 공공연하게 북한군의 현대화를 지원한다면 북한의 첨단군사력은 한층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 분명하며, 이는 우리나라의 안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제라도 한반도의 안보 현실을 똑바로 보고 제대로 처신하기를 바란다.

조성렬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시민언론 민들레 2023.06.01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억', 그리고 김귀정의 오열

사회를 32년 전으로 되돌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32년 전 5월 하순의 어느 날, 거리마다에 장미꽃이 피어나던 그 봄날의 어느 날,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 아니 그 자신이 꽃이었던 한 여학생의 목숨이 거리에서 꺼져가고 있었다.

 

이 여학생은 자신을 때리는 백골단에게 이렇게 애원한다. “아저씨, 때리지 말아요. 저 죽어요.”

 

그러나 백골단은 이년아, 집에서 공부나 하지 데모는 왜 해하며 구타를 멈추지 않는다.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건너편에서 이렇게 무차별 난타를 당한 여학생은 의식을 잃었고 그녀의 몸은 최루탄 가스 자욱한 그 거리에 한동안 그대로 놓여 있었다. 뒤늦게 다른 대학의 남학생이 이를 발견하고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만 백골단은 그런 그에게도 무차별 몽둥이질을 했고, 할 수 없이 그는 골목을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한겨레신문 취재차량에 태워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스물 다섯 여학생의 거리에서의 죽음

이 여학생의 이름은 김귀정, 성균관대 불문과 4학년이었다. 나이는 스물 다섯. 대학생으로는, 특히 여학생으로는 적잖은 나이였던 것은 그녀가 원래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있다가 다시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동아리 심산학회 회장을 하며 적극적으로 학생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했던 김귀정은 비가 내리던 이날 거리 시위에 참여했다가 살인 폭력에 의해 그 생명을 마감했다(이상 지승룡 민들레 영토 대표의 2022525일 페이스북 글에서 인용).

 

오늘 김귀정의 죽음을 다시금 생각한다. 그것은 그의 짧았던 삶, 너무도 짧았던 삶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했다가 다시 들어온 대학에서 후배들에게 든든한 언니였던, 그러나 그럼에도 아직 20대 아가씨가 꿈꿨을 미래, 이루고 싶었던 꿈을 생각한다.

 

그때 김귀정이 있었고, 다른 많은 김귀정들이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거리에 나섰던 것은, 강의실 대신 거리에 나와서 백골단이 던진 하라는 공부는 왜 안 하고라는 말처럼 왜 강의실에서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아니 학교가 아닌 거리에서야말로 진짜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왜였는가.

 

그 떠올리기만 해도 살벌한 백골단의 폭력에 몸을 떨면서고 교문을 박차고 나왔던 것은 왜였던가. 거기에는 대단한 결단, 비장한 각오가 있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차마 그러지 않을 수는 없어서였을 것이다.

 

김귀정은, 이 만학의 젊음은 열심히 살았다. 김귀정과 다른 김귀정들만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때의 젊은이들, 대학생이었건 아니었건, 그때 젊은이들은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았다. 그들의 열심은 자신의 내일을 위한 것이었고, 오늘보다 더 나은 자신의 내일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만 적잖은 이들에겐 자신의 내일만이 아니라 이웃까지, 아니 전혀 모르는 이들의 내일까지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만인의 자유를 위해 싸울 때 그때라야 나는 자유다라고 한 김남주 시인의 시와 같은 결연한 의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다른 이들의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느 한켠에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안녕을 살피는 마음뿐일 때는 나올 수 없는 용기와 결심을 하게 됐을 것이다.

 

김귀정과 다른 김귀정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오늘이 있게 된 데에는, 거리의 시위 대열에 함께 어깨를 겯지 않더라도, 학교 도서관에서 오로지 자신의 내일을 위해 법전을 파고들던 이들에게조차도 도서관에 사복 차림의 경찰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몸을 뒤지고 무릎을 꿇리는 일을 언젠가부터 겪지 않게 된 데에는, 그런 김귀정의 마음이 있었던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지라도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난 70년대, 80년대의 어느 날을 아직도 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사망한 지 18일 만에 다니던 성균관대에서 치러진 김귀정의 영결식.

 

한 사회를 '사회'로 만들어주는 것

지난 80년대의 숨 막히고 기가 막히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우리가 옛날 얘기하듯 웃으면서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러니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 윤정모 선생, 시대의 모순과 맞섰던 이 담대한 작가가 지금에도 그 시절을 얘기할 때면 그때는 정말 무서웠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그런 시절은, 우리가 그냥 흘러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시절을 지나온 것이 아니라 헤쳐온 것이며, 그것은 적잖게 우리 사회의 김귀정들이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오늘에 이르게 된 것, 거기에는 누군가의 땀이 있었고, 피도 있었으며,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의 목숨까지의 희생도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처절함도 있었고, 김귀정과 같은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모르게 허망하게 죽음을 맞은 이도 있었다.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이들의 내면에서의 죽음들도 있었다.

 

김귀정이 죽은 뒤 3년 뒤에 그녀의 언니의 딸, 그러니까 김귀정의 조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수영선수가 됐고, 씩씩한 태도와 용모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정유인이라는 이름의 이 젊음은 자신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모 김귀정과 눈매가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 젊은이는 아마 아는 것 같다. 자신이 앞만 보고 물살을 가를 수 있었던 것은, 윤정모 작가처럼 마음 졸이지 않고 거리를 맘껏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이모 김귀정, 김귀정들, 그리고 그와 함께 거리에 나서지는 못했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그걸 지켜보며 마음은 그와 한편에 있었던 이들의 기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렇게 어린 청년도 그걸 안다.

 

30년 전에 거리에서, 도서관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았던 이들은 이제 다들 뭔가가 돼 있다. 그중의 어느 일부에는 열심히 법전을 외워서 대통령이 된 이도 있고, 법전만 읽느라 도서관 창밖을 내다볼 시간이 없었던 듯한 어떤 이는 그 최고권력자의 지극한 총애로 장관이 돼 있기도 하다. 그런 이들을 맹목으로 받드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자리에 있건, 무슨 일을 하건, 젊은 날을 어떻게 보냈건, 저마다 자신의 삶에서 어떤 최선을 다했건 누구에게라도 한 가지 반드시 없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김귀정이 있었다는 것, 김귀정의 죽음이 있었고,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하나의 인간의 사회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에 속하는 일인데,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다. 자기 안의 인간에 대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고서는 어떤 사회도, 어떤 나라라고 하는 것도, 그리고 어떤 자유도 있을 수 없다.

 

경찰이 농성 중인 노동자의 머리를 내려쳐 피를 흘리는, 91년으로부터 32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인지 믿기 힘든 장면을 보면서, 최루탄 캡사이신이니 하는 얘기를 스스럼 없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김귀정을 다시 생각한다. 숨이 끊어진 지 18일이 지나서야 모교에서 후배와 친구들의 영결의 배웅을 받을 수 있었던 김귀정을, 다시 그날을 앞두고 있는 즈음, 올해의 그 즈음에 더욱 생각하게 된다. 또 다른 김귀정을 예고하는 듯한 저 무례 무도한 이들의 언행을 들으면서 그의 생전의 웃음을, 그리고 그의 마지막 생의 순간의 비명과 고통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이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다면 그가 터뜨릴 하늘 위에서의 그의, 김귀정의 오열을 생각한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그 오열을 견뎌내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이명재 에디터 시민언론 민들레 2023.06.01.

 

 

대형교회 목사의 도 넘은 거짓 선동

여의도 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이자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직함을 가진 이영훈 목사가 지난 516일 전광훈 목사의 자유통일당 중앙당 개소식에 참석하여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그 내용이 해괴하여 그대로 옮긴다.

 

이 땅에 주사파가 들끓고 공산주의로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는 이때에 이 자유통일당이 특별히 주사파를 타파하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서 사명을 갖고 세움 받은 것을 감사드린다. 선봉장으로 전(광훈) 목사님 세우셨는데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함께해 주셔서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게 할 줄로 믿는다.”

 

목사가 정당 만들고 다른 목사가 축사하는 해괴한 장면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이자 수십만 신자를 두고 있는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 목사의 발언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녹화 영상을 보니 이 목사가 일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상에 나와 술술 토로한 내용이다. 그의 발언은 그가 대표성을 가진 집단에서 너무나 쉽게 유통되고 있는 정치의식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도 무방한 것이었다.

 

한국교회가 전광훈을 공인하고 그의 정치적 행보를 지지하는 것을 넘어 십자군 대열에 나서라는 소리였다. 과연 전광훈 측은 이 목사의 발언을 전광훈 지지선언인 것처럼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비판의 소리가 나왔다. 이 목사의 발언은, 그가 속했던 교단에서 전광훈이 목사직을 박탈당했고, 일부 개신교에서는 그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이유로 이단적인 인물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의 극우적인 정치행보가 한국 교회에 대한 신뢰를 급격히 추락시켜왔다는 문제를 모른 척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자, 이번에는 구차하게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는 적절치 못했다” “부주의했다” “정치적 오해가 없길 바란다라고 하면서 공인으로서 공적 석상에서 자신이 했던 발언에 대하여 책임을 지려 하기보다, 회피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하고 변명해도 그의 발언에 담긴 심각성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목사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편향된 정치의식의 역기능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이 땅에 주사파가 들끓고, 공산주의로 빨갛게 물들어가는 때라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주사파를 때려잡고 공산주의를 뿌리 뽑기 위한 사명이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으니 공산당 마귀를 때려잡고 하늘의 역사를 이루어서 복음 통일을 이루자라며 마치 십자군 동원령을 내리듯이 처방을 내놓았다.

 

이게 무슨 망발인가? 그의 횡설수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거듭 여러분, 지금 대한민국이 정신적으로 굉장히 좌파 주사파 사상에 의해서 많이 물들어 있고 좌경화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주사파를 때려잡고 진정한 자유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영적 전쟁에 나서야한다는 선동을 더했다.

 

그가 사과하고 오해가 없기를 바란 것은 기독교의 기괴한 변종 전광훈을 지지했다는 사실에 대한 세간의 비난을 피하려는 의도로 읽히지만, 일단 내뱉은 발언으로 그의 현실인식은 전광훈 무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목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발언은 일부 개신교 목사와 장로들이 가지고 있는, 뒤틀리고 왜곡된 정치의식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본다. 이들의 정신세계를 살펴보면 남한 사회에 대한 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을 지나쳐서 거의 공포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우리 국민의 민주적 역량을 극도로 폄하하는 왜곡된 시각도 담겨 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북한 정권이 남한 사회를 향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남한 사회 구성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버리고 속수무책 공산주의 사상에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단의 근거가 무엇일까?

 

그는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북한과 같은 악성 세습 독재정권을 흠모하여 대거 추종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기독교 신자들이 나서서 이 세력과 대척하여 내전(內戰)을 벌이는 십자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싸움의 선봉장이 전 씨이니 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 인식이나, 상황 분석이나, 도덕적 판단 능력의 수준이 조야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그는 어떤 눈을 가졌기에 그의 눈에는 주사파가 보이고, 우리 사회가 공산주의로 발갛게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는 말인가?

 

세계 최대 교회 목사의 조야한 인식 수준 때려잡자, 공산당!“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과연 북한은 그가 주장하듯 남한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럴 능력이 있는가? 그리고 남한 사회는 그의 주장대로 적화되어 가고 있는가? 이 목사의 상황 판단은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다. 몇 가지 사실만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의 주장은 허황된 주장, 곧 허구라는 것이 드러난다.

 

첫째, 북한은 일당 독재 국가인데다 3대에 걸쳐 정권이 세습되고 있는 전대미문의 폐쇄 사회다. 반면 남한 사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재와 싸우며 피흘려온 사회다. 남한 사회는 부자간 목사직 세습조차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는 사회다. 민주사회 국민이 악성 독재 사회를 더 좋은 사회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나라가 공산주의 사상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진실한 판단이 아니다.

 

둘째, 북한은 세계에서 최극빈 사회 중의 하나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남북한 경제지표에 따르면 2021년 북한의 수출입 무역 총액은 7.1억 달러였다. 남한은 무려 12594.9억 달러에 이르렀다. 경제력에 있어서 남한은 북한의 1774배에 이른다. 2022년 북한의 1인당 국민 소득은 142만 원, 남한은 4777만 원이다. 세계 나라들과 경쟁하여 이룬 세계 10위권 경제력을 가진 남한 사회 구성원들이 무슨 이유로 최극빈 북한 사회를 흠모하여 남한 사회를 공산주의로 물들이고 있다는 말인가? 해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셋째, 2023년 세계 군사력 보고서에 의하면 준 군사비를 제외하고 남한은 군사비 440억 달러를 사용하는 나라로 군사력 세계 6위다. 반면, 북한은 군사비 발표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나라로서 국방력 세계 35위로 평가되고 있다. 세습독재, 극빈국, 국방 능력에 있어서도 상대가 안 되는 북한이 국방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 핵무기다. 핵무기를 가졌다고 북한 주민들이 잘살고, 자유를 얻고, 안전한가? 아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는 순간부터 북한 수뇌부는 우리 동맹의 잠정적인 핵 타격 대상이 되었다.

 

세계 최대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 목사가 가진 분석 자료나 데이터는 도대체 어디서, 누구로부터 얻은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는 기괴한 종이호랑이 북한을 그려 놓고 신자들에게 공포와 더불어 살기 넘치는 증오와 전의(戰意)를 품게 만드는 이가 과연 이 시대의 진실한 목사인가? 이 목사의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구다. 그의 허구적 주장에 "아멘" 하며 화답하는 이들은 우민(愚民)이거나,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혼란을 조장하려는 악의를 가진 무리라 할 수밖에 없다.

 

민주시민 음해하려는 마녀사냥의 그림자

윤석열 정권의 무능, 반민족, 반민주적 행태에 대하여 저항하고 비판하는 촛불시민, 노조, 대학의 지식인, 종교인을 망라한 민주시민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지는 이 시점에서 혹시 그가 언급하고 있는 주사파, 공산주의 세력이 바로 이 민주시민들을 지칭하여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음해하기 위한 술수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든다. 생각만 해도, 중세의 성직자들이 무고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장작더미 위에서 산 채로 불태워 죽였던 짓이 연상되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만의 하나 사실이 그렇다면, 이 목사가 속한 기독교는 어느 틈에 이 땅의 민주세력을 음해하려는 반민주 집단으로 변종 퇴화한 것인가?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 목사를 추종하는 기독교 집단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무서운, 민주사회를 파괴하며 분열시키고 핍박하려는 악성 사교(邪敎)집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혹을 불러일으킨 이 목사와 그가 속한 순복음교회, 한국교회총연합회 측의 진지하고 정직한 해명이 있기를 바란다. 만일 우리 사회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면 금방 그 정체가 드러날 것이며 결코 지도자로 행세할 수도 없다. 하지만, 민주사회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퍼지는 사교 집단은 우리가 쉽게 판별해 내기 어렵다. 허구적인 주장을 일삼는 이영훈 목사는 대형교회 목사직도, 교단의 총회장, 더군다나 한국 교회 일각을 대표하는 대표회장이라는 거창한 종교 지도자 직함을 가질 자격이 없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동고동락 해 온 한국 교회는 이 목사의 허구적 주장에 휩쓸려 경거망동할 정도로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박충구/ 전 감신대 교수ㆍ 생명과 평화윤리 연구자 시민언론 민들레 2023.06.01.

 

공포와 야만의 경보음이 울린 아침에

나중에 안 것이지만 정확하게 오전 632분이었다고 한다. 아파트에서 울리는 화재경보와는 음향의 크기와 음색이 조금 달리 들리던 경보음. 허공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공포감이 엄습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왈칵 겁이 났다. 불이 났나? 어느 동에서 불이 났지? 무섭고 두려웠다. 베란다 문을 열고 냄새를 맡으려 애썼다. 허공에선 계속 경보음이 울어댔다. 이것도 나중에 안 것이지만, 1분 동안 울렸다고 한다.

 

다행히 경보음은 수그러들고 마음이 놓였지만 이미 심장은 녹아내린 것 같았다. 함께 사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고층 아파트에 불이 나면 어떤 불행이 시작되는지 뉴스를 본 사람들은 상상할 것이다. 17층에서 고양이 세마리와 함께 대피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그리고 무엇을 챙기고 무엇을 그대로 두고 나와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경보음 속에서도 아파트 단지 재활용물품을 실어가는 차가 작업하고 있었다. 짐짓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시 핸드폰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잔인한 음향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자가 날아왔다.

 

오늘 6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 전쟁이 났구나. 두말할 필요도 없는 확신으로 전쟁을 생각했다. 19506월 시작된 전쟁. 3년 동안 끌었던 전쟁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갑작스러웠다. 전쟁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1950년 겨우 세살이던 나. 하지만 눈과 귀로 피란을 경험한 공포가 내면화돼 있는 사람. 그 경험은 나의 내면에 죽지 않은 바이러스로 잠재돼 있다. 영원한 평화가 약속되기 전에는 결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약속된 평화도 없는 현실에서는 어떤 치료제도 없는 깊은 질환인 셈이다. 경계경보는 바로 이 바이러스를 내 생명으로부터 폭발시켰다.

 

첫째와 셋째 고양이는 눈길이 닿았다. 그러나 둘째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10분이 흐르고, 20분이 흐를 즈음 다시 핸드폰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이래도 문자 안 읽을래? 이런 위협감을 느끼게끔 하는 잔혹한 음향은 어떤 이가 생산했을까?

 

‘0641분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행정안전부의 문자였다. 그러니 문제의, 허공을 찢는 듯하던 경계경보는 632. 그 경보에 대한 설명은 9분 후인 641분에 국민이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오발령이었음을 알리는 행안부의 문자는 73.

 

갑자기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안도감보다 먼저. 그리고 불쾌하고 괘씸했다. 선거 때만 되면 오로지 국민만을 위해서, 국민의 편에 서서 등등으로 국민이 주인이라서 국민의 말만 듣고 국민의 안전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할 것을 하늘에 맹세하듯 말하고 또 말하던 분들!’

 

국민이 주인이라면 국민을 존중한다면 어떻게 이런 재난경보를 미사일 쏘듯 내보낼 수 있는가. 주인이 놀라면 어쩌라고. 주인 중에는 거동이 불편한 어른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있는데. 나처럼 반려동물과 생활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겠는가.

 

더군다나 우리가 누군가! 전세계,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 휴전상태에 놓인 국가 국민 아닌가. 휴전(休戰). 전쟁을 좀 멈춘 상태.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전쟁. 휴전은 그런 것이다.

아직도 우리 국민 중에는 전쟁의 공포, 그 절체절명의 혼란과 무법천지의 상황을 경험한 분들이 살아 계신다. 그런 경험이 없는 세대라고 왜 분단을 모르겠는가.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이 상황을 이용해 먹던 정치가들. 선거 때면 북풍몰이라는 것으로 전략을 짰다. 전쟁 경험이 기억에 없는 세대들이 다수 유권자가 되자, 슬그머니 북풍몰이는 사라졌다. ‘빨갱이’ ‘간첩도 해가 갈수록 약효가 떨어지는 주제가 됐다. 정치가들이 그것을 이용해 먹지 않고 진심으로 평화’ ‘분단 극복’ ‘민족화해 협력등등의 제 할 일들을 했다면 531일 오전 632분부터 73분 사이에 일어난 코미디 같은 일은 없지 않았을까? 국민 마음을 요리조리 잡아끌어 표를 모으던 정치세력들. 도대체 몇십년이 흘렀나.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고 나아졌나?

 

국민을 조금이라도 존중한다면, 국민을 위한다면, 위기 상황이 왔을 때라도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정부가 재난 상황에 잘 대처할 것이라고, 정부를 믿으시라고 안심시키는 일부터 했을 것이다. 어려움에 닥친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다친 자식이 공포에 떨 때, 우선 안심시키고 뒤로 다급하게 처치를 위한 일을 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그래야 국민을 주인으로 아는 정권이 아니겠는가.

 

부디 우리의 현재를 잘 살피고 그 원인을 찾아 진실과 사실에 가닿는 해결책을 찾고 그 해결책을 우리 실정에 맞게 실천하려고 노력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현재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자식을 낳기 싫은 나라가 된 것이다. 정권 하나가 나랏빚을 400조나 늘려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전세 사기와 코인 사기, 주식투자 사기 등등, 살이 찌지 않으려는 애달파 보이는 노력에 편승한 약물과 정신적 공허를 이기지 못해 찾게 되는 다양한 마약과 사이비 종교들. 모두 타인의 불행을 휘둘러서 돈을 벌려는 추악한 범죄다. 자살하는 이들은 늘어나고 증오심은 마치 사회감정처럼 퍼져 있다.

 

크기와 굵기가 다른 손가락 다섯개가 있어야 손이 제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듯이, 그리고 그 손가락이 서로 비방하고 멸시하지 않듯이, 우리도 기능과 역할이 다른 국민 모두가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기댈 수 있을 때 비로소 건강한 국가라고 할 것이다. 그래야 아이도 낳고 자살도 하지 않고 마약이나 사이비 종교의 유혹에 넘어갈 필요가 없지 않겠나.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나의 생각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세상. 오래전에 남미 쪽 어느 나라 정치가가 한 말이라고 기억되는데 나는 정말 이런 평화를 원한다.

오늘 아침 울린 저 공포와 야만이 느껴지는 경보음에 존재 자체가 뒤흔들리는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너무 초라해서 울지도 못하겠다.

이경자 | 소설가 한겨레 2023.06.02.

 

한국엔 왜 젠슨 황 같은 기업인이 없을까?

 

국 반도체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책임자가 최근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의 대중국 봉쇄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타임>2021년 황 최고책임자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한 바 있다.

 

미국 대표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중국 봉쇄정책에 잇달아 반기를 들었다. 챗지피티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의 총아로 떠오른 반도체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의 대중 반도체 수출규제가 실리콘밸리 기업의 두 손을 등 뒤로 묶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글로벌 전기차 1위 기업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도 중국을 방문해 -디커플링’(탈동조화)에 반대한다고 거들었다.

 

한국 기업인들도 미·일에 편향되어 중국·러시아를 과도하게 자극하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불만이 결코 작지 않다. 기업인들은 사석에서는 이구동성으로 국가경제와 기업경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쉰다. 차라리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은 이들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 눈에 보이는 한국 기업인들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다. 정부에 대한 지지와 찬양 일색이어서 같은 사람들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경제6단체는 논란이 컸던 대통령의 방일 및 방미에 대해 한일 양국의 미래를 위한 결단을 응원합니다”,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 성과를 환영합니다라고 지지광고를 실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대통령이 한··일 경제협력 강화를 위해 힘쓴 것에 중소기업의 85%가 긍정 평가했다고 발표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변제안을 나라의 미래와 국민을 위한 결단으로 칭송하는 윤비어천가까지 틀었다. 뒤에서는 손가락질 하면서, 앞에서는 박수를 보내는 게 벌거벗은 임금님동화를 연상시킨다.

 

한국 기업인들은 과거 정권의 비위를 건드리는 발언을 했다가 곤욕을 치른 흑역사를 기억한다. 또 검찰 권력이 국정 전반을 쥐락펴락하는 검찰정권에서 그 어느 기업인도 검찰의 칼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공포감도 엄청나다. 윤 정부의 눈 밖에 났다가 사정당국으로부터 무차별 융단폭격을 받는 케이티(KT)가 대표 사례다.

 

기업인에게는 기업의 이익이 중요하지만, 국익과 충돌할 때는 양보하는 게 순리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 국익에 부합하는지 불분명하거나, 정부의 오판이 명확한데도 일신상의 안위만 걱정하며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고, 경영자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다.

 

한국경제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비교적 명확하다. 중국은 오랫동안 한국의 가장 큰 수출시장으로 효자 노릇을 해왔다. 이런 중국 시장을 포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중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구축한 삼성과 에스케이의 중국 생산 의존도는 품목별로 20~40%에 달한다. 중장기적으로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하지만, 경제적 충격이 없도록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유럽이 최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중국과의 완전 분리를 의미하는 디커플링 대신에 위험을 낮추는 디리스킹’(탈위험)을 내세우며 전략적 유연성을 보인 것은 타산지석이다.

 

윤 정부가 미·일의 대중국 강경노선에 장단을 맞춰 망나니 칼춤을 추는 것은 한국경제에 해가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일이 한국의 국익을 챙겨주거나, 중국이 한국의 처지를 이해해줄 리도 만무하다. 중국이 미 메모리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테크놀러지 제품에 대해 구매중단 조처를 내리자, 미국은 한국기업이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메워서는 안된다고 압박한다. 중국도 한국을 향해 미국 편에 서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2 사드사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일본은 미·중 전략경쟁의 틈새를 노려 과거 반도체 영광의 재연을 꿈꾼다. 우리로서는 미국의 대중국 규제 동참 압박과 중국의 보복이라는 두 개의 칼날을 피하고 일본을 견제하면서 실리를 잃지않는 지혜가 절실하다.

 

2024년 총선은 결국 경제가 관건이다. 경제성장률 수정 전망치가 계속 낮아지고, 수출 부진이 이어지고, 무역수지 적자가 갈수록 쌓인다. 고물가·고금리·고용난이 겹치면서 저소득층은 물론 중산층까지 고통이 깊어진다. 그런데도 윤 정부는 부자감세, 약자복지 축소, 재정 건전성 강화라는 고장난 경제정책을 고집하며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최근 한국경제의 상저하고를 호언장담하지만, 경제계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윤 정부의 위험한 외교안보 정책은 국민과 국가의 안위에 도움이 될지도 모호하지만, 한국경제에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공산이 높다.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목적 중 하나는 국가의 발전과 번영에 직결되는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미국의 대중 봉쇄도 결국 경제적 패권을 지키려는 게 목적이다.

 

최근 경제계에서는 윤 정부도 경제가 계속 어려워지면 총선을 치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변화를 모색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흘러나온다. 윤 정부가 미·일 편향에서 벗어나 제대로 중심을 잡는다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벌거숭이 임금님이 현실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경제로서는 마냥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 기업인들도 이제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 우리 기업인들에게 엔비디아와 테슬라의 최고경영자와 같은 소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곽정수ㅣ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한겨레 2023.06.02.

 

 

법치를 오독한 대통령이 포퓰리즘과 만날 때

윤석열 정부 '법치주의' 실체

윤석열 정부는 어떤 정부인가? 지난 1년 여간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회자된 것은 '검찰 공화국'이다. 무엇보다 전 정부의 검찰총장이 곧바로 야당의 대선후보를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건이 상징적이다. 검찰 공화국의 현상적 실체는 검사 출신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는 주체의 측면에서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구체적으로는 지난 3월 참여연대가 발표한 대로, 대통령실을 포함해 국가의 주요 요직에 130여명이 넘는 검찰 출신이 포진한 점이 두드러진다. 지난해 말 주요 국정과제 중 3대 개혁으로 지목한 교육, 노동, 연금 분야의 핵심 공직에 검찰 출신이 차례로 임명되었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이 정부는 정치를 작동시키는 데 적합한 통치의 주체로 확실히 검찰 출신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의 성격이 그렇다면 그것이 발현되는 방식은 무엇일까? 정부는 그 실체를 '법치주의'라고 강조해 왔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임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는 스스로를 '자유를 법치주의로 확립하는 정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자유의 적은 '반지성주의'이고, 이를 방지하고 '모두가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규칙을 지켜야'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공정한 규칙을 잘 지킨다는 것의 내용은, 지난해 말 화물연대 파업에 정부가 대처하는 방식과 올해 초 신년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정부가 대처한 방식은 취임사에서 짧게 언급한 '양극화와 사회갈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자유가 대신 정치를 배제한 채 준법만을 강조함으로써 합법과 불법의 이분법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신년사에서는 '노사 법치주의''노동개혁'의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그 결과는 엊그제 우리가 본 그대로다. 민주노총의 집회를 앞두고 경찰청장은 기동복을 입고 회의에 참석했다. 심지어 '캡사이신 분사'라는 구체적인 진압 방법을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캡사이신 분사를 언급하면서도 '강경 진압'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같은 날 경찰은 농성 현장에서 한국노총 간부를 연행하면서 과도한 공권력을 행사했다. 금속노련 위원장을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뜨리고 뒤로 수갑을 채웠고, 농성장에 혼자 있던 사무처장을 곤봉으로 구타해서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노동조합의 간부들을 살인·강도를 저지른 중대범죄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듯이 다룬 것이다. 경찰은 상황이 위험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장 영상을 공개한 것은 오히려 노조측이다.

 

사실 이번 민주노총의 집회는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노동 관련 쟁점이 있을 때마다 관성적으로 열리던 집회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너무나 '관성적'이라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고, 또 시민불편의 차원에서 문제가 된 적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민주국가에나 보장받아야 하는 노동조합의 기본적 권리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핵심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란 무엇이고, 왜 이것을 작동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법에 따른 통치 vs 법을 활용한 통치

최근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와 관련해 아주 흥미롭고도 핵심적인 문서가 하나 확인되었다. 한상희 참여연대 공동대표는 법무부가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청구서에서 이 정부가 법치주의를 정의한 대목을 공개했다. 법무부는 이 법이 법치주의의 원칙을 위배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으로서 오늘날의 법치주의는 단순히 국가가 법률의 구속을 받는 것을 넘어 법률을 비롯한 입법·행정·사법 등 모든 국가행위는 그 내용 역시 정당해야 하며 사회정의 실현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원칙"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정치학이나 법학 교과서에서 법치주의를 '법에 의한 통치(rule by law)'로 정의한 것을 보지 못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치주의는 대체로 법의 통치(rule of law)로 이해된다. 법치주의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권력을 법으로 제한한다는 민주적 헌정주의와 제한정부의 원리다. 그래서 이 법치주의는 국가의 적극적인 공권력 집행을 통한 질서를 확립한다는 식의 통치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있다.

 

종종 특정한 맥락에서 법치주의가 '법에 의한 통치'로 불릴 때가 있다. 이 때의 용법은 '법치(法治)''인치(人治)'와 구별될 때다. 이 때의 인치는 단순히 사람의 통치가 아니라, 통치자 개인이 아무런 기준 없이 다스리는 '자의적인 통치'를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 대응되는 법치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법에 따른 통치'가 된다. 그리고 이 맥락은 '법치주의(rule of law)'와 상통한다.

 

법치주의를 우리말로 '법에 의한 통치'라고 쓰면서 'rule by law'라는 표현을 강조했다면, 그 의도는 하나다. 법치주의를 '법을 활용한 통치(rule by law)'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개념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자들은, 종종 사법만능주의로도 해석되는 '법률주의(legalism)'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법률주의와 기술관료-포퓰리즘

사실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는 법을 활용한 통치나 법률주의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대목이 있다. 이 통치에서 강조되는 것은, 실은 법 자체가 아니라 법의 해석과 적용권한을 가진 자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법치는 오히려 '법률가 통치(rule by lawyer)''검사 통치(rule by prosecutor)'라고 불러야 더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법률주의'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할까? 단순히 윤석열이라는 개인의 출현으로 인해 한국에서만 우발적으로 나타난 예외적인 현상일까?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맥락과 보편적 차원에서의 정치현상의 측면을 이어보면 적어도 하나의 흐름이 존재한다. '기술관료-포퓰리즘(Technocrat-Populism)'이다.

 

우선 법률주의는 포퓰리즘에서 자주 활용되는 정치 전술이다. 법률주의는 포퓰리즘이 가진 정치적 비전의 결핍과 불명확한 이념적 지향성을 덮을 수 있는 유용한 정치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적 집권세력은 수사와 기소라는 사법적 수단을 통해서 다른 정치세력을 정치의 장에서 배제함으로써 정치적 논쟁과 타협을 효과적으로 회피할 수 있다.

 

, 자신의 정치적 미숙함을 법률주의 전략으로 압도함으로써 사법적 논란 이외에 다른 정치적 쟁점이 등장할 계기를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와 관련한 사법적 수사의 빈번함을 통해 정치혐오 정서를 강화시키면서, 정치 자체를 순수하게 중립적인 어떤 것으로 변질시키는 반정치적 기획이기도 하다. 포퓰리즘과 법률주의의 결합은 이렇게 정치의 종결을 가져온다.

 

기술관료주의 역시 전통적으로 포퓰리즘과 연관성이 높다. 포퓰리즘 자체가 반정치적 성격을 가지면서, 정치 엘리트들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전문가'를 그 대안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중립적 전문가의 신화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공무원 관료'에게 투영되곤 했다.

 

실제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임명한 차관인사에서 20명 전원을 남성으로 임명하면서 18명을 50대의 관료출신으로 채웠다. 첫 내각에서 장관 후보자 18명 중 15명이 남성이었고, 서울대 출신이 9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명분은 '일하는 실력'이었다. 이후에는 검찰 출신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윤 정부가 행정고시 출신들을 행정부처의 전면에 배치하고, 사법고시 출신들인 검사들이 정부 고위직을 사실상 독점하는 현상은, 기술관료-포퓰리즘의 한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본인처럼 '시험'을 거쳐서 선발된 행정과 사법 엘리트들로 운영되는 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중 더 핵심적인 역할은 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검사'들에게 부여된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는 법률주의를 기반으로 한 검찰 중심의 기술관료-포퓰리즘을 통치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수사와 기소가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수단이며, 이것이 정책에 투영되면 공권력의 적극적 활용을 통한 억압적 사회 통제로 나타나게 된다. 말 그대로 '법과 질서(law and order)'를 통한 자유의 확립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우리 국민이 선택한 하나의 통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법과 질서라는 것은 대체로 민주국가에서 법무부의 역할이지 정부 전체의 역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법무부의 역할이 국가 전체의 역할과 비전이 되면, 아마도 그 국가의 성격은 대통령이 천명한 '자유민주주의'에서 크게 벗어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관후 정치학자 프레시안 2023.06.02.

 

 

남 탓의 심리학

남 탓이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는 태도를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의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귀인(歸因)이라 한다. 사건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그다음에 이어질 행동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귀인은 심리학의 중요한 주제로 연구돼 왔다.

 

남 탓이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는 태도를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의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귀인(歸因)이라 한다. 사건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그다음에 이어질 행동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귀인은 심리학의 중요한 주제로 연구돼 왔다.

 

예를 들면, 시험을 잘 못 본 학생이 그 이유를 자신의 노력 부족에서 찾았다면 학생은 다음에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것이다. 시험을 잘 못 본 다른 학생이 만약 자신이 시험을 못 본 이유를 문제를 이상하게 낸 선생님 탓으로 돌렸다면 이 학생이 다음에 시험을 잘 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선생님이 문제를 제대로(?)’ 내시기를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

 

이러한 귀인 과정은 귀인 차원에 따라 달라진다. 연구자들은 우선 통제의 소재를 들고 있다. 사건의 원인이 행위자 자신에게 있으면 내부 귀인, 상황이나 조건처럼 행위자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있으면 외부 귀인이 그것이다.

 

앞의 예에서 시험 못 본 것을 자신의 노력에 귀인한 학생은 내부 귀인을, 문제를 이상하게 낸 선생님에게 돌린 학생은 외부 귀인을 한 셈이다. 그러면, 이런 귀인의 방향은 어떻게 결정될까. 우선 동기와 관련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성취동기가 있는 이들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단점을 보완하고 역량을 발전시켜 다음에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더 좋은 결과를 낳을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반면, 일단 눈앞의 부정적 결과를 회피하고자 하는 이들은 외부 귀인을 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내부 귀인이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지진이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나 다른 나라의 전쟁, 세계 경기의 흐름 등으로 인한 불행한 일들은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런 경우에까지 내부 귀인을 하는 습관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까지 자기 탓을 하면 쉽게 우울에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고양적 귀인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성취는 운이 좋아서, 나의 성취는 능력이나 노력의 결과라 믿는다. 실패에서는 반대의 패턴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의 실패는 능력 부족, 내 실패는 상황과 조건 등의 탓을 하는 것이다. 우리 속담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 딱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자기고양적 귀인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자존감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나 늘, 한결같이 자기고양적 귀인을 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심리적 결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잘한 것은 다 제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 안 된 것은 다 남이 잘못한 거라는 태도 말이다.

 

매사에 이런 경향을 보이는 사람은 일단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의심해볼 수 있다. 자신의 가치를 실제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는 자기애성 성격은 그토록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신이 잘못이나 실수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므로 남 탓을 한다. 자기애성 성격보다 더 심각한 케이스는 남 탓이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경우다.

 

정신역동 이론에 투사라는 방어기제가 있다. 자신의 욕구가 좌절되거나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이 엄습할 때,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주위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들이 자신의 실수나 능력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자 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방어기제가 투사, 바로 남 탓이다. 이 방어기제는 성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성인의 행위양식일 리가 없다.

 

더구나 좋은 것만 차지하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태도는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책임 있는 사람의 남 탓은 결국 자신은 이 결과에 책임이 없으며 앞으로도 남에게 책임을 묻는 일 외에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는 개인의 성숙도와는 별개로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가 있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그 자리를 맡는 편이 좋겠으나 만약 그렇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남 탓만 하고 있는 상황은 사회의 불행이다. 매사를 남 탓으로 일관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 피로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경향 2023.06.03.

 

 

가계발 금융위기, 위기의식 없는 정부

전 금융권의 연체율이 급증하고 있다. 새마을금고 등 상호금융은 2.5%에 육박하고, 카드사와 저축은행은 각각 1.5%5%를 넘어섰다. 은행들의 연체율은 0.33%로 일반 국민들의 시각에서는 연체율에 대한 우려가 과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금융권의 연체율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정부가 발표하는 연체율은 분기말마다 부실채권을 상각처리 해 최대한 낮은 수준으로 조정된 결과이다. 3개월 이상 연체된 고정이하의 여신, 일명 부실채권을 손실처리함으로써 장부에서 지워버린다. 장부에서 사라진 채권은 연체율을 낮추는데 기여하고, 정부에서 발표하는 가계부채 총량에서도 지워진다. 한마디로 부실채권을 정리한 뒤 발표하는 연체율 이면에는 더 큰 부실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이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3년간 급증한 대출과 작년 하반기까지 이어진 금리 상승의 여파가 시차를 두고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시중은행의 연체율이 빠르게 오르고 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KB·신한·하나·우리·NH농협)4월 말 원화 대출 연체율(1개월 이상 원리금 연체 기준)은 평균 0.304%로 집계됐다. 이날 서울시내 은행 현금인출기 앞으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2023.5.22. 연합뉴스

 

13천억 원 부실채권 지우고도 계속되는 연체율 상승

최근 은행들의 부실채권의 처리 규모가 크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신한·KB·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이 올해 1분기 매각 혹은 상각한 대출채권 규모는 7102억 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1분기는 3904억 원 규모였는데 1년 사이 두 배 가량 늘어난 셈이다. 20224분기에 처리한 부실채권 규모 또한 5814억 원이다. 지난해 9월부터 올 3월까지 6개월 동안 4대 은행들이 팔아치우거나 손실처리한 채권 규모가 13000억가량이나 된다. 분기말마다 부실채권을 처리하고 나면 은행권의 연체율은 이전보다 낮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6개월 동안 부실채권 13000억 원을 장부에서 지웠음에도 연체율 상승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실제 부실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감독원은 25'가계대출 동향 및 건전성 점검 회의'를 통해 최근 금융권 연체율 상승세에 대해 선제적 대응으로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금감원이 내놓은 관리의 요지는 부실채권 상각기준을 완화해 주는 방안과 저축은행 부실채권 처리를 민간에 열어주는 규제완화 방안이다.

 

쉽게 말하면 첫째 저축은행의 부실채권을 장부에서 쉽게 지워주겠다는 것이다. 장기연체된 1000만 원 이하의 채권은 자체 상각이 가능하지만 1000만 원을 초과한 채권은 금감원의 승인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지난 413일 금융감독원은 주요 저축은행 가계여신 담당 임원들과 가계대출 연체율 관리를 위한 상각 등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비공개 간담회를 열었다. 이 간담회를 통해 향후 1000만 원을 초과하는 부실채권의 상각과정에서 금감원이 신속한 심사와 승인을 추진할 것을 협의했다고 한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정부의 연체율 관리

이처럼 부실채권을 신속하게 장부에서 삭제하도록 돕게 되면 연체율이 낮아진다. 지난해 말 기준 전국 79개 저축은행의 가계대출 부문 추정손실 잔액은 40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저축은행 업계에 따르면 이를 모두 상각한다고 가정할 경우 부실채권 비율은 4.1%에서 3%대 중반, 가계 대출 연체율은 4.7%에서 4%대 초반 수준까지 낮아질 것으로 분석된다.

 

연체율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연체를 할 수밖에 없는 채무자의 채권을 상환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저축은행 장부에서 연체 채권을 지워버림으로써 연체율 수치를 조정하는 것이다. 부실채권을 건전한 채권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안이 아니라, 회계장부 상에서 삭제되어 연체율이 낮아지는 마법일 뿐이다. 문제는 이렇게 회계장부에서 사라진 채권이 채무자에게도 상환의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각된 채권은 특별회계로 옮겨져 채무자에게는 추심이 지속된다. 공식적인 회계장부에서는 지워진 채권으로 연체율에도 반영되지 않고, 금융당국이 집계해 발표한 가계부채 총량에서도 빠졌지만, 특별회계장부에 살아남아 채무자들을 향한 비정한 빚 독촉이 계속된다.

 

채무자 추심 고통 배가시키는 정부의 연체율 관리 마법

금융권의 연체율 완화를 위한 두 번째 조치는 채권 땡처리 시장을 활성화 하겠다는 의미이다. 2020년 이전까지 부실채권 시장은 최소한의 규제나 관리 지침도 없는 상태에서 야만적인 시장으로 성장해 왔다. 채권을 매입할 수 있는 자격기준도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부업 등록만 할 수 있으면 매입채권 추심업자로 채권을 매입할 수 있었다. 이에 은행을 비롯해 거의 모든 금융권들이 신용대출 채권은 대부업체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부실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대부업체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추심함으로써 돈을 벌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채무자에 대한 무분별한 추심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매입채권 대부업체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자본금 규제를 강화하고, 감독 또한 지자체에서 담당했던 것을 금감원으로 이관시켰다. 더 나아가 20206월부터는 모든 금융권이 코로나 사태 이후 발생한 개인 무담보대출을 캠코에만 매각하도록 했다. 코로나로 어려워진 개인들이 대부업체로부터 과잉 및 불법 추심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캠코에만 채권을 매각할 수 있게 되자 연체 채권을 매각하지 않고 보유하는 회사가 늘어나 연체율이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이 금융당국과 업계의 주장이다. 따라서 금융권의 무담보 부실채권을 대부업체등에 무분별하게 매각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규제가 완화되어 또 다시 대부업체들이 금융권의 부실채권을 매입하기 시작하면 경쟁이 심화된다. 이는 부실채권의 가격을 상승시켜 채권을 내다 파는 금융권의 손실을 줄일 수 있다.

 

금융당국 관리 방안은 채무자의 각자도생 뿐인가

이 과정에서 채무자가 겪게 될 고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금융권으로부터 경쟁적으로 높은 가격에 매입한 부실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대부업체들이 과잉 불법 추심을 할 것이란 우려는 온데간데없다. 그저 금융권의 연체율을 신속하게 줄이고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에만 금융감독의 관리 방안이 집중되고 있다.

 

결국 정부가 가계대출 부실에 대해 관리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신감은 채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더 큰 고통으로 내모는 방안이다. 연체율 수치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금융권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줄 수 있는 관리 방안을 의미한다.

 

그러나 금융소비자들의 보호를 뒷전으로 한 채 금융권의 건전성이 담보될 수는 없다. 상처부위가 곪아서 염증이 온 몸으로 퍼지고 있는데, 빨간약만 바르면 된다는 식의 처방을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실채권 처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채무자들의 고통이 채무 상환 불능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 눈을 가리고, 금융권만을 위하는 정부의 관리는 가능할지는 모르나, 가계발 금융위기를 차단하고 국민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관리는 찾아볼 수 없는 지금. 이 또한 각자도생이 유일한 길이다.

제윤경​​​​​​ 사회적기업 에듀머니 이사 시민언론 민들레 2023.06.03

 

 

덜 나쁜 놈고르는 선거에서 벗어나야

83 7. 5월 셋째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자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중 윤석열 대통령이 직무수행을 잘하고 있다고 답한 이들의 비율이다. 여야 지지층 간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평가 비율 차이가 76%포인트나 된다는 의미다. 정치 양극화의 실상을 보여주는 수치다. 한국 정치가 늘 그랬지라며 별일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행정연구원에 따르면 갤럽 조사 기준 여야 지지층 간 대통령 국정운영 긍정평가 비율 차이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역대 정부의 최대 격차를 보면 김영삼 정부 39%포인트, 김대중 정부 48%포인트, 노무현 정부 62%포인트, 이명박 정부 64%포인트, 박근혜 정부 75%포인트, 문재인 정부 85%포인트를 기록했다. 한때 지지 정당이 다른 이들 사이에서도 국정운영과 관련해 공론이 모이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양당제에 가까운 한국 정치에서 양극화 심화의 폐해는 명백하다. 타협은 사라졌고 입법은 교착됐다. 양곡법, 방송법 등 입장이 갈리는 법안에 대해 여당은 합의를 요구하며 무작정 저지했고, 민주당은 수적 우위를 앞세우며 무작정 표결로 맞섰다. 민주당은 여당이 반대해도 법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입법을 무산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타협이 사라진 자리는 배제의 정치가 차지했다. 국정운영에서 야당은 더 이상 파트너가 아니다. 윤 대통령은 집권 1년이 넘도록 제1야당 대표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정책의 당파적 편향성은 심화됐다. ‘ABM’(Anything But Moon·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아니면 다 된다)은 현 정부 정책 기조로 자리 잡았다. 특히 상대방을 악마화해 반사이익을 노리는 혐오정치가 극성을 부린다. 내가 못해도 상대방이 더 못하면 된다는 식이다. 여권은 안전사고도 전세사기도 모두 전 정권 탓만 한다. 그러면서 이재명 리스크를 안전핀으로 여기는 듯하다. 검찰은 대선 1년이 지나도록 야당 대표 수사를 끌면서 도덕성 흠집 내기에 집중한다. 야당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관련 질문에 김현아 () 의원은 어떻게 돼가고 있냐. 모르냐고 되묻는다. ‘국민의힘은 깨끗하냐는 식이다.

 

이런 거대 양당 중심 혐오정치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대안 중 하나가 선거제도 개편이다. 양당 기득권 유지에 유리하게 작동하는 현행 단순다수대표제는 한국 정치사에서 수명을 다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 표만 더 받아도 의석을 독점하는 구조에서 정당 득표와 의석수 간의 불일치는 심해진다. 국회의원 절대다수가 고학력, 고소득, 고연령 남성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기는 어렵다. 선거제를 고쳐 비례성과 대표성을 강화해야 제3당과 소수정당을 활성화할 수 있고, 의원 구성의 다양성도 개선할 수 있다. 개편안과 관련해서는 지난 5KBS가 실시한 선거제도 개편 공론조사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시민 469명의 입장은 전문가들과 학습·토론을 거친 후 크게 달라졌다. “지역구는 소선거구제로 운영하되 그 비율을 줄이더라도 비례대표 의석은 늘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 숫자를 늘리는 것도 용인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문제는 선거제 개편도 거대 양당의 손에 달린 현실이다. 여야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결의안을 도출하고 국회의원 전원위원회까지 개최하며 선거제 개편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듯했다. 하지만 비례대표 감축, 의원 정수 축소 등 개편 취지와 정반대의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논의는 전원위 이후 두 달 가까이 공전하고 있다. 개편 논의를 주도할 리더십도, 개편을 강제할 외부의 압력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 총선에서 문제가 됐던 위성정당 출현만 막아도 성공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 와중에 정치권은 내년 410일 총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다수의 유권자는 또 한 번 힘든 선택을 해야 한다. 거대 양당 중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은 약 30%의 무당층은 특히 힘들다.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로 나쁜 놈이 다 해 먹는다.”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또다시 제일 나쁜 놈을 가리고 덜 나쁜 놈에게 주고 싶지 않은 한 표를 줘야 할까. 그걸 믿고 거대 양당은 덜 나쁜 놈 되기 경쟁만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똘똘한 제3, 키워주고 싶은 소수당에 기꺼이 준 한 표가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박영환 정치부장 경향 2023.06.04.

 

 

모든 힘을 상상력으로!

‘68혁명당시 프랑스 파리 모습. EPA 연합뉴스

 

지방소멸 관련 기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지방소멸이 임박하면 가장 먼저 죽는 것 중의 하나가 지역언론이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마땅한 일이겠건만, 꼭 그렇지는 않다. 지역에서 언론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몇 사람이 모인 사석에서 지역언론이 죽기 일보 직전에 처해 있다는 말이 나오면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수십년째 들어온, 너무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나온다. “지방 자체가 소멸되는 마당에 무슨 그런 사치스러운 걱정을 하느냐?”

 

그러나 토론회나 언론 기고처럼 지역언론을 주제로 말하거나 글을 쓸 때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순 없다.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역언론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소중하며, 그래서 지역언론에 대한 공적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그런 지원으로 지역언론이 살아나고 성장할 수 있을까?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늘 더 많은 지원을 외쳐댄다.

 

더 많은 지원외에 지역에서 스스로 해볼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이성적·논리적·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없다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정치·경제·교육·문화의 권력과 부가 서울에 집중된 서울공화국이라는 체제의 벽이 워낙 높고 두텁기 때문이다. 그런 답답한 상황에서 부르짖을 수 있는 건 오직 상상력뿐이다.

 

19685월 프랑스 파리의 봉기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68혁명때 소르본대학 벽들엔 이런 구호가 등장했다. “모든 힘을 상상력으로!” 포스터, 배지, 전단, 성명서, 영화 그리고 노래 가사 등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이 구호는 1960년대의 반란 정신을 상징했다.

 

‘68혁명정신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강고한 기존 질서를 깰 수 있는 힘은 상상력뿐이라는 데엔 동의하기 어렵지 않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추앙의 대상인 여론엔 상상력이 없다. 대중이 답답한 사람들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객관식 문제 형식으로 던져지는 설문조사엔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상상력을 죽이게끔 구조화된 여론조사가 정치를 공멸의 수렁으로 몰고 간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여론조사의 설문은 갈등 지향적이며, 그렇게 해서 드러나고 끊임없이 확인되는 양극화된 여론은 갈등을 생산하고 증폭시키는 도구로 기능할 뿐이다. 여론조사는 출구가 없는 갈등의 회로를 만들어놓고 그 회로에 갇힌 사람들의 일희일비를 마케팅의 도구로 이용해 팔아먹는 상술로 전락한 건 아닐까?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했을 때 시장조사를 했을 것 같은가?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스티브 잡스의 말이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우리의 일은 고객이 욕구를 느끼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원할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직접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내가 절대 시장조사에 의존하지 않는 이유이다. 아직 적히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게 우리의 일이다.”

 

오만하게 들리는 발언이긴 하지만, 나는 잡스가 강조한 상상력이야말로 지역언론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걸 입 밖에 내긴 쉽지 않다.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리처드 오글이 지적했듯이, 학자들의 세계에서 선호하는 용어는 이성적, 객관적, 예측 가능, 설명 가능 등이기 때문에 상상력이 풍부한이라는 말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니 온갖 갈등이 분출하는 현실 세계에서 상상력 운운하는 건 욕먹기 십상이지만,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비상한 상황이 오히려 상상력을 외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지역언론은 서울공화국이라는 구조의 회로에 갇힌 채 몇가지 공식을 1365일 내내 우려먹는 건 아닌지 살펴보자. 지역언론은 홀대’, ‘소외’, ‘낙후를 외치는 나쁜 뉴스생산에 주력한다. 지역언론은 늘 중앙의 더 많은 지원을 외치면서 그걸 비판과 찬사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지역언론은 선의에서 비롯됐을망정 중앙의 힘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학습된 무력감을 키우는 일에 열심이다.

 

지역언론은 이런 식의 자기비판을 독자들에게 간곡히 요청해 게재하면서 성찰의 기회로 삼아보는 게 어떨까? 모든 힘을 상상력으로 돌리기 위해서 말이다. 상상력은 발칙할수록 좋다. 기존의 모든 틀과 관행을 의심하면서 그걸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지방소멸대신 그 결과인 서울멸종이란 말을 써야 한다. 그래야 지방소멸이 지방만 소멸하는 걸로 알고 외면하는 상상력 없는 사람들의 생각도 바꿀 수 있다.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한겨레 2023-06-04

 

 

성장률과 사라져가는 평균

지금의 50·60대가 어린 시절, 1인당 국민소득과 수출목표는 교실 벽에 위압적인 구호로 걸려 있다가 시험에까지 출제되는 숫자였다. 그 숫자가 코흘리개들에게 구체적 의미로 다가왔을 리야 만무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회 전체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남아 성장률에 대한 집착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그 옛날에는 북한을 앞지르는 것이 지상과제이자 자랑거리였다면, 어느 순간에는 중진국, 다시 선진국에 접어드는 것이 마치 국가대표 축구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기쁘게 받아들여지곤 했다.

1인당 소득이란 산술평균 개념이므로 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음은 당연하지만, 그 실제 의미를 깨닫기란 생각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복잡한 논의보다는 인터넷에서 손쉽게 검색 가능한 데이터에 따라 한국 경제에 관해 간단한 어림 계산을 해보자.

 

2022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200만원, 환율이 달러당 1300원이라고만 쳐도 32000달러가 넘는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평균만 한다면 4인 가족의 가계소득이 16000만원에 이른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에서 재산의 소득에 대한 비율(경제학자 피케티가 이른바 베타라고 불렀던 비율)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7 정도라고 하면, 평균적인 4인 가구의 재산은 16000만원의 7배인 112000만원이 된다. 그런데 막상 상위 10%에 들기 위한 커트라인이 되는 순자산은 겨우(!) 9억원이 약간 넘는다(NH투자증권 보고서). 무슨 뜻일까? 국민소득으로 계산한 평균적 가구가 재산도 평균적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이미 전체에서 10% 상위권에 든다는 의미다.

 

사실 체감하는 평균에 더 가까운 것은 국민소득보다는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이다. 2021년 기준 도시근로자 가구(4)의 월평균소득은 700만원 남짓, 연간으로 계산하면 8400만원가량이니, 1인당 국민소득으로 단순 계산한 값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2인 가구 기준으로 보면, 연간 5400만원 정도라 사정이 조금 나아지기는 한다. 단순 평균값과의 차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한국 가계의 평균 부채가 연간 소득의 약 95%라는 데이터와 주거용 부동산이 전체 자산의 4분의 3 정도 된다는 데이터를 결합해 도시근로자 4인 가구의 평균적인 모습을 그려보자. 예의 베타 비율로 계산한 재산 총액은 58000만원가량이고 그중에서 4분의 343000만원 정도가 주거용 부동산에 쓰이며, 8000만원의 가계부채가 모두 주택 구입이나 전세를 얻기 위한 대출이라 가정해도 이를 합쳐 5억원 약간 넘는 부동산을 소유하거나 임차해 살고 있는 셈이다. 서울 시내 아파트의 평균 전세가격과도 대체로 비슷한 수준이니 비교적 현실감 있는 계산일 것이다.

 

이 지루하지만 나름 극적인 계산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른바 평균 실종의 시대에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증가율로 정의되는 경제성장률은 이미 절대적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나 언론 등은 성장을 당연히 추구해야 할 디폴트 값으로 간주하며, 현실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이러한 태도는 끊임없이 증폭된다. 무엇을 하는가보다는 무엇을 했다고 간주되는가가 더 중요하며, 따라서 홍보가 관건이라 생각하는 이들 옆에는 온갖 낙관적 전망을 시쳇말로 영끌하여 예상치를 만들어주는 경제학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나라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문제라면, 지역 단위의 선거에서는 해당 지역의 성장률에 관한 온갖 장밋빛 전망이 난무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른바 진보 정부도 양극화 해소나 분배 개선 못지않게 소득주도 성장을 포기하지 못했던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던 것, 그 결과 스스로 성장의 입증 책임이라는 덫에 걸리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그 입증책임과 더불어 소득주도마저 내팽개친 시대에 추상적 자유와 효율성의 외침만 공허히 허공을 맴돈다. 다시 돌고 돌아 규제혁파’ ‘노동개혁’ ‘기업하기 좋은 나라등의 단골 메뉴가 과연 성장을 가져다줄 것인지도 의문이거니와, 그렇게 해서 성장을 얻은들 평균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실 누가 언제 무슨 옷을 입고, 언제 누구와 술을 마셨는가는 부차적인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골 깊게 갈라진 진영논리에 따라 누구는 비아냥거리고, 누구는 옹호하며 술자리 안줏감으로 소비하고 있기에 이미 우리의 미래는 충분히 어둡다. 어쩌면 기후위기나 출생률 저하 같은 선진적(?) 걱정은 오히려 한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누구 말마따나 벽에라도 대고 소리 질러야 한다는 심정으로 써보는 글이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2023.06.05

 

 

대통령 지지도 공식과 미디어 이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전화면접으로 30% 중반, ARS40%대로 올랐다는 조사결과가 지난주 보도된 바 있다. 지난해 해외방문 후엔 지지도가 떨어진 적이 있지만, 최근 외교활동 후엔 그렇지 않았다. 정상회담 등의 외교는 일반적으로 지지도를 올린다.

 

학술연구들은 지지도가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임을 보여준다. 우선, 국민적 지지는 대통령 추진 정책이 의회를 통과하는 데 압박 수단이 된다. 미국에서 조사한 바로, 지지도가 1% 오르면 대통령 결정의 의회 통과율도 1% 올라간다. 지지도 높은 대통령은 의원입법 법률안에 거부권을 행사해도 큰 파장이 없다. 대통령 지지도는 자당 소속 국회의원이 선출될 가능성과도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대통령 지지도는 성과 평가다. 성과를 내야 지지도로 정책 리더십을 확보해 다시 성과를 낼 수 있는 순환 구조다.

 

지지도 공식의 주요 변수는 경제 등 구조적 문제, 정치 스캔들, 그리고 미디어 이벤트다. 이 가운데 대통령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미디어 노출이다. 최고 권력자가 해외순방, 시장방문, 방송출연 등을 꾸미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디로 가고, 어디서 멈추고, 누구를 만나고, 어디서 어묵을 먹고, 뭐라고 말할지 등을 세밀하게 선택할 수 있다. 돌발질문 가능성이 있는 기자회견은 피하는 게 좋다. 3자 개입 없는 자국 시민과 해외 정상 만남을 각국 대통령이 좋아하는 이유다. 한국에선 약속대련식 기자회견을 열기도 한다. 전략의 요체는 선별적 정보 제공, 즉 정보 통제력이다. 원하는 화면과 말만 퍼뜨리는, ‘일방적이란 말은 생략하고 소통이라고 일부 기자들이 보도자료대로 쓰는 바로 그 능력이다.

 

감각적 속성을 지닌 방송영상 미디어는 잘 짜인 이벤트를 더 화려하게, 더 감각적으로 보여줄 동인을 지닌다. 강대국을 방문해 타군의 힘찬 밴드 연주 속에 사열하고, 해당국 수반의 팔뚝을 툭툭 치며 이야기하고, 보타이 만찬에서 눈과 샴페인을 마주치고 아메리칸 파이를 부르는 모습은 미디어가 놓칠 수 없는 짜릿한 순간들이다. 관련 연구자들은 이런 것들을 대통령 드라마라고 부른다.

 

지난해 출근길 문답 스캔들 등은 비통제상황이 위험하다는 공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권 초기 시행착오로 학습한 윤 대통령은 이제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인 전략을 펼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시나리오를 벗어나 바이든/날리면보도로 ·미 간의 동맹날조해서 이간했다는 MBC 등 공영방송사를 통제 구조 아래 넣는 일도 가속하는 듯하다. 정보 통제력이 있으면 경제 문제나 스캔들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

 

하지만 미디어 이벤트 효과는 단기적이다. 드라마가 끝나면 시청자는 몰입에서 벗어나 곧 새 작품을 찾는다. 대통령들이 외국행 비행기에 자꾸 올라타려는 이유 중 하나다. 여소야대 상황의 대통령이라면 정책 법안을 위해서 야당을 구슬리든지, 아니면 지지도를 크게 올려 압박해야 한다. 그런데 긍정보다 부정평가가 높은 윤 대통령이 다수 야당과 협치 없이 연거푸 거부권만 행사하는 것이 의아하다. 국회가 필요 없는, 논란의 시행령 정치로 버티면서 미디어 이벤트에 집중하는 것은 내년 총선을 위한 전략일지 모른다. 법률 제·개정을 통한 구조적 문제 해결엔 미온적인 채 공권력 강화만 강조하는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되려던 이유를 궁금하게 한다.

 

확고한 지지도 법칙이 있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대통령 지지도는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크고 작은 미디어 이벤트가 많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약 80%에서 시작해 40%대로 퇴임했다. 취임 및 퇴임 모두 역대 최고지만 반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역대 대통령 중 집권 초기 지지도가 낮은 편에 속하는 윤 대통령이 재임 내 성과도출을 위해선 총선 이후로 구조적 문제를 미뤄둬선 안 될 이유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경향 2023.06.05

 

 

광우병 광기, 방사능 방기

광우병에 이어 후쿠시마원전의 방사능 오염수를 둘러싸고 광기가 넘실대고 있다. 광기를 선도하는 곳은 예의 조선 신방복합체와 그 아류들이다. 조선닷컴(64)이 부각한 광우병 파동 주도 195개 단체, 후쿠시마 오염수도 반대제하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자극적인 기사는 인터넷에 퍼져갔고 집권당 대변인까지 가세해 눈 부라렸다.

 

문제의 기사는 지난 2008년 미국산 소고기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참여했던 시민단체 중 195개 단체가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여론을 주도하는 일본 방사성 오염수 방류 저지 공동행동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로 시작한다. 이어 수입 반대 근거들은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면서 당시 반대집회에 참여한 단체들은 큰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이렇다 할 사과 없이 또다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언구럭 부린다.

64일 주간조선 광우병 파동 주도 195개 단체, 후쿠시마 오염수도 반대기사 갈무리.

 

기실 사회운동 단체들의 집회와 운동에 대해 이른바 광우병 광기를 들먹이며 여론을 조작하는 보도는 처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민중대회가 열렸을 때를 비롯해 수시로 써먹었다. 그래서일까. 일부 진보적 지식인마저 광우병 소동에 사과하는 사람이 없다며 후쿠시마 오염수도 마찬가지인 듯 부르댄다. 어느새 15년이 지났기에 2030세대는 언론의 집요한 진실 호도에 자칫 홀리기 십상이다.

 

차분히 짚어보자. 20084월 미국에 간 대통령 이명박은 30개월 이상 소고기까지 전면 수입을 발표했다. 그때까지 ‘30개월 미만의 뼈 없는 살코기로 수입을 제한해왔는데 미국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당시 사람에게 옮겨지는 광우병 소의 90%30개월 이상이었다. 일본은 20개월 미만의 소고기만 수입하고 있었다. 조중동은 이명박이 한미 정상회담 직전에 소고기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소함으로써 외교적으로 발언권을 강화하게 됐다고 찬양했다. 기심감이 들지 않는가. 언론이 권력 감시를 못하자 민중이 촛불을 들고 나섰다. 조중동은 반미, ‘좌파, 그것도 모자라 종북까지 색칠했다.

2008527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정부에 미국 쇠고기 수입재협상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중동은 그 이후 내내 촛불집회를 광기나 괴담으로 몰았다. 하지만 그 촛불 때문에 이명박과 미국은 한 발 물러섰다. 현재까지 30개월 이상 소고기는 제약받고 있다. 굴욕적 협상에 맞서 촛불 민중이 지켜낸 성과다. 최근 미국에서 5년 만에 발생한 광우병도 30개월 넘은 소에서 나타났다. 물론 촛불집회에서 확인되지 않은 말들도 나왔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모든 운동에 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을 빌미로 틈날 때마다 광기로 몰아치는 작태야말로 광우병에 걸려도 좋다는 광기어린 선동 아닌가. 그 시점에 일본 정부는 자국 국민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그로부터 5년이 더 지나서야 규제를 풀었다. 광우병 발생 추이를 5년이나 면밀히 점검하고 결정했다. 바로 그것이 정부가 할 일 아닌가. 나는 당시 티비토론에서 광우병 우려가 빗나가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전면수입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다시 그 순간이 와도 촛불을 들 것이다.

 

만일 원전 사고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오염수를 방류한다고 할 때, 일본 정부가 윤 정부처럼 용춤 출까. 광우병 때나 지금이나 일본 정부는 제 국익에 충실하다. 그래서 더욱 생게망게하다. 왜 일본의 오염수 방류에 한국이 나팔 불고 나서는가. 제 나라 국민의 건강권을 가장 우선해야 할 대통령이라는 자들이 이명박이든 윤석열이든 외세에 빌붙은 꼴 아닌가. 삼일절 망언의 여파가 하도 커서일까. 이제 윤 정부의 어지간한 실책엔 많은 이들이 둔감해지고 있다. 위험한 흐름이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이 걸린 문제는 아무리 신중해도 부족하다. ‘광우병 촛불에 광기어린 언론은 방사능 오염엔 검증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미국 광우병 때도 그랬듯이 일본 방사능 오염수를 둘러싼 미친 짓을 정녕 누가 하고 있는가. 촛불 민중이 아니다. 외세에 부닐고 있는 정권과 그에 유착한 사이비 언론들이다.

손석춘 철학자·<우주철학서설> 저자 미디오오늘 2023.06.05.

 

 

자제력 잃은 공권력이 가져올 비극

경찰이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에서 고공농성하던 한국노총 간부를 곤봉으로 마구 때리며 진압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전남경찰청은 이 간부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해 부득이 경찰봉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농성 해산의 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이미 저항능력을 상실한 단 한 사람을 여러명의 무장 경찰관이 집단 폭행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자제력을 잃은 경찰력 행사가 과거에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 우리는 기억한다.

 

대통령 발언에 한술 더 떠 대응하는 경찰 수뇌부 태도로 보면, 앞으로 비슷하거나 더한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19914월의 명지대생 강경대씨 사망사건은 내무부 치안본부가 불법·폭력 시위는 국가보위 차원에서 강력하게 대응하라고 일선 경찰에 지시한 뒤 발생했다. 건물 옥상에서 농성하던 철거민을 이른 새벽 무리하게 진압하다 6명이 숨진 용산 참사가 일어난 건 14년 전 일이다. 권위주의 정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폭력을 이유로 한 공권력의 무절제한 폭력 행사다. 여러 법률과 규정, 관행을 고치면서 이것을 제어해온 게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진전 과정이었다. 지금 그 고삐를 윤석열 정부가 다시 풀고 있다.

 

현 정부가 집회·시위에 강경 대응하는 근거로 드는 건 시민의 불편불법·폭력성이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시민의 자유를 볼모로 관행적으로 자행된 불법에 경찰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당당히 하겠다고 말했다. ‘시민의 자유를 내세워 시민의 가장 중요한 권리인 집회·시위를 옥죄는 건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 헌법은 집회·시위를 허가받을 필요가 없는 기본적 권리로 분명하게 규정한다. 집회·시위에 손쉽게 불법딱지를 붙이는 건, 사상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온한 사상은 처벌하겠다는 반자유주의적 발상의 또 다른 사례다.

 

누군가의 시위가 다른 누군가에겐 불편함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 국가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한 건, 다른 이에게 직접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단순한 불편함을 이유로 규제하지 말라는 취지에서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주며 공개적인 의사 표명을 할 수 있고, 이것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경찰 과잉 대응의 맨 위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 윤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라고 한다. 학창 시절 <자유론>을 읽고 감명을 받아 경제학과에서 법학과로 지망을 바꿨다는 얘기가 있고, “윤 대통령은 19세기 위대한 정치사상가인 밀의 <자유론>에 심취했던 터라 지도자로서 소양이 있다는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의 찬사도 있었다. 취임사에서 자유35번이나 언급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밑바탕엔 <자유론>이 있다고 언론은 분석했다. 그런데 모든 자유 가운데 의견 표명의 자유가 핵심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 <자유론>을 왜 윤 대통령은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걸까.

 

밀은 집회·시위와 같은 의견 표명이 소수자나 약자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했다. 다수는 굳이 그런 방식을 택할 이유가 없다. 밀은 비록 소수의 의견 표명일지라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네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모든 의견은 설령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더라도 진리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해도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 수가 있다. 따라서 대립하는 의견을 서로 부딪치게 하는 것만이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셋째, 설령 일반 통념이 전적으로 옳다고 해도 토론을 통해 활발하고 진지하게 다투지 않으면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합리적 근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편견에 빠져버릴 수가 있다. 넷째, 그런 주장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쇠퇴하면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이것은 진심 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걸 방해한다.”

 

자유로운 선거로 뽑힌 정부가 꼭 민주적이지 않다는 건 2000년대 이후에 세계 곳곳에서 입증되고 있다. 왜 보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민주주의 퇴행의 우려가 커지는지 윤 대통령은 돌아보기 바란다. 도 넘은 경찰 대응이 내년 총선을 겨냥한 보수표 결집의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다고 해도, 적어도 <자유론>에 심취했던 대통령이라면 지켜야 할 선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박찬수ㅣ대기자 한겨레 2023.06.05

 

 

35분 이어진 장광설윤 대통령 복지관이 위험한 이유

한마디로 기괴했다. 또한 퇴행적이었다. 회의 형식에서 발언 내용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게 없었다. 지난 3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사회보장전략회의와 이를 주재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날 회의는 104분에 시작됐다. 애초 1110분까지 70분으로 예정된 회의는 30분가량을 초과하고서야 끝났다. 보통 분 단위로 치밀하게 계산돼 치르는 게 브이아이피(VIP) 행사. 하여 뭔가 깊은 토의가 있었겠구나라고 상상할 법하다. 하지만 참석자들이 전한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이날 회의는 의논을 하거나 질의응답이 자유롭게 오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실상 윤 대통령의 원맨쇼에 가까웠다. 회의 주재자인 윤 대통령은 언론에 공개된 머리 발언15분여, 비공개로 이어진 발표와 토론 뒤의 마무리 발언20여분을 더해, 대략 35분가량을 복지와 사회보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파하는 데 할애했다.

 

정작 발표와 토론은 짧았다. ‘윤석열 정부의 복지국가전략이란 거창한 발표를 한 조규홍 복지부 장관 등 세명의 발표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각 3분이었다. 사회보장 관련 정부 내 위원회 소속 민간위원들의 토론, 관계부처 장관들의 답변 시간은 각 2분 남짓 주어졌다. 이마저도 내용과 맥락, 토론자까지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이뤄졌다. 권위주의 시대에서나 봄직한 퇴행적인 회의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더 시대착오적이고, 숫제 해괴한 것은 윤 대통령의 발언 내용이다. “현금복지는 선별복지로 약자복지로 해야지 보편복지로 하면 안 된다 이겁니다라는 발언부터 그랬다. 한마디로 복지의 문법을 모르는 무지한 발언이다. 복지의 기본이 바로 현금급여이기 때문이다. 실업이나 질병, 노령 등으로 인해 소득을 잃었을 때 최저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지급하는 현금성 소득보장이야말로 베버리지 보고서가 강조한 사회보장의 원칙이다. 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궁핍으로부터) 자유의 철학에 기반한 원칙이기도 하다.

 

우리의 복지제도 또한 이미 선별만이 아닌 보편적 현금복지로 짜여 있다. 국민연금이 대표적인 현금복지이자 보편적인 사회보험제도다. 아동수당이나 현 정부 들어 도입한 부모급여도 현금복지다. 물론 실업부조나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생계급여 같은 약자를 위한 선별성 현금복지도 있다. 대부분의 복지국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복지 지출 분야는 이런 소득 보장성 현금복지이자 보편복지다. 우리나라는 턱없이 모자라 여전히 더 적극적인 확대가 필요한 복지 분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전체 복지지출(2019년 기준, 12.2%) 가운데 의료 및 보육 등 현물서비스 지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6.9%(2019년 기준)로 남부 유럽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반면 현금지출은 국내총생산의 5%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1%에 미치지 못하는 최하위에 속한다.

 

사회서비스에 관한 발언은 무지를 넘어 위험하다. “사회보장 서비스 자체도 시장화가 되고, 산업화를 하고, 경쟁 체제가 되고 이렇게 가야 합니다.” 본말이 전도된 발언이다. 복지와 사회보장의 본질은 경쟁을 통한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 즉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 복지국가의 역사는 이런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복지가 고용과 성장과 선순환하는 길이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더욱이 우리의 사회서비스 시장은 과잉 경쟁으로 인한 시장 실패와 서비스 품질 저하가 구조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온 지도 오래다.

 

윤 대통령은 이전에도 보건복지부는 서비스 산업부로 생각해야 한다는 등의 괴이쩍은 발언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하지만 공개된 발언은 물론 더 길고 더 강했던 비공개 발언까지 종합하면, 그의 이날 발언은 강도나 논리 등에서 윤석열의 복지관날것 그대로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 결정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 대통령은 자료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수십년간 복지를 전공한 전문가들 앞에서 조금의 주저함 없이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펼쳤다는 게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실상 주목해야 할 윤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따로 있는데, 바로 재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회보장은 우리 사회() 스스로 갉아먹는 게 되죠란 대목이다. 윤석열 정부 복지 정책 기조와 맞닿는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의 복지 발언은 시장화와 산업화를 앞세운 위장된 복지억제론이란 생각이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한겨레 2023.06.05.

 

 

총체적 난국, 길 잃은 한국경제

코로나19 팬데믹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전 세계의 이목을 끌 정도로 한국경제는 견실히 버텼다. 그러나 팬데믹 위기를 벗어나고 작년 하반기부터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작년 경제성장률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못 미치는 이례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추세는 올 1분기까지 지속돼 국제통화기금(IMF)OECD가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고 최근 한국은행도 1.6%에서 1.4%로 낮춰 많은 우려를 자아냈다. 성장률 전망이 낮은 것만으로 경제가 나빠졌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침체국면에는 엄중한 문제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보인다. 한국경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내부적·외부적 요인들의 원인이자 결과다.

 

우선, 무역수지 적자 문제다. 작년 3월부터 시작된 월별 무역수지 적자가 지난 5월까지 15개월 지속되고 있다. 수출도 8개월 연속 감소 중이다. 특히 대중국 수출의 경우 중국의 전면적 재개방 이후인데도 12개월 연속 감소하고 있다. 흑자만 기록하던 대중국 무역수지도 작년 5월부터 적자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역수지 악화를 개선하려면 급감한 대중국 수출을 회복하려는 정부 대책이 필요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론 미국에 떠밀려, 또 한편으론 자발적으로 한국 정부가, 미국(일본) 중심주의의 행동대장을 자처했다. 그러나 군사와 외교 그리고 반도체 산업의 한··일 협력 강화에 앞장서며 중국과의 신뢰관계를 회복하려는 정부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아세안국가들과의 무역도 마찬가지다. 선진국 중 무역의존도가 최상위권인 나라의 정부가 무역수지 악화와 수출 급감에도 손 놓고 구경만 하는 것 같다.

 

··일 공조와 협력을 강화한다고 대일, 대미 수출과 무역수지가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협력의 파트너가 된 일본과의 무역수지는 더 나빠지고 있다. 앞으로도 대일본 무역수지 적자는 오히려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2019년 일본 아베 정부의 대한국 수출규제로 촉발된 한·일 경제전쟁으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일본 수입의존도를 낮추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되며 대일 무역수지 적자폭이 크게 하락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이전 수준으로 복귀했다.

 

소부장산업에서 일본과의 협력을 강조하는 정부정책은 일본기업을 추격해야 할 국내 소부장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반한다. 정부가 일본 소부장산업과의 협력을 강조할수록 국내 소부장기업의 입지는 약해지고 경쟁력을 키울 기회는 축소될 것이라는 예상이 합리적이다. 결과적으로 소부장산업 대일 의존도를 다시 높일 것이다. ·일 경제전쟁으로 손해를 본 것은 한국경제가 아니라 일본경제다. 일본 정부와의 갈등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목 잡혔다고 말하는 것은 궤변이다. 지금 정부가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일본과의 전방위적 관계개선은 경제적으로 봐도 국익과 관련 없어 보인다.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이웃의 행패까지 무조건 덮겠다는 식의 태도는 국민이 부여한 본분과 책임을 거역하는 것이다.

 

정부 재정 상황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작년 정부의 부자감세로 국세수입 감소는 어느 정도 예견됐지만 경기침체와 수출실적 부진까지 겹쳐 더 빠르게 진행됐다. 1분기 국세수입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24조원이나 감소했고 정부지출 감축에도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54조원을 기록했다. 3개월 만에 기획재정부가 올해 목표치로 설정한 규모에 가까운 적자가 난 것이다.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를 무색하게 할 지경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기조로 가면 재정지출을 크게 줄여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결과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저성장과 불평등의 악순환을 피하려면 위기에 취약한 경제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한편 부자증세와 횡재세 도입 등 세수확충에도 노력해야 한다. 난국을 극복하려면 잘못된 정책 기조를 철회하고 전면적인 조세재정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제의 근간을 해치는 검찰 공안 통치의 국가 지배구조와 그 속에서 방향을 잃은 각종 개혁이다. 그 나침반의 방향은 검찰통치가 결정한다. 노동자와 노조에 검찰의 칼이 향할 때 노조탄압, 집회결사의 자유 제한, 노란봉투법 결사반대가 노동개혁이 된다. 검찰의 칼이 지난 정부 인사와 정책을 향하면 개혁은 지난 개혁의 반동이 된다. 그래서 노동시간은 늘리고, 원전은 확대하고, 재생에너지 확대에는 별 관심 없는 기괴한 개혁이 탄생한다. ‘간첩 조작 사건으로 내부징계까지 받은 검사가 대통령실 고위 공직자로 복귀하고 또 다른 증거조작 혐의가 있는 검사가 국가보훈부 장관이 되는 경천동지할 일도 보란 듯 벌어지고 이런 광란의 칼이 한국경제의 방향이 된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경향 2023.06.06.

 

 

만만한 게 노동자 임금인가

원재료 가격 등 물가 상승으로 부득이 가격을 인상합니다.” 자주 가는 음식점마다 비슷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내 지갑만 생각하면 서운하다가도 임대료에 대출 이자까지 떠안을 사장님 생각을 하니 납득이 된다. 정반대의 안내문을 붙이는 상품도 있다. ‘물가 상승으로 부득이 가격을 인하합니다.’ 인간 노동력의 가격, 임금이다.

 

재계와 보수언론은 임금이 상승하면 자영업자가 힘들어져 고용이 줄고 물가가 상승해 조삼모사가 되니 임금을 동결 또는 인하하자고 주장한다. 이들이 최저임금을 너무 많이 올렸다고 비난한 2018년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1.5% 올랐고, 2019년에도 0.4% 오르는 데 그쳤다. 1000원 수준의 임금 인상으로는 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다.

 

최근 경제상황을 보면 임금이 아니라 전쟁과 기후위기, 재정 및 통화 정책 등 정치·경제 문제가 물가와 일자리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 수 있다. 노동자들과 최저임금은 책임이 없다. 그럼에도 노동자의 임금이 가장 먼저 깎이는 것은 경제학의 원리가 아니라 권력의 원리다. 깎을 수 있기 때문에 깎는다. 최저임금 노동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고용노동부가 4월에 발간한 사업체 노동력 조사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노동자 1인당 월평균 실질임금은 전년 동기 대비 2.7% 하락했다. 무려 103000원 감소한 3773000원이다. 비교적 높은 월급을 받는 노동자들도 임금 삭감을 당한 것이다.

 

노동자를 노동법 바깥으로 추방해 최저임금 적용을 받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시흥지역 배달라이더들은 건당 임금이 무려 1300원 깎였다. 4200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배달의민족도 기본 배달료를 3000원에서 2200원으로 삭감했다. 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최저임금위원회도 이를 의식해 연구보고서 플랫폼 노동자의 생활실태를 통해 살펴본 최저임금 적용방안을 발간했다. 택배·가사서비스·음식배달·대리운전 등의 플랫폼 노동자들의 건당 수입을 시급으로 환산했더니 2022년 최저시급인 9160원에 한참 못 미치는 7289원을 기록했다. 업종별 차등 적용 역시 합법적 임금 삭감 방법이다. 노조가 없고 협상력이 낮아 지금도 최저임금과 주휴수당을 받지 못하는 편의점·미용업 등 서비스 업종의 임금을 삭감하려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탄하며 취약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개혁을 하겠다고 했는데 현실 정책은 반대로 가고 있다. 급기야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값싼 가격으로 데려오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다른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면,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가격 인하 경쟁이 벌어진다. 이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문제다. 헌법 323항에는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고 돼 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2016최저임금에 대한 시각은 그 사회의 품격이요, 노동자를 바라보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품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원재료값 상승으로 부득이 가격을 인상한다고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력의 원가는 생계비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조사한 2022년 비혼 단신 근로자 생계비는 241만원이다. 2024년 일하는 모든 사람의 시간당 소득이 12000원은 되어야 하는 이유다.

박정훈 배달노동자 경향 2023.06.06.

 

 

아무도 모른다

왜 잘되는지 모르겠다.”

 

하루에도 신기술이 수십 가지씩 쏟아지는 인공지능(AI) 분야이지만 하나의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이미지 인식에 주로 쓰이는 합성곱 신경망(CNN)의 발전 역사를 봐도 그렇다. 신경망을 몇 개의 층으로 쌓을 것인지, 특징을 추출하는 필터의 크기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은 컴퓨터가 결정해 주지 않는다. 수년간, 수많은 실험을 거쳐 가장 잘되는 층의 개수와 필터의 크기 등을 찾은 것이다. 사람이 미세조정하는 이런 수치들을 컴퓨터가 반복계산을 통해 만들어내는(학습하는) ‘파라미터와 구분해 하이퍼 파라미터라고 한다. 특정 수치의 하이퍼 파라미터에서 왜 성능이 가장 잘 나오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잘 나오니까 그렇게 쓸 뿐이다.

 

GPT의 발전 역사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그 기본이 되는 언어 모델이란 거칠게 말하면 수많은 텍스트를 넣어서 단어 간의 순서를 학습시킨 뒤 어떤 단어 다음에 나올 단어를 통계적으로 예측하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GPTG의 의미가 ‘Generative(생성의)’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텍스트 생성을 목적으로 한 모델이었다. 버트(BERT)처럼 문장 이해를 위한 모델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모델의 크기를 키우고 데이터를 많이 집어넣었더니 GPT가 문장 이해도 잘하기 시작했다. 요약과 질의응답 등 특정 목적으로 학습시킨 기존의 모델 성능을 뛰어넘기까지 했다. 이 또한 추론은 가능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모든 기술의 기반인 딥러닝 역시 최적의 파라미터를 찾아내는 과정인데, 학습 결과가 가장 최선의 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없는 오차 계산 끝에 발견 가능했던 최적의 답일 뿐이다.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 뇌의 구조를 흉내 낸 것이다. 인공지능 성능의 향상과 인간, 인간 사회의 발전도 닮아 있다. 뉴런과 뉴런이 신호를 주고받는 시냅스의 연결 양상은 오랜 기간의 학습과 자극으로 만들어진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도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욕망이 투사된 결과물이다.

 

사회 문제는 그래서, 복잡하고 풀기 쉽지 않다. 흠잡을 곳 없어 보이는 정책도 때론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 인공지능의 하이퍼 파라미터를 조정하듯이 다수의 의견을 수렴해 신중하게 조정하고 실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다. 인공지능 모델처럼 세상만사에도 정답은 없고, 뭐가 가장 좋은 방법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고민하고 추론할 뿐이다.

 

특정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고 대화보다는 엄벌을 내세우는 윤석열 정부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특정 법만 통과되면, 어떤 기구만 설치하면 만사형통 이라고 믿었던 이들도 생각난다. 자신을 지지하는 집단에만 최적화된, 인공지능으로 따지면 딥러닝 과정의 오버피팅(Overfitting)’을 연상케 한다. 오버피팅된 모델은 주어진 학습 데이터에는 엄청난 성능을 보이지만,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젬병이다. 가장 좋은 성능을 보여줄 하이퍼 파라미터를 찾고, 파라미터를 계산하는 인공지능의 지난한 학습 과정처럼 민주주의도 지루한 과정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도출해 내는 제도일 뿐이다. 정답은 있을 수 없다.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경향 2023.06.06.

 

 

우리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도시의 풍경을 바꾸는 높은 건물,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 공중을 달리는 다리. ‘건설하면 떠오르는 웅장하고 진취적인 이미지다. 그러나 건설하는 일에 대한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하는 일. 삶의 자리를 짓는 일은 일의 세계에 자리를 얻지 못하고, 아직 일의 자리에 닿지 못한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가다가 된다. 건설 현장은 법질서로 조직된 현대사회를 아직 따라오지 못하는 곳으로 연상되고, 누군가 건폭이라는 말을 던지면 그럴 법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건설현장에 법보다 폭력이 앞선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흔히 떠올리는 육체의 폭력이 아니라 자본의 폭력이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널리 이름이 알려진 건설사가 권력의 정점에 있다. 그들은 공사를 따내고 광고를 하는 일로 이윤을 올리고, 건물 짓는 일은 책임과 함께 하청업체로 떠넘긴다. 2022년 등록 건설업체 수는 94567. 한국에 그렇게 많다는 치킨집이나 편의점보다 많다. 이들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건설노동자의 임금을 떼어먹거나 공사기간을 맞추려고 안전조치를 무시하는 것 등이다. 법은 다단계 하도급을 금지하지만 자본은 건설현장에 법을 금지한다.

 

사회가 유지되는 원리를 정하는 것이 법이라면 건설현장에 법을 세워온 것은 건설노조다. 사람이 살아야 건물도 지어질 테니 안전화와 안전모를 지급하라는 요구부터 원청업체에 안전보건 책임을 묻는 입법 활동을 이어왔다. 사람은 비 오면 창고에 넣었다 아무 때나 꺼내 쓰는 기계가 아니니 노동시간과 휴식에 관한 기준을 정해야 했다. 공사를 마쳐야 돈을 줄 수 있다며 일부터 시키려고 할 때 정해진 기한 내 정해진 임금을 지급하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부실시공을 낳는 다단계 하도급을 정부가 방치할 때 건설노조는 재하도급의 동기를 차단해왔다. 더디게나마 건설산업 구조는 이윤보다 모두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순위에 놓도록 변화하고 있다. 세상을 건설하려니 새 세상까지 건설해야 했던, 건설노조의 역사다.

 

설계도가 있으면 편하련만 마땅치 않았다.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의 조항들은 건설산업의 특성에 딱 들어맞지 않아 건설노조는 스스로 길을 내야 했다. 무슨 일을 하든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감각에 기댈 뿐이었다. 정치인들이 구호로만 말하는 저녁이 있는 삶같은 것들.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의 평균 퇴근 시간은 다른 건설노동자보다 10분 이르다(2022년 건설근로자 종합생활실태조사). 수만명의 조합원이 수천일의 시간을 쌓아 만든 변화가 고작 10분이다. 하지만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내일을 위해 쉴 수도 있다는 걸 알아버린 사람들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 10분은 모든 건설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단축할 강력한 힘이 된다. 세상을 건설하는 일이 그렇듯 새 세상을 건설하는 일도 작은 몸짓이 차곡차곡 쌓여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만드는 일이다.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가 않네요.” 건설노동자 양회동이 제 몸에 불을 붙이며 남긴 말이 그의 것일 수만은 없다.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고 키우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고 법의 기능이라고 믿는다면, 온갖 국가기관을 동원해 새 세상을 무너뜨리려는 윤석열 정부는, 우리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면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말하는 자긍심은 존엄을 이루는 방법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 건물을 지어올릴 수 없다는 걸 아는, 서로 다른 수많은 노동들이 기어이 만나고 엮이며 무언가 이뤄내는 시간에 대한 감각. 존엄은 다 지어진 건물처럼 어느날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쌓아올리고 비뚤어진 곳을 바로잡고 때로는 부숴 다시 만들기도 하는, 촘촘하게 현재를 잇는 수고로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경향 2023.06.06.

 

비나이다 비나이다거짓 선동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둘러싼 공방은 한국 정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것이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1311일이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그리고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후쿠시마에서 유출될 수 있는 방사능을 비롯한 여러 위험물질에 대해 연구하고 대비하고 국제적 협력을 구해와야 했다. 말로는 성명도 내고 법안도 발의했다고 하지만 성과로 드러난 것은 실질적으로 제로라고 봐야 한다. 국제해양법재판소에 제소한다고 으름장을 놨던 문재인 정부도 슬그머니 접고 말았다.

 

그러던 중 20214월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뒤늦게 정치권이 열을 올리기 시작했고, 3월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사실 일본이 오염수 방류 발표를 2~3년 앞당겨서 문재인 정부 때 했더라면 공수만 뒤바뀌었지 싸움의 양상은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국이 이러고 있는 사이에 일본은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다.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 전 세계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문건이라면 아마도 이달 중에 발표될 국제원자력기구(IAEA) 태스크포스(TF)의 보고서일 것이다. 일본은 이 보고서가 발표되면 국제적인 검증을 통과했다고 간주하고, 올해 안에 방류를 시작할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일본은 20214월 오염수 방류 계획을 발표한 직후 IAEA에 객관적인 검증을 해달라고 먼저 요청했고, IAEA와 일본 정부는 같은 해 7월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2년 가까이 검증을 해왔다. 지금까지 다섯 차례의 중간보고서가 발표됐고, 6월에 발표될 보고서는 여섯번째가 될 것이다. 가장 최근 보고서는 지난달에 공개됐는데, 아직 최종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매우 호의적이다.

 

호의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첫째, 일본은 방류가 안전하고 투명하게 IAEA의 기준에 맞추어 진행될 예정이라며 그것을 검증해달라고 먼저 요청했다. 둘째, 일본의 원자력규제위원회(NRA)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적법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셋째, NRA는 향후 필요에 따라 방류와 관련된 여러 기준들을 IAEA와 협의하에 변경할 수 있다고 동의했다. 넷째, NRA는 방류 결정과 관련한 충분한 정보를 IAEA에 제공해왔다. 다섯째, NRA는 오염수에 존재하는 유해한 핵종의 존재를 모두 파악했고 특정 핵종을 제외하지 않았다. 여섯째, NRA는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평가를 지속하고 향후 필요에 따라 개선할 것을 약속했다 등이다. 일각에서는 IAEA가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더 공신력 있는 다른 기관을 찾을 수도 없고 지난 12년간 한국 정부가 대안적인 여론을 만들어온 것도 아니어서 현실적으로 의미 없는 주장이다.

 

IAEA 태스크포스에는 한국이 포함돼 있고,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6개월 만에 방사능에 오염된 물고기가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달했음이 밝혀진 바 있는 미국이 공개적으로 찬성했고 또 다른 당사국들인 태평양제도포럼과 주요 7개국(G7)도 찬성 입장을 내놓았다. 중국과 러시아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만 우리처럼 강력하지는 않고, 대만은 반대 입장이지만 후쿠시마산 수산물을 수입하고 있는 중이다. 잠재적 피해자인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 일본이 차곡차곡 국제사회를 설득해온 일이어서 이제 와서 이를 뒤집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여야 간 다툼은 점입가경이다. 그렇게 안전하면 오염수를 수입해서 대통령이 생수처럼 마시라는 주장은 태평양을 한 바퀴 돌아 5년 후에 우리 바다로 유입된다는 과학적 분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선동일 뿐이다. 대통령이 반드시 마셔야 한다면 지난 12년간 거쳐간 네 명의 대통령이 다 같이 모여 원샷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국민 눈에는 사법 리스크에 돈봉투에 코인까지 겹쳐 활로가 없는 민주당이 이번 일을 계기로 또 한 번의 촛불이 일어나지 않을까 비나이다 비나이다치성드리는 모습으로 비칠 뿐이다.

 

15년 전 광우병 촛불로 덴 적이 있는 여당은 혹시라도 또 델까 거짓 선동이라고 외칠 뿐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는 정보와 소통에는 무능하다. 위험에 대한 공포는 과학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경험을 뼈저리게 했음에도 말이다. 사태 해결의 본질과 무관한 이전투구를 하는 동안 방류를 향한 초침은 째깍째깍 흘러갈 뿐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23.06.06.

 

 

초등 의대반과 부모 해방일지

유치가 다 빠지지도 않은 어린이들이 오후 시간을 2차방정식, 피타고라스 정리, 복잡한 영어 구문과 씨름하며 보내고 있다. 10년 뒤의 의대 진학을 위해서다. 최근 한 방송국의 <의대 블랙홀>이라는 취재물에 따르면 요즘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의대 입시 준비를 위한 초등 의대반운영이 한창이다.

 

학원 관계자는 말한다. “특히 의대를 희망한다고 그럴 때는 4학년 때부터 무조건 시작해줘야 하는 거고요, 그러니까 초등에서부터. 이제 의대반이 더 밑으로 내려간 거죠.” 특목고 입시를 위한 초등반, 특정 대학 입시를 위한 중등반 정도야 오래된 이야기지만, 이렇게 특정 학과 입시를 위해 초등학생을 대놓고 모집하는 일은 한국 사교육의 역사에서 처음이지 않나 싶다.

 

한편 최근 방영된 다른 방송국의 다큐 <인도 천재>에서는 공대 입시를 위해 1인당 국민총소득의 두 배에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서라도 고등학생 자식을 명문 입시학원에 보내려고 하는 인도 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도 한때는 엔지니어를 꿈꾸는 전국의 수재들이 공대로 몰린 시기가 있었다.

 

초등 의대반열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꽤 충격적이긴 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과생들이 수능 성적 순으로 전국의 모든 의대를 다 채운 후에야 공대의 정원이 채워지기 시작한다는 소식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혀를 차는 이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의대냐 공대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심지어 중·고등반이냐 초등반이냐도 핵심은 아니다. 그보다도 초등 의대반현상의 배후에는 사회구조, 양극화, 입시 제도, 저출생 등의 더 본질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부모의 양육 방식이 자녀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리의 통념도 토론의 주제여야 한다. 왜냐하면 결국 부모의 의사결정 패턴이 초등 의대반같은 기현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주디스 리치 해리스(2018년 작고)를 소환해보자. 그녀는 아동 발달에 관한 전통적 견해에 수류탄을 던진 심리학자였다. 해리스는 <양육 가설>이라는 책에서 부모의 양육 방식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가정(양육 가설)은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대신 자녀의 또래 집단과 유전적 성향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여전히 논란 중이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그녀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여러 분야에서 축적되었다. 적어도 그녀의 도발 이후에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영향력에 관한 믿음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부모보다 또래에 더 큰 영향 받아

가령 행동유전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쌍둥이 연구는 떨어져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가 행동, 성격, 삶의 결과 등에서 현저한 유사성을 보였다며 강력한 유전적 요소가 있음을 입증했다. 또한 발달심리학과 사회학 분야에서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또래 집단의 영향력이 커지며 부모보다는 친구의 말투, 행동,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들이 입증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작금의 초등 의대반현상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부모의 선택과 투자를 통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전통적 견해를 깊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는 여전히 부모의 영향력을 과장하고 또래 집단의 영향과 자녀의 유전적 소인을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명확히 해야 할 점은 적어도 한국의 부모는 자녀의 주변 환경뿐만 아니라 또래 집단에 대해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네 부모들은 자녀를 고급 수학 수업에 등록시킴으로써 최신 게임이나 아이돌 문화에 휩쓸리는 대신 고급의 수학적 개념과 진로 지향적 학습에 집중할 수 있게끔 전문화된 또래 집단 환경을 조기에 조성하려고 애쓴다. 언뜻 보면 특수한 또래 집단을 만들어주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부모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부모들이 가장 크게 실수하고 있는 부분은 그들이 지나칠 정도로 자녀의 환경과 그에 따른 또래 집단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고급 수학 입시학원에 밀어넣는 일은 해리스의 통찰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해리스가 말하려는 바는 우선적으로 자녀의 인격 형성에 부모의 역할이 크지 않으며 그에 비해 또래 집단이 중요하다는 것이지, 또래 집단을 특수하게 설계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녀의 또래 집단을 학업 성취자들로만 채우려는 부모는 자녀의 사회적, 심리적 성장에 필수적인 측면인 상호작용의 다양성을 간과하고 있다. 어린이는 다양한 경험과 상호작용을 통해 공감, 갈등 해결, 그 밖의 중요한 사회적 기술을 배운다. 아동복지 전문가들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아이들이 겪는 부정적 경험은 부모보다도 또래로부터 더 많이 온다는 점이다. 유년기의 가장 치명적 고통은 또래들 사이의 갈등과 괴롭힘이다. 이런 맥락에서 초등 의대반의 부모들이 자녀의 환경을 학업 성취에만 집중한다면 아이들은 필수적인 사회적 기술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자녀에 영혼의 집까지 줄 수 없다

한편 초등 의대반입시 교육은 해리스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유전적 요인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부모들은 조기에 집중적인 학업 훈련을 받는 것이 반드시 미래의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아이들의 유전적 소인의 역할을 간과한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신체적 특징을 물려받는 것처럼 다양한 적성과 성향도 물려받는다. 모든 아이들이 경쟁이 치열한 학업 환경에서 성공하거나 의학과 같은 분야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성향을 지닌 것은 아니다. 자녀에게 유전적 성향과 맞지 않은 길을 강요하면 불만과 성과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라는 말인가? 맹모삼천지교도 아니라면 말이다.

우선, 자녀의 환경에 대한 부모의 극단적 통제나 또래 집단에 대한 강압적 선택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해리스의 이론은 부모가 자신의 영향력 한계와 자녀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그리고 통제해야 하는 범위)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성공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재고해야 한다. 의사와 같은 명망 있는 직업이라는 단일한 렌즈를 통해 성취를 바라보는 대신, 다양한 열정, 재능, 경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예술가, 사회복지사, 데이터 과학자, 농부 등 각 직업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사회 구조에도 크게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자녀의 인생에서 부모는 한발 물러설 필요가 있다. 이런 제안은 당위적 차원의 당부가 아니다. 오히려 사실에 근거한 냉정한 제안이다. 부모는 자녀의 인생에 큰 영향력이 없다. 관련 연구들에서 말하는바, 부모가 악보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교향곡을 만드는 것은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세심한 건축가라기보다는 자상한 정원사와 비슷하다. 영양분을 제공하되 자연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의 시집 <예언자>에 수록되어 있는 아이들에 대하여는 부모 해방 일지다. 자녀에 대해 불안과 자책이 느껴질 때마다 읊조리자.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말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그대는 활, 그리고 그대의 아이들은 마치 살아있는 화살처럼/ 그대로부터 쏘아져 앞으로 나아간다/ (하략).”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학장) 경향 2023.06.06.

 

신념과 아집의 혼동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경제적인 편익과 비용을 비교해서 행동한다는 건 협소하고 건조하다는 비판을 들을지언정 가정치고는 과히 나쁘지 않다. 꽤나 많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만큼 인간의 행동을 잘 설명하는 건 자기합리화이다. 자기합리화를 잘 묘사해주는 것은 영화에 나오는 불법 무기상의 대사이다. “자동차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지 알아? 사람들이 자동차를 팔지 않으면 나도 무기 안 팔아. 적어도 내 총은 안전장치라도 있어.”

 

자신의 행동을 사후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 자기합리화인데 이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럴듯한 논리를 개발해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도 하고, 뭔가 책임이 필요한 행동에는 자기합리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합리적인 듯 보이는 이유가 있어야 본인이 책임을 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좋게 생각하면 적당한 자기합리화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다. 듣는 사람이야 , 저 인간은 왜 또 저렇게 억지를 부리나짜증나겠지만 자신의 모든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 피곤해서 못 산다. 그러나 이게 적정선을 넘어서면 사회적 피해는 생각보다 크다. 자신의 행동과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우기기 시작하면 집착에 가까운 자기합리화가 잇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합리화와 권력이 합쳐지면 무서운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드는 집단을 찍어내는 것이다.

 

현 정권의 표적 중에는 노조·시민단체가 있고,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기득권화, 내로남불 등이다. 그런데 어떻게 노조·시민단체가 30년 전만큼 순수할 수 있겠나? 군사정권 이후 진보가 정권을 세 번 잡았는데 거기에 그들이 참여했다. 거리에서 시위만 하는 게 평생의 업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거쳤어야 할 현실정치 참여의 과정이었고 그 와중에 권력과의 네트워크도 형성되었다. 오해는 마시길 바란다. 마구잡이로 그들을 방어하자는 것도 아니고 국민의 돈을 허투루 썼다면 그만큼의 책임을 지면 된다. 또 검찰 등을 통해 상대방을 찍어내는 악습에는 그동안 과하게 고소·고발에 기댄 노조·시민단체의 책임도 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겉으로 드러내는 이성적 이유가 항상 진실을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끼리끼리 네트워크의 중요성에 누구보다도 목숨 거는, 현실에 닳고 닳은 현 정권의 정치인들이 노조·시민단체를 향해 초심을 찾아 순수하게 사회를 바꾸라고 훈계를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닐 것이다.

 

인간 행동의 내면에는 자존심·콤플렉스·질투·멸시라는 감정이 있다. 현 정권의 노조·시민단체에 대한 분노와 청산의 감정이 걱정된다. 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는 주사파 빨갱이라서 싫은 건 적어도 전쟁의 아픈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세대의 감정일 테니 현 정권 핵심의 마인드는 아닐 것이다. 그럼 순수함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너무 실망해서? 노조·시민단체 등과 동시대를 살아오면서 같이 못해 미안했고 심정적인 지지를 했으나, 이제 기득권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반감을 가지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현 정권은 끊임없이 이용할 뿐이다. 현 정권 핵심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기대를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애초부터 세상은 살 만했고 노조·시민단체는 자기보다 못난 비딱한 집단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이런 자신들의 생각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능력도 안 되는 것들이 권력을 잡더니 꼴값을 떨었다고 말이다.

 

자기합리화가 남들에게 들키기 쉬운 이유는 무리한 논리를 끌어오기 때문이다. 노조·시민단체가 무오류 집단도 아니지만 이들을 때려잡지 않으면 한국 사회의 미래가 없다는 논리는 당황스럽다. 하나만 보자. 미국 경제성장 최전성기인 1940~1960년대에 노조가입률은 30%를 웃돌았으나 계속 떨어져 200014%, 2021년에 10.4%이다. 한국은 197725.4%에서 2000년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10% 언저리이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미국 및 선진국의 생산성 정체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정체의 원인을 찾아 경제학자들은 여러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노조는 핵심이 아니다. 국가 운영에 있어 언어는 정확하고 근거는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현 정권은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지 않고 선의와 아집을 혼동하고 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자존심은 강하나 책임은 회피해야 하는 집단은 아집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십상이다. 내년 총선에 사활을 걸었지만,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 2년차 집권 여당이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 경향 2023.06.07.

 

 

대화에 열려 있는 팬덤은 가능한가

한국은 정당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다. 양적 규모로만 보면 그렇다. 202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각 정당이 보고한 ‘2021년도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보고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485만여명, 국민의힘 407만여명, 정의당 5만여명 등 전체 당원 수는 1042만여명에 달했다. 대중 정당의 역사가 100년이 훨씬 넘는 영국·독일 등은 당원이 100만명이 안 되고 감소 추세인데 한국은 1000만 당원으로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당원인 나라가 되었으니, 이 어찌 놀랄 일이 아니랴.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최근 국회미래연구원이 공개한 <만들어진 당원: 우리는 어떻게 1천만 당원을 가진 나라가 되었나>란 제목의 보고서는 1000만 당원의 비밀을 “80%에 달하는 자신이 당원인지조차 모르는 유령 당원’” “각종 공직 후보자들에 의해 매집된 당원’” “대통령 후보자 등 특정 팬덤 리더를 위해 당을 지배하려는 당원’” 3가지 유형으로 분석했다.

 

이 세 번째 유형의 당원이 가장 중요하다. 보고서를 공동 작성한 거버넌스그룹 연구위원 박상훈은 여야가 참여를 명분으로 온라인 투표 등 개방형 경선을 도입한 뒤 10~20만명 상당의 팬덤 당원만 있으면 당권은 물론 대선 후보가 될 수 있게 됐다포퓰리스트만 승자가 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윤왕희는 기성 정당이 중앙당만 있고 당원 기반은 취약해 외부 팬덤 세력의 포획(hijacking)이 쉬웠다지역 풀뿌리 정당이 생겨나도록 정당법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자 정효식이 중앙일보 202352일자에 쓴 1면 머리기사의 핵심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가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을 잘 포착한 기사다. 어떤 위기인가? ‘1% 법칙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 법칙은 처음엔 웹사이트의 콘텐츠 창출자는 전체 이용자의 1%라는 사실에서 출발했지만, 이젠 어느 분야에서건 꼭 1%가 아니더라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전체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걸 가리켜 ‘1% 법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치는 그런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드려야 할 일도 많지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비판하거나 사정해야 할 일도 있다. ‘팬덤 정치가 바로 후자의 경우로 지목되어 뜨거운 논쟁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0~20만명 상당의 팬덤 당원은 전체 인구의 0.2~0.4%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현재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실세로 군림하고 있다. 이 당원들에겐 일단 감사드리는 게 옳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대중의 능동적인 참여에 있건만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투표를 제외하곤 참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

 

팬덤 당원이 정당 민주주의 실세

민주주의 체제에 사는 시민들은 어렸을 때부터 참여는 아름답거니와 신성하다는 교육을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받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팬덤으로 불릴 정도로 열성적인 당원의 자긍심은 매우 강하다. 참여를 하지 않는 시민과 비교해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 나머지 독선과 오만으로 치닫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일부 강성 당원들은 자신들이 반대하는 의원들을 모욕하고 공식 행사 참석을 물리적으로 저지하고 대화조차 거부하는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강성 당원들이 추앙하는 의원들이 그걸 즐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극 개입해 그런 폭력성을 없애려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넘어가는 정당의 전반적인 행태가 기가 막히다. 도대체 어쩌다가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가 이 지경이 됐을까?

 

정치인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팬덤 옹호론을 펴고 있는 민주당 의원 정청래의 이론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그는 이미 7년 전 <정청래의 국회의원 사용법>(2016)에서 국회의원을 움직이는 최고 단위 정치 행위는 팬클럽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20226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팬덤 정치와의 결별을 주장하는 당내 의원들을 향해 팬덤은 무죄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정치인이 문제라며 팬덤을 욕할 시간에 왜 나는 팬덤이 형성되지 않는가 성찰해 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의원들도 이재명을 응원하는 팬덤이 부러우면 이재명처럼 실력을 연마하고 지지받을 생각을 해야 한다괜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이재명을 응원하는 국민과 당원을 향해 눈 흘기지 마시라고 했다.

 

이런 식의 논법은 곤란하다.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일지라도 이성적인 비판을 시기·질투의 산물로 몰아가는 건 과거 보수가 진보를 비판하던 전형적인 수법이 아닌가. 그가 강조하는 실력의 정체도 궁금하다. 민주당 의원들 중 누가 더 많은 팬을 갖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10’을 뽑아보자. 그건 순전히 실력 순인가? 실력이라면, 어떤 실력인가? 팬들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증오·혐오의 선동과는 전혀 무관한 실력인가?

 

정치인 팬덤 원동력은 증오·혐오

말이라는 게 다르고 다른 법이다. 정청래가 문재인 청와대의 행정관 출신인 섀도우캐비닛 대표 김경미처럼 생산적인 화두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떨치기 어렵다. 김경미는 비명계에 던지는 차가운 질문들이라는 제목의 한국일보(2023531일자) 칼럼에서 비명계의 비판이 타당한 면이 많음에도, 비명계가 개딸 탓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라면서 몇 개의 질문을 던진 후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친명계가 개딸들의 열정 뒤에 숨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내는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면, 비명계 역시 개딸들의 다소 과격한 활동 뒤에 숨어 자신들의 비전에 동의하고 이를 함께 실현해나갈 것을 결의하는 시민들을 조직해내는 조직가로서의 역할을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친명계가 개딸로 대표되는 시민들의 정치적 열정을 남용 혹은 오용하고 있다면, 비명계는 시민들의 정치적 열정을 조직화해내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맞다. 분명히 그런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적 열정의 조직화에 포퓰리즘이나 포퓰리즘에 가까운 정치적 담론이 미치는 영향이다.

 

포퓰리즘에 취약한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의 시대에 포퓰리즘을 거부하는 사람이나 세력이 포퓰리즘에 친화적인 사람이나 세력과 공정하게 경쟁하는 게 가능할까? 상대편에 대한 증오·혐오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지 않을까?

 

우리는 정치인 팬덤을 연예인 팬덤과 비슷한 팬덤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둘은 속성이 다르다. 연예인 팬덤이 특정 연예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정치인 팬덤도 특정 정치인을 사랑한다. 그러나 둘은 사랑의 목적과 수단에 있어서 다르다. 연예인 팬덤은 연예인을 사랑하며 그게 바로 팬덤의 목적이자 수단이지만, 정치인 팬덤에게 정치인에 대한 사랑은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다. 정치인 팬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증오·혐오이며, 그 실현을 위한 매개체로서 정치인을 사랑할 뿐이다.

 

당신은 특정 정치인의 팬이거나 팬에 가까운 지지자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자답해 보시라. 당신이 지지의 이유로 내세운 가치의 실현은 증오·혐오와 무관한가? 그럴 수는 없다.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를 권력의 자리에서 밀어내야만 한다. 그런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동력이 바로 증오·혐오다. 당신은 스스로 선하고 정의롭다고 확신하지만, 당신들의 선과 정의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선 선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은 언행을 보인다.

 

그런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나는 증오·혐오의 선동과는 거리를 둔 정치적 열정의 조직화도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런 점에서 김경미의 주장을 지지한다. 미국 언론인 맷 타이비는 <우리는 증오를 팝니다>라는 책에서 우리는 정치란 타협을 수반할 수 있거나 수반해야 하는 행위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하는 세대를 키웠다우리는 독자와 시청자 대신 팬을 길들이고 있었다고 했다.

 

우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증오·혐오의 감정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마저 거부하면서 드러내는 폭력성은 곤란하다. 대화와 타협에 열려 있는 팬덤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반드시 풀어야 할 우리 모두의 숙제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경향 2023.06.07.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모호한 말

시장에 맡겨야 한다.”

경제가 삐걱댈 때마다 전문가들이 애용하는 조언이다. 시장에 비시장적인 것이 개입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시간을 주면 시장이 자율적으로 해결한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그런데 이 조언을 따랐다가 문제가 악화하면 경제전문가들은 이제 정부의 무책임함과 나태함을 나무란다. 시장의 요구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해 시장이 위기에 빠졌으니 시장을 구하라고 한다. 이런 때는 보통 수천억원 이상의 나랏돈이 필요하다. 납세자 입장에서는 그놈의 시장이 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고 뺨 맞고 돈만 내주는 꼴이니, 참으로 난감하다.

 

시장에 대한 이런 오락가락하는 태도는 경제학의 태초부터 있었다.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수많은 시장행위자가 자신의 이익을 좇아 치열하게 경쟁하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하다. 천 페이지가 넘는 <국부론>에 단 한번 언급됐지만 그 파급력은 유례없이 컸다.

 

그런데 스미스는 같은 책에서 시장에 짙게 드리워진 기업의 반경쟁적 경향을 경고했다. 말하자면 보이는 손인데, 워낙 은밀해서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목소리를 내야 제 몫을 받아가는 노동자의 처지와 비교된다. 그래서 스미스는 노동자들의 단합에 관해서는 자주 듣게 되지만 고용주들의 연합에 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하는데 그건 이 연합이 ()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는 법이 노동자의 연합은 금지하면서도 고용주의 연합은 허가하거나 적어도 금지하지는 않는다고 쏘아붙였다. 이런 경우 일부 그룹의 이익만 늘어날 뿐, 시장은 비효율적이다.

 

결국 시장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 손보이는 손의 끊임없는 충돌이고, 시장의 효율성은 이 충돌의 해결 여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경제학의 아버지가 뭐라고 했든, 경제학의 후손들은 대체로 보이지 않는 손의 세계에 집중했다. 시장에서 어느 누구도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이른바 완전경쟁 상황을 가정하고 분석과 조언을 쏟아냈다. 이런 모델에서는 고용도 완전해서 원하는 사람은 모두 일할 수 있다. 일자리가 없다면 그 이유는 자신의 생산성보다 높은 임금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네 탓이다.

 

이런 접근은 물론 분석적 편의성의 소산이기도 하나, 심각한 정책적 편의성을 내재하고 있다. 보통 시장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할 때, 그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의 세계를 전제한다. 따라서 보이는 손이 넘치는 현실에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를 적용하게 되면, 반경쟁적 기업들은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시장만 남게 된다. , ‘시장이라는 모호한 말 뒤로 반시장적이고 비효율적인 행위가 숨겨진다. 심지어 기업들의 잘못을 따지면 시장을 억압하는 것이 되고, “보이지 않는 손을 회복하려는 조치들에는 반시장적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런 모호성이 극대화되는 곳이 바로 노동시장이다.

 

흥미롭게도 요즘 수요독점이라는 개념을 통해 노동시장의 보이는 손에 대한 연구가 성황이다. 수요독점은 제한된 그룹의 기업들이 일자리를 지배(예컨대 광산촌)하고 있거나 노동자가 다른 일자리로 옮겨가기 힘든 상황(예컨대 육아 책임을 진 여성노동자)에서 생긴다. 완전경쟁 상황에서는 고용주가 노동자의 생산기여분만큼 임금을 지불하는데, 수요독점 상황이라면 고용주는 생산기여분보다 적게 주면서 노동자가 계속 일하게 할 수 있다. 또한 고용수요를 늘리면 임금이 인상될 수 있기 때문에 고용을 최적 수준 이하로 유지한다. 고용주가 이렇게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활용해 임금과 고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면, 전체 노동시장은 비효율적이고 불공정해진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용전망보고서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실증연구는 보이는 손의 광범위한 존재를 보여준다. 어느 나라에나 있고, 제조업에도 서비스업에도 있다. 2022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발표된 연구는 수요독점 현상 때문에 미국 제조업체는 노동자 생산기여분의 65%만을 임금으로 지불한다고 추정했다. 고용도 수요독점이 없는 상황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임금과 고용에서 노동자가 손실을 보는 만큼, 기업의 이득은 커졌다. 돌봄의무나 차별적 관행 등으로 노동시장 제약이 훨씬 큰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이런 손실은 더 심각했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한국노동연구원 홍민기의 연구를 보면, 한국의 수요독점력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다. 수요독점이 높아질수록 노동소득분배율이 줄어들어 전반적인 소득분배가 악화한다는 점도 확인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플랫폼 노동이다. 통상 플랫폼이라고 하면 무수한 수요자가 무수한 공급자를 만나는 완전경쟁시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몇년 전 미국의 대표적인 플랫폼 시장을 분석했던 연구를 보면, 플랫폼의 수요독점은 예상외로 높아서 10%에 이르는 수요자가 시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노동공급자의 수입은 자신의 생산기여분보다 13% 정도 모자라는 것으로 추정됐다.

 

그래서 노동시장 연구의 대가인 데이비드 카드는 시장이 임금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더이상 타당하지 않고 고용주가 임금을 결정한다고 단언했다. 시장이라는 모호한 말 뒤에 숨어 있는 고용주를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얘기다. 임금이 수많은 경제 문제의 원인이라는 편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론은 역설적이다. 수요독점을 타파하여 노동시장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은 곧 노동자가 자신의 기여분만큼 공정하게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오이시디 보고서는 수요독점의 해법으로 단체임금협상과 최저임금을 제시했다. 특히 최저임금이 효과적으로 운영될 경우, 수요독점기업들은 생산기여분 이하로 임금을 지불해 이윤을 늘리기보다 주어진 임금에서 고용을 확대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최저임금 덕분에 임금은 늘고 고용은 유지되거나 늘어난다는 수많은 실증연구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반시장적이라고 비난받기도 하는 최저임금이 시장의 효율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제도인 셈이다. 그래서 시장에만 맡기자는 말은 모호하고, 때로는 무책임하다.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한겨레 2023.06.07.

 

 

윤 대통령의 법치주의가 수상한 이유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노동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노동 개혁의 출발점은 노사 법치주의라고 했다. 노사 법치주의야말로 불필요한 쟁의와 갈등을 예방하고 진정으로 노동의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일리는 있어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23일 국무회의에서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서울 도심 집회를 콕 집어서 강하게 비판했다.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타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공공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까지 정당화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했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일리는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 뒤는 이상했다. “과거 (문재인) 정부가 불법 집회, 불법 시위에 대해서도 법 집행 발동을 사실상 포기한 결과, 확성기 소음, 도로 점거 등 국민이 불편을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그런가? 경찰이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법 집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까지 전임자를 탓하고 있다. 어쨌든 대통령의 준엄한지시는 즉시 위력을 발휘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531일 민주노총 집회를 앞두고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열린 경비대책회의에 기동복을 입고 나타났다. 캡사이신(최루액)을 현장 지휘관 판단으로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이태원 참사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경찰의 진압 방식도 확 달라졌다. 민주노총이 설치한 고 양회동씨 분향소를 곧바로 철거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며 저항하던 김준영 금속노련 사무처장 머리를 진압봉으로 때려서 연행했다. 경찰의 진압이 지나쳤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명백한 불법을 경찰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현장 판단과 매뉴얼에 따라 단호하면서도 냉정하게 법을 집행하면 된다. 고도로 훈련된 경찰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경찰관도 사람이다. 대통령이나 경찰청장이 이런 식으로 자꾸 몰아붙이면 사고가 날 위험이 점점 커진다. 경찰관들도 위험해진다. 걱정이다. 경찰의 진압은 그렇다고 치자. 윤석열 대통령이 공언했던 노동 개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노동 개혁은 노··정의 대화와 합의, 그리고 국회 입법이 필요하다.

 

한국노총은 7일 긴급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중단을 결정했다. 75개월 만에 사회적 대화 기구의 문이 닫힌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묘수가 있을까? 없는 것 같다. 정부·여당은 별로 걱정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이쯤 되니 노동 개혁의 출발점은 노사 법치주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가 진심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혹시 처음부터 노조에 대한 정서적 반감과 노-노 갈등을 이용해서 지지층을 결집하고 내년 총선에서 이기려는 선거 전술 아니었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두달 남은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을 면직했다. “지휘·감독 책임이 있고, 본인이 직접 중대 범죄를 저질러 형사 소추되는 등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명분이다. 역시 법대로논리다.

 

면직 처분이 법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는 법원에 의해 곧 가려질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2020년 검찰총장 시절 법무부의 정직 2개월 징계에 대해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해서 인용 결정을 받아낸 일이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별 실익이 없는 면직을 도대체 왜 했는지 의문이다. 해답은 후임자 인선에 있는 것 같다. 윤석열 대선후보 선대위에서 미디어소통 특별위원장을 지낸 이동관 대외협력특보가 방송통신위원장 후임으로 거론되고 있다. 사실이라면 독립적 운영이 가장 중요한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에 대통령 특보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의심스럽다. 결국 한상혁 위원장 면직도 방송을 서둘러 장악하기 위한 정지 작업 아니었을까?

 

법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이다. 법 없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지만, 법만으로 공동체가 유지될 수도 없다.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경찰청장이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은 정치인이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다. 법치에 머물면 안 된다. 비전을 제시하고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과제다. 가능할까?

성한용 | 정치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3.06.07.

 

 

인구절벽과 비수도권 대학 구조조정

지방대학의 대량 폐교가 코앞에 닥치자 교육부는 라이즈(RISE) 사업글로컬(Glocal) 대학이란 두 가지 대학 구조조정 전략을 내놓았다. ‘라이즈 사업은 기존에 별개 사업으로 진행되던 네 개의 지역혁신형 대학 재정지원 사업들을 연계·통합하고 그중 50%를 지자체가 시행 주체가 되도록 변형한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 사업이다. ‘글로컬 대학이란 비수도권 지역의 우수 대학 30곳을 선정해 향후 5년간 1000억원씩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벌써 라이즈 사업에 7개 광역시·도가 시범 선정됐고, 글로컬 대학 사업에도 100개가 넘는 대학들이 신청서를 제출했다.

 

원칙적으로 중앙정부 일변도의 대학교육의 거버넌스를 광역시·도가 주도하도록 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지금까지 대학들은 교육부의 획일적 사업 기준을 맞추느라 지역 적합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라이즈 사업의 목적이 광역 지자체에 고등교육 재정사업권을 부여하겠다는 점에서 볼 때, 지금부터라도 광역시·도별로 지자체와 대학, 주민과 산업체가 함께하는 협치적 교육자치가 가능하다면 구태여 여기에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간에 현재 교육부는 시·도 지자체들을 서로 경쟁시키면서 그들의 기준과 관점에 맞는 시·도를 시범 지역으로 선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도 지자체들은 다시 한번 교육부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놓고 눈치를 보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처음부터 산업-대학 연관 생태계 구도에 따른 광역 고등교육 권역을 구분한 후 일정 비율의 고등교육 예산을 일괄적으로 이양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지자체가 대학을 관리해 본 경험이 부족할 테니 전체 광역시·도에 대해 단계적인 역량 강화와 인큐베이팅 시범사업을 실시하면 될 일이다.

 

반면, 이와 함께 실시되고 있는 글로컬 대학 사업은 사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5년 동안 1000억원이라는 예산을 한꺼번에 퍼붓는 방식은 비유컨대 단비를 기다리다가 폭우를 맞는 형국이 될 수 있다. 학생은 부족한데 학교는 때아닌 돈잔치를 벌여야 하게 되며, 방만한 지출과 예산 낭비는 불 보듯 뻔하다.

 

게다가 이러한 대규모 재정지원사업의 대상이 대부분 사립대학이라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사립대학들은 기본적으로 개별 기업처럼 각자도생을 위해 노력하며, 공공성 차원에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며 교류하는 공동재로서의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 그래서 한국의 대학들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개별 대학들만 존재할 뿐, 통합된 형태의 입학방식, 대학 간 학생 이동, 공동 수업 및 연구 등을 활성화할 수 있는 통합된 고등교육 생태시스템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 재정보조금을 대학의 공공 거버넌스 체계를 확장하는 마중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사립대학들이 이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사립대로서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거버넌스 차원에서 준공립대학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또한 예산 지원이 끝나는 5년 후에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평가 장치를 갖춰야 한다. 과연 5년 후에는 교육부가 기대하는 글로벌 수준의 로컬 대학들의 기초가 다져질까? 혹은 입학자원 고갈의 태풍을 피한 30개의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들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파산선고를 기다리는 상황만 남게 될까? 그 결과에 대해 교육부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업의 주 타깃이 되는 지역대학 입학 가능 인구 가운데는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86세대를 비롯한 곧 노동시장에서 밀려날 40·50대들도 포함돼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청년층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그 지역에 남아 있을 정주민들이며, 은퇴 후에도 다시 노동시장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진행돼온 대학의 평생교육 체제 지원사업(LIFE)’은 대학과 평생학습을 연계하면서 중장년층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던 시도였다. 이것이 앞으로 라이즈 사업과 글로컬 대학 사업 속에 통합되더라도 이들에 대한 관심이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

 

참고로 올해 교육부의 전체 교육예산 96조원은 각각 유초중등교육에 84.5%, 고등교육에 14%가 배정돼 있지만 평생 직업교육에는 단지 1.5%만 배정돼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25세 이상 성인 인구에게 투자되는 공적 교육예산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다. 올해부터 신설된 고등평생교육지원 특별회계를 포함해 라이즈 사업과 글로컬 대학 사업이 이들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경향 2023.06.08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이승만은 자신이 하와이에서 발행하던 태평양잡지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글을 게재했다(19233월호). 당시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희망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 지식인들도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 비판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먼저 양반, 상놈 하는 신분제가 없어진 자리를 자본가-노동자 간의 빈부격차가 대신해버린 세태를 비판하며, 공산주의의 평등 주장을 일단 평가했다. 그러나 재산을 나눠 갖게 되면 소수의 부지런한 사람이 다수의 게으른 사람을 먹여 살리게 될 것이고, 자본가를 없애버리면 혁신과 진보는 중지될 것이며, 보통 사람의 학식을 높여 지식인과 대등하게 만들어야지 지식인을 아예 없애자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등의 이유를 대며 공산주의의 부당성을 갈파했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며 공산주의자와 소련을 경계했다(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그의 반공주의는 철두철미하여 해방 후 정국을 주도할 때는 공산주의자들은 콜레라와 같다”(방송연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고 했고, 미국인들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투쟁에 있어서는 중립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훈계(?)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 대해 온건했던 하지 미군정 사령관이나 미국 국무부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 이런 투철한 반공주의는 이승만만 갖고 있었던 게 아니다. 당시 일본의 정치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는 극동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남긴 유서에서 미국을 향해 일본이 적화되지 않도록 부탁한다. 미국 지도자는 커다란 실수를 범했다. 일본이라는 적화의 방벽을 파괴했다. 지금 만주는 적화의 근거지다. 조선을 양분한 것은 동아의 화근이다라고 썼다. 미국은 그 후 소련에 대한 협조주의를 바꿔 일본을 적화의 방벽으로 재건하는 쪽으로 선회했으니(이른바 역코스’), 도조의 충고가 먹힌 것일까.

 

당시 일본 보수 정치가의 반공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고노에 상주문일 것이다.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태평양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 진주만 기습 한 달 반 전 퇴진했다. 그는 그 후 패전을 예견하고 가능하면 빨리 미국과 강화를 맺으려는 활동에 들어갔다. 19452월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히로히토 일왕을 만나 상주문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그는 먼저 국체호지(일왕제 유지)의 관점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최악의 사태(패전을 의미)보다도 이에 수반해 일어날 공산혁명이라고 단언한다. 이어 현재 전 세계가 공산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며, 유고의 티토 정권을 비롯해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핀란드 등 동유럽의 공산화 움직임을 우려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인식과 흡사하다. 심지어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확산되는 공산세력과 소련의 지원도 주시했다. 이어 국내로 눈을 돌려 현재 강화를 반대하고 승산 없는 전쟁을 계속하려는 군부의 일부 세력은 사실은 패전의 혼란을 노려 공산혁명을 일으키려는 속셈이라고 주장했다. 훗날 일왕 측근은 이런 특이한 주장에 히로히토도 놀란 모습이었다고 술회했다.

 

고노에는 미군이 체포하려 하자 음독자살했다. 도조는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쳐 재판 끝에 사형에 처해졌다. 반면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을 뿐 아니라 미적거리는 미국을 몰아세워 한·미 동맹을 체결했다. 그들의 운명은 판이했지만 당시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강력했던 동아시아 보수 정치가들의 반공주의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경향 2023.06.08.

 

진보는 보조금으로 오지 않는다

지난해 정부가 전수조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이달 4일 대통령실은 비영리 민간단체 보조금 감사 결과를 발표했고, 다음날 윤석열 대통령은 보조금 비리에 대한 단죄와 환수 조치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비영리 민간단체에는 물론 시민단체가 포함돼 있다.

 

정부는 314억원 수준의 부정 사용을 적발했다면서 처벌에 중점을 둔 대규모 개선방안을 나열했다. 적발된 단체는 향후 5년간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배제하며, 부정하게 수령 및 집행된 보조금은 전액 환수하고, 심각한 사안은 고발 및 수사의뢰하겠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보다 선제적인 규제책도 발표했다. 앞으로 선심성 사업은 구조조정될 것이며, 내년도 민간단체 지원 예산을 5천억원 이상 삭감하고, 회계감사 대상 역시 확대하겠다는 것이 그 뼈대다. 심지어 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감시와 신고를 활성화하기 위해 포상금 제도를 확대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제 정부 비판적 사업은 설령 그 비판이 정당하거나 필요한 것일지라도 보조금이 끊길까, 혹은 신고당할까 두려워 애초에 추진되지 못할 수 있다. 5년 동안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타격인가? “고발과 단죄의 엄포 앞에 당장 시급한 사업이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밀려날 수도 있는 일이다. 반면 정부 정책기조에 발맞춘 사업은 우선해서 보조금을 지원받게 될 것이다. 이번 발표로 시민사회의 경직이 우려되는 이유다.

 

물론 민간단체의 보조금 부정 사용은 반드시 뿌리뽑아야 하며, 보조금이 이권 추구에 활용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시민단체 전체를 범죄집단으로 매도하거나 시민사회 영역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부추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민의힘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민단체가 아니라 범죄단체” “국고 탈취범들의 모임” “가짜 엔지오(NGO)”와 같은 자극적인 표현들을 쏟아냈고, 특정 진보성향 단체를 겨냥해 본격적인 수사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권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집단을 폭도”, “약탈과 같은 용어를 써서 범죄자로 호명함으로써 현 정권은 비판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결국 건설적 비판과 견제 세력마저 위법이라는 공격 앞에 크게 위축될 것이다.

 

미국의 비판 이론가 딜런 로드리게즈는 신자유주의적 복지서비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종 보조금에 기대게 된 시민사회가 처한 현실을 당근과 채찍이라는 비유로 표현했다. 정부, 기업, 비영리재단의 중점 과제에 걸맞은 사업을 해내며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숫자를 뽑아내는 단체들은 각종 보조금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물적 지원이라는 당근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어떤 시민단체는 주류가 되기도 하고 기득권과 친밀하게 결탁하기도 한다. 반면 현 사회체제에 내재해 있는 구조적 한계를 전면에 드러내고 보다 발본적인 변혁을 부르짖는 단체들은 사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처벌당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운동의 범죄화라는 채찍이다.

 

이처럼 당근과 채찍전략을 적절히 배분함으로써 정부가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 바로 사회운동의 테두리를 규정짓는 것이다. , 기득권의 선호에 맞춰 시민단체의 활동 범위가 결정된다. 시민사회의 진보적 역량은 재정지원 대상인지 아닌지 여부에 따라 구획되고, 활동가들은 사업계획서와 공모전 응모에 최적화된 프로가 된다. 한정된 자원과 각박한 환경 속에서 시민단체들은 결국 지원금과 법제의 제약 앞에 타협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 변화를 가능케 할 혁신적 사유들은 보조금 앞에서 뒤로 밀려나고,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한 밑바닥의 실천들은 우선순위에서 탈락한다. 사회운동은 협소한 스펙트럼 안에서 부족한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게 된다.

 

그래서 시민사회를 구할 것은 우리뿐이다. 시민단체의 생존이 당근과 채찍에 결판나지 않으려면 풀뿌리로부터 자원이 모여야 한다. 보조금에 기대지 않고 사회운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힘은 오직 평범한 사람들의 참여뿐이다. 소액이더라도 다수의 풀뿌리 후원이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는 전망이 있을 때 사회운동은 변절하지 않고 뚝심 있게 지속될 수 있으며, 그 활동기반을 두려움 없이 단단하게 다질 수 있다. 진보는 보조금으로 오지 않는다. 지금 당장 어려움에 처한 시민단체를 찾고 소액 후원을 시작하자.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한겨레 2023.06.08.

 

 

'개딸', '전광훈'에 끌려가는 한국정치, 무당층의 선택은?

프랑스 공화당·사회당 공멸 교훈 되새겨야

"부동층이 당락 가를 듯", "중도 확장 전략 모색".

 

선거 때가 되면 종종 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양대 정당은 평소 핵심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로 이념적 양극화를 부채질한다고 느껴집니다만, 선거가 가까워지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외연 확장이 절실한 과제가 되기 때문이죠.

 

엄밀히 말하자면 부동층과 중도층을 개념화하는 기준은 다릅니다. 각각 정치적 선택, 이념 성향의 측면에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정치를 대하는 태도나 투표를 결정하는 기준 등에서 비슷한 경향을 보여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기도 합니다.

 

부동(浮動)층은 종종 스윙 보터(swing voter), 무당층이라고도 합니다. 일관되게 선호하는 정치세력이 없고 상황에 따라 투표하는 유권자들입니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비율이 정당 지지층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거대 양당의 고정 지지층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여기서부터는 무당층이라는 용어를 쓰려고 합니다.

 

1950년대 미국 미시간대학의 정치 과학자들은 미시간 모델(The Michigan Model)’이라는 사회심리학적 접근법으로 투표 행동의 기본 이론을 정립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특정 정당에 상당 기간 애착하거나 귀속되는 감정을 정당일체감(Party Identification)으로 개념화했습니다.

 

미시간 학파는 선거 이슈나 후보자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정당일체감을 투표를 결정하는 3대 핵심 요소 중 하나로 보았고, 어느 정당에도 일체감을 느끼지 않는 무당층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지식이나 관심, 참여가 낮은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을 '전통적 무당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중대한 사건이 잇따르며 미국 정치는 격변의 시기에 접어듭니다. 시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히피 문화 확산 등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정당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는 급격하게 떨어지고 기성정치에 대한 회의감으로 무당층이 늘어납니다.

 

이제 '무당층은 정말 정치를 모르고 관심이 없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됩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미디어가 발달하는 등 사회가 현대화하면서 정당일체감보다는 개인의 인지능력에 따른 정치적 결정이 늘어났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 겁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달톤(Russell J. Dalton)은 정당에 소속감을 느끼지 않더라도 높은 수준의 정치적 관여를 보이는 새로운 무당층이 등장했다고 분석했습니다. 과거에 비해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진 이들을 '인지적 무당층'이라고 구분하겠습니다.

 

흔히 '전통적 무당층 = 정치 무관심층(apolitical)'이라고 여기지만, 인지적 무당층은 일관되게 지지하는 정당이 없을 뿐 정치적 지식과 관심이 높아 투표할 가능성은 큰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가 바로 이들입니다.

 

무당층은 대개 선거 시기가 되면 늘어나고 선거가 끝나면 줄어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선택한 정당(후보)에 대한 실망감으로 지지를 철회하기 때문이죠.

 

최근 발표된 20236월 첫째 주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5%, 더불어민주당 32%, 무당층 27%입니다. 1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202262일 현재 국민의힘 45%, 더불어민주당 32%, 무당층 18%였습니다. 지방선거 다음 날 조사입니다.

 

민주당의 지지도는 1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국민의힘 지지도는 10%포인트 줄고 무당층의 규모는 9%포인트 늘었습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무당층으로 이동한 겁니다.

 

6월 첫째 주 한국갤럽의 같은 조사에서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은 35%, 부정 평가는 57%였습니다. 무당층의 경우 긍정 22%, 부정 62%입니다. 1년 전 무당층의 평가(긍정 33%, 부정 35%)와 비교하면 현 정부를 둘러싼 여론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으로 분석됩니다.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는 타이밍으로 보자면 윤석열 정부 2년을 거의 꽉 채운 시점에서 치러지는 중간선거(midterm election)입니다. 현직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성과 평가가 중심이 되는 '신임투표(referendum)' 성격의 선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총선이 어떤 이슈를 중심으로 치러지게 될지 가늠하기는 아직 어렵습니다. 특히 경제 상황은 민심을 읽어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인데, 우리 국민이 윤석열 정부의 경제 운영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 것인지 지금 전망하기는 좀 이른 감이 있습니다.

 

다만 국민의힘 지지도 하락과 무당층 규모의 확대,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 증가 추세로 볼 때 현시점에서 정부·여당이 위험 신호를 받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민주당 역시 여권에 비우호적인 여론에만 기대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지지도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는 건 윤석열 정부에 실망해 지지를 철회한 유권자가 제1야당을 대안 세력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신생 정당 앙마르슈(En marche. 전진)의 창당 주역인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은 취임 약 한 달 만에 치러진 2017년 총선에서 350석의 과반 의석을 확보합니다. 이전까지 의회에 단 한 석도 없던 정당이 총선에서 거대 여당으로 등장하는 대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앙마르슈의 성공 배경에는 공화당과 사회당이 양분해 온 기존 정당정치에 환멸을 느낀 거대한 무당층이 있었습니다. 새 정당이 내건 중도주의와 실용주의, 그리고 비()이데올로기적 접근에 대한 이들의 지지가 양당 헤게모니 해체의 기반을 형성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프랑스는 작년에 대통령 선거를 치렀는데, 1차 투표에서 공화당 발레리 페크레스(Valérie Pécresse) 후보가 4.78%, 사회당 안 이달고(Anne Hidalgo) 후보가 불과 1.75%의 득표율로 탈락하는 등 프랑스의 양당 독식 체제는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프랑스를 지배해 온 거대 정당의 부패와 무능함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습니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우리 정치권에서는 신당 창당이니 선거제도 개편이니 하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제껏 시도된 정치실험들이 양극화된 정치체제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해 비관적 전망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양한 세력, 새로운 정치 문화의 등장을 또 한 번 기대하며 '똑똑한 무당층'의 선택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박해성 티브릿지 대표 | 프레시안 2023.06.08.

 

 

6월항쟁, 87년헌법, 대법관 인사권

현행 ‘87년헌법을 탄생시킨 6월항쟁이 36주년을 맞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던 경찰 등 권력기관의 음모를 국민이 막아내고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킨 게 6월항쟁이다. 그 와중에 경찰의 최루탄에 청년 이한열이 희생됐다. 청년들의 귀한 목숨이 국가폭력에 스러지고서야 민주주의가 꽃핀 것이다. 그 소중한 결실이 87년헌법이다.

 

87년헌법 아래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선도국가가 됐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이룩한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발전모델에 대한 관심이 한류 열풍 못지않게 높다. 그러나 다시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민주주의 위기론의 먹구름이 한반도 남단에 드리우고 있다. 권력기관의 폭력으로 얼룩진 법치 없는 권력만능 시대의 악몽이 법치를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킨 민주 없는 법치만능의 시대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87년헌법은 6월항쟁의 시대정신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온전히 해석될 수 없다. 무엇보다 6월항쟁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구현한 80년헌법에 따라 독재정권을 연장하려는 호헌 시도를 저지한 국민의 직접 행동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아울러 제왕적 대통령제민주공화적 대통령제로 전환하기 위한 기본과제로 대통령을 국민직선제로 개혁한 것임을 잊어서도 안 된다.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 위기가 반복되는 것은 바로 국민을 중심에 두는 87년헌법의 기본정신이 정치현실에서 무시되거나 소홀히 돼 온 탓이 크다. 무엇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해 대통령제를 합리적으로 정상화하여 한국형 대통령제로 구성한 헌법적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 87년헌법의 대통령제를 미국식 대통령제나 권위주의 시대의 독재적 대통령제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형 대통령제는 미국식 대통령제가 1인 기관인 대통령에게 행정권을 전속시킨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수반을 대통령으로 삼기는 하지만 대통령 외에도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국무회의, 행정 각부 등으로 구성되는 집단적 권력체인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하고 있다.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제청권이나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에 대한 부서권을 가지는 것도 특징이다. 집단적 행정권의 구도에다가 2인자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만 임명될 수 있다는 것은 의회와의 협치를 전제로 한 분권형 대통령제87년헌법이 추구하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87년헌법이 분권형 대통령제를 추구하고 있는 또 다른 근거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법관 인사권이다. 조재연·박정화 대법관의 후임 인선을 위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절차가 마무리되면서 대법원장의 최종 제청이 곧 있을 모양이다. 그런데 제청이 되기도 전에 용산의 대통령실에서 특정 후보 불가론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어 문제다.

 

최고법원인 대법원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는 전형적인 비선출 권력이어서 민주적 정당성을 최소한으로 확보하기 위해 선출권력인 대통령이나 국회의 관여가 불가피하다. 민주화 이전의 독재헌법은 그 역할을 대통령에게만 부여했다. 그러나 87년헌법은 한국 헌정사 최초로 국회의 동의를 대법관 임명의 조건으로 삼음으로써 의회와의 협치에 기초한 민주공화적 대통령제의 장치를 마련했다.

 

현행 ‘87년헌법을 탄생시킨 6월항쟁이 36주년을 맞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던 경찰 등 권력기관의 음모를 국민이 막아내고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킨 게 6월항쟁이다. 그 와중에 경찰의 최루탄에 청년 이한열이 희생됐다. 청년들의 귀한 목숨이 국가폭력에 스러지고서야 민주주의가 꽃핀 것이다. 그 소중한 결실이 87년헌법이다.

 

87년헌법 아래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선도국가가 됐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이룩한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발전모델에 대한 관심이 한류 열풍 못지않게 높다. 그러나 다시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민주주의 위기론의 먹구름이 한반도 남단에 드리우고 있다. 권력기관의 폭력으로 얼룩진 법치 없는 권력만능 시대의 악몽이 법치를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킨 민주 없는 법치만능의 시대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87년헌법은 6월항쟁의 시대정신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온전히 해석될 수 없다. 무엇보다 6월항쟁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구현한 80년헌법에 따라 독재정권을 연장하려는 호헌 시도를 저지한 국민의 직접 행동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아울러 제왕적 대통령제민주공화적 대통령제로 전환하기 위한 기본과제로 대통령을 국민직선제로 개혁한 것임을 잊어서도 안 된다.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 위기가 반복되는 것은 바로 국민을 중심에 두는 87년헌법의 기본정신이 정치현실에서 무시되거나 소홀히 돼 온 탓이 크다. 무엇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해 대통령제를 합리적으로 정상화하여 한국형 대통령제로 구성한 헌법적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 87년헌법의 대통령제를 미국식 대통령제나 권위주의 시대의 독재적 대통령제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형 대통령제는 미국식 대통령제가 1인 기관인 대통령에게 행정권을 전속시킨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수반을 대통령으로 삼기는 하지만 대통령 외에도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국무회의, 행정 각부 등으로 구성되는 집단적 권력체인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하고 있다.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제청권이나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에 대한 부서권을 가지는 것도 특징이다. 집단적 행정권의 구도에다가 2인자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만 임명될 수 있다는 것은 의회와의 협치를 전제로 한 분권형 대통령제87년헌법이 추구하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87년헌법이 분권형 대통령제를 추구하고 있는 또 다른 근거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법관 인사권이다. 조재연·박정화 대법관의 후임 인선을 위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절차가 마무리되면서 대법원장의 최종 제청이 곧 있을 모양이다. 그런데 제청이 되기도 전에 용산의 대통령실에서 특정 후보 불가론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어 문제다.

 

최고법원인 대법원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는 전형적인 비선출 권력이어서 민주적 정당성을 최소한으로 확보하기 위해 선출권력인 대통령이나 국회의 관여가 불가피하다. 민주화 이전의 독재헌법은 그 역할을 대통령에게만 부여했다. 그러나 87년헌법은 한국 헌정사 최초로 국회의 동의를 대법관 임명의 조건으로 삼음으로써 의회와의 협치에 기초한 민주공화적 대통령제의 장치를 마련했다.

 

한편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이 또 다른 요건이어서 결국 대법관은 삼권이 모두 인사에 관여하는 구도라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합의제 기관인 대법원의 본질에 어긋나게 대법원장이 과대대표되는 문제점 때문에 폐지론이 지속돼 왔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는 대통령과 국회 등 정치적 선출권력에 의해 독립성이 근간인 최고법원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버팀목이기도 하다는 긍정적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60년헌법이 법관 자격자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한 선거제를 채택하거나 법관추천회의의 제청동의권을 인정한 62년헌법의 예에서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완전히 무력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헌법적 명령을 헌정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삼권이 모두 관여하는 대법관 인사제도는 일방의 독주보다는 국민을 중심에 두고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할 주체들의 협치를 주문한 것이다. 6월항쟁 36주년을 맞이하면서 또다시 87년헌법의 기본정신을 답답하게 되뇌는 현실이 마냥 서글프기만 하다. 무엇보다 국가폭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민주적이고 분권화된 권력에 의한 공화적 법치를 구현할 대법관의 인선이 6월항쟁에 기초한 헌법정신에 맞게 합리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경향 2023.06.09.

 

 

도덕적 피로감의 쓸모

차별적 문화나 언어에 대한 문제제기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어난 것 같다. 드라마 <굿 플레이스> <더 오피스>의 프로듀서 마이클 슈어는 최근 펴낸 책에서 윤리적 삶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피넛버터에 잼 바른 샌드위치 좋아하는구나? 맛있겠네. 그 이기적인 네 점심 메뉴 때문에 땅콩알레르기로 고통받고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어린이 1천만명은 상관없나 보네.” “기원전 340년에는 개인의 선택이 야생동물 생태계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을 아무도 몰랐다.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설사 모르는 게 있어도 어딘가에서 잘 아는 사람이 나타나 아주 친절하고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일깨워준다.”(<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262)

 

슈어는 저런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도덕적 피로감’(Moral Exhaustion)이라 표현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의 일상 속 행동, 말 한마디가 가지는 윤리적 의미를 주의 깊게 고민하는 사람일수록, 윤리적 딜레마를 발견할 확률이 높고 도덕적 피로감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어떤 행동을 해도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차라리 이런 고민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한국에서 흔히 피시’(PC·Political Correctness)라는 개념으로 불리는 태도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저런 것까지 고민해야 돼?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지 않았다. 몇년 전, ‘결정장애라는 말을 왜 쓰면 안 되는지를 설명하는 책을 읽으며 내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물론 머리로는 왜 그게 장애인 차별적 표현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선 쓰면 안 되는 표현들의 목록을 끝도 없이 작성하는 일에 어딘가 좀 삐딱한 감정이 솟아났던 것 같다. ‘거참, 이러다가 무슨 말 한마디를 못 하겠네.’ 무심코 뱉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기업에 성희롱 예방교육이 하나둘 생겨나던 무렵 남자 부장님 및 이사님 단골 레퍼토리. 깨달은 순간 수치심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도덕적 피로감은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건전한 윤리감각을 품고 있음을 보이는 강력한 증거다. 슈어가 집요하게 도덕적 피로감을 언급하는 이유도 그것이 해롭거나 기피해야 할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직시하고 견뎌내야 할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리적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도덕적 피로감에 시달리는 반면, 도덕적 피로감을 못 느끼거나 적극적으로 안 느끼는 자들이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자식의 입시비리 증거가 쏟아져 나오고 법적 판단까지 나온 다음에도 내 딸 때문에 피해 본 사람 없다고 주장하는 전직 장관도 있다.

 

남이야 피해를 보건 말건, 공동체가 무너지건 말건 제 이기심을 충족하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인 자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소위 말하는 성공한 자들일수록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 경우가 많다. 이들이 뻔뻔하게 활개 치는 상황은 내버려둔 채, 우리만 자그마한 부도덕에도 전전긍긍하는 게 썩 공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상황은 도덕적 피로감을 가중하고 사회 전반에 윤리에 대한 냉소를 전염시킨다. 도덕적 불감증에 적절히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도덕적 피로감 역시 나쁜 쪽으로 변질하기 쉽다.

 

그러므로 도덕적 불감증은 제재돼야 한다. 경제인류학자 새뮤얼 볼스와 허버트 긴티스에 따르면 인간은 이타적 처벌자. 인간에게는 설령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배신자, 무임승차자를 기어코 처벌하려는 성향이 있다. 일종의 본능이다. 본능이라고 다 정당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에 그렇게 진화해왔다.

 

일상적 표현이나 대중문화에 도덕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는, 사회 정의의 문화적 기반이 될 수 있기에 바람직하다. 다만 한가지 준칙이 필요하다. ‘공평하게 관대하라.’ 우선 우리가 완벽하게 도덕적일 수 없다는 점을 겸허히 인정하자. 우리 부족이라고 눈감아주지 말고 상대 부족이라고 과도하게 가혹해선 안 된다. 사람마다 자원과 정보의 접근성이 다르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한다. 요컨대 약자의 부도덕에는 더 관대하고 강자의 부도덕에는 더 엄격해야 한다. 잘 조절된 피로는 근육을 강화한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한겨레 2023.06.09.

 

 

그런 저녁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지난 51일 제 몸에 불을 살라서 노조 활동에 대한 음해와 탄압을 고발하며 세상을 떠난 건설노조 간부 양회동씨 사건을 두고, <조선일보>는 사건 당시 곁에 있던 같은 조합 간부가 분신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곧이어 <월간조선>은 양회동씨 유서가 대필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필적감정 결과 유서가 그의 자필임이 확인되자 월간조선은 간략한 사과문을 내고 꼬리 내리는 시늉을 했지만 기사 삭제 등 후속 조치는 여전히 없고, 조선일보는 아직 어떠한 사과도 입장 표명도 없는 상태다.

 

이 희대의 언론 참사 앞에서 많은 사람이 조선일보를 두고 과연 사회적 흉기답다고들 한다. 여담이지만 안티조선운동이 한창이던 2001년 봄 어떤 칼럼에서 그 표현을 처음 사용해 조선일보 쪽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당했던 필자로서는 쓴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다. 그때 필자는 이렇게 썼다.

 

합법적으로 매일매일 그 어떤 위계와 사술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그리고 그 누구도 섣불리 이를 문제 삼을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흉기로 성장한 이들을 과연 누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언론 자유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바로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거대 언론권력으로부터의 자유이다.”(<한겨레> 2001319일치 3면 기고 사회적 흉기’)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일보는 변한 것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무죄판결 선례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한 노동자가 목숨을 던지며 써나간 유서를 누군가 대필했다고, 현장에 있던 동료가 이를 방조했다고 제멋대로 매도하고 모독하는 패륜 행위를 저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의 문제는 이런 노골적인 여론의 왜곡과 조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사태가 잘 보여주듯이 그 왜곡과 조작의 심층에 있는 노동자에 대한 멸시와 혐오는 한국의 주류 여론층 전체가 가지고 있는, 심지어 같은 노동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퍼져 있는 매우 심각한 하나의 병리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노동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공공연한 타자다. 나아가 노동조합을 결성해 자신의 권리를 집단으로 지키고자 하는 조직노동자들은 거의 공공의 적으로 취급받는다.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생산직종과 서비스직종,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모두 포함하면 우리나라 생산가능인구의 절대다수는 모두 자신의 노동을 자본가에게 판매해 임금을 받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다. 이번에 대형 사고를 친 조선일보 기자도 언론노동자이고, 이를 개탄하는 필자도 알고 보면 일개 교육노동자다.

 

정치판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그렇게 강조하는 민생이란 것도 결국 국민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삶일 텐데, 민생을 절대 우선해야 한다고 침을 튀기던 국회의원들도 노동자들의 삶을 향상시키자고 하면 주춤한다. 노동자라고 호명되는 순간 멀쩡하던 사람들 시야에는 일종의 편광 필터가 끼워지고 입에는 보이지 않는 재갈이 물린다. 게다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명백한 힘의 비대칭성을 완화하고자 헌법에서 노동3권을 보장하고, 근로기준법 같은 각종 노동자 보호 입법이 제도화되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노동자들의 가입이 장려되고 있음에도 노동조합, 단체행동, 파업 같은 말들은 어쩐지 가급적 기피돼야 할 어두운 말들로 분류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사회가 노동자와 임노동을 타자화하고 노동운동을 적대시하는 거대한 사회심리적 카르텔이 지배하는 사회, 간단히 말하면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가 철저히 관철돼온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중동을 일컬어 수구언론이라고 하지만, 그 본질은 결국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당파적 언론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틈만 나면 노동자들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기사를 써대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갈등과 이해를 조정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국가의 역할일 텐데, 이번 윤석열 정부는 집권 이래 노골적으로 친자본·반노동 정책을 일관되게 구사해 툭하면 노동시간을 늘린다, 노조를 압수수색한다, 정부보조금 회계감사를 한다, 노조 활동을 조폭 활동처럼 취급한다, 정당한 쟁의 투쟁을 몽둥이찜질로 대응한다 하는 판이니, 마침 분위기도 좋겠다 계급언론의 선봉에 선 조선일보는 이 기회에 권력과 손잡고 주제넘은 노예들을 한 방에 보내버릴 건수를 하나 잡았다 싶었을 것이다.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니건만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금 밀려오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다. 참으로 잔인한 세상이다. 전태일 열사에서부터 양회동 열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무슨 폭력혁명을 하자 했는가, 자본가계급을 처단하자 했는가? 한때 급진 노동자 조직의 리더였던 한 시인이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우리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기계나 개돼지처럼 죽도록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 삶이 아니라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는 저녁이 있는 삶그 이상이 아닐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누군가에게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누리는 삶의 작은 여유들이 누군가에게는 한번이라도 누려보고 싶은 평생의 소원인 세상이 과연 이대로 연년세세 유지돼도 좋단 말인가. 명색이 국민소득 3만달러고 세계 10위 무역대국인 선진국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길거리에 나서거나 높은 굴뚝 위에 올라가서 장기 농성을 하거나 아니면 제 몸에 불을 지르면서도 이런 작은 꿈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얼마나 잘난 세상이길래, 노동자라면 천민 대하듯 하고 노동조합이라면 도끼눈을 뜨며 파업이라면 세상 모두 들고일어나 욕을 해댄다는 말인가.

 

의사가 연봉 1억을 받으면 벽돌공은 7천만원을 받는 스웨덴 이야기를 하면, 그 나라 국민소득은 10만달러 아니냐고들 반박한다. 하지만 국민소득 1만달러 때부터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때부터 의사건 벽돌공이건 누구든 저녁이 있는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스웨덴의 오늘이 올 수 있었을까? 자칭 신문 그 이상의 신문이라는 거대 보수언론이, 제 몸을 불에 사른 한 사람의 노동자가 외친 마지막 말 한마디에 다가가 귀를 기울이지는 못할망정 그 죽음이 방조됐고 그 유서는 대필됐다고 저주를 퍼붓는 이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모차르트를 듣는 그런 저녁이 올 수 있을까,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한겨레 2023.06.09.

 

 

대학 평준화의 두 가지 의미

핀란드 교육이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2010년대 초부터였다. 세계적으로 가장 탁월한 교육시스템으로 손꼽히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TV 프로그램 및 언론 기사들을 통해 앞다퉈 소개되었다. 특히 진보교육감들의 등장과 맞물리면서 경쟁 없는 교육의 좋은 사례로 선전되었다.

 

그러나 핀란드 교육은 결코 롤모델이 되지 못했다. 그저 마케팅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핀란드 교육은 한국 교육계의 통념과 상충하는 요소를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대입제도를 설명해주면 경악하는 사람들이 많다. 첫째, 핀란드는 대입에서 내신을 반영하지 않는다. ‘내신 성적을 반영해야 공교육이 정상화된다는 주장의 반례다. 둘째, 핀란드 대학들은 대입시험을 통해 학과별 지원자를 한 줄로 세워 선발한다. ‘한 줄 세우기가 경쟁과 획일화를 유발한다는 주장과 상충한다. 셋째, 핀란드는 성적순으로 합격자를 가려낸다. 성적순 선발의 비교육적 측면을 부각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적극적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강조하는 미국식 담론의 대척점에 있다.

 

핀란드의 대학은 지원자를 한 줄로 세워 성적순으로 선발을 한다. 그런데도 왜 핀란드에서는 대입경쟁이 과열되지 않는가? 대학들의 수준이 고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들에서 제공하는 교육의 질이 비교적 고르다. 물론 대학들 사이에서 서열을 매길 수는 있다. 대학들이 서로 완벽하게 동일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대학들 사이의 편차는 적다. 그러니 핀란드 학생들로서는 특정한 대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한국에 대학평준화의 전형으로 알려진 나라는 프랑스였다.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 의해 프랑스 대입제도가 개혁되었는데, 그 이전에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프랑스의 전통적 대입제도는 전 세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었다. 대입시험(바칼로레아)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으면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나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주지에서 너무 먼 대학은 지원이 제한되며, 특정 대학에 너무 많이 몰리면 추첨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선발(selection), 즉 대학이 입학자를 골라내는 과정이 없다는 특성이 있었다.

 

프랑스와 핀란드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의 일부 학과는 프랑스처럼 일정 성적 이상만 되면 입학시키지만, 정원제한(numerus clausus)이라고 불리는 일부 학과는 핀란드처럼 성적이 높은 지원자를 선발한다. 특정 학과가 선발 학과인지 비선발 학과인지는 대학마다 다르지만 의학, 수의학, 심리학, 경제학과 같은 최고 인기 학과들은 예외 없이 정원제한을 두고 선발한다. 선발 기준은 일부는 아비투어 성적순(내신과 공인시험 2 1로 합산), 일부는 대학 자율인데 대학 자율의 경우라 해도 성적이 가장 중요하다. 이 밖에 대기자 입학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어 성적 미달로 입학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대기자로 등록하고 몇년간 기다리면 입학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인원은 정원의 20% 정도로 국한된다. 대학에 재학하면서 대기자로 등록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주로 취업했거나 직업교육을 이수 중인 사람들이 활용한다.

 

핀란드가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제도를 택하지 않고 모든 학과에서 성적순으로 선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나 독일 제도에 나름의 상당한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중도탈락률이 높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1학년 때 절반 이상이 진급에 실패하고, 의학과는 중도탈락률이 무려 80%가 넘는 경우도 있다. 독일에서도 문과계통 학과의 중도탈락률은 10~20%대이지만 이공계열 학과의 중도탈락률은 40~50%대에 달한다.

 

평준화와 관련된 논의가 종종 미궁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준화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교육품질의 평준화와 입학제도의 평준화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프랑스, 독일, 핀란드는 모두 교육품질의 평준화를 이뤘다. 하지만 입학제도는 프랑스와 핀란드가 전혀 다르고, 독일은 그 중간쯤에 해당한다.

 

한국의 대학평준화 담론과 정책은 입학제도 평준화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것이 교육품질 평준화다. 설령 입학제도의 평준화를 이루는 것이 목표라 할지라도, 교육품질의 평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육품질 평준화를 위해 대학 재정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한국 진보교육계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 경향 2023.06.10.

 

 

닫힌 도시와 열린 도시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분양 광고 문구이다. 이 문구는 특권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든 안 하든, 우리는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혹은 자신이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자 한다. 따라서 도시화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마주하고 섞이는 과정이자, 이 속에서 동질적인 공간을 구축하려고 끊임없이 분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리처드 세넷은 <짓기와 거주하기-도시를 위한 윤리>에서 이러한 도시화의 양면성을 세밀하게 그린다. 세넷은 우리가 그들로부터 달아나거나, 그들을 고립시키는방식으로, 이질적인 타자를 기피해왔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유대인을 피해 산골짜기에 지은 오두막이 전자의 예라면,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유대인 게토는 후자의 예다.

 

세넷의 도시 읽기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분리가 도시 설계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효과를 가져오는 복잡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베네치아의 유대인 게토에 대한 그의 설명을 살펴보자.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 당국은 기독교도만 도시에 수용하고 유대인 이주민을 배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도시에서 기독교도들이 꺼리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로, 도시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베네치아 당국은 특이한 도시 속의 섬으로 유대인 게토를 지었다. 이 게토는 운하로 둘러싸여 두 개의 다리로만 도시의 나머지 부분과 연결됐다. 아침에 다리가 열리면 유대인은 도시로 나가 활동하고 기독교도는 게토로 들어가 필요한 업무를 봤다. 저녁엔 각자의 거주지로 돌아가고 다리가 올라간다. 밤엔 불빛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게토 내의 바깥을 향한 모든 문과 창문을 닫게 하여, 유대인의 존재가 도시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는 의도치 않은 효과들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게토는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안전하게 모여 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소규모로 흩어져 사는 방식으로 자신을 감추며 박해로부터 스스로 보호해왔다. 베네치아 당국이 게토 연결 다리에 세운 24시간 경비는 과격한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해줬다. 또한 게토 내에 거주하는 조건으로 유대교회당 설립이 허락되었다. 밤 시간은 게토 밖에서는 유대인이 사라지는 시간이지만, 게토 내에서는 교회당에서 성경 공부를 하며 유대인으로 거듭나는 시간이었다. 세넷이 주목하는 또 다른 주요한 효과는 다양한 민족 출신의 유대인들이 언어도 다르고, 공통의 문화도 없는 상태에서 함께 거주하도록 강요된 상황에서 같이 사는 방법을 배워나간 점이다. 세넷에 따르면, 이질적인 유대인 집단들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을 발전시키며 이웃 관계를 구성했다

 

강남의 고급 아파트는 하이데거의 오두막을 연상시킨다. 하이데거는 도시 공간에 섞여 있는 유대인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했다. 그가 추구했던 평화로운 삶은 동질적 사람들끼리 구성하는 것으로, 이질적 타자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를 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강남 아파트 광고 문구가 불편함을 주는 이유는 다른 집단에 대한 배제와 혐오를 깔고 있어서다.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가 유대인 없이 돌아가지 못했듯, 현대 고급 아파트촌의 분리된 삶은 이들이 배제하고자 하는 사람들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스마트 시티는 이러한 모순을 기술적 장치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열린 도시는 산골짜기 오두막이나 스마트 시티의 편리하고 단순한삶 속이 아니라, 공통의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불편하고 복잡한삶들 속에 잠재해 있다. 이미 현실에서 구성되고 있는 열린 도시를 위한 윤리적 실천들을 읽어내는 작업이 절실하다.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 경향 2023.06.10.

 

 

칼럼 쓰지 맙시다

깜빡이는 커서를 밀어내지 못하고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는 지금과 달리, 과거 어느 시절엔 글을 곧잘 썼다. 현장에 다녀오면 글이 써졌다. 사람을 만나고 시공간을 만지면, 문장이 팝콘처럼 곳곳에서 튀어 올랐다. 글쓰기가 얼마나 쉬운지, 하얗고 뜨거운 그것을 주워 담으면 됐다. 신났다.

 

피처, 르포, 내러티브로 채워진 그 시절이 천국이었다면, 칼럼 쓰던 시절은 지옥이었다. 오장육부를 쥐어짜면 문장 하나가 나왔다.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는 칼럼은 없으므로 백수십 번 비틀어 짰다. 설익은 추론이 억지로 게워낸 글에 매달려 너덜댔다. 창피했다.

 

그 창피를 견뎌야 좋은 기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한국의 많은 언론인이 칼럼으로 명성을 얻지 않았는가 말이다. 높은 평판을 꿈꾸지 않아도 칼럼 쓰기는 피할 수 없었다. 한국 언론, 특히 신문은 연차별로 칼럼 집필을 할당한다. 기자 시절엔 현장 칼럼을 쓰고, 부장이 되면 데스크 칼럼을 쓴다. 그것은 블랙홀과 같다. 다른 중력을 집어삼킨다. 현장 칼럼 쓰는 날이면 다른 현장 취재를 미뤘다. 데스크 칼럼 쓰는 날엔 기사 데스킹 시간을 줄였다.

 

이토록 대단한 칼럼을 영미 기자들은 거의 쓰지 않는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들이 성취하려 안달하는 대상은 고정 칼럼이 아니라 심층보도를 담은 단행본이라는 점도 알게 됐다. 그러고 보니, 밥 우드워드가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엮어 책까지 낸 일은 알아도, 그가 무슨 칼럼을 썼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논문을 뒤지던 일이 뜻밖으로 흘러 언론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공부 이후, 나는 분리주의자가 됐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것, 적어도 그 분리를 근본 지향으로 삼는 것이 현대 저널리즘의 핵심이라는 의견을 갖게 됐다.

 

사실과 의견의 분리의 여러 차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보도 조직의견 주장 조직의 격리다. 두 조직의 접촉과 연관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게 핵심이다. 기사 쓰는 기자는 칼럼을, 칼럼 쓰는 논설위원은 기사를 아예 못 쓰게 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그 형식만 남았다. 편집국과 논설위원실을 따로 두지만, 기자는 종종 칼럼을 쓰고, 논설위원도 가끔 기사를 쓴다. 논설위원이 뉴스룸에 돌아와 취재하는 일도 흔하다. 반면 영미 언론의 뉴스룸과 논설위원실 사이에는 유리 바닥이 있다. 일단 논설위원이 되면 기자나 에디터로 돌아가는 일이 극히 드물다. 은퇴할 때까지 의견만 쓴다.

 

202112, 워싱턴포스트 논설실 책임자 프레드 하얏트(Fred Hiatt)가 사망했다. 15년의 기자 생활을 거쳐 1996년 논설위원이 된 그는 25년 동안 칼럼·논설만 썼다. 뒤이어 임명된 데이비드 쉬플리(David Shipley)는 뉴욕타임스 논설 에디터를 거쳐 10년 동안 블룸버그통신 논설실 책임자로 일한 인물이었다. 비유하면, 한겨레 논설위원으로 일하다 연합뉴스 논설실장으로 옮긴 이를 동아일보가 새 논설실장으로 스카웃한 셈이다. 그런 일이 한국에선 불가능하다. 의견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기자건 칼럼이나 논설을 쓸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과 의견의 분리는 의견을 낮춰 보는 원칙이 아니다. 의견을 제대로 밝히려면, 사실 보도와 의견 제시를 구분하여 각각을 대단한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를 마구 섞으면, 사실 보도도 망하고 의견 제시도 망한다. 오만가지 일에 대한 온갖 칼럼을 기자와 부장의 이름으로 내보내는 한국 언론은 정확히 그 지경으로 향하고 있다.

 

기자가 사실 취재에 집중하고, 데스크는 사실 검증에 집중해야 사실 보도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 그 일도 바쁜데, 칼럼 집필의 부담까지 보탤 이유가 없다. 초년 시절부터 칼럼을 썼던 습성 때문에 기자는 의견을 담아 기사를 쓰고, 데스크는 의견을 앞세워 기사를 고친다. 반규범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사실과 의견을 둘러싼 문제에 집중해 칼럼을 써보려 한다. 새 대표를 맞은 언론 전문매체가 언론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언론학자에게 주문했는데, 거절할 이유를 찾다가 포기했다. 글을 비틀어 짜내는 지옥이 다시 왔다. 공부한 사실과 의견을 정돈할 기회라고 억지 위로해 본다. 아니면, 이제라도 칼럼 못 쓰겠다고 말할까.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미디어오늘 2023.06.10

 

 

국익을 포기하면서 가치에 몰두하는 나라

공급망 분리(디커플링)에서 위험 완화(디리스킹)로 전환인가?

미국도 유럽도 모두 위험 완화를 강조한다. 세계화로 얽혀 있는 공급망을 분리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웠다. 그렇다고 분리 전략의 포기는 아니다. 공급망 분리라는 의지와 상호의존이라는 현실의 격차를 인정하고, 속도를 조절하는 국면이다. 전환의 과정엔 언제나 과거와 미래가, 협력과 경쟁이 섞여 있다. 디리스킹이라는 구호 밑에 감춰진 이익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첨단산업에서는 분리를, 전통산업에서는 의존을 선택했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전략산업에서는 중국과 분리를 목표로, 우호 동맹국 사이의 공급망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과 경제적 상호의존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2022년 미국과 중국의 교역액은 6906억달러로 역대 최대였다. 중국은 세계 제조업 공급망에서 최대의 중간재 조달자이고 제공자이다. -중 무역에서 상호의존도가 높은 분야가 중간재이고, 특히 미국의 핵심 산업과 연결된 전기·기계와 석유화학, 비금속 광물 분야에서 중국과 공급망을 분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바이든 정부가 중산층을 위한 외교를 위해, 중국으로 나갔던 제조업을 국내로 다시 불러오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미국 정부는 안보로 접근하지만, 기업은 경제로 판단한다. 중국에 나가 있는 미국 기업이 인건비가 싸고 원자재 조달이 쉽고 그래서 생산비용을 줄일 수 있고, 그러면서도 거대한 소비시장을 갖춘 중국을 왜 포기하겠는가? 보조금으로 기업의 경제 이익을 상쇄하기 어렵다.

 

미국 소비재 시장의 중국 의존은 더욱 심하다.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으려는 미국이 값싼 중국산 소비재를 어떻게 막겠는가? 중국에 중간재를 의존하는 것도 결국 생산비용의 절감을 위해서다. 공급망 분리와 물가 관리는 충돌할 수밖에 없고, 선거를 치러야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안보 논리가 시장 논리를 이기기는 어렵다.

 

유럽은 미-중 전략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열린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해왔다. 말 그대로 열린 개념으로, 에너지 의존도 차이에 따라 러시아 제재 참여 수준이 다르고, 산업구조 차이에 따라 미-중 경쟁 사이 위치가 달랐다. 지난해 11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 이어, 올해 4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공통점이 있다. 대규모 기업대표단이 동행해서, 그야말로 대규모 계약을 주고받았다. 유럽은 가치가 아니라 이익을, 분리의 미래가 아니라 의존의 현실을 중시한다. 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중국은 미국과 유럽을 분리하기 위해, 이 틈을 파고들고 있다.

 

현재 정말로 위험 완화가 필요한 곳이 바로 한-중 관계다. 얼마 전 중국의 아시아담당 국장이 한국을 방문해서, 기존 한-중 사드 합의의 중요성과 한-중 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전달했다. 이렇듯 중국은 위험을 경고했지만, 정부는 완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정부와 여당, 그리고 보수언론은 탈중국이라는 이념만 외칠 뿐, 수십년 동안 쌓인 상호의존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 나갈지에 대한 전략이 없다.

 

공급망 재편은 장기적인 과정이다. 미국과 유럽, 혹은 다른 나라들도 현재의 이익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변화에 대응한다. 일본조차 미-중 사이에서, -러 사이에서 핵심 이익이 걸리면, 손해 보지 않으려 양자택일을 피하려고 한다. 우호 동맹국 사이의 공급망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경쟁 관계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안보와 경제 사이에서 활발하게 소통해야 한다.

 

-중 무역에서 구조적으로 무역적자가 쌓이고, 그것이 무역수지를 악화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너무 빨리 한-중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 중국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의 속이 타들어가고, 중국산 중간재에 의존해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제조업의 상황도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중국과 관계 악화로 물가 관리에도 빨간불이 들어온 지도 오래다.

 

세상의 이치도, 공급망의 전환도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살아가다 보면 수없이 양자택일을 강요받지만, 해결의 출구는 언제나 균형의 지혜다. 특히 전환기에는 유연함이 생존의 비결이다. 가치 외교라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과연 국가이익을 포기하고 가치 외교를 추구한 나라가 있을까? 이익만 추구하는 나라는 많다. 이익을 위해 가치를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국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처럼 국익을 포기하면서, 가치에 몰두하는 나라는 없다.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한겨레 2023.06.11.

 

 

회식비 윤석열’, ‘출장비 한동훈의 앙상블

윤석열 정권이 일부 시민단체들이 받은 보조금 문제를 가지고 여론몰이를 시도하고 있다. 순수한 의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시민단체들 전체의 신뢰도에 흠집을 내려고 하는 것같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의 의도가 관철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참에 전수 검증을 해보자

우선 윤석열 정권이 눈엣가시처럼 생각할 시민단체 가운데에는 아예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않는 단체들도 많다. 예를 들면 참여연대같은 단체는 창립 때부터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재정을 운영해 왔다. 필자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세금도둑잡아라같은 단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윤석열 정권은 문제가 있는 단체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방식이 아니라, 뭉뚱그려서 시민단체를 비난하는 정치공세를 펴고 있다. 이런 정치공세가 부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기왕에 판이 벌어졌으니, 이번 기회에 국민 세금 사용의 투명성문제를 놓고 전면적인 상호 검증과 토론을 할 것을 제안한다. 시민단체들에 대해서는 감사를 한다고 하니, 감사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라.

 

지난 46일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 해운대구의 한 횟집에서 회식을 한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그리고 윤석열 정권도 대통령실과 권력기관들의 예산 사용내역과 증빙자료를 공개하라. 대통령실, 법무부, 검찰, 감사원 같은 기관부터 예산을 잘 쓰고 있어야 시민단체들을 비판할 자격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해야 국가 전체의 투명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아닌가? 그리고 스스로 떳떳하다면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뭔가?

 

윤석열과 한동훈의 비밀주의 앙상블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의 행태를 보면, 필자가 제안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자료를 공개하지는 않을 것같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석열 대통령이 419일 해운대 횟집에서 사용한 회식비에 대해서도 정보를 비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 모두가 그 횟집에서 회식한 것을 알고 있는데, 회식비를 얼마 썼는지를 공개하면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다는 황당한 비공개이유를 들고 있다.

 

여기에 대해 시민들은 트위터에서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할 정도로 회를 먹었단 말인가?’, ‘횟집 사장님, 갑자기 국가기밀 보유자 만듦이라고 비꼬았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마찬가지이다. 한동훈 장관이 작년 7월 미국 출장을 다녀온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에 가서 어디를 방문했는지에 대해서도 법무부가 홍보자료를 만들어서 배포했다. 그런데 미국을 오가면서 사용한 교통비와 숙박비 같은 정보를 공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비공개 이유로 국가안전보장, 외교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회식비를 비공개하면서 제시한 비공개 사유와 같다.

 

그러나 장관이 미국 출장을 다녀오면서 교통비를 얼마나 썼고, 숙박비를 어디서 얼마나 썼는지가 공개된다고 해서 무슨 국가의 중대한 이익이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인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미국 출장을 마치고 지난 20227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장관의 행태를 보면, 한마디로 국민세금을 쓰면서도 아무런 정보도 공개하지 않겠다는 비밀주의, 은폐주의의 앙상블이라고 할 수 있다.

 

공직자로서의 기본 자세 의심스러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장관이 비밀주의 행태를 스스로 개선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결국 소송을 하고 여론의 압력을 가해서 자료가 공개되도록 하는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장관이 보이는 내로남불식 비밀주의 행태는 공직자로서의 기본적인 자세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국민세금을 쓰는 공직자라면 당연히 투명하게 사용해야 하고, 증빙을 남겨야 하며, 그 사용결과에 대해 국민들에게 자료를 공개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런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공직자로서의 기본적인 윤리의식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의무도 지키지 않으면서, 민간조직인 시민단체와 노조에 대해 정치공세를 펴는 것은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따라서 윤석열 정권의 최근 행태는 지금 당장에도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행정소송에서 비공개가 위법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반드시 져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해운대 횟집 회식비, 한동훈 장관의 미국출장비에 대한 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소송 1심을 진행중에 있다. 시간은 걸려도 자료는 공개될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장관이 쓴 국민세금도 검증의 심판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하승수(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민중의소리 2023.06.11.

 

 

우리 대통령과 저런 인간

문재인 정부의 실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동산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놨고 에너지 정책도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다. 대북 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편 가르기와 내로남불의 참모습도 보여줬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전 정부 탓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후유증이 만만치 많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정책 실패에 따른 후유증을 놓고 보면, 검찰개혁 화두를 빼놓을 수 없다. 그 파장은 정권 교체 뒤에도 이어졌고, 부작용은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인과 학자들이 지적했듯, 문재인 정부에선 한낱 국가기관에 불과한 검찰을 의인화해 악마화했다. 검찰이란 기관을 정부 통제가 되지 않는 유기체로 보고 개혁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기관과 그 구성원들을 동일시하면 당연히 오류가 발생한다. “내가 악마라고?” 많은 검사들이 되물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검사들의 반발은 거기서 멈춰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선을 넘고 말았다. 검사 대통령이 배출되면서 몸값이 급등하자 일부 구성원들은 본분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제보가 이어지는 걸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에도 새벽시간에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소 흥분한 목소리였다. 조직이 망가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은 우리 대통령때문이었다. 술자리에서 우리 대통령이란 말이 검사들 입에서 연신 터져 나왔다고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이기 이전에 검사들의 대통령이란 뜻이었다. 우리가 안 도우면 누가 돕겠냐는 얘기였다. 우리가 악마냐고 되물었던 검사들이 지금 와서 우리 대통령을 외치는 모습이 그에겐 초현실주의 영화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공사 구분 못 하고 대통령과 검찰을 동일시하는 검사들이 생기다 보니, 문재인 정부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부작용이 생겼다. 대통령 말씀을 뒷받침한다는 명분으로 알아서 기는 구성원들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대통령을 대하던 검사들의 모습과 너무 비교된다는 자조 섞인 얘기도 들려온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저런 인간으로 칭한 검사들도 있었다.

 

내부 분위기 탓인지 요즘 살아 있는 권력 수사라는 말이 검찰 내에서 실종됐다. 적폐수사에 올인한 문재인 정부 때도 검찰은 출범 6개월 만에 살아 있는 권력인 청와대 정무수석을 잡겠다고 날을 세웠다. 비록 실패한 수사로 끝났지만, 지금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살아 있는 권력은커녕 살아 있는 권력의 측근 하나 건들지 못하고 있다.

 

검찰이 윤석열 정부 내내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전례 없는 혼란이 예상된다. 정권이 연장되지 않고 4년 뒤 교체된다면 검찰 조직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을 게 자명하다. ‘우리 대통령을 외치던 조직을 정치권이 이성적으로 대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조직의 명운이 걸려 있다 보니, 검찰이 기를 쓰고 야당에 공세적으로 나올 것이란 얘기가 헛소리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요즘 부쩍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수사 대상이 누구든지 동일한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그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적어도 정치권의 비이성적 대응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강철원 사회부장 한국 2023.06.12.

 

 

무책임한 극단주의, 프리드먼과 윤석열

신자유주의의 원조 밀턴 프리드먼은 2006년에 죽었다. 오늘의 전환시대는 프리드먼의 육신과 함께 그의 정신도 죽었음을 일러준다. 그런데 웬일인가. 지하 깊이 잠들고 있어야 할 그의 유령이 되살아나 한국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으니 말이다. 역사의 여신은 왜 이런 퇴행의 시련을 주실까.

 

프리드먼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칠레 피노체트 독재 정권을 찬양했다. 피노체트는 학살과 고문,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프리드먼의 눈에는 자유의 수호자였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프리드먼의 세례를 받은 칠레인 제자들(‘시카고 보이들’)의 수중에서 칠레는 급진적 자유시장 실험실로 전락했다. 프리드먼 은 칠레를 방문해 피노체트를 고무하고, 시카고 보이들을 격려했다. 하지만 시카고 보이들이 이끈 극단적 자유시장 실험으로 칠레 경제는 나빠졌다. 이 실험이 낳은 것은 빈곤과 불평등의 확대, 투기경제화와 저성장, 경제권력의 집중이었다. 프리드먼-피노체트 체제 아래 대중은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를 박탈당한 반면, 보장된 것은 소수 특권층의 자유, 가진 자들의 선택할 자유였을 뿐이다. 프리드먼이 사랑한 것은 소수의 특권적 자유였고, 대중의 실질적 자유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린든 존슨과 배리 골드워터가 대통령 선거 경쟁을 할 때 골드워터가 베트남 전쟁에 수소폭탄을 사용하자고 주장했는데 프리드먼이 옹호하며 말했다. “베트남에 수소폭탄을 떨어뜨리면 몇백만명이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당연한 일이다.” 수소폭탄 주장이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비판을 받자 골드워터는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프리드먼의 시대착오적 시장만능주의-작은 정부 사상에 깊이 감명받고 늘 그의 책을 끼고 다녔다는 인물, 거기에 정치를 검찰 수사처럼 여기는 전직 검찰총장이 한국의 최고권력자가 되어 있으니 나라 꼴이 어떠할까. 프리드먼이 토지보유세만큼은 가장 덜 나쁜 세금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윤석열은 보유세 감면과 자산 소유자 퍼주기에 올인했으니 윤석열의 자유는 프리드먼보다 더 프리드먼적이다.

 

공공의 국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세가지가 있다. 첫째, 사회생태적 지속 가능성의 시대명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능동적 책무를 떠맡아야 한다. 작은 정부는 시대착오적이니 큰 정부로서 담대하게 시장을 이끌고 재구성해야 한다. <초거대 위협>의 저자 루비니는 말한다. “초거대 위협과 싸우려면 그동안 고이 간직해왔던 가정을 버려야 한다. 세율을 낮추고 무역을 자유화하고 규제를 완화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경제적 에너지가 생성될 거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파멸의 시나리오를 피하려면 책임있는 큰 정부가 조정과 협력을 선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메시지다.

 

둘째, 담대한 정부의 역할에서 우선돼야 할 것은 불평등 축소와 대중의 기본적 필요 충족이다. 정부가 여기에 집중하지 않고 대중이 삶의 불안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같은 배를 타고 가는 공통감이 나올 리 없고, 요란한 국민의 나라는 새빨간 거짓이다. 특히 에너지··대중교통 등에서 친환경적 전환을 위한 대규모 공공투자, 환경 돌봄·사람 돌봄·지역사회 돌봄을 위한 공공투자는 불평등 완화와 생태위기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환정책이다. 서로를 연결하는 진지 역할도 한다.

 

셋째, 책임정치는 민주공화국 헌정정치의 기본이다. 이는 정부가 할 일을 하는 것뿐 아니라 할 일을 방기하고 불법과 과오를 저질렀을 때 응분의 책임을 지는 것을 반드시 포함한다. 이건 국가 공공성의 마지노선이다.

 

윤석열 정부는 거대한 퇴행으로 가고 있다. 이태원 참사로 무고한 시민 159명이 죽었다. 그런데 정부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철면피로 버티고 대통령은 감싸준다. “이게 나라냐며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릴레이 시민행진이 진행 중이다.

 

프리드먼-윤석열 체제는 노조 때리기와 노동탄압으로 먹고산다. 건설노조를 건폭으로 몰며 공권력을 오·남용한 결과 양회동씨가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네요라는 말을 남기고 분신 사망했다. 조선일보는 함께 있던 노조 간부가 분신을 방조했다고 악의적 왜곡보도를 하고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도 맞장구쳤다.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선 고공농성하던 김준영씨가 경찰의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구속됐다. 지배권력의 무책임 극단주의가 어떤 지경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편 정부는 돌봄 등 사회복지서비스의 시장화를 추진하는 전략을 발표했다. 이 나라는 지속 불가능한 디스토피아로 떨어지고 있다. 당신의 자존심은 어떤가?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경향 2023.06.12.

 

뒤끝윤석열 정부, 자유도 보수도 아니다

6·10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했던 김정표씨가 지난 10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열린 제36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민주항쟁을 기억하는 편지를 읽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6·10 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2007년 이후 처음으로 정부가 올해 기념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유는 주관 기관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후원한 진보단체 행사 광고에 윤석열 정권 퇴진문구가 실렸다는 이유다. 사업회는 사전에 이를 몰랐고, 후원 철회를 했음에도 행정안전부는 불참 결정을 되돌리지 않았다. 12일부터 해당 행사 후원뿐 아니라 사업 전반에 대한 특별감사도 벌인다.

 

지난해 11월에는 바이든-날리면보도 여파로 대통령실이 <문화방송>(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을 불허했고, 지난 4월에는 한달 전 윤 대통령 방일 환영행사를 중계하면서 일장기를 향해 경례하는 윤 대통령이라고 잘못 말한 것을 이유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해당 기자의 해외연수 선정을 돌연 취소했다. 해당 실수는 생방송 도중 빚어진 일로, 당일 중계에서 곧바로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음에도 문제 삼은 것이다.

각 기관은 다르지만, 모두 윤석열 정부 아래 벌어지고 있는 좁쌀 뒤끝이다. 그 바탕에는 위임받은 국민의 권한과 자산을 정권의 소유와 시혜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윤석열 정부의 또 다른 특징은 속내가 여실히 보이는데, 남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것이다. <한국방송>(KBS) 수신료 분리징수를 압박하면서 국민들이 원한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수신료 분리징수를 택할 수 있다. 다만, 공영방송 하나를 없애겠다는 게 아니라면 분리징수 이후 대책이 있어야 한다. 전혀 없다. 한국방송 재원 중 수신료 비중은 45%에 이른다. 대통령실이 분리징수 권고 근거로 제시한 설문조사는 대통령실 누리집 국민참여 토론코너에 티브이(TV) 수신료와 전기요금 통합 징수 개선, 국민 의견을 듣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한달간 무작위 수렴한 결과다. 징수방식 개선 추천(찬성)96%였다는 것이다. 민간기업에서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면 무능으로 찍힌다. 제대로 된 여론조사를 하더라도 분리징수 찬성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주먹구구와 얼렁뚱땅으로 정책을 결정해도 되는가. 일부 민간단체의 지원금 유용을 들어 전체 시민단체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세우며 난리법석을 떠는 것도 속내가 뻔히 보인다.

 

하부 권력기관에선 과잉이 만성화되고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 요청서 자료 유출을 문제 삼아 문화방송 본사와 국회의원실 압수수색에 나서는 경찰, 권익위원장에 대한 무리한 감사를 제지하는 감사위원회 결정도 불복하는 감사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시대착오와 무능이 결합한 결과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35, 광복절 기념사에서 33,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21자유를 언급했다. 그러나 이 연설문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자유가 도대체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냥 자유’, ‘자유만 무한반복할 뿐이다. 표현의 자유를 이토록 옥죄는 정권이 자유’, ‘자유라 하니 어이가 없다. 자유북한 괴뢰에 맞서는 1970년대의 자유 대한개념으로 바라보면, 이 정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해석 가능해진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한 70년대 말 권위주의 시대에서 사고의 성장이 멈춰진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당시 고성장으로 보수는 유능이란 신앙이 한동안 떠돌았다. 그건 후진국에서 노동탄압, 정경유착을 통한 몽둥이 유능이었다. 아이들 몽둥이찜질해 성적 올리는 말죽거리 시대를 챗지피티(GPT) 시대에 적용할 순 없다. 과거 사고에 머물러 있는데다 검찰 습성에 익숙한 윤석열 정부는 일사불란 권위주의 리더십을 추구하는데, 권위주의 수단은 없으니 무리수와 무능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장세동·허문도가 있어야 하는데, ‘땡윤 뉴스가 있어야 하는데, ‘이근안이 있어야 하는데, ‘유정회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시대에 이를 구현하려 한다면 시대착오이자, 비극이다.

 

윤석열 정부를 보수정부라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수는 이런 게 아니다. 관용과 도덕, 품격, 합리성에 기반해야 진정한 보수다. 대의를 위해 이익을 버리기도 하는 것이 보수인데, 사익을 위해 가치를 훼손하고 공공자원을 동원한다. 해방 이후 한국 보수가 줄곧 보여준 행태이긴 하다. 한국 보수에는 자기희생의 전통이 없다. 윤 대통령은 결단이란 말을 자주 쓴다. 대부분 묵과하지 않겠다등 상대 진영을 박살낼 때 쓴다. ‘결단이란 자신을 희생할 때 울림이 있다. 지금 진행되는 건 공정도 상식도 아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지배 엘리트층의 이해관계에 충실할 뿐이다. 공직자로서 고민과 성찰의 일상이 바탕 되지 않으면, 결단도 성과도 업적도 없다. 부질없는 당부일지라도, 윤석열 정부가 제대로 된 보수정부의 길을 걷기 바란다.

권태호 | 논설위원실장 한겨레 2023.06.12.

 

 

이상하기 짝이 없는 정치논리

정치논리라는 게 그렇다. 유권자들은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권리를 포기할 순 없어 덜 나쁜 놈을 뽑고자 하지만, 판단하기 쉽지 않고 결국은 속는 처지다. 두 번 속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기에 유권자들은 지지한 대상에 실망했더라도 상대편이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란 확신이 없으면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윤석열 정권의 등장도 그랬다. 문재인 정권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개혁은 자기들끼리 나눠 먹기 위한 핑계 같은 걸로 비쳤다. 물론 이런 생각이 곧바로 보수정치 지지로 이어진 건 아니다. 과거 정권의 사례를 보면 보수정치도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는 개혁을 핑계로 한 길들이기 시도에 저항하는 검찰총장이 나오면서 가능해졌다. 위선적이고 자의적인 개혁의 시대를 청산할 수 있는 법치주의자가 등장한 것처럼 보인 것이다.

 

이런 기대는 집권 1년도 안 돼 산산조각 났다. 법치는 없고 편가르기만 횡행한다. 야당 입장에선 기회인데, 쉽지 않아 보인다. 윤석열 정권 비판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운 정권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훼손한다. 둘째, 미국과 일본에 과도하게 밀착하는 이념편향적 외교 안보로 일관한다. 셋째, 이 때문에 민생에 불필요한 부담을 안기는 아마추어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지적에 공감하는 유권자들은 곧이어 생각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이었다면 달랐을까? 이념편향적 외교를 바로잡을 대안으로 인식되려면 편향 없는 실리 외교를 구사할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이래경 혁신위원장 논란은 편향이 없는 게 아니라 반대쪽 편향 아니냐는 의심을 갖게 한다. 지금 필요한 건 미국·일본·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에 적절한 전략을 갖고 임하는 것이지, 미국과 일본을 반대하다 중국·러시아의 가짜뉴스 전략에 포섭되는 게 아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싱하이밍 대사는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 주장에 대한 반론을 신문에 직접 기고할 정도로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인사이다. 대사관저에 제1야당 대표를 초청할 때에는 나름의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걸 간파 못하고 외국의 자기 나라 공격에 제1야당 대표가 들러리를 선 모양이 된 건 이해 못할 일이다.

 

보수정치는 자신들을 주류로 규정하고 민주당을 시대에 뒤떨어진 이념을 답습하는 비주류로 공격해왔다. 집권을 3차례나 한 민주당의 가장 효과적인 반격 방식은 오히려 자신들이 주류의 최첨단에 있으며, 좌파 타령하며 감세와 낙수효과를 신봉하는 보수정치가 구시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래경과 싱하이밍, 두 키워드는 민주당이 오히려 보수정치의 공격 논리를 인정하고 앞으로도 비주류를 고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보인다. 윤석열 정권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그림이다. 이는 사상이라기보다는 능력의 문제다. 이 사태는 민주당의 정무적 기획 및 판단 능력이 고장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도적 유권자가 보기엔 민주당 역시 아마추어집단인 것이다. 아직도 개딸얘기를 하는 민주당이 더 민주적인 것 같지도 않다. ‘민주당이 집권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봐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윤석열 정권에 실망해 민주당을 새롭게 지지하기로 했다는 흐름은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총선은 조국 대 우병우구도로 지지층만 갖고 치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대선은 어떻게 할 건가? 정권 잃은 야당에게 5년은 빌드 업의 시간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재출마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는 이재명 대표다. 상대는 선수를 바꾸는데 고장난 민주당을 계속 유지해서 이길 수 있겠는가? 재집권하고 싶다면 지금 정신을 차려야 한다.

김민하 정치평론가 경향 2023.06.13.

 

 

붕 떠버린 복지국가

19876월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이 민주화라는 날개를 장착할 때만 해도 우리는 복지가 다른 날개 한 축이 돼 행복한 대한민국을 띄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민주항쟁 30여년,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망은 옅어지고, 부의 대물림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은 가속화하고 있다. 국민복지에 대한 책임이 있는 국가는 복지정책이 모든 구성원의 건강권, 안락한 환경권, 삶의 행복권 추구를 목표로 해야 한다.

 

지난 53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하는 사회보장 전략회의가 열렸다. 윤 대통령은 현금 복지와 관련해 보편적 대신 선별 복지를 언급했다. 사회보장 서비스의 경쟁을 통한 시장화·산업화를 강조했다. 범위를 넘어선 사회보장은 사회를 갉아먹는다는 그의 생각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사회보장만을 강조했다. 이날 회의 내용이 20242028년에 걸친 3차 사회보장기본계획의 기본 틀이 될 것이라 하니, 이 정부의 인식에 우려가 앞선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과 민간 모두를 포함하는 사회적 지출을 보면 복지국가와 거리가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게 된다.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사회적 지출은 21.1%,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30%를 넘겼지만 한국은 14.8%에 머물며, 멕시코, 튀르키예와 함께 최하위권에 놓여 있다.

 

노동시장에서 은퇴한 사람이 받는 연금 혜택은 2019년 기준 GDP 대비 OECD 회원국 평균은 7.7%, 이탈리아와 그리스가 15%를 넘겼지만 한국은 고작 3.6%(2020년 기준)에 불과하다. 절대적 현금 부족이다. 질병, 장애 및 산업 재해로 인한 지출은 2019년 기준 OECD 회원국 평균은 2.0%인데 비해 한국은 0.8%(2020년 기준)에 불과하다. 낮은 사회적 지출 비용으로 많은 국민이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최약자와 약자를 가르는 선별 복지는 전혀 의미가 없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노무현 정부에서 입법해 이명박 정부에서 시행했다. 현재 국공립 노인요양시설은 전체 시설의 3% 남짓이다. 장기 요양이 필요한 노인 4247명 중 한 명만이 국공립 노인요양시설에 들어갈 수 있는 셈이다. 노인돌봄서비스는 대부분 민간기관을 통해 제공되나 만족한 돌봄을 받고자 한다면 높은 비용을 치러야만 하는 구조다.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고, 시장화·산업화, 경쟁의 효율화를 강조한 결과가 이렇다. 현 정부의 올해 노인요양시설 확충 사업 예산은 전년 대비 19.3% 감소했다. 우후죽순처럼 생긴 소규모 시설에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는 돌봄 노동자의 고통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시장 논리가 사회보장에는 맞는 옷이 아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영국 경제를 따라잡기 위한 노동정책의 일환으로 실업, 질병, 연금, 산업 재해에 대비한 국가 사회보험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행복한 나라가 강국이 된다. 2022년 독일의 GDP 대비 사회적 지출은 26.7%. 사실 이탈리아와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측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의 경제성장은 성공한 복지국가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 여기에는 국가의 낮은 세금 정책이 중산층 가구의 실질소득을 늘려 사적 재산이 공적 복지를 대신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분석이 있다. 현 정부는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등 감세정책을 펴고 있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수출과 내수의 균형적 성장을 포기한 한국은 대기업 위주의 수입, 조립 생산 산업구조 전환으로 말미암아 하청 및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고용이 확산했다고 판단한다. 현재 플랫폼 노동자 수는 80만명이 넘었다. 불안정한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가 사회보험에서 배제돼 있다. 진정한 복지는 경제·정치·사회의 구조개혁과 함께 간다.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경향 2023.06.14.

 

15년 만에 다시 등장한 괴담 몰이

대검찰청은 긴급회의를 열어 인터넷 괴담처벌에 대한 법리 검토와 수사지휘는 검찰이, 수사는 경찰이 각각 맡기로 했다. 대검 관계자는 괴담에 대해 많은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고 있어 예의 주시 중이다. 전혀 근거가 없고 유포 과정 등에서 좀 심했던 것이 사실로 보여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청 고위 관계자도 부정확한 정보나, 사실과 다르게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글이 넘쳐나 심각한 문제로 판단하고 있다. 이를 찾아내 처벌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놀라지 마시라. 위 기사는 200856<한겨레> 기사 중 일부다. 지금처럼 막강 파워를 과시했던 당시 검찰과 경찰이 이른바 광우병 파동과 관련해 내놓은 일종의 사회안정 대책이었다. 유언비어 유포로 정치권과 국민 사이에 불필요한 갈등이 유발됨에 따라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한 조처였던 셈이다.

 

그 후 15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정부와 여당 수뇌부는 이런 말을 되풀이한다.

민주당이 가짜뉴스와 괴담 정치에 심각하게 중독돼 사회를 극심한 혼란과 갈등으로 병들게 하고 있다. 과학이 아닌 괴담을 통해 불안감을 키우는 구태를 국민들께서 엄중히 심판해줄 것으로 확신한다.”(61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 광우병 걸리고 다 죽는다는 광우병 사태와 똑같다. 생선과 해산물을 먹으면 위험해지고 소금값도 오를 것이라는 민주당의 주장에 과학적 근거가 어디 있느냐.”(67일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

근거 없는 유언비어에 대응하고, 과감하고 지속적인 소비 촉진책으로 수산업계가 굳건히 버틸 힘을 만들어내겠다.”(67일 조승환 해양수산부 장관)

 

정리하면 민주당과 일부 세력이 과학을 배척하고 부풀려 조작된 오염수 괴담 등으로 사회를 극심한 혼란과 갈등으로 몰아넣고 있다. 광우병 사태 때와 똑같다는 것이다. 이들 말처럼 15년 전과 똑같다면 조만간 똑같은 수사가 진행될 듯싶다.

광우병 파동을 회고해보자.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에서 광우병 사례가 발견됐다. 거의 모든 국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았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무제한 수입을 허용했다. ‘걱정에 휩싸인 엄마들은 유아차를 끌고 거리로 나섰고 국민은 촛불을 들어 저항했다. 검경은 광우병 우려는 괴담이라며 칼을 빼 들었다.

 

아랑곳하지 않은 국민은 광우병에 대한 불안감을 씻어낼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요구했다. 특히 검역주권을 미국에 송두리째 던져준 정부를 규탄하며 강력하게 저항했다. 결국 괴담론만 펴던 보수정권은 수입 소의 특정 부위 수입을 금지하고 월령을 30개월 이하로 제한하는 등의 조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검역도 강화됐다. 결과적으로 정책 결정권자에 대한 주권자의 불신과 걱정이 경제외교의 자존심을 그나마 바로 세운 것이다.

 

초읽기에 들어간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의 현실을 곱씹어보자. 정부 여당의 말대로 당시와 똑같다. 1인당 연간 수산물 소비량 1위라는 우리나라 국민의 당연한 걱정을 괴담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야당이 오염수 안전성의 과학적 검증을 요구하면 이재명 사법리스크 덮기’, 객관적 증명을 주장하면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무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국제적 대응을 제의하면 국민 선동이라며 일갈한다. 물론, 이에 동조하며 걱정하는 국민도 한통속으로 본다.

 

중세 유럽을 뒤흔든 마녀재판이 그랬다. 일단 잡아놓고 너 마녀지?’ 묻는다. 억울한 당사자는 아니요라고 답한다. 그러면 곧바로 그래? 그럼 스스로 마녀가 아님을 증명해봐라며 모진 고문을 하다가 화형에 처했다.

 

이제 정부 여당은 되레 주권자인 우리에게 묻는다. ‘오염수 걱정은 괴담이지?’ 우린 아니다. 우려다라고 답한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요구한다. ‘뭐가 걱정이고 우려인지 너희가 증명해봐라고.

김기성 | 수도권데스크 한겨레 2023.06.14.

 

중국을 껌으로 보던 시절

-중 수교(1992) 전 대학에서 중국사 수업을 들을 때였다. 보통 사람은 아직 접근할 수 없던 죽의 장막너머를 다녀온 교수가 진기한 경험담을 풀어놨다. 가보니 정말 한심하더란 얘기였다. 그러면서 혹시 갈 일이 있으면 껌 몇통만 챙기면 된다고 했다. 껌 한통 건네주니 그리 좋아할 수가 없더란 얘기였다. 화려했던 중국 문명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서는 혀를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1990년대쯤 중국에 가본 한국인 중 비슷한 인상을 받은 이들이 꽤 될 것이다. 그들은 자부심과 우월감이 섞인 경험담을 전파했을 테다. 하물며 미국인들 눈에는 어땠을까. 한 미국인은 공영라디오 <엔피아르>(NPR) 인터뷰에서 1970년대 초반 베이징에서 머물 때 자동차를 10대 이상 보면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고 했다. 한국의 중년 이상은 단군 이래 이웃 대국에 가장 우월감을 느낀 세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제 많은 한국인이 미국과 호각을 다투는 중국에 당혹스러워한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만남에서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고 말한 게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외교 사절의 발언으로 부적절하고, 상대국을 불쾌하게 만드는 말이다.

 

불쾌함을 표출하는 것과 별개로, 이런 상황의 배경에 있는 구조를 살피고 냉철한 대응을 고민해야 한다.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중국이 거칠어지고 있다. 급성장한 국력에 바탕한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동시에 위기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대체로 수세였던 중국이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을 제재한 것은 갈등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표시다. 앞으로도 청나라와 일본이 번갈아 조선 조정을 압박하던 구한말에 비유하는 말이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런데 한국을 둘러싼 미·중의 밀고 당기기에서 정부는 과연 중심을 잡고 있나? 한국이 미국 편임은 유치원생도 안다. 문제는 어느 선까지 편들고, 그 과정에서 포기하면 안 되는 게 무엇인가다. 미국의 국가안보실 도청 의혹에 대통령실은 악의를 갖고 했다는 정황은 없다며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해 변론하는 해괴한 모습을 보였다. 정부는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중국에서 마이크론 제재에 따른 부족분을 메우지 못하게 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싱 대사 발언에 대한 반응과 차이가 크다. 한국은 이중 국격을 가진 나라인가. 누가 하든 주권침해는 주권침해, 내정간섭은 내정간섭, 경제적 압박은 경제적 압박이다.

 

냉철하게 대응해야 할 국제정세 문제에 정치적 계산이 끼어들어 이런 모순이 더 커진다. 정부와 여당은 싱 대사가 야당 대표를 만나 한 말이라서 때는 이때다라고 판단한 것 같다. ‘친북 프레임의 새 버전인 친중 프레임이다. 같은 사람도 내가 만나면 접견이고 다른 이가 만나면 알현이란다. 윤석열 대통령이 싱 대사를 보면 청나라 위안스카이를 떠올린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총독처럼 군림하며 고종 폐위 음모를 꾸미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인물이다. 싱 대사가 위안스카이의 반의반에라도 해당하는 패악질을 했다면 한국인들은 당장 봉기해야 하지 않겠나. 과유불급이다.

 

흥분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다. 그 흥분을 공동체 전체의 이해와 상관없이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본영워싱턴 특파원 한겨레 2023.06.15

 

 

진영공화국의 고착 막아, 나라의 살 길 틔워야 한다

많은 흐름과 지표들이 뚜렷하게 보여주었듯 대한민국은 압축성장에서 압축소멸로 치닫고 있다. 벼락발전에서 벼락소멸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기적의 나라에서 인간이 만든 재앙의 나라로 돌변하고 있다. 나라를 살려야 한다. 나라를 먼저 살리는 길이 나를 살리는 길이고, 나의 자녀를 살리는 길이다. 침몰하는 나라에서 나와 내 진영만 살려고 해서는 나도 진영도 함께 죽는다. 존망의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소멸로 치닫는 이 나라를 과연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그때 우리는 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인가, 아니면 미래의 청년들인가? 청년들에게 이 짐을 떠넘기면 안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인간공동체로서 본질과 속성이 사라지고 삭막한 사막으로 바뀌고 있다. 위로는 국가의 공적인 보편적 역할이 실종되고 아래로는 시민들의 인간적 관계의 그물망이 해체되고 있다. 이 둘의 결합이 대한민국 소멸 흐름의 근원이다. 위와 아래를 함께 살리자. 여기에서 말하는 위와 아래는 결코 높고 낮다는 뜻이 아니다. 아래는 토대·바탕·근본을 말하고, 위는 대표·선도·책임을 말한다. 둘 다 변해야 한다. 아래의 변화는 내일을 살릴 것이고, 위의 변화는 오늘을 살릴 것이다.

 

먼저 위를 보자. 최근 연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 국가들의 집합통계를 보면 공적 제도가 초래하는 삶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 특히 나라의 근간인 권력구조와 정부 형태는 가장 중요하다. 대통령책임제와 의회책임제의 차이는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각각 대통령책임제 대 의회책임제의 순서다. 먼저 지니계수는 0.43 0.30이다. 민주주의 지수는 10점 만점을 기준으로 할 때 6.96 8.35. 수치가 클수록 격차가 적은 성() 격차 지수는 0.73 0.77이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41.18% 47.94%.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지출은 15.22% 22.31%.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 기준으로 5.99 6.85. 합계출산율은 1.54 1.59. 정규직 고용률은 66.63% 67.11%, 여성 정규직 고용률은 44.73% 57.43%. 실업률은 7.37% 5.21%.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은 52.34% 34.74%. 1인당 GDP 역시 (동일하게 OECD에 한정하더라도) 36860달러 대 62589달러다.

 

정치와 제도가 혁명의 최우선 순위

전체 평균을 통해 볼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아마 개연(蓋然)일 것이다- 정부지표, 경제지표, 사회지표, 삶의 지표, 마음지표에서 단 한 부문도 대통령제가 나은 것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라의 체제와 제도가 정부 성격과 경제 수준, 그리고 사회와 개인 삶과 마음의 지표로 연결된다는 개연성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 제도가 인간들의 삶과 마음까지 연결될진대 더 이상 제도 우열 논쟁은 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 지표들이 제도 변수 하나의 차이는 아닐지도 모른다. 또한 특정 제도가 특정 국가들에서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도는 개연적 확률의 결정요소인 동시에, 특히 권력독점과 권력분산 체제가 서로 다르게 산생하는 삶과 사회의 차이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대통령책임제 대신 의회책임제를 채택할 경우 더 나은 정부와 경제, 더 나은 사회와 삶과 마음 상태를 가질 확률이 높다는 점은 분명하다.

 

기실 권력의 승자독식 구조를 해체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개혁은 불가능하거나 효과가 없다. 그것 없이 재벌·법조·금융·남성·교육·노동·수도의 상층 기득권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은 국내와 국외의 거의 모든 조사와 분석들이 보여주듯 정치·사회·경제의 갈등과 양극화 최선두권 국가이다. 그리고 조사들이 또한 보여주듯 항상 그 갈등과 진영 대결의 중심은 정부(대통령)와 국회다. 즉 정치다.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 견제받는 공적 정치 영역조차 특정 개인과 부문과 진영이 민심과 유리된 채 불비례적으로 독점·과점하면서 사적이며 자율적인 민간 영역의 독점과 과점 구조를 혁파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어불성설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공공과 사사, 권력과 경제, 제도와 개인 삶의 관계에 대한 오랜 역사가 보여주는 바 그대로다. 우리의 경로를 봐도 정치의 승자독식과 민간의 집중·과점은 함께 극심해져왔다. 개혁과 혁명의 대상은 정치와 제도가 가장 우선이다. 정치의 대표성과 형평성과 비례성 없이 가치와 물질을 고르게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도에 관한 한 자신의 정념적 선호를 고집한다. 객관적 지표와 사실에 결코 승복하지 않는다.

 

이제 아래를 보자. 지금 한국에서 이웃은 없거나 몹시 드물다. 국제조사 결과를 보면 공동체 네트워크의 질도, 이웃에 대한 신뢰도, 삶에서 중요한 가치에 대한 질문에서도 유독 한국민들은 건강과 가족, 이웃과 공동체보다는 물질을 가장 중시한다. 우리들이 답변한 부끄럽고 객관적인 자화상이다. 누가 지금 마을에서 이웃과 자신의 문제를 상의하는가? 상의는커녕 이웃이 나를 잘 알게 되는 것조차 원치 않는다. 아파트건 연립이건 단독주택이건 다양한 형태의 1인 거주이건, 주거공간에 따른 차이는 없다. 이웃은 사람이고 주체이기 이전에 그저 사물이고 소음이고 공포다.

 

아파트값을 같이 올리는 물질적 담합자요, 욕망의 동맹자. 우리에게 이웃이 필요한 이유는 거기까지다. 인간적 교류와 연대는 불필요하다. 같은 아파트 단지, 같은 동()일지라도 윗집과 아랫집과 앞집의 개인 신상과 가족 사정, 일가친척, 질병과 아픔을 알면 안 되며 관심도 없고 물으려 해서도 안 된다. 아무런 간섭과 대화도 나누지 않는 재산과 사물일 때는 안전하고 고맙지만, 인간적으로 접근하고 아는 척을 하면 부담스럽고 거북하며 무엇보다도 귀찮고 내 삶을 방해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물적 존재로는 편안하지만 인간적 존재로는 불편하다. 아니 싫다. 다투고 고소만 안 해도 최선이다.

 

인간 평등 추구 땐 인구 문제 풀려

이게 인간집단의 모습이 맞는가? 물론 맞다. 나의 사적 독립과 자율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독립과 자율은 곧 절연과 고립을 의미한다. 인류에게 이웃의 말뜻은 동양과 서양에서 완전히 같다. 이웃은 가깝다는 말과 사람·거주자라는 말의 결합이다. 시민과 국민도 같은 뜻이다. 도시와 성읍과 나라 안의 이웃 전체를 말한다. 내 이웃이 동서남북에 걸쳐 있는 것이 시민이고 국민이다. 실제 마을과 동네가 사라지고, 내 마음과 삶에 이웃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데 () 이웃 전체로서 도시와 나라가 있을 수는 결코 없다.

 

가까운 사이? 이웃보다 훨씬 더 무섭다. 우리의 최근 집계인 2021년 살인 통계를 보자. 10명 중 7명의 범죄자는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다. 친족이 30.2%이며, 이웃·지인이 17.1%, 친구·직장동료가 9.8%, 애인이 9.3%이다. 범죄자는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옆 사람인 것이다. 대부분의 살인 사건은 가족·친족 살해이거나, 이웃·지인·동료·친구 살해이거나 애인 살해인 것이다(대검찰청·2022). 부모를 죽이는 존속살해 비율 역시 다른 나라들에 비해 2~3배나 압도적으로 높다. 부모와 자녀, 가족과 친척, 동료와 애인은 사랑과 연대의 상대인 동시에 증오와 살해의 상대인 것이다.

 

이제 위와 아래를 합쳐보자. 나는 이 나라의 생명과 인간 문제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통계를 오래도록 모으고 조사해왔다. 그럴 때마다 묻고 또 묻게 된다. 이 나라는 과연 인간국가가 맞나? 이때 인간국가는 인간적인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이루어진 국가를 말한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되는 해다. 한국전쟁 종식 이후 오랫동안은 구타 사망을 포함해 군내 사망사고가 실로 가공할 수치였다. 그 뒤로는 산업재해 사망률과 교통사고 사망률이 OECD 1위 또는 세계 선두권을 오랜 기간 차지하였다. 지금 수치를 열거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군대도 일터도 거리도 세계 최선두권의 사고사망 나라였다. 오늘날에는 자살과 저출산에서 세계 최선두권이다.

 

하나하나 깊이 살펴보면 모두가 깊은 격통(激痛)의 단말마적 신음소리를 자아내는 목숨 통계들이다. 나는 자주 물었다. 목숨과 생명을 이리도 가벼이 여기는 인간공동체가 또 있을까? 이들은 모두 오래도록 OECD 또는 세계 1위를 지켰고, 지켜오고 있고, 앞으로도 지켜갈 것이다. 사고사망이 이토록 만연한 사회에서 자연사라는 말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가장 소중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가벼운 사회에서 사고사망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행운이 아닌가. 자연사가 행운인 나라, 여기에 이르면 한숨과 탄식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체제 성격의 반영이자 연장인 출산과 소멸을 포함한 인구 문제 역시 전적으로 시민 문제이며 국민 문제이다. 또 인간 문제이자 개인존중의 문제이다. 어제와 오늘의 인류 지혜가 보여주었듯 같은 시민과 국민, 같은 인간과 사람으로 대우받고 존중받으면 인구 문제는 풀린다. 여기에 반드시 눈을 떠야 한다. 거기에 눈을 뜨지 않으면 해결은 불가능하다. 장구한 인류 역사를 보면 고등한 문명사회의 소멸을 초래할 인구 감소 문제는 인간(의 성·계층·세대·지역) 형평과 평등, 결혼과 동거, 부부와 가구의 전면적인 재개념화와 재구성, 이민자 수용, 이 세 가지가 아니면 해결된 사례가 거의 없다. 이 중 하나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는, 지원을 포함한 형평과 평등이 그나마 가장 쉽다. 나머지 둘은 아직은 합의가 쉽지 않다. 한국은 혼인과 부부 출산이 아닌 비혼 출산은 거의 없는 수준에 가까울 정도다. 이민자 수용에도 극도로 배타적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최악 수준의 자살국가·청년자살국가·지방소멸국가·저출산국가·노인빈곤국가·인구소멸국가이다. 이번 연재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여러 다른 이름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선진 민주국가들 중 최악 수준의 승자독식국가이자 불평등국가이며, 갈등국가이자 격차국가라는 점이다. 후자를 먼저 고치지 않으면 전자는 고칠 수 없다. 후자를 고치면 전자도 고칠 수 있다.

 

정부가 나라와 국민의 뜻 따라야

정권과 파당으로부터 사회와 사람을 보호하고 보전해야 한다. 매 정권의 파당화와 극단적 양극 대결로 인한 국가소멸과 파멸의 길로부터 사회와 시민을 지켜내야 한다. 더 이상의 정치적·이념적·경제적 양극화는 안 된다. 대통령 1인과 한 줌의 정치파당들 뜻에 따라 좌와 우로 요동하는 나라를 지속해서는 안 된다. 나라를 구할 길이 없게 된다. 이제 정녕 끝내야 한다고 간절히 호소한다. 정권과 정부가 나라와 국민의 목적과 뜻을 따라야지, 나라와 국민이 정권과 정부에 좌지우지되어선 안 된다. 이 말의 무게는 천금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한국은 진영국가와 진영시민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다. 좌파국가와 우파국가, 보수시민과 진보시민으로 정렬되고 있다. 진민(陣民)의 탄생이다. 진영은 본래 극, 군대 주둔 진지, 파벌·부족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공통점은 투쟁대오 또는 시민 이전 상태를 말한다. 이성과 대화, 도덕과 법률 이전의 가족과 혈연, 명령과 복종의 단계나 상태를 말한다. 민주공화국에서 국민과 시민들의 갈등은 결코 진영과 진지 간의 죽기살기 투쟁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진영화·진민화의 길은 문명화·시민화·근대화·공화화의 반대다.

 

포퓰리즘과 중우정으로 치닫는, 국민과 시민이 아니라 신민(臣民)과 우민(愚民)의 토대가 되고 있는 진민의 고착을 막아야 한다. 일부는 벌써 확실히 국민과 시민을 넘어 철저하게 신민과 진민으로 행동한다. 진민들에게 상대 절반은 증오와 혐오, 적대와 척결의 대상일 뿐이다. 진민들은 마음속에서는 이미 반대 진민들이 사라져주길 바라고 있다. 안 된다. 반대다. 자기 진영과 진영 주자의 승리 때 흘리는 눈물을 옆 사람과 이웃을 위해 흘릴 수 있을 때 나도 나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내가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라도 똑같다. 나라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든다. 그 남들을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속한 진영과 나라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을 망칠 진영국가, 즉 대한진국(大韓陣國)의 지속과 고착만은 막아야 한다.

 

물론 대한민국(民國)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물질과 땅만 남는 대한물국(物國)과 대한토국(土國)도 막아야 한다. 장중하고 장엄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동해로 시작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때 ’()은 밝다, 해가 뜬다는 뜻이다. 바다도 같다. 바다는 밝고 밝은 해를 처음 맞이하는 곳이다. 동해는 마르지도 않고 닳지도 않을 밝디밝은 바다를 말한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는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이 후렴을 반드시 부른다.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게 하는, 부를 때마다 우리 가슴속에 애국의 불을 지피는 가장 감동적인 문구다. 그러나 이 나라가 지금처럼 계속 간다면 대한이 존재하지 않는데 대한사람이 보존될 수는 없다. 마르지도 않고 닳지도 않게 길이 보존될 수는 더더욱 없다.

 

개인이든 집안이든 나라든 안에서 스스로 망할 징조를 보인 다음에야 밖에서 망하게 한다. 우리는 지금 외국에 침탈을 당한 것이 아니다. 즉 망국이 아닌 스스로 멸국의 길을 가고 있다. 지금 당장 나라를 살리는 혁명이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말에 트다가 있다. 싹이 트다, ()이 트다, 길을 트다, 마음을 트다. 참 좋은 말이다. 이제 다시 틔워야 한다. 사람과 나라를 살리기 위한 새 길과 새 동, 새싹과 새 마음을 틔워야 한다. 여기까지 발전해온 우리들의 나라, 우리들의 사랑 대한민국은 지금 그 싹과 동, 그 길과 마음을 트기 위한 정치혁명과 사회혁명, 정신혁명과 인간혁명이 절실하다. 그 혁명을 싹틔우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숱한 난관을 극복해온 우리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시리즈 끝>

박명림 연세대 정차학과 교수 경향 2023.06.15

 

대통령제의 위험’ 30년 전 경고, 현실화하다

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_01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인 1990, 미국 예일대학 교수 후안 린츠는 유명한 에세이 대통령제의 위험성’(The perils of presidentialism)에서 대통령제가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통령과 입법부 모두 선거로 선출되기에 언제든지 대통령과 의회가 갈등할 수 있고, 대통령이 아무리 무능해도 정해진 임기 중에 바꾸기가 매우 어려우며, 승자 독식 구조에서 대통령이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길 것이라는 게 린츠 교수의 주장이었다.

 

어린 시절 스페인 내전을 직접 겪어 민주주의 공고화에 관심이 많던 린츠 교수는 1970~80년대 중남미에서 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쿠데타와 독재, 부패로 얼룩지는 것을 보고 이 에세이를 썼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미국 대통령제는 1974년 닉슨 대통령의 중도 사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린츠 교수의 우려는 정치학자들을 제외하곤 대중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에세이가 언론과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얻은 건 2016년 집권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을 거치면서다. 트럼프 시대엔 일방적 국정운영과 삼권분립 훼손, 극단적인 정치 갈등 등 대통령제의 단점이 적나라하게 표출됐다. 2021<퓨리서치 센터> 조사에서 미국은 한국과 함께 세계에서 정치적 갈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 공동 1위에 올랐다.

미국 정치학자 존 캐리(다트머스대 교수)20212<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대통령제가 견고하게 유지돼온 것은 (대통령제에 비판적인) 린츠 교수에겐 도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그의 퇴임을 꺼리는 대중을 부추겨 의회를 공격하도록 한 사건은 정확하게 린츠 교수가 걱정한 그런 종류의 갈등이었다. 린츠의 글에는 트럼프가 드러낸 다른 많은 메아리가 담겨 있다. 즉 강력한 대통령제가 독재적 성향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제가 심각하게 삐걱거린다는 징후는 많다. 미국 검찰은 지난 3월 성관계를 불법으로 입막음한 혐의로, 6월엔 기밀문서 반출 혐의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을 형사기소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더 놀라운 건, 이렇게 기소된 전직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실제로 당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점이다. <시비에스>(CBS) 방송이 11일 발표한 공화당 경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61%의 지지를 받아 당내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5월에 실시한 7개 주요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현 대통령의 양자 대결시 트럼프 전 대통령(45.5%)과 조 바이든 대통령(43.7%)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그는 자신을 셀프 사면하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법 질서의 극적인 붕괴다. 재선 도전을 공식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이 내년 대선일 기준으로 미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 후보가 될 거란 점도 대통령제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단면이다.

 

현시기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2공화국 시절 짧은 내각책임제 기간을 빼고는 줄곧 대통령제를 고수해왔다. 19199월 상해 임시정부가 대통령제를 채택했던 때부터 치면, 100년의 역사를 갖는다. 특히 군부의 장기집권에 대한 반발로 19876월항쟁 이후엔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5년 단임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했다. 이후 199712월 대선에서 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등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 차례 전직 대통령 구속이 있었지만, 한국은 미국과 함께 대통령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도 대통령제 민주주의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523일 국무회의에서 민노총(민주노총) 집회로 서울 도심 교통이 마비됐다.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고 공공질서를 무너뜨린 집회 행태는 국민들이 용납하기 어렵다며 엄정한 법 집행을 지시했다. 정부는 곧바로 불법 전력 있는 단체의 집회·시위를 제한하고, 출퇴근 시간대나 야간의 도심 집회·시위를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불법 전력이나 출퇴근 시간대라는 게 얼마나 자의적일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집회·결사의 허가제를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헌법 조항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현 정부는 지난해 8월 경찰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행정안전부에 경찰국을 신설했다. 법을 바꾼 게 아니라 대통령령(시행령) 개정을 통한 편법 직제개편이다. 또 검찰의 직접수사 개시 범위를 6대 범죄에서 2대 범죄(부패, 경제범죄)로 축소한 법률안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령을 개정했다. 검찰 수사권 범위는 다시 넓어졌다. 정부는 <한국방송>(KBS)을 압박하기 위한 수신료 분리징수도 방송법을 개정하지 않고 시행령을 바꾸는 식으로 밀어붙일 생각이라고 한다. 시행령을 활용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률을 무력화하거나 회피하는 건 대통령의 권력 남용, 제왕적 대통령의 전형적 현상이다.

 

과거엔 민주주의 후퇴 = 독재와 장기집권이란 시각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최근엔 자유선거라는 정치상황 속에서 민주주의 후퇴가 일어나는 현상을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목격할 수 있다. 변형된 선거 권위주의의 출현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51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그 뒤로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재헌씨,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현철씨,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홍업씨의 모습이 보인다. 갈수록 대통령제 장점인 정치적 관용은 사라지고 대립과 갈등, 검찰 수사의 칼날이 날카로워진다. 공동취재사진

 

올해 1월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민주주의 후퇴에 관한 여론조사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이 결과를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주장에 공감한 응답자 비율은 72.3%에 달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 이후 어느 정부에서 민주주의 후퇴가 시작됐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5.8%윤석열 정부라고 답했다. 그다음은 이명박 정부(28.4%), 박근혜 정부(15.7%) 순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주의 후퇴가 시작됐다는 응답은 6.3%, 김대중 정부 2.2%, 노무현 정부 1.7%였다. ‘민주주의가 가장 많이 후퇴한 정부를 꼽는 질문에도 압도적 1위는 윤석열 정부(57.7%)였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 논문 <민주주의 후퇴 인식의 이념적 편향성>에서 재인용)

 

대통령제의 자기 보완과 개선 능력은 이 제도가 활력을 가질 때 긍정적으로 작동한다. 대표적인 게 장기집권에 대한 대응이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무려 4(1932~1945)을 했고 네 번째 임기 중 뇌출혈로 숨졌다. 어찌 보면 종신 대통령이었던 셈이다. 그 이후 미국 의회는 두 번까지만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게 헌법을 고침으로써 장기집권 대통령의 출현을 막았다.

 

한국에도 종신 대통령이 있다. 197910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숨진 박정희 대통령이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693선 개헌과 72년 유신헌법 제정으로 종신 집권의 길을 텄다. 김재규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박 대통령은 많은 국민이 희생되더라도 끝까지 방어해낼 사람으로 (대통령을) 그만둘 사람이 아니다. 이를 알기 때문에 더는 방관할 수 없어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두드려 부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역시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7년간 전임자 못지않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퇴임 후엔 막후 실세가 되길 노렸지만, 19876월항쟁으로 이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직후 개정된 헌법은 ‘5년 단임 대통령제를 명문화했다. ‘5년 단임제1인 장기집권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중요한 밑돌을 놓았다. 대통령제의 자정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강력한 대통령일수록 독재 또는 재집권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강력한 대통령때문에 대통령제가 위태로워지는 건 아니다. 최근 대통령제가 민주주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건, 대통령이란 자리에 오르면 임기를 망각하고 지금 당장 행사하는 권력의 강렬함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했던 임기 5년이 뭐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라는 말은 권력의 찰나적 속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권력은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 모든 걸 압도할 수 있으리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착각이 민주주의 후퇴를 부르고, 대통령제의 긍정성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앞으로 한국 대통령제의 주요 장면들을 되짚어 보면서 대통령제 민주주의의 활력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본다.

박찬수 I 대기자 한겨레 2023.06.15.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전하는 언론

불의의 사건, 사고로 혈육을 잃은 유족. 이들을 취재하러 나서는 기자의 발걸음은 무겁다. 사랑하는 이를 허망하게 떠나 보내고 망연자실한 유족에게 다가서는 일조차 쉽지 않다. 특히 사회 초년생 기자에게 빈소 취재는 낯설면서도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다. 유족에게 어떤 방식으로 위로의 뜻을 전해야 할지부터 난감하다. 슬픔에 쌓인 이들에게 말을 걸고, 질문하고, 대답을 들어야 한다. 기자 직업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문전 박대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기자를 직업으로 선택한 누구나 감당해야 할 몫으로 여기고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그게 잘 안 된다.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도 선뜻 빈소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한참 머뭇거리는 기자도 있다. 언론사 내부에서는 이런 모습을 기자답지 않고 나약한 태도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여간해서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이라면 기자가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게 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주저함이 기자로서의 직업 의식과 동료 시민을 향한 애도의 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문제 될 게 없다. 권력자가 아닌 취재원을 수단으로만 삼지 않고 예의를 갖춰 대하는 태도, 이건 현재 한국의 언론 수용자 대부분이 기자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일간지 기자 입장에서 보면 빈소 취재는 비효율적이다. 열 번 찾아간다고 하면 한 번 정도 기사화가 될까 말까 하니 말이다. 특히 취재 인력이 크게 부족한 지역신문에서는 그렇다. 석연치 않은 죽음은 사건·사고 현장과 목격자 그리고 유족을 만나본 다음에야 조금이나마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온 세상이 기자들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현장에는 기자가 없다. 전국에 유통되는 뉴스는 지역으로 보면 서울에 집중돼 있고 그 중 정치·연예 등 특정 분야에 쏠려 있다. 지역 소식은 가물가물하다. 언론 유통 시장을 장악한 포털과 SNS에서 서울 아닌 지역의 뉴스는 사건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하지만 그 내막을 파헤치는 차별화된 콘텐츠는 드물고, 혹시 있더라도 독자·수용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몇 월 며칠 어디서 아무개가 죽었고, 경찰은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라는 식의 뉴스를 넘어 그 이면을 들여다 보려면 사건·사고 현장 그리고 장례식장을 찾아가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애도하는 곳에 가 본 경험과 그런 곳을 방문하는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자는 물론이고 찾는 사람이 드문 적막한 빈소가 적지 않다. 유족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기자임을 밝히고 조문의 뜻을 전한 뒤 고인(故人)이 세상을 떠나게 된 길을 되짚어볼 때 꺼림칙한 점은 없는지를 묻는다. 대화가 힘든 상황이면 연락처를 남기고 조용히 빈소를 빠져 나온다.

 

최근 지인 소개로 조선인촌 주식회사 소년 직공 김오진이란 제목의 시를 알게 됐다. 이설야 시인이 2021년 낸 <굴 소년들>에 실린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인천 금곡리(현 동구 송림동)에 세워진 최초의 성냥공장, 조선인촌 주식회사에서 일하던 노동자 김오진의 죽음(자살)을 다뤘다. 이 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실제 발생했던 일을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참고하지는 않았지만, 그 소식을 전한 신문 기사도 현재 남아있다.

 

194019일 송림정 182번지에 사는 조선인촌 주식회사 직공 김오진씨가 공장에서 성냥의 원료로 쓰이는 독성물질 인을 다량으로 숨진 일을 조선일보가 그해 112일자 3면에 보도했다. 기사는 물가는 한없이 오르는 반면 월급은 그대로인 스무 살 공장 노동자가 음독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기록했다. 이 기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전시동원체제 속 식민지 인천 공장 노동자들의 피폐한 삶을 떠올릴 수 있다. “별이 빛나지 않는 밤/소년은 인()을 삼켰지로 시작하는 이설야 시인의 작품은 매일 전쟁 중이라 숟가락조차 우리 것이 아니었던 인천 성냥공장 직공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현재의 우리에게 전달한다. 시를 읽고 기사를 찾아 보면서 사회적 죽음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난 9일 인천시 중구 운서동(영종도)의 한 오피스텔 공사장에서 32살 임채웅 씨가 소형타워크레인에서 떨어진 300짜리 공구함에 깔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경인일보 변민철 기자가 빈소를 찾아가 유족을 만나 <서른 둘 아들 앗아간 산재유족들은 아직 악몽 속’>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내년 결혼을 앞두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열심히 돈을 모으는 건실한 청년이 끔찍한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났다.

 

이 기사에서 눈에 들어온 건 그 누구도 아들의 죽음에 대해 어떤 변명이나 해명도 내놓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시공사 관계자는 현장을 찾아간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멀쩡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는데 관계자들은 묵묵부답이다. 답답한 마음에 유족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역신문 기자를 만났다고 한다. 주목받지 못한,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은 전국 각지에서 매일 발생한다. 억울함을 말하고,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어도 도움을 받지 못해 가슴만 치며 애태우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 죽음에 무뎌지지 않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을 기자는 잃지 않아야 한다. 그건 기자가 갖춰야 할 직업의식이기도 하다.

김명래 경인일보 인천본사 기획취재팀장 미디어오늘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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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나팔수들에 피울음 호소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와 싸우지 말라. 그 힘 가지고 정의를 위해 힘 있는 사람과 한 번이라도 싸우라.” 617양회동 열사 범시민추모대회에서 고인의 형 양회선이 뱉은 피울음이다. 건설노조는 분신 방조의혹에 가세한 국토부 장관 원희룡에게 사과를 촉구했지만 모르쇠다. 기실 그 피울음을 들어야 할 자는 원희룡과 윤석열만이 아니다. 애초 기획 분신을 내놓고 조장한 원흉이 있다. 조선 신방복합체다. 심지어 유서의 필적이 다르다는 보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조선 신방복합체만 보는 이들에겐 지금도 그게 진실이다.

 

조선 신방복합체는 자신이 지닌 미디어 권력으로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와 집요하게 싸워왔다. 중앙 신방복합체도 가세했다. 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는 “29정글도 든 장면 쏙 뺐다공영방송 거짓선동 안 먹힌 이유제목의 칼럼(66)에서 이미 조선일보가 보도한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뒤 노조는 김씨가 진압봉에 맞아 다쳤다는 점을 부각하며 반격에 나섰다고 썼다. 이어 특히 노영방송 MBC가 앞장섰다고 부르댔다. “악마의 편집을 한 문화방송과 달리 풀영상을 보면 뉴스에서 삭제된 장면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단다. 그 정치부장과 중앙일보 기자들이 진실을 정녕 추구한다면 뉴스타파 기사의 정독을 권한다(홍주환, ‘정부는 무시하고, 경찰은 짓밟았다’ 615). 중앙일보는 이어 차라리 공영방송 민영화가 낫겠다”(616)는 논설위원 칼럼을 내보냈다. KBSMBC는 노조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영방송비난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어떤가. 언론은 언론기업을 자자손손 세습한 사주가 아니라 편집국 기자들이 주도해야 옳지 않은가. 군부독재와 야합해온 사주들을 믿지 못해 기자들이 만든 조직이 바로 언론노조 아닌가.

 

공영방송 공격엔 조선일보가 빠질 수 없다. 그 신문의 정치부장은 염치와 상식을 들먹였다. “수신료로 먹고사는 공기업 직원들을 비판하며 중립이나 공정 같은 어려운 말이 아니라고 조롱도 했다(‘공영방송서 12, 17번째로 밀린 뉴스’ 617). 자신들이 권력과 손잡고 건폭으로 몰아친 노동인이 자살로 항의했음에도 아랑곳없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 의혹을 받은 의원의 체포 동의안이 부결된 사실을 두 공영방송이 톱뉴스로 올리지 않고 일본의 오염수 문제를 다뤘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임박한 방사성 오염수 방출의 문제점을 일본 언론보다 더 보도하지 않는 조선 신방복합체야말로 문제 아닐까. 작은 섬나라 피지의 장관조차 오염수가 안전하다면 왜 일본에 두지 않느냐고 촌철살인으로 따졌다. 조선일보 정치부장이 공기업 직원들이라고 비웃은 한국방송 기자들은 조선신방복합체와 달리 분신한 건설노동인의 추모대회와 양회선의 호소를 비중있게 보도했다.

 

조선과 중앙의 정치부장들이 공영방송 공격에 팔 걷고 나선 모습은 흥미롭다. 두 공영방송을 조중동 방송처럼 만들고 싶은 윤석열의 정략적 의도와 맞아떨어진다. 미처 의식하지 못했거나 주관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객관적으로는 권력의 나팔수다.

 

나는 문재인 정부 시절 공영방송의 권력 감시 소홀을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서 신방복합체들은 아예 권력과 찰싹 붙었다. 지금 가장 감시할 권력은 윤석열이지 민주당이 아니다. 신방복합체들보다 KBSMBC는 훨씬 저널리즘에 충실하다. 더구나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가는 보도가 늘어나고 있다. 공영방송의 발전이다. 신방복합체들에선 문재인 때도 그랬듯이 자본의 목소리만 왕왕댄다.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뒤엔 자본에 더해 권력의 목소리가 넘친다. 그러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정의라도 구현하는 듯 언구럭 부린다. 권력과 자본을 대변하는 신방복합체들이 노조 탄압과 공영방송 죽이기에 나팔을 불어대는 꼴은 살풍경이다. 윤석열과 언론권력이 건폭으로 몰아 생때같은 아우를 잃은 형의 피울음을 다시 꾹꾹 눌러 전한다. “정의를 위해 힘 있는 사람과 한 번이라도 싸우라.”

손석춘 철학자·우주철학서설저자 미디어오늘 2023.06.19

 

 

세계 최대 규모 영재교육 제도의 허와 실

우리나라에는 영재교육의 제도와 법이 아주 잘 갖춰져 있다. 과학고를 설립하기 시작한 지도 40년이 넘었고, 영재교육진흥법이 시행된 지도 20년이 넘었다. 외국의 영재교육 전문가들은 한국에 과학고와 과학영재학교가 28개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워한다. 실제로 다른 어느 나라도 우리만큼 방대하고 다양한 과학영재 교육 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다.

 

중학생 또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영재교육원이 340개 있고, 영재학급도 1118개가 있다. 영재교육 대상자는 2022년 기준 72518, 담당 교원은 18340명이나 된다. 교육 대상자가 전체 학생의 약 1.4%로 양적 규모 면에서 가히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운영하는 영재교육종합데이터베이스(GED)라는 사이트는 정책 결정자, 교육자, 연구자, 학생, 학부모 등 다양한 수요자에게 영재교육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 및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영재교육 대상자 중 수학·과학의 비중이 약 63%이고, 기타 발명, 외국어, 게임, 정보, 예술, 인문사회, 종합, 체육 등이 37% 정도 된다. 예를 들어 국립국악고에는 국악예능영재교육원이 있다. 영재교육원이나 영재학급은 담당 교사들의 전문성이 미흡하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과학고, 일반고로 전환 고려해야

현재 전국에 20개의 과학고와 8개의 과학영재학교가 있다. 그런데 과학고와 영재학교는 학생 선발 방식의 차이로 인해 두 그룹 간의 학생들 수준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고, 영재학교 간에도 격차가 크다. 영재학교는 3차에 걸친 선발 시험을 통해 전국의 모든 영재들을 자유롭게 선발할 수 있는 반면, 과학고는 해당 지역의 중학생을 대상으로 시험 없이 수학·과학 내신 성적으로만 선발한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수도권 몇 개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 과학고는 2류 영재 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심지어는 영재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할 정도인 학교도 있다. 애초 전국에 막대한 국가 예산을 들여 과학고, 영재학교를 설치한 것은 각 지역의 영재들을 교육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전국 최고의 영재들이 영재학교인 서울과학고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도 문제이다. 수학올림피아드의 예를 들면, 최상위권 수십명은 모두 서울과학고 학생들이다. 영재교육에서도 지나친 동종교배는 좋지 않다. 서울과학고에 입학한 학생들 대부분이 학습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학습 의욕을 잃기도 한다.

 

얼마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앞으로 과학영재학교를 2개 더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교육부는 제5차 영재교육진흥종합계획을 발표했다. 그동안 영재교육은 확대일로의 길을 달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좀 차분히 돌이켜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과학영재학교와 과학고의 격차가 벌어진 데다 두 학교가 영재교육진흥법상 구별되는 학교이니 차제에 영재학교를 제외한 20개의 일반 과학고는 일반 학교로 전환하는 것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사교육과 과다학습이라는 문제의 원인으로 많은 이들이 대학입시의 과열 경쟁을 꼽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교입시가 야기하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과학고, 명문 자사고, 외국어고 등에 입학하기 위해 학생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사교육에 내몰린다. 어린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다른 활동을 할 시간이 없다. 정서 발달이 필요한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과다학습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수학영재들을 가르쳐 왔지만 실은 고교 평준화 정책을 지지한다. ‘하향 평준화를 염려하며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수준별로 선발해 교육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상식으로 여기는 고교 평준화는 하향 평준화를 가져온다는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평준화 시대에 학교를 다녔지만 당시에 학력 증진이 미흡하지 않았다. 일반 학교가 갖는 장점도 많이 있다.

 

나는 영재교육 자체를 전면 축소하거나 고교 평준화로 당장 돌아가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교육에서의 급격한 변화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과학고와 과학영재학교가 그동안 우리나라의 이공계 인재 양성에 크게 공헌해 온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어린 학생들의 과다한 학습 부담 문제와 사교육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영재교육의 양적인 확대는 이제 그만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 경향 2023.06.20.

 

 

 

균형 잃은 사회복지와 국민연금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거인 키클롭스는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넘어가 포도주에 취해 하나뿐인 눈을 잃고 오디세우스 일행을 놓치고 만다. 거인의 눈이 두 개였다면 오디세우스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새의 한쪽 날개를 묶어 자라지 못하게 하면 날개를 펴고 날려고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얼마 전 청와대에서 열린 사회보장전략회의는 키클롭스의 실패를 떠올리게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현금 복지는 제한하고, 서비스 복지는 산업으로 육성하자고 했다. 복지에 대한 시장중심적 관점도 문제이지만, ‘사회서비스는 돈이 되는 일이고, 소득보장은 돈 쓰는 일이라는 이분법도 이상하다. 특히 현금 복지는 식생활 등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 최약자를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는 데 지침이 꽤 구체적이다.

 

현금 복지는 소득보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소득 보장은 산재, 장애, 실업, 질병, 은퇴와 같은 삶의 국면에서 교육, 출산, 가족돌봄 등으로 돈을 벌기 어려울 때 빈곤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장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득보장을 하는 것은 시민에게 삶의 안정성을 부여해주는 장치인 것은 물론,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에도 꼭 필요하다. 소득보장을 통해 소득재분배도 이루어지고 빈곤도 예방된다. 자본주의 역사는 사회가 소득보장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기능부전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식생활 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지경에 이르러서야 소득보장을 받을 수 있다면, 삶의 고비마다 각자 버티다 결국 빈곤해지기 쉽다. 실직하면, 은퇴하면, 가족을 돌보면, 무방비 상태로 가난해진다. 더욱이 날로 커지는 시장 불평등을 줄이는 데 복지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차별과 좌절감은 커진다. 이럴 때엔 아무리 복지국가라는 팻말을 내걸고 있어도 복지국가라 말할 수 없다.

 

이런 사회는 경제적 성취도 기대하기 어렵다. 불평등한 곳에서는 기회도 공평할 수 없다. 초고령사회에서 노인에게 적정한 소득보장을 하지 않는다면 안정적 수요 창출과 경기 순환은 어렵다. 예를 들면 사회보장전략회의에서 밝힌 대로 노인이 민간업자가 제공하는 돌봄 서비스를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구매해야 한다면, 적정 노후 소득보장 없이는 돌봄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킬 수도 없고, 정부가 원하는 서비스산업 육성도 어렵다. 부실한 노후 소득보장은 돌봄에서의 소외와 불평등을 가중시킨다. 이른바 선택의 자유는 그들만의 자유가 될 것이 뻔하다.

 

한국 사회는 노후 소득보장의 기본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국민연금은 월평균 약 60만원에 불과하고, 보장 수준을 올리자는 주장은 미래세대 부담론에 가로막혀 있다. 보험료를 내고 급여를 받게 되는 국민연금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는 무기여 연금인 기초연금도 빈곤 대응이 가능한 수준으로 계속 올리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빈곤 문제의 크기는 상당하다. 그럼에도 사회보장전략회의에서 이런 문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국민연금이 세대 간 연대에 기초한 제도라는 인식은 물론, 적정 노후보장이 가지는 경제적 효과에 대한 인식도 일천하다. 오히려 세대 간 공정과 재정 건전성 논리만 강조됐다. 이는 국민연금과 같은 노후 소득보장 강화를 도외시하는 데 알리바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이라는 날개를 묶어놓는 것은 현재 청년세대의 노후 전망을 어둡게 만든다. 복지국가를 설계하며 청년세대에게 노후에도 각자도생하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사회서비스는 수익이 창출되는 산업으로 시장에 넘기고, 소득보장은 최소수준으로 억제하는 전략으로는 약자복지라는 소극적 목표조차 달성하기 어렵다. 사회서비스와 소득보장이라는 두 개의 날개를 달고 어느 누구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는 사회보장전략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경향 2023.06.20.

 

 

북한 인권을 걱정한다면 남북교류부터 재개를

며칠 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한국 외교관 한분이 북한 인권 관련 학술발표를 했다. 발표 화면에 정처 없이 유랑하는 북한의 가난한 어린이인 이른바 꽃제비들과 탈북자들의 기억에 의해 복원된 정치범수용소의 이런저런 끔찍한 장면들이 계속해서 펼쳐졌다. 발표자 말대로 북한 인권은 세계 최악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토론자들도 이에 관해서는 전반적으로 당연히 수긍했다.

 

한데 질의응답 시간에 평양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외국 외교관이 손을 들었다. 그는 북한 인권 참상에 관한 발표 내용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본인 역시 북한 근무 시절에 그쪽 인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이미 눈치챘다고 했다. 그가 궁금해한 것은 북한이 이 정도로 반인권적 지옥이라면 도대체 왜 수십명(정확하게는 지난 10년 동안 31)의 탈북자들이 스스로 재입북의 길에 나서는가였다. 아무리 가족이 보고 싶다는 등의 개인적 사연이 있어도 천당에서 지옥으로돌아가는 것은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았단다.

 

이 질문을 들은 발표자는 자신을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남한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본인들이 남한 사회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남한의 노동환경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을 수도 있다, 거의 변명 투의 답변이 이어졌다. 한데 이 답변은 청중의 의심을 푸는 데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도대체 차별이 어느 정도였고 노동환경이 얼마나 나빴기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하고 인권 이슈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북한으로 스스로 돌아간다는 것일까?

 

이참에 나도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 싶었다. 2015년 한국 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탈북자들의 사망 원인 중 자살이 15%를 차지하는데, 이는 한국 사람들 평균보다 3배나 높은 수치다. 이처럼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해 북한인권센터 조사에 의하면, 탈북민 18%가 재입북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원인 역시 무엇으로 보느냐도 나의 또 다른 질문거리였다. 한데 토론 시간이 다 돼 이 질문들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남북한의 인권 상황을 굳이 단순 비교하면, 북한 인권 실태의 심각성은 크게 두드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하늘이 사람에게 내렸다는 의미에서 천부인권을 얘기하지만, 인권이란 자연 발생적인 게 전혀 아니다.

 

단순 생존을 목표로 하는 인간집단 안에서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될 리 없다. 인권이 지켜지자면 한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사회적 부의 축적과 함께, 그 사회 안에서의 안보불안 정도나 국제적 인권 표준들을 공유할 만한 수준의 국제교류 등이 중요하다. 오늘날 북한처럼 매우 빈약한 물질적 토대 위에서 군사적 총동원 분위기, 즉 조르조 아감벤이 이야기한 예외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의회정치나 삼권분립의 원칙이 결여된 채 커다란 군부대처럼 운영되는 사회에서 인권이 충분히 지켜질 수 있다고 예상하는 사람은 적어도 인권 전문가 중에서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탈북민들이 겪는 차별과 멸시, 각종 인권침해가 상징하는 남한의 인권 상황은 훨씬 더 의외다. 북한은 가난과 지배그룹에 의한 사회적 자원의 독점 등 제3세계 탈식민 국가들의 전형적 문제들을 심각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지만, 남한은 세계인들의 대부분이 선망하고 있는 유럽 수준의 1인당 국민소득에 의회정치가 작동하는 제1세계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인권도 제1세계의 평균 정도로 지켜질 것으로 합리적으로 기대해볼 수 있는데, 실상은 이와 전혀 다르다. 국제노총(ITUC)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노동권지수에서 한국은 최악에 가까운 5등급을 계속 유지한다. 최근에 분신자살로 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선 건설노조 간부는 유서에서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 한 것뿐인데, 윤석열 검사독재 정치의 제물이 되어 자기 지지율 숫자 올리는 데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고, 또 죄 없이 구속돼야 한다고 적지 않았는가? 이 문장 하나가 수천쪽 보고서들보다 한국 노동인권의 현실을 제대로 웅변한다.

 

잔혹한 노동탄압은 한국형 신자유주의의 불가결한 동반자다. 신자유주의란, 노동자 계층의 파편화와 노동의 비정규화, 노임 억제와 초착취에 의한 자본 축적의 레짐(체제)을 뜻한다. 이 레짐은 인권과 제대로 된 공존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이와 같은 반인권적인 신자유주의가 너무나 쉽게 착근한 사유는, 바로 분단 상황을 이유로 많은 국가기구들이 지니게 된 폭압성이다. 북한보다 훨씬 더 강한 국가인 남한에서는 북한 정도의 예외상태를 유지할 필요야 없지만, 남북 대치 상황에서 남한은 부유한 나라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군사화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니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29(강제노동 금지)를 비준해놓고도, 괴롭힘과 폭언 등이 만연한 직장에서 사회복무요원들이 사실상의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어 강제노동 국가라는 오명을 얻게 됐다. 군사화 지수가 매우 높은 사회 아니면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물론 쌍방의 대치와 군사화로 인한 인권침해의 정도는, 국력이 더 약한 북한이 훨씬 높을 것이다.

 

북한 인권과 남한 인권을 함께 개선하고자 한다면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 즉 남북대화가 급선무다. 특히 상대적 약자인 북한의 경우에는, 남북이 해빙 모드에 들어가야 사회에 대한 군사적 통제의 끈을 어느 정도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 반대로, 지금과 같은 대치 분위기 속에서 북한은 한류 단속등 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 남한에서는 노동탄압을 자행하기 쉬운 보수적 분위기가 사회를 장악하게 된다. 서로를 맞대고 있는 남북한은, 하나의 분단체제를 같이 이루는 만큼 그 관계의 상태가 양쪽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부터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관계가 좋아져야 인권적 상황 개선의 가닥도 동시에 잡힐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3.06.20.

 

 

일본의 처리수 환경영향평가 보고서

일본 후쿠시마 바다는 하나이다. 그러나 바다를 둘러싼 두 개의 불확실성이 있다. 하나는 일본이 해결해야 할 원전 사고 오염수 방출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이 감당해야 할 수산물 수입금지이다. 먼저, 일본은 오염수 방출이 후쿠시마 바다를 방사능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바다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과학을 수립해야 한다. 일본의 국제해양법적 의무이다. 반대로 한국은 후쿠시마 바다가 방사능에 오염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정밀하게 분석한 결론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계속 금지할 수 있다. 한국의 국제통상법적 의무이다.

 

일본의 대응 과학이 집적된 것이 올해 2월 개정된 처리수 환경영향평가 보고서이다. 보고서에서 일본은 오염수 방출이 후쿠시마 바다를 방사능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2011년 원전 사고 이후 후쿠시마 바다에서 측정한 방사능 농도 데이터를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후쿠시마 바다는 방사능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며, 오염수 방출로 위험해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보고서는 정부가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중요 문서다. 윤석열 대통령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국제원자력기구(IAEA)안전성 리뷰라는 게 바로 이 보고서에 대한 검증이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일본은 보고서에서 불확실성을 스스로 밝혔다. 평가할 만하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과학이다. 핵 연료봉이 녹아내려 원전 격리 시스템을 뚫어 버리고, 자연 속 지하수에 직접 노출이 되는 끔찍한 상태는 불확실성, 그 자체이다.

 

일본의 최신 개정판 처리수 환경영향평가 보고서가 고백한 불확실성은 핵종 조성과 어류 농축계수이다. 먼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오염수 핵종에 대해 모른다고 밝혔다. 보고서 122쪽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다. “저장 중인 처리도상수(처리 중인 물)2차 처리 예정인데, 2차 처리 종료 후에 측정할 때까지 어떤 핵종이 조성될지는 불분명하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일본은 이를 핵종 조성의 불확실성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보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이른바 처리 전오염수 자체에 어떠한 방사능 물질이 들어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다핵종제거설비(ALPS)’를 이용해 1차 처리를 한 뒤에도 오염수에 어떠한 핵종이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고 서술했다. 일본은 2차 처리를 한 뒤 해양 방출 전에 30개 핵종에 대해서만 실제 검사를 할 뿐(보고서 16)이다. 지금 일본과 IAEA과학은 핵 연료봉에 노출된 오염수에 어떤 핵종이 들어 있고, 모든 핵종이 실제로 어떤 상태로 바다로 방출되는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일본이 인정한 또 하나의 불확실성은 어류 농축계수이다. 일본 보고서의 안전성 결론은 방사능의 해수 중 농도와 해양 생물의 농도가 평형상태를 이룬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보고서가 설명하고 있듯이 해수의 이동 속도는 빠르지만, 어류로의 이행 프로세스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조사 시점에서 평형상태였는지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서술하고 있다.

 

지금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일본이 말하고 있는 불확실성의 실체를 국민에게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다. 아울러 한국이 수용할 만한 불확실성인지 국민에게 물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출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후쿠시마 바다는 방사능 위험에서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일본의 보고서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는 후쿠시마 바다의 방사능 위험성을 근거로 한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와 양립할 수 없다. 오염수 방출은 동의하지만 수산물 수입금지는 하지 않겠다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에 떼를 쓰듯이, 좀 봐 달라며, 수산물 수입금지를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동의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일본에 동조하려면 그 이전에 일본의 처리수 환경영향평가 보고서를 한글로 번역해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만약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계속 금지하겠다면, 한국 정부는 일본 동조 발걸음을 당장 멈춰야 한다. 아울러 일본에 오염수 시료를 요구해 독자적으로 방사능 위험 분석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일본 정부에 세슘 우럭이 왜 나왔는지 따져 묻고, 후쿠시마 해저토와 심층수의 방사능 축적 실태 조사에 실시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한국이 오염수 방출에는 동의하고, 수산물 수입은 금지해도 되는 과학은 없다. 그것은 하나의 바다에 관한 과학이 아니다. 후쿠시마 바다는 하나이다.

송기호 변호사 경향 2023.06.21.

 

평행선 위에서

한국 언론에 거의 매일 등장하는 트로트가 도대체 무슨 음악 장르에 속하는지 한번 검색해 보았다. 일본에 들를 때면 가끔 보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엔카(演歌) 비슷한 대중가요가 아닌가 하면서 찾아보니 곡목이 조금 특이한 평행선이 눈에 띄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흥겨운 발라드였다. “나는 나밖에 모르고/ 너는 너밖에 모르고/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길을 걷지 평행선/ 나는 나밖에 몰랐지/ 너는 너밖에 몰랐지로 시작하는 가사 내용도 간단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좋은 결실을 보지 못한 상태를 묘사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1980년대부터 사회학에서 많은 논쟁을 낳았던 평행사회를 떠올렸다. 서유럽국가들이 일반적으로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 문제로 심한 사회적 갈등을 겪는 가운데 등장한 개념이다. 특히 이슬람 문화권에서 건너와 세대를 넘기면서 서유럽에 사는 이주민의 사회가 논쟁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들이 주류사회의 생활세계가 요구하는 이른바 주도문화와의 통합보다는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안주하는 데서 오는 긴장과 갈등이 테러리즘의 온상도 되었다고 보았다. 이 시각은 당연히 다양성을 강조하는 다문화라는 개념도 강하게 비판했다.

 

이렇게 평행선을 그으며 서로 다른 생활세계를 보여주는 양상들을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확인하게 된다. 유럽에서처럼 이주민의 생활세계가 이의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같은 시대에 같은 삶의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마치 서로가 다른 행성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언론매체가 그렇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중요한 사건을 한 편에서는 아주 크게 다루는데 다른 편에서는 없었던 것처럼 아예 다루지도 않거나, 설사 다룬다고 해도 의도적으로 이를 왜곡한다. 사설과 칼럼의 내용도 같은 사건이지만,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지를 의심할 정도로 전혀 서로 다른 사회적 메시지를 내놓기 때문이다.

 

이른바 진영논리가 낳는 심각한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최근 들어 특별히 시선을 끄는 사례로 한 건설노동자의 분신 사건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문제가 떠오른다. 노조활동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에 익숙해지다 보니 197011월에 일어났던 전태일 분신 사건을 연상시키는 양회동 건설노동자 분신 사건도 기획된 것으로까지 보려는 반인륜적인 언론매체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노동쟁의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대응이 오히려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사회다.

 

사회적 자본 통해 갈등 치유 모색

국민의 80% 이상이 우려하고 반대하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후쿠시마 괴담이 만들어 낸 결과로만 몰고 가는 기사, 칼럼과 사설도 쏟아지고 있다.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여전히 갈리고 있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언론매체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리 전달된다.

 

사회 성원 간의 서로 다른 의견이 교차점 없이 평행선을 그리면서 달리는 사회는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끼리만 모여 사는 일종의 동호인 사회. 바로 이 점에서 공공성을 규정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힘으로서 정치는 실종되고 그 자리에 분절화된 개인과 집단이 그릇된 정보나 선동에 쉽게 휩쓸리는, 부정적인 의미의 정체성 정치가 들어서게 된다.

 

사회 성원들을 유기적으로 서로 결속시키는 요소는 기본적으로 정치와 경제다. 국가의 통치 권력과 시장을 매개로 한 경제활동은 이의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사회성원 간의 신뢰와 유대감, 호혜의 규범이 없다면 그런 정치나 경제활동도 안정된 상태에서 지속할 수 없다.

 

연구자와 연구 대상인 사회에 따라 공통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지만,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개념이 바로 사회적 자본이다.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서 구성되는 사회의 구조와 이를 유지하는 작동방식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가 있다. 그는 물질적인 경제적 자본과 주로 교육과 지적 능력과 연관된 문화적 자본에 이어 어떤 집단 속에 지속해서 몸을 담은 성원이 얻는 자산으로서 사회적 자본을 추가했다.

 

이론적으로 사회적 자본도 다른 두 자본처럼 독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적 자본은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 자본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나타나며 경제적, 문화적 자본이 낳은 불평등을 대부분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회적 자본에 대한 이런 비판적 견해는 프랑스 사회의 특이하고 견고한 엘리트 집단을 염두에 두었다. 대부분이 전통적인 부르주아 배경을 지닌 젊은이들이 특정한 엘리트 교육을 거쳐 상호신뢰의 강한 연계망을 구축해서 정치와 경제의 핵심부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엘리트의 동종교배식 자가 충원이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비판도 거셌다. 1945년에 창립되었다가 2021년 말에 폐쇄된, 프랑스의 고위관리를 양성했던 국립행정학교(ENA)가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과 달리 개인주의나 초())개인주의로 말미암은 한 사회 통합능력의 저하나 상실에 대처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처방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자본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로버트 퍼트넘을 포함한 미국의 공동체주의자들은 대체로 공화주의 전통의 시민사회와 공동체의 연대성을 사회적 자본의 기본 내용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 자본을 개인의 자산으로 보는 부르디외와 달리 집단의 자산으로 보려 한다.

 

사회적 자본과 관련된 많은 실증적 연구는 주로 이 후자의 사회적 자본을 염두에 두면서 공동체의 위기와 이의 치유에 관심을 둔다. 한국의 사회과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많은 갈등의 양상은 사회 성원이 함께 지녀야 할 공동 규범이나 상호신뢰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을 낳는다. 세계 10대 무역국에다가 ‘G8(주요 8개국)’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을 들게 하는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이게 나라냐라는 자조와 냉소 섞인 질문이 그렇다.

 

평행선도 발상 바꾸면 만날 가능성

지난 대선 득표율에서 겨우 0.73%포인트 차이로 신승한 정권이기에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만큼이나 큰 반대 세력의 존재를 의식하고 이들과 평행선을 그으며 앞으로 치닫기보다는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게다가 검찰 공화국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은 기득권자들의 엄청난 비판을 감수하고 프랑스의 정치와 경제계의 화려한 등용문이었던, 자신이 졸업한 학교 문까지 닫았다. 어떤 특정한 집단이 갖는 사회적 자본이 주로 내적인 신뢰와 호혜를 바탕으로 한, 마피아 같은 비밀결사 조직체를 낳을 수도 있다.

 

내부적으로 결속력과 통합력이 강한 사회나 조직은 대체로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다. 이는 평행사회 안에서 사는 이주민도 그렇지만 혈연, 지연과 학연의 질긴 연결망 속에서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처지도 비슷하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영남과 호남으로 갈라지고, 금수저와 흙수저가 다투고, ‘토착 왜구종북 빨갱이가 싸우는 평행사회 속에서 끼리끼리 쌓아 올린 높은 장벽을 허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정글 북>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이 남긴 동양과 서양의 발라드라는 시가 있다. 지독한 인종주의자, 식민주의자였던 그가 제2차 영·일 동맹의 결성을 맞아 190510월에 발표한 이 시는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 절대 서로 만날 수 없을지니/ 천지가 하나님의 위대한 심판의 옥좌에 설 때까지도 그러리라/ 그러나 동서양에도 국경, 인종, 계급도 없으리라/ 세계의 끝에서 온 두 강자가 서로 만날 때면으로 시작하고, 같은 구절로 끝난다. 철저한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그도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유색인의 제국주의와도 만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평행선이 만날 수 있다는 주장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공간 속 도형의 성질을 밝히는 기하학마저도 만나는 평행선을 이야기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평면 위의 두 직선은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전제하는 굽은 공간에서는 만난다. 거의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평행선 위를 서로 각각 질주하는 우리 삶의 양식도 발상 자체를 바꾸면 언젠가는 서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경향 2023.06.21.

 

 

대통령 한마디에 시스템이 무너지는 나라

이번엔 다들 수능 출제진에 포함되기 두려워하겠죠. 어떤 단어는 교과과정 안이고 어떤 건 아니고 이걸 따지기도 쉽지 않고. 그걸 누가 판단하나요?” 한 유명 영어 강사는 통화에서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15일 발언을 처음 접했을 땐 그리 유별나게 느끼지 않았다. ‘공교육 정상화’ ‘사교육비 절감을 외치지 않은 정부가 역대 있었나. 교육과정평가원도 교육과정 내에서 수능 출제를 다짐해온 터다. 이런 기조를 꼭 실천하겠다는 뜻이라면 환영이다.

이후 전개는 모두가 알다시피다. 교육부 담당 국장 대기발령평가원 감사교육부 장관 사과와 킬러문항배제 발표평가원장 사임이 숨가쁘게 진행됐다. 두 아이가 수능을 치른 지 꽤 세월이 흘렀지만, 일반적으로 6월 모의평가가 어렵고 9월이 좀 쉬웠다는 정도는 기억한다. 이번 결과는 28일 발표될 예정이고, 입시기관들의 가채점이 엇갈리긴 했어도 난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떤 과목의 어떤 문항이 문제냐는 기자들의 끈질긴 질문에 답을 못 하는 교육부 차관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검찰 시보 시절부터 입시 부정 수사를 맡은 전문가”(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나도 전문가지만 대통령에게 많이 배운다”(이주호 부총리) 같은 웃음코드도 있지만,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공포물에 가깝다.

 

정부와 <조선일보> 등은 교육개혁이자 사교육 카르텔과의 싸움이라 의미부여하려 애쓴다. 사교육업체 이권이 교육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맞다. 개혁이란 때론 상식을 뛰어넘는 의지와 실행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 또한 맞다. 하지만 좋아, 빠르게 가가 필요한 일과 그래선 안 되는 일이 있다. 그걸 구분하는 게 국정 능력이다. 대한민국 입시제도 변화가 언제 그럴듯한 명분이 없어 실패했었나. 구체적인 근거와 대책 없이 출제 기법의 고도화만 되뇔 때, 신유형·준킬러문항 같은 불안 마케팅이 커진다는 건 옆집 학부모에게만 물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정녕 교육개혁을 바란다면 들여다볼 지점은 명확하다. 챗지피티와 인공지능 시대엔 창의성과 융합이 결정적이라고 하나같이 말하는데, 현실은 오지선다형 수능에서 얻은 소수점 이하 단위의 점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듯 돌아간다. 킬러문항은 30년 된 수능의 한계와 이런 현실이 낳은 부산물일 뿐이다. 능력주의란 이름으로 학력 차별과 노동 천시가 이토록 일상화된 사회에서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할 부모들이 얼마나 있을까. 모든 이들이 자녀 교육을 뒷받침할 지적 능력과 환경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율형사립고·외국어고는 유지한 채 킬러문항을 없애 교육 약자를 위한다고 한다.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내 능력치 밖 논리다.

 

지금 온통 관심은 수능 혼란과 전망에 가 있지만, 주목할 지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번처럼 어떤 통로로 대통령한테 입력됐는지 알 수 없는 정보가 정책 발언으로 튀어나오는 일이 반복되면 사회의 리스크는 커질 수밖에 없다. 노동과 외교, 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편향된 인식은 이유를 짐작이나 할 수 있다. 실제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도 적잖다. 그에 비하면 교육은 뜬금없다. 박순애 장관 사임으로 끝난 취학연령 앞당기기 전말은 아직도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대통령이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얻고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어떤 정책도 신뢰를 얻기 어려운 건 자명한 일이다.

 

공직사회, 나아가 사회 각계에 조금이라도 대통령에 어긋나면 다친다는 메시지가 확산되는 것도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모평 하나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데 수능에 대해 작은 불만이라도 제기될 경우, 출제위원이나 기관에 검찰 압수수색이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최근 현안에 의견을 내는 것에 대해 감사나 수사의 두려움을 실제 느끼는 학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늘었다. 정권퇴진 주장도 자유롭게 하는 세상 아니냐 할지 몰라도 중간지대의 분위기는 다르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위축 효과가 장기적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입시의 ‘4년 예고제는 가볍게 무시됐고, 전문가들의 우려는 이권 카르텔정도로 치부돼 버렸다. 설사 문제가 있어도 제도와 시스템엔 역사와 맥락이 있는 법이다. 국가교육위원회,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수장에 논란 많은 인사를 앉혀놓길래 뭔가 뜻이 있는 줄 알았더니 숙의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교육개혁·노동개혁에서 이 기구들도 존재감은 제로다. 대통령 한마디에 각 분야 시스템이 무너지는 지금 상황을 아직은 코미디라 믿고 싶다. 이런 코미디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퇴행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게,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dora@hani.co.kr 한겨레 2023.06.21.

 

 

극단적 중도파들의 시대

문화의 힘은 위대하다.”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을 찾은 김건희 여사의 말이다. 그날 그가 우아하게 축사를 한 행사장에서 송경동, 정보라, 이원재 등 문화예술인들이 강제퇴거당했다. 소설가 오정희씨의 도서전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던 중이었다. 오씨는 박근혜 정부 시절 문학계 블랙리스트실행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블랙리스트 자체가 문화의 힘을 통제하기 위한 검열이다. 그런데 그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또다시 권력자의 안전을 이유로 삭제되었다. 그러고 보면 김 여사의 연설은 그 자체로 반어법의 가장 당대적인 퍼포먼스였다. 문화의 힘이 짓밟힌 자리에서 그것을 상찬했으니 말이다.

 

다음날, 나는 같은 자리에서 예술, 소외, 검열이라는 제목으로 토크를 진행했다. 시인 김선오, 아티스트 이반지하, 연극 연출가 신재, 이렇게 세 사람을 연사로 초청해 퀴어, 장애인, 채식인 등 존재 자체가 검열의 대상이 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검열이 일어난 자리에서 검열을 비판할 수 있을까? 허용되는 저항과 그렇지 않은 저항은 어디에서 갈리는가? 우리는 김선오 시인의 말처럼 저항을 상품화하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팔고 있는 건 아닌가. 깊이 있는 화두를 던져준 연사들과 그 자리에 함께해준 열성적인 청중들이 아니었다면 황망했을 자리였다.

 

토크가 끝나자 한 청중이 손을 들고 마이크를 잡았다. “좀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하겠다며 입을 연 그는 소위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정상화하자는 극좌적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러다 보면 나치의 우생학처럼 우리 사회에서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극우적 생각도 정상화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우생학처럼 힘 있는 자들을 위한 논리가 과학의 지위를 얻어 소외시키고 죽여 온 사람들을 더 이상 죽이지 말자는 이야기가 우생학을 옹호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없다고 답했고, 신재 연출가는 나는 사상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차별받는 엄연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질문의 내용만큼이나 나를 괴롭힌 건 형식이었다. 어떤 극단적입장에도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 중도로서 내가 당신들의 말을 평가할 수 있다는 그 태도 말이다. 요즘 어디에서나 이런 태도를 만날 수 있다. 기이한 중립 기어가 우월한 판단력의 증거처럼 사용되지만 그 바탕에는 비판과 저항의 맥락을 지우고 입장을 가지는 것 자체를 극단으로 치부하는 반지성적 몰이해가 놓여 있다.

 

이 난감한 풍경 앞에서 극단적 중도파”(타리크 알리)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는 영국 노동당의 3의 길이나 노무현의 좌파 신자유주의같은, 대안을 상상하기를 포기한 좌파 정치의 자살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탈정치적 중도 표방은 더 이상 일부 정치 세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의 끊임없는 실패 속에서 등장해 단단히 자리 잡은 악질적인 시대정신이다.

 

그러다 보니 공공기관 역시 중도파를 자처한다. 최근 인천시에서는 인천여성영화제에 퀴어 영화를 상영하려면 탈퀴어 영화도 상영하라고 압박을 넣었다. 퀴어는 사상이 아니다. 존재다. 도대체 어떻게 탈퀴어하란 말인가? 이는 퀴어에 대한 억압이자 검열이지만, 인천시는 중립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인천여성영화제는 이에 항의하면서 시의 지원 없이 영화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김건희 여사는 도서전에서 <펀홈>을 구매했다. 레즈비언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평생 자신이 퀴어임을 숨기고 살았던 아버지에 대해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여당 지자체장들의 퀴어 배제 기조를 생각하면, 여사님은 이번에도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셨다. 혹은, 이런 소비야말로 여사님이 극단적 중도파의 시대에 선택한, 진심을 전달하는 방식이었을 수도.

손희정 문화평론가 경향 : 2023.06.22.

 

김밥말이 패션'은 그만, 헬멧 없으면 자전거도 없다

우리 아이들 지키는 자전거 안전 세가지

지난 16일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길에 덤프트럭에 치어 사망한 아산병원 흉부외과 주석중 교수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애도의 목소리와 함께 안타까움을 표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어렵게 구해주고 정작 본인은 허무하게 떠났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안타까운 사고를 언급하며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사고가 자전거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고인은 자전거를 탄 채 횡단보도를 건너다 덤프트럭 뒷바퀴에 깔린 것으로 알려졌다. 자전거 사고에서 목격하게 되는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사고 유형이다.

 

오토바이보다 위험한 자전거

우리가 흔히 오토바이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전거가 더 위험하다. 2019년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교통사고 유형별 응급실 내원 현황'에 따르면 차량(48%)과 보행자(19.7%) 다음이 자전거(17.2%)였다. 오토바이는 자전거 다음(12.8%)이었다.

 

국내 자전거 인구가 12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런데 다쳐본 사람은 안다. 자전거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특히 아이들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자전거 사고는 하루 중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가장 많이 발생한다. 즉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이후 발생이 급증하는 것이다. 특히 소아·청소년 사고율(36%)은 성인(12%)의 세 배다. 그래서 자전거 사고 환자 중 19세 이하 소아·청소년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43.1%.

 

아이들 자전거 사고 발생률, 헬멧 착용률과 정확하게 반비례

자전거 안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헬멧 착용이다. 자전거 사망사고의 원인 중 77%가 두부 손상이다. 문제는 전체 자전거 사고에서 헬멧 착용 비율이 11.6%라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낮은 헬멧 착용률이다. 어른들이 헬멧을 우습게 보니 자식들도 헬멧을 우습게 본다. 한 조사에 따르면 어린이 헬멧 착용률이 19%에 불과한데 부모들이 어릴수록 헬멧을 씌우지 않는 것인지 14세 미만 소아청소년 헬멧 착용률은 고작 9%. 아이들 사고 발생 시 헬멧 착용률이 4.6%인 것을 보면 아이들 자전거 사고 발생은 헬멧 착용률과 정확하게 반비례한다.

 

고 주 교수는 사고 당시 헬멧을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몇 가지가 우리나라 치명적 자전거 사고의 특성을 보여준다. 우선 횡단보도를 자전거를 탄 채 건넜다는 점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면 보행자로 건너야 한다. 도로교통법 제217항은 자전거를 '이륜차'로 분류한다. 횡단보도를 자전거에 탑승한 채 건너다 사고가 나면 보행자로서 보호받지 못하고 차량끼리의 사고로 간주한다. 횡단보도에서는 자전거에서 하차한 후 손으로 밀고 가야 한다. "그게 말이 되냐"? 쓰레기분리수거나 버스중앙차로제나 모두 처음엔 그게 말이 되냐고 했지만 지금은 당연한 문화로 자리잡았다. 의지의 문제다.

 

공포의 우측 뒷바퀴

두 번째는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는 덤프트럭 우측 뒷바퀴의 공포스러움이다. 고인도 여기에 당했다. 대형 차량이 우회전 하는 경우 뒷바퀴는 앞바퀴의 궤적보다 훨씬 안쪽으로 치고들어오게 마련이다. (급작스러운 후진이 어려운) 자전거도 위험할 뿐 아니라 교차로 횡단보도에 서있는 사람들도 위험하게 마련이다. 내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가 도심 한복판에서 그냥 서 있다 그렇게 세상을 떴다. 몇 년 후 아들을 잊지 못한 그 어머니도 결국 아들을 따라갔고. 그래서 교차로 횡단보도에서 대기할 때는 두 걸음 안쪽에서 대기해야 한다. 아이들은 세 걸음 안으로 들어가 기다려야 하고.

 

세 번째는 트럭 운전자가 고인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뉴스에 나온 사고 현장을 보니 당시 고인의 자전거, 헬멧, 신발은 모두 검은색이었다. 옷색깔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안전을 고려한다면 밝은색의 옷과 장비가 필수적이다. 특히 우리 아이들을 보면 위험천만하다. 이 아이들도 분명 '백의 민족'일텐데 아이들은 한사코, 떼거리로 검은색을 선호한다. 그래서 등장한 게 이른바 '김밥말이 패션' 아니던가. 배트맨이 검은색 옷을 입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밤에 안 보이려는 거 아닌가? 한밤 중 헬멧도 쓰지 않은 채 검은 자전거에 검은색 패딩을 입고 도로를 질주하는 위험천만한 아이들을 보면 내 마음이 다 불안해진다.

 

'김밥말이 패션'은 이제 그만: 아이들을 밝게 입히자!

서울의 리라초등학교는 교복, 체육복이 모두 노란색이다. 학교 건물도, 스쿨버스도 노란색이고, 교화도 노란색 개나리고, 교가는 '병아리 행진곡'이다. 교복이라면 검은색이나 군청색 일색인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이례적이다. 그래서 '병아리 학교'라는 웃음 어린 지적도 있지만 아이들 안전을 위해서라면 대단히 훌륭하고도 용감한 결정이다. 설립자의 결정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언젠가 설립자의 손주가 어두운 밤 교통사고를 당해 밤에도 잘 보이는 노란색으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오래전 OECD 가입국이 됐고 이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고 자랑스러워 한다. 그러나 안전에 있어서 만큼은 한참 멀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일본이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러 나올 때 아이들은 '로보캅'으로 변모해서 등장한다. 헬멧은 물론 손목보호용 장갑, 팔꿈치보호대, 무릎보호대는 기본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도, 아이도 헬멧조차 쓰지 않는다. 어릴수록 헬멧을 쓰지 않는 게 우리나라다.

 

고민할 필요도, 헷갈릴 필요도 없다. 헬멧이 없으면 자전거도 없다. 아이들은 밝은 옷을 입혀서 내보내야 한다. 안전은 타협의 대상도 아니고,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

정희준 문화연대 집행위원 | 프레시안 2023.06.23.

 

 

검찰수사로 대입 전문성 키워온 대통령이걱정스러운이유

스스로 '킬러문항'이란 좁은 프레임에 걸어 들어간 대통령

역시 수사를 통해 입시 전문성을 쌓아온 검찰 출신 대통령(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답다. 교육 정책을 검찰 수사하듯 한다. '킬러 문항''핀셋 제거'라는 말도 나왔다. 벌써 교육부 대학입시 담당 국장과 교육과정평가원장을 날리고 시작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국무총리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교과과정 밖 수능 출제 배제' 지시가 반영되지 않았다며 교육부에 대한 복무 감사에 돌입했다. 대통령이 지난 3월부터 수능 모의고사에 킬러 문항을 출제하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6월 모의고사에서 킬러 문항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어떤 복무 행태를 감사하는 것인가. 직권남용인가, 복지부동인가? 그림도 잘 그려지지 않는다.

 

보안을 요하는 수사처럼, '6월 모의고사'에서 킬러문항이 어떤 형태로 등장했는지부터, 모든 게 베일에 가려있다. 킬러 문항이 6월 모의고사에서 실제 등장했는지 여부조차 아직 정부가 '분석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킬러 문항' 혐의는 있다는 것이다.이주호 교육부장관은 대통령이 킬러 문항에 격노한지 일주일도 넘은 오는 26일에 그걸 공개한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전광석화같은 '깨알 지시'에 대한 반응 치고 너무 오래 걸린다.대체대통령실과 교육부는 소통이란 걸하고있는것인가.

 

공개된 후에도 문제다. 과연 공개될 문제는 '킬러 문항'인가 아닌가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킬러 문항'의 기준은 무엇인가. 대통령이 '어렵다' 느끼면 킬러 문항인가? 여론조사라도 할 것인가? 나아가공개된 킬러 문항 수준의 난이도 문제가 9월 모의고사와 수능에서 제거되면 '사교육비 경감' 효과가 발생할 것인가의문제도있다.킬러문항이제거됐는데사교육비통계수치상유의미한변화가있을것인가?변화가없다면대통령이직접챙긴정책은실패했다고평가될것인가?대통령은지금스스로에대한평가기준을'킬러 문항'을 통해 제시하고있는것이다.

 

검찰수사처럼,킬러문항을잡아넣고철창문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 이 스토리가끝나면 다행이다. 그러나 정책은 수사가 아니다. 킬러 문항을 잡았을 때, 그것이 실제 국민의 생활에어떤 이익으로 돌아가는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킬러 문항, 문제다. 중요하다. 그런데 무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모의고사 수능 문제 출제까지 꼼꼼히 챙기는 '만기친람' 방식은 우려스럽다. 검찰 수사하듯 '킬러 문항'과 그와 연계된 '이권 카르텔'의 환부를 도려내면 마치 사교육이 줄어들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고 스스로를 가뒀다. 실제로 수술하듯 교육 정책을 만지고 있다. 깡패를 많이 잡는다고 범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재벌 총수를 구속한다고 재벌 개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교육 '이권 카르텔', 이게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본보기로 '카르텔 패밀리' 몇명잡아들인다고 사교육 시장이 축소될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그게 유의미한 저출생 대책으로 이어질 것 같지도 않다. 지나친 비약 같나? 하지만 이 비약의 모델은 윤석열 정부가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킬러 문항 타령'도 뜬금없다. 정부는 지난 3월부터 지시했다고 반박했지만,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지난 328'저출산 정책 추진방향 및 과제'을 마련하면서 내놓은 '저출산 5대 핵심 분야'에서 사교육 문제는 달랑 한 줄 언급돼 있다. 그 내용도 (사교육비 경감) 빈틈없는 돌봄과 수준 높은 방과후 프로그램제공 등 사교육비 경감대책 마련" 수준이다. 대입 수능시험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었다.

 

지금 교육 정책을 다루는 윤석열 정부의 방식은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다룬그것과 비슷해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다양한 방식을 강구했지만, 정작 시장 구성원들에게는 마치 '부동산 세금만 올리면', 마치 '공직자의 주택 보유 수만 줄이면', 마치 '다주택자만 단속하면'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 것처럼 받아들여진 면이 있다. 정부의 나이브함과 보수 언론의 집요한 공격, 부동산 수요·공급 주체의 심리 예측 실패가 뒤섞인 것이다. 모든 걸 고려해 법과 제도를 종합적으로개선했어야하는일인데,정부스스로 '공직자 2주택'과 같은 특정 사례를 제거하는 대증요법에 매몰되며 좁은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부동산이 심리라면, 교육도 심리다. 교육 정책 역시부동산 정책 못지 않게 복잡하다. 대통령이 직접 눈에 보이는 '킬러 문항'(실제 존재하는지 아직 알 수 없는)을 때려잡겠다고 검찰 수사하듯 달려들면 여론의 이목은 킬러 문항에 쏠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대통령과 교육당국이 움직일 공간은 좁아진다. 대통령 스스로 '킬러 문항' 프레임을 만들고 자신을 가둔 셈이다.

 

이제 6월 모의고사, 9월 모의고사, 12월 수능에서의 최대 관심은 '킬러 문항'이 됐다. '킬러 문항'이 나타났느냐, 안나타났느냐가 논쟁이 될 수밖에 없고, '불수능'이든 '물수능' 그에 따른 혼란도 대통령이 오롯히 책임지게 되어버렸다. 만약'킬러 문항'이 제거됐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교육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평가마저 대통령이 안아야 한다. 킬러문항을 제거했는데 사교육비가 줄지 않았다는 통계가 나오면이제 뭐라고 할 것인가.

 

사교육 문제가 문제 출제 '기술'의 문제였다면진작해결됐을일일것이다. 한심스럽게도 보수 언론은 대통령의 '킬러 문항 죽이기'장단에 맞춰 사교육 시장 몇몇 기술자(일타강사)들의 초호화 생활을 캐내고, 이미 수십년 지난 야당 정치인의 '학원 운영' 경력을 보도하고 있다. 이런 건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난하기 위해 청와대 대변인의 흑석동 땅 구매를 추적하는 것만큼이나 허탈하고 무의미한 일이다.학원강사세무조사하고,'카르텔'지목된전직교육부간부잡아들이면사교육비가줄어들까?

 

검찰은 사회 구조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쁜 놈'을 포착해 잡아들이고 벌해'나쁜하면이렇게된다'본보기를보여주는역할을하는사람들이다. 검찰 수사는 보직을 날릴 수 있고 때론 사람을 처벌할 수 있고 '권 카르텔'을 일시적으로 와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교육 정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근본적으로 '조국 사태'에 올라타 정시 모집 확대 여론을 받아들여 공약에 반영한 윤석열 정부가, 정시의 근간인 수능의 변별력을 손대겠다는 것도 모순이다. '모순'은 이 정부의 주요한 특성이기도 하다.

 

검찰 수사로 대학 입시의 전문성을 키운 윤 대통령이걱정스러운이유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3.06.24.

 

 

공교육의 가치를 물어야 할 시간

킬러 문항이 공개되면 누구나 분노에 치를 떨게 될 것 같다. 며칠 전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이사장이 변호사도 풀지 못하는 문제라면서 공개한 내용을 보고 나도 그랬다. “갑 은행이 어느 해 말에 발표한 자기자본 및 위험가중자산은 아래 표와 같다. 갑 은행은 OECD 국가의 국채와 회사채만을 자산으로 보유했으며 바젤협약의 표준 모형에 따라 BIS 비율을 산출하여 공시하였다. 이때 회사채에 반영된 위험 가중치는 50%이다. 그 이외의 자본 및 자산은 모두 무시한다.” 이런 설명과 수치를 제시하고 갑 은행이 보유 중인 회사채의 위험 가중치가 20%였다면 BIS 비율은 공시된 비율보다 높았겠군등의 5개 보기를 주면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라는 2020년 수능 국어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대입 수험생이 풀어야 하는 현실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킬러라는 말 그대로 아이들을 죽이는 일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골병들고 사교육은 존속한다. 문제가 어려워져도 아이들은 죽기 살기로 따라가야 한다는 점에서, 수사나 감사로 밝혀질지 모르겠지만, 교육당국과 사교육업계의 카르텔이라는 점도 확실하다. 5공화국의 업적인 사교육 금지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수십년간 누적된 현상이고 변화가 절실하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수능 난도를 낮추고 학원의 불공정 행위를 단속하고 사교육이 필요 없도록 공교육을 강화한다는데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진짜 생각하는 걸까? 문제가 쉬우면 변별력이 떨어지는 물수능이 되거나 킬러대신 준킬러문항이 늘어나서 학원 수요는 여전하다는 등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다. 공교육이 어떻게 사교육을 대체할 것이며 나아가 왜 그래야 하냐는 것이다. 공교육이 국····과 학습 위주로 이뤄지는 한 사교육을 대체하기 어렵다. 학원은 집요하게 따라잡으면서 아이들을 문제 푸는 기계로 만들어준다. 학원을 핍박해서 다 없애면 되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공교육은 사교육과 달라야 하며 공교육의 가치에 따라 입시제도가 만들어지는 게 이상적이다.

 

윤석열 정부만 탓할 바도 아니다. ‘조국 사태를 봉합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대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시 학교생활기록부 전형 위주로 가던 입시제도를 되돌려 서울 시내 대학들의 정시 비중을 40%로 높이도록 했다. 수능 비중이 높아지면 난이도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교육과 입시 문제는 난제 중 난제이지만 어느 쪽이든 정치적 이익에 따라 접근하다 보니 문제를 더욱 키우는 것이다. 난데없는 수능 이슈를 놓고 다시 편 가르기를 하기보다는 공교육의 가치가 무엇인지 물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교육은 가정과 더불어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도록 키우며 그 아이들을 통해 국가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부모의 능력에 따라 아이들 처지가 크게 달라지지 않도록 보완하는 것이 공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공정이다. 이는 학원에 가지 않고도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학원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교육해야 할지에 대한 공통감각이 필요할 텐데 지금 우리 사회가 극단적 대립상태이니 교육현장마저 미래의 유권자를 확보하려는 정치투쟁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 사례가 최근 생태전환교육을 둘러싼 갈등이다. 서울시의회 최유희 의원을 비롯한 국민의힘 소속 시의원 53명은 서울시교육청이 2020년부터 추진해온 생태전환교육을 무력화하기 위해 생태전환교육 지원 및 활성화에 관한 조례를 폐지하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서울 학생들의 농촌유학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들지만 본질은 생태전환교육환경교육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환경교육을 생태전환교육으로 확대할 당시, 기후위기와 지속 불가능한 미래를 극복하는 사고와 삶의 전환이라는 문제의식을 희석시키려는 움직임이다.

 

기후생태위기는 진보적 의제라기보다는 보편적 의제이다. 나날이 격변하는 기후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보수가 이 의제를 진보로 몰아붙이는 한, 보수는 영원히 소수의 입장에 서게 될 수밖에 없다. 인권, 세계시민의식, 공동체의 가치, 동료 시민이나 자연생태계와의 연대와 공존 등은 공교육이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 난데없는 킬러문항의 공격 앞에서 가치중립적인 문제풀이식 학교교육으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경향 : 2023.06.24.

 

 

주식으로 100% 돈을 버는 법

주식으로 100% 돈을 버는 방법이 있다. 먼저 시총 상위 100개 종목을 산다. 한 달 뒤에 보면 오른 종목도 있고 내린 종목도 있다. 오른 종목은 팔고 내린 종목은 홀딩한다. 또다시 한 달 뒤에 빨간색(이익) 종목만 판다. 이를 반복하면 실현이익은 매달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실현이익이 계속 커지는 것과 동시에 미실현 손실도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오르기만 하면 족족 팔기 때문에 큰 이익을 볼 수는 없다. 반면, 악재가 터진 기업의 손절 전략이 없기 때문에 미실현 손실은 점점 커진다.

 

세수결손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그래서 매달 국세수입 실적이 나올 때마다 거의 모든 언론이 세수결손 규모를 전한다. 지난 3월 말 기준(5월 발표) 보도를 보니 1분기(3월 말) 이미 54조 원 적자라고 한다. KBS 기사를 보면 올해 예산에서 계획된 적자 규모가 58조 원인데 3월 말에 이미 54조 원 적자가 났다고 한다. 1분기만 54조 원 적자면 4분기까지 누적되면 적자폭이 얼마나 확대될까 두렵기까지 한다.

 

3월 말 재정적자 규모가 54조 원임을 전하는 기사

 

최근(6) 4월 말 기준 실적이 발표되었다. 갑자기 4월 재정수지가 흑자 전환되었다고 한다. 최악의 세수 펑크를 피할 것이라는 장밋빛 기사 제목도 보인다. 나라살림은 개선되었지만 세수 감소 폭은 확대되었다는 기사제목과 재정수지 적자 폭 감소는 코로나 대응 지출 감소 덕이라는 해설 기사 제목도 보인다.

 

4월 말 기준 재정수지 흑자전환 보도

 

그럼, 3월말 기준 재정수지 보도 수치가 중요할까? 아니면 4월말 기준 보도가 중요할까? 안타깝지만 둘 다 기사로서는 가치가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매달 세수결손 규모를 전하는 보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매월말 기준 재정수지 적자규모 보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재정수지는 재정 수입과 재정 지출의 차액을 뜻한다. 그런데 1년 예산 제도를 편성하는 우리나라는 지출시기를 1년 동안 조정할 수 있다. 올해 우리나라 중앙정부는 639조 원을 쓰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639조 원을 12로 나누어서 매달 동일한 금액을 지출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상황에 따라 또는 정치적 결단에 따라 1월에 많은 금액을 지출할 수도 있고 또는 12월에 몰아서 지출할 수도 있다.

 

당연히 우리나라 행정부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심의한 예산금액만을 지출해야 한다. 행정부는 국회가 정한 639조 원보다 더 쓸 수도 없고 덜 쓸 수도 없다. 만약 1분기에 몰아서 지출했다면 3월말 기준 재정수지는 엄청난 적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1분기에 639조 원의 상당부분을 지출했다면 자연스럽게 나머지 기간동안에는 지출할 돈의 규모가 줄어드니 적자폭은 개선된다. 그래서 특정 월의 재정수지를 좋게 만들거나 나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지출 시기만 조정하면 된다. 이는 마치 주식해서 100% 돈을 따는 일과도 마찬가지다. 실현된 재정수지로는 경제적 실질을 알 수 없다. 또한, 국세수입도 매달 12분의 1만큼 나누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매월 재정수지가 아니라 매월 세수결손 규모를 파악해야 한다. 전년동월 대비 세수 부족규모는 3월말 기준 -24조 원이다. 4월말 기준은 -34조 원으로 더욱 확대 되었다. 실질 세수 상황은 더 악화되었으나 4월말 재정수지 보도를 보면, 마치 재정상황이 개선된 것처럼 혼란을 준다.

 

정리해 보자. 올해 우리나라 재정상황은 좋지 않다. 국세가 덜 걷혀서 세수결손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다만, 월간 재정수지의 적자 또는 흑자를 통해 재정상황을 파악하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준칙을 만들자고 한다. 그러나 이미 4월까지 발생한 세수 결손 규모만 따져도 이미 우리나라 12월말 기준 관리재정수지는 GDP 대비 -4%. -3% 이내로 재정준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간의 논의는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책상물림 논의라는 의미다.

 

한걸음 더 나아가보자. 매월 재정수지는 경제적 실질과 상관없이 흑자 또는 적자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럼 매년 재정수지 규모도 예산 기술자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은 이미 들어갔다. 지난 정부에서는 재정지출을 확대하라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기재부는 융자지출을 크게 증대시켰다. 융자지출 전액을 지출로 계상하는 기재부의 독특한 방식의 재정수지 개념에 따르면 마치 큰 폭의 재정수지 적자로 기록된다. 그러나 융자지출은 5년뒤 또는 10년뒤에 융자금 회수 수입으로 되돌아 온다. 경제적 실질적 측면의 국가지출 증가규모는 제한적이다.

 

반면, 이번 정부는 재정건전성을 강조한다. 기재부는 융자지출을 줄이고 이차보전 사업을 늘린다. 또한, 캠코에 1천억 원 현금출자를 줄이는 대신 현물출자(정부보유 주식)5천억 원을 확대했다. 결과적으로 재정수지는 1천억 원 개선되었지만 실질적 재정건전성은 악화되었다. 이런 기술을 통해 달성하는 재정준칙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식의 재정준칙은 재정건전성을 위한 재정준칙이 아니라 재정건전성을 훼손하면서 정치적 재정건전성만을 획득하는 기술일 뿐이다. 감세와 재정건전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식해서 100% 돈을 따는 방법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한달 간, 1년 간 또는 5년간 실현 이익을 100% 내는 방법은 존재한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프레시안 : 2023.06.24.

 

 

70년 전 일이 아닙니다, 도종환 의원님

 

2009227일 티베트 설인 로사르의 셋째날, 타페이(롭상 따시)라는 승려가 사원 밖에서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이것을 시작으로 외부로 알려진 것만 159명의 티베트인들이 잇따라 분신했다. 처음엔 승려들이었지만, 유목민, 학생, 노동자, 예술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뒤를 이었다.

 

1950년 중국군이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명분으로 티베트를 무력 점령하고, 강압 속에서 티베트 정부와 평화해방 17개조 협의를 맺었다. 강제 합병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는 가운데 19593월 달라이 라마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티베트인들을 중국군은 탱크를 동원해 진압했다. 티베트인 12천명이 숨졌고, 달라이 라마는 험준한 설산을 걸어서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이어진 학살,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탄압 등으로 1984년까지 120만명이 처형, 기아, 고문, 자살로 사망했다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통계도 있다.

 

티베트 작가 체링 외세르는 <불타는 티베트>(Tibet on fire)에서 그들이 살아온 일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중국 당국은 승려들을 추방하고 사원들을 파괴하고, 승려들이 달라이 라마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도록 강요했다. 불심검문과 가택수색으로 달라이 라마 사진을 몰래 품고 있던 이들까지 색출해 감옥에 가뒀다. 대규모로 이주한 한족들은 개발빈곤 퇴치명목으로 목초지에서 유목민들을 몰아내고 광산 개발로 환경을 파괴하고, 경제적 이권을 독점했다. 티베트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는 강제동화 정책, 이웃을 서로 고발하게 하고 첨단기술로 옥죄는 삼엄한 감시가 계속된다. 이런 숨막히는 상황 속에서 70년 넘게 살아왔노라고.

 

티베트인들은 1959, 1989, 그리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계속 봉기를 일으켜 저항했지만, 중국의 군사력 앞에 계속 무너졌다. “티베트인들이 시위를 할 수 있는 실낱 같은 기회라도 있었다면, 분신에 의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체링은 썼다. 티베트인들은 고통과 슬픔을 알리기 위해, 존엄을 지키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분신할 수밖에 없었다고.

 

시진핑 시대 들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강조되면서 상황은 훨씬 엄혹해졌다. 지난 2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티베트에서 어린이들을 강제로 가족과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에 보내, 티베트어, 문화, 역사 교육을 금지하고 중국어로만 교육하는 강제동화 정책에 대해 우려하는 보고서를 냈다.

 

지난 16~18일 중국을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의원 7명이 중국 정부가 주최한 티베트 관광문화 국제박람회에 참가해 축사까지 했다. 단장인 도종환 의원은 티베트 인권 탄압 논란에 대해 그건 1951, 1959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도 의원은 2015년 동북아역사재단이 작성한 역사 지도가 중국 동북공정, 식민사학 논리와 똑같다고 비난하며 지도 발간까지 막았던 자칭 역사 전문가. 한중관계를 위한 교류라면, 역사의 의미는 더욱 제대로 알고 가야 한다. ‘탄압은 70년 전에 끝났다는 무지를 방패 삼아, 전태일 열사처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참혹한 현실을 알리려 한 티베트인들의 마음마저 짓밟지는 마시라.

박민희 논설위원 minggu@hani.co.kr 한겨레 : 2023.06.25

 

 

어떻게 자유는 무너지는가

1859, 지금은 자유주의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교과서가 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출간됐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On Liberty>인데, 밀은 머리말에서 최고 권력자가 행사할 권력의 남용을 우려한 사람들이 그 힘의 한계를 규정하고자 했는데 이렇게 권력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것을 바로 ‘liberty’라고 불렀다고 밝힌다. 이에 더하여 공권력에 좀 더 완벽하게 제한을 가하는 것이 자유를 찬미하는 사람들의 목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공권력이 함부로 권력을 행사해선 안 되는 자유가 있다는 의미이다.

 

밀은 아주 구체적으로 그런 자유의 내용을 규정하는데, 그 첫 번째가 내면 의식의 영역으로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가 해당된다. 표현할 수 없는 양심, 생각, 감정, 의견, 주장은 사실상 없는 자유나 마찬가지이므로 토론과 논쟁의 자유, 표현 및 출판의 자유는 당연히 따라온다. 정치적으론 이를 표명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까지 필수적이다.

 

20세기 이후의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가진 양심, 생각, 감정, 의견, 주장을 표명하는 방식으로서 집회 및 시위의 자유까지 온전히 보장한다. 이 중 출판과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자연스럽게 권력을 견제하는 기능까지 수행한다.

 

밀은 19세기에 출판의 자유가 정부의 타락이나 전횡을 막아주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라는 사실을 굳이 강조해야 하는 때는 이미 지났다고 말한다. 제도적으로 볼 때 이와 같이 권력을 견제하는 자유의 핵심은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에 있다. 허가제는 그 자체로 검열과 금지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재자들일수록 교묘하게 이런 자유를 통제한다.

 

예를 들어, 유신헌법은 제18조에서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겉으로는 이 모든 자유를 보장한 듯이 보이지만, ‘법률로는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규정에 숨어 있는 핵심이다.

 

쉽게 말해 법률로 허가제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현행 헌법과 비교해보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행 헌법은 제21조에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라고 하여 허가제를 명백하게 금지하고 있다.

 

권력의 허가가 필요 없는 이러한 자유는 20세기 중반부터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을 측정하는 기본적 지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견고하게 지속할 것만 같던 이 모든 자유가 21세기 들어 세계 곳곳의 민주정체에서 권위주의 지도자들이 등장하며 위협받고 있다. 그 시작에 미국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썼다. 여기서 두 저자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전제주의적 행동을 가리키는 네 가지 주요 신호를 제시하는데, 그중 네 번째가 언론 및 정치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성향이다.

 

네 번째 성향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항목으로 나뉜다. 첫째, 명예훼손과 비방 및 집회를 금지하거나 정부 및 정치조직을 비난하는 등 시민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법률이나 정책을 지지한 적이 있는가? 둘째, 상대 정당, 시민단체, 언론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는가? 셋째, 과거에 혹은 다른 나라의 정부가 행한 억압 행위를 칭찬한 적이 있는가?

 

문제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 모든 항목에 해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현재 대통령실 국민제안 사이트에는 집회·시위 요건 및 제재 강화라는 제목으로 안건이 올라와 있다. 제목이 그대로 보여주듯이 집회와 시위를 제한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이미 두 번이나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10~17시 이외의 집회 금지까지 추진하고 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오랜 세월을 통해 민주정체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합의한 가장 기본적 자유에 대한 제한을 일시적 여론몰이를 통해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권력의 이런 일시적 여론몰이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고 경고한다. 밀 역시 여론몰이를 통해 자유를 제한하는 시도를 두고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여론을 빌려 자유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여론에 반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짓이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경향 : 2023.06.26.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볼일을 보고 나서 물을 내리다가 멈칫할 때가 있다. 간단한 조작 하나로 오물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고 깨끗한 물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 엄청난 사람들이 곳곳에서 흘려보내는 이 하수들이 어떻게 처리될지 걱정스럽기도 해서다. 그다음의 과정을 모르는 우리의 눈에는 편리한 조작과 깔끔한 결과만 보일 뿐이다. 지정된 봉투에 담아 수거장에 내놓기만 하면 눈앞에서 곧 사라져 버리는 쓰레기도 마찬가지다. 비용만 내면 그다음의 과정은 볼 필요도 없이 처리되는 게 당연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경향신문에서 최근 연재한 당신은 무슨 옷을 입고 일하시나요에서는 그다음의 과정에 투입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작업복이라는 구체적인 제재를 초점으로 삼아 눈에 띄지 않는 여러 공간에서 일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조명한 내용이다. 첫 회에서 하수와 생활 폐기물을 처리하는 이들의 작업 양태를 접하며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혹은 보지 않았던 것들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언론의 기능에 대한 우려가 적잖게 제기되는 가운데, 수개월의 기획 탐사를 거친 밀도 높은 기사를 읽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인터넷 환경의 변화로 특정 정보의 시의적 가치가 예전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언론을 비롯한 여러 매체의 존재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하는 것들을 더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독서를 왜 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역시, 지금 나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한다는 케케묵은 답변만 한 것이 없다.

 

효율적인 구조 속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편리함을 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결과를 누리는 것도 사람이지만, 지하 25m 온도 30도 습도 84%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에도 사람이 있다. 눈감아도 될 그다음의 과정을 봄으로써 우리는 내가 내는 비용이 적절한지, 지금 이대로의 구조가 지속되어도 좋은지 고민하게 된다. 우리의 삶과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이런 불편한 고민에서 비롯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눈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경향 : 2023.06.28.

 

 

재벌 영업사원 1'에 맞선 ''들의 저항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7.7~8 3차 노숙문화제를 제안하며

요즘 모두 어렵겠지만 대리운전 노동자들은 시쳇말로 죽을 맛이다. 코로나19로 벼랑 끝에 내몰렸고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버텨 왔다. 재난은 끝났지만 좀처럼 일감은 늘지 않고 물가인상으로 생계부담은 더욱 무거워지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지 않겠습니까?" 대우조선 하청노동자가 철창에 몸을 가둔 채 외쳤던 절박한 호소에 한국사회는 응답하지 않고 있다. 더욱 참담한 것은 스스로 희망을 찾아가려는 몸부림조차도 거부되고 짓밟히는 것이다.

 

지난 69일 저녁,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열린 비정규노동자들과 문화예술인들의 평화로운 노숙문화제가 공권력을 남용한 경찰폭력에 의하여 또다시 강제 해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참가자들이 연행되고, 팔다리가 꺾여 기절하고 넘어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이 10년 이상 미루어지면서 해고되고 있는 수 많은 하청노동자들, 어렵게 정규직이 되어도 불법적인 차별로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받지 못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포함한 비정규노동자들의 절절한 외침에 재갈을 물리려 하였다. 수년 동안 평화롭게 진행되던 비정규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이 윤석열 대통령 말 한마디에 헌법에 명시된 집회의 자유의 권리마저 무시한 공권력의 남용에 짓밟힌 것이다.

 

"억울하고 창피하다. 정당한 노조 활동을 한 것뿐인데" 날품팔이 하청 인생, 빨리빨리 속도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건설노동자의 권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왔던 고 양회동 열사는 스스로를 살라야 했다. 윤석열 정부는 법질서를 엄중히 지키겠다며 정당한 노조 활동을 '공갈', '협박'으로 몰아세웠고, 성실교섭을 요구하며 망루에 오른 노동자를 무참히 짓밟고 구속하였다.

 

공정을 내세운 윤석열 정부는 버젓이 온갖 탈법과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재벌에게만 친절한 1호 영업사원일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권한을 정치보복에 쓴다면 그게 깡패지 검사냐?'고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 자본은 비호하면서 노동자들을 탄압하는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게 깡패가 아니고 무엇인가?

 

윤석열 대통령은 최고의 가치로 '자유'를 외치고 있으나 정작 소외되고 차별받는 비정규노동자들의 외침의 자유, 문화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 시민들의 집회 시위 자유를 탄압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자유'가 오직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만의 것이라면 '개나 줘버릴' 일이다.

 

우리가 거리에서, 촛불광장에서 일구어 온 자유는 그것이 아니다. 차별받고 배제된 노동자들이 싸울 자유, 권력의 전횡에 맞서 모이고 요구할 자유, 부당함에 맞서 비판할 자유가 이 사회를 가치 있게 하고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기에 피땀 흘려 일구어 온 것이다. 이제 그 자유마저 위협받고 있다.

 

코로나19 3년 동안 정부는 기업에는 수백조를 지원하면서도 노동자들의 생계 위기에는 인색했다. 기업의 금고에는 수백조가 쌓이는 동안 노동자 서민들의 빚은 눈덩이로 불어나 불평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한 고물가 고금리로 인한 고통은 고스란히 노동자 서민의 몫일 뿐이다. 노동자의 생계가 걸린 최저임금을 다루는 최저임금위원회는 을들의 전쟁터로 변질되었고 재벌들은 웃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이윤의 컨베이어벨트를 지키려는 자본의 요구에 윤석열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을 누더기로 만들려 하고 있다. 최소한의 책임조차도 지지 않으려는 원청의 자유를 위하여 윤석열 정부는 노조법 2·3조 개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공언하고 있다. 최근 정부 여당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떠들고 있으나 추악한 노동탄압을 숨기기 위한 위선의 애드벌룬일 공산이 크다.

 

기죽지 말자! 길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일방적인 가진 자들 편들기, 배제와 차별의 고착화, 노동탄압,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려는 윤석열 정부에 맞서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멈추지 않는 길로 나가야 한다. 피땀으로 일궈 놓은 성과를 빼앗길 수는 없지만 지키고만 있을 일도 아니다.

 

우리는 끌려가더라도 비정규직의 간절한 요구를 외칠 것이다. "모든 노동자의 생존이 보장되는 실질적인 최저임금 플랫폼노동에도 최저임금 적용!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이 보장되도록 제대로 노조법 2·3조 개정! 원청사용자에게는 사용자 책임 특수고용노동자에게 노동기본권! 일터에서 모든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 지켜질 수 있도록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국회에서 멈춰버린 민주주의를 다시 살아 숨 쉬게 광장을 열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해야 한다. 77~8일 파이낸스에서 312일 노숙투쟁에 함께 나서고자 한다. 양회동 열사가 걸었던 '한 발 떼기'처럼.

김주환 전국대리운전노조 위원장 | 프레시안 2023.06.28.

 

 

인생 후반기의 도전이란

 

단출한 짐을 자루에 넣은 채 여성 최초로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성공한 엠마 게이트우드.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난 주말에도 가출했다. 몇년 전 애가 사춘기가 되면 엄마가 독서실 이용권을 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집구석에서 게임이나 유튜브로 시간을 때우며 엄마의 잔소리 한마디에 열마디로 바락바락 대드는 꼴을 보기 싫어서 엄마가 집 나가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온다는 건데 이제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천불을 식히기 위해 오전부터 집을 뛰쳐나와야 했다.

 

녹음이 우거진 서울시내 산자락을 두세시간 걷다 보니 마음이 좀 풀렸다. 이래서 걷기, 걷기 하는구먼, 나도 본격적으로 걷기 수행을 해볼까 생각하면서 집에 돌아와 오래전에 선물받은 책을 펴들었다. <할머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할머니가 등산하는, 웃기는 이야기라고만 듣고 빌 브라이슨의 여성 버전 같은 책인가 했더니 이건 노년의 새로운 도전에 관한 위대한 기록이자, 비범한 지침서였다.

 

주인공인 엠마 게이트우드는 미국의 대표적 트레킹코스 중 하나인 동부 애팔래치아 트레일 3300를 여성 최초로 완주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고 애팔래치아 트레일에는 이름을 딴 구간도 있다. 아웃도어 브랜드 이름으로 써도 손색없는 인물인데, 책 표지를 장식한 그의 아웃도어는 개척자나 탐험가와는 거리가 먼 텃밭 농사복장이다. 좋게 봐도 동네 뒷산에 야생딸기 따러 가는 할머니 행색이다. 트레킹의 기본인 신발조차 등산화가 아닌 얇은 헝겊 운동화를 신고 도전에 나섰다. 도중에 6번이나 새 신발을 사야 했지만 말이다.

 

신발보다 놀라운 건 그가 들고 다닌 가방이다. 50년대 이야기지만 그때도 일주일 이상 길을 걷는 이들의 배낭은 20이 넘는 것으로 책에 나온다. 그런데 게이트우드는 집에서 남는 천으로 자루를 만들어 들고 다녔다. 침낭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고 욕실 방수커튼을 비옷으로 썼다. 최소한의 짐만 챙긴 가볍고 허름한 자루를 메고 5개월을 걸어 이 길을 종주했다. 요즘 유행하는 초경량 여행의 시조인 셈이다. 이런 차림으로 백발이 산발이 되도록 홀로 수풀을 헤치고 다니던 그를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이랬다. “숲속에서 별의별 걸 다 봤는데 그중에서 할머니가 가장 이상해요.”

 

이 정도라면 젊은 시절부터 등산을 밥 먹듯이 하면서 체력을 단련한 게 아닐까 싶은데, 그가 트레킹이라는 걸 처음 시도한 게 예순여섯살이었다. 평생 열한명 아이를 낳아 키우고 살림하면서 폭력적인 남편의 종처럼 농장일까지 하느라 예순이 넘어서야 가족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 날 병원 대기실에서 본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기사가 증손자까지 본 할머니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예순여섯의 첫 도전은 도중하차해야 했지만 이듬해 성공했다. 그는 훗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그때 내 나이 비록 예순 하고도 여섯이었지만 나는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흥미로운 건 그가 이 여정을 통해 유명인이 되면서 왜 도전에 나섰는가, 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지만 똑 부러지게 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머뭇거리다가 그냥 걷는 게 그냥 좋아서라거나 때로는 언덕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고 답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럴싸한 이유가 없었던 거다. 여기에 인생 후반기 도전의 정답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태어났으니까 살아감에도 목적과 명분에 매달려 산다. 입시와 취업이라는 주어진 목표가 사라진 뒤에도 직업적 성취, 자아실현, 가족부양, 사회기여 같은 명분과 목적을 끊임없이 부여한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태어났으니 살아간다는 생각만으로 견디기에는 권태롭고 버거운 삶이다. 하지만 이런 의무나 목적의식은 중년을 지나면서 주변에서 박탈하든 스스로 벗어나든 점차 약화한다. 그때 비어가는 마음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 인생 후반기의 도전이다.

게이트우드에게 이 길을 종주하는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되겠다따위 야심은 없었다. 그렇다면 복장이나 준비물부터 이렇게 허술하진 않았겠지. 어떤 구간이 가장 좋았냐는 질문에 그는 그야 물론 내리막길이라고 답했다. 굳이 인정받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나이 들어서도 마라톤 완주든, 책을 쓰든, 남극 여행이든 꿈꿀 수 있다. 다만 중년 이후의 그 도전은 좋아서이상의 이유가 나열되지 않기를 바란다. ‘노년의 기쁨이라는 말에 아직 반신반의하지만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드러나는 성과를 내야 하는 부담이나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 아닐까. 그럴싸한 이유가 필요 없는,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도전 같은 일 말이다. 우선은 사춘기 자식과의 공존을 위한 서울산 도장깨기부터 시작해볼까 한다.

김은형ㅣ문화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3.06.28.

 

 

우리 바다 지키기해산물 '먹방 릴레이'가 해답인가

일본 도쿄전력이 26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를 위한 터널 공사를 끝냈다. 방류시설 확인 검사만 남아있어 해양 방류는 시간문제다.

주변 국가에서는 오염수 방류 반대를 외치며, 일본제품 불매운동, 수입 중단 등 일본에 대한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지정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에게 일본 오염수 방류이슈는 일본 경제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경제 문제로 바뀌었다. 적은 외부에 있는데 내부에서 싸우는 꼴이다. 25일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따르면 홍콩인은 일본의 오염수 방류 계획을 반대하며 63%는 일본산 식품 구매를 줄이고 52%는 일본 방문을 줄이겠다는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홍콩당국은 오염수 방류가 시작될 경우 일부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즉시 중단할 것이라 밝혔다.

 

중국 최대 SNS 웨이보에서는 누리꾼들이 일본 화장품 브랜드 목록을 공유하며, ‘일본화장품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일본 화장품 기업들이 주식시장에서 한때 불매운동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오염수 방류 당사국인 일본에서조차 후쿠시마, 이바라키현 어업 단체 모두 방류 반대의사를 표명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전했다. 올 가을 열리는 후쿠시마 서핑 세계대회는 국제 서핑 단체 측이 원전 오염수의 안전성 문제로 개최 승인을 거절하며 일본 선수만 출전하는 대회로 축소해서 진행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천일염 사재기로 소금 품귀현상이 발생하면서 지역 사회가 난리다. ‘김치 제조업체, 조미 김 가공업체, 안동 간 고등어 제조업체 등 연쇄적으로 비상이 걸렸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수산물 소비량이 줄면서 수산물 판매업자·어업 종사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협중앙회에서는 우리 수산물 지키기운동본부를 만들고, 여당에서는 우리 바다 지키기 검증 TF’를 가동하며 국무총리, 여당 국회의원, 해양 수산부 장관, 노동진 수협중앙회장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우리 수산물 먹방 릴레이'수산물 안전성 홍보에 나서고 있다. 우리 수산물과 우리 바다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우리 바다가 오염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인데 '수산물은 안전하니 많이 사 먹으라는 '소비 촉진' 캠페인으로 무엇을 지키겠다는 건지 의문이다.

 

또한 핵 전문가와 지식인 중 일부는 오염수를 마실 수 있을 만큼 안전하다고 국민을 설득하고 있다. ‘원전 오염수 해상 방류라는 국제적 문제가 한국대 일본이 아닌 국내 소비위축 문제로 쪼그라들면서 해결 방안이 우스꽝스러워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 원전 오염수 방류는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일본 정부 말대로 오염수 해상 방류 피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 불안도 엄연한 현실이다. 정부는 제 나라 국민 불안이 보이지 않는가 오염수 방류 문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부터 논란 됐던 일이고, 20214월 일본이 오염수 방류 결정을 했을 때 국민의힘은 반대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제주도지사였던 원희룡 국토부장관은 오염수 방류를 규탄하며, 제주 주재 일본 총영사를 초치했고, 박형준 부산시장은 일본총영사관에 유감성명서를 전달했다. 우리 바다지키기 검증 TF성일종 위원장은 '외교채널을 가동해 일본을 압박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당정이 입을 모아 오염수 해양 방류만이 현실적 대안이라며 예전에 본인들이 했던 말들이 지금은 괴담이란다. 시간이 지났다고 원전 오염수가 처리수로 희석되지 않고, 국민 불안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바뀐 것은 정치권이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라는 논리로 국민 불안을 불식시키기엔 정부의 설득력이 부족하다.

 

정부와 여당이 원전 오염수 방류는 안전하다고 국민을 설득할 것이 아니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안심하게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

양지욱 기자 yjw@sateconomy.co.kr 토요경제 2023.06.28.

 

 

이권 카르텔 낙인찍기 해괴한 굿판

지난 616일 타계한 대니얼 엘즈버그는 미군이 베트남전 참전을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사람이다.

국방부 소속 군사 분석 전문가였던 엘즈버그는 1969펜타곤 페이퍼를 복사해, 언론에 넘겼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근거로 미군 구축함에 대한 북베트남군 어뢰정의 통킹만 2차 공격이, 미국의 베트남전 본격 개입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1971년 보도했다.

 

20019·11 테러가 일어났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선언했다. 이라크가 대량파괴무기를 만든다는 첩보를 근거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다. 2주 만에 바그다드를 함락했지만, 대량파괴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첩보는 거짓이었다.

강대국의 이익이 곧 규범인 국제무대에서 잘못된 첩보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조작해서 전쟁의 명분으로 삼은 역사적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전세계의 독재자들은 언제나 외침을 막고 범죄를 척결하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필리핀 두테르테, 튀르키예 에르도안,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은 강한 남자들이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공포와 분노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했다.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북한이 내려보낸 간첩이나 체제 전복 불순 세력으로 몰았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그랬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20216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였다. “이 정권이 저지른 무도한 행태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습니다.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의 이권 카르텔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책임 의식과 윤리 의식이 마비된 먹이사슬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카르텔은 본래 공급자 담합을 뜻하는 경제학 용어다. 지금은 범죄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더 많이 쓴다.

 

윤석열 대통령은 왜 갑자기 이권 카르텔을 들고 나왔을까? 평생 검사를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에 나서려니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이권 카르텔은 도대체 뭘까?

오랜 세월 집권해 이권을 나눠 먹은 카르텔 기득권 세력을 박살 내겠다. 정권 전체가 공범이다.”(2022216, 충주 유세)

어려운 분을 돕는 복지에 쓰여야 할 혈세가 이권 카르텔에 쓰여 개탄스럽다.”(2022915일 출근길 약식회견,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사업 보조금 부당 집행에 대해)

국민 혈세가 그들만의 이권 카르텔에 쓰인다면 국민 여러분께서 이를 알고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20221227일 국무회의, 시민단체 국고보조금 지원에 대해)

과거의 낡은 이념에 기반한 정책, 기득권 카르텔의 부당한 지대 추구를 방치하고서는 한 치 앞의 미래도 꿈꿀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국민을 고통에 빠뜨리는 기득권 이권 카르텔을 확실하게 뿌리 뽑아야 한다.”(202338일 국민의힘 전당대회 축사)

“3대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도, 미뤄서도 안 된다. 개혁은 언제나 이권 카르텔의 저항에 직면하지만, 국민의 이익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겠다.”(2023516일 국무회의)

강력한 이권 카르텔의 증거로 오늘 경질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2023616일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교육부 대학입시 담당 국장 대기 발령에 대해)

 

민주당 정권, 태양광, 시민단체, 화물연대, 건설노조, 민주노총, 좌파 정책, 교육 정책 등 나쁜 것, 잘못된 것은 모두 다 이권 카르텔이라는 얘기다.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악당으로 점지하는 사람들, ‘윤석열표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을 차례차례 이권 카르텔로 낙인찍는 것 같다. 연극에 비유하자면 이권 카르텔은 검사 출신 대통령을 빛나게 하려고 그때그때 무대에 올라가는 악역 배우들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이권 카르텔이 윤석열 대통령을 만든 것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다. 다음 차례는 또 누구일까? 언제까지 이렇게 해괴한 굿판을 지켜봐야 할까? 궁금하다.

 

그런데도 이른바 보수 신문의 논객들과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이권 카르텔 굿판에 장단을 맞추며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고 있다. 서글프다.

성한용 | 정치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3.06.28.

 

 

하루 만에 한 달치 비가 쏟아지는 나라

한국에서 환경에 대한 문제 제기와 대안 논의는 1980년대에 시작됐다. 대표적 환경단체인 환경운동연합은 홈페이지에 “19876월 항쟁 이후 높아진 시민들의 사회참여 기운에 힘입어 1988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가 통합한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을 직접적인 뿌리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환경에 대한 문제 제기는 소위 운동권의 또 다른 목소리 정도로 폄하됐다.

 

이제는 모든 국민이 참가하는 쓰레기 분리수거가 제도화될 정도로 환경은 생활의 일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괄목할 만한 성과다. 그러나 환경문제의 최대 현안인 지구온난화가 자신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온난화 해결을 위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 아쉽지만 아직도 많지 않다고 단언하고 싶다.

 

한국에서는 더우면 에어컨을 마음껏 켜고, 길거리에 즐비한 커피 매장에서 얼음 가득한 음료를 사서 마시고, 쾌적한 자가용으로 어디든 다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있는지는 굳이 따질 이유가 없다.

 

더 큰 장벽은 한국이란 생태계의 흐름과 질서를 좌우하는 정치권과 경제계다. 한쪽 진영만 이기면 된다는 식의 선거가 반복되고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게 목표인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득세하는 판에 환경문제는 권력과 이윤을 획득하는 데 장애가 되는 걸림돌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진짜 환경은 걸림돌 정도일까. 환경이 개인의 삶과 사회라는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살펴보자. 답이 나올 듯하다.

 

낙동강은 대구 등 영남지역에 거주하는 국민들의 식수원이다. 매년 녹조로 뒤덮인 강물을 정화해 식수로 바꾸는 게 큰일이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한 달이나 먼저 불청객이 찾아왔다. 지난 19일 대구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낙동강 지천 응암천을 찾아가 본 경향신문 기자는 물가를 향해 몇 걸음 옮기자 시궁창 냄새가 진동했다고 현장 상황을 전했다.

 

녹조는 청산가리의 6600배에 달하는 독성물질인 마이크로시스틴을 함유하고 있다. 이 물을 식수로 바꾸려고 갖가지 첨단 기술이 동원되고 있지만 문제는 녹조 현상이 더 빈번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구환경청도 올해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얘기할 정도다.

 

지난 19일에는 서울 기온이 34도까지 올라갔다. 강원도 양양 등 해안가에서는 열대야가 이어졌다. 폭염주의보는 지난해보다 일주일이나 빨라졌다.

 

기상청이 1912~1940년과 1991~2020년의 각 30년 기후를 비교해 보니 여름은 20일 길어지고 겨울은 22일 짧아졌다. 강수일은 연평균 21.2일 줄어든 반면 강수량은 135.4나 급증했다. 폭염과 집중 호우가 빈번해졌다는 뜻이다.

 

실제 광주에 지난 27일부터 24시간 동안 쏟아진 비는 274.6. 이는 평년(1991~2020) 7월 한 달치 평균 강수량인 294.2와 맞먹는다. 하룻밤에 한 달치 내릴 비가 쏟아진 셈이다. 지난해 여름 사망 사고까지 발생한 서울과 포항의 폭우도 우연이 아니라 예견된 환경의 역습이라고 보는 게 맞다.

 

기업들은 이젠 온난화 해결이란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수출도 할 수 없게 됐다. 대표적으로 환경 경영을 구체화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지수 평가는 RE100으로 이어지고 있다.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로만 충당하겠다는 국제 캠페인이다. 정부의 강제는 아니지만 구글, 애플, 이케아 등 글로벌 기업들의 자발적 참여가 확산되면서 제조업 비중이 높은 한국 기업들은 RE100에 가입하지 못할 경우 이들 기업과 거래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친환경, 온난화를 막기 위한 전 지구적 노력이 유럽과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거세지고 있다.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무한정 생산하고 마음껏 쓰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려는 한국식 자본주의를 이제는 접어야 할 때가 됐다. 정치권은 생태적 가치를 최우선 정책으로 설정해야 한다. 환경은 정치적 이해다툼의 대상이 아니다. 기업도 석탄류에 의존해 온 관성을 벗어던지고 무한 변신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개인도 편리함보다는 느리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늦었지만 머리를 맞대야 할 상황이다.

한대광 사회에디터 경향 2023.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