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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3.9.1~29 시대정신이 된 후안무치

by 이성근 2023. 9. 30.

세속의 삶과 그 항의 한겨레 2023-09-01

금권 과두정으로 추락한 미국 민주주의 시민언론 민들레23.09.01

감옥과 너무 친한 한국 사회 경향 : 2023.08.30.

윤 대통령의 극우 편향, '권력중독' 탓이다 오마이뉴스 : 2023.09.01.

집의 상실 경향 : 2023.09.01.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경향 : 2023.09.01.

윤 정부의 폭주를 멈추는 방법 경향 : 2023.09.01.

이념전사 윤석열은 어떻게 탄생했나 경향 : 2023.09.03.

깊은 수치와 무기력의 핵심 경향 : 2023.09.03.

불행을 가르쳐 드립니다! 한겨레 : 2023.09.03.

동맹의 굴레, 과학의 구멍, 나라 죽이기 경향 : 2023.09.03.

노동자가 불안하면 사회도 위태롭다 한겨레 : 2023.09.04.

홍범도지우려는 윤석열 정부, 교과서도 손댈 텐가 경향 : 2023.09.04.

육사의 뿌리가 만주군관학교인가 한겨레 : 2023.09.04.

이념의 무서움을 목도할 순간이 도래하는가 주간경향 : 2023.09.04.

깨어진 균형의 한국사회 주간경향 : 2023.08.07

불평등과 계층이동성 경향 : 2023.09.04.

윤석열 대통령 전략적 모호성 발언, 매카시즘과 닮았다 사설 : 미디어오늘 230905

참을 수 없는 전직 대통령의 가벼움, 문재인의 훈수정치 CBS노컷뉴스 2023-09-05

단식이라는 당연한 귀결 미디어오늘 2023.09.05.

저 인간에게서 냄새가 난다, 참을 수 없는 구린내가 한겨레21 2023-09-05

10년이 아니라 30년쯤 후퇴했다 한겨레 2023-09-05

윤 대통령, 시민의 인내력을 시험하지 마라 경향 2023-09-05

홍위병과 매카시 경향 2023-09-05

··일 회담 이후, 한국 경제 어디로? 경향 2023-09-05

농사에서 배우는 역사의 준엄함 경남도민 2023-09-05

누가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세력인가? 한겨레 2023-09-06

홍범도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한겨레 2023-09-06

역사전쟁, 처칠을 소환한다 한국 2023.09.06.

시민이 동료 시민에게, 어떤 역사를 만들겠습니까 경향 2023.09.06.

일본 침몰 경향 2023.09.08.

수구·반공몰이는 정책인가? 주술인가? 한겨레 2023.09.08.

 

쫄지마 페미니스트, 힘내라 시민운동 경향 : 2023.09.10

마이웨이 대통령과 홍범도 총선 경향 : 2023.09.10.

협치 요구를 거둬야 할 때 경향 : 2023.09.10.

뽀개버리고 갈아버릴리더십의 귀환 경향 : 2023.09.11.

시대정신이 된 후안무치 한겨레 : 2023.09.11.

두 번의 실패와 때아닌 극우 늦바람경향 : 2023.09.11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한겨레 : 2023.09.11.

육사의 부끄러운 뿌리 찾기 한겨레 : 2023.09.11.

뉴스타파, ‘역린을 건드린 죄? 한겨레 : 2023.09.12.

이념의 시대가 오는가 경향 : 2023.09.12.

오른쪽 날개가 앞으로 가고 있습니까 경향 : 2023.09.12.

오염수 정보 아는 데 소송이 필요한가 경향 : 2023.09.12.

이한 '승자의 대선 불복', 진짜 이유는 언론 '뽀개버리기'? 프레시안 2023.09.16

홍범도가 본 송평인 칼럼 미디어오눌 2023.09.16

21세기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섹시한 공산주의자 미디어오늘 2023-09-16

매카시즘은 어떻게 무너질까? 한겨레 2023-09-17

김윤아 경향 2023-09-17

또 하나의 언론 탄압 경향 2023-09-17

이데올로기의 낙인찍기 경향 2023-09-17

진보는 왜 교권을 외면했나, 보편적 약자의 종말 경향 2023-09-18

부동산 PF 부실 폭탄 돌리기가계부채로 전가하지 말아야 한겨레 2023-09-18

불평등 방치한 국가의 책임과 재정건전성 경향 2023-09-19

카니발 정치의 비극 경향 2023-09-19

 

방통위의 가짜뉴스 대응 패스트트랙’, 사실상 검열이다 한겨레 2023-09-20

김양래, 518을 유엔으로 가져가려했던 하얀 셔츠의 사나이 경향 2023.09.20.

내래 ○○○ 모가지 따러 왔수다경향 2023.09.20

대세는 따라야 하는가 경향 : 2023.09.22

문재인 모가X, 윤석열 모X지 미디어오늘 2023.09.25

한동훈, 무엇이 중한가 셀럽 놀이’? 인사검증? 경향 : 2023.09.25

감세 집착증에 대한 의문 경향 : 2023.09.25.

우린 당신들이 필요하지 않다 경향 : 2023.09.25.

윤 대통령 부부 확정적 중범죄 의혹대처법 한겨레: 2023.09.26

오고 싶은 나라 주식회사 대한민국한겨레: 2023.09.26

이재명 대표 구속 '절대 불가' 이유, 차고 넘친다 시민언론 민들레: 2023.09.26

어른으로 산다는 것 시민언론 민들레: 2023.09.26.

빨갱이는 만들어진다 경향 : 2023.09.27.

지방 경향 : 2023.09.27.

명절에 알아두면 좋을 몇 가지 통계들 경향 : 2023.09.27.

대통령의 검찰과 수사의 정당성 한겨레 : 2023.09.27.

김정은, 을에서 갑으로윤석열 정부만 모른다 한겨레 : 2023.09.27.

검찰정치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재명 영장 기각 이후 한겨레 : 2023.09.27.

21세기에도 '호남 푸대접', 누가 시키고 있나? 프레시안 2023.09.28

검사의 사형수와 오웰의 사형수 시민언론 민들레 : 2023.09.29

 

세속의 삶과 그 항의

인공지능이 개발되어 사람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도는 내게 의외로 긴 충격을 준 것 같다. 근래의 발전으로 보아 당연히 이를 것으로 예측했으면서도 사물이 사람들과 말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고 오늘의 인간 문화가 새로운 단계로 뛰어오른다는 인류사적 비약이란 말만 되뇌고 있었다. 호모가 언어를 사용하여 사피엔스가 되는 30만년 전의 단계,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5천년 전의 호모 리테라투스 단계, 인쇄술을 이용해 글로 엮는 6세기 전의 인쇄혁명에 이어, 이제 인간세계는 사물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는 새로운 인류사적 변혁으로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급변의 역사를 관통해서 삶을 누린다는 내 생애의 행운과, 어쩔 수 없이 여기 끼어든 변혁의 불안함이 안기는 또 다른 두려움이 드잡이하는 혼란에 나는 피할 수 없이 젖어들기도 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믿어온 언어가 사물에 의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인류사적 사태를 어떤 형태로 불러올지 예측할 수 없는, 그래서 미래는 오히려 무섭고 불안한 예감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을 멀리 에둘러 찾은 인물이 다빈치(1452~1519)와 미켈란젤로(1475~1564)였다. 르네상스를 불러온 이 예술가들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른바 천재로서 하늘이 안겨준 그들의 능력은 회화와 조각·건축을 통해 당대 주류의 기독교 정신을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감수성의 세계로 틀어 새로운 지향의 예술 지평을 열었다.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신봉아 옮김)의 생애와 월리스의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이종인 옮김)은 이들이 치러낸 삶을 소개하면서 하늘로부터 타고난 천재다움과 함께, 당연히 우리와 다름없는 지상에 묶인 인간적 면모도 보여주었다. 내가 여기서 찾은 것도 그들의 타고난 초인적 예술보다는 이 험한 세상 속 그들도 피하지 못한 강박의 세속, 그들도 고통받아야 했던 지상의 누추함, 그럼에도 그 비속한 삶을 견디고 아름다움을 향해 세상의 너저분한 고역들을 이겨내는 인간적 견딤이었다.

모나리자최후의 만찬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건축가이면서 광학·지질학·무기 등의 과학기술자이고 식물학·해부학·의학의 생리학자로 당대의 모든 예술과 학문에 뛰어나게 능통했다. 그러나 고급교육을 받지 못해 당시의 지식인이라면 으레 사용했을 라틴어에 미숙했다. 사생아였고 이성 간의 성교에 혐오감을 드러낸 동성애자였으며 동물을 사랑한 채식주의자였고 딱따구리 혀를 그리고 싶어 한 왼손잡이로 현실과 공상세계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계획하고 설계했지만 그 많은 것들을 끝내지 못하고 상상의 자유를 더 크게, 마음껏 누린 미완성의 천재였다. 그 당시 발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행기를 설계했고(훗날 그가 설계한 대로 만들어본 그 기계는 날 엄두를 못 냈다), “구상을 현실화하기보다 구상 그 자체를 좋아한기술자였지만 끝내 나는 사는 법을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죽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말았다. 그가 쓴 글과 설계 등등 현존하는 원고·메모들은 7200쪽이지만 실제 양은 그보다 4배 더 많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위대한 고통 없이는 위대한 재능도 없다는 말로 자신의 인간다움을 정직하게 드러낸 그가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말은 수프가 식고 있다였다.

다빈치보다 23살 아래인 미켈란젤로는 그런 다빈치를 존경하기보다 오히려 혐오감에 젖어 있었다. 나는 피렌체에서 그의 다윗상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의 대표작들을 완성한 후 노년의 삶을 여유 있게 즐기며, 여느 천재들과는 달리 자식들과 대가 예술가로서의 영예와 유복한 시민적 여유를 누리며 풍족하게 살았다. 그런 그도 석상 모세를 끼고 산 마지막 10여년은 죽음을 앞둔 노인의 한탄으로 점철되고 있다: “피렌체로 돌아가 죽음을 벗하며 그곳에서 쉬고 싶다고 고백하고 죽음은 오래 머문 감옥을 나서는 일이라는 소감을 토하며 깊은 우울 속에서 나는 노인이고 죽음은 내게서 청춘의 꿈을 빼앗아갔다고 한탄했다. 장인에서 귀족 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했음에도 그는 이제 나의 백발과 나의 고령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미 내 손안에는 저승의 차표가 들려 있다/ 저승은 진정 참회하는 자만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란 시를 쓴 것도 이런 늙음의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리라. ‘죄악과 무용성에 침잠해 있던 미켈란젤로는 드디어 자신의 예술가 경력이 끝났다고 자인하며 죽음에의 순명을 확인한다. 병자성사를 받고 그는 저승은 진정 참회하는 자만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란 말로 생애를 마친다.

미완성의 대가다빈치와 스스로 오류로 가득한 일생이라 고백한 미켈란젤로는 중세의 세계를 넘어 근대로의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도 자신들이 문을 연 르네상스의 실제 장면들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인공의 언어로써 새로운 세계로 변화할 미래의 모습들에 당황하면서 선량한 죽음이란 중세의 지혜를 떠올린다. 과연 오늘의 사물들은 어떤 형태의 세상을 만들 것이고 그 형상은 무슨 꼴을 보일 것인가. 중세를 지배한 것은 신앙이었고 현재를 아우르는 것은 과학이다. 신앙을 예술로 승화한 중세의 화가들처럼 태양계를 넘어서는 우주론이 지구적 인생관을 뛰어넘을 그 세계는 어떤 모습이며 그것은 어떤 쪽으로 그 영원성을 추구할 것인가.

다빈치도, 미켈란젤로도 자신의 육체적 수명에서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작품에서 그 영원성을 품어 안아 들였고, 예술을 떼면 그들도 가냘프고 노쇠하며 결국 죽음을 한탄하는 여느 세속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속살이기에, 예술은 끝내 그 있음의 덕성과 무상한 것들의 무의미함을 드러내는 인간적 자의식이 아닐까.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와 다윗의 힘찬 돌팔매는 이처럼 땅 위의 삶과 그 시간이 뿌리는 운명의 받아들임이고 비속한 지상세계에 대한 외로운 존재의 체념 어린 항의가 아닐지. 그렇다면 이 과학의 시대는 그 죽음 앞의 모습들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김병익 | 문학평론가 한겨레 2023-09-01

금권 과두정으로 추락한 미국 민주주의

부자의, 부자에 의한, 부자를 위한 정치

미국 민주주의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2021년의 트럼프 쿠데타 시도 이후 지금까지 시행된 많은 정치현안 관련 여론조사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미국민들의 답변이다. 눈여겨 볼 것은 지지 정당에 따라 이유가 다르다는 점이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선거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거짓이 진실로 통용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트럼프 쿠데타에 대해서도 공화당 지지자들은 선거부정 비판 시위가 격해진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선거부정이라는 거짓을 믿는 사람들이 집단 정신병(group mental illness)’에 걸린 게 아닐까 개탄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상식 중 하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인데 여론조사는 그 토대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초 중 기초인 선거가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선거부정이라는 거짓 주장이 진실로 통용되는 만화경 역시 납득불가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 허위와 진실이 동일한 비중으로 공존한다는 것은 분단국가라는 증거이기도 하고 망가져가는 민주주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다. 더 깊고 오랜 원인이 있으니 곧 금권 과두정의 문제다. 미국의 정치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실은 부자의, 부자에 의한, 부자를 위한 정치로 추락한 것이다. 이 문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됐고 2007-8년 금융공황 사태를 거치면서 대중의 오큐파이 운동으로 폭발했다.

2009년 미국에서 벌어진 오큐파이 운동 참여자들이 뉴욕 맨해튼에서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큐파이 운동의 메시지 자본이 좌우하는 정치는 민주주의 아니다

세계 각국이 금융공황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었을 2009년 가을부터 길게는 20124월까지, 미국은 물론 전 세계 80여 개 국가로 오큐파이 운동의 물결이 이어졌다. 한국에서도 여의도를 점령하라’ ‘오큐파이 서울등의 시위와 농성이 201110월부터 11월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99%라는 대표구호가 말해주듯, 점령운동은 1%를 위한 대책에 몰두하고 있는 정부에 맞서 ‘1. 금융공황을 불러온 자들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 2.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 3. 기업-자본이 좌우하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를 선포하는 인민의 저항이었다. 미국의 오큐파이 시위대가 월가를 점령한 것은 그곳이 이 세 가지 문제를 집약적으로 상징하는 장소인 때문이었다.

 

오큐파이의 메시지를 한 줄로 요약하면 자본에 포획된 정부는 경제정의도 사회정의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뉴딜 시절, 루스벨트 대통령은 돈이 좌우하는 정부는 폭력배가 좌우하는 정부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일갈한 바 있다. 금권 과두정의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다.

 

위의 그림은 상원의 우두머리들 (Bosses of the Senate)’이라는 제목의 만평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금권정치 시대(Gilded age)를 그린 풍자만평(18991, 시사만화 잡지 Puck. 작가는 J. 케플러)으로, 그림 중간 위쪽 현판에는 ‘This is the Senate of the monopolists, by the monopolists, for the monopolists: 독점 기업의, 독점 기업에 의한, 독점 기업을 위한 상원이라고 쓰여 있다. 아래쪽 조무래기 정치인들을 거느리며 우뚝 서 있는 돈주머니 모양의 배불뚝이 인물들은 오른쪽부터 강철, 구리, 석유, , 설탕, 주석, 석탄, 제지 등, 당시 해당 업종의 독과점 대기업들을 상징한다. 왼쪽 상단 벽의 작은 문에는 ‘People’s entrance: Closed: 보통사람 출입금지라고 새겨진 채 빗장과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그런데 오늘의 미국 정치가 바로 금권 과두정이다. 의회의 법, 정부의 정책이 자본권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이다. 사실 보통사람보다 자본과 정치의 권력집단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불평등의 역사는 동서고금의 사실이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해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금권정치를 제1, 최근의 금권정치를 제2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곳에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부자방어산업이 돌보는 백만장자 클럽

미국 정치가 부자의, 부자에 의한, 부자를 위한 정치라면, 실제로는 어떻게 작동할까?

 

위의 사진의 인물의 안면에 ‘god save the super rich’라고 쓰여 있다.

첫째, 정치인들이 부자다. 2022년 기준 이들의 연봉(174000달러)은 상위 6%에 속하는 수준이며 재산 규모 역시 미국 평균의 열두 배가 넘는 150만 달러에 이른다. 위계상 개별 의원들에게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부는 공화, 민주 양당 공히 대체로 부유층 중의 부유층에 속한다. 한편 정치인들의 가장 큰 일은 돈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업무 시간의 1/3을 후원전화 돌리는 데 쓰지 않으면 낙선한다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다. 자본가와 로비스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정치구조인 때문이다. 한편, 그 구조는 정치인들에게 백만장자 클럽이라고도 불리는 워싱턴 정가의 사치스런 삶을 제공해준다. 당이나 로비스트들이 주관하는 회의나 연수, 세미나 같은 공식모임은 사실상 정치인들의 호사스런 여행과 유흥과 식도락의 경로가 된 지 오래다. 또 정치 후원금은 의원들의 개인경비로 어렵지 않게 전용 가능하다. 정치인의 삶과 다수 인민의 삶은 천양지차다.

 

둘째, 부자가 결정한다. 1981년부터 2002년까지, 1800건에 이르는 경제, 사회, 외교 및 군사 분야 정책을 연구한 결과, 정부가 채택한 정책은 거의 예외 없이 소득 상위 10%가 원하는 것이었다. 부자가 정부와 의회의 정책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하위 소득계층이 원하는 것도 일부 포함됐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사실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는 공화당 정부와 민주당 정부 간에 차이가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기업과 유관단체의 정치활동(: 선거 후원금과 로비), 주류 매체와 각종 정책 연구소의 여론 영향력 등이 정치인 각자의 입법 활동을 사실상 좌우하기 때문이다. 또 초대형 부자들-최상위 1%의 부유층-은 개인이면서도, 각자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막대한 규모의 정치 후원금을 통해 정치인들에게 기업과 단체 이상의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즉 기업과 부자들이 제공하는 정치를 키우는 모유로서의 돈이 정치인들에게 직간접적인 행동지침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셋째, 부자를 보호한다. ‘부자방어산업(wealth defense industry)’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금융공황 사태 이후, 오바마 정부는 해외 조세도피처에 대한 조사 및 과세조처를 개혁과제로 내세웠다. 20103, 해외 탈세자금의 탐지·추적을 위해 800명의 국세청 요원 추가 및 예산지원 법안이 발효됐다. 그 즉시 싱크탱크, 로비스트, 변호사 등, 부자방어산업 요원들(?)이 동원됐다. 법은 실상 허점이 많아 도피처 계좌의 소유주를 대조·확인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이 된 공화당은 국세청의 해당 예산을 삭감했다. 조사 인원도 조사 건수도 대폭 줄었다. 삭감 이유는 영업 비밀 공개로 인한 미국 기업의 국제 경쟁력 약화라는 것이었다. 자유방임주의 싱크탱크인 카토연구소는 조세 회피처를 자유의 초소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돈을 옮기는 이유가 더 나은 세제 때문이라며 미국 과세제도의 개편, 즉 더욱 큰 부자감세를 촉구했다. 부자보호산업은 이렇게 승리한다.

 

신자유주의 풍조 속 이정표 잃어버린 미국 정치

금권 과두정 문제의 핵심은 정치, 경제, 사회의 불평등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미국이 불평등한 나라라는 것은 대형 스캔들이다.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만인의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 정치제제는 미국 건국의 이상이자 사회의 기둥이다. 그런데 국가의 토대가 불평등으로 기울어지면서 무너진다는 것은 미국이 다른 나라로 달라지고 있다는, 문자 그대로 대형 스캔들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사회운동의 지속적 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오큐파이 운동은 1년 반여 지나면서 사위었고 경제정의를 기본 메시지로 한 B. 샌더스의 대선운동도 좌절되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한 정치학자는 이를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상식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신자유주의의 핵심논리는 탈규제와 자유, 경쟁과 시장의 선택, 개인의 능력과 책임, 국가/정부의 최소화 등이다. 더 짧게 요약하면 시장의 자유경쟁 과정에서 능력의 차이로 발생하는 성공과 실패, 나아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사람들이 불평등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미국 정치는 어땠을까? 70년대까지 미국 사회의 이념적 토대는 국가가 주도하는 사회 안전망의 구축과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하는 뉴딜의 정신이었다. 그 시절에는 석유, 철강, 자동차 재벌의 해체를 주창하는 의원, 선거 후원금을 거부하면서 대형 은행과 금융산업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의원, 국방비를 삭감하고 그 재원으로 기본소득제를 추진하고자 했던 의원, CIAFBI의 직권남용과 비리를 파헤치는 의원들이 있었다. 한편 워싱턴으로 몰려드는 젊은 정치 지망생들의 태도와 사고방식도 남달랐다. 그들은 국가를 바꾸고 나아가 세계를 구하겠다는 정치적 열망과 이상의 실현을 위해 권력을 추구했다.

 

그러나 60-70년대 미국 사회의 변혁운동이 실패하면서 뉴딜의 이념도 함께 무너진다. 대신 신자유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다. 이때부터 합법적 뇌물거래업이라 불리는 로비산업이 빠르고 크게 성장한다. 각종 기업과 자본가들, 그리고 이익단체를 대변하는 로비회사와 로비스트, 로비예산도 가파르게 증가한다. 거대한 규모의 돈이 워싱턴에 돌기 시작하고 부유층 파티 스타일의 정치행위가 번성한다. 급진파(?) 정치인들은 점차 소수로 밀려나면서 사라진다. 젊은 정치 지망생들도 이젠 부자가 되기 위해 DC로 뛰어든다. 과두 금권정치의 틀이 갖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1기 금권정치 시대, T. 루스벨트 대통령은 과감한 개혁조처를 통해, ‘강도귀족(robber baron)’이라 불리던 자본가들의 독점적 경제구조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작금의 2기 금권정치 시대, 대안의 이념을 모색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극복하려는 정치인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루스벨트의 개혁조처는 노동조합과 사회 운동가, 개혁적 정치인들이 앞장섰던 불평등 타파 투쟁의 산물이다. 오늘날 그 같은 투쟁의 전선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돈의 힘이 좌우하는 정치의 대안을 모색치 않거나 못하고 있는 정치가 가장 큰 이유이다. 이정표가 없는 정치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사기극인가? 사기극은 아닐 것이다. 다만 더 완강한 금권 과두정으로 변모하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을 자유와 민주의 모범국가로 생각하는 것, 그것은 거대한 거짓만큼이나 유해한 거대한 착각이다.

김평호 저술가 ·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시민언론 민들레23.09.01

 

 

감옥과 너무 친한 한국 사회

지난 주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머그샷(범인식별용 사진)을 찍은 게 화제가 됐다. 미국 전·현직 대통령을 통틀어 형사 기소를 당한 것도, 이런 사진이 찍힌 것도 처음이라고 한다. 지폐와 동전에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를 점점이 박아놓은 미국인들인 만큼 충격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나저나 역대 45명의 대통령 중 구속이나 투옥은 고사하고 형사 기소를 당한 것도 처음이라니, 현직 포함 13명의 대통령 중 3분의 2 이상이 감옥 신세를 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인으로선 신기한 느낌이다.

 

일본은 어떨까? 일왕이야 사법처리는커녕 비판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존재니 논외로 치고 내각총리대신, 즉 총리를 살펴보자. 1948년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총리가 쇼와전공사건(昭和電工事件)으로, 1976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록히드 사건으로 기소된 적은 있으나 감옥신세는 면했다. 1885년 내각제도 창설 이래 지금까지 64명의 총리 중 옥살이를 한 이는 떠오르지 않는다. 도쿠가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선시대에는 반정(反正)으로 탄핵당한 왕(연산군·광해군)도 권력투쟁으로 귀양살이를 한 임금(단종)도 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將軍)이 그런 험한 꼴을 당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조선의 유력 대신들 중 하옥되거나 귀양 간 경우는 쉽게 떠오르는데, 막부의 총리 격인 로주(老中)가 그런 일을 당했었는지 확인하려면 한참 뒤져야 할 거 같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은, 정확히 말해 한국 정치는 감옥과 너무 친하다. 한국 대통령들은 미국과는 달리 화폐에는 얼씬도 못하는 반면, 머그샷 따위를 가볍게 넘어 감옥에 간다. 재임 시 행적으로 감옥에 간 분들도 있고, 대통령 되기 전 민주화운동(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따지고 보면 만민공동회로 잡혀 들어갔으니 여기에 해당될 듯)으로 투옥된 양반들도 있다. 대통령뿐 아니다. 정치인, 기업인들 중에서도 별 단 사람들이 즐비하다. 재벌총수들은 마치 통과의례처럼 감옥을 다녀오곤 한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죄수복을 입고 있는 장면은 참 낯설 것이다.

 

물론 정의를 실현하려다 투옥된 것과, 부정한 일을 해서 가게 된 감방행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옥고(獄苦)’옥바라지라는 한국어가 상징하는 것처럼, 그런 구분이 뒤섞여, 감옥행이 한 인간의 사회적 커리어에 결정적 타격이 되지는 않는, 심하게 말하면 큰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사회적 심성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이 큰 자랑이었고 정치적 자산이었다. 감옥은 정의 집행의 장소라기보다 불의 저항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니 비록 거룩한 일을 하다 감옥에 간 게 아니라 하더라도 수감자에 대한 거부감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현저히 낮다. 영화 <공공의 적2>에서 뇌물을 받아 포승줄에 묶인 채 호송 차량에 타던 정치인(박근형)이 하늘을 바라보며 ~~이 나라가 걱정이야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조선시대의 원격감옥행이라 할 수 있는 유배도 정작 당사자의 명예에 큰 대미지가 된 적은 별로 없는 듯하다. 유배지를 관할하는 지방관리는 물심양면으로 죄인을 배려했고, 현지 주민들도 죄수 바라보듯 하지 않았다. 정의의 배반자라기보다는 체제의 불운아로 여겨지기 십상이었고, 그 불운이 가셔 화려하게 복귀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이런 상황은 세상의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이 치열하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법치, 체제권위 같은 게 여전히 확립돼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구치소에서 나오면서 끔찍한 경험을 했다며 선거 개입에 절대 굴복하지 말자!”는 문구를 게시했다. 트럼프도 사법당국과의 인연을 로 삼으려는 걸까. 각 신문에 느닷없이 그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나왔길래 이리저리 해본 생각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경향 : 2023.08.30.

 

 

윤 대통령의 극우 편향, '권력중독' 탓이다

대통령 '이념 전쟁'에 여당 의원들도 속앓이...국민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철지난 '반공'으로 시대 역행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한 의원들이 윤석열 대통령 앞에서 "우리 모두 윤석열"이라고 환하게 웃었지만 속내가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윤 대통령의 극단적 이념 편향 연설에 속앓이를 한다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중도층 떠나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하소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여권 내에서는 윤 대통령의 우편향 행보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추측이 무성하다. 특이한 건 얼마 전까지 총선을 겨냥한 지지층 결집 의도라는 해석이 주를 이뤘지만, 지금은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의 발언이 보수 진영에서도 눈을 찌푸릴만큼 거칠어진데다 '홍범도 지우기' 같은 지지층 균열 정책이 갑자기 튀어나와서다. 일각에선 윤 대통령이 총선 승리보다는 자신의 신념 관철에 더 신경쓰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윤 대통령의 극우적 태도 형성 시기도 여야를 막론한 논쟁거리로 등장했다. 한편에선 성장기 때부터 보수적 성향이 충만했는데 검사 시절엔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을뿐이라는 견해가 있는 반면, 대통령으로서 지켜본 신냉전 질서와 북한의 위협에 대한 우려가 표출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아무튼 밀턴 프리드먼의 사상에 깊이 감명받아 늘 그의 책을 끼고 다녔다는 윤 대통령 말에서 유추하듯 원래의 성향이 대통령이 된 뒤 강화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취임 1년 만에 극우 전사가 된 윤 대통령

사실 윤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역사와 이념을 고리로 한 퇴행적 행보를 보였다. 유세 현장에서 야당을 겨냥해 "좌파 혁명 이론에 빠진 몽상가"라고 강한 색깔론을 폈고, 또 다른 연설에서는 "저는 누구보다 공산주의를 싫어하고 안보관이 투철하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극단적 경향성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한 국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어쩌다 취임 1년 만에 "실용보단 이념"을 부르짖는 극우의 '전사'가 됐을까.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문제에 대해 "누군가 해야할 일이라면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역사 논쟁으로 가는 게 좋지 않다는 분들도 있지만, 잘못된 것을 가만히 놔둬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나아가 "이념은 방향이다. 싸우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다"'이념 전쟁'을 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고 한다. 지금이 '역사 전쟁''이념 전쟁'을 할 때라는 자기 확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임기 후반에 접어들면 '역사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국민으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후에 역사로부터 평가받겠다는 생각에 빠져 민심과 동떨어진 행보로 치닫곤 했다. 윤 대통령에게는 그 시기가 앞당겨진 모습이다. 윤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이래 줄곧 30%대 중후반을 맴돌고 있다. 그 자신은 "지지율은 의식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국민들이 인정해주지 않느냐"는 섭섭함이 있을 법하다. 그런 억하심정이 철지난 반공 신념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심리학자 데이비드 와이너는 저서 <권력 중독자>에서 "권력에 중독된 인물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과대망상적 신념을 갖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왜 자신이 이룬 위대한 업적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 않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자주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또한 "그에게 자기 잘못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책임을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울 방도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고 했다. 윤 대통령을 대입하면 현재의 극우편향 행보가 어느 정도 설명된다.

 

걱정되는 건 윤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정치와 미래가 맡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질서 재편이 가속화되는 지금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는 지도자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유독 윤 대통령만이 국제 현실과 동떨어진 채 과거로 줄달음치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이념에 사로잡혀 허깨비와 싸우는 모습이다. 이러다 '극우 전체주의'로 치닫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나온다.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대통령이 나라를 어디로 이끌려는지 심히 두렵다.

이충재(h871682) 전 한국일보 편집국장, 오마이뉴스 : 2023.09.01.

 

 

집의 상실

모든 인류 문화에서 집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집은 비바람, 더위,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공간이자, 외부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상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전통적인 의미에서 집은 삶을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최근의 미디어 전경에서 접하는 집은 삶의 장소라기보다 죽음의 장소인 듯하다. 일례로 최근 방영한 드라마 <마스크걸> <힙하게>에서 집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고립되어 살아가는 곳이거나, 폭력과 살인이 일어나는 주요한 공간으로 설정된다. 이제 집은 더 이상 외부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안전한 성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공간으로 상상되는 듯하다.

 

집의 의미는 대중적인 논의에서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논의에서도 주요한 주제이다. 관련 문헌들은 집이 가지고 있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어떤 학자들은 주택, 거주, 가정성, 사적 영역 등과 결합된 장소로서 집의 의미를 강조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집을 사회적 경험으로 이해하며, 물리적인 장소보다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 부여하는 감각들로 정의한다. 이들은 안전함, 친숙함, 통제감 등을 집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제시한다. ‘안전함은 자신이 물질적이고 개인적인 보호를 받고 있으며, 외부 세계가 연속성 있게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친숙함은 시간에 걸쳐 반복적이고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경험된다. ‘통제감은 자신의 일상 환경과 그 기반이 되는 사회적 환경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사회적 경험으로서의 집은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과 온전히 겹치지는 않는다. 특정 개인이나 사회 집단은 공적 영역의 일부를 선택해 일시적으로 집 같은공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노숙인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이들이 이전에 거주하였던 집을 뛰쳐나와 거리에서 새로운 집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어떤 이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집에서 집 없음을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집에 있는감각을 형성하기도 한다.

 

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는 집에서 느끼는 집 없음의 감각을 선명하게 전달한다. 저자는 수년 동안 특수청소업자로 일하며 마주하였던,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맞이한 숨겨진 죽음의 공간을 보여준다. 대부분 혼자 살던 거주자가 죽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되었던 장소이다. ‘죽은 자의 집의 질감은 일상적인 물건들을 통해 전달된다. 현관 앞에 쌓여 있는 독촉장, 끊긴 전기, 쓰레기더미, 배설물이 담긴 수백 개의 페트병, 죽은 이의 체액이 스며들어 있는 침구류 등. 또 다른 집은 인간이 아닌 고양이들의 사체가 겹겹이 쌓여 있다. 썩는 냄새를 없애기 위한 냄새 제거제와 쓰레기들, 그 옆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고양이들이 섞여 있다. 이들의 죽음은 수개월이 넘도록 발견되지 못하다, 이웃들에게 견디기 힘든 냄새로 지각된다. 발견된 이후에도 이들의 죽음은 집값이 떨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처리되어 감추어진다.

 

김완이 보여주는 죽은 자의 집 전경은 돌보지 않은 삶을 드러낸다. 사회, 친구, 가족과 떨어져 전기와 난방도 끊긴 채 쓰레기로 덮인 공간. 이 공간은 이들에게 죽음 외에는 탈출구가 없는 막다른 공간으로 보인다. 김완의 청소는 혼자 죽음을 맞은 이들을 애도하는 작업이자, 이들과 함께 버려져 죽어가던 집을 다시 산 자를 위한 집으로 바꾸는 작업으로 보인다.

 

오늘도 미디어는 수많은 죽음을 자극적인 볼거리로 쏟아낸다. 버려지는 신생아, 성폭행당한 후 죽은 여성, 공장 기계에 끼여 사망한 노동자, 고층 아파트에서 던져져 죽은 고양이, 생매장당한 개들 등. 우리는 어떻게 이들을 위한 집을 만들 수 있을까?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경향 : 2023.09.01.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자기 죄를 씻기 위해 에우리스테우스 왕의 종이 되었다. 심술궂었던 왕은 그에게 열두 가지 과업을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하루 동안에 청소하는 일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 외양간에는 소가 수천 마리 살고 있었고,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이지만 헤라클레스는 알페이오스강과 페네우스의 강물 줄기를 외양간으로 끌어들여 단번에 외양간 청소를 끝냈다. 과거에는 일거에 일을 끝내버린 헤라클레스의 지력과 담력에 마음이 후련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외양간의 오물들이 강물로 흘러들어갔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 때문이다.

 

일본 도쿄전력은 824일부터 방사능 오염수 해양 방류를 시작했다. 주변국들의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는 경청되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그런 행태에 대해 항의하기는커녕 오히려 분노하는 국민들을 괴담의 생산자 혹은 유포자로 낙인찍고 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방류해도 우리나라에 위험하지 않다는 취지를 담은 정부의 유튜브 홍보 영상 제작을 대통령실이 주도했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영상 송출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부와 과학을 믿어달라는 말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과학이 객관적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염수 방류 사태를 두고 과학자들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과학적 사실이라는 게 매우 주관적일 수 있음을 반증한다.

 

방사능 오염수 방류는 지구 공동체를 향한 생태 학살이라고 규정하는 종교인들도 있다. 오염수로 인해 생태계가 교란되고, 수많은 종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삼중수소가 인체에 무해한 수준이라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것이 바다에 혹은 인체에 오랜 시간 누적될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유전적 변형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날 수도 있다. 미래 세대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는 것은 괴담이 아니다.

 

도쿄전력이 내놓은 방류 계획서에 따르면 삼중수소 농도가 낮은 것부터 방류를 시작해 향후 30년간 점차 농도가 높은 오염수를 배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충격의 표백을 자신하기 때문일까? 주변국들의 우려와 충격의 시효가 길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결코 짤 수 없는 계획서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은 법이다. 방사능 오염수 방류 허용이 나쁜 선례가 되어, 여러 나라가 더 위험한 물질들을 해양에 투기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모든 생명을 품는 바다가 죽음의 공간으로 변하는 순간 인류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기원전 6세기의 히브리 예언자 에스겔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동족들을 생각하다가 놀라운 비전을 본다. 성전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수위가 높아지고 강폭이 넓어지는 광경이었다. 강 좌우편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 강물은 동방으로 향하여 흐르다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마침내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강물이 바다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에 들려온 소리였다. “이 흘러내리는 물로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게 될 것이다.” 이 장면에서 바다는 사해를 가리킨다. 사해는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있기에 출구가 없다. 사해에 이른 물은 더 이상 흐르지 못한다. 흐르지 못하고 막혀 있기에 사해는 염분이 많아져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말았다.

 

물론 죽음의 바다가 살아나는 꿈은 몽상일 수 있다. 그런데 역사의 새로움은 언제나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이들을 통해 개시되곤 했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죽었던 생명들이 살아나고, 강 좌우편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는 꿈. 이러한 꿈조차 없다면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생명의 바다가 죽음의 바다로 변하도록 방치하면 안 된다. 생명이 넘실대는 세상의 꿈을 보여주던 에스겔의 비전은 경고음도 내포하고 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다.” 방사능 오염수가 흘러가는 곳마다 불모의 공간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경고의 나팔소리를 무시할 때 재앙은 예기치 않은 시간 우리 삶을 엄습하게 마련이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경향 : 2023.09.01.

 

 

윤 정부의 폭주를 멈추는 방법

윤석열 정부는 이명박 정부를 보면 안다. 이명박의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든 것을 시작으로, 윤 대통령은 이명박의 길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라는 허황된 자신감, 정권에 대한 험한 여론을 언론 탓으로 돌리는 나쁜 습관은 이명박 정부 때 질리도록 봤다. 공영방송 경영진을 내쫓고 방송국 주류를 친정부 인사들로 바꾸려는 행태도 재연될 참이다. 방송장악 기술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동관으로 같다. 이명박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10을 외치더니, 윤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은 뭐든 문재인 정부를 탓한다. 친서민 행보라며 시장에서 오뎅 꼬치를 먹었던 이명박처럼, 윤 대통령은 노량진 시장을 찾아 우럭탕·전어구이·꽃게찜 점심을 먹었다.

 

달라진 것도 있다. 이명박 시대와 윤석열 시대를 견뎌내는 사람들의 태도다. 이명박 정부 때는 사람들이 깨어 있었다.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이 회자됐고, 4대강 사업, 부자감세, 노동·언론탄압 등에 대해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정부 실책을 비판하는 원로와 학자들의 조언들은 공감을 얻었다. 이명박 정부 때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는 단순히 쇠고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역주행하는 정부에 대한 민심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사람들은 무덤덤하다. 대통령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덮고, 도쿄전력 오염수 방류를 용인하는 행보를 보였다. 막말 논란, 인사참사,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각종 논란 등으로 정권 주변은 시끄럽다. 그러나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도, 체념하는 듯 고개를 돌린다. ‘정치는 늘 그랬다는 식의 정치혐오 정서가 팽배한 탓이다. 담론과 구호들은 시들해졌으며, 공감보다 혐오의 정서가 도드라진다.

 

윤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이런 냉소와 무기력이 싫지 않은 듯하다. 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활개치고 있다고 했다. 국방부는 독립영웅들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치운다고 했다. 민주화를 이끌어낸 국민들의 성취를 모욕하고, 독립을 위해 싸운 선조들을 욕보이는 행태다. 아무리 무데뽀라도 윤 대통령과 그 주변이 앞뒤 고려 없이 폭주할 수는 없다. 이렇게 막나가도 국민들이 무덤덤하니 문제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이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임명을 강행한 것도 이런 분위기에 기댄 바 크다. 이 위원장의 재산형성 과정, 언론탄압 논란은 진행형이다. 학교폭력 논란에도 이 위원장 아들이 고려대에 수시전형으로 입학한 사실은 윤 대통령이 강조했던 공정성에 어긋난다. 여권 내부에서도 다수가 반대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이 이동관 카드를 밀어붙인 것은 사람들이 이동관이 되든 말든식의 냉소적 반응을 보인 탓이 클 터이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전문가들은 각자도생사회의 증상이라고들 한다. 실업난, 취업난, 주택난 등 어려움이 쌓이다보니 청년들은 좌절하고, 중년들은 제 살길 찾기 바쁘고, 장년층은 무력함에 빠졌다는 것이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나,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불과 몇년 전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국민들이다. 국민을 배신한 지도자를 두고 보지 않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이 그새 없어질 리 없다.

 

그렇다면 깨어 있는 시민들을 누가 잠들게 했는가. 정치권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본다. 앞서 말했듯 윤 대통령과 여권은 정치혐오와 냉소를 부채질하고 있다. 냉소를 틈타 윤석열 정부가 얼마나 더 역주행할지 두렵다.

 

더불어민주당도 상당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전 정부는 위선, 내로남불, 오만한 행태로 실망을 안겼고, ‘진보나 보수나 다를 바 없다는 회의론이 번졌다. 민주당은 냉소사회의 기초를 깔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대선 패배 후 사정은 더 악화됐다. 이재명 대표 사법 리스크, 김남국 제명안 부결 등 민주당은 냉소사회의 공범이다.

 

그럼에도 무기력과 냉소를 걷어내는 것은 여전히 민주당의 몫이다. 정권의 폭주를 견제하고 맞서 싸우는 것은 야당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다만 퇴행적 행태로 윤석열 정부 뒷배 노릇이나 하는 현재 모습으론 곤란하다. 윤석열 정부에 성난 민심이 결국 돌아올 것이라는 헛된 기대는 버릴 때도 됐다. 이재명 대표는 자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86세대의 상징적 인사들은 진보정치 실패 책임을 지고 총선 불출마 선언 등 기득권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찬물 끼얹는 야당에 머문다면, 윤석열 정부의 폭주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용욱 정치에디터 경향 : 2023.09.01.

 

 

이념전사 윤석열은 어떻게 탄생했나

2017년 중반의 어느 날, ‘윤석열 검사장이 개인 톡방에 사진 몇장을 보내왔다. 첫 줄에 “‘처치위원회활동 배경이라고 적힌, 어떤 책의 일부를 손수 찍은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캠프 데이비드에서 활짝 웃고 있는 윤 대통령을 보며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중에, 기획할 때 참고하라고 보내요. 국가기관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파괴했는지, 우리도 (국정원) 댓글 사건 하고 있으니까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기사를 준비해 보시면 좋겠다 싶어서.”

 

미국 상원의 처치위원회(Church Commitee)워터게이트 사건’(1972)으로 닉슨이 하야한 뒤 만들어졌다. 국가기관의 불법 정치 관여, ‘반공을 명분 삼은 연방수사국의 코인텔프로공작 등 권력 남용의 실체를 파헤쳤다. 윤 검사장 덕분에 처음 알았다.

 

그래서, ‘우회전가속페달을 거침없이 밟고 있는 윤 대통령이 몹시 낯설다. 그는 반세기 전 처치위원회의 조사 대상이 됐던 일을 새삼 리바이벌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맹종 세력,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 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다.” 대체로 경악하는 사람이 많다. “날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있다. 70~80년대 공안부 선배들 말씀을 다시 듣는 것 같다.” ‘공안이 전공인, 윤 대통령의 검찰 선배가 한 말이다.

 

원래 꼴보수였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윤 검사의 동료, 선후배의 기억은 다르다. “보수 성향은 맞지만, 꼴보수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같은 편인) 박근혜 대통령 초기에 굳이 역린’(댓글 사건)을 건드려 불이익을 자초했겠나, 대충 덮고 말지.”(전직 검찰총장) 처치위원회 같은 것에 관심을 두었을 것 같지도 않다.

 

집권 초기에도 지금과는 달랐다. “(둘이 만났을 때) 윤 당선인이 그러더라. ‘야당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술도 한잔씩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해볼 거다라고. 거짓말이었다고 보지 않는다.” 난화분 들고 당선 축하 사절로 갔던 이철희 전 정무수석의 회고다. 국민의힘의 한 친윤중진은 취임 초부터 높은 벽같은 걸 느낀 것 같다고 했다. “야권이 자신을 전 정권의 배신자 취급하며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윤 대통령은 스토리를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말할 때 보면 음모론 비슷한, 소설 같은 얘기를 즐겨 했다”(특수검사 출신 변호사)고 한다. 정권을 잃은 좌익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며 잘 짜여진 각본하에 자신을 반대한다고 상상한다. 이런 의식화의 교재로, 검찰총장 때부터 애청해온 유튜브를 지목하는 사람이 그의 지인 중에 꽤 있다. 발언 수위는 한··일 정상회의 전후로 급격히 높아졌다. “정치를 몰라도 대통령이 됐잖냐는 자신감이 있는데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기대 이상의 외교 성과를 올렸다는 생각에 부쩍 고무된 것 같다.”(전 청와대 수석)

윤 대통령은 집요하고 단호한 성정을 지녔다. 방향을 정하면, ‘위험과 보상 사이의 균형은 신경 쓰지 않는다. 검사 때는 물론, 서울중앙지검장이 돼서도 기각당한 영장을 두번, 세번 재청구했다. 법원에 대들면 손해가 막심한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준석을 내친 것도 그렇고, 죽마고우의 부친이자 온건보수의 아이콘인 이종찬을 등지면서 홍범도 흉상 철거를 밀어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내년 선거를 앞두고 정무적으로 너무 거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서도 잘못된 것을 놔둘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지지율, 총선은 후순위라는 말이다. 부재하다고 늘 비판받던 국정 철학이 비로소 선포됐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행보는, 총포 시대에 기사 갑옷을 입고 허상을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흡사하다. 검찰총장 때는 말리는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통령을 무서워하는 참모들만 넘쳐난다. 힘없는 촌로 돈키호테와 달리 대통령이 이념전사로 나서면 나라가 두쪽 난다.

 

캠프 데이비드는 1959, -소 정상회담이 열린 역사적 장소다. 살벌한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 수괴흐루쇼프를 초청한 아이젠하워는 숙식을 같이하며 평화의 돌파구를 모색했다. 정치의 요체는 대화와 타협임을 상징하는 그곳에 가고도 윤 대통령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옛말에도 아는 만큼 본다’(Tantum videmus quantum scimus)고 했다.

강희철 ㅣ 논설위원 경향 : 2023.09.03.

 

 

깊은 수치와 무기력의 핵심

일본 정부의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로 주위 사람들이 깊은 수치심과 무기력을 토로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47월 후쿠시마현을 강타했던 바다에게 보복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방사성 물질로 범벅 된 오염수를 지난 824일 전격 방류하기 시작했다. 이는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실제로 사태가 일어나고 나서야 심하게 움직이기 마련인지라 방류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던 때와는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우리를 수치심과 무기력에 빠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바다에 대한 원초적인 감수성이 직격을 당한 탓이 컸을 것이다. 이는 단지 바다에 대한 낭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우리 삶은 가시적으로는 육지에서 꾸려지는 것만 같지만 사실 바다에 의존하는 바 크다. 단순히 우리가 바다에서 나는 생물을 섭취하기 때문이 아니다.

 

바다는 인간의 또 다른 자아다. 바다 앞에 섰을 때 해방감과 막막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육지에 사는 존재가 바다라는 한계를 직접 대면하는 찰나에 생성되는 자아 때문이다. 이 자아는 한편으로 수평선을 넘으려 하지만 대부분 발길을 돌려야 한다는 진실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다를 떠나도 바다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바다가 일상인 사람들은 육지에 사는 이들과는 또 다를 것이다. 이는 육상 생명의 시작도 바다에서 이뤄졌다는 진화사적인 맥락과는 다른 삶의 실감 문제이다. 주위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수치심과 무기력은 아마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가 심하게 모욕당하고 있다는 심정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선택한 정부가 바다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르는 일본 편에 섰다는 사실에서도 충격을 받았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이 어느 후보를 선택했느냐와는 다른 차원에서, 어쨌든 우리가 속한 국가 공동체인 대한민국의 정부가 거리낌 없이 일본의 야만적인 선택에 암묵·동조(정황상으로는 승인)한 것을 넘어 적극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배신감을 느꼈다.

 

더군다나 집권 후 계속해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말을 쏟아냄으로써 협의와 합의라는 공화국 기본 원칙을 무시하다 못해, 원전 오염수 문제에서는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며 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 중이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입장에서 사안을 보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이번 오염수 방류 사태를 통해 갖게 됐다.

 

과학의 이름으로, 국민을 정치 선동에 좌우되는 우민(愚民)으로 여기는 사실 앞에서도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과학적 사실을 넘어서는 감정적 반응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에는 원인과 맥락이 있는 법이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대체로 과학의 차원에서는 일시적이고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기득권 카르텔이 들먹이는 과학이라는 것은 고작 정치 과학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너무도 많다. 정치 과학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의심과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 과학이 공산 세력의 반일 감정이거나 가짜뉴스인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 사실을 공산 세력의 반일 감정이나 가짜뉴스로 만드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정치 과학 목적이다.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캠프 데이비드 회담 직후 오염수 방류를 단행했다. 그 전에 한국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전임 정부의 어설픈탈핵 정책에 대해 검찰 수사를 하는가 하면 다시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지난 7월 폭우로 산사태가 나고 충북 오송 궁평2지하차도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은 상황인데도 부산에 입항한 미국의 핵잠수함 켄터키함에 대통령 부부가 외국 정상 최초로승선했다. 언론은 외국 정상 최초를 강조하면서 엄청난 영광이나 된 듯이 일제히 보도했다. 하지만 왜 나 같은 사람은 수치를 느끼는 것일까.

 

일련의 사태 전개를 볼 때 원전 오염수 방류는 반핵의사회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장처럼 한··일의 핵동맹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핵동맹은 전쟁 위험을 높이고 생명의 터전을 불가역적으로 퇴행시킨다. 이게 수치와 무기력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황규관 시인 경향 : 2023.09.03.

 

 

불행을 가르쳐 드립니다!

나는 불행한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무차별 칼부림을 했던 33살 청년이 체포되면서 했다는 말이다. 이후 유사 범죄와 묻지마 살인 예고가 줄을 이었고 피의자 대부분이 청()년들이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잃을 것이/ 없다. 끝에 끝!”(츠베타예바, ‘끝의 시’)이라는 절망을 읽은 건 비단 나뿐일까? 이 새파란 청춘들을 증오와 분노로 끓게 했던 불행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선망했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을 으로 내몰았던 건 누구 혹은 무엇이었을까?

 

눈을 뜨자마자 카페인’(카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중독된 하루가 시작된다. , 더 강력한 유튜브도 있다. 손안에 펼쳐진 액정화면에서는 먹고 마시고, 입고 차고 들고 살고, 놀고 여행 다니는 행복 배틀경연장, 아니 행복 포르노전시장이 펼쳐진다. 그 행복의 근원은 돈이다. 볼수록 비교 불행’, ‘상대적 박탈감은 증폭되고, 관계와 소통과 공감의 척도란 좋아요, 구독, 팔로우, 조회수로 결정된다. 원색적인 감정 배설구가 된 댓글은 또 어떤가. 코로나 3년은 여기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개도 부럽지가 않어, 전혀로 시작하는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를 자주 듣는다. 십만원 있는 자는 백만원 있는 자가 부러워 짜증 나겠지만, 백만원 있는 자는 천만원 있는 자가 부러워 짜증 나는 법이라고, 부러우니까 자랑하고 자랑하니까 부러워지는 거라고, 부러워하는 한 짜증 지옥을 벗어날 수 없으니 부러움을 모르는 자가 이기는 거라고, 그러니 얼마든 자랑하라고 자기는 전혀 괜찮다고, 와이어에 묶여 무중력 상태로 중얼거리는 그를 보면 금세 유쾌해진다. 장기하식 불행을 피하는 방법이랄까?

 

돈 모으는 데 전념하는 일, 처자식만 사랑하는 일, 부모 돌보지 않는 일, 맹자가 경계했던 삼불행이다. 이렇게 대놓고 가르치려 하다니! 젊어서 벼슬하는 일, 부모형제 힘으로 출세하는 일, 뛰어난 재능으로 문장을 떨치는 일, 이건 송나라 유학자 정이가 꼽았던 삼불행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음 직한, 타고난 금수저인 듯한 삼행복을 삼불행으로 퉁치다니!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부러우면 지는 거다, 너의 행복은 나의 불행의 심정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투기 아니 사기, 맘충 아니 학부모충, 아빠찬스 아니 엄마찬스, 입시전쟁 아니 무한경쟁, 노인빈곤 아니 고독사, 자살 아니 무차별 타살. 매일 터지는 사회문제들이 이 삼불행을 겨냥하고 있지 않은가. 맹자나 정이는 인간 날것 그대로의 맹목적인 행복에의 욕망이 불행의 씨앗임을, 사회악의 뿌리임을 경고하고 싶었던 거다.

 

자살률 세계 1, 인구절벽 세계 1. 20대 우울·불안장애 환자 30여만명에 알코올, 마약, 흉기관련 사범 급증은 또 어떤가. ‘헬조선을 외치는 엔(N)포세대,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니트(NEET)족과 특정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프리터(Freeter)족이 태반인 엠제트(MZ)세대 얘기다. 이렇게 으로 내몰리는 피의자이자 피해자들이 청()년들이라면, 강력 대응이나 엄벌에 앞서 사회제도나 구조를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화무십일홍’(열흘 붉은 꽃은 없다)이랬거니, 이 말은 일년에 꽃을 준비하는 과정이 삼백쉰다섯 날이라는 거다. 행복을 꽃에 비유하자면, 꽃을 피우기 위한 허구한 날은 고통을 견뎌내거나 불행을 이겨내는 시간이다. 자연의 섭리 혹은 생명의 기본값이란 애초에 고통과 불행과 절망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기에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하지 않던가. 하물며 그 꽃들은 또 얼마나 다른 만화(萬花)던가.

 

불행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가르치는 것, “저마다의 손금처럼 저마다 다르면서 은밀하게 말해야 하는 행복”(한정원, ‘시와 산책’)을 보여주는 것이 문학과 인문학의 몫이다. 반대 의미를 알고 있는 한 인간은 절망하지 않는다고 했거니, 인문 정신의 출발이자 도착점은 인간의 고통과 불행과 절망과 비극과 죽음을 가르치는 일이다. 우리 사회가 잃어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그러기에 젊은 시인 박보영의 시를 나는 이렇게 패러디해 읽는다. “이상적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지쳐 있는 존재다”(‘적응을 이해하다’) ‘지쳐 있는불행해 보이는으로 바꿔 읽는다. “악어가 진정 소망을 뜻할지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소망에게 잡아먹히거나 물어뜯길 거라고,”(‘소망’) ‘소망대신 행복을 넣어 읽는다.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한겨레 : 2023.09.03.

 

 

동맹의 굴레, 과학의 구멍, 나라 죽이기

올해 8월은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다. 전쟁이냐 평화냐, 멸종이냐 기후정의냐, 불평등 심화냐 민생안정이냐의 갈림길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전환시대의 요구를 거슬러간 반동적 역류(逆流)의 달로 기록될 것이다.

 

··일 정상이 만나 캠프 데이비드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으로 세 나라는 중국을 겨냥하는 군사동맹으로 가는 길을 내디뎠다. ··일 정상은 공동의 이익과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적 도전·도발·위협에 대해 서로 협의할 것을 공약했다. 이어 인도·태평양 지역과 그 너머를 협력 공간으로 호명하고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 등을 언급하며 역내 평화와 안정을 악화시키는 행동으로 중국을 특정했다. 여기서 협의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 협의 공약으로 한국은 대만 문제나 남중국해 영토분쟁 등에서 미국·일본의 공동대응 요구에 응해야 하는 실질적 의무를 지게 됐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번 합의를 동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로 나아가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윤석열 정부가 눈이 멀어 미국이 내세우는 허울 좋은 가치동맹(실체는 미국 국익 보호)의 허상에 갇힘으로써 동북아의 신냉전 대결구도가 심화되고, 한반도 평화문제의 해결과정이 미·중 간 패권다툼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우리는 동맹의 굴레를 뒤집어쓴 섣부른 선택의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할 판이다. 마침내 일본 도쿄전력이 방사능 오염수 해양방류에 돌입한 것은 거의 정해진 수준이었다. 한국의 윤석열 정부가 친일정부를 자임하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 제3자 변제라는 해괴한 해법(일본 피고 기업의 책임을 묻지 않고 한국 내부에서 자체 해결)을 제시함으로써, 사실 오염수 방류에 대한 큰 걸림돌도 제거된 꼴이었다. 정부는 일본의 무책임한 오염수 방류 행위를 적극 지지·동조했다. 미국이 배후 펌프질을 했고 윤 정부는 기대 이상으로 호응했다.

 

일본 정부는 뻔한 꼼수를 부려 방사능 오염수를 처리수라 부른다. 이에 발맞추어 한국 여당도 처리수 또는 오염 처리수로 부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도쿄전력은 알프스(ALPS)’라고 하는, 일본제 다핵종(多核種) 제거 설비를 통해 방사성 물질 함유 오염수를 정화한 뒤 물에 희석해 바다로 내보낸다. 알프스로 처리하고 태평양 물과 섞으면 안전하다는 게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정부와 여당은 일본의 오염수 방류에 대한 반대 여론과 시민적 항의 운동을 과학을 무시하는 괴담이라 몰아붙이고 괴담 자료집까지 배포했다. 일본 입장에선 자국 안에 지하매립을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해양방류함으로써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비용도 엄청 줄일 수 있다. 그래서 과학을 들먹인다. 하지만 한국인과 아시아인들, 지구 시민들, 차세대의 입장에선 삶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것은 정당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 문제다. 첫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부터 그들은 위험을 감추면서 과소평가해 왔다. 처음부터 신뢰를 잃었다. 둘째, 알프스를 믿으라지만 고장 없이 작동한다는 전제가 의심스럽다. 1~2년도 아니고 30년에 걸쳐 방류가 진행될 예정인데 많은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고장이 나도 은폐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삼중수소는 알프스로 걸러지지 않는데도 별다른 조치 없이 방류되며, 향후 농도가 높은 오염수가 방류된다. 넷째, 이미 원전사고 직후 세슘이 포함된 오염수가 바다로 대량 방출됐고, 원전 인근 어류에서 기준치를 훨씬 넘는 세슘이 검출됐다.

 

과연 무엇이 괴담이고 무엇이 과학일까? 나는 과학을 믿지만 맹신하지 않는다. 과학도 오만을 버려야 하며 열린 자세로 시민과 숙의를 거쳐야 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태가 주는 생생한 교훈이 있다. 첫째, 과학에도 심각한 구멍과 위험이 있다. 깨어 있는 시민은 과학의 확증편향을 의심해야 한다. 둘째, 정치가 과학의 이름으로 진실을 덮는다. 과학 자체가 오염되어 있고 과학의 이름을 빌린 괴담이 있다. 도쿄전력 방사능 오염수는 결코 안전하게 처리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안전한 처리수가 아니라 여전히 방사능 위험이 내장된 오염수다. 그 위험수가 해양투기됐고 앞으로 30년 또는 더 오래 투기된다.

 

유난스레 사건·사고가 많았던 8월의 반동적 역류는 육사 교정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사태로까지 불똥이 튀었다. 그 자리에 새로 백선엽 흉상을 세운다고 한다. 독립영웅을 지우고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기린다니, ‘역사 거꾸로 세우기나라 죽이기가 따로 없다.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는 논리라면 남로당 조직책을 지낸 박정희의 기념물도 모두 치우는 게 앞뒤가 맞지 않을까? 참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2년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한 바 있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경향 : 2023.09.03.

 

 

노동자가 불안하면 사회도 위태롭다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이 쓴 불평등 트라우마는 경제적 불평등이 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병들게 하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사회역학자인 저자들은 20여개 선진국을 나라끼리 비교하거나 미국 50개 주를 서로 비교하는 방법 등으로 분석한 뒤 이렇게 정리했다. 불평등한 사회에는 덜 불평등한 사회에 비해 정신질환자가 훨씬 많다. 따돌림 등 학교폭력이 만연하고, 마약·알코올·도박 등 중독도 더 흔하다. 살인 등 범죄로 교도소에 갇힌 인구 비중이 높고, 경호산업이 번성한다. 명품 등 과시적 소비와 성형 등 외모 관련 투자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다.

 

이유가 뭘까. 저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지위 불안에 시달린다. 소득과 지위에 따라 사회적 평가와 대접이 너무 달라지니,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한다. 경쟁과 지위 불안은 심한 스트레스를 낳고, 육체와 정신을 압박한다. 이를 견디지 못해 은둔을 선택하거나, 도를 넘는 자기과시로 대응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심각한 스트레스와 좌절은 우울증·조현병 등 정신적 증상이나 마약·알코올 등의 중독으로 종종 이어진다. 학교에도 사회상이 투영돼 경쟁·갈등·폭력이 만연하니 아이들의 행복감은 추락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통합 대신 구분 짓기가 지배적이므로, 뒤처진 개인은 소외감에 빠진다. 가족·친구 등 사회적 연결까지 단절되는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이를 해치는 범죄로 폭발하기도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은 한국의 자살률과 최근 급증한 무차별 범죄는 불평등 트라우마의 설명을 곱씹게 한다. 토마 피케티 등 불평등 연구자들이 활용하는 상위 10% 소득집중도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선진국 중 미국 다음으로 불평등한 나라다. 물론 서울 신림동과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등에서 일어난 무차별 범죄를 불평등한 경제사회구조 탓만으로 돌린다면 섣부른 일이 될 수 있다. 각 사건에는 하나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맥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연구는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 ‘다 죽이고 나도 죽고 싶다등의 극단적 일탈이 늘어날 것을 짐작하게 한다. 불평등이 더 심해진다는 것은, ‘성냥불만 그으면 폭발할 기름탱크같은 사회로 가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해법은 없을까. 윌킨슨과 피킷은 경제민주주의를 통해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불평등을 없앨 수는 없지만, 소득과 지위 격차의 피라미드를 좀 더 완만한 기울기로 만들 수는 있다는 것이다. 특히 피라미드 아랫부분에 있는 대다수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해서, 자본가 등 부유층과 간격을 좁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노동조합 조직률과 협상력을 높일 것, 기업 이사회 등에 노동자 대표를 참여시켜 임금 격차를 줄이고 의사결정의 질을 높일 것 등을 제안했다. 또 누진세 강화와 조세회피처 규제 등으로 세금을 더 걷어 복지 등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하는 것, 노동시간을 줄여 실직자 등과 일자리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 정부의 행보는 이런 제언과 거꾸로 가고 있다. 화물노조 파업과 건설노조 사태, 노조 회계공시 논란, 주당 최장 근무시간 연장 시도, 최저임금 인상 억제, ‘시럽급여파동 등은 아등바등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좌절을 안기고 있다. 지금도 살기 어려운데, 앞으로 더 힘들겠다는 절망감이 커진다. 반면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깎아주기 등 대기업과 자산가들이 흡족해할 일들은 이어지고 있다. 일상의 평온을 뒤흔든 무차별 범죄에 정부가 내놓은 대안은 장갑차 출동 등 경찰 무장 확충과 처벌 강화 등이다.

 

불평등 피라미드가 더 가팔라지게 된 이 시점에, 언론은 뭘 하고 있을까. 일부 언론은 정부와 함께 노조 때리기에 여념이 없고, 일부는 무차별 범죄를 선정적으로 다루거나 처벌 방안 등 지엽적 논의에 매달리고 있다. 한겨레는 평소 노동 보도를 적극적으로 해왔고, 무차별 범죄 대응책의 문제점도 균형 있게 짚었다. 그러나 불평등 구조라는 거대한 빙산과 무차별 범죄라는 일각, 경제·노동정책을 통합해서 보는 접근법으로 근본적인 대안을 끌어내고 정부·정치권 대응을 압박하는 역할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한겨레를 포함한 언론의 분발이 절실하다.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한겨레 : 2023.09.04.

 

 

홍범도지우려는 윤석열 정부, 교과서도 손댈 텐가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학교에서 홍범도 장군(1868~1943)과 봉오동 전투(1920)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그런 평범한 시민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수십년간 온 나라가 독립전쟁 영웅으로 숭앙해온 인사의 흉상을 갑자기 철거하겠다니 말이다.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작업은 국가 정체성과 국민 자존의 문제다. 우리 사회가 어떤 삶을 장려하고 어떤 죽음을 기억할지 공표하는 결단이다. 오랜 세월 쌓아올린 역사적·사회적 합의를 기어코 깨뜨리겠다면, 정부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흉상을 철거할 명분·논리가 있는지(합리성), 철거 결정이 시민 의사를 반영했는지(민주성), 철거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것인지(책임성).

 

합리성. 최근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국방부 브리핑(829)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국방부는 육사 내 홍 장군 흉상 이전이 필요한 이유로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은 자유시 참변과의 연관성 봉오동 전투에 빨치산으로 참가 소련공산당 활동 등 세 가지를 댔다. 모두 논파당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직접 참여했다는 취지로 답했다가 기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제가 잘못 말한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 기자들은 빨치산을 두고 “(프랑스어) ‘파르티잔에서 넘어온 말로 비정규군을 뜻한다. 당시 군대도 국가도 없으니 독립운동한 사람은 다 빨치산이라고 지적했다. 소련공산당 활동에 대해선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이고 북한군 남침을 사주한 공산당은 스탈린 공산당으로 둘은 아주 다르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차이보다 크다고 논박했다.

 

팩트폭격당하던 대변인은 그럼에도 “(철거·이전 결정에) 외부 학계와 협의는 필요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 보수 정권에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검정에 통과시키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할 때도 최소한 학자·전문가의 허울 정도는 차용하려 했다. 해당 전문가들의 주장이 주류 학계의 통설과 거리가 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전문가 견해라는 형식적 외피조차 없이 철거를 밀어붙이겠다고 한다. 이렇게 무성의한 정권을 봤나.

 

민주성. 지성사 연구자인 김민철 성균관대 교수는 저서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에 썼다. “어떤 정치인이 인민의 견해에 대해 너희는 틀렸으니 내 말을 따르라는 방식으로 말한다면, 그 자신의 견해가 당대 사회 기준에서 얼마나 진보적인지 또는 보수적인지와 별개로 그는 반민주적 정치인이다. 반대로 어떤 정치인이 인민의 견해에 대해 내 입장과는 다르지만 귀 기울여 듣겠다는 방식으로 말한다면, 그 자신의 견해가 당대 사회 기준에서 얼마나 진보적인지 또는 보수적인지와 별개로 그는 민주적 정치인이다.”

 

지난 1일 뉴스토마토가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5.9%가 홍 장군 흉상 철거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은 22.1%였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이래도 너희는 틀렸으니 내 말을 따르라할 텐가.

 

책임성. 국방부 장관이 책임지고 결정했다고 한들 믿을 사람은 없다. 윤석열 대통령 의중이 아니라면 이토록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일 이유가 없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30일 국회에 출석해 대통령은 어떻게 하라고 얘기하지 않겠다. 다만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학계에서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거나, 전문 연구자가 통설을 바꿀 만한 논문을 발표한 것도 아닌데 어떤 게 옳은지 생각해보라는 건 흉상을 치우라는 지시나 매한가지다. 국방부 장관 뒤에 숨을 일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언급한 이후 이념전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한동안 애용하던 카르텔의 자리를 이념더 구체적으로는 공산전체주의가 대체하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게 이념”(828일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이 반일 감정을 선동”(91일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식) 등이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공산전체주의는 전형적인 뉴라이트세력의 언어다. 2008년 뉴라이트의 핵심이던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은 한 논문에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가장 큰 특징은 공산주의 확산의 저지와 공산 전체주의와의 대결 승리를 통해 민주주의가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보고서’(2018)에 따르면, 20159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 박근혜 청와대는 편찬기준에 대한 수정 요구 21건을 담은 문서를 교육부에 전달한다. 21건 중에는 세계사적 배경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대결과 경쟁 그리고 그 필연적 귀결에 대해 내용이 없다. 들어가야 할 필요라는 의견이 포함돼 있다.

 

윤석열 정권 요직에는 뉴라이트 인사가 다수 포진해 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뉴라이트 싱크넷운영위원장을 지내고, 뉴라이트 성향 역사교과서 집필을 목표로 한 교과서 포럼에 참여했다.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관여했다. 김광동 전 원장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뉴라이트에 둘러싸여 늦깎이 의식화된”(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의 표현) 윤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라는 정체불명 개념어에 경도되고, 그 첫번째 액션이 홍범도 지우기로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윤 대통령을 등에 업은 뉴라이트는 전방위적 이념·역사 논쟁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도 역사교과서가 타깃이 될 수 있다. 2025학년도부터 사용될,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 절차가 12월쯤 시작된다. 박래훈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현 정부가 특정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 평가에 이념적 잣대를 적용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권력으로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시도는 그러나 성공한 적이 없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 박근혜 정권의 말로가 어떠했나.

김민아 칼럼니스트 경향 : 2023.09.04.

 

 

육사의 뿌리가 만주군관학교인가

육군사관학교에서 근무지원단(연대급) 행정병으로 군 생활을 했다. 벌써 30년 전이지만,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육사 행정병은 꽃보직에 해당될 터이고 크게 고생한 적도 없어, 군대 얘기가 나오면 별로 할 말이 없다. 다만 육사 전체를 지원·총괄하는 근무지원단 행정병이어서 당시 육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엿보기는 했다. 당시엔 전체 생도가 1200, 근무지원단 소속 장교·사병이 1500명가량 됐다. 육사에서 가장 큰 행사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3월 졸업식이다. D-50일부터 비상이고, 매일 아침 간부회의 뒤 과장(대위)이 전해주는 단장(대령) 지시사항을 먹지 깔아 넣고 타자 세게 쳐서 각 대대에 하달하고, 저녁엔 각 대대로부터 올라온 금일 진행사항익일 예정사항을 취합했다. 대통령이 둘러볼 가능성이 0%인 육사 구석진 곳 화장실 변기까지 염산 들이부어 미백 청소하고, 화랑연병장 건너편 박물관에 전시된 구한말 대포 포신이 대통령을 향한다며 대포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고참에게 좀 과하지 않냐고 했더니, “요즘(노태우 대통령)은 헬기 타고 오지만, 예전(전두환 대통령)에 자동차 타고 올 때는 정문부터 연병장까지 아스팔트를 하이타이 풀어 걸레로 닦았다고 전했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옛 기억을 되살려냈다. 독립전쟁 영웅 흉상이 충무관(종합강의동) 앞에 설치된 건 2018년이지만, 육사에는 이런저런 동상이 꽤 많다. 가장 유명한 건 화랑연병장 건너편에 있는 재구상(강재구 동상)이다. 생도들은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예복을 착용하고 분열을 하면서 부하들을 위해 몸을 던진 강재구 소령 동상 앞에서 1주일간 생활을 반성하며 새롭게 결의를 다진다. 한국전쟁 당시 현 육사 체계를 마련한 제임스 밴플리트 전 미8군 사령관, 2015년 건립된 안중근 의사 동상 등도 있다.

 

육사는 독립전쟁 영웅들 가운데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사 바깥으로 철거하고, 이회영·김좌진·지청천·이범석·박승환 흉상은 육사 내 적절한 장소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육군박물관이 거론된다. 박물관은 주로 방문객 견학 코스로, 생도들은 입학 때에나 둘러볼 뿐이다. ‘독립영웅들과 생도들이 마주치지 않게 하겠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육사의 외형적 시초는 미 군정이 통역관 및 군간부요원 확보를 위해 1945125일 개교한 군사영어학교. 이는 4651(육사 개교기념일) 국방경비사관학교로 이어진다. 이 군사영어학교에 일본군·만주군 출신이 대거 들어왔다. 백선엽·정일권·장도영 등이 1기로 들어와 국군 장교로 신분이 세탁됐다. 1952년 백선엽에서 1969년 김계원에 이르기까지 육군 참모총장이 모두 이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들이고, 모두 일본군 출신이다.

 

2018년 이회영 선생을 포함한 독립영웅 흉상들이 육사에 세워진 것은 육사의 뿌리를 일본군이 아닌 독립군을 길러낸 1919년 신흥무관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는 중대한 기점이었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군은 그때까지 국군의 뿌리를 해방 이후 미 군정에 의해 창설된 1946년 남조선국방경비대로 봤다. 2018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책자를 발간해 처음으로 독립군과 광복군(1940)을 우리 군 역사에 편입시켰다. 국군의 정통성을 독립군에 두려 한 것이다. 이 책은 육사 교재로 사용됐다. 당시에도 일부 육사 출신 퇴역 장성들 가운데 반대가 있었지만, 목소리가 크진 않았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서 홍범도 장군을 공산당이라며 육사에서 쫓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육사의 뿌리를 다시 만주군관학교로 두자는 것처럼 들린다.

 

육사는 반공학교가 아니다. ‘주적관운운하지만, 군의 존재 이유는 국민 보호다. 주적을 무찌르는 것도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해방 이후 군은 4·3, 5·16, 12·12, 5·18 등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거나 쿠데타를 일으킨 바 있다. 그때마다 반공을 국민 보호보다 앞자리에 내세웠다. 군의 부끄러운 역사다. 육사의 정체성은 호국간성이다. 반공간성이 아니다. 국군은 북한만 막으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적으로부터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

 

홍범도 장군 동상 철거를 결정한 육사는 백선엽 웹툰을 홈페이지에 복구했다. 독립군 토벌이 목적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만주육사에 지원했고, 한국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오욕을 덮고, 이젠 사후 존경까지 받으려는 백 장군의 삶과 한평생 조국광복 위해 몸 바치고, 아내는 일제 고문으로 숨지고, 아들은 일본군과 교전하다 전사하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숨진 홍 장군의 삶 중에서 생도는 어떤 삶을 기려야 하는가.

권태호 | 논설위원실장 한겨레 : 2023.09.04.

 

 

이념의 무서움을 목도할 순간이 도래하는가

이념은 무섭다. 이는 그저 좋은 것으로만, 그래서 지켜야만 하는 이념으로 여겨지는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폭력을 동반한 혁명과 전쟁을 통해 만들어져왔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민주주의 이념 자체가 엄청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가질 자격도 없는 피지배층으로서 온갖 고된 노동을 담당하는 하찮은 ()’이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과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민주정)가 뜻하는 바이기에 무섭지 않을 수가 없다. 즉 민주주의는 전복의 이념이다. 특히 기존의 지배층이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부의 독점적 소유권과 행사권을 부정당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대해 거세게 저항한다. 혁명과 전쟁은 그런 지배층의 반동적 저항에 맞서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좋은 이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이념과 역사 과정의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낳은 결과가 민의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라는 가치를 함양하고 구현해낸 덕분이다.

 

한국만 봐도 이념의 무서움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좌우 갈등을 통해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생하게겪어봤다. 동포라는 추상적 관계 이전에 이미 형제와 벗들과 이웃들 간에 골육상쟁을 치러야 했다. 그 와중에 겪은 대표적 비극이 바로 섬 인구 10% 이상(25000~3만명)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4·3’이다. 75년이 지났다지만, (특히 우파 반공주의 세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규모와 방식을 담은 사건 기록만 봐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생명의 존엄성마저 묵살한 이념의 무서움을 느끼는 데 있어 75년은 결코 오랜 시간이 아니다.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부정과 왜곡을 둘러싼 시비가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지금도 분단과 전쟁을 일으킨 적대 구조와 그 여파가 지속되고 있다. 최근 집권세력의 통치행태를 보며 새삼 목도하고 느끼는 것이지만, 그 구조와 여파의 영향은 시간의 부식 효과라는 말을 무색하게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8·15 경축사와 국방부의 최근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를 볼 때에도 그렇다. 다시금 반공주의를 내세워 배제의 대상과 적을 호명하고 있다.

 

시간의 부식 효과란 분단과 전쟁을 겪었던 정치·사회적 집단 간의 좌·우파 간 이념적 적대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약해지고 결국 사라지게 된다는 뜻이다. 분단과 전쟁 시기와 이념갈등을 실제 겪어 좌·우 간 이념적 적대 성향이 유독 강한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 세대의 별세를 염두에 둔 말이기도 하다. 한국의 인구 구성상 분단과 전쟁 과정을 경험한 세대(적어도 1940년대 초 태생인 80)의 비중이 현저히 작아진 것은 맞다. 80대 인구는 2023년 국가통계포털 기준 전체 인구의 4.54%(총인구 5100만명 대비 약 23만명)에 불과하다.

 

반공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빨갱이로 몰며 탄압했던, 또 민주화 투쟁을 사회주의 이념에 기대 수행했던 군부 독재정권 시기가 끝나고, 19876월항쟁을 거쳐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시작된 1988년에는 출생년 기준 분단-전쟁 세대’(40대 이상)가 전체 인구 중 25% 정도(총인구 4200만명 대비 약 1050만명)였다.

 

시간의 부식효과라는 말이 무색

그런데 휴전 이후 70년이 지나 분단-전쟁 세대가 현격히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1988년부터 현재까지 이념의 자유와 그것에 대한 포용성이 신장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그래서 이념 균열과 갈등의 영향 강도와 동원 정도가 약화될 것으로 기대되는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35년이 지났는데도, 이념은 여전히 문제다. 현실 주요 정치세력 간 갈등의 핵심 소재이고, 정치 전략의 주요 레퍼토리다. 양대 세력 중 한 측인 집권세력은 상대방을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친북 이념을 추종한다는 혐의를 두고 공격한다. 1야당인 다른 한 측도 집권세력에 대해 ‘(친일)매판세력=토착왜구아니냐며 그리 한다.

 

왜 그런 것일까? 심지어 지난 35년의 시간은 현실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이념 대립) 역사의 종말마저 선언된 때 아니었던가. 그래서 이 당 저 당 가릴 것 없이 기성 양대 정당이 탈이념을 기치로 이념 대신 민생을추구하겠다고 공언해오지 않았던가.

 

시간의 부식 효과론은 이념을 호락호락한 것으로 봤던 것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의 적대적 이념의 강고함, 특히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이념은 한 번 만들어지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과 기억을 섞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작동한다. 즉 이념은 초역사적이다.

 

반공주의 역시 마찬가지다(반일·반미 민족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이념의 진짜 무서움은 여기에 있다. 언제든 맹목적 적대감을 재생산할 수 있다. 반공주의의 경우, ‘시대 초월적 재동원에서 필요한 건 공산주의자=척결해야 할 나쁜 놈으로 딱지 붙일 대상의 존재인데, 국가권력은 이를 썩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의 현 집권세력에게 그 대상은 실제 공산주의자인지의 여부를 떠나 전임 정권 및 방계 세력이다. 그리고 그들이 추앙하며 현재로 소환해낸 역사 속 인물이다.

 

반공주의를 자유주의·보수주의·사회주의 같은 이념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묻지 말자. 정치에서 이념은 체계적인 지식-담론 구조를 갖추고 있느냐의 여부보다 실제 정치 현실에서의 힘의 관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느냐가 더 중요하다. 자유주의·보수주의·사회주의가 3대 정치이념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다만 자유주의·보수주의·사회주의는 학문적 조명이 흥했지만, 반공주의는 그렇지 못했다. 반공주의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기대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즉 독자적으로 품고 있는 유토피아적 지향 가치와 질서에 대한 구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체제의 목적이 된 한국 반공주의

그런데도 굳이 이념으로서의 위상을 언급하자면, 반공주의는 선동적이고 공격적으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 및 작동 방식을 수호하기 위한 하위 이념, 즉 도구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직접세 증가와 같이 체제 기득권층의 물질적 양보를 요구하는 지방자치체의 복지정책 확대와 자유당의 사회개혁 시도를 계급투쟁과 혁명을 책동하는 불순한 이념이라는 의미의 사회주의로 몰아가며 저지하고자 했던 타임스와 보수당, 1950년대 초 미국에서 냉전 질서의 강화에 편승하거나 그것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입지와 영향력 확보의 차원에서 체제 내 비판세력을 추방하고 매장했던 매카시즘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반공주의도 그 선상에 놓여 있다. 그런데 한국의 반공주의는 좀 특별하다. 이 특별함이 한국 반공주의의 색다른 무서움을 낳는 모태다. 한국에서 반공주의는 사회체제 자체에 내장돼 있다. 체제 수립의 과정이었던 분단과 전쟁 자체가 반공주의의 장착을 위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반공주의는 체제 수호의 도구가 아니라 체제의 목적이다. 그래서 재동원의 빈도가 거의 일상적이고, 그 방식이 거세고 제도적이다. 반대세력에 대해 친북세력이라는 딱지 붙이기가 흔하고,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윤석열 정권의 반공주의를 기치로 한 이념정치의 구사는 일개 정권이 아니라, 체제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악화일로에 처한 남북관계와 개선 가능성의 희박함, ·중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국제정세의 경색과 군사화, 전임 정권에 대한 열성적 반대자에 한정된 정권의 협소한 지지 기반과 낮은 지지율이 촉매가 돼 한층 더 거칠고 공세적으로 표출되고 있을 따름이다.

 

문제는 이것이 대내외 정세 상황의 특성으로 인해 나라 안팎에 걸쳐 이념적 적대감과 체제 간 대결의 위기를 동시에 키울 우려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역사와 달리 이념의 무서움만을 선사하는 역사의 순간을 다시금 목도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주간경향 : 2023.09.04.

 

 

깨어진 균형의 한국사회

사회가 불평등해지면 사회갈등이 증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회 경제성장의 속도도 늦어진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이후 사람들이 공유하게 된 신지식이다. 여야의 보수정치인과 경제관료들 그리고 많은 이의 두뇌 속에는 그러나 경제성장과 분배가 서로 상충되는 개념인 것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한 정도에 대한 국가 비교에서 한국은 미국과 함께 최고 상층부에 속한다. 우리 사회의 심한 불평등은 어디에서 연유된 걸까.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가난한 나라에서 자산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던 토지가 사람들에게 분배됐으니 불평등의 기원을 그 시기나 그 이전에서 찾기는 어렵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빠른 성장을 위해 자본축적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불평등이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과도한 수도권 집중과 사교육 투자

한국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경제 수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경제발전과 함께 자본축적도 이뤘다. 수출을 통한 경상수지 흑자가 누적돼 순자본수출국에 속한 지도 오래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2년 말 대외금융자산은 21271억달러, 대외금융부채는 13805억달러로 해외에 투자된 국내자본이 국내에 투자된 해외자본을 능가하는 수준이 7466억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규모의 자본을 해외에 순수출하는 나라라면 자본축적이 더 이상 경제발전의 관건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자본이 희소한 생산요소가 아닌 이상 그에 대한 가격인 자본재 비용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부족하고 더 희소한 자원인 노동력에 대한 대가는 반대로 높아지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사회 불평등이 완만하게나마 해소돼 가는 것이 경제 이치로도 자연스럽다. 꽤 오래된 자본수출국이므로 지나간 시기 자본축적의 필요성에 의해 방치됐던 불평등은 이미 어느 정도 해소됐어야 한다. 왜 그렇지 못했을까. 경제의 불평등을 줄여주는 움직임이 한국의 경제체계 내에서는 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한번 형성된 세력은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습성이 있다. 초기에 형성된 자본에 대한 정부의 엄청난 지원과 노동자들의 희생은 한국에 공고한 재벌세력을 만들었다. 이들은 시간이 흐르며 선거에 의해 교체되는 정치권력을 자연스럽게 능가하기 시작했다. 경제권력은 기존의 발전방식과 성장으로부터의 독점적 혜택을 유지하고자 했고, 경제정책을 움직이는 정치권력은 이에 봉사하는 위치로 전락했다. 언론과 학계조차 기생세력화됐다. 재벌에게만 유리한 경제정책을 투입하고, 기업과 자본계층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조세와 재정정책을 채택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유지되는 불평등은 많은 이들의 고통, 경제발전에서 중하위계층의 차별과 제외, 전체 경제에는 성장의 저해를 의미한다.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다. 이를 위해선 긴 여정의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하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열정과 집단지성을 필요로 한다.

 

한국사회에는 불평등 구조가 공고해지면서 병행해 고착화한 두 가지 사회현상이 있다. 과다한 수도권 집중과 병적인 사교육 투자가 그것이다. 두 가지 사회현상과 관련해 개인들이 처한 상황과 이해관계도 상이하기에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좀처럼 한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해결책에 대한 소통을 어렵게 하는 배경이다. 한국사회의 깨져버린 균형이다.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기이한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국토 대부분이 저발전 단계에 방치된 상태에서 인구의 역동적인 절반이 좁은 수도권 영역에서 주거와 생업의 고비용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국민은 또한 교통혼잡비용과 제한적 여가생활의 고통을 감내하며 어렵게 지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과 정체가 오래 유지된다는 건 거대한 비용을 초래하므로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인구 및 경제력의 수도권 집중은 국민의 자산(부동산) 쏠림현상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비생산적인 부동산투자로의 자원 쏠림은 효율성을 심하게 훼손한다. 결과적으로 전체 경제의 성장과 개인의 평균적인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최근 국가전략산업이 강조되자 국가가 용인 반도체단지 조성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다. 이미 국제경쟁력을 갖췄고, 수십조원의 현금성 자산을 가진 업계에 국가가 나서서 더 특혜를 주겠다는 것도 논리가 없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반도체에 대한 지원이 왜 꼭 수도권이어야 하는가 말이다. 업계에서 인력수급의 문제, 외국인 투자의 문제 등을 거론하겠지만 정부는 파주, 마곡단지 등에서도 (국가균형발전 측면에서) 이미 많은 후퇴를 했다. 용인까지도 반도체산업에 필요한 팹리스 인력이 가기는 어렵다고 혹자는 말한다. 무엇이 과연 더 중요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반도체단지 조성도 중요한 경제적 목표이겠으나, 국토의 장기적 균형발전이 더 중요하다. 이를 후순위로 두는 건 사안의 경중에 대한 심각한 판단의 오류에 해당한다.

 

개인 삶을 궁핍하게 하는 것

과다한 사교육비 지출 문제도 심각하다. 부모들의 소득에서 자녀 사교육비로 나가는 비중이 매우 높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저출생의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노후소득보장을 어렵게 해 부동산투자에 목을 매달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문제는 이 나라에서 행해지는 사교육이 개인의 인적자원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개선한다는 측면에서 투자효율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다. 사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지 못하는 저소득계층의 자녀들을 입시에서 배제하는 단기적인 목적에서 효율성이 존재할 뿐이다.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중에서 서울 강남구에 소재한 고교 출신 비중이 현저하게 높아졌다. 이는 불평등한 방향으로의 사회변화가 오히려 가속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특정 대학에서 수학한 연고를 가진 집단이 끌어주기를 통해 사회적 세력을 더 공고히 한다. 그만큼 학력 사회의 병폐는 뿌리가 깊다. 대학입시제도는 2~3년을 가지 못하고 바뀌며, 제도 시행의 기술적인 실수가 정권에 대한 민심의 평가까지 큰 폭으로 좌우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수도권 집중과 과다한 사교육비 지출의 근저에는 개인들의 경쟁심리와 욕구도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개인들의 선택은 대체로 방어적으로 이뤄진다. 수도권에 거주하거나 투자하지 않으면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뒤처지게 된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실제로 과거 수십 년 한국사회의 변화가 충분한 경험적 근거를 제공한 상황이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면 취업 등에서 불리하다는 점도 현실이다. 이에 따른 방어기제로 발휘되는 개인의 선택이 불균형을 더 심화시키면서 다시 부메랑이 돼 개인들의 삶을 어렵고 궁핍하게 만들고 있다. 속히 빠져나가야 하는 국가 사회적 함정이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주간경향 : 2023.08.07

 

 

불평등과 계층이동성

역동적이고 발전하는 사회는 계층이동성이 높은 사회일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의 계층이동성이 높다고 보고된다. 계층이동성이 낮은 사회에서는 열등한 계층의 가계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더 나은 계층으로 진입하기 어렵다. 계층의 고착화는 경제적으로 열등한 계층에 태어난 자녀들의 인적자원이 사회에서 소외받으며 개발되지 못하면서 발생한다. 불평등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이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의 경우 빈곤선(기준중위소득 50%) 이하의 소득구간에 위치한 사람들의 비중이 크다. 생활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결핍되거나 부족한 상태에 있다면 당사자들의 삶의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결혼이나 출산 등 중요한 인생의 계획이 심각하게 제약받게 된다. 그러기에 빈곤선 이하의 인구 비중이 높은 사회는 우선 저출생을 통해 경제성장의 가능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이 경우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빈곤이 저출생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부분의 주민이 빈곤한 저개발국가의 경우 출산율은 낮지 않지만, 상대적 빈곤율이 높은 나라에서 빈곤계층의 출산율은 대체로 낮게 보고된다.

 

불평등과 정부의 역할

불평등한 경제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사람들은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본다. 출발지점의 상황을 유사하게 만들어 준다면 개인이 획득한 경제활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국가의 재분배적 개입이 필요없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개인의 성공 요인을 살펴보면 (불평등도 여기서 유래될 것이다) 유전적 요인과 교육적 환경, 그리고 경제적 환경을 들 수 있다. 유전적 요인과 교육적 환경은 지적능력이나 성취동기와 같은 정서적 측면, 지구력이나 손재주 같은 육체적 측면, 외향성의 정도 같은 심리적인 측면들에 모두 영향을 준다. 경제적 환경의 차이는 증여 혹은 상속의 과정을 거쳐 재산상의 차이로 이어진다. 자녀의 고등교육비를 부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증여행위의 일종이고, 결과적으로 교육수준에 영향을 미친다. 불평등의 싹은 결국 가정과 부모에 있는 셈이다. 개인들이 선택할 수 없는 성장 초기의 환경 차이가 개인들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이다.

 

가정과 부모를 균등하게 만드는 것은 정부의 역할을 넘어선다. 가능하지도 않다. 취약한 가정에 태어나더라도 좋은 교육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학교와 학교 외적 서비스를 충분하게 제공하는 역할을 정부는 계속해야 한다. 기회균등 추구 방식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한계는 그러나 명확하다. 결국 불평등을 실효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방식의 노력이 내실 있게 이행돼야 한다. 정부가 의무교육을 실행하고 노동시장 정책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는 방식의 기회 균등화 정책은 반드시 재정이 넉넉한 나라들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며 많은 나라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다. 결과의 평등, 즉 양극화의 축소를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방식은 국민이 경제활동에서 획득한 소득이나 저축, 상속을 통해 형성된 자산에 대해 누진적으로 과세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는데,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모습은 요원하다.

 

소득과 자산에 대한 누진적인 과세는 개인들의 경제적 성과가 반드시 그들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지원, 환경의 변화 등 여러 요인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정당성이 충분하다. 1980년대 이전에는 선진국에서 잘 정착돼 있던 내용이다. 1980년대 이후 작은 정부론이 추세적으로 자리를 잡으며 누진과세가 현저하게 약화됐다. 법인과 개인에 대해 50%에 달하던 주요 국가들의 세율 수준은 큰 폭으로 낮아졌다. 기업과 소득상위 계층의 정치적 영향력이 과대하게 대변되면서 조세 및 재정정책수단의 투입은 정치현실에서 터부시되고 통화정책이 홀로 모든 부담을 안고 분투했다. 그 결과 경제위기 때마다 반복되는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시중에 유동성이 엄청난 수준으로 늘어났다. 최근의 인플레이션으로 통화정책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늘어난 유동성은 전 세계에서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격을 끌어올려 양극화를 더 크게 벌렸다.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소득과 자산 하위계층에 속한 이들의 정부에 대한 분노가 깊어졌다. 유럽 재정위기 이후 기층사회로부터의 분노는 정치권 전체로 향했으나 진보정치인들을 향해 더 강하게 표출됐다. 기층시민들에게 그들의 어려운 경제현실에 대한 책임을 어디에 돌려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보정당들의 대안은 설득력이 있지도, 실효적이지도 못했다. 결국 극우정치인들이 제시하는 손쉬운 해법(이민자 제한, 글로벌화와 중국의 책임 등)에 기대를 걸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극우정치인들이 제기하는 정책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근거 있는 분노를 풀어줄 실효적 대안을 만들어 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경제 격차 완화

재정정책이 본연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조세제도는 응능부담 원칙(납세자의 부담 능력에 맞게 과세하는 원칙)에 충실한 소득세와 법인세를 주축으로 적절한 수준의 세 부담을 정착시키고, 필요한 수준의 재정지출이 가능하도록 재정조달의 기능을 감당해줘야 한다. 마련된 재원은 복지와 교육 및 사회안전 등 인프라 투자에 효율적으로 활용돼 기저층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기대하면서 살 수 있도록 사회가 변화돼야 한다. 정부 세입과 세출의 양방향에서 소득과 자산의 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재정이 조달되고 사용돼 양극화가 점진적으로 해소되도록 재정정책이 역할을 해야 한다.

 

사업이나 부동산 등에 대한 자산투자를 통해 형성된 자산을 자식 세대에게 물려줄 때 국가가 상속세나 증여세를 부과하겠다고 나서면 심리적인 저항감을 가지는 것은 인지상정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봐야 한다. 자식 세대가 물려받은 자산 등은 본인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계층이동성을 심각하게 제약한다.

 

지대 추구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지 않고 단지 기존의 부에서 자신의 몫을 늘리기 위한 활동이다. 독과점적 이익을 누리는 기업, 공급의 제한을 통해 고소득을 누리는 의사 등의 직업군들만이 지대 추구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지대 추구는 기득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경제의 잠재성장력이 떨어지는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가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집단화된 기득권층의 지대 추구 행위다.

 

부의 대물림은 지대 추구 행위 그 자체이며, 형성된 불평등을 고착시킨다. 소득과 자산에서 지대적 요소를 줄이는 것이 경제정책의 핵심이다. 지대에 대한 높은 과세는 경제원리에 부합한다. 경제학 교과서는 가장 효율적인 조세는 지대를 창출하는 자산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정과 부모를 균등화하지는 못해도 경제적 격차는 적절하게 줄여야 한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경향 : 2023.09.04.

 

 

윤석열 대통령 전략적 모호성 발언, 매카시즘과 닮았다

2015년 연말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라는 시가 대학가에 연달아 게시됐다. “‘김일성 만세’ /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 인정하는 데 있는데 /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이라는 내용의 시를 최초 대학가 대자보에 게시한 것은 경희대학교 한 학생이었다.

 

그는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표현의자유라는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그런데 학교 당국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자보를 수거했다. 1960년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문제를 풍자했던 시의 내용이 2015년 현실로 재현된 셈이다. 김일성 만세 대자보는 오히려 확산됐다. 경희대의 다른 캠퍼스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었고, 고려대와 서울대에도 대자보가 등장했다.

 

201512월 고() 김수영 시인의 시 '김일성 만세'를 옮겨 적은 대자보가 경희대 학내에 게시됐다 강제 수거됐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 얼굴에 독재자의 딸이라는 문구가 쓰인 포스터를 공방에 붙였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근거를 대라고 얘기를 들었던 사건이 회자되면서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 한국 표현의 자유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경찰과 검찰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라고 패러디한 대자보까지 등장했다. 한 편의 시조차도, 그것도 표현의자유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시를 허용하지 않은 한국 사회를 고발하려는 듯 대학가에서 김일성 만세열풍이 벌어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일 무시무시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립외교원 설립 6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지금 우리의 자유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아직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그리고 반국가 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한다고 했다.

 

공산전체주의’ ‘반국가 세력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대통령 발언은 전략적 모호성을 띠고 있다. 공산전체주의라는 개념도 생소할 뿐아니라 그 세력의 실체를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오로지 대통령만 알 뿐이다. 위정자의 말이 모호하면 그 위력도 배가 된다. 행여 대통령이 말한 세력으로 찍힐까 두려워한다. 대통령이 말이 유령처럼 떠돌면서 공공의적 찾기가 횡행한다.

 

윤 대통령은 앞서 지난달 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국회에서 여소야대에다가 언론도 전부 야당 지지 세력들이 잡고 있어서, 그래서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했다. 국정운영에 혼란을 빠뜨리기 위해 언론과 야당을 협잡하는 세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앞으로 일부 언론을 향해 편향성 지적을 넘어 반국가 딱지를 붙이고 야당 정치인 중 반국가 체제 인사로 솎아내는 작업에 나설 수 있다. 대통령 발언의 전략적 모호성은 이런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입시키는게 목적이다.

 

결국 윤 대통령 발언은 표현의자유를 폭넓게 침해하는 것이며 매카시즘과 매우 닮아있다. 최연소 상원의원에 올랐던 조셉 R. 매카시가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라고 발언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사회를 광기로 몰아넣은 것처럼 실체가 없었던 공산주의자 명단을 현재 윤 대통령이 흔들고 있다.

 

하지만 매카시즘의 종말을 알린 건 언론의 사실보도였음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CBS는 한 공군장교가 공산주의자로 몰린 사건을 취재해 매카시즘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CBS 간판 앵커 에드워드 머로는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사실에 기반한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 팩트가 모이자 매카시즘은 실체 없는 공포몰이 광기라는 것이 입증됐다.

 

지난달 28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을 놓고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근거에 대한 허점을 캐물은 모습은 사실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선동은 사실을 넘어설 수 없다. 이념 전쟁을 불사한 듯 험악한 말이 오고가고,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홍범도 장군 만세>로 바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역사 논쟁에 끼어드는 건 좋은데 치열하고, 정확하게 해야한다는 기자의 말한디가 유독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설 : 미디어오늘 230905

 

 

참을 수 없는 전직 대통령의 가벼움, 문재인의 훈수정치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과 관련해 ABM(Anything But Moon)이라는 말이 있다. '문재인 정부 것만 아니면 된다'라는 뜻이다.

 

외교, 안보와 민생, 친원전 정책 등 현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 곳곳에서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가 분명하다. 이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내년 총선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제 불과 7개월 남짓 남았다.

 

그런데, 그 숙려의 기간을 참지 못하고 이른바 ABM이 제기될 때마다 실시간으로 반박하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행보는 가벼움 그 이상이다.

 

문 전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과 관련해 지난달 27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깊은 우려를 표한다. 숙고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일주일 만인 3"육사 차원에서 논의된 일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논란이 커졌으면 대통령실이 나서서 논란을 정리하는 것이 옳다"고 다시 견해를 밝혔다.

 

문 대통령이 최근 국정 현안에 자신의 생각을 공개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앞서 24일에는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반대한다"고 밝혔고 열흘 전에는 잼버리 파행 사태와 관련해 "국격을 잃었고 긍지를 잃었다""대회 유치 당시의 대통령으로서 사과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지난 1일 단식중인 이재명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윤석열 정부의 폭주가 너무 심해 제1야당 대표가 단식하는 상황이 염려스럽다"고 전하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SNS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과 비난으로 가득차 있다.

 

문 전 대통령은 퇴임하기 2년 전인 2020년 신년회견에서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잊힌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고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퇴임 후 잊힌 삶을 살겠다" "현실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현재 민주당의 가장 큰 스피커이자 빅마우스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다. "잊혀지고 싶다"는 본인의 말과 달리 실제 행보는 "기억해달라"는 강한 메시지로 보인다. 이런 식이라면, 내년 총선은 문재인.윤석열 전현직 대통령의 대결 국면으로 갈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우려가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책적 평가와 별개로 선택적 공정과 내로남불로 도덕적 심판을 받았다.

생존해있는 퇴임한 대통령 3명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유독 문재인 전 대통령만이 현 정부의 각종 정책에 시시콜콜 훈수 두듯이 견해를 밝히는 것은 상왕정치라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정에 대한 충정을 이해할지라도 직전 대통령이 현 정부에 대해 비판과 비난을 쏟아내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자 국격에도 맞지 않다. 내년 총선승리를 바라는 민주당에도 도움은커녕 부담을 안길 뿐이다.

 

페이스북 캡처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국정 현안 외에도 SNS를 통해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있다.

방문객 소식은 일상이고 텃밭을 가꾸고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진을 올린다. 책 소개를 하고 산행중에 컵라면을 먹는 모습까지 공개한다.

 

전직 대통령도 자연인으로서 일상의 자유를 느끼고 알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상의 자유가 일일이 언론에 공개됨으로써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순수한 자유가 아니다.

 

보여주고 싶은 권리가 있다면 이를 보고 싶지 않을 권리도 있다.

문 전 대통령이 진정으로 국정을 염려하고 민주당을 응원한다면 이런 가벼움 보다 훨씬 무게있는 침묵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전직 대통령의 행보가 SNS 세상에 난무하는 한낱 관종의 자기만족으로 치부되지 않도록 경계할 일이다. 문 전 대통령의 최근 행보는 퇴임 당시 40%대 후반에 이르던 역대급 지지율에 대한 기억을 사라지게 하고 반대 진영의 반발은 물론 지지층에서도 우려를 표하는 자충수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김규완 기자 CBS노컷뉴스 2023-09-05

 

-희망만들기 전직을 현직으로 끌어들이는 이 정부의 처사에 대해서는 단 1%도 언급이 없군요~ABM이라면서 그 불법성과 반민족성에 대해서는 왜 언급을 안하는지...기자님~~~~아무리 컬럼이라도 갖출건 갖추고 쓰셔야죠~~출세가 그리우신가 봅니다.

-audvksrhks 김 규완이란 기자라. 이 친구 몇 년 차 기자인지 알 순 없지만 다소 황당한 글을 올려 놓아 당황스럽기만 하다. 전임 대통령이 그런 지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걸 가벼움으로 치부하고 끌어 내리고 있다. 이런 기자가 노컷뉴스에서 근무한다는 게 과연 이 신문의 정체성과 맞는 것인지, 거기까지 안가더라도 이 신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는 지 묻고 싶다. 매우 부적절한 글이 올려져 있는 것이다. 이건 부끄러운 노컷의 기회주의적인 행태다.

-지중해블루 쥐뿔도 모르는 무지렁이 레벨의 기사. 김규완씨, 그건 당신 私見으로 보이는데,

과연 CBS社説인지.. 컴퓨터 자판 치는 지식은 배운 듯하나, 옥석가리는 눈은 없는 듯. 요즘 말로 뭐라 하던데..

-국장님 지난 정권에서 정치를 잘했으면 왜 윤가가 대통령이 됐을까? 국민을 이런 말도 안되는 나라에 살게 만든 책임의 일부를 문 전대통령과 민주당은 담당해야만 한다. 겨우 정권을 빼앗긴 것 만으로 다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을 말 몇 마디로 퉁치지 말아라.

=조작의힘믿거는국 적극 동감. 조국과 추미애 장관에게 하극상. 없는 죄 만들어 엉겨 붙을 때.. 제대로 처리를 했다면.. 과연 돌굥이가 대통령이 되었겠는가? 10선비 짓 하느라.. 문재인 정권의 검찰총장이라고 쉴드 쳐 줬지? 그 결과가 지금의 나라 꼴이고... 문재인은 현재 돌굥 정권의 탄생에 원죄를 피할 수 없다!

-미하 진정한 가벼움이 뭔지 모르는 기자의 멍멍이 기사 잘보았다. 아닌걸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불의를 보고 참는것이 진정한 가벼움이다.

 

 

단식이라는 당연한 귀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31일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윤석열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를 막아내는 마지막 방법이라면서 말이다. 여권에서는 보여주기 식 단식이다, 검찰 소환을 앞둔 방탄 단식이라는 조롱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런 모욕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재명 대표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특히 지난 대선 후보이자 현 당대표로서 본인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인정은 큰 울림을 준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단식은 민주당 정치의 난맥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점이다.

 

이재명의 단식은 어쩌면 대선 패배 후부터 예정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선거에서 진다는 건 무슨 뜻인가. 정당이 그간 시행해 온 정치적, 정책적 행보와 앞으로 하겠다고 내건 공약들이 다수의 동의를 모아내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선거에서 진 정당이 지난 행보와 공약을 재검토해 새로운 정책 프로그램과 전략을 내놓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건 유권자에 대핸 도리일 뿐 아니라 정당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특히 정권교체가 일어난 경우, 여당이었던 패배 정당에게 반성과 재구축이 필요하다는 건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경우 대선 패배에도 문재인 정부나 이재명 후보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이은 지방선거에서 또 실패한 프로그램을 그대로 밀어붙이면서 더 큰 패배를 겪어야 했다. 대선과 지선 사이의 검수완박입법에 대한 대중의 차가운 반응은 검찰 수사권 조정이라는 내용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선거 패배에도 바뀌려 하지 않은 민주당식 정치에 대한 냉정한 평가였다. 잇따른 선거 패배의 책임에도 이재명 대표가 당대표가 됐다는 것 자체가 원인은 아니지만, 이재명 대표가 지난 1년간 과반수의 유권자를 묶어낼 정책 프로그램의 단초조차 만들지 못한 점은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다수를 설득할 새로운 방안을 대신한 건 더 열심히 뛰겠다는 결기였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방향은 잘못이 없지만 진의가 잘못 전달되거나 외부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고만 생각했다. 주로 방해한 건 물론 검찰이나 보수 언론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방해를 뚫어내기 위해선 정치인과 열성 지지자들이 더 불굴의 자세로 타협 없이 달려야만 한다. 결국 민주당의 정치는 유권자들이 이미 재차 실패했다고 판정한 방향을 향해 더더욱 열심히 달리는 꼴이 된다.

 

이렇게 대중의 판정과 엇갈리는 방향으로 열심히만 달리는 정치는 강하고 고립된 정치로 귀결되기 쉽다. 표현 방식은 점차 거세지지만, 그럴수록 대중의 이해는 구하기 어려워진다. 대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 표현 방식은 더욱 극단적이게 되고, 결국 단식 등 통상적인 의회 정치 방식을 넘어선 극단적 방식이 나타나는 조건이 된다.

 

이재명 대표를 응원하는 지지층 사이에서도 이번 단식에서 내건 요구사항이 불분명하다 지적이 많다. 첫째 요구사항인 국정방향을 국민 중심으로 바꾸십시오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요청하는지, 언제 단식을 마칠 수 있는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함은 단식돌입 연설문을 작성한 한 순간만의 미흡함이 아니다. 당 대표가 단식에 들어간 순간마저도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불분명할 정도로 민주당이 지금 구체적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유권자들은 무엇을 위해 함께 화내고, ‘무엇의 부재에 함께 슬퍼해야 하는가. 민주당은 그저 관객보다 먼저 울고 더 크게 화내면서 억지로 감정적 동조를 끌어내는 삼류 신파영화 같은 정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윤석열 대통령은 아마 사과하지 않을 것이고, 국정방향을 민주당이 요구한 대로 국민 중심으로 바꾸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윤석열도 이미 스스로는 그 나름대로의 국민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로 자기만 진짜로 국민을 위해 싸운다는 상황에서, 나만 진짜 국민을 위한다는 호소는 애절할수록 허망하다. 다수를 묶어낼 능력을 잃어버린 민주당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민주당이 어떻게 더 많은 유권자들을 묶어낼 것인가 하는 구체적 전략이 구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자리에 어떤 고열량 식사가 곁들여진들, 탓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황두영 작가 미디어오늘 2023.09.05.

 

 

저 인간에게서 냄새가 난다, 참을 수 없는 구린내가

12 _후각, 체취

 

냄새가 혐오의 원인이자 살인의 동기로 작용한 영화 기생충한 장면. 자본가 계급이 가진 후각의 아비투스는 다른 계급과 선을 긋고 혐오적 악취를 풍기는 타자와 고급스러운 향기가 나는 자아를 구별한다.

 

냄새가 혐오의 원인이자 살인의 동기로 작용한 영화 기생충한 장면. 자본가 계급이 가진 후각의 아비투스는 다른 계급과 선을 긋고 혐오적 악취를 풍기는 타자와 고급스러운 향기가 나는 자아를 구별한다.

개는 냄새로 사람을 식별한다. 사람도 조금은 가능하다. 덧붙이자면, 계급 냄새만큼은 사람이 개보다 날카롭게 맡는다.

 

비판적 작가 조지 오웰은 계급간 차이의 비밀이 냄새에 있다고 보았다. 오웰이 장미를 키운 것을 두고 작가 리베카 솔닛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가 한그루 사과나무가 아닌 장미나무를 가꾸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적었다. 하지만 오웰의 장미는 악취 대신 향기를 가까이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노동계급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한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자전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오웰은 빈민의 악취를 상세히 묘사했다. ‘카탈로니아 찬가에서는 민병대 참호 속 지린내를 묘사하며 전쟁 특유의 냄새라고 적었다. 문제적인 체제나 인물도 냄새로 감별했다. 전체주의에 저항하지 않는 사회주의에서 썩은 내가 난다고 비판했고, 위선적이고 부유한 사회주의자들에게서는 돈 냄새를 맡았다. 지금 한국사회에도 오웰의 코를 가진 정치인이나 정치평론가들이 적지 않다. 특정 당에서 썩은 내, 구린내가 난다는 류의 표현은 정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근대 이전까지 후각은 인간의 오감 중에서도 별로 중요하게 쳐주지 않던 감각이었다. 야만인에 가까울수록 후각이 발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알랭 코르뱅은 1750년 무렵 기체화학이 등장하면서 악취와 향기가 뚜렷하게 구분되었다고 설명한다. 근대정신은 개인위생을 강조했고 배설물, 분뇨, 동물적인 것, 유기체 특유의 냄새는 민중의 것으로 분리되었다. 빈민 지역의 변소 냄새, 농촌의 퇴비 냄새, 노동자 몸에 흐르는 땀 냄새는 혐오를 받았다. 프랑스 성매매 여성들은 악취를 풍기는 여자를 뜻하는 퓌탱’(putain)으로 불리면서 불결한 여자로 분류됐다.

 

악취에 대한 불안감은 도시 곳곳에 안개처럼 불길하게 스며들었다. 병원·교도소·병영·교회·극장 등 냄새나는 사람들이 밀집한 공간은 위생학적 위험이 들끓기 때문에 철저히 관리받아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분비물을 두려워했으며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냄새가 자신에게 스며들지 못하도록 선을 긋고 집안 냄새를 정화했다. 공공장소를 정화하는 근대적 기획은 냄새나는 오염된 존재들을 감지하고 그들과 시민을 분리하려는 배타적 전략이었다. 도심 거리 퀴어퍼레이드 반대 운동도 이런 근대적 타자화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프랑스 성매매 여성이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를 맞아들이고 있다. 근대 이후 성매매 여성들은

프랑스 성매매 여성이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를 맞아들이고 있다. 근대 이후 성매매 여성들은 악취를 풍기는 여자를 뜻하는 퓌탱’(putain)으로 불리면서 불결한 여자로 분류됐다. 18세기 프랑스 그림.

 

서구의 근대적 후각 관념은 19세기 후반 한반도에 당도했다. 조선을 찾은 선교사들은 처음엔 산과 들에 가득한 꽃향기에 매혹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찌르는 타자의 냄새를 맞닥뜨린다. 거리의 도랑 냄새, 길가에 방치한 주검 썩는 냄새, 환기하지 않는 방에서 나는 등불기름 냄새, 메주 냄새, 씻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풍기는 악취가 서구 백인들의 혐오와 동정을 함께 불러일으켰다. 비위생적인 조선의 악취는 서구 백인들에겐 참기 힘든 것이었지만 후각은 쉽게 무뎌지는 것이기도 해서 이들은 점점 환경에 익숙해진다. 하지만 조선인은 결국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할 전근대적인 민족이었다. 근대 초기 선교사 후각 기록을 연구한 국문학자 김성연은 보이지 않는 미생물 위협과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믿음을 결합한 선교사들의 감각 경험은 종교와 과학과 사상이 한반도에 개입되는 장면임과 동시에 상호이해의 가능성이 움트는 지점이기도 했다고 분석했다.

 

구미의 위생학적 지식을 받아들인 1920년대 이 땅의 계몽주의자들은 전근대적 악취를 퇴치하는 위생 담론을 전개한다. 아무리 비단 치마저고리를 떨쳐입었더라도 머리에 냄새가 나면 견딜 수 없다거나, 암내가 있으면 소박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거나, 겨드랑이 땀내가 나면 시집도 못 간다거나, 흑인종은 냄새가 지독하다는 식의 성차별적, 인종차별적인 체취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다. 한국인들에게 체취는 점차 자기 신체를 관리하고 타인의 신체를 감시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갔다. 체취 문제는 의료화해서 입냄새를 없애는 신진대사 활성법, 겨드랑이 액취증(땀 악취증) 치료법, 냄새의 원인이 되는 생식기 질환 치료법 등에 관한 광범위하고 세밀한 의료지식 담론을 미디어가 적극 유포했다.

 

글로벌 신자유주의 시대에 체취는 더욱 예민하고 섬세한 계급 의제가 되었다.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는 혐오의 원인이자 살인의 동기로 작용한다. 아이티(IT)기업 사장 박동익(이선균)은 운전기사 기택(송강호)의 몸에서 행주 냄새, 지하철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박동익은 자기 곁에서 하층민 냄새를 피우는 기택이 을 넘는다고 생각했지만, 기택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가난의 냄새를 식별하고 코를 틀어쥐면서 선을 넘는 박동익의 모습을 본 뒤 그를 살해한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특정 취향의 행동 기제를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자본가 계급이 가진 후각의 아비투스는 다른 계급과 선을 긋고 혐오적 악취를 풍기는 타자와 고급스러운 향기가 나는 자아를 구별한다. 오늘날 후각의 계급 정체성은 자본·연령·지역 등에 따라 더욱더 섬세하게 나뉜다.

 

도시의 청결과 위생을 담당하는 청소노동자는 역설적으로 씻을 권리조차 갖지 못하고 체취 때문에 성원권을 박탈당한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01386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평등예감_‘들의 이어말하기행사가 열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벌어지는 냄새 갈등에 대해 참석자들이 말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최근 시골에서 농사짓는 장인·장모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온라인 게시판에서 뒷담화를 했던 남편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체취 관리는 공동체 성원권(membership,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권리)의 문제다. 서구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은 마늘 냄새를 없애느라 김치를 멀리한다. 수능을 준비하는 교실에서 냄새나는 아이는 그 자체로 훼방자가 된다. 공부만으로도 힘겨운 아이들은 자기 살 냄새를 관리하려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미용제품과 의학 정보를 구하며 스스로 신체를 감시한다. 한겨레가 최근 씻을 권리기획기사를 내보내면서 민주노총과 청소노동자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대답한 이는 60%에 달했다. 도시의 청결과 위생을 담당하는 청소노동자가 역설적으로 씻을 권리조차 갖지 못하고 체취 때문에 성원권을 박탈당한다. 노숙인은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 냄새 때문에 식당에서 내쫓긴다

 

체취를 유발하는 땀샘은 체온 조절을 담당하는 에크린선과 겨드랑이 등 특정부위에 발달해 지방산과 유기물질을 배출시키는 아포크린선으로 나뉜다. 땀은 원래 냄새가 없지만 아포크린선 땀샘에서 분비가 과다할 때 피부에 서식하는 세균과 땀이 섞여 지방산과 암모니아로 분해되면서 악취로 바뀐다

 

체취가 심한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큰 고통을 겪는다. 나이가 들면 몸에서 가령취라는 노인 냄새가 난다. 중년 이후 피지 속 지방산이 산화돼 생기는 노넨알데하이드가 원인이다. 생선냄새증후군인 트리메틸아민뇨증은 몸에서 땀, 소변, 썩은 생선, 썩은 계란, 쓰레기 같은 냄새가 나는 희귀질환으로, 유전되며 여성의 경우 월경 때 특히 냄새가 심하다고 한다.

 

남성 특유의 체취에 총각 냄새’ ‘홀아비 냄새라는 딱지를 붙이지만 성적 이미지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여성을 비난할 때 냄새나는 걸레에 비유하는 것은 성적으로 더럽고 문란하다는 뜻을 포함한다.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암내암컷의 몸에서 나는 냄새, 발정기에 수컷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고 적고 있다. 작가 최현숙은 암내는 여성을 성적 존재로만 보는 멸시가 담긴 단어이기도 하다며 아버지에게서 유전된 액취증이 자신을 끝도 없는 구덩이인 무저갱속에 빠뜨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생애를 지배한 액취증 때문에 얻은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소외된 사람에 대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만들어 나갔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를 맡고 과거를 돌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듯 특정 냄새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고인의 옷을 끌어안고 숨을 훅 들이마시며 폐부 깊이 냄새를 간직하려고 한다. 체취가 사라지기 전까지 애도는 완성되지 않고, 체취가 사라진 뒤에도 어느 순간 바람결에 프루스트 효과로 남은 이는 고인을 떠올리게 된다. 여름만 있는 지역에서 공부하다 문득 코끝을 스치는 겨울 냄새가 그리워 귀국했다는 어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냄새는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인생을 움직인다.

 

참고문헌: 오웰의 코(존 서덜랜드 지음, 차은정 옮김) 악취와 향기(알랭 코르뱅 지음, 주나미 옮김) ‘근대 초기 선교사 기록에 담긴 후각 감각을 통해 본 문화번역의 가능성’(김성연),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최현숙)

이유진 한겨레21 선임기자 2023-09-05

 

 

10년이 아니라 30년쯤 후퇴했다

뿔뿔이 흩어져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는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정체성이 같이 모여 있으면 매우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간호사들은 전공을 선택할 때부터 환자 곁에서 살아가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으면 선한 의지의 아우라같은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같은 내용의 강의를 해도 매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직 대통령 중 한분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시민단체가 있다. 가끔 행사에 초대받아 가 보면 이마에 착한 사람이라고 써 붙인 것 같은 인상의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다. 단체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분위기는 마치 공립도서관처럼 고즈넉하고 나도 모르게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진다.

 

문재인 정부 말기 그 단체의 한 지역위원회 초청을 받아 중대재해처벌법 등 노동정책의 한계와 개선 방안 등에 관한 강의를 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민주노총 위원장 연행 등을 규탄하며 분노하는 한 회원에게 오히려 내가 그래도 여기는 문재인 정부가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벽돌 한장 쌓는 심정으로 힘을 보태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아닙니까?”라는 말로 위로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현 정부에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느냐?”는 마지막 질문에는 이런 행사를 했다고 잡혀가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의 기대는 한다고 답하면서 웃었지만, 말하는 강사나 듣고 있는 회원들 모두 마음이 우울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기대조차 하기 어려운 정부가 이 땅에 다시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지금까지 구속되거나 압수수색을 받거나 연행돼 조사를 받은 노동자나 활동가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현 정부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닥칠지 모르니 굳게 마음먹고 대비하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학교 밖에서 어렵게 이루어지던 노동교육을 학교 안에서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은 2013년께부터였다. 경기도교육청이 2012민주시민과목을 개설하고 그 이듬해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교과서를 발간해 보급했다. ‘노동단원이 신설된 그 교과서를 다른 지역 학교에서도 널리 사용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교육부에 민주시민교육과가 신설되고, 교육청에 담당 장학사가 배치되고, 학교에도 담당교사가 배정돼 민주시민교육의 일부로 학교 노동교육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예산이 넉넉하게 뒷받침되지 못해 미흡한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 노동교육을 중시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불만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에서 민주시민교육과를 폐지하거나 명칭을 변경하고 지방의회에서 민주시민교육 조례등을 폐지하는 일이 잇달았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학교 노동교육이 하루아침에 10년쯤 뒤로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는 글을 쓴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가 10년이 아니라 30년쯤 후퇴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설립되던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며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그 무렵 정치인들이 전교조를 비난하며 자주 했던 말이 왜 교사가 자신을 노동자라고 스스로 비하하는가?”라는 표현이었다. 그 뒤 한동안 한국 사회의 특이한 노동혐오 현상을 설명할 때 그 몰상식한 발언이 자주 인용되곤 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자신을 노동자라고 인정하면 스스로 비하하는 행위가 된다고 설명하면 청소년들도 웃었다. 30년도 훨씬 지난 일이어서 까맣게 잊고 살아온 지 꽤 되었다.

 

우리나라 교사 수가 줄잡아 50만명이라는데 지난 2일 집회에 30만명이 모였다. 단일 직종 노동자들이 이렇게 절반 이상이나 한자리에 모인 장면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4공교육 멈춤의 날에도 교사들의 대규모 집회가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놓고 보수 여당 수석대변인은 신성한 선생님을 스스로 노동자로 격하시킨 단체가 충분한 책임이 있지 않나 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10년이 아니라 30년도 더 후퇴한 느낌이다.

 

요즘 각종 콜센터에 전화하면, ‘노동자에게 욕설·폭언 등을 하면 산업안전보건법에 저촉되니 삼가고 통화 내용은 녹음된다는 안내가 먼저 나온다. 교사 역시 중차대한 교육을 담당하는 노동자로서 같은 보호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한겨레 2023-09-05

 

 

윤 대통령, 시민의 인내력을 시험하지 마라

20238월의 윤석열 대통령은 당혹스러웠다. 두번째 맞은 8·15 경축사에 이어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간부위원 대화, 그리고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사로 이어지는 윤 대통령의 발언은 반공 전사선언과 다름없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이 분단의 현실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하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다.”(민주평통 간부위원 대화) 불과 취임 15개월 만에 극렬 우익 이념의 전사가 돼 있다. 지난 대선 때 공개된 녹취록에서 윤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우리는 원래 좌파라고 한 것을 떠올리면 그 급속 변신이 더욱 당혹스러워진다.

 

유인태 전 의원은 뒤늦게 뉴라이트 의식의 세례를 받은 거 아닌가라고 분석했고, 혹자는 대통령 주변의 측근들 탓을 한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이념 전사가 된 대통령은 바람직하지 않다. 4차혁명으로의 전환과 신냉전으로 가는 격변기에 웬 공산전체주의 타령인가. 전환기일수록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데 가장 경직되고 꼰대스러운 사고로 대응하고 있다.

 

해병대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을 항명수괴죄로 얽어넣은 것은 현 정부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해병대 채모 상병이 실종자 수색 중 사망한 데 대한 책임을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가리는 게 공정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군 내부에서는 아예 이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하지만, 윤 대통령과 국방부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홍범도 장군 동상을 육사에서 철거하자는 것은 역사에 남을 망발이다.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당시 정세에 따라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홍 장군은 내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쫓은 백선엽은 동상을 세워 육사 생도들에게 본보기로 삼자니, 내가 하면 공정이고 남이 하면 불공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두 사건으로 공정과 상식이라는 윤 대통령의 대선 구호는 허망해졌다. 윤 대통령의 여러 결정들이 시민이 위임한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수십년간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한··일 안보협력 강화는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언론인 80%가 반대하는 이동관은 청문회 결과와 무관하게 방통위원장으로 앉혔다. 대선 후보 때 본 윤 대통령이 아니다.

 

윤 대통령이 이념 전사를 자임한 것은 당장은 비판받아도 역사에 남는 존재가 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후대에 평가받는 지도자는 당대에도 성공한 정치인들이었다. 윤 대통령은 지지층을 결집해 내년 총선에서 이기는 데 전력을 다하기로 한 듯하다. 윤 대통령은 이번 총선은 내 이름으로 치른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는 곧 당 공천 개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공천 개입으로 처벌됐다. 당시 이 수사를 이끈 서울지검장이 윤 대통령 자신이다.

 

윤 대통령을 잘 아는 전직 검찰총장은 윤 대통령에게 가장 큰 리스크는 고집이라고 말했다. 검사일 때는 그 강골의 모습이 소신으로 비쳤지만, 대통령이 고집을 부리면 불통이 된다고 우려했다. 이대로라면 윤 대통령은 계속 자신의 길을 갈 것이고, 그렇다면 기댈 곳은 검찰뿐이다. 최근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건을 다시 캐는 것을 보면, 이복현 검사를 금융감독원장으로 보낸 이유가 분명해진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남부지검에 금융수사 부서를 확충시킨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리고 고발사주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손준성 검사 등 친윤 검사들을 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들은 야권을 향한 수사의 강도를 더욱 높일 것이다. 대법원장과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에도 자신의 친구와 법대 동기를 심어놓았다. 선거전을 유리하게 끌고갈 채비를 갖췄다.

 

최근 뉴스를 안 본다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난다. 문재인 정부에 실망한 데 이어 윤석열 정부를 보며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다는 말이다. 윤 대통령은 이런 진흙탕이 여권에 유리하다고 볼지 모른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30% 언저리에서 맴도는 국정지지율을 믿는 것일까. 하지만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율 30%도 순식간에 5%로 떨어졌다. 20대와 중도층이 이미 여권 지지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념에 물든 정책들이 후과를 부를 때, 윤석열 정부는 가장 무능한 정권으로 타매(唾罵)당할 것이다. 성경도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다.

이중근 논설고문 경향 2023-09-05

 

 

홍위병과 매카시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는 2005년 펴낸 장편소설 <형제>에서 문화대혁명기(1966~1976) 중국 사회의 모습을 그린다. 소설 속 송범평은 중학교 교사이자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작은 마을에까지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시작되자 홍기를 들고 계급투쟁 선봉에 서며 영웅 대접을 받던 그는 지주의 아들이라는 게 알려져 하루아침에 홍위병들의 공격 대상이 된 뒤 결국 목숨까지 잃는다.

 

문화대혁명기 중국은 혼돈의 시기였다. 마오쩌둥은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겠다며 농업과 산업 생산 증대를 목표로 추진했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전근대적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며 문화대혁명을 시작한다. 그 중심에 홍위병이 있었다. 대학생, 심지어 중·고등학생들까지 가세해 만들어진 홍위병은 마오쩌둥 사상을 찬양하며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부르주아 지식인과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정치인 등을 색출·처단하는 데 앞장선다. 홍색 완장을 찬 홍위병들이 전국을 휩쓸었던 이 시기 중국에서는 숱한 문화재가 파괴되고 최대 200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미국에선 반공산주의 광풍이 몰아친 시기가 있었다. 19502월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조지프 매카시가 여성당원대회에서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주장하며 시작된 매카시 선풍이다. 매카시의 폭탄 발언이 있은 이후 미국에서는 4년여에 걸친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이 이뤄졌고, ‘마녀사냥의 공포가 불어닥쳤다. 매카시 선풍은 195412월 매카시가 반미활동위원회위원장에서 해임되면서 일단락됐지만 미국 사회에 남긴 상처는 크다.

 

요즘 언론 보도를 보면 21세기 한국 사회에 매카시와 홍위병의 망령이 동시에 살아 움직이는 건 아닌가 하는 기시감이 든다. 무턱대고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정치인들이 매카시를 연상시킨다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기에 바쁜 보수 언론은 홍위병을 연상시킨다.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지난 1일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는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그리고 반국가 세력이 반일 감정을 선동한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작곡가 정율성의 행적을 지적하며 광주시가 2018년부터 추진해온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문제 삼았다. 또 육군사관학교는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입당 전력을 문제 삼아 학교 내 흉상 이전을 결정하며 논란을 불렀다. 보수 언론은 단독딱지를 붙여가며 그들의 지난 행적에 관한 기사를 쏟아낸다. 정치권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좌표를 붙이면 보수 언론이 달려들어 물어뜯는 형국이다.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던 홍범도 장군이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논란의 중심에 서는 모습에서는 위화의 소설 속 송범평의 모습까지 묘하게 겹쳐진다. 홍위병의 광기와 매카시즘은 전혀 다른 곳을 겨냥했지만 사회에 극심한 공포와 분열의 상처를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홍위병과 매카시의 망령을 걷어내야 할 때다.

이종섭 베이징 특파원 경향 2023-09-05

 

 

··일 회담 이후, 한국 경제 어디로?

8·18 ··일 정상회담은 역사적 전환점이 될 것인가. 8·18 회담의 핵심은 유사시 세 나라가 협의해 대응을 조절한다는 것이다. 이는 안보체제 차원에서는 전환의 계기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향후 과정에 대해,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일은 인도·태평양에서 공동 역량을 건설하는 역내 이니셔티브를 발표할 것이고, 이는 해상 안보를 포함한다고 언급했다.

 

머지않은 시기에 육··, 잠수함, 사이버 분야를 망라하는 다년간 공동 군사훈련 계획이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설리번 보좌관은 3국 안보협력의 제도화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같은 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향후 3국 안보체제는 느슨한 협의체와 새로운 군사동맹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8·18 회담은 우선 미국 외교의 승리이다. 미국은 2010년대 들어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하면서 중국의 군사적 굴기를 견제하려 해왔다. 8·18 회담으로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을 결속하는 안보체제가 가시화됐다. 미국 외교가에서는 8·178·19는 전혀 다른 날이라는 평가도 나온다고 한다.

 

한반도 차원에서는, 분단체제가 다시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한 분단체제는 1980년대 말 이후 냉전체제의 해체, 민주화의 진전 등으로 약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중 협조에서 경쟁의 시대로 전화되면서 한··일 결속과 북··러 결속이 상호작용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분단체제의 강화는 남북한 기득권층의 강화, 민주화체제와 평화체제의 약화라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국의 성장체제는 위기에 봉착했다. 그간 한국경제의 성장 경로를 이끌어온 동아시아형 발전모델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대안적 성장모델은 오리무중인데, 8·18 회담 이후의 한··일 안보체제는 동아시아형 모델을 뒷받침했던 지정학적 조건의 변경을 가져오고 있다. 한국형 성장체제는 동아시아 모델 1’의 단계와 동아시아 모델 2’의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동아시아 모델 1’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제1단계 한국형 성장체제는 1960~1980년대 한··일 국제분업 체제에 근거해 형성된 것이다. 1990년대의 탈냉전 및 글로벌화 조건 아래에서 전개된 동북아 분업구조 속에서 제2단계의 새로운 성장체제가 형성되었다. 한국은 이때 선진국 수준의 발전단계를 거의 추격하는 데 이르렀다.

 

동아시아 모델 2’에 해당하는 한국형 성장체제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정체·후퇴 국면에 들어선다. 이때부터 중국의 추격으로 한국의 경쟁우위가 축소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도체 산업과 중국 시장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의 성장체제에서 성장률 침체 현상이 뚜렷해졌다. 여기에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반도체·에너지·식량 부문의 변동성이 한층 더 커졌다. 무역수지 악화, 원화 가치 불안정, 가계부채 위험, 인구구조 악화 등은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또한 소득·자산, 지역, 세대 등 여러 방면에서의 격차·불평등이 빠르게 악화됐다. 동아시아 모델의 장점이었던 성장, 분배, 안정성 모두 흔들리고 있다.

 

8·18 회담에서 논의된 경제 의제는 주로 경제안보와 관련된 것들이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첨단 분야에서는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배터리, 에너지, 바이오기술, 핵심광물, 제약,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등은 미국이 주도하고자 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분야이다. 3국 간 협의체를 가동하겠다고 하지만,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협의체 속에서 한국에 협력의 이익이 배분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8·18 회담은 동아시아 모델 2’가 작동하던 지정학적 조건에 재차 타격을 가했다. 한국이 낮은 발전단계에 있던 1960~1980년대의 동아시아 모델 1’을 다시 불러올 수는 없다. 한국·중국의 추격이 진행된 조건에서 수평분업 구조를 새롭게 짜야 한다. 중국과 인접한 한국·일본은 협력해서 미·중 갈등을 완화하고 한··일 분업의 새 틀을 만들어야 한다. 어렵지만 해야 할 일이다.

 

인도·태평양과 일본의 역할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8·18 회담에서도 “3국의 인도·태평양에 대한 접근법 조율아세안 주도의 지역구조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 인도·태평양으로의 연결에서는, 미국·일본·중국 모두 일정한 경쟁관계에 있다. 일본은 한··일 관계, 동아시아 정세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 같다. 한국은 스스로 다층적 연결전략을 갖고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한국경제,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이일영 한신대 교수 경향 2023-09-05

 

 

농사에서 배우는 역사의 준엄함

내 딴에는 한 몇 년 농사일에 허덕였다. 생업으로 삼았으니 십년공부에 절반을 넘겨 좀 이력이 붙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은 턱없는 자신감이었다는 것을 엊그제 다시금 깨달았다. 비닐이 찢어진 하우스가 한 동 있었고 여름작물을 심을 수 없다 싶어 그냥 두었더니 잡초가 점령해 버렸다. 올해는 가뭄을 못 느낄 만큼 적당한 시기에 비까지 와주니 풀이 제 세상을 만난 것이었다. 친환경을 천명했으니 제초제 뿌리는 방법은 쓸 수 없는 터라 고민 끝에 풀씨를 받기 전에 트랙터로 로터리 작업을 해댔다. 풀 자체보다 풀씨를 받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기에 적절한 대처를 했다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느 농사 전문가가 둘러보더니 땅은 자꾸 갈아엎으면 오히려 굳어져 작물 생육에 좋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잘한다고 한 짓이 아니함만 못하지는 않더라도 잘한 것은 아니니 반성을 해야 했다. 그리고 문득 땅뿐 아니라 세상 이치가 너무 분별없이 자주 갈아엎어서는 득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꼴이 날 수도 있다.

 

윤석열 정권은 끝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에서 들어낼 모양이다. 이전 정부에서 성대한 환영식까지 하며 모셔온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겨우 정권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정권은 하나에서 열까지 이전 정부가 했던 것은 모두 바꾸려고 하고 있다. 옳다 그르다는 이치에 맞는 판단은 없는 듯하다. 그러고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들은 모두 이전 정부 탓만 한다. 정권을 선택하는 것은 국민이고 탓도 국민만이 할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이 했던 정책들은 정말 하나같이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엉망진창 놀음이었을까? 더욱이 문재인 정권은 국민적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다. 국민은 이런 정권의 정책들을 마음대로 짓밟을 권력까지 윤석열 정권에 부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했다. 성숙한 정권은 남 탓 안 하고 겸허하게 자신을 낮춘다. 또 큰 틀을 마련해서 미래를 지향할 때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는 것이다. 너희가 싹 다 바꾸었으니 우리도 싹 다 바꾼다는 식은 정말 위험한 것이다. 국민이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려서는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이치를 저들이 모를 리는 없다고 본다. 그래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은 국민을 졸로 보거나 자신들 이익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는 것을 여론화해서 이념 대결을 하겠다는 모양인데 그야말로 시대에 덜 떨어진 짓이다. 국사책에 기술되어 있듯이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우뚝한 위인이다. 불과 5년을 약속받은 정권이 갖고 놀 공깃돌이 아니다.

 

농사는 대풍을 염원해서 짓는다. 국민이 이 정권을 선택한 까닭도 그 이치에 어긋나지 않다고 본다. 홍범도 장군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옮길 계획이라는데 그 거처가 어디여야 하는가를 떠나 해묵은 이념 논쟁이 민족의 미래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것에 걱정이 더 앞선다. 윤석열 정권은 지금 핵오염수 방류와 갈수록 심화하는 경제난, 지방 소멸 등 풀어야 할 난제가 한둘이 아니다. 이념 논쟁으로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이다. 국민이 등 돌리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경남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우주항공청 설치부터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 정치놀음보다는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다. 농자의 꿈인 대풍은 절대 그냥 오지 않는다.

이순수 작가·객원논설위원 경남도민 2023-09-05

 

 

누가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세력인가?

자유센터는 한국자유총연맹의 본부 건물이다.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1964년 서울 장충동 남산 자락에 들어섰다. 1966년 제12회 아시아민족반공총회, 1967년 세계반공연맹 총회가 이곳에서 열렸고, 1970~80년대엔 관 주도 이념 행사나 궐기대회, 공무원·학생 대상 반공 교육 장소로 활용됐다. 1990년대부터는 연맹 사무 공간을 제외한 건물 대부분이 웨딩홀과 식당, 양주클럽, 택배회사 등에 임대됐는데, 냉전이 해체되고 남북 간 대결 구도가 약화하면서 행사 공간으로 쓰임새가 줄어든 결과였다.

 

한동안 한국 반공주의의 조락을 상징하던 이곳이 돌연 활기를 띠게 된 건 자유를 취임 일성으로 내건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지난 628일엔 자유총연맹 창립 69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이곳을 찾았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24년 만이었다. 대통령 방문도 이례적이었지만, 압권은 대통령의 말이었다. “자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하거나, 자유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로막으려는 세력들이 나라 도처에 조직과 세력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고백이요, 선언이었다. 자신이 줄곧 강조해온 자유라는 화두가, 자율성과 다원성이 핵심인 정치적 자유주의의 근본이념이 아니라, ‘자유=반공이란 등식에 기초한 냉전 자유주의, 우익 국가주의의 그 자유임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른바 반국가 세력을 겨냥한 대통령의 당시 발언은 40여일 뒤 8·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란 표현으로 한층 구체화했다. 전임 정부 핵심 인사들을 위시해, 자신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 전체에 공산전체주의라는 생경한 이념 언어를 덧칠한 것이다.

 

윤 대통령이 말한 공산전체주의는 우익 전체주의(나치즘)와 짝을 이룬 좌익 전체주의(볼셰비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전체주의 비판에서 빌려 온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의 전체주의는 대중운동을 본질적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독재권위주의와는 구분된다. 거기엔 대중의 열광과 자발적 복종, 확신에 찬 행동이 동반된다.

 

중요한 건 아렌트가 전체주의적 대중의 출현을 외로움이란 감정 상태와 연결 짓는다는 사실이다. 그가 볼 때 대중은 원자화되고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체. 원자화된 개인을 대중으로 결합시키는 것은 고립돼 있다는 사실, 거기서 느끼는 외로움인데, 바로 그 외로움이 최악의 경우만을 생각하는 극단주의로 인간을 밀어붙인다는 게 아렌트의 진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전체주의 운동을 키워낼 토양은 좌파보다는 우파 쪽이 더 비옥해 보인다. 스스로를 애국 진영이라 일컫는 아스팔트 우파의 주력이 유튜브 생태계에 기생하는 정치 낭인들, 퇴직 언론인,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60~70대 남성 노인층인 것을 봐도 그렇다. 대통령이 주도하는 이념전쟁에 신바람 난 것도 궁핍과 고립과 외로움과 싸우는 냉전 우파들이다.

 

역사적 경험에 비춰 볼 때, 전체주의 운동은 이런저런 이유로 정치조직에 대한 욕구를 가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아렌트는 그것이 노인 등 사회적 주변부의 한계 경험이었던 외로움이 점점 더 많은 대중이 매일 겪는 일상 경험이 되었다”(‘전체주의의 기원’)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고 했다.

 

지금 단언할 수 있는 건 정부 지원을 받는 법정 단체 가운데 전체주의 운동의 조직 기반으로 활용될 위험성이 가장 큰 조직이 자유총연맹이란 사실이다. 돈과 조직, 인정에 목마른 이들이 17개 시·도 지부와 228개 시··구 지회, 3300여개 읍··동 위원회까지 갖추고 정부·지자체의 1년 보조금만 138억원(올해 기준)인 이념운동 조직을 두고 볼 리 없기 때문이다.

 

자유총연맹 역시 5년 전 정관에 도입된 정치적 중립조항을 지난 3월 삭제하고, 6월엔 극우 성향 유튜버 20여명을 자문위원에 위촉하는 등 정치조직화를 위한 정지 작업을 마쳤다. 심지어 극우 유튜버들의 영입 창구로 의심받는 사무부총장은 연맹의 정치적 중립정관 삭제가 윤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묻고 싶다. 지금,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전체주의 세력은 누구인가?

이세영 | 전국부장 한겨레 2023-09-06

 

홍범도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독립군 흉상 토벌 작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소식이 전해졌다. 한반도에서 대화와 협상이 증발했다. 몰아칠 대결과 갈등의 폭풍에 아득할 뿐이다.

윤석열 정부가 일제 황군에 쫓겨 소련 영내로 넘어간 홍범도 장군을, ‘빨치산’ ‘공산당이라며 그 흉상을 육사에서 철거하려 한다. 국군은 그 뿌리가 백선엽 같은 일본 황군이어서, 그들이 가담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이어서 완수하려는 수작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기도 미묘하다. 지난 818일 한··일이 미국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정상회의를 하고, 세 나라의 삼각 동맹 체제로 가는 길을 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금기시되던 한국과 일본의 군사협력, 군사동맹 체제로 가는 문을 열었다.

일제와 싸우던 독립군들이 국군의 군문에서 버티고 있자, 향후 원활한 한-일 군사 관계에 장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홍범도 대신 백선엽 동상을 군문에 세우겠다 하고, 그의 친일 부역 기록도 이미 지웠다.

 

때맞춰 김정은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하고는 두 나라의 군사협력을 다지려 한다. 한세기 전 만주의 독립군은 일제의 토벌에 쫓기며 중국 본토나 소련 연해주로 넘어갔다. 이제 김정은은 북한을 옥죄는 한··일 협력 체제에 맞서기 위해 연해주를 찾는다.

 

당시 독립군은 일제의 토벌에 울분과 낙담 속에서 쫓겨갔는데, 김정은은 한··일 삼각 협력 체제나 한·일 군사협력에 활짝 웃으며 연해주를 찾을 것이다. 독립군들은 중국이나 소련에 의탁하려고 갔는데, 김정은은 한··일 체제에 맞설 자신의 몫을 러시아와 중국에 과시하러 갈 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국제사회에서 왕따당한 천애 고아처럼 지냈다. 이제 중·러의 든든한 동반자로 나서게 됐다. 30년 전 소련은 망했고, 중국은 미국과 손을 잡았다. 그래서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과 수교했으나 북한은 미·일과 수교를 못 하고 배척당했다.

북한은 핵 개발을 선택해 미·일과 협상하고 수교해 고립을 타개하려고 했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까지 북한의 길이었다. 하노이 회담이 노 딜로 끝나자, 김정은의 북한 체제는 미·일과의 협상을 포기했다. 유일한 자구책으로서 핵무력의 고도화로 질주했다.

 

그 이후 미-중 대결이 본격화돼 미국의 대중국 디커플링과 인도·태평양 전략이 강화됐다.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동병상련의 중국과 러시아는 양국 우호에는 제한이 없다는 역사적인 우호 관계를 맺으며 서방과 분리되는 독자적인 생태계 구축에 나섰다. ·러는 지난 30년간 핵 개발 중단을 종용하며 지원을 끊었던 북한을 다시 자기들 진영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러의 구애에 김정은의 북한은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미·일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핵무력 고도화로 질주해온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1960~70년대 중-소 분쟁 와중에 중·소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쳤던 경험이 있던 북한에 현재 중·러의 역사적인 연대와 자신에 대한 구애는 그 어느 때보다 우호적인 환경이다.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과 관련해 한·미가 비난하는 양국의 무기 거래는 아마 북·러에는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들은 더 큰 전략적 그림을 그릴 것이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북한과의 연합훈련에 대해 왜 안 되겠는가, 우리는 이웃이다라고 답했다. ·러는 이미 동해와 서해에서 연합훈련이 이뤄지고 있다. 북한의 참여는 시간문제이고, ·러는 동북아에서 북한의 전략적 역할을 기대한다.

 

2차대전 이후 동북아에서는 항상 한··일 남방 동맹 대 북··러 북방 연대 세력의 대결 가능성이 상존해왔다. 하지만 한··일 동맹은 한-일 관계에, ··러 연대는 중-러 관계에 막혀왔다. 이제 그 매듭이 풀리고 있다.

 

홍범도 일대기 범도의 작가 방현석은 백년 전 홍범도가 발사한 마지막 한 발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 반드시 표적의 정중앙을 관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탄환이 탄착점에 명중하기까지, 우리도 그가 겪었던 능욕과 풍상을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 탄환의 명중을 방해하려는 이들의 독립군 흉상 철거, 이 소동의 동력인 국제 정세에서 촉발된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이 야기할 한반도와 그 주변의 폭풍우가 그것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3-09-06

 

 

역사전쟁, 처칠을 소환한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1941622일 영국의 전시 내각을 이끌던 윈스턴 처칠 수상의 방송 연설은 이랬다. “우리는 히틀러와 나치 체제의 모든 것을 그 흔적까지 없애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치 제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그 어느 개인도 국가도 우리는 지원할 것입니다. 히틀러와 함께하는 그 어느 개인도 국가도 우리의 적이 될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당연하게도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을 도울 것입니다.”

 

 

1919년 러시아 혁명 당시 영국 육군장관이었던 처칠은 러시아 적군에 대항하는 백군을 지원하는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하지만 독일 나치의 공세 앞에서 러시아의 위험은 우리의 위험이라며 공산주의자들과 힘을 합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소련이 무너지면 영국도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존망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나치는 공산주의보다 더 위험한 전쟁 기계였다. “모든 형태의 인간의 사악함을 모아 놓은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그 사악한 나치 체제의 동맹이 이탈리아와 일본이었다. 일본이 그해 12월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이 참전하면서 추축국 대 영국ㆍ미국ㆍ소련의 연합국 간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권이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전체주의라는 구도로 역사ㆍ이념전의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냉전 이전 20세기 초의 정치ㆍ사상 구도는 전혀 달랐다. 자유민주주의나 공산전체주의라는 용어나 개념이 없거나 희미한 때였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군주제를 벗어나지 못한 나라도 많았고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 경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제국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이념과 사상이 경합했다. 이 중에서 자유세계, 아니 인류에게 가장 위험한 것으로 드러난 게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전체주의가 결합된 나치즘과 파시즘이었다. 일본의 군국주의도 그 대열 편이었다.

 

처칠마저 스탈린과 손을 잡던 마당인데, 하물며 나라를 잃은 약소 민족들은 어땠을까. ‘가짜 혁명이라는 게 사후에 드러났지만 소비에트는 그때만 해도 제3세계의 독립과 해방을 표방했기에 제국주의에 시달리던 민족들에겐 우군으로 여겨졌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에 격렬하게 맞섰던 측도 주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적대 관계였던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전체주의의 쌍생아라는 인식이 대두된 것은 1940년대 후반이었다. 스탈린이 동유럽에 위성국가를 건설하며 소련식 제국의 본색을 드러낸 데 이어 그의 사후 소련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전체주의 이론임을 파헤친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출간된 해가 1945년이고, 스탈린 정권이 나치 체제처럼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등에 기반한 전체주의 정권임을 갈파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나온 것도 1951년이다. 2차 대전 후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한 정치사상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진 셈이다.

 

홍범도가 타계한 1943년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당시 처칠의 기준에서 보면 홍범도는 인류 파멸을 구원하는 진영에 속했고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 군인이었던 백선엽은 인류 최악의 체제에 복무한 이였다.

 

굳이 처칠의 기준을 소환한 것은 당대의 맥락을 살피지 않고 독립전쟁의 영웅들을 지금 잣대로 빨갱이딱지를 붙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이 노예 소유주였다는 이유로 동상을 철거하려는 미국 일부 좌파들의 철부지 짓을 한국 우파들이 정권 차원에서 벌이고 있으니 황당할 따름이다.

송용창 뉴스1부문장 hermeet@hankookilbo.com 한국 2023.09.06.

 

 

시민이 동료 시민에게, 어떤 역사를 만들겠습니까

한국 사회가 느닷없는 역사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현 정부가 독립전쟁 영웅인 홍범도 장군에게 색깔론을 씌워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흉상 이전을 추진하면서부터다. 홍 장군에 처음 서훈한 것이 박정희 정부였고, 해군 잠수함에 홍범도함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박근혜 정부 때였다. 홍 장군은 보수·진보의 이견이 없는 독립운동의 영웅이다. 1943년에 작고한 국가적 영웅에게 80년 만에 덧씌워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념 논란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지난달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거론한 이후, 지난달 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해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이라며 이념·역사 전쟁의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다. 평소에도 강조하던 신념이었다면 이렇게 당혹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1년 전, 불과 몇달 전만 해도 윤 대통령은 낡은 이념을 공격하는 쪽이었다. 1년여 전, 윤 대통령은 새 정부에 국민이 기대하는 것은 이념이 아닌 민생 최우선”(2022722윤석열 정부 장차관 국정과제 워크숍모두발언)이라고 했다. 3개월 전만 해도 이념이나 정치 논리가 시장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523일 제21회 국무회의 모두발언)며 탈이념을 강조했다. 그런데, 갑자기 본인의 입장을 아무 설명 없이 뒤집으며, 과거와는 180도 반대되는 말을 툭툭 던지고 있다. “왜 갑자기?”라는 질문과 함께, 각종 총선용 악재들을 가리려 하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국땅에서 쓸쓸히 작고한 지 80년이 지난 독립투사에게 부관참시에 비견될 만한 수모를 안기며 이념 논란중인 우리 사회는 정작 부끄러운 현재사를 써가고 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59명이 생명을 잃은 이태원 참사 이후 그 판박이인 오송 참사가 1년도 안 돼 일어났지만, 교훈도, 처벌도, 제대로 된 재발방지책도 없다. 오송 참사 분향소를 기습 철거한 뒤 재설치한 데서 보듯 서둘러 참사의 기억을 덮는 데 급급하다. 후쿠시마발 전례 없는 원전사고 오염수의 해양 방류에 시민들은 불안해하고 민심은 들끓고 있지만, 정작 주권국가로서의 책임 있는 태도와 답변은 듣기 어렵다.

 

SPC그룹 제빵공장에서 잇단 끼임 사망·부상 사고가 발생하며 피 묻은 빵비판 목소리가 높아지는데도 노동자의 안전과 권리는 여전히 뒷전이고, 장애인도 지하철과 버스로 자유롭게 이동하게 해달라는, 시민으로서의 권리 요구엔 정치권의 혐오 조장과 갈라치기로 더욱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고 있다.

 

80년 전의 독립영웅을 소환해 이념전쟁을 벌이고 있는 정부·여당은 불과 1년이 안 된 이 같은 현재 진행형 사건들엔 눈을 감고 있다. 역설적인 몰역사 상황이다. 사회에, 국가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체념, 각자도생이라는 앙상한 구호 뒤로, 어느 하나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쌓이며, 시민들은 집단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다.

 

내년은 총선의 해. 겉치레라도 여야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유권자들에게 반짝 관심을 가지고, 반짝 귀를 기울이는 때다.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가 우리 사회의 현재사를 함께, 다시 써보자는 강좌를 진행한다. 제목은 시민이 동료 시민에게’. 이슈의 중심에 선 시민들이 동료 시민들에게 한발 앞서, 전면에서 경험한 얘기를 전하며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내일의 변화를 함께 요구하고, 만들어보자는 취지다.

 

1년이 다가오는 이태원 참사 유족과 내년이면 10년을 맞는 세월호 유족이, 산업재해와 갑질로 공분을 일으키는 사업장 SPC 파리바게뜨 노조의 임종린 지회장과 크고 작은 일터에서의 일상적인 갑질을 고발해온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이,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겪은 후 한국에 와서 먹거리·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일본인 주부와 가습기살균제 사건 등 환경·산업재해의 위험성을 알려온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명예교수가, 22년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선봉을 지켜온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마이크 앞에 선다. 1016일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5차례의 특강. 첫 시간에는 정치의 좌우 스펙트럼을 모두 경험한 후, 우리 정치의 반전을 모색하고 있는 전 국회의원 김성식 정치학교 반전운영위원장이 더 나은 민주공화국을 위하여를 주제로 시리즈 특강의 문을 연다.

 

30, 50년 후에는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까. 우리 시대의 역사는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닌, 현재의 역사 쓰기에 많은 시민이 동참하길 기대한다.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경향 2023.09.06.

 

 

일본 침몰

이 순간에도 일본 후쿠시마에서는 핵 오염수가 바다로 쏟아지고 있다. 일본이라는 섬을 떠받치고 있는 생명의 바다에 방사능을 투척하고 있다. 오염수 위에 떠있는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지구촌 어느 나라도 엄두를 내지 못할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일본 열도는 조용하다. 반생명·반윤리·반문명의 업보를 어찌 견딜 것인가. 세계인의 탄식과 원망의 무게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일본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학승 탄허 스님(1913~1983)은 일찍이 일본 침몰을 예언했다. 1975년 여름, 스님이 <화엄경>을 최초로 완역하는 대역사(大役事)를 마쳤을 때 필자는 말씀을 얻으려 찾아갔다. 그때 탄허는 세 가지를 예측했다. 머잖아 소련이 붕괴할 것이고, 한국은 국운이 왕성해질 것이며, 언젠가 일본 열도가 침몰할 것이라 말했다. 소련이 미국에 맞서 기세등등할 때였고, 한국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살기(殺氣)가 사회 구석구석을 핥고 있을 때였다. 우리나라가 곧 융성할 것이라는 예측은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탄허는 여인들의 얼굴을 보라고 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윤기가 흐른다고 했다. 어느 집단이건 번성의 기운은 사람들의 외모에서 감지된다고 했다.

 

그 후 소련은 20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거짓말처럼 해체되었고, 한국은 눈부신 발전을 했다. 탄허는 분명 미래를 내다봤다. 4·19혁명 발발,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패배, 중국 마오쩌둥의 사망, 박정희의 금속에 의한 참변 등을 예언했고 그때마다 적중했다. 197910·26사태 이후 ‘3(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 각축을 벌일 때도 아직은 3김의 시간이 아니라며 제3의 인물(전두환)이 집권할 것이라 단언했다.

 

탄허는 인류에게 닥칠 재앙도 알려줬다. 세계적으로 전쟁이 계속 일어날 것이고, 해일과 지진이 빈발하며, 불 기운이 북극으로 들어가 빙산이 빠르게 녹을 것이라 했다. 237분쯤 기울어진 지구의 축이 바로 서면서 전혀 다른 후천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했다. 탄허의 예지력은 높고 깊은 화엄학의 식견에서 퍼올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동양사상에 능통했기에 <주역>에 기대었고, 김항이 쓴 <정역>도 참고했을 것이라며 정법에서 벗어났다는 시각도 있다. 탄허도 자신의 예언은 도()가 아닌 술()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앞이 보이는데 어찌 말하지 않을 것인가.

 

이 순간에도 일본 후쿠시마에서는 핵 오염수가 바다로 쏟아지고 있다. 일본이라는 섬을 떠받치고 있는 생명의 바다에 방사능을 투척하고 있다. 오염수 위에 떠있는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지구촌 어느 나라도 엄두를 내지 못할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일본 열도는 조용하다. 반생명·반윤리·반문명의 업보를 어찌 견딜 것인가. 세계인의 탄식과 원망의 무게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일본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학승 탄허 스님(1913~1983)은 일찍이 일본 침몰을 예언했다. 1975년 여름, 스님이 <화엄경>을 최초로 완역하는 대역사(大役事)를 마쳤을 때 필자는 말씀을 얻으려 찾아갔다. 그때 탄허는 세 가지를 예측했다. 머잖아 소련이 붕괴할 것이고, 한국은 국운이 왕성해질 것이며, 언젠가 일본 열도가 침몰할 것이라 말했다. 소련이 미국에 맞서 기세등등할 때였고, 한국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살기(殺氣)가 사회 구석구석을 핥고 있을 때였다. 우리나라가 곧 융성할 것이라는 예측은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탄허는 여인들의 얼굴을 보라고 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윤기가 흐른다고 했다. 어느 집단이건 번성의 기운은 사람들의 외모에서 감지된다고 했다.

 

그 후 소련은 20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거짓말처럼 해체되었고, 한국은 눈부신 발전을 했다. 탄허는 분명 미래를 내다봤다. 4·19혁명 발발,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패배, 중국 마오쩌둥의 사망, 박정희의 금속에 의한 참변 등을 예언했고 그때마다 적중했다. 197910·26사태 이후 ‘3(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 각축을 벌일 때도 아직은 3김의 시간이 아니라며 제3의 인물(전두환)이 집권할 것이라 단언했다.

 

탄허는 인류에게 닥칠 재앙도 알려줬다. 세계적으로 전쟁이 계속 일어날 것이고, 해일과 지진이 빈발하며, 불 기운이 북극으로 들어가 빙산이 빠르게 녹을 것이라 했다. 237분쯤 기울어진 지구의 축이 바로 서면서 전혀 다른 후천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했다. 탄허의 예지력은 높고 깊은 화엄학의 식견에서 퍼올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동양사상에 능통했기에 <주역>에 기대었고, 김항이 쓴 <정역>도 참고했을 것이라며 정법에서 벗어났다는 시각도 있다. 탄허도 자신의 예언은 도()가 아닌 술()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앞이 보이는데 어찌 말하지 않을 것인가.

 

필자가 받은 세 가지 예언 중에 일본 열도의 침몰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핵 오염수를 방류하는 무도한 일본을 보면서 자꾸 탄허의 말씀이 떠올랐다. 탄허는 여러 매체를 통해 일본 침몰을 수차례 언급했다. 일본은 손방(巽方)’인데 손()<주역>에서 입야(入也)’로 풀고, 이 입()이 일본의 침몰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일본 열도의 3분의 2가량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침몰해야만 할까.

 

미래의 역사에 관한 한 일본은 가장 불행한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선조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미래의 업보가 분명히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지난 500년 동안 무려 49차에 달하는 침략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반면 우리 선조들은 두들겨 맞고만 살았지 남을 해칠 줄 모르고, 동양의 가치관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왔다는 것은 우리나라 장래를 밝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양 사상의 근본 원리인 인과의 법칙이요, 우주의 법칙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부처님이 계신다면>)

 

197512, 탄허는 대담을 통해 핵 재앙을 분명하게 경고했다. “인류를 파멸시킬 세계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지진에 의한 자동적인 핵폭발이 있게 되는데, 이때는 핵 보유국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받을 것입니다. 남을 죽이려 하는 자는 먼저 죽고, 남을 살리려고 하면 자기도 살고 남도 사는 법입니다.”(위와 같은 책) 흡사 36년 후 2011년에 일어날 후쿠시마 원전 폭발을 미리 본 것만 같다.

 

일본은 각 분야에 인재들이 즐비하다. 그럼에도 국가권력의 횡포에는 무기력하다. 국민들이 힘을 모아 저항하는 법을 모른다.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뭉쳐서 민심이 바다를 이룬다면 어찌 그 바다에 정치인들이 핵 오염수를 퍼붓겠는가. 탄허는 수소탄을 막는 것은 민중의 맨주먹뿐이라고 했다. 일본 침몰, 탄허는 떠났고 예언은 남아 있다.

김택근 시인·작가 경향 2023.09.08.

 

 

수구·반공몰이는 정책인가? 주술인가?

지난 대선 텔레비전 토론회 때 손바닥에 쓰인 ’()이란 글자가 황당했다. 유세장에서 매번 어퍼컷을 휘두를 때 어이없었다. 당선되자 풍수 술사를 앞세워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옮기자 염려스러웠다. 그때 앞으로 한국 정치 5년이 걱정스럽겠다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마구잡이 정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지하게도 항일전쟁의 역사를 뒤집으려 한다. 국립현충원의 백선엽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육군사관학교는 교내에 설치했던 항일전쟁과 독립투쟁의 영웅 김좌진·홍범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 흉상을 이전하거나 철거하겠단다. 윤석열 정권은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관련을 내세워 배척하고, 친일·반민족 행위자는 공비 토벌을 내세워 감싸면서 새롭게 치장한다. 나아가 그동안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다시 살피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1006명 친일반민족행위자 발표도 뒤집을 기세다.

 

일제 침략에 맞서 국내에선 적수공권으로 3·1만세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만주와 연해주에선 50여만 동포를 기반으로 무장한 30여 항일독립군 부대가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강을 넘나들며 국내 침공작전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은 1920년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격파했다. 또 같은 해 김좌진과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하고 2천여명을 부상시킨 대승을 거뒀다.

 

조선 시대 의병정신을 이은 비정규군 유격대(빨치산)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 침략 군대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이른바 뉴라이트 패거리의 친일식민사관을 내치고 일제 침략 시기를 반침략 항쟁의 높은 기개를 새겨 서술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위대한 항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식민지 침탈을 겪었던 많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는 우리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지금 윤 정권은 이러한 100년 전 홍범도 장군의 항일전쟁 승리 업적까지 이념 색깔을 덧씌워 지우고 있다.

 

그동안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까지 32년에 걸친 군사반란과 권위주의 통치를 겪은 탓에 국민 뇌리에 육군사관학교는 정치군인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인식됐다. 육사에 가해진 부정적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과거 냉전 시대에 맞춰진 교육체계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진취적 리더십을 갖춘 사관을 양성하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에서 다섯분 흉상을 설치하고 그 영웅들이 민족사에 남긴 위대한 행적을 사관 양성의 정신으로 본받으려 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은 이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라고 했다. 그래서 항일전쟁 승리 역사는 반갑지 않다.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를 들춰내기 때문이다.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에서 그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곧 과거사에 대한 성찰과 사과 요구를 깡패들이나 하는 짓(무릎 꿇으라!)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반공주의 친일 역사만 강조하는 정권에서 육사가 수구 놀음의 들러리가 되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통합위원회 1주년 성과보고회에 참석해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이 우리의 통합이나 관용과 부합되는 것처럼 해석된다면, 우리의 자유·연대·통합 지향의 기반 자체가 무너진다며 비판했다. 논란이 커지면서 정율성 역사공원은 육사와 더불어 현 정권이 추진하는 반공·친일 회귀정책에 어깃장 부리는 상징처럼 됐다.

 

정율성은 19살 때 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상해·연안 등의 항일운동에 참여하면서 음악 공부와 창작 활동을 했다. 그가 1939년 작곡한 팔로군대합창중의 팔로군행진곡은 중국 인민군 군가로 불려왔는데, 그렇게 50여년 애창되다가 1988년 중국 당국이 이를 공식적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비준했다. 이때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40년이나 됐기 때문에 얼마든지 새롭게 중국 군대의 군가를 제정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조선 청년의 작품이지만, 항일투쟁 현장에서 불리던 그대로 중국의 공식 군가로 삼은 것이다.

 

반면 이 나라 지도자는 정율성 고향에서 조성하는 기념공원을 대상으로 철 지난 사상 검증에 집착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으로 찰리 채플린 등 수많은 예술가를 공산주의자라며 공격하고 탄압했던 야만의 역사를 오늘날 한반도에서 재현시키겠다는 것인가. 입으로 자유·연대·통합을 말하면서, 벌이는 지금 행태는 언급하기조차 창피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런 시대착오적 사고로 세계 곳곳에서 모인 감수성 예민한 10대 청소년 4만명에게 나라 망신을 시키더니, 급하게 케이팝 아이돌을 동원하여 잼버리를 구해낼 술책을 꾸몄다. 하지만 그 케이팝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세계 문화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 보수정치의 한계를 상징한다. 외부에서 영입한 인물의 검증되지 않는 지도자 역량은 우격다짐의 이념 공세를 펼치는 것으로 메꾸었다. 쉽고 간편하게 휘두르는 검찰의 위세는 과거 회귀를 가져와 정치의 전제조건인 미래에 대한 진취적 전망을 내세울 동기를 앗아 갔다. 윤 대통령은 화합과 타협으로 소통하려는 뜻이 전혀 없기 때문에 논리도, 사실 확인도 무시해버린 발언들을 임의로 내뱉는다.

 

그 이면에는 이명박 정권 참모들의 절치부심해온 복수심이 작용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그들의 부추김에 따라 사실의 뒷받침도 없이 낙인찍은 대상자들을 향한 공격적 발언들을 쏟아낸 것이다. 다만 술사의 주술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역성드는 보수언론에 비위 맞추는 언술이면 충분하다.

 

주변 인물들에게 휘둘리면서도 자기도취에 빠져 행하는 윤 대통령의 마구잡이 정치는 나라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상실했던 이승만 정치를 연상시킨다. 오직 왕 노릇을 하고 싶은 욕망에 찼던 이승만은 친일 부역자들의 들러리가 되어 민족 분열의 길을 걸었다. 현재 윤 대통령의 정치는 이승만 시대의 행보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한겨레 2023.09.08.

 

 

쫄지마 페미니스트, 힘내라 시민운동

연구년을 맞아 스톡홀름에 왔다. 대학교수에게 주어지는 특권 중의 특권인 연구년은 그래서 더 부담스럽다. 강의 노동에서 벗어나 미뤄왔던 공부를 맘껏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특혜가 어디 있으랴. 게다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모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교육이란 노동을 면제받는 대신, 연구란 노동의 책임은 더 무겁다.

 

그래서 스웨덴을 선택했다. 스웨덴이란 나라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오래된 물음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성평등 제도와 문화를 갖고 있고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일하고 아이를 키운다는 현대사회의 신화를 써 온 나라다. 한국에서 유명한 라테 파파란 말은 정작 스웨덴에선 들을 수 없다지만, 스웨덴 남성들은 부드럽고 육아에 익숙하다. 이웃 덴마크 남성들이 스웨덴 남자는 여자에게 연애하자는 말도 못한다고 비웃는다지만, 그래서 여성들에게 더 인기다.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스톡홀름에 도착하면서 마주친 몇 가지 장면은 그사이 한국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과 겹쳐 마음을 내내 무겁게 짓눌렀다.

 

장면 하나. 프랑크푸르트 대학(공식 명칭은 요한 볼프강 괴테 대학 프랑크푸르트 암마인)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며 민주주의와 비판사회이론을 집대성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벤야민, 프롬 등의 대가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보켄하임 캠퍼스의 학생회관은 1층에 이주민, 연대 등을 외치는 그라피티가 전면을 차지한다. 이 중 절반은 따르라, 페미니스트 남성이라는 구호 아래 그려진, 남성들도 페미니즘에 동참하라는 벽화였다. 학생회관 2층엔 나치시대에 복무한 대학 교직원들의 사진과 이름, 기록이 전면에 걸려 있다. 잊지 말자는 메시지다.

 

장면 둘. 스톡홀름의 시립도서관은 스웨덴의 건축가 군나르 아스플룬드가 설계한, 붉은색과 원통형의 외관이 무척 아름다워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물이다. 4만여권의 장서를 갖췄다는 이 도서관에서 사회과학 도서실 2층의 한 서가는 모두 젠더와 페미니즘 도서로 가득 차 있다. 스웨덴어뿐 아니라 영어 도서도 적잖아 한나절을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장면 셋. 스웨덴에서 사는 한국인들을 만났다. 우파냐 좌파냐에 관계없이 정권이 어느 쪽으로 바뀌어도 성평등과 민주주의, 사회복지의 기본선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공통된 얘기였다.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중도우파가 극우정당의 눈치를 보긴 하지만, 이민 정책을 제외하곤 시민들에게 체감되는 큰 변화는 없다고 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의 조롱거리에 불과했던 극우정당이 점점 득세하게 된 현실을 걱정하긴 했지만,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 시간 접한 한국의 소식은 참담했다. 남산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기념물 철거 사건이다. 임옥상의 성추행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기억의 터는 임씨 개인의 창작물이라기보다 집단의 의지를 모아 국민 모금으로 조성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2만여명의 시민들과 위안부 할머니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철거를 강행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시민운동이 죽었다는 오세훈 시장의 말이다. 기념물에서 임옥상의 이름을 지우고 보존하자는 여성계의 주장을 여야 정치판 다툼으로 격하해 버리는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한국의 여성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숙제인지 모를 뿐 아니라, 편협하기 그지없는 여야 대립으로 축소시켜버리다니 어처구니없다.

 

오 시장과 보수 정치인들이 틈만 나면 입에 올리는 시민단체가 정부 돈을 현금인출기에서 빼다 쓰듯이 한다는 말도 참담하다. 시민단체가 없다면 당신들 같은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마구잡이 행정을, 막가파식 정치를 누가 감시한단 말인가.

 

공천을 앞두고 쏟아지는 정치인들의 선동도 극에 달한 듯하다. ‘여성에게 가산점이나 주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라는 허은아 의원의 국정 질의는 어떤 증거를 두고 한 말인지 궁금하다. 여성에게 가산점을 주는 곳이 많은지, 여성을 차별하는 곳이 많은지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바닥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한 후배가 말했다. ‘페미니스트란 말조차 눈치 보게 만들고, 그래서 성평등이라고 했더니 지우라 하고, 공공도서관에서 민원이라는 구실로 성평등 성교육 도서를 버리라고 강요한다. 무지의 소산이자 시대를 거스르는 행위들이다. 세계는 지금 앞으로 나아가려 몸부림치는데, 한국은 뒤로, 바닥으로 내달린다. 그러나 위축되지 말자. 세계사회는 성평등과 민주주의를 향하고 있고 한국의 시민들도 더 깊은 민주주의를 꿈꾸고 있다. 여성과 남성 그리고 자신의 성별을 다르게 주장하는 모든 이들의 평등,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의 전선에서 싸우는 여러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 2023.09.10

 

 

마이웨이 대통령과 홍범도 총선

내년 4월에는 총선이 있다. 상원과 하원이 있는 게 아니어서, 지역구든 비례든 한꺼번에 바뀐다. 일본처럼 총리가 수시로 국회를 해산하고 다시 선거를 치르는 것도 아니어서, 한국 총선은 예외 없이 4년마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진행된다.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것은 아니지만 5년의 대통령 임기와 4년의 국회의원 임기가 묘하게 교차하면서 때때로 중간평가 역할을 하게 된다. 내년 총선은 중간평가 성격이 더 강할 것으로 보인다.

 

요즘 윤석열 대통령의 마이웨이행보가 두드러진다.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이 전면화한 이념 논쟁을 집권여당이 그렇게 반기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공천을 받아야 하는 여당 의원들이 특별히 입장을 내기는 어렵다. 어쨌든 홍범도라는 역사적 인물의 공산당 가입 문제가 총선을 앞둔 한국 정치권의 1번 의제가 되었다. 홍범도에 대한 평가는 좌우 상관없이 어느 정도는 국민적 공감대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한국을 뒤흔드는 맨 앞의 의제가 될 줄은 몰랐다. 이런 건 그냥 역사학자들의 논쟁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나서서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하는 걸 보니까, 다음 단계는 사상검증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독립운동사에서 좌우합작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배웠는데, 합작보다는 사상적 순수성이 더 중요하다며 이제 교과서도 바꿀 것 같다. 실용주의 노선으로 중국 개방을 이끌었던 덩샤오핑(鄧小平)흑묘백묘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고양이가 검은지 하얀지가 뭐가 중요하냐, 쥐만 잘 잡으면 된다. 그런 정신이 중국의 개방과 번영을 이끌었다고 본다. 정치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념의 순수성이 아니라 효과를 발생시키는 실용 정신이다. 영국을 2차 세계대전에서 구한 처칠도 스탈린과 대화하고 협력도 했다. 경제학자로서 나는 정치적 유불리로만 세상을 보지는 않는다. 경제는 결국 먹고사는 일이다. 이념이 밥 먹여준 적은 역사적으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념이 밥 먹여준 적 한 번도 없어

이념이 경제를 강하게 해줄까? 보수 정치인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는 건강보험을 비롯해 수많은 복지 정책의 기본틀을 만들어냈다. 경제가 힘들어지면 공산 혁명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생길 것으로 판단한 비스마르크는 복지가 체제를 지키기 위한 필수 비용이라며 복지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설득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 정도로 2류 취급받던 독일이 세계 경제의 큰 축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다.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요소들을 경제 운용에 도입한 프랑스의 드골도 매우 유연한 인물이었다. 전후 프랑스의 계획경제는 박정희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모티브가 되었다. 박정희는 독재자였지만, 경제에서는 꽉 막힌 보수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토지공개념을 적극 도입한 노태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 시기에 한국 경제가 개도국을 벗어날 성과를 올렸다.

 

, 윤석열 정부는 과연 역사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지금처럼 경제적 성과가 나오는 게 없어서는 홍범도 흉상을 육사에서 치운 대통령으로 한 줄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그것도 행복한 경우다. 지금 같은 출산율 추이가 계속된다면, 결정적으로 출산율이 회복할 수 없을 수준으로 떨어진 시기의 대통령으로 한 줄 더 남을 수도 있다. 그나마 임기 중에 결정적인 경제 위기가 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그렇다.

 

내년 총선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어느 쪽이 다수당이 될지 참 예측하기 어렵다. 이념 대통령과 방탄 국회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니! 누가 이겨도 지금과 같아서는 크게 변하기 어려운 구도다. 그렇다고 홍범도 선거가 되는 것 역시 비극적이긴 마찬가지다. 풀어야 할 경제적 숙제가 많은 시기인데, 이념과 이념이 부딪치는 것은 행복한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 개인적 바람은 내년 총선이 경제 총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홍범도가 맞냐 틀리냐, 일본 정부가 맞냐 틀리냐, 이런 얘기보다는 우리가 뭘 할 것인지, 어떻게 위기를 넘길 것인지, 그런 얘기가 첨예하게 맞붙는 선거면 좋겠다.

 

홍범도 총선 아닌 정책 선거 돼야

세계 최저의 합계출산율, 세계 1위의 자살률, 급증하는 영·유아 사교육. 누구나 아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조금 더 진지하게 총선 국면에서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문제 해결 능력과 함께 대중과의 편안한 소통 능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국회에 더 많이 갈 수 있으면, 현실도 조금은 더 나아질 것 같다.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초선 108명은 ‘108 번뇌라고 불렸다. 결국 2007년 열린우리당은 사라졌고, 노무현 정권은 붕괴하였다. ‘마이웨이 대통령을 견제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고용과 복지 등 현실문제 해결을 정치의 목적으로 삼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 아닐까 싶다. 홍범도 총선이 아니라 정책 선거를 만들어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

우석훈 경제학자 경향 : 2023.09.10.

 

 

협치 요구를 거둬야 할 때

현 정부 출범 1주년 즈음에 실시한 한 빅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취임 1년 동안 여론에서 언급된 윤석열 대통령 연관어 중에서 상위 다섯 개가 순서대로 민주당, 국민, 이재명, 김건희, 문재인이었다. 이 중 국민을 제외하면 모두 물의를 일으켜 이슈가 되거나 윤석열 정부가 대립각을 세워 공격하거나 비난한 대상이다. 이후 다시 4개월이 지났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정부가 정책을 언급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국민을 입에 올리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기본적인 것은 구태여 언급하지 않아도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주 언급되거나 이슈가 된다는 것은 그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국민이라는 단어는 요즘 정치계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는 단어일 것이다. 정부부터가 그렇다. 오히려 그 실제 내용은 국민의 의사나 이익에 반하기 일쑤다. 특히 일본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일본을 역성든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강제징용 배상과 핵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고, 홍범도 장군 폄훼에 이르면 할 말을 잃는다. ‘나가도 너무 나간다는 푸념이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들린다.

 

과거에 보수는 진보 진영에 이념을 덧씌우고 실용주의를 내세웠다. 그런데 이제는 보수 진영이 이념을 내세우며 수용하지 않을 경우 비과학, 가짜뉴스, 괴담, 선동으로 몰아간다. 1990년대 이래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공산주의의 유령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현 정부와 국민의힘에 용산 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공산 전체주의자일 뿐 협치의 대상이 아니다.

 

더 나아가 윤미향 의원 징계안 제출에서 보듯이 용산 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반국가행위를 일삼는 사람일 뿐 아니라 국민의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자신들이 국가이며, 자신들의 지지자만이 국민이다. 지지자가 아닌 모든 사람을 전체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또 다른 전체주의다. ‘용산 전체주의라는 표현이 입길에 오르내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박정훈 대령을 항명과 명예훼손으로 기소한 것도 용산 전체주의의 산물이다. 외압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외압에 항명했다는 비과학적, 비논리적 주장을 내세운다. 항명을 주장할수록 외압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한 병사, 한 국민의 안타까운 죽음이 권력에 의해 묻혀 가고 있다.

 

언론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도 매카시즘과 다름없다. ‘바이든이라 말하고 날리면으로 우긴 사건을 통해 정부는 가짜뉴스와 통제, 조작의 힘을 톡톡히 실감했기 때문일까. 자신을 국무위원으로 착각하는 방송통신위원장을 내세워 통제의 고삐를 바싹 조이고 있다.

 

1야당 대표의 단식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물론 뜬금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단식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해야 할 이유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내 활동을 다했는지, 다른 합리적 방법을 충분히 시도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재명 대표를 단식으로 몰아간 근본적 원인은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에 있다. 총체적으로 대화를 거부했고 종국적으론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협치를 할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부 출범 초기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협치를 희망하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는 접을 때가 되었고 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권력층이나 지배계층이 도전과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해 상대나 피지배층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하는 방법이다.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의 조직과 성격을 개혁해 상대나 피지배층으로부터 동의와 양보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봉건제 사회와 독재 권력이 종종 그러했듯이 첫 번째 방법은 극단적 대립과 억압으로 인해 체제가 붕괴되는 결과로 치닫는다. 그에 비해 두 번째 방법은 체제와 지배 질서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안이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도 일부 내어놓아야 한다. 현 정부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까.

 

마하트마 간디는 원칙 없는 정치를 가장 큰 일곱 가지 죄의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인격 없는 지식과 인성 없는 과학도 그 죄의 하나라 했다. 핵 오염수 처리에서 보듯 과학이란 이름으로 생명권을 위협하고, 이태원 참사 대응에서 보듯 책임에 대한 검찰 지식을 비인격적 통치에 활용하고 있다. 이념보다 실용을 외치던 대선 후보가 이념 없인 실용도 없다고 외치는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과 실용을 도외시한 원칙과 이념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우리는 어느 나라 국민보다 처절히 경험하지 않았나.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 : 2023.09.10.

 

 

뽀개버리고 갈아버릴리더십의 귀환

양당체제와 현 정치판을 비판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후보 시절 육성 전화음성이 보도됐다. 거대 양당체제에 신물이 난 제3지대 시민들의 개혁 열망과 무채색 관료주의에 호소하는 통화로 인식될 듯싶다. 때 묻지 않은 손으로 정치해야 한다는 결벽주의반카르텔론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하지만 다원주의 체제에서의 권력은 연대하는 세력들이 덧대고, 더하고, 공존하고, 때로는 공유하는 그런 것이다. 덕지덕지 기운 스님의 가사장삼처럼 덧댄 거버넌스, 그것이 바로 다원주의 민주주의다. 이런 다원주의 권력은 선과 악으로 갈라지지도 않고 흑백으로 나누어지는 경계도 없다. ‘뽀개버리고 갈아버릴이분법이 설 자리가 없는 다원주의 리더십의 실체이다.

 

전통적 권력론은 특정 세력이 다른 세력들을 지배하고, 여러 군상들을 내려다보며 통치하는 수직관계의 도구적 권력을 전제한다. 이런 권력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연대, 즉 공존과 공유의 수평적 규칙을 만드는 거버넌스적 권력이란 환상일 따름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도덕성, 위와 아래를 나누는 효율성, 과정보다 결과의 논리에 익숙한 효과성, 이 모든 이분법은 전통 권력이 강조하는 덕목이다.

 

촛불 정부가 꿈꿨던 권력은 새로운 연대를 향한 다원주의 리더십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신속한 의사결정권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엘리트들이 보기에 지난 정부의 권력 프로세스는 더디고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러 세력이 수평적으로 연합해서 만든 이런 연대의 권력은 정당성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확장성만큼이나 느려 터져 보이게 마련이다. 이념적 대의가 분명하지 않은 답답하고 무능한 반대론자들의 연대로 비쳤기에 이권 카르텔이란 비아냥도 등장했다. 촛불 정부는 전통적 권력 바깥에 자리잡아온 대안 세력을 초청했지만 주변부 세력에 대한 기득권의 반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태극기 부대는 참여연대, 민주노총, 조국, 윤미향 등을 ‘21세기의 적들을 상징하는 용어로 치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착시를 더 강화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화해와 협력이라는 평화주의 국제관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다.

 

육성 통화는 여기가 출발점이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흐른 지금 윤석열 정부는 야당과의 전투를 격려하는 독전의 리더십, 장관들이 모두 전사가 되기를 바라는 영웅주의 서사를 설파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제 다원주의와 결별하고, 이념 공동체의 좌표로 전환되었다. 음각으로 음미돼 왔던 자유주의를 양각으로 조각하자며 반 공산전체주의라는 불상의 주적관을 호명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오펜하이머를 옥죄던 매카시즘 시대의 청문회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념의 깃대는 공동체의 기억도 재해석하고자 한다. 공존하고 공유하는 기억이 아니라 정치 기획에 걸맞은 역사 기록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 애꿎은 홍범도 장군이 곤욕을 치르고 있고, 건국절 논란이 재소환됐다. 전사가 된 국방부 장관의 변심에 해병대 수사단장은 보직 해임과 항명에 내몰려 있기도 하다.

 

육성 통화의 표현이 상스러우냐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 육성에서 느껴지는 강한 진정성이 오히려 문제이다. 확신에 찬 기획자의 의지가 가져올 이분법과 갈등의 미래가 안타까운 것이다. 현재 권력이 여야 정치세력을 뽀개고 갈아버린다고 해서 정치문화가 단기간에 바뀔 리가 없고, 이분법적 정치문화가 지배하는 한 무늬만 새로운 정치판은 계속될 것이다. 역사와 이념을 동원해 상황을 통제한다지만 이익을 좇는 철새들의 이합집산은 계속되고 이념 전쟁의 상흔만 가득할 것이다.

 

데이터와 다원적 정치변동 이론에 근거하지 않는 저잣거리 술판의 정치 기획이 판형을 바꾼다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문재인 정부의 주택 정책이 수요 관리라는 단일 정책 때문에 실패했다고 비아냥대지만, 부동산 정책의 변수는 수요·공급의 단순 이항대립만이 아니다. 지금도 정책 회임의 장단기 차이, 주택 멸실과 내구력 차이, 인구 문제 변동에 따른 수급 차이, 기준금리와 조달금리 차이 등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심지어 글로벌 정세에 따른 환율과 국채전쟁에 따른 채권 자금 향배, 나아가 영끌하는 참여자들의 욕망 등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다원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21세기 리더십이 되기는 어렵다. 의원들의 지적질이 듣기 싫다고 장관들이 냅다 싸움만 하다보면 확증 편향에 빠져 변화와 성찰의 기회를 놓치기 마련이다. ‘부수고 뽀개서얻은 권력이란 게 결국 국민들을 부수고 뽀개 놓는다면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를 연 20세기 사기극과 뭐가 그리 다를 텐가?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경향 : 2023.09.11.

 

 

시대정신이 된 후안무치

거침없는 퇴행이다. 한순간에 독립운동가는 일개 볼셰비키로 전락했고, 오염수 방류는 참칭된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훈풍이 불던 남북관계는 삭풍이 거세고 균형외교는 사대외교로 회귀했다. 정부 비판은 반국가 범죄로 겁박당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자유민주주의, 법치를 부정하는 법치의 시대다. 역사가 다시 쓰이고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는 데 1년 반이면 충분했다.

 

한번 시작된 붕괴는 걷잡을 수 없다. 이념이나 진영과 거리가 먼 도덕과 윤리도 예외가 아니다. 공직자의 권위는 그 지위와 직책에서 나오지 않는다. 공직자가 윤리를 내면화했을 때 비로소 그 이 선다. 그러나 애써 일궈온 공직자의 도덕 기준은 속절없이 후퇴했고 공직윤리 제도는 형해화됐다. 이 정권 사람들은 대놓고 뻔뻔하다. 감췄다가 들키면 몰랐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몰랐다기억나지 않는다와 함께 법 기술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그렇다. 2009년부터 십수년간 재산 신고를 해온 판사가 비상장주식이 신고 대상인 줄 몰랐다는 변명을 누가 곧이듣겠는가. 심지어 이 후보자와 가족은 그 주식 배당금으로 매년 수천만원을 받았다. 소득의 증감은 재산 변동 신고에서 핵심인데도 배당소득의 원천인 비상장주식을 빠뜨렸단 게 말이 되는 해명인가.

 

그의 거짓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후보자는 2018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안성시장 후보자가 채무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았다며 당선무효형을 선고했다. 고의로 재산 신고를 누락한 행위를 허위사실 공표라고 본 것이다. 그가 당시 쓴 판결문의 일부다. “공직자윤리법이 등록재산 신고서를 제출토록 한 것은 부정한 재산 증식을 방지하고,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 공직자 윤리를 확립하고자 하는 것으로 재산 기재를 누락한 것은 입법 취지에도 반하고, 국민 알권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직자윤리법이 정한 신고 대상 재산을 모르고서는 내릴 수 없는 판결이다. 내로남불 논란이 일자 그는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죄는 공직자윤리법이 정한 재산 신고와 구성요건과 제도 취지가 달라 동일선상에서 보기 어렵다고 해명했다. 궤변이다. 공직선거 후보자 역시 일반 공무원과 똑같이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재산 신고를 해야 한다. 이 후보자가 재산 신고를 누락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직무관련성 심사를 피하려는 고의가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정권 고위직 인사들의 몰염치는 백지신탁 불복에서도 드러난다.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그의 배우자가 소유한 한 건설업체의 주식을 처분하라는 인사혁신처의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도 똑같은 이유로 배우자 주식의 백지신탁을 거부한 채 소송을 벌이고 있다. 어떻게든 주식을 처분하지 않고 임기를 채우겠다는 시간 벌기.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0년 백지신탁 제도가 합헌이라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공직자가) 직무상 얻은 정보를 활용해 개인적인 주식거래를 한번이라도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드러나는 이상, 공직자 전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이미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고, 그 부정이익을 환수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백지신탁 제도의 존치 필요성을 국민 신뢰 담보에서 찾은 것이다. 사후적·형사적 제재로도 부당한 주식거래를 막을 수 있다는 백지신탁 반대론자들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헌재의 합헌 결정과 앞선 백지신탁 불복 소송에서 법원이 잇따라 기각 판결을 내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국민 신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권이다.

 

백지신탁을 비롯한 이해충돌 제도의 유래는 이 정권이 그토록 사대하는 미국의 정부윤리법이다. 그 나라에선 이해충돌을 해소하지 않으면 승진은커녕 공직 자체를 맡을 수 없다. 하지만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이균용 후보자에 대한 조사나 징계에 나섰다는 소식을 지금껏 듣지 못했다. 박성근 비서실장과 유병호 총장에 대해서도 불복은 개인 권리라며 방치하고 있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은 국외 순방 중에도 야권 추천 방송통

신심의위원회 위원인 정민영 변호사가 이해충돌 규정을 위반했다며 전광석화처럼 해촉했다.

이 정권에서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 됐다.

이재명 | 기획부국장 한겨레 : 2023.09.11.

 

두 번의 실패와 때아닌 극우 늦바람

카오스 이론·복잡성 이론·나비효과·만유인력 법칙 등처럼 자연현상이 규칙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근대과학관과 달리, 이 첨단 이론들은 법칙으로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요인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역사와 사회현상도 마찬가지다. 최근 이론들은 구조적 요인보다는 우발적 요인과 행위자의 선택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한국정치가 발전할 수 있는 두 번의 중요한 기회, 구체적으로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보수 내지 수구 세력글로벌 스탠더드합리적 보수로 진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 실패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윤석열 대통령의 때아닌, ‘무서운 극우 늦바람이다.

 

첫 기회는 촛불항쟁과 문재인 정부의 출범이다. 박근혜 탄핵은 정의당, 더불어민주당, 안철수의 국민의당뿐만 아니라 유승민의 바른정당, 새누리당 의원 등 일부 보수세력이 지지해 가능했다. 민주당이 촛불연정을 통해 유승민 등 합리적 보수세력에 힘을 실어줬다면 보수가 재편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무능하면서도 탐욕에 빠져 승자 독식주의를 선택했고, 5년 만에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두 번째 기회는 윤석열이다. 윤 대통령은 정치에 나선 2년 전만 해도 지금 같은 강경 보수가 아니라 진보적 자유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는 정치에 나서며 존엄한 삶에 필요한 경제적 기초와 교육 기회가 없다면 자유는 공허한 것이고 승자 독식은 절대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며 새 정권이 보수를 넘어 중도와 이탈한 진보까지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보수세력은 탄핵으로 지리멸렬해 있었던 만큼 이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면 보수의 재편이 가능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가 윤 대통령은 이 노선을 상징하는 김종인과 결별했다. 이후 그가 의존한 것은 과거 인연에 의한 윤핵관이란 낡은 보수세력이었고, 정치초년생인 그를 둘러싸고 의식화시킨 것이 뉴라이트라는 강경 보수세력이었다. 특히 강한 성격, 오랜 검사생활에서 익힌 유무죄의 이분법적 사고, ‘늦바람이 더 무섭다는 특징 등이 겹쳐져 그의 극우적 언술은 보수세력, 보수언론까지도 지나치다고 비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윤 대통령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리영희 선생의 말을 인용하며 날아가는 방향이 같아야 날 수 있는 것이지 오른쪽 날개는 앞으로 가려고 그러고 왼쪽 날개는 뒤로 가려고 그런다면 그 새는 날 수 없고 떨어지게 돼 있시대착오적 투쟁과 혁명과 사기적 이념에 휩쓸리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며 우리 한쪽 날개가 될 수 없다고 일갈했다. 윤 대통령은 민주당을 왼쪽 날개라고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이는 잘못이다. 민주당은 국민의힘보다는 왼쪽에 있기는 하지만 또 다른 오른쪽 날개에 불과하다.

 

리영희 선생이 통탄했듯이, 한국정치는 아직 제대로 된 왼쪽 날개를 갖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미국식 리버럴, 자유민주주의세력인 민주당을 사실상 공산전체주의, 그 맹종, 추종세력, 반국가세력인 것처럼 비판하는 것은 매카시즘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비판할 수 있는 주된 근거는 대북정책인데, 햇볕정책 때문에 민주당이 이 같은 세력이라면 소련에 대해 유화정책을 폈던 처칠과 루스벨트, 케네디, 나아가 북한에 유화책을 폈던 트럼프도 공산주의 추종세력이란 말에 다름 아니다. 히틀러의 눈에는 처칠과 루스벨트가 공산주의자로 보였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민주당이 공산주의자로 보인다면 이는 그의 관점이 히틀러를 닮아가고 있다는 방증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윤 대통령이 날아가려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보다 더 많은 국민들이 다른 방향으로 날아야 한다고 주장한 민주당과 정의당 후보를 찍었다. 정부가 날아가는 방향은 국민에 의해 검증받아야 하며, “내가 날아가는 방향이 무조건 옳다는 독선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위험이다. 히틀러도, 스탈린도 자신이 나는 방향이 옳다는 확신에 빠져 국민들과 세계를 비극으로 몰고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극우 행보를 통해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 이에 따른 레임덕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가 민주당 비밀당원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든다. 윤 대통령의 말을 이용하자면, “시대착오적 매카시즘 투쟁과 극우 궁정 쿠데타, 사기적 극우 이념에 휩쓸리는 것은 제대로 된 보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며 우리의 한쪽 날개가 될 수 없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경향 : 2023.09.11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그대들이 훈련하고 공부하는 그곳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배 군인이자 교수까지도 거침없이 그 일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숨죽이듯 침묵해야 하는 그대들의 심경을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비정상적 판단이라도 상명하복이 아니면 항명수괴라는 어불성설이 지배하는 군의 꽉 막힌 상황도 참담합니다. 위에서 하라는 것이면 무지와 거짓까지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이른바 군인정신은 아니길 바라봅니다. 명석하고 활기 넘칠 뿐 아니라 각별한 애국심으로 모인 그대들이 갈고 닦을 군인정신은 진실에 두 눈 끝까지 뜨고, 다만 당장의 자리와 출세가 아니라, 역사와 함께 담담히 흐를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그것과 호흡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몇 년 뒤면 지도자가 돼 수많은 사병 앞에 설 그대는 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의 육군사관생도이기에 그렇습니다.

 

현대사 최대 비극 중 하나인 동족상잔의 전쟁 이후 남한 거주 한국인은 각자의 경제적 능력에 버거운 천문학적 수치의 국방비를 감당해 왔습니다. 또한 정치 엘리트 등 신의 아들이 갖가지 기술로 빠져나간 징집을 보통 시민의 아들은 예외 없이 감당하며 피 같은청춘의 시간을 썼습니다. 그러나 최근 해병대 상병의 죽음과 잊힐 만하면 불거져 나오는 군내 성·폭력 사건이 보여주듯, 군은 보통 시민의 딸과 아들을 귀히 여기지도, 최소한이나마 보살피지도 않았습니다. 국민이 더 나은 삶을 포기하며 지불한 국방비 위에 세워졌음에도, 대한민국 군은 쿠데타, 군사독재, 군납비리, 군 성·폭력 등의 단어가 익숙할 만큼 국민 배신의 역사를 지속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군 당국은 자신을 떠받치는 국민을 독재로, 학살로, 각종 비리로, 폭력으로 배신해 온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철 지난이념으로, 구국 영웅에 대한 왜곡과 폄훼로 배신하려 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육군사관생도 여러분, 그대들 생도로서의 현재와 군 지도자로서의 미래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뜻을 계승하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평화 통일에 대한 염원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슴에 큰 별 주렁주렁 매단 이들이 지금까지 보여준 국민 향한 독재, 학살, 폭력, 그리고 심지어 내 새끼처럼 귀하다는 부하들을 가벼이 여긴 것에 대해 군 스스로가 치열하게 반성하고 성찰할 때만 가능해집니다. 안타깝게도 위계 상 그대들의 맨 위에 있는 이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입니다. 그대들에게 군인으로서, 스승으로서 모범이 돼야 할 그 역시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에 대한 모욕적 이전 문제로 시끄러운 이때, 그 흉상을 보며 군인다운 처신에 대해,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 바치고도 이국땅에서 스러져 간 한 영웅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을, 그리고 때론 두려워하고, 자주 결연해졌을 그대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려 봅니다. 상상 속 그 누구도 지금 그대들 향해 감히 호령하는 자들에겐 과분하기만 합니다.

 

경험한 적 없기에 한국 사회는 군인정신이란 걸 알지 못합니다. 다만 사랑하는 부하를 죽음으로 이끈 군의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조직적이고 습관적인 은폐 시도에 저항하며 고군분투하는 해병대 전 수사단장의 소신 있는 발언과 의연함, 그리고 그의 빨간 셔츠입은 동료 군인들의 모습에서 미지의 군인정신을 상상할 뿐입니다. 그대들도 이 선배들로부터 군인정신의 어떤 면모를 배우고 다질 수 있으면 합니다. 이것이 큰 별 가슴에 달고 국민에게 총부리 겨눴던 것도 모자라 날조된 역사 앞에 무릎 꿇은 군인 아닌 군인을 넘어 그대 사관생도들이 참 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입니다.

 

부디 흉상의 영웅들과 그분들의 뜻을 받든 국민의 자부심으로 성장해주길 바랍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군이 존재하는 이유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그대들이 매일 숨 쉬고, 공부하고, 훈련하는 거기 그곳에 처음 모셨던 그대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임윤경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겨레 : 2023.09.11.

 

 

육사의 부끄러운 뿌리 찾기

나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와 달리 경남 진해에 위치한 우리 학교는 물리적인 위치로 인해 대학으로써 교육 시설과 인프라가 집중된 수도권의 이점을 누리기 어렵다. 이러한 탓에 우리는 종종 서울의 유명 대학과 학점 교류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육사를 부러워했다. 부지를 단독으로 쓰며 웅장함을 뽐내는 육사의 시설에 비해 진해 해군기지 내 한쪽 구석에 자리한 채 낡은 건물을 개조해 쓰던 우리 학교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해사 생도에겐 육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자부심의 근원이 있다. 바로 해군과 해사 창설의 주역인 손원일 제독의 존재이다. 손 제독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냈던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로, 자신 역시 중국 길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조선 해군을 창설하고자 중국 해군부에 들어가 훈련받았으며, 1934년 임시정부 군자금 마련과 무장투쟁을 위해 평양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 제독은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하였고, 1946년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을 지냈다.

 

해사에서는 해군 창설과 손원일 제독에 대해 자세히 교육하고 기념한다. 해군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생도들에게 체화시키기 위해서다. 학업과 품행이 우수한 생도에게는 손원일상이 수여된다. 손원일함은 장보고-사업을 통해 건조된 잠수함의 선도함이 됐고, 이 잠수함 클래스에 안중근, 김좌진, 이범석, 유관순 그리고 홍범도함이 포함되어 있다. 해군의 발전과 위상을 대표하는 잠수함에 독립영웅의 이름을 따 명함으로써 해군의 뿌리가 항일독립투쟁에 있다는 자부심을 되새기는 것이다.

 

한편 1946년 창설된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전신으로 하는 육사의 뿌리 찾기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진행되었다. 육사는 그해 12독립군·광복군의 독립운동과 육군의 역사라는 특별 학술대회 개최를 통해, 신흥무관학교와 육사의 직접적인 계승 관계가 존재함을 주장했다. 당시 박일송 육사 교수는 학술대회에서 신흥무관학교 등의 무관학교들이 독립전쟁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육사의 정신적 정통성의 연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흐름은 윤석열 정부 들어 -미 동맹에 기반한 국군의 뿌리를 바꾸기 위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조치라고 해석되기 시작했다. 지난 831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현 정부의 흉상 이전 계획은 전임 정부가 남북 관계를 고려해 치밀하게 군의 정체성을 바꾸려고 했던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정상화 조치라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와 독립군 활동의 어느 지점을 친북적이라 해석할 수 있고, 항일무장투쟁이 어째서 한-미 동맹의 가치와 배치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혹시, ··일 군사협력이 강화되는 판국에 항일이라는 가치가 좀 불편한 것일까?

 

지나온 역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지키는 일은 후세의 역할이다. 이름을 제외하곤 가족도, 재산도 남기지 못한 채 조국도 없이 떠돌아야 했으나 누구보다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고 전투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운 독립투사보다, 공산당 때려잡기에 진심이었으나 같은 동포를 때려잡는 것에도 진심이었던 친일 군인 집단이 육사와 육군에 적절한 뿌리라고 판단했다면 이를 계속 고집했으면 될 일이다. 결국 정권의 지시라는 명목으로 여기저기 뿌리가 흔들린다는 건 육군의 근간과 건군 이념에 대해 육군 역시 낯부끄러워하는 지점이 있고, 그것을 아킬레스건처럼 느끼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홍범도함 명칭을 변경하도록 총리와 장관이 압박을 가하는 가운데 해군은 아직 단호히 버티는 중이다. 명칭이 끝내 변경되더라도 해군엔 이를 반대한 역사가 남는다. 뿌리란 이런 힘을 가진다. 육사도 기왕 말이 나왔으니, 이참에 흔들리지 않도록 뿌리를 제대로 내리길 바란다. 그 뿌리가 어떤 힘을 줄지, 이번에는 부끄럽지 않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방혜린 |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한겨레 : 2023.09.11.

 

 

뉴스타파, ‘역린을 건드린 죄?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시절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의 검찰 찐후배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윤석열 사단이 장악한 검찰은 지금 윤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한다. 최근 뉴스타파의 김만배-신학림 녹취파일보도를 빌미로 검찰이 대선개입 여론조작의 배후세력을 수사하겠다고 나선 행태가 딱 그렇다. 윤 사단은 지난 대선 때 이 녹취파일 내용이 보도되지 않았다면 윤 대통령이 더 큰 표 차이로 이길 수 있었다고 믿는 것 같다. 혹시 지금 30%대의 대통령 지지율도 언론의 여론조작탓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뉴스타파를 비롯해 당시 언론들이 제기한 문제의 본질은, 윤 대통령이 2011년 대검 중수2과장 시절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을 수사할 때 대장동 일당에 대한 불법대출 부분은 부실하게 수사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당시 수사팀은 대장동 사업을 위해 부산저축은행에서 1천억원이 넘는 대출을 끌어오고 그 대가로 10억여원을 챙긴 대출 브로커 조우형씨를 불러 조사하고도 처벌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씨는 2015년에 수원지검에 덜미를 잡혀 대장동 사업 불법대출 건으로 기소돼 징역형(26개월)을 선고받았다. 따라서 ‘4년 전 대검 중수부 수사 때는 왜 조씨가 처벌을 받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은 삼척동자라도 품게 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대장동 일당인 남욱 변호사는 검찰 조사에서 대검 중수부 수사 때 김만배가 김홍일 당시 대검 중수부장에게 조씨 관련 사건을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김 전 중수부장은 당시 윤 대통령의 직속상관이었다(윤 대통령은 최근 그를 국민권익위원장에 임명했다). 또 조씨는 당시 김만배씨의 소개로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상관으로 모셨던박영수 전 특별검사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런 팩트들은 부실 수사의혹이 전혀 허무맹랑한 게 아님을 뒷받침한다. 이를 대선개입 여론조작으로 몰아 처벌하려는 것은 언론사에 권력 감시 기능을 포기하라고 겁박하는 것과 같다. 대장동은 당시 수사 대상이 아니었다고? 그 수사 대상은 누가 정했나? ‘주임검사’(윤석열 중수2과장)는 관여 안 했나?

 

윤 사단이 뉴스타파를 겨냥한 진짜 이유는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일가의 비리의혹을 집요하게 추적 보도한 탓 아닐까. 뉴스타파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조금만 훑어봐도 이런 의심이 든다. 뉴스타파는 20197월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때 검사 윤석열이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인물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와 호형호제하는 검찰 간부의 친형에게 변호사를 소개해준 사실이 있는지를 묻는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아니요를 반복하다, 청문회장에서 뉴스타파 기자와 과거에 통화했던 녹음파일이 공개되면서 거짓말이 탄로 났다. 지금은 적대적 관계가 된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결단(!)이 없었다면,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후보자로 남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통령 부인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연루 의혹과 대통령 장모의 부동산 관련 사기 행각도 뉴스타파의 보도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장모 최은순씨는 지난 7월 항소심에서 법정구속됐다).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국민 세금에서 지원하는 특별활동비 등을 기밀 수사 용도가 아닌 회식 등에 사용한 정황을 보도한 것도 뉴스타파다. 시민단체의 정부 보조금과 노조 회비의 사용처까지 문제 삼는 윤 대통령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혹시 윤 사단의 눈에는 뉴스타파가 감히 주군의 역린을 자꾸 건드리는 것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대통령 지키기에 올인하는 검찰은 오히려 그 대통령을 불행하게 만든다. 박근혜 정권 중반기에 터진 정윤회 문건수사를 검찰이 제대로 했다면 최순실 국정농단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씨를 둘러싼 비선 실세의혹을 정조준했다면 최순실씨의 존재를 알게 됐을 테니 말이다. 대통령을 무리하게 지키려다 검찰도 망가졌다. 2016년 겨울 국정농단 규탄촛불집회 때 박근혜 탄핵다음으로 많이 나온 구호가 검찰개혁이었다. 윤 사단은 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대부분 검찰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후배 검사들은 남는다. 남은 자의 몫은 부끄러움이 될까, 조직에 대한 자부심이 될까.

이춘재 | 논설위원 한겨레 : 2023.09.12.

 

 

이념의 시대가 오는가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죽음과 함께 탈역사의 도래를 주장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오늘 한국사회에서는 이념 논쟁이 다시 뜨겁다. 게다가 이 논쟁의 화두를 윤석열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제공했기에, 이의 파장 역시 크다.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맹공한 데 이어 얼마 전에는 기본적으로 분명한 철학과 방향성 없이는 실용도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선 때는 낡은 이념으로 국민 편 가르지 않고 경제 도약을 이루는 데 모든 역량을 모으겠다고 하면서 강조했던 실용과 민생의 자리에 이념문제가 둥지를 틀었다. 정치적 맥락을 잠시 접어둔다면 역대 대통령 가운데 그는 가장 철학적인 대통령이라는 생각조차 든다. 흔히 이념보다는 실용을, 이상보다는 현실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정치가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런데 실용을 강조하는 탈역사에서 빠져나와 이념을 중시하는 역사로 역주행하려는, 흔치 않은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동서냉전의 이념투쟁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종국적인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인류는 드디어 역사로부터 탈역사의 시대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계산이나 기술문제의 무한한 해결, 묘한 소비 욕구의 충족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가 인정받기를 위한 노력, 추상적인 목표를 위한 자기희생, 지속적인 용기와 도전, 상상력과 이상주의를 대치하면서 결국 철학이나 예술마저 사라지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고 보았다.

 

물론 후쿠야마는 이런 단순한 시각을 후에 어느 정도 수정했지만, 탈역사에 대한 그의 생각은 논문에서도 언급된, 파리에서 활동한 러시아 유대계 출신의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1902~1968)<헤겔철학 입문>에 등장한 탈역사 개념에 주로 의존했다. 탈역사와 관련된 주장 가운데는 독일의 전후 보수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 아르놀트 겔렌(1904~1976)이 있다. 특히 산업사회의 생활 수준 향상과 연관을 지어 제기한 그의 탈역사에 관한 논의는 오늘의 한국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이상적인 동기들이 점차 사라지는 대신 세상에 나오자마자 곧 낡아 버릴 발명으로 채워질 미래 속으로 흡수되는, 오로지 향상되는 생활 수준에 젖어 있는 탈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가 탈역사 시대에 산다면 미래에 대해서 더는 이야기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탈역사 시대에는 많은 이념은 역사박물관에나 보존되는 것이기에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떤 슬픈 감정도 자아낼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겔렌은 우리가 여전히 과거로부터 미래를 위한 열쇠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논거가 있다면 이는 바로 탈역사에 대한 반동(反動)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대량소비사회에서 지속되는 개성의 상실에 저항하는 금욕적 엘리트의 탄생에 큰 기대를 건다. “우리는 언젠가는 풍요한 삶만을 좇는 일반적인 경쟁에서 스스로 벗어나서 시끄러운 사회적·정치적 갈등의 보편적인 전제에 도전하는 금욕적 엘리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념과 이상이 사라진 탈역사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이런 금욕적 엘리트는 니체가 그렸던 초인(超人)’의 모습에서 하나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초인은 졸아들어 창조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지막 인간의 정반대 개념이다.

 

이를 두고 니체는 대지 위에 만물을 작아지게 만드는 마지막 인간이 뛰어다닌다. 이 종족은 벼룩처럼 없애기 힘들다. 마지막 인간은 가장 오래 사는 종족이다라고 묘사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이 마지막 인간을 말인(末人)’으로 번역하는데, ‘인간말종(人間末種)’이라는 단어도 있으니 마지막 인간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시켜준다는 느낌도 든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10년 동안 심산에서 수도를 마치고 다시 대지를 밟은 차라투스트라는 처음으로 군중에게 자유스럽고 창조적이며 자기파멸도 두려워하지 않은 초인의 의미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그런 초인보다는 행복과 안일을 추구하고 법과 복종의 차이에 대해서도 별 관심 없는, 나약한 말인을 택하겠다고 외친다. 이들은 ,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말인을 달라! 우리를 그 말인으로 만들어 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대에게 초인을 선사하겠다!”고 빈정거리며 그를 조롱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평준화된 대량소비사회에서 초인일 수도 있는, 앞서 언급한 금욕적인 엘리트의 등장은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 오히려 과욕으로 살찐, 확대 재생산하는 지배 엘리트 집단이 공략 불가능해 보이는 철옹성을 쌓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진단이 아닌가.

 

오늘날 지배 엘리트는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정치적 계급을 형성하고 촘촘히 엮인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념 창출에 골몰한다. 그러나 이 이념은 대개 기술발전과 경제운용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어떤 신비스러운 이념으로도 포장되지 않아 투명해진 이런 상황을 겔렌은 수정화(水晶化)’정지된 토대 위의 운동이라고 묘사했다.

 

이렇게 이념이 사라지고 기술과 과학만이 마지막 이데올로기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오늘날, 뜬금없이 제일 중요한 게 이념입니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바로 이념입니다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다.

 

그렇다면 그러한 철학과 이념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물론 모두 이야기하는 4차 산업혁명도 그 안에 들어 있다. 후쿠야마가 주장한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도 당연히 그 목록 안에 들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공산전체주의의 비판이 들어 있다. 대체로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동의어로 이해하지만, 독일의 정치학자 카를 디트리히 브라허(1922~2016)나 미국의 유럽과 중동 현대사의 전문가인 월터 라커(1921~2018)는 이를 너무 도식적이고 정태적(靜態的)’인 시각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흥미 삼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 대화형 챗봇에 공산전체주의라는 단어를 입력해 보았다. 예상대로 공산주의에 대한 답변만 반복한다. 그렇다면 공산전체주의라는 신조어를 특별히 사용해야 할 동기는 어디서 왔는가.

 

몇년 전에 있었던 새 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을 둘러싼 시끄러운 논란이 있었다. 보수진영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주의라는 개념만을 사용하는 것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도 민주주의에 포함하려는 의도라고 거세게 항의했다. 이런 정황으로 미뤄 볼 때 전체주의 안에서도 파시즘이나 나치즘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공산주의, 그리고 바로 이 이념 위에 세워진 북한의 존재를 특별히 부각하려는 신조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논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천황제 파시즘의 질곡으로부터 민족해방을 위해 외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무장투쟁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확신이다. 그는 조국 해방도, 비극적인 민족분단도 못 본 채 카자흐스탄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런데 2023년의 잣대로 그의 삶을 평가절하하려는 시도는 한마디로 오늘의 이념을 위해서 과거를 재단하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1980년대 중반에 서독에서 이른바 역사학자 논쟁이 있었다. 일련의 보수적 역사학자들은 나치즘은 볼셰비즘에 대한 일종의 반응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나치즘에 면죄부를 주려 했다. 이러한 시도를 하버마스를 비롯한 학자들은 강하게 비판했고, 언론과 정치도 이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번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논란은 이상하게도 학계 논쟁도 없이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이내 정치적이며 행정적인 차원의 결말로 넘어간다.

 

사실 코로나19 팬데믹이란 미증유의 재난을 겪고, 유럽의 한복판에서조차 1년 반 넘게 전쟁이 지속하는 과정으로 말미암은 경제위기로 지구촌은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말 그대로 모두가 지쳐 있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는 민생이 곧 이념일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경향 : 2023.09.12.

 

 

오른쪽 날개가 앞으로 가고 있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이다.” 8월을 휘저은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논객들의 글도 한 달째 그 말을 붙들고 있다. “국가 지향점을 이념으로 잡은 첫 대통령이어서일 게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맹종·추종 세력을 반국가세력으로 틀 짓고, 그들이 자유사회를 교란시키고 반일 감정을 선동한다고 공격했다. 대통령이 곧 국가였고, 말끝은 야당·비판언론·진보적 시민사회를 겨눴다. 세상은 그날로 두 동강났다.

 

공산전체주의는 학자들도 생소한 조어다. 이 땅에서만, 뉴라이트가 썼다. 2017123, 뉴라이트 130여명이 한국자유회의를 출범시켰다. 2005년 수면 위로 처음 봉기한 이 집단이 박근혜 탄핵 촛불에 맞서 2차 사상전에 뛰어든 날이다. 그 선언문 해제(解題)를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썼다. 김 장관은 그때부터 국민은 실재하지 않는 추상적 존재라며 헌법 제1(국민주권)에서 엇나갔다. ()대한민국 세력이 조직한 광장의 촛불은 북한식·공산주의식·전체주의식 반동이고, 그와 싸우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적 진보 세력이라고 우겼다. 그 후 공산전체주의를 쓰는 뉴라이트가 하나둘 늘더니, 급기야 대통령 입에까지 올랐다. 이 단체를 공동발기한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을 필두로, 정부에 둥지 튼 뉴라이트는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다. 일제 식민지로 근대화됐고, 해방은 미군의 선물이며, 이승만·박정희를 찬미하는 사람들이다. 그 우극단을 대통령이 품자, 이 검찰국가엔 뉴라이트 꽃도 활짝 피어버렸다.

 

그 여름, 독립영웅 홍범도 흉상이 봉변을 당했다.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는 이국 땅 고려인의 울분에 고개를 들 수 없다. 국방부는 수사 외압에 맞선 해병대 대령에게 항명죄를 씌우고, 국토교통부는 대통령 처가 땅에 고속도로 놔드릴 수 있다는 망상을 접지 않는다. 일 오염수 해양 투기를 최인접국 정부가 한번 따져묻지 않고, 그걸 뭐라 하니 ‘1+1’도 모르는 미개인으로 몬다. 공영방송 옥죄고, 총선 뛰겠다는 관변단체 예산 늘리고, 국정원은 다시 빅브러더를 꿈꾼다. 대통령 말대로, 지금 대한민국은 오른쪽 날개만 앞으로 가고 있는가. 나는 X표를 친다.

 

이념의 난장(亂場)에 가려진 게 있다. 민생이다. 7월 생산(-0.7%)과 소비(-3.2%)와 설비투자(-8.9%)가 다 뒷걸음쳤다. 2분기 가구 실질소득 하락폭은 신기록(-3.9%)을 찍고, 세수는 7월까지 43조원이 비고, 수출은 11개월째 쪼그라들었다. 치솟은 건 추석 앞 농산물·기름 값과 4개월째 가계빚뿐이다. 500대 기업 55%는 올해 사람을 뽑지 않는다. 청년 58%는 부모와 살고, 36%만 결혼 의사가 있고, 34%번아웃을 겪는다. 그 총합일까. 합계출산율(0.7)은 또 추락했다.

 

민생이 숫자뿐인가. 둘레길·쇼핑몰 흉악범죄와 스토킹에 떨고, 국회 앞에선 교사 수십만명이 더 죽이지 말라고 외친다. ‘위기가구의 생활고 비극은 송파·수원·신촌에서 전주로 이어졌다. 안전운임제가 없어져 최저시급도 못 받는 화물운전자는 과속·과적이 늘었다고 한다. 청년과 노후가 다 퍽퍽한 한국의 빈곤 곡선이 쌍봉형 낙타로 그려졌다. 그런데도 세수 펑크로 쥐어짠 새해 예산안은 노인·아동·장애인 보조금부터 싹둑 잘라 시끄럽다. 돈이 돌지 않는 나라에서 약자들은 하루를 버텨도 1년을 살 방법이 없다.

 

1000원쯤 되지 않았나요?” 한덕수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4800원까지 오른 서울 택시 기본요금을 몰라 쩔쩔 맸다. 누구나 물가 퀴즈에 당황할 수 있지만, 29년 전 택시요금에 멈춰 서 있는 총리는 심했다. 정책 신뢰가 달린 문제다. 다산 정약용이 식위정수(食爲政首)’라 했고, 공자는 족식(足食)’족병(足兵)’ 위에 뒀다. 정치의 으뜸과 목표가 민생이고, 그게 흔들리면 다 흔들린다고 일깨웠다.

 

1야당 대표 단식이 13일을 지났다. 국정 사과와 쇄신을 내걸었다. 일축한 대통령은 나가 싸우라고 장관들을 내몬다. 추석·설을 지나 총선까지 갈 대치다. 이념전이 먹힐까, 윤석열 2년의 민생 심판이 먹힐까. 열쇳말로 돌리면, 공산전체주의 대 먹고사니즘이다. 정치는 생물이다. 보수의 홍범도 내분과 수도권 역풍을 보면, 대통령의 뉴라이트 이념전은 해를 못 넘길 수도 있다. 공자와 다산이 꿰뚫어본 먹고사니즘은 끝까지 선거 줄기를 가를 게다. “못 살겠다면 야당이, “사는 맛 난다면 여당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7개월 앞 총선에 두 물음을 먼저 던진다. 다들 먹고살 만하십니까. 지금 오른쪽 날개는 앞으로 가고 있습니까.

이기수 편집인·논설주간 경향 : 2023.09.12.

 

 

오염수 정보 아는 데 소송이 필요한가

법원에 소장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무더웠던 지난달, 서울행정법원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정보공개 소송을 제기했다. 첫 재판이 오는 1027일 열린다. 나는 무엇을 알기 위해 정보공개 소송을 해야만 했는가? 무슨 대단한 비밀 정보가 아니다. 나는 그저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일본에 어떤 수준의 오염수 자료를 달라고 요구했는지 점검하고 싶었다.

 

20214,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를 일방적으로 공식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 때였다. 해양수산부는 이미 2019년 런던의정서 당사국 총회에서 일본의 해양 투기 문제를 제기했다. 2006년 발효한 런던의정서는 일체의 방사능 폐기물의 해양 투기를 금지한다. 그러나 원안위는 해수부와 달랐다. 일본의 공식 발표로부터 3개월이 지난 20217월이었다. 나는 원안위원장에게 일본으로부터 받은 오염수 정보 공개를 요청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원자력법에 따른 오염수 해양 투기 인가 절차를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렇다! 오염수 해양 투기를 시행하는 도쿄전력은 일본 국내법상 원자력 사업자이다. 해가 바뀌어 20222, 나는 다시 원안위원장에게 정보공개를 요구했다. 도쿄전력이 방사선 환경영향평가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검토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정보 공개를 거부했다.

 

나는 직감했다. 그리고 애가 탔다. 원안위는 일본의 오염수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스스로 할 의사가 없구나! 사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는 일본에는 커다란 난제였다. 여전히 일본 국민들에게는 고통이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7등급 대참사였다. 일본 시민단체인 원자력자료정보실(CNIC)의 마쓰쿠보 하지메 사무국장이 이달 국제회의에서 발표했듯이 후쿠시마 사고 원전에서는 여전히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처리해 바다에 버리려는 일부 오염수 또한 원전 사고로 녹아내려 격납고를 뚫고 나간 핵 연료봉에 냉각수와 지하수, 비가 직접 노출된 상태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원안위원장은 일본에 오염수 자체의 정보를 요구해야 했다. 30년 이상, 아니 일본의 원자력 전문가들이 염려하듯이 100년이 걸릴지 모를 사고 원전 폐로 시기에 장기간 방출될 오염수의 방사선 환경영향평가를 독자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의 신뢰를 확보했어야 했다. 도쿄전력의 방사선 환경영향평가를 한국 정부가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해 한국민의 염려를 일본에 전달하고 상황을 개선시켜야 했다.

 

나는 거듭 정보공개 청구라는 방법으로 원안위에 독자적 분석을 요구했다. 내가 올 5월에 공개를 청구한 오염수 정보에는, 20222월 일본에 질의한 방사선 영향평가 검토 기준도 있다. 그러나 원안위는 끝내 어떠한 오염수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올 77일 원자력안전기술원의 검토보고서를 내놓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도쿄전력의 환경영향평가 보고서를 지지하는 포괄적 보고서를 발표한 지 이틀 후였다. 나는 한국 정부의 보고서를 보고 매우 놀랐다. 거기에는 도쿄전력의 보고서도 담지 못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지금의 후쿠시마 바다에 오염수가 방출되더라도 삼중수소 농도는 한국 주변 해역에서 평상시 검출될 수 있는 환경준위에 해당한다고 썼다. 그리고 후쿠시마 바다에서 잡힌 어류를 연간 69.35을 먹어도 안전하다는 도쿄전력의 평가가 적절하다고 했다. 세슘 안전 기준치를 180배 초과한 우럭 발견에 대해서는 일절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올 7월에 원안위원장에게 다시 오염수 정보공개를 요구했다. 그러나 거부당했다. 그로 인해 서울행정법원에 원전 오염수 정보공개 소장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이 원전 오염수 정보를 알아야 하는데 소송이 필요한가? 한국은 원자력안전 정보공개 및 소통에 관한 법률을 가진 나라이다.

 

급기야 올 7, 한국해양수산개발원·한국환경연구원 등이 작성한 오염수 대응 보고서마저 비공개 처리됐다. ‘원전 오염수 대응전략 수립을 위한 기초연구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의 요약은 오염은 국가관할권의 경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로 시작한다. 이 보고서가 제시한 11대 추진 과제에는 내가 2년 전부터 주장한 내용이 이제야 그대로 들어 있다. ‘해양 환경영향 평가를 실시하기 위한 평가기준 및 방법을 개발한다는 내용이었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주무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마저 후쿠시마 수산물에 대한 위험평가 보고서도 비공개 처분했다. 그래서 거듭 묻는다. 오염수 정보를 아는 데 소송이 필요한가?

송기호 변호사 경향 : 2023.09.12.

 

 

이한 '승자의 대선 불복', 진짜 이유는 언론 '뽀개버리기'?

대통령에서 떨어뜨리게 할 뻔 하도록 한 죄?

윤석열 대통령은 0.73%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2위와의 표 차이는 247077표다. 국회의원 지역구 하나 수준으로 역대 최저 표차다. 많은 이들이 "0.73%포인트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정치하라"고 대통령에게 진심이 담긴 조언을 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많은 시민들이 바란 것과는 '다른 의미'0.73%포인트에 대해 고심을 한 것 같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 성명(이 또한 처음 들어본다)을 보면, 뉴스타파의 '신학림-김만배 녹취 보도' 문제는 "희대의 대선 정치 공작 사건"이라고 한다. 도어스테핑에서, '성명 불상' 입장문으로, 1년 사이 대국민 소통 방식의 극적인 변화다.

 

20219월 김만배가 언론계 선배인 신학림을 만나 한 대화 녹취 보도는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건에서 대장동 사업 대출 브로커인 조우형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윤석열 당시 대검 중수2과장이 수사 무마 의혹에 연루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핵심이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과 검찰은 2011년 조우형의 부산저축은행 대장동 대출과 관련된 사건을 수사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2011년에 검찰 수사에서 '무사 통과'한 조우형은 2015년에 부산저축은행 대출 불법 알선수재 건으로 기소된다. 당시 조우형의 변호사는 윤 대통령의 상관을 지낸 적 있는 '50억 클럽' 박영수 전 특검이었다. 당시 대검 중수부가 조우형의 부산저축은행 불법 대출 건을 수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무능함'을 자인한 것인데, 검찰은 스스로 '무능했다'며 열정적으로 강변하는 꼴이다. 하지만 검찰의 '무능함'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게 특수통 출신 거물급 전관 변호사라는 건 여전히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내내 남겨 놓는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대장동 사건 몸통을 이재명에서 윤석열로 뒤바꾸려 한 정치공작"이며 "김대업 정치공작, 기양건설 로비 가짜뉴스 폭로의 계보를 잇는 2022년 대선 최대 정치공작 사건"이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사형에 처해야 할 만큼의 국가 반역죄"라며 "국민 주권 찬탈 시도이자 민주공화국을 파괴하는 쿠데타 시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검찰은 떠들썩하게 뉴스타파와 JTBC를 압수수색하고 여권은 MBC 기자들을 비롯해 방송사 유명 진행자들을 무더기로 고소했다.

 

과연 이번 사안이 김대업 정치공작이나 이회창 부인 뇌물설(기양건설 로비) 수준의 스캔들인가? 이 사안의 핵심은 뉴스타파의 김만배와 신학림 대화 녹취 보도다. 김만배는 대장동 사건의 핵심 인물이다. 애초 대장동 수사라는 게 김만배와 김만배를 둘러싼 이른바 '대장동 일당'들의 녹취록에 기반해서 시작한 것 아닌가. 검찰발()로 살라미처럼 흘러나오는 대장동 일당의 '주장'만 의미있고, 언론이 수집한 김만배의 '주장'은 의미가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김만배의 새로운 주장은 충분히 보도 대상이 된다. 오히려 이런 녹취록을 확보했는데 보도하지 않았다면 그게 문제다. 김만배의 자기 과시적 동기가 있든, 목적 있는 거짓말이든 그건 검찰이 밝혀내야 할 부분이다.

 

들춰보면 앙상하다. 김만배의 자기 과시, 그리고 당사자 주장이 엇갈리는 보도 내용이 스토리의 전부다. 일개 언론 보도 분쟁인 셈이다. 결은 다르지만 채널A 기자의 강요미수 사건이 무죄를 받은 과정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해당 기자는 피의자에게 '플리바게닝'을 주선하겠다며 검찰 고위층과의 친분 및 자신의 '수사 개입' 능력을 과장했으나, 이것이 죄가 될 수 없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박근혜의 세월호 당일 행적과 관련한 칼럼을 썼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사건도 비슷하다. 법원은 "기사를 작성하면서도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았다"면서도 "언론의 자유"를 이유로 다쓰야 전 지국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설사 김만배가 '거물급 검사'의 커피 한잔 사건을 무마 스토리를 허구로 나열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가리면 될 일이다. '고의성', '허위임을 알고 상대에 해를 입히려는 목적으로' 보도했거나, 현저한 '악의성', 즉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내 보도한 게 아니라면 우리 법원은 언론 자유를 넉넉히 인정해 준다. 민주 공화국 헌법의 장점이다. 물론 '언론 보도 윤리'는 남는다. 신학림과 김만배의 돈거래는 신뢰에 관한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신학림과 김만배의 돈 거래 배경에 대해서는 검찰이 수사를 하고 있으니 곧 밝혀지게 될 것이다. 오히려 뉴스타파의 사과, 방송사의 사과 모두 언론의 자정 능력에 기대를 갖게 한다.

 

또다른 쟁점은 대통령실이 언급한 '정치 공작' 의혹인데, 이건 이른바 '민주당 배후설'이다. 허나 그 근거라는 건 어설프다. 보도가 나온 직후 민주당과 이재명 캠프가 '마치 짜고 친 듯이' 적극적으로 전파했다는 건데, 24시간 돌아가는 대선 캠프가 상대 후보와 관련된 언론 보도를 기를 쓰고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어느 후보의 경우든 마찬가지 일이다. 사전에 민주당이 이 인터뷰에 개입되어 있었다는 증거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대통령에서 떨어뜨리게 할 뻔 하도록 한 죄?

굳이 죄명을 지어보자면 '대통령에서 떨어뜨리게 할 뻔 하도록 한 죄' 쯤일까? 모기를 보고 뽑아든 검은 '내란죄''사형'의 집행검이 되어 태산을 명동케 하고 있으나(태산명동), 정작 MBC 기자들을 고발한 내용을 보면 내란죄도, 반공법도 아닌,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윤석열 대통령의 명예훼손 혐의다(서일필). 그렇다면 모기를 보고 칼을 뽑은 목적이 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됐다. 0.73%포인트 차이 득표율의 의미를 새기고 정치를 하라고 주문했더니, 0.73%포인트 차이로 당선된 것을 '억울함'으로 치환했다. 기이한 '승자의 대선 불복' 풍경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보면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승자의 대선 불복'은 대선 1년 반 이상 지난 시점에서 어떻게 불쑥 제기됐을까. 타임라인을 따라가 보면 이 사건은 대장동 핵심 인물 김만배의 구속 기간 만료(70)를 일주일 가량 앞두고 전격적으로 불거졌다. 많은 사람들이 놓친 장면이 있다.

 

지난 1일 검찰이 김만배와 돈거래를 한 신학림 씨를 압수수색했다. '대선 공작 수사'의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실 '고위관계자 성명'5일에 나왔다. 검찰은 6일 오전에 김만배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오후에 검찰은 구속 만기를 앞둔 김만배에 대한 구속영장 심사 과정에서 "김만배가 (20219) 스스로 허위 인터뷰를 하고, 이 내용이 뉴스타파에 보도되게 했다""김만배가 자신과 배후 사범들의 범행을 은폐하고자 새로운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정황이 확인된다"고 새로 발굴한 '사유'를 들어 구속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법원은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김만배는 70시를 기해 석방됐다. 한 검찰 관계자는 "대통령실이 직접 '가이드라인'을 내리고 검찰이 김만배를 묶어놓으려 총력을 기울였는데 법원이 구속 영장을 기각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검찰은 대장동 수사로 16개월간 김만배를 구속해 놓고도 이른바 '몸통'에 대해선 기소조차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2년째 이어진 수사는 여전히 진행중이고, 갈수록 곁가지 수사들이 튀어나오고 있으며 그때마다 수사팀이 새로 꾸려지길 반복한다. 검찰 수사는 무한 확장의 우주론적 스케일로 진화 중이다. 이번 건도 대장동 수사에서 파생된 수많은 수사 중 하나인데, 김만배 구속에 실패한 검찰은 이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를 수사하기 위해 검사 10명을 꾸려 '대선 개입 여론 조작 사건' 특별수사팀 또 발족했다. 이쯤 되면 수사의 목표는 '수사 확장' 그 자체가 된다.

 

'검찰 공화국'의 최종판,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대통령

언론에 대한 대대적 수사는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방송 장악' 논란과 만나 시너지를 낸다. MBC 방문진 이사장을 쫓아 내는 건 시간문제고, 김의철 KBS 사장은 벼락처럼 해임됐다. 방심위는 방송 보도를 상대로 무더기 법정 제재를 쏟아내고 있으며, 연예인 발언을 집권 여당 대표가 때리고, 정부가 언론 보도를 팩트체크하겠다고 나선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이 임명되고 MB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이 있는 유인촌은 다시 장관직으로 컴백할 채비를 마쳤다. 그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이 암약하고 있었다는 그 세력 중 한 축이 알고보니 언론이었다는 얘기일까?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헤아려 보면 목표가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 협치는 싫다. 국회를 우회하고 싶다. 믿을 건 검찰과 언론인데, "공산당 기관지"같은 언론은 걸림돌이다. 언론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검찰이 대통령 명예훼손을 처벌하기 위해 언론사를 압수수색하는 나라. '검찰공화국' 최종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여소야대 아무리 얘기해도 (윤석열 대통령은)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하고 싶은 거 다하고 다니는 것 같아 보인다(여권 관계자)"는 점이다.

 

언론을 '뽀개'버리기 위해 검찰이 나선 것도, 최근 '반국가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도, '윤석열식 역사 바로세우기'도 대통령을 '국정에 발목 잡힌 0.73% 대통령'으로 만들지 못한다. 총선을 대비해 중도층을 끌어 모아야 하는 대통령은 지금, '0.73%포인트'에 매달려 승리한 대선에 불복을 선언하고 있다. 30% 초반대의 지지율을 가지고 과거와 싸우고 있는 '강한 대통령',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강한 대통령'을 보는 여권은 불안하다. '견제론'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점하는 이유다. '승자의 대선 불복'은 영 어색하다. 아직 윤석열 정부의 시계는 대선에 머물러 있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3.09.16

 

 

홍범도가 본 송평인 칼럼

-송평인 동아일보 논설위원 칼럼에 대한 반박

 

96,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

 

참 고약한 노릇이외다. ‘홍범도가 본 홍범도라니내 비록 제대로 배우지 못해 이름 석 자나 간신히 쓰고, 회고록이나 자서전이 아닌 일지나 겨우 몇 자 끄적거리는 수준이오만 왜곡과 분칠로 가득 찬 글을 보고 마음이 심란하여 도무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소이다. 그래서 몇 자 적으려 하오.

 

이른바 민족정론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이라고 했지요? 내 들으니 그쪽 세계에서는 그냥 기자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하더이다. 그래도 칼럼에 논설위원이라고 썼으니 그냥 위원 선생이라 부르도록 하겠소. 내 살던 원동에서 위원은 참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에게만 붙여주는 호칭이었으니 기분 나빠하지는 말길 바라오.

 

위원 선생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글을 썼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내가 1932년에 썼다고 하는 이력서와 앙케트를 보지 않고 나에 대해 쓴 역사학자들은 모두 알량한 지식으로 낭설을 늘어놓고있는 무뢰한들이라는 것이지요? 그 자료를 본 위원 선생만이 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최고 전문가라는 것이지요? 그런 억지가 어디에 있소?

 

한 사람의 인생도 역사인데, 어떻게 어느 한 시점에 쓰여진 글 하나로 그 사람의 역사를 두부 자르듯 재단한다는 말이오. 내가 아는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소. 몇 개 되지도 않는 내가 쓴 글, 내 동지들이 나에 대해 쓴 글, 나의 활동을 유추할 수 있는 여러 단편적인 자료들, 심지어 나의 적인 일제가 추적한 정보 보고들까지 모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나와 내 활동의 실체를 밝혀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역사학자들이오. 일제의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고, 러시아 자료를 읽기 위해 러시아어를 익히는 사람들이오.

 

기왕에 역사학자들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더 하겠소. 위원 선생은 국내에 나에 대한 연구자가 한두 명에 불과하다고 했지요? 참으로 불성실하오. 굳이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소.

 

국내외에서 발행된 논문들을 제공하는 학술연구정보서비스에 들어가 그냥 홍범도를 치면 되오. 문학 등 다른 분야는 빼고 역사학 분야에서만 2000년 이후 제목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논문을 쓴 연구자가 7~8명이오. 정미의병, 대한독립군, 봉오동전투, 자유시참변 등 내 활동과 관련된 논문은 말할 것도 없소. 그래 십분 양보해서 요즘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논문을 쓴 두 연구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 연구자들이 홍범도가 좋은 평가를 받아야 먹고 산다고요? 이런 막말이 어디 있소?

 

한 사람은 대학에서 20여 년간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명예교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재 국립대학교의 교수라오. ‘거대신문사의 논설위원보다야 훨씬 적은 수입이겠지만, 굳이 나를 연구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학자들이오. 그들의 연구가 비록 완벽한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생계를 위해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역사적 진실을 비트는 사람들은 아니라오.

 

어디선가 본 글이 생각나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판관이 아니다. 개별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연구가 곧바로 역사적 진실을 담보한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최종적으로 완벽한 역사적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역사학자들은 주어진 사료를 토대로 역사적 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들이 쌓이면 잠정적인 역사적 진실로 인정받게 된다. 한편, ‘잠정적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언제든지 새로운 연구결과로 대체될 수 있다는데 대해 열려있고자 한다. 그렇게 역사학은 발전해 왔다.” 나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요.

 

1932년의 그 자료가 무엇인지 짐작되는 바 없지 않지만, 기억이 희미해 정확히 어떤 자료인지 확신을 못하겠소. 다만 역사학자들이 보지 못했다는 위원 선생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소. 그러나 사료를 그렇게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오. 이미 30년 전에 거금을 들여 구입했다면서 지금까지 꽁꽁 숨겨놓고 있었소? 그러면서 너희들은 이 자료 못 봤지, 나는 봤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오? 이런 건 철부지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라오. 일찍 그 자료들을 공개했더라면, 역사학자들이 그 자료들을 토대로 새로운 연구결과를 도출해낼 수도 있었겠지요. 어쩌면 위원 선생네들이 원하는 그런 결과일 수도 있었을 것이오. 하지만 그렇게 하지도 않은 채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알량한 지식이니 낭설이니 말하는 것은 역사학자들에 대한 모욕이오.

 

또한 왜 1932년의 그 자료만 맹신하고, 다른 자료들에는 눈을 감는 것이오? 온라인상에 떠돌고 있는 1922년 앙케트는 보지 못한 것이오?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오? 위원 선생이 비난하는 그 역사학자가 발굴해 공개한 자료라오. 내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이른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목적을 고려 독립이라고 쓴 자료 말이오. 나뿐만이 아니라오. 대회에 참가한 52명의 동지 대부분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스크바에 왔소. 이후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 동지도 조국 독립을 목적하고라고 썼고,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 되는 김규식 동지도 한민족 해방과 세계대동을 위해 대회에 참석했다오.

 

1922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 사진=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홈페이지

 

내가 1922년 앙케트에 고려 독립을 목적으로 대회에 참석했다고 썼으니, “이것만이 나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다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라오. 1922년의 나와 1932년의 나에 대한 자료는 전체의 나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는 것이오. 또한 당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읽어야 하오. 몇 장인지 알 수 없는 1932년의 자료만으로 나의 일생 전체를 규정하려는 위원 선생의 태도가 얼마나 몰역사적인지를 지적하려는 것뿐이라오.

 

얘기가 길어졌지만, 위원 선생이 칼럼에서 주장한 내용이 얼마나 왜곡되고, 무지와 억측에 기반해 있는지 말하지 않을 수 없소. 차근차근 읽어봅시다.

 

위원 선생은 내가 레닌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간 것은 자유시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를 보고하기 위함이고, 내가 자유시사변 3개월 전에 한인 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니, 나와 나의 부대가 단순히 무장해제에 응한 것 이상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가능하다고 썼지요.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좀 더 읽어봤으면 이런 얘기를 못하지요.

 

내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된 것은 자유시에 모인 한인 독립군들을 고려혁명군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조치라오. 무장해제가 결정된 이유 중 하나는 수라세프카 평야에 있던 대한의용군이 이 재편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오. , 자유시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한인 여단(고려혁명군)은 제대로 편성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오.

 

나는 자유시에서 유혈 사태를 보고하기 위해 레닌을 만나러 갔소. 유혈 사태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자유시사변으로 체포된 동지들을 즉각 석방하는 것이 옳음을 보고하러 간 것이오. 이후 코민테른의 결정에 내 보고가 반영되었다오. 레닌이 내게 권총을 준 것은 의병 이후 그때까지 독립군 대장으로 싸워온 내 경력을 존중해서이지, 자유시사변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오. 이미 여러 자료와 연구들을 통해 설명이 가능한 나의 이력을 위원 선생 혼자만 의심하고 있는 것이란 말이오.

 

위원 선생은 내가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빨치산 부대를 거느렸다고 썼으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임할 때 나의 자의식이 독립군이 아니라 빨치산이었건 것이다고 썼네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소. 아니 국방부 발표회장에서 위원 선생의 동료 기자들이 국방부를 질타했던 내용을 듣지 못했단 말이요? 당시에는 독립군이 빨치산이었소.

 

1940년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이 창설되기 전까지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군 부대는 모두 빨치산이었다오. 빨치산(영어로 파르티잔)은 비정규군을 말하는 것이잖소? 나와 내 부대는 러시아에서는 빨치산으로 불리고, 우리 동포들에게는 의병으로 불리고, 북간도로 왔더니 독립군으로 불렸다오. 이런 가장 기초적인 사실도 모르니 내가 독립군이 아니라 빨치산이다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요.

 

또 위원 선생은 산포수였던 내가 현대 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고 엽총으로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러시아 적군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고도 썼더라고요. 그게 아니오. 내가 1919년까지 머무르던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이 대부분 적군 편에 선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그것은 무기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내전 과정에서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출병한 일본군이 백군을 지원했기 때문이오. 내전 초기에는 백군 편에 선 한인들도 있었다오. 하지만 일본군의 출병 이후에는 대부분이 적군 편으로 돌아섰소. 당연하지 않겠소? 하지만 위원 선생처럼 이 당연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구려.

 

위원 선생은 참 잔인하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 이후 독립영웅으로 불리기에는 수치스럽게도 다시 총을 잡지 못했다는 말에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소. 미안하오. 그래 나는 자유시사변 이후 다시 총을 잡지 않았소. 연해주에서 동포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오.

 

그런데 말이오. 내가 1868년 출생인 것은 아시오? 봉오동전투를 치를 때 내 나이가 53세였소. 자유시사변 때는 54세이오. 청산리전투 때 김좌진 동지가 32, 이범석 동지가 21세였소. 자유시사변 때 고려혁명군의 사령관이었던 칼란다라시빌리가 1876년생으로 나보다 8살이 어리오. 그런데 그의 별명이 제두쉬카(할아버지)’였다오. 50대 중반이 넘어가는 나이에 군문을 떠나 은퇴하는 것이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이란 말이오? 맞소.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었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총을 잡고 싸우던지, 총을 잡고 싸우다 죽던지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너무나 미안하오.

 

1937년 강제이주 때도 그랬어야 했소. 이미 70세가 되었지만, 강제이주에 저항해 불만을 토로했어야 했다오. 강제이주를 전후해 스탈린의 탄압을 받았던 한인 희생자가 확인된 것만 해도 6천 명에 이르고, 그중에서 총살된 사람만 28백 명이 넘소. 이것도 위원 선생이 비난한 그 역사학자가 밝혀낸 것이오. 그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강제이주를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앞장서서 반대해야 했는데, 그러다 총살을 당했어야 마땅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미안하오.

 

2017930, YTN '강제 이주 80년 고려인, 아리랑 고개를 넘다' 보도 갈무리.

 

위원 선생은 관심법을 가졌나 보오. 내가 뼛속 깊이 공산주의자이고, 이미 1919년 무렵부터 자의식 속에서 새로운 조국은 소련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네요. 내 자의식은 언제 들여다보았고, 내 뼛속은 언제 살폈는지 모를 일이오.

 

내가 1927년에 입당을 했으니 공산주의자인 것은 맞소. 나와 함께 그리고 내가 은퇴한 후에도 일제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소련공산당에, 중국공산당에, 심지어는 일본공산당에도 입당을 했소. 이유는 단 하나였소. 그렇게 해야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조금이라도 일찍 조국의 해방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일제가 우리 땅을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있던 시기에 공산주의운동과 조국의 독립은 둘이 아니었소.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수많은 지사들이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공산주의운동을 통해 조국을 독립시키려고 청춘을 불살랐소. 이제는 상식이 된 이야기요. 나는 이런 상식을 거부하는 자들이 일제 때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고등계 경찰들이나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설립된 간도특설대 출신들만 있는 줄 알았소.

 

내 비록 은퇴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을 소련 땅에서 거주하며 소련 공민이 되었지만, 단 한 번도 내 조국을 바꾼 적은 없소. 바꾸려 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오. 나는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에서 언제나 우리 동포들과 함께 있었고,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극장장 태장춘과 그 동료들의 배려로 동포들 속에서 비교적 안락한 삶을 살았소.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소련 공민이 되었다고 해서 내가 조국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모욕을 넘어서는 망설이오.

 

소련 땅에서 소련 공민으로 살아야 했던 고려인, 중국 땅에서 조선민족의 뿌리를 지키고자 했던 조선족, 국적도 없이 식민모국에서 차별을 견뎌야 했고 자식들을 위해 귀화를 하면서도 끝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았던 일본의 자이니치(在日) 그리고 이제는 750만 명에 달하는 전 세계의 우리 동포들에 대한 모욕이오. 현지의 국민이면서 한민족이라는 이중 정체성 속에서 부유하면서도 역사적 조국과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재외동포들의 노력과 염원을 짓뭉개버리는 무도한 짓이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무장투쟁의 여명으로 착각한 황혼이었다? 위원 선생은 정말 무장투쟁이 봉오동-청산리 전투와 1940년대 광복군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자유시참변 이후 연해주로 돌아온 한인 빨치산들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적기단을 만들어 일제에 저항했던 사실, 1920년대 후반부터 만주에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당군이 조직되어 활동했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 및 만주군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이 상승(常勝)의 명장으로 불렸던 사실, 만주사변 이후 만주의 한인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 등에서 일본군과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 중일전쟁 이후 중국 관내에서 조선의용대가 조직되고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어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사실, 이 모두를 정말 모르는 것이오? 모르는 척 하는 것이오?

 

해방 때까지 한 시도 쉬지 않았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나라를 잃은 적이 없고 따라서 건국이 뭔 말이냐는 이종찬 광복회장의 고언을 헛소리로 치부하는 것이겠지요. 그의 조부인 이회영 동지가 다섯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어 서간도로 망명했고, 마침내는 일제 경찰의 고문으로 척추가 부러져 순국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랬겠지요. 함께 망명한 여섯 형제 중 막내 이시영 동지만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오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타지에서 고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몰라서겠지요. 그래서 6형제와 그 자제들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라는 광복회장의 질정을 새겨들을 생각이 없는 것이겠지요. 진정 몰라서 그랬다면, 앞으로 배우면 될 텐데굳이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오.

 

홍범도 장군. 사진=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나더러 지옥에나 꺼지라고 하는 건 아니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오. 하지만 난 이미 지옥에 있소. 내 비록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였지만, 내 동포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였지만, 수없이 많은 일본 젊은이들을 살생했으니 어찌 천당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소. 통합을 둘러싼 내홍 속에 많은 동지들이 죽고 다치는 모습을 피눈물을 쏟으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의 죄책감을 어떻게 씻을 수 있겠소. 새로운 터전이라 생각했던 소련에서 동지들이 숙청되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을 때의 무력감을 어디에 말할 수 있겠소.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죽어간 동지들이 나를 질책하고, 내게 하소연할게 분명한데 어떻게 천당에서 마음 편히 머무를 수 있겠소. 동지들의 질책과 하소연은 그들의 투쟁과 희생 덕분에 독립영웅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얻은 나를 내리누르는 징벌과도 같은 것이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위원 선생네 같은 이들에게 들어야 할 질책은 아닌 것 같소이다. 내 흉상쯤이야 육사에서, 국방부에서 사라진다고 뭐 그리 큰 대수이겠소. 하지만 그 이유가 위원 선생이 주장하는 것처럼 내가 공산당에 입당했기 때문이라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공산주의를 택하여 독립운동의 전당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수많은 동지들과, 또한 그런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연합하여 운동을 전개했던 수많은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가 동지들을 모욕하는 것이오. 그러니 이제는 그 망설을 멈추기를 바라오.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 미디어오눌 2023.09.16

 

 

21세기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섹시한 공산주의자

선생님, 그런데 좌파가 뭔가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일화가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내가 대학 선생으로 첫 강의를 시작한 이천년대 초반의 기억이다. 20세기 문화이론의 학습에서 마르크스 주의좌파라는 어휘는 유의미한 지성의 사유로 반드시 다뤄진다. 이는 내가 아는 한 거의 모든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그러하다. 이런 수업을 하고 강의실을 나서려 할 때 한 학부생이 수줍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온화하며 겸손한 질문은, “선생님, 그런데 좌파가 뭔가요?”

 

그즈음 대학생들은 대부분 1980년대생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중견인 40대에 해당한다. 나는 이 학생의 질문으로 비로소 깨달았다. 이들은 1980~90년대에 걸쳐 긴박하게 진행된 소련의 해체와 개방, 베를린 장벽 붕괴,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 이후 성장한 이들이라는 걸. 한국인이 중국과 러시아로, 더 낭만적으로는 체코와 폴란드에 여행을 다니고 메이드 인 차이나가 찍힌 상품들로 일상을 생활하는 게 자연스런 세대라는 걸.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과 공포,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한반도의 첫 세대라는 걸. 공산주의, 좌파, 종북좌파, 심지어 반공은 역사책에나 나오는 먼 과거의 일로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는 축복받은 인류라는 걸.

 

198911월 서베를린인이 베를린 장벽을 파괴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21세기 섹시한 공산주의자

섹시한 공산주의자의 출현은 21세기 한반도의, 아니 지구적 미디어 풍경의 흔한 일상이다. 2010년 블록버스터 영화인 <의형제>에서 강동원이 연기한 송지원은 남파된 북한 엘리트 첩보원이다. 우리는 달콤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북한 엘리트 첩보원이 저렇게 매혹적인가? 아울러 2020년 즈음 시청률 24%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리정혁은 북한의 특급 장교다. 심지어 대중적 인기가 드높던 현빈이 연기한 덕에, 이 북한의 멋진 특급 장교와 한국 재벌가 딸과의 로맨스를 대중은 기꺼이 환영했다.

 

한편 올여름 전 세계적인 인기와 평단의 극찬을 거머쥔 영화 <오펜하이머>는 어떠한가? 핵폭탄을 인류에게 가져다준 과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탁월한 손길을 거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로 부활했다. 실제 오펜하이머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남달랐던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게다가 지적이고 우수에 젖은 듯한 배우 킬리언 머피가 그 역을 멋지게 구현함으로써, 오펜하이머가 체현했던 공산주의자 삶의 깊이를 관객들은 더욱 투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인간의 사유, 신념, 희망, 야심,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불행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었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이 같은 미디어 문화 안에서 우리는, 이념으로 억압하고 이념으로 이기려는 정치란 얼마나 부당하고 비겁한지, 나아가 그 암울한 조건에서조차 한 인간의 색채가 얼마나 무한하게 빛날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자연스럽게 키워올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지난 수십 년간 대부분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공산당 나쁜 놈, 반공 착한 놈같은 단순한 논리를 뛰어넘을 줄 아는 성숙한 시야를 갖추게 되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에도 더 이상 열광하지 않는다.

 

이 변화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격동하는 세계사의 흐름 안에서 정치적임에 대한 사회적 사유가 성숙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복된 결실이기도 하다. 1+1=100이라고 믿을 만큼 무지해서가 아니다. 정치와 사회라는 게, 또 이념이란 것도 물론, 찬반의 양극단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숙고하는 현명함 때문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무조건반국가세력이라고 공격하는 일 따위는 수치스러운 행위라는 점 역시 유념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무릇 국가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리라는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21세기 공산 전체주의에 관한 공포몰이

국립 국어표준대사전의 온라인 사이트에서 요즘 대통령이 공격 대상으로 애용하는 공산전체주의의 뜻을 찾아보았다. 이십 년 전 내게 질문했던 학생에 이어, 지금 와서 내가 이런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최근 한 이용자가 올린, ‘공산 전체주의의 뜻을 묻는 질문(나만 모르는 건 아닌가 보다)에 대한 국립 국어표준대사전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중략) ‘공산주의는 정치 전문어로서는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하여 체계화된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에 입각한 사상을 뜻하고 (중략) ‘전체주의는 사회 일반 전문어로서 개인의 모든 활동은 민족·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하여서만 존재한다는 이념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을 뜻하며,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이 대표적입니다.”

 

국립국어원 "공산전체주의의 뜻에 대해 알려주세요" 질문과 답변 갈무리

 

그리하여 이 권위 있는 대사전의 결론은? “문의하신 공산 전체주의는 국어사전에 올라 있지 않아 의미를 안내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체 왜 21세기 한국의 대통령이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한 분노에 시달리며, 사전에 있지도 않은 단어로 공포몰이를 주도하는 걸까? 이 물음과 관련하여, 최근 지지율(‘대통령으로서 직무수행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로 표명되는 대통령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는 지금 한국 사회에 현존하는 간극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낸다. 한편으론 한국 사회 이념 지형의 역사적 변화, 다른 한편으론 이런 변화에 무지하거나 이를 부정하는 대통령의 오류, 이 둘 사이의 간극이다.

 

일례로 한국갤럽이 진행한 91주 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해 긍정적인 응답자의 비율이 40대 이하는 10%대이며 50대가 되어서야 30%를 간신히 넘는다. 결코 요즘애들의 철모르는 투정이 아니다. ‘반공이란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고, ‘섹시한 공산주의자를 이해할 줄 알며, 사회적 다름을 존중하는 정치적 감수성을 체득해 온, 한국 사회의 젊은 주축 세대들의 중론이다.

 

202391주 갤럽리포트 갈무리. 사진=갤럽 홈페이지

 

최근 대통령의 공산 전체주의자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공격하며 자기도취에 마비되는 불쾌한 권력이다. 일상적인 대화라면 개인의 맹신적인 열광의 하나로 양해될 수 있을지 몰라도, 대통령이란 한 국가 내 유일, 그리고최고인 권력과 결합하면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이념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명백하게 유권자인 시민 대부분이 지지하지 않는다.

 

오로지 반공에 의존하는 통치의 역사란 얼마나 질기고 천박한가. 과연 한반도에 공산, 반공, -반공으로 이어지는 남루한 이분법 넘어 새로운, 창발적인 보다 나은 미래란 언제나 도래할 수 있는가.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미디어오늘 2023-09-16

 

 

매카시즘은 어떻게 무너질까?

오펜하이머1945년 맨해튼 계획이 아니라, 1954오펜하이머 사건을 다룬 영화다. 바로 원자력 분야의 매카시즘이 영화의 주제다. 세계의 파괴자로 자책하고, 군비경쟁을 우려하고, 수소폭탄 개발에 소극적이었던 오펜하이머를 빨갱이로 몰았던 매카시즘은 미국 민주주의의 오점이었다. 오바마 정부를 거쳐 바이든 정부에 와서야 미국은 얼룩을 지우고, 오펜하이머를 복권시켰다. 민주주의의 얼룩이 번져가는 한국에서 미국의 매카시즘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1950년 매카시 상원의원이 국무부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내 손안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 뒤, 워싱턴포스트의 허버트 블록은 매카시즘을 선동, 근거 없는 비방, 인신공격으로 정의했다. 홍범도 장군의 시련이 바로 대표적인 매카시즘의 사례다. 마치 1950년대의 찰리 채플린을 보는 듯하다. 찰리 채플린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고, 2차 세계대전 연합국이었던 소련 후원 행사에서 연설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렸고, 결국 사실상 추방당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독일과 일본에 맞서기 위해 협력했는데, 냉전 이후의 반공주의로 냉전 이전의 역사에 빨간 색깔을 칠한 사례다.

 

매카시즘의 특징은 거짓말이다. 중요한 것은 거짓 의혹이 적색 공포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오펜하이머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사찰하고 정보를 흘리는 정보기관이 대상을 정하고, 진실을 가리지 않는 언론이 키우고, 개인의 출세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앞잡이들이 나선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끊임없이 매카시즘이 부활하는 이유가 있다. 권력과 언론, 정치권이 얽혀 있는 거짓말의 카르텔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 때는 숨죽였다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얼룩을 깨끗이 지우는 노력이 그만큼 중요하다.

 

매카시즘은 어떻게 무너졌을까? 누가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졌다. 모래 위의 성처럼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리 언론을 장악해도, 국가 기관의 제도적인 폭력을 동원해도, 민주주의가 살아 있으면, 거짓말의 실체가 드러난다. 매카시즘은 정치의 병리 현상이고, 민주주의는 치유의 힘이 있다. 물론 파시즘은 다르다. 파시즘의 특징이 바로 조직화된 거짓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사실 자체를 경멸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조직 논리에 복종하는 악의 상투성을 밝혔다. 폭력으로 거짓말을 조직하는 파시즘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시민들이 생각을 나누며 오류를 인정하는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매카시즘의 가장 큰 약점은 불통이다.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소통 능력이 없고, 대화하기 어렵다.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추상적인 이념을 맹신하기에 일방적이다. 그래서 언제나 여론의 변화에 둔감하다. 매카시처럼 거짓말에 피로를 느끼던 대중이 돌아섰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몰락의 선을 넘는 이유도 불통의 예정된 결과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는 혐오와 대결만 난무하고, 무너지는 것은 국민의 삶이다.

 

매카시즘의 가장 큰 후유증은 신뢰의 붕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파도가 밀려오는 현실에서 신뢰의 붕괴는 치명적이다. 정부가 너무 자주 거짓말을 하면, 불신의 사회적 비용이 커진다. 작은 조직이든 큰 조직이든 신뢰 자산을 유지하고 키우는 일이 쉽지 않고, 시간이 필요하다. 언제나 신뢰를 만들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매카시의 결정적 판단 착오는 군대를 빨갱이로 몰았다는 점이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를 이념으로 흔들려 하다가, 결국 거짓말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몰락했다. 육군 청문회에서 조지프 웰치 변호사가 당신은 품위라는 것도 모르나요라고 물었을 때, 비방과 인신공격은 힘을 잃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한 합리적인 보수도 거리를 두었고, 황색언론도 흥미를 잃었다.

매카시는 대중의 관심이 끊어지자 술만 마시다 48살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했다. 매카시는 죽었지만, 매카시즘은 자주 부활한다. 매카시즘은 민주주의가 약점을 드러낼 때 나타나고, 민주주의가 작동할 때 무너진다. 매카시즘은 단순한 정치적 반동이 아니라, 보수의 분열을 의미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한다. 선거 때문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부정하고 납득이 어려운 궤변으로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기는 어렵다.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을 보고 실망하지 마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언제나 증명했다. 풀들은 항상 바람보다 먼저 일어선다.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한겨레 2023-09-17

 

김윤아

여당 대표가 개념 없는 개념 연예인으로 지목한 김윤아(사진)는 오랫동안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노래를 만들고 불러온 가수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 정답이 없는 질문들/ 나를 채워줄 그 무엇이 있을까/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살아있다는 괴로움/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그는 샤이닝에서 세상이 점점 더 개인을 외롭고, 괴롭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2006년 자우림(紫雨林)의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자우림은 곧 김윤아라고 할 정도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김진만·이선규와 더불어 26년째 3인조 혼성밴드로 활동 중이다.

 

출발은 4인조였으나 드러머 구태훈이 중간에 탈퇴했다. 데뷔 전 홍대 클럽에서 미운 오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영화 <꽃을 든 남자>의 주제가 헤이 헤이 헤이를 불러 명성을 얻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들여다본 자우림의 노래는 한두 곡이 아니다. 주한 미군의 성폭행 살해 사건을 바탕으로 한 노래인 동두천 찰리가 이를 증명한다.

 

동두천 찰리/ 꽃다운 미스리의 가슴팍을 찔러놓고/ 동두천 찰리/ 빛나는 계급장과 엄마 품에 안기었지/ 동두천 찰리/ 말 못하는 풀잎처럼 누워있는 너는/ 아직 한밤중/ 목이 말라 말이 없나 어디 들어나 볼까.”

 

청소년의 극단적 선택 문제를 다룬 낙화에서는 엄마 미안해요/ 아무도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어요/ 아무런 잘못도 나는 하지 않았어요/ 왜 나를 미워하나요라고 노래한다. 끝없는 경쟁 사회의 폐해를 다룬 광야에서는 너의 머릴 밟지 않고 그곳에 갈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오늘 하루도 살아남은 것이 기쁠 뿐인가라고 절규한다.

 

노래는 메시지다. 가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메신저다. 하여, 김윤아의 개념은 존중돼야 한다.

오광수 시인·대중음악평론가 경향 2023-09-17

 

 

또 하나의 언론 탄압

검찰이 뉴스타파와 JTBC를 압수 수색하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KBS·MBC 등의 보도를 심의하고, 방송통신위원회는 MBC·KBS 등의 팩트체킹 시스템을 점검하겠다고 나섰다. 서울시는 뉴스타파를 등록 취소할 수 있는 등록취소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202236일 뉴스타파는 부산저축은행 불법 대출 사건 관련자인 조우형씨가 2011년 기소되지 않은 것에 당시 사건 주임검사였던 윤석열 중수2과장 관련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허위이고 대선공작이기 때문에 대대적인 수사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사형에 처해야 할 반국가범죄라는 극언까지 했다.

 

대장동 개발비리의 핵심 인물인 김만배씨는 20219월 뉴스타파 전문위원인 신학림씨를 만나 대장동 사건의 전모를 설명하는 과정에 조우형씨가 기소되지 않고 참고인 조사만 받고 풀려난 것은 자신이 박영수 변호사를 소개해 잘 무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스타파는 보도하기 전 박영수, 대선 후보 윤석열 등에게 관련 질문을 했으나 박영수 측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고, 윤석열 캠프는 응답하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보도에 반론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김만배씨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는 의미다. 사법부가 인정하는 위법성의 조각사유가 성립한다.

 

하지만 여당 측은 녹음한 대화 내용을 뉴스타파 측에 전달한 신학림씨가 김만배씨에게 책값으로 16500만원을 받았기 때문에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공작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사안이 대선공작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대장동 사업을 설명하는 72분의 대화 내용 중 조우형씨와 윤석열 후보 관련 내용은 1~2분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내용이 알려지면 김만배씨에게 불리하다. 게다가 당시는 윤석열 후보가 대선 후보로 확정되기 전이다. 김만배씨의 속내야 어떻든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의 인터뷰로 볼 수 있는 정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검찰은 정보통신망법의 명예훼손 조항을 적용하면서 중앙지검에 무려 10명으로 구성된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민주 국가에서 대통령의 명예훼손 수사가 적절한 지도 의문이지만, 명예훼손 수사를 하다가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검찰 수사 인력이 자연스럽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대선공작으로 전제하고 사건을 키우려는 속내가 엿보인다. 더군다나 언론의 압수 수색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상의 언론 자유를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사 또는 기자의 협조가 없거나, 압수 수색 말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이다. 검찰은 그런 과정을 거쳤을까?

 

방송통신심의위의 행태도 지나치다. 정연주 위원장을 석연찮은 이유로 해촉하고 새로 위촉된 류희림 위원장이 관행과 다르게 방송심의소위원장을 맡겠다고 해서 관계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방송심의 관련 사항들을 직접 챙기겠다는 의미였을까? 그리고 소위원회를 열어 뉴스타파 보도를 인용 보도한 KBSMBC 등의 의견진술을 듣는 결정을 했다. 의견진술은 법적 제재를 결정하기 위한 사전단계다. 직접 취재한 보도도 아니고, 인용한 보도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그런 심의 조항이 있는지 의문이다.

 

국제기자연맹을 비롯한 국내 현업 단체, 시민 단체들은 검찰 등의 과잉 대응 행태를 언론 탄압이라고 규정했다. 윤석열 정부가 특정 언론을 적대시하고, 방송정책 기구를 장악해 공영방송을 침탈해온 일련의 행태를 고려하면 이번 사건 역시 또 하나의 언론 탄압으로 보인다. 즉 대통령, 검찰 등을 비판하는 미운털을 뽑아내려는 행태로 보인다. 그러나 그 미운털은 주권자인 시민을 대신해서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다. ‘미운털 뽑기가 주권자의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두려워하기 바란다.

김서중 성공회대 미디어콘텐츠융합자율학부 교수 경향 2023-09-17

 

 

이데올로기의 낙인찍기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돌아왔다. “제일 중요한 게 이념입니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이 나라를 제대로 끌고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이념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그러면서 타도의 대상으로 내세운 이념이 공산전체주의.

 

21세기도 중반을 향해가는 이 무렵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의외로 그 해답은 이념이라는 말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모든 사유에는 세 가지 고유한 전체주의적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이데올로기 사유에 빠진 이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자신이 내세우는 이념 하나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이런 경향을 총체적 설명이라 부르는데, 이에 빠져든 이들은 이념으로 과거에 대한 완전한 설명, 현재에 대한 완벽한 지식, 미래에 대한 믿을 만한 예측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이 집착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 역사.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자신이 내세운 이념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현재와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정작 이들은 우리 곁에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제대로 설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들의 싸움은 주로 이미 죽은 것에서 시작한다.

 

둘째, 이데올로기적 사유에 빠진 이들은 경험의 세계를 무시한다. 같은 사건에서도 각자가 다른 경험을 공유하는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이런 일이 가능해지려면 이데올로기가 경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경험이 이데올로기에 들어맞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현실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주장에 따라 바꾸기 시작한다. “적의 개념이 음모 개념을 대신할 뿐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고 마주하는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동적으로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적 태도가 자리 잡는다.

 

셋째, 이데올로기에 빠진 이들은 현실 영역에서는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의 일관성에 집착한다. 그래서 이들은 경험에서 오는 귀납적 사고 대신 늘 결과가 이미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연역적 논리 고리 안에 갇히고 만다. 이런 고리 안에 갇히게 되면 타인의 다른 경험, 다른 세계의 경험을 볼 수 없게 된다. 자신이 빠져든 이데올로기가 논리적으로 지향하는 하나의 세계만 존재하고, 그 세계는 다른 이들의 경험을 철저히 무시해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렌트의 설명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공세만 해도 그렇다. 이데올로기에 빠진 자들은 언제나 역사와 싸운다. 역사의 물길이 자신이 내세운 세계와 다르다면 자신이 내민 이데올로기의 세계관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 어디에도 없을 일관성에 집착하는 이들에겐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내칠 이유가 된다. 자신들이 떠받드는 박정희 대통령이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헌장을 서훈했다는 사실도 의미는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들에게 문제는 현실이 이데올로기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지,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은 윤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서 볼 수 있듯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된다. 심지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는다. 아렌트의 설명처럼 적의 개념으로 음모의 개념을 대신하는 이들에게 이런 과정은 자동적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이들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받든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저지르는 모순에서 해방될 자격이 있다고,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정당성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현실 영역에서는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의 일관성이 강요되는 대상은 늘 그들이 적으로 삼는 존재다.

 

하지만 이런 일관성이 비폭력적으로, 평화롭게 달성될 수 있을까? 매카시즘의 경험은 미국 같은 자유 사회에서도 그렇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승전에 원자폭탄 개발로 결정적 공헌을 한 오펜하이머마저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마치 홍범도 장군처럼 말이다. 홍 장군을 통해 우리 정부는 넌지시, 아니 대놓고 말한다. 누구라도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면 그 낙인을 찍겠다고 말이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경향 2023-09-17

 

 

진보는 왜 교권을 외면했나, 보편적 약자의 종말

교권 침해라는 개념은 오류다. 교권은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교사에 대한 존중은 문화적 전통이었을 뿐, 교권을 보장하는 법령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10여년 전 교육청에 근무하다 법령상 교권이 없음을 절감한 적이 있다. 첫째로 교사가 자신이 담당할 학년과 과목을 개학하기 겨우 1~2주일 전에 통보받는다. 창의적인 기획, 충실한 준비를 하기에는 턱없이 촉박하다. 둘째로 교사가 학생을 방과후에 남겨서 개별적인 보충지도를 할 권리가 없다. 학부모가 아이를 보내달라고 하면 당장 귀가시켜야 한다.

 

시스템과 법령이 교사의 교육활동을 지원하거나 보호하지 않으니, 뭔가를 해보려고 의욕을 발휘한 교사는 상처받고, 남들 하는 대로 적당히 따라 하는 교사는 안전했다. 학교는 그렇게 안분지족을 향해 진화했다(20211223일자 칼럼 교사에게 권력을’, 2022416일자 칼럼 공교육 걱정없는 세상참조).

 

2000년대까지 학교는 법령상 교권과 학생인권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폭력과 부조리가 횡행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2010년대 들어 학생인권조례, 체벌 금지, 아동학대법 등 학생인권의 수준을 높이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교권의 수준은 그만큼 높아지지 못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교권 관련 법률인 교원지위법(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을 보자. 교권 침해 사례가 발생하면 교장에게 보고하고 교권보호위원회를 소집하라고 되어 있다. 정작 교사가 현장에서 즉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아무것도 없다. 수업방해행위를 하는 학생을 교실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고,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을 막기 위해 완력을 사용하기도 어렵다. 교사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긴급행동권과 같은 구체적권리 조항들인데, 이것이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러니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이 침해되었다는 착시현상이 나타났다. 백화점에서 고객을 상대로 짝퉁을 팔고 현금 결제를 강요하는 등 온갖 부당행위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 바로잡으려 소비자보호법을 제정했고, 이로 인해 소비자의 권익이 보호되었다. 그런데 차츰 소비자 중에 판매사원에게 갑질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갑질은 소비자보호법 때문인가? 소비자보호법이 너무 강해 갑질이 일어났으니 소비자보호법을 없애거나 약화시켜야 하는가? 이는 명백하게 논리적 오류다. 소비자보호법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보호법을 제정하고 효력을 높이는 것이 올바른 해법이다. 이를테면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이 필요한 것이다.

 

 

학생인권조례의 뼈대는 때리지 말라차별하지 말라이고, 그 어디에도 모욕이나 수업방해를 조장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학생인권조례가 교권을 침해했다는 주장은 완벽한 오류다. 지금의 사태는 학생인권조례가 있어서생긴 게 아니라 교권보호법령이 없어서생긴 것이다.

 

교권 부재, 진보·보수 다 직무유기

그렇다면 교권을 법령으로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왜 지속적으로 묵살당했을까? 여기서 진보와 보수가 모두 직무유기를 했다. 보수의 직무유기는 이유가 단순했다. 보수는 가뜩이나 학생인권조례나 체벌 금지를 반대해서 비난을 산 전력이 있는데, 여기에 더하여 교권을 옹호하겠다고 나섰다간 스스로에게 찍혀 있는 낙인을 더 깊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한마디로 욕 먹기 싫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진보의 직무유기에는 내밀한 사상적 이유가 있다. 진보 세력은 약자 보호가 자신의 주요한 임무라고 생각하는데, ‘아동이 대표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에게 약자를 옹호한다는 것은 곧 특정한 집단전체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었다. 즉 진보의 약자 개념에는 개별성맥락이 결여되어 있다.

 

약자(minority)에 대한 대중의 감수성은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나는 2000년대부터 여러 커뮤니티들을 관찰하다가 약자에 대한 대중의 태도 변화를 발견했다. 맨 처음 눈에 띈 것은 노점상이었다. 과거엔 노점상이 단속을 당하면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2000년대 중후반이 되면 노점상이 단속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거나 최소한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우세해진다. 그들 중에는 기업형 노점상도 있고, 생계형 노점상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세금과 임차료를 부담하면서 장사하는 일반 상인들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논리였다.

 

비슷한 시기에 노동자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 소속 노동자가 2차 또는 3차 하청업체의 사장보다 약자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노조는 약자를 위한 조직이라는 인식에 균열이 생긴다. 개별 기업 수준에서는 노조가 약자(노동자)를 옹호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도 과연 노조가 약자를 옹호할까? 이로 인해 특히 청년 세대에서는 노조를 원하지만 동시에 노조를 욕하는기이한 양가감정이 발전한다. 그들이 보기에 대기업 정규직 노조란 근본적으로 위선적인 조직이다.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것은 길고양이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2010년대 길고양이는 인간에 의해 버려진, 돌봐야 할 가련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2020년대 길고양이는 습관적으로 소형 포유류와 조류를 사냥하는 유해 동물이다. 관악산에 다람쥐가 부쩍 줄어든 것은 등산객들이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면서 길고양이들이 산에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집단적 약자의문은 세계적 현상

지난 3월 제주도 인근 마라도에서는 천연기념물 뿔쇠오리가 길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사태를 막기 위해 길고양이를 제주도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뜨거운 감자, 여성이 약자냐는 반문이 등장한다. 여성이 집단으로서 약자로 상정됨으로써 여성에 대한 혜택이 정당화되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하지만 많은 이대남들은 생각이 다르다. 군대도 가야 하고 결혼하면 집도 마련해야 하며 심리적 부양 의무도 더 크게 지는 자신이 오히려 더 약자다. 통계적으로는 가해자가 주로 남성이고 피해자는 주로 여성이지만, 개별 사건에서는 남성이 무고의 피해자일 수 있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이 교사를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하는 아동학대법에 대한 반발과 닮은꼴임은 의미심장하다.

 

집단적 약자성이 의문시되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영국 중부의 소도시 로더럼에서는 파키스탄계 이민자들이 1997년부터 2013년까지 1400명의 백인 여성 청소년을 성착취해서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다. 저소득층 백인 소녀들은 이들의 조직적 폭력과 가스라이팅에 속수무책이었고, 경찰과 지역 정치인들은 상당한 단서가 있었는데도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이민자·유색인종·이슬람 등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중첩적으로 지닌 가해집단의 정체를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PC)에 의한 일종의 인식적 장애란 주장이 일었다.

 

올해 6월 미국에서 소수자 우대법(affirmative action)이 위헌 판결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60년대 소수인종의 대학 입학에 혜택을 주기 위해 제정된 이 법의 수혜자는 의사나 변호사를 부모로 둔 부유한 흑인 학생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백인 중에서도 저소득층은 열악한 교육환경에 처해 있는데, 과연 이들보다 저런 흑인이 더 약자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진보 교육감들은 상당수 교사 출신이다. 교사의 구체적 권리를 법령화해달라는 요구가 전달될 만한 여러 통로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이를 수용하지 못했을까? ‘약자 옹호는 진보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진보의 패러다임에서 약자란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동이 특정한 경우에 폭력 행사의 주체이거나 상황의 지배자일 수 있음에 애써 눈감은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감수성은 진즉 달라졌다. 14세 미만 촉법소년의 범죄행위에 대한 분노의 수위가 높아진 것이 대표적인 증거다.

 

지금의 교권 논의는 약자개념의 개별화 및 맥락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과제를 진보세력에게 부여한다. 이러한 작업이 노동자, 여성, 난민 등 여러 집단으로 확장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미 대중의 약자 개념은 상당히 변동했다. 이러한 변동을 백래시(backlash)의 사례로 보고 배척할 것인가,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반영으로 보고 수용할 것인가? 아마도 후자 속에 86세대와 단절한 새로운 진보의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이범 교육평론가 경향 2023-09-18

 

 

부동산 PF 부실 폭탄 돌리기가계부채로 전가하지 말아야

정부는 가계부채가 관리 가능한 수준이고 당장 급격하게 부실화할 가능성은 작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가파르게 상승하던 가계대출 연체율은 0.33%로 최근 다소 하락했다. 반면, 프로젝트파이낸싱(PF·피에프) 대출 연체율은 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증권사의 연체율은 17%를 넘겨 우려할만한 수준이다. 이러한 추세를 보면 133조 원 규모의 피에프 대출이 문제지, 1000조 원의 가계대출은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계부채의 잠재 위험은 언제든지 가시화할 수 있다. 최근 가계대출 연체율의 하락은 상당 부분 대출 잔액의 급증에 기인한다. 또한, 지난 6월 은행권은 3조 원이 넘는 원화 대출채권을 회수할 수 없는 것으로 확정하고 이를 장부에서 제거했다. 이러한 대규모 부실채권 정리는 2019년 이후 처음이다. 연체율의 분모에 해당하는 대출채권 잔액은 증가하고 분자가 되는 기존 연체채권은 감소하는 가운데, 연체율이 단지 소폭 감소했다는 것은 분자의 또 다른 항목인 신규 연체채권이 상당한 규모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연체율은 다른 지표와 달리 완만히 증가하지 않고, 외부 충격에 따라 일시에 폭등하는 행태를 보인다. 200910%대에 이르던 저축은행 피에프 대출 연체율이 2011년 순식간에 40%를 넘긴 것이 그 예다.

 

가계부채의 더 큰 위험은 정부가 지속적으로 피에프 대출의 부실을 가계로 이전시키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정부가 이러한 정책적 방향을 잡은 시점은 집값 하락이 본격화하면서였다. 피에프 부실은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악화시켜 시스템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건설사의 도덕적 해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정부 개입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건설사에 대한 직·간접적인 금융지원에 더해, 부동산 거래와 가계대출 규제 완화를 통해 개인들이 주택을 매입하도록 적극 유도했다. 그 결과, 실수요 아닌 투자자들이 대거 부동산과 분양시장에 뛰어들었고, 5개월 새 분양가가 40% 이상 급등하는 가운데 청약 경쟁률은 수백 대 일에 이르는 투기 광풍이 재현됐다.

 

아파트를 높은 가격에 분양받음으로써 개인들은 피에프 부실을 가계부채로 떠안게 됐다. 특히 자기자본이 거의 없이 높은 가격에 분양을 받은 투자자들은 집값 일부는 자신의 직접 대출로, 나머지는 임차인의 전세자금 대출로 충당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는 분양가 대부분이 가계부채의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대출 취급 과정에서 금융기관이 차주의 채무상환 능력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전세자금 대출에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디에스알) 규제가 적용되지 않고 있고, 주택 매입자의 디에스알 계산에는 전세 보증금이 포함되지 않는다. 거주목적으로 분양받은 경우에도, 채무자가 생전에 갚을 수 없을 만큼 긴 소득 기간을 적용함으로써 대출금액을 늘리고 있다. 이러한 대출은 비우량 대출이 횡횡하던 2008년 이전 미국의 죽은 자에 대한 대출과 닮았다.

 

장기 주택담보 대출이 비판을 받자 정부는 이러한 대출이 통상 만기 이전에 상환된다고 반박했다. 대출 자체는 비상식적이지만, 대부분의 장기대출이 조기에 상환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평생의 소득으로도 상환하기 어려운 거액의 대출을 차주는 어떻게 조기 상환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시나리오는 집값이 상승해 대출 시점보다 높은 가격에 부동산을 처분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집값은 정부의 기대와 같이 계속 상승할 수 있을 것인가? 돌이켜 보면, 피에프와 역전세에 따른 가계부채의 부실 우려는 집값 하락과 금리상승으로 촉발됐다. 이후의 정부 정책은 최소한의 부동산 거래를 활성화해서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미 상환능력을 크게 넘어선 가계가 갚을 수 없는 더 많은 부채를 부담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하지만 다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한다면 현재의 가계대출은 결국 상환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피에프 부실을 가계부채에 전가하는 방식은 현재의 가계부채 규모가 함의하는 위험성을 고려하면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폭탄 돌리기에 불과하다.

 

정부가 이제라도 50년 만기 대출에 제동을 건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40년 만기 대출도 길다. 다음은 임대인과 임차인의 대출 모두에 디에스알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피에프 부실은 별도로 처리하고, 정부가 점진적이지만 적극적으로 가계부채 축소에 나서길 바란다.

안재환 | 인하대 경영대학원 부원장 한겨레 2023-09-18

 

 

불평등 방치한 국가의 책임과 재정건전성

계층 간 갈등을 심화시켜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질 수 있다.’ 양극화나 불평등에 관한 경제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최근 사회불만 범죄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경제면에서 접했던 내용이 현실화하고 있다. 성남 서현역과 서울 신림동 흉기난동뿐 아니라 며칠 전에는 7층 건물 옥상에서 아래로 벽돌과 나무토막을 던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여 범행을 저질렀다는 공통점이 있다.

 

2021년 선진국 그룹에 편입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설립 이래 57년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된 사례는 한국이 처음이었다.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그해 미국 여론조사업체 퓨 리서치센터가 17개 선진국 성인 19000명을 상대로 무엇이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가를 조사했다. 한국은 물질적 풍요1순위로 꼽았고, 2위는 건강’, 3위는 가족이었다. ‘가족1순위였던 14개국 사람들과는 달랐다. ‘건강’(스페인)사회’(대만)를 꼽은 나라도 있었다. 매경이코노미가 지난해 13~18세 청소년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물었다. ‘(물질적 풍요)’이라고 답한 청소년이 30.1%(복수응답 기준)로 가장 많았다.

 

조사 결과만 보면 한국 사회가 돈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지도층이라고 불렸던 이들일수록 돈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 후보자의 재산 내역을 보면 대부분 투기에 가까운 투자로 부를 불렸다. 세금을 덜 내기 위해 온갖 치졸한 편법을 동원한 사례도 흔하다. 지도층이 아니라 천박한 졸부일 뿐이다. 문명 이전 사회에서 지위를 얻는 방법은 물건을 포기하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반대가 됐다.

 

삶의 질은 따지지 않은 채 급속한 경제성장에 매달린 결과인 것 같아 부끄럽다. 인구가 5000만명을 넘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서는 등 규모는 커졌지만 삶의 질 지표는 바닥권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음에도 지난해 산업재해 사망자는 2223명으로 전년보다 7%가량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중남미 3개국을 제외하고는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 자살률은 최고 수준이고, 행복도는 바닥권이다.

 

6·25전쟁 직후 한국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고, 실제 그렇게 자수성가한 부자도 있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에 속도가 붙으면서 빈부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는 대물림돼 불평등이 고착화하고 있다. 부에 따라 서열을 매기는 사실상 계급사회가 됐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이 확산됐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소득 5분위(상위 20%) 가구의 순자산은 10273만원으로 1분위(하위 20%) 가구(15472만원)에 비해 6.5배 많았다. 20064.5배였던 것에 견주면 격차가 확대됐다. 자본주의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부자일수록 부를 늘릴 가능성이 큰 사회가 됐다.

 

경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해진 사회는 갈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발간한 유럽 공중보건 저널33개국의 불평등과 강력범죄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 결과, 불평등은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살인·폭력 등 범죄를 유발한다고 밝혔다. 반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작은 사회는 건강 수준이 높고, 폭력도 적게 발생한다.

 

한국 사회는 불만’ ‘분노’ ‘적대감따위의 격한 감정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거나 해소할 방법이 없으니 사회불만 범죄로 표출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처벌을 강화하면 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범죄의 원인을 찾아내고, 근본적인 예방책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불평등을 해소해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게 시급하다. 공정한 경쟁 시스템을 만들고, 경쟁에서 탈락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시민의 기본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공공사회지출은 2022년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14.8%OECD 국가 평균보다 6.3%포인트 낮았다. 정부가 내년 보건·복지·고용 예산을 올해보다 7.5% 늘리기로 한 것은 환영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재정건전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장기적 안목의 정책이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경향 2023-09-19

 

카니발 정치의 비극

정쟁만 있고 진정한 정치는 실종된 한국 사회에서 정치 행위는 오락이 되고, 예능이 된 것처럼 보인다.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한국의 정치는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온갖 기술을 다 사용한다. 정치인들은 때로는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누아르를 연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지한 논의 대신 비방과 풍자에 능한 카바레티스트가 된다. 우리나라에 정치를 풍자하는 카바레 예술가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카바레 정치인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일에 종사하는 정치인에게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 따위를 비웃는 비판 행위는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비판에서 자기 자신을 제외할 때 발생한다. 자신은 전적으로 옳다고 믿고 남의 결점을 비웃으면서 폭로하고 공격하다 보면, 결국에는 옳음과 그름의 문제는 사라지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욕설만 난무한다. 정치적 비판은 해학적이어야 하는데, 요즘의 정치적 공방은 파괴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다.

 

해학(諧謔)의 한자가 말해주는 것처럼 현재는 사이가 멀어졌어도 다시 뜻이 잘 맞게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던지는 정치적 농담만이 익살스럽고 멋이 있다. 우리 정치인들의 말에는 이러한 품위와 품격이 없다. 공격적인 선동만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은 이렇게 정치를 예능으로 만든다.

 

그런데 맨날 똑같은 얼굴이 판에 박힌 프로그램만 반복하는 예능은 재미가 없다. 요즘 예능도 재미없지만, 사실 정치는 훨씬 더 재미가 없어졌다. 그 원인을 찾다 보면, 둘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왔던 사람만 계속 나온다. 공감과 익살보다는 과장과 자극적인 소재에 집중한다. 사람의 관심을 돈벌이 또는 득표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관심을 끌기 위해 악의적인 말로 상대방을 도발한다. 뭐 하나 잘된다 싶으면 모두 따라 한다. 신선하지 않은 사람들이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 상대방이 주는 부정적인 감정에 집중하는 것을 어그로(aggro)’를 끈다고 하는데, 분란과 전쟁을 위한 지속적 도발 행위가 재미있을 리 없다.

 

민주주의 파괴하는 카니발 정치

우리 정치인들은 상대를 도발해 적의를 갖게 하는 어그로로 국민의 관심을 끄는 데 중독된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정권이 출범했음에도 신선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정치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두 사람에게 집중된다. 자기의 정치적 권력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필요한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연일 상대를 악의적으로 도발한다. 이 대표는 무기한 단식을 시작하면서 오늘부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무능 폭력 정권을 향해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전쟁을 하면서 말을 골라 쓸 필요가 없어서일까? 사즉생의 각오로 민주주의 파괴를 막아내겠다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거칠고 선동적이다.

 

이 대표의 단식투쟁은 우리 정치가 이미 카니발화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카니발화는 사육제 축제를 가리키는 독일어 단어 ‘Karneval’에서 유래한 용어로 풍자 또는 사회적 비판을 목적으로 터무니없는 과장의 형태로 기존의 관습을 뒤집는 과정을 의미한다. 화려한 의상, 활기찬 거리 파티 및 정교한 퍼레이드로 구성된 브라질 축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풍자 문화이다. 물론 카니발의 묘미는 카니발 시즌과 축제가 끝난 후에는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통상적인 규칙과 관계를 잠시 중단하는 데 있다. 단식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극단적 정치 행위이다. 자신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정치적 행위가 뉴노멀이 되면 정치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정권에 반대하고 저항할 수 있는 다른 합리적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정치 행위가 바로 단식이다.

 

과연 지금의 정권이 어떤 반대의 목소리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 정권인가? 단식 외에는 정권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정말 없는 것인가? 민주당이 의회 독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절대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여소야대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물음에 결코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진영으로 갈라진 우리 사회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여전히 단식도 지지하겠지만, 국민 항쟁의 대열에 참여할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지금 명분도 없는 단식투쟁을 시작한 것일까?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과장된 방식으로 국민의 관심을 끌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의 건강과 한국 정치의 건강을 위해 단식을 중단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카니발 정치다. 방탕한 축제 후에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기는커녕 과장된 일탈이 이어지는 카니발 정치는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 정권이 잘못된 방향으로 벗어났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토론과 타협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자극한다면, 우리는 결코 민주적 정상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정권 교체는 과거 정권에 당했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보복 정치의 도돌이표일 뿐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추구하는 카니발 정치에서는 사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 같으면 정치 생명이 끝났을 스캔들을 겪고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정치인들을 보면, 정치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도 유리하게 만드는 반전의 기술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가 법정에 출석하면 그의 인기가 무너지고 정치적 생명이 끝날 것이라는 많은 사람의 추측과 달리 그는 여전히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는 부정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반전시키는 포퓰리즘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는 재미없어진다

카니발 정치는 치명적인 스캔들조차 정치적 자본으로 만드는 반전의 권력 기술에 기반한다. 이들은 국민의 관심을 끄는 스캔들을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더 많은 관심을 끌기 위해 더 자극적인 선동을 한다. 카니발 정치에서는 어느 것이든 반대 방향으로의 영구적인 반전이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된다. 진실은 가짜뉴스가 되고, 가짜뉴스는 진실이 된다.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서로를 비판하고 비방하는 정치적 수사는 이미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윤석열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능’ ‘무식’ ‘불통이라는 민주당의 정치적 수사는 무능’ ‘독선’ ‘불통이라고 문재인 정권을 비판했던 보수 세력의 정치적 수사와 판에 박은 듯이 똑같다. 윤 대통령이 정치적 반대 집단을 반국가세력이라고 매도하고 배제하는 것은 전 정부의 적폐 청산논리를 그대로 따른다. 우리 사회에 정말 자유 대한민국을 흔들고 위협하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많다면, 그 사례와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반국가세력이란 용어는 오직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한 사운드 바이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이 이러한 반전의 권력 기술을 꿰뚫어 보지 않는 한 카니발 정치는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반전 기술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카니발 축제에서 들었을 수도 있는 정치적 농담이 이 물음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치고받는 싸움에 연루된 두 남자가 재판을 받고 있을 때, 폭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묻는 판사에게 한 사람이 분개해 이렇게 말했다. “판사님, 그가 반격했을 때 모든 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우스갯소리의 핵심은 현실을 거스르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반전이다. 내 아이 손이 친구 뺨에 맞았다는 어이없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이 과도한 자기중심주의가 반전의 기술을 가져온다. 내가 때린 것은 당신이 때린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고, 당신이 하는 짓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란다.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의 합의가 없으니 지켜야 할 규칙도 없고, 품격도 없다.

 

반성과 성찰, 용서와 화해 없이 계속되는 자극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이렇게 정치는 재미없어진다. 어떻게 이 카니발 정치의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경향 2023-09-19

 

 

방통위의 가짜뉴스 대응 패스트트랙’, 사실상 검열이다

신학림 전 뉴스타파 전문위원의 김만배 녹취파일 보도와 관련하여 허위 논란이 불거진 뒤 대략 20여일 동안 언론계는 그야말로 난리를 만났다. 여당 대표는 해당 보도를 대선 정치공작으로 단정하고 이를 극형에 처해야 하는 중대한 반국가 범죄라고 무시무시한 말을 쏟아내고, 이에 맞장구라도 치듯이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인터넷 언론까지 심사해 악의적 허위 보도에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추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누가 뭐래도 신학림 전 위원이 책값이라며 김만배씨와 거액 돈거래를 한 점은 부적절한 행동이겠지만, 이후 뉴스타파에서 공개한 녹취록 전문을 보면 당시 김만배 인터뷰 보도가 책값을 대가로 완전히 조작된 허위 인터뷰를 내보냈다고 단정할 만한 확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 해당 녹취록이 대가에 의한 명백한 허위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정치권과 방통위는 누가 무슨 버튼이라도 누른 듯이 언론 전체를 대상으로 가히 폭주하고 있는 셈이다.

 

급기야 지난 18일 방통위가 허위 뉴스에 대한 구체적 대책으로 심의 패스트트랙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정작 독립성을 갖고 심의를 담당해야 하는 기관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인데 이를 대신해 방통위가 심의 정책을 발표한 형식도 부적절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가히 깜짝 놀랄 만한 것이다. 발표된 내용의 핵심은 방심위에서 인터넷 뉴스 중 가짜 뉴스 심의가 접수되면 원스톱으로 접수 순서와 상관없이 신속 심의해 포털사업자에게 선제 조치를 요구하겠다는 내용인 듯싶다. 물론 포털사업자의 자율규제를 통한 선제 조치를 우선 추진한다고 하지만, 이 서슬 퍼런 시대에 포털사업자들이 정부 선제 조치 요청에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다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가짜 뉴스로 접수되면 심의기관의 자의적 판단과 요청으로 우선 조처될 수 있는 셈인데, 이는 언론 보도의 진실성이 편의점의 3분 즉석요리가 아닌 이상 커다란 언론자유 침해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 문제가 되는 김만배 녹취파일 보도만 봐도, 과연 누가 그 보도를 보자마자 척 보면 압니다! 이건 가짜!’라고 판정할 수 있겠는가? 또한 대부분 선거 보도는 유권자에게 투표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인데, 보도의 진실 여부를 심의기관이 심의 중이라는 이유로 선거가 끝날 때까지 차단한다면 애초 뉴스로서의 본질적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론에 대해서 사전 억제(Prior Restraint)의 금지 원칙을 갖고 있으며 적지 않은 언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을 지켜왔다. 설사 오류가 있더라도 그 오류에 대한 정부의 사전적인 간섭과 검열은 오히려 진실의 발견을 가로막을 뿐이라는 것은 근대 언론자유 사상의 출발이자 뿌리이다. 단언하자면,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의 금지 원칙은 우리의 근대 이성과 표현의 자유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언론중재법 개정을 시도하면서 열람차단청구권이 논란이 됐다. 피해구제를 위한 것이더라도 언론 보도의 열람 차단이 정치인 등에 의해 자의적으로 적용될 우려가 있기에 당시에도 언론계는 강하게 반대하였으며,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의힘이 이를 얼마나 강력하게 비난했는지는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해볼 수 있다. 하물며 당시 언론중재법의 열람차단청구권은 현재 방통위가 밝힌 패스트트랙 같은 즉각성을 갖는 임시 조치가 아니라 사후적인 피해구제 수준이었지만, 언론계도 그리고 당시 야당도 그렇게 반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방심위를 통해 하겠다는 패스트트랙은 임의적이고 즉각적이라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열람차단청구권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사전 억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현 정부가 처음 출범할 때부터 좋아! 빠르게 가!’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바는 아니다. 다만 요즘 들어 더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그렇게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목적지가 미래가 아니라 엠비(MB) 시절과 같은 해묵은 옛날이라는 것이다. 10여년 전 그때 방송 뉴스에서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선거는 뒷전이고 아스팔트에 계란을 던져놓으며 날씨가 덥다는 소식을 첫번째 헤드라인으로 다루곤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패스트트랙을 타고 우린 또 그곳으로 그렇게 좋아! 빠르게가려나 보다.

홍원식 | 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 한겨레 2023-09-20

 

 

김양래, 518을 유엔으로 가져가려했던 하얀 셔츠의 사나이

김양래 전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를 추모하며

지난 98일 소천한 김양래 전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스스로의 삶을 5.18 민주항쟁의 진상규명과 국제적 위상 제고를 위해 바쳤다. 내가 기억하는 김양래 이사는 언제나 아이디어가 넘쳤고, 목표를 정하면 무섭게 추진했던 비젼있는 지도자였다.

 

하얀 셔츠의 사나이

나는 김양래 이사를(이하 존칭 생략) 80년대 내내 망월동 희생자 묘역을 안내하던 '하얀 셔츠 입은 훤칠한 사나이', 광주 비디오를 만든 전설의 인물로만 알고 있었었다. 그 전설을 처음 만난 것은 2016. 김양래는 나에게 사실상, 해적판의 홍수 속에 죽어가던 나와 닉 마마타스가 번역 편집한 "죽음의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의 영문판 "Gwangju Diary"5.18 재단에서 개정출판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개정판의 판권을 재단에 기부했고, 개정판 준비하는 삯으로 상당한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덕에, Gwangju Diary에 기여한 나를 포함한 네 사람, 저널리스트 팀 셔록,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그리고 닉 마마타스 모두 처음으로 원고료다운 원고료를 받으며 개정판 작업을 할 수 있었다.

 

UN

김양래가 나를 광주로 불러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이듬해 5월에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항쟁기념 행사를 주최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당시로서는 워낙 원대하기만 아이디어였다. 사실, 요원한 얘기였다. 박근혜가 탄핵됐더라도, 황교안 대행 체제에서 그런 행사를 지원할 리 만무였다. 다만 김양래가 국회와 외무부를 끊임없이 찾아가 읍소하는 지역 뉴스를 인터넷으로 보며 그냥 안되는 일에 애쓰는구나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420, 불쑥 뉴욕에 왔다. 정부를 설득 하여, 526일에 유엔의 공간은 잡았으나, 연사도 프로그램도 못 정했으니, 여하튼 한 번 해보자고 말했다. 김양래가 뉴욕에 머무는 5일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며, 움직이며 회의를 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집단 기억"라는 행사명은 유엔대표부 가는 지하철 안에서 결정할 정도였다.

 

문제는 연사였다. 내 개인 친분으로, 커밍스와 항쟁을 취재한 AP 기자 테리 앤더슨 정도는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언제나 바쁜 커밍스에 대해 자신은 없었다. 나는 도널드 그레그를 초청할 것을 제안했다. 박정희 정권 때 CIA 한국 지부장을 지냈고, 5.18 당시 백악관 아시아 안보담당관에, 80년대말 주한 미대사를 지낸 인물 정도는 와야 구색은 갖출 것 같았다. 게다가, 명색이 유엔 학술 행사인데, 다른 편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냐 것이 내 논리였다.

 

김양래와 나는 촉박한 일정을 쪼개, 뉴욕 교외에 사는 그레그를 찾아갔다. 난색을 표하는 그레그에게 김양래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반미운동 열심히 한 사람이고, 여전히 반미적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은 CIA 와 백악관, 그리고 주한 대사로서 한국을 줄곧 다룬 사람 아니냐? 당신이 5.18 대해 아는 것만 이야기하면 된다. 특히, 북한의 개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 명백히 말하면 된다." 그는 당시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는 5.18 북한 개입설을 전 CIA 간부의 입으로 쳐버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잠시 골똘히 생각한 그레그는 연사 초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익 그레그가 오니, 좌익 커밍스의 성격 상, 거절하기 힘들게 된 것 아닌가. 결국 커밍스도 수락했다.

 

그 후 3주 남짓한 준비기간은 모두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해야 할 일, 처리할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뉴욕 인권단체 민권센터의 최고의 일꾼 차주범과 나는 뉴욕에서, 김양래는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정말 젖먹던 힘까지 동원, 행사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나는 가끔 김양래가 왜 이렇게 유엔행사에 집착할까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행사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보수 언론조차 대대적 보도했다. 공식적으로 초청하지도 않은 스웨덴 유엔 대사 올로프 스쿠프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테리 앤더슨의 현장 증언은 청중들을 울렸고, 유엔 한복판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도 다같이 불렀다. 커밍스는 스스로가 참여한 한국 관련 행사 가운데 최고라는 찬사를 했고, 그레그는 6개월 정도는 준비한 것 같은데 수고했다는 과찬도 했다.

 

UN 산하 NGO

"이제 5.18 재단을 유엔 산하 비정부기구(NGO)로 등록하는 일이 남았어." 김양래가 뒷풀이 저녁식사에서 그렇게 툭 한 마디를 사람들에게 던졌다. 그때서야 그가 유엔행사에 매달렸는지를 나는 깨달았다. 그는 5.18의 세계적 위상을 유엔의 권위 아래 영구화하려는 빅픽처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빠듯한 시간때문에 차주범과 나를 그렇게 몰아세웠고, 쪼들린 예산 덕분에 커밍스와 앤더슨을 삼류 모텔에서 재우고, 유엔대표부에 그레그에게 차량 제공할 것을 사정하면서 그렇게 직진했다.

 

비방

그러나 그가 꿈꿨던 5.18의 세계적 도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비방이 시작됐다. 특히 광주와 오랜 인연이 있던 미국 학자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비방은 소아병적이었다. 그는 CIA 경력의 그레그 초청을 문제 삼아 김양래를 괴롭혔다. 그레그 초청의 계기로 5.18 재단이 CIA의 외곽조직(front)가 됐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가 재단에 보낸 이메일이 재단 측에 의해 그레그에 전달됐고 CIA 수중에도 들어갔을거라는 황당한 주장을 퍼뜨렸다.

 

김양래는 한 미국인의 황당한 주장에 분노하기 보다, 주변 그의 동료와 선후배들이 그 미국인을 말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매우 섭섭해 하고 있는듯 보였다. 나야 저간 사정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지만, 김양래의 뜻과 그와 같이 이룬 성과의 잠재력은 지켜내고 싶었다. 그래서 지역 인터넷 매체를 통해 카치아피카스와 지리한 갑론을박을 했다. 카치아피카스는 내게도 온갖 비방과 억측을 쏟아냈다. 나는 김양래 대신 그것을 대응하고 감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게 그는 그럴만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보공개 요구

김양래는 여전히 집요했다. 미국 정부가 80년대 아르헨티나의 독재 관련 모든 기밀 문서를 삭제없이 제공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시, 5.18 관련 기밀문서를 검열삭제없이 공개할 것을 미국정부에 요구했고, 마크 리퍼트 대사가 광주를 방문할 때, 공개적으로 그를 압박하기도 했다. 현재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의 미국에 대한 온전한 정보 공개 요구의 시작은 김양래의 추진력이었다.

 

죽음

5.18 재단에서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암투병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선 너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활기차게 들렸다. 아직 하고픈 일도 많고, 못다한 일도 많은 목소리였다. 그 후, 3, 그의 소천 소식을 접했다. 김양래 이사가 운명하기 전에 한 번 더 뵙지 못한 아쉬움이 죄책감이 되어 가슴을 억눌렀다. 그가 이뤄낸 일 때문에 슬펐고, 그가 못다한 일을 알기에 서러웠다.

 

불과 몇 년 사이, 광주와 5.18를 보는 전국의 시선이 예전만 못하다. 미군 정보관을 사칭하는 자가 5.18 진상조사를 호도하고, 조폭이 5.18 단체의 장까지 올라가고, 별 다른 해명과 사과도 없는 진압공수부대와 화해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윤상원이 투사회보를 만들던 들불 야학 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우연일 수 있겠지만, 이 모든 일이 김양래가 5.18에서 은퇴하고 나서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이렇게 5.18 주변이 어지러워질수록, 우리를 망월동을 안내하던 '하얀 셔츠 입은 훤칠한 사나이'가 그리워지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 | 프레시안 2023.09.20.

설갑수는 뉴욕에 살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급진적 글을 쓰려고 취재하고 연구한다. 미국의 노동관련 뉴스매체 <Labor Notes>와 세계적 진보간행물 <Jacobin>의 빈번한 기고자이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Gwangju Diary"의 공동 번역 편집자이다

 

 

정권 말기 같은 공직 사회

세상이 어수선하고 혼탁하다. 극한 대결을 보이는 정치권도 문제지만 공직 사회의 민심 이반도 심각하다. 전임 정부에서 일깨나 한 공무원들은 감사원 감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 원래 일을 하지 않던 공무원들은 늘 그렇듯 납작 엎드려 있다. 관가 분위기가 정권 말기 같다.

 

요즘처럼 기획재정부가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게 보인 적이 없다. 경제와 민생 위기에도 공무원들이 일을 하지 않을 핑곗거리는 널려 있다. 여야 대치로 예산안의 정부 원안 처리는 꿈도 꾸지 못한다. 과거 예산실은 추가경정예산 편성으로 밤샘 작업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이 건전 재정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고 있으니 업무량은 물론이고 고민 자체가 줄었다. 세제실이나 경제정책국 등도 일하겠다는 의욕이 안 보인다. 국회 입법이나 야당 설득이 필요한 정책은 불가능하다고 지레 판단한 듯하다. 기재부가 올해 경기 예측을 제대로 못해 발생한 세수 결손 규모가 59조원, 국민 1인당 118만원꼴이다. 그런데도 사과나 반성이 없다. 온통 빨간불인 생산·소득·물가 지표를 보는 것도 무섭지만 이런 기재부의 태도가 더 무섭다.

 

통일부와 여성가족부는 일손을 완전히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일부는 윤 대통령이 통일부가 더 이상 대북지원부가 돼서는 안 된다고 못 박으면서 조직과 인력이 대폭 축소됐다. 여가부는 윤 대통령이 부처 폐지 공약을 낸 마당에 새만금 잼버리 부실 운영 건까지 터지면서 쑥대밭이 됐다. 국방부는 또 어떤가.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이종섭 장관은 해병대원 순직 사건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조사를 앞두고 있다. 윤 대통령이 여가부·국방부 장관을 교체하기 위해 후임자를 지명했지만 흠결이 너무 많다. 설령 장관에 임명되더라도 쇄신이나 개혁은 기대하기 어렵다.

 

국토교통부와 법무부 등은 조직의 수장이 리스크요인이다. 과거 한때의 민주화운동 경력을 훈장처럼 내세우곤 하는 원희룡 장관은 극단적 발언과 돌출 행동으로 부처에 짐이 되고 있다. 한동훈 장관은 야당을 자극하고 폄훼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공무원들은 헌정사 최초로 국회의 해임건의와 탄핵소추를 모두 당한 이상민 장관 밑에서 일하고 있다. 교육부의 과장급 인사는 지난 6월 윤 대통령의 수능 킬러문항 배제발언 이후 입시 담당 국장을 전격 경질하고, “대통령에게서 많이 배운다며 아부성 발언을 하는 이주호 장관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었다고 한다. 사고는 장관이 쳐도 국회에 가서 빌고 뒷수습하는 일은 부하 공무원들 몫이다.

 

윤 대통령의 결정은 일방적으로 하달된다. 중앙 부처의 공무원들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윤 대통령의 카르텔한마디에 연구·개발 예산 수조원이 날아갔다. 긴축 재정과 보조금 삭감 정책으로 보건복지부는 사회안전망 확충 대신 취약계층 복지를 구조조정해야 할 판이다. 윤 대통령이 노동조합을 적대시하고 있는데 고용노동부가 노동계와 어떤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안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를 왜 해양수산부가 해야 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공무원들은 지시 사항을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정권이 바뀌면 인사상 불이익이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산업부에서 원전 업무, 환경부에서 4대강 사업 등을 담당한 공무원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책에 관여한 공무원들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윤석열 정부에서 요즘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은 감사원과 검찰 일부다. 이들을 제외한 공무원들의 인사말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이다. 국민이 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40만 교원과 7만 경찰의 사기는 시쳇말로 단군 이래 최악이다. 이 모두가 행정 수반인 윤 대통령,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한덕수 국무총리 책임이다. 포식자나 천적을 만났을 때 약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죽은 척하기라고 한다. 공무원들의 복지부동과 무기력이 안타깝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공무원만큼 실력 있는 인재도 없다. 공무원 개개인이 국민에게 헌신하며 신나고 보람차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오창민 논설위원 | 경향 2023.09.20.

 

 

내래 ○○○ 모가지 따러 왔수다

19681월 어느 날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청년의 목소리에 놀라 나자빠질 뻔했다. 나는 어린 중학생이었지만 그 소리가 북한 말투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름이 김신조이며,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 소속으로 청와대를 기습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러 왔다고 말했다. 31명의 게릴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는 일찍이 우리 군에 생포되었다. 한국전쟁에서 전면전으로 실패한 북한은 1960년대에 들어와 비정규군으로 남쪽을 공격하곤 했는데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은 그러한 게릴라전의 대표적 사례였다. 그 일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까지 우리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때 김신조의 입에서 나온 내래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말은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공포, 그리고 분노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런 말을 21세기 대명천지에 국방부 장관 후보자 신원식의 입에서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원식은 2019921일 어느 태극기 집회에서 벌써 6일 전에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기 때문에 문재인의 모가지를 따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그뿐 아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악마’ ‘간첩등 막말을 퍼부었다. 예비역이지만 장성 출신인 그가 국군 통수권자에게 한 망언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그가 이제야 자신이 한 말의 진의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모양인데 늦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이었다. 표현이 거칠었다. 말실수였다. 이런 사후 설명으로 이해를 구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자격이 없다. 북한 124군부대 게릴라 김신조의 말이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한 그 상처를 다시 헤집어내는 신원식은 국방부 장관 후보자 자격조차 의심스럽다.

 

신원식의 정신세계는 독특한 것 같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는 군사쿠데타 5·16과 군사반란 12·12에 대해서도 각각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헌법 질서를 부정하는 반체제적 발상이다. 5·16 군사쿠데타는 4·19혁명으로 이룬 민간 민주 정부를 폭력으로 무너뜨린 부끄러운 역사이고,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유신체제와 같은 군부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하극상을 일으킨 것이다.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군대라는 조직의 직업적 소명인데 신군부 세력은 총부리를 거꾸로 겨누어 같은 나라의 군인들을 살해하고 군권을 찬탈하는 반란을 획책했다. 동료 군인을 이유 없이 죽이고 지휘체계를 폭력으로 무력화시킨, 우리나라 군대의 부끄러운 역사였다.

 

우리는 긴 군부 통치 시대를 겪었다. 국가의 폭력을 관리하는 군대 조직이 권력을 장악하고, 억압적 국가기구를 이용해 국가 운영을 해 온 권위주의 체제가 오래 지속됐다. 권력을 분립하고 상호견제를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민주주의는 유명무실화하였고, 국민이 주권자로서 자유롭게 국가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기회도 봉쇄됐다. 국가가 가야 할 목표는 오로지 권력자에 의해 정해지고 그 뜻에 따라 모든 자원이 동원, 조직화됐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대가 그러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생각대로라면, 그것이 신원식을 임명한 윤석열 대통령의 뜻이라면 우리나라는 과거 군부 권위주의 시대를 방불케 하는 상황으로 갈 수도 있겠다. 야당은 윤 대통령이 검찰이라는 국가폭력기구를 정치화해 권력 유지에 이용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원식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군대라는 기구도 정치적으로 장악해 이용하려는 의도가 아닌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유 있는 문제 제기라고 생각한다.

 

검찰이 정치의 시간을 찢고 들어가 야당 지도자들을 탈탈 털어 왔으며, 집권 세력의 잘못에 대한 수사에는 공정하지 못하다는 항의를 줄기차게 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를 임명하려는 윤 대통령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해병대 채모 상병의 사망 수사와 관련해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보이는 태도,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 등을 보면 신원식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해 윤 대통령이 무엇을 하려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김신조가 내래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한 말이나 신원식이 문재인의 모가지 따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한 말이 모두 섬뜩하고 무서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 말 한마디가 신원식의 성정을 압축하고 있다. 이 말 한마디만으로 판단할 수 있다. 신원식은 국방부 장관에 어울리지 않는다.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 경향 2023.09.20

 

 

대세는 따라야 하는가

사람들은 대세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꽤나 대세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특정 상품의 유행뿐만이 아니라 대학입시, 고시, 의대 진학, 부동산, 코인 열풍 등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강력한 대세들이 한국에는 많이 존재한다. 대세를 따르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이는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의 유명한 실험으로 증명된 바 있다. 애시는 7, 8명의 참가자들을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히고 선 하나가 그려진 종이를 보여주고, 잠시 후 서로 다른 길이의 세 개의 선이 그려진 종이를 보여주며 좀 전에 본 선과 같은 길이의 선을 고르게 했다.

 

이 실험에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참가자들 중 실제로 응답을 해야 할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대답하는 한 사람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연구자(애시)와 짜고 사실과 다른 답을 하기로 약속한 이들이었다. 앞서 응답하는 사람들이 전혀 엉뚱한 답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실제로 응답해야 할 참가자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나중에는 초조해했고,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이 한 답을 따라 했다.

 

이렇듯 집단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세를 따르는 현상을 동조(conformity)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 하는 대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집단주의 문화의 산물이나 한국인들 특유의 습성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인데 동조는 서구 개인주의 문화에서도 일관성 있게 보고되는 인류 보편적 현상이다. 미국에서 실시된 애시의 연구에서 동조율은 무려 77%에 달한다.

 

동조가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집단생활을 선택했다. 개개인의 인간은 약하지만 무리로 있으면 그 어떤 맹수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친 것이다. 수백만년 동안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다수와 함께하는 것이 살아남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유전자에 새겼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일수록 동조경향성은 강해진다. 전쟁과 가난, 불안과 위기가 끊이지 않았던 대한민국에서 대세를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은 당연하다. 대학에 진학하고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의사가 되고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 그나마 확실하게 부자가 되고 계층을 이동할 수 있는 길이었기에 한국인들은 따른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애시의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동조경향성은 전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방향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집단에 대한 맹목적인 동조가 어떠한 결과로 이어졌는지는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동조가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가끔 집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는데, 심리학개론을 잘못 배운 사람이거나 지식인 코스프레라도 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동조가 늘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면 애초에 인간에게 동조경향성이 나타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내가 대세를 따른다고 해서 대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다수의 행동에 동조하는 것이 집단 전체의 생존과 관계없는 일일수록 그렇다. 예를 들면, 개인이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 같은 주제다. 비인기 전공으로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필자는 굶어 죽으려고 인문학을 하느냐는 소리를 참 많이도 들었다.

 

대세를 따르는 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한국의 인문학은 예전에 죽었고 이공계도 이미 가망이 없으며 예술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약간의 심리적 안정을 더해줄지 모른다.

 

세상에는 대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저냥 있는 게 아니라 일정 비율 꾸준히 존재해 왔다. 솔로몬 애시의 실험에서도 끝끝내 자신의 견해를 지킨 23%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집단에서나 20~30%의 사람들은 대세에 따르기를 거부한다.

 

사안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세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집단의 생존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100%의 의견 일치율을 가진 집단이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집단은 절멸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잘못될 경우에도 20~30%의 생존자들이 남아 있다면 집단은 영속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세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존재가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결국에는 집단 전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높은 현실에서는 더욱.

한민 문화심리학자 경향 : 2023.09.22

 

 

문재인 모가X, 윤석열 모X

애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나는 지금 쓰고 싶지 않은 말을 썼다. 고심하며 ‘X’를 끼웠지만 칼럼의 품격은 이미 떨어졌다. 그럼에도 모가지를 쓰는 까닭은 대통령 윤석열과 참모들의 콘크리트 불감증에 다가갈 길이 도무지 없어서다.

 

딴은 그들만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목놓아 부르댄 교수들이 있다. 장수 철학교수, 원로 정치학교수, 기자출신 언론학교수 등등 참 다양했다. 신문방송 복합체와 그 아류 매체들의 고위직 언론인, 그들에 줄 선 기자들, 저마다 무슨무슨 직함을 붙인 훼절한 먹물들도 윤석열을 따라 문재인 정부를 파시즘, 전체주의로 몰아세우며 정권 교체를 외쳤다.

 

그들이 여론을 주도하며 정권이 교체됐고 16개월이 다가온다. 어떤가. 민주주의는 진전되었는가. 민생은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아니, 민생 이전에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라고 설레발친 대통령의 경제성적표는 어떤가. 안보가 문재인 때는 불안했지만 지금은 편안한가.

 

그들 가운데 하나라도 자성의 글을 쓰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내내 아니다. 대통령 윤석열의 실정엔 눈감고 야당 대표 이재명엔 끝없이 여론재판을 벌였다. 불구속 수사의 원칙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먹물다운 온갖 교언영색이 만발했다. 마침 신방복합체가 대표적인 윤똑똑이를 부각했다. 김한길이다.

 

민주당 대표를 지낸 그는 윤석열 캠프에 들어가 새시대준비위원장을 맡았고 국민통합위원장 감투를 썼다. 조선일보는 주말판(923) ‘커버스토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좌우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김한길의 주장을 큼직하게 편집했다. 국민통합위가 정권교체 후 시대정신이 국민 통합에 있다는 의지의 산물이고 최근의 업무 보고도 극찬을 받았단다.

 

김한길은 언죽번죽 대통령은 실사구시, 실용주의를 말했다며 보수나 진보, 좌우를 떠나 국민만 생각한다고 부닐었다. 과연 그러한가. 그게 이념이 중요하다며 눈 홉뜬 윤석열 아래서 국민통합을 맡아온 김한길이 할 말인가? 굳이 따지자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윤석열의 이념은 실제로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정확히 수구다. 그럼에도 김한길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게 진정한 통합이란다. 유체이탈의 종결자라도 되고픈 걸까. 대체 무엇이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가치인가.

 

보라. 후보시절 장차관에 가장 유능한 인재들을 발탁하겠다고 부르댄 윤석열은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로 몬 모리배들을 여기저기 앉혔다. 그럼에도 자신을 지지한 먹물들이 비호해서일까. 마침내 국방장관으로 홍범도 동상 철거를 주도한 신원식을 지명했다.

 

그런데 장성 출신인 그가 문재인이 대통령이던 2019년에 군통수권자를 악마로 규정하며 문재인 모가지를 따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공언한 사실이 드러났다. “김정은이한테 대한민국을 바치기 위한 교묘한 공작을 벌였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윤석열이 몰랐으리라는 생각에 지명을 철회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대통령 모가지 따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공언한 자를 국방장관에 지명했음에도 마치 저만 자유민주주의자인 듯 문재인 파시즘을 떠들어댄 먹물들 은 모르쇠다. 여전히 신방복합체의 지면과 화면은 야당대표 구속 기우제로 넘쳐난다.

 

저들의 불감증 또는 출세욕에 각성제로 쓴다. 행여 ‘X’를 써서 효과가 반감될까 싶어 곧이 묻는다. 누군가 윤석열 모가지를 따는 것은 시간문제라 공언해도 좋은가? 물론 그따위 천박한 말을 할 촛불은 없다. 저들이 파시스트로 몰아세운 문재인도 그를 문제 삼지 않았다. 자신을 검찰총장으로 발탁한 문재인 모가지를 따자는 예비역 장성을 버젓이 국방장관에 앉히는 윤석열의 인성은 접어두자.

 

윤석열의 모가X’를 쓰는 내 칼럼의 품격도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 나라 보수의 품격에 그치지 않는다.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을 어쩔 수 없었다며 두둔하는 자가 나라 지키는 국방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래도 철회하지 않겠다면 앞으로 윤석열 모가지 따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말쯤은 깃털처럼 가벼이 여길 일이다.

손석춘 철학자·우주철학서설저자 미디어오늘 2023.09.25

 

 

한동훈, 무엇이 중한가 셀럽 놀이’? 인사검증?

당초 주식 파킹(3자에게 지분을 맡기는 행위)’ 의혹에 휩싸인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 쓰려던 참이었다. 관련 기사와 자료를 살필수록 허망해졌다. 그럼, 12·12 쿠데타는 나라를 구하러 나온것이고 이완용(의 친일행각)어쩔 수 없었다는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여 의혹에다 사진 찍지 마! XX 찍지 마!’로 유명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는?

 

공직후보자 개개인에게 따진다고 달라질 건 없다. 묻기로 했다. 구글링만 해도 나올 의혹을 몰랐거나 눈감은 채 ‘1차 검증을 마쳤다는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과 그 책임자 한동훈 장관에게.

 

윤석열 정부의 인사 추천·검증은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실의 추천→②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의 1차 검증→③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의 2차 검증순으로 이뤄진다. 의 복두규 인사기획관·이원모 인사비서관, 의 한 장관, 의 이시원 공직기강비서관 모두 검찰 출신이다. ‘끼리끼리크로스체크가 될 리 없다는 문제는 일단 제쳐두자.

 

1차 검증을 담당한 법무부는 김··유 후보자의 과거 행적·재산에 대해 몰랐나, 아니면 알고도 통과시켰나. 몰랐다 해도 문제지만, 알고 통과시켰다면 더 큰 문제다. 주식을 시누이에게 맡겨도, 쿠데타를 미화해도 장관 자격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인사검증 업무에 대해 민정수석 등에게 질문해본 적 있나. 없을 것이다. 이제 이게 가능해지는 거다.” 한 장관은 지난해 인사정보관리단이 창설될 무렵 이렇게 말했다. 국회와 감사원, 언론의 감시를 받게 돼 투명성이 강화된다는 취지였다. 출범 이후엔 “(인사검증과 관련해) 국민적 지탄이 커지면 제가 다른 종류의 책임을 져야 될 상황도 생기지 않겠나라고도 했다.

 

올해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 학교폭력 문제로 낙마하자 180도 달라졌다. 법무부는 더불어민주당 조사단의 인사정보관리단 방문 요청에 응답하긴커녕 사무실 소재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한 장관은 정무적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책임지겠다는 뜻이냐는 질문엔 아니다라고 잘랐다. 책임감은 느끼지만 책임은 안 지고, 인사검증 권한은 챙기되 검증실패 책임은 나몰라라 하겠다니. ‘꽃보직이 따로 없다.

 

신호는 초기부터 감지됐다. 인사정보관리단이 출범 이후 최초로 검증한 공직 후보자는 송옥렬 공정거래위원장·윤희근 경찰청장 후보자였다. 송 후보자는 제자 성희롱논란에 휩싸였고, 윤 후보자는 스쿨존 과속을 포함해 8차례 교통법규 위반으로 과태료를 낸 사실이 드러났다. 송 후보자는 지명 엿새 만에 사퇴했다. 첫 검증부터 낙제점이었지만, 한 장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치적 리더의 책무 가운데 대체불가능한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저서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목표의 언어화의사결정이다. 목표의 언어화란, 리더가 집단의 목표를 구성원들에게 분명하게 기술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법무부라는 주요 부처의 리더이자 윤석열 정권의 핵심 관료로서, 한 장관에겐 언어화할 수 있는 목표가 있나. 취임 1년이 넘었지만 주권자들은 잘 알지 못한다. 있다면 혹여 제1야당을 조롱해 열받게만드는 일인가.

 

한 장관은 국회에 출석할 때마다 출입구에서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한다. 내용은 다양하고 태도는 거침없다. 기자들은 이를 국회스테핑’(국회+도어스테핑)이라 부른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도 빈틈없다. 주디스 버틀러 미국 UC버클리 석좌교수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생활동반자법은 시기상조라는) 한동훈 장관, 피할 수 없는 일을 피하려 한다는 취지로 언급하자, 반박문을 법무부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렸다. 광복절인 815일 밤 912분이었다.

 

저는() 국민 설득할 자신 있으면 정면으로 논의하자는 말씀을 더불어민주당에 드린 바 있다. 그러니, 경향신문이 민주당에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 부처 공식 계정에서 저는이란 표현도 낯설고, 언론 보도를 반박하며 야당을 언급한 것도 이상하다. 무엇보다 법무부 장관이 휴일 한밤중에 입장을 밝혀야 할 만큼 화급한 사안은 아닌 것 같다.

 

한 장관이 야당 조롱과 국회스테핑과 셀럽 놀이에 열중하는 사이, 인사검증 같은 본업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당장 장관직을 버리고 국민의힘에 입당하는 편이 낫겠다. 윤석열 대통령의 윤허가 아직 떨어지지 않아서 못 하는 건가.

 

사족. 김행 후보자에게도 한 말씀 드린다. 정순신 변호사 낙마 이후 김 후보자는 공개적으로 말했다. “만약에 인사청문회가 있었다면 본인(정순신)이 거절했을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228KBC 여의도초대석).

 

김 후보자도, 본인이 본인을 가장 잘 알지 않나. ‘드라마틱하게 엑시트(exit·퇴장)’하시라.

김민아 칼럼니스트 경향 : 2023.09.25

 

 

감세 집착증에 대한 의문

정부에서는 정부 지출을 큰 폭으로 줄여 균형 재정으로 가고 있음을 강조했다. 어폐가 있다. 정부의 감세정책으로 지출보다 훨씬 큰 폭으로 세수가 줄어 실제로는 균형 재정이 아닌 적자 재정으로 치닫고 있다. 법인세를 비롯해 크고 작은 부분에서의 전면적인 감세정책으로 인해 올해 7월까지도 세수 진도율은 53%에 머물고 있으며, 연말이 되면 50조원 이상의 세수 결손이 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올해로 끝나지 않는다. 정부의 감세 기조가 본격적으로 효과를 발휘할 내년이 더 걱정이다. 이미 정부가 내놓은 내년 예산안의 세수 계획을 보게 되면 내국세만 10% 정도를 줄여 놓았다. 400만원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가정에서 내년 수입이 40% 줄어든다고 생각해보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우리나라의 재정정책 기조는 폭발적인 감세정책으로 균형 재정이 아니라 적자 재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의문과 혼란이 이어진다. 어째서 불현듯 적자 재정인가? 그것도 국가가 적극적 역할을 떠맡으면서 지출이 확장돼 벌어지는 적자 재정도 아니고, 큰 폭의 감세를 통한 적자 재정이라니? 선례가 없지 않다. 1980년대 초 많은 경제학자들을 당혹하게 했던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이른바 레이거노믹스가 비슷한 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시에도 레이건 대통령은 이른바 래퍼 곡선을 앞세워 민간 경제 활성화와 투자 촉진을 위해서는 정부의 감세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1930년대 뉴딜 이후 내려온 미국의 세금 제도를 파격적인 감세 기조로 손본 바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 또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당시 공산권과의 본격적인 군비경쟁을 꾀하고 이른바 2의 냉전을 시작하면서 레이건 정권은 군사비를 중심으로 한 정부 지출은 또 파격적으로 늘린 바 있다. 그 결과 적자 재정이 나타난 것은 지금 우리와 비슷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감세 기조만이 아니라 오히려 큰 폭의 지출 증가가 나타난 바 있다. 이 점에서 레이거노믹스의 재판이라는 식으로 현재의 재정정책의 기조를 설명하기도 힘들다.

 

다른 점은 또 하나 있다. 거시경제에 미치는 재정정책의 효과를 음미하기 위해서는 항상 금융정책과의 조합을 살펴야 한다. 레이건 정부 시절 특히 임기 전반기의 금융정책은 철저한 긴축이었다. 1970년대까지의 고질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엄청난 고금리 정책과 긴축적인 금융정책 운용으로 실업률이 치솟고 경기가 죽는 상황이 벌어진 바 있다.

 

레이거노믹스와 닮은 듯 너무 다른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금융정책은 아무리 보아도 긴축적인 기조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기준금리는 지난해부터 계속 올라갔지만, 이는 전 세계 인플레이션과 특히 미국의 금리 상승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수동적인 대응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 반면 정부는 경기 침체와 민간의 자금 수요를 명분으로 은행권 등에 대해 계속적인 금리 인하 압박을 가했고, 주택담보대출 금리 등은 세계적인 금리 인상의 시기 이전보다 크게 올랐다고 보기는 힘들며, 가계부채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실제로 9월 들어 보름 사이에만 가계대출은 무려 8000억원이 폭증했다. 모두 다 알고 있다. 정부는 시한폭탄처럼 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의 문제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규제와 금융 모두에서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이것 때문에 집값이 바닥을 쳤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을.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연루된 새마을금고의 건전성 문제가 나오자 한국은행이 40조원 규모의 지원을 약속하는 과정 또한 금융정책의 기조가 적어도 긴축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더 크게 만든다.

 

레이건 정부의 경제정책 또한 기묘한 정책 조합이라고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으며 그 효과에 대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감세를 하면서 지출은 늘리고, 정부 재정은 적자 기조를 달리면서 금융정책은 긴축이라니. 그런데 지금 우리의 상황은 감세라는 것 하나만 공통점이 보일 뿐, 정부 지출을 늘리는 것은 아니면서 금융정책은 긴축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러한 조합은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실 내가 아는 바로 정부에서 이렇다할 만한 이론적·체계적 경제정책의 기조를 포괄적으로 밝힌 바가 없으므로, ‘감세를 통해 투자를 유발한다는 것 하나 말고는 별다른 계획 없이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무원칙의 기조(그것도 기조라면)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2020년대의 한국 경제상황에서 이것이 적실성을 갖는 정책 기조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첫째, 미국 바이든 정권의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은 향후 10년간의 명확한 증세기조를 밝히고 있다. 지난해 영국에서 단명했던 보수당의 트러스 총리 내각은 파격적인 감세기조를 내걸었다가 국제 금융시장의 공격과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의 비난까지 뒤집어쓰면서 결국 물러났고, 내각도 무너지고 말았다.

 

둘째, 지금은 기후위기와 산업 패러다임 전환이 겹친 대규모 전환기이며 이에 각국은 국내·국제적 경제구조와 체질을 바꾸기 위해 각종 보조금과 정부 프로젝트 등 대규모의 지출을 계획하고 있다. 방금 언급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뿐만 아니라 유럽연합(EU)에서도 이를 거의 그대로 모방해 반도체 등의 전략적 산업 등에 대한 대규모 정부 보조금과 연구 지출을 공언하고 있다. ‘국가 자본주의인 중국의 대규모 정부 지출의 산업 정책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구조적 변환기에서 자원의 조달을 오로지 그 효과도 심히 의심스러운 낙수 효과하나에 맡겨 세금과 정부 지출을 모두 깎는다는 것은 무슨 현실성을 갖는 것일까?

 

효과 의문 낙수효과에 기댄 정부

틀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언짢은 예후를 그려본다면 이렇다. 벌써 공공부문과의 관계가 깊은 여러 부문에서는 내년 예산안의 정부 지출 감축으로 인해 크나큰 고통과 비명소리가 나오고 있다. 여기서의 구매력 감소를 금융 부문에서의 대출로 메꾸면 되지 않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정부 지출은 직접적으로 구매력을 자극하고 유발효과까지 가져올 수 있지만, 금융 부문에서의 대출에는 이자가 붙어 있다. 따라서 더 큰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산시장 투자자들이거나 이자를 감수하고라도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생활형 대출자들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전자는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울 것이며, 후자는 그나마 위축된 소비를 더욱 졸라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게 되면 자산시장은 갈수록 뜨거워지면서 실제 산업은 이자 부담과 정부 지출 축소가 겹쳐지며 생겨나는 소비 위축으로 인해 침체가 되는, ‘아랫목은 펄펄, 윗목은 냉골이라는 경제 이분화 현상을 부추기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산계급은 자산시장의 지속적인 가격 상승으로 명목적 부의 증대를 누리게 될 것이며, 다수의 사람들이 근로소득과 영업소득을 벌어들이는 산업경제는 침체를 면치 못하면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과 문제를 최종적으로 바로잡도록 기대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보루인 정부는 누적되는 정부 부채로 인해 갈수록 손발이 묶이게 될 것이다. 지금 정부의 재정정책 기조가 흑자 재정으로 여력을 비축해두기는커녕 적자 재정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공언한 낙수효과가 발동돼 감세 정책이 투자 확대와 경제 성장 및 세수 확충으로 이어질 그날이 오기 전에는, 정부의 세수는 졸아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는 언제일까? 그때까지 누적될 정부의 부채는 얼마나 될까?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어째서 감세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윤석열 정부의 감세에 대한 집착은 법인세 등 굵직한 사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결혼하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증여세 면제 한도를 현재의 5000만원에서 15000만원까지 늘리겠다는 발표까지 나왔다. 결혼과 출산 장려라는 게 명분이다. 결혼하는 자녀에게 15000만원을 해줄 수 있는 이들이 인구의 몇 퍼센트나 될 것이며, 그들이 과연 이런 혜택이 없다고 할 결혼을 하지 않을 이들인가? 별 효과도 없고 사람들에게 박탈감만 안기는 이런 깨알 같은정책까지 남발하는 감세정책에 대한 집착은 대체 왜 나타난 것일까? 정책 엘리트들의 깊은 속을 알지도, 또 들어볼 수도 없는 백면서생과 서민들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경향 : 2023.09.25.

 

 

우린 당신들이 필요하지 않다

800여명이 그 산골까지 왔다고요? . 저도 기적 같은 일에 놀랐습니다. 개인 차량만 300여대가 와서 산골마을 2차선 도로에 4가량 늘어서 있었습니다. 대구지역에서 사회운동하는 벗들이 승합차 네 대를 가지고 와서 종일 셔틀 운행해주었습니다. 지난 92.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후원 연대의 날이었습니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은 전북 남원의 귀정사 계곡가에 터를 잡고 그간 국가폭력과 자본폭력, 사회폭력의 피해자들과 그에 맞서 연대하고 저항하다 지치고 아픈 이들을 위한 무료연대쉼터로 조용히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매해 잠시 쉬는 것조차 죄스러워하는 100여분의 피해자, 활동가들이 내 집처럼 편히 쉬었다 갔습니다. 비판하기는 쉬운데 지키기는 힘든 게 동지라는 걸 뒤늦게 배운 이들이 함께 만들고 지켜온 곳. 누군가 힘들거나 아파 보일 때 쉼을 통해 자신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나와 우리를 진정으로 지키는 일이라는 오랜 반성이 깃들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당일 남원지역 사회운동가들과 장수민중의집등이 나서서 연잎밥 300인분과 김밥 100인분을 준비해주었습니다. 배식 15분 만에 동이 나 차량 두 대가 먼 남원 시내 여러 분식집의 김밥과 빵집의 빵을 털어 와서야 간신히 저녁밥공양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뒤풀이 음식은 그간 온갖 민주주의 투쟁 현장에 함께해온 우리밥연대 벗들이 정성스레 준비해주었습니다. 모든 이들의 헌신과 열정을 여기 모두 다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정태춘·박은옥 두 분이 나서주셔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노래 중간중간 덧붙여주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시였습니다. 여전히 투병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이 고공농성하던 때 만든 연대의 노래를 불러줄 때는 현장에 와있던 김진숙님을 포함해 모두의 눈가가 젖기도 했습니다. 사회를 봐준 정혜윤 PD와 명인, 박성훈 가수의 말과 노래, 박남준 시인의 시, 모두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난 꿈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 군대와 폭력이 없는 나라, 나의 오랜 고난이 기쁨이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문정현 신부님의 말씀, “어떠한 비극,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김판수 선생님의 말씀이 모두 귀했습니다. “이곳이 빈 도화지 같은 곳이면 좋겠습니다. 수고한 분들이 편히 쉬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보는 아름다운 곳이면 좋겠습니다라는 신학철 선생님의 당부도 뇌리에 오래 남았습니다.

 

제발 이 시대의 위정자들과 각종 폭력을 일삼는 정치권력 모리배들이 우릴 위해 무엇을 한다는 더럽고 어지러운 일들을 그만 멈추고 이 세상이 그냥 빈 도화지같은 곳이게만 해주어도 좋겠다는 생각.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과 예의를 갖추고 있는 이 시대의 주권자들이, 시민들이, 힘써 일하는 노동자 민중들이,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해 몸부림치며 일하는 여러 소수자 집단들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하나씩 그려나가 볼 수 있는 빈 도화지같은 세상. 미래세대 청소년들이 아직 때 묻지 않은 인간의 고귀한 심성을 자유롭게 표현해볼 수 있는 빈 도화지같은 세상이면 좋겠다는 꿈이 돋아났습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우리의 오랜 고난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다시 힘써야겠다는 선한 기운을 채우는 고마운 날이었습니다.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다시 제왕이 되어 공산전체주의 세력운운하며 사회분열과 갈등을 앞장서 조장하는 대통령, 위험한 한··일 군사자본동맹을 좇으며 핵오염수 방류도 괜찮다는 정부, 독립투사들의 동상을 철거하는 국방부, 언론 사전검열을 부활시키겠다는 방송통신위원회, 촛불항쟁을 가능케 했던 야간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박탈하겠다는 경찰, 권력투쟁의 도구와 화신이 된 검찰, 이명박 시기 블랙리스트 실행의 공모자와 다름없는 유인촌을 다시 장관으로 세우는 문화체육관광부, ‘자본옹호부가 돼 2200만 노동자 가족들에게 작은 희망이 될 노조법 2, 3조 개정에 반대하는 노동부, 4대강을 다시 막고 원전을 세우겠다는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등. 우리 모두가 어렵사리 정화해온 세상의 도화지를 짓밟는 이들이 여전히 정치권력이란 이름으로 모두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하는 불의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어떤 공포와 절망, 어떤 독점과 폭력의 세력도 좀 더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인류의 오랜 꿈을 막아오지는 못했습니다. 권력과 자본에 기생해 만인의 불평등과 아픔과 불안을 조장하며 호의호식하고자 하는 그들 소수는 다시 최소한의 양심과 정의, 세상에 대한 예의를 다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손에 의해 솎아내질 것입니다. 그게 우리도 다 인지할 수 없는 이 존엄한 세상의 변하지 않는 성문법일 것입니다.

송경동 시인 경향 : 2023.09.25.

 

 

윤 대통령 부부 확정적 중범죄 의혹대처법

이재명 논란에 가려진 중요한 한가지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야말로 공히 중범죄 의혹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중범죄 의혹을 받는 헌정사 초유의 사태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2년 전 대선 후보 시절 대장동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도 안 나온 상황에서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확정적 중범죄 후보라고 지칭한 바 있다. 그러니 지금 윤 대통령 부부에게 확정적 중범죄 부부라는 표현을 돌려주더라도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선 저널리즘 원칙에 입각해 의혹꼬리표는 떼지 않기로 한다.

 

주가조작은 자본시장 질서를 교란해 기업 활동을 방해하고 일반 투자자를 먹잇감 삼는 중대범죄다. 미국에선 징벌적 벌금과 장기 징역형으로 단죄한다. 김건희 여사는 바로 이 주가조작 개입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210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공범들에 대한 1심 유죄 판결로 김 여사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재판부는 김 여사 계좌 2개가 주가조작 일당에 의해 운용됐다고 적시했다. 유죄로 인정된 통정·가장 매매 102건 중 김건희 계좌거래는 무려 48건에 이르렀다.

 

재판부는 이 거래들을 김 여사가 직접 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면서도, 다른 공범들에게 일임됐거나 적어도 이들의 의사나 지시에 따라 운용된 계좌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앞서 이 사건 공판 검사는 당시 김 여사가 핵심 공범들의 연락을 받아 직접 거래하는 구조였음을 재판 과정에서 제시한 바 있다. 검사와 재판부 모두 김 여사 개입 의혹을 공판 진술과 판결문을 통해 명토 박은 것이다.

 

윤 대통령 본인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의혹을 받고 있다. 해병대 1사단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한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에 격노해 국방부 장관을 질책했다는 의혹이다. 바로 전날 수사가 잘됐다며 흔쾌히 결재 사인을 한 국방부 장관이 불과 20시간 만에 이를 뒤집고 혐의를 특정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국방부 검찰단이 해병대 전 수사단장의 항명죄 구속영장에 적시한 내용이다. 결재까지 마친 국방부 장관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건 장관보다 센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는 게 상식적이다.

 

해병대 전 수사단장은 대통령 격노와 질타상황을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그 해병대 사령관은 국가안보실 2차장, 안보실에 파견된 해병대 대령 등과 통화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해병대 사령관과 안보실, 국방부 관련자들의 비화폰을 포렌식하면 어렵지 않게 대통령 외압 의혹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지만, 구체적인 사건 수사 개입은 범죄다. ‘특정인 혐의를 빼라고 국방부 장관을 윽박질렀다면, 수사 기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침해하고 장관에게 부당한 지시를 수행토록 한 국기문란급 직권남용이다. 최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선 이 정도 중대한 법률 위반은, 사실이면 직접적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여러 민주당 의원들의 경고가 나왔다.

 

이런 심각한 의혹조차 윤석열 사단이 장악한 검찰은 수수방관이다. 국회 국정조사와 특검 등의 중립적 수사가 유일한 대안이다. 그리고 이걸 가능하게 만들 책임은 결국 제1야당인 민주당에 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의 돌아가는 상황이 암울하다. 김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안은 지난 4월 국민의힘과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의 반대를 뚫고 어렵사리 패스트트랙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오는 12월 본회의에서 통과될지 불확실성이 커졌다. 민주당이 지난 7일 발의한 윤 대통령 수사 외압 의혹 특검법안도 현 국회 임기 만료 전에 패스트트랙 지정과 표결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이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 갈등이 촉발한 민주당의 분열 가능성 때문이다.

 

민주당이 내홍을 빠르게 수습하지 못할 경우 지지층 분열과 중도층 이반이 겹쳐 총선에도 먹장구름이 드리울 수 있다. 대통령 부부의 중범죄 의혹 규명과 심판의 길도 까마득해질 수 있다.

 

당내 침묵하는 합리적 목소리가 나올 때가 됐다. 강압적 응징 주장은 이제 잦아들어야 한다. 이탄희류의 단정하고 이성적인 의견 개진이 분출해야 한다. 책임도 권한도 가장 큰 이 대표도 이 결정적 국면에서만큼은 국민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포용과 헌신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분열 아닌 통합과 협력만이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손원제 ㅣ논설위원 한겨레: 2023.09.26

 

 

오고 싶은 나라 주식회사 대한민국

요새 사람들은 직장을 구하기 전에 기업리뷰 사이트의 별점을 본다고 한다. ·현직 사원들이 직접 자기 회사의 복지, 급여, 업무삶 균형, 조직문화 등을 평가해 점수를 매기는데, 각 항목 5점 만점에 평균 3.5점 이상이면 상당히 괜찮은 회사고, 2.5점 미만은 지원하기 전에 한번 더 고민해봐야 할 곳이란다. 1점대면 요즘 말로 돔황챠”(도망쳐)야 하는 회사다. 이 기준이 꽤 정확한지 요새 구직시장엔 이런 말이 돈다. “별점은 과학이다.”

 

구직자가 입사희망 기업을 평가하여 거르는 일은 최근 전세계적 노동공급 부족 상황에 더 흔해졌다. 코로나19 유행 중 질병 후유증, 조기 은퇴, 입국제한 등으로 일터를 떠났던 내외국인 근로자들의 업무 복귀가 더디게 일어나고 있다. 경기둔화 국면에서도 요 몇달 미국과 유로지역 실업률은 역대 최저 수준을 유지했으며, 구직자 대비 빈 일자리 수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노동시장이 경색되면서 근로여건 개선이 미흡한 기업 위주로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선진경제권에서 공히 진행되어온 저출생, 고령화로 인해 앞으로도 노동수급 불균형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우리나라도 더 심하면 심했지 피해 갈 가능성은 적다.

 

노동시장 경색을 풀 대안 중 하나로 이민인력 확충이 꼽힌다. 국가별로 인력 부족이 예상되는 업종에 외국의 인적 자본을 들여오기 위한 제도 정비가 활발하다. 미국은 지난해와 올해 각종 행정조치를 통해 이민비자 및 비이민 취업비자 발급 수를 대폭 확대했고, 유럽연합 역시 최근 인재풀시범사업, 인재파트너십제도 등을 신설해 역외국가와 인력교류 활성화에 나섰다. 독일 의회는 지난달 숙련이민인력법을 통과시키며 해외 숙련인력의 취업비자 및 영주권 획득 요건을 완화했다.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는 이 법을 통해 해외 인재를 연간 150만명 유치하겠다고 공언했다.

 

우리나라도 해외인력 쟁탈전에 가세했다. 팬데믹 때 본국으로 돌아갔던 외국인 취업자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2023년 계절근로자 배정인력을 4만여명으로 두배 이상 증원하고 체류기간도 5개월에서 8개월로 확대했다. 올해 고용허가제(E-9 비자) 입국자 규모도 11만명으로 지난해(69천명)보다 대폭 늘렸고, 특히 숙련기능인력(E-7-4 비자) 연간 쿼터는 현행 2천명에서 35천명까지 무려 17배나 증가시켰다.

 

문제는 해외 구직자들이 우리나라에서의 노동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끼는지다. 노동공급 부족 상황에 이주인력 유치 경쟁이 앞으로 더 심화한다면, 협상의 추는 이민을 받는 우리보다 이민을 오는 노동자에게로 기울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가 별점 3.5점 이상을 유지하지 못하면 양질의 인적자본을 다른 나라에 빼앗길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기업리뷰 사이트처럼 인재유치 지수(Talent Attractiveness)라는 걸 만들어 제공한다. 잠재이주 숙련노동자의 입장에서 외국인 취업기회, 기대소득, 가족동반 용이성, 근무인프라, 포용력 등을 평가해 순위를 매겼다. 우리나라의 종합순위는 38개국 중 25, 아주 처지는 건 아니지만 그리 인상적인 성적도 아니다. 근무인프라(1)와 소득(7) 항목에서 상위권인 반면 외국인 취업기회(36)와 가족동반 용이성(33)은 최하위권이다.

 

숙련노동자를 대상으로 이 정도면 비숙련노동자에겐 더 가혹할 것이다.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열악한 숙소에 비싼 월세를 내며 사는 농촌 이주노동자들의 실상은 이미 잘 알려졌다. 제조업 이주노동자들은 안전장비도 없이 기계에 몸을 들이밀면서도, 휴식도 없이 폭염과 혹한을 받아내면서도, 정보 부족과 신분상 불안정 때문에 불평도 제대로 못 한다. 공식 기록만 따져도 2021년 외국인 산재 사망률은 내국인의 7배에 달했다. 이 와중에 고용허가제의 업장변경은 여전히 제한적이고, 급기야 최저임금도 안 주고 외국 가사인력을 데려다 쓰겠다는 어이없는 시도까지 있었다.

 

전세계적 외국인재 유치 경쟁을 뚫고 주식회사 대한민국에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면,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더 나은 대우를 약속해야 한다. 나를 부품으로 쓰다가 버리려는 회사에 좋은 별점을 줄 순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귀하게 여기는 회사가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오고 싶은 나라’, 대한민국은 내외국인 모두에게 살고 싶은 나라가 될 것이 분명하다.

장영욱ㅣ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한겨레: 2023.09.26

 

 

이재명 대표 구속 '절대 불가' 이유, 차고 넘친다

12년 전 이맘때 나는 후보매수혐의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구속됐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나중에 1, 2, 3심 재판부는 공히, 내게 적용된 후보매수 혐의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후보매수혐의에 의한 구속결정이 오판으로 판명났다는 뜻이다.

 

물론 영장심사법관은 후보매수혐의가 그럴듯하게 소명되었고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내줬을 것이다. 지금도 법관 본인은 유무죄 본안판결을 한 게 아니고 구속요건 충족여부만 판단했을 뿐이라서 오판한 게 아니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도 영장심사법관이 200쪽도 넘는 검찰조서에 깨알같이 기재된 내 말을 믿었더라면 구속영장을 내주지 않고 불구속재판을 받게 했을 것이다.

 

당시 법관이 200쪽 넘게 거침없이 피력된 내 말을 믿지 않은 이유는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및 언론의 받아쓰기가 2주일 넘게 계속되며 내게 부정적인 여론몰이가 성공한 탓이 크다. 판사도 시민의 일원으로서 처음부터 언론보도를 접하며 검찰 시나리오에 물들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측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검찰시나리오가 그럴듯한데다 이미 여론도 내게 부정적이기 때문에 여러 모로 검찰 손을 들어주는 게 심리적으로도 편했을 것 같다

 

아무튼 법관이 유무죄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에서 잘못된 구속결정을 내린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개인적, 사회적 피해로 이어졌다. 이미 2주 넘게 검찰의 피의사실 기획배급과 언론의 대서특필이 계속된 탓에 여론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법관이 구속영장을 발부하자 나는 본안재판도 받기 전에 완전히 후보매수범으로 낙인찍혔다. 재판과정도 뒤틀렸다. 내게 들씌워진 후보매수 시나리오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는 데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사후매수죄의 가벌성 유무를 꼼꼼히 파고드는 게 불가능했다. 당연히 재판결과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서울교육과 개혁진보진영에 회복할 수 없는 충격과 혼란을 줬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오판의 여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경험에 기초해서 26일 이재명 대표 영장실질심사를 맡은 법관에게 몇 가지 원칙을 상기시키며 반드시 유념해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한다.

하명표적수사의 끝판왕 사건 아닌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안이 이재명 대표를 '확정적 범죄자'라고 못박은 윤석열 대통령의 예단에 따라 진행된 하명표적수사의 끝판왕 사례라는 점이다. 본래 검찰은 대장동 사안 수사로 시작했으나 그것으로 이 대표를 엮는 게 여의치 않자 인디언 기우제식 먼지털이 별건수사를 무려 1년 반 가까이 계속한 끝에 이번 구속영장 청구에 이르렀다는 경위도 잊어서는 안 된다. 검찰은 그 과정에서 피의사실을 끊임없이 흘리며 이 대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덧칠해왔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재명 대표가 자신에게 들씌워진 모든 혐의가 무리한 예단과 추정으로 꿰어맞춘 가짜혐의라며 법원의 판단을 기다려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연히 방어권 보장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더욱이 이재명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1624만 표를 얻고 지금까지도 가장 유력한 차기주자로 꼽히는 과반수 제1야당의 당대표이다. 이런 이 대표가 구속될 경우의 정치적 파급효과는 가히 핵폭탄급이다. 한마디로 이 대표 구속여부 재판은 그 파급효과가 이 대표 본인과 지지자, 민주당은 물론이고 윤석열 정권과 국민들에게 두루두루 미친다는 점에서 철두철미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런 사안일수록 원칙에 충실한 것 외에 왕도가 없다.

 

유창훈 판사에게 묻는다. 지난 대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진 야당 대표는 모든 혐의를 정치공작으로 규탄하며 부인한다. 검찰은 그동안 공언해온 대장동 사건도 아닌 별건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더욱이 1년 반이나 전방위적으로 파서 모든 증거를 확보했다고 자신만만해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야당대표의 인신까지 구속하며 방어권을 제약하고 정치판을 뒤흔드는 게 민주주의와 헌법원칙에 부합할까, 아니면 불구속재판 원칙에 충실하게 영장청구를 기각하고 검찰권의 남용에 제동을 거는 것이 부합할까. 나는 유 판사가 이 근본질문부터 답해야 한다고 믿는다.

 

반면 많은 평론가들은 증거인멸 우려가 있는지가 제1판단기준이 될 것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주문한다. 검찰이 제기한 범죄혐의들이 중대하고 이 대표의 도주 우려가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므로 증거인멸 우려가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검찰은 1년 반도 넘는 저인망식 수사를 통해 모든 유죄증거를 확보했다고 큰소리친다. 그렇다면 누가 무슨 재주로 증거인멸을 한단 말인가. 만약 이 대표 측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불리한 진술을 한 핵심증인들의 진술번복을 이끌어낼까 염려된다고 가정해보자. 검찰에 따르면 이미 유죄증거가 차고 넘친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법원이 바보인가. 증언 번복에 대해서는 그 신빙성 여부를 판단하면 그만이고 오히려 부정적인 심증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검찰 역시 이 대표에게 위증교사혐의를 추가하면 된다.

 

검찰과 언론의 몰아가기에 넘어가지 말아야

언론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무려 500쪽도 넘는 구속이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한다. 검찰측 시나리오는 누가 읽어도 일응 그럴듯할 것이다. 윤석열-한동훈 검찰이 조직의 명운을 걸고 1년 반 넘게 달려들어 최대한 의심의 눈으로 엮어놓은 역작이기 때문에 이 대표가 아무리 무고하다고 하소연해도 당장은 대단히 유능하고 정의로운 판사라도 솔깃할 만큼 그럴싸한 스토리라인이 펼쳐질 게 틀림없다.

 

두툼한 검찰측 시나리오와 소명자료를 받아든 판사 입장에선 범죄혐의가 중대하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소명됐다고 판단되는 순간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내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증거인멸 우려가 제일 중요한 판단기준이라는 식의 언론보도도 이런 안이한 판단을 부채질할 수 있다. 명확한 물증 없이 관계자 진술에 의존하는 이번 혐의들의 속성상, 진술번복을 위한 증인압박·회유 가능성이 의심되면 구속해도 무방하지 않겠냐는 암묵적 메시지를 은연중에 확산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파렴치범 사안이라면 이런 판단기준이 일응 타당하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여러 예외적인 특수사정으로 특징지워지는 이 대표 사안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단순해서 구체적 타당성이 없다. 이 대표 사안에 고유한 특수한 사정들을 다 외면하고 증거인멸 우려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이야말로 법을 빙자한 극도의 부정의가 아닐 수 없다. 정의로운 결정을 위해서는 사안의 성격과 무게, 파급력에 값하는 종합적인 검토와 고려가 필수적이다. 한마디로 증거인멸 우려를 금과옥조로 삼는 안이한 접근은 이 대표 사안에 어울리지 않는 무책임한 접근이다.

 

이재명 대표 사안에서 검찰은 지난 1년 넘게 모든 주변인물과 관계자들을 압수수색하고 소환조사하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검찰은 모든 증거를 확보해서 유죄입증을 자신한다. 그동안 투입된 수사인력과 수사기간을 생각해볼 때 안 그러면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와서 굳이 이대표를 구속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검찰이 더 조사할 내용이 없고 이 대표도 만약 필요했다면 입막음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이미 가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재판과정에서 중요한 증인이 종전 진술을 번복하면 법원이 그 신빙성을 부정하면 그만이다.

 

반면에 구속해선 안 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안에서처럼 유무죄 주장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경우 법관이 검찰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 구속영장을 발부했으나 나중에 재판과정을 통해 무죄로 판명나면 그 후과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자신은 구속필요성 유무를 재판했을 뿐 유무죄 본안재판을 한 게 아니라서 오판을 한 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이재명 대표 사안에서처럼 검찰의 의도적인 피의사실 흘리기가 장기간 지속된 경우 판사는 구속영장 발부에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판사가 검찰의 피의사실공표 범죄관행에 눈감고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무죄 일관되게 다투는 중대사안에선 불구속재판 원칙 고수해야

그래서다. 유무죄를 일관되게 다투는 중대사안에선 더더욱 불구속재판 원칙을 고수하고 구속영장을 내줘선 안된다. 이럴 때는 판사의 오판 가능성이 작지 않고 피고인의 변론권을 보장해야 할 필요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구속결정이 초래할 사회적·정치적 파급효과가 워낙 중대해서 나중에 오판으로 판명되면 원상회복과 피해복구가 어려운 사안에서도 같은 이유로 불구속재판 원칙에 더 충실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검찰은 이재명 대표가 현행범도 아니고 시종일관 무죄를 주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본래 큰소리치던 대장동 사안도 아닌 별건들로 인신구속 영장까지 청구했다. 이 대표를 잡아넣기 위해 윤석열-한동훈 검찰이 1년 반 넘게 360번도 넘는 압수수색을 자행하며 인디언 기우제식 먼지털이 수사를 해온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다.

 

만약에 윤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야당 대표에 대한 저인망식 표적수사에 매달려온 검찰이 정치검찰이 아니라면, 또한 이런 표적수사가 정적제거와 야당분열을 위한 수사권 남용이 아니라면 어떤 게 정치검찰이고 어떤 게 수사를 빙자한 정치보복이겠는가.

 

검찰의 집요한 먼지털이 표적수사 및 계획적인 피의사실 누설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구속영장을 내어주는 판사는 정치검찰의 조폭행태 및 정치사법의 공범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영장실질심사 법관이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인이자 야당 지도자에 대한 검찰의 수사권 남용을 제어하기는커녕 눈감아주고 구속영장을 내준다면 그는 법관이기를 포기하고 정치검찰의 하수인 노릇을 자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요약해보자. 이재명 대표 구속여부 재판에서 판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과 원칙에 충실해야한다.

 

첫째, 불구속재판이 원칙이다. 둘째, 유무죄 주장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셋째, 검찰은 지난 1년 넘게 막대한 수사인력과 시간을 투입해서 이미 모든 유죄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넷째, 훗날 본안재판에서 무죄로 판명되더라도 이번에 구속결정을 할 경우 이 대표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예상된다. 다섯째, 검찰은 지난1년 넘게 먼지털이 수사와 피의사실 공표를 통해 수사권남용과 여론몰이를 일삼았다. 유창훈 판사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한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시민언론 민들레: 2023.09.26

 

 

어른으로 산다는 것

얼마 전 가까운 지인이, 예전엔 부모로부터 네가 안 나서면 나라가 안 돌아가냐, 적당히 하라는 타박을 들었는데 이젠 자식에게 적당히 하시라는 걱정을 듣는다며 혀를 찼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후쿠시마 핵폐수 무단 투기에 가장 분노하는 세대도,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구속 여부에 대한 질문에 부당하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연령대도 4050이었으니,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이 세대의 현실인식은 다른 세대에 비해 진보적이거나 관심이 많은 세대라 할 수 있겠다. 에코 챔버 효과이기도 하겠지만 기성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SNS인 페이스북에서도 나라 걱정, 숨가쁜 정치현실에 한숨 짓는 목소리가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어떤 시절도 격양가를 부르며 편안한 날은 없었다.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니 이는 민주공화국에 사는 시민의 숙명 같은 것일 게다. 최근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최강욱 의원의 의원직 상실. 윤미향 의원 2심 징역형, 박원순 다큐영화 상영금지 가처분신청 인용, 이재명 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한 대통령 재가 및 국회 가결과 이에 따른 구속영장실질심사. 그리고 자질에 앞서 극우발언을 서슴지 않는 국무위원 후보자들의 배설물 같은 말들, 이외에도 수면 아래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을 많은 국가적 결정들.

 

차가운 이성으로 연대를 모색하는 시민들

총선을 6개월 앞두고 있는 최근 여의도발 뉴스는 각각의 사안마다 며칠씩 포털을 도배했을 중량급이지만 시민들에게 가 닿지 않는다. 예민하게 찾아보지 않으면 세상은 놀라우리만치 평온하다. 이것이 권위적인 정부가 바라는, 주권은 있으되 행사하지는 않는 세상이다. 주권 행사를 불온시하고 표현의 자유를 직간접적으로 억압하며 표본을 정해 공포와 증오를 조장하는 것, 이로써 그들이 얻는 것은 조용한 세상이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세상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처럼 자각한 시민들의 목소리로 바뀌어왔고 그 힘으로 균형점을 잡는다.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던 시민들은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을 지켜보며 뜨거운 분노에서 차가운 이성으로 자세를 고쳐 앉기 시작했다. 긴 호흡으로 멀리 가기 위해서라도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전술적 제휴가 어렵다면 손절하는 것이 최선이다. 일찍이 현실적 역량을 확인한 시민들은 절망을 연료삼아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지킨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고 시민들은 응원이 필요한 곳들을 찾아다니며 힘을 보태는 동시에 견딜힘을 얻는다. 그것이 연대가 주는 선물이다.

 

또 시민들은 이동순 시인의 홍범도 장군의 절규라는 문학작품을 혐오딱지를 붙여 무단 삭제한 페이스북 코리아의 도를 넘는 검열과 표현의 자유 탄압에 개천절 하루 접속거부라는 자발적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한다. 권리와 자존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표현에 납득할 수 있는 설명도 없이 마구잡이로 삭제하고 계정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권위주의와 이윤을 신성시하는 자본의 만남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낯선 이들과 자유로운 소통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유대를 쌓고 시민적 덕성을 배우는 공론의 장에서 삭제와 계정차단과 같은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공공이라는 뜻의 publicpoblicus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라틴어 pubes(어른)타인을 돌보다,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니 공적인 삶이란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볼 준비가 된 사람들의 활동무대이자 방식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정치나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갖고 안 갖고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이 되는 전제조건이니, 고대에 완전히 사적인 것만 아는 사람을 바보를 뜻하는 idiot의 어원인 idiotes라 불렀다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공적인 삶을 도외시하는 개인을 바보, 멍청이로 보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모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장하에게서 본 어른다움, 조민에게서도 보다

그러니 사적 이익보다 공공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 이해관계를 앞세우기보다 한 번이라도 더 자신을 들여다보는 이른바 검토하는 삶이야말로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요구받는 태도라 하겠다.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는 말도 이와 같은 함의를 지닌 것이다. 지난해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준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개개인에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질문으로부터 지유롭지 않다는 것, 그 누구도 지금 가진 것이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가 어른 김장하다.

 

최근 한 청년이 펴낸 책을 읽은 많은 분들이 그녀가 바로 어른이었다며 오히려 위로받았다고 말했다. 바로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 씨다. 그녀의 책도, 그 책을 접한 시민들의 한결같은 반응도 매우 흥미롭다. 이 시대, 공적 삶을 살 자격을 갖춘 어른이란 물리적 시간이 만드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청년 조민은 이렇게 독백한다.

 

어떤 때는 파도를 거슬러 헤쳐 나갈 테고 또 어떤 때는 파도에 몸을 싣고 부유하기를 즐길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파도든 폭풍이든 그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은 채 나의 속도에 맞춰 나의 흐름을 찾아 오롯이 나로서 빛날 날이 오겠지요.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찾으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더 이상 사회가 정하고 요구하는 학력이나 자격증이 아닌 자신 스스로 기준이 될 것임을 선언하는 청년이야말로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이 아닐까. 성실한 땀과 노력, 그 시간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삭제당하는 아픔은 일찍이 없었던 종류의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산산히 부서진 마음을 공적인 삶을 통해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을 추스리고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위로하려는 이들이 오히려 위로받는 것은 지옥에서 헤매던 이가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했음이며 위로나 연민보다는 격려와 연대가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응원하고 격려함으로써 서로가 위로받는 것이다.

 

오늘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재명은 소년공으로 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진 경험이 있고, 가난을 이기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음에도 재능을 자신의 안온한 삶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쓰겠다고 정치에 입문했다. 행정가로서의 능력은 검증받았지만 1% 차이로 대통령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집요한 보복수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영혼 털리고도 자존 지키며 당당한 조민과 이재명

이 싸움에서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재명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대장동으로 안 되니 백현동으로, 누가 봐도 범죄자로 만들어 조리돌림하려는 의도가 뻔한데 도주 우려가 없는 제1야당 대표의 구속영장을 내준다면 사법부의 권위는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 절반의 지지를 얻고도 1% 차로 낙선한 야당대표, 나아가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를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것에 부역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잡초처럼 살아온 이재명은 죽이려 할수록 살아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소년공, 행정가의 이미지에서 비로소 정치가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조민과 이재명. 이들의 공통점은 권력을 사유화한 이들에게 영혼이 털리고도 거리낄 것이 없기에 여전히 자존을 지키며 당당하다는 점이다. 청년이 그린 책표지 그림을 보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전지적 관점에서 보고 있고 이제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파도에 유연하게 올라타겠다고 말한다. 그 속에서 자기 속도를 찾아 중단없이 나아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재명 대표도 강물은 굽이쳐도 결국 바다로 흘러갔다어떤 고통도 역경도 마다하지 않겠다, 사즉생의 각오로 국민항쟁의 맨 앞에 서겠다의지를 다졌다. 구속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며 이제부터 그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자신의 삶을 대상화하여 볼 줄 아는 이에게 위기는 또다른 기회다. 조민은 의사라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어쩌면 자유롭게 더 큰 날개를 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정부와 언론에 철저하게 외면당해온 이재명 대표 입장에서 자신의 체포동의안 표결은 모든 국민 앞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새로운 길을 연 기회였다. 위기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기회로 삼는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생에 대한 사랑이다.

 

권력자들의 추석상앞에서 분노 키우며 혜안 찾아나갈 어른들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했다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었던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 생활을 기록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저들이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고자 하는 의도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노예처럼 하라는 대로 할지라도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존중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조민도 이재명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곧추세우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 곧 명절이다. 검찰권력으로 국가를 영구히 장악하려는 이들은 추석상에 오를 안주를 만드느라 바쁘지만 국민들은 조용히, 냉정한 분노를 키우며 혜안을 찾아나갈 것이다. 그것이 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어른이니까 말이다. 후쿠시마 핵폐수 방류로 차례상에 수산물을 올리는 것도 망설여야 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추석에 시금치 한 단 마음 편히 집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가족 모두 한 상에 둘러앉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상식과 공적인 삶이 무엇인지 곱씹어볼 수 있는, 마음만은 넉넉하고 풍요한 추석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명절이어서 가족의 빈자리에 더욱 가슴이 미어질 가정에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강미숙/시민소셜칼럼니스트 시민언론 민들레: 2023.09.26.

 

 

빨갱이는 만들어진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검토 중이라던 시기에 육사 측에서 이미 이전을 위한 용역 계약까지 맺은 상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박정희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한 번도 문제된 적 없었던 홍범도 장군의 과거 행적에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우려는 윤석열 정부의 움직임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홍범도 장군이 스스로를 의병이라 지칭한 것을 번역한 ‘partisan(비정규군)’6·25 전쟁 전후에 활동한 공산 게릴라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지만, 맥락을 생략한 채 홍범도 장군이 빨치산으로 활동했다며, 현재 통용되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부각한다.

 

국방부가 문제 삼는 그의 소련 공산당 이력 또한 윤석열 정부가 경계하는 분단 이후의 공산당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그의 입당은 독립군 생계유지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더군다나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다는 국방부의 주장과 달리, 이들이 참고했다는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에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직접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홍범도 장군의 이력을 왜곡해 문제 삼는 일에 대해서는 더 말을 보탤 필요도 없을 만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그 부당함을 적절히 비판해 주었지만, 논란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해 볼 부분이 있을 것 같다.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은데 의혹이라는 무적의 단어와 논증하지 않는 자세. 역사적 자료가 새로이 발굴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제까지 정립된 평가를 부정하려는 무리한 시도는 오직 의혹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포하는 모호한 단어에 의존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기려왔던 이전 정부 모두에 반기를 드는 일이자 역사적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학계의 평가를 뒤집는 엄청난 일을 벌이려 하면서도, 전혀 치밀하지 않다. 엄밀하게 검토하지 않는 태도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이함을 기반으로 한다.

 

국방부 정례 브리핑에서 국방부 대변인은 기자들의 논리적인 반박에 저희는 저희 입장을 설명해 드린 것이라는 무응답에 가까운 답변만 되풀이했다. 재반론할 근거는 없지만 입장은 그대로 고수하겠다는 말이다. 의혹이라는 갑옷을 두르고 최소한의 설득력도 갖추지 않은 주장만을 남발하는 방식으로 한 인물을 몰아세우는 것이다. 이는 영화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한다.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들과 연관돼 있다는 의혹만으로도 한 인물을 거뜬히 몰아낼 수 있었던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보안 인가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와 그의 아내, 동료 과학자, 변호사 등은 그 의혹에 근거를 들어 합리적으로 반박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의혹은 한 번 제기되면, 이를 제기한 이가 아닌 의심을 받는 당사자에게 그 입증 책임이 전가된다. 그 의혹이 사실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데 설령 무고함을 충분히 입증해 낸다고 하더라도, ‘빨갱이라는 낙인은 한 번 찍히고 나면 쉬이 씻어낼 수 없기에 당사자는 불에 덴 듯한 흉터를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빨갱이 낙인은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강력하게 기능한다. 국가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반공이 국가 의제로 자리 잡으며, 공산주의자는 적으로 상정되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죽여도 되는, 아니 죽여 마땅한 빨갱이로 전락했다. 문제는 공산주의자임이 밝혀졌기에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 된 이들이 국가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빨갱이로 간주된 사례가 훨씬 많았다는 점이다. 적과 아군을 판가름하는 기준인 듯 보이는 사상이나 이념은 치밀하게 검증되지 않으며, 표적이 된 누군가를 몰아내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이념 대립을 부추기기 위한 악의적인 의혹 제기가 수없이 되풀이돼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혹이라는 두루뭉술한 단어만으로도 빨갱이는 만들어진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경향 : 2023.09.27.

 

 

지방은 일 때문에 지역을 곧잘 가는 편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지방이라는 말 대신에 지역이라는 표현을 쓴다. 지방이라는 말이 서울중심주의가 철저히 내면화된 우리 사회에서 비하 또는 멸칭의 의미로 잘못 통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또한 하나의 지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현실을 보라. ‘시골이나 촌스럽다라는 말 또한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시골이라는 말은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고, 촌스럽다는 말 또한 더 이상 쉽게 변하지 않는 한결같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근 방문한 지역은 전남 고흥과 강원 춘천·속초 그리고 경북 영천이다. 배운 게 도적질이라고 했나. 어느 도시를 방문하면 그 지역의 문인이 누구였는지 떠올리며 혼자만의 문학기행을 하는 오래된 버릇이 있다. 고흥 거금도에 갔을 때 소설가 전성태의 <퇴역 레슬러>(2000)를 떠올리고, 속초에 갔을 때 소설가 이경자의 <순이>(2010)를 생각하는가 하면, 영천에서는 소설가 하근찬의 <수난이대>(1957)<야호>(1970~1971) 속 주인공들의 모진 운명을 연상하는 식이다. 영화 <변산>(2018)에 등장해 유명해진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라는 구절을 읊조리며 지는 해를 보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지역을 공간적으로인식하려는 시선은 지역 사람들이 긍지를 갖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지난 8월 초 속초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한 속고양포럼에서 발표한 <사라지는 도시, ‘살아지는도시>에서 지역은 사람이다라는 명제를 주목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속고양은 강원 영북(嶺北) 문화권에 속하는 속초·고성·양양을 아우르는 호칭이다. ‘지역은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잘 작동하려면 젊은 사람,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마음껏 활보하고, 활개 치고, 활동할 수 있는 도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활기가 넘쳐야 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비롯해 젊은 사람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대학 하나 없는 속초에서 청년들이 19세가 되면 고향을 떠날 채비를 한다는 말이 왜 그렇게 쓸쓸하게 들렸을까. 비단 속초뿐일까.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해야 한다. 서울의 시선이 아니라 지역의 눈으로 전환해야 한다. 국민소득 3만달러를 돌파한 일류 선진국이 되었다고 우쭐해할 게 아니라, 지역을 대표하는 출판사 하나, 잡지 하나, 서점 하나 없는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서점 하나 없는 자치단체가 7곳이나 되고, 서점 소멸 예정 지역이 29곳으로 추산되는 지역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초라한 경제동물이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추석 명절이 시작됐다.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불황 탓만도 아닐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의 공기가 나쁜 탓이 클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와 나라에 대해 안돼요” “없어요” “못해요라며 (no)’ 3종 세트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와 나라가 좋은 현상은 분명 아닐 것이다. 어떻게 내가 사는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인가. ‘지방에서 지역으로시선과 언어를 전환하고, 지역의 서점·출판사·잡지·작가 등을 기억하자. ‘지방은 더 이상 없다.없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경향 : 2023.09.27.

 

 

명절에 알아두면 좋을 몇 가지 통계들

이젠 민족의 대이동까지는 아니지만,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근황을 얘기하고 회포를 풀기에 명절만큼 반가운 날이 또 있을까. 차표를 구하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왕복 수백거리도 기꺼이 운전할 수 있는 건 이런 설렘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복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깃들지는 않는다. 노력했던 일이 물거품이 되고 기대했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좌절한 이들에게 명절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은 행사다. 그래서 때로는 취업은 언제 하니’ ‘결혼은 안 할 거니같은 인사치레조차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여기에 한 명 두 명 거들다 보면 관심은 참견이 되고, 염려는 오지랖이 된다.

 

명절이 아니면 보기 힘든 친척들명절만 아니면 보지 않아도 되는 친척들로 돌변하는 데는 이런 몇마디면 충분하다. 어째서인지 기성세대 주변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구해 인생을 순항하는 엄친아’ ‘엄친딸들만 즐비하다. 하지만 현실에선 학교(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한 청년(15~29) 4명 중 1명이 백수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조사에서 청년층 부가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 5월 기준 청년 인구 8416000명 중 재학·휴학생을 제외한 최종학교 졸업자는 4521000명이다. 이 가운데 1261000명은 미취업 상태였다. 대학 졸업자가 666000, 대학원 이상 졸업자도 12000명이나 됐다. 인구가 줄었다느니 구인난이 심화됐다느니 하지만 맹렬한 취업경쟁 속에 청년들은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고졸 이상 청년 4명 중 1명이 백수

연애관과 결혼관도 말 그대로 천지개벽 수준으로 변했다. 통계청이 청년(15~34) 10586000명을 대상으로 살펴본 청년 의식 변화자료를 보면 결혼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은 10명 중 4(36.4%)이 채 되지 않았다. 이는 10명 중 6명꼴이던 10년 전보다 20%포인트나 낮아진 것으로, ‘결혼에 긍정적이라는 여성 응답자는 10명 중 3(28%)도 안 됐다.

 

젊은이들의 결혼관이 이토록 가파르게 변화하고 있으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같은 질문 자체가 애초에 고리타분하고 맥락 없이 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해 혼인 건수는 192000건으로 1년 전보다 0.4% 감소했다. 이는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7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가장 많은 혼인이 이루어졌던 1996년에는 한 해 435000건의 혼인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는데, 199730만건대로 내려온 뒤 201620만건대, 202110만건대로 내려앉았다. 25~49세 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 인구구조적인 원인이 가장 큰 배경이지만, 이처럼 달라진 가치관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게 통계청 설명이다.

 

노총각이나 노처녀, 결혼적령기라는 표현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지난해 기준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은 33.7, 여성은 31.3세로 1년 전보다 각각 0.4, 0.2세 올라갔다. 남성의 경우 34세 이하에서 전년 대비 혼인 건수가 감소하고 35세 이상에서 증가했는데, 20대 후반(-8.4%)에서 가장 많이 줄고 40대 초반(10%)에서 가장 많이 늘었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초혼 기준으로 20대보다 30대 비중이 높아진 지 오래다. 2021년 초혼 여성 총 156576명 중 30대가 76900(49.1%)으로 절반에 육박했다. 이어 2071263(45.5%), 406564(4.2%) 순이었다. 20여년 전인 2000년에는 초혼인 20대가 30대의 무려 8배였다.

 

아이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결혼해도 자녀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인식은 201846.4%였지만, 2022년에는 53.5%로 과반이었다. 반면 결혼생활에서 가족 간 관계보다 부부가 우선시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청년 비중은 202260.7%2012(54.7%)보다 늘었다.

 

결혼해도 자녀 불필요절반 넘어

기성세대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 표준으로 삼아왔던 졸업취업결혼출산의 도식 상당 부분이 옅어진 것으로,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누구든 명절만 아니면 보지 않아도 되는 꼰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상황극에서 한 고모가 명절에 만난 다 큰 조카에게 물었다. “취업은 왜 안 하니”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움츠리며 말을 더듬는 조카에게 고모가 또 묻는다. “, 네 오빠는 이번에 왜 안 왔니?”

 

조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고모 때문에요.”

이호준 경제부 차장 경향 : 2023.09.27.

 

 

대통령의 검찰과 수사의 정당성

검찰청법 제34(검사의 임명 및 보직 등) 검사의 임명과 보직은 법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한다.”

대한민국 모든 검사는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어떤 일을 할지도 대통령이 정합니다. 이런 대통령의 검찰이 정치권력에 종속될까 염려돼 여러 제도가 고안되었습니다.

 

우선 검찰총장을 두었습니다. 정부 부처들에 딸린 17개 외청 가운데 검찰만이 유일하게 수장 명칭이 청장아닌 총장이고, 위상과 대우도 차관급이 아닌 장관급입니다.(17개 외청 중 검찰에만 인사·예산편성권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견제 장치를 두었습니다) 법무부 장관을 검찰의 감독자로 두면서도, 구체적 사건에 관해서는 개별 검사를 지휘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장관은 검찰총장만 지휘·감독할 수 있는데, 총장 임기 2년을 보장해 부당한 지휘에는 맞설 방패 역할의 토대도 마련해두었습니다. 문재인 정권 때 윤석열 검찰총장을 떠올려보세요.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검찰총장을 정치권력이 제어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임명 단계에서부터 대통령 의지가 반영된 인물이 검찰총장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검사 인사권을 대통령이 쥐고 있기 때문에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검찰입니다.

 

미국에는 여러 검찰이 있습니다. 연방검찰(US Attorney's Office), 주검찰(State Attorney General's Office), 카운티마다 있는 지역검찰(District Attorney's Office) 입니다. 세 기관은 상하관계가 아닙니다. 독립적으로 움직입니다.

 

연방검찰의 검사장(US Attorney)은 모두 93명으로, 상원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연방 법무부 장관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주검찰총장과 지역검찰 검사장은 대부분 선거로 뽑습니다. 눈치를 봐야 할 임명권자 자체가 없습니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복수의 검찰청은 서로서로 감시하는 미국식 사법제도의 근간을 이룹니다. 카운티 검사가 기소하지 않기로 한 사건을 주 검사가 기소할 수 있습니다. 범죄 관할권이 조금씩 다르지만, 각자의 소관법령 위반이라고 걸 수 있습니다. 카운티 검사가 주 검사를, 주 검사가 카운티 검사를 기소하기도 합니다. 세 곳이 같은 사건을 두고 모두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특히 권력형 비리는 특정 검찰의 기소독점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먼저 조사에 착수하는 검찰이 우선적으로 기소 권한을 갖습니다. ‘대통령의 검찰이 있다 한들 여러 검찰청 중 일부이고, 다른 검찰의 견제를 받습니다.

 

정당한 것만큼이나 정당해 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 검찰, 대통령의 검찰은 이 지점에서 치명적으로 허약합니다. 제아무리 공명정대하게 수사해도 수사 주체가 대통령의 검찰이라는 점은 수사 결과를 의심케 하는 요소가 됩니다.

 

이 수사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대통령의 검찰은 운명처럼 달고 다닙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둘러싸고 극과 극의 대립이 펼쳐집니다. ‘대통령의 검찰이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문제입니다.

 

수사 정당성에 의문을 가질 상황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대통령의 검찰이 맡기에 부적절한 수사라면 원칙적으로 특별검사에게 맡기는 것부터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미 법률은 마련되어 있습니다. 특별검사법은 국회나 법무부 장관이 공정성 등을 이유로 특별검사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건이라면, 특별검사를 임명해 수사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검사 추천 규정이 여권에 유리하다고 야당이 판단하고 있어 실제 활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기왕에 만들어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 대상을 넓히고 조직을 키워 상설특검처럼 운용할 수도, 미국처럼 검사장 직선제를 고민해볼 수도 있겠죠. 선출직이다 보니 또다른 의미로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적어도 임명권자에 따라 표변한다는 한국 검찰식 오명은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사가 정당해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수사가 정당해 보이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검찰로 인한 갈등, 다른 질문이 필요합니다.

김원철 사회부장 한겨레 : 2023.09.27.

 

 

김정은, 을에서 갑으로윤석열 정부만 모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9424일 러시아를 찾았다. 베트남 하노이의 북-미 정상회담을 노딜로 끝내고 회담장인 메트로폴 호텔을 떠난지 두 달 만이었다.

새벽 기차를 타고 떠난 김 위원장은 오후 6시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도착해 러시아 언론에 기습적으로 인터뷰를 당했다. 당황했는지 , 라는 신음성 소리를 냈다. 러시아는 북한의 존엄을 존엄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북한은 자신들의 관례대로 전날에야 김 위원장의 방러를 발표했지만, 러시아는 이미 6일 전에 발표했다. 러시아는 러시아어로 러시아-북조선 회담이라고 표기했다. 미국과 대화가 결렬돼 러시아를 찾은 김 위원장에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는 북-미 대화를 지지하고, 6자회담을 열어 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양국 군사협력을 언급하지 않았다. 고립무원의 북한이 러시아를 찾아 손을 내밀었지만, “-로 관계에서 새로운 전성기가 펼쳐졌다는 말잔치뿐이었다. 그해 말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북한의 대외관계는 전면 동결됐다.

 

45개월이 흐른 뒤인 지난 12일 김 위원장은 다시 러시아를 방문했다. 러시아는 이번에는 북한과 동시에 전날에야 그의 방문을 공식 발표했다. 정상회담에서 늦게 나타나기로 악명 높은 푸틴은 13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 30분 일찍 도착해, 그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러시아-조선 회담이라고 표기했다. 2019년엔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북한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를 인정하고 한국을 무시했다.

 

존엄이 상처받던 이던 김 위원장은 45개월이 흐른 뒤 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중 대결의 격화, 우크라이나 전쟁, 동아시아에서 한··일 준동맹체제의 진전에 대응해 중-러와 북한이 만든 정세 변화다.

 

김 위원장의 을에서 갑으로의 격상은 미국의 반응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은 김 위원장의 방러를 지난 4일에 뉴욕타임스 보도를 통해 누설하고는 북한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필요한 포탄 등을 제공하는 무기 거래를 할 것이라고 양국 때리기에 나섰다.

 

하지만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이 지난 16북한의 무기 제공이 우크라이나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내겠느냐나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듯이, 북한 재래식 재고무기의 지원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다. -러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의 전략관계 재개를 시사했다. 양국의 전략관계 재개는 양국을 넘어 동아시아, 미국의 세계전략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푸틴은 지난 13일 김 위원장과의 회담 전에 러시아가 북한의 우주 위성을 건설하는 것을 도울 것인가라는 기자들의 물음에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라고 답했다. 러시아는 20154월 김 위원장의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한 현영철 당시 인민무력부장이 방공미사일 시스템 S300의 구매와 원자력잠수함 설계 지원을 요청했지만, 명시적으로 거절한 바 있다. 하노이 노딜 이후 핵무력 고도화로 질주해온 북한에 러시아가 정찰위성 등 전략무기 기술을 지원하며, 북한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러시아와 북한의 경제협력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무력화한다. 2022년 북한 대외무역에서 중국은 96.7%, 러시아는 0.1% 미만을 차지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서방의 제재로 서방 경제와 절연된 러시아는 이제 북한과의 경제협력에 주저할 이유가 없어졌다. 제재에도 불구하고 유가 상승과 중국과의 위안-루블화 거래로 새로운 경제생태계를 구축하려는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해 부족한 노동력을 북한으로부터 조달할 수 있다. 석유와 식량도 남아돌고 있다.

 

물론 군사 및 경제에서 북-러의 전략관계 심화는 아직 실현성 높은 가능성일 뿐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그 가능성을 카드로 휘두르고 있다. 김 위원장의 방러 때 푸틴의 방중과 중-러 정상회담이 발표됐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로 가던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미국이 몰타에서 붙잡고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의 회담을 급조했다. 그리고 조 바이든-시진핑 정상회담을 조율했다. 김 위원장의 방러가 미··러 삼각관계에 준 충격을 여실히 드러낸다.

 

-러의 전략관계에 놀란 미국이 중국에 다가서고, 중국은 북한과 결속하려는 러시아와의 연대 카드를 미국에 흔들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 카드로 미국을 자극하는 한편, 중국도 견인하려 한다. 북한은 이제 미··러 삼각관계를 요동치게 하는 독립변수로 등장했다.

하지만 한국과 윤석열 정부는 아직도 북한을 4년 전의 왕따당한 로 보고 있다.

정의길 ㅣ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 2023.09.27.

 

 

검찰정치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재명 영장 기각 이후

우리나라 정치의 주인공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딱 두 사람이다. 다른 정치인들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빌런의 시대다. 증오와 증오, 분노와 분노가 충돌하는 전쟁판에는 악당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우리 편 빌런이 가진 악당성을 사랑한다. 거대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팬덤의 시대다. 증오와 증오, 분노와 분노가 충돌하는 전쟁판에는 팬덤이 필요하다. ‘비판적 지지는 필요 없다. ‘맹목적 지지가 필요하다. 거대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202239일 대통령 선거 이후 16개월이 지났다. 그런데도 대선 연장전이 계속되고 있다.

 

927일 이재명 대표 영장 기각까지가 대선 연장 전반전이었다. 연장 전반전에 이재명 대표는 고전했다. 두 차례나 구속 위기에 몰렸고, 정당 지지도에서도 대체로 밀렸다.

지금부터는 연장 후반전이다. 이재명 대표에게 반격의 기회가 왔다.

 

대선 연장전의 최종 승부는 202441022대 총선에서 가려질 것이다. 총선에서 패배하면 치명상을 입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 이재명 대표는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재명 대표 구속영장이 기각됐으니 이제 상황이 끝났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민주당의 총선 승리와 이재명 대표의 부활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운명은 이재명 대표 자신이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921일 국회 본회의 표결 내용을 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 의원은 168명이다. 반대는 136표였다. 30명 정도가 찬성과 기권·무효로 이탈했다.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의원 136명이 모두 친명’(친이재명)일까? 이재명 대표의 지시에 따라 반대표를 던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민주당에서 친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의원은 엄밀히 따지면 10명도 되지 않는다. 그럼 뭘까? 왜 이렇게 많은 의원이 반대표를 던진 것일까?

 

이재명이 아니라 민주당 대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분간 방탄 정당이라고 욕을 먹더라도 민주당이 무너지거나 분열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들이 반드시 이재명 대표 체제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적절한 시기에 이재명 대표가 한발 뒤로 물러나고 비대위 체제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원들도 많다.

 

체포동의안에 찬성이나 기권·무효표를 던진 30명 정도의 비명’(비이재명) 의원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이재명 대표가 공천을 주지 않을까 걱정해서 그런 것일까? 민주당 당권을 차지하려고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재명의 민주당만으로는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자신도 선거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지난 6월 불체포특권 포기 선언을 갑자기 번복한 것은 명분이 너무 없다고 본 것이다.

 

일러스트 하재욱

체포동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과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은 의외로 생각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런데도 체포동의안 가결 직후 의원총회에서 서로 욕설을 하고 분노에 찬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추태를 보였다. 의원들도 사람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기자들의 눈에는 좀 한심해 보인다. 의원들이 차분해지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이제 민주당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이 깨질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민주당은 926일 홍익표 의원을 새 원내대표로 선출했다. 추석 연휴 냉각기를 거친 뒤 서서히 수습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내부 갈등이 격화하거나 길어지면 위험하다는 것을 의원들이 누구보다도 잘 안다.

 

당장의 관심사는 이재명 대표가 비명 의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다. 비명 의원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구속은 면했지만, 이재명 대표의 리더십에는 이미 큰 흠집이 났다. 어떻게든 리더십을 다시 세워야 한다. 리더십을 세우려면 당내 통합에 나서야 한다. 비명 의원들에게 화해의 손짓을 해야 한다. 가능할까?

 

여론조사 정당 지지도가 중요하다. 추석 연휴 직후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도가 올라가면 이재명 대표의 정국 주도권과 민주당 장악력이 강화될 것이다. 민주당 지지도가 오히려 떨어지거나 별 변화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재명 대표가 좀 더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는 체포동의안 표결 직전 민주당 의원들에게 내가 전횡하면 총선에서 질 텐데 그럴 리가 있겠냐고 말한 일이 있다. 이재명 대표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실 공천은 대표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후보자 검증위원회’, ‘후보자 추천 관리위원회’, ‘경선 선거관리위원회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공천의 기준은 친명, 비명이 아니라 본선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재명 대표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총선 승리다. 총선에서 이겨야 정치적으로 부활할 수 있다. 재판도 유리해진다. 다음 대선 출마 가능성도 커진다. 총선에서 이기려면 이재명 플러스알파체제를 갖춰야 한다. 자신은 한발 물러서고 새로운 인물을 비대위원장이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세우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결단에 달린 문제다.

 

이재명 대표의 구속영장이 기각됨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에는 당장 비상이 걸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에서 맞붙은 경쟁자를 감옥에 보내지 않는다는 우리 정치의 불문율을 깨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김대중 대통령을 비난했지만 디제이(DJ)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검찰총장에게 수사 유보를 지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나라당 총풍’ ‘세풍사건을 수사하도록 했지만, 이회창 총재를 직접 건드리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 출신이다. 검찰 정권이다. 검찰이 정치를 주도한다. 검찰은 대선 이후 이재명 대표를 말 그대로 탈탈 털어서 두차례나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한번은 국회에 의해, 한번은 법원에 의해 가로막혔다. 검찰을 앞세운 정치는 이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추석 연휴 뒤 윤석열 대통령은 어떻게 나올까? 이념 전쟁을 강화할까, ‘민생과 지속가능한 발전쪽으로 돌아설까? 당분간은 민주당을 공산 전체주의’ ‘반국가세력이라고 계속 몰아붙일 것 같다. 워낙 자기 확신이 강해서다.

 

총선까지는 겨우 6개월 남짓 남았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여기는 다이내믹 코리아다. 우리나라의 6개월은 다른 나라의 6년과 맞먹는다.

10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한 김태우 전 구청장을 다시 공천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처사다. 이재명 대표 영장 기각 사태가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다. 위기를 느낀 국민의힘 지지층이 결집할 수도 있다. 승패와 득표율 격차 모두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결과가 나오면 좀 시끄러워질 것이다.

 

1128일에는 부산 엑스포 유치 여부가 결정된다. 성공하면 부산·경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사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에 호재가 될 것이다.

해를 넘기면 각 정당의 총선 전략에 따른 공천 전쟁이 시작된다. 잘하는 것보다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총선에는 몇가지 법칙이 있다.

 

혁신하면 유리하다. 2012년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새누리당이 그랬다. 경제민주화를 약속하고 색깔을 빨갛게 바꿨다. 예상을 깨고 과반 압승을 거뒀다. 공천을 무리하게 하면 진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새누리당이 그랬다. ‘진박 감별사’ ‘옥새 들고 나르샤파동 끝에 1당을 빼앗겼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성한용 선임기자 한겨레 : 2023.09.27.

 

 

21세기에도 '호남 푸대접', 누가 시키고 있나?

민주당의 호남 공천 시스템, 이대로 괜찮나

칼럼을 쓴다고 해서 공당(公黨)의 운영을 두고 어떻게 하라 마라 할 일은 아니지만, '좋은 정치'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선제도와 호남 정치입니다.

 

지난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전라남도 등 호남권 3개 광역시·도의 당선자는 모두 스물여덟 명입니다. 이중 광주 8, 전북 9, 전남 10석 등 27석을 더불어민주당이 석권했습니다. 전북의 남원·임실·순창 선거구에서만 국민의당 출신인 무소속 이용호 후보가 당선됐는데, 민주당에 복당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습니다만 이듬해 국민의힘에 입당해 지금은 여당 국회의원입니다.

 

민주당은 전국정당입니다. 우리나라의 정당법은 제3조에서 '정당은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특별시·광역시·도에 각각 소재하는 시·도당으로 구성한다'는 요건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어 제17조에서는 '정당은 5 이상의 시·도당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 지역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의 창당을 사실상 제한하고 있습니다.

 

다만 영·호남을 중심으로 특정 정당 몰표 선거가 반복되는 등 지역주의가 현상적으로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과거 정치적 목적으로 조성된 영남과 호남의 지역 차별과 갈등이 표심을 통해 반복적으로 표출되고, 결국 극단적 진영으로 나뉘어 고착화한 역사적 과정이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와 지역감정의 완화를 기대하게 만든 선거 결과도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영·호남 지역의 보편적 투표 기준이 후보자의 소속 정당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전국정당이 일부 공고한 지역 기반을 갖는 건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닙니다. 미국의 경우만 보아도 캘리포니아, 뉴욕, 일리노이, 매사추세츠, 워싱턴 등 매번 민주당이 승리하는 주, 앨라배마, 오클라호마, 아이다호, 몬태나, 노스다코타 등 매번 공화당이 승리하는 주가 있습니다. 일관된 지지 경향이 없는 주들은 경합 주(swing states)라고 부릅니다. 플로리다,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미시간 등이 여기 해당합니다.

 

미국의 정치비평가나 학자, 언론인들은 이른바 '파란 주(민주당)', '빨간 주(공화당)'들의 존재에 대해 몇 가지 우려를 표합니다. '선거 때 정당의 관심이 늘 경합 주에 집중되므로 파란·빨간 주 유권자의 관심사와 문제는 캠페인에서 소외된다', '경쟁이 없어 지방정부의 질이 저하되고 공직자가 좋은 성과를 낼 동기가 줄어든다', '혁신이 저해되고 정치가 유권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게으르게 만든다' 이런 것들입니다. 어떤가요? 우리 정치에 바로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죠?

 

호남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입니다. 지나온 선거 결과들을 살펴보면 좋은 정치를 갖기 위한 유권자들의 노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국회의원이나 광역단체장 선거보다 투표의 정치적 부담이 덜한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무소속을 후보자를 선택함으로써 민주당에 경고를 보내는 일이 흔한 편입니다. 지난 202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전국의 기초단체장 중 무소속은 17명이었는데, 이 중 10명이 호남권에서 나왔습니다. 2018년에는 무소속 17명 중 7명이 호남이었고, 2012년에는 29명 중 15명이었습니다.

 

한편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진보 성향의 제3당이 선택지가 됩니다. 2016년 국민의당 녹색 돌풍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2020년 총선에서는 그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민생당 소속으로 출마한 거물급 중진 의원들이 참패했습니다. 광주의 장병완·박주선·천정배·김동철, 전북의 정동영·조배숙·유성엽, 전남의 박지원 전 의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민생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치인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수진영 바른미래당 계열과의 합종연횡, 끊임없는 계파 갈등으로 호남 시민들의 기대를 짓밟은 호남 기반 제3정당을 심판한 것이죠.

 

결과적으로 초선 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었습니다. 호남 국회의원 28명 중 17명에 달합니다. 비율로 보면 60.7%, 여야 경쟁이 치열한 서울의 36.7%(49명 중 초선 18)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선거 결과를 지켜보며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으로 호남 정치의 변화를 기대해볼 만한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개인적인 기대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21대 국회의원의 임기는 불과 8개월여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음 선거를 준비해야 할 시점입니다. 호남은 '경선 승리 = 당선'의 공식이 통하는 곳이니만큼 현역 의원이나 도전자나 경선에 사활을 겁니다. 그런데 그 준비라는 게 말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됩니다. 권리당원의 모집, 조직관리, 동원입니다.

 

민주당은 당헌 제98조에서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의 경선 방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권리당원의 투표·조사결과는 100분의 50 이하, 권리당원이 아닌 유권자의 투표·조사결과는 100분의 50 이상으로 반영한다'라는 것입니다. 민주당은 이 비율을 5:5로 적용해오고 있습니다. 당원과 일반 유권자의 의견을 반반씩 반영해 후보자를 선출한다니, 일견 합리적인 방식으로 느껴집니다.

 

여기서 몇 가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일단 권리당원 외 50%의 비중을 차지하는 일반유권자는 세부규칙상 '민주당 지지층 또는 무당층'으로 자격이 제한됩니다. 무당층의 참여는 드문 일이라 핵심 지지층을 대상으로 한 경선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일반 유권자 경선은 일반적 여론조사가 아니라 투표입니다. 정해진 규모의 안심번호를 추출('안심번호 선거인단'이라고 부릅니다)ARS를 몇 차례 발송하고, 참여하는 모든 민주당 지지층·무당층에 투표권을 주는 방식입니다. 여론조사와 비교하면 놀랄 정도로 응답률이 높습니다. 거의 모든 후보자가 조직을 동원해 전화 대기를 시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경쟁이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 과열된다는 점입니다. 경선이 본선과 다름없는 호남 정치인들의 관심사는 A부터 Z까지 권리당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현역의원들이 노심초사하는 국회의원 평가에도 권리당원의 여론조사가 포함되죠. 다른 데 신경 쓸 여력도, 필요도 없습니다. 권리당원 조직을 장악한 국회의원이 지방선거 공천을 무기로 후보자들을 줄 세우거나 경선에 개입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한번 상상해 봅시다. 만약 내가 사는 지역의 국회의원을 뽑는데 정당의 당원과 핵심 지지자들의 투표로만 결정한다면, 정치인들이 나 같은 일반 시민들의 삶에 일말의 관심이나 가질까요?

 

, 그래서 피해는 고스란히 호남 유권자의 몫이 됩니다. 주민의 삶을 개선한다거나 일자리를 만든다거나 서민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 같은 지역 정치 본연의 일들이 후 순위로 밀리니까요. 정책을 만들고 비전을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일 필요도 없겠죠. '호남 푸대접'이 박정희 정부에서 시작되었을지언정, 정작 지금 호남을 정치적으로 소외시키는 건 민주당 경선제도의 왜곡과 조직선거에 온전히 기대는 낡은 정치 행태가 아닐까요.

 

과거 민주당은 몇 가지 정치 실험의 경험이 있습니다. 배심원제 경선이라든지 공론조사를 통한 야권후보 단일화 등이 대표적입니다. 유권자들에게 인물을 충분히 알린 후 판단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공정성을 장담할 수 없다거나 후보자들이 승복하기 어렵고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사라지고 말았죠. 관리의 부담을 피하고 보다 간편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유권자를 위한 최선의 후보자를 공천해야 한다는 정당의 본질적 역할론을 압도하고 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닐 겁니다만, 적어도 호남의 특수성을 고려한 공천 제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호남 정치인들이 시민과 지역사회를 위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면 좋겠습니다. 그게 바로 민생을 챙기고,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돌보며, 좋은 정치를 만들겠다는 민주당의 초심과도 일치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박해성 티브릿지 대표 | 프레시안 2023.09.28

 

 

검사의 사형수와 오웰의 사형수

80년 전, 1940년대 독일 나치 정권 때다. 한 경찰부대 사령관으로 600명의 부하를 지휘, 1년간 9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이가 있다. 당시 30대 초반의 오토 올렌도르프(Otto Ohlendorf, 1907~1951)! 전쟁 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는 교수형평결을 받았다. 자녀 5명을 남긴 채 만 44세에 사형으로,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올렌도르프를 비롯한 22명의 전범을 재판에 세워 철저히 단죄한 검사,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인 벤 페렌츠(Benjamin Ferencz, 1920~2023)! 그가 1947, ‘학살자 명단 보고서를 발견하자마자 학살범 단죄 결심을 한 것은 만 27세였다. 당시 판사는 올렌도르프의 외모나 유창한 언변에, “착한 것 같아 마음에 든다. 그런데 당신 같은 이가 사람을 그토록 죽인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끝까지 괴물로 사형 당한 유대인 학살자

마침내 교수형평결이 나온 뒤, 올렌도르프는 집행관을 따라 사형장으로 걸어간다. 모든 재판과정을 면밀히 지켜본 페렌츠 검사 역시 올렌도르프를 뒤따랐다. 검사가 올렌도르프에게 물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할 말이나 후회 같은 게 있습니까?” 페렌츠 검사는 행여 그가 5명의 자식들에게 사랑한다거나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아무 할 말도 없습니다.” 올렌도르프가 말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인간성이 마비된 괴물!

 

그래도 뭔가 후회의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올렌도르프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페렌츠 검사, 마치 그에게서 마지막 남은 인간성의 실낱이라도 건지려는 듯 유도 질문을 했다. 그러나 올렌도르프는 매우 당당했다.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내 누이라도 죽였을 것.” 검사 페렌츠가 귀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그 같은 확신범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 했다.

 

독일 영화 <아주 평범한 사람들>(만프레드 올덴부르크 감독, 2023)에 나오는 한 장면을 내 나름 정리한 것이다.

 

오웰에게 생명의 의미 성찰케 한 힌두인 사형수

전혀 다른 분위기지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버마의 나날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냐 찬가>, <동물농장>, <1984> 등을 쓴, 조지 오웰(1903~1951)이라는 필명의 영국 작가가 있다. 그는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벵갈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아버지가 식민지 관리로 일했기 때문. 만 두 살 무렵 오웰은 어머니와 영국으로 돌아갔다.

 

오웰의 집안 형편은 평범했는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그는 스스로 상류 중산층의 하층이라 했다. 이는 증조부가 쿠바 인근의 자메이카에 있는 플랜테이션 농장으로부터 큰돈을 벌었지만, 재물 상속이 별로 없었기 때문.

 

오웰은 식민지 관료 양성을 위한 학교이던 이튼스쿨을 포함, 학창 시절을 그리 행복하게 보내진 못했다. 19세이던 1922, 그는 (35년간 식민지 인도의 하급 관리로 인생을 보낸) 아버지처럼 식민지 공무원(경찰)이 되기로 결심, 같은 영국 식민지였던 버마로 간다. 1927년 영구 귀국까지 총 5년에 걸친 그의 버마 시절은 오웰이 영국 제국주의 현장에 배치된 권력자(가해자)의 입장에서 식민지 권력관계의 실상을 체험할 생생한 계기였다.

 

흥미롭게도 오웰은 지위 상승을 추구하던 세태와 달리 하방의 길을 걸었다. 버마에서의 5년간 식민지 경찰 경험은 유일한 권력의 자리이자 자기 인생에선 예외적으로 높은자리였다. 아니, 식민지 경험에 대한 그 특유의 성찰이 그로 하여금 기꺼이 밑바닥 삶을 향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고세훈 교수는 2006지식인과 제국주의란 논문에서 제국경찰 오웰이 식민지 버마에서 평등 없는 친밀성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 그를 밑바닥의 작가로 이끌었다고 본다.

 

일례로, 버마에서 제국경찰로 일하던 오웰은 자신의 하인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지만, 그가 하인에게 아무리 친절하고 인정스럽게 한다 하더라도 주인과 하인이라는 불평등한 관계 자체는 극복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권력자 위치에 있고 하인도 순종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권력자는 여유와 친절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오웰이 내연녀 내지 창녀와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창녀나 내연녀를 아주 살갑게 대할 수 있었던 배경엔 불가피하게 백인 경찰과 식민 여성의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오웰은 같은 영국인 클럽 안에서는 저 혼자 신사인 탓에 왕따 당하기 일쑤였고, 하인이나 여성과도 진정한 친구가 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그럼에도 오웰은 자기 관할 감옥에서 어느 힌두인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호송할 때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불과 30여 미터 떨어진 교수대를 향해 걷던 그 힌두인 사형수가 도중에 물웅덩이를 피하려고 옆으로 비켜갔다. 그 장면을 본 오웰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까지 정신이 멀쩡하고 건강한 한 인간의 생명을 파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눈치챘던 것이다.

 

앞의 오토 올렌도르프와 달리 이 힌두인 사형수는 확신범이 아니라 우발범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오웰의 아버지야말로 영국 제국주의가 식민지 인도를 확실히 관리해야 모두에 좋다고 믿는 확신범인지 모른다. 그에 비하면 평등 없는 친밀함으로 현지인들과 인간적 교류를 원했던 오웰은, 전쟁 당시 올렌도르프 사령관이 유대인 학살 명령을 내렸을 때, 차라리 겁쟁이라 욕을 먹더라도 도저히 사람은 못 죽인다며 앞으로 나섰던 이탈범에 속한다. 그 뒤 유럽으로 돌아가 작가가 된 오웰은 마치 속죄의 길을 걷듯, 자본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자본 전체주의인 파시즘 및 공산 전체주의인 스탈린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글을 죽을 때까지 쓰고 또 쓴다. <오웰의 장미>에서 리베카 솔닛은 오웰의 친구 조지 우드콕을 인용, “그의 자기 재생 능력은 그가 평범한 것,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경험, 그리고 특히 자연과의 접촉에서 누리는 기쁨에 있었다.”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명 감수성을 지키는 길

여기서 나는 페렌츠 검사가 본 사형수와 제국경찰 오웰(예비 작가)이 본 사형수를 나란히 떠올린다. 검사 페렌츠의 사형수(올렌도르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냉혈한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평소에 유대인과 러시아 볼셰비키(공산주의)를 동일시했고, 이들을 국가의 적이라 믿는 확신범이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교육받고, 세뇌된 탓! 마침내 그는 자신의시스템과 일체감을 느꼈다. 일종의 강자 동일시’! 반면, 예비 작가이자 제국경찰인 오웰이 본 사형수는 그 마지막 순간에조차 생명을 가진 인간의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설사 그가 죽을 짓을 했다 하더라도 그는 필시 우발범이었을 것이다.

 

 

페렌츠 검사는 당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의미에 대해, “(전범에 대한) 복수나 응징이 아니라, 평화롭고 위엄 있게 살 인간의 권리를 확인받는 과정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확신범사형수로부터는 결코 인간의 얼굴을 찾을 수 없었다. 검사가 사형수로부터 배울 점은커녕 오히려 자괴감만 들었다. 반면, 예비 작가 오웰이 동행한 사형수는 죽으러 가던 도중에 물웅덩이를 피해 걸을 정도로 정신이 맑았다. “정신이 멀쩡하고 건강한 한 인간이었던 오웰의 사형수는 오웰에게 인간성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이 근원적 체험은 오웰로 하여금 제국주의 가해자와 식민지 피해자 구도를 이탈하게 했고 결국 치열한 작가가 됐다.

 

그런데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저술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 교수는 흥미롭게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 현장에서조차 확신범만 있었던 게 아니라 한다. 오히려 대다수 병사나 경찰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처럼) ‘아주 평범한사람들로부터 출발했는데, 이들이 일단 명령에 복종할수록 점차 학살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지면서 갈수록 야만화했을 뿐이라는 것! 만일 이들이 초기의 살상 명령에 순순히 복종 않고 한사코 자신의 평범한 인간성을 지키려 했다면 상당 정도 가능했다고 봤다. 실제로, 상부로부터 학살 명령을 받은 대대장은 실행 대원들에게 자신이 없다면 빠져도 좋다했고, 500여 명 중 12명이 빠지겠다고 하자 이 이탈범들은 임무에서 제외됐고 별다른 징계 처분도 받지 않았다 한다. 물론 브라우닝 교수의 사례 분석을 나치 시대 전반에 일반화할 순 없지만, 최소한 위 사례만큼은 일리가 있다.

 

우리가 평소에 권위에 대한 복종이나 주변의 동조 압박을 절대화하지 않고, 또 낙인배제죽음의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고, 상황과 맥락은 물론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얼마나 멀쩡한 정신으로 보는가에 따라 탈주가능성이 열린다는 얘기다. 홀거 하이데 교수는 포퓰리즘의 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녹색평론> 2018159)에서 (두려움을 감추는 한 형태가 분노나 증오로 나타나지만 이는 근본적 사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기에) “진정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두려움을 억압하는 시도를 마침내 그만 두는 것이라 했다. 마치 생명 감수성을 가진 12명의 이탈이나 조지 오웰의 탈주처럼 능동적 행위자가 되려면!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보다 많은 용기를 내어 우리가 가진 두려움을 제대로 해소할 수 있는 개인적사회적 조건들을 창출하는 일이 중요하다.

 

지금의 검찰공화국에 멀쩡한 정신이 남긴 말

따지고 보면, 우리는 비단 전쟁 때 학살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 야만적인 상황에 놓인다. 일례로, 국가기관이나 지자체, 검찰, 경찰, 언론, 기업, 은행, ()발전소, 군대, 학교, 종교 등에서 예사로 일어나는 진실 조작압박 역시 전시의 학살 명령과 유사한 야만적 상황이다. ‘진실 조작에의 동조나 묵인은 타인 이전에 이미 자기 학살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자신이 날마다 경험하는 이 숱한 야만의 상황들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자유인(自由人)으로 살 수 있을까? 오웰의 사형수가, 그리고 작가 오웰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이다. 103세에 작고한 멀쩡한 정신의 페렌츠 검사가 내 할 일은 다했다. 이제 젊은이들에게 바통을 넘긴다.”고 한 말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지금의 검찰공화국대한민국에!***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 2023.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