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정부의 가장 큰 위험 경향 2022.11.01.
MZ포퓰리즘과 찐꼰대 그리고 진혼 경향 2022.11.01.
룰라의 승리 앞에 닥친 더 큰 난관…'유사 파시스트'의 준동 프레시안 2022.11.01.
서해 피격, 이상하고 위험한 수사 경향 2022.11.02
이 정부를 어찌하오리까 경향 2022.11.02.
일상을 가능케 하는 권력을 생각함 경향 2022.11.02.
재야’의 경제학 경향 2022.11.02.
윤석열 정부, 자유만 있고 책임은 없었다 경향 2022.11.03.
다시 국가를 묻는다 경향 2022.11.03.
자식 잃은 슬픔 강원일보 : 2022-11-03
누가 반이성적이었나? 한겨레 2022.11.03.
윤 정부의 애도 계엄령, 곧 검찰이 등장할 차례 한겨레 2022.11.03.
윤석열의 ‘무능 리스크 한겨레 2022.11.03.
슬퍼는 하되 ‘구조는 비판말라’는 국가 미디어오늘 2022.11.3
추궁의 시간, 면피의 시간 한겨레 2022.11.04.
윤 정부의 애도 계엄령, 곧 검찰이 등장할 차례 한겨레 2022.11.04.
책임지는 권력이 없다, ‘개인의 악마화’만 남았다 한겨레 2022.11.04.
이태원, 그리고 블랙 미러 미디어오늘 2022.11.05
극단적 상식, 상식적 극단 한겨레 2022.11.06
인재(manmade disaster)’ 책임을 묻는 외신 한겨레 2022.11.06
속보 전쟁과 뒷북 자성은 왜 반복될까 시사인 2022.11.07.
그날 악마는 이태원에 가지 않았다 한겨레 2022.11.07.
윤석열,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까 경향 2022.11.07.
죄송한 마음” 대통령, “웃기고 있네” 수석 한겨레 2022.11.08.
위급 상황에서 존엄할 권리 경향 2022.11.08.
10.29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며 광주 in 2022.11.08.
멋진 늙음 경향 2022.11.09.
“그날 국가는 무엇을 했나요 경향 2022.11.09.
금융위 문서로 론스타 소송 졌다 경향 2022.11.09.
이태원 참사 후 공권력의 기이한 행태 미디어오늘 2022.11.09.
격노와 처벌의 리더십 경향 2022.11.09.
이주호 부총리와 윤석열 정부, ‘위험한 컬래버’ 경향 2022.11.10.
용서하지 않을 자유 경향 2022.11.11.
세월호와 이태원, 반복된 참사 보도 삽질 미디어오늘 2022.11.12.
[사설] 왜곡·외압 의혹 잇따르는 ‘자유민주주의’ 교육과정 한겨레
법원은 ‘검찰 통제’ 역할 제대로 하고 있나 한겨레 2022.11.13.
법의 구멍으로 도망친 정치, ‘적법의 세계관’이 부른 참극 한겨레 2022.11.13.
전쟁의 또 다른 비용 한겨레 2022.11.13.
국익? 대통령의 이익 경향 2022.11.14
한동훈식 화법 경향 2022.11.14
대통령의 위험한 'XX정치' 프레시안 2022.11.14.
참사, 알레고리 세계 2022.11.14.
기회의 불평등, 진짜 악화됐을까 주간경향 2022.11.21
지독한 슬픔은 왜 비난받는가 경향 2022.11.15.
슬픔을 거부하는 권력 경향 2022.11.15.
혐오라는 괴물에 등을 보이지 말자 경향 2022.11.15.
국가의 부재와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 한겨레 2022.11.15.
을숙도를 새까맣게 뒤덮었던 철새들을 떠올리며 한겨레 2022.11.15.
선진국이라기엔 부끄러운 한국과 대통령의 품격 경향 2022.11.16
왜 지금 횡재세인가 경향 2022.11.16.
통화긴축 시대의 새로운 정책조합 경향 2022.11.17.
각자도생을 거부한다 경향 2022.11.17.
윤 대통령의 ‘나의 투쟁’, 우리가 닮아가지 말아야 할 것 한겨레 2022.11.17.
남향에 산다는 착각 한겨레 2022.11.17.
“미안합니다.” 한겨레 2022.11.17.
지속 불가능한 한국 경제 경향 2022.11.18.
이태원 참사, 기록을 미래로 보내자 뉴스타파 2022.11.18.
줄일 걸 줄여야지…허울만 남은 ‘약자복지’ 경향 2022.11.18.
유럽연합이 가는 길 경향 2022.11.19.
차별과 착취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공교육 미디어오늘 2022.11.19.
희생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한겨레 2022.11.20.
기자의 슬리퍼와 도어스테핑 CBS노컷뉴스 2022.11.21.
언론의 침묵이 깨어진 이후 경향 2022.11.21.
이태원 참사에서 되풀이되는 한국증후군 경향 2022.11.21.
최소한, 지금은 아닙니다 경향 2022.11.21.
윤석열의 ‘슬픈 대한민국’ 미디어오늘 2022.11.21.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을 믿기 힘든 이유 한겨레 2022.11.21.
빈곤 포르노” 뭐가 문제란 말인가…우려할 것은 당신들의 반지성 한겨레 2022.11.21.
횡재세, 반드시 연내 입법되어야 한다 프레시안 2022.11.21.
수능시험 문제에까지 드리운 식민사관의 그림자 프레시안 2022.11.21.
대통령의 ‘짝퉁 리더십’ 한겨레21 2022.11.21
신남방 정책과 인·태 전략, 차이점과 공통점 경향 2022.11.22
패륜과 애도라는 정치적 기획 경향 2022.11.22.
김건희 액세서리’ 된 캄보디아 아이 한겨레 2022.11.22.
실패로 시작한 윤석열식 외교와 암울한 ‘한반도 시나리오 한겨레 2022.11.22.
미국 <뉴욕타임스>는 옳고…우리나라 <민들레>는 틀리다? 한겨레 2022.11.22.
대통령이 참 좀스럽다 경향 2022.11.22.
거짓말, 궤변, 그리고 'X소리’ 프레시안 2022.11.23.
성한용·강준만 칼럼에 부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한겨레 2022.11.23.
남욱 가라사대 경향 2022.11.24.
교육의 대전환, 기다릴 시간이 없다 경향 2022.11.24.
민심의 무서움 보여주고 있는 일본 한겨레 2022.11.24.
윤 대통령은 존슨이 선물한 ‘처칠 팩터’ 내팽개쳤나 한겨레 2022.11.24.
보도연맹 학살과 ‘고무신’···애도에 자격이 필요한가 주간경향 2022.11.28.
누가 헌법을 수호하는가 경향 2022.11.25.
가장 정치적인 애도 경향 2022.11.25.
저열한 말들의 풍경 경향 2022.11.26.
결국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경향 2022.11.26.
군주의 시대…참사 책임보다 무거운 불경죄 한겨레 2022.11.27.
윤 대통령과 참모들의 거짓말…도어스테핑은 끝났다 한겨레 2022.11.27.
대통령실과 해당 언론사가 풀 문제라고? 한겨레 2022.11.27.
윤석열 정부, 밥그릇 걷어차기 2022.11.28.
노동자의 자유와 국민의 자유 경향 2022.11.28.
윤석열의 ‘압색 정부’ 경향 2022.11.28.
달도 차면 기운다 경인 2022.11.29.
여당, 침묵은 독이다 경향 2022.11.30.
사진과 총, 캄보디아에서의 대통령 부인 경향 2022.11.30.
정의와 철학이 사라진 한국 정치 경향 2022.11.30.
화물연대 파업은 불법인가? 경향 경향 2022.11.30.
보수 정부의 가장 큰 위험
벌써 세 번째이다. 보수 정부에서 위험이 핵심적인 사회현상으로 등장하는 것 말이다.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정부 때에도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지금과는 양상이 달랐다.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던 수많은 사고는 회유 혹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취약한 사회 인프라로 인한 일상의 위험은 숙명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 때의 광우병 사태와 4대강 사업, 박근혜 정부 때의 세월호 참사, 그리고 윤석열 정부 들어 일어난 이태원 참사는 이제 고질화해가는 보수 정부의 패턴처럼 느껴져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이명박 정부는 위험의 사회화와 그 반작용으로서의 위험의 정치화를 최초로 경험했다. 이익을 보는 집단은 분명한데 그에 따르는 위험은 불특정 다수에게로 분산시켜버릴 때, 국가가 국민을 지킬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국민들은 분노하게 되고, 그것은 위험의 폭발적 정치화로 이어진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 광우병 사태는 비과학적 음모론이었다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고 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그보다는 좀 더 엄밀한 진단이 필요하다. 과학적 기준으로 보면 비합리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수치에 근거해서 보면 그 당시 한국은 광우병으로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중 하나였는데,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가장 취약한 국가인 영국보다도 훨씬 더 커져 있었기 때문이다. 배후세력의 음모라는 주장은 필요조건을 충족하지만 충분조건에는 한참 못 미친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그랬듯이 그 당시에도 집회를 조직화하는 세력, 즉 필요조건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사회운동이란 아무리 열심히 조직하더라도 성공확률이 매우 낮다. 필요조건에 시민들의 폭발적 참여라는 충분조건을 더해준 것은 국민을 지킬 의지가 없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내보냈던 이명박 정부였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위험하면 못 먹고 안 먹는 것인데, 수입업자들도 장사가 안 되면 안 들여올 것”이라는 대통령 본인의 발언이었다. 시장이 어련히 알아서 걸러줄 텐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고, 국민들은 분노했다. 오죽하면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한국 사태를 두고 “신자유주의 국가가 다가오는 위험사회에 맞서 국민을 보호할 능력과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라는 훈수까지 둬야 했다.
박근혜 정부 때의 세월호 참사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훨씬 더 큰 비극이었지만, 과정은 아주 단순했다. 낡은 배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과도한 규제완화가 이루어졌고, 그나마 지켜야 할 안전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그것을 감독해야 할 관료들이 사업자와 결탁해 이익공동체가 되었고, 머리를 올리느라 7시간 지나서야 나타난 대통령은 “구명조끼 입었다는데 그렇게 찾기 어렵습니까”라는 한가한 소리를 했다는 것이 그 내막이다. 복잡한 현상과 맞물린 광우병 사태에 비하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건의 전개이다. 그러나 국민을 지킬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난 8월9일자 이 칼럼에서 나는 “지지율에 갇힌 채 좀 더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면 국민들은 삶이 위태롭게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중략) 닥쳐 있는 문제들은 하나같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국민 생존의 문제이다. 이명박 정부 때 보았듯이 보수 정부의 가장 큰 위험은 정부가 국민들의 삶을 지키는 데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마치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고 해석될 수 있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은 보수 정부의 가장 큰 위험의 뇌관을 건드릴 수 있어서 부적절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즉각적인 정쟁화 대신 애도와 적극 협조를 택한 더불어민주당은 오랜만에 좋은 선택을 했다. 두고봐야 알겠지만, 이태원 참사가 정치화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광우병과는 달리 위험의 경계선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예고한 여러 정책 중에는 사회적 위험을 증폭시킬 수 있는 것들이 다수 섞여 있다. 보수 정부의 개혁이 국민의 삶을 세심하게 지키면서 진행된다는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정치적 위험이 곳곳에 도사릴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진짜 리스크는 낮은 지지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아지는 사회적 위험을 관리하는 데 실패하는 것에 있다. 인파로 가득 찬 축제의 골목길에서 느닷없이 맞이한 억울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여러 정책의 변화가 가져올 혹시 모를 사회적 위험을 수없이 사전에 다듬어야 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22.11.01.
MZ포퓰리즘과 찐꼰대 그리고 진혼
마음이 무겁다. 꽃다운 이들이 스러졌다. 교단의 일원으로서 유구무언일 따름이다. 자식을 키우고 있는 부모로서는 피눈물이 날 지경이다. 억울한 젊은 영혼들 앞에 마뜩한 진혼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 ‘헬조선’이라는 얘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경제는 효율성만 좇아 양극화되었고 정치는 깃털같이 가벼웠으며 안보는 충돌 전야를 방불케 했다. 다행스럽게 당시의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는 난파선을 탈출하기보다는 부서진 함선을 직접 개조하는 위대한 여정에 나섰다. 촛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광장정치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권부의 무책임성에 대한 조건 반사로 시작해, 정치·경제·안보 상황이 직면한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직접정치로 진화했다.
‘촛불혁명의 위임권력’임을 자처한 문재인 정부 5년의 실험은 그러나 세 가지 오류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러졌다. 각각 무능력과 불공정 그리고 위선으로 상징되는 부동산 문제, 조국 사태 그리고 잇따른 성추문이 그것들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 부동산 문제는 강남 현상이자 비강남 지역의 상대적 빈곤감의 문제로 비추어졌다. ‘강남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운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정부가 강남 잡기에만 열중한 이유이다. 조국 사태는 야망을 지닌 정치 검찰과 검수완박을 시도한 신권력의 자존심 싸움으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촛불정부의 도덕성은 쇠락했고 대안적 직접정치의 출현을 초래했다. 입시 불공정에 주목한 젊은이들의 직접 저항은 세대 연합을 자처하는 이른바 태극기 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잇따른 미투 사건들은 직접정치로 깨어난 젠더의식이 단죄한 구태였다. 역사 투쟁의 정당성이라는 포장에 파묻혀 있던 농양들이 터져 나올 때의 충격과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촛불정부의 위선을 향해 터져 나온 분노는 진영 논리를 수용하지 않았다. 세 가지 문제는 젊은이들이 마음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로 기능했고 촛불정부는 끝내 청년들의 마음을 되사지 못한 채 임기를 마감했다.
새 정부 역시 여의도 정치보다는 광장정치 즉 직접정치를 선호하는 인상이다. 정보의 소비자였던 시민들이 정보의 생산자로 변모해가면서 직접정치는 시대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고 이미 대의정치를 압도하고 있다. 시민들이 생산한 정보는 구체적이지만 파편화되어 가면서 다양한 정체성 정치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정치의 상징인 여의도 정치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스마트한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새 대통령은 낡은 정당정치와 부패한(?) 여의도 정치로 대표되는 대의정치에 포획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여의도 정치를 폄훼하고 국회와 맞서는 모습을 빈번히 연출하는 새 정부 주요 각료들도, 자신은 국민에게만 부채가 있다는 대통령과 이념적 동지라 할 만하다.
대체로 이념적 선도성이나 피박해자의 구도적 실천을 강조하는 정치세력은 근본주의를 선호하게 마련이다. 이 점에서 검수완박의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현 정부 중심 세력들이 섣부른 협치보다는 직접정치와 근본주의적 접근법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경향이다. 실제 ‘2말 3초 박스권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대통령의 선언은 근본 개혁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하지만 근본주의 ‘선언’은 실력의 시간대로 진입하고 있다. 경제 위기가 닥쳤고 글로벌 경제침체는 파이가 커져야 가능한 공정 담론을 꺼내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미투는 사라지고 스타일리시한 마초들이 득세하는 양상이다. 취임 6개월 허니문을 끝내고 있는 새 정부로서는 이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보일 때가 되었다.
직접정치의 주인은 미래 세대들이다. 그들이 헬조선을 외칠 때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그들이 불공정과 위선을 외칠 때 정권은 교체되었다. 물론 젊은이들이 요구하는 공정이 모두 현실 가능한 것도 아니요, 그들이 요구하는 미투가 단번에 해소되기도 어려운 과제이며 그들의 요구가 즉자적이어서 허위의식일 수도 있다. MZ포퓰리즘을 경계하고 때로는 용기를 내어(?) 젊은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가는 세대가 미래 세대에게 매표를 위해 던진 약속을 뒤집어서는 안 되고, 그들의 부채로 배를 채우며 88만원 세대를 재생산하는 찐꼰대 노릇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광장정치의 시대에 직접정치의 주역들을 좌절시키지 말 것! 그것은 어떤 정치전략보다도 소중한 대한민국호의 미래 공약(commitment)이다. 미래는 쓰고 버리는 과거의 나룻배가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진혼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경향 2022.11.01.
룰라의 승리 앞에 닥친 더 큰 난관…'유사 파시스트'의 준동
브라질에서 다시 희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30일에 실시된 브라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노동자당(PT)의 루이즈 이냐시우 '룰라' 다 시우바 후보가 극우파인 현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를 누르고 마침내 당선됐다. 2002~2010년에 두 차례 대통령을 역임한 룰라가 이로써 12년만에 3기 룰라 정부를 출범시키게 됐고, 노동자당으로 따지면 2016년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 이후 6년만에 다시 여당이 됐다.
브라질인들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이 선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미의 도널드 트럼프와 쌍벽을 이루며 남미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기둥 노릇을 해온 보우소나루가 21세기 민주주의에 끼치는 해악이 크기도 했거니와 그의 재임 기간에 엄청난 속도로 자행된 아마존 열대 우림 파괴가 가뜩이나 심각해지는 기후 재앙을 더욱 파국에 가깝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31일 새벽, 브라질에서 들려온 소식에 다들 가슴을 쓸어내리는 분위기다.
그러나 당선자가 보우소나루가 아니라는 점은 다행스럽더라도, 전반적으로는 썩 반가운 결과가 아니었다. 보우소나루는 49.1%를 득표해 룰라(50.9%)를 불과 1.8% 포인트 차이로 바짝 뒤쫓았다. 부유층과 중산층이 밀집한 남부 주들에서는 보우소나루가 예외 없이 룰라를 눌렀다. 게다가 보우소나루가 속한 극우 자유당(PL)은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실시된 하원의원 총선거에서 의석을 66석이나 늘렸다. 보우소나루를 힘겹게 물리친 룰라 당선자는 사실상 보우소나루 세력이 지배하는 상·하원과 대결하며 앞으로 4년간 국정을 끌고 가야 할 처지다.
환호하거나 낙관할 때가 아닌 것이다. 전 세계 좌파 정치가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정치 9단'으로 인정받는 룰라조차 준파시스트 세력과 1 대 1로 맞서 겨우 승리를 따내는 나라가 지금 브라질이다. 이 상황을 뿌리부터 치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3기 룰라 정부의 앞날은 어둡기만 할 것이다.
보우소나루주의를 낳은 주류 우파와 지배 세력의 패착
보우소나루주의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우리와 비슷하게 1980년대까지 지속된 군부독재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보우소나루 자신이 군부독재 시절에 정치 장교로 악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1991년에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될 때에 그가 속한 정당은 기독교민주당이었는데, 벌써 이때부터 브라질에서는 개신교 신흥 종파들을 대중적 기반으로 삼은 극우 정치가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런 흐름은 어디까지나 '주변'적 세력이었다. 브라질 정치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보우소나루주의라 불릴 수 있을 극우파 바람은 불과 몇 년 전인 2010년대 초에 들어서야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계기를 연 것은 작은 극우 정당들이 아니라 주류 우파 정당들이었다.
2000년대에 1기, 2기 룰라 정부는 계급 타협 입장을 철저히 견지했다. 경제 정책으로 따지면, 1기에는 신자유주의 기조에 순종하다가 2기에 들어 국가 개입을 조금씩 늘리기는 했다. 또한 빈곤 가정에 일종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보우사 파밀리아' 정책을 통해 절대 빈곤을 크게 줄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들을 추진하면서도 자본 세력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세금도 더 걷지 않았고, 천정부지이던 이자율에조차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았다.
정당정치 측면에서는 이 기조가 주류 우파와의 대타협으로 나타났다. 룰라는 집권 1기에 뇌물 제공이라는 다분히 부정한 수단을 통해 여러 원내 소수 정당들의 정부 법안 찬성 표결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원내 최대 정당인 '브라질 민주운동'당(MDB, 이하 민주운동당)을 국정 운영 동반자로 끌어들였다. 민주운동당은 군부독재 시절에 민주화 진영의 대표 역할을 하다 이제는 부패하고 노회한 정치인들의 본산처럼 여겨지는 정당이다. 우리의 경우에 대입해보면, 상도동계나 동교동계 인사들이 여전히 국회 다수 의석을 점한 격이라고나 할까.
노동자당 정부와 민주운동당의 협력 관계는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됐다. 민주운동당에서 떨어져 나와 한때는 좌파 쪽에서 노동자당과 경쟁하다 1990년대에 신자유주의로 돌아선 브라질 사회민주주의당(PSDB, 이하 사회민주당)이 노동자당과 대립하는 제1야당 역할을 한 데 반해 민주운동당은 대표 정객 미셰우 테메르가 두 차례나 호세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을 역임하기까지 하며 노동자당과 충실히 합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브라질의 자본 세력도, 그 정치적 대변자들도 노동자당 정부의 타협 정책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교리를 철저히 추종하는데다 실제로 자국민보다는 월스트리트와 훨씬 더 많은 이익을 공유하는 브라질 자본가계급은 2기 룰라 정부에서 국가 주도 발전 정책이 늘어나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다 호세프 정부에서 이 기조가 더욱 강화되자 노골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배은망덕한 집단은 룰라 집권기에 바이오에너지 생산을 통해 급성장한 농업 자본이었다. 이들은 아마존 보호 정책에 반기를 들며 반노동자당의 선봉에 섰다.
호세프 정부의 공공요금 인상 조치에 반발해 일어난 2013년의 시위운동은 자본 진영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사실 이 운동 자체는 2019년에 대중교통요금 인상에 반대하며 폭발한 칠레의 가두시위와 아주 유사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칠레의 시위는 반신자유주의 대중투쟁으로 발전한 반면에 그보다 6년 먼저 벌어진 브라질의 시위는 반노동자당 우파가 결집하고 대중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급진좌파 대학생들이 주도하던 시위는 어느새 노란색 브라질 축구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거리에 나선 극우 정파, 개신교 복음주의 세력, 대도시 중산층 일색이 되어갔다. 바로 이 대열이 보우소나루주의를 탄생시킨 온상이었다.
처음에는 노동자당의 오랜 숙적 사회민주당이 노란색 유니폼 시위대의 대변자 노릇을 했다. 또한 자본 진영에 속한 주류 언론들이 갑자기 가두 저항의 옹호자로 돌변했다. 그러나 아직은 민주운동당과 동맹을 맺은 노동자당 정부를 고꾸라뜨리기에 역부족이었다. 다시 한 번 테메르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운 호세프 대통령 후보는 2014년 대선 결선에서 이번에 룰라가 받은 것보다 더 높은 득표율(51.64%)을 기록하며 사회민주당 후보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 패배가 자본 세력에게 다음 단계 전략으로 넘어가라는 신호탄이 되었다. 집권 2기를 시작한 호세프가 경제 위기 상황에서 더욱 강력한 개입 정책을 펼치려 한데다, 더 결정적으로는 룰라 이후의 무거운 짐, 즉 부패 정치의 사슬을 스스로 끊으려 하자 드디어 '의회 쿠데타' 시나리오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2016년에 결국 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켜 노동자당 14년 집권을 강제로 중단시키게 될 부패수사-대통령 탄핵 정국이 열린 것이다.
사실 부패수사에 착수하기로 결단한 장본인은 호세프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이 결단에 화들짝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민주운동당이었다. 가장 많은 정치인들이 일상적으로 비리에 연루된 정당이 민주운동당이었기 때문이다. 부패수사가 진행되면서 언론이 가장 떠들썩하게 보도한 것은 룰라 전 대통령과 호세프 현 대통령이 과연 뇌물 수수와 직접 연루됐는지 여부였지만, 실제로 이 수사로 목이 조이는 공포를 느낀 이들은 테메르를 비롯한 민주운동당 수뇌부였다.
결국 이들의 모진 결심과 함께 자본 세력 총연합의 테두리가 완성됐다. 부통령 소속당이자 원내 제2당이 현직 대통령 탄핵 입장으로 돌아서자 탄핵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막상 탄핵안의 중심 내용은 애초 탄핵 이유였던 부패 혐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예산안 관련 법률 위반이었지만, 이미 이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본 세력에게 실질적인 위협이라고는 하나도 가하지 않았음에도 그 존재만으로 눈엣가시인 노동자당 정부의 장기 집권을 끝내는 일만이 중요했을 따름이다.
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킨 뒤에 만사는 자본 진영과 주류 우파의 뜻대로 굴러가는 듯 보였다. 테메르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었고, 시장지상주의와 전통 수호(달리 말하면, 여성, 성소수자, 아마존 선주민 등의 권리 확대 결사 반대)로 똘똘 뭉친 중년 남성들로만 이뤄진 내각이 출범했다. 이제는 다음 대선에서 민주운동당, 사회민주당이 하나가 된 주류 우파 블록이 노동자당을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더는 좌파 집권 가능성을 우려할 필요가 없는 정치 질서가 뿌리를 내릴 터였다.
그러나 승자는 전혀 다른 이들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수사망을 피하려고 '의회 쿠데타'를 획책한데다 테메르 정부에서 무능과 독선만을 보여준 주류 우파, 즉 민주운동당과 사회민주당은 지지율이 땅에 떨어졌다. 대신 2013년 거리의 노란색 물결을 통해 그 불길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신진 세력이 곧바로 빈자리를 채웠다. 그들이 바로 보우소나루가 이끄는 현 자유당이다.
이것이 보우소나루주의의 탄생 신화다. 지난 4년간 브라질 국민을 팬데믹의 최대 희생자로 만들고 아마존 밀림을 불지옥으로 만든 이 괴물은 다름 아니라 브라질 자본가계급과 주류 우파의 예기치 않은 자식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대단치도 않은 계급 타협 제안조차 뿌리친 속 좁은 지배계급이 낳은 이 괴물의 이름은 '파시즘'이다.
북부 문제'와 대결했던 그 경험으로 대혼란의 시대에 맞서길
룰라 당선자가 마주할 정치 지형은 2000년대의 집권 1기, 2기보다 훨씬 더 안 좋다. 단순히 의석수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주요 야당의 성격부터가 통상적인 우파가 아니라 유사 파시스트로 바뀌었다. 더구나 이번 대선 결과로 드러났듯이,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대도시 중산층은 여전히 노동자당과 좌파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3기 룰라 정부를 막기 위해 보우소나루에게 표를 던지길 꺼려하지 않을 정도다.
이런 정치·사회 지형만 놓고 보면, 3기 룰라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 1기 룰라 정부 때부터 부패 추문을 일으키고 결국은 2010년대에 비극을 폭발시킨 뇌물 수수 정치를 반복할 게 아니라면, 출구는 하나뿐인 듯 보인다. 노동자당이 집권 이후에 너무도 집착해온 수세적 계급 타협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어차피 기득권 세력이 그런 수준의 타협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이 사달이 났으니 이제는 룰라와 노동자당 스스로 이 금기를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이번에 룰라의 당선을 진심으로 바란 좌파 성향 논평가들이 하나같이 이 점을 강조한다. 제도정치 안에서 막강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룰라를 지지하는 노동운동, 땅 없는 농민들의 운동, 여성운동과 성소수자운동, 아마존 열대 우림을 지키려는 선주민운동과 환경운동 등이 있다. 그리고 룰라 정부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할 준비가 돼 있는 북부 빈농과 남부 대도시 빈곤층이 있다. 룰라 정부가 이러한 대중에게 직접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좌파가 견지해야 할 기본적 해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만은 않다. 2000년대에 룰라가 처음 집권했을 때에 이런 식으로 정치적 교착 상태를 풀려 했다면, 훨씬 더 잘 먹혔을 것이다. 그러나 2010년대를 거치면서 이미 중산층이 우파 대중운동에 동원된 상태다. 이런 형국에서는, 대중(운동)의 참여를 통한 정치적 돌파가 자칫 거리에서 양 진영의 직접 대결을 유발함으로써 더 큰 혼란만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다. 가장 선명한 선택지의 제시만으로는 답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변혁 세력의 오류가 쌓인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복잡하고 고뇌어린 선택이 필요하다.
다만, 3기 룰라 정부 혹은 5기 노동자당 정부에 대해 그래도 기대를 접지는 못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껏 지난 노동자당 정부의 한계와 오류를 끄집어내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이룬 한 가지 위업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1기 룰라 정부 시절에 불과 4년의 집권만으로 노동자당과 브라질 좌파 전체의 주요 지지 기반을 바꿔버린 일이다.
그때까지 남부의 조직 노동자와 중산층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노동자당은 1기 룰라 정부를 거쳐 2006년 대선을 치르며 북부 빈농과 도시 빈곤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와 함께 기존 남부 지지층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이런 지지층 이탈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북부에서 새 지지층이 쇄도했다. 이들은 브라질 자본주의의 최대 희생자였지만, 그 동안은 남부 중산층-조직노동 중심 좌파정치에서 멀찍이 떨어져 군부독재나 우파정당을 지지하곤 했다(이른바 '북부 문제'). 룰라는 집권기에 이들을 브라질 좌파의 새 구심으로 만드는 위업을 달성했다.
룰라 정부가 그 숱한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열대의 블레어 정부'나 지구 반대쪽의 '노무현-문재인 정부'로 불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또한 이 대혼란의 시기에 3기 룰라 정부에 대해 기대와 관심의 눈길을 거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룰라-노동자당 정부가 북부 문제와 정면 대결했던 그 경험을 잊지 않고 새롭게 펼쳐낸다면,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브라질에서 들려올 이야기들에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저 희망의 냄새를 다시 맡게 될지도 모르겠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신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2.11.01.
서해 피격, 이상하고 위험한 수사
세상은 온통 이태원 참사로 슬픔에 잠겨 있지만, 국방부와 군은 열흘 전 일로 침잠해 있다. 서욱 전 국방부 장관의 구속이 남긴 충격파가 작지 않아서다. 서 전 장관의 구속이 왜 군을 충격에 빠뜨렸는지, 몇개의 장면을 통해 되짚어보자.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되어가던 지난 7월7일, 합동참모본부는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대응 과정에서 군이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MIMS·밈스)의 첩보를 삭제했다는 KBS의 보도를 반박했다. 불법 삭제가 아니라 불필요한 첩보의 열람을 막기 위해 배포선을 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군의 이런 주장은 결국 무시됐다. 정부는 국가정보원과 검찰, 감사원을 총동원해 수사한 끝에 지난달 22일 서 전 장관과 김홍희 전 해양경찰청장을 구속했다. ‘윤석열 정부의 군’의 논리를, ‘윤석열 정부의 검찰’이 깨고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에 나선 것이다.
이상한 점은 이뿐이 아니다. 이 사건의 시발점은 국정원이 박지원·서훈 전 원장을 고발한 것이다. 당시 고발장은 박 전 원장이 고 이대준씨가 피격당했다는 첩보가 입수된 지 하루 뒤인 2020년 9월23일 오전 9시30분~10시 원장 집무실에서 차관급·1급 간부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고 적시했다. 이 회의에서 “국정원 시스템에 등재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첩보 및 보고서를 즉시 삭제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원은 국방부와 국정원에서 새벽 3시에 동시에 첩보가 삭제됐다고 발표했다. 첩보를 삭제했다는 시간에서조차 두 기관의 조사가 어긋난다. 더구나 국정원은 고발장에 당시 참석자들을 적시했는데, 8월 초에 이미 퇴직한 이석수 전 기조실장의 이름까지 넣었다. 정보 삭제라는 살벌한 모의를 처벌해달라는 고발장치고는 너무나 허술하다. 감사원 조사대로라면, 국정원은 스스로 한 일조차 엉터리로 조사해 고발했다는 뜻이 된다. 엇박자는 또 있다. 이대준씨가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정원이 합참보다 51분 먼저 알았다는 감사원의 발표를 두고 두 기관이 다투고 있다. 국정원은 첩보 수집 수단이 없어 합참에서 정보를 받아보고서야 알았다고 하는데, 감사원은 조사 결과 국정원이 먼저 표류 사실을 인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감사원이 국정원에 면박을 주는 태도인데, 조사 결과를 우겨대는 감사원의 고집이 기괴하기까지 하다.
관건은 서 전 장관이 밈스 첩보에 대해 모종의 조치를 취한 것의 적법성 여부다. 군에서는 실시간 판단이 생명이다. 지휘관은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의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포기하고 큰 목표를 취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검찰의 주장대로라면, 당시 서 전 장관은 밈스에 있는 첩보들을 그대로 두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첩보 내용은 암호 등이 섞여 있어 관련자 이외에는 해석할 수도 없다) 첩보를 이 사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후방의 육군 부대까지 다 보도록 방치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인가. 또 검찰 측은 “공용전자기록 손상죄의 큰 핵심은 손상·은닉하는 것뿐만 아니라 효용을 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첩보를 그대로 두었다면 누군가 제대로 활용했을 수 있는데, 그 여지를 없앴다는 뜻인 듯하다. 안보의 특성과 현실을 무시한 억지 논리다.
서해 피격을 둘러싼 윤석열 정부의 감사와 수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바로 이 수사가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는 것이다. 이대준씨의 탈북 조작을 기정사실화한 상황에서 안보 논리는 고려할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대준씨가 어떤 과정을 통해 희생되었는지, 당국의 잘못은 없는지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 법원이 영장을 발부한 것을 보면 서 전 장관의 행위 중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재판 과정에서 짚어져야 할 일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수사가 군에 미칠 악영향이다. 안보 논리는 깡그리 무시한 채 목표를 정해놓고 어떻게든 혐의를 잡겠다고 나서면 군인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일이 터지면 상부에 보고하고 지시만 기다릴 게 뻔하다. 1일 한·미가 전투기들을 대거 동원해 공중연합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권이 안보의 특성과 논리를 무시한다면 전투기로 하늘을 뒤덮는다 해도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 해결의 출발은 사실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안보에는 안보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옳다. 이태원 참사의 원인도 결국 사실을 그대로 보지 않은 것 아닌가.
이중근 논설주간 경향 2022.11.02
이 정부를 어찌하오리까
비상 경제 시국이다. 미 달러당 원화 가격이 지난 9월22일을 기점으로 1400원대를 찍은 후 ‘강달러’는 계속되고 있다. 11월 현재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3.00%다. 이 또한, 미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상 속도에 따라 환율과 금리는 요동칠 것이다.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5.6%)을 감안할 때, 전문가들은 이 정도의 상승폭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더해 레고랜드 사태로 경색된 채권시장은 기업의 자금줄을 조이고 있다. 그야말로 기업은 ‘돈맥경화’ 위기다.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올해 8월 우리나라 경상수지는 30억5000만달러 적자를 나타냈다. 또한 원·달러 환율 방어를 위해 보유 달러를 매도한 결과 9월 말 외화보유액은 한 달 전보다 196억6000만달러 감소했다고 밝혔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 10월 이후 두 번째 높은 감소치다. 만만치 않은 국내외 여건에 국민의 삶(민생)은 고달프기만 하다.
지난달 27일 대통령이 주재하고, 주무장관과 수석비서관급 참모진 20여명이 모여 진행한 비상경제민생회의 생방송에 관심이 쏠렸다. 비상한 상황에 특별한 대책이 나오리라는 기대와 함께.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참석자들은 비상한 상황이라는 인식조차 없어 보였다. 이날 발표는 신성장 수출동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취지 아래, ‘주력산업 수출전략’ ‘해외건설·인프라 수주 확대’ ‘중소기업·벤처 육성’ ‘관광·콘텐츠 산업 활성화’ ‘디지털·바이오·우주 발전’ 등 5개 주제에 걸쳤으나, 비상시국에 걸맞은 해결책 제시라기보다는 통상의 부처 업무보고나 자문회의 보고안건 정도의 사안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국민을 두고 장관과 대통령이 한가로이 뱃놀이하는 모습에 빗댄 채이배 전 의원의 평가가 아프게 다가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모든 정부 부처가 산업부가 되길 원한다. 국방부, 농림축산식품부, 국토교통부, 문화체육관광부는 각각 방위산업부, 농림산업부, 건설교통산업부, 그리고 문화산업부로. 10·26 사건 43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윤 대통령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가 보수 결집을 노렸다는 평가도 있지만,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및 수출진흥전략에서 위기 해법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나마 대통령이 교육부를 교육산업부라 부르지 않은 것이,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지난 6월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가 산업 인재 공급이라 했고, 교육부 스스로가 경제부처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교육과정의 획기적 디지털 전환을 주문하며, AI 산업 육성과 관련해 “어린 나이부터 디지털 리터러시 알고리즘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켜서 많은 선수를 배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강조했다. 어린 나이에 이루어지는 교육의 목적이 전문 선수 배양이라는 인식이 아찔하다. 교육부 차관 대응 또한 도긴개긴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정보교육 시간을 2배 이상 늘리고, 고등학교는 아예 교과를 하나 신설할 것이라 답했다.
그러나 디지털 리터러시가 읽고, 쓰고, 비판적 사고를 기본으로 하는 리터러시(문장해석능력)에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정보 탐색이 덧칠된 것으로 생각해 보면, 탐색하고, 새롭게 가공할 정보는 결국 많은 책 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문학, 수학, 과학 수업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게 된다. 알고리즘 의사결정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할 능력 또한 마찬가지다. 기본 교육에 충실하면 인재는 길러진다.
지난달 29일 밤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8일 정부에 여·야·정이 함께하는 ‘국민안전대책회의’를 제안했다. 여러 차례의 영수회담 제의도 무시하고, 협치를 거부하는 정부 여당의 위기 극복 의지를 믿어도 될까?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경향 2022.11.02.
일상을 가능케 하는 권력을 생각함
윤석열 정부를 상징하는 구호 중 하나는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이다. 이 말은 용감했지만, 저잣거리에 넘쳐나는 남성문화의 일부이자 30년이 넘은 신자유주의 통치 패러다임일 뿐이다. 물론 ‘구조도 구조적 문제도 없다’는 비현실이다.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도 증류수 같은 현실도 불가능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사회 구조적 문제다.
구조와 구조주의는 다르다. 구조는 사회의 물리적, 정치경제적, 심리적 관계들을 의미하고 이런 상황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은 없다.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개인은 사후에도 성립되지 않는다. 기억되기 때문이다.
반면, 문제의 원인을 개인 몸 외부에서 찾는 사고가 구조주의이다. 성별이든 계급이든 구조적이지 않은 문제는 없지만 구조에 대한 개인의 인식, 반응(reaction), 대처, 행위는 다르다. 그래서 포스트(후기) 구조주의가 등장했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개인과 구조 사이의 저항, 충돌, 협상 등을 중요시하고 이 과정에서 구조와 개인 모두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자유주의가 상정하는 개인의 관념성과 구조주의에 내재한 환원주의가 모두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구조적 차별이 없다”에 “있다”고 외쳐 봤자, 모든 갑들은 귀찮거나 무슨 말인지 모른다. 국가 권력이든 개인 사이의 권력이든 일상에서 체감하는 영향력 혹은 책임감으로서 힘의 관계는 인간의 조건이고, 구조는 사회라는 ‘집 전체’를 이룬다. 구조를 부정하는 것은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남성문화는 근대 국가가 역사상 최고 수준의 사회 조직이라고 믿으며 정상(正常) 국가, ‘이왕이면’ 정상(頂上) 국가를 꿈꾸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 정부의 ‘구조론’은 이 정권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나쁜 정부’가 아니라 (행)정부가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구조적 문제지만 가장 개인적 문제로 간주되는 사안이 성매매이다. ‘페미니스트’들도 성매매의 성별에 대해서 무지한 경우가 많다. 그만큼 뿌리 깊고 복잡한 남성 문제다. 여성주의 연구나 정치경제학 연구 중에서도 ‘동의-강제’의 이분법(자유주의)을 벗어나기 어렵고, 연구자도 사회적 관심도 적다. 범죄학에서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s)는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도박과 매춘은 전통적으로 피해자 없는 범죄로 인식되어 왔다. 범죄이되, 피해자는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범죄를 선택했다는 논리다.
피해자가 범죄를 선택했다?
성 산업에는 피해자가 없는가. 알선업, 대부업, 임대업, 성형업, 요식업, 숙박업 관련 종사자, 남성 구매자, 여성 판매자(정확히는 상품으로 간주되는 특정한 몸)는 모두 피해와 가해와 무관한가? 최근 출간된,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기획하고, 연구자 12명이 참여한 <불처벌>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처벌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다. 성매매 연구서지만 여성학 입문서이자 전문서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구조적인 문제로서 젠더, 돈과 성별을 매개로 인간 행동의 다양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젠더는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이 아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여성주의 책을 읽은 바 없다. 그런 논리가 있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다. 여성들 내부에는 나이, 계급, 인종 등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젠더는 여성(female)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인식론이다. 구조적 문제로서 젠더는 성차별뿐 아니라 여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현실도 포함한다. 남성들 간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성매매는 남성 사이의 차별과 적대를 봉합해온 제도화된 남성 연대이다.
<불처벌>에 나온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한국 사회에서 상식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글에 인용된 부분은 나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책 전체를 읽기 바란다. 책을 사지 않아도 좋다. 공동체를 위해 지역의 공공도서관에 희망 도서로 신청하자.
황유나의 서문은 이 책을 요약한다. “성 판매자의 성별은 압도적으로 여성이다.”(7쪽) 성매매는 개인 사이의 성적 거래를 넘어 여성의 몸과 성을 상품화, 확대 재생산하는 산업과 자본의 문제다. 성을 매매하는 경로가 성별에 따라 정반대임에도 구매자와 ‘판매자’는 현행 성매매처벌법에 따라 동일하게 처벌받는다. 성매매로 처벌받는 남성은 ‘억울하고’ 여성은 ‘수치스러운’ 두 갈래의 사회적 감정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9쪽)
실제 일상에는 이분법이 없다
남성들의 성 구매 동기는 그 자체로 성별 권력관계를 증명한다.(76쪽, 이 글을 읽는 여성 독자 중 성 구매 동기가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현재 성매매처벌법은 ‘동의’를 통해 성매매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여성이 놓인 곤궁과 취약성, 성매매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착취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무시하고 있다.(113쪽) 강간 사건 피해자 A씨는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성매매하려고 만났다”는 범인의 말을 듣고 성폭력 피해 여성을 성매매처벌법 위반 혐의 피의자로 조사했다.(121쪽)
성매매 집결지가 사라졌다고 해서 성매매가 없어지거나 축소되지 않았음은 명확하다.(142쪽) 사회와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한 까닭은 살면서 자기가 겪은 모든 부당함을 팔자로 체념하는 것을 막고 짐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187쪽) 나는 학술대회에서 윤락(淪落)의 의미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는데, 몇몇 남성 연구자들이 윤락의 ‘락’이 ‘즐거울 樂’인 줄 알았다고 고백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197쪽)
성매매 수요와 공급을 각각 성 구매 남성과 성 판매 여성에 대응하여 각 개인에 대한 규제를 통해 성매매를 근절하겠다는 생각은 현실화되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성 판매 여성만을 겨냥한 ‘공급 차단’이 아니라 공급 주체인 성 산업(남성 문화) 자체를 명확히 가시화하는 것이다.(233쪽) 각자도생이 깊숙이 스며든 한국사회지만 유독 여성의 성적인 동시에 경제적인 행위성은 공공의 적으로 비난받는다.(246쪽) 한편, 남성 구매자 처벌로만 성 산업을 축소할 수 있을까? 성 산업으로 돈을 버는 브로커들이 조장하는 수요와 공급이 가장 문제다.(312쪽)
특히 민가영은 동의와 강제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분석한다. 가출 청소년 패밀리의 일상 연구를 통해 새로운 개념을 도출했는데, ‘피해자의 협력에 의존하는 비강압적 착취’가 그것이다. 착취와 협력은 서로 대립하는가? 협력이 있었다면 착취는 없는 것인가?(285쪽) 지금 구조를 바꾸기 위해 국가 권력을 탈취하거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이들은 드물다. 우리는 단지, 안전한 하루를 바란다. 이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10대 여성의 성 판매가 가출 패밀리에서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방식이라는 점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인생은 대단하지 않다.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안 아프고, 안전하고,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으면 더 좋겠지만, 굶주림과 주거가 안정치 않은 이들을 생각하면 그것도 욕심이다. 큰일 없이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기를 소망한다. 일상은 구조와 개인, 동의와 강제, 폭력과 비폭력의 재정의를 요구한다. 일상에서 택일은 가능하지 않다. 가정 내 폭력이나 빈곤으로부터 탈출한 10대 여성들이 새로운 가족에서 가해자에게 ‘협력’하는 이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태원 참사로 문자와 메일이 쇄도한다. 긴 하루였다. “제2의 세월호, 여성들은 CPR을 할 줄 모른다, 정쟁에 이용하지 말라. 미국인이 많이 안 죽어서 다행, 원인을 찾기 어려울 것….” 여론이 폭발한다. 행정과 안전을 담당하는 이상민 장관의 말대로, 이태원 골목에 몰린 10만 인파 자체가 원인일까. 미리 예약하고 가게 안에서 안전한 파티를 즐기고 있던 이들 중, 피해자는 없다. 피해자 대부분은 이태원 거리 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가게 밖의 사람들, 이 중에는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상경한 이들도 있다. 이 사건의 원인 중 하나는‘가게 안과 밖의 차이’ 아닐까.
일상이 과로와 폭력을 무릅쓰고 버텨야 하는 시간인지, 최소한의 안전과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지 여부는 구조에 달려 있다. 가출 패밀리에서 10대 여성을 괴롭히는 ‘아저씨’와 통치자들, 그들이 바로 구조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2022.11.02.
재야’의 경제학
얼마 전 ‘재야’의 경제학자 정태인 박사(1960~2022)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음이 전해지자 시중과 언론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추모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에게는 진보 경제학자, 진보 경제정책가, 독립연구자, 경제평론가 등의 칭호가 따랐다. 필자는 그를 ‘재야’의 경제학에 헌신한 이로 부르고 싶다.
재야’는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한국만의 독특한 개념이다. 재야는 제도권 밖이라는 정치공간,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변혁지향적인 운동, 정치적·경제적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도덕성 등을 특징적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재야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정권의 억압으로 제도권 밖으로 밀려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있다. 또한 권력 획득에만 연연하기보다는 국가권력 자체를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려는 능동적인 성격도 있다(이기호 교수).
재야는 주로 운동의 정치를 수행했는데, 경제학 분야에서는 재야 운동에 깊숙이 간여한 이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정태인은 박현채(1934~1995)의 제자를 자처하곤 했는데, ‘재야의 경제학’을 말하려면 그 두 사람을 대표적 인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950~1960년대는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이 전 세계적인 화두였던 시대였다. 19세기 후반 이후 선진국의 산업혁명 사례를 추격하려는 후발·후진국들은 국민경제 형성을 위해 나름의 실험을 전개하였다. 일본과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진영 안에서 동아시아형 경제발전을 추구했다.
박현채의 재야 활동은 196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에 걸쳐 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1950~1960년대에 제기된 자립경제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립경제론은 알렉산더 해밀턴이나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국민경제 모델에 입각한 산업화 노선을 기본으로 한다. 산업 간 균형이냐 불균형이냐, 수입대체 우선이냐 수출 우선이냐 하는 것은 산업화의 구체적인 전략 문제다. 민족경제론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민족 분단의 위험,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반동화 등에 대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1990년대에 새로운 조건을 맞이했다. 국내적으로는 1987년 민주화체제가 형성되었고, 세계적으로는 글로벌화와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진행되었다. 냉전체제의 이완과 민주화의 진전은 남북관계와 불평등 개선의 징후를 나타냈다. 1980년대 후반 박현채와 적극 교류한 정태인은 민족경제론을 두 가지 방향에서 수정·보완하려 했다고 여겨진다.
첫째는 진보 이론 내부에 존재하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고전파 경제학 이래 이론의 중심이 되었던 일국적 차원의 생산주의 관점에 전 세계적 차원의 유통주의를 결합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생산양식에 교통양식을 결합하여 사회구성체를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두 번째는 글로벌화 시대를 맞아 민족경제를 동아시아 지역주의와 결합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적극적인 정책 개입을 통해 현실에 바로 적용하려고 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 적극 참여하면서 ‘동북아’라는 지역주의 비전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노무현 정부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라는 국정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필자는 정태인이 이론의 세계에서 현실정치의 세계로 급속히 돌격해간 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세계공화국> 등의 저술을 접했다. 그가 논의하는 교환양식과 세계공화국 개념을 보면서 정태인의 생각을 떠올렸다. 가라타니 고진은 네 개의 교환양식을 상정했다. 그것은 부족사회의 호혜, 국가사회의 약탈과 재분배, 자본제 사회의 상품교환, 그리고 세계공화국의 고차원적으로 회복된 호혜의 교환양식이다. 정태인은 사회적경제와 협동의 경제학, 동아시아 평화의 경제학을 전개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론적이지만 정태인은 실천적이다.
정태인은 현실 정치권에 적극 개입했지만 결코 제도권 인사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진보적 권력을 열망했지만 권력 자체와는 불화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경제학은 변혁을 지향하는 경제학, 도덕성을 추구하는 재야의 경제학이었다. 그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나 돌격대를 자임했다. 필자는 그가 정치에 기여하되 정치에 너무 깊이 연루되지 않기를 바랐다. 조금 더 후방에서 숨을 고르고 중도와 공화의 길을 탐색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최전선을 지켰다. 그는 끝까지 기후위기와 동아시아 평화의 경제학을 외쳤다. (그가 그토록 걱정하던 청년들이 또 많이 희생되었다. 함께 안식을 빈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 경향 2022.11.02.
윤석열 정부, 자유만 있고 책임은 없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죽음을 정쟁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당분간 애도기간을 갖자는 여권 인사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희생자와 가족들의 상실감, 사회를 짓누르는 슬픔의 공기를 생각하면 조용히 명복을 비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이태원 참사는 청와대 이전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는 민주연구원 부원장이나, 세월호 사태에 빗대려는 일각의 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치유되지 않은 세월호를 정치적 의도로 헤집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난잡한 정치판에도 금도는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찰 녹취록이 사고 3일 만에 공개되면서 국면이 바뀌었다. 녹취록에 따르면 사고 발생 약 4시간 전부터 “난리가 났다” “압사당할 것 같다”는 112신고가 11건이나 들어왔지만, 경찰은 추가인력 배치 등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신고자들이 어렴풋하게 사고 위험을 알린 것도 아니다. 11건의 신고에서 ‘압사’라는 단어가 총 13회 등장했다. 이런데도 참사가 빚어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응에 실패한 경찰, 이런 경찰을 지휘하는 정부의 명백한 잘못이고 인재였다. 이 상황을 묵과할 수 없어, 당초 준비했던 글을 보관함에 넣었다.
되짚어보니 여권 인사들의 행태는 상식을 벗어났다. 윤 대통령은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끝내 사과하지 않는다. 국정 최고책임자로 국민 생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 ‘송구하다’고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윤 대통령이 뒤늦게 녹취록을 보고받고 불같이 화냈다는데,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뒤늦게 보고받았다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윤 대통령이 화낼 일이 아니다. 인재임을 알고도 사과하지 않는 대통령을 향해 유족과 국민들이 화내야 한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외신기자간담회에서 관련 질문에 농담하고 웃음을 보인 것도 어이가 없다. 국격 추락이며, 죽음에 대한 무례다.
이해불가 언행들을 나열하면 끝없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소방 인력 배치 부족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일관하다가 등떠밀려 사과했다. 그는 사고 수습과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나, 이 사람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고,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사건 본질을 은폐하려던 사람이 진상규명을 지휘하는 것은 신뢰성을 훼손시키는 행위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읍참마속을 이야기했는데, 꼬리자르기 하겠다는 건가. 경찰 지휘 책임이 있는 두 사람을 파면하는 것이 사태 수습의 첫걸음이다. 국민의힘은 비겁하다. 지도부는 “추궁이 아니라 애도의 시간”이라며 입을 막으려 하더니, 녹취록 공개 후 경찰에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집권여당의 책임감은 어디로 갔나.
여권 의도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여당 관계자는 사건 발생 직후 “우리가 세월호 때처럼 당할 것 같으냐”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가 결국 탄핵으로 이어진 박근혜 정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대신 ‘이태원 사고 사망자’로 규정하고, 주최자가 없는 행사임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부에 법적 책임이 없음을 은연중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여권은 세월호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사회의 짐처럼 취급했던 박근혜 정부의 행태가 세월호를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로 남게 했다. 윤석열 정부가 여태껏 보여준 책임 회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행태들은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세월호 늪에 빠지지 않겠다며 같은 짓을 반복하다니 딱하다. 국민의 죽음 앞에서 정치적 실익을 따지며 주판알을 튕긴 대가다.
취임 후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지금이 윤석열 정부 최대 위기일 것이다. 틈만 나면 자유를 외치더니, 그에 따르는 책임은 외면하는 윤석열식 자유방임주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세월호 때 제기됐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던져졌고, 윤석열 정부는 성의있게 답해야 한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최근 KBS 라디오에서 “본인이 무엇이 부족한지를 투철하게 모르고 있는 거 아닌가. 알면 그렇게 편하게 있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태원 참사 이전 발언이지만, 윤 대통령은 이 말을 곱씹어야 한다. 이번 참사는 내각이 총사퇴해도 지나치지 않을 사안이다. 윤 대통령은 진솔하게 사과하고, 전면적 국정쇄신으로 진정성을 입증하라. 어물쩍 넘기려 하다가는 파국에 직면할 것이다.
이용욱 논설위원 경향 2022.11.03.
다시 국가를 묻는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갑자기 156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희생자 중 10~20대가 116명이다. 세월호 참사와 그것이 남겼던 과제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지난 8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던 다짐과 노력은 어디로 갔을까. 말로 다 못할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낀다. 삶을 누리지도 못한 너무 젊은 희생 앞에서 ‘명복을 빈다’고 말하지 못한다.
거대한 사태에는 복합적이고 다기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미래의 주인인 젊은이들이 살아갈 이 체제 자체에 대해 다시 진단하고 실천해야 한다. ‘국뽕’ ‘선진국’ 같은 허위의식 따위는 버리고 말이다.
이태원에는 온갖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오가고 또 그만한 문화적 축적이 있다. 이주민 중에서도 소수에 속하는 무슬림 사원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들의 클럽도 포진해 있으니, 인종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이 사회에서 그만한 자유와 개방성이 있는 곳이 없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그런 곳에서 한국과 이태원이 좋아서 왔을 14개국 출신 26명의 외국인들도 목숨을 잃었다. 이태원길은 소위 ‘선진국’을 자처하는 국가의 위상이나 거리의 국제적인 명성에 걸맞지 않게 너무 좁고 안전하지 않았던 것이겠다. 왜?
누가 어떻게 이 엄청난 참사와 손실에 책임을 져야 할까. 그날 경찰의 배치와 112신고에 대한 묵살에 나타난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과 비판이 나오고 있지만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찰과 관료시스템이 갑자기 기능부전 상태가 된 것은 더 크고 근원적인 어떤 원인의 현상이 아닐까.
나는 용산구청장, 행정안전부 장관, 대통령실의 가볍고 무책임한 언동과 외신기자 회견에서의 한덕수 총리의 말이 ‘실수’라 생각하지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고 시민사회를 탓하는 위험한 발언과 어이없는 농담이, 있어야 할 곳엔 없고 다른 곳엔 과잉 배치된 공권력의 문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근본적 무능과 빈약하고 전도된 의식이 있는 것이다. 정치검사와 특권층 엘리트들로 구성된 정권이 과연 보통 사람들의 관점에서 안전문제를 생각하고 다룰 능력이 있을까. 그들에게 만원 지하철 출퇴근과 산업현장의 위험에 대해 어떤 경험과 공감이 있을까. 2021년 산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828명이었다. SPC 공장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과 이태원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 다른 존재가 아니다. 겨우 만들어놓은 중대재해처벌법을 악덕 기업과 그 소유주에게 적용하기는커녕 시행령으로 무력화하려 하거나, 틈만 나면 주52시간 근무제를 없애려 하는 것이 이번 참사와 다른 맥락에 있지 않을 것이다. 굳이 해밀턴호텔의 불법 증축을 들지 않더라도 참사의 근인에 생명이나 안전보다는 돈, 사람보다는 이윤의 논리에 아부하고 기생하는 권력과 정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3월 ‘최악의 대선’을 치르고 (또 그랬기에) 필연적인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 이후, 많은 이들이 정치뉴스는 안(못) 본다 했었다. 피로감 때문만이 아니라, 적실한 방향과 언어는 없고 지저분하고 소모적인 정쟁이 필요한 정치와 정책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각에선 진작 ‘윤석열 퇴진, 김건희 특검’ 같은 구호를 들고 나섰지만 설득력은 약했다. 비록 대통령의 지지율이 30%에도 미치지 못함에도, 그 주체와 어젠다가 대선 때부터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책임의 반은 당연히 더불어민주당의 실패와 그 지도자의 흠결에 있었다. 진심으로 믿고 기댈 만한 지도자와 정치세력이 없고, 여전히 새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는 혼돈이다. 이 와중에 이태원의 비극이 터졌다. 경제와 안보 상황도 더 심각해지고 있고 심화된 기후위기가 또 언제 심각한 자연재해를 불러올지 모른다. 이들을 잘 관리하고 대처할 능력이 윤석열 정권에 있는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이 위기와 참변에서 그래도 뭔가 교훈을 얻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혼돈 속에서도 타인의 생명을 구하려 이태원 길바닥에서 CPR(심폐소생술)에 뛰어든 시민들이다. 그들은 ‘피 묻은 빵’은 먹지 않겠다는 시민적 공덕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대학생들과 노동조합원들과 서로 다른 이들이 아니겠다. 그외에는 다른 주체가 없고, 공감과 연대 외에 다른 필요한 마음이 없다. 세월호와 이태원을 겪은 청년들은 부디 마음을 잘 추스르고 책임의 소재가 어디 있는지 냉철하게 살피기 바란다. 그리고 무능한 정치와 부패한 기성세대를 용서하지 말고 연대로써 부수고 자신들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기 바란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경향 2022.11.03.
자식 잃은 슬픔
육친(肉親)을 잃은 것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라는 뜻이다. 자식의 죽음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 해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한다. 부모 주검은 산에 묻고 자식 주검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다. 자식 잃은 아픔은 동물적 본능의 슬픔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슬픔을 참척(慘慽)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식 잃은 슬픔과 고통을 일컫는 말이다. 참척의 고통은 눈을 감을 때까지 부모 가슴에 납덩이로 얹혀 있고, 세월이 흘러도 딱지가 앉지 않는 상처다.
▼소설가 박완서는 1988년 스물다섯 외아들을 앞세웠다. 의대를 졸업하고 레지던트 과정을 밟던 ‘청동기처럼 단단하고 앞날이 촉망되던 젊은 의사 아들’을 잃은 그는 스무 날이 넘게 부산 수녀원에 칩거하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하시라고 하나님께 대들며 따졌다.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이 어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나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라고 통한에 몸부림쳤던 박완서는 후일 그렇게라도 따져 묻고 분풀이할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참척의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회고하며 감사했다. 자식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참담한 일은 없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그랬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이태원 참사로 참척의 고통을 터져 나가는 가슴으로 삼키며 견디는 이가 수백명이 넘다. 참척을 당한 부모에게 조문은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일지라도 견디기 힘든 모진 고문이다. 이제 늦은 밤 공용화장실 가기가 두렵고, 여자 혼자 사는 게 무섭다. 우연히, 운 좋아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는 요원한 걸까. 최소한 수학여행 갔다가, 직장에서 일하다가, 공용화장실에 갔다가, 축제장에 갔다가 비명횡사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권혁순 논설주간 hsgweon@kwnews.co.kr 강원일보 : 2022-11-03
누가 반이성적이었나?
‘스탬피드’라는 현상이 있다.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초원, 어슬렁거리던 사자가 고개를 돌리니, 얼룩말 한 마리가 대열에서 뛰쳐나간다. 나머지 얼룩말도 일제히 뒤를 따른다. 군집을 이룬 동물들 중 갑자기 한 마리가 뛰쳐나가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 현상이 스템피드다. 우리가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앞으로 나가면 다들 무의식적으로 발을 떼는 현상도 바로 이 스탬피드다.
스탬피드는 비슷한 다른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군중 압사사고를 말한다. 많은 외신에서 이번 이태원 재난을 이르며 스탬피드라고 불렀다. 군중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 키스 스틸(영국 서포크대 방문교수)은 ‘스탬피드’라는 용어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압사사고는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에 뭉쳐있고, 사람들이 미는 힘으로 넘어져서 발생한다. 반면 스탬피드는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려 뛰어드는 장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압사사고를 반세기 전의 추석 귀향 행렬, 하지에 참가하려는 이슬람 순례객, 축구장에서 술 취해 난동을 부리는 관중에게나 볼 법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최첨단을 달리는 서울 한복판에서 희생자들을 마주하고 있다.
군중 압사사고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많지 않다. 2018년 스웨덴 최고 의과대학인 카롤린스카연구소의 마리아 모이티노 데 알메이다 연구원 등이 압사사고에 대한 다수의 영어 논문을 분석했는데, 2016년까지 64개를 찾았을 뿐이다. 그들은 압사사고를 ‘군중의 질서정연한 이동이 깨져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정의한다.
압사사고가 나는 메커니즘은 비슷하다. 평소 자유로웠던 군중의 이동 흐름에 과밀도가 높아지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게 된다. 누군가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뒷사람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앞사람을 밟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다 넘어지고 넘어지고… 밑에 깔린 사람들은 다치거나 숨지게 되는 것이다.
이 연구원이 분석한 논문들은 압사사고에 대한 다양한 면을 포착했다. 가로 세로 1m당 5.26명이 넘으면 사고가 발생한다는 결과도 있었다. 군중의 일제 행동을 일으키는 방아쇠가 피해를 키울 수 있다. 이를테면, 10월초 인도네시아 말랑의 축구장에서 벌어진 압사사고는 최루탄이 방아쇠가 됐다. 놀란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달려가다 뒤엉키면서 100여명이 숨졌다.
압사사고를 일으키는 원인에는 많은 군중, 단위면적당 높은 군중 밀도, 출구의 부족 등이 꼽히지만, 여러 연구자가 지적한 것이 ‘병목(bottleneck) 효과’다. 원래 사람들은 대열을 이뤄 걸을 때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고 흐름을 타면서 협력한다. 그런데, 병주둥이처럼 좁은 길목을 지나가면 문제가 생긴다. 대열이 활 모양처럼 좁아지고 사람의 신체 압력이 증가하면서, 전체적인 협력 행동이 깨지고 마는 것이다. 이번 이태원 사고에서도 골목으로 튀어나온 건물 출입구 계단이나 철제 가벽이 군중의 협력을 망가뜨렸다.
과거에는 압사사고가 공포에 빠진 군중의 비이성적인 행동의 결과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저개발국가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편견도 한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이러한 선입견과 반대로 군중의 합리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논문의 저자는 말한다.
“압사사고 경험자와 피해자에 대한 질적 연구를 보면, 아주 급박한 순간에도 군중은 서로 협력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압사사고를 막기 위해 조직적으로 한몸처럼 움직인다.”
1989년 영국 셰필드에서 100명 가까이 숨진 힐스버러 축구장 압사사고에서는 사건 직후 관중의 음주와 약물이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나중에 이와 관련된 특이 수치는 없는 것으로 보고됐다. 동물의 스탬피드도 이성적인 행동이다. 무리에서 떨어지면 안전이 위협되는 상황에서 포식자에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진화의 결과물이다.
오히려 압사사고를 막기 위해선 다수의 출구를 만들어주고(차도를 열어주는 것), 진입 시간을 통제하고(지하철 무정차), 좁은 길목을 없애는(골목의 장애물 철거) 등 군중의 흐름을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간의 연구는 말하고 있다. 이태원에서는 이 모든 게 없었다.
나는 폭 3.2m 골목에 몸이 막혀 군중의 압력이 가슴을 죄어올 때,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뒤로, 뒤로”를 잊을 수 없다. 급박한 순간에도 이들은 이성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 경찰 한 명이 없었던 사실이야말로 반이성적이었던 것이다
남종영 | 기후변화팀 기자 한겨레 2022.11.03.
윤 정부의 애도 계엄령, 곧 검찰이 등장할 차례
영국 사상 최단명 총리로 물러난 리즈 트러스가 던진 폭탄에 영국은 여전히 침몰 중이다.
리시 수낵 총리 내각은 영국 경제에 재앙을 부른 트러스의 450억파운드 감세안을 뒤집는 데서 더 나아가 500억파운드 증세 및 지출삭감안을 곧 발표한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더 붙인 격이다. 서민들이 집에서 쫓겨날 위기다. 지난 4월 이후 영국의 임대료는 45%가 인상돼, 거의 250만명의 세입자가 집세를 밀리고 있다고 홈리스 자선단체 ‘셸터’가 집계했다. 세입자 3명 중 1명이 수입의 절반을 집세로 낸다.
트러스의 감세안이 재정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에 8월 초 2%에 못 미치던 10년 국채 이자율이 10월 중순에 4.5%까지 올랐다. 파산 위기에 영국의 연기금들은 자산을 내다 팔면서 1500억파운드의 손실을 봤다.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은 연기금 파산을 막느라고 이들의 자산을 매입했다. 물가오름세 앞에서 돈을 죄어야 하는 중앙은행이 돈을 풀었으니, 앞으로는 이를 거둬들이는 긴축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이는 금리인상을 더욱 가파르게 해, 집 없는 서민들을 거리로 내쫓을 것이다.
물러나는 트러스는 “나는 우리가 대담해지고, 우리가 직면한 도전에 대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한다”며 한마디 사과나 미안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임 중에 감세안에 대해 “너무 빨리 멀리 왔다”며 실수를 인정하는 듯했으나, 낙마가 불가피하자 다시 자신의 정당함을 강조했다. 물러나는 마당이니 자신을 뽑아준 지지층을 묶어두려는 정략이다.
트러스가 물러날 즈음에 한국에서도 똑같은 사태가 터졌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강원도가 보증을 선 레고랜드 채무 2050억원의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발표를 해서, 채권 시장에 패닉이 몰아쳤다. 지방자치단체의 보증 채권도 믿을 수 없다는 우려가 퍼지며, 지자체나 웬만한 기업들의 채권 금리가 2~3배까지 올랐다. 강원도가 다시 채무 보증을 이행하겠다고 밝히기까지 24일이 걸렸다. 이를 진정하려고 정부가 쏟아부은 돈은 50조+알파, 5대 은행도 95조를 쏟아붓고 있다.
강원도가 이런 결정을 독단으로 했다면 중앙정부의 직무유기이고, 상의했다면 공모 책임이 있다. 추경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태가 발발한 지 2주도 넘은 지난달 14일(현지시각) 미국에서 한가롭게 기자간담회를 열어 “강원도에서 대응을 해야 할 거 같다”며 “(시장 전반으로 불안 심리가) 확산될 단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해외로 나간 뒤 귀국하면서 “조금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무도 사과를 하거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왜 이들은 사과와 미안함이 없나? 윤석열 대통령도 ‘이 ××’ ‘쪽팔려’ 막말 사태를 사과하지 않았다. 지지율 떨어지는데 사과보다는 더 밀고 나가는 것이 고정 지지층이라도 결집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정략이 아니고서야 이런 사태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태원 참사는 “경찰을 더 배치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사흘 만인 1일 자신의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이 112에 접수된 이 사건의 신고 전화에 경찰의 대응이 미흡했다고 ‘격노’했다고 하자,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 등이 책임과 사과에 모르쇠하던 ‘모드’를 일제히 바꾸기 시작했다. 각종 막말과 사고에 임하는 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의 자세가 바뀌는 건가?
두고 보자. 윤 정부는 책임보다는 애도가 먼저라며, 애도를 계엄령처럼 선포했다. 자국민이 5명 죽은 이란 외교부 대변인이 “한국 정부가 행사 관리를 했어야 했다”고 말하자, 한국 외교부는 “이런 언급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각별한 주의와 재발 방지를 강력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란 쪽 발언이 외교적으로 적절한지는 의문이나, 자국민이 5명이나 죽은 나라에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이 고작 이런 것인가?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고,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는 계엄 보도지침을 내렸다.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제 경찰이라는 만만히 책임을 물을 대상이 떠올랐다. 윤 정부의 전가의 보도인 검찰이 곧 등장할 차례다. 초동 대처에 태만했다는 경찰을 잡도리하고, 군중 속에서 밀었다는 사람들을 찍어내고, 불법 증축을 했다는 해밀톤호텔 등을 철거하는 사태를 예견한다면, 내가 너무 과민한가? 세월호 때도 해경을 해체하고, 선주 일가를 잡는다고 야산까지 샅샅이 수색했다.
문제는 윤 대통령을 비롯한 이 정부에 포진한 ‘한국의 트러스’들이다. 영국의 트러스처럼 사과나 미안함은 그들의 몫이 아닐 것이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2.11.03.
윤석열의 ‘무능 리스크
이태원에서 안타까운 참사가 일어난 지 나흘째. 채 피지도 못한 채 떨어진 156송이의 꽃봉오리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의 물결이 전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가애도기간 중에는 추모에 집중하는 것이 도리다. 하지만 그럴 수만은 없는 일이 또 터졌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이어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친일 망언에 이어 이번에도 ‘그놈의 입’이 사고를 쳤다. 정권 자체가 지지율을 깎아 먹는 최대 위험요인이다.
경제 분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윤석열 정부의 무능과 정책 오류가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이른바 ‘윤석열 리스크’가 심각하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는 10월24일,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서비스 먹통 사태와 관련해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이용자들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기업의 사과로 끝날 일인지는 의문이다. 정부도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책임이 크다.
윤 정부가 그동안 플랫폼의 독과점 심화에 따른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무시한 채 친기업과 규제완화를 앞세워 ‘최소·자율 규제’ 원칙을 고집한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빅테크의 독점을 규제할 법안들을 마련하는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 윤 대통령은 10월17일 “독과점이 심한 상태에서 시장이 왜곡되거나 국가 기간 인프라에 문제가 발생하면 당연히 국가가 필요한 대응을 해야 한다”며 규제 강화를 지시했다. 자신의 정책 오류를 감추려는 ‘눈 가리고 아웅 식’ 대응이 아닐 수 없다.
에스피씨(SPC)그룹 계열의 빵 재료 제조업체에서 20대 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참혹하게 숨진 사건이 발생한 뒤 불매운동이 확산하고 있다. 허영인 에스피씨 회장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사고 8일 만에 다른 계열사에서 끼임 사고로 노동자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일이 또 발생했다. 최악의 산재 국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올해 1월 말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산재 사고는 지난해와 별 차이가 없다. 9월 말까지 중대재해사건 사망자는 446명에 이른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해당 법에 대해 “기업인 경영 의지를 위축시키는 메시지를 준다”는 왜곡된 인식을 보여줬다. 지금도 중대재해처벌법 처벌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31일 리시 수낵 신임 총리가 500억파운드 규모의 증세를 검토하는 등 시장 신뢰 회복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전임 리즈 트러스 총리는 잘못된 부자감세로 파운드화 폭락 사태를 부른 뒤 44일 만에 물러났다. 많은 경제전문가는 윤 정부도 부자감세를 철회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와 낙수효과가 끊긴 상황에서는 부자감세로 인한 투자·고용 증가 효과가 거의 없고, 세수 감소로 인해 재정 건전성만 해칠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정부는 “한국은 영국과 다르다”며 옹고집을 부린다.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경솔한 결정이 낳은 ‘레고랜드 사태’는 경제에 어두운 정치인의 무지와 무능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강원중도개발공사의 2050억원 규모 자산유동화기업어음의 채무보증을 철회하는 ‘도박’은 가뜩이나 얼어붙은 자본시장을 아예 마비시켰다. 급기야 정부가 ‘50조원+알파’를 푸는 등 긴급조처를 했는데도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플랫폼 규제 공백,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 시도, 무리한 부자감세, 레고랜드 참사는 윤 정부의 ‘무능 리스크’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 중 일부에 불과하다. 보수진영은 문재인 정부가 무능하다고 집요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윤 정부의 무능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더욱이 윤 정부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잘못된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는 무지와 아집까지 보여준다.
한국 경제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 속에 경기침체 우려가 겹치고, 금융시장마저 마비되는 복합위기를 맞고 있다. ‘윤석열의 무능 리스크’를 계속 감당할 여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오죽하면 보수언론조차 “위기 대응에 사령탑이 보이지 않는다”고 질책하겠는가?
서울 도심에서 주말마다 윤석열 퇴진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제 출범 5개월밖에 안 된 대통령에게 할 소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남은 4년 반의 임기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너무 큰 것 같다. 윤석열의 ‘무능 리스크’를 어찌할꼬.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한겨레 2022.11.03.
슬퍼는 하되 ‘구조는 비판말라’는 국가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1999년 10월30일)는 대부분의 희생자가 청소년으로 56명이 사망하고 78명이 부상당했던 큰 사건이다. 지하에 노래방, 1층에 식당, 2층에 호프집, 3층에 당구장이 있는 건물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망자는 호프집에서 나왔다.
당시 참사에 의한 희생자들은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당시 인천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던 나는, 이 사건이 ‘술 마시는 “불량 청소년”이라 일어난 일’이라는 방식의 메시지를 학교, 교회, 미디어 등 모든 곳에서 들었다. 당시 나로서는 ‘노래방, 호프집, 당구장과 같은 곳은 다니면 안되는구나’와 같은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불량 청소년이라 죽었다’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는 전국적이었겠지만 인천에서는 더 심했다. 어른들은 노래방, 호프집은 물론이고 아예 동인천역 근처에도 가지말라고 했다. 당시 나는 ‘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호프집이 성행하고 있는지’, ‘왜 50평 밖에 안되는 곳에 100명이나 들어갈 수 있게 했는지’, ‘비상구는 왜 없었는지’와 같은 질문들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위험하게 돈을 벌어들였던 무책임한 어른의 문제, 뒷돈을 받으며 이를 묵인했던 국가권력의 문제는 쉽게 묻혀졌다. 누군가는 그런 질문들을 했겠지만 적어도 청소년이었던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인현동 화재참사의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고통에 더해 희생자들에게 가해지는 낙인 그리고 낙인으로 인해 공감은 커녕 희생자들을 비난, 비하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이 컸을 것이다.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지난달 29일 밤, 이태원의 좁은 골목 비탈길에서 사람들이 압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태원이라는 공간에 대한 낙인, 핼러윈이라는 행사에 대한 낙인, 놀러간 청년에 대한 낙인으로 인해 만들어지고 공유되는 발언들의 수위가 정말 끔찍한 상황이다.
‘거기 놀러간 젊은 애들 잘못이다’, ‘서양 귀신 축제 챙기다 죽었다’라는 방식의 낙인은 놀랍게도 23년이나 지난 사건과 닮아있다. 모든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은 “놀러갔다 죽은 것을 어떡하냐”고 한다.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 가운데서, 국민의 안전에 책임이 있는 국가는 쉽게 숨는다. 112신고 녹취록이 공개되기 전까지 그토록 방어적인 자세만 취하며 누군가는 축제가 아닌 ‘현상’으로, 누군가는 구조적 ‘사건’이 아닌 개별적 ‘사고’로 취급되기를 바랐다. 국가는 세월호 참사(2014년 4월16일)때와 너무나 유사하게도 국민의 구조요청에 응답하지 않고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을 만들어 버렸다.
세월호가 암초에 부딪친 것이든 잠수함에 부딪친 것이든 부딪친 후라도 모든 사람을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구하지 않았다. 배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고 구조를 위해 출동한 미군의 군함과 헬기에게는 다가오지 말라고 했다. 아직도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의 이유와 책임자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에 대한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진상규명 요구도 끝나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 때와 다른 점은 이태원 참사는 “애도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추궁이 아닌 추모의 시간을 갖자고 하면서, ‘참사’, ‘희생자’라는 표현은 쓰지말고 ‘사고’, ‘사망자’라는 표현을 쓰란다. 즉, 슬퍼는하되 구조적인 관점은 배제하라고 한다.
이 사건은 구조적인 관점을 배제할 수 있는 사건인가? 그렇지 않다. 핼러윈 주말에 이태원에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예상하고 대비했어야 한다. 지하철 무정차 조치나 차 없는 거리 지정, 일방통행 조치, 경찰의 충분한 배치와 통제 등의 조치는 그간 한국사회가 잘 하고 있는 일이었다. 이미 과거 이태원 핼러윈 행사 때 했던 조치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지 않았고 엄청난 참사가 발생한 이후에도 책임을 회피한다. 수백명의 수사관을 동원해 진상 조사를 하겠다고 한다. ‘누가 가장 먼저 밀기 시작했는지 찾아내겠다’는 태도는 기가 막힌다.
일상이 안전해야 한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든 수학여행을 가든 일터에서 노동을 하든 휴일에 축제에 놀러가든 어디서나 누구나 안전해야 한다. 그런데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 그 이유는 학업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다가 사망하는 노동재해 사망률은 전 세계 1위다. 매년 800명에 달한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든 아무 잘못없이 죽을 수도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왜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안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머리를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공부를 하다가 똑같은 노동을 하는 권력이 정한 ‘정답’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며 이따금 해방감을 느끼려 한다. 해외여행을 가거나 명품쇼핑으로 ‘플렉스’하는 등 감옥 같은 삶을 지속하기 위한 잠깐의 탈출구를 찾기도 한다. 여행과 쇼핑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여행과 쇼핑을 할 때만 만족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삶이라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을 점검해 봐야 한다.
잠깐의 해방을 위해 나섰던 이태원 좁은 골목길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득 차 있던 모습은 너무나 슬픈 오늘날 한국의 자화상이다. 엄청난 인파가 모이는 곳에 가지 않아도 재미있는 행사와 축제가 마을 곳곳에 많아야 한다.
특정한 날, 특정한 곳에 가서 특정한 무언가를 해야하는 모습이 아니여도 되길 바란다. 여의도 불꽃축제도 보신각 타종행사도 꼭 그 날 거기에 그걸 보러 가지 않아도 우리들의 일상에 크고 작은 즐거운 일들이 많아야 한다. 감옥 같은 일상이 아니라, ‘정답’이 아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나답게 생존할 수 있는 해방세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더 많은 춤, 노래, 문화, 예술로 채워져야 한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내가 하고 싶은 머리를 하고 내가 주인공인 나의 삶을 너의 삶의 주인공인 너와 함께 공연처럼 예술처럼 즐거운 무대로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해방이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무엇을 하든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미디어오늘 2022.11.0
추궁의 시간, 면피의 시간
최근 공개된 경찰청 정보국의 ‘정책참고자료’를 보면, 이태원 참사가 ‘정부 책임론’으로 튈 것을 극도로 경계한 정부 여당의 인식 구조를 엿볼 수 있다. 문건은 진보 성향 단체들이 “세월호 사고 당시 정부의 대응 미비점을 상기”, “정부 성토 여론 형성에 주력할 것” 등의 진단을 내놨고, 정권 퇴진 운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경찰력 부재 비판을 “선동성 정치적 주장”으로 규정하고, 국민의힘이 참사 직후부터 “추궁이 아닌 추모의 시간”(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슬픔을 당파적 분노로 전도시켜서는 안 돼”(권성동 의원) 등 진상 규명 요구를 정쟁으로 매도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태원 참사로 온 나라가 비탄에 잠겼지만, 지난 닷새간 윤석열 정부가 국민에게 보여준 모습은 ‘발뺌’과 ‘선긋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6명의 목숨이 국가의 부재 속에 스러졌는데도, 지금껏 ‘내 책임’ 혹은 ‘정부 책임’을 언급한 정부 여당의 주요 인사는 한명도 없다. 참사 직후 재난 안전 총괄 부처인 행정안전부의 이상민 장관은 경찰·소방인력 배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고, 윤희근 경찰청장은 예년보다 많은 경찰을 배치했다면서도 실제 질서 유지 인력은 지구대 소속 30여명이 전부였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안전 대책에 손 놓고 있던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원인 파악이 먼저라는 취지로 답해 공분을 자아냈다. 그나마 지난 1일 이들이 잇따라 사과에 나섰는데, “무거운 책임감”을 언급했을 뿐 실질적 책임은 진상 규명 뒤에 밝혀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사과는 112 녹취록 파장을 줄이기 위한 선제적 조처로 보인다. 한 기관장의 측근은 “(사과를) 우리 마음대로 하지는 않았다”고 해 모종의 ‘지시’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정부가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기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 역시 재난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정부의 관리 책임을 희석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애도만 하고 ‘가만히 있으라’던 집권 세력의 요구는 지난 1일 오후 참사 직전 접수된 112 신고 내용이 공개되면서 힘을 잃었다. 경찰과 지방자치단체의 사전·사후 부실 대응 사실이 잇따라 공개됐고, 경찰은 참사 원인을 규명하겠다며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서울경찰청 등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했다. 경찰청 특별감찰반은 3일 이태원 관할 경찰서인 용산경찰서장과 112 상황관리관의 늑장 보고 책임을 물어 특수본에 수사를 의뢰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의 “현장 대응 미흡” 언급이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하지만 10만명의 운집이 예상되는 행사에 왜 통제 인력을 미리 배치하지 않았는지, 경력 지원 요청은 왜 묵살됐는지, 보고 체계는 왜 붕괴됐는지 등 ‘윗선’의 문제는 가려지고, 일선 실무자들만 희생양이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정 총책임자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공직자들은 ‘덤터기’를 쓸까 두려워 책임을 회피하거나 떠넘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번 참사가 인재라는 점이 확실해진 만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의무가 있는 대통령의 사과는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대통령실까지 포함한 성역 없는 진상 규명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112 녹취록을 보고받은 뒤 ‘격노’했다고 전해지면서, 진상 규명의 방향은 경찰, 특히 일선 직원들의 책임으로 방향이 잡히는 추세다. 이상민 장관 경질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거세지만, 윤 대통령은 희생자 분향소 조문에 연일 이 장관을 대동하며 신뢰를 보이고 있다. 대통령실 안에서는 ‘사과하면 밀린다’는 정서도 적지 않다고 한다.
경찰청의 ‘정책참고자료’ 맨 뒷장에는 “대체로 사고 발생 2~4일 ‘정부 대처, 사고 원인’ 등에 관심이 고조되다 정부의 중간수사 결과 또는 재발 방지 대책 발표 등을 계기로 보도 감소”라고 적혀 있다. 정부는 애초 7일간의 국가애도기간을 일종의 마지노선으로 여기고, 자연스럽게 여론의 관심이 사그라들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참사의 원인은 명확하다. 정부와 지자체가 할 일을 하지 않아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윤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책임자 문책, 재발 방지책이 뒤따라야 한다. 국민들이 슬픔과 분노를 품고 지켜보고 있다.
최혜정 | 논설위원 한겨레 2022.11.04.
윤 정부의 애도 계엄령, 곧 검찰이 등장할 차례
영국 사상 최단명 총리로 물러난 리즈 트러스가 던진 폭탄에 영국은 여전히 침몰 중이다.
리시 수낵 총리 내각은 영국 경제에 재앙을 부른 트러스의 450억파운드 감세안을 뒤집는 데서 더 나아가 500억파운드 증세 및 지출삭감안을 곧 발표한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더 붙인 격이다. 서민들이 집에서 쫓겨날 위기다. 지난 4월 이후 영국의 임대료는 45%가 인상돼, 거의 250만명의 세입자가 집세를 밀리고 있다고 홈리스 자선단체 ‘셸터’가 집계했다. 세입자 3명 중 1명이 수입의 절반을 집세로 낸다.
트러스의 감세안이 재정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에 8월 초 2%에 못 미치던 10년 국채 이자율이 10월 중순에 4.5%까지 올랐다. 파산 위기에 영국의 연기금들은 자산을 내다 팔면서 1500억파운드의 손실을 봤다.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은 연기금 파산을 막느라고 이들의 자산을 매입했다. 물가오름세 앞에서 돈을 죄어야 하는 중앙은행이 돈을 풀었으니, 앞으로는 이를 거둬들이는 긴축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이는 금리인상을 더욱 가파르게 해, 집 없는 서민들을 거리로 내쫓을 것이다.
물러나는 트러스는 “나는 우리가 대담해지고, 우리가 직면한 도전에 대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한다”며 한마디 사과나 미안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임 중에 감세안에 대해 “너무 빨리 멀리 왔다”며 실수를 인정하는 듯했으나, 낙마가 불가피하자 다시 자신의 정당함을 강조했다. 물러나는 마당이니 자신을 뽑아준 지지층을 묶어두려는 정략이다.
트러스가 물러날 즈음에 한국에서도 똑같은 사태가 터졌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강원도가 보증을 선 레고랜드 채무 2050억원의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발표를 해서, 채권 시장에 패닉이 몰아쳤다. 지방자치단체의 보증 채권도 믿을 수 없다는 우려가 퍼지며, 지자체나 웬만한 기업들의 채권 금리가 2~3배까지 올랐다. 강원도가 다시 채무 보증을 이행하겠다고 밝히기까지 24일이 걸렸다. 이를 진정하려고 정부가 쏟아부은 돈은 50조+알파, 5대 은행도 95조를 쏟아붓고 있다.
강원도가 이런 결정을 독단으로 했다면 중앙정부의 직무유기이고, 상의했다면 공모 책임이 있다. 추경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태가 발발한 지 2주도 넘은 지난달 14일(현지시각) 미국에서 한가롭게 기자간담회를 열어 “강원도에서 대응을 해야 할 거 같다”며 “(시장 전반으로 불안 심리가) 확산될 단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해외로 나간 뒤 귀국하면서 “조금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무도 사과를 하거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왜 이들은 사과와 미안함이 없나? 윤석열 대통령도 ‘이 ××’ ‘쪽팔려’ 막말 사태를 사과하지 않았다. 지지율 떨어지는데 사과보다는 더 밀고 나가는 것이 고정 지지층이라도 결집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정략이 아니고서야 이런 사태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태원 참사는 “경찰을 더 배치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사흘 만인 1일 자신의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이 112에 접수된 이 사건의 신고 전화에 경찰의 대응이 미흡했다고 ‘격노’했다고 하자,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 등이 책임과 사과에 모르쇠하던 ‘모드’를 일제히 바꾸기 시작했다. 각종 막말과 사고에 임하는 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의 자세가 바뀌는 건가?
두고 보자. 윤 정부는 책임보다는 애도가 먼저라며, 애도를 계엄령처럼 선포했다. 자국민이 5명 죽은 이란 외교부 대변인이 “한국 정부가 행사 관리를 했어야 했다”고 말하자, 한국 외교부는 “이런 언급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각별한 주의와 재발 방지를 강력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란 쪽 발언이 외교적으로 적절한지는 의문이나, 자국민이 5명이나 죽은 나라에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이 고작 이런 것인가?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고,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는 계엄 보도지침을 내렸다.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제 경찰이라는 만만히 책임을 물을 대상이 떠올랐다. 윤 정부의 전가의 보도인 검찰이 곧 등장할 차례다. 초동 대처에 태만했다는 경찰을 잡도리하고, 군중 속에서 밀었다는 사람들을 찍어내고, 불법 증축을 했다는 해밀톤호텔 등을 철거하는 사태를 예견한다면, 내가 너무 과민한가? 세월호 때도 해경을 해체하고, 선주 일가를 잡는다고 야산까지 샅샅이 수색했다.
문제는 윤 대통령을 비롯한 이 정부에 포진한 ‘한국의 트러스’들이다. 영국의 트러스처럼 사과나 미안함은 그들의 몫이 아닐 것이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2.11.04.
책임지는 권력이 없다, ‘개인의 악마화’만 남았다
“고등학생이던 세월호 때는 배가 침몰하는 것 같으면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따르지 말고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걸 배웠죠. 그리고 20대 중반이 된 지금은 사고가 나면 거기를 간 내 책임이니 밀집한 곳에 가면 안 된다는 걸 배웠어요. 그럼 국가는 뭐 하는 것인가요? 그런데 이런 말 하기도 꺼려집니다. 네가 선택한 걸 왜 국가 탓을 하냐며 욕먹을 테니까요.”
이태원 참사가 있고 난 다음 몇명의 이십대들과 나눈 이야기를 종합하면 위와 같은 이야기가 된다. 공교롭게도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동료 학생들의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국가에 대해 불신했던 학생들이 다시 또래들이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것을 보며 국가를 넘어 사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부정하고 있었다. 더 강화된 것은 “자기를 지키는 것은 자기뿐”이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판단”을 해야 한다는 확신이고 달라진 점은 “그 판단에 대한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질타를 당한다는 의식이 더 강해졌다는 점이다.
이번 참사를 겪으며 그들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쉽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악마화”하는지를 경험했다며 몸서리쳤다. 100m가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춤을 출 수 있냐는 비난에 대해 당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하는 게 가능한 것이냐고 반문했다. 축제이고, 사람들이 혼잡하고, 다수가 코스튬을 하고 있는 곳에서 명확한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비상 상황’인지, 발 빠르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냐는 말이다. 그 장소 인근에서 춤을 춘 사람, 술을 마신 사람, 지나간 사람,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던 사람, 모두가 다 악마가 되고 죄인이 되었다.
어떤 결정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제발!”을 확성기 하나 없이 쉰 목소리로 절규하던 이태원의 경찰관에게나 음악에 묻혀 그게 무슨 말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나, 그곳은 시스템이 부재하는 절망의 장소였다. 한쪽은 지금 죽어가는 사람들을 두고 확성기로 상징되는 시스템이 부족하였기에 ‘개인’으로서의 자기의 역량이 부족함을 절감하며 무력감에 무너져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쪽은 그 소리가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지나갔다는 사실, 그 사실을 이후에 알게 된 다음 밀려오는 죄책감에 몸을 떨며 무너져가고 있다. 한쪽은 의인이고, 한쪽은 악마인가. 아니면 두 쪽 모두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현장’의 피해자들인가?
반면 그 자리에 대해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다. 그 자리가 성공적이었다면 그 성과를 자신의 치적으로 가져갔을 사람들이다. 코로나를 드디어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하였다거나, 혹은 지역 상권을 다시 살리는 데 기여한 지자체라는 이름과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고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종의 ‘부재지주들’이다. 이 부재지주들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악마화하여 그 죄를 따져묻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하는 게 아니라 대중이 나서서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벌어졌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죄인이 되어갔다.
권력을 가진 이 부재지주들은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질 책임이 없으며 불가피한 사고였다고 말한다. 그럴듯하다. 그들은 아무런 책임을 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사건의 전후로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산구청장의 말처럼 이번 사건은 주체가 있는 ‘행사’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었기 때문에 이 부재지주들은 현상이 발생하고 흘러가는 대로 구경만 했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책임질 일도 없다. 애초에 책임질, 즉 결정을 하지 않았으니 질 책임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시민들은 매우 근본적인 것을 물을 수밖에 없다. 책임질 ‘결정’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시민은 권력을 위임해야 하는가? 위임받은 권력으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만일 책임이 이리 정해진(=결정된) 지침과 매뉴얼에 따라 착실히 수행하는 것의 여부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할 이유가 하등 없다. 선거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은 정책을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질 사람을 뽑는 정치적 행위이지 행정적 절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책감을 먹이삼는 ‘책임의 부재지주’들
선거로 뽑히고, 선거 승리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정치적 과정’으로 임명되어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법적·행정적 책임’이라는 말로 뻔뻔하게 정치적 책임을 무책임하게 부정할 때 시민들은 황당함을 넘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그들은 사실은 ‘결정하지 않는 결정’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책임과 달리 정치는 결코 결정을 피해갈 수 없다.
더하여 행정적 책임이라도 제대로 수행하였냐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112 신고 녹취록이 공개된 후 매뉴얼과 권한이 없다던 초기의 변명과는 달리 매뉴얼대로 진행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권한이 없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해야 할 의무와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것이다. 시민들이, 일선 경찰들이, 파출소가 상황에 대해 급박하게 보고를 하며 대처할 것을 아무리 요청하여도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 부재지주들이었다.
참사의 전후로 정치적 판단과 책임만 부재한 것이 아니라 행정적 판단과 책임도 부재했다. 오히려 이제야 다시 드러나고 있지만 상황 판단이 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현장에 있던 다수의 사람들이었다. 이벤트가 아니라 진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감지하자마자 업소 주인들은 손발을 걷고 뛰어나가 도왔다.(그런데 경황없이 뛰어나간 이들은 음악을 끄지 않았다고 비판받고 있다.) 지나가던 간호사·간호조무사 자매는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가서 3시간 넘게 30~40명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다. 권력과 시스템의 판단과 행동이 부재한 곳에서 판단하고 행동한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죄책감에 몸부림을 치며 파괴되어 가야 하는가?(이런 점에서 지금 이들의 정신적 트라우마 극복을 돕기 위해 정신의학 치료·상담을 진행하는 일선의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책임지는 정치’를 회복해야
한국은 참사가 있을 때마다 정치의 부재, 행정의 부재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 공백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뼈를 갈아넣어 버텼지만 그 한계치에 도달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버틸 수는 없다. 물론 한국의 시민들은 이 부재를 메꾸기 위해 나서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부재는 행정적인 판단과 책임을 포괄하는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정치의 회복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에 책임을 물으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죄책감을 먹이 삼아 빠져나가려는 저 책임의 부재지주들을 권력으로부터 내보내야 한다. 현장을 보호하고 부재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권력이 부재지주가 되는 것을 용인해서는 정치와 행정 모두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이 책임을 ‘지는’(‘묻는’ 것이 아니라) ‘무한책임자’가 필요하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한겨레 2022.11.04.
이태원, 그리고 블랙 미러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일주일이 흘렀다. 세월호 때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그 위로 다시 깊은 생채기가 났다. 뉴스에서는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나와 ‘집단적 트라우마’가 우려된다며, 그날의 충격을 되새길 수 있는 영상을 멀리하고 뉴스 시청도 자제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매일 같이 참사 소식을 전해야 하는 보도 인력에게는 닿지 않는 조언이다. 그만 보고 싶어도,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했다. 하루 종일 피할 수 없는 이 잔혹한 참사를 앵커석에 앉아 보도하며 나는, 혹시 내가 블랙 미러 속 스피커가 아닌지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태원에는 일부 언론사 기자들이 있었다. 최근 경각심이 높아져 가는 마약 범죄에 대해 경찰이 핼러윈 이태원에 특별 단속을 하겠다고 예고했기 때문이다. 3년 만의 노 마스크 핼러윈, 10만 명 이상 인파가 몰릴 것이라고 예측됐기 때문에 모처럼 북적이는 10월의 마지막 주말을 기록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다, 현장을 담은 기자들이 있었다. 참사를 기록하러 간 게 아니었는데, 어깨에 카메라를 진 그들은 그날의 기록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기자들 말고도 많았다. 유튜브에, SNS에 마구잡이로 떠돌아다니는 영상들 속 가슴이 무너지는 절규만큼이나 소름 돋는 장면.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로 손을 뻗어 들린 핸드폰이었다. 누군가 생의 경계에서 사투하는 순간을 기록하는 검은 화면이 나는 쓰러진 사람들의 참혹한 광경만큼이나 견디기 힘들었다. 코앞에 있는 죽어가는 어떤 사람과, 넘치는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는 자신을 완벽히 타자화해야 할 수 있는 행동.
그들 중 일부는 선의의 알리미를 자처했을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려고,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블랙 미러’의 주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의 비극을 팔아 관심을, 좋아요를 벌었다. 그럼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었고, 다수에게 이 참사를 전시한 우리 보도 인력도 역시 ‘블랙 미러’일까. 고개를 끄덕이다, 젓는다.
참사 초반 우리는 그 경계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거의 모든 언론이 처음에는 인터넷에 올려진 영상들을 가공 없이 반복 방송했다. 그리고 ‘건설기계공학’, 혹은 ‘법률 전문가’들을 급한 대로 패널로 불러놓고 그들의 전공과 상관없는 망자들의 사인을 물으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지 묘사했다. 물론,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말도 안 되는 비극을 일단 알려야 한다는 공익적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각사마다 정리된 보도 지침이 내려지기 전까지 거의 모든 언론은 재난 방송이 아닌, 고어물(Gore,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피를 의미하는 뜻으로, 잔혹함을 강조한 공포 장르의 속칭)을 내보냈다.
상황이 차츰 정리되자 언론사들 스스로 자정(自淨)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현장에서 영상 취재를 한 기자들 전부가 자신들이 찍어온 영상을 내보내지 않았다. MBC의 경우, 참사 광경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담긴 인터넷 영상은 인용 시 뿌옇게 처리하는 것을 기본으로, 비명소리를 일부러 지우고, 증언 중에서도 너무 사실적인 것들은 보도하지 않기로 했다. 전문가 출연 대담에서 피해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묘사도 곧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정은 여전히 더 기민해야 한다.
더 사실적인 장면으로, 자극적인 보도를 더 오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이 참사로 우리 보도 인력이 알려야 할 진실은 망자들이 얼마나 잔혹한 모습으로 생을 달리했는지가 아니라, 이런 일이 발생할 때까지 우리가 뒷짐 져온 숙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아야 할 조회 수는 반드시 후자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사실 보도가 원칙이며, 그 가치를 따져 취사 선택하는 것은 시청자의 몫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절대 전자가 후자를 앞지를 수 없다. 한정된 뉴스 큐시트 블록에, 우리는 당연히 후자를 최대한 채워 넣어야 한다.
언론은 언제든 ‘블랙 미러’로 전락할 수 있다. ‘블랙 미러’냐 아니냐를 정하는 건 정말 종잇장 같은 한 끗 차이기 때문이다. 숨 쉬듯이 블랙 미러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자. 이제 남은 유가족 취재와, 수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오지 않았으면 하는 미래의 모든 비극에 대해 언제나 몸부림 쳐야 한다. 폴리스 라인 안 비집고 뻗쳐 나온 ‘블랙 미러’가 되지 않게 말이다. 이선영 MBC 아나운서 미디어오늘 2022.11.05
전쟁 같은 일상, 어디라도 이태원이다
지난달 30일 아침, 버스를 갈아타려고 서울 연세대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여느 일요일 출근길이면 차 한대 볼 수 없던 연세로를 버스들이 태연히 오가고 있었다. 서대문구가 얼마 전에 ‘주말 차 없는 거리’를 폐지했고, 평일엔 버스만 지나갈 수 있는 ‘대중교통전용지구’마저 해제하려고 한다는 기사를 읽기는 했었다. 한적함이 좋아 500m를 부러 걸어서 지나곤 하던 거리가 차량과 경적 소리만 빼곡했던 오래전으로 되돌아가 있는 풍경이 떠올랐다. 간밤 이태원 참사에 개기일식처럼 검게 먹어버린 심장 한가운데로 저릿한 파동이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와 그보다 한없이 사소해 보이는 기초지방자치단체의 퇴행 사이에도 별자리처럼 이어지는 지점이 있다. 무엇보다, 그날 이태원로의 차량 통행을 막았더라면 골목길 인파가 이태원로로 수월하게 빠져 참사를 막거나 적어도 희생자 수를 줄일 수 있었을 거라는 점에서 연세로의 ‘차 없는 거리’와 연결된다. 물리적 맥락 못지않게 중시해야 할 것이 정치적 맥락이다. 2011년 서울광장을 에워쌌던 이명박 정부의 차벽은 사람과 차가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일 수 있음을 인상 깊게 보여줬다. 우리 사회가 사람에 의한 차도의 평화로운 점유를 처음 체험하며 월드컵 응원전을 펼친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람과 차의 역학관계를 좌우하는 건 다름 아닌 권력의 의지였다.
연세로 차 없는 거리 사례는 오늘 권력의 의지가 질주하는 방향을 암시하는 작은 징후다. 속도(이윤)의 가치가 언제나 안전(생명)의 가치를 앞질러 왔지만, 지금은 최고 권력자가 전위에서 브레이크를 뗀 채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경남 창원의 원전 업체를 찾아가 팔짱을 낀 채 “지금 원전업계는 ‘탈원전’이라는 폭탄이 터져 폐허가 된 전쟁터다. 전시엔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나라 고위관료들이 이미 윤 대통령의 의지를 전방위로 초과 달성했음을 적나라하게 입증한 것이 이태원 참사다.
윤 대통령이 하필 사고가 났다 하면 피해 규모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원전 안전 문제에 ‘전쟁’의 메타포를 들이댄 것도 고약하지만, 그 메타포가 일회성의 우연이 아니라면 더욱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난달 21일 경찰의 날을 맞아 “마약과의 전쟁에서 승리해달라”고 주문했다. 핼러윈 데이의 이태원은 그 지시를 수행하고자 한 ‘전쟁터’였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애초 용산경찰서가 계획한 16명에 서울청 마약범죄수사대와 인접 경찰서 3개 팀을 더해 총 50명의 형사를 투입했다. 공권력은 부재하지 않았다. 다만 안전 대신 전투에 최적화됐을 뿐.
프로이센 시대 독일의 군인이자 전쟁 이론가였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나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했다.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라고도 했다. 그의 개념은 전쟁을 전투행위로만 국한하지 않는 맥락적 시선을 제공한다. 전쟁은 비전투 상태로 확장되고, 일상으로 연장된다. 윤 대통령과 그의 관료 수하들은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초과 달성했다. 전시 상태인 이 정부의 개념어 사전에 ‘참사’가 ‘사고’로, ‘희생자’가 ‘사망자’로 등재돼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쟁의 메타포는 발화자의 의도를 넘어서 우리 일상이 안전과도, 평화와도 정반대의 상태임을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태원 참사를 거치며 다시 목격한 체제의 부작위에 의한 죽음이야말로 지금이 전쟁 상태임을 암시하는 메타포다. ‘문득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기형도 ‘안개’)하듯, 이참에 향긋한 빵 속에 고단한 야간작업을 하다 안전설비도 없는 기계에 끼여 숨진 노동자의 피가 섞여 있고, 반지하 셋방 일가족의 익사에 권력과 자본이 은폐하는 기후위기의 계급성과 공멸의 위험이 있음을 우리는 각성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전쟁의 메타포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제목(2015)처럼, 전쟁은 약자의 방식이 아니다. 약자의 메타포는 ‘저항’이고, 저항적 삶으로의 전환은 이태원처럼 일상과 가까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연세로 ‘차 없는 거리’는 어떤가.
안영춘 | 논설위원 한겨레 2022.11.06
극단적 상식, 상식적 극단
급진적, 극단적, 전복적, 과격한… 등을 뜻하는 영어 형용사 ‘래디컬’(radical). 이 말이 칭찬으로 통하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예술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예측 불허의 상상력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접근이 환영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나라엔 예술가가 할 일이 없어 보인다. 세상이 너무도 ‘래디컬’하기 때문이다. 상식과 예상을 벗어나는 사건·사람·발언이 난무하는 통에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다. 상대적으로 예술은 상식 수준에서 맴도는 듯하다. 한때 예술가 지망생이었던 나 역시, 이 상식 밖 세상에 질려 점점 상식적인 생각밖에 못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제발 바다에 쓰레기 좀 그만 버렸으면, 동물들 좀 그만 괴롭혔으면, 숲 좀 보호했으면,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했으면 소원이 없겠건만, 이토록 평범한 생각도 진지하게 실천하다 보면 근본주의자 취급을 받기 일쑤다.
최근 기후활동가들이 예술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영국·유럽의 주요 미술관들이 석유 반대 운동의 무대가 된 것. 시위자들은 고흐의 <해바라기>,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명화에 액상 토마토나 케이크를 투척하고 액자에 몸을 접착한 뒤 이렇게 외쳤다. “소중한 작품이 공격받는 걸 보는 기분이 어떤가? 지구가 공격받는 것은 괜찮은가? 인류의 미래를 죽이는 화석연료를 당장 금지하라!” 즉, 그들이 ‘공격’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정치권과 언론, 우리의 무관심이었다. 코로나19 이후 정체된 기후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여론의 주목을 끌어내려는 계산된 행동이었기에 작품 자체는 훼손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류 여론은 ‘경악스럽다’ ‘과격하다’는 반응이고, 대부분의 활동가는 체포되어 재판 중이거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치가들은 이런 ‘과격’ 시위를 강하게 처벌하는 신속한 법안 발의를 약속했다. 한시가 급한 기후위기 대응이 한없이 지체되는 걸 보다 못해 일어난 시위를 근절하는 것이 당국에 가장 시급했던 모양이다.
함부로 다뤄지는 자연과 보물 취급받는 예술을 비교한 발상이 처음은 아니다. 과격하다는 평가를 받는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의 창립자 폴 왓슨은, 심해를 무참히 파괴하는 트롤 어업을 이렇게 비판했다. “누가 루브르박물관에 포클레인을 끌고 들어가 작품들을 박살 낸다면 당장 감옥에 갈 것이다. 전세계 바다와 밀림에선 그런 일이 지금도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처벌은커녕 정부 지원을 받는다.” 길어야 수천년인 미술사에 비해, 수억만년의 진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 자연이란 작품에 대해 우리가 무지하다는 진단은 틀리지 않다. 인공물과 자연물에 대한 가치 평가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를 이유가 있을까?
이번 시위는 예술품의 의미에 대해서도 재고하게 만든다. 사실 고흐의 <해바라기> 같은 작품의 경우, 진품 훼손 여부는 일반인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다. 부유한 미술관, 혹은 탈세를 목적으로 미술품에 투자한 억만장자가 손해 볼 순 있어도 말이다. 이미 최고의 3D 기술로 기록되어 있고, 셀 수 없이 복제/재생산되어 누가 마음먹고 파괴하려 해도 전세계인의 기억에 수천년은 남을 것이다. 게다가 원화를 구경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고, 그나마 경호원, 보호 유리, 인파 때문에 제대로 감상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원작을 정교한 복제품으로 바꾸면 대다수는 눈치도 못 채고 똑같은 감흥을 받으리라. 그러니 안심해도 좋다. 인류의 문화유산들은 아주 잘 있다. 문제는 자연유산, 특히 ‘돈 안 되는’ 것들이다. 6대 멸종 시대로 칭할 만큼 수많은 동식물이 인간의 끝없는 개발 행위 때문에 파괴되는데, 이런 만행에는 왜 경악하지 않는가.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시위에 찬성하는 거냐고? 내게 권한이 있었다면 우리를 성찰하게 만든 동시에 예술의 급진성을 부활시킨 공로로 상이라도 주고 싶다.
김한민 |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한겨레 2022.11.06
인재(manmade disaster)’ 책임을 묻는 외신
이태원 참사를 보도하는 외신들은 한국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문제삼았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든 한국에서 왜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압사 사고가 발생했는지 의아해한다.
브리핑 시작 1시간30분이 지났지만 기자들이 계속해서 손을 들었다. 발언 기회를 얻은 한 기자가 자신을 ‘알자지라’ 소속이라 소개했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기본적으로 관리가 안 될 수 있는 상황에 놓였는지 궁금해서 카메라맨이지만 질문한다”라고 말했다. 11월1일 ‘한덕수 국무총리 이태원 사고 외신 브리핑’ 현장에서 나온 이 질문은 이태원 참사를 바라보는 외신들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날 외신기자 70여 명은 한국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며 날 선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는 인재가 주기적으로 일어난다고도 한다. 그때마다 안전 사회를 정부가 강조했는데 왜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가?(〈뉴욕타임스〉)” “주최 측이 없던 행사라고 해서 과연 방지 못할 만한 참사였나(NBC)” “공공기관 중에서 안전을 총책임지는 기관이 어디인가?(BBC)”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청년들이 또다시 이런 시국을 감당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가디언〉)”
주요 외신은 참사 직후부터 현장 소식을 발 빠르게 전했다. 사건 당일 홈페이지에 속보 창을 띄운 〈뉴욕타임스〉는 현장에서 인파에 휩쓸렸다 살아남은 생존자, 인근 상점 관계자, 목격자 등의 증언을 토대로 사건의 퍼즐을 그렸다. 공통적으로 그 같은 대규모 인파는 처음이고 경찰 인력이 적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핼러윈 당시에도 이태원을 찾았던 한 외국인은 여러 경찰이 골목 입구를 감시했던 1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그 경찰이 올해 거기에 있었다면 아마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CNN 역시 사고 당일 통제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중점 보도했다. 이태원이 최근 핼러윈 축제를 즐기는 인기 장소로 부상했고, 일부는 해외에서도 오는 등 많은 인파가 예상되었는데도 군중 통제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게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참사 초기에는 주로 사고가 왜 발생했는지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일본 ANN 방송은 스튜디오에 사고지점인 이태원 골목 경사와 같은 각도의 구조물을 설치해 당시 상황을 추측했다.
이태원 참사로 사망한 희생자 중 외국인은 26명이다. 이들의 생전 삶을 반추하는 기사도 잇따랐다. 미국 언론은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스티븐 블레시와 앤 마리 기스케의 비보를 전했다. 유족은 슬픔을 넘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한 당국에 분노를 느낀다고 밝혔다. 희생자 중 한 명이 미국 연방 하원의원의 조카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일본인 희생자 두 명 역시 유학생으로 〈요미우리신문〉은 케이팝과 한국을 좋아하는 도미카와 메이의 사연을 전했다. 이번 참사로 5명이 사망한 이란의 외무부 대변인이 한국 정부의 현장 관리가 부실했다고 비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후 해당 언급이 개인적 발언이었다는 해명과 더불어 한국 정부의 유감 표명이 있었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함께 정부·지자체의 대응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미국의 군중 안전 전문가 폴 워트하이머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코로나19로 억눌린 수요가 있다는 걸 고려할 때 당국이 많은 인파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의문이라며 경찰이 골목길에 대한 접근을 관리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사고는 한 가지 원인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정책적·행정적·간접적·직접적 원인이 있다. 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재앙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재해나 사고가 아니라 인재라는 기조가 명확해졌다. 한국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문제삼는 기사들이 늘었다. 경찰을 미리 배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도 소개되었다. 10월31일 AP통신은 이번 사고를 ‘인재(manmade disaster)’라고 규정했다. 11월1일 〈뉴욕타임스〉는 군중 안전을 연구하는 밀라드 하가니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대학 교수의 발언을 빌려 ‘분명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그는 “당국이 골목이 위험한 병목지역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어야 한다. 경찰도, 서울시도, 정부도 이 지역의 군중 관리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해당 매체는 BTS가 5만5000명 규모의 쇼를 열 때 경찰 1300명을 배치했지만 이태원 참사 당일에는 137명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어 덧붙였다. “한국 경찰은 아무리 작은 규모의 시위라도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지난 토요일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기 없는 지도자의 시험대
비판적 논조의 외신 보도가 이어지자 한덕수 국무총리가 외신기자를 상대로 브리핑을 열었다. 수차례 ‘크라우드 매니지먼트(crowd management, 군중 관리)’라는 단어를 반복하며 질문이 없을 때까지 회견을 진행했지만 가장 화제가 된 발언은 농담조의 실언이었다. ‘한국 정부 책임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라는 질문 과정에서 통역에 문제가 생기자 “이렇게 잘 안 들리는 것에 책임져야 할 사람의 첫 번째와 마지막 책임은 뭔가”라고 웃으며 말한 것.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는 비판이 일자 사과했다. BBC는 한 총리가 사전 관리가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했다며 정부가 이번 일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사고’로 치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꼬집어 보도했다.
이번 참사가 미칠 영향에 대한 분석도 눈에 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일로 “한국의 기술·대중문화 강국의 이미지가 손상됐다”라며 2014년 판교 환풍구 추락 사고, 세월호 참사를 언급했다. 〈블룸버그〉는 이태원 참사가 정치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핼러윈 비극은 인기 없는 지도자의 시험대’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희생자가 주로 젊은이인 악몽 같은 재난” “인기가 하락하고 있는 중도 우파 지도자” 등을 언급하며 “잠재적으로 정치적 인화점이 될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뒤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는 과정을 짚으며 ‘7시간 논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역대 정부는 외신 보도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국가 이미지를 형성하거나 정부를 평가하는 데 주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외신에서 한국에 관심을 갖는 주된 영역은 북한 이슈다. 이번만은 이례적 참사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한 달 전 인도네시아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을 때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경제적으로 선진국의 반열에 든 한국에서 왜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압사 사고가 발생했는지 이들은 의아해한다. 참사 이후 〈뉴욕타임스〉가 던진 질문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이제, 목격자들은 과학적으로 군중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가 젊은 참석자들이 모이는 1년 중 가장 바쁜 밤, 어떻게 그렇게 비참하게 실패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임지영 기자 시사인 2022.11.07.
속보 전쟁과 뒷북 자성은 왜 반복될까
지난 10월29일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다수의 시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끼고,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며 공적 책임을 다하기를 촉구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시민들의 목소리는 우리가 믿었던 공동체의 가치와 이상, 즉 모두가 안전하게 공적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훼손된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적 재난에서 공적 애도가 중요해진다.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유족에 대한 위로와 부상자의 쾌유를 비는 기원을 건네면서 이 문제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정부의 책임을 묻고, 시민의 입장에서 어떤 공동체적 실천이 필요한지를 함께 이야기하는 사회적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공적 애도를 위해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짚어볼 수 있다.
우리 언론은 2014년 세월호 참사에서 취재 및 보도 과정에 관한 반성을 통해 재난보도준칙을 만든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참사 초기 보도는 이러한 언론계의 자성의 움직임을 반영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속보를 내보내기 위해 SNS에 공유되는 영상을 활용하면서 희생자와 부상자의 상황을 과도하게 노출하고 현장의 정제되지 않은 영상을 단순히 공유하는 데 그쳤다. 온라인 공간에 떠도는 희생자에 대한 무분별한 혐오와 비하를 보도하면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에서 지난 3일 지적한 바와 같이, 언론은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지만 문제가 있는 영상과 혐오적 발화들을 유포하고 다수의 시선에 닿도록 한 책임은 오히려 언론에 있다. 이는 언론이 디지털 매개 환경에서 제공되는 뉴스의 책임에 대해 무심한 문제와도 관련된다. 과거와 달리 디지털 세계의 유포성과 영속성 때문에 한번 언론을 통해 특정한 이미지가 유포된 경우, SNS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되어 문제를 확산시키고 있다. 해당 기사를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은 언론사의 책임 회피가 될 뿐 그로 인한 피해와 고통을 되돌릴 수가 없다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단 생산하기만 하는 것이다.
현재 공적 애도를 수행하기 어렵게 하는 일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그런데 언론 역시 이에 부응하면서 시민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였다. 시민의식의 부재, 생산적이지 않은 유희만 즐기는 MZ 세대, 미디어에 자극을 받아서 유흥과 소비에 몰두하는 청년 여성과 같은 부당한 비난 대상이 정치권과 언론을 통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참사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주변 상인들 등 시민들이 서로를 살리기 위해 보여준 시민의식이 더 조명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서로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순간 정부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며, 참사 당시의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것과 정부의 책임과 책무를 논의하는 것이 언론의 일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민을 비난하면서 시민의 유흥이 문제라서 이를 중지시키는 것이 애도라는 식으로 움직이는 정부를 언론이 시민에게 책임을 지우는 보도를 통해 뒷받침해주는 양상이 되고 말았다.
참사 발생 후 나흘이 지난 1일 한국기자협회를 비롯해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여성기자협회, 한국인터넷신문협회에서 ‘선정적 보도와 혐오표현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는 초기 보도의 문제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언론의 재난 보도에서는 참사 초기 선정적이거나 희생자를 대상화하여 책임 소재를 흐리거나 시민을 비난하는 보도가 양산되고 이후 내부적 자정 움직임이 발생하는 경향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러한 자정의 목소리가 필요하지만 언제나 늦다. 공적 애도를 위한 명확한 책임의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의 책무를 수행하고 ‘속보’의 문제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또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 경향 2022.11.07.
그날 악마는 이태원에 가지 않았다
인간은 일상적인 인식 범위를 벗어나는 재난을 접하면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찾으려 한다. 합리적인 설명을 할 만큼의 충분한 정보가 없는 경우엔 초자연적인 이유라도 가져온다. 물론 절대적으로 옳거나 틀린 설명은 없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사건은 대단히 다양한 원인의 결과이고 대부분의 해석은 그 가운데 적어도 한 측면을 드러내거나, 일부 사람들의 마음이라도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설명은 있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이 그렇다. 이에 의하면 재앙이란 체제가 지시하는 윤리나 규범을 어긴 이들에게 내려지는 일종의 형벌이다. 안전하기 위해서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참사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피해자와 유족들을 모욕하고 그들의 죽음이 자업자득이라는 식의 망언을 뱉었다. 왜 “우리 명절도 아닌 외래문화”에 빠져서 “반기독교적”인 축제에 갔다가, 혹은 가족으로서 말리지 않다가 그런 일을 당했냐는 식이다. 전자는 기성세대에게서, 후자는 개신교 배경의 인사들에게서 참사 이전부터 꾸준히 나왔던 핼러윈 축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도 “거봐라, 내 말 안 들으니까 그렇게 된 거 아니냐”는 속내를 끝내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었음에도 충분한 조처를 하지 않은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형태의 설명도 있다. 그들을 벌한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재앙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더는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정당한 방법이다. 책임을 지는 것은 왕조 시대부터 통치자들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였다. 공화정 체제에서도 최고의 권력은 곧 최대의 책임을 의미한다. ‘관료제’는 책임의 소재를 체계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그 원리에 따르면, 조직의 아래에서는 일을 하고 위에서는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로부터 파생된 ‘관료주의’의 사유 방식에 의하면, 위에서는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아래에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가장 좋은 설명은 구조의 문제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원인이 구조적이라면 그것을 뜯어고침으로써 미래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외양간이 미비해서 소를 잃었다면 소를 탓하거나 목장 주인의 어리석음을 욕하기보다는 늦게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편이 낫다. 물론 그것은 그 구조를 조직하고 운영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과 병행될 수 있다.
희생양 이론으로 잘 알려진 르네 지라르는 말년에 자기 사상에 기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입혔다. 후기작인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그는 1세기께 종교 지도자인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아폴로니우스)가 일으킨 “기적” 사례를 소개한다. 에페소스에 페스트가 유행하자 아폴로니오스는 자기가 병을 몰아내겠다며 시민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극장 한구석에 앉아 있는 불쌍한 거지에게 다 같이 돌을 던지라고 지시한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사람들도 몇몇 사람이 던진 돌을 무기력하게 맞던 거지가 증오의 눈빛을 드러내자, 그가 재앙을 가져온 악마라는 것을 확신하고 다 같이 돌을 던져 죽인다.
지라르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문명이 사회적 위기를 처리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공동의 악을 지정하기로 합의하면 사회는 통합되고 갈등은 봉합된다. 참사 이후 정부가 당시 군중을 밀었다는 혐의를 받는 인물을 색출해 조사하면서 그 과정을 언론에 흘린 것이 전형적인 사례다. 그런데 지라르는 여기에 예수를 대비시킨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군중을 말리고, 그 자신도 마찬가지의 메커니즘에 의해 부당하게 살해된다. 이른바 “십자가의 승리”라는 것은 희생양을 이용해 유지되는 평화의 허구성, 나아가 악마성을 폭로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지라르의 주장 전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개인에게 재앙의 책임을 돌리는 체제야말로 ‘악마’의 정체라는 통찰은 마음을 울린다. 나는 한 개신교인 작가가 온라인에 올린 게시물을 보고 이 칼럼의 제목을 정했다. 그에 의하면 참사 피해자들은 다음날 교회에 갈 생각은 않고 토요일 밤에 모여 모종의 악마 숭배에 가담했다가 변을 당했다. 천만에, 악마는 이태원에 가지 않았다. 다음날 교회에 가면 (피해자들과는 달리)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신들의 운명에 기뻐하는 자기 추종자들의 찬양을 받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한승훈 | 종교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한겨레 2022.11.07.
윤석열,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까
조문하고, 조문하고, 조문하고, 조문하고, 조문하고, 조문했다. 추모법회, 추모예배, 추모미사에 갔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핼러윈 참사’ 발생 후 1주일 동안 한 일이다.
대통령은 조문객에 머물 수 없다. 흰 국화를 바치고, 법회와 예배에서 손 모으는 일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이를 반복하는 건 정치도 통치도 아니다. 시민이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국정책임자로서의 진솔한 사과다. 윤 대통령은 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를 주재하며 “비통하고 마음이 무겁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시민은 대통령의 ‘마음’이 아니라 ‘책임’이 궁금하다. 김호·정재승의 <쿨하게 사과하라>에 따르면, 좋은 사과는 네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유감표명(“안타깝다”), 책임 인정(“제가 실수를 저질렀다”), 원인 설명(“이런 문제점이 발견됐다”), 배상·해결책 제시(“이렇게 대가를 치르겠다”)이다. 윤 대통령의 사과에는 첫 번째만 있을 뿐, 나머지가 없다. 윤 대통령은 전날 참모진 회의에선 “다시는 이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책임이 대통령인 제게 있다”고 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참사는 이미 일어났다. 시민 156명이 목숨을 잃었다. 참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인정하는 게 우선이다. 윤 대통령은 교묘한 언술로 피해갔다.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책임’만 자기 몫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쯤 되면 <책임회피의 기술> 같은 책을 펴내도 될 수준이다.
시민이 요구하는 두 번째는 잘못한 사람에게 상응하는 책임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물으라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진상규명 결과에 따라 책임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엄정히 그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경찰 수사 결과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뜻이다. 참사 전 압사 위험을 알리는 112신고가 쇄도했지만 경찰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이 이미 드러났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도, 윤희근 경찰청장도, 김광호 서울경찰청장도 늑장 대응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은 고위공직자이다. 법적 책임 이전에 정무적 책임부터 묻는 게 순리다. 경찰이 ‘셀프 수사’로 ‘하늘 같은’ 청장과 서울청장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는가. 서울시·행정안전부·대통령실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재난대응체계의 오판과 과실을 파헤칠 수 있겠는가. 이날 회의엔 이 장관과 윤 청장이 참석했다.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든 책임자들이 시스템을 개선하겠다며 앉아 있는 게 말이 되나. 언제까지 이들의 얼굴을 봐야 하는가.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적었다.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오랫동안 윤 대통령에게 묻고 싶었던 게 있다.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습니까? 대통령이 되면 뭘 하고 싶었습니까?’ 감옥에 갇히거나 탄핵당한 전 대통령 이명박·박근혜에게도 포부는 있었다. 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 같은 (어처구니는 없지만) 대역사를 꿈꿨고, 박근혜는 (역시 어처구니없으나) ‘아버지 박정희의 나라’를 재현하고자 했다. 윤 대통령에겐 ‘동기’가 보이지 않았다. 선거 과정에서 공정과 정의를, 취임 후 자유를 외치긴 했으나 내용 없는 동어반복이었다.
이제는 안다. ‘윤석열의 세상’에서 심오한 무엇인가 찾으려는 시도의 허망함을. 윤 대통령의 목표는 ‘대통령이 되는 일’ 자체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 대해선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권한·권력에 책임이 따른다는 점도 생각지 못한 듯하다.
이번 재난은 리더십의 재난이다. 슬프게도, 리더십의 재난은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8월 시민은 윤석열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극한직업’이 될 것을 예감했다. 윤 대통령은 물난리로 일가족 세 명이 숨진 서울 신림동 반지하주택에서 말했다. “근데 어떻게… 여기 계신 분들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 이태원 참사 현장을 찾은 윤 대통령은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다고?”라고 했다. 윤석열의 세상에는 공감이 없다.
지난 4일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 갔다. 폴리스라인 너머는 적막했다. 청년들이 국화를 바치고 엄마와 아빠, 딸이 묵념을 했다. 외국인 여성이 눈물 흘리자 한국인 연인이 손을 잡았다. 기시감이 들었다. 8년 전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이 머물던 진도실내체육관 모습이다. 다녀온 뒤 ‘진도에 정부는 없었다’란 글을 썼다. 이번 참사에서도 정부는 ‘없었’다. 없었을 뿐 아니라 ‘나빴’고 지금도 ‘나쁘’다. 정부의 부재를 넘어 정부의 오만·나태·부정직을 따져야 한다. 대통령이 ‘비통 코스프레’를 멈추고 현실을 직면할 때까지.
김민아 논설실장 경향 2022.11.07.
죄송한 마음” 대통령, “웃기고 있네” 수석
소요, 선동, 마음의 책임….
말 같지 않은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혼란스러울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언어의 도착, 말의 타락이다. 이번엔 고관대작 권력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쏟아지고 있고, 갈수록 단어 선택과 배열이 더 교묘해진다는 특징이 있다. 사태를 호도하고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저열한 욕망의 표출이다. 그 결과는 전례가 드문 무책임의 난장이다. 국가의 부재, 정부의 무능이 드러났는데도 정치·도의적 책임을 지고 깨끗이 물러나는 국정 지휘부가 단 한명도 없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태원 참사 이튿날(10월30일)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한다고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니었다”는 희대의 발언으로 ‘책임 회피’ 릴레이의 첫 주자로 나섰다. “서울 시내 곳곳에 ‘소요와 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경비 병력이 분산됐다”며 사태 책임을 시위에 나선 시민들에게 돌렸다. 다음날(10월31일)엔 “선동성 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며 국가 책임을 제기하는 목소리에 ‘선동’ 딱지를 붙였다.
물론 그의 모든 주장은 단 이틀 만에 엉터리 거짓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인파 사고를 우려하는 여러 사전 경고와 당일 쏟아진 절박한 112 신고마저 묵살했다. 서울 시내 시위는 모두 밤 9시 이전에 끝나, 인력 배치엔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이런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내뱉었거나, 알면서도 책임을 모면하려 거짓 선동을 한 것이다. 후자라면 도덕적 지탄을 넘어 법적 처벌 가능성까지도 따져봐야 한다. 어느 쪽이든 1분, 1초라도 더 자리를 지킬 자격은 이미 상실했다.
눈길이 가는 건 그가 쓴 ‘소요’ ‘선동’ 같은 날 선 단어들이다. 소요는 ‘여러 사람이 모여 폭행이나 협박 또는 파괴 행위를 함으로써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표준국어대사전)를 뜻한다. 시위보다 폭동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런데 참사의 날, 서울 시내에 어떤 집단적 폭행과 협박, 파괴 행위가 있었나. ‘윤석열 퇴진 촛불 행진’은 열기가 뜨거웠지만 물리적 충돌 없이 삼각지역 앞에서 마무리됐다. 왜 존재하지도 않은 소요를 앞세웠을까. 시대착오적 세계관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시위조차 정권 퇴진을 외치면 소요라고 보는 도착적 인식, 한마디로 망상이다. 외국 컨설팅 기업의 국내 지사장을 지낸 한 지인은 “소요란 단어는 군사정권 이래 처음 들어본 것 같다”고 했다. 이 장관은 지난 7월 경찰국 설치에 반발하는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쿠데타” “하나회”라고 불렀다. 정권의 경찰 장악에 반대하자, 자율적인 정책적 의견 수렴 모임에조차 ‘군사반란’ 낙인을 찍은 거다. 시위에 소요 딱지를 붙인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거울상의 행태다. ‘정권 보위’ 관점에서 세상사를 재단할 때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런 망상적 인식을 집권 엘리트 다수가 드러내고 있다는 게 현 정권의 불행이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7일 “광화문에서 열린 정권 퇴진 촉구 대회에 서울 시내 모든 경찰 기동대가 투입됐고, 그날 밤 이태원에서 참사가 벌어졌다”고 했다. 이미 일주일 전 기각된 이 장관의 엉터리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은 각시탈을 쓴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참사 현장에서 아보카도오일을 뿌렸다는 괴담까지 불러냈다. 경찰은 어떤 사람들인지 분명하지 않고 위치도 참사 현장과 달랐으며, 뿌린 건 오일이 아닌 ‘짐빔’ 위스키로 확인됐다고 일축했다. 정권 책임을 반대 진영에 뒤집어씌우겠다고 집권세력이 공공연히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기괴한 형국이다.
압권은 7일 국회에서 나온, 국민의힘 부대변인 출신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마음의 책임” 발언이다. 이 장관 주장과 함께 쌍벽으로 남을 궤변이다. 이제 권력자는 행동 아닌 마음으로 책임지는 척하면 된다.
이 모든 조직화된 무책임의 정점엔 대통령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두차례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을 뿐, 책임자 문책과 대책 마련의 다짐을 담은 ‘대통령의 사과’는 하지 않고 있다. 경찰을 질타했을 뿐, 고교·대학 후배인 이 장관 문책에 선을 그었다. 대통령이 마음만 죄송하니, 구청장도 마음의 책임만 지겠다고 뻗대고, 김은혜 홍보수석은 국회 참사 질의 도중 수첩에 “웃기고 있네”라고 끄적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아무도 행동으로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의 나라로 추락하고 있다.
손원제 | 논설위원 한겨레 2022.11.08.
위급 상황에서 존엄할 권리
이태원에서 일어난 끔찍한 참사는 며칠 동안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정부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였고 사건의 전후처리에 고심하는 중이다. 부디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영면을 바랄 뿐이다.
참사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였다.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났는데 사람이 죽은 것 같다는 게시글이었다. 처음 글을 봤을 땐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고 아무래도 축제 기간이다 보니 음주와 관련한 작은 사고가 났을까 싶었다. 뉴스 등에는 자세한 사항이 나오지 않아 인터넷에 이태원 관련 사건 소식을 접하기 위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모자이크를 하지 않은 채 자리에 드러누워 CPR을 받는 사상자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시되고 있었다. 시신을 파란 방수포로 덮은 모습부터 다각도로 촬영된 사람들은 참사 속 피해자의 장면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CPR의 추억을 아름답게 여과해 애도를 표하는 ‘나’에 심취한 사람들도 온갖 사방 SNS에서 튀어나왔다. 심지어 한 간호사는 병원에서 CPR을 위해 응급 투입된 상황을 브이로그로 찍어 유튜브에 게시해 사과문을 쓰기까지 했으니. 이 모든 과정엔 피해를 입는 당사자들이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존엄성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신경정신의학회는 지난달 31일 성명을 통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당부의 말을 전했다. 학회는 심리적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재난정신건강시스템 마련에 주력하겠다고 밝히며 “사고 당시 참혹한 영상과 사진이 SNS 등을 통해 여과 없이 공유되고 있”으니 “이런 행위는 고인과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2차, 3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으며, 국민에게 심리적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시민의식을 발휘해 추가적인 유포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 영상을 공유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단순히 개개 시민의식만으로 해결될 것 같진 않다. 해당 사건 사고 사진과 영상을 유포한 주체 중에선 기업과 연결된 마케팅 페이지가 있었다. 페이스북의 수많은 페이지들은 해당 영상을 발 빠르게 게시하며 수십만건의 조회수를 얻었고 지난 7월 ‘쿠팡은 타인의 삶을 착취한다’라는 칼럼에서 지적한 바 있는 쿠팡의 마케팅 페이지들도 해당 사진과 영상을 통해 기업의 광고에 힘썼다. 수많은 사상자들이 생과 사의 경계에서 가장 취약한 순간의 모습이 누군가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장삿속을 보이는 주체가 굉장히 복잡한 과정에서 책임 소재를 묻기 힘든 구조란 점이다. 대기업은 그저 조회수를 위해 광고를 하청으로 외주했을 뿐이고, 마케팅 업체는 인터넷에 떠도는 글 중 이슈몰이가 될 만한 글을 비윤리적으로 무분별하게 퍼왔을 뿐이다. 자본과 기술이 만들어낸 외주와 하청의 알고리즘 속에서 보이는 사람과 보는 사람, 두 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삼풍백화점 참사 피해자인 이선민 작가는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오징어 게임을 실사판으로 함께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힌남노 수해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비극적인 사건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 힘든 사회가 아니라 존엄하게 죽는 것조차 다행인 사회에 놓여 있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경향 2022.11.08.
10.29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며
또 다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세월호의 아픔도 여전히 가슴을 누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어이없는 참사가 일어나니 억장이 무너지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최악의 시간입니다. 바다에서, 도심 한복판에서, 참사의 반복입니다.
8년전 바다에서 살아남은 열일곱살 아이들이 8년이 지난 스물다섯이 되어 도로에서 희생을 했습니다. 살아도 끝내 죽어야만 하는 죽임의 사슬에 우리는 목이 감기고 있습니다.
이 무참한 슬픔의 나날 숨 쉬는 마디마디가 아파옵니다.
아주 잠깐 열린 해방구 잠시 숨통이었던 그 길을 갔던 내 딸들아! 오랜만에 친구 만나러 간 내 아들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같이 손잡고 그 길을 내려오던 연인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우리의 친구 아들 딸 들입니다. 엄마 손 꼭 잡고 부푼 마음으로 간 15살 소녀도 있습니다. 엄마와 딸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내가 달려갈 테니 조금만 버텨달라고 애원하던 남자 친구 목소리가 아직도 쟁쟁하게 들립니다 숨 쉴 공간이 없어 살려달라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사방에서 짓누르는 인파의 압력 때문에 손을 놓쳐버린 손들 결혼을 앞 둔 사람 친구를 만나 기위해 해외에서 찾아온 사람
156명은 156가지의 삶과 꿈을 안고 살아가던 우리 형제자매들 이며 우리의 이웃입니다.
쏟아진 물처럼 퍼져 버리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진 사람들
마음은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기력은 옹기처럼 말라버린 유가족들의 상실감과 아픔을 누가 어루만져줄 있을 까요 숨이 짓이겨 버린 그날
하늘도 땅도 압사 당하는 거기 옴짝달싹 못하는 비명과 절규의 시간 살려달라는 숨넘어가는 소리 외면하는 사이 숨은 땅바닥에 납작해졌습니다.
그 때 국가 부재하는 숨 막힌 세상입니다. 피묻은 옷, 짝 잃은 신발, 부러진 안경사이로,
널브러진 변명과 책임회피 혐오와 춤추는 괴물들의 광란입니다. 보십시오. “근조 글씨가 없는 검은 리본을 착용하라.” “영정 사진을 쓰지 말라.”
“참사, 희생자라는 용어를 사고, 사망자로 통일 하라.” 말문이 막히고 숨이 막힌 저 권력자들의 야만의 모습을 보십시오.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 예견됐지만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아 발생한 것이 어찌 사고인가요? 사고가 아닌 참사입니다. 목숨을 잃은 분들 , 부상당한 분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참사로 인해 사망자가 아닌 희생자입니다.
우리는 태산 같은 분노와 슬픔의 힘을 남김없이 끌어 모아 생명세상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 애도와 추모를 넘어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한 사회를 민들 수 있도록 진상규명과 책임자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평생 아픔과 슬픔으로 살아갈 가족과 지금도 병원에서 치료하는 부상자와 그날의 고통을 우리는 연대의 꽃으로 숨 쉬는 세상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장헌권 목사(서정교회.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대표) 광주 in 2022.11.08.
멋진 늙음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속에는 늙은이가 없다. 핼러윈이라는 젊은이의 축제에 늙은이가 낄 리도 없지만, 이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개념이다. 동지나 정월 대보름처럼 악귀를 쫓는 우리의 전통적인 축제도 있는데 왜 미국에서 들어온 축제에 열광해서 아까운 목숨을 잃었느냐는, 비난이나 질책이 섞인 반응조차 보인다.
젊은이에게는 삶은 무한하고 긴 미래지만 늙은이에게는 매우 짧은 과거에 지나지 않기에 새것에 대체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젊음과 이에 둔감한 늙음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지난 시간에 있었던 자신의 경험세계를 절대화해서 젊은이를 가르치려 드는 근성은 늙은이에게 일반적으로 있다. 그래서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도 모두 늙게 마련이지만 누가 과연 현명한지를 묻는다. 작년 4월에 타계한 ‘진짜 어른’ 채현국 선생(효암학원 이사장)이 남긴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것을 잘 봐두어라’는 일갈도 마찬가지다.
중학교 시절로 기억되는데 ‘꼰대’라는 은어가 우리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 단어의 유래를 아무도 몰랐지만, 잔소리깨나 하고 책벌을 주는 선생을 주로 지칭했고 점차 늙은이 일반을 뜻하는 내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표현이 60년을 훨씬 넘긴 오늘에도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세대갈등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변치 않는 공통점을 새삼스럽게 보게 된다.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절대로 젊은이를 자신 곁에 강제로 묶어두지 마라. 변덕스럽게 대하거나 투덜거리거나 불신하지도 말라’는 <걸리버의 여행기>를 남긴 아일랜드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남겼던 경고가 생각난다. 똑같은 잔소리를 녹음기를 틀어놓듯이 반복하지 말고 권위가 녹아들어 있는 단호함과 품위를 노인이 지녀야 하는 덕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압축된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도시화, 대가족의 해체와 핵가족화, 인구의 고령화, 직업과 노동세계의 변화, 정보사회와 디지털화 등으로 노인세대의 위상과 역할은 큰 변화를 겪었다.
이에 따라 노인세대에 대한 사회학, 심리학, 보건의학적인 연구도 활발해졌고, 이를 근거로 노인을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그렇지만 노후의 건강과 연금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보여주는 것처럼, 주로 경제적인 비용을 염두에 두고 노인 문제에 접근한다는 비판도 낳았다.
노인 문제의 출발점은 개개인의 삶
우리 모두 언젠가는 늙은이가 되는, 인간적인 숙명을 생각하면 문제의 출발점을 노인 개개인의 삶으로부터 찾아보는 것도 이런 접근방식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노인 문제에 대한 이러저러한 철학적 성찰은 이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었다.
이런 논의에 빠질 수 없는, 동양의 고전에 속하는, 공자의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잘 알려진 구절이 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고, 서른 살에 우뚝 섰으며, 마흔 살에 망설임이 없게 되었고, 쉰 살에 천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 남의 말을 그냥 그대로 듣게 되었고, 일흔 살에 마음대로 해도 할 바를 넘어서지 않았다.” 당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대략 천명을 알게 되는 쉰 살을 넘기면서 자신의 언행을 절제와 균형 속에서 철저히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노년의 덕목을 이야기한다.
공자보다 480년 뒤에 태어난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서양의 고전에 속하는 <노년에 대하여>에서 나이가 들면 활동이 부자연스러워진다는 사람들에게 먼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살려 공공의 복리를 위해 활동하며 학문적 수양의 중요성을 깨닫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체력이 떨어져 노년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체력을 단련하고 근면하고 성실하며, 또 원숙하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후손들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노력하라고 주문한다. 쾌락이 사라지니 노년이 싫다는 사람들에게 충동적인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라고 권유한다.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죽음 때문에 노년의 삶이 고통스럽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모두가 겪는 일이기에, 자연의 법칙을 따라 이를 담담하게 맞이하라고 충고한다.
노년에 사회봉사활동과 평생교육에 적극 참여하고 자립적인 삶을 꾸려 권위를 잃지 않으면서 마음의 평정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라는 이런 이야기는 오래 살고 싶으면서도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노년을 위한 훌륭한 조언임은 틀림없다. 노년에 ‘얻어지는 연륜’을 그동안 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가정과 시민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 적극 활용하라고 노인학의 여러 연구도 거듭 강조한다.
헤르만 헤세도 “늙음은 젊음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성스러운 과제다. (…) 사람의 품위에 걸맞게 늙고, 나이에 걸맞은 자세 또는 지혜를 지닌다는 것은 하나의 어려운 예술이다. (…) 노년의 의미를 충족시키고 이 과제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문제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늙거나 젊거나를 막론하고 자연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나날의 가치와 의미를 잃게 되고 삶을 기만하게 된다”고 <노년에 대하여>(1952)에서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늙음의 근원에 놓인 문제에 대한 성찰보다는 어떻게 늙음을 지연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이를 이겨내는 방법이 없는가에 많은 신경을 쓴다. 이런 추세에 발맞추는 노화방지나 항노화(anti-aging)를 위한 온갖 상품과 이에 대한 광고는 넘쳐나고, 노화도 일종의 질병이기에 머지않아 극복할 수 있다는 과학기사도 나돈다. 한편에서는 불로장생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첨단과학에 거는 기대를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노인학대와 노후빈곤에 따른 자살과 같은 비극은 여전한데 전통적인 경로사상이나 효도를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한다.
가장 두려운 건 추하게 늙는 것
학제 간의 새로운 학문으로서 성장한 노인학의 그간 이룬 성과도 물론 작지 않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노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의 노인은 물론, 미래의 노인인 오늘의 젊은이도 함께 바람직한 노년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묻는 진지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의 간결한 시 한 편이 이 고민이 담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한눈에 들어오게 한다. 비록 작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는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제목의 시다. 노년의 삶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던 동서양의 철인이나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큰 화두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시다.
“나는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 늙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내 힘으로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추하게 늙는 것은 두렵다/ 세상을 원망하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욕심을 버리긴커녕 더욱 큰 욕심에 힘들어하며/ 자신을 학대하고 또 주변 사람까지 힘들게 하는 그런 노인이 될까 정말 두렵다/ 나는 정말 멋지게 늙고 싶다/ 육체적으론 늙었지만 정신적으론 복학한 대학생 정도로 살고 싶다/ 늘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사랑으로 넘치는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주변 사람들에게 늘 관대하고 부지런한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어 늘 어떤 도움을 어떤 방식으로 줄까 고민하고 싶다/ 어른대접 안 한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대접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그런 근사한 노인이 되고 싶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눈감을 시간도 없다는 불평을 하면서 하도 오라는 데가 많아 집사람과 수시로 행방불명이 되는 정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고 부러워할 수 있게 멋지게 늙고 싶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슬퍼하는 가운데 나 자신은 미소를 지으며 살고 싶다.”
미루어 보건대 노추(老醜)와 노욕(老慾)에 찌들며 오늘을 사는 군상의 구체적인 여러 모습을 떠올리면서 시인은 이 시를 남겼을 것이다. 시를 읽으면서 나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시는 단지 앞으로 남은 날이 많지 않은 노인을 위한 경구(警句)만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늙음에 대해서 성찰해야 하는 젊은이를 위한 아름다운 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경향 2022.11.09.
“그날 국가는 무엇을 했나요
분명 “확실히 막을 수 있었다(Absolutely Avoidable).”(뉴욕타임스 10월31일 이태원 참사 보도 제목) 대형 재난 뒤에 ‘만약에’라는 가정을 붙여 ‘막을 수 있었던 참사’를 복기하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 그럼에도 이태원 참사를 두고는 ‘만약에’를 뼈아프게 되뇌게 한다. 참사 이전, 참사 발생 순간, 참사 이후 구조·수습 과정에서 너무도 부실하고 무능한 정부의 대응이 드러난 때문이다. 희생자 유족들에게는 너무나 안타까운 이 ‘만약에’가 확인시키는 건 이태원 참사에서 ‘국가는 없었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만약에 3년 만의 노마스크 핼러윈 행사로 대규모 인원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안전관리 대책을 준비했더라면 생때같은 젊은이들의 죽음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밀집 위험을 완화하는 ‘가장 쉬운 대책’으로 꼽히는 지하철 무정차 계획만 마련했어도 참극은 피할 수 있었을 터이다.
만약에 참사 발생 4시간 전부터 ‘압사’ 위험을 알리는 112신고가 빗발칠 때 묵살하지 않고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그날 이태원은 청춘의 축제장으로 온전했을 게다.
이런 기막힌 경우도 있다. 만약에 이태원 치안 책임자인 용산경찰서장이 첫 보고를 받은 뒤 신속히 이동해 참사 발생 전에 현장에 도착, 적극적 지휘로 핼러윈 인파를 통제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도보로 10분 거리를 차 안에서 1시간이나 허비해 참사 발생 50분 뒤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만약에 재난 보고·지휘 체계가 정상 작동되어 적시에 구조와 수습 조처가 실행됐다면 희생자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경찰청장은 잠을 자느라 소방당국이 ‘대응 3단계’를 발령한 이후에야 참사를 보고받았고, 행정안전부 장관은 참사 발생 1시간쯤 뒤 소방청 긴급문자를 통해 참사를 인지했다. 이태원 현장에서 수십명이 ‘심정지 상태’에 빠졌을 때야 서울경찰청장의 가용부대 급파 지시가 나왔다. 구조의 골든타임을 완벽히 놓쳤다.
만약에 경찰과 소방의 유기적 협조와 대응체계가 가동되었다면 무참한 죽음을 더 많이 막았을 것이다. 경찰과 서울시의 늦장 교통 통제로 구급대가 5분 거리를 33분 걸려 도착했다. 소방에 첫 신고가 접수된 후 1시간이 지나서야 재난의료지원팀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새 ‘심정지 상태’에 빠진 수십명의 젊은이들은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만약에’로 복기한 것들은 대단한 결단과 희생을 요하는 것들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정부로서는 응당 ‘했어야 할’ 일이다. “주최자가 없어 권한이 없다”던 변명과 달리 매뉴얼대로 진행된 것이 거의 없다는 게 밝혀졌다. 112신고 녹취록으로 드러난 참사 직전의 상황, 참사 발생 뒤 경찰과 공직 책임자들이 보여준 대처, 수습 과정에서 엉망진창의 보고 체계와 늑장 대응은 실로 ‘정부의 부재’에 다름없다. 지난여름 서울 물난리 때 정부의 재난 대응을 보면서 SNS에 ‘#무정부 상태’란 해시태그가 번져나간 게 겹쳐진다. 재난 때마다 시민들이 ‘무정부 상태’를 떠올리는 건 참담한 일이다.
이제 참사의 원인과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따져야 할 시간이다. 총괄적으로 이런 참사가 일어났다면 정부의 책임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정부의 제일 책무이기 때문이다. 참사 발생 후 대통령실부터 국무총리, 행안부 장관, 경찰청장, 용산구청장 등 책임자들은 하나같이 책임 회피에 겁겁하다. 설령 경찰에 책임을 전적으로 돌린다고 해서 정부의 책임론이 벗어지는 게 아니다. 경찰 따로, 정부 따로가 될 수 없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경찰도 정부고, 대통령도 정부고, 행정안전부 장관도 정부다.”(금태섭 전 의원) 더구나 경찰만을 ‘희생제의’ 삼아 재난과 안전 관리 총책임자인 행안부 장관에 대한 문책을 회피한다면 ‘수습 참사’를 불러올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할 일을 하지 않아’ 무고한 시민 156명이 목숨을 잃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 검찰총장 시절인 지난해 8월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국민을 어떻게 보호하느냐에 정부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인데, 이 정부는 정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완벽히 막을 수 있었던” 이태원 참사, 윤석열 정부는 정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못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족이 직접 조문 온 윤 대통령에게 차마 묻지 못한 말이 있다고 했다. “그날 국가는 무엇을 했나요.” 이 물음에 답할 책임은 일선 경찰도, 경찰 지휘부도, 행안부 장관도, 국무총리도 아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윤 대통령이 이 아픈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론스타 사건 판정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금융위원회 론스타 사건 실무 책임자 손주형 팀장의 증언을 배척했다. 인수 가격을 깎아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의 증언도 외면했다.
금융위의 내부 문서가 패소를 불렀다. 판정부는 대한민국 금융위는 지문을 남기지 않는 전략을 세웠으나 그 내부 문서에 많은 유죄 증거가 담겨 있다고 썼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패소 판정을 무효로 만들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말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그러나 국민이라면 당연히 희망하는 론스타 판정 무효 가능성은 없다. 판정 무효 절차는 다수의견과 소수의견 중 누가 옳은가를 다시 판단하는 절차가 아님을 한동훈 장관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 것이다. 만일 한 장관의 주장처럼 론스타 판정 무효 신청을 하고, 사건 진행에 3년 정도 걸리면 배상액은 대략 36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한 장관은 대한민국이 왜 패소했는지를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해야 한다.
금융위는 하나금융의 보고서를 제출받기 직전인 2011년 11월6일에 <론스타 주요 쟁점>이라는 문서를 만든다. 이 문서에서 하나금융이 론스타에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도 일을 진행할 방안을 연구했다. 심지어 하나금융이 론스타에 의해 계약금을 몰취당할 문제까지 검토한다. 법에 따라 론스타 대주주 자격과 하나금융 인수 자격을 심사하는 기관인 금융위가 하나금융의 보고서를 기다리면서 이런 문서를 만들었다. 판정부는 금융위에 그 이유를 물었으나 금융위는 설명하지 못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금융위는 하나금융 보고서를 받은 직후인 2011년 11월18일 <론스타 관련 Q&A>라는 문서를 만든다. 금융위는 이 문서에서 하나금융이 국내 정치 환경과 국내 금융시장 상항 등을 고려하여 기존 계약 가격을 인하해야 한다는 입장을 론스타에 설명했다고 담담하게 기록했다. 손주형은 하나금융 보고서에 가격 인하가 언급되어 놀랐다고 증언했으나, 금융위는 놀라지 않았다. 더 심각한 금융위 내부 문서들이 증거로 제출되었다.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라는 문서에서 금융위는 하나금융의 인수를 승인해 주면 론스타 먹튀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국회 청문회나 감사가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이 염려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주식 매각>이라는 문서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더욱 결정적인 문서가 있다. 금융위는 <론스타 외환은행 매각 관련 금융위 검토>이란 내부 문서에서 세 가지 선택 대안을 검토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문서 작성 3주 전에 하나금융 관계자가 론스타 관계자를 하와이에서 만나 검토했던 대안과 동일하다. 여기에는 론스타의 대주주 자격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고 하나금융의 주식 인수를 승인하는 방안이 같은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판정부는 이를 금융위와 하나금융의 ‘비밀작업’의 증거라고 보았다.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위 하와이 회합 직전인 2011년 3월15일 김석동 금융위원장을 만났다. 판정부는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판단했다. “금융위원장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하나금융 회장과 소통했는데, 금융위가 승인을 하려면 가격 인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금융 김 회장은 론스타의 주가조작 유죄판결 이후, 문제의 e메일을 론스타 회장에게 보낸다. 이는 판정문에 모두 다섯 차례나 증거로 인용된다. 주가 조작 사건을 일으킨 론스타에 외환은행 주식을 증권거래소 주식시장에서 공개 매각하라는 징벌적 매각 명령 요구가 높지만 하나금융은 그리하지 말도록 금융위를 설득했다고 썼다. 판정부는 이렇게 말한다. 금융위는 론스타에 징벌적 매각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론스타를 은행 대주주 자격이 없는 산업자본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주식 인수를 취소하지도 않았다. 금융위 조직의 이익을 위하여 불법적으로 가격 인하를 지휘하였다. 하나금융은 이를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했다.
한동훈 장관은 지금 판정 무효 승산이 충분하다고 말할 때가 아니다. 패소 사유를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익을 본 사람들이 책임을 지게 수사해야 한다.
양권모 편집인 경향 2022.11.09.
금융위 문서로 론스타 소송 졌다
하나금융의 보고서를 받고 놀랐다. 하나금융에 요구했던 범위를 벗어났다. 나는 그저 하나금융에 론스타와의 주식인수 계약을 계속 유지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었다. 그렇지만 하나금융은 보고서에 주식인수 가격을 깎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담았다. 나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나는 인수 가격에 대해서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론스타 사건 판정문 241면)
그러나 론스타 사건 판정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금융위원회 론스타 사건 실무 책임자 손주형 팀장의 증언을 배척했다. 인수 가격을 깎아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의 증언도 외면했다.
금융위의 내부 문서가 패소를 불렀다. 판정부는 대한민국 금융위는 지문을 남기지 않는 전략을 세웠으나 그 내부 문서에 많은 유죄 증거가 담겨 있다고 썼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패소 판정을 무효로 만들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말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그러나 국민이라면 당연히 희망하는 론스타 판정 무효 가능성은 없다. 판정 무효 절차는 다수의견과 소수의견 중 누가 옳은가를 다시 판단하는 절차가 아님을 한동훈 장관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 것이다. 만일 한 장관의 주장처럼 론스타 판정 무효 신청을 하고, 사건 진행에 3년 정도 걸리면 배상액은 대략 36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한 장관은 대한민국이 왜 패소했는지를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해야 한다.
금융위는 하나금융의 보고서를 제출받기 직전인 2011년 11월6일에 <론스타 주요 쟁점>이라는 문서를 만든다. 이 문서에서 하나금융이 론스타에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도 일을 진행할 방안을 연구했다. 심지어 하나금융이 론스타에 의해 계약금을 몰취당할 문제까지 검토한다. 법에 따라 론스타 대주주 자격과 하나금융 인수 자격을 심사하는 기관인 금융위가 하나금융의 보고서를 기다리면서 이런 문서를 만들었다. 판정부는 금융위에 그 이유를 물었으나 금융위는 설명하지 못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금융위는 하나금융 보고서를 받은 직후인 2011년 11월18일 <론스타 관련 Q&A>라는 문서를 만든다. 금융위는 이 문서에서 하나금융이 국내 정치 환경과 국내 금융시장 상항 등을 고려하여 기존 계약 가격을 인하해야 한다는 입장을 론스타에 설명했다고 담담하게 기록했다. 손주형은 하나금융 보고서에 가격 인하가 언급되어 놀랐다고 증언했으나, 금융위는 놀라지 않았다. 더 심각한 금융위 내부 문서들이 증거로 제출되었다.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라는 문서에서 금융위는 하나금융의 인수를 승인해 주면 론스타 먹튀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국회 청문회나 감사가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이 염려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주식 매각>이라는 문서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더욱 결정적인 문서가 있다. 금융위는 <론스타 외환은행 매각 관련 금융위 검토>이란 내부 문서에서 세 가지 선택 대안을 검토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문서 작성 3주 전에 하나금융 관계자가 론스타 관계자를 하와이에서 만나 검토했던 대안과 동일하다. 여기에는 론스타의 대주주 자격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고 하나금융의 주식 인수를 승인하는 방안이 같은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판정부는 이를 금융위와 하나금융의 ‘비밀작업’의 증거라고 보았다.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위 하와이 회합 직전인 2011년 3월15일 김석동 금융위원장을 만났다. 판정부는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판단했다. “금융위원장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하나금융 회장과 소통했는데, 금융위가 승인을 하려면 가격 인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금융 김 회장은 론스타의 주가조작 유죄판결 이후, 문제의 e메일을 론스타 회장에게 보낸다. 이는 판정문에 모두 다섯 차례나 증거로 인용된다. 주가 조작 사건을 일으킨 론스타에 외환은행 주식을 증권거래소 주식시장에서 공개 매각하라는 징벌적 매각 명령 요구가 높지만 하나금융은 그리하지 말도록 금융위를 설득했다고 썼다. 판정부는 이렇게 말한다. 금융위는 론스타에 징벌적 매각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론스타를 은행 대주주 자격이 없는 산업자본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주식 인수를 취소하지도 않았다. 금융위 조직의 이익을 위하여 불법적으로 가격 인하를 지휘하였다. 하나금융은 이를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했다.
한동훈 장관은 지금 판정 무효 승산이 충분하다고 말할 때가 아니다. 패소 사유를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익을 본 사람들이 책임을 지게 수사해야 한다.
송기호 변호사 경향 2022.11.09.
이태원 참사 후 공권력의 기이한 행태
정부가 적극 육성하는 관광특구에서 무정부 상태와 같은 무질서가 공권력에 의해 방치되어 300여 명이 죽고 다쳤다. 상식이 통하는 나라라면 피해자에 대한 애도와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 피해자 유가족 등에 대한 심심한 위로를 포함한 적극적인 사회적 배려, 사고 원인 규명, 법적, 정치적 책임을 지는 일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을 터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의 경우 기이하다.
참사 발생 직후 행안부 장관은 행사 주최자가 없었고 사전 예방이 불가능한 사고라고 했다. 대통령도 장관의 말이 정해준 틀 안에서 발언했을 뿐이다. 멀쩡한 젊은이들이 참변을 당했는데도 사과 한마디 없었다. 정부는 이어 경찰 등 공권력의 사고 예방 조치 등에 대해서는 예년의 경우와 비교해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들에 대한 손가락질이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게 됐다. 법률적으로 말하는 피해자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갔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서 문제가 생긴다는 피해자 사고 유발론이었다.
이런 해괴한 논리는 상황의 특수성 등을 외면한 자들이 내놓는 해괴한 논리로 오늘날에는 법이론 분야에서 거의 퇴출된 상태다. 그러나 검찰총장 출신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그 취임 6개월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발생한 참사에 대한 후속 조치는 법치와 정의로운 정치가 포함된 상식과 상궤를 벗어난 식으로 강행되고 있다.
이번 참사 이후 발생한 현상 가운데 먼저 살필 부분이 피해자와 유가족 등에 대한 정치, 사회, 윤리적 배려 문제다. 참사 발생 후 정부가 국가 애도 기간을 정한 뒤 영정 사진과 이름을 써놓는 위패 없는 합동분향소가 전국 곳곳에 설치됐다.
하지만 그 모습도 기이했다. 우리의 장례 관습은 고인 명패와 영정 사진을 놓고 애도하고 추념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그것을 외면했다. 추념 리본도 그랬다. 행정부 쪽에서 아무 글씨도 새기지 않은 것으로 사용하라는 지침이 내려진 것이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고인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상징인데 일률적인 형식을 고집한 것이다. 이는 합동분향소에 사진과 이름을 생략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애도 기간이 끝난 뒤에도 피해자 명단 전체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외국인 다수가 포함돼 있고 대부분이 젊은이들인 피해자 전체 상황이 공개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를 외면한 처사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과오가 아닌 공권력의 직무유기 성격에 의해 참변을 당한 경우라서 그들을 집단으로 추모하는 사회적 배려가 절실하다. 영정 사진과 위패는 피해자의 상징이다.
유족이나 가족에 대한 배려도 문제다. 그들의 슬픔과 분노를 생각할 때 그들만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서로를 확인하고 슬픔을 나누며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이 공권력 등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가 아닌가. 그렇게 하는 것이 재발 방지 등의 대책을 마련하는 추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명단 공개를 ‘폐륜, 정치적 악용’ 등과 같은 흉한 말로 비난하는 여권의 행동은 너무 빗나갔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두 번째 문제는 사고 원인 규명 모습이다. 대통령, 특별수사팀은 주로 해당 경찰이 책임이라는 식의 중간 수사결과를 계속 발표하고 있다. 이른바 법대로 하는 수사의 모습이다. 그러나 대통령 집무실이 수 km 안에 위치해 있어 그에 대한 경호와 참사 현장에 대한 안전 조치와의 관계 등은 점차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참사를 유발한 ‘가까운 원인’과 ‘먼 원인’ 등에 대한 철저한 규명 작업이 이뤄져야 하지만 대통령과 행안부 장관, 경찰 수뇌부 등은 참사 지역 관할 경찰과 지휘 체계에 대한 수사로 좁히는 언행을 계속하고 있다.
세 번째 공권력의 사과 문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은 애도 기간이 끝날 즈음까지 사과 발언을 하지 않다가 종교 행사 등에서 발언하는 과정에 한두 문장 언급하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가 권장 육성하는 관광특구에서 발생한 대규모 참사라면, 참사에 국한한 대국민 기자회견과 같은 형식으로 피해자와 가족, 전체 국민에게 정중히 사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경찰 대응이 문제였다고 장시간 호통 치는 모습을 녹화해 방송에 나가도록 했다. 이는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대통령 소신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국무총리가 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해 농담하거나 미소 짓는 등의 행동을 한 것은 그렇지 않아도 상처 난 국격을 더 추락시켰다. 행안부 장관이 ‘불가피한 사고’에서 ‘참사’라고 말 바꾸기를 하면서도 사퇴에 대해 선을 긋는 태도가 완강한 것도 꼴불견이다. 여권이 반대하면 야당이라도 앞장서서 해야 할 책무라고 보여진다.
9일 한 조간 신문의 관련 기사 제목이 <한덕수·이상민·윤희근 모두 사퇴 거부… “어려운 길 가겠다”>였다. 이런 모습은 대통령의 진솔한 사과와 책임 소재 규명이라는 사회적 요구 앞에 바리케이트를 치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정치는 정(正)이라 했다. 올바름을 실천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꼼수를 부리는 식은 곤란하다. 이태원 참사 발생 이후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보여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행안부, 경찰의 태도는 ‘국정 최고 책임자와 각료는 참사와 직접적인 정치적 책임이 없다’는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피해자들에 대해 그들을 기억하고 상징할 수 있는 영정, 이름조차 백지로 만들어 버린 상징 조작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피해자들 상징은 찾을 수 없고 대통령, 총리, 장관들의 목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과거 독재정권이 했던 수법은 국민 분노와 슬픔이 집중될 수 있는 구심점을 파괴하는 것이었는데, 이와 많이 닮아 있다. 피해자와 유가족 등에 대한 정치, 사회, 도의적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정치 현실이 전율을 느끼게 한다.
고승우 민언련 고문·언론사회학 박사 미디어오늘 2022.11.09.
격노와 처벌의 리더십
취임 초기 허니문 지지율조차 없는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위기의식, 분노가 더욱 높아졌다. 희생자가 155명이라는 소식을 듣던 10월31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길거리 참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긴급상황에서 155명이 무사히 구조된 실화가 떠올랐다. 위기관리 분야의 교과서로 거론되는 유명한 사례다.
2009년 1월,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한 1549편 에어버스는 이륙 2분 만에 갑자기 날아든 새 떼로 인해 엔진 2개가 동시에 나가는 위기를 맞게 된다. 관제탑 컨트롤러는 가까운 공항착륙을 권했지만, 당시 비행기의 상태를 고려한 기장 설렌버거는 허드슨강 비상착수라는 특단의 결심을 한다. 지상착륙보다 위험성이 몇 배 높은 수상착륙 결정에 관제탑은 당황했으나 더 나은 방법도 없었다. 교신종료 후 1분여 만에 한겨울의 강 위에 불시착한 기체에서 승객 전원이 무사히 구출된 상황은 언뜻 보면 운좋은 영웅담 같지만, 구체적 상황을 들여다볼수록 교훈은 간단치 않다.
첫째는 위기관리능력의 요체는 전문성이라는 점이다. 기체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가진 기장의 기민한 판단력과 조종기술. 강추위 속 침몰 직전의 흔들리는 날개 위에서 패닉상태인 승객들의 비상탈출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어낸 승무원들. 해경, 소방서, 비상구조대 등 필요한 모든 기관을 침착하고 신속하게 출동시킨 컨트롤러의 대응까지.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한 치도 빈틈없는 전문가들의 노련한 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두번째는 같은 사건이 발생되지 않도록 예방체계를 구축하는 엄격한 시스템이다. 대형참사의 위기를 극복한 기장에 대한 찬사와는 별개로, 책임을 다루는 조직위원들은 최첨단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의 위험천만한 선택이 최선이었는지를 꼼꼼히 묻고 검증한다. 기장 역시 혼란과 고통을 느끼지만 결국 그의 판단이 적절했음이 판정되고 조종사로서 최상의 명예를 누리게 된다.
매뉴얼에 없더라도 관록과 경험으로 위기를 대처하는 능력. 침몰 직전의 상황에서도 마지막 한 명의 승객까지 살피는 책임감. 그런 이들에게조차 프로페셔널한 검증을 진행하는 사회를 보며, 몇 년에 한 번씩 유사한 대형 사고를 일으키면서도 반성도 개선도 없는 집단의 무능과 나태에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우연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유능한 전문가와 리더들은 피해를 최소화하고 재발방지 대책에는 더욱 세심하다. 평안한 일상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문제발생을 예방하는 무수한 이들의 숨은 노고와 실력으로 유지된다. 반면 맡은 일에 전문성도 책임감도 없는 이들이 정파성이나 연고로 층층시하 지위를 차지한 곳에서는 늘 사건 사고와 참사가 반복된다. 그런 리더들이 모인 조직은 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성실히 일하던 사람들도 의욕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모든 재난의 원인에는 부실 인사가 있고, 최종 리더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직장생활하며 모든 순간 만전을 기했고 큰 위기 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불통의 리더들을 만나며 점차 지치고 사소한 실수를 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 따위로 할 거면 그만두자”고 느낀 시점이었다. 열정이 없거나 시들고, 핵심과 디테일 모두를 꿰뚫어 장악하지 못한 책임자라면 그 자리를 그만두는 것이 맞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무게보다는 오직 권력의 빛에 눈 멀고 꿀만 빨려는 이들이 모여든 집단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리더는 격노하고 처벌하라는 자리가 아니다. 전문성과 지혜를 통해 아랫사람들을 독려하고 의욕을 북돋아, 본인 스스로 재난을 예방하라는 자리다. 직원보다 무능한 상사를 요즘 세대들은 월급 루팡, 즉 세금 도둑이라 부른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경향 2022.11.09.
이주호 부총리와 윤석열 정부, ‘위험한 컬래버’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일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을 임명했다. 현 정부 들어 국회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을 강행한 14번째 고위직 인사다.
현 정부에 더 이상 잘 어울릴 수 없는, ‘완벽한’ 인사다. 지난달 27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전 부처의 산업부화를 주문했다. 보건복지부는 보건복지 관련 서비스 산업부라 봐야 하고, 국방부는 방위산업부, 국토교통부는 건설산업부, 농림축산식품부는 농림산업부,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산업부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산업 증진과 수출 촉진을 위해 뛴다는 자세”도 당부했다. 교육부에 대해선 이미 지난 6월 “교육부 스스로가 경제부처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던 터다. 각 부처의 존재이유를 배반할 수도 있는, 기막힌 인식이다. 이런 대통령의 장단에 별 고민 없이 박자를 맞춰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이주호 부총리다.
이 부총리는 경제학을 전공하고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일했던 경제학자다. 언론 인터뷰에선 스스로를 “시장경제주의에 철저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재임 당시, 교육에도 시장경쟁이 기본이 돼야 한다고 공언하며, 가능한 한 많은 정보 공개로 교육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들이 판단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원 평가, 일제고사,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 등을 추진하며 점수 공개와 줄세우기를 일삼았고, 입학사정관제 확대, 국립대 총장 직선제 폐지 등은 예산과 페널티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단시간 내에 정해진 답을 향해 현장을 굴복시켰다.
그러나 교육에선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잊었을지 모르지만 이주호 장관 시절 교육계 최대 이슈는 심각해져가는 학교폭력이었다. 모든 것이 점수와 평가로 재단되는 극도의 경쟁적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열패감과 고통의 수렁에 빠졌고 교육현장은 안으로 병들며 황폐해졌다.
세월호 참사 한 달 후 신설된 사회부총리는 비경제정책 분야인 교육·사회·문화를 총괄하는 자리다. 교육·문화체육·보건복지·고용노동·환경·여성가족부 등 경제적 효율보다는 일상의 복지가 중요한 분야들이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분한 국가의 오른손(전통적 의미의 국가 기능)과 국가의 왼손(복지를 위한 예산 지출 기능) 중 왼손에 해당한다. 스스로 시장경제주의에 철저하다고 평가하는 사회부총리가, 국가의 오른손을 견제하며 복지를 챙기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견제는커녕 폭주하는 오른손에 맞춰 박수를 쳐주지 않을까 불안하다.
세월호에 이어, SPC 사태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며 “돈보다 생명” “이윤보다 안전”의 구호가 높아지고 있다. 민심은 ‘적극적인 공공의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시대정신은 ‘복지와 공공성 강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세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경제위기에서) 재정정책은 취약계층 지원에 집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현 정부는 반대로 가고 있다. 안상훈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지난 9월 현금 복지는 취약계층 위주로 하고, 서비스 복지는 민간 주도로 고도화하겠다고 밝혔다. “민간 주도 고도화”라 포장했지만, 사회서비스 민영화를 가속화해 안 그래도 한 줌뿐인 복지서비스의 공공성을 놔버리겠다는 의미다. 이 같은 방향은 약자 복지를 줄줄이 삭감한 내년도 예산안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주거 약자들에 절실한 공공임대 예산 5조600억원이 삭감됐고, 중소기업이 청년을 고용하면 주던 정부 지원금 1조원, 저소득층 에너지 바우처, 에너지 복지예산 492억원 등이 싹둑싹둑 잘렸다.
어느 때보다 공공의 자리가 절실한데, 현 정부는 기본부터 바닥을 뒤흔들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서비스산업발전법 입법, 다각적인 공공부문 민영화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전 부처의 산업부화’라는 기치 아래 이 부총리와 윤석열 정부의 ‘협업’이 몰고 올 난장판이 무섭다.
지난달 28일 인사청문회에서 이주호 후보자는 “고교 다양화 정책이 서열화로 이어진 부작용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 교육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사회부총리의 영향력은 장관 때와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교육·노동·복지·환경 등의 잘못된 정책 방향은 ‘사회적 재난’을 몰고 올 텐데, “최선을 다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10년 후 한국 사회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비극적 역사가 반복될까 정말 우려스럽다.
송현숙 후마니타스 연구소장·논설위원 경향 2022.11.10.
용서하지 않을 자유
콰이강의 다리 위에서 화해한 에릭 로맥스(왼쪽)와 나가세 다카시.
경쾌한 휘파람 행진곡으로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는 1958년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주요 부문을 석권한 명화다. 일본군 군수품 수송을 위한 버마-시암(미얀마-태국) 간 철도, 일명 ‘죽음의 철도’ 공사에 동원된 영국군 포로들과 일본군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영국군 포로를 대표하는 니콜슨 대령은 견고한 원칙주의자다. 제때 공사를 마쳐야 하는 일본군 사령관은 총동원을 명령한다. 니콜슨은 장교는 지휘할 뿐 노동하지 않는다며 원칙을 고수하며 거부한다. 자신과 장교들의 목숨을 건 위험한 저항 끝에 사령관의 고집을 꺾은 니콜슨은 영국군의 선진 기술과 경험을 자랑하며 명예롭게(?) 다리 건설에 참여한다. 일본군의 전승을 위해 튼튼하게 축조되는 다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니콜슨 대령은 전쟁의 부조리함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10만명 이상이 사망한 ‘죽음의 철도’ 건설에 투입됐던 영국인 에릭 로맥스는 <콰이강의 다리>가 불편했다. “저렇게 살찐 포로가 있었다니….” 일본군의 악랄한 폭행과 끔찍한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한 로맥스의 눈에 영화 속 포로의 처지는 실제와 거리가 멀었다. 로맥스는 사경의 공포, 파괴된 존엄성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원한으로 분열된 인생을 기록한 회고록 <레일웨이 맨>을 발표했다. 회고록은 콜린 퍼스와 니콜 키드먼 주연으로 영화화되었으나 원작의 가치라 할 수 있는 화해와 용서를 마주하며 겪는 또 다른 고통을 전달하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불안정하던 로맥스는 고문 가해자였던 나가세 다카시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눌한 영어로 다그치며 물고문을 가하던 악마 같은 통역장교가 속죄하며 ‘화해’의 만남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경이 복잡해진다.
나가세는 <십자가와 호랑이>란 책을 통해 포로수용소 안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잔혹한 폭력과 자신이 받은 심리적 고통을 토로했다. 어이없게도 7000명의 전사자들 묘지 앞에서 용서받은 영적 체험을 감격하여 적어놓았다.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신에게서 용서를 받았다는 가해자의 파렴치한 자기구제 퍼포먼스. 로맥스의 부인은 나가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예상치 못한 나가세의 진심이 담긴 사죄 답장이 이어지면서 속죄와 용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전범 군인으로서 나가세는 평생 뉘우치며 살았다. 일왕의 이름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 한편 희생자들을 위한 사원을 세워 영령을 위로했다. 2007년에 교토에서 열린 ‘전쟁의 진실을 말하는 모임’에 고령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경향신문 2007년 7월9일 기사)
나가세를 겨우 용서한 로맥스는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후 일본마저 용서하기는 어려웠다. 일왕을 위해 목숨 바쳐 다른 나라를 괴롭힌 일제국주의 전범들을 칭송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마치 ‘독일 성당에서 게슈타포 기념비를 보는 기분이었다’며 불쾌해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죽음의 철도’ 건설을 위해 침목 하나당 목숨 하나를 강요한 A급 전범자 도조 히데키와 죽음의 철도 개통식에 동원된 증기기관차 C 56 13호가 자랑스럽게 전시돼 있다. 태국이 ‘죽음의 철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시도하고 있으나 일본이 반대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의 죄를 지우려고 애쓸 뿐 사과나 반성은 없다. 일본의 역사 인식은 퇴행적이다.
에릭 로맥스의 경우처럼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다시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일본에 복수할 악의는 없지만 일본을 용서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우리가 아플 이유는 없다. 폐기해야 마땅할 욱일기를 펄럭이는 일본함에 경의를 표하는 한국 해군의 굴욕이 수치스러울 뿐이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경향 2022.11.11.
세월호와 이태원, 반복된 참사 보도 삽질
이태원 참사로 대한민국이 또 한 번 슬픔에 잠겼다. ‘또 한 번’이 중요하다. 1980년대생들은 이태원 참사를 보며 H.O.T.의 ‘아이야’를, 1990년대생은 방탄소년단의 ‘봄날’을 떠올렸다고 한다. 여전히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는 세상(아이야). “어떤 어둠도 어떤 계절도 영원할 순 없다”(봄날)고 믿으며 달라진 세상을 기대해봤지만, 그 기대를 다시 배신한 세상. 그저 10대 시절 좋아했던 노래를 반갑게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세상을 한탄하며 떠올린 것이다. 유행가는 시대를 노래한다는데, 노래가 기록한 끔찍한 참사가 반복되고 그 아픔과 슬픔이 시대를 초월해 이렇게 공감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비극이다.
1996년생인 한 후배는 이태원 참사 보도를 지켜보며 자꾸만 ‘다음엔 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1999년 씨랜드 참사 당시 유치원생들의 나이가 1992~1994년생,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고등학생들은 1996~1998년생, 이태원 참사에서도 20대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는데 모두 후배의 또래다. 후배는 씨랜드 참사는 너무 어려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세월호에 이어 이태원 참사까지 또래가 대형 참사의 희생자가 된 것을 목격하고 나니 알 수 없는 무력감과 공포감이 밀려온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가 씨랜드, 세월호라는 끔찍한 비극을 겪고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원인을 밝히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정비해야 할 정부는 “주최자가 없다”,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했다. 언론은 SNS에서 무분별하게 유포되던 현장 사진과 영상, 확인되지 않은 사실 퍼 나르기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참사 직후인 지난달 30일에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를 인용해 “아이들이 사탕 얻는 핼러윈, 한국에서는 클럽 가는 날” 류의 보도가 쏟아졌다. 그중에는 3대 ‘정통’ 일간지로 꼽히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도 있었다. 댓글에는 ‘외래 변종 문화를 즐기러 갔다 죽었다’는, 유족과 생존자까지 두 번 상처 입히는 반응이 달렸다.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온 아미들로 부산이 북적였고, 미국인 유튜버가 제작한 현실판 ‘오징어게임’을 1억 명이 보는 세상을 보도하던 언론이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1년에 하루, 서양에서 기원한 축제를 즐기러 나선 것이 참변의 피해자가 될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모를 리 없다.
삽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토끼 머리띠를 한 남자’, ‘현장에 나타난 유명인’ 찾기에 나선 온라인 마녀사냥에 일조했고, 핼러윈 현장 중계 중 상황이 급박해지자 구조 활동을 한 BJ를 ‘사고 현장에서도 별풍선 후원을 받았다’고 매도했으며, 사람들이 심정지된 채 이송 중이던 급박한 상황에서 현장 컨트롤타워인 소방서장을 붙들고 의미 없는 질문을 쏟아냈다.
그 사이 BBC와 로이터의 이태원 참사 보도는 대형 참사 발생 시 언론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BBC는 소방방재학 교수의 “1제곱미터 당 한계 인원이 5명을 넘어선 순간부터 위험이 시작됐고 한계 인원이 거의 10명에 육박한 순간 참사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번 참사의 직접적이고 유일한 원인은 군중 밀집도를 관리하지 않은 당국에 있다”는 발언을 보도했다. 정상적으로 통제되던 군중이 한계선을 넘으면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개개인의 생존 욕구로 인해 동물적 행동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전문가의 설명도 함께였다.
로이터통신은 이태원이라는 지역의 특징과 사건 발생 장소의 지리적 특성, 탄탄한 취재를 기반으로 작성된 사건 타임라인과 현장 증언, 관련 기록과 전문가 의견 등을 인터랙티브로 정리했다. 현장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왜 군중이 현장을 제대로 빠져나올 수 없었으며 특정인을 찾아 범인으로 모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깨닫게 도왔다.
▲ [이태원 참사 로이터통신 인터랙티브 기사=How Seoul crowd crush turned Halloween revelry to disaster]
당시 우리 언론이 ‘뒤에서 계속 밀던 사람들’에 대한 개개인의 인터뷰를 검증없이 그저 전달하며 대중이 가상의 범인 찾기에 매몰되도록 돕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BBC와 로이터의 보도는 참사 진상 규명에 더 실질적 도움이 되는 뉴스였다. 재난 보도에서 시민이 언론에 기대하는 역할이고 말이다.
김윤정 칼럼니스트 미디어오늘 2022.11.12.
[사설] 왜곡·외압 의혹 잇따르는 ‘자유민주주의’ 교육과정
2022 개정교육과정’ 행정예고안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교육부가 ‘자유민주주의’ 등 표현을 해당 연구진의 동의 없이 넣어 반발을 산 데 이어, 심의기구의 회의 내용을 왜곡하고 연구진에 직접 압박을 가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개정안은 ‘성소수자’와 ‘성평등’ 표현을 삭제해 구조적·제도적 차별을 가리려 한다는 비판 또한 받고 있다. 내용과 절차 모두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이번 개정은 디지털 전환과 고교학점제 도입 등 학교교육의 큰 틀의 변화에 맞춰 2015년 이후 처음으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을 전면 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의미의 개정안에 교육부는 지난 9일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추가해 해묵은 이념적·정치적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2011년 이주호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교육과정 개편 때와 판박이다. 역사과 개발연구진이 성명에서 밝혔듯 ‘자유민주주의’ 표현 집착은 “민주주의가 내포하는 다양성과 포용적 가치를 좁히는 결과”를 낳을뿐이다.
여기에 절차적인 하자마저 드러나고 있다. 교육부는 그동안 연구진이 반대했지만 ‘법적 절차’를 밟아 개정안을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육과정심의회 운영위원들 일부는 교육부가 자신들 대부분이 ‘자유민주주의’ 표현에 동의한 것처럼 내용을 왜곡했다며 회의록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집필진 스스로 문맥에 맞게 표현을 선택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 것이지 교육부가 자의적으로 고치도록 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회의자료는 당일 배포됐고 표결절차 같은 것도 없었다고 한다. 지난달 10일 연구진 회의엔 교육부 직원 2명이 찾아와 자유민주주의 표현을 넣고 전근대사 비중을 늘리라는 ‘주문’을 했다는 증언이 나와 ‘외압’ 의혹까지 사고 있다. 교육부 직원은 이 자리에서 “이젠 정치의 시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육부는 현재 전체회의록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교육과정 개정을 무리하게 바꾸고 있다는 의혹을 교육부 스스로 해소하지 않는 이상, 개정안에 대한 반발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획일화된 정부 역사관을 강요하려던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시도가 전 국민적 반대를 불러일으켰던 게 불과 몇년 전이다./ 한겨레
법원은 ‘검찰 통제’ 역할 제대로 하고 있나
서해 사건’으로 구속됐던 서욱 전 국방부 장관(왼쪽)과 김홍희 전 해양경찰청장이 지난 8일과 11일 구속적부심에서 모두 석방됐다. 사진은 지난달 2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검찰이 전 정권과 야당을 겨냥해 몰아치고 있는 최근 수사에서는 낯설고 극적인(?) 장면들이 도드라진다.
국정감사 기간에 더불어민주당사 압수수색 시도로 밤늦게까지 검찰-야당 대치 광경이 연출됐다.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을 하루 앞두고 다시 압수수색을 벌였다. 이재명 대표 측근인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겨냥한 것인데, 김 부원장은 일주일 전 임명돼 당사 사무실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검찰은 파일 몇개를 압수해 갔다고 한다.
이태원 참사 애도 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검찰은 또다시 야당 당사를 압수수색했다. 이번엔 정진상 당대표 비서실 정무조정실장을 겨냥한 것인데, 정 실장은 국회에서 업무를 볼 뿐 당사에는 책상도 놓여 있지 않다고 한다. 검찰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민주당은 검찰의 ‘정치적 쇼’라고 반발했다. 야당 당사 압수수색 자체가 전례가 드문데다, 실효성이 의심되는 압수수색을 요란하게 벌인 탓이다. 하지만 검찰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집행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검찰의 영장 청구뿐 아니라 법원의 영장 발부가 적절했느냐는 질문도 던질 필요가 있다.
수사의 밀행성으로 인해 초기 수사의 정당성이나 방식의 적절성을 외부에서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검찰이 제시하는 증거를 살펴보고 강제수사 필요성을 판단하는 법원의 영장 심사가 중요하다. 압수수색은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검찰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가 법원이다.
그런데 최근 영장 발부와 관련해, 법원이 김 부원장과 정 실장의 당사 근무 여부 등을 충분히 고려해 영장을 내주었는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영장의 야간 집행이 필요하다고 본 이유는 무엇인지 등 여러 의문이 생긴다. 단순한 사실관계가 틀린 영장 내용도 논란이 되고 있다. 영장에는 정 실장이 이재명 대표의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다고 적시됐는데,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수사 대상자가 배제되는 영장 심사 과정에서 검찰이 법원을 오도할 가능성도 제기되는 것이다.
체포·구속영장에서는 법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핵심적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공권력이 함부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사법부의 본질적 역할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구속=유죄’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인신 구속이 수사 편의나 여론몰이의 방편으로 활용될 가능성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검찰은 김 부원장에게 소환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소환 불응 우려’를 이유로 체포영장을 청구해 발부받았다. 통상 몇차례 소환에 불응하는 경우 체포영장을 활용하는 것과 다른 방식이었다. 수사 편의와 기본권 보호를 저울질했을 때 적절한 방식인지 의문이 든다. 검찰은 정 실장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을 사용하려 했으나 이번엔 법원이 체포영장을 기각했다.
‘서해 사건’에서는 반전이 거듭됐다. 애초 서욱 전 국방부 장관과 김홍희 전 해양경찰청장의 구속영장이 청구됐을 때 전문가들 사이에선 구속 사유가 인정되기 어렵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럼에도 법원은 ‘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이후 구속적부심에서 이들은 모두 석방됐다.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할 때와는 반대로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고 판단했다.
서해 사건은 격렬한 논란의 대상이다. 야당은 물론이고 현 정부의 감사원과 국가정보원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등 구체적 진상부터 모호하다. 사건의 성격상 형사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민감한 안보정책 영역이기도 하다. 구속영장 발부에 더욱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지금은 원론적 차원을 넘어 법원의 역할을 더욱 강조해야 할 특수한 국면이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등장해 검찰 직할체제라는 평가가 나오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공정성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살아 있는 권력’ 수사는 지지부진한 반면 대통령의 정적에 대한 수사만 급발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검찰 수사에 원칙적인 통제를 하지 못하고 소극적 방조자 노릇에 그친다면 형사사법체계 전반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사법권의 담지자로서 법원은 형사사법체계가 흠결 없이 작동하고 국민의 신뢰를 얻게 할 책무가 있다. 그것은 법원의 신뢰·권위와도 직결되는 일이다. 지금 법원이 검찰에 대한 사법 통제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이유다.
박용현 | 논설위원 한겨레 2022.11.13.
법의 구멍으로 도망친 정치, ‘적법의 세계관’이 부른 참극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빅쇼트>는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다. 주인공 마이클 버리(크리스천 베일)는 모두가 들떠 있을 때 주택금융의 잠재 부실을 간파하고 공매도에 베팅해 1조원에 이르는 돈을 벌며 일약 스타로 뜬다. 기라성 같은 투자은행과 보험사가 연이어 파산하고 글로벌 금융시장이 붕괴하는 와중에 빚어낸 대박이었다. 탐욕에 눈이 멀면 돈을 잃고, 위험을 간파하면 큰돈을 번다.
올가을 돈 가뭄에 빠져든 채권시장에 불씨를 던진 건 한 지방자치단체장이다. 부실 출자기관을 법원에 회생 신청하거나 만기에 이른 채권 상환 시점을 수개월 미룬 결정은 평소라면 찻잔 속 태풍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수백조원 규모 채권시장이 고작 2050억원에 휘둘린 건, 시장이 어디에 숨겨져 있을지 모를 ‘지뢰’ 탓에 한껏 취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위험의 크기를 눈치채지 못한 김진태 강원지사는 무능이란 낙인과 함께 정치인이자 행정가의 생명인 신뢰를 잃었다. 그가 얻은 건 앞으로 강원도가 빌릴 돈에 덧붙을 ‘김진태 프리미엄(가산금리)’뿐이다.
위험에 예민하지 않은 정부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다. 핼러윈 데이를 맞아 10여만명 인파가 이태원에 몰릴 수 있다는 전망보고에도 사전 대비를 하지 않은 위정자들은 그 보고서 행간에 숨겨진 위험을 알아채지 못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서 압사해가던 그 순간 안락한 집에서 피로를 씻어내고 있었고, 윤희근 경찰청장은 서울과 멀리 떨어진 산세 좋은 곳에서 지인들과 모닥불을 피웠다. 이들은 위험의 부스러기도 인지하지 못했다.
이들은 왜 위험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을까. 엉뚱하게도 한달여 전 검사 출신 대통령실 인사비서관의 한줄 답변이 떠올랐다. 그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서 배우자와 함께 40여채가 넘는 부동산을 보유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적법하게 형성된 재산으로, 제반 세금을 모두 납부했다”로 단출한 설명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명징한 답변이라며 자족했을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꽤 이상한 해명으로 들렸다. 재산 형성에 불법이 개입됐거나 세금 탈루를 의심할 만한 정황 때문에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민 눈높이와 거리가 있어 유감” 정도의 뻔한 말만 덧붙였어도 ‘적법이면 다인가’란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법복을 벗은 그는 여전히 ‘검사의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윤석열 정부의 첫 일성은 “주최자 없는 축제여서 마땅한 책임자가 없다”였다. 주최자 없는 행사를 안전관리 대상으로 분류하지 않는 재난안전법의 맹점을 염두에 둔 메시지였다. 조금 비약해 보면 이런 메시지는 ‘정부는 법에 충실했지만 157명의 희생자를 낳은 재난을 막지 못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사실은 참사 책임이 ‘정부’가 아니라 ‘법’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상한 메시지는 정권 핵심부에 ‘적법-불법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들이 다수 포진해서 나온 건 아닐까. 검사 출신 대통령과 판사 출신 행안부 장관은 사과도 쉽게 하지 못했(거나 안 했)다. 두 사람의 모습에는 금융시장에 대혼란을 부른 뒤에 뒤늦게 “좀 미안”이란 짧은 사과를 한 검사 출신 김진태 지사가 오버랩된다.
정치와 행정은 적법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지 않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면 정치와 행정은 최소한의 도덕 그 이상을 다룬다. 교과서에서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일컫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법에만 기댄 세계관, 법 만능주의는 평범한 법조인의 덕목일지 모르나, 정치·행정가에겐 위험하며 국민까지 안쓰러운 처지에 놓이게 하기 십상이다. 위험의 크기를 모르는 투자자는 스스로 손실을 감내하지만, 위험의 크기를 모르는 정치·행정가가 불러오는 위험은 그를 뽑아준 유권자들이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탐욕에 눈먼 투자자보다 적법의 세계관에 눈먼 정치·행정가가 더 위험한 이유다.
김경락 | 전국팀장 한겨레 2022.11.13.
전쟁의 또 다른 비용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서방의 대러 제재와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가 서로 첨예하게 날을 겨누고 있다. 이런 고래 싸움에 등짝이 터지는 것은 언제나 보통 사람들이다. 치솟는 에너지 가격에 저항하는 시위 소식이 끊이지 않는 게 그 증거다. 그런데 이는 대개 프랑스나 독일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서유럽 얘기다. 더 힘든 겨울을 앞두고 있지만 우리에겐 좀처럼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유럽이 탄소중립 움직임에서 앞서 있기는 하지만, 이는 에너지 특히 천연가스 수입에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2020년 기준 유럽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57.5%에 이른다. 세분화하면 석탄 등 고체화석연료의 수입 의존도는 35.8%, 원유와 천연가스는 각각 97.0%와 83.6%다. 수입처 다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2020년 기준 수입된 석탄의 49.1%를 러시아로부터 들여오고 있다. 천연가스와 원유는 각각 38.2% 및 25.7%다. 러시아가 ‘배짱’을 부리는 근거다.
그런데 유럽이라고 다 같진 않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독일 등 북유럽과 그리스 등 남유럽 사이 격차가 한동안 화제였지만, 2000년대 이후 옛 소련과 강하게 연계돼 있던 동유럽 나라들이 대거 유럽연합(EU)에 가입함에 따라 동서 사이 격차도 그에 못지않다.
이런 차이는 최근 러시아발 에너지 위기 속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먼저 경제력에 따라 각국이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맷집’이 큰 틀에서 결정될 것이다. 당연히 가난한 나라가 더 힘들다. 다음으로 나라마다 에너지를 조달하고 소비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천연가스만 보자. 2020년 유럽 전체의 러시아 의존도가 38.2%이지만, 나라별로는 프랑스처럼 의존도가 20% 미만인 곳이 있는가 하면 라트비아, 북마케도니아, 몰도바 등은 수입되는 천연가스 전량이 러시아산이다. 헝가리나 체코도 천연가스 수입의 95%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 유럽 각국이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대하는 처지가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대러 제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동유럽 나라들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러시아 제재에 유예 기간을 둘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지난 9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대러 제재 철폐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 사례는 옛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반유럽 정서, 그리고 유럽연합의 제도적 취약성 및 비민주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정치 차원에서만 볼 건 아니다. 유럽의 대러 제재를 통해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할 이들이 동유럽 각국 국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힘들고, 러시아 의존도가 높아서 힘들다.
외신들로부터 전해지는 동유럽의 실상은 처참하다. 이미 헝가리는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도심 대형 호텔에서부터 전국의 체육관, 극장, 박물관, 도서관에 이르는 공공시설을 폐쇄하고 있다. 체코에서는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스웨터 입기를 권장하는 한편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담요를 나눠 주고 있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폐쇄된 화석연료 발전소를 재가동하고 있는데, 가장 질 낮은 종류의 석탄인 갈탄이 그 주요 연료로 쓰이고 있다.
이런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치솟는 에너지 가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책을 구할 수밖에 없다. 지난달 말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한 기사에서 그 충격적인 실상을 상세히 전한 바 있다. 여기엔 갈탄부터 낡은 축구화, 온갖 쓰레기까지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태우는 헝가리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행위 상당 부분은 불법이지만, 이런 행위가 대중 사이에서 만연하면 마냥 그것을 불법으로 낙인찍을 수만도 없다. 실제로 헝가리 총리는 벌목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불법의 현실을 일부 용인할 수밖에 없었고, 폴란드의 여당 지도자는 아예 자국민들에게 ‘타이어 빼고 뭐든 태우라’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올해 러시아의 ‘도발’이 기후위기 대응 움직임에 재를 뿌렸다는 비판이 흔히 들린다. 그런데 이런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그것이 후퇴시키고 있는 것은 인류문명 자체가 아닌가도 싶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애초 ‘정의로운 전환’에서도 뒤처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번 후퇴가 좀 더 포용적인 전환을 고민하는 계기라도 됐으면 좋겠다.
김공회 |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 2022.11.13.
국익? 대통령의 이익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 동남아 순방 전용기에 MBC 기자 탑승을 배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대통령의 ‘바이든’ 언급 관련 보도, <PD수첩>의 김건희 여사 논문 표절 방송 등에서 왜곡 또는 조작 보도를 하고 정정이나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그러나 대통령 발언 보도와 관련하여 대통령실은 보도 이후 즉각 대통령 발언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고, ‘바이든’이 아니라는 전문가 견해를 확인했다지만 음성 분석 업체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 발언의 진실은 아직 논란 중이다. <PD수첩>이 대역을 사용했음을 명기하지 않았고 이에 사과했다. 하지만 논문표절 문제 제기는 여전히 남는다. 이러니 대통령실로서는 MBC에 불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MBC 배제가 적절한 조치였을까? 대통령실 출입기자단은 공동대응의 형태로 유감을 표시하고, 탑승 배제를 조속히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각 현업언론단체, 시민언론운동 단체 등은 물론 신문협회도 배제 조치를 비판하고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MBC 보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나라 법제가 보장하는 일정한 절차 즉 정정·반론보도 요구 등을 통해 해결하면 되는데, MBC를 다른 언론과 차별하여 전용기 내의 취재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언론을 탄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MBC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언론계 대부분이 대통령실의 조치를 비판하고 나섰으니 득은 없고 실만이 있는 상황이다. 대통령실의 전술적 실수다. 하지만 이는 전술적 실수가 아니라 전략적 실패일 수 있다.
대통령실이 대통령 관련 부정적 보도를 하면 배제될 수 있다는 신호를 공개적으로 보낸 것이니 ‘자유’를 대표 상품으로 내세우던 대통령의 이미지를 스스로 훼손했다. 대통령의 자유 개념 속에는 언론의 자유는 애초 없었던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그렇잖아도 대통령의 ‘자유’가 선택적 자유라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 그 사례를 하나 더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대통령에 관해 부정적 보도를 한 언론의 배제란 뒤집어 보면 긍정적 보도를 하는 언론을 포용하겠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 순방은 당연히 긍정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처럼 전용기 탑승을 거부하지 않고 탑승한 언론이 대통령을 우호적으로 보도하면, 시민들이 그것을 액면 그대로 읽을까? 대통령과 가까운 언론의 우호적인 보도라 생각하지 않을까? 대통령실은 언론의 진실 보도조차도 의혹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실 기자단이 전용기 탑승 거부를 결의하지 못한 것도 못내 아쉽다. 언론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여하튼 대통령실의 이번 조치는 전략적 실패다.
전략적 실패는 개념의 혼란에서 비롯했다. 국가의 이익과 대통령의 이익은 동일한가? 마찬가지로 국가의 홍보와 대통령의 홍보는 일치하는가? 대통령의 활동 일반은 국가를 대표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니 대부분 국익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모든 행동을 우호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국익을 수호하는 일일까? 대통령의 정책 실패, 대통령의 실수 등은 외려 국익에 반한다. 대통령의 실패, 실수 등이 반복되지 않도록 비판 감시 견제하는 것은 언론의 책무다. 대통령 비판을 국익의 훼손이라 주장하는 것은 대통령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인식의 오류다. 즉 대통령 순방 동행 취재와 대통령 홍보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대통령 순방 동행 취재는 대통령이 아닌 국가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더군다나 언론은 어느 순간 국익과 진실이 충돌하면, 진실을 선택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존재다. 그런 언론에 국가도 아니고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보도했다고 차별적 조치를 취하는 게 적절했을까?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처럼 대통령실도 대통령이 아닌 국가를 위해 일하는 국가 기구여야 한다.
김서중 성공회대 미디어콘텐츠융합자율학부 교수 경향 2022.11.14
한동훈식 화법
자기부죄거부특권은 범죄의 혐의를 받거나 기소된 사람이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다. 미국법에는 경찰관 자신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비리와 관련하여 조사를 받으면서 ‘만약 자기부죄거부특권을 행사하면 면직될 것’이라는 압박을 받아 비리에 관해 진술할 경우, 그 진술은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없다는 법리가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1967년의 개리티 사건에서 판시한 것이어서 개리티 원칙(Garrity Rule)이라고 부른다.
같은 해 가드너 사건에서 나온 판결은 ‘대배심에서 위의 특권 포기를 거절하면 면직된다’고 규정한 주법을 무효로 보았다. 그런데 1968년의 통합위생직원연합회 사건에서는 위의 특권을 행사하여 진술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면직되면 그 면직은 위헌이라고 했다가, 1970년에는 피조사자들에게 다시 ‘형사사건에서 유죄증거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부여했는데도 진술을 거부하면 면직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개리티 원칙은 공무원이 직위를 지키고 처벌을 받느냐 아니면 실직하고 처벌을 면할 것이냐는 딜레마에서 진술거부권을 보장하려던 것인데, 이처럼 관련 법리는 당초의 개리티 판결에서와는 조금씩 달라져 왔다. 그래서 후속 사건들에서는 이 원칙의 적용 범위와 관련해서 하급심 판결이 엇갈렸고 해석론도 분분하다.
이 개리티 원칙을 놓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공직후보자로 출석했던 인사청문회에서 설전이 벌어졌다. 이 원칙을 아느냐는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한 후보자는 “징계를 통해서 겁줘서 진술을 이끌어냈을 때 그 진술이 증거능력이 없다는 원칙”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 의원은 그렇지 않다면서 이를 “헌법상 진술을 거부할 권리를 통해서 법 집행을 방해했다면 국민이 그 법집행관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이유로 직무에서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했다. 청문회가 있기 며칠 전 한겨레에는 박용현 논설위원이 개리티 원칙과 관련하여 한 후보자의 공직 적격에 의문을 표하는 내용으로 쓴 칼럼이 실렸다. 여기엔 연방대법원이 제시한 대안적 원칙이라면서 ‘불리한 진술을 해도 형사처벌의 근거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면책 조건을 부여한 뒤 진술을 요구했는데도 진술을 거부하면 파면 등 징계에 처해도 위헌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설명이 붙어 있었다.
누구 말이 옳은가? 한 후보자의 답변은 단순하지만 개리티 판결 자체에서 판시된 내용과 일치한다. 반면 김 의원이나 박 논설위원의 주장은 그 후에 나온 다른 사건의 판결에서 판시된 법리와 대략 일치한다.
실상 김 의원의 질문은 한 후보자가 검사 재직 중 자기에 대한 범죄혐의와 관련하여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수사기관에 말하지 않은 행위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개리티 원칙만으로 따져보기는 적당치 않다. 법체계 전체에 비추어 보면 어떨까? 비밀번호를 말하지 않은 것은 개인적으로는 헌법상 보장된 권리의 행사란 점에서 용인되어야 하지만, 검사의 직위에 있으면서 수사에 협조하지 않은 것을 공무원으로서 적절한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여기까지는 법률론이다. 그런데 청문회장은 법정이 아니고, 청문절차는 재판이 아니다. 또 장관으로서의 적격성을 법률론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날 청문회 중 보기에 가장 딱한 장면은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지금이라도 제공할 의사가 있느냐는 김영배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한 후보자가 탄압 운운하며 헌법상 기본권을 무력화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답변을 내놓은 것이었다. 청문회는 그런 대답을 들으려고 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일국의 법무부 장관”이라는 직위, 법률직으로는 행정부 내 최고직에 지명된 이가 그런 초보적 법률지식에 기대어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인정할 상식인은 없었을 게다. 자기의 행위가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양해시킬 만한 사정에 대한 설명, 최소한의 책임이라도 인정하고 사과하는 자세를 기대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한동훈식 화법이 가지는 위험은 바로 이 지점이다. 법률가의 한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 시비와 승부에 집착하는 것이다. 장관 취임 후에도 국정감사에서 이태원 참사까지 그가 국회에서 한 발언의 내용과 태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작은 승리가 큰 패배로 이어지거나 반대로 작은 것을 내주고 큰 것을 얻은 예는 역사상 많다. 말싸움에서 이긴다고 능사는 아니다. 작게 지고 크게 이기는 게 상지상책이다. 법률가들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지 이미 오래다. 국회에서 진중하고 겸손한 태도로 때론 좀 어눌하게 발언하는 법무부 장관을 볼 수는 없을까.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경향 2022.11.14
대통령의 위험한 'XX정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난 9월 미국 순방 중 불거진 '비속어' 논란에 대해 대통령실이 내놓았던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발뺌은 궁지에 몰린 정치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지만 이번 경우는 특이하다. '증거'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본인이 직접 들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인데 '기억 부재'란 엉뚱한 해명을 내놓았다. 한술 더 떠서 윤 대통령은 '선택적 기억'과 '선택적 기억상실'의 신묘한 머리구조까지 선보였다. 몇 개 단어로 이뤄진 짧은 문장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겨냥한 얘기는 한 적이 없다"고 기억하면서 "'이 XX들' 얘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윤 대통령의 말은 일정 부분 진실일 수 있다. 사람은 너무 일상화된 행위에 대해서는 특별히 기억하지 못한다. 평소 된장국을 즐겨 먹는 사람이 어느 날 식사에서 자신이 된장국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별식'이라면 몰라도 만날 지겹게 먹는 음식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윤 대통령에게 ' XX들'은 '별식'이 아니다. 그러니 비속어 사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윤 대통령의 주장은 딱히 거짓말이 아닐 수 있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이 XX들'은 한국의 야당을 지칭한 것이라고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김 수석의 주장은 '바이든' 부분을 빠져나오기 위한 '해명 아닌 해명'이지만 최소한 비속어 사용만큼은 시인했다. 녹화된 영상의 발음이 너무 정확한 탓도 있지만 바이든 발언에 대해 우긴 것처럼 "대통령은 그런 비속어를 사용할 분이 아니고 그럴 이유도 전혀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 수석은 자신의 '보스'가 '평소 비속어를 많이 사용하는 분'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김 수석의 해명을 통해 우리는 윤 대통령이 "야당 XX들'을 입에 달고 지낸다는 사실을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언어 습관은 인식의 거울이자 행동의 모태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비속어 사용이 위험한 이유다. 백성을 하늘로 여기지는(以民爲天) 못할망정 국민을 욕하며 함부로 대할 때 어떻게 국가가 순탄하게 굴러갈 수 있겠는가. 야당을 비속어의 대상으로 삼을 때 협치를 통한 원활한 국정운영은 물건너간다. 언론사를 비속어 대상으로 삼으면 언론 자유는 질식한다.
대통령실이 윤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서 문화방송 기자들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것도 윤 대통령이 "MBC XX들"이라며 '격노'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적반하장이라고 한다. 대통령실이 저지른 '반헌법적 폭거'의 무도함과 부당성에 대해서는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궁금한 게 있다. 윤 대통령이 이번에 바이든 대통령을 만났을 때 비속어 논란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저는 결코 대통령님 비하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MBC라는 나쁜 방송사가 사실을 왜곡해서 벌어진 소동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MBC 기자들은 전용기에 태우지 않는 방식으로 혼을 내주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할 용기는 없었겠지만 미국 쪽에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김종구
그런데 '바이든 폄하' 발언의 실체를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바이든 대통령일 수 있다. 남이 하는 말 가운데 자기 이름이 튀어나오면 본인이 가장 잘 알아듣는 법이다. 외국어로 해도 마찬가지다.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들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한국어 능통자는 미국 정부에도 많으니 백악관은 이미 윤 대통령 발언의 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는 '나는 다 알고 있어'라고 냉소를 흘리지 않았을까.
미국은 자기네 수정헌법 제1조(언론·출판, 표현의 자유)를 어떤 가치보다도 숭앙하는 나라다. 그러니 '언론을 탄압하는 한국 대통령'을 바이든 대통령은 어떻게 바라볼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을 보니 내가 정말 싫어하는 트럼프가 생각나는군. 앞뒤 안 맞는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뉴욕타임스> <CNN> 등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에 대한 비상식적 태도도 비슷하고….'
<1984년> <동물농장> 등으로 친숙한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을 돌아보며' 등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총통이 이러이러한 사건에 대해 "절대로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다, 절대로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그가 2 더하기 2가 5라고 말한다면, 그렇다. 2 더하기 2는 5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그자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이 공식 역사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만일 대통령이 비속어 사건에 대해 "절대로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다, 절대로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비속어 사건은 MBC가 만든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공식 역사가 될 것이다.'
대통령실과 국민의 힘은 온갖 궤변을 짜내 윤 대통령의 억지를 뒷받침하느라 바쁘다. 화를 내는 윤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보복책까지 짜냈다. 외국 언론들마저 '날리면'이 아니라 '바이든'이 맞다고 말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MBC 기자 전용기 탑승 배제라는 '2+2=5 산수'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외교는 결국 국내 정치의 연장이다. "내 외교 정책의 첫 번째 원칙은 국내 정치를 잘한다는 것"(윌리엄 글래드스톤 전 영국 총리)이라고 선언한 정치지도자도 있을 만큼 국가지도자의 '국내 정치 점수'는 외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내 여론의 든든한 지지가 있어야 외교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어떤가. '인기 없는 대통령(unpopular leader)', '세계에서 가장 미움받는 지도자(world's the most-disliked leader)'. 외국 언론이 윤 대통령을 묘사할 때 앞에 붙이는 수식어다. 이제는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달게 됐다. 동남아 순방 기간 만나는 다른 나라 모든 지도자들이 윤 대통령의 이런 평판을 모를 리 없다. '글로벌 망신'이다. 외국 지도자들한테 은근히 손가락질을 받는 대통령이 외교 현장에서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윤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감지할 지적 능력과 감수성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는 데 있다. 나라의 품격은 점점 떨어지고, 역사는 뒷걸음치고, 한국에 대한 외국의 조롱은 늘어만 가는 현실, 윤 대통령의 'XX정치'가 빚어낸 위험하고 안타까운 풍경이다.
김종구 (언론인) | 프레시안 2022.11.14.
참사, 알레고리
#1. 사과할 수 없는 아이
아이가 유치원에서 맞고 왔다. 얼굴 긁힌 자국에 피가 맺혀 있다. 젊은 엄마는 유치원 교사에게 전화한다. 교사는 때린 아이를 교육하겠다고 말한다. 며칠 뒤, 유치원에서 온 아이의 표정이 다시 굳어 있다. 엄마는 유치원에 찾아간다. 뾰족한 수가 없다. 딸을 때린 상대는 딸과 같은 어린아이다.
“너도 참지만 말고, 가만있지만 말고, 응?” 엄마는 차마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한다. 때리라고는 말 못하겠다.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안다. “나도 때리면 나중에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잖아.”
이 예민한 아이는 잘못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잘못하지 않았는데 잘못했다고 말해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자기 기만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과는 기만이고, 이 기만으로 진실을 덮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사과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과하는 아이를 어른은 칭찬할지도 모르고, 사과는 면책이겠으나, 그 때문에 문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될 것이다.
선생과 부모는 때린 아이에게 사과하라 타이른다. 때린 아이는 곧장 사과한다. 선생과 부모는 만족한다. 사과받은 아이는 고통스럽다. 사과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자에게 사과를 받아내려는 것은 오히려 사과받는 사람을 거듭 소외시킬 뿐이다. ‘잘못’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과부터 받는 것은 오히려 잘못한 자를 면죄하는 것이 된다.
이태원 참사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복합적이며, 그래서 원인을 더 치밀하게 규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치밀한 규명에 걸려드는 사람은 실무자다. 실무자는 과실치사, 직무유기로 잡혀들어갈 것이다. 대중이 그들에게 분노하는 사이, 그들은 또 다른 희생양이 된다. 철저한 원인 규명의 함정이다. 책임을 물었기에 근본적인 원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2. 죽음이 두려운 아이
다섯 살 아이가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 죽는 게 무서워.” 젊은 아빠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차분히 응대한다. 건강하면 오래오래 산다, 아빠는 오래 살 것이다, 너도 건강하니까 오래오래 살 것이다. 이 현명한 아빠는, ‘아빠는 죽지 않는다’ 같은 환상으로 상황을 봉합하지 않는다. ‘사람은 다 죽는다’ 운운하며 아이도 모르지 않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주지도 않는다.
아이에게 전달된 것은 무엇일까. 아빠가 오래오래 살 거라는 믿음이 아니다. 자신이 무럭무럭 커서 건강한 어른이 될 거라는 확신도 아니다. 아이에게 전달된 것은 아빠가 그 이야기를 차분히 해내기 위해 숨긴 긴장과 불안이다.
아이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아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불안한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온전히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이 없는 것이다. 그 불안이 죽음에 투사된 것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죽음에 대한 지식도, 오래오래 살 거라는 확신도 아니다. 자신이 보호받는다는 안정감이다.
밥벌이가 고단한 젊은 부부는 아이를 더 잘 키우기 위해 잔뜩 긴장했을 것이고, 그 긴장은 아이에게 전이됐을 것이다. 모두가 불안한 시대, 재난의 시대다. 이 세상엔 불안한 이와 불안을 억압한 이가 살고 있다. 아이는 불안했고, 부모는 불안을 억압했다. 그래도 아슬아슬 살아간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로 그 불안한 균형마저 깨졌다. 불안에, 공포와 슬픔이 뒤섞인다. 국가가 애도 기간을 지정하는 것은 도착적(倒錯的)이다. 책임을 져야 할 국가가 애도를 규정한다는 것도 당착적이다. 애도는 규범으로 정할 수 없다. 우리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애도하는 것인가. ‘애도 기간’이라는 것은 상처받은 개인의 슬픔의 개별성을 삭제한다. 개인은 슬픔을 도난당한 듯한 박탈감을 느낀다. 애도 기간은 그 이후, 애도 부재의 알리바이가 된다. 애도 기간 지정은 오히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국가의 명령에 다름 아니다.
#3. 언어를 얻지 못한 고통
참사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은 아직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조각조각 파편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뿐이다. 스물한 살 생존자는 그 상황이 기괴했다고 말했다. 물이 차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고 했다. 압사는 또 다른 익사였다. 물이 차오르는 듯 숨을 쉴 수 없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는데, 2층에서 웃으며 촬영하는 사람이 보였단다. 이제 죽는구나 했을 때, 함께 온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정신을 잃었고, 그땐 분명히 발이 땅에 붙어 있었는데, 깨 보니 발이 땅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발밑에 주검이 있었다. 병원에서 친구가 사망했다는 걸 알았다.
그 고통을 듣는 우리도 온전히 이성적일 수 없다. 이 글이 알레고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알레고리는 표현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고작 선택할 수 있는 발화법이다. 알레고리는 글 쓰는 이의 무능을 증명한다.
두 사람이 자살했다. 참사의 책임 추궁을 받던 공무원이었다. 이 중 한 명은 아직 수사 대상이 아니었다. 희생양 찾기가 전방위로, 최하단까지 뻗쳐 있다는 뜻이다. 수많은 하급 실무자가 죄의식과 억울함과 공포에 노출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도 국가의 부실한 시스템의 희생자는 아닐까. 이 시스템의 희생자가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세계 2022.11.14.
기회의 불평등, 진짜 악화됐을까
몇년 전 유행한 수저계급론은 자신이 다이아몬드수저에서 흙수저까지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부모를 잘 만나야 성공하기 쉽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한국이 ‘헬조선’이라는 슬픈 현실의 반영이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부모의 소득과 집안 배경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면 청년들의 불만이 커지게 마련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 청년들은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조국 장관의 자녀교육 문제에서 불공정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형식적인 공정만 주장하는 것은 한계가 크겠지만, 이러한 목소리를 그냥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이미 기회가 불평등한 상황에서 시험을 통한 공정마저 약화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대 남성이 지난 대선에서 여당(더불어민주당) 후보에 등을 돌린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자식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것이라 대답한 비율이 2009년 48.4%에서 2021년 30.3%로 하락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기회의 불평등 문제는 얼마나 심각할까. 과거에는 소득과 기회 모두 국제적으로 한국의 불평등이 매우 낮다고 이야기돼왔다. 하지만 2016년부터 변경된 공식소득분배 지표에 따르면 가처분소득기준 소득불평등은 선진국 중 높은 수준이다. 또한 이전에는 세대 간 소득탄력성으로 측정되는 기회의 불평등도 국제적으로 낮다고 보고됐지만, 더 나은 방법론을 사용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회의 불평등도 낮지 않다. ‘고장난 사회적 엘리베이터’라는 제목의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하위 10% 가정 출신의 자녀가 평균소득을 벌려면 다섯 세대가 걸린다. 미국과 같은 수준이며 OECD 평균보다도 약간 높다.
“소득의 세습 강화”… 최근 연구결과는 ‘글쎄’
더욱 중요한 질문은 과연 기회의 불평등이 최근 악화됐는가 하는 점이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조귀동 작가의 <세습 중산층 사회>라는 책은 1990년대생 청년들에게 소득의 대물림 문제가 뚜렷해져 중상류층 부모의 지위가 자식에게 세습되는 사회가 됐다고 보고해 주목을 받았다. 한국은 노동시장에서 격차가 크고 최근 소수의 좋은 일자리가 감소해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청년들은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감소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몇몇 연구에 따르면 소득 세습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주병기 서울대 교수는 아버지의 직업이 좋은 자녀가 자라서 높은 소득을 얻을 확률로 측정한 기회불평등이 악화됐다고 보고한다. 특히 최하위 환경을 지닌 이들이 최상위소득을 얻을 확률로 따진 ‘개천용 불평등지수’가 2000년대 이후 높아졌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보고서도 20여년 동안 부모의 소득계층이 자녀의 소득에 미치는 영향력이 1980년생보다 젊은이들에게 점점 더 커졌다고 보고한다.
최근 사회학자들의 연구는 한국에서 기회의 불평등이 악화됐다는 증거가 희박하다고 반박한다. 최성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1940년대 이전 출생자부터 1980년대 후반 출생자까지 포괄하는 서베이 자료들을 통합해 부모와 자녀의 교육성취도 상관관계에 변화가 없다고 말한다. 학력 수준 상위 20%의 부모와 하위 20%의 부모 사이에 자녀가 명문대를 졸업할 확률의 차이도 커지지 않았다. 박현준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와 정인관 숭실대 교수의 연구도 부모와 자녀 세대 간 사회경제적 지위의 상대적 이동성이 악화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다. 1950년에서 1984년까지의 출생자 집단 사이에 부모-자녀의 상대적 지위의 연관을 분석하면 소득증가와 직업구조 변화로 인한 절대적 이동을 통제한 후 ‘순수한 세대 간 사회이동성’이 오히려 높아졌다고 한다. 1998년과 2018년의 30~49세까지 동일연령집단을 비교한 다른 분석도 2018년의 상대적 사회이동성이 더 높다고 보고한다.
좋은 일자리 경쟁 심화… 20대 연구 ‘아직’
이러한 연구결과는 세간의 인식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 비해 성장률이 둔화돼 부모 세대에 비해 잘살게 될 확률이 낮아진 현실이 청년들의 절망과 불만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특히 부모의 영향력이 과거보다 커지지 않았다 해도 대학교육이 확대되고 성별 격차가 줄어들어 좋은 일자리 경쟁이 심화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가 청년들에게 기회의 불평등 문제를 피부로 느끼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대부분 연구는 현재 20대인 1990년대생의 자료는 포함하고 있지 않아 최근 변화를 더욱 정확히 분석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최근의 여러 언론기사는 한국장학재단의 국가장학금 자료를 통해 고소득층 자녀들의 명문대 입학 비중이 높아졌다고 보도한다. 이에 따르면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SKY’ 신입생 중 고소득층 자녀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2020년 부모의 월소득 인정금액이 9분위(949만원) 이상인 고소득 가정 출신이 2017년 41%에서 2018년 51%, 2020년에는 55%까지 높아졌고, 서울대는 2017년 43%에서 2020년 63%로 크게 높아졌다. 의과대학이나 로스쿨 신입생도 마찬가지였다. 장기적으로 보면 재학생 기준으로 SKY 대학은 9분위 이상 고소득층 장학금 신청자 비중이 2012년 약 47%에서 2017년 36%까지 감소했지만, 이후 증가해 2019년 44%로 높아졌다. 국가장학금 신청자 중 빈곤층인 기초/차상위계층의 비중은 매우 낮지만 2012년 이후 2019년까지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저소득층인 1~3분위 계층의 비중은 2017년 27%에서 2019년 19%로 급락했다.
국가장학금 신청의 기준인 가구소득은 소득분위가 아니라 소득과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한 금액을 기준중위소득과 비교한 것이다. 소득환산액이 기준중위소득의 200%가 넘으면 9분위 이상이 된다. 2017년 이후의 변화는 부동산가격의 상승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SKY 대학뿐 아니라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전체 학생의 경우에도 9분위 이상 고소득층 신청자 비중이 2017년 21%에서 2019년 27%로 높아졌다. 따라서 국가장학금 신청자료에 기초한 기회의 불평등 논의는 주의해야 한다. 더욱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우려의 목소리는 높지만 최근 한국에서 세대 간 사회이동성이 약화됐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물론 앞으로 1990년대생을 대상으로, 그리고 자산을 고려한 기회의 불평등 문제에 관한 연구를 더 발전시켜야 한다. 문제는 결과의 불평등이 고착된 노동시장의 현실에서 전반적인 기회 축소와 경쟁 심화를 배경으로 청년들 삶의 불안이 악화되고 기회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모두가 고민해야 할 때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경제학부 교수> 주간경향 2022.11.21
지독한 슬픔은 왜 비난받는가
지난주 ‘책과 삶’ 면 프런트 기사로 신간을 소개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로 모두가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가운데, 이 참사를 함께 슬퍼하고 애도하기 위해 읽으면 좋을 책들을 추천받아 소개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슬픔을 겪은 당사자들의 개인적 슬픔을 다루는 이야기부터, 사회적으로 애도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비난받았던 죽음과 재난, 이타심으로 서로를 도우며 새로운 공동체를 재건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하나의 스펙트럼처럼 다섯 권의 책이 연결됐다.
이태원 참사 관련 사망자가 계속 늘어나고, 진상규명 과정에서 수사를 받던 이까지 숨진 채 발견됐다. 참담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책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참사를 바라보기 위한 우회적 도구로서 책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비극과 슬픔을 자신과 연결시킬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정확히는 ‘두려웠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진은영 시인이 추천한 책 <슬픔의 위안>을 <슬픔의 위로>로 착각한 것이다. 마침 그 책이 있었고, 내용도 얼추 비슷했다. 다행히도 너무 늦기 전에 책 제목을 착각한 것을 알게 됐고, 수정할 수 있었다.
인지적 착오가 빚어낸 실수였지만, 다행히 <슬픔의 위로>가 나쁜 책은 아니었다. ‘위안’과 ‘위로’의 한 글자 차이처럼, 두 책은 비슷한 이야기를 서로 다른 화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대목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회가 찍는 ‘낙인’이다.
<슬픔의 위안>엔 조앤 디디온이 사고로 남편을 잃고 쓴 <상실>의 한 구절이 소개된다. “당신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미친 게 아니라면 위험하니까. 방사능처럼. 내가 제정신이라면, 내게 일어난 일이 당신들한테도 일어날 수 있겠지.”
<슬픔의 위로>는 이 말을 이런 식으로 들려준다. “상실들은 삶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 상실의 경험이 독특하고, 격렬하고, 우발적일수록 비난의 강도가 더 심하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도 “비난은 고통과 불편함을 내보내는 한 방법”이며 “타인의 재앙은 우리가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의 증거”라고 말한다. 자신도 유사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인식에 직면하면 고통에 공감하게 하는 ‘감정이입 센터’를 즉각 폐쇄하고 비판과 비난 쪽으로 태세를 전환한다는 것이다. “놀러간 게 잘못”이라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여론은 이런 메커니즘 아래 작동한다.
정부나 통치세력들은 폭력, 불평등, 불안정의 근본 원인을 회피하기 위한 편법의 하나로 고통을 억누르는 낙관주의를 조장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정받지 못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불안과 우울증, 물질 중독, 사회적 고립의 형태로 얼굴을 들이민다.
하지만 고통에 대한 ‘혐오감’은 우리가 원하는 것, 바로 ‘안전’과 거리가 멀어지게 만든다.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고, 아픔 안에서 함께할 때 ‘사랑과 유대감, 관계 안에서 안전’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또다시 수많은 젊은 생명들을 잃으면서,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적극적으로 함께할 때 비로소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안전이 가능하다는 걸 아프게 배워가고 있다.
이영경 문화부 차장 경향 2022.11.15.
슬픔을 거부하는 권력
정혜윤 CBS PD가 2015년 11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 한 대목을 잊을 수가 없다. 세월호 유가족과 광주 유가족의 만남을 묘사한 글이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미안해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기 전까지는 광주에서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몰랐다고 세월호 유가족들이 미안해했고, 우리가 안산으로 가야 했는데 광주까지 오게 했다고 광주 유가족들이 미안해했다. 이들의 만남에 동행한 정혜윤 PD는 이렇게 적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슬픈 자들이, 가장 고통받는 자들이 오히려 책임을 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가장 슬픈 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다.’ 글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참사가 일어난 현장이면 어디서든 재확인된다. 과거사·의문사 피해 유가족들이, 산재 유가족들이, 참사 유가족들이 그렇다. 죽음이 일어난 현장에 같이 있었던 이들도 그렇다. 누군가의 죽음에 자책감과 죄책감을 호소하는 이들은 언제나 가장 슬픈 자들이다. 이 말은 10·29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그날 확성기도 없이 상황을 해결하려 뛰어다닌 경찰관은 “소명을 다하지 못해 면목 없고 죄송하다”고 울었다. 그날 비번이라 현장에 출동하지 않았던 소방관은 동료들이 뛰어다닌 영상을 보다가 그날 같이 일하지 못한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 사람들을 살리려 심폐소생술을 했던 간호사는 “제가 한 심폐소생술이 아프진 않았나요”라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추모 현장에 남겼다. 살아남은 생존자는 자신만 살아남아 망자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들에도 이런 사회를 만들어 미안하다는 말들이 가득하다. 이번에도, 가장 슬픈 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다.
‘가장 슬픈 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다.’ 이 말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슬퍼하기를 가장 거부한다’라는 말로도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책임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책하는 동안,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슬퍼하기를 끊임없이 거부한다. 이태원 참사 뒤 한국 사회가 정확하게 그런 모습이다. 참사에 대한 책임감을 가장 크게 가져야 할 이들이 가장 빠르게 책임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며칠 전 수석비서관들과의 간담회에서 했다는 발언은 상당히 투명하다. “막연하게 정부 책임이라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진상규명을 통해) 법적 책임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국가의 무한책임’을 운운하면서도 함께 새어 나오는 이런 종류의 말들은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또 무엇에 무관심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참사에 대한 책임을 ‘막연한 책임’과 ‘법적 책임’으로 나누고, 이 중 ‘막연한 책임’은 거부하면서 법적 책임만을 다루겠다는 게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받아들이길 거부한 ‘막연한 책임’이라는 막연한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경찰관과 소방관, 간호사와 생존자들, 그리고 유족들이 온몸으로 떠안고 있는, 바로 그런 종류의 책임일 것이다. 저 막대한 권력과 의무를 가진 대통령이 이런 책임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오직 권력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법적 책임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무슨 말을 어떻게 정제해야 할지 솔직히 잘 판단이 안 된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슬퍼하기를 가장 거부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지금 시민들이 정부의 법적 책임을 따져 묻고 있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수 시민들이 분노하며 묻고 있는 것은 ‘너희는 이 참사 앞에 슬퍼하고 있는가’라는, ‘막연한 책임’에 관한 질문이다. 권력 쥔 자들로서, 동료 시민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이 수많은 생명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진정으로 슬퍼하며 자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뭘 하자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경향 2022.11.15.
혐오라는 괴물에 등을 보이지 말자
요즘 기사를 보기 힘들어 아예 눈과 귀를 막는다는 분들이 주변에 많다. 10·29 참사에 관한 기사들마다 감정을 쉽게 주체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나부터도 그러하고 주변의 학생들 또한 다르지 않다.
특히, 참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자들의 발언을 들을 때마다 더욱 심해지는 듯하다.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답답한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기사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게 되는 것 같았다.
물론 정부에 맞서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민추모 촛불 제안’을 기획하는 시민들의 기자회견도 지난주에 있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시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다. 내 질문은 그 슬픔과 충격이 얼마나 진지하게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다. 혹시 혐오가 덧씌워진 대책들 앞에 더 큰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 등을 돌린 채 일상으로 회귀한 사람들이 대다수는 아닐까 우려스럽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덮어둔 채 말이다.
2001년 미국 세계무역센터에 9·11테러가 발생하고 열흘 뒤인 21일에 프랑스 툴루즈시에서 화학공장이 폭발했다. 가옥 1만채가 완파되고 공장에서만 그 즉시 2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시민들은 모두 9·11테러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포에 휩싸였다. 프랑스 의료인류학자 디디에 파생과 리샤르 레스만은 바로 이 시기에 프랑스 사회가 트라우마 개념을 공유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소위 ‘인류학적 변화’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정신의학(전문가들)이 정신적 고통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여러 전문가가 참여하는 ‘피해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연히 충격의 정도에 상관없이 시민들은 즉각적으로 트라우마를 인정받고 임상적 확진과 상관없이 인정과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몇 번의 참사가 발생했지만 프랑스와 같은 전환기를 맞고 있는가. ‘진짜’ 책임자는 없고 희생양만 찾는 똑같은 매뉴얼 속에 시민들의 트라우마는 사회적 논의조차 되지 않는 듯하다. 문제는 그러는 사이 시민들은 각자도생의 삶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혐오의 얼굴과 말로부터 등을 돌리고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특히 젊은 학생들의 경우 더욱 그러해 보인다. 보름이 지난 시점 대학캠퍼스 안은 싸늘해진 날씨와 함께 고요하다.
하지만 나는 10·29 참사가 4·16 참사와 함께 한국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적 트라우마’로 남을까봐 깊이 우려된다. 미국 사회학자 닐 스멜서는 문화적 트라우마를 그 사회의 존속을 위협하거나 “문화적 근본 전체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기억”이라 설명한다.
이미 공정담론 속에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차별과 혐오가 팽배한 현실에서 연이은 참사로 인해 생명에 대한 위협과 죽음에 대한 무책임, 그리고 조롱 섞인 대응을 보며 한국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트라우마처럼 남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최근 영국 신경과 전문의 수잰 오설리번은 2015·2016년 스웨덴 난민 아이들 169명이 1년 안팎의 기간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소위 ‘체념증후군’이라는 집단적인 기능성 신경장애 현상에 대해 소개했다. 이것은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위기(즉, 생명에 대한 위협)에 직면한 아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한 소년의 증언에 따르면, “깊은 바닷속에서 깨지기 쉬운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서 “물이 쏟아져 들어와서 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고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 이미 다른 양상의 체념증후군이 존재한다고 느껴진다. 부당한 과로 업무에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서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직장인들이 있지 않은가.
한국이라는 혐오의 바닷속에서 본능적으로 찾아낸 안전지대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로그아웃을 택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잠을 잔다고, 혹은 잠시 의식을 잃는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더 큰 혐오로 백래시될 것임을 확신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한 확신이 문화적 트라우마로 확산되지 않도록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혐오에 등을 돌린 채 각자도생의 길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등을 서로가 기댈 수 있는 지지대로 활용하며 혐오와 마주 서야 하지 않을까.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경향 2022.11.15.
국가의 부재와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
이태원 참사 사진을 1면에 실었던 미국 <뉴욕 타임스>는 “확실히 막을 수 있었다”(absolutely avoidable)고 보도했다. 여기서 참사를 막지 못한 주체는 정부, 즉 국가다.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는 전국 각지 학생들이 그린 타일벽화가 있는데, 그중 한 타일벽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라가 있었는데….”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있는 전국 각지 학생들이 그린 타일벽화 중의 한 작품. 사진 권혁용
이태원 참사와 국가의 부재는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과 맞물려 있다. 정치학자 낸시 버메오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집권자가 민주적 수단을 활용해 민주주의 가치와 규범, 작동원리를 점진적으로 잠식해 가는 현상을 민주주의 퇴행이라 불렀다. 그 특징적인 징후는 행정부 권력 증대와 야당 괴롭히기다. 행정부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견제하는 입법부와 사법부를 약화하고, 정치적 경쟁자인 야당을 부패집단 또는 악의 무리라는 프레임을 씌워 수사-기소라는 매뉴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윤석열 정부는 경찰, 검찰, 감사원 등 억압적 국가기구를 동원해 야당 괴롭히기에 여념이 없다. 트럼프도 집권 뒤 한해 동안 한 일은 오바마 행정부의 업적을 뒤집는 일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현재까지 한 일도, 잊을 만하면 나오는 대통령 설화와 문재인 정부 비난·정책뒤집기 아닌가? 경찰, 검찰, 감사원 등 국가기구를 동원해 야당을 괴롭히면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등엔 공권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을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권력일 때도 있다.
윤석열 정부 집권당은 대통령 충성파로 지도부를 구성했고 유승민, 이준석 전 대표는 체계적으로 치밀하게, 그리고 ‘적법한 절차를 따라’ 각각 배제됐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이 다수인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들의 입법 취지를 무력화하는 시행령 정치를 하고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안이 대표적이고, 중대재해처벌법을 우회하는 시행령 개정도 추진되고 있다. ‘시행령 정치’는 미국에서도 이뤄졌는데 정치학자 앤드루 리브스와 존 로가우스키는 유권자 다수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의회를 우회하는 방식은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다. 국가권력은 선택적으로 행사되고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들을 방기한다. 국가권력이 권력분립과 견제와 균형을 핵심으로 하는 입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무너지도록 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최애 단어인 ‘자유’는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다. 고교생이 그린 만평 ‘윤석열차’에 “엄중 경고”했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자유와 자유주의에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책임성의 체제다. 입법부와 사법부의 견제에 행정부 권력이 책임을 지는 수평적 책임성이 그 하나이고, 시민과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는 수직적 책임성이 또다른 하나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국회에 책임을 진다는 개념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시민과 유권자에게 책임을 진다는 자세는 있는가?
정치학자 다니엘레 카라마니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두가지 위협으로 포퓰리즘과 전문기술 관료주의를 든 바 있다. 시민들의 신탁위임(트러스트)을 받은 전문기술 관료주의(expert technocracy)가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권력자에게만 성과를 보여주고 평가받을 뿐 시민의 요구와 민의에 반응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치학자 로버트 달이 언급했듯이, 정치적으로 동등한 시민의 요구에 정부가 지속해서 반응하는 체제다.
판사 출신 ‘법률 전문가’ 행정안전부 장관, 시행령 정치의 법리적 근거를 강변하는 검사 출신 ‘법률 전문가’ 법무부 장관, 대법원에서 보복기소라며 공권력 남용으로 지적받고도 권력 핵심에 발탁된 검찰 출신 ‘법률 전문가’ 대통령실 관계자, 정경관 유착의 아이콘 ‘경제 전문가’ 국무총리, 그리고 ‘부패수사 전문가’ 대통령을 보면, 전문기술 관료주의의 위협이 이 나라에서 현실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참사에 대해, 희생자에 대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공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은 전문기술 관료 출신들은 자신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 지금 이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다.
권혁용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겸 정치연구소장 한겨레 2022.11.15.
을숙도를 새까맣게 뒤덮었던 철새들을 떠올리며
1980년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부산 강서구 집에서 낙동강 하굿둑(1987년 준공)을 통해 사하구로 통학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하굿둑 가운데쯤 을숙도가 나오는데, 겨울철 그곳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철새가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곤 했다. 철새 수천마리가 홰를 치다 일제히 날아오르는 모습을 종종 보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야말로 ‘국내 최대 철새도래지’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친구들과 을숙도 갈대밭에 몰래 숨어들어 청둥오리나 고니 같은 철새를 잡아보려고도 했다. 천연기념물인 철새들을 잡다 경찰에 잡혀갈 수 있으니 을숙도 쪽으로는 가지 말라는 어른들 말에 겁을 먹고, 이후로는 을숙도에는 잘 가지 않게 됐다. 철새 말고는 갈대밭만 무성했던 허허벌판인 을숙도엔 별다른 놀 거리가 없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개발되지 않은 땅, 대신 먹잇감은 풍부했던 당시 을숙도는 철새에게는 낙원이었을 것이다.
2019년 1월, 20여년 넘게 낙동강 하구 철새 모니터링을 하는 환경단체 ‘습지와새들의친구’에서 고니가 사라져간다고 알려와 30여년 만에 을숙도를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문화회관, 체육공원, 에코센터, 낙동강 생태탐방선, 부산현대미술관. 이들 시설에 딸린 주차장과 각종 편의시설…. 허허벌판이었던 어릴 적 기억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로 바뀐 모습이었다.
낯설었다. 새로 들어선 여러 시설보다도 겨울철이면 새까맣게 앉아 있었던 철새들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2급 보호종인 큰고니 등 철새를 찾아보려고 을숙도 등 낙동강 하구를 종일 샅샅이 돌아다녔는데, 종일 돌아다녀 큰고니 10여마리를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철새 군락지가 낙동강 하구 곳곳,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으로 잘게 쪼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습지와새들의친구는 2011년 4200여마리였던 큰고니 수가 2018년 1500여마리, 2019년 1200여마리로 해마다 줄어들었다고 했다. 박중록 습지와새들의친구 운영위원장은 “아파트 건설 등 낙동강 하구 근처 지역 여러 개발사업과 수변지역 도시화에 따른 철새 서식환경 악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해 낙동강 하구 철새 개체 수가 감소했다”고 분석한다.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이 조사한 겨울철 조류 동시센서스를 보면, 2006년 1월 낙동강 하구에서 관찰된 조류 개체 수는 6만6961마리였는데 이후 차츰 줄어들어 2020년 1월에는 4만872마리로 조사됐다. 낙동강 하구를 찾는 조류 수가 줄어드는 것은 그만큼 자연환경이 훼손됐다는 방증이다.
부산시는 낙동강 횡단 교통량 증가 등을 이유로 대저대교 등 16개 다리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부산항 신항 물동량 증가, 에코델타시티 건설 등 서부산 개발로 2020년 하루 평균 58만6000여대 수준인 교통량이 2025년에는 73만6000여대가 될 것으로 전망돼 현재 다리 10개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단체는 낙동강 다리 건설 계획이 철새 서식처 파괴를 확대·증진할 것이라며 부산시에 계획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다리 건설에 따른 시민과 물류 편익’을 앞세운 부산시와 ‘자연보호의 생태적 가치 공공성 확보’로 맞서는 환경단체는 3~4년 동안 여러차례 토론회 등을 열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갈등만 커지는 모양새다.
답은 없을까. 시는 다리 건설에만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기존 낙동강 횡단 다리들의 연결로 증축과 신호체계 정비,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 증편 등 환경 훼손을 최소화하면서도 차량 흐름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대안 마련부터 고민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 을숙도는 다시 ‘철새의 천국’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평화로운 을숙도에서 수천마리 철새가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장관을 본 적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언젠가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바람이다.
김영동 | 전국부 기자 한겨레 2022.11.15.
선진국이라기엔 부끄러운 한국과 대통령의 품격
선진국에 대한 기준은 명확지 않다. 보통은 경제력 강한 국가를 일컫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국내총생산(GDP) 1위 중국이나 1인당 국민소득(GNI)이 10만달러를 넘는 버뮤다, 군사대국 러시아 등을 선진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경제가 중요한 기준이기는 하지만, 시민 삶의 질이 높고 글로벌 책임을 이행해야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7개국(G7,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캐나다·일본)은 모두 선진국이지만 범위가 좁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과거 선진국 클럽으로 불렸으나 회원국을 늘리면서 개발도상국이 다수 참여해 지금은 달라졌다. 한국이 포함된 G20은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등 대륙을 대표하는 국가들도 있어 순수한 선진국 모임이라고 하기 어렵다.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가 지난해 7월 한국을 선진국 그룹에 편입했다. UNCTAD는 회원국을 A(아시아·아프리카), B(선진국), C(중남미), D(러시아·동구) 등으로 분류하는데, A그룹에 있던 한국을 B그룹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2021년 기준 한국의 GDP는 세계 10위이고, 1인당 GNI는 24위, 무역규모는 8위에 자리했다. 군사비와 병력, 전투기, 전차 등을 고려한 군사력은 6위권으로 평가된다. 유엔 195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이 선진국 그룹 32개국에 들어간 것은 이상하지 않다.
미국의 ‘US뉴스’가 커뮤니케이션 기업 BAV그룹,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과 공동조사해 발표한 ‘2022 최고의 국가’에서 한국은 85개국 중 20위였다. 항목별 순위에서는 국력과 기업가 정신이 각각 6위, 문화적 영향이 7위로 상위권이었다. 전 세계 메모리반도체 D램의 70%, 낸드플래시의 절반은 한국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생산한 것이다. 오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의 절반가량도 한국 조선소에서 만들었다. BTS와 블랙핑크의 K팝과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은 한국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하지만 낮은 평가를 받은 세부 항목이 적지 않았다. 성평등, 인종차별, 임금격차, 기후변화 방지 노력, 동물권 보호, 정부정책 투명성 등에서는 100점 만점에 10점 내외에 그쳤다. 유엔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발표한 ‘2022 세계 행복보고서’에서도 한국은 경제력 관련 항목은 높은 수치를 기록한 반면 도덕성이나 포용성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행복지수는 146개국 가운데 59위였는데, OECD 회원국으로만 보면 최하위권이다. GDP와 기대수명 항목에서는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사회적 지지, 선택의 자유, 부정부패, 관용 등의 항목에서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외형적으로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에 걸맞은 품격은 갖추지 못했다. 단기간에 고속성장을 하느라 내면을 돌보고 성숙시킬 여유가 없었던 탓일까. US뉴스가 최고의 국가로 꼽은 스위스는 가족 친화, 성평등, 사회정의에 대한 헌신, 환경에 대한 관심 등 ‘삶의 질’과 ‘사회적 목적’ 분야에서 각각 세계 1위였다. 경제적 풍요 못지않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포용하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지도자(리더)가 더 낮은 평가를 받는다. 미국 여론조사업체 ‘모닝 컨설트’가 전 세계 주요 지도자를 대상으로 하는 지지율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또 꼴찌였다. 11월2~8일 조사 결과를 보면 윤 대통령은 지지율 20%로 22개국 지도자 중 가장 낮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이태원 압사 참사 후 ‘핼러윈 비극이 세계에서 가장 비호감인 지도자에게 시험대가 됐다(Halloween Tragedy Is a Test For the World’s Most Disliked Leader)’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미국에서 비속어로 이미 글로벌 망신을 샀던 윤 대통령은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및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한 순방에 MBC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막아 비호감도를 끌어올렸다. 부인 김건희 여사는 현지에서 각국 정상 배우자 프로그램에 불참한 채 개별 일정을 진행했다. 김 여사에게 ‘오드리 헵번 따라하기’ 비판이 일자 여당 중진 의원은 “대통령 부인 중에 이렇게 미모가 아름다운 분이 있었나”라고 치켜세웠다.
윤 대통령 임기는 이제 갓 반년을 지났을 뿐이고 4년 반이 남아 있다. 언제까지 주권자 시민에게 부끄러움을 떠넘길 텐가. 밑바닥까지 갔으니 앞으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기저효과라는 용어를 주술처럼 믿는 걸까.
안호기 논설위원 경향 2022.11.16
왜 지금 횡재세인가
최근 유럽연합 이사회는 ‘연대기여금’의 이름으로 횡재세를 공식화했다. 연대기여금은 화석연료 부문의 유럽연합 회원국 기업이 올해나 내년에 벌어들이는 초과이윤에 대해 최소 33%의 세율로 부과될 예정이다. 법인세 과세표준이 2018~2021년 4개년 평균에 비해 20% 넘게 늘어난 부분을 초과이윤으로 본다. 세입은 주로 에너지 취약 계층 및 중소기업 지원에 쓴다. 회원국 별도의 횡재세를 도입하면 연대기여금은 적용 안 된다. 횡재세는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헝가리, 그리스, 루마니아, 네덜란드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다. 벨기에도 도입을 확정했다. 오스트리아도 도입으로 가닥이 잡혔다. 독일과 미국은 논의 중이다. 나라마다 제도가 다르다. 우여곡절도 적잖다.
예컨대 매출부가세와 매입부가세 신고금액 차이에 기초해 횡재세를 부과하는 이탈리아에서는 납세 기업들이 행정소송에 나선 가운데 정부가 미납 과태료를 올리고 횡재세율도 10%에서 25%로 인상했다. 법인세에 더해지던 특별세에 25% 세율을 추가해 횡재세를 부과하는 영국에서는 리즈 트러스가 40여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폐지 수순을 모면했다. 스페인에서는 천연가스 매출 가격의 기준치 초과 정도를 따져서 세액을 산정하는데 향후 대상 업종을 은행업까지 확대하고 세입은 공공주택 건설과 국영철도 투자 등에 쓸 예정이다. 헝가리는 항공사와 보험사한테도 횡재세를 걷는다. 오스트리아는 노동조합의 제도 설계로 현금영업이익(EBITDA) 증가분을 과세대상이익으로 정의한다.
그래도 문제의식은 다르지 않다. 그것은 팬데믹과 전쟁을 배경으로 경제위기 기간에 정상 범위를 넘는 독점자본의 초과이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물음과 연결된다. 독점자본에 초과이윤을 몰아준 위기가 일반 대중의 희생을 수반하는 과정이었다면 그 초과이윤을 사회적 순편익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위기가 불러온 편익과 비용을 재분배함으로써 경제적 자원배분을 개선할 여지는 없을까. 핵심 질문은, 이 경우 공정한 보상은 어떤 재분배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가이다.
경제학에서 이와 관련된 논란은 역사가 짧지 않다. 제1차 대전 당시 영국에서 정립되어 세계 최초로 횡재세에 근거를 제공한 ‘전시이윤 원리’는 전쟁 이전보다 늘어난 전시이윤은 환수되어 전비 조달에 기여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반면 당시 미국에서는 이윤 말고 투하자본에 대한 공정수익률을 중시하는 ‘초과이윤 원리’가 맞섰고 1917년 10월 통과된 미국 최초의 횡재세 법안은 그 결실이었다. 초과이윤을 계산하는 영국식 ‘평균소득법’과 미국식 ‘투하자본법’은 그렇게 등장했다. 한편 초과이윤과 ‘횡재이윤’이 구분되기도 했다. 전자가 독점자본의 가격설정 결과라면 후자는 외부 요인에 따른 시장 변동 결과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독점자본이 횡재이윤을 몽땅 가져가는 현실에서는 횡재이윤과 초과이윤을 구별하는 실익이 없다.
한국에서도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과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법인세법 개정안이 발의되면서 횡재세 논의가 시작됐다. 볼멘소리부터 나온다. 혹자는 한국 정유사들은 외국 석유 회사들과는 영위 업종이 다르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국가적 위기를 배경으로 외부 요인에 힘입어 전례 없는 초과이윤을 벌어들였다면 업종과 상관없이 횡재세의 환수 대상이 맞다. 한국 정유사들은 국제가격을 수용할 수밖에 없어 독과점기업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에는 독과점기업 자체가 있기 어려울 텐데 과연 그런가. 독과점이 아니어서 시장지배력이 없다면 횡재세를 부과해도 가격 인상으로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전가할 수 없다. 그런데 왜 한편으로는 정유사들이 독과점이 아니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격 전가 때문에 소비자들만 피해를 입는다고 주장하는가. 궤변이다. 횡재세가 기업투자를 줄인다는 분도 있지만 일회적인 한시 대책을 두고 그런 우려는 과장되었다. 1980년 미국 카터 정부의 실패한 횡재세도 언급되지만 그것은 원유 공급과잉을 내다보지 못한 잘못일 뿐이다. 2020년 상반기의 손실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었고 이월공제로 감세 혜택이 주어지므로 따로 고려될 사유는 아니다.
경제위기가 일상이 되면서 심화되는 양극화에 대한 우려가 깊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로 절박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약자들을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양극화가 눈앞에서 버젓이 진행되는데도 그것을 막아낼 수 없다면 우리 사회는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버리는 셈이다. 횡재세도 못하면 다른 의제인들 쉬울까. 입법이 속도를 더해 연내 꼭 통과되기를 소망한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 교수 경향 2022.11.16.
통화긴축 시대의 새로운 정책조합
0월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다소 둔화된 것으로 나타나 시장의 안도감을 낳고 있다. 하지만 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하더라도 고물가 지속으로 금리 고점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입장이다. 내년에도 금리 인상이 지속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국내 통화정책 운용에도 부담이 커지고 있다. 내외 금리차 확대로 인한 자본 유출 우려 탓에 미국과의 동조적 금리 인상이 요구되지만, 동시에 부동산이나 자금시장 경색 등과 맞물린 국내 금융불안을 고려하면 운신의 폭이 제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물론 코로나 위기 초입에도 급격한 자본 유출입으로 인한 취약성 현실화 우려가 현안으로 제기된 바 있다. 여기서 얻은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국제적으로 자본 유출입의 변동성에 맞선 일국의 통화정책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 핵심 고리는 ‘글로벌 금융사이클’이다. 즉 자산가격, 자본 흐름 및 차입 등이 글로벌 차원에서 강한 동조화 흐름을 보인다는 것이다. 금융·자본 흐름의 자유화에 따른 많은 편익에도 불구하고, 대내외 금융여건의 동조화로 인한 자본 유출입의 변동성 심화가 오히려 대내 경제 및 금융 안정을 훼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국제경제학의 전통적인 ‘트릴레마’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진단이 나온다. 트릴레마는 자유로운 자본 이동과 환율 안정, 통화정책의 독립성 등 3가지 목표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인데, 지금처럼 글로벌 금융사이클이 주도하는 상황에서는 환율체제(변동환율 대 고정환율)와 무관하게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담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트릴레마가 아니라 ‘딜레마’의 세상인데, 이 경우에는 독립적인 통화정책은 자본 이동을 직간접적으로 관리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적인 통화정책 외의 정책 수단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크다. 이미 국제통화기금(IMF)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또 코로나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도 거듭해서 자본 유출입 위험에 맞서 통화정책 이외에도 외환시장 개입을 포함하여 자본 이동 관리와 거시건전성 조치 등을 아우르는 ‘통합정책체계’(Integrated Policy Framework)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도 인플레이션 부담이 큰 상황에서, 또 내외 금리차로 인한 환율불안이 이어지는 환경에서는 당장에 금리 인상을 멈추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국과의 인플레이션 격차가 큰 데다 국내 부동산 불안이나 신용경색 위험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통화긴축 동조화에만 매달리기는 어렵다. IMF가 권고한 것처럼, 환율불안과 자본 유출 위험을 억제할 외환시장 개입이나 다양한 안전장치들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를 통해 국내 통화정책은 진정으로 국내 인플레이션 압력을 관리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글로벌 금융사이클의 변동성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국내 투자자 기반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대내적으로 외화차입 의존성을 줄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여전히 국내 금융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영향력이 크다. 해외 금융여건 경색과 환율불안으로 이들이 포지션을 조정하게 되면 국내 금융시장도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다. 지난 10여년간 고수익을 좇아 해외투자가 급증해 왔지만, 대내 금융안정 차원에서 연기금이나 기관투자가들의 국내 투자 환류를 유도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나아가 금융시장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정부 역할도 중요하다. 그동안 은행권 위주의 규제 안착에도 불구하고 정작 비은행 금융권은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금융안정 측면에서 많은 공백을 낳고 있다. 특히 레버리지와 유동성 규제로 은행의 시장조성자 역할이 위축되고, 비은행 중개플랫폼 등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시장 쏠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금융시장 안정에 정부의 능동적인 ‘최종 시장조성자’ 역할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유동성 지원기구나 구조조정기구의 설립과 운영에 은행이나 민간에 의존하는 방식보다는 미국처럼 정부의 발권력을 활용한 직접 개입 방식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 경향 2022.11.17.
각자도생을 거부한다
너무 많은 글과 말이 쏟아지고 있는 요즘, 굳이 말을 더 보태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생각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뭐라도 한마디씩 뱉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10월30일 일요일 오전 6시. 단톡방에서 첫 소식을 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취하는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이 없다. 연거푸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는다. 아들이 종종 외국인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노는 걸 알기에 이미 심장은 쿵쾅거리고 맥박도 빨라졌다. 아들에게 ‘자고 있었어’라는 답이 올 때까지 30여분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한 아들도 친구들은 괜찮은지 걱정하며 참담하다고 했다. 그날 대한민국의 아침은 전 국민 안부 묻기로 꽤나 분주했다. 20대 자녀를 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노부모들도 머리 희끗한 중장년 자녀와 가족을 챙기며 ‘별일 없다, 다행이다’라는 말이 오갔으리라. 그런데 과연 우리는 별일이 없는가.
친구 J는 아들이 군 복무 중이어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날 외박을 내고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 시간 사람이 너무 많아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고 해 같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한 아들이 너무 걱정돼 친구는 상담 신청할 것을 권했고 아들도 그러겠다고 했지만, 평소와 너무 다른 아들 모습에 친구는 불안하다고 한다. 데자뷔처럼 여러 단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8년 전 고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이 수학여행 가기 이틀 전 세월호 사고가 났다. 아들의 수학여행도 취소되었다. 문득 자다 말고 소식을 접한 내 아들은 그 현장에 있었던 친구의 아들보다는 충격이 덜할까 의문이 들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현장에 있었건 없었건 충격이 크건 작건 단순히 경중을 따지고 비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거 같다. 연거푸 동년배 친구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지켜본 이 젊은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온 국민이 그렇듯 나도 눈물과 허탈과 분노로 애써 뉴스를 외면하려 했지만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도 아니다. 국가 시스템 부재, 불통 리더십 등 총체적 난국 속에서 온갖 추측과 해석이 난무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상식 이하의 말과 상황들이 쏟아지고 있다. 미덥지 못한 국가 체계에서, 무능한 정치체제하에서, 불확실성이 남발되는 전대미문의 시간 속에서 나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당장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평안한 것이 아닌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내 일상도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데.
문득 오래전 일본에 연수 갔을 때, 일본 NPO(비영리 민간단체) 관계자들이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을 겪으며 일본 사람들이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는데, 위기의 순간에 나를, 우리 가족을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이웃이라는 것이다. 국가도 지자체도 아니고 바로 이웃과 공동체, 시민사회만이 자신을 지켜주었던 그 경험 덕분에 일본 시민사회는 급속히 성장했다는 것이다. 혹시 지금 우리 국가가 이런 걸 기대한다면, 어림없다. 우리는 든든한 국가, 믿음직한 정부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시민사회 공동체를 원한다. 시민사회가 성장하기를 누구보다 바라지만, 국가 없는 시민사회를 바라는 건 절대 아니다. 각자도생을 거부한다. 제발 우리를 뼈저리게 하지 마라.
남경아 <50플러스세대> 저자 경향 2022.11.17.
윤 대통령의 ‘나의 투쟁’, 우리가 닮아가지 말아야 할 것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뒤집어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전쟁”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배격하면서 “국가의 탄생을 주재했던 것은 전쟁”이라는 그의 가설적 담론이 떠오른 것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뒤 6개월을 지나면서다. 기회마다 “자유”를 외쳐온 그에게서 다원적 자유주의 사상에 기반한 통치행위를 찾기 어렵지만, 나치즘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칼 슈미트의 주장―정치의 본령을 화해할 수 없는 아군과 적군 사이 투쟁에서 찾았다―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의 품에 있다가 느닷없이 찾아온 기회를 거머쥔 그에게 어떤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비전이나 청사진은 애당초 없었다. 대통령 당선 자체가 목적이었는데 덜컥 대통령이 됐다. 현실정치 경험은 없고 오로지 범죄(자)에 맞선 전쟁터에서 일생을 보낸 검사였다. 정치, 정책을 놓고 경쟁하기보다 피아간 유무죄, 투쟁의 삶을 살아왔다. 경쟁과 투쟁의 차이는 상대방을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있는데, 검사의 상대방은 부정되고 사회에서 배제돼야 하는 범법자들뿐이다. 그런 검사에게서 인간 하나하나 앞에서 느낄 어떤 멈춤, 머뭇거림, 떨림, 흔들림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훈련은 그가 국가운영의 최고책임자로서 반대편의 충언이나 고언을 귀담아듣고 학습함으로써 부족한 공부를 채우려고 노력하기보다, 21세기 한국판 라스푸틴에게 의지하는 편을 택하게 했을 수 있다.
윤 대통령 취임 뒤 6개월 동안 보여준 것은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여성가족부 폐지를 비롯해 독불장군식 밀어붙이기와 피아를 식별해 ‘아’는 껴안고 ‘비아’(적)는 내치는 행위가 대부분이었다. ‘내 사람’을 요직에 앉힌 인사, 그런 인사를 통한 검-경 갈등과 감사원 운영, 임기가 보장된 국민권익위원장 등에 대한 사퇴 압박, 언론 통제 등이 모두 그런 ‘피아 구별’에 준거한 것이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쫓아낸 일, 말로는 공정과 상식의 회복을 강조했으나 행동으로는 부인 김건희씨에게 얽힌 잡음에는 눈감는 불공정과 자신의 말실수를 인정·사과하고 넘어가는 대신 뭉개는 몰상식을 보여줬던 것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행태상으로 볼 때, 현재 한국 정당정치의 장에서 여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두말할 필요 없지만, 집권여당인 국민의힘도 이전 문재인 정권을 반대하는 야당, 입법권력인 국회의 다수를 차지한 민주당에 반대하는 행태를 보일 뿐이다. 서로 반대하는 야당만 존재하므로 여야 간 협치나 통합은 실현 불가능한 주문이다. 정책 차이나 경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에, 과거 문재인 정권의 통치행위는 통치행위로 인정될 수 없고 법적 제재 대상이 된다. 그 결과 법률상 독립기관인 감사원이 전 정권을, 검찰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겨냥한 수사에 집중하고 있다. 이전 정권과 단절한다며 사정기관에 ‘내 사람’만을 앉히고, 교육, 노동, 경제, 외교, 국방 등 분야에는 구태의 극우적 인사들을 주로 기용했다. 결국 윤 대통령이 꾸린 진용은 과거로의 퇴행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물론 남북관계를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의 퇴행이다. 이전 정권 때 이뤄진 각종 유착 비리 색출을 그나마 윤 정권에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가 먼 옛일이 아닌데, 우리는 다시 158명의 아까운 생명을 잃었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희생 앞에서 집권세력은 공적 책임을 절감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모색하고 강구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책임자들은 면책성 발언으로 일관하고 정권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세우기만 했다. 봉건시대 왕도 가뭄이나 수해가 발생해 백성이 고통을 당하면 자신의 부덕 탓이라며 하늘을 우러러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실 이전 결과, 용산경찰서는 대통령 경호 부담이 크게 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경찰청을 관할하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파면하라는 최소한의 요구조차 외면하고 있다. 이런 ‘피아식별법’에 따른 것일 텐데, 대신 일선 경찰을 닦달하다 용산서 정보계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출생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고 자살률은 가장 높은 대한민국이다. 사회를 따뜻하게 보듬어도 모자란데 각계각층에서 분노가 분출하고 있다. 분노는 적개심으로, 나아가 증오심으로 진화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탑승한 항공기 추락을 염원한 종교인까지 있었다. 맹자가 인간 본성으로 꼽은 인의예지(仁義禮智) 4단,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우리한테서 저 멀리 물러나고 있다. 집권세력에 맞서 싸우되 닮지는 말아야 한다. <민들레>라는 신생 온라인 매체가 가족 동의 없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발표했다. 애도의 뜻보다 정치적 목적이, 적개심이 스며 있다고 느끼는 게 나만의 일일까? 숫자로만 표시될 때 애도의 뜻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점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그렇지만 감정 이입을 가능케 할 서사가 없는 이름뿐이라는 점에서 숫자만 밝혔던 것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행위들은 오히려 집권세력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이 성립된 것부터가 민주당 강성 의원들과 극렬 지지자들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그래서 강조하건대 ‘윤석열 퇴진 촛불’을 들자고 선동하지 말라. 아직 때가 아니고 자칫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 지금 윤 정권에 맞서 싸울 선차적 방안, 시민사회가 제기해야 할 것은 민주당과 정의당에 미래지향적인 입법권력을 행사하도록 강력히 요구해 관철하는 일이다. 노란봉투법 등 말로 그쳤던 법안이 한둘이 아니다. 국가보안법과 정당법 폐지, 노동법 개선,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기본권, 차별금지법 제정, 비례대표 확대, 결선투표제 등…. 돌아보라. 이들 중 단 하나에라도 이른바 검수완박법, 공수처법에 기울였던 역량의 10분의 1이라도 기울였는지를!
홍세화 |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한겨레 2022.11.17.
남향에 산다는 착각
가끔 고향 서울에 들를 때마다 지인들에게서 듣는 두가지 불평이 있다. “올해 여름이 가장 더운 것 같아” 그리고 “요즘 경기가 제일 안좋은 것 같아”
매년 그해가 가장 더울 리도, 그해 경기가 제일 나빴을 리도 없을 텐데 항상 올해가 제일 문제라고 한다. 눈앞에 놓인 것이 더 중요하고 심각해 보인다. 인간의 지각은 그만큼 미시적이고 즉시적이다.
한국인의 남향집 선호는 유명하다. 아파트 신규 분양광고에 ‘전 세대 남향’이란 문구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미분양 폭발력이 큰 아파트 시장에서, 건설회사는 소비자가 좋아하는 조건을 최대한 반영해 집을 지어야 한다. 그중 남향은 신성불가침 영역에 해당한다. 이렇게 당연하게 취급되는 남향 선호는 당연히 오랜 전통으로도 느껴진다. 남향 선호가 유구한 한국의 주거문화에서 황당할 정도로 최근의 것이라는 사실은 상상하기 힘들다.
예로부터 한국의 집은 무덥고 습한 여름바람과 차고 건조한 겨울바람에 적응해야 했다. 그런데 구할 수 있는 재료는 물과 습기에 약한 목재뿐이라, 우리 조상들은 지혜를 발휘해야 했다. 많은 비에 목재로 만든 집을 보호하기 위해 집보다 훨씬 큰 기와지붕을 덮었고, 습기에 약한 황토와 문풍지로 마감된 내부를 건조하게 유지해야 했다. 그 비책이 바로 오랜 경험이 쌓여 정리된 게 풍수지리다. 풍수지리가 찾은 최상의 해결책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이른바 배산임수였다. 그런 지형이면 잔잔한 공기 흐름, 즉 항구적인 대류현상이 발생하기에 바람으로 습기를 말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좁은 나라에 뒤는 높고 앞에 물이 있으면서 집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땅이 충분할 리 없었다. 근대 들어 집 수요가 많아지자, 전통적 풍수지리설에선 크게 치지 않던 보완적 개념, ‘향’이 등장한다. 지붕 처마가 길게 나오는 한옥에서는 바람에 비해 향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서향이 여름에 덥다 해도 지붕 처마가 가려 주니 큰 문제는 아니었고, 한옥의 모든 방은 직사광이 아니라 마당에서 반사되는 간접광에 의지하는 구조였기에 향에 강하게 구속될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남향에 대한 집착도 없었다. 전통 가옥들이 창밖 경치나 경사 흐름 같은 지형에 순응하는 식으로 지어져 온 이유다.
요즘처럼 남향집이 도시를 지배하게 된 데는 아파트가 큰 역할을 한다. 아파트는 풍수지리의 가장 높은 가치인 배산임수를 실현할 수 없었지만, 낮은 가치였던 남향은 어렵지 않게 만족시킬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배산임수를 포기하고 남향을 선택할 정도로 사람들은 남향에 집착했다. 70년대 서울 강남 한강변에 들어선 고급아파트들은 멋진 한강 전망도 북쪽이란 이유로 포기하고 옆 아파트 뒷면밖에 안보이는 남향을 선택할 정도였다.
그런데 모든 아파트가 남향으로 지어졌으니 모든 사람이 남향의 이점을 누리며 살게 됐을까? 한국인이면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는 아파트는, 남쪽에 거실과 안방이, 반대쪽에 두개의 작은 방과 주방이 있는 4인 가족 기준 32평 ‘표준 평면’이다. 일전에 인테리어 설계를 의뢰한 한 가족에게 각자 방에서 자신이 보내는 시간을 타임워치로 측정하도록 한 적이 있다. 측정 결과는 그곳에 사는 사람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남쪽 안방과 거실은 해가 진 뒤에나 사람이 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가장 좋은 자리의 넓은 안방은 밤 10시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직접 빛이 들이 않는 침침한 북쪽에 자리한 주방과 아이들 방은 오후 내내 형광등을 켜놓고 사용하고 있었다. 밝은 남향 빛의 혜택을 입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티브이(TV)와 소파 그리고 더블침대였다. 그들은 남향집이 아니라 북향집에 살고 있었다.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보이지 않는 도시> 저자 한겨레 2022.11.17.
“미안합니다.”
지난 13일 서울지하철 이태원역 1번 출구로 올라가는 계단부터 포스트잇이 빼곡했다. 전날 밤 늦가을비가 내렸다. 시민들이 쓴 편지, 음료수, 과자, 곰돌이 인형 그리고 수북한 국화가 젖을까 자원봉사자들이 비닐을 덮어뒀다. 흰 스웨터를 입은 20대 여자가 골목 귀퉁이에 서서 추모편지를 쓰려는 사람들에게 펜과 포스트잇을 건넸다. 여자는 추워 보였다. 4시간 넘게 자원봉사자라고 쓰인 목걸이를 걸고 거기 있었다. “저기 저분 보이시죠. 저분 혼자 여기 정리하는 거 볼 수가 없어서 같이 있는 거예요.” 그가 가리킨 쪽엔 베레모를 쓴 60대 남자가 추모물품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포스트잇에 쓰인 글들은 비슷했다. “꿈 많은 나이, 우리는 당신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어른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난 날 김백겸 경사는 외쳤다. “사람이 죽고 있어요.” 울먹이며 현장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퍼졌다. 그날 이후 그는 <비비시>(BBC)와 인터뷰하며 오열했다. “제가 고맙다는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닌데…. 저는…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는데…. 더 면목이 없고… 죄송합니다.” 이 인터뷰 영상 아래 댓글들이 달렸다. “이것이 위로다.”
이태원역 1번 출구 포스트잇들은 유족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가 함께 있다.’ 책 <슬픔의 위안>에서 론 마라스코는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썼다. 절벽에 매달린 것처럼 일상이 갑자기 꺼져버린 유족에게 필요한 건 밧줄의 다른 끝을 누군가 잡고 있다는 신뢰라고 했다. 미안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미안하다는 말은 당신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함께 지겠다는 뜻이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까닭은 우리는 서로를 돌봐야 하는 책임을 나눠 진 사람들이란 자각 때문이다. 그게 공동체이니까.
애도는 공동체가 슬픔에 잠긴 당신을 받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의례이기도 하다.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한 정부는 애도의 반대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참사가 나고 재난관리 총책임자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일성은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였다.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거다. 그날 거기에 간 사람들 탓이라면, 이제 어딜 가든 인파가 얼마나 모일지, 그 모임에 주최는 있는지 각자 확인해야 한다. 정부 책임을 묻는 외신기자 질문에 한덕수 국무총리는 농담으로 답했다. 이어진 책임전가로 한국 정부 최고위직들이 전한 메시지는 이렇다. ‘당신 곁에 우린 없다.’ 책임을 묻는 수사는 현장에서 분투했던 일선 소방관과 경찰을 향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듣고 민간잠수사 25명은 팽목항으로 갔다. 김상우 잠수사는 4·16구술집 <그날을 말하다>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바닷속에서) 로프를 두손으로 잡아야 하고 시신이 훼손되면 안되니까 아이가 입은 재킷에 손을 끼고 안고 가는 거예요. 그 아이와 내 얼굴이 맞닿아요. ‘엄마한테 가자.’”
한명이라도 더 데리고 나오려고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 잠수사가 숨지자 해경은 관리감독 권한이 없는 동료 민간잠수사 공우영씨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가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데 3년이 걸렸다. 민간잠수사 25명 가운데 8명이 뼈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뼈조직이 죽어가는 골괴사 판정을 받았다.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을 앓는 잠수사들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생활고를 겪었다. 잠수사 황병주 씨는 2017년 촛불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가족들은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지만, 우리는 죽는 날까지 유가족들에게 미안합니다…. 어른이고, 국민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김소민 | 자유기고가 한겨레 2022.11.17.
지속 불가능한 한국 경제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촬영된 동영상 클립들을 보면, 참사는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몇 시간 전부터 신고 전화가 이어졌고, 질서 있게 군중을 해산시킬 수 있는 ‘골든 타임’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방관했고, 감당할 수 없을 수준으로 군중의 밀집도가 높아지면서 순식간에 참사가 일어났다. 이태원 희생자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는 ‘제2의 세월호 참사’이다. 안전과 관련된 참사뿐만이 아니다. 미리 대비하지 못하면 경제적 참사도 발생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1997년 경제위기를 겪었고,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다가오는 탄소중립 시대의 위기에 우리 정부는 사실상 두 손을 놓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암울하다.
2018년 기준으로 발전(전환) 부문과 산업 부문이 우리나라 탄소 순배출량의 약 39%와 38%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발전 수요의 약 53%가 산업용이므로, 산업 부문의 직간접적 탄소배출량은 전체의 58%를 상회한다. 산업 부문에서는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정유, 디스플레이, 반도체 등 6개 업종이 전체 산업 배출량의 79%를 차지하고 있다. 또 이들 6개 업종에 자동차, 조선, 기계, 전기전자 업종을 포함하면, 이들의 탄소배출량은 전체 산업의 직간접적 배출량의 83% 이상을 차지한다.
한마디로, 우리 주력산업들이 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하고 있다. 이는 제조업이 우리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26%로 매우 높고, 주력 제조업들이 1970년대 이후에 형성된 중화학공업 중심이기 때문이다. 탄소 1㎏을 사용해 생산하는 부가가치를 ‘탄소생산성’이라고 부르는데, 중화학공업 산업은 탄소생산성이 매우 낮은 산업이다. 따라서 탄소중립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탄소생산성이 높은 산업구조로 바꾸는 ‘산업전환’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소중립에 관한 국내의 논의와 관심은 주로 발전 부문에 집중되어 있다. 발전 부문에서 재생에너지 비중과 원전 비중을 어떻게 설정할 것이며, 녹색분류체계상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원전 발전 원료와 폐기물 처리 시설 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물론 중요한 이슈이다.
그러나 발전 부문의 이런 문제보다도 산업 부문의 탄소배출량을 2050년까지 2018년의 20% 수준으로 감축하는 것이 더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정부는 산업전환이 어렵다고, 기존 중화학공업 생산 공정에서 탄소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기술개발과 이를 위한 R&D 지원을 차선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정책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탄소배출이 가장 많은 철강산업의 경우에 2030년과 2050년 사이에 수소환원제철 공정이 상용화되어서 탄소배출 자체를 없앨 수 있다는 가정을 탄소중립 시나리오에서 하고 있다. 그러나 수소환원제철이 실제로 상용화될 수 있고 상용화되더라도 2050년 이전에 상용화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예측을 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우리 정부의 탄소중립 대책은 이런 불확실한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정부의 희망대로 수소환원제철이 상용화된다고 하더라도, 한국 철강산업은 가격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다. 수소환원제철에 그린 수소가 대량으로 필요한데, 국내에서 이를 충분히 생산할 수 없기에 80% 정도를 수입한다고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가벼운 수소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특수선 제작 등 상당한 비용이 든다. 따라서 그린 수소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국가에 수소환원제철소를 짓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우리 제철산업은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기존의 중화학 공업이 사양화되고, 최신 공장들은 탄소중립이나 RE100 불이행에 따른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국외로 이전하기 시작하면, 동남권을 중심으로 지역 경제의 파탄과 대량실업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경제와 사회는 1997년 경제위기 당시보다 더 극심한 침체에 더 오랫동안 빠질 수 있으며, 이 경우 사회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경제적·사회적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장기적인 관점에서 산업전환을 준비하고 시작해야만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이라는 목전의 경제 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탄소중립과 RE100을 달성할 수 있는 산업전환의 ‘골든 타임’을 놓치면, 우리는 돌이키기 어려운 경제적 참사를 피할 수 없다. 정권 쟁탈에 매몰된 정쟁이 아니라 탄소중립과 산업전환이 현재 우리 정치의 주요 의제가 되어야만 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경향 2022.11.18.
이태원 참사, 기록을 미래로 보내자
10.29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20여 일이 지났다. 아직 애도하는 중이고, 원인을 찾는 중이고, 수습하는 중이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을 공유하고, 시민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야 할 때이다. 또한 진상과 책임자 규명도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참사 관련 기록을 빠짐없이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할 틀을 만드는 것이다. 진상규명, 추모, 연구 모든 것을 위해 기록이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 공공기록과 시민기록 모두 수집해 미래로 보내야
참사기록은 참사 원인을 밝혀줄 기록과 대응 및 수습 기록, 그리고 추모기록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것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생산하고 관리하는 기록이고, 뒤의 것은 시민기록이다.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수습하는 공공기록과 아픔을 공유하는 시민기록을 모두 수집 보관해 미래로 보내야 한다. 참사의 사회적 기억을 모아 미래로 보내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참사기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비용을 치러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월호참사 수습 과정에서 기록을 제대로 수집하고 관리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일이다. 세월호참사는 그 진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저러한 수사와 조사가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합의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런 결과의 이유는 참사 대응 초기에 기록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수습과정에서 기록을 제대로 수집하고 관리하지 못해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른 대표적 사례다.
세월호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대통령지정기록물에 접근하고 이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지만 대통령지정기록물에 세월호참사의 진상을 밝혀줄 기록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검찰이 세월호참사를 수사한다며 대통령기록관을 세 번이나 압수수색해서 대통령지정기록물에 접근했지만 결정적인 증거기록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통령지정기록물이 진상을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헛된 바람일 수 있다. 오히려 기록을 남기지 않았거나, 남긴 것도 불법적으로 처분했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참사의 수습 과정에서 체계적 기록관리를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정부와 서울시가 기록 관리 나서라
역사적 사회적 기억을 모아서 미래로 보내는 일은 국가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다. 더욱이 그것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참사라면 그 의무는 더욱 크고 무겁다. 그래서 정부와 서울시가 기록관리에 나서야 한다.
첫째, 기록이 소실되지 않고 역사기록이 되도록 해야 한다. 공공기록물법 제27조의2 제2호에는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의 보호 등 국민의 권익 보호를 위하여 기록물의 폐기금지가 긴급히 필요한 경우”에는 기록의 폐기를 금지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고, 같은 법 시행령 제26조 제2항에는 “영구기록물관리기관의 장은 특별히 보존기간을 달리 정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단위과제에 대해서는 보존기간을 직접 정할 수 있다”라고 정해 놓았다.
이 두 조항 모두 국가기록원장과 서울기록원장의 권한으로 시행할 수 있다. 법령에 따라 정부와 서울시는 이번 참사와 관련한 기록의 폐기를 금지해야 한다. 참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기관들, 이를테면 대통령실, 서울시청, 행정안전부, 소방방재청, 경찰청, 서울경찰청, 서울소방안전본부, 용산구청 등이 이번 사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곳들이다. 또 이 기관들에게 이번 참사 발생 전후의 원인 규명, 대응과 수습 기록을 단위과제로 한데 묶고, 영구보존 기간을 부여하는 등 따로 분류해서 관리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추가 진상규명과 수습에 대한 피해자 지원과 역사적 평가를 위해 모든 기록이 하나도 누락없이 역사기록이 되도록 해야 한다.
시민기록은 벌써 소실되는 중
둘째, 시민 추모기록을 완전하게 수집하고 보존해야 한다. 참사 이후부터 많은 시민들이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물품과 글귀를 남겨 추모에 동참하고 있다. 시민들이 남긴 추모와 위로의 메모 하나하나는 10.29 이태원 참사라는 ‘사회적 기억’의 한 대목이다. 이것을 스쳐 지나가는 행동으로 끝나게 해서는 안된다. 이미 이전에 발생했던 참사의 경우 기록을 수집해서 보존하고 있는 사례가 있다. 구의역 사건과 강남역 사건의 추모기록은 서울시에서 수집하여 보존하고 있다.
구의역 사건 당시 시민들이 남긴 추모기록들. 서울시가 수집해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참사의 추모기록은 아직 수집하지 못하고 있다. 추모 공간을 관리하는 주체가 명확하지 않고, 대표성이 없어서 서울기록원 같은 아카이브가 협의할 대상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들을 대표자라고 할 수는 없다. 피해 유가족의 모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시민들이 하나하나 붙여 놓은 메모지들을 수습해서 기록관리 조치를 할 수 없다. 정부와 서울시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기록을 수집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만약 서울시가 추모기록 수집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시민을 설득해야 한다. 실외의 추모 공간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바람은 기록의 소실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미 많은 기록이 사라져 가는 중이다. 매우 급하다.
유족과 피해자의 기록 접근 보장해야
셋째, 참사기록에 대한 피해자와 유가족의 접근을 완전히 보장해야 한다. 참사에 대한 애도와 진상규명 요구는 금방 끝날 일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때 관련 기록의 접근과 열람, 그리고 공개는 반드시 보장돼야 할 전제 조건이다. 특히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기록에 대한 접근은 상처를 씻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게 할 가장 적극적인 지원정책이다. 피해자와 유가족이 무언가 하려고 할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기록이다.
그러나 벌써 지우고 없애려는 반문명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핼러윈을 앞두고 작성된 용산경찰서의 정보보고서가 삭제되었고, 관련자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용산구청은 기존에 공개되었던 핼러윈 회의 문서를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비공개하고, 일부 기록은 알 수 없는 시스템 오류로 확인이 불가능하다며 시민의 알 권리를 외면하고 있다.
철저한 기록과 빠짐없는 공개만이 사회적 비용 줄인다
참사에 대응하고 수습하는 가장 확실한 조치는 철저하게 기록하고 빠짐없이 공개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적 논란을 없애고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빨리 잊히길 원해서 기록되고 공개되는 것을 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결코 잊히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송곳처럼 불쑥 드러날 것이다. 그때 우리 사회는 또 대립과 갈라치기로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그 상황을 맞지 않기 위해서 ‘지금, 여기’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공개해야 한다.
조영삼 뉴스타파 전문위원 / 전 서울기록원장 뉴스타파 2022.11.18.
줄일 걸 줄여야지…허울만 남은 ‘약자복지’
재정건전성 강화 기조 아래 편성된 내년도 예산안과 관련하여 윤석열 정부가 강조한 약자복지의 진정성과 실체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 위기 이전부터 여러 국제기구들은 불평등과 격차 심화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안전망 강화를 강조해왔다. 개별 국가에서도 코로나 대응뿐만 아니라 회복 과정에서 직면한 고물가 상황 등 취약계층에게 더욱 가혹한 경제 여건 속에 국민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재정의 역할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약자복지의 방향과 적절성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약자복지라도 실천하려는 정부 의지가 예산안에 제대로 반영됐는지 세심하게 묻고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국회는 이를 꼼꼼하게 심의하고 조정하여 국민의 삶이 불안정해지지 않도록 일상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다.
대통령과 정부는 몇 가지 단편적 사례를 들면서 사회복지 분야나 하위 부문별 예산 증가액 규모나 증가율 중심으로 반복해서 설명한다. 국민은 언론을 통해 이러한 설명을 듣고 ‘약자복지’라는 방향 속에 편성된 내년 예산안이 적어도 취약계층의 어려운 삶을 나아지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예산안 발표 이후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언론마다 약자복지와 관련된 기존 지원들이 축소되거나 중단되어 예산이 삭감된 사례를 찾아내고 있다.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고령의 노인들이 생계를 위해 참여하는 공공형 노인일자리 축소로부터 시작된 약자복지의 진정성과 실체에 대한 논란은 보건복지와 고용 분야뿐만 아니라 개별 부처마다 다양한 형태로 취약계층을 지원해왔던 사업들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취약층 예산 싹둑…진정성 의구심
우선 청년층 지원과 관련하여, 대선 공약이나 인수위 당시 발표된 내용보다 정부 매칭 지원이 줄어 내년 하반기에 시행될 예정인 청년도약계좌 도입에 따른 조정을 이유로 중소기업 재직 청년을 대상으로 지원했던 청년내일채움공제가 축소되었다. 정책 대상이 소규모에 불과한 시설퇴소 자립준비청년과 은둔형 청년 지원 확대를 강조했지만 한편에서는 청년층과 경력단절 여성 등을 위한 재정지원 일자리도 축소되었다. 정부의 예산안 발표와 설명 이후 약자복지와 관련해서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취약계층 지원 중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국정과제에 반영된 농식품바우처는 2025년이 되어야 전면 확대될 예정이다. 현재 지난 정부에서 시작된 시범사업(약 89억원)이 일부 지역에서 진행 중이다. 그런데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제한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농식품바우처 시범사업을 근거로 기존의 취약계층 임산부 친환경 농산물 지원(약 158억원)과 초등 돌봄교실 아동 과일간식 지원은 당장 내년부터 중단되고 예산(약 72억원)도 삭감되었다. 저소득층 청소년 교육콘텐츠 데이터 지원도 여전히 이를 이용하는 취약계층 청소년이 존재함에도 집행률이 낮다는 이유로 예산(약 30억원)이 전액 삭감되었다.
국정과제에 담긴 정책마다 고유한 목적이나 계획에 따른 정책 대상의 범위와 시행 시점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일부의 정책이 약자복지를 대표하는 것처럼 강조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핑계로 기존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을 축소 또는 중단하면서 예산이 삭감된 전형적인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소규모의 예산이지만 취약계층의 팍팍한 일상에서 그나마 소중하게 느껴지던 지원들이 제대로 증액되지 않거나 아예 중단될 상황에 처하다보니 국회 앞에서 열리는 시민사회단체와 정책 수혜대상이 직접 참여하는 집회에서는 “줄일 걸 줄여야지”라는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언론으로부터 가장 큰 비판에 직면했던 공익활동형 노인일자리 축소의 경우 다시 현행 수준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정부 입장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약자복지와 관련된 예산 증가율 속에는 재정당국 입장에서 증액하고 싶지 않더라도 법령에 규정된 근거(기초연금 등) 또는 위원회 등이 합의한 원칙(기준 중위소득 인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반영했던 자연증가분이 여전히 대부분을 차지한다.
문재인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 정부가 편성했던 첫 번째 예산안조차 당시 국정과제에 반영된 기초연금의 인상 등 주요 정책 공약 추진을 위한 대규모 예산 증액이 이루어졌던 것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상황이다.
예산안의 상세한 정보 공개해야
그럼에도 아직도 고물가 상황에 따른 법정 의무지출 확대로 인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고 정부가 진정으로 약자복지라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 정책 추진 의지를 반영한 사례가 무엇인지 찾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몇 가지 사례만 가지고 이를 강조하는 것이 ‘웃프고’ 안쓰럽다. 어쩌면 이는 정부가 예산안 편성 과정에 단순히 자연증가분을 반영한 것인지, 약자복지 관련 정책 추진 의지를 적극 반영한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부 예산안 발표 시, 각 부처별 세부사업 단위로 법령에 근거한 자연증가분에 의한 것인지, 국정과제에 따른 정책 의지와 국민의 정책 수요를 반영한 것인지 명시하여 공개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정부 예산안 편성 과정에 담당 부처와 기획재정부의 당초 입장과 조정 결과는 무엇이었는지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최근 국회의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장애인 권리 예산이 대폭 증액된 것처럼, 정부 예산안을 수정 반영한 결과와 관련해서도 여야를 불문하고 누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적극 노력하여 최종 반영된 것인지를 국민이 알 수 있게 명시하여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약자복지든 보편복지든 국민들의 삶을 위한 예산안 편성과 결정 과정에서 재정당국과 각 부처, 여야를 포함한 정치권이 각각 어떤 입장을 가지고 노력했는지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학계, 언론과 시민사회가 정부 예산안과 국회 예산심사 결과에 대한 엄밀한 평가를 내리고 이러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국민들은 대통령과 정부의 반복적인 설명만이 아니라 정책과 예산을 중심으로 국민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정부와 정치권의 진정성과 노력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최현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경향 2022.11.18.
유럽연합이 가는 길
유럽연합은 공동체성이 견고해지는 동안 끊임없이 도전을 맞이했다. 전 세계가 대립각을 세우는 시대에는 더 그렇다. 지난 2월24일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써 10개월을 향해가고 있다. 전쟁은 올 한 해 내내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우크라이나와 지리적으로 밀접한 데다 관계설정 등 민감한 사안이 걸려 있었던 유럽연합에는 더욱 그러하다. 주요 가치로 협력과 평화를 위시하며 지켜온 유럽연합의 공동체성 역시 다시 주목받았다.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공동체와 개별 국가 간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힌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사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도 유럽연합을 향한 우려 어린 시선은 늘 존재했었다. 그러던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얽힌 연합 내부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그동안 추구했던 공동체의 기조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십 년 전 새로운 세계질서의 대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던 유럽연합은 역풍 속에서 안간힘을 쓰는 기세다.
브렉시트로 고초를 겪었지만 돌이켜보면 유럽연합은 창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전례 없는 지역공동체이다. 스물일곱 개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들이 하나의 기치를 세우고 움직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존중받았다. 국제사회에서는 유럽연합을 이루는 개별 회원국들뿐 아니라 연합 자체가 유럽을 대표하는 일련의 조직으로 부각되었다. 유럽연합은 창설 계기였던 경제뿐 아니라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개별 국가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유럽연합은 실체를 띤 유의미한 조직으로 변화해나가는가 싶었다.
얼마 전 난민을 태운 배의 이탈리아 입항이 거부되자 프랑스가 난민 200여명을 수용하기로 한 일이 있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두 나라 사이에 신경전이 오갔다. 한편 난민 수용 문제는 이미 유럽연합 회원국들 사이에서 오래된 이슈이므로, 이런 신경전을 드문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갈등 이슈에 대해 국가 간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 애쓴다. 난민 문제에 관해서도 유럽연합 차원에서 망명신청센터 설치나 역외 입국관리소 설치 등 공동 대응책 마련에 힘썼다. 그러나 평화와 공동체의 번영이라는 추상적 기조와 구속력 없는 합의문은 매번 유럽연합의 발목을 잡는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유럽으로 몰려든 난민 440만여명은 연합에도 회원국들에도 다루기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연합 사람들은 전에 없던 불안정성을 실감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과 이로 인한 가스 공급 부족은 올해 내내 유럽연합 국가들에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였고, 집행위원회는 회원국들에 난방 비상대책 마련을 촉구했으며, 개별 국가들은 겨울 추위를 벌써부터 실감하고 있다. 연합을 유지하던 질서로는 작동하지 않는 국가별 인프라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경제적 변화는 물론이고, 테러나 전쟁, 생존에 대한 위험을 감지한다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나라마다 서로 다른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이런 대중의 마음을 이용한 포퓰리즘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이런 와중에 2025년 5000명 규모로 창설될 유럽연합의 첫 번째 자체 평화유지군인 신속대응군도 구체적인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다. 신속대응군은 구조나 대피, 지역 안정화에 우선 투입되며, 첫 임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도 들린다. 신속대응군이 창설되면 이를 이끄는 첫 번째 회원국은 독일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태생적으로 군사 안보 영역에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유럽연합으로서는 이를 계기로 공동체가 앞세웠던 가치들이 다시 시험대에 오르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찾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지난 10월 말 대통령궁 연설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과 경제 격변, 그 모든 위험에서도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서로 간의 신뢰이며, 어려운 시대를 지나가게 하는 것은 결국 갈등회복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에게는 위기가 아닌 때가 드물었고, 도전 거리가 없었던 때가 적었으며, 숙명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늘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말처럼, 세상이 불확실할수록 우리는 공동의 길에 대해 확신하며, 겸허하게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고, 각자 자신의 앞에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며 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경향 2022.11.19.
차별과 착취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공교육
혐오를 등에 업고 당선된 대통령은 지지율이 추락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 사회의 곳곳에 차별과 혐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게끔 촘촘히 신경 쓰는 이 국가는, 끊임없이 “공정”과 “자유”를 앞세워 국민들을 길들이려 하고 있다. 가짜뉴스에 책임을 묻는 것이라며 해외순방에서 MBC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승인 안해주고 날리’면서 언론통제를 하더니, 이번에는 공교육을 ‘날리고’ 있다.
교육부가 2022 개정 교육과정 행정예고안을 고시했다. 일상에서 수많은 국민이 죽었지만 ‘슬퍼하되 구조는 묻지 말라’며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는 이 국가는, 국민들이 차별과 착취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도록 공교육을 바꾸려 하고 있다. ‘성평등’과 ‘성소수자’라는 단어가 사라졌고 ‘노동자’는 ‘근로자’로 바뀌었다. 빠른 속도로 국민은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요구받으며, 그 자리를 기업이 차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모양새다. 생태전환교육과 노동교육을 총론 교육목표에 반영하라는 시민들과 교사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철학의 부재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 국가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정’을 부르짖는다. 민주주의 개념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대체표현으로 넣으며 ‘좌편향 교육’을 막겠다고 한다. 사회구조를 볼 수 있게 하는 “위험한 교육”은 모두 없애고, 모두가 개별적으로 각자 ‘노-오력’하여 ‘공정’한 게임에서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한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도록 요구받는 이 국가의 방향성은, 초1부터 심폐소생술을 배우도록 추가하게 했다. 10·29 참사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있는 국가가 내놓은 교육개정안이라는 점이 참담하다.
이 교육개정의 방향성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뜻이 정확히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말 빠른 속도로 오랜 시간 일궈온 성평등, 노동, 역사 교육운동의 결실을 무너뜨리며 다양성과 포함의 시대로 나아가는 방향에 역행하는 결정을 하고 있다. 마치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이 ‘미국인의 자부심을 훼손시키는 다양성교육을 금지하라’고 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사람보다 자본을 우선한다는 점 때문이다. 씁쓸하게도, 참 닮았다.
후퇴하고 있는 한국의 안타까운 현실의 속도감을 높이는 데에는, ‘국민의 목소리’라며 차별과 혐오를 방조하는 국가의 역할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 지난 9월과 10월에 있었던 개정 교육과정 공청회는 조직된 극우세력의 폭력과 혐오 선동의 장이었다. ‘동성애 옹호교육 반대, 성평등 반대, 페미교육 반대’ 등 혐오 메시지를 쏟아내는 피켓을 든 사람들의 고성, 욕설, 물리적 폭력, 단상 난입 등으로 공청회는 진행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경찰이 현장에 와있었지만 교육부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11월이 되고 행정예고안이 나왔다. 교육과정 연구를 맡은 연구진의 의견 그리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길 원하는 시민들의 요구사항이 아니라, 공청회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적극 반영된 안이 나왔다. 교육부는 이 행정예고안을 ‘국민의 목소리를 담은 교육과정 개정’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차별과 혐오를 방조하면서 이를 유일한 “국민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공교육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순응하는 “근로자”를 양성하겠다는 국가는, 동시에 초·중등 예산을 깎아 고등교육 예산으로 편성했다. 이쯤 되면 공교육을 포기하겠다는 국가의 의지표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공교육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우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공존하여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식, 기술, 태도를 깨닫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나라의 공교육은 충분하게 그 역할을 하지 못했던 까닭에, 이 사회는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이주배경, 인종, 경제력 차이, 장애, 외모에 따른 차별과 혐오가 점철되어 자신을 긍정하기 어렵고 생존마저 걱정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퇴행 이전에도 공교육은 너무나 불충분했고, 더 나아지기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국가는 오히려 오랜 시간에 걸쳐 공교육이 다루도록 해온 수많은 ‘존재’들을 지우고,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며 착취가 용이한 교육으로 바꿨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정권이 시작한지 불과 6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4년 반을 더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존버’할 때가 아니다. 인내가 아니라 분노와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덧붙여서, 11월29일 화요일까지 행정예고안에 대한 의견을 받는다고 한다. 이미 어떤 목소리만 반영하는지 알게 됐기 때문에 큰 기대를 가지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목소리를 기록에 많이 남겨두자. 이메일을 보낼 곳은 nacur@korea.kr 이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미디어오늘 2022.11.19.
희생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죽음의 해석은 다분히 사회적인 ‘배치’다. “호상입니다”라는 조의에 망자의 사전동의가 있을 리 없다. 사회의 암묵적 합의가 있을 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언론 보도다. 장삼이사의 극단적 선택은 신병 비관, 실연, 생활고, 수사 압박, 입시 실패 등 정형화된 선택지 중 하나에 기필코 배치된다. 물론, 모든 죽음을 낱낱이 해석하기란 불가능하다. 타자의 죽음 앞에 가로놓인 실존의 강을 건너가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타자의 죽음을 산 자의 감정으로만 처리하면서 그걸 애써 ‘애도’라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실의에 빠진 돈키호테를 향해 산초는 “슬픔은 짐승이 아닌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슬픔이 지나치면 사람도 짐승이 돼버린다”며 나무란다. 진정한 애도에는 멜랑콜리(슬픔과 우울)를 넘어서려는 정동이 있다. 애도는 죽은 자에게 시도하는, 얼핏 무망해 보이는 ‘말 걸기’다. 왜 말을 걸어야 하는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삶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에게 말을 거는 건 죽음에 깃든 삶의 이야기를 들어 복원하고자 함이다. 그제야 산 자의 자의로 죽음을 배치하지 않고, 실존의 강을 건너기 위한 배를 띄울 수 있다.
참사에 의한 희생은 개별적인 이야기마저 넘어선다. 정치적 맥락의 죽음이다. 슬퍼만 해서는 죽음의 원인을 사인화의 굴레에 가두고 만다. 책임자들을 처벌한다고 정의가 온전히 복원되지도 않는다. 참사의 배후에 죽음을 강제하는 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은 체제의 거대한 구조 앞에서 대면해야 한다. 희생자들에게 정당한 발언권을 제공하고 구술을 채록하는 것, 산 자들의 세계에 죽임의 힘이 작동하는 구조적 맥락을 가시화하고 전복하려는 것까지가 참사에 대한 애도의 전 과정을 이룬다.
그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체제 지배세력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며 진상 조사 활동을 벌인 시간이 8년 남짓이다. 지금이 그 시간보다 고통스러운 건 뒤늦은 자각 탓이다. 이태원 참사는 긴 애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안전한 체제를 향해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가혹하게 증명했다. 애도의 과정은 충분하지 못했고, 결과도 미완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애도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 숱하다. 우리의 발부리는 무엇에 걸린 것일까.
‘유사 애도’는 애써 식별해야 보인다. 그나마 윤석열 정부가 ‘국가애도기간’을 정하고 슬픔 이외의 행위를 금지한 ‘탈정치화 기획’ 따위는 꼼수가 빤히 보인다. 지배 시스템 안에 내장된 자기지시적 원리를 찾는 건 훨씬 어렵다. 시스템의 힘은 자신이 정상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효과에 있다. 정작 시스템을 장악한 건 정상작동을 못 하게 하는 시스템 내부의 ‘반시스템’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날마다 드러나고 있는 (타락한) 관료주의를 보라. 그런데도 시스템은 해법마저 시스템 내부에서 찾도록 회로화돼 있다.
우리의 정동이 그 회로에 갇혀 있는 한, 애도의 완성은 요원하다. 지난 8년 남짓 우리가 그 회로를 꿰뚫어보려고 해왔는지 의문이다. 가령, 세월호의 침몰을 음모론으로 재구성하려는 일각의 집요한 시도는 죽임의 시스템을 냉철하게 응시하려는 애도의 이성을 흐려놓지 않았는가. 시스템의 악마성 대신 실제 악마를 색출하고자 하는 욕망은 이미 회로화된 욕망이 아니었나. 그리하여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담아야 할 수첩은 자기독백으로 채워졌고, 세월호 참사가 이태원 참사로 회귀하는 걸 막을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명단 공개에 어떤 애도의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추궁도 마찬가지다. 명단 공개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순수한 슬픔 이상을 금지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 위에 있다. ‘유족들의 동의를 받았느냐’는 질문도 본질은 아니라고 본다. ‘명단 공개는 희생자들에 대한 말 걸기인가’로 질문은 전환돼야 한다. 생전 공적으로 통용된 이름 몇자 호명한다고 말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자칫 죽음에 신병 비관, 실연, 생활고, 수사 압박, 입시 실패를 배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기왕 이름을 불렀으면 애도의 대화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희생자들을 죽임의 시스템 회로 밖으로 구조해낼 수 있을 때까지.
안영춘 논설위원 한겨레 2022.11.20
기자의 슬리퍼와 도어스테핑
부끄러운 고백 하나. 지난 주말 MBC 기자와 대통령실의 충돌을 보니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기억이 났다. 30여년 전 경찰 출입기자 시절 기자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먹다남은 김치찌개와 자장면을 덮어높은 신문 쪼가리들에 수북한 담배꽁초들, 여기저기 벗어놓은 옷가지에 나뒹구는 세면도구들이 마치 난민 수용소를 방불케했다.
실내금연이 당연한 요즘 후배 기자들은 이 보다는 더 정돈된 환경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시 경찰출입 기자들의 복장은 또 어떠했을까? 서울역 노숙자가 취재기자를 같은 노숙자로 알고 무료급식소를 친절히 안내해줬다는 소설같은 실화도 있었다.
새벽부터 사건·사고를 찾아 헤매는 경찰 출입기자들 중 상당수는 기자실에 들어오면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신발은 편한 슬리퍼가 대세였다. 그러다보니, 형사계는 물론 정보과, 경무과 등 경찰서 내를 가끔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곤 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자에게 슬리퍼가 사라진 것은 이른바 '시경캡'이라고 불리는 서울경찰청 출입기자 때였다. 새벽보고를 마치면 아침식사를 위해 무궁화식당이라고 불리는 간부식당에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했는데, 항상 서울청 로비 정면 의경 초소를 지나야했다.
언제부터인가 몇몇 젊은 의경의 기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치안의 사령부인 엄숙한 서울경찰청을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기자가 못마땅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마음. 의경의 그런 따가운 시선을 느낀 이후, 기자는 추리링과 작별했고 슬리퍼는 기자실 내부로 한정했다.
지난 18일 MBC 이 모 기자와 대통령실 이기정 홍보기획비서관 사이에 벌어진 설전의 여파가 작지 않다.이 기자는 최근 MBC의 최근 보도를 "악의적"이라고 규정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 "뭐가 악의적이란 거냐?"며 항의성 질문을 던졌다.
이기정 비서관이 이를 가로막자 언론자유까지 언급되는 거친 언쟁으로 확산됐다. 같은 기자 출신인 이기정 비서관과 MBC 기자 사이에 반말과 쌍욕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로 험악했다. 대통령실은 이를 "심각한 사안"이라고 규정했고 급기야 21일 윤 대통령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이 중단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통령실 청사 1층 로비에는 대통령의 동선을 가리는 가림막까지 등장했다.
MBC 기자와 비서관 간의 설전 동영상은 유투브 등으로 퍼지면서 주말 사이 논란이 됐다
국민의힘 김종혁 비대위원 페이스북 캡처
여권 인사들은 하나같이 MBC 기자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기자라기보다 주총장을 망가뜨릴 기회를 찾는 총회꾼 같다" "슬리퍼로 대한민국 언론 수준을 한 큐에 날려버렸다" "대통령 회견장에서 슬리퍼 신고 팔짱 끼고 시비걸듯 질문하고 소리지르는 기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난생 처음 봤다"라는 맹비난이 쏟아졌다.
동영상을 다시 보니 MBC 기자의 '삼선 슬리퍼'가 유난히 선명해보였다. '대통령 출근길 취재에 슬리퍼라니?'라는 아연실색에 필자의 초년병 시절 슬리퍼가 오버랩됐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과거 검찰 경찰 출입기자 시절에는 급한 일이 발생하면 기자실에서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MBC 기자를 맹비난한 기자 출신 정치인들도 그 옛날 기자 시절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함께 돌아다닌 기억이 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슬리퍼 취재기자는 용납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뒤통수에 고함을 친 것보다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다. 그렇다고 윤석열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을 단번에 중단한 것은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어스테핑은 과거 구중궁궐에 갖혀있던 대통령들의 불통을 깨는 윤 대통령의 소통 의지이자 용산시대의 의미이기도 하다. 또, MBC 기자의 교체를 요구하거나 출입 징계를 주겠다는 대통령실의 거론도 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번 MBC 기자의 태도불량이 나비효과처럼 윤 대통령의 적대적인 언론관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
지난 주말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다시 20%대로 떨어졌고 21일 리얼미터 여론조사도 1.2% 하락한 33.4%에 그쳤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언론과 싸워서 득을 본 대통령은 없다. 언론은 국민과 소통하는 창구이자 국정의 동반자이자 훌륭한 감시자가 될 수 있는 존재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국민과 소통하는 자리가 절실하고 많을수록 좋다. 그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이다.
훗날 '슬리퍼 하나로 윤석열 시대 소통의 상징이 사라져버렸다'는 해학적 평가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김규완 기자 CBS노컷뉴스 2022.11.21.
언론의 침묵이 깨어진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성취를 내심 부러워하던 일본 정치가 한국 정치를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점이 있다. 바로 한국 검찰이 2014년 일본 산케이 신문의 가토 당시 한국지국장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한 때다.
세월호 사건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가토의 칼럼,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 누구와 만났을까?>가 문제였다. 애당초 일본 극우민족주의를 대변하면서 독도 문제 등에 있어서 가장 반한(反韓)적인 논조를 취해온 산케이 신문이, 현직 대통령의 “애정행각” 운운한 내용은 즉각 독도사랑 등의 시민단체에 의해 고발되었고, 검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기소, 이듬해 징역 1년6개월을 구형하였다.
해당 재판에 대한 일본 및 해외 언론들의 뜨거운 관심에 비해, 국내 언론이 특별한 입장을 표명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산케이가 산케이했고, 검찰이 검찰했을 따름”인데 아마 입장을 표명하기도 난감했을 것이다. 국가수반을 모욕하는 쓰레기 기사를 쓴 일본인 기자와 대통령 심기를 살펴 기소한 검사 중 누군가를 이상형 월드컵에서 꼭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나 또한 당연히 침묵하였다. 당시 우리의 침묵이 값비싼 대가로 돌아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대통령비서실장은 동아일보 기자를 고소하였고, 세계일보는 사장이 해임되었으며, KBS든 MBC든 정부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단 하나의 기사, 단 한 명의 기자, 단 한 개의 언론사를 정부가 ‘응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다음 타깃은 누구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설령 그 기사가 아무리 허접한 혐한 쓰레기 기사여도 말이다.
가토 전 지국장이 결국 한국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왜 나는 한국에 승리하였나. 박근혜 정권과의 500일 전쟁>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일본 전역에서 지금도 열심히 강연 중이라는 허탈한 에필로그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치 우물에 한 방울의 독이 떨어져 퍼진 것처럼, 정부가 언론을 쉽사리 고소하고 ‘응징’을 시도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언론사들은 이미 조심스러운 스텝을 뗄 것이며 기자들은 자기 검열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한국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쇠락한 시기로서, 프리덤 하우스나 V-Dem 등의 국제지표에서 1987년 이후 언론자유의 최저점을 보여준 때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우리 모두가 침묵한 탓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대통령 동남아 순방에서 MBC 취재진의 전용기 탑승을 ‘불허’한 대통령실의 결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나 우리 언론의 양적 질적 발전을 정면으로 역행하는 매우 의아한 결정이었다. 대통령실은 MBC에서 “최근 외교 관련 왜곡·편파 보도가 반복되어 온 점”을 이유로 들었는데, 여기서 “바이든”이 맞는지 “날리면”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쓰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보도 내용이 언론사에 대한 응징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는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기 때문이다. 또한, 왜곡·편파 보도, 나아가 가짜뉴스에 대한 정부 나름의 판단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판단을 근거로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응징의 주체가 되는 것은 전혀 정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엄연히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한 절차도 있고, 심지어 형사적 판단도 구할 수 있겠지만, 당장 해외 취재를 앞두고 MBC에 탑승불가를 통보한 것은, 과거의 기사를 이유로 미래의 취재에 구제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언론사들이 침묵하지만은 않았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전용기 탑승을 거부하고 민항기를 이용한 해외 순방 취재로 MBC와의 연대를 표시했고 대통령실 출입기자단을 포함한 모든 언론이 예외없이 정부의 결정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다만 침묵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는 어쩌면 언론의 역할이 새삼 더 중요해진 국면이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한 가치가 무시되면, 너무나 당연한 말 이상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은 침묵을 깨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행동과 용기로 당연한 말을 끊기지 않고 끈기 있게 해나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용기 탑승을 포기하고 민항기를 탄 채, 험난한 취재길에 올랐던 젊은 기자들의 자존심(“가오”)을 생각한다. 이들이라면 정부와 독자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필요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우연찮게도 이들의 어깨에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걸려 있게 된 셈이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경향 2022.11.21.
이태원 참사에서 되풀이되는 한국증후군
삼각지 근처로 이사한 지 4년이 되었다. 삼각지가 속한 용산구는 서울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어쩐지 어설픈 느낌이었는데, 몇년 전부터 새로운 도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실마저 이곳으로 이전했다. 위압적이고 비밀스러운 느낌의 청와대를 떠나려는 의지는 수긍할 수 있다. 의지를 보인 여러 대통령들이 못한 것을 윤석열 대통령이 과단성 있게 실행한 점도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하루라도 청와대에 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 태도로 부랴부랴 이전한 것은 이상했다. 도무지 다른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어렵고 그저 결단이라기에는 기이했기에 주술적인 사연이 있으리라는 온갖 추측이 떠돈다. 세월이 흐르면 억측이었는지 실체가 있었는지는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다.
그 와중에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지구의 첨단을 걷고 질서를 잘 지키는 것으로 이름난 나라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행정력과 경찰력이 무색하다. 서울에 돌연 블랙홀 하나가 떨어진 것 같다. 출퇴근길에 내가 타는 버스는 그 골목 옆을 지나간다. 나는 그 골목 주변에 놓인 추모의 꽃다발들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사고 못지않게 큰 재난은 사건을 둘러싼 온갖 주장과 보도와 공세와 해명이 난무한다는 점에 있다.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주장부터 다른 나라 축제에 왜 부화뇌동했냐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온다. 정권이 퇴진해야 한다는 성토부터 참사를 정치화하는 세력이 문제라는 진단까지 온갖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솔직히 말해서 날마다 되풀이되는 레퍼토리라서 낯설지도 않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원인과 책임소재를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물러나고 누군가 유죄 선고를 받겠지만, 그렇다고 사건이 질서정연하게 일단락되지 않을 것이다. 아까운 사람이 뒤집어썼다는 서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처럼 진상을 모른 채 살아가고, 언젠가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할 것이다.
대통령실의 이전과 이 사건 사이에는 거의 틀림없이 자연적 인과관계가 있다. 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근접하여 이 정부에서 가장 큰 재난이 발생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관련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추론은 상식적이다. 그러므로 대통령과 그 의사결정에 관여한 사람들은 자숙해야 한다. 정치적·법적 책임이 있든 없든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면 성찰과 참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정치적·행정적·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자연적 인과관계는 어떤 개인이나 조직의 책임으로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실의 졸속 이전은 용산이라는 구역의 행정과 경찰의 업무에 분명히 부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향이 행정의 잘못된 공백을 야기하고, 참담한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조사와 엄정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선정적인 추측과 아니면 말고 식의 주장 말고는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위대한 동시에 초라한 이 나라의 실상이다. 책임이 있다고 단정 짓는 사람들과 그저 불운일 뿐이라고 단정 짓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양극화된 정치세력, 사실에 천착하지 못하는 언론, 편으로 갈라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이 아수라장이 된 채 뒤엉켜 있다.
대한민국은 나라의 기술력과 행정력으로는 분명히 어떤 사건의 원인과 과정과 책임을 밝힐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건이 정쟁화되는 과정에서 그것을 밝히기는커녕 오리무중으로 만들고 마는 심각한 증후군을 앓고 있다. 이미 선진국에 도달한 나라치고는 너무 예외적인 이 현상을 ‘한국증후군’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치명적 증후군의 원인은 무엇일까.
거대 정당의 적대적 공존을 초래하는 선거제도, 정확한 팩트체크와 불편부당함을 외면하는 언론, 전 세계적으로 의견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인터넷 알고리듬이 이 증후군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 증후군을 치료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이것을 누가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국민적 저항? 언론의 자성? 지식인의 연구와 고언? 알다시피 모두 불가능하다. 가장 책임이 큰 정치권의 새로운 리더십? 그나마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 증후군을 긴 시간 시름시름 앓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고귀한 생명을 잃은 후에야 이 증후군을 치료할 수 있을까.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조광희 변호사 경향 2022.11.21.
최소한, 지금은 아닙니다
6~7년 전쯤 온라인 관련 부서에서 일할 때 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1980년대에 이름이 꽤 알려졌던 사람인데 자신이 관련된 ‘사건 기사’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건 이후 20여년이 흘러 자식들이 결혼할 때가 됐는데 그런 기사가 남아있어서 부끄럽다는 것이 이유였다. 해당 기사를 찾아봤더니 전화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람들의 실명이 모두 공개되어 있었다. 이름과 나이는 물론 살고 있는 집의 주소까지 나온 관련자도 있었다. 내부 회의를 거쳐 기사를 삭제하지는 않고, ‘현재 기준’에 맞게 이름과 주소를 모두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 당사자도 만족했는지 그 이후에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수십년 전에는 흔한 기사였다. 사건이 일어나면 관련된 사람의 실명 공개는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기사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사회 전체의 인권 감수성이 올라가면서 언론도 이를 따라갔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일어나고 다음날, 내가 일하는 부서는 ‘사상자 통계 업데이트’ 업무를 맡았다. 소방청 등 관련기관에서 나오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종합해 희생자와 부상자가 얼마나 나왔는지 알려야 했다. 그중에는 희생자들이 지금 어느 병원에 안치되어 있는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병원에 몇 명이 있는지까지 정리한 뒤 선배에게 물었다. “희생자 명단이 병원별로 나오면 그것도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애타게 가족을 찾고 있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선배가 대답했다. “무슨 20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냐.” 물론 관련기관이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지도 않았다.
교육부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일어나고 이틀 뒤인 지난달 31일 ‘학생 피해 현황’을 발표했다. 학생 사망자는 6명, 교사 사망자는 3명, 학생 부상자는 5명이었다. 학생 사망자 중 중학생은 1명, 고등학생은 5명으로 확인됐다. 교육부는 사망한 학생들은 모두 서울시교육청 관할 학교에 재학 중이란 사실까지만 밝혔다.
과거의 관행대로라면 기자들은 사망자가 나온 학교를 찾아가서 같은 반 친구들에게 심경을 물었을지도 모른다. 다친 학생들을 찾아 마이크를 들이댔을 수도 있다. 교육부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해당 학교의 이름과 위치를 알아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언론사와 기자의 인권 감수성이 높아진 까닭도 있겠지만, 이제는 그런 기사를 쓰면 시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은 2019년 11월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라는 기획 시리즈로 산업재해의 심각성을 알렸다. 고용노동부에 보고된 중대재해 발생 현황 목록과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작성한 조사의견서를 토대로 2018년부터 2019년 9월까지 떨어짐, 끼임, 깔림·뒤집힘, 부딪힘, 물체에 맞음 등 주요 5대 원인으로 사망한 노동자 1200명을 11월21일자 종이신문 1면에 실었다. 김용균처럼 알려진 고인 외에는 성씨만 적었다. 외국인은 알파벳 첫 자나 한글 발음 첫 글자로 표기했다. 이름을 다 쓰지 않았지만 그들을 추모하고, 산업재해 심각성을 환기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지난 14일 시민언론을 표방한 신생 매체 ‘민들레’가 이태원 핼러윈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공개해 논란이 일었다. 이들의 선의와 정의감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명단 비공개가 “끊임없이 책임을 회피하며 책임을 논하는 자체를 금기시했던 정부 및 집권여당의 태도와 무관치 않다”는 이들의 주장도 존중한다. “지금까지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정부 당국과 언론은 사망자들의 기본적 신상이 담긴 명단을 국민들에게 공개해 왔다”는 민들레의 반박도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에 여러 사례를 든 것처럼 이제 개인의 이름은 언론이 마음대로 공개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때그때 여론의 흐름과 맥락을 면밀히 살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 이름이 필요하면 유족에게 동의를 얻어 취재한 뒤 공개하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다. 물론, 유족 취재는 당하는 사람은 물론, 하는 사람도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시도 자체를 안 하는 경우도 많다. 보도로 얻을 수 있는 ‘공익’보다 유족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더 클 수 있다. 자료를 입수해 공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칠 의사가 없다면, 희생자 명단 공개는 하지 않는 것이 맞다. 최소한, 지금 당장은 아니다.
홍진수 정책사회부장 경향 2022.11.21.
윤석열의 ‘슬픈 대한민국’
슬픔에 빠진 대한민국에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대통령 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이태원 참사로 온통 슬픔에 빠진 상황이었다. 경북 봉화의 아연 광산 갱도에서 221시간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소식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 명이 매몰되어 있을 때 대통령은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준비하겠다고 공언도 했다. 두 광부는 퇴원하면서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면서 전국 곳곳의 어두운 지하에 들어가 있는 ‘산업전사’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작업환경을 간곡히 당부했다.
그런데 보라. 11월16일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광산피해 방지법’ 개정안은 방향이 정반대다. 대다수 언론이 보도에 인색했지만 ‘광산업자 등이 관리 감독을 거부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처벌 규정을 ‘500만 원 이하 과태료’로 확 낮췄다. 광산이 매몰되었을 때 안전 대책이 소홀했다는 지적이 많았음에도 사고 사업자의 처벌 수위를 되레 낮춰주는 법안이다. 매몰되었을 때 대통령의 공언과도 정반대다.
광산업만도 아니다. 각종 사업자의 경제형벌 수위를 낮춰주는 법안 14개를 입법예고 했다. 화학 사고로 상해를 입힐 경우 금고 10년 이하에서 7년 이하로 조정하고, 상수원 오염 처벌도 징역 3년 이상 15년 이하에서 1년 이상 10년 이하로 낮췄다. 모두 국민 생명과 이어진다.
국민 안전 무시는 이태원 참사에 어떤 고위관료도 책임지지 않는 행태에서 확인된다. 대통령은 순방 귀국길에서 책임론에 휩싸인 행정안전 장관 이상민과 악수한 뒤 어깨 토닥이며 “고생 많았다”고 말했다. 이상민은 행안부 안의 경찰국 신설에 반대하는 중견 경찰들을 ‘하나회의 12·12 쿠데타 사건’에 빗대어 살천스레 몰아세웠다. 치안 업무는 경찰청을 통해서 관장하도록 했다며 “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이 사무 관장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바로 명백하게 나타난다”고 호기를 부렸다. 그렇게 경찰국을 신설하고 프락치 의혹을 받은 자를 국장 임명에 강행한 그는 핼러윈 참사 이후 자신이 “일체의 지휘 권한이 없다”며 “법적 책임은 당연히 없다”고 부르댔다. 하지만 행안부에 경찰국을 신설해 경찰이 국민의 생명 안전보다 정권 안보와 대통령 과잉경호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전문가의 분석은 합리적이다. 바로 그런 장관을 대통령은 계속 두남두며 고생 많았단다. 슬픔에 잠긴 유족들, 압사 위기를 호소했음에도 도움 받지 못한 비애에 그가 진정으로 공감하는 걸까 의심마저 든다.
정권이 슬픔에 빠진 대한민국에 외려 새로운 절망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희망을 만들 근거는 있다. 다름 아닌 두 ‘광부’다. 병실을 찾아온 대통령실 산업정책비서관에게 옷에 흙 한줌 묻히지 않는 공무원의 탄광 안전점검 행태를 개선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일까. 대통령과 화상 통화를 바랐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통화가 이루어졌으면 “감독할 건 제대로 감독해야한다”는 말을 꼭 전하려고 했다.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행정을 펼쳐야 한다’는 예순두 살 광산노동인 박정하의 말을 그와 동갑인 대통령 윤석열이 새겨들을 수 있을까.
함께 매몰됐던 50대 광산노동인도 “회사 소유주부터 시작해서 제도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법률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법률적 허점이 안 보이는 게 선진국 아니냐”며 관련 제도 정비를 당부했다. 스스로를 ‘시골사람’으로만 밝힌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바꿔 봉사도 하고 사람들을 챙기면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지하 190m에서 열흘이나 고립된 두 민중이 체험에서 길어 올린 말들은 깔끔하고 싱그럽다. 경영책임자의 처벌 수위를 가까스로 높인 중대재해법을 완화하려고 안간힘 쓰고 있는 윤석열 정권, 말과 행동이 다른 대통령에게 경청을 권한다. 저 민중의 언어야말로 오늘의 슬픈 대한민국에 깨끗한 희망 아닌가.
손석춘 칼럼니스트‧철학자 미디어오늘 2022.11.21.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을 믿기 힘든 이유
칼럼에 타당한 얘기만 담으려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열어두는 편이다. 그래서 댓글 등 독자 의견에 참고할 부분이 있는지 열심히 살핀다. 지난달 칼럼 ‘원전 오염수가 후쿠시마를 벗어날 때’를 반박한 11월17일치 독자투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위험, 정확한 정보로 판단해야’도 반갑게 읽었다. 다만 사실과과학네트워크 활동가가 쓴 그 글은 해당 단체를 구성하는 원자력 관계자들의 평소 주장을 대체로 반복하는 내용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관한 국내 친원전 인사들의 의견은 ‘일본 정부 및 도쿄전력과 동일함’처럼 보인다. 오염수는 다핵종제거설비(ALPS)로 방사성물질을 걸러내 안전한 ‘처리수’가 됐으며, 이 설비로 못 거르는 삼중수소는 바다에 방류해도 무해하다는 주장이다. 또 후쿠시마에서 소아갑상샘암 환자가 많이 나온 것은 과잉진단의 결과이며, 피폭 수준이 낮아 건강 피해는 전혀 없다는 얘기다. 방사성물질이 대거 검출된 후쿠시마산 생선을 마음껏 먹어도 괜찮다고 한다. 이들은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 등 친원자력 단체의 기준을 논거로 들고, 유럽방사선위험위원회(ECRR) 등 대안 조직의 이견은 배척한다.
반면 국내외 반핵 환경단체와 의학자 등은 이를 반박한다. 요지는 이렇다. 첫째, 오염수 처리와 폐로 과정을 신뢰할 수 없다. 다핵종제거설비로 걸렀다는 오염수의 70%에서 기준 이상 방사성물질이 검출됐다. 다시 걸러서 방류한다지만, 그래도 삼중수소와 탄소-14 등 일부 핵종은 남는다. 제대로 거를지 알 수 없고, 걸러도 여러 방사성물질이 남는 오염수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폐로까지 수십년 동안 계속 바다로 흘러든다. 오염수가 태평양을 돌아오면 묽어진다지만, 일본에서 선박들이 평형수를 싣고 와 우리 바다에 쏟을 때, 일본 근해와 태평양에서 잡힌 수산물이 수입될 때는 즉각적 위협이 될 수 있다.
둘째, 삼중수소는 먹이사슬을 통해 농축되므로 위험할 수 있다. 국내 대표적 역학자인 백도명 국립암센터 초빙의(전 서울대 보건대학장)는 “삼중수소가 생물체의 몸에 흡수돼 유기물결합삼중수소(OBT)가 되면 유전체를 직접 손상시킬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한 생명체에서 만들어진 유기물결합삼중수소는 다른 생명체가 먹고 먹히면서 농축된다”며 “삼중수소의 지속적 유입은 전체 생태계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셋째, 후쿠시마에서 사고 당시 18살 이하였던 38만여명 중 300명 가까운 소아갑상샘암 의심·확진자가 나온 것은 과잉진단이 아니라 방사선 피폭 탓이다. 원자력안전위원을 지낸 김익중 전 동국대 의대 교수는 원자력계가 국내 대학병원 진단 사례를 들어 ‘후쿠시마 소아갑상샘암 발생은 정상 범위’라고 한 데 관해 “특정 국가의 특정 병원 사례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소아갑상샘암의 세계적 통계치는 의학 교과서에 실린 대로 100만명당 1~2명”이라며 “후쿠시마는 세계적 통계치에 비해 100배 정도 증가한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 일본 오카야마대 환경생명과학대학원의 쓰다 도시히데 교수 등은 지난 8월 국제학술지 <환경과 건강>에 실린 논문에서 “체르노빌 연구와 병리적 증후 등을 종합할 때 후쿠시마 소아갑상샘암 증가는 과잉진단이 아닌 방사선 피폭 탓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논문은 “100밀리시버트(m㏜) 이하 저선량 피폭도 암을 유발한다는 연구가 많다”고 밝혔다.
넷째, 방사능오염 식품은 ‘권고선량 이하’라도 먹은 만큼 암 발병 위험이 커진다. 김익중 교수는 “방사선의 기준치는 관리용일 뿐 의학적으로 안전기준은 없다”며 “피폭량과 암 발생은 정비례 관계”라고 말했다.
다섯째, 일본 정부를 옹호하는 국제기구들은 연구윤리를 의심받고 있다. 쓰다 교수 등은 같은 논문에서 유엔방사선영향과학위원회(UNSCEAR) 등 원자력 관련 기구들이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 등의 자금을 받고 활동했다고 밝혔다. 백도명 교수도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는 원전업계에서 경제적 혜택을 받으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집단”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를 믿고 오염수 방류를 지켜보는 것이 옳을까. 직업적 이해를 떠나 국민의 잠재적 피해를 함께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돈이 들어도 일본 땅 안에서 오염수를 처리하라’고 요구해야 옳지 않을까.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한겨레 2022.11.21.
빈곤 포르노” 뭐가 문제란 말인가…우려할 것은 당신들의 반지성
얼마 전 한 인터넷카페의 “심심한 사과” 발언이 뜻하지 않은 ‘공분’을 부르며 낮아진 문해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읽고 쓰기 쉽게 만들어진 한글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라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한국인의 문해력에 대해 의심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한 교사는 문해력뿐 아니라 길어진 비대면 상황이나, 간명한 정보만 주고받는 디지털 환경 등이 “대박 죄송”처럼 중2 정도가 쓸법한 표현에만 익숙하게 했을 거라 분석한다
그러나 내가 주목했던 것은 “심심한 사과” 발언을 이해하지 못했던 일부 사람들의 안하무인 격 태도다. 욕설과 조롱 섞인 일부의 과격한 반응에는 주어진 정보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나, 호기심 같은 뭔가 이해하거나 배우려는 태도가 없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뭐든 거슬려하고 시비 걸듯 하는 그들의 태도는 낮아진 문해력만큼이나 걱정스럽다. 대기업 편의점 캠핑 광고와 경찰청 홍보물에 대해 덮어놓고 했던 ‘남혐’ 주장이나, 여대 재학 중인 숏커트 국가대표 선수에 대한 금메달 회수 요구 등에는 ‘도를 넘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뭔가가 있다.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이번 야당 의원의 “빈곤 포르노” 발언 역시도 난해했던 듯, 그 황당했던 ‘남혐’ 논란 못지않은 여당 정치인들의 격한 반응을 불렀다. 10년 가까이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직을 조용히 수행해 온 배우에 대해 뜬금없이 그가 “포르노 배우냐”고 질타하질 않나, 엉뚱하게도 대한민국 모든 여성에게 사과하라는 호기를 부리질 않나. 이들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크게 성을 내는 상황을 예상했다면 “빈곤 포르노” 대신 “선진국에서였다면 꿈도 못꿨을 봉사활동”, “백인 아동을 대상으로는 생각지도 못했을 봉사활동”, “품 안의 아동이 아니라 아스라이 먼 곳을 응시하며 잿밥에만 관심 보인 봉사활동”, “마스크도 쓰지 않은 코로나 전파 봉사활동” 등으로 말했어야 했나.
<급진의 20대> 저자 김내훈은 이른바 ‘이대남’의 페미니즘에 대한 ‘극혐’에 대해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모르면서 그 이름에만 ‘극불호’의 정서를 갖는 것이라 분석한다. 새롭고 낯선 개념이나 현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 의미를 차근차근 배우려는 진지한 노력 대신, 혐오, 조롱, 분노의 손가락질부터 한다는 것이다.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으니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이번 “빈곤 포르노”에 대한 여당 정치인들의 반응에서 보듯, 논지를 벗어나 전혀 무관한 논리로 자주 변질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이론이나 개념에 대해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분노의 정서부터 표출하며 권력감과 정치적 효능감을 맛보려는 자들이 다만 20대 일부 남성만은 아니다.
민주화의 주역이라면서 성차별과 성폭력에 무감한 정치인들, 자유와 법치를 말하면서 언론의 자유와 성평등은 안중에 없는 정치인들, 국민만 본다면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은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 청년 남성을 대변한다면서 페미니스트를 ‘페미나찌’라 멸칭하는 정치인들, 페미니즘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긴다는 가짜 뉴스로 남성들을 울분의 정동으로 몰아넣는 정치인들. 이처럼 ‘87 민주화 체제 이후에조차 의미를 모르는 화려한 공언, 빈말들만으로도 정권을 교체하고 권력을 잡고, 호통치며 호가호위하는 것이 가능했던 한국 사회 반지성주의 정치사는 빈곤 포르노 ‘우화’에서도 예외 없이 반복되었다.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이기에 가능했던 비공식 “봉사활동”, 백인들의 인종주의를 한껏 흉내 내며 동남아 아동을 품에 안은 ‘하얀’ 피부의 대통령 배우자, 품 안의 아동이 아니라 자신에게 심취한 시선을 포함한 그 한컷의 사진 모두는 “빈곤 포르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이여, 대한민국 여성은 물론 난민을 위해 봉사해 온 그 배우의 명예는 한없이 높아 그 어떤 정치인도 감히 훼손할 수 없으니, 생각해주는 척 목소리 높이지 마시라. 대신 뜻도 모르면서 자유, 민주주의, 성평등, 생명, 책임, 성찰 등을 입에 담을 수 있는 ‘무식하니 용감할 수 있는’ 당신들의 반지성은 돌아보시라, 제발.
나임윤경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겨레 2022.11.21.
횡재세, 반드시 연내 입법되어야 한다
횡재세, 보편증세로 나갈 물꼬
21대 국회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공방으로 인해 뜨겁지만, 여야가 의견을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대기업에 불리한 법안에는 침묵하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더 구체적으로 횡재세 도입에 반대하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다.
이미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는 횡재세를 정식 세수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코로나19와 석유위기를 거치며 앉아서 떼돈을 번 회사에는 그에 적합한 세금을 걷어 어려운 계층을 도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이 정식 법안으로 마련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횡재세 도입안이 발의됐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과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했다. 그러나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양당은 본래 국회 기재위에 상정 예정이던 해당 법안을 상정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두 거대정당의 합의로 인해 횡재세 연내 도입은 어려워졌다.
최근 금융감독원 발표에 따르면 국내은행의 올해 9월말까지 이자이익은 40조 원을 넘어섰다. 은행의 이자이익은 작년부터 매 분기마다 분기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금리 인상에 따른 예대마진(대출과 예금의 금리 차이) 확대와 대출 증가가 폭리의 원인으로 꼽힌다. 민생경제가 무너지는 와중에 은행이 땅 짚고 헤엄치기 식 이자놀이로 벌어들인 '횡재이윤'이다.
정유사들은 어떤가. 올해 9월말까지 SK에너지, SK인천석유화학,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 5개사의 합산 매출총이익(매출액에서 원가를 차감)은 16.5조 원이다. 코로나19 이전 2019년 같은 기간의 4배가 넘는다. 올해 3분기까지 매출총이익률(매출총이익을 매출액으로 나눈 비율)은 2015년~2019년 5개년 평균의 약 2배다. 이익이 어떻게 갑자기 늘어났는가. 전쟁과 경제제재, 상품시장 투기로 국제유가가 오른 덕이었다. 한마디로 횡재였다.
ⓒ나원준
독점자본의 횡재와 심화되는 양극화, 그냥 두고 볼 일인가
은행과 정유사에 막대한 이윤을 몰아준 고금리와 고유가가 서민들한테는 고통이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결과, 올해 3분기 가구당 월평균 실질소득은 작년보다 줄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기간인 2009년 이래 가장 큰 감소다. 실질소득 감소는 특히 저소득층에서 두드러졌다. 상위 20%와 하위 20%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저소득층은 필요지출마저도 억제하고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 부담 탓이다.
은행을 배불린 고금리는 중소기업도 덮쳤다. 한국은행은 9월 금융안정 상황 보고에서 한계기업(영업이익으로 이자를 못 내는 기업) 비중이 작년 14.9%에서 올해는 18.6%까지 오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위기와 에너지위기를 배경으로 한쪽에는 독과점 대기업의 횡재이윤이, 다른 쪽에는 서민들과 중소기업의 고통이 쌓여간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횡재세 논의의 출발점
이 양극화의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그것을 제도적으로 바로잡지 않고 눈 감고 말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입에 올릴 자격은 없다. 오늘과 같은 상황을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한다. 독점자본의 초과이윤을 환수하는 제도인 횡재세를 둘러싼 논의는 그런 절박함에서 출발했다.
양극화의 심화가 기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에 유럽 여러 나라는 횡재세를 이미 도입했다. 올해 7월 기준 각국의 횡재세 현황은 다음 표와 같다. 8월 이후로도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로 횡재세 도입이 확산하고 있다. 독일도 지난 9월 집권 연정 3당인 사회민주당, 녹색당, 자유민주당이 에너지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횡재세 부과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유럽연합 차원에서는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의 공개지지 속에 '연대기여금'이라는 이름의 횡재세가 최근 설계되었다. 자국만의 횡재세가 없는 회원국에는 12월부터 유럽연합 연대기여금이 각국의 법인세 체계에 맞춰 적용될 예정이다.
ⓒ나원준
횡재세는 협소한 시장 논리로 반대할 일이 아니다
유럽도 그렇지만 입법 움직임이 막 본격화된 한국에서도 횡재세에 대한 반론은 만만치 않다. 당장 기업 활동을 지나치게 억압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시장경제를 위협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규모 감염이나 전쟁 같은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누구는 크게 이득을 보고 다른 누구는 크게 손실을 보는 상황이 자연스러울 리 없다. 그렇게 경제 내 불균형이 누적되면 시장경제 발전에도 결코 유리하지 않다. 극단적인 시장 변동이 초래한 분배적 영향은 제한되고 조절되어야 한다. 횡재세는 그 한 가지 수단일 뿐이다.
현재 논의되는 횡재세 계획으로는 초과이윤의 전부를 환수할 수도 없다. 관련 기업은 여전히 초과이윤을 부분적으로 누린다. 더욱이 횡재세는 현재로서는 한시적인 위기 대책이다. 따라서 횡재세 때문에 실물투자가 급감할 것처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시장원리주의 시각에서 횡재세를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만 앞세우는 가장 이념적인 주장이다. 시민 다수한테는 초과이윤 환수가 이득이다. 현 시기 횡재세는 경제를 포함하는 보다 큰 외연인 시민사회의 정당한 요구를 반영한다. 평등과 연대라는 공동체적 가치가 그것이다. 시장 논리에 갇힌 좁은 시각으로 볼 일이 아니다.
횡재세는 횡재이윤이 독점자본에 집중되는 구조가 정당한지 묻는다
횡재세가 추가적인 물가상승을 불러와 결국 그 부담이 소비자에게 귀착되고 말 것이라는 비판도 들려온다. 그러나 횡재세가 법인세에 부가되는 방식으로 설계되는 한에서는 그럴 우려가 적다. 독과점 기업이 상품가격을 인상해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면 횡재세 세액도 함께 늘어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발생한 이윤이 과세 근거라면 그 과세 때문에 가격을 더 인상한다는 주장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것은 시장지배력의 남용이다.
결국 횡재이윤을 얻은 기업의 시장지배력과 독과점적 행태가 문제일 터이다. 혹자는 이와 관련해 한국 정유사들은 독과점이 아니라고도 주장한다. 한국 정유사들이 국제시장 가격을 수용한다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국내시장에서 독과점이 아니라는 말은 억지다. 진짜 핵심은 외부환경이 변동할 때 일부 독과점 대기업이 횡재이윤을 쓸어 담을 수 있는 시장구조에 있다. 횡재세는 그 구조가 정당한지 묻는 세금이다.
횡재세 적용 업종은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다
횡재세는 최근 경제상황에서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초과이윤의 발생이 확인된 업종에 국한돼 적용된다. 대상 산업의 선정에 있어 정유사와 은행에 일차적인 관심을 둔 것은 그런 점에서 잘못되지 않았다. 민간발전사나 빅테크 등 다른 업종으로 범위를 넓히는 논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연내에 횡재세 입법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2022년에 발생한 은행과 정유사의 대규모 횡재이윤을 환수하기 어려운 시간 제약에 있다. 그래서도 반드시 올해 내에 입법되어야 한다.
부연컨대 정유사의 경우 2013년에 개정된 석유사업법 제18조에 의해 국내 실정법상으로도 횡재이윤을 환수할 수 있는 근거가 이미 존재한다. 동법 제18조 제1항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석유 수급과 석유가격의 안정을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자로부터 부과금을 징수할 수 있"다고 규정하며 그 제2호는 "국제 석유가격의 현저한 등락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많은 이윤을 얻게 되는 석유정제업자 또는 석유수출입업자"를 특정하고 있다. 최근 횡재세 법안은 그동안 기능하지 않았던 석유사업법 제18조를 실정에 맞게 구체화하는 의미도 갖는다.
한편 혹자는 한국 정유사들은 산유국 석유사업자들과는 처지가 다르다고 항변한다. 한국 정유사들은 탐사와 개발, 생산(업스트림)을 못하고 정제에 치중하는 이른바 '다운스트림' 사업구조를 가져서 횡재세 부과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업스트림이 아닌 사업자를 포함한 에너지산업 전반에 걸쳐 횡재세 부과 및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미 스페인이나 헝가리에서는 횡재세 부과 업종이 에너지산업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횡재세가 특정 업종에 국한될 이유는 전혀 없다.
▲기준금리 인상에 따라 은행은 앉아서 폭등하는 이자이익을 누리고 있다. 반면 서민과 중소기업은 일방적으로 고통받고 있다. 횡재세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횡재세 반대론은 적어도 노동계급 관점은 아니다
또 다른 횡재세 반대론은 한국 법인세는 이미 누진구조를 갖추고 있기에 횡재세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누진구조 자체가 횡재세를 반대할 근거는 아니다. 유럽연합의 연대기여금을 개별 회원국에 적용할 때도 각국의 누진구조 차이는 고려되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 법인세는 명목 최고세율은 높지만 각종 공제감면으로 인해 실효세율의 누진성은 그에 못 미친다. 한국 법인세의 누진성 정도가 어떻건, 횡재세가 누진구조를 약화하지 않고 강화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무엇인가.
횡재세 반대론자들은 한국 기업의 법인세 부담이 이미 과도하다는 자신들의 시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국의 법인세수 비중이 다른 나라보다 큰 이유는 재벌에 경제력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고 소득세율보다 법인세율이 낮아 법인이 선호되는 사정에 있다. 법인의 과세대상 소득이 워낙 크니까 법인세수도 클 뿐이다. 횡재세 반대는 법인세 증세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나왔다. 그러나 적어도 노동계급 관점에 선다면 그런 입장을 지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횡재세 반대론에는 법인세 자체가 공평하지 않은 세금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업이 지속적인 결손에 직면한다면 과거 이익 발생 시 납부했던 세금을 돌려받을 길이 없기에 불공평하다는 것이 그 요지다. 그러나 횡재세를 낼만한 기업인데 미래 지속적으로 결손을 보리라고 예상하기는 참으로 난망한 노릇이다.
횡재세는 부자증세, 보편증세로 나아가는 물꼬 역할을 할 수 있다
횡재세는 대기업 법인세 증세이기에 민주노조운동이 그간에 제기해온 부자증세와 맥락이 다르지 않다. 횡재세 세수가 빈곤층과 에너지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특정 목적에 사용된다면, 횡재세는 시민사회에서 추진해온 목적세로서의 사회연대세 성격에도 부합한다. 횡재세는 특정 업종과 특정 시기에 한정해 적용되기에 대중적인 증세 운동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한테는 일점돌파의 승리 경험이 절실하다. 바로 그런 이유로도 횡재세는 반드시 연내 입법되어야 한다.
나원준 경북대학교 경제학 교수 프레시안 2022.11.21.
수능시험 문제에까지 드리운 식민사관의 그림자
한국사 수능 시험문제 유감
지난 17일 수능시험이 있었다. 시험 후 늘 그렇듯이 분야별 출제 경향과 난이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본부는 "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학문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거나 시사적으로 의미 있는 내용을 출제에 반영했다"다며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학습 내용이라도 최근 변화된 내용을 반영해 출제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한국사 시험문제 2번 지문에 문제를 푸는 단서로 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설명이 들어갔다. 고려 시대 지명인 철주에 대해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일대이다. 강동 6주의 한 곳으로 서북면 방어의 요충지였다'라고 기술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고려 시대 문신 김구가 지은 시문을 소재로 출제하면서 시문의 구절에 대해 출제위원들이 문제가 있는 주석을 단 것이다. 시문에서 언급한 지역(철주)은 10세기 말 서희 장군이 고려에 쳐들어온 요나라(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획득한 땅(강동 6주)의 일부로서 고려의 서북 국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곳이다. 대일항쟁기에 일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 강역을 축소하려는 의도에서 현재 요동반도(중국 요녕성 요하 동부지역)에 있어야 할 그 지역을 현재의 압록강 이남 평안북도에 있었다고 위치를 왜곡하였다.
이러한 왜곡은 일제 식민사학자이자 반도사관의 기초를 잡은 '쓰다 쏘우키치'라는 일본 학자가 1913년에 시작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에 반영되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아무런 검증을 받지 않고 이어져 왔다. 그런데 2017년에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고려사>, <요사>, <금사> 등 우리나라와 중국 사료들을 비교 분석하여 '쓰다 쏘우키치' 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희 장군은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 리"라고 하였는데 거란의 동경은 현재 요동반도 요양이므로 고려의 안북부는 현재 평안도 지역이 아니라 현재의 압록강 건너 요동반도 동부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주를 비롯한 강동 6주는 요나라의 동쪽 경계와 고려의 서북 경계 사이에 설치된 것이므로 당연히 지금의 평안북도가 아니라 요동반도 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실 다른 근거를 댈 필요도 없이 서희 장군의 이 말만 갖고도 강동 6주, 나아가 강동 6주의 하나인 철주의 위치를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학자는 당대의 인물인 서희 장군이 이웃 나라인 요나라와의 국경이 어디인지 모르고 거리를 잘못 말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학계는 일차적으로 누구의 말에 더 무게를 두고 이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맞는가?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데 대해 한국의 주류학계는 아직 의미 있는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필자는 역사학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대부분 주류 학설을 싣고 있다. 그런데 수능본부의 설명대로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학습 내용이라도 최근 변화된 내용을 반영"한다면 출제위원들은 좀 더 신중하였어야 한다고 본다. 즉, 한국사 2번 문제에 논란이 될 설명은 넣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출제위원들이 최근의 학술 논문이나 저술을 보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관리하는 시험이라면 적어도 새로운 학설은 없는지, 기존의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도 되는지 등 출제에 앞서 깊이 있는 점검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들은 대학에서 우리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한 고교를 졸업한 뒤 국사를 다시 배울 기회는 사실상 없다. 고교 때까지 배운 것이 평생의 지식이 된다. 국사 교육은 왜 중요한가?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 교육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는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러한 정체성은 우리나라의 미래 비전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서 작용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 맹목적으로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것은 경계하여야 하지만 그간의 이해가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면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리 학계는 그러한 노력은 게을리하면서도 주류 학설에 배치되는 주장이 제기되면 토론을 거부하고 소위 '국뽕'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바삐 시정되어야 할 태도라고 본다.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프레시안 2022.11.21.
대통령의 ‘짝퉁 리더십’
참사 책임 씌우기를 기강 잡기로, 과한 사진 연출을 미담으로 포장한들
아이들 세계건 어른들 세계건 소집단을 만들어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이가 꼭 있다. 얼핏 힘세 보이지만 실은 겁이 많은 이들이다. 패거리를 지어야만 안심하는 습성을 윤석열 대통령에게서도 본다. 혹자는 ‘형님 리더십’이라고 하는데 그건 학교 선후배 무리, 좁은 검사 세계에서나 통했을 터이다. 한 나라를 이끄는 이의 이런 리더십은 오히려 재앙에 가깝다는 것을 10·29 이태원 참사 수습 과정에서 목도한다. 많은 국민이 최대한의 ‘전략적 인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는 듯하다.
“현장에 있었잖아!”라고 호통친 장면이 상징적이다. 2022년 11월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에서 대통령은 혼자 온갖 말을 하면서 이렇게 샤우팅했다. 결국 이게 다 경찰 책임이고, 법적 책임은 내가 지우고 싶은 사람에게만 지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대통령실은 회의 장면이라며 이 모습을 길게 공개했다. ‘극대노’하며 기강을 잡았다고 알리는 게 도움이 된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나. 정작 우리가 확인한 건 이 와중에도 ‘내가 다 알아’ ‘다 꿇어’ 하는 우두머리의 모습이다. 평소 회의나 대화 방식이 어떤지도 직관적으로 알게 됐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언행에서 참사에 대한 아무런 미안함도 그 어떤 간곡함도 간절함도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껴버렸다.
캄보디아·인도네시아 순방(사진)을 떠나기 전 엠비시(MBC) 취재진을 전용기에 못 태우겠다고 해 논란을 일으키더니 현지에선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사진 한 장이 많은 걸 말해줬다. 김 여사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각국 정상들의 배우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대신 현지 병원과 심장병 환아의 집을 찾았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대통령실 제공’으로 나온 사진이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다. 참사를 겪은 국내 상황을 고려했다면서, 아픈 아이를 찾아 위로하는 데 ‘조명빨’ ‘빽판빨’을 그렇게까지 동원해야 했을까? 눈 밝은 이라면 최소 조명 두 개, 반사판 한 개가 어느 위치에 놓였는지 짐작할 정도였다. 필요한 인력과 장비의 윤곽도 나온다. 진심이든 흉내든 여사님이 ‘나의 사진첩’을 채우는 건 자유라고 치자. 적어도 참사를 들먹이지 말아야 했다. 언론을 포함해 온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대통령의 말본새를 강한 리더십으로 포장하는 참모의 실력을 탓해야 하나.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배경음이 깔리는 듯한 대통령 배우자의 사진을 내놓는 참모의 감수성을 탓해야 하나. 일찍이 대선 당시 ‘개 사과’ 때부터 지적돼온 기이한 홍보 마인드를 이렇게까지 고집하는 이유는 무얼까. 심리학이 아니라 심령학의 영역이라는 비아냥이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참모는 리더의 수준을 따른다.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시절 보수의 세련됨을 그리 잘 내보였던 김은혜 당시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이 윤석열 대통령실 홍보수석으로서 연일 선보이는 ‘웃기고 있는’ 모습만 봐도 분명하다.
대통령이 국민 눈치를 보지 않는 건, 더는 선거를 치르지 않아서다. 여당이라도 각성하면 좋으련만, 지금 국민의힘 인사들은 국회의원 공천장에 매달려 대통령 내외의 ‘짝퉁 리더십’ ‘짭 선행’을 앞다투어 칭송하느라 바쁘다. 이러다간 ‘쪽팔려서 어떡하나’가 실은 김장철을 내다보고 ‘쪽파 없어 어떡하나’라고 한 말씀이었다고 우겨댈 기세다.
딱하다. 공천장만 받으면 뭐 하나. 중뿔난 더불어민주당 몇몇 인사가 성마른 소리를 하고 친민주당 매체가 유족 동의 없이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며 헛발질한다고 정부의 허물이 가려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조용히 분노하고 있다. 흥분하거나 표현하지 않는 분노가 더 강하고 넓은 법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한겨레21 2022.11.21
신남방 정책과 인·태 전략, 차이점과 공통점
문재인 정부가 잘한 정책 중에는 신남방 정책이 있다. 한국 외교의 중심축은 오랫동안 대북관계 또는 동북아시아였다. 신남방 정책은 동남아시아+인도를 외교의 중심 축으로 주목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문재인 정부 집권 기간, 동남아시아+인도와의 경제 교류는 대폭 확대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한·아세안 정상회의, 한·미·일 정상회담, G20 정상회의 등에 참석했다.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발표했다. 한·미·일 정상회담에서는 ‘프놈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 정책’과 윤석열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 것일까?
먼저 차이점을 살펴보자. 문재인 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신남방 정책은 ‘사람 중심의 평화와 번영 공동체’를 표방했다. 대중국 견제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원조는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다. 아베 총리가 2007년 인도 의회 연설에서 처음 사용했다. 이후 아베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고, 조 바이든 정부도 인도·태평양 전략 개념을 활용하고 있다. 일본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는 ‘자유롭고 개방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대중국 견제 성격이 담겨 있다.
윤석열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진보 쪽의 주요 논객들은 매우 비판적이다. 대중국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미국 의도에 영합했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아세안 버전의 인도·태평양 전략도 있다고 해명한다. 아세안은 2019년 ‘인도·태평양에 대한 아세안의 관점’을 발표했다. 중국을 배제하지 않고, 모두의 발전과 번영을 강조한다.
다음으로, 공통점을 살펴보자. 첫째, 아세안의 중요성을 주목한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 정책 전체가 아세안 및 인도와의 관계개선을 목표로 했다. 문재인 정부 기간, 신남방 지역 투자는 70% 이상 증가했다. 문재인 정부는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필리핀 등과 양자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했다. 최근 윤 대통령은 ‘한·아세안 연대구상’을 발표했다. 한·아세안 외교당국 전략대화, 한·아세안 국방장관회의 정례화, 한·아세안 자유무역협정(FTA) 업그레이드, 전기차·배터리·디지털 분야의 협력 강화도 제안했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 정책을 계승해야 한다.
둘째, 중국 견제에 대한 거리 두기를 강조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중국 견제와 거리 두기를 하려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윤석열 정부 역시 중국 배제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두 가지 근거가 제시된다. 하나는, 윤 대통령 스스로가 한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아세안의 관점과 많은 부분 일치”하고 “아세안의 관점을 확고하게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일본 버전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아니라, ‘아세안 버전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가깝다고 해명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윤 대통령이 밝힌 인도·태평양 전략의 협력 원칙이다. 윤 대통령은 ‘포용, 신뢰, 호혜’를 3대 협력 원칙으로 밝혔다. 재밌는 것은 얼마 전 중국공산당 20차 당 대회 때 밝힌 ‘주변국 외교’의 대외정책 기조와 매우 흡사하다. 지난 당 대회 보고에서 시진핑 주석은 ‘우호, 상호신뢰, 이익융합’을 강조했다. 한국은 ‘포용, 신뢰, 호혜’이고, 중국 공산당은 ‘우호, 신뢰, 이익융합’이다. 개념도 같고, 순서도 같다.
종합하면, 윤석열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실체는 더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분명한 것은 동남아시아+인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고, 중국을 배제하면 안 된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 정책을 계승해야 한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경향 2022.11.22
패륜과 애도라는 정치적 기획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 공개는 패륜인가 애도인가. 공개하자고 주장하거나 유족 동의 없이 공개를 감행한 쪽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진정한 애도라고 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패륜이라거나 ‘미친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개인정보보호법이나 명예훼손 등 법적인 쟁점이나 2차 가해와 프라이버시 등 인권 쟁점은 지난 며칠간 많은 조명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은 공개하자거나 공개하지 말자는 주장에 깔려 있는 정치적 기획이다. 법적이나 도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정치적 기획이 가진 의도와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자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촛불을 들고 다시 해야 되겠나”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가 읽히는 단어 선택이다. 실제로 익명의 당 지도부 관계자는 “이슈가 최소 2년은 갈 것”이라고 희망 사항을 내비쳤으며, 거리로 나선 강경파 의원들은 “민주당 지도부가 촛불광장으로 나오기 전에 선도적으로” 나왔다고 외쳤다. 이태원 참사를 세월호 참사로 연결하고, 나아가 촛불집회로 이끌어보려는 기획이 엿보인다. 민주당 내에서도 명단 공개가 부적절하다는 반발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이 기획은 주로 친명계의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만약 성공한다면 검찰의 칼끝 위에 서 있는 이 대표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 될 것이다.
미래의 일을 단정해서 말할 수 없겠으나, 재난의 정치화에 대해 축적되어 있는 연구나 촛불집회와 같은 집합행동 연구의 성과에 기대어 보면 이 기획이 성공할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 재난의 정쟁화와 정치화는 다른 것이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정치 세력들이 각자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프레임을 짜고 정쟁화하는 것이야 늘 있는 일이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재난의 정치화는 대형 재난을 목격한 시민들이 언제든지 본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실감하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의지나 능력이 없어 보이는 정부를 상대로 집합적인 항의를 벌이는 것이다. 재난은 많지만 정치화하는 재난은 드물다. 정권에 타격이 되려면 정치화해야 하는데, 이것은 예외적으로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럼 이태원 참사는 이런 예외에 속할 수 있을 것인가.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정치화했었던 재난은 세월호가 아니라 광우병 사태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는 무려 304명이 사망 혹은 실종된 재난이었지만 당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10%포인트 하락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총선이 다가오자 다시 회복되었다. 반면 광우병은 재난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뿐, 실제 재난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들불과 같이 정치화했다. 당시 취임한 지 석 달도 안 된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은 40%포인트 넘게 떨어져 거의 4분의 1 토막이 났다.
지난 연구의 성과들을 보면, 재난이 정치화하기 위해서는 최소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재난이 사회적 위험과 연관되어 있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미국산 소고기가 실제로 위험하더라도 한우만 사먹는 부자들은 안전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서민들은 위험할 것이라는 인식은 촛불집회 참여 확률을 3배 가까이 높여놓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 사회적 위험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다. 둘째는 재난의 경계선이 불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언제든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 위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 무심코 먹은 음식에 미국산 소고기가 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 현실적 공포심 말이다. 사람들이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앞으로는 인파가 몰리는 곳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재난의 경계선 바깥에 서게 된다. 재난이 정치화하기에는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다. 셋째는 참여자들의 네트워크 형성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프레임 공유와 조직화, 그리고 집합행동이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같은 학교 학생들이었던 세월호 참사와 달리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명단 공개는 네트워크 형성의 가능성이 주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변수이다. 그러나 설사 이 세 번째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앞의 두 조건의 결여는 이번 비극이 정치화로 연결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음을 말해준다.
패륜과 애도라는 정치적 기획을 떠나 재난을 반복하지 않을 시스템 개선에 공을 들이는 것이 최선의 정치적 선택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22.11.22.
김건희 액세서리’ 된 캄보디아 아이
한국 정치에는 ‘민생투어’나 ‘봉사쇼’ 같은 독특한 관습(?)이 있다. 대통령 부부나 장관, 국회의원 같은 높으신 분들이 전통시장을 찾아 상인들과 몇마디 나누거나 재해 복구 현장에서 삽을 잡고 노동하는 포즈를 취한다. 기자들은 이를 사진으로 포착해 ‘민생을 챙겨주는’ 통치자들의 보기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아마도 이런 관습의 뿌리를 추적하면 전통 왕조시대 군주의 ‘순행’(巡幸) 같은 의식 행위로 거슬러 올라갈지 모른다. 유교의 민본 이데올로기에서는 군주와 고관들이 ‘어린 백성’을 어루만지며 그 고락을 직접 볼 도덕적 의무가 있었다. 북한 지도자들의 ‘현지지도’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근대화된 ‘순행’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이런 정치 행위 근저에 깔린 민본 이데올로기는, 현대의 민주주의나 평등 원리와 본질에서 다르다. 예를 들어, 평등주의가 철저하게 뿌리내린 노르웨이에서는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자신의 아이를 직접 유치원에 등하원시키고, 때 되면 지역주민들과 함께 자원봉사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다. 따라서 그런 모습을 사진 찍어 언론에 공개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사거나 삽을 손에 드는 ‘윗분’의 모습이 이례적인 사회에서야말로 그런 모습이 ‘뉴스’가 된다.
김건희 여사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수척한 캄보디아 소년을 안고 있는 논란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것도 일종의 ‘국제화된 봉사쇼’로 받아들였다. 그런 쇼란 게 대개 정치의 ‘부실’을 가리는 데에 동원되는데, 실은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한국의 지원은 부실해도 너무 부실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내총소득(GDI) 대비 공적개발원조는 0.16%로, 1% 수준인 노르웨이나 스웨덴은 물론 폐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일본(0.34%)이나 헝가리(0.29%)보다도 낮다. 선진국 가운데 개발원조에 가장 인색한 나라라는 사실을 가리고자 이런 쇼를 벌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사진을 보는 순간 떠올랐다. 한데 이 사진을 가만히 보면 볼수록 마음이 자꾸 불편해졌다.
정치인들의 ‘봉사쇼’를 보는 서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짧은 시간 이뤄지는 일회성 행사라 어려운 이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안 되는데다, 평상시 삽 같은 도구를 잡아보지도 못한 손으로 카메라 앞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시늉을 하는 모습이 위선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사진에서 대통령 부인이 잡고 있는 것은 삽이 아니라 아이였다. 어려운 삶을 사는 그 먼 나라의 아이를, 일개 정치적 ‘쇼’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 과연 납세자의 돈으로 외교 현장으로 간 선출직 공무원의 배우자가 해야 할 일인가? 만약 대통령 부인이 이번에 방문한 소년 또는 소년이 수술받은 헤브론의료원을 예전부터 후원하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불쑥 소년의 집을 찾아 아픈 소년과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것은 한 인간을 정치적으로 도구화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많은 국내외 관찰자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이 ‘해외 봉사쇼’ 과정에서 대통령 부인이 네덜란드계의 유명한 영미권 배우인 오드리 헵번의 소말리아 아이를 안고 찍은 유명한 사진을 ‘벤치마킹’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아동을 계획된 ‘연출’에 동원하는 것은 주류 정치인 다수의 공통점인 ‘위선’을 넘어 아예 가탄스러운 비양심, 몰상식으로밖에 안 보이지만, 이를 통해 유명한 서양 배우를 ‘코스프레’하는 게 몰상식한 개인이 벌인 쇼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 지배층 상당수가 공유하는 의식·욕망임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제공해준다.
현직 대통령 부인과 달리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를 위한 활동을 수년 동안 지속했으며, 의료원조 같은 분야에서 나름의 전문성을 쌓은 인물이었다. 헵번이 국제적 구호활동에 나선 동기 역시, 불량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정책적 부실을 가리기 위해 벌이는 봉사쇼와 차원이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군에 점령을 당했을 때 기아에 시달리고 영양실조로 인한 질환을 겪어본 헵번이었기에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 방글라데시, 베트남 어린이들이 겪는 곤란에 “동병상련을 느꼈다”고 말했을 때 왠지 그 진정성에 믿음이 갔다. 한데 헵번으로 대표되는 구미권 주류에 의한 국제적 자선활동은, 그 활동을 벌이는 개개인의 진정성 여부와 관계없이, 세계 체제 주변부가 겪고 있는 기아·빈곤이나 유행병 문제의 기원을 호도하는 역할을, 심하게 이야기하면 구미권 주류의 ‘이미지 세탁’을 위한 역할을 했다.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국가가 경제개발을 주도해 부가가치 높은 상품을 생산하도록 이끌었던 한국이나, 현재 비슷한 모델을 이용해 세계 최대 실물경제를 키운 중국은 구미권의 자선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자선조차 필요로 하는 최빈국들 대부분은, 개발을 주도할 만한 국가의 정치력·행정력이 부족하고 구미권을 비롯한 해외자본이 매장자원 채굴이나 저임금 위주 저부가가치 제조업을 장악하고 있다. 결국, 본인 의도와 무관하게 헵번 같은 자선가들의 ‘착한 일’은, 구미권 자본이 주변부 국가에서 벌이는 추악한 돈벌이를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한데 오늘날 한국 대통령 부인의 헵번 ‘코스프레’는, 한국과 캄보디아의 관계가 구미권과 세계 주변부 사이의 관계와 한 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명예 백인’ 노릇이나 즐겨보려는 한국 지배층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준다. 12년 전 캄보디아 국가별 투자 누계에서 1위를 차지한 한국은, 캄보디아 현지에서도 국내에서도 캄보디아인들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이윤을 챙기는 한편, 구미권의 백인 못지않게 남의 빈곤을 이용한 초과 이윤 추구를 자선 이미지로 아름답게 가리려 한다. 김건희 여사뿐만 아니라 국내 많은 기업체나 종교단체들이 캄보디아에서 벌이는 자선활동을 홍보에 이용하며 이미지를 세탁한다. 아픈 아이를 ‘장신구’처럼 이용한 자기 홍보 행각은 그중에서도 특히 ‘뻔뻔스러움’의 상징처럼 눈에 띈다. 이 낯 뜨거운 자선쇼를 지켜보는 캄보디아 현지인들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렵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2.11.22.
실패로 시작한 윤석열식 외교와 암울한 ‘한반도 시나리오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외교는 출발도 하기 전에 실패했다. 입만 열면 자유와 ‘보편적 규범과 가치’를 외치는 대통령이 특정 언론사를 지목해 전용기 탑승을 불허하면서, 언론 탄압의 자욱한 먼지로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귀국 뒤에는 “전용기 탑승 배제는 헌법 수호”라는 거창한 궤변으로 언론과의 싸움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이번 순방 동안 발표한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과 한·미·일 프놈펜 공동선언은 1990년대 초반 탈냉전 흐름에 대응한 북방외교 이후 가장 큰 폭의 외교 궤도 수정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 여론의 동의를 구하려는 노력은 흔적도 없다. 한없이 무책임하다.
이번 정상외교의 결과를 가장 예리하게 파악한 쪽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첫 대면 정상회담에서 미-중의 입장 차이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것은 북한 핵·미사일과 대만 문제였다.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북핵 문제에 대한 이견은 팽팽했다. 한국과 미국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이 적극적 역할을 하라, 아니면 한·미·일 군사협력으로 중국 견제를 강화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중국은 북한의 “합리적 우려”를 강조하며 미국의 전략무기 배치나 한·미 훈련 등을 먼저 중단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중국의 신호를 확인한 뒤, 북한은 곧바로 18일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을 발사했다. 어린 딸까지 데리고 나와 시험발사를 직접 참관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에는 핵으로, 정면대결에는 정면대결로 대답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과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금 세계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강대국이 영토와 영향권을 넓히기 위해 주변 국가·지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가 되돌아오고 있고, 이를 막을 수 있는 기존 국제질서는 사실상 무너지고 있으며, 제국들과 핵을 가진 국가들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세계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전략 변화가 중요하다. 우크라이나-대만-북핵 문제가 연동되어 있다고 경고해온 백승욱 중앙대 교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기본 입장은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중국이 한반도에서 비핵화 원칙을 포기하고 대만 상황과 관련해 북한을 변수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대만 통일’은 시진핑 주석이 중국 인민들에게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약속한, 통치 정당성을 떠받치는 버팀목이 되었다. 지난 14일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시진핑 주석은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이익 중의 핵심이며, 중-미 관계에서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최우선 레드라인”이라고 했다.
중국은 이런 전략 변화에 맞춰,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북-중 동맹 강화’를 선택했다. 중국이 대만 통일에 나설 경우, 미국의 억지력을 분산시키려면 북한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2개의 전선’을 펼치는 것이 중국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번 한-중, 미-중 정상회담에 대한 중국의 발표문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정세 변화에 따라, 북한은 핵 전략을 바꿨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기 전까지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은 미국을 협상장에 나오도록 해 거래를 하려는 전략의 일부였다. 하지만 올해 9월 핵무력 법제화와 계속되는 탄도미사일 발사, ‘전술핵 부대 훈련’ 등은 북한 핵이 ‘전쟁 억지용’을 넘어섰다는 매우 우려스러운 신호로 보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핵·미사일 전문가인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기술적인 면에서 현재 북한의 전술핵 개발과 부대 편성, 장비 등을 종합해 보면, 실제로 한국을 겨냥해 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개발과 훈련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이 완성되면, 김정은 위원장은 전술핵으로 한국을 직접 겨냥해도 미국은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능력을 고려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하지 않을까. 특히 대만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위기가 벌어진다면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런 암울한 시나리오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의 본질과 국제질서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진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대통령은 ‘한·미·일 3각 공조’만 구호처럼 외칠 뿐 한국의 입장에서 ‘용미’ ‘용일’ 하려는 전략을 고민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야당은 국제질서가 급변하고 과거의 북핵 해법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직시하거나, 현실적 대안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외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는 ‘친미’ ‘친중’ ‘친일’로 서로를 비난하는 진영 싸움으로 좁아졌고, ‘한국의 관점’에서 장기적 전략을 함께 마련할 공론장은 실종되어버렸다. 지금 가장 심각한 위기는 권력자들의 떠들썩한 정치 공방에 온 사회가 휩쓸린 채 ‘생존의 위기’에 대비할 골든타임마저 계속 흘려보내고 있는 것 아닐까.
박민희 | 논설위원 한겨레 2022.11.22.
미국 <뉴욕타임스>는 옳고…우리나라 <민들레>는 틀리다?
인터넷 매체 <민들레> 누리집 갈무리
10·29 참사가 일어난 뒤 희생자들을 무명씨로 만든 합장 위패와 영정사진 없는 분향대가 진혼분위기를 저해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희생자 명단을 공개한 신생언론 <민들레>에 대한 기울어진 여론이 빗발친다.
참사현장 사진과 동영상을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퍼나르는 황색저널리즘도 문제지만, 진실을 알리는 보도사진의 의미는 중요하다. 그런데 이번 참사와 관련한 자세한 현장 모습은 일반언론매체에서 실종돼 가고 있다.
80년대 대학에 입학한 사람들이면 웬만하면 겪었을 트라우마가 있다. 당시 제5공화국 보도지침에 의해 조작된 ‘80년 5월 광주’의 모습만을 바라보다, 대학에 입학한 뒤 소위 학내 ‘대자보’라는 것을 통해 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접하게 됐기 때문이다. 학내 대자보에 게시된 참상의 진실을 알리는 글과 사진은 수많은 대학생의 의식구조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나 또한 대학생이 된 뒤 학내 대자보를 통해 게시된 5·18 광주의 처참한 기록사진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찌 보면 그 사진들이 내 삶의 행보 한구석을 통째로 바꿔놨다는 생각도 든다. 대통령과 정부에 무조건적인 경건한 마음만을 가지고 국기에 대한 경례에도 한치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알고 살아왔던 풋내기 고교생은, 학내 대자보를 통해 ‘5·18 광주’의 진상이 담긴 보도사진들을 접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가와 정부를 구분하게 됐다.
10·29 참사와 관련해서도 인식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날 이태원에 간 젊은이들이 무슨 해괴한 모임에 갔던 게 아니다. 이 사회가 만들어준 젊은이들을 위한 페스티벌에 수많은 젊은이가 참여했고, 이 사회, 이 정부의 안일한 대처로 158명 숭고한 목숨이 희생됐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얼토당토않은 이상한 정치적 프레임에 휘말린 채, 애써 그 참상의 진실을 직시하는 것을 억지로 외면하고 대한민국의 전통적 상례에도 안맞는 합장 위패와 영정사진조차 없는 제단만을 차려 추모해야 하는가. 과거 수학여행에 나선 학생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추락했을 때 온갖 매체들이 희생자 보도 속보경쟁을 하고, 세월호 참사 때는 영정사진과 희생자 명단을 오래도록 공개하지 않았던가.
난데없이 80년 광주 5·18 희생자 개인신상 공개 논란을 이번 10·29 참사 희생자 추모명단 공개와 묶어 물타기하는 움직임 또한 기괴하다. 왜냐하면 5·18 희생자 명단은 기존 언론보도로, 또 광주 5·18추모기념공원에 묘비 등에 공개돼 있지 않은가.
희생자들 신상공개와 추모를 위한 희생자 이름 또는 영정사진 공개는 엄연히 별개 사안이다. 그런데 어째서 법무부 장관과 여당 의원은 이를 혼동해 물타기로 일관하는 걸까. 미국 9·11 참사 때 <뉴욕타임스>는 희생자 이름을 전면기사로 공개했다. 또 추모비에 희생자 이름을 아로새겨 세상에 경종을 울리며 스러져간 분들을 세계인이 추모하도록 했다. 도대체 왜 <뉴욕타임스>는 되는데 왜 <민들레>는 안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영국 <비비시>(BBC) 마저 두손으로 입을 막은 채 오열하는 유족 사진과 함께 “슬퍼하는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분노할 때”라고 보도했다.
“마당은 비뚤어져도 장구는 바로 치라”고 했다. 그런데 왜 한국언론이 해야 할 이런 이야기를 외신이 해야 하는가 말이다.
전창관 | 태국 랑싯대 한국어학과 교수 한겨레 2022.11.22.
대통령이 참 좀스럽다
몹시 끔찍할 때 무참(無慘)하고, 더없이 부끄러울 때 무참(無참)하다. 6개월 넘긴 ‘윤석열 시대’가 그렇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4주째 사과의 덫에 갇혀 있다.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는데도, 국민은 제대로 다시 하란다. 158명이 억울하게 죽은 참사에 책임 물은 장관 하나 없어서일 게다. 대통령의 사과는 납득할 문책 뒤에 누가 뭘 어떻게 왜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어찌보면, 타이밍과 진정성은 이미 놓쳤다.
점입가경이다. 이슈로 이슈를 덮는 검사 영화 <더 킹> 속 대사같이…. 참사를 추궁한 대통령실 국감에서 김은혜 수석이 쓴 “웃기고 있네”가 세상을 뒤집었다. 그 분노는 대통령 전용기에 MBC 기자를 못 타게 한 일로 커지고, 문책론 중심에 선 행안부 장관에게 “고생 많았다”는 대통령 말로 불똥 튀고, 출근길 도어스테핑까지 중단하는 사태로 번졌다. 동영상 첨부된 140여 언론사의 비속어 보도를 왜 MBC만 문제 삼고, 그 화풀이를 “헌법수호”라고 궤변하는가. 상처받은 국민보다 장관을 위로한 대통령 말도 방향이 틀렸다. 어느 것도 민주적 지도자의 품새가 아니다.
11월 셋째주, 윤 대통령 국정지지율(갤럽)은 29%를 찍었다. 사우디 왕세자 특수에도 한주 새 1%P 빠졌고, 두달째 24~30%에 걸쳐 있다. 아집·오기만 보이고, 협치는 뒷전이고, 국민을 이기려는 대통령의 성적표다. 그 무참한 6개월을 보여주는 열쇳말이 있다.
#허송세월 국정=수개월째 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 이유 1위는 ‘모름·무응답’이다. 첫 6개월의 정책 긍정평가도 북한(33%), 복지(27%), 외교(25%), 경제(21%), 공직자 인사(19%), 교육(17%) 순으로 다 낙제점이다. 참사는 이태원뿐이 아니고, 내놓고 평가할 국정의제가 없었단 뜻이다. 저잣거리엔 대통령이 6개월째 이룬 게 용산 이주(한남동 관사 입주)와 내각 구성(이주호 교육장관 임명)뿐인데, 참사 문책하라니 머리 아플 거란 조소(嘲笑)가 터진다. 대통령은 시작이 반이다. 정사는 새롭거나 볼 것 없고, 야사만 쌓이는 나라는 시간도 더디 간다.
#해바라기 여당=대통령실은 현재를 중시하고, 여당은 미래를 본다고 한다. 민심과 선거는 당이 더 챙겨서 나온 소리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그 가교 역할을 놓아버렸다. 이상민 문책론은 “장관 하나 못 지키냐”는 대통령 말에 오그라들고, 검찰·김앤장만 득세한다는 인사 불만도 사석에서만 부글거린다. 저마다 총선에 목매 몸 사리는 탓이다. 민심에 민감한 수도권 의원이 19명(16%)뿐인 것도 이유일 수 있다. 여당에 유승민·이준석이 두 축인 ‘비윤의 길’이 섰고, 안철수도 그 길을 곁눈질한다. 반년 만에 ‘29% 대통령’이 빚어낸 풍경이다
#승자독식의 인치=이런 적은 없었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3부와 공공수사1~3부가 동시에 이재명·민주당·문재인 정부에 칼끝을 겨누고 있다.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수사를 1년째 뭉개던 반부패수사2부까지 그 판에 뛰어들었다. 모두 ‘윤석열 사단’이 포진한 곳이다. 반대로 경찰은 선관위까지 수사의뢰한 김은혜 수석 재산 축소신고 수사를 불송치했다. 검사들만 탄 ‘윤석열차’엔 주구장창 야당의 한방만 좇는 인치(人治)가 어른거린다. “자유는 결코 승자독식이 아니다”라던 대통령의 말도 길을 잃었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의 분석이 날카롭다. 문재인 정권은 ‘40% 콘크리트 지지층’과 ‘50% 콘크리트 비토층’이 있었다고 봤다. 윤 대통령은 ‘매우 못한다’는 답이 벌써 절반을 넘었다. 대통령과 국정기조가 바뀔 때까지 쉽게 꿈적 않을 비토층이다. 미 중간선거는 임신중단과 학자금이 여성·젊은층을 움직이고 접전지 승부를 갈랐다. 대한민국 정기국회도 기로에 섰다. 예산과 법의 방향을 정하는 민생은 큰 싸움이다.
추워진다. 김훈은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서 라이더들이 눈비 대신 맞으며 비탈길 올라 갖다주는 밥이 무섭다고 했다. 삶은 ‘Life(생명)’가 아닌 ‘Being Alive(살아가는 것)’라 했고, 그 앞에선 까불지 말고 경건해지자고 했다. 정치도 민생과 다를 게 없다. 기후·도시형 재난도 잦아질 게다. 그런데도 최고 권력자는 믿음과 울림이 없다. ‘존중받는 나라’를 공약한 취임사는 9월22일 뉴욕에서,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취임 100일 회견은 10월29일 이태원에서 서버렸다. 그 무참함은 사과도 받지 못한 국민 몫이 됐다. 길 못 잡는 혼군(昏君)의 허송세월은 그칠까. 윤석열의 6개월, 새롭지 않아 지루하다. 싸우기만 해 좀스럽다. 다시 시작하라고, ‘F’를 매긴다.
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2022.11.22.
거짓말, 궤변, 그리고 'X소리’
지난 2005년 미국에서 출간돼 화제를 모은 뒤 한국에서도 2016년에 번역돼 나온 <개소리에 대하여>란 책이 있다. 책의 제목은 다소 상스럽고 거북하지만 내용은 묵직하다. 저자인 해리 G. 프랭크퍼트는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과 명예교수로, 자유주의와 도덕적 책임에 관한 연구 등으로 유명한 철학자다. 프랭크퍼트 교수와 대학원 유학 시절 인연이 있는 서울대 철학과 강성훈 교수는 이 책의 해제에서 "책의 제목이 주는 당혹감은 역설적으로 철학이라는 것이 어떤 작업인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고 적었다. 이 시대에 만연한 언어의 타락상을 다룬 이 책은 개소리를 협잡, 기만, 거짓말 등과 비교해 개념적 특성을 연구하고, 개소리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중요한 사회 문제인지를 탐구한다.
이 책의 원제는 <On Bullshit>이다. bullshit은 헛소리, 허튼소리, 엉터리, 실없는 소리, 허튼수작, 허풍, 과장, 바보 같은 소리, 터무니없는 소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다. 지난 2015학년도 서울대 입시 구두 논술시험에서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해 지문으로 출제했는데, 그때는 '빈말'로 번역됐다고 한다. 책을 옮긴이(이윤 번역가)는 "처음에는 개소리라는 비속어보다는 '헛소리' 정도로 옮기는 게 좀 더 철학책의 격에 맞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헛소리는 난센스와 차별화가 어렵고 무의미한 말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어 어딘지 만족스럽지 못했다"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기사에 실린 도서명에서 힌트를 얻어 결국 '개소리'로 번역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책이 가장 역점을 둔 내용은 "X소리가 거짓말보다 위험하다"는 대목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 말이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라도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주는 반면 X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리든 거짓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한마디로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언론의 품격상 책의 본문과는 달리 지금부터는 'X소리'로 표기함.)
거짓말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많은 연구가 있다. 자크 데리다의 <거짓말의 역사>, 베티나 슈탕네트의 <거짓말 읽는 법>, 볼프강 라인하르트의 <거짓말하는 사회> 등 번역돼 나온 책도 꽤 많다. 베티나 슈탕네트의 책에서는 인류가 지난 2000년 동안 거짓말의 정의를 정밀하게 다듬어 왔다며 다음과 같은 정의들을 소개한다. 거짓말에는 의도가 있다, 거짓말은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유인전략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나쁜 줄 알면서도 거짓말한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속이려는 의도를 지닌다, 거짓말은 가짜 정보다…. 그런데 프랭크퍼트 교수는 '진리에 대한 관심'이라는 각도에서 거짓말과 X소리를 조명해 구분한다. "X소리를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X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X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옮긴이 이윤 번역가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데는 생각보다 엄격한 지적 정밀성과 장인정신이 필요한 반면에 X소리는 굳이 공들여 만들 필요가 없다. 단지 약간의 뻔뻔함만 있으면 된다"며,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예로 든다. "트럼프는 진리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때문에 그처럼 강력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 트럼프의 말이 사실인가? 그러면 좋다. 트럼프의 말이 거짓인가? 그래도 좋다. 어차피 X소리쟁이와 그 지지자들은 참과 거짓이라는 진릿값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논리적 공간에서 언어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은 그렇다 치고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은 어떤가? 가장 최근에 논란을 빚은 윤석열 대통령의 '말씀'은 "MBC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는 헌법 수호를 위한 부득이한 조처"라는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이 발언에 대해 상당수 언론이 "궤변"이라고 비판했는데 엄밀히 따지면 '궤변'이 아니다. 궤변이란 '얼핏 들으면 옳은 듯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둘러대 논리를 합리화시키려는 허위의 변론'을 뜻한다. 궤변은 일단 '속이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상대방을 속여 참을 거짓으로, 혹은 거짓을 참으로 잘못 생각하게 하거나, 또는 거짓인 줄 알면서도 상대방이 쉽게 반론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궤변이다. 윤 대통령이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언론 자유를 탄압하는 데 대해 "나는 자유를 무척 존중한다. 그렇다면 '자유를 억압할 자유' 역시 존중받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것이 일종의 궤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헌법 수호" 발언은 그런 수준이 아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말'도 아니고, '기이한 논리로 헷갈리게' 하지도 않는다. '얼핏 들어도 틀린 말'이고 '헷갈리게 하는 교묘한 논리도 없는 말'이다. 궤변의 필요조건을 전혀 충족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의 말에는 '속이려는 의지' 자체가 없어 보인다. 진실에 대한 의식이 아예 없기 때문에 속인다는 차원을 이미 벗어나 버린 것이다.
'진실에 대한 관심'을 중심에 놓고 윤 대통령의 발언을 분석해보자. 이런 발언을 하려면 '헌법 수호'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하고, 이에 앞서 자신의 '바이든 비하 및 비속어 발언'의 진위부터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진실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한 '바이든 비하' 발언 논란에 대해서도 진실을 애써 외면한다. 프랭크퍼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 프랭크퍼트 교수가 말하는 '그'와 윤 대통령의 모습이 놀랍도록 정확히 겹치지 않는가?
프랭크퍼트 교수의 책은 현대 사회에서 언어의 타락이 심각해지는 이유와 문제점 등을 짚었으나 아쉽게도 '권력형 X소리'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책이 정치학 관련 책이 아니라 철학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자가 참과 거짓의 구별 자체에 무관심한 것은, 일반 '장삼이사'들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것과는 심각성에서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지금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 국민의힘은 '참과 거짓이라는 진릿값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논리적 공간'에서 언설을 토해내고 있다.
권력자가 말한다는 것은 법을 말한다는 것이다. 권력의 형태와 언어의 형상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언어학을 뺀 정치학이란 있을 수 없다. 권력을 제대로 쓰려면 최소한 교묘한 수사학적 기교로 형상화하는 능력이라도 발휘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최고권력자에게는 그마저도 없다. 의미내용이 없는 벌거벗은 거친 언어만 난무할 뿐이다. 언어의 난폭성은 권력의 난폭성의 다른 이름이다. 진실의 권위에 오불관언하는 권력자의 말은 거대한 폭력이다.
프랭크퍼트 교수는 X소리가 끼치는 사회적 악영향에 대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무너뜨린다"고 지적했다. 지금 윤 대통령을 비롯해 이 정권 사람들은 참과 거짓에 대한 사회의 기본 상식을 뿌리부터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김종구 (언론인) | 프레시안 2022.11.23.
성한용·강준만 칼럼에 부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지난 12일과 14일 각각 본지에 실린 <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왼쪽)와 <강준만 칼럼>.
이 글을 쓰기 전에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읽었다. 오래전부터 책꽂이에만 있던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지난주 성한용 선임기자의 ‘국정 목표도 공감 능력도 없는 윤 대통령, 여당이 책임져야’와 강준만 교수의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 칼럼 때문이었다. 하워드 진의 삶이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192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하워드 진은 교수로서 많은 저술과 강연만 아니라 인종차별, 베트남전쟁 등 시대의 문제에서도 정치적 견해를 숨기지 않고 발언하고 행동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삶을 대변하는 제목의 책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나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우리가 ‘소통 불가능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텔레비전(TV) 토론 등에서 윤 대통령은 국정을 이끌어가기엔 모르는 것이 많고, 생각하는 바와 판단력에도 문제점이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런 약점은 취임 뒤 업무를 수행하면서 보완되기는커녕 더 확대됐고 불통을 향해 가고 있다. 온 국민의 귀를 시험하고, 사실을 부정하고, 일방통행식 발언으로 반대편의 말은 애써 무시한다.
하워드 진이 말했듯이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성한용 기자와 강준만 교수의 칼럼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아쉽고 부적절했다.
12일치 신문에 실린 성한용 기자의 글은 윤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균형을 맞추고자 그랬는지 글 앞부분에 윤 대통령의 두가지 긍정적인 점을 언급한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과 지방선거 승리다. 지방선거 승리야 사실이므로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잘한 일이라고 평가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사안일 수 있으나 졸속으로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윤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얘기한 예산은 496억원이었지만, 야당에서는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용 문제 말고도 추진 과정에서 불법의혹 등과 관련해 참여연대에서는 감사원에 감사청구서를 제출한 상태다. 더욱이 윤석열 대통령이 이전 이유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했지만 대통령의 의식이 바뀌었나? 성한용 기자는 대통령실 이전이 “대한민국에서 권위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했지만, 그 근거가 무엇인가? 공간은 옮겨졌지만, 의식은 바뀌지 않았고 대통령 특유의 고집과 불통은 심화됐다.
14일치 신문에 실린 강준만 교수의 칼럼은 10월29일 이태원 참사 이후 그가 처음으로 쓴 칼럼이었다. 다른 매체에 기고한 칼럼이 있는지 검색했지만 10월26일치 <경향신문>에 쓴 게 가장 최근이었다. 일간지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시의성이다. 그런데 강 교수는 어떤 사건,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선택적 과잉 공감”이라고 한 것인지 생뚱맞다. 이태원 참사 이후 20여일이 지났건만 대통령은 물론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사과나 책임지고 사퇴한 사람은 없다. 이런 정부를 향해 ‘윤석열 퇴진’, ‘김건희 수사’, ‘국정조사’를 외치는 촛불시위대를 향해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이라고 한 것인지 묻고 싶다. 오피니언 리더이자 언론학자인 강준만 교수가 최근 시국에는 침묵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 칼럼은 차라리 장대익 교수의 책 <공감의 반경―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를 소개하는 서평기사로 적절했다.
언론에서 다양한 의견수렴을 위해 양적 객관성은 어느 정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질적 측면, 즉 내용에서는 <한겨레>다운 관점과 명철한 비판 정신을 기대한다.
“역사가 잘못 흘러가고 있을 때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그 잘못에 동조하는 행위입니다.!”(하워드 진)
유정민 | 50대 서울시민 한겨레 2022.11.23.
남욱 가라사대
대장동 3인방’ 가운데 한 명인 남욱 변호사의 폭로가 장안에 화제다. 1년 전에 남씨는 말했다. “A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남씨는 말을 완전히 뒤집었다. “A는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 그땐 A가 대통령이 될지 몰라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고. A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지난 21일 구속기간 만료로 풀려난 남씨는 법정에 출석해 증언을 쏟아냈다. “2015년 2월부터 천화동인 1호 지분이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실 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만배씨에게서 들어서 알았다”는 것이다. 2013년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에게 전달한 3억5200만원에 대해 남씨는 “(유 전 본부장이) 본인이 쓸 돈이 아니고 높은 분들한테 드려야 하는 돈이라고 얘기했다”고 했다. ‘높은 분들’은 “정진상(민주당 당대표 정무조정실장)과 김용(민주연구원 부원장)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A와 일전을 벌이고 있는 검찰 수사팀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다. A에 대한 여론이 나빠질수록 수사는 순풍에 배 가듯 힘을 받는다. 하지만 남씨는 무슨 일인지 ‘살아 있는 권력’인 B, 검찰 고위직인 C·D 관련 사건도 증언했다. B는 윤석열 대통령, C는 박영수 전 특별검사, D는 김수남 전 검찰총장이다.
B와 C에 관한 남씨의 발언은 “김만배를 어떻게 알게 됐느냐”고 묻는 검사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요약하면 2011년 김만배가 대검 중수부 수사를 받던 부산저축은행 브로커 조우형에게 당시 주임 검사인 B와 친분이 있는 C를 변호인으로 소개했고, 김만배가 수사팀에 조우형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다는 내용이다. 조우형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가 적용될 여지가 있었지만 결국 처벌받지 않았다.
D는 이른바 ‘법조인 50억 클럽’ 중 한 명으로 지목된 인사다. 남씨는 재판에서 “김만배로부터 최윤길 전 성남시의회 의장의 뇌물수수 사건을 잘 봐달라고 D에게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남씨는 김만배가 D와의 친분을 과시한 적 있느냐는 검사 질문에도 “그렇다. 여러 차례 말했다”고 답했다.
남씨 증언이 있기 전에도 대장동 세력과 B·C·D의 유착 의혹은 제기됐지만 검찰은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고 있다. 김만배의 누나는 B의 아버지가 소유한 서울 연희동 주택을 19억원에 사들였다. C의 딸은 화천대유에 입사해 대여금 명목으로 11억원을 받았고, 대장동의 미분양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C의 인척이 운영하는 대장동 분양대행업체는 김만배로부터 대여금 명목으로 100억원을 받기도 했다. 대장동 수사 단초가 된 회계사 정영학의 녹음파일에는 김만배가 “50개 나갈 사람을 세어 줄게”라며 곽상도 전 의원과 함께 C와 D의 실명을 언급한 대목도 있다.
아프리카 남동부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난초 ‘안그레쿰 세스퀴페달레’는 꽃이 독특하다. 기다란 관 모양인데 꿀주머니가 그 밑에 있다. 찰스 다윈(1809~1882)이 재보니 관 길이가 28㎝나 됐다. 다윈은 이 꽃을 보자마자 28㎝의 주둥이를 가진 매개 동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다윈 사후 그의 예언대로 주둥이가 긴 나방이 발견됐다. 난초의 꽃이 기다란 관 모양으로 진화한 것은 주둥이가 긴 나방이 수분을 해결해준 덕분이고, 나방은 꿀을 먹기 위해 난초 꽃의 관 길이만큼 주둥이가 기형적으로 길어진 것이다.
정권과 검찰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기이하게 진화하고 있다. 외계인이 망원경으로 대한민국의 권력 생태계를 관찰한다면 지구가 태양을 5바퀴 도는 시간을 주기로 대살육전이 벌어지는 장면에서 검찰의 존재를 예측할지도 모른다. 난초가 번식을 위해 나방과 거래하듯 한국의 권력자와 검찰은 불가분의 관계다. 검찰총장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서 정권과 검찰은 공생과 공진화(共進化)를 넘어 일심동체가 돼가고 있다. 대통령실은 물론이고 각 부처와 국가정보원 요직에 대통령과 친한 검사들이 임명되고 있다. 검찰의 힘은 기본적으로 강제적인 수사에 있지만 더 큰 영향력은 범죄 혐의자를 선택적으로 수사하는 데서 발휘되고 있다. 유검무죄, 무검유죄라는 말이 시대의 유행어가 됐다.
검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검찰은 남씨의 증언 가운데 A 관련 내용만 수용하지 말고, B의 부산저축은행 부실 수사 의혹, 대장동 세력과 법조인들의 유착 의혹까지 철저히 수사해 관련자를 엄벌해야 한다. 검찰이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정권으로부터 독립된 수사를 하는 것 외에는 없다.
오창민 논설위원 경향 2022.11.24.
교육의 대전환, 기다릴 시간이 없다
한국의 정치 이미지 안에는 아직도 전근대적 절대권력의 망령이 서려 있다. 정치인들은 국가를 오직 권력으로만 이해하며, 통치자는 그 위에 군림하는 군주쯤으로 여긴다. 그 부인을 국모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세력을 악의 축으로 여긴다. 또한 재벌과 결탁하며 사회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간다. 여기에 검찰과 경찰을 장악함으로써 일찍이 알투세가 말한 ‘억압적 국가장치’를 완성한다.
그런 정치에게도 언론은 늘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이다. 이번 MBC 사태는 윤석열 정부의 언론관이 잘못되었거나 ‘속이 좁아서’ 생긴 일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언론을 적극적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현 정부의 다급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이라고 본다. 혹은 현 정부가 권력과 국가를 어떤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교육은 언론만큼이나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며, 그런 점에서 내 관심은 현 정부가 어떻게 ‘교육 길들이기’에 나서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현 정부가 건강한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정치와 언론, 그리고 정치와 교육 사이의 거리 두기와 긴장관계를 존중하겠지만, 만일 오직 ‘그들만의 리그’를 재생산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면 그 체제를 장악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현대사회를 기능적으로 자기조직화하면서 분화하는 각종 사회체계들의 연합으로 규정했고, 그 가운데 교육체계 역시 정치체계나 경제체계, 대중매체체계 등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기능적 전문성에 의해 자기준거적으로 조직화되어 가는 체계로 보았다. 말하자면 교육은 본질적으로 정치나 경제 등에 종속된 사회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윤석열 정부가 교육을 철저하게 정치-경제 동맹의 하부 기구로 전락시키려는 의도는 여러 가지 징후를 통해 확인된다. 국가교육위원장에 교육전문성도 없고 친일미화와 역사교과서 우경화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분을 임명하였다. “교육부는 경제부처”라는 인식 아래 시장주의경제학자를 교육부 장관에 인선하였다. 최근 발표된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노동자 개념을 삭제하고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대체하였다.
교육학자인 내가 볼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 무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개발주의적 국가-자본 시스템의 틈새에 낀 채로 얼마나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국가는 교육을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선발기제로 활용하고 있다. 서울과 지방처럼 사회양극화의 대립 지점들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모든 에너지, 자원, 기회를 활용해서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이동하려고 한다. 반면 교육은 그사이를 가로막고 소수만을 통과시키는 깔때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비유하면 엄청난 질량들이 몰려들지만 통과할 수 있는 길의 폭은 한정되어 있고, 그 결과 교육이라는 터널에는 통제불능의 밀도와 압력이 쌓이게 된다. 딱 봐도 한눈에 ‘이태원 골목길’의 형상이다.
우리는 이태원 사태를 ‘참사’라고 부르지만 매년 300명 가까이 자살하는 아이들은 그저 ‘일상’으로 치부한다. 매년 2만명이 넘는 아이들이 자살을 시도한다. 교육이라는 풍선은 이미 곳곳에서 압력을 못 이기고 터지고 있다. 압력과 밀도를 낮추는 일이 시급하다. 나는 이것을 국가위기상황으로 규정한다. 교육의 위험상황은 재난안전법상의 사회재난에 해당하거나 심지어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으로까지 검토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경쟁을 지향하는 한국의 교육정책은 세계적 흐름과 정확히 반대로 가고 있다. 유네스코가 올해 발간한 ‘교육의 미래 보고서’는 교육을 산업의 일부로 보는 관점을 버리고 생태적 관점으로 전환하라고 말한다. 너무 오랫동안 경제성장 위주의 근대적 개발 패러다임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이제는 교육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삶의 균형과 상호의존적인 지구 생태계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라고 촉구한다. 교육의 사적 이익으로 야기되는 과잉경쟁을 포기하고 교육을 공동재로 재의미화하도록 권한다. 어찌 보면 너무나 한가한 공자님 말씀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지속-불-가능성’이라는 재난상황으로 본다면, 유네스코의 이 주장은 오히려 시급하고 적합한 해결책으로 보일 수 있다. 위기에 처한 지구생태를 위해 생태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처럼 교육의 대전환은 이제 기다릴 시간이 없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경향 2022.11.24.
민심의 무서움 보여주고 있는 일본
좀 고독하고 힘들 때도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최근 모교인 와세다대 출신 의원 등을 만나 어려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뭘 해도 지지율이 떨어지는데다, 한달 새 불미스러운 일로 각료 3명을 경질시켰으니 그런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사안 하나하나를 곱씹어보면 그 답답한 상황은 총리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치솟았던 시기가 있었다.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를 보면, 취임 직후인 지난해 10월 52%로 출발했던 내각 지지율은 56%→62%→66%로 연말·연초 고공행진을 했다. 기시다 총리의 ‘듣는 힘’이 여론을 움직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난해 12월 임시국회 최대 쟁점이던 18살 이하 대상 코로나19 지원금(10만엔) 문제가 대표적이다. 애초 현금과 쿠폰을 5만엔씩 주는 방안으로 추진됐으나,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신속하게 전액 현금 지급으로 정책을 수정했다.
자민당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실책을 인정한 것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20년 4월 코로나 대유행 당시 아베 총리는 마스크 부족을 해소한다며 일방적으로 ‘천마스크’를 대량 주문했다. 하지만 품질이 나빠 재고가 쌓였고 오히려 상당한 액수의 보관료를 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반성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그 뒤 천마스크는 폐기 처분됐다. 자민당 내 소수파인 ‘고치카이’ 출신이라 정치적 타격이 우려됐을 텐데 민심을 먼저 생각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강한 제재와 코로나19 감염자 감소까지 겹치면서 올해 7월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무난히 승리했고 ‘장기 집권’ 얘기도 심심찮게 나왔다.
분위기가 급변한 것은 아베 전 총리가 선거 유세 과정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뒤다. 그가 숨지게 된 주요 원인이었던 통일교와 자민당의 유착 의혹이 연일 폭로되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주변 일본인 지인들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 많았다. 유착의 역사가 깊고, 광범위했다는 사실에 일본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데도 기시다 내각은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대응했다. 말로는 통일교와 고리를 끊어내겠다며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지만, 각료들 가운데 통일교 관련자들이 계속 발각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난달 사임한 야마기와 다이시로 경제재생담당상이다. 결국 경질됐지만 “너무 늦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여기에 아베 전 총리의 국장 문제로 민심은 기시다 총리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7월에 국장이 결정되고 9월에 시행되기까지 두달 동안 국민의 60~70%가 ‘국장 반대’를 외쳤지만 기시다 총리는 강행했다.
민심을 외면한 대가는 컸다. 내각 지지율은 20~30%대까지 하락했다. 29조엔(약 279조원) 규모 경제 대책을 발표했는데도 지지율이 오르기는커녕 더 떨어졌다. “정책을 기대할 수 없다”(33%), “총리에게 지도력이 없다”(24%)는 반응이 나왔다. 일본 국민 43%는 기시다 총리가 “빨리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민심의 무서움은 신뢰가 한번 무너지면 회복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김소연 | 도쿄 특파원 한겨레 2022.11.24.
윤 대통령은 존슨이 선물한 ‘처칠 팩터’ 내팽개쳤나
큰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따라 하다 비슷해질 수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를 존경한다고 했다. 당선 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한 첫 통화에서 “국정 운영에 임하면서 늘 처칠 경을 거울처럼 생각하며 앞으로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처칠이 인생의 스승이라는 존슨 총리는 며칠 뒤 사람을 보내 직접 쓴 책 <처칠 팩터>를 선물하기도 했다.
누구나 그렇듯 처칠도 다면적 인물이다. 그렇기에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반면교사 삼으면 된다. 그럼, 윤 대통령은 지난 6개월간 처칠을 “거울처럼 생각하며” 국정에 임했을까? 안타깝게도 빈말이었던 것 같다.
처칠은 정치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지 않았다. 독일의 영국 침공이 현실이 되자 히틀러와 평화협상을 하는 데 매달린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유화파들을 적폐로 모는 여론이 일었다. 새로 총리가 된 처칠은 진상 조사와 처벌 요구를 거절한다. “현재와 과거가 다투면 미래를 잃을 것입니다”라며 체임벌린 전 총리를 전시 내각에 참여시키고, 야당인 노동당과는 거국내각을 구성해 국가의 역량을 모아냈다.
2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날 무렵인 1945년 7월 처칠의 보수당은 보람도 없이 총선에서 패한다. 집권한 노동당의 애틀리 정부는 무상의료인 국가보건서비스(NHS)를 도입하는 등 대대적인 복지정책을 펼친다. 와신상담하다 1951년 재집권한 처칠의 보수당은 전 정권의 진보 정책을 폐기할 수 있었다. 엔에이치에스만 해도 3년 전 도입 당시 90%의 의사가 반대한 제도여서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었다.
측근들은 처칠에게 노동당의 실책을 파고들자고 한다. 그러나 처칠은 “우리를 지지하지 않은 49%의 국민이 모두 바보일 리는 없습니다”라며 거절한다. 처칠의 보수당은 엔에이치에스를 포함해 노동당의 정책 대부분을 계승한다. 보수의 손으로 한 이 진보 개혁이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되는 ‘전후 황금기’를 일궈냈다.
지난 3월 대통령선거에서 0.73%포인트 이긴 윤석열 대통령은 압승한 듯 행동했다. 취임 후 야당 대표와 회담한 적이 없다. 야당을 국정 파트너가 아니라 제압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제대로 된 국정 비전은 내놓지 못하면서 전 정부 정책 뒤집는 것을 주요 치적으로 자랑한다.
처칠은 말이 정치의 시작이자 끝이란 것을 알았다. 취임 뒤 첫 하원 연설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앞두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진솔하게 고백했을 때 반대파 의원들도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떤 메시지를 어떤 단어로 발신할지를 놓고 침대, 욕실, 서재를 오가며 고심하는 처칠의 모습은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 잘 나와 있다.
윤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은 신선했다. 하지만 “전 정권에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어요?” 같은 말실수를 연발했고, 메시지는 준비되지 않았다. 반지하방 수해 현장과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골목에서 한 무신경한 말, “내부총질”, “이 ××”, “바이든-날리면” 같은 분열의 말들은, 국난의 시기에 영국인의 용기를 일깨워 하나로 묶어낸 처칠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었다.
처칠은 “노”라고 말하는 부하를 곁에 뒀다. 됭케르크의 영웅 앨런 브룩 육군참모총장과는 전략을 두고 의견 충돌이 잦았지만 서로 단점을 보완하며,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쌍두마차가 됐다. 처칠은 권력으로 브룩의 반대 의견을 제압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면서 브룩을 임명한 것은 자신이 1차 대전 당시 해군 장관으로 겪었던 갈리폴리 패전(영국군 25만명 사상)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윤 대통령 주변엔 직언하는 참모가 없어 보인다. “그러면 안 됩니다”라는 이가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특정 언론사 전용기 탑승 배제 같은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겠는가?
처칠은 책임을 분명히 했다. 친하다고 봐주지 않았다.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밥 부스비를 식품부 차관에 임명했지만, 얼마 뒤 그가 ‘체코 금 사건’이란 추문에 연루되자 곧 해임했다. 윤 대통령은 고교·대학 후배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묻지 않고 도리어 범정부 재난안전관리체계 개편 티에프(TF) 단장을 맡겼다.
윤 대통령은 어쩌면 처칠과 아무 관계가 없는지 모른다. 존경한다는 게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공관 어딘가에서 먼지를 쓰고 있을 <처칠 팩터>를 꺼내 읽길 바란다. 4년 반이나 남았다.
이봉현 ㅣ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한겨레 2022.11.24.
보도연맹 학살과 ‘고무신’···애도에 자격이 필요한가
2007년 충북 청원군 ‘분터골’ 유해발굴 현장. 57년 만에 땅 위로 나온 고무신 한짝에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됐다. 밑창에 선명하게 찍힌 세 글자 ‘大同江(대동강)’. 고무신의 상표였다. 이 상표를 추적하면, 57년 전 이 고무신을 신고 분터골까지 와서 이곳에 삶의 마지막 발자국을 남긴 ‘그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1950년 7월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사망자들을 기리는 원혼비가 박혀 있다. / 최규화 전 주무관
‘대동강’의 정체는 1956년 발간된 <충북연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당시 청주에 있던 ‘청주합동고무신공업사’의 상표. 1948년 개업한 이 공업사는 직원 약 160명 규모의 큰 공장이었다. ‘大同江’ 세 글자가 찍힌 고무신 한짝은 분터골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청주 주민이거나 그 가까이에 살았을 거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물증’이 됐다.(<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2008)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에 있는 분터골.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4일부터 11일까지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들과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이 경찰과 헌병대, CIC(방첩대) 등에 의해 이곳 분터골에서 학살됐다.
“후퇴하기 전에 죽였어. 옛날 트럭이야. 하얀 윗도리를 입었는데 형무소에서 끌려나온 것 같더라고. 경찰들이 장총 들고, 정장 모자(턱에 끈이 달린 모자) 쓰고, 죄 엮어서 오더라고. 줄로 엮어서 20명씩을 한데다 묶었어. 그러니까 앞에 있는 사람 허리를 묶으면, 또 묶고, 또 묶고 해서 도망을 못 갔어.”(<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제2권·진실화해위원회·2008)
학살 목격자 이재우 옹(가명·당시 15세)이 기억하는 1950년 ‘그날’의 풍경이다.
2006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는 300~400명의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이 트럭에 실려가 분터골에서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 약 700명도 같은 곳에서 학살당했고, 시신을 흙으로 덮어 가매장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청주·청원지역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수는 약 1500명. 그중 분터골에서 희생된 수만 약 1000명에 이른다. 분터골은 충북지역 최대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다.
추정 희생자 1000명… 충북지역 최대 학살지
1949년 좌익 전향자를 ‘바른길로 이끈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중에는 실제 남로당원도 일부 있었지만, 당국의 강요로 강제 가입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보도연맹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죽을 거라고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집명령에 바로 응했고, 구금 중에도 탈주하지 않고 석방을 기다렸다.
“거기(분터골) 가니께 경찰관들이 보초를 서 있어. 고 언저리에 수천명이 피란민이 서 있어. 못 가게 막았나봐. 하거나 말거나 자전거를 타고 고개 7부쯤인가 8부쯤에 올라갔더니, GMC 자동차 두 대가 청주 쪽을 앞을 두고 서 있더라고.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다 끝났어요’ 하길래, ‘하이고 살릴 사람이 있는데’ 그랬더니 ‘할 수 없죠’ 그래. 드문드문 총소리가 나는데, 저게 확인사살 하는 거라고 그래.”(<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당시 청주에서 우익 청년단체 활동을 한 장풍연 옹(가명·당시 25세)은 ‘분터골에 가봤느냐’는 조사관의 물음에 위와 같이 답했다. 57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만은 생생했다.
그날의 총소리가 남긴 참상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년과 2008년 진행한 유해발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2007년 118구, 2008년 214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M1·카빈총 소총의 총탄과 옷감, 단추, 고무줄, 신발 등이 출토됐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분터골 학살 조사결과를 포함해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65명. 92%가 20~30대였다.
“여기(분터골)가 충북 도내 최대의 학살지라면 저거(안내판) 달랑 하나 세워놓는 게 아니라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현장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만들어놔야 하는데…. 몇십억 들여 위령비를 세우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을 전혀 안 하는 거예요. (돈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예요, 의지의 문제.”(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유튜브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찾아서-분터골’ 2022. 1. 14.)
직접 분터골을 찾아가 보니 박만순 대표의 분노가 이해됐다. 지난 10월 30일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가 주최한 ‘예술과 함께하는 한국전쟁 기억여행’ 답사에 함께했다. 국도변 식당 앞에 차를 대고, 차가 갈 수 없는 좁은 길을 걸어 올랐다. 200m쯤 걸으니 좁은 길조차 아예 사라졌다. 펜션촌을 짓느라 세워놓은 낮은 옹벽을 타고 올라 현장에 도착했다.
무성히 자란 풀밭 사이 진실화해위원회 안내판이 보였다. 그 발치에는 높이가 두뼘 정도 될까,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가 세운 작은 원혼비가 살짝 기울어진 채 ‘박혀’ 있었다.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다. 분터골의 오늘은 너무도 초라하고 쓸쓸했다.
마침 그날은 10월 30일. 자고 일어난 사람들의 귀에 이태원 참사의 소식이 들려온 날이었다. 답사에 참가한 사람들도 충격과 놀라움, 추모와 애도의 말들을 서로 나눴다. 그리고 다시 이곳 분터골로 눈을 돌렸을 때, 우리는 한없는 비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다룬 기사에는 늘 ‘빨갱이라서 죽었는데 무슨 애도를 하고 무슨 보상을 하나’ 하는 댓글이 달린다. 학살의 가해자인 국가의 태도 또한 다를 바 없다는 점은 충북 최대 학살지, 분터골의 ‘폐허’가 말해주고 있다. 아직도 이 사회는 분터골의 원혼들을 향해 ‘애도 받을 자격’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72년간 그래왔듯이.
1950년 당시에는 없었을 것 같은 어린나무에 가지고 간 실을 걸어두고 왔다. 죽음의 땅을 뚫고 올라온 새로운 생명. 실은 기억과 감정을 엮고 잇는다. 분터골, 그날의 참극과 오늘의 애도가 이어지기를.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원한과 내일의 화해가 이어지기를.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6월 말부터 충북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예비검속자들이 청주경찰서 경찰과 헌병대, 청주CIC에 의해 경찰서와 각 지서, 형무소 등에 소집·구금됐다가 7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청원군과 보은군 일부 지역에서 사살된 사건이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주간경향 2022.11.28.
누가 헌법을 수호하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지는 정평이 나 있다. 정치중립이 생명인 검찰총장직을 박차고 나와 전격적으로 대선출마를 선언한 명분이 헌법수호였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어내려는 당시 정권으로부터 헌법의 기본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결단임을 역설하였다. 자유삭제라는 인위적 설정이나 검찰을 정치화하여 헌법질서를 훼손한 본인의 행적을 연상하면 뜨악하기는 했지만 여하튼 헌법수호의 구호만은 분명히 각인되었다. 가까스로 당선된 후 취임사에서 애써 강조한 핵심요지도 그러했다.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윤 대통령이 수호한다는 헌법의 정체성이다. 반지성주의를 헌법의 적으로 설정했던 당사자가 외교현장에서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막말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뜬금없이 MBC(문화방송)만을 콕 집어서 대통령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하고, 이를 받아 여당의 국회의원들이 광고불매운동을 겁박하도록 방임하는 것을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압권은 세무조사, 특별근로감독, 기자징계요구 등 특정 방송에 집중된 압박의 상징이 된 전용기 탑승 배제를 대통령의 헌법수호 책무를 실천하는 것으로 강변하는 것이다. ‘악의적 가짜뉴스’로 동맹관계를 훼손했다는 게 헌법수호 책무를 언급한 동기로 지목되었다. 동맹국이건 우리나라건 의회를 막말로 비아냥거린 당사자가 정작 자신의 발언 자체에 대한 사과는 고사하고 이를 보도한 걸 국익훼손이라 우기니 반지성주의에 매몰된 묻지마 지지층이 아니고서야 누가 납득하겠는가?
더구나 차별적 언론통제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바탕을 둔 헌법을 수호하는 권력발동으로 연계시키는 모순적 상상력이 검사 출신이 지배하는 나라를 이룬 대통령이 수호하려는 헌법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 같아 황당하다. 무엇보다 이런 퇴행적 행태가 대통령만이 헌법을 수호할 수 있다는 발상에 근거한 것이라면 아직은 섣부른 것처럼 보이는 광장의 퇴진요구가 머지않아 우국충정의 발로로 평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해당 방송이 오보를 했다손 치더라도 대통령실이 직접 나서서 이런 사달을 벌이는 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추구하는 법치주의나 적법절차의 원리에 배치된다. 언론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법이 정한 언론중재제도나 사법절차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지 공권력을 배경으로 불이익을 주는 방식은 헌법수호 책무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정작 헌법은 대통령만을 헌법수호자로 설정하고 있지 않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윤 대통령은 헌법소원심판의 피청구인으로 헌재의 심판을 받게 될 수 있다.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라고 하더라도 법 아래에 있고 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법치주의이며, 우리가 경험한 바 있듯이 직무수행과 관련하여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면 탄핵될 수도 있는 것이 대통령이다. 대통령도 헌법의 수호자이지만 헌재도 대통령의 침해로부터 헌법을 지키는 수호책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실의 MBC에 대한 여러 대응들도 민형사상의 불법행위에 해당되어 형사처벌이나 국가배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법원도 대통령이나 그 보좌기관의 불법행위로부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는 책무를 부여받는다. 의회민주주의에 따라 국정통제권을 가지는 국회 또한 헌법을 수호하는 책무를 담당한다. 어처구니없는 무책임과 무능 탓에 21세기 국제도시 서울의 한복판에서 애꿎은 젊은이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의무를 다하지 못한 국정난맥에 대하여 조사하는 것은 여야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국회가 반드시 이행해야 할 너무나 당연한 헌법상의 책무이다. 헌법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일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을 기우(杞憂)라고 한다. 헌법수호 책무에 너무 충만한 나머지 스스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어 보이는 대통령을 둔 국민이다 보니 이러다 1인독재가, 전쟁이, 원전사고가, 제2의 IMF 외환위기가, 닥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것도 기우가 될까 모르겠다. 하루아침에 안 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되는 것도 없어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헌법을 수호할 최후의 보루는 바로 주권자 국민이기에, 짜증이 나더라도, 기우이기를 간절히 바라더라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2022.11.25.
가장 정치적인 애도
2022년 10월29일 밤, 서울 용산 이태원동 119-7번지 골목에서 두 번째 세월호가 침몰했다. ‘두 번째 세월호’란 말을 수차례 쓰고 지웠다. 한 번 비극을 겪었다고 다음 비극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웃다가도 심란하고, 자다가도 수시로 깼던 지난 한 달이었다. ‘두 번째 세월호’는 참사 규모만 해당하지 않는다. 유족을 향해 ‘시체장사’라 하더니 이번엔 ‘감성팔이’라 비난하고, 꼬리 자르기식 책임 전가가 등장하는 장면도 8년 전과 유사하다. 애도와 추모를 탈정치로 몰고 가려는 시도 또한 낯설지 않다. ‘두 번째 세월호’는 국가 권력의 총체적 무능이 한 사회를 유지하는 상식적 기준을 무너뜨렸고 정치적 내전을 불사했던 상황을 집약한 말이다
정부가 사고라 고집해도 이태원 참사는 명백한 정치적 참사다. 외국인까지 포함해 전국에서 모여 축제를 즐기던 158명이 서울 한복판에서 희생됐다. 적지 않은 희생자들은 세월호 참사, 코로나19에 갇혀 외로움의 벼랑 끝에 내몰렸던 세대들이다. 정부는 예측 가능했던 위험을 무시했고, 안전관리 법과 조례는 서류뭉치에 불과했다.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력으로 막을 수 없는 사고라고, 주무부처 장관 역할을 ‘폼나는’ 일이라고 했다. 행정‘안전’부 장관이 아니라 내무부 장관이라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1의 헌법 가치가 무너진 데 따른 어떤 조치도 행사하지 않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국정 최고 지도자의 성찰이 없다. 법을 집행해야 할 대통령이 아직 검찰총장인 양 법을 수호하는 역할만 강조한다.
국가애도기간, 근조 글씨 없는 검은 리본, 희생자가 아닌 사망자, 참사가 아닌 사고를 강요했다. 국가 통제를 거스르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권력의 책임을 따지는 모든 질문을 봉쇄하겠다는 엄포나 다름없다. J S 밀의 <자유론>을 탐독했다는 윤 대통령은 밀의 어떤 자유론을 내면화한 것인가. ‘나의 자유는 다른 이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는 자유론의 핵심은 무시한 걸까.
백번 양보해서 수습에 필요한 행정 능력이 부족했다 해도 정치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기회는 충분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치는 ‘통치를 작동하게 하는 가장 권위 있는 자원’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이태원 참사엔 통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 권력은 ‘국가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국가’를 만든다고 했던 바우만의 경고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태원 참사를 가리키고 있다.
정치적 참사에 대응하는 모든 애도는 정치적이다. 정치적 참사는 정치적 애도를 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당장 질문부터 시작하자. 경찰이 수습 최일선에 있었다면 자치경찰제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이태원 축제의 거리에 마약 단속 경찰이 주로 배치됐던게 사실인지, ‘참사 골든타임 45분’은 경찰에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의도가 아닌지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수습의 최종 목표가 사정기관 존재감을 키우기 위한 것 아니냐는 질문도 빠뜨리지 말아야겠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국민의힘은 국정조사 합의 하루 만에 대검찰청을 조사 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했다.
질문이 늘어날수록 ‘정쟁화’ 프레임도 짙어질 게 분명하다. 여권과 보수 진영은 촛불집회와 한 인터넷 언론의 희생자 명단 공개를 빌미 삼았다. 집회에 가담하지 않고, 명단 공개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도 정부 책임을 묻기만 하면 야당 편, 불순한 세력으로 낙인찍을 기세다. 애도와 일상을 분리하려는 탈정치화 압박도 강해질 것이다. 일단 유족들이 막아섰다. 이들은 참사 한 달여 만인 지난 22일 통곡의 기자회견을 했다. 아직 슬픔을 가누기조차 힘들고, 단일한 요구를 모아내기 어려운 시기임에도 한목소리로 대통령 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했다. 이제 우리가 최대치의 정치적 애도로 유족들을 부축할 차례다. 다행히 진상규명에 앞장서겠다고 나선 160여개 시민단체, 젊은 세대의 상실감을 채워 주려는 어른들의 노력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출퇴근길 버스 안에선 이태원 참사를 주제로 공개 설전이 벌어진다. 쉬쉬하며 슬픔을 목울대로 넘기기만 했던 세월호 참사 때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나 역시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당사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애도가 무엇인지 찾을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정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새기고 새기면서.
구혜영 정치에디터 경향 2022.11.25.
저열한 말들의 풍경
막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힘들다. 저 깊은 심경 속에 가라앉은 오니를 마구 헤집어 정신을 흙탕물처럼 뿌옇게 만드는 기분이다. 인간은 선악의 양면을 지녔으며 상황과 노력에 따라 진흙 위에 살면서도 탐스러운 연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선한 품성을 북돋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교육을 받고 시와 고전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막말계의 대표 주자라면 북한의 김여정과 남한의 한동훈을 들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은 남남북녀 막말배틀이라도 하나 싶을 정도로 거친 말을 쏟아낸다. 그들의 찰진 증오와 비판은 언어의 독화살로 상대를 쏘아 넘어뜨리고자 한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 독자제재 방침에 대해) “국민들은 윤석열 저 천치바보들이 들어앉아 자꾸만 위태로운 상황을 만들어가는 정권을 왜 그대로 보고만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문재인이 앉아 해먹을 때에는 적어도 서울이 우리의 과녁은 아니었다.”(김여정)
(청담동 술자리설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파도가 밀려나면 누가 바지 벗고 수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데, 이제 파도가 밀려났고 책임질 시간이다. 저에게 사과하는 게 모양 빠져서 싫으시면 국민들께라도 사과하시기 바란다.”(한동훈)
정치인으로서 상대방을 대하는 두 사람의 자질을 의심할 만한 수준이다. 두려운 개가 많이 짖는다고 했던가. 오빠 덕분에, 선배 덕분에 별다른 준비 없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던지는 설익은 언어다.
그런데 더 듣기 힘든 것은 관록 있는 정치인 나경원의 말이다. 우아한 태도로 포장됐지만 개인의 정치적 욕망만 담겼을 뿐 시대정신과 상식에서 벗어나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겸 기후환경대사를 맡고 있는 그는 국회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저출산위 부위원장직)를 줘도 당 대표 안 나간다고 안 해서 두 개(기후대사)를 줬다는 말이 있다. 그게 아니라 사실은 두 개를 같이하라고 했는데 (임명장을) 뒤에 받은 것이다.”
인구와 기후라는 중대한 문제는 순식간에 우는 아이를 달래주는 알사탕이 됐다. 어떻게 받았든 일만 잘하면 될 터이지만 인구와 기후에 대한 인식 역시 그 자리에 걸맞지 않다.
“<나 혼자 산다>는 저출산 극복에 도움이 안 된다고 했더니, 기사가 나왔는데 MBC(프로그램)인 줄은 몰랐다. <고딩엄빠>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게 좋은 프로그램이다. 저출산 정책은 좀 그런 쪽으로 가야 된다.”
인구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세계 인구는 1950년 25억명에서 최근 80억명까지 늘었으며 2086년 104억명으로 정점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다. 현재 인구로도 지구 용량에 비해 과부하 상태(세계 평균 1.75배, 한국 4배)여서 늘리는 게 최선은 아니다. 국내적으로는 경제구조 변동, 지방소멸 등 문제가 있으나 관계인구(다양한 방식으로 지역과 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인구), 귀농·귀촌 등 다양한 해법이 나오고 있다. 더구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출생률을 좌지우지할 만큼 젊은 세대는 어리석지 않다. 청소년의 인권과 미래가 달린 ‘고딩엄빠’를 저출생 극복의 맥락에 동원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기후대사 나경원의 인식 역시 석연치 않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이 작년에 조금 사고를 치고 퇴임했다. 별다른 계산, 계획도 없이 2030년까지 무조건 2018년 대비 탄소 40%를 감축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가신 것이다. 다행히 우리 (윤석열)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한 약속이니 지키겠다고 했다. 범정부적으로 40%를 맞추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사고 친 사람과 해결하는 사람의 구도가 유치할 뿐 아니라 팩트도 틀리다. 문재인 정부가 결정한 ‘2030년 40% 감축’은 현재 기후위기와 한국의 위상으로 볼 때 불가피한 선택이며 감원전, 신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감축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현 정부가 친원전으로 뒤집은 것이다.
정치인들의 막말은 지지자들의 막말로 확대 재생산된다. 머리가 움직이면 꼬리가 요동치는 것과 같다. 어느 정권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정치적 지지층 사이의 분열, 대립, 증오가 심해져왔지만 10·29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막말로 정점을 찍는 것 아닌가 싶다.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어디까지 물을지는 정쟁의 영역으로 남겨두자. 그렇더라도 최소한 희생자에 대한 예의는 필요하다. “왜 갔느냐”로 시작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까지 한계를 훌쩍 넘는다. 피도 눈물도 없다. 정치에 의해 더러워진 입들….
한윤정 전환연구자 경향 2022.11.26.
결국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상상은 희망의 동력이 되지만, 어떤 상상은 절망의 표징이 되기도 한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JTBC)을 보다가 든 생각이다.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재계 1위 재벌 순양의 충성스러운 노예로 살다가 죽임당한 윤현우(송중기)가 1987년의 순양 창업주 막내 손자 진도준(송중기)으로 회귀하여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특정 시기의 과거로 돌아가 ‘인생 2회차’를 살게 된다는 면에서 요즘 유행하는 ‘회귀물’의 일종이다.
몸은 11세가 되었지만 과거의 기억과 지식을 잃지 않은 윤현우는 자신이 순양의 4-2(넷째아들의 둘째아들을 지칭하는 순양 직원들이 사용하는 용어)의 몸으로 살게 되었다는 걸 빠르게 인지하고 그 상황을 기회로 삼는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미 아는 진도준은 1987년 대선을 앞둔 시기에 어느 후보에게 후원할지 고민하는 회장에게 김대중과 김영삼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노태우 후보에게 후원금을 더 많이 보낼 것을 조언하여 회장의 신임을 얻는다. 회장의 신임을 얻은 그는 “옹기나 짓던 별 볼일 없는 땅”으로 취급되던 분당 대지 5만평을 증여받아 엄청난 시세차익을 얻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 입학하는 등 성공적인 ‘인생 2회차’를 살게 된다. 그가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이유는 자신의 본체인 윤현우를 죽인 사람을 찾아서 복수하기 위해서다.
이런 회귀물은 과거로 돌아가 확실하게 성공하여 통쾌하게 복수하고 싶다는,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상상을 대신 실현해주기에 매력적이다. 또한 우리의 성공 욕망을 자극하는 면도 있다. 대중문화를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 본다면, 2022년의 회귀물은 우리의 현재를 어떻게 비추고 있는 걸까? <재벌집 막내아들>은 마피아 출신 변호사 ‘빈센조’가 사적 복수를 행하거나 <모범택시>(SBS) 속 ‘무지개 운수’ 사람들이 누군가를 대신해 악을 응징하는 ‘다크히어로물’과 다르고, 정의로운 변호사를 통해 억울한 약자를 돕고 사회문제를 공적으로 해결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법정물’과도 다르다. 또한 후회와 미련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 미제 사건을 해결하거나 현재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를 발견하는 기존의 회귀물과도 다르다.
수년 전부터 웹소설과 웹툰을 중심으로 유행하다가 TV 드라마로 확산된 2022년의 회귀물은 억울함과 그로 인한 좌절과 분노, 미래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사회적 절망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으니 과거로 돌아가서라도 성공하여 자신을 모욕하거나 죽인 현실세계에 복수하고 싶다는, 서글픈 욕망이자 좌절된 절망이 투영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사적 복수를 해서라도 악을 응징하거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랐다면 이제는 그런 바람마저 사치다.
윤현우가 순양 후계자의 지시로 해외에 은닉한 비자금을 찾으러 갔을 때 그것이 윤현우의 돈이라 오해한 은행 직원은 이렇게 질문한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큰돈의 주인이 되었네요. 노력인가요, 행운인가요?” 노력이 좌절된 사회에서 성공하는 일이란 결국 ‘재벌집 막내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행운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 것일까? 그 행운은 누구의 절망에서 비롯된 것일까?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경향 2022.11.26.
군주의 시대…참사 책임보다 무거운 불경죄
윤석열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 중단 사태를 거치며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우선 현 정부 출범 이후 책임지는 공직자가 드디어(!) 등장했다. 김영태 대통령실 대외협력비서관은 이번 사태의 직접 원인인 <문화방송>(MBC) 기자와 대통령실의 충돌과 관련해 “불미스러운 일에 도덕적 책임감을 느낀다”며 사퇴했는데, 정부 출범 이후 숱한 책임론이 불거졌지만 공개적으로 도의적 책임을 언급하며 물러난 이는 김 전 비서관이 유일한 것 같다.
‘책임의 무게’라는 화두도 던져줬다. 대외협력비서관 업무가 대통령실 출입기자단과의 소통 및 출근길 문답 관리 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김 전 비서관의 도덕적 책임이란 ‘기자를 통제하지 못한 책임’으로 귀결된다. ‘불미스러운 일’의 당사자인 이기정 홍보기획비서관은 건재하다.
무엇보다 158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에도 주무 장관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사퇴는커녕 “고생했다”는 격려까지 받았지만, ‘기자 관리’에 실패해 대통령 심기를 불편하게 한 비서관은 직을 내놓아야 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불경죄가 참사 책임을 압도한 모양새다. 심각한 민심 역주행이다.
윤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며 ‘용산 시대’를 선언했지만, 실제 윤 대통령이 열어젖힌 것은 ‘경복궁 시대’인 것 같다. 지금 윤 대통령에게는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민주공화국 대통령이 아닌 군림하는 군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사과 한마디면 끝났을 정상회담 비속어 논란이 문화방송 전용기 탑승 배제, 출근길 문답 중단으로 엉뚱하게 확대 재생산된 배경에는 윤 대통령의 고집과 독단이 있다. 윤 대통령이 밝힌 ‘동맹 훼손’ ‘국익 침해’ 등의 이유는 모두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대통령 전용기에 비판 언론을 태우지 않겠다는 결정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전용기를 개인 제트기 정도로 여긴다는 의구심을 낳았다. 그 와중에 전용기 안에서 자신과 가까운 기자들을 따로 불러 ‘개인적 대화’를 나눴다는 것은 대통령직이 가진 공공성에 대한 몰이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대통령실은 출근길 문답 중단 이유로 돌아서는 윤 대통령을 향해 항의성 질문을 한 문화방송 기자의 태도와 참모와의 설전을 문제 삼았다. 재발방지책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문답을 재개하기 어렵다는 입장도 내놨다. 그런데 기자들이 돌아서는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그간 예사로 있던 일이고, 윤 대통령은 심지어 지난 8월 “대통령님 파이팅” 구호에 활짝 웃으며 되돌아와 추가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유일한 잣대는 대통령의 심기뿐이다.
출근길 문답으로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방식은 윤 대통령 스스로가 내세운 원칙이다. ‘참모 뒤에 숨는 대통령’ ‘군림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이자, 대통령실 이전의 핵심 근거이기도 했다. 비판 언론과의 갈등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마음대로 그만두는 것도 권력의 오만이다.
윤 대통령이 주장하는 ‘국익’은 김건희 여사에게도 적용된다. 대통령실은 최근 김건희 여사의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 방문 사진에 ‘조명 활용’ 의혹을 제기한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국익을 침해해 묵과하기 어렵다”면서 경찰에 고발했다. 김 여사 주변의 비선 논란, 이권 개입 의혹에는 뭉개기로 일관한다. 국정 운영이 윤 대통령의 사적 감정에 기반한 즉흥적 결정에 좌우된다는 의심이 퍼져가고, 여권에서조차 ‘지금이 쓰레빠, 조명 갖고 감정싸움할 때인가’라는 한탄이 흘러나온다.
윤 대통령이 스스로 경계했듯이 대통령은 제왕이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신중히 행사하는 것은 물론, 감시와 견제를 받을 의무가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검찰 편중 인사, 국외 순방에 지인 동행, 대통령실 사적 채용 등으로 끊임없이 권력 사유화 논란을 빚더니 이제는 비판 언론을 향한 노골적 보복마저 ‘헌법 수호’로 강변하는 데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태원 참사 한달이 되어가도록 윤 대통령은 ‘아랫사람’을 향해 호통만 쳤을 뿐, 자신의 책임은 인정한 적이 없다. 국민 생명·안전의 책임자로서 대국민 사과도, 행정부 수반으로서 문책도 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독단적 스타일에 대통령실과 여당은 참모·동반자보다는 대통령 눈치 보기에 급급한 ‘신하’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이러다간 2024년 총선의 주요 화두가 ‘민주주의 회복’이 될지 모르겠다.
최혜정 | 논설위원 한겨레 2022.11.27.
윤 대통령과 참모들의 거짓말…도어스테핑은 끝났다
2022년 11월20일 일요일 오후 용산 대통령실 1층 현관에서 별안간 가림벽을 세우는 공사가 시작됐다. 이틀 전 윤석열 대통령은 출근길 약식회견(도어스테핑)에서 “악의적인 행태” 때문에 <문화방송>(MBC) 기자를 대통령 전용기에 태우지 않았다고 했고, 문화방송 기자는 “무엇을 악의적으로 했다는 거냐”고 따졌다. 그날의 ‘불상사’가 휴일에 기자들의 시야를 가리는 기습적인 공사로 이어진 것 같은데 대통령실은 무려 18일 전(11월2일)에 발생한 “일부 출입기자들이 대통령실과의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일본) 대표단을 촬영한 일” 때문에 공사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믿으라는 해명이었을까.
지난 8일 국회 운영위원회의 대통령실 국정감사장에서 김은혜 홍보수석은 이태원 참사 때 대통령실이 제대로 대응했는지 따져 묻는 야당 의원 질의 중 강승규 시민사회수석 메모장에 “웃기고 있네”라고 적었다가 딱 걸렸다. 김 수석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면서도 “단연코 질의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튿날에도 반성한다고 울먹이며 “이 필담은 운영위와 이태원 참사와 전혀 관계없음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야당 의원을 조롱한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뭘 잘못했다는 건가.
대통령실의 거짓말이 횡행하고 있다. 곤궁한 상황을 모면하려 개연성과 논리도 없이 막 던지는 말들이다. ‘거짓말 퍼레이드’의 선봉엔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준석 전 대표의 비판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민생 안정과 국민 안전에 매진하다 보니 다른 정치인들께서 어떤 정치적 발언을 하셨는지 제대로 챙길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라는 험담을 들은 이 전 대표가 불과 이틀 전, 윤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이 ××, 저 ××”라고 지칭하며 ‘윤핵관’(윤 대통령 핵심관계자)에게 ‘공격 지령’을 내렸다고 폭로했는데, 윤 대통령은 그런 내용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에 매진하느라.
윤 대통령의 잡아떼기는 미국 순방 ‘비속어 파문’에서 정점을 찍었다. 김은혜 홍보수석은 미국 현지 브리핑에서 귀에 들리는 대로 윤 대통령의 ‘이 ××들’ 발언은 인정했지만 윤 대통령은 사후에 이것마저 부인했다. 윤 대통령이 아니라고 하니 ‘비속어 파문’ 보도는 통째로 “사실과 다른 가짜 뉴스”가 됐다. ‘짐이 곧 법’이었다.
공자는 정치란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군을 튼튼히 양성하며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했다.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느냐”는 자공의 질문에 공자는 우선 군을 버리고 그다음 먹을 것을 버리라고 했다.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기 때문”(무신불립)이다. 윤 대통령과 참모들의 거짓말은 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더욱 실추시키고 있다. <시사인>이 지난 8월 전국 성인 100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신뢰도 점수는 10점 만점에 3.62점으로 2007년 조사 이래 최저점을 기록했다.
윤 대통령은 가림벽을 세운 이튿날 약식회견 중단을 선언했다. 대통령실 출입기자단의 문화방송 징계가 없는 한 재개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본인 필요로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던 약식회견을 엄청난 시혜로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윤 대통령은 매일 기자들과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국정을 이끄는 소탈한 권력자의 모습을 꿈꿨을 거다.
그러나 윤 대통령 발언 중 기억나는 건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 훌륭한 사람 봤느냐”(인사 파문 관련), “대통령 집무실도 시위가 허가되는 판이니까 다 법에 따라 되지 않겠냐”(문재인 전 대통령 자택 앞 욕설시위 논란), “헌법수호 책임의 일환“(문화방송 전용기 배제) 따위의 분열과 우격다짐 메시지뿐이다. 신뢰 기반이 무너진 상태에서 아침마다 반복되는 윤 대통령의 험한 말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짓이다. 이런 말은 안 하고 안 듣는 게 좋다.
김태규 | 정치팀장 한겨레 2022.11.27.
대통령실과 해당 언론사가 풀 문제라고?
1830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에서 시작해 1814년 나폴레옹 체제의 몰락까지 버텨내며 다시 권력을 회복했던 부르봉 왕조가 이 혁명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기엔 인쇄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16세기 인쇄술의 발명은 같은 문헌을 읽는 사람들 간에 정신적·지적 유대를 갖는 집단을 처음 만들어냈다. 인쇄술로 인해 책을 베끼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게 됐고 그 대표적 사례가 성서의 대중적 보급이었다. 교회 밖으로 나간 성서와 종교개혁이 맞물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정치적 견해를 함께 공유하며 서로 간에 정신적 유대를 갖는 ‘공중’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에 따르면, 프랑스에선 1789년 혁명이야말로 이런 공중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였다. 혁명이 일어나고 파리 시민들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 알고 싶어 했다. 이런 욕망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문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는 혁명이 일어나고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선언은 11조에서 “사상과 의사의 자유로운 통교는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다.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발언하고 기술하고 인쇄할 수 있다”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렇게 파리의 시민들은 신문에 빠져들었다. 같은 신문을 읽는 사람들끼리 정신적 유대를 형성했고, 여러 신문을 통해 같은 사안에 관해 다른 의견을 갖는 다양한 공중이 등장했다.
이런 열기는 부르봉 왕조가 복고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보에 대한 공중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 루이 18세는 1814년 헌장에서 “프랑스인들은 자기 의견을 출판하고 인쇄할 권리가 있다”는 말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했다. 하지만 오랜 망명생활을 거쳐 다시 권력을 잡은 왕과 귀족들에게 언론의 자유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은 이들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이 문제였다. 다시 권력을 되찾은 왕과 귀족에게 호의적인 언론보다 비판적인 언론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1824년 루이 18세의 뒤를 이은 샤를 10세가 극단적인 복고주의 정치로 치달으며 상황은 더 악화했다. 왕은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몰락한 지주들에 대한 배상정책을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신성모독죄 제정과 장자상속권 부활 같은, 혁명 이전으로 프랑스를 되돌리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았다.
자유주의 세력이 다수였던 의회가 이에 저항하자, 1830년 5월 왕은 의회 해산으로 맞섰다.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선거에서 또다시 반왕당파 세력이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왕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자격을 제한할 수 있도록 선거법을 개정하고, 정기간행물 출판을 중단한다’는 칙령으로 맞섰다.
이에 자유주의 성향의 신문 <나시오날>은 1면에 “합법적 정권은 끝이 났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복종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다”라는 선언으로 칙령에 응수했다. 다른 비판적인 언론도 7월27일 아침에 발행된 신문 기사를 통해 <나시오날>의 선언에 일제히 호응했다. 언론의 자유와 함께 성장한 공중 역시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결국,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사흘간의 혁명 끝에 파리에 남은 이는 언론인들이었고 떠난 이는 왕이었다.
과거회귀적 무능 논란이 그치지 않는 현 정부 아래 ‘국익’을 명분으로 언론의 자유 제한을 정당화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더 기이한 건 헌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헌법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이슈가 한창인 가운데 빚어진 대통령 출근길 질의응답 논란을 두고 “대통령실과 해당 언론사가 풀어야 할 문제”라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단 성명을 보면 정작 언론인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역사는 말한다. 공권력의 언론에 대한 억압은 대체로 공권력의 무능과 무리한 정책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더하여 7월 혁명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억압적 공권력에 맞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최전선엔 언론인 자신이 있었다. 그래야 공중도 함께 선다’고 말이다.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한겨레 2022.11.27.
윤석열 정부, 밥그릇 걷어차기
문화 정책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단어는 ‘팔길이 원칙’이다. 너무 멀리 하지 않고, 너무 가깝게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원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 반댓말은 ‘손바닥 원칙’이다. 문화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이렇게 표현한다. 힘을 가지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싶어지는 게 힘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그건 힘의 속성일 뿐이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촛불집회가 있었다. “이 돈이 다 어디서 나왔느냐”고 대통령이 질문을 하였고, 그때부터 정권 차원에서 ‘밥그릇 걷어차기’가 진행되었다. 문화 영역의 대부분의 생산자와 스태프들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고, 정부 문화정책에 연명하여 겨우겨우 버티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 형식까지 갖추어서 진행된 것이 그 유명한 ‘블랙 리스트’ 사건이다. 그나마 유명한 사람들이 블랙 리스트 같은 데에도 올라가고 그런다. 협회나 이런 데에 별로 관련되어 있지 않고 인지도도 높지 않은 문화 창작인들은 블랙 리스트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지원금을 끊었고, 이런 경우에는 어디서 하소연할 방법도 별로 없다.
지난 16일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사건 하나가 터져나왔다. 작년에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노래가 재단 부탁으로 예정된 공연이었다. 합창단과 함께 공연을 준비해온 이랑에게 시련이 나타난 것은 행정안전부의 조치 이후다.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검토해 달라는 의견을 재단에 전달한 바”는 있다고 하는데, 이게 검열은 아니라는 게 행안부 입장이다. 돈을 행안부에서 받아야 하는 부마항쟁기념재단의 입장이 곤란해졌을 것이다. 이 곡을 꼭 넣어달라고 이랑에게 부탁한 것은 재단이다.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록수’ 정도로 곡을 바꿔달라는 요청이 가수에게 있었나보다. 아마 가수 개인의 일이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공연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 그것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결국 ‘늑대가 나타났다’는 공연되지 못했다. 그러면 돈은? 돈을 안 주겠다고 한 건 아닌데, 가수가 거절했다는 행정적 취지로 계약한 돈을 주니 안 주니, 조금만 주겠느니, 이런 실랑이가 진행 중인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유사한 행사 혹은 행안부가 연관된 많은 사업에 영향을 미친다. 전형적인 갑을관계인 원청이 원하는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피하지 않을 사업자는 별로 없다. 문화의 팔길이 원칙은 이미 훼손되었고, “내 눈에 좋은 것”을 하라는 손바닥 원칙이 윤석열 정부의 새로운 문화 원칙이 되어간다. 부마민주항쟁에서도 이랬는데, 그보다 대표성이 약하고 관심이 덜한 행사야 말할 게 뭐가 있겠는가?
진보 정부라고 문화 정책을 잘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분야별로 돈 줄을 쥔 몇몇 실력자가 줄세우기하고, 행정 자체를 쥐고 흔드는 경우가 많았다. 광주에서도 보았고, 서울에서도 보았고, 연극에서도 보았고, 영화에서도 보았다.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인 ‘밥그릇 걷어차기’는 좀 숨어서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윤석열 정부 6개월, 문화 분야에서 ‘밥그릇 걷어차기’가 점점 더 빈번해진다. 마포구청에서 전국적인 모범사례가 된 작은 도서관의 위탁 업체에 일방적으로 위탁 종료를 통보한 것은 밥그릇 걷어차기의 일종이다. 문화의 영역은 크고 넓다. 서울시 의회가 자신의 입맛대로 방송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TBS에 대한 지원을 끊는 것 역시 전형적인 ‘밥그릇 걷어차기’다. “돈 줄을 끊어버리면 자기들이 어쩔 것이냐”, 이런 좀 치사한 문화 정책이다. 대주주로 있던 YTN에서 한전 자회사가 철수하는 것 역시 이런 ‘밥그릇 걷어차기’의 일환 아니겠느냐? 심지어는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편과 같은 좀 더 큰 스케일의 공작 역시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흉흉하다.
보수들의 문화 정책과 관련해서 내가 가장 감명 깊게 들은 얘기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사례다. 실제 문화부라는 정부 부서를 만든 것 자체가 드골이 한 일이다.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에 대해서 장 폴 사르트르가 반대 의견을 냈는데, 완전 난리가 났다. “사르트르 죽인다.” 이런 반응이 한창이던 때, 드골이 했다는 얘기가 내 가슴 한구석을 후벼폈다. “그도 애국자다.” 노벨 문학상도 거부한 사르트르에게 ‘애국자’라는 말이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 수수방관하지 않았던 드골을 보면서 ‘훌륭한 보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 이랑에게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부탁한 윤석열 정부는 팔길이 원칙을 내던진 검열 정부이다. 그리고 이번의 부마민주항쟁 사건은 ‘밥그릇 걷어차기’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겠다는 노골적인 선언 아닌가? 문화 정책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일본 자민당의 집권이 오래 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만화와 애니메이션 같은 데에서 ‘밥그릇 걷어차기’를 안 한 것 아닌가?
우석훈 경제학자 경향 2022.11.28.
노동자의 자유와 국민의 자유
공공부문 총파업이 줄줄이 예고된 가운데 정부와 여당은 볼모론과 불법 규정, 침소봉대와 강경 대응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 ‘나 때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는 기자들이 넥타이 매고 정자세로 경청했다’는 말만큼이나 식상하다. 식상한 대응은 적절한 대응이 궁할 때 나오는 행동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번 총파업을 ‘국가 경제를 볼모로 한 이기적 행동’으로 규정하면서 이로 인해 국가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것처럼 과장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사실상 정권 퇴진 운동’이라며 확대해 이번 총파업을 정치적 파업으로 규정했다. 과연 우리나라 경제가 일부 공공부문 총파업으로 위기에 처할 수준인가. 물론 굳이 왜 이 어려운 시기에 파업을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이 논리조차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위기 해결의 주체인 정부가 올바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는 잘하고 있는데 노동계가 발목을 잡는다는 논리로 엮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파업으로 규정하는 것은 윤석열 정부에게 자충수가 될 수 있다. 막상 노동계는 노동 문제를 둘러싼 경제적 파업으로 규정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부가 정치적 파업으로 키워 정부와 노동계의 전면 대립으로 몰아가는 형국이다. 정부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약한 상태에서 이 대립은 노동계 전반으로 파업을 확대시킬 뿐 아니라 여타 시민 사회 단체와 노동계의 연대를 더욱 촉진해 실제 정권 퇴진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파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 지난 23일에 공공운수노조 소속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지부와 서울대병원분회가 파업을 시작했고, 24일에는 화물연대본부가 파업에 돌입했으며, 25일에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조와 학교 비정규직 노조가 파업을 단행했다. 이어 30일에는 서울교통공사 노조의 파업과 다음달 2일에는 전국철도노조 파업이 예고돼 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공공부문 파업의 주요 요구는 노동시간·임금체계 개악 저지,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법 2·3조 개정, 안전운임제의 지속 및 확대 적용, 인력 감축 철회와 민영화 중단 등이다.
특히 ‘노란봉투법’과 안전운임제, 인력 감축 문제는 노동자들의 파업권과 생계 및 안전 문제를 좌우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노란봉투법’이 제정되지 못함으로써 손배·가압류를 통해 노동자들의 파업권이 심각하게 제약되고 있으며, 안전운임제가 연말에 폐지됨으로써 화물운송 종사자들이 다시금 과로·과적·과속에 방치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오봉역 사고 등 주로 부족한 인력에 따른 안전 사고로 철도 노동자는 올해 4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정부와 공사는 인력 확충 요구를 무시하고 수천명에 달하는 인력 감축 계획을 내놓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시간과 임금체계 등도 오래된 고질적인 문제다. 이러한 구체적 삶의 요구들이 어떻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적 파업으로 비약하는가. 거듭되는 실정에 지지율이 추락하자 스스로 두려워하던 단어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것인가.
공공부문의 사용자는 정부다. 공익성이 강한 부문이므로 정부가 국민을 대신해 운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를 빌미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노동하는 국민 전체에 미치는 요구일 경우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유감스럽게도 정부와 여당은 노동계 파업에 적대적 정치 논리를 적용해 노동자를 적으로 규정하며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 파업 노조들이 민주노총 산하 노조여서 그런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색깔론이나 진영론으로 국민을 양분해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노동조합은 이념과 직종 및 종교 등에 따라 다양하게 조직되어 있고, 이들은 동등한 자격으로 정부 및 사용자와 협상한다. 정부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이념적 기반을 가진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노동조합에 대해 차별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다.
노동계에 적대적인 인물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할 때 이미 충분히 드러났지만, 윤석열 정부의 노동 정책이 불안하다. 오히려 정부가 국가 경제를 볼모로 잡고 노동계를 탄압할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 노동자를 적대시하는 강경 정책을 지속한다면, 이번 총파업은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파업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다. 노동자도 국민이며 게다가 국민의 다수가 노동자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될 수 있겠는가.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 2022.11.28.
윤석열의 ‘압색 정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5일 서울 한남동 관저로 국민의힘 지도부를 초청해 만찬을 했다. 저녁 6시50분 시작된 자리는 3시간20분간 이어졌다. 그러나 풀(pool·대표) 취재가 허용되지 않았고, 대통령실에서 촬영한 ‘전속’ 사진을 배포하겠다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만찬 도중 ‘사진 공개는 없을 것’이라고 공지했다. 현직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가 만찬을 하고도 사진 한 장 보도되지 않은 것은 민주화 이후 처음일 터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 수 없다. 대통령의 언론관 문제로 좁힐 일도 아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강력한 권한과 권력을 합법적으로 누리는 대신,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진다. 여기에는 헌법과 법률이 명시적으로 규정한 부분은 물론, 수십년간 대통령제를 유지하며 수립되고 지켜져온 관행도 포함된다. 대통령의 공적·공식 행사에 언론 취재가 허용되며, 언론이 취재하지 못한 부분은 사후 충실하게 브리핑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윤 대통령은 국민과 맺은 신사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있다. 최근 동남아시아 순방에서 한·미, 한·일 정상회담에 풀 취재를 불허하고, 김건희 여사 일정도 ‘전속’만 동행한 채 진행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통령과 집권당 지도부가 대통령 관저에서 만찬을 하는 행사는 비공개일 수 없고 비공개여서도 안 된다. 참석자, 장소, 준비 인력·비용 모두 ‘공적(公的)’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사의 비공개를 묵인한다면, 윤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몰래 만나는 일도 ‘뉴 노멀’이 될 수 있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은 ‘내로남불’을 넘어 ‘내맘대로’에 가깝다. 대통령 전용기는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며 동행취재 비용은 각 언론사가 부담하는데, 특정 언론사만 안 태운다. 내맘대로다. 전용기 내에선 가까운 기자들만 불러 ‘개인적’ 대화를 나눈다. 내맘대로다.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을 업적으로 자랑하더니 갑자기 중단한다. 내맘대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태도다.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연 유족들의 6개 요구사항 중 첫 번째는 대통령과 정부의 진정한 사과였다. 윤 대통령은 그러나 “이미 사과했다”고 버틴다. 내맘대로다. 유족은 물론 시민 여론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경질을 촉구하는데, 윤 대통령은 감싸기에 바쁘다. 고교·대학 후배이니 내맘대로 하겠다는 거다. 대통령은 공복(公僕·public servant) 중의 공복이다. 공공성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요구된다. 모든 언행의 기준은 내맘이 아니라 주권자의 마음이어야 한다.
세간에 우스갯소리가 돈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정부,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로 명명됐는데 윤석열 정부는 ‘압색(압수수색) 정부’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 질병관리청 압수수색에 나설 거라는 내용이다. 농담 속에 뼈가 있다. 윤석열 정부는 왜 수사와 압수수색에 매달리나. 왜 야당 의원의 의혹 제기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고발하나. 왜 화물연대가 국토교통부와 교섭에 나선 날, 업무개시명령을 예고하나. 윤 대통령이 뼛속까지 검사여서라고들 한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다른 요인은 없을까.
뒤집어보면 취약성의 징후일 수 있다. 윤 대통령에겐 이슈를 직면하고 카운터파트와 논쟁해 의사를 관철할 자신감이 보이지 않는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겨냥한 ‘내부 총질’ 문자 논란 당시 대통령은 열흘 넘게 출근길 문답을 피했다. 주요 20개국(G20) 만찬장에서 김건희 여사가 ‘다른 정상들과 어울리라’는 듯한 손짓을 했지만, 대통령은 곧바로 일어서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야당과 논리 싸움을 벌이거나, 언론의 불편한 질문에 답하거나, 파업 노동자들과 협상해 설복시킬 배짱이 없다. 그러니 수사와 압수수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용기에 못 타는 기자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국민의힘 지도부 만찬에서 윤 대통령은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를 거론하며 농담했다고 한다. “월드컵에서 우리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만나면 어떻게 하나? 져줄 수도 없고….” 윤 대통령은 뭐든 내맘대로 할 수 있다는 ‘미스터 에브리싱’이 부러운가. 대통령은 신민(臣民) 위에 군림하는 군주가 아니다. 시민이 일정 기간 심부름시키려고 뽑은 대리인일 뿐이다. 모 대부업체 광고처럼 “어쩌라고? 내맘이지!”만 외치는 대통령은 위험하다. 제어해야 한다.
김민아 논설실장 경향 2022.11.28.
달도 차면 기운다
한국 정당정치를 상징하는 몇 개의 키워드가 있다. 이 중에서 '적대적 공생'이란 단어만큼 한국정치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없다. 여당과 제1야당의 거대정당이 독과점 체제 하에서 기득권을 향유하며 자신들의 권력에 탐닉하는 구조를 의미하는 말이다. 익숙한 구조이지만 현재의 정당체제만큼 적대의 수위가 높은 적은 없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요소 중 중요한 것은 관용과 절제의 규범이다. 그리고 정당의 '문지기'기능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 상대를 경쟁자가 아닌 적으로 인식하는 증오의 정치는 정치기능 자체를 형해화시키는 단계에 이르렀다. 여야 어느 정당도 정치적 양극화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정치가 갈등의 조정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다하기는커녕 자신들의 기득권과 공천을 보장받기 위해서 당 지도부의 생각에 맹목으로 추종하는 지금의 정치구조가 타파되지 않으면 정치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정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헌법기관으로서 국민을 대표할 책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을 지지했던 유권자만 보고 하는 정치에 익숙해 있다. 진영 내의 존재감을 확립하고 공천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자극적 발언과 비이성적 언어를 쏟아내고 저급한 담론을 생산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단순 인지도 제고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영 내의 '투사'가 되기 위해 계산된 저질 발언을 배설하듯이 내뱉으면 언론은 이를 연일 보도하고 방송은 이들을 불러서 백해무익한 논란을 확대 재생산한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사라지고 억지와 견강부회, 논리의 비약만이 남는다. 민생과 한국사회의 균열축으로서의 담론과 쟁점들은 사라지고 저급한 지라시 수준의 언어들이 정치라는 이름으로 횡행한다.
여야 정치지도자는 물론 국회의원들은 정당의 민주주의의 제도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정당 기능이 제도화되려면 당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한 어떠한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정치현실이다.
여야 거대정당들이 정치의 양극화에 편승하여 극렬 지지자들을 의식하는 것은 공천을 의식해서이다. 이러한 정당체제는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정당이 정치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정당체제 안정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정당조직에 대한 민주적 통제 기능도 작동하지 않는다. 정당이 소수의 지도부에 의해 중앙집중적으로 운영되고 당내 이견이 봉쇄되는 구조는 정당 내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는 통로의 원천봉쇄로 이어진다.
거대 양당들이 기득권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양극단의 정치를 동력으로 삼는 한 경쟁적이고 다원적인 정당체제로 전환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현행 공천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국회의원들은 정당에 종속된 기능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여당은 대통령실의 거수기로 전락하고 야당은 극단적 지지자들에 포획되어 강성 의원들의 발언만이 과대대표된다.
공천제도의 혁신, 당내 민주주의의 확립 등이 연계되어 있지만 당장 이러한 제도화를 통해서 정당의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우선 중요한 것은 여야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규범을 익히는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현실화된다면 자제와 이해, 상호관용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지성적 장치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정당기능의 제도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한계는 뚜렷할 수밖에 없다. 정기국회기간 임에도 저급한 이슈와 수준 이하의 논란들이 꼬리를 물고 갈등의 접점을 만들어가는 정치담론은 실종됐다.
국민은 1987년 민주화와 박근혜 탄핵을 이뤄낸 저력을 가지고 있다. 당장은 정치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저력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불신의 수위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여야 정당의 지지율이 30%대에서 답보를 보이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여야 지도자는 물론이고 대통령이 포용적 리더십을 가지고 극한적 대치를 풀 수 있는 물꼬를 터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만의 회동이 이러한 리더십과 배치되는 것은 자명하다.
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 경인 2022.11.29.
여당, 침묵은 독이다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다시 인용해보자. 요즘 우리로선 너무나 낯설고, 또 부럽기도 해서다. 바로 미국 백악관과 행정부 고위 관리들의 ‘미친 트럼프 막아내기’ 이야기다. 첫번째 주인공은 명령에 죽고사는 군인 마크 밀리 합참의장이다. 트럼프는 2020년 5월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을 메운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대를 거론하며 “총으로 그들을 쏴버릴 수 없나. 다리든 어디든 그냥 쏘라”고 밀리에게 명령했다. 지하벙커로 피신할 만큼 트럼프가 위협을 느낀 터라, 단순히 화풀이식 명령으로 치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밀리는 발포를 거부했다. 또 그는 대선을 즈음해서는 흥분한 트럼프가 우발적으로 전쟁을 벌일 것을 염려해 중국에 두 차례 비밀전화를 했다. “우리는 중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트럼프가 대선 결과에 불복할 기미를 보였을 때에는 평화적 이양을 위해 막후 협의를 진행했다. 트럼프와 함께 퇴임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여기에 참여했다(<분열자: 백악관의 트럼프>).
앞서 2017년 4월엔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트럼프의 망동을 저지한다.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민간인을 향해 화학무기를 쓰자 트럼프는 매티스에게 “쳐들어가서, 아사드를 죽이자”고 했다. 매티스는 “즉시 작전에 나서겠다”며 전화를 끊은 뒤 참모에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신중히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분야의 백미는 역시 ‘문서 빼돌리기’다. 백악관 경제참모인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파기하려는 트럼프를 막기 위해 트럼프의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문서를 훔쳐 숨겨버렸다. 콘은 훗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문서를 훔쳤다”고 술회했다(<공포: 백악관의 트럼프>).
그렇다면 밀리나 매티스 등은 대쪽 같은 소신파이기만 할까. 아니다. 그들 역시 자신의 자리를 아끼고, 트럼프와의 관계를 쉽게 끊지 못한 사람들이다. 밀리는 트럼프가 시위대를 해산하고 백악관 맞은편 교회로 가 성경을 든 채 기도하는 정치 쇼를 벌일 때 군복 차림으로 동행해 ‘병풍’ 역할을 했다. 군의 정치 중립을 훼손했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트럼프가 미군을 정치화한다고 비난하는 내용으로 사직서를 써놓고도 제출하지 않았다. 매티스 역시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가 나오자 사실과 다르다며 트럼프를 두둔했다. 그들은 단지 민주주의 가치를 실천한 것이다. 공직자로서 헌법정신을 지킴으로써 미국이라는 공동체를 지켜냈다.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의 저자 밥 우드워드는 “트럼프의 국가 안보 파괴를 막기 위해 백악관 참모들이 서류를 훔치는 일은 반복적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이런 장면들이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트럼프의 참모들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것은 그에 대한 불충이 될지언정, 미국을 위해서는 충성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MBC에 대한 대응은 명백한 퇴행이자 자충수다(동의하지 못하겠으면, 민주당 정권이 보수언론을 건드렸을 때 보수당과 언론이 어떻게 대응했을지를 상상해보라). 그런데 여권 내에서 이를 막고 나선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유승민 전 의원 홀로 광야에서 외치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실과 여당의 이런 침묵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 중단에 이어 출입기자실을 대통령 집무실과 다른 건물로 옮기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를 버리고 용산으로 갈 때 윤 대통령 자신이 “언론과 소통하기 위해 같은 건물에 두겠다”고 한 약속을 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을 막아서는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예스맨 일색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을 추진할 때, 환경부 공무원들은 침묵했다. 사석에서는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누구 하나 공식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무섭게 돌아섰다.
독일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는 ‘그들이 처음 왔을 때’라는 시에서 나치에 침묵한 대가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나치가 공산당원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에게 갔을 때, 또 유태인에게 갔을 때도 나는 침묵했다. (…)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당의 침묵은 머지않아 독이 되어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들의 침묵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목소리를 분출할 때는 눌려 있었던 만큼 더 크게 튀어오를 것이다.
이중근 논설주간 경향 2022.11.30.
사진과 총, 캄보디아에서의 대통령 부인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현대국제정치론>(1987·법문사판)의 저자 한스 모겐소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자 에피소드를 예로 든다.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1813년,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와 9시간 동안 만났다. 전쟁의 양상이 프랑스 대(對) 러시아·프로이센·영국·스웨덴 동맹군으로 변화하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에 반(反)프랑스 동맹에 참가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을 무시했고, 여전히 유럽의 지배자처럼 행동했던 나폴레옹은 상대방을 떠본다. 그는 일부러 모자를 떨어뜨려 메테르니히가 집어주길 바랐지만, 메테르니히는 못 본 척했다 .
모겐소는 의전이 곧 국력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며 ‘흥분했지만’, 20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두 인물 모두 유치해 보인다. 당대 상황은 ‘모자를 떨어뜨리고, 안 주워주고’ 이런 수준이 아니다. 푸틴은 아베 전 일본 총리와의 회의 일정에 3시간씩 늦었다. 2007년에는 개를 무서워하는 것으로 알려진 메르켈 독일 총리와 회담할 때 송아지만 한 개를 앞세웠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만나 악수를 나눈 후 급히 자신의 손을 바지에 닦았다. 코로나19라는 맥락이 있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개인 간 행동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굉장한 무례인데, 전 세계로 중계되는 국가 정상 간 만남에서 이런 일이? 동영상을 보면 가해자인 해리스도 놀란 듯했다.
푸틴의 행동이 의도적이라면, 해리스의 경우는 근대적 위생 관념이 작동한 것일까. ‘유색 인종 문재인’에 대한? 그러나 그녀야말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흑인·여성’ 부통령 아닌가. 의식적 망동이든, 무의식적 실례든 푸틴과 해리스의 공통점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이다. 차이는 개인의 배경이다. 푸틴은 백인 남자고, 해리스는 둘 다 아니다. 문 대통령은 잘 모르겠고, 아베나 메르켈은 매우 불쾌해했다. 메르켈은 그 자리에서 항의했다. 독일이고 메르켈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외교에서 모든 나라를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다. 과잉, 과소 의전 모두 외교력 낭비다. 하지만 거창한 의전은 아니더라도 국가를 대표해서 타국을 방문한 약소국 외교관 개인에 대한 존중은 그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존중해서 나쁠 일은 없다.
조상의 지혜를 본받자. 조선이 천명한 공식 외교 사상인 사대교린(事大交隣)은, 글자 그대로만 보면 합리적 전략이었다. 사대는 논쟁이 많으니 차치하고, 교린은 이웃을 무시하지 말고 잘 지내라는 뜻이니 나쁘지 않다. 이웃과 잘 지내면 되지, 굳이 “왜(倭)니, 오랑캐니” 하며 얕잡아 볼 필요가 있을까. ‘상대 무시 = 나 훌륭’이라는 방식, 즉 열등감에 기초한 방어기제의 갑옷을 입은 인생들은 어디에나 있다.
재현의 윤리
하긴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랴. 아예 맥락에 벗어난 기이한 일도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캄보디아 방문이 그것이다. 나랏일에 주제넘은 걱정이지만, 그것은 내가 한국인일 때이다. ‘캄보디아(의 이미지)’에 동일시하는 지구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제 캄보디아 사회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분노한다. 동시에 이는 평범한 시민의 고달픈 일상이기도 하다. 타인이나 집단이 나를 마음대로 재현(묘사, 평가, 규정)할 때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야 할까.
김건희 여사는 ‘국경 없는 의사회’ 활동가가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국제적인 공식 회의가 있어서 방문했는데, 빈곤 지역의 심장병을 앓는 아동을 찾아가고 (조명 설치 여부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고 배포하는 행위는 적절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폭력이다.
전쟁만이 폭력은 아니다. 문화연구, 탈식민주의, 여성주의, 인류학 등 현대 인문학은 재현의 윤리에 대해 수없이 고민해왔다. 이들 학문의 목적 자체가 이 윤리와 정치경제학에 대한 탐구이다.
젠더 폭력 피해를 연구할 때 피해 여성을 피해자화하지 않고 어떻게 피해 구조를 드러낼 것인가. 음핵 절개가 널리 행해지는 지역에서 서구 페미니스트는 그 현장을 찍을 것인가, 당장 피해자를 구조할 것인가. 다른 차원의 논쟁도 있다. 서구 여성도 야만적인 성차별을 당하는데, 그들은 왜 자국 문제보다 ‘제3세계’ 여성을 그토록 걱정하는가.
수단의 기아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를 촬영하여,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수상한 후 2개월 만인 33세에 자살했다. 사진을 찍기 전에 소녀를 먼저 구하지 않았다는 대중의 비난은 격렬했고 그 역시 자책감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독수리가 다가오기를 20분간 기다린 후 사진을 찍고, 소녀를 긴급 식량센터에 옮겨주고 내내 울었지만 죄의식을 감당하지 못했다.
캄보디아에서 대통령 부인의 성녀(聖女) 코스프레는 이번 정권의 성격을 압축한다. 더 놀랄 일이 무엇이겠냐마는, 그래도 놀랐다. 나는 윤 대통령 부부가 ‘나쁜 사람’이거나 ‘극우 보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이상한 경우라고 본다. ‘이승만부터 문재인까지’ 이런 커플은 없었다. 만일 질 바이든 여사가 한국을 방문, 보육원 아동을 만나고 사진을 찍어 널리 알린다면? 푸틴과의 사이에 자녀 4명을 둔 31세 연하 연인(실질적 배우자)인 알리나 카바예바가 빈곤국을 방문해서 사진을 찍어댄다면? 이는 의전이고 국격이고 운운할 것도 없는, 정신 나간 권력자의 기이한 행동이다.
김 여사의 시선은 ‘저 높은 곳을 향해’ 응시하고 있고, 그가 안은 어린이는 카메라를 보고 있다. 상식대로라면 두 사람이 마주 보아야 한다. 이번 사건에 대한 반응은 한국 사회의 총체적 수준을 보여준다. “이렇게 미모가 아름다운 분이 있었느냐”는 국회의원(국민의힘 윤상현), 김 여사 비판은 무조건 미소지니(여성혐오)이니 자제해야 한다는 사람들, “김혜자, 정우성 배우도 마찬가지 아닌가”식의 빈곤 포르노에 대한 옹호….
돋보이고 싶음의 폭력
윤 의원의 발언은 논외고, 배우와 액티비스트의 활동은 대립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김건희’는 ‘엘리너 루스벨트’가 아니다. 미소지니는 여성 개인을 혐오하는 행위가 아니다. 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당연히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착하지 않다. 미소지니는 한 인간을 동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성으로 조작하는 행위를 뜻한다. 여자는 모두, 그저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을 어머니와 창녀로 이분화하고 그 스펙트럼 안에서 평가하는 방식이다.
내가 미소지니를 번역하지 않고 사용하는 이유는 혐오라는 단어가 주는 피로감, 남성 혐오라는 황당한 대칭어의 생산, 그리고 이 문제가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 전반에 대한 지배 전략이기 때문이다.
미소지니는 상대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맘대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사고인 가부장제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상상(망상)인 오리엔탈리즘, 이 두 가지가 문명의 두 축이다.
대상과 대상화는 다르다. 누구나 대상일 수 있다. 대상화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한다. 이성애의 정상성은 동성애에 대한 낙인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결혼제도의 정상성은 이혼과 저출산이 문제라는 사고방식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흰 피부의 우월성은 흑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것이 사고방식으로서 ‘미소지니’다.
주지하다시피 카메라와 권총은 동반 발전했다. 사진을 찍다와 총을 쏘다가 모두 ‘shoot’로 같은 이유다. 김 여사의 성모 마리아, 오드리 헵번 흉내내기는 ‘캄보디아’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주의는 물자와 노동력을 착취하는 시스템만이 아니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게 만드는 장치까지 포함한다.
제국주의는 불쌍한 어린이를 이용, 관용을 선전한다. 제국주의 용어가 불편하다면, 순한 말로 바꿀 수 있다. 주인공병, ‘관종’, 돋보이고 싶은 욕망. “돋보이고 싶다”도 그 행동에 비한다면 너무 좋은 표현이다. 타인의 생명과 고통을 볼모로 셀럽이 되고 돈을 버는 이유가 겨우 돋보임 욕망 때문일까.
김 여사는 대선 중 허위 경력과 범죄 연루 의혹 문제로 6분13초짜리 기자회견을 했다. “돋보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에게 폐가 되었다”는 요지였다. 누구나 돋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생계만 해결된다면,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도 많다. 돋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국력을 사용(私用)하지 말고, 거울 앞에서 혼자 하기를 권한다. 어차피 관중도 그의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2022.11.30.
정의와 철학이 사라진 한국 정치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종료 5년 뒤, 그의 나이 70세에 받은 재판에서였다. 플라톤은 지혜를 사랑하다,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소크라테스를 보면서 참지식을 사랑하고, 철학적 올바름을 지닌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할 때만 정의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오오. 인간들이여, 너희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지혜가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대한 자각은 ‘모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이라고 말한 공자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이는 자기 생각만 옳다는 독단을 경계하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고, 새로운 배움으로 나아가는 열린 마음을 지향하기도 한다. 위정자의 지혜가 모자라면 정치는 닫힌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고도의 정치는커녕, 보기에도 민망할 때가 다반사다. 이태원 참사 후, 외신기자회견장에서 웃음과 농담으로 망신을 당한 한덕수 국무총리. 158명의 쓰러진 꽃무덤에 “폼 나게 사표” 망언 인터뷰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정말 웃기고 있던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 그들의 행위는 철학적 올바름에 대한 강한 회의를 불러오며, 정의의 정치가 실현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으로 바뀌고 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더 포스트>는 미 국방성 비밀문서 보도 사건을 핵심으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정부를 상대로 벌인 언론과 권력의 갈등을 그렸다. 소송에 대한 미 대법원의 판결은 명확했다. “언론은 자유를 보장받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다. 언론이 섬기는 건 국민이지, 통치자가 아니다.” 문화방송(MBC)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가 동맹관계를 훼손시킨다며, 국익과 헌법수호 차원의 대응이었다는 대통령의 답변은 지혜로운 판단이었을까? 대통령은 자의적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출근길 문답이 이루어졌던 대통령실 청사 1층엔 가림막이 설치됐다. 경호와 보안상의 이유라지만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청와대를 비웠다는 윤 대통령 스스로가 목 터지게 부르짖던 자유에 스스로 커다란 가림막을 씌운 꼴이다. MBC 기자의 태도와 대통령실 참모와의 설전은 출근길 문답의 중단 원인이 되었다. 참모 뒤에 숨지 않고, 군림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던 약속은 언론과 국민 앞에 지금도 그래야 하는 현재진행형이다.
대통령 부인의 일정은 또 다른 가림막 안에서 진행된다. 캄보디아, 프놈펜 일정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통령실은 심장병 어린이 조명 의혹을 제기한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국익 침해 이유로 경찰에 고발했다. 자유로운 취재가 거부당하면, 진실은 늘 숨바꼭질하는 법이다. 지난 23일 김건희 여사는 케냐 대통령 배우자와 대표취재 기자 없이 환담했다. 대통령실이 던져주는 사진과 브리핑이 전부다. 원단을 가져다 재단하는 건 언론의 사명이고, 역할이다. 시침질까지 마친 천을 던져주는 대통령실은 재단사 역할까지 수행한다. 몸에 예쁘게 어울리는지만 봐 달란 얘기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옷을 만들지를 결정하는 건 언론사다. 권력기관이 아니다. 재단사인 기자는 언론사 고유의 브랜드를 만든다. 대통령실의 받아쓰기 언론관이 심히 우려스럽다.
취임 200일이 지났어도, 윤 대통령과 야당 지도부와의 회동은 없다. 이 와중에 25일 대통령은 관저로 여당 지도부를 초청해 만찬을 함께했다.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성과와 외교 현안 및 내년도 예산안과 주요 법안처리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고 전해진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수도 없이 불통과 아집에서 벗어나서, 소통과 협치를 통한 정치를 당부했다. 메아리가 없다. 김지하의 시를 꺼내 읽는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경향 2022.11.30.
화물연대 파업은 불법인가?
1. ㄱ기업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인력감축안을 발표했다. 수십년 동안 ㄱ기업에 몸담았던 장년의 해고자들은 재취업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저임금 일용직으로 내몰려 월 소득이 줄어드는 경제적 손해를 입게 됐고 일부는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해 파산했다. 이 노동자들은 줄어든 소득분과 파산의 책임을 물어 해고를 결정한 ㄱ기업 대표의 불법을 주장할 수 있을까? 물론 터무니없는 소리다.
2. ㄴ기업의 소비자 정책에 불만을 가진 고객들이 소비자단체를 결성하고 불매운동을 개시했다. 이로 인해 ㄴ기업은 커다란 경제적 손해를 입게 됐다. ㄴ기업은 불매운동을 벌인 소비자들이 불법행위를 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역시 터무니없는 소리다.
3. ㄷ기업과 거래 관계에 있는 개인사업자들이 거래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단체로 일을 거부했다. 일종의 파업이다. 이로 인해 ㄷ기업 영업에 차질이 발생해 ㄷ기업과 ㄷ기업이 만든 제품 소비자, 더 나아가 국가경제에 손실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이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불법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을까? 이번엔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인 문제다. 화물연대 파업 이야기다.
화물연대가 파업에 돌입하자 정부와 여당은 즉각 파업의 불법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불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윤석열 대통령), “섬뜩한 국가파괴 선동” “불법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우리 경제와 국민을 인질로 잡고 벌이는 불법파업”(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정부는 불법행위에는 한치의 물러섬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하길 바란다”(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마침내 윤 대통령은 29일 “불법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며 파업을 강제로 중단시키는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했다.
‘파업 중 불법행위가 일어난 것’과 ‘파업이 불법인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정부와 여당은 파업 참여자 12명이 폭행 및 재물손괴 혐의로 수사받고 있다는 사실과 파업으로 인해 경제에 부담이 가중된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는데, 그렇다 해도 2만5천명이 참여한 파업 전체를 불법으로 단정해 강제로 중단시킬 근거는 될 수 없다. 파업의 합법 여부를 둘러싼 주된 쟁점은 노동자들이 기업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물리적으로 점거하는 행위를 합법적인 쟁의로 볼 수 있는가다. 파업 노동자에게 점거 농성은 기업을 압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기업은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로 맞대응해왔으며,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 입법을 두고 정부·여당과 야당들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화물연대 파업에는 재산권 침해 논란을 일으킬 점거 행위가 없다. 대부분 개인차주인 화물연대 구성원들이 자차 운행을 중단한 ‘정직한’ 쟁의다. 파업이란 단어의 뜻 그대로 ‘일하지 않는’ 시위다. 그것도 업무에 자신의 사유재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시위다. 노동권 아니라 시장경제 관점에서도 납득할 만한 내용이다. 내가 내 차를 사용해 일하지 않는 게 어떻게 불법이 될 수 있는가? 합법적인 파업은 어떤 파업인가? 단 한건의 폭력이나 소요도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누구에게도 직간접적인 손해를 입히지 않는 파업인가? 그렇다면 합법적인 파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기준을 적용하면 합법적인 정리해고도, 합법적인 불매운동도, 합법적인 길거리 축구 응원도 불가능하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할 자유를 갖는 것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을 자유도 갖는다. 국가경제 위기, 국가물류 마비, 국가파괴 선동, 국가를 접두어로 한 험악한 말들을 아무리 잔뜩 만들어내도 적당한 조건이 아니면 일하지 않겠다는 개인들의 선택이 불법이 될 수는 없다.
앞으로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에 불응하는 파업 참여자는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파업이 불법인 게 아니라, 정부가 파업을 불법으로 만들었다. 그간 화물연대의 안전운임제 입법 요구를 노사문제로 치부하며 깊이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던 윤 대통령은 정작 파업이 발생하자 누구보다 빠르고 깊게 개입했다. 대통령이 자주 말해왔던 자유국가는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진다. 국민이 권리를 달라고 요구할 때만 자유국가 행세를 하다가 국민이 권리를 쟁취하려 들면 물리력을 동원해 막고 나서는 국가는 자유를 반만 허용하는 나라가 아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나라다.
손아람 | 작가 경향 경향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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