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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022.9.1~30 “임기 5년이 뭐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

by 이성근 2022. 10. 2.

너무 심각한 아랫돌 빼기예산안 한겨레 2022.9.1.

헌법은 누구의 편인가 경향 2022.9.2.

빈곤은 정의의 문제다 경향 2022.9.2.

컨트리클럽에 농촌이 없다 경향 2022.9.2.

탐욕 인플레와 치킨플레이션 한겨레 2022-09-05

힌남노 역시 '가난'을 가장 먼저 노리고 있다 | 프레시안 2022.09.05.

서울법대 망국론 한겨레 2022.09.05.

이대로 살 수 없다면 한겨레 2022.09.05.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한겨레 2022.09.05.

우리에게 내재된 인종차별적 시선, 씁쓸하다 한겨레 2022.09.05.

BTS 여론조사'라니, 연예인 병역이 방송 경연 프로인가? 2022-09-05

스킵하는 시대 국민일보 2022-09-05

응답하라, 김건희 경향 2022-09-05

드론 정밀포격?자포리자 핵재앙 누가 장담하나 한겨레 2022-09-05

회복탄력성과 불평등 경향 2022-09-06

약자인가, 동료시민인가? 약자복지의 오만 경향 2022-09-06

윤석열 정부, 미국을 오판한 치명적친미 외교 한겨레 2022-09-06

국민의힘 코미디의 본질, 충성 경쟁은 필패 한겨레 2022-09-06

대물림 전관예우, 그리고 검피아의 이기적 선택 한겨레 2022-09-06

1997730일 경향신문, 96일 한겨레, 7일 연합통신 경향 2022-09-07

위기의 중국 조선족 살리는 법 경향 2022-09-07

부산엑스포 유치전, BTS천군만마는 될 수 없다 미디어오늘 2022.09.07.

한국의 언론은 민주화투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미디어오늘 2022.09.07.

환율 1380, 탈탄소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 한겨레 2022.09.07.

약자 예산축소소리만 요란한 윤석열 복지경향 2022.09.09.

원전 전문가들이 결정할 위험한 미래경향 2022.09.09.

밀려오는 긴축의 고통, 정부의 실패 경향 2022.09.09.

구약의 잔인한 하나님은 무차별적 사랑의 하나님과 다르다 한겨레 2022.09.10

 

나라 걱정 하기 프레시안 2022.09.11.

강제징용 피해자를 채권자라 칭한 대통령 시사인 2022.09.11.

정의로운 검사 윤석열이란 허상법치는 다음이다, 정치가 먼저다 한겨레 2022.09.12.

역대급의 정치 경향 2022.09.13.

윤석열 길, 이재명 길 미디어오늘 2022.09.13.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듯, 검찰의 개입에 맡겨진 선거법 한겨레 2022.09.13.

권위 장사’, 혹은 대학의 사망 한겨레 2022.09.13.

검사 대통령의 본색 경향 2022.09.13.

기후위기시대와 눈치(nunchi) 교육 제주의 소리 2022.09.13.

한동훈 기획 론스타 3경향 2022.09.14.

정치의 실종 경향 2022.09.14.

오만한 엘리트의 나라 한겨레 2022.09.14.

부자감세라는 이름의 혐오 캠페인 한국경제 2022.09.14.

노인 1000만명 시대 경향 2022.09.15.

여왕의 서거와 북한 핵 법제화에 대한 보도, 정상인가? 미디어오늘 2022.09.15.

영부인의 짜집기 논문과 침묵경기신문 2022.09.15.

한동훈 장관, 그 자신감의 원천은 경향 2022.09.16.

사랑받으려 사랑하지 마세요 경향 2022.09.16.

누구를 위한 소액심판인가 경향 2022.09.16.

허대만과 허대만들의 동행 경향 2022.09.16.

음모론은 누구의 음모인가? 경향 2022.09.17.

··북방 삼각관계의 귀환 한겨레 2022.09.18.

청년 빚탕감과 횡재세사이 한겨레 2022.09.19.

감사원을 감사하라 경향 2022.09.19.

세계화라는 황금 구속복 벗어던진 미국 경향 2022.09.19.

SKT 원패스300의 함정과 망중립성 경향 2022.09.19.

미국, 결국 깡패국가로 가는가 경기신문 2022.09.19.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드러낸 한국의 정책역량 경향 2022.09.20.

민주노총만 지켜주는 노란봉투법? 경향 2022.09.20.

미국에 농락당하는 윤석열식 외교 한겨레 2022.09.20.

 

 

유엔서도 공허한 자유론만 외친 아마추어 외교 한겨레 2022.09.21.

금리 인상의 후폭풍 경향 2022.09.21.

복합위기로 치닫는 경제와 무능한 정부 경향 2022.09.22.

지경학 시대의 위험과 기회 경향 2022.09.22.

파트타임 기후활동가 어때요 경향 2022.09.23.

편리의 대가와 9·24 기후정의행진 한겨레 2022.09.23.

공정한 불평등 vs 가치 너머의 가치관 한겨레 :2022-07-21

내부총질부터 ××”윤 대통령 입이 추락시킨 국격 한겨레 2022-09-25

윤 대통령의 XX’ 외교 담론과 문재인 때리기한겨레 2022-09-26

흙으로 돌아가리라퇴비장을 아시나요 한겨레 2022-09-26

윤석열 정권, 미국은 겁내고 국민은 겁주나 경향 2022-09-26

헤어질 결심 2 경향 2022-09-26

빈곤과 기후위기, 이대로는 살 수 없지 않은가 경향 2022-09-26

윤석열의 자유, 한국인의 품격 미디어오늘 2022.09.26.

구애 거절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나 매일신문 2022-09-26

진실보다 우선하는 국익이 있을까? 미디어오늘 2022.09.27

임기 5년이 뭐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한겨레 2022.09.28.

586세대, 사회적 상속에 나설 때다 경향 2022.09.28.

·일 비교의 묘미 경향 2022.09.29.

디지털 시대의 인연 한겨레 2022.09.29.

ESG에 진심이어야 할 헌법적 이유 경향 2022.09.30.

삼겹살 1인분은 왜 180그램? 경향 2022.09.30.

대재앙 앞에서 한겨레 2022.09.30.

다른 정치는 가능하다 한겨레 2022.09.30.

비속어' 또렷한데 '가짜뉴스' 척결이라니? | 프레시안 2022.09.30

 

 

너무 심각한 아랫돌 빼기예산안

윤석열 정부의 첫 예산안이 윤곽을 드러냈다. 7월 국가재정전략회의 결과가 알려지고 기획재정부의 세제개편안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방향이 예측되긴 했지만, 실제 예산안이 안겨주는 충격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세금을 대폭 깎아 재정수입을 줄이겠다고 하더니 건전재정이라는 명분으로 올해보다 줄어든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취약계층과 지방에 들어갔던 예산과 사업을 빼내 기업과 중산층, 수도권에 재정이 집중되도록 했다. 이렇게 파격적으로 아랫돌을 빼내 윗돌을 괴면 사회가 무너진다. 시민들이 선택한 정부이고 이 정부의 정책노선을 5천만 국민이 감당하긴 해야겠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아랫돌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2023년 예산안이 드러낸 내년도 주거정책은 그 변화의 방향과 강도에서 가히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정부는 공공임대주택 공급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공공분양주택 공급예산을 늘리면서 마치 두 정책이 호환 가능한 사업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두 정책은 정책 대상이 전혀 다른 사업이다. 국토교통부는 시가의 70% 수준으로 공급되는 원가주택 등이 주거취약 계층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얼마나 싸게 공급하는가와 무관하게 아파트를 분양받을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임대주택에 거주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임대주택이 필요한 사람과 저렴한 분양주택이 필요한 사람은 다르다.

 

얼마 전 폭우로 반지하 거주 시민들을 위한 주거정책의 필요성은 온 사회가 공감한 바 있다. 국토교통부는 이번 예산안에 반지하 거주 시민들의 이사비용 지원과 5천만원 한도 대출 지원사업을 반영하고 반지하 거주 시민들을 위한 대책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러면 안 된다. 국토교통부 공무원들도 설마 이사 갈 곳이 없어서 문제인 이들에게 이사비용을 지원하는 게 대책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자리 정책에서 아랫돌 빼기도 심각하다. 정부는 노인 직접일자리 사업 예산을 삭감하면서 고령자 고용 기업에 고용지원금을 대폭 늘리겠다고 한다. 고령자 고용지원금도 고령자 일자리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두 정책의 대상 집단은 다르다. 현재 직접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고령층은 주로 70대 이상 시민들이다. 이들은 기업에 고용돼 종일 노동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시간 공공일자리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현 정부는 현재 제공되고 있는 공공 직접일자리를 질 낮은 일자리라고 깎아내리지만, 그 일자리로 생계를 유지하는 시민들에게 중요한 건 질이 높은지 낮은지가 아니다. 고령자 고용지원금이 만들 수 있는 일자리는 기업이 요구하는 노동강도를 감당할 수 있는 젊은 노인들에게 효용이 있지, 70대 이상 고령층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아니다.

 

청년일자리 예산안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정부는 현재 진행하고 있는 청년고용장려금이나 유지 지원금을 거의 없애다시피 하면서 디지털 인재 양성사업 등을 새롭게 편성했다. 정부는 현재 청년고용 창출 및 유지 지원금을 애써 코로나 한시 사업이고 내년도 경기가 회복될 전망이므로 없애도 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전혀 아니다. 정부가 새롭게 추진하는 사업으로 혜택을 볼 수 있는 청년과 현재 고용 관련 지원금으로 혜택을 보는 청년은 다르다. 2020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2019년부터 2021년까지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의 취업 적체가 여전히 심각하다. 이 청년들에게 다시 디지털 교육을 받아서 취업하라고 하는 건 현실성이 없을 뿐 아니라, 너무 가혹한 일이다. 당장 일자리가 필요한 청년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빼내 미래의 직업교육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해야 한다.

 

새롭게 들어선 정부에 자신들의 공약을 실현할 정책을 시행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국민에게 약속하고 집권했으니 하시라. 그런데 이런 식으로 아랫돌 빼서 하면 안 된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에게 일방적인 혜택을 주는 법인세, 상속세, 종합부동산세 감세 정책만 철회하더라도 현 정부가 원하는 정책과 기존의 정책이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한겨레 2022.9.1.

 

 

헌법은 누구의 편인가

현대 민주공화국은 헌법국가를 지향한다. 헌법 제10조가 선언하듯이 국가의 존립 이유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헌법에 의한 지배가 민주공화국의 기본형태가 된 것은 서구의 경우에도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근대국가의 태동과 함께 성문헌법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헌법은 정치를 제대로 통제하는 규범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장식적 혹은 명목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 이전의 절대권력의 시대는 아예 민주적 입법기관으로서의 의회 자체가 형성되지 못하고 법규범 또한 절대권력의 전횡을 정당화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행정국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시민혁명을 계기로 의회가 국정과제를 법률의 형식으로 규범화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하였지만 법률의 정당성과 합리성보다 그 형식에만 집착하는 법률국가에 머물렀다. 법률국가는 그 명분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와 자유화가 뒷받침되지 않을 때는 껍데기뿐인 민주공화국으로 전락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개인의 침해할 수 없는 기본적 인권의 본질적 내용은 아무리 법률에 의하더라도 침해할 수 없도록 입법권을 헌법에 따라 통제하지 않는다면 법률국가는 부정의한 법률에 의한 독재로 폭주할 위험성을 가진다.

 

행정국가에서 법률국가로, 법률국가에서 헌법국가로의 민주공화국의 진화라는 교과서적인 원론을 되새기는 것은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룬 한국의 민주공화제가 국가권력의 역주행 때문에 극복해야 할 과제가 쌓여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다.

 

행정국가로의 역주행은 이 난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왔던 검찰국가화와 시행령통치의 사례가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는 데서 확인된다. 정부조직법 등 관계법률을 무력화하는 시행령 개정을 통해 법무장관에게 인사검증권을 부여하고 행안부 장관이 경찰을 지휘할 수 있도록 경찰국을 신설하는 것도 모자라 검찰청법 등을 정면으로 거슬러 검찰의 직접수사권을 자의적으로 확대하려는 시행령 개정이 가시화되고 있다.

 

법률국가로의 퇴행의 흔적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을 억압해온 노동관계법과 이를 통제하기는커녕 더욱 강화하는 판례의 지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제헌헌법 이래 우리 헌법은 경제적 자유지상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민주복지주의 경제헌법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특히 노사관계와 관련하여 노사자율주의를 원칙으로 하되 노사 사이의 사회경제적 교섭력의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근로자에게 노동3권을 헌법상의 기본적 인권으로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결단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관계 법률은 오히려 노동3권의 핵심인 파업권을 매우 엄격한 조건에 따르도록 규제하고 파업이 불법행위로 전환될 여지를 폭넓게 인정함으로써 노동기본권의 취지를 무력화하고 있다. 법원은 불법파업의 범위를 확대한 법률을 고리로 파업에 적용이 배제되는 것이 원칙인 업무방해죄를 손쉽게 인정하거나 파업근로자의 재산에 대한 가압류를 허용하고 거액의 손해배상이 가능한 법적 통로를 개방함으로써 노동헌법에 역행하는 부정의한 법률국가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흔히들 법은 중립적인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구체적 분쟁해결의 장에서 법이 당사자를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법의 내용면에서 분쟁해결의 기준을 설정할 때는 가치중립적이기보다는 특정 가치나 정책을 반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헌법은 정치투쟁의 결과이다 보니 중요한 가치나 정책적 결단을 반영하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입법권과 행정권이 수평적 관계인 것과 별개로 각각의 핵심권한인 법률과 행정입법인 시행령의 관계는 서열관계가 명확한 상하관계에 있는 것이 헌법국가의 기본원칙이다. 한마디로 시행령이 법률의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은 헌법이 허용하지 않는다. 헌법국가로의 진화가 무색하게 행정국가로 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기본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특별하게 파업할 수 있는 기본권을 보장했는데 과도하게 법률요건을 강화함으로써 근로자의 지위를 오히려 더 열악하게 만드는 입법과 사법해석은 헌법국가를 법률국가로 퇴행시키는 것이다. 헌법은 의회민주주의와 노동자의 편을 자임하고 있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태도가 아쉬운 시점이다. 민주화의 역사를 볼 때 곧 극복될 퇴행이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기본적인 원리마저 부정당하는 현실을 견디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2022.9.2.

 

빈곤은 정의의 문제다

달동네1960~1970년대 가난의 대명사였다. 높은 곳에 동네가 자리잡고 있어 달이 잘 보인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업화에 따른 대규모 이농으로 도시에 몰려든 주민들이 산비탈이나 고지대에 모여 다닥다닥 붙어살던 곳이었다. 달동네는 싼값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터전이자 생존 공동체이기도 했다. 정신없이 쓸려들어온 도시생활의 각박함 속에서 지친 심신을 어루만져줄 이웃의 따뜻한 정도 있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들어 재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달동네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아파트 단지가 속속 들어서면서 90년대 후반에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까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달동네는 반지하옥탑방’ ‘쪽방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이었다.

 

지난주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수원 세 모녀의 사연이 전해졌다. 60대 여성과 40대의 두 딸은 경기 수원의 다세대주택에 살면서 오랜 기간 암 등 난치병과 생활고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 한 달에 1만원대에 불과한 건강보험료조차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도움을 줄 친척도, 이웃과의 교류도 없었다고 한다. 긴급복지·생계비 신청도 하지 않아 정부나 지자체의 복지 지원도 받지 못했다. 사회와 완전히 고립된 위기가구였다. 그런 상황이 결국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달동네 시절보다 더 각박한 삶을 살았던 셈이다.

 

광주에서는 나이가 차 보육시설에서 퇴소한 젊은이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비극이 잇따랐다. 장애인 부모 때문에 보육시설에서 자라다가 지난해 2월 그곳을 나와 아버지를 모시던 19세 청년이 지난 24일 생의 끈을 놨다. 시설에서 퇴소한 지 16개월 만이었다. 그는 유서에 왜 내가 이런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살아온 삶이 너무 가혹했다고 적었다고 한다. 이보다 사흘 전엔 보육시설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꿈꾼 18세의 대학생이 기숙사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는 죽기 전 보육원 관계자와 통화하면서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빈곤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빈곤 퇴치를 위해 정부가 실시해온 정책 역시 한둘이 아니다. 생활능력이 없거나 곤궁한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2000년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이후 여러 대안과 정책이 마련됐다. 하지만 수원 세 모녀와 같은 비극은 늘 반복돼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한 구상과 보완책이 줄을 잇고 있다. 위기가구를 찾아내 지원하기 위한 수집 정보 항목을 늘리고, ‘핫라인을 구축하는 등 시스템을 개선하겠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숨은 세 모녀를 찾겠다며 건보료 연체 가구에 대한 점검도 추진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복지 담당 공무원은 부족하고, 실제 위기기구를 찾아내더라도 이들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만한 자원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빈곤 해결이 구두선에 그칠 것 같아 보이는 이유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빈곤 문제가 일반인들의 의식에 절절하게 와닿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세간의 관심을 자극하는 몇몇 사례가 나오면 반짝 관심을 갖는 게 전부다. 그러고 나면 곧 잊혀진다. 정부 부처나 유관기관이 내놓은 수치만으로는 빈곤의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한다. 예컨대 수원 세 모녀와 같이 월 5만원 이하 건강보험료를 체납하는 생계형 체납자가 지난해 6월 기준 73만가구에 이른다는 통계만 보고 빈곤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빈곤을 해결하려면 근본부터 따져 들어가야 한다. 바로 빈곤은 정의의 문제라는 시각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다. 아무리 부유한 사회라 하더라도 개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가난해질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이 존재하는 한 빈곤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는 결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빈곤이 단순히 물질적 결핍에서만 비롯된다고 하기도 힘들다. 경제가 발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번다고 빈곤이 단숨에 사라질 수는 없다는 얘기다. 모르고 지나치는, 일상에 녹아 있는 빈곤문제를 끄집어내서 구체화해 공론에 부쳐야 한다. 시민들이 빈곤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경향 2022.9.2.

 

 

컨트리클럽에 농촌이 없다

80년대 공일(휴일)’ 특유의 풍경이 있었다. 전국노래자랑을 보면서 !’ 소리에 박장대소를 한다든가 권투와 씨름 생중계를 보는 풍경이 아련하다. 아버지는 텔레비전 화면에 대고 잽잽! 어퍼컷!”을 외치며 훈수를 두곤 했지만, 이제 권투경기는 올림픽 때나 볼까 말까다. 대체로 소득이 올라가면 스포츠도 큰 자본이 얽힌 종목이 인기를 끌고, 골프도 그중 하나여서 생중계도 이루어진다. 스타 골프선수들도 많은 데다 특권층만의 스포츠가 아닌 대중스포츠의 면모를 갖추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골프 치는 예능프로그램도 많아지면서 더욱 친근해졌고, 이제 회식 뒤에 노래방 코스 대신에 스크린골프문화도 낯설지 않다.

 

심지어 골프 업계는 코로나19 특수까지 누렸다. 실내 스포츠에는 여러 제약이 있던 탓에 야외활동을 할 수 있는 골프의 인기가 치솟고, MZ세대까지 골프에 유입되어 새로운 골프 소비계층이 창출되었다. <레저백서2022>에 따르면 골프 인구는 564만명으로 전년 대비 20% 급증했고, 가격이 싼 동남아시아 골프 투어가 어려워지자 국내 골프장으로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영업이익률이 39.7% 상승한 것으로 나왔다. 한때는 아웃도어 모델이 톱스타의 상징이었지만 근래엔 골프의류 광고 모델을 거머쥐는 것이 기준일 정도로 골프 산업은 나날이 성장 중이다. 하지만 성장에는 그늘이 짙기 마련이다. 결국 골프장 문제가 남는다. 한국에는 골프장이 500곳 정도 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려 이용료가 너무 비싸고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도 턱없이 부족하며, 무엇보다 골프 산업이 갖는 경제성을 이유로 골프장을 늘려야 한다고 골프업계는 말한다.

 

하지만 골프장이 들어서는 곳은 대체로 농어촌이다. 해안가를 따라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곳들이나 풍경이 좋은 골프장은 인기가 높아 심지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골프장같은 순위를 매길 정도다. 다만 죽기 전에 변하지 않을 사실 하나는 골프장이 들어설 때마다 지역주민들은 갈등에 휩싸이고, 산을 깎고 농지는 훼손된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남양주시에는 아직도 반딧불이가 나오는 곳이 있다. 축령산을 끼고 계곡도 맑은 수동면 내방리 일대다. 그런데 이곳에 무려 38홀짜리 거대 골프장이 들어서려 하자 갈등이 일고 있다. 또 전북 순창군 주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순창읍에는 기존의 9홀짜리 골프장을 18홀까지 확장공사를 하겠다 하여 끌탕을 하고 있다. 골프장 건설 계획이 알려지면 그때부터 유치위원회의 이름을 내걸고 지역발전, 세수확보 등의 명분으로 일부 인사들이 찬성운동에 나선다. 지역 정치인들은 여기에 힘을 보태고, 지역언론은 골프장이 큰손 광고주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우호적인 여론을 만드는 데 끼어든다. 반면 골프장 지척의 주민들은 골프공도 날아오고 골프장에 뿌린 농약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며 극렬하게 반대운동을 한다. 골프장 문제로 어제는 형님아우, 오늘은 원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깟 공놀이 때문에!

 

골프장의 농약사용 논란 때문에 친환경 골프장을 만든다 해도 골프공을 잘 굴리려면 잔디만 남아야 하므로 제초제가 필수다. 여기에 어마어마한 양의 지하수를 쓰는데 농촌에서 지하수는 농업용수이자, 식수이기도 해서 물꼬 싸움까지 벌어진다. 지방세를 체납하던 제주도 골프장에 지하수를 막아 버린다 하자 득달같이 달려가 납부를 하는 걸 보니 골프 산업은 지독한 물 산업이기도 하다.

 

어디 남양주시 수동면과 순창군 순창읍뿐이랴. 이 지면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골프장은 전국 농어촌을 쪼개놓는 일등 공신이다. 골프가 대중스포츠가 되어간다고 하지만 그 어떤 스포츠가 이렇게까지 삶의 터전을 갈등으로 몰아넣는단 말인가. 골프장을 보통 CC, 즉 컨트리클럽(country club)이라 부르던데, 컨트리들어서면 진짜 컨트리인 농촌은 괴롭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경향 2022.9.2.

 

 

탐욕인플레와 치킨플레이션

그리드플레이션. 김재욱 화백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은 탐욕을 의미하는 그리드’(greed)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미국 물가가 40여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자 대기업의 탐욕이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등장한 용어다. 코로나19 대유행 여파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식량·에너지 가격 급등이 인플레이션을 촉발하자, 기업들이 시장지배력을 악용해 상품 가격을 무분별하게 올렸다는 주장이다.

 

한국 역시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물가상승 국면을 지나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2일 발표한 8월 물가상승률은 5.7%6(6.0%), 7(6.3%)에 견줘 다소 둔화했지만, 서민들은 체감하기 어렵다. 폭염과 장마로 인해 채솟값이 급등한 데다 치킨(11.4%)으로 대표되는 외식 물가상승률(8.8%)199210(8.8%)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탓이 크다.

 

외식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꼽힌 치킨은 최근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외식 항목이다. “치킨은 서민”(영화 <극한직업> 속 대사)이라지만, 올해 들어 치킨 2만원 시대가 열리며 치킨플레이션’(치킨+인플레이션)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이 틈을 타고 홈플러스의 당당치킨을 시작으로 대형마트들은 반값 치킨전쟁을 시작했고, 소비자들은 오픈런까지 감행하며 열광했다.

 

10년 전 롯데마트의 통큰치킨때와 달리 서민들은 대형마트의 골목상권 침해논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치킨 업계의 과도한 영업이익률때문이다. 국내 대표 치킨 프랜차이즈인 비에이치시(BHC)와 비비큐(BBQ)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각각 32.2%, 16.8%로 요식업 평균치(8%)2~4배에 달했다. 이 와중에 영업이익률이 가장 높은 비에이치시는 지난 7월엔 가맹점에 공급하는 해바라기유 가격을 60.9%나 올린 데 이어 8월엔 일부 닭고기 공급 가격까지 올려 비난을 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비에이치시가 가맹점에 튀김기름을 고가에 매입하도록 강요했다는 의혹에 관해 조사에 나섰다.

치킨 업계는 억울하다며 울상이지만, 밀가루·식용유 값 상승을 핑계로 서민과 가맹점주의 주머니를 터는 치킨 업계의 탐욕적 가격 인상이야말로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듯 싶다.

유선희 산업팀 기자 한겨레 2022-09-05

 

 

힌남노 역시 '가난'을 가장 먼저 노리고 있다

폭우의 피해를 다 회복하기도 전에 초강력 태풍 '힌남노'의 피해가 걱정이다. 언론은 실시간으로 태풍의 경로와 그 위력을 보도하고, 태풍의 직접적 영향권으로 예측되는 지자체(남성 고위공무원)들은 비상대책회의 등 재난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분주하다. 지난 재난의 가혹한 결과를 지금 이 순간에도 홀로 감당하고 있는 '아래'의 불평등한 고통이 무색하게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가난 사파리'라 했던가.(<가난 사파리-하층계급은 왜 분노하는가> 대런 맥가비 지음, 김영선 옮김, 돌베개 펴냄) 가난의 고통은 특히 재난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구경거리 되기 쉽고, 재난이 아닌 일상에서는 그 고통이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 관심조차 받기 어렵다. 가난을 재난과 죽음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한, 모순적이게도 가난으로 인한 죽음은 반복해서 재현된다. 최근, 우리가 또다시 목도한 가난의 죽음''이 증거다.

 

이 죽음들에 사회가 다 함께 애도하며 사회적 '죽임'이라 분노했다. 그 책임을 통감했는지 대통령은 곧바로 '특단의 조치'를 주문했고, 보건복지부는 '복지 사각지대 발굴·지원체계 개선 전담팀'을 발족했다. 시민사회의 비판처럼 위기에 처한 이를 찾아서 필요한 제도를 지원하도록 체계를 개편하고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기술주의적 접근은 임시방편조차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가난의 죽음이 그 증거다.

 

빈곤 활동가들은 수급 대상자를 발굴할 것이 아니라 빈곤과 불평등의 사회구조적 원인을 찾고 또 제거하라 요구했다. 동의한다. 사각지대를 찾는다 한들 이들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제도가 없는 경우가 많고, 제도가 있다 한들 까다로운 자격조건으로 인해 가난을 증명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제도에 선정되기 어렵다는 인식은 비수급 빈곤 가구 및 개인이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신청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바로 가기 : 정책연구관리시스템 '2020년 기초생활보장 실태조사 및 평가연구')

 

우리는 가난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기에 더해 돌봄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돌봄 관계를 잘 보살펴야 한다. 가난의 돌봄은 일방의 '불가피한 의존'과 연관되어 있다. 기존 복지체계에서 가난의 돌봄은 자신의 힘만으로 생활이 어려운 이들에 일방적으로 주는, 그래서 일방적으로 받는 돌봄이다. 하지만 실상 가난은 불가피한 의존인인 자기 자신, 가족, 또는 이웃 등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든, 돌봄을 제공해야만 하는 이들의 돌봄 필요 즉, '파생된 의존'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가난으로 인한 많은 죽음이 가난한 동시에 그 속에서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누군가의 부담과 이에 따른 취약성을 매개로 한다. 따라서 일방의 필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주고받는 돌봄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새로운 돌봄 필요에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가난은 파생된 의존인에 대한 차별과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불평등의 결과다. 따라서 가난과 죽음의 관계는 선형적이지도, 일차원적이지도 않다. 특히 여전히 주된 돌봄 제공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가난과 죽음의 관계는 젠더 불평등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정확한 통계조차 없어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렵지만, 보도된 사례 대다수가 여성(가구)의 죽음이다. 2020년 기준 남성 가구주 가구 중 가구 빈곤율은 14.5%인데 반해 여성 가구주 가구에서 가구 빈곤율은 33.9%에 달한다.(바로 가기 : 한국여성정책연구원'코로나19 경제위기에 따른 여성노동시장 영향과 정책과제') 실업 등 코로나19의 부정적인 경제 영향이 돌봄 부담이 주어진 (유자녀) 여성에게 불균형하게 컸음을 의미하는 '쉬세션(She-cession)' 혹은 '맘세션(Mom-cession)'이 보여주듯, 위기나 재난 상황에서 여성 가구주의 빈곤 위험은 유독 크다. 한편, 빈곤의 위험이 높다고 알려져 있는 한부모 가족 가운데 65.5%가 모자 중심 가구이며, 부자 가구(평균 약 247만 원)보다 모자가구(평균 약 169만 원)에서 평균 소득이 상대적으로 더 낮다. 이러한 결과는 가난의 문제에서 돌봄이 핵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돌봄 제공자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차별, 불평등, 억압, 착취 등의 구조적 부정의를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한편, 이 모든 과정에서 건강 돌봄의 보장이 필수적이다. 가난과 질병은 악순환하며 공존한다. 또한 가난의 죽음은 소득 결핍을 넘어 불안정한 주거, 부족한 음식, 불충분한 의료이용, 불건강, 사회적 관계의 단절, 노동력 상실 등 삶의 모든 조건이 망라한 결과다. 나열한 많은 조건들이 또한 건강의 결정요인이라면 건강을 잘 돌보는 것에서 가난의 고통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돌봄의 윤리로 가난을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권력이 서로 연대하여 그 힘을 강화하는 과정이다. 돌봄은 관계에 그 본질이 있다. 보살핌과 공감은 결국 동원과 강요가 아닌, 참여와 협력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참여와 협력은 민주적 공공성으로 이어진다.

 

돌봄의 결핍은 비의존적이고 이성적이며, 또 경제적인 개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매일을 살아가는 이들을 권리가 아닌 의무의 주체로 상정함으로써 취약한 이들을 차별하고 또 배제한다. 의존하는 이들의 힘이 약한 각자도생의 시공간에서 민주적 공공성은 실천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되고, 이곳에서 가난은 계속에서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존적 존재로의 개인, 그 개인들이 존엄하고 온존한 상태에서 서로 보살핌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구조로의 변혁이 필요하다. 돌봄 윤리가 필요하다.

시민건강연구소 | 프레시안 2022.09.05.

 

 

서울법대 망국론

2000년대 초반 서울대 망국론이 사회적 이슈가 됐다. 서울대 출신들이 사회·경제·문화 등 대부분의 영역을 장악하면서 제기됐던 사회적 논쟁이었다. “고대 나와도 기자하느냐는 이회창 대선 후보의 발언이 나왔던 것도 이때였다. 학벌지상주의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을까, 서울대 법대 출신의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는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상고를 나온 김대중,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지난주 중요한 인사청문회가 두 건 있었다. 한 건은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였고, 또 한 건은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였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서울법대 출신이다. 대법관이야 그렇다쳐도 공정거래원장까지 서울법대 출신을 골라야 했을까. 더구나 한후보자는 보험연구원장을 지내는 등 기업보다는 금융전문가에 더 가깝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의 서울법대 편애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하면서 대통령실을 개편하네 어쩌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서울법대에 대한 믿음은 공고해 보인다.

 

서울법대 79학번인 윤석열 대통령은 보수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 학벌을 갖고 있다. 과거와 달리 윤 대통령이 당선된 데는 그간 사회적 다양성이 강화되면서 학벌에 대한 논란이 잦아진 탓이 크다. 동시에 능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가 득세한 것도 서울법대 출신에 대한 거부감을 줄였을 것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윤 대통령은 할당이나 안배를 하지 않고 능력만 보고 뽑았다며 서울법대 출신을 초대내각 전면에 배치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진 외교부 장관, 한동훈 법무부 장관.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서울법대다. 그 기조에 서울대 타과 출신들도 대거 중용됐다.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의대 출신들이 줄줄이 윤석열 행정부의 핵심 요직에 앉아있다.

 

윤석열 정부의 서울법대 편애는 여당의 분열도 불러왔다. 대선에 기여하고도 아직 한자리를 얻지 못한 여당 관계자들은 서울법대 출신이어도 그랬겠느냐는 푸념을 많이 한다.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100일 만에 20%대까지 추락한 것은 여권 지지자들의 이탈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백보 양보해 윤석열 행정부가 일을 잘하고는 있는 것일까. 최근 들어 사회적 분위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고 있다. 남쪽에서 거칠게 올라온다는 태풍 힌남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온통 경제가 나쁘다는 소식뿐이니 시민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1달러 환율이 1360원을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월말에는 1400원도 예상해야 한다. 무역수지 적자는 월간 기준으로 66년 만에 가장 나빴다. 세계 무역질서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부의 대응은 신속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한국 전기차들이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되게 됐지만 부랴부랴 워싱턴으로 떠난 정부 대표단은 기쁜 소식을 들고 오지 못했다.

 

대출받아 내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금리 상승을 이미 체감하고 있다. 손실을 본 주가, 가상통화는 언제나 원금을 회복할지 모르겠다. 하반기에는 경제가 더 나쁘다면서요, 만나는 기업인마다 금융인마다 주고받는 안부에는 근심, 걱정이 묻어 있다. 서울 강남에서도 세금을 깎아달랬지 집값을 깎아달랬느냐는 불만이 터져나온다고 한다.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것은 전 정권과 야당 대표에 대한 전방위 수사 정도다.

 

최근 들어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행보를 강화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경제지표만 보자면 무능하다는 말을 들어도 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윤 대통령 말마따나 오직 능력만 보고내각을 배치했는데도 성적표가 고작 이 정도라면 그간 무능한 진보라고 공격했던 보수로서는 민망스럽다.

 

서울법대 출신들의 공부머리야 시비를 걸기 어렵다. 하지만 일을 시켜보면 안다. 공부머리와 일머리는 다르다는 것을. 시험만으로 민생을 살릴 수 있다면 몇번이고 서울법대 출신들을 써야겠지만, 국가 운영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국내외 갈등과 난제를 서로 다른 색깔의 사람들과 만나 협의와 합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성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내각이 그렇다. 만약 국내 최고 학벌로 이뤄진 윤석열 정부가 실패한다면 보수에 대한 또 다른 책임론이 제기될지 모를 일이다. 서울대 망국론, 아니 서울법대 망국론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박병률 경제부장 한겨레 2022.09.05.

 

 

이대로 살 수 없다면

나는 기다린다. 924일을. 그날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올 것이다. 오후 3,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부터 기후정의행진이 시작된다. 2019년 대학로에서 열린 대규모 기후위기 집회 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내가 속한 모임도 4일 모여 회의를 했다. 우리는 조금 일찍 만나 커다란 깃발을 만들기로 했다. 각자 깃발에 붙일 상징들을 하나씩 가져와 붙일 계획이다. 오랜만에 깃발을 들어보겠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기후정의와 관련된 책을 들고 와서 길거리 독서회도 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속한 단체들이 다 나온다니, 어느 깃발 아래서 행진을 해야 할지 즐거운 고민을 한다. 누구는 몸에 풀을 붙이고 온다고 하고, 누구는 허리춤에 호미를 차고 온단다. 누구는 개구리의 전령이 되어, 누구는 산양과 멧돼지의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이 든 피켓에는 이대로 살 수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문장은 지난 7월 대우조선 하청지회 파업 당시 0.3평 용접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유최안 노동자가 세상을 향해 던졌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한 노동자의 외침에서 시작된 물음은 더 멀리, 더 크게 울려퍼져야 한다. 그건 이대로 살 수 없는 모든 존재의 외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대로 살 수 없다, 삭감 임금 복구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노동시간 감축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화석연료, 투기자본 규제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안전한 주거 대책 마련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불평등 사회 끝내자, 이대로 살 수 없다, 공장식 축산 중단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개구리도 뜨거워 못 살겠다, 이대로 살 수 없다, 이대로 살다가는 물도 없고 에너지도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농사도 없고 식량도 없다, 성장의 질주를 멈춰라!’ 우리는 외치며 행진할 것이다.

 

흩어져 있던 목소리들이 함께 모일 때, 이 문제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지금 눈앞에 닥친 위기가 어떤 위기인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이 위기는 단지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문제나, 대기 중 탄소량 과다의 문제, 에너지 부족과 연료 대체 문제로 이해해선 안 되는, 그 모든 것들을 야기하는 자본주의 성장체제의 문제이며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이처럼 집회는 각자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로 바꾸어내며, 사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것임을 깨닫고, 일상 속에서 드러나지 않던 정치적 진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힘의 크기를 보여주는 장이다. 한 사람이 외치면 바꾸기 힘든 것을 백 사람, 만 사람이 외치면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집회의 힘이고 그래서 우리는 집회를 한다.

 

이제는 기후위기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증상에만 주목하고 원인은 외면하는 주류 기후위기 서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자본과 정부, 미디어와 전문가들이 만든 탄소중립프레임에서도 탈피해야 한다. 지금 다가오는 태풍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마스크의 일상도, 혹독한 가뭄, 폭우와 홍수도, 모두 위기를 알리는 자연의 징후이자 증상들이다. 이런 징후들이 가져올 피해도 치명적이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는 증상으로부터의 고통을 돌보고 경감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증상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더 많은 사람들이 탄소중립이 아니라 배출제로를,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전환을 외치기를 바란다. ‘이대로 살 수 없다, ‘이대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말해야 한다. 기후 재난은 자연이 만든 재난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든 재난이다.

 

그동안 수많은 기후협약과 탄소감축 선언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는 더욱 심화되어 왔다. 대표자들의 합의나 기업의 자발적 책임, 이행 관리라는 방식은 기술과 시장에 기댄 탄소 조절주의 정책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이 성장의 위기가 닥칠 때는 노동탄압과 시민권 축소 등 정치적인 억압의 강도도 함께 높아진다.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성장의 돌파구는 대다수 민중에겐 얼마나 혹독한 재난이었나. 상상하지 못한 기후위기는 상상하지 못한 정치적 파국도 함께 예고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경로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의 압력이다. 물론 하루의 집회로 해결될 수는 없다. 924일이 이어질 수많은 저항의 날들을 시작하는 하루이기를 바란다. 이제 광장을 열자. 서로의 고통을 만나고, 서로의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대표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가진 힘을 믿기 위해서. 9월이여, 오라.

채효정 오늘의 교육편집위원장 한겨레 2022.09.05.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가을로 접어들며 무더위가 가니까 지내기는 한결 수월하다. 하지만 가뭄과 호우 때나 반짝하는 기후에 관한 관심도 함께 가버릴까 걱정이다. 올해도 세계 곳곳이 혹독한 기후 재난에 시달렸다. 유럽과 중국은 가뭄, 파키스탄은 홍수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고 한국도 기상 관측 사상 최대라는 비가 서울과 중부 지방을 덮쳤다. 모두 유례가 없는규모였고, 이 불길한 수식어는 해마다 강도를 높여 등장할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과 중국의 첨예한 대립 같은 국제적 분쟁과 갈등이 가뜩이나 지지부진한 기후위기의 국제적 공조를 어렵게 한다. 국내 상황은 더 암울하다. 지난 정부에서는 탄소중립 선언이니 탄소중립위원회 발족이니 하며 담론은 있었는데, 지금 정부에서는 아예 담론조차 실종됐다. 핵발전 확충 명분이 필요할 때만 기후는 위기가 된다. 기후 문제를 다루는 정부의 모습은 지난 호우로 일가족 3명이 숨진 반지하 집 바깥에서 우산을 쓰고 쪼그려 앉아 있는 대통령을 닮았다. , 구경꾼 같다. 집권당은 집안 싸움하느라 기후는 안중에도 없다.

 

기후위기를 기술로 모면하자는 생각은 여전하다. 해결사로 등장한 탄소 포집·저장 기술은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그 매력에 심각한 문제들이 가려져 있다. 지금은 소규모로만 가능한 이 기술을 실제로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있을 정도로 구현할 수 있는지, 그 시점은 언제인지, 모두 불확실하다. 탄소 포집·저장 과정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얼마나 되는지, 계속 포집하는 탄소를 어디에 얼마나 묻을 것인지, 그곳은 안전한지, 모두 불확실하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 기술에 매달리느라 정작 필요한 체제 전환은 미뤄지고, 사람들은 기술이 알아서 해결하겠거니 생각한다. 설혹 기술로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지금 기후 재난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불평등은 더 늘어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바꿔야만 희망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체제의 대안은 없다며 우리 마음에 체념을 내재화했다. 상상력이 고갈된 우리는 현재의 변화를 꿈꾸기는커녕 두려워한다. 전 지구적 차원의 거대한 기후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줄 거대한 해법은 없다. 다양한 작은 대응이 있을 뿐이다. 지구공학 같은 거대한 기술 요법은 허황하기도 하지만 지극히 자본주의적이다. 기후도 거대한 이윤을 안겨줄 유망한 사업 종목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해법을 기대할 순 없다.

 

자본주의는 온실가스 감축보다 이윤 증대에 훨씬 관심이 많다. 이윤 증대를 위한 성장은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는 뜻이다. 성장과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 우리는 어떤가? 체제의 변화라는 거대한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이렇게 우리는 무력한 방관자로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거듭 묻는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청노동의 착취적 현실을 고발했던 철창의 절규는 가뭄으로 밭과 마음이 타들어 가는 농촌에서도, 공장식 축산으로 무너져가는 아마존 열대우림에서도 터져 나온다. 이들 절규에 담긴 현실을 외면할 때, 희망은 없다. 미래의 재난에는 아직 괜찮으니까”, 현재의 재난에는 나는 괜찮으니까이러면서 가짜 위안에 빠져 진짜 현실을 외면할 때, 희망은 없다. 이들 절규가 사그라지지 않게 기억하고 여기에 우리의 목소리를 더할 때, 희망은 있다. 가뭄과 산불, 폭우와 홍수가 닥치면 기후위기라 호들갑을 떨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고 고개를 떨군 채 일상으로 돌아갈 때, 희망은 없다. 온전한 기억으로 재난의 현실과 맞설 때, 희망은 있다.

 

문제가 심각할수록 근원으로 내려가야 희망이 있다. 기후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뜻이 있다면, 체제의 전환은 비현실적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다. 목적지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면, 내려서 다시 타야 한다. “주판도 잘못 놓게 되면 털고 다시놓아야 한다(장일순). 이런 게 근원적 전환이다.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가? 그대로 주판만 열심히 놓으면 잘못은 더 커진다. 체제를 한 번에 바꿀 순 없겠지만 “1인 혁명은 할 수 있다(로버트 프로스트). 지금까지 열심히 놓아온 주판을 이젠 그만 털겠다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적 변화의 물꼬도 트인다. 사회의 근간이 사람의 관계라면, 그럴 것이다.

 

기후정의행진은 변화의 시작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내가 변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세상이 함부로 굴러간다고 내 삶을 함부로 굴릴 까닭도 없다. 거대한 문제라고 주눅들 것도 없다. 기후가 모두의 문제라면 그건 바로 내 문제다. 이대로 살 순 없다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번 움직여보는 건 어떨까. 924기후정의행진에 보태는 우리의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한겨레 2022.09.05.

 

 

우리에게 내재된 인종차별적 시선, 씁쓸하다

드라마에서 타국을 음식명으로 대표하면서 비하적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미권 드라마에서 ‘kimchi’를 대사에 포함할 때, 이는 음식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다.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한 경멸의 표시이거나, 아시안 문화를 통칭하여 모욕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통상 단지 유머였을 뿐이라면서 재치있는 말장난 정도로 수용된다. 한국 드라마 <빅 마우스>에서 태국의 음식명을 상대방을 모욕하기 위한 대사에 포함한 것 역시 같은 경우일 것이다. 한국 드라마의 수용이 초국적이고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터라, 방영 당일 태국의 드라마 시청자들이 관련한 SNS 메시지를 다수 남기기도 했다. 한국 문화의 수용이 OTT 및 기타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문화의 차이에 대한 존중이 부족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종종 한국 케이팝 스타들이 드레드록스 헤어스타일을 할 때 문화 정체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해외 팬덤의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다 보니, 이 문제 역시 수차례 반복되어오고 있다. 이 문제가 문화 차이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온 결과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무관심들은 일상화된 인종차별 문제로 이어진다. 종종 한국 사회는 인종차별을 서구의 비서구 세계에 대한 차별 문제로만 인식하기도 한다. 한국 내에서 인종차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무심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공부하는 다수 유학생들은 공적 공간에서 경험하는 일상적 차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인 외국인 예능인 샘 오취리에 대한 뉴스의 댓글은 그가 비판적 태도를 보이게 만들었던 한국 내 일상화된 인종차별적 인식의 경연장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언론 보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최근의 보도는 한국인 대 외국인을 구분하여 이주 노동자들을 이등 노동자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인 노동자 인권보장 어디까지 해야 하나라는 질문,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상전 모시듯해야 한다고 표현하거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급여가 맞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라면서 갑질을 한다는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이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이는 한국의 노동 보도 전반에서 나타나는 노동자에 대한 억압적 시각과도 관련되지만, 인종 문제가 결합하면서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은 한국인보다 못한이등 노동자라는 함의를 전달하는 데 대해 언론은 별로 고민이 없어 보인다.

 

다문화 청소년3%를 넘은 지금, 우리 사회가 인종과 차이, 문화 다양성에 대해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시급히 점검해야 한다. 한국의 교육 과정에서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삭제했지만 여전히 주류 집단으로 한국인을 두고 다문화를 시혜와 배려 대상으로 놓고 있다. 종종 언론은 다문화 청소년의 문제와 관련하여 부정적인 이슈를 주로 언급하면서 타자화한다. 청소년 입장에서 공감하여 우려하는 것이 아닌 한국 사회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는 방식 등이 그러하다.

 

서로 다른 인종적·민족적 배경을 지니고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그 수많은 차이들을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환원할 때, 이 대립항은 명백히 혈통 중심의 한국인이며 그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차이에 대한 존중 인식이 없으면 한국인과 다문화를 구분하는 법제도적 범주는 구분이 아닌 차별로 작동하게 된다. 언론 보도는 물론 글로벌하게 수용되는 문화 콘텐츠에서 문화 다양성과 차이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 한겨레 2022.09.05.

 

 

BTS 여론조사'라니, 연예인 병역이 방송 경연 프로인가?

대한민국 정치인과 프로스포츠 선수, 연예인들에게 성추문과 음주운전, 폭력, 허위 경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순간은 폭풍처럼 비난이 쏟아지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망각의 강물을 타고 돌아온다.

다만 예외가 있으니 바로 병역이다. 병역 비리만큼은 도무지 용서가 안된다. 스티브 유로 불리는 유승준은 연예계 복귀는 커녕 국내 입국조차 안되고 있다.

 

군대를 피해 해외를 전전했던 프로축구 선수 석현준은 결국 처벌을 감수하고 국내 입국을 결심했고 국제대회 금메달로 어떻게든 병역면제를 받으려고 30세가 되도록 버틴 프로야구 오지환 선수는 훌륭한 기량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주홍글씨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 남성에게 병역은 시지프스의 돌처럼 피할 수 없는 짐이다. 병역을 둘러싼 논란은 그 돌을 누구나 공평하게 짊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BTS(방탄소년단). 빅히트뮤직 제공

 

BTS(방탄소년단)의 병역 문제가 국회까지 넘어왔다. 국민의 힘 성일종 의원과 민주당 설훈 의원 등 여야 일부 의원들이 'BTS가 군대에 가야하는지' 여론조사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국방부 장관까지 논란에 참여했다. 이종섭 국방장관은 지난 31일 국회에서 "여론조사를 빨리 하자고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연예인의 병역을 여론조사로 결정한다는 소식에 2030 청년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정인의 병역을 여론조사 찬반으로 결정한다는 단순한 해결방식이 어이없고 제도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병역을 한낱 가요 방송 경연 프로그램쯤으로 여기는 것 아니냐?"는 반응들이 많다.

연예인에 대한 여론조사는 인기투표의 성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2년 전 BTS 병역특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찬반은 46% 48%로 엇비슷했지만 최근인 지난 4월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찬성이 59%(반대 33%)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조사하는 방식과 시점에 따라 변수가 많기 때문에 객관성과 일관성에 논란이 많다.민주당 김영배 의원은 "여론조사의 맹점은 누가 설계하느냐, 어떻게 물어보느냐, 전후 질문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므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설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안규백 의원도 "BTS가 대중예술로 국위를 선양한건 사실이지만 대학에서 공부한 청년이나 농촌의 농사짓는 청년, 방산업체에서 근무하는 청년도 다 국위 선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회에서조차 의견이 모아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인구절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한민국은 병역자원이 부족해져가고 있는 시점이다. 공정과 형평성인 핵심인 병역의무를 국위선양에만 맞춘다면 누구는 군대를 가고 누구는 가지않는 심각한 형평성과 위헌 논란이 생길 수 있다.운동선수는 나이에 따른 전성기가 지나면 기량이 현격하게 떨어지지만 연예인은 나이를 들어도 활동을 하는데 지장이 없다.

 

이런 차별성과 논란을 모두 외면하고 특정인을 위한 특례를 만들 경우 위인설법, 위인조사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국방부는 "국방부가 주도해 여론조사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을 바꿨다가 "여론조사를 할 계획이 아예 없다"고 태도를 바꿨다.

 

이와 관련한 국민의 정서도 알지 못하고 "BTS의 병역을 여론조사 결과로 판단하겠다"는 이종섭 국방장관의 발언은 경솔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국방과 병역의 사령탑인 국방장관이 병역의무의 신성함을 지키기 보다 면제 논리에 적극 뛰어드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BTS의 국위선양 기여도는 새삼 되짚을 필요 없이 전국민이 인정하는 사실이고 해외에서도 멤버들의 병역 이행에 관심이 높다. BTS 멤버 중 가장 생일이 빠른 진(30)의 병역 연기 기간은 연말까지다. 국방부로서는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하는 시점이다.

 

반드시 면제가 아니더라도 BTS의 병역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운동 선수들의 상무 부대처럼 군 복무를 하면서 연예활동을 할 수 있다. 다만, 인기투표나 다름없는 여론조사로 특정인의 병역특례를 결정한다는 말만큼은 더 이상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민개병제 국가에서 병역면제는 누군가에게는 병역특례지만 누군가에게는 병역기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CBS노컷뉴스 김규완 기자 2022-09-05

 

 

스킵하는 시대

직장인 김지연(38)씨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기가 너무나 답답하다. 보고 싶은 장면만 보고 나머지는 빠르게 스킵한다(건너뛴다). 맥락은 궁금하지만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빠짐없이 듣고 싶지는 않다. 유튜브 등에 올라온 편집본, 소위 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콘텐츠를 둘러보기에 정말 편리하다.

 

수년간 이런 방식으로 콘텐츠를 즐기다 보니 영화처럼 길이가 긴 영상물에 집중하는 일이 김씨에겐 쉽지 않다. 이제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생각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 지루해도 스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용을 곱씹을 만한 콘텐츠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콘텐츠는 솔직히 별로 없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는 영화를 볼 마음을 먹을 수 있다. 재미없는 장면은 스킵하고, 궁금한 장면만 보면 된다. 중요한 장면을 놓치면 뒤로 돌리면 되고, 지루하면 앞으로 넘길 수 있다.

 

모두들 시간은 없고, 볼 건 많다. 재밌는 볼거리도 많지만 골치 아픈 일도 쌓여 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내일까지 마감인 기획안도 써야 한다. 콘텐츠를 보는 행위 안에서도 멀티태스킹이 이뤄진다. 영상을 틀어놓고 웹툰을 보기도 한다. 오디오드라마, 오디오북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일을 하면서 콘텐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의 영상 콘텐츠는 예전보다 선택받기 힘들다. 스킵하면서 보기가 쉽지 않고, 정신적 피로도가 큰 탓이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 느리고 여백이 많은 연출 스타일은 흥행에 성공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더 이상의 고구마는 사절인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모범가족에 출연한 배우 박희순을 최근 인터뷰했다. ‘모범가족은 호흡이 느리다. 유튜브엔 ‘30분 만에 몰아보기같은 콘텐츠가 등장했다. 전개가 답답하다는 일부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먼저 작품에 대한 관객의 호불호는 어느 작품에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OTT에선 스킵하기도 하고 몇 배속으로 돌리기도 하며 빠르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호흡이 느린 작품은 느림의 미학을 만끽할 때만 진정한 힘을 느낄 수 있다. 2배속으로 보면 당연히 재미가 없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몇 달간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일부만 보고 끄거나 빨리 보기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거 같다.”

 

지난 6월 공개된 티빙 오리지널 예능 전체관람가+:숏버스터시대에 맞는 콘텐츠라는 창작자의 고민을 보여줬다. 10명의 영화감독이 러닝타임 20분 안팎의 단편 8편을 제작했다. 프로그램 한 회차는 30분가량이다. 단편영화 한 편은 영화, 제작영상 및 토크 2개의 클립으로 구성됐다. 영화 클립만 볼 수도 있고, 제작영상을 보며 감독과 배우들이 이야기 나누는 클립만 볼 수도 있다. 영화라는 소재로 숏폼 콘텐츠의 예능을 만든 거다.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과 방식이 존재한다. 방식에 옳고 그름이 있다기보단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영화가 좋아서 두세 번씩 극장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아하는 장면만 보고 싶어서 극장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하다. 인물들의 말소리와 숨소리, 표정, 음악이 시작되고 끝나는 타이밍, 카메라의 앵글과 속도까지 모든 요소에 창작자들은 의미를 담았을 텐데 그게 온전히 전달되기 어려운 시대다.

 

어느 순간부터 문화를 향유한다는 표현이 낯설어졌다. 사람들은 감상한다기보다 소비한다. 내용을 대충 이해는 하지만 몰입하지는 않는다. 긴 호흡은 버겁다. 2020년대의 문화일 것이다. 이것 역시, 일상이 너무 고달픈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상일까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국민일보 2022-09-05

 

 

응답하라, 김건희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달 19일 충북 충주 중앙경찰학교에서 열린 310기 졸업식에서 졸업생을 대표해 복무선서를 한 여성 경찰관에게 흉장(가슴표장)을 달아주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갤럽이 지난 2일 공개한 9월 첫 주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27%였다. 전주(84)와 같았지만, 국정수행 부정평가 이유 중에는 변화가 있었다. 81~4주 조사에서 모두 1%에 머물렀던 김건희 여사 행보3%로 오른 것이다.

 

시민이 김 여사에 대해 뜨악한 지점은 모두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겐 코바나컨텐츠 관련 업체가 관저 공사 계약을 따낸 문제, 누군가에겐 김 여사가 고가 장신구를 지인에게 빌린 일, 누군가에겐 김 여사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이 취임식에 초청된 사안일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겐 회원 유지‘member Yuji’로 표기한 논문, 누군가에겐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일 것이다.

 

내겐 중앙경찰학교 졸업식이었다. 지난달 19일 중앙경찰학교 졸업식에 윤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김 여사는 여성 졸업생 대표에게 흉장(가슴표장)을 달아줬다. 모든 공무원의 최종 임명권자는 대통령이지, 대통령의 배우자가 아니다. 당일 행사 직전 중앙경찰학교가 낸 보도자료를 보면 윤 대통령은 졸업생을 대표하여 복무선서를 한 ○○○(41, ) 순경과 ○○○(32, ) 순경에게 직접 가슴표장을 부착해줌으로써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자료대로라면 김 여사의 흉장 수여는 원래 식순에 없던 게 갑자기 들어간 셈이다. 졸업식 후 김 여사는 윤 대통령과 별도의 여성 졸업생·가족 간담회까지 했다.

 

돌아보면 알아차릴 기회는 많았다. ‘언터처블 김건희말이다. 예고편 첫 번째. 지난해 12월 후보 배우자로서 허위 학력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을 때다. 사과문 내용이 낯설었다. 그동안 접해온 정치인 및 가족들의 사과문과 전혀 달랐다. 김 여사의 사과문은 몸이 약한 저를 걱정해 날씨가 추운데 따뜻하게 입어라 늘 전화를 잊지 않던남편 자랑과 신변 잡사로 일관했다. 선거캠프에서 문안에 손도 못 댄 게 분명해 보였다.

 

예고편 두 번째. 지난 5월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대통령 부부가 찍은 사진이 김 여사 팬클럽 건희사랑을 통해 공개됐을 때다. 대통령실에선 해당 사진을 외부에 제공한 주체는 여사님일 것 같다고 했다.

 

예고편 세 번째. 지난 6월 봉하마을 방문이다. 당시 전직 코바나컨텐츠 임원이 동행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대통령실은 여사와 가까운 사이고, 고향도 그쪽 비슷해서라고 설명했다.

 

김 여사를 둘러싼 논란에는 특징이 있다. 형태는 유사한데 스케일이 커지며 재연된다. ‘예고편 2’는 대통령 일정 노출로 변주됐다. 출입기자들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윤 대통령의 대구 서문시장 방문 일정이 김 여사 팬클럽에 미리 흘러나갔다. ‘예고편 3’은 나토 방문 동행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김 여사의 오랜 지인이자 이원모 인사비서관 부인인 신모씨가 민간인 신분으로 동행했다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귀국한 사실이 드러났다.

 

논란이 다른 논란으로 덮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논문관저 공사, 관저 공사는 장신구, 장신구는 취임식 초청으로 덮인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해명 없음이다. 대통령실은 사고가 터지면 확인해보겠다고 하지만 그때뿐이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제 처는 (제가) 정치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대통령 부인은 그냥 가족에 불과하다”(동아일보 인터뷰)고 했다. 2부속실 폐지 공약도 배우자 활동을 최소화하려는 취지로 해석됐다. 착각이었다. 2부속실은 배우자 활동을 자유롭게하려고 없앤 걸로 봐야 한다.

 

지난달 23일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풍경은 징후적이다. 야당 의원들이 김 여사 관련 의혹을 파고들자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지금 우리 여사가 뭘 잘못했는지 먼저 말씀해달라고 맞받았다. 비서실 수장이 이 정도면, 다른 참모들은 우리 여사에 대해 입도 뻥끗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 여사가 직접 말씀하시라. 코바나컨텐츠 관련 업체가 입찰공고 3시간 만에 수주에 성공하는 데 관여하지 않았는지, 수천만원대 장신구를 어떤 지인에게서 무슨 조건으로 빌렸는지, 취임식에 경찰관을 초청한 까닭은 뭔지 국민 앞에 설명하시라. 잘못이 있으면 사과하면 된다. ‘Yuji’ 논문은 철회하고 팬클럽은 해체하면 된다. 다만 주가조작 연루 의혹은 다른 사안이다. 국민에게 설명할 게 아니라 검찰 조사를 받을 일이다. 대통령 배우자의 일거수일투족에는 국민 세금이 들어간다. 김 여사는 침묵할 권리가 없다. 대한민국은 김건희의 나라가 아니다.

김민아 논설실장 경향 2022-09-05

 

 

드론 정밀포격?자포리자 핵재앙 누가 장담하나

전쟁이 벌어지면, 진실은 사라지고 오직 이기려는 선전선동만이 판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자포리자 원전을 사이에 둔 포격 등 교전 상황이 전형적이다.

핵 재앙 우려가 국제사회에 만연하나, 기껏해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이 포격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정도만 전해진다. 러시아는 자국군이 점령하고 주둔한 자포리자 원전을 향해 포격을 가한다는 것인가? 우크라이나가 자국 주민이 가장 피해를 볼 자포리자 원전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가?

 

지난달 29일 미국 국방부의 언론 브리핑에서 익명을 요구한 고위 군 관리는 이 사태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그 인근에 포격을 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그들이 했을 가능성이 아마 있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위치에서 포격하는 러시아에 대한 대응 포격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러시아가 자포리자 원전 시설을 볼모로 하고는 그 위치에서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기존의 서방 주장의 연장이나, 우크라이나도 원전에 포격을 가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지난 722일 우크라이나 국방부의 국방정보국은 트위터에 자포리자 원전에 주둔한 러시아군 텐트가 드론으로 공격당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텐트 옆에서 폭발이 일어나 불타고, 러시아 병사들이 혼비백산 도망치는 장면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자살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 병사 3명이 죽고, 12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핵 문제를 감시하는 우려하는 과학자들의 연맹의 핵발전소안전국장인 에드윈 라이먼은 미국 공영방송 <엔피아르>(NPR)에 우크라이나가 자신의 공격 정밀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며 불장난이 명백히 시작됐다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을 매일 언론에 제공하는 미국 전쟁연구소는 자포리자 원전을 둘러싼 핵 재앙 긴장은 미국이 이번 여름 들어서 우크라이나에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하이마스)과 공격용 드론 등 정밀 중무기를 제공하는 시점과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이 무기들을 가지고 헤르손 등 남부 지역 탈환에 나서는 반격을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가 자포리자 원전을 건드린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안고 있는 모순과 기만을 보여준다.

 

유럽 최대인 자포리자 원전은 우크라이나 전력의 20%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동맹국인 벨라루스 등 옛 소련 공화국 국가들에 전력을 공급했다.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발발하자 벨라루스 등으로 가는 원전 전력을 끊고는 이를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돌리겠다고 밝혔다. 침공한 러시아가 3월에 자포리자 원전을 점령했는데, 그 운영은 여전히 우크라이나 회사와 기술진이 했다. 전력망 배분도 그대로 유지됐다.

 

하지만 7월에 우크라이나는 원전 전력을 루마니아를 거쳐서 유럽연합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를 유럽 동맹국들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는 과정의 시작이라고 말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러시아군이 전력망 변경을 막으려고 직원들과 충돌했는지, 직원들이 러시아군에게 구타 등 괴롭힘을 당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러시아는 아예 자포리자 원전을 우크라이나 전력망에서 완전히 끊어버리고, 자국 전력망으로 연결하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즈음을 기해 자포리자 원전을 둘러싼 포격전이 시작됐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에도 전력을 인근 국가에 팔려 했고, 러시아는 위험스럽게 원전의 전력망 교체를 시도하다가 벌어진 것이 자포리자 원전 사태라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소비하는 가스의 약 30%를 유럽으로부터 수입한다. 그런데 이 가스는 사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을 통해 유럽에 수출한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유럽으로 수출하는 러시아 가스를 도중에서 받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가스관 통행료를 여전히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는 유럽 국가들에 러시아 가스 등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러시아도 독일로 가는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은 폐쇄하면서도, 정작 교전국인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은 잠그지 않고 있다.

 

전쟁을 해도 먹고살아야 하기에, 러시아나 우크라이나가 서로 얽혀 있는 전기나 가스 문제를 놓고 기만과 위선을 떠는 것도 이해한다. 그들이 전쟁을 하기에 그 문제들을 가지고 선전선동에 이용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전쟁의 선전선동에 국제사회 전체가 진영논리로 갈라지고 있다. 핵 재앙을 부르는 사태이고, 3차대전으로 비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자신 있게 장담할 것인가?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2-09-05

 

 

회복탄력성과 불평등

힘든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회복탄력성이 좋은 친구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회복탄력성은 심리학 용어라는데, 정확한 학술적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감정적으로나 심리적 좌절감, 실패감을 느꼈을 때 그 좌절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금방 회복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회복탄력성이 좋을수록 일상으로 돌아가는 타이밍도 빨라진다. 좌절을 금방 떨쳐내는 것도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은 게 언제였을까. 실패하고도 다시 일어날 힘은 믿고 의지할 만한 기반에서 나온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사회에도 회복탄력성이 있다면 어떨까. 코로나19라는 감염병 재난을 2년 넘게 앓고 있으며, 치솟는 물가와 금리 인상으로 일해도 빈곤한 날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자연재해도 일상을 위협한다. 지난달 폭우로는 17명이 사망했고, 이재민은 25444가구에 이른다. 이 중 하나만 경험해도 벅찬데, 재난은 쉬이 우리를 피해 가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덮쳐오는 재난 앞에 사회의 회복탄력성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가혹하게도 재난은 모두에게 같은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재해에 더 취약한 사람들이 있다. 지난달 폭우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사람도 도시의 가장 낮은 곳, 반지하에 사는 주거 취약계층이었다. 코로나19의 피해 또한 고르지 않다. 고소득층보다 저소득층에,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에, 그리고 더 작은 가게의 소상공인에게 큰 피해를 남겼다. 아프면 치료받기도 쉽지 않다.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그마저도 수가 적다. 기후위기의 상흔도 비슷하다. 폭염과 혹한으로 고통받는 것은 에어컨, 난방시스템 등이 충분히 구비된 주거 공간에 살 여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의 회복탄력성이란, 결국 재난 취약계층에게 기반을 만들어주는 일일 테다.

 

하지만 지난 830일 정부가 발표한 예산안에는 이런 회복탄력성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에 따르면 내년 예산은 639조원으로, 올해 본예산보다는 314000억원 늘었지만,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포함한 총지출과 비교하면 41조원 부족한 규모다. 특히 공공임대 예산은 56000억원이 깎였다. 복지 수급의 기준이 되는 기준중위소득 증가율은 5.47%이지만 물가상승률이 6%대인 것을 감안하면 미미하다. 감염병 재난에 필수 대책으로 거론된 공공의료 예산도 올해 대비 11.6%나 깎였다.

 

윤석열 정부는 집권 전부터 재정건전성, 아니 긴축 재정을 목표로 지출 구조조정할 것을 대대적으로 밝혀왔다. 결국 정부의 재정 긴축 기조가 복지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폭우 피해로 주거 취약계층의 죽음을 맞이하고도 회복탄력성의 기반을 약화하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불평등이 재난이다.” 지난달 16일부터 23일까지 서울시의회 앞에 열린 폭우 참사 시민 추모 분향소에 걸린 문구다. 결국 재난에 대비하는 것은 불평등에 대비하는 것이다. 기후위기, 물가위기, 감염병 재난이라는 다양한 재난에 마주하는 모습은 같아야 한다. 지금껏 제기되어 온 불평등을 묵과하지 않는 것, 사회의 회복탄력성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경향 2022-09-06

 

 

약자인가, 동료시민인가? 약자복지의 오만

당신은 약자인가, 동료시민인가? 복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번 대통령의 복지철학이 궁금했다. 답이 제시되었다. ‘약자복지라고 한다. “대통령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가 진정한 약자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부연하면 노동조합 등으로 조직화한 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고 그 수혜를 입을 수 있지만,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못한 이들을 살피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라 설명했다. 최근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수원 세 모녀와 같이 빈곤과 고립으로 내몰린 이들, 장애인, 다문화가족, 한부모 가족 등이 약자복지의 약자로 보인다.

 

따뜻한 보수에 걸맞은 언어이다. 집권 100일이 지나 드디어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치복지가 아닌 약자복지를 하겠다는 언급에서 나는 한국사회 주류가 오랫동안 가진 오만을 느낀다. 정치인이 장애인, 어린이, 노인의 손을 잡고 다독이는 장면, 극단적으로는 카메라 앞에서 누군가 장애인을 목욕시킨 사건이 떠오른다. 한국의 복지와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장애인, 어린이, 노인, 한부모, 다문화 가족 등 소위 약자로 소환된 이들은 그 정치인과 동등한 동료시민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든 타인을 약자로 지칭하며 대상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라는 촘촘하고 팽팽한 그물망에서 누구나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이런 상호의존의 드넓은 그물망에서 벗어나 생존할 수 없다. 시장에서 돈으로 산다고 다 내 것이며, 구매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적이라 할 수 없다. 그 형태가 다를 뿐 모두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고, 동시에 기여하고 있다. 생애를 통틀어 잠시 정치적 대표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회에 더 많이 기여하고 있다고 간주될 이유도 없다. 대부분 시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만큼은 하고 있다.

 

둘째, 특수한 필요욕구(needs)가 있다는 이유로 약자로 규정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누구든 생애 어느 순간에는 일자리, 간병, 휴식, 돌봄 등에 대한 특수한 욕구를 가질 수밖에 없다. 특수한 욕구는 취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물론 사람들의 고통의 다양함은 사회복지의 세심한 대응을 필요로 한다. 수원 세 모녀의 죽음은 행정공백을 거론하기 위해 사건으로 동원되기보다는 그 고통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필요로 한다. 배려나 연민의 대상이 아닌 특수한 필요를 가진 주체로서 그의 권리와 우리의 연결망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셋째, 조직된 이들을 국가가 돌봐야 할 약자와 대비시키고, 정치적 복지가 아닌 약자복지를 지향한다는 것은 복지를 탈정치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지를 정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장애인, 빈민, 노인, 어린이가 조직되어 의회와 거리에서 적정소득보장과 충분한 돌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소위 약자복지의 대상에서 탈락하는가? 정치적 복지의 대표로 거론된 노동조합은 어떠한가? 노동권 없는 복지는 아이러니인데 불안정한 고용의 빈자리를 복지로 채우겠다는 것인가? 돈과 권력이 비례하는 지금, 민주주의는 조직된 주체를 통해 풍성해지며 복지의 내용은 시민의 욕구에 부합하게 된다.

 

사회복지정책은 감정, 그리고 감각의 바탕 위에서 작동한다. 연민은 고귀한 감정이지만 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우리 사회에서 복지국가를 세우는 바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21세기 사회복지는 동등함의 감각을 필요로 한다. 상처받은 시민을 다양하게 조직하고 연결시키는 복지정치는 사회복지를 상호존중과 연대의 바탕 위에서 세우는 행위이다. 연민을 넘어서는 연대, 그리고 동료 시민에 대한 존중의 감정이 한국 사회복지의 바탕이 되길 바란다. 사회복지는 남은 것을 약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경향 2022-09-06

 

 

윤석열 정부, 미국을 오판한 치명적친미 외교 [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 캠프의 외교 정책을 총괄했다. 트럼프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뒤, 설리번이 한 일은 미국 외교와 중산층의 관계에 대한 심층 연구였다. 그가 민주당 외교·안보 전문가들과 함께 2020년에 내놓은 82쪽짜리 보고서 <미국 외교 정책을 중산층에게 더 적합하게 만들기>는 그 결과물이다.

보고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미국의) 중산층이다. 값비싼 해외 군사 개입과 중국에 생산을 의존하는 방식의 세계화로 피해를 입은 미국 중산층을 되살려야만, 미국의 전세계 패권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설리번 등은 강조한다. 미국 첨단기술 경쟁력 강화, 해외 투자 유치에 정부가 적극 나서고, 외교적 영향력을 이용해 글로벌 공급망 규칙을 미국에 유리하게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럼프보다 훨씬 정교한 미국 우선정책이다. 미국이 비판해온 중국식 국가 주도 발전 전략까지 적극 차용하는 미국 제조 2025’ 전략으로도 볼 수 있다. 지금 반도체와 과학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으로 실현되고 있는 미국의 이기적 정책은 뿌리가 깊다.

 

지난달 미 의회에서 통과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북미에서 최종 조립규정을 충족하지 못한 한국산 전기차가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 뒤에야, 정부가 요란한 뒷북 외교로 분주하다. 정부 합동대표단이 미국으로 달려가고, 김성한 안보실장이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에게 해결을 요청했지만, 이미 확정된 법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현실만 분명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열흘 만에 바이든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한미가 경제안보 동맹으로 격상되었다고 자화자찬한 지 석달 만에, 구호만 요란한 외교의 실상이 드러났다.

 

우선 미국 의회의 동향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외교의 기본기부터 부실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미 의회가 전광석화처럼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켜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고 해명한다. 1년 동안 표류하던 법안이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겨냥해 7월 말부터 초고속으로 진전된 것은 맞다. 그 사이에 테슬라와 지엠(GM) 등 미국 자동차 기업, 도요타 등 일본 기업, 캐나다와 멕시코 등은 미국 의회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치열한 로비를 통해 핵심 요구를 관철시켰다. 왜 유독 한국의 입장만 반영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정부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국 의회 상황에 정통한 워싱턴의 한 전문가는 지엠 등 미국 자동차 기업들이 러스트 벨트에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며 상·하원 의원들에게 강력한 로비를 하면서 막판에 법안 내용이 바뀌었다면서 외교·안보, 통상 등의 주요 현안이 미 의회를 중심으로 결정되고 있는데, 주미 한국대사관과 외교부가 미국 의회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전한다.

 

윤석열 정부의 친미 외교가 정작 미국의 정책 변화를 제대로 읽고 대응하지 못한 것도 치명적 한계였다. 미국의 한국 전기차에 대한 차별은 2016년 주한미군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이 한국산 배터리가 탑재된 차량을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시킨 보복 조처와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미국과 중국 모두 자국 산업 경쟁력과 안보 논리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도체와 에너지·바이오·우주항공 등 중국과 경쟁하는 분야에서, 중국처럼 국가 주도로 투자와 연구 개발에 나서고, 핵심 분야의 공장들을 미국 내로 흡수하는 전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 정부는 동맹의 선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현태 인천대 교수(중어중국학과)지금과 같은 흐름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새 기준에 맞추려고 미국으로 공장 이전을 서두를 것이고, 한국 전체로는 실업과 산업 공동화 등이 심각해질 수 있다반도체 등 첨단 산업은 미국이 한국 안보를 더욱 중시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한데 이런 산업을 미국으로 옮길 경우 한국의 안보 우려가 커질 가능성 등도 다각적으로 고려해 정교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첨단기술과 시장의 필요에 따라 미국과 협력 하더라도, 국내 노동자들과 산업 경쟁력을 고려해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전략적으로 미국과 협상을 해나가야 한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국가들과 공조하며 미국에 동맹의 책임을 단호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전임 정부의 친중 외교를 비난하느라 바빴던 윤석열 정부는 이런 고민과 전략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박민희 ㅣ논설위원 한겨레 2022-09-06

 

 

국민의힘 코미디의 본질, 충성 경쟁은 필패

암초 만난 도로 권성동비대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한겨레> 830일치 사설 제목이다. 그런데 사설 내용은 웃기기보다는 집권여당의 한심한 수준에 대한 분노와 울화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다. 이게 어떻게 코미디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정치가 늘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그렇게 심각하게 살다간 혈압이 치솟아 스스로 수명을 단축할 수 있다. 그러니 차라리 코미디로 이해하자는 무언의 배려가 담긴 사설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그렇게 보는 게 좋겠다. 나 역시 언제부턴가 정치를 그런 자세로 보기 시작했는데, 좋은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나의 건강을 돌보면서 냉정한 공평무사와 크게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갖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도로 권성동비대위라고 하는 코미디, 국민의힘 코미디의 본질도 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다.

 

국민의힘 코미디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두말할 필요 없이, 그건 대통령 윤석열이다.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라고 한 윤석열과 이 메시지 노출에 책임이 있는 그의 친구 권성동이 합동으로 저지른 ‘7·26 자해 사건은 이들이 자신이 맡은 공적 역할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책임의식도 없거나 약했을 것이다. 또 그래서 새 비대위 말고 대안 있나”, “당이 중지를 모아 내린 결론이면 존중해야 한다같은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코 큰소리를 쳐선 안 될 사람들이 큰소리를 치면서 해법을 제시하고 그걸 힘으로 밀어붙이는 코미디가 연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부나마 우리 자신, 즉 평범한 유권자들에게도 있다. 그건 바로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그에 따른 추종이다. 정치학자 강원택은 문재인 정부가 이른바 적폐 청산을 추진해왔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모든 적폐의 근원은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였다고 했다. <한겨레> 정치팀장 김태규도 “5년 만에 한번씩 철인을 기대하며 대통령을 뽑아놓고 실망하고, 또 베팅하는 패턴이 반복된다전지전능할 수 없는 인간에게 변치 않는 유능함만을 강요하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는 이제 성공할 수 없다는 게 역사적 실험으로 확인된 게 아닐까라고 했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매우 제한적인데다, 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 아무 일도 못 한 채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반론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정부·여당과 지지자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권력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다. 이런 추종은 내부 비판에 대한 탄압, 그리고 오류의 교정 가능성의 박탈로 이어짐으로써 대통령과 정권의 실패를 초래한다.

 

이는 충분히 확인된 사실인 것 같은데도 도무지 바뀌지 않는 정치의 영원한 풍경이다. 왜 그럴까? 미국 정치학자 크리스토퍼 에이컨은 정책의 선호도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집단과 정당에 대한 충성심이 민주정치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사항이다라고 했다.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도 정당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념적 헌신이라기보다는 부족적 헌신이고, 그것이 정당 양극화라는 맥락의 핵심 사항이다라며 정당 부족주의를 점점 강조하면서 유권자들의 대통령 후보 자질 평가는 점점 더 정당 충성심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의 말에 답이 있다. 충성심을 신성하게 여기는 부족주의 정서는 정치인에겐 강력한 지지 기반을, 지지자들에겐 정치 참여의 보람과 기쁨을 준다. 충성심에 매몰되면 중도파 유권자들의 정서를 외면함으로써 정치적 패배를 당하지만, 이를 개의치 않거나 깨닫지 못할 정도로 부족주의가 제공하는 열매는 너무도 달콤하다.

 

야당인 민주당은 국민의힘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비난과 조롱을 퍼붓고 있지만, 부족주의 문화에선 한 수 위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이재명의 득표율은 77.77%였는데, 국민의힘에서 이런 쏠림이 가능할까? 민주당은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를 막기 위해 여러 겹의 방탄장치를 마련했는데, 국민의힘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는 국민의힘이 민주당의 일사불란한 부족주의를 부러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내부 반란을 빨리 진압해야 대통령·정당 지지율이 오를 거라는 착각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윤석열에게 표를 준 유권자 중엔 정치권의 내로남불후안무치를 더는 보고 싶지 않은 소망을 품은 이들이 많았을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한겨레 2022-09-06

 

 

대물림 전관예우, 그리고 검피아의 이기적 선택

관료 사익 추구 폭로한 제임스 뷰캐넌

제임스 M. 뷰캐넌. 한겨레 자료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작은 정부론을 추구하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 가운데 가장 파렴치한데도 여론의 주목을 덜 받는 이슈가 공공기관 자산 매각이다. “공공기관 파티는 끝났다”(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익숙한 클리셰로 방만한 경영을 지적하는 척하면서 자산을 팔아 부채비율을 낮추라, 역시 많이 들어본 명령을 내렸는데 최근 MBC 보도로 그 흉악한 속내의 일부가 드러났다.

 

한국석유공사는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71월 코람코자산신탁이라는 회사에 울산 본사 사옥을 2200억여원에 팔았다. 알고 보니 코람코는 재무부 장관을 두 번이나 지낸 이규성이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낸 회사였다. 이규성 이후의 회장도 모두 재무부 출신으로 사실상 모피아주식회사였다. 석유공사는 자기 소유였던 건물에서 세를 살면서 지난 5년 동안 임대료만 480억원을 냈고, 코람코는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올리고 있다.

 

모피아들의 석유공사 사옥 매입은 너무나 직접적이고 뻔뻔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노태우 정권은 대한석유공사(유공, SK에너지)와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SK그룹에 넘기면서 자녀들의 혼사로 혈연동맹을 맺어버렸는데, 민도가 낮았던 1980년대에나 가능했던 얘기다. 요즘엔 훨씬 지능적이고 간접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현직 시절 특정 기업에 유리한 결정을 내려 은혜를 베푼 뒤, 퇴직해서 사외이사 등의 형태로 해당 기업에 취업하거나 자녀 취업으로 간접적 혜택을 누린다. 시차가 존재하고 수혜자를 달리하는 사후 취업 방식은 뇌물성을 입증하기 어려워 처벌도 어렵다. 코람코처럼 퇴직 관료가 정부와 거래하는 전관예우(전관비리’) 역시 합법적 외양을 갖춘 경우가 많아 처벌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포획이론과 합리적 무시 이론

제임스 M. 뷰캐넌(1919~2013)은 코람코의 경우처럼 관료와 정치인이 공공이익에 복무하는 게 아니라 이기적인 목적과 이유에 따라 정책을 만들고 집행한다는 공공선택(Public Choice)이론으로 198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수상 이유는 경제 및 정치적 의사결정 이론에 대한 계약 및 헌법적 기반 개발’(development of the contractual and constitutional bases for the theory of economic and political decision-making)이다. 세금을 비롯한 공공재화의 쓰임새를 결정하는 관료와 정치인의 의사결정이 사익에 기반한 지대추구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으므로 정부 기관과 그들의 의사결정을 헌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낸 점을 평가한 것이다.

 

공공선택이론과 함께 공공적 의사결정 과정의 비밀을 밝힌 이론이 198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 스티글러(1911~1991)포획이론이다.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이익단체의 정보와 논리에 포획돼 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직접적 뇌물이 아니더라도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이익단체의 영향력이 공무원과 정치인을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투표를 통한 심판이라는 민주주의제도에도 불구하고 공무원과 정치인이 이익단체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공공선택이론에서는 합리적 무시 이론으로 설명한다. 어떤 이익단체가 특정 법안을 통과시켰을 경우 얻는 이익이 1천억원이라고 하더라도 국민 개개인이 입을 피해는 사실상 미미하므로, 국민은 이 비용을 합리적으로무시하게 된다는 논리다. 이는 거꾸로 공무원과 정치인이 거리낌 없이 이익단체의 편을 드는 동인이 된다.

 

공공선택이론의 사상적 기반은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동물임을 부인하는 현대 이념은 거의 없다. 인간이 이기적 존재이므로 국가의 공공 기능을 강화해 경쟁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현대사회복지국가론(또는 사회민주주의)이라면, 인간은 이기적 존재여서 공무원이나 정치인도 이기적 결정을 할 수밖에 없으므로 국가를 축소해야 한다는 게 신자유주의다.

 

뷰캐넌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본산인 시카고학파 일원이어서, 공공선택이론의 종착지가 결국 재정 팽창에 대한 경계와 작은 정부론으로 향하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뷰캐넌이 지적한 공복들의 이기적 선택이 가장 두드러지는 사례가 신자유주의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같은 공공자산 매각이라는 점은 고약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사익 추구 경향은 신자유주의의 본산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과 칠레 등 신자유주의 정부를 경험했거나 경험하는 모든 나라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다.

 

엘리트관료 연합정권의 운명

윤석열 대통령의 경제관료 사랑은 후보 시절부터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다.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며 경제는 전문가에게 맡길 생각이라는 그의 말은 국무총리 한덕수부터 대통령실 비서실장 김대기 등 경제관료 대거 등용으로 현실이 됐다. 전두환 정권이 군인+모피아 정권이었다면, 윤석열 정권은 검사+모피아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이 워낙 빨리 변해 관료들은 시장을 따라잡기도 버거운 시대에, 계획경제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했던 40년 전의 관료 타령을 따라 부르고 있으니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검사와 모피아는 고시 출신 엘리트 관료로 각자의 영역에서 슈퍼 갑으로 군림하며 권력을 휘둘러온 영감님들의 집단이라는 점 말고도 더욱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퇴직 이후 더 많은 돈을 버는 전관예우가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집단이라는 사실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려는 개혁 방안에 검찰이 이성을 잃고 반대하는 이유 역시 검찰의 밥그릇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모피아 못지않게 관료의 이기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집단이 한국의 검찰이다.

 

요컨대 윤석열 정권은 엘리트 관료 연합정권이자 과두정의 완성이다. 엘리트 관료는 윗사람이 원하는 말을 찾아내는 데는 유능하지만 평범한 서민들에게 공감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갈등 조절에 무능하고 변수 대처에 서툴다. 정치와는 맞지 않는 집단이다. 취임 100일 만에 역대 최저치 지지율에 허덕이는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san@hani.co.kr 한겨레 2022-09-06

 

 

1997730일 경향신문, 96일 한겨레, 7일 연합통신

이 글의 목적은 어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20년 전 나는 처음 일본을 방문했다. 동아시아 지역 제노사이드 주제의 학술대회 일정이었다. 가장 크게 놀란 장면은 교토 거리 곳곳에 붙은 공산당 선전 포스터였다. 共産黨. 박정희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내게, 세 글자는 충격이었지만 곧바로 이성을 찾았다. 일본 좌파는 천황제를 의식, 대중노선을 채택하고 국가사회주의를 주도했다. 국가는 소수자 배제를 통해 자랑스럽게 대표되어야 하므로 일본 공산당이 자이니치, 오키나와 사람을 차별하는 단체로 타락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진보는 특정한 집단이 아니므로 내부도 다양하고 주류 사회의 서열이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주요 모순이 실재하고 자신이 사회운동의 주류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나머지 사람’(여성, 지방 사람, 장애인,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불편하다. 이들이 인권을 주장하면 나중에를 외친다. 이런 인식에 인성까지 나쁘면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걸어다니는 재앙’(운동가)이 등장한다. 사회운동도 회사 생활과 마찬가지다. 신념만으로 할 수 없다. 동료이든 동지이든 상처받으면 분노하고 좌절한다.

 

사회운동이나 혁명이 약자, 소수자를 탄압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동서고금 마찬가지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누가 정하는가를 묻고 싶지만, 자신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이들과의 대화는 쉽지 않을뿐더러 매장당할 수도 있다.

 

사회운동과 피해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목소리 큰 이들이 개인의 상황을 대의에 종속시킨다. 2002년 중학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살당한 사건에서 반미 민족주의 명망가들이 가난하고 목소리 없는 유가족을 억압한 사례는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미군 범죄로 인한 피해 보상은 당연한데, 운동가들은 이를 순결한 피해, 자존심 운운하며 반대했다.

 

위안부’(이후 작음 따옴표 생략)를 전쟁의 부산물로 보면 과거 청산의 일환으로 간주되겠지만, 위안부 역사는 성별화된 국가, 일상의 젠더 폭력, ·일관계, 한국사회의 식민지 남성성을 보여주는 역사의 중요한 프레임이다.

 

듣기는 책임이다

지난 811,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날을 맞아 서울시가 주최하고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원장 김은실)이 주관한 국제학술대회가 온라인으로 열렸다. ‘분쟁과 여성인권 : 이행기 정의와 책임의 정치를 주제로 한 이번 포럼은 3개 세션으로 기조연설’ ‘발표와 토론’ ‘대담으로 진행되었다. 김은실 원장은 기조연설에서 그간 군 위안부 운동을 둘러싼 각종 논란과 피해자들의 고령화 등 증언 이후의 상황에 대해 책임의 정치를 제안했다.

 

삶은 대화이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식으로든 반응(response)해야 한다는 다양한 강도의 의무감을 느낀다. 특히 역사적·구조적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사회적 책임(responsibility)이며,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듣기, 반응, 책임이 모든 과정은 간단치 않다. 사랑이 왜 어렵겠는가. 내 이야기를 조건 없이 들어주고 수용해주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30여년 동안 군 위안부 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논란이 커져가고 있는 이유는 피해자-운동가-연구자가 분업화된 데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한국사회가 원하는 방향(반일 피해의식)으로 모아졌기때문이다(국가의 무능과 방관은 아예 논외다). 이때 피해자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여성은 사람이 아니라 상징물로 통일(물화)된다. 이용수님의 문제제기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고뇌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걸러서들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듯이, 듣고 싶은 것만 들었고 심지어 듣고 싶은 말을 강요했다. 여기에 피해자 지원과 복지, 돈 문제가 얽혀 있다. 분명한 현실이지만 밝히기 어려운 판도라의 상자다.

 

한국은 인식론으로서 젠더의 지위가 낮아서 성폭력조차 해프닝으로 소모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피해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박유하, 우에노 지즈코의 마음은 소중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군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 성격을 인지하지 못한 무지의 산물이어서, 문제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획일적 목소리나 다양한 목소리나 모두 문제가 된 것이다. 전자는 남성 민족주의가 원하는 역사였고, 다양한 목소리는 이 문제의 본질인 일본이 조직적으로 제도화한 전시 성폭력이라는 인식 부재로, 이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국내외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피해자와 대의를 대립시키는 운동

게다가 나눔의집은 80억원대의 횡령을 감추기 위해 박유하씨를 고소했으니, 박씨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위안부 운동의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2020922일 방영, MBC <PD 수첩> 참고). 윤미향 의원은 운동에 헌신해 왔는데, 보수 언론이 공격하니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정작 군 위안부 피해자의 말은 흩어지고 다른 이들이 피해자가 되었다. 고통의 역사에 개입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다.

 

앞에 말한 포럼에서, 군 위안부 영화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침묵>의 박수남 감독과의 대담 세션이 있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여성영화제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사장 김은실)에서도 올해 그의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이 상영되었다. 1991년 제작된 이 작품은 군 위안부 운동 재현을 촉발시킨 매우 소중한 작품이다. 자이니치인 그는 일본과 오키나와에서 귀국하지 못한 위안부들을 찾아다니며 평생 일본 우익에 맞서 살아왔으나 김대중 정권 당시 여성단체의 의사를 존중한 정부에 의해 입국을 금지당했다(경향신문 810일자, ‘정희진의 낯선 사이참조).

 

그날 대담에서 고령(1935년생)의 박 감독은 줌 회의에다 순차 통역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인터뷰에 응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김대중, 김영삼 정부를 착각했다. 그러자 바로 유튜브 댓글 창에 그의 말에 신빙성이 없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간단한 말실수인데 그의 착오를 굳이 지적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이미 남한 정부와 여성주의 세력으로부터 깊이 상처받은 고령의 운동가에게 보인 이 적대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군 위안부 운동의 중심을 자처하는 정의연(이사장 이나영)에 불편을 넘어 불안한존재다. 일본 좌파가 국가사회주의를 위해 불가촉천민에 가까웠던 자이니치를 짓밟았던 심리와 비슷한 현상이다.

 

가슴 아픈 현실은, 행사 이후 당시 통역자인 이유미 프로그래머에게 박수남 감독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여러 가지 자료를 보내왔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 항상 자기 의견을 의심받고 부정당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사소한 실수에도 증명 강박에 시달린다. 박수남 감독의 입국 금지 사실은 1997730일 경향신문, 96일 한겨레, 97일 일본판 연합통신, 같은 일자 한국판 연합통신에 보도되었다. 언론에 보도된 사실을 밝히기 위해,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소위 국민기금 수령에 대해 과거 정대협과 다른 입장을 가진 다양한 세력이 있다. 일단 기금의 성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수령은 곧 매춘 여성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막강했다. 정대협은 수령을 적극적으로 막았고, 생계가 곤란한 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낙인과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기금의 성격도 오해가 있었지만, 나는 수령 여부 자체는 피해자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은 국민기금을 계기로 초심을 잃었다. 사회운동이 피해자를 배척한 것이다.

 

예전에는 사회운동을 하면 감옥에 갔지만, 지금은 출세가 목적이거나 자신의 다른 문제(횡령, 논문 부정)를 감추기 위해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진보 타이틀이 일부 인사에게 돈과 정계 진출의 기회가 되면서 이 판도 경쟁 시대다. 결국 위선과 불법의 진보는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다.

 

운동이든 학문이든 자신이 독점해야 한다는 사고는 필연적으로 부패와 패권주의, 권력화를 낳는다. 그때 제대로 지급되지 못한 돈과 한·일 정부와의 자존심 싸움으로 만들어진 돈은, 지금 대학을 매개로 한 연구자들의 소위 프로젝트로 사용되고 있다. 대학 교원이 아니면 수주가 어렵고, 대학은 연구비의 일정액을 교비로 환수한다. 30년간 국내외 개인들이 기부한 성금은? <PD 수첩>을 다시 보기 바란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2022-09-07

 

 

위기의 중국 조선족 살리는 법

중국 베이징의 한인타운으로 불리는 왕징(望京)에는 한국 음식점이 밀집돼 있고 한국어로 된 간판도 즐비하다. ·중관계의 냉각기를 거치며 숫자가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교민들이 이곳에 모여 산다. 왕징에는 한국 국적의 교민들 이외에 한인 커뮤니티를 떠받치고 있는 또 다른 이들이 있다.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 동포들이다. 그들은 주로 한인들을 상대로 슈퍼마켓, 식당 등을 운영하거나 각종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교민들과 얽혀 산다. 한국 기업에서 일하거나 개인사업을 하며 이래저래 한·중 간 가교 역할을 하는 이들도 많다

 

조선족들은 중국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과 한민족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동시에 안고 살아간다.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는 간혹 충돌도 발생한다. 요즘 조선족 기성세대는 대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자녀세대가 우리 말과 글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 정체성의 위기다.

 

그들이 느끼는 정체성의 위기는 크게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첫째가 중국의 소수민족 동화 정책이다. 중국 정부는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과 국가 통합 등을 강조하며 지속적으로 소수민족 통합 정책을 편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앞세우는 것이 중국 표준어(보통화) 교육 확대다. 중국 국무원은 지난해 2035년까지 보통화 사용을 전면화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그러면서 언어와 문자는 국가 통합의 중요한 버팀목이라며 통용 언어와 문자 보급에 중점을 둬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고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갈 자녀세대에 무턱대고 우리 말과 글을 지키라고 강요만 할 수도 없고 민족 정체성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게 기성세대의 고민이다.

 

조선족의 정체성 위기를 초래하는 또 다른 원인은 인구 감소다. 2000192만여명으로 정점을 찍은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20여년 새 22만명 이상이 줄어 170만명대로 내려앉았다. 인구 자체가 감소한 상황에서 과거 주로 동북3성에 모여 살던 조선족 상당수가 중국 내 각 지역과 해외로 흩어지면서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됐다.

 

이 같은 현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중국 내 유일한 조선족 자치지역인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다. 옌볜자치주는 지난달 조선 언어문자 공작조례 실시세칙을 공포했다. 한글 중심의 문자 표기를 중국어 우선으로 바꾸는 게 골자다. 세칙 시행 후 옌볜에서는 한글만 표기했거나 한글을 우선 표기한 간판을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중국 내 조선족들은 이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언젠가 말과 글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1952년 자치주 성립 초기 70%를 넘어섰던 옌볜 내 조선족 인구 비중은 30.8%까지 떨어졌다. 규정에 따라 인구 비중이 30% 아래로 내려가면 자치주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터다. 옌볜조선족자치주는 지난 3일 성립 7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옌볜을 떠난 조선족 상당수가 한국에 정착했다. 그들은 한국에서도 차별과 혐오를 경험한다. 양쪽에서 모두 경계인으로 살아온 그들을 중국인이라고 싸잡아 구별짓기보다 민족의 언어와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하고 지원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이종섭 베이징 특파원 경향 2022-09-07

 

 

부산엑스포 유치전, BTS천군만마는 될 수 없다

방탄소년단의 부산 엑스포 유치 기원 콘서트 '방탄소년단 옛 투 컴 인 부산'(BTS Yet to Come in BUSAN) 공연장이 끊임없는 우려와 논란 끝에 결국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으로 변경됐다. 기존에 공지됐던 기장군 옛 한국유리 부지는 진출입로가 한 곳뿐인데다 그나마도 매우 협소해 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계속 제기됐다. , 배차 간격이 긴 도시철도와 몇 개의 버스노선만 있어 교통편이 부족하고, 공연장 인근에 화장실 등 기본적인 편의시설조차 갖춰져 있지 않다. 어떻게 생각해도 10만 관객 방문이 예상된 대규모 공연을 치르기에 적절하지 않은 장소다. 결국 방탄소년단 소속사인 하이브는 2공연 취지를 보호하는 한편, 관객 여러분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보다 쾌적하고 원활한 관람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장소를 변경했다고 공지한 것이다.

 

하지만 장소 변경이 공지되자 앞서 기장에서 발생했던 일이 반복됐다. 기장 인근 숙박업소들은 기존 숙박료보다 10배 이상으로 가격을 올리거나, 이미 예약한 고객에게 리모델링’, ‘내부사정’, ‘휴업등 갖가지 이유를 대며 예약 취소를 종용하기도 했다. 고객이 취소에 응하지 않을 경우 일방적으로 예약을 취소한 후 가격을 올린 경우도 있었다. 아시아드경기장으로 콘서트 장소가 변경되자 같은 일이 인근 숙박업소들에서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 아시아드경기장은 교통이 용이해 부산 전역 숙소를 이용할 수 있어 기장보단 나은 수준이지만, 부산 전체적으로 숙박료가 크게 오른 것만은 분명하고, 그마저도 공연 당일인 15일은 대부분 매진이다. 이제 겨우 날짜와 장소만 공지됐을 뿐인 공연을 두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고작 10만 명이 찾는 행사를 치르면서도 이런데, 예상 관람객 규모가 5050만 명에 달한다는 엑스포를 어떻게 치르겠다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부산시가 유치하려는 엑스포는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빅 이벤트로 꼽힌다. 대전과 여수에서 열렸던 엑스포는 인정 엑스포고 부산이 유치하려는 등록 엑스포는 그 규모도 크고 위상도 높다. 개최지는 장소만 제공하고, 참가국은 각국의 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한 각종 시설들을 설치하고 다 두고 가게 되는데, 이것들이 해당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파리의 에펠탑, 시카고의 대관람차도 다 엑스포가 남긴 유산이다.

 

하지만 2030 부산엑스포 유치전은 2014년부터 시작됐음에도 국내에서조차 좀처럼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에 부산시는 방탄소년단을 홍보대사로 영입하기 위해 등 1년 넘게 공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 출신 멤버인 지민과 정국의 부모까지 만나 설득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대한민국 기술력에 더해 방탄소년단으로 대표되는 K-팝과 K-콘텐츠의 성취를 부각해 경쟁 상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차별화를 꾀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가 되어준다면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다만 부산시의 기대처럼,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인 170개국보다 많은 197개국의 BTS 팬클럽 아미가 부산엑스포 유치전의 천군만마가 되어줄지는 미지수다. 이번 방탄소년단 콘서트는 한국 아미들에게 201910월 열린 ‘BTS 월드 투어 러브 유어셀프: 스피크 유어셀프’ [더 파이널]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함성 대면 콘서트다. 지난 3월에 열린 ‘BTS 퍼미션 투 댄스 온 스테이지 서울은 코로나19 방역 조치로 함성을 지를 수 없었던 이른바 박수 콘서트였다. 여기에 맏형인 멤버 진이 연말 예정대로 군에 입대한다면 방탄소년단 멤버 7명이 함께하는 다음 콘서트는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다.

 

아미들은 이렇게 소중한 공연 기회를 부산엑스포 유치라는 대의 앞에 양보한 셈이다. 그나마 공연 좌석 중 가장 좋은 3800석은 국제박람회기구 170개국 회원국 VIP들에게 배정될 예정이니 쓰린 속이 오죽할까. 하지만 부산의 숙박업소들은 대목에 눈이 멀어 팬들의 주머니를 털 생각에 혈안이 됐고, 부산시(혹은 하이브)는 공연장 부지를 선정하면서 공연장을 찾을 10만 아미들의 편의성과 안전은 우선순위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저 아미들이 방탄소년단에 대한 무한 지지와 사랑으로 부산엑스포 홍보에까지 앞장서줄 거라 기대한다면 착각에 가깝다. K-팝 팬덤이라는 집단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각국의 유력한 의사결정자나 그 가족들이 BTS의 팬들인 경우가 대단히 많다고 수차례 언급하고 있고, “7월 부산시와 외교부가 공동으로 주최한 -중남미 미래협력포럼에 참석한 각국 외교장관과 그 부인 중 다수가 BTS의 공연에 초대만 해준다면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에 발 벗고 나설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는 후문”(부산일보)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각국의 유력 의사결정자들이 이렇게 중요한 투표권을, 이렇게 사적인 감정과 애정을 기반으로 행사한다는 것도 그저 의아할 뿐이다.

 

이번 유치전에서 방탄소년단의 활약과 역할은 분명하다. 하지만 부산의 100년 미래를 걸렸다는 엑스포 유치전인데, 현재로선 무기가 오로지 방탄소년단뿐인가 싶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공들여 섭외한 홍보대사를 야무지게 활용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주객은 전도됐고, 가장 큰 지원군이 되어주어야 할 아미들은 화가 났다. 방탄소년단과 아미는 부산엑스포 유치전의 화룡점정은 될 수 있을지언정, 천군만마는 될 수 없다. 유치전도 전쟁인데 전략을 이렇게 세워서야 어디 이길 수 있겠는가.

김윤정 칼럼니스트 미디어오늘 2022.09.07.

 

 

한국의 언론은 민주화투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당히 많이 헷갈리기도 한다. 여 대 야의 구도가 개입하는 바람에 지금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 큰바람이 어디로 불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내로남불형 진영논리에 갇혀서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기운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더 도약시킬 도도한 물결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관심을 쏟지 못하고 있다. 직업정치 분야에서 도드라지고 있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다양한 부문에서 일관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주요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여야가 아닌 민주 대 반민주 전쟁

이 물결은 민주화투쟁이다. 멀리는 19604·19 독재타도 민주화투쟁으로부터 시작해 1970년대 3공화국 시절을 관통하는 반독재운동을 거쳐 1980년대 5·186·10을 거치는 동안 제도적으로 많은 성과를 얻어낸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과거와 달라진 내용이 있다면 과거엔 권력을 쥔 여당과 이를 타도하려는 야당 사이 혹은 국민과 정권 사이 투쟁 양상이었다면 지금은 각 정당, 사회 각 부문 안에서의 민주화투쟁이라 할 수 있다. 화염병과 최루탄 없이 그러나 가히 도도하게 일어나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만든 실마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시작한 합당 정치라고 할 수 있겠다.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싸운 민주 투사 김영삼이 집권 전략으로 군부 독재 세력과 합당을 채택함으로써 민주 대 독재(혹은 반민주)의 정당 구도가 옅어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들 정당에 대항해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이른바 DJP연합으로 불리는 합당을 함으로써 3~5공화국 군부출신 인사와 민주투사였던 사람들이 함께 정당을 운영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후 민주주의는 어느 정당의 전유물이 되기 어려웠다.

지난 2021511일 국민의힘 당 지도부와 대선 예비후보들은 광주 5·18 묘역을 참배했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오른쪽 두 번째)와 원희룡(왼쪽부터), 유승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가 분향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최근에는 여당 국민의힘이 5·18에 관련한 그간의 잘못된 언동을 사죄함으로써 거대 양당의 변별력이 더욱 낮아졌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당 지도부가 5·18묘역으로 가서 광주항쟁을 북한 지령을 받은 폭도들에 의한 무력행사라고 말했던 과거 행태에 대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5월 기념행사에는 소속 의원들이 모두 내려가 그간 금기시하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소리 높여 제창하기도 했다.

 

상대 정당이 독재와 같은 절대 악과 결별한 상황에서는 우리의 결속을 저들의 악함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아무리 저들이 악하다고 우긴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선한 연대체가 되긴 불가능하다. ‘우리가 절대 선한 연대체가 되기 위해서는 토론과 논쟁, 연구를 통해 보편적 미래 가치를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보편적 미래 가치를 찾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1공화국을 무너트린 4·19를 대한민국 민주주의 완성을 위한 시즌 1의 투쟁이라면 1970~80년대 군부를 무너트린 움직임은 시즌 2의 투쟁이라고 명명해볼 수 있다. 지금 한국의 정당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보이는 내부 분열은 과거 민주주의 완성을 위한 시즌 3의 투쟁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사의 연속선상에 있다.

 

시즌 3의 투쟁은 시즌 12의 투쟁이 미완이어서 일어난 일이다. 이제는 특정 세력이 조직화하여 독재와 같은 절대 악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으로 인해 내 마음 속반민주, 비민주와 싸우는 움직임이 한국의 완성된 민주화를 위해 전개되고 있다. 언론을 통해 다양하게 보도되는 바람에 직업정치 세계만 두드러져 보이긴 하지만 교육, 경제, 가정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양대 정당의 지도체제에 대한 다양한 도전은 민주화투쟁

젊은이의 소리를 듣고자 파격적으로 젊은 사람을 대표로, 비대위원장으로 뽑아 놓고는 더는 못 들어주겠다며 내쫓는 식의 사고는 민주적이지 못하다. 고쳐야 한다. ‘여의도 문법을 모르기 때문에 신선한 생각이 될 수 있을 터인데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거나 내부 총질이라며 내치는 일은 반민주적이다.

 

정보사회 이전 시기라면 나이는 곧 경험의 양이나 지식 축적도와 비례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보기기 사용량이나 활용능력에 따라 젊거나 어려도 많은 정보와 지식을 쌓을 수 있다. 민주주의는 구성원 모두에게 동등한 한 표를 보장하는 시스템이다. 경륜을 가진 사람, 기존 문법을 몰라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사람, 현재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 새로운 질서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 모두의 생각이 1표씩의 권리를 가진 채 숙의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있다.

 

자유롭고도 평등한 개인이 보장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없다. 정당 간 경쟁이 더 성숙하기 위해서도 자유롭고도 평등한 개인은 필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대한민국 양대 정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도체제에 대한 다양한 도전은 민주화투쟁임이 틀림없다. 한국의 언론은 이런 민주화투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연구 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미디어오늘 2022.09.07.

 

 

환율 1380, 탈탄소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

환율이 1380원대까지 올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환율은 가장 복잡하고 민감한 경제지표 중 하나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국제적 관점에서 한 나라의 경제안정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다. 최근 환율 상승 배경에는 미국의 급속한 금리 인상과 국제금융 시장의 불확실성이 있다. 이자율도 높고 안전성도 높은 달러 수요가 늘면서 환율이 오르고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은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 무역수지 상황이다. 무역에서 달러 순유출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올해 8월까지 이미 247억달러 적자를 기록했고, 8월 한달 적자 규모가 거의 100억달러에 이르렀다. 당분간 적자는 계속될 것이고 연간 기준 사상 최대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원유, 천연가스,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의 가격 상승이다. 올해 무역수지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54억달러 줄어들었는데,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이 중 약 80%가 화석연료와 석유제품 가격 상승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글로벌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발발하면서 화석연료 가격이 급등했다.

 

만약 화석연료 가격이 지금과 같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우리 무역수지는 만성적 적자에 빠질 수도 있다. 이는 우리 경제 안정에 큰 위협 요인이다. 일부에서는 국가채무가 국가신인도의 위협 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무역수지가 근간이 되는 경상수지는 그보다 몇배 더 중요하다. 10여년 전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이 위기에 빠진 것도 국가채무보다는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 때문이라는 사실이 많은 연구에서 확인됐다. 더구나 우리 국가채무비율은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그래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경상수지의 핵심이 되는 무역수지다. 지금 무역수지는 적자지만 경상수지는 흑자라고 위안하기도 하지만, 이런 구조는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 지속될지도 의문이다.

 

국제유가가 지금과 같은 수준 혹은 배럴당 100달러를 넘으면 우리 무역수지는 어떻게 될까? 100달러대 유가는 결코 비현실적인 가정이 아니다. 10년 전 이미 그 수준을 넘었다가 북미의 셰일오일 개발 덕분에 몇년간 크게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바이든 정부는 탈탄소 정책을 채택하면서 셰일오일 생산 확대에 소극적이다. 유가가 100달러 안팎에 머무른다면 우리 무역수지는 지금처럼 계속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10여년 전에는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가 흑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몇가지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 2007~2008년 고유가는 중국의 고속성장에 따른 에너지 수요 증가 때문이었다. 2011~2013년 고유가 역시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강력한 경기부양의 결과였다. 이런 글로벌 수요견인형 고유가는 우리의 에너지수입액을 늘렸지만, 우리 수출도 같이 끌어올렸다. 글로벌 경제 특히 중국 시장의 성장 때문에 우리 수출도 같이 증가했다. 그 결과 무역수지가 흑자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화석연료 가격이 상승하는 데는 수요 요인도 있지만 전쟁이나 전략적 선택과 같은 공급망 교란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에너지가격 상승이 곧 세계경제의 활황, 그리고 우리의 수출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의 성장 엔진이 많이 식었다. 그래서 이런 공급교란형 고유가는 분명히 우리 무역수지 구조에 큰 위험이다. 지금의 무역적자는 바로 그것을 경고하는 것일 수 있다.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화석연료 수입을 줄이는 탈탄소의 길이다. 탈탄소는 기후위기 대응은 물론 경제 안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화석연료 수입은 우리 총수입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다른 선진국들이 탄소 저감에 나선 지난 20년간 우리 석유 수입량은 오히려 30% 증가하고 천연가스 수입량은 무려 3배나 늘었다. 국제 에너지가격이 하락해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기를 바라지만, 우리 경제의 운명을 외부에 맡기는 천수답처럼 놓아둘 수는 없다. 최근 정부는 무역수지 개선 대책으로 수출금융 확대와 해외플랜트 수주 노력을 내놓았지만 1970년대 석유파동기 때 대책이 지금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신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탄소세 도입 등 탈탄소의 길이 멀지만 안정된 미래로 가는 길이다.

박복영 | 경희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보좌관 한겨레 2022.09.07.

 

 

약자 예산축소소리만 요란한 윤석열 복지

윤석열 정부의 첫 번째 예산안이 발표되었다. 이미 예상됐던 것처럼 예산 편성방향이 확장 재정에서 건전 재정 기조로 전환됐지만, 취약계층 중심의 약자 복지를 강조한 것을 고려하면 여전히 아쉽다. 물론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편성됐던 예산을 조정한 보건 분야(보건복지부 예산 기준 전년 대비 0.6% 증가) 및 고용 분야(고용노동부 예산 기준 전년 대비 4.3% 감소)를 제외하면 보건복지부 소관 사회복지 분야는 약 92조원으로 전년 대비 약 114000억원(14.2%) 증가했다.

 

그러나 약자 복지란 생소한 표현을 통해 강조했던 저소득 취약계층 지원 예산안에 새 정부의 정책 의지는 얼마나 반영된 것일까? 긴축 재정 기조로 재정지출을 효율적으로 줄이더라도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에 대해 보다 두껍게 지원한다는 정책 방향이 실질적으로 반영된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우선 복지부 소관 사회복지 분야 예산 증가액에 해당하는 약 114000억원 중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공적연금 부문(57000억원 증가, 전년 대비 약 18.0% 증가)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 부분 개혁 논의를 앞둔 현행 국민연금 제도와 인구 고령화에 의한 연금 수급대상과 연금급여액 확대로 정부의 정책 의지와 상관없는 자연증가분이다.

 

사회복지 분야 증가액 중 약 23.3%를 차지하며 전년 대비 약 27000억원(13.0%) 증가한 노인 부문 역시 대부분 기초연금 인상에 따른 자연증가분이다. 기초연금법 제5조 제2항에 따라 기초연금은 매년 통계청장이 고시하는 소비자물가변동률을 반영하여 조정한다. 이에 따라 2023년 예산안에서도 기초연금 수급대상 노인 증가(37만명 확대된 665만명)와 최근 고물가로 인한 물가상승률(4.7%) 반영에 따라 307500원에서 321950원으로 인상된 급여액, 국고보조율 조정에 의한 자연증가분이 전년 대비 약 24000억원(15.0% 증가)에 이른다. 이것은 기초연금을 40만원으로 인상한다는 국정과제 이행 계획에 따른 단계적 추진이 아니라 단순히 법령에 따라 기초연금 급여액을 조정한 결과로 정책 의지와는 상관없다(장애인연금 역시 동일하다). 결국, 기초연금 증액을 제외하면 노인 부문 예산 증가액은 약 3000억원에 불과하다.

 

가장 취약한 노인 일자리 줄어들어

기초연금과 장기요양보험 다음으로 노인 부문에서 규모가 큰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지원 사업은 공익활동형 일자리 축소에 따른 총량 감소와 실질적인 일자리 지원 예산 축소로 쟁점이 되고 있다. 2023년 예산은 약 14000억원으로 전년도 대비 약 0.4% 증가하는 데 그쳤으며, 노인일자리 사업 예산 구성 등을 감안하면 실제 일자리 예산은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새 정부가 강조한 약자 복지대상 중 가장 취약한 집단인 저소득층 고령 노인이 주로 참여하는 공익활동형 일자리를 약 10%61000개 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정 당국은 예산안 설명자료에서 사회서비스형을 7만개에서 85000개로, 60세 이상부터 참여 가능한 시장형을 167000개에서 19만개로 확대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반면, 공익활동형 일자리 감소로 총량이 845000개에서 822000개로 오히려 감소한 것에 대해서는 노인일자리의 절대적 규모는 크게 변화가 없고 단순 노무형 일자리는 소폭 줄이고, 민간형 일자리는 더 늘어나는 흐름으로 일부 조정했다고 설명한다.

 

국민연금을 거의 받지 못하고 기초연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운 고령의 노인들에게는, 지역사회의 공익을 위한 활동을 통해 받는 소득은 27만원에 불과해도, 대부분 생계를 위해 공익활동형 일자리에 참여한다. 또한 일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다양한 효과가 나타난다. 취업자 수와 고용률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활동과 단순히 비교하여 질 낮은 일자리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매월 고용동향 등 일자리 통계에서 공익형 또는 시장형 노인일자리를 구분할 방법은 마련하지 않고, 노인일자리를 취업자 수 통계의 착시를 가져온 질 낮은 일자리로 만든 것은 정치권과 언론이었다. 취업자 수나 고용률보다 일을 통해 생계에 도움이 되고 노인들의 삶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공익활동형 일자리를 6만개 이상 축소한 것은 가장 취약한 분들의 마지막 기회마저 없애는 것이다. 60세 이상도 참여 가능한 시장형 일자리가 만들어져도 기업이 고령 노인을 선호할 가능성은 낮다. 공익활동형 일자리 참여를 위해 대기 중인 노인들이 지난 5월 말 기준 9만명 가까운 상황을 고려하면 마지막 기회를 잃거나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노인들이 복지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저소득층 예산 심폐소생술필요

2023년 예산안에는 기존 영아수당을 부모급여로 확대 개편하는 데 약 13000억원을 증액했다. 비록 자연증가분이지만 원칙에 따른 기준중위소득 인상과 함께 국정과제에 제시된 재산의 소득환산제 관련 기본재산공제 확대, 긴급복지 지원 수준과 장애수당 인상 등 기초생활보장과 취약계층 부문은 약 24000억원 증가했다. 그러나 70%를 넘는 지연증가분을 제외하면 약자 복지에 대한 새 정부의 정책 의지를 충분히 반영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공공의 역할은 최소로 증가 또는 축소하고 민간과 시장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보인다. 그동안의 정부와 달리 첫 번째 예산안에서 기초연금 인상이나 생계급여 선정기준 조정 등 핵심 국정과제 이행 의지는 아직 반영되지 않았다.

 

이제 2023년 예산안의 심의·의결을 통한 확정은 국회의 몫이다. 새 정부가 처음으로 편성한 예산안에서 부족한 부분은 국회에서 조정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 체제 출범과 함께 민생을 우선 챙기겠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저소득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예산 증액과 전액 삭감된 사업에 대한 심폐소생술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대선 당시 공통 공약이 아닌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일지라도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재정 전문가로 새 정부 출범 100여일 만에 세 번째로 지명된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정부의 약자 복지를 위한 국정과제 이행뿐만 아니라 사각지대 해소와 보장수준 제고를 위해 꼭 필요한 정책과 예산만이라도 확대해주길 바란다.

최현수 보건사회연구원 사회보장재정·정책연구실장 경향 2022.09.09.

 

 

원전 전문가들이 결정할 위험한 미래

2011311, 최악의 시나리오가 이야기되었다. 반경 250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피신한다. 10, 20, 30년 동안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없다. 그 수는 무려 5000만명이다. 갑작스럽게 자기가 살던 터전을 떠나 250바깥으로 이동한다고 상상해 보자. 집을 버리고, 마을을 버리고, 직장을 버려야 한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전쟁도 가장 큰 비극이지만, 곧 끝나리라는 희망은 있다. 하지만 이 최악의 시나리오는 10~30년 동안 지속된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때 일본 총리였던 간 나오토는 당시 상황을 무겁게 회고했다. 그는 일본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곤도 슌스케가 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이야기했었다고 말했다. 만약 한국이라면 어떨까? 고리 원자력발전소를 중심으로 250의 범위는 삼척, 평창, 충주, 세종, 군산, 강진에까지 미친다. 한국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암울하고 두려운 상상이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은 다음 세기에는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술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고 수습 최고 책임자였던 그는 사고 원인을 첫째가 대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완전 정전이었고, 둘째가 도쿄전력과 정부가 적절한 예방조치를 하지 않아 인간이 만든 재해였다고 했다. 우발적 자연재해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재(人災)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간 나오토 전 총리는 가장 안전한 에너지 정책은 원전을 보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하게 말했다. 이 이야기는 헨리 캘디콧이 엮은 <끝없는 위기>(글항아리, 2016)에 나온다.

 

지난 830, 산업통상자원부가 10차 전력수급기본 계획(전기본)’ 총괄분과위원회 실무안을 공개했다.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22년부터 2036년까지 청사진을 담고 있다. 한국의 미래와 관련된 예민한 문제이기에, 원전과 관련된 내용에 눈길이 먼저 갔다. 2030년까지 원전 비중이 32.8%로 높아진다. 이는 9차 전기본25%보다 7.8%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2021년 문재인 정부 시절 확정했던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상향안보다는 원전 비율이 8.9%나 상승했다. 윤석열 정부는 탈원전 정책 폐기를 공식화하는 위험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 기본 방향은 탄소중립 이행의 중요한 수단으로 원자력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10차 전기본실무안에 따르면, ‘2036년까지 12기의 원전을 계속 운전하고,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신한울 1·2호기와 신고리 5·6호기를 준공한다. 2032년부터 2033년까지 신한울 3·4호기도 건설한다.

 

이 실무안에서 원전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표현이 있다. “(원전) 사업자의 의향을 반영하여 이와 같은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국가의 발전설비 계획을 원전 사업자들이 주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원전 전문가들과 원전 사업자들이 에너지 정책에서 독점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미래에 태풍보다 무서운 엄청난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미래 세대의 운명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정치적 결정들이 원전 전문가들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원전은 국가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한 에너지이고, 사용 후 핵연료 처리 문제를 고려할 때 절대 저렴한 에너지원도 아니다. 지금 세대의 경제적 풍요를 위해 오염된 지구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 원전이야말로 지금의 풍요를 위해 미래에 있을 불행의 씨앗을 곳곳에 뿌리는 것과 같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인류가 원자를 조작해 에너원으로 쓰는 원자력발전의 길을 여는 순간, 지구상의 생명과 공존할 수 없는 기술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작고한 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 선생도 전력이 부족해도 인간다운 삶은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지만, 핵분열에 의한 환경 파괴는 삶의 종식을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미래 에너지 정책은 풍력·태양광·바이오매스 같은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바뀌어야 한다.

 

원전 전문가들이 지식을 독점하고, 의사결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면 시민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10차 계획안은 연말까지 확정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사회와 지구의 미래를 생각할 때, 일부 원전 전문가들은 민주주의 적이 되어가고 있다.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려고 하는 원전 전문가들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2036년까지 한국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에너지 정책과 관련한 결정들이 반대도 없이 통과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개입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경향 2022.09.09.

 

 

밀려오는 긴축의 고통, 정부의 실패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은 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린다. 달러가 기축통화인 데다, 연준은 발권력까지 갖고 있으니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나온 말이다. 요즘 이 표현이 별로 과장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지난달 26일 세계 중앙은행 책임자들이 모이는 잭슨홀 미팅에서 강력한 긴축(기준금리 인상)을 천명한 뒤 1주일 동안 전 세계적으로 5조달러(7000조원) 규모의 주식 가치가 증발했다. 연준발 긴축은 한국에서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여기저기서 대출을 끌어모아 집을 산 청년층에 이자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는 몇 가지 사례일 뿐 언제 어떤 식으로 강달러가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경제를 뒤흔들 것인지 예측불허다.

 

연준이 성장을 희생하고라도 물가부터 잡으려는 건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자금이 많이 풀린 데다, 글로벌 공급망 교란 등으로 물가가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연준이 금리를 올리면 글로벌 자금이 미국으로 몰려들고 다른 국가들에서는 자본 유출이 불가피하다. 이를 막으려면 다른 나라들도 연준을 따라 금리를 올려야 하고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여기에 한국도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외신 인터뷰에서 한은의 통화정책은 정부로부터는 독립했지만, 연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것도 어쩌면 냉혹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속내를 드러낸 게 아닐까 싶다. ‘연준에 맞서지 말라는 월가의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원·달러 환율 상승, 금리 인상으로 인한 가계와 기업의 고통 증가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연준의 긴축정책이 과도하다는 비판이 미국 내에서 제기되고, 세계의 리더국인 미국이 이래도 되는 건지 야속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 정부의 무능과 실패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대외변수의 영향이 강하다 해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주어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원화 가치 하락세가 다른 나라 통화에 비해 지나치게 빠른 건 한국경제의 규모와 능력에 비춰 납득하기 어렵다. 최근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속도는 유럽연합이나 중국 등 주요국 통화는 물론이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통화보다도 빠르다. 정부가 안정된 경제리더십을 보여준다면 외국인투자가들의 신뢰가 높아지고 원화 가치를 방어할 수 있다. 당국자들이 외환시장 쏠림현상 주시’ ‘필요시 시장안정조치같은 실효성 없는 메시지만 발신해서는 경제 주체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없다. 행여 시스템 위기로 이어지지 않는 범위에서 대기업 수출에 유리한 환율 상승을 용인하겠다는 의도를 정부가 갖고 있다면 반서민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수출 대기업을 위해 원화 가치 하락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면서, 그 고통이 서민에게 전가됐던 경험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를 마냥 지켜볼 수 없는 데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서라도 한은은 금리 인상에 나설 수밖에 없다. 관건은 금리 인상이 가져올 취약계층에 대한 타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의 인플레는 금리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공급 문제에서 유발되고 있으며 수년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한은의 금리 처방만으로는 넘기 어렵다. 그럼에도 정부는 할당관세 인하, 유류세 인하, 농축산물 비축물 방출 등 과거 물가급등기의 일회성 대책만 내놓고 있을 뿐 인플레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정책은 별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긴축은 거시경제적으로 필요하다 해도 저소득층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사회에 불안정성을 가중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정부는 서민생활 안정을 중심에 두고, 위기 극복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는 재정건전성에 집착해서는 나올 수 없다. 인플레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금리 인상과 긴축 재정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타당성이 있지만 지금은 물가가 오르면서 경기가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이 고조되는 시기다.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 정부가 긴축재정을 한다며 통화량 증가 요인인 감세를 내세우는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감세도 법인세, 상속세, 종합부동산세 등 부자감세에 치우쳐 있다.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 희생은 늘 경제적 약자들의 몫이었다. 긴축의 시대에 요구되는 정부의 덕목은 따뜻함이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경향 2022.09.09.

 

 

구약의 잔인한 하나님은 무차별적 사랑의 하나님과 다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One) 가지만이라도 족 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1041·42)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One) 가지만이라도 족 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생명(·)의 양식은 하나(One)의 진리뿐이다는 의미이며, 무심(無心), 무아(無我)로 분별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천국(극락)의 자리(One)이다.

 

현대물리학이 에너지일원론(energy一元論)으로 증명하고 있는 오묘한 하나(One)의 경지는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사유(ego)로부터 벗어나 만물을 상호의존과 평등·무차별하게 보는 보편적 진리이다(일미평등·一味平等). 묵상, 명상 등의 수행으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이원성의 거짓 나’(겉 사람)를 소멸하고,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비이원성의 참나(속사람)를 회복하는 것은 영원한 평안과 환희심을 일으키게 한다(요한복음 1225).

 

진리를 깨닫게 되면 모든 것과 하나(One)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둘이 아닌 하나(One)이며”(갈라디아서 320), “만물이 주(One)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도생만물·道生萬物, 로마서 1136). 즉 우리가 분별 시비하는 허상(거짓 나)을 제거한다면 영원한 실상(참나)인 하나(One)가 된다. 이러한 하나(One)는 순수 의식이며, 항상 우주의 정기(精氣)인 에너지로 넘쳐흐르는 생명과 기쁨의 원천이다.

 

예수께서 무릇 살아서 나(진리)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한복음 1126)고 말씀하신 것은 진리()는 영원함으로, 안개와 같은 육신의 몸은 죽어도 영()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도덕경 16). 베단타 철학은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각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며, 불교는 모든 것은 근원인 일심(一心)에서 나오고, 다시 일심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과 본체의 바탕이 하나라는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사상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인 진리의 세계에서는 주객 이분법으로 나누어지는 타자(他者)란 있을 수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다. 예수는 모양이 없는 진리()란 말과 글로써 표현되어 질 수 없고, 사람의 의식 수준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는 점을 아셨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법집(法執)으로 종교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하나이며, 둘이 아닌 진리(생명)의 가르침은 집착을 벗어나 항상 그 시대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구약이 전하는 무섭고 잔인한 타자(他者)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은 주객을 초월하여 전체로서 하나(One)이며, 무차별적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다르다.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벗어나 근본에서 보는 하나의 진리로 재해석을 하여야 한다. 궁극적 실재인 오묘한 하나의 하나님 즉 부처님()으로 가득 한 이 세계는 조화롭고 경이롭기 그지없으며, 저절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충기이위화·沖氣而爲和, 도덕경 42).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는 나누어질 수 없는 보편적, 절대적인 진리의 ’(One)이다(요한복음 858). 그러나 를 상대적인 ’(ego)로 잘못 해석하여 인류에게 많은 불행을 초래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너와 나, 주와 객, 선과 악을 나누는 이원적 사고에 그 원인이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One)의 진리이다.

글 구자만 신학박사(개신교 장로 · 신흥지앤티회장) 한겨레 2022.09.10

 

 

나라 걱정 하기

새로운 '시민 정치'가 필요한 때

추석 명절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도 나라 걱정을 했을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을 둘러싼 주변 여건부터 좋지 않다. 팬데믹은 잦아드는가 싶지만, 국제 정세는 불안하고 경제 여건은 더 나빠질 것 같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러시아의 침략 전쟁, 그리고 북한 문제, 지정학적 위험도 점점 커지는 중이다.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 혼란(climate chaos)의 시기에, 국민국가 사이의 경쟁이 결국 '제로섬'의 파국을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물론, 여건과 환경보다는 대응 태세와 그 실력에 대한 한탄이 더 많았을 줄로 짐작한다. 넉 달을 겨우 넘긴 신정부와 여당이 지금 어떤 말들을 듣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터, 그렇다고 야당들에 의지할 형편도 아닌 것 같다. 한때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과 관심, 에너지를 모을 다른 구심점이 있으면 좀 나을까. 이 또한 당분간은 가능하지 않은 시나리오가 아닌가 싶다.

 

이런 '비전의 부재(不在)' 상태는 현실의 고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무도 (정치) 공동체의 미래 비전을 말하지 못하고 또한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이렇게 되면 개인과 집단은 그저 현실이라는 횡단면, 그리고 각자의 터널 속에서 각자도생의 분투를 견딜 도리밖에 없다. 공동체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위기를 맞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개인에 미친다.

 

물론, 이런 시대적 징후는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어떤 이름의 시기로부터 다른 어떤 이름의 시기로,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어떤 시기는 지나갔으나 아마도 다른 어떤 시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 전환이 쉬울 리 만무하니, 그것은 모호하거나 혼란스럽거나 위태로운 것이 당연하다. 아마도 우리가 추석 명절에 나눈 이야기는 그 징후의 일부임이 틀림없다.

 

진정한 위기란 전환 그 자체보다 전환의 준비를 미뤘거나 그럴 능력을 축적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그 책임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포함한 '시민 정치'의 무력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 만들기'로부터 '더 나은 사회 만들기''더 나은 공동체 만들기'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책임을 국가와 정부, 그리고 경제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은 당연지사. 그리하여 '사회적인 것'과 사회권력(시민사회)이 오늘 이 사태를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어쩌면 거창한, 그것의 역사적인 힘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기서 길게 말하기보다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새로운 전환 또한 책임을 다른 데 미룰 수 없다. 2022년 추석을 막 지난 시점에 우리는 다시, 본격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가. 특정 집단이나 조직은 물론 아니다. 국가권력이나 정부, 정당 또는 경제 권력 등 '기득권의 힘'이 아니라, 비판을 토대로 새로운 힘을 만들어가야 할 '대안 세력'을 가리킨다. 그러니 제안이면서 동시에 다짐이기도 하다.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그것이 어떤 시대가 될지 명시할 수는 없되, 우리는 상당 부분 이미 안다. 새로운 시대 또한 갑자기 시작하기보다는 내재한 모순과 거기서 비롯된 새로운 힘을 축적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불평등, 기후위기와 생태, 젠더, 새로운 노동, 탈성장 또는 탈자본주의, 평화 등의 '키워드'가 중심에 있다.

 

생각보다,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비록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긴 했으나 칠레 제헌의회가 제안한 헌법은 눈앞에 온 현실의 가장 최근 예이다. 새로운 제안은 인권, 생태와 발전, 성 평등, 건강과 웰빙, 신식민주의, 국제질서 등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바로 가기 : <NLR(New Left Reader)> 블로그 <SIDECAR> 9'Chile’s Rejection') 그곳에서 시작한 신자유주의가 지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듯, 그들의 새로운 꿈이 또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자극이 될 것으로 믿는다.

 

무엇을 지향하는지가 거의 전적으로 '형성'의 문제라면, 정해진 미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체''과정'이 아닌가 한다. 새로운 주체로 국가권력, 정부, 정당, 경제권력을 다시 끌어올 수는 없다. 과정도 마찬가지, 우리에게 익숙한 정책, 제도, 행정, 사회활동, 조직을 그대로 연장하는 선택지는 없다. 필요한 것은 바로 새로운 상상력과 실험, 담대한 시도이다.

 

지금 당장의 과제? 이것부터 새로운 틀과 접근 방법을 만들어 내고 '자유롭게'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새로운 정당과 정권에 다시 헛된 희망을 거는, 익숙한 잘못을 고치지 못할 것이다. 최근 들어 그럴싸한 대안 정책을 본 적이 있는가?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이 아무런 역할을 못 하는 시대, '나라 만들기'의 시대 정신을 넘는 실천이 아니면 가망이 없다.

 

그러니 '현실적' 대안에 조바심을 내기보다는 공동체의 꿈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더 긴요하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실험도 더 많아져야 한다. 모든 새로운 시도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다른 무엇보다, 무기력과 냉소를 넘어 '불가피한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싸움과 저항이 영감의 원천이다.

시민건강연구소 | 프레시안 2022.09.11.

 

 

강제징용 피해자를 채권자라 칭한 대통령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 이춘식씨.시사IN 신선영

 

채권자라는 말이 이렇게 생경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지난 817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아 기자회견을 했다. 취임 후 짧은 기간이지만 국민들에게 여러 가지를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자리였다. 미리 질문자나 내용을 정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질문을 받아 답변하는 등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여기며 실시간으로 시청했다.

 

그런데 한 일본 기자가 던진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질문에 관한 대통령의 대답을 듣고, 그 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대통령이 말한 보편적 가치와 규범, 미래지향적 해결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하여 강제징용은 이미 확정판결이 나오고, 판결 채권자들이 법에 따른 보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채권자들이 보상을 받을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라고 말했다. 법률가로서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이 확정되었으니 보상이 아니라 배상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 텐데, 굳이 보상이라고 말한 것은 일본 기자의 질문에 한 답변이므로 외교적 언사로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굳이 채권자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의도와 의미인지 정말 묻고 싶다. 대통령의 발언 덕분(?)에 수십 년 전 민법 총칙을 배운 이후로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채권자의 뜻을 찾아보았다. 교과서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고, ‘빌리다, , 빚돈의 뜻을 가진 ()’저울추, (저울에) 달다는 뜻을 가진 ()’을 합친 단어다. 위키백과를 보니 다른 사람에게 일정한 행위를 할 것을 청구할 수 있는 자, 채무자에게 급부를 할 것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 자, 즉 채권을 보유한 사람 또는 기관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편적 인권 규범에서 피해자는 단지 빚 받을 권리만 가진 것은 아니다. 2005년 유엔총회는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행위와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행위로 인한 피해자들을 위한 구제 및 배상의 권리에 관한 기본원칙과 가이드라인(피해자 권리 기본원칙)’을 채택한 바 있다. 피해자 권리 기본원칙에는 인권침해 피해자가 실효성 있게 구제받을 권리를 진실에 대한 권리, 정의에 대한 권리, 배상의 권리로 분류하고, 각 권리의 내용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배상의 권리 실현을 위한 다섯 가지 적극적 조치

특히 배상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당사국이 해야 할 적극적 조치로서 원상회복(restitution), 금전적 배상(compensation), 재활(rehabilitation), 만족(satisfaction), 재발방지 보장(guarantee of non-repetition)’을 규정하고 있다. 채권자는 빚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유엔이 정한 피해자 권리 기본원칙에 따르면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서 가해자 혹은 사회가 해야 할 일이 많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배상은 돈만이 아니다. 배상금과 함께 재활과 만족, 재발방지 보장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가 취한 권리구제 조치는 아무것도 없다. 그 흔한 사과 한마디라도 했으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법원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들은 진실과 정의, 배상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법원 문을 두드린 것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채권자라 칭한 윤석열 대통령은 진심으로 보편적 가치와 규범에 맞게 피해자들의 입장을 헤아려봤는지 묻고 싶다.

하주희 (변호사) 시사인 2022.09.11.

 

 

정의로운 검사 윤석열이란 허상법치는 다음이다, 정치가 먼저다

모든 특검은 찬성 여론이 높다. 특검이라는 단어 자체가 정권으로부터 독립된 수사기관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처벌의 의미를 내포한다. 정의라는 긍정적 가치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김건희 여사 특검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대구·경북, 부산·울산·경남도 별로 다르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윤석열 대통령만은 김건희 여사 특검 찬성 여론이 이처럼 높은 현상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살아있는 권력과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검사라는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준 덕분에 대통령이 됐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검찰은 윤석열 대통령을 수호하고 야당을 때려잡는 검찰로 비친다.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국민이 속은 것일까?

검찰은 이재명 대표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이재명 후보 조폭연루설을 제기했던 장영하 변호사는 불기소했다. 윤석열 정부의 검찰이 김건희 여사를 제대로 수사하리라고 기대하는 국민은 이제 거의 없는 것 같다. ‘살아있는 권력과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윤석열 검사는 결국 허상이었던 셈이다.

 

이재명 대표 선거법 위반에 대한 민심은 어떨까? 여론조사에서는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법적 절차에 따른 것으로 표적 수사는 아니라고 본다는 응답이 야당 대표에 대한 표적 수사로 문제가 있다는 응답보다 많다.

 

조사가 잘못됐을까? 아닐 것이다. 이재명 대표의 모든 의혹에 대한 특검 찬반 의견을 물으면 아마도 찬성이 더 많이 나올 것이다. 유권자는 정파성을 가진다. 동시에 모든 정치인의 의혹에 대해 진상 규명을 원한다. 모순되는 것 같지만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수사와 기소의 주체다. 지금처럼 대통령과 정권에 강하게 예속된 것으로 보이는 검찰이 정치인의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과 처벌을 주도하는 한 국민은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사안에 특검을 도입할 수도 없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둘째, 수사와 기소의 적정성이다.

 

선관위나 경찰, 검찰이 작심하고 정치인을 털어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기는 어렵지 않다.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 같은 어려운 범죄 혐의를 고위 공직자에게 들이대면 살아남을 공직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수사와 기소를 담당하는 기관의 권한 행사에는 그래서 적정성이라는 금도가 필요하다.

 

앞으로 이런 장면이 펼쳐질 것 같다. 검찰은 이재명 대표와 문재인 정부를 향한 수사의 강도를 점점 더 높여갈 것이다. ‘조자룡 헌 칼 쓰듯수사권과 기소권을 마구 휘두를 것이다. 금품수수와 같은 명백한 부패 혐의가 드러나지 않아도, 배임, 직권남용, 직무유기 등 온갖 혐의로 기소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 시절 수사를 그런 식으로 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종신직이 아니다. 늦어도 20275월에는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민주당이 정권을 탈환하든, 국민의힘이 재집권하든 다음 대통령은 검찰, 경찰, 감사원, 국정원 등을 총동원해 윤석열 정부 적폐청산에 나설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 수사의 칼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지난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저지른 선거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을 가능성도 있다. 대통령 재임 5년 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이다. 정치 보복과 야당 탄압의 악순환이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끔찍한가?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변호했던 타이 콥 전 백악관 법률고문이 1·6 의사당 난입 사태와 관련해 트럼프 전 대통령이 기소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지금까지 전직 대통령이 기소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일까? 전직 대통령을 기소하지 않는 것이 미국 정치의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미국도 이제 정치 보복과 야당 탄압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일까? 안타까운 일이다.

 

법치주의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행정은 의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의회에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 정치다. 정치의 요체는 대화와 타협, 협상과 합의다. 정치가 법치보다 우선한다. 대화와 타협, 협상과 합의가 법치보다 우선해야 한다. 검사 출신 윤석열 대통령이 새겨야 한다.

성한용 | 정치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2.09.12.

 

 

역대급의 정치

힌남노라 불린 초대형 태풍이 지나갔다. 큰 태풍이 아니라도 한창 낟알이 차는 시기여서 벼가 쓰러지면 어쩌나, 수확기가 다 된 과일이 떨어지면 어쩌나, 농부들의 걱정이 컸다. 바람이 잦아든 뒤 읍내를 돌아보니 비가 많이 내리면 넘치던 하천도 큰 탈 없고 무너진 곳도 없었다. 나무가 쓰러져 도로를 막은 곳이 있다는 소식도 있었으나 며칠 동안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태풍의 경로에 있던 남부지방을 생각하면 그 피해가 적었다고 보기 어렵다. 피해의 규모가 다를 뿐 강한 바람과 폭우를 동반한 태풍은 심각한 자연재해이고, 그동안 한국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혀온 자연재난도 호우와 태풍이다. 가을태풍이란 말처럼 태풍이 오는 시기가 늦춰지는 것도 수확기 농작물에 피해를 크게 준다. 피해가 적은 태풍은 없다.

 

이번 태풍의 경우 문제는 역대(歷代)이라는 표현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뒤 인터넷에는 기상청을 조롱하고 역대급 호들갑, 사기라며 비난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이슈가 이슈를 덮는다고 정부가 태풍으로 김건희씨 관련 뉴스를 덮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비난과 음모론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020년에 노르웨이 기상청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나라의 기상앱을 쓰고 있다. 언론에 대한 불신과 정부의 여론조작 시도가 빚어낸 음모론도 낯설지 않다. 심각한 재난상황일수록 정부의 말을 듣기보다 스스로 정보를 찾아 판단하는 게 생활화된 한국 사람들은 저마다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음모론의 씨앗은 시민들의 상상력이 아니라 정부에 대한 불신이고, 그 불신은 자연재난을 사회재난으로 바꾼다.

 

불신은 자연재난을 사회재난으로

지지율이 낮은 윤석열 정부 입장에선 태풍에 잘 대처해서 점수를 좀 따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지난 집중호우 때 여론의 질타를 받았으니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클 수밖에 없다. 잘하려는 의도를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의도만큼 대응도 실질적이어야 하는데,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5월 발표한 110대 국정과제에서 선진화된 재난안전 관리체계 구축을 목표로 내세웠다. 디지털 재난관리체계 구축, 민관 협업을 통한 재난 대응역량 제고 등을 주요 정책으로 다뤘는데, 이런 구상이 지금의 재난에 효과적일까? 잦아지는 기상이변을 예측할 체계를 만들 인력이나 예산확충은 여전히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재난 이후의 대응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태풍에 큰 피해를 본 곳들 중 한 곳은 경북 포항시이고, 포항시는 2017년에도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곳이다. 재난이 반복되는데 포항시는 안전한 도시로 변해가고 있을까? 개인에게 지급되는 지원금도 필요하지만 재난에 강한 도시 인프라, 탄력성과 회복력을 갖춘 사회구조, 협력과 신뢰를 증가시킬 관계망 등도 필요한데,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대응은 다분히 관행적이다.

 

재난 시에 가장 많은 정보와 자원, 권한을 가진 정부가 무기력하게 대처하고 시민들이 각자 알아서 판단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사실 역대급은 없던 현상이 아니라 그동안에 있던 현상을 가리키니 역대급 태풍이란 말은 가장 강력한 태풍이 아니라 기존의 태풍이란 말이다. 문법으로 따지면 잘못된 표현이고, 표현이 불러오는 긴장감에 비해 내용은 추상적이다. 이제는 역대급이 조성하는 불안감보다 차분한 대응이 필요하다.

 

태풍 외에도 예고된 위기들이 심상치 않다. 환율은 계속 올라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1380원을 넘어섰고, 물가인상 속도도 빠르다. 코로나19 위기도 3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석유와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 가격도 계속 오르며 경고등을 깜빡거리고 있다.

 

다가올 여러 위기에 대응해야

초대형 태풍도 계속 올 거고, 여러 위기들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규모로 올 수 있다. 1차적으로는 정부가 이런 위기들에 적절히 대응해야 하고, 이상과 변동이 심하니 정부가 조금 과잉된 대응을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이 되지 않으려면 구체적인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민들과 함께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재난에 대한 대비가 꼭 정부만의 역할은 아니다. 기후위기처럼 전 지구적인 위기에는 정부가 제 몫을 하도록 시민들이 강력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 924일로 예정된 기후위기 해결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기후정의행진이 그 출발점이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경향 2022.09.13.

 

 

윤석열 길, 이재명 길

윤석열 정부 앞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협치, 하나는 정쟁의 길이다. 나는 현 정부 출범부터 지금까지 칼럼에서 작은 가능성이라도 살려보고 싶다며 협치를 권해왔다.

 

조선일보와 그 아류들은 정반대였다. 조선일보가 전설로 추앙하는 김대중은 두 차례 같은 제목의 칼럼(816, 96)에서 윤 대통령 달라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첫 칼럼에서 대장동 사건 등 사법 당국의 심판에 올라있는 불법들을 처리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윤대통령큰 실수를 하는 것이고 민주당 세력과의 협치운운하는 데 뜻이 있는 것이라면 그들에게 말려드는 것이라고 한껏 자극했다. 한가위를 앞둔 칼럼에선 이제 야당과의 협치는 물 건너갔다. 의석수에서 절대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정석의 정치를 하려면 윤 대통령은 협치로 문제를 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장동·백현동 사건과 관련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법정에 불러내면서 민주당과의 협치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고 썼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언구럭이다. 심지어 김대중은 이 대표를 법정에 세우지 않으면, 윤 대통령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단언한다. 가히 그 신문의 전설답다. 조선일보 안팎의 김대중 아류들이 곰비임비 어금버금한 논리를 펼쳤다.

816일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대통령은 달라져야 한다

96일 조선일보 金大中 칼럼 윤 대통령 달라져야 한다

 

윤 정부는 이재명 기소로 용춤 추며 조선일보의 길을 선택했다. 더러는 불법을 덮자는 말이냐고 눈 홉뜰 수 있겠다. 하지만 냉철할 일이다. 선거 패자에게 선거법 위반을 건 기소도 물색없거니와 그 위반혐의가 사뭇 주관적 표현들이다. 그리 따지면 당선자에겐 없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김건희 의혹을 차단하려던 그의 안간힘 가운데 허위사실 유포로 볼 발언들을 스스로 짚어보기 바란다.

 

대선 과정에서 신문방송 복합체들은 이재명을 둘러싼 대장동, 백현동, 위례신도시 의혹들을 악패듯 보도했다. 묻고 싶다. 그 의혹들에서 이재명이 돈이나 재단을 챙긴 혐의가 보이는가? 대선 초반에는 화천대유의 실소유자가 마치 이재명인 듯 각인했다. 물론 뇌물을 받았다면 단죄가 마땅하다. 의혹도 보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재명 의혹은 너무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부풀려왔다. 지금까지 보도된 의혹 대부분은 시차에 따라 판단이 필요한 행정상의 문제다. 그럼에도 이미 여론재판으로 대선 당락을 좌우한 신방복합체들은 대선이 끝나고도 거푸거푸 찔러댄다.

 

대선에서 이긴 대통령이 상대 후보를 수사한다? 더구나 검찰이 작심했다? 대체 나라를 어디로 끌 깜냥인가. 후보 시절 윤석열이 인생의 책으로 꼽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애쓰모글루는 98한국의 진짜 문제는 정치 분열이라고 우려했다. 대선에서 윤석열은 1639만여 표, 이재명은 1615만표를 얻었다. 0.7% 차이다. SBS911일 보도한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수사와 김건희 특검법에 각각 50.3%55%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또렷한 정치 분열이 경제 위기와 민생 위협으로 이어질 길목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셈이다.

 

이재명에 표를 준 유권자들은 무지렁이가 아니다. 그는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 행정을 통해 지역화폐, 청년배당, 무상교복, 산후조리, 채무자 은행과 같은 민생 정책을 앞장서서 실험하고 구현하는 길을 걸어왔다. ‘검사 대통령윤석열은 자신이 민생에 전념하고 있기에 검찰의 이재명 기소 따위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윤석열이 내세운 민생이 진정이라면 이재명과 협치 또는 민생 경쟁이 갈 길이다. 신방복합체와 그에 동조한 먹물들은 그가 협치 아닌 정쟁을 선택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여차하면 가장 먼저 돌 던질 자들이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정쟁의 길에서 되돌아와 협치의 길로 들어서라. 더 가면 돌아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정쟁의 길은 국가와 민생만 위기를 불러오지 않는다. 48개월 뒤엔 자연인으로 돌아갈 윤석열김건희 부부에게도 그 길은 불행이다. 협치를 권하는 마지막 칼럼이다

손석춘 칼럼니스트철학자 미디어오늘 2022.09.13.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듯, 검찰의 개입에 맡겨진 선거법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8, 검찰이 공직선거법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 앞두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기소했다. 검찰 공소사실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고발 혐의 가운데 백현동 특혜 의혹관련 국토교통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발언과, “김문기 처장을 몰랐다는 발언을 허위사실 공표로 판단해 재판에 넘겼다. 대장동 특혜 의혹, 변호사비 대납 사건 등 본류 수사가 따로 진행되는 사안은 불기소 처분했다.

 

민주당은 즉각 비상체제를 선포하고,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의혹 특검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민주당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도이치모터스 사건의 경우, 검찰은 김 여사 명의 계좌 5개에서 284차례 시세조종 거래가 있었음을 공소장에 적시하고도 2년 동안 김 여사를 한번도 조사하지 않았다. 검찰 스스로 선택적 수사라는 비판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특히 판단과 언행이 신중한 이원석 검찰총장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때 전임 장관께서 검찰총장의 수사지휘권을 배제해, 이 사건 관련해 일체 보고받지 못했다고 추미애 전 장관 탓을 한 것은 여러모로 아쉬웠다. 국민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원칙에 따라 수사하겠다 다짐하면 족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검찰 정권과 선명한 대치구도 속 야당 탄압의 방패막이 안에서 안온하지는 않기 바란다. 169석 국회 권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선거법에는 민주주의의 축제인 선거를 검찰의 자의적 법집행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모호한 처벌규정이 넘쳐난다.

이 대표에게 적용된 허위사실 공표부터 따져보자. 공직선거법 제250조는 당선 목적으로 연설·방송·신문·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출생지·신분·직업·경력·행위 등에 관해 허위사실을 공표하거나 공표하게 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김문기 처장을 몰랐다는 발언은 이 대표의 경력에 관한 허위인가, ‘행위에 관한 허위인가, 아니면 에 관한 허위인가?

 

선거법에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규정도 많다. 선거운동을 위해 명칭·목적 불문 단체를 설립할 수 없도록 한 조항이 대표적이다. 누구든지 선거일 전 180일부터 화환·풍선·간판 등을 설치할 수 없고, 공개장소에서 확성장치를 사용할 수 없고, 자동차를 사용해 선거운동을 해서도 안 된다. 저술·연예·연극·영화·사진을 선거운동 목적으로 공연·상영·게시하는 것도 금지된다. 한국 사회 빈부격차의 단면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선거기간 유권자들에게 반복 상영할 경우, 소득재분배를 강하게 주장하는 정의당이나 기본소득당을 위한 선거운동으로 볼 여지는 없을까?

 

문제는 이런 처벌규정의 1차 해석권자가 검찰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잇따른 헌법불합치 결정과 무죄판결 등으로 선거법에서 예외적 허용영역을 넓히는 추세지만, 이는 모두 검찰 기소로 형사재판 절차에 들어선 뒤의 일들이다. 결과적으로 선거운동 기간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다는 것은, 검찰의 수사와 기소를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하는 일인 셈이다. 검찰의 권력은 바로 이런 법해석의 재량권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정치의 사법화가 극심한 우리 정치상황은 그 위험성을 증폭시킨다. 반대편을 공격하는 데 이렇게 효율적인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각 진영은, 상대 후보 발언의 시시비비를 따져 일일이 검찰에 고발할 것이다. 지금 선거법을 손보지 않는다면 대선 패자는 선거 직후,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승자는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검찰 수사 대상으로 전락하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2027년엔 과연 누가 검찰 수사를 받게 될까.

 

5년마다 야당 지도자와 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는 일을 지켜볼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대의제 원리에 따라 주권자인 국민의 일반의지를 확인하는 그 찰나의 순간마저 검찰권이 개입하는 통로는 최소화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노현웅 | 법조팀장 한겨레 2022.09.13.

 

 

권위 장사’, 혹은 대학의 사망

현직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 나는 국민대 당국과 교수들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자살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학에 권위가 생기는 원천은 연구의 진실성, 그리고 그 연구가 다른 나라나 다른 기관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용되고 인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에 있다. 다른 나라의 연구자는 그렇다 치고, 나름 공부 좀 하는 고등학생이 봐도 연구라고 할 수 없는, 상당 부분이 다른 자료에서 무단 전재한 글을 학위 논문이라고 통과시킨 국민대는 이미 대학으로서 권위를 상당히 잃었다. 그럼에도 과거의 오류를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역량조차 없다는 점이 드러나면 사실 대학으로서는 사망이 선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취직 준비를 위한 고등학원역할은 계속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연구의 세계에서는 그런 대학은 완벽한 고립에 빠지게 된다. ‘Yuji의 오명을 쓴 학교에 제대로 된 국내 연구자나 유학생·외국 학자들이 올 리 있을까? 아무리 현 정권 존속기간에 정권과의 관계를 통해 대학에 좋은 일을 만들겠다는 계산이라 해도, 궁극적으로 대학으로서는 자살이다. 그런데 학교 당국이나 다수의 교수가 이와 같은 자살행위를 선택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사실, 이번 국민대 당국이나 교수들의 치욕스러운 결정은 권력과 부에 대한 학문의 오랜 종속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고, 그 역사를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 결국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자명한 이야기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학문이란 본래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다. 서양 대학은 국민국가 탄생 이전에는 교회에 종속돼 있었으며, 국민국가 시대에는 많은 경우 국가의 지배적 영향을 받았다. 옥스퍼드나 하버드 같은, 엄청난 규모의 자산을 가진 영미권 명문 사립대들은 스스로 비용 조달이 가능한 만큼 국가의 영향을 덜 받지만 부유층의 계급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적은 결코 없었다. , 자유주의 혁명들이 바꾸어 놓은 19세기 유럽의 풍토에서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권력으로부터 그 어떤 구속도 당하지 않는 대학 내에서의 자유로운 연구라는 당위적 관념이 성립했다. 한데 관념은 관념일 뿐이었다.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9세기 독일 태생의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는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본대학교 등에서 아무리 구직을 해도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다. ‘급진파로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가 일찌감치 교수라는 이름으로 독일의 사회귀족이 됐다면 과연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마르크스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조선시대 학자라면 대개 벼슬길에 오른 지주이자 노비소유주였다. 퇴계 이황을 우리는 보통 위대한 학자라고 추앙한다. 퇴계가 선조에게 지어 바친 <성학십도>에 담긴 성군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사해 이상적 군주처럼 보이려 했던 박정희는, 유신 시절인 1975년부터 천원권 도안에 퇴계의 얼굴을 새기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퇴계는 전답 3000두락(36만평)과 노비 360여명을 보유한 재산가이자, 2품 대제학까지 오른 고관이었다. 그와 같은 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그 지위와 재산을 지켜주는 국가로부터 과연 어디까지 자율적일 수 있었을까? , 군권 못지않게 신권이 강했던 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사대부 명망가들은 국가에 일방적으로 종속됐다기보다는 동시에 국정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면서 학자와 권력자 사이 이와 같은 쌍방향성은 많이 옅어지면서 일방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에 더 가까워졌다. 조선에서 근대란 자유주의 혁명이 아닌 식민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제국대학은 본질상 식민지배를 위한 기관이었으며, 그 교원들은 학자이기 전에 일차적으로 관료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조선인 학생들이 해방 이후 한국 학계의 첫 세대를 이뤘다. 그 세대한테 독재국가와의 유착은 거의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다. 한국이라는 신생국가 위에는 그 후견국가인 미국이 있었기에, 한국의 최고 학부가 돼야 할 국립 서울대의 1(1948) 명예박사가 된 사람은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었고, 2(1949) 명예박사는 초대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이었다. 물론 현직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도 1949년에 서울대 명예박사가 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라이베리아의 독재자인 새뮤얼 캐니언 도와 전례 없는 국고횡령 등으로 세계적 악명을 떨친 자이르의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도 국립 서울대 명예박사가 됐다. 그렇게 대학은 국가의 대아프리카 외교에 이바지해야 했던 셈이다.

 

자신을 학위가 필요 없는 성군으로 인식한 탓인지 박정희는 명예박사 학위는 없었다. 한데 그 중신들의 박사병은 만만찮았다. 박정희의 신변 경호를 맡은 총잡이차지철만 해도 한양대 법학박사이자 국민대 초빙교수였다. 대학들이 독재정권에 매우 협조적이었던 만큼 정권도 대학의 전임교수들을 챙기는일을 잊지 않았다. 1970년대 국립대 교수 임금은 일반 직장인의 월급(20만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정부 관료로 발탁되는 게 비교적 쉬웠다. ‘교수 출신 장차관이라는 틀이 그때부터 굳어져 지금 윤석열 정부 내각 19명 가운데 5명이 (석좌·객원교수를 포함한) 교수 출신이다. 사실 내각의 4분의 1가량을 교수로 채우는 것은 최근 수십년 동안 유지된 패턴이다. 학계, 대학의 국가에 대한 종속적 협조의 대가는 결국 폴리페서들의 입신양명이다.

 

어디 국가뿐이겠나.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은 이제 국가 이상으로 에 더 맹목적으로 매달린다. 대학마다 앞다퉈 최고지도자 과정’, ‘최고경영자 과정등을 신설해 부유층 모시기에 바쁘고, 부유층은 부유층대로 이 과정들을 인맥 쌓기와 경력 부풀리기에 이용한다. 김건희 여사가 다녔다는 서울대 문화콘텐츠 글로벌리더 과정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과연 이와 같은 무분별한 권위 장사에 매진하는 대학에 연구다운 연구를 할 만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을까? 국가에 대한 종속 이상으로 돈에 대한 종속은 대학의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2.09.13.

 

 

검사 대통령의 본색

검사 대통령은 바뀌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과오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전제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정 지지율을 폭락시킨 여러 국정 난맥과 인사 실패, 비선 논란, ‘김건희 의혹등에 대해 여태까지 한 번이라도 성찰과 자성, 사과의 자세를 보인 적이 없다. 최소한 국민의 기대에 못 미쳤다는 정도의 되돌아봄도 없었다. 윤 대통령은 수도권 집중호우 피해와 관련, “불편을 겪은 국민께 정부를 대표해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물난리에 고통을 겪고 정부의 대처에 실망한 국민에게 죄송한 마음이라고 한 게 최대치의 사과다. 언젠가 서울시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우성씨가 검사들은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사과를 거부하는 것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게다. 실은 국민의 눈높이와 상식의 기준이 아니라 불법·합법, 유무죄를 가르는 법기술자의 기준으로 국정 사안을 보기 때문이다. 인사 실패나 검찰공화국 논란, 비선 의혹, 사적 채용 등을 두고 제기되는 비판에도 뭐가 문제냐고 당당(?)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5세 취학안 논란으로 훌륭한 사람박순애 교육부 장관을 경질하면서도 대통령은 일말의 책임감조차 피력하지 않았다. 교육부 업무보고 때 5세 취학안에 대해 검토하라가 아니라 신속히 강구하라고 지시한 건 윤 대통령이다. 극우 유튜버와의 유착이 논란인 와중에 대통령 부부의 추석선물을 극우 유튜버에게 버젓이 보냈다.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방증이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도그마에 빠지면 위기를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리게 된다. 지지율 폭락을 이재명 야당의 반대, 여론조작, 내부총질 탓이라고 간주하면 인적 쇄신, 국정 혁신의 요구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윤 대통령이 고비마다 전 정부는 안 했나라거나 전 정부가 더했다고 대꾸하는 것은 진심일 터이다. 세번째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에 또 기획재정부’ ‘또 서울대가 지명됐다. 정무 기능을 보강한다며 새로 임명한 대통령실 정무1비서관은 극우적 주장을 펴온 인물이다. 요지부동 마이웨이 인사가 계속될 판이다.

 

대통령 지도력이 도마에 오른 검사 대통령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전공인 수사와 사정 작업이다. 복합위기를 타개할 국정 능력은 불비하고, 인적 쇄신이나 국정 혁신을 할 생각도 없다면 결국 의지할 건 사정뿐이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의 국가 사정기관 통제력은 역대 대통령과 비교 불가다. 검찰 출신을 인사, 행정, 정보, 금융까지 사정의 요로에 포진시켜 직할 체제를 구축했다.

 

윤석열 정부가 위기 국면에 처하자 사정 카드를 꺼내들었다. 검찰, 경찰, 감사원, 국정원을 비롯한 사정기관이 전방위적으로 전 정권과 야당을 옥죄고 있다. 윤 대통령과 정부 요직에 포진한 검찰 인사들이 유일하게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사정 정국인 셈이다. 새로 선출된 제1야당 대표의 영수회담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정기국회 첫날 검찰 소환을 통보하고, 곧장 기소했다. 민주당은 전쟁이라고 반발했지만, 실은 검찰이 대놓고 전쟁을 유도한 꼴이다. 선거법 위반으로 이재명 대표를 기소한 건 시작에 불과하다. 경찰은 어제 성남FC 후원금 의혹과 관련해 이 대표를 제3자 뇌물공여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대장동·백현동 개발, 변호사비 대납 의혹 등에 대한 수사와 기소도 계속될 것이다. 선거법 위반과는 차원이 다른 과 연관된 사안이다. 집요한 수사와 기소, 재판이 진행될수록 파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 고위 인사들을 겨냥한 소위 신적폐수사도 줄지어 있다. 서해 공무원 피격·탈북어민 북송 사건 등과 관련해 대통령기록관만 벌써 세번째 압수수색을 벌였다. 최종 타깃이 어디인지 짐작하게 한다.

 

민주당이 실효성이 의문시되는 김건희 특검법을 당론으로 발의하고, 현직 대통령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 대표의 정치생명은 물론 당의 명운이 달려 있으니 강경 대응 외에는 달리 길도 없다.

 

검사 대통령이 바뀌지 않는 한 이 전쟁 같은 정치는 이 정권 내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화와 타협, 협상을 요체로 하는 정치는 디딜 땅이 없어진다. 포연이 자욱한 정쟁과 대결로 날을 지새우면서 민생은 뒷전으로 밀리고, 의회의 역할은 형해화될 터이다. 이제 정치권에 대한 분노와 환멸이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여야의 전쟁 같은 정치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게 됐다. 돌이켜보면, 정치를 모르는 검사 대통령을 선택한 순간 한국 정치의 이 비극적 행로는 예정됐을 것이다.

양권모 편집인 경향 2022.09.13.

 

 

기후위기시대와 눈치(nunchi) 교육

초등학생들도 심심하면 한다는 눈치 게임을 아시는지요? ‘게임을 시작한 사람이 1을 외치면 2, 3, 4... 순서대로 더 높은 숫자를 외치다 둘 이상이 동시에 같은 숫자를 외치거나 가장 마지막으로 숫자를 외치면 패배하는 게임이라고 나무위키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게임에 함께 하는 이들의 의중을 잘 살펴야 하는 게임입니다.

 

우리말의 눈치라는 말도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윗사람 눈치를 본다던가 남의 눈치를 자꾸 살피게 된다는 식의 말들은 주눅 들었다거나 소신이 뚜렷하지 못하다는 https://news.imaeil.com/photos/2022/09/13/2022091318390596509_l.jpg뉘앙스를 풍깁니다. ‘눈치가 없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반면 눈치껏행동하거나 빨리 눈치채는 이들은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잘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나무위키에서는 눈치를 사회성 중 일부를 묶어서 부르는 말로 주변의 상황을 스스로 파악하고 적절한 행동을 하는 능력으로 인간관계의 필수요소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인간관계의 필수요소라고 하지만 서구권에서는 눈치를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찾기 힘들다고 합니다.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이 기후위기 시대 사회시스템을 제안하는 책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2021, 창비)의 한국어판 서문에는 눈치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이슨 히켈은 한국은 세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보다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경제를 향해 이끌어갈수 있거나 그런 혁명을 이루는데 서구 국가들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한국은 이미 핵심가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핵심가치의 하나로 눈치(nunchi)라는 개념을 언급합니다.

 

그는 눈치 개념의 뉘앙스는 번역 과정에서 분명 사라졌겠지만, 저는 그것이 탈성장 사고와 공명한다는 것만큼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의 눈치를 경제에 적용함으로써, 경제체제를 보다 이해심 있게, 더욱 정의롭게, 더욱 인간의 필요에 잘 들어맞게, 공동체의 정신에 보다 부합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해석합니다. 제임스 히켈이 세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갈 핵심 개념의 하나로 내세운 한국의 눈치(nunchi)’가 그렇게 심오한 개념인가요?

 

전 세계는 유래 없는 7-8월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폭염과 가뭄, 폭우, 초강력 태풍이 일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2022년 끔찍한 여름이 100년 만의 이상기상이 아니라 앞으로 매년 경험하게 될 기후위기 시대의 전주에 불과하다는 암울한 전망을 과학자들은 내놓고 있습니다. 인류는 주변 상황을 적절히 파악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눈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간다면 기후위기는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눈치보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교권이 무너졌다는 소리가 자주 들립니다. 지난 8월 수업시간에 학생이 교단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사진 한 장이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생활지도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등 제도개선의 목소리도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제도 마련이 교권 추락을 막을 수 있을까요? 친구들이나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이런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교육현장의 교권 침해는 눈치 보지 않는 사회 환경이 만들어 낸 결과일지 모릅니다.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눈치 없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눈치 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탄소배출이 지구온난화의 원인이라며 탄소배출을 줄이기는커녕 늘려가고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문제를 얘기하며 소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을 얻는 과정에 타인의 고통 따위는 잊어도 좋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난 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 기아문제는 인권을 침해하는 수치이자 범죄라고 했습니다. 기아문제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들의 밥을 빼앗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한국사회는 눈치 보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지구촌 생명의 신음에 눈감으면서 교육현장만 정의롭기를 바라는 게 가능할까요.

 

앎과 삶이 하나가 되는 교육을 눈치 교육에서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기후위기 교육을 눈치 교육으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탄소배출 없는 학교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출발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함께 살아갈 세상에서의 행동요령을 배우는 것이 기후위기교육입니다.

안재홍 (news@jejusori.net) 애월지역 마을교육공동체 활동 제주의 소리 2022.09.13.

 

 

한동훈 기획 론스타 3

일에는 때가 있다. 씨앗을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 대통령 관저를 짓는 일도 그렇다. 취임 100일간이라는 국민 통합 황금기에 청와대에 입주도 하지 않은 채 새 집을 짓는 건 때에 맞지 않다.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새로운 비전 제시와 국민 통합에 전념해야 했다.

 

보름 전, 론스타에 2925억원과 지연이자 약 185억원을 합해 약 3110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중재 판정이 있었다. 판정 후 120일 안으로 한국은 판정을 이행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날 이후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행동은 때에 맞는가? 장관은 이의신청을 검토할 것이며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판정문의 요지라면서 일방적으로 공개하면서 정부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장관은 말하지 않는다. 그가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말한 절차는 대한민국 조약 제234호 제52조의 판정 무효 신청이다. 법무부 장관이고 검사로 오랫동안 일한 법률전문가인 사람이 법률에 나와 있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또 말하지 않는다. 그가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판정 무효 신청에서 한국이 완전히 승소해 론스타 판정이 전부 무효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건은 끝나지 않는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강조한다. 론스타 판정이 전부 무효가 되어도 론스타 분쟁 사건은 다시 시작한다. 론스타가 요청하는 새로운 판정부가 구성된다. 위 조약 526항에 그렇게 되어 있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섯 개로 제한한 판정 무효 사유 중의 하나가 판정부가 뇌물을 받고 판정한 경우이다. 예를 들어 만일 론스타 판정이 여기에 해당하여 판정이 전부 무효가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 후속 절차는 어떠할까? 당연히 깨끗한 판정부를 다시 구성해서 재판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 이것이 공정하다. 그리고 그렇게 법에 되어 있다. 상식이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애써 재판을 해 승소했는데, 알고 보니 법관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했다는 이유로 판결이 무효가 되었다고 하자. 다시 깨끗한 법관에게 재판을 새로 받게 하는 것이 상식이다. 강조하지만 법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법무장관이 모를 리 없다.

 

결정적으로,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말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오직 다섯 개로 제한된 판정 무효 사유 중 어디에 해당하기에 승산이 충분하다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부하 검사들은 소송 전략을 노출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검사들조차 알고 있다. 판정 무효 절차는 오직 무효 사유가 있는지만을 보는 절차라는 것을. 판정 무효 신청 사유가 고스란히 론스타에 송달된다는 것을. 론스타 판정에서 한국을 패소시킨 중재인들이 그동안 내린 판정 36건 중 단 한 건도 무효가 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한동훈 장관이 론스타 3막을 기획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 론스타가 5조원대의 이익을 본 1막과 5조원대의 배상 청구를 한 2막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판정이 있다. 일국의 법무장관이라면 판정문을 정직하게 읽어야 한다. 2012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주식 매각에 불법관여한 자들이 있다는 판정이다. 이들 때문에 한국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관이라면 2012년에 누가 잘못을 하였고, 누가 이익을 보았는지 따져야 하고 그들이 책임지게 해야 한다. 2012년의 매각에 불법적으로 관여한 공무원들과 이익을 본 곳에 대해 배임죄가 성립하는지 치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공소시효는 남아 있다.

 

그러나 장관이 기획하는 론스타 3막에는 국민 세금 3110억원 피해를 발생시킨 책임 규명은 온통 뺐다. 대신 중재판정부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를 등장시킨다. 충분한 승산이 있다며 중재인들과 싸우자고 한다. 그도 모른다. 론스타 3막이 완전히 끝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무대 첫 장면으로 등장시키려는 판정 무효 절차 특별위원회 구성과 심리에 2년 이상 걸릴 것이다. 다행히 한국이 전부 이겨도, 새로운 론스타 사건 판정부를 구성해서 새로 심리를 하는 데에는 또 몇 년이 걸릴 것인가? 만일 한국이 여기서도 전부 승소한다고 하여도 론스타가 판정 무효를 신청하고, 여기서도 한국이 전부 승소해야 비로소 론스타 3막은 완전히 막이 내린다. 그사이 2012년에 배상책임을 발생시킨 자들은 면죄부를 받을 것이다.

 

나는 법무장관의 론스타 3막을 보기 위해 돈을 내지 않겠다. 누가 잘못하여 국민이 세금 3110억원을 내야 하는지 국민은 알아야 한다. 판정문에 나와 있다. 지금은 판정문을 있는 그대로 공개할 때이다. 일에는 때가 있다.

송기호 변호사 경향 2022.09.14.

 

 

정치의 실종

여름방학 때 잠시 들린 손자에게 장래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소방관이라고 대답한다. 오늘날 존경받는 직업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많은 나라에서 대개 소방관, 의사와 간호사가 제일 앞에, 정치인이 거의 예외 없이 끝자리에 서 있다. 가뭄과 함께 무섭게 번지는 산불 진화작업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곳 포르투갈은 물론, 한국에서도 소방관이 맨 첫 자리, 정치인은 역시 꼴찌다. 가장 위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소방관과, 버나드 쇼의 지적처럼 능변 수다쟁이들의 천국인 정치판에서 노는 정치인을 대비시켜 정치인을 평가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대개 비슷하다. 그럼에도 선거는 있게 마련이고 이에 따라 너나없이 정치의 열풍 속으로 홀린 듯이 빠져 들어간다. 선거의 결과에 따라 승자는 당연히 전리품을 챙기며, 패자는 다음 선거에서 설욕할 것을 다짐한다. 여기까지는 정치가 겪는 기본적인 과정이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도 발생한다.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서 정당성을 인정받아 집권했으나 수임받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부족해서 정변이나 탄핵으로 중도에 하차하는 예도 있다. 전자는 5·16 군사정변으로 축출당한 장면 정부, 후자는 촛불 혁명으로 물러난 박근혜 정부를 예로 들 수 있다.

 

어떻든 선거를 계기로 해서 분출되는 정치에 관한 관심의 정도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지표로 여겨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38개 가맹국의 평균 투표율은 69%이다. 한국은 이보다 높은 77%를 기록하고 있어 비교적 상위권에 속한다. 유럽에서는 핀란드가 예외지만 일반적으로 북유럽 국가의 투표율이 높고 이탈리아를 제외한 남부 유럽국가는 대체로 이 비율이 낮다.

 

그렇다면 높은 투표율은 과연 건강한 민주주의의 척도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여러 경험적인 자료에 의하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유권자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저소득과 저학력층, 연령적으로는 젊은층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근거로 투표율이 높은 것은 상대적으로 중산층이 한 사회의 정치적인 안정 추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반대로 투표율이 낮은 것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치 사법화·언론도 여기에 한몫

그러나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빅딜이 있을 때 온 사회가 총동원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지는 선거가 과연 민주주의의 바람직한 모습이 될 수 있는가. 오는 102일에 있을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 현직에 있는 우익 포퓰리스트 자이르 보우소나루와 과거 두 번의 임기에 걸쳐 대통령이었던 좌파 룰라 다 실바가 격돌하고 있다. 한국보다도 높은 투표율을 보이는 브라질 사회는 또다시 양분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선거 이후의 심한 갈등이 이미 예상된다.

 

OECD 가맹국 가운데 칠레와 포르투갈과 더불어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이는 일본의 사정은 또한 특별하다.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유세 중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살해되는 대형 사고까지 발생했으나 투표율은 전과 비교해서 조금 오른 56%였다. 이런 저조한 투표율의 주원인으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1955년 이후 지속하는 자민당의 보수적 체제를 대치할 대안이 없는, 정치적으로 짜증스럽고 지루한 상황이 있다.

 

유럽에서는 20여년 이래 선거에 적극 참여하는 비율이 거의 감소하거나, 설사 변화가 있어도 거의 미미한 상황이 지속하고 있으며 특히 경제와 재정위기 속에서 사회(민주)당과 같은 전통적인 좌파는 오히려 퇴조하고 대신에 우익 포퓰리즘이 일반적으로 득세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 스웨덴 민주의 약진은 전통적으로 사회당이 강한 스웨덴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불만이 투표행태에서 표출되는 이러한 현상을 영국의 정치학자 콜린 크러치는 껍데기만 남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민주주의라고 진단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유, 벨기에 출신 여성 정치학자 샹탈 무프는 이런 경향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라고 부른다. 눈앞에서 전개되는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애써 피하거나 봉합하고, 어설픈 합의만을 추구하는 정치는 결국에 극우주의나 인종주의를 키운다는 뜻에서다.

 

기성 정치,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실망이나 환멸을 느끼는 유권자의 정치적 무관심이 ()정치의 흐름으로 연결되었던 선례도 적지 않게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에 남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잠깐 등장했던 콸룽퀴스모’(‘보통사람주의)나 드골의 제5공화국의 등장과 더불어 급격히 몰락했던 프랑스의 푸자드주의가 그런 예다. 기상천외한 공약을 내걸고 세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기성정치를 비난하고 희화하는 국가혁명당의 허경영 후보를 연상하면 대충 이해될 수 있는 반정치적 흐름이다.

 

유권자의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정치의 사법화를 들 수 있다. 원래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현안을 번번이 법정으로 끌고 가다 보니 법조문 해석이 마치 정치의 본령인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국민은 지루한 법정공방에 지치고 따라서 정치에도 등을 돌리게 된다. 유럽에서는 그래서 법관만 있으면 됐지, 정치인은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는 반문이 자주 제기된다.

 

최근에 당권을 둘러싼 국민의힘 내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태는 정치가 스스로 풀어야 하는 과제를 법에 의존해서 해결하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법적인 규범은 정치적인 행위로 창출되고, 이런 정치적 행위는 또 법적인 규범에 의해서 통제되는 법과 정치 사이에 상호규정성이 있다. 그러나 법이 일방적으로 정치의 수단이 되는 상황에서 정치는 실종되기 마련이다.

 

몹쓸 정치에 멀어지는 한반도 평화

이와 더불어 정치실종의 중요한 원인 제공자로 흔히 언론매체가 지목된다. 정치나 정책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보도하기보다는 편향적이고 왜곡되거나 흥미 위주의 보도가 남기는 나쁜 결과를 두고 미국의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1847~1911)냉소적이고 매수될 수 있는, 선동적인 언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자기와 똑같이 비열한 국민을 낳는다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나쁜 언론이 나쁜 정치를 만들고 또 나쁜 정치가 나쁜 언론을 낳게 마련이기에 권언유착은 정치를 망가뜨리는 빠른 길이다. 얼마 전 언론사의 기자가 취재윤리를 벗어나 취재원을 회유, 협박해서 편향된 검찰의 수사를 도왔다는 의혹을 받고있는, 이른바 채널A’ 사건도 그런 길의 하나다.

 

특히 사회적으로 큰 쟁점이 되는 사건에 대해서도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아니면 충실한 탐사 없는 결론을 반복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제도 언론의 폐해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충분히 여과되지 못한 보도와 논평은 특히 소셜 미디어가 중요한 대중매체로 자리 잡은 오늘날,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속시킨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언론매체가 얼마나 정치적 무관심이나 증오감에 영향을 주고 있는가에 대한 경험적 연구는 많다. 정보보다는 흥미나 오락 위주의 미디어가 정치적 무관심을,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로 정치적 무관심 때문에 흥미나 오락에 관한 정보를 찾게 되는지를 두고 사회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이에 대해서 스위스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0)는 간결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해석을 했다. ‘러시아에서 당이, 미국에서는 TV가 국민을 바보로 만들었다.’ 과도한 정치적 선동과 선전이나 흥미나 오락 위주의 정보매체는 똑같이 국민을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몰고 가, 결국 쓸모 있는 정치적인 바보로 만든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정치 실종은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와 경제위기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이즈음 더더욱 문제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위기의 심각성은 누구나 감지할 수가 있기에 정치에 거는 기대도 크지만, 낙관적인 전망은 지금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특히 대선과 그 이후의 한국의 정치상황을 지켜보면서 정치의 모습이 지금처럼 앞으로도 보인다면 당장 원하는 민생 문제의 해결은 물론, 한반도의 평화정착도 정말 어려운 이야기라고 느껴진다. 한가위를 보내면서 멀리서 지나친 기우를 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경향 2022.09.14.

 

 

오만한 엘리트의 나라

능력주의가 오늘날 미국 사회의 공동선을 파괴하는 폭군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화제가 된 마이클 샌델 교수의 문제작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특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트럼프 현상의 원인을 무엇보다도 미국 엘리트의 오만(hubris)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샌델에 따르면 미국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오만한 엘리트는 없었고, 이들의 행태가 지금처럼 공동체에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엘리트의 오만으로 치자면 한국 엘리트도 결코 빠지지 않는다. 한국 사회를 한번 둘러보라. 오늘날처럼 오만한 엘리트들이 지배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코로나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던 2020년 여름, 공공병원 의사 3000명을 늘리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항의해 거리로 나선 전공의들이 내보낸 성명서는 충격을 넘어 비애를 안긴다. 그들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실력은 한참 모자라지만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중에서 어떤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은지묻는다. 이 성명서는 한국 교육이 길러낸 최고 모범생들의 미성숙한 내면세계를 숨김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적 기록이다.

 

판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고위직 판사가 재판에 개입하거나, 재판을 두고 정부와 거래한 초유의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문은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한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법관 독립을 침해한 위헌 또는 부적절한 재판 관여에 해당한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판사에게는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할 권한 자체가 없다. 수석부장판사의 재판 개입은 월권이지 권한 남용이 아니어서 직권남용죄는 무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참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오만한 엘리트의 궤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리대로라면 사법농단을 벌인 자는 누구도 처벌할 수 없다는 말 아닌가.

 

한국 엘리트들의 오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피의자에게 고급 향응을 받은 검사들을 기소하지 않은 검찰이나, ‘봐주기 수사의 백미로 결국 무죄 판결로 끝난 검찰 출신 김학의 전 법무차관 사건을 상기해보라.

 

대학교수는 다른가. 표절이 확실시되는 대통령 부인의 논문에 대해 눈감고 넘어가자고 결의한 국민대 교수들,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거액의 회의비를 챙기며 거수기로 전락한 교수들은 또 어떤가. 창피스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능력주의가 만들어낸 오만한 엘리트들이 미국을 야만사회로 만든 주범이라는 샌델 교수의 주장을 읽으며 나는 곧장 독일의 엘리트들을 떠올렸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한 7년 동안 오만한 엘리트를 본 적이 있는가.’ 놀랍게도 한명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다수가 매우 겸손하고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던 기억밖에 없다. 같은 질문을 아내에게, 또 독일에서 공부한 연구소 동료 교수들에게도 던졌지만 모두 같은 답이 돌아왔다. 오만한 엘리트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한국과 미국의 오만한 엘리트와 독일의 겸손한 엘리트,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육의 차이에서 연유한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과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쟁교육으로 악명이 높은 나라다. 그러니 이른바 엘리트 대학(미국의 아이비리그’, 한국의 스카이’)을 나온 이들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부와 권력을 자신의 능력’(재능과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학교라는 사활을 건 전쟁터에서 쟁취한 전리품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오만할 수밖에.

 

반면 독일의 엘리트는 대부분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원칙 아래 단행된 1970년의 교육개혁을 통해 변화된 학교에서 성장한 이들이다. 등수도 석차도 없는 교실에서 비판적 사고와 민주적 참여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은 그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은 개인적 성취라기보다는 사회적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이는 겸양의 미덕과 사회적 의식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유독 한국의 엘리트 중에 대중을 깔보는 오만한 자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잘못된 교육 탓이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교실에서 12년 동안 자란 아이가 어떻게 성숙하고 기품있는 인간이 되겠는가. 미성숙하고 오만한 한국의 엘리트 자신도 기실 한국 교육의 피해자다.

 

소수의 오만한 엘리트와 다수의 열등감에 시달리는 대중을 낳는 능력주의 경쟁교육은 이제 끝내야 한다. 모든 아이가 예외 없이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인정받고, 사랑받는 존엄주의교육으로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한겨레 2022.09.14.

 

 

부자감세라는 이름의 혐오 캠페인

금수저, 흙수저는 태생적 불평등을 비꼬는 말이지만 불공정의 증거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어떤 선택권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좋은 유전자를 받는 것,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받는 것 모두 우연의 소산이다. 국가가 가난한 청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기회 균등을 통해 계층 이동 가능성을 넓히는 정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태어날 때 받아든 격차를 뒤집기가 쉽지 않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어떤 사회에서든 부자(고소득자)는 상대적 소수다. 선망과 질시를 동시에 받는다.

 

부자들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고 자존감을 확인한다. 선망하는 마음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신분 상승 욕구를 자극한다. 더 높은 소득과 지위를 갖기 위해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에너지원이 된다. 하지만 부러워하는 마음이 지나쳐 시기심으로 나아가면 부자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체제에 대한 불신과 분노도 강해진다. 부자들을 끌어내려 결과의 평등을 만들자는 유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과 좌파·진보 진영이 법인세 상속세 종합부동산세 등에 대한 감세 논의가 나올 때마다 부자감세라는 프로파간다를 들고나오는 데는 부자에 대한 생래적 시기심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저의가 담겨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부자감세가 아니라 감세 자체를 비판할 일인데 말이다. 소득세든, 법인세든 소득 상위 10%가 대부분의 세금을 부담하는 구조다. 감세는 원천적으로 세금 안 내는 사람과는 관련이 없는 정책이다. 그런데도 굳이 부자를 끼워 넣는 것에는 부자와 서민을 갈라치기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부자감세해줄 돈으로 서민 복지를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자와 빈자는 제로섬 게임의 참여자들이 아니다. 만약 제로섬 구조라면 부자들이 증가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져야 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부자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늘어나면 자본 투자와 일자리 확대로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줄어든다. 고급 아파트와 자동차, 명품은 주로 부자들이 소비하지만 이들 산업에서 돈을 버는 대다수 사람은 임금 근로자다. 감세의 경제 활성화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감세를 통해 생겨난 민간 여윳돈이 생산이나 고용으로 흐르지 않고 양극화만 부추겼다는 보고서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준다는 논의의 출발선 자체가 시혜적이고 불온하다. 납세자 부담을 덜어준다고 하는 것이 온당한 표현이다. 마치 부자들에게 걷어야 할 세금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듯이 국가가 징세권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납세자는 국가 재정의 고객이며 정치적 주권자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돌려주는 세금의 경제적 효과와 기존 재정지출의 효용을 따지는 것은 정책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실려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이다. 하지만 어엿한 경제 이론으로 정립돼 있는 재정의 민간 구축 효과까지 제쳐놓을 정도로 정부의 재정 운용 능력이 탄탄할까. 그렇지 않다. 어떤 나라든 재정 지출의 비효율성은 좌우 정파를 가리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 국회는 예산 결산심의 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부자감세 프레임은 악의적이다. 부자 지갑 채워주려고 가난한 사람 복지 예산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서민팔이, 민생팔이 정치인들은 여기에 포퓰리즘이라는 독버섯을 키운다. 잘못된 주장이 되풀이되고 동조자들이 늘어나면 마침내 거짓이 진실 행세를 한다. 시기심은 정당화되고 한방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선동이 먹혀든다. 하지만 양극화의 근본적 문제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의 존재다. 부자를 끌어내린다고 가난이 구제되는 것이 아니다. 교육과 산업 육성, 적절한 복지 제공을 통해 가난한 사람을 얼마나 빠른 속도로 줄여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정치가 잘사는 사람에 대한 미움을 부추기고 대중의 분노를 법제화하는 나라의 경제는 망한다. 무엇보다 인간성을 저열하게 파괴한다. 시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부러워하는 인간만으로 가득한 세상을 상상해보라. 지성도, 문명도 모두 파탄이다. 경제적 자유가 소멸되고 사회적 이동성은 질식될 것이다. 시기심이 아무리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한 사회의 정의(正義)로 세울 수는 없다.

조일훈 논설실장 한국경제 2022.09.14.

 

 

노인 1000만명 시대

추석 연휴에 동네 공원과 산책길에서 오가는 어르신들을 보았다. 올해 주민자치활동에 참여하면서 여러 경로당과 어르신 집을 방문한 덕분에 생긴 새로운 관심이다. 주민들이 귀향해서인지 곳곳이 차분하고 가끔 만나는 어르신들도 조용하시다.

 

평온하신 걸까, 적적하신 걸까. 어르신 표정을 자신있게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생각은 자꾸만 후자로 향한다. 대부분 홀로 사는 분이라는 경로당 회장님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며칠 전 회의에서 들은 노인 1000만명도 마음을 무겁게 한다. 통계청에 의하면 65세 이상 인구가 2024년에 1000만명을 넘는다. 이후에도 가파르게 증가하여 생산인구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는 시대가 온다는데 새삼스레 겁이 덜컥 났다. 그때 나는 초고령 노인일 텐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실 노후 불안은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노인빈곤율은 늘 세계 1위이다. 가난하면 삶 자체가 움츠려든다. 어디 외출하기도 어렵고, 몇천원의 병원비도 부담이다. 어르신 사이 교류도 한정된다. 우리 마을 단지마다 있는 경로당에도 매주 두세 번의 식사 제공 시간에만 어르신들이 주로 모인다. 노인이 늘고 있다는데 정작 지역 일상 공간에서는 소수이다.

 

앞으로는 개선될까? 소득과 돌봄 모두에서 미래가 어둡다. 소득에선 공적연금이 핵심이다. 현재 가입자들의 노후를 대비하여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올리자는 제안이 나오지만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지금도 받을 연금액에 비하여 내는 보험료가 턱없이 낮기에 연금액 인상은 후세대에게 미안한 일이다. 기초연금도 계속 올라 30만원이지만 다른 소득이 없는 가난한 노인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금액이다. 심지어 어르신들이 월 27만원을 얻는 공익형 노인일자리 사업은 내년 예산안에서 그 수가 줄었다. 노인들에게 일자리뿐만 아니라 소득 지원 역할도 하는 사업인데 이번 정부가 너무 박하다. 다음 순번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의 실망이 클 것이다.

 

65세 기준을 높여 노인복지 지출을 줄여보자는 노인연령 상향도 불편한 주제이다. 사실 노인 연령 65세가 시대 흐름에 맞는 건 아니다. 수명은 계속 늘어나 100세시대라면서 65세부터 노인이라는 건 적절하지 않다. 일할 의지가 있고 건강하다면 사회적으로는 노인이 아니다.

 

올해 통계청 조사에서도 55~79세 시민 10명 중 7명이 장래 계속 일하기를 원하고, 희망근로 상한연령은 평균 73세라고 답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이다. 은퇴 후에 일자리 구하기는 어렵고 생활비는 부족하니 삶이 빈궁하다. 이러한 여건에서 노인연령 상향은 기존 복지의 박탈을 의미할 뿐이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돌봄은 어떨까? 동네에서 갈 곳이 마땅치 않으니 주로 집 안에 머무르신다. 지난 초여름에 뵌 어르신은 반지하방에서 종일 텔레비전을 보셨다. 아마도 거동이 어려우신 분들은 요양시설에 계실 거다. 가장 돌봄이 절실하여 찾는 곳인데, 여기도 평안하지는 않다. 여러 어르신들이 손사래를 치며 거기는 가기 싫으시단다. 내가 늙어도 이곳은 오고 싶지 않다던 어느 요양사의 한탄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방치하고 있는 우리의 요양돌봄 현실이다.

 

이렇게 노인 1000만명 시대를 코앞에 두고도 우리의 준비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미래가 불안하면 현재도 행복하기 어렵다. 노인의 삶이 이리 힘든데 미래 노인인 청년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노후 정책을 전면 전환해야 한다.

고령자 소득을 위하여 연성 일자리망을 만들어가자. 행정이 위로부터 설계하는 노인일자리가 아니라 주민들이 아래로부터 짜가는 사회적 역할망이다. 현대사회의 생산력이면 점차 노동시간을 줄여 오후에는 사람들이 자기 동네에서 어울려야 한다. 지역에 주민들이 모이면 돌봄, 문화, 체육, 평생교육, 도시재생 등 새로운 역할들이 생길 수 있다. 노동시장에서 경쟁하는 경성 일자리가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협동하는 참여 일자리이다. 또한 요양돌봄을 완전 재설계하자. 지금의 소규모 상업적 체제를 지자체와 지역사회가 주도하는 사회적 요양돌봄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므로 존엄한 죽음을 위한 임종기 인프라도 절실하다.

 

연성 일자리와 사회적 돌봄, 금세 달성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담대한 의지로 차곡차곡 추진해야 한다. 특히 모두 우리 동네에서 이루어야 하는 숙제임을 주목하자. 근대 혁명이 국가를 형성했다면 21세기 혁명은 마을이다. 지금도 늦었다. 노후 대계획을 세우자.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경향 2022.09.15.

 

 

여왕의 서거와 북한 핵 법제화에 대한 보도, 정상인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와 북한 핵 무력의 법제화에 대한 국내 대중매체의 보도를 보면 흥미위주 기사에 매몰된 상업주의 언론의 특성이 심각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망과 관련해서는 흥미위주의 뉴스가 쏟아지고 있는데 비해 북한의 핵 정책에 대해서는 미국이 주가 되고 한국이 종이 되는 식의 대책 강구라는 식의 의례적인 기사가 나왔을 뿐이다.

 

북한 핵문제는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의 명운과 직결된 것이고 향후 평화통일 노력 등에 미칠 영향이 매우 큰 주제이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언론은 북한의 의도가 00으로 보인다는 식의 대북 보도 패턴에 맞춘 기사가 주를 이룰 뿐 현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나 그 해법, 향후 전망 등에 대한 보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기사를 보면 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여왕이라는 뉴스메이커의 사망과 장례절차, 왕권 승계 등에만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영국 입헌군주제와 무관치 않은, 지난 수백 년 간 지구촌식민지배라는 범죄를 자행한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국 제국주의는 자치령, 식민지, 위임통치령 등 다양한 형태로 16~18세기에 주로 이뤄졌고 세계역사상 최대 수준이었던 1913년에는 당시 전체 세계인구의 23%4억 여 명을 지배했다. 그 면적은 세계 전체 육지의 24%에 달래 해가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렸다. 영국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의 원주민 학살과 불법 지배를 통한 인권 탄압과 자원수탈, 노예무역 등의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 영국은 특히 인도에서 마약을 재배해 중국에서 판매하다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비판받는 마약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영국 과거 수 세기 동안 식민지 등으로부터 수탈한 부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인데 인도의 경우를 오늘날 달러로 환산할 경우 45조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대영제국이 세계 침략 과정에서 자행한 폭력과 갖가지 음모 등에 대한 영국 국왕 등이 직접 개입한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하지만 그 책임이 전무하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영국 황실이 보유한 막대한 재산도 그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영국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점되는데도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1905812일 영국은 일본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해주었다. 그에 따라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경제·군사상의 이익을 보장해주고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국경 지역에서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야합은 그 해 7월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가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 - 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은 직후 취해졌다.

 

한편 북한이 지난 8일 자위적 수단으로 핵 선제 타격을 명문화한 법령을 통과시킨 것에 대한 국내 언론 보도는 대체로 심층보도와는 거리가 멀다. 이번 북한 조치는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의 공세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하는 조치를 가시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향후 비핵화 회담을 거부하는 의미로 해석되면서 향후 한반도 정세가 가팔라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북한의 이번 조치는 남북의 평화통일 노력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으로 왜 이런 일이 벌어 졌는지에 대한 분석 등이 나와야 해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지만 국내 언론 보도에서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이번 조치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의 하나는 미국의 대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미 국무부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세계평화를 위협한다거나 북한의 미사일 실험 등을 도발로 규정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해 놓고 있는데 이런 조치는 미국의 선제타격 대상 국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1997년 이후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자 북한의 주요 핵시설을 공격하는 선제타격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검토했지만 한국은 단 한 번도 사전에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중앙일보 2020919). 이는 미국이 전략무기인 핵무기에 관해선 사용 계획을 동맹국과도 사전 협의하지 않는 법 체제 때문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북한을 향한 구체적인 핵 공격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미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가진 북한에 대한 핵공격에 한국의 허락은 필요 없다고 미 군사전문가들은 인식하고 있다(조선일보 2020916).

 

미국 정부가 선제타격을 거론할 때는 미국 헌법 2조와 무력사용 권한(AUMF)’ 두 개를 법률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도 이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은 한반도 전면전을 의미하고 그로 인한 남측의 인명 피해만 해도 천문학적인 숫자가 되는데도 미국은 선제공격 기획 단계부터 한국을 배제하고 있다. 이는 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군사작전에 외국의 동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행한다는 자국 이기주의적 발상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배타적인 핵 무장을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는 1991, 소련 해체 당시 미국, 러시아에 이은 세계 3위 규모의 핵 보유국 이었다. 구소련이 미국과 서유럽을 겨냥해 우크라이나에 핵무기를 배치했기 때문인데, 당시 보유했던 핵탄두만 1,700여 개,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170여 개에 달했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러시아, 미국, 영국과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하고 비핵화에 나서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안전보장과 경제 원조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정작 지난 2014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할 당시 미국과 영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각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2022년 또다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국 등 서방진영의 무력 대응이 우크라이나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핵을 포기하면서 안전 보장 약속을 받았지만 그 후 강대국의 침략 위협과 같은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은 비핵화 요구를 받고 있는 북한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편 북한이 최고 지도자에 대한 외부 공격에 대해 핵무기로 응수하겠다고 밝힌 것은, 한미연합군의 대북전략에 포함된 참수작전은 물론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신형무기를 개발하는 식으로 테러집단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작전을 지속한 것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지난 7월 말 닌자 폭탄으로 불리는 초정밀 암살용 ‘R9X’ 미사일로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수괴로 알려진 아이만 알자와히리(71)를 사살했다. 이 미사일은 폭약이 터지지 않는 대신 날카로운 칼날 6개가 공격목표로 지목된 사람만을 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형 무기로 알려졌다(연합뉴스 202282).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회의 2일회의가 지난 9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권 붕괴라며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천명했다. 연합뉴스

 

북한의 핵무장 강화에 대해 남한의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노력이 필요해보이지만 미국만 바라보고 따라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타격 대상으로 검토할 경우 한국을 배제하는 상황이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윤석열 정부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북한과의 대화통로를 만들고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를 만들어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할 것이다.

 

영 제국주의 범죄 생략된 여왕 보도나 북핵 적극적 해법 외면한 보도 문제

이상에서 영국 여왕 사망과 북한 핵무력 법제화에 대한 보도 경향을 살펴보았는데 대중매체가 어떤 식으로 보도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공익과 공공의 선에 대한 내용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1세기에 기이한 입헌군주제에 대해 단순히 흥미위주에 몰두하면서 한국도 피해를 입은 식민지 역사를 외면하거나 남북한 문제 해결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 외면하는 것은 대중매체의 소임을 다 하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

 

국내언론은 영국 여왕이 70년 동안 재위한 최장 집권 군주이면서 영연방의 수장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대영제국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와 영국 왕실의 관계 등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흥미위주의 기사를 남발하는 상업주의에 매몰되었다는 비판을 자초한다. 윤석열 대통령도 오는 19일에 열리는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향후 여왕에 대한 보도가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북한이 핵무기를 법제화하면서 남북관계는 과거와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남북 간에 불통상태가 장기화되는 것도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언론의 주목과 해법 제시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한반도 주변 정세가 한미일, 북중러로 양분되어 대결하는 식의 냉전이 심화되면 평화통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한반도 문제는 주변 강대국이 노리는 이해관계와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언론은 이 문제에 집중해서 정치와 학계, 시민사회를 의식화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미디어오늘 2022.09.15.

 

 

영부인의 짜집기 논문과 침묵

선진국인 대한민국임에도 불구하고 검찰에 의한 먼지털이식 수사 현실이 여전하다. 야당 대표와 가족에게는 선거 기간 중의 말 한마디나 관행에 가까운 소액 사용에도 압수수색과 소환은 당연하고, 살아있는 권력인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해서는 여러 불법 의혹에도 압수수색은커녕 소환에 응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이런 상황과 대통령 가족의 초법적 태도는 김건희 여사의 학위논문 표절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누가 보아도 표절이 분명한 김건희 여사의 석사와 박사 학위 논문 및 관련 논문들에 대한 14개 교수·연구자 단체의 검증은 건강한 학문 사회의 기본 틀을 유지하기 위한 자정 노력이다.

 

사회 건강성을 유지하는 기본 틀은 법이나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병들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고,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암묵적 합의에 근거하는 각 분야의 윤리와 도덕이야말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동료 연구자들의 앞선 연구 결과에 기반해 후속 학문 연구와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 대학이다.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구성원들 간의 상호 신뢰와 존중이다. 이것에 기반하여 사회 발전에 직결되는 학문 연구가 가능하며, 건전한 학문 후속세대 교육과 양성이 가능하다.

 

이런 신뢰와 존중을 깨는 연구 부정행위는 자연스레 학문 연구와 사회 발전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셈이다. 학계나 대학에서 연구부정행위를 학문 발전을 저해하는 매우 악질적 행위로 간주하는 이유다. 모든 학문 분야에 있어서 대표적인 3대 연구 부정행위의 하나인 표절 역시 학문 연구 근간을 오염시켜 학문의 건강성과 발전을 막는 행위이며, 해당자는 매우 엄격히 징계 되고 대학 강단과 학계에서 퇴출된다.

 

그런 표절에 있어서 표절당한 피해자 교수가 책임을 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절한 대통령 부인과 이를 방조한 국민대 지도 교수 및 심사위원들의 침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를 조사한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는 표절이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냈고, 대학 관련 행정 부처인 교육부도 해당 대학의 결론을 존중한다고 하니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개인 표절을 넘어 그 이면에 있는 사립대학의 구조적 비리를 말해 준다.

 

일반대학원생의 표절이라면 이렇게 비호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 국회의원이었던 문대성 씨의 학위논문에서 표절이 드러나자 학위 취소를 결정했던 국민대다. 이제 권력자의 부인이 표절 당사자가 되자, 대학 당국은 과거와 같이 학위 취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문대성 씨의 변명 논리를 거꾸로 대학이 이용하면서 정당화를 꾀한다.

 

최근 국내 대부분의 교수를 망라하는 14개 단체들이 김건희 여사의 논문들을 검증했고, 표절논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한 짜깁기 논문임을 밝혔다. 이제 이런 논문이 박사 학위 논문으로 통과된 경위와 대학이 이를 용인하는 과정에서 작동한 사학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힐 때다. 이는 학문의 기본을 되찾는 것이자, 건강한 학문 후속 세대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짜깁기 논문 당사자인 김건희 여사는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된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 부부에 대하여, 불법 행위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회 윤리나 도덕성마저 지키지 않음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우희종 서울대 교수·()생명정치 이사장 경기신문 2022.09.15.

 

 

한동훈 장관, 그 자신감의 원천은

여태껏 볼 수 없던 유형의 장관이 출현했다. 자신감이 넘치고, 국회에선 국회의원들과 다툼도 피하지 않는다. 자잘한 말싸움에서조차 지지 않으려 한다. 되레 훈계하거나 윽박지르는 언동도 자주 보인다. 좋게 보면 자신감이나 달리 보면 기본적 예의도 갖추지 않은 무례한 모습이다. 이렇게 당당한 일국의 국무위원은 좀체 볼 수 없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늘 당당한 모습이다. 론스타에 수천억원을 물어주게 되자, 한 장관은 이의신청을 검토할 것이고,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했다. 송기호 변호사가 정동 칼럼에서 지적했듯,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국민 세금으로 론스타에 막대한 돈을 물어주게 만든 관련 공무원들의 배임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한 장관이 이쪽저쪽 상관없이 박수를 받았던 일도 있었다. 인혁당 피해자들이 반환해야 할 배상금 이자 면제 결정이 그랬다. 사람들의 박수에 고무된 듯, “법무부는 오직 팩트, 상식과 정의의 관점에서 국민의 억울함을 해소하려 노력할 것이고, 국민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데에 진영 논리나 정치 논리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란 말도 남겼다.

 

인혁당 피해자 배상금 반환 문제는 오랜 숙제였다. 국가가 인혁당 피해자에게 지급한 배상금의 이자 계산이 잘못되었다며, 지급한 돈의 일부를 반환하라면서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줬다 뺏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반발했다. 반환해야 할 배상금에는 매년 20%씩 이자가 붙었다. 반환해야 할 원금은 5억원이었지만, 나중엔 이자만 10억원쯤으로 불어났다. 법원은 원금만 반환하고 이자는 내지 않도록 하는 화해권고안을 제시했다. 이걸 법무부가 받아들인 거다. 법원의 권고를 받아들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여길 수 있겠지만, 여태껏 그런 결정을 머뭇거렸던 건, 국고로 들어와야 할 돈을 포기하는 일이 자칫 배임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이 부분을 파고들면, 업무상 배임죄로 징역 10년 이하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KBS 정연주 사장 사건은 특히 심했다. 검찰은 세금을 많이 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정 사장을 배임죄로 기소했다. 법원이 하자는 대로 세금을 냈는데도 칼을 휘둘렀다. 나중에 무죄를 받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정 사장을 괴롭히며 KBS 사장에서 쫓아내는 게 핵심이었다. 2009년 쌍용차 사태 때, 경찰은 쌍용차 노조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대테러 진압부대인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해서 무리한 진압을 했고, 64명의 노동자를 구속했지만,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쌍용차 사태의 상처는 두고두고 남았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경찰청장은 과거의 무리한 진압에 대해 사과했다. 그렇지만 손해배상 소송은 철회할 수 없다고 했다. 경찰개혁위원회의 권고도 국회 차원의 결의안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배임죄 적용 여부 때문이었다. 검찰이 이 부분을 파고들면 감당할 수 없다는 거였다.

 

수사기관인 경찰도 검찰 수사의 부담을 피해갈 수 없지만, 이런 일로는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검사들이다. 전임 장관과 달리 한동훈 장관만 정의감에 불타고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일념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다. 한동훈 장관 자신감의 원천은 검찰이라는 든든한 배경이다. 검사 출신 장관이니 검찰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불법 접대에도 금액 끼워 맞추기로 멀쩡했던 것도, 검사 또는 검사 출신들이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았던 숱한 사례들은 모두 검찰이라는 뒷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대선 2차전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여야의 대결이 격화하는 지금의 상황도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대결이 본질은 아니다. 검사 출신이냐 아니냐가 핵심이다. 범죄 여부, 혐의의 무거움과 상관없이 검찰은 오로지 이재명 대표만 캐고, 숱한 문제 제기에도 윤석열 대통령 본인, 부인, 장모에 대한 수사는 진행하지 않고 있다.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독점적으로 휘두르고 있다. 검찰이 독점하는 기소권은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검찰 맘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이다. 죄가 없는 게 뻔해도 기소할 수 있고, 죄가 많아도 기소하지 않을 수 있다. 검찰 처지에서 무서울 건 없다. 여론이 빗발치면 잠시 호흡을 고르면 그만이다. 국회와 언론은 물론, 국민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바로 힘을 가진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뒷배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법은 만인 앞에 공평하지 않다. 검사들 앞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경향 2022.09.16.

 

 

사랑받으려 사랑하지 마세요

한 여자가 외롭게 살고 있다. 무관심한 남편은 집을 자주 비우고, 성장한 딸은 더 이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다. 음악당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되어 가까워지지만, 오만한 그는 자기 얘기만 한다. 그럼에도 남자의 말을 들어 주며 사랑하는 그녀. 그러나 여자에게 돌아온 건 차가운 이별통보.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여자는 술에 의존하게 되고, 4년 후 기차역에서 죽음을 당한다.

 

이 이야기는 지난 칼럼에서 다룬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1914)가슴 아픈 사건을 시니코 부인의 입장에서 다시 쓴 것이다. 그녀의 관점에서 보니, 우리 삶의 또 다른 층위의 진실, 욕망, 폭력이 드러난다. 그녀는 왜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의 말을 계속 들어주었을까. 그녀는 왜 그의 상처를 알아보고, 기꺼이 자신을 내주었을까. 그녀는 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을까. 나는 그녀가 사랑받고 싶어서,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이 단편은 사랑받으려 사랑했지만, 끝내 받지 못한 여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잘 보여 준다. 그 로맨틱한 목마름이 어떻게 그녀를 파멸시키는지도.

 

시니코 부인은 왜 그토록 사랑받고 싶었을까. 그것은 당시 아일랜드의 가부장제와 관련이 깊다.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집 안에 갇히고, 자아실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를 통해서만이,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만이 삶의 이유가 된다. 시니코 부인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관심을 받지 못하자 더피에게서 사랑을 갈구한다. 자신의 상처에 갇힌 이기적인 그를 모성애로 따뜻하게 감싸 안으면서. 그러나 그마저도 그의 이별 통보로 끝나고, 그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결국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그리고 나는 상상해 본다. 시니코 부인의 어린 시절을. 그녀는 분명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들, 특히 장남은 그들 자체로 관심과 애정을 받지만, 딸은 그렇지 않다. 딸이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해야 한다. 노동과 희생을 해야 한다. 어머니의 집안일을 거들거나 어머니가 아끼는 아들을 챙겨주거나. 그렇게 딸은 조건부 사랑을 받고 애정결핍의 상태로 자란다. 그 결핍은 남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되고, 그 욕망은 필연적으로 마조히즘과 자기소외를 낳는다. 남에게 잘 보이려 할수록, 나는 나일 수 없고 나를 억압하게 되니까. 그 욕망이 여자의 존재 이유가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자신에게 폭력이 된다.

 

우리 사회에는 시니코 부인처럼 사랑을 좇다가 불행해진 여자들이 있다. 가족에게 차별당하고 착취당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헌신하는 착한 장녀, 남편이 폭언과 폭력을 일삼고 바람을 피워도 헤어지지 못하는 순종적인 아내, 부모와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자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 때로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상대를 지치게 하기도 한다. 원하지도 않는 것을 갖다 바치며 부담을 주고, 애정을 확인받고자 요구하고 통제한다. 그녀들의 짝사랑은 친구, 동료,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비굴한 태도로 드러난다. 상대가 존중하지 않아도 폭력을 휘둘러도, 언젠가는 좋아해 줄 거라 감내하고 이해하려는 그녀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그녀들. 그 관계의 욕망 속에서 그들은 자신을 서서히 잃어버린다.

 

물론 사랑은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고,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니코 부인처럼 타인의 상처에 아파하고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다. 그 마음은 친절, 봉사, 헌신, 책임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나를 잃을 만큼, 사랑받으려 욕망할 때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이젠 여자에게 사랑이 나를 잃는 수렁이 아닌, ‘나를 찾는 여정이면 좋겠다.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경향 2022.09.16.

 

 

누구를 위한 소액심판인가

대한민국 최대 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했다. 필자 역시 기쁜 마음으로 일가친척을 만나러 갔다. 도란도란 친척과 이야기를 하던 중 동네 청년 재판이야기가 나왔다. 청년은 창업을 위해 모아둔 2000만원을 친구에게 빌려 주었는데 친구가 갚지 않아,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를 했다고 한다. 청년은 판결에 불복하기 위해 판결문을 읽어봤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판결문에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라는 2줄이 전부였다고 했다. 친척은 이런 판결문이 가능한지 물어왔다. 순간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법이 그렇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법원 판사 수가 적어 하는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이도저도 아니면 얼마 안 되는 소액이니 그냥 참고 살면 어때라는 궤변을 해야 하나.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독자들도 이런 판결문이 가능해?”라고 놀랄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2021년 기준 최근 5년간 1심 민사 본안 사건은 매해 평균 981296건이다. 이 중에서 소액 사건은 71691건으로 72.4%를 차지하고 있다. 민사소송을 제기한 국민 4분의 3 정도가 패소 이유를 모르는 판결문을 받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소액사건은 뭘까? 소액사건심판법과 대법원규칙에서 3000만원을 초과하지 않는 민사사건을 소액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럼 왜 3000만원 이하 소액사건 판결문은 이렇게 간단한 걸까? 이 역시 법에 답이 있다. 소액사건심판법 제11조의 2 3항에 판결서에는 민사소송법 제208조의 규정에 불구하고 이유를 기재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3심제도가 보장되어 있다. 1심에 불만이 있는 경우 2심에서 다툴 수 있다. 다투기 위해서는 1심에서 패소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판결문에 이유가 없다면 를 알 수 없다. 무엇을 가지고 항소를 한단 말인가. 2021년 기준 최근 5년간 평균, 판결문에 판결이유가 기재된 경우 항소 비율은 22.3%에 이르고 있지만 소액심판사건 항소 비율은 4.1%에 그치고 있다. 이유가 기재되지 않는 판결문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알권리와 재판을 받을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회·문화적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과 프랑스는 소액사건에 있어 이유를 적시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당사자 동의 혹은 이유 근거가 되는 내용이 녹음되어 있는 경우 이유 기재를 생략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국회에 20202, 20211건의 소액사건심판법개정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해당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된 후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 최근 대법원도 대책을 내어 놓았다. 골자는 정원 외로 소액 사건을 전담하는 법관을 늘리고, 법관 정년을 10년 정도 연장하자는 것이다.

 

신속한 재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신속한 재판이 헌법상 기본권에 앞설 수 없다. 민사사건의 70%를 차지하는 소액심판에 이유를 기재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규정한 소액사건심판법은 개정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당위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면 유토피아적 이상향에 지나지 않는다. 1년에 법관 한 명이 처리하는 소액사건은 4000건에 이른다. 하루 8시간 꼬박 해도 한 사건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 남짓이다. 법관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국회는 현재 3214명으로 되어 있는 각급법원판사정원법을 개정해 법관의 수를 늘려야 한다.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도 법관 증원 필요성에 대해 결의한 바 있다.

 

국민의 알권리와 재판청구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회는 국회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또 대법원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국민을 위한 소액심판이 되어야 할 때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경향 2022.09.16.

 

 

허대만과 허대만들의 동행

한 시절 깊게 연대한 누군가의 죽음은 내 삶을 성찰하게 한다. 이때 누군가의 죽음은 소설가 박상륭이 통찰했던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닌것이 된다.

 

허대만 전 더불어민주당 경북도당위원장. 포항에서 1995년 전국 최연소 시의원으로 당선됐지만 이후 7번 선거에서 7번 모두 낙선했다. 포항에서 민주당 깃발을 들고 30년 가까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악마의 맷돌에 인생을 갈아넣는 일이다. 스스로에게 가했던 심적 질타는 얼마나 매서웠을까. 결국 그는 쓰러졌다. 두 번의 시한부 선고에도 여러 해를 넘겼지만 지난 822일 생을 내려놓았다.

 

포항과 정치를 매개로 그와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고향은 그를 권력의 바깥으로 밀어냈지만 그에게 고향은 가능성과 도전의 바다였다. 그래서, 그라면 어떤 상황도 견딜 것이라 안도했다. 이제 그의 부재가 결핍이 된 포항. 그에게 고향은 30년 목엣가시였다.

 

포항에서 민주당 정치를 한다는 것은 지역주의와의 싸움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지역주의도 변했고,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화 이전엔 영·호남이 지역주의 패권의 중심이었다. 수도권은 중립지대였다. 그는 ·호남 정치인들은 예산 유치에 혈안이 됐고, 주민들은 특정 정당에 힘을 몰아주면서 지역주의가 유지됐다고 말했다. 지역 정치권이 무능해도, 주민들은 알아서결집했다. ·호남 정치인들은 주민들의 정치적 스톡홀름 증후군을 맘껏 이용했다. 지방선거는 지역대망론, 중앙정치 대리전으로 치러졌다. 민주화 이후 지역주의는 다른 얼굴로 등장했다. 수도권이 과실을 챙겼다. 지역 쇠퇴를 등에 업고 수도권 지역구가 늘어난 현상이 단적인 예다. 200560여개 분야를 지역으로 이전한 복지분권 사업도 마찬가지다. “지방선거 승자는 수도권, 패자는 지역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 무렵부터 가치와 콘텐츠에 눈길을 돌렸다. 1995년 시의원이었을 때 지역문화예술활동 지원조례를 발의했다. 그의 동지인 박희정 시의원은 그가 정치권 밖에 있는 동안 방치되다가 지난해에야 목표액의 절반인 20억원의 기금이 조성됐다고 아쉬워했다. 최근엔 포항의 미래를 걱정하며 포스트 철강을 찾는 데 고심했다.

 

201711월 발생한 포항 지진은 대형 재난이었다. 칠레 발파라이소의 잦은 지진을 우주적인 공포에 빗댔던 파블로 네루다의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당시 그는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정책보좌관이었다. 그는 지진 발생이 이명박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국책사업과 연관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포항의 미래로 추앙받았던 지열발전소의 수압 파괴를 지진 발생 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얼마 전태풍 힌남노가 포항을 강타했다. 그가 있었다면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아류 사업인 고향의 강(냉천) 정비사업이 하천 범람의 원인이었음을 조목조목 따졌을 것이다.

 

그의 죽음 후 이른바 허대만법으로 불리는 선거법 개정 요구가 커지고 있다. 선거법 개정은 지역주의가 어떤 얼굴이든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문제는 지역 1당 체제 해소를 위한 지역주의 개선책이 여의도 중심주의를 강화했다는 데 있다. 정당공천제, 지분(비례대표, 대의원 배정 등) 분배 결과가 어떠했나. 그는 영·호남을 축으로 한 지역주의 구도가 희석된 뒤 갈등의 주전장이 정당 내부로 옮겨왔다고 봤다. 특히 원외의 원내 종속화를 지적했다. 민주당의 원외란 수도권과 호남, 충청 일부를 제외한 곳이다. 원내 정치는 선거법 개정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수도권은 의석 기득권을, 호남은 지역 기득권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선거법 개정을 하려면 여의도 민주당과 싸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험지에서 고생했으니 호의를 베풀어달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2013년 당 기초자치정당공천 폐지 검토위원회 자문단장을 맡은 것도 제도 개선을 정치발전이라는 큰 틀에 담으려 한 의지였다. 박 의원은 허 위원장은 허대만법이라는 명칭이 반갑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죽고 나서야 영일만의 자부심이 된 만년 야당 정치인허대만. 답답할 정도로 원칙적이고, 정치 이외엔 세상의 결을 읽는 데 미숙했다. 하지만 제때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를 쥐었을 뿐, 그는 한 시대의 평균값을 다한 사람이었고, 절벽 끝에서도 성장하고 진화한 정치인이었다. 정치가 어디 설명으로 될 일인가. 수많은 허대만들이 그를 기억하는 한 허대만 인생의 장례는 끝났어도 허대만 정치의 장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경향 2022.09.16.

 

 

음모론은 누구의 음모인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해서 처음 장을 보았다. ‘할라 미로프스카라는 전통시장이다. 선명한 색깔의 과일과 야채, 암탉의 종에 따라 분류해 놓은 계란, 러시아어로 시끌시끌한 그루지야 제빵소, 시골 치즈와 가정식 해장 수프 등은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유적지보다는 시장 구경을 더 좋아하는 못난 역사가인 내게 이 시장은 딱 제격이다.

 

빈약한 상점마다 뱀처럼 구부러진 줄이 길게 서 있고, 연금생활자들이 수시간씩 걸리는 줄서기를 대신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회주의 시대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오스카 랑게 같은 개혁 사회주의자들이 시장의 소매업 등은 개인 경영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는 현장의 절박함이 있었다.

 

1953년 동독의 베를린 봉기나 1956년 폴란드의 포즈난 봉기 당시 가장 자주 들리던 구호는 빵을 달라였다. 잔뜩 격앙되어 지역 당사를 공격한 군중은 먹을 게 없는 시장과 대조적으로 당사 내부의 관료 전용 특수상점의 풍요로움에 배반감을 느꼈다. 그들의 분노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정치범 생존자이자 베테랑 사회주의자였던 당시 폴란드 총리 치란키에비츠의 반응은 의외였다. 노동자의 정당인 공산당은 노동자들의 곤경에 따뜻한 시선을 돌리는 대신, 노동자 천국을 질시한 서방 제국주의의 음모를 찾아냈다. 그러니 해결책도 간단했다. 서방 제국주의와 결탁한 간첩을 색출해서 제거하면 만사형통이었다.

 

동유럽 현실사회주의의 정치 담론에서 음모론이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포위된 요새신드롬에서 시작한 음모론은 정치 담론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다. 제국주의 음모는 분쇄되어야 했고, 간첩들은 색출해야 했다.

 

음모론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들이 공론장의 토론을 거쳐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제로섬 게임의 정치 문화를 낳는다. 간첩은 협상 대상이 아니고 적의 음모는 파기되어야 했다. 냉전체제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은 살아남았다.

 

푸틴의 침략전쟁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서방의 제국주의 음모에 결연히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거꾸로 폴란드의 반공 극우 정권은 푸틴의 음모에 넘어간 독일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각을 세운다. 심지어 폴란드의 국토교통부 차관은 자국 영내의 오데르강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환경 재앙이 폴란드 국가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독일의 음모라고 떠벌려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을 비롯해 100명에 가까운 폴란드 정치 엘리트들이 몰사한 스몰렌스크의 대통령 전용기 추락 사고에 대해서도 러시아 음모론이 끊이질 않는다. 블랙박스가 해독되어 카친스키 대통령의 무리한 착륙 지시가 사고의 원인임이 밝혀졌는데도 음모론은 가라앉을 줄 모른다. 러시아의 음모, 유럽연합의 음모, 그리고 그들과 결탁해 사건의 진실을 가리려는 폴란드 매국노들의 음모에 대한 비난은 기세가 등등하다.

 

냉전 시대의 폴란드 공산당과 탈냉전 시대의 반공주의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은 음모론의 정치적 문법을 공유한다. 1968년 공산당의 반유대주의 캠페인이나 법과 정의당의 극단적 반공주의는 모두 폴란드 민족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외세와 결탁한 폴란드 매국노들의 음모론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다. 이들의 인식 지평에서는 자본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모두 매국노라는 점에서 한통속이다.

 

음모론의 정치 동학은 폴란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광주를 비롯해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음모로 돌리는 극우적 주장이나, 박헌영과 이강국 등 남로당 인사들을 미 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한 북한의 제국주의 음모론은 묘하게도 닮아 있다.

 

문재인 정권 이래 음모론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독재정권의 특허인 북한 간첩음모론은 토착 왜구음모론으로, 자신들의 파국적 부동산정책 실패는 미 제국주의 대신 반동적 부자들의 음모로 황당하게 바뀌었다. 국민의힘 권력투쟁에서 등장하는 음모론은 상상력이 많이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먹혀든다.

 

국경을 넘어 여야를 막론하고 이렇게 판치는 음모론은 도대체 누구의 음모인가?

임지현 서강대 교수 경향 2022.09.17.

 

 

··북방 삼각관계의 귀환

냉전은 진영의 대결이었다. 한반도에서도 북한, 중국, 소련의 북방 삼각과 남한, 미국, 일본의 남방 삼각이 대립했다. 냉전이 끝나자, 진영도 무너졌다. 한국은 탈냉전 이후 중국과 러시아와 협력적 관계로 전환했고, 북방 삼각관계도 느슨해졌다. 그런데 최근 미-중 전략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북방 삼각관계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 새로운 질서 변화는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북방 삼각관계는 세개의 양자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러 관계는 푸틴-시진핑 체제에서 점차 사실상의 동맹관계로 진화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소련과 미·중의 대결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중·러의 대결로 전환했다. 양국 정상회담도 빈번해졌고, 경제협력 수준도 높아졌다. 2021년 중국은 러시아에서 원유의 16%, 석탄의 15%, 천연가스의 10%를 수입했는데, 2022년 들어 에너지 수입이 급격히 늘었다. 러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던 가스관을 닫고, 이제 중국으로 가스관을 연결하고 있다. 군사 분야에서, 특히 최신 전투기와 미사일 방공시스템 등 전략무기 협력이 늘고, 양국이 주도하는 군사훈련의 규모가 커졌다.

 

-중 관계는 남북, -미 관계가 악화하면서, 더욱 긴밀해지고 있다. 2018년 봄을 우리는 남··미 삼각관계의 선순환으로 기억한다. 당시 북-미 관계는 남북의 특사회담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또 하나의 삼각관계에 신경을 썼다. 바로 북··중 삼각관계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를 튼튼히 했다. 북한은 미-중 전략경쟁을 유리하게 활용하려고 했지만, 20192월 하노이 회담이 실패하자, 중국에 편승했다. 이후 북-중 관계는 과거에 보기 어려운 전략적 협력으로 돌아섰다.

 

-러 관계도 달라졌다. 탈냉전 시대에 러시아는 남북 균형 외교를 유지해왔으나, 앞으로는 아니다. -러 관계로, 국제사회의 북한 제재 정책은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존재하는 한, 북한의 전략 도발에 대한 유엔의 추가 제재는 어렵다. 코로나 상황이 끝나고, 북한의 국경이 열리면 북-러 경제관계도 달라질 것이다. 북한은 러시아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러시아는 북한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협력은 현행 유엔 결의에서 제재 위반이다. 제재 위반에 대해 할 수 있는 조치가 추가 제재인데, 북한과 러시아 모두 추가 제재를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이 분쟁을 겪을 때, 실리 외교로 이익을 본 경험이 있다. 현재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악화하면서, 북한은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러시아의 등장은 새로운 북방 삼각관계의 역동성을 의미한다. 세개의 양자관계의 역동성과 별개로 삼자 협력도 늘어날 것이다. 앞으로 중·러가 주도하는 군사훈련에 북한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지정학적 중간지대인 한반도에서, 북방과 남방의 군사질서가 대립하면 그만큼 긴장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 질서에서 북방 삼각관계의 귀환은 매우 중대한 변화다. 그동안 남··미 삼각관계로 문제를 해결하던 시대가 끝났다. 북한은 남방의 문을 닫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생존을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북방의 문이 닫히고 있고, 신남방정책도 길을 잃었다. 일부에서는 현재의 정세를 신냉전으로 해석하고, 진영을 선택하자고 주장한다. 동의하기 어렵다. 북한은 남방을 포기하고 북방에서 활로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북방을 포기하기 어렵다. 진영이 이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의 진영화는 미국 제조업의 부흥을 위해서지, 결코 진영 내 이익 조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화 시대의 종말은 복합적인 경제위기를 의미한다. 광물과 에너지 가격의 상승, 생산의 국내화에 따른 비용 상승, 그리고 국제적인 분업체계의 혼란이 만들어내는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다고 해소되지 않는다. 복합위기의 시대에 진영의 경계에 선 국가들은 균형을 잡으며 국익을 추구한다. 인도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철저하게 실리를 선택하고, 튀르키예는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서 중재 외교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적인 지정학적 중간국가들 역시 진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익을 추구한다. 우리도 진영에 갇히면, 미래가 없다. 냉전 시대의 대한민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무장지대가 남북을 가르고 세계를 가르는 분단의 단층지대로 변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한겨레 2022.09.18.

 

 

청년 빚탕감과 횡재세사이

최대 2만달러의 학자금 빚을 없애드립니다.” 지난달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일정 소득 아래 대학생·대졸자 등록금 대출을 2800여만원까지 탕감해주기로 하자, 찬반 논란에 불이 붙었다. 공화당은 대학에 못 간 노동자들과 성실하게 빚을 갚은 사람들을 역차별하는 정책이라고 공격했다. 빚 탕감으로 소비를 자극하면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전문가도 있다.

반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미국 경제규모 등을 고려할 때 빚 탕감이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은 작다며 이 정책을 옹호했다. 그는 학자금대출을 쓴 사람들이 부채의 족쇄를 벗어나면 더 나은 일자리를 얻고 소득도 는다는 증거가 있다소득 상승은 세수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간 수천만원의 등록금을 빚으로 막은 뒤 40~50대까지 상환 부담에 시달리는 수천만 중·저소득층을 돕는 일은 국가적으로 좋은 정책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크루그먼은 특히 미국에는 파산보호 절차가 있다도널드 트럼프(전 대통령) 소유 기업들은 여섯차례나 이를 이용했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많은 사업주도 정부 대출을 쓴 뒤 탕감받았다고 상기시켰다. 백악관도 학자금대출 탕감을 비난한 공화당 의원들이 사업주로서 거액의 정부 대출금 상환을 면제받았던 사례를 줄줄이 트위터에 올려 그들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미국의 학자금 탕감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기 어렵지만, 국내에서도 청년특례채무조정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이 제도는 34살 이하 저신용자에게 최대 50%까지 이자를 감면하고 상환 기간을 늘려주는 것이다. 원금 탕감도 아니고 이자를 줄여주는 정도인데도 도덕적 해이시비가 거셌다. 금융위원회가 빚투(빚내서 투자) 청년 구제를 언급한 탓이 컸다. 가상자산 등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본 청년까지 세금으로 도와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지난해 신용회복위원회 대학생 및 미취업청년 특별지원 프로그램실적을 보면 청년 채무조정자의 주된 연체 사유는 생계비 증가와 실직, 근로소득 감소였다. 투자 실패는 0.8%에 그쳤다.

국내외에서 이렇게 부채조정이 부각되는 것은 금리가 올라 상환 압박이 커지는 환경과 관련이 있다. 미국이 물가안정을 위해 금리를 계속 올리니, 따라 올리지 않으면 원화 가치가 떨어지고 외국 자금도 빠져나가므로 한국은행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국은 지난 6월 말 기준 가계부채가 1869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4%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 1년여의 기준금리 인상만으로도 주택담보대출 이자 등이 크게 오르며 한계에 몰린 채무자가 늘었다.

 

팬데믹·전쟁의 파장과 금리상승 속에 가계부채 해법을 찾으려면 횡재세논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에너지 가격이 치솟으면서 막대한 수익을 내는 정유·가스·발전회사 등에 횡재세 부과를 추진 중이다. 각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대다수가 고통받는데 누군가 그 덕에 횡재를 한다면 이익을 나눠야 한다는 논리다. 에너지기업들에서 1400억유로(195조원)를 걷어 가계·기업에 전기료·난방비 등을 보조한다는 구상이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비슷한 내용의 횡재세를 이미 도입했고, 미국도 법안 발의를 논의 중이다.

국내에서는 정유사 외에 은행을 포함한 횡재세 법안이 발의돼 있다. 지난 6월 기준 국내은행 예대금리차는 1년 전보다 0.28%포인트 커졌고, 올 상반기 이자 수익은 전년 동기보다 20% 가까이 늘었다. 기준금리 상승을 핑계로 은행들이 대출이자를 더 많이 올려 쉽게 돈을 번다는 지적이 있다. 반면 어려운 고객을 위해 이자 경감, 상환 유예 등 자발적 채무조정을 해주는 은행은 찾기 어렵다. 아티프 미안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등은 <빚으로 지은 집>에서 채무자뿐 아니라 채권자도 손실을 분담해야 가계부채 급증에 따른 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은 기준금리 상승기에 대출이자 인상 최소화로 고통을 나누고, 채무조정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이를 회피한다면 다음 처방은 횡재세 부과 등 공적 개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한겨레 2022.09.19.

 

 

감사원을 감사하라

최근 감사원은 이곳저곳에서 무리한 감사를 진행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을 야기했다. 그중에는 2020년 종합편성채널 재승인 심사 과정을 감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TV조선 등 종편 재심사에서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수정한 흔적이 있고, TV조선은 공적책임과 관련된 중점 심사항목에서 과락을 하여 조건부재승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누군가의 조작으로 TV조선이 부당하게 조건부 재승인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TV조선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재승인 심사에서도 625.13점으로 낙제점을 받아 재승인이 거부됐어야 마땅함에도 조건부 재승인을 받았던 전력이 있다. 당연히 당시 방송통신위원회가 봐주기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2020년에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2020년 재승인 심사 과정을 기록한 백서에 따르면 심사과정에서 수렴한 시청자 의견 조사에서 TV조선은 다른 종편에 비해 재승인하지 말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심사위원들이 매긴 총점은 이전보다 오히려 높게 나왔다. 2020년 종편 재승인 심사 결과는 정권의 성격과 무관하게 심사위원들이 독립적으로 판단하였음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게다가 심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주요 심사 항목에서 낙제점을 받으면 재승인을 취소할 수 있다고 밝혔던 당시 방송통신위원회는 조건부 재승인을 하여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이게 정치적 탄압의 증거인가?

 

또 점수를 수정했다고 하지만 이전에 방송사 재허가, 재승인 심사에 참여했던 심사위원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점수를 부여하고 나서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여 점수를 수정하는 사례는 으레 있는 일이다. 이전에는 수정을 하면 기존 점수표를 파기하고 새 점수표에 기록하였다. 하지만 2020년 심사 당시에는 심사과정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기존 점수에 두 줄을 그어 취소하고 그 점수표에 수정된 점수를 다시 적게 하였다고 한다. 조작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근거를 남기는 이런 절차를 마련했겠는가? 그럼에도 감사원은 당시 심사에 참여했던 위원들에게 출석을 요구하고, 출석이 어렵다고 하면 방문 조사를 감행했다. 그리고 보도에 따르면 감사원은 점수가 조작된 정황이 있다며 대검찰청에 관련 자료를 이첩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앞으로 검찰 조사도 받게 될 것이다. 감사원은 당시 전문가들이나 시민사회가 종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심사 과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방송통신위원회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 당연히 고려했어야 할 맥락은 배제하고 수정된 흔적만으로 조작 정황 결론을 내렸다. 이게 오히려 정치적 고려가 작동한 결과가 아닐까?

 

사실 이런 감사원의 행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정부나 공공기관에서는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외부 전문가들에게 심사를 맡긴다. 그런데 외부 전문가들이 독립적으로 진행한 심사도 감사원 감사 대상이 되고, 검찰 조사를 받는다면 앞으로 설사 독립적으로 공정하게 심사에 임해도 사회는 그 심사 결과를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누가 이득을 볼까? 이번 사안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에서 미뤄 짐작 가능하다. 지금 진행되는 감사가 정권과 정권에 우호적인 언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행태가 아닐까 의심하는 이유다.

 

최재해 감사원장이 지난 7월 조정훈 의원의 질문에 감사원이 국정운영을 지원하는 기관이라고 답변해서 논란이 됐을 때만 해도 질문도 이해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라고 여겼다. 그러나 감사원이 일련의 기관들을 먼지 털기 식으로 감사하는 것을 보면서, 실수가 아니라 감사원장의 본심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감사원법이 보장한 독립의 지위를 가진 헌법상의 기관에서 지원기관으로 전락한 감사원은 누가 감사해야 할까. 감사원에 국민감사라도 청구해야 할까?

김서중 성공회대 미디어콘텐츠융합자율학부 교수 경향 2022.09.19.

 

 

세계화라는 황금 구속복 벗어던진 미국

탈세계화, 세계화 후퇴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지난 30년간 우리가 경험해왔던 세계화는 끝났다고 자신한다.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기디언 래크먼도 세계화의 적들이 배회하고 있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10년 전만 해도 미국 정치에서 보호주의는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이제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움직임에서 세계화의 후퇴는 분명히 확인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 기업과 노동자를 앞세우며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는 대선 공약과 달리 전 정부가 도입한 대중국 관세도 폐지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만든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켰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선거운동에 돌입한 바이든은 연일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외친다. 그는 미국 노동자들이 미국 공장에서 만든 미국산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건설하려는 미국의 미래라고 말한다.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 근거한 자유무역은 설 자리가 없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1999<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세계화를 황금 구속복에 비유했다. 세계화를 통한 번영을 누리려면 규제 완화, 무역 자유화, 민영화, 관세 인하 등과 같은 구속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는 이제 그 구속복을 입고 있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황금 구속복을 거부한 시초는 도널드 트럼프다. 프리드먼은 건전한 글로벌 사회는 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미국만큼 모범적인 모델은 없다며 지속 가능한 세계화를 자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공장들이 신흥국으로 빠져나가자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미국 사회를 떠받치던 백인 중산층이 무너졌다. ‘러스트 벨트로 상징되는 거대한 사회적 균열이 생겼고, 트럼프는 빼앗긴 일자리를 되찾아주겠다며 그 빈틈을 파고들어 2017년 대통령이 됐다. 바이든도 트럼프 집권의 교훈을 알기에 트럼프 없는 트럼프주의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중 패권 경쟁은 보호무역과 디커플링을 추동하고 있다. 중국은 앞에선 자유무역을 강조하며 세계화의 결실을 챙기고 뒤에선 국가 주도 발전전략으로 패권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그런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은 세계화란 구속복을 벗어 던졌다. 구속복에 몸을 끼고 있는 한 정치는 경제에 예속되고 정책 자율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핵심 부품과 자재의 국산화율을 2025년까지 70%로 끌어올려 10대 핵심 산업에서 세계 선두로 올라선다는 중국제조(Made in China) 2025’ 전략을 트럼프 집권 전인 2015년 이미 발표했다. 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경제는 이제 시장 논리로만 따질 수 없는 안보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비용과 효율보다 안정과 억제가 우선 가치가 됐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도 세계화의 후퇴를 가져왔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중국의 봉쇄 정책은 세계적 물류대란을 초래했다. 서방의 제재에 맞서기 위한 러시아의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 중단 등 자원 무기화는 신뢰할 수 없는 국가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미국 입장에선 권위주의 국가와의 경제적 상호의존을 줄여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것이다.

 

세계화의 후퇴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고 숫자로도 확인된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증가하던 세계 국내총생산(GDP) 대비 무역 비중은 200861%로 정점을 찍은 뒤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은 현재의 세계 경제를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탈세계화와 비교한다. 19세기에 시작된 첫 번째 세계화는 1차 대전으로 종말을 고했고, 30% 수준이던 세계 GDP 대비 무역 비중은 2차 대전 직전 10%대 후반까지 추락했다. 크루그먼은 두 번째 탈세계화의 결과는 과거보다 훨씬 더 냉혹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세계화가 만든 우호적 환경에서 무역을 통해 성장해온 한국은 세계화 후퇴 시 직접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나라다. 미국과 중국의 공급망 블록화 등 편가르기가 노골화되면서 더 이상 안미경중노선도 통하지 않는다. 미국도 이제는 선량한 제국이 아니다. 세계 경제질서 변화의 파도를 타고 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박영환 국제부장 경향 2022.09.19.

 

 

SKT 원패스300의 함정과 망중립성

해외출장에서 인터넷을 자유롭게 쓰고 싶은 SK텔레콤 이용자들은 하루에 9000~1만원을 하는 Onepass300을 많이 써왔다. 61일부터 혜택이 확대되었다며 통지가 왔다. “변경 전: 문자메시지 이용건당 SMS 165- 변경 후: 문자메시지 기본제공. 해외에서 데이터를 이용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낸 날에만 이용요금이 청구됩니다.” 어감은 달콤하게 들리지만 요금폭탄이다. 이전에는 문자메시지가 데이터로밍 정액상품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포함되면서 전에는 문자 1건에 165원을 냈지만 이제 9000원을 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즉 하루에 문자메시지 발신을 1건만 하는 사람은 건당 요금이 54배로 늘어난다.

 

경악스러운 것은 데이터로밍 요금을 피하기 위해 기기(휴대폰)에 로밍차단 설정을 해놓아도 문자를 1건이라도 보내면 Onepass300 이용요금이 부과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 혜택확대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 특히 예기치 않게 데이터로밍이 가동되어 물게 될 종량제 과금을 피하려고 상시 Onepass300을 켜놓았던 사람들은 문자 몇 개 보냈다가 요금폭탄을 맞고 있다.

 

61일의 달콤한 통지는 요금폭탄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통지를 못 받는 사람들도 있다. 통지를 MMS(또는 긴 문자)만으로 하는데 선거기간에 무데뽀로 들어오는 문자를 피하기 위해 MMS 수신기능을 꺼놓은 사람은 아예 통지도 받지 못했다.

 

사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해외 데이터로밍 요금 자체가 없어져야 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자칭 망중립성 준수를 선도하는 이통사인 티모바일(TMobile)은 자사의 데이터플랜을 해외에서 추가비용 없이 무제한으로 쓸 수 있게 해준다. 국경을 넘을 때 신청할 것도 없고 확인할 것도 없다. 사실 티모바일 하나만 가입하면 전 세계 어디에서든 인터넷을 쓸 수 있다. 요즘 음성전화 대신 카카오톡 보이스를 쓸 거라면 가히 세계전화와 다름없다.

 

특별해보이지만 인터넷에선 예정된 혁신이다. 첫째,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인터넷에서 접속료 외에 데이터전달료는 무료. 둘째, 인터넷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상품이다. 미국에서 구입하든, 서울에서 구입하든 인터넷에 올라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인터넷 이전에는 한국전화에 가입해도 미국에 전화하려면 별도의 비용을 내야 했지만 인터넷은 어디에서 가입하든 전 세계에 연락할 수 있다. 많이 쓴다고 비용이 더 발생하지 않으니 망사업자들 간의 정산이 간단하다. 인터넷 접속료만 서로 내주면 쉽게 상대 고객을 자기 고객으로 받아들여 각자가 세계전화를 쓸 수 있게 해준다. 티모바일 정도는 아니지만 유럽 통신사들은 유럽 내 데이터로밍에 별도 비용을 받지 않는다.

 

데이터전달료는 무료인가? 인터넷에서는 모든 네트워크들이 서로 망중립성이라는 약속을 준수한다. 즉 각 네트워크가 자신을 지나는 데이터패킷이 누구에게서 누구에게로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지 관계없이 또 전달료를 요구하지 않고 착신주소에 더 가까운 이웃네트워크에 선착순으로 전달을 해준다. 각자의 고객이 수신도 하지만 발신도 할 뿐 아니라 전화나 우편처럼 일일이 전달료를 주고받으려 하다보면 거래비용이 더 커질 수 있어 서로 퉁치기로한 것이다. 전 세계 망사업자들이 모두 이런 약속을 지키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데이터전달료는 없다. 각자 인터넷과의 물리적 접속만 접속료를 내고 유지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쓰는 초고속 인터넷 상품들은 모두 접속 속도별로 가격이 정해질 뿐 데이터를 얼마를 쓰든 관계없다. 불합리한 것 같지만 TV(케이블, 지상파)UHD급 등의 고화질 영상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오지만 TV를 오래 본다고 돈을 더 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물론 무선인터넷은 기존 전화의 음성신호도 날라야 하고 일부 접속지점(AP)에 이용자들이 몰릴 경우에 발생하는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종량제로 운영되었지만 이마저도 기술의 발전과 접속용량의 확대로 유럽·미국을 중심으로 통신사들이 자발적으로 폐지하고 있다. 올해 7월 미국 상원에서는 인터넷 데이터상한제를 아예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통신3사가 과점하고 있는 시장상황 속에서 티모바일 같은 혁신은 보이지 않고 1인당 통신비용은 OECD 최고 수준이다. 인터넷에선 멸종되어가는 데이터로밍 요금제를 거꾸로 개악하면서 소비자를 골탕 먹인다. 게다가 국회는 인터넷을 쓴 만큼 낸다는 전화시대의 종량제에 가둘 망이용료법안을 발의하였다. 오픈넷 홈페이지에서 반대서명운동에 참여해달라.

박경신 고려대 교수·오픈넷 이사 경향 2022.09.19.

 

 

미국, 결국 깡패국가로 가는가

트럼프와 달리 바이든 대통령 시대가 열리면서 미국은 자국 이익만 중시하는 것이 아닌 국제질서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했다. 실제로 바이든은 집권 초기 트럼프가 탈퇴한 파리기후협약과 세계보건기구에 재가입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와 기후변화 위기에 지도력을 발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트럼프와 다름없는 미국 우선주의, 미국 제일주의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이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사인함으로써 내년부터 판매되는 차량은 모두 미국 내에서 생산된 부품만을 사용해야만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법규화 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9일과 12일에는 새로운 바이 아메리칸법에 서명하였다. 미국 내에 건설하는 반도체 생산시설에 거액의 보조금을 주는 칩과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그리고 국내 개발과 생산을 우대하는 국가 생명공학 및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NBBI)’ 행정명령을 승인한 것이다. 향후 자동차산업과 반도체 그리고 바이오산업까지 모두 미국 내 생산시설과 제품생산을 유도함으로써 일자리 창출을 하겠다는 꿈을 실현하는 내용들이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응하겠다는 논리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산업을 경쟁 없이 미국에서 생산하고 미국산만을 사라는 정책이다. 2016년 대선에서 공화당에 패배한 민주당은 왜 미국인은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친 트럼프에게 열광하는가를 분석했다. 특히 현 정부의 국가안보 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은 당시의 패배를 중국에 생산을 의존하는 방식의 세계화로 일자리를 잃은 미국 중산층의 실망에 있다고 판단하고 첨단기술의 강화와 해외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미국의 강력한 외교력을 이용하자는 안을 구상하였다. ,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타국의 주요산업 생산시설을 모두 미국 내로 옮겨 생산케 하는 정교한 미국 제일주의의 실천이었다.

 

자동차, 배터리, 반도체, 생명 바이오산업 등 향후 미래 최고의 부가가치가 창출될 수 있는 영역들을 모두 미국이 가져가겠다는 이 바이든 정부의 구상은 트럼프 시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더 철저한 아메리카 퍼스트이다. 다른 국가에서 힘들여 개발해 놓은 산업들을 우격다짐으로 자국 내에 몰아넣겠다는 발상의 오만함은 깡패국가(rogue state)의 모습 그 자체이다. 벌써 미국 내에서도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1920년 상선법을 제정해 미국 내에서 상품유통의 배를 모두 미국 상선으로 제한하자 오히려 해상이용이 줄었다는 사례를 들면서 경쟁을 통한 기술개발과 혁신만이 일자리와 생산성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임을 지적하고 있다.

 

동맹을 배신하고 자신들의 배만 부리겠다는 심보로는 결코 세계의 지도 국가가 될 수 없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혼자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며 함께 가는 길의 아름다움을 역설했다. 누가 일갈을 해 주어야 하는데 마침 윤 대통령이 미국을 간다니 제발 대국다운 자세를 보이라고 큰소리 좀 치고 올 수 없을까.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경기신문 2022.09.19.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드러낸 한국의 정책역량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국내 반응은 배신이라는 한 단어로 모아지는 듯하다. 때로는 동맹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살벌한 표현도 들린다. 친환경 전기차에 주어지는 7500달러 보조금에서 당장 한국산 차가 배제되게 생겼고, 이것은 결국 한국산 전기차의 가격이 1000만원이나 비싸지는 셈이 될 것이라서 미국 내 전기차 판매 2위인 현대차·기아는 물론이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 전체에도 커다란 부담인 것이 사실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미·중 대립에서 한국은 분명하게 미국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조 바이든 대통령 방한을 전후해 현대차 100억달러와 삼성전자 170억달러 등 한국 기업들의 대대적인 미국 내 투자 약속까지 이어진 직후임을 감안하면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야당은 정부의 무능을 조롱하고 나섰고, 영국을 거쳐 미국을 방문 예정인 윤 대통령으로서는 빈손으로 귀국할 경우 또 한 번의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됐다.

 

그런데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인식은 앞에 요약한 우리의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전기차 보조금에 대한 법이라면, 미국 내에서 이 법은 바이든의 대선공약이었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정책의 축소판이다. 전체 법안은 법인세 인상, 처방약 가격 인하, 국세청(IRS) 개혁, 건강보험 보조금 연장,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투자 등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중시하는 전기차 보조금은 다섯 번째 항목의 한 부분일 뿐, 전체적으로는 중산층을 위한 대대적인 사회투자 프로그램이다. 전기차 보조금은 외국 기업들로 하여금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할 인센티브를 높이기 때문에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중산층 보호라는 반박하기 힘든 사회적 명분에 슬쩍 얹혀 있는 모양새다. 11월 미국 중간선거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빠른 시일 안에 이 명분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막상 인플레이션 잡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거나 심지어 역효과일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전망이 수없이 나와 있으나 이 또한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분위기다.

 

국제사회에서 이 법은 첫째로 미국이 마침내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한 국제적 공동 대응에 적극 동참한다는 뜻이고, 둘째로 이미 안보 무기가 되어버린 국제적 공급망 재편에 대대적으로 나선다는 뜻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했던 파리 기후변화협약에 다시 가입했고 이번에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청정에너지 산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함으로써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50~52% 감축한다는 파리 협약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차피 전기차 생산과 무관한 대다수 국가들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이다. 급속하게 팽창해온 중국의 일방주의적 태도와 산업 기밀 유출, 코로나19로 인한 국제 공급망 마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난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등은 세계 각국이 동맹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재편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피해를 보게 된 EU, 일본, 브라질은 배신이나 등에 칼같은 자극적 반응보다는 WTO를 통한 조용한 문제 해결 쪽으로 방향을 잡는 모양새다.

 

남는 것은 대한민국의 장기적 정책역량에 대한 걱정이다. 지금 겪는 어려움은 거의 다 예측하고 있었던 것들이다. 팬데믹이 처음 시작됐던 3년 전에 이미 전 세계 전문가들은 경제의 블록화와 자유무역의 퇴조, 세계적인 유동성 과잉 공급에 따른 대대적 인플레이션과 부채 쓰나미를 한목소리로 예측했다. 한국의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이 미국의 정책금리 인상을 끌어낼 것이고, 이것은 각국 정부의 이자비용을 높이면서 재정여력을 줄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확장적 재정정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이미 여러 전문가들이 내놓고 있었다. 지금 겪는 어려움은 이미 2~3년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던 것인데, 문재인 정부는 재정확장 일변도의 길을 갔고 윤석열 정부는 수습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장기적 정책역량 부족이 국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데, ‘배신이니 등에 칼이니 하는 자극적 언사가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정쟁이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는 정책을 근시안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장기적 정책역량 복원에 힘써야 할 때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22.09.20.

 

 

민주노총만 지켜주는 노란봉투법?

노란봉투법이 다시 정국의 중심에 섰다.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에 대해 막대한 규모의 손해배상을 무분별하게 청구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이다. 2015년 처음 국회에서 발의된 이후 7년간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가 미뤄온 사이에 또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야 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이 받은 액수는 470억원, 2014년 쌍용차 노동자들이 받았던 47억원의 정확히 10배다.

 

이런 일 막자고 발의한 법안을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인 성일종 의원은 민주노총 방탄법이라고 불렀다. 참 악의적인 표현인데, 성 의원은 왜 노란봉투법을 민주노총 방탄법이라고 불렀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도 번역된다. 왜 민주노총만이 노란봉투법의 보호를 받는가? 이렇게 질문을 바꿔 생각해 보니 성 의원의 악의 섞인 표현이 민주노총에 대한 상찬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화물·택배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을 노동관계법상 근로자로 포함시키고, 하청·파견·도급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사실상 지배력을 행사하는 원청에 사용자성을 명확히 부여하는 내용이다. 이런 법이 민주노총만을 보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지난해 2월 기준으로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중 30%가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한다. 화물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화물연대는 이미 2002년에 출범했고, 택배노조는 2017년 출범해 조직을 넓히고 있다. 이 법이 어째서 민주노총 방탄법이 될 수밖에 없는지 분명해 보인다. 정규직 노동자에 그치지 않고 보호망 바깥에 놓인 이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조직해온 것이 민주노총이라는 얘기다.

 

쟁의행위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노란봉투법의 두 번째 내용이다. 현행법상 임금·근로시간·복지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국한된 노동쟁의의 대상을 근로조건 및 노동관계 당사자 사이의 주장으로 확대하겠다는 것. 이렇게 되면 정리해고 철회나 노동조합 활동 보장,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요구 같은 의제들이 쟁의행위의 대상이 될 여지가 생긴다. 예컨대 철도 민영화 저지 투쟁과 같이 공기업의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는 파업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내용이 민주노총에만 해당된다면 그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소위 밥그릇 싸움으로 불리는 임금 문제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 전체의 권리 확대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촉구를 위해 파업도 불사하는 것이 민주노총이라는 얘기 아닌가. 그러니 이것이 민주노총을 향한 상찬이 아니고 무엇일까.

 

노란봉투법의 마지막 내용은 손해배상 청구범위를 제한하고 청구액의 상한선을 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어째서 민주노총을 위한 방패가 되는가? 손해배상 청구가 사실상 전략적 봉쇄소송으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막대한 손해배상 청구로 노동조합 활동을 억제하고, 손해배상 철회를 조건으로 조합 탈퇴를 유도하며, 이 사건을 지켜보는 다른 노동자들로하여금 쟁의행위를 망설이게 한다. 이 정도 수준의 압박을 가해야만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조직이 민주노총이라면, 그 자주성과 비타협성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성 의원은 폄하의 의도로 민주노총 방탄법이라고 했을 테지만, 그 명명은 역의 방향으로 어떤 진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간 보수언론과 보수정당이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성해 온 대공장 정규직의 밥그릇 지키기라는 편견과는 영 딴판이다. 물론 노동조합의 첫 번째 목적이 조합원의 권익 증진에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부당하다고 비난받을 이유도 별로 없지만,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단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폭넓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다. 노란봉투법이 그 역할을 더할 수 있는 것이라면 역시 서둘러 제정되는 것이 좋겠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경향 2022.09.20.

 

 

미국에 농락당하는 윤석열식 외교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처음부터 좀 튀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지난해 9월 백악관이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에 고객 정보를 내놓을 것을 요구할 때 총대를 멨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협조하지 않으면 강제로 수집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올해 들어서도 그는 대중국 견제와 미국 제조업 부활이라는 바이든 책략의 사실상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수출통제 리스트에 중국 기업 100개 이상을 추가하고,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창설에 앞장섰다. 한술 더 떠 한국 투자를 검토하던 대만 반도체 기업 글로벌웨이퍼스를 중간에 가로채기도 했다. 그는 올해 6월 이 회사 대표와 1시간 동안 전화통화를 통해 투자처를 미국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로드아일랜드 주지사 출신으로 대권 야망도 갖고 있다는 그는 자유무역을 주창해온 기존 상무장관들과는 결이 많이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어찌됐든 바이든 대통령에겐 스타 장관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우리나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나 통상교섭본부장은 존재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최근 미국의 한국산 전기차 차별대우 문제가 불거진 뒤에야 뒷북 대응하느라 분주하다. 이에 대해 산업부 고위관계자는 300페이지가 넘는 법안(‘인플레 감축법’)을 분석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유럽연합(EU)·일본도 비슷한 처지라는 점을 거론하며 할 만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조항은 이미 지난해부터 논란이 됐던 터라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사태 파악에 하루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 내 전기차 판매 2위로 순위가 뒤처진 유럽연합·일본에 견줘 피해가 훨씬 크다. 피해가 큰 당사국이 가장 열심히 뛰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 지난 727일 법안 최종안이 공개됐을 때 신속히 파악해 국내에 보고했다면, 때마침 방한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실이 혼돈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일선 부처들도 기강이 해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사이 현대·기아차는 바이든의 투자 요청에 무려 100억달러 이상을 약속하면서도 홀대를 당하는 처지다. 현대·기아차의 이런 투자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 수혜를 전제로 계획한 것으로 알려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스타 장관들이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바이든의 스타 장관에게 판판이 깨지는 형국이다.

 

문제는 기강 해이 차원을 넘어 현 정부에 과연 이 난국을 헤쳐나갈 전략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미국은 동맹·우방국들을 경제안보라는 기치 하에 자신이 주도하는 경제블록 안에 묶어 패권 도전국인 중국을 약화시키는 한편으로 자국 제조업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우리 같은 개방형 통상국가엔 이런 보호무역주의가 매우 불리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미-중간 첨단기술 분야 교역이 중단되는 기술 디커플링(분리)’이 현실화할 경우 미·중과 한국·일본·유럽연합·인도 등 6개국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추정했다. 우리는 미-중 디커플링 시에도 두 경제블록과 모두 교역이 허용될 경우 국내총생산(GDP)이 소폭 증가했다. 우리가 중국을 대체하는 어부지리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같은 블록 내에서만 교역이 허용될 경우엔 국내총생산 감소율이 6%에 달해 충격이 경쟁국 중에서 가장 컸다. 감소 규모가 일본의 2배나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일찌기 논두렁론으로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안보 면에서는 미국이 중요하고, 경제는 양쪽 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도랑에 든 송아지와 마찬가지입니다. 양쪽 언덕의 풀을 뜯어 먹거든요. 주변에 있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다 활용해야 해요.” 지금 같은 강대국간 대립 시기에는 논두렁론이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지만 기회는 열려 있다.

 

1980년대 중후반 미-일간 산업패권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미국은 당시 자국 산업을 추월하려던 일본을 주저앉히고자 플라자 합의와 미-일 반도체협정을 맺었다. 어찌보면 지금과 유사한 면이 있다. 당시 우리 기업들은 일본 기업들이 주춤하는 사이 새롭게 열린 중국 시장을 발판삼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의 미-중 대립 시기도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활로를 찾을 수 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사다리 걷어차기시도는 중국의 무서운 추격을 지연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이런 기회에 새로운 성장동력인 동남아·서남아시아 시장을 개척하는 등 세계시장의 입지를 넓여나가야 할 것이다. -중 대립은 장기전을 띨 공산이 크기 때문에 초기 단계에서 룰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기업들의 지위가 크게 위협받을 것이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미국 시장에서의 공정한 대우와 대중국 시장 접근권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더이상 미국에 농락당해서는 안 된다

박현 | 논설위원 한겨레 2022.09.20.

 

 

유엔서도 공허한 자유론만 외친 아마추어 외교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주 초 외국 순방에 나서기 전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싸잡아 비난했다. 남북정상회담은 정치쇼였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한 친구에게만 사로잡힌 학생 같아 보였다고 했다. 외국 유력 언론에 전직 대통령과 우리 외교를 마구잡이로 폄하한 것이다. ‘제 얼굴에 침 뱉기인 셈인데, 순방 전부터 사고를 쳤다.

 

모든 정상회담은 화해·협력 또는 갈등까지 내보이는 정치적 보여주기다. 그 시점에서 최선의 절충일 뿐이다. 윤 대통령 말대로라면 남북정상회담은 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 문 전 대통령의 역지사지 외교한 친구에게만 사로잡혔다고 한 건 유치하기까지 하다. 문제 발언들이 사전에 준비됐다면 정말 큰일이고, 윤 대통령이 평소 생각을 내뱉었다면 외교 초보임을 자인한 꼴이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조문 무산은 준비 안 된 외교의 실패다. 경위야 어찌 됐든 런던엔 안 가느니만 못하게 됐다. 인터뷰 발언이나 조문 실패는 웬만하면 벌어지지 않을 일들, 제대로 준비했다면 생기지 않을 일들이라는 점에서 심각하다.

 

윤 대통령이 유엔 총회 연설에서 자유와 가치 연대를 또다시 역설한 건 공허하기 짝이 없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건 여기서도 적용된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동북아의 평화에 관한 소신과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국제사회의 협력을 촉구했어야 했다. 유엔 연설은 보편성에 입각해 우리 이야기를 설파하는 자리이지 추상적 자유론을 늘어놓는 곳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와 세계시민 연대를 얘기했으니 유엔에 가서 알리는 게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자기중심적 생각이다. 취임사는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항목을 중심으로 준비된 내용을 정리해 내놓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엔 연설은 국제사회가 한국 대통령에게 듣고 싶은 주제를 얘기하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유엔에서 어떤 식으로든 북한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룬 이유다.

 

윤 대통령이 외교에서 준비가 너무 안 됐거나 핵심을 놓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유엔 연설문은 다각도로 검토됐을 텐데 윤 대통령 특유의 아마추어식 접근이 유지됐다는 건 심각한 오작동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일 정상회담을 두고도 미숙함을 드러냈다. 대통령실이 공식 브리핑을 통해 양자회담 개최를 먼저 공개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꼭 드러내고 싶었다면 익명으로 흘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초입부터 꼬인 이번 순방은 참사 수준의 실수들이 이어지면서 현재로선 낙제점에 가깝다.

현 정부 외교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윤 대통령이 면담하지 않은 건 일종의 미국 편향에 대한 균형추로서 의미 있는 절제 외교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담대한 구상이나 남북 이산가족 협상 제의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담대한 구상은 작명도 이상하고 창의적인 구석을 찾기도 어렵다. 한반도 상황이 크게 변했는데 이명박 정부의 판박이로는 요령부득이다. 북한더러 말 잘 들으면 떡 하나 더 준다는 식의 접근일 뿐이다. 북한의 이해와 요구에 기초한 타협, 공생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문 전 대통령이 남북 군사합의 4돌을 맞아 평화의 길을 역설한 건 이상적이면서도 고답적이다. 남북한이 이전의 모든 합의를 존중하면서 역지사지의 대화를 할 것을 촉구했다. 원론적으로 맞지만 현실에서 얼마나 유효할지 의문이다.

 

한반도 상황은 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 이후 30년 넘게 세월이 흐르면서 근본적으로 변했다. 북한은 핵무기 사용을 법으로 정한 사실상의 핵 보유 국가가 됐고, -중 대결은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돼가고 있다. 중국이 소련처럼 해체되지 않고 건재한 한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한 모델, 즉 독일 모델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남북은 앞으로 많은 세월 다른 나라처럼 따로 또 같이살아야 할지 모른다.

 

윤석열 정부가 진보, 보수 정부 35년의 한계를 넘어서는, 조금은 진전된 대북정책을 내놓기를 바랐다. 상황이 변했고 세월의 무게도 더해졌기 때문이다. 보수 정부는 원점에서 모든 옵션을 검토할 수 있는 여지도 더 많다.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다르다.

현 정부에서 보수의 창의적인 대북 이니셔티브를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일 것 같다. 현재로선 실수 없이 기본이라도 해서 국제사회에서 망신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백기철ㅣ 편집인 한겨레 2022.09.21.

 

 

금리 인상의 후폭풍

멀리는 닷컴버블, 가까이는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저금리 시대를 살았다.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렸고 이도 모자라 국채를 사들이는 방식(양적완화)으로 시중에 돈을 풀었다. 그래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자 마이너스 금리까지 출현했다. 통화량이 늘면 물가가 오른다는 경제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저금리 트렌드가 굳어지는 것처럼 보인 시기였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것이다. 주요 선진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10%를 넘나들고 있다. 미국은 지난 69.1%를 기록했다. 41년 만에 최고다. 유로존은 9.1%(8), 영국은 10.1%(7)에 달했다. 신흥국가들 중에는 물가가 수십% 오른 나라도 많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는 국가경제를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다. 저물가가 아닌 고물가가 고민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물가 급등의 주범은 그동안 시장에 과도하게 풀린 돈이다. 금융위기 이후 공급된 유동성에다 코로나19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찍어낸 결과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석유·천연가스·곡물 공급난과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봉쇄조치 등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한국 경제는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파고에서 안전할까. 세계화로 인해 세계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국제 경제의 변화는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수출 중심 경제인 한국은 외부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한국 경제를 진단하기 위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 경제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제어하는 선제적인 대응에 실패했다. 지난해 초 미국에서는 인플레이션 경고가 이어졌다. 그러나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안이하게 대처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위험 경고를 코로나19 봉쇄에 따른 일시적 물가불안이라며 무시했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다루기 힘든 상황이 됐다.

 

인플레이션의 불을 끄는 최선책은 금리 인상이다. 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꺾어야 한다. 그런데 연준은 올해 중반이 되어서야 불끄기에 나섰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0.25%포인트에서 0.5%포인트, 0.75%포인트로 인상폭을 확대했다. 이달 초 발표된 8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예상보다 높자 이른바 울트라스텝(한번에 1.0%포인트 인상)에 나설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21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는 최소한 0.75%포인트 인상이 확정적이다.

 

미국의 급속한 금리 인상은 세계 경제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안전자산으로 수요가 몰리고 있는 데다 금리까지 오르면서 달러화 가치가 급등하고 있다. 각국 통화 가운데 가장 비싼 킹 달러가 됐다. 이례적인 강달러는 유럽과 신흥국에 인플레이션과 금융위기를, 미국에는 해외투자 이익 감소를 부르고 있다. 한국도 무풍지대는 아니다. 올 들어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다. 연초 1193원에서 출발해 1400원을 넘보고 있다. 외환보유액은 연초 4615억달러에서 4364억달러(8월 기준)로 감소했다. 달러화 유출을 막으려면 한국도 금리를 올려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현재 미국 중앙은행의 기준금리는 연 2.5%. 한국과 동일하다. 미국은 연말까지 금리를 최고 4.5%까지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달러 유출을 막기 위해 미국 수준까지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가계부채는 18694000억원에 달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금리 인상은 가계경제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과 같다. 한국은행은 금리를 올릴 수도 안 올릴 수도 없는 고민에 빠졌다.

 

금리를 인상해도 문제는 남는다. 금리 인상은 경기침체로 이어진다.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정부는 경기침체 없는 금리 인상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대부분 실패했다. 1980년 당시 폴 볼커 연준 의장은 오일쇼크 이후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10% 수준이던 금리를 22%까지 올렸다. 볼커 전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잠재웠다. 그러나 침체로 이어지며 경기마저 잠들게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을 기대한다. 그건 헛된 꿈일 수 있다. 한국 경제는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 길 끝에는 고난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

박종성 논설위원 경향 2022.09.21.

 

 

복합위기로 치닫는 경제와 무능한 정부

·달러 환율이 한 달 새 100원가량 폭등했다. 조만간 달러당 1400원대에 진입할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지난달 0.25%포인트 인상해 연 2.25%인 기준금리는 연말까지 3% 이상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7%로 여전히 높은 편인데, 인상 대기 중인 품목이 적지 않다. ‘3가 뉴노멀로 자리 잡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복합위기, 퍼펙트 스톰, 스태그플레이션 등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용어가 등장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예측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올해 2.8%, 내년 2.2%.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각각 5.2%, 3.9%로 전망했다. 성장률보다 물가가 더 높다면 성장해도 소용이 없다. 내년 물가가 안정을 찾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전기와 가스는 원가가 상승한 만큼 요금이 인상되지 않아 언제든 오를 수 있다. 가공식품 가격도 줄줄이 오르고 있다. ‘3가 맞물려 금융·실물 경제를 악화시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야 한다.

 

부채는 한국 경제의 가장 취약한 고리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올해 1분기 세계 부채 모니터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4.3%였다. 조사 대상 36개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가계와 기업, 정부가 1년간 생산한 부가가치를 쏟아부어도 가계빚에 못 미친다. OECD 분석 결과 지난해 기준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6.6%였다. 세금과 보험료 등을 제외하고 쓸 수 있는 돈을 2년간 모아야 빚을 갚을 수 있다.

 

글로벌 금리의 기준이 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연말까지 기준금리를 4%대로 상향할 것으로 보인다. 같은 폭은 아니어도 한국 역시 따라 올릴 수밖에 없다. 대출금리가 올라가면 소득에 비해 대출이 많은 가계나 기업은 원리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금융기관 3곳 이상에 빚을 낸 다중채무자는 450만명이 넘는데, 1인당 평균 13269만원을 빚지고 있다. 금리는 뜀박질하는데 고물가로 실질소득 감소까지 겹친다면 빚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취약 대출자가 속출할 수 있다. 채무불이행이 급증하면 금융기관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부동산과 증시마저 급락할 경우 금융시장은 말 그대로 패닉에 빠지게 된다.

 

2000년 이후 월평균 환율 고점은 금융위기 당시인 20093월의 1453.35원이다. 환율은 지난 16일 장중 1399원까지 치솟아 최고점 턱밑까지 이르렀다. 정부는 외환보유액 등 대외건전성 지표가 안정적이어서 과거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재현 가능성은 낮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원화가치 하락(환율 상승) 속도가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는 전문가들의 경고와는 결이 다르다.

 

원화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이 늘어 무역수지 흑자가 커지고 외환보유액도 증가해야 하는데 현실은 반대다. 4월부터 5개월 연속 기록했던 무역적자는 9월까지 이어질 공산이 크다. 물가 불안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외환보유액은 9월 현재 43643000만달러로 6개월 새 5.5% 줄었다. 에너지와 곡물 수입 가격이 고공행진을 한 데다, 한국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진 탓이다. 성장과 수출을 주도해온 반도체 산업은 최근 가동률이 떨어지고 재고는 늘어나는 등 둔화 움직임이 뚜렷하다.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많은 전문가들은 내년 상반기를 경기침체 저점으로 꼽는다. 얼마나 더 나빠질지 알 수 없다. 명백한 사실은 형편이 어려운 가계와 기업일수록 고통이 크다는 점이다. 3고 복합위기는 실질소득 감소와 자산거품 붕괴를 초래한다. 증시와 집값은 계속 떨어질 것이다. 한계상황에 내몰린 가계와 기업은 도산하고, 일자리를 잃는 사람도 크게 늘어난다. 취약계층은 고난의 시기를 버텨야 한다. 희망이 사라진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과거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는 정부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증명했다. 그럼에도 비빌 언덕은 정부뿐이다. ‘선제적 위기 대응태세’ ‘모니터링 강화’ ‘비상계획 검토등 위기 때마다 반복해온 앵무새 같은 다짐은 그만두기 바란다. 시민을 안심시킬 대책을 내놔야 한다. 물가와 외환시장을 안정시킬 정책이 시급하다. 취약계층에 대한 안전망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 틈바구니에서의 생존 전략도 필요하다. 과거 위기 때마다 역할을 했던 민간 네트워크를 총동원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 중이다. 통화 스와프든 한국산 전기차 보조금이든 뭐라도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길 기대한다.

안호기 논설위원 경향 2022.09.22.

 

 

지경학 시대의 위험과 기회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공세가 본격화되고 있다. 반도체와 전기차·배터리, 바이오 등 핵심 전략품목에 대한 자국 내 생산 규제에다 외국인투자와 해외투자에 대해서도 안보 위험을 들어 기술 규제에 나선 것이다. 물론 주 타깃은 중국이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대내 정치용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패권주의 야심을 지닌 권위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동맹을 규합하고 있지만, 실상은 중국식의 패권적 산업정책을 답습하는 건 아닌지 우려도 크다.

 

이처럼 자국 또는 자기 동맹의 정치적, 외교적, 안보적 목적을 위해 경제적 수단을 활용하는 현상에 주목하는 게 이른바 지경학(geo-economics)’이다. 사실 그동안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패권전쟁이 격화되면서 지정학의 귀환이 종종 이슈화되어 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처럼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빚은 경우도 있지만, 주요 열강 간의 지정학적 갈등은 대체로 지경학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전략에 맞선 중국의 일대일로가 단적인 예이고, ·중 무역전쟁이나 러시아 침공에 맞선 서방의 경제제재 등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초 탈냉전기에 돌입하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유교역 등 세계화의 확산이 국가 간, 지역 간 상호의존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지정학적 갈등을 막고 공동 번영을 도모할 버팀목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점차 이러한 상호의존성의 비대칭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수요와 공급, 승자와 패자, 주도자와 추종자 간에 불평등이 커지고, 나아가 복잡한 공급사슬의 하중과 파열에 따른 연쇄적인 충격 위험이 부각된 탓이다. 이제는 오히려 비대칭적인 상호의존성을 지정학적 목적에 맞추어 무기화하거나, 역으로 이처럼 무기화된 상호의존성에 맞서 대비 태세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진정 지경학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최근의 양상에 대해 탈냉전 시대에 세상을 풍미하던 세계화 혹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군사안보적 차원의 지정학이 우선시되던 냉전 시대가 부활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크다. 코로나19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계기로 핵심 자재나 원자재의 공급망 붕괴에 따른 위험이 부각되면서 일반적인 경제 논리에 안보 논리가 합세하는 모습이다. 효율성보다는 회복탄력성에 관심이 커지면서 자국의 안정적인 공급망이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와 같은 지경학적 논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계화는 지경학적 대결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그간의 세계화를 주도했던 국제분업체계 혹은 글로벌가치사슬(GVC)은 이제 안보 논리가 우선시되는 신뢰가치사슬’(TVC)로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경학적 세계화가 얼마나 안정적일지는 불확실하다. 트럼프나 바이든처럼 자국 우선주의가 앞서고, 브렉시트처럼 분리주의, 고립주의 등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전쟁이나 안보 위협을 억제하던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흔들리고 뒤틀리면서 언제라도 우발적 충돌이나 통제 불가능한 갈등이 발생할 위험이 커진다. 오히려 냉전기처럼 세상의 양분(혹은 3세계를 포함하여 삼분) 관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20세기 초 1차 세계화 이후의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혼돈이 더욱 현실적인 악몽으로 어른거린다.

 

지경학의 득세에 대해 우리도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사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이 깊이 각인된 우리로서는 21세기 패권을 겨루는 미·중 양강의 틈새에 끼인 처지가 실로 갑갑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G20 실험에서 확인했듯이, 역설적으로 균형자나 중재자로서 새로운 가치나 기회를 타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한 세계화와 상호의존의 양상은 지경학적 전환하에서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재화교역이 위축되고 제조업 공급망도 뒤틀리고 있지만, 우리는 새로운 다자간 국제분업구조의 형성 과정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한편 데이터나 디지털 혁신에 기반한 중간서비스의 교역이나 가치사슬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언제나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한 법이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 경향 2022.09.22.

 

 

파트타임 기후활동가 어때요

기후위기 인식과 기후행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을 너무 믿거나 의지하지는 말아야 한다.

 

첫째는 기후과학자들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가장 많은 데이터와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이며, 유엔 기후체제의 중요한 한 축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의 구성원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기후변화의 추세를 전망하고 해법의 얼개를 제시해온 공로가 크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확률의 숫자들은 기후위기를 우리에게 충분히 전달해주지 못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들 다수는 과학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방법론만을 사용하고 증명 가능한 결과만을 말한다. 하지만 현실의 기후위기는 그것보다 빨리 그리고 크게 다가오고 있다.

 

둘째는 언론인들이다. 그들은 홍수와 가뭄 같은 기후위기의 현장을 전하며 때로는 기후난민의 비극과 기후 불평등을 고발한다. 그러나 이 위기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이 위기에 맞서려면 어떤 체계적 변화가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언론은 드물다. 가십성 기후재난 보도와 착한 기후행동 소개 사이를 널뛰기하면서 클릭수가 나올 만한 기사를 만드는 데에 몰두한다.

 

셋째는 정치인들이다. 지구온난화를 저지하고 생명들을 살릴 수 있는 중요한 제도를 만들고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 다수는 자신의 4년 임기 동안 다음 선거에 표가 될 사업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2050년 배출제로는 너무 먼 일이고, 국방 예산이나 토건개발 프로젝트를 줄여 기후위기 대응에 돌린다는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넷째는 환경운동가들이다. 보잘것없는 급여에 과로를 감수하며 환경 현장을 누비고 기후 캠페인을 준비하는 노고를 감당하고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해오던 방식의 활동 이상을 감행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반응할 수 있고 후원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 조직의 대표단이 수용할 수 있는 사업을 기획해야 한다. 그러나 기후 붕괴의 현실은 우리 모두 잘하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에는 이런 캐릭터들이 모두 등장한다. 기후위기를 은유하는 혜성이 지구로 다가오지만 과학자는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하고 언론인들은 너무 심각한 얘기는 그만하자고 하며 정치인들은 책임을 회피하거나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환경운동가들은 무력감에 좌절한다.

 

물론, 이런 답답한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여러 기후학자, 언론인, 정치인, 환경운동가들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2019년 기후행동 이후 적지 않은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너무 부족하다. 한국에서 필요한 기후행동의 티핑포인트는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바로 우리의 일임을 확인하자. 우리는 나름대로 기후과학자이고 기후철학자이며 기후시민이며, 파트타임으로 기후활동가가 될 수 있다. 그럴 때 전문가와 정치인 그리고 환경운동가들도 변화할 것이다.

 

그러니, 924일 토요일 오후 서울광장으로 모이자. 기후정의행진이 시작된다.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경향 2022.09.23.

 

 

편리의 대가와 9·24 기후정의행진

#장면1: 조용한 마을에 포클레인 기계 소리 요란하다. 느닷없이 산과 언덕이 사라진다. 아파트 신축 간판도 내걸린다. 숲과 논밭 대신 시멘트 덩어리 고층 건물이 빼곡히 선다. 지하주차장에서 집까지 엘리베이터가 오간다. 비밀번호를 모르는 외부인은 접근금지! 고급 아파트일수록 추위나 더위, 자연을 철저히 차단, 깔끔하다. 운 좋으면 아파트 시세가 해마다 쑥쑥 오른다. 편리하면서도 투자가치 높은 아파트, 참 멋진 세상!

#장면2: 스마트폰으로 쿠팡이나 아마존 등 웹사이트를 검색한다. 비슷한 물품 중 가격비교표를 보고 가성비좋은 걸 고른다. 마침내 사고 싶은 상품을 선택한 뒤 신용카드로 결제한다. 하루나 이틀 뒤 택배차가 날라준다. 박스 속엔 해당 상품이 포장지로 잘 싸여 있다. 쓰레기는 분리수거만 하면 끝! 선택의 자유, 참 편한 세상!

 

#장면3: 친구들과 비행기를 타고 동남아 여행을 한다. 여행사가 만든 패키지상품이라 내용도 알차다. 특산물 쇼핑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제주 여행과 비교해도 그리 비싸지 않다. ‘한류분위기 덕인지 한국 돈이 통하기도 한다. 은근한 자부심! 가이드에 따라선 현지 전통시장 구경 뒤 특별요리까지 즐긴다. 돈이 주는 자유, 참 좋은 세상!

그러나 이 그럴듯한 상품, 화폐, 자본의 세상도 결코 공짜가 아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과정에서 자원과 에너지가 얼마나 낭비되며,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를 부르는 온실가스는 오죽 많은가? 대량폐기 쓰레기는 어딘가 사라져 어머니 대지를 괴롭히고 있으리.

편리함의 대가는 따질수록 어마무시하다. 겉보기에 깔끔·편리해도 아파트는 환경호르몬과 라돈 검출 위험이 있고 이웃·자연까지 분리한다. 터 조성 과정부터 논밭과 숲, 산을 없앤다. 이렇게 야생동물 서식지를 파괴한 결과가 코로나19 사태 아닌가? 또 편리한 인터넷 마케팅, 플랫폼시장, 택배회사, 해외관광과 여행, 자동차 대중화 등은 모두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와 연동해 기후위기를 촉진한다. 비행기 한대는 자동차 3천대분의 온실가스를 뿜는다. 많은 학자가 2050년을 인류 생존의 마지노선이라 했다. 기후변화 정부간 협의체(IPCC) 최근 보고서는 이걸 2040년으로 당겼다. 그간 온 세상이 잘살겠다고 아등바등 달려왔는데, 그 결과가 인류 생존위기라니, 근원적 자기모순이다. 노동 역시 자본과 공범 신세다. 편리함의 대가가 우리 자신의 존재 위기라니!

 

30대 때 약 10년 동안 아파트에 살았다. 만사 편리했지만 늘 마음속엔 이게 아닌데하는 느낌이 있었다. 농협에서 주관한 주말 텃밭을 7평 남짓 일구며 서서히 수도권 탈출을 꿈꿨다. 1999년 충남 조치원 시골마을에 전통 살림집을 짓고 아이 셋을 키웠다. 벌레에게 물리고 풀과 싸우면서도 자연 속 삶에 감동했다. 깔끔한 수세식 화장실 대신 소박한 생태 뒷간을 쓰면서 물 낭비, 전기 낭비 없이 오히려 내 똥과 오줌으로 텃밭 퇴비도 만드니 완전히 딴 세상이다. 최근 하동으로 이사했지만, 여전히 생태 뒷간을 쓴다. 이삿짐 팀장도 이사 경력 10년에 화장실을 싣는 경우는 처음이라 했다. 시골생활의 또 다른 맛은 나날이 변하는 텃밭 작물, 나무, 산과 하늘, 바람을 통해 삶의 변화무쌍함을 직접 느끼는 것! 살아 있음의 느낌이다.

1987<중독 사회>를 쓰기 전 미국의 앤 윌슨 섀프 박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노인을 만났다. “당신네 백인들은 수백년 전에 과학기술의 길로 나아가기를 결정했잖소? 그런데 그렇게 하면 분명 이 지구가 망가짐을 알지 않소? 바라건대 너무 늦기 전에 이 점을 잘 깨달으면 좋겠소.” 섀프 박사의 놀란 눈에 노인이 말을 이었다. “내 말은 과학이나 기술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오. 다만 당신네들이 영적 발달 차원에서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까닭에, 이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과학이나 기술을 창조할 수 없다는 얘기일 뿐이오.”

 

그렇다! 자본주의 생산력은 눈부시다. 그러나 바로 이 눈부신 발전과 인간적 성숙의 부조화 탓에 지금 지구 전체가 위기다. 노인이 토로했다. “우리 종족도 얼마든지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오. 실제로 우리는 막대한 자연자원과 우수한 지적 능력까지 지녔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일부러 선택하지 않았다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드높이는 방향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정도로 영적 성숙이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오.” 노인의 말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포기의 미학이 답이다!

 

팀 버턴 감독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사업주 윌리 웡카는 내 맘이 병드니까 초콜릿도 병든 거야라 한다. 영성(관계성)을 무시한 이성(계산성)이 세상을 망친다. 꼬마 찰리가 어른 윌리를 깨우친 셈! 자본 주도의 과학기술, 그 깔끔함과 편리함에 중독된 채 무책임하게 사는 한, 우리네 삶은 더는 유지 불가능! 과연 이 불편한 진실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는가?

 

지리산과 섬진강, 한려수도 품에 싸인 경남 하동군과 남해군에 15만볼트 송전탑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최초의 주민주도형입지 선정이라는 거창한 구호와 달리 사실상 마을 사람들이 배제돼, 불씨를 안고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발전회사 공식 누리집에서는 지속가능한 친환경 에너지 전환과 탄소중립을 외치지만 석탄·가스를 포기할 계획이 없다. 기업이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중시하거나 재생에너지를 100% 사용한다는 계획(RE100)에 진정성이 있다면, 송전탑을 포기하고 최대 절전과 에너지효율, 소형 태양광 발전 등에 힘써야 한다.

 

일반 시민들도 지구온난화와 생존위기 앞에서,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처럼 우리들 집(지구)에 불이 났으니 모두 불 끄는 행동을 해야한다. 24일 서울 광화문·시청 일대에서 전국 360여개 단체 수만명이 기후정의행진에 나선다. 부디 서울시나 경찰이 방해하지 않길 빈다. 위기는 외면·회피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9·24 기후정의 대행진은 그간 무심코 누린 편리의 대가를 책임성 있게 직시하고 대안을 찾는 첫걸음이다.

야구치 시노부의 <서바이벌 패밀리>는 편리의 상징인 전기가 사라질 때 그 대안은 소박한 농어촌 생태 공동체임을 알린다. 도시 불빛이 없으니 별도 밝다. 요컨대 대통령부터 일반인까지 조금 먹고 조금 싸는포기의 미학을 실천할 때 삶의 희망이 생긴다.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마지막 권두언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이 자본의 탐욕 바이러스에 한사코 저항하는, 행동하는 민중이 세상의 백신이다!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한겨레 2022.09.23.

 

 

공정한 불평등 vs 가치 너머의 가치관

1981년 시작한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에 따르면, 한국인 대다수는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고 더는 믿지 않는다. 1990(2차 조사)에선 응답자의 73%가 노력을 통한 성공을 믿었지만, 2010(6차 조사)54%로 떨어졌고 2018(7차 조사)30%로 줄었다. 반면, “운이나 연줄이 있어야 성공한다고 느낀 이는 199014%에서 201025%, 201837%로 늘었다. 특히 19908.4%였던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느낀 청년(1020세대)201820.8%로 늘었다. 무려 2.5배다. 갈수록 ~오력의 배신이다!

 

그만큼 자기 노력에 대한 차별적 보상을 원한다. 이는 소득불평등에 대한 지지, 즉 미시적 차별의식이기도 하다. 예컨대, “소득이 더 평등해져야한다는 이는 199045%에서 201024%, 2018년엔 12%로 줄었다. 반면 노력에 따른 보상 차이가 더 벌어져야 한다는 이는 199039%에서 201059%, 201865%로 급등했다. 일본 28%, 미국 30%, 중국 39%, 독일 44%, 홍콩 51%보다 높다.

 

같은 설문에 대한 세대별 차이도 크다. 20106차 조사 때 평등주의:차별주의 비율은 1020세대 11%:40%, 3050세대는 16%:33%, 60살 이상 20%:42%였다. 평등보다 차별주의가 대세인데, 젊을수록 더 차별에 찬성했다. 당시 1020세대는 지금의 2030세대다.

요컨대, 한국에선 갈수록 소득차별에 찬성하는 이가 는다. 중국, 일본, 미국, 독일과 견줘도 평등주의 성향은 최저, 차별주의 성향이 최고다. 평소에 우리는 한가족 또는 운명공동체를 강조하지만, 막상 경제적 이익과 관련해서는 평등보다 차별을 선호한다. 세대 문제라기보다 세태가 변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 가치관이 이렇게 변했나? 이는 경쟁의 내면화와 경제가치 맹신 탓이다. 여기엔 사회적 배경이 있다.

 

첫째, 1960년대 경제개발 이전만 해도 자본주의 경제가치(돈벌이)보다 사회가치(인간관계)나 생명가치(만물 존중)를 중시했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가치관이 뒤틀린다. 돈벌이를 위한 새마을운동과 수출 공업화는 인정스러운 농어촌 공동체를 해체했고, 각종 개발 사업은 자연생태계를 파괴했다. ‘가치() 너머의 가치들이 버림받은 것!

 

둘째,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은 1960~80년대 성장기와 1987~1996년 최고조기를 지나 1997아이엠에프(IMF·국제통화기금) 체제를 경과하면서 포화기에 들어섰다. 성장기나 팽창기 때는 전체 부의 크기가 증대하고, 또 노동자의 조직된 힘이 세질수록 부의 분배도 비교적 순조로웠다. 당시 평등주의 의식이 확대된 배경이다. 그러나 경제 전반이 포화기에 들고 자본의 분할지배 전략과 경쟁의 세계화 탓에 분배의 토대와 결과가 악화했다. 이제 약 20%에 이르는 대기업,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은 상대적 기득권층이 됐지만, 80%의 중소기업, 비정규직, 여성, 노인, 청년, 장애인, 이주민의 삶은 열악하다. 이 상황은 다수에게 ~오력의 배신을 안겼고 평등보다 차별을 내면화하게 했다.

 

셋째, 1997년 이후 아이엠에프 트라우마는 이 경향을 가속했다. ‘아이엠에프 체제란 사실상 국가부도 상황에서 아이엠에프 등 국제금융기관이 긴급 구제금융을 하는 대신 글로벌 스탠더드란 이름 아래 한국의 사회경제 구조를 세계자본에 유리하게 재편한 것! 100년 전 일제 식민지 체제가 조선을 제국주의 아래 복속시킨 것이라면, 25년 전 아이엠에프 체제란 세계자본주의가 한국을 포섭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강압 통치 위주였는데 후자는 합의 통치인 점! 전자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색채를 띠게 했지만 아이엠에프식 합의 통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개방화, 탈규제, 민영화, 유연화)을 통해 온 사회에 아이엠에프 트라우마를 남겼다. , 사회 전반이 전례 없는 대량해고와 고용불안에 충격받았다.

해고는 노동자에게 죽음이고 공포다. 이제 실업은 물론, 비정규, 알바, 취업대란이 일상이 됐다. 민주노총이 저항하고 진보정당이 국회에 입성해도 대세는 역부족! “해고는 살인이다” “차라리 우리를 죽여라!” “잘리기 전에 실컷 벌자. 모두 아이엠에프 트라우마의 결과다. 이게 한 세대 이상 지속되자 이제 다수는 마침내 자본주의 공정성 논리, 공정한 차별을 지지한다.

 

그러나 숨 쉴 구멍은 있다! 희망의 여지는 모순의 틈새에서 생긴다. 위 조사에서 경쟁은 열심히 일하게 하고 새 아이디어를 촉진한다고 본 이는 1990년엔 81%에서 201064%, 201848%로 줄었다. 반면, “경쟁은 사람들에게 최악을 부른다는 이는 19908.5%에서 201012%, 201817%로 늘었다. 여전히 절반 정도가 경쟁의 내면화상태이나, 갈수록 경쟁에 지치고 실망한 이들이 는다. 2018년 조사 때 환경 침해가 좀 있어도 경제성장이나 고용창출을 우선하는 이가 43%였지만, “성장이나 일자리에 일부 손실이 와도 환경보호를 우선하는 이는 57%나 됐다! ~오력의 배신이나 이상기후 등 삶의 위기 앞에 가치관도 꿈틀댄다!

 

이런 지표 변화는 미시적 차별의식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근면성실·경쟁신화와 심리적 거리두기를 하거나 또 성장·고용보다 환경·생태를 우선시하는 등, 거시적 사회의식이 고양됨을 뜻한다. 희망의 실마리다. 이는 자본의 위기가 커질수록, 분배의 물적 토대가 약할수록, 또 지구 생태위기가 심해질수록 증폭할 가능성이 크다. 만일 이런 점에 착안해 여러 사회운동이 연대해 사람과 사람(사회가치), 사람과 자연(생명가치)의 공생을 보장하는 새 사회경제 시스템에 동의한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성급한 낙관은 금물! 변화를 만들 주체가 이미 경제가치를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면 아무리 투표를 잘해도 결과는 뻔하다. 노조나 노동자 시위를 소음이라 한 일부 청년만 문제가 아니다. 솔직히 빨갱이암세포논리로 노동운동을 적대시한 어른들은 더 많다. 모두, 자본과 권력의 시선일 뿐! 따라서 근본적인 변화의 첫걸음은 남녀노소 불문, 우리가 맹신해온 경제가치를 철저히 성찰하는 것, 또 여럿이 둘러앉아 무엇이 두려운지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 자본의 가치에 기초한 공정한 불평등너머에 좋은 삶이 있다. 경쟁이나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치 너머의 가치관이 절실하다. 기껏 성공한 노예는 결코 우리의 미래가 아니므로!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한겨레 :2022-07-21

 

 

내부총질부터 ××”윤 대통령 입이 추락시킨 국격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께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의 답은 이랬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불량배 출신이었던 자로는 공자의 이상적인 대답이 못마땅했던 듯하다. “선생님, 너무 고지식하십니다. 어떻게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공자도 화가 났던 모양이다. “네 이놈! 함부로 말하는구나.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는 법이거늘.”

공자의 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맞아떨어지지 못한다. 형벌이 올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어디에 놓을지 모르게 된다.”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정치가 말의 힘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말의 힘은 정명’, 어떤 일의 이름을 바로잡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름을 바로잡는 일은 임금은 임금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의 이름을 바로 세워야 제대로 된 시작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자는 정치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제대로 이름 붙여 부르지 않으면, 벌이려는 일을 말로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탓에 설득이 힘들어 종래에는 뜻한 바를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더하여 정치가가 올바른 말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면, 다스림의 의식인 예와 악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고, 절차로서 의식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으면 법 집행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결국엔 백성들이 혼란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다.

 

오랫동안 덮어둔 <논어>를 다시 살펴본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의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와 대통령이 주고받은 문자가 그렇다. 당대표의 행위를 두고 내부총질이라 이름 붙인 그 문자는 국민의힘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겪고 있는 혼란의 시작이었다.

 

체리따봉을 더한, 대통령의 직분을 망각한 듯한 내부총질이라는 표현은 그 어떤 이유와 말로도 제대로 수습하기 어려웠다. 공자의 말씀에 따라 생각해보면, 이로 인해 제대로 된 예와 악의 절차가 작동하지 않으니 이준석 대표를 향한 처벌 역시 부당하다는 비판이 일고 비대위 전환에 대한 정당성도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법원마저 이준석 대표가 낸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며 국민의힘은 여전히 대혼란에 빠져 있는 상태다.

 

대통령이 이처럼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망각하고 또 함부로 내뱉은 말이 이젠 국제적 논란을 만들었다. 뉴욕에서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에 참석한 대통령이 공식 석상을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미국 의회와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욕설이 섞인 막말(“국회에서 이 ××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팔려서 어떻게 하나”)을 하는 듯한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이 꼬인 말을 풀어내자니 대통령실의 해명도 논란을 낳았다. ‘××’가 미국 의회가 아니라 우리 국회를 말한 것이고, ‘바이든날리면이란 말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졸지에 대한민국 의원들이 ××’가 돼버린 것이다. 뉴욕을 떠나며 대통령은 사과 한마디 없이 글로벌펀드에서 정부가 약속한 국제사회 1억달러 공여에 국회의 협력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국외 순방을 나서기 직전, 대통령실이 공론화 과정 없이 영빈관 신축을 하려다 밀실정치라는 여론의 역풍을 맞으며 좌절됐다. 대통령실은 영빈관 신축을 두고 국격에 맞게 내외빈을 영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질문해본다. ‘나라의 품격을 세우는 데 무엇이 필요할까?

 

물론 여기엔 국내외 귀빈을 대접하는 공간이 포함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자에 따르면 예악의 의식을 위한 공간은 정치에서 말을 바르게 세운 다음에야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난 몇개월 대통령의 말과 사적 채용, 대통령실의 불투명한 수의계약과 같은 문제에 대한 해명은 끊임없이 정치적 논란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국민에게 지금 가장 국격이 떨어지는 건 말을 바르게 세우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과 대통령실이다. ‘정치의 품격나라의 품격이다.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한겨레 2022-09-25

 

 

윤 대통령의 XX’ 외교 담론과 문재인 때리기

20013월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디스 맨”(이 양반)이라는 말을 들었다. 부시는 20035월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이지 맨”(편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부시가 두 대통령을 깔보는 말을 했다는 여론이 일었다.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디스 맨 표현에 대해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하나 불쾌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의 하나로 끼워놓고는 북핵 문제에 강경대응을 하려고 김대중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합의를 뒤집을 때였다.

 

부시가 깔보려고 이런 말을 했는지는 논란의 영역이다. 부시는 20022월 미국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도 디스 맨이라고 호칭했으나, 문제 되진 않았다. 미 국무부에서 27년간 통역을 하며 한-미 정상회담을 지켜본 김동현씨는 2005년 은퇴 회견에서 디스 맨이나 이지 맨은 얕잡아 본 말이 아니고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해명했다. 부시는 나중에 노 대통령 서거 뒤 자신이 그린 초상화를 선물했다.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문제는 국내였다. 문제의 발언은 부시가 했는데, 욕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더 먹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김대중, 노무현이 대접도 못 받고 다녀, 국격을 훼손한다는 조롱이 난무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정치권이 이런 조롱에 노골적으로 합류하지는 않았다.

홍사덕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디스 맨과 관련해 백악관에 항의편지를 보냈다. 부시가 북핵 문제에서 입장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한 2003년 박주천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미국 방송과의 회견에서 노 대통령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면 영원히 이지 맨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급히 취소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 정상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을 못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불쌍한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야당이 노골적으로 조롱하지는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12월 중국을 방문해 아침에 서민들의 대중적 식당에서 수행원들과 식사를 하는 이른바 혼밥논란으로 금도는 깨졌다. 자유한국당은 중국에 조공외교를 가서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 외교를 하고도 푸대접받아 혼자 아침을 먹는다는 조롱과 공격을 가했다. 그 이후 해외순방에서도 김정숙 여사의 의상 등을 놓고 트집을 잡고 조롱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영국 여왕 장례식에서 조문 없는 조문외교’, 유엔 총회 연설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 대한 스토킹 회동’,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48초 만남에 이어 ××’, ‘쪽팔려발언으로 조롱과 맹공을 당하고 있다. 앞서, 김건희 여사가 나토 정상회의에서 패션과 장신구, 의전 실수로 조롱을 당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민주당에 간곡히 부탁드린다. 대통령 외교 중에는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풍토를 만들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쪽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윤 대통령이 외교를 전 정부 때리기 수단으로 본다는 의문이다. 그는 후보 당시 사드 재배치를 한줄 공약으로 제시한 때부터 외교 사안을 문재인 때리기로 일관한다. 일본 총리에게 만나자고 매달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망가뜨린 한-일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명분이다. 사실 한-일 관계 악화는 이명박 대통령이 20128월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느닷없이 독도를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어쨌든, 윤 정부 들어서 한-일 관계는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 한국에 큰소리를 치는 관계로 역전됐다.

 

이번 순방에 앞서, 그는 <뉴욕 타임스> 회견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교실에서 특정한 친구에게만 집착하는 학생이라며 기존의 남북정상회담이나 남북협상을 정치적 쇼라고 비난했다. 그가 국내외 연설에서 자유 연대론를 줄곧 외치는 것도, 문 정부가 중국과 북한에 경사됐다는 것을 비난하는 반어가 아닐 수 없다. 윤 정부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대외정책을 펼치면 된다. 굳이 전임 정부의 외교에 대한 디스를 앞세운다면, 이와 관련된 국가에 약점 잡히고 외교 리스크만 키울 뿐이다. 지금 벌어진 외교 참사가 그 결과이다.

 

이런 의문은 윤 대통령이 토해낸 ××’가 미국 의회가 아니고 한국 야당이라는 해명으로 더욱 짙어진다. 지금까지 대통령 외교에서 논란은 주로 상대의 홀대나 의전 실수였다. 이번에는 윤 대통령이 스스로 뱉은 말이다. 그 실수조차도 전임 정부 세력 쪽과의 정쟁 구도로 만들었다. 오로지 문재인 때리기를 위해서 그가 검사 시절에 즐겨 했다는 별건 수사, 가지치기 수사 기법이 외교에서도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2-09-26

 

 

흙으로 돌아가리라퇴비장을 아시나요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설적으로 죽음 이후에 드러난다. 오직 인간만이 죽은 자를 장사 지낸다. 인간 외에는 아무리 지능이 뛰어난 동물도 죽은 동족을 땅에 묻거나 화장하지 않는다. 죽음을 애통해하고 죽음 이후를 상상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특성이다. 40만년 전에 출현한 네안데르탈인조차 죽은 이를 매장하고, 꽃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고고학 연구팀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장례문화는 환경·종교 등의 영향을 받는다. 죽은 자의 혼이 새와 함께 하늘로 가도록 새가 시신을 쪼아먹게 두는 조장풍습은 티베트에 아직 남아 있다. 바이킹처럼 배를 오래 타는 부족은 시신을 바다에 가라앉히는 수장을 선호했다. 한랭건조한 몽골에선 시신을 야산에 두어 풍화되도록 하는 풍장의 관습이 있었다. 종교적으로 보면, 불교는 인간의 육체를 정화하는 의미를 담아 화장을 한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힌두교 역시 화장을 선호하며 유골을 갠지스강에 뿌린다. 개신교·가톨릭에서는 부활신앙의 영향으로 매장을 하도록 권한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주검을 거름용 흙으로 활용하는 퇴비장2027년부터 허용하기로 했다. 퇴비장을 처음 허용한 것은 2019년 워싱턴주였고, 뒤를 이어 오리건, 콜로라도, 버몬트주가 동참했다. 퇴비장은 풀, 나무, 미생물 등을 활용해 시신을 30~45일 동안 자연분해한 뒤, 퇴비용 흙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퇴비장 서비스업체 리컴포즈는 시신을 화장하는 대신 퇴비화하면, 대기 중에 탄소 1.4t()이 방출되는 것은 막을 수 있고, 비용 역시 7천달러(한화 약 970만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라고 설명한다.

 

코로나19 대유행 사태 이후 장례문화의 간소화와 친환경화가 화두다. 코코로나로 숨진 사람들의 시신이 냉동 트럭에 쌓이고, 구덩이에 팽개쳐지고, 화장실에 방치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환경을 동시에 지키는 장례 방식을 고민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독교계 등 일부에선 퇴비장을 두고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며 반발도 극심하다고 하는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19)라는 성경 구절에도 어긋나지 않는 일인 듯싶다. 장례문화는 환경의 변화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수목장의 보편화에 이어 잔디장·바다장·우주장·빙장까지 등장한 마당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한겨레 2022-09-26

 

 

윤석열 정권, 미국은 겁내고 국민은 겁주나

순방에서 돌아온 윤석열 대통령의 출근 일성은 뜻밖이었다. 윤 대통령은 26비속어 논란과 관련해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는 것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했다. “전 세계의 두세 개 초강대국을 제외하고는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자국 능력만으로 지킬 수 있는 국가는 없다면서 한 말이다. “진상이 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도 했다.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윤 대통령 말을 종합하면 비속어 논란은 사실과 다르고, ·미 동맹을 훼손하며, 관련 보도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독자도 계실 수 있으니 전말을 요약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 21(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글로벌펀드 재정공약 회의장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48초간 환담했다. 이후 회의장에서 나오던 윤 대통령이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말하는 듯한 장면이 카메라에 담겼다. ‘XX’는 미 의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대통령실은 영상 공개 후 13시간이 지나 해명을 내놓았다. ‘XX’는 한국 국회를 지칭한 것이며,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했다는 취지였다. 논란은 더 커졌다. 한국 국회의원은 폄훼해도 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소셜미디어에선 버스커버스커가 부른 벚꽃 엔딩의 가사 봄바람 휘날리며봄바람 휘바이든으로, 영화 제목 태극기 휘날리며태극기 휘바이든으로 패러디됐다.

 

모두가 대통령의 첫 출근길을 주목했다. 나는 윤 대통령이 당시 발언 취지를 설명하거나, 껄끄러우면 직답을 피하리라 생각했다. 틀렸다. 대통령을 과소평가했다. 그는 답을 피하지 않았다.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며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상은 발언 당사자가 가장 잘 알 텐데, 스스로 밝히는 대신 타깃을 언론으로 돌렸다. 국민의힘도 발 맞춰 영상을 처음 공개한 MBC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항의 방문과 경위 해명 요구 등 여러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김행 비대위원은 수사의뢰를 거론했다. 이종배 서울시의원은 MBC 사장과 편집자·담당 기자를 경찰에 고발했다. 전날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이 가짜뉴스를 언급한 게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팩트체크를 해보자. 윤 대통령은 비속어를 발화했다. 이 부분은 김은혜 홍보수석도 인정했다. XX’는 미 의회 의원 또는 (적어도) 한국 국회의원을 지칭한다. 앞에 국회에서란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발언한 곳은 각국 정상이 모인 국제회의장 안이었고, 바로 옆에 사적 지인이 아니라 고위공직자들이 있었다. 백보 양보해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 했다고 치자. ①②③만으로도 대통령은 사과해야 마땅하다. 바이든 대통령이 화내는 건 겁나지만, 한국 국회와 국민은 분노하든 말든 상관없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도 잘못 끼우기 마련이다.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솔직하게 시인하고 논란을 매듭지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①②③이 부적절했다는 점조차 인정하지 않은 채 사적 발언’ ‘혼잣말로 덮으려다 사태를 키웠다. 스스로 퇴로를 끊은 셈이다.

 

이제 어찌할 텐가. 이명박 정권이 <PD수첩>과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수사했듯 MBC를 수사하고 휘바이든패러디를 퍼뜨린 소셜미디어 이용자를 잡아들일 건가. 윤 대통령이 몰입해온 검찰의,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통치 방식대로라면 이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시민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핵심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를 기대할지 모른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야기했다. “만약 (사랑과 두려움)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여될 수밖에 없다면, (군주는) 사랑을 받기보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도 했다. “증오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받는 것을 피하고, 인민이 그에게 만족하도록 한다면, 그 군주는 스스로를 충분히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정치철학자이자 마키아벨리 연구자인 곽준혁은 저서 <지배와 비지배>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음모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면, 다수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인민을 적대시하면 군주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고까지 단언한다.”

국민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지도자는 없다. 500년 전에도, 지금도.

김민아 논설실장 경향 2022-09-26

 

 

헤어질 결심 2

국무총리는 신문 보고 알았다는 영빈관 신축, 참배 못한 조문 외교, ·일 정상 약식 회담’, ·미 정상 ‘48초 환담’, 대통령의 비속어 파문.

 

지난 일주일여간 대통령실의 행보는 촌극의 연속이었다. 아니, 촌극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국정책임자는 무슨 생각으로 일하는지.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부를 불문하고 국민 우려를 자아내고 낯을 화끈거리게 하는 일들이 잇따랐다. 윤석열 대통령의 두번째 해외 순방은 조문 빠진 조문 외교로 시작됐다. 별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 대한 참배는 현지 교통 사정 때문에 불발됐다. 대통령실에선 늦게 도착한 다른 정상들도 못했다’ ‘성당에서 하는 장례가 진짜 국장이라고 해명했지만 도대체 영국에 왜 갔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28개월 만에 이뤄진 한·일 정상회담은 저자세 외교 논란을 낳았다. 대통령실은 회담을 한다는데 일본 측은 정해진 게 없다고 막판까지 신경전을 벌였다. 윤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찾아갔다. 회담장에는 양국 국기나 회담 테이블도 마련되지 않았다. 회담 후에도 대통령실은 약식 회담이라고 했지만 일본은 간담회라고 했다. 강제동원 피해 배상 등 핵심 현안에 대한 진전도 없었다. 아사히신문은 일본 당국자 말을 인용해 우리는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여러 번 만나고 싶다고 한국이 요청해 만났다. 한국은 일본에 빚을 졌다고 전했다.

 

대통령실이 30분으로 예상했던 한·미 정상회담은 불발됐고 ‘48초 환담에 그쳤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해결 등 가시적 성과도 얻지 못했다. 대통령실은 바이든 대통령이 우리 측 IRA 우려를 잘 안다고 인정한 게 진전이라고 밝혔다. 미 백악관은 환담 결과 보도자료에 IRA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되레 48초 환담 뒤 행사장에서 나오던 윤 대통령의 비속어 사용 논란이 불거졌다.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언급한 듯한 장면이 취재진의 영상 카메라에 잡혔다. 대통령실은 15시간 뒤에야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고, ‘XX’는 야당을 지칭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비속어를 반복해서 들어야 했고, 음성학 전문가까지 동원됐다. 인터넷상에는 봄바람 휘바이든’ ‘태극기 휘바이든’ ‘조 날리면등 패러디들이 번졌다. 대통령실 해명은 또 다른 파장을 낳았다. 앞에선 초당적 협력운운하더니 뒤에선 야당을 깔보는 야당 폄훼, 입법부 무시 논란으로 번졌다. 이런 상황에 대해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일련의 논란들은 대통령실 주변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윤 대통령의 거친 언행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익히 알려진 바다. “검찰 출신에 상남자 스타일”(국민의힘 의원)이라고? 외교 무대는 총칼 없는 전쟁터다. 국가지도자의 언행이 불러올 파장에 대한 충분한 자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참모들은 도대체 무얼 했나. 대통령실의 부실과 아마추어리즘도 심각하다. 조급함만 앞섰지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책임을 면치 못한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한·, ·일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섣불리 발표해 결과적으로 운신의 폭을 좁혔다. 혹시 전 정부 뒤집기나 차별화에 대한 집착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 아닌가.

 

순방 직전 백지로 돌린 영빈관 신축 계획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실 이전 도그마에 사로잡혀 밀어붙이기만 했다. 불어난 이전 비용 등 청구서가 날아들고 있다. 윤 대통령은 혈세 낭비를 개탄하는데 대통령실은 불쑥 영빈관 신축 예산을 끼워넣었다. 총리는 신문 보고 알았다고 하고, 대통령실 수석 대부분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도 책임 소재는 가려지지 않고 있다. 이거야말로 국기문란 아닌가.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지난 13일 전 직원 조회에서 어디서 짱돌이 날아올지 모른다고 했다. 문제는 바깥이 아니라 안이다.

 

윤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한 치도 국민의 뜻에 벗어나지 않도록 살피겠다고 한 지 40일이 지났다. 고물가 저성장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중 대립 등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시대. 국민은 불안하다. 윤 대통령은 대선 당시 자신의 검찰 이력을 들며 “(부패세력은) 딱 보면 견적이 나온다고 했다. 이 정부는 견적이 안 나온다고 느끼는 건 필자뿐일까. 대통령에게 익숙한 것과 헤어질 결심은 서지 않은 모양이다.

김진우 정치부장 경향 2022-09-26

 

 

빈곤과 기후위기, 이대로는 살 수 없지 않은가

지난 924일 열린 기후정의행진에 서울시청부터 남대문까지 35000명의 시민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여느 집회에는 단일 구호가 쓰인 손팻말이 등장하지만 이곳에는 박스를 잘라 손수 자신의 구호를 쓴 피켓이 많았다.

 

35000명이 각자의 목소리가 쓰인 피켓을 머리 위로 번쩍 들자 무대의 스피커가 내는 소리보다 더 큰 광장의 소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 자리에 나는 쪽방과 고시원의 주민들, 기초생활수급자, 거리 홈리스와 함께 참여했다. 우리 역시 각자의 생각을 담은 피켓을 하나씩 만들어 행진에 함께했다. ‘기후위기로 물가가 올라서 수급비로 못 살겠다’ ‘기후위기 시대, 모두의 주거권을 보장하라’ ‘기후위기 때문에 우리들만 숨막힌다’ ‘집값 오른다고 지구 하나 살 수 있냐와 같은 내용들이었다. 뜨거운 여름을 창문 하나 없는 방에서 보낸 쪽방과 고시원 거주자들인 만큼 문제가 가장 중요한 화두였지만 물가 인상으로 인한 걱정, 가난한 이들이 기후위기의 피해를 감당하게 될 것에 대한 염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져가는 불평등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담겨 있었다.

 

미국 시카고의 폭염을 연구한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폭염으로 인한 사망을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가 만든 비극이라고 분석했다.

 

폭염이 참사가 되는 경로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이로부터 비롯된 고립이라는 인간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빈곤층이라 할지라도 공동체가 있는 이들이 더 많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원주민 재정착률이 현저히 낮은 한국의 개발정책, 도심 내 퇴거로 인한 도시 빈민의 산개는 불평등의 원인이며 재난의 뿌리다.

 

매년 1017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빈곤퇴치의날이다. 빈곤사회연대는 이날을 기념해 2005년부터 빈곤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빈곤 문제는 시혜나 원조, 몇 가지 정책으로 퇴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이날을 빈곤철폐의날로 이름 붙이고, 빈곤을 만드는 구조와 불평등에 주목할 것을 요구해왔다.

 

이날의 주인공은 빈곤 문제를 직접 맞닥뜨리고 살아가는 당사자들이다. 올해도 노점상, 철거민, 장애인, 홈리스, 세입자와 기초생활수급자를 비롯한 다양한 도시 빈민이 모여 1015일 서울 청계천 광교에서 거리 행진을 연다.

 

대통령과 여당은 목소리 없는 약자를 대변하겠노라 강변하지만 목소리 없는 사람은 없다. 빈곤철폐의날에 울려퍼지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고립되지 않을 때, 이들의 싸움이 승리할 때 우리 사회의 불평등도 해소될 수 있다.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닥쳐온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적응법이다. 기후정의와 빈곤철폐가 시급하다. 이대로는 살 수 없지 않은가.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경향 2022-09-26

 

 

윤석열의 자유, 한국인의 품격

윤석열의 자유. 국제무대까지 선보였다. 유엔총회 11분 연설에서 자유21번 부르댔다. 같은 자리에서 칠레 대통령 가브리엘 보릭이 사회 정의를 강조하며 부와 권력을 더 나은 방식으로 분배하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제안한 연설과 참 대조적이다.

 

한국 대통령의 연설은 감응을 주었을까. 아니다. 자유를 외치는 그의 연설은 신자유이데올로기조차 외면 받는 세계적 흐름에서 미국의 아바타수준으로 읽혔을 터다. 기실 그의 낡은 자유론은 케케묵은 냉전에 찌든 철학 또는 정치학 교수 출신들이 그의 주변에 있기에 필연적이다. 자유 아니면 전체주의로 정치체제를 단순화하는 미국의 냉전논리를 2020년대에도 되풀이하는 윤똑똑이들의 모습은 19세기 이 땅을 지배했던 주자학자들과 다를 바 없다.

 

낡았을 뿐만 아니라 현실 설명력도 없는 정치철학의 귀결은 어떤가. 주자학자들의 조선은 망국을 불러왔다. 다행히 그때와 달리 민중의 힘이 무럭무럭 커져있다. 다만 국제무대에서 그가 내세운 허접한 자유론은 모멸스러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보라. 윤석열의 자유는 정말 자유롭잖은가. 나는 한국 대통령이 영국 여왕을 꼭 조문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세금 들여 조문하러 가서 못했으면 무엇 때문인지 성찰해야 옳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변명의 자유다. 일본이 연 행사장까지 찾아가 약식회담을 하는 것도 자유일까. 그나마 일본은 약식회담도 아닌 간담으로 낮췄다. 정상회담 일정 조율 중에 일방적으로 불쑥 발표한 자유가 불러온 참사다. 결국 회담 또는 간담에 아무런 성과가 없다. 강제징용 현안에 진전도 없으면서 비웃음 산 꼴이다.

 

미국과의 정상 회담은 어떤가. 순방 전에 미국도 흔쾌히 정상회담에 응했다고 과시했다. 당연히 전기차 문제를 협상하리라 기대했다. 결과는 48초 만남이다. 더구나 바이든 앞에 온갖 웃음 짓던 대통령은 바로 사고를 쳤다. 그는 미국 의회를 “XX”라 부르고 바이든은 “X팔려 어떡하나따위로 조롱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사적 발언이라고 되레 눈 홉떴다. 15시간 만에 내놓은 해명은 더 가관이다. 홍보수석 김은혜는 대통령의 욕설이 한국 국회에 대한 우려라고 언구럭 부렸다. 바이든과 전기차 협상을 해야 마땅했던 대통령이 못하고 한국 국회를 싸잡아 욕설한다? 그 또한 공분할 일이다. 그런데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는 해명이 정부 차원의 거짓말이라면? 우리를 개돼지로 여기는 작태와 다름없는 엄중한 사안이다.

 

언론이 책임지고 목소리 식별을 비롯해 진실을 낱낱이 밝혀야한다. 우리가 지켜보았듯이 대통령도 그의 참모들도 생각과 행동은 물론 정책까지 욜랑욜랑 가볍다. 민중의 고통에 감수성이 없어서다. 지금 물가와 환율로 민생과 경제 두루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런데도 기득권 세력에 치우친 정책을 무람없이 추진하며 언죽번죽 민생을 내건다. 궁금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나라 안팎에서 곰팡내 나는 자유를 부르대는 대통령에게 권한다. 이렇다 할 학술논문이나 전공 저서도 없는 석학들에 매몰될 때가 아니다. 성악의 조수미, 빙상의 김연아, 방탄소년단,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촛불혁명의 민중들이 한국인의 품격을 높여온 상황에서 윤석열의 자유는 너무 낡았고 그의 껄렁껄렁한 언행은 국격을 떨어트렸다.

 

앞으로도 국제무대에서 자유를 들먹이려면 최소한 현대 과학의 성과를 담은 민주주의 철학을 살펴보기 바란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면 대통령실에 요약본을 요청해서라도 신문방송복합체들이 마구 퍼트리는 구린 자유론에서 벗어나 제대로 민생 정책을 펼 일이다.

 

자신 때문에 한국인의 품격이 계속 추락하기를 그도 바라지는 않을 터다. 그런데 어떤가. ‘협치를 비롯해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에 절실한 제안들을 “XX”라며 내팽개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딴은 그 또한 윤석열의 자유.

손석춘 칼럼니스트철학자 미디어오늘 2022.09.26.

 

 

구애 거절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나

'신당역 여성 역무원 피살' 사건에서 보듯 우리나라 여성들은 일상에서 남성들은 대체로 의식하지 않는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스토킹 사건'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다. 직장과 집, 인적 뜸한 곳과 사람 왕래가 많은 큰길을 가리지 않는다. '스토킹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이 평소 폭력 성향이 강하거나 악한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불안감은 더하다.

 

헤어지자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만남을 요구하는 사례, 구애를 거절해 모욕감을 주었다고 살해한 사건, 헤어지자는 연인을 납치 폭행하는 사건, 수개월에 걸쳐 전화와 문자로 협박을 일삼는 사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감금하고 폭행하는 사건, 이혼한 전처를 찾아가 살해한 사건, 연인이 변심했다고 그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 등 끝이 없다.

 

112에 스토킹으로 신고된 사건이 20204515, 202114509, 올해 7월까지 16571건이다. 현재 경찰이 수사 중이거나 불송치를 결정한 스토킹 사건은 2천 건이 넘는다. 피해자와 합의나 고소 취하로 사건화되지 않은 숫자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스토킹 처벌법'1999년 처음 발의됐지만 20년 넘도록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다가 20213월 국회를 통과, 20211021일에야 시행됐다.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면 요란을 떨다가도 한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넘어가 버린 것이다. '스토킹'을 범죄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 약하니 가해자들도 스토킹을 범죄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현행법상 스토킹은 반의사불벌죄여서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거나 합의해 주면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면 처벌받지 않기에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더욱 못살게 협박한다. 협박에 질려 피해자가 합의해 주고 사건이 무마되면 가해자는 또 스토킹을 재개한다. 견디다 못한 피해자가 더 이상 합의해 주지 않으면 더 큰 범죄로 이어지는 식이다. 이런 틈을 막자면 스토킹 범죄에 대한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미 발생한 사건, 점점 더 흉포해질 가능성이 높은 사건에 대해 수사기관이 개입해 조치를 취할 수 있고, 구속영장을 청구할 근거도 생긴다.

 

가해자에 대해 무죄 추정과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는 만큼 피해자에 대한 신변 보호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스마트워치만으로는 작정하고 달려드는 가해자를 막기 어렵다. 신변 보호를 받던 여성이 살해되는 사건이 올해에도 몇 건 있었다. 나아가 감시 대상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전환해야 한다.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시 위치 추적 장치 부착, 가해자의 활동 반경 제한, 가해자가 일정한 거리 안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할 경우 피해자 휴대폰 등에 자동 알림, 경찰의 즉각 대응 체계도 마련돼야 한다.

 

나를 해치려는 사람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불안감,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위기 속에서 살 수는 없다.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지려면 끔찍한 보복을 각오해야 하고, 구애를 거절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야만 사회'. 가해자의 인권을 위해 피해자의 목숨을 저버리는 법률은 바뀌어야 한다. 상대가 싫다는데도 끊임없이 들러붙는 것을 '구애 행위'로 여기는 인식도 사라져야 한다. 현행 법률은 가둘 수 있는 범죄를 날뛰게 하고, 지킬 수 있는 생명을 잃게 하고 있다.

조두진 논설위원 earful@imaeil.com 매일신문 2022-09-26

 

 

진실보다 우선하는 국익이 있을까?

진실과 국익 중 어느 것이 우선인가요?”

진실이 우선이죠. 궁극적으로 국익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4년 개봉한 영화 <제보자> 대사 중 일부다. 영화는 2000년대 초, 줄기세포 연구 성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과 불법 난자 채취 행위를 고발한 MBC 의 취재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당시 MBC국가적 인재의 연구를 방해했다’, ‘국익에 저해되는 보도를 했다며 융단 폭격을 맞았다.

2005년 말 PD수첩은 인간 배이줄기세포를 확립했다고 발표한 황우석 교수가 난자를 매매하거나 연구원 난자를 사용하고, 없는 줄기세포를 있는 것처럼 논문 조작한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2022. MBC윤석열 대통령 막말보도가 다시금 국익 논란의 중심에 섰다. 현재 대통령실은 이를 허위로 규정한 상태다. 국민의힘 일부 의원은 짜깁기’, ‘조작을 운운하며 MBC에 대한 법적 조치까지 예고했다. 하지만 해당 발언은 대통령실 출입 영상기자단에서 촬영한 풀 영상에 담긴 것이고, MBC 보도 전 영상기자단 소속 전체 언론사에 이미 배포된 상태였다. MBC가 자의적으로 허위, 조작, 짜깁기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타깃이 MBC로 특정된 것이다.

 

윤 대통령은 해당 보도를 겨냥해 동맹을 훼손하고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비판했다. 정미경 전 국민의힘 최고의원이 YTN <뉴스N이슈>에 출연해 말한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송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한 마디로 MBC 보도로 인해 한미 동맹이 훼손되고 국가 안보가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대통령실이나 국민의힘의 호들갑처럼 국가안보나 국익에 현저한 위험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윤 대통령이 미국 의회를 가리켜 XX’라고 한 발언은 ‘idiots(멍청이)’ 혹은 욕설인 ‘f**kers’라고 번역돼 현지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데, 공화당 소속 미시간주 하원의원인 피터 마이어는 이봐, 우리만 그렇게 말할 수 있어고 장난스레 대꾸했고, 민주당 소속 하와이주 하원의원인 카이알리 카헬레는 지지율 20%. 존경하는 대통령님, 당신 나라에 집중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라고 비판했다. 여야 상관없이 비꼼에 가까운 농담이지, 심각한 어조는 아니다. 백악관 역시 노코멘트하겠다고 밝히고 한미 관계는 여전히 굳건하다고 밝힌 상태다.

 

한미 동맹은 선출직 임기제 지도자인 대통령의 실언 한 마디에 흔들릴 만큼 유약하지 않다. 설사 해당 발언이 보도돼 한미 동맹이 훼손되고 국가 안보가 위험해졌다면 그 책임은 언론이 아니라 대통령 당사자가 져야 마땅하다.

 

MBC 보도의 핵심은 대통령이 비속어를 썼다’, ‘미국 대통령과 미국 의회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 그 짧디짧았던 외교 무대에서조차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와 태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1(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재정공약회의에 참석한 뒤 행사장을 나오면서 막말을 한 장면이 포착됐다. 사진=MBC 영상 갈무리

 

행사장을 빠져나오던 대통령이 참모들과 이야기 나누던 도중 나온 대화인 만큼 사적 대화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엄연히 여러 나라에서 온 언론사 카메라가 모여있던 공식 현장이었고, 외교 무대의 한복판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한 사람이, 사석에서나 나눌 비속어를 사용해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다.

 

우리 국민은 우리 대통령이 그 정도 분별은 있는 사람인지, 외교 무대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 권리가 있다. 그리고 언론은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윤 대통령이 실언했다는 진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다시 영화 <제보자>의 대사로 돌아가 보자. 진실보다 우선하는 국익이 있을까? 국익을 위해서라면 자국 대통령의 허물쯤은 덮어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일까? 그렇게 해야만 국가 안보와 국익이 지켜지는 나라를 온전한 국가라고 볼 수는 있는 것일까? 진정 참담한 것은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 의회를 향해 비속어를 사용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그 자체가 아닌, 여전히 진실보다 우선하는 국익이 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다. 황우석 사태가 벌써 20년 전의 일인데 말이다.

김윤정 칼럼니스트 미디어오늘 2022.09.27

 

 

임기 5년이 뭐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30% 밑으로 처음 떨어진 건 딱 두달 전이다. 726~28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28%를 기록했다. 취임 석달이 채 안 돼 30% 선이 무너진 건 희한한 일이라고 <조선일보> 사설은 썼다. 이제 관심은 윤 대통령이 낮은 지지율을 어떻게 벗어날까에 쏠렸다. 돌이켜 보면 817일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은 윤 대통령이 5년간 나라를 어떻게 이끌지 보여준 날이고, 지지율 회복이 쉽지 않을 것임을 또렷하게 각인시킨 날이었다. 그는 대선 선거운동 하듯이 국정을 운영하는 길을 택했고, 그 정점이 바로 뉴욕 비속어 파문에 대한 적반하장식 강공 드라이브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소주성과 같은 잘못된 경제정책을 폐기했다. 민간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세제를 정상화했다며 단기간에 엄청난 성과를 거둔 양 자화자찬했다. 누가 보더라도 이전 정부 때부터 오래 준비해온 국책사업인 누리호 발사마저 세계 7대 우주 강국으로서 우주 경제비전을 선포했다고 자신의 공으로 돌렸다. 역대급 최저 지지율을 기록한 데 대한 성찰은 찾을 수 없었다.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대통령의 성향은 그때 이미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을 떠올리면, 뉴욕 비속어 파문에 한마디 사과 없이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는 건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 역공한 건 뜻밖의 행동이 아니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후보의 인천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두고 대선 연장전이라 불렀지만, 정말 임기 5년 내내 선거운동 하듯이 국정을 끌고 갈 태세를 갖춘 건 바로 윤석열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비속어 사용이 파문을 낳자 권성동 의원을 비롯한 윤핵관들이 즉각 이재명 대표가 더 심했다고 공격하고, <문화방송>을 겨냥해선 조작된 광우병 사태를 다시 획책하려는 무리들이라 비난한 건 단적인 예다.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야당과 언론에 대한 반격으로 지지층을 결집해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발상은 집권 이전이나 후나 달라진 게 없다.

 

문제는 선거운동 하듯이 팩트를 취사선택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게 국정의 성공을 가져오진 못한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 비판과 그래도 민주당보다 낫다는 비교우위론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한 현 집권세력이 야당 시절의 행태를 그대로 반복하는 건 더 이상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를 공격하고 언론과 시민사회를 선동 세력으로 몰아붙인다고 해서, ·일 정상의 비상식적 만남과 한-미 간 경제현안 타결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점점 더 타오르는 비속어 파문속에서, -달러 환율 급등과 주식시장 폭락, 경제위기에 대한 국민 불안감은 대통령의 국정 우선순위에서 까맣게 잊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대통령 권력은 유한하고 책임은 무한하다고 말한 건 바로 대선후보 시절의 윤 대통령 자신이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과 여당은 민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은 무한할 거라 여기면서 국정 책임은 깃털만큼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꿎은 외교부 장관을 해임 건의라는 정쟁의 최전선에 세울지언정 대통령은 검사 특유의 오기와 자존심을 한치도 굽히지 않으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뜩이나 위태로운 대한민국 외교의 길을 개척하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싶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문재인 정권의 검찰개혁을 겨냥해 이런 말도 했다.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 정말 5년이란 시간이 길면 얼마나 길다고, 너무 겁 없이 행동하고 발언하는 해바라기 인사들이 여의도와 용산에 넘쳐난다. 그 중심엔 윤 대통령이 서 있다는 걸 깨닫고는 있을까.

 

국정 운영은 선거운동과 다르다. 효과적으로 반격해서 점수를 얻는 건 선거운동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이젠 대통령으로서 책임 있는 행동과 정책으로 성과를 내고, 국민 신뢰를 얻어야 한다.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논란 속에 미증유의 경제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절실한 국민 통합과 협치의 노력은 물밑으로 이미 가라앉고 있다. 그 책임은 결국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다. 미국 정치에 전례 없는 분열과 선동의 길을 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입으로는 몰락한 미국 중산층의 삶을 되돌리겠다는 걸 국정 목표로 내걸었다. 윤 대통령에게선 허울뿐인 자유가 아닌, 국민 삶과 직결된 정책 목표와 실행 의지를 언제쯤이나 들을 수 있게 될까 몹시 궁금하다.

박찬수ㅣ 대기자 한겨레 2022.09.28.

 

 

586세대, 사회적 상속에 나설 때다

사례 1. 1920년대 초, 부자 곡물상 아버지를 둔 독일의 펠릭스 바일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창설했다. 그가 자유로운 독립 연구를 지원해 독일의 사회 연구와 사회사상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사례 2. 얼마 전에는 1980년대 독일의 대기업 소유주 아들인 양 필리프 렘츠마가 유산을 모두 팔아 함부르크 사회연구소(HIS)’를 만들었다. 다양한 사회적 후원과 연구 지원을 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칼럼을 읽었다.

 

사례 3. 586세대인 A대의 B교수가 최근 10억원을 기부하고 다른 친구들의 기부를 받아 세대연대기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의 포부는 기후위기 시대에 대응하는 생태환경 연구 및 실천 지원을 위한 허브(공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쁜 권력과의 투쟁을 통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온 586세대 중 다음 세대를 위한 사회적 상속과 기부, 지원 활동을 병행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는 것 같다. B교수의 작심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1989년 경실련이 출범할 때, 손봉호 교수 등이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기윤실)를 만들고 그 활동 과정에서 유산 안 남기기 캠페인을 한 적이 있다(최근 손 교수는 자신의 약속을 실행하는 의미에서 재산 13억원을 밀알복지재단에 기부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시민사회에 참여하면서 가장 부럽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 운동이었다. 유산 안 남기기는 양면적이다. 자신에게는 유산 포기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상속시킨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상속의 형태는 주로 기부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기부활동이 있다. 서울교육청에만 1000여개의 공익재단 및 비영리법인이 등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노동조합들도 공익재단을 만들고 있다. 우분투 재단에서부터 한국금융산업공익재단 등도 있다. 노조에 기반한 공익재단들은 기업에 기반한 공익재단과는 다른 지원을 할 것이다. 충분히 의미 있고 좋은 일이다.

 

나는 586 민주화 세대들도 이제 미래세대를 위한 사회적 상속과 기부, 그를 위한 연대의 진지들을 더 다양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그동안 586세대의 기여로 민주화가 되면서 국가와 시장이 많이 개혁됐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담당하는 영역이 넓어졌다. 복지 같은 분야가 대표적이다. 이전에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수업료와 학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장학재단이 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상교육이 확대되면서 민간의 헌신을 공적 기관이 대체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공적 권력이 담당하지 못하는 영역들이 존재한다. 이를 위한 비전과 대안을 만들 다양한 진지들이 필요하다. B교수의 기부가 생태환경 분야라면, 이외의 다양한 주제 영역에서 사회적 상속과 기부, 지원을 위한 진지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나도 한때 긴급조치 9호 친구들과 같이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기금을 작게나마 만든 일이 있다. 아시아 평화대학을 만들고자 하는 그룹도 내 주변에 있다.

 

대한민국을 주도하던 586세대가 이제 중추세대로부터 변화해가는 지금, 어떻게 자신의 여력을 미래세대 또는 다음세대를 위해 써야 할지 고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쁜 권력과의 싸움만으로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하다.

 

586세대가 대학생이기를 거부하고 현장 노동자로 존재 이전을 했던 그 시대의 정신으로 자신의 기득권적 지위를 바라본다면, 미래세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더 많은 연대의 영역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불태웠던 세대. 이제는 세대 연대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세상은 넓고, 의미있는 연대는 많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경향 2022.09.28.

 

 

·일 비교의 묘미

조선후기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제 한·일 비교사(주로 조선후기와 도쿠가와 막부시대 비교)가 조금씩 가능해지고 있다. 막연한 인상 속의 사안들을 학문적으로 증명하는 경험은 짜릿하다. 그 시절에도 한국과 일본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사회였다

 

눈에 띄는 것은 문인(양반)-무인(사무라이)이라는 지배층의 차이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현격한 것이어서 일본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지배층이 상시 무장을 했던 사회일 것이다. 사무라이는 두 개의 칼을 항상 패용하고 다녔는데, 무기 사용은 정당방위 때만 허용되는 게 아니었다. 예를 들면 평민이 심각한 무례를 범했을 때 그를 베는 것이 가능했다(기리스테 고멘·切捨御免). 이에 비해 조선은 비무장에 가까운 사회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역을 지지 않는 양반과 무기의 거리는 더욱 멀었다.

 

도시화율의 비교도 선명하다. 18세기 일본은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에 전 인구의 56%가 살고 있었다. 동 시기 유럽은 10만 이상의 도시에 2%의 인구가 거주했을 뿐이다. 에도(도쿄)100만명, 오사카·교토에 각 3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았을 뿐 아니라 510만명에 이르는 조카마치(城下町·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가 즐비했다.

 

반면 조선은 비교적 높은 농업생산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도시 발달이 더뎠다. 수도 한성이 30만명이 못 되었고, 그 밖에 조카마치 수준의 도시는 평양·개성·대구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본은 전국시대가 끝나면서 지방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모든 사무라이들을 조카마치에 강제이주시켰다(병농분리). 순수한 소비계층인 무인들이 대거 집주하게 되니 자연히 이를 지탱하는 상업 발달과 인구 증가가 전개된 것이다. 조선의 지방양반들은 기본적으로 도시에 살지 않고 하회마을 같은 데서 살았다. 각 군()의 도시라 할 읍()에는 양반이 아니라 서리나 상인들이 거주했다. 일본인 하면 떠오르는 규율, 질서, 복종, 위생등등은 군사사회와 도시문화에서 오랫동안 배양되어 온 것일 것이다. 실제로 도쿠가와 시대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들은 거리의 일본인들이 행렬을 구경하면서도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떠들지 않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도시와 상업이 이렇게 발달했다면 사회적, 지역적 유동성도 일본 쪽이 높을 거 같은데, 실제는 달랐다. 일본은 조선보다 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사무라이-상인(조닌·町人)-농민-부락민(천민)으로 엄격히 구분됐을 뿐 아니라, 각 신분 내에서도 계층 차는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신분만이 아니라 직업도 잘 바꾸지 못했다(않았다). 초밥집을 하는 이에()의 자손은 으레 그 일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았다. 대가 끊기거나 있더라도 초밥집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재능 있는 양자를 들여 초밥집을 유지했다. 때로는 성이 다른 사람이 양자로 들어오기도 했다. 혈연보다 가업을 앞세우는 것이다. 이러니 그 초밥이 맛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 초밥집이 오래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은 혈연의 이름이자, 이에가의 상호(商號)였다. 일본 회사나 가게 이름에 스즈키, 다나카 등 곧잘 성이 붙어 있는 이유다. 거기에 비하면 조선의 가문은 무엇보다 혈연이 최우선이다. 대가 끊기면 재능보다는 같은 혈연의 양자를 들였다. 타성양자(他姓養子)란 생각하기 어려웠다. 직업은 자주 바뀌었다. 구한말 서울 종로를 방문한 한 일본인이 어떻게 1년을 가는 가게가 없나며 놀라더라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지금도 우리 아파트 앞 상가는 잠시 방심하면 다른 가게가 들어와 있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한다. 이왕이면 이런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며 일본 사회를 관찰해보는 것은 어떨까. 초밥집 주인에게 영업한 지 얼마나 되었냐고 한번 물어봐도 좋겠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경향 2022.09.29.

 

 

디지털 시대의 인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인연을 참 가볍게 여겨요. 인터넷이다 소셜미디어다 해서 서로 쉽게 연이 닿다 보니,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네요.”

 

얼마 전 조찬 모임에서 한 참석자가 꺼낸 말이다. 디지털 매체를 잘 쓰는 젊은 층과 디지털 매체를 덜 사용하는 중장년층, 이렇게 집단을 둘로 나눠서, 전자가 후자보다 인연을 가벼이 여긴다는 의견을 전했다.

 

조찬 모임을 끝내고 이동하는 길에, 최근에 내가 받았던 새로운 인연에 관한 연락을 회상해봤다. 휴대전화, 연구실 전화, 문자메시지, 페이스북 메신저, 카카오톡, 이메일 등 다양한 경로로 낯선 이들이 연락해 온다. 돌아보니 내게 다가온 낯선 이들의 연락이 크게 세 유형으로 나뉘었다.

 

첫째, 이름을 알 만한 기업체 대표의 경우, 비서실에 있는 분이 연락해 오는 경우가 흔하다. 어찌 알았는지, 주로 내 개인 휴대전화로 연락해 온다. 대표가 나와 만나서 식사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서가 전달해준다. 유행하는 성격검사인 엠비티아이’(MBTI)에서 늘 내향적 성격으로 판별되는 내게, 낯선 이,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영자와 갑자기 대면하는 상황은 적잖이 불편하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만남을 청하는지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고 한다. 만남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둘째, 많지는 않았으나, 중고생 자녀를 둔 학부모가 연락해 온 경우가 좀 있었다. 메신저를 통해 연락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자기 아이와 한 시간 정도 만나달라는 요청이다. 좋은 곳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소정의 비용을 지불할 테니 시간을 내달라고 한다. 아이에게 동기부여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아이의 진로에 관한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 때로는 아이의 생활기록부에 남길 만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이런 만남을 청했다.

 

셋째,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이 직접 만남을 청하는 경우이다. 주로 이메일로 연락해 온다. 대개 학교에 제출할 과제를 위해 만났으면 하는 상황이다. 나와 만나면 본인이 물어보려는 내용을 기자의 인터뷰 질문지처럼 번호를 달아서 보내주는 경우가 많다. 질문 내용을 보면, 최소한의 조사와 고민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질문에 담긴 내용 자체가 오류이거나, 친구와의 채팅창에 남긴 글처럼 오타와 비문이 난무한다. 월요일에 이메일을 보내면서, 과제를 수요일까지 내야 하니, 화요일에 만나달라는 경우도 있다.

 

결과적으로 필자는 앞서 열거한 세가지 유형의 요청에 모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편이다. 상대의 요청이 내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최근 내게 연락해 온 한 중학생을 다음달에 만나기로 했다. 오랜 고민과 정성이 담긴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온 학생이다. 왜 만남을 청하는지, 만나기 전에 개인적으로 어떤 준비와 고민을 했는지, 만남을 통해 본인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지를 상세히 보내왔다. 본인의 몇달치 용돈을 모아서 30만원을 준비했는데, 일종의 자문비로 지급하고 싶다는 뜻도 조심스레 전해 왔다. 이 학생과의 만남이 기대된다. 자문비를 받을 생각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학교 앞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려고 한다. 그 학생은 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거나 얻어간다고 여기며 고마워하겠으나, 반대로 나는 그 학생을 통해 요즘 10대 청소년의 고민, , 생각을 배우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멋진 미래가 기대되는 청소년과 새로운 인연이 닿는다는 점이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한다.

 

나와 상대의 마음이 닿을 때 우리의 인연은 연결된다. 마음이 닿게 이끌어주는 힘은 디지털 매체에 관한 친화성이나 나이대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권력, 위치, 돈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마음이 닿게 하는 힘을 가진 그 학생, 내향적인 내 마음에 깊게 들어온 그 학생과의 만남이 기대된다. 그와 어떤 음식을 함께 나눌지 즐거운 고민을 해본다.

김상균 | 인지과학자·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한겨레 2022.09.29.

 

 

ESG에 진심이어야 할 헌법적 이유

5대 그룹 중 SK에 뒤이어 LGESG 보고서를 발표했다. 친환경(E), 사회적 책임(S), 투명하고 민주적인 지배구조(G)를 지향하는 ESG 경영이 기업의 필수적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 기업의 투자유도 전략으로 논의되던 ESG는 새로운 재편 국면을 맞은 세계화 질서 속에서 기후위기, 보편적 인권 의식의 성장,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 등 전 지구적 대응이 필요해진 현안들에 대해 기업들도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가치가 되고 있다.

 

2021년부터 유럽연합이 자본시장에 관여하는 금융사에 ESG 공시의무를 법제화함으로써 이제 ESG 경영은 기업윤리의 차원을 넘어 법적 의무로 전환되고 있다. 올해 초 이탈리아는 헌법을 개정하여 기업의 환경보전 의무를 명시하였다. 환경보전의 과제를 헌법화한 것은 스페인(1978)을 필두로, 네덜란드(1984), 독일(1994), 프랑스(2005)의 사례에 뒤이은 것으로 ESG가 헌법적 차원에서 추진되는 큰 흐름을 보여준다. 3세계 아동 및 여성 노동 착취와 같은 기업 인권에 대한 국제인권규범의 발전 또한 기업활동에 또 다른 법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국제사회에서 ESG의 헌법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보다 더 빠른 시기에 우리는 ESG 경영을 헌법적 과제로 설정해왔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도적 가치를 담은 헌법이 제대로 규범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헌법은 제헌헌법 이래 권력구조와 기본적 인권에 관한 장과 별도로 경제에 관한 독립된 장을 두어 온 특색이 있다. 현행 헌법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119조 제1항에서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것이 경제질서의 기본임을 명시하여 기업에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이례적 접근을 하고 있다.

 

이처럼 기업을 헌법화한 데 대해 경제관계의 일방 당사자에게 과도한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마땅치 않아 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시장경제체제에서 기업이 주요한 경제주체임이 엄연한 현실에서 국가와 사회의 기본법인 헌법에서 기업을 헌법생활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추구하는 민주공화국의 기본질서에서 국민경제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는 기업에 그에 걸맞은 시민적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새길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기업에 국민경제생활의 주축인 시민, , 공동체 구성원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모두가 공존·공생·공영하는 민주공화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 기업의 헌법화는 축적된 자본의 효율성과 재생산에만 골몰하기보다 기업성장의 보이지 않는 토대인 공동체의 지속 가능 발전을 위해 기업이 공적 책임의 일부를 부담하는 헌법적 이유가 된다.

 

현행 헌법은 1980년 헌법부터 명문화한 환경보전에 대한 국가와 국민의 공동책임을 제35조에서 계승하고 있다. 개인과 더불어 경제주체의 지위를 헌법에 의하여 승인받은 기업은 환경보전에 대한 국민의 공동책임을 이행해야 할 헌법적 의무를 가진다.

 

시민적 지위를 가지게 된 기업의 사회적 책무 또한 근로환경과 노사관계에 대한 기본적 인권의 보장 조항을 통해 이미 헌법적 과제가 된 지 오래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근로조건의 기준을 법률로 설정하도록 한 근로의 권리에 관한 조항이나, 사용자인 기업에 또 다른 경제주체인 근로자와의 단체적 교섭 및 쟁의를 원칙적으로 수용하도록 규율하는 노동3권 보장 조항이 대표적이다. 이로써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국가의 기본적 존립이유에 순응하여 기업은 소속 근로자의 인간으로서 존엄을 존중하는 근무환경을 조성할 공적 책무를 기본과제로 한다.

 

나아가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해 경제민주화를 달성하도록 한 경제헌법의 조항은 사회정의와 공정경제의 가치를 실현할 기업시민의 공적 책임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기업은 소속근로자뿐만 아니라 협력관계를 가진 다른 기업과 그 소속 근로자의 인권과 복지, 그리고 기업활동의 기반이 되는 지역사회와 국민경제 및 국제사회의 균형발전을 위한 책임의식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헌법적 책무를 가진다.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이나 노란봉투법에 대하여도 경영권이나 재산권에 함몰된 주장보다는 기업의 헌법적 지위에 걸맞은 책임과 조화를 이루는 조건을 고민하면서 헌법적 자유와 권리를 추구할 수 있는 기업의 예지가 필요해 보인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2022.09.30.

 

 

삼겹살 1인분은 왜 180그램?

이건 아마 전 국민 궁금증일 테다. 고깃집에서 삼겹살 1인분을 주문하면 애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거 먹고 배가 찰까 싶다. 그러니 1인분에 그치는 일이 없다. 단언컨대, 건국 이래 건장한 남성 넷이 고깃집에 모여 4인분에 만족하는 사건은 일어난 적 없다. 고깃집 주인의 말을 들어보면 어지간한 사내 넷이면 적게는 6인분, 많게는 12인분도 주문한다. 어느 전직 운동선수 가족은 방송에서 소고기 16인분을 셋이 해치우기도 했다. 덩치 큰 넷이 나오는 다른 방송에서는 1인분만 먹는 걸 불명예로 여긴다. 아무렴 삼겹살 1인분 180g은 도무지 성에 안 찬다.

 

까닭을 알아봤다. 열량을 셈하면 이해된다. 보통 성인 남성은 하루에 2700, 여성은 2000를 먹어야 한다. 한 끼에 평균 780를 섭취하면 된다. 쌀밥 한 공기가 300, 찌개 100, 각종 반찬과 쌈, 채소 100면 이미 고기 없이 500. 나머지 280는 삼겹살 80g이면 충분하다. 요거트 한 컵과 비슷한 양이다. 이게 권장 섭취량이다. 안타깝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삼겹살 1인분 180g을 다 먹으면 고기만 630. 여기에 밥, 반찬, 찌개까지 먹으면 1130가 된다. 우리 배가 불룩하게 나오는 원인이 여기 있다. 덩치가 커서 많이 먹는다고 2인분을 해치우면 고기만 1260에 나머지 음식을 합해 총 1760. 과식이다. 칼로리를 따지면 삼겹살 1인분도 많다. 엄밀히 말해 그 절반이면 충분하다. 고깃집에서 1인분을 둘이 나눠 먹는 건 너무 가혹하고, 고깃집 주인 눈치도 고려하면, 양보해서 각자 1인분만 먹자. 먹고 이미 과식했다 생각하자.

 

고기 소비를 줄이는 건 우리 건강뿐 아니라 환경을 지키는 좋은 방법이다. 현재 축산업은 전 세계 온실가스의 18%를 배출한다. 오토바이, 비행기, 기차, 자동차, 화물차, 선박 같은 전 세계 운송수단의 배출량을 모두 모은 양보다 많다. 구글 지도를 보면 남아메리카 대륙의 절반은 가축에게 먹일 사료를 기르는 밭이 되어 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 브라질에서는 경작지를 더 넓히려고 숲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베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먹는 고기는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치는 공장식 축산업의 상품이다.

 

더 많은 고기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숲을 밀어내면, 거기 살던 꽃과 풀, 풍뎅이와 메뚜기, 토끼와 여우, 오랑우탄은 어디로 가야 할까. 그린피스는 이렇게 탄소발자국을 많이 남기는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고 있다.

 

갑자기 식습관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탄소를 비교적 적게 뱉고 건강에도 좋은 채소 위주 식단을 차츰 짜보면 좋겠다. 그것도 힘들 수 있으니 가장 먼저 고기를 영양에 맞게 적당량으로 줄여보자. 과식이라도 멈추자는 말이다. 어떤 방식이든 고기 소비를 시나브로 줄이면 가축을 먹이는 데 사용하는 곡물을 기아 문제 해결에 쓸 여력도 생긴다. 건강한 식생활은 내 몸과 세상을 건강하게 만든다. 나와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길은 가까이 내 식탁에도 있다. 고깃집 주인장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 건강을 위해, 또 환경을 위해 일단 고기는 딱 1인분만 먹기 어떨까. 물론 더 적을수록 좋고, 채식이면 금상첨화다. 내일 101일은 세계 채식인의날이다.

김연식 전 그린피스 항해사 경향 2022.09.30.

 

 

대재앙 앞에서

지난 924일 오후, 서울 숭례문·시청·광화문 일대에서 35천여 시민이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이윤보다 사람!”을 외치며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했다. 상서로운 기운이었을까 신기루였을까, 하늘에 피어 있던 무지개 구름이 꽤 오랫동안 행진 참가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는 부국이 짓고 벌은 빈국이 받고’. <한겨레21>이 꾸린 특집호에 담긴 제목의 기사는 온실가스 0.4% 배출한 파키스탄이 기후위기 취약국, 사상 최고의 비 쏟아진 몬순 영향으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겨라고 전했다. 그들의 식민모국이었던 영국보다 더 넓은 지역이 수몰됐고, “어린이 340만명을 포함해 640만명의 주민이 이재민이 됐고, 국민 7명 중 1명인 3300만명이 홍수 피해를 봤으며 어린이 551명 등 1559명이 숨졌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숫자에 서사가 담길 여지는 없었다.

 

<경향신문> 사설이 인용한 국제구호기구 옥스팜 발표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전세계 소득 상위 10%가 온실가스의 절반 이상을 배출한 반면, 소득 하위 50%는 단지 7%의 온실가스를 배출했다고 한다. 이 부조리한 현실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소득 상위 국가들은 거의 모두 식민모국이었고, 소득 하위 국가들은 대부분 식민지였다. 노예무역과 식민지화에 따른 죽음과 고통은 조상의 일로 끝나지 않았다. 자원 수탈과 식민모국의 획일적 농지 이용 등으로 자손들에겐 자력으로 순환 발전시킬 경제적 토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식민모국들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국경선과 토착 지배세력을 통한 신식민지 정책으로 인민들은 내전과 폭정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살길을 찾아 식민모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해보지만 지중해를 건너는 데 성공해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반이민, 제노포비아 구호와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다. 그런 그들에게 급기야 기후재앙까지 덮쳤다. 대대로 풍요를 누린 식민모국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영향으로.

 

책임? 2009년 코펜하겐 기후협약에서 북반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책임지기로 합의하고, 기후위기 최전선에서 고통받고 있는 개발도상국과 저소득 국가들이 인프라를 구축하고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1천억달러를 조성해 2020년부터 주기로 약속했다. 202012월 유엔 사무총장이 당신들이 주기로 약속했잖아?”라고 통사정을 했다는데, 그는 정말 그 나라들이 십여년 전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 나라들은 최근 반이민, 반이슬람 기치를 높이 든 극렬 파시스트를 총리로 선출한 이탈리아를 비롯해 극우화 경쟁을 벌이는 유럽 국가들이 모두 그렇듯이,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는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차기 유엔기후회의(COP27)가 이집트의 휴양지에서 열린다. 2013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수많은 민주인사를 고문, 투옥, 처형한 군사독재 정권에 알리바이 기회를 제공한 것도 그들 민주국가다.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국제정치에 비해 그나마 민주적 통제가 작동하는 각국의 국내정치 상황을 보더라도 불평등은 심화하고 있다. 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외친 이윤보다 사람!”의 구체적 국내 현안인 노란봉투법은 하청-특수고용노동자를 근로자로 인정하고 원청을 교섭 대상에 포함해(여태 그렇지 않았다!)’ 합법 파업의 범위를 아주 조금 넓히자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국회 통과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내 불평등도 민주정치로 극복할 수 없는 터에 국경 없는 기후위기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오늘의 세계시민이 막을 수 있을까. 기후재앙은 이미 남반구 제3세계를 덮쳤고 그 파고에 최근 가속도가 붙은 게 분명한데!

 

인간이 여전히 전쟁을 벌이는 것에도 어느새 익숙해진 우리다. 최근 핵무기 사용까지 거론되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침략, 마침내 제국주의 세력 간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위험 앞에서도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다. 과학과 학문의 엄청난 발전, 경제적 도약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인식은 칸트가 <영구평화론>을 썼던 18세기 말보다도 지금이 더 퇴영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어떤가. 오늘날 동물권 표어의 하나인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가 아닌가도 아니다.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가 아닌가이다라는 글을 제러미 벤담이 썼던 때가 18세기 말이었다.

 

이런 인식의 빈곤, 공감능력의 상실 말고도 오만한 기술주의자들이 우리를 흔든다. 대재앙의 인자는 기후위기만큼 우리 안에 있다. 모든 사회 상부구조의 물적 토대가 자본주의에 있다고 할 때, 지배세력이 자신의 발등을 찍는 일에 나설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들이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기술주의자들에게 이끌리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에겐 오직 세계시민의 분노와 항거, 그들과의 연대, 아스팔트 거리투쟁을 통한 정치권에 대한 압박만 남아 있다.

 

대재앙을 피하기에는 이미 때를 놓쳤을 것이다. 이런 비관적 전망이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그래서 수백년 동안 인간의 욕망체계와 가치관을 지배하면서 절제 없이 자연을 유린해온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자연을 존중하듯 다른 인간, 다른 동물을 존중하는 생태공동체 사회를 이룩할 수 있기를. 인간사는 말한다. 노예(농민, 노동자)의 자발적 반란은 거의 실패했고 설령 성공해도 주인만 바뀔 뿐 노예의 처지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유 아니면 죽음을!”은 인간이 아닌 자연의 구호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굴종하지만, 자연은 굴종하지 않고 그냥 파괴된다. 그리하여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자연의 복원 속도보다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속도가 빠른앞에서 가진 자들은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투항하는 대신 끝까지 버티려고 할 것이다. 지하 수백m 벙커 속에서 두더지처럼 살더라도. 지금 우리는 그런 디스토피아와 생태공동체 사회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다.

 

부기: 탈석탄법 제정 국민동의청원이 이 글이 실리는 오늘(930) 마감된다. 국회의원들에게 법안 논의를 하도록 의무를 지우려면 5만명이 참여해야 하는데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참여하기를, 또 주위 분들에게 권하기를. 우리가 중고생 시절에 읽었던 스피노자의 설령 지구가 내일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다는 그런 심정으로.

https://bit.ly/탈석탄법제정.

홍세화 |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대표 한겨레 2022.09.30.

 

 

다른 정치는 가능하다

한동안 현 정부를 보면서 과거를 향해 돌아가는 시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와 한국 사회 시계 초침은 부지런히 미래를 향해 가는데, 현 정부의 초침은 더 부지런히 과거로 가고 있는 느낌.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정부의 시계는 그저 오작동하고 있었다. 어떨 때는 2022년에, 어떨 때는 2002년이나 1992년에 서서 가끔은 오른쪽으로 돌고 가끔은 왼쪽으로도 도는 시계.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현실감각을 잃게 하는, 그런 시계 같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과연 이 정부만 그런 걸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이 정부가 불과 몇달 전 대한민국 선거권자의 77.1%가 투표에 참여해서 만든 정부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불과 0.73%포인트 차이였다는 이유로 애써 이 정부의 정당성을 부인하려 하지만, 이 정부가 아무런 하자 없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출범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최근 대통령 국정지지도를 보면, 현 대통령을 선택하지 않았던 유권자들만이 아니라, 선택했던 유권자들도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 투표자 다수는 그를 선택했고, 그 선택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오작동하는 정부와 정치를 바로잡는 일은 지난 대선에서 우리의 집단적 선택이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가 짐작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 그때 이 격변의 시대 대한민국 정치공동체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복잡한 심경들이 모인 집단적 결과가 현 정부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엄청난 파고를 함께 넘었지만, 그 과정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실직이든 폐업이든 집값이든 말이다. 세계가 함께 겪는 고통이라고 해도 그게 위로가 될 수는 없었다. 내 삶을 이런 고난에 밀어 넣은 그 무엇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성의 질서 밖에서 누군가 일거에 해법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사람이 많았다. 또 어떤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하다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다. 현 정부가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들이 집단으로 모여 만든 결과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해법도 소위 ‘1, 2을 나눠 책임을 전가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면서 머리를 맞대는 것이어야 한다.

 

여전히 우리는 어렵고 혼란스럽다. ‘코로나19’는 아직도 꼬리가 길고, 유례없는 기후재난이 닥치고, 금리와 물가는 오르고 주식시장은 곤두박질치는데, 무엇 하나 뚜렷이 설명되는 건 없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지금은 지구와 인간이, 국가들 관계가, 시장이 동시에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대다. 혼란스러운 건 미국 시민이나 독일 시민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분명한 건 있다. 어디서건 이 격변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은 정치이며, 정치를 통해 정책을 바꾸고 국가적 자원을 나누면서 해결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 정치와 정부가 오작동하고 있다면, 제대로 작동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느 영역에서나 기성의 질서를 지탱하는 논리는 강력하다. 정치에서도 그렇다. ‘어차피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아, 정치인이 제 머리 깎는 건 불가능해, 이 제도는 이래서 문제고 저 제도는 저래서 문제래, 어차피 방법은 없어.’ 이런 논리에 수긍하는 순간,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을 바꿀 방법은 사라진다. 오작동하는 정치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좌절하기보다 그 무엇이라도 선택을 할 때다. 기회비용을 치러야 할 테지만 지금의 선택이 잘못됐다면 바꾸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고통과 혼란을 감당하기보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발이라도 움직이는 게 낫다. 어쨌든 기존 제도가 바뀌면 현 제도 안에 안주하던 정당과 정치인들은 긴장하게 되고 시민들 눈치를 보게 된다.

 

20244월 총선을 치르려면 20234월까지 선거법을 바꿔야 하기에 국회에는 이미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꾸려져 있고, 국회의장에 이어 제1야당 대표가 개헌 논의도 제안해 놓은 상태다. 헌법, 선거법, 정당법 개정 논의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고 다양한 공간에서 다른 정치에 대한 상상을 이야기해보자. 지금은 다른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한겨레 2022.09.30.

 

 

비속어' 또렷한데 '가짜뉴스' 척결이라니?

정공법 외면한 프레임 싸움이 전략적 대응?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 중 벌어진 '비속어' 논란이 여야 대치를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여권이 갈등을 새 전선으로 전이시킴으로써 국면을 바꾸고 지지층 결집을 시도하는 전형적 전략이다.

 

여권은 윤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이 왜곡 보도 탓이라며 MBC와의 대치 구도로 프레임을 바꾸고 급기야 '좌파언론의 과거 광우병 보도'를 소환하면서 갈등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이는 윤 대통령이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 "진상을 밝혀야"한다고 한 발언 이후 벌어진 일이다. 여권은 비속어 논란을 '가짜뉴스''허위 보도' 프레임으로 돌파하려는 것 같다. 가뜩이나 눈에 가시였던 방송사에 대한 압박으로 언론을 길들이겠다는 의도도 읽힌다.

 

비속언 논란의 프레임 전환으로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겠다는 전략으로 보이지만 이는 여권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일단 비속어 논란이 본질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반복함으로써 논란의 핵심을 언론사의 가짜뉴스로 돌려 대통령 실언을 가릴 수 있다고 믿는 태도 자체가 적절치 않다.

 

첫째, 여권이 정직하지 않다는 인식을 각인시킴으로서 향후 국정 운영의 신뢰 훼손과 동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정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체는 신뢰다. 논어 안연(顏淵) 편에 나오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정부에 대한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신뢰의 위기는 정권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명백하게 들리는 말을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면 과연 국민이 이를 믿겠는가. 해프닝이자 가십으로 끝날 일을 이렇게 키우고도 전략적 대처라고 위안을 삼을 건가. 설령 '바이든'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해도 비속어는 여전히 남는 문제다. 이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나 사과 없이 이 상황이 가라앉을 수 있다고 보는 인식 자체가 납득되지 않는다.

 

둘째, 명백한 사실을 놔두고 동맹 훼손, 왜곡 보도로 전선을 치환하고 야당과의 대립을 격화시킨다면 윤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을 구현할 수가 없다. 가뜩이나 윤 정권의 특화된 정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임기 초 역대급의 저조한 지지율을 타파하려면 정책으로 정권의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정책은 다수를 점하는 야당과의 협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여야 모두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더라도 국정주도 세력인 여권이 더 큰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셋째, 국민의힘에 '신핵관'으로 불리는 의원들의 처신이 조국 사태 때의 더불어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의 행태와 오버랩 된다. 결국 과도한 비호와 견강부회는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고 민주당 정권은 5년 만에 정권을 내줘야 했다. 초선 의원들이 정의감과 개혁 마인드를 가지고 당에 혁신의 새 기풍을 진작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를 속이고 아첨만 일삼는다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총선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결국 공천의 유리한 입지를 점하려다가 자신의 몰락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우를 범하고 있다.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자를 동양에서는 소인이라 한다. 맹자는 의()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고 하고, ()을 해치는 사람은 적()이라고 하고, ()나라의 폭군 주왕을 잔적(殘賊)이라 일컬었다. 결국 주왕은 주()나라의 무왕에 의해 정벌됐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얘기이고 기원 전 일들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

 

지금 여권은 총체적 난국이다. 이준석 전 대표와의 내홍, 해외 순방 논란, 낮은 지지율 등의 복합 위기를 돌파하기 위하여 정치공학적 프레임 전략으로 국면을 전환하려 하는 것은 하책(下策)에 불과하다.

 

위기를 돌파하려면 정공법을 선택해야 한다. 여권은 정공법을 국면전환의 갈등 치환책으로 오인하고 있다. 정공법이란 정직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어찌 정치에 왕도가 있겠는가. 길은 먼 데 있지 않다. 민심은 권력의 의중과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 프레시안 2022.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