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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022.8.1~8.30 우리 시대의 롤모델 ‘김건희’

by 이성근 2022. 9. 5.

한국판 '악마의 맷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프레시안 2022.08.01.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경향 2022.08.01.

반환경 시대와 환경 포기 지역 경향 2022.08.01.

남방큰돌고래와 반려동물 세계 2022-07-31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하는 나라 경향 : 2022.08.02.

리더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이유 경향 : 2022.08.03.

대한민국은 망했다 한겨레 2022.08.04

김건희 박사의 학위논문을 다시 읽으며 한겨레 2022.08.04.

대한민국 교육정책은 시민이 결정한다 경향 2022.08.04.

퇴행적 정부와 한국형 민주공화제 경향 2022.08.05

엉터리 개편안의 기원은 안철수 경향 2022.08.06.

보수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였나 2022.08.07

복수극에 열광하는 사회 주간경향 2022.08.08.

해가 저물면 나는 야한 춤을 출 거야 주간경향 2022.08.08.

취업난 속 구인난 경향 2022.08.08.

서민의 실존 위협, 국가는 알까 경향 2022.08.09

윤석열 정부의 아마추어 국정 참사, 졸속 추진-사후 공론? 프레시안 2022.08.08.

헤어질 결심’, 군 위안부, 김건희님의 다운로드 경향 2022. 08.10

윤 대통령과 소용돌이 한국정치의 비극 한겨레 2022. 08.10

팬데믹,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지요한겨레 2022. 08.10

국민대와 숙명여대, 굴종할 것인가 승리할 것인가 프레시안 2022.08.11

장애·저임노동·어린이겹겹의 소외 드러낸 반지하의 폭우한겨레 2022. 08.11

고쳐 쓴김건희 박사논문 심사서 경향 2022. 08.12

흑표의 맹수성과 모기의 상상력 경향 2022. 08.13

 

대통령님 파이팅!’, 단순 해프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돼 경향 2022. 08.15

서울의 이기주의를 고발한다 경향 2022. 08.15

윤 대통령 외부총질 리스크·중에 또 우스워질 텐가 한겨레 2022. 08.15

사대주의 언론의 윤석열 교육미디어오늘 2022. 08.15

 

썩은 육신에서 삶의 진실을 마주하다 동아 2022. 08.15

해골에 다가가는 아이生死의 거리는 짧다 2022-07-04

인생의 마지막 유희, ‘죽음의 춤 2022-05-2

 

실제 상황물난리, 윤석열 정부는 없었다 경향 : 2022.08.15.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이득은 누가 챙기나 경향 : 2022.08.16.

소수의견 경향 : 2022.08.16.

아래쪽의 재난 경향 : 2022.08.16.

취임 100, 윤 대통령의 두 갈래 길 경향 : 2022.08.16.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한겨레 : 2022.08.16.

노동시간, 최저임금, 중대재해처벌법의 불안한 미래 한겨레 : 2022.08.16.

3C'의 시대기후(climate)·계급(class), 그리고 자본주의(capitalism) 프레시안 2022.08.16

·중 수교 30,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경향 2022.08.17

역사의식과 독립운동 통일뉴스 2022.08.17.

0.001%도 나아가지 못할 담대한 구상 통일뉴스 2022.08.17.

약자와 동행하시겠다고요? 경향 2022.08.18

이재용 특별사면이 말해주는 것 경기 2022.08.18.

맞는 말' 윤석열이 빠진 함정, 정치 외면하는 건 정치인이 아니다 프레시안 2022.08.19.

 

유럽은 올겨울이 두렵다는데, 우리는? 한겨레 2022-08-21

죽음에 대하여 한국 2022.08.22

정의롭지 못한 미국을 보는 착잡함 한국 2022.08.22

어버이의 나라 경기신문 2022.08.22

중산층의 집짓기, 로망과 욕망 한겨레 2022.08.23.

김건희 논문 사태와 대학·교수의 부끄러움 한겨레 2022.08.23.

역동적인 부산항, 가덕신공항으로 비상해야 부산 2022.08.23.

승자와 패자, 그리고 버려진 자 경향 2022.08.24

우리 시대의 롤모델 김건희겨레 2022.08.25

인사가 만사라는데 한겨레 2022.08.25.

부끄러운 줄 모르는 얼굴 경향 2022.08.26

헛다리 짚기 경향 2022.08.26

성장의 한계’, 그 후 50년 경향 2022.08.26.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경향 2022.08.27.

이승만의 국가보안법 활용법 프레시안 2022.08.27.

김건희·한동훈·대통령실, 답변하지 않는 권력 한겨레 2022.08.28.

사회권을 망각한 사회 한겨레 2022.08.28.

집단 지식만 있고 집단 지성은 없다 경향 2022.08.29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경향 2022.08.29

윤석열 정부의 삼위일체 경향 2022.08.29.

 

서러운 딸들과 개딸미디어오늘 2022.08.29.

기대할 게 없고, 기댈 게 없다 경향 2022.08.30

담대한 구상의 뚜렷한 한계 경향 2022.08.30

검찰보다 더 열심히 국정 지원하는 최재해 감사원장 한겨레 2022-08-30

진짜 범인은 감옥 밖에 있다 한겨레 2022-08-30

 

 

 

한국판 '악마의 맷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제 '경쟁' 아닌 '관계'로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 때

필사 방식으로 성경과 지식을 공유했던 15세기 유럽에서,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유럽 사회를 정보혁명, 지식혁명으로 이끈 주인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발명품을 가장 먼저 활용한 건 당시의 타락한 교회다. 면죄부로 돈벌이에 열중했던 교회에 이 활판 인쇄기는 단시간에 원하는 만큼 면죄부를 찍어낼 수 있는 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타락한 이들 교회를 비판하며 일어났던 종교개혁도 이 인쇄혁명 덕분에 성공한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유럽 전역에 전달되는데 불과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인류 역사에서 지식과 정보의 소통 공간이 획기적으로 확대되는 순간엔 늘 기술의 힘이 작용했다. 사람과 물자를 대량으로 실어 날랐던 최초의 이동 수단인 증기기관차 발명, 이어진 전기, 전화와 인터넷 혁명은 시공간 제약을 훌쩍 넘어 인간 삶을 세계무대로 옮겨 놓았다. 상품 노동에 기반 한 자본의 생산력 증대가 지금의 세계시장으로까지 뻗어갈 수 있었던 것도 기술의 힘이다. 인간은 그 기술 기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을 기꺼이 상품화했지만 이제 그마저도 기술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그래도 아직 인류는 완전고용을 꿈꾼다.

 

상품시장경제의 메커니즘 간파했던 마르크스와 폴라니

카를 마르크스와 사회철학자 칼 폴라니는 상품 시장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한 학자들이다. 분석의 초점은 경제가 인간사회의 일부가 아닌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사회구조다. 산업혁명 당시를 살았던 마르크스는 생산 및 생산관계로 이루어지는 하부구조가 결국 상부구조를 지배하게 되는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한 반면, 이후 1·2차 세계대전과 공황을 겪었던 폴라니는 인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작동원리로 당연시 믿고 있는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 허구임을 추적했다.

 

폴라니가 말했듯이 '사회'란 인간이 존재하는 실체적 기반이다. 따라서 인간이 실존하려면 최소한 그 사회가 붕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19세기라는 독특한 문명의 모태였던 자기조정시장이라는 혁신적 아이디어가 등장한다. 이 자기조정시장은 완전한 유토피아이며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는 시장이다.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아예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의 씨를 말려 버리기 때문이다(폴라니는 이를 '악마의 맷돌'에 비유). 따라서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과 자연이 그 폭력적 방식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운동이 주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저, 홍기빈 역).

 

폴라니는 19세기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유럽 문명과 세계 자본주의가 겪어야 했던 격변의 순간들을 사회의 '이중운동'으로 설명한다. 이중운동은, 사회가 한쪽에서는 시장 메커니즘(수요와 공급의 가격메커니즘으로 운영되는 체제)으로 경제를 조직하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화폐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보호 운동으로 나타난다. 애초에 상품이 될 수 없는 인간, 자연, 화폐를 상품경제의 토대로 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사회를 해체할 만큼 위협적이어서 이런 긴장에 맞서 공동체 스스로 자기보호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폴라니에게 공황은 사실상 자유시장 경제 원리에 완벽하게 근접해가는 상태다. 19세기 말 자유시장경제가 극도의 긴장으로 치닫자, 전쟁과 대공황 같은 위기가 오면서 파시즘, 공산주의, 뉴딜 정책 등이 등장하는데, 이는 위기에 대한 사회의 대응인 이중운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자기조정 메커니즘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면 반대 방향의 보호주의가 작동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풍요의 세계시장이 자기조정 기능을 멈춘 지금의 위기는 어떤가. 환경재앙이 목전에 왔음에도 인류 스스로 신자유주의적 생산방식을 멈추지 못하니 자연이 대신 자기보호운동을 한 것일까? 이는 자연이 세계화에 제동을 건 최초의 전 지구적 현상이다.

 

풍요의 바다, 세계시장이라는 허상

세계화의 다른 이름인 세계시장은 세계의 값싼 제품 소비가 가능한 시장이다. 즉 어느 나라에선가 값싼 노동력으로 제공되는 자원과 제품들이 상대적으로 임금이 비싼 나라들에 값싸게 공급되는 구조다. 인류가 그 세계화라는 완전한 분업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던 끝자락에서 세계 공장이 갑자기 멈춰 섰다. 세계는 그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지만 이전의 풍요가 계속될 지는 의문부호다. 값싼 노동력의 나라들도 언젠가 자본의 축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산업사회로 편입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임금과 생산물가도 오른다. 세계 노동시장의 값싼 노동력도 함께 고갈되는 건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처럼 '풍요''고갈'은 지금의 세계시장을 함축하는 핵심적 단어다. 누군가의 풍요는 누군가의 착취로, 어느 나라 도시의 풍요는 어느 지역 자연과 노동의 고갈로 연결된다. 폴라니는 이런 식으로 조여 오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완전하게 작동하는 것은 유토피아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도 자연도 결국 한계에 이르는 순간이 온다면 사회적 관계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풍요에 대한 경고음이었던 잦은 기상 이변에도 무심히 살아온 인류의 일상에도 지금까지의 풍요를 걷어낼 물가 급등이 찾아왔다. 이제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인간과 자연을 갈아 넣을 정도로 가혹하게 돌아갔던 신자유주의적 메커니즘에서 공동체를 지키려 작동한 보호주의(파시즘, 공산주의,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난 이후 인류사회는 혹독한 후유증을 경험해야했던 세계역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자유경쟁시장은 안녕한가?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자유경쟁시장은 어떻게 돌고 있을까? 우리의 노동시장에도 자기조정 메커니즘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매섭게 돌고 있다. 해마다 산업 현장에서 2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갈리고 잘리고 찢기는 등 온갖 형태의 사고들로 사망한다. 심리적 맷돌도 돈다. 부의 양극화로 인한 갈등 양상을 넘어 시장 논리에 포위된 청년 남녀들의 갈등, 세대갈등, 직업 간 갈등, 젠더갈등 등 분리될 수 있는 모든 지점에서 갈등들이 폭증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 기반인 '사회'는 실종된 채, 오직 효율성 중심의 '무한 경쟁'이라는 신념의 맷돌이 돌고 있다.

 

이런 현상들을 심각히 인식해야할 정부는 오히려 갈등 구조를 악화시키고 있다. 정부는 노동의 유연화가 필요하다며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을 발표했다. 마치 지금의 경제위기를 노동자들이 너무 빈둥거린 탓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첫 단추가 이제 막 시작해 자리잡아가는 주 52시간제(연장근로 12시간을 제외하면 40시간)를 손보는 일이다. 주 단위로 상한을 규정한 연장근로 12시간 자체가 점차 줄여가야 할 대상인데 오히려 월 단위로 확대하겠다고 한다. 확대될 경우 특정 주에 최장 92시간까지 근로가 가능하다. 이게 생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정부는 연장근로 확대의 근거로 유럽 등 선진국 사례를 들었지만 우리나라 연평균 근로시간(1928시간)은 이들 나라들의 연평균 근로시간(OECD 평균 1500시간)과는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산업혁명의 출발지인 영국에서 최초로 제정된 '공장법'은 살인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에 대한 요구였다. 그로부터 200년이 흐른 지금의 유럽은 국가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35시간 이내에서 30시간대의 노동을 한다. 20시간대의 노동을 포함해 주 4일 근로도 실험 중이다. 그런 흐름과 차이를 종합적으로 살피지 않고 연장근로 하나만을 두고 선진국보다 규제가 심하다는 식의 인식은 산재 1위 공화국인 이 나라 국민의 건강권 등 삶의 조건들을 아예 무시한 단편적 처사다.

 

여당도 다를 바 없다. 자신이 추천한 젊은 청와대 행정관이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받는 9급 공무원일 뿐이어서 안타깝다는 여당 원내대표의 절절한 해명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절망했다. 절망했던 이유조차 간파하지 못했던 그 무심함은 무지함보다 못하다. 그런 무심함에서 인간다운 삶을 생각하는 좋은 정책과 제도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단계 원·하청 착취구조의 끝은 개인사업자

전 세계 기아 문제를 추적하며 투쟁해온 사회철학자 장 지글러는 '5초마다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은 살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미개함으로 만들어낸 풍요로움이 넘치는 이 지구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도 말한다. 우리나라 노동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눈물로 만든 빵에 반대한다!' 제빵사 5300명을 불법파견으로 사용해 불법 착취하고도 노동 조건을 개선하지 않는 파리바게뜨에 대한 불매운동의 표어다. 우리나라에서 지속적으로 양산되는 소상공인들과 특수고용노동들은 사실상 노동법 보호를 받지 못하는 유연적 노동들이며 많은 기업들이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신자유주의적 맷돌 방식의 중심에 바로 이 다단계 하청구조가 있다.

 

이번 대우조선해양 사태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가 2배에 이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온갖 위험하고 힘든 노동은 대체로 수차례 하청으로 내려가면서 비용절감 수단으로 악용되는 구조다. 이런 불평등 구조는 놔둔 채 정부는 임금체계를 개선해 능력에 따라 임금이 지급되는 구조를 만들겠다고 한다. 물론 우리의 연공급제는 시대적으로 시효를 다한 골동품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개선해갈지를 결정할 근거는 정확한 실태파악에 있다. 과연 그 능력의 기준이 무엇인가. 같은 일을 하고도 다른 처우를 감당하고 있는 원청과 하청 간 격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정확한 실사 파악이 우선이다. 순서가 뒤바뀐 정책 실행은 또 다른 경쟁적 부작용만 야기할 뿐이다.

 

해마다 2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혹하게 죽어나가고 있고, 많은 사고들이 하청 노동현장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더 많은 노동 착취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 사회가 몹시 불편하다. 시간당 최저임금 440원 올려달라고 집회를 벌이고 있는 노년의 청소노동자들을 상대로 젊은 대학생들이 수업권 침해 소송으로 대치하고 있는 이 극단의 사회는 장 지글러가 추적해낸 '기아와 다국적기업 사이의 잔인한 메커니즘'과 너무 닮아있다. 바로 우리나라 산업 전반에 견고히 뿌리내린 다단계 착취구조와 닮았다.

 

규제혁신추진단을 만들겠다는 정부는 규제전문가를 채용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인식의 빈곤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16명의 채용공고를 내면서 18시간 근무조건에 내년 최저임금에도 미달하는 196만 원을 제시했다. 지원자가 미달하자 깜짝 놀란 정부는 3시간을 대폭 줄인 5시간 근무조건으로 정정해 재공고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5시간 근무로도 가능했던 추진단 운영을 8시간으로 착각했다면 그런 주먹구구식 운영도 문제지만, 최저임금법의 취지와 그에 대한 인식의 부재 역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개정된 주52시간제, 중대재해처벌법 등 노동 관련법들의 개정 취지가 여유로운 삶의 수준에 맞춰진 것이 아니다. 세계 산재 사망 1위 국가의 오명을 인식한데서 시작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유로운 삶은 '경쟁' 아닌 '관계'에서

세계인으로 살아온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린 세계시장을 목격했다. 거기서 다시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서니 스스로 자본의 노예로, 소비의 노예로 살아온 삶의 그물망도 보인다. 적게 소비하면 노동시간도 조금씩 줄일 여유와 자유가 따라올까? 그 자유의 공간에 치열한 경쟁 대신 인간의 실존 기반인 '사회'라는 관계로 채우는 건 어떨까 상상해본다. 우리나라의 인구절벽을 해결하려면 그런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구절벽에 대한 정부의 무대책도 문제지만, 우리사회에 만연한 극단적 경쟁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개선책은 요원하다.

 

코로나로 인한 세계체제의 붕괴는 극단적 시장경제에 대해 자연과 세계사회가 자기보호운동을 한 결과다. 다시 이전의 '경제 수준'을 회복하는 데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맷돌방식의 시장에서 인간이 사는 '사회'로 나갈 것인지로 방향을 틀어야 할 때다. 무한 소비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 착취로만 가능하다. 무한 착취 기반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 불평등과 그로부터 야기된 우울, 폭력, 자살 등 거의 모든 사회문제와도 연결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반세계화에 직면해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전례 없는 거대한 전환기와도 맞물려 있다. 인류와 함께해온 과학, 철학, 예술, 문화 등 모든 사유의 학문들은 더 넓은 세상, 더 먼 세상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너머의 호기심으로 만들어낸 인류의 귀중한 결과물들을 오직 시장경제에만 '몰빵' 해서야 되겠는가?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타락한 교회가 이용하기도 했고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는데도 쓰였다. 기술을 어떻게 가져다 쓰느냐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몫이다. 어떤 제도를 가져다 쓸 것인지도 당연히 인간의 몫이다. 그 쓸모에 따라 세상도 달라질 것이다.

김진희 노무법인 벽성 대표 | 프레시안 2022.08.01.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법과 원칙’, ‘손해 배상’, ‘분리 매각’.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이 종료된 후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말들이다. 지난 22일 파업이 종료되던 날 경찰은 파업 참가자 9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신청했다. 24일에는 대통령실이 법과 원칙대로후속 조치를 취할 것을 발표하고, 28일에는 산업은행이 대우조선 분리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법과 원칙은 과연 모두에게 공정한가? 법과 원칙이 어느 한쪽에 불리하다면 저항할 권리가 있다. 독일 등 노동 관련법이 발전된 나라에서는 노동자의 파업권을 폭넓게 인정하고 단체교섭의 자율성도 보장한다.

 

2021년 택배기사 노조 교섭과 관련해 중앙노동위원회가 원청의 단체교섭 당사자성을 인정했지만, 법적으로는 아직 논란이 해소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단체교섭이므로 처벌할 것인가. 생계가 달린 문제에서 법과 원칙을 따질 때에는 위법을 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들여다봐야 하며 법과 원칙의 공정성도 따져 봐야 한다.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것에 머물지만, 정치는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손해 배상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대우조선은 이번 파업에 7000억원 이상의 손해 배상 청구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2002년 두산중공업이 65억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해 조합비와 임금, 살던 집까지 가압류당한 노조 간부 배달호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도 158억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해 당시 노조 조직차장 최강서씨가 극단의 선택을 했다. 안타까운 사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파업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노동자들을 다시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손해 배상 청구다.

 

노동자단체 비정규직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이 지난 29일 거제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민형사 소송으로 탄압하지 말라고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불어민주당도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제정에 나섰다. 파업 노동자에 대한 손해 배상과 가압류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은 20209월 발의된 후 국회에 계류 중이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손배·가압류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이 노란 봉투에 모금을 시작했듯이 노란봉투법 제정에 시민들의 관심이 절실한 때다.

 

윤석열 대통령은 협상 타결 사흘 전인 19기다릴 만큼 기다리지 않았나라며 공권력 투입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공권력 투입을 못했으니 손해 배상으로라도 노동자들의 힘을 뿌리 뽑아 기울어진 법과 원칙을 보존하려는 것인가. 20216월 시작된 노사 교섭에 대우조선이 1년 넘도록 나오지 않았으니 노동자들도 기다릴 만큼 기다리지 않았나”. 노란봉투법 제정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이번 파업의 근본 원인이 다단계 하청 구조에 있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조선 산업은 고임금에 호황이라는 세평과 달리 2019년 이후에는 사망 사고 비율이 제조업 평균보다 높고 임금 수준도 하락해 제조업 평균과 거의 차이가 없다. 게다가 2016년 이후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은 30%까지 하락했고 사망 사고의 많은 부분도 이들에게서 발생했다. 파업 당시 요구한 임금 인상 30%는 하락한 임금 수준의 회복에 불과했는데, 그마저도 노조의 양보로 4.5% 인상에 그쳤다.

 

조선 산업의 인력난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이라는 듯 기업과 정부는 노동자들의 사기를 꺾어 공포의 노사 평화를 이루려는 것으로 보인다. 대우조선과 산업은행은 손해 배상 청구와 분리 매각을 예고했고, 정부와 여당은 내부 총싸움에 바쁜 와중에도 기울어진 법과 원칙으로 견강부회한다. ‘부자들의 정당이 되고 싶어 하는 민주당도 노란봉투법 제정의 불씨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지지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담대함이 노동자의 삶에도 무신경하게 만든 것인가. 하청노동자들을 귀족 노조로 매도할 수 없으니 여론 조작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지도자의 네 가지 등급을 얘기한 바 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그가 있는 것만 겨우 알고, 버금가는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가까이 여겨 받들고, 셋째 등급의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두려워하고, 가장 낮은 등급의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경멸한다고 했다. 20%대의 지지율로는 4등급 중 2등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영국의 민주주의 지수 2020’에 따르면, 우리나라 민주주의 수준은 미국과 일본보다 높은 23위에 올라 완전한 민주 국가에 포함됐다. 공정하지 못한 억압으로 국민을 우롱해 부메랑 효과를 빚는다면, 그 등급은 어디에 해당할까.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 2022.08.01.

 

 

반환경 시대와 환경 포기 지역

내가 직업적으로 환경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다. 정몽구가 한때 환경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고, 마침 그 시절에 생태경제학으로 학위를 마쳤다. 좌파로 살면서 과연 밥이나 먹고 살까, 걱정을 많이 했었다. 현대그룹이 잠시 환경에 관심을 가지면서 밥이나 먹고 사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한국에 환경에 관심이 가장 높던 때가 그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사건 당시, 환경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이 지금보다 오히려 더 높았다. 두산그룹 회장이 그 사건으로 물러났고, 두산의 많은 임직원들이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사실 따져보면 지금의 4대강에서 발생하는 식수원의 녹조 사건은 페놀 오염보다 몇 배는 더 위중하고, 여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만약 지금 낙동강 페놀 사건이 벌어졌다면? 4대강 사업이 그렇듯이, 대충 덮고 넘어갔을 것 같다.

 

보수 정권이라서 그런 것일까? 2004년 포스코가 광양만에서 독극물인 시안 폐수를 무단 방류한 사건이 있었다. 시안화칼륨은 흔히 청산가리라고 불린다. 페놀 사건보다 크다면 더 큰 사건이지만, 정치적으로 적당히 넘어갔다.

 

생각해보자. 지금 식수원을 주기적으로 위협하는 4대강 녹조 사건이 1991년의 낙동강 페놀 사건보다 더 가벼운 문제인가? 환경 문제로는 더 크고 구조적인 문제이지만, 식수원 오염 문제를 이제는 문제로도 안 본다. 30년 전보다 우리가 환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은 주위를 기울일까? 아니라고 본다.

 

고향에 원전 몰아넣은 한국 보수

물론 구조적 차이는 있다. 1991년에는 그룹 회장이 물러났지만, 지금은 더 큰일이 생겨도 환경 문제로 회장이나 사장의 자리가 직접 염려되는 일은 없다. 법적 책임을 지고 담당자만 처벌받으면 그만이다. 그게 환경 경영이 현실적으로 해 온 일이다. 책임자를 지정하는 것, 그리하여 그 위의 상층부들은 다치는 일이 없는 것, 그렇게 우리는 살아왔다.

 

다른 선진국과 한국 환경 문제의 차이점 딱 하나만 꼽자면, 정치인들의 자기 고향에 대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보수 정치인들이라도 자기 고향은 끔찍이 아끼고, 잘 가꾸려고 한다. TK, PK, 그런 게 한국 보수의 원류라고 알고 있다. 자기 고향에 이렇게 고밀도로 원전을 몰아넣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위세를 갖는 경우는 잘 보기 어렵다. 보수가 원래 자기 고향은 잘 지킨다. 미국 보수들도 그렇다. 가장 극단적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국가 기본으로 삼는 스위스가 대표적이다. 영광을 제외하면 한국의 원전은 부산에서 경주 사이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보수가 한 것은 원전 때문에 땅값 내려가지 않게 원전 이름에서 지역명을 빼는 시도를 한 정도 아닌가? 예전에 원전 논쟁하면서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한강을 끼고 있는 여의도에 놓아보라고 한 적이 있다. 국회 옆에 그리고 한남대교 옆에 두 개쯤 원전을 놓는다면 나도 한국 원전이 안전하다고 인정하겠다.

 

결국 원전은 TKPK 지역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고, 고준위 폐기물도 적당히 원전 안에 보관할 것이고, 신규 원전도 이 지역 안에 들어갈 것이다. 자기 고향에다가 이렇게 무자비한 일을 하는 보수를 OECD 국가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근원을 따지면 4대강 녹조 사건과 최근의 원전 강행의 뿌리는 같다. 박정희와 이명박 등 한국의 보수들이 환경 오염시설들을 서울과 수도권을 피해서 자기 고향에 갖다 놓은 사건이다. 그러다 보니 밀도가 너무 높아졌다. 확산은 환경에서 중요한 전략이다. 대기 오염이든 수질 오염이든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확산시켜서 농도를 낮게 하는 게 맨 먼저 하는 일이다. 물론 역발상으로 오염을 집중시키는 경우가 있다. 고농도의 산업폐기물의 경우는 집중시키고 그곳을 환경 포기지역으로 만든다. 고농도 방폐장이 세계적으로 처리가 어려운 게, 그 지역이 현실적으로 환경 포기지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고향 환경 포기권은 헌법에 없다

지금보다 원전 밀도가 높아지면, 그게 바로 환경 포기지역 아닌가 싶다. 자꾸 일본이랑 비교하는데, 일본은 국토 거의 전 지역에 고르게 원전을 흩어놓았다. 후쿠시마가 도쿄 바로 위에 있다. 한국의 보수들은 환경 문제에서는 스위스는 물론 일본의 보수들과도 다르다.

 

자기 고향에 오염시설들을 자꾸 유치하고 늘리려는 한국의 보수들, 이것도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국토가 좁다. 포기해도 좋은 국토는 없다. 헌법 제1202항은 국토와 자원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라고 말하고 있고, 국토는 균형 있게 개발하라고 되어 있다. , 원전, 이런 것들로부터 국토를 균형 있게 보호하는 게 국가의 일이다. 자기 고향이라고 환경적으로 마음대로 포기할 수 있는 권리는 헌법에 없다.

우석훈 경제학자 경향 2022.08.01.

 

 

남방큰돌고래와 반려동물

지금은 스페인에서도 투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동물학대라고. 그래야 할 것 같다.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관광 구역으로만 남은 투우장에서 가이드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귀에 쏙, 들어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케렌시아(Querencia)였다. 케렌시아는 투우장에서 싸우는 소만 아는 장소다. 싸우다 지친 소가 돌아와 잠시 숨을 고르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회복의 장소란다. 동물에게서 배우는 지혜가 있는 것 같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에게서 본능이 길임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출처:제주도에서 야생 돌고래를 매일 볼 수 있는 곳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대학 다닐 때 철학개론 시간에 던져졌던 질문이었다. 그때 나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영혼을 영혼답게 하는 것은 영성 혹은 신의 형상일 텐데 본능밖에 없는 동물과 이성이 본질인 인간은 존재론적 차이가 있는 거 아니겠냐고. 그렇지 않다면 동물을 먹는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정당화되겠냐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생각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상식과 편견을 생각 없이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잊고 있었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대문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반가워 펄쩍펄쩍 뛰면서 나를 향해 달려들었던 우리 집 강아지 루비와의 기억이. 그때 나는 루비와 함께 산야를 돌아다녔었다. 그런 루비를 잃어버리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느닷없는 이별이 몸과 마음에 어떻게 구멍을 내는지를 배운 것 같다. 자꾸 눈물이 차올랐다. 먹은 밥이 소화가 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정을 나눈 강아지가 있었으면서 어떻게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는지. 그때 내게 영혼이라는 말은 인간중심적인 아집의 틀, 이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영혼 속에는 남방큰돌고래가 있다. 우영우에게 그 돌고래는 영혼의 반쪽, 혹은 그림자다. 변호사인 그녀는 2009, 제주 신풍 앞바다에서 그물에 걸려 퍼시픽랜드로 끌려온 돌고래들이 법원의 판결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간 사건을 잊지 못한다. 고래는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고래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일이 그녀에게는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렇듯 동물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에는 우리가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 들어있다.

 

개 혹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점차로 많아진다. 개나 고양이가 가족으로 들어오면서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 많아졌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기질을 아는 일이다. 본능과 기질을 알아야 교감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동물들과 교감을 하다보면 마음이 쉴 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상대의 본능과 감정을 존중해주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영혼의 길임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으니 종종 개물림 사고가 일어나고, 이에 따라 책임소재를 가려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때 벌의 근거가 되는 죄목이 과실치상이란다. 어떻게 과실치상이 될까 했더니 개를 범죄에 사용된 물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반려동물들은 현행법상 물건이다. 반려동물을 공격해서 상처를 입힌 자를 벌하는 죄목도 타인의 재물을 부수거나 망가뜨려서 손해를 입힐 때 적용하는 재물손괴죄라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가, 를 물었던 80년대에서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되지 않는지.

 

이제 우리 사회도 동물권을 논의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에게 인권이 있듯 동물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동물권은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지금 논의되고 있는 동물학대는 어떤 유형으로 나타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함께 사는 동물에 대해 우리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세계 2022-07-31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하는 나라

윤석열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28%까지 폭락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7월 첫주 데드크로스(긍정 37%-부정 49%)가 일어나고, 악어 입처럼 격차가 벌어지더니, 3주 만에 30% 벽도 무너졌다. 남녀·지역·직종을 가릴 것 없고, 2040은 십중팔구가 고개를 저었다. 대통령 첫 휴가 기사는 뭐 한 일이 있다고란 악플로 덮였다. 워싱턴의 안보전문지(내셔널인터레스트)인기 없는 윤 대통령이 너무 빨리 미국의 짐(liability)이 됐다는 글이 실렸고, 뉴욕의 경제전문지(블룸버그)는 물가·코로나가 아니라 경찰과 싸우고 있는 한국 대통령의 지지율 회복에 물음표를 달았다. 취임 80일 만에 동네북 된 채 대통령 부부는 여름휴가에 들어갔다.

 

흔히 데드크로스는 대통령을 찍은 스윙보터가 떠나고, 국민과의 허니문도 끝났다는 뜻이다. 30% 붕괴는 콘크리트 지지층까지 등돌린 신호로 읽는다. 악몽 같았을 7, 집권세력엔 제 발등을 찍은 세 컷이 있었다.

 

#대통령의 표리부동 =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 윤 대통령이 726일 권성동 여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에게 보낸 문자는 5년 갈 파문을 일으켰다. ‘윤심윤핵관이었다. “당무에 관여하지 않는다던 말이 거짓이 된 내상도 컸다. 이 문자는 대통령 처음 해봐서란 실언, ‘법률가(검찰)의 정·관계 진출이 많은 게 법치라는 편견, 대통령이 국기문란이라 한 치안감 인사번복 사태를 경징계한 황당함과는 결이 다른 설화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곤 국가지도자가 국민·당원에게 어떤 설명·사과도 없이 휴가를 갔다. “참모 뒤에 숨지 않겠다던 약속은 허언이 됐다. 대통령 말이 이리 가볍고 여반장(如反掌)이어선 리더십과 영이 설 수 없다.

 

#섬이 된 집권당 = 권 대행은 물러났다. 검수완박 합의 번복, 대통령실 9급 사적 채용에 이어진 3번째 사과는 리더십 상실이었다. 윤핵관은 비상대책위로 방향을 틀었다. 성비위 문제로 당원권이 6개월 정지된 이준석 대표 복귀를 봉쇄하는 길이다. 이 대표는 잠시 들른 울릉도와 양두구육 여의도를 이 섬과 그 섬으로 갈랐다. 윤핵관·당권주자의 이합집산에 따라 섬 숫자는 오륙도로 늘 수도 있다. 기자에게 포착된 대통령 문자가 우연이면, 윤핵관과 이준석 간 권력쟁투는 필연이다. 전대·총선·대선까지 갈 주류·비주류 내전이 집권 100일도 전에 시작됐다.

 

#정부의 자기부정 = 통일부가 3년 전 발표한 흉악범죄 북한주민 추방북한어민 강제 북송으로 번복했다. 새 증거는 없었다. 통일부에선 통일부는 통일부다!”라는 노동조합 성명이 나왔다. 익명의 직원들도 분단국 특성의 통일업무를 자처한 통일부가 국방부보다도 정쟁 돌격대로 나선 걸 민망해하고, 일관성과 신뢰를 잃은 뒷날을 걱정했다. 인권지킴이를 표방한 검찰은 대법원이 인정한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 보복 기소의 사과를 거부했다. 부처들의 혼 없는 반성문과 자기부정이 쓴웃음 짓게 한 7월이다.

 

대통령은 말과 인사로, 집권당은 책임정치로, 정부는 정책과 예산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 힘이 뚝 떨어졌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메신저로서의 믿음을 잃으니 말도 협치도 국정도 바로 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현실은 반대다. 대통령·윤핵관의 비선정치는 잘하고 있다는 정신승리에 여념없다. 전 정부 탓, 여소야대 탓, 어느새 대통령 입에선 정책 홍보가 안 된 탓도 늘었다. 잘하는데, 잘할 건데 언론과 국민이 몰라준다는 걸까. 이리 빨리 민심 위에 붕 떠버린 부평초 정권은 없었다. ··대의 80일에 평점 D를 매긴다. F는 퇴장이니까.

 

정치원로들이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금칙이 있다. 지지자를 부끄럽게 하지 말고, 민생과 먼 지도자로 보이지 말며,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하는 나라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은 세 가지가 다 깨졌다.

 

20121219일이다. 대선 날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극장에 걸렸다. 파리 민중들이 바리케이드 치고 부른 마지막 합창은 지금도 코끝이 찡해온다. 대혁명 후에도 삶의 변화가 오지 않은 19세기 프랑스는 민주화 후에도 빈곤·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대한민국과 공명(共鳴)한다. 오늘의 고물가·코로나·경제위기도 약자부터 잡아먹고 있다. 국정지지율 28%는 멈추라, 낮추라, 바꾸라, 함께 살자는 주권자의 명령이다. <레미제라블> 마지막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너는 민중의 노래를 듣고 있는가)’

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 2022.08.02.

 

리더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이유

일론 머스크는 참 독특하다. 그의 기행은 주로 트윗인데 2018년에는 테슬라가 완전히 파산했다는 만우절 트윗을 했고, 테슬라를 비상장회사로 전환하겠다고 했다가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에 사기혐의로 피소되어 약 255억원의 벌금을 내고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그는 주가, 코인, 증권거래위원회 등에 관한 발언을 계속했고 하비 피트 전 위원장에게 철 좀 들어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트위터 인수결정을 철회해서 또 시장에 혼란을 주고 있다. 머스크가 왜 그러는지 누가 알겠냐마는 우리는 머스크를 통해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번째 교훈은 최고의사결정권자들이 만들어내는 불확실성이다. 행동경제학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숨은 요인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특히,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러냐에 관심이 많다. 원인은 개인적 성격, 경험, 주변 환경 등 다양한데 과잉자신감, 어릴 적 재난경험, 유유상종 등이 대표적이다. 예전의 연구들은 적어도 경영진은 이런 비합리성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우선, 미국기업 5200만 직원 중 9%가 중·하위 경영진이 되고, 2%가 상위경영진, 그리고 오직 0.002%만이 상장기업의 CEO가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이상한 사람은 다 걸러지고 능력자만이 선택된다는 것이다. 최고경영진은 이사회와 시장의 감시를 받기 때문에 편향과 실수를 줄일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최고경영진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고경영진도 과잉투자, 사사로운 자원배분 등 비합리적 의사결정을 자주한다. 이제 우리는 훌륭한 그들을 믿고 마냥 엎어져 있을 수만은 없다. 왜 그들이라고 다르지 않을까? 개인의 숨겨진 특성을 다 알 수가 없는데 보이는 지표만으로 판단을 하면 이상한 사람이 계속 승진할 수 있다. 과잉자신감 등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 당시의 상황에서 회사에 더 필요하기 때문에 이상한 걸 알고도 승진시킨다는 분석도 있다. 인사권자가 그냥 개인 입맛에 맞는 사람을 자기복제하기도 한다. 한국 재벌의 경우는 아무런 경쟁 없이 그냥 아들, 딸이 최고경영진이 된다. 마지막으로 경영진 감시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CEO가 이미 영향력이 너무 커졌거나 이사회를 CEO의 참호로 만들어 놓은 경우가 이에 해당할 거다. 불행하게도 최고위층의 스펙이 상위 0.002%라 하더라도 우리가 감내해야 할 불확실성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두번째 교훈은 최고위층들의 커지는 영향력이다. 머스크는 그 자신이 트위터를 인수하려는 것이지 테슬라가 트위터를 인수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시가총액 40조원에 달하는 소셜 네트워크 기업을 상대로 맞짱을 뜨고 있는 거다. 그는 정부와의 싸움에도 거침이 없다.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테슬라라는 첨단 거대기업의 CEO이다. 이제 거대기업의 매출은 어지간한 국가의 정부예산보다도 많고 CEO 연봉은 천문학적으로 올랐다. 점점 강해지는 거대기업의 시장지배력은 최근 인플레이션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까지 한다. 198021%이던 지배력지표인 마진율이 2016년에 61%까지 치솟았고 대부분 거대기업에서 올랐다. 거대기업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정치자금 펀딩, 관료·정치인들과의 네트워크로 인해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여기에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소셜 네트워크 등으로 인한 강력한 팬덤과 그들만의 영웅의 탄생이다. 머스크의 트위터 팔로어는 무려 1억명이 넘는다. 그의 한마디에 주식시장과 코인시장이 출렁거리며 그가 혐오발언을 해도 그를 옹호하는 댓글이 넘쳐난다. 기이함이 묘하게 팬을 만들고 있다.

 

국민은 재벌총수도 궁금하지만 대통령, 장관들이 도대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가 궁금할 거다. 우리는 리더에 대한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첫째, 보이는 것 이외에 숨겨진 리더의 개인적 특성을 분석하고, 견제해야 한다. 숨겨진 특성이 잘못된 결정을 부르는데 선거와 청문회 등을 통해 리더의 모든 것을 검증할 수는 없다. 안에서는 참모, 밖에서는 언론의 역할이 필요하다. 둘째, 비합리적 리더는 조직의 자원을 자신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사용한다. CEO의 사익추구는 기업을 말아먹고 대통령의 사익추구는 국가와 시장에 혼란을 준다. 무엇보다 사익추구를 막지 못하면 겁없는 리더가 탄생한다. 겁없는 것만큼 무서운 게 있을까? 거기에 규율 없는 소셜 네트워크는 비이성적 권력에 날개를 달아준다. 술자리에서나 할 말을 유튜버들이 공론장으로 끌고 나오는 게 표현의 자유는 아니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 경향 : 2022.08.03.

 

 

대한민국은 망했다

유엔 인구통계를 보면 2023년에는 인도가 중국을 누르고 세계 최대 인구 대국에 오를 거라고 한다. 유엔 보고서 추산으로 올해 중국은 142600만명, 인도는 141200만명이다.

 

인도 정부는 이미 올해 3월쯤부터 자기들이 세계 1위 인구 대국에 올랐다고 홍보하고 있는데, 중국 정부는 대만과 홍콩 인구를 더하면 아직 자기 나라가 훨씬 많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인도와 중국의 가임여성 1인당 출산율은 2010~2020년 사이 각각 2.2명과 1.7명으로 차이가 제법 난다. 즉 중국이 아무리 세계 1위 인구 대국을 유지하고 싶어도 추세상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고작 몇개월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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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간

 

은 지난달 출산율 0.8명의 막다른 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낮은 출산율을 콕 집어 보도했다. 불과 10~20여년 전만 해도 일본의 낮은 출산율을 보도하며 곧 일본은 망할 거라는 기대 섞인 예언을 했던 한국으로서는 옆집 불구경하다 자기 집 홀랑 타고 있는 걸 못 본 셈이라 기사를 읽는 내내 기분이 무척 묘했다. 출산율은 20~30년 뒤의 노동가능인구 수와 직결된다. 우리 눈으로야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 타이틀이 뭐가 그리 값지다고 인도와 중국이 저런 신경전을 벌이나 싶지만, 결국 누군가는 일하고 그들이 세금을 내야 우리가 지금 누리는 복지는 지속가능하다. 우리가 자랑하는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도 노동인구가 아래에서 받쳐주지 않는다면 무작정 혜택만 누리는 화수분일 수 없다. 노동인구가 줄면 세금도 줄기 마련이니 국고로 그 빈틈을 메꿀 수도 없다.

 

얼마 전 한 광역시에서 열린 지방소멸 토론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서울을 벗어나 지역 현장에서 듣는 목소리는 강렬했다. 벚꽃 피는 순으로 대학이 망할 거라는 이야기는 진작 들은 바 있는데 현장에서 지방대 구성원들이 갖는 위기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신입생이 안 들어와 학과가 통폐합될뿐더러 교수들이 지역의 각 고교를 찾아다니며 입시 담당 교사에게 학생 모집을 부탁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지역에서는 상식에 가깝다. 수도권만 심각성을 못 느낄 뿐이다.

 

단순하게 산술적으로 따져보자. 2021년 출생자가 26500명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20년 동안 521만명의 인구가 증가한단 말이다. 이미 올해부터 사망자가 출생자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인구는 이미 줄고 있다.

 

그럴 리는 없겠으나 지금부터 드라마틱하게 출생률이 늘어난다고 해도 이들이 노동가능인구가 되려면 최소 25년은 걸린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복지구조는 곧 망한다는 말이다. 드디어 선진국이라며 국뽕에 차올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기간 또한 몇년 남지 않았다. 국회 예산정책처 발표를 보면 2006년 이후 16년간 정부가 저출산 예산으로 지출한 금액은 200조원에 육박한다. 최근에는 매년 40조원을 쓰는데도 출산율은 20171.052명에서 20210.81명으로 떨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있는지 복기가 필요한 시점이고 국가는 현 위기를 더 강력하게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한국은 기후 문제보다 인구 소멸이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연금개혁을 한다는 새 정부의 선언은 그나마 다행이다. 인구소멸에 대한 대안은 마련하지 못했지만 다가올 재앙 하나에 대비한다는 점에서는 어려운 결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입학 연령 논쟁만 봐도, 설득 과정을 생략한 채 수류탄 까서 진중에 던지듯 정책을 내던지는 스타일이다 보니 이 실력으로 뭔갈 할 수는 있겠느냐는 걱정이 앞선다.

 

이 글을 준비하는 도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돈을 쓰고 정책을 만들고 해봐야 다 별 소용이 없는 게, 요즘은 또래 남녀가 혐오하는 시대야. 일단 뭘 만나야 결혼을 하든, 출산을 하든가 하지. 서로 증오하기 바쁜데.”

 

첩첩산중이다. 뭐부터 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전명윤 | 아시아 역사문화 탐구자 한겨레 2022.08.04

 

 

김건희 박사의 학위논문을 다시 읽으며

김건희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 89.

 

어떤 남녀가 궁합이 좋을까?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 옮겨본다. 너무 진지하게 듣지는 마시라.

 

얼굴에 비해 코가 작은 남자입이 작은 여자와 궁합이 좋다. ‘곱슬머리인 남자좌우 콧방울이 도톰하거나 숯이 많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어울린다. ‘억센 머리카락의 남자입이 큰 여자와 잘 맞는다.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대머리인 남자는 주걱턱의 여자와 궁합이 좋다. ‘주먹코인 남자는 키 큰 여자가 어울린다. ‘콧구멍이 큰 남자입이 크고 튀어나온 여자와 궁합이 맞는다.

 

우선 외모 비하 표현이 담긴 부분, 머리 으로 쓴 것에 용서를 구한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느라 부득이 그랬다.

 

무얼 근거로 하는 얘기냐고는 묻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애초 글을 쓴 사람도 묻지 말라는 듯이 전혀 밝히지 않았으니까.

 

나로선 처음 들어보는 이런 궁합 판별법은 김명신(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개명 전 이름)2007학년도에 국민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애니타개발과 시장적용을 중심으로에 나오는 내용이다. 청소년 및 젊은층을 타깃으로 이용자의 고유 아바타를 이용해 운세, 관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애니타(Avatas for anybody)’는 이런 질문 항목들로 아바타 간 궁합이 맞는지를 계산할 수 있게 설계됐다고 한다.

 

나는 이 논문을 꽤 진지하게 읽었는데, 이 대목에서 터졌다. 저런 콘텐츠로 애니타가 과연 고객을 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논문을 다 보고는 꽤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연구한 것이라고 도저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은 이론적 배경등을 넣어 논문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전체 골격은 제한적인 시장조사 보고서라고 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애니타는 김건희 여사가 당시 기획이사로 재직한 에이치(H)컬쳐테크놀러지라는 업체 대표가 2004년에 특허를 출원하고, 2007년과 2009년 두차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9천만원을 지원받아 개발한 앱이다. 제출된 학위논문은 기획·개발 단계에 있는 애니타 서비스에 대해 만 15살에서 35살 사이의 남녀 3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해서 그 결과값을 제시한 것뿐이었다.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용, 외국 논문을 어설프게 번역해 넣은 것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표절이란 지적을 받았다. 표절은 논문 작성에서 심사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일어난 연구 부정행위 의혹 가운데 일부일 뿐이었다.

 

그런데 문제제기가 있고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도 빤히 보이는 부정행위를 교정할 능력을 상실했음을 목격하고 있다. 국민대는 지난해 95년이 지나 접수된 제보는 처리하지 않는다는 규정에 따라 본조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검증시효를 이미 폐지했음에도 거짓말을 한 것이다. 반발이 거세자, 국민대는 결국 재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지난 1일 세상을 놀라게 할 발표를 했다. 국민대는 보도자료를 통해 일부 타인의 연구내용 또는 저작물의 출처표시를 하지 않은 사례가 있으나”, “표절에 해당하거나 학문 분야에서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날 정도의 연구부정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발표했다.

 

국민대의 이런 발표에 국민대는 망했다는 말이 무성하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국민대만의 일인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판단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상식이 조롱당한 것이니,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2016122일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수사하는 특별검사팀에 합류하게 된 윤석열 대전고검 검사는 일부에서 보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질문에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라고 대답했다. 거친 말이었지만, 멋있었다. 무릇 공직자들은 그런 자세로 일해야 한다. 권한은 오로지 공적 이익을 위해 행사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629일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뜻을 밝히면서 국민의 상식으로부터 출발하겠다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공정의 가치를 기필코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말짱 빈말이었다. 그동안의 일을 돌이켜보니, 왜 윤석열 대통령이 그렇게도 문제가 많은 박순애 교육부 장관 후보자의 임명을 강행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간다. 역시 나는 하수다’.

정남구 ㅣ논설위원 한겨레 2022.08.04.

 

 

대한민국 교육정책은 시민이 결정한다

주식시장은 초등학교 취학연령을 2025년부터 만 5세로 낮추는 학제개편안의 부작용을 곧바로 간파했다. 정책 발표 후 처음으로 개장한 지난 1일 사교육 업체들의 주가는 일제히 강세를 보였다. 정부는 공교육을 살리고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이라고 강조했지만 수용자들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박순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보충설명을 하고 공론화의 장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윤석열 정부의 1호 교육정책은 결국 학부모와 교사들의 반발로 나흘 만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이 학제 개편을 논의할 시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고교와 대학을 어떻게 둘지, 각급 학교에 몇 살에 들어가 몇 년씩 다니게 할지 등을 정해놓은 학제는 공교육의 기본틀이다. 한번 정하면 오랜 시간 변화 없이 유지되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의 생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 학제는 ‘6(초등학교)-3(중학교)-3(고등학교)-4(대학교)’가 기본이다. 70여년 전 미 군정기에 도입됐다. 이 시스템이 우리 학생들에게 과연 최선이고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지에 관해서는 진지한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학계의 주류 의견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초등 6년 과정이 다소 길어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즘 어린이들의 지적·육체적 성장 수준을 감안할 때 초등 과정을 5년으로 단축하고, 6학년은 중학교로 편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초등 과정을 1년 줄이면 중학교를 4년으로 늘린 ‘5-4-3-4’나 고등학교를 4년제로 한 ‘5-3-4-4’ 같은 다양한 학제 설계가 가능하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5()-5(·)-5()’를 제시했다. 10년으로 초·중등교육을 마치고 대학에서 1년 더 공부해 전문지식을 쌓게 하자는 취지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유치원 교육을 기간학제에 포함시키는 -5-4-3-4’를 제안했다. 5세 유치원 취학을 의무화하고 초등학교를 5년으로 한 뒤 중학교 과정을 1년 연장하는 방식이다. 현재 유치원 교육은 국가가 공교육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지만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학력 요건은 아니다.

 

학기제개편도 논의할 만한 주제다. 미국·유럽은 물론이고 중국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9월 신학기제를 택하고 있다. 겨울방학이 짧고 여름방학이 길며 새 학년이 9월에 시작한다. 한국은 ‘3월 신학기제. 여름방학이 짧고 겨울방학이 길며 3월 초에 입학식을 한다. ‘3월 신학기제는 일제강점기의 유물이다. 궁핍하던 시대에 겨울 난방비 절약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한다. 한국에 오는 외국 유학생들과 외국으로 떠나는 한국 학생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그러나 새 학년 시작 시점이 달라 입학 및 편입 학년을 맞추기 위해 한 학기(6개월)를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이 박 부총리에게 학제 개편에 관한 공론화를 지시했으니 이번 기회에 신학년 시작 시기를 국제 표준 격인 9월로 변경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학제는 백년대계다. 일단 정해지면 바꾸기가 매우 어렵고, 바뀐 제도가 안착하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학제 개편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학제 개편이 과연 현시점에서 절실한가 하는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후 개편의 목적과 대상을 분명히 한 뒤, 법률 개정과 홍보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사전 계획과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시행 초기 혼란을 최소화하는 방안, 정책 변경으로 피해를 보는 계층이나 집단에 대한 지원 방안 등도 마련해야 한다. 대학 입시에 미치는 영향이 있는지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예컨대 이번 정부 개편안이 그대로 적용되면 2025년에 만 5세로 취학한 어린이들은 초··12년 동안 학교 시험은 물론이고 대입 전형까지 한 살 많은 동료들과 경쟁해야 하므로 불리하기 짝이 없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 없이 개편안만 불쑥 내놓으니 학부모들로서는 당황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정책 의도도 순수하지 않았다. 교육정책을 표방했지만 이면에는 산업 인력 조기 양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윤 대통령은 학제개편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박 부총리에게 교육부는 사회부처이자 경제부처라고 말했다.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서 대통령과 교육부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은 궁극적으로 시민이 결정한다. 특히 학제 개편 같은 사안은 시민들의 실질적인 동의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교육정책이 밀실에서 결정되고 정부의 발표대로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는 것을 윤 대통령과 박 부총리는 명심해야 한다.

오창민 논설위원 경향 2022.08.04.

 

 

퇴행적 정부와 한국형 민주공화제

취임한 지 세 달도 못 되어 새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다. 진영을 넘어 그 원인을 둘러싼 열띤 논란에 국민들의 시름이 깊다. 그 와중에 새 정부의 위기를 대통령 개인의 책임을 넘어 대통령제 정부형태 탓으로 돌리는 목소리도 새삼 꿈틀거린다. 하지만 무능한 대통령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국정의 중심을 잡아줄 다양한 헌정시스템이 작용하는 한국형 민주공화제가 진화해온 역사가 우리 민주화의 과정임을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근현대사의 결정적인 시기마다 선거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이제 생활현장에서까지 참정권, 표현의 자유, 노동권 등 다양한 기본권으로 무장하고 투표로, 구호로, SNS, 소송으로 민주공화제를 지켜온 것은 주권자 국민이었다. 대한국민들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병행발전을 달성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이내믹 코리아를 구현함으로써 대만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선도적 민주공화체제를 떠받치고 있다. 일당독재체제에 터 잡은 인민공화국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중국이나 1.5당 선거독재를 구조화한 일본과는 달리 정치의 역동성이 살아 있는 것이다.

 

진흙탕 대선의 근소한 득표 차이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에 그래도 과반의 국민들이 기대를 모아준 것은 국민 중심의 민주공화체제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염원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맹목적 진영주의자들을 제외하고 대다수가 지지를 철회하고 있는 것은 정치보복을 대통령 놀잇감으로나 여기는 듯 민주공화제에 반하는 검경직할체제를 위헌·불법 시비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는 이율배반적 행태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습을 끊는다면서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시행령 체제로 법무장관의 인사검증권이나 행안부 장관의 경찰통제권을 부여한 것은 그나마 뜻있는 국민들의 지지를 뒷받침하던 공정과 상식에 입각한 법치의 슬로건이 오히려 검찰조직 이기주의와 정권쟁취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증명하여 새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탄핵의 오명을 안은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당 원내대표를 내쳤던 사건을 연상시키듯 당대표 찍어내기를 불사하면서 여전히 대통령바라기의 시대착오적 고질병을 보여주는 집권여당의 무책임한 행태가 국민의 분노를 자아낸다. 전방위적 정치보복을 위한 검경직할체제의 헛발질이 우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권력의 덧없이 짧은 숙명은 근래까지의 민주화 역사가 생생히 증거하고 있다. 도구화된 법치를 빌미로 굴종을 강요하는 칼바람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동아시아의 민주화를 선도해온 대한국민의 집단지성이 이끄는 민주화의 거대한 흐름에 비추어 찰나의 미동에 그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될 것이다. -정보기관-경찰-검찰로 이어져온 권력기관에 의존한 절대 권력의 시대는 국민을 정점으로 한 대한민국의 헌정시스템의 자정능력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전환기에 돌출된 퇴행적 정부의 출몰이라는 배경에서 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헌법수호기관인 헌재와 법원의 역할이다. 사법권력이야말로 주권자 국민과 더불어 퇴행적 정부의 준동으로부터 다원적 사회가 공존·공생·공영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할 보루인 것이다. 새 정부에 대한 국민의 커가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제의 토대를 공고하게 하는 중요한 판결들은 희망의 씨앗이 된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임신중단권 인정 사건이나 잇따른 노동사건에서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는 전향적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헌재는 최근 오프라인 선거운동을 규제하는 공직선거법 조항들에 대하여 무더기로 위헌결정을 내림으로써 민주화 이후에도 더디게 진행되던 선거의 자유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선거연령을 18세로, 정당연령을 16세로 하향하는 개혁입법과 더불어 정치과정에서 국민을 수동적 지위에 머무르게 강요하는 법적 규제가 완화되고 주권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신장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권력기관에 의존하는 퇴행적 정부는 주권자의 능동성을 억압하고 탈정치·반정치라는, 민주공화제에 독이 되는 정치문화와 정치제도를 숙주로 삼는다. 이렇듯 사법권력과 입법권력이 국민의 주권을 강화시키는 정치개혁적 역할을 지속함으로써 민주공화제를 한 단계 더 상향시키기 위한 전향적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퇴행적 정부에 의해 일시적으로 도구화되어 왜곡된 법치의 장치들은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2022.08.05

 

 

엉터리 개편안의 기원은 안철수

윤석열 정부의 학제개편안은 2017년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가 내놓았던 학제개편안과 꼭 닮았다. 당시 안철수 후보는 6-3-3제를 5-5-2제로 바꾸면서 입학연령을 6세에서 5세로, 고교 졸업연령을 18세에서 17세로 낮출 것을 공약했다. 아울러 과도기 4년간 1학년 구성을 12개월간 출생자가 아닌 15개월간 출생자로 하면 학제개편이 완료된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안과 똑같지 않은가? 윤석열 정부안은 안철수 후보안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여론이 비등하면서 각종 비판론이 쏟아지고 있는데, ‘5세는 원래 초등학교에 안 맞는다는 식의 주장은 삼가자. 제도는 구성하기 나름이어서 심지어 4세도 다수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라들도 있기 때문이다. 검토해볼 만한 비판론은 네 가지 정도이다.

 

첫째, 4년의 과도기 동안 해당 학년 학생 수가 25% 증가하므로 이들이 겪을 대입경쟁·취업경쟁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마침 출생아 수가 급속히 줄었기 때문이다. 연간 40만명대 중반을 꾸준히 유지하던 출생아 수는 2015438000명을 기록한 이후 급속히 감소했는데, 과도기 첫해 입학생인 2018년생은 2015년생 대비 25.5% 적고 이후는 더 적다.

 

둘째, 과도기 4년 동안 12개월간 출생자가 아닌 15개월간 출생자가 1학년이 되므로 학급 내 성장발달상의 격차가 더 커지는 문제가 있다. 이른바 생일이 늦은 아이가 뒤처질 걱정이 증폭되는 것이다. 다만 박순애 교육부 장관은 과도기를 4년에서 12년으로 늘리면서 학년 구성을 15개월이 아닌 13개월간 출생자로 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는데, 이러면 문제가 다소 완화될 수는 있을 것이다.

 

셋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비해 초등학교가 돌봄 기능에 있어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여성의 경력 단절이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가장 많이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런 참담한 현실을 알지 못하고 취학연령을 앞당기는 방안을 덜컥 발표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고서야 종일 돌봄을 강화하겠다고 덧붙이니 신뢰를 잃었다.

 

넷째, 교육과정 개편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며 그동안 교육현장에 상당한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아무도 이 점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이것이 어쩌면 가장 치명적인 문제이며 기술적으로 보완하기도 어렵다. 왜 그럴까? 어릴 적 한 살 차이는 크기 때문에, 6세가 배우던 내용을 고스란히 5세가 배우도록 할 수는 없다. 초등 1학년용 교육과정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초 1에서 배우는 내용이 달라지면 초 2에서 배우는 내용도 달라지고 초 3, 43 교육과정까지 모두 개편해야 한다. 결국 6~18세용 교육과정은 5~17세용 교육과정과 전체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 교육과정을 과도기 중간부터 적용한다고 가정하면, 과도기가 12년일 경우 교육과정 개편에 무려 18년이 걸린다. 일종의 꼼수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손대지 않고 초·중 교육과정만 바꾼다 해도 15년이 걸린다.

 

안철수 의원은 최근 페이스북에 학제개편에 대한 소신을 드러내며 지금 논의가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1년 낮추네 마네 하는 지엽적인 문제에 머무르는 것이 안타깝다는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지엽적인문제가 아닐뿐더러, 나는 5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시뮬레이션을 못하고 있는 안철수 의원이 더 안타깝다. 2017년의 학제개편안이 당시 누구에게 하청되어 얼마나 졸속으로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해 보기를 권한다.

 

반대론이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결국 윤석열 정부의 KO패로 끝날 듯하다. 하지만 나는 이번 기회에 두 가지 주제에서 건설적 토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초등 돌봄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해보자는 것, 그리고 ‘5세 의무교육을 검토해보자는 것이다. ‘5세 의무교육1안은 미국의 많은 주()처럼 유치원 마지막해를 의무교육에 포함하는 방안이고 2안은 영국·호주·뉴질랜드·아일랜드처럼 초등학교에 5세에 입학하는 대신 고교 졸업까지 13개 학년을 두는 방안이다. 한국에서 2안을 채택한다면 1~12학년은 그대로 두고 초등 0학년을 점진적으로 도입하면 될 것이다. 1안의 단점은 5세에 유치원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이미 3·4세부터 형성되어 있는 또래집단에 끼어들어가야 하고 또 바로 1년 뒤에 초등학교로 옮겨야 한다는 점이고, 2안의 단점은 기존의 유아교육/초등교육 경계를 교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른들 기준으로야 당연히 1안이 좋겠지만, 아이들 기준으로는 2안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경향 2022.08.06.

 

 

보수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였나

정권 출범 이래 윤석열 정부의 일관된 정책기조는 성장을 통해 민생을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1990년대부터 성장률 둔화가 불평등의 심화를 동반했으니 생각해볼 수 있는 해법이다. 더욱이 경제는 보수가 잘해라는 세간의 믿음이 있지 않나. 보수정부의 이런 공언은 고도성장을 통해 부자가 되고 싶은 국민의 욕망을 건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욕망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금을 낮추면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는 신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폴 크루그먼이 지적했듯이 보수주의자가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1982~84년 미국 호황은 레이건 정부의 감세정책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급격한 이자율 상승이 만든 인위적 경기침체에 따른 기저효과와 1982년 금리를 급격히 낮춘 금융완화의 결과였다.

더 큰 역설은 레이건 정부가 감세와 함께 경기하강을 막기 위해 부채를 늘려 수요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감세로 부족해진 재정을 부채로 메운 것이다. 아들 부시 정부의 감세정책도 보수의 공언과 달리 경기침체로 이어졌고 마침내 금융위기로 종말을 고했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고 종합부동산세를 무력화해 기업과 부자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감세는 경제를 살리지도, 민생을 회복시키지도 못했다. 이명박 정부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훨씬 못 미치는 3.2%에 불과했고 감세로 재벌의 사내유보금만 늘려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도 레이건 정부처럼 감세로 부족해진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국채 발행을 늘렸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발행된 국채가 연평균 5.6조원이었던 것에 견줘 이명박 정부는 민주당 정부4배에 가까운 연평균 20조원을 발행했다. ‘증세 없는 복지를 외친 박근혜 정부는 감세로 부족해진 재정을 메우려고 증세를 해야만 했다.

사실이 이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경제 활력을 제고하고 민생 안정을 위해 또다시 부자와 재벌을 위한 감세를 하겠단다. 당황스러운 일은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 감세정책이 우리 경제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어떤 기준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금융위기와 팬데믹을 거치면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이 강조하는 글로벌 기준은 정부가 불평등을 낮추기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경제가 장기침체에서 벗어나 지속성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마 장관이 세상 물정 모르고 수십년 전에 유행했던 정책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착각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도 굳이 글로벌 기준에 맞추고 싶다면 왜 노동과 복지는 맞추지 않는지 궁금하다.

 

대통령이야 본인 말대로 대통령이 처음이고 수사밖에 모르는 정책의 문외한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기재부 장관을 비롯해 실질적결정권을 가진 관료와 전문가는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부자와 대기업의 세금을 낮추면 경제와 민생이 나아진다는 비과학적 주장을 되풀이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들만이 아니다. 국민의힘은 마치 집권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 여당처럼 행동하고 있다.

 

보수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였나. 팬데믹에 이어 인플레이션이 경기를 끌어내리면서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위협하는데, 대책이라며 내놓은 것이 부자에게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주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는 감세라니. 이 정부를 보면 경제는 보수가 잘해라는 세간의 믿음이 근거가 없는 잘못된 믿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세는 글로벌 기준도 아니며, 인플레이션과 경제위기의 시대에 해야 할 일도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보수의 이념에 맞게 위기에 처한 민생을 보듬는 것이다. 돈이 없다고 구차하게 변명하지 마라. 국민이 거의 체감할 수 없는 유류세 인하와 계획된 감세만 되돌려도 5년 동안 대략 60조원 이상을 마련할 수 있다. 이 돈으로 보수의 색깔에 맞게 기준중위소득의 현실화 같은 취약계층을 위한 선별적 복지를 제대로 확대해라. 인플레이션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며, 세계경제의 흐름과 기본적 산수만 알아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보수정부의 체면이 있는데 경제와 민생 정책에서 낙제는 면해야 하지 않겠나.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2022.08.07

 

 

복수극에 열광하는 사회

왜 한국사회는 처벌 강화에 이토록 집착하는가? 죄와 벌의 등가교환이라는 판타지를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은 것인가? 강력한 처벌이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죄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닌가?

 

복수극은 대중문화의 주류 콘텐츠다. 권력 집단의 악행으로 고통받은 피해자가 치밀하게 복수를 실행하는 이야기는 지겨울 정도로 많다. 법의 무력함에 절망한 피해자가 폭력적 방법으로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도 흔하다. 어느 경우든 복수극은 판타지다. 이는 복수의 현실적 불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죗값의 의미 인류학은 사회관계의 기본 형태를 탐구하기 위해 이른바 원시사회에 집중해왔다. 그곳의 관계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행위로 유지된다. 물건, 상징, 언어 등 모든 것이 그 대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 사이에 사람을 주고받는 행위, 즉 혼인이다. 원시사회의 혼인제도는 인류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였다. 핵심 문제는 주고받음이 교환관계와 부채관계 중 무엇인지다. 예컨대 신부를 데려오고 귀중품을 보내는 관습이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이를 돈과 여성의 교환이라고 이해하면, 일종의 인신매매가 될 것이다. 많은 인류학자가 이런 견해를 비판하며, 부채관계의 관점을 취한다.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의 여성을 신부로 맞이한다면, 그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된다. 우리가 귀중품을 보내는 것은 상환 불가능한 부채의 존재를 선언하기 위함이다(이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를 수행한 사람이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다. 이 칼럼의 기본 발상은 그의 작업에서 온 것이다).

 

교환과 부채는 전혀 다르다. 교환은 깔끔하다. A를 주고 B를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반면 화폐를 빌렸다가 갚는 경우를 제외하면, 부채는 뒤끝이 있다. 타인의 친절은 나에게 빚으로 남는다. 내가 친절로 화답하는 것은 그 빚의 상환이 아니라 거꾸로 그가 나에게 빚지게 만드는 행위다. 인간관계 대부분이 빚의 연쇄로 유지된다. 은혜, 원수, 친절, 감사, 복수 등의 원초적 관계는 모두 부채의 형식을 가진다.

 

죄도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부채관계의 일종이다. 그것은 타인의 생명, 재산, 행복, 신체, 믿음, 존엄성 등을 부당하게 빼앗는 행위에서 성립한다. 죄인은 일종의 채무자다. 그는 피해자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 한국어 단어 죗값은 이 관계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표현한다. 죄를 지었으면 값을 치러야 한다. 빼앗은 것의 반환은 죗값이 되지 못한다. 누군가 당신의 물건을 훔쳤다가 나중에 돌려주면서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는 단순히 물건을 훔친 것이 아니라 내 소유 영역을 침범한 것이고, 그에 해당하는 죗값은 훔쳐간 물건의 가치보다 크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빼앗은 것이 내 행복이나 존엄성이라면, 잃은 것을 온전히 돌려받을 방법은 없다.

 

복수극이라는 판타지 죄인에게 강력한 처벌을 가해도 마찬가지다. 죄와 벌은 등가교환되지 않으며, 처벌로 죗값을 온전히 받아낼 수는 없다. 일단 죄에는 한계가 없지만 처벌은 제한적이다. 한 인간이 수백, 수천을 학살할 수 있지만, 가장 강력한 처벌은 그 한명의 죽음이다(더구나 사형은 민주주의 국가가 택할 방법도 아니다). 또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도 죄와 벌의 등가교환을 실현할 수 없다. 내게 폭력을 행사한 자에게 똑같은 폭력을 가한다고 해도 내 고통과 그의 고통은 등가일 수 없다. 무고한 피해자의 고통과 죄지은 가해자의 고통은 결코 동등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리 큰 고통을 줘도 내 고통을 상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처벌을 통해 죗값을 온전히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처벌은 왜 하는 것인가? 여기서 가설을 하나 세워보자. 처벌의 목적은 죗값을 받아내는 게 아니라 죗값이 상환 불가능한 부채임을 선언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훼손한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만 처벌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처벌의 목적은 다양하다. 과거에는 죄인의 신체를 잔인하게 훼손함으로써 범죄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근대 감옥은 죄인을 도덕적 주체로 갱생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어느 경우든 죗값을 온전히 받는 것은 처벌의 목적이 아니다. 이는 객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수극은 현실의 부채관계를 부정하고, 죄와 벌이 등가교환되는 세상을 상상한다. 우리의 마음은 부채관계에서 답답함을, 그것의 청산에서 통쾌함을 맛보도록 만들어져 있다. 복수극이 사이다를 주는 것은 가해자를 향한 처벌과 폭력을 통해 부채관계가 완전히 청산되는 판타지를 그리기 때문이다. 간혹 청산되지 않는 부채를 다루는 작품도 있는데, 관객은 참기 힘든 당혹감을 느낀다(<복수는 나의 것>·<밀양> ).

 

복수극은 단지 판타지에 머물지 않는다. 심각한 사회적 폭력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강력한 처벌이다. 그 외의 다른 조치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촉법소년 연령 하향이 전형적 사례다. 왜 한국사회는 처벌 강화에 이토록 집착하는가? 죄와 벌의 등가교환이라는 판타지를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은 것인가? 강력한 처벌이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죄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닌가?

 

죗값을 온전히 치르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를 받는 것이다. 용서란 죄를 사()해주는 것, 죗값의 면제를 의미한다. 현실 사회에서 용서의 권리는 피해자에게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실제로 가능한지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것은 종교적 구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구원(redemption)은 빚을 갚는다는 어원적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적 구원이란 신의 아들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갚아주고, 죄의 부채관계 자체를 청산하는 과정이다.

 

어쨌든 용서는 공동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죗값을 받기 위한 공동체의 최선은 일종의 보증을 서는 것 아닐까? 죗값의 부채관계를 피해자와 가해자에게만 한정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같은 죄의 반복을 방지할 책임, 빼앗긴 것을 피해자에게 돌려줄 책임을 공동체가 져야 한다. 실제로 이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통치 권력의 주요 기능이다. 처벌은 이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일 뿐이다. 죄와 벌이 교환 가능하다는 믿음, 강력한 처벌로 죗값을 받아낼 수 있다는 환상은 공동체의 본래 책임을 망각하게 만든다. 죗값의 완전한 청산은 불가능한 목표지만, 공동체가 책임의 주체가 될 때만 조금이라도 그에 가까워질 수 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주간경향 2022.08.08.

 

 

해가 저물면 나는 야한 춤을 출 거야

2000년대 브라운관에서 섹시는 오롯이 섹시 가수라고 명명된 이들에게만 부여된 자격이었다. 춤을 추기 전부터 보였다. 눈에 띄게 화려한 화장, 쥐 잡아먹은 듯 빨간 입술, 손잡이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링 귀고리,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스커트와 가슴골이 보이는 상의가 그의 역할을 알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노래는 십중팔구 템포가 아주 느리고 끈적했으며 목소리는 희미했다. ‘요 쏘 섹시라든지 섹시 보이등 실제로 섹시라는 단어를 가사에 내포하기도 했다. 노래가 시작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들에게만 허락된 행위인 섹시 웨이브를 미꾸라지처럼 반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심하게 섹시했다. 그 옆에는 섹시가 무엇인지 초성부터 배워야 할 듯한 여자들이 서 있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솜사탕 같은 머리띠를 한 채 입을 앙다물고 춤사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범접할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업무분담 하나는 끝내주게 돼 있었다. 요정이냐, 요물이냐 중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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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를 원하고 원망하다

마치 섹시 가수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그들의 작위적인 요염에도 사람들은 곧잘 숙연해졌다. ‘깔깔웃고 와와손뼉을 치다가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장내 엄숙을 선언한 듯 조용해졌다. 그걸 바라보고 있던 나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주변이 지워졌고 어딘가 싸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부드러운 손이 와서 입을 막은 것 같았다. 어른들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도 나에게는 절대로 저런 건 추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그렇게 되는 일이 마치 어딘가로 전락하게 되는 일인 양 말했다. 섹시를 원하고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된다고?’ 어린 나는 오기로 벌떡 일어나 화면 속의 그들처럼 온몸을 꺾고 흔들었다. 엄마는 살아 있는 나무토막을 보는 것 같다며 그렇게 끔찍한 움직임은 삼가라고 했다. 내가 움직이는 동시에 코미디가 시작된다고.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의 이 발언을 언급하며 문제 삼는다. 그 말 때문에 내가 코미디언이 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나의 역할은 침묵을 깨는 것이었다. 침묵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농담으로 깨뜨려야만 하는 것이 됐다.

 

그러면서도 나는 씩씩하게 걷고 싶을 때마다 비욘세와 니키 미나즈의 필링 마이 셀프(feeling my self)’를 들었다. 박재범의 몸매를 들으며 어깨를 들썩거렸고 울적할 때면 카디 비의 ‘WAP’를 들었다. 걸음걸이가 이상해졌고 묘하게 힘이 났으며 신이 났다. 기막히게 웃긴 코미디언에게서, 단단한 일직선의 다리로 아이스링크를 가로지르는 피겨 스케이터에게서, 얇은 입술을 가만히 다문 여성 장관에게서, 머리카락을 싹 올려묶고 힘찬 기합으로 공을 튀겨내는 배구선수로부터 자꾸만 그것을 발견했다. 입술을 조금 벌린 채 그들을 바라보게 됐다. 섹시가 위대함과 멀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됐다. 그것이 청과 홍처럼 구분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눈빛에 누군가의 손짓에, 목소리에, 말에, 생각에 어려 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것보다 웃지 못하게 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됐다. 부드러운 손으로 입막음을 당한 듯, 잠자코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열망하게 됐다.

 

때는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가을, 직장인 3년차였던 나는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풍선 같았다. 답답한 상사를 증오하지 못해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다 바치고 있었다. 회의실 테이블에 놓인 휴지를 3초간 응시하기만 해도 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홧김에 석 달치 월급으로 에르메스 백을 샀다가 웃돈을 얹어 되팔아 짭짤한 이익을 얻었다. 밀려드는 나날을 견뎌내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쌓여가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삶은 해일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그때 나의 섹시 댄스 선생님을 만났다. 아무나 내 선생이 될 수는 없었다. 첫째로 아무나 섹시를 가르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둘째로 아무나 이만한 몸치를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언자처럼 선언했다. 3명의 몸치를 데려올 테니 우리에게 트월킹(상체를 숙인 자세로 엉덩이를 흔들며 추는 자극적인 춤)을 가르치거라.

 

마음의 먼지 털듯 엉덩이를 털다

나만큼 몸치인데다 나만큼 섹시해지고 싶은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낌새라도 좀 보이는 일에 도전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걸어서 지구를 한바퀴 돌자고 하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호기심에 기웃거리다 사라졌다. 딱 한명의 동료만이 자리를 지켰다. 섹시해지고 싶은 범생이 게이였다. 그렇게 섹시한 선생님과 게이와 몸치인 내가 매주 서울 마포구 지하 연습실에 모여 엉덩이를 터는 연습을 하게 됐다. 노래는 아주 흘러간 노래든 지금 나오는 노래든 상관없으니 무조건 선정적일 것, 평소에 밥 먹는 표정으로는 절대 못 추는 춤일 것이었다. 회사라는 끔찍한 운명을 견디고 나면 섹시 댄스를 출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무실에 앉아 생각했다. 내가 평범하고 얌전한 회사원으로 보인다면 그건 크나큰 착각이야. 해가 저물면 나는 마포구에서 가장 야한 춤을 출 거라고.

 

처음엔 거울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분명 선생님을 따라 하고 있는데 완전히 다른 장르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같은 동작을 해도 내 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래처럼 흩어졌다. 동요를 부르듯이 발라드를 부르는 것 같았다. 침묵은커녕 웃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몸도 말을 안 들었다. 왼쪽 발이 어디 있는지, 골반과 허리가 어떻게 다른지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새로 구분했다. 섹시는 그야말로 어려웠다. 2시간을 꼬박 연습해 30초를 겨우 따라 움직였다. 누가 제일 몸치인지 결국 알 수 없었다. 내 동작을 따라가느라 다른 사람을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막상 부끄러워 거울을 제대로 응시할 수 없었다. 거울 속의 내가 민망하고 어색했다. 나를 요정으로 봐야 할지 요물로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껏 섹시를 표출해도 되는 건가. 내가 매력 있다고 주장해도 되는 건가, 그럼 안 되는 것 아닌가 솔직히 알쏭달쏭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혼신을 다해 엉덩이를 털고 골반을 씰룩이는 내 모습은 처음 보는 유()의 것이었다. 정해진 동작을 몸에 익히고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면 어느새 온몸이 비 오듯 땀으로 젖어 있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마음이 덩달아 개운해졌다. 엉덩이를 털다가 마음속 무언가도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뇌수막염으로 병원에 실려가기 직전까지도 트월킹을 연습하는 학생이 돼 있었다. 몸이 뻑뻑하든 말든, 섹시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거울 속에는 신나게 흔들리는 내 몸이 있었다.

양다솔 작가 주간경향 2022.08.08.

 

 

취업난 속 구인난

한국에서 지난해 고교를 졸업한 437515명 중 322246명이 고등교육기관(대학)에 진학했다. 진학률 73.7%로 세계 최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한 2020년 기준 25~34세 청년층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한국이 69.8%1위였다. OECD 평균(45.6%)을 훌쩍 넘는다. 1995년 한국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28.8%로 캐나다, 미국, 벨기에 등에 이어 5위였다. 2008년 캐나다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선 뒤 13년 연속 선두를 고수하고 있다.

 

해마다 40만명 넘는 청년이 사회에 쏟아져나오지만 일자리 구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 6월 취업자 통계를 보면 15~29세 청년 실업자는 30만명이었다. 월별 청년 실업자는 20~50만명을 오르내리는데, 전체 실업자 3명 중 1명은 청년이다.

 

고용노동부가 84차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발표한 구인난 해소 지원방안을 보면, 6월 기준 빈 일자리 수가 234000개에 이른다. 농업 분야 구인난이 가장 심각하고, 뿌리산업에만 27000명의 일자리가 비어 있다. 음식점·소매업 14200, 조선업 4800, 택시·버스업 2300명 등도 모자란다. 청년 취업난과 구인난이 상시 겹치는 일자리 미스매치고급 인력에 걸맞은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농촌 일자리가 대졸 청년의 성에 찰 리 없다. 주조, 금형, 용접, 소성가공, 열처리 등 제조업의 근간인 뿌리산업이나 조선업도 꺼린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구인난의 본질적 원인은 저임금·고위험 등 열악한 근로환경과 노동시장 이중구조라고 진단했다. 한국 노동시장은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 등 1차 노동시장과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등으로 구성된 2차 노동시장으로 나뉜다. 안정성이 높고 임금도 많은 1차 시장 노동자는 10%뿐이다.

 

일자리 미스매치를 줄이려면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과 산업 변화에 맞춘 대학교육 혁신 등이 필요하다. 이 장관은 그 해법으로 노동시장 개혁과 외국인 노동자 확대를 제시했다. 그런데 국무조정실은 해고 제한이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형사처벌의 완화 등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발등의 불만 끄겠다는 발상이라 안타깝다. 일자리는 산업뿐 아니라 국민 복지이자 생존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이 문제는 풀린다.

안호기 논설위원 경향 2022.08.08.

 

 

서민의 실존 위협, 국가는 알까

친구들에게 요즘 고민이 뭐냐 물어보면 대부분 주거와 관련한 답을 들었다. 늘 누군가는 이사를 준비하고, 독립을 예정하고 있거나, 이미 을 얻은 상태라면 집주인과 자잘하게 싸우고 있다고 한다. 뜻밖의 대답도 있었다. “나는 기후위기가 고민이 돼.” 친구의 나이는 30, 나와는 제로웨이스트보다 투자라는 단어를 더 많이 주고받은 사이다. 지금 당장의 경제적 고민이 아니라 환경문제라니. 조금 새삼스러웠다.

 

그에게 기후위기는 무엇이냐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머리에 떠오른 새삼이란 단어를 지워버렸다. 친구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갑자기 지구가 자연재해로 파괴된다거나, 어느 날 온난화로 인한 열사병으로 죽을 것 같아서 무섭다는 말이 아니다. 기후위기는 모두에게 같은 크기의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저소득 취약계층에 더 큰 피해를 준다. 친구는 30년 뒤에도 지금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현재만큼의 소득이 없을 수도 있고, 나아가 모아둔 자산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에너지 불평등 구조에서, 얼마나 갖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불안하다고 했다. 결국 우리 세대에게 기후위기는 경제적 불안과 직결된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불안의 면면이 다양할 수 있나. ·월세를 전전하며 다음 집을 고민해야 하는 동시에 치솟는 금리와 물가로 인한 텅장도 고민해야 한다. 열심히 벌어도 30년 뒤 마주할 파괴된 생태계에서 내 자산은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노동의 가치는 무엇인가. 결혼이 선택인 시대, 같이 사는 친구나 파트너가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이런 고민을 나눌 법적 반려조차 없을 수도 있다. 혈혈단신으로 안정이란 단어를 쟁취하기엔 삶이 너무 길다.

 

이처럼 다면적인 삶의 불안에 정부는 시장 만능과 각자도생을 대책으로 내놓는다. 윤석열 정부는 과학적인 탄소중립 정책 이행을 약속했다. 말만 들으면 기후변화 스케줄에 맞춰 치밀하게 계산된 온실가스 감축 정책인 듯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술과 산업에 이 나라 기후의 미래를 맡겨버린 무책임한 단어 일색이다. 기업과 시민을 설득해 탄소 배출을 감축하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국가가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인 국민연금 제도에서마저도 발을 뺐다. 청년세대는 국민연금을 못 받는 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반박하며 공적연금 강화의 필요성을 설득하기는커녕 사적연금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를 연금개혁의 방안으로 내놓았다. 불안한 시민에게 국가가 손을 내밀지는 못할망정 시민을 시장으로 내쫓고 있는 꼴이다.

 

국가는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한국개발연구원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20대 청년의 30%는 국가가 우선 수행해야 할 정책으로 복지 확대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을 꼽았다. 한편 정부의 우선순위는 복지 확대가 아닌 경제성장과 재정건전성이다. 시민의 복지 수요를 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단어다. 재벌대기업과 부자에 대한 감세가 어떻게 재정건전성과 연결될 수 있는지, 노동자와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 지출 없이 어떻게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기후위기와 양극화. 세대를 넘어 시대가 마주한, 이 실존하는 위협을 감각하고는 있는가. 정부의 답을 듣고 싶다.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경향 2022.08.09

 

 

윤석열 정부의 아마추어 국정 참사, 졸속 추진-사후 공론?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들에 의해서, 이런 원칙들의 이름으로, 이런 목표들을 위해, 이런 절차를 통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위해, 그들에 의해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비판이란 무엇인가?>(미셀 푸코 지음, 심세광·오트르망·전혜리 옮김, 동녘 펴냄)

 

교육부 장관이 새 정부 첫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돌연 대선공약에도, 국정과제에도 없던 취학연령 하향을 발표했다. 내용은 물론 추진 방식에 대해서도 비난이 거세지자, 급히 사후공론화를 시작했다. 나흘 후 개최한 학부모단체와의 긴급 간담회 일정은 회의 당일, 회의 시작 4시간 전에야 단체들에 통보됐다고 한다.

 

반대 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사후공론화라고 해봤자 결국 정책 폐기 절차를 밟으리라는 예측도 있다. 학제 개편 자체는 논의해 볼 만한 주제인데 여론 수렴 없는 졸속행정으로 정책 추진동력을 상실했다는 비판도 있다. 돌봄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비판, 아동의 건강과 행복 관점이 빠졌다는 비판 모두 타당하다.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취임 석 달도 안 돼 20%대로 떨어진 상황은 이미 이 정책을 예정대로 추진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이나 추진 방식을 넘어, 우리는 반복되는 '졸속추진-논란-사후공론화' 순환 너머에서 작동하는 통치에 분노한다. 천천히 추진했더라면, 사전공론화를 했더라면 그 경과가 크게 달랐을 거라 기대하기 어렵다. 다음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비슷한 시기 대통령실은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 최저임금 차등적용 등을 포함한 '국민제안 TOP 10'을 발표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국민제안'을 접수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민관 합동심사위원'이 기준을 알 수 없는 'TOP 10'을 선정한 것도 모자라, 이미 오랜 사회적 논의와 실험을 거쳐 제도화한 사안을 열흘간의 '좋아요' 투표 결과에 따라 '우수제안'으로 선정해 국정 운영에 반영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정작 투표 종료 후 중복·편법 투표 사실이 드러나자 애초 계획한 'TOP 3'시상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튿날 국무조정실은 "기존의 정부 주도 규제개선 방식에서 벗어나 민간이 주도해 규제개선을 추진하는 방식"이라는 '규제심판' 제도의 첫 대상으로 대형마트 영업제한 규제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틀 후 '민간전문가' 5인으로 구성한 '규제심판부'가 제1차 규제심판회의를 개최했다. 비공개 방침이었다가 결국 사후 공개한 민간전문가는 변호사 1인과 경영·경제학과 교수 4인이었다.

 

회의에는 규제 완화(폐지) 측 이해당사자로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체인스토어협회가, 규제 유지 측 이해당사자로 소상공인연합회, 전국상인연합회,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이 참석했고, 소관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공정거래위원회도 자리했다.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과 의무휴업을 규정한 '유통산업발전법' 조차 "건전한 유통질서 확립, 근로자의 건강권 및 대규모점포등과 중소유통업의 상생발전"을 그 목적으로 명시했건만, 대형마트 노동자는 자신의 건강과 안전이 걸린 이 자리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우연히 동시에, 갑자기 불거진 사례들이 아니다. 반도체산업 인력양성을 위해 유치원과 초··고등학교 예산을 삭감했을 때,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는 산업 인재 공급"이라며 수도권대학 정원 규제 완화를 주문했을 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기업인들의 경영 의지를 위축'시킨다고, 노동자들이 '120시간 바짝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운운했을 때, 이미 통치의 원칙과 목표는 정해졌다.

 

민주주의 축소 및 불평등 심화! 시민사회 및 노동진영에 대한 배제와 억압! 사회권력의 유토피아적 에너지 해체!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연합의 강화를 통한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을 위한 나라 만들기! 우리는 이 정부가 지향하는 통치의 본질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색 갖추기 절차와 참여가 어떻게든 작동하면, 이번 논란만 가라앉으면, 지지율이 반등하면, 통치는 다시 안전하다. 그러니 졸속추진 비판이나 공론화 요구에서 멈출 수 없다. 대통령과 정권 호명도 넘어서자. 더는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기반한 방어와 반격을 시작하자! 노동자 안전과 삶을, 아동·청소년의 행복을,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간 불평등 해결을 더 가열차게 이야기하자! 현실정치에 대한 환멸과 혐오를 이겨내고, 각자도생에 맞서는 연대적 상상력과 실천을 만들어가자!

 

"[현실이] 변한다면, 그것은 개혁 방안이 [주체의] 머릿속에 주입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변화는 () 현실과 관계된 이들이 서로 부딪히고, 그 자신과도 갈등하며, 난관과 불가능에 부딪히고, 갈등과 대립을 통과할 때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 변화는 비판이 현실에서 작동할 때 이뤄지는 것이지, 개혁가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때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푸코 효과-통치성에 관한 연구>(콜린 고든·미셸 푸코 외 지음, 이승철·심성보 외옮김, 난장펴냄))

시민건강연구소 프레시안 2022.08.08.

 

 

헤어질 결심’, 군 위안부, 김건희님의 다운로드

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 해외 연출작 외에는 모두 보았다. <복수는 나의 것>(2002)<헤어질 결심>을 가장 좋아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보기 힘들어서 두 번 보지 못했지만 꿈에 나타났으므로 여러 번 봤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은 세 번 보았다. ·조연은 말할 것도 없고 독립영화 <들꽃> 시리즈의 스타 정하담 배우까지 멋진 배우들의 기막힌 연기, 언어의 차이가 작품의 깊이로 전환되는 각본과 연출, 이야기 구조. 이 영화의 매력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작품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날을 꿈꾸지만, 불가능한 일임을 안다. 정치적이지 않은 텍스트는 없다.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탕웨이)은 젠더 폭력 피해자다. 그녀가 남편을 죽였다면, 당연히 정당방위다. 남편은 지갑, 가방모든 물건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인간이다. 중국 출신 이주여성인 그녀는 8년 동안 의료진도 놀랄 만큼 표시 안 나게, 매일 맞고 살았다. 몸에는 남편의 여느 소지품처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당방위이므로 영화의 전제인 남편의 사인이 자살이냐 타살이냐는 줄거리는 붕괴된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문신은 흔하다. 폭력 남편들은 주로 몸의 민감한 부분에 자기 이름이나 욕설을 새긴다. 소유물, 낙인, 노예라는 뜻이다. 정육(精肉) 과정에서 상품에 도장을 찍는 행위와 같지만 문신과 도장은 다르다. 문신은 조각(彫刻)이다. ‘에는 칼()이 필요하다. 육체가 조각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전문가의 시술도 아닌 피와 살이 튀는 인체 실험, 폭력이다.

 

이처럼 박학(薄學)한 지식조차 괴로울 때가 있다. 젠더 폭력으로서 문신. 이 멋진 영화를 나는 온전히 감상할 수 없었다. 관련 기억이 줄줄이 소환된다.

 

<나는 부정한다>는 홀로코스트 소재 영화로서 최근 출몰하는 역사부정론자들의 실화다. 이들은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있었다는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나이 든 여성이 나치가 새긴 문신을 보이자 역사부정론자는 조롱한다.

 

젠더 폭력의 증언, 문신

박수남 감독의 <침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운동가로 성장하는 다큐멘터리로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관련 영화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힌다. <침묵>은 운동 조직 없이 활동하는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 당사자 운동을 다룬다. 이들의 언어는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 극복한다. 듣는 이가 같은 처지의 동료일 때, 팩트가 드러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침묵한 이들은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회다. 피해자가 아무리 말해도 한·일 양국은 침묵하거나, 그들의 말을 취사선택하여 피해자를 위계화시켰다. <침묵>에도 문신이 나온다. 당시 일본군이 군 위안부의 팔에 이름을 새긴 것이다. 피해자는 고향에 돌아와서 지우려 했으나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자, 이 문신을 역사적 증거로 삼기로 하고 남겨둔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마다 그 나날들을 상기하며 몸으로 증언하는 삶을 살아간다.

 

<헤어질 결심><침묵>의 역사적 맥락과 장르는 완전히 다르지만, 문신이라는 젠더 폭력으로 만난다. <헤어질 결심>에서 형사가 남편의 폭력을 왜 경찰에 알리지 않았느냐고 묻는 장면은 <침묵>에서 군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사회와 겹친다. 가정폭력을 신고하면 경찰이 도와주는가? 사회는 군 위안부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믿어주었는가?

 

박수남 감독은 재일교포로 일제강점기에 부모를 따라 일본에서 성장한 영화감독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서울의 정대협만 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대구, 수원, 광주, 해외에서도 왕성했다.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자이니치 여성들의 군 위안부 운동은 일본사, 한국사의 한 부분이 될 만큼 치열하고 광범위했다. 그들은 일본 우익의 살해 협박을 받아가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버려진군 위안부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했다.

 

그런 박수남 감독이 1998, 한국 정부에 의해 입국을 금지당했다. 당시 박수남 감독은 자신의 입국 금지 사실을 한국의 신문 기사를 보고 알았다. 1970년대 재일교포를 간첩으로 조작하던 시절도 아니고, 2000년대를 앞두고 입국 금지라니. 입국 금지령을 내린집단은 한국의 군 위안부 단체였다. 학계에서 매장을 무릅쓴 어느 연구자가 당시 외교부 직원을 끈질기게 추적, 오랜 설득과 인터뷰 끝에 관련 문서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침묵한 사건이다.

 

박수남 감독과 정대협의 군 위안부에 대한 입장은 같다. “군 위안부는 국가가 조직한 명백한 전시 성폭력이고, 일본 정부는 가해자로서 책임과 관련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런데 왜 같은 운동을 해 온 동지인 박수남 감독의 입국을 막았을까.

 

주지하다시피 DJ의 당선은 천운이었다. 이인제씨의 500만표 분산, DJP연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DJP연합의 대표가 왜 김종필이 아니라 김대중이냐고 항의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정권 교체는 되었지만 DJ 정부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김대중 정권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건국 이래 최초의 정권 교체, 김대중 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사실은 김대중 정부였기에 가능한 사건이었다. ‘친정부 단체가 된 일부 사회운동은 오만, 독선, 독점욕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이후 나눔의집의 부정부패와 윤미향 의원의 각종 혐의, 위안부 쉼터 담당자의 자살, 이용수님의 폭로로 이어졌다.

 

대통령 배우자·여성운동가의 표절

모처럼 박찬욱 월드에서 행복했던 나는 문신 장면 때문에 마침내 붕괴되었다. 지난 정권은 무엇을 잘못했고, 현 정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영화를 네 번째 보지 못한 이유는 여기서 넘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 지면에서 대통령 배우자의 논문 다운로드에 대해 쓰려 했다. 하지만 한국 학계에서 표절이나 다운로드는 대통령 배우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일부 군 위안부 운동가, 연구자들의 표절, 횡령, 성폭력, 인적 네트워크를 기준으로 다른 운동가와 연구자를 배제하고 모욕한 행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윤석열 정권의 탄생은 민주당이 싫어서였지 국민의힘을 지지한 결과가 아니다(누구보다도 현 정권이 가장 잘 알 것이다). 1998, 24년 전에도 군 위안부 단체가 외교부를 흔들 정도였으니 문재인 정권에서는 어떻겠는가. 군 위안부 이슈는 한국의 경제 성장과 민주화운동 수출이라는 담론 속에서 일부 똑똑한지식인들에게 블루오션이 되었다.

 

일본 우익의 폭력과는 별개로 세계 곳곳의 소녀상이 대변하듯 운동은 대중화와 동시에 성역화되었다. 실리는 말할 것도 없다. 군 위안부 관련 각종 기금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고, 주인을 잃은 채 처리 곤란 상태에 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자신의 비리를 덮고 각종 자원 확보를 위해, 위안부 사안에 뛰어든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의 부패는 현 정권 탄생에 일조했다.

 

나는 원래 대통령 배우자의 논문 다운로드에 대해 쓰려고 했다. 그러나 같은 여성주의자로서, 김건희 여사보다 더한 사례가 있으니 난감했다. 정의기억연대(이사장 이나영) 일부 관계자의 논문도 지난 15년간 계속 문제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여성계와 학계는 쉬쉬했다. 입국 금지 같은 보복이 실제로 빈발했다.

 

특히 정의연의 핵심 모 교수는 최초 학위 논문부터 재판에 버금가는 조사를 받았고 이후에도 모든 논문이 절도 의혹을 받았지만 쉽게 무마되었다. 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은 해임, 매장 위협, 학술지 심사위원과 연구비 배제 등 공포에 떨었다.

 

사회운동이 피해자의 인권 중심이 아니라 조직 자체의 존속과 대의가 강조될 때, 이런 일은 필연적이다.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해 최소한 현 정권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군 위안부 운동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로남불의 반복이다. 위안부 운동의 변화가 검찰에서 시작되지 않기를 절실히 바란다. 그러면 일부 진보 세력은 또다시 피해를 주장할 것이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나는 정훈희·송창식씨의 안개에 의지하며 이 끔찍한 현실에 눈을 감는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2022. 08.10

 

 

 

윤 대통령과 소용돌이 한국정치의 비극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추락과 이를 둘러싼 정치권·언론의 움직임을 보면서 문뜩 소용돌이 한국정치이론이 떠올랐다. 미국 정치학자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은 고도의 중앙집권을 지속한 결과 원자화된 개인들이 만드는 소용돌이, 즉 강력한 상승기류를 발생시켰다고 썼다. 모두가 권력의 상층을 향해 각개약진하는 거대한 소용돌이 군상으로 우리 정치를 묘사한 것이다.

 

오래된 분석이지만 지금도 틀린 것 같지 않다. 대선이라는 상승 소용돌이가 한바탕 지나갔지만 여전히 모두 그 안에 갇혀 있다. 소용돌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와중에 정점만 쳐다본다. 소용돌이의 정점이 모든 걸 갖고서, 모든 일을 해낼 것처럼 바라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본인 오구라 기조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상승 지향의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라고 썼다. 유교적 명분을 내세워 위로만 향하는 권력 쟁탈전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했다. 멀리는 조선의 당쟁, 가까이는 죽기 살기식 진영대결까지 모두 한 뿌리다. 흑백논리에 기반한 거대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갇혀 있다.

 

최근 윤 대통령이 크게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언과 읍소, 비판이 쏟아지지만 본질적 해법들인지 의문이다. 대통령이 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런데 대통령이 변할 수 있을까? 조금 바뀌어 나아진다 해도 근본적 해결이 될까? 대통령들은 왜 이렇게 매번 망가지나?

 

우선 윤 대통령이 지금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까? 부분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초심으로 절치부심하면 얼마간 지지율을 회복하고 안정을 찾을 것이다. 20%대 지지율은 극히 비정상이다. 하지만 난국은 언제든 다시 올 수 있고, 후반으로 갈수록 가능성은 커진다.

 

윤 대통령의 최대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벤치마킹하는 정도 아닌가 싶다. 이 전 대통령은 임기 초 위태로울 때 청와대에서 시위대의 아침이슬노래를 들으며 크게 깨우쳤다는, 속 보이는 반성 쇼를 했다. 칼만 휘두르던 윤 대통령이 노회한 이 전 대통령의 변신을 따라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런 이 전 대통령도 임기 말엔 거의 망가져 정권이 넘어갈 뻔했다.

 

거대한 소용돌이 정치구조에서 모두가 윤 대통령만 바라보지만 중요한 건 이 소용돌이 구조를 객관적으로 보는 일이다. 소용돌이에 갇혀 꼭대기만 쳐다보며 아우성칠 게 아니라 소용돌이 그 자체를 봐야 한다. 그 무모함, 비생산성, 격렬함, 허무함을 봐야 한다.

 

무한 루프의 소용돌이 구조에서는 정점의 대통령조차 혼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지지율 폭락의 원인은 여럿이지만,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작전하듯 몰아내며 드러난 윤 대통령의 독단, 무모함, 배타성도 한몫했다. 요로에 박힌 검찰 출신, 윤핵관들로만 국정을 이끌 수는 없다.

 

난국을 함께 풀어갈 인재와 세력을 집권세력 안팎에서 폭넓게 찾아야 한다. 야당과도 일정 부분 협력해야 한다. 경쟁 관계지만 최소한의 협력 기반은 갖춰야 한다.

윤 대통령이 청와대를 버리고 용산 이전을 결단했듯, 지금의 소용돌이 정치구조에 결정적 균열을 내겠다는 각오로 나서야 한다. 대통령이 변해서 국정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 환경 자체를 바꾸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발등의 불이 아니라며 중장기 과제로 밀어놓을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대통령조차 그 구조에 갇혀 시들어간다.

 

당장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총리 국회 추천제다. 정부조직법, 국회법 개정으로 가능하다. 윤 대통령은 대선 당시 책임장관이라는 해괴한 조어를 내세워 책임총리제를 회피했다. ‘내가 잘하면 되지 무슨 책임총리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혼자 잘하기도 어렵고, 그래도 어려운 게 지금 구조다. 책임총리제를 여야가 함께 추진해 꽉 막힌 소용돌이 구조에 숨통을 틔워야 한다.

 

개헌 문제는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로 간다고 했을 때 국민적 합의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개헌 시 지방선거와 대선을 맞추기 위해 대통령 임기 단축 문제가 제기됐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백년대계 차원에서 장기적 정치 일정을 숙고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로 상징되는 소모적 소용돌이 구조를 해결할 주체는 그 정점에 있는 이가 아니라 소용돌이 속에 있는 우리 모두다.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특단의 결심, 헤어질 결심을 모두가 해야 한다. 여야 정치권은 물론 국민이 다 함께 합심해야 한다.

 

그 소용돌이는 약육강식, 이전투구, 내로남불, 민생 외면, 거대양당 독식, 진영대결의 뿌리다. 소용돌이를 흩트려 모두가 함께하는 공존의 바다, 공존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백기철 | 편집인 한겨레 2022. 08.10

 

 

팬데믹,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지요

헤아릴 수 없는 죽음으로/ 도시는 죽어가고,/ 이 도시의 자식들은 동정도 문상도 받지 못한 채/ 땅바닥에 누워 죽음을 퍼뜨리고 있구나./ 거기에 맞춰 아내들과 백발의 노모들은/ 여기저기서 제단으로 몰려가 통곡하며/ 쓰라린 고통에서 구해주기를 애원하고 있구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에서 역병이 번진 도시국가 테베의 참상을 노래하는 코러스의 한 대목이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왕좌에 오른 오이디푸스는 역병의 원인과 해법을 찾고자 신탁을 청해 들은바, 선왕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벌하지 않는 한 역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신탁을 좇은 결과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선왕이자 친부의 살해범임을 알고 제 두 눈을 찌른 뒤 테베 바깥으로 스스로 추방당하는 결말은 비극이라는 문학 장르의 원형을 이루었다.

 

그리스 비극의 가장 유력한 적자(嫡子)라 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가짜 죽음을 로미오에게 알리고자 파견됐던 존 신부는 흑사병에 걸린 이들의 집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방역당국에 의해 감금되는 바람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이 일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진짜 죽음으로 귀결된다. 1603년에서 1613년까지 런던을 휩쓴 흑사병 유행 때 셰익스피어가 소속된 글로브 극장은 무려 78개월 동안이나 휴관해야 했고, 그런 휴지기에 그는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 같은 걸작들을 집필했다. 그러니까 흑사병은 배우이자 극장 경영자 셰익스피어에게는 치명적이었지만 극작가 셰익스피어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이기도 했던 셈이다.

 

<오이디푸스왕>에서 보듯, 역병에 관한 과학적 이해가 부족했던 고대인들에게 가장 손쉽고 개연성 있는 서사는 그것을 신이 내린 벌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이성과 과학의 시대라 할 현대에도 면면히 이어진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슬픔과 불안에 쫓겨 성당을 찾은 시민들에게 파늘루 신부는 여러분은 불행을 겪어 마땅하다고 매몰차게 선언한다.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늘루 신부의 이런 생각은 오르한 파무크의 소설 <페스트의 밤>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는 이슬람 성직자 셰이크 함둘라흐가 신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하는 것밖에 다른 위안이 없습니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대니얼 디포는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라는 책에서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필치로 흑사병의 파괴력과 그에 대한 대응을 그렸는데, 특히 대규모 전염병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회구조를 날카롭게 관찰한 사실이 놀랍다.

 

전염병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앞에서 겁 없이 무모하게 움직이며 맡은 일을 일종의 야만적인 용기로 해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 병든 사람을 돌보거나, 봉쇄된 집을 감시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을 격리 병원으로 이송하는 일이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한 일이었으며, 이보다 더 위험한 일로는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작업이 있었다.”

 

이 책은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동시에 넘치는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디포 역시 시대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이런 대목에서 알게 된다.

그것(=흑사병의 종식)은 틀림없이 처음에 우리에게 일종의 심판으로 질병을 보냈던 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손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듯 역병을 신의 심판으로 파악하는 유구한 전통에 비춰 보면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오히려 이례적으로 다가온다. 흑사병을 그린 가장 초기 문학작품이라 할 이 소설집에서 신에 대한 두려움 대신 인간의 육체적 쾌락에 대한 예찬을 만나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다. 중세의 한복판인 1353년에 탈고한 이 작품은 단테(1265~1321)<신곡>에 견주어 인곡’(人曲)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단테의 작품이 신의 섭리와 종교적 구원을 다루는 반면 <데카메론>은 인간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담은 데에서 그런 별칭이 비롯되었다. 문제는 보카치오가 생각한 인간적 면모의 핵심이 성욕의 자유분방한 추구와 충족에 있다는 사실이다. <데카메론>은 한마디로 음담패설이라 할 정도로 분방하고 음탕한 성애의 묘사로 질펀하다.

그런데 하필 흑사병의 습격으로 죽음이 만연한 때에 성욕의 과감한 분출을 예찬한 소설이 쓰이고 읽힌 까닭은 무엇일까. 프로이트가 말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관계에서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쾌락 충동과 죽음 충동이 통한다는 그의 통찰은 <데카메론>의 배경과 작품 주제의 관계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눈앞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억눌려왔던 쾌락 충동을 자극했다는 해석이 가능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라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데카메론>의 후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은 사실 제목과는 달리 콜레라가 만연한 무렵이 아니라 콜레라 이후의 시기를 무대로 삼는데, 그럼에도 콜레라는 여전히 흔적과 그림자로 남아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 속 주요 인물인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가 여주인공 페르미나 다사를 처음 만나고 결국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된 계기가 콜레라의 예비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진료해 달라는 동료 의사의 부탁이었다. 페르미나의 첫사랑이었던 남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실연의 상처를 안고 무려 반세기 남짓을 기다린 끝에, 우르비노 박사가 사고로 숨진 뒤에야 페르미나와 재결합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도 콜레라는 사랑의 중개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 소설 말미에서 두 사람은 콜레라 환자 발생을 알리는 노란 깃발을 (가짜로!) 단 배에 단둘이 탄 채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랑의 항해를 계속한다.

 

두 사람은 경험 많은 노인들답게 조용하고 건전한 사랑을 나누었다. ()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사랑이지만,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 사랑의 농도는 진해진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김탁환의 소설 <살아야겠다>2015년 한국에서 번진 변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메르스 사태를 비판적으로 되짚어본 작품이다. 작가는 특히 환자의 생명보다는 정권의 안위와 병원의 수익을 앞세우는 본말전도식 사고에 날을 세운다. 메르스는 세월호 참사 1년여 뒤에 한국 사회를 덮쳤고, 정권의 무능과 무책임은 세월호 때나 메르스 때나 다르지 않았다. 메르스에 걸렸다가 회복된 방송기자 이첫꽃송이에게 선배 기자 선우병호는 이렇게 말한다. “세월호란 배에 타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안일하고 허약한 자기합리화가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중이지. 그렇게 비겁한 다행에 안주하면 결국 언젠가 우리도 외롭게 불행을 만나게 돼.” 여기서 병호가 말하는 마지막 메르스 환자로 찍힌 뒤 병원 격리실에 갇힌 채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결국 숨지고 만 김석주를 가리킨다.

 

병호는 첫꽃송이에게 디포의 책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를 권하며 그 책처럼 2015년 한국 사회의 메르스 사태를 기록으로 남기자고 제안한다. 추상적인 숫자나 통계가 아니라 피해자들의 생생한 경험과 느낌을 담은 피해자들의 서사를 남겨야 가까운 미래에 되풀이될 수도 있을 잘못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의 의미가 거기에 있겠거니와, 소설 <살아야겠다>가 바로 그런 피해자들의 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지요.”

<오이디푸스왕>에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추궁하는 오이디푸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이런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무시한 결과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불이익과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오이디푸스의 용기는 가상하다 하겠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따로 있다. 코로나19 사태의 원인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교훈 말이다. 지구를 착취하고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 인간이 인간 자신의 재앙이 된 현실을 코로나19 팬데믹은 준엄하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한겨레 2022. 08.10

 

 

간병비 없는 죽음

두시간 좀 넘게 기다렸을까.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 담당 주치의에게 물었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사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호스피스 받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주치의는 퉁명스레 말했다. “할아버지는 호스피스 못 받아요.” 말뜻은 이러했다. ‘말기 암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려면 반드시 24시간 간병인이 필요하다. 간병비만 한달에 300만원 이상 든다. 할아버지가 그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거였다. 가난에 대한 무례한 태도에 기분이 상했으나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나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할아버지의 통장에는 100만원도 채 들어 있지 않았다.

 

1인가구 한달 생활비가 132만원(2020년 기준)인 것을 생각하면 한국은 살아가는 데보다 죽는 데 더 많은 돈이 드는 사회이다. 국립암센터 보고에 따르면 2020년 한해 동안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82204명이었지만 그중 23%만이 호스피스 서비스를 이용했다. 6만명 넘는 나머지 분들은, 장기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힘들다는 암성 통증을 어떻게 견디고 죽음을 맞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중 상당수가 간병비라는 장벽을 넘지 못해 호스피스를 포기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이 상태로 오래갈까 봐 걱정이야.”

 

할아버지는 점점 기운이 없고 통증이 심해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입맛을 잃었다. 겨우 물만 마셨고 그날도 온종일 소변 한번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시 방문진료센터로 돌아가려는 나를 붙들고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밥은 먹고 가.”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병원 입구 언덕길을 내려오다 안간힘을 쓰며 휠체어를 붙들고 내려가는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중심을 못 잡아 뒤뚱거리는 휠체어에는 깡마른 할아버지가 타고 있었는데 입원 안내서를 쥐고 있는 손가락 모양이 특이했다. 곤봉 손가락이었다. 폐암인가 싶었다. 도와드리겠다 하고 할머니 대신 휠체어를 붙들고 내려가면서 어디 가시냐 여쭤봤다. 할아버지가 오늘 입원해야 하는데 입원 전에 좋아하는 갈비탕 한그릇이라도 먹게 하고 싶다 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 신호등을 건너고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 주택을 개조한 식당에 겨우 도착했다. 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문득 식당 안채에 놓인 계단 세개가 보였다. 멈칫했지만 결국 등을 돌리고 나왔다. 입구에서 식당 주인을 부르던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둘러업고라도 식당 안으로 들어갔을까. 돌아오는 내내 그 계단 세개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만약 나를 가장 비참하게 하고 싶다면 밥벌이도 힘겨워하는 내 가족에게 간병비를 감당하게 하라. 만약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면 암덩어리가 내 살을 좀먹는 말기 암의 고통 속에서 간병비 때문에 호스피스에 입원하지 못하고 요양원을 전전하게 하라. 만약 내 삶을 끝내 고통으로 기억하며 이 세상을 떠나게 하고 싶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호스피스 병동을 줄이고 있는 정부를 그냥 방관하라. 그리하면 나는, 우리는 분명 통한의 눈물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그리하라.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죽을 것이다.”

 

방문진료를 시작한 이후 이런 죽음의 과정이 벌써 몇번째인가 세어보던 그날 밤.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내게, 이리 말하는 듯한 어르신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암환자 가족들이 수없이 들었을 목소리,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나는 그날 이후 할아버지의 간병비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통이 왔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공사 과장이었다. 회사 직원들이 기금을 모아 할아버지의 간병비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달밖에 지원해드리지 못한다며 미안해했다. 기뻤다. 그날만큼은 곤봉 손가락을 지녔던 할아버지와 그의 가족들 앞에 나타날 계단들도 아른거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한겨레 2022. 08.10

 

국민대와 숙명여대, 굴종할 것인가 승리할 것인가

국민대가 표절 판정할 수 없는 이유

(이 글은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다수의 대한민국 대학원생, 연구자, 교수들과는 무관한 이야기입니다.필자주)

 

1990년대 중반 대학원을 다닐 때 일이다. 도서관 휴게실에서 동료 학생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한 학생이 와서 앉자마자 씩씩거리며 가방에서 잡지 하나를 꺼낸다. "이거 한 번 읽어 봐." 이 친구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이 올랐나 궁금해 하며 접힌 부분을 펼쳐 들여다보니 성공한 사업가의 인터뷰였다. 역경을 딛고 성공한 것까지는 훌륭했는데 문제는 그 중간쯤 박혀있는 그의 발언이었다. 30여 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나중에 혹시 필요할지 몰라 박사학위도 따 두었다."

 

역경을 헤쳐 나가야 했던 그 바쁜 와중에 짬을 내 박사학위도 따 두었단다. 나중에 혹시 필요할지 몰라 1종 운전면허를 땄다는 사람은 봤어도 박사학위를 미리 따 두었다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앞뒤를 읽어봐도 학문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가 더욱 열불이 올랐던 것은 이 사람은 그렇다 치고, 이런 이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학교는 도대체 어떤 학교인가였다.

 

88서울올림픽을 향해 치닫던 1980년대는 한국사회가 뒤집어지듯 급변하던 시기였다. 컬러TV방송이 시작되고, 프로스포츠가 출범하고, 정부가 갑자기 저축이 아닌 '소비의 미덕'을 강조하기 시작하고, 덕분에 '마이카붐'이 확산하고, 해외여행이 자율화되고, 외제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범사회적 흐름과 별개로 대학가에서도 조용하지만 확실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박사학위 취득이었다.

 

학위 장사(?)의 시작

당시엔 대학 교수들 중 석사학위 소지자가 꽤 많았다. 서울대에도 있었다. 한국 지성사의 대표적 석학 고 이어령 교수도 이화여대 교수가 된 건 1966년이었지만 박사학위를 딴 건 1987년이었다. 사실 당시 '이어령의 논문을 감히 누가 심사할 것인가'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어령 자신이 밝혔듯 박사학위 제자들 가르치는 데 불편함을 느껴 늦은 나이지만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이때는 '석사 교수'들 뿐 아니라 대학원생들의 박사과정 입학이 급증할 때였다.

 

문제는 1990년대를 지나면서 대학이 박사학위를 남발하는 '논문공장'으로 변질됐다는 점이다.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재정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 사립대들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전임 교원을 뽑기 보다는 겸임교수, 초빙교수, 특임교수, 산학교수, 강의교수, 연구교수 등 기존에 없던 단기 계약직 교수들을 임용하기 시작한다. 국립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들이 무더기로 교수가 됐다.

 

교수들도 문제였다. 학계엔 존경 마땅한 훌륭한 교수들이 많이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많은데, 이들의 못된 버릇 중 하나는 제자들로부터 대접 받고 제자들 거느리길 즐긴다는 것이다. 대학원 지망생이 줄고 있는 분야가 특히 심하다. 그래서 이들은 전문대학원, 특수대학원, 협동과정 등을 신설해 학생들 모집에 나선다. 자신의 전공과 상관이 없어도 '장사'만 되면 대학원 프로그램을 새로 만든다.

 

표절의 발전

이런 학위과정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대부분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입학 전 교수로부터 편의(?)를 봐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입학한 이들이 과연 제대로 논문지도를 받고 자신의 논문을 스스로 작성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렇지 않다. 결국 그들은 선배가 했던 대로, 옆에서 하는 대로 논문을 작성하게 된다. 표절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남의 글을 베끼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을 학위를 쥐어줘 졸업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학위장사 맞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날림 논문, 표절 논문으로 박사가 된 이들이 또 교수가 된다는 점이다. 결국 대학은 표절논문을 양산하는 논문공장이 되고, 여기서 박사가 된 사람이 또 교수가 되고, 이들이 다시 제자를 날림 지도하며 표절논문을 재생산하게 되는, 표절의 무한루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압축성장이 많은 사회문제를 동반한 것처럼 학계도 빠르게 진화하면서 많은 문제를 수반하게 됐는데 그 중 가장 뼈아픈 것이 바로 표절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공직자 논문표절 문제가 빈번해지자 전수조사에 나섰는데 모든 대상자의 논문이 표절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나자 중간에 접었다고 한다. 답답한 것은 이 논란이 20년이 지나도 도대체 끝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국민대의 궤변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논문 표절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문제는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의 "표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에서 촉발됐다. 표절의 '피해자'로 알려진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의 설명대로 김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의 21절의 3쪽 되는 분량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또 한글 '유지''Yuji'로 번역한 논문의 경우 본문과 각주 곳곳이 출처 없이 토씨까지 똑 같을 뿐 아니라 표절률이 무려 43%가 나왔음에도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한 것은 학계 상식 뿐 아니라 학술 윤리에 반한다.

 

국민대가 김 여사의 논문들이 연구부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제시한 근거는 모조리 반박의 대상이다. 우선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의 박사학위가 실무·실용에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생전 처음 듣는 궤변이다. 일반대학원생 아니면 표절을 봐줘도 된다는 것인가? 이는 전문대학원, 특수대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대학원의 형태나 이름이 어떠하든, 그것이 석사논문이든 박사논문이든, 논문 쓰면서 남의 것을 자기 것인양 베껴 쓰면 안 된다. 간단하다.

 

또 국민대는 유사도가 높은 부분이 대부분 이론적 배경이라는 점을 들어 표절이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희한한 결론이다. 이론적 배경은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에겐 결론 못지않게, 어쩌면 더 중요한 부분이다. 그 연구의 출발점이자 토대이기 때문이다. 연구의 토대를 베껴 썼다는 이야기는 이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개인적 경험이지만 과거 내 논문을 쓸 때나 제자의 논문을 지도할 때 나는 논문의 서론격인 1장과 이론적 배경인 2장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여기에서 논문의 설계와 방향성이 결정되고, 결국 연구의 핵심인 '연구문제'가 확정되기 때문이다. 앞부분이 탄탄하면 뒷부분은 오히려 쉬워지고 깔끔하게 마무리가 된다. 꼬리(결론)는 머리(서론)에 의해 규정된다.

 

나아가 국민대는 연구의 핵심 부분에서는 독자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는 점, 표절 의혹이 제기된 부분이 결론 같은 '결정적 대목'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독자적으로 진행한 핵심 부분이 '대머리 남성은 주걱턱 여성과 궁합이 좋다'는 걸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핵심이 아니면 표절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그리고 결정적 대목? 논문에 결정적 대목이 있다는 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논문은 목차부터 참고문헌까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게 학자의 자세다.

 

마지막으로 국민대는 김 여사가 재직했던 회사의 사업계획서를 도용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회사 측이 학위논문 작성에 동의했다는 사실확인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아마도 조사기간 중 제출된 듯한데 이 역시 논문의 표절여부와 상관이 없다. 학위논문이나 학술논문은 공적 영역의 저작물이지 사인 간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논문 작성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면 무조건 출처를 밝혀야 한다. 연구윤리는 누가 봐줘서 지켜지는 게 아니다. 연구 수행자 본인이 지켜야 한다.

 

국민대의 반 학술적 기만

구 교수가 "복사해서 붙여넣기""완벽한 표절"이라고 지적했음에도 국민대는 위와 같은 반 학술적 논리로 표절논문에 면죄부를 준 것에서 더 나아가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한다. 국민대는 "논문 작성 당시 연구윤리를 가늠할 수 있는 시스템과 연구윤리 교육에 관한 기준이 아직 확립되지 못했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김 여사의 논문 통과가 확정된 게 2007년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사회 고위층과 교수들의 논문 표절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 때다. 논란이 끊이지 않던 연구부정행위는 급기야 2005년 황우석 교수의 연구윤리위반으로 나라를 뒤흔들었고 이듬해엔 김병준 교육부총리와 이필상 고려대 총장이 취임하고서도 논문표절 문제 때문에 낙마하는 참사로까지 이어졌다.

 

논문표절이라는 사회적 논란이 10년이 넘도록 끊이지 않자 당시 거의 모든 대학들이 '교원연구윤리지침'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만약 당시 국민대에 관련한 '연구윤리 시스템'이나 '연구윤리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회문제로까지 비화한 논문표절 문제를 강 건너 불 보듯 했다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는다.

 

지난 513개 교수단체 최초의 공동성명 발표가 있었는데 이들은 국민대의 판정을 "타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 또는 창작물을 적절한 출처표시 없이 활용함으로써, 3자에게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행위"로 규정한 2018년 공표 교육부 훈령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김 여사의 논문은 '인용 표시 없이 6개 이상 동일한 단어가 연속으로 나열될 경우 표절'이라는 교육부의 2007'논문표절 가이드라인'에도 명백하게 저촉될 뿐 아니라 국민대의 그 이전 연구윤리지침에 근거해도 명백한 연구윤리위반이 될 것이다.

 

참고로, 하나, 표절은 학술 연구자가 이를 사전에 인지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성립한다. , 논문의 연구윤리 검증에는 시효가 없다.

 

국민대와 숙명여대, 굴종할 것인가 승리할 것인가

국민대에 이어 숙명여대도 난감한 상황이 됐다. 김 여사의 1999년 석사학위 논문이 또 표절 의혹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우희종 교수에 따르면 논문의 표절률이 40%를 넘는다고 한다. 숙명여대가 난감한 이유는 국민대와 동일하다.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는 총 네 편의 논문을 심사했는데 하나는 김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이고 세편은 박사학위 논문심사 청구 자격을 얻기 위해 제출했던 학술지 및 학술대회 발표문이었다. 따라서 박사학위 논문은 물론이고 이 학위논문의 전제가 되는 나머지 세 편 역시 표절판정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 세 편 중 한 편이라도 표절판정을 받으면 논문심사 청구 자격 자체가 상실되니까.

 

숙대도 마찬가지다. 만약 김 여사의 석사학위 논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석사학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국민대 박사과정 지원자격 자체가 상실된다. 국민대가 연구부정행위가 아니라고 끝까지 버티더라도 숙대가 표절판정을 내리면 김 여사의 국민대 박사과정 입학이 취소될 가능성이 높다. 힘든 판단이고 어려운 순간이다.

 

그러나 국민대와 숙명여대의 구성원들이 학자적 양심과 지식인으로서의 용기를 발휘한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많은 생각이 들겠지만 복잡할수록 단순화 시켜야 한다. 굴종할 것인가, 승리할 것인가. 대한민국 학계는 지금 시험대에 올랐다.

정희준 전 동아대 교수 | 프레시안 2022.08.11

 

 

장애·저임노동·어린이겹겹의 소외 드러낸 반지하의 폭우

이번 수도권 물난리가 기후위기와 관련 있는지는 아직 축적된 데이터가 적어 판단할 수 없다고 어느 전문가가 언론에다 말했다. 기후위기는 축적된 데이터를 교란하는 양극적이고 돌발적이며, 따라서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없게 된 사태다. 쓸모없어진 데이터가 계속해서 쌓여야 언젠가 쓸모를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기후위기 여부를 영원히 판단하지 않겠다는 재귀적인 자기암시로 들린다.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도 통계적으로 위험이 예측 불가능해진 사회라는 점에서 기후위기의 20세기적 언명과 같다. 다만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그의 명제는 적어도 기후위기 앞에서는 참이 아니다. 기후위기는 지독히 위계적이고 계급적이다.

 

발달장애인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와 감정노동하는 면세점 사업장 노조 간부와 열세살 비성인이 깊은 밤 서울 신림동 빌라 반지하 방 안에서 익사했다. 이웃 사람이 안간힘을 썼으나, 빼내지 못했다고 한다. 창틀 밖에 한 사람만 더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가정은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노모가 화를 면한 것만큼이나 우연에 기대고 있다. 그들도 우연히 집을 떠나 있었다면, 지금쯤 젖은 세간을 창틀 앞에서 말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비극은 폭우에 무방비로 노출된 주거 조건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그들의 주거 조건은 발달장애, 저임 노동, 비성년이라는 겹겹의 소외된 위계 위에서 구성됐다. 그들을 물에 가둔 건 그 사회구조였다.

 

반지하 방에서 멀지 않은 강남 지역은 차들의 무덤이 됐다. 피해 차량은 3000여대고, 그중 800여대는 고가 외제차였다. 폭우는 차들에 대해 민주적이었다. 차주들은 재산상 피해만 입고, 무사히 차에서 빠져나왔다. 지하 주차장 등 몇곳에서 실종자가 발생하기는 했다. 실종자들도 제가끔 소우주이고 누군가의 가족일 것이다. 물에 잠긴 차 위로 올라가 태블릿피시를 보는 어느 차주의 사진은 에스엔에스를 뜨겁게 달궜다. 거센 탁류 위에서 보여준 침착함은 방재 전문가도 칭찬할 정도였고, 망연한 포즈는 미학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실종 또는 고립과 사회적 위계의 관계는 뚜렷해 보이지 않았다. 신림동 반지하와 강남의 폭우는 사회학적으로 상이한 기상현상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반지하 방 바깥에서 높이가 어른 팔뚝 길이만 한 쪽창 너머를 들여다봤다. 그 모습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 시절>에서 어린 발터 베냐민이 어느 건물 반지하실 안을 조그만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곤 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베냐민은 그 안에서 카나리아 새나 램프, 사람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정작 마주한 건 꼽추 난쟁이였다. 그는 이 요정에 무관심했던 기억을 현재로 소환해 돌아보고는 했다. 타자에 대한 성찰이다. 하루 만에 내려진 대통령실 홍보 카드뉴스를 보면, 윤 대통령이 보고자 한 건 자신의 애민하는 모습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의 나르시시즘은 빈곤과 기후위기를 동시에 타자화하는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냈을 뿐이다.

 

빈곤과 기후위기는 뿌리가 같다. 3세계 어느 지역에서 기아와 물 부족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그곳을 오랫동안 식민화했던 제1세계가 화석연료와 축산 가공품을 맘껏 누리고 있는 것과 깊이 닿아 있다. 윤석열 정부가 노동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 제도를 덩어리과제로 지목해 해고 사유를 확대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을 완화하겠다는 발상과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를 버리고 원전산업을 부흥시켜 기후위기에 대응하겠다는 발상을 동시에 하는 것도 그러한 회로 안에서 벌어지는 사태다. 가령 그 회로 안에서는 세계 최고 원전 밀집지역에 사는 하청노동자가 빈곤과 기후위기 위계의 상징적인 기층을 이룬다. 그들도 쪽창 너머 반지하 방의 세 가족이다.

 

기후위기는 누군가에겐 기회로 인식된다. 윤 정부의 원전 르네상스만이 아니다. 최근 외신은 그린란드 빙하가 녹자 희토류를 선점하려고 제프 베이조스, 마이클 블룸버그 같은 억만장자들이 광물 전쟁에 뛰어들었다고 전했다. 저들은 영화 <돈 룩 업>의 권력자와 자본가처럼 광물자원을 탐하다 실패하면 인류를 내팽개치고 자기들끼리 지구를 몰래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도착한 행성에서 무슨 꼴을 당하게 되든.

안영춘ㅣ논설위원 한겨레 2022. 08.11

 

 

고쳐 쓴김건희 박사논문 심사서

김명신(김건희)<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 ‘애니타개발과 시장 적용을 중심으로>(2008)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엄청난 논문이다. 이 논문은 “IT 기반의 디지털 산업과 운세 콘텐츠의 접맥을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놀랍다. 이 논문이 시론적 연구인 만큼 학문적 체계, 형식과 내용, 연구윤리의 측면에서 보다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본 심사자는 다음 사안에 대한 청구자의 수정과 숙고를 요청한다.

 

첫째, ‘통상적 용인 범위내에서 박사논문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는가이다. 인문사회 분야의 박사논문으로서는 예외적이고, 특별하게도 이 논문은 각주가 단 ‘30에 불과하다. 심사자는 30개만으로 이뤄진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최초로 접했다. 학술지에 게재되는 일반논문도 최소 20~30개의 각주가 있다.

 

각주가 30개뿐인 박사논문은 통상적인 용인 범위를 크게 벗어날 정도로 예외적이고 특별하다. 이뿐만 아니라, 대학원생이라면 기본적으로 습득하는 각주·참고문헌 작성법도 오류투성이다. 청구자는 이 논문의 심사통과를 위해 각주·참고문헌 작성법을 준수하고, 각주를 대폭 보완하여 연구의 밀도를 높이기를 권유한다.

 

둘째, 논문의 형식적 측면에서 학문적 적합성이 있는가이다. 박사학위논문은 연구사 검토를 통해 학문세계의 전통을 계승하고, 연구방법론 제시를 통해 박사논문의 보편화 가능성을 획득한다. 심사자는 처음으로 연구사 검토연구방법론제시가 없는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접했다. 논문의 목차에는 2장 이론적 배경 및 선행 연구의 고찰항목이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 본문에서는 기술내용을 찾을 수 없다. 혹시 기존 연구 자체가 없는 논문인가 하는 의구심에서 심사자가 논문을 검색해 보았다. 기존 연구로는 동양철학 사주 관련 논문 25, 얼굴 관상 관련 논문 107, 부부 궁합 관련 논문만 9건을 찾을 수 있었다. 연구방법론이 아무 설명 없이 생략된 것도 문제다. 연구사 검토와 연구방법론 제시가 이뤄지지 않은 박사논문은 학문적 약속 위반이다. 청구자의 논문은 형식적 측면에서 통상적 용인 범위를 크게 벗어나 있기에, ‘연구사 검토연구방법론을 추가로 기술할 필요가 있다.

 

셋째, 논문의 내용적 측면에서 학문적 가치가 있는가이다. 이 논문은 내용적으로 부조화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디지털 콘텐츠로서의 운세 콘텐츠에 대한 개론적 설명이고, 두 번째 부분은 애니타라는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관련 설문조사와 마케팅 전략에 관한 부분이다. 별개의 두 글이 박사학위 청구논문으로 묶여 있어 기괴한 병렬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논문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설문조사의 경우 ‘()메트릭스라는 업체에 의뢰한 것이다. 설문조사가 언제 이뤄졌고, 어떤 방법으로 표본 추출이 되었는가도 서술되어 있지 않다. 300명의 온라인 조사 결과가 박사학위 논문의 가치에 준하는 데이터로서의 유효성이 있는가도 문제다. 박사학위논문은 설문조사 결과값 기술이 아니라, 그 데이터에 대한 학문적 해석과 설득적 근거 제시가 중요하다. 논문의 중요 부분이 데이터 제시에 그치고 있어 내용적 측면에서도 수정이 이뤄져야 한다.

 

 

넷째, 학문윤리적 측면에서 표절 행위는 없는가에 대한 검증이 가장 중요하다. 이 논문은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의 디지털 콘텐츠와 사이버문화’(2002) 논문을 인용 없이 그대로 자신의 것인 양 사용하여, 표절을 공공연하게 자행한 대범한 사례에 해당한다. 연구윤리 위반은 박사논문 심사에서 가장 엄격하게 다루는 사안이다. 이 논문이 심사에 통과되더라도, 추후 연구윤리 위반으로 판명될 경우 박사학위가 취소된다.

 

심사자는 4개 대학교에서 11건의 박사논문을 심사한 경험이 있다. 심사논문 중 1건은 반려되었고, 3건은 한 학기 혹은 1년간 심사가 유예되었다. 7건은 엄격한 심사과정과 청구자의 치열한 수정 과정을 거치면서 통과되었다. 박사학위 논문심사 과정은 돈과 권력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학문의 자율적 영역이어야 한다. 대중이 학문세계에 기대하는 한국사회의 다른 미래학문의 자유가 존중될 때 움튼다. 학문세계마저도 돈과 권력의 눈치를 본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어두운 회색빛으로 변하고 만다. 박사논문 심사위원들의 공정한 판정을 위한 노력에 비추어 볼 때, 이 논문은 반려가 타당하다. 김명신 박사논문 청구자에게도 논문 자진 철회를 권고한다.

 

위의 글은 가상의 박사논문 심사자가 되어, 김건희 여사의 박사논문을 학문적 요건에 비춰 검증한 심사보고서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경향 2022. 08.12

 

 

흑표의 맹수성과 모기의 상상력

세상은 이상하게 얽혀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폴란드와 한국이 이렇게까지 깊이 얽힐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명색이 폴란드사 전공자인 나도 그랬다.

 

2015년 러시아가 크름반도(크림반도)를 점령하고 친러 민병대들이 도네츠크 지역을 장악했을 때의 일이다. 포즈난 등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폴란드 지역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군사훈련을 받는 사진과 기사를 접하고는 1970년대 우리 세대가 받았던 교련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폴란드는 동유럽 국가 중 러시아의 위협을 가장 피부로 느끼는 나라 중의 하나다. 교련 수업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올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275만명에 이르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전쟁이 지속되자 우크라이나 정부에 자신들이 운영하고 있는 구소련제 탱크와 미그기 등 주요 무기들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1795년 이후 120년 넘게 러시아의 속국이었고, 1918년 독립하자마자 볼셰비키 러시아와 국가의 존립을 건 일전을 벌였고, 19392차대전이 발발하자 르부프, 그로드노, 빌니우스 등을 유서 깊은 동부 영토를 다시 러시아군에 점령당했으며, 2차대전 이후에는 다시 러시아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주권을 제한받았던 역사를 보면,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 조야의 위기의식은 충분히 이해된다.

 

차르의 러시아든, 스탈린의 러시아든, 푸틴의 러시아든, 폴란드인들에게 러시아는 러시아인 것이다. 나토 가입을 서두른 스웨덴, 핀란드와 달리 이미 나토 국가인 폴란드는 나름대로 국방력 강화에 결사적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폴란드·독일·미국·터키·이란·이스라엘 등이 벌이는 난전에 한국이 중요한 플레이어로 끼어든 것도 이 지점에서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폴란드 정부는 국산전차 K-2 흑표를 2024년까지 180대 구입하고, 2030년까지 400대를 추가 구매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고 한다. 급한 대로 우선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구소련제 T-72 탱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조치라는데, 한국 언론들은 환영 일색이다. 한국 방위산업의 놀라운 성취를 입증해준다는 논조다. 기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터널 비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나는 특수장교로 짧은 군대 복무 경험밖에 없고, 또 평화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군수산업에 대해서는 견문이 없다. 그러나 오류의 검증 가능성을 위해 군수산업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서서 이 문제를 따라간다고 해도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내 불편함을 해명해준 것은 뜻밖에도 폴란드 일간지 가제타 뷔보르차’ 83일자에 실린 폴란드군 무기 전문가 파베우 노박 장군의 인터뷰였다. 노박 장군의 평가에 따르면, K-2 흑표전차 구매가 완료되면 폴란드군은 영국·독일·프랑스군의 전차를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차를 보유하게 된다. 그러나 폴란드군이 영국·독일·프랑스 3국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막강한 군 전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주력인 T-72 전차는 물론 괴수처럼 강력한 최신 T-90 전차조차 몇 푼 안 되는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에 속수무책임을 잘 보여주었다. 고가의 초음속 전투기들이 맥없이 스팅어 대공미사일에 격추되는 장면들도 낯익다. 우크라이나에서 모기라고 부르는 민수용 드론의 혁혁한 전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는 터키에서 수입한 군수용 드론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보낸 민수용 드론을 가내 공장에서 군수용으로 바꾸어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다. 뜨거운 여름밤 잠을 설치게 만드는 모기처럼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우크라이나의 아마추어 드론들 때문에 러시아군은 밥도 마음대로 못 먹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고 전장에 대한 최근 보도들은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기의 상상력이 흑표의 맹수성을 진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강력한 전차군단에 대한 폴란드군의 집착은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인 집권당 법과 정의당의 과시용 과대망상증이 군사적 합리주의를 압도하고 있는 징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2차대전 발발 당시 빛나는 전통의 막강한 폴란드의 기마병 부대가 독일군 전차부대를 일격에 궤멸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흑표전차의 한국 판매자나 폴란드 구매자 모두 동병상련의 민족주의적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지 걱정이다. 21세기 한국과 폴란드의 K-2 전차 군단이 1939년 폴란드 기마부대의 운명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임지현 서강대 교수 경향 2022. 08.13

 

 

대통령님 파이팅!’, 단순 해프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돼

윤석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88일 출근길에 기자와 대화하는 시간을 재개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발언 도중에 한 언론사 기자가 대통령님 파이팅이라고 외쳐서 화제가 됐다. 주변에서는 기자인지 수행원인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대통령실 출입기자가 대통령 응원을 외쳤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다. 속으로 지지하는 거야 자유이지만 겉으로 지지를 밝히는 것은 제반 권력을 감시 견제해야 하는 언론의 본질을 망각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설마 기자들일까 하는 의구심은 있지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야유는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위에 있던 기자들이 기자의 본분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깊은 탄식을 하거나 그 기자의 어이없는 행동을 질타했어야 마땅하다. 그 기자의 행동은 다른 기자들 더 나아가 언론계 전체를 비난받게 할 가능성이 높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기존 언론을 신뢰하지 않고 새로운 소통 매체로 이동하는 작금의 수용자들에게 이 행동이 그 기자 개인의 돌출행동으로만 비쳤을까?

 

대통령실 기자단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문제의 기자는 십중팔구 기자단 소속이었을 것이다. 기자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기자를 하다못해 주의·경고라도 징계할지 또다시 웃고 넘어갈지 의문이다. 기자단이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진실을 드러내어 큰 기여를 한 적도 있지만, 기자단은 폐쇄적 운영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그 폐쇄적 운영의 가장 큰 폐해가 취재원과의 유착이다. 취재원과 밀착되면서 취재원으로부터 갖가지 편의를 제공받고 취재원에게 유리한 보도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예를 들어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 기자단은 전시작전권 환수 연기와 관련한 부당한 엠바고를 깨면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려 했던 경향과 한겨레 기자들을 오히려 징계했다. 지금의 대통령실 기자단은 이번 사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의문이다. <청와대 출입기자의 반성문>에서 저자인 김두수 기자는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고 반성하였다. 질문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기자들과 대통령을 대놓고 응원하는 기자 사이, 그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유사하다.

 

이 사안을 다룬 언론들의 보도 행태도 문제다. 기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비판한 일부 언론도 있었지만, 사실을 단순하게 전한 기사들이 많았다. 국민일보는 제목에서 뜬금포라 표현했다. 어이없는 행동이라는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이없음의 본질은 언론의 자세를 포기했다는 데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날카로운 비판을 했어야 함에도 일종의 해프닝으로 다룬 것이다. 게다가 이게(기자의 응원) 진짜 여론이라는 전여옥 전 의원의 페이스북 발언을 찾아내 기사화한 세계일보의 기사는 더욱 심각하다. 이 사안의 심각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기자의 행동에 동의하는 것으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그 기사의 마지막은 전날 윤 대통령 도어스테핑에서 한 기자는 대통령님 파이팅이라고 외쳤고 이에 윤 대통령은 발언 중 눈웃음과 손짓으로 화답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로 끝난다. 전혀 문제의식이 없다.

 

 

우리 언론들이 대통령실을 출입하는 기자가 대통령 발언 중에 대통령님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것을 단순 해프닝이라고 간주할지, 아니면 심화하는 언론의 위기를 드러내는 하나의 징표라고 인식할지는 매우 중요하다. 빅데이터를 분석한 빅터뉴스의 기사는 이 사안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댓글과 공감의 현상을 짚었다. 이게 언론을 향한 민심이다. 부디 언론들은 뾰두라지가 뿌리 깊은 화농의 징후임을 이해하는 환자는 그나마 치료의 가능성이 있지만, 단순 부스럼으로 치부하는 환자는 그 회생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김서중 성공회대 미디어콘텐츠융합자율학부 교수 경향 2022. 08.15

 

 

서울의 이기주의를 고발한다

경기도는 43개에 이르는 서울시 주민기피시설로 고통받고 있다. 장사시설이 주변에 미치는 피해 규모는 약 13000억원에 이른다.” 20년 전인 20123, 경기도의 싱크탱크인 경기개발연구원이 발표한 이슈&진단-주민기피시설 해법, 성공사례에서 찾자는 자료집 서문의 글이다. 이 자료집은 이용은 서울시민들이 하고 있지만 시설은 경기도에 있는 주민기피시설의 현황과 대안을 모색하자는 취지로 작성됐다.

 

주민기피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63년 파주시 용미리와 고양시 벽제리 묘지 등 장사시설부터다. 1980년대에는 환경시설과 사회복지시설까지 경기도로 밀려들어 왔다. 가장 많은 시설은 노숙인·장애인·노인요양·정신요양 등 수용시설로 26곳이나 된다. 서울시민들의 쓰레기와 폐기물을 처리하는 폐기물처리장·매립장·하수처리장 등 4개의 환경시설도 경기도가 떠맡고 있다.

 

서울시민들이 마지막 가는 길인 화장장·봉안당·공설묘지 등 13개의 장사시설도 경기도에 있다. 2011년 서울 서초구에 서울추모공원이 세워졌지만, 화장로 11기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올해 초 코로나19로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화장시설을 찾지 못한 서울시민들은 전국의 장례시설을 찾아다니며 4일장은 물론 7일장까지 치르는 일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경기 고양시에 있지만 1987년부터 서울시가 하수처리시설로 사용하고 있는 난지물재생센터에 추가로 서대문·마포·영등포·종로·은평 등 5개 자치구의 통합 음식물쓰레기 처리시설까지 건립하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인천으로 떠넘겨진 시설도 있다. 서구 수도권매립지와 옹진군 영흥도 석탄화력발전소가 대표적이다. 영흥화력발전소는 수도권의 안정적 전력 수급을 명분으로 2004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인천의 전력 자립률은 241.7%(2020년 기준)나 된다. 인천에서 쓰지 않는 전력까지 만들어 서울과 경기도에 보내주고 있다는 의미다. 석탄이 주원료여서 인천시민들이 고통받는 미세먼지의 배출원이기도 하다. 수도권매립지는 한때 서울 난지도에 있었던 쓰레기가 거대한 산더미로 변하자 대체용으로 1992년에 조성됐다.

 

주민기피시설 인근에 거주하는 경기·인천 주민들은 길게는 60년 가까이 악취·교통체증·재산권 침해 등 피해를 보며 살고 있다. 반면 혐오시설을 찾아보기 힘든 서울은 막강한 재정자립도를 바탕으로 교통망 등 각종 도시기반시설을 확충했다. 지하철은 거미줄처럼 연결됐다. 국가기관, 대기업, 대학교, 병원까지 밀집한 서울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서울의 급성장은 끊임없는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과 인천의 집값은 평당 100만원 미만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이제는 집값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서울의 눈부신 발전뒤에는 혐오시설 떠넘기기라는 흑역사가 숨겨져 있다. 서울시민 대부분은 이 같은 현황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외부에 떠넘긴 현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단 한 번도 논의해본 적이 없다. 서울은 주민기피시설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지극히 이기적인 도시다.

 

서울의 이기심은 도시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3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이용하는 전국 최초의 복합 문화·복지 공간인 어울림플라자건립 공사가 시작됐다. 이 사업은 서울시가 2016년 계획을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졌지만, 주민들의 반대를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데 6년이란 시간이 허비됐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시설은 20%로 줄어드는 우여곡절도 벌어졌다. 이처럼 서울시 내부에서도 주민기피시설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기심과 파행행정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다.

 

서울은 당장 1일 처리용량 1000t 규모의 소각장 건설 부지를 정해야 한다. 폐기물관리법 시행규칙에 따라 2026년부터 생활폐기물을 재활용하거나 소각장에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각장이 없으면 쓰레기가 도심을 뒤덮는 대란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주민기피시설에 대한 합의의 경험이 짧은 서울이란 도시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낼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상황이다.

 

서울은 최근 세계 5대 도시의 반열에 올라서겠다며 각종 개발계획이 쏟아지고 있다. 건물의 높이, 미관, 놀이시설, 집값은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식과 이성이 사라진 도시는 모래 위에 짓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이다.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경향 2022. 08.15

 

 

윤 대통령 외부총질 리스크·중에 또 우스워질 텐가

한 재벌 총수는 유난히 감옥행이 잦았다. 그가 수사기관에 불려갈 때마다 그 기업의 임원들은 여론 무마나 사법 대처에 몸살을 앓았다. “뭔 고생이냐고 물어보자 한 임원은 괜찮아요, 이런 사태 때문에 우리들의 존재 가치가 증명되는데요라며 체념을 넘어서 달관을 한 듯 답했다.

 

신세계그룹의 총수인 정용진 부회장이 중국 등을 겨냥해 멸콩챌린지 등 극우적 언행을 이어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기업에 있는 사람이 정 부회장의 언행을 어이없어 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대선 기간에 윤석열 당시 후보가 정 부회장의 멸콩 챌린지에 화답해, 멸치와 콩을 마트에서 쇼핑하는 모습을 소셜미디어에 떡하니 올리는 것을 보고 대통령 리스크를 감지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상할 것이다.

 

멸콩 챌린지에 호응한 윤 후보는 사드 추가 배치라는 한줄 공약을 소셜미디어에 이어갔다. 이에 앞서 그는 강연에서 한국 국민들, 특히 청년들의 대부분은 중국을 싫어한다는 말도 했다.

이런 언행을 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 “세계가 존중하는 가치를 추구하는데, 중국이 경제적으로 불리한 행동을 한다면, 옳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한덕수 국무총리) 등 윤 정부의 고위 인사 발언들이 이어졌다.

 

중국 포위를 목적으로 열리는 나토 회의에 참석하면서 굳이 탈중국 수출다변화를 표현해야 하는 건지, 아직 현실화되지도 않은 중국의 경제보복에 미리 맞짱 뜨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외교적으로 현명한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반중적인 인식을 보였으니 참모들이 따라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참모들이 대통령의 언행을 마사지못 하는 것을 개탄해야 하나?

 

대통령과 참모들의 이런 언행에는 비용이 뒤따르게 된다. 사드 배치를 그렇게 명확하게 얘기했으니, 중국으로선 설사 사드 문제를 꺼내고 싶지 않았어도 꺼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만 방문으로 국제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방한했을 때 윤 대통령이 그와의 만남을 놓고 오락가락한 것은 결국 사드 문제 등 일련의 중국 자극 발언의 후폭풍이 아닐 수 없다. -중 외교장관 회담을 앞두고 한국으로서도 중국에 성의를 보이려는 것이었을 텐데 굴욕 외교라는 말이 윤 대통령 지지층에서 터져나왔다.

 

한국 대통령이 방한한 미국 하원의장을 만날 수도 있고, 안 만날 수도 있다. 미묘한 시기라면, 접견 여부를 극히 로키로 처리하면서 일관된 입장을 보여줘야 외교적 파장이 줄어든다. 펠로시를 안 만난다’, ‘만난다’, ‘만나는 일정조차 조율 안 했다라고 하다가 결국 전화통화로 귀결되는 과정은 중국과 미국 모두에 우습게 보이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었다.

 

사드 하나로 중국 안보가 결정적으로 위협되거나, 한국 안보가 획기적으로 신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군사안보 전문가들이라면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드가 새롭게 출범한 한국 정부와 중국의 첫 외교장관 회담의 주 의제가 되는 것은 두 나라 모두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박진 외교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첫 만남은 중국이 사드를 놓고 ‘31지침을 발표해 사드만이 부각됐다. 중국의 오만이 크지만 그것만 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한국은 지금 4강의 압박 속에 안보·외교 위기로 빨려들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 대결에서 한국이 올인하라고 압박한다. 이와 관련해 중국은 한국의 일거수일투족에 대응하고 있다. 일본은 강제동원 등의 문제를 놓고 한국이 먼저 항복하고 나서라 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제재에 동참한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다. 북한은 코로나19 감염까지 한국 책임이라며 핵실험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물론 윤석열 정부의 책임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열강이 조성한 국제정세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중하고 균형 잡힌 능력이 절실하다.

 

그런데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은 칼퇴근한 아파트에서 전화 지시로 논란을 야기하고, 아침저녁으론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미군기지를 거쳐 출퇴근하며, 안보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키운다. 철없는 재벌 3세와 동급으로 처신하지 말고, 이제라도 언행에서 외부 총질을 거두고 리스크를 키우지 않는 자중자애를 정말 부탁한다. 미우나 고우나 그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이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2. 08.15

 

 

사대주의 언론의 윤석열 교육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의 대만 방문은 한국 언론의 속살을 드러내주었다. 그가 대만을 방문한 2일 밤부터 지난 2주일 내내 조선일보와 그 아류들은 미국 하원의장 의전을 내세워 윤석열 교육또는 길들이기에 나섰다.

 

조선일보는 가장 먼저 펠로시 안 만나는 윤, ·중에 잘못된 신호 주는 건 아닌지제목의 4일자 사설에서 윤 정부가 문재인 정권처럼 굴종적 자세를 보인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열흘째 펠로시 소홀을 들먹였다. 전 국가정보원장 박지원까지 인용해 김대중 대통령이었으면 만났을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DJ정신을 팔아먹는 자칭 정치 9이 딱하다. 내부필진을 대표하는 강천석 고문은 13일자 칼럼에서 미국 내 의전 서열 3위인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한국 도착 때 한국 측에선 아무도 공항에 나가지 않았다혀를 차야 하나 야단을 쳐야 하나로 끝맺었다.

 

대체로 하루 지나 그 신문을 따라가는 중앙일보도 가세했다. 주필·부사장 이하경은 펠로시 홀대는 한국 스스로에 대한 모욕행위다제목의 자극적 칼럼(88일자)에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윤 대통령이 펠로시를 냉대했다고 보도했다며 ·미 동맹을 강조하는 보수정권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개탄했다. 조선중앙 신방복합체는 앞으로도 끝없이 펠로시를 소환해 윤석열 교육에 나설 태세다.

 

하지만 펠로시의 대만 방문은 서방의 언론들로부터도 비판받았다. 펠로시는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대만과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위협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언론도 분석했듯이 그의 대만 방문 배경에는 반도체산업이 있다. 중앙일보 주필이 인용한 영국 언론만 보더라도 가디언은 펠로시의 대만 방문을 도발로 규정하면서 평화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디언은 펠로시가 11월 중간선거를 노린 선거 산술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펠로시 의 대만 방문을 완전히 무모하고 위험하며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아무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민중의 생때같은 목숨은 물론 주요 산업시설들은 지금 잿더미가 되었다.

 

일찍이 한국전쟁에 대대장으로 참전한 군 출신 역사저술가 페렌바하는 한국전쟁을 증언한 책에서 역사를 통해서 한국의 둘레에 있는 세력은 한국의 항구적인 자유와 독립을 부르짖고 보장해왔다. 그러나 속셈은 딴판이었다. 서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실속 없이 고통을 당해왔다. 그리고 아직도 당하고 있는 셈이라고 썼다.

 

지금도 우리를 둘러싸고 미국은 자유, 중국은 독립을 주장한다. 보수적인 페렌바하도 증언하듯이 모두 속셈이 있다. 우리가 실속을 찾아야 할 이유다.

 

조선일보의 펠로시 소동은 단순히 친미를 넘어 종미(從美)수준임을 드러내준다. 여기서 윤석열 정부는 물론 미국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바로 그 신문이 일제 강점기에는 미국을 격멸해야 한다고 앞장섰다. 그 본질은 일관된다. 강자에게 부니는 사대주의, 부라퀴 근성이다.

 

사대언론 또는 종미언론일수록 자신과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내도 눈 홉뜨고 몰아세운다. 새삼 상식을 쓰는 까닭이다. 최소한 국제 문제와 외교에선 정부도 언론도 대한민국의 국익이 우선이다. 그 국익이 민족의 이익과 이어지면 더 좋은 일이다.

 

윤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단계에 맞춰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비핵화 과정에서 북 못지않게 미국의 적극적 대화 의지도 중요하다. 그래서다. 윤 정부가 종미 수준인 언론의 지적질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

손석춘 칼럼니스트철학자 미디어오늘 2022. 08.15

 

썩은 육신에서 삶의 진실을 마주하다

19세기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오는 주인공 햄릿의 연인인 오필리아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미모와 죽음을 병치시켜서 상황의 비극성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장의사나 장례지도사처럼 직업상 시체를 자주 대해야 하는 이들 말고, 일반 사람들이 시체를 보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대개 시체를 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도 야산에서 변사체를 발견하거나, 문을 열었을 때 목맨 시체가 매달려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시체 그림이라도 보기를 원한다.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가 좋은 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오필리아가 바로 시체를 그린 그림이다. 오필리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오는 주인공 햄릿의 연인이다. 사랑하는 햄릿의 칼에 아버지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오필리아는 물에 빠져 죽어간다. 시리도록 창백한 얼굴 묘사는 오필리아가 얼마나 실의에 빠진 상태인지 보여주고, 힘없이 벌린 팔은 오필리아가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아니라 힘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는 죽어가는 이 젊은 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표현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

 

밀레이가 갓 죽은 혹은 죽어가는 상태를 포착한 데는 이유가 있다. 미모와 죽음을 병치시켜서 상황의 비극성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것이다. 가장 비극적이지만 가장 아름답기도 한 이 오필리아의 마지막 순간을 다 함께 보자고, 밀레이는 관객을 초대한다. 이 초대장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밀레이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의 시체도 죽으면 곧 부패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부패해서 추해진 그 시체를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추한 장면을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다. 중세의 어떤 수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육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피부 껍데기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여자의 콧구멍, 목구멍, 똥구멍에 있는 것을 상상해 본다면, 더러운 오물밖에 떠오르는 게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수도자들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대신 아름다운 여자 시체를 벌레가 파먹고 있는 모습을 구태여 그리고 보았다.

 

1870년대 고바야시 에이타쿠가 그린 구상도일부. 사진 출처 대영박물관 홈페이지

일본에도 아름다운 여인 시체가 어떻게 부패해 가는지를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라고 권하는 그림이 있다. 방치된 시체가 들짐승에 의해 먹히고 결국 뼈와 가루만 남게 되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그린 구상도(九相圖)’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 승려들은 이 구상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그 몸에 있는 해골을 상상하라! 아무것도 실체가 없다!

 

그림으로 그려지기 전, 이 구상도의 가르침은 일찍부터 인도에 존재했다. 석가모니 사후 100년 안에 고대 팔리어로 작성되었다는 인도 불교 경전 맛지마니까야(Majjhima Nikaya), 그중에서도 대념처경(大念處經·Satipa33hana Sutta)에 바로 구상도의 가르침이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승려들은 몸과 자아가 영원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새기기 위해 시체가 썩고 분해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이때만 해도 시체의 성별이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시체의 성별이 여성으로 특정된다. 마침내 시리마(Sirima)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시체가 등장한다. 왜 아름다운 여체가 등장한 것일까. 여체를 등장시킴으로 인해 존재의 무상함뿐 아니라 욕망의 덧없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부사 잇초가 미인 오노노 고마치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린 구상도일부. 방치된 시체가 들짐승에 의해 먹히고 뼈와 가루만 남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눠 그린 것이 구상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 변태적인(?) 가르침이 일본의 구상화 전통이 되면서, 그 시체의 주인공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 이를테면 미녀로 유명했던 단린 황후(檀林皇后) 다치바나노 가치코(橘嘉智子·52대 사가 덴노의 정실)나 궁정 시인 오노노 고마치(小野小町) 등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평민이 아니라 귀족의 여인이라는 점은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결국 해골이 된다는 가르침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어떤 구상도에는 구상시(九相詩)’라는 이름으로 한시가 첨부되어 있기도 하다. 그 작자는 일본 고승 구카이(空海)와 중국 문인 소식(蘇軾)이라고 되어 있는데, 물론 이들이 실제로 쓴 작품은 아니다. 그들이 유명한 인물이고 또 그들의 생각이 구상도의 메시지와 통하는 면이 있어서 이름을 빌린 것에 불과하다.

 

시체를 직면하는 전통은 현대에도 지속된다. 1980년대에 롭 라이너 감독이 만든 영화 스탠바이미는 실종자의 시체를 찾아 떠나는 네 명의 철부지 소년들을 그린 영화다. 천신만고 끝에 그 소년들은 마침내 시체를 발견한다. 막상 시체를 두 눈으로 보고 나자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시체를 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인생이란 유한하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엄연한 사실, 모두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허무의 물결을 이럭저럭 헤쳐 나가고 있음을 철부지들조차 깨닫게 된 것이다.

 

21세기 한국, 옛 그림이나 뒤적이는 중년 남자로서, 나도 가끔 내 십이지장과 대장에서 조용히 썩어가고 있을 오물과, 희고 고운 피부에 가려져 있는 내 해골바가지를 떠올린다. 물론 직접 보고 싶지는 않다. 상상만으로도 똥과 뼈는 세속의 허영으로 향하던 내 마음을 가만히 돌려세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 2022. 08.15

 

해골에 다가가는 아이生死의 거리는 짧다

해골에게 묻는다

스위스 바젤의 도미니쿠스 수도원 공동묘지에는 죽음의 춤(Danse Macabre)’을 소재로 한 벽화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해골 둘이 아이를 둘러싸고 춤추고 노래하는 그림이다. 해골이 노래한다. “아장거리는 아가야, 너 역시 춤을 배워야 해/네가 울든 웃든 너 자신을 지킬 수 없어/네가 젖먹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지.” 아이가 놀라서 말한다. “, 엄마. 어쩌면 좋죠/앙상한 사람이 절 데려가려고 해요/엄마 절 지켜줘요/전 춤을 배워야 하는데, 죽기엔 아직 일러요.”

보호자가 졸고 있는 틈을 타 해골 모양의 사신이 아이를 빼앗아가는 장면을 그린 다니엘 호도비에츠키의 동판화(1780). 사진 출처 프린스턴대 미술관

 

이 노래가 그토록 강렬하게 들리는 이유는 어린아이에게도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죽음은 대체로 노인에게 찾아오긴 하지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게 죽음이기도 하다. 18세기 독일 화가 다니엘 호도비에츠키의 1780년 동판화 역시 그런 냉정한 사실을 주제로 삼는다. 엄마 혹은 유모가 졸고 있는 틈을 타서 해골 모양의 사신이 아이를 빼앗아 가고 있다.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당신 아이가 죽음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해골이 아이를 꾀어내자 놀란 엄마가 아이를 꼭 끌어안는 모습을 그린 이숭의 고루환희도’(위쪽 그림). 죽음은 아이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래쪽 그림은 잡화류를 파는 행랑과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이숭의 시담영희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그림은 중국에도 있다. 그중에서도 남송(南宋) 시절 궁정화가였던 이숭(李嵩·11901230년경 활동)고루환희도({)’가 단연 주목할 만하다. 커다란 해골이 작은 해골 인형을 가지고 아이를 꾀어내고 있다. 해골의 신기한 인형 놀이에 매혹된 아이가 그리로 다가가자, 아이 엄마 혹은 유모가 아이 뒤를 부랴부랴 쫓는다. 왼편에는 결코 아이를 뺏기지 않겠다는 양 엄마가 단호한 자세로 아이를 꼭 안고 있다.

 

이 흥미로운 그림은 도대체 어떤 장면을 묘사한 것일까. 일설에는 이 그림이 가설무대의 인형극 공연 모습을 묘사했다고 하나, 그림에 가설무대는 없다. 등장인물들이 속이 훤히 보이는 얇은 옷을 걸친 것을 보면 늦봄이나 여름날의 한 장면 같다. 그래서 이 그림이 단오절의 한 장면을 묘사한 거라고 보기도 한다. 생명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가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에게 다가가고 있으니, 이것은 혹시 생명과 죽음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생과 사의 충돌 혹은 모순을 상징한 것일까. 그림 왼편 위쪽에 있는 오리(五里)’라는 길 표지판은 인생이란 결국 하나의 여행이라는 말을 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정한 도()를 찾으라는 뜻이라는 제안일까.

 

왼편에 그려진 물건들을 감안할 때, 이 그림은 일단 화랑도(貨郞圖) 장르의 연장선에 있다. ‘화랑이란 거리를 다니면서 일용잡화류를 파는 행상을 말한다. 이숭은 저명한 궁정화가였지만 화랑도같은 풍속화 역시 즐겨 그렸다. 궁정화가 이종훈(李從訓)에게 배워 저명한 화가가 되기 전에는 소박한 목수에 불과했으니 그 풍속화들은 젊은 시절 삶의 체험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루환희도가 단순한 화랑도는 아니다. ‘고루환희도에 나오는 고루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이 그림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해골이다. 실로 이숭은 해골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이숭이 그린 화랑도에는 아이들, 아이 엄마, 행상뿐 아니라 해골이 종종 등장한다. 명나라 기록에 의하면, 이숭은 고루환희도화랑도이외에도 해골이 수레를 끄는 모습의 고루예거도({(,)車圖)’, 동전 한가운데 해골이 앉아 있는 모습의 전안중좌고루도(錢眼中坐{)’ 같은 해골 소재 그림들을 다수 그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니, 이숭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 특이한 해골 그림을 통해서 이숭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보는 즉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고루환희도의 궁극적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죽음은 부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취지의 죽음의 춤장르화라는 해석, 단오절의 의미를 새기고 있는 그림이라는 해석, 남송 황실의 퇴폐적인 향락 문화를 에둘러 비판하는 그림이라는 해석, 괴로운 백성들의 삶에 동정을 표하는 그림이라는 해석, 전진교(全眞敎)라는 종교의 교의를 구현한 그림이라는 해석 등 그간 제출된 해석만 해도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중국 문화 전통에서 해골 이야기는 장자지락(至樂)’에서 먼저 나온다. 장자가 해골에게 다시 삶을 받겠느냐고 권하자, 해골은 군주도 신하도 없는 죽음의 세계에 머물겠노라며 그 제안을 사양한다. “내 어찌 인간 사회의 고단함을 다시 반복하겠는가(復爲人間之勞乎).” 이러한 메시지를 계승한 전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실은 환상이고 인간은 결국 백골이 되기 마련이니, 너 나 할 것 없이 미망(迷妄)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아직 미망에 사로잡힌 (우리) 보통 사람들은 오늘도 허무한 일상 속을 그림자처럼 걷는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의 주인공처럼.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불쌍한 연극배우에 불과할 뿐/무대 위에서는 이말 저말 떠들어대지만/결국에는 정적이 찾아오지,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바보의 이야기, 분노에 차 고함치지만/아무 의미도 없는.”

김영민의 본다는 것은]2022-07-04

 

 

인생의 마지막 유희, ‘죽음의 춤

죽음과 함께 춤을 추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 삶에서 그래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좋건 싫건 이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 중세의 광장에는 죽음은 확실하다. 다만 그 시기만 불확실하다”(mors certa hora incerta)라고 적혀 있곤 했다.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어쩔 수 있다. 죽음이야 신의 소관이겠지만, 죽음에 대한 입장만큼은 인간의 소관이다. 즐거운 인생을 사는 이에게야 죽음은 더없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고단한 인생을 사는 이에게는 죽음이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다. 메트니츠 납골당 외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산 자들이 당신에게 잘해주지 않았겠죠. 그러나 죽음은 당신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요.” 이런 글귀는 사회가 그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암시한다.

 

실로 죽음의 의미는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영원히 살 수 없으니 매 순간 열심히 살아보자고 할 수도 있고, , 명예, 권력 같은 세속적 가치가 덧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어차피 죽는 인생을 쾌락으로 가득 채워 보자고 마음먹을 수도 있고, 현세의 즐거움에 한계가 있다고 깨달을 수도 있다.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무도가(舞蹈歌) 필사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서둘러 죽음을 맞이하러 가네. 더 이상 죄를 범하고 싶지 않아서.”

독일에서 16세기 그려진 작자 미상의 죽음의 춤관련 작품. 죽음을 대상화한 예술 장르인 죽음의 춤은 삶은 허망하며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진다는 메시지를 주로 담고 있다. 사진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언젠가는 닥칠 죽음의 체험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죽음을 대상화할 필요가 있다. ‘죽음의 춤’(Dance Machabre)이라는 예술 장르는 바로 그런 대상화의 산물이다. 이 장르에 속하는 작품에는 대개 춤추는 해골이 등장한다. 해골은 죽음의 소식을 가져오는 사자(使者)를 의미할 때도 있고, 의인화된 죽음을 나타낼 때도 있다. ‘죽음의 춤은 유럽 중세 후기에서 크게 유행했지만, 그 이전 시기나 비서구권에도 유사한 그림이나 조각들이 존재한다. 이토록 다양한 작품들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16세기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의 죽음의 춤관련 작품들. 용맹한 기사(왼쪽 사진)도 고귀한 성직자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사진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그래도 자주 반복되는 메시지는 있다. 가장 흔한 것은, 삶이란 결국 허망한 것이라는 메시지다. 그에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메시지가 평등이다. 살면서 어떤 향락을 누리고, 어떤 고귀한 신분을 가졌든 죽음 앞에서는 모두 같다. 신분 사회에서 이 평등의 메시지는 한층 강렬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한스 홀바인의 작품에 보이는 것처럼, 용맹한 기사나 신실한 성직자도 죽음을 무찌를 수 없다. 16세기 독일 작품에 나타난 것처럼, 신분이 고귀하다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별개의 인생행로를 걷던 이들이 마침내 하나 되는 길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왜 춤을 추고 있는가? 죽음의 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자 울리 분덜리히조차도 이 장르에 체계적인 요소는 없다고 단언할 정도이니, 시대를 초월하여 그 춤의 의미를 확정할 수는 없다. 춤에는 주술적 성격이 있으니, 죽음의 춤은 생사가 갖는 비합리성이나 불경함을 뜻할 수도 있다. 죽음이라는 게 슬퍼할 일이 아니라, 춤추며 기뻐할 일이라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춤이 동반하는 움직임이란 결국 생명의 표현이니, 마지막 생명의 약동을 나타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죽음의 춤이 다름 아닌 배움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파리의 생이노상 수도원 벽화에 적힌 대화시(對話詩)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여기에 유한한 인생을 올바르게 마치기 위해/명심할 교훈이 있네/그것은 바로 죽음의 춤/누구나 이 춤을 배워야 하네.” 배워야 한다는 말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저 얻어지지는 않지만, 노력하면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점에서 죽음의 춤은 죽기 전에 꼭 배워야 하는 필수과목이다.

 

그래서일까. 스오 마사유키 감독의 영화 쉘 위 댄스의 주인공 스기야마는 중년이 되어 느닷없이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나이에 결혼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자식을 낳고, 사회에서 기대하는 대로 은행 융자를 받아 집 장만을 한 나름 성공적인 직장인 스기야마. 그는 어느 날 사교댄스를 배우기 시작하고, 그러지 않고는 찾지 못했을 자신을 찾게 된다.

 

이미 중년이 된 스기야마가 춤을 배우는 일은 쉽지 않다. 몸과 마음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범대로 살아온 그의 마음이 유연할 리 없다. 출퇴근에 급급했던 그의 몸도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춤을 추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유연해져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경직이란 과제와 싸워야 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죽은 뒤에야 비로소 사후 경직이 찾아온다.

 

춤에는 흥과 리듬이 필수다. 그뿐이랴. 막춤 아사리판이 아니라, 사교댄스에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파트너란 합을 맞추어야 하는 존재. 파트너와 조화를 이루려면, 어느 정도 정신줄을 놓되 완전히 놓지는 않아야 한다. 춤은 배우기 쉽지 않은 고난도의 예술이지만,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유희이기도 하다. 인생행로에서 봉착하는 모든 것들을 댄스 파트너로 간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의 춤장르에 따르면, 인생의 마지막 댄스 파트너는 다름 아닌 죽음이다. 심신이 유연하다면, 심지어 죽음마저도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지.

[김영민의 본다는 것은]2022-05-2

 

 

 

실제 상황물난리, 윤석열 정부는 없었다

1주일이 지났다. 88일 저녁. 대통령은 물에 잠긴 서울을 보며 집으로 향했다. 신림동에선 40대 발달장애인 언니와 그 동생, 동생의 10대 딸이 반지하주택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상도동의 반지하에서도 50대 여성이 숨졌다. 60대 공무원은 쓰러진 가로수를 정리하다 감전사했다. 50대 누나와 40대 남동생은 맨홀에 빨려들어가 참변을 당했다. 중국인 노동자는 컨테이너에서 잠자다 산사태로 매몰돼 사망했다. 대통령은 9일 아침까지 고층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았다. 수도권 물난리라는 실제 상황은 윤석열 정부의 총체적 난맥을 드러냈다.

 

무책임

기상청은 8일 낮 1250분 서울 동남·서남권에, 오후 440분 서울 동북·서북권에 호우경보를 발령했다. 윤 대통령은 정상 퇴근했다. 용산 대통령실을 떠난 시간은 오후 8시 전후로 추정된다. 이튿날 윤 대통령은 말했다. “제가 퇴근하면서 보니까 벌써 다른 아파트들이, 아래쪽에 있는 아파트들은 침수가 시작되더라고요.” 후보 시절 울진 산불 이재민보호소를 찾은 윤 대통령은 산불 나면 헬기라도 타고 와야죠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차를 돌리지 않았다. 폭우와 관련한 대통령의 첫 메시지는 자정 직전에 나왔다.

 

무지

재택근무가 논란이 되자 윤 대통령은 9일 일가족 3명이 숨진 신림동 반지하주택을 찾았다. “, 주무시다 그랬구나.” 사고 발생 시각을 들은 윤 대통령 반응이다. 피해자들은 자고 있지 않았다. 사망한 자매 중 동생은 지인에게 침수 신고를 해달라고 요청해 밤 9시 전후해 신고가 접수됐다. 이런 내용은 9일 오전 수많은 매체에서 보도됐다. 윤 대통령이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40분 즈음이다. 대통령은 포털사이트만 검색해도 나오는 기초적 팩트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신림동 방문 후 그는 하천 모니터링 시스템 개발을 환경부에 지시했다. 신림동 사고의 원인이 된 도림천에는 수위계 등 모니터링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무공감

윤 대통령이 신림동에서 말했다. “근데 어떻게 여기 계신 분들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데 찾기가 어렵습니까?”라고 했다. 기시감을 지우기 어렵다.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은 대통령 계신 곳이 상황실이라는 어록을 남겼다. 역시 대통령 계신 곳이 집무실이라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 발언을 연상케 한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반지하 창문 앞에 앉은 사진을 카드뉴스로 제작했다가 뒤늦게 삭제했다. 고위공직자들에게 공감능력은 디폴트값이다.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이들은 공직 말고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낫다.

 

무논리

대통령실에선 8일 밤 상황을 두고 대통령이 고립된 게 아니다. 이동 시 보고·의전으로 인한 대처역량 약화를 우려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누가 대통령에게 차량이 떠다니는 강남역이나 천장 무너진 이수역을 찾으라 했나. 240여개 지자체와 화상회의가 가능한 국가위기관리센터로 가면 대처역량이 강화되지, 약화될 리 없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대통령 자택이 지하벙커 수준이라 했으나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관련 부처 공무원들은 사저의 제한된 통신회선을 이용해 보고하느라 진땀깨나 흘렸을 것이다. ‘어록 제조기강승규 수석은 비가 온다고 퇴근 안 하느냐는 말로 분노를 돋웠다. 그날 내린 비가 가랑비였나.

 

‘4가 야기한 결과는 무정부. 빅데이터 분석서비스 썸트렌드에 따르면, 지난 9일 블로그·뉴스·트위터에서 무정부가 언급된 횟수는 23251건에 달했다. 폭우가 쏟아지기 전인 7일 언급량(304)76배를 넘는다. ‘무정부에 대한 긍정·부정 인식을 보면 부정적 인식이 91%로 압도적이었고, 긍정·부정 인식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어이없다였다.

 

취임 100일을 맞는 윤 대통령이 대통령실 홍보라인을 보강할 것이라고 한다. 위기의 원인을 홍보에서 찾는 모양이다. 잘못 짚었다. 물난리를 겪으며 대통령의 언행은 날것 그대로 시민에게 전달됐다. 대통령이 바뀌지 않는 한 세계 최고의 스핀닥터를 모셔와도 달라질 건 없다. 윤 대통령은 자료 숙지하기, 입을 다물고 귀를 열기, 말하기 전에 생각하기부터 학습해야 한다.

김민아 논설실장 경향 : 2022.08.15.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이득은 누가 챙기나

지방소멸대응기금은 인구가 줄어드는 비수도권의 지방자치단체가 생활인구와 관계인구(이주하지는 않았지만 지역을 방문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를 늘릴 계획을 자율적으로 세우도록 유도하기 위한 기금이다. 지난 7월 행정안전부는 전국 122개 지방자치단체가 지방소멸대응기금을 받기 위한 투자계획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매년 1조원 규모로 편성되는 기금이라 n분의 1로 쪼개면 그리 큰 금액은 아님에도 많은 지자체들이 지원했다. 내가 사는 지역도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되어 사업계획을 제출했다.

 

이런 지원이 지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길 바라지만 큰 기대는 없다. 관계인구라는 말은 뭔가 어정쩡하고 사업을 추진하는 지자체의 태도도 애매하다. 이번에 제출된 사업들은 그동안 지자체들이 추진해온 사업들과 얼마나 다를까? 행안부에 따르면 제출된 투자계획들이 문화·관광(28%), 산업·일자리(23%), 주거(20%) 등에 맞춰졌다고 하니 기대감이 잘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역의 자율성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전문성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과 공무원들이 계획을 심사해서 투자규모를 결정한다. 평가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122개 지역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여기저기 혁신이란 단어는 보이지만 자율적인 계획을 심사해서 사업비를 지원한다는 이상한 과정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돈의 규모는 늘어도 중앙정부가 돈을 쓰는 방식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들만의 이득 잔치에 주민은 뒷전

운 좋게 사업에 선정되면 지자체는 얼마를 받았다는 현수막을 또 여기저기 내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업들이 주민들에게 얼마만큼 도움이 될까? 2005년 이후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144조원이 투자되었고, 우리 지역에도 10여개의 사업들이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지방소멸대응기금 이전에도 수도권의 지방소비세 일부로 조성된 지역상생발전기금이 2010년부터 운용되고 있지만 위기는 여전하다.

 

더구나 중앙정부가 지자체의 자율적인 노력을 평가하고 그에 상응해서 지원규모를 정하기 때문에 지자체들은 사업지원을 위한 예산을 묶어놓는다. 그러면 주민들과 함께 열심히 고민해야 할 텐데, 지자체가 사업계획을 컨설팅업체에 맡기는 경우도 많다. 어렵게 지원을 받아도 지자체 공무원들이 제대로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그러다보니 정작 주민들에게 필요한 사업은 뒤로 밀리기 일쑤이고 불편해진 사람들은 지역을 떠난다. 지역을 살린다며 대대적으로 홍보되는 사업들이 실제로는 위기를 심화시키는 셈이다. 돈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돈의 성격과 돈을 쓰는 방식도 문제인데, 그에 관한 논의는 없다.

 

지자체는 중앙정부의 지원을 못 받으면 큰일이 나는 듯 말하지만 정말 돈이 문제일까? 2022년을 기준으로 주민 1인당 세출예산액을 비교해 보면, 내가 사는 지역은 서울시에서 가장 높은 중구보다도 두 배 이상 많다. 물론 인구가 적고 고령화된 농촌과 도시를 기계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세금으로 걷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고 그 차이는 중앙정부의 교부금과 보조금으로 메워진다. 지자체들은 돈이 없어 주민을 위한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얘기하지만 매년 많은 잉여금을 남긴다.

 

좀 과하게 말하면 지자체들은 지역주민들을 볼모로 삼아 중앙정부에 지원을 요구한다. 필요한 지원은 받아야 하고 주민들이 원하는 사업은 해야 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새로운 지원금이 계속 생겨도 그 돈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가능성은 낮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현란한 수식어를 단 사업들이 생긴들 불편해서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진 못한다. 결국 사업의 이득은 정치인과 기업, 지주, 브로커들이 챙기고, 주민들은 점점 더 관객석으로 밀려난다.

 

흠뻑쇼 논란의 의미심장한 대목

가뭄이 한창이던 때 싸이의 흠뻑쇼를 두고 오간 설전은 날선 감정만 남겼다. 한편은 지방 처지를 모르는 서울로 가는 물과 농산물을 끊어버리자고 했고, 다른 편은 이럴 거면 서울에서 나오는 지방교부금을 끊어 버리자고 했다. 오해와 편견을 강화시키는 말은 쉽고,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려는 말은 어렵다.

 

지방의 활기를 회복시키려면 분명히 돈이 필요하지만, 그 돈은 우리가 의존해온 수많은 관계들을 은폐하거나 왜곡시키곤 한다. 이제는 돈의 액수보다는 집행방식과 그 흐름을 봐야 하지 않을까? 소멸이라는 위협보다 보듬어야 할 관계가 드러나면 좋겠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경향 : 2022.08.16.

 

 

소수의견

지난 9, 사실상 철회된 만 5세 조기입학 정책에 대하여 소수의견을 남긴다. ‘5세 의무교육환영, 단 유아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7세 아동에 대하여 현행 누리과정을 유지하고, 당연히 유아교육을 전공한 유치원교사를 배치하고, 교사 대 아동비율도 유치원과 동일하게 1 20 이하로 유지하고, 교실 환경도 유치원처럼 좌식 생활이 가능하도록 리모델링하는 것이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른바 ‘K학년제(취학 전 유아 의무교육)’는 이낙연 전 민주당 대선경선 후보의 공약이기도 했다. K학년제에 대해서는 지난 725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발간한 이슈페이퍼 ‘K학년제 도입의 쟁점과 전망을 참고하시길 권한다.

 

나의 소수의견은, 쉽게 말하면 병설유치원 7세반을 의무교육화하자는 거다. 기존 학제를 건드리지 않고 0학년을 신설해 K학년제를 도입할 수도 있겠지만, 한정된 학교 공간 안에 0학년 교실을 수급하는 게 어렵다. 특히 학령기 인구가 밀집된 신도시 지역은 이미 과밀학급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0학년 신설은 실현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만 5세 아동이 조기입학하되 1학년은 유아교육 과정을 이수하며, 1년 동안 초등학교 공간 안에서 충분한 적응기간을 갖게 하여 유초연계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초등학교 연간 수업시간은 2020년 기준 680시간으로 OECD 평균 789시간보다 100시간 이상 적다. 네덜란드 940시간, 뉴질랜드 922시간, 아일랜드 909시간, 프랑스 900시간 등 900시간이 넘는 나라도 7개국이나 된다. 한국의 수업시간이 적은 이유는 저학년 조기하교 때문이다. 주요 국가들의 초등 저학년 정규수업 종료시간은 오후 3시 이후이고, 전 학년 동시하교가 일반적이다. 반면 한국의 초등 저학년 하교시간은 오후 1~130분으로 어린이집·유치원이 오후 4~5시에 하원하고 있는 현실과도 괴리가 크다.

 

6학년 하교시간도 오후 230~3시로 주요 국가보다 이른 편이다. 즉 초등 1~6학년 전부 오후 3~4시에 동시 하교하면, 초등학교 정규 수업시간을 OECD 평균 이상으로 현실화할 수 있다. 그러면 현재 6년 동안 가르치던 교육과정을 2~6학년까지 5개년 동안 가르치는 것도 무리가 없다. 물론 윤석열 정부의 주장대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졸업을 1년 앞당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새로운 1은 반드시 학생의 행복을 위해 쓰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덴마크의 애프터스쿨(Efterskole)이나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Transition Year)와 같은 공교육의 진로지도·탐색프로그램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9학년까지 중학교 과정을 마친 덴마크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선택적으로 애프터스쿨에 들어가 10학년(전체 학생 중 약 30%) 과정을 보내며, 말 그대로 1년간 인생을 설계한다. 아일랜드는 전환학년인 고등학교 1학년 때 직업체험, 현장학습, 교환학생, 해외여행, 봉사활동 등 다양한 특별 과목을 선택하여 진로를 탐색하고 사회를 경험하게 한다. 1970년대 도입 초창기에는 학부모의 반발로 소수 학교만 참여했지만, 2013년 기준 아일랜드 전체 학교의 80%가 전환학년제를 운영하며 전체 학생의 55%가 참여하고 있다.

 

프랑스의 교육과정은 3-5-4-3 학제로 유치원 3(5~7), 초등학교 5(8~12), 중학교 4(13~16), 고등학교 3(17~19)이다.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교육개혁으로 만 3세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프랑스의 유치원은 초등학교와 연계되어 있으며, 유치원 3학년(7) 때 이름 쓰기 등 최소한의 문자교육을 시작하되 6세 이전 문자교육은 금지한다. 유치원~초등학교의 하교시간은 일괄 오후 4시이고, 방과후 학교는 18~19시 운영한다. 프랑스의 중학교 4학년 역시 직업교육 준비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

 

초등 하교시간을 연장한다고 하면, 대번 학원 갈 시간이 줄어든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이것이 대한민국 공교육의 현실이다. OECD 대비 정규수업 시간은 짧지만, 학생 개인의 학습시간은 길다. 2003OECD 국제학업성취도 조사에 따르면 핀란드 학생들은 일주일에 수학을 4시간22분 공부해서 544점을 얻었고, 한국 학생들은 8시간55분을 공부해서 542점을 받았다. 핀란드 아동들의 주관적 행복도가 OECD 최상위권인 데 반해 한국은 만년 최하위권이다. 공교육 개혁은 지상과제다. 5세 조기입학을 막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한 학부모, 교육관계자, 정치인들 모두 그 기세로 지체 없이 교육개혁을 논하자!

장하나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가 경향 : 2022.08.16.

 

 

아래쪽의 재난

아래쪽 집들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는 걸 보며 대통령은 퇴근했다. 재난은 아래쪽의 문제였을 뿐이다. 침수로 사람이 목숨을 잃은 집 앞에서 반지하 방을 내려다보던 사진만큼 솔직한 고백이 있을까. 그는 아래쪽의 재난을 구경하는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폭우와 함께 재난불평등이 드러나고 있다. 가난할수록 재해에 더 잦게 노출되고 더 크게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은 새롭지 않다. 장애인, 아동, 노인 등 재난에서 더 취약한 집단이 있다는 사실도 재난 대응 정책의 서두에 곧잘 언급된다. 이번에는 반지하가 주목을 받았다. 그 도시의 시장은 반지하 주택을 없애나가겠다고 했다. 그 나라의 장관은 그분들은 어디로 가나물으며 반지하 거주민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아무도 아래쪽 사람들에게 묻지 않았고 듣지 않았다.

 

재난불평등에서 피해의 격차만큼 중요한 회복의 격차는 잘 조명되지 않는다. 재난에서 회복하는 과정에는 사회적 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원하고 획득할 수 있는 자원도, 회복을 돕고 지지할 관계망도 불평등의 구조를 따라 차이가 난다. 아래쪽의 회복은 더디고 무겁다. 아래쪽 사람들은 공론장에 등장하기도 어렵다. 피해가 잊히는 순간 정치적으로도 잊힌다. 재난 대응 자체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재난 대응 정책에서도 취약성의 조건을 바꾸는 일은 뒤로 밀린다.

 

취약성은 신체적·물리적 조건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자연재해 사망자는 여성이 많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남녀 사망률의 격차가 작아진다. 차별받는 집단일수록 빈곤과 사회적 배제에 처하기 쉽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더 위험한 곳에 살게 되는데 정보를 전달받거나 구조받기는 더 어렵다. 여성이 누군가 돌보는 일을 많이 맡다 보니 마지막까지 탈출하기 어렵다는 점도 사망률 격차를 설명한다. 이달 초 투석전문병원 화재로 숨진 간호사를 떠올려봐도 된다. 장애인, 아동, 노인이 재난에 취약한 이유도 복합적이다.

 

코로나19는 젠더불평등을 확연히 드러냈다.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에도 격차가 있다. 여성은 일자리를 잃기 더 쉬웠다. 노동권 보장이 취약한 일자리에 있었거나, 공적 돌봄의 중단으로 돌봄 부담을 떠안게 되었거나, 타인을 돌보는 대면 노동이 중단되거나 하는 등의 이유다. 그러나 갱신을 거듭하는 코로나19 대응책에는 젠더의 관점이 담기지 않고, 피해의 회복은 여성 개인들에게 떠넘겨졌다. 여성의 일할 권리와 쉴 권리도, 돌봄의 공공성이나 책임 분배도 논의되지 않는다. 회복의 격차는 불평등 구조를 강화하고 고스란히 피해의 격차로 이어진다.

 

코로나19를 겪는 와중에 폭우가 쏟아진 것처럼, 재난은 회복을 기다려 찾아오지 않는다. 기후위기 시대, 재난은 더욱 가쁘게 밀려올 것이다. 아래쪽 사람들은 더 아래쪽으로 밀려나고, 아래쪽의 재난은 더 참혹해지지만 잠깐의 구경거리가 되고 만다. 불평등은 재난의 수식어가 아니라 본질이다. 아래쪽의 재난을 두고 위쪽에서 갑론을박하게 둘수록 재난이 반복된다. 재난 대응과 회복은 평등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재난불평등을 마주하는 시간은 두 갈래로 흐를 수 있다. 우리가 취약한 집단에 속해 있음을 절망스럽게 확인하며 숨어드는 시간, 우리를 취약하게 만드는 세계에 맞설 계기를 발견하며 모여드는 시간. 우리는 어떤 시간을 바라는가.

 

대통령이 구경하던 아래쪽 집에는 네 명의 여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동시에 노동자였고 어린이였고 노인이었고 장애인이었다. 주로 돌보는 사람, 서로 돌보는 관계, 일하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저항. 그곳에는 피해의 굴레이기도 한 취약성을 연대로 빚어 재난 이후의 세계를 틔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의 애도는 비탄에서 멈출 수 없다. 평등을 향한 아래쪽 사람들의 정치를 만들어가는 일이 애도이자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경향 : 2022.08.16.

 

취임 100, 윤 대통령의 두 갈래 길

야권 일각에서 탄핵을 거론하는 것보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을 개고기에 빗댄 만큼 윤석열 정권 출범 100일의 일그러진 초상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20%대 지지율은 내부 총질로 쫓겨난 여당 대표가 다시 대통령을 향해 총질을 주저하지 않게 만든다. 레임덕 수준의 지지율이 고착되면, 관료사회는 더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국정운영의 동력은 갈수록 소진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백일도 지나지 않아 심대한 지도력 위기에 봉착했다. 이준석 대표가 호명한 윤핵관과 더불어 양두구육은 아마도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통치자들의 자격없음을 조롱하는 언어로 남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초반 고전과 혼돈은 어쩌면 예견된 바다. 0.73%포인트 차이의 승리와 거대 야당 등 척박한 집권 환경 때문이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 모두 집권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집권 세력은 특정 이념이나 가치에 입각해 뭉쳐진 게 아니다. 단순히 반문재인 동맹에 가깝다. 윤 대통령부터 민주당의 재집권을 막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목표가 없었다. 시대정신과 비전, 정책 같은 건 애초 고민해 본 적도 없을 터이다. 그러니 출범 100일이 되도록 윤석열 정부가 추구하는 국가적 의제가 무엇인지, 국정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그나마 새 정부의 기치로 내세웠던 공정은 연이은 인사 실패와 권력 사유화 논란이 거듭되면서 형해화되었다. 윤 대통령이 내세운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구현한 인사나 정책이 어디 하나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공정의 깃발마저 퇴색하자 윤석열 정부는 대체 뭘 하려는 것일까라는 의문만 펄럭인다.

 

대선 직전,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의 전국지표조사(NBS)에서 윤석열을 찍겠다고 한 사람들 중 7할이 정권교체를 위해서라고 답했다. ‘자질과 능력이 뛰어나서4%에 불과했다.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 부족에도 불구, 정권교체의 바람을 타고 당선된 어쩌다 대통령은 스스로 부족한 부문을 보완할 인물을 기용하고, 포용과 통합의 진용을 꾸려야 했는데 거꾸로 갔다. 윤 대통령과 검찰, 윤핵관, 김건희 여사의 사적 네트워크 중심으로 대통령실과 내각을 구축했다. 그러니 민생과 경제를 다루는 데 있어 무능함이 도드라지고, 52시간제와 5세 취학 등 치명적인 정책 혼선이 반복되는 것이다. 급기야 수도권 물난리 재난 대응을 보면서 시민들이 무정부 상태를 떠올리는 지경에 처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정수행 부정평가가 70%에 달한다. 부정평가 이유는 인사, 능력 부족, 독단으로 요약된다. 근본적으로 윤 대통령 본인의 문제다. 윤 대통령이 바뀌어야 극복되겠지만, 우선 대통령의 결단만으로 변화와 쇄신 의지를 보일 수 있는 게 인사다. 검찰과 지인, 측근 중심으로 구성된 끼리끼리대통령실과 내각으로는 지금의 복합 위기를 타개하기 어렵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각계의 경륜 있고 유능한 인물로 윤석열 정부를 재구성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이번에도 주권자의 궤도 수정 요구에 역진할 태세다.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지 않고,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인적 쇄신이나 국정 전환의 해법이 나올 리 없다. 취임사의 연장선상에서 자유33번이나 외친 8·15 경축사는 흔들림 없이 이대로 쭉가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 “정치적 득실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윤 대통령)라고 하는 걸 보면 과감한 인적 쇄신도 물 건너갔다. 겨우 정책과 홍보, 정무 기능 보강에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지지율 폭락의 이유를 홍보와 기획 부족에서 찾는 건 도단이다.

 

분명 윤 대통령과 검찰공화국의 핵관들은 지지율 위기의 출구를 다른 데서 찾고 있을 것이다. 지난 정부와 이재명의 민주당’, 나아가 진보 진영 전체와의 대결을 펼쳐 보수층 재결집을 도모하려는 길이다. 정책은 오로지 문재인 정부의 것을 뒤집는데 집중하고, 경찰·검찰·감사원·국정원 등 권력기구를 총동원해 신적폐 청산의 칼춤을 추면 된다는 생각이다. 경찰국 설치, 검수완박 무력화 조치로 사정(司正) 정지작업도 끝냈다. ‘칼잡이검사 출신인 윤 대통령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 정부와 야당의 잘못과 비리를 아무리 들춰내고 파헤쳐도 현 정부가 잘했다는 평가를 받을 순 없다. 전면적 국정 전환을 회피하고, 위기를 사정 정국으로 돌파하려는 자체가 진짜 망하는 길이다.

양권모 편집인 경향 : 2022.08.16.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아테네 민주주의 전성기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첫해(기원전 431) 전몰장병들을 추도하는 장례식 연설에서 조국 아테네를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의 정체는 이웃 나라들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보다는 남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통치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정이라고 부릅니다. 시민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페리클레스는 그 연설에서 아테네의 토론 문화도 찬양했다. “행동을 막는 가장 큰 장애는 토론이 아니라 무지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심사숙고를 꺼리고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용맹해지지만, 우리 아테네인들은 행동에 앞서 또 행동하는 중에도 사고하는 특출한 능력이 있습니다.” 아테네의 훌륭한 면모를 열거한 뒤 페리클레스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아테네는 헬라스(그리스)의 학교입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장례식 분위기에 맞춘 것이었기에 수사학적 화장이 짙었다. 실상을 보면, 아테네인들은 적국과 전쟁하는 중에도 당파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분열은 아테네 전력까지 갉아먹었다. 자유로운 토론 문화 뒤편에는 파당의 이기주의로 물든 자멸적인 내부 투쟁이 있었다. 이 연설 뒤 페리클레스는 전염병으로 죽고 아테네는 긴 전쟁 끝에 스파르타에 굴복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쇠퇴와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헬라스의 학교가 무너져가던 시기에 진짜 학교가 아테네에 들어섰다는 사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채 안 돼 플라톤이 아카데미아 숲에 철학 학교를 세웠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에 학교를 세웠고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학교가 뒤를 이었다. 아테네의 학교는 수백년 동안 헬라스 전역, 나아가 지중해 전역의 젊은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 최초의 철학 학교에서 플라톤이 가르친 것 가운데 하나가 정치사상이다. 정치는 언제나 플라톤의 관심사 한가운데 있었다. 플라톤은 말년에 쓴 편지에서 정치가가 되는 것이 젊은 날 꿈이었지만 아테네를 휩쓴 혼란을 보고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스파르타의 지배 아래 들어선 ‘30인 과두정이 저지른 끔찍한 폭정은 이전의 정치체제가 황금으로 보이게했다. 그 폭정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민주정은 또 다른 광포함을 드러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것도 이때였다. 이 경험이 플라톤을 현실 너머의 정치체제를 구상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그 구상이 집대성된 것이 <국가>.

 

플라톤은 올바른 통치 형태를 현실에서 구할 수 없으니, 우리의 이성적 사유를 끝까지 밀고 가 가장 아름다운 이상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상에 따라 통치를 하려면 이상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바로 철인(philosophos), 지혜의 친구였다. 이성의 힘으로 최선의 이데아를 체득한 철인들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플라톤은 그 나라를 구성하는 시민을 세 계급으로 나누었다. 재화를 산출하는 생산 계급, 국방을 담당하는 전사 계급, 국정을 책임지는 통치 계급이었다. 기억할 것은 이 계급이 카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계급은 개별 인간들의 적성에 맞게 배분된 것이지, 혈통이나 빈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의 급진주의는 전사와 통치자로 이루어진 수호자 계급에 요구한 혹독한 삶에서 드러난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혼란이 빈부 사이 화해할 길 없는 대립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처방전으로 일종의 공산주의를 제시했다. 수호자 계급은 돈이든 집이든 아무것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 사유재산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다. 플라톤이 더 부정적으로 본 것은 가족제도였다. 가족이야말로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갉아먹는 이기심의 원천이다. 수호자 계급은 가정을 둘 수 없고 공동 막사에 살면서 자식을 공동으로 양육해야 한다. 수호자들에게는 공동체의 선을 증진해야 한다는 의무 말고 어떤 특권도 없었다. 플라톤이 요구한 수호자들의 삶은 출가 수도승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국가>가 묘사한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는 수호자들에게 너무 가혹한 나라였다.

 

플라톤은 자신이 신봉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이런 나라를 구상했다. 그러나 이 이성의 나라는 현실로 구현할 수 없는 나라였다. 그리하여 만년의 플라톤은 지상의 나라를 다시 설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설계도가 담긴 저작이 <법률>이다. <국가>에서 그린 나라는 순수이성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법률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이성이 곧 최선의 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순수이성을 현실에서 만날 수는 없다. 불완전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지상의 나라를 꾸려가자면 법률을 만드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없다. “사람은 법률을 제정해 법률에 따라 사는 게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가장 사나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다.”(<법률>) 좋은 법률을 만들어 통치자부터 생산자까지 모두 복종할 때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 보편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 플라톤 말년의 법치국가는 중년의 이성국가와는 사뭇 다른 나라다.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국가><법률> 사이에 굵은 단절선이 있다.

 

정치사상의 이런 내적 단절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발견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을 가르는 단절선은 <정치학> 내부의 이상국가현실국가사이에 있다. 전체 8권으로 이루어진 <정치학>은 서론(1)을 빼면, 이상국가를 구상하는 부분(2-3-7-8)과 현실국가를 소묘하는 부분(4-5-6)으로 나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사상에 이런 균열이 생긴 것은 이 저작이 15년이 넘는 긴 시간에 걸쳐 집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세월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학교를 떠나 그리스 정치의 소용돌이를 통과했고 아테네에 돌아와 자신의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 도시국가 158곳의 헌법을 수집해 분석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과 연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바꾸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유사한 방식으로 최선의 국가를 구상하던 작업을 중단하고, 현실의 국가들을 살펴 차선의 국가를 그려내는 일로 눈을 돌렸다. <정치학>현실국가편은 현실의 체제를 과두정’(oligarchia)과 민주정(demokratia)으로 나누고, 이 두 정체가 섞인 혼합정체에서 실현 가능한 가장 좋은 정치체제를 찾아낸다. 또 그 혼합정체를 떠받치는 세력으로 넓게 포진한 중간계급에 주목한다. 이 중간계급이 가운데 서서 과두정의 극단도 민주정의 극단도 거부하는 균형 잡힌 정체를 이끌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때의 혼합정도 법률이 최고권을 쥐고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 구상은 근대 정치사상으로 이어졌다.

 

그 사상의 연속선상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다. 사상의 단절은 마키아벨리에게도 있다. 마키아벨리 단절선은 <군주론><로마사 논고>를 가른다. 표면의 주장만 보면 <군주론><로마사 논고>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저작처럼 보인다. <군주론>은 군주라는 특권적 개인에게 국가를 창건하는 길을 가르쳐주는 책이고, <로마사 논고>는 그런 특권적 개인을 거부하는 시민들이 중심이 돼 자유로운 공화국을 건설하는 방안을 얘기하는 책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탈리아가 주변 강국들의 위협에 시달리던 분열된 나라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마키아벨리 심중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일인자를 통해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어낸 뒤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공화국을 창출하는 것이 현실적인 길이라고 본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눈이 향하는 곳은 공화주의 나라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마키아벨리도 모두 정치사상 연구에 난제를 던지는 사람들이다. 저마다 사상 내부에 균열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 사상가들이 어떤 사상을 표명했든 그들의 꿈은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데 있었다. 특권층의 이익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최대한 평등에 가까운 나라를 세울 길을 찾는 것이 이 사상가들의 목표였다. 우리는 어떤가? 법률이 모든 사람을 균일하게 다스리는 나라에 살고 있는가? 통치자의 행위가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증진하는 데 이바지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가?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한겨레 : 2022.08.16.

 

 

노동시간, 최저임금, 중대재해처벌법의 불안한 미래

80년대 초반 같이 활동하던 동료들로부터 프락치’(fraktsiya, 밀고자)일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하종강이 프락치라는 소문이 있는데 근거가 있는 얘기냐?”고 묻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후배가 일러줘 알게 됐다. 엄혹하던 80년대 초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비합법 운동조직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내부 투쟁이 일상적이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 일을 치열하게 수행하는 것이 성실한 활동가의 덕목이었다. 한번은 학습 모임에서 내가 발제하던 중에 당시 심각한 갈등을 빚던 동료 활동가가 음료수를 갖다줬는데 혹시 설사약이나 수면제를 탄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어 선뜻 마시지 못한 적도 있다. 나도 가끔 설사약이나 수면제를 먹이고 싶은 상대가 있었으니까.

 

하종강이 프락치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나를 조직에서 배제하고 싶었던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이었다. 자취방으로 찾아온 후배들은 총력을 동원해 전면전으로 대응하자고 했지만, 말렸다. “내가 절대로 프락치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이 바닥에서 오래 활동하면 언젠가 이 오해는 풀리기 마련이다. 앞으로 만날 기회가 없어서 오해를 풀지 못한다면, 만나지 않을 사람들이니 그 또한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후배들을 설득했다. 그 뒤 4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오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를 모함했던 동료는 일찍이 노동운동을 떠나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내 주변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존재가 됐다.

 

그러한 북새통을 10여년 겪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 돼 비합법 조직사업을 포기하고 노동상담과 교육이라는 공개운동 부문으로 나왔다. 그 뒤 조직을 책임져야 하는 직책은 철저히 마다했고 너무 편한 선택을 했다고 비난하는 동료들에게 상담과 교육을 선택했다는 것은 운동의 중심에 절대로 서지 않겠다는 뜻이다라며 이해를 구했다. 그 뒤로 나는 시골 농공단지의 허름한 비닐하우스 공장에 있는 작은 노동조합의 활동가라도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포기한 일을 계속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철학이 바뀌어서 노동운동을 떠난 사람들보다 동료에게서 받은 상처를 이기지 못해서 떠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처음 노동운동에 발을 딛는 후배들에게 언젠가 동료들로부터 상처를 받게 될 텐데 그때 꼭 이겨내야 오래 활동할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나를 모함했던 친구나 나는 그냥 조직 노동운동을 포기하고 떠났을 뿐이다. 우리의 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 협력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신념이 바뀌면 사람들은 그냥 포기할 뿐이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 협력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그런 일을 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요직을 맡겼다. 걱정스럽다.

 

윤석열 정부 취임 100일을 맞았다. 정부의 노동정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대략의 방향은 잡혔다. 전체적인 기조는 일찍이 윤 대통령이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했던 발언들을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 정치인 경험이 일천했던 시절에 한 발언들이어서 이후 정치적 경험과 수업을 쌓는 과정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정되거나 다듬어지기를 바랐으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110대 국정과제와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에 대한 대응 등을 들여다보면 윤 대통령이 정치 신인 시절에 가졌던 노동정책에 대한 방향과 의지가 바뀌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이, 최저임금제에 대해서는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고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시각이,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서는 기업인들의 경영 의지를 위축시키는 강한 메시지를 주는 법이라는 주장이 관철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동시간 규제 완화 임금체계 개편 자율 중심 안전관리체계 공정한 노사관계 구축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과 위험한 노동환경을 강제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이 기업의 단기적 이윤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뿐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에 재앙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한겨레 : 2022.08.16.

 

 

3C'의 시대기후(climate)·계급(class), 그리고 자본주의(capitalism)

기후 재앙보편적 돌봄 사회 실현 통한 '계급적 적응' 필요

날씨가 무섭다. 대한민국 중부 지방에는 한 세기만의 폭우가 쏟아졌는데, 유럽 여러 나라는 폭염과 가뭄으로 고통 받고 있다. 서울의 한강 이남 지역에 난데없는 물길이 생긴 반면 중부 유럽에서는 내륙 운송을 책임지던 라인강 물길이 끊어져 버렸다. 과잉과 결핍의 양극단이 엄습한다. 마치 인간의 변덕을 심판하듯 이제는 지구가 변덕을 부린다.

 

그런 와중에 미국에서는 기후 위기 대응 법안이 오랜 논란 끝에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라는 예상치 못한 이름으로 상하 양원을 통과했다. 기후 위기의 급진전에 맞서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한데 이 나라가 러시아, 중국과 벌이는 각축 탓에 다른 여러 나라의 관심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기후 위기에서 멀어져 있다. 기후 위기 대응에서 전 세계 선두 주자라 자처하던 유럽연합마저 동쪽의 전쟁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기후 위기 대응 계획을 크게 후퇴시키고 있다.

 

지금 인류와 지구의 시계는 어디쯤에 와 있는가? 기후 위기에 맞서 인류는 한 발자국이라도 전진하고 있는가, 아니면 돌이킬 수 없이 후퇴하고 있는가? 최근의 급박한 상황 전개를 반영한, 기후 위기의 중간 결산이 시급히 필요하다.

 

이미 시작된 기후 재앙 시대

첫 번째로 확인해야 할 것은 기후 재앙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벌써 기후 재앙 시대의 한 복판에 있다.

 

생활인의 감각으로 보더라도, 재앙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이상 기후가 최근 몇 년 새 빈발하고 있다. 굳이 다른 나라 사례를 댈 것 없이 한국만 봐도 엄청나게 더운 여름과 그만큼 엄청나게 추운 겨울, 기나긴 장마와 처음 겪는 가을 태풍 릴레이가 2010년대 후반에 집중하여 나타났다. 이제 우리에게는 평온한 사시사철보다는 뭔가 거기에서 엇나간 한 해 날씨가 더 익숙할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의 기후 위기 관념은 현재의 일상과 기후 재앙 사이에 아직 상당한 시간적 간극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기후 재앙 시대란 미래에 닥칠 수도 있는 위험한 '시나리오' 중 하나이며, 지금 나타나는 재앙들은 (재앙 자체가 아니라) '전조'라 여기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조들이 인류를 각성시키면 오히려 최악의 시나리오는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신화가 21세기의 첫 몇 십 년 동안 그나마 기후 위기에 가장 민감하다는 이들을 지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후 과학자들이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내놓은 메시지의 형태와 방식이 이런 신화를 부추겼다. 산업화 이전과 대비해 지구 평균 기온이 1.1도까지 치솟았고, 이번 세기 안에 그 상승을 1.5도에서 중단시키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며, 그러자면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이 제로인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운운. 이 메시지에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우리가 2050년까지 뭔가를 열심히 하면 기후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이런 생각 탓에 지금껏 기후 위기 대응 담론은 탄소 배출을 더 빨리, 더 크게 줄이는 데에만 집중됐다.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이런 노력은 분명히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기후 위기 대응의 전부여서는 안 된다. 기후 위기 대책은 각국 정부의 탄소 중립 실현 계획이 담고 있는 기술 관료적 전망보다는 훨씬 더 사회적으로 민감하며 정치적으로 불온한 내용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기후 재앙 시대가 이미 시작됐기 때문이다. 2050년까지 뭔가를 잘 하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식의 전망은 경제 성장 신화만큼이나 환상적인 또 하나의 신화가 돼버렸다. 지구는 인간들의 이러한 자기위안적 낙관주의를 비웃으며 온실가스 증가의 결과를 인간 사회에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빈발하는 극단적 기상 현상만이 그 증거는 아니다. 이런 날씨가 전 세계 농업에 가하는 긴장과 압박 탓에 지금 불황과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인플레이션 또한 이를 증명한다.

 

이제는, 기후 위기를 둘러싸고 이제껏 단단히 굳어져 온 상식을 해체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가 도래하기 전까지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란 '없다'. 최악의 상황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세 개의 c는 하나다 기후, 계급, 자본주의

이와 함께 시급히 확인해야 할 또 다른 진실은 기후 문제가 계급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선각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에 관해 지겨울 정도로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기후 재앙 시대의 한 복판에서 이 경고는 그저 시대를 앞선 고담준론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목숨을 쥐고 흔드는 현실로 육박한다.

 

한국 사회는 88일에 인천, 서울, 경기 남부를 덮친 폭우에서 이를 너무도 뼈아프게 실감했다. 연립주택 반지하층에 살던 가족이 성난 물살에 휩쓸려 생명을 잃었다. 희생자들은 상대적 저소득층이고 노동계급이었으며, 여성이고 장애인이고 어린이였다. 누구에게는 일상의 안락과 수익의 교란 요인이었을 뿐인 극단적 기후가 이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는 위협으로 닥쳤다.

 

이 사실은 기후 문제가 온 인류가 공통으로 직면한 보편적 위기가 '아님'을 말해준다.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에 따라 위기의 성격과 강도가 전혀 달라진다. 적도 인근 국가의 농민이 체감하는 바와 대개 온대인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의 도시인이 느끼는 게 천양지차다. 그리고 같은 도시 안에서도 서울 강남의 초고층 건물 같은 곳에 사는 이들과 반지하 셋집 거주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난다. 지구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피라미드에서 보다 아래쪽에 자리한 이들일수록 기후 위기는 생존과 생명의 급박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반면에 기후 위기에 기여한 정도는 피라미드의 위쪽에 자리한 이들일수록 커진다. 국가별로 따져서 빈국일수록 탄소 배출량이 적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계층별로 봐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2020년에 옥스팜과 스톡홀름환경연구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상위 10%의 부유층이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절반 이상을 배출했다. 상위 1%는 하위 50%보다 두 배 이상을 배출했다. 탄소 배출의 직접적 원인은 화석 연료 사용이지만, 화석 연료를 태우게 만드는 근본적 힘은 소비 자본주의이며, 그 주역은 북반구 부유층과 상위 중산층이다.

 

지금껏 통상적인 기후 위기 대응 담론에서는 이런 차이가 쉽게 은폐됐다. 기후 위기 대책은 21세기 후반 언젠가를 살 후세대를 위해 현존 인류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만 하는 과제가 되어 버렸다. 마치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임원과 번화가에서 비싼 외제차를 모는 이들, 반지하에 거주하는 노동자 가정, 폭우와 가뭄에 신음하는 농민이 모두 같은 무게의 짐을 짊어지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깔끔한 은폐도 더는 힘을 발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 시대가 이미 기후 재앙 시대임이 분명히 드러날수록 계급에 따라 다가오는 곤란과 위험의 무게가 확연히 다르게 체감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문제가 계급에 따라 불편이나 불로소득 감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면, 이 문제의 또 다른 이름은 항상 계급 문제일 수밖에 없다. , 기후 문제는 계급 문제다.

 

이것이 202288일 이후 한국 사회에 깊이 새겨져야 할 깨달음이다. 영어 단어에서 모두 c로 시작되는 두 단어, 기후(climate)와 계급(class)은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 사실 두 c는 오늘날 또 다른 c(자본주의, capitalism)의 두 얼굴일 뿐이다.

 

기후 위기 대응 - 탈탄소화만이 아니라 보편적 돌봄 사회를!

그렇다고 탈탄소화 노력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최악의 상황이 이미 열리고 말았지만, 최악에는 한계가 없는 법이다. 벌써 기후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구 평균 기온이 이번 세기 안에 산업화 이전보다 3도 이상 상승하는 상황을 예측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문명 붕괴, 인간 멸종 등과 직결될 수밖에 없기에 그 동안 거의 금기시되던 시나리오조차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만큼 기후 재앙은 극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탈탄소화 노력은 더욱더 치열하고 빠르게 추진돼야만 한다. 2050년 넷제로(Net-Zero)실현 구상이 한갓 신화에 불과하더라도, 탈탄소화 요청 자체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만약 탈탄소화가 시도되지 않는다면, 3도 이상 상승 시나리오가 끝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벌어진 최악의 상황에 그나마 한계선을 긋기 위해서도 오히려 2050년보다 더 빠른 시점에 탈탄소 사회를 실현하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전망과 고투가 필요하다.

 

그러나 더는 탈탄소화 노력만이 기후 위기 대응 담론의 전부인 양 치부돼서는 안 된다. 기후 재앙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면, 시작되고 만 이 재앙에서 생명을 최대한 구하려는 조치가 기후 위기 대책의 또 다른 기둥이 되어야 한다. 기후 재앙이 더욱 극악한 상황으로 치닫지 못하게 '예방'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기정사실이 된 기후 재앙에 '적응'하려는 조치들 또한 시급히 필요하다.

 

실은 '적응'은 지금껏 기후 운동에서 기피하거나, 아니면 쓰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던 개념이다. 탈탄소화에 소극적이거나 이를 훼방 놓으려는 세력이 기후 위기에 적응하자는 주장을 퍼뜨리며 에너지 체제 전환 등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곤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적응'론이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궁극적 해법인 사회 전환을 가로막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과는 다른 차원과 입장에서 어쨌든 '적응'의 노력이 필요하게 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를테면 기후 재앙에 대한 '계급적 적응'이다. 극단적 기후에 취약한 주거 환경을 탈시장-공공 주거 정책을 통해 해결하고 재난 시에 기민하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공공 안전 인력을 대폭 확대하는 식의 적응 말이다. 일상적인 위험과 재난을 최대한 막고 안전을 보장하는 활동 역시 돌봄의 일부로 본다면, 이는 기후 위기에 맞서는 보편적 돌봄 사회를 실현하는 과업이라 하겠다.

 

보편적 돌봄 사회의 재원은 기후 재앙의 원인 제공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음으로써 확보해야 한다. 사회 전체의 자원 중 상당 부분을 시장의 논리와 지배에서 떼어내 기후 재앙에 맞선 돌봄 활동 영역에 우선 투입해야 한다. 코비드-19 팬데믹 기간에 그랬듯이, 상시적 재난 대응이라는 정언명령이 이윤 동기보다 위에 놓여야 한다.

 

이런 요구가 하루빨리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들의 가장 긴급하고 중대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탈탄소화를 위한 에너지 체제 전환이 그 동안 사회운동들에조차 조금은 먼 미래의 과제로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면, 당장의 기후 재앙에 맞선 보편적 돌봄 사회의 조속한 실현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이 여름 이후, 우리는 결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2.08.16

 

 

·중 수교 30,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오는 24일은 한·중 수교 30주년이다. 수교가 되던 1992, 나는 한 재단에서 파견한 중국학 연구원으로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이미 10년이 넘었지만 사회주의 풍속이 엄연히 존재했다. 영화 <버닝>의 한 장면에 나오는 것처럼 국영상점에서는 점원이 거스름돈을 던져주는 일도 흔했다. 환율제도도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 다른 이중환율제를 선택하고 있었다. 시장 환율은 요동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암시장에서 적절한 순간에 높은 환율로 달러를 인민폐와 바꾸는 일은 중국 체류 외국인에게 중요한 일상이었다. 생활은 낙후했지만 만나는 중국인들 대부분은 순박하고 친절했으며,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한국에 대해서 관심도 높고 좋은 인상도 가지고 있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만드는 개인적 추억이다.

 

수교 이래 양국 관계는 전체적으로 볼 때 호혜적이고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한다. 2017년 사드 사태와 같은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사이 중국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고, 우리의 제일의 무역 상대국으로 변신했다. 최근 대중국 무역적자가 몇 달 연속 발생하여 경고음이 들리지만 수교 이래 우린 줄곧 중국을 상대로 커다란 흑자를 기록했다. 우리가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데 중국과의 경제 교류가 큰 기여를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국 관계는 협력 동반자 관계,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꾸준히 심화되고 격상되어 왔다. 우려스러운 것은 근자에 들어 미·중 갈등의 영향으로 일각에서 반중·혐중적 분위기가 확대되고 있는 일이다.

 

최근 화제가 된 <짱깨주의의 탄생>에서 잘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에 관한 우리 언론 보도를 보면, 일반 시민이 중국에 합리적인 접근을 하기가 구조적으로 힘들게 되어 있다. 이는 비단 중국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중국의 한 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서구 언론의 중국에 대한 보도는 60% 이상이 부정적 뉴스라고 한다.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우리 언론도 이런 서구 언론이 설정한 틀과 어젠다에 부지불식간에 종속되어 중국에 관해 뭔가 비판적 보도를 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처럼 된 지도 꽤 된다. 중국을 우리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부상에 질투와 두려움을 느끼는 서구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작은 나라도 자세히 보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듯이 오랜 역사와 거대한 국토, 그리고 다양한 민족이 뒤섞인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엔 잠 못 이룰정도로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놀라운 지혜와 제도적 장점도 많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중국이 세계가 놀라는 부상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이 시대를 만약 후세의 역사학자가 기록한다면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중국의 부상과 서구의 쇠락을 거론할 것이라고 많은 전략가와 역사가들이 예측한다. 도대체 중국은 어떤 나라이기에 여러 버전의 중국 붕괴론을 붕괴시키며 부상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우리는 어떻게 중국을 바라봐야 하는가?

 

헨리 키신저가 말하는 것처럼 중국은 매우 특이한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도도한 미국 예외주의 시대에 냉정한 키신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예외주의의 나라가 중국이다. 유구하며 연속적인 문화를 가졌으면서도, 삼장법사처럼 진리를 구하러 다녔지, 자신의 것을 보편적이라고 선교하지 않는 나라가 중국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럽연합이 도달하려는 세계를 2000여년 전에 도달해서 유지한 나라, 로마제국과 샤를마뉴 대제의 유럽과 달리 아직까지 분열되지 않고 이어져 온 대륙의 나라, 루시앙 파이가 말한 것처럼 민족국가라기보다는 하나의 문명인 나라가 중국이다. 20세기 중국의 역사가 천하를 민족국가 속에 욱여 넣는 지난한 과정이었다면 이제 문화의 자각을 바탕으로 민족국가에서 문명국가로 변신하려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의 부상은 무엇보다 이런 문명의 힘으로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엊그제가 광복절 77주년이었다. 이념을 초월해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해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에게 지리적 공간을 내어주고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수교한 지는 30년이 되었지만 우리와 중국은 냉전을 떨치고 다시 만난 오랜 이웃이며 동아시아의 운명공동체이다. 수교 30주년을 맞아 양국 간의 우호가 더욱 굳건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황희경 중국철학자·전 영산대 교수 경향 2022.08.17

 

 

역사의식과 독립운동

역사학이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러 활동에서, 시간적·공간적으로 이루어지는 발전의 모든 사실을 심리적인 인과관계 및 그때그때의 사회적 가치와 관련되는 인과관계에서 구명하고 또 서술하는 과학이다.”

 

베른하임(E. Bernheim, 1850-1942)이 말하는 역사학의 정의다. 역사 사실에 대한 심리적 인과관계 및 사회적 가치의 인과관계를 중요시하고 있다. 특히 심리적 인과관계가 역사가의 가치판단의 함수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역사가의 가치관과 직접 맞닿는 말이다. 역사학에서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와 사회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의 문제 역시 역사가의 가치와 직결된다. 역사학이 사실의 문제를 넘어 가치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실이란 역사가들이 그것을 찾아줄 때에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고, 어떠한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그리고 어떠한 순서와 전후 관련 속에서 이야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역사가인 것이다라고 외친 카(E.H. Carr, 1892-1982)의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한 역사학이 살아있는 역사학이요 인간을 외면치 않는 역사학이다. 역사가를 과거로 향한 예언자라 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듯하다.

 

분명 과학적 역사학은 필요조건이지만 역사학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무한한 역사적 사실들을 일정한 기록을 통해 재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과학적 역사학을 신주처럼 떠받드는 역사학자들에게 월쉬(W.H. Walsh, 1913-1986)는 이렇게 충고했다.

 

역사에 있어서 본질적 중요성에 관한 판단이 실재하고 있고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부인하기 힘든 일로 보이며, 만약 이것이 옳다면 완전히 과학적인 역사학이라는 교리(敎理), 사실들로부터 이러한 판단을 읽어낼 수 없다는 명백한 이유 때문에 내 던져 버려야 한다.”

 

월쉬가 말하는 본질적 중요성에 대한 판단이란 바로 역사가의 가치다. 그는 역사가들이 신앙처럼 떠받드는 과학적인 역사학을 내 던져 버리라 했다. 본질적 중요성에 대한 판단을 외면한 역사학은 이미 기록 주체로서의 인간을 외면한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민중의 빈곤으로부터 찾았던 미슐레(J. Michelet, 1798-1874)현재에만 자신을 닫아두려는 사람은 현재의 진면목을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상기시켰다. 과거와 부단한 교감을 통해 현재를 올바로 보라는 의미일 듯하다. 까닭에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는 인간에 속한 역사가의 눈을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금방 눈에 뜨이는 풍경이나 연장·기계 따위의 너머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차디차게 식은 듯한 문서나 그것을 확립해 놓은 자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제도의 너머에서, 역사학이 파악해 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이다.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는 기껏해야 생명력 없는 잡다한 지식을 다루는 엉터리 학자에 머물고 말 것이다. 훌륭한 역사가란 전설에 나오는 식인귀(食人鬼)와 흡사하다. 인간의 살냄새를 맡게 되는 바로 그곳에, 자신의 사냥감이 있음을 그는 아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학에서는 자연과학과 달리 객관적 역사 그 자체보다 역사를 보는 쪽의 주관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의식의 문제가 역사연구와 해석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영국 역사가 루이스 네이미어(L.B. Namier, 1888-1960)의 다음 경구를 되새겨 보자.

 

"역사학의 최고 성취는 역사의식이며 그 최종 결론은 직관적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인간의 현실관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고도의 역사의식을 성취하는 일은 개인이나 집단(민족·국가)의 경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의식을 담지 않은 기록의 나열은 무가치한 연대기나 해적이[年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도 여기에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의식의 스펙트럼 역시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저항과 순응이라는 가치 충돌은 그 시기 역사학 형성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나아가 주인과 노예, 애국과 매국, 항일과 친일의 경계도 여기에서 나뉜다. 전자가 양심, 자율, 책임에 무게를 실었다면 후자는 비양심, 타율, 무책임으로 기울어졌다.

 

빼앗긴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역사관도 극명했다. 나를 잃어버린 데 대한 반성과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한 역사학, 그것이 우리의 민족주의역사학이다. 반면 남을 부정하면서 남을 지배하기 위한 역사학, 그것이 일제의 식민주의역사학이다. 전자가 반중화(反中華)와 항일의 현장에서 움튼 역사학이라면, 후자는 일제의 관학(官學)에 부용(附庸공생(共生)하며 성장한 역사학이었다.

 

그러므로 김교헌(金敎獻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그 항일의 에너지를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찾고자 노력하였다. 박은식이 우리 역사의식에서 발생하는 동력이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한 아래 내용이 그에 대한 답일 것이다.

 

우리 대한은 아시아 동부의 옛 나라이다. 옛날 신인(神人)이 태백산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땅을 연 때부터 드디어 대동(大東)을 소유하였다.(중략)우리의 독립정신은 일찍이 이로 말미암아 이지러지거나 파괴된 일은 없다.(중략)또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은 최근 30년 간 중단된 일이 없었고, 또 우리 역사상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동력이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우리의 연면한 역사에서 독립운동의 명분과 동력을 찾은 것이다. 그 중 김교헌은 대종교에 참여하면서 모든 기득권을 버린 인물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역사학의 정리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대종교의 2세 교주를 맡아 포교를 통한 항일투쟁과 더불어 수많은 학교를 개척했다. 그곳은 학교이자 독립운동의 근거이며 대종교의 교당 역할을 한 삼위일체의 공간이었다.

 

당시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으며 대종교의 교주는 곧 항일집단의 우두머리였다. 특히 그의 신단민사(神檀民史)·배달족역사(倍達族歷史)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독립운동 단체 및 사관학교 등에서 역사교재로 쓰이며 항일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반면 일제식민지역사학의 관점은 확연히 다르다. 오히려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에 실린 역사관을 망설(妄說)로 매도하며 식민지역사학의 완성을 위한 지침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 보인다.

 

조선인은 여타의 식민지의 야만미개한 민족과 달라서, 독서와 문장에 있어 조금도 문명인에 뒤떨어질 바 없는 민족이다.(중략)혹은 한국통사(韓國痛史)라고 일컫는 한 재외조선인 저서 같은 것의 진상을 규명하지는 않고 함부로 망설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중략)그러나 이를 절멸시킬 방책만을 강구한다는 것은 도로(徒勞)에 그치는 일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전파를 장려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옛 역사를 강제로 금하는 대신 공명적확한 사서로써 대처하는 것이 보다 첩경이고 또한 효과가 더욱 클 것이다. 이 점을 조선반도사 편찬의 주된 이유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서적의 편찬이 없다면 조선인은 무심코 병합과 관련 없는 고사(古史), 또한 병합을 저주하는 서적만을 읽는 일에 그칠 것이다.(중략)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조선인동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조선반도사편찬요지(朝鮮半島史編纂要旨))

 

일제의 역사관이 조선인의 동화를 통한 영구식민지의 완성에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은 학문의 과학성·합리성·객관성으로 포장된 실증주의(實證主義)를 내세워, 우리 민족주의역사학을 비학문적 관념사학으로 매도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지침에 충실했던 학자군(學者群)이 이병도(李丙燾)와 같은 부류들이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의 공간에서도 건재를 과시한 인물이다. 1945년 이후의 해방 공간, 19506월 이후의 전쟁 기간, 1953년의 휴전 이후의 상황, 1960년의 419혁명, 1961년의 516군사쿠데타 등 격변의 시기마다 시의(時宜)에 영합하는 민첩한 행동으로써 권력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한국사학계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1961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상황이 되었을 당시는, 즉시 군사정권의 최고 기관지 역할을 하는 최고회의보에 쿠데타의 역사적 정당성을 밝히는 글도 올렸다. 대의명분과는 상관없었던 이병도의 이러한 처세는 서울대 교수(1945)를 기점으로 하여, 학술원 종신회원(1954),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장(1955), 진단학회 이사장(1956), 문교부장관(1960), 학술원 회장(1960), 국정자문위원(1980) 등등의 감투를 쓰며 한국사학계에 군림하였다.

 

더욱이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그의 학문적 선택을 순수학문의 길로 호도하며 행세했다. 엎어진 세상이 오면, 그것을 바로 선 세상으로 환각하며 살아온 그로서는 당연한 변명일 듯하다. 이것은 식민지의 현실을 외면했던 생명파(인생파)나 청록파(자연파) 문인들이, 당시의 계급문학에 대항하며 순수문학을 견지하려 했다는 자기변명에도 훨씬 못 미치는 억설일 뿐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이병도 만큼 총독부 주변을 서성거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김교헌은 부귀영화를 스스로 버리고 대의명분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은 나라사랑의 길로 독립운동의 험로였다. 그 수단의 하나로 택한 것이 실증을 통한 민족주의역사역학이다. 그의 역사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과서로 쓰인 동시에, 만주 독립군들의 정신적 지침서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주의역사학에 대항하는 우리의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곳도 독립운동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는 그를 평가하지 않았다. 다시 우리가 주인이 된 해방의 공간에서 그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가 바로 김교헌이다.

 

반면 이병도는 중국 경극(京劇)에 등장하는 변검(變臉)의 달인인 양, 시류의 변화에 너무 잘 적응한 인물이다. 일제관학자들에게 감명 받아 역사학도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러한 인연을 토대로 식민의 그늘에서도 늘 양지에 발을 딛고 살았다. 실증사학순수학문이라는 가면을 쓰고 조선사편수회에 부용하며 식민주의역사학 확립에도 공헌하였다.

 

한편에서는 청구학회진단학회라는 허울을 쓰고 어쭙잖게도 민족사학의 맥으로 대접받았고, 광복 후에는 다시 변신하여 늘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 일제 관념(식민)사학의 아류밖에 안 되는 그가, 한국 실증사학의 태두로도 자리 잡았다. 그에게는 나라사랑은커녕 명분도 염치도 없었다. 오직 변신을 통해 온존해 온 지식인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저 기득권에 빌붙으며 약삭빠르게 변신하는 것이 실력이요 능력으로 대접 받았다. 과거의 친일은 적당한 변명으로 호도할 수 있었고, 일제에 부용했던 지식인들은 민족의 어정쩡한 우상으로도 변신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춘원 이광수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하며 천황어명과 독법(讀法)을 같이하는 씨명(氏名)을 갖기 위해서라고 자랑한 사이비 한국인이다. 일제강점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환각한 아류 일본인이다. 스스로 일등국민이 되고자 우리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의 역사를 미개와 전근대로 타락시킨 무뢰한이다. 해방 이후 그가 늘어놓은 변명은 더 가관 아닌가. 자신이 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순교자적 자세로 대신했다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언어적 수사를 통해 스스로의 친일 행적을 교묘히 변명하고 호도하였다. 역사의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노예적 지식인의 형해화(形骸化) 된 몰골이 이광수다.

 

올바른 역사의식은 주인과 노예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것의 붕괴는 정체성의 와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의식은 과거의 잠꼬대로 구축되었다. 반면 일제에 부용하며 왜곡한 정치사학(政治史學)은 현재의 기득권 학문으로 행세 중이다. 주객이 전도된 우리 역사학계의 추한 자화상이다.

 

그러나 주인은 불행을 도피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행복을 구걸하는 일도 없다. 그것이 진정 주인된 역사의식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풍찬노숙·삼순구식하면서도 항일의 길을 걸었다. 개인의 함포고복(含哺鼓腹)을 위해 대의와 명분을 묻어버린 일제의 주구(走狗)들과는 천양지차다.

 

회색지대에 서있는 우리의 앞길도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곡학아세(曲學阿世)로 세상을 속이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다. 꼭 사필귀정의 가치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더 이상 사이비 역사의식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의식을 내몰기는 힘들 듯하다. 역사의식의 망각은 곧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신채호의 말처럼, 역사의식이 결여된 집단은 내일을 기약하기 힘들다.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는 루이스 네이미어의 명언을, 광복절을 보내면서 다시금 되새겨본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통일뉴스 2022.08.17.

 

0.001%도 나아가지 못할 담대한 구상

대통령의 인식이 참으로 못나고 안타깝다. 윤석열 대통령의 77주년 8.15 경축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치적으로는 이준석의 양두구육(懸羊賣狗)에 밀렸고, 내용적으로도 대한민국 광복절 경축사가 아닌 대일본제국에 대한 내선일체(內鮮一體) 선언문 같아서 더더욱 그랬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인가, 아니면 일본의 대리 총통인가?

현대판내선일체가 아니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2가지 근거가 있다. 먼저,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독립운동은 일본에로의 내선일체화를 강요받은 전체 조선민족이 일제에 항거해낸 위대한 민족해방운동이지 당시 제국주의(전체주의) 일본에 대한 일본의 민주화운동이 절대 아니었다. 다음으로는,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독립운동은 일본에로의 내선일체화를 강요받은 전체 조선민족이 당시 제국주의(전체주의) 일본에 대해 단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 국가들이 자유에 대한 위협에 함께 대항하기 위한 이웃되기 운동도 절대 아니었다.

 

결과, 위 인식은 결국 민족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또 남북기본합의서-전문에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재확인하고, 정치·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며,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 되어 있다.-에 의한 실효적 동질성을 갖고 있는 북에 대해 적대의 끝판왕인 원수인식으로 나아간다. 일본은 이웃되고, 진작 더 손잡아야 될 북은 적이 된다.

 

인식도 이런 인식이 없다. 정말 어쩌다가 대한민국 대통령의 8.15 광복절 경축 메시지가 이 지경까지 갔는가? 연장선상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은 과연 대한민국 헌법 전문,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 계승하고(강조, 필자)”을 제대로 이해하고나 있는가?

 

10여년 전 경험을 전혀 반면교사 못한 윤석열 대통령, 또다시 헛발질

그쯤 해놓고, 본 글의 주제로 되돌아 가보자. 윤석열 대통령은 77주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북정책과 관련해 북한의 비핵화는 한반도와 동북아, 전 세계의 지속 가능한 평화에 필수적인 것이라며 북이 실질적 비핵화로 전환하겠다는 약속만 명확히 해준다면 북한에 대한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 발전과 송배전 인프라 지원 등을 실시하겠다고 하면서 국제 교역을 위한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 프로젝트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 지원 프로그램 병원·의료인프라 현대화 지원 국제 투자 및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즉각 가동시키겠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위 구상은 단 0.001%의 진도도 못 나간다. 왜냐하면 이 담대한 구상은 사실상 보수정권의 전 전임정권인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완전실패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소위 비핵·개방 3000’으로 일컬어졌던 이명박 정부의 선비핵화대북정책은 북의 대화문을 여는데 0.001%도 기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또 이 실패한정책을 들고 나온다? 정말 북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고, 대통령 본인에게 주어진 헌법적 의무인 평화통일에 대한 사명감도 0(제로)임을 제대로 증명한다.

 

왜 그런지는, 담대한 구상이 왜 종이 휴지조각에 불과한지는 2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 가능하다.

 

첫째는, 북이 현재 취하고 있는 대남인식에 대한 이해가 하나도 없다. 아시다시피 북은 지난 8차 당대회에서 북남관계에서 근본적인 문제부터 풀어나가려는 입장과 자세를 가져야 하며 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를 일체 중지하며 북남선언들을 무겁게 대하고 성실히 이행해 나가야 한다. ……(중략) 현재 남조선당국은 방역 협력, 인도주의적 협력, 개별관광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을 꺼내들고 북남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첨단 군사장비 반입과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해야 한다는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를 계속 외면하면서 조선반도의 평화와 군사적 안정을 보장할 데 대한 북남합의 이행에 역행하고 있다.” 이렇게 밝혔고, 2021929일 최고인민회의 145차 회의 시정연설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조선당국은 우리 공화국에 대한 대결적인 자세와 상습적인 태도부터 변해야 하며 말로써가 아니라 실천으로 민족자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근본적인 문제부터 해결하려는 자세에서 북남관계를 대하며 북남선언들을 무게 있게 대하고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소위 담대한 구상에서 북의 이러한 변화된 대남인식과는 전혀 호응될 수 없는 비본질적문제에 집착했고, 선비핵화하면 경제지원을 해주겠다는 체제우월적 시각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윤석열 정부는 그렇게 북과 전혀 호응할 수 없는 대척점에 서 있다. 한 가지 예만 들어도 이 담대한 구상이 왜 실패할 것임은 금방 드러난다. 북의 근본적인 문제부터 풀어나가려는 입장과 자세는 결국 남측이 한미합동군사훈련 중지 등과 같은 것을 실제 실효적으로 조치를 취해 달라는 것인데 그 정반대, 8.15 경축사 이틀 뒤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속내가 정확히 들어났기 때문이다. “(한미 연합훈련 등에 대해) 담대한 구상이라도 양보해선 안 되는 부분으로 명확히 했다. 그러고도 북과 남북관계 개선을 이뤄내겠다? 북은 전혀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를 좀 더 근원적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들여다보면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혀 실현될 수 없는 대북정책임이 정말 간단명료하게 증명될 수 있어서 그런데 다름 아닌, 북의 선비핵화를 전제한 윤석열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은 다음과 같은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다.

 

4.27판문점 공동선언문 제34항은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 북미싱가포르 정상회담 합의문 제3항에는 다음과 같이 적시되어 있다. “3. 2018427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고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바로 윤석열 대통령의 이 담대한 구상은 이 두 합의정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과거의원점으로 되돌려 버리는 것이다. 20년 전 프레임 북한 비핵화로 완전 되돌이표 해버린다.

 

나아가 9월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인 9·19 남북 군사분야 합의서 1항과 5항도 무력화시켜 버린다. “1.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상호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다양한 조치들을 강구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 ‘일체의 적대적인 행위 전면 중지신뢰구축을 위한 다양한 조치가 이뤄줘야 하는데, 한미합동군사훈련은 이 합의사항을 전면 부정하고, 2021330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상학이라는 인물이 대표로 있는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이 법을 위반해 대북전단을 살포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북은 기간 자신들이 유지해왔던 코로나 청정국지위가 무너진 데는 남북 접경 지역인 강원도 금강군 이포리에서 최초 발생한 원인 모를 바이러스가 그 주범이라 인식, 우리 남측에서 살포한 대북 전단과 물품을 코로나 유입 원인으로 지목했다. 김여정 부부장의 발언을 들어보면 이는 명확하다. "바이러스로 오염된 물품을 만진 후 눈과 코, 입을 만지면 코로나에 감염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남측 민간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 등을 '반인륜적 범죄'라고 규정하며 이미 남측을 향한 여러 가지 대응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했다. "아주 강력한 보복성 대응을 가해야 한다"고 강조함은 물론, "적들이(남측 윤석열 정부를 일컬음) 코로나가 유입될 수 있는 위험한 짓거리를 계속 행하는 경우 바이러스는 물론 남조선 당국도 박멸해버리는 것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했다.(<조선중앙통신>, 2022.8.11. 재인용)

 

이렇게 명확한 근거로 이번 담대한 구상은 첫 발짝도 띨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북이 정말 호응해 오길 바랐다면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모르고, 무식하다.

 

두 번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북은 지금 자신들의 국정운영 기조를 자력에 의한 사회주의 전면적 발전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8차 당대회에서 결정) 과거와는 다른 몇 가지 명백한 특징이 있다. 첫째는, ‘미국의 제재를 상수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과거의추상적 인민생활 향상대신, ‘도시와 농촌, 지방과 평양의 차이를 없애겠다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질 향상을 그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이 전제하에 북은 사회주의 문명국가, 사회주의 강성국가를 지향한다. 여기서 핵임은 자주이다. 그렇다. 북은 이 자주를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생각하는 그런 국가이다. 그러니 그 어렵고 엄혹한 시절에도-2의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또 남북관계가 좋던 그 어떤 시절에도, 구체적으로는 2005년 여름,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전력 200KW를 북에 지원하는 송전 제안을 북에 했지만, 당시 북은 그 어떤 조건도 없었던그 제안마저도 일언지하 거절했다. 이유가 뭐 갰는가? ‘자주의 경제적 영역인 자력을 포기할 수 없어 그랬다.

 

여기에는 2가지 의미를 매우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남북관계가 나빠져 이 전력문제를 정치적으로 쟁점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체제를 흔들려고 할 때 그때 북 자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결론을 내렸다는 것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다른 하나는 실제 벌어진 현상에 대한 총화이다.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이자 남북평화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박근혜 정권 때 박근혜 정부의 일방적 중단 경험을 보면서 북은 예의 그 심각한결론이 100% 옳았다는 것으로 총화할 수밖에 없고, 충분히 반면교사 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번 8.15 경축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또다시 그 문제, “발전과 송배전 인프라 지원을 들고 나왔다? 언감생심이다. 절대 실현 불가능한 제안이다.

 

해서, 결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연유에서 나왔던 이번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윤석열 대통령의 북을 향한 메시지, ‘담대한 구상은 북의 마음을 단 0.001%도 못 연다. 하루라도 빨리 궤도수정이 필요하고, 그래야만 그 첫걸음도 열린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굳이 그 대강을 안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근본문제 우선의 원칙에 매우 충실하라. 둘째, 용도 폐기된 선비핵화정책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라. 셋째, 외교문제는 어쩔 수 없이한미동맹관점에서 풀어 나간다하더라도 민족내부문제는 철저하게 민족공조의 관점에서 푸시라.

 

총결론은 이렇다. 북을 체제우월적 시각에서 지원대상이 아닌, 더 큰 하나의 조선민족으로 나아가기 위한 동반자로 인식하시라. 그리고 비핵화는 입구가 아닌 출구에 놓으시라.

 

정말 그러면 이 정부-윤석열 정부는 5년 내내 대북정책이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되지 않는다.

김광수 정치학 박사 통일뉴스 2022.08.17.

 

 

약자와 동행하시겠다고요?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 급락과 물난리 와중에 유난히 귀에 꽂힌 말들이 있었다. 약자, 사회적 약자, 약자와의 동행 등이 그것이다.

 

공적 부문의 긴축과 구조조정을 통해 재정을 최대한 건전하게 운용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확보된 재정 여력은 서민과 사회적 약자를 더욱 두껍게 지원하는 데 쓰겠습니다.”(윤석열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

 

대한민국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누군가는 소외받는 그늘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울시의 모든 정책은 약자와의 동행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오세훈 서울시장, 싱가포르 세계도시정상회의 2022’ 개회식 특별연설)

 

사회적 약자는 정치인들에겐 참 그럴듯한 말인가 보다. 윤 대통령이 지난 대선 제1공약으로 내세운 것도 약자와의 동행이었다. 약자와의동행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도 직접 맡았다. 오 시장도 지방선거 당시 약자와의 동행을 핵심 공약으로 강조했다. 취임식에선 약자동행지수를 개발해 정책 수립과 예산 집행 단계부터 반영하겠다고도 밝혔다.

 

그런데 출범 후 현 정부의 정책은 정반대로 갔다. 약자는 외면하면서 강자에겐 너그러웠다. 하청노동자 파업에는 손해배상과 형사처벌이 원칙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재벌 총수들은 경제회복을 앞세워 특별사면으로 족쇄를 풀어줬다.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면서도 정반대 효과를 가져올, 올해 세수 대비 5년간 누적 60조원이라는 막대한 감세안을 내놨다. 그것도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종합부동산세 삭감, 다주택자 중과율 폐지 등 대기업과 고액자산가들에게 혜택이 쏠리는 부자 감세안이다. 그러면서 76개 복지제도의 기준선이 되는 기준중위소득 인상을 두곤 재정부담론을 들어 인상률을 깎자고 했다. 결국엔 정해진 룰로 만든 원칙안으로 결정됐지만, 정부가 아끼려 했던 6000억원은 60조원에 비하면 벼룩의 간이다. 이러고도 약자와 동행하겠다고 한다.

 

물난리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주거약자 대책은 또 어떤가. 서울시는 침수피해가 큰 지하·반지하를 없애겠다고 했다가 당장 못하니 20년에 걸쳐 하겠다고 한다. 당장 내일 비 올지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20년 후의 시간표는 희망고문일 뿐이다. 공교롭게 수해 당일 오전 한강의 낙조를 즐길 수 있는 뷰 포인트를 곳곳에 마련해 해외 관광객을 늘리겠다는 그레이트 선셋 한강 프로젝트계획을 발표하면서도 오 시장은 약자와의 동행을 거론했다. 노약자나 장애인 등 약자들의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하겠단다.

 

집중호우 때 신림동 반지하 가족이 겪은 참사는 약자 보호 실패의 상징적 사건이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자 발달장애인인 언니, 10대 딸, 가족을 부양한 40대 여성 가장 등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지병이 있는 70대 노모는 함께 살던 중 입원으로 화를 면했다. 이런 절박한 상황이 주변에 널려 있는데도 서울시는 쪽방촌에 에어컨 150대 설치, 유니버설 디자인 적용 등으로 약자와 동행하겠다고 한다.

 

이러니 어떤 정책을 말해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정부·여당, 서울시에 약자란 누구인가. 약자들이 원하는 정책을 제대로, 진지하게 들어보기나 했나. 약자와의 동행을 혹시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는 그럴듯한 배경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마치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라는 솔직한 속내처럼.

 

고물가 속에 가난한 이들의 삶이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지난달 시민단체들이 기초생활보장 대상자 25가구의 가계부를 두 달간 조사한 결과는 참담하다. 외식비를 포함한 하루 평균 식비는 도시민들의 한 끼 식비도 되지 않을 8618원이었다. 두 달 동안 수산물이나 육류, 과일을 한 번도 사먹지 않았다는 가구가 각각 56%, 36%, 36%였다. 수급자들은 정해진 소득 안에서 생활하기 위해 가장 먼저 식비를 줄였다. 물난리 속에서 부자들은 차를 잃지만 가난한 이들은 집과 목숨을 잃는다. 침수피해 경험이 있는 이들은 작은 빗소리에도 잠을 설치고 문을 여닫길 반복한다.

 

약자들과 동행하겠다고? 동행에 앞서 약자 옆에 서서 그들이 바라는 것들을 듣기라도 하라. 사진기 앞에서 비스킷만 나눠주며, 60조원 감세 같은 대규모 폭탄으로 발목이나 잡지 말고. 진정성을 보여주겠다면 약자들의 불안과 걱정을 함께 느끼고 끈질기게 대책에 매달려야 한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송현숙 후마니타스 연구소장·논설위원 경향 2022.08.18

 

 

이재용 특별사면이 말해주는 것

이재용 삼성부회장은 원죄를 안고 산다. 그는 단돈 16억을 증여세로 내고 삼성그룹 지배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의 보유지분은 단 한 주도 줄지 않았으며 이재용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경영권 무세승계 의지와 비서실의 무세승계 전략에 따라 계열사들이 헐값발행 등 배임행위를 마다지 않고 움직여준 덕분이었다. 무세 경영권 승계는 평생 안고가야 하는 이재용의 원죄다.

 

오래됐다. 이건희 회장은 1996년 말 지주회사격인 에버랜드의 지배지분을 이재용에게 헐값에 전환사채형식으로 신규발행해준 후 1999년에는 에버랜드에 삼성생명의 지배지분을 몰아준다. 이로써 이재용-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전기-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지배구조가 완성돼 이재용이 그룹경영권을 통째로 획득한다. 그 후 에버랜드가 제일모직에,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으로 흡수 합병되는 약간의 변화가 뒤따랐지만 이는 이재용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원죄의 후과는 끈질기다. 달랑 증여세 16억을 내고 삼성그룹 경영권을 통째로 넘겨받은 결과는 누구의 눈에도 정의롭지 못하다. 오직 이재용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 기회균등이 있을 수 없다. 경영권 무세승계라는 불법목적을 위해 법적절차를 모두 오염시켰기 때문에 공정절차라는 게 불가능했다. 당연하게도 지난 25년 동안 숱한 비난과 지탄, 수사와 재판이 계속됐다.

 

민주화가 진행된 덕에 삼성총수의 원죄를 완전히 덮을 수는 없었다. 20006월 일군의 법학교수들이 정치한 논리와 법리를 동원해 검찰에 공식 고발장을 냈고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 진보언론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상식과 원칙이 승리할 때가 없지 않았으나 삼성의 금력과 성공신화 앞에서 빛을 잃은 때가 훨씬 많았다. 심지어는 삼성의 경영권 무세승계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잡아떼며 1심 형량을 대폭 낮춰준 2심 재판부도 있었다.

 

 

1997년 원죄가 드러난 이후 정권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청와대의 주인들은 예외 없이 묵언수행으로 일관했다. 국회도 편법상속 조사청문회 한번 열지 않았으며 사법부도 경영권 무세세습 맥락엔 눈을 질끈 감고 최대한 봐주기 판결을 내렸다. 그 덕에 삼성부회장 이재용은 원하는 건 뭐든지 이뤄지는 세상을 살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원하는 게 무엇이든 한국의 정치와 언론, 사법이 합심해서 어떻게든 이뤄주는 환상적인 세상을 살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이재용이 원하므로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연금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게 했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는 불공정합병과 분식회계 건에 대해 불기소와 수사중단을 권고했다. 문재인 정부는 가석방규정을 고쳐서 최대한 빨리 가석방을 해줬다. 나아가서 무보수/비상근/미등기 임원은 취업제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행정해석으로 이재용의 부회장=총수 활동을 눈감아줬다.

 

지난 812, 윤석열 정권은 드디어 이재용을 특별사면해서 복권시켰다. 박영수 특검의 지휘를 받아 윤석열-한동훈 수사팀이 잡아넣었던 국정농단 뇌물사범 이재용을 서둘러 복권시킨 것이다. 이재용은 현재 제일모직-삼성물산 불공정합병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는 중이고 그 일환인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과 증거인멸 혐의도 만만치 않다. 이번에 특별사면 해준 이재용을 불공정합병 재판의 결과로 1,2년 안에 다시 교도소로 보내게 된다면 이번 특별사면의 의미가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1997년 원죄가 드러난 이후 정권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청와대의 주인들은 예외 없이 묵언수행으로 일관했다. 국회도 편법상속 조사청문회 한번 열지 않았으며 사법부도 경영권 무세세습 맥락엔 눈을 질끈 감고 최대한 봐주기 판결을 내렸다. 그 덕에 삼성부회장 이재용은 원하는 건 뭐든지 이뤄지는 세상을 살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원하는 게 무엇이든 한국의 정치와 언론, 사법이 합심해서 어떻게든 이뤄주는 환상적인 세상을 살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이재용이 원하므로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연금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게 했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는 불공정합병과 분식회계 건에 대해 불기소와 수사중단을 권고했다. 문재인 정부는 가석방규정을 고쳐서 최대한 빨리 가석방을 해줬다. 나아가서 무보수/비상근/미등기 임원은 취업제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행정해석으로 이재용의 부회장=총수 활동을 눈감아줬다.

 

지난 812, 윤석열 정권은 드디어 이재용을 특별사면해서 복권시켰다. 박영수 특검의 지휘를 받아 윤석열-한동훈 수사팀이 잡아넣었던 국정농단 뇌물사범 이재용을 서둘러 복권시킨 것이다. 이재용은 현재 제일모직-삼성물산 불공정합병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는 중이고 그 일환인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과 증거인멸 혐의도 만만치 않다. 이번에 특별사면 해준 이재용을 불공정합병 재판의 결과로 1,2년 안에 다시 교도소로 보내게 된다면 이번 특별사면의 의미가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장관은 검사시절 자신들이 수사해서 기소한 이재용이 불공정합병 건과 분식회계 건으로 처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무죄라고 생각하는가? 윤석열 정권은 도대체 이재용의 원죄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여전히 작은 재벌들은 이재용을 벤치마킹하며 기를 쓰고 무세 경영권세습을 도모한다.

곽노현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 전 서울시교육감 경기 2022.08.18

 

표절 사회의 풍경

1.말복이 지났다. 폭우와 염천(炎天)이 교대로 세상을 때리고 있다. 이 와중에 김건희 씨 논문 표절 문제가 사람들의 분노지수를 치솟게 만들고 있다. 지난 81일 국민대가 발표를 했다. 그녀의 2007년 학위 논문을 포함한 모두 4편의 논문에 대하여 표절이 아니거나 검증불가라고. 수여된 박사학위에도 문제가 없다는 판정이다.

 

과연 그런가?

2018717일 대한민국 교육부는 훈령을 공표했다.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이란 제목이다. 이 훈령의 제 3장 제 12조는 표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린다. “일반적 지식이 아닌 타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 또는 창작물을 적절한 출처표시 없이 활용함으로써, 3자에게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행위”.

 

국민대는 박사학위 논문심사 청구 자격으로, 전문학술지 및 학술대회 발표 논문 3편의 사전 게재를 요구한다. 김건희 씨가 이 같은 요건 구비를 위해 발표한 3편의 논문 모두가 심각한 표절의혹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한글 '유지'를 엉터리 영어인 'Yuji'라고 번역해서 제목으로 올린 논문을 보자. 본문의 5단락, 각주 3개가 특정 신문 기사와 토씨까지 동일하다. 그런데도 일체의 인용 및 출처표기가 없다. 이 논문을 대상으로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돌려보니 표절률이 무려 43퍼센트로 나왔다.

 

2.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박사 학위 논문도 이에 모자라지 않다. 언론 기사를 거의 그대로 베껴 적거나, 다른 사람 블로그에 있는 문장을 인용표기 없이 옮겨 적은 것이 한두 건이 아니다. 해당 학위논문의 직접적 표절 피해자인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는 방송에 나와서 이렇게 지적했다.

 

문제의 박사학위 논문의 21절을 보면 3~4쪽 정도가 100% 똑같다는 것이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베껴 썼고, 심지어 구 교수 논문에서는 본문에 기술한 문장을 각주로 가져가서 자기가 쓴 것처럼 위장했다. 이처럼 논문 작성에 있어 출처를 숨기면 정신적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이 어이없는 사태를 묵과할 수 없어 13개 교수연구자 단체가 뜻을 모았다. 85일 기자회견을 열고 공동성명을 통해 논문표절을 통렬히 규탄한 것이다. 한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사교련), 전국국공립대학교수회연합회(국교련), 한국사립대학교수노동조합, 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 민주평등사회를위한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민교협 2.0), 전국교수노동조합,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등이다. 이들 단체의 회원 범위에는 대한민국 거의 모든 교수연구자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성명 참여 규모는 그만큼 교수연구자들의 모욕감이 깊다는 증거다.

 

3.13개 교수연구자 단체가 발표한 공동성명 제목은 대학의 불이 꺼지면 나라의 불이 꺼진다이다. 대학이야말로 공동체의 상식과 윤리 타락을 막아내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학문공동체 존립의 기초가 되는 학위 수여에 있어 정당성이 부정된다면 대학은 더 이상 대학일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 공동성명에 참여했던 단체를 중심으로 전공과 계열을 뛰어넘은 <범 학계 국민검증단>이 구성,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최대한 신속한 조사를 마친 후 <표절 논문 및 은폐 실상에 대한 대국민 보고회> 개최를 예고했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논문 표절의 팩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표절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음에도, 해당 문제가 어두운 구덩이에 파묻히는 현실에 대한 조명이다.

 

국민대와 숙명여대는 백일하에 드러난 논문 표절에 대하여 심각한 무리수를 두고 있다. 특히 국민대는 세상을 뒤흔든 이 같은 발표를 감행하고도 표절 관련 재조사위원회 구성과 논의 과정, 회의 자료, 최종 보고서 등의 공개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만약에 존재한다면) 외부 압력을 포함한 진상 묵살 정황에 대한 진실이 반드시 밝혀질 필요가 있다. 그러한 총체적 시스템에 대한 규명 없이 이번 사태는 결코 마무리되지 않을 것이다.

 

4.

다시 구연상 교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202281일 전까지 한국 학계의 논문 검증 시스템을 믿었고, 명백한 표절 논문이 표절 아님으로 판정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국민대의 틀린 결론앞에서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91일부터 마주하게 될 나의 수강생들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김건희 씨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그녀 스스로가 (국민대에) 학위취소 요청을 하라고 촉구한다.

 

누가 이를 과하다고 비난하겠는가.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도, 그녀에게 수여된 숙명여대와 국민대 학위 논문은 취소되어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교수연구자들의 분노가 땅을 울리고 있다. 이런 분노에 말굽쇠가 울리듯 공명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원칙과 지조가 증발한 공동체다. 이것이 김건희 씨 논문 표절 논란을 지켜보는 교수연구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김동규 동명대 교수 경기 2022.08.18.

 

 

맞는 말' 윤석열이 빠진 함정, 정치 외면하는 건 정치인이 아니다

국민이 알고 싶은 것에 대답해야 소통

국민들은 지난 정권들에서 살아있는 권력을 의식하지 않았던 윤석열 대통령의 강단과 기개에 매력을 느꼈다. 진보정권의 내로남불과 독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무한 정치경험, 여의도와의 인연의 부재가 정치의 지평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컸다.

 

유독 통합과 협치를 강조하는 대통령의 언어에서 확신을 가졌고, 품이 넓은 대통령이 고질적이고 판에 박힌 여의도 정치의 문법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보았음직도 하다. 그러나 정치문법을 바꾼다는 것이 정치를 배제하고 관료의 전문성을 과도하게 앞세우는 전문가주의를 앞세우라는 의미는 아니다.

 

권력은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다. 이를 바탕으로 민생도 챙기고 이전의 잘못된 정책도 바꿀 수 있다. 힘은 선거 때 국민의 선택에서 나오고, 선거 국면이 아닐 때는 지지율에서 나온다. 20%대의 지지율로는 정권이 지향하는 바를 실천해 나갈 동력을 공급받을 수 없다. 야당의 공세는 당연히 거세질 테고, 더구나 지금은 야당이 압도적 다수다. 정치가 작동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정치가 소모적이고 불필요하며 비효율적이란 인식은 관료주의의 폐해다. 정치가 불신받고 외면받는 것은 정치실종과 정치부재에 기인한다.

 

지금은 정치적 득실을 따져야 할 때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인적쇄신도 해야 하고 국면전환과 지지율 반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는 여론이 형성한 흐름에 반응하고 이를 지향함으로써 대의와 명분을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정책과 실천을 모색해 나가는 작업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갈등을 소통과 타협으로 해소해 나가고 접점을 공유해 나가는 과정이 정치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정치를 애써 외면했다.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 첫머리 20분간 경제 사회 외교에 대해 설명했다. '성과'가 알려지지 않고 부정적 면이 지나치게 부각된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애써 강조한 성과들보다 국민과 언론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대통령은 답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이탈한 이유에 대한 질문에 나름의 진단과 이유를 밝히지 않았고, 인사문제 개선방안에 대해서도 정치적 국면 전환이라든지 지지율 반등이라는 그런 정치적 목적으로 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준석 전 대표의 윤 대통령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다른 정치인들의 정치적 발언을 챙길 기회가 없고"로 답했다. 지지율 하락의 중요한 원인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은 것이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은 솔직하지도 정치적이지도 않다. 정치인은 '정치적'이어야 한다. 통합도 협치도 정치의 영역이다. 여의도 정치를 혐오하는 것은 정치적 명분을 위장하여 자신들의 속물적 이익을 챙기는 것 때문일 뿐이다.

 

윤 대통령은 "분골쇄신하겠다", "대통령실부터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짚어보고 있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국정전반을 되돌아보겠다는 각오도 보였다. "국민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한치도 국민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국민의 뜻을 잘 받들겠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민심 이반의 원인 진단과 반성, 구체적 현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추상적이고 원론적 회견이라는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변화라는 것은 결국 민생을 챙기고 국민안전을 꼼꼼히 챙기기 위한 것이어야지, 어떤 정치적 득실을 따져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확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에는 중대한 함정이 있다. 정치적 지지율이 받쳐주지 않으면 민생을 챙길 권력도, 국민안전을 챙기기 위한 추진력도 무력해 진다는 결정적 함정이다.

 

소통 없이는 협치와 통합은 불가능하다. 국민이 알고 싶은 것에 대해 성실히 대답하고 잘못된 판단과 처방이었다면 개선해 나가는 것이 소통의 요체다. 정치에 왕도(王道)는 없지만 왕도정치는 있다. 이의 기본은 국민과 여론에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답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만기(萬機)를 친람(親覽)할 수 없다. 그래서 대통령은 '정치'를 해야 한다. 대통령이 발화하는 언어에서 통합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고언(苦言)과 여론에 탄력적이고 유연할 때 정치가 살아날 수 있다.

 

정권 출범 100일의 위기는 극복 가능하지만 더 지체했다간 실기(失機)할 수 있다. 야당은 탄핵을 꺼내기 시작했다. 곧 구성될 더불어민주당의 지도부는 역대 어느 야당에 비해서도 강성이다. 이에 가장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무기는 국민의 눈높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 그러나 그 정치는 즉자적(卽自的)이어서는 안 되고 대자적(對自的)이어야 한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 프레시안 2022.08.19.

 

유럽은 올겨울이 두렵다는데, 우리는?

에너지 돌봄 국가가 있다면 한국일 것이다. 전기와 가스 요금이 아주 싸다. 주택용 전기는 관련 통계가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4곳 중 네번째로 저렴하다. 각국 평균 요금의 61% 수준이다(산업용은 88%, 2020년 기준). 도시가스 요금도 산유국인 영국의 절반 정도이다. 올해 들어 국제유가와 가스값이 급등하자 여러 나라가 전기·가스 요금을 많게는 두배까지 올렸는데, 우리 정부는 물가안정과 산업경쟁력을 앞세우며 늘 신중한 자세이다.

 

이대로 계속 가면 좋겠지만 무리이다. 그 비명이 터지는 곳이 한국전력의 천문학적 적자이다. 한전은 상반기에 143천억원의 영업손실을 봤다. 올해 적자가 최대 30조원에 이르리란 예측이다. 지난해 적자 59억천원은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 한전 적자는 연료비 상승분을 요금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서이다. 원가 연동제를 2020년 말부터 시행하기로 해놓고, 정부 스스로 유명무실하게 운영한다.

 

싼 도시가스도 한전 적자에 일조한다. 가정용을 저렴하게 공급하고 이를 발전용에서 회수하는 교차보조때문이다. 연탄가스로 해마다 2천명이 사망하던 1980년대, 도시가스 보급을 촉진하려 만든 가격정책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보급된 지금도 살아남아 에너지 시장을 왜곡한다.

한전 적자의 불똥은 금융시장으로 튀었다. 올해 회사채 시장은 한전채에 휘둘렸다. 적자 내는 한전이 운영자금을 조달하려 한전채를 밀어내듯 발행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올해 6월 말까지 1년간 순증 발행액만 21조원이다. 정부를 믿고 사는 초우량채권(AAA)4% 가까운 이자를 주니 돈이 빨려 들어간다. 우량 대기업마저 회사채 발행 시장에 선뜻 나서기 어려운 돈 가뭄에 조달 금리도 훌쩍 올랐다. 이런 구축 효과가 계속되면 기업 자금조달비용이 증가하고 투자가 위축될 수도 있다.

 

물론 적자가 곧 파국은 아니다. 관망하다 연료비가 내려갈 때 요금을 동결해 앞선 손해를 벌충하는 방법도 있다. 2013~2016년에 그렇게 했다. 정부가 기대하는 최선의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국제정세와 에너지 시장이 돌아가는 모양은 그런 기대를 배신할 듯하다. 국제유가는 약간 고개를 숙였지만 국내 발전원의 30%를 차지하는 천연가스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 지금 가격은 원유로 치면 배럴당 400달러 수준으로, 지난 10년 평균 가격의 10배 수준이다.

 

우울한 것은 국제에너지기구(IEA) 같은 데서 이런 미친 가격이 앞으로 몇년 더 가리라 보는 것이다. 유럽은 자원 무기화에 맞서, 수요의 40%를 의존하던 러시아산 가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이 물량은 미국, 카타르 등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이 시장에서 중국·일본·한국과 유럽의 피 터지는 물량 쟁탈전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공급이 금방 늘 가능성도 없다. 유럽이 러시아산의 3분의 1을 대체하려는 미국 셰일가스의 경우, 수출을 위한 터미널 건설에 4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은 지금 가뭄과 폭염에 시달리면서도 몇달 앞의 겨울을 더 걱정하고 있다. 가스를 배급하게 될지 모를 국가 비상사태라는 긴장감을 갖고 대응하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의 장관들은 각국의 올겨울 가스 소비량을 15% 줄이기로 합의했다. 스페인은 겨울 난방온도를 19도 이하로 내리도록 못박고, 독일 뮌헨은 피크 시간이 아니면 신호등도 끄는 등 애처로운 에너지 절감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원가를 반영한 요금 인상으로 소비절약을 유도하기도 한다. 네덜란드는 에너지 가격 인상으로 올해 5월까지 소비가 전년 대비 30%나 줄었다.

 

이에 견줘보면 우리는 정부나 민간이나 아직 평온해 보인다. 탈원전이 정치화되면서 전기요금에 대한 투명한 대응이 안 되는 것은 전 정권이나 현 정권이나 매한가지이다. 전기·가스 요금이 원가와 따로 놀다 보니 가격의 수요조절 기능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에어컨을 켠 채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중국산 냉동고추를 들여다 저렴한 농업용 전기로 건조하는 등 비싼 원료로 만들었을 전기를 부담 없이 쓰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이 중요해지면서 싼 에너지가 복지인 시대도 저물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은 가격은 시장기능에 맡기고, 에너지 취약계층만 따로 지원한다. 한전 적자는 올해 말쯤 적립금이 바닥나면 정부가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쓰레기를 물가안정이란 양탄자 밑으로 밀어 넣고 있는 셈이다. 유럽의 겨울, 우리에겐 먼 나라 일일 따름인가?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한겨레 2022-08-21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열역학적으로 말하면, 완전한 열적 평형 상태다. 불교식으론 더 이상 들고 남이 없는 적멸의 상태일 테다. 뇌과학적으로는 뇌의 전기적 정보 활동이 끝나는 것이다. 뜨거웠던 사랑의 시간과 성공의 환희는, 스치듯 지나간 뇌의 전기 폭풍 흔적이다. 죽음은 또 시공의 속박에서 풀려나 이 세계로부터 로그아웃되는 것이며, 일생 동안 꾸미고 전시해온 자아가 완전하게 소실되고 이야기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적 윤회가 있다 하더라도 이번 생과 다음 생 사이에 이야기의 연속성은 없다. 삼도천을 건너면 이승의 모든 정보가 포맷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생의 업보를 따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삶은 우연하게 새로울 뿐이다.

 

삶에는 기쁨의 크기만큼 고통이 늘 따른다. 삶을 유지하는 일은 꽤나 힘들다. 매 순간 먹을거리를 찾아야 하고, 각종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좋은 평판을 얻고 좋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신적·감정적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다 간혹 관계에 실패하면 관계의 지옥에 빠진다. 인간의 비루한 욕망들이 관계의 균형을 이루고 품위를 갖추는 일은 참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힘겹게 수행하고 나면, 약속처럼 죽음이 찾아온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금언처럼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모든 괴로움에도 마지막이 있다는 생각이 종종 삶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지난 2015년 간호사 출신의 75세 영국 여성 질 패로는 "내 삶이 다했고 죽을 준비가 됐다고 느낀다"며 스스로 안락사를 택해 화제가 됐다. 대상포진을 잠시 앓았을 뿐 건강에 별 이상이 없는 노년이었다. 그는 "보행기로 앞길을 막는 늙은이가 되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안락사를 위해 동행해준 남편과 라인강변에서 조용히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나는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질 패로처럼 삶의 마지막 스위치를 스스로 내릴 수 있는 품위에 대해 생각한다.

 

오래전 출간된 스티브 잡스 평전에 인상적 사진이 하나 있었다. 대부호의 거실엔 어떤 집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디오와 스탠드 등, 그리고 방석 하나가 전부였다. 잡스는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이 극단적 미니멀리즘이 잡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압축해 보여줬다. 용맹정진하는 스님들 방처럼 삶의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의 멘토가 일본의 선승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늘 생사를 겹쳐 두고, 삶에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다.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그의 명연설에도 그런 생각이 나온다. 그는 죽음이 삶을 새롭게 하고, 또 죽음을 염두에 두면 삶의 잔가지들이 떨어져 나가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는다고 말했다.

 

내가 작사한 정미조의 노래 '바람같이 살다가(2020)'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떠나는 그 날에 / 내가 두렵지 않도록 / 오직 자유로움만이 내 마지막 꿈이 되길." 노래처럼 내 마지막 순간이 두렵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광막한 우주적 우연 속으로 자유롭게 사라질 수 있길 바란다.

 

이번 여름 나는 어머니에 이어 큰누나와도 사별했다. 우리는 각자 우연한 삶을 얻었지만 기적처럼 가족이 됐다. 사랑의 기억만 남긴 채, 두 분이 다시 우연 속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모든 욕망의 굴레를 벗고 자유와 안식을 얻었으리라 믿는다. 언젠가 너른 무욕의 바다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이주엽 작사가·JNH뮤직 대표 한국 2022.08.22

 

 

 

정의롭지 못한 미국을 보는 착잡함

미국의 ‘2022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미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워 온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번 배반한다. 이번에 훼손된 보편적 가치는 인류공영을 위한 자유롭고 공정한 교역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2017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일방 탈퇴함으로써 글로벌 지도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을 스스로 훼손했다. 하지만 이번 감축법을 통한 자유무역 가치 훼손은 기후협약 탈퇴 못지않은 폭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이라면 미국이 민주주의 운운하며 중국을 비난한들 어떤 바보가 동조하겠는가.

 

지난 16일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된 감축법의 목적은 역대급으로 치솟은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구조적으로 완화하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대표적 변수인 에너지의 경우, 3,690억 달러(480조 원)를 투입해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적극 확대함으로써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고 에너지 가격 안정과 온실가스 감축 목표 이행을 동시에 이루고자 한다.

 

에너지 안정화와 함께 인플레 감축을 위한 또 다른 구조적 조치는 공급망 재편이다. 그동안 미국은 글로벌 밸류체인의 정점에서 생산설비를 아웃소싱함으로써 비용을 낮추고 더 많은 이익을 누려 왔다. 그 결과 자본 이익은 극대화했지만, 수입 인플레이션 위험이 높아지게 됐다. 미국 내 일자리가 줄고 소득양극화가 심화되는 부작용도 빚어졌다. 감축법은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소재와 부품 공급, 생산기반 등 밸류체인 전체를 미국 내에 재구축하는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이 대목이다. ·반도체 전쟁단계만 해도 미국의 목표는 미국이 보유한 첨단기술의 불법적 중국 유출, 중국의 반도체 소재·부품의 무기화 등을 막기 위한 우방국 간 반도체동맹구축이었다. 이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되, 우방국 간 국제분업체제는 인정하는 조치였다. 하지만 감축법에서는 미국 내 전기차 구매자에게 적용하는 대당 최대 7,500달러(1,000만 원)의 구매 보조금 지원(세금 감면) 대상을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로 한정함으로써 외국산 완성 전기차에 대해 실질적 무역장벽을 구축한 셈이 됐다.

 

사실 미국에서 팔려면 미국 내에서 생산하라는 식의 노골적 일방주의는 전기차에만 적용되고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반도체와 배터리 등에서도 미국 내 생산이 아닐 경우 차별적 대우가 예고돼 각국의 생산기지가 미국으로 급격히 이전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당장 지난해 우리나라의 미국 직접투자가 2020년 대비 83.4%나 폭증한 278억 달러에 달하고,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부터 SK하이닉스, LG전자, 현대·기아차 등 우리 글로벌기업들의 대규모 미국 투자계획 발표가 잇따르는 것만 봐도 추세는 뚜렷하다.

 

감축법은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바이든 정부와 민주당 득표에 크게 기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자유무역 증진을 위한 FTA 규정상 내국인 대우 원칙과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인 최혜국 대우 원칙등과 정면 충돌하며 글로벌 자유무역의 근간을 뒤흔들 위험이 크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일찍이 정의로운 보편적 가치야말로 국제관계에서 자발적 동의와 지지를 이끄는 매력으로서 소프트 파워라고 간파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체제 선도국으로서 그동안 소프트 파워 1위국 자리를 굳건히 유지해왔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 이래 미국의 소프트 파워는 급속히 소실되어 가는 느낌이다. 전락하는 미국의 모습도 착잡하지만, 정작 걱정인 건 세계가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잃고 갈등과 투쟁이 만연하는 야만의 시대로 점차 회귀하는 듯한 상황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한국 2022.08.22

 

 

어버이의 나라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쿠데타다. 쿠데타로 왕좌를 빼앗은 자는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이고 빼앗긴 자는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이다. 조카에게 왕좌를 빼앗긴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자들은 쫓아낸 광해군의 죄상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중국을 섬긴지 2백여 년,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관계요 은혜로는 부모와 자식관계로다. 그러함에도, 배은망덕한 광해군은 천명을 어기고 오랑캐에게 투항하는 대역죄를 범하였음이라.” ()과 후금() 사이에서 관형향배(觀形向背)하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사정이 그러하였으니, 쿠데타로 등극한 인조가 숭명반청(崇明反淸)’을 부르짖은 건 당연했다.

 

인조와 쿠데타 세력은 명나라를 끔찍이도 추앙했다. 추앙의 정도가 어찌나 지극하던지, 왕은 명나라 황제의 신하이기를 자청했고, 쿠데타 주역들은 명나라 황제의 자식이기를 갈망했다. 신하이자 자식의 눈에 청나라가 제대로 보일 리 없었다. 그들에게 청()은 오랑캐에 불과했다. 아버지 나라를 도와 청()과 싸우겠다던 인조는 전쟁이 일어나자 궁을 버리고 도망치기 바빴다. 도망칠 때, 인조는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감고 닫은 왕의 마음에 백성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두 번째 쳐들어왔을 때, 남한산성에 숨어있던 왕은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항복했다. 항복한 왕은 청나라 황제를 향해 세 번 큰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찧었다.

 

세자와 함께 60만 명의 백성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그중 50만 명이 여성이었다. 몸값을 치르고 살아 돌아온 여성들은 극히 일부였다. 대부분 양반집 아녀자들로 실록(實錄)에 기록된 속환녀(贖還女)가 그녀들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로 불리다가 화냥년의 어원이 되었다는 주장은 헛소리다. 정절을 잃었다며 이혼을 요구한 사대부들의 비겁과 다를 게 없다. 부끄러워야 할 자는 그녀들이 아니라 왕과 사대부들이다. 사대주의(事大主義)와 당파에 찌들어서 전쟁을 막지 못한 왕과 사대부의 잘못이다. 제 목숨 부지하겠다고 아내와 딸과 누이와 만백성을 인질로 잡힌 그자들이 문제다.

 

안타깝게도, 400년이 지났지만 그자들은 여전하다. 위안부 할머니를 가리키며 창녀라고 비웃는 자들이 그렇고, 성조기를 흔들며 맹목적으로 미국을 섬기는 대한국민이 그렇고, 선제타격 운운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는 정치집단이 그렇고, 광복절 축하연설에서 일본은 자유를 위해 함께 힘을 합쳐야 하는 이웃이라 선언하는 대통령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관심사에 백성은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당파싸움을 하며, 미국의 신하가 되기를 갈망하고 아버지의 나라로 모실 것을 맹세한다. 그러니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과의 균형외교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전쟁이 일어나면 어버이의 나라 미국이 다 알아서 막아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데.

 

백성이 다 아는 걸 왕과 신하들이 왜 모를까. 명분은 허울이고 이익이 본질인 것이 전쟁임을. 러시아가 그렇고, 중국이 그렇고, 미국과 일본 또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음을. 선거에서 이기고 자신들의 패거리가 다시 집권할 수만 있다면, 전쟁 아니라 전쟁 할애비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백성의 눈에 빤히 보이는 상식이 왕과 신하들의 눈에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

고향갑 극작가 경기신문 2022.08.22

 

중산층의 집짓기, 로망과 욕망

4월 말에 시작한 집짓기가 사실상 끝났다. 지난 금요일 오전에 입주청소가, 오후에 대강의 조경공사가 끝났다. 사소한 마무리 공정들이 조금 남았고 이사는 한참 뒤 일이지만, 사람이 살 만한 집이 됐다.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두었더니 훌륭한 작업실이 됐다. 당분간 두집 살림이다.

일하던 이들이 모두 떠난 금요일 오후, 혼자 새집에 있는데 폭우가 왔다. 장대 같은 빗줄기를 뚫고 출판사에서 퀵 배송으로 보내준 내 신간이 도착했다. 인쇄소에서 갓 나온 책들을 새집의 첫 택배로 받았다. 직장을 그만둔 지 2년 반 남짓 지나서 책을 내고 집을 지었다. 철들고 세상 물정 알게 된 뒤에 정원 딸린 단독주택에 사는 꿈을 꿔본 적이 없다. 엄두를 내본 적이 없으니 로망이라고 하기조차 어렵다. 지난 금요일, 나는 그 로망을 이룬 사람이 됐다.

 

지금 사는 수도권 외곽의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이 8년 반쯤 전. 재계약 때마다 치솟는 서울 전세가를 감당하지 못해 탈진 상태였다. 여기 온 것도 운이 좋았다. 수도권이라고는 해도 외곽인데다 개발 중에 금융위기로 큰 타격을 입은 곳이었다. 그래도 애초 분양가는 엄두를 낼 수준이 아니었다.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으며 미분양 단지들이 나왔다. 와 보니 허허벌판에 선 아파트였다. 신도시가 아니라 신시골같았다. 대폭 할인가라 서울 전세금에 조금 보탰더니 전세살이 불안과 이별할 수 있었다. 출퇴근 시간 길어져 몸은 힘들어도 맘 편하게 살게 되어 좋았다.

 

그리고 우연히 동네살이가 시작됐다. 동네살이의 중심은 아파트촌이 아니라 인근의 단독 및 다세대주택 지구다. 이런저런 가게들, 모임 장소들이 있고, 담장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다. 거기서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며 놀다 보니 우리 동네처럼 친근해졌다. 예쁘고 소박하게 단독주택 짓고 사는 이들과 어울리면서 시나브로 새로운 로망이 생겼다. 저런 집 지어 살고 싶다는.

 

단독주택 사는 이들이 말렸다. 여러모로 불편하고 아파트가 최고라며. 그런 당신들은 왜 집을 지었냐고 물으면 웃었다. 한 이웃은 단독주택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파트에선 아침에 일어나면 얼른 씻고 먹고 출근하는 게 전부잖아요? 여기선 아침에 깨어나면 일단 마당으로 나가요. 정원도 걷고 꽃하고 나무에 물도 주죠. 5, 10분이 천국 같아요.” 또 누군가는 말했다. “담장이 낮으니까 지나가다 서로 보게 돼요. 눈인사만 할 때도 있고, 같이 차 한잔할 때도 있고. 그러다 밥도 먹고 술도 먹고.” 굳이 약속한 이벤트가 없어도 이웃생활이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로망은 부푸는데 희망은 멀어졌다. 우리 아파트를 팔아봐야 땅값도 치르기 힘든데 직장까지 그만뒀으니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이 외진 동네까지 부동산값 폭등의 물결이 닥치며 느닷없이 사정이 변했다. 단독주택 쪽 택지도 조금 올랐지만 아파트 폭등과는 차이가 컸다. 덕분에 아파트를 팔면 얼추 땅 사고 집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지난해 초 땅을 사고 올해 집을 지었다. 아파트도 팔려서 이제 이사만 남았다. 글로는 옮기기 힘든 행운들이 겹쳐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겹치니 두렵기까지 하다. 부동산값 폭등으로 많은 이들이, 집 없는 이웃들이 고통받던 때 나는 단독주택 건축이라는 중산층의 로망을 실현하게 됐다. 물론 대가가 없지는 않다. 단독주택은 집값이 오르기를 기대해선 안 된다. 이번에 얻은 엉겁결의 이익 따위는 앞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마음만은 더욱 완연한 중산층이 된 것 같다. 나는 그 욕망의 레이스에서 확실히 빠져나왔다는 자부심 섞인 안도감 같은 것 말이다.

 

집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를 갖는 일이다. 그 집이 속한 세계의 일부를 가지면 그 세계 전부가 달리 보인다. 자가소유계급이 보수화되는 이유다. 집을 짓는다는 건 어떻게 같고 다를까? 자가소유라는 점은 같다. 그만큼 지킬 게 많아진다. 차이도 있다. 집을 짓는 딱 그만큼은 세계를 짓게 된다. 아파트가 소유자의 욕망을 실현한다면, 단독주택은 거기에 약간의 로망 실현도 덧붙인다. 집 가진 평범한 중산층일 뿐이지만, 무언가 자기만의 의미를 집에 부여하고 투영할 수 있다. 소유욕을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포장하고픈 또 다른 욕망일 수도 있겠다. 다 갖고 싶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 결과가 지금의 집이다.

 

우선 작은 집을 콘셉트로 삼았다. 건평 72.7(22). 보기에 따라 그리 작은 집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건폐율 10.3%라고 하면 아는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덕분에 건축비를 크게 아꼈다. 집이 작으니 욕조 포함 여러 편의시설이 사라졌다. 소파도 없어지고, 수천권의 장서도 절반 아래로 줄여야 한다. 불편한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대신 큰 마당이 생겼다. 잔디밭, 주차장 따위를 만들고도 꽤 넓은 터가 남아 텃밭으로 가꾸기로 했다. 남의 텃밭농사도 즐거워하던 처는 지금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

 

우리 집을 지은 시공 책임자는 바로 앞집에 사는 이웃이다. 본업이 있지만 자기 집을 직접 지었고, 취미 삼아 다른 작은 집도 지었다. 취미를 전업으로 바꾸려던 참에 우리와 이야기가 됐다. 그에게 다 맡겼다. 집 지으면 10년 늙는다는데 신뢰가 깊으니 오히려 유쾌한 경험이 됐다. 공정마다 여러 팀의 노동자들이 수고해줬지만, 종종 이웃들이 일손을 보탰다. 이웃이 지어준 집도 새집의 콘셉트다. 여기서 이웃살이를 하게 된다.

 

이렇게 집짓기의 윤리적 의미를 꿈꾸며 열중하던 와중에 큰 물난리가 났다. 집은 비 한 방울 새지 않고 튼튼했다. 서울에서는 반지하에 살던 세 가족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났다. 내가 여기로 이사 오기 전 20년 이상 살던 동네다. 거기 살던 동안 나는 대부분 달동네 꼭대기에 살았다. 침수 걱정은 없었다. 늘 내려가 평지에 사는 꿈을 꿨다. 내려가다 보면 더 내려간 반지하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난 금요일, 막 지은 집에 혼자 앉아 갓 인쇄되어 나온 내 신간을 펼쳐 읽었다. 서문의 마지막은 1980년대 말, 사당동 철거촌 투쟁에서 백골단과 철거용역이 진압할 때 도망치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부끄럽게 도망친 나는 이제 정원 딸린 단독주택을 가진 완연한 중산층이 됐다. 중산층인 채로 양심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건 좋은 일이다. 양심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한 세상이 집 밖에 있다. 착한 사람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렇게 모진 것은 아닐 것이다, 불편한 말, 위험한 정치가 필요한데 집이 너무 편안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밖에서는 억수같이 계속 비가 내렸다.

조형근 | 사회학자 한겨레 2022.08.23.

 

 

김건희 논문 사태와 대학·교수의 부끄러움

19일 국민대 교수회가 김건희 여사 논문들에 연구부정이 없었다는 학교 쪽 발표에 조사과정을 공개하라는 요구도, 자체 검증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합리적이고 명확한 규명을 기대했던 국민에게는 다소 맥 빠지는 일이다. 앞서 교육부 또한 지난 9일 국회 교육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대학의 검증 시스템을 존중한다며 대학에 떠넘기는 태도를 보였다. 미성년 자녀들의 부모 논문 공저자 등재 문제가 불거지자 대학들에 전수조사를 요구하고 자료를 제출받아 검증, 공개했던 3년 전 행보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국민대와 교육부의 이런 태도도 문제지만, 학계 또한 김명신(당시 논문 저자명)씨의 부실하고 부정한 논문이 나오게 될 수 있었던 원인을 짚어보고 각성해야 한다.

 

문제의 ‘member Yuji’ 논문은 <한국디자인포럼> 학술지에 김명신과 지도교수 전승규, 2인 저자로 게재됐다. 논문이 학술지에 투고되면 주장하는 바와 제안하는 정보가 정확하고 가치가 있는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심사를 받는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문장과 단어가 적합하게 사용됐는지 살펴보게 되고 적절히 수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제목에서부터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있고 본문에는 형편없는 수준의 비문들이 여럿 존재하는 이 논문은 제대로 된 심사를 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저자, 지도교수가 주로 맡는 교신저자는 논문 투고 전에 최대한 오류를 줄이고자 검토, 수정 작업을 수차례 반복한다. 그런데 문제 논문을 보면, 지도교수가 이런 노력은커녕 단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듯하다. 진실한 정보와 지혜 전파의 소명을 가진 학술지 또한 어떤 심사도 거치지 않고서 이 논문을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대가 문제없다고 변호하고 있지만 여러 매체의 글과 자료들을 표절한 것으로 의심되는 김명신의 박사학위 논문 또한, 지도교수는 논문 심사위원들과 함께 주어진 책임을 방기했다는 점에서 김명신씨보다 더 큰 비난을 받아야 한다. 표절된 내용은 지금처럼 중복검증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으면 쉽게 알기 어렵지만, 논문에 사용된 자료들은 얘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논문 초고를 한번이라도 들여다보고 이건 어떻게 만든 자료인가?’ 하고 묻기만 했어도, 이런 수준의 표절을 피했을 것이다.

 

수년 동안 연구부정 관련 조사에 참여한 필자 경험에 의하면, 학위논문 표절이나 데이터 날조 같은 연구부정의 경우 그 태반은 이면에 연구 지도의 부재가 있었다. 일전에 매스컴을 달구었던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팀의 논문 표절도 교수의 부실한 연구관리에 기인한 사례였다. 김명신씨 학위논문에는 지도교수 외에 4명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박사학위를 받을 만한 수준의 논문인지 심사해야 하는데, 논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이름만 빌려준 듯하다. 국민대는 이렇게 부실한 논문 지도와 심사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또 있다. 과거 국회의원이던 문대성씨의 학위논문 건이 그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치부할 일일까?

 

교수와 대학이 바뀌어야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지금이 좋은 기회다. 대학원생의 논문에서 연구부정이 있었을 때, 학생만 징계하고 말 게 아니다. 지도교수도 부실한 연구교육의 책임을 져야 한다. 논문 심사위원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학생의 기만으로 발생한 것인지, 연구교육의 부실함 때문인지 조사하면 쉽게 파악된다. 연구정의 수립에 대한 공감대가 대학 전체에 만들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 대학 총장이 나서야 한다. 이제라도 국민대가 김건희 여사 문제를 옳게 처리한다면 국민대는 물론 학계 전체의 신뢰도는 급상승할 것이다.

황은성 | 서울시립대 생명과학과 교수·교육부 연구윤리자문위원 한겨레 2022.08.23.

 

역동적인 부산항, 가덕신공항으로 비상해야

노인과 바다의 도시’. 초고령화 도시로 쇠락해 가는 부산의 실상을 헤밍웨이가 쓴 명작 소설 노인과 바다의 제목에 빗댄 자조적인 문구다. 이 표현은 부산경제의 오랜 침체로 지역 청년들이 취업이나 창업을 위해 타지로 떠나는 현상이 심화하면서 세간에 회자한 지 오래다. 부산은 인구 유출과 감소로 제2 도시 위상마저 위태롭다.

 

부산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고 해서 체념한 채 가만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으로 더 악화하기 전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노인과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라면, 바다에서라도 재도약을 위한 돌파구를 찾아야 마땅하다. 그 방법으로는 부산에 발달한 수산업의 활성화나 해양관광, 해양레포츠, 해양과학기술, 해양바이오 등 해양 관련 신산업 육성이 있을 테다. 무엇보다 올해로 개항 146주년을 맞은 부산항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이 유력하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항구에 기반한 해운·항만·물류산업에서 막대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선진국으로 잘 먹고 잘살듯이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부산항이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있어 정말 다행스럽다. 언제든지 항만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노력을 집중할 경우 미래 먹거리를 만들 수 있는 든든한 밑바탕이 돼서다. 지난해 1년간 부산항에서 처리된 물동량은 2020년에 비해 4% 늘어난 2270TEU(1TEU는 길이 6m 컨테이너 1)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글로벌 물류대란이라는 초대형 악재를 극복하며 이뤄 낸 성과라 의미가 크다. 게다가 부산항은 부가가치가 높은 환적(중계) 화물 처리량이 싱가포르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동북아 물류 허브항만이다. 이는 지역 해운·항만·물류업계 종사자들이 제 역할에 매진한 결과다.

 

올 들어선 부산항의 경쟁력을 키우는 경사가 잇따라 고무적이다. 다음 달 2일 부산신항 남컨테이너부두 내 6부두 개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기념식이 열린다. 인근 5부두 개장 후 신항 추가 개장은 10년 만이다. 연간 220TEU 처리 능력을 가진 6부두의 3개 선석이 가동됨으로써 국내 선사와 수출입 업체들이 수년째 시달리는 만성적인 물류 적체 현상의 완화가 기대된다. 이 부두는 국내 항만 최초로 원격 조정으로 움직이는 무인 안벽 크레인과 자동화 야드크레인을 갖춘 게 특징이다.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화물 처리 속도를 높이는 등 효율성 제고와 안전사고 예방이 가능해 부산항의 신규 물동량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앞서 24일에는 신항 배후부지(경남 창원시 진해구)45608의 대우로직스틱스 컨테이너 공영 장치장이 문을 연다.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하루 3580TEU를 처리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이다. 이로써 장치장 포화가 잦은 신항 일대 물류난 해소에 숨통이 트이지 싶다. 특히 다음 달 11~16일 부산항이 다양한 글로벌 물류기업을 파트너로 확보하고 국제물류 네트워크를 강화해 세계의 허브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이 기간에 해운대에서 세계 물류인의 대축제인 국제물류협회(FIATA) 세계총회가 열리는 것. 이 행사를 찾는 145개국 4만여 개 회원 기업을 상대로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부산항의 가치와 우수성을 널리 알려 엄청난 물동량 증대로 이어지면 금상첨화일 게다.

 

부산항 관리·운영 주체인 부산항만공사(BPA)는 부산항의 활황세를 감안해 올 물동량 계획치를 지난해보다 3.5% 증가한 2350TEU로 잡았다. 환적 물량은 5% 늘어난 1290TEU. 부산항의 특장점을 잘 살려 도전적인 목표를 달성하면 좋겠다. BPA는 각각 내년과 2026년 최첨단 스마트 항만으로 개장 예정인 신항 서컨테이너부두 2-5, 2-6단계 선석 개발도 차질없이 진행해 부산항 경쟁력을 강화할 일이다. 때마침 정부는 최근 BPA를 공기업에서 기타공공기관으로 변경키로 했다. BPA는 독립성 보장에는 미흡하지만, 앞으로 기획재정부 간섭이 줄고 인사와 경영 등에서 자율성이 생기는 만큼 부산항 육성과 연관 산업 지원에 최선을 다하며 책임 경영을 펼쳐야 할 것이다.

 

역동적인 부산항은 신항 근처에 들어설 가덕신공항으로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다. 육해공이 결합된 복합물류는 세계적인 추세다. 2030부산월드엑스포를 겨냥한 신공항 조기 건설이 추진돼 202924시간 운영되는 국제공항이 개항한다면 항만, 공항, 고속도로·철도망이 긴밀하게 연결된 트라이포트 체계가 구축된다. 글로벌 복합물류와 교통·관광 중심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에 따른 시너지와 경제적 파급효과는 추산하기 힘들 정도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요구되는 이유다. 부산항이 하루빨리 가덕신공항의 날개를 달아 세계 초일류의 물류 허브로 비상하기를 바란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부산 2022.08.23.

부산에는 이런 류의 사람이 많다.

 

 

승자와 패자, 그리고 버려진 자

최근 인플레이션의 두드러진 특징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물가급등 탓에 서민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지만 OECD 공식 통계 기준으로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근원소비자물가가 코로나19 이전보다 덜 오른 축에 든다. 말 그대로 전 세계적인 생계비 위기인 셈이다. 글로벌인플레이션의 또 다른 특징은 수요보다는 공급 측면 원인이 결정적이라는 점이다. 코로나19 확산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생산비용이 치솟으면서 이번 인플레이션이 점화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전쟁의 영향을 논할 때에는 서방의 경제제재와 그 배후에 작용하는 미국의 대외 전략도 종합적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중국 견제 역시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을 강제하며 비용인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주요국 정부의 재정 확장과 같은 수요 측면 원인이 중요했다는 미국 공화당의 가설이 맞다면, 코로나19 이전에 비해 실업률이 최근에 더 많이 떨어진 나라일수록 물가상승률이 더 많이 올랐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일이 벌어졌다. 미국의 민간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EPI)에 따르면 실업률이 더 많이 떨어진 나라에서 물가상승이 덜했으니 말이다. 공화당의 가설은 틀렸다. 한국에서는 그 가설이 더 틀렸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세계경제전망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과는 반대로 경제활동 수준이 추세를 밑돌아 GDP갭이 마이너스다. 그런 상황에서는 수요 진작이 물가를 자극하는 효과가 더욱 제한된다. 지난 2년여 진보진영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재정 확장을 주장했는데 결과적으로 당시 주장이 옳았음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 인플레이션의 승자는 누구고 패자는 누굴까. 인플레이션은 사회계급 간 분배 갈등이 조정되고 난 결과적 현상이다. 따라서 임금과 이윤이 물가상승에 각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따져보는 작업은 최근 인플레이션의 성격 파악에 도움이 된다. 우리로서는 경제부총리마저 임금인상이 물가를 자극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마당이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해외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부총리의 걱정은 근거가 미약하다.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기간 들어 임금인상(19%)보다 이윤 증가(38%)가 물가 상승에 두 배나 더 기여하고 있다는 네덜란드 경제학 교수 세르파스 스톰의 분석 결과가 그렇다. 호주의 최근 물가급등은 15% 정도가 임금 상승 때문이고 60% 정도는 이윤 증가 때문이라는 호주연구소의 분석이 또 다른 예다. 유럽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유럽중앙은행 집행위원 이자벨 슈나벨의 설명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오히려 이윤과 물가의 상승 악순환일 수 있다.

 

미국 루스벨트 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의 판매가와 원가의 차이에 상응하는 총마진은 최근 들어 사상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시장지배적인 독과점 대기업들이 총마진을 늘린 폭이 가장 크다고도 한다. 독점자본이 인플레이션 환경과 시장 권력을 이용해 기회주의적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면서 물가상승이 가속화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4대 금융지주사의 올해 2분기 순이익은 신기록을 경신했다. 4대 정유사의 2분기 합산 매출 총이익률은 15%를 넘어 코로나19 이전 5년 평균의 2.25배다. 반면 OECD 통계 기준으로 2021년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연간 실질임금은 2019년보다도 절대적으로 낮아졌다. 실질임금 하락은 경제성장률이나 노동생산성 상승률 추이와도 대조를 이룬다. 결국 이번 인플레이션의 승자는 독점자본이고 패자는 노동자다. 쌀값마저 폭락한 한국 농민은 아예 버려진 자다.

 

이와 관련해 최근 남미 경제학자들이 1990~2014년에 걸쳐 133개국 자료를 실증 분석한 결과 국민소득 가운데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임금 몫이 늘어날수록 물가상승률이 낮아진다는 결론을 도출한 점은 의미가 크다. 임금상승을 경계하는 프로파간다는 실상을 은폐한다. 분배가 평등할수록 물가도 하향 안정되기 쉽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기업가들의 혁신이 자극되어 생산성 향상 효과도 커지기 때문이다. 임금 정체가 생산성 둔화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넘쳐난다. 경제가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이윤 몫이 줄지 않으면 회복도 그만큼 더디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된다. 경제적 약자들에게 부담이 가중되는 탓이다. 그러니 횡재세나 초과이윤세가 지금 맥락 없이 언급되는 것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에 맞서는 경제정책은 시장 권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확립하고 분배를 보다 평등하게 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승자와 패자, 그리고 버려진 자 각자가 마주한 오늘의 비정한 현실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 교수 경향 2022.08.24

 

 

우리 시대의 롤모델 김건희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는 우리 시대의 롤모델이다.

국민대가 멤버 유지를 영문으로 ‘member Yuji’라고 쓴 논문 등 김 여사의 표절 의혹 논문 세편을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라며 유지했을 때, 나는 희망에 부풀었다. 나도 박사가 될 수 있다! 김 여사의 용기 있는 논문은 전 국민 박사 시대를 여는 포석 아니겠는가.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봐도 우리 가족 중엔 박사가 한명도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박사를 텔레비전에서만 봤다. 박사는 디엔에이(DNA)부터 다른 사람들인 줄 알았다. 진리를 향한 탐구열에 불타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 꿈도 못 꿨다. 역시 박사 청정 집안에서 태어난 내 친구는 40대가 돼 진짜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았다. 내가 박사까지 쭉 달려보자니까 친구가 가능하겠냐란다. 친구에게 그런 약한 소리 하지 말라 했다. 우리에겐 이제 롤모델이 있다.

 

지난 10일 숙명민주동문회는 김 여사의 숙명여대 교육대학원 석사 논문의 표절률이 48.1~54.9%에 달한다고 밝혔다. 표절률이 올라갈수록 희망이 차오른다. 석사 논문은 절반 베껴도 될 거 같다.

 

<한겨레> 보도를 보면, 임홍재 국민대 총장은 여사의 논문 4편 가운데 3편을 표절 검증 프로그램인 카피킬러에 검증해본 결과를 공개했는데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률은 12%. 임 총장님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말자. 김 여사 논문 재조사위원회 위원 명단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며 그는 학문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성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양심의 자유를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분이 허용한 박사학위 논문 표절률이니 마음 편하게 12%까지는 베끼자. 그렇다고 이 숫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진취적인 자세가 아니다. 12%는 되고 15%는 안 된다는 근거는 없다. 20%? 30%? 두근거리지 않는가? 지난 19일 국민대 교수회는 집단지성을 모은 결과,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자체 검증하지 않고 재조사위원회 회의록 공개도 요청하지 않기로 했다는데, 이 교수님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전 국민 박사학위라는 여사의 깊은 뜻을 교수의 자존심을 걸고 지켜내니 이를 집단지성이 아니면 뭐라고 말하겠는가. 아직도 박사 도전을 망설이는가? 논문 주제가 고민인가? ‘손금에 대한 고찰은 어떤가?

 

여사의 ‘Yuji 논문유지는 해방 선언이다. 드디어 영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영어 잘해보겠다고 한국의 아이들은 얼마나 학대당하나. 이제 영어 단어 생각이 안 나면 한국말 발음을 알파벳으로 쓰면 된다. 여사의 Yuji 논문이 유지된 날은 우리가 영어 식민지에서 해방된 날이다. 이날은 21세기 어린이날로 지정해야 한다. 게다가 이제 없는 돈 끌어모아 어학연수 1년씩 갈 필요 없다. 여사도 이력서에 뉴욕대 5일 방문을 뉴욕대 연수로 쓰지 않았나. 얼마나 머물렀느냐가 뭐가 중요한가? 외국 땅 밟았으면 연수다. 영어뿐이겠나. 여사의 논문 속 비문을 보면, 우리는 국어 문법으로부터도 해방됐다.

 

윤 대통령도 불철주야 국민의 염원을 풀어주고 있다. 한국인이 오매불망 바라는 게 뭔가? ‘워라밸이다. 그는 이 꿈을 몸소 실현한다. 지난 8일 수도권에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난 날, 그는 서울 서초동 자택으로 퇴근했다. 우리도 이제 퇴근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유를 무려 33번 강조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윤석열 정부를 나는 해방의 정부라 부르고 싶다. 그 깊은 뜻을 모르고 지지율이 20~30%대로 추락한 걸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나 절망은 이르다.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예스, 위 캔 두 잇. Hal su it da.

김소민 | 자유기고가 한겨레 2022.08.25

 

 

인사가 만사라는데

새 정부 출범 뒤 110일이 돼간다. 그간 대통령 지지율이 20% 중반대로 떨어지면서 인적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최근 지지율이 다소 반등하면서 정책기획수석 신설과 홍보수석 교체 등 일부 보강에 그쳤다. 내각은 아직 미완성인 채다. 인사 문제가 계속해서 지지율 하락의 주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인 한국은 인사에 대한 민감도가 매우 높다. 이런 상황에서 새 정부 인사가 혹평을 받고 있다. 수월성을 강조하면서 전문성을 무시했고, 통합을 말하면서 검찰과 경제관료 편중이 심했으며, 무엇보다 사적 인연을 중시해 공사가 불분명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새 정부가 국정철학으로 내세운 공정과 상식은 사라지고 비이성적이고 후진적인 인사 관행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을 세가지로 구분해 살펴본다.

 

첫째는 지나친 엘리트 선호다. 우리 사회는 인재를 평가하면서 공부 잘하는 걸 높게 친다. 사람을 시험으로 구분하고 등수를 매기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인성과 개성 등 정작 중요한 인적 자질이 경시되고 선진화 과정에서 요구되는 창의성, 포용력, 균형감각 등은 저평가된다. 이러한 지나친 엘리트 선호가 순혈주의라는 우리 사회 전통적 가치와 맞물려 편중 인사를 불렀다. 인재를 찾다 보니 서울대 출신이고, 검사고, 관료라는 것이다.

 

미국 대학은 교수 채용 때 본교 출신을 우대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유지한다. 본교 출신을 교수로 받아들여 이른바 동종교배(inbreeding)가 관행으로 정착하면 외부의 학문적 영향이 차단돼 학문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둘째는 검찰과 관료 집단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다. 우선 대통령 측근인 검찰 출신들이 대통령실과 정부 요직을 대거 차지해 권력의 핵심을 구성했다. 대통령실 비서관급 이상 자리에 검찰 출신이 5명이고, 총무비서관과 부속실장도 검찰 출신을 발탁했다. 대통령실과 검찰을 검사동일체로 만든 셈이다.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관피아(관료+마피아)들을 정부 주요 보직에 배치해 실세 검찰을 보완하게 했다. 문제는 검찰과 관료 모두가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해온 집단이라는 점이다. 비록 과거 한국 경제 성장과 비리 척결 과정에서 관료와 검찰의 기여가 일부 인정된다고 해도, 권위주의와 기득권 사수 마인드가 강한 이들이 대통령이 얘기한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혁신의 나라를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통령실 요직에의 검찰 출신 발탁과 정부 부처 요직에 관피아 또는 모피아(재경부 관료+마피아) 전면 배치는 그간 국가행정에서 경험하지 못한 바다. 검찰과 관료가 서로 협력해 강력한 통제체제를 만들거나, 서로 갈등하면서 견제하는 경우 어느 쪽도 민간인 등용이나 새 정부가 추구하는 민간 중심 국가에 기여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요즘 검찰 파워를 등에 업고 모피아가 전성시대를 구가한다는 일부 언론의 지적은 첫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제수석 그리고 정부 쪽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금융위원장, 국무조정실장 등이 모두 모피아 출신이다. 여기에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보건복지부 1차관 그리고 관세청장과 조달청장, 통계청장 모두 기획재정부 출신이 차지했다. 전례 없는 모피아 전성시대다.

 

관료들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지만 결과에는 책임지지 않는다. 비근한 예가 최근 사모펀드 사태고, 결론이 임박한 론스타 사건에서도 관료의 역할이 중요했다. 또한 이들은 재임 중 누렸던 권한을 퇴임 뒤에도 지속하려는데, ‘낙하산회전문 인사가 그 수단이다. 퇴임 관료가 산하 공공기관 또는 민간조직의 고위직에 안착하는 낙하산이나 민간인 신분으로 대형로펌 등을 돌다가 공직에 복귀하는 회전문 인사 모두 새 정부가 추구하는 민간 중심 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낙하산의 폐해는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우선 낙하산은 부임하면 전임자 흔적 지우기에 나서는데, 이런 행태가 되풀이되면서 직원들은 단기 성과에 매몰되고 한탕주의에 빠져 사고 발생 위험이 커진다. 직원들 사기에도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하다. 평생직장으로 알고 들어와 열심히 일했는데 알고 보니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그 위로는 올라갈 수 없다면, 업무에 열정을 불태우기보다 무사안일에 빠지거나 실세 줄대기에 신경을 쓰게 돼 업무가 부실화할 위험이 커진다. 한편 회전문 인사는 전관예우 문제로도 이어진다. 관직을 물러난 전관이 후일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현직들로서는 예우를 소홀히 하기 어렵고 따라서 공사 구분이 흐려지게 된다.

 

셋째는 공사 구분이 불분명한 것이다. 우리 국민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성향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겐 뻣뻣하나, 일단 통성명하면 금세 살가워진다. 관계를 중시하는 것인데, 좋은 관계가 맺어지면 원칙에 좀 어긋나도 그럭저럭 넘어가려는 경우가 많다.

 

사람 사이 관계는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공사 구분은 필요하다. 예컨대 금융이론에서는 관계형 금융을 장려한다. 은행과 고객이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건전한 상생 관계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이는 사적 계약의 경우이며, 대통령실이나 국회 등 공적 부문에서는 허용 범위를 제한하는 게 상식이다. 공정과 상식을 내세우며 집권하더니 대통령실 사적 채용, 관저 사적 공사, 공무 여행 때 지인 동반 등 사적 관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할까?

 

지난 18일 대통령실은 인사와 관련해 전면 쇄신보다 점진적 변화를 내걸었다. 사실 어느 쪽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인사가 만사라는데, 몇가지를 제안해 본다.

우선, 어차피 새 정부는 전 정부의 성과 위에 자신의 성과를 쌓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전 정부의 정책방향을 되돌리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오히려 한국 경제와 사회의 선진화를 위해 진영 구분 없이 소신을 지닌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을 삼고초려해 모셔와 정책의 정반합을 이뤄내야 한다.

 

다음, 낙하산과 회전문 인사를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과거 국회에서 논의됐던 낙하산 금지법재추진을 고려할 수도 있겠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관료제 대안 마련도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적 채용과 인맥 인사는 중단해야 한다. 공직자가 의리와 인연을 중시하는 것은 사적 이득을 취하는 것과 같아 공익에 반할 소지가 크다. 공직자의 직무적합성을 나타내는 긍정적 기준과 사적 인연이나 친분관계 등을 나타내는 부정적 기준을 시행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첫 단추는 잘못 끼웠지만, 이제라도 새 정부가 다양한 인재들로 역동적 정책을 시행하여 성과를 도출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기대한다.

윤석헌 | 전 금융감독원장 한겨레 2022.08.25.

 

 

부끄러운 줄 모르는 얼굴

한 대학이 등 떠밀려 재조사에 착수한 논문 표절 사건을 그냥 덮어버렸다. “학문 분야에서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날 정도의 연구부정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교수회가 전체 교수를 상대로 박사학위 논문 검증위원회 구성 찬반 투표까지 시행했지만, 이마저도 반대가 다수였다. 그러면 그렇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학문의 자율성이 전혀 없는 대학 현실이니 그럴 수밖에. 다들 혀를 차는데, 보다 못한 표절 피해자가 시정과 사과를 요청하고 나선다. 표절 당사자와 대학 당국은 마치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 전혀 응답하지 않고 깔아뭉갠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 모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부끄러워야 마땅한데 어쩜 저렇게나 당당하지?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이러한 의아함을 풀어준다. 사람은 존중하는 상호작용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승인된 사회적 속성에 맞춰 연출해서 상대방에게 제출한다. 이 얼굴이 드러내는 이미지대로 대우해달라고 요청한다. 상대방도 자신의 얼굴을 제출함으로써 이러한 요청에 응답한다. 요청과 응답의 연쇄 속에서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존중받는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상대방의 평가를 조작하기 위한 기만적인 체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상호작용의 질서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공적 얼굴이다. 자신이 제출한 얼굴이 상대방으로부터 마땅한 인정을 받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부끄럽다 못해 평정을 잃은 사람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때문에 자신이 존중하는 상호작용의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려고 마음먹지 않는 한 모두 부끄러움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런 점에서 부끄러움은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감정이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상호작용의 질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증거다. 손상된 얼굴을 수습해서 존중받는 얼굴로 되돌리기 위한 교정작업에 착수한다. 여기에서 사회가 출현한다. 이는 얼굴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현대세계 이전에는 얼굴이 없는 비인간이 많았다. 노예와 하인이 대표적인 예다. 주인의 얼굴을 꾸미는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얼굴이 없다. 자리에 함께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없다. 주인과 손님은 노예와 하인이 옆에 있는데도 마치 없는 것처럼 마음대로 행동한다. 비인간은 굴욕감과 모멸감에 휩싸이지만, 마냥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비인간이라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사회 밖에 나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주인과 노예는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인간들 사이에 마땅히 주고받아야 할 의례가 완전히 사라진다.

 

현대세계라고 해서 비인간이 아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고프만은 가사노동자, 유아, 노인, 흑인, 정신병자를 그 예로 들었다. 요즘 같으면 난민이나 이주노동자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들은 얼굴이 아예 없거나, 아직 갖지 못했거나, 잃어버린 비인간이다. 얼굴 없이 사회 세계 밖에 살아가도록 강제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하는 현대세계는 누구나 얼굴을 가지고 상호작용의 당사자로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얼굴을 가진 참여자라면 상호작용에 참여한 누군가의 얼굴이 손상되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상호작용의 질서를 존중하는 이상 참여자 모두 손상된 얼굴을 회복하기 위해 힘쓴다. 얼굴이 손상되었는데도 뻔뻔하다 못해 당당하게 나오면 상호작용의 질서는 붕괴한다. 표절 당사자와 대학이 얼굴이 심하게 망가졌는데도 전혀 교정작업을 하지 않는 것은 참여자를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비인간 취급받은 참여자도 부끄러움을 놓아버리고 사회 밖으로 나가버린다. 저출생과 고령화로 대한민국이 소멸하기도 전에 사회가 먼저 소멸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경향 2022.08.26

 

헛다리 짚기

취임 100일 즈음에 실시된 직무평가 여론조사들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30% 안팎의 지지를 받았다. 대통령의 인사·자질·태도 등에 대한 실망감이 반영된 결과라는 데 전문가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통령실의 인식은 다소 다른 듯하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홍보나 소통이 부족했다든가, 구체적 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하면 달라질 것이라든지,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이야기만 들린다.

 

그런데 추진하겠다는 정책들을 보면 걱정만 더 든다. 또 국민만 보고 가겠다면서, 피상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성과에만 집중하고 장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는 뒷전으로 미룰 수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한, 탄소중립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 이에 해당한다. 이대로 어영부영 2027년을 맞이하게 된다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를 수 있다. 진정 미래와 청년을 생각한다면,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윤석열 정부가 정책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을 받는 것은 실제로 제시된 정책들이 없어서도 또 제대로 홍보가 안 되어서도 아니다. 제시된 대부분 정책이 MB시대 실패한 정책을 조금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 현재 우리의 당면 문제를 극복하고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닦는 방안이라는 공감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재벌과 부자 감세 및 백화점식 친재벌 규제완화라는 폭주를 시작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윤 대통령은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 등 재벌 총수에 대해 8·15 광복절 특별사면 및 복권을 단행했다. 16일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부담을 덜어주는 합리적(?) 제도 운용을 담은 대통령 업무보고를 했다. 앞서 721일 기획재정부의 2022년 세제개편안에는 재벌과 부자 감세 계획이 촘촘히 담겨 있었다.

 

재벌 총수 사면·복권으로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근거가 없음을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재벌 총수의 사면 및 복권이 기업 투자와 경제 활성화를 가져온다는 황당한 주장의 두 번째 연결고리인 기업 투자와 경제 활성화에 대한 생각도 중화학공업 중심의 공업화라는 개도기 시절 이야기이다. 1990년대 이미 잃어버린 30에 들어간 일본은 이때도 미국보다 GDP 대비 훨씬 더 높은 투자를 지속했지만 경제 성장 엔진은 꺼지고 말았다. 1990년대 미국과 선진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한 것은 슘페터적인 제품과 기술 혁신이었고, 이런 혁신은 주로 잠재적 경쟁 기업의 진입으로 일어났다. 즉 진입과 퇴출이 자유롭고, 혁신에 대한 대가가 확실히 보장되는 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슘페터가 말한 혁신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혁신경제·포용성장·탄소중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해소해 제조업에서 진입과 퇴출 장벽을 낮추고, 소유지배구조의 유연성을 확보해 탄소중립을 위한 산업전환을 유인해야 한다. 현 재벌체제에서 중소기업을 지원정책으로 연명시키는 것은 혁신을 위해서도 포용적 성장을 위해서도 충분하지 않음은 이미 경험으로 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와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탈취를 막아 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이 시장경제체제를 똑바로 세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의 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와 세제 개편안은, 재벌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를 고취하고,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더 악화시키고, 세습을 제도화할 수 있는 독소조항으로 가득하다. 동일인의 친족 범위 축소와 부당지원 적용 대상 축소로 사익편취 규제의 사각지대를 넓히고, 조사과정에서 기업의 이의제기 절차 신설로 인해 강제조사권이 없는 공정위의 조사를 더 무력화시키고, 사익편취 총수일가에 대한 형사고발이 없어질 수 있다. 결국 사익편취를 위한 일감몰아주기 규제는 유명무실화될 것이다.

 

나아가 금산분리 완화를 통해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더욱 장려하고, 재벌 세습을 제도화할 수 있는 복수의결권 주식 도입도 공언하고 있다. 이에 더해 유산증여세 도입, 법인세 최고 세율 인하, 배당수익에 대한 이중과세 경감 그리고 동일인 친족 범위 축소는 세습을 위한 자본 마련과 관계 회사 활용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 것이다.

 

윤 대통령이 시장을 중시하고 공정과 포용을 강조하는 것이 맞는다면, 정부는 지금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윤석열 정부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을 어디로 몰아가고 있는가?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경향 2022.08.26

 

 

성장의 한계’, 그 후 50

지금부터 딱 50년 전인 197232, 로마클럽의 유명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되었다. 이 책은 세계적 반향을 불러왔고 환경 문헌의 고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런데 고전이라는 칭호는 마치 <자본론>이나 <국부론>이 그렇듯이, 실은 사람들이 읽지는 않고 인용하고 비판하는 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이나 자본가 타도를 주장한 게 아니라 자본의 본성을 고찰했다. <성장의 한계> 역시 성장 자체의 끝을 말한 게 아니지만 사람들은 쉬이 오해하고 단순한 종말론의 하나로 여긴다.

 

이런 오해는 특히 한국에서는 제목 번역 탓도 있었을 것 같다. 엄밀하게 보자면 영어 제목(Limits to Growth)은 성장의(of) 한계가 아니라 성장에 관한 또는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한계들이다. 이 책의 내용 역시 자원이 고갈되거나 식량 생산이 급락하여 성장이 멈춘다는 게 아니라, 다섯 가지 주요 변수가 상호 작용하면서 과잉과 고갈의 피드백 속에 생태계와 사회에 큰 충격과 위기가 예상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성장의 한계>는 냉담한 반응에 직면했다. 3년 전인 1969년에 인간이 달에 착륙하고 핵발전소가 곳곳에서 지어지던 시절이었다. 동서 냉전이 심화되었지만 양 진영 모두 끝없는 성장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세계 기아를 해결하고, 지구가 쓰레기로 덮이면 우주 식민지라도 개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정치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이 책의 방법론적 오류를 지적하고 인간의 창의성과 역량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저자들은 이 책이 구체적인 예측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추세에 비춘 미래의 전망이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50년이 흐르면서 그들이 예측했던 주요 경향들, 즉 자원 위기와 일인당 식량 생산 정체, 그리고 기후위기가 하나둘씩 현실로 드러났다. 이 책의 불우한 처지는 카산드라의 저주에 비유되곤 한다. 카산드라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얻었지만 그 말을 사람들이 믿지 않도록 저주를 내린 게 아폴로였으니, 아폴로 11호가 <성장의 한계>에 저주와 같은 효과를 발휘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들의 핵심 메시지는 생산이 있으면 그만큼 폐기가 있고,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적절한 시점에서 인식하거나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구라는 그릇의 용량은 정해져 있지만 인류는 기발한 마술을 통해 그 한계를 돌파해 왔다. 화석에너지와 핵에너지 이용, 세계화된 시장과 광고, 심지어 공황을 해결한 전쟁조차 그런 마술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팬데믹과 기후 붕괴, 심화된 불평등이 결합된 만성적 위기를 대가로 얻었다. 성장이 끝나는 게 아니라 성장에 관한 한계와 위기들이 더욱 격렬하게 계속된다.

 

한국의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는 30년 뒤의 인구와 산업 생산, 에너지 소비량을 불변으로 가정하고 검증되지 않은 지구공학 기술을 해법으로 포함한다. 줄어드는 인구를 억지로 늘리고 핵폐기물을 돌려막기 하며 커다란 지하터널을 만들어 홍수를 해결해 보려 한다. 그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하나의 예측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만능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예측과 상상이 없다는 것이다.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경향 2022.08.26.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저보다 꼭 10년 위신데 10년 전보다 좋은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후배가 물었다. 늘 긍정적이고 명석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그의 음성이 해 질 녘 서해 바다처럼 사뭇 쓸쓸하게 들렸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 것이 10년 세월이 내게 준 선물 같아요.” 그는 사소한 차이 때문에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분열에까지 이르는 세태를 탄식했다. 어제까지 동료였던 이들이 진영 논리에 따라 갈리면서 서로를 낯선 존재로 바라보는 현실이 아팠던 것이다.

 

통합을 지향해야 하는 정치와 종교가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주장과 종교적 신념은 삶의 미세한 결을 무질러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일수록 견해가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려 하지 않는다. 흑과 백,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 집착하는 이들은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차이를 간과하곤 한다. 양극단 사이에서 서성이는 이들에게 설 땅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청준 선생의 소설 <전짓불 앞의 방백>은 엄혹했던 좌우 대립 시기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낮의 지배자와 밤의 지배자가 갈리는 산간 지방,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눈앞에 전짓불을 들이대며 묻는다. “너는 어느 편이냐?” 전짓불 너머에 있는 사람이 어느 편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던져진 이 질문은 질문받는 이를 벼랑 끝에 세운다. 이때 전짓불은 빛이 아니라 공포이고 어둠이고 폭력이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지켜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모호함 속에서 부유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양자택일의 강요는 점이지대에 머무는 이들에게서 설 땅을 빼앗는 일이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도 달리 보인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의 지세가 다른 탓이지.” 정약용 선생의 시이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릴 때가 많다. 작은 산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눈에 큰 산은 들어오지 않는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닫힌 마음이 지옥이다.

 

에밀리 에스파하니 스미스의 TED 강연 삶에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를 보았다. 그는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네 개 기둥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유대감이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든든한 유대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둘째는 목적에 대한 자각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려 할 때 삶이 든든해진다. 셋째는 초월성이다.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예배에 참여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바로 그런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해준다. 넷째는 스토리텔링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 이야기를 대신 써줄 수 없다. 가끔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이야기를 수정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실패와 쓰라림, 부끄러웠던 기억을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경험들을 사회적 자산으로 만드는 이들도 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일이고 존재의 용기이다.

 

에밀리는 강연 말미에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피교도였던 아버지는 가족들과 명상하는 시간을 참 좋아했고 성실한 시민으로 살았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수술에 앞서 마취실에 들어간 그는 자기 아들과 딸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깨어나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자기의 마지막 말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살고 싶어 했다. 자기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에밀리가 말하는 삶의 네 기둥이 다 담겨 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고립감, 버림받음에 대한 의식, 무의미성이다. 하지만 우리 삶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삶은 견딜 만해진다. 옳음을 전유하려는 욕망은 연결을 끊는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우정과 환대의 장소를 만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세상의 숨구멍이다. 눈에 보이진 않아도 작은 산 너머에 큰 산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이들이 그리운 시절이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경향 2022.08.27.

 

 

이승만의 국가보안법 활용법

학문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보법 민족 공동체를 망친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시대 상황과 오늘날을 비교하면 이 법이 왜 21세기에 부적절한 것인지 자명해진다. 이 법이 제정된 1948년은 소련이 동구권에 위성국가를 세우는 등 영향력이 비대해지고 중국에서 모택동 혁명이 성공을 목전에 두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이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던 상황이었다.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중국 대륙이 홍군으로 가득 차기 직전이었다. 칼 마르크스가 제시한 진화론에 의해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되지 않나 하는 공포가 전 세계 자본부의 진영에서 지배적이었다. 미국에서 현대판 마녀사냥 빨갱이 소동인 매카시즘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국보법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차원의 고무, 찬양, 동조 등을 범죄로 탄압하려 한 것은 당시 지구촌을 휩쓸던 사회주의에 대한 무한 공포 속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 정권은 사회주의는 일단 접촉했다 하면 헤어날 수 없는 엄청난 마력을 지닌 것으로 보고 아예 상상 속에서 생각지도 말라는 식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무한공포 속에 만들어진 국보법 21세기에 부적절

 

국보법은 1948년 만들어진 뒤 74년이 흐르면서 국내에서는 해묵은 익숙한 환경이 되어 그 존재 자체에도 무신경한 분들이 적지 않다. 이 법이 만들어지기 두 어 달 전인 194810월 발생한 여순사건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초강경 담화에서 이 대통령의 이념에 대한 비상식적 적개심과 공포가 확인된다. 그는 이념이 다를 경우 어떻게 할지에 대한 지침을 다음과 같이 내린 것이다.

 

반란세력은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조사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반인륜적 지침은 국보법 제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결과 여순 반란과 민중봉기사건의 원인이 공산주의, 좌익세력에 있다며 아동까지 포함한 철저하고 무자비한 탄압이 강조되면서 진압군이 잔혹하게 민간인을 집단학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의 지시는 히틀러가 1941 소련을 침공한 뒤 레닌그라드 포위작전을 벌이던 독일군에게 내렸던 학살명령과 유사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가 지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곳 주민들은 전멸시키거나 굶어죽게 만들어라. 이는 나치 독일이 시도하는 위대한 동방점령계획의 일환이다.”

 

히틀러의 명령은 독일군에 의해 집행되었고 그 결과 1944년 끝난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사상 최장의 것으로 기록되면서 4백 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나치 독일패망 후 수년 뒤에 이승만은 피를 나눈 동포인데도 어린아이일지라도 이념이 다르다면 제거하라는 천인공노할 학살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이민족인 러시아인을 전멸시킬 대상으로 지칭하고 이승만은 이른바 빨갱이를 집단학살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 이승만 정부는 국보법을 만들었고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에 달하는 118천 명이 이 법에 적용될 만큼 광범위하게 악용되었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여순사건이후 공산주의자를 민족과 국민의 범주로부터 추방함으로써 6·25 전쟁 전후 보도연맹 및 민간인 학살 사건이 전국적으로 발생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국보법이 만들어진 뒤 이승만의 조봉암 선생, 박정희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법살 사건이 발생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이 강제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국내에서 이른바 진보세력은 제거되고 약화되면서 정강정책에 큰 차이가 없는 두 개의 거대 정당이 여의도 정치를 좌우하고 있다. 군소정당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도 사상과 상상의 자유를 불허하는 국보법의 탓이라 하겠다.

정부 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한미수뇌들. 왼쪽부터 미진주군사령관 하지, 태평양미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연합뉴스

 

정신적 자유 억압하는 국보법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악법

세상은 하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다. 세상을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 동일한 것에 대해 정 반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세상을 보는 시각만이 아니라 진리, 또는 진실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르다. 이런 시각차는 한 집단, 국가에 항상 존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 또는 진리를 서로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 다투는 일은 흔하다. 때로는 전쟁도 일어난다. 그렇지만 대부분 어울려 지내고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살아간다. 이런 일은 과거와 현재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신적 자유를 부정하는 국보법은 오늘날 당연히 없어졌어야 할 정신적 족쇄다. 이 법이 상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학문의 세계를 재단하려 한 것은 사후 검열과 같은 것으로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법의 집행자들이 학문이라는 바다와 같이 넓은 영역에 대해 고문 기구와 같은 국보법을 가지고 덤벼들어 만행을 저지른 것은 역사적 수치다.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와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를 괴롭힌 경우가 해당된다.

 

송두율 교수는 독일 사회학자이자, 대화와 타협을 주목하는 공론의 철학자로 불리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총애를 받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송 교수는 2003년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다가 2009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송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사당국이 북한을 바라보는 자신의 이론적 방법론중 하나인 내재적-비판적 접근이 국보법에 위반된다며 끊임없이 물고 늘어졌다고 전했다.

 

송 교수는 이 문제로 공안당국과 보수논객들에게 곤욕을 치렀다. 송 교수의 내재적-비판적 접근의 골자는 북한 내부의 문제는 북한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으로 북쪽 사회가 어떤 사회이고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지 그들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고 나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 걸린 문제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위클리 서울 2008520>. 사회과학적 성과물인 이런 관점을 놓고 국보법으로 왈가왈부하려 한 것은 지독한 야만행위였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송두율 교수가 200485일 오후 독일로 출국하며 석방운동을 벌여온 대학생들로부터 선물을 건네받고 있다. 연합뉴스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는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는 취지의 글을 언론매체에 실은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가 대법원으로부터 201012월 징역2(집행유예 3) 확정판결을 받았다. 강 교수는, 사회과학은 역사 구조적 설명 또는 사회형성론을 중심에 놓고 사회현상을 설명한다는 관점에 따라 구조 중심의 사회 형성론적 접근으로 6·25전쟁의 설명을 시도했다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위클리 서울 2007126).

 

-- ‘역사 현상의 인과요인을 사람중심이 아니라 구조중심으로 설명할 경우 6·25의 경우 남북 지도부 모두 전쟁목적을 통일로 삼았기에 당연히 통일전쟁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남측으로서는 사회주의를 괴멸시키기 위한 목적도 가졌으니까 이념전쟁이고, 북측은 민족해방, 계급해방, 사회주의 적화 등도 목적으로 삼았으므로 민족해방전쟁, 계급전쟁, 이념전쟁 등일 수 있다. 이처럼 전쟁성격은 주체에 따라 다양하고 또 시기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할 수 있다. 통일전쟁론을 문제 삼는 것은 방법론적 공약을 부정하는 것으로 학문자체의 성립을 부정하는 폭거이다.

 

통일은 사전적으로 두 개로 나눠진 것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또 방식이 무력이든 평화든, 결과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남이든 북이든, 견훤이든 궁예든 상관없이, 전쟁주체가 통일을 지향한 전쟁목표를 가졌다면 그 전쟁은 통일전쟁일 수밖에 없다.---만약 어떤 집단과 조직의 이해득실, 국민정서와 같은 여론,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 규정에 따라 학문연구 결과가 좌우되거나 달라진다면 이 학문결과는 학문의 생명이라고 볼 수 있는 객관성도, 신뢰성도, 설명력도 없어지게 된다.

 

이는 더 이상 과학적 지식이나 학문이 아니고, 진실과 진리를 배반하고 학자의 양심을 파는 것이며, 곡학아세해 지식인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자기부정이며, 학문의 존립기반 자체를 허무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국보법 7조의 찬양·고무라는 사법적 잣대는 원초적으로 학문자유와 양립될 수 없다.’ --

 

두 학자의 경우처럼 하나의 현상에 대한 학문적 견해는 다양하다. 현실을 보는 눈이 다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존중해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사회가 건강하고 그리고 내실 있게 발전한다. 국보법은 이런 원칙을 원천 부정하고 있다. 국보법은 21세기에 존재해서는 안 될, 벌써 역사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했을 야만적인 법체계다. 국보법을 고집하는 것은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불안전하게 만드는 것이고 지구촌 차원에서 엄청 수치스런 일이다.

 

국가사회주의 해체이후 국보법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오늘날 사회주의는 어떻게 되었나를 살피면 국보법의 위상은 더욱 분명해진다. 국가사회주의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실패했다는 평가가 대세다. 중국의 경우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를 채택한 절충식 체제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는 엄격한 의미의 사회주의체제인가 하는 것에 논란이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칼 마르크스의 이론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마르크스는 무산자가 인류 해방자로 등장해 자본주의체제대신 지상낙원을 만들 수 있다는 낙관론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 사회주의 실험을 통해 실패로 일단락됐다.

칼 마르크스.

 

무산자가 소련 등 사회주의권에서 궁극적인 해방자가 되지 못한 것은 사회주의 지배층의 부정, 부패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무산자나 유산자 모두 인간에게 보편적인 무한한 잠재력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치 못하고 인류의 진보가능성을 확신하는 오류를 범했다. 마르크스도 당시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한계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완성해야 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생존했던 당시는 유전학 등 인간생체학에 대한 지식이 초보 단계였기 때문에 그런 오류는 피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가 추구한 영구혁명은 그 추진 세력이 공익적 차원의 사상과 실천력으로 무장해야 하는데 인간의 DNA적 속성은 그런 것과 무관하다. 정도에서 벗어나거나 천박한 욕망 추구의 유혹에 빠지는 유전적 취약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사회주의 체제의 절대 권력자는 부패하고 초심을 잃어버리는 실패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는 특성이 있어서 사회과학도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 들어 오늘날 현존 인류, 호모사피엔스는 조상이 하나라는 고고인류학적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발견으로 현존 인류는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무한한 유전적 잠재력을 지닌 공동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과학 기술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면 인간의 유전적인 모든 속성을 포함시킨 사회과학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종교인, 철학자, 정치인, 지식인 등은 인간의 불행을 축소하고 행복의 가능성을 크게 하는 논리를 개발하거나 확산시키려 노력해왔다. 즉 구도자, 구원자, 메시아의 모습이 그들에게서 발견된다. 마르크스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런 노력은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었지만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른 논리와 방법론이 등장했다. 사회과학은 인간의 됨됨이 즉 인문학과 같이 가야하는데 인간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은 여전히 완전치 못하다.

 

흔히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진보와 보수로 나누듯이 세상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세상을 협동과 조화로 보는가 하면 정반대로 갈등과 싸움의 장으로 보기도 한다. 이뿐 아니라 사회라는 구조를 무시하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만 보는 이론도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사회과학 이론은 다 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의 이론만으로는 사회 전체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 여러 이론이 공존하거나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는 식으로 상부상조하면서 인간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여야가 국보법 논의 2024년까지 미루기로 합의한 것, 국민 무시 처사

국보법은 너무 시대착오적이고 비이성적이다. 같은 민족인데도 북한주민 전체를 반국가단체 소속 원으로 규정하고 있어 북한에 부모 형제가 있다 해도 소통, 왕래, 물물 교환 등을 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특히 이 법 7조가 북한에 대한 고무찬양동조를 금하고 있어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이 점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한국에서 국보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대통령이 유일하다. 통치권 차원에서 이 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이다. 21대 국회는 국보법 개정안이 발의되자 거대 여야 합의로 2024년까지 논의를 미루기로 합의했다. 국민의 힘이나 민주당 모두 국보법의 개폐를 논한다는 것에 정치적인 부담을 느낀다는 점에서 일치한 것이다. 한국형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진적이며 주권자인 국민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지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다.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프레시안 2022.08.27.

 

김건희·한동훈·대통령실, 답변하지 않는 권력

김건희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당한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김 여사의 침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에서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영어 리스폰서빌리티(responsibility)는 우리가 책임으로 번역을 했지만 응답한다는 뜻이다. (중략) 책임의 기본은 누군가의 물음에 대해 대답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거기에 맞는 올바른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이나 내가 표절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해도 김 여사는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식의 무시 전략을 펴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점이야말로 논문의 표절 판정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느냐는 근본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주권자 국민이 그 권력을 집권세력에게 위임하되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책임을 묻는 수단은 선거나 탄핵 등 직접적인 것도 있지만, 일상적으로는 바로 묻고 답하기. 영어권에서 정치적 책임을 뜻하는 또다른 단어인 어카운터빌리티(accountability) 역시 설명할 의무와 그에 따른 보상·처벌의 의미를 내포한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대표적인 게 국회에서 이뤄지는 질의·답변이다. 이는 우리 헌법도 명시하고 있다(622국회나 그 위원회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국무총리·국무위원 또는 정부위원은 출석·답변하여야 한다’). 여기에 더해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의사결정 과정에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보장하거나 여론조사로 의견을 청취하거나 정보공개를 통해 투명성을 높이는 식으로 묻고 답하기의 수단과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현안 대처에서는 답변하지 않음이 답답하게 일상화하고 있다. 김 여사 표절 문제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미국 출장비 공개를 거부했다. 현지에 머문 기간은 7일이었는데 미국 독립기념일 연휴 3일이 끼어 있었고, 평일 중에도 하루는 공식 일정이 없었다. 출장계획서와 달리 미국 법무부 장관은 만나지도 못했다. 검찰총장도 공석 상태인 임기 초기에 이런 출장이 긴급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법무부로 가져온 인사검증 기능과 관련해 미국에서 이 업무를 맡는 연방수사국(FBI)과 논의한다는 게 한 명분이었는데, 그렇다면 왜 인사정보관리단장은 동행하지 않았는지도 의아하다. 이밖에도 숱한 의문을 낳는 이번 출장의 경비 공개는 어쩌면 당연한 요구다. 그런데도 법무부는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며 거부했다. 공개 일정이 없던 4일 동안 무슨 극비 임무라도 수행했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답변, 아니 답변 없음이다.

 

한 장관은 국회에서도 황당한 모습을 보였다. 22일 국회에서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시행령을 통해 검찰의 직접수사 범위를 늘리는 꼼수를 비판하며 대통령조차도 (거부권 외에는) 국회 입법권을 침해할 수 없다. 장관이 대통령 권한을 넘어설 수 있느냐. 아주 심플한 질문이다라고 묻자 한 장관은 너무 심플해서 질문 같지가 않다고 했다. 이런 태도는 국회 답변을 통한 책임정치를 규정한 헌법을 거스르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어떤가. 대통령 부정평가 항목 1위인 인사 문제를 비롯해 관저공사 수의계약 논란, 건진법사 청탁 개입 의혹, 김 여사 팬클럽 보안 사고 등 국민들이 지적하고 궁금해하는 사안이 넘치는데도 답변이라고 할 만한 것을 내놓지 않는다. 23일 국회에서 김대기 비서실장은 김 여사 관련 의혹에 대해 우리 여사가 뭘 잘못했는지 먼저 좀 말씀을 해달라고 했다. 몸은 국회에 출석해 답변했으되 실제로는 답변하지 않은 것이나 매한가지다. 윤 대통령 자신도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그랬듯 국민이 답을 듣고 싶어하는 질문은 귓등으로 듣고 만다.

대신 매우 기괴한 방식의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주가조작 사건에 김 여사가 연루된 의혹이나 윤 대통령 장모의 통장 잔고 증명서 위조 사건에 대해 엄정한 수사와 진솔한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대통령 취임식에 이들 사건 관련자를 대거 초청한 행태가 그것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오기가 느껴진다.

 

정권을 잡은 집단이 국민의 질문과 요구를 하찮게 여긴다면 민주주의는 부정된다. 이를 바로잡지 못하면, 민주적 선거를 통해 5년간의 독재를 선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불길한 징후는 점점 짙어지고 있다.

박용현 | 논설위원 한겨레 2022.08.28.

 

 

사회권을 망각한 사회

범죄나 재해로부터 안전하고 건강을 해하지 않는 주거에서 안정적으로 살 권리(주거권), 위생적인 음식과 물을 섭취하고 질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받으며 건강하게 살 권리(건강권), 경제적 빈곤 및 위험에 대비하여 각종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사회보장권)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이러한 권리가 존재한다. 이들 권리와 평등권, 노동권, 교육권 등을 가리켜 사회권이라고 부른다.

 

이주영 유엔 사회권위원회 위원의 연구(공저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역사적 변화 과정과 미래 발전 방향> 시민권의 확장과 사회권 등장사회권 보장을 위한 국제적 노력부분)에 따르면 사회권과 사회보장 정책은 자본주의 산업사회로 인해 탄생했다고 한다. 가족 내에서 자급자족하거나 지배계층의 원조에 기대어 또는 길드에 가입하여 살아온 사람들은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일을 하고 돈을 받는 임금노동자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삶의 기반을 제공해주던 가족, 교회, 길드 등이 쇠퇴했다. 공동체의 공백 상태에서 임금노동자들은 식량, , 의료와 같은 모든 것을 구매해야 했고, 돈이 없으면 내몰리다 죽었다. 살 수 없는 삶들은 곧 사회문제가 되었고, 혁명을 불렀다. ‘살 권리를 만들고 살 수 있게 할 것을 사회의 책무로 정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인식이 새롭게 등장한 시민사회에 싹텄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 시기 채택된 인권선언과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에 살 권리’, 즉 사회권이 등장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질병, 실업, 노령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시민의 삶을 보호하고 시민에게 의료, 교육, 주거, 고용에 대한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국가 개념이 생겼다. ‘극빈자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대책으로서만 필요했던 살 권리의 개념도 확장되었다. 복지국가가 전세계로 확산되며 국가별 사회합의에 따라 구현은 제각각 달라졌다. 어느 국가는 복지국가의 역할을 가능한 한 좁혔고 어느 국가는 복지국가의 역할을 가능한 한 넓혔다. 이 시기를 거치며 살 권리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갖는 권리, 사회적 시민권으로 인정받게 된다. 한편, 국제기구는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과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거치며 사회권을 보편적 인권으로서 다루었다. 이러한 노력은 1966년 유엔 사회적, 경제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하 사회권규약)의 채택으로 이어졌다. 현재 국제인권규범 체계에서 사회권은 보편적 인권으로 인정받고 국가는 사회권을 가능한 한 충실히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권리를 의미하며, 시민과 비시민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 헌법은 사회국가 원리를 채택하고, 사회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한다. 유엔 사회권규약에는 법적 효력이 부여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보편적 인권으로서 살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이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모든 자유는 경제적, 환경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어야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으므로 국가가 사회권을 보장하는 것은 곧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권이 시민권으로, 나아가 인권으로 승인받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이유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사회권 도입 이전 시대의 그것과 유사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다. 그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하고 사회보장제도가 갖춰진 사회다. 그런데 공동체의 공백 상태에서 각자도생하다가 돈이 없어 내몰리는 죽음이 반복된다. 그 원인으로 신청주의, 정보접근권 미보장, 지나치게 까다로운 사회보장 요건 및 절차, 모욕적인 가난 증명 과정 등이 지적된다. 나는 그 이전에 우리 사회가 사회권을 망각한 것 아닌지 묻게 된다. ‘가난으로 인한 생활고는 개인의 책임이고 복지는 시혜라는 관점에서 제도가 설계되고 운용되는 것 아닌지. 시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사회보장의 요건과 내용은 도식적으로 정하고, 자격심사는 엄격히 실시하는 것 아닌지.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여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보다, 자격을 심사하고 거짓말을 하는지 따져보아 부적격자를 거르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 아닌지. 그 인식 아래 가난은 수치가 된 것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잊힌 사회권을 불러올 차례다. 우린 모두 살 권리를 갖는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길 바란다.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한겨레 2022.08.28.

 

 

집단 지식만 있고 집단 지성은 없다

이 땅에서 학자로 산다는 것이 부끄럽다. 교수로 재직하는 것에도 자괴감이 든다. 국민대 교수회가 무려 61.5%의 반대로 김건희 논문 재검증도 하지 않고 조사위원회 조사자료 공개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벌써 열흘이 지났지만 곱씹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논문의 수준은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더 큰 문제는 표절이 분명하고 수준 이하인 논문을 통과시키고도 지도교수를 비롯해 교수들 다수가 이를 묵인, 방조,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절은 굳이 학술적 정의를 따르지 않더라도 표준국어대사전에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씀이라고 나와 있다. 상식적 수준에서도 남의 작품을 베껴 마치 자신이 지은 것처럼 사용하는 행위라는 것이 자명하다. 한자로도 겁박할 표()’훔칠 절()’을 써서 노략질이나 도둑질을 의미한다. 영어인 플레저리즘(plagiarism)은 더욱 적나라하다. 라틴어 어원에서 이 단어는 아이를 유괴하거나 자유인을 노예로 매매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범죄를 용인, 방조, 은폐하는 것이 집단 지성이라는 말로 포장될 수 있는가. 집단 지성으로 부르지 말자는 표절 피해자 구연상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학자나 교수라면 표절이 무엇인지를 모르지 않고 표절로 학위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집단 지식은 있지만 집단 지성은 사라졌다. 국민대 교수들 다수가 선택한 집단 지식의 행동이 무엇인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자.

 

첫째, 이익 앞에서 의()를 저버리는 견리망의(見利忘義)형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유형으로, 기회를 엿보다가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기회주의자도 여기에 속한다. 국민대 투표에서 집단적 이익을 계산하고 이를 지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표절이 범죄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고 이것을 단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은폐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취하려 했다. 이 유형의 학자는 곡학아세의 위험이 있다. 은폐를 선택한 61.5%의 교수 중에서 이 유형이 가장 적기를 바랄 뿐이다.

 

둘째, 구차스럽게 목숨을 이어가는 구명도생(苟命徒生)형이다. 알면서도 권력이 두려워 행하지 못하는 소심형이다. 대세를 따르기는 하지만 기회주의자와 달리 이익이 아니라 정의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물론 무기명 비밀 투표에서조차 소신을 밝히지 않은 것은 구명도생이 의식적으로 작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차스럽다떳떳하지 못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가난하여 궁색하다라는 뜻이기도 하므로 용기가 부족한 소심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셋째, 자기 몸을 상해 가면서 계책을 꾸며 내는 고육지계(苦肉之計)형이다. 궁지에 몰려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책을 따르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사로운 정보다 공정한 법 집행을 행하는 읍참마속과는 다르다. 김건희 논문의 표절을 파헤쳐 들어가면 줄줄이 나올 다른 비행과 불명예를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국민대가 특수하거나 예외적인 경우일까. 한국 교수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국민대에 전체 교수 사회의 압축된 모습이 어른거린다. 교수 출신 공직 후보 청문회에서 자주 보았듯이 표절과 교직 수행에서 적지 않은 비리들이 드러났음에도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 그 한 증거다.

 

사회적으로 교수 집단은 기득권층에 속한다. 혁명의 고조기에 교수 사회의 다수는 마지막에 나타나 동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실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교수도 항상 있었지만 언제나 소수였다. 그러나 이 소수의 목소리가 울리는 파장은 크다. 적어도 둘째와 셋째 유형은 늦게나마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

 

32대와 제33대 국민대 총동문회장을 지낸 장영달 전 우석대 총장도 이번 투표 결과에 크게 실망해 일제강점기 변절 지식인들에 비유하면서 교수들이 권력과 재단의 노예들이라 선언한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 교수들에 그 제자들이 많아질까 두렵다. 이 사달이 교수 사회에 국한된 것이기를 바란다.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교단에 설 낯이 없어졌다. 비민주적, 비학문적, 비교육적인 것은 행하지도 말고 쓰지도 말며 가르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 교수의 덕목이다. 아직도 이 말을 할 면목이 있는가. 뭐 묻은 무엇이 뭐 묻은 무엇을 욕하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이 글은 어느 한 교수가 제출하는 통한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 2022.08.29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책을 쓸 준비를 하던 시절, 교육방송의 장학퀴즈용 문제를 만드는 알바를 했다. 경제와 환경에 대한 문제들을 주로 냈다. 그러다 영화 <퀴즈쇼>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NBC 방송국에서 1958년 발생한 퀴즈 스캔들을 다루고 있다. 연승을 하던 젊은 컬럼비아 대학의 찰스 반 도렌은 사실 방송국으로부터 질문을 미리 받았다. 이 사건을 파헤쳐서 결국 부정을 저지른 방송국과 출연진을 잡아낸 조사관인 리처드 굿윈은 나중에 케네디의 연설 담당관이 된다. 미국을 뒤흔든 이 스캔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내가 놀랐던 것은 그게 감사원이나 정보기관이 아니라 미국 국회 소속 조사관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국회가? 미국에서는 감사원, 정확히는 회계감사원이 국회 소속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나서야 처음 알았다. 국가별로 감사원의 법률적 위상이 조금씩 다른데, 영국·미국이 국회 소속이고, 프랑스는 별도의 독립 기관이다. 한국은 헌법상 대통령 산하로 감사원이 설치되어 있다.

 

감사원, 정권 교체 후 보복자 역할

민주당이 야당이었고, 당대표가 문재인이던 시절,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하면서 온갖 종류의 개혁안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때 감사원 개혁 문제도 다루었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그건 손대지 말라고 나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민주연구원이나 여의도연구원 같은 정당 싱크탱크들도 국고보조금을 받고 있어서 언제든 감사원에서 자금 집행 같은 것을 챙겨보자면 챙겨볼 수 있다. 한국의 정당 역시 자금 운영과 관련된 오래된 관행과 편법 같은 게 있어서 완전히 투명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평소에는 바른 소리 잘하던 정부 연구원에 소속된 연구진도 감사원 문제는 자신들이 얘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오죽하면 감사한다고 하니까 경제 연구소 중의 경제 연구소인 KDI 원장이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겠는가? 감사원을 두려워하는 것은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학회장을 몇 번씩이나 한 어느 원로 교수가 몇 년 전에 먹은 점심값 영수증까지 다 챙겨오라고 한다니까, 그건 그냥 접으시게”, 나에게 이렇게 조언해주었다. 무서운 게 아니라 귀찮은 건지도 모르겠다. 감사원도 일단 떴다고 하면, 자기들도 명분이 필요하니까 뭐라도 뒤져낸다. 검사 개혁과 비교하면 감사원 개혁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는 건, 전문가들조차 검사보다 감사원이 더 무서워서 그런 것 아닐까?

 

헌법과 법률이 잘 지켜진다면 감사원은 행정부에 있어도 되고, 입법부에 있어도 된다. 잘 운영되고 모두가 만족하면, 그걸로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다. 행정부가 제대로 운영되는지 감시하라는 감시자가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의 정책을 보복 감사하는 보복자의 모습에 더욱 가깝다. 이쯤에서 오래된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이 사회과학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감사원이 문제가 되니까, 미국처럼 소속 기관을 국회로 바꾸는 게 한국적 대통령제에서는 정답이다. 그렇지만 이건 개헌 상황이라서 당장 시행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정책 감시자의 정치적 폭주를 그냥 방관하는 것도 좀 그렇다. 헌법은 그대로 두고 감사원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미국처럼 국회 소속되는 게 맞아

우선은 시민들이 감사원 운영에 좀 더 관여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폐쇄적 행정 기관의 운영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서 종종 사용되는 옴부즈맨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손쉽다. 모두에게 과정을 공개하지는 않더라도 선출된 시민들에게 감시자의 감시 역할을 맡기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제도가 되었다. 감사원장과 감사위원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 시민이 참여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검토할 사안이다.

 

여기에 더하여 국회의 감시를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만들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도 법제사법위원회가 감사원 업무를 다루기는 한다. 그렇지만 너무 피상적이고, 제한적이다. 이걸 좀 더 키워서 국회에서 감사위원회 운영을 별도로 다루는 기구를 만들고, 여기에 최소 분기에 한 번 감사업무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할 수도 있다. 여야 합의로 이런 기구 인원을 구성하면, 좀 더 전문적으로 감사의 적절성과 타당성 혹은 효율성 같은 성과평가를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한국의 감사원은 미국처럼 국회 소속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이전이라도 감사원법을 통해서 감시자의 감시자를 제도화시킬 수 있다. 행정과 독립적으로 작동해야 할 감사원이 지금처럼 감시자가 아니라 보복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파행적이다. 그건 누가 집권해도 마찬가지다. 해야 할 감사는 잘 모른다고 안 하고, 하지 않아도 될 감사를 보복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지금의 감사원을 그냥 방치하면 안 된다.

우석훈 경제학자 경향 2022.08.29

 

 

윤석열 정부의 삼위일체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을 진단하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지지율이 푹 꺼진 상황이었으니 평가가 좋았을 리 없다. 부정적 평가는 무책임한 실험주의, 무분별한 복수주의, 법기술 만능주의로 요약된다.

 

무책임한 실험주의는 일단 바꾸자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용산 이전의 후과를 단단히 치르고 있다. 이전 정부가 대통령실 이전을 검토했다가 포기한 데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게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이전부터 했다. 윤 대통령이 서초동 자택에서 용산 집무실까지 차량으로 출퇴근하고 한남동 옛 외교부 장관 공관을 대통령 관저로 뜯어고치는 어수선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졸속은 졸속을 낳는다. 대통령 관저 공사를 둘러싼 여러 잡음, 용산 대통령실 앞 옛 국방부 연병장에서 열린 추레한 광복절 기념식이 그렇다. 청와대 위기대응시스템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서울 도심에 폭우가 쏟아진 날 대통령실이 우왕좌왕한 것도 대통령실 졸속 이전이 한 원인이다.

 

이런 일이 한둘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민정수석실을 없앴다. 민정수석실이 하던 고위공직자 검증 업무는 법무부에 인사정보관리단을 신설해 이관했다. 이를 위한 입법예고 기간은 단 이틀에 불과했다. 민정수석실이 없으니 서둘러 인사정보관리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비슷한 논리로 행정안전부 경찰국 설치도 4일 만에 끝냈다. 주요 제도나 기관을 일단 없앤 뒤 공백을 메워야 한다면서 졸속으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습성이 되었다. 대통령 부인을 보좌하는 제2부속실을 없앤 것도 마찬가지이다. 2부속실 폐지는 김건희 여사가 공적으로 활동하지 않아야 아귀가 맞는데, 김 여사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김 여사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이상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관리에 사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적 연고에 따른 특혜채용 의혹, 보안사항인 윤 대통령 일정 노출이 그런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정치 경험도, 국정운영 경험도 없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을 튼실하게 뒷받침할 상황이 아니다. ‘5세 입학정책으로 낙마한 박순애 교육부 장관 사례에서 보듯 내각이 짱짱한 것도 아니다. 야당과 통 크게 손을 잡으려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기능부터 축소했다. 그 결과가 국정의 공동화요,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하는 나라이다.

 

무분별한 복수주의는 복수는 나의 힘이라는 태도이다. 현 정부 사정 트로이카로 불리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상민 행안부 장관,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에게서 유독 강하게 나타난다. 한 장관과 유 사무총장은 전 정권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이는 매사 전 정권 탓을 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이원석 검찰총장 후보자의 수사기밀 유출 의혹에 대해 한 장관은 진짜 문제가 됐다면 이 후보자가 어떻게 전 정권(문재인 정부)에서 검증까지 통과해서 검사장까지 승진했겠느냐고 말한다. 한 장관은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지휘한 사람이고, 이 후보자의 수사기밀 유출 의혹은 사법농단 수사 때 처음 인지된 사실이다. 사법농단 수사 책임자로서, 이 후보자 인사검증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자초지종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책임이 있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부적절한 것이 있었다면 인정하고 교정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정상이다. ‘너나 잘하세요식 태도로 적당히 눙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너도 그랬잖아’ ‘왜 나만 가지고 그래식 남 탓은 유아적인 언어이지 성숙한 어른의 언어가 아니다. 한 장관을 두고 너무 설친다” “미운 일곱 살 같다는 비아냥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헌법기관인 감사원을 복수혈전의 무대로 삼는 유병호 사무총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법기술 만능주의는 법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이다. 시행령 통치, 의회주의 경시와 같은 계열이다. 법무부가 검찰청법 개정 취지에 반하는 검수원복’(검찰수사권 원상 복구) 시행령 개정을 밀어붙이는 것, 행안부가 시행령을 개정해 경찰국을 신설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무책임한 실험주의, 무분별한 복수주의, 법기술 만능주의는 연결돼 있다. 전 정권과 무조건 달라야 한다는 강박이 국정운영 지표라면 전 정권에 앙갚음하려는 마음은 그 심리적 에너지다. 여기에 실행을 담보할 법기술이 더해지면 삼위일체가 완성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25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더 이상 전 정권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전 정권 탓하는 태도를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정제혁 사회부장 경향 2022.08.29.

 

 

서러운 딸들과 개딸

다음 생엔 부잣집에서.”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다 삶을 접은 수원 세 모녀의 빈소를 스케치한 중앙일보(인터넷판)가 머리기사로 올린 큼직한 표제다(825). 몇몇 언론도 그렇게 보도했다. 기자와 편집자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세 모녀를 두 번 죽이는 행태다. 실제로 수원의 세 모녀만이 아니다. 8년 전 송파 세 모녀도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수원의 다세대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모녀는 수첩에 적바림을 남겼다. “그냥 가려 했는데 한 자 적는다며 경제 활동을 하던 오빠가 병사하고, 몇 달 뒤 아버지마저 숨진 사연을 담았다. 각각 난소암과 희귀병에 걸린 어머니와 언니를 책임져야 했던 정신적 고통도 담았다. 그냥 떠나려다가 유서를 적을 때 그 딸의 설운 심경을 헤아리면 콧잔등이 시큰해온다.

 

수원과 송파의 여섯 모녀 모두 이 땅의 딸들이다. 그 딸들의 서러운 죽음은 정치 현실을 되짚게 한다. 문재인 정부를 거쳤어도 민중이 살기다툼에 시달리는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촛불로 대통령은 물론 입법 권력까지 얻은 민주당이 무엇을 했는지 분노하는 이들에 공감한다.

 

그래서다. 대다수 언론이 극렬 팬덤따위로 조소하는 개혁의 딸(개딸)’에 주목하고 싶다. 국힘당 기관지와 다름없는 언론이 흠집 내기에 앞장서 더 그렇다. 그 신문 출신의 여대 여교수 글이 압권이다. 여기서 여교수란 말은 성차별 의도가 아니다. ‘개혁의 딸에 견준 말이다. 여교수는 조선일보에 기고한 커피하우스 칼럼’(826)에서 개인을 숭배하는 이상한 무리가 그 인간이 무조건 좋다를 외치는 섬뜩함 위로 윤석열 인간 자체가 싫다는 김여정이 오버랩된다고 쓴다. “단 한 사람의 자유인을 위한 일사불란한 매스게임을 보는 것 같다고 강조한다. 지난 대선에서 노골적으로 특정후보를 지지한 여교수가 이상한 무리로 훌닦은 이들은 문맥상 개딸로 보인다. 케케묵되 교묘히 변주한 색깔몰이다. 아무리 글쓰기가 자유이고 더욱이 조선일보 기자출신이라지만 언론학자의 글이라고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녀가 공론장을 들먹이기에 더 생게망게하다.

826, 조선일보 박성희의 커피하우스-자유라는 나무는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내가 아는 개혁의 딸들은 친문 의원중심의 민주당이 기득권화 되었다고 비판한다. 문파들 가운데 개혁 성향 강한 지지자들이 새로 뭉친 셈이다.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을 혁신하기 위해 정치인 이재명을 지지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대선 직후에 꼬박꼬박 당비를 내는 당원으로 대거 가입했다.

 

개혁의 딸들은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이 문재인 정부를 거치고도 수원에서 재현되는 바로 그런 상황을 해결하려는 정치운동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삶이 서러운 이 나라의 딸들을 자살로 모는 한국 정치를 바꾸려는 결기다. 민주당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이유다. 한국 정치의 변화를 국힘당에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개혁의 딸들에겐 자신을 김여정이나 일사불란한 매스게임으로 색칠하는 언론은 개혁 과제다. 확인되지 않은 사안들로 집요하게 민주당 분열을 조장하는 언론권력에 비판 의식도 사뭇 강하다.

 

그렇다. “다음 생엔 부잣집에서 태어나라따위의 언론에 맞서 부잣집에서 태어나라?”를 물어야 옳다. 다음 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자살률 1위 출산율 꼴지의 참극을 벅벅이 정치로 바꿔내야 한다. 그때 고통 받는 민중들이 살아갈 희망도 자랄 수 있다. 민주당 정권과 의원들이 촛불의 기대에 어긋났기에 제1야당 개혁은 시대적 요구다. 흠집이나 조소에 앞서 여성정치운동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개딸의 의미 있는 활동도 최소한 균형 있게 보도해야 한다.

 

개혁의 딸들은 철학이 없던 대깨문과 달라 보인다. 지금까지 보여준 문제의식과 현실 감각을 더 깊은 민주주의 철학으로 벼려 가리라 믿는다. 새로 선출된 이재명 대표와 개혁의 딸들이 민주당을 슬기롭게 바꿔가기 바란다. 삶이 서러운 딸들을 위해, 더 나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딸과 아들을 위해 그렇다.

손석춘 칼럼니스트철학자 미디어오늘 2022.08.29.

 

 

기대할 게 없고, 기댈 게 없다

기대할 게 없어요.” 지난 2년간 코로나19와 기후위기를 끝없이 마주한 장애인과 부모들, 동료 시민을 만날 때마다 들어온 말이었다. 팬데믹과 재난이 연속되는 현실 앞에서 무엇이 가장 괴로운지 묻는 말에는 어김없이 기대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코로나가 너무 아팠다거나, ‘소득이 줄었다거나 하는 하소연이 주를 이루리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재난 앞에서 삶이 해체되는 고통을 체험한 이들조차 가장 괴롭게 인식하는 것은 기대할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장애인 활동가는 2018년 메르스 사태 때부터 장애인이 대처할 수 있는 방역 지침을 정부에 요구했지만 여태껏 제대로 준비된 게 없어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했고, 발달장애인의 부모는 자녀가 확진되어도 정부로부터 적합한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기대할 게 없다고, 장애 당사자는 중증 장애를 가진 이들의 지원책 실무를 두고 부처끼리 책임만 떠넘기다 말 것이 뻔해 기대하는 게 없다고 말했다. 저마다의 사연 속 되풀이되는 문제 속에 더는 기대할 게 없다는 우울한 결론은 더는 기댈 게 없다는 좌절로 들렸다.

 

재난의 시대 속 힘겹게 남은 한 뿌리라도 지탱하려는 이들은 국가의 사회적 안전망이 자신의 그늘이 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문제 앞에서, 구조적 차별 속에서 생존의 책임이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떠넘겨졌다는 사실을 사회적 취약계층은 맘 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침수 속 죽어가는 이를 볼 때 한 번, 자녀를 죽이고 스스로 죽은 부모를 볼 때 한 번, 형용할 수 없는 기구한 참사 사연들 앞에서 또 한 번 떠올렸다. 끝없이 목격한 결과, 죽음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전망 없는 삶 앞에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것을 선택지로 인식하고 있었다.

 

내일을 살아야 할 기대를 갖지 못하는 시민들의 호소 너머 마주한, 뉴스 속 국가는 아무런 전망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질병관리청만 보더라도 과학방역을 제시했다가, 자율방역이 더 낫다고 했다가, 아무래도 표적 방역이 좋겠다는 둥 시작이 중요하다며 중언부언하다 말았다. 이제 더 이상 화려한 수사로 점철된 새 정책이 발표된들, 죽음을 고민하는 시민들은 허울 같은 명칭 따위를 고민할 여유조차 갖지 않는다. 사치라 여긴다. 도리어 냉혹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나마 지금까지라도 제 기능을 한 몇 남은 기존 대책마저 요란 속에서 붕괴될까 맘 졸이고 있었다.

 

착지의 기약이 없는 채 배제와 죽음의 위협으로 드리워진 망망대해에서 새 파고를 마주하는 승선자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국민에게 국가는 나침반 같은 존재가 아니라, 폭풍우처럼 인식되고 있다. 기대가 없는 사회, 믿음이 없는 사회는 돌고 돌아 미래가 없는 사회를 종착지로 향하고 있다.

 

때때로 여당이 화를 내며 치받는 뉴스와 야당이 열을 내며 전당대회를 여는 뉴스가 우리 사회의 에너지가 아직 여전하다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TV 밖 거리에서 만나는 대다수 이웃들은 집단적 무기력감에 드리워져 말을 잃었다. 출구를 찾지 못해 목소리를 잃어간 채 단념한 이들의 현실을 기록하는 나조차 2년간 격려할 힘을 잃었다. 모두들 목메는 슬픔에 잠겼을 뿐이다. 기대할 게 없고, 기댈 게 없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경향 2022.08.30

 

 

담대한 구상의 뚜렷한 한계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이 여러 가지로 안정성을 잃고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또 무슨 일이 터져 얼마나 더 흔들릴지 걱정하며 살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마땅히 공공선의 확보와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안정과 희망을 주어야 할 정치, 경제, 남북관계 등 주요 분야가 하나같이 깊은 불안감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고 있는가? 우선 정치 분야를 보면, 검찰 출신 윤석열 대통령이 아직 정치지도자, 국가지도자로 태어나지 못하고 있고, 여당은 권력투쟁의 늪에 빠져 반쪽짜리 리더십마저 실종됐다.

 

취임 100일을 겨우 넘겼는데 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가 30% 안팎으로 떨어져 있다. 외교도 다가오는 경제위기의 극복과 우리와 후손의 장기적인 생존과 번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미·중 양국에 대한 균형외교 요구를 무시하고 과도하게 친미·반중외교로 기울어져 있어 후폭풍을 가늠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과 정부가 앞으로 문제해결 능력을 갖게 될 것인지 국민들에게 확신을 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분야에서는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3() 현상, GDP를 구성하는 4대 요소인 소비, 투자, 정부지출, 순수출의 위축, 그리고 국제 상품 공급망 구축과 관리의 어려움, 식량과 에너지 가격 불안정 등으로 초대형 복합 경제위기가 닥쳐오지 않을까 불안하다. 무엇보다도 더욱 피폐해질 서민들의 삶이 걱정이다. 극도의 소득격차, 부의 양극화는 어떤 정치·경제체제든지 간에 그 정통성을 붕괴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다면 남북·한반도 분야는 어떠한가?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 대만을 둘러싼 미·중 대결의 악화로 한반도가 첨예한 국제대결 무대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 대만과 함께 가장 위험한 화약고임을 부정할 수 없다. 만일 남북관계와 한반도 국제정치에서 파국이 온다면 우리의 정치·경제 분야는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미 양국 정부는 한·미 동맹과 한··3국협력 강화 외에 어떤 실효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510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국제사회와 협력하여 북한경제와 북한주민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계획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광복절 경축사에서 510일자 조건을 재차 확인하면서 식량과 농업 관련 지원, 송배선, 항만과 공항, 의료 분야의 사회경제적 인프라 건설 지원, 국제투자 및 금융 지원 등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는 한·미 양국이 반복해왔던 선 비핵화, 후 경제지원제안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북한은 818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는 김여정 담화를 통해 윤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을 거부했다. ‘담대한 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동족대결의 산물로 버림받은 비핵·개방·3000’의 복사판에 불과하다. ‘북이 비핵화 조치를 취한다면이라는 가정부터가 잘못됐다. 북한의 국체인 핵을 경제협력과 같은 물건짝과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오늘은 담대한 구상을 운운하고 내일은 북침 전쟁연습을 강행하는 윤 대통령에게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면서 윤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차원의 깊은 실망을 표현했다. 그리고 앞으로 윤석열 정부를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파국을 막은 열쇠는 예외 없이 남북관계 개선이었다. 남북한 간에 파국을 막기 위한 실질적이고 실효성 있는 노력 없이는 강대국들의 협력을 기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분단 77, 정전체제 69년의 고통 그 자체인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병의 근원과 증후를 구별하고 증후 차원에서 꾸준히 고통을 감소시키는 노력과 함께 병의 근치를 위한 장기적인 차원의 노력을 지속해야만 한다. 어차피 한반도 문제에 대한 단기적인 해결은 난망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로서 담대한 구상을 넘어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 구상을 제시해야 할 책무가 있다. 평화공존을 기반으로 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새로운 정립, 6·25전쟁 종전과 평화체제 수립, 비핵화, 대북 제재해제를 통한 주고받기 등 핵심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정책목표와 정책수단의 정합성을 갖춘 장기적인 전략구상을 내어놓기를 희망한다.

백학순 김대중평화회의 집행위원장 경향 2022.08.30

 

 

검찰보다 더 열심히 국정 지원하는 최재해 감사원장

최재해 감사원장 집무실에 윤석열 정부의 국정지표가 표구돼 걸려 있다는 말을 들은 지가 제법 됐다. 독립적인 국정 감찰을 맡은 헌법기관의 수장이, 그것도 첫 감사원 출신 원장이 왜 저럴까 의아했다. “감사원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원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국회 답변 한마디로 의문이 풀렸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공사판 같은 감사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감사는 어차피 사후에 하는 것이니 지난 정권의 사안들을 들추는 것은 감사원의 고유한 판단 영역이라고 해둘 수 있다. ‘무엇을 감사하는가, ‘감사하는가는 전·현 정권의 유불리, 진영의 이해득실이 충돌하는 지점이라 정답 없는 논란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어떤 감사건 적법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지금 진행 중인 감사 중 3, 즉 서해 공무원 피살,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관련, 비영리민간단체 지원 실태는 감사위원회의의 의결 없이 감사 결정이 내려졌다. 감사원법에는 감사정책 및 주요 감사계획은 감사위원회의 의결 사항이라고 명시돼 있는데, 3건은 해당 절차를 건너뛰었다. 감사원 대변인도 인정했다.

 

“(3건은) 별도로 (감사위원회의의) 의결을 받지 않았다. ‘상시 공직감찰이라고 해서 주제를 특정하지 않고, 원장이 첩보나 정보에 따라 구체적인 아이템을 정해서 감사를 나가는 것이다. 서해 사건도 그런 경우다. 원장에게 (권한이) 위임돼 있다.”

 

위임이 적법하려면 법령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감사원법과 관련 규칙에서 찾을 수 없다. 3건의 경우 감사위원회의에서 원장에게 권한 위임을 의결한 적도 없다고 한다. 이런 식이면 원장 마음대로어떤 것이든 감사할 수 있다. 민감한 사안은 감사위원회의를 열 필요도 없다. 서해 사건 감사가 그렇다. 국방부와 해경이 자진 월북 입증 불가라고 발표한 바로 다음날, 감사원은 기다렸다는 듯 감사 착수 보도자료를 뿌렸다. 전현희 위원장 건도 정치권 공방이 가열되자 특별조사국을 곧바로 투입했다. 이런 법외 감사감사원 설립 이래 쭉 해왔다고 대변인은 설명했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감사는 내가 전격 지시했다는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의 호언(<신동아> 인터뷰)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감사위원회의도 간단치 않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대선 직후인 지난 4월 감사위원이 된 이미현 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논의되는 안건마다 대부분 윤 정부 편에 선다고 한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마지막 감사위원이기 이전에 윤 대통령의 대학 동기이고 친구이 위원의 남편까지. 지난해 고발사주의혹이 불거졌을 때는 윤석열 캠프 정치공작 진상규명 특별위원회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색이 이토록 선명한 사람을 임명제청한 이가 최 원장이다.

 

이 교수만이 아니다. 지난해 12, 문 전 대통령과 <검찰을 생각한다>를 함께 쓴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최 원장의 제청으로 감사원에 입성했다. 그는 2012년 총선에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다 낙선했고, 2017년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 지원 포럼 활동을 했다. 또 감사위원이 되기 직전까지 이재명 민주당 후보 캠프에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신구 정권 밀접 인사를 한 사람씩 받아주면서 감사위원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운동에 관여할 수 없다는 감사원법(10)눈 가리고 아웅이 됐다. 이런 최 원장이 지난 26일 감사원 설립 74돌 기념사에서는 직무상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 불편부당한 자세를 엄정히 견지해달라고 당부했다가 직원들의 빈축을 샀다.

 

문 정부 때 임명됐으니 자리가 불안해서 그럴 것이다.” 최 원장의 의도가 궁금해 늘공들에게 물어보니 거의 다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그는 20181월 퇴직했다가 지난해 11월 원장으로 복귀하기까지 310개월을 야인으로 살았다. 아직도 4년 임기 중 3년여가 남았다. 최 원장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은 검찰총장, 국세청장이 이명박 정부에서 임기를 보장받으려고 오버하다가 큰 사달을 낸 과거사를 새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검찰보다 더 열심인 최 원장의 국정 지원활동이 윤석열 정부에 보탬이 됐는지도 의문이다. 공교롭게도 감사판이 사방팔방 확대될수록 윤 대통령 직무수행 지지율은 점점 더 떨어져 20%(한국갤럽)로 내려앉았다.

강희철 | 논설위원 한겨레 2022-08-30

 

진짜 범인은 감옥 밖에 있다

거의 40년 전, 중학교 절친은 대학에 가서 소위 운동권 학생이 됐고 나는 그저 소심한 의대생으로 살았다. 그를 구치소 면회하고 온 날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그 녀석은 면회실 안쪽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정 갇힌 이는 그인가 나인가?”

 

며칠 전, 수원 12평 월셋집에서 빚 독촉에 시달리던 난소암 투병 어머니와 잦은 경련에 시달리는 희귀병을 가진 두 딸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8년 전 정말 죄송하다며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떠난 송파 세 모녀 사건은 2018년 관악구 탈북 모자 사건, 2019년 성북구 네 모녀 사건, 2020년 방배동 모자 사건, 다시 이번 수원 세 모녀 사건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큰비에 쇠창살이 있는 반지하 집에 갇혀 살던 홍아무개씨와 딸, 장애를 가진 언니도 쏟아져 들어오는 빗물에 익사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치던 정치인들은 지금 모두 감옥 밖에 있다. 요즘엔 한술 더 떠 마지막 사회안전망인 공공·복지부문 예산을 줄이면서 부자감세에 혈안이 돼 있다.

 

갇혀 죽어가는 이들이 이뿐이랴. 우리나라 장애인 평균 시설거주기간은 약 19년에 이른다. 하지만 수십년째 이를 방치하고 있는 정치·행정·의료 전문가들도 감옥 밖에 있다. 엄마를 만나러 기차를 탔던 어린 남매, 길 가던 청년들을 이유 없이 끌고 가 가두고 구타와 성폭행도 모자라 657명이나 죽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이 최근 추가로 규명됐지만, 이 범죄의 공범인 군인, 행정관료, 정치인 대다수는 감옥 문턱에도 가지 않았다.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하청노동자 유최안씨는 가로·세로·높이 각 1인 쇠창살에 스스로 자신을 가뒀다. 하지만 고용주들은 공범인 거대 로펌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손실부담금을 청구하고 휴가를 떠났다.

 

좁은 공간에 갇혀 고통받는 이는 아프고 가난한 이들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 상당수도 학원이 끝나는 밤 10시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위 자물쇠반교실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그 학원장, 그곳으로 자식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모두 감옥 밖에 있다.

얼마 전 모 대학 교수회의 표절논문 검증회의 결과를 보니, 일찍이 조지훈 시인이 수유리 4·19묘지에 누워 있는 이들 중 교수는 한명도 없고 왜 모두 젊은 학생들뿐인가 통탄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오늘날 바른말 하고 감옥 가는 교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한해 최소 210만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전세계 곡물가격이 20% 이상 급등한 상황에서 23~100%의 기록적인 매출 증가로 폭리를 취하고 있는 세계 4대 곡물회사 경영자들, 빈곤국의 20.9%만이 겨우 한번 이상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있을 때, 백신이 남아돌아 폐기하기에 바쁜 부자나라 관료들과 천문학적 규모의 수익을 남기는 다국적 제약회사 경영자들도 감옥 밖에 있다. 지난 3년 코로나19 유행으로 세계 인구 99%가 소득이 줄어드는 동안 자산을 2배로 불린 10대 부자들도 모두 감옥 밖에 있다.

 

국제구호개발단체인 옥스팜 보고서에 따르면, 1995년부터 인구 상위 1%가 하위 50%보다 약 20배 더 많은 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부유한 억만장자 20명이 가장 가난한 10억명보다 평균 8000배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불평등으로 인해 4초마다 1, 하루에 21300명이 사망하고 있지만 이 가해자들도 감옥 밖에 있다.

 

며칠 전부터 한반도에서 연합훈련이란 이름으로 다시 외국의 탱크와 폭격기가 굉음을 내며 우리 땅에 상륙하고 우리 상공을 가로질러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남북관계를 50년 전 7·4남북공동선언 때보다 후퇴시켜 오랜 평화의 꿈을 깨뜨리고 전쟁 기운을 고조시키고 있는 세력들, 전쟁을 벌인 자도, 벌이려 하는 자들도 모두 감옥 밖에 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감옥 밖에 있다면 그들의 공범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을 쓴 한 철학자의 말을 조금 비틀어 요약하면 근대 지배권력은 반대자를 감옥에 가둠으로써가 아니라 감옥 밖에 머물게 함으로써 작동한다”.

 

일제강점기나 군사독재 시절 같은 난세에 희망의 불씨는 늘 감옥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다. 하지만 전쟁, 기후와 환경 위기 등으로 인류의 종말까지 심심찮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오늘날, 감옥 밖에 있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쯤 되는 칼럼을 쓰면 나도 감옥에 갈 수 있을까? 그래서 감옥 밖에서 살아온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을까? 진짜 범인은 감옥 밖에 있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한겨레 2022-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