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경향 2021.03.02.
있는 놈이 더하다 경향 2021.03.02.
천국에서 한국인 목사가 품귀를 빚는 이유? 프레시안 2021.03.03.
<일탈>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가? 씨네21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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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요 근래 부쩍 듣는 말이 있다. 여야 정객을 만나도, 지인들과의 밥자리에서도 오가는 얘기다. “대통령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정가의 뒷얘기를 곧잘 풀어주던 친문 원로도 도통 모르겠단다. 아는 거 없냐고 여기저기서 물어온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짧고 모호한 말’과 ‘침묵’이 낳은 풍경이다.
설 직후에 터진 신현수 민정수석의 사표 파동은 철회도 반려도 없이 3월을 맞았다.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에 나와 “나는 사표를 수리하면 안 된다고 건의했고, 아마 수리가 될 수도 있다”며 “(후임자 물색은) 설혹 하고 있더라도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알쏭달쏭 무슨 말인지…. 어차피 거취를 일임받고 아무 말이 없는 ‘대통령의 시간’임을 알린 것이다. 사태의 얼개는 나왔다. 인사안 보고부터 승인·발표·전자결재·발령까지 ‘통상절차’는 밟았다 하고, 박범계 법무장관이 조율 중인 인사안을 밀어붙이자 신 수석이 직을 던졌다는 게 골격이다. 사달은 신 수석이 윤석열 검찰총장 요구도 담은 인사를 중재하다 막판에 터진 걸로 짐작된다. 사표 내고 날린 “저의 동력을 상실했다”는 문자가 그것일 테다. 모종의 구상이나 역할이나 언약이 흔들렸을 때 하는 말이다. 그것이 뭘까. 법무장관의 인사안도, 민정수석의 중재도 어디까지가 대통령의 생각인지 알 길이 없다.
대통령의 진의 시비는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으로도 번져 있다. “시행 중인 수사권 개혁부터 안착시켜달라”는 대통령의 말이 중수청의 ‘속도조절’을 주문한 것으로 해석되면서다. 유영민 실장은 대통령이 그 네 마디를 했다고 전했다가, 여당의 사실확인엔 ‘그런 취지였다’고 정정했다. 검찰의 6대 범죄 수사권도 넘겨 만들려 하는 중수청은 야당·검찰·경찰·공수처도 한마디씩 벼르고 있는 올해의 화약고다. 여권으로 좁혀도, 공수처와 검경 수사권 조정을 대선공약 축으로 삼는 청와대와 한발 더 가겠다는 2차 검찰개혁파의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임기 말 당·청의 시선은 미래(선거)와 현재(국정)로 갈라진다. 대통령의 짧은 메시지 후에 ‘중수청 내전’이 잦아들지 않는 것도 그렇게 읽게 된다.
2020년을 꽉 채운 ‘추·윤 갈등’과 2라운드 격인 ‘신·박 갈등’, 심지가 타고 있는 중수청 대치는 공통점이 있다. 대통령이 당사자 간 해결을 기다리는 ‘관찰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문제가 반복되니 레임덕 얘기도 불쑥 나오지만, 외려 혼선은 명확히 제때 전달되지 않는 대통령 메시지에 있을 수 있다.
대통령의 말이 흐트러져가는 것은 또 있다. ‘만사(萬事)’라는 인사다. 문재인 정부의 총리·장관 49명 중 현역의원 입각자는 18명(36.7%), 전직까지 합치면 22명(44.9%)에 달한다. ‘내각제 정부’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보니 정치인·전문가·관료가 정권의 세 토막을 나눠 맡으면 좋다는 관가의 ‘장관 3박자론’도 시도된 곳은 통일부(조명균→김연철→이인영)뿐이다. 한때 6명이 포진했던 여성 장관도 지금은 3명으로 줄며 대통령이 약속한 30%룰이 깨졌다. 첫 조각 때 61.2세였던 내각은 오늘도 60.8세이다. 4년 전 취임사에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널리 삼고초려하겠다”고 한 말은 무색해졌다. 왜 그랬을까. 권력 주변에선 인사청문회 벽을 먼저 얘기한다. 본인 고사로 열 사람 지나 만난 장관이 수두룩하고, 40고개를 넘기거나 “(청문회 없이)차관이면 하겠다”고 역제안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인사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 사람도 메시지다. 그 흔들림이 계속되면, ‘정은경’ 석 자가 유난히 빛나는 문재인 정부에서 인사는 ‘아픈 손가락’이 될 수 있다.
“흔히들 임기 후반을 하산(下山)에 비유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끝없이 위를 향해 오르다가 임기 마지막 날 마침내 멈춰 선 정상이 우리가 가야 할 코스입니다.” 문 대통령이 2007년 3월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 취임식에서 한 말이다. ‘오르다 멈추자’는 이 말은 요즘 청와대 사람들도 곧잘 소환한다. 백신 장정도, 한반도 평화도, 부동산도 갈 길이 멀고 코로나19 끝에 대선과 만나는 정권의 운명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도 달은 차면 기운다. 대통령의 시간도 예외는 없다. 국정과 여당을 쥐는 ‘그립(Grip)’이 하루하루 다르고, ‘맞을 매’와 ‘억울한 매’와 ‘공매’가 함께 쌓이는 것도 보게 된다. 그런 정권 끝일수록, 대통령의 생각과 말이 궁금한 세상엔 속설이 차오른다. 달리 왕도(王道)가 있을까. 가장 강력한 대통령의 이미지는 ‘지도자’이고, 대통령의 존재 이유와 힘은 거기서 나온다. 대통령의 메시지와 용인술은 분명하고, 빠르고, 획이 커야 한다.
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2021.03.02
있는 놈이 더하다
‘노후대비’라는 말을 들을 때면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떠오른다. 원룸촌에서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다가구주택으로 구성된 원룸촌 집주인 대부분은 이미 노후의 삶을 살고 있거나 노후대비로 주택 임대업을 하는 중장년층이었다. 집도 노후해서 살면서 크고 작은 불편을 자주 겪었다. 그렇다고 임차료가 낮은 편도 아니었다. 나는 품질 좋고 교통편의성 높으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청년공공주택의 ‘대량’ 공급이 필요하다고 봤다.
물론 많은 집주인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노후대비를 위해 대학가에 주택을 마련해놨는데, 기숙사나 공공주택이 생기면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에겐 청년들이 저렴하고 괜찮은 주거시설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지 여부는 안중에 없어 보였다. 오직 자신의 손해가 걱정일 뿐. 거칠게 요약하면 ‘본인의 노후가 청년들의 현재보다 더 중요하다’ 정도 아니었을까.
어르신들 모두가 그렇다고 일반화하고 싶진 않다. 사실 집주인이 된 노인 자체가 소수에 속한다. 다수 노인들은 빈곤에 시달린다. 노인 빈곤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믿을 건 자산 증식뿐인가? 코로나 시국의 유동성은 ‘FOMO(fear of missing out)’, 한국식으로 풀어 말하면 ‘이러다 나만 X되는 거 아냐?’ 심리를 자극해, 안 하던 짓까지 하게 만들었다. 국민건강보험만 믿던 내가 암보험과 실비보험에 가입하고, 주식시장까지 기웃거리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노후를 ‘계획’이라도 해본다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노후는커녕 지금 당장의 삶에 힘겨운 이들이 많다. 코로나19가 청년 자살률 상승폭을 더욱 가파르게 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살아있는 매 순간이 경쟁인 사회에서 자존감을 지키며 사는 일이 쉽지 않다. 게다가 주거 문제로 고통받는 청년에게 주택 가격 급등 또한 희망을 꺾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주택을 증여해줄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못한 청년은 평생 집주인의 레버리지 수단이 돼야 하는 걸까? 인구재생산을 거부하는 청년들의 선택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니 합계출산율이 0.84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다. 오히려 이 와중에도 노후 걱정을 앞세우는 사람이 놀랍다. 낮은 출생률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걱정이 ‘국민연금 고갈되면 어쩌지’라면, 인성에 좀 문제 있는 것 아닌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청년마저 수단으로 보는, 그 시선을 숨기지도 않는 뻔뻔함이 거북하다.
행복한 노후를 위해, 자산을 증식하려는 개인의 노력도 어느 정도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매몰되어 시민성이 상실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제도로서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 못지않게, 개개인의 인식 개선과 실천이 중요한 시점이다. 적어도 있는 사람이 더한, 그런 꼴은 좀 덜 보고 살고 싶다. 그 시작은 누군가 코로나가 기회의 시기라며 자산을 증식할 때, 다른 누군가는 살아있음이 고통이라 ‘그만 살기’를 선택하고 있다는 이 간극의 비극을 감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서윤 작가 경향 2021.03.02.
천국에서 한국인 목사가 품귀를 빚는 이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 목사하고 몇 년 전에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밥 먹다가 "목사님, 천국에서 가장 찾기 힘든 직업이 목사라고 하던데 들어보셨나요?"라고 물었더니, 그 목사는 웃기만 했다. 구차하지만 굳이 내가 기독교인임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기독교 혐오가 아니다), 천국에서 목사를 발견할 확률보다 무신론자를 발견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끔 나의 이러한 생각을 주변에 전하는데, 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 아니든 대체로 동감을 표시했다. '존경하는' 목사님들은 나의 농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정확하게 말해 '개신교' 목사에 대한 이러한 뼈 있는 농담은 꼭 코로나19와 연관된다고 할 수 없지만, 코로나19 국면을 거치며 민낯이 드러난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러운 행동을 한다는 게 문제겠지만 더 큰 문제는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이겠다. 비단 전광훈 씨 같은 유사 목사나 전 씨를 따르는 유사 기독교인만 문제가 아니다. 소위 정통 기독교인 중에서도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지난 1월 27일~2월 12일 125명의 코로나19 확진자를 발생시키고 담임목사도 확진 판정을 받아 격리된 광주의 한 교회는 전광훈 씨의 사랑제일교회와 달리 예수교 장로회 통합교단에 소속된 '정상' 혹은 '정통' 교회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격리에서 해제된 이 교회 박 아무개 담임목사는 코로나19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더 복을 주려는 훈련"이라며 "우리 교회를 핍박한 그들도 피해자이니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주라"라고 설교했다. 박 목사는 또한 "우리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고 (대면예배를 진행하는 등) 하나님 뜻대로 하려고 애를 썼잖나. 여러분이 얼마나 충성스럽고 잘했나"라고 자신들의 코로나19 대응을 매우 긍정적으로, 더구나 신앙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주라"는 표현은 방역당국과 정부를 '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인한 표현이다. 반성과 사과가 우선이 아니었을까? 교회 용어로 회개하는 게 격리 후 담임목사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었을까? 복을 빌기 위해 그렇게 자주 행하는 통성기도라도 하며 회개해야 하지 않았을까?
개신교라는 기독교 분파를 만들어낸 마르틴 루터라면, 이 문제에 어떤 의견을 표명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오래전 인물이라 의견을 찾기 어려울 것 같지만 의외로 찾으면 간단하게 나온다. 루터의 시대 또한 '흑사병'이라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전염병의 시대였고, 흑사병으로 형제를 잃은 루터는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감염병을 잘 알았으며, 종교인으로서 대처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한 듯하다. 루터가 수도사가 된 이유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우연히 벌어진 낙뢰 사건보다는 그 이전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인한 형제들의 죽음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루터는 흑사병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치명적인 전염병을 주셨을 때, 나는 이 병을 막아달라고 주님께 자비를 구하며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집에 연기를 피우고 환기를 시키면서 약을 받아먹어야 했습니다. 나를 꼭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라면 가지 않고 피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도 있고, 나의 사소한 부주의가 이웃을 죽이는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갈 것입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사람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 어떤 일이든 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어리석거나 뻔뻔하지 않으며, 사람을 선동하거나 미혹하지 않습니다."
* WA 5, 334f.: 1527년 여름 흑사병이 비텐베르크를 강타했을 때, 루터의 설교(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담임목사 번역(☞ 바로 가기 : 최주훈 목사 블로그))
흑사병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를 정리한, 널리 알려진 루터의 이 설교는 유사 목사 전광훈 씨나 광주의 '정통' 교회의 박 목사와 180도 다른 입장을 표명한다. 하긴 종교라고 상식이 무시될 리는 없지 않은가. 이런 간단한 지각조차 없는 상식 없는 소위 목사, 상식 없는 이른바 기독교인이 기독교와 예수를 욕보이고 있다. "교회가 신의 무덤"(고리키)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회칠한 무덤 위에다 금송아지 올려놓고 헌금이나 많이 내라고 하는 이들을 성직자라고 불러야 옳을까.
구약성서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찾을 수 있다. 모세의 누이로 구약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 인물인 미리암이 피부병에 걸리자 당시 규례에 따라 그는 진영 밖으로 나가 이레 동안 갇혀 있었다. 요즘 말로 격리된 것이다.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행진하지 아니하다가"(<민수기> 12장 15절)는 구약 구절은 루터의 설교와 일치한다.
전광훈 씨가 '본 훼퍼'라고 성(姓)을 이름과 성으로 분할하여 불러 졸지에 '본회퍼' 가문 족보에서 쫓겨날 뻔한 독일의 목사이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히틀러 암살을 모의하다 총살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행적보다 더 유명한 것은 교회를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규정한 그의 신학이다. '타자를 위한 존재'인 교회는 결코 '신의 무덤'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이제 천국에서 본회퍼 목사가 '요즘 왜 한국인 목사를 보기 힘든가' 하고 의아해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의 쟁쟁한 개신교 목사님들이 돌아가실 텐데, 그땐 아예 천국에서 한국인 목사의 씨가 마를 것 같아 벌써 본회퍼 목사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안치용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 | 프레시안 2021.03.03.
<일탈>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가?
자우림의 노래 몇개를 좋아하고,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를 정말로 좋아한다. 그렇지만 자우림 앨범을 찬찬히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일탈>의 가사를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신도림역에서 스트립쇼를 하고, 선보기 하루 전에 홀딱 삭발을, 이런 가사가 한국에 또 있었나, 그런 생각을 했다. 아내가 김윤아 또래인데, 환경 활동가 시절에 새만금 농성을 시작하면서 삭발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공교롭게도 자우림 1집은 1997년 11월에 나왔다. IMF 경제 위기와 함께, 딱 한번 한국에서 만개하려고 하던 다양성의 시대, 그런 흐름의 날개가 꺾였다. 군사정권 이후 획일성을 강요받던 그 시기가 미처 정리되지 않고 우리는 21세기를 만났다. 일탈을 대놓고 노래 부르던 시기는 다시 오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의 문화는 사관학교라는 비유를 써도 이상하지 않은 기획사 연습실로 들어가거나,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오디션 방송의 심사위원 앞에서 고분고분하게 “선배들을 존경하는” 집단 관음증처럼 되어버렸다.
다시 팬데믹과 함께 경제 위기가 왔다. 그동안 충분한 복지와 안전망 없이 적당히 입으로만 경제를 얘기하던 시기가 되었고, 영화를 비롯한 많은 문화 생산자들이 현장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아무리 경제 위기라도 장사할 놈은 다 장사하고, 떼돈 버는 놈들도 나온다. 그렇지만 자본과 잘 결합된 특별한 요소가 있어야 그렇고 전체적으로는 획일성을 높이는 쪽으로 경제 위기가 작동한다. 우연히 방송국 문서를 볼 일이 있었는데 “작고 내적으로 단단한 얘기”라는 표현이 나왔다. 이게 뭔지 잘 몰라서 물어봤더니 로코, 로맨스 코미디를 얘기하는 거라고 했다. 영화든 드라마든 위기와 함께 불확실성이 워낙 높아지다 보니 다들 로맨스 코미디만 찾는 거란다.
많은 생태계가 그렇듯이 획일성이 높아지고 다양성이 줄어들면 사회적으로 퇴행적 현상이 일어난다. 나훈아쇼가 KBS를 장식할 때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겠지만 사회적 퇴행의 전조라고 생각한 나 같은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자우림에 열광했던 사람들도 이제 40대고, 그들이 청년기에 잠시 누렸던 풍요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코로나19 경제 위기, 일탈보다는 생존이 덕목이 되고, 기득권들은 이래라저래라 더욱 꼰대스러워질 것이다. 지금의 20대는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잃어버린 세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권은 그들의 정치적 선택을 표로만 계산하지만 그들의 문화적 선택이 무엇인지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이렇게 IMF 위기 한가운데에 버거워하던 청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과 비교하면 코로나19 국면의 대한민국은 너무 질서정연하고, 재미없다.
글 우석훈(경제학자) 씨네21 2021-02-24
검찰개혁, 목욕물 버리려다 애까지 버릴 판
"이번에 확실히 검찰개혁 완수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원혼을 달래주세요." 어느 친문 지지자가 한겨레의 검찰개혁 관련 기사에 남긴 댓글이다. 검찰 관련 기사엔 이런 종류의 댓글들이 많다. 그런 원한 때문에 검찰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은 소수일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는 6월까지 검찰의 수사권을 폐지하고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설치 입법을 완료하겠다는 더불어민주당 내 움직임은 갚아야 할 원한의 대상이 자꾸 늘어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검찰 수사권의 완전 폐지는 '중·장기적 과제'라고 했던 민주당이 왜 이렇게 달라진 걸까? 민주당의 윤호중 검찰개혁특위 위원장은 "(검찰 수사권 폐지를) 앞당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 건 윤석열 총장이나 검찰이 해온 행태 때문"이라고 했다. 그 행태가 무엇이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일부 여권 의원 수사에 대한 보복이자 대응책이라고 보는 건 합리적 의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 2월 24일 국회에서 유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이 "문재인 대통령이 박범계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의 속도 조절을 당부했다"고 말한 것에 대해 김태년 원내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이 그런 뜻이 아닐 것이라며 집요하게 이의를 제기한 사건이 있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사람을 면박주면서까지 이의를 제기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이 장면은 한 편의 '개그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책임윤리라고 하는 점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다르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국회의원들은 '책임감 분산'으로 인해 어떤 제도의 급격한 변화가 훗날 엄청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려가 단독 책임을 져야 하는 대통령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여당의 기본 생각은 같을망정 대통령이 '속도 조절'을 요구하는 데엔 이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는 것이다.
중수청 설치를 추진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움직이는 동력 중엔 친문 지지자들의 강한 요구가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5선 이상민 의원은 "너무나 단순 무식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속도 조절을 요구했는데, 그는 이 발언으로 강성 지지층의 문자 폭탄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국가를 위해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그의 소신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의원은 "당내에도 수사청 설치법이 과속이라며 걱정하는 의원이 많다"며 "하지만 강성 당원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이른바 '친(親)조국' 성향 초·재선 의원들이 이 법을 밀어붙이는 데에 관해서도 "각자 생각은 다르겠지만, 강성 당원들의 요구가 워낙 커서 이에 따라 움직이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민주당 당원게시판에 "그동안 뭐한게 있다고 검찰 개혁에 속도 조절을 하냐"고 문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는 글들이 올라온 것도 그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강성 당원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수사청 설치를 주도하는 의원들이 검찰 수사나 재판을 받고 있는 피의자들로서 이해 당사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해충돌의 소지가 다분한 이들이 "선진국 대부분이 수사와 기소가 분리돼 있다"며 사실 왜곡을 하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들이 강성 친문을 업고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겠지만, 정부여당은 검찰개혁에 관한 한 신뢰를 잃은지 오래라는 점을 감안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칸타코리아의 신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 정권이 추진하는 검찰개혁에 대해 '권력기관 개혁이라는 당초 취지와 달라졌다'는 응답(57.5%)이 '당초 취지에 부합한다'는 의견(28%)의 약 2배였다. 여론은 바뀌기 마련이라는 점을 믿고 강행할 수도 있겠지만, 검찰개혁에 적극 동의하는 시민들도 목욕물 버리려다 애까지 버리는 것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역사가 바바라 터크먼의 다음 경고를 명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모든 성공한 혁명은 조만간 자신이 몰아냈던 폭군의 옷을 입는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UPI뉴스 : 2021-03-03
일토-쯔쯔.. 알고 보니 완전히 검찰의 종복이었구만. 지난번에는 안철수에 붙었으니 이제는 윤석열에 붙으려는가? 나는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된다는 명제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 말은 가엾은 변명일 뿐이다. 말년에 입장을 급격하게 바꾸려는 자가 자신의 노추를 정당화하려고 갖다붙인 핑계에 불과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일정 시점부터는 직업적 연관에서 해방된다는 의미이다. 그 시점에서 사회적 페르소나 때문에 억눌러왔던 본질을 해방한다 해서 이상할 것 없다. 그러나 그런 자들의 행색은 늘 추태스럽다.
‘토건정치’ 너머
부산에 살던 청소년 시절에는 늘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에 매달린 채 등교했다. 그래서 요즘 이 도시의 스산한 풍경은 볼 때마다 낯설다. 한때 “한국 최대 직할시”의 시청이 있었고 국제영화제의 심장부였던 중구 인근 골목들은 밤이 되면 유령도시처럼 으스스해진다. “아시아 최대” 규모가 된 영화제의 주요 행사도 더 이상 남포동에서 열리지 않는다. 지금은 북동부 지역, 해운대와 기장이 부산의 중심이자 ‘강남’이다. 문제는 도심의 이동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비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부산 어느 대학교는 경영난을 이유로 학교 청소용역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대신에 총장, 교수, 교직원들이 학교 청소를 한다고 한다. 지방의 다른 대학들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거나 더 나쁘다.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학생이 없다. 숱한 대학들이 정원 미달이다. 광주의 어느 대학은 신입생에게 아이폰과 에어팟을 준다고 했음에도 올해 정시 경쟁률이 0.8 대 1에 그쳤다고 한다.
시설 좋은 병원들도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에 다 몰려 있다. 청년들만 서울로 가는 게 아니라 몸이 아픈 노인들도 수도권으로 간다. 문화 인프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형편만 되면 서울로 가고 지방엔 사람이 남아나지 않는다(25년 전 상경한 나도 예외는 아니다). 수도권 일부와 세종시를 제외하고 모든 지역들이 비슷한 상황이다. 그 와중에 서울 인구 폭증을 막는 건 성층권을 뚫어버린 집값 정도다.
‘균형발전’ ‘지방소멸’ ‘압축도시’ 등 그간 수도권과 지방 격차에 대한 수많은 담론과 정책들이 나왔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는 별로 없었다. 공허한 말의 성찬들 속에서 정부는 ‘도시재생’이란 명목으로 다시 개발중심·공급중심 정책을 펴거나 가덕도 신공항처럼 정치공학적 토건사업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가덕도 신공항은 문재인 정부의 ‘4대강’ 사업”이라고 비판한 것은 큰 틀에서 옳은 이야기였다. 신공항 건설이 야기할 생태 환경 파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든다.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 똑같은 토건세력이고 그들의 정책이 틀렸다고 얘기하려면, 적어도 그들과 차별화된 대안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신공항 추진 과정 자체가 문제임은 말할 것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정치공학적 술수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조건’에 대한 대응은 필요하다. 수도권과 지방 격차, 그 격차에서 비롯한 지방민의 울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정의당을 포함한 ‘진보정치’ 세력이 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양대 ‘토건정치’ 세력의 대안이 되려면 “토건 반대”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적으로도 일체의 토건사업 없는 지방 활성화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토건 일변도가 아닌 종합적인 대책을 꺼내 보여야 한다. 실현 여부야 차치하더라도, 대중의 언어로 작성된 비전과 로드맵 정도는 제공을 해야 시민들도 지지할 명분이 생길 게 아닌가.
201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바네르지와 뒤플로는 오랜 현장연구를 통해 가난한 사람이 우둔하기는커녕 매우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2012). 또한 이들은 빈곤을 줄이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가난한 사람들’이 직접 지역공동체 운영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관건은 목소리 큰 소수가 아닌 다수를 가급적 많이 참여하게 만드는 규칙을 고안하는 것이다. 만약 목소리 큰 소수를 제어하지 못하면 소위 ‘과두제의 철칙’이 작동해 그들 이익에 봉사하는 사업만 추진되기 때문이다.
바네르지와 뒤플로는 인도네시아 크차마탄 개발 프로젝트를 사례로 든다. 프로젝트 초기에 마을총회에 참석하고 발언한 사람들은 전부 마을의 유지였다. 그러나 규칙을 조금 바꿔 무작위 선발된 주민들을 참석하게 하자 회의가 활발해졌음은 물론, 비판적이며 공익적인 의견이 나와서 마을 발전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수도권과 지방 격차 문제에서도 이런 관점은 필수적이다. 소수의 지역 토호, 관료, 학자, 거대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지역 발전 논의를 주도하면, 역시 과두제의 철칙에 따라 지방 내부의 양극화만 심화시키고 가장 힘든 지역 주민의 삶은 그대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토건정치’를 넘어서는 진보적 대안에는 무엇보다 지역 격차의 계급성, 그리고 지방자치-민주주의를 가장한 과두제에 대한 치밀한 고려가 담겨야 할 것이다.
박권일ㅣ사회비평가 한겨레 2021-03-04
콘페이트 살인사건과 수사·기소 분리, 그리고 윤석열
1972년 어느 새벽, 영국 런던의 한 주택에 불이 났다. 소방관들은 2층에서 성노동자인 맥스웰 콘페이트가 목졸려 숨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틀 뒤 인근에 방화 사건이 잇따랐다. 경찰은 방화 용의자로 붙잡은 청소년 3명을 조사한 끝에 콘페이트 살해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 중 살인 혐의를 자백한 콜린 래티모어(18)는 심한 학습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들은 강압적인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됐다.
1974년 반전이 찾아왔다. 새 내무장관과 해당 지역 국회의원 등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콘페이트의 사망 추정 시각이 애초 경찰의 결론과 다르다는 법의학적 소견이 제출됐다. 결국 소년들은 다시 재판을 받게 됐고 1975년 무죄로 풀려났다.
여기까지 보면, 억울한 피고인이 누명을 벗은 이야기 또는 수사기관의 무리한 강압 수사를 드러내는 한 사례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오히려 더 극적인 사례를 많이 보아 왔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내무장관은 재수사 지시에도 경찰이 뭉기적거리자, 전직 고위 법관이 이끄는 조사팀을 구성해 사건의 전 과정을 들여다보게 했다. 1977년 조사팀은 엉터리 수사·기소의 문제점을 밝히고 전면적인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필립스위원회’로 불리는 왕립형사절차위원회(1979~81)가 구성됐다.(위원회가 활동 중이던 1980년 경찰은 콘페이트 사건의 진범을 찾아냈다. 사건 초기에 경찰이 수사 초점을 소년들에게 맞추지 않았더라면 어렵지 않게 수사선상에 올랐을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곧 자살했다.) 필립스위원회는 백년 넘게 이어져온 전통을 깨고 경찰이 한 손에 쥐고 있던 수사·기소권을 분리하는 개혁안을 제시했다. 당시까지 기소는 경찰에 소속되거나 고용된 법률가가 담당했는데 기소의 주도권은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들이 쥐고 있었다. 위원회는 ‘수사 주체는 불가피하게 피의자가 유죄라는 심증을 갖게 되고 이에 반하는 증거에는 눈감게 된다’고 지적했다. 기소는 수사로부터 독립돼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범죄 대응의 비효율화 등을 두고 사회적 논쟁도 벌어졌지만 결국 독립된 기소기관인 기소청(CPS)을 설치하는 법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영국이 1986년 수사·기소 분리를 단행한 전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로스킬위원회’(1983~86)도 구성됐다. 급증하는 금융·기업 범죄에 대한 대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위원회는 사건의 복잡성과 신속한 수사 필요성을 감안해 ‘예외적으로’ 수사·기소 기능이 통합된 기관을 만들 것을 권고했다. 이로써 특화된 수사 영역을 갖는 중대범죄수사청(SFO)이 1988년 발족했다. 주요 사건 위주로 연평균 12건 정도의 사건을 처리하는 이 기관은 수사관, 변호사, 회계사, 디지털 전문가 등 다양한 직역으로 구성됐고 내부적으로는 수사·기소 기능을 분리하고 있다.
영국은 하나의 실패한 사건에서 ‘지금의 형사사법 시스템으로는 안 된다’는 성찰을 끌어내고 과단성 있게 제도를 변화시켰다. 그러면서 실용적인 예외도 도입했다. 1980년대는 영국 형사사법 역사에서 일대 개혁의 시기였던 셈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왼쪽 둘째)이 지난 3일 오후 직원과 간담회를 하기 위해 대구고검과 지검을 방문한 자리에서 권영진 대구시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도 지금 그런 시대를 지나고 있다. 개혁은 당위의 이식보다는 절절한 현실의 요구에 응답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형사사법체계를 몇번이고 갈아엎을 만큼의 비극적 사건과 뻔뻔한 횡포를 목도해 왔다. 수사기관은 살인범을 조작하고 간첩을 조작했다. 객관적인 법률전문가로서 수사를 감시해야 할 검찰은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수사기관이라는 그릇된 정체성에 갇혀 조작을 방조하거나 무능하게 간과했다. 검찰이 정치적·조직적 이해관계에 따라 직접 사건을 비틀고 덮고 만들어낸 것도 숱하다. 검찰 수사를 받다 자살한 이들도 부지기수다.(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 동안에만 83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드러난들 대부분 철저한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근본적 제도 개혁에는 더더군다나 이르지 못했다.
영국 사례에 비춰보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뇌물 사건을 검찰이 축소·은폐한 것 하나만 갖고도 검찰의 직접수사 기능을 폐지하고도 남았을 것 같다. 최근의 검사 룸살롱 접대 사건은 어떤가. 수사·기소가 분리돼 있다면,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기소기관이 ‘다른 산수’만 적용했어도 기소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은 검찰의 수사·기소권 독점과 그 폐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례다. 검찰이 한 전 총리의 혐의를 뒷받침할 거짓 증언을 재소자인 증인들에게 사주했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기소권까지 움켜쥔, 견제받지 않는 수사기관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대법원 판결문에서도 검찰의 부적절한 수사 방식이 지적됐던 사건이다.
그런데 수사·기소권 분리에 강력 반발하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언론 인터뷰가 보도된 바로 그날, 한명숙 전 총리 수사 과정의 비위 의혹을 조사해온 임은정 대검찰청 감찰정책연구관이 이 수사에서 배제된 사실이 공개됐다. 의혹을 뭉개겠다는 의도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윤 총장은 “검찰 수사권의 완전한 박탈은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힘 있는 세력들에게 치외법권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이야말로 수사·기소권 독점을 통해 치외법권을 누렸고 지금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윤 총장의 요란한 반발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검찰의 특권 유지를 위한 것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수사·기소 분리가 반부패 수사 역량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폄훼다. 오히려 과거 보수정권들은 검찰이라는 독점적 수사·기소기관 하나만 장악하면 손쉽게 부패·비리를 은폐·축소할 수 있었다. 다양하게 분화된 수사기관이 전문 역량을 쌓고 서로 경쟁·견제한다면 수사기관이 멋대로 사건을 주무르거나 덮어버리는 일은 되레 어려워진다. 복잡한 경제범죄 대응이 중요하다면 특화된 수사기관을 만들고, 필요하면 관련 전문성을 쌓은 검사들을 데려가면 된다. 독립된 기소기관으로서 검찰은 이들 수사기관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동시에 권한 남용과 인권 침해를 제대로 감독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수사·기소를 한 기관에 귀속시킬 필요가 있다면 지금껏 드러난 폐해를 방지할 장치가 분명히 병행돼야 한다. 무엇보다 단일한 기관에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허용돼선 안된다.(영국은 2000년 기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의 기소 기능을 감시·감독하는 기관인 기소감찰청까지 별도로 설립해 2중, 3중의 견제장치를 마련했다.) 이것이 권력분립과 인권과 투명성을 중시하는 민주국가에서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원칙이다.
멀게는 일제 강점기에 원형이 형성돼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이후만도 67년이나 묵은 형사사법체계, 그것도 검찰의 특권화를 비롯한 숱한 부작용을 일으킨 제도를 21세기에도 유일한 선택지라고 강변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퇴보요, 헌법 정신의 파괴다. 윤 총장의 비장한 사퇴가 과장된 몸짓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 박용현 논설위원 한겨레 2021-03-04
한국이 미국의 현금자동지급기인가?
방위비 분담금 합의의 문제점
난항을 겪어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이 체결됐다. 핵심적인 내용은 올해 분담금은 지난해보다 13.9% 인상된 1조 1833억 원을 지급하고, 2022년부터 2025년까지 분담금 인상률은 전년도 한국의 국방예산 증가율을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청와대는 "합리적인 분담금"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가 갈수록 미국의 현금자동지급기(ATM)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황당한 요구를 "갈취"라고 표현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점잖게 갈취를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현재 우리 국민 세금으로 미국에 준 방위비 분담금 가운데 9700억 원 가량의 '현금'이 남아 있다. 국가재정법이 따르면, 이는 국고로 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돈은 미국 은행에 예치되어 있다. 국고 귀속이 어렵다면 새롭게 방위비 분담금을 정할 때 이 액수를 감안해 차감하는 게 상식적일 게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올해 방위비 분담금을 13.9%나 올렸다. 돈을 줄 때에는 용처를 정확히 따져보고 주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뭉칫돈을 먼저 주고 어디에 쓸지는 나중에 따져보는 식이다. 미국이 용처에 맞지 않게 다른 곳에 써도 그만이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률을 우리 국방비 인상률과 연동시킨 것도 큰 우려를 자아낸다. 우선 미국은 한국의 국방비 인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방위비 분담금도 더 많이 받아내고 미국산 무기와 장비도 더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11일(현지 시각) 미국 방송 <CNN>이 미국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 국방예산의 의무적인 확대와 한국이 일부 군사장비를 구매할 것임을 양측이 이해한다는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고 보도한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미국으로선 돈도 많이 받고 무기도 더 파는 '일석이조'의 이익을 얻게 되는 셈이지만 우리로선 '설상가상'이 될 수 있다. 국방비를 인상할수록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할 소중한 예산은 줄어들게 된다.
또 대규모 군비증강을 지속할수록 수렁에 빠진 남북관계를 복원하기도 어려워진다. 더구나 그 적용기간을 2025년까지 정한 것은 차기 정부의 선택의 폭을 크게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청와대의 자화자찬이 거북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로 구성된 방위비 분담금은 9000억 원 정도로도 충분히 충당할 수 있다. 10조 원 이상 소요된 평택 미군기지 확장 사업이 완료되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미국이 남는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가 바로 그것이다. 주일미군 등 한반도 밖의 미군 지원용으로 사용되어왔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바이다.
복병은 또 있다. 바로 경북 성주의 사드 기지이다. 현재 임시배치 상태에 있는 사드는 일반환경영향평가가 마무리되면 정식 배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동맹 강화"를 다짐하고 있고 바이든 행정부는 동맹의 핵심으로 미사일 방어체제(MD) 강화를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정식 배치의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미국은 정식 배치와 운용에 필요한 경비를 방위비 분담금을 전용해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사드 배치 결정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빈센트 브룩스가 2017년 4월 미 의회 청문회에서 방위비 분담금이 "사드 기지 향상과 같은 점증하는 요구를 충족시킬 비용 전용을 가능케 한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전망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또 방위비 분담금이 "변화하는 안보 환경에 대응하는 데에 필요한 유연성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말했었다. 알쏭달쏭했던 이 말은 최근 미군 정찰기인 U-2기의 행보를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오산공군기지에 배치되어 있는 U-2기의 대중 감시·정찰 비행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한미 갈등의 주요 원인들 가운데 하나였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한국이 준 방위비 분담금으로 정비를 받으면서 말이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국회마저 이와 같은 '비합리적인' 방위비 분담금 합의에 거수기 역할을 한다면, 한미동맹의 퇴행적인 변화를 막을 수 있는 길은 더더욱 요원해진다. 국회가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는 결기를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 프레시안 2021.03.11.
‘인간 친화적 기술혁신’ 코로나 위기서 더 중요
코로나19 위기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변화는 이른바 ‘언택트’로 대변되는 기술혁신의 파고일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 전 세계가 전자상거래, 디지털 및 원격 경제에 대한 특강을 받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4차 산업혁명의 열풍에도 완고함을 잃지 않던 중장년층들조차 이제는 전자상거래는 물론 야식 배달서비스와 랜선 회의마저 친숙해진 모습이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몰고 온 새 바람의 이면에는 매출 없이 임대료와 이자만 부담해야 하는 자영업자나 영세기업들, 그리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 망연자실해하는 청년들과 실직자들의 비애가 넘쳐난다. 아니면 언택트 열풍에 따른 배달 특수에 라이더나 택배기사가 되어 생계의 현장에 나서야 한다. 공허하게만 다가오던 4차 산업혁명의 어두운 면, 아니 생생한 현장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 일자리 상실과 생계난, 안전사고 위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건강하고 안전한 양질의 일자리는 디지털 전환이란 명목하에 축소되고, 현대판 ‘3D’ 일자리만 그 공백을 채우고 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공저자로 유명한 경제학자 다론 아제모을루는 최근 이처럼 기술혁신, 특히 AI로 대변되는 자동화의 부정적 이면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잘못된 유형의 AI’(the wrong kind of AI)가 문제다. 흔히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사회적 영향을 감안하면 가치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그는 기술혁신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수준을 넘어섰다”고 지적한다. 생산비용 절감 차원을 넘어 고용 위축과 임금 감소 등 사회적 비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기술혁신은 경제성장 및 인류 진보의 원동력이다. 기술혁신은 생산성 증대와 고용기회의 확대를 통해 생활수준을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 전반의 생산성이 둔화되고 고용 위축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그 이유로 아제모을루는 빅테크 주도의 기술혁신에 따른 시장실패, 또 기초연구에 대한 정부의 지원 축소와 노동보다는 자본을 우대하는 세제 편향 등을 꼽는다. 따라서 그는 ‘기술혁신의 방향 재조정’, 즉 고용기회를 확대하고 번영의 과실을 고르게 나눠줄 ‘인간 친화적인 기술혁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자본 친화적 방향에서 노동 친화적 방향으로 기술혁신의 구성을 바꿔줄 인센티브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부의 기술규제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정부가 너무 나서는 건 아닌지, 그런다고 기술혁신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 혹시 빅브러더와 같은 새로운 전체주의를 낳는 것은 아닌지 등등. 하지만 아제모을루는 과거에도 정부는 정책 지원이나 기술표준 제정 등을 통해 언제나 기술혁신에 개입해왔고, 인터넷이나 항생제와 백신의 도입에서 볼 수 있듯이 정부개입에 따른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하이에크와 같은 극단적인 자유론자의 우려와 달리 정부개입은 대부분 현대 복지국가의 번영을 이끌어 왔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다만 국가의 개입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의 균형’이 중요하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독과점 폐해와 확증편향 강화 등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그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고 또 커질수록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법률이나 권력분립의 제도적 설계 자체가 아니라 정치인과 관료들의 행위에 책임을 묻고 감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역량이다. 국가와 사회의 상호보완적인 균형에 기반하여 기술혁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규율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세상의 재건을 위해 이제 기술혁신의 방향 재조정은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과제이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 연구소 소장/ 경향: 2021.03.11
투기의 역사’가 말하는 것
3기 신도시 지정 지역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부동산 불법투기를 했다는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폭로가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국민의 분노와 좌절이 크다는 방증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사실을 규명하라고 신속하게 지시했다. 4년 재임 기간 중에 이처럼 문 대통령이 신속하게 반응한 사건은 드물었다. 수사 권한이 없는 합동조사단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이번에는 총리가 나서서 국가수사본부·국세청·금융위원회 등이 참여하는 합동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발본색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부의 신속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신도시 땅 투기 의혹을 받고 있는 LH 직원들을 처벌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LH 직원도 부패방지법상 ‘공직자’이므로, 업무상 비밀이용죄를 적용하면 7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러나 업무처리 중 얻은 비밀을 이용해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3기 신도시 지정은 이미 언론을 통해 공공연하게 알려졌고, 광명·시흥 지역은 언젠가는 개발될 유력 후보지였다는 점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심증과 사법적 입증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것이다.
개발정보를 이용해 땅 투기하고 거액의 이득을 남긴 사례는 그동안 차고 넘치게 많았다. 노태우 정부 때 1기 신도시로 건설한 분당·일산·평촌 지역에 부동산 투기가 급증했고, 당시 정부는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해 1만3000명 정도의 부동산 투기범을 적발했고, 1000명 정도를 구속했다. 2003년에 노무현 정부 때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LH 직원들의 3기 신도시 땅 투기 의혹이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배경이기도 하다. 또 공직자·정치인·언론인·기업가 등등 이른바 힘 있거나 정보에 밝은 사람들이 더 많이, 더 은밀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드는 근거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런 반복된 정책 실패에서 제대로 된 교훈을 못 배웠고, 또 제대로 된 대책도 못 세워왔다는 점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제대로 못 고쳐서, 또 소를 잃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조사와 수사가 이뤄지고, 일부 투기범들을 처벌하는 방식으로는 투기와 부패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검찰의 수사 참여 여부가 문제의 핵심도 아니다.
부동산 투기와 이와 관련된 부패를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먼저 부동산이나 금융자산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에 과세를 강화해 투기를 통해 축재하는 유인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 그동안 정부의 정책은 투기지역 지정을 통한 이른바 ‘핀셋 규제’와 대출 규제 그리고 특정지역 개발정책 등으로 아파트 가격을 잡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이런 핀셋 규제와 특정지역 개발정책은 오히려 부동산 투기와 부패를 더 조장할 뿐이고, 부동산 가격 안정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핀셋 규제나 특정지역 개발정보를 한발 앞서 접할 수 있는 공직자, 정치인, LH 직원 등에게 이런 정책은 먹잇감을 던져주는 꼴인 것이다.
부동산 양도소득이나 택지 보상액에 대한 충분한 과세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계할지는 정책기술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부동산이나 금융거래 정보의 가용성 등을 고려할 때, 지면 제약으로 구체적 설명을 하기는 어려우나, 부동산 거래를 위축시키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가능함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세제 개혁과 더불어 이해충돌방지법의 제정도 필요불가결하다. 이해충돌방지법이 제정된다면 LH 직원, 공직자, 국회의원 등은 자신의 주식이나 부동산 관련 정보 등을 정기적으로 신고해야 하며, 직무와 관련된 이해충돌이 있으면 관련 업무에서 사전적으로 배제된다. 또한 신고하지 않은 차명 등의 자산이 사후적으로 밝혀지면, 그 자체가 징계, 벌금, 징역형의 근거로 이용될 수 있다. 따라서 부패방지법상 업무상 비밀이용죄의 적용보다 훨씬 입증이 쉬워지고, 그만큼 부패를 사전적으로 방지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1년2개월 정도 남았다. 그러나 집권여당이 사실상 5분의 3 이상 의석을 확보한 국회의원 임기는 아직 3년 남았다. 2016년 가을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웠던 시민들의 분노는 ‘이게 나라냐’라는 짧은 문구에 요약되어 있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이 분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구태적인 정책과 대책의 반복으로 달성될 수 없다./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경향 2021.03.12
지구가 계속 ‘생명 거주 적합 행성’이 되려면…
지구의 역사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현과 번성, 멸종은 지난 40억년 동안 무수히 반복된 ‘지구-생명권 공진화(Coevolution)’의 필연적 과정이었다. 과거 지질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고생대 바다를 지배했던 삼엽충과 중생대를 호령했던 공룡도 그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인류 또한 지구환경의 필연적 혹은 순환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서서히 도태되거나 소행성 충돌과 같은 우발적인 대재난에 의해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지금까지 지구에 출현했던 모든 생물 종과 달리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궈낸 과학기술이 그 증거이다.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생존에 성공한 최초의 영장류 종(種)이 바로 사람이다.
급격한 지구환경 변화를 맞이해 인류가 지구와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다뤄야 할 과학기술의 난제는 무엇일까. 바로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할 수 있는 ‘테라포밍(Terraforming)’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다. 테라포밍은 인간이 더 이상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가정해 화성, 금성 등의 다른 천체 환경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즉 ‘지구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생명 거주 적합 행성을 찾고 지구와 유사하게 환경을 바꾸는 단계로 수행되며, 전자는 ‘우주생물학’, 후자는 ‘지구생물학’의 연구 분야에 해당한다.
지질시대를 연구하는 이들은 지구의 탄생에서 약 40억년 전까지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 하데스의 이름에서 따온 ‘하디안(Hadean)’ 또는 명왕누대라고 일컫는다. 이 시기의 지구 표면은 마그마 바다가 출렁이고 하늘에서 수많은 소행성이 떨어지는 등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옥처럼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금성과 유사한 매우 척박한 지표환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5억년 동안 지구는 ‘생명 거주 부적합 행성’을 ‘생명 거주 적합 행성’으로 전환하는 테라포밍을 스스로 진행해 최초의 생명을 탄생시킨 것으로 알려진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가 지구 생명체 탄생의 기원과 비밀이 담겨있는 테라포밍의 비밀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시기의 지표환경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 지질 시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호주 잭힐 지역에서 발견된 44억년 전 ‘지르콘(zircon)’ 광물, 시시생대(40억~38억년)의 암석과 운석 등 극히 제한적인 물질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 시기의 테라포밍을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달 운석에서 지구 암석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발견돼 초기 지구 지표환경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하디안 시기에 형성된 새로운 연구 시료를 찾아내는 것 자체가 굉장한 과학적 발견이기 때문에 하디안 연구는 지구의 테라포밍 과정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산이 된다.
지구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이다. 하지만 지구의 입장에서는 생명 거주 적합 행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숙련 과정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어쩌면 지구는 인류를 버리고 새로운 생명 종을 선택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인류가 지구와 공존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테라포밍과 지구-생물권의 공진화 과정에 대한 근원적 원리의 연구와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구환경 변화에 수반되는 수많은 현안들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대응과 해결방안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지구가 지금까지 진행해오고 있는 테라포밍의 원리에 기초한 지구 모방기술이 그 해답이다.
이승렬 |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국토지질연구본부장 : 경향 2021.03.14.
능력주의에 묻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시골에 와 살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우는 것투성이다. 봄이 되니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산, 들, 바다에 먹을 것이 널렸는데, 나는 여전히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며칠 전 봉래산에 갔을 때 이름을 배운 나무라는데, 팔영산에서 보니 내 눈엔 전혀 다른 나무다. 3월에 뜯었던 나물도 4월에 가면 못 알아보고 꽃이 피었을 땐 알던 나무도 꽃이 지면 첨 보는 나무다. 심지어 같은 시기 같은 산에서도 고도에 따라 생김새가 다르니 어찌 알아본단 말인가? 한번은 밭에서 냉이를 알아보곤 신이 나서 말했다. “10월인데 냉이가 있네요. 당연히 못 먹는 거죠?” 웬걸, 냉이는 봄의 전령사인 줄만 알았는데 가을 냉이는 보약으로 친단다. 이웃이 나눠주는 걸 받고도 난감했던 적이 많다. 요리해본 적은커녕 먹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게 태반이다. ‘몰’이라면서 주길래 검색 신공을 발휘하니 표준어로는 ‘모자반’이라 하고 해조류라 한다. 데쳐서 무쳐도 먹고, 국을 끓이기도 한다는데 어떤 맛인지도 모르고 어찌 요리를 한단 말인가? 김은 ‘그냥 김’과 ‘조미김’만 있는 줄 알았지, 물김이라니, 이건 또 뭐지? 서대면 그냥 서대지, 서대는 뭐고 박대는 뭐고 용서대는 또 뭐냐고요.
올해로 시골살이 10년차인데도 나는 시시때때로 이런 무능감을 마주한다. 특히 귀농귀촌인 건 같아도 시골 출신이어서 나와 달리 안 배워도 알거나 배움이 빠른 사람이 있으면 열등감마저 든다. ‘나도 도시에 살 땐 나름 능력 있단 소리도 들었고, 그런 거 몰라도 그만인데 왜 이러고 살까?’ 투덜거리다가 생각났다. 결혼 초반이었다. 결혼 전에 별로 안 해보긴 나나 옆지기나 마찬가지였는데 옆지기는 나에 비해 살림에 너무 무능했다. 나에겐 어떻게 해서라도 해내야 하는 일인데 옆지기는 못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바로 그 이유로 살림에서 한 발을 빼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무능한 게 자랑이고 벼슬이야?” 옆지기는 그 말에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회사에서 같은 말을 들었다면 몹시 자괴감을 느꼈을 텐데, 집안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못하는 것을 ‘무능’이라 여겨본 적이 없다는 게 되게 놀랍다면서. 그때부터 옆지기는 살림을 ‘당연히’ 같이 하면서 배우려고 애쓰는 사람이 됐다. 농사를 짓거나 바다 일을 하거나 직접 무언가를 생산하는 삶은 아무리 가난해도 나눌 것이 있다. 그래서인지 시골 사람들은 툭하면 뭘 나눠준다. 낯선 시골에 처음 와서 살기 시작한 사람에게 그런 나눔은 결국, 돌봄이었다. 살 집을 같이 찾아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나는 다시, 무능감과 열등감을 추스르고 갓 태어나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가처럼 소외되지 않은 노동과 자연, 돌봄과 나눔의 관계, 이 경이로운 세계에 발을 딛기로 한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과 인정 시스템을 말한다. 신분이나 재산, 운이 아니라 재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과 ‘노오력’을 권하는 사회를 낳았다. 그러한 능력주의가 실은 어떤 허상이며 어떻게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심화하는지를 지적해온 분들도 많다. 나는 그러한 능력주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오늘은 좀 다르게 묻고 싶다.
능력으로 줄 세우는 사회, 자본주의가 훈육한 바로 그 ‘전문성과 능력’이 이 사회를 기후위기와 팬데믹에 빠뜨린 건 아닌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재난과 위기의 시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연과 더불어 생존하는 능력, 관계를 되찾고 서로를 돌보는 능력이 아닐까? 대체 이런 건 왜 능력이 아니란 말인가?
명인(命人) ㅣ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한겨레 2021.03.14.
시장’은 죄가 없다
경제민주화119가 2020년 12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경제민주화 5법 처리 못하는 국회 규탄 및 입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장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경제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럼에도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이는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하고, 또 다른 이는 ‘시장을 이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양극단의 주장은 시장을 마치 자존자(自存子), 즉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처럼 여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시장이 잘 작동하는지는 이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갖췄는지에 달렸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존 맥밀런 교수는 저서 <시장의 탄생>(Reinventing the Bazaar: A Natural History of Markets)에서, 시장을 시장거래가 이뤄지는 물리적 공간이나 사이버공간으로 정의하고, 고대부터 시장이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고 진화해왔음을 풍부한 예시로 설명하고 있다.
자연발생적 시장들은 중세시대 영국에서 유행한 마을축구(Folk Football)에 비유할 수 있다. 당시 마을축구에는 제도화한 규칙이 거의 없었다. 마을마다 시합마다 규칙이 달랐다. 그러나 1863년 축구협회와 1871년 럭비조합이 결성돼 경기 규칙이 성문화함에 따라, 마을축구는 오늘날 세계인의 스포츠인 축구와 럭비로 도약할 수 있었다.
축구 비유처럼, 시장경제의 제도화란 시장거래가 제도화하고 법적 보호를 받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서는 거래가 사적 자치에 따른 계약으로 이뤄졌고, 평판과 관습에 따라 보호받았다. 그러나 20세기부터 기업의 대규모화와 경제의 복잡화로 사적 자치만으로는 시장거래를 제대로 보호하고 장려하기 어려워졌다.
시장경제의 기본은 재산권 보호
그렇다면 시장거래란 무엇인가? 시장거래란 거래 당사자가 거래 자체를 거부(veto)할 수 있고, 비록 관습이나 법규의 제약을 받으나 자유롭게 거래 조건에 동의할 수 있는 자발적 교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산권의 정립과 보호야말로 시장경제의 가장 기본이다. 하지만 사유재산권 보호는 단지 실체법에 명문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재산권과 관련한 분쟁이 생길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공정한 사법 절차와 재산권 침해에 적정한 손해배상제도가 확립돼야 실질적으로 재산권이 보호된다.
특히 재산권 보호에서 중요한 것이 엘리트로부터 사회적 약자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수직적 재산권 보호’인데, 이는 근로·사업 의욕을 증진하고 혁신의 유인을 제공한다. 약자의 재산권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려면 법의 지배를 확립해야 한다.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와 무관하게 만인에게 평등하게 법 적용과 집행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약자의 재산권은 보호될 수 없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우드로 윌슨 등의 민주당 지도자들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같은 공화당의 개혁 세력은 경제력 집중에 따라 특정인이 사회의 게이트키퍼(Gatekeeper)가 되면 결국 다원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도 시장경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우려를 제기하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진보적 운동(Progressive Movement)을 전개했다.
결국 미국 대법원은 1911년 스탠더드오일을 90개 독립기업으로 분할했고, 대공황기에 뉴딜정책으로 미국의 대규모 기업집단이 사실상 해체됐다. 이처럼 뉴딜정책의 중요한 함의 중 하나는 제도화된 시장경제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금융계의 거대화와 플랫폼 사업자의 등장으로 또다시 시장경제 오작동 경고가 미국의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진보적 경제학자인 로버트 라이시는 저서 <자본주의를 구하라>에서 오늘날 새로운 경제환경에서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보수 경제학의 본산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스티글러센터(Stigler Center)도 경제력 집중 문제를 다시 본격적으로 제기하며, 경제·정치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는 문제를 막기 위해 “경제력 집중 규제”(fighting ‘bigness’)는 반독점 규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미국 대법원 판사 루이스 브랜다이스의 주장을 재조명했다.
지금 한국의 경제 현실은, 20세기 초 미국의 진보적 운동이 우려했던 경제력 집중의 폐해가 극심한 상황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으로 일어난 공정 경쟁 기회 상실, 기술 탈취와 단가 후려치기에 따른 사회적 약자의 재산권 침해, 소수주주의 재산권 침해, 위험의 외주화를 통한 노동착취 등 반시장경제적 일탈이 난무하고 있다.
이런 일탈을 시장 탓으로 돌리는 것도, 반대로 이런 일탈이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도 잘못됐다.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 요건
문제는 이런 일탈이 일어나도 정치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바로잡을 수 없을 만큼, 재벌에 의한 정치·관·언론·법조 포획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물론 재산권 보호가 잘 확립되더라도, 시장경제라는 유인 체계가 항상 의도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체제가 원활히 작동하려면, 공정거래 정책과 노동삼권을 보장하는 정책, 시장 실패를 보정하는 정책 등 정부 역할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기득권자가 약자의 재산권을 침탈하고 정치와 정책이 이들 기득권에 포획되는 것을 바로잡는 일이 우선이다. 진정한 시장주의자라면 재벌 개혁을 주장해야 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한겨레 :2021-03-15
윤석열이 답해야 할 것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2011년 청춘콘서트로 각광받을 때만 해도 그가 정치에 뛰어들어 힘든 세월을 보내리라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시 후배 기자와 그의 정치 참여를 놓고 논쟁한 적이 있는데, 후배는 “결코 정치하려는 게 아닐 것”이라고 항변했다. 아마 후배 생각이 꼭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주변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결국 정치라는 블랙홀에 빠져든 것이다.
안 대표가 2012년 대선 때 민주당 후보인 문재인 대통령과 단일화 기싸움을 벌일 무렵 “안철수가 선거에서 이길 순 있겠지만 대통령 된 뒤가 더 걱정”이라는 말들을 했다. 그의 짧은 정치 경험을 우려한 것인데, 이후로도 이 꼬리표를 완전히 떼지는 못했다.
10년 전 ‘안철수 현상’과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이른바 ‘윤석열 신드롬’이 불어닥칠 모양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사퇴 직후 대선 여론조사에서 선두 자리를 차지한 건 중대한 상황 변화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월 4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사의를 표명하는 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전 총장의 행보를 단순히 정치공학이나 진영 간 승패의 문제로만 볼 일은 아니다. 초점은 그의 등판이 국민 입장에서 더 나은 정치로 이어질지, 나라의 미래에 보탬이 될지다. 윤석열이 정치를 할지 말지, 또는 성공할지 말지보다 국민 요구와 기준에 걸맞은 내용을 갖출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안철수가 진보에 기반한 제3세력이었다면, 윤석열은 보수 유권자의 성원에 힘입은 제3세력이다. 두 사람 모두 현실 정치에 속하지 않은 채 선두권에 진입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윤석열은 사실상 고도의 정치 영역에 속하는 검찰에 몸담았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윤석열의 정치 참여도 훨씬 명확해 보인다. 그가 정치에 뛰어들 수밖에 없을 걸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문재인 정권이 4년 됐는데도 야권에 변변한 주자 하나 없는 상황에서 윤석열이 단박에 그 자리를 꿰찼다. 대체 주자가 없다면 원하든 원치 않든 윤석열은 정치판에 불려나올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이 정치에 뛰어드는 건 국가적으로 불행이다. 검찰총장의 정치 직행은 사법과 정치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후진적이다. 오늘의 윤석열을 만든 게 상당 부분 집권세력 탓이지만 검찰주의자인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측면도 크다. 국민을 내세워 무소불위에 가까운 검찰권을 행사하더니 이젠 나라의 대권을 넘보는 꼴이다.
본질적 질문은 윤석열이 과연 준비됐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적 리더십과 정치 역량을 갖췄는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소명의식이 있는지 여부다. 정치에 뛰어들어 검찰개혁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시대정신에 해당하는 공정과 정의, 연대와 통합에 대한 비전은 무엇인지, 남북문제와 4강 외교에 대한 비전은 있는지 등에 윤석열은 답해야 한다.
보수 언론이 온갖 논리와 가십으로 그의 정치 참여를 합리화하고 부추기지만 리더십과 비전, 다시 말해 정치 역량이 없다면 헛일이다. 지도자는 밀도있는 토론과 현장 경험 등을 통해 국정 현안을 꿰뚫는 안목과 경륜을 갖춰야 한다. 머리를 빌려 쓴다거나, 고시 공부 하듯 전문가들과 벼락치기해서 될 일이 아니다.
특수 수사 경험으로 나라 돌아가는 걸 대개는 알고 있다고 반박할 순 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앞선 대통령들도 별것 없지 않냐고도 한다. 그렇지 않다. 문 대통령만 해도 야당 대표와 의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명박은 의원·서울시장을 했고, 박근혜는 의원 정도지만 어쨌든 아버지한테 정치를 배웠다. 디제이, 와이에스, 노무현은 말할 필요도 없다. 27년 검사로 지도자에 걸맞은 경륜을 쌓았다고 보기 어렵다.
윤 전 총장에게 공정과 정의, 연대와 통합으로 대변되는 시대정신의 구체성, 다시 말해 ‘단죄를 통한 공정’을 뛰어넘는 정치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의 공정은 조준된 타깃을 온갖 방법으로 거꾸러트리는 검찰주의식 공정 아닌가. ‘죄와 벌’을 통한 공정일 뿐 복지와 연대, 혁신을 통한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윤 전 총장이 수직적·폐쇄적·조폭식 리더십이 아니라 개방적·수평적·합리적 리더십을 갖췄는지 따져봐야 한다. 검찰총장 취임 이후 검찰 인사는 철저히 자기 사람 챙기기여서 검찰 내부가 크게 출렁인 적이 있다. 지도자가 그렇게 인사하면 나라가 기우뚱거린다.
윤 전 총장이 정치를 할 거면 이런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검찰에서 하던 대로 깊숙이 들어앉아 으르고 주고받으면서 언론에 흘리는 식으로 국정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치를 하려면 최소한 갖출 건 갖춰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본인도 국민도 불행해진다.
백기철 ㅣ 편집인 한겨레 :2021-03-15
‘내 집 마련’으로 기만하는 기성세대에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3기 신도시 투기 의혹이 제기됐다. 진상규명 결과는 지켜봐야겠지만, 공직자와 특권층이 정보를 불법적으로 독점하며 벌인 투기의 역사는 강남이 개발될 때부터 50년이 넘도록 반복되었다. 변하지 않은 현실이 슬프고 분노스러움에도 기시감까지 드는 이유는, 오늘의 사태가 비단 신도시 택지 개발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 자산가들은 집을 보금자리가 아닌 투기 대상으로 삼는다. 이익을 위해 모든 자원과 편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호가 띄우기, 실거래가 허위 신고, 임대주택 공공사업에 대한 집단적 반대, 용역 깡패를 동원한 철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은 집으로 몰려들었고, 한국은 부동산 계급사회를 이룩했다.
정치는 나아가 욕망을 부추긴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후보들만 하더라도, 여야 가릴 것 없이 건물을 더 높이 올리겠다는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다주택자의 배만 불렸던 10여년 전으로 회귀한 듯하다. ‘주거 사다리’를 통해 단계적으로 집을 마련하라는 정부의 말이 무색하다. 사태를 심화시킨 사람들이 청년들만 만나면 관용어처럼 ‘내 집 마련’을 약속한다. 부동산 이슈만 터지면 너도나도 ‘청년’을 언급하고 소비한다. 높은 지지율의 대권주자는 LH 사태를 두고 ‘청년’에 ‘공정’까지 끌어왔다. ‘공정’만 하면 청년들이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것같이 눈속임을 시도한다.
미디어에서 유명한 모 건축과 교수는 칼럼에서 “청년들을 ‘월세 소작농’ 만들 텐가”라며 부동산 권력에 종속시키는 임대주택 정책을 비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물이나 전기를 국가가 통제 및 제공한다고 해서 국민을 국가에 종속된 소작농이라고 하지 않는다. ‘집’의 공공성을 존중했다면 월세든 매매가든 적정한 수준이 되었을 것이고, 소유냐 임대냐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해지자. 현실은 천문학적인 부채를 지고 집을 사야만 하는 청년이나 월세를 내며 사는 청년이나 모두가 소작농이다. 수십년치 임금을 가불한 내 집 마련은 말마따나 ‘이자 소작’에 불과하다. 갖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니다. 집에 공공성이 삭제된 것이 문제다. 정·언·학계를 불문하고 집을 절대권력으로 삼는 부동산 시장의 패러다임을 뼛속까지 내재화하여, ‘집은 소유해야 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초점이 엇나갔다.
대안은 있다. LH 직원이든 자산을 소유한 개인이든, 주택 정책을 통해 공공이 기여한 개발이익을 적절히 환수하면 된다. 시장을 교란하고 투기를 부추기는 사람들을 강하게 처벌하고, 집의 공공성을 해치는 과도한 이익을 금지하면 된다. 집을 구매할 만한 자산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임대주택에서 안정적으로 살게 지원하면 된다. 청년들이 방법을 몰라 ‘내 집 마련’을 못하는 게 아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그 세대’의 산물이다.
이한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 경향 : 2021.03.15
자유주의의 위기
지난 일요일에 있었던 독일 남서부에 있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회의 선거 결과가 발표되었다. 녹색당 32.6%, 기민당 24.1%, 사민당 11.0%, 자유민주당 10.5%, 그리고 극우 정당인 대안당 9.7%였다. 독일 자유주의의 종가(宗家)답게 이 지역에서 자유민주당은 선전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의회 진출의 하한선인 5%를 겨우 턱걸이하는 상황이다. 한때는 사민당이나 기민당과 함께 중앙정부를 구성했던 당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전에 발표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완전 승리를 선언했다.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요즘, 특히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자유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의 위기에 관한 저술이 눈에 띄게 많다. 저자의 성향도 자유주의로부터 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하다.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과 극적인 퇴장, 브렉시트를 둘러싼 갈등, 세계 곳곳에서 위세를 보이는 극우 포퓰리즘과 함께 코로나19 재앙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싼 많은 쟁점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코로나19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기본적인 자유권에 심한 제약을 받게 되자 곳곳에서 국가의 위기관리능력에 대한 회의와 함께 저항도 거세졌다.
자유주의의 위기와 관련된 최근 논쟁은 먼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자유민주주의 안에 들어있는 두 가지 개념, 즉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 있는 미묘한 차이와 갈등에 눈을 돌린다. 자유주의만을 극단적으로 고집할 때 이는 결과적으로 소수 엘리트만이 군림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경쟁 과정에서 탈락한 대다수 사람을 포퓰리즘의 동력으로 내몬다는 점이 주로 지적된다. 자유주의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을, 시민정신보다 개인의 이익을 끊임없이 강조하기 때문에 자유가 결국 불평등의 씨앗을 뿌리고 이의 결과로 자유주의는 자신의 토대마저 허문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의 해결 전망은 어떤가. 논점 대부분이 한때 있었다고 믿어지는 이상적인 자유주의의 복권에 주로 초점이 머물고 있다. 자유주의 이후의 자유를 규명해보려는 젊은 미국 정치학자 패트릭 드닌의 <자유주의는 왜 실패했는가>는 조금 예외적이다. 그는 종교, 문화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지역환경의 함양을 통해 자유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찾고 있다.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인 미국인이 이상하게도 그들 자신보다 더 훌륭한 철학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드닌도 이런 자유주의에서 어떤 대안을 찾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위기와 이에 맞물린 대안 추구는 단순히 정치적 이념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사회의 구조 문제와 직결된다. 이와 관련해서 로널드 레이건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화신이었던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1987년 한 여성잡지와 인터뷰하면서 나름대로 명쾌한 주장을 편 적이 있다. “사회는 없다. 오직 개별적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우선 돌보지 않는다면 어떤 정부도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는 시장의 합리성에 대한 확신이 바로 그 해법이었다. 시장의 자율성을 해칠 수 있는 어떤 경제정책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자유주의가 동반하는 사회적인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신자유주의는 그 이후 개별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 지구화 시대의 철학이 되었다. 개인적인 이해와 보편적인 복리 사이에 어떤 예정된 조화가 있다는 믿음은 흡사 부두(voodoo) 주술(呪術)처럼 경험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고 케인스는 <자유 방림의 끝>(1926)에서 경고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오스트리아 작가 카를 크라우스(1874~1936)도 자유주의는 설거지물을 생명수인 것처럼 권한다는 쓴소리를 남겼다. 이 경고와 비판의 목소리는 거의 한 세기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정책은 반드시 경제행위의 보편적인 질서 수립에 필수적인 테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자유주의는 국가개입주의, 심지어 사회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2009년 12월1일 유럽연합은 ‘리스본협약’을 통해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한다는 공동의 큰 목표를 세울 정도였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는 정치문화의 전통이 취약한 미국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유주의의 위기가 있기 이전에도 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종종 욕설의 범주에 속하기도 했다. 특히 자유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현실정치 안에서 구현한다는 정당이 바로 그의 원인 제공자였다. 자유주의 이념을 당명 속에 크게 새겼지만 실제는 극우 정당인 ‘오스트리아 자유당’(FPO)도 있다. 그래서 자유라는 단어를 당명에 집어넣는 것 자체가 상표 도용이라는 비난도 있다.
운신의 폭은 비록 좁아졌지만 자유주의와 사민주의를 결합해 1988년 재창당한 영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DL)이나 중도주의가 사민주의, 진보주의와 함께 큰 판을 벌여 2017년 마크롱의 집권을 이끈 ‘전진하는 공화국!’(La Repubrique en Marche!)처럼 자유주의도 계속 변신을 시도했다. 유럽연합 안에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결성한 ‘유럽을 위한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의 연합’(ALDE) 안에서 활동하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아일랜드와 같은 작은 나라도 있고, 동구권에 속했던 에스토니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정당도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다.
하기야 당 이름만으로 보자면 우리 정당사에도 ‘자유당’ ‘민주당’ ‘자민련’ 등 자유나 민주라는 이름을 새긴 정당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자유주의의 정치이념을 뿌리내리게 한 정당이 과연 있었던가. 정당이 자유주의를 검증하는 여과의 장이 아니라 도리어 이의 성장을 저해한 장본인은 아니었던가.
몇년 전에 있었던 새 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을 둘러싼 논란 때 보수진영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주의라는 개념만을 사용하는 데 대하여 거센 항의를 한 적이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반대개념으로서 남북 간의 체제경쟁에서 승리를 이끌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이념적 무기인데 진보세력에 의해 심히 폄하되거나 부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도 나름대로 지난했던 민주화의 한 동력으로서 어느 정도 역할을 했지만 오랜 기간 많은 희생과 고난의 길을 걸었던 진보주의자들의 그것에 비하면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보수주의의 당의정(糖衣錠) 역할을 해왔던 자유주의일지라도 변혁운동을 추동했던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진보주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저변 확대를 위해 자유주의의 역할도 수용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미 퇴조기에 접어든 지 오래된 자유주의에 관하여 이의 토양이 여전히 척박한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먼저 국가보안법을 떠올리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기조로 삼는 헌법이 그의 하위법인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훼손되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자유의 제한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시끄러운 유럽과 달리 지금 한국은 온통 부동산 문제로 들끓고 있는 것 같다. 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투자나 투기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공정치 못한 경제질서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국의 자유주의가 과연 어떤 해법을 제시할 것인지도 궁금하다.
그래서 희미한 자유주의에 거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나는 오히려 스스로가 온전한 새로운 사회체계를 실천적으로 구성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싸우는 새로운 힘의 부상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게 된다. 이 힘은 개인이 그저 외부적인 제약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의 소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해 연대하는 속에서 추동하는 적극적인 자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경향 2021.03.17
윤석열 현상’의 음영
정치인 윤석열’을 놓고 여론은 매우 분열적·대립적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정계 진출에 대해 ‘적절’ 48.0%, ‘부적절’ 46.3%로 팽팽히 갈렸다(5일 리얼미터 조사). 윤석열의 대선 출마를 두고는 ‘찬성’ 45%, ‘반대’ 42%로 나뉘었다(11일 케이스탯리서치·엠브레인퍼블릭·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공동조사). 윤석열이 대선에 출마하면 국민의힘으로 나오든 제3지대로 나오든 ‘찍겠다’(45.2%, 45.3%)와 ‘찍지 않겠다’(47.1%, 46.1%)로 첨예했다(11일 리얼미터 조사). 오차범위를 감안하면 뾰족하게 두 쪽 난 여론이다. 민감한 정치 현안 여론조사에서 응답이 반반(半半)으로 쪼개지는 건 드문 일이다. 기본적으로 무당파가 20% 안팎인 상황에서 ‘모름/무응답’이 상당 비율 존재하기 마련이다. 윤석열 변수는 중간과 회색이 설 땅을 없앤다.
선례가 하나 있다. 조국 사태 당시 ‘서초동 집회’과 ‘광화문 집회’로 대결할 때 여론지형이 반반으로 쫙 갈렸다. 그때도 윤석열이 주인공이었다.
윤석열에 대한 여권의 맹렬한 적의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박근혜를 구속시킨 윤석열에 포한(抱恨)이 깊을 친박 김재원 전 의원은 “이길 수만 있다면 윤석열이 괴물이면 어떻고 악마면 어떤가”라고 했다. ‘칼잡이’ 윤석열의 대선판 등장은 필시 전쟁 같은 진영 대결의 완판을 예고한다. ‘윤석열 현상’이 배태한, 어두운 그림자다.
실제 오늘의 윤석열을 불러낸 것은 ‘반문 전사’라는 정체성을 빼고는 설명이 힘들다. 소위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면서 여권의 핍박에 맞서 저항했다는 표상이 ‘정치인 윤석열’의 유일한 자산이다.
새정치 열망에서 발아된 10년 전 ‘안철수 현상’과는 토대가 다르다. 안철수 현상은 정치불신과 중도무당파의 호명이었던 반면, 윤석열의 부상은 반문·반민주당 유권자의 지지·성원에 바탕하고 있다. 사실상 ‘반문 선언’을 하며 검찰총장직을 사퇴한 윤석열을 문재인 정권의 대항마로 찍고 보수층과 비문 중도층이 결집한 결과다. 야권에 변변한 대선주자가 없는 상황이어서 윤석열을 대안으로 삼으려는 기대 표출이다.
그렇다고 윤석열의 높은 지지율이 검찰총장의 정치 직행 부조리를 덮어주지 못한다. 정치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대선 도전을 변호해 주지도 못한다. 검찰총장이 곧장 정치로 뛰어드는 건 검찰의 중립·독립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최악의 선례로 남을 터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턱없이 부족한 정치 경험과 검증되지 않은 정치적 능력이다. 평생 검사로 수사한 일밖에 없는 윤석열이 대선주자에게 필수적인 민주적 리더십과 정치 역량을 갖췄을지 의문이다. 검사의 일과 정치의 일은 성격이 너무 다르다. 지도자에게는 정치의 핵심인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타협과 협상, 소통 능력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그러한 자질과 정치 역량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 국회의원이나 광역단체장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된 경우는 없었다.
어둡고 어지러운 발자국을 남긴 윤석열의 정치 참여 명분이 ‘반문’뿐이라면 국가적 불행이다. 문재인 정부가 가장 미덥게 보여주지 못한 가치인 공정과 정의를 앞세우는 것만으로 시대정신을 운위할 수는 없다.
윤석열이 기어코 대선에 나서려면 ‘무엇 때문에 대통령이 되려는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려 하는지’부터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 윤석열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한국 정치에서 대선 때마다 등장한 ‘○○○현상’이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 현상의 주인공이 ‘정치 세력 교체’의 열망을 담지하고 나갈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풋내나는 걸음마도 걸은 바 없는 윤석열도 그 실패의 길을 답습할 수 있다.
여하튼 검찰주의자 윤석열을 반문의 구심으로 만들어준 팔할의 책임은 여권에 있다. 여전히 ‘윤나땡’(윤석열이 대선주자로 나오면 탱큐)이라고 낙락할 때가 아니다. 여권이 직시할 것은 윤석열을 매개로 분출되고 있는 분노한 민심이다.
여권이 끔찍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칼을 거꾸로 겨눈 윤석열의 도발이 아니라, ‘윤석열 현상’을 통해 확인된 민심의 이반이다. 윤석열 현상에 담긴 민의를 정확히 읽고 반성과 자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권이 1%도 가능성을 인정하기 싫은 ‘검사 대통령’이 진짜 현실이 될 수도 있다./양권모 편집인 경향 2021.03.17.
투기의 추억
#1기 신도시. 1989년 노태우 정부는 분당·일산 등 5곳에 200만호의 베드타운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곧 예정지는 투기장이 되었고 심각한 사회문제에 대대적인 수사로 무려 1만3000명의 투기꾼이 적발되고 비리공직자 131명을 포함해 987명이 구속되었다.
#2기 신도시. 2003년 노무현 정부는 동탄·위례 등 12곳에 신도시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다시 투기가 극성을 부리자 대대적인 수사로 투기꾼에게 개발정보를 준 공무원 27명 등 무려 투기꾼 1만5000명이 입건되었다.
#3기 신도시. 2018년 문재인 정부는 하남·과천 등 6곳에 신도시 계획을 발표했다. 이상하게도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1·2기와는 달리 2년 넘게 조용했다. 지난 2월 뒤늦게 광명·시흥에 7만호 신도시를 추가 발표하자, 한 달 만에 LH 투기사건이 터졌고 뿌리 깊은 투기 복마전의 일각이 다시 드러나고 있다.
한국의 신도시는, 늘 집값 폭등으로 출발해 대출이나 중과세 등 수요규제를 대책으로 내놓았다가 부동산시장과 언론의 공급 확대만이 정답이라는 집요한 요구에 굴복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엄청난 국가자원과 사회적 비용을 들인 신도시는 집값 안정은커녕 불법전매, 부정청약, 집값담합 등 불법행위를 일삼는 투기꾼들의 먹잇감이자 놀이터로 전락했다.
한국의 주택 보급 등 부동산 상황은 나쁜 편이 아닌데도, 왜 한국만 집값 폭등이 사회문제가 되고 부동산투기가 만연할까. 부동산에 국민 재산의 76%가 몰려 있고 GDP의 5배나 된다는 특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강남불패’라는 말처럼 한정된 주택시장에서 실수요 아닌 투기수요를 무제한 허용하다 보니 국민의 주거권이 심각하게 침해되어 생겼다.
문재인 정부도 집값 폭등에 ‘역대급’ 금융규제와 중과세는 물론 신도시 계획에 도심 고밀도 공공개발 방안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공공주택 공급을 맡은 LH 공직자들까지 뛰어드는 뿌리 깊은 투기에 대한 안일한 상황인식으로 결국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백약이 무효요, 진퇴양난인 상황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50년 부동산투기꾼과 비호세력을 영원히 축출할 흔치 않은 기회도 맞았다. 투기로 불로소득을 올리고 개발정보로 국고를 축내는 이들에게 적용할 이해충돌방지법 등 입법적 개선은 물론, 지긋지긋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 조직과 정책을 혁신적으로 재편해야 한다.
우선, 주거복지정책을 전담할 ‘주거복지부’나 ‘주택청’ 같은 중앙행정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국토부의 주거정책과 LH 주택공급 기능을 떼내 주거복지정책의 컨트롤타워로 삼아 공공성을 중심으로 주택시장을 통괄시켜야 한다. 주거복지정책을 국정의 중심에 둘 때가 되었다. 임직원 9500명, 자산 184조원의 거대 조직에 정부 대신 주택정책을 총괄해온 LH는 기능 대부분을 정부로 넘기고 해체해야 한다. 정책은 중앙부처, 집행은 지방청 등 집행조직으로 이관하되 인원과 기능은 대폭 재조정하고, 도시재생 등 여타 업무는 지방공사로 넘긴다.
핵심은, 망국적 투기를 예방할 방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투기 종식을 위해서는 경기부양 수단으로서 부동산시장을 포기하고 사후적 안정화 방안이 아닌 사전적 시장감독기구를 두어야 한다. 상설감독기구는 거래 분석이나 하는 ‘부동산거래분석원’이 아니라 금융·자본시장의 금융감독원처럼 시장 관리와 감독 기능을 갖춘 ‘부동산감독원’이 더 적합하다. 정녕 투기를 근절하고자 한다면 비상한 특단의 대책이 되어야 한다.
남의 일 같았던 부동산투기가 우리 국민들의 문제가 되었다.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각해진 지금, 땀 흘려 일한 보람과 우리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정이 확보될 수 없다면 대부분 투기 탓이다. 매번 수사와 처벌이 반복되었지만 투기세력과 그들의 이익은 더 커졌다. 지금이 국민과 정부가 힘을 합쳐 익숙한 ‘투기의 추억’과 진짜로 절연할 절호의 기회다./구재이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 세무사 / 경향 : 2021.03.18
공정과 정의' 바닥 드러낸 자칭 '촛불 정부'
투기 자본주의가 부른 신뢰와 정당성의 위기
황석영의 소설 <강남몽>은 일제 강점기부터 1995년 서울 강남구 소재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때까지의 시간의 흔적을 한국 근현대사와의 연관 하에 풀어나간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강남의 형성 과정에 투영된 한국 현대사의 뒤틀린 모순과 부조리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왜곡된 부의 축적과 부동산 투기가 강남이라는 지역과 오버 랩되면서 정경유착과 부패한 인간 군상들의 욕망이 강남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박정희 시대의 압축성장을 기본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정경유착, 투기를 매개로 한 부패 사슬이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이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LH(대한토지주택공사) 사건은 그동안 응축된 모순의 일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땅과 아파트 등의 부동산 문제는 비단 특정 계층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번 사건이 공공택지개발과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공공기관에서 일어났고 신도시 관련 정보에 접근 가능한 공공 영역의 종사자나 고위공직자들의 행태가 부각되고 있지만, 민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전방위로 만연한 투기와 편법은 대한민국 성장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응축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정치권은 선거를 의식한 정쟁에 몰두하고 있다. 여야가 특검과 국정조사, 전수조사에 합의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퇴행적 한계는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정치와 관련하여 아무 말도 없는 윤석열의 지지율이 높은 이유를 여야 정치인들만 모르고 있다.
부동산 문제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모순 중 하나로 치부되어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노력과 희생보다는 정보와 편법을 활용하는 자가 사회의 권력을 차지하는 구조 자체가 정당하지 않다. 정보를 쫓는 수고의 대가가 수익이라는 괴변이 부동산 부자들이 내세우는 정당화의 논리다. 이러한 사변적 측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행각이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1년 내 열심히 벌어도 고작 몇 천만을 버는 사람들, (이보다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아파트와 땅을 얻어서 한 번에 수억 원을 챙긴다면 사회계약에 대한 파기를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토지와 주택이 자본 축적의 방편이며 특권층과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경제권력의 아성이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적 성격을 논하는 것이 1980년대의 시대착오적 분석틀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군부와 관료, 재벌의 3자 동맹으로 맺어진 관료적 권위주의 요소의 특징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혜와 반칙, 특권과 부정의가 어우러진 한국의 성장은 세계 10대 경제권이라는 찬란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적 요소에 대한 천착과 사회적 대성찰이 수반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쌓은 성이 될 수 있다.
2016년 가을부터 박근혜 파면이 결정된 2017년 3월 초까지의 탄핵 집회와 촛불시민들의 바람은 단순히 국정을 농단한 정권의 붕괴만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응집되어 있는 불법과 편법의 일상화, 정치와 경제의 유착구조, 시민의 서열화 등의 총체적 부조리와 모순을 광정하라는 것이었다.
그 기대를 안고 촛불정부라 스스로 칭하는 문재인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적폐청산을 내세우며 성과를 낸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수사를 한 사람은 정권의 적이 되었고 바로 그래서 민주당은 위기이다.
그럼에도 위기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검찰을 배제하는 것을 정권의 금과옥조로 삼고 검찰개혁 외의 의제는 아스라이 멀어졌다. 이제 국민의힘은 기사회생했다. 게다가 윤석열조차 힘을 보태면 정권 재창출은 소가 웃을 일이 되고 말았다.
부동산 문제는 시민들의 촛불을 소환할 대형 뇌관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양대 정당 체제의 근간을 허물 수 있다. 우리 시민은 적절한 시기에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민족이다. 4·19 혁명이 그랬고, 1980년의 5·18 민주화 혁명과 1987년의 6·10 민주대항쟁이 그랬다.
투기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정치가 이에 대한 해답과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해결의 단초를 열어 갈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 상상 이상의 경우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이해충돌방지법 제정과 '부동산 적폐'라는 신조어를 동원하며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화석처럼 굳어진 투기 자본주의를 얼마나 혁파할 수 있을지 시민들은 불신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 신뢰와 정당성의 위기에 정권과 정치가 직면해 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 프레시안 2021.03.19.
상위 0.001% 과세하기
최근 조 바이든 행정부는 ‘부자 증세’ 계획을 본격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낮추었던 연 소득 40만달러(약 4.5억원) 이상 개인의 최고소득세율을 감세 이전의 39.6%로 되돌리기로 한 것이다. 이는 현재 미국이 직면한 천문학 수준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시도인 동시에 미국 사회의 양극화 문제에 대한 정책적 대응으로 이해된다. 민주당의 경우 이미 지난 당내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와 엘리자베스 워런이 순자산이 최소 3200만달러(약 360억원)가 넘는 ‘슈퍼리치’에게 부유세를 걷자고 제안한 바 있다.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우리는?”이란 질문을 던져본다. 한편에선 대한민국은 2010년 이후 최고세율을 35%에서 45%로, 10%포인트 인상한 국가라는 점을 들어 반대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선 불평등 문제의 해결과 재정을 위해 슈퍼리치 대상의 증세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경제학자들은 ‘최적 최고소득세율’을 정하는 데서 두가지를 고려할 것을 조언한다. 먼저 세율 인상이 충분한 세수의 확보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도와 관련이 있다. 만약 상위 1%의 소득이 실제 상위 0.01% 이상에 몰려 있다면 상위 0.01%에 대해 세율을 인상하는 것이 세수 확보에 유리하다. 다음은 세율 인상의 비효율이다. 만약 최고소득세율이 그 사회의 가장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집단에 적용된다면 급격한 인상은 피해야 한다. 이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의사결정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를 ‘과세소득 탄력성’이라고 부르는데 낮은 과세소득 탄력성은 증세의 경제적 비용을 줄여주어 세율 인상 폭을 넓혀준다.
국세청 미시자료를 이용하여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권성오·권성준 박사는 2018년 과표 5억~10억원의 구간의 최고소득세율 인상(40%에서 42%)이 상위 0.1%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았다. 결론은 이들이 세율 인상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즉 최고경영자(CEO)와 같은 최상위 근로소득자들의 노동공급의 의사결정은 인상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세율 인상에 대해 노동공급의 조정 외에 소득원의 변화나 세무조정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고소득 사업소득자들의 행동 변화 폭도 기존 연구보다 상당히 낮았다. 이는 최고세율의 추가적 인상이 가져올 사회적 비용이 실제 크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과세소득 탄력성과 노동과 자본소득을 포함한 소득분포를 이용하여 필자가 개략적으로 계산한, 슈퍼리치에게 적용될 최적 최고소득세율은 55~70%였다. 현재의 최고세율이 45%인 점을 고려하면 사회적 비용을 크게 걱정하지 않으며 증세할 여지는 있어 보인다.
남은 문제는 이러한 최고세율의 적용을 받는 최상위 소득자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것보다 더 많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만 최고세율 인상 목적이 노동소득보다 자본소득, 그리고 이의 근원인 자산불평등 축소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010년 이후 최상위 소득의 불평등 악화는 임금소득이 아니라 배당과 같은 금융소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2018년 70만개 영리법인 중 상위 100개 기업(약 0.017%)의 최고경영자 평균 보수는 약 24억이었다. 같은 해 배당소득 상위 0.01%의 평균 배당소득은 약 69억이었다. 거의 3배 차이다.
또한 배당소득자의 상당수가 재벌 2·3세와 같은 ‘세습부자’였다. 2018년 기준으로 상위 10대 재벌총수 일가가 보유한 주식의 시가총액은 약 41조 수준이다. 이로부터 나온 배당수입은 0.99조였다. 거기에 이 중 0.3조는 이들 세습부자가 회사기회의 유용과 같은 편법적 방법을 통해 취득한 지분에서 나온 배당소득이다. 이 금액은 2018년 상위 100여명의 배당소득 총액 4.49조의 약 4분의 1 수준이다.
따라서 100억 이상 소득구간에 대해 최고한계세율을 50% 이상으로 하는 새로운 구간을 만들 경우 그 적용 대상은 ‘세습부자’이지 전문경영인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는 앞서 걱정한 최고세율의 인상에 따른 경제적 비용이 그다지 크지 않으며 오히려 부의 세습을 막고 이들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됨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대선 시기에 각 정당이 최고세율 인상에 대한 입장을 내놓고 논의를 진행할 것을 기대해본다. /최한수 ㅣ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한겨레 2021.3.21
전작권 없는 서글픈 한국군, 언제까지?
“자기 나라 군대 작전 통제 한 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깁니까?” 2006년 12월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예비역 군 장성을 “직무유기자”라며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북한 핵 개발에 북폭론을 제기한 미국의 강경파, 북한 정권 붕괴 등에 대비해 독자적 작전권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노 전 대통령은 천신만고 끝에 2006년 9월 조지 부시 전 미 대통령과 ‘전작권 환수 추진’에 합의했다. 그런데 예비역 장성들이 결사반대하자 폭발한 것이다. 결국 2007년 2월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2012년 4월17일에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전작권을 환수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주권국 군대의 면모를 갖추려는 결단이었다.
보수세력은 합의를 뒤엎으려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전쟁 억지가 어렵고, 핵우산 보장도 곤란하고, 미군 지원이 불투명하다는 등 온갖 핑계를 동원했다. 한국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비하의 극치였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을 계기로 2010년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2015년 12월1일’로 환수 시기를 3년 늦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초까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과 ‘2015년 전작권 환수’도 거듭 확인했다. 그런데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을 이유로 2014년 10월 미국과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에 합의하며 재연기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19일 만인 1950년 7월14일 작전지휘권을 유엔사로 이관했다. 일부 장성이 전선을 이탈한 당시 국군의 현실을 고려할 때 불가피했을 수 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떠날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1954년 11월17일 한-미 합의의사록 제2항에 “국제연합사령부가 대한민국 방위를 위해 책임을 분담하는 동안 국군을 연합사의 작전통제하에 둔다”고 명시했다. 전시·평시 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것이다.
국력이 성장하면서 작전권 환수 요구도 커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12월1일 60년 만에 평시작전권을 환수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석달 뒤인 지난 2017년 8월 국방부 핵심정책 토의에서 “막강한 국방비를 투입하고도 독자적 작전능력에 대해서 아직 때가 이르다고 하면 어떻게 군을 신뢰하겠는가”라고 군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의 ‘똥별 비판’을 11년만에 소환한 듯했다. ‘임기 내 환수 조건 확보’를 위해 지난 4년간 막대한 국방비를 쏟아부었다. 그런데 지난 18일 한국을 찾은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조건을 충족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 임기 내 전작권 환수는 사실상 어렵다는 미국의 의사를 밝힌 것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이에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19일 “진정한 주권국가가 되기 위해선 전작권을 반드시 환수해야 한다”며 “문재인 정부 임기 내 환수가 사실상 어려워졌다면 전환요건을 추상적인 ‘조건’이 아니라 ‘기한’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 때 처럼 미국에 환수 날짜를 못 박자고 요구한 것이다. 서글픈 한국군, 언제쯤 온전한 주권 국가의 군대가 될 수 있을까. 신승근 논설위원 skshin@hani.co.kr/ 한겨레 2021.3.22
‘미나리’의 가족주의 그리고 ‘국뽕’
영화 <미나리>의 리 아이작 정 감독(맨 왼쪽)과 배우들. 판씨네마 제공
세계 영화제의 트로피 수를 늘려가고 있는 <미나리>에 불손한 소리가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족이 서사의 중심에 서는 영화의 계보에서 <미나리>는 현저한 퇴행을 보인 영화로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대 영화들이 가족을 해체하고, 비틀고, 대안 가족의 가능성을 모색한 지 오래인데, 혈연에 따른 가족주의에 호소하는 영화가 세계(정확히는 미국) 영화제를 휩쓸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미나리>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원성이 벌써 들리는 것 같다.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말하면, 나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객관적인 시선의 카메라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과묵한 등장인물들은 예술영화에 익숙한 관객을 편안하게 맞는다. 감독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데이비드(앨런 김)의 짓궂은 장난, 순자(윤여정)의 직설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대사들, 정성 들여 키운 농작물과 미나리의 극적인 대조…, 장점만으로 지면을 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영화의 예술영화적 에토스 안에 담긴 가족주의라는 정념에 관해 말하려고 한다. 영화 전반에 대한 평가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 영화가 미국을 사로잡은 배경을 이해하려면 미국의 마음으로 <미나리>를 분석해야 한다. 아시안 아메리칸의 비중이 커지면서 그들이 미국에 정착한 사연에 대한 호기심이 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영화가 가족과 종교(기독교)라는 미국인들의 보편적인 정신의 뿌리에 가닿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 가족이 망설인 끝에 나가게 된 교회의 목사가 이들을 일으켜 세워 “참 아름다운 가족”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은 다분히 미국적이다. 인적이 드문 광활한 미국의 시골에서 가족과 종교는 세상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이컵(스티븐 연)은 십자가를 메고 가는 폴(윌 패튼)을 거의 대놓고 경멸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가족에게 내릴 ‘천벌’의 복선이 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고난의 클라이맥스에 이어 등장한다.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자는 4명의 가족과 그들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얼굴 클로즈업.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관객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문구가 새겨진다. ‘그래도 가족.’
리 아이작 정 감독이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으로 밝힌 바 있는 ‘그 어떤 언어보다 심오한 (가족이라는) 진심의 언어’는 안전하지만 보수적이다. 누구에게나 가족은 소중하고, 그래서 가족은 안전한 영화적 소재이지만, 가족주의라는 결론은 보수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지만, 어떤 영화가 ‘그래도 돈’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영화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미셸 푸코가 말했듯이, 현대 예술은 관습에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이며, 부당한 합의에 반대하는 능력이고,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지닌 반문화적 힘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역할이 답을 찾는 것이라면, 예술의 역할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족에 관한 새로운 질문을 요청한다. 1인 가정이 급격히 늘고, 동성결혼을 비롯해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져서만은 아니다.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내린 명령은 탐욕을 멈추고 성장 중독에서 벗어나라는 것인데, 그 명령의 이행을 가로막는 것이 인간의 이기심이고, 그 이기심을 재생산하는 체제의 기초에 가족(이기)주의가 있다. 부계혈족 중심의 가족주의는 민족(nation)이라는 유사가족주의 개념으로 몸집을 키워 전쟁과 살육의 연료가 되기도 했다. 작금의 부동산 투기나 교육 문제 같은 첨예한 사회적 갈등의 근저에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근본주의적인 주장일까.
한국인이 <미나리>를 보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이 영화를 외국어영화로 분류한 골든글로브의 국수주의적 처사에 분개하면서도, 아카데미 수상을 기대하며 한국영화인 것처럼 응원한다. 가족주의 확장판으로서 국가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세상을 이타주의로 가득 채울 수는 없어도, 덜 찬미하고 더 경계하는 게 우리가 나아지는 길이라고 믿는다. 우린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이재성 ㅣ 문화부장/ 한겨레 2021.3.22
신계급사회’의 예감
과거에 이런 시기는 없었던 것 같다. 경제는 나빠지는데 수도권 집값은 끝을 모르고 오르고, 빚을 더 내어 집을 사게 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일자리는 사라진다는데 재테크 열풍은 최고조다. 취업절벽 앞에서 ‘잃어버린 1년’을 보냈다는 청년들은 만나면 주식과 가상화폐 투자 이야기를 나눈다. 벼락부자가 되지 못하면 벼락거지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온 나라를 휘감고 있다.
다들 왜 이럴까? 우리는 지금 되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계급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모두가 이를 예감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지금 상층 계급에 진입하지 못하면, 후손까지도 영영 뒤처지고 말 것이라는 초조함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최근의 몇가지 사회적 논쟁을 되돌아보자. 새로운 계급사회를 상징하는 장면들이 곳곳에 들어 있다.
첫째,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의 정규직 전환 과정이다. 정부가 협력업체 소속이거나 파견직이던 노동자들이 본사에 낮은 처우로 입사해 고용불안을 줄여주려 했다. 그런데 기존 정규직 직원들이 ‘불공정하다’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공공기관 입사를 준비하던 취업준비생들도 ‘새치기’라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역설적으로 이 논쟁은 공공기관 취업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전 국민에게 알려줬다. 실제로 정년이 보장되고 매년 호봉 승급이 보장되는 공공기관 정규직 일자리는, 매년 보장된 수익률을 올려주는 안전자산과 같다. 저성장 시대가 오니 더욱 빛나는 자산이다. 공공기관 일자리는 단순한 일자리를 넘어 새로운 신분이 됐다.
둘째, 대학입시 전형을 놓고 벌어진 논란이다. 자유로운 활동과 경험을 통한 학습을 권장하겠다며 도입했던 새로운 입시제도는 불공정 시비의 대상이 됐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정해진 과목만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 점수 하나로만 대학에 가게 해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식 역시 새로운 계급의 경계선을 긋는 요소다. 디지털 전환으로 경계선은 더욱 진해졌다.
이른바 명문 대학 졸업장은 일종의 지식 자격증이 됐다. 지식은 입증할 수 없지만 졸업장은 입증할 수 있다. 지식은 누구나 얻을 수 있어 희소성이 없지만, 졸업장 같은 자격증은 희소성을 국가가 관리해주기까지 한다.
셋째, 부동산 투자 공정성 논란이다. 엘에이치 임직원들의 투기 의혹으로 분노가 폭발했지만, 이미 부동산은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어느 지역이 먼저 개발이 되는지, 누가 먼저 분양을 받는지, 누가 얼마나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누가 세금을 얼마나 더 내는지에 대한 관심이 극단적으로 팽창한 상태였다.
부동산 소유 여부야말로 새로운 계급의 핵심적 경계선이 되어가고 있다. 데이터로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로소득의 불평등은 산업화 이후 빠르게 커졌지만, 최근 몇년 동안 눈에 띄게 완만해지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부동산과 금융자산으로부터 얻는 소득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자산으로부터의 소득불평등은 더 가팔라지고 있고, 상위 10%에서 1%로, 1%에서 0.1%로 더 집중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아무리 능력이 있고 노력을 해도 일을 해서 얻는 근로소득으로는 상승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공무원 시험으로, 입시 사교육으로, 부동산 투자로 몰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묵묵히 일하기만 하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창업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겪을 암울한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 상층 계급이 될 기회를 공정하게 가지면 될까? 의문이다.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격차가 커지고 승자의 비율이 줄어드는 사회라면, 공정한 규칙이란 사실 부수적이다.
‘신계급사회’를 향해 달리고 있는 우리 사회 방향을 뒤집는 일이 핵심이다. 집과 땅에서 나오는 불로소득과, 학벌에 따른 차별과, 공공기관 담장 안팎의 격차를 없애는 게 그 내용이다.
사람들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세상의 흐름에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흐름이 바뀐다는 믿음이 생기면 또 다른 방향으로 에너지를 쏟기 마련이다. 굳은 의지로 일관된 방향의 바람을 만들어내는 일을 정부가 정책을 통해서 해야 한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외쳤던 문재인 정부의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지 않도록 만들고, 사람들이 이를 믿도록 만드는 데 남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이원재 ㅣ LAB2050 대표/ 한겨레 2021.3.23
분양제도의 명분과 실제
내집 마련은 대다수 국민의 꿈이다. 주거안정의 근거이자 가장 유력한 재테크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분양권 당첨은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러나 현실은 간단치 않다. 2020년 11월 기준 청약통장 1순위 가입자만 1496만명이다. 로또 당첨에 빗대 로또 분양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특히 서울 등 수도권에 한자녀 이하를 둔 40~50대는 더욱 그렇다. 분양제도가 30대 신혼부부와 다자녀 등 부양가족이 많은 가구에 혜택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공분양의 85%, 민간분양의 평균 54%가 특별공급으로 배정된다. 가장 큰 수혜자는 30대 신혼부부다. 공공분양의 30%, 민간분양의 20%가 배정되고, 25%의 생애최초 특별공급 물량에도 신청자격이 주어진다. 신혼희망타운 등 신혼부부만을 대상으로 한 주택공급도 있다.
청년 주거지원 정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30대 신혼부부에게 편중된 물량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세대 간, 세대 내 형평성 차원에서 바람직한지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생애주기와 경제활동의 남은 기간을 고려하면 내집 마련의 필요성과 절박함은 40~50대 장기 무주택자가 30대 신혼부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지 않은 대다수 청년에게 30대는 경제활동으로 자산을 축적할 시기지만, 40~50대 서민들에겐 분양은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30대 신혼부부 우선분양 제도는 세대 내 계층 간 형평성 차원에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서울의 아파트 분양가는 7억원대를 넘어서고 있다. 2018년 기준 30대 임금근로자의 월평균 중위소득은 286만원이다. 비정규직은 물론 중소기업에 종사하는 30대 청년에게 분양 혜택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더구나 신혼부부 특별공급의 소득 기준도 점차 완화되어 올해부터는 월소득 777만원(맞벌이 889만원)까지 자격이 주어진다. 월소득 777만원은 30대 임금근로자 상위 6% 수준이고, 부부합산 연소득 1억원은 전국 무주택 신혼부부의 상위 8%에 해당한다. 결국 신혼부부 특별공급 물량 확대는 30대 청년세대 내에서도 부모한테 재산을 물려받거나, 대기업, 공공기관, 금융권 등 높은 분양가를 감당할 수 있는 일부 고소득 계층에 혜택이 집중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책은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고, 다른 효과 특히 형평성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30대 신혼부부에게는 양질의 저렴한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여 내집 마련을 착실히 준비할 수 있도록 하고, 40~50대 장기 무주택자에게 분양 기회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부양가족 수에 가장 높은 배점을 주고 있는 청약가점제 역시 가구 변화를 반영해 재검토가 필요하다. 수도권 민간분양의 대부분은 청약가점제에 의해 입주자를 선정한다. 2020년 분양을 받을 수 있었던 청약가점은 서울의 경우 61.83점으로, 부양가족 수에서 5~10점밖에 받지 못하는 1~2인 가구는 납입기간, 무주택기간 등 다른 항목에서 만점을 받아도 분양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1~2인 가구 비중은 2000년 34.5%에서 2019년 58%로 급속도로 늘어난 반면, 4인 이상 가구는 44.4%에서 21.2%로 절반 넘게 줄어들었다. 2047년에는 1~2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72.3%까지 늘고 4인 이상 가구는 8.4%로 줄어들 전망이다. 1~2인 가구의 증가는 비혼, 이혼 및 한부모 가구, 독립거주 노인 가구의 증가 등 가구 구성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출산 장려라는 정책적 취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청약가점 제도가 도입된 지 14년, 그동안 합계출산율은 2006년 1.13명에서 2019년 0.918명으로 감소했다. 정책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가구소득이 높을수록 출산 자녀 수가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는 부양가족 수에 대한 가점 혜택이 출산율을 증가시키기보다는 다자녀를 둘 수 있는 고소득 계층에 추가적 혜택을 제공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다자녀, 노부모 부양 가구에는 각각 10%, 5%의 특별공급 물량이 배정되고 있다. 이중의 혜택을 주는 셈이다. 노부모, 다자녀 특별공급과 부양가족 수 배점 중 하나를 폐지하거나 비중을 축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책은 기대한 효과가 없다면 과감히 변경해야 한다. 또한 정책은 현실의 변화를 직시하고, 이를 반영해야 한다. 과거의 정책을 관성적으로 유지하면 정책의 허점,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효과가 왜곡된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장 한겨레 2021.03.23.
일본, 대한민국의 반면교사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990년대 초 나는 당시에 유행했던 폴 케네디(1945년생) 교수의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1987년)을 읽어본 일이 있었다. 반천년 동안의 패권 정치를 파헤친 명작임에 틀림없었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예측이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미국 패권의 쇠락을 상당히 논리정연하게 논한 그 책에서 저자는 미국을 제치고 패권 국가로 등장할지도 모를 ‘미래의 강자’로 다름 아닌 일본을 지목했다. 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빗나간 예측을 두고 ‘미래 예측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경우’라고 흔히 평가한다.
그러나 사후적으로 케네디를 지나치게 혹평하는 것도 어쩌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비판적 의식을 가진 일부의 전문가를 제외한 서방 세계의 다수에게는 1980년대 중반의 일본이야말로 ‘가장 미래성이 있는 자본주의의 모델’로 보였다. 일본은 미국에 비해 격차가 훨씬 덜한 사회였고 아동 빈곤율(10%)도 미국이 두배나 높았다. 1985년 당시, 일본의 출산율(1.76)도 예컨대 독일(1.36) 등 서구에 비해 다소 높았다. 전체적으로 사회가 훨씬 더 ‘건전하게’ 보였다. 폭력이나 사회적 탈선 등은 고소득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으며, 사회적 응집력은 서방에서 그저 부러워하기만 해야 하는 고수준이었다. 거기에다 일본산 만화 등이 갈수록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추세였다. 일부의 전문가들은 재일조선인 같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서 보이는 일본 사회의 폐쇄성이나 ‘토건 국가’의 내재적 부실성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최고의 나라 일본’(Japan as Number One)을 철석같이 믿었던 다수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30여년이 지났다. 1990년대에 소련 몰락과 인터넷 기술 혁명의 힘으로 미국의 위상은 잠시 회복되었지만, 2000년대 들면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참패 등으로 케네디가 진단한 미국 패권의 쇠락은 지속되었다. 그러니 실패한 침략과 인종주의적 혐오의 정치세력화, 그리고 코로나 방역의 실패 등으로 세계적 구설에 오른 미국 이상으로 그 위상이 쇠락한 나라를 찾자면 그건 바로 일본일 것이다. 우선 일본의 ‘성장 시대’는 과거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국내 총수요가 늘지 않는 상황에서 정권이 아무리 양적 완화를 통해 경제에 돈을 부어봤자 성장 둔화의 추세를 면할 수 없다. 총수요가 늘 수 없는 자명한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비정규직 양산 등이 가져다준 대대적 ‘빈곤화’다. 전체의 38%나 되는 고용노동자가 비정규직인 일본의 빈곤율(15%)은 미국(9%)보다 더 높으며, 평균 임금은 미국의 약 75% 정도밖에 안 된다. 침체되고 격차도 늘어나고 불안에 시달리는 사회인 만큼 온갖 병리 현상도 다 나타나게 된다. 일본의 자살률만 해도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구미권 국가보다 훨씬 높다. 2011년 이후로는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총인구 감소 추세까지 가세되어 ‘일본에 미래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많아지는 것이다.
미국은 케네디의 분석대로 과도한 군사적 팽창 등으로 부실을 키워온 것이다. 그러면 1945년 이후로는 군비 지출을 자제해온 일본의 패인은 무엇인가?
극히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1955년부터 줄곧 권력을 독점한 채 아무리 정책을 그르쳐도 사회의 견제를 피할 수 있었던 자민당이라는 ‘기득권 블록’을 지난 몇십년 사이 일본이 밟아온 하강 곡선의 주요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땅부자’ 정치인들이 삽질 경제를 부추겨 결국 터지고 만 부동산 버블(거품) 현상을 예방하지 못했으며, 기득권자인 만큼 재분배·격차 문제에 둔감해 노동의 불안화와 상대적 빈곤화를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기득권자들이 노동 문제에 무관심한 반면에, 조직 노동의 발언권이 너무나 취약해 격차 해소에 전 사회가 실패하고 만 것이다. 또 기득권자들이 추구해온 폐쇄적 이민 정책이 이민자 유입에 의한 인구수의 유지나 증가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결국 인구 감소를 초래했다는 분석도 있다. 전후 일본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공룡과 같은 자민당이, 결국 일본을 오국(誤國)했다는 진단인 셈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는 한국과 무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일본이 ‘실질적인 준일당제’라면 한국에서는 최근 25년 동안 양당제가 나름대로 잘 정착되어 권력은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문제는, 비록 여야의 날 선 대결이 한국 정치의 무대를 훨씬 더 건전하게 만들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여야가 공유하는 일종의 비공식적 ‘합의 사항’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자민당의 재앙적 정책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환경 훼손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 집권 세력이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보면 삽질 경제에 대한 엘리트들의 ‘초당파적 합의’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공임대주택의 증설 등 여러 진보적 대안이 제시되지만, 보수 정권도 자유주의 정권도 집값을 잡고 거품 형성을 방지하는 데에 여태까지 실패해왔다. 그만큼 세금 혜택까지 받는 등록임대사업자 같은 고소득 다주택자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겨주어 왔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데, 삽질 경제의 지속과 주거 정책의 실패를 보면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느낌이 바로 들 정도다. 이민자 유치를 통한 고령화 시대 노동인구의 확보에는, 한국은 여태까지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더 성공해왔다. 한국의 외국계 인구의 비율이 4.9% 정도인 반면 일본은 그 절반도 안 되는 2.3%에 불과하다. 그러나 외국인 정책의 배타적인 근간을, 한·일이 생각보다 많이 공유한다. 결혼 이주자들은 ‘국민’으로 받아들여 주지만 단순노무자 등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정주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고 (임시적) ‘체류’와 ‘노동’만을 허용하는 정책이다. ‘돈’이나 ‘기술’보다 ‘인재’(人才)가 더 귀한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이런 폐쇄적 정책이야말로 ‘인재’(人災)나 다름없다. 일본에서 이미 실패한 정책을 한국이 굳이 답습해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물론 무엇보다 이미 일본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대중의 빈곤화와 총수요 저하의 원인으로 지목된 비정규직 양산을 왜 여태까지 답습해왔는지 물어봐야 할 것이다.
한때 근대의 모델이었던 일본은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반면교사다. 그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며, 일본이 이미 빠지고 만 그 함정을 우리가 어떻게 피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나마 그 함정을 부분적으로라도 피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이미 거의 남지 않았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1.03.23.
제3 후보가 매번 실패하는 이유는
1987년 체제가 들어선 이후 제3 지대는 항상 열려 있었다. 그러나 제3 후보는 늘 실패했다.
출발은 1992년 정주영 현대 회장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1992년 3월 총선을 앞두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31석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었다. 12월 대선에 출마했다. 겨우 16.31%를 득표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 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에서 제3 후보는 무소속 박찬종 후보였다. 대단한 기세를 올렸지만 33.51% 득표로 2위에 그쳤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유시민 작가가 <97 대선, 게임의 법칙>이라는 책을 썼다. 정권교체를 위해 제3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했다. 김대중 총재는 여권의 분열, 대다수 김종필 지지자들의 전폭적 지원, 재야의 지지라는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돼야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고 했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를테면 조순 시장 같은 제3 후보를 내세워 밀어줘야 한다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제3 후보론이 아니라 대리전을 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런데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갔다.
제3 후보론은 그래도 힘을 잃지 않았다. 2002년 대선 제3 후보는 정몽준 의원이었다.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흡수했다. 2007년 대선에는 이회창 무소속 후보가 출마했다. 세 번째 도전이었다. 제3 후보라고 할 수 없었다.
2011년부터 제3 후보의 지위를 이어간 것은 정치 신인 안철수 교수였다. 2012년 대선,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서울시장 선거, 2020년 총선에 도전했다. 거의 다 실패했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도전은 제3 후보로서 마지막 승부수였을 것이다. 결국 또 실패했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제3 후보는 왜 매번 실패하는 것일까?
첫째, 반정치주의다. 제3 후보는 언제나 반정치주의를 적당히 이용했다. 정주영 회장도 그랬고 안철수 교수도 그랬다. 정치하면서 반정치주의를 이용하는 것은 위선이다. 유권자는 어리숙해 보이지만 멍청하지 않다.
둘째, 확증편향이 점점 더 심해지는 추세 때문이다. 확증편향은 정보화 시대의 부산물이다. 사실과 믿음이 충돌하면 과거에는 믿음을 바꿨다. 지금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 편’과 ’네 편’만 존재하는 생태계에서는 제3 후보가 헤집고 들어가 공간을 만들기가 어렵다.
셋째, 정당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과거 정당의 주인은 총재였다. 정당을 만들기도 쉬웠고 없애기도 쉬웠다. 지금 정당의 주인은 당원들이다. 정당을 만들기도 어렵고 없애기도 어렵다. 제3 후보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정당을 새로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대한민국 정치에서 제3 후보는 사라질까? 안철수 대표를 끝으로 제3 후보는 더는 없는 것일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때문이다. 안철수 대표의 신비감이 꺼져가는 제3 후보 무대에 윤석열 전 총장이 등장하고 있다. 절묘하다.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윤석열 전 총장 자신이 가장 당황스러울 것 같다. 100세 넘은 철학자를 찾아가서 “내가 정치를 해도 되겠냐”고 물어본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윤석열 전 총장 인기가 치솟는 이유가 뭘까? 문재인 정부의 실정 때문이다. 윤석열 총장에 대한 무리한 징계 청구는 그에게 ‘핍박받는 의인’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그 뒤 엘에이치(LH) 사태가 터지자 문재인 정권 심판을 위한 정치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윤석열 전 총장이 내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을까? 없다고 본다. 두 가지 이유다.
첫째, 그는 제3 후보다. 한계가 명확하다. 거품은 언젠가 꺼질 것이다.
둘째, 그가 출마하면 대한민국 검찰은 윤석열 전 총장의 정치 조직으로 전락한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요즘 윤석열 전 총장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잘할 수도 있다고 추켜세우는 논객들이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 만들기’까지 앞장서는 것은 지나치다. 계속하면 언젠가 혹세무민의 책임을 혹독하게 져야 할 것이다.
성한용ㅣ정치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1-03-24
다시 생각해보는 북한인권 문제
북한의 인권 문제는 2003년 처음 유엔 의제로 상정된 뒤, 인권이사회와 총회를 거쳐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다루어지게 되었다. 인권 문제가 이처럼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국가는 세계에 10개국이 안 된다. 북한인권 문제가 다른 어떤 국제적 이슈보다 우리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분단된 민족인 북한 주민들이 현시점에 실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선포한 1948년 세계인권선언 이후, 국제적으로 인권은 크게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나뉘어 구현되어 왔다. 표현의 자유와 같은 자유권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면 보장될 수 있지만, 복지권과 같은 사회권은 국가가 보장해줄 능력이 있어야 한다. 현재 북한은 양쪽 모두 문제가 있다. 인권 증진에 필요한 민주화나 경제발전이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북한 주민들의 인권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장기적으로는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권탄압 국가에 인권 향상을 강제할 수 있는 직접적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국제적 압박은 여전히 유효한 수단이다. 국제적 압박에 있어서 가급적 비정치적이고 전문적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인권에 있어서 완벽한 국가는 없다. 유엔 인권이사회의 ‘보편적 인권검토’에서는 북한뿐 아니라 미국이나 우리나라도 수백개의 권고사항을 받아왔다. 물론 우리나 미국이 사형제도, 경찰의 과잉대응 등에 관한 권고를 받는 것과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공개처형 등에 관한 지적은 심각성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북한의 인권상황을 지적할 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도와줘서 인권을 개선해야 한다는 비정치적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이 북한의 반발을 줄이고 변화를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 한국이 2019년부터 유엔의 북한인권 결의안에서 공동제안국 참여를 중지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정책 변화라고 본다. 우리 정부는 “현재의 한반도 정세 등 제반상황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공동제안국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지만, 이러한 정치적 접근 방식은 인권 문제에 관한 원칙을 약화시켜 우리의 입지를 좁히게 된다. 향후 인권 결의안의 대상이 되는 다른 국가들이 우리의 입장 변화를 요구할 때, 인권 문제에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우기도 어려워질 수 있다.
단기적으로 우리는 대북 인도적 지원 등을 통해 북한 주민의 사회권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사회권은 정부의 독재와 탄압만이 아니고, 경험이나 재원이 부족해서 실현되지 못하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고려할 때 이러한 지원은 인도적 분야에 국한되어야 한다. 인도적 지원은 기본적으로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면 장애인 인권 분야가 있다. 사실 북한은 지난 10년간 장애인권리협약 가입 등 장애인 인권 분야에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우리 정부나 민간단체가 북한 장애인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은 대북 제재하에서도 가능한 일이고 인권상황 개선에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다.
1990년대 초 세계적으로 냉전이 끝나고 남북한 간에도 데탕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북한 핵 문제가 시작되었다. 30년 된 북핵 문제는 북한 자신의 발전은 물론이고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제는 북한 정권이 좀 더 현명한 판단으로 주민들에 필요한 것이 핵무기가 아니고 경제적 풍요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점을 깨닫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대화를 통해 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와 공동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누리게 되면, 북한인권 문제도 유엔 의제에서 자동적으로 삭제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북한인권 문제를 제대로 다루는 것이 모두에게 중요하다. / 오준ㅣ경희대 석좌교수·전 유엔대사 한겨레 2021.03.25.
4·7 선거와 부동산 역풍
여권이 서울·부산 시장 선거에서 고전하고 있다. 작년 4월 총선에서 올린 대승의 기세는 1년 만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중도층이 여권에서 이탈하여 야권에 합류하는 흐름이다. 중도층과 보수층이 연결되면서 ‘윤석열 현상’은 국지풍에서 항상풍으로 넘어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중도층의 두려움이 어느 순간 급속히 커졌기 때문이다. 여권의 행동이 중도층의 두려움을 보수층의 증오와 경멸과 연결시켰다. 4년 전 촛불항쟁에서 형성된 연대감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여권은 거대한 대중 정서의 역풍에 직면하고 있다.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은 <좁은 회랑>이라는 책에서 국가와 사회가 균형을 이루는 경로를 논한 바 있다. 국가 부재와 독재 국가가 널리 퍼져 있는 사이에 좁은 회랑이 있다. 그 좁은 회랑에서 유능한 국가가 유능한 사회와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좁은 회랑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좁은 회랑 안에서는 국가 엘리트들과 사회 세력들과의 균형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이 회랑 구조의 밖으로 이탈하려고 하면 저항력에 직면한다. 거대한 역풍을 맞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의 국가보안법 개정 무산이 이런 사례 중 하나이다. 당시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의 회고에 의하면,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여야 간 협상을 통해 의견 접근을 보았으나, 완전폐지파 의원들에 패배하면서 국가보안법 개정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득세한 여권의 강경론은 국민들의 균형 감각과 충돌했고, 이후 노무현 정부는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몰락도 좁은 회랑의 반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이라는 자신감 속에서 민주화 체제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조치들을 내놨다. 국정원의 정치도구화, 테러방지법 추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통합진보당의 강제해산, 민주노총 억압 등을 밀어붙였다. 이러한 조치들이 이어지면서 민주화 체제를 위협하는 ‘점진 쿠데타’라는 평가가 나오고, 몰락이 시작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자 힘을 과시하려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회랑의 균형에서 벗어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완고한 부동산정책은 역방향의 바람을 키우고 또 키웠다. 첫째로 부동산 관련법을 처리하는 과정이 문제였다. 기립표결, 속전속결 방식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경한 충격이었다. 이는 국회 원 구성에서의 상임위원장 독식과 함께 견제장치 없는 폭주로 여겨졌다. 이후 공수처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도 여당 의원들은 기립표결을 강행했다. 이런 방식은 중도층 국민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둘째로 부동산 관련 조세 문제는 자유와 정의의 문제를 이념적 수준에서 다시 제기했다. 자유와 정의는 정치 이념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복지정책, 기본소득·기본자산제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근대국가의 기본 골격은 자유와 정의를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조세재정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다. 로빈 후드는 의적이지만 국가시스템이 될 수는 없다. 조세 문제는 정파 간, 사회 세력 간 숙의와 타협을 거치지 않으면 저항과 반란의 불씨가 된다.
셋째로 정책이 사법체계의 혼란과 얽혀들고 있다. LH 사태는 공기업의 부패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사법체계 개혁을 강조해왔고 검찰 수사권이 주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사법체계의 본질은 자원의 소유·사용을 둘러싼 게임의 규칙이다. 정부는 부동산 문제를 적폐청산 차원으로 봤지만, 국가 엘리트에 대한 단속과 기강 문제는 계속 의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국가기구가 통렬하게 자승자박하지 않으면, 규칙의 공정성과 사법의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
국가란 본질적으로 공통의 권력으로서 ‘리바이어던’이다. 그런데 그 리바이어던에 채워진 족쇄가 풀렸다는 두려움이 커지면, 사회의 저항이 시작된다. 여기서 큰 바람은 중도층이 일으킨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경향 : 2021.03.25
원래 어디서 왔어?
뉴욕은 전세계 거의 모든 인종과 성별이 모여 멜팅(melting·용해)된 냄비(pot)로 유명하다. 신대륙에서도 대도시인 장소의 특성상 “원래” 뉴욕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과 사귈 때 스몰토크의 시작을 여는 문장이 “넌 원래 어디서 왔어?”(Where are you originally from?)일 때가 있다. 내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대표적으로는 한국, 구체적으로는 남한, 특별히 소개하고 싶으면 제주라는 섬에서 왔다고 짤막하게 말하곤 했다. 외모가 아시안이기 때문에 더 구체적인 혈통까진 말하지 않는데,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들이 문화적으로 달라서 흥미롭다. 어떤 식이냐면, 캐나다에서 온 친구는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인이고 어머니가 프랑스인인데, 캐나다 퀘벡에서 살다가 공부하러 뉴욕에 왔다는 거다. 뉴욕의 흑인지구인 브롱크스에 사는 친구는 증조부 때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미국 중서부로 이주해서는 조부 때 브롱크스에 정착했고, 부모님은 곧 할렘으로 이사 가는 게 꿈이고, 본인은 브루클린에 독립해서 산다는 미국사를 읊어준다. 나도 그에 화답해서 나는 극동아시아에 있는 반도인 대한민국에서 왔는데, 알다시피 거긴 남북으로 나뉘어 있고, 나는 남한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제주라는 섬에서 태어났다가 공부하려고 도시인 서울로 진학했다가 지금은 뉴욕에 와 있지, 정도의 오리지널리 프롬에 대해 정성을 들여 설명하게 된다.
왜 갑자기 오리지널리 프롬인고 하니,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유난히 어디 출신인가를 묻는 질문을 많이 받아서 그렇다. 제주에서 어디 출신이냐고 묻는데, 제주 출신이라고 말하면 뭔가 어색하고, 구체적인 진짜 출생지를 말해야 한다. 이를테면 서귀포시 호근동같이. 호적지는 호근동 어디쯤이고 유년기는 남성마을에서 보냈고, 그다음에 학교를 다니러 제주시로 이사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뉴욕에서 자연스럽게 말하던 오리지널리 프롬이 생각났다. 돋보기로 점점 더 확대해 들여다보는 것처럼 나는 내 출신지에 대해서 점점 더 디테일하게 말하는 조건에 놓이게 됐다. 급기야 선대 어디쯤에 제주에 정착했냐는 질문에, 족보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로선 기어코 증조 어디쯤이란 거짓말까지 지어내는 데 이르고 말았다. 내 기억 속에 그나마 남아 있는 조상은 증조부 정도인데, 그분들이 제주에 사셨던 건 확실하니까, 그나마 거짓말이 아니고자 증조부쯤 제주에 온 것 같다고 답하게 되는 상황이 됐다. 조부가 모두 돌아가셔서 도대체 언제쯤 우리 선조가 제주에 정착해 입도조가 되었는지 나로선 이제 알 길이 없다.
증조부 때 제주에 입도했다면, 나는 제주 사람일까? 뉴욕에서부터 출신을 말할 때마다 늘 불편함이 있었다. 어느 정도의 밀도로 친절히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차치하고, 일단 외국인인 나를 상정해둔다는 태도 때문이었다. 질문자가 원래 뉴요커이든 이주민이든 상관없이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질문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향에서 다시 끊임없이 원래 출신이 어딘지 질문받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내 고향이지만, 내게 질문하는 이는 일단 이주민이라고 나를 상정하고 던지는 질문 같아서이고, 실제로 내 고향을 말하면서도 변명처럼 제주 출신이라고 말하게 되는 상황이 불편하다. “원래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느끼는 불편함이 애틀랜타 총기사고 관련 뉴스를 보면서 오는 무거운 마음과 같은 맥락에서 오는 것임을 희미하게 느낀다. 혐오 이전엔 차별이 있고, 차별 이전에 배제, 배제를 위해선 구분짓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출생지는 가장 편리한 구분짓기 수단이다./이나연 ㅣ 제주도립미술관장 한겨레 2021.03.28
미국의 ‘영원한 내전’…지난해 2만명이 죽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국외에서 미국의 ‘영원한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 안에서의 ‘영원한 전쟁’은 어떠한가?
2020년 거의 2만명의 미국인이 총기 폭력으로 숨졌다. 팬데믹과 경제적 봉쇄도 미국인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지난 20년 사이 어느 해보다도 많은 숫자다. 여기에는 매년 총으로 자살하는 2만4000명은 포함되지도 않는다.
폭력은 2021년에도 멈추지 않았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와 콜로라도주 볼더에서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두 건의 총기 난사는 미국이 전쟁지역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미국은 세계에서 1인당 총기 소유 비율이 가장 높다. 평균적으로 100명당 총 120정을 갖고 있다. 미국에 근접한 나라는 100명당 52정의 총을 갖고 있는 예멘이다. 예멘은 진짜 전쟁을 하고 있지만 1인당 총기 수는 미국의 절반도 안 된다.
총기 판매상은 여전히 미국에서 장사가 잘된다. 폭도들이 미국 의사당을 습격한 지난 1월 미국인들은 200만개 이상의 총을 구입했는데, 이는 한 달 기준으로 사상 세번째 기록이다.
물론 모든 미국인이 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총기를 여럿 가진 사람이 많다. 이들 총기 소유자들은 많은 정치적 힘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로비세력 중 하나인 전미총기협회(NRA)는 500만명 회원을 자랑한다.
전미총기협회 때문에 의회는 온건한 총기 규제조차 통과시키지 못했다. 예를 들어 2013년 하원은 총기 난사에 많이 사용되는 돌격소총(AR)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코네티컷주 샌디훅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이 6~7살 어린이 20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상원 문턱을 못 넘었다.
총기 찬성파는 미국 수정헌법 제2조가 총기 소유권을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이 조항에는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State)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돼 있다. 전미총기협회는 헌법이 모든 시민의 총기 소유권을 보호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인민의 권리”라는 문구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 조항은 분명히 무기 소지 권리를 “잘 규율된 민병대”의 유지와 연결짓는다. 헌법이 쓰여졌을 때, 입안자들은 연방정부의 폭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민병대를 유지하는 개별 주들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조항은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잘 규율된 민병대 안에서의 무기 소지에 초점을 둔다.
대법원은 이 해석을 유지했으나, 2008년 권총 소지를 금지하는 워싱턴 디시의 법을 5 대 4의 결정으로 뒤집었다. 대법관 한 사람의 견해가 미국의 총기 소유에 대한 판례를 바꿨다.
미국이 국외에서 벌이는 ‘영원한 전쟁’은 국내 총기 폭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가진 참전용사들이 생겨났는데, 매일 약 11명, 연간 4000명의 참전용사가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1949년 뉴저지 인근에서 13명을 살해한 사건을 비롯해, 참전용사들이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 추정에 따르면 대규모 총격범 3명 중 1명 이상이 미군 훈련을 받았다.
미국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정치인들은 뭔가를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총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미국 문화는 비디오 게임과 할리우드 영화부터 사냥, 페인트볼(페인트가 든 탄환을 쏘는 게임)까지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서부 개척 시대가 지난 지 100년이 넘었어도 ‘와일드 웨스트’ 기풍이 미국에 만연해 있다.
총기 폭력은 미국이 국내외에서 비무장화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첫번째 단계는 미국의 전쟁 중독을 끝내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죽이는 것을 관두면 스스로를 죽이는 것도 멈출 수 있다./존 페퍼 ㅣ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한겨레 2021.03.28.
부동산 적폐, 보유세 강화가 답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로 민심이 분노했다. 엘에이치 직원들의 내부망에 올라온 “우리도 부동산 투자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라는 글에 더욱 분노했다. 언제부터인가 공직자들이 부동산 투기를 재테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 또다시 놀랐다. 이번 사태가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무너트리고 있다. 공직자 윤리 실종은 물론이거니와 투기세력이 정책을 맡고 있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촛불시민이 만들어낸 정부의 부동산 문제 해결에 대한 시민의 열망과 기대는 높았다. 정부는 투기수요 근절과 집값 안정화 의지를 밝혔다. 투기 열풍을 잠재우겠다는 의지는 결연했다. 그런데 그간 많은 부동산 정책 발표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은 안정화되지 않았다. 정부 대책이 나오면 집값이 잠시 진정되다가 다시 오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자 시민들은 정책 당국의 실력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부동산값을 잡을 정책 능력이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30대 청년들도 지금 안 사면 영원히 못 산다는 공포와 불안으로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 사기에 나섰다. 이렇게 정책 신뢰도가 크게 낮아진 상황에서 터진 엘에이치 사태는 집값을 잡고 투기를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조차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시점, 무엇보다도 실추된 정책 당국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정부의 의지조차 의심받는 상황에서 제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장에서 통할 리가 만무하다. 정부도 부동산 관련 공직자의 재산등록을 의무화하고 대상을 모든 공직자로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공직자 지위에서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부동산 투기이익을 얻는 일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에 대해 몇 배의 과징금과 형사처벌 등 강력한 처벌규정도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후적 처벌만으로는 부족하다. 공직자는 부동산으로 이익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공직자 부동산신탁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은 공직자 윤리를 넘어 우리 사회 공정의 문제를 전면에 두고 있다. 코로나19로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투기 열풍으로 자산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코로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역대급으로 불어난 유동성이 자산시장으로 계속 몰리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 노동의 대가보다 올라가는 집값을 따라잡을 수 없는데, 누가 일하려 하고 누가 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까. 정부가 공익을 위해 신도시를 만들고 도로를 내서 개발이익이 생겼는데, 이를 왜 개인이 가져갈까. 부동산 불로소득을 제대로 막지 못한 정부에 대한 질타와 사회에 대한 실망이 바탕에 깔려 있다.
국민 모두의 자산인 토지가 소수의 투기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투기이익은 환수하고 투기거래는 규제되어야 마땅하다. 온 국민이 부동산 불로소득 혁파를 요구하는 지금이야말로 부동산 개혁의 기회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엘에이치 사태와 관련해 부동산 적폐 청산이 남은 임기 동안의 핵심 과제임을 분명히 밝혔다. 부동산 투기를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투기이익 환수에 있다. 투기이익을 환수하는 핵심적인 정책수단은 보유세 강화이다. 보유세를 높이면, 부동산 투기의 기대수익률을 떨어트려 투기수요를 잠재울 수 있다.
부동산 정책에서 일관성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그간 부동산 정책 방향이 흔들렸다. 투기수요가 집값 상승의 원인이라고 했다가, 언제부터인가 공급 부족으로 바뀌었다. 부동산 세제정책도 혼란스러웠다. 2018년 9·13대책의 종합부동산세 인상폭은 시장의 예상에도 못 미칠 정도로 낮았고 투기 열풍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작년에는 종합부동산세율을 다시 올렸지만 재산세율은 내렸다. 최근에는 집값 상승으로 종부세 부담자가 늘어났으니 대상자를 줄여야 한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이런 식으로 정책이 방향을 잃으면 정책의 신뢰도 추락은 돌이킬 수 없다. 부동산으로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보유세를 높여 투기로 얻는 초과이익을 환수해야 한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를 통한 투기이익 환수, 한치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투기 열풍을 잠재우고, 부동산 적폐 청산의 길도 열린다.
홍장표|부경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 2021.03.29.
공부는 나의 몸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얼마 전 2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자리가 있었다. 그들의 공통 고민은 진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에요”, “그거 해서 언제 돈 벌어요”, “저는요, ‘네가 원하는 게 뭐니’, 그 질문이 제일 싫어요”… 이후 이구동성. “공산주의가 되면 좋겠어요. 고민이 너무 지겨워요.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나라가 다 정해주면 얼마나 좋아요!”
무한한 자유,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유의 시대다. 하고 싶은 말이 없진 않았다. “공부를 하세요. 공부가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 시대니까, 공부를 하는 거예요. 돈 안 드는 나만의 공부. 물론 입시 공부는 아니에요.”
지난달 통계청은 국내 취업 준비자를 역대 최다인 85만3천명이라고 발표했다. 더 많을 것이다. 취업 준비를 하지 ‘않는’ 니트족(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도 급증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수십년 전부터 연구가 활발했다. 신자유주의? 간단하다. 실업의 시대다. 실업과 과로사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공부, 혼자만이 가능한 삶
그들의 고민을 듣고 나름 ‘대안’을 생각하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명한 말이 생각났다. “누구나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 그는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30년 동안 매일 4㎞씩 달렸다고 한다. 통념에 기댄 그의 비유는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이 얼마나 막강한지 보여준다.
머리, 즉 목 윗부분의 신체도 몸에 포함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빌린단 말인가. 잘라서? 그 누구도 타인의 머리를 빌릴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 정치 지도자의 첫번째 조건은, 현명함이다. 그래야 참모의 몸(머리)도 제대로 빌릴 수 있다. 타인의 능력이나 건강은 빌릴 수 있다. 그것은 내 몸 밖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는 빌릴 수 없다. 사람의 몸 안에는 정신과 육체가 같이 있다. 뇌는 정신이고, 팔다리는 육체인가?
위 두 가지와 비슷한 이야기. 내가 종종 겪은 일인데 전자우편으로 자료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얼마 전 내 강의를 들은 이로부터 “코로나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출처를 알려 달라”는 메일이 왔다. 나는 “특별한 출처는 없고 여러 신문을 꼼꼼히 본 다음, 기존의 내 생각을 정리한 것”이라고 성실히 답했다. 메일이 또 왔다. “막상 주려니까 아까운가 보죠? 정보를 독점하시네요.” 안타까운 사실은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음이다. 이는 내가 김연아 선수에게 “당장 내가 점프할 수 있도록 당신 몸을 주세요”와 같은 말이다.
세 가지 이야기는 융합 개념의 핵심을 건드리는 적절한 사례이다. 코로나를 주제로 내가 강의한 내용은 현실이라는 텍스트에 근대성, 발전주의, 기후위기, 생태주의, 팬데믹, 거버넌스, 개인의 자유, 전염병의 역사, 돌봄노동 등 기존 나의 지식과 관점이 합쳐진 것이다. 나, 몸의 역사다. 개인의 몸은 그 개별성 때문에 앎의 내용과 가치관에 따라, 현실과 합쳐지는 지식의 범위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한국 사회의 인구수만큼 다른 코로나 지식이 있어야 한다. 획일적 생각을 하는 큰 몸이 국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삶은 몸들의 개별적 화학이다.
요컨대, 인생사에서 공부는 혼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요즘은 생사도 의료의 도움으로 외부의 개입 여지가 있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단 한 가지, 공부다. 취업이 안 되는 시대라면, 공부를 하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工夫)는 글자 그대로 특정 분야에 자기 몸을 훈련하여 장인(匠人)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공부는 내 몸이 세상이라는 공방(工房)에서 대장장이, 쇳물, 망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환을 거듭해, 기(技)와 예(藝)를 몸에 새기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 불가능한 완벽한 개체다. 사랑하는 이가 아플 때 대신 아플 수 없고, ‘입시 코디’를 고용해도 안 되는 공부는 안 되는 거다. 그 어떤 경우에도 별도의 몸인 타인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폭력과 고문이 인문학(humanities)의 주된 주제여야 하는 이유다.
공동체와 도반의 지속가능성
주변에 어떤 사람을 가까이 두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공부처럼 좋은 예도 없을 것이다.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만큼 행운이 없다.
공동체와 도반(道伴)은 함께 공부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두 가지 모두, 제도 안팎에 동시에 존재한다. 학교와 배타적인 연애, 가족제도는 대표적인 제도권 안에서의 공부 모임이다.
반면, 각자가 조직하고 참여하는 온/오프 공부 모임이나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두 사람만의 관계가 있다. 도반은 두 사람이어야 한다. 세 사람이면 대화가 흩어진다. 공부에 필요한 적대는 1:1의 관계여야 하기 때문이다. 1:1 관계가 ‘유사 연애’를 띠는 이유는 둘 사이에 검열 없는 대화, 상대방의 뇌를 출/입할 수 있는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권 밖의 공동체와 도반. 외로운 우리는 단어만으로도 힐링이 된다(‘사이비 종교’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공부 공동체를 ‘교회’, 쉼터, 가족, 도피처로 착각할 때, 공부 외에 다른 일로 골치가 아파진다. 무임승차, 인간관계 갈등, 성별 분업, 리더십 문제… 외부로부터는 “패거리”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도반은 배신과 치정, 경쟁 관계가 변질되거나 처음부터 세속적 단짝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많다.
학교, 가족, 이성애 제도는 제도가 관계를 유지해주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이 덜 요구된다. 제도적 관계는 제도가 관계를 유지해주기 때문에 개인에게 특별한 노력이 필요치 않다. 흔히 생각하듯, 개인이 공동체나 도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개인이 열심히 공부할 때만, 즉 스스로 융합을 멈추지 않을 때 관계는 지속된다. 모여서 융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개인 내부의 융합이 있어야 외부와 ‘함께’가 가능하다.
동무(同舞)는 독무(獨舞)가 전제되어야 하고, 운이 좋으면 아름다운 결과가 나온다. 많은 이들이 융합의 어감 때문에 무엇인가가 합해진다고 생각한다. 융합은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융합하는 개별적 몸들이 접속하는 상태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자의 가치관이 충돌하여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과 충돌할 자기만의 몸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도반은 믿을 만한, 편한 길동무라기보다는 자극과 긴장 관계에 가깝다.
영원한 사랑, 지속가능한 도반, 헌신할 만한 조직과 결합되어 내 몸이 확장된다면, 인생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랴. 그러나 대부분은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1967), 프랑스 영화 <이웃집 여인>(1981)처럼, 총으로 상징되는 제도를 이기지 못한다. 영원한 사랑(도반)이 있긴 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을 만큼 유지가 어렵다. 계속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질 급한 이들은 혼자 득도하는 쪽을 택한다. 상대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때, 남는 것은 노동뿐이다.
그래서 상대를 ‘버리는데’, 그 이유를 아는 상대도 있고 모르는 이도 있다. 혼자 남겨진 ‘을’은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융합하는 상대방의 몸(mindful body)에 집착한다. 대개 치정으로 간주되지만, 그냥 한쪽의 불성실이다. 불성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성실한 삶이 어렵기 때문이다. 길동무가 지속되려면, 각자 보조가 맞아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매우 매우 매우’ 드물다. 그래서 나는 “그냥 친구로 남자”는 대화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융합은 내 몸에서 먼저, 공동체나 도반에서는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다. 혼자 공부하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한다. 굶으면서 공부할 수는 없지만, 최소 비용으로 할 수 있다. 결국 사회적 인프라의 문제다. 걸을 수 있는 거리면 좋고, 아니라면 몇천원의 교통비와 주민증을 가지고 큰 도서관에 가는 것이다. 가방도 필요 없다. 읽고 조사하고 필요한 부분은 본인 메일로 보낸다. 이런 방식의 공부를 권한다. 누구든 어느 한 가지에도 관심 없는 이는 없다. 본인의 생계를 전문적 지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면 더욱 좋다.
스스로 융합된 몸이 되어야 다른 융합도 가능하고,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파성의 지속적인 생산이기 때문이다. 가치관의 충돌과 재생산이 없는 공동체나 도반이 무슨 소용인가.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한겨레 2021.03.30
우리 안의 기득권
진보와 보수를 쉽게 한마디로 정의하면 ‘바꾸자’와 ‘지키자’로 요약할 수 있다. 그 기준은 기득권에 대한 태도다. 기득권을 깨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진보이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 보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각기 다른 것이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관성은 보수와 진보가 크게 다르지 않다. 양상은 다르다. 보수는 자신이 기득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꿀 생각과 의지, 능력이 없을 뿐이다. 문제는 진보다. 태도와 행동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개별적인 자각과는 별개로 진보는 오랜 저항의 역사와 기억 때문에 자신 안에 생긴 기득권을 집단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국민이 진보 역시 기득권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더구나 기존의 보수와 진보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기득권에 대해 보수 못지않게 무감각하다.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재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영원한 기득권이다. 기존의 법질서에 따라 사회를 규율하는 법원과 검찰은 태생적으로 기득권적 속성을 갖고 있다. 정치권력과 기성의 언론은 논할 필요 없이 우리 사회 대표적 기득권이다. 사회의 진보와 개혁에 대한 저항은 본질적으로 돈과 권력을 가진 자의 기득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기득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모든 영역에 기득권은 존재하고, 모든 사람이 기득권자다.
언필칭 진보주의자도,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집에 가면 가부장적 기득권을 누린다. 구조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가부장적 문화, 성인지 감수성의 결여에서 비롯된 남성적 기득권은 우리 사회 모든 곳에, 모든 계층에 존재한다.
모든 어른은 아이들에게 기득권이고, 나이와 세대는 우리 사회 가장 큰 기득권 중 하나다. 대한민국 어느 골목길에서 싸움이 나도 빠지지 않는 한마디가 ‘너 몇살이야’다. 잘못한 어른에게 항의하고 지적하는 어린 사람은 싸가지 없는 놈이다. 정치 영역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기성세대의 기득권은 공고하다. 능력이나 숙련도, 업무량과 무관하게 똑같은 노동에도 나이와 입사연도에 따라 급여를 더 받는 임금구조는 청년세대에겐 기성세대의 기득권이다. 심각한 청년실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정년 연장을 요구하고, 낮은 보험료로 높은 국민연금 수급을 보장받으며 이후 재정 부담을 미래세대에 전가하는 기성세대는 기득권자다.
재벌 대기업에게 1차 하청업체는 을이지만, 그들도 2차 하청업체에겐 원청 못지않게 횡포를 부리는 갑이고 기득권이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는 자본에겐 을이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나 그보다도 못한 하청업체 정규직 노동자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저임금으로 고용과 임금이 보장되는 기득권자다. 국책연구소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했더니 프로젝트 참여와 실험에 목맨 학교 후배들을 또 다른 비정규직으로 삼아 자신들이 하던 일을 시킨다며 울분을 토하던 누군가의 하소연은 기득권과 갑을 관계가 그리 단순하고 간단치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먹이사슬처럼 누군가의 갑은 누군가에게 을이고, 누군가의 을이 누군가에겐 갑이다.
산업 부문도 마찬가지다. 4차 산업혁명, 자율주행 시대에 택시산업은 위기다. 연착륙을 위해 정책적 보호가 필요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모빌리티 혁신기업에게 기존의 택시산업은 강력한 기득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보호해서 지속가능했던 기업이나 산업은 없다. 산업정책에서 보호해야 할 영역과 혁파해야 할 기득권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 그게 그거고,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도 진보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변화를 주도하고 지속하려면 보수에 비해 더 성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득권에서 스스로도 자유롭지 않다는 자각, 내가 누군가에게 갑이고 기득권일 수 있다는 자기 경계와 성찰,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버리고 바꾸려는 자기 혁신의 노력, 이런 것들이 진보를 진보답게 한다. 그것이 국민에게 보여지고 믿음을 얻어야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
과거 기득권에 저항했던 기억, 더 큰 기득권의 존재가 이런 자각과 성찰, 자기 혁신을 가로막아 누군가에게 갑이고 기득권이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면 진보의 희망이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보수는 주류 기득권이고, 진보는 저항하는 비주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진보는 적어도 정치사회적으로 주류가 되기도 하고, 주류가 되는 순간 기득권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주류가 된 진보가 스스로의 기득권을 자각하지 못하면 진보의 향기를 잃는다. 지금이 그렇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장 한겨레 20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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