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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1~2.24 진짜 위기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

by 이성근 2021. 3. 2.

탈토건 보수를 보고 싶다 경향: 2021.02.01

김종인 색깔론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겨레 2021.02.01

부족국가 대한민국 경향 : 2021.02.03.

재난을 똑바로 못 보는 한국 정치 경향 : 2021.02.04

선거 닥치니 '저주와 막말''저비용 고효율' 정치? 프레시안 2021.02.05

영어사전에서 재벌이란 단어가 사라지는 날 kyunghyang 2021.02.05

노예제 일상 kyunghyang 2021.02.05

혼돈과 분열의 시대 kyunghyang 2021.02.05

유튜버가 뒤집어버린 금융시장 헤게모니 시사인 2021.02.18

누구를 위하여 순위를 매기나 경향 : 2021.02.18.

박정희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경향 : 2021.02.18.

백기완이 있었기에 한겨레21 2021-02-19

진짜 위기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 한겨레 2021-02-22

우리의 도시와 건축]주거냐 혁명이냐 경향 2021.02.24.

금값과 집값 경향 2021.02.24.

 

탈토건 보수를 보고 싶다

한국의 보수에 대해 사실 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오랫동안 힘과 권력을 다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유능해 보이지도 않았고, 적당히 부패해 보였다. 그리고 평균적으로는 책을 너무 안 읽었다. 가끔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처럼 정말 책 많이 읽고, 아는 것 많은 보수 인사들을 만나게 되면 경이감을 느끼는데, 그런 보수는 매우 드물다. 물론 내가 모든 보수 인사들을 다 아는 건 아니라서, 나도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제정책으로만 국한해서 보면, 박근혜의 줄푸세이후 정형화된 보수의 경제 담론이 존재한다. 세금과 정부를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 이 정도라 이외에 뭘 더 분석할 게 별로 없어 보인다. 그 후로도 이걸 이렇게 변형하고 저렇게 변형한 게 거의 전부다, 트럼프 경제정책도 이렇게 단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줄푸세가 보수 경제정책의 골간이라면, 나머지 지역 및 공간 정책은 대부분 토건이다. 다리 짓고, 도로 만들고, 그런 일본 경제의 아픈 모습이 한국 보수에게도 일종의 DNA가 된 것 같다.

 

물론 민주당이 늘 토건에 반대한 건 아니다. 뉴타운의 시작은 MB가 했지만, 국회에서 실제로 뉴타운법의 제정을 위해 움직인 건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야당 시절에는 토건에 반대하지만, 여당이 되면 딱히 보수랑 크게 다르게 움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면적 뉴타운을 할 거냐, 부분적 도심 재생을 할 거냐, 이런 약간의 차이 정도를 제외하면 엄청나게 다르다고 보기도 어렵다. 선거 때 지역 공약을 비교하면, 저마다 다리 만들고, 도로 끌어오고, 지하철 놓겠다고 하는 게, 대체 누가 야당이고 누가 여당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다.

 

안철수가 처음 정치인으로 등장할 때, 나도 전혀 모르던 사람이라서 내심 기대를 가졌다. 그도 나름 신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그도 크게 다를 게 없을 거라고 처음 생각한 것은 그가 새만금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MB도 선글라스 끼고 갔었고, 민주당 정치인들도 갔다. 안철수도 갔고, 다들 거기서 거기인 얘기들을 했다. 그날 기대를 접었다.

 

여든 야든, 현실 정치라는 이름으로 선거 때면 무슨 부동산 디벨로퍼처럼 여기에는 뭘 짓고, 여기에는 뭘 꾸미고, 여기는 싹 밀어서 새 출발하고, 그렇게 공약을 내거는 모습을 수십년 보았다. 공항이냐, 역세권이냐, 혹은 지하도로냐, 메뉴만 다르지 2020년대에도 정치권은 여전히 디벨로퍼 전성시대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보수 정치에 대해서는 변화의 가능성을 본다. 그들이 야당이라서 그렇다.

 

김종인 비대위원회가 기본소득을 강령으로 채택할 때, 솔직히 놀랐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과감했다. 최근 보수 중에서 가장 과감했던 것은 원내대표 시절에 중부담 중복지를 테이블에 올렸던 유승민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고인이 된 정두언이 특목고 폐지를 외칠 때에도 신선했다. 한국 보수는 건설이 아니라 정비 및 보전,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시선을 주는 세력이 아니다.

 

환경운동의 원형 중인 하나인 시에라 클럽 같은 데는 매우 보수적이지만, 자연을 지키고, 동물을 보호하는 데에는 선구적이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의 보수에는 꼭 한국 보수처럼 디벨로퍼를 자처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이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경제의 생태적 전환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가 지금 독일과 영국인데, 보수가 집권 중인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맨날 뭐 짓고 세우고, 그런 디벨로퍼 방식의 정책만 내세우면서 그들이 집권한 것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수도권만 남고 나머지는 붕괴할 것 같은 지역경제의 위기다. 민주당은 노무현 시대부터 익숙한 방식인 지방 개발 패러다임으로 돌아섰다. 여기가 언제 4대강을 반대했던 당인가 싶게 예비타당성 평가 같은 것은 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토건으로 질주하는 중이다. 민주당 욕하기도 그렇다. “우리는 보수보다 더 세게, 더 빨리”, 요런 간단한 원칙 하나로 디벨로퍼 정당으로 순식간에 기조를 바꾸는 중이다. 그러면 보수는 그것보다 더 세고, 더 강력하게? 그러다 나라 망한다. 지역경제를 회생시킨다고 죽어라고 테마파크 만들고 공항 만들다 국민경제가 힘들어진 일본 사례를 우리가 늘 보지 않았던가?

 

미안하지만 지금 한국의 보수는 야당이다. 여당과 똑같이 토건 레이스로 붙어서는 집권세력을 쉽게 이기기 어렵다. 절대 과반수 의석으로 토건을 밀어붙일 줄은 지난 총선 때 아무도 몰랐겠지만, 이렇게 현실이 되지 않았는가? ‘건전한 보수의 탈토건 논의를 보고 싶다. 국제 표준 보수가 토건파인 것은 아니다. 친환경 보수, 복지 보수, 기본소득 보수. 이런 흐름이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탈토건 보수도 익숙한 시대가 오기를 기대한다

우석훈 성결대 교수·경제학자 경향: 2021.02.01

김종인 색깔론은 어울리지 않는다

월성 원전 1호기 조기폐쇄 공소장·관련자료 공개에 대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입장문이라는 긴 제목의 자료를 보는 순간 아찔했다.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 원전을 폐쇄하고 북한에 극비리에 원전을 지어주려 했습니다. 원전 게이트를 넘어 정권의 운명을 흔들 수 있는 충격적인 이적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적행위라니! 한눈에 봐도 탈원전과 북핵을 엮은 색깔론이었다. 나라가 반으로 쪼개지겠다는 걱정이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문재인 대통령이 펄쩍 뛰었다. 주말을 넘기며 지금까지 정당 지도부, ·보선 후보들, 언론이 양편으로 갈려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의혹은 지난 28<에스비에스>가 검찰 공소장을 입수해 보도하면서 제기됐다. 이런 경우 야당은 대변인이 성명이나 논평으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당 대표 명의의 입장문은 이례적이다. 왜 그랬을까?

 

김종인 위원장이 본래 원전에 예민한 사람이기는 하다. 6공 경제수석 때 경제 발전에는 전력이 중요하다며 원전 건설을 앞당겼다. 문재인 정부의 원전 가동 중단을 미래 세대에 폭탄을 넘겨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적행위라니! 왜 그랬을까? 47일 재·보선용일 것이다. 당내 경선에 나선 후보들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고, 정당 지지도는 오르지 않고, 이러다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혹시 지는 것 아닌가 걱정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색깔론은 지나쳤다. 김종인 위원장은 6공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소련과의 수교를 비롯해 북방정책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는 1990년 이후 우리나라 경제가 버틸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하나가 북방정책이라고 했다. 북방정책은 외교·통일정책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경제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이어졌다. 김종인 위원장은 햇볕정책을 효과적인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을 포용하려면 박태준 포스코 회장이 생전에 북한 원산 지역에 포스코 제3 제철소를 짓기를 염원했다는 이야기를 새겨들어야 한다고 했다. 2, 3의 개성공단 건설도 필요하다고도 했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정책은 큰 틀에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김종인 위원장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정책을 공격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부정이다.

색깔론이 김종인 위원장에게 어울리지 않는 다른 이유도 있다. 김종인 위원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할아버지 가인 김병로의 정신을 계승한 사람이다. 가인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힌 수많은 사람을 무료로 변론했다.

 

당시 신문과 잡지는 가인을 조선 좌경 변호사로 첫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좌파적 사회주의가 민족운동에 파급되면서 사상범변호를 많이 한 탓이다. 가인은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1958년 이승만의 자유당은 국가보안법을 대폭 강화했다. “북괴의 위장평화통일공작을 주임무로 하는 간첩과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천태만양의 범죄를 충분히 단속할 수 있는 법조항이 결여되어 있다는 명분이었다. 재야에 있던 가인이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글을 실었다.

사실을 왜곡이라는 어구와 적을 이롭게 한다는 어구와 같은 것은 형벌법규상 너무 모호하고 부정확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으므로 이것이 언론을 탄압하자는 계교(計巧)가 아닌가 국민이 의아하는 바이다. 만일 이러한 조항을 널리 해석하여 신문 잡지상에 공무원의 비행이라든지 강·절도의 발호라든지 국가재정의 남비(濫費)와 같은 사실을 보도하였을 때에 적이 이런 것을 역용(逆用)하여 한국의 정치를 비난하는 일이 있다면 일응 우리 신문, 잡지의 기사에 대하여 이적행위라고 수사를 개시할 수도 있을 것이며···”

 

가인의 우려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혜안이 놀랍다. 그런데 가인의 손자는 63년 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정치적 경쟁 상대를 이적행위로 공격하고 있다.

그래서다. 이건 아니다. 무리하게 색깔론을 제기한 김종인 위원장이 먼저 물러서야 한다. 김종인 위원장이 물러서면 문재인 대통령도 물러설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설 연휴까지 2주 연장됐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성한용 ㅣ 정치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1.02.01

 

 

부족국가 대한민국

나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사람들은 누굴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가족, 친척, 친구일 게다. 친구엔 동네(고향) 친구와 학교 친구가 있다. 혹 이름을 꼽아 본다면 거의 대부분 혈연, 지연, 학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일 게다. 이런 연고는 개인적으론 행복의 근원이지만, 우리는 사회적으론 연고주의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른바 공사(公私) 구분의 원칙때문이다.

어느 공직자가 큰 어려움에 처한 친구에게 자기 돈을 주는 건 아름다운 일이겠지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금전적 특혜를 주는 건 범죄행위다. 돈뿐이겠는가? 친구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의 유형은 다양하다. 어떤 도움이건 공사를 엄격히 구분해서 줘야 한다는 게 우리 사회의 합의이지만, 그런 합의가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연고주의를 넘어서 아예 부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원시시대의 부족사회에선 연고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부족이 곧 한 덩어리의 연고집단이었으니까. 한 부족이 다른 부족들과의 전쟁이나 갈등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자신의 부족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필요했다. 세상이 발달하면서 부족사회나 부족국가는 사라졌지만, 그런 부족 본능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부족을 만들어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마피아 집단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부족주의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 장점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에 비해 개인주의가 발달했던 서양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개인주의의 한계와 폐해에 질린 탓일까?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부족의 시대>라는 책에서 부족주의는 경험적으로 어떤 장소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고 말한다. 미국 철학자 스티븐 아스마는 <편애하는 인간>이란 책에서 자신의 부족에 대한 편애가 인간의 행복을 상당히 증진시킨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아스마의 책을 읽다가 좌파는 편애가 없어지지 않으면 열린 사회는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단언하는 대목에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의 부족주의엔 좌우 차이가 좀 있는지 몰라도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편애와 연고주의를 포함하는 부족주의는 이념의 좌우를 초월하는 최상위 개념이다.

 

엘리트 집단일수록 부족주의 성향도 강하다. 아니 한국 엘리트의 본질적 속성은 부족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정을 목숨처럼 알아야 할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10여명을 대기업에 재취업시켜 주면서 억대 연봉 지침까지 기업에 정해준 것으로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만든 적도 있다. 우리는 수십년째 대표적인 부족주의 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전관예우관피아(관료+마피아)’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게 사라졌거나 개선됐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참으로 희한한 일 아닌가? 세 번째의 진보정권을 맞이했지만, 진보나 보수나 그 점에선 한통속이라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 물론 이유는 간단하다. 최악의 부족주의는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똥 묻은 개가 어찌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이 정도면 대한민국은 부족국가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부족주의에 좌우 차이가 있다면, 그건 이해관계의 충실도 수준이다. 보수가 비교적 이해관계에 더 민감하다. 보수 부족주의의 전성시대는 박근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친박의 정도를 따지며 온갖 유형의 부족들이 난무했던 2015년이었다. 진박(진짜 친박), 가박(가짜 친박), 용박(박근혜를 이용만 하는 친박), 원박(원조친박), 범박(범친박), 신박(신친박), 복박(돌아온 친박), 홀박(홀대받는 친박), 멀박(멀어진 친박), 짤박(잘린 친박) 등 끝모를 박타령이 울려 퍼졌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런 박타령은 보수의 제 무덤을 파는 격이었던지라,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는 바와 같다.

 

험난한 반독재 투쟁의 과정에서 성장한 진보는 좀 다른 유형의 부족주의에 빠져들었다. 끈끈한 동지애가 없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투쟁의 과정에서 탄압이 모질고 동지애가 강해질수록 우리편과 반대편의 경계를 선명하게 나누는 선악 이분법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권의 주체이자 핵심세력은 바로 그런 민주화 운동가들이다. 독재정권 시절 그들의 투쟁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나서지 못했던 사람들은 나름의 역사적 부채의식을 갖고 있기에 그들이 권력을 잡아 국정운영을 하는 것에 대해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한국인들은 공정 유전자가 강한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국정운영을 반독재 투쟁 하듯이 하면서 운동권 부족주의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게 아닌가. 보기에 흉한 부족주의 스캔들이 많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윤미향 사건박원순 사건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진보의 가치를 위해 오랜 세월 헌신하면서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적잖은 업적을 이뤘던 분들이다. 그래서 이분들과 직간접적인 인간관계를 맺었던 지지자들이 느낀 충격이 그만큼 컸을 게다. 그러나 충격이 크다는 게 곧장 부족주의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두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진보 인사들이 양산해 낸 발언들 중엔 개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비판보다는 이해를 해보고 싶었다. 내가 살펴본 몇 사람은 박원순 사건에 대해 느낀 심한 우울감을 토로했다. 개인적인 관계가 깊었던 이들은 어쩌면 자신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듯한 고통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그런 우울과 고통을 개인적으로 삭일 시간이 있었을 텐데, 때는 바야흐로 ‘SNS의 시대인지라 자신의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곧장 비판자들에 대한 반감의 형식으로 표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은 피소 사실 유출과 관련해 여성단체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어느 여성단체 막내 활동가는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몸담았었거니와 피소 사실 유출의 통로가 된 한국여성단체연합 건물 앞에 이런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다. “여성단체는 정치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에 있어 가해자와의 함께하기를 택했다.” 2030 여성이 주축이 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이번 사건으로 십수년간 여성단체 대표 경력으로 민주당 비례선거에 영입되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그렇게 형성된 인맥이 여성주의 사회 견인을 위한 정치적 과제 수행의 임무보다 진영 구축에 이용된 결과를 확인했다고 비판했다.

 

,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페미니즘의 선구자들마저 정치적 부족주의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일까? 정치적 부족주의를 위해선 페미니즘의 가치를 저버릴 수도 있다는 건가? 수십년간 피땀 흘려 쌓아올린 그 공적 금자탑을 부족주의 정서 하나로 그렇게 쉽게 날려 버려도 괜찮은 건가? 부족주의가 정말 무섭고 징그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때는 바야흐로 진보 부족주의의 전성시대다. 몇 년 전 보수 부족주의의 전성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명분과 당위의 포장을 더 앞세우고 더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부족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일 게다.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 지지를 실천하는 부족주의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드는 걸 보면, 앞서 소개한 마페졸리와 아스마가 괜한 말을 한 건 아닌 것 같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엔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중요하며, 그런 소속감을 기반으로 한 편애가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말을 믿어야 할까?

 

믿더라도 공사 구분의 원칙은 따져봐야 하는 게 아닌가? 사실 공직을 맡는 건 두려운 일이다. 아니 그렇게 여겨져야만 한다. 자신의 부족주의 DNA에 결사적으로 저항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조차 부족주의 정서에 투항하는 것이 자신의 신분 상승과 출세에 도움이 되는 걸 어이하랴. 좀 더 나은 부족에 속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오늘의 한국을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모델은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그런 부족주의를 증오해야 할 보통사람들마저 엘리트 부족 전쟁에 참전해 싸우고 있으니, ‘부족국가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게 우리 모두의 행복일까? 부족 사랑, 좀 적당히 하자.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경향 : 2021.02.03.

 

 

재난을 똑바로 못 보는 한국 정치

나는 경기도민이다. 동네 네거리에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1인당 10만원 지급현수막이 걸려 있다. 돈을 준다니 반겨야겠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코로나19 재난에 대응한다면서 굳이 모두에게 주어야 할까.

 

모든 국민이 코로나19로 불편한 일상을 겪고 있지만 경제적 타격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미 K자 양극화가 확연하다. 코로나19에도 디지털·플랫폼 업종은 호황을 누리고, 일부 집 가진 사람과 주식투자자들은 가격 상승에 들떠 있다. 안정적 기업에서 일하는 종사자 역시 재택근무가 익숙하지 않을 뿐 경제적 어려움은 없다. 반면 영업을 못하거나 소득이 급감해 하루하루가 막막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제는 국회 앞에서 얼마 전 유서를 작성했습니다라며 자영업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행정은 권력을 위임받은 만큼 민생을 책임질 의무를 지닌다.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추구해야 한다. 폐업 직전까지 몰린 자영업자, 일거리가 줄어든 특수고용노동자 등이 벼랑에 서 있다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거다.

 

유럽 나라들을 본받자. 이들은 피해가 발생하면 두껍게 지원한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선진경제 21개국의 코로나19 대응 직접 지출이 평균 GDP 9.3%로 한국의 3.4%를 크게 앞선다. 코로나19 확산 정도가 다르다 해도 현재 우리나라 소상공인·자영업자·특수고용노동자들을 위한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건 분명하다. 독일의 경우 매출이 전년 대비 70% 이상 감소하면 임차료, 직원 급여, 감가상각비, 보험료 등 고정비용의 90%를 보상하듯이 지원이 실질적이다. 영업금지를 당해도 지원금이 일회성 300만원에 그치는 한국과 확연히 비교된다.

 

또 하나 주목할 특징은 필요에 기반한 지원이다. 계층·집단마다 피해 정도를 고려한다. 보통 매출의 손실 폭에 따라 지원 비율을 정하는 방식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전 국민 지원을 둘러싸고 계속 논란이 인다. 피해 정도에 맞추어 대상과 지원액을 정하는 서구의 눈에서는 다소 의아한 일이다. 그들에겐 코로나19 영향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대응 정책도 대상별 필요에 맞추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재난에서 전 국민 지원금을 시행한 나라가 한국, 미국, 일본 그리고 싱가포르와 홍콩 등 일부 도시국가에 한정된 이유이다.

 

왜 한국에선 유독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부상할까? 사회안전망이 빈약해 전 국민 지급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현실 진단은 맞지만 해법이 그러해야 할 근거는 약하다. 긴급지원은 정확한 소득 파악을 요구하지 않는다. 세금을 걷는 일이 아니기에 현재의 영업 수준을 알면 충분하다. 서구도 최종이익이나 과세소득이 아니라 영업과정의 매출을 기준으로 감소폭을 보상한다. 한국은 신용카드 사용이 일반화됐고, 거의 모든 거래 이력이 은행 계좌에 기록돼 있다. 처음엔 번거롭더라도 한두번 진행하면 매출이나 수입 자료 양식을 정리할 수 있다. 만약 자료가 없는 무등록 자영업자 등이 우려된다면 한시적으로 포괄적 긴급부조를 통한 보완이 가능하다. 지난 1년의 경험에서 얻은 정책 수행 기반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 대통령도 “(2, 3차 지원금으로) 피해 입는 대상을 대체로 선별할 수 있게 됐고 또 선별에 많은 행정적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는 자신도 생겨났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정치권에서는 10년 전 무상급식에서 시작된 보편 대 선별 구도도 꺼낸다. 복지의 보편주의는 필요가 있을 때 누구든 받을 권리를 의미하지 어떤 경우든 무차별로 동일액을 제공하자는 원리가 아니다. 또한 국민 위로금이라는데, 코로나19에 지친 국민에게 진정한 위로는 소액의 돈보다는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내 세금이 사용된다는 믿음과 자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소비 진작 역시 지원방식보다는 재정 규모가 관건이며 지금처럼 집합제한 방역 상황에선 그나마 취지도 약화된다.

 

소득파악 틈새의 지나친 부각, 보편적 복지에 대한 일면적 이해, 중상층 이해에 치우친 정치 지형, 그리고 기본소득상표를 향한 어떤 일념. 한국에서 이토록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정치 의제가 되는 배경이다. 그 결과 재난 시대에도 한국 정치는 재난을 직시하지 않는다. 임대료에도 못미치는 금액으로 지원했다 생색내고, 여러 곳간의 돈을 다 모아 10만원씩 주면서 모두가 함께 잘 살 수있을 거라 홍보한다. 양극화와 불평등의 해결사를 자처하는 정치인이 수없이 많지만 실제 민생은 수사로만 활용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오늘도 네거리 현수막을 보며 묻는다. 그렇게 어렵게 조성한 재정을 도민 모두에게 소액으로 나누는 게 민생일까? 제발, 재난에는 재난 대책을.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경향 : 2021.02.04

 

 

선거 닥치니 '저주와 막말''저비용 고효율' 정치?

'쇼 비즈니스' 정치 게임, 시민은 절반의 주권자

인민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가 민주적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시민이 정부를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치러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최대 민주주의(maximal democracy)를 성취할 수 없다. 사회구성원의 파편화와 시민이 정치적 측면에서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선거가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정치과정으로 작동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정당 이론의 대가인 샤츠슈나이더는 그의 저서인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정당이 공직자를 선출하는 데 머무를 뿐 정책과 강령을 수립하고 실현하지 못한다면 시민은 온전한 주권자가 아니라 절반의 주권자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경우 시민은 정부를 통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절차적 정의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정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 아닐 수 없다.

 

4월 보궐선거는 대선을 불과 1년 앞둔 선거라는 시기적 요인으로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에 양보할 수 없는 선거가 됐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의 모든 선거가 그렇지만 이번 선거 역시 선거정치를 이용한 정치계급의 게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는 쇼 비즈니스에 의존하고 현대시민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 출마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이러한 우려를 불식하기 어렵다. 정치계급이란 대중의 이해관계보다 정치인 자신의 이해와 정당이익 및 수익을 의식하는 현대정치인을 의미한다.(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 서문)

 

정치가 갖는 역동성의 근원은 투쟁과 갈등에 있다. 갈등이 제대로 조직화되지 않을 때 시민은 정부를 통제하지 못하고 정당은 당파성에 몰두함으로써 정치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게 된다. 시민들은 정치세계의 주요 갈등이 자신의 이해와의 관련성이 적다고 생각할 때 정치에서 멀어진다. 모든 이슈가 개인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없으나 시민사회의 갈등이 역동적일 때 정치가 시민의 삶과 연계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정치는 정치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혐오정치의 임계점에 와 있다. 팬덤과 진영정치에 기반한 진부함이야 새삼 거론할 일도 아니지만 4월 보궐선거에 임하는 정당들에서 나오는 발언들은 혐오와 적대를 부추김으로써 지지층 결집을 노리는 한국정치의 퇴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정치 언어의 저급함은 정치의 일상이 됐지만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상식을 벗어난 비유와 과장, 저주에 가까운 언술들은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선거를 석 달 가까이 앞둔 시점에서 여야 정당에서 터져 나오는 발언은 철학의 빈곤이나 인품의 수준만의 문제가 아닐 정도로 고의성이 짙기 때문이다.

 

저급한 언어와 상대를 혐오하는 비합리적이며 반지성적 단어들은 시민의 갈등이 정치에 투영됨으로써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이들 언어는 정치 균열을 차단하고 원시적 정서에 정치를 환원시킴으로써 반정치를 획책하는 주범으로 기능한다. 발언의 당사자는 잠시 언론의 비판만을 감수하면 정당 내에서의 위상 제고라는 전리품을 챙기고 비록 품격이 낮은 정치인으로 자리매김 되지만 인지도 상승이라는 혜택도 누린다. 정치인들의 막말들을 단순하게 일회성 실수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수혜가 존재하는 한 천한 언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로 오염된 정치는 초선 정치인들에게는 매력적이고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저비용 고효율의 기법으로 각광받는다.

 

선거를 앞두고 저질 단어들이 유별나게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정책적 차별화를 통한 승부보다는 선거 과정에서 사회갈등이 토론되고 용해되지 못하는 정책의 빈곤함과 선거공학적 구도에 집착하는 현실이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정치엘리트의 가면을 쓰고 극단화한 정치지형에 편승하여 자신의 입지를 노리는 추방되어야 할 정치계급의 위선도 한 몫 한다. 결국 시민이 정치 통제에 실패한 업보가 아닐 수 없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 프레시안 2021.02.05

 

 

영어사전에서 재벌이란 단어가 사라지는 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대표적 한글 경제용어가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등재돼 있는 ‘Chaebol’(재벌)이다. 학벌, 군벌, 문벌, 족벌, 파벌 등의 표현에서 보듯 자가 주는 어감은 그리 좋지 않다. 철저한 가족 승계, 선단식 경영, 재벌 패밀리들의 결속 등 한국 재벌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기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단어가 됐을 것이다.

 

한국 재벌이 이런 부정적 특성을 벗어던지려면 가야 할 길이 멀지만 3~4세 경영이 본격화되면서 근래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LG전자가 적자에 시달리던 스마트폰 사업 철수 가능성을 스스로 밝힌 것은 파격적이다. 과거 재벌들이 부실 사업·계열사를 질질 끌고 다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사례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결단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핵심 미래사업에 주력하는 모습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로보틱스와 도심항공모빌리티, 차량공유 등 오롯이 모빌리티 사업에 올인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재벌들은 과거 중소기업 영역까지 침범하며 무차별적 확장에 몰두해 왔다. 계열사 독립체제라 해도 실질적으로는 총수 1인의 입김에 좌지우지됐다. 문어발식 확장, 선단식 경영이 저물고 있다고 확언하긴 이르나 현재의 재계 리더들이 선택과 집중의 시간으로 내몰리고 있으며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앞으로 고비용 사업은 축소하면서 과감한 인수·합병, 비주력 계열사 매각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충분하다. 선도기업이라 해도 자신 있는 영역에서 최고를 유지하는 데 너무 오래 집중하다 보면 신기술에 대한 주의와 자금투입을 소홀히 하게 되고, 퇴조를 면키 어렵다는 점에서 앞으로 예기치 못한 격변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한국 재벌들은 개발독재 시절부터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정경유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정권이 없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재벌의 특권이 야기한 불평등과 불공정성은 극복해야 할 대표적 병폐로 지적돼 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이 마무리되면서 한국 기업사에서 정경유착의 어두운 그림자는 역사의 한고비를 넘고 있다.

 

재벌 패밀리를 대표하는 모임으로 불렸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급격한 위상 저하도 한 시대가 청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1일 최태원 SK 회장이 중소기업까지 아우르는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추대된 것은 주목할 만한 행보다. 그가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며 사회적 가치 경영을 주창해 왔기에 대한상의를 어떻게 이끌고 나가느냐는 재벌의 변화를 재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3~4세 경영자들 간 공개 회동이 부쩍 잦아지면서 협력을 타진하는 장면도 은둔에 익숙했던 과거 총수들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전기차 배터리, 자율주행차, 정보통신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대기업 간 합종연횡은 바뀌지 않으면 밀려난다는 위기감의 발로일 듯싶다.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다. 한국 재계의 리더들이 새 패러다임으로, 과거의 방식과 완전 결별하고 새로운 기업 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함여유신’(함께 새로이 고친다)의 자세로 재벌의 환골탈태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미래는 예측불허지만 기존 재벌체제가 전환점을 맞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역할은 막중하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단기간에 확립될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에 젊은 오너들이 달라져야 하는 게 고비를 넘는 현실적 방법일 수밖에 없다.

 

한국 재벌은 과감한 투자와 초격차 기술 확보에 집중하되, 상생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대상이 많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자리를 위협받는 직원들의 고통도 외면해선 안 될 숙제다. 경제민주화는 이제 확고한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재벌 3~4세들은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며 시장의 신뢰를 쌓고, 경영능력을 검증받아야 하는 시험을 아직 완전히 통과하지 못했다.

 

‘Chaebol’이란 단어에는 한국 재벌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대기업집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재벌 문제가 비단 한국적인 것이냐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경영권이 황태자수업을 받은 직계 자손에게 승계되는 방식이 한국만큼 일반화된 나라는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Chaebol’ 단어가 사라지는 날이 올지는 젊은 회장들에게 달렸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겸 산업부장 kyunghyang 2021.02.05

 

노예제 일상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고용 유연화 정책의 하나로 파견법이 도입되었다. 정식 명칭은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지만 직접고용 원칙을 파괴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위태롭게 만들었다. 법 제정 당시에도 간접고용의 폐해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지만, 슬그머니 법이 통과되었다. 비상시국이기에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비상시국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노동의 일상을 회복할 것이라 믿었다. 2001년 구제금융을 모두 상환하고 외환위기 극복 선언이 있었지만, 이 믿음은 처참히 배반당했다. 오히려 2007년 비정규직 보호 명목으로 여러 법을 시행하여 온갖 비정규직을 합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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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누구도 도덕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다. 인간 한계를 부정하는 극한 노동을 일삼다가 산업재해를 당하고 끝내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유연하게 만들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경제 논리 앞에 전면 폐지 소리는 아예 입도 뻥긋 못한다. 이러한 좁다란 경제 논리를 넘어 보다 넓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비정규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법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반자본주의 악법이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베버는 현세에서 금욕노동을 실천하는 것에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를 본다. 모든 금욕이 그러하듯 노동도 행복의 즉각적인 실현을 포기한다. 그러면 고통이 따르고 이내 의문이 생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런 고통을 견뎌야 하나? 내면이 일깨워진 근대인은 구원의 징표를 확인하기 위해 금욕노동을 한다. 이제 금욕노동은 소명 의식을 가지고 헌신해야 할 자발적 의무로 바뀐다. 베버는 이러한 종교 이야기로부터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나왔다고 본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가진 경제인은 이윤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상을 금욕노동이라는 합리적 수단을 통해 조직한다.

 

한국인에게 금욕노동을 정당화해 준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성장주의. 민족과 가족의 성장(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위의 자발성을 인간 한계의 극한까지 끌어올려 금욕노동(수단)한다. 목적·수단 도식을 사용하여 일상을 합리적으로 조직한다는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 같지만, 속에는 온갖 비합리성으로 골병이 들었다. 성장 하나 보고 이 모든 것을 버텼지만, 이제 이 이야기마저 파탄 났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아무리 극한의 금욕노동을 실천해도 성장은커녕 생존마저 위태롭다. 그런데도 비정규직법은 여전히 노동자에게 비합리적 수단을 강제한다. 강제에 떠밀려 생존노동에 시달리니 소명의식은커녕 가슴속에 원한이 가득 들어찬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금욕노동을 감내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좋은 미래를 안내할 이야기가 없어 그저 눈앞 생존투쟁에 급급한다. 두려운 것은 이런 노예 윤리에 물든 세대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환위기 때 노동시장에 진출한 사람들은 비정규직을 한시적인 것으로 알고 수긍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출생한 세대는 비정규직을 아예 자신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으로 받아들인다. 잔혹한 한국 자본주의는 이들에게 극한의 금욕노동을 강제하여 이윤을 뽑아낸다. 원한에 싸인 울부짖음에 온 사회가 음습한 죽음의 전율로 휘청거리고 있다. 외환위기 비상시국을 틈타 시행된 비정규직법이 경제적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얼마나 더 계속 확인해야 하나. 내면을 온통 원한으로 가득 채운 노예를 대량 생산하는 사회가 과연 지속 가능한가? 비정규직법은 노동자에게 아무런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예제보다 더 악하다. 더 늦기 전에 반자본주의 악법을 완전히 철폐하여 노예제에 빠진 일상을 구출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kyunghyang 2021.02.05

 

혼돈과 분열의 시대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시장의 우상은 언어와 명칭이 결합해 지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언어는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모든 것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인간으로 하여금 공허한 논쟁이나 일삼게 하고 수많은 오류를 범하게 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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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미얀마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구금했다는 외신의 속보가 있었다. 1988년에 귀국한 후 이듬해 군사정권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비폭력저항을 이끌어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2010년 말 20년 만에 총선이 실시되면서 석방되었던 아웅산 수지는 한때 미얀마 민주화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집권 이후 아웅산 수지는 민주주의나 인권 존중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한때 인권유린을 자행한 군사정부와 맞섰다는 게 곧 인권과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군사정권이라는 명칭과 저항이라는 언어가 결합해 민주주의인권이라는 추론에 이르게 하는 지성의 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친 촛불집회를 통해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다.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집권세력이 정경유착과 재벌특혜를 없애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열 것이라고 당연히 믿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했던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런 기대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4년간 재벌에 대한 의존도는 더 심해졌고, 총수 일가에 대한 사법적 특혜도 바뀐 게 없었다. 대통령은 시늉만 한 공정거래3법을 통과시키고는 재벌개혁을 했다고 신년 기자회견에서 말했고, 국회는 위험의 외주화를 근절해 달라는 피해 가족들의 목숨을 건 4주간의 단식에도 아랑곳없이 실효성 없는 중대재해법을 통과시켰다. 금융사기꾼과 권력의 유착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고, 입법 과정과 정책 집행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은 하찮은 가치가 되어버렸다.

 

이른바 조국사태를 계기로 정의적폐라는 언어가 국민의 지성에 폭력을 가하는 정도를 넘어, 우리 사회를 갈가리 찢어내고 있다. 자신에 대한 엄격한 성찰과 일관성 있는 기준은 내팽개쳐졌고, 내 잘못보다는 너의 잘못이 더 크다는 주장이 자기 정당화로 사용되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집단사고와 자기 확신은 사회적 소통마저 힘들게 하고 있다.

 

경제개혁 운동에 참여한 이후 나의 경험은, 진보라는 언어 그리고 보수라는 언어에 의한 혼돈과 오류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진보진영은 무슨 가치를 대표하는가? 집권 여당인 민주당을 진보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보수진영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정당 이름을 몇 번이나 바꾼 야당인 국민의힘은 과거와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현 집권 세력들은 경제·사회 문제에 대해 과거 박근혜 정부나 소위 보수 정권과 대동소이하다. 이들은 시장에 대한 이해도 없고, 기본적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박정희주의의 신봉자들일 뿐이다. 사회·노동 문제도 기득권자의 시각에서 바라볼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남북 문제에서 협조적 공조냐 아니면 적대적 공조냐는 정도인 것 같다. 과거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민주적이거나 정의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시장의 우상에 빠진 오류다.

 

게다가 공허한 언어와 명칭으로 국민을 현혹하고 실제로는 선거기술자일 뿐인 정치인들이 한국의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여당은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경제성과 타당성이 검증되지 않은 가덕도신공항 공약으로 국민을 현혹하고 있고, 야당은 한·일 해저터널로 맞받고 있다. 결국 막대한 운영 적자는 국민과 후세대가 모두 떠안게 될 일들이다. 또한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피해가 막심한 중소상인과 비정규직·특수고용노동자 등 사회취약계층에 대한 보상 및 지원을 두껍게 해야 한다는 말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전체 국민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선거공학적 감언이설이 난무하고 있다.

 

혼돈과 분열을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그러나 어설픈 사회 통합은 또 다른 시장의 우상을 만들 수 있다. 통합은 야합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인내하고 포용해야 진정한 사회적 통합이 이뤄질 수 있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논쟁은 공허하고, 인식과 현실의 불일치만 부추길 뿐이다.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이라는 현실 언어로 이야기하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어야 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kyunghyang 2021.02.05

 

 

유튜버가 뒤집어버린 금융시장 헤게모니

올해는 주식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오히려 지난해보다 더 폭증할 가능성이 있다. 2030 세대는 주식 투자를 인터넷에 유행하는 놀이처럼 대하며 고위험 투자도 서슴지 않는다.

요새는 어딜 가든 주식 이야기다. 유튜브 세계라고 다르지 않다. 주식 투자와 재테크 관련 영상들이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인기 탭에 오른다. 최근 멀티채널 네트워크(MCN) 기업 샌드박스네트워크가 발표한 ‘2020 유튜브 데이터 리포트에 따르면 이런 흐름은 코로나19가 불러왔다.

 

유튜브 지표만 보면 올해는 주식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오히려 지난해보다 더 폭증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최근 주식 관련 채널들의 성장세를 보면 기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수준이다. 가령 지난해 12월만 해도 구독자 수 10만명대였던 증권사 유튜브 채널들이 올해 1월 들어 40만명대까지 급성장했다. 심지어 그런 채널이 여러 개 있다. 고작 한두 달 사이에 구독자 수십만 명이 늘며 초고속 성장한 것이다.

 

증권사에서 운영하는 채널뿐만이 아니다. 1월 마지막 주, 인기 탭에 올라온 채널들은 주로 채널명에 슈퍼개미란 글자가 붙은 개인 방송이었다. 주식 관련 콘텐츠로 인기를 끌며 TV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출연하기도 한 유튜버 슈카월드100만명이 구독한다. 그는 131일 라이브 방송을 통해 최근 화제가 된 게임스톱을 다뤘는데, 실시간 시청자 수가 무려 81000명을 넘어섰다.

 

심지어 유튜버가 주식시장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미국 헤지펀드의 공매도에 대항해 게임스톱 주가 폭등을 이끈 개미군단의 리더 키스 질은 언론을 통해 자신을 두 살짜리 딸을 둔 유튜버라고 소개했다. 그는 게임스톱 주가가 폭등하던 미친 일주일의 초입인 123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게임스톱 주식 차트를 띄워두고 7시간 동안 스트리밍 방송을 했다. 이 영상은 총 조회수 56만 회에 육박한다.

 

일반적으로 금융시장의 헤게모니는 기관에 있었다. 개인투자자에 비해 전문적인 운용 전략, 고급 정보, 거대자본을 갖춘 기관투자자들이 시장지배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게임스톱 공매도 전쟁에서는 이 헤게모니가 전복되었다.

 

미국 개인투자자와 동학개미의 닮은 점

공매도는 주가가 떨어져야 이득을 보는 숏포지션(short position)’인데 개인투자자들이 단합해서 가격을 계속 올렸다. 헤지펀드는 방어하기 위해 주식을 더 공매도했지만 결국 개인투자자들에게 패배했다. 헤지펀드 몇 곳은 도산했다. 심지어 공매도 전문 헤지펀드인 시트론은 이번 일로 앞으로 매도 대신 매수 포지션 추천에 주력하겠다며 사업 방향을 바꾼다는 선언까지 했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미국의 개인투자자들과 2020년 한국 자산시장을 끌어올린 동학개미들은 닮은 구석이 있다. 첫째, 주로 2030 세대가 핵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인터넷 트렌드를 주도하는 그들은 주식 투자에 관한 것들도 인터넷에 유행하는 놀이처럼 대하며 고위험 투자도 서슴지 않는다.

 

게임스톱의 공매도 전쟁에서 승리한 개미군단의 주역은 키스 질이 활동하던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주식 커뮤니티(WSB:WallStreetBEts) 이용자들이라고 한다. WSB는 대개 고위험 투자를 하는 젊은이들이 투자 손실이나 이익을 자랑하며 노는 공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빚투를 하는 영끌족들의 커뮤니티쯤 되겠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 시사인 2021.02.18

 

누구를 위하여 순위를 매기나

우리는 수많은 목록(리스트)과 함께 살아간다. 목록 중에는 순위가 매겨진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순위가 없는, ‘무순의 목록이라도 그 안에서 우선순위를 대강 가늠할 수 있다. 어쩌면 목록 안에 든 것만으로 우선순위에 포함된 것일지도 모른다.

똑 떨어지는 수치로 집계되는 사회통계나 경제지표, 온갖 성적 순위는 논외로 치자. 그것 말고도 일상생활에서 좋든 싫든 접하는 목록과 순위가 무척 많다. 온라인 속 세상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물건을 사거나 맛집을 고를 때를 생각해보자. 검색·추천 목록 안에서 비교해보고 결정한다. 가장 많이 팔렸거나, 평점이 높거나 하는 순위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뉴스나 유튜브·넷플릭스 콘텐츠를 볼 땐 어떤가. 누군가 친절히 제시해준 추천 목록 안에서 손쉽게 고른다. 온라인에 접속하면 도처에 목록과 순위가 깔려 있다.

 

목록은 유용하다. 내가 할 일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어서다. 영국 심리학자 클라우디아 해먼드는 사람들이 목록을 사랑하는 심리학적 이유를 9가지나 꼽았다. 이 또한 목록이다. 그는 목록이 있으면 정보를 한눈에 알아보기 쉽고 무엇을 이해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고 확실한 느낌을 받으며 더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남았는지도 금세 안다고 했다. 무언가를 놓치기 싫어하는 욕구를 충족하고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고도 했다. 더불어 목록에 포함된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재미가 있고 목록을 확보하면 두뇌의 부담이 덜어지며 목록 외의 것들을 읽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는 생각까지 들게 해준다는 점도 들었다. 목록 자체에 이토록 다양한 장점이 내재한다니 놀라울 지경이다.

 

하지만 목록은 때때로 귀찮다. 원치도 않는 정보를 강요받는 느낌이 든다. 목록만 보면 내가 하거나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좌절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목록 외의 것들을 고려하지 못하도록 목록 안에 생각을 가두어버리기도 한다. 적당한 순위까지, 목록에 제시된 내용만 알면 만사형통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목록과 순위가 주관적이고 편향되며 조작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점이다. 사용자들에게 목록과 순위를 제시하는 기반이 데이터와 알고리즘인데, 설계·운용 과정에서 편향이 발생할 여지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데이터를 가공하고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각종 전자상거래·콘텐츠 사이트들이 제공하는 목록과 순위는 결국에는 소비자들의 신뢰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존폐가 갈릴 것이다. 각자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능동적으로 찾아내는 데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MZ세대와 그 이후 세대까지 지금의 목록과 순위, 추천 시스템이 유효할지 알 수 없다.

 

국내 포털 네이버가 25일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서비스를 폐지한다. 2005년 시작돼 실검으로 불린 이 서비스가 16년 만에 사라지는 것이다. 실검은 그동안 하루 3000만명 이용자들에게 제시된 목록이었다. 1위부터 20위까지, 실시간으로 검색이 많이 된 검색어를 보여준 것이다. 네이버 측은 다양한 이용자들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간 신뢰성·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검색어 순위를 놓고 세력 다툼이 벌어지는 등 부작용을 노출했다. 일부 몰지각한 업체의 광고 수단으로 악용되고, 실검을 확대 재생산하는 베끼기 기사가 남발되기도 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려준 게 아니라 세상을 잘못 알게 만든 것이다. 실검의 폐해를 생각하면 폐지 결정이 너무 늦었다. 네이버는 하루아침에 폐지 선언만 할 게 아니라 그간 실검의 문제점까지 밝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네이버의 실검 폐지는 이런 종류의 목록이 더는 필요치 않음을 증명한다. 이용자 신뢰를 잃은 목록은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그간 실검이 건전한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면 되살리기 운동이 벌어질 테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실검이 없어져 불편하고 불리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검을 오용하고 악용한 이들일 것이다. 네이버일 수도 있고, 정치권이나 기업일 수도 있다. 어뷰징에 매달렸던 언론사도 마찬가지다. 실검이 사라지면 이전에 제기된 문제들도 모두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또 다른 종류의 목록이 나타나고 조작·악용될 틈이 생길 것이다. 반칙과 왜곡·편향이 없는 목록을 보려면 이용자들이 철저히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경향 : 2021.02.18.

 

박정희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부동산, 의료, 교육은 사회정책의 핵심이다. 셋 중에서 정부의 힘이 가장 강한 곳은 어딜까? 정부의 힘을 곧 가격을 결정할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정부의 힘이 제일 센 영역은 교육이다. 오로지 정부의 힘으로 10년째 대학 등록금을 동결시키고 있지 않은가? ‘의료는 중간이다. 국민건강보험 급여 진료비는 정부가 결정하지만 비급여 진료비는 시장이 결정하므로. 정부의 힘이 가장 약한 영역은 부동산이다. 주택 가격은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 원리에 의해 좌우되며, 정부의 힘은 조세나 대출·재건축 규제 등 간접적 작용에 그친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수요 감소라는 시그널도, ‘공급 증가라는 시그널도 제대로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요약된다. ‘주택은 살 것이 아니라 살 곳이라는 도덕률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1990년대 초반과 2010년대 초반 서울 집값 하락세를 이끈 것은 투기와의 전쟁이 아니라 ‘1기 신도시보금자리주택의 공급이었다. 도덕률이 아니라 지극히 시장원리에 충실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최근 공급 계획을 쏟아내고 있지만, 올해와 내년 서울 아파트 공급이 바닥 수준임을 고려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문재인 정부의 아이러니는 정부의 힘이 가장 약한 부동산에서는 강경책을 내놓고, 정부의 힘이 가장 강한 교육에서는 힘쓰기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유승민·심상정 후보는 외고·국제고·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겠다고 공약했고, 안철수 후보는 학생 선발권을 박탈해 선지원 추첨만 허용하겠다고 했다. 5대 후보 가운데 4명이 대략 고교평준화의 범주에 속하는 공약을 제시한 데다, 공약을 실현하기도 쉬웠다. 자사고·특목고에 대한 규정이 법률이 아닌 시행령에 있기 때문에 국회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단계적 전환을 내세우며 교육청의 재지정 심사로 공을 넘겼고, 소모적 시비 끝에 재지정 심사에서 탈락한 자사고들은 법원의 가처분 인용으로 모두 구제되었다. 조국 사태 이후 뒤늦게 일괄 전환계획을 밝혔지만 2025년 예정이니 차기 정부의 일이 되어버렸다.

 

문재인 정부의 미온적 교육정책은 놀랍게도 또 다른 도덕률의 산물이다. 이 도덕률의 핵심 가치는 자율인데, 박정희가 사립학교의 자율을 깔아뭉개고 고교평준화를 단행한 것을 관치와 개발독재와 국가주의로 여겨 비판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가고시인 수능보다 대학 자율을 상징하는 수시를 선호한다. 이러한 사상은 박정희와 직접 맞섰던 75세대(1970년대 학번, 1950년대 출생)의 진보 지식인들에게 종종 발견되는데, 문재인 정부에서 구심점은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다. 그의 재벌개혁론이 지분에 비례하는 지배로 요약되는 시장원리에 충실한 버전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12년 전에 박정희를 본받으라는 칼럼에서 공공의료보험, 그린벨트, 고교평준화가 모두 박정희의 유산인데 보수는 이를 허물려 하고 진보는 이를 지키려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지적한 바 있다. 박정희는 100% 개인 재산으로 민간병원이나 사립학교를 세워도 원하는 환자를 골라 받을 수 없도록 하고 원하는 학생을 골라 뽑을 수 없게 했다. 이 정도로 사유재산권을 억압하는 제도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엘리트 집단은 종종 이를 비판하지만 대중은 이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당연지정제 해제와 영리병원 도입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반대가 찬성을 상당한 격차로 앞서고, 한국교육개발원이 매년 실시한 조사에서 고교평준화 찬성은 반대의 2배 정도에 달한다.

 

문재인 정부는 시장원리를 존중해야 할 영역에서는 힘을 앞세워 폭주했고, 정부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시장원리를 고려하며 주저했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한국의 진보와 보수가 박정희라는 모순적인 유산을 공유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지점은 진보와 보수가 교집합을 넓혀갈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민간병원과 사립학교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진보가 인정하고, 공익을 위해 사유재산권을 억압하는 박정희식 사회정책이 한국사회에서 공공성의 원형임을 보수가 인정한다면 말이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경향 : 2021.02.18.

 

 

백기완이 있었기에

세상을 떠난 백기완 선생은 인생 방향을 결정지은 기억을 말할 때 두 가지 일을 빼놓지 않았다. 첫째는 백범 김구를 만난 것인데, 해방 뒤 부친을 따라 고향인 황해도를 떠나 서울에 살던 1948년의 일이다. 백범은 15살 소년 백기완을 앉혀놓고 민족 통일을 논하고는 책에 시를 적어줬다고 한다. 둘째는 같은 시기 거리에서 또래와 주먹질하다 들었다는 말이다. “없는 사람들끼리 싸우면 코피밖에 더 나느냐.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과 하는 것이다.” 이 경험들은 가족이 한국전쟁으로 나뉘어 살게 된 일과 함께, 민족주의자이자 민중주의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원체험이 되었던 것 같다.

 

백기완 선생의 인생을 논하자면 장준하 선생과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장준하 선생은 서북 사람으로 학병으로 입대했다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애초 그의 영입을 시도한 것은 약산 김원봉이었다. 장준하 선생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이범석 휘하로 갔다. 이후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서도 활동했으나 이범석이 좌익을 받아들인 것에 실망해 곧 떠났다. 그러니까 이 시기 장준하 선생은 백범 김구와는 다른 대결주의적 반공주의자였던 셈이다.

 

아마도 갈 길이 달랐을 백기완과 장준하를 만나게 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이다.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겠다는 것은 5·16 군사정변을 긍정적으로 평했던 장준하 선생으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백기완은 광복군 이력을 높이 평가하며 장준하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만들자고도 했다. 그로부터 8년 뒤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장준하 선생은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라고 썼다. 장준하의 변화는 백기완과 바로 그 아랫세대인 6·3세대 젊은이들과 교류한 덕분이기도 했을 거다. 박정희 정권과 싸우면서 반일과 통일,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만난 것이다.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를 당했으나 백기완 선생은 멈추지 않았다. 10·26 사태 이후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당하면서도 시를 썼다.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도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1987년 대선에 출마해 양김 단일화를 촉구한 것은, 그에겐 반독재 투쟁의 연장선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최근까지도 그때 내 말을 들었으면 군사독재도 청산됐을 것이라고 했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백기완 선생은 그다음에도 거리에서 계속 싸우자고 했다. 그 시절 백기완 선생의 포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중년이 지금도 많다.

 

1992년 대선 완주는 진보정치로선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백기완 선생이 해방 이후 정국에서 좌익에 선 일은 없다. 그럼에도 백기완선거대책운동본부의 강령이 사회주의였던 건 모든 민중의 싸움에 함께하려 한 결과였다. 백기완 선생은 이후에도 모든 투쟁 현장의 앞자리에 서고 담장을 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글귀마저 그런 얘기였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진보는 독자적 당위를 가질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백기완 선생 빈소를 조문해 술잔을 올리고(사진) 유족들의 쓴소리를 들었다.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맡기고 훨훨 자유롭게 날아가셨으면 한다고 한 만큼, 이 기회에 이 정권이 누구 편에서 누구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돌아봤으면 한다.

김민하 칼럼니스트 한겨레21 2021-02-19

 

 

진짜 위기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

경기가 잠시 나빠서 생긴 문제는 다시 경기가 좋으면 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구조적 변화로 인한 문제는 회복되기 어렵다. 일본 도쿄 도심 5구의 오피스 평균 공실률이 지난달 기준 4.82%까지 치솟았다. 1년 전엔 1.53% 정도였고, 6개월 전에도 1%대였으니 반년 새 급등한 셈이다. 수년간 1~2%대를 유지했었는데, 팬데믹 이후 매달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이유는 원격, 재택 근무가 확산된 것과 기업의 구조조정이 증가한 때문이다.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가 사옥을 팔고, 이걸 다시 임대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는데 사무 공간이 기존보다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 직원 20%가 원격 근무 중이고, 대량 감원도 했기 때문에 사무 공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영국의 대표적 광고회사 엠앤시(M&C) 사치도 사무실 공간을 25% 줄이겠다고 했고, 전세계 107개국 13만명의 직원이 있는 글로벌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기업 더블유피피(WPP)의 영국 본사도 공간을 20% 줄일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건 남의 나라 얘기만이 아니다. 국내도 사무실 공간을 줄이고 싶어 하는 기업들은 많다. 원격, 재택 근무의 보편화, 경기침체로 인한 구조조정뿐 아니라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감소도 오피스 공실률을 끌어올리게 만든다. 오피스 공실률 증가는 결국 근처 자영업자들의 위기로도 이어지고, 이는 악순환이 되어 상가 공실률을 끌어올린다. 서울 도심의 오피스 공실률은 조사 기관마다 차이가 있긴 한데 대략 10% 안팎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20년 극장 전체 관객 수는 5952만명이다. 2019년에 22668만명이었으니 4분의 1 토막 났다. 반면 넷플릭스를 비롯해 오티티(OTT) 서비스 이용은 급증했고, 고화질 대형 티브이(TV) 판매도 급증했다. 극장은 망하게 생겼으나 영화는 계속 봤다. 집에서 영화 볼 환경은 더 잘 갖춰졌기에, 팬데믹이 끝나도 극장 관객 수가 다시 2억명대로 회복된다는 보장을 못 한다. 어쩌면 영화는 남지만 극장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1994년에 빌 게이츠가 은행 업무는 필요하지만 은행은 필요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었는데, 이미 현실이 되었다. 은행 영업점은 줄고 구조조정도 계속된다. 빌 게이츠의 말을 살짝 바꾸면, 영업은 필요하지만 영업사원은 필요 없다, 쇼핑은 필요하지만 쇼핑몰은 필요 없다도 된다. 테슬라는 전기차, 자율주행차뿐 아니라 차를 파는 방식에서도 기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처음부터 자동차를 영업사원이 아닌 온라인 플랫폼으로 팔았고, 이젠 자동차 보험도 플랫폼에서 팔고 있다. 팬데믹이 되고 대면 영업이 더 어려워지자, 자동차 업계도 온라인 플랫폼에서 자동차를 파는 것에 더 관심이 커졌다. 자동차건 보험이건 영업사원의 입지는 줄어들고 있고, 팬데믹이 본격적 전환점이 되었다. 전통적 유통 강자인 롯데는 온라인 전략에서 한계를 보이며 고전하고 있다. 반대로 쿠팡은 온라인에서 대기업 유통을 압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팬데믹이 끝나도 달라질 리 없고, 오래된 비즈니스 모델이 가진 위기는 더 커질 것이다. 모든 변화는 일자리와 연결된다.

 

개인의 위기도 다 일자리와 연결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1월 기준 실업자 수가 157만명으로 1999년 이후 최대치다. 비경제활동인구 중 쉬었음’(육아, 가사, 학업 등에도 관여하지 않는데 일하지 않은), 즉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았다는 사람이 2020년에 237만명이었다. 여기에 더해 구직활동을 포기한 구직단념자 60만명, 취업은 했지만 일은 하지 않는 일시휴직자도 84만명 정도다. 이런 숫자가 사실상 실업이다. 수많은 숫자들이 지금보다 앞으로 더 심각해질 위기를 얘기하고 있지만, 정치는 뜬구름만 잡고 소모적 대결만 한다. 현실 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한겨레 2021-02-22

 

우리의 도시와 건축]주거냐 혁명이냐

지난 23, 블룸버그가 발표한 국가별 혁신지수에서 우리나라가 1위를 차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생산성이나 연구개발, 첨단기술 등을 따지는 모양인데 지난 9년 동안 일곱번이나 1위를 차지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우리나라를 완전한 민주국가의 그룹으로 발표하였다. 시민의 권리, 선거절차, 정부기능, 정치참여 등을 따져 전 세계 167개국을 4개 등급으로 분류하고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강조해 온 미국을 2등급인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매겼다니,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아직도 생생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나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선진적이라고 하는 증표가 요즘 들어 속속 나타난다. 특히 코로나19와 관련해 소위 선진국들에서 벌어지는 수준 이하의 행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 지도가 얼마나 허상이었는지를 알게 해주었고,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는 K방역은 세계 표준모델로 추진된다고도 하여 우리의 자긍심을 한껏 높인다.

 

외신에 의하면 경제지수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대단히 좋은 소식이 많다. 블룸버그는 우리나라의 작년 1인당 국민총소득이 이탈리아를 넘어 처음으로 G7 수준에 이를 것이라 전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세계 상위권의 경제지수를 기록하여 왔다. 모리재단의 세계 도시 경쟁력지수에 의하면 서울은 근래 6·7위에 줄곧 랭크되어 있다. 지지리도 못살아 외국으로부터 구호물자를 받은 때가 내 학생 시절이었으니 천지개벽도 이만저만 아닌 게다. 문제는, 이렇게 돈을 많이 벌어 삐까뻔쩍하게 잘사는 우리가 그 가난할 때보다 과연 행복한가이다.

 

한국, 거주 분야 행복 최하위권

공공주도 주택 대량 공급 나서

공급만 늘리면 문제는 해결될까?

부동산의 주택정책이 아니라

삶에 대한 주거정책 펴야 할 때

 

유엔은 매년 320일을 행복의날로 정하고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를 통해 세계행복보고서를 발간하는데 작년의 경우 우리나라는 153개국 중 61위라고 한다. 돈은 잘 버는데 그 번 돈만큼 행복하지는 않다는 게다. 이 기관에서 행복을 따지는 기준 중에 거주선택의 자유라는 항목이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140위로 매겨졌다. 그냥 최하위인 셈이다. 또 있다. 서울의 경쟁력이 세계 선두권이라 했지만, ‘삶의 질을 따지는 머셔컨설팅에 따르면 서울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 77위를 기록했다. 7위의 경제력에 77위라는 삶의 질. 이 부끄러운 불균형을 이루게 한 중요한 판별 기준의 하나는 역시 주거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 주거 문제는 우리의 모든 찬란한 성과를 격하시키는 주범인 셈이다.

 

주택 문제가 사회의 이슈가 된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난해 하반기 임대차보호법 제정 직후 이 이슈는 더욱 확산되어 우리 모두를 곤혹에 빠뜨렸다. 사실 이 법은 행복지수를 따지는 거주선택의 자유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선진적 장치지만 후속조치가 미흡하여 가진 자는 가지고 있어서, 없는 이는 없어서 폭발하고 만 것이다. 급기야 이를 공급 부족 때문으로 여긴 정부는 2025년까지 무려 83만채를 공급하겠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특별히 공공에서 주도하여 규제나 절차를 간편히 하고 개발에 따른 이익을 공유하겠다는 진보적 내용이어서, 잘만 하면 우리나라 주택건설의 역사에 전기가 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의문스럽다. 공급이 충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리고 행복지수가 상승할까? 사실 우리나라의 전체 주택수는 전체 가구수를 넘은 지 오래고, 서울의 경우도 전체 가구수에 불과 5%가 부족할 뿐이라 매년 증가하는 주택수를 감안하면 수적으로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오래된 주택 문제는 물량이 아니라 주택 혹은 주거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부당한 공급 방식에 보다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나는 짙게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집에 대한 주된 관념은 아무리 봐도 부동산이다. 아파트만 사면 몇억원씩 순식간에 올라가니 영끌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며 모두들 부동산 사재기에 혈안이 되었다. 자기가 사는 아파트가 안전성이 위험해 D등급 받았다고 경축 플래카드를 내거는 민족이 되었고, 집은 가족의 단란을 도모하는 곳이 아니라 시세차익을 남기고 떠나는 재물이 된 지가 오래여서 늘 유목민적 삶을 산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할 삶터에 대한 애착이 도무지 없다.

 

아파트는 동네가 아니라 오로지 이익결사체가 되었으며, 임대아파트에 사는 이들을 불가촉천민처럼 취급하여 소셜믹스니 사회통합이란 말은 먼 나라 일이다. 사회공동체가 아니라 부동산공동체가 된 주택단지는 지금도 전국 방방곡곡에 똑같은 모습으로 들어차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아서 건축가인 나도 구별 못한다. 단지 내에서는 아무리 넓어도 교통법규도 적용이 안 되고 일반시민의 차량통행을 불허하며 고립을 오히려 자랑하는 도시의 섬, 그래서 아파트공화국이란 명칭도 얻었다.

 

또한 공급 방식이 절대적으로 공급자 위주의 선분양제여서 사용자는 물건을 보지도 못하고 사게 한다. 그래도 잘 팔리니 고민할 일이 없는 아파트설계는 개선될 리가 없다. 그래서 마감재료만 바꿔 분양가만 올린 이 아파트단지는 겉모습만 번쩍일 뿐 40~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는 모습이 똑같다. 공동의 삶? 옆집에서 누가 죽어도 모르는 곳이라 공동주택이 아니라 그저 붙어만 사는 집합주택일 따름이다. 그런데 83만호를 공급하고 나면 어떤 몰골일까? 더구나 용적률을 몇배나 올린다고 하니 밀집·밀폐는 뻔한 일이라 코로나시대마저 역행하는데불문가지다.

 

삶의 질에 대한 머셔컨설팅의 조사에서 10년째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는 오스트리아 빈은 자가보유율이 30%(서울은 48%)를 겨우 넘을 뿐이지만 주거 안정성은 아마도 세계 최고일 게다. 임차인은 원하면 그 임대주택을 자식에게 넘겨줄 수도 있어, 자가나 임차에 대한 관념 없이 편안히 거주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주거정책을 빈 모델이라고 칭하며 자랑하는데 그 정책을 표현하는 단어가 ‘Soziales Wohnen’이다. 이를 우리는 사회주택이라고 번역하지만 이는 오역이다. 바르게 번역하면 사회적 거주라고 해야 한다. 어떤 사회를 이루며 어떻게 모여 살 것인가라는 뜻이어서 공동주거를 기획하고 건설할 때 거주자들의 의사가 늘 우선시되며 그 타당성이 확인되면 시정부는 전폭적 지원으로 공동주거를 짓게 한다. 물량 우선인 주택정책이 아니라 거주자의 삶의 방식에 기반하는 주거정책을 그들은 무려 100년 전부터 지속해 왔다는 것이니, 그 까닭에 그들이 짓는 공동주택들은 공간구조나 형식이 모두가 다 달라 늘 연구 대상이 되어 빈 모델이라는 자부심 가득한 이름을 쓰고 있다.

 

왜 우리는 이런 정책을 쓰지 못하고 주거 문제를 여전히 부동산정책으로만 취급할까? 몰라서? 토건 투기세력이 여전히 막강해서? 단임정부라 장기정책을 펴지 못해서? 그러나 우리도 이제 부동산의 주택정책이 아니라 삶에 대한 주거정책을 펴야 하는 것은 더구나 코로나시대에 필수적이며, 사람이 먼저인 이 정부라면 더욱 그래야 하지 않을까?

 

100년 전 스페인독감의 참상이 비효율적·비위생적 도시환경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말로 새로운 건축을 통한 혁명적 도시개조가 불가피함을 역설한 바 있다. 그의 말을 빌려 이 글의 제목을 단다. ‘주거냐 혁명이냐.’ 우리의 정책기조가 여전히 과거지향이라면, 실로 혁명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집이 가진 고유의 아름다운 정서를 회복할 길이 없고 결국 우리의 행복지수는 올라가지 못할 게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공간의 시학>이란 책에서 집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기술했다.

 

우리들이 태어난 집은 단순한 건물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꿈들의 집합체/ 옛날 그 집의 구석진 곳들 모두 하나하나가 몽상의 장소였으며/ 우리들은 거기서 특별한 몽상의 습관을 익혔다/ 우리들이 홀로 있었던 집, , 공간은/ 끝없는 몽상, 오직 시를 작품으로 끝내고 완성시킬 수 있을/ 그러한 몽상의 무대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동아대 석좌교수 경향 2021.02.24.

 

 

금값과 집값

지구상에 약 19t의 금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연평균 약 4300t의 새 금이 생산된다. 금값은 2018년 여름부터 2020년 여름까지 70%나 급등했다. 분석가들이 내세운 이유는 저금리와 세계 경제 불확실성의 증가다. 매년 새로 공급되는 금의 양이 금값 등락의 분석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이미 존재하는 금 총량의 2~3%에 불과해 목욕통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충격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 수명이 긴 다른 자산의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다. 개별 종목이 아니라 주식의 평균 가격을 분석할 때 통상적으로 경제학자가 주목하는 것은 새 유입량이 아니라 존재하는 주식 스톡의 가치를 결정하는 거시금융 변수들이다. 금리, 유동성, 위험도, 경제성장률 등등.

 

서울 아파트의 평균 가격은 김대중 정부 때 60%, 노무현 정부 때 53% 폭등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 개방으로 금리가 8%나 하락했고, 시장이 이에 대해 시차를 두고 반응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와 서울의 아파트 가격은 현재까지 41% 상승했다. 가격을 안정시키겠다고 도입한 정책이 임대주택과 똘똘한 한 채사재기를 조장한 것도 한 요인이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초저금리와 유동성 팽창,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형성된 저금리 장기화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집값뿐만 아니라 세계의 자산시장이 요동하고 있다. 주식, 비트코인, , 구리, 니켈 등.

 

주택은 삶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투자의 대상이다. 우리나라 가계는 자산의 70% 이상을 주택으로 보유한다. 주택은 이질적이어서 금이나 주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가격 차이가 크게 벌어지면 주택 투자자도 다른 주택으로 갈아탄다. 주식도 종목에 따라 이질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언론에서 자주 접하는 부동산 전문가들의 분석을 보면 필자의 시각과 매우 다르다. 보수 성향의 분석가들은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늘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거는 최근 몇 년간 공급량이 조금 줄었다는 것이고, 해법은 용적률 규제 완화를 통한 획기적 공급 증대다. 그리고 GDP 대비 가계부채의 비율이 10%포인트나 증가해도 걱정하지 않다가 가격 하락 조짐이 조금 보이면 특단의 조치를 요구하기도 한다.

 

진보 성향의 분석가 중에는 새 아파트의 분양가격을 낮추면 헌 아파트의 가격도 저절로 낮아진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부동산 가격을 바이러스와 비슷하게 보는 시각도 있다. 강남 아파트의 가격 상승을 막으면 다른 지역으로 가격 상승이 전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소유자의 주택 관련 세금을 세게 때리면 전국의 주택 가격이 안정될 것으로 믿기도 한다.

 

서울에 약 180만채의 아파트가 있다. 그리고 매년 3~5만채의 새 아파트가 공급되고 있다. 사실 줄지도 않았지만 2~3%의 새 아파트 공급이 평소보다 조금 줄어든다고 아파트 전체의 평균 가격이 갑자기 40%나 뛸까? 소수의 새 아파트 분양 가격을 억제하면 아파트 전체의 평균 가격이 억제될까? 세금폭탄이라고 하지만 서울 아파트의 시가 총액이 1500조원에 달하는데 종부세 3~4조원 더 걷는다고 아파트 평균 가격이 의미 있게 하락할까?

 

그럼 어떤 정책을 써야 하는가? 실망스럽게도 커다란 금융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자산 가격의 상승은 투기 모멘텀이 지속되는 동안 정부가 되돌리기 힘들다. 거대한 공급 충격은 효과가 있겠지만 미래에 가격이 조정될 때 더 큰 아픔을 초래한다. 반복된 위기로 지난 10여년간 각국의 중앙은행은 앞다퉈 금리를 인하했고 불황 속에서 자산 가격이 급등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중앙은행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부의 불평등 심화, 부채 급증, 금리 상승 시 발생할 위험 증가라는 거대한 골칫거리를 세상에 안겼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짐을 중앙은행이 아니라 행정부가 전부 지고 있다. 꼬리로 몸통을 흔들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 표출 때문이다.

 

그래도 필자가 제안하고 싶은 정책은 1주택 가구를 포함한 대규모 보편적 종부세의 도입이다. 금리가 하락하면 세율을 증가시키고 금리가 상승하면 세율을 감소시키는 금리역행적 종부세다. 부동산 가격의 큰 출렁임은 막기 힘들겠지만 가격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다. 동시에 금리의 행동 반경을 넓혀 중앙은행이 실물경제 안정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정치, 입법, 행정상의 어려움이 심각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전례 없는 난제로 가득한 세상에는 전례 없는 정책이 필요하다./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2021.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