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죽이는 경제’는 안된다 한겨레 2020.1.17.
뉴노멀’을 맞을 준비는 됐는가 한겨레 2020.1.17.
피해와 고통의 양극화 한겨레 2021-01-19
지구촌 3% 부자로 살아가는 법 경향 2021.01.20
트럼프 몰락과 대중매체 미디어오늘
우리가 부르짖던 공정론의 민낯...한국의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프레시안 2021.01.21
일반고 황폐화’는 특목고 때문이 아니다 경향 2021.01.21
'26채 집부자' 종부세 0원...이재명의 '종부세 합산배제 개정' 요구가 옳다 프레시안 2021.01.22
대북전단, 프레임에 감춰진 진실 경향 : 2021.01.23
‘외교실패론’의 근거를 묻는다 한겨레 2021.01.24.
내팽개친 노무현의 유산,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민중의 소리 2021-01-24
김진숙과 송경동의 요청 경향 2021-01-28
지지율과 정치공학 아닌 '진정성'과 '초심의 소박함'이 필요하다 프레시안 2021.01.30
정말 결국, 케이블카? 한겨레 :2021-01-31
‘사람 죽이는 경제’는 안된다
누군가 내게 “지난해에 가장 인상 깊었던 한마디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12월24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 설치된 정의당의 농성장에서 나온 말을 꼽고 싶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인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를 찾은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중대재해법 제정에 야당인 국민의힘이 협조하지 않아 문제라고 했다. 그러자 김미숙씨는 “여태까지 (민주당이 원한 법안은) 여당이 다 통과시켰지 않느냐”며 “많은 법을 통과시켰는데 왜 이 법은 꼭 야당이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순간 할 말을 잃고 당황해하는 김 원내대표의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민주당이 다른 법안들을 힘으로 밀어붙인 것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중대재해법에 대해선 달리 생각한다. 이 법을 그런 식으로 통과시켰다면 나는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일관성이 없느냐고 추궁한다면, 나는 이런 답을 드리고 싶다. “매일 7명이 일하다 죽어나가는 걸 구경만 해온 우리는 모두 미쳤다!” 산업재해 사망은 상당 부분 ‘사회적 타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지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중대재해법은 원안에서 대폭 후퇴한 ‘누더기법’이 되고 말았다. 이미 민주당을 향해 거센 비판이 많이 쏟아졌기에 비판을 보태고 싶진 않다.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건 민주당이 그런 비판을 예상했을 텐데도 왜 그랬을까 하는 점이다. 실력이 없다거나 원칙 없는 타협을 해서 그렇게 됐다는 진단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지지율이 급락할 정도로 큰 정치적 타격을 받는다면 그래도 그렇게 했을까?
물론 큰 정치적 타격은 없었다. 그렇다면 좀 다른 생각을 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산업재해 문제가 ‘경로의존의 덫’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경로의존(path dependency)은 한번 경로가 결정되고 나면 경로 이용의 타성과 경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 시스템의 관성 때문에 경로를 바꾸는 게 매우 어려워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런 경로는 우리의 의식에도 형성되는 것이어서 우리 모두의 성찰을 요구한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초고속 압축성장은 인권을 중시한 건 아니었다. 50년 전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민족사적 금자탑’ 운운하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건설 중 사망자가 77명이나 나왔다. 1977년 사상 최초로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한 것도 격한 자축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이면엔 전태일 열사와 같은 수많은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사회적 약자를 희생으로 한 개발독재의 습속은 우리 모두의 의식에 깊게 새겨진 경로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그간 긍지를 느껴온 케이(K)-방역이 사실상 사회적 약자들은 외면해온 것도 바로 그런 의식의 경로 때문이었을 게다.
‘중단 없는 전진’을 외치며 살아온 우리에게 ‘안전 우선’은 사치스러운 것으로까지 여겨졌으며, 그런 심성은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를 토대로 형성된 기업 시스템과 관행은 큰 변화 없이 오늘날까지 지속돼왔다. 이를 단기간에 바꾸긴 쉽지 않다. 강력한 처벌이 해결책일 수 없다는 주장엔 일말의 진실은 있다. 문제는 기업들이 그런 시스템과 체질을 바꾸려는 노력을 평소에 얼마나 해왔으며, 정부·정치권·언론 등은 얼마나 상시적인 관심을 보였느냐 하는 점이다. 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우리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비로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닌가.
경제계·재계 인사들께 묻고 싶다. 매일 7명 사망, 이대로 좋은가? 왜 그간 침묵만 해오다가 노동자들의 분노 폭발이 중대재해법 제정으로 이어지는 순간에야 들고일어나는가? 그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자업자득 아닌가? 정부와 정치권의 개입 이전에 스스로 알아서 상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문제 해결에 나설 자유 의지가 전혀 없는가? 산업재해를 전담하는 상시적인 다자협의기구의 구성을 제안하면서 정부와 사회의 협력을 구하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하면 기업에 대한 존중과 신뢰도 높아질 텐데, 왜 자꾸 로비와 압력 위주의 방어에만 몰두하는가? 경제, 정말 중요하다. 정치가 수렁에 처박혀도 나라가 그럭저럭 돌아가는 건 경제 덕분일 게다. 모든 경제인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러나 ‘사람 죽이는 경제’는 이제 더 이상 안 된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시라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2020.1.17.
뉴노멀’을 맞을 준비는 됐는가
과학기술 문명은 코로나 팬데믹을 인간 세계로 가져왔지만, 동시에 코로나를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도 가르쳐줬다. 지난해 인류는 미증유의 속도로 번진 팬데믹 공포로 한 해를 보냈지만, 또한 미증유의 속도로 백신을 개발하는 성과도 거뒀다.
지난 1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과학기술의 영향력을 더 절감했다. 첫손에 꼽을 수 있는 게 비대면 경제의 전면 부상이다. 온라인 쇼핑과 화상회의 이용자 급증이 이를 상징한다.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이 폭증하는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추가로 고용한 인력이 지난해 1~10월 42만명이었다. 이는 미국 역사에서 2차대전 특수 때나 볼 수 있었던 현상이라고 <뉴욕 타임스>는 평가했다. 화상회의 도구인 줌의 하루 평균 사용자 수는 코로나19 발생 전후 넉달 새 1000만명에서 3억명으로 늘었다.
비대면 경제의 전면화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 생활에 또 하나의 선택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비대면 경제는 생활의 편의성을 한층 높여줬다. 쇼핑을 위해, 일이나 회의를 위해, 문화생활을 위해 과거처럼 거리로, 사무실로, 극장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가족 교류와 개인 시간을 확보하는 긍정 효과도 있었다. 스마트폰이 세계인의 일상을 바꾸는 데 수년이 걸렸다면, 줌은 몇달 사이에 세계인의 소통 방식을 바꿔버렸다. 코로나가 변화의 가속기 역할을 했다. 물론 우리는 현장만이 줄 수 있는 오감의 경험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편리하게 사는 방법을 깨친 이상 코로나 종식 이후에도 이전의 방식으로 온전히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코로나는 이미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코로나도 그렇지만 모든 위기는 취약점에서 시작된다. 전염병 연구로 유명한 예일대 역사학자 프랭크 스노든은 ‘전염병은 인간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그의 통찰에 따르면 콜레라는 19세기 산업혁명의 취약점을 공략했다. 공장의 등장과 함께 형성된 인구 밀집 도시, 그곳의 비위생적인 시설과 하수가 인간이 만든 전염병을 확산시킨 통로였다. 코로나는 20세기 세계화의 취약점을 공략했다. 세계화는 지구촌을 일일생활권, 단일시장으로 만들었다. 아침에 아시아에서 출현한 전염병이 저녁이면 유럽에 나타날 수 있다. 세계화는 또한 자연 세계의 질병을 숲 밖으로 뛰쳐나오게 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팜유 산업을 위해 서아프리카 숲의 박쥐 서식처를 파괴한 결과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인류는 취약점을 보완하며 위기를 극복해 왔다. 19세기 전염병은 공중보건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그런 도시에 콜레라가 다시 들어설 자리는 없다. 코로나가 드러낸 취약점은 뭘까? 코로나는 한정된 자원으로 무한 성장을 향해 달려가다 맞은 부메랑이다. 이 취약점을 보완하는 길은 자연과의 공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때마침 인류가 설정한 2050년 탄소중립 목표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기후위기 대책이 자연을 연결 고리로 전염병 대책과 마주한 셈이다. 하지만 그사이 세계화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훨씬 더 복잡하게 얽어놨다. 실타래를 풀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미래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그 일이 한결 쉬울 수 있다. 지금의 결정이 만드는 세상을 살아갈 주인공 자리에 서서 판단하는 것이다. 비대면 경제로 코로나 극복의 길을 찾아냈듯 과학기술이 든든한 원군이 될 수 있다.
몇해 전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맹세한 스웨덴의 기후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최근 새 옷을 사지 않겠다는 다짐을 더했다. 그는 올해 18살 성인이 됐다. 성장과 성공 추구를 덕목으로 알고 살아온 기성세대는 상상하기 어려운 약속이다. 21세기 ‘뉴노멀’은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곽노필 ㅣ 콘텐츠기획팀 선임기자 한겨레 2020.1.17.
피해와 고통의 양극화
고도성장과 사실상의 완전고용 시대를 지나 아이엠에프(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 사회와 진보의 최대 화두는 양극화였다. 아이엠에프 경제위기는 국가 경제와 국민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주었지만, 부담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 과정을 거쳐 자산과 소득의 양극화가 그 이전에 비해 훨씬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재난적 경제위기가 왔다. 모두가 불편과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 경제적 피해는 아이엠에프 경제위기에 비해 매우 차별적이고, 취약한 계층과 부문에 집중되고 있다.
아이엠에프 때는 재벌조차 구조조정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피해는 산업과 업종에 따라 다르고, 온라인 유통업, 언택트(비대면) 산업 등은 오히려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항공과 여행 산업은 큰 타격을 받은 반면, 현대자동차의 2020년 국내 판매는 전년 대비 6.2% 증가했다. 외국여행을 못 가니 자동차를 바꿨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벌 대기업이나 금융, 공공기관과 해당 부문 노동자들의 경제적 피해는 없거나 미미한 반면, 영업금지와 제한으로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와 해당 업종 비정규직 노동자는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다. 자영업 안에서도 피해는 차별적이다. 부동산 등 일부 업종이나, 배달 등 비대면 서비스 전환이 가능한 곳은 급속히 회복한 반면, 헬스장, 노래방 등 영업이 금지되거나 비대면 전환이 어려운 업종, 영세 자영업은 몰락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코로나19는 누군가에게는 죽음과 같은 고통이지만, 누군가에는 단지 불편함일 뿐이다.
아이엠에프보다 더한 피해와 고통의 양극화는 필연적으로 아이엠에프 이후보다 더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초래할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위기 상황이 1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도 양극화 문제에 대한 진보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는다.
3차 재난지원금이 다 지급도 되기 전에 4차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피해 지원 차원에서나 양극화 대책 차원에서는 한정된 국가의 재정 지원을 실제 피해를 받고 있고, 가장 어려운 계층에 집중해야 함은 사실 논쟁의 대상조차 아니다. 국채를 더 발행해서라도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문제의 논점이 아니다. 4인가구 기준 100만원을 지급한 1차 전국민재난지원금 14조3천억은 영업금지 및 제한을 받은 자영업자들에게 해당 기간 월임대료와 최저임금을 지급하고도 남는 규모다. 그 규모를 더 키우면 지원 기간을 더 늘릴 수 있다.
코로나 경제위기에도 소득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계층에게까지 지원을 하느라, 영업금지로 문을 닫고도 임대료를 내야 하고, 일자리를 잃어버린 분들에게 불과 몇십만원을 지원하는 것은 고통과 피해의 양극화를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주장은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 소비 대책 차원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소비 대책 차원에서 불황기에 소비쿠폰을 발행한 국외 사례처럼 전국민에게 지급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전반적인 경기침체 상황이 아닌, 피해가 매우 차별적이고 양극화된 지금과 같은 재난적 경제위기 상황에서 한정된 국가 재정을 양극화 대책에 우선해 소비 대책 차원에서 사용할 때냐는 것이다. 두번째는 소비 대책 차원에서도 전국민 지급이 타당하고, 효과적이냐는 것이다.
재난지원금의 추가 소비 효과가 제한적이고, 특히 중산층 이상의 경우 기존 소비의 대체 효과가 두드러진다는 것은 여러 연구기관의 공통된 분석 결과다. 무엇보다 업종에 따라 차별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지난해 5월 1차 재난지원금 지급 직전 소비는 이미 전년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2차 유행으로 다시 위축되었던 소비도 방역 조치가 완화된 10월경에는 코로나 이전으로
회복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의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소비 위축은 경제적 요인이 아닌 말 그대로 재난적 상황에 따른 것으로 방역 조치가 완화되면 바로 회복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 가장 큰 피해를 본 영업금지 업종엔 방역 조치가 유지되는 한 재난지원금의 소비 효과는 전혀 없다. 즉 소비의 회복은 코로나 상황에 연동되는 것이지 재정 투입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재정 투입은 양극화 대책 차원에서는 거의 유일하고 강력한 수단이지만 소비 대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동기 외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물론 정치적 고려가 없는 정책이란 없다. 그래도 피해와 고통이 양극화된 현실 속 재정 지원에서 이를 외면하는 것은 당장 큰 고통을 겪는 분들에 대한 도리도, 책임 있는 정치적 선택도 아니다. 김기식 ㅣ 더미래연구소 소장 한겨레 2021-01-19
1억이나 86억이나 마찬가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적용된 뇌물공여죄 양형기준을 보면, 뇌물 액수에 따라 4개 구간으로 나눈 뒤 각각 권고 형량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4개 구간이 3천만원 미만, 3천만~5천만원, 5천만~1억원, 1억원 이상으로 돼 있기 때문에 뇌물을 1억원을 줬든 이 부회장처럼 86억원을 줬든 형량을 따질 때는 똑같이 취급된다. 1억원 이상 뇌물공여는 최대 권고 형량이 징역 3~5년이다(이 부회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뇌물 액수가 크면 그만큼 죄질이 나쁠 것이라는 상식과 배치되는 법 현실이다.
형법에는 뇌물수수죄와 뇌물공여죄 모두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지만, 이 가운데 뇌물수수죄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으로 액수에 따라 10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도록 형량을 높여놨다. 뇌물수수죄의 양형기준도 뇌물 액수에 따라 6개 구간으로 세분화했고, 5억원 이상일 때는 최고 11년 이상~무기징역으로 규정했다. 이 역시 5억원 이상을 한 데 묶어 규정하는 한계가 있지만, 충분히 높은 형량을 적용할 여지가 있다. 반면 뇌물공여죄는 이같은 가중처벌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액의 구간을 신설해봐야 최고 형량(5년)을 늘릴 수 없으니 별무소용이다.
뇌물죄가 본질적으로 공직자의 직무집행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형벌 규정인 만큼 뇌물을 준 자보다 받은 자를 엄히 처벌하는 게 타당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 형법에서 정한 형량은 서로 같고 뇌물공여 행위도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점에서 두 범죄의 실질적 형량이 지나치게 차이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뇌물공여죄의 최대 형량인 징역 3~5년은 뇌물수수죄의 경우 3천만~5천만원을 받았을 때에 해당한다.
이 부회장은 뇌물공여와 함께 횡령죄도 저질렀다. 액수에 따라 가중처벌하는 횡령죄가 합쳐지면서 이 부회장에 대한 양형기준상 권고 형량은 징역 4년~10년2개월로 늘어났다. 여기에 판사 재량으로 형량을 낮춰주는 ‘작량 감경’이 적용돼 최저 한도보다 낮은 2년6개월의 형량이 결정됐다.
시민들의 법감정에 비춰, 86억원이라는 뇌물 규모에 징역 2년6개월의 형벌은 아무래도 약해 보인다. 이런 결과가 나온 데는 재판부의 판단이 주되게 작용했지만, 뇌물수수죄에 비해 현격히 관대할 뿐 아니라 작은 뇌물과 큰 뇌물을 변별하지 못하는 뇌물공여죄 형량의 부조리도 한몫 한 듯하다./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한겨레 2021-01-19
지구촌 3% 부자로 살아가는 법
어지럽다. 눈뜨면 오르는 부동산 가격에 주식·비트코인 열풍까지 세상이 온통 ‘돈’ 얘기다. 세계적인 투자자는 금과 달러를 사라 하고 어떤 이는 당분간 호황세를 장담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위기를 예언한다. 대개는 맞을 수도 있고 틀려도 그만인 이야기들로 전문가라기보다 역술인들 같은데 재미를 본 사람들은 신이 나서, 기회를 놓친 사람들은 겁이 나서 모두들 달려든다. 나만 뒤처지는 건가 슬며시 걱정도 된다.
부자로 살아본 경험이 없다. 온갖 꽃과 식물, 새와 벌이 어우러진 정원이 있는 고택에서 놀던 유년의 기억이 내 인생에서 가장 부티 나는 시절이었다. 양친은 모두 몰락해가는 부잣집 장남, 장녀로 자존감과 교양은 있었지만 세상 사는 요령이 부족하고 과하게 고지식한 분들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 비슷한 중산층의 생활에 비해 문화적 경험은 많았고, 물질적 혜택은 부족한 삶이었다. 최대의 위기는 엄마의 빚 보증으로 큰 타격을 받았을 때다. 갑작스레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터라 낙천성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깊은 절망감이 찾아왔다. 많은 것을 정리하고 몇 년간 극단의 긴축 생활을 했는데, 엄마는 그 시간을 10년 이상으로 기억하신다.
컬러풀한 세계 속에 나 홀로 흑백의 존재로 살아가는 듯한 상실감에서 벗어나게 한 뜻밖의 계기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게 된 ‘나의 세계 부자 순위’였다. 연봉이나 자산을 입력하면 지구인 70억명 중 어느 정도에 위치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인데, 믿기지 않는 결과에 몇 번을 다시 확인했다. “내가 세계 3% 이내라고? 말이 돼?”
잠시 생각하니 말이 되고도 남았다. 당시 대한민국은 전 세계 250여개국 중 경제 순위 10위권에 근접하고 있었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세계 4~5% 이내고 중산층이면 2~3% 이내다. 극소수의 슈퍼 리치들이 소유한 부의 지분율이나 후진국의 천문학적 부자 등 간단치 않은 고려사항들은 있지만, 마찬가지로 선진국의 중·하층이나 전 세계 초극빈층을 생각하면 틀린 계산도 아니다. 대한민국 평균 연봉은 저개발국가 국민의 50년 이상 소득에 가깝다.
나와 주변인만이 아닌 세계와 지구촌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삶에 큰 변곡점이 되었다. 절대 빈곤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수십억 인류가 굶주림과 열악하다는 표현으로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쉴 만한 안식처에 다이어트를 고민할 만큼 충분히 양질인 세 끼 식사를 하고, 읽고 싶은 책과 큰돈 들지 않는 문화생활, 가끔은 여행까지 즐기고 사는 삶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무엇이 더 필요해서 그리 안달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힘들면 수도권을 벗어나고, 더 힘들면 경제력이 우리보다 못한 나라로 가서 살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사이에 우리 경제는 더욱 발전해서 지금은 연봉 3000만원 정도면 세계 2% 이내라고도 한다.
물론 현실의 삶이 결코 간단한 수치로 환산될 수 없는 무한 변수의 집합체임을 알고 있다. 재력과 상관없이 이민이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준거집단에서의 상대적 박탈감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 요소다. 더 나은 삶의 욕망은 죄악이 아니다. 하지만 삶이 팍팍하고 빈곤하게 느껴질 때 가끔은 지구촌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조금은 낡고 소박한 보금자리와 평소 당연히 누리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고맙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비현실적 정신 승리 같은가. 아니, 그것이야말로 때로 비정한 인간 세계의 현실적 판단이다. 조급한 더 큰 부자의 기대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판타지 아닌가. 그 환상이 부동산 거품을 만들고 벌어도 벌어도 채울 수 없는 허기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감사와 긍정심, 마음의 여유는 넓은 시야와 정확한 현실이해 능력,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일을 아는 진짜 부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자 선물이 아닐까.
박선화 한신대 교수 경향 2021.01.20
트럼프 몰락과 대중매체
21세기의 정보환경이 과거의 그것과 크게 달라지면서 정보의 교통정리라 할까, 믿을만한 정보를 어디에서 구해야 하나 하는 사회적 고민이 커지고 있다. 이는 대중매체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오늘날 정보시장은 대중매체, 플렛폼, 포털, 1인 미디어, 각종 SNS가 생산하는 정보로 넘쳐난다. 대중매체의 역할이 나날이 쪼그라들고 있는 상황이다. 앞으로 대중매체가 어떤 목적의식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귀중한 교훈 사례가 트럼프식 정보 생산과정에서 목격된다.
트럼프는 현대사회의 대표적 의사전달 수단인 트윗으로 흥했다가 망한 정치인이다. 그는 대중매체를 아예 무시하고 트윗으로 자신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는 방식을 썼다. 자신의 말을 대중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에 유권자는 열광했다. 그런 정치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정치인들은 대변인을 두거나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잘 정리된 자신의 말을 전하는 방식이었는데 트럼프가 그것을 깨면서 대중적 인기를 누린 것이다. 그 결과 지방의 한 부동산 재벌이 워싱턴의 정치 중심가로 직행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재임 중에 대중매체가 자신의 견해와 다르거나 자신을 비판하면 가짜뉴스라고 매도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정보 생산과 소비를 하면서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대중가운데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생산하는 정보만을 소비했다. 그의 메시지에 따라 세상을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수십 통의 트윗을 날릴 정도 정열적이었다. 그가 트윗으로 많은 메시지를 날리면서 거짓이거나 엉터리인 것도 생기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궁지에 몰리는 경우 뻔한 가짜뉴스를 생산해서 퍼뜨리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노렸지만 낙선하자 아무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가 자행됐다는 트윗을 계속 날렸다. 당연히 그의 지지자들은 분노하고 거리로 뛰어 나와 시위를 벌였다. 트럼프는 그것을 선동하는 말을 지속했다. 결국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을 의회에서 인준하는 날 수많은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폭도로 난입해 사상자가 생기는 등 미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트럼프는 내란선동 혐의로 하원에서 탄핵되어 임기 중에 두 번이나 탄핵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트윗 등 포털사이트에서도 그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그의 계정을 중단시켰다. 일국의 대통령으로써 불명예스런 일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수치심을 전혀 모르는 파렴치한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선거에 불복한다는 태도를 바꾸지 않고 새 대통령 취임식에 불참 의사를 밝히는 등 기본기가 되어 있지 않은 일탈적 모습을 반복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6월3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에서 열린 장병 격려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치인이나 유명인의 말 또는 대중매체의 정보가 전파되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피면 정보 생산을 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자명해진다. 학자들의 대중매체의 전달 효과에 대한 연구 결과에서 그것이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중매체가 전달하는 내용을 자신의 가치관이나 흥미에 따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인식 또는 기억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말을 대중매체 등을 통해 접하게 되면 자신의 가치관이나 선입견에 따라 그 내용을 해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적절하다고 여기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은 송신자의 정보에 대해서는 쉽게 싫증을 느끼게 된다. 이런 태도는 담배의 유해성을 알리는 금연캠페인에도 불구하고 흡연을 계속하는 경우나 지역감정이 부적절하다는 사회적 경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은 사례 등에서 입증된다.
사람들이 말을 받아들이는 특성을 살필 때 지명도가 높은 정치인이나 유명인사는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에서 자신의 말에 신중해야 한다. 대중들은 그들이 궁금해 하거나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리더를 통해 해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뉴스는 부당한 정치적 이익 또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만들어지는데 미국 주요 대중매체의 경우 지난해 11월 대선전이 한참일 때 팩트체크를 최우선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정치인들이 승리를 위해 막말을 하는 사례가 많아 독자나 시청자에 대한 언론서비스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일상적인 사건, 사고가 아닌 공개된 정보의 진위부터 가리는 작업이 대중매체에서 행해지는 것은 21세기 정보환경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측면도 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중매체가 아닌 미디어로 개인이 대중에게 말을 전파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생긴 그늘로 설명할 수 있다. 모두가 모두를 향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긍정적인 의미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런 장점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역기능을 해소하기 위한 범사회적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게 하다보면 머잖아 모두가 모두를 향해 생산적인 말을 하는 시대가 올 가능성이 크다. 이런 목적을 위해 대중매체가 할 일이 있다.
한국의 경우 대중매체는 다매체 다채널, 1인 미디어 시대의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공공, 공익적 정보를 생산 전파하는 매체의 성격을 굳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민감한 사회문제 등에 대한 정보 생산 방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TV에서 정치문제에 대한 대담프로의 경우 여야 정치인을 불러다 말을 시키는데 이는 시청자들에게 알아서 판단하시오 하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이런 방식이 방송사 입장에서는 품이 덜 들고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 진영논리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불러서 여야 정책에 대해 타당한 분석과 해석을 내놓는 방향으로 해야 시청자가 균형 잡힌 지식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특성을 고려할 때 진영논리를 벗어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진정한 정보 서비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매체는 뉴스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뉴스를 재미있게 만들려 노력하는 경향이 있어 ‘Infotainment (Information+Entertainment)'라는 합성어가 등장했고 교육도 오락적 요소를 가미해 제공한다는 뜻의 합성어 Edutainment (Education+Entertainment)는 신조어가 정착해 있다. 정보는 단순히 정보로서만이 아니라 오락적 요소가 가미되어야 소비자들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다. 흥미위주로 만들어진 각종 프로들이 실제 많은 청취자, 시청자들을 정확치 않거나 부적절하게 교육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일부 국내 매체는 SNS 속 독설가나 재담꾼들의 말을 중계 방송하는 식으로 전달하고 있는데 이는 대중매체 본연의 영역을 허무는 자해 행위의 성격이 짙다. 대중매체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정보 상품을 판매한다는 점에서 여러 방식을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혼탁한 잡음 속에서 진실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를 대중매체가 충족시키는 책무를 생략해서는 곤란하다. 대중매체는 객관성의 원칙아래, 정확한 사실관계를 기본으로 삼고 정보를 생산가공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해 그 방향 설정에 고민할 때다. 지금처럼 모두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정보환경에 휩쓸리면서 대중매체가 제 위치를 찾지 못한다면 지금의 옹색한 자리도 영영 잃어버릴지 모른다./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 미디어오늘
우리가 부르짖던 공정론의 민낯...한국의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으로 나아간 오랜 여정
지난번에 이 지면에서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를 읽으며 떠오른 단상을 풀어보았다("60년 전에 지금의 "능력 독재"를 정확히 예언하다", <프레시안>, 2021. 1. 4). 영의 책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뚜렷한 지지 집단이 있음을 환기시킨다는 점이었는데, 이들은 "지식인-중간층"이라 불리는 게 가장 적당한 이들이다.
이번에는 이들 지식인-중간층이 자본주의 역사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역사적 과정을 엉성하게나마 소묘해보고 싶다. 영이 "소설" <능력주의>에서 전개하는 가상 역사 말고 그것과 비슷하면서 또 다른 실제 역사 말이다. 칼럼 한 편에서 한 대목으로 다루기에는 벅찬 주제인데도 이에 도전하는 이유는 단지 한국 사회가 도달한 현재 모습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으로 나아간 오랜 여정
지난 글에서 능력주의가 자본주의와 친화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부속물은 결코 아니며 처음부터 역사를 함께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능력주의와 더 뿌리 깊이 얽힌 것은 국가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만인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단일한 척도로 일원화하려는 열망을 처음 세상에 선보이고 이후 줄곧 이 열망의 대표자가 돼온 조직이 국가다. 이런 국가가 유럽에 비해 훨씬 일찍부터 정연하게 발전한 유라시아 대륙 반대쪽(동아시아)에서 근대적 능력주의의 조숙한 원형이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될 때만 해도 자본과 능력주의 사이에서 이 정도로 친근한 관계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친근성의 기준이란 단지 세습에 반대해 능력을 내세운다는 것 이상이다. 더 나아가, 능력을 측정 가능한 무엇으로 만들고 그래서 모든 인간을 그 측정 결과에 따라 배열할 수 있어야 한다. 제1차 산업혁명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은 자본주의 현실이 아직 이를 강렬히 요구하지 않았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근대 능력주의의 본격적인 역사는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열렸다. 새로운 산업혁명의 핵심은 전기를 주된 동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기계를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중화학공업 작업장이 당대 산업의 중심이 됐다. 생산 과정과 과학기술 지식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게 유기적으로 결합하자 당연히 이런 지식의 담당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그러나 이보다 더 커다란 변화를 낳은 것은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기업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산업 혁신을 선도한 두 나라, 미국과 독일에서 흔히 "독점기업"이라 불리는 거대 기업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엄청난 생산력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으로까지 발전시켜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는 만큼, 이런 지배의 대선배인 다른 조직을 닮아갔다. 다름 아닌 국가기구다. 국가기구를 모태 삼아 발전해온 관료제가 신흥 대기업들로 확산돼 기업 관료제가 대두했다. 그리고 이는 공학도에 대한 수요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기업 공무원의 수요를 늘렸다.
하지만 제2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19세기 말부터 곧바로 지식인-중간층이 자본주의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변수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능력주의 역시 아직은 "주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미국, 독일에서 시작된 새로운 산업 구조가 무르익고 널리 퍼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려서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지식인-중간층을 대량 배출할 사회적 기반이 갖춰지지 못한 데 있었다. 그러려면 미국에서 발전한 대중적 고등교육 체계가 다른 중심부 국가들에도 뿌리내려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결국 서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하위 중산층과 노동계급 가족의 실질 소득이 상승하고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의 수용 능력이 확대되면서 이들 계급-계층의 자녀 가운데 대졸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들 중 다수는 물론 대자본이 요구하는 기업 관료, 기술 관료로 진출했지만,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이 집단(하위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대졸 1세대)이 체제에 어떤 충격을 낳을지는 아직 불분명했다. 영의 <능력주의>가 나온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이 충격이 영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향, 그러니까 자본주의에게는 가장 불길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듯 보였다. 1960년대에 자본주의 중심부 곳곳에서 대학 분규와 학생운동, 신좌파운동이 폭발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사자 가운데 단호히 민족해방전선 쪽에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각목이나 화염병을 들고 거리에 나선 이들의 이념이 지금도 모두 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들을 능력주의의 주역으로 보기는 힘들었고 오히려 "대학 해체" 등의 주장을 통해 그 정반대 편에 섰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패배했다. 적어도 이때 이들이 대변하던 그 역사적 가능성은 철저히 패배했다. 1970년대에 자본주의가 발 빠르게 착수한 세 가지 자기혁신운동, 즉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가 지식인-중간층의 대규모 등장을 1960년대 대학가에 잠재하던 가능성과는 전혀 다른 역사의 방향과 접합시켰다.
첫째, 지구화. 중심부 자본이 생산 설비를 해외로 옮기면서 생산직 일자리는 줄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 생산 사슬을 관리하는 초국적기업의 관료 체계가 확장되는 바람에 중심부 국가들의 전문직-관리직 일자리는 반대로 늘어났다. 20세기 후반부터 일상적으로 대량 배출된 지식인-중간층은 노동계급의 패배로 두텁던 중산층의 다른 부분이 와해되는 시대에도 이 사다리를 부여잡고 중산층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금융화. 영의 <능력주의>에서 능력주의의 수혜자인 새로운 지배 계급은 지금 우리 현실에 견줘보면 차라리 청빈한 편이다. 그들은 그저 능력에 따른 급여 격차에 만족한다. 그들에게는 "재테크"의 세계가 없는 것이다. 주식 투자도, 부동산 투기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실현된 능력주의는 영이 상상한 능력주의보다 더 강력하고 반동적이다. 중심부 국가들에서 전문직-관리직 일자리를 획득한 지식인-중간층은 금융화에 가담해 거대한 불로소득자 집단을 형성했다. 더불어, 불로소득자의 세습주의("세습 중산층")와 기묘하게 결합된 우리 시대의 능력주의가 부상했다.
셋째, 정보화. 제3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환원하고 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는 오늘날의 능력주의에까지 이르게 된, 고대 국가 이래의 유구한 열망에 전에 없던 날개를 달아줬다. 만인의 능력을 지능이라는 단일한 기준에 따라 판정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배열하려는 열망 말이다.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노동이 맡던 역할을 완전히 자동화하려는 기획("제4차 산업혁명"이라 잘못 명명된)은 이런 열망을 완성하려는 시도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기획이 자본주의 구조 아래에서 실현된다면 오직 지식인-중간층만이 "1% 지배자들"과 함께 "능동 시민"의 범주에 들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가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사적 결합에 기여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패배다. 지식인-중간층이 성장하고 능력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부상하던 바로 그 시기에 그간 대안 세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항 세력으로는 상당한 역량을 과시했던 중심부 국가들의 노동계급이 돌이킬 수 없이 패퇴하고 해체됐다. 이는 단지 비극적인 대비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어쩌면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얼핏 이야기했지만, 능력주의란 단순히 다른 가치에 비해 능력이 중시된다고 하여 대두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만인을 "단일한" 능력 관념과 기준에 따라 재단하려 할 때에 능력주의가 부상하고 힘을 얻는다. 반대로 말하면, 능력의 다원론이 무너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능력주의가 지배할 수 없다. 능력주의의 필수 구성요소가 능력의 일원론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말까지 중심부 자본주의, 특히 서유럽에서는 노동계급이야말로 이러한 능력의 다원론을 지탱하는 주역이었다. 자본가, 관리자, 정치인, 대학 교수가 뭐라 떠들든 노동자는 늘 그들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고, 그들이 믿는 제대로 된 삶이 따로 있었다. 그들이 버티고 있을 때에 자본주의 사회는 능력의 일원론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반면에 지식인-중간층은 능력의 일원론의 신실한 신자가 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한때 노동계급에 뿌리를 둔 지식인-중간층의 대규모 등장은 "지식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름으로 일부 좌파의 환영을 받은 바 있다. 이들의 부상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노동계급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데 새롭고 결정적인 자원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결과는 정반대다. 지식인-중간층은 자본주의가 계급투쟁에 선수 치며 선택한 방향, 즉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에 편승하고 여기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자원을 더해주면서, 오히려 위로부터의 진지전, 즉 수동혁명의 강력한 토대가 됐다. 이들을 통해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사적 결합이 완성되려 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능력주의 결합의 최첨단?
이런 자본주의 역사의 전반적 흐름과 비교해보면, 한국 사회가 처한 상황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우선 한국은 근대 능력주의의 조숙한 원형이 등장하고 오랫동안 지속된 동아시아의 두세 나라 가운데 하나다. 이 기억은 지금도 대학 입시나 대기업 입사 시험, 공무원 시험 등을 현대판 과거제도로 여기는 관성으로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양반신분제가 과거제도와 결합됐던 경험 역시 세습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설적인 결합이 재연될만한 예외적인 토양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에 이미 이렇게 오랜 능력주의의 역사가 있더라도 이것이 자본주의 현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남한은 처음부터 제2차 산업혁명이 도달한 결론을 학습하고 재연하는 방식으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국가가 주도해 포항제철을 만들고, 재벌 독점기업들을 키워 중화학공업에 진출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국가 관료기구와 기업 관료기구를 채울 인력이 대규모로 필요했다. 이는 먼저 산업화한 나라들과 달리 지식인-중간층과 노동계급이 동시에 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이런 지식인-중간층 수요를 충족시킬 사회적 기반도 급하게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대학이 빠르게 성장했고, 이를 통해 자격 증서를 획득하려는 젊은이들의 숫자도 충분했다. 농지 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민층은 마치 전후 복지국가의 노동계급 가족처럼 적어도 집안에 한 명은 대학에 보낼 여력을 확보했다.
이렇게 하여 20세기 말에 한국에서는 어느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지식인-중간층 집단이 성장했고, 그만큼 능력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될 만한 토대 역시 강력히 구축됐다. 영이 <능력주의>에서 제시한 IQ 테스트보다 훨씬 더 세련된 현대판 과거시험들을 통해 경제사회적 위치를 나누며 부와 권력을 배분하는 체계가 완성되어갔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중간층 역시 민주화 이후에 동시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 즉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에 올라타며 전 지구적인 지식인-중간층 대열에 합류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가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서구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도 이것과 노동계급 형성(혹은 탈-형성)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의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가 이미 고도화 단계에 접어들던 1980년대 말에야 사회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몇 년간을 돌아보면, 한국 사회에서도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속도는 지식인-중간층 헤게모니가 확산되는 속도에 종내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뒤늦게 타올랐던 노동운동조차 1997년 외환위기의 일격으로 기세가 꺾여 버렸다.
그렇다. 지식인-중간층 헤게모니가 유례없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절반쯤은 노동계급 쪽의 도전이 실패한 탓이었다. 지구자본주의의 오래 된 중심부에서 세기 전환기에 벌어진 것과 비슷한 상호작용이다. 다만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다. 오래 된 중심부에서는 한때 성장했던 노동계급 문화가 해체됐지만, 이 나라에서는 그런 문화가 채 등장도 하지 못하고 압살됐다. 현재는 똑같이 그런 문화가 부재하지만, 적어도 한 쪽에는 기억 정도는 살아 있다.
이런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잠정 결론은 능력주의 문제에서 한국은 (아마도 중국과 함께) 지구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서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능력주의가 심각하다면, 이는 과거제도의 기억 같은 전자본주의 유산이 너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런 기억은 강렬하다. 그러나 이는 다름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가 밟은 독특한 궤적 때문에 살아남아 재활용되고 번성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다른 사회가 100여 년은 훨씬 넘는 여정 끝에 도달한 결론, 즉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을 불과 한, 두 세대만에 그것도 가장 순도 높은 형태로 달성했다.
영미 자본주의보다 더 앞서간, 자본주의적 능력주의의 이상형이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더 투명한 능력 검정을 요구하는 이른바 "공정"론이 세습-능력주의 결합체를 더욱 강화하는 자기 모순적 주장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시험제도나 고등교육 체계에 대한 개혁론이 그것만으로는 무력한 제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진짜 과제는 우리도 모르는 새 도달하고 만 자본주의의 가장 첨단의 형태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이다.
그러려면 답해야 할 근본적 물음이 여전히 많다. 노동계급 문화가 부재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부재했던 사회에서 능력의 다원론은 어떻게 복구될 수 있는가? 지금이라도 우리는 21세기에 맞는 그런 대항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가? 나는 감히 능력주의 극복의 가능성이 온전히 이 물음들에 대한 답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음 글에서는 부족하나마 이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다./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프레시안 2021.01.21
일반고 황폐화’는 특목고 때문이 아니다
특목고·자사고 때문에 일반고가 황폐해졌다는 주장은 거짓이거나, 적어도 과장이다. 중학교 졸업자는 매년 45만명 안팎이다. 외고·국제고, 자사고, 과학고·영재학교 입학 정원은 약 2만2000명이다. 중졸자의 5%, 고작 고교 학급당 1~2명 차이 때문에 일반고가 ‘황폐화’되다니? 다만 서울로 한정하면 이명박 정부 때 워낙 많은 자사고를 지정해서 학급당 5명 정도 차이났다. 자사고가 밀집된 강북 일부 지역은 충격이 더 심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일반고 황폐화는 특목고·자사고 때문이 아니다.
이른바 ‘교실 붕괴’는 이미 1990년대에 시작되었다. 교실 붕괴의 첫 번째 원인은 ‘문화적 부조화’, 즉 체벌과 주입식 교육이 횡행하는 학교 문화와 풍요와 다양성을 맛보며 자란 신세대 사이의 미스매치다. 두 번째 원인은 ‘제도적 부조화’, 즉 인문계 비율이 급증함에 따른 적성과 교육과정 사이의 미스매치다. 여태까지 아무도 두 번째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
1980년 고등학생 중 인문계 대 실업계 비율은 55 대 45였다. 당시 만 15~17세 가운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비율(취학률)이 불과 48.8%였으므로, 해당 연령집단 중에서 인문계 교육을 받는 비율은 26.8%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불과 10년 뒤인 1990년에 인문계 교육을 받는 비율이 15~17세 인구의 51.2%로 늘어나고 이후 계속 증가해서 2018년 76.1%에 달한다.
실업계란 직업적(vocational)이라는 뜻이고, 인문계란 학문적(academic)이라는 뜻이다. ‘학문적’ 교육과정이 적성에 맞는 학생이 그토록 많을 리가 없다. 특히 서울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중학교에서 거의 꼴찌를 해도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인구의 12~14%에 달하는 ‘경계선 지능’ 학생들에게까지 획일적인 인문계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 아닐까? 왜 모든 선진국이 의무교육을 고등학교가 아닌 중학교까지로 설정하는지 숙고해 봐야 한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정책의 일환으로 실업계고를 육성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숙련노동자를 공급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세대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산업정책을 개발독재와 관치의 산물로 간주하고, 학부모가 원한다는 명분으로 인문계고 비율을 계속 높였다. 한국 교육의 양대 포퓰리즘이 바로 대학을 무분별하게 늘린 것과 인문계 비율을 지나치게 높인 것이다. 진보 교육계는 전자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라고 짚고 넘어가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오히려 특목고·자사고 탓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예고한 것처럼 2025년 외고·국제고·자사고를 모두 일반고로 전환한다면 고입 경쟁·사교육이 감소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고 사정이 그리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나마 수준별 이동수업이 허용될 때에는 좀 나았는데, 많은 진보 교육감들이 이를 금지하면서 사정이 악화되었다.
대안은? 첫째, 매년 1만명 이상이 직업계고(특성화고·마이스터로)에 지원했다가 불합격되는 점을 고려해 직업계고 정원을 늘려야 한다. 아울러 노동시장 수요를 외면해온 건설·인테리어 등의 분야로 교육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지금 이런 분야는 외국인 노동자에 의해 잠식되고 있다. 둘째, 매년 1만명 이상이 참여하고 있는 직업 특화 위탁교육을 더욱 늘리고 활성화해야 한다. 이것은 교육기간이 6개월 또는 1년이어서 그 효과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대책 없이 사회로 진출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고 폴리텍이나 전문대를 통해 학업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셋째, 현재 교육부가 준비 중인 ‘인문계’ 중심의 고교학점제를 대폭 확장하여 다양한 IT·외국어·경영·예술 관련 과목들을 개설해야 한다. 이를테면 관광 가이드가 되려는 학생이 일본어와 사진을 선택하고, 택배 배달원이 되려는 학생이 운전과 기초 회계·세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원격교육을 활용하면 당장도 시작할 수 있다. 아울러 과목별 필수이수단위를 해제하여 이를테면 고1부터 수학을 이수하지 않을 선택권을 줘야 한다.
물론 교육부와 교육청은 아무것도 안 할 가능성이 높다. 뼛속까지 ‘인문계’맨이고, 이것 자체가 기득권이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경향 2021.01.21
'26채 집부자' 종부세 0원...이재명의 '종부세 합산배제 개정' 요구가 옳다
'종부세 합산배제'만 폐지하면 '수 조원 종부세 탈루' 막을 수 있다
며칠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정부에 매우 흥미로운 건의를 했다. 경기도에서 주택을 26채나 소유한 사람이 종부세를 1원도 안 내는데, 이런 불합리한 정책을 바로잡아달라는 요청이었다.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한 부분이 있다. '합산배제'라는 생소한 법률용어 때문이다. 이재명 지사는 합산배제 조항을 개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종합부동산세법 시행령 제3조(합산배제 임대주택)는 종부세 합산배제 대상으로 '주택임대업 사업자등록을 한 자가 임대하거나 소유하고 있는 주택'을 포함하고 있다. 합산배제란 '비과세'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현행 대통령령에 의하면 주택을 수십 채 혹은 수백 채를 소유해도 임대주택으로 등록만 하면 종부세를 1원도 안 낸다.
경기도 26채 주택 소유자 종부세 0원
이 합산배제 조항만 폐지하면 26채 주택 소유자에 대해 상당한 금액의 종부세를 부과할 수 있게 된다. 이재명 지사는 종부세 세수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달라는 지극히 당연한 요청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요청에 대해 정부와 청와대는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올해 11월에도 26채 소유한 다주택자에게는 종부세고지서가 아예 발부조차 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26채 주택을 소유한 사람은 주택 최다소유자 명단에 끼지도 못한다. 얼마 전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전국에서 임대주택을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등록한 임대주택이 753채였다.
국토부는 753채의 세부내역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으나, 그가 거주하는 곳이 서초구이므로 753채 대부분이 서울 소재 주택일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 주택의 평균가격인 7억원으로 계산하면 총 5,271억원이고, 5억원으로만 계산해도 3700억원이 넘는다. 작년 7.10대책에서 종부세를 대폭 인상했다. 시가 기준 130억원이 넘는 주택소유자는 종부세율 6%를 부과한다. 주택가액이 3700억원이면 종부세는 약 220억원이다.
그런데 합산배제 조항 때문에 753채 주택 소유자가 종부세를 1원도 안 내고, 국가는 220억원의 세수를 포기해야 한다. 실로 경악할 일이 아닌가.
주택 최다소유자 3명에게 약 500억원 종부세 감면
임대주택 등록 2위와 3위는 각각 591채와 586채를 등록했다. 이들의 거주지가 강서구와 마포구이므로 591채와 586채의 대부분이 서울에 소재할 것으로 추측된다. 주택 평균가격을 5억원으로 계산하면 두 사람의 주택가액은 각각 2,955억원과 2,930억원이다. 이 주택들 역시 합산배제 대상이므로 이 두 사람은 종부세를 1원도 안 낸다.
대통령령을 개정하여 '합산배제' 문구만 삭제하면 이들 3명에게서만 종부세 세수수입이 500억원 이상 늘어난다. 실로 엄청난 금액이다. 이 금액을 정부가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전국에 등록된 주택임대사업자는 작년 3월말 현재 51만명이고, 그들이 등록한 임대주택은 157만채에 달한다. 그 상세내역을 공개하지 않아서 정확한 금액을 계산할 수 없으나, 이들에게 감면해주는 종부세액은 매년 수 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명예교수는 "정부가 임대사업자들에게 최대 10조원이 넘을 수도 있는 종부세 감면 혜택을 주고 있다"고 추정했다.
종부세 세수 포기 최대 10조원
정부는 이런 엄청난 세금특혜를 베푸는 이유로 ‘서민의 주거안정’을 말한다. 문재인정부가 2017년 12월 13일 발표한 '임대주택등록 활성화방안'은 "전월세주택 세입자의 주거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집주인에게 엄청난 세금특혜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작년 11월 21일 '집값정상화 시민행동'이 청와대에서 "집값을 원상회복시키라"는 기자회견을 열고, 임대사업자 세금특혜를 전면 폐지하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이 기자회견에 대해 12월 16일 국토부가 답변서를 보냈는데, "임차가구의 주거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적 전월세 주택을 임대기간이 보장되고, 임대료 인상이 제한되는 등록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임대사업자 등록제도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임차인이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임대료를 5% 이내로 인상해야 하는 희생(?)의 대가로 임대사업자들에게 엄청난 세금특혜를 계속 베풀겠다는 것이 국토부의 입장이다.
대통령 결정이 매년 수 조원의 세수 좌우해
그 5% 상한마저도 임대차 3법의 시행으로 모든 주택에 적용되고 있다. 임대사업자의 희생이라고 할 만한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데도 세금특혜는 유지하겠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임대사업자에 대한 종부세 감면이 매년 10조원일지 아니면 그보다 적은 금액일지 정확한 금액을 계산할 수 없지만, 그 금액을 감면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
때마침 이재명지사가 이런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정부도 더이상 모른 체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야당의 반대로 시행이 어렵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맘만 먹으면 당장 오늘이라도 시행할 수 있는 사안이다.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매년 수 조원의 세수가 좌우되는 만큼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모든 국민이 대통령의 결정을 지켜보고 있다.
송기균 송기균경제연구소장 프레시안 2021.01.22
대북전단, 프레임에 감춰진 진실
프레임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다.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을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한 번 프레임이 형성되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람은 프레임에 부합하는 사실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프레임에 의해 사실이 왜곡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대북전단에 대한 공론장에서, 때로는 진실보다 프레임이 더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를 보면서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일부 정치인과 보수언론, 그리고 대북전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단체들이 만든 프레임이 감추고 왜곡하는 대북전단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 ‘대북전단금지법’ 프레임이다. ‘대북전단금지법’이란 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문가들도 잘못된 프레임으로 인해 이런 법률이 제정됐다고 오인하고 있다. 전단 규제는 2020년 12월 공포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 개정안에 일부 요소로 규정돼 있을 뿐이다. 또한 개정법률이 대북전단만을 규제하는 것도 아니며, 전단을 살포했다고 바로 처벌받는 것도 아니다. 이 법률은 국민의 생명·안전을 침해하고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군사분계선 일대 확성기 방송과 게시물 게시, 전단 등 살포라는 3개의 극단적 표현행위만 금지하고 있다. 그것도 국민의 생명·신체에 위해를 끼치거나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때만 벌칙을 부과하도록 엄격하게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둘째, ‘북한인권운동 금지’ 프레임이다. 이들은 대북전단만이 북한 인권을 증진하는 방법이라고 강변하며, 대북전단 규제는 북한인권운동 금지 조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북전단이 아니더라도 북한 인권에 기여할 방법이 많다. 휴대폰 600여만대가 보급되고, 400여개 장마당이 열리고 있는 북한 사회에서 대북전단은 비웃음을 살 뿐이다. 수준 높은 한류 드라마·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 지도부를 조잡하게 합성한 음란사진이나 가짜뉴스를 담은 전단은 오히려 반감과 부정적 인식만을 남길 뿐이다.
셋째, ‘선택적 인권’ 프레임이다. 전단 관련 단체와 보수언론, 일부 정치세력은 북한 주민의 인권 증진을 외치면서 전단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대북전단으로 생명까지 위협받는 112만 접경지역 우리 국민의 인권은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한다. 파주 통일촌 주민들은 2020년 8월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에게 제출한 진정서에서 전단 살포로 인해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학생들은 등교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전단 단체들은 마치 접경지역 국민의 생명권과 생존권, 어린이들 학습권마저 짓밟을 ‘특권’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헌법이나 유엔인권규약 등 어디에도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권과 생존권을 침해할 ‘권리’나 ‘특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보수언론과 일부 정치세력은 이런 자명한 사실조차 외면한 채, 전단 단체들의 ‘특권’을 정당화하고 옹호하고 있다.
넷째, ‘해외인사들의 대북전단 지지’ 프레임이다. 이들은 해외인사들이 대북전단 규제에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외 대북전단 단체와 이들과 연계된 언론들은 세계 각국에 왜곡한 법 내용을 선전하고, 입장표명을 요구하며 대한민국을 비방하고 있다. 미국 하원의원 중에서도 독불장군으로 이름난 크리스 스미스는 우리 정부를 비방하고, 전단 규제는 물론 코로나19 방역조치까지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대북전단 단체와 언론·정치세력은 대한민국을 모독하는 스미스를 치켜세우고 있다. 1월19일 기준 미국의 코로나19 감염자는 인구 규모를 고려해도 한국의 50배, 사망자는 47배 이상 많다. 우리의 엄격한 방역조치를 비난하는 스미스는 한국인은 물론 미국인의 생명권마저 경시하는 반인권적 인사일 뿐이다. 대북전단 규제와 방역조치를 비난하는 스미스를 옹호하는 보수언론과 정치세력도 우리 국민의 생명권과 생존권을 경시하는 반인권적 집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베를린자유대 이은정 교수는 최근 언론기고에서 1960년대 서독연방군이 극비리에 동독으로 전단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슈피겔’ 등 서독 언론들은 민주주의에 흠집 낸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지금도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돼 있다고 언급했다. 1965년 6월 헤센주 내무장관은 전단 살포를 금지하면서 ‘전단 살포는 정보전달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 의미 없는 행위이며, 동독 주민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접경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이해관계 때문에 대북전단을 옹호하는 보수언론과 일부 정치세력, 관련 단체들에 1960년대 서독인 수준의 양식과 염치를 기대하는 것은 과한 것인가.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 경향 : 2021.01.23
‘외교실패론’의 근거를 묻는다
시간이 빠르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는 이제 1년5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 3년7개월이 흡사 롤러코스터처럼 흘러갔다. 2017년의 위기에서 출발해 2018년 희망의 한해를 만들었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좌절하면서 한반도는 다시 얼어붙었다. 출구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안과 밖에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도 거세진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 언론의 이른바 외교 실패론이다. 동의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가 애초 내세웠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과제가 단기간에 이룰 수 없는 일임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이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에서 이룬 것도 많다. 판문점 선언과 평양 선언, 남북 군사합의서를 채택했고, 이로 인해 천안함 사태나 연평도 포격, 목함지뢰 같은 군사적 위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구두와 서면으로 북측 지도자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고 싱가포르와 하노이 회동을 가능케 한 것은 결코 사소한 성과가 아니다. 북한의 핵 보유가 본격화된 이래 역대 어느 정부가 이 정도 성과를 냈는가. 비핵화와 평화를 모색했던 2018년의 외교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더욱이 파탄났다는 한-미 동맹은 여전히 견고하고, 중국과의 관계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 양자뿐 아니라 다자외교에서 이룬 성과도 적지 않다. 코로나 사태가 없었다면 운신의 폭은 더 넓었을 것이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다음으로 일부 일본 언론인과 보수 논객들은 문 대통령의 포퓰리즘이 한-일 관계를 망쳤다고 비판한다. 여기에는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문제를 대통령이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실과 다르다. 지지율이 고공행진하던 임기 초부터 지금까지 문 대통령은 일관된 태도를 지켜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초기부터 역사 문제는 우리 국민에게 집단 기억과 상처로 남아 있으므로 치유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따라서 역사 문제는 국민적 합의를 구하면서 점진적으로 풀어나가고, 북핵, 중국의 부상, 경제협력 등 시급한 전략적 사안부터 협력을 논의하자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이들 분야에서 성공적 협력이 이루어지면 국민을 설득하기도 쉬워진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일본 지도부는 역사 문제의 선결 없이 한-일 협력이 불가능하다는 태도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만 하더라도 김정은 총비서는 아무 조건 없이 만날 용의가 있다면서도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는 징용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참석할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한국은 삼권분립이 명확한 민주주의 국가다. 행정부가 사법부 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다. 더욱이 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시절부터 피해자 중심주의를 주장해왔다. 민주주의 제도와 원칙에 입각한 이러한 외교정책의 어디에 포퓰리즘이 자리하고 있는지 수긍하기 어렵다.
세번째는 최근 등장한 미국 언론의 비판이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 살포 금지의 기준, 대상, 주체, 방법 등을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있어 우리 국민은 물론 외국인의 기본권까지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해 일부 인사들이 헌법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했으니 최종 판단을 지켜볼 일이지만, 그 입법 취지를 복기해 보면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표현의 자유와 북한 인권의 증진이라는 보편적 가치 못지않게 200만 접경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법을 입안한 의원들은 남북이 전단살포를 포함해 상호 비방을 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이행을 위해서도 해당 법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살포전단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이미 오랜 기간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전단과 시디(CD), 달러화 등이 북측 지역에 얼마나 도착하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처벌을 두려워하는 주민들은 전단을 발견하면 곧바로 당국에 신고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한계가 명확한 행동을, 접경지역 주민의 불안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부 인사들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방임하는 게 정부의 적절한 태도인가. ‘국제 인권규범과 한국의 주권 사이의 충돌’이라는 일각의 프레임이 지나친 과장이라는 생각을 피하기 어렵다.
비판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그 비판은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편견과 억측, 매도를 위한 비판은 민주주의를 권력투쟁의 비극으로 끌어내릴 뿐이다. 앞으로의 1년5개월간 한국 외교가 성과를 이뤄내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무엇보다 책임있는 비판이 필요하다.
문정인 ㅣ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한겨레 2021.01.24.
내팽개친 노무현의 유산,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2003년 2월 25일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대통령기록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그 공약이 실현됐음에도, 그 이후 잊혀져버린 것이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료집단과 기득권세력에 의해 내팽겨쳐졌고, 정치적 무관심속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도입하겠다고 공약했다.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는 꼼수를 동원한 변칙적인 증여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과세를 할 수 있는 개념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시민단체들이 주장하고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던 정책이었다.
노무현은 찬성, 이회창·정몽준은 반대
당시의 세법상으로는 A유형의 변칙증여가 등장하면 세법을 고쳐서 A유형에 대해 과세하고, 다시 B유형의 변칙증여가 등장하면 세법을 고쳐서 B유형에 대해 과세하는 식이었다. 이런 방식은 당연히 ‘사후약방문’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날로 진화하는 변칙증여 수법들을 뒤늦게 따라가면서 세법을 개정해서 과세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법적인 허점을 이용해 재벌뿐만 아니라 재산을 많이 가진 자산가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자식세대에게 부를 물려주고 있었다. 단 16억 원의 증여세를 내고 수천억 원 이상의 부를 물려받았던 이재용 삼성 부회장같은 사례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였다. 어떤 명목이나 행위 유형을 택하든 간에 실질적으로 ‘부의 무상 이전’이 발생한 경우에는 상속·증여세를 납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영화 노무현과 바보들 스틸컷 2002년 대선 선거 운동 모습ⓒ(주)바보들 제공
2002년 10월 8일 당시 대통령 후보신분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를 채택하겠다고 발표하자, 뜨거운 논란이 일어났다. 노무현 후보는 부당한 부의 세습을 근절하기 위해 상속·증여세의 ‘완전 포괄주의’를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경쟁후보였던 이회창 후보, 정몽준 후보측은 반대하고 나섰다. 전경련과 보수적인 학자,전문가들도 ‘위헌’이라면서 반대주장을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 이후에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3년 한 해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참여연대에서 조세개혁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필자도 찬성측 입장에서 논쟁에 참여했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2003년 12월 9일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상속세및증여세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도입과 함께 무력화된 완전포괄주의
이로써 온갖 꼼수와 편법을 동원해서 재산을 무상으로 물려주려던 일부 재벌들, 재산가들의 행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에 관한 얘기는 쑥 들어갔다.
국세청이 과연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제대로 적용하고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과세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국세청의 행태 때문에 실상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2012년 감사원이 완전포괄주의 과세실태에 대해 감사를 실시하고 2013년 그 결과를 발표했다. 2004년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가 도입된 이후에 과세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에 대해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등을 감사한 것이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2004년 이후 9년 동안 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적용해서 과세한 사례는 16건에 432억 원에 불과했다. 특히 완전포괄주의가 도입된 이후에 유행하고 있던 새로운 형태의 변칙증여에 대해서는 손을 놓고 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1.01.18ⓒ김철수 기자
대기업의 지배주주들이 자녀들이 보유하고 있는 비상장회사에 ‘일감몰아주기’, ‘일감떼어주기’로 변칙증여를 하고 있는데 국세청은 손을 놓고 있었다. ‘관련 법령에 증여시기, 증여이익산정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조사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획재정부는 ‘국세청이 판단할 사항’이라면서 손을 놓고 있었다. 뒤늦게 기획재정부는 2011년 일감몰아주기에 대해서만 증여세를 과세하는 조항을 신설한 정도였다
한마디로 국세청은 ‘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휴짓조각으로 만드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었고, 기획재정부는 이를 알고도 손놓고 있었던 것이다.
완전포괄주의 과세실적에 관한 정보도 없다?
그리고 또다시 많은 세월이 흘렀다. 2015년 기획재정부는 일감떼어주기에 대해 증여세 과세조항을 신설했다. 완전포괄주의를 제대로 적용하면 당연히 과세대상일 수 있는 행위이지만, 개별조항을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조항들은 제대로 적용되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개별조항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완전포괄주의에 의해 변칙증여에 대해 과세를 하고 있을까?
최근 전봉민의원 사건이 드러나면서 이런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전봉민 의원의 경우에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건설회사들간의 일감몰아주기, 일감떼어주기를 통해 6억8천3백만 원을 주고 취득한 주식가치가 858억 원까지 뛰어서 문제가 됐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 증여세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일감몰아주기, 일감떼어주기 조항에 의한 과세실태와 함께 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적용해서 과세한 실적이 어느 정도 되는지에 대해 국세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그러나 국세청의 답변을 받아보고 필자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정보부존재’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료ⓒ기타
국세청은 일감몰아주기 과세실적의 경우에는 국세통계연보를 보라는 것이니,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2016년부터 적용되는 일감떼어주기 증여의제조항의 경우에는 과세실적에 관한 자료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적용해서 과세한 실적에 대해서도 자료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세청이 변칙증여를 근절할 의지도 없고, 최소한의 정보도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말 실망스러운 행태이다. 2016년 가을부터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원했던 것은 ‘최소한의 공정’이었다. 그런데 세금도 내지 않고 부를 물려주는 행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그것에 대해 법집행을 해야 할 국세청은 자료관리도 하지 않고 있다.
완전포괄주의 도입을 주장하고 관철시켰던 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문재인 정부는 정말 정신차려야 한다. 국세청, 기획재정부같은 관료조직에 맡겨놓을 일이 아니다. 범 정부 차원에서 ‘정부합동 변칙증여 실태조사단’같은 것을 구성하고, 변칙증여를 뿌리 뽑을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부여당은 휴지조각이 된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살릴 대책도 시급하게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하승수(변호사,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민중의 소리 2021-01-24
김진숙과 송경동의 요청
한 사람은 작년에 암 선고를 받았지만 치료를 중단한 채 겨울의 산하를 걷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30일 넘게 시멘트 바닥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 둘 다 장년의 나이다. 좀 알려진 대로 이들의 요구는 단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복직과 명예회복이 아니며, 단지 한진중공업 노사 간의 문제도 아니다.
2007년에 나온 김진숙의 산문집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를 처음 읽었을 때의 전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책은 1960년 강화에서 태어난 시골 소녀가 어떻게 부산 영도까지 가서 거대 조선소의 용접공이 되었고 또 왜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왜 그 생애의 3분의 2나 되는 시간을 어렵고 외로운 싸움에 바쳐야 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의 현장에서 만난 운동가들, 그리고 그가 집회 현장이나 ‘노동 열사’들을 떠나보내면서 한 말들을 묶었다.
나는 <소금꽃나무>가 2000년대 한국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산문집이자 문학서의 하나라 생각한다. 강렬한 주제와 절절한 문장으로 쓴 이 책은 나뿐 아니라 많은 문학사·문화사·여성사 연구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1960~1980년대의 젊은 여성들은 가정에서부터 차별을 견디며 교육 기회를 동생이나 오빠에게 양보하고, 직장과 생활세계의 일상적 폭력과 차별을 견디며 ‘산업 전사’가 되어야 했다. 그러다 그중 일부는 일하다 죽고 부당해고당하는 동료들을 보며 어느날 각성한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싸운다.
이런 스토리는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너무 전형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의 부도, 민주주의도 없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특히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의 ‘민주정부’와 거기 발 담근 남자들은 더 큰 빚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리고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은 산업체 학급, 야학, 독서모임 등에서 공부하고자 열망했다.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것은 민중의 자기구원이자 자기계몽이며, 동시에 이젠 없는 노학, 지성과 노동의 연대였다. 나는 이를 한국 지성사와 문화 민주주의 역사의 요체라 믿고 있다.
근 40일째 단식 중인 시인 송경동도 비슷하겠다. 2016~2017년 촛불항쟁의 반블랙리스트 예술가 행동의 주역이며 ‘꿀잠 비정규노동자 쉼터’를 만든 그는 특히 586세대와 지식층이 새겨 두어야 하는 시를 쓴 적 있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을 새삼 적어본다.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중략)/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시는 학력·학벌주의에 물든 ‘진보’ 지식인들과 그들의 네트워크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발표한 지 10년이 된 시는 자칭 ‘맑스주의자’나 ‘민족해방주의자’였던 사람들이 권력과 부를 누리는 이 불평등 사회에서 양심과 윤리의 상태를 반성하게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시는 무엇이 보편적인 이념이고 실질적 평등이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아직도 밥을 굶거나 고공타워에 올라가거나, 또 그렇게 몸과 건강을 깎고 목숨마저 담보로 싸워야만 비로소 작은 목소리라도 들리는 이 오랜 한국의 딜레마와 지배의 잔인함이 원망스럽다.
여전히 노동운동에 대한 혐오와 노동운동가들에 대한 편견이 너무 두껍다. 바로 그 자신의 어미·아비가 박정희시대로부터, 또 저 자신과 동료들이 오늘도, 그렇게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또 오히려 쫓겨나고, 또 ‘빨갱이’라고 불리고 내몰리는데도 말이다.
희생당한 수많은 ‘산업전사’들과 오늘의 4000만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그들이 싸우고 있다. 김진숙의 복직으로부터, 노조를 만들거나 노조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가해졌던 부당해고와 국가폭력에 대한 회고와 성찰이 크게 번져가기를 바란다. 노사 문제에 있어서도 ‘과거 청산’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에는 ‘노동 존중’을 실천으로 보여줄 큰 기회다.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경향 2021-01-28
지지율과 정치공학 아닌 '진정성'과 '초심의 소박함'이 필요하다
'초심'을 잃지 않고 '기본'을 돌아볼 일이다
거듭되는 부동산가격 폭등 현상이야말로 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 하락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간 부동산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토지공개념에 기반한 다주택자 규제 제도, 후분양제, 분양가 공개 등의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대책이 취약했다. 대신 토건세력과 그와 연계된 보수언론의 공세에 수세적으로 몰리면서 공급 확대나 용적률 완화, 아니면 세제 감면 등 임시변통의 조치를 내놓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오히려 부동산에 대한 격렬한 투기수요를 불러일으켜 매번 어김없이 집값만 올리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시적 조치들은 결국 투기꾼과 토건세력들의 극대 이익만을 보장해주는 최악의 그림만을 낳았다.
최근의 중대재해처벌법도 근본적인 생명 중시의 희생 방지 대책이 아니라 기업과 관료들의 시각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용두사미, 결국 법의 실효성은 약화되고 당의 정체성은 크게 의심받게 되고 말았다.
<논어>는 “인무원려, 필유근우(人無遠慮, 必有近憂)”라고 했다. “원대한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
우리 사회 최후의 버팀목으로서의 ‘기본’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를 야기시킨 근본적인 요인은 우리 사회에서 ‘기본’과 ‘원칙’이 충실히 지켜지지 않고, 많은 경우 도리어 무시되고 경시하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준(基準)’이나 ‘표준(標準)’의 의미를 지니는 영어 ‘standard’는 원래 ‘군기(軍旗)’라는 뜻으로서 중세시대 전쟁에서 병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꼿꼿하게 박아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결전을 치르도록 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 군기가 쓰러지면 병사들은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고 패퇴해야만 했다. 따라서 ‘standard’라는 단어는 전쟁터의 용사들이 적의 어떠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꼿꼿이 버티는 자세에 적용되어, ‘최후의 저항, 반항, 확고한 입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기준’, 혹은 ‘표준’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standard’는 사회의 최후의 버팀목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준’이 무너지게 되면 전체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또 ‘기준’과 ‘원칙’을 나타내는 ‘principle’의 어원은 라틴어 ‘principium’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그 의미는 ‘시작’, 또는 ‘근원’이다. 사실 ‘법’을 뜻하는 ‘law’의 어원도 ‘origin’으로서 ‘근원’이다. ‘규칙’을 말하는 ‘rule’의 어원은 “똑바로 가다”에서 비롯되었다. ‘시작’ 또는 ‘근원’이 없으면, 그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렇듯 ‘기준’이나 ‘원칙’은 ‘근원’ 혹은 ‘똑바로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작위의 정치공학을 버리고 ‘초심의 소박함’을
정부와 여당은 집권한 당일 바로 그날로부터 무엇을 하든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그 눈과 귀는 온통 ‘지지율’과 각종 선거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지지율의 변동에 집착하여 수동적으로 일희일비하거나 선거의 유불리에 사로잡혀 작위적인 정치공학에 의존한다면, 결코 신뢰를 얻을 수 없고 레임덕도 피하기 어렵다.
현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던 ‘시작’과 ‘근원’은 바로 촛불항쟁이다. 따라서 정부는 촛불시민들이 무엇을 위해 엄동설한 그 모진 추위에도 광장에서 외쳤던가를 언제나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초심’을 잃지 않고 견지하면서 똑바로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전략목표 하에서 어떤 정책, 어느 조치를 시행하든 언제나 그 가이드라인 혹은 기준으로 삼아나가야 할 일이다. 이 과제의 수행이야말로 현 정부에 부여된 역사적 책무이며 시대적 사명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코로나 19라는 엄중한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데도 이러한 관점과 방향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그 성과가 크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표피적인 지지율이 아니라 바로 ‘진정성’이 중요하며, 작위의 정치공학이 아니라 오히려 ‘초심’에 충실한 ‘소박함’이 필요한 때다.
신종여시, 즉무패사(愼終如始, 則無敗事). 시작할 때와 같이 끝맺음도 신중히 하면 실패하는 일이 없다. 노자의 가르침이다./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 프레시안 2021.01.30
정말 결국, 케이블카?
‘청천벽력’, 맑게 갠 하늘에서 치는 날벼락이라는 뜻이다. 물론 뜻밖에 일어난 큰 재앙이나 사건을 의미한다. 요즘처럼 소위 기상이변 현상이 더 이상 이변이 아닌 시대에는 좀 안 어울리는 비유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맑은 하늘에서 날벼락을 보기란 여전히 매우 드문 일이다. 그만큼 청천벽력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최근의 그 일을 묘사하는 데.
코로나19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이미 1년 이상 지속된 일이고 앞으로도 별로 수그러들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인류가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걸 보면 그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다고 치자. 다른 뉴스에 파묻혀 잘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최근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사건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바로 설악산 케이블카 재추진 결정이다.
‘엥? 난 또 뭐라고’ 하며 눈을 돌리려 했다면 잠깐 멈추어 사안을 돌아보길 강력히 권고한다. 이것은 그저 개발 대 보존 입장이 격돌한 여러 한판 승부 중 하나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비통하고, 황망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것이 21세기 지금 시점에서 일어난 것은 더더욱 추가적인 충격이다.
생각해보라.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해가 1970년, 이제 50년이 막 지났다. 하지만 같은 해에 이미 권금성을 오르내리는 첫 케이블카가 완공되었다. 국립공원이 되자마자 케이블카 논란이 일었다가 불과 10여년 후인 1982년에 오색과 대청봉을 잇는 케이블카가 또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40년간이나 이어져온 문제의 케이블카다. 한마디로 설악산은 국립공원으로서 생애 내내 케이블카에 시달려온 것이다.
강산이 네 번은 바뀌는 40년. 정권이 5년마다 바뀐다고 치면 여덟 번이나 정권교체가 됐을 기간이다. 그동안 수많은 엎치락뒤치락이 있었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두 번째 케이블카는 허락되지 않았다. 설악산이 지금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이유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 정부와 세대에 걸쳐 설악산을 그대로 두자는 결론에 결국 수차례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그 정도면 매우 일관된 노선을 걸은 셈이다. 설악산에 케이블카는 하나로 족하다고, 더 이상의 자연 훼손은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같은 사업이 40년 동안 여러 정부 아래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실패했다면 당연히 퇴출돼야 한다. 진작에 삼진 아웃제가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사법시험도 4회로 응시를 제한한 마당에 말이다. 아니, 반복적으로 같은 걸 밀어붙이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 책임을 물어야 할 판이다. 그런데 오히려 긴 세월 동안 일관되게 보호 결정이 내려진 사안을 행정심판위원회의 재판관 몇 명이 뒤집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산양 서식지로서의 중요성과 같은 전문 과학 분야에 대해 행정심판의 기구가 임의로 판단을 해버린 것이다. 필자를 포함하여 수많은 과학자가 그곳이 산양의 서식지임을 논증했고 번식의 증거까지 있는 마당에 말이다. 그 수많았던 “노!”가 이 마지막 한 번의 “예스!”에 의해 그렇게 쉽게 뒤집혀도 좋다는 것인가?
케이블카가 장애인과 노약자 등 교통약자의 문화향유권을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은, 적어도 설악산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 이미 한 대 있지 않은가? 오색과 대청봉 사이마저 꼭 연결되어야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 논리에 따르면 전국 산천 어디든 대규모 토목공사에 기반한 교통 인프라를 설치해도 된다는 것 아닌가?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후변화의 위기 속에서 전세계가 지속가능한 변화를 일구려고 노력하는 이 판국에, 시대를 역행하는 케이블카는 반드시 퇴출돼야 한다.
김산하 ㅣ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 한겨레 :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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