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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4.1~29 불로소득이 판치는 세상과 학교 공부

by 이성근 2021. 5. 4.

다수결 투표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

혐오를 선동하는 정치

사유리와 정상가족 신화

가난은 대물림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도 짱돌은 던져져야 한다

모든 불륜의 시작은 로맨스였다

부동산, 강남, 계급 투표

불평등과 큰 정부의 시대증세가 다가오고 있다

내년 대선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불로소득이 판치는 세상과 학교 공부

나경원, 혹은 나경영을 응원하며

한국 586, 프랑스 68세대 따라가나?

민주당 집권, 다시 볼 수 있을까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부자증세 시대가 온다

바보처럼 사는당신을 지지하며

인구 감소 시대 두 지역 살기

대통령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있나

산림파괴청은 당장 멈춰라

종부세 역주행이 부를 역풍

동포들을 차별하는 나라

소다 넣은 밀가루빵 같은 아파트값

21세기 부동산 봉건사회

 

 

다수결 투표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

우리는 무언가를 결정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때가 많다. 이때마다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 다수결투표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들은 다수결투표 결과가 맘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많은 경제학자들은 과반수투표가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한계점을 일찍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197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 교수가 제시한 불가능성의 정리(impossibility theorem)’ 이론이다. 완벽한 의사결정 방식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민주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집단의 의사결정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런 의사결정 방식은 없다는 것이다. 즉 효율적 의사결정 방식은 민주적이지 못하거나, 반대로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큰형, 작은형, 누나, 나 그리고 동생까지 포함해서 총 9명의 식구가 투표를 통해 새로 이사할 동네를 결정하기로 했다고 하자. 그런데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은 오래전에 거주했던 동네인 강북 지역을 가장 선호하고 뒤이어 강남, 강서 순서로 선호도를 보였다. 반면 형들과 누나는 친구들과 놀기 편한 강남 지역을 가장 선호했으며 뒤이어 강서, 강북 순으로 선호도를 보였다. 나와 동생은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강서 지역을 가장 선호했으며 뒤이어 강남, 강북 순으로 선호도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당 가족이 다수결로 이사 지역을 결정하면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1순위로 선호하는 강북으로 결정될 것이다. 일견 이러한 의사결정은 온 가족의 민주적인 다수결투표에 의한 내용이므로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강북 지역으로 이사하는 것이 정말 이 가족이 원하는 결과일까? 만약 나와 동생이 강서 지역을 투표 후보군에서 빼자고 주장하여 강북과 강남만을 두고 투표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는 기존대로 강북에 투표할 것이며, 누나와 두 형은 강남에 투표할 것이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강서 지역이 없어졌기 때문에 2순위에 해당하는 강남에 투표하여, 결국 투표 결과는 강북 4, 강남 5명으로 뒤바뀌게 된다. 이번에는 누나와 두 형이 동생들을 위해 자신들이 선호하는 강남 지역을 배제하고 투표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누나와 형들은 자신들이 2순위로 선호하는 강서 지역에 투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강서 5, 강북 4명으로 투표 결과가 다시 뒤바뀐다.

 

이는 이들 가족 대부분이 실제로는 강북보다 강남이나 강서 지역을 더욱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세 지역을 대상으로 한 투표 결과 이러한 개인의 선호와는 상반된 강북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민주적인 방식의 가족 투표 결과가 가족들의 선호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우리는 왜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우리 동네 대표가 맘에 안 드는지, 왜 민주적인 가족 투표 방식으로 선택한 이사 지역이 마음에 안 드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케네스 애로 교수의 불가능성의 정리는 단순 다수결투표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활용하고 있는 다양한 의사결정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하고 이상적인 방식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완벽한 의사결정 방식은 애당초 기대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다 개선된 투표제도 내지 집단 의사결정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밤새 연구하는 학자가 수없이 많다. 언젠가 또 다른 천재 경제학자가 등장해 만족할 만한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제시해주길 고대해본다./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경향 2021.04.01

 

봄의 정치

봄의 정치는 지인 고영민 시인의 표제작이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4월 재·보궐 선거 끝자락에 불현듯 봄의 정치를 묻고 싶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 구상했던 이 시는 2년 전 출간됐다. 그와 오랜만에 통화했다. “봄이란 말만 들어도 따뜻해지잖아. 물론 현실 정치는 봄이 아니지. 그래도 조금씩 따뜻해지면서 봄을 향해 나아가는 거지.” 정치가 암흑기였던 그때, 그는 시민들의 분노를 미래라 읽었고 봄이라 불렀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4월 재·보선은 봄의 정치로 가는 길을 잃었다. 아니, 퇴행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박원순 전 시장의 성범죄가 촉발했다. 그러나 여권은 권력 자산을 총동원해 박 전 시장 옹호에 나섰다. ‘박원순의 향기라는 말에선 그의 공을 그의 가해 행위를 지우는 데 이용하려는 결기가 읽힌다. 한쪽에선 피해자에게 하필 왜 지금 기자회견을 하냐며 의도를 묻는다. 자신의 일로 치러지는 선거에, 표가 걸린 선거 때 아니면 들은 체도 않는 정치권을 상대로 피해자가 정치적으로 구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진짜비극의 탄생이다. 박 전 시장 사건 이후 온 사회가 성찰했던 성평등·젠더 문제는 흔적조차 사라졌다. 가부장제 사회의 정상가족규범을 따르는 조강지처란 말이 등장했고, 여기에 버린다는 수식어를 붙여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대상으로 끌어내렸다. 여성 후보를 엄마 리더십 틀에 가두고, 아줌마라 공격하는 몰상식한 발언까지 나왔다. 아마 남성 후보였다면 세대와 시대를 대표하는 기수론의 주인공으로 추어올렸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서울의 미래가 달린 생태적 성찰 대신 규제완화와 대규모 개발 공약만 난무한다. 심지어 12년 전 여섯 명이 사망한 용산참사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후보는 사태 본질을 임차인들의 폭력적 저항이라고 왜곡했다. 용산참사는 난개발 사업이 빚은 비극이다. 이 후보는 당선되면 일주일, 한 달 안에 재개발 규제를 풀겠다고 공약했다.

 

여야의 백래시 경쟁은 토머스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에 가까운 선거를 만들고 있다. 이 상황에서 민심의 분노는 더불어민주당을 향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찬반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가 됐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유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가 있긴 했지만 왜 우리가 일방적으로 책임져야 하냐고 항변한다. 사람들이 왜 민주당에 더 많이 화를 내는지, 왜 더 큰 책임을 묻는지 그들의 표정만 볼 게 아니라면 탄핵 이후 정치의 맥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탄핵은 야 3당 공조 체제 때문에 가능했다. 박근혜 정부의 독주, 우편향 국정교과서 추진 등 일방통행 정책도 권력을 끌어내린 요인이라는 점에서 탄핵 정신은 다원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은 권력의 집중을 강화시킨다고 했던 토크빌의 말이 예언이 될 줄이야. 집권 이후 민주당은 야당을 적폐세력으로 간주하고, 위성정당 창당으로 다당제를 허물었다. 탄핵 동맹 붕괴는 제3정당 소멸뿐 아니라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세력으로 회귀하는 후과도 초래했다. 총선 이후 양극화한 양당제가 공고해졌고 오로지 밀어붙이기 아니면 발목잡기 옵션만 있는 강대강 대치가 이어졌다. 양극화한 양당제는 정치가 감당해야 할 다양한 의제를 원천봉쇄했다. 여기에 검찰개혁, 적폐청산을 둘러싼 갈등은 거대 정당의 극한 대립에 정치와 법치의 갈등을 추가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유력 주자로 등장한 것이다. 지지율 5%를 넘는 후보가 없던 야권은 윤 전 총장 등장에 환호했고 지지자도 결집하기 시작했다.

 

4월 재·보선은 누적된 백래시 정치를 동반하고 왔다. 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선택의 기준이 민주당 심판이냐 아니냐밖에 없는 이유, 시민을 폭도라 하는 보수 후보가 심판받지 않는 이유를 외면하게 된다. 역사의 퇴행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번에 민주당을 혼찌검 내야 한다며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있음에도 민주당은 상대가 나쁘니 우리를 찍어달라는 구호만 반복한다. 분노와 미움의 근원이 어딘지 알아차릴 때도 됐건만.

 

봄의 정치가 아직도 유효한 거냐고, 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적이 맞냐고 오늘쯤 그에게 물으려 했다. 그러나 청와대 정책실장의 염치없는 처신을 본 뒤 연락을 접었다.

 

봄이 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던 그에게, 나는 차마 이 봄을 물을 수가 없었다./ 구혜영 정치부 선임기자 koohy@kyunghyang.com 2021.04.02

 

혐오를 선동하는 정치

20198월 미국 텍사스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22명이 사망했다. 용의자는 극우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민자에 대한 증오심이 담긴 선언문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 등 몇몇 극우 정치인들의 이민자에 대한 부정적 언사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종, 종교, 동성애, 트랜스젠더, 여성 등에 대한 혐오 선동을 일삼는 극우정치인들이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동유럽의 트럼프라 불리며 이주자, 난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선동을 일삼던 정치인들이 체코와 헝가리에서 정권을 잡았고, 러시아, 콜롬비아,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그리스, 이라크, 일본, 필리핀 등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의 혐오 선동이 계속되고 있다. 일촉즉발의 상황인 경우도 있고, 이미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현재 진행형인 곳도 있다.

 

정치인들의 발언에 주목하는 것은 그 발언이 사회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2017년 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정치인 등 공인의 발언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가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히틀러가 혐오 선동을 시작할 때, 600만명이 가스실에서 학살당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인의 사소한 발언 하나하나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는지, 그 메커니즘과 비극적인 결과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혐오 선동을 처벌하는 국가라 해도 처벌 가능한 혐오 선동의 범위는 좁은 편이다. 하지만 정치인의 발언에는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적극적인 선동은 말할 것도 없고, 혐오와 차별을 암시하는 발언이나 심지어 침묵에도 정치적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 사소한 발언 하나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6년 트럼프 당선 직후 혐오범죄가 유의미하게 증가했다는 실증적 자료들이 있다. 영국에서도 이민자들에 대한 거부감을 부추긴 정치선동의 결과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가 감행되었고, 2016년 국민투표 이후 인종과 종교를 이유로 한 혐오범죄가 유의미하게 증가되었다. 일본의 재일 조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 역시 정부와 정치인들의 책임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 세계 각국에서 정치인들의 혐오표현 문제를 조사한 연구는, 정치인의 혐오표현이 테러를 증가시킨다는 점을 입증해냈다(Piazza, 2020).

 

먼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는 정치인의 혐오 선동이 구체적인 폭력으로 이어진 사례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낙관할 만한 상황인 것은 결코 아니다. 2014년에는 일베 회원으로 알려진 이들이 세월호 농성장 앞에서 자칭 폭식투쟁을 벌였고, 역시 일베 회원으로 알려진 한 고교생이 종북콘서트를 응징한다면서 황산테러를 벌였다. 다행히 이러한 흐름은 2016년 촛불항쟁 이후 일단 주춤했다. 정치적 분위기가 극단적 폭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2018년 여름 연달아 개최된 제주 예멘 난민 반대 집회에서는 김진태, 이언주, 조경태 의원 등 현역 정치인들이 가세했다. 자유한국당은 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난민법 폐지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2019년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외국인은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여해온 바가 없기 때문에 똑같이 임금 수준을 유지해줘야 한다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발언했다. 난민이나 이주자에 대한 반대가 정치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계산이 없었다면 이런 발언이 있을 수 있었을까? 소수자 혐오를 정치적 계산대에 올려 놓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2021년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서는 성소수자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원칙은 온데간데없고,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차별에는 반대한다’ ‘퀴어축제 자체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여 최소한의 체면을 차린 뒤 시민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서울광장에서는 안 된다’ ‘시장이 결정할 수 없다는 등 하나마나한 얘기들로 물을 타는 것이 유행인 듯하다. 소수자 인권 옹호를 자신있게 내세우는 군소 후보들의 분투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말에서 시작되어 거대한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 과정이 수십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단 몇 달 만에 극단적인 사태로까지 치닫기도 한다. 이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속도조절자가 바로 정치인이다. 타오르고 있는 불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고,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인의 선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유권자 시민들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경향 : 2021.04.05

 

 

사유리와 정상가족 신화

방송인 사유리씨가 KBS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작진은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영웅이라는 의미로 슈퍼맨이라면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유리씨가 육아를 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전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유리씨의 출연을 반대하는 청원이 진행 중이라는 뉴스가 온라인 공간에서 공유되기 시작했다. 우선 이 뉴스의 필요성과 의미에 대해서부터 따져 물어야 할 것 같다. 뉴스 등장 당시 청원 인원은 1000명대에 불과했다. 뉴스를 통해 청원 내용이 알려지면서 논란으로 번졌다. 애초 논란거리가 아닌 사안을 장사 수단으로 삼은 언론이 만든 논란이었다.

 

물론 청원 인원수가 적다고 반드시 뉴스가치가 낮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안은 언론 스스로 논란을 만들고 대중의 관심을 확산시키면서 뉴스가치를 만들어갔다. 처음 보도가 나온 후 충격적 출연자, 여론 격돌, 여러분의 선택 등 자극적 제목을 단 유튜브 영상, 블로그 게시글, SNS 게시물이 양산됐다. 제작진 반응, 정치인 반응에 대한 뉴스도 보태졌다. “이런 청원이 있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물으면 제작진이 답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뉴스로 포장되면서 마치 큰 사회적 갈등이 발생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정확히는 언론이 단초를 만들고, 부추기고, 활용하는 갈등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남성의 육아 참여를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이다. 남성 육아 참여의 인식 제고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남성 육아를 돌봄의 영역보다 놀이의 영역으로 제한해 돌봄에서의 성별 분업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강한 정상가족 중심성, 무엇보다 이성애를 정상규범화한다는 비판도 있다. 유아나 아동이 등장하는 경우에도 성별에 따라 연인 관계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단지 해당 프로그램만의 문제도 아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조명했던 몇몇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에서도 유사한 시각이 발견된다. 이들 육아 관련 프로그램들이 보이는 공통점 중 하나가 여전히 정상가족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정말로 수많은 아이들을 해외입양이라는 허울을 통해 포기한 과거가 있다. 많은 여성들이 일부의 가족 형태만을 정상이라고 규정짓는 제도적 제한과 사회적 인식의 무게에 눌려 아이를 보내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특정 존재의 모습을 비정상과 결핍의 틀 안에만 해석하는 것, 이는 우리 사회의 배제와 혐오를 가속화하는 기층 인식을 형성하고 있다. 해당 청원의 근간에는 이러한 인식 구조가 깔려 있다. 즉 사유리씨 가족은 정상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비혼 출산을 장려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우려는 출산이 여성의 권리 문제라는 점을 무시하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이며 여성들이 자신의 생의 기획과 친밀성의 문제 등을 고려하면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언론과 미디어의 역할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여성이 출산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의 제도와 담론이 어떤 결정은 막고 어떤 결정만 허용하는지에 대해 살펴야 한다. 비혼이면서 출산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제도적 제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미디어에 다양한 가족과 양육의 형태가 등장할 때, 이것이 더 이상 정상가족을 신화화하는 소재로 활용되지 않도록, 결핍의 패러다임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미디어가 개입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결코 배제하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는 논란만 양산해서는 안 된다./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 경향 : 2021.04.05

 

 

가난은 대물림조차 되지 않는다

한국은 세계에서 아이를 가장 적게 낳는 나라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180.981보다 낮아졌는데 선진국 평균은 약 1.6이었다. 이후에도 더 낮아져 20190.92를 기록했고 코로나19의 충격을 배경으로 작년에는 0.84까지 떨어졌다. 신생아 수는 2019302700명에서 2020272400명으로 약 10% 감소했다.

 

한국은행은 코로나19로 인한 청년층의 고용과 소득 충격, 비대면 생활의 확산, 출산계획 취소 등으로 2022년에는 출산율이 저위 시나리오인 0.72보다 더 낮아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인구쇼크나 인구절벽 이야기가 나온 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지난해에는 주민등록 기준으로 드디어 인구가 감소하고 말았다. 인구가 급속히 고령화되고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경제성장과 재정에는 당연히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출산율 하락은 사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다. 급속한 성장을 배경으로 한 가치관의 변화와 일과 육아를 양립하기 어려운 여성의 지위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를 빼놓을 수 없다. 청년들에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돈이 많이 드는데 생활은 팍팍하고 미래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특히 결혼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문제다. 한국의 인구 1천명당 혼인율은 20116.6을 기록한 이후 내내 하락하여 20204.2까지 낮아졌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혼인율이 낮지는 않지만 하락 속도가 매우 빠르다. 무엇보다도 비혼가정의 출산 비율이 한국은 약 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약 40%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다. 따라서 비혼출산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바뀌기 어려운 현실에서 혼인의 감소는 바로 출산율 하락으로 이어진다. 한 연구는 결혼한 여성만 대상으로 한 출산율은 꽤 높다고 보고한다.

 

혼인율의 하락은 결혼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사람들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역시 결혼에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정을 꾸리는 데는 안정적인 일자리와 따뜻한 보금자리가 필요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보도에 따르면 2018년 신혼집 마련에 드는 비용이 약 2억원에 이른다 하니 어느 정치인의 파격적인 결혼지원금 공약도 이해할 만하다. 최근 서울 집값은 크게 올라 평생 버는 소득으로 집 한 채 가질 수가 없으니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청년들의 절망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러므로 결혼은 정확하게 불평등의 문제다.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201830대 남성 임금근로자 혼인율이 상위 10%86.3%인데 소득이 하락할수록 계속 내려가 하위 10%20.3%에 불과했다. 2008년에는 그 비율이 각각 92%57%였으니 최근 10년간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혼인율이 크게 하락한 것이다. 또한 한 실증연구는 다른 요인들을 통제하고도 부모의 가구소득이나 금융자산이 미혼자녀의 결혼 확률에 유의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한다.

일본 남성은 50살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생애미혼율이 2015년 약 23%나 되었는데 저소득층의 미혼율이 훨씬 더 높았다. 한국도 일본을 급속히 쫓아가고 있어서 2025년에는 전체 남성의 약 5분의 1이 평생 결혼을 하지 못할 전망이다.

 

힘겹게 결혼을 해도 가난을 물려주기 싫고 아이가 자라서 나만큼의 삶도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통계청의 사회조사를 보면 자식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 비율이 200948.3%에서 201928.9%로 감소했다. 건강보험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이후 12년 동안 분만 건수는 감소했지만 그중 저소득층 비중이 뚜렷이 줄어든 반면 상위 30% 이상 고소득층의 비중은 증가했다. 이제 결혼도 출산도 고소득층이 누리기 쉬운 사치품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정부의 저출산대책이 청년세대와 여성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전환된 것은 바람직한 변화다. 그러나 결혼과 출산을 높이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청년의 일자리를 위한 공공투자와 교육을 확충하고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과 사회안전망도 강화해야 한다. 흔히들 부의 대물림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가난은 대물림조차 되지 않는 현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강국 ㅣ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 :2021-04-0

 

 

그래도 짱돌은 던져져야 한다

역대 이런 선거는 없었다. 서울과 부산의 시장을 새로 뽑는 4·7 보궐선거는 최악의 선거였다. ·보궐 선거는 원래 경쟁이 치열하다. 선거는 특정 지역에서 벌어지지만 관심은 전국에서 쏠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울과 부산 시장을 뽑는 선거이다보니 다른 재·보궐 선거와 규모부터 달랐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고 축제여야 한다는 전제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선거의 원인이 된 전직 시장의 성추행에서부터 당헌을 바꿔가며 뒤집은 여당의 무공천 원칙, 게다가 10년 전 후보들이 그대로 나온 진부함까지 긍정적인 구석을 찾기 어려웠다.

 

정책 선거는 고사하고 코로나19 속에 신음하는 시민을 다독이는 제대로 된 의제도 없었다. 여야 정치권의 초급행 합작에 부산·경남 주민들은 가덕도신공항이라는, 향후 수년간 먹거리를 챙겼다. 이제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서울에서는 잠시 박영선 후보의 ‘21분 도시가 관심을 끌었지만 이내 오세훈 후보의 부동산 의혹에 묻혔다. 오 후보는 취임 후 1주일 이내에 재건축·재개발 규제를 풀겠다고 공약했다. 오로지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선거였다. 선거전은 또 얼마나 혼탁했나. 내년 대선의 전초전이라며 두 거대정당이 승부에 사활을 건 사이, 선거판에 시민은 없었다.

 

선거 전날까지 거대 양당 모두 자신들이 이긴다며 투표를 독려했다. 여당은 끝까지 야당 후보들의 도덕성을 물고늘어지면서 그동안 유권자들에게 소홀히했다고 읍소하고 있다. 처음에는 여당 심판론이 압도적이었지만 이후 야당 후보들의 도덕성 논란이 커지면서 박빙의 승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 180의석의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야당은 심판론이라는 이름으로 여당에 대한 분노를 부추기기 바쁘다. 수권 능력을 담은 대안 제시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페미니스트·진보 후보들이 여럿 나섰지만, 유권자들에게는 힘을 실을 마땅한 대안세력으로 비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일찍이 이번 선거처럼 투표할 동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경우도 없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투표를 포기했다는 지인도 있다.

 

때론 기권하는 것도 정치권에 대한 경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욕망으로 점철된 선거에서는 통하지 않을 저항이다. 뒤에서 불평하고 속으로 웅얼거리는 의견은 누구도 존중하지 않는다. 코로나19를 뚫고 투표장에 직접 나가서 투표용지, 종이 짱돌을 던지는 것만이 유효한 의사표시이다. 설사 주권자로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선거일 하루뿐이라고 해도 좋다. 본디 내 맘같이 흔쾌한 후보나 정책은 드물었다. 여의치 않으면 차선·차악 선택법을 동원하면 된다.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그도 아니라면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마저 싫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2017년 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에서 벌어진 무효표 현상을 참고하는 것이다. 당시 앙마르슈의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도 싫고 극우파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도 싫다는 무효표가 11.49%에 이르렀다. 유권자들은 어차피 페스트 아니면 콜레라다. 우린 둘 다 원치 않는다며 이를 투표장에서 행동으로 옮겨 정치권에 매서운 민심을 알렸다.

 

연극 이론 중 체호프의 총이라는 게 있다. 극중에 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등장한 요소는 반드시 쓰여야 하며, 그것도 지속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판이 벌어졌다면 짱돌은 반드시 던져져야 한다. 이번 선거전으로 볼 때 향후 대선전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정의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정치권에 분명한 경고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정당이 시민을 두려워하고 그 의사를 존중한다. 젊은 세대가 특히 새겨야 할 대목이다.

 

오늘 밤, 누군가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패배의 멍에가 씌워질 것이다. 이긴 쪽은 내년 3월 대선을 위한 승기를 잡았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그럴지 장담할 수 없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확인된 민심이 있다. 촛불집회를 통해 고양된 민주시민은 예외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든 오만하고 독선의 길을 간다면 힘을 뺀다는 것이다. 오늘 투표는 마무리되지만 그것은 다음 여정을 향한 새로운 출발이다. 이번 선거엔 승자가 없다. 야당 덕을 보는 여당은 더 이상 없다. 야당도 반사이익만으로는 대선에서 이길 수 없다. 여야 모두에 이 점을 강력히 경고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투표장에 나가기로 했다.

이중근 논설실장경향: 2021.04.07.

 

모든 불륜의 시작은 로맨스였다

자기 옳음에 꽐라돼 있던 민주당 몰락의 과정

2년도 더 전, 이 정권의 실세들과 막역히 지내는 한 인사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나도 알고 그도 아는 어떤 이가 놀고 있는 게 안타까워 청와대 아무개에게 전화해서 어느 자리는 갈 만한데 스스로는 못하니 좀 챙겨주라했다고 전했다. 아무개는 알았다고 하고 끊었단다. 나는 어버버버 말까지 더듬으며 놀고 있던 어떤 이가 생활고에 시달렸는지 물었다. 돕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변명으로라도 듣는 내 귀를 닦아주고 싶었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물론 큰 이권은 없는 자리이고 그이는 그 자리의 조건을 갖췄으며 알아서 지원했는지도 모른다. 아무개는 그저 대답만 했을 수도 있다. 정작 내가 놀란 점은 내 앞의 인사가 이런 명백한 청탁 사실을 지인 근황 토크에 섞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는 것이다. 늘 개혁의 올바른 방향을 이야기하고 자신도 큰 고초를 겪었으며 자기 분야에서 존경받는 이였다. 그래서인가. 자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너무 쉽게 내부자들로 대하는 것 같았다.

 

권력을 잡으면 옳은 처신을 해야 하는데, 옳은 처신을 하기 때문에 권력을 얻었다는 착각을 한다. 마이크()를 잡았으니 옳은 말을 해야 하는 기자들이, 옳은 말을 하기 때문에 마이크()를 쥐었다고 착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책임과 권한을 크게 혼동하는 것이다.

 

지난 4·7 재보선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직무대행(사진)의 막판 읍소였다. 그는 “‘내로남불자세도 혁파하겠다개혁의 설계자로서 스스로에게 더 엄격하고 단호해지도록 윤리와 행동강령의 기준을 높이겠다고 했다. 너무 늦었다. 이미 사람들은 민주당이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반복해서 알아버렸다. 멀게는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서울 흑석동 상가 구매가 알려졌을 때, 가까이는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의 청담동 아파트 임대료 인상이 드러났을 때 즉각적으로 나왔어야 하는 말이다. 많은 이가 내로남불에 주목했으나 나는 개혁의 설계자라는 표현이 두고두고 목에 걸렸다. 이 와중에도 자신들이 모든 걸 통제할 수 있고 제어해야 한다고 착각하는구나 싶어서다.

 

실천하라고 했지 설계하라고 했나. 정치공학적으로 몇 명이 머리 맞대어 짜내는 게 개혁인가. 내 편끼리만 옳다고 여기는 일을 밀어붙이는 게 개혁인가. 아주 오래, 많은 사람이, 그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만들어내는 전 과정이 개혁이다. 오죽하면 혁명보다 어렵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민주당은 너무 쉽게 하려 들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재난 앞에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자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몰아준 표를 자신들이 정의로워서라고 착각했다. 옳음에 꽐라’(술에 취한 상태)됐다. 그리 얻은 의석을 면허증이라도 되는 양 입맛대로 사용했다. 못하면 언론 탓, 적폐 탓이었다. 급기야 이 정권 안에서 저질러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투기마저 과거부터 이어져온 부패라고 떠넘겼다.

 

민주당은 스스로 지나치게 옳아서 망가졌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했고 또래에 견줘 치부를 많이 하지 않은 것이 인생의 한 시절에는 옳음과 선함의 잣대로 여겨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권력을 갖고도 그런 잣대를 지니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 정당한 견제와 비판 장치를 마련하는 데 게을러지거나 그런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조국 내외는 아마 자신들의 능력보다는 훨씬 덜자식 뒷배를 봐주고 훨씬 덜재산을 불렸을 것이다. 김의겸은 상가 하나 집 한 칸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는 오랜 전세살이를 멈추기 위한 정도DNA만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시대 어느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각했다. 나는 권력을 탐한 게 아니니까. 옳은 일을 위해 이용하는 거니까. 오래 싸워온 적들과는 다르니까. 그러나 모든 불륜도 저마다의 시작은 로맨스였다.

 

국민은 이번 재보선으로 선한의지를 탓한 게 아니다. 그 결과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한겨레 2021-04-10

 

 

부동산, 강남, 계급 투표

·7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부동산 계급 투표의 위력을 다시 한번 드러낸 선거로 기록될 것 같다. 이번 보선에서 강남 3는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에게 압도적인 몰표를 몰아줬다. 강남구 73.54%, 서초구 71.02%, 송파구 63.91%로 서울 25개 자치구 중 오 후보 득표율 1~3위를 기록했다. 전체 득표율 57.50%보다 훨씬 높다. 특히 강남구 압구정동에선 오 후보가 88%를 득표했다. 현대아파트 재건축 이슈가 걸려 있는 압구정동 제1투표소로 좁혀보면, 투표수(1815)93.7%(1700)가 오 후보를 찍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5.5%(100) 득표, 19 1이다.

 

강남권 몰표는 종합부동산세 등 보유세 인하, 재건축 규제 완화 등 오 후보의 공약에 대한 기대를 담은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의 부동산정책 기조를 이 기회에 꺾어놓아야 한다는 적극적 의지를 투표로 표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강남권의 고가주택 소유자들은 정권과 정책에 따라 엄청난 자산 이익이 왔다 갔다 한 경험이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종부세가 도입됐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세대별 합산 위헌 결정과 과세표준 인하 등을 거치며 실제 내야 하는 세금이 집값에 따라 수백만~수천만원 줄어든 것이다. 대통령 자신부터 강남 집부자였던 이명박 정부가 벌인 사실상의 셀프 감세였다.

또 강남권 아파트 재건축 추진 조합들은 박원순 전 시장 때 확립된 층고 규제를 풀고 재건축 때 의무적으로 지어야 하는 공공임대 가구 비율을 줄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개발이익을 사회가 나눠 갖고, 좋은 주거환경을 다양한 계층이 섞여 살며 누리도록 하자는 소셜 믹스의 가치를 부정하는 특권적 발상이다.

 

선거 민심을 들어 국민의힘과 보수언론에선 보유세 인하와 규제 완화로 정책을 확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물론 강남권 계급 투표도 민심의 표출이다. 그러나 일부일 뿐이다. 절반을 넘는 서울 무주택 가구 등에선 집값 폭등에 대한 좌절과 분노를 투표 또는 기권으로 드러냈을 가능성이 크다. 비고가주택 소유층의 박탈감도 강남 민심과는 결이 다르다. 지금 정치권이 할 일은 다층적인 민심을 종합적으로 받아안는 것이다. 소수의 이해를 전체 민의인 양 호도해선 안 된다./ 손원제 논설위원 wonje@hani.co.kr 경향 :2021-04-11

 

불평등과 큰 정부의 시대증세가 다가오고 있다

미국이 법인세 인상 계획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다른 나라들에도 법인세 인하 경쟁을 멈추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독일과 프랑스가 동의를 표했고, 국제통화기금(IMF)도 환영 의사를 나타냈다. 이에 앞서 영국은 2023년부터 법인세 세율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국면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난 공공부채 때문에 증세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경제 운용에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오래된 논쟁거리이다. 많은 이들에게 감세와 규제 완화로 대표되는 작은 정부 패러다임이 익숙하겠지만, 자본주의가 늘 그렇게 운영돼왔던 것은 아니다.

 

1930년대 대공황 국면을 기점으로 1960년대까지 이어진 시기는 큰 정부의 시대였다. 경제 운용에 있어 정부의 역할이 매우 컸고, 그러다 보니 미국의 최고 소득세율은 90%를 넘어서기도 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정부가 책임져줬지만, 이를 위해 세금은 많이 걷었다. 반면 1980년대부터는 가능하면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시장의 자율권이 커지는 흐름이 자본주의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직전 시대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비롯된다. 큰 정부 시대의 방종과 무능이 1980년대 이후 작은 정부의 시대를 불렀다. 케네디 대통령 사후 집권한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건설은 미국 진보주의자들의 로망이었지만, 이때부터 미국 경제는 쇠락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방만한 재정지출과 중앙은행의 통화 증발로 만성적 인플레이션이 나타났고, 기축통화 달러의 권위도 심각하게 훼손됐다. 가능하면 많은 것을 경쟁과 시장에 맡기는 1980년 이후의 흐름은 이런 과정에서 잉태됐다.

 

이젠 다시 큰 정부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번에는 작은 정부 시대의 어떤 그림자들이 부정되면서, 새로운 세상의 동력이 되고 있는 걸까. ‘불평등경제적 자원 배분의 실패를 들고 싶다. 두 표현은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불평등은 실물경제와 자산시장의 괴리로 설명할 수 있다. 많은 한계가 지적되고 있지만 그래도 국내총생산(GDP)은 실물경제 활동을 평가하는 가장 권위 있는 지표이다.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금융영역에서 평가받는 경제(기업)의 가치로 볼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최근 10여년간 주식 시가총액 증가 속도가 GDP 증가율보다 훨씬 빠르게 나타났다. 2020년 말 기준 한국과 미국의 GDP 대비 시가총액 비율은 각각 119%234%이다. 직전 사상 최고치는 양국 모두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이었던 2007년에 기록됐는데 한국이 99%, 미국이 195%였다.

 

주가 상승이 국가 경제에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다. 주식시장이 버블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설사 버블이 붕괴되더라도 그 손실이 주주 이외의 다른 경제주체들에게 파급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문제는 실물경제의 정체 속에 나타나는 자산가격의 상승은 불평등을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주식이건, 부동산이건 기본적으로 투자는 여윳돈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드머니가 많건, 적건 관계없이 말이다.

 

방법론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역사적으로 근로소득의 증가율보다 자산가격 상승률이 높았고, 이런 점이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그래서 생활인의 관점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투자하고 사는 게 좋다고 본다. 토마 피케티가 투자를 장려하려고 글을 쓴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작년부터 나타나고 있는 주식투자 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만 어떤 경우든 실물이 정체된 가운데 주가만 오르면 버블에 대한 논란과 별도로 불평등이 강화된다. 투자를 하는 사람보다 안 하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작년에 주식투자 붐이 일면서 한국의 주식투자 인구는 913만명까지 늘어났다. 2019년의 613만명에서 폭발적인 증가세를 나타냈지만, 경제활동인구 3735만명과 비교하면 2020년 말의 주식투자 인구 비율은 24%에 불과하다.

 

1980년대 이후의 시장과 경쟁 중시 패러다임으로 능력 본위에 따른 불평등이 강화돼 온 가운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실물경제와 자산시장의 괴리가 극단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주식이야 투자를 안 하고 살 수도 있지만, 의식주를 구성하는 필수 항목인 주택가격 급등 앞에서 많은 이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불평등의 생생한 증거이다. 민간에서 이뤄진 경제적 자원 배분이 실물경제보다 자산시장에 편중돼 이뤄진 데 대한 성찰이 큰 정부의 시대를 불러오고 있다고 본다. 정부가 시장보다 더 잘한다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지만, 부정해야 할 상은 비교적 명백한 게 아닌가 싶다. 장기적으로 주식시장의 가장 큰 리스크는 투자자들이 전유했던 부를 정부가 가져가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일련의 과정이고, 이는 증세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김학균 |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경향: 2021.04.12.

 

내년 대선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4·7 ·보궐선거결과를 놓고 온갖 해석이 난무하고 있지만, 정작 짚어야 할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선거 과정에서 분명해진 한국 정치리더십의 후진성과 무책임에 대한 반성이다. ‘가덕도 신공항 소동이 단적인 사례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몇 차례나 부적합진단을 내린 가덕도 신공항이 선거를 앞두고 되살아난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줬다. 전말(顚末)을 제대로 기록하고 돌아봐야 마땅하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최소 28조원(국토교통부 추정)이 들어가야 하는 데다 엄청난 해수면 매립으로 인한 해양생태계 파괴 논란이 제기된 가덕도 공항 건설계획을 묻지마로 밀어붙였다. “동남권 균형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부산시민들이 원하는 사업이라는 등의 주장을 앞세워 예비타당성조사마저 생략하는 특별법을 강행 처리했다. 특유의 바람몰이를 통해 가덕도 공항 반대=부산 발전 반대의 정치공식을 확립하고선 다른 목소리를 틀어막았다. 1야당을 꼼짝없이 동조대열에 끌어들일 정도로 서슬이 시퍼렜다.

 

놀라운 건 그런 선동에 마침표를 찍은 사람이 국정 최고·최종책임을 맡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 특별법이 국회에 상정되자 주무부처인 국토부는 이 법에 반대하지 않는 건 공무원으로서 직무유기라는 법률 자문내용을 제출하면서까지 반대의견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문재인 대통령이 신공항에 의지를 가져야 한다며 국토부 장관을 질타했고, 모든 논란을 이 한마디로 잠재웠다. 과학과 합리의 영역을 무너뜨리고 의지의 문제로 바꾼 순간이다. /이학영 논설고문 한국경제 2021.4.14.

 

불로소득이 판치는 세상과 학교 공부

우리는 불로소득시대에 살고 있다. 작년 중반, 이미 경실련은 지난 3년 동안 서울 아파트값 상승으로 생긴 불로소득을 493조원으로 추정했다. 저금리 시대에 민간투자금은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부동산, 동학개미, 코인시장 등 돈의 쓰나미는 무섭게 휘몰아친다.

 

한국 현대사에서 불로소득은 1970년대 압축성장, 개발경제, 1997년 외환위기 등의 여파로 탄생한 잉여가치를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데 실패한 시대적 산물이다. 자산소득은 이미 오래전에 근로소득을 앞질렀고, 노동시장 양극화로 질 낮은 일자리의 비중이 점차 늘어났다. 시중의 유동자금은 상시적 투기현상을 낳았다. 지금의 부동산 가격 급등은 한 정부의 정책실패 탓이라기보다 오히려 한국 현대사에서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온 자본소득 과속 현상의 필연적 결과물이었다.

 

돌이켜보면, 근대사회는 노동과 능력의 가치 위에 세워진 사회체계이다. 전통적으로 노동의 신성함과 인간의 근면함에 기초하여 모든 불로소득을 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고, 애덤 스미스조차 불로소득에 대한 세금에 찬성하였다. 학교는 그런 철학과 노동관을 전파하는 가장 핵심적 사회기제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능력과 경쟁을 통해 성공할 수 있고, 자유롭고 평등한 기회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교정되어 나가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불로소득이 성장을 견인하는(?) 시국에 이 전제는 힘없이 무너진다. 당장 학교가 사회평등화 기제라는 전제가 부정된다. 아이들은 공부가 성공을 보장하지 않으며, 미래를 결정하는 데 절대적 요인이 아니라는 점을 안다. 공부가 월급 몇 푼으로 치환되는 세상이라는 걸 간파하고 있다. 건물주가 되지 못할 바에야 사실상 노예일 수밖에 없는 근로자가 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현실을 거부한다. 결국 대학입학지원자 수는 당연히 이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실패한 이유는 분명하다. 불로소득시대의 사회양극화가 소득의 양적 차이를 넘어 사회계급적 구조화로 전화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단지 면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자본소득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즐기고 세습하는 계급과 여전히 제한된 노동소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계급 간의 분리현상을 솔직히 공론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당 지도층 인사 가운데도 그런 세습에 편승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의 실체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여전히 겉으로만공정, 공정, 공정을 외쳤기 때문이다. 공정 사회는 결코 입시제도 개선이나 청년 창업 혹은 종부세 인상 등의 미시적 조정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기성세대보다 현명하다. 이미 공정사회가 한물간 유행가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절차적 공정성이 남아있어 보이는 시험에 목숨을 걸고,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고, 정년이 긴 직장을 찾아다닌다. 이런 청년세대를 기성세대는 꿈이 없는 세대로 몰아붙인다.

 

아이들은 베이비부머 기성세대가 가졌던 그런 성공신화나 꿈을 버린 지 오래다. 미래는 사치스러운 단어이며, ‘지금을 가장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던져준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소중히 여기라는 말이 지금 와서 더 아이들의 마음을 울린다. 기왕이면 욜로(Yolo), 즉 한번 사는 인생을 의미있게 살아보고 싶어한다. 아등바등 영끌을 하더라도 어쨌든 살아보려는 이들의 눈은 충혈되어 있다. 이런 걸 인생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지옥에서 빨리 벗어나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엉뚱하게도 빨리 벌고 빨리 은퇴하는 파이어족에 대한 동경을 낳는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 시대에 학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지금까지 가르쳐왔던 근대정신으로서의 자유와 평등, 공정성과 노력의 가치는 재해석되어야 할지 모른다. 우등생-명문 대학-좋은 직장-인생 성공으로 이어지는 환상이 인생을 바꾸어 놓기는 어려울지 모른다고 말해줘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던 습관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는 점을 솔직히 말해 줘야 한다. 그래서 공부의 의미가 이제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이참에 학교도 존재 이유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사회발전의 도구로 인간을 규정해왔던 낡은 철학을 버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새로운 교육논리를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공부 잘해서 돈 많이 벌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경향 : 2021.04.15

 

나경원, 혹은 나경영을 응원하며

한국인들은 세대마다 독특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6·25를 겪은 세대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심을, 독재와 맞선 세대는 반민주세력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청년세대가 공유하는 가장 큰 공포심은 중국화()에 대한 공포와 인구구조에 대한 공포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관찰해 보면 중국에 대한 혐오감은 동북공정, 미세먼지, 사드, 김치·한복 논란 등을 거치며 계속 높아졌고 이젠 보수와 진보, 청년과 장년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이 되었다. 그런데 청년층의 혐중은 체제 우월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국은 정권 교체도 여러 번 했고 대통령도 탄핵할 수 있고 언론 자유도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반면, 중국은 유튜브도 못 보고 미투가 검열 대상이 되는 일당독재 체제이고 일본은 자민당이 사실상 권력을 독점해온 유사민주주의체제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반일 감정이 높아도 일본이 한국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보이지는 않는 반면, 중국은 한국의 우월한 체제를 타락시킬 위협으로 보인다. 그 궁극적인 증거는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 즉 북한 정권과 한패라는 것이다.

 

진보적 역사개설서인 <한국 현대사>(강만길)<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박세길)에 한국전쟁은 어쩌다일어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각각 2006년과 2016년에 나온 개정판에서도 그러하다. 1990년대 이후 실증 연구를 통해 밝혀진 김일성의 주도적 역할, 즉 스탈린과 모택동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내고 무기를 얻어내는 등의 과정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실제로 일부 진보적 지식인이나 정치인들과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 대화해 보면 낡은 남침유도설로 얼버무리거나 이것저것 중언부언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청년들은 무엇보다 자생적 반공주의자다.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룬 한국 현대사의 위대한 성취는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2000년대 인천 월미도 공원에서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했던 진보적 시민단체들을 왜 진보라고 불러야 하는지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초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축하한 발언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이 대외적인 공포라면 저출산은 내부적인 공포다. 청년 세대의 엘리트층은 이미 한국 사회에 미래가 없다고 본다. 한국의 출산율이 저출산의 기준인 1.3명 이하로 떨어진 것이 2002년부터니 거의 20년이 되었다. 국민연금기금은 2050년대 중반에 고갈될 예정이다. 기금이 고갈되면 적립식에서 부과식으로 전환하자는, 즉 청장년층이 노년층의 연금을 내주는 식으로 변경하자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부양비 예측치를 보면 지금은 100명이 40명을 부양하지만 그때의 인구구조로는 100명이 100명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금보험료를 소득세보다 많이 내야 할 지경이다. 이처럼 극단적인 인구구조를 지탱하는 데 성공한 사회는 없다. 같은 이유로 건강보험도 지속 불가능할 것이며, 경제성장률 자체가 마이너스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단연 돋보인 공약은 국민의힘 당내 경선에서 탈락한 나경원 후보의 신혼부부에게 12000만원씩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나경영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는 했지만, 나는 나 후보가 앞으로 대선 당내 경선에서도 이 공약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온갖 저출산 대책이 효과가 없었으니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국 사회가 성취해온 근간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보수본연의 의미에 충실한 공약이기도 하다. 만일 대선에서 이재명과 나경원이 맞붙는다면 어떻게 될까? 적어도 청년층은 나경원을 지지할 이유가 있다. 기본소득을 기존 복지제도와 병행하면 재정이 오히려 더 빨리 고갈될 우려가 있는 반면, 강력한 선별적 지원을 통해 출산율을 높이는 데 성공한다면 인구구조의 보릿고개를 견딜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민주당이 한두 가지 변화로 청년층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86세대와 청년층 사이의 간극은 일종의 사상적 차이인데, 자고로 나이 50 이후에 사고방식을 바꾸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체제문제를 민족문제로 치환하고, 정문으로 연대’(solidarity)를 들여오는 대신 옆문으로 복지를 들여온 86세대 민주당 정치인들의 세계관이 청년들의 거대한 반문에 직면한 셈이다.: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경향 2021.04.15.

 

한국 586, 프랑스 68세대 따라가나?

혁명 뒤 집권했지만 땅에 떨어진 사회당의 도덕성청년들은 부패와 무능에 등 돌려

19685, 프랑스 파리에서 총파업을 벌이는 노동자와 학생들. 이른바 ‘68혁명뒤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이 14년 동안 집권했지만, 부패와 무능 등으로 인해 청년들에게 외면받고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EPA 연합뉴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20대 남성의 72.5%가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에게 투표했다. 거의 대부분이다. 20대 여성의 경우 오 후보(40.9%)보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44%)에게 미세하게 높은 비율로 투표했다(지상파 방송 3사 출구조사).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유사한 수치를 프랑스에서 종종 본 적 있다.

 

14년 집권 뒤 군소정당으로 몰락

2017년 프랑스 대선 과정에서 나온 한 여론조사에서 25~34살 여론 지지도를 보면 우리가 어떻게 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좌파인 장뤼크 멜랑숑은 24%, 중도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23% 그리고 극우파인 마린 르펜이 30%가 나왔다. 이 선거에서 좌파는 대통령 결선투표에 진출하지 못했고, 극우보다는 차라리 중도가 낫다는 흐름 속에 마크롱이 대통령이 됐다. 2002년 총리를 지낸 사회당 리오넬 조스팽이 결선투표에 가지 못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좌파는 눈물을 머금고 극우파 대통령을 피하기 위해 전형적인 보수인 자크 시라크에게 투표했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은 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하나하나의 투표를 보면 그때마다 여러 주제와 상황이 있지만, 좀 큰 시선으로 본다면 68혁명과 이른바 ‘68세대의 부패로 인한 몰락과 관계가 있다. 68혁명은 20세기 후반부를 관통하는 매우 큰 사건이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처럼, 이들이 윗세대를 뚫고 매우 빠르게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본다면, 1970년대 군소후보 중 한 명에 불과한 프랑수아 미테랑이 1981년 드디어 대통령이 되고, 사회당이 군소정당을 벗어나 집권세력이 된다. 프랑스 좌파의 전성기였다. 7년 중임제, 미테랑은 14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했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으로 사망한다. 좌파가 아름답던 시대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추억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장 폴 뒤부아의 소설 <프랑스적인 삶>2005년 프랑스 사회를 강타했다. 소설 구성이 좀 특이하다. 샤를 드골에서 자크 시라크까지, 대통령 임기별로 각 장이 구성됐다. 고등학생으로 68혁명에 참가한 주인공이 대학에서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교수들 덕분에 쉽게 쉽게 인생을 풀어가는 장면은 68세대가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1992년 미테랑 정권의 전형적인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총리가 된 피에르 베레고부아가 부패 스캔들로 총리에서 물러난 후 권총 자살을 했다. 14년에 걸친 집권은 사회당의 도덕성을 땅바닥에 떨어지게 했지만, 그 흐름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계파별로 지독한 갈등만을 보여줬다. 이후 사회당은 한 번 더 집권했지만, 프랑수아 올랑드 정권의 무능과 실패로 이제는 더 이상 결선투표에도 나가지 못하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지금 내가 본 민주당의 모습은 미테랑 집권이 마무리되는 시점의 프랑스 사회당과 아주 비슷하다. 68세대가 집권하고 부패하고, 청년들은 그들에게 진저리를 내면서 그들에게 투표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 돼갔다. 프랑스의 68세대가 14년에 걸쳐서 만든 변화를 한국의 ‘586세대’(50, 80년대 학번, 60년대생)4년 만에 만들어냈다. 압축 성장하듯이 압축 부패를 한 것일까? 뭐든 한국의 속도는 빠르다. 경제 위기, 특히 고용 위기가 오면서 청년들은 무능과 부패라는 이미지를 가진 프랑스 사회당을 철저히 외면하게 된다.

 

극우 청년등장은 시간문제

우리 진보 진영은 프랑스 사회당의 몰락과 완전히 똑같은데, 보수 쪽 구도가 조금 다르다. 유럽은 68세대의 부패와 함께 청년 극우파가 등장했고, 우파 정당 일부가 극우파 정당으로 분화해서 나갔다. 청년의 10~15%는 극우파 정당에 투표한다. 개별적으로는 아직 집권할 정도는 아니지만, 유럽 의회에서는 이미 제1당이다. 좌파가 주류였던 청년들이 우파와 극우파로 분화하면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현실화됐다. 현재 고용 위기와 주거 위기 같은 청년 경제의 위기가 더 강화되면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극우 청년이 등장하는 건 시간문제다.

 

한국의 많은 정치학자가 미국식 양당 구도를 주로 염두에 두고 분석한다. 유럽의 경우는 68혁명을 계기로 전성기를 맞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점차 위기를 맞고 그 자리를 극우파 정당이 채우는 좀 다른 유형이다. 지금 한국의 민주당이 맞은 위기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우파와 극우파에 68세대가 밀려나는 1990년대 이후의 유럽식 흐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90년대 사회당 이론가들도 이게 그렇게 큰 변화일 줄 몰랐다. 인종주의 성향의 극우가 등장하면, 정상적인 보수 정도만 돼도 훨씬 더 합리적이고 건전해 보인다. 그 흐름에서 좌파는 완전 왼쪽으로 밀려 집권과는 아주 거리가 먼 소수파 정당이 된다.

 

민주당 집권,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번 보궐선거의 투표 결과만 보면 흔히 얘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정도가 아니라 엎어진 운동장에 가깝다. 민주당 쪽 이론가들은 이걸 일시적 현상이라고 보는 듯하지만, 나는 20년 넘게 거의 회복하지 못하고 청년들이 더는 선택하지 않는 프랑스 사회당의 몰락을 다시 보는 것 같다. 미테랑 이후 보수 쪽에서 자크 시라크가 2, 니콜라 사르코지가 1회 연속 집권하기 직전의 프랑스 사회당 모습과 지금의 한국 민주당 모습이 정말 너무너무 닮았다.

 

프랑스 사회당의 68세대는 변화하는 현실에 대처하지 못하고, 다음번에는 자신들에게 다시 정권이 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냥 버텼다. 아마 살아서 나는 프랑스 사회당의 집권을 보지 못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지금 민주당을 보면서 이번 생에 한국 민주당의 집권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비대위를 꾸려야 할 비상한 상황이라면 정말로 비상하게 움직여야 한다. 청년 보수 정도가 아니라 청년 극우가 등장할 사회경제적 조건을 이미 민주당 정권이 완벽히 만들어놓았다. 지금처럼 하면 운동장이 진짜 엎어진다.

우석훈 성결대 교수·경제학자 한겨레21 2021.04.16.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석방된 지학순 주교는 명동의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으로 주거가 제한됐다. 이후 지학순 주교는 동생의 집으로 옮겨졌다가 신병을 이유로 다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지학순 주교가 로마 유학 당시 당뇨병을 얻었고, 이후 지학순 주교는 당뇨병으로 생애 내내 고생했다.

 

지학순이 중정에서 나온 뒤 그럼 그렇지, 누가 감히 천주교회를 건드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좀 더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학순은 병원에 있으면서 계속 고심하다가, 716일 김지하의 어머니와 아내를 면담하고 나서 마음을 굳혔다. 그들의 자식과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죄목으로 함께 감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독재 권력과 싸우겠다는 결의를 굽히지 않은 것이다. 천주교 신부들 중 지학순 주교를 말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지학순 주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74723일 아침, 지학순 주교는 명동 성모병원 정문에서 미리 몰려와 있었던 내외신 기자를 앞에 두고 양심 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본인은 1974723일 오전, 형사피고인으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둔다. 소위 비상군법회의에서 본인에 대한 어떠한 절차가 진행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1.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7210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2.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이 최소한도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기본 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이래서는 인간의 양심이 여지없이 파괴될 것이다.

 

3. 본인이 위반했다고 기소된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제1, 4호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자연법 유린의 하나다. 이것들은 소위 유신헌법의 개정에 대한 청원이나 건의를 금지하고, 그러한 청원이 있었다는 것의 보도까지도 금지,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그 자체에 대한 불만이나 반대의사조차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금지를 위반하면 종신징역 또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식이다.

 

4. 본인이 위반했다고 그들이 기소한 또 하나의 죄목인 내란선동은 본인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올바로 가졌기 때문에 억압받는 청년에게 그리스도교적 정의와 사랑의 운동을 하라고 돈을 준 사실에 대하여 붙인 조작된 죄목이다.

 

본인을 재판하겠다는 소위 비상군법회의라는 것은 그 스스로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할 수 없는 꼭두각시다. 저들은 지금 수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데 있어서 비상군법회의라 불리는 이 형사절차의 꼭두각시 이름을 빌리고 싶은 것이다. 울부짖는 피고인들의 목소리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 동안 당국에 의해 통제된 신문들·방송들·TV들은 지금도 계속 증거가 희박한 검찰관의 주장만을 사실처럼 보도하고 있다.

 

양심선언에서 지학순 주교는 자신의 체포와 재판 출두 등이 모두 독재정권의 강요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의 반헌법성과 반민주성을 지적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반민주 독재정권이라는 뜻도 밝혔다. 아울러, 자신에 대한 혐의와 체포 등도 모두 부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 지학순 주교에게 지목된 혐의의 부당함은 지학순 주교의 행적에서도 확인된다. 지학순 주교는 해방 이후 한반도 북쪽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목숨을 걸고 월남을 시도했다가 옥살이를 한 경험도 있었다. 월남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제2사단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다. 이러한 사람에게 소위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학순 주교 역시 다른 신부들에게 양심선언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내가 젊은이들에게서 돈을 대서 내란을 선동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빨갱이입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양심선언을 해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2)라는 뜻을 밝혔다.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 직후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주교와 함께 미사를 집전하고, 오후 1210,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한국 천주교회는 민주화의 열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725일 명동 성당에서는 벨기에와 프랑스 대사까지 참석한 가운데 시국 미사가 열렸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원주교구 신부들을 잇달아 구속했고, 지학순 주교는 8123차 공판에서 징역 15,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이후 923, 원주에서 성직자 300여명이 참여한 세미나가 개최됐고, 사제모임의 결성과 명칭에 합의했으니, 이것이 바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었다.3) 그리고 전국민적 저항 앞에서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통해 19752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과 대통령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재야인사들과 정의구현사제단은 이것을 정략적 요식 행위로 규정하고 국민투표 거부 운동을 전개했으며,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지학순 주교가 모범을 보인 양심선언 운동을 제안했다. 그리고 부정선거였던 문제의 국민투표가 진행된 뒤 지학순 주교는 구속집행정지 조치로 1976217일에 출감했다. 그리고, 20209월 지학순 주교의 긴급조치 위반은 재심 결과 무죄로 판결됐다.

 

1) 「[실록 민주화 운동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경향신문, 2003615일자.

2)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 사건(3), 가톨릭평화신문, 759, 200428일자.

3) 한상봉, 지학순 주교 구속으로 정의구현사제단 발족,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0925일자.

 

이종우 칼럼니스트 출처 : 투데이신문 2021.04.16

 

부자증세 시대가 온다

불평등은 정치의 문제이며 그 치열한 싸움의 전장은 역시 세금이다. 1980년대 이후 선진국들에서 보수 정치의 득세와 감세의 물결은 불평등 심화로 이어졌다. 불평등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정치적으로 쉽지 않은 증세를 실현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재정 확장으로 큰정부가 귀환했고 증세의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1.9조 달러의 경기부양에 추가로 4조 달러에 달하는 공공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이로 인한 막대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증세 계획도 내놓았다. 그 대상은 역시 부자와 기업이다. 트럼프가 인하한 법인세와 최고소득세율을 인상하고 상속세를 강화하며 자본이득세도 올릴 전망이다. 불황과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직접 돈을 쓰고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팬데믹이 심화시킨 불평등이 부자증세를 정당화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충격에도 고소득층은 타격을 받지 않았고 고통은 저소득층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자산가격 상승으로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감세를 지지하던 논리도 무너지고 말았다. 보수파는 세금을 높이면 노동과 투자에 대한 유인에 악영향을 미쳐 성장을 저해할 것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낙수효과가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경제학에 기초하여 선진국들은 평균적으로 198162%에서 201535%로 최고소득세율을 인하했다. 성장은 촉진되지 않았고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OECD 18개국의 주요 부자감세 사례를 분석한 최근의 실증연구는 감세로 인해 성장이 촉진되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보고한다. 감세는 상위 1%의 소득집중도를 높인 반면 성장과 실업에 미치는 효과는 없었다.

 

그렇다면 부자증세가 불평등을 교정하고 재정지출을 지지하여 성장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미 미국의 정가와 경제학계에서는 최고소득세율을 인상하고 거대 부자들의 자산에 대해서도 누진세를 매기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세금을 얼마나 올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최적의 최고소득세율에 관한 경제학에서 핵심은 세금이 높아질 때 최고소득층이 노동을 얼마나 덜 해서 과세대상소득이 얼마나 줄어들 것인가를 의미하는 탄력성이다. 여러 연구들은 이 탄력성이 별로 높지 않다고 보고하며, 따라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다이아몬드 MIT 교수는 미국의 최적 최고소득세율을 약 70%로 높게 추정했다.

 

또한 피케티(파리경제대학)와 사에즈(UC 버클리) 교수 등은 높은 세금이 최고소득자들의 지대 추구를 억제하기 때문에 노동 공급만 고려한 경우보다 최고소득세율이 높아야 하며, 세금이 높으면 세전소득의 불평등도 줄어들 것이라 강조한다. 최근 조세재정연구원의 연구는 한국에서도 최고소득층의 과세소득탄력성이 상당히 낮다고 보고한다.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 세금 이데올로기 바뀌나

경제성장률이 높고 불평등은 낮았던 1950년대에 미국의 최고소득세율은 90%가 넘었고, 1970년대에도 70%였다. 한국도 1970년대 박정희 정부 때 70%까지 높아졌고, 1980년대에도 50%였다. 이후 감세로 세율이 계속 낮아져왔지만 최근 문재인 정부는 최고소득세율을 45%까지 인상했다. 이자나 배당과 같은 종합소득에서 상위 0.1%의 집중도가 최근 몇 년간 높아졌음을 고려하면 최고소득세율을 더 인상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세수와 재분배 효과를 고려하면 과도한 소득세 공제를 축소하여 중상위층까지 포함하는 증세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피케티는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사회는 저마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며 모든 사회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역사라고 썼다. 그는 또한 불평등 변화의 주된 원인이 정치라는 점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이제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에서 세금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지형이 변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부자증세와 포스트코로나 시대 경제의 미래는 결국 정치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세금의 경제학과 증세를 위한 정치적 노력이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시사인 2021.04.17.

 

바보처럼 사는당신을 지지하며

김도향 가수의 바보처럼 살았군요란 노래가 있다.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그렇게 흘려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날마다 찰지게 살아도 모자란 시간, 표도 없이 듬성듬성 보냈으니, 바보는 바보다. 이 바보들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하나. “그동안 내가 진짜 바보처럼 살았더라고요. 친구 하나는 아파트 하나 잘 샀다가 3년 만에 1억원 넘게 벌었어요. 또 다른 이는 길도 없는 산을 사더니 몇 년 만에 수억 벌었대요. 친정아버지는 논밭에서 땀 흘려도 일 년에 천만원도 못 버는데 말이죠. 나 역시 바보처럼 식당에서 하루 종일 일해도 몇 푼 저축 못해요. 빚만 안 져도 다행이지.”

 

. “평생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사업을 해왔는데, 갈수록 힘들어져요. 원가를 조작하고 허위 서류를 만들고 예사로 자연 파괴하며 인건비까지 쥐어짜는 회사들은 승승장구하는데, 나같이 근면·성실로 사업하는 이들은 이상하게 힘들어요. 주변에 엉터리 같은 사업체가 오히려 잘되는 걸 보면서,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정말 바보처럼 살았구나, 싶더라고요.”

 

. “오늘 선생님 강의를 듣고 보니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구나, 싶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 무언지,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사는 척했구나 싶네요. 아이를 낳고 교육을 해도 무엇이 옳은지도 모르고 그저 공부 잘하라고만 닦달해온 저 자신을 반성합니다. 직장 일도 그 의미를 묻지 않은 채 오직 월급 오르고 승진하면 성공인 줄 알았죠. 참 바보같이 살았어요. 지금부턴 좀 다르게 살려고요. 고맙습니다.”

 

그렇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는 단순한 가사가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의 화두다. 지금이라도 이 진지한 성찰이 절실하다. 그래야 한번밖에 없는 인생, 헛살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 알찬 삶이고 무엇이 헛된 삶인가? 이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바보. 아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존재, 좀비.

 

왜냐하면 첫째 이야기처럼 부동산 투자·투기로 돈을 버는 것은 얼핏 인생에서의 영리한 성공으로 보이나 실은 불로소득만 노리며 사회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또 둘째는 부정부패나 상황 조작, 착취·수탈 등으로 혼자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걸 성공이라 보는 것인데, 겉으로는 성공이나 실은 파탄을 부른다. 둘 다, 일확천금을 위해 영혼을 판다는 점에서 파우스트 계약일 뿐이다. 그런 게 잘못인 줄 모르고 마치 정상처럼 보는 것, 이게 좀비 개인, 좀비 사회의 실체다.

 

따라서 거부(巨富) 되기를 삶의 성공이라 착각하면 인생을 헛산다. 특히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이런 가치관으로 살면 오히려 우리를 억압하는 자본만 강화한다.

 

그 결과는? 현재와 같은 코로나19 사태, 부동산 폭등, 미래 불안, 기후위기, 미세먼지, 방사능 재앙 등이 우리 삶을 덮치는 게 그 대가다. 여러 선각자에 따르면 2030~2050년 경 지구와 인류는 총체적 재앙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류는 멸망해도 지구는 계속될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멸망해야 지구의 상처가 치유될지 모른다. 거시적 비관의 근거다. 그러나 미시적 낙관도 있다.

 

위의 셋째 바보 덕이다. 이는 참된 행복을 향한 진지한 성찰이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후회하며 가장 많이 하는 말을 상기해 보라. 예컨대, “주변 사람들한테 좀 더 잘해 줄 걸” “인생 별것 아닌데, 뭐 하려고 바쁘게만 살았나?”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도 길지 않은 인생, 왜 돈벌이 기계처럼 살았을까?” 등등.

 

그렇다. 아이를 길러도 그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아이의 자유 선택을 지지하면 된다. 진학이나 취업도, 하고 싶은 공부나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격려하면 된다. 돈이야 먹고살 만큼이면 충분하다. 사회구조가 제대로 변하면 돈도 불필요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모두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면 누구나 부자처럼 살 수 있다.

 

내 권리를 제때 못 찾아먹었다고, 부동산·주식 투자를 못해 평생 가난하다고, 근면·성실·정직으로 사는 바람에 남들처럼 부자가 못 돼 억울하다고, 스스로 바보라 자책하지 마시라. 자녀들에게 엄마아빠같이 바보처럼 살지 말라고도 마시라. 당신은 바보이면서도 결코 바보가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익 추구하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바로 그런 행위들이 세상을 망치는 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안 하는것이다. 이런 똑똑한 바보들이 많아져야 세상을 구한다. 거시적 비관 속에서도 미시적 낙관을 하는 근거다. ‘바보처럼사는 당신, 희망의 근거다!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세종환경운동연합 난방특위 위원장 경향 2021.04.17

 

인구 감소 시대 두 지역 살기

제주도나 울릉도에서 1주일 혹은 한 달 살아 보기가 유행이다. 인구 감소 시대 듀얼 라이프(dual life)'두 지역 살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두 지역 살기는 지자체 간 인구 유입의 출혈경쟁을 피하고, 지자체가 주민등록을 옮기는 것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유동 혹은 관계인구를 증가시키는 전략이다. 지역의 매력도를 증진해 지역 경쟁력을 제고하는 것이다.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주민등록인구 기준 지역 보조금 지원 대책의 제도 개편도 포함한다. 지자체의 인구 유입 경쟁은 국가 측면에서는 제로섬(zero sum) 게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 우리나라 인구는 처음으로 전년 대비 2838명 감소했다. 노동인구가 2040년까지 17%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있고, 사망자가 출생자보다 많은 데드 크로스(dead cross)를 경험했다. 이에 정부는 인구절벽 충격 완화, 축소 사회 시대 지역 소멸 대응, 사회의 지속가능발전으로 대응해 나가겠다고 했다.

 

현재 삶의 질을 유지하거나 개선하기 위해서는 생산가능인구 감소를 최대한 완화하면서 인적 자원 축적의 고도화와 혁신 기술을 접목하는 효과적인 인구 관리 및 일자리 정책이 필요하다.

 

단기간 내 인구 감소와 고령화 진행의 추세를 반전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우려된다. 인구 감소는 앞으로 수년간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최근까지 많은 예산의 투입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은 향상되지 않고 지역 인구의 자연 감소와 사회적 감소가 계속되고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통계를 보면 주민등록 변경은 하지 않으면서 행정 경계를 넘어 경제활동은 하는 인구가 많아지고 있다. 정보통신과 도로교통 등 사회 인프라가 개선되고 그 비용이 감소할수록 증가할 것이다. 한 예로 수도권의 주거 비용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많은 근로자가 생활(주거)은 도심 주변의 보다 쾌적하고 생활 비용이 저렴한 지역에서 하면서 수도권으로 통근을 하거나, 두 집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다.

 

지방 대도시는 반대로 거주는 지방 대도시에서 하고 경제활동은 중소 도시에서 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언택산업 활성화, 재택근무와 주4일 근무의 일상화 등 근무 환경이 변화되면 이러한 추세는 보다 증가할 것이다. 코로나 시기 미국의 일부 업종에서는 재택근무의 생산성이 높고 효율적이라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고민해야 할 두 지역 살기 사례가 많아질 수 있다. 환경과 공간구조 및 삶의 패턴 변화를 고려한 지자체의 관계인구 정책은 다음의 방향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첫째, 단기간 체험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 단기간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 지원은 행정과 관계인구 모두에게 이주에 대한 부담감을 낮추고, 해당 지역으로 이주 또는 두 지역 살기를 추진할 시 거래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

 

둘째, 지역과 관계인구를 연결하는 매개체(예를 들어 고향)가 필요하다. 먼저 정착한 사람의 경험을 나누고, 지역 자원에 대한 이해도를 높임으로써 향후 지역에 정착할 수 있다.

 

셋째, 단순 주거 공간 제공에 머무르지 않고, 교육·문화·커뮤니티를 연계하고 구심점이 되는 중심인물이나 중간 지원 조직을 발굴 및 양성하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새로운 인구 관리 정책으로 복수 주소지(second address)에 대한 제도 개편 방향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주민이 자신의 고향 혹은 은퇴 후 살고 싶은 지역이나 실제 생활하고 있는 지역을 복수 주소지로 선택할 수 있게 해 급속한 인구 감소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는 지방세와 지방교부세 배분의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지역 간 재정 격차 완화와 지역 균형발전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지자체 간 주민등록인구 유치의 출혈경쟁에서 벗어나 유동 및 관계인구 정책을 진행할 경우 지역의 경제 및 산업과 문화 영토는 확장될 수 있다.

 

그간 주민등록상 거주인구 기준의 양적 인구 확대 정책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미래에는 인구의 이동성을 반영할 수 있는 인구 관리 정책이 필요하다. 미래 사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개별 지자체는 외부 주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적인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김용현 대구경북연구원 빅데이터센터장 매일신문 2021-04-20

 

대통령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있나

세월호 참사 7주기, 대통령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를 통해 성역 없는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도록 끝까지 챙기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참위가 말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사회적참사특별법 개정 후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그만두면서 대통령이 임명해야 할 두 상임위원 자리가 공석이다. 시행령이 개정되지 않아 30여명의 신규 직원 채용 절차는 진행조차 안 되고 예산편성이 안 되어 사업비는 바닥이 났다. 조금 지나면 공무원 임금 체불이라는 정부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고 짧은 활동 기간으로 인해 필요한 인력 채용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있나.

 

작년, 사참위의 활동기한 연장, 인력 보강 등을 요구하는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수렴하고자 하는 여당과 인력 보강 등 추가 조치에 소극적인 야당의 입장이 대립했다. 사참위 조사 대상인 환경부는 사참위를 비판하는 일부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왜곡하여 내세우며, 사참위의 가습기살균제 참사 관련 활동 종료를 위한 대국회 로비전을 벌였다.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기업들의 움직임도 없었을 리 없을 것이다.

 

환경부의 로비는 여야가 타협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세월호 관련 조직은 늘리고 가습기살균제 관련 조직과 내용은 축소하여 현행 조직 규모를 유지하는 것으로 했다. 법률상 진상규명 업무 영역은 참사의 원인, 피해자 지원 대책, 그리고 안전 대책 등인데 가습기살균제 사건에 관하여는 피해자 구제 및 제도 개선, 종합보고서 작성 등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업무에 한정하여 수행한다는 규정이 신설됐다.

 

사참위 3개의 국 중 참사의 원인 규명 업무를 담당하는 가습기살균제참사진상규명국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고, 법 개정에 항의한 부위원장, 그 책임을 통감한 위원장은 사참위를 떠났다. 법률의 규정상 피해자 지원·안전 대책과 관련된 조사 및 후속 조치와 청문회는 당연히 전부 가능한데, 개정 법률 규정의 에 포함될 수 있는 참사 원인 부분을 시행령에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았다.

 

기존 조사의 진행 정도 등을 고려하여 조사의 책임 주체인 사참위가 그 업무 영역의 범위를 정하여 규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고 일단 업무 영역이 정해지면 그 영역과 관련하여 조사 및 후속 조치, 청문회 등 업무 절차를 밟게 된다. 그런데 조사 대상인 환경부가 갑자기 업무 영역과 관련된 위임 규정이 마치 업무 절차에도 미치는 것인 양 왜곡하여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사참위가 아무런 조사를 할 수 없다는 식의 시행령 개정안을 들고나왔다. 이에 대해 관련 기관들, 즉 청와대 관련 단위, 국무조정실, 법제처 등이 묵인하거나 동조하거나 가세하면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무지나 친분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참위의 조사 대상 또는 청문회 증인에 이들 기관 소속 전·현직 공무원, 그리고 다수의 관련 기업인이 포함되어 강도 높은 조사나 청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환경부는 조사 말고도 청문회, 조사 결과를 갖고 진행되는 고발, 감사원 감사 요구 등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법리적인 논쟁인 양 포장되어 있지만 이러한 환경부 등의 행태는 진상규명을 부정함으로써 참사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드는 것이고,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두번 세번 죽이는 국가폭력이다. 최근 두달 동안 사참위는 환경부 등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로 인한 가습기살균제 참사 진상규명 조사 강제종료라는 어쩌다 국가폭력의 공범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등을 지연시키는 역사적 범죄를 저지를 것인가의 잔인한 선택을 강요받아왔다.

작년 8월 부실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 특별법 시행령안을 가지고 열린 환경부의 준비 안 된 공청회에서 다쳐 입원한 피해자의 항의에 대해 환경부 과장이 했던 말을 그대로 환경부에 돌려주고 싶다. “적반하장.”

 

사참위가 요청하는 내용으로 시행령을 빨리 개정해서 작년 12월 어렵게 연장한 조사 기간을 더 이상 허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세월호 참사 피해가족의 세월호 참사 7주기 기억식에서의 절규를 누군가는 들어야 한다. 누군가는 어쩌다 국가폭력을 책임지고 막아야 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회적참사특별법 시행령, 대통령'령이다.

ㅣ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한겨레 2021-04-22

 

산림파괴청은 당장 멈춰라

무엇을? 이름에 답이 있지 않은가. 산림 파괴 말이다. 에이 설마, 과장이겠지. 좀 과한 것 아닌가? 이렇게 느꼈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숲을 가꾸는 일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이 설마 숲을 해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없다. 다들 속고만 산 것 같아도 실은 어떤 기본적인 믿음이 마음 밑바닥에는 깔려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믿음을 산산조각 내는 일이 지금 모두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산림청이 나서서 산림을 파괴하고 있다.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이런 칼럼에 일부러 낚시성 제목을 달아놓고 실은 내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필자가 볼 이득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차라리 정말로 그저 과장된 표현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두렵게도 사실이다.

 

올해 산림청이 야심차게 내놓은 사업은 이른바 ‘30년 동안 30억그루 나무 심기’! 얼마나 희망찬 목표인가! 이를 접한 정상인의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펼쳐진다.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 하나둘 묘목이 심어진다. 비가 내리고, 햇볕을 쬐면서 묘목은 무럭무럭 자란다. 숲이 점점 늘어난다. 대한민국이 푸른색으로 뒤덮인다. 암 그래야지.

 

실상은 아니다. 숲에 있는 나무를 베고 거기에 새로 심는다는 것이다. 아니 뭐라고! 여러분의 이 격앙된 반응이 옳은 것이다. 하지만 산림파괴청의 생각은 다르다. 1970년대에 조성된 산림이 이젠 노령화되어 탄소흡수량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놓은 발상은? 이른바 산림의 영급(나무의 나이) 구조개선’, 오래된 나무를 없애고 그 자리에 새 나무를 심겠다는 것이다. 말문을 막히게 할 만큼 충격적이다.

 

첫째,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 오래된 숲의 탄소 저장량이 떨어진다는 것은 과거의 추정일 뿐 전혀 정설이 아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연구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가령 <네이처>에 실린 2008년 논문은 수백년 된 숲조차 계속해서 우수한 탄소 저장력을 보인다고 하였고, 같은 학회지 2014년 논문은 나무가 클수록 탄소 저장 속도가 늘어나는 것을 밝혔다. 또한 글로벌 생태와 생물지리학지에 2020년 실린 논문은 오래된 숲이 탄소 저장에 크게 기여한다고 밝혔고, 올해 산림생태와 관리지에는 성숙한 숲이 최대의 생물량을 보유한다고 하였다. 나무만이 아니라 숲 아래 토양 또한 탄소 흡수에 큰 역할을 하며, 생태계가 온전하게 갖춰진 서식처가 탄소 저장력도 높다.

 

둘째, 숲은 단순 탄소 저장고가 아니다. 다른 수많은 기능에 추가적으로 탄소 저장도 하는 것일 뿐, 탄소 저장력 하나로 숲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마치 사람의 가치를 몸무게로 판단하는 격이다. 공기와 물의 정화, 영양물질 순환, 토양 안정 등 숲이 제공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생태계 서비스는 갑자기 다 망각했단 말인가? ‘=탄소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셋째, 숲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떠나, 숲은 다른 수많은 생물의 서식처이다. 이런 말까지 정말 반복해야 하나? 산림파괴청에 근무하는 그 수많은 석사, 박사들은 자신들이 전공한 그 생물이 그 숲에 산다는 것을 정녕 모른 척할 것인가?

 

넷째, 기후변화는 산림이 다 책임질 일이 아니다. 탄소 걱정해서 숲부터 자르는 것은, 학습 역량을 강화한답시고 반의 가장 우수한 학생부터 조지는것과 같다. 현대사회의 작동 방식 자체에서 탄소배출량을 대폭 줄이는 것이 최우선이고, 산림에게 약간의 역할을 주더라도 한참 나중의 얘기이다. 하더라도 숲을 늘려야지 교체는 얼토당토않다.

숲은 인간이 싼 똥을 치워놓는 정화조가 아니다. 산림파괴청은 숲을 숲으로 대하라.

김산하 ㅣ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 한겨레 2021-04-25

 

 

종부세 역주행이 부를 역풍

4·7 보궐선거가 여당의 참패로 끝난 후 야당은 보유세 인하와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로 부동산정책 기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쏟아냈다. 이에 여당은 성난 민심을 달래지 못하면 다음 선거에서 또다시 처참한 성적표를 받는다는 위기감에 정책 보완에 나섰다. 관련해 종합부동산세를 내리고 대출 규제도 풀자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뜨겁다.

 

성난 민심을 푸는 열쇠가 종부세 개편이라니,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아마 이런 얘기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종부세와 같은 보유세 부담 증가가 여당 패배의 주요한 원인이다. 그런데 집값 하향 안정은 어렵고 오를 가능성이 더 크니까 조세저항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현행대로 1주택자 종부세가 공시가격 9억원 기준으로 부과되면, 서울에 집 가진 사람의 16%가 내게 되고, 언젠가는 모두가 내는 서울 거주세가 될지 모른다. 다음 선거에 대비하려면 종부세가 부과되는 6월 이전에 법을 바꿔야 한다. 종부세 공시가격 기준을 상향 조정하든지 전국 상위 1~2%로 묶어두면 집값이 올라도 대상자는 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런 생각이라면, 선거에서 드러난 부동산 민심을 완전히 잘못 읽은 것이다. 여당 패배의 주된 원인이 과연 종부세였나? 부동산 민심은 하나의 결이 아니었다. 서울 강남에서는 종부세를 내리고 재건축 규제도 풀어달라는 특수한 이해를 표에 담았다. 반면 서울과 부산의 중저가 주택 소유자들은 강남이나 서울과의 집값 격차 확대로 인한 박탈감을 드러냈다. 한편 무주택자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이 멀어졌고, 청년들은 계층이동 사다리가 막혔다는 좌절감으로 투표했다. 부동산 민심은 계층별로 달랐다. 하지만 집값 상승을 막지 못한 정부에 대한 실망과 엘에이치 사태로 드러난 공직자의 반칙으로 투기 근절 의지조차 못 믿겠다는 국민적 분노는 공통적이었다. 여당은 서울 강남뿐 아니라 25개 구 전부, 종부세 이슈와 무관한 부산에서도 모두 패배했다. 종부세가 아니라 정책당국에 대한 신뢰 추락이 패배의 근원이었다.

 

민심은 투기와 반칙, 집값 상승으로 자산 불평등이 극심해진 현실을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집값이 올라 수억원의 시세 차액이 생겼는데, 예정된 부과 기준 시점을 눈앞에 두고 법까지 바꿔 종부세를 빼주겠다는 건, 희망을 잃은 청년과 서민들의 박탈감은 안중에 없다는 얘기로 들린다. 물론 정책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소득이 없거나 담세능력이 취약한 고가 1주택자들의 보유세 부담 문제는 풀어야 할 숙제다. 하지만 종부세 부과 대상을 줄인다고 이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1주택 은퇴자에 대해 과세이연제도를 도입하고, 주택연금 가입의 가격요건을 폐지해 부동산에 묶여 있는 재산을 소득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옳은 해법이다.

 

부동산 시장은 어떤 시장보다도 정책 신호에 민감하다. 투기 열풍이 거셀 때는 재건축·재개발 규제를 풀겠다는 말만 나와도 집값 상승의 불쏘시개가 된다. 보궐선거로 부동산 시장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선거 이전에는 집값 상승률이 둔화되고 매수세가 약화되는 등 집값 불안이 진정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런데 야당의 승리로 재건축 아파트 가격이 다시 치솟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에서 나온 종부세 개편과 대출 규제 완화 카드는 되살아난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시장에서는 이 카드를 세개의 신호로 읽을 것이다. 첫째, 집값 하향 안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앞으로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 둘째, 세금을 깎아주고 대출을 풀 것이니 기다리지 말고 집을 사라. 셋째, 확정된 정책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 정책은 시행 전까지 믿지 말라. 이 세개를 종합해서, 정책 후퇴와 역주행으로 가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책이 원칙과 방향을 잃으면 신뢰 추락은 돌이킬 수 없다.

 

그간 정부는 투기 열풍을 잠재우고 집값을 안정시키겠다고 공언했지만, 정책당국에 대한 신뢰는 떨어졌고 정책 의지조차 의심받고 있다. 투기를 발본색원하고 집값을 반드시 잡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대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2·4 대책에서 약속한 공급 확대로 무주택자의 불안 심리를 해소하고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민심에 부응하는 길이다. 그러지 않고 역주행의 길로 접어든다면, 서울에 좋은 집 가진 사람 편에 서서 집값은 올려놓고 세금은 깎아줘 결국 자산 불평등을 조장했다는 역풍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홍장표 ㅣ 부경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 2021-04-26

 

동포들을 차별하는 나라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20여년 전에 나는 국내의 한 사립대학에서 러시아어 강사로 일했다. 러어과에서 나는 유일한 외국인이었지만, 같은 대학의 영문과에는 원어민 교수가 10여명 있었다. 그들 중에 흑인은 한명도 없었고, 내가 알고 있는 한 그 당시 다른 대학에도 흑인 출신의 원어민 교수는 거의 없었다.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 패턴을, 한국 대학가도 그대로 배운 게 아니었나 싶다. 원어민 교수의 대다수는 중산층 백인이었으며 몇명은 2세 재미 동포 출신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의 영어는, 백인 원어민 교수와 하등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한데 그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그들에게 부모의 고향인 한국에서 취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대학이나 학원에서 재미 동포들이 백인 원어민에 비해 열등한존재로 취급되곤 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에서 가장 차별을 받는 외국인들 범주에 재외 동포들이 속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민족같은 용어들은 널리 쓰이고 있었지만, 정작 해외 한민족들이야말로 실은 국내에서 찬밥 신세가 되기 쉬웠던 것이다.

 

근대에 접어들어 한반도는 이산의 땅이 됐다. 식민지 시대의 억압, 그리고 그 뒤의 극심한 가난은 동아시아에서 본국 총인구에 비해 가장 많은 디아스포라를 낳았다. 해외 한인들은 한반도 총인구의 약 10%에 달하는데, 이는 중국 총인구에 대한 해외 화교의 비율이나 일본 총인구에 대한 해외 일인(닛케이진)의 비율(각각 약 3%) 내지 해외에서 거주하는 베트남인의 비율(4.4%)보다 훨씬 높다. 동아시아에서는 한인들이야말로 이산의 민족이 됐다. 그런데 이산된 한인에 대한 한반도 두 국가의 태도는 늘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한편으로 경제 차원에서 절실히 필요한 자원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남북한의 총동원식 병영 질서에 들어맞지 않는 이질 분자들이었다. 그래서 한반도 두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그들이 입은 피해도 만만찮았다.

 

6·25 전쟁 이후에 노동력과 외화를 절실히 필요로 했던 북한은 1959년부터 재일 조선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93300명 넘는 재일 동포가 북한으로 갔다. 한편으로 그들에게 북송은 일본 사회 안에서의 태심한 차별을 벗어나는 길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질적 사회에서 살다가 온 그들을 제대로 수용할 정도로 북한 사회의 관용 지수는 높지 않았다. 적응에 실패한 사례가 잇따르고 불평·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하는 사람들에게는 탄압이 가해졌다. 한데 같은 시기의 남한에서도 재일 동포들이 겪은 수난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근본적 이유는 똑같았다. 훨씬 더 자유로운 이질적 세계에서 살다 온 사람들을, 하나의 커다란 병영 같은 남한 사회가 제대로 포용할 리 없었다. 동포 기업인 롯데그룹 같은 회사들이 1960~70년대에 한국에 진출했을 때에는 박정희 정권의 전폭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수많은 재일 동포들의 모국 귀환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0~80년대 모국 유학생 등 한국 체류 재일 동포들이 연루된 각종 간첩 사건319건이나 발생했는데, 대부분의 경우는 고문에 의한 자백 강요 같은 조작된 사건이었다. ‘모국에 귀환해서 이렇게 죄도 없이 고문실로 끌려갔던 재일 동포들이 감당했을 고통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다.

 

냉전이 끝난 뒤에는 총련계와 연계될 수도 있다는 재일 동포들을 노리는 의심의 눈초리는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이번 정권 집권기에는 한국 국적자가 아닌 조선적 재일 동포들의 모국 방문도 가능해지는 등 여러가지 진척이 있었다. 한데 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그리고 미-중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국내 여론이 미국으로 경도되는 지정학적 갈등의 시대에 또 다른 국민적 타자가 된 것은 저임금 지역인 연변에서 온 중국 국적 동포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지금 가장 심한 차별을 일상적으로 겪는 소수자 집단으로서 장애인과 성소수자, 새터민(탈북 주민) 등과 함께 바로 조선족으로 자주 불리는 중국 동포들이 부상한 것이다.

 

1970~80년대의 재일 동포를 둘러싼 시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 동포를 응시하는 한국 국가와 상당수 주민들의 시선은 이중적이며 자기모순적이다. 한편으로는, 1970~80년대의 한국 경제에 재일 동포들의 재력이 필요했듯이, 오늘날 한국 경제에 중국 동포들의 노동력은 필수적이다. 귀화자 등까지 포함하면 현재 한국에서 체류하는 중국 동포는 약 80만명, 즉 중국 내 조선족 커뮤니티 전체의 3분의 1 이상이다. 이 정도로 많은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 와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회피하려는 직종에서 그들의 노동력이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반공 광기의 시대에 모국에 와 있는 재일 동포들이 매우 쉽게 조총련계 연루자로 몰렸듯이, 많은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동맹국 미국의 적으로 인식되는 중국이라는 국가의 연장이자 일부분으로 보려 한다. 결국 신냉전의 두 축 사이에 중간적 존재가 된 조선족은 극도로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중국 안에서도 비교적 가난한 지방인 동북 3성 출신인 그들은 한국을 경제적 생존의 차원에서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다민족 국가 중국의 소수자로서 당연히 인민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중국에 대한 귀속의식을 드러내야 하는 입장이다. ‘민족국가가 동일시되는 나라에서 자라난 한국인들로서는 제국형 국가에서 하나의 소수민족이 정치·문화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벌여야 할 고투란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아 문제다.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에 오히려 노골적 차별이 판친다. 이 차별은 문화적 측면과 계급적 측면을 겸비한다. 획일주의 성향이 강한 병영형 국가인 한국에서 한국적 표준과 다른 조선족의 언어나 일상적 행동거지 등이 이질시되는 한편, 특히 한국 안에서도 주로 저임금 하층 노동계급을 연상시키는 흡연이나 고성방가 등은 멸시적 응시의 대상이 된다. 결국 국가개인내지 소수자 집단사이 구별의 부족, ‘차이를 받아들이려는 자세의 부재, 그리고 계급적 차별의 패턴 등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들은 국내에 와 있는 해외 한인들에 대한 혐오 정서를 낳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들은 애초에 한국인들부터 불행하게 만들어왔던 사회적 병폐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1-04-27

 

소다 넣은 밀가루빵 같은 아파트값

쉰 해를 조금 넘게 사는 동안 내가 몇번이나 이사를 했는지 꼽아봤다. 1년 이상 머물러 산 집이 17곳이었다. 그중 우리 집은 태어나 13년 산 고향 집과 8년 전 입주해 지금 살고 있는 고양시 아파트 2곳뿐이다. 30년 넘게 남의집살이를 하는 동안 가장 감당하기 버거운 것은 갑작스러운 전셋값 폭등이었다. 그래서 이사 그만하고 살 내 집이 있었으면하고 바랐다. 집 사서 재산을 불려보자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렵게 분양받아 입주한 뒤 몇해 동안 별 움직임이 없던 아파트값이 지난해 꽤 큰 폭으로 뛰자 내가 이상해졌다. 부끄럽게도, 시세를 자주 살펴보게 된 것이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 선생께서 오래전 쓰신 글이 떠올랐다.

 

아파트값이 움직이는 시기에는 모든 아파트 주민이 소다를 잔뜩 넣은 밀가루 빵처럼 부풀어오른다. 아파트 단지는 사람을 적당히 미치게 하는 데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뿌리 깊은 나무>, 19789)

43년 전 글인데,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그동안 수많은 정책적 노력에도 부동산 불패 신화는 건재하다. 더 오를 거란 불안감에, 젊은이들이 영혼까지 끌어모아집을 산다고 한다.

은행의 가계 주택담보대출 잔액이 지난 3739조원으로, 10년 전보다 449조원 늘었다. 이렇게 금융시장과 부동산의 연계성이 커지면서, 금리가 집값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지난해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은행이 정책금리를 사상 최저로 내렸는데, 집값 급등이 서울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퍼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집 없는 사람들은 더 불안해졌고, 비싼 집 여러채 가진 사람들은 불어나는 세금에 입이 튀어나와 있다.

 

‘4월 누에는 날이 따뜻하기를 바라지만 보리는 차갑기를 바라고, 길손은 맑은 하늘을, 농부는 비를, 뽕잎 따는 아낙은 구름 낀 하늘을 바란다.’ 이런 옛 시의 하늘 노릇 하기만큼이나 부동산 정치는 어렵다. 세 들어 사냐 집을 가졌냐, 어디에 어떤 집을 가졌냐에 따라 요구하는 것이 다른 까닭이다. 그래서 선거철만 되면 정책이 춤을 춘다. 불만인 사람들은 기다리면 또 바뀐다고 믿고 실제 그렇게 되는 일이 잦으니, 부동산 불패 신화는 맷집이 자꾸 세진다.

 

과거 우리나라의 부동산 정치는 정부가 값싸게 택지를 대규모로 확보하고 분양가를 통제하여, 청약통장 가입자들에게 적잖은 물량의 새 아파트를 싸게 공급하는 방식이 주였다. 무주택자에게 희망을 주고 집값 상승도 어느 정도 억제해, 큰손들이 부동산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것을 눈감게 했다. 그런데 값싼 택지를 대규모로 확보하기가 점차 어렵게 되면서 한계에 봉착했다.

게다가 주택 시장 규모가 커지고 부동산의 금융화도 진척돼, 정부가 집값을 좌우할 능력을 여전히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정책 목표를 임대료 안정으로 전환하고, 거기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 서민 주거 복지 확대와 집값 안정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그것은 어찌하든, 다주택자의 주택 매각을 유도하지 못하면 부동산 불패 신화는 깨뜨리지 못할 것이다.

 

금리가 원인이든 수급이 배경이든, 집값 상승은 사실 땅값이 오르는 것이다. 건축물은 시간이 갈수록 낡아 값어치가 떨어진다. 반면 대지 가치가 그보다 더 올라 집값이 뛴다. 땅은 주변이 개발되고, 인프라가 갖춰져 이용가치가 커지면서 값이 뛴다. 일단 사서 소유권이란 금줄을 치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앞세대들이 쓸 만한 땅을 싹쓸이해버렸으니, 후세대들은 세대 착취로 여긴다. 대전환을 해야 한다.

 

돈 있는 사람이 땅과 집을 사서 그야말로 묻어두고 지낼 수 있는 것은 보유세가 낮기 때문이다. 다주택자들이 임대사업자 시늉을 하게 하기보단 집을 팔게 해야 한다. 긴 계획을 갖고 차근차근 보유세를 올려야 한다. 고가 다주택 보유자에겐 더 크게 올려야 한다. 그걸 놔두고 손가락질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국회가 종합부동산세를 고친 것은 지난해다. 6월부터 적용된다. 시행을 눈앞에 두고 고치자는 사람들이야말로 집값 안정의 적이다.

사실 1주택자의 보유세 부담은 그리 크지 않다. 지난해 내가 낸 아파트 재산세는 7년간 탄 2짜리 승용차의 자동차세와 비슷했다. 올해는 공시가격이 오르겠지만, 세율은 낮췄다고 한다. jeje@hani.co.kr 한겨레 2021-04-27

 

21세기 부동산 봉건사회

동네에서 몇 년째 텃밭을 가꾸고 있다. 새싹과 이파리들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 이렇게 조그만 공간에서도 생명을 무성하게 키우는 땅이 참으로 위대하고, 잠시나마 일상에서 나오게 해주는 텃밭이 무척 고맙다.

 

지난 주말에도 텃밭에 앉아 땅을 예찬하다 문득 조선시대 어느 농민을 생각했다. 봄날의 찬란함은 오늘과 같았지만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있다. ‘나에게도 땅이 있었으면.’ 매일 땀 흘려 일하건만 생산물의 상당을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세상에 대한 탄식이다. 그에게 땅은 고역과 착취의 전장이었다.

 

아마 요즘 부동산 사태 때문에 든 생각이었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인생을 가르는 신분제도 사라지고 헌법에 경자유전도 명시되어 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에 억눌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도 지난 1년 집값이 폭등해 다음 이사 때도 여기서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사람들이 일해서 얻는 소득 수준을 비웃기나 하듯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보면 화가 나다가도 결국 남는 건 막막함뿐이다. 땅이 삶을 억압하는 건 예전 봉건시대의 역사만이 아니다. 훌쩍 오른 전·월세 값을 충당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뛰어야 하는 집 없는 사람들이 사실상 21세기 소작인이다. 우리가 사는 곳도 여전히 봉건사회이다!

 

이런저런 상념과 안식의 공간이었던 이 텃밭도 올해로 문을 닫을 예정이다. 텃밭단지가 3기 신도시 사업에 포함되었다. 언제부턴가 텃밭 입구에는 높은 보상을 요구하는 험악한 문구의 현수막들이 자리를 잡았다. 정겨웠던 텃밭단지가 부동산 봉건사회의 각축장으로 바뀌는 거다. 그렇게 한 차례 홍역이 지나가면 집소유로 나누어진 신분화는 심화되고 부동산공화국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서구 역사에서 봉건시대를 종결 지은 건 혁명이었다. 어떤 모양일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에서 그 혁명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대한민국 헌법에 담긴 토지공개념에서 시작하자. 헌법은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하고”(23),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있는 이용을 위해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122)고 선언한다. 토지는 모두가 누려야 할 유한한 자산이므로 사적 소유를 인정하더라도 재산권의 행사는 공동체의 이익을 앞설 수 없다는 원칙이다. 앞으로는 국민들이 맺은 이 계약서를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제 참여연대가 토지초과이득세법을 제정하자고 입법청원했다. 국회에선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법안을 대표발의한다고 한다. 토지초과이득세는 일반적 지가에 비해 가격이 많은 오른 유휴토지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개인들이 가진 투기성 토지, 그리고 대기업이 고유 사업과 무관하게 대규모로 매입한 토지 등이 과세대상이다. 세금 수입을 늘리는 목적보다는 주거와 경영에 관련이 없는 토지는 팔도록 유도하려는 게 본래 취지이다.

 

일부에서 토지장부에서만 가격이 올랐을 뿐 실제 현금소득이 생긴 것은 아닌데 세금을 매기는 건 위헌이라고 주장하나 토지초과이득세는 완전히 헌법에 부합하는 제도이다. 이미 헌법재판소는 미실현이익에 대한 과세도 헌법의 지향에 따라 입법자가 채택할 수 있는 정책수단임을 확인했다. 다만 초과이득세를 납부했음에도 나중에 다시 매각 차익에 대해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는 문제 등 일부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이 있었으나 정부가 곧바로 모두 보완해 합헌 제도로 인정받아 계속 시행되었다. 그런데 외환위기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경기부양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던 김대중 정부가 토지초과이득세법을 폐지해버렸다. 당시 급박함은 이해하지만 굳이 없애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분명 헌법 내용을 훼손하고 이후 부동산 불패 역사를 촉진한 조치였다.

 

이제 토지초과이득세를 부활시키자. LH 사건으로 부동산정책의 대전환이 요구되는 지금이 적기이다. 이 세금으로 헌법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토지의 가격을 관리하여 서민 주거안정에 초석을 놓아야 한다. 특히 촛불혁명 정부를 자임하는 과반 의석 여당이 무거운 책임으로 나서기 바란다. ‘빚내서 집 사라하고, 집부자 세금 깎아주자면서 지난 재·보궐 선거의 민심을 거슬러가다간 진짜 혁명을 맞을지도 모른다.

 

벌써 텃밭 이웃들끼리 내년에 어디서 텃밭을 할지 수소문한다. 아마 나도 새로운 둥지를 찾고, 봄이 오면 또 멍하니 텃밭에 앉아 생각의 나래를 펼칠 것이다. 그때는 조선시대의 어느 농민을 만나서 다른 인사를 전할 수 있을까. 당신의 후손들이 봉건시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경향 : 2021.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