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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021.1.4 ~14 촛불 민주주의는 어떻게 벼랑 끝에 몰린 것일까

by 이성근 2021. 1. 17.

1가구1주택과 경자유전, 무엇이 위헌인가 한겨레 2021-01-04

도쿄, 22벼랑 끝의 죽음 스트레이트뉴스 2020.12.21

2021년 오디세이 2021-01-04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 한겨레 2021-01-04

크로노스의 낫 경인일보 2021-01-04

삶은 계속된다 부산일보 2021-01-04

불행히도 기후백신은 없다 국제신문 2021-01-04

이낙연 대표가 집중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한겨레 2021-01-04

2021년의 시대정신 경향 2021-01-05

공급확대라는 도박 경향 2021-01-05

문 정권의 20가지 대국민 약속위반 (대구) 매일신문 2021-01-05

이재용 재판과 박근혜 사면 한겨레 2021-01-06

새해 여론조사 읽는 법 한겨레 2021-01-06

여론 없는 여론조사 사회 한겨레 2021-01-06

촛불 민주주의는 어떻게 벼랑 끝에 몰린 것일까 제주의 소리 2021.01.06.

의사 국가시험을 허용한다고? 전남일보 2021-01-06

팩트는 없다 광주드림 2020.09.18.

정인이가 미국에 있었다면 한겨레 2021-01-07

지구환경과 생명 중시 그리고 민주주의의 큰 걸음을 내딛는 한해이길 프레시안 2021-01-07

 

우리 사회에 정의가 있는가? 경향: 2021.01.08

조용한 학살 경향 : 2021.01.11

우리를 갈라놓는 능력주의 경향 : 2021.01.11.

여성운동가들의 이중성 <리포액트> 2021.1. 11

왜 이용수 할머니는 언론이 검증하지 않는가 <리포액트> 2020 .6. 18

정치의 사법화와 입법 무능 한겨레 :2021-01-12

따라잡기의 종말 한겨레

미국 의사당에 나부낀 태극기 부산일보 20221. 1.12

선한 영향력의 모순 경향 20221. 1.13

정인이 사건을 보는 또 다른 관점 경향: 2021.01.14

 

1가구1주택과 경자유전, 무엇이 위헌인가

지금부터 약 350년 전, 전라도 부안에 살던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지어 나라를 근본적으로 다시 조직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 첫머리가 토지의 세습은 물론 사유제 자체를 철폐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는 토지가 소수 부자에게 집중되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자리도 없어서 빈부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필요한 사람에게 국가가 토지를 분배하는 공전제를 실시하자고 했다. 유형원의 공전제는 지배층의 대규모 토지 소유를 허물어버리는 현실적 파괴력뿐 아니라 그 논리도 논란의 소지가 컸다. 토지 사유제 또한 유구한 역사와 중요한 의의를 지닌 사회 운영의 기초 원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형원은 반역죄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인물의 아들이며, 과거에 거듭 낙방하여 말단 관직 하나 가져본 적 없는 민간의 일개 선비였다.

 

그런데도 유생에서 고위 관리까지 여러 인사가 유형원의 개혁안을 시행하자고 거듭 건의했다. 국왕과 신하들은 국정을 이끄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반계수록>을 검토하고 논의했으며, 13책이나 되는 분량을 국가에서 간행해 널리 배포했다. 오늘날 시민들은 조선이 왜 망했는지 끊임없이 물으며 당시 통치자들이 체제 개혁에 소홀했다는 사실에서 답을 찾곤 한다. 그런 조선 후기에도 국가 체제를 허물어 다시 세우자는 무명 선비의 제안을 놓고 그 정도 고민은 했다.

지금은 21세기, 국회에서 1가구 1주택의 원칙을 천명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유형원이 토지 사유를 막자고 한 것과 달리, 헌법이 명시한 모든 국민의 쾌적한 주거생활을 구현하기 위해 주택 정책의 큰 원칙이자 기준을 밝히는 법률안이다. 발의자는 유형원처럼 숨은 선비가 아닌 국민의 대표다. 그런데도 당장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위헌적 발상이라거나 공산국가 말고는 이런 나라 없다’ ‘이젠 대놓고 사회주의냐하는 표제들이 뉴스 화면을 뒤덮었다. 발의한 의원이 속한 여당은 그 큰 덩치가 무색하게 화들짝 놀라 앞으로 소속 의원은 법안 발의에 앞서 지도부와 협의를 강화하라고 했다. 이대로는 그 법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도 못 할 듯하다.

 

우리 헌법은 경자유전의 원칙을 명시하고 농지의 소작제도를 금지한다. 일찍이 제헌 헌법에서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고 선언한 이후, 농사짓는 사람만이 논과 밭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원칙이 헌법에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유형원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이 긴 세월 경제 정의를 위해 고민하고 싸워온 끝에 도달한 우리 사회의 합의다. 농민이 논밭을 가져야 하듯이, 아니 그 이상으로 사람에겐 집이 필요하고 집 지을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집은 직접 들어가 살 사람이 소유하라는 원칙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라면, 농사짓는 사람만 논밭을 가지라는 헌법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이다. 1가구 1주택의 원칙이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위헌이라면, 논밭은 농사짓는 사람만 가지라는 대한민국 헌법이 위헌이다.

 

유형원이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한쪽에서는 제 한 몸 누일 공간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도는 사람이 넘쳐나고 다른 쪽에서는 들어가 살지도 않을 집을 차지하여 재산을 불려가는 현실을 한탄하면서 주택의 세습과 매매, 사유를 철폐할 개혁안을 내놓을 것이다. 의미가 큰 토지 사유도 부정했으니 집 문제 앞에서는 고민조차 없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정신은 주택과 땅으로 돈을 버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년 전 <반계수록>의 개혁안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온건한 원칙의 천명을, 왕조시대만큼이라도 고민하기는커녕 체제 부정이라고 험한 말로 찍어 누르는 우리 시대를 미래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1가구 1주택의 원칙을 천명하자는 쪽이 위헌인가, 걸핏하면 무시무시한 빨간딱지 위헌딱지를 들이대는 쪽이 위헌인가.

오수창 ㅣ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겨레 2021-01-04

 

도쿄, 22벼랑 끝의 죽음

지난 1116일 새벽 4시경, 일본 도쿄(東京) 시부야(渋谷)구의 한 버스 정류장 22cm 간이 의자 위에 여성 노숙인이 숨져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뒷머리를 강하게 맞은듯, 충격받은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이 여성의 사인은 외상에 의한 뇌출혈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뛰어난 정보력을 자랑하는 일본 경찰은 자국민에 대해서는 인권보호 차원(?)인지 알 수 없으나, 제대로 디지털화를 못한 탓에 몇 날 며칠을 동네 사람 붙잡고 탐방하고 가가호호 물어물어 조사한 끝에 피해 여성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오오바야시 미사코(大林美佐子,64). 올해 2월말까지 시부야의 한 슈퍼마켓에서 시식코너를 담당한 판매원으로 일해 왔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지자 슈퍼마켓도 한산해 지면서 비정규직, 그 중에서도 시식 판매대가 제일 먼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속수무책, 오오바야시씨의 호구지책도 매정한 구조조정의 칼날에 단번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판매대에서 한달 꼬박 일 해봐야 150만원도 안되는 돈이었지만 그 돈이라도 손에 쥐면 애도 남편도 없는 여성 혼자의 한달 생활은 빠듯하게 버텨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진짜? 도쿄에서 가능할까?)

 

그러나 저축도 연금도 사라진 비정규직 노년의 퇴사조치는 이 여성을 하루아침에 차디찬 길거리로 내 몰았고, 올해 4월부터 폭 22cm인 정류장 간이의자에서 노숙을 하는 신세가 됐다. 일본 특유의 국민성인 메이와쿠 (迷惑: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이 착하디 착한 자조인간(스가총리는 지난 9월 이후 일본국민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조(自助)’를 강조해왔다)’은 어디에도 하소연도, 도움요청도, 폐도 안끼치고 살기로 결심한 모양새였다.

 

'자조'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새벽 2시에 '22Cm의 벼랑'에 걸터 누웠다가 5시면 자리를 비켜 줬다. 출근하는 첫차 시간에 맞춰 여러사람에게 메이와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메이와쿠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조인간으로 노력해온 오오바야시를 구타해 죽음으로 몰아 넣은 범인이 자수했다. 요시다 카즈토 (吉田和人,46)였다.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로 동네를 깨끗이 청소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그로서는 매일 한 밤중에 자기 나와바리(縄張: 세력권)을 침범하는 여성노숙인이 마땅치 않았다.

 

카즈토는 오오바야시에게 범행 하루 전에도 돈을 줄테니 버스정류장에서 나가라고 회유했으나 말을 듣지않아 분노가 치밀었다고 한다. 아프게하면(구타) 사라질거라고 생각했다는 진술에 모두들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가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은둔형 외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일본 정부는 개인과 가장의 문제라며 히키코모리 성향을 보이는 성인들을 방치하고 있지만, 이들의 반사회적이고 반인간적인 공격성향은 수십건의 '묻지마 살인'과 주변인들을 괴롭히는 이상 증상으로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99대 총리가 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원하는 사회상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조'(自助), 그것이 안 되면 지역 공동체와 함께 해결하는 '공조'(共助), 그것도 부족하면 국가나 지방공공단체가 나서는 '공조'(公助)라며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참고 희생한후에 미흡하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 여성들은 충분히 자조해 왔다. 전쟁 전에는 천황제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에서 나를 버리고 일왕의 신민으로 공장의 정신대나 공창의 윤락녀로 전락했고, 패전이후에는 미군의 놀이개로 다시 남성중심사회의 밑바닥 인생으로 일본사회를 지지해 왔다.

 

이제는 일본 여성들도 아프면 아프다고, 싫으면 싫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목소리 를 내야 한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일본 남성들이 소리쳐야 한다. 이것이 공동체의 기본이라고 외쳐야한다.

 

일본은 민폐 끼치지 말라(迷惑かけるな)’는 문장을 일본의 여성들에게 일본의 하층민들에게만 강요하지 말기를 바란다. 일본의 엘리트라는 정치인들이 이미 일본땅에서 충분히 민폐를 끼치고 살아 왔고, 이제는 동아시아와 세계를 상대로 민폐를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정치인들 역시 이 작은 나비의 파동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22cm의 벼랑은 일본에만 있는게 아니다. 대한민국 휴전선 넘어 북쪽에도 22cm는 있다. 서울의 망원동에도, 대구 동성로에도, 부산 남포동에도, 광주의 송정동에도 있다.

 

정부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로 밀려난 '방배동 모자'는 어떠한가. 발달장애 아들과 거주하던 이 60대 여성은 정부의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제대로 된 생계·의료혜택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세상과 하직했다. 그녀가 떠난 후 시신이 발견되기까지 무려 반년이나 걸렸다.

 

이 와중에 이렇다할 대안도 없이 마타도어와 가짜뉴스로 선동질에 급급한 저 수구세력과 거기에 빌붙은 언론의 행태는 더 가관이다. 사회 취약층에는 눈꼽만큼의 애정도 없으면서 그럴싸한 말잔치만 펼치는 그들의 위선은 일본의 엘리트 정치인들과 꼭 닮아있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풍자만화가 고경일 스트레이트뉴스 2020.12.21

 

2021년 오디세이

그리스 시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Odyssey) 모험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2021년에 와서는 멈췄다. 자연이 인간사회에 대해 맹렬한 반격을 가하고, 인간은 거기에 맞서 저항하는 시대적 상황을 보고 있다. 오디세이는 쎄이렌(Siren)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의 몸을 기둥에 묶고 눈을 가렸는데, 지금은 눈 대신 입을 가리고 몸을 집에 묶어 밖을 다니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힐 때가 아니라, 집에서 콕 들어박혀 세상과 접촉을 끊어야 생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구호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그리스 오디세이는 유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겪는 모험과 역경을 그리고 있는데, 2021년의 오디세이는 집에 머물며 밖으로 나다니지 못하는 격리와 고립에 빠져 있다. 아니 세상이 어떻게 됐기에 이렇게 변했다는 말인가? 테스형에게 물어봐야 하나! 인간이 자중 그리고 자숙하라는 자연의 메시지인 것 같은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사뭇 혼란스럽다.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것을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하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들은 재앙이 발생하면 모두 신들한테 죄를 뒤집어씌운다. 재앙이란 재앙은 우리한테서 일어난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인간 자신들의 분수를 넘어선 행동 때문에 타고난 운명보다도 더한 쓰라린 꼴을 당하는 것을(위키백과 인용).”

 

프랑스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논술한 학문과 예술이 인간의 습속을 순화시켰는가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었는데, 인간사회가 루소의 예상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인간은 문명사를 통해 과학과 기술, 학문과 예술에서 엄청난 발달을 가져왔는데, 독일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얘기한 위험사회는 더욱 가속되고 있다.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인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존재의 존재론'에서 주장한 '인간의 인간화'도 성취하지 못하면서 '인간의 신격화'를 추구한 자만심에 대한 징벌이 아닌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할지 싶다.

 

오디세이는 2021년 인류에게 묻는다. 학문과 과학이 발달했으나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사회와 비록 지금보다는 살기 어려웠지만 공동체의 삶이 있는 사회 가운데 과연 어떤 사회가 살만한 사회인가를? 물론 이 또한 시간과 함께 지나갈 것이다. 세상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 같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번 코로나 팬데믹을 통하여 멈추니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동안 일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이번 코로나를 기회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한번 뒤돌아보자. 자연에 대해 너무 자만했던 것은 아니었나? 공동체 삶의 소중함을 망각했던 것은 아니었나? 지구는 아파가는데 인간의 욕심만을 채우는 과학과 지식의 탐닉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인간 자신의 분수를 넘어선 행동은 재앙을 가져온다는 신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나?

 

이제 신축년이 밝았다. 아프면서 큰다는 옛말이 있다. 오디세이가 10년의 방황에서 귀환했듯이, 새해에는 코로나를 극복하여 더 건강한 면역력을 가진 성숙한 사회가 되어 우리 모두 일상으로 복귀하는 2021년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해 본다.

/김천권 인하대 명예교수 인천일보 2021-01-04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

코로나가 빨리 끝나서 예전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죠.”

ㄱ씨의 새해 소망도 대다수 사람과 다르지 않다. ㄱ씨는 서울 마포구에서 10평짜리 작은 주점을 운영한다. 코로나19 초기이던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8월 하순 2차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11월 저녁 9시 영업시간 제한이 시행되고부터는 30%까지 줄었다. 1년 중 최고 대목인 12월은 최악의 한달이 됐다. 손님이 많아야 한두 테이블이고, 어떤 때는 한명도 없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730분 정도까지 손님이 오지 않으면 , 오늘은 끝났구나생각하죠.” 예전엔 새벽 1~2시에 퇴근했지만 지금은 8시에 문을 닫기도 한다.

 

손님이 없다고 고정비용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임대료 200만원은 꼬박꼬박 내야 하고 재료비와 각종 공과금도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아르바이트생 두명은 결국 그만두게 했다. 아직까진 저축을 헐어서 적자를 메꾸고 있지만 몇백만원 정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조만간 정부에서 해준다는 소상공인 대출을 받을 생각이다.

 

코로나가 끝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요즘 배달 음식, 홈파티 이런 것 많잖아요. 예전 같지는 않을 것 같아요. 코로나가 하나의 전환기 같은 느낌이 듭니다.”

코로나19라는 이 낯선 질병은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가져왔지만, 어떤 이들에게 그 무게는 더 무겁다. 지난해 봄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하자 이른바 코로나 시대에 대한 전망과 분석들이 쏟아졌다. 그중 현실로 이어진 한 우울한 예측은 코로나가 불평등을 확대하리라는 것이었다. 코로나가 고소득층, 정규직, 남성보다 저소득층, 비정규직, 자영업자, 여성에게 더 가혹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코로나가 불평등한 재난이라는 사실은 어김없이 지표로 확인된다. 지난해 3분기 상위 5분위 소득은 하위 1분위 소득의 4.88배로 나타나 전년 3분기(4.66)보다 격차가 더 커졌다. 일자리 역시 음식업·소매업 같은 대면서비스, 임시·일용직, 자영업자 부분에서 큰 폭으로 감소했다.

 

자산시장 활황은 실물경제의 어둠과 대비돼 더 극적으로 보인다. 지난해 성장률은 외환위기 이후 22년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했지만,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주택 매매가격 상승률은 14년 만에 가장 높았다. 경기침체를 막기 위한 저금리와 유동성이 주가와 집값을 밀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자산가격이 상승하면 자산을 보유한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기업 중에서도 반도체, 플랫폼, 온라인쇼핑 같은 비대면 관련 분야는 큰 호황을 누리고 있다.

 

더구나 이런 어려움과 혜택의 치우침이 코로나19 이후에도 고착화할지 모른다는 전망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코로나가 가져올 경제구조의 변화는 누군가에겐 도약의 기회가, 누군가에겐 생존의 위협이 될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4차 추가경정예산까지 편성하며 나름대로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자평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 계층의 비명이 커지고 지원 여론이 높아지면 마지못해 재정을 푸는 모습을 반복했다는 비판 역시 나온다. 어느 때보다 분배자로서의 정부 역할이 요구되는 때다. 코로나 종식 시기가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선제적이고 과감한 재정지출은 상당한 기간 동안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기존의 정책 지평을 뛰어넘는 시도가 필요할 수도 있다. 코로나라는 시련 속에서 우리 사회가 얻은 성과 중 하나라면 실제 시행된 전국민 재난지원금을 비롯해 기본소득, 기본자산, 사회연대세 등 다양한 경제사회정책이 공론장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시대에는 이런 제언들에 대한 더 적극적인 논의와 실험이 이뤄져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6우리는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그때마다 소득 격차가 벌어졌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공식을 깨기 위한 더 많은 포용정책과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안선희 ㅣ 경제부장 한겨레 2021-01-04

 

크로노스의 낫

크로노스의 신이 시간의 낫으로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면 추악한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진실은 즐겨 자신을 감춘다. 그러나 시간의 신은 그 거짓의 장막을 걷어낸다. 그는 보이지 않던 것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멈춰 세운 일상은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는 시간의 신인지도 모른다. 지난 일년 감춰져 있던 거짓들이 멈춰진 일상을 통해 그 민낯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현대 문화의 근본적 문제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 사회와 정치를 움직이는 숨은 동기가 무엇인지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코로나 감염사태가 문명의 전환을 예고하는 징후라면 지난 일년 동안의 검찰 개혁 논란은 이 사회의 본질적 병폐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사회의 법이 얼마나 허상인지, 그 작동 과정이 너무도 기득권의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덧붙여 정치의 사법화가 초래하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도 알게 되었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법의 자의적 판단이 민주주의를 바닥으로 몰아간다. 법의 판단을 사람들이 비웃는 이유를 그들만이 모른다. 사법 농단을 처벌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전 사회적 요구를 다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둠의 장막 속에 감춰두었다. 그러고서는 법원의 판단을 좌우하려 들지 말라고 훈계하고 있다.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누가 봐도 뻔한 검찰 개혁은 그 사이 추악한 늪에 빠져 허위적 거리고 있다. 법의 작동과 판단을 갈수록 불신하고 비웃는 이유를 정녕 모른단 말인가? 굳이 시간의 신이 개입해야만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는 것일까. 진실을 말하리라고 믿었던 언론은 사실은커녕 자사 이익에 매몰되어 과장, 선정, 맹탕 뉴스를 쏟아낸다. 언론 불신이 만연하고 신문의 신뢰도와 영향력이 바닥을 헤매는 원인을 그들만이 외면한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약했던 개혁에서 무엇이 이뤄졌는가? 법조 개혁은 고사하고 언론, 환경, 교육 개혁이 제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 사이 기득권과 자본의 힘은 갈수록 더 강고해지고 있다. 그러니 자칭 진보였던 이들이 쏟아내는 '내로남불' 따위의 헛소리가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가장 많이 전달하는 매체가 어딘지를 보면 그 말의 사회적 용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그 자칭 진보의 헛소리는 이른바 '개소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일정하게 소비되는 까닭을 그들만 모른 채 한다. 그들의 추악함이 힘을 발휘하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이 정권은 그 헛소리에 의해 무너질 것이다.

 

크로노스의 신은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지만 이 사회를 움직이는 신은 기득권의 힘일 뿐이다.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검찰개혁에 쏠린 힘의 일부라도 쏟았는가. 개혁과 돌봄은 대당 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내놓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안보다 더 허망한 거짓과 위선이 어디에 있을까. 올해 최고의 헛소리로 전혀 손색이 없다.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무엇을 위한 정치인가? 누구를 위한 법인가?

 

진실을 드러내고 우리를 구원할 신은 떠나갔다. 그럼에도 우리를 구원할 신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 신이 아니라도 좋다. 규범이든 공동선이든, 또는 그 어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신적인 힘은 사람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원칙이며 그런 마음이다.

 

코로나19와 함께 검찰 개혁 사태는 이 사회의 숨은 진실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기득권에 목을 매는 그들이 이 사회의 진정한 적이 아닌가. 자기 이해관계와 이익에 매달려 공동선을 철저히 외면하는 그들의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새해 아침을 지금처럼 집 안에 박혀 맞이하기 싫다면, 더 이상 그들이 뿜어내는 맹목적 헛소리에 갇혀 일상의 삶을 포기하기 싫다면 우리가 이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어야 한다. 크로노스의 신이 떠난 시대에 성찰하고 행동하며 외치는 우리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신이 떠난 시대에 구원의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거짓과 사적 이익을 깨는 힘은 우리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경인일보 2021-01-04

 

삶은 계속된다

신축년(辛丑年) 첫날도 언택트’(비대면)로 시작됐다. 2020년 마지막과 2021년 새해 시작을 알리는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 행사가 현장이 아닌 온라인에서 사전 제작 영상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올해도 언택트 열풍이 더 확산할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소상공인, 자영업자 등 많은 이들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은 문화예술계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많은 공연이 취소되거나 거리 두기를 통해 관객 일부분만 입장할 수 있었고, 언택트 방식으로 급선회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영화산업은 2020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해 12‘2020 한국영화산업 가결산을 발표했다. 지난해 영화산업 추정 매출액은 9132억 원으로 201925093억 원보다 63.6%나 감소했다. 극장가 연말 특수는 사라졌고 재개봉이나 특별상영으로만 명맥을 이어가야 했다.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극장 매출은 2020년엔 5100억 원에 그쳐 201919140억 원에 비해 무려 73.3%가 줄어들었다.

 

극장 관객이 줄어들자,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대표적인 OTT(Over the Top·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인 넷플릭스 공개를 택한 영화가 속출하고 있다. 영화 사냥의 시간’ ‘’ ‘차인표를 비롯해 제작비 240억 원의 SF 블록버스터 승리호가 넷플릭스와 계약을 마쳤다.

 

이처럼 코로나19는 영화, 드라마 등 영상 콘텐츠 산업 변화의 축을 OTT로 급속히 이동시켰다. OTT는 전파나 케이블이 아닌 인터넷으로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코로나19로 넷플릭스를 사용하는 50~60대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기존의 TV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들을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들을 통해 TV보다 더 저렴하게, 화질은 높게,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다. 안성민 트렌드 전문가는 저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 마이크로 트렌드에서 넷플릭스가 OTT 시장에서 1위를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저렴한 가격 때문이라고 본다. 한 달에 7.99달러의 요금(최저 해상도 기준)만 내면 무제한으로 넷플릭스의 콘텐츠들을 시청할 수 있다.

 

언택트기술은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조명받은 트렌드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언택트 기술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인간과의 단절이나 대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접촉을 보완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휴먼터치(Human Touch)’의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트렌드 코리아 2021에서 이에 대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감성적 센스를 기계가 결코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고도의 추천 알고리즘으로 유명한 넷플릭스도 예외가 아니다. 넷플릭스에는 태거(tagger)’라고 불리는 영상 콘텐츠 분석 전문가들이 있다.

 

태거들은 영화·방송 업계에서 5년 이상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콘텐츠에 관한 높은 수준의 지식과 함께 콘텐츠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구별하는 능력과 영화나 드라마 콘텐츠의 본질적 특성을 추출해서 간결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겸비한다. 이처럼 디테일한 작업은 인공지능이 수행하기 어려우며, 오롯이 경험이 풍부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넷플릭스 큐레이션의 탁월성은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극도로 잘게 쪼개내는 사람에게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2021년 역시 코로나 팬데믹과 언택트로 명명되는 해가 될 듯하다. 백신이 모든 국민에게 공급될 때까지 코로나 팬데믹은 맹위를 떨칠 것이다. 하지만 소띠해를 맞아 코로나 종식에 대한 희망을 품어본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장은 소는 코로나 시대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를 종식할 유일한 방안이 백신인데, 백신이란 말이 소(vacca·암소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인류를 천연두에서 구해낸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는 소의 젖을 짜다가 우두에 한 번 걸려본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 사전 접종을 통한 예방 개념을 창안해냈다. 이러한 방법을 종두법혹은 우두법(牛痘法)’이라고 한다. 백신의 원조가 된 소가 바이러스로 신음하는 인류의 희망인 셈이다.

 

2021년은 백신 접종을 통해 코로나가 종식돼 소중한 일상을 회복하는 원년이 됐으면 한다.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의 완벽한 하모니에 전율을 느끼고, 연극배우의 즉흥적 대사에 웃음을 터뜨리고,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음악으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전해준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노래 제목인 라이프 고즈 온(Life Goes On)’처럼 삶은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김상훈 문화부장 부산일보 2021-01-04

 

불행히도 기후백신은 없다

‘2050년쯤 한반도 남부에는 겨울이 없어진다. 사과와 배 복숭아 포도 같은 온대과일 재배가 불가능하게 되고, 연근해에서는 명태 등 냉수어종이 사라진다. 또한 현재의 쌀 대신 안남미(인도차이나 반도의 안남 지방에서 생산하는 쌀 종류)가 주종을 이루고, 강원도 대관령에서만 양질의 쌀이 생산된다. 해수면은 최고 160까지 오른다.’

 

1995년 우리나라 과학기술처는 이런 내용이 담긴 최종보고서를 내놨다. ‘기후변화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과 지구 환경이란 제목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2년간 연구한 결과였다. 당시 언론매체에 큼지막하게 실리며 주목받았다. 보고서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2050년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두 배나 높아지면서 한반도 연평균 기온이 2~4도 상승하고 생태계 파괴와 병충해 증가, 홍수를 비롯한 각종 피해가 속출할 거라는 경고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그로부터 35년이 흘렀다. 하지만 역대 정부가 국책연구기관의 이 같은 위험경보와 촉구에 얼마나 잘 대응해 왔는지는 의문스럽다. 최근 발표된 정부·여당의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을 보면서 이런 생각과 함께 35년 전 자료가 떠올랐다. 이 전략에는 2050년까지 국내 탄소 순배출량이 제로(0)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한 큰 틀이 담겼다. 지극히 당연한 방향이나, 아쉬운 느낌도 떨칠 수 없다. 때늦은 감이 드는 데다, 구체적인 실행방법이 부족해 자칫하면 선언에만 그칠 우려도 커서다.

 

기후위기인권그룹의 시민 40여 명이 지난해 12월 정부를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소극적으로 설정하고, 방만하게 대응해 왔다는 이유다. 앞서 청소년기후행동 19명은 지난해 3월 정부의 미온적 정책으로 기본권이 침해받는다며 국내 최초로 헌법재판소에 기후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런 목소리는 갈수록 더하지 싶다.

 

이제 ‘2050 탄소중립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미국, 유럽 등의 여러 국가들이 잇따라 참여하고 상당수는 이를 아예 법제화하고 나섰다. 2018년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협의체(IPCC)’가 권고한 것으로, 2015파리협약에 동의한 국가는 여기에 대한 비전과 추진방안을 내놔야 한다. 그런 만큼 2050 탄소중립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런 흐름을 소홀히 하면 글로벌 경쟁력에서 뒤처질 게 뻔하다.

 

더욱이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 당선으로 기후변화 대응과 친환경을 위한 국제사회의 녹색규제 강도가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세계 9위 탄소배출국인 한국이 받는 위협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부산과 밀접한 해운업 분야만 해도 포세이돈 원칙에 비상이 걸렸다. 세계적 금융기관들이 해운업계에 대출을 결정할 때, 탄소배출 감소 등을 평가해 기준에 못 미치면 제약을 준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기후위기에 대한 국내 인식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새해 역점 추진분야 중 하나로 기후변화 대응을 내세운 단체·기관장들이 확연히 늘었다. 중앙·지방정부, 민간의 유기적인 협력과 동참이 탄소중립 실현의 기본 요소인 걸 감안하면 바람직한 현상임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변화와 철저한 실천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산업·경제와 사회 전반의 체질을 저탄소화로 바꿔나가는 일이 급선무다. 아울러 국민과 기업의 적극적 동참을 이끌어내고 삶의 방식도 종전과는 달라져 한다. 물론 탄소중립화가 말처럼 쉽지 않고, 큰 고통이 따른다. 그래도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기후위기는 여러 위기 중 하나가 아니라 인류 문명 자체를 위협한다. 지난 100년 간 인류의 온실가스 배출은 지구 온도를 1도 올려놨다. 여기서 0.5도 더 오르면 전 세계는 폭풍 홍수 폭염 산불 같은 극단적 기후재난이 다반사로 일어나게 된다. 만일 2도 이상 오르면 아예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다. 그때는 인류가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오늘날 기후위기는 과거부터 예견돼 왔음에도, 상황이 호전은커녕 계속 나빠졌다. 마치 자기 이익만 챙겨서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공유지의 비극을 보는 듯하다. 세계기상기구(WMO)의 예측으로는 지난해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약 1.2도 상승했다. 2024년까지 적어도 한 해는 1.5도를 초과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국제적십자연맹은 최근 보고서에서 기후위기를 코로나19보다 더 큰 위협으로 꼽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 엄청난 고통을 겪지만, 백신이란 희망이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백신 접종이 한창이고, 우리나라도 이르면 다음 달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후위기를 해결할 백신은 없다. 이제는 더 미루거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구시영 선임기자 ksyoung@kookje.co.kr 국제신문 2021-01-04

 

이낙연 대표가 집중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의 느닷없는 이명박·박근혜 사면제안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제안인데, 논란이 되는 것 자체가 매우 서글픈 일입니다. 국정농단 세력들의 재판도 안 끝났을 뿐만 아니라, 국정농단 및 민주공화국 파괴 주범들의 반성도, 참회도, 사과도 전혀 없었습니다.

 

또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수많은 범죄들 중 지금까지도 규명이 안 된 일도 아주 많습니다. 불법 민간인 사찰, 내곡동 사저 사기 사건, 자원외교 혈세 탕진, 4대강 죽이기, 극심했던 재벌 유착과 온갖 특혜들, 검찰·언론 장악, 국정원·검찰의 각종 정치공작 등은 아직도 기소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심판과 청산도 끝나지 않았는데, 사면 논의를 제안한다는 것은 실로 불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 비록 해산했지만 촛불시민혁명에 함께했던 대다수 국민과 시민사회도 결코 찬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작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정치검찰에 의한 피해자들도 사면이 안 되고 있는데, 이명박·박근혜 사면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일도 아니고, 민심을 얻지도 못할 것이며, 범진보개혁 진영의 극심한 반발과 갈등을 불러일으켜 그나마 지지율도 더 하락시킬 것입니다.

 

진정한 국민통합은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철저히 단죄를 받고 국정농단 당사자들과 공범인 국민의힘까지 모두 처절하게 참회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거기에 집권 여당 대표의 새해 첫 메시지라는 것도 너무 고약합니다. 코로나19와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질려 있는,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을 염원하지만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지쳐 있는 국민들에 대한 도리도 아닌 것이죠.

 

올해 1학기부터 전국 대학생·대학원생들의 학자금 대출금리가 더 내려갑니다. 작년에 1.85%로 내린 데 이어 올해부터 1.7%면 상당한 저금리입니다. 저희들 호소대로 무이자까지 되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많은 분이 노력한 성과일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사학비리 퇴출 노력과 함께 학자금 대출이자를 많이 내린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 올해부터는 어르신들의 기초연금, 장애인들의 장애인연금도 일괄적으로 30만원으로 상향되었고, 박스 손잡이 설치도 대폭 확대되고 착오송금 구제법도 시행됩니다. ··고 전면 무상교육이 올해부터 실현되고 친환경 무상급식도 더욱 확대됩니다. 서울의 중·고등학생에겐 입학준비금 30만원도 지급되고요. 이런 변화가 더욱더 가속화되어야 합니다.

 

지금 민주당과 이낙연 대표가 집중할 일도 여기에 있습니다. 코로나19 극복과 함께 부동산 문제 해결 및 집값·전월셋값 하향 정상화, 국민들의 교육비·주거비·의료비·통신비·이자비·교통비의 획기적 절감을 위해 더 치열하게 발로 뛰어야 합니다. 경제민주화와 노동존중, 그것을 통한 저소득층·서민·중산층 국민들의 소득 증대 및 가계 안정, 그리고 우리 국민이 코로나19를 완전히 이겨내고 내수경제를 확 살려낼 수 있는 힘과 계기를 만들 두번째 전국민 재난지원금의 지급 등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택배법 제정은 기본입니다).

 

이낙연 대표와 민주당은 이런 일에 얼마나 앞장서고 있습니까? 문재인 정부와 청와대 역시 진심을 담아 올인'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디 지금 가장 필요한 경세제민'이 무엇인지가장 시급한 민생 대책이 무엇인지, 민중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보시고 동시에 절박하고 절실한 민심 속으로민생 속으로 두루 들어가 보십시오. 말도 안 되는 사면을 논의할 때가 아니라 우리 국민과 민생경제를 위한 좋은 정책에 다 걸기' 할 때입니다.

촛불시민혁명 이후 지금이 여러모로 최악의 위기 상황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이낙연 대표와 민주당은 작금의 여러 혼란과 국민들 심려에 대해 국민들에게 직접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정중히 위로하면서 올해를 제대로 시작하길 바랍니다.

안진걸 ㅣ 민생경제연구소장·전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대변인 한겨레 2021-01-04

 

2021년의 시대정신

1929년 대공황에 맞서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정부가 제시한 뉴딜의 비전은 ‘3R’이다. ‘구제(Relief), 회복(Recovery), 개혁(Reform)’이 그것이다. 3R은 코로나19 팬데믹에 맞선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 가운데 맨 앞에 놓인 구제는 의학적 구제와 경제적 구제로 나뉜다. 의학적 구제는 백신 보급이 관건이다. 올겨울까지 대다수 나라들이 백신 보급을 완료함으로써 2년 동안 갇혀 있던 팬데믹의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날 것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14일 현재 9000만명에 가까운 확진자는 올해 1억명을 훌쩍 넘길 것이고, 200만명에 육박하는 사망자 역시 300만명에 가까이 도달할 것이다. 어느 나라든 백신 보급이 신속히, 원활히 이뤄져야 할 까닭이다.

 

경제적 구제는 경제적 회복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어느 나라든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분은 소상공인 등 제조업과 서비스부문이다. 따라서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 긴급 생활 지원은 물론 사업 복구 지원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직면한 최대의 위기인 만큼, 경제 살리기를 위한 재정 확대는 올해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핵심은 개혁이다. 루스벨트 정부가 선택했던 개혁의 방향은 사회적 대타협으로서의 사회계약이었다. 뉴딜은 정부·기업·노동자가 사회계약을 맺게 해 생산성과 형평성을 동시에 제고하는 정치적 교환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1935년 제정된 와그너법은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팬데믹이 지속되는 한, 안전 의제는 불평등 의제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팬데믹이 종식되면, 불평등 완화가 가장 중대한 과제가 되고, 이를 위한 전방위적 제도개혁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는 어떨까. 2021년 한국사회의 선 자리를 예상해 보면, 다섯 가지가 특히 눈에 들어올 것이다. 첫째, 계속되는 팬데믹에 맞서 백신 보급이 이뤄지고, 이와 연동해 완만한 경제 회복이 진행될 것이다. 둘째, 4월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정치적 양극화가 강화되고, 20223월 대통령선거를 향한 경쟁이 서서히 달아오를 것이다. 셋째, 지난해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부동산시장에 대한 국민 다수의 관심은 계속 뜨거울 것이다. 경제학자 닉 서르닉이 분석하듯 지구적 차원에서 부동산시장 거품의 이면에는 자산-가격 케인스주의가 놓여 있는 만큼, 케인스주의의 정책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각자도생 사회에서 이 거품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넷째, 저출산과 고령화로 대표되는 인구 절벽의 압박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다섯째, 여름쯤 미국 조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가시화되면, 남북관계를 포함한 동북아 대외관계 구도가 출렁거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이제 문재인 정부는 서서히 국정 과제들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로 들어서고 있다. 돌아보면,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반기에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적극적으로 추구했고, 집권 중반기에는 혁신적 포용국가를 전면에 내세웠으며, 후반기에는 예기치 않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한국판 뉴딜에 주력해오고 있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그리고 혁신적 포용국가는 올가을부터 가시화될 대선 과정에서 본격적인 평가가 이뤄질 것이다. 2021년 올해 문재인 정부에게 부여된 가장 중대한 과제는 한국판 뉴딜이 내건 단기적 위기 극복과 장기적 미래 비전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팬데믹의 출구가 희미하게 보이는 올해, 무엇이 시대정신이 될 것인지의 물음이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지만 교훈을 안겨준다. 이점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면 대공황에 맞선 구제, 회복, 개혁은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다. 팬데믹으로부터 우리 삶을 보호하는 안전과 자산·소득을 포함한 불평등 해소가 2021년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내년 3월 대선으로 가는 올 한 해 정치사회의 조건을 주목할 때, 정치적 양극화를 완화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일지 모른다. 정치의 계절에는 외려 시대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과제들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그것들의 정책적 구현을 통해 결과로서의 사회통합을 성취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과정일 것이다. 팬데믹 극복을 위한 회복과 개혁에 대한 담론 및 정책들이 생산적으로 경쟁하길 나는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21-01-05

 

공급확대라는 도박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해 말 취임과 동시에 설 전까지 공급대책을 발표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시장의 관심은 벌써부터 대상 지역이 어디인지에 쏠려 있다. 민간이 주도하든 공공이 주도하든 시장에선 공급대책을 개발호재라고 읽는다. 투자처를 찾는 현금이 시중에는 여전히 넘쳐난다.

 

지난해 ‘7·10 부동산 대책발표 며칠 뒤(14) 김현미 당시 국토부 장관은 공급이 부족하지 않다며 일각에서 제기되던 공급부족론을 일축했다. 그리고 3주 뒤인 84일 공급대책이 전격 발표됐다. 장관의 발언이 이렇게 쉽게 뒤집히는 것도 놀랍지만 단 3주 만에 10만가구가 넘는 물량을 뚝딱 만들어낸 정부의 능력이 더 놀랍다. 변 장관이 취임일성으로 설 이전을 언급한 건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급확대 방안이 무엇일지 예측하기가 어렵진 않다. 변 장관은 이미 힌트도 많이 줬다. 서울시 내 역세권 및 지하철역 주변 저층 주거지역, 준주거지역, 그리고 민간 주도로는 개발이 힘든 지역 등을 거론했는데 이 같은 곳을 찾는 것 역시 힘든 일이 아니다. 이미 정보가 빠삭한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약서를 쓰고 있을 것이다.

 

현재로선 공급확대가 집값 안정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공급확대를 놓고 별다른 비판이 없는 이유다. 정부의 고민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꺼낼 수 있는 규제카드는 다 써봤다. 보유세나 규제지역 확대 등 규제강도를 더 올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대통령 부정평가가 60%를 넘어가는 이 마당에 불가능한 일이다. 이도 저도 안 되니 공급이라도 왕창 해보자는 심산일까. 정부 심정이 여느 노랫말처럼 에라 모르겠다는 아니길 바란다.

 

대규모 개발사업 위주의 공급대책은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서울을 떠들썩하게 했던 뉴타운 사업이 대표적이다. 주거환경을 개선하겠다고 시작한 뉴타운 사업은 서울 집값만 올려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길음·은평뉴타운 등의 경우 원주민 정착률이 낮게는 20% 미만으로 나온다. 막상 주거환경 개선의 대상자’ 10명 중 8명이 해당 지역을 떠났다는 얘기다. 상당수는 개발에 따른 추가부담금을 마련하지 못해 약간의 웃돈을 받고 딱지를 팔고 떠난 사람들이다. 집주인이 이랬는데 세입자들은 어땠을지 볼 것도 없다. 막대한 개발이익은 외지인이나 다주택자들에게 돌아갔다.

 

주변 집값을 올리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주택은 감가상각이 큰 의미가 없는 재화다. 2~3년 뒤면 같은 동네 신축과 구축 가격이 엇비슷해진다. 옆동네가 10억원인데 우리 동네만 9억원을 받을 이유는 없다. 집값 상승은 전염병이 번지는 것과 비슷하다.

 

의식주 중 부동산 안정문제를 정권에만 맡겨둘 게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1999년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국민건강보험법 등과 같은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 구축됐다. 주거문제의 경우 2015년이 돼서야 주거기본법이 제정됐다. 몇 년간 이어져온 집값 폭등은 그나마 마련된 주거기본법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이야말로 법을 고쳐쓸 가장 적절한 시기다

송진식 경제부 경향 2021-01-05

 

문 정권의 20가지 대국민 약속위반

차기 대통령 선거일은 내년 39일이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이 일할 기간은 불과 1년여다. 그러나 새해 들면서 레임덕(Lame Duck), 권력 누수 현상이 본격화하고 있다. 측근 비리에다 인사 실패로 국정 동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국정 철학과 운영 방향을 밝혔다. 국민들은 어느 대통령보다 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문 정권의 공과(功過)를 취임사로 들여다보자.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1). 지난 대선에서 당시 문 후보는 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다며 광화문에 집무실을 두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아무런 해명도 없이 공약을 저버렸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2). '주요 사안은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3). '때로 광화문 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다'(4). 문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은커녕 조국추미애 사태, 윤석열 찍어내기,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등 굵직한 현안이 생겨도 뒤로 숨기에 바빴지 직접 브리핑은 없었다. 작년 수백만 명이 모인 우파 진영의 시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문 대통령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나누겠다'(5). '권력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다'(6). 여당은 청와대 하명만 받드는 거수기였고,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려던 검찰 해체를 시도했다.

'한미동맹을 강화하겠다'(7),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8), 문 정부는 친중 행보를 보이며 한미동맹을 남북 관계의 걸림돌로 여기는 외교·국방 정책을 펼쳤다. 북핵은 진척이 없고 외교·국방·경제 문제에서 우방국들과 갈등만 빚었다.

 

'능력과 적재적소를 인사의 대원칙으로 삼겠다'(9),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관계없이 인재를 삼고초려해서 일을 맡기겠다'(10). 문 대통령은 좌파적 이념을 바탕에 둔 인사들만 골라 썼다. 적재적소가 아닌 반시장적 인사들만 주로 기용했다.

 

'일자리를 가장 먼저 챙기겠다'(11). '문 정부하에서는 정경유착이 사라질 것이다'(12), 문 정부는 질 높은 일자리보다는 일용직, 공공근로성 일자리만 늘렸다. 또 라임펀드 사태에서 보듯 어느 정권보다 권력형 비리가 많았다.

 

'지역과 계층과 세대 간 갈등을 해소하겠다'(13). 여권은 과거사 논쟁 등 프레임 전쟁을 일으켜 계층별로, 지역별로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차별 없는 세상,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14).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15). 조국, 추미애 등 정권 내부 인사들이 먼저 반칙과 특권을 일삼아 국민들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 치지 않겠다'(16).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하겠다'(17),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다'(18). 문 대통령은 최근 TV에 나와 '2050년 탄소 0시대'를 열겠다고 했지만 여당의 싱크탱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문 정부는 또 자기 진영에 유리한 여론만 차용했다.

 

'소외된 국민이 없도록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살피겠다'(19). 계층 간 소득 격차는 더 벌어졌고 서민과 자영업자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20). 문 정부에선 여론·포퓰리즘 정치, 적과 아군을 확실히 구분하는 정치만 있었다. 이 같은 국민과의 약속 위반으로 문 정권이 유일하게 지킨 약속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춘수 동부지역본부장 (대구) 매일신문 2021-01-05

 

이재용 재판과 박근혜 사면

판결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넘어 법관 개개인에 대해 공격이 가해지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저는 대법원장으로서 재판 독립을 침해하는 부당한 외부의 공격에 대해서는 의연하고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겠다.”

 

새해를 맞아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시무식사) 중 일부다. 정경심 동양대 교수 1심 선고와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처분 집행정지 결정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과도한 판사 공격을 지적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 교수 판결은 좀 과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있지만 이는 항소심에서 다투면 될 일이다. 대법원장의 우려는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얼마든지 판사를 비판할 수 있지만, 판결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탄핵하라는 식의 주장은 설득력도 없고 갈등만 키운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아프게 받아들일 리 없다.

 

그렇다면 이런 비판은 아플까. “대한민국이 사법의 과잉지배를 받고 있다는 국민의 우려가 커졌다.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탄식이 들린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 총장 징계 정지 결정 뒤 이를 비판하며 공개적으로 쓴 글이다. 그의 스타일처럼 신중하고 절제된 표현이긴 한데, 법원이 그리고 판사들이 아파할 것 같지 않다. 번지수를 잘못 짚어서다. 이 대표는 윤 총장도 과오가 없지 않은데 징계가 법원에서 막혀 유감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절차적 잘못이나 지나친 문책으로 없던 일이 되는 징계는 너무나 많다. 목적에 이르는 과정의 정당성을 가리는 건 당연한 법원의 역할이다.

 

이미 보도된 대법원장과 여당 대표의 발언을 장황하게 다시 인용한 건, 오는 18일 선고 예정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때문이다. 재판부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그와 상관없이 지난 1년 이상 진행된 이 재판의 과정이야말로 이 대표가 우려하는 사법의 과잉지배사례이자, 대법원장과 많은 판사들이 지키려고 하는 사법부 신뢰를 깨부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파기환송심 첫 공판에서 재판부가 이 부회장에게 주문한 내용부터 해괴했다. 고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버금가는 과감한 혁신 내부 준법감시제도 마련 재벌 체제 폐해 시정. 삼성의 준법감시위원회는 재판부의 이런 주문에 맞춰 만들어졌고, 재판부는 준법감시위가 잘 돌아가는지 보고 형량을 정하는 데 반영하겠다고 했다. 재벌 총수의 과거 개인 범죄형량을 그가 대주주인 회사의 미래 범죄예방시스템을 보고 깎아주겠다는 논리다. 특검과 시민사회의 반발에도 재판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오죽하면 박용진 민주당 의원이 이렇게 일갈했을까. “돈을 빼앗긴 피해자(회사)에게 문단속 잘하라고 한 셈이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문단속을 잘하는지 눈으로 쓱 한번 보고 (돈 빼돌린 이의) 형량을 깎아주겠다고 한 것이다. 앞뒤가 바뀌어도 단단히 바뀐 재판이다.”

 

재판부가 18일 준법감시위를 이유로 형량을 깎는 결과를 내놓는다면 국민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앞서 살폈듯, 법원은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 정당했는지 따지는 최후의 보루인데, 재판부조차 스스로 재판 과정을 공정하게 이끌지 않았다.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지 두렵다.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 선고 나흘 전인 14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법원 최종 선고가 있다. 새해 첫날부터 사면 논의를 공격적으로 던진 이낙연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이 사면 요건을 갖추게 되는 14일 선고 일정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표가 국정농단 사건에서 박 전 대통령과 동전의 양면 격인 이 부회장 선고 일정까지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이 부회장이 시민사회의 우려대로 재벌의 3-5 선고법칙(징역 3년에 집행유예 5)을 적용받는다면 이 대표의 사면 승부수는 더 어려운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역시나 만약이지만, 최고 경제권력이 법원의 통 큰 결단으로 면죄부를 받고 두 전직 대통령은 정치적 결단으로 면죄부를 받는다면, 많은 이들이 상처받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중요한 두 선고와 사면론까지 겹쳐 어지러운 논쟁이 이어질 듯하다. 초심을 생각하고 과정에 공을 들여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석진환ㅣ이슈 부국장 한겨레 2021-01-06

 

새해 여론조사 읽는 법

2021년은 언론사들이 실시한 여론조사로 새해의 문을 연 듯싶다. 대통령선거를 1년 남짓 앞둔 시점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올해 첫 여론조사 결과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취임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무너졌다또는 레임덕 시작이란 분석이 쏟아진다. 두번째는, 여론조사 기관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윤석열 검찰총장이 대선후보 지지율 2, 3위 또는 1위로 분명하게 올라섰다는 점이다.

여론조사는 민심의 향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진폭이 큰 바늘의 지향점을 정확하게 읽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기대와 희망에 치우쳐 바라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상황을 너무 암울하게 여기는 건 오히려 독이 되기 쉽다. 여론조사에 취했던 권력과 정치인이 실패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우선, 좋든 싫든 윤 총장이 야당의 유력한 대선주자로 올라선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윤 총장이 새해 국립현충원을 찾아 지난해와 거의 똑같은 내용의 방명록을 적은 건 의미심장하다. 1년 전의 방명록과 달라진 건 국민과 함께라는 문구가 빠진 것뿐이다. 왜 뺐을지는 자명하다. 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난해와 같은 내용을 적은 데서, ‘국민과 함께라는 대목까지 같이 읽어달라는 속뜻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검찰총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냐는 우려와 비판은 타당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윤석열이 아니라, 1년 전 그가 언급한 국민이다. 윤석열과 직접 싸우는 것보다 오는 4월의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에서 국민 지지를 받는 게 검찰개혁 추진에 훨씬 효과적이란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새해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 다양했다. 어쨌든 취임 이후 최저치라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정말 레임덕의 시작이고 콘크리트 지지층붕괴의 징표일까. 레임덕이 정권에 주는 가장 큰 부담은, 의회와 집권당이 대통령의 정책 어젠다를 입법화하는 데 소극적으로 돌아선다는 점이다. 이래선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의회가 전적으로 입법권을 가진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이 문제가 정권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관료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는 게 문제인데, 관료사회의 기류는 4월 재·보궐선거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진 걸 두고 마치 정권 붕괴의 서막처럼 말하는 건 난센스에 가깝다. 역대 대통령의 임기 5년차 1분기 여론조사 결과(한국갤럽)를 한번 보자. 국정운영 지지율이 김영삼 14%, 김대중 33%, 노무현 16%, 이명박 24%였다. 탄핵으로 임기를 1년가량 못 채운 박근혜 대통령의 4년차(2016) 1~3월 지지율은 36~43% 수준이었다. 지금 문 대통령 지지율과 비슷하다. 그때 언론은 이걸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율이라 했다. 이 지지율을 믿고 박 대통령은 20164월 총선에서 친박 공천을 무리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총선 패배와 함께 20%대로 지지율이 주저앉았다. 말 그대로 콘크리트 지지율은 그때 깨졌다. 문 대통령과 박 대통령의 정치적 처지가 다를 수는 있지만, 지지율 기준을 자의적으로 적용하는 건 정치공세 외엔 별 의미가 없다.

 

정말 중요한 건, 집권세력이 여론조사 결과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이다. 지지율이 떨어졌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는 건 긴요하다. 부동산이나 교육처럼 많은 국민의 이해가 엇갈리는 사안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면서 해법을 찾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사안에서 신속한 효과를 강조하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나기 쉽다. 코로나 방역도 비슷하다.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코로나 방역의 목표와 가치가 다를 순 없다. 야당에 적극 설명하고 협조를 구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처럼 정치적 가치가 명확히 갈리는 사안에선 신속하게 실행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맞다. 유연해야 할 사안에선 유연하지 못하고, 빠르고 단호해야 할 사안에선 그렇지 못한 태도가 지지율엔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 논란도 비슷하다. 이 사안은 정치적 지향과 가치에 따라 뚜렷하게 견해가 갈릴 수밖에 없다. 국민 통합과 외연 확대는 민생과 정책을 통해 이뤄나가야지, 가치를 포기하거나 정치적 좌표를 중도로 이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박찬수ㅣ선임논설위원 한겨레 2021-01-06

 

여론 없는 여론조사 사회

새해 벽두부터 온갖 여론조사 결과들이 언론사와 포털의 첫 면을 장식했다. 4월엔 보궐선거가 있고 내년 3월엔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정당들은 여론조사 공천을 할 테고 언론사들은 1년 내도록 후보군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을 것이다. 갈등적인 국회 법안이나 정부 정책을 둘러싼 단타 여론조사도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 ‘여론조사로 점철될 2021을 앞두고, 여론 없는 여론조사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시간이다.

 

여론조사는 당연하게도 여론을 조사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여론을 조사해서 정부 정책결정자, 국회 입법자, 공천을 관리해야 하는 정당 지도부, 시민들에게 유의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그러니 논리적으로는 여론이 선행해야 조사 결과가 의미를 갖는다. 여론조사의 대상은 시민들의 생각이나 판단이다. 좋거나 나쁘거나,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대안들 가운데 우선순위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시민들이 답을 하려면, 먼저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판단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응답들이 모여야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정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여론을 조사해 공표하는 일이 다반사다. 여론조사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모르거나 관심이 없거나 아직 판단하지 않은 문제를 물어본다면? 아마 전화를 끊거나 다른 기준에 의한 답을 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정부가 제시한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책에 대해 모르는 나는 집권 정부에 대한 호불호를 기준으로 답을 할 수 있다. 정부를 강하게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일수록 △△정책을 몰라도 답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말을 해야 할 강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과대 대표되는 이유다. 이렇게 조사된 결과는 대통령 지지도일 수는 있어도 △△정책에 대한 여론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조사들이 미치는 엄청난 결과다. 아직 여론이 형성될 만큼 충분히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고 판단을 형성할 공론장조차 열리지 않았는데, 여론조사 결과라는 것이 공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부 정책결정자들은 △△정책이 지금 이 순간 지지를 받거나 받지 않는다고 착각을 하게 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그 정책을 밀어붙이거나 자신감을 잃고 폐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충분한 정보를 갖게 되고 서로의 논의를 통해 판단을 형성했을 때 그 결과값이 정반대가 된다면? 사건 초기 발표된 그 여론조사는 결과적으로 정부 정책 과정을, 국회 입법 과정을, 정당 공천 과정을 왜곡한 것이 된다.

 

500표본, 700표본의 설익은 여론조사 결과로 재미를 본 언론사들은 점점 더 본분을 잊는다. 사안의 발생 초기에 정부와 국회,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주된 내용이 무엇이고 갈등하는 쟁점은 무엇이며 대안은 무엇인지를 캐물어 시민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야 할 책임은 망각한 채, 소설에 가까운 조사 결과 해설로 지면과 방송을 채운다.

 

더 큰 문제는 사회 구성원 다수의 생각 멈춤상태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나는 그게 뭐지?’ 단계에 있는데 다수의 생각은 이렇다더라는 결과가 공표되어버린다면? ‘나만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문제에 대해 정보를 찾거나 판단을 갖기 위해 동료 시민들에게 물어보는 일 자체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시민들이 매일의 일상에서 이런 종류의 정보들을 접하게 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정부와 정당은 정보 제공과 설명의 책임을 잊고 언론은 정보 전달의 책임을 잊고 생각과 판단을 멈추는 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2021년 여론조사 의뢰자와 시행자 모두 여론 있는 여론조사를 해주면 좋겠지만 불가능할 것이다. 시민들이 복잡한 현안에 대해 정보를 얻고 판단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최소 2~3주는 걸린다고 한다. 여론 없는 여론조사 결과를 정보저장고에 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서복경ㅣ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한겨레 2021-01-06

 

 

촛불 민주주의는 어떻게 벼랑 끝에 몰린 것일까

적폐의 땅

요즘 세계적 화제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위기의 민주주의, 룰라에서 탄핵까지는 수십 년의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온 국민의 열망 속에 탄생한 브라질의 민주주의가 한순간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다룬다. 이 다큐는 민주진영의 호세프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에서 끌어내려지고 룰라 전 대통령이 차가운 철창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상황에서 시작해 그 이면에 숨은 이유와 진상을 차분한 영상으로 비춰준다. 이 영화의 내레이터는 열렬한 민주운동가 집안의 출신이지만 최대한 절제되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판단을 관람자들의 몫으로 맡긴다.

 

그러나 퇴임 시 80%의 기록적인 지지율을 기록했으며 아직도 국민들의 절대적 존경을 받는 룰라가 수많은 지지자들의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진해 경찰의 호송차에 올라타 감옥으로 향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내레이터는 끝내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국에서 태어난 노예보다 혹독한 노동으로 죽어간 노예가 더 많은 나라,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오는 게 더 싼 나라의 오명을 지닌 브라질. 이 뿌리 깊은 적폐의 땅에서 일궈낸 브라질의 민주화는 사막에서 꽃을 피워내는 기적으로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말이다.

 

민주주의의 역설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수많은 이름 없는 민주시민들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적인 희생은 모든 것에 보상이 따라야 하는 자본주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한낱 한여름 밤의 허망한 꿈으로 스러지며 과거의 독재정권 시절로 빠르게 회귀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개혁이 혁명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지시하고 있음은 충분히 눈치 챌 수 있다. 민주적 시스템은 독재정권들에 기생하며 특권을 유지해온 기득권층에게 역설적으로 합법적인 튼튼한 보호막이 돼줬던 것이다.

 

내레이터는 민주주의는 오직 특권층이 위협을 느낄 때만 작동된다는 고대 그리스의 어느 현자의 지견(智見)을 냉소적인 어조로 읽어나간다. 민주운동가 출신이자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각광을 받은 호세프가 룰라의 정책기조를 이어받아 노예제 시절부터 수백 년을 이어온 오랜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본격적인 제도개혁에 나서자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층은 급속도로 결집한다. 자신들의 특권 지키기에 그들이 이용한 것은 민주화의 결실로 독재정치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민주적 장치인 의회의 탄핵권이었다.

 

빵 한조각의 배신

탄핵소추권을 지닌 하원과 탄핵결정권을 보유한 상원은 여전히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들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금권선거가 횡행하는 브라질의 정치판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적어도 의원선거만큼은 가난한 국민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투표가 가져올 미래보다 빵 한 조각의 현재였다. 이들이 상,하원 의원으로 선택한 것은 정직하지만 가난한 후보가 아니라 매표의 대가로 몇 푼의 돈을 건네주는 부패한 후보들이었다. 그리고 정치를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정치인들과 기득권층 간 더러운 거래가 이뤄지는 악순환이 이뤄졌다.

 

따라서 언제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유권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언제라도 퍼주는 기득권층을 정치인들이 대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기득권층의 아바타로 전락한 보수정당 의원들이 기득권층의 이익을 방어하고 그들만의 리그의 과거로 회귀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 대통령 탄핵이었다. 하지만 탄핵은 합법적 과정의 탈만 썼을 뿐 사실상 민의를 뒤엎는 쿠데타였다. 의회를 장악한 보수정당들이 단순한 회계오류를 권력형 부패로 부풀리고 탄핵사안으로 만들어 국민들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을 몰아낸 것이다.

 

룰라의 논두렁 시계

룰라의 기소는 더 억지였다. 한마디로 브라질 판 논두렁 시계에 비견할 수 있다. 룰라가 대통령 재임시절 한 건설회사로부터 아파트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검사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행사함은 물론 판결까지 내리는 판사 역할까지 겸한다. 담당 검사는 룰라에 대해 한 차례의 소환조사도 없이 기소를 강행했다. 얼마 전 우리 검찰이 조국 전 장관의 아내를 조사도 없이 서둘러 기소부터 하는 모습과 판박이다. 하지만 검찰은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를 단 한 개도 내놓지 못했다. 이에 대한 검사의 변명이 역대급 가관이다.

 

룰라가 아파트 소유자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가 완벽하게 자신의 범죄를 숨겼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친일언론들의 땡전뉴스

궤변과 함께 검찰이 사용한 무기는 역시 언론이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브라질도 주요 언론을 몇 개의 유서 깊은 가문들이 장악하고 있다. 검찰이 룰라의 뇌물혐의를 일목요연한 도표로 만들어 파워포인트로 띄우고, 이를 재판정에 몰려든 언론들이 방송 화면과 신문 지면에 담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더 이상의 증거 공방(攻防)은 필요하지 않았다. “빈자(貧者)들의 성인(聖人)”으로 칭송을 받을 만큼 평생 청렴한 삶을 살아왔던 룰라는 여론재판만으로 이미 파렴치범이 돼버렸고, 결국 11년의 징역형이 확정된다.

 

그동안 극심한 빈부격차의 해소에 주력했던 진보정권에게 복지정책의 주요 재원이었던 최대 국영석유회사는 보수정권이 복귀하자 즉시 미국의 어느 대기업의 소유로 넘겨졌다. 이 이른바 연성(軟性) 쿠데타의 또 다른 배후가 누구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지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 기득권층과 이들에 기생하는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엘리트의식에 젖은 사법부와 관료들, 그리고 매판자본의 카르텔은 여전히 탄탄했다. 이 철옹성을 깨뜨리기 위해 민주적으로 개혁의 칼을 들이댄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것이다.

 

절반의 쿠데타

이러한 브라질의 상황이 결코 남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촛불혁명이 성공한지 4년이 지난 우리나라도 비슷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부장관이 검찰의 먼지 털기수사에 의해 조기 낙마하고, 대통령이 재가한 검찰총장 징계마저 사법부에 의해 무산되는 사태는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면 대통령의 손발을 꽁꽁 묶고 있는 셈이다. 친일후손들이 장악한 주요언론은 또 어떤가. 군부독재시절 소리 높여 독재를 찬양하던 땡전 뉴스는 이제 땡하면 기승전문재인 탓 뉴스로 국민들을 현혹하는 상황이다.

 

정권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군부독재시절과 다를 바 없다. 돈을 무기로 휘두르는 최상층의 재벌 왕족, 광고라는 먹이사슬에 기생하는 언론,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해 통제받지 않는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 자본의 특권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관료조직, “유전무죄의 판결로 기득권층의 든든한 법적 방패가 돼주는 사법부. 대통령을 식물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게 바로 이들 과두(寡頭) 기득권 동맹일 것이다. 국회만 다수를 뺏기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 판 연성쿠데타의 완결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과거로 회귀하려는 힘이 미래를 지향하는 힘을 상당히 잠식하고 있는 이 위급한 시기에 절망에 빠져 있을 촛불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안타깝지만 다음 한 마디밖에 없다. “역사는 스스로 진보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다.” /

김헌범 논설위원, 제주한라대 교수/ 제주의 소리 2021.01.06.

 

의사 국가시험을 허용한다고?

'의과대학 정원을 2022년부터 10년 동안 매년 400명씩 늘리겠다'는 정부 정책에 반발해 지난해 '의사 국가고시 실기 시험'2차례나 거부했던 의과대학생들에게 정부가 올해 1월 추가 시험 기회를 주기로 발표했다.

 

앞서 정부는 더불어민주당과 당정협의회를 열고 2022학년도부터 10년 동안 한시적으로 의과대학 정원을 매년 400명씩 늘리는 의과대학 정원 확충과 공공의대 설립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300명은 전액 장학금을 받는 대신 졸업 후 10년 동안 농어촌지역에 근무해야 하는 자격을 두고 선발, 의과대학 정원 확대와 별도로 의료 낙후지역에 의과대학을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정책이다.

 

이에 반발해 작년 의사 국가고시 실기 시험을 거부했던 의과대학생들에게 올해 1월 추가 시험 기회를 주기로 발표한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2차례 의사 국가 고시 실기 시험을 연기해 가면서까지 이들에게 응시 기회를 주었지만, 의과대학생 2700여명은 끝내 의사 국가 고시 실기 시험을 거부했다. 또 의사 국가 고시 실기 시험을 거부했던 응시 거부 의과대학생들에 대한 구제책은 없다고 여러 차례 확고하게 밝혀 왔기 때문에 이번 정부의 '응시 기회를 주겠다'는 정책 결정 변경은 의아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 정부의 보건 분야 정책은 지난 2006년 이후 14년 동안 의과대학 정원을 3058명으로 동결해 왔다. 의사가 넘쳐나서가 아니라 정부가 의과대학 정원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면 의사협회 등이 극력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시민들의 의료 서비스 욕구 충족과 기대를 저버리는 정책이었고, 시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아 왔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사태와 같이 의사 및 의료 인력에 극심한 피로감에 몰리고 이를 대체하거나 보완해야 할 대책이 없음을 절실히 느낀 상황에서 국가 고시 실기 시험을 거부한 의과대학생들에 응시 기회를 다시 주는 정책은 소가 웃을 일이다.

 

정부는 이번 조치를 두고 코로나19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특별한 조치이고, 앞으로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2700여명의 의과대학생들이 실기시험에 응시하고 전원이 합격한다고 해도 과연 몇사람이나 코로나19 치료에 투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5%도 채 안될 것이다.

 

결국 이번 정부의 정책 변경은 의사나 의과대학생들이 시민을 볼모로 불법으로 집단행동을 벌여도 어떤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특권의식을 키워 주었고, 시민건강이라는 공적인 가치를 외면한 그들 직능주의의 오만을 인정해주는 꼴이 돼버렸다.

 

의사들의 파업이 가능한 슬픈 이유는 '의사들이 직업 소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게임의 법칙에 충실하도록 정부가 방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부 관계자는 의사 국가 고시 실기 시험 재 응시 허용 방침을 발표하면서 '국민 공감대는 어느 정도 인정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런 공감대는 의사들과 의사협회, 그리고 의사 국가 고시 실기 시험을 거부한 학생들에게 있을 뿐, 일반 시민들은 아직도 의사협회 등의 직능주의의 오만에 분개하고 있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의료정책에 관한 정책다운 정책을 연구하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지난해 발표한 정책처럼 단순히 의과대학 정원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의사, 간호사, 병상 수, 의료시설 등을 확충하고 나아가 국공립대학에 한의과대학을 설립해 한의사와 한약사 등 한국 전통 의학을 되살려 관련 의료인을 양성하는 방안까지 적극 검토해야 한다.

 

사실 대한민국 정부 의료정책은 의료 직능 단체의 압력에 굴복해 박정희 정부이래 한결같이 서양의술 보급과 서양 의료인 양성에 주력해 왔다. 국공립대학의 의과대학은 서양의 의료기술을 배우는 의사, 약사, 간호사를 양성하며 한의사, 한약사, 한의 간호사를 양성하는 국공립 한의과대학은 단 한 곳도 없다.

 

한의사, 한약사를 하려면 모두 사립 대학교의 한의과대학, 한약과대학을 다녀야 한다. 말하자면 국가가 한의사, 한약사 양성에 대한 책무를 저버리고 있기 때문에 민간 대학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술과 의학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처럼 자국의 중의학을 서양의학과 함께 중시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 정부도 그동안 서양의학에 치우쳐왔던 것을 한의학과 균형을 이루도록 국공립대학에 한의과대학, 한약과대학을 신설해 한의약 분야의 의료인 양성에 나서야 한다. 서양의술은 서양의술대로, 1, 2, 3약 또는 1, 2, 3약이라고 하는 한국의 전통 의술을 복원해 환자들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

배동진 배동진 전 전남공무원교육원 교육지원과장 전남일보 2021-01-06

 

팩트는 없다

가짜 뉴스는 왜 없어지지 않을까 ? 가짜뉴스는 왜 진짜뉴스보다 더 영향력을 발휘하며, 진짜뉴스를 공격할까 ? 가짜 뉴스의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가짜 뉴스는 왜 법정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잘 빠져나갈까?기성 언론은 왜 가짜뉴스 프레임을 설정하는데 열을 올릴까 ?

 

가짜뉴스라는 말은 뉴스플랫폼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적인 권력의 입장에서 하는 표현이다. 기성언론에 들어오지 않는 뉴스는 다 가짜뉴스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한 것으로, 제왕적 뉴스플랫폼을 방어하기위한 측면이 강하다. 가짜뉴스로 인해 뉴스플랫폼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뉴스의 플랫폼 안에 들어와 있는 한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판별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 쉽지가 않다. 이미 기성 뉴스플랫폼 안에 또아리를 틀고, 더 그럴싸한 형식을 갖추고 , 그 주변에서 뉴스의 정체성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매체, 비주류 언론들의 다양성 저항이 시작된지 오래되었다. 종종 학계에서 신뢰성의 문제와 다양성의 문제로 정리되는 이 논점은 이미 매체나 관점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그 성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문제는 신뢰성이라는 본질의 문제에서 이를 방어하지 못하면, 진짜같은 가짜뉴스가 유언비어선동의 가면을 벗고, 대로를 활보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것이다.

기성 뉴스플랫폼에서 먹고사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위 팩트주의의 깃발이다. 경력이 있는 언론 종사자들이 진실한 팩트를 보도하기 위해 소명의식을 가지고 노력해 온 결과로 지금까지 뉴스플랫폼의 주인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짜뉴스를 선두로 한 비주류 언론들이 들어올린 깃발은 팩트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해석과 비판의 자유가 상대주의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팩트주의가 결국 다양성의 공격앞에 무너지고 있다. 그 극단의 명제가 팩트는 없다는 주장이다.

태풍이 불고, 산불이 나고, 정치인의 스캔들과 스쿨존의 사고들, 코로나 확진자 등 뉴스는 널려있고 모두가 팩트이다. 이렇게 팩트가 차고 넘치는대, 팩트가 없다니 무슨 헛소리인가? 물고기는 물 속에서 한생을 살지만 물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은 평생을 공기를 마시며 살지만 공기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부재의 순간에 비로소 존재를 인식한다. 분리 불가능하게 붙어있어, 한몸이 되었기때문이다. 수많은 팩트 중에서 어떤 팩트를 선택하고, 어떤 맥락으로 비판하고,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매체 파워에 의존하는 시대는 갔다.

 

결과적으로 (팩트)를 팩트하는 플랫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모든 팩트는 유보된 (팩트)라는 주장을 딛고, 팩트의 신뢰성을 확보하는데 실패가 계속된다면, 언론은 황색지가 되고, 기자는 정말로 기사를 동냥하는 기레기가 될 것이다. (팩트)를 팩트하는 플랫폼에는 당연히 소비자가 주인의 권력을 행사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가짜뉴스는 그것이 뉴스라는 플랫폼으로 무장하고, 상대주의와 다양성을 자기 철학으로 정립하는 순간, 기성의 뉴스플랫폼들에 대한 공격은 계속될 것이다. 마지막 은신처는 (팩트)를 팩트하는 플랫폼일 수 밖에 없다. 그 메타 플랫폼은 누가 어떻게 만들수 있을까 ? 언론소비자운동이 정답이다.

이재남 [교육비평가·양산초등학교 교감]/광주드림 2020.09.18.

 

정인이가 미국에 있었다면

한동네에 살던 한 한국계 미국인은 학교 숙제를 하지 않고 친구와 놀려고 하는 초등학생 아들을 꾸짖으며 구둣주걱으로 엉덩이를 몇 대 때렸다. 며칠 뒤 주정부 산하 아동보호서비스(CPS·시피에스) 상담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아이가 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엄마한테 혼났다고 말했고, 학교는 시피에스에 신고한 것이다. 이들 부모는 45일간의 관찰 기간이 지난 뒤에야 시피에스로부터 사건 종결통보를 받았다. 지나간 경험담처럼 대화를 나눴지만, 아동학대 문제에 매우 엄격한 미국을 간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양부모의 학대와 방치로 생후 16개월 만에 세상을 뜬 정인이 사건은 다시 떠올리기조차 겁날 정도로 끔찍하고 안타깝다. 감히 비할 바 아니지만, 만약 정인이가 미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정인이의 양부모는 아이를 학대하면서도 죄의식이 전혀 없었고, 어린이집과 의사의 세 차례 신고에도 경찰은 허망하게 돌아섰다. 미국에서도 이랬을까.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으로 20년간 교육현장을 지켜본 문일룡 변호사는 세 차례나 신고가 들어갔는데도 필요한 조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말했다. 초동 단계에서 아이의 멍 자국만 갖고도 당국이 적극 개입해 부모-아동 분리 조처 등이 이뤄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한국과 미국에 엄청난 제도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 모두 유치원·학교 교사와 의사 등 아동 관련 종사자들은 아동학대·방치 의심 사례가 발생하면 반드시 경찰이나 관련 기구에 신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미국에 시피에스가 있듯이, 한국에도 아동보호전문기관을 둬서 경찰과 민간이 함께 대처하도록 하는 등 기본적인 틀거리는 유사하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선, 현장에서의 협업이다. 미국의 경우 아동학대·방치 신고는 경찰과 시피에스가 긴밀하게 공조해서 다룬다. 전문적 훈련을 받은 공무원인 시피에스 상담사는 아동학대·방치에 대해 평가, 조사, 개입할 권한을 갖는다. 경찰은 처벌 등 형사적 접근을 한다. 한 경찰은 한국도 경찰과 전문기관의 협업 체계가 있지만 미국처럼 유기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 미국이었다면, 정인이에 대한 1차 신고 때부터 오다리 교정을 위해 다리 마사지를 해준 것이라는 양부모의 설명은 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적 차이도 크다. 아동학대를 신고하는 자나 출동한 경찰이나 아이 부모의 항의가 부담스러운 것은 한국과 미국 모두 똑같다. 위에 든 학부모는 그 일로 아이 담임선생님과 몹시 어색해졌다. 그럼에도 관계 불편을 감수하고 어린이의 안전부터 생각해 전화기를 드는 게 미국이다. 미국 지방정부에서 아동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지인은 어린이 학대·방치 관련 모든 사례에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접근한다고 말했다. 최초 사례 발견부터 신고, 상담, 조사, 처분 등의 각 단계마다 고강도의 의무와 책임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어린이들에게 안전한 나라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미국에서는 한 해 약 70만명의 어린이가 학대·방치를 당한다. 엄격한 대응 체계를 갖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4년 미국인 양아버지의 폭력으로 숨진 현수 사건도 있다. 하지만 신고가 세 차례나 묵살당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이에게 사소한 이상만 감지돼도 언제든 집 밖의 개입과 심각한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보편적 경각심은 한국보다 미국이 높은 것 같다. 또 다른 정인이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남은 어른들이 할 일이다.

황준범 | 워싱턴 특파원 한겨레 2021-01-07

 

 

지구환경과 생명 중시 그리고 민주주의의 큰 걸음을 내딛는 한해이길

[기고] 새해에 바라는 소망

이 기적과도 같은 지구환경과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어쩌면 이 광활한 우주에서도 지구처럼 생명체가 존재하는 다른 행성이 또 존재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듭니다.

 

공기와 물, 바람, 적절한 온도 등등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절묘한 비율로 구성되어 비로소 생명체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질소 78%, 산소 21%로 구성된 공기의 비율은 조금이라도 그 비율이 달라져도 곧바로 모든 생명체의 절멸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수십 번의 기적이 거듭 일어나 비로소 오늘날의 지구와 같은 곳이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또 우리 모두는 기적처럼 지구에 찾아와 생명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기적과도 같은 곳이 몹시 위태롭습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고, 환경처럼 소중한 보물은 없습니다. 모두가 기적과도 같은 지구환경과 기적과도 같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올해가 커다란 진전을 이뤄내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1, 시민의 민주적 통제가 이뤄지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년이 되길

우리 사회는 쓰라린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대를 거치고 또 군사독재를 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쨌든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자타공인 거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엉성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각종 제도와 법률은 일제가 남기고 간 잔재 그리고 군사독재가 왜곡시켜놓은 틀을 거의 손대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 의회에서도 국회의원들이 국회 공무원들의 검토를 받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또 감사원이 대통령 직속으로 되어 있는 나라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제도와 법률이라는 형식과 시민의식 등 시민의 역량 혹은 시대 정신의 내용이 전혀 부합되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가 겪는 각종 혼란은 이처럼 형식내용이 전혀 부합되지 못한 데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특히 국민주권주의는 허울좋은 미사여구에 그칠 뿐 실제로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아무런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검찰과 법원의 운영에 우리나라처럼 시민들이 전혀 개입하고 참여할 수 없는 나라는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손과 발은 여전히 일제 강점기처럼 군사독재 시절처럼 묶여있는 상황 그대로입니다.

 

민주주의, 지구환경 그리고 생명 중시의 2021년이기를

그저 선거를 치르고 투표를 할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이 곧 민주주의인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겉으로만 치장된 위장 민주주의, 빈껍데기의 가짜 민주주의일 뿐입니다. 민주주의란 대중들이 단순한 참여의 범주를 넘어서 자신을 지배하는 지배자를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권력기관에 대한 시민의 민주적 통제가 이뤄질 때 비로소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의 법률과 제도가 진정으로 민주주의와 지구환경 그리고 생명 중시의 정신에 부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 역사적 과제의 실현에 2021년이 의미 있는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프레시안 2021-01-07

 

 

우리 사회에 정의가 있는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최종 선고가 임박했다. 2019829일에 대법원전원합의체는,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 86억원을 삼성 계열사로부터 횡령해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행위를 유죄로 확정했고, 이에 따라 1025일에 이 부회장의 형량을 다시 선고할 파기환송심 첫 공판이 열렸다. 결국 최종 선고는 첫 공판 이후 무려 13개월 만에 잡힌 것이다.

 

대법원 상고심 판결로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뤄졌다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었다. 파기환송심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는 첫 공판에서 치유적 사법이라는 명목으로 삼성그룹에 준법감시위원회 설치를 주문하면서도, 이는 이 부회장의 형량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에 정 부장판사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활동을 이 부회장의 양형에 고려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왜 이런 식언을 했을까? 횡령·뇌물액이 50억원이 넘으면 법에 따라 5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는데 이럴 경우에 집행유예는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위해서는 재판부가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를 만들어 작량감경을 통해 3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해야만 한다. 그래서 불쑥 치유적 사법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나 준법감시위원회 설치와 같은 치유적 사법은 기업 범죄에 대한 정상참작 사유로 인정되는 것이지, 개인 범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확정된 범죄는 이재용이라는 개인이 삼성전자라는 기업의 돈을 횡령해 경영권 세습을 위해 뇌물로 제공한 개인 범죄이다. 삼성전자라는 기업은 이런 개인 범죄의 피해자일 뿐이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는 2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뇌물을 준 이 부회장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사법 절차가 진행되고 있고, 경제를 핑계로 삼는 여론몰이가 벌어지고 있다. 우려대로 정준영 재판부가 억지스러운 지록위마로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면, 정의는 다시 한번 무너지고 건전한 시장경제 질서의 확립은 요원해진다.

 

이처럼 가진 자에게는 소위 봐주기식 법 집행이 횡행하는 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법 집행은 매몰차고 무성의하기 짝이 없다. 새해 벽두에 양부모의 상습적 학대로 사망한 정인이 사건이 다시금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다.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와 한 방송사에서 시작한 정인아 미안해챌린지로 사회적 공분이 재점화되었기 때문이다. 비단 정인이 사건만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청주 아동학대 암매장사건, 울산 입양 아동학대 사망사건 등 여러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바뀐 것은 없었다. 이번 정인아 미안해챌린지는 과연 아동학대에 관한 미비한 법률, 무성의한 법집행, 보여주기식 대책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또한 한 차례 휘몰아쳤다가 결국 잊혀지는 사회적 공분의 반복이 될까?

 

기득권의 이익에 반하는 정의는 더 실현되기 어렵다. 20181211일 새벽에 홀로 석탄 운반용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던 24세 김용균 청년이 벨트에 끼여 사망했다. 김용균 청년 이전에도 구의역 김군이 있었고, 이후에도 매년 우리 사회에서 2000명가량의 노동자가 산재로 숨지고 있다. 위험의 외주화에 따른 안전사고를 방지하고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21대 국회 개원에 맞춰 발의되었고, 원안대로 법이 통과되기를 호소하는 김용균 청년의 어머니 김미숙씨와 다른 사건 희생자 가족들의 단식농성이 4주째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거대 여야는 원청 기업과 경영자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독소조항으로 가득한 법안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으면 기업하기 좋고, 그러면 경제가 잘된다는 천박하고 전근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

 

사회적 약자에게는 매몰차나 기득권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면서 과연 정의가 있는가라고 절규하게 된다.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사변적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대변하는 법이 만들어지는 것이 정의의 필요조건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런 정의가 있어야 시장도 사회도 작동할 수 있다.

 

현실의 부정의에 절규하고 공직자와 정치인들을 질타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도 지금의 부정의에 소극적 공범이다. 정의에 부합한 법이 제정되고 집행되도록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감시하고, 선거로 견제해야만 우리 사회가 정의로워질 수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경향: 2021.01.08

 

조용한 학살

펀드를 한 적이 있다. 적금을 넣으러 갔더니 은행 창구 직원이 펀드를 권했다. 저축은행이 투자은행으로 변신하여 개인들에게 펀드와 보험을 팔고 카드와 대출을 권하던 시기였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처음에는 잘 몰랐다. 다달이 납입해서 만기에 찾는 방식은 같지만 이자가 좀 더 높을 거란 말에 그냥 펀드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몇 년을 모아 만기가 도래하고 보니 당초 1000만원을 모을 생각으로 부은 돈이 1200만원 가까이 불어나 있었다. 마술에 홀린 것 같았다. 창구 직원은 재테크를 권했다. 목돈을 깨면 써버릴 것 같아 반신반의하면서 그렇게 해주세요라고 했는데, 돈이 급속도로 불어났다. 겁이 날 정도였다.

 

은행에서 받아온 투자안내서에 적혀있던 브릭스(BRICs)’라는 글자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표지에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노동자들이 활짝 웃고 있었고, 지도 위로는 철도와 도로가 뻗어나가고 공장과 빌딩이 올라가고 있었다. ‘고객님이 맡긴 돈으로 우리는 이런 나라들을 발전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잘살게 해줄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그건 속임수였다. 저축이 미덕이던 시대에 자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금융시장은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경제전문가들은 TV에 나와서 돈을 그냥 모으기만 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이기적인 일이라고 했다. 반면에 투자는 필요한 곳에서 돈이 제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혁신적인 경제활동이었다. 빚지는 일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공격적 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정신으로 무장되기 시작했다.

 

돈이 갑자기 불어나는 것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건 그 돈이 어디서 무엇을 해서 그렇게 돈을 불려왔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주 몰랐다고도 할 수 없다. 그 즈음에 나는 브라질의 숲이 불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소고기가 될 소에게 먹일 곡물사료를 키우기 위해 거대 식품 자본이 주민들에게서 숲과 경작지와 삶터를 빼앗는다는 것을. 인도에서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이 땅을 빼앗기고 자살하고, 중국에선 아이폰을 만드는 폭스콘 공장 노동자들의 자살이 이어진다는 소식도 들었다. 철도와 도로, 공장과 빌딩은 지도 위에 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투자는 침략과 약탈의 다른 이름이었다. 잘사는 나라에서 들어온 자본은 가난한 이들의 삶을 전쟁으로 몰아가는 발전의 불쏘시개였고, 금융가들의 전투 화력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생명과 맞바꾼 돈이 수익배당금이 되어 통장에 쌓였던 것이다.

 

거짓말처럼 불어났던 돈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짓말처럼 다시 빠져나갔다. 빠져나갈 때는 더 무서웠다. 두 배 가까이 불어났던 돈이 다시 원금으로 돌아왔는데, 꼭 돈이 어디로 증발한 것 같고, 내 돈이 반토막난 것만 같고, 졸지에 날강도에게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애초에 내 돈이었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숫자의 마술은 영혼과 양심도 훔쳐간다는 걸 알았다. 이후로 펀드니 주식이니 하는 근처에는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때가 2008.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내 생애에 두 번째 금융위기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영혼까지 끌어 모아주식에 투자한다는 영끌이 유행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최악의 경제위기라 느끼는 사람들의 체감을 비웃듯이 새해 들어 코스피 지수는 사상 최초로 3000을 넘어섰다. 어떤 사람들의 전쟁이 어떤 사람들에겐 축제인 세상이다. 역사 속에서 이런 세상을 나는 언제 보았던가. 전쟁과 파시즘을 맞이하던 시대가 이러했다. 착한 소비자가 저렴한 상품의 출처를 묻지 않고, 선의의 투자자들이 수익의 출처를 캐지 않고, 정부가 고삐 풀린 자본을 통제하지 못할 때, 돈은 자연을 파괴하고 산 목숨을 잡아먹고 덩치를 키운다.

 

녹색 투자라도 마찬가지다. 기업 활동에서 금융이 중심이 될수록 청정기업이 된다. 자본은 언제나 깨끗하다. 지나간 자리가 검고 붉을 뿐. 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지난 8, 국회는 국민들이 발의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난도질해서 이렇게 더 죽여도 좋다는 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사람 살리자는 법을 기업은 악재라 불렀다. 기업이 악재를 면한 것과 코스피 지수 상승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일까? 생명을 갈아 넣어 이윤을 뽑아내는 거대한 죽음의 발전소는 오늘도 돌아간다. 우리가 가장 먼저 멈춰 세워야 할 발전소는 증권거래소인지도 모른다. 조용한 학살을 끝내려면

채효정<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경향 : 2021.01.11

 

우리를 갈라놓는 능력주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회에 난입한 최근의 사태는 오늘날 분열된 미국을 상징한다. 몰락한 중산층은 엘리트 민주주의에 분노하고, 정치인들은 선동에 휘둘리는이들을 경멸한다. 다원주의 공동체는 사라지고 서로 다른 정치적 부족들로 나라가 갈라졌다.

 

이 같은 민주주의의 실패로 이어진 경제 실패의 뿌리는 수십년간 지속돼온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흘려들을 남 얘기가 아니다.

 

능력주의는 개인이 공평한 기회를 바탕으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 성과를 얻는다는 자유주의의 핵심 이념이다. 노력하면 계급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으니, 혈연으로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귀족체제보다 언뜻 공정해보인다. 하지만 1958년 이 단어를 처음 만든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마저 승자들이 패자들을 배제하고 모욕하는 근거로 악용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실제로 미국의 중산층이 맞닥뜨린 비정한 현실이다. 1980년 이후 세계화와 기술발달로 중간 관리자급 일자리가 25% 사라졌고, 하위 50%의 소득은 제자리걸음했다. 반면 능력주의의 승자인 상위 10% 소득만 급증했다. 연봉 최상위권인 최고 경영자 200명의 평균소득은 2000만달러(218억원)로 중위 근로소득의 300배다. 50년 만에 15배나 늘었다. 하지만 진보성향 민주당마저 불평등을 줄이는 재편보다는 적응에만 주력했다고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지적한다. 계급상승의 사다리칸이 듬성듬성해졌으니 교육을 더 받고 노력하면 되지 않겠냐고 채근한 것이다.

 

의도와 달리, 교육은 차별을 강화하고 있다. 부유층은 자녀교육에 집중투자해 지위를 세습하며 새로운 귀족계급으로 자리굳히기에 들어갔다. 미국판 수능인 SAT성적은 대체로 부모의 재력에 비례한다.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교수는 전형적인 부유층 가정의 인적자본 투자 초과분은 자녀 한 명당 1000만달러(109억원)를 전통적인 유산 형태로 상속하는 것과 맞먹는다<엘리트 세습>에서 분석했다. 반면 그만한 투자여력이 없는 중산층의 아이들은 경쟁에서 더욱 밀려난다. 불공정 게임 앞에 중산층은 좌절한다.

 

정치는 어쩌다 이 같은 양극화를 막는 데 실패한 것일까.

노동계급과 괴리된 아이비리그 명문대 출신 승자들만 득실득실한 정치권이 능력주의의 폐단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샌델은 지적한다. <21세기 자본론>을 쓴 토마 피케티는 과거 노동자 정당이었던 좌파 정당들이 지식계급, 전문직업인 정당으로 탈바꿈하면서 지난 수십년간 불평등 증가에 손을 놓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좌파정당에 배반당한 노동자들은 이제 민주주의 그 자체에 회의하며 분개한다.

 

아니면 실패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이른바 절망사’(death of dispair)의 증가다. 미국에서는 100년 만에 처음으로 2014~2017년 사이 3년 연속 미국인의 기대수명이 감소했는데 약물··자살에 따른 사망자가 늘어난 결과다. 프린스턴대 경제학자 앤 케이스 등은 능력주의사회에서 이 같은 죽음이 경제적 보상뿐만 아니라 성실한 노동자,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도덕적 명예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된 데 따른 것이라고 분석한다. 마코비츠의 말대로 능력주의는 조직적인 계층 갈등을 조장해 사회적·정치적 삶을 망가뜨린다.”

 

미국 못지않게 능력주의가 만연한 한국사회는 어떤가. 신분제에서 탈피한 지 100년쯤밖에 되지 않는 데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압축성장의 신화가 내면화된 터라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에 대한 촘촘한 차별이 일상에서 만연하다. 출신학교, 거주지역, 주거의 형태, 직업의 종류, 고용형태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구분짓기가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방불케 할 정도다. 이는 경쟁에서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깊은 불안함에서 비롯된다. 일말의 우월함을 확인해 안도하려는 것이다.

 

이제는 능력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다 덫에 빠진 미국의 현재를 반면교사 삼아야 할 때다. 코로나19로 인한 불가항력의 경제충격에 비틀거리는 이들, 파괴적인 디지털경제 이행에 따라 일하는 인간으로서 의미를 빼앗길 처지에 놓인 이들을 어떻게 포용하고 공동체를 회복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불평등과 모멸감 속에 붕괴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경제와 민주주의 모두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최민영 경제부장 경향 : 2021.01.11.

 

여성운동가들의 이중성

미투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이상한 학자들은 이수정 교수만 있는 게 아닙니다. 권김현영씨라는 분도 있습니다. 이분은 현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기획위원으로 있으면서 각종 방송에 단골로 출연해 여성이슈에 대해 설명하는 분입니다. 현 한겨레 고정 칼럼니스트이기도 합니다. 이분은 박원순 시장 사건에 대해서는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성폭력 사건으로 당사자들의 증언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2020.12.본인 페이스북)

 

그런데 정작 과거 자신이 쓴 책에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피해자중심주의는 마치 피해자의 말이 곧 진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중략) 2차 가해라는 용어는 진상 조사 자체를 불가능 하도록 남용되었다. (중략) 성폭력 문제의 핵심은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다. 그런데 피해자의 주관적 판단에 해석을 전부 위임하게 된다면, 성폭력은 대체 어떻게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나." (권김현영, 피해와가해의 페미니즘,2018)

 

저는 여성주의가 '정치의 색안경'을 끼기 시작하면 이런 모순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정치인을 고려하지 않고 원칙적인 판단을 하면, 2018년의 권김현영처럼 올바른 목소리를 내지만, 이게 정치인이 고려되니까 갑자기 2020년 권김현영처럼 또다른 자아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또 권김현영씨는 "언론이 미투를 검증하는 것은 위험하다. 재판부에 대한 특별한 지적이 아니라면 대단히 문제" 라는 말도 최근에 했습니다. (MBC 시선집중, 2020.8.14)

 

그런데 권김현영씨는 정작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이 정치인 상대로 벌어진 한 미투사건의 조작사실을 검증보도해 2018년 퓰리처상까지 받은 일이 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미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이들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에게 2차 가해 논란은 없었습니다.

 

저는 여성학자들이 언론 전문가가 아닌데 어떻게 언론 전문의 영역에서까지 전문가처럼 대담하고 나서는 것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경향신문은 저런 분들 말에 의지해 강진구 기자를 징계했습니다.

 

저는 이수정 교수나 권김현영씨 같은 분들과 여성주의 해석에 대한 논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아, 정확히는 한국 사회 혹은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뿌리박힌 가부장제가 일으키는 모순과 각종 소수자들의 문제들, 20대부터 지금까지 이런저런 책을 열심히 읽어온 기자일 뿐이고 제 전문 영역이 아닌 분야에서는 겸손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미투 폭로가 나왔을 때 이를 취재하는 언론은 양쪽(피해자-가해자) 당사자 모두로부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따라서 언론은 어쩔 수 없이 가해자 말의 신빙성과, 피해자 말의 신빙성 모두를 검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피해자중심주의는 '2018년의 권김현영'이 올바르게 지적했듯, '피해자절대주의'가 아닙니다. 피해자 말의 신빙성을 검증한다고 하여,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거나 2차가해라는 식으로 몰면 안됩니다.

 

저널리즘은 페미니즘의 곁가지 학문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영역입니다. 여성 학자들이 언론의 대원칙까지 흔들면서 우리 사회 언론정책을 만들어가는 듯한 지금의 사회 분위기를 경계합니다. / 허재현 대표 기자 <리포액트> 2021.1. 11

 

왜 이용수 할머니는 언론이 검증하지 않는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이용수(92) 할머니가 지난 525일 오후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용수 어른이 촉발시킨 사회적 논쟁

언론은 정치인 검증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검증의 증거나 증인에 대한 검증의 의무 또한 있습니다. 제보자가 지목하는 대상에도 집중해야 하지만 그전에 제보자 자체를 검증해야 함은 취재의 기본입니다. <워싱턴포스트>2017년 미국 공화당의 한 유력 상원후보에 대한 성추행 의혹 제보를 받았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피해자라는 자의 말을 빌어 보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이후 제보자에 대한 검증 또한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제보자가 보수단체와 짜고 진보언론을 곤란에 빠트리기 위해 함정을 판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제보자의 허위제보 과정까지 모두 보도했고 결국 2018년 퓰리처상 탐사보도 부문 수상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언론은 그러나 지금 어떤지 살펴봅니다. 지난 25일 이용수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대해 폭로했습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를 미국으로 어디로 끌고 다니면서 고생시키고 이용해 먹었다. 생명 걸고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을 정대협이 쭉 이용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이용해 시민단체가 후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제기여서 많은 언론들이 윤미향 의원에 대한 검증보도를 쏟아낸 계기가 되었습니다. 윤 의원과 정의기억연대에 대한 빗발치는 비난 여론의 시발이었습니다.

 

윤미향 의원은 이제 정치인이기 때문에 언론이 일정 정도 윤 의원과 정의기억연대에 초점을 맞추어 검증 보도를 이어가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논쟁의 시발점인 이용수 어른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도 역시 언론의 관심사여야 하지 않을까요. 진보·보수 언론을 막론하고 이용수 어른의 말은 누구도 검증하려 들지 않습니다. 윤 의원 쪽은 이용수 어른과의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려고 모든 것에 침묵하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용수 어른의 말은 무조건 참이고, 윤 의원은 침묵하는 의혹의 대상으로 언론이 간주해 버리고 맙니다. <윤미향, 정치 후원금 모금 나서...통합당 "당혹스럽다">는 보도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이유입니다.

 

저는 한번쯤은 이용수 어른의 말에 대해서도 검증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핵심은 김복동 어른이 과연 아무것도 모른 채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에 의해 각종 행사장에 끌려다닌 것이 맞는지, 후원금의 사용처도 모른 채 각종 모금행사에 이용당한 것인지 맞는 것인지 분석하는 것이겠지요. 김복동 어른께 물어보면 되지만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라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김복동 어른의 모습을 오랜 기간 영상으로 찍어온 촬영자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그의 양해를 얻어, 김복동 어른의 평소 모습이 담긴 수년간의 미공개 영상을 확보해 샅샅이 살폈습니다.

 

영상에는 김복동 어른이 해외 곳곳 증언을 다닐 때의 모습, 윤미향 대표와 언론 인터뷰 내용 등을 사전 상의하는 모습, 후원금 사용방향에 대한 보고를 받는 모습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수년 치의 영상을 모두 확인한 제 느낌은 이러했습니다.

 

김복동은 끌려다녔다? 위안부 운동의 온화한 리더 김복동

김복동 어른은 어디서든 존엄을 잃지 않았고 윤 대표와 모든 것을 상의하는 듯 보였습니다. 김복동 어른은 윤미향 대표를 딸처럼 아끼고, 자신을 세계적인 인권운동가로서 위치지움하게 한 동료라고 인식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형식적으로 윤미향이 단체의 대표이지만 활동의 중심에는 김복동 어른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김복동 어른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재일조선인 학교 학생들을 돕는 '김복동의 희망' 재단 등을 만들 때, 윤 대표도 자신의 후원금을 보태며 "(김복동) 어른께 부끄럽다"고 말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김복동 어른은 윤미향 대표에게 희생정신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을 띄기도 했습니다. 해외 증언대회를 다녀오면 무척이나 몸이 상하는데도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힘을 얻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김복동 어른은 특유의 온화한 리더십으로 위안부 피해자 운동을 이끌고 있었고 윤 대표는 그를 보좌했습니다. 고인이 되기 전 병실에서 김복동 어른은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윤미향 대표 덕이니 윤 대표도 상을 받게 해달라"고 유언을 남기듯 주변인들에게 말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순간순간 자연스럽게 찍힌 장면들이어서 미공개 영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김복동 어른이 고인이 되었을 때 윤 대표가 "거짓의 눈물"을 흘렸다고 이용수 어른은 주장했지만, 그렇게 볼만한 단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쯤 되니, 이용수 어른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윤 대표를 비난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용수 어른을 잘 아는 시민단체 활동가를 접촉해 이용수 어른의 입장을 이해해보려 노력했습니다. <노컷뉴스>가 지난달 27일 보도해서 세상에 알려지기 전, 저는 윤미향 대표가 과거에 이용수 어른의 국회의원 출마를 반대했다는 것을 파악하 바 있었습니다. 다소 이용수 어른이 불쾌하게 느낄 만한 윤 대표의 발언까지 들어있는 통화 녹취록도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가, <노컷뉴스>가 이 사실을 보도하기는 했지만 역시 이용수 어른이 이렇게까지 폭로에 나설 만한 윤 대표의 비위로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윤미향 대표와 이용수 어른과의 사적인 감정의 문제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번쯤은 김복동 어른의 시선에서 윤미향 의원을 설명하는 보도를 할 필요가 있겠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김복동 어른과 다시 나눈 인터뷰 윤미향 대표 상받게 하는 게 내 소원" http://repoact.com/bbs/board.php?bo_table=free&wr_id=150> 리포액트 기사입니다. 형식은 가상 인터뷰였지만, 온전히 김복동 어른이 실제로 한 말들만 편집해 가공했기에 실제로 인터뷰를 했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용수 할머니를 음모론에 빠트린 책임, 언론에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11SNS"문재인 대통령이 이용수님이 내는 목소리에 정면으로 응답했어야 한다"고 글을 남겼습니다. <한겨레>는 이용수 어른의 기자회견 직후 "이제 윤미향이 답할 차례다"라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취재결과는, 만약 김복동 어른이 지금 생존해 있다면 이용수 어른의 문제제기가 이런 방식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조차 회의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용수 어른에 대한 인신공격과 배후설 등은 당연히 문제이지만, 일부 대중의 그러한 불편한 감정은 언론의 차분하지 못한 경주마식 보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판단해야 합니다. 이용수 어른의 문제제기는 활동가로서 당연히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을 소비하는 언론의 방식이 대중의 불필요한 대립을 더 키운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말입니다. 진보·보수 언론 구분 없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인상입니다.

 

<한국일보>는 최근 "대구서 위안부 할머니 당사자 중심 시민단체 '아이캔스피크' 출범한다"는 제목의 단독보도를 했습니다. '정대협'이 피해당사자 중심 단체가 아니었다는 단정적 판단이 담겨 있는 이 기사는 그러나 지금 삭제되고 없습니다. 새 단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이용수 어른과 아무런 상의조차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단체였던 것 같습니다. 이용수 어른 쪽이 항의했는지 기사는 없어졌습니다. 당사자 중심 시민단체를 만든다는 세력이 당사자와 논의도 안 하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언론에 제보를 하고 언론은 검증과정 없이 보도를 이어가고 있는 촌극인 것입니다.

 

<경향신문>은 최근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라는 연재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14<경향신문>"민족주의 관점 밖 위안부 연구 외면한 운동 비판·성찰 사라져"라는 제목으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연구 방식을 비판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의 말로 <경향신문>"연구자들은 할머니 인터뷰부터 기초 자료까지 모두 정의연을 통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었다. 정의연이 곧 피해자이자 한국 입장을 대변하게 된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정의연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를 두려워했다"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러자 당장 SNS에는 한 연구가가 2004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부설 전쟁과 여성인권센터가 발간한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 서론부분을 발췌해 <경향신문>을 반박했습니다. 이미 정대협은 십수년 전부터 민족주의 관점 밖의 위안부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해당 부분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동원과정만을 부각시켜 일본군 위안부의 전형을 만들어냈던 기존의 위안부개념의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위안소에서의 성폭력 경험과 그 당사자의 기억을 중심으로 일본군위안부개념이 재정립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이 책에서는 강제로 끌려간이라는 수식어를 과감히 버리고, 그동안 민족담론의 틀에서 배제되었던 개인의 경험들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 거대담론 아래에서 공론화되지 못했던 개인의 역사를 이야기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지윤 '다른세상을향한연대' 실행위원은 이를 보고 "대체 지난 30년에 대해 철저한 고민과 조사도 안 해 보고 며칠간의 가벼운 취재 끝에 '위안부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저 놀라운 오만함은 어디서 나올까. <경향신문>이 반일종족주의 등에 나오는 내용과 대동소이한 프레임을 전파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정대협이 삼성과 같은 거대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다른 시각의 연구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인지 <경향신문> 보도 안에 근거는 없습니다.

 

이용수 어른의 문제제기가 우리 사회에서 적정하게 소비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언론의 책임으로 분석됩니다. 우리 언론이 너무 한쪽의 일방적 문제제기에 기대어 정치인 검증에 나서는 것의 부작용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입니다. 조국, 최강욱, 황운하, 윤미향 등 시작은 매우 떠들썩했으나, 현재 뭐하나 뚜렷하게 사실로 확인된 비위가 없습니다. 정치인 검증에 당연히 여야는 없어야 하지만, 검증의 단서들이 너무 편향적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언론의 자기 검열은 그간 얼마나 깊었었는지 의문입니다.

허재현 대표 기자 <리포액트> 2020 .6. 18

 

정치의 사법화와 입법 무능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효력을 정지시킨 법원 결정은 여러가지 절차 위반 주장을 모두 배척하고 단 하나만 인정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명쾌하지는 않다. 상반된 판례가 존재한다. 법리가 난해한 것도 아니니 각자 상식에 입각해 판단해볼 만하다.

 

쟁점은 이렇다. 검사징계법 174항은 징계위원에 대한 기피신청이 있을 때는 재적위원 과반수의 출석(의사정족수)과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의결정족수)으로 기피 여부를 의결한다. 이 경우 기피신청을 받은 사람은 그 의결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의결이란 기피 여부를 다루는 회의 전체를 의미할까, 아니면 기피 여부에 대한 찬반 표결 과정만 의미할까?

 

재적위원이 7명이고 5명이 회의에 출석했는데 이 중 2명이 기피신청을 당했다. 전자로 해석하면 이 2명은 회의 자체에 참여할 수 없는 만큼 의사정족수(4)를 채우지 못한다. 후자로 해석하면 5명이 회의에 참가한 만큼 의사정족수를 채운 게 된다. 다만 기피신청을 당한 위원은 의결정족수 산정에서 제외되고, 나머지 출석위원 3명의 과반수인 2명 이상의 의견이 모아지면 의결이 성립한다.

 

정족수 문제에 관한 대법원 판례는 두번째 해석을 채택하고 있다. 기업 이사회, 조합원 총회, 종중회의 등의 구성원이 자신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의결권을 박탈당하는 경우 의사정족수에는 포함시키되 의결정족수에서는 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징계위라는 상황을 직접적으로 다룬 대법원 판례는 아직 없다.

 

고등법원 판례는 있다. 그러나 서로 엇갈린다. 윤 총장 징계 효력정지 결정에서는 대구고법 판례(20117797)를 참조했다. 위의 첫번째 해석을 따른 판결이다. 반면 서울고법 판례(200671818)는 위의 두번째 해석을 따랐다. 이 판례는 이번 결정에 언급되지 않았다.

판례를 떠나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느 한쪽이 절대적 정합성을 지니는 건 아니다. 결국 어떤 시각을 가진 판사가 해당 재판을 맡는지에 따라 결론이 좌우되는 셈이다. 이는 법관의 독립적 재판을 보장하는 한에서는 피할 수 없는 불합리성이기도 하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대법원 판례가 나오면 되지만, 그보다 국회가 입법으로 정족수 산입 방식을 못박는 게 더 간명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검사징계법 174항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치밀하지 못했다. 20194월 징계위원 기피제도를 새로 도입하면서 이 조항이 신설됐는데 정부가 낸 법안에는 정족수 규정이 아예 없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채이배 당시 바른미래당 의원이 이를 지적하자 별다른 토론도 없이 공무원징계령에 있는 문구를 그대로 가져다 넣었다. 이 문제를 두고 법원 판결이 엇갈리는 현실을 법사위원들은 인식조차 못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사상 초유의 현직 검찰총장 징계 사건에서 이 조항에 대한 한 법관의 해석이 징계 효력정지라는 중차대한 정치적·법적 국면을 결정짓게 만들었다

 

정치의 사법화가 우려를 낳고 있다. 갈등을 정치적으로 풀지 못하고 검찰·법원으로 달려가는 정치권의 행태는 물론 잘못됐다. 하지만 피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사법적 판단을 받아야 하는 사안도 있게 마련이다. 이때 판단의 주체는 법관이 되지만 판단의 룰을 정하는 것은 선출권력인 국회다. 검사징계법 조항을 명확히 만들었더라면 그 해석 문제로 사법권력 과잉 논란을 빚지 않았을 것이다

 

법의 해석과 함께 사실의 판단도 법관의 재량이 지배한다. 윤 총장 징계 사유 중 정치적 중립에 관한 부적절한 언행부분을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해 벽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여론조사에서 윤 총장은 엄연한 주요 대선 주자로 거듭 각인됐고 이는 호불호를 떠나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사실로 받아들이는 바다. 검찰의 생명인 정치적 중립성이 위협받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인데도 법원은 아무 문제 없다는 식이다. 이렇게 사실 판단에서 나타나는 괴리도 법관 개인에게 독립된 재판을 맡기는 한 불가피한 비합리성의 하나이며, 이를 개선하는 일 역시 입법의 영역이다. 좁게는 징계 사유가 되는 검사의 정치적 언행을 더 엄격하게 규정할 수도 있고, 넓게는 배심원제처럼 사실 판단에서 시민의 의견이 재판에 반영되는 제도를 만들 수도 있다

선출권력의 우위는 당위의 부르짖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법전에 법을 새겨 넣는 권한을 시민의 뜻에 따라 제대로 행사하면서 확보해나가는 것이다.

박용현 ㅣ 논설위원 한겨레 :2021-01-12

 

따라잡기의 종말

궁극적으로 문제는, 애당초에 한국의 지배층에 의해 선택되어 여태까지 한번도 본질적으로 수정된 적이 없는 따라잡기식 개발주의의 경로일 것이다. 사회적 정의, 약자의 인권을 위한 그 어떤 움직임도 쉽게 범죄시될 수 있는 초강경 반공 규율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개발은 거의 유일신의 자리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세계 체제 ()주변부 후발 국가들의 피할 수 없는 공동 운명인지, 나는 소련에서 성장하면서 미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자주 듣곤 했다. 철강 생산 같은 전략 산업의 생산량에 있어서 미국이라는 최고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은 스탈린 시대 이래의 (실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대체한) 국가의 주요 목표였다. 실제 1978년에 이르러 거의 30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소련 핵탄두의 수는 미국 핵탄두의 수를 드디어 추월했다. , 추월의 달성에 지나치게 올인한 나머지 경공업의 발달에 거의 자원을 배분할 여유가 없었던 소련 체제는 그 뒤로 10여년밖에 버티지 못했다. 중국에서도 1950년대 말부터 소련과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이 되는 것은, ‘사회주의간판을 내건 좌파 개발주의적 체제로서의 목표였다. 중국이 실제로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앞지른 지 이미 15년이 지났고, 명목 국내총생산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보이는 2028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대기오염으로 인해 매년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되는 약 100만명의 중국인들에게 세계 최강 국가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러시아나 중국과 그리 다르지 않게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문명국 따라잡기는 불변의 사회 이데올로기였다. ‘따라잡기의 성과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인당 국민소득의 숫자였다. 1994, 이 숫자가 1만달러에 도달하자, 머지않아 외환위기라는 사상 최악의 경제 대란을 앞두고 있던 나라의 언론에서는 때아닌 자축의 장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기도 했었다. 2018년에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아예 3만달러까지 넘었다. 지금은 어떨까? 만약 명목액수가 아닌 구매력비례(PPP) 1인당 국내총생산으로 이야기하자면,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숫자(44292달러)는 이미 영국(44288달러)이나 예전의 식민 본국이었던 일본(41637달러)까지도 추월한 상태다. 그렇게 보면 한국은 이미 속칭 선진국중의 하나다. 경제 통계뿐만도 아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확인된 한국이나 대만 싱가포르의 행정력이나 보건의료체계는 구미권을 뛰어넘을 정도다. 그러나 웬일인지, ‘선진국 문턱과 같은 이야기가 떠들썩했던 1994년과 달리 나이브한 자축의 분위기는 이젠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숫자 차원의 따라잡기와 앞서가기, 그리고 세계 최고의 기술이 가 아니라는 것을, 지난 25년여 동안 뼈저리게 실감해왔기 때문이다. ‘’(지옥)이라고 흔히 표현되는 대한민국에서의 삶의 실상은 대개 신자유주의, 즉 제약을 받지 않는 자본 갑질 문제 본위로 이해되곤 한다. 이는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과연 자본만이 갑질의 주체인가? 과거의 관존민비 관행은 전반적으로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검찰과 같은, 기소권을 독점하는 최강의 공무원 조직은 여태까지의 각종 관제 간첩조작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반성의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사법 시스템의 강자인 만큼 그 위치를 끝까지 고집하여 사법의 민주화를 애써 반대한다. 그런데 이 사회의 다른 강자들은 과연 어디까지 얼마나 다른가? 심지어 하나의 사회적 계층으로서 자본에 착취의 대상이 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강자가 약자를 보호막으로 이용하고 핍박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나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률은 세계 어디에서도 전례가 없는 0.7%에 불과하다. 10년 전만 해도 거의 3%였는데, 지금은 이처럼 100명의 비정규직 중에 단 한명만이 노조원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는 절반 넘는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가입을 원천 불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함께 노조 활동도 같이 못 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이외에 어디에도 없다.

 

경제 지표를 보면 이미 과거의 식민 본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과거의 세계 패권 국가인 영국까지 추월한 선진국대한민국에서, 왜 강자와 약자 사이의 거의 모든 사회적 관계에 무조건적 복종 요구와 심리적 폭력, 갑질이 따르는 것일까? 경제 지표들은 고공 행진을 하고 있는데, 왜 다수가 으로 실감하는 삶은 지옥같은 지경일까? 궁극적으로 문제는, 애당초에 한국의 지배층에 의해 선택되어 여태까지 한번도 본질적으로 수정된 적이 없는 따라잡기식 개발주의의 경로일 것이다. 사회적 정의, 약자의 인권을 위한 그 어떤 움직임도 쉽게 범죄시될 수 있는 초강경 반공 규율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개발은 거의 유일신의 자리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수출량, 국내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과 같은 숫자들은, 개발의 신에 의해 한국 국민이 선택을 받아 개발의 선민’(選民)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유사 종교적 상징쯤이 되었다. ‘개발교()’ 사제들이 군인 출신인 만큼, ‘개발교의 예배당이 된 회사 역시 병영화되고, 나아가서 사회 전체가 명령과 폭언이 난무하는 하나의 커다란 병영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1990년대에 군인 출신의 개발교사제들은 민간인으로 교체되었지만, 이 사이비 종교의 교리는 본질적으로 바뀐 적이 없다. 여전히 지표로 나타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권 보호 같은 절차생략해도 된다는 식의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안 그래도 매일매일이 전쟁 같기만 하던 일터의 일상은,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완전히 전쟁터가 되었다. 군인과 민간인이 따로 없는 이 전쟁터에 무슨 인권이 있겠는가?

 

하지만 선진국을 따라잡으려고 발버둥 쳤던 시기는 이제 끝났다. 한국이야말로 경제적 선진국이 되었으며, ‘선진권은 전반적으로 성장이 둔화되는 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입사 이후 직장인의 83%가 격무와 과로, 상사의 폭언 등으로 건강 이상을 호소하는 이 같은 사회를, 사람이 살 만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역사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1897~1990)가 이야기했던 문명화 과정의 중심에는 강약이 엇갈리는 사회관계의 광의의 비폭력화가 있었다. 한국 사회의 비폭력화가 이루어지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특히 직장의 탈군사화와 사회 전반의 평등화, 사회적 관계들의 대등화 등이다. 대학 평준화를 통한 학벌 카스트 제도의 타파가 필요하고,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를 통한 기업의 민주화부터 필요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설령 10만달러가 되어도, 시민적 평등을 결여한, 권력자·강자 본위의 폭력적 사회는 행복할 리가 없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미국 의사당에 나부낀 태극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 시위대가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에 난입한 지난 6, 현장에서 특이한 장면이 포착됐다. 미국 국기인 성조기와 백인 우월주의를 상징하는 남부군 깃발이 물결을 이룬 속에 태극기가 등장한 것이다. 이날 시위 군중 속에 태극기가 나부끼는 장면은 여러 매체의 카메라에 찍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늘 등장했는데, 이번에는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자기들 문제로 시위하는 자리에 태극기가 나타난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트럼프가 아니면 전쟁을 외치며 총 쏘는 법을 모르면 지금 배우라는 섬뜩한 구호도 서슴지 않는 극성 트럼프 지지자들은 나름의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나라를 망치게 놔둘 수 없다거나 워싱턴DC를 불태워서라도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행태를 두고 나오는 분석 중 하나가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다. 지난 대선 때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 유권자 10명 중 8명꼴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악마와 싸우는 전사로 여긴다.

 

복음주의라고는 하지만 근본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이들이 상당수다. 이들은 여성과 인종에 대한 차별의식이 강하고 환경이나 빈부 문제에도 보수적 성향을 보인다. 이들은 또 기독교 신성의 영토로서 예루살렘의 지위를 회복하길 갈망한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3대 종교의 성지로서 국제법상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수도를 텔아비브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2017년 트럼프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해 버렸다.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수복한 것으로 여겼다. 트럼프는 하늘이 내린 영웅이 됐다.

 

사탄을 숭배하는 어둠의 집단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큐어논(QAnon)이나 무장투쟁을 선동하는 프라우드보이즈(Proud Boys) 등 극우 단체들과 연결되면서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 세력은 정치적으로도 과격해졌다. 특히 큐어논은 어둠의 집단이 지구 장악을 위해 코로나19를 퍼뜨렸으며, 백신도 사람의 DNA를 조작해 노예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코로나19 사망자도 조작됐다고 본다. 이들 세력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적극 활용했고 마침내 의사당을 폭력으로 점거하는 사태까지 초래하게 했다.

 

우리나라(남한) 개신교는 해방 이후 미 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지대한 영향 아래 정착했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 미국과 우리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하는데도 정부의 방역 지침을 거부하는 여러 교회와 관련 단체가 우선 그렇다. 최근 모 방송의 탐사 프로그램은 선교단체 인터콥의 대표가 코로나19는 어둠의 세력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며, 백신으로 사람을 노예로 만들려 하고, 그 중심에 한국 정부가 있다고 설교했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하는 인터콥은 BTJ열방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때 ‘BTJ’예루살렘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Back to Jerusalem’의 약자다. 근래 이 센터 방문자 중 코로나19 확진자가 500명 이상 발생했는데도 상당수는 검사조차 받지 않고 있다.

 

이런 인식은 인터콥만이 아니다. 일부 개신교 세력이 주도한 태극기 집회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됐으며, 다수 교회들도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더 우려되는 상황은 이들이 정치적 목적을 갖고 세력화하는 때다. 최근 감옥에서 풀려난 전광훈 목사를 두고 정가에서는 올 4월 부산·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내년 대선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벌써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전 목사는 이미 815광화문비대위 등 여러 우파 인사들과 함께 13광화문 자유대연합 정당출범을 선언하는 한편, 오는 31삼일절 국민대회를 열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이들은 과거에도 기독교인이 중심이 돼 대한민국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며 대규모 시위를 가진 바 있다.

 

우리나라 현 상황이 미국의 것을 꼭 닮은 것이다. 이쯤 되면 미국 의사당에 태극기가 나부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 미국 의사당 난동 같은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 흔히 의사당 난동으로 미국 민주주의가 무너졌다고 개탄하지만 그래도 미국은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건전함과 저력을 보였다. 보수 성향의 언론들도 폭도로 변한 시위대를 비난하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화살을 돌렸고, 정치인들은 당파를 초월해 대선 결과에 대해 상식에 따른 합리적 결정을 내렸다. 여하튼 미국의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임광명 논설위원 부산일보 20221. 1.12

 

선한 영향력의 모순

권력을 사회현상으로 파악한 푸코의 입장을 차치하면, 권력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개념, 영향력(파워)이다. 요즘에는 인플루언서라는 말로 대중화되었다. 또 하나는 대안적 개념으로서 책임감이다. 파워와 책임감은 획득 경로나 실천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열망하는 강하고 선한 리더는 출현하기 어렵다. 선한 사람이 원칙을 지키면서 권력자의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는 사회라면, 이미 그런 리더가 다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특히 당대 우리 사회에서 선함은 약함을 의미한다. 착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선의를 비웃는다.

 

 

이전 시대에는 부자가 여러 명이었다면, 신자유주의의 특성인 양극화 시대에는 큰 부자 몇 명이 자본주의를 좌우한다. 나로선 문해력이 부족한 뉴스, 2012년부터 억만장자 지수(Bloomberg Billionaires Index)를 발표해온 블룸버그 통신은 며칠 전 세계 최고 부자 순위를 발표했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미국의 전기차 회사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1,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가 2위다. 두 사람의 자산평가액만 합쳐도 미국인 1억명에게 2000달러(218만원 정도) 수표를 지급할 수 있다. 1억명에게! 두 사람의 재산 증가분을 합치면 217조원으로, 139개국의 국내총생산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산다.

 

한국의 최고 부호 다섯 명(이건희, 서경배, 이재용, 정몽구, 최태원)의 재산 합계는 40조원으로, 북한의 지난해 국내총생산보다 18.3%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자본주의에 절망한다 해도, 이들 부자가 마음을 바꾸면 인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자산은 복잡한 개념이기 때문에 이 돈이 모두 현금은 아니겠지만, 나는 잠시 이들의 선한 영향력이 세상을 바꾸는 상상에 잠겼다.

 

혁명이 그토록 어려울 필요가 있는가. 돈이 권력인 시대, 선한 영향력이 삼라만상에 퍼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선함은 자유주의적 사고에서 개인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고, 영향력은 구조주의적 차원에서 획득(대물림)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구조주의의 충돌, 선한 영향력은 대중화되기 어렵다.

 

똑똑하면서도 착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 대통령이 그렇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직장 상사나 아파트 관리소장이라도 이런 분이 있다면, 살 만한 세상이다.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이 나서서 알아서 정의를 실현해주고, 나는 내 일상에만 집중했으면 좋겠다. 선거 때마다 나오는 후보들의 구호 일꾼, 이런 사람 아닌가. 그러나 영화감독이든 지자체장이든 팀장이든 지도교수든, 선하고 능력 있는 리더는 많지 않다. 현실 정치권력에 가까운 인물들일수록 그렇다.

 

요즘에는 이도 저도 아닌 이들이 등장했다. 청문회 도입으로 장관 하면서 욕먹고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편히 살면서 아파트를 지키겠다는 이들이다. 책임에 대한 부담과 겸손함 때문이 아니라 돈과 가족의 계급 유지(자녀 교육)’를 중시하면서 편하게 살겠다는 신인류(?). 이런 이유로 국회의원 비례대표나 장관직을 사양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관직이나 명예를 전부로 여겼던 입신양명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치가 아닌 것이다.

 

선한 영향력은 모순이지만, 우리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분명 있다. 아마 백종원씨가 대표적일 것이다. 대한민국 남편감선호도 1. 그는 전문성, 진정성, 원칙에 대한 비타협적인 자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모두 갖췄다. 무엇보다 그는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 같다. 공동체를 걱정하는 계몽적 인간이되,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나만 그럴까. 이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우리 사회의 공식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백종원씨의 레시피는 그가 실제로 자신만의 오랜 노력과 시간으로 체화한 아이디어다. 오랜 가사노동자인 내 입장에서 봐도, 그는 당면을 넣은 김말이 튀김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이다. 그는 파는 음식이든, 집밥이든 음식 만드는 사람을 존중한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의 선한 영향력의 절정은 골목 식당 살리기와 더불어 자신의 인맥을 활용, 팔지 못한 신선한 농산물을 유통업체, 식품 제조업체에 연결해주었을 때다. 그가 전화 한 통으로생산자의 시름을 덜고 소비자에겐 저렴한 상품을 공급하는 핫라인 역할을 할 때, 나는 거의 힐링이 될 정도였다. 사실 한국 농업의 큰 문제는 고령화, 수입 농산물이 아니다. 유통 문제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할 것이다. 그가 다시마와 감자를 팔아줄 때, 생산자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러나 백종원은 한 명이다. 선한 영향력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나도 실력과 인기를 모두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사회구조를 부채질할 뿐이다. 백종원씨 자신은 연예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그는 경영인이자 방송인이다. , 정혜영씨 부부나 유재석, 정우성, 차인표, 권해효씨와 같은 이들도 선한 영향력을 대표하는 인사들이다. 즉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대부분 연예계 종사자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원이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등장한 우월한 인류’, 일종의 엄친아개념에 가깝다.

 

정치인이나 기업가 중에는 거의 없다. 왜일까? 선한 영향력은 대중과 소통하는 일환으로서, 그 자체로 연예인들의 자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인이나 자본가는 사람들의 욕을 먹더라도, ‘그냥 영향력’, 즉 권력 자체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한마디로, “당선이 되어야 그다음이 있기때문이다.

 

앞서 말한 강하고 선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강해야 한다. 정치 지도자들이 품위를 지키면 유약,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기 쉽다. 이들은 과정이 어떻든 강한 이미지를 어필해야 한다. 물론 국민을 상대로 내전을 벌인 전두환씨 식의 폭력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나쁜 국민’ ‘자잘하게 나를 괴롭히는 인간들을 제대로 처벌해주는 추진력을 갖춘 인물이다. 이 과정이 반드시 합리적이거나 선할 수는 없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 국가의 역할은 절실하게 되었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글로벌 경제가 기존 국가의 역할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그들의 보편주의는 틀렸다’. 로컬의 상황, 우리의 투쟁과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2016년 집권한 필리핀의 16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그 자신이 범죄자인지, 범죄자를 잡는 사람인지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막말과 막무가내는 기본. 살인, 성폭력, 마약 범죄자나 코로나19 봉쇄령을 어긴 시민에게 즉각 처형을 명령한다.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에는 백신 안 주려면, 필리핀 떠나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한국 사회라면 감당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러나 필리핀 국민 대다수는 물론 평화운동가까지 그를 지지한다. 내가 아는 필리핀의 수녀님은 그는 문제가 많지만, 악질 강간범 재판 과정에 세금을 사용하기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이 돌아가길 원한다고 말해서 놀랐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녀와 비슷했다. 글쓰기가 생계인 내게서 원고지 장당 8.8%의 세금을 떼어가다니! 그 돈이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조두순에게 쓰인다고 생각하면 나도 강력한 지도자가 나의 억울함을 해결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모든 일상을, 인생을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국민이 쥐여준 권한을 갖고 있는 선한 이들이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다. 욕심 많고 무능한 이들이 정치를 하겠다고 나댈 때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이 모두 권력에 미쳐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권력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기피하는 이들도 많다. 나는 노무현 정부 당시, 히말라야로 도망간(?)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대표적인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점잖은인물이어서, 권력이 부여한 책임을 지나치게 고뇌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성찰은 개인적으로 해결할 문제고, 일단 책임 방기다. 어려운 시절, 있는 권력이라도 제대로 행사하는 지도자가 많기를 바란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경향 20221. 1.13

 

 

정인이 사건을 보는 또 다른 관점

아동학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가 이토록 논란이 된 적이 있던가? 16개월 짧은 생을 살다 간 정인이 죽음을 모두 애도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다. 정인이는 분명 아동학대로 사망했지만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입양에 대한 복잡한 담론이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만들고 있다.

 

아동은 물질적·정서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하므로 혈연이 아니더라도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결속시킬 수 있는 장치로 입양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부모의 국적과 입양되는 자녀의 국적이 상이한 경우 국제입양이라는 확장된 법적 제도로 가족이 되는 것을 승인함으로써 아동 복지에 기여하게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 입양의 제도화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입양의 법적 주체 중 하나인 기관의 문제다. 사회적 자원이 부족했던 한국전쟁 직후 아동복지를 입양 제도로 보완했던 것이 입양의 시작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입양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전쟁 직후가 아니라 1980년대라는 점이다. 미 국무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1960년에 627명을 입양 보냈는데 1985년에는 6021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1980년대 국외 입양이 활발했다는 것은 입양제도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고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비한 아동 복지지원 체계에 대한 대안으로 정부의 책임을 민간에 전가하면서 개별 기관이 아동복지를 주도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입양을 이제 국가적 책임으로 편입해 절차와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둘째, 입양 주체에서 소외되고 비가시화된 생모의 존재이다. 입양의 법적 주체는 입양기관, 양부모, 아동이다. 여기서 아동을 낳고 입양을 선택한 여성의 목소리는 개입될 여지가 없다. 만약 결혼제도 밖에서 임신한 여성에게 자녀에 대한 완벽한 자율권과 지원이 확보된다면 낙태나 입양을 선택할 비율은 지금보다 줄어들 것이다. 입양 문제는 여성의 문제다. 이번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가장 먼저 아이를 출산한 여성이 왜 양육을 포기했는지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지난 7일 정춘숙 의원실에서 주최한 긴급 국회 간담회에서 인트리 대표가 대독한 은비 사건생모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정인이의 죽음을 더 이상 입양 문제나 가정폭력 사건으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정인이 사건은 공동체의 일원인 이 사회 모두에게 부채감을 남겼다. 그래서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민간에 위임한 입양을 중앙정부로 이전하고, 출산한 여성이 왜 입양을 선택했는지 그 원인에 대한 심층적 분석과 이해가 이뤄져 사회적 정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한서승희 젠더문화연구소 대표 경향: 2021.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