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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1.5.7~6.30 코로나 불평등, 거꾸로 가는 부자

by 이성근 2021. 7. 1.

가짜로 오염된 소셜미디어 경향 : 2021.06.01

한국 보수를 생각한다 경향 : 2021.06.01.

시장에 맡기자는 쉬운 말 한겨레 :2021-06-02

개소리를 닮은 언론 보도 PD저널 2021.06.04.

슬픔과 분노가 공동체의 규범을 대체할 때 경향 : 2021.06.06.

도쿄 올림픽을 어찌할 것인가 프레시안 2021.06.07.

공수처 제1호 사건을 보는 답답함 경향 : 2021.06.07.

이준석 돌풍에서 진짜 봐야 할 것들 내일신문 2020.6.15.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한겨레 2021-06-16

<退>, <>, <> 경향 : 2021.06.17.

라는 의문이 실종된 사회 경향 : 2021.06.19.

윤석열의 ‘10원 한 장건보 23억 사취의혹 한겨레 2021.06. 22

더불어부동산 경향 : 2021.06.24.

주방 오물분쇄기 경향 : 2021.06.25.

코로나 시대, 이준석 현상과 사회적 성찰 경향 : 2021.06.30.

검사의 정체성, 진보의 정체성 경향 2021.06.30.

최재형·윤석열은 진보정부위장취업했나 경향 2021.06.30.

조국과 언론 경기신문/ 2021.06.30.

 

한때 대도시의 자동차는 말똥 지옥의 구세주였다 경향

행동대장 산림청 뒤엔 누가 한겨레 2021-05-07

이재용 사면의 정치학 경향 : 2021.05.10

평등한 불행을 증식하는 적대에 맞서 경향 : 2021.05.10

바이든 100일은 왜 루스벨트에 비교되나 한겨레 2021.05.10.

가족의 현재와 미래 경향: 2021.05.11

문해력 최하위한국

분단 체제와 플랫폼 자본주의

자신이 집 없는 사람이라면 토지공개념을 주장하자 시사인 2021.05.14.

코인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한겨레 :2021-05-24

국가보안법마피아 게임을 끝내야 한다 한겨레 :2021-05-24

코로나 불평등, 거꾸로 가는 부자 감세 한겨레 :2021-05-24

 

가짜로 오염된 소셜미디어

허위정보가 넘치고, 뉴스의 허울을 쓴 가짜뉴스가 판친다. 전통 언론은 팩트체크라는 형식으로 진위를 검증해 보여주지만 이미 퍼져나간 가짜와 허위의 위력을 잠재우지 못한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공권력도 가짜와의 싸움을 벌이지만 역부족이다. 최근 한강실종사망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있는 수사기관이 그러하다. 각종 음모론과 추측이 끊이지 않고 방구석 코난과 돈벌이 유튜버들이 쏟아내는 가짜뉴스와 허위정보에 대응하느라 경찰은 힘이 빠진다. 독자적인 수사권을 부여받은 경찰에 대한 불신이 초래한 사태이지만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급기야 허위사실 유포 행위를 수사해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코로나19와 관련된 허위정보와 가짜뉴스도 방역 당국을 힘들게 하고 있다. 전염병처럼 전파력이 대단해 인포데믹(Infodemic)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기 편에게 유리하게 조작된 정보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각종 선거가 끊이질 않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그 폐해가 심각하다. 구독자가 많은 미디어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을 담은 가짜뉴스 공장이 된 지 오래고, 내 편이 퍼뜨리는 정보만 골라서 보고 듣는 확증편향이 표심을 왜곡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사와 잘못된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소셜미디어가 순기능 못지않게 위협 요소가 된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위를 식별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기란 전문가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정식 기사의 모습으로 변장해 전파되기 때문이다. 정통 언론도 가짜뉴스를 진실로 알고 퍼뜨리기도 한다.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 등 온라인으로 활자화되어 유통되면 신뢰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대화하다 보면 그의 몸짓이나 표정, 말투 등을 통해 거짓인지 판단할 기회가 있지만, 활자는 즉각적으로 확산되고 수많은 사람이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친구나 가족, 지인들을 신뢰하기 때문에 소셜미디어에 공유된 정보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 폐해가 크다 보니 규제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이용자에게 의심하고 확인하라는 조언만으로 예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정보 생산 유통자와 이용자의 자율에 맡기기에는 이미 오염의 정도를 넘어섰다. 유해 정보 및 혐오 발언과 관련하여 유튜브 동영상 등의 가짜뉴스를 단속하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들려오고, 규제법안을 마련하겠다는 집권 여당의 기획은 이런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짜뉴스 근절과 처벌에 관한 입법안이 여러 건 발의된 상태다.

 

그러나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개인을 처벌하고 포털사이트의 책임 소재를 강화하는 내용의 가짜뉴스 방지 입법화에는 표현의 자유 억압이라는 반대가 만만치 않다. 개인에게 손해액의 최대 3배에 달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무는 방안은 헌법상 과잉금지원칙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고 반발한다. 이런 비판을 피하려면 우선 규제 대상 허위정보의 개념 정의와 범위가 구체적이고 명확해야 한다. 개념을 좁게 잡고 이에 대한 단호한 규제여야 위헌논란도 피하고 규제의 실효성을 꾀할 수 있다. 새로운 입법도 필요하지만 형법, 방송법, 정보통신망법 등 기존 법률과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

 

사기죄가 인류와 함께한 범죄인 것처럼 가짜뉴스의 역사도 인류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고 한다. 아무리 사기범을 처벌해도 사기는 끊이지 않는다. 가짜뉴스도 마찬가지다. 이득을 얻기 위한 가짜뉴스의 생산을 형벌만으로 차단할 수 없는 이유다. 처벌에만 초점을 맞춘 대응책은 한계가 있다. 기성 언론은 팩트체크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그래서 사용자에게 주기적으로 경고를 보내야 한다. 기자와 전문가, 시민이 참여하는 팩트체크 플랫폼도 확대해 팩트체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올바르고 정확한 정보 유통의 장이 서야 가짜뉴스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새로운 형태의 공론장을 만든 인터넷 기업과 서비스사업자는 가짜뉴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가짜뉴스를 걸러내고 신고된 가짜뉴스를 신속하게 차단할 기술적 방법을 고안할 의무도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뉴스가 소비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그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플랫폼 사업자를 온라인 콘텐츠의 단순 전달자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기성 신문사나 방송사와 달리 취급할 근거가 사라졌다. 지금까지 누려온 면책특권의 지위를 거두고 그들에게 법적 의무를 지우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책임을 다하는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경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 2021.06.01

 

한국 보수를 생각한다

나는 보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수가 진보와 생산적으로 경쟁할 때 사회가 발전한다고 믿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 보수는 두 차례의 혁신을 모색했다. 첫 번째, 1970년대 후반 보수는 하이에크 등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신보수로 거듭났다. 미국 레이거노믹스와 영국 대처리즘은 대표 사례였다. 앤서니 기든스는 이 신보수를 모순적 혼합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경제적으론 시장에서 개인의 경쟁력을 중시한 반면 정치적으론 가족 등 공동체의 보존을 중시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모순적 성격에도 보수는 권력을 획득했고, 신보수주의 시대를 열었다.

 

두 번째, 2000년대 들어와 3의 길에 맞서 보수는 울리히 벡이 말한 우파적 제3의 길을 추진했다. 3의 길이란 영국 블레어 정부와 독일 슈뢰더 정부처럼 전통적 사회민주주의를 혁신한 기획이었다. 우파적 제3의 길이란 영국 캐머런 정부와 독일 메르켈 정부처럼 기성의 신자유주의를 혁신한 프로그램이었다. 캐머런 정부는 따듯한 자본주의를 앞세워, 메르켈 정부는 탈이념적 정치연합을 추구해 보수의 이념적 지평을 넓혔다.

 

최근 주목할 것은 보수적 포퓰리즘의 부상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포퓰리스트들은 계급·이념 균열에 엘리트 대 국민의 새로운 균열을 더했다.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 등 포퓰리스트들은 기성 정치인을 기득권자로 공격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적대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전략으로 포퓰리즘은 한때 권력을 장악했다. 2021년 현재 보수는 미국 공화당에서 독일 기민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서구와 다른 길을 걸었다. 광복 이후 보수의 동의어는 박정희주의였다. 박정희주의는 경제성장이란 목표를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을 이룬다. 결과를 위해 과정은 무시해도 좋다는 성장만능주의가 시장 보수로 거듭났다면, 국가를 위해 인권은 무시해도 좋다는 반공권위주의가 안보 보수로 나타났다. 시장 보수가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이었다면, 안보 보수는 박근혜 정부의 정체성이었다.

 

시장 보수든, 안보 보수든 우리나라 보수는 2016년 촛불집회를 통해 정치·사회적으로 거부됐다. 지난 4년 동안 보수의 위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에서 큰 힘의 하나가 야당 복이라는 말은 보수가 놓인 자리를 증거했다. 보수는 완전히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철학의 빈곤에 있었다. 기질적 보수와 세력적 보수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박정희주의를 대체할 보수적 철학의 부재는 보수의 위기를 구조화시켰다.

 

보수가 새로운 동력을 얻은 것은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체제를 통해서였다. 김종인 위원장은 개혁적 중도보수를 보수의 새로운 길로 제시했다. 김종인 체제에 대해선 여러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지난 4월 재·보궐 선거에서 보수는 극적으로 소생했다. 선거 결과의 일등 공신은 선택적 공정으로 국민적 불신을 자초한 여당의 실책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오세훈 후보와 박형준 후보가 보여준 중도보수적 이미지와 성향 역시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보수 안에서 이준석 돌풍이 일어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과 젠더 균열의 부상이 놓여 있다. 돌풍의 핵심은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 나선 이준석 후보에 대한 보수적 성향의 2030세대 남성 유권자로부터의 지지가 뜨겁고, 이 열기가 보수 유권자의 전 세대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대교체 열망을 이해할 수 있더라도 젠더 균열을 동원한 정치세력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이 돌풍은 청년세대 안에서 젠더 갈등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이준석 후보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든, 아니면 제3의 인물이든 보수를 대표하는 정치가라면, 박정희주의를 넘어선 보수의 철학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시장·성장·통합·공동체와 같은 보수의 고전적 가치를 21세기 정보혁명 시대에 걸맞게 재구성해야 한다.

 

둘째, 이러한 보수의 변화는 자연스레 진보의 변화를 자극할 것이다. 진보 역시 국가·분배·개혁·개인과 같은 진보의 고전적 가치를 새롭게 혁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렇게 보수와 진보가 생산적으로 경쟁하고 균형을 이룰 때, 다시 한번 말하면 우리 정치와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 2021.06.01

 

시장에 맡기자는 쉬운 말

시장이란 무엇인가?’ 경제학에 이 질문이 없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이다. 경제학자들은, 무슨 문제에 당하든지 시장에 물어보라고 말한다. 그러니 출발이 시장에 대한 분석적 정의에서 시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시장을 분석적으로 정의한 경제학자가 드물고 있다고 해도 정의가 불완전하다. 그렇게 두꺼운 경제원론 책을 열어봐도 시장의 정의를 분명하게 다룬 장이 없다. 시장제도란 주제의 책도 없고, 전공도 없고, 분야도 없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주어진 것’(taken for granted)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다. 시장이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고 작동하는’(ubiquitous)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세상에 가장 불가사의한 질문이 이것이다. 기독교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서나계신다고 본다. 경제학에서 시장은 하느님의 권능에 비견되는 존재인 셈이다. 경제학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도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자원배분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서 실행된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은 하느님을 말한다.

 

개인의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고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던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이행하던 시절의 러시아는 1992년 초 국가 소유 생산시설을 일시에 사유화하는 빅뱅급 정책을 단행한다. 당시 이 사유화 정책을 지휘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제프리 색스 교수 팀이었다.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는 규모의 경제를 도모하고자 중요 상품의 생산을 소수의 플랜트에 집중하는 대규모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대규모 생산체제에서 생산 과정은 생산의 각 단계가 다음 생산 단계로 연결되는 시스템이었다. 각 생산 단계는 분할되어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 분할된 단계들이 각기 다른 주인에게 사유화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은 생산의 각 단계에 소유권을 정해주면 자원의 배분은 시장이 알아서 해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는 시장제도가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생산 각 단계의 제품을 다음 생산 단계의 생산조직에서 팔고 사는 중개소도 없었고, 구입 자금이 없는 경우 신용을 제공할 금융기관이나 금융상품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정거래의 기준도, 이를 집행할 조직도 없었다. 모든 자원이동이 중지되었고 생산은 정지되었다. 굶주림과 인플레이션이 밀어닥쳤다. 생산설비는 고철이 되었고, 농업 생산물도 운송수단의 정지로 현지에서 부패하였다. 연금은 휴지 조각이 되었고, 마피아만 활개 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러시아의 정치가 그때의 정책 실패와 무관하다고 부인할 수 있을까?

 

시장교환이란, 원시적인 공감교환으로부터 가격이라고 하는 새로운 공감 방식으로 교환이 이루어지는, 교환 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원시적인 공감교환으로부터 시장교환으로의 전환 과정이 바로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이다. 역사적으로는 13세기에 시작되는 중상주의 시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중상주의 시기에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의 기간(13~18세기)이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기간으로 중요하다.

 

이 기간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시장제도(화폐, 각종 금융상품, 물리적 표준, 공정거래의 표준, 재산권의 표준, 도덕, 관습, -판례 등), 시장 인프라(통화 발행 및 관리, 자본시장 인프라, 간접금융 인프라, 지급-결제 인프라 등), 시장조직(통화의 발행 및 관리 조직, 자본시장 관리조직, 간접금융 관리조직, 지급-결제 관리조직, 공정거래 관리조직, 검찰·경찰 및 사법부의 재산권 관리조직 등)이 만들어지고 발달되었다. 이것은 수백년 내지 천년의 세월을 요하는 작업이다. 후발주자의 압축적 학습이라고 해도 백년을 요하는 작업이다.

 

문제는 경제학에 이 시장제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을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 맡기자는 말을 쉽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시장에 맡기자는 주장의 시장제도에 대한 표준 개념은 무엇인가?

이성섭 l 숭실대 명예교수·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 한겨레 :2021-06-02

 

개소리를 닮은 언론 보도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해외에서 보는 한강 사건에 대한 의견은 타살에 무게>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높아진 국격을 체감하려던 찰나 기사는 삭제되었다. 글에 언급된 전문가들이 실은 버추얼 유튜버와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이었다는 사실이 금세 들통났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는 장난스런 게시물을, 사실 확인조차 없이 긁어서 만든 기사의 흔한 운명이었다.

 

허무맹랑한 내용조차 확인하지 않는 소홀함을 마주하는 일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그들은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정작 진리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관심을 끌었다가 논란이 되면 은근슬쩍 기사를 내려버리는 이들이다. 형태만 기사일 뿐 내용 없는 글이 양산되는 모습은 소홀함이 장사의 수단은 아닌지 의심이 들게 한다.

 

이런 기사는 해리 G.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 속 개소리와 닮았다. 그는 책에서 개소리를 사태의 진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소홀한 말이라 본다. 거짓말과는 다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고, 진실을 두려워한다. 개소리를 일삼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진실한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진실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그가 보기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위험하다. 진실은 거짓말쟁이를 침묵시키지만, 개소리를 일삼는 이에겐 소용이 없다. 게다가 우리는 일상에서 개소리를 어느 정도는 하고 있기에 거짓말보다 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거짓말은 자신을 진실의 자리에 대치하려는 날카로운 초점을 가진 행위지만, 개소리는 방향이 없다. 단지 즐기는 행위이기에 더욱 제거하기 어렵다.

 

프리스턴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해리 G.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

아니면 말고식의 발화는 그 점에서 개소리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터무니없는 소리지만, 어쩌면 진실일 수도 있다며 음모를 제시하는 이들의 발화 형태를 닮았다. 그것이 경제적 의도에 의한 것이든,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든 상관없다. 진실에 대해 냉소적이고, 사태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의견끼리 맞붙여 정확하게 진실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카리스마적 개소리쟁이사이다 발언에 열광하는 목소리에 지워진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그 주제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는 태도가 민주주의 시민의 덕성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이젠 개소리를 내뱉는 이들이 저마다 영향력을 가진 매체를 손쉽게 얻는다. 그들은 자신의 진술이 세계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데 관심이 없거나 진작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대신 자기 자신의 진정성만 확신한다. 다양한 관점이 아니라 저마다의 진정성만이 남는다.

 

침묵을 절박하게 요청할 때다. 저자는 우리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배양하기를 요청한다. 모르는 문제는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의심하는 태도를 민주주의 시민의 덕목으로 포함시키길 바란다. 분별력 있는 시민을 길러내야 민주주의는 개소리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별력 있는 시민은 까다롭고, 환영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편도선 수술을 하고 온 과외 교사가 마치 차에 치인 개가 된 느낌이에요라며 자신의 아픔을 표현했을 때, 정색하며 당신은 차에 치인 개가 무엇을 느끼는 지 알 수 없다며 대꾸했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누가 환영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내뱉은 말의 진실은 무엇인지, 그걸 알 도리가 있는지 장인 정신을 가지고 접근하기를 프랭크퍼트는 요청한다. 모두가 그럴 수 없다면, 책임 있게 말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언제나 그럴 수 없다면, 우리의 운명이 걸린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논할 때 만이라도 서로는 말의 장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문제는 도덕적 요청이 지닌 한계다. 기꺼이 이 요청을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그들은 개소리를 하나의 놀이로 즐긴다.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만약 진짜라면 어찌할 것이냐?’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이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절대자의 언어를 들여올 수는 없다. 우리 역시 침묵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극단적 회의주의와 절대자의 언어 사이에서 우리는 근거 없는 합의의 허무함을 견뎌야 한다.

 

언론이 거대한 개소리의 파도 속에서 또 하나의 개소리를 덧붙이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칼날이 될지, 아니면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가 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나날이다. 어처구니 없는 헤드라인들을 마주할 때마다 비관적 전망에 기울면서도, 어딘가에서 자부도 체념도 없이장인 정신으로 자신의 말과 글을 다듬는 이들을 마주하며 다시금 자세를 가다듬는다. 견디어 내는 삶들이 나를 견디게 한다./ 오학준 SBS PD/ PD저널 2021.06.04

 

슬픔과 분노가 공동체의 규범을 대체할 때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관심이 보여준 민주주의 위기의 징후

손정민씨가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 이후 벌어진 사회적 논란은 자못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의혹을 제기하는 시민, 그 의혹을 퍼 나르는 언론, 거기에 거짓을 덧붙여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유튜버, 가짜 뉴스를 신뢰하며 다시 의혹을 제기하는 시민, 이들 모두가 한데 뭉쳐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마치 정해진 의례처럼 친구 A를 향한 온라인 공격과 신상털이도 빠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풍경이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다. ‘플랫어스(flat Earth)’ 따위의 음모론, 혹은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사건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발견할 수 있다(지난 529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손정민씨의 죽음을 둘러싼 거짓과 음모론을 겨냥했는데, 이는 2010MBC스페셜 타블로, 스탠퍼드 가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에도 논란과 의혹은 머지않아 잦아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에 꽤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한강 공원에서 손정민씨의 죽음을 추모하며 친구 A를 가해자로 지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죽음에 공감하며 슬픔과 분노에 잠긴 시민,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의심의 눈초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민이야말로 그동안 한국 사회의 정의를 실현해 온 주역이었다. 그렇다면 한강에 모인 그들을 정의로운 시민이라고 부르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정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가짜 뉴스와 음모론의 소비자가 되어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낡은 인식을 제거하자. 흔히 진보라고 불리는 성향에는 대중 운동을 무조건 긍정하는 경향도 포함된다. , 시민의 자발적 움직임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기원은 역사적이다. 군사 독재 시절에는 다수의 모임 자체가 곧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이기도 했다. 그래서 2002년 당시 진보 진영대부분이 월드컵 거리 응원을 찬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인식에 충격을 준 첫 번째 사건은 아마도 극우파의 대규모 거리 집회일 것이다. 대략 2000년대 중반이 되면 진보민주주의가 거리와 광장을 독점하는 시대는 끝난다. 이때부터 대중 운동을 진보보수로 구별하는 전통이 생겨나고, 이후에 촛불태극기라는 정치적 상징으로 고정된다. 하지만 이제 이런 식의 구별도 의미가 없다. 예컨대 조국 반대 촛불집회검찰개혁 촛불집회중 누가 진보이고 누가 보수인가? 사회적 폭력에 분노하며 청와대 국민청원에 서명하는 수십만의 시민들,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라인 전쟁, 인터넷 커뮤니티 단위로 진행되는 다양한 집단행동들을 기존의 인식틀에 따라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른바 586 세력이 지금의 사회 갈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네이버 카페 반포한강사건 진실을 찾는 사람들회원들이 지난 525일 오전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한강공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대학생 손정민씨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그렇지만 과거의 인식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살아남는다. 대중 운동에 대한 긍정과 찬양은 국가가 권력자와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숨기고 있으므로,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전환된다. 실제로 과거 반독재 투쟁부터 최근의 세월호 참사와 ‘n번방사건까지, 시민들은 국가 제도에 의존하지 않은 채, 직접 진실을 파헤치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해왔다. ‘친구 A에 대한 의혹 제기가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의를 찾는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은 이미 보편적 가치가 되었다. 설사 그런 의혹 제기가 음모론의 영향 때문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무능한 국가 권력, 부패한 정치, 비정상적 언론을 탓할 뿐, 시민들의 집단행동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게 다 무능한 정부와 썩은 정치인들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깔때기 논리와 같아서, 구체적 행위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가치 판단을 중지시킨다. 그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든, ‘친구 A를 공격하는 시민들의 윤리적 책임과 행동의 정당성은 그 자체로 평가되어야 한다.

 

국가를 대신해 시민이 직접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믿음의 현실적 효과는 이중적이다. 일단, 말 그대로 정의를 실현할 때가 있다(물론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 정의란 대부분 가해자 처벌과 신상 공개로 수렴한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공동체와 시민의 분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제도와 공동체의 규범을 약화하는 역효과를 발휘한다. , 법과 제도를 만들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은 여전히 권력자와 엘리트의 일로 간주되고, 시민의 역할은 제도 외부의 집단행동을 통해 그들을 비판하고 압박하는 것에 한정된다. 이러한 분리는 기존의 지배 질서를 그대로 답습한다. 실제로 지금 시민의 직접 행동은 대안적 제도를 구축하는 대신, 국가 제도 외부의 공간을 확장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여기서 도발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국가가 무능해서 시민이 직접 행동하는 것인가, 아니면 시민이 직접 행동해서 국가가 무능해지는 것인가? ‘친구 A를 향한 집단적 공격을 보고 있으면, 이 질문이 그냥 은유적인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시민의 직접 행동은 국가 기관과 제도의 매개 없이 물리적, 정치적, 문화적 힘을 행사한다. ‘네티즌 수사대가 경찰을 대신하고, 청와대 국민청원 추천 수가 법원의 결정에 우선한다. 만일 이러한 행동의 목표가 제도 외부에서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라면,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도 외부에서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느새 온라인 대중 운동의 중심이 된 국민청원에 들어가 보자. 추천 수 상위 목록 상당수가 사회적 폭력에 관련된 것인데, 그 핵심은 철저한 수사, 강력한 처벌, 신상 공개로 요약된다. 제도의 개혁은 공동체의 윤리적 규범을 수립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하지만, 시민의 정의는 오로지 가해자 개인의 처벌을 향한다. 수많은 이들이 범죄자 신상 공개를 요구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다.

 

운동의 지향, 유형, 내용, 주체가 무엇이든 간에, 한국의 대중 운동은 거의 예외 없이 반()제도적 경향을 보여왔다. 이때 제도란 단지 국가 기관이나 법률뿐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일반에게 내면화된 공통의 윤리적 규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한 공동체의 규범 중 하나를 사례로 들어보자. 민주주의 체제에서 타인의 죄를 평가하는 것은 시민 각자의 자유다. 무죄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결백을 지지하고, 유죄라고 생각한다면 엄격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다. 오로지 국가 권력만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규제할 자격이 있다. 심지어 용서 불가능한 끔찍한 범죄자도 예외가 아니다.

 

손정민씨 죽음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놀랍게도 친구 A의 권리 문제에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대한 의혹 제기가 어떤 윤리적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는 애초에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시민의 집단적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오히려 지지, 공감, 분노, 슬픔, 증오 등이다. 그 작동 방식은 이렇게 요약된다. “피해자에게 지지와 공감을, 가해자에게 분노와 증오를!” 이러한 감정의 논리가 민주주의적 윤리 규범을 대체하는 상황은 음모론과 가짜 뉴스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해준다. 자신이 지지하는 피해자를 지켜주고 증오하는 가해자를 공격하는 것이 최상의 규칙이 되면,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의 기준이 사람마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공통의 가치와 규범에 의해 유지되는 정치 공동체는 갈수록 약화하고, 공감과 증오의 대상에 따라 일시적으로 탄생했다 소멸하는 감정 공동체들만 재생산된다. 그들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투쟁이 지금 한국의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장·정치철학자 경향 : 2021.06.06.

 

 

도쿄 올림픽을 어찌할 것인가

도쿄 올림픽이 불과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이 대회는 원래 지난해 724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1년 연기됐다. 대한체육회는 지난 5, 각종 예선을 통과해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한 선수는 총 23개 종목 186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6월 말까지 예정된 올림픽 예선을 거치면 한국 대표선수단은 200210명 정도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 참가 여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최근 만 18세 이상 성인 10명 중 8명이 한국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수의 국민이 도쿄 올림픽 참가를 반대하는 데는 코로나19 외에 다른 이유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선 지 2년이 되어가고 있다. 수출 규제 금지 품목은 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 불화 폴리이미드라는 세 가지 품목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핵심 소재이다. 외국산 수입품이 자국 시장에 물밀 듯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입국이 수입 규제를 하는 모습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특정국에 자신들의 제품을 팔지 않겠다는 상황은 무척이나 생소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일본이 이렇게 나섰던 이유는 우리나라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가 취한 보복 조치였던 바, 아베 정부가 한국 때리기로 자국 내 정치 갈등을 해결하고, 동시에 우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오히려 이는 우리 산업계에 대일 의존도를 낮추는 기회가 됐다는 평가가 일반적이긴 하나, 일본 측이 수출 규제 강화 사유로 제시했던 제도 개선을 한국 정부가 신속하고 과감하게 추진해 왔음에도 일본은 아직도 규제를 풀지 않고 있다.

 

또 일본 정부는 지난 413일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처리 방법을 결정하는 관계 각료회의를 열어 주변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해양 방류를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인체에 영향이 없는 수준까지 오염수를 희석해서 순차적으로 방류할 예정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우리나라 어민은 물론이고, 국내 모든 국민들이 오염수 방류의 안전성에 대해 크게 걱정을 하고 있다.

 

이에 더해 도쿄 올림픽 골프팀의 유니폼이 지난 531일 공개됐다. 일본 골프 대표팀의 유니폼은 총 다섯 종류로 되어 있는데 모든 디자인에 '해 뜨는 나라'를 나타내는 비스듬한 선이 들어가 있다. 뜨는 태양을 빗살로 표현한 것인데, 이는 욱일(旭日)기의 상징이다. 욱일기는 일본이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 기간 사용한 군기로,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전범기이다. , 피해를 겪은 나라엔 지울 수 없는 상처일 수밖에 없는 군국주의의 상징을 입고 경기에 임한다는 것은 피해국에 대한 추가 가해이다.

 

뿐만 아니라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 루트를 표시하는 지도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했다. 2018년 평창 올림픽 당시 한국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올림픽 원칙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기에서 독도를 삭제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 관방장관은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거나 국제법상으로 명백한 일본 고유 영토"라는 해괴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일본의 경우, 지난 달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57000명대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다소 줄긴 했으나 지금도 매일 2000명이 넘는 신규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330일 도쿄 올림픽 1년 연기 확정 당시 일본의 일일 신규 확진자 수는 73명이었으며 누적 감염자는 총 2676명이었다.

 

선수들 입장에서는 올림픽이 개최되기만을 학수고대하며 4년에 1년을 더한 오랜 기간 굵은 땀을 흘리며 노력했기에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각오를 하고 있을 것이다. 고생한 선수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안전이 담보된다는 가정 하에서만, 올림픽의 가치가 유효할 수 있다.

 

더욱이 대()한국 수출 규제가 유지되고 있고, 방사능 오염수 방류의 뜻을 일본이 굽히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욱일기의 올림픽 사용을 통해 아시아인들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고 있으며, 올림픽 지도에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하는 억지를 지속하고 있음에도 굳이 올림픽에 참가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박병일 한국외대 교수 | 프레시안 2021.06.07

 

공수처 제1호 사건을 보는 답답함

헌법재판소가 1988년 출범했을 때, 그 전신인 헌법위원회의 유명무실함을 보아온 법조계 일각에서는 저 기관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보았다. 그러나 그해 헌재는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 제6조 제1항 단서의 위헌 여부가 문제가 된 사건에서 공개변론을 열고 창설 이래 제1호의 위헌 결정을 내렸다. 누가 봐도 위헌이라고 할 만한 법률조항이 문제가 된 사건을 골랐고, 그 심리과정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변론에 부쳤다. 민사소송에서 당사자인 국가와 국민을 동등하게 대하라는 선언은, 군사독재에 지쳐 국가주의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시작되던 시대적 상황에서 타이밍도 절묘했다. 헌재의 초대 소장과 재판관들의 혜안과 감각이 돋보인 순간이었다. 이로써 헌재는 일반의 의구심을 불식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교사 특혜채용 의혹을 제1호 사건으로 입건하고 수사하고 있다. 공수처에 접수된 사건은 지난 4월 말 기준으로 1000건에 가깝고 그중 절반 이상에서 판사와 검사가 대상자다. 공수처는 권력기관의 횡포와 비리를 실효적으로 제어하고 단죄하려고 설치된 것이다. 이런 공수처가 하고 많은 대상자와 사건 중 하필 교육감의 교육행정 직무수행과 관련된 사건을 제1호 사건으로 삼은 것은, 감각은 그만두고라도 권한 행사에 적정성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혹시라도 공수처가 정치적 부담이 작은 사건을 고른 것이라면 그 전략적 판단은 수가 얕다.

 

우선 조 교육감의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는지부터 의문이다. 공수처가 검토한다는 직권남용죄의 성부를 보자. 특별채용이 직권의 남용에 해당하는가? 서울시교육청의 교원 특별채용 절차에는 부교육감, 교육정책국장, 중등교육과장, 장학관 등이 담당 결재라인에 있다고 한다. 이들을 그 직무에서 배제하고 비서실장으로 하여금 실무를 맡게 하여 해직교사 5명을 채용하게 했다는 것이 혐의 사실이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부교육감은 스스로 결재를 회피했고, 교육정책국장 등은 결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 여하는 수사 결과를 보아야 하겠지만, 대법원은 2017년 교사의 특별채용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교육기관의 인력 수요는 복잡 다양하므로 그 보완책으로 경쟁이 제한되는 별도의 선발 방법을 인정하는 것이 특별채용 제도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교사 선발에서의 광범위한 재량을 인정한 바 있다. 교사 임용의 최종 권한을 가진 교육감이 교육행정상 목적 달성을 위한 행정행위로 임용 결정을 내린 이상, 결재 과정에서 담당자들이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는 사정만으로 담당자들로 하여금 직권남용죄의 요건인 권리 행사를 방해하거나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행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조 교육감의 지시로 비서실장이 관련 실무 일부에 관여했다고 하는데, 비서실장의 임무가 교육감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라면 그 관여행위가 의무 없는 일을 한행위가 될 것 같지도 않다. 임용 강행이 행정적 관점에서 적절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이를 범죄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죄가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가벌성은 크지 않다. 직권남용죄 자체가 공직사회에선 이미 고무줄 범죄같은 괴물이 되어 버린 세상에, 조 교육감에 대한 직권남용죄 적용은 직권남용죄의 남용 같아 보인다. 더욱이 이 사건에서는 공수처에 수사권만 있을 뿐 기소권이 없다. 검찰이 기소한다고 하더라도, 직권남용죄의 성립을 제한적으로 해석해 온 대법원 판례에 비추어보면 유죄 판결이 나올지도 매우 의심스럽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이다. 헌법 제31조 제4항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 자주성이나 전문성을 보장한다고 한 경우는 교육 분야 외에 없다. 한편으로는 교육감을 선거로 선출하는 의미도 새겨 보아야 한다. 교육행정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최대한 존중해 정책상 당부에 관한 판단은 교육계 자체에 맡기는 것이 옳고, 혹시 잘못된 일이 있으면 후일 유권자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민주정에서의 적정한 책임 추궁 방식일 것이다. 이것을 굳이 형사범으로 다루려는 방책은 하수다. 형사책임의 존재부터 의심스러울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공수처가 아니면 감히 건드릴 수 없을 권력기관이 저지른, 누구도 범죄성을 의심할 수 없고 또 중대한 권력형 비리를 제1호 사건으로 입건할 수는 없었을까. 답답하다./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경향 : 2021.06.07

 

이준석 돌풍에서 진짜 봐야 할 것들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준석 돌풍이 화제다. 하긴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보수당에 30대의, 그것도 국회의원 경력조차 없는 정치인이 대표가 됐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긴 하다.

정치권과 언론은 돌풍의 원인을 놓고 여러 해석을 내놓는다. ‘세대교체 민심이 이끌고 정권교체 당심이 따라간 전략적 선택’ ‘간절한 정권교체 열망이 만들어낸 집단창작품’ ‘독선적 진보정권과 아스팔트 우파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등등.

 

다 일리 있는 분석이다. ‘이준석 돌풍의 배경에는 기성세대에 대한 MZ세대의 불신, 정권교체를 바라는 보수 지지층의 전략적 선택, 좀처럼 바뀌지 않는 기득권 정치에 대한 거부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 그것뿐인가.

 

정권교체 세대교체 넘어 시대교체 의미 읽어야

현대경제사 분야의 석학 애덤 투즈 콜럼비아대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을 추적한 책 붕괴’(CRASHED)에서 대공황은 히틀러를 낳았고, 금융위기 10년은 트럼프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준석 돌풍도 이런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가 만든 사회경제적 충격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그것이 또 정치지형을 흔들고 있다는 얘기다.

 

코로나 사태 1년 반, 국민들은 미지의 미래에 대해 엄청난 불안을 느끼고 있다. 끝이 안보이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경제상황,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 기후문제. ‘뉴노멀이라면서도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표준도 기준도 없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알량한 권력을 놓고 아귀다툼 중이다.

 

이준석 돌풍의 밑바닥에는 이대로는 안된다는 국민들의 위기감이 깔려 있다. 그런 만큼 이 돌풍은 정권교체나 세대교체를 넘어 시대교체의 전조로 해석하는 게 맞다. 아마 이 흐름은 내년 대선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시대전환 조짐은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다. 9월 독일 총선에서 녹색당이 1당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1983년 연방하원에 처음 진출한 이래 10%대에 머물던 녹색당 지지율은 최근 20%를 훌쩍 넘었다.

 

우리도 1997IMF 외환위기로 큰 정치경제적 변화를 경험한 바 있다. 정치적으로는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경제적으로는 재벌의 시장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술기업들이 등장할 배경이 만들어졌다. 1987년 시작된 산업화에서 민주화로의 시대교체는 불완전하지만 이로써 일단락됐다.

 

코로나 팬데믹이 만든 충격은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크고 엄중하다. 그럼 우리 정치권은 이 거대한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 외환위기 때만해도 DJ라는 나름의 대안이 있었다. 지금 유럽에서는 녹색당이건 좌파건 급격한 변화의 충격을 흡수할 데가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정치권에게서는 그게 보이지 않는다.

 

2008년 금융위기 충격으로 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온건좌파가 몰락했다. 미국 등에서는 포퓰리즘이 기세를 떨쳤다. 기득권 정치가 철퇴를 맞은 것이다. 지금의 코로나 충격도 우리의 기존 정치문법을 통째로 바꿀 수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민심은 여야 기득권 정치를 모두 내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국민의힘 내 구세력을 밀어낸 돌풍이지만, 곧바로 민주당을 겨냥한 태풍이 될 것이다. 국민의힘 모 중진인사의 말마따나 대선판이 지금은 이재명 경기지사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양강구도로 전개되고 있지만 이준석을 만든 돌풍은 이들 둘 모두를 구시대 인물로 쓸어버릴지 모른다.

 

이재명 윤석열도 구시대 인물로 쓸어버릴 수도

그럼에도 우리 정치권은 이준석 돌풍을 정치공학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것 같다. 정권재창출을 바라는 쪽에서는 이 대표가 살아남으려면 구세대를 칠 수밖에 없고, 구세대 또한 정치주도권을 순순히 내놓을 리 없다며 국민의힘 내 갈등 가능성을 크게 본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쪽에서는 이준석의 MZ세대와 윤석열의 산업화세대의 환상적 세대연합을 기대한다. 그야말로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지금 우리는 예측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국민의힘 경선이 시작될 때만 해도 이준석 돌풍을 예견한 이는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윤석열 전 총장에게서 나름 새로움이 읽혔지만 어느새 낡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불과 몇달 사이에 올드로 만들 만큼 민심의 변량이 크고 빠른 시대다.

 

분명한 것은 변하지 않으면 한국사회에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선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헝클어지게 돼 있다. 진보 보수를 떠나 많은 이들이 이준석 돌풍에 흥분하는 이유다.‘ 남봉우 논설주간 내일신문 2020.6.15.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  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한겨레 2021-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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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능력주의에 대해 익숙하게 들었던 것과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는 개천에서 난 용의 신화가 있었다. 능력주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개천에서 난 용들은 공적 직무에 따른 권한을, 자기 능력으로 획득한 일종의 트로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나온 맥락이다. 그랬던 능력주의가 의심받기 시작했다. 능력이 우리 공동체에 유익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역사적 사실들을 안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같은 처지에 놓이고 나서야 상황을 실감하게 된다.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의 대립도 그렇다. 훈구와 사림은 세조 시대(1455~1468)의 유산이다. 세조는 조선 건국 63년째에 즉위해서 13년간 재위했다. 2021년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73년째이니, 지금을 조선시대로 치면 세조 11년이다. 흥미롭게도 현 사회 상황이 당시와 비슷하게 되어 훈구와 사림의 대립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새삼스레 사림과 훈구의 대결에서 어느 편이 이겼는가가 지금 중요하지는 않다. 대신 흥미로운 것은 사림이 도대체 어떻게 막강한 정치적·경제적 자원을 가진 훈구를 이겼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의외의 결과였다. 사림은 똑똑하기는 해도 그저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 있는 지방 출신들이 많았고, 그들 모두 그랬던 것도 아니다. 사실 당시에도 훈구의 일부가 되려고 애쓴 사림이 적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훈구는 사림을 자신들의 진지한 정치적 경쟁상대로 인식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사림이 훈구를 이겼던 핵심적 이유는 사림이 능력이 아닌 가치를 선택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림은 훈구와 다른 존재가 되고자 했다. 사림이 훈구와 같은 것을 욕망했다면 그들은 훈구를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김굉필이다.

 

김굉필(1454~1504)의 생애는 당시의 사회 기준에서 보아도 보잘것없다. 그는 문과에 합격하지 못했고, 겨우 생원시에 합격했을 뿐이다. 40세에야 종9품 참봉이 되었다. 그 후 약간 승진했지만 4년이 고작이었다. 그는 짧은 관료 재직 기간보다 긴 기간을 유배 살다가 결국 갑자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자기가 믿는 가치에 목숨을 바쳤다. 물론 당시에도 김굉필의 처신은 영리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사림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최고의 인물로 김굉필을 기렸다.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김굉필이 죽었다는 것보다, 사림이 그 죽음의 의의를 시대정신으로 기렸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사회 개혁의 격랑 속에 놓여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한국 사회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이제까지 한국 사회가 이룩한 성취에 기여했던 세력의 후손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경우 사회는 크고 작은 갈등이 이어지며 현 상황을 상당 기간 이어가지만 장기적으로 침체의 길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하나는 기득권 집단을 억제하면서 새로운 가치와 더 나은 사회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일정한 성취에 도달했던 대부분의 국가는 첫 번째 길을 걸었다. 이것이 보통 200년 정도 지속된 일반적 왕조들의 모습이다. 조선이 일반적 왕조들의 두 배쯤 되는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것은 기득권 세력과의 투쟁에서 성공한 대안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굉필 후예인 조선시대 인물들 호에는 퇴(退), (), () 같은 글자들이 자주 나온다.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잠곡 김육 같은 인물들의 호이다. 이 글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세상에 자신을 빼앗기지 않기를 욕망했음을 보여준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경향 : 2021.06.17

 

라는 의문이 실종된 사회

젊은 정치가 이준석의 등장은 많은 해석을 낳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성세대에 대해 라는 질문을 던졌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내가 왜 당신들이 만든 질서에 예속되어야만 하는가, 젊은 세대는 왜 마리오네트로 살아가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그가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는 점, 자본의 최고 수혜자라는 점은 부차적인 이미지에 불과하다. ‘언제나 옳다는 젊음을 대변하는 그 역동성이 신물나는 기성 정치판을 해체시키기를 기대하는 심리도 한몫했다.

 

인공지능(AI) 로봇의 특이점이 온다면, 그 출발은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문제의식에서 보자면, 무제약적인 존재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자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다. 파편화된 인간이 다시 이 존재의 대해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지적 전통도 과연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 왜라는 질문은 인류 문명의 추동력임을 새삼 확인한다. 4세 때 이미 하늘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주자는 인간의 본성인 성()과 우주의 법칙인 리()를 추구하여 성리학을 구축했다.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아무도 손들지 않는다. 단호하게 질문한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앉아 있는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녀야 정상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풀려고 하지 않는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듯 던져진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발휘하기보다는 기존 질서의 그물에 포획된 채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중국의 남쪽지방에서 온 청년 혜능은 홍인선사의 문하생이 되기를 청했다. 홍인선사가 영남 사람은 불성이 없는데 어찌 성불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혜능은 단번에 사람은 남북이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 한마디가 중국불교의 꽃인 선종 역사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질문의 서()’<벽암록> 7칙에는 무엇이 부처인가라는 혜초 스님의 질문에 법안선사는 그대는 혜초다라고 답한다. 부처가 따로 있지 않고, 묻는 그대 자신이 바로 부처라는 말이다.

 

종교의 대가들은 의문을 주고받음으로써 진리에 도달했다. 화두, 즉 의문이 나 자신과 우주 전체를 집어삼키는 의단(疑團·마음속의 늘 풀리지 않는 의문)의 극점에 이르렀을 때 깨달음을 얻는다. 권력이든 물질이든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무아(無我)가 확립된 삶의 진실을 획득한다. 묻는 자가 입구라면, 출구 또한 묻는 자에게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라는 질문에 있다.

 

젊은 공당 대표가 천안함 유족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눈물을 흘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천안함 사건을 보면 훈련 중 경계에 실패해 수많은 병사가 죽었는데 지휘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상식을 뒤엎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그도 왜라는 질문을 품고 있을까. 일상으로 내려오면 그 질문은 본질의 문제가 된다. 군대 내 성추행 사건은 왜 끊이지 않고 일어날까.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문제는 늘 발생한다. 그러나 속성상 힘을 내세우는 조직이라는 생각에 여성은 부차적 존재로 보는 것일까. 살육이 목적인 군대는 필요악일 뿐 존재 자체가 모순인 집단 아닌가. 왜라는 질문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야만성이 더욱 극성을 부린다.

 

실종된 왜라는 질문을 되찾아야 한다. 이 반역의 언어는 인류의 무지를 일깨웠다. 마르크스가 인간은 왜 자신이 행한 노동의 주인이 될 수 없는가를 고민한 것에서부터 자본을 둘러싼 먹이사슬은 왜 생목숨이 죽어나가도 여전히 자기 폭주를 즐기고 있는가에 이르기까지 왜라는 질문으로 무도한 현실에 저항하여 애초부터 걸림 없는 삶의 야생성을 회복해야 한다.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야말로 나이를 초월한 진정한 젊은이다.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경향 : 2021.06.19.

 

윤석열의 ‘10원 한 장건보 23억 사취의혹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64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10원 한 장발언을 비판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합성 이미지. 정청래 의원 페이스북 정청래의 알콩달콩갈무리

 

장모 10원 한 장발언을 접하고 처음 든 느낌은 생경함이었다. 10원은 동전인데, 왜 한 장이지? 나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관련 기사에 이런 댓글이 적잖이 달렸다. ‘한 장은 차표 한 장이지.’ ‘10억 한 장 아닌가요.’ 의문을 풀어 준 답도 댓글에 있었다. ‘옛날에 10원짜리 지폐도 있었어요.’ 검색을 해봤다. 19621, 10환으로 쓰던 화폐 표시를 1, 10원으로 바꾸는 긴급통화조치가 발동됐다. 이 때부터 종이돈 10원짜리가 통용되다가 197310월 발행 중지됐고, 동전으로 전면 대체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1961년생, 10원 지폐를 꽤나 만져봤을 세대다.

 

표현의 미스터리는 풀렸다. 그러나 그가 이 말을 한 맥락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전언인데, 말을 전한 사람이 갑자기 말을 바꿨기 때문이다. ‘고향 친구라는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달 26일 식사 자리에서 들었다며 처음 전한 발언은 이랬다. “내 장모가 사기를 당한 적은 있어도 누구한테 10원 한 장 피해 준 적이 없다. 약점 잡힐 게 있었다면 아예 정치를 시작도 하지 않았다.”

 

궤변이다. 윤 전 총장 장모 최아무개(74)씨가 검찰에 의해 기소돼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은 요양병원 사기은행 잔고증명서 위조두 가지다. 이 중 사무장 병원을 설립해 불법으로 23억여원의 요양급여를 타낸 혐의(의료법 위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가 걸린 사건에선 검찰이 지난달 31일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이 사건은 애초 2015년 경찰이 1차 수사를 했다. 당시엔 동업자와 병원 운영자 등 3명이 기소돼 유죄 판결이 확정됐지만 장모 최씨는 빠졌다. 최씨는 돈을 빌려줬을 뿐 병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며, 동업자에게서 받은 이른바 책임면제 각서를 제시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검찰 재수사 결과 최씨의 범죄 정황 3가지가 새로 드러났다.

 

첫째, 장모 최씨가 소유한 건물을 담보로 요양병원 재단이 17억원을 빌린 사실이 밝혀졌다. 단순 금전 대여관계라면 있기 어려운 일이다. 둘째, 윤 전 총장 부인 김건희씨의 언니의 남편, 곧 윤 전 총장 손윗동서가 이 병원 행정원장을 지낸 사실이 드러났다. 사위가 행정원장인데, 병원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누가 믿겠나. 셋째, 장모 최씨가 제시한 책임면제 각서를 써준 것으로 알려진 동업자가 그 각서는 내가 작성한 게 아니라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필적이 다르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다. 이런 사건을 놓고 윤 전 총장은 장모는 사기 피해자일 뿐 피해 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가족의 결백주장이야 자유이자 권리다. 그러나 법과 원칙을 입에 달았던 직전 검찰총장이 검찰 구형까지 무시하면서 장모가 피해자라고 주장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법무부 장관 일가 의혹에는 역대급 수사력을 투입해 먼지떨이수사를 독려했던 그다.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검찰 수사 결과마저 전면 부인하면서 감쌌다는 건데, 이쯤이면 내로남불의 에베레스트 아닌가.

파문이 커지자 정 의원은 이달 10일 돌연 말을 잘못 전달했다고 해명했다. “윤 전 총장은 자신이 아는 바로는 사건의 유무죄 여부와 관계없이 장모 사건이 사건 당사자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준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는 취지로 얘기한 것이다.”

 

정작 윤 전 총장은 입을 굳게 닫고 있다. 그는 지난 9일 우당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하는 길에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국민의힘 입당, 대선 출마와 관련해 좀 지켜봐 달라고 했을 뿐, ‘10원 한장 피해준 것이 없다고 말한 입장 그대로냐등 이어진 7개 질문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설령 정 의원의 갑작스런 해명이 사실이라고 해도, 나아질 건 없다. 윤 전 총장의 취지가 사건 당사자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안 줬으니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라면 문제가 더 심각하다. 장모 최씨는 국민이 낸 돈으로 운용되는 건강보험 급여를 수십억원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일반 사기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국민연금에 손실을 끼친 혐의로 이재용 부회장을 잡아넣은 윤 전 총장 아닌가. 그의 발언은 내 식구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한 검찰주의자의 박약한 공적 책임감을 드러낸다. 국가 지도자로선 치명적 결격 사유가 될 수 있다. 72요양급여 사기’ 1심 판결이 나온다. 첫 검증의 시간이다./ 손원제 ㅣ 논설위원 / 한겨레 2021.06. 22

 

더불어부동산

안녕하세요? 집부자님들의 든든한 벗, ‘더불어부동산입니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에서 땀 흘리지 않고 돈을 버는 최고의 수단은 부동산입니다. 여러분의 동반자, 정부 정책까지 손에 쥐고 있는 국내 최고 부동산기획사, 더불어부동산을 소개합니다.

 

우선 지난 성과를 알려드립니다. 최대 경쟁사인 국민의부동산이 노골적으로 부자마케팅을 벌여왔지만 실속을 챙기는 건 저희 회사입니다. 알려져 있듯이, 저희는 밖으로는 서민 주거 안정을 표방합니다. 지금까지 부동산시장이 불안하다며 외부에 제안한 대책만 26번입니다. 사람들이 서민 주거를 위한 회사로 여기는 이유이지요. 하지만 정작 저희가 한 일은 집값을 끌어올렸다는 겁니다. 단어 그대로 폭등, 대박입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을 볼까요. 국민의부동산이 명박부동산간판으로 요란하게 영업을 하던 시절, 가격이 오히려 8.4% 떨어졌어요. 이후 신전략을 수립하고 새누리부동산으로 회사명을 바꾸어 22.1% 올렸지요. 반면 저희는 2017년부터 지금까지 집값을 무려 75.2% 인상시켰답니다(실거래가격지수 기준). 놀라셨지요? 더불어부동산은 반드시 최대 수익으로 보답합니다.

 

세금이 늘지 않겠느냐고요? 걱정 마세요. 저희에게는 세금을 전담하는 부동산특혜위원회가 있습니다. 예전에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서 경제부총리까지 지냈던 분이 책임을 맡고 있지요. 지난주 저희는 종합부동산세 대상을 절반으로 줄이는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저희의 정치적 영향력을 아시지요? 곧 이 방향으로 국회가 움직일 것입니다. 상위 2%로 대상을 한정하니 이 범위에 속하는 슈퍼부자분들이 섭섭해하시는데 실제는 이분들이 최대 수혜자입니다. 종합부동산세의 누진세율구조에서는 고가 부동산일수록 감세액이 많답니다. 저희를 믿으십시오. 마지막 한 명의 집부자까지 챙기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새 저희와 국민의부동산을 혼동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지난 재·보궐선거 이후 내놓은 상품들이 비슷하지요. 하지만 실행력에서 저희를 따르지 못합니다. 집부자를 위해서라면 상상을 넘어서는 게 더불어부동산입니다. 경쟁사는 종합부동산세 기준금액을 9억원에서 12억원으로 올려 집부자 특혜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만, 저희는 상위 2%’라는 기상천외한 방식을 창안하였습니다. 이러면 어떤 주택이 종합부동산세 대상인지 쉽게 알 수 없지요. 앞으로는 집가격이 아무리 올라도 상위 2% 비율로만 작동하니 세금 증가 걱정은 크게 안 하셔도 됩니다. 종합부동산세가 조세부담의 형평성을 제고하고, 부동산의 가격안정을 도모”(법 제1조 목적)하는 세금이라 집값이 폭등한 지금 흔드는 게 좀 민망합니다만, 저희는 정책 명분 이런 거 따지지 않습니다. 항상 집부자 여러분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이러다 혹 역풍이 불면 어쩌나 걱정이 되신다고요? 1년 만에 수억원씩 앉아서 버는 우리를 향해, 뼈빠지게 일해 겨우 2000~3000만원 버는 서민들이 달려들면 어떡하냐고요? 마음 놓으십시오. 저희 문 고문님을 아시잖습니까? 착하고 착한 얼굴을 가지신 분입니다. 사람 좋은 고문님이 계시는 회사를 설마 집부자를 위한 부동산기획사라고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저희 홍보팀은 세계적인 에이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어 모두가 포용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저희 회사 공익광고를 보셨지요. 누가 우리에게 돌을 던지겠습니까?

 

물론 요즘 민심이 심상치 않은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안전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청년, 신혼부부를 위한 파격상품 누구나집입니다. 집값의 약 10%만 내고 살다가 10년 후에 처음 가격으로 분양받는 집이지요. 적은 돈을 투자해 시세차익까지 얻는 로또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부동산 폭등으로 좌절하는 무주택자들에게도 공평하게 기회를 주려는 배려이지요. 물론 극히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티켓이지만 우리 집부자 성곽을 지키는 우군을 모으는 당근책입니다. 솔직히, 일해서는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잖습니까? 주변에 청년들이 있다면 꼭 챙겨주십시오. 좋을 일 하시는 겁니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도 부동산을 두고 논란이 클 겁니다. 저희 회사도 이번 부자감세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집부자 부동산기획사로 도약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지적을 받아왔지요. 서민을 위한다면서 온갖 기득권을 챙기는 내로남불 회사라는 애칭까지 붙었고요. 여러분은 이제 헷갈리지 않으시지요? 저희 본모습을 명확하게 보여드렸으니까요. 부동산으로 계속 돈을 벌고 싶다면, 저희를 선택하십시오. 우리는 한배를 탄 식구입니다. 여러분의 더불어부동산입니다./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경향 : 2021.06.24

 

 

주방 오물분쇄기

나는 여름을 사랑한다. 365일 여름인 동남아시아와 여름 과일인 수박도 사랑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에는 수박 껍질이 캄브리아기 지층의 화석처럼 쌓여가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여름 다들 음식물 쓰레기는 어떻고 처리하고 있나요?

 

음식물 쓰레기는, 한 줄도 못 썼는데 마감이 닥친 원고처럼 치워버리고 싶은 존재다. 냄새가 나고 수분이 생기고 벌레가 꼬이고 무겁다. 생분해 비닐, 냄새 차단 용기 등이 나왔지만 영 마뜩잖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는 시대에 이게 최선이란 말입니까라고 묻고 싶다. 그러다 음식물 쓰레기를 싱크대에 넣기만 하면 된다는 기특한 물건을 접했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지인 역시 입주민들이 대동단결해 이 물건, 바로 오물분쇄기를 신청했단다.

 

오물분쇄기의 경우 분쇄된 음식물 찌꺼기의 80% 이상을 회수해야 한다. 물론 아파트 입주 설명회에서 환경부 인증을 받은 친환경 오물분쇄기는 찌꺼기를 갈아 하수도에 배출하도록 불법 개조된 제품이었다. 누가 싱크대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잘게 다져진 음식물 쓰레기를 퍼내려고 80만원을 쓰겠는가. 하수도로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할 경우 판매업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을, 사용한 소비자는 1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내야 한다. 하수도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법 개조된 분쇄기가 설치된 가정에 무단 침입해 증거를 잡지 않는 한 적발할 방법은 없다. 도살장에 몰래 잠입해 현장을 폭로하고 잡혀가는 동물권 활동가 정도의 각오가 서야 한다.

 

그러나 음식물 쓰레기를 갈아버리는 일은 지구를 갈아버리는 일이자, 공동주택 하수도를 막히게 해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자, 세금을 더 내게 하는 일이다. 너나없이 음식물 쓰레기를 하수도로 배출하면 오염부하가 27% 증가하고 하수처리장 증설 등에 122000억원의 비용이 든다. 이런 까닭에 주방용 오물분쇄기는 1995년 하수도법에서 금지되었다가 2012년 음식물 쓰레기를 다시 회수하는 인증제품에 한해 허용되었다. 2020년 말까지 오물분쇄기 누적 판매량은 18만여개로, 이 중 5만대 이상이 불법으로 개조된 제품이었다. 다행히도 지난달 주방용 오물분쇄기를 금지하는 법안이 제안됐고, 이 개정안에 대한 시민 의견을 묻는 국회 입법예고 홈페이지가 열렸다. 하지만 본인 인증과 로그인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이해관계가 확실한 판매업자들만 의견을 달았다. 나도 비밀번호 찾느라 10분 걸렸다. 그 결과 절대다수가 금지안을 반대하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 소문을 들은 전국의 쓰레기 덕후들이 궐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돈이 아니라 지구의 건강과 지속 가능성이다. 이들이 궐기하자마자 오물분쇄기를 금지하는 법안에 찬성하는 의견이 반대 의견을 덮어버린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가치를 자기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 개인의 실천과 참여를 통해 사회적 물결을 바꾸는 사람들. 그리하여 일상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김질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가. 쓰레기 덕후들은 라이프스타일로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

고금숙|플라스틱프리 활동가 경향 : 2021.06.25.

 

코로나 시대, 이준석 현상과 사회적 성찰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시작한 지 벌써 16개월이나 되었다. 그동안 15만여명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2000여명이 사망했다. 물론 한국은 매우 선진적인 방역 체계 덕분에 다른 나라에 비해 피해가 현저하게 적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겪었던 피해와 불안감은 19506·25전쟁 이후 역대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불안감은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인간의 지식 체계 밖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지만 제2, 3의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 돌출하고 있는 것이 그 증후이다.

 

세계적으로 만연됐던 전염병 피해는 역사적으로 당대의 사회질서와 문화, 권위를 무너뜨렸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는 공동체 전체를 눈앞에 닥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일상적 통념이나 관습적 규제는 허물어졌다. 당시 독일에서는 전염병 전파의 주범으로 몰렸던 유대인들을 습격하여 불안감의 표출 타깃으로 삼았다. 심지어 불안감과 공포감을 달래기 위해 사적인 방식으로 신과 교류하는 신비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미국 역사학자인 윌리엄 맥닐은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에서 전염병은 단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생존자들을 더러 정신적 혼란에 빠지게 하고 전염병을 막아주지 못한 고유의 관습과 신앙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한다고 밝혔다. 코로나 시대에 국민 대다수는 미래에 대한 불가지성으로 혼란을 겪고 있으며, 일상적 삶이 파괴되고, 불안감 속에서 살고 있다. 마스크를 하루 종일 착용해야 하는 답답함도 가중되었다. 비대면 접촉이 일상화되었으며 거리 두기는 인간 접촉의 사회생활을 제약했다. 자영업자의 타격이 가장 심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중소기업과 영세기업, 서비스업종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자, 임시직, 청년 알바생 등은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명확한 해법을 내놓을 수 없었다. 전 세계가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국민은 팬데믹 현상이라고 이해하면서도 무능한 정치권이라고 그들에게 감성적 화살을 돌리게 되었다. 기성 정치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첫 번째 타격은 내로남불과 자만의 프레임으로 몰린 민주당이었다. 더욱이 내수 부진과 부동산 정책 실패는 문재인 정부를 타깃 삼게 하였다. 주거의 삶이 훼손되자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을 해결하지 못하는 집권여당이 너무나 싫었다. 대중은 전염병으로 초래된 답답함과 불안감을 표출시키기 위해 지난 47일 투표장으로 몰려나갔다. 역대 지방 재·보궐 선거 사상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면서 대중은 민주당을 응징했다. 투표율은 서울이 58.2%, 부산은 52.7%였다.

 

다음 타깃은 고루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있던 야당이었다. 마침 야당의 아웃사이더였던 36세의 이준석이 발견됐다. 경험과 경륜이 필요한 대선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별로 필요 없었다. 기성 정치질서와 기득권적 권위를 바꿔야 코로나로 지친 심신을 달래줄 것이라는 감성이 대중을 지배했다.

 

기존 질서와 권위를 부정하는 징후(symptom)로 봐야 한다. 아직까지는 정치 제도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기저에 깔려 있는 대중의 심리적 내면을 보지 못하면 징후는 발전하여 정치권에 쓰나미로 몰아닥칠 수 있다. 사회적 성찰이 절실하다. 그동안 정치가 국민의 생활과 생명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인간 문명의 제한성이 명확히 드러난 것은 아닌지, 국민 삶의 문제를 정파적이고 적대적 공존 방식으로 풀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대중이 반사적으로 호출한 정치인을 스타로 만든다고 해서, 세대교체만을 내세운다고 해서 전염병으로 지친 대중의 삶과 불안감을 해소시켜주지 못한다. 국민의 삶을 보듬어주는 진정 어린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 삶의 정치가 해결 방안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 요구하고 있는 신뢰와 능력, 안정감, 그리고 미래를 전망하는 성찰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유용화 | 한국외대 초빙교수 경향 : 2021.06.30

 

검사의 정체성, 진보의 정체성

오독을 우려하는 심정에서, 서두에 이 글의 요지를 분명히 하고 싶다. 이 글은 이념과 직업에 근거하여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정체성의 정치를 비판한다. 특히 이 문제는 현 정권에서 많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선, ‘윤석열 X파일은 존재와 사실 여부를 떠나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X’파일이니 하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검증보다는 추측과 대립만 양산할 뿐이다. 매체들은 다른 표기를 고민하기 바란다.

 

인간은 누구나 흠결이 있다. 다만, 공인일 경우 그 흠결의 내용과 수위는 사회적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하 윤석열씨’)도 결점이 있을 것이다. 그의 단점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살아온 이력, 가치관, 능력 등의 총체로 현재 윤석열을 구성하는 일부일 뿐, 특별히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의 결함이 대통령으로서 아니 대통령 후보로서 수용할 만한 내용인가 여부다.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불법 행위 등 문제가 많았지만, 국민은 압도적으로 그를 선택했다. 당시 유권자의 의식에서는 수용할 만한 단점이었던 것이다.

 

나는 1년 전에 윤석열씨의 사연을 들었다. 그 내용이 ‘X파일과 동일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게 그 이야기를 해준 이들의 성별, 나이, 직업군 등 사회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는 점은 고려할 만하다. 윤씨 부인의 영어 이름부터 관련자들의 실명도 언급되는데, 이후 포털사이트에 관련 기사가 날 때마다 댓글 내용을 보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아는 것 같다. 오래된 얘기라는 뜻이다.

 

그의 문제가 방어할 수 없는 수준이다” “공작정치다라는 대립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이 글의 관심은 사연의 수위, 사실 여부라기보다는 그 이야기를 관통하는 자연인 윤석열의 직업 개념을 중심으로 한 정체성이다. 아무리 사연을 덜어내도, 분명한 점은 그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같은 피해(?)를 입은 후배 검사들과는 달리 직업을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 그에게 검사는 자신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겠지만 구조적 차원에서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 출발했다. 두 가지. 2년간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 사태.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인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 정체성의 정치는 피해를 받았다는 자각에서 구성되는데,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문화에서 남을 해치지 않는 유일한 도덕적 주체는 피해자뿐이기 때문에 모두가 내가 더 피해자, 내가 가장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었다(부동산 이슈에 대한 소위 있는 사람들의 피해 의식을 보라).

 

이번 정부에서 기득권층이면서도 피해자라고 주장함으로써 윤리성까지 갖고자 한 대표적인 집단은, 일부 진보 세력 출신 관료와 검사 집단이다. 전자는 보수 세력의 피해자, 후자는 정권의 피해자라는 주장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이념 정체성의 정치와 건국 이래 군()과 함께 시민 감시(civil control)의 마지막 영역으로 남아있는 검찰의 직업 정체성의 정치가 극단적으로 충돌했다. 더구나 소송사회로 진입하면서 법조계 전반과 검찰의 위상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기에, 우리는 매일 정권으로부터 억압받는 검사들의 분노와 만나야 했다.

 

정체성(正體性)의 정치(identity politics), 즉 동일시(同一視)의 정치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공동체와 관계 맺는 중요한 방식이다. 계급, 인종, 젠더 등 구조적으로 형성된 피억압 집단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나는 누구다라고 자신을 설명하는 사고방식이다.

 

대표적인 정체성의 정치는 민족주의와 여성주의다. 민족주의는 부족, 소수민족을 강제로 통합하여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가능케 한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상상의 공동체’). 여성주의는 인구의 반이 문명의 시작과 함께 종속되어 왔기에, 여성의 정체성 자각은 어느 사회에서나 큰 변화를 가져온다. 물론 여성, 민족, 흑인, 장애인, 해병대 등 모든 정체성은 동일한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동일시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정체성의 정치는 실현 불가능하다. 정체성의 정치가 의미를 가질 때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민족주의나 퀴어나 여성 같은 사회적 소수자, 약자가 저항할 경우뿐이다. 정체성은 상황에 따른 맥락적 개념으로 약자에게만 의미가 있다. 게르만민족, 시오니즘, 백인 정체성처럼 강자의 정체성은 악의 뿌리다.

 

한편 한국 사회에는 다른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유난스럽고 위험한 정체성의 정치가 있다. 생계인 직업과 진보(혹은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자부심)를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 이들이다. 당연히 이 둘은 정체성이 될 수 없다. 소위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본질과 직업을 분리한다. ‘노숙자님이라는 말도 없다. 그러나 법조계 종사자나 의사, 교수, 국회의원 중에는 직업으로 자신의 삶 전부를 평가하고 평가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변호사님, 의사 선생님, 의원님은 모두 지칭으로 어법상 맞지 않지만 이들은 그렇게 불리길 원한다.

 

윤석열씨의 가장 큰 문제는 검사 정체성이 그의 생애와 영혼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데 있다. 검사가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가리지 않고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이를 오해한 문재인 정권은 윤석열씨를 고속 승진시키며 검찰총장으로까지 발탁했다. 그가 국정농단 사건과 사법 행정권 남용 등 이른바 적폐 사건의 수사를 지휘한 사실을 정의와 도덕성의 징표로 착각한 것이다.

 

그는 단지 검사로서 신나게일했을 뿐이다. 대신 자신의 검사 정체성을 건드리는 세력은 누구든 가만두지 않는다. 그는 절대로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항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살아 있는 권력도 자신의 검사 정체성과 비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물론 그의 칼춤에 보수 언론과 태극기부대가 함께했다.

 

영화 <내부자들>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의 정치, 언론, 검경의 카르텔과 협상을 그린 텍스트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그중 <괴물>이라는 드라마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선배 형사가 후배에게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이 작두를 잘못 타면 발목만 다치지만, 다른 사람은 모가지가 날아간다.” 나는 이 대사를 법조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공유했으면 한다.

 

가치관은 더더욱 정체성이 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든 페미니즘이든 채식주의든 합리적 보수주의든, 이는 개인이 추구하는 세계관의 일부일 뿐이다. 때로는 충돌하거나 모순적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페미니스트이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향할 뿐이다. 그 때문에 남들이 “~주의자로 불러도 불편하고 민망한 판에, 스스로 난 좌파야” “난 민주화운동을 했어라고 나대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여야 학생운동권 출신 중 실제로는 아무 활동도 안 한 이들조차 있다. ‘진보 경력은 개인의 자부심 혹은 과거의 조작된 기억의 산물이지 팩트가 될 수 없다.

 

진보는 관점이지 사람이 아니다. “~주의자라는 인식과 실천에는 누구나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진보는 자기 선언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보고 타인과 사회가 판단하는 것이다. 자신은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남들은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시대 우울증의 원인 중 하나는 패거리로 몰려다니면서(‘네트워킹’) 부패를 공모하는 이들의 진보 정체성의 정치다.

 

미국 이야기이긴 하지만 환경운동가 앨 고어는 화장실 여덟 개, 방 스무 개짜리 맨션에 산다. 1년 전기료가 2700만원으로 미국 일반 가정의 10배가 넘는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도 페미니스트를 포함하여 그런 진보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강남 좌파가 아니다. 권력에 취해 부패한 변절 진보 카르텔일 뿐이다.

 

, 검사야” “, 진보야이런 자의식 다음에 오는 말은 누가 감히, 나를 건드려?”이다. 직업을 자기 정체성의 전부로 생각하는 행위는 신분주의이고, 가치관을 정체성으로 착각하는 이들은 스스로 위선자임을 선택한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들의 자아 결투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보라면, 자기 자리에서 신념에 맞게 살면 된다. 한편 고위 공직자라는 직업 도취증 외에는 능력을 알 수 없는 이들의 대선 출마는 답이 없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경향 2021.06.30

 

최재형·윤석열은 진보정부위장취업했나

중국 수나라 하면 수양제의 폭정과 고구려에 깨진 나라가 연상되겠지만, 처음 과거제를 도입해 세습귀족의 폐단을 없앤 나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958년 고려 광종 때 과거가 도입된 뒤 고위관료 등용문이 됐다. 1000년 가까이 과거가 존속한 이유는 공정의 상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국과 달리 양반제가 뿌리내린 조선에서는 후기로 갈수록 불공정이 활개 쳤다. 과거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됐으나 일제강점기 때 고등문관시험과 해방 후 고등고시로 부활했다.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가치가 다양해진 사회에서 법률 과목 위주로 고위공무원을 선발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전 정권의 국정농단, 지금도 계속되는 검찰·사법부의 반인권적 작태와 제 식구 감싸기는 기수와 상명하복이 중시되는 고시제 탓이 크다.

 

문재인 정부 핵심 요직에 복무하다가 야당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이들에게는 고시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행태는 현대판 과거제의 폐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한국을 양극화 사회로 몰아넣은 능력주의 정점에 고시제가 있다. 1단계 과거를 대입 수능시험이라 친다면 2단계는 고시다. 수능 점수는 부모 소득에 거의 비례하는데도 공정의 허울을 쓴 채 개인의 능력을 재단하고 평생을 좌우한다.

 

백수 윤석열이 고시 9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부모 덕분이다. 당시 그렇게 할 수 있는 청년은 드물었고 의식 있는 청년들은 강제징집 또는 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회현실에 눈감고 고시에 매진해 합격하면 남들은 평생 오르기 힘든 고위직으로 직행했다.

 

최재형 감사원장과 윤석열 검찰총장은 수구적 인물이다. 그럼에도 성향에 맞지 않은 정부의 핵심 요직을 차지한 것은 입신양명을 위한 위장취업이었나? 이들은 얼마 안 가서 감사와 수사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정부의 발목을 잡다가 끝내 정치에 뛰어들었다. 막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관료는 절대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경고가 무색해졌다. 그들은 정치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국민이 불러낸 거라며 소명론을 편다. 국민이 그들을 불러낸 적이 있었나? 보수야당에 입당하고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정치적 중립을 스스로 부정하고 공직을 이용해 자기 길을 닦아 왔음을 입증하는 짓이다.

 

최 원장은 문 대통령이 탈원전정책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걸 뻔히 알면서도 경제성에 치우친 감사로 원전마피아를 편들었는데 이는 민주주의에 어긋난다. 그는 하나님의 확신이라며 월성1호기를 조기폐쇄하면 문제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했다는데, 그런 확증편향의 정신상태라면 감사는 왜 하나? ‘신의 계시가 스스로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줄 텐데.

 

윤 총장은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막상 자신은 보수언론과 수구세력에 선을 대고 정치를 해왔다. 이는 검찰총장이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자기 이름을 빼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점에서도 입증된다. 검찰권력 사유화로 선택적 정의를 구사하면서 정치에 뛰어들 꿈을 키워온 정치검사의 전형이다.

 

김동연 전 부총리도 정치적 야망을 키우는 듯한데, 그도 문 정부 초기 경제정책에서 선출권력과 대립한 관료였다. 최근엔 현금복지가 아니라 기회복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복지는 기회를 못 누려서 가난해진 사람에게 돈을 주는 건데 복지를 하지 말자는 건가? ‘자수성가 신화능력주의 화신이다.

 

고시에 의한 고위관료 양성제도는 한계에 왔다. 엘리트의식은 공공에 봉사하는 직무에는 오히려 걸림돌이다. 그들 중 봉사하는 우수 관료도 많지만, ‘소년등과에 성공해 선민의식과 권위의식에 찌들거나 출세를 위해 시류에 영합한 이도 많다. <이완용 평전>에는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엘리트 관료가 친미파를 거쳐 친일파로 변신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완용은 1882년 과거 급제자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자 노무현씨라고 부른 우병우 검사는 최루탄이 난무하는 영화 <1987>의 해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였다.

 

고위관료 충원제도가 없으면 행정이나 법률 서비스의 질이 떨어진다고들 하지만 그건 기우다. 정부보다 더 치열하게 경쟁하는 기업의 세계에서 고위직을 일괄공채하는 데는 없다. 세계적 기업 최고경영자(CEO)들도 처음에는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경향 2021.06.30.

 

조국과 언론

-조국의 사악한 언론에 관한 비망록

조국의 시간이 출간 4주 만에 40만부를 돌파했다고 한다. 현재 출판 시장 여건을 고려할 때 경이로운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조국 뉘우스’(전상훈)에 따르면 지난 20198월 조국교수가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되던 무렵부터 약 4주간 신문과 방송에서 내보낸 조국관련 의혹기사는 무려 130만 건이 넘었다.

 

조국의 시간을 읽으면서, 사나운 사냥개로 전락한 한국 언론의 실상에 새삼 몸서리쳤다. 검찰이 정보를 흘리면 대다수 언론이 거국적으로 단독보를 양산하고, 야당이 메가톤급 확성기가 되어 소음을 굉음으로 키운다. 의도한대로 여론이 형성되면 검찰은 수사를 확대하고 정보를 또 언론에 흘린다. 이것이 검찰-언론-국힘당 삼각편대의 진보인사 죽이기 알고리즘이다. 핵심 고리가 언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윤석열사태전까지만 해도 국내 언론사를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과 한경('한겨레' '경향')같은 진보언론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옛날이야기다. 이제 중앙 일간지와 종편채널, 공민영 지상파방송과 같은 주류언론의 경우, 적어도 뉴스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무한경쟁 환경이 그들을 추락시킨 면이 있지만 환경 탓만은 아니다. 스스로 기득권세력에 편입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신의 계층성에 함몰된 채 오로지 돈줄에만 목을 매는, ‘자본가의 폐품창고를 지키는 사나운 개’(junkyard dog)로 전락했다.

 

부패한 기득권세력과 언론으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힘없는 시민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마주했던 모든 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야만 자신을 부당하게 공격하고 감금하고 기소했던 사악한 무리를 역사의 법정에 다시 세울 수 있다.

 

조국교수에 대한 수구세력 삼각편대의 융단폭격은 본인뿐만 아니라 아내와 딸, 부모와 동생 등 전 가족을 대상으로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조국교수가 고통스럽게 기록하고 있듯이, 그들의 목표는 조리돌림과 멍석말이를 통해 사건을 공소권 없음’(죽음)으로 종결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국의 시간은 기득권 세력에 맞서 싸우고 있는 한 지식인의 처절한 생존보고서.

 

그럼에도 기레기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621조선일보성매매 유인기사에 아무 관계도 없는 조국교수와 딸의 모습이 묘사된 일러스트를 사용했다. 전형적인 부도덕 이미지들씌우기다. 이 기사를 보고 분노한 한 시민이 6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조선일보 폐간을 청원했다. 신청 5일 만에 26만여 명의 시민이 동참했다.

 

누군가 말했듯이 저 것들은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칼자루를 쥐고 있을 때 베푸는 어설픈 관용은 언제나 비극의 씨앗이 된다. 루쉰이 이야기했듯이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 물에 빠진 개는 큰 몽둥이로 두들겨 패야 한다.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 경기신문/ 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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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도시의 자동차는 말똥 지옥의 구세주였다

코로나19 이후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산업을 하나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전기자동차를 꼽는다.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인 피치의 전망에 따르면, 2040년 전 세계 자동차 중 전기차 비중은 45%에 달한다. 전기차 시장이 이처럼 급성장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단연코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 고조이다. 기후변화, 코로나19 등의 이슈가 연이어 불거지면서 더 이상 친환경 자동차로의 전환을 미룰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인식 때문이다. 자동차는 대기오염과 온실가스를 유발하는 주범 중 하나이다. 교토의정서에서 확인된 6개 온실가스에 대해 유럽연합도로연맹(EU Road Federation)’이 수행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교통 부문의 배출량(19%)은 에너지(30%), 제조 및 산업 부문(20%) 다음으로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원래 자동차는 도시 환경을 개선하는 구제주였다는 사실이다.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교통수단은 말과 마차였다. 말과 마차를 교통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지만, 인류가 말과 마차로 인한 부정적 현상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로 추정된다. 1605년 런던에 처음으로 요금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마차가 등장했고, 1640년에는 역마차를 대중교통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대도시를 중심으로 마차를 다각적인 교통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지 100년도 지나지 않은 17세기 후반에 말과 마차로 인한 교통 혼잡 현상이 목격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보다 말똥이었다. 당시 유럽의 주요 대도시와 뉴욕의 도로는 말똥 등 분뇨로 가득 찼다. 20세기 초 뉴욕시에서는 말 20만마리가 교통수단 등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말 한 마리당 하루 평균 10내외의 배설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당시 뉴욕의 말들은 하루 평균 2000t에 가까운 배설물을 거리 곳곳에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말똥은 온실가스 효과가 이산화탄소보다 25배나 높은 메탄 배출의 주범이다. 말이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뀔 때도 메탄 성분이 배출된다.

 

사실 당시 말똥으로 인한 가장 커다란 불이익은 온실가스 효과보다는 건강 문제에 있었다. 말똥이 건조해지며 부서지는 과정에서 유발하는 말똥 먼지가 시민들의 기관지를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매년 뉴욕 시민 2만명 정도가 파리가 옮기는 각종 질환으로 사망했다. 장티푸스를 비롯해 당시 대도시 거주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 역시 말과 말똥이었다. 비 오는 날 똥물이 흐르는 도로 위를 걷지 않도록 안아서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직업이 생겨났는가 하면, 뉴욕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하여 말똥으로 인한 피해 등에 대해 논의한 바도 있다.

 

이처럼 심각했던 말똥으로 인한 피해를 한 번에 해결해준 것은 다름 아닌 자동차였다. 1900년 초기부터 유럽과 미국에는 수백개의 소규모 차량 제조회사들이 등장했고, 이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자동차 관련 기술 수준이 높아짐과 동시에 자동차 가격은 점차 하락했다. 이 과정에서 자동차의 가격과 유지비가 점점 저렴해졌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동차는 분뇨를 치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크게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국의 경우 1904년 자전거를 제외한 자동차 생산대수가 17810대였는데 1910년에는 107635, 1918년에는 33518대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러한 자동차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유럽의 대도시와 뉴욕의 거리에는 차츰 말의 숫자와 함께 말의 분뇨로 인한 피해도 줄어들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말똥으로 인한 대기오염 및 위생 문제 등도 차츰 개선되기 시작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도시 환경을 개선시킨 기술은 자동차였다. 이제 또다시 자동차가 환경 개선에 도움을 줄지 지켜볼 일이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경향

 

행동대장 산림청 뒤엔 누가

산림청의 30억그루 나무심기 계획을 두고 연일 비판이 거세다. 산림청의 나무심기는 탄소중립이라는 목표 아래 계획되고 있다. 탄소중립을 위해 탄소 배출량은 줄이고 탄소 흡수량은 늘려야 한다. 배출량 감소와 흡수량 증가는 모두 온실가스 감축으로 인정된다. , 나무를 심어 탄소 흡수량을 늘리는 것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중요한 계획이 된다. 정부의 대한민국 2050 탄소중립 전략에서 산림에 거는 기대가 크다.

 

산림청은 몇십억그루의 나무를 심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어디에 심는다는 말인가? 답은 간단했다. 현존하는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심는다는 것이다. 30년 이상 된 나무는 탄소 흡수 능력이 떨어진다는 산림청 산하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결과가 명분이 되었다. 이와 상반되는 결과를 보여주는 국제적인 연구도 많은데 산림청은 산림의 노령화를 문제로 보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나무의 연령과 탄소 흡수량의 상관관계는 과학으로 포장된 정치가 되었다. 탄소 흡수량을 늘리는 임무를 받은 산림청은 더 많은 나무를 심기 위해 더 많은 나무를 베어내는 계획을 세우고 이에 대한 명분으로 늙은 나무 프레임을 만든 것이다.

 

왜 산림청은 기후위기에 맞서 나무를 베어내자는 끔찍하게 참신한 주장을 해야만 할까?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 산림 부문에 과도한 목표치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림 부문에 부과된 것만큼 다른 부문은 의무를 덜었다. 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부문별 온실가스 배출량 1위는 산업, 2위는 전력(에너지), 3위는 수송이다. 각각 국가 온실가스 총 배출량의 37%, 36%, 14%를 차지했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유엔에 제출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에 따르면 2030년까지 17300만톤의 온실가스를 감축하겠다고 한다. 그중 35%를 전력에서, 22%를 국외 및 산림에서, 15%를 수송에서, 11%를 산업에서 감축하겠다는 부문별 목표를 세웠다. 정해놓은 감축 목표량 안에서 흡수량을 늘릴수록 탄소 배출량을 덜 줄여도 된다. 반대로 탄소 배출량 감소 목표치를 높인다면 흡수 목표량을 줄여도 되는 것이다.

정부는 산림이 아닌 산업, 에너지, 수송 등의 부문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계획을 보강해야 한다. 이를 통해 총 감축 목표량 역시 상향할 필요가 있다. 기후위기에 진정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나무를 심어 탄소 흡수량을 늘리는 것은 필요하다. 다만 최대한 기존 나무를 보존하고 새로운 곳에 심자는 것이다. 기후위기에 맞서 정말 중요한 것은 탄소 배출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따라서 좀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어째서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항변할 수 없는 나무가 온실가스 감축의 선봉에 서야 하는가. 기존 해외 석탄발전 투자를 지속하고, 국내 신규 석탄발전소 7기를 그대로 가동하겠다는 정부의 에너지 계획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수송과 산업 분야에서의 감축 계획은 최선이라 할 수 있는가 말이다.

 

확실한 건 이 모든 계획에는 해당 부문 이해관계자들의 이해가 반영되었다는 것이고 그들의 탄소 배출 감축 의무를 줄여주기 위한 탄소 흡수원으로서의 산림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산림청 뒤에 숨어 웃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산림청의 산림 부문 온실가스 감축 계획은 에너지, 산업, 수송 부문 감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현 정부의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과 탄소중립 이행 계획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김혜린ㅣ환경운동연합 활동가 한겨레 2021-05-07

 

이재용 사면의 정치학

경제 5단체가 지난달 27일 청와대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사면을 건의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도 건의 대열에 끼었다. 어느 경제지는 지난달 아예 여론조사까지 했다. 응답률 9.6%1008명 중 찬성 69.4%였다고 한다. 여기에 유교와 불교 등 종교계가 가세했다. 사면론의 요지는 반도체 위기. 일부 언론의 태도는 점점 강해진다. “나라 위해 기여할 기회를 주자라던 어느 칼럼의 주장은 사설로 이어지더니 마지막으로 어떤 칼럼은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을 바라며 부디 진영을 넘어 나라를 구하시기 바란다라고 끝을 맺었다.

 

우리나라의 법률은 자주 바뀌어서 법률가도 아차하면 실수하지만, 유독 사면법은 1948년에 제정된 후 무려 60년이 지난 2008년에야 개정되었다. 그 후 세 번의 개정이 있었으나 내용은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보기 어렵다. 특별사면의 법률적 요건은 무엇인가? 어떤 사유가 있어야 사면할 수 있는지를 정한 조항 같은 것은 사면법에 없다. 다만 사면을 상신하는 검사나 교도소장이 신청서에 판결서의 등본 또는 초본, 형기 계산서 외에 범죄의 정상, 수형 태도, 장래의 생계, 그 밖에 참고가 될 사항에 관한 조사서류를 첨부하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이 부회장의 경우에는 크게 참고될 만한 사항 같지가 않다.

 

사면에 대해서는 이것이 비민주적인 제도이고 사면권은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으로 삼권분립과 법치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주장이 있다. 수긍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제도가 왜 헌법에 정해져 있겠는가.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운영이다. 근대적 의미의 사면은 본래 중세 국왕의 특권에서 생겨난 제도다. 잘못된 재판의 시정책으로 쓰이기도 했고, 가혹한 법 집행을 완화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법조계는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재벌 총수 사면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고, 경실련은 되풀이된 사면에도 불구하고 기업인의 범죄는 근절되지 않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국민들의 사법 불신만 심화했다고 반발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의 경우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우선 판결이 확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재판에 무슨 특별한 결함이 있다고 볼 근거도 없다. 사면이라는 제도의 긍정적 역할을 내세울 명분이 약한 것이다. 과거 정권 아래에서 기업인들이 사면을 받아 형벌권 행사가 흔들렸던 사정도 부정적 이미지를 줄 것이다. 삼성이라는 기업이 무슨 이유에서든 수사와 처벌을 받아온 역사가 되풀이되어도 경영에서 크게 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도 사면의 효과를 의심하게 할 만한 점이다. 게다가 이 부회장은 현재 다른 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이미 네 차례의 특별사면을 했다. 그중에는 민생 사면이 있는데, 이 용어는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붙인 것이다. 사면은 대통령의 정치다.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사면에 관한 견해이기는 하나, 문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사면에 국민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이번의 여론조사 결과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이 점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은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사면과는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정봉주 전 의원, 이광재 전 지사, 곽노현 전 교육감을 사면한 바 있다. 법 앞의 평등과 형평을 따지자면 기업 총수라고 꼭 사면에서 제외해야 할 것도 아니다. 사면의 논란에선 아무도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 없고, 아무도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은 단 한 사람,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사면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국정 최고책임자가 그의 정치학으로 내리는 고독한 결단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이 사면을 하려 하고 대신들은 이에 반대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때마다 사면의 폐해를 지적하며 나오는 말은 사면은 소인에게는 다행이나 군자에게는 불행이다(赦者 君子之不幸 小人之幸也)’라는 것이다. 본래 당 태종이 한 말이라는데, 사면이 잦아지면 악한 짓을 하는 자의 마음이 고쳐지거나 악행의 풍습이 사라지지는 않으면서 죄 없는 양민들만 해친다는 경고다. 자의적이지만 이걸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사면은 소인이나 바라는 바고, 군자는 사면받기를 외려 불행으로 안다라고. 수형생활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은사(恩赦)는 망상이 아니라 수형자의 꿈이다. 꿈을 탓할 순 없다. 그러나 은혜는 갚아야 할 빚이다. 빚을 지더라도 꿈을 이룰 것인가, 아니면 빚 없는 강자가 될 것인가. 문제의 해법은 이 부회장 본인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경향 : 2021.05.10

 

평등한 불행을 증식하는 적대에 맞서

타인을 향한 적대에 몰입하면 상대의 사소한 언어와 제스처까지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기 쉽다. 검증 여부와 상관없이 당신의 일탈적 표현은 나를 위협하는 가공할 단어로 둔갑한다. 그것이 사회적 의미까지 갖게 되면 적대에 동조하는 이들은 집단으로 비난과 공격을 가한다. 논리의 빈자리엔 음모론이 들어서고 시끄러운 현장은 언론에 오르내린다. 상대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특권으로 표적이 되고 몇몇 정치인은 그 상황을 기회 삼아 대결구도를 만든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익숙하게 겪어온 패턴이다.

 

·보궐 선거 이후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린 이대남20대 남성을 집단으로 묶는다. 특정 세대와 성별을 좁혀 부른 이름은 이들을 소환한 배경을 묻기보다 당장 이대남을 명명한 주체들의 이해타산을 위한 도구처럼 소비된다. ‘공정을 말하면서 플랫폼노동과 위험을 외주화하는 노동시장에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인과 언론은 손에 꼽을 정도다. 군대 내 차별과 반인권적 처우, 편히 살 수 있는 집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부동산시장의 편향, 영끌과 빚투를 탈출구로 삼는 개발 중심의 불평등은 실질적인 논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찾기 어렵다.

 

정작 공론장에는 역차별과 페미니즘이 논쟁의 도마에 오른다. 젠더 위계를 갈등으로 바꿔 부르는 형국은 집단 내부의 차이와 기존의 위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손쉽게 적대를 키운다. 혐오의 경쟁은 사회 구조를 인식하고 스스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보다 쉽게 판을 뜨겁게 만든다. 그 속에서 페미니즘은 특정 성별의 이해를 위한 당파적 논리로 압착된다. 문제는 이러한 접근이 내부 불평등까지 평평하게 만드는 착시를 강화하며 본인의 존재적 무게와 시야까지 좁힌다는 점이다. 역차별과 여성우대정책 폐지는 박탈당한 경제적 분배와 사회적 평등을 이야기할 자리를 대체한다. 구조적 변화의 요구는 억울함의 성토로 전치된다. 게토처럼 내부에서 회자되던 음모와 가십들이 보수 정치인과 저널의 힘을 받아 공론을 휘젓고 여론을 잠식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보다 다른 소수자 집단을 끌어와 대결을 조장하고 위계를 외면한 채 타인을 부정하는 정치를 부추기는 것은 성원들을 길들여온 기득권 문법의 오랜 관행이다. 남는 건 어려운 성찰보다 상호 적대에 기반한 불행의 증식이다.

 

이른바 평등한 불행의 선동은,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기보다 불행의 원천이 당신임을 적시하며 당신도 나만큼 불행해야 함을 설파하고 삶을 하향평준화하며 보편적인 불평등을 양산한다. 하지만, 적어도 페미니즘은 당신보다 더 잘살기 위함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변화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해왔고 그래야 함을 지향하지 않았던가. 공존의 양식을 모색하며 미래를 그리기 위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적대를 부추겨 살집을 키우는 이들일 것이다.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경향 : 2021.05.10

 

바이든 100일은 왜 루스벨트에 비교되나

지난 429일로 취임 100일이 지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행보는 미국을 환골탈태시키려는 것이라고 언론들은 평가한다.

 

취임 100일 동안의 지표를 보면, 바이든은 전임 대통령들에 비해 오히려 뒤처진다. 여론조사 종합인 리얼클리어폴리틱스의 바이든 지지율은 7일 현재 54.1%이고 취임 이후 60%를 넘지 못했다. 버락 오바마는 취임 직후 65%에 달했고, 60%대 지지율이 6월 중순까지 유지됐다. 조지 부시도 취임 후 60%를 유지했다. 취임 100일 동안 치적을 평가하는 척도인 법안 통과 건수는 11개이다. 트럼프는 21, 오바마는 14, 부시는 7, 클린턴은 22개였다.

 

취임 100일이 대통령 평가 지표가 된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100일 동안 대공황에 맞서는 76개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키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전범을 세웠다. 그는 1933724일 라디오 연설에서 100이라는 조어를 선보였다.

 

그런데 바이든은 지금 루스벨트와 비교된다. 미국이 처한 상황 때문이고, 그들이 내놓은 처방 때문이다. 루스벨트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대공황에 직면했다면, 바이든은 지난 30년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든 불평등이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 위기로 심화된 상황에 처해 있다.

루스벨트가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확대한 뉴딜 정책을 내놓았듯이, 바이든은 취임 이후 모두 세차례에 걸쳐 6조달러(6700조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지출안을 내놓았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이후 기조인 작은 정부, 감세, 균형재정을 큰 정부, 증세, 확대재정으로 바꾸고 있다. 부자와 대기업을 위한 규제 완화와 감세에서 중하류층의 복지 확대와 증세로의 큰 전환이다.

 

하지만 바이든은 극단적으로 당파화된 정치 문화, 특히 공화당 지지층의 다수는 아직도 그의 당선을 부정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의 대형 지출안 중 첫번째인 19천억달러 규모의 미국 구호 계획에 상원의 공화당 의원들은 한명도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이든의 국정 운영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없다. 의회에서 민주당 의원들만의 표로 통과된 미국 구호 계획은 여론조사에서 전체 유권자의 77%, 공화당 지지층에선 59%의 지지를 얻었다. 공화당이 바이든의 국정 의제에 대한 반대를 고리 삼아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정쟁화의 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든 정부가 현재 미국과 자본주의 위기의 핵심인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처방을 내놓고 승부를 걸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주당 정부가 빠졌던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나려는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1960년대 68혁명 이후 선진국의 진보·자유주의 세력들은 소수자와 약자 집단의 동원에 주력하는 정체성 정치에 빠졌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는 필요하고 당연히 관철돼야 하는 의제이나, 중하류층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 노력이 결여되면서 문화전쟁이라는 큰 역풍을 야기했다. 백인 중하류층의 트럼프 지지와 당선이 이를 보여줬다.

 

바이든은 돋보이려는 이벤트를 자제하며, ‘졸린 조이미지를 전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소수집단, 총기, 임신중절 등 문화전쟁을 부르던 사안들에 대해 극히 로키로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그 어느 행정부보다도 소수인종과 여성, 진보 인사를 각료로 많이 기용했다. 그럼에도 언론은 이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바이든 100일의 핵심은 6조달러 지출안과 그 내용임에도 공화당은 이를 애써 외면한다. 공화당은 지지층인 백인 중하류층들이 이 사안을 지지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화당 내부에서 문화전쟁이 벌어진다. 트럼프의 선거 부정 주장을 비판한 리즈 체니 하원의원의 당직 박탈 문제를 놓고 싸움을 벌인다. 공화당 지지층에서는 인종주의 논란으로 책 출판을 중지한 그림책 작가 닥터 수스 논란, 캐릭터 완구인 미스터 포테이토 헤드에서 젠더 포용성을 넓히기 위해 미스터를 뺀다는 결정 등에 더 관심이 높다는 여론조사도 나왔다.

 

6조달러 지출안 등 불평등 개선안이 부작용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가 소수집단에 초점을 맞춘 정체성 정치와 문화전쟁을 지양하고, 불평등 해소에 정면으로 맞서는 처방안을 내놓으며 백인 중하류층들을 다시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정체성 정치의 목적인 다름을 인정하고 평등한 몫배분을 위해서도 이제는 대중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지위를 높이는 2의 뉴딜’, 이를 위한 2의 뉴딜 동맹이 필요한 때이다.

10일로 임기를 1년 남긴 문재인 정부에 바이든의 100일은 너무 늦은 처방인가?

정의길 ㅣ 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1.05.10.

 

가족의 현재와 미래

5월은 가정의달이다. 5일은 어린이날이었고, 8일은 어버이날이었다. 21일은 부부의날이다. 5월에는 누구나 한번쯤 가족을 돌아본다. 나의 경우 가족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내가 기억하는 우리 세대 가족의 초상은 이처럼 시리다. 마음 아픈 풍경이 먼저 소환된다.

 

사회학적으로 가족이란 이채로운 존재다.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공동체다. 인간은 국가와 시장이라는 제도 속에 살아가는 동시에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 터 잡고 있다. 고전적 시각에서 가족은 혼인과 출산으로 연결된, 정서적으로 더없이 친밀한 1차집단을 의미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선 핵가족이 빠르게 확산됐다. 가부장제와 사적 친밀성은 핵가족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었다.

 

주목할 것은 20세기 후반에 가족이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서구의 경우 가족의 형태는 가족(the family)’이 아니라 가족들(families)’로 존재한다. 전통적 가족 외에 한부모 가족 또는 재결합 가족, 그리고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가족 등이 존재한다. 21세기에 들어와선 가족을 말할 때 하나의 보편 모델을 상정하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뤄왔다.

 

우리 사회에서도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가족은 크게 변화해 왔다. 핵가족의 증대와 가족의 소규모화가 가족 변동을 이끌었다. 여기에 최근 1인 가구의 증가, 저출산·고령화의 강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가족 변동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1인 가구의 변동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9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0.2%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가족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선 두 사회학자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 먼저, 김동춘은 <한국인의 에너지, 가족주의>에서 우리나라 가족의 역사적 특징을 주목한다. 김동춘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는 독자적 자유와 책임을 한 몸에 지닌 서구적인 개인의 탄생사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유기적 단위 속의 개인인 가족 개인의 탄생사였다. 김동춘은 우리나라 가족과 가족주의가 극히 불안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받을 수 있는 안식처이자 도피처이며, 국가와 시장의 폭력을 버텨내는 울타리였다고 분석한다. 나의 체험을 돌아봐도 날카로운 통찰이다.

 

한편, 장경섭은 <내일의 종언?>에서 우리나라 가족의 특징을 가족자유주의로 포착한다. 가족자유주의는 서구 자유주의를 핵심 가치로 채택하되, 그 자유와 책임의 기본 단위를 개인이 아닌 가족에 놓아두고 있다. 장경섭에 따르면, 이런 독특한 가족주의는 개발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며 형성된 상황적 구성물이다. 가족 의존적 경제사회 체제는 가족자유주의와 장기간 결합해 있었고, 그 결과 만성적 가족피로 증후군이 나타났다. 더하여,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비혼·만혼의 증가, 저출산의 강화, 노인자살의 증가 등 가족 재생산 위기가 구조화됐다. 이러한 가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장경섭은 가족자유주의 정치경제와 사회정책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

 

두 사회학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두 가지다. 우리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 가족의 특수성을 주목해야 한다는 게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가족과 가족주의가, 최근 저출산·고령화 경향이 증거하듯, 새로운 전환의 지점에 이미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 특히 ‘100세 시대의 개막에서 볼 수 있듯, 고령사회의 도전은 빈곤·고용·복지 등 경제·사회정책 전반의 변화를 촉구한다. 요컨대 한국적 가족과 그 위기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이에 기반한 정책 모색 및 추진을 더 이상 미뤄선 안 될 것이다.

 

가족의 초상은 어떤 색일까. 나의 경험을 돌아볼 때 화려한 색깔은 아닌 듯하다. 유채색이 아닌 무채색인, 애틋하지만 삶에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그런 색깔이 아닐까.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의 마지막 구절이다. 가정의달을 맞아 우리 시대 가족의 초상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여기에 적어둔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21.05.11

 

문해력 최하위한국

나는 종합일간지몇 종을 꼼꼼히 보는 편이지만 주식, 부동산, 자동차 관련 기사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공매도? 180마력? 이런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내 생활과 무관해서 큰 불편은 없다. 그래도 답답한 표현이 있다. 평수. 넓이를 제곱미터로 표현하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지만, 나처럼 평수 개념에 익숙한 사람은 25평이 편하다. 84는 감이 안 온다. 자랑은 아니다. 다만, 세상 모든 문장을 어찌 다 이해하겠는가.

 

위의 내 경우처럼 글자는 읽지만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 “문해력(文解力, literacy)이 낮다고 한다. 공매도(空賣渡, short selling)를 읽을 수는 있지만 주식을 실제로 갖고 있지 않거나 갖고 있어도 상대에게 인도할 의사 없이 신용 거래로 환매(還買)하는 것이라는 문장은 이해하지 못한다. 문해력은 글자를 보는 행위가 아니라 문장을 실제로 이해하는 능력으로, 인간의 사고방식을 좌우한다. 요즘은 문장뿐 아니라 특정 분야에 대한 인식으로서 생태

문해력, 이미지 문해력, 미디어 리터러시, 디지털 문해력 등 다양한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문자 읽기와 문장 이해는 전혀 다르다. 한국은 훌륭한 한글 덕분에 문맹률 1% 이하의 세계 최고의 글자 해독 국가지만, 문해력은 반대다. 조사 시기와 연령대마다 다르지만, 문해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혹은 중간 이하라는 게 중론이다(20여 년 전, 최하위 통계가 있었다). 한국은 지식 강국과 거리가 멀다. 아마 한국사회의 문해력을 가장 실감하는 집단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원일 것이다. ··, 대학 모두 마찬가지다. 교실 붕괴, 강의실 붕괴는 이미 오래전 일이다.

 

낮은 문해력은 소통과 직결되므로 사회 갈등의 주원인이 된다. 사회 갈등은 총기 난사와 인종 차별로 얼룩진 미국, 내전 중인 지역들, 한국 모두 심각하지만 우리의 갈등은 약간 다른 양상인 듯하다. 그들은 진짜사회 갈등을 겪고 있고, 우리는 문해력 부족으로 인한 의미 없는 소모전인 경우가 많다. 더구나 이를 진보-보수라는 내용으로 소위 식자층이 주도하고 있으니 더욱 심란하다.

문해력은 인간의 조건, ‘상식 사회의 초석이다. 낮은 문해력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고 지적 양극화,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 수많은 문제를 낳는다. 말이 안 통하는 사회를 대신할 사회는, 없다.

 

분단 체제와 플랫폼 자본주의

분단(/) 체제의 기반은 이분법이고, 이분법은 문해를 불가능케 하는 가장 쉬운 논리다.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의 낮은 문해력의 근인은 분단과 식민주의다. ‘건국이후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한 사회 문해력의 기준은 외부였다. 반미, 반북, 친일. 이와 관련한 언설이 그 자체로 생명줄이거나 ()국가인 사회에서 무슨 문해력을 논하겠는가. 국가보안법은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인간과 지식 모두를 압살해왔다. 그러나 색깔론도 국가보안법도 여전히 활발히 작동하고 있다.

 

19653, 소설가 남정현은 단편 분지(糞地)’를 남한의 문예지 <현대문학>에 발표했는데, 작가도 남한 당국도 모르는 사이에 두 달 뒤 북한 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에 전재되었다. 작가는 충일기업사라는 중앙정보부 을지로 대공 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작품과 관련한 작가 구속은 일제 시대에도 없던 일이다. 이처럼 사실관계 자체가 조작되는 상황에서 문해력은 사치일 것이다.

 

라떼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토록 진영 논리가 판칠 줄 몰랐다. 정권 탓이 아니다. 그간 한국사회에 내재하고 있던 무지의 힘이 개인의 이해와 맞물려 폭발한 것이다. 중앙정보부 시절 양희은씨의 노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금지곡이었다. “사랑이 안 이루어진다는 부정적 사고방식이것이 이유였다. 이해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경우다. 지금은 개인이 스스로 이해를 거부한다. 문해력이 없는 사회에서는 그것도 돈벌이 수단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당대 한국사회의 문해력은 그 낮은 수준조차 8·15, 미군정, 한국전쟁 때보다 후퇴했다.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과의 대화처럼 괴로운 일도 없다. 게다가 위계 관계 때문에 그런 재앙을 피할 수 없을 때의 스트레스와 분노는 몸의 면역력을 망가뜨린다. 소통 불가능성은 일상이 되었다. 전광훈, 강용석, 김어준씨 등 소위 관종으로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생계와 명예(?)를 위해, 말이 안 되는 소리로 도발한다. 그들은 허언으로 돈을 챙기는 이들이다.

 

관련해 “‘다섯 줄만 넘어가도 읽기 힘들어하는 아이들”(<한겨레> 인터넷판, 2019813)이 제시한 대안을 보자. “‘북튜버(book+youtuber)’가 대신 읽어주는 책보다는 아이 손으로 직접 종이책 만져보고 소리 내어 읽어봐야 한다.” 중요한 지적이다. 모든 공부는 몸과 텍스트의 닿음과 느낌, 접촉을 통해 몸으로 익혀야 한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보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와 한몸이 될 때까지 친다. 반면, 공부는 남이 하는 것을 보는 시대가 되었다. 대책을 찾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에 전기(스마트폰, 컴퓨터 등)와 매개를 거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산업자본주의 시기에는 몸을 써서 노동(공부)을 함으로써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았다. 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노동은 미덕이었다. 지금은 소비 주체의 시대다. 소비가 곧 노동이다. 온라인 공간에 오래 머물면서 자기 시간을 포털 사이트에 제공하는 소비행위가 공부(검색)가 되었다. 이 대세를 거스를 기력이 있는가. 하향평준화는 필연이다. ‘긴 글이나 조금만 익숙하지 않은 문장에도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근본적으로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대안이 없는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를 직면하고 보완하려는 사회가 있고,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언설로 문제 인식조차 없는 사회가 있을 뿐이다. 한국은 후자의 대표적인 국가다.

 

이해하려는 과정이 융합

학문의 한자 표기는 學問이다”, “셰익스피어는 배우였다”, “<자산어보>에는 백상아리(백상어)’로 추정되는 어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처럼 정보에 가까운 문장은 문해력 논란이 적다. 그러나 고대(古代)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은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다”, “기후위기는 자연을 대상화한 결과다”, 이때는 문해력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통념과 달리 문해력은 지식의 정도보다는 가치관과 태도의 영향이 크다. 초등교육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학력(學歷), 학력(學力)과 무관하다. 남녀, ‘페미와 마초불문,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미 문해의 영역에 들어오기 어렵다. 최근 나는 건설자본주의 비판과 빈집 재활용에 관한 글을 썼는데, 곧바로 돌아온 반응은 그러니까 오세훈을 찍지 말라는 거죠?”였다. 어느 유명 남성 지식인이 성폭력 가해자를 지나치게 두둔하여, 나는 피해자를 돕는 몇몇 이들과 함께 그 남성을 설득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대한민국에 나만한 문해력을 갖춘 사람이 없는데, 내가 당신들이(여성들이) 하는 이야기를 못 알아들으니, 이건 당신들 잘못이다.”

 

문해력은 이해력이다. 그런데 이해의 의미부터가 매우 복잡한 문제다. 앎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 의미의 이동 즉 차이(差移) 그리고 유착(流着)의 반복, 즉 융합이기 때문이다. 이해 과정에서 이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해는 본디 불가능한 일이다. 이때 위로가 되는 말이 있다. 마르크스가 죽기 전에 했다는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교조적으로 수용되기 쉽고 그는 레닌처럼 정치가가 아니라 사상가였기에, 또한 당시 수정주의 논란이 컸기에, “나의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 같은 한탄이었을 것이다.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다. 때문에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epoche, 판단 정지)이다. “나는 모른다가 공부의 시작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력부터 의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 몸에는 이미 많은 의미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무지라는 가정을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다.

 

잠깐의 판단 중지. 그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앎은 자기 진화의 과정이지 시비를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다. 지식을 정보로 아는 이들은 타인을 가르치려 들지만’, 아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들은 우리를 가르친다’./정희진ㅣ여성학연구자·문학박사.한겨레 :2021-05-11

 

만국의 벼락거지여, 단결하라

벼락거지라는 신조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기분을 한 단어로 축약하는 일은 지금도 난감하다. 유쾌함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고, 부풀려 말하면 양잿물 같은 액체가 얼굴에 훅 끼얹힌 느낌에 가까웠다. 부동산도, 주식도, 암호화폐도 없는 나를 멸칭하는 거라 여겨져서만은 아니었다. 자기비하의 포즈를 취하려고 하필 길에서 힘겹게 연명하는 약자를 비유의 도구로 삼은 것부터 걸렸다. 적어도 같은 계열 신조어의 선배격인 흙수저는 자신의 처지를 사물에 빗댈 뿐, 더 열악한 동료 시민의 비참을 끌어와 전시하지는 않았다. 무의식적이어서 되레 공공연하게 배제와 차별을 표상했는지 모른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뿐더러, 더 심대한 징후적 문제를 품고 있기도 하다.

 

벼락거지는 범주를 지우는 진공청소기다. 벼락부자 아니면 모두 벼락거지다. 세습 부자와 신흥 4차산업 자본가 정도만 예외다. 부자와 거지 사이에 제3의 범주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 양극성의 담론에도 리얼리티는 있을 터이다. 상징은 본디 현실을 이분법으로 단순화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하지만 정작 벼락거지의 인식론이 빼닮은 건 공상과학(SF)의 문법이다. 영화 <엘리시움>(2013)에서는 버려진 99%의 인류와 선택받은 1%의 인류가 지구(지옥)와 엘리시움(천국)으로 단절된 채 살아간다. 사이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벼락거지<엘리시움>의 서사적 차이라면, 전자는 특권으로의 편입을 욕망하는 반면 후자는 특권 구조의 해체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러나 벼락거지라는 표현에 공상적인 선망만 담겨 있다면 이토록 곤혹스럽지는 않을 듯하다. <엘리시움>이 현재의 부조리를 먼 미래의 시간으로 증류한 유토피아적 예언이라면 벼락거지는 현재의 모순을 당대의 스크린에 투영한 디스토피아적 그림자다. 그림자는 광원과의 거리와 각도만큼 부풀거나 늘어나 있으나, 동시대의 무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벼락거지의 리얼리티는 계보학으로도 입증된다.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이후 등장한 부자 되세요의 속물주의 덕담은 출생 배경을 극복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흙수저의 자조를 거쳐 까마득히 멀어지는 자산격차의 꽁무니를 하릴없이 응시하다 벼락거지로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실을 가장 뼈저리게 절감하는 세대는 아마도 엠제트(MZ) 세대일 것이다. 세대론자들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들은 단군 이래 최초로 앞세대보다 가난해지는 세대, 어려서부터 경쟁과 공정의 원리를 체화한 세대인데, 불행하게도 부동산과 주식, 암호화폐 말고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없다 보니 영끌이니 빚투니 하는 모험을 주저 없이 감행하는 게 공정성을 구현하기 위한 주요한 실천이라고 인식하게 됐다. 적어도 벼락거지-영끌-빚투의 신조어 계열체가 엠제트 세대에 의해 발명된 거라면(확인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공통된 세대적 특성이 실재할 가능성을 유력하게 뒷받침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이 세대 내부의 차이보다 큰지는 따져볼 일이다.

 

영끌과 빚투는 지옥(지구)에서 풀려나 천국(엘리시움)으로 가려고 보석금을 내는 행위다. 알다시피 감방 동기라고 해서 계급이 같지는 않다. 두 전직 대통령과 재벌 총수도 있으나, 몇푼 벌금을 못 내 형을 사는 노역수가 부지기수다. 벼락거지라는 상대적 신분은 어떻게든 보석금을 마련해볼 꿈이라도 꾸지만, 이들 절대적 신분(그냥 거지)에게는 언감생심이다. 영끌, 빚투는 그 자체로 자원이다. 이 자원을 확보한 이들은 엠제트 세대를 과잉대표한다. 대기업의 젊은 사무직이 전형적이다. 자본가보다 생산직 노조와 투쟁을 더 적대하는 듯 보이는 저들이 공정성이라는 이름의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노조를 만들 때, 또래의 파견 노동자는 평택항에서 산재로 비명횡사했다.

 

벼락거지의 작명에 차별과 배제의 기제가 들어 있는 것을 우연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작명은 선망과 더불어 자기비하의 우울도 동반하기 마련이다. 엠제트 세대의 자살률이 최근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하는 여러 배경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을 속절없이 몰락시키는 압도적 지대 추구 경제의 참담한 이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만국의 벼락거지들이여, 엘리시움을 선망 말고 해체를 위해 단결하라!

안영춘 | 논설위원 한겨레 :2021-05-11

 

자신이 집 없는 사람이라면 토지공개념을 주장하자

토지초과이득세를 부과하자. 유휴 토지에 매기는 세금이다. 보유세를 강화하자. 부동산을 가졌다면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연합뉴스

 

대한민국에서는 집 한 채 갖는 게 최고의 안전망이다. 지난 역사에서 확인되듯이 집값이 떨어질 리는 없다. 예전에도 가끔 부동산이 폭락할 거라는 예견이 돌아다녔으나 공연한 위협에 불과했다. 과반 의석을 가진 여당도 든든한 원군이다. ‘빚내서 집 사라는 박근혜 정부를 그토록 비판하더니만 대출을 늘려주는 방안을 적극 검토한단다. 돈을 더 빌려주겠다는 제안은 결코 집값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증과 다름없다. 집값이 내렸을 때 자신에게 되돌아올 부메랑을 생각해 집값 하락만은 허용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마다 집을 사자 달려들면 집값은 더욱 오르고 참여자는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다.

 

위 이야기는 모든 국민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집을 가진 절반의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파티다. 신규 입장권은 무주택자 중에서도 자금을 동원할 능력이 있는 일부에게만 제공될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완전 반대편 자리에 서 있다. 집값이 오를수록 임대인에게 내야 하는 전월세는 높아지니 인상분을 충당하려면 지금보다 더 일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축은 먼 꿈이 되고 앞으로 집을 살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그도 그렇고 아마 그의 자녀들도 그럴 것이다.

 

국토의 효율적 이용위해 재산권 제한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집 소유를 기준으로 계층화하고 있다. 일해서 버는 소득보다는 자산으로 인한 격차가 빠르게 증가하는 부동산공화국이다. 이미 세상이 집을 두고 나뉘었다면 양편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집 없는 사람이라면 건너편의 로또 축제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집값 인상을 막고 점진적인 하향까지 말해야 한다. 불가능하지 않다. 현행 헌법과 법률의 가치와 내용을 엄격하게 실행하자는 일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토지공개념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하되 그 행사가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하고(23), 나아가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하여 제한과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고 명시해놓았다(122). 이대로 하면 된다. 토지 사재기가 공공복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가? 대기업들이 당장 사업에 사용하지 않음에도 전국 방방곡곡에 대규모 토지를 가지고 있는 게 국토의 효율적 이용인가?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에 따른 세금 의무는 다해야 하는 거 아닌가?

 

두 가지를 꼭 추진하자. 먼저 토지초과이득세를 부활하자. 이는 개인의 주거나 기업의 경영에 꼭 필요하지 않음에도 보유하고 있는 유휴 토지에 매기는 세금이다. 1990년 시행 이후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적이 있어서 위헌 제도로 오해되곤 하나, 곧바로 불합치 내용들을 모두 보완하여 완전 합헌 제도로 시행되었다. 서울올림픽 등 개발 바람으로 1989년에는 전국 평균 지가상승률이 32%까지 달했으나 1990년 토지초과이득세가 도입된 후 199020.6%, 199112.9%, 19921.3%로 낮아질 만큼 효과를 발휘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를 맞아 김대중 정부가 부동산 부양을 명분으로 이 제도를 폐지해버렸다. 사실상 헌법이 지향하는 토지공개념을 상자 안에 가두어버린 셈이다. 최근 국회에서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토지초과이득세법 제정안을 발의했고 여당 의원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법안 제정 운동을 벌여나가자.

 

또 하나는 보유세 강화다. 부동산을 가진다면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우리나라 보유세 평균 실효세율은 20180.16%OECD 주요 8개국 평균 0.53%보다 턱없이 낮다. 이후 공시지가가 단계적으로 현실화되고, 종합부동산세의 경우 공정시장가액비율과 세율도 상향되는 방향으로 강화되고 있다. 최근 보유세 완화 논란은 이러한 추세를 되돌리려는 부동산 기득권의 요구를 반영한다. 그만큼 고가의 주택을 가진 사람들이 이전보다는 보유세를 부담으로 느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금 추진하는 보유세 강화 흐름을 유지해서 다주택자들이 주택을 시장에 내놓도록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집값 하향 안정화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말이다./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 시사인 2021.05.14.

 

 

코인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암호화폐(가상자산)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모두가 한마디씩 하지만 일부러 언급하지 않는 내용도 있다. 국회가 말하지 않는 것부터 보자. 올해 들어 국민 10명 중 1명이 암호화폐에 투자했다. 국내 4대 암호화폐 거래소(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에 따르면, 지난 1분기 투자자는 511만명이다. 지난 3월 인구(5170만명)10%에 해당한다. 경제활동인구(지난 12739만명)를 기준으로 하면, 암호화폐 투자자는 5명 중 1(19%)으로 늘어난다.

 

특히 2030세대가 46%(233만명)나 차지했다. 투자금 비중은 더 크다. 4대 거래소 예치금(64863억원) 50%(31819억원)2030세대의 돈이었다. 이 현황을 보고 많은 정치인은 말했다. 청년 세대가 왜 암호화폐에 투자하는지 그 사회경제적 배경을 봐야 한다고. 부동산이 폭등하면서, 노동소득으로는 집을 살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낀 청년층이 암호화폐에 몰렸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맞는 말이지만 상대적 박탈감만이 동기는 아니다. 청년들이 암호화폐를 사는 본질적 이유는 큰돈을 벌고 싶어서. 주변의 친구, 동료가 암호화폐 투자로 쉽게 수백, 수천만원을 버는 걸 보면 나도 해볼까생각이 드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중장년층이 (주거 목적이 아닌) 강남 부동산을 사는 것과, 청년층이 암호화폐를 사는 목적은 같다. ‘나만 좋은 기회를 놓치나라는 포모(FOMO) 심리와 이 상승장에 올라타 돈을 벌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굳이 청년이 힘들어서 그래라고만 포장할 필요는 없다. 많은 정치인은 굳이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정부가 말하지 않는 것도 있다. 암호화폐 그 자체다. 2018년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이 거래소 폐쇄를 언급하면서 국내 가격이 폭락했다. 그 이후 정부는 암호화폐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려왔다. 특히 주무부처가 될 것을 우려한 금융위원회는 더 조심했다. 작년 초 은성수 금융위원장을 만나 암호화폐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대신 보좌진이 기사가 나오면 가격이 움직인다며 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동안 정부는 암호화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정부의 기조를 물으면 2018년에서 달라진 건 없다고 답했다. 한국이 가입된 국제기구(FATF)의 권고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특정금융정보법 개정 말고는 최대한 거리를 뒀다. 우리는 담당이 아니니 다른 부처, 부서에 물으라는 말을 여러차례 들었다. 그러다 올해 다시 코인 붐이 일었다.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사기, 시세조종 피해자는 정부가 방치한 결과이기도 하다.

 

마지막은 블록체인 업계가 말하지 않는 것이다. 2016~2018년 화제였던 암호화폐공개(ICO·아이시오)를 기억하는가. 금융당국이 국내 아이시오를 금지하자, 많은 기업이 스위스 등에서 암호화폐를 발행하며 자금을 모았다. 이른바 현대코인이라고 불렸던 에이치닥(HDAC) 토큰은 비트코인 16786개를 모았다. 당시 시세로 약 2800억원이다. 보스코인은 비트코인 6902(157억원)를 모았다

 

이 외에도 많은 아이시오가 투자자의 돈을 모았다. 그러나 아직 쓸 만한 블록체인 서비스를 내놓지 못했다. 한국은 아직도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는 분리할 수 있다, 없다를 가지고 논쟁 중이다. 암호화폐를 활용한 서비스 중 대중적으로 성공한 사례를 보여주지 못한 탓도 있다. 그나마 다날(페이코인), 차이(루나, 테라), 밀크(Mil.k)가 결제에 사용되지만, 논쟁을 끝낼 수준은 아니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이다. 서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하고 싶은 말만 해선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 김병철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한겨레 :2021-05-24

 

국가보안법마피아 게임을 끝내야 한다

02010월께 상영되었던 스릴러 영화’ <게임의 전환>이 뇌리에서 계속 사라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마피아 게임을 빌려 국가보안법을 설명한다. 우리 사회 안에 빨갱이를 사냥하라!’는 잔인하고 끔찍한 게임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견고하게 내재되어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당장, 인권운동에 몸담고 있는 나부터도 내 생각과 표현을 스스로 억제해왔다자기 검열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어 놀랐다.

 

국가보안법은 이런 법이다.

우리가 좋든 싫든 모두 마피아(빨갱이) 게임의 참가자가 되어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 마피아를 찾아내고(자기 검열),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마피아를 찾아내기 위하여 나 스스로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을 모두 의심하게 한다(공포의 내재화). 개개인의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 나아가 학문의 자유 영역까지 간섭하고 억압해왔다.

이제, 국가보안법에 의해 시작된 마피아(빨갱이) 게임을 끝내야 한다.

 

이미 20048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문을 내놓은 바 있다. 이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국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2004826일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려 의미가 탈색되었다. 최근 헌법재판소에서는 다시 국가보안법 7조 위헌법률심판사건 심리가 진행 중이다. 헌법재판소가 종전 2004년의 결정을 변경할 것인지 관심이 모인다. 유엔 인권이사회,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 인권 관련 기구들도 꾸준히 한국 정부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해왔다는 점에 비춰 본다면, 헌법재판소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위헌 결정은 우리나라 인권의 측면에서,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국격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최근 21대 국회에서도 적폐청산, 촛불혁명의 정신을 잇는 맥락에서 국가보안법의 폐지 내지 국가보안법 7조 삭제 등 개정 법안에 관한 발의가 진행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부터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우려된 일종의 한시법이었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되어 그동안 인권유린과 사상탄압의 도구로,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남용·악용되어 왔다. 지난 세월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수많은 노력이 좌절된 사례가 있는 만큼 최종적인 결실을 볼 때까지 방심하거나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115일 한 언론사 창간 기념 서면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은 폐지돼야 한다. 1998년 유엔에서 한국 정부에 대해 국가보안법이 유엔의 인권규약 위반 사실을 재확인하는 등 국제 인권규범과도 충돌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폐지돼도 현행 형법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며 폐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또한 문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참여정부 민정수석 시절 공수처 설치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회고했다. 특히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해서는 더 뼈아팠다고도 했다. 그렇기에 대통령으로서의 입장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져야 할 것이다.

 

올해는, 이 사회를 통치하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73년이 되는 해다. 이미 사문화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당장 며칠 전에도 통일 문제를 연구하는 민간연구소 연구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지 않았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세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4·27 판문점 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등 남북 화해·협력의 구체적인 사항들에 합의했고, 평화와 통일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런 소중한 합의들을 실행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제정 목적 자체가 분단 대결체제 유지 내지 강화를 전제하는 국가보안법의 폐지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를 그 가장 밑바탕에서부터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원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포은법률은을 이 땅에 뿌리내리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류문수ㅣ변호사·원불교 인권위원회 위원장 한겨레 :2021-05-24

 

코로나 불평등, 거꾸로 가는 부자 감세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 경제는 대공황 이래 최대 불황에 빠졌다. 전례 없는 재난사태에 선진국들은 재난구제와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을 과감히 풀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케이(K)-방역 덕분에 다른 나라보다 재정을 적게 썼다. 그런데도 많은 언론에서는 국가채무가 늘어나는 속도가 가파르니까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민 혈세로 마련한 재정이니 꼭 필요한 부분에만 써야 한다는 말이다. 예전에도 복지를 늘려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재정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늘 따랐다. 이번 코로나 재난지원금 지급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을 때 전국민 재난지원금은 가뭄에 단비였다. 그런데 피해구제가 논의될 때마다 재정당국은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국채를 찍어 나랏빚을 무작정 늘리는 식으로 재정을 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난지원금은 피해가 큰 소상공인에게 선별 지급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원금은 부족했고, 영업 제한으로 입은 손실을 보상해달라는 소상공인들의 요구가 거셌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또 손실보상제 입법을 서두르면 재정건전성을 해친다고 우려했다.

 

이런 식의 나라살림 걱정에 반론도 만만찮다. 가계가 힘들고 국민이 어려울 때 정부는 재정건전성에만 집착하지 말고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현대화폐이론에서는 재정적자는 과도한 지출의 증거라는 통념을 뒤집고, 적극적인 화폐 발행으로 시민을 부양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는 한 재정은 언제라도 꺼내 쓸 수 있는 화수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론인 만큼 우리에게 먼 나라 얘기로 들린다. 원화는 달러처럼 다른 나라에서 기꺼이 사들이는 기축통화가 아니다. 우리가 대규모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국채 발행에 나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외환위기를 겪었던 우리나라는 국가채무에 특히 신경써야 한다. 하지만 재정건전성이 목표는 아니다. 재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민의 어려움을 돌보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평상시 재정을 아끼는 것은 어려울 때 쓰기 위해서다. 경제가 회복세를 보여도 자영업자의 어려움은 여전하고 일자리 회복도 갈 길이 멀다. 부동산가격 상승으로 자산 불평등도 심해졌다. 써야 할 곳이 많은데 재원이 부족하면 국채도 발행하고 세금도 거두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와 국제통화기금 같은 국제기구에서는 코로나 불평등을 막으려면 누진세를 높이고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도 4·7 재보궐선거 이전에 이런 흐름이 뚜렷했다. 여권에서는 재난사회연대세와 같은 증세가 불가피하고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기류는 재보선으로 180도 달라졌다. 보선에서 승리한 야당의 지자체 단체장들은 부동산 공시가격을 재조사하고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동산 민심에 놀란 여당은 종부세, 재산세, 양도소득세 인하 카드를 꺼냈다. 여야를 막론하고 감세 논의로 흐름이 뒤바뀐 것이다. 공시가격을 동결하고 보유세를 내리면, 가장 큰 수혜자는 부동산 재산이 많은 부유층이다. 하지만 감세가 불평등을 낳고 재정을 어렵게 한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보도는 별로 없다. 부동산 보유세와 양도세를 인하하고 법인세를 감면하면 재정이 빠듯해진다는 우려의 꼬리표조차 달지 않는다. 서민과 가계를 지원하면 재정 파탄이고, 부자나 기업 감세는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명백한 이중잣대다.

 

부자 감세가 경제를 회복시키고 세수를 늘린다는 낙수경제학을 믿어 침묵하는 것일까. 부자든 기업이든 감세의 낙수효과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경제학계의 오랜 정설이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시절에 초대형 감세가 있었다. 하지만 투자와 고용 효과는 없었고 양극화만 심화시켰다. 부자 감세는 미국 역사상 평화기 최대의 국가채무 누적을 초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월 의회 연설에서 낙수효과는 작동한 적이 없었다고 단언했다. 불평등을 막고 중산층을 재건하기 위한 대규모 재정지출과 이를 뒷받침하는 부자 증세와 법인세 인상 계획을 밝혔다. 미국과 세계는 불평등에 맞서는 길로 가는데, 우리는 왜 거꾸로 불평등의 길로 가는가. 제 길로 가야 온 국민이 살고 정치도 산다.

홍장표 ㅣ 부경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 :2021-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