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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022.2.2~28 윤석열의 상식 밖 언행, 참을 수가 없다

by 이성근 2022. 2. 27.

"민중은 언제나 분노했고 민중은 언제나 승자였다. 비록 한때 좌절은 있었지만 그것은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은 지약(至弱)하나 불가승자(不可勝者)는 민야(民也), ()은 지우(至愚)이나 불가기자(不可欺者)는 민야(民也).(백성은 미약하나 백성을 이길 수는 없고, 백성은 어리석지만 백성을 속일 수는 없다)“

 

시 읽는 대통령 중도일보 2022-02-02

개에게서 배우는 행복 뉴스민 2022-02-02

문재인의 어두운 유산, 윤석열 한겨레 2022-02-02

여가부 폐지, 윤석열이 꿈꾸는 세상은 뭔가 경향 : 2022.02.03.

선제타격과 전면전 경기신문 2022.02.03.

우크라이나와 한국 얼마나 다른가 한겨레 2022.02.03.

윤석열 후보의 위험한 혐오 선동 경향: 2022.02.04

누가 집권해도 후폭풍, 칼날 위에 선 민주주의 프레시안 2022.02.04.

은행들의 성과급 경향 : 2022.02.06

일곱 정권과 2030의 정치효능감 미디어오늘 2022.02.07.

'트럼프 바이러스'로 정권 잡겠다는 건가 2022.02.07.

윤석열의 혐오 세일즈’, 그리고 우익포퓰리즘 경향 : 2022.02.07

필사적 보수, 이대남 결집, 오미크론 경향 : 2022.02.

생각 없는중도층의 생각 경향 : 2022.02.09.

누구를 찍을 것인가 한겨레 : 2022.02.09.

누가 누굴 키워? 한겨레 : 2022.02.09.

내 마음의 센트럴 파크 데일리투머로우 2022.01.25.

작정한 외면은 죄가 된다 경향 : 2022.02.10.

 

마음은 흐리고 몸은 뻣뻣한 후보가 집권하면 경기신문 :2022-02-15

문화는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 한겨레 :2022-02-20

주택은 선택이다 주간경향 2022.02.21

윤석열의 상식 밖 언행, 참을 수가 없다 한겨레 :20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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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꾸락 콱 잘라뿌고싶은 이에게 경향 : 2022.02.21

대선의 시간, 질문의 시간 경향 : 2022.02.21

대선후보의 수준, 대한민국의 수준 미디어오늘 2022.02.21

법 앞에서 불평등”, 굴종의 사슬을 끊자 경기신문 2022.02.21

대선과 숨죽인 부동산 경향 2022.02.22.

배신의 미학 뉴스프리존 2022.02.22

촛불혁명과 대통령 선거 한겨레 :2022-02-22

이재명과 박수영의 업무추진비 한겨레 :2022-02-23

이재명·윤석열 후보의 같음과 다름 경향 : 2022.02.23.

최악의 대선에서 차악의 기준 찾기 경향 : 2022.02.23.

노무현의 고뇌를 아는가 경향 : 2022.02.23

윤석열과 이명박, 그리고 경향 : 2022.02.24.

이재명윤석열 공약, 정말 차이가 없는가 미디어오늘 2022.02.24.

'정권교체론'은 허구다 프레시안 2022.02.24

대선과 냉전 콤플렉스 경향 2022.02.26

지역균형발전 사기극 한겨레 2022.02.27

성장사회와 성숙사회 한겨레 2022.02.27

 

시 읽는 대통령

봄도 오지 않았는데 여름휴가 타령이다. 꽃샘추위도 남았고 대선 시계도 열심히 돌아간다. 무엇보다 3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봄 언저리에 피었다 지는 꽃봉오리 몇 번 만나고 나면 여름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올 것이다. 제목처럼 20대 대통령은 '시 읽는 대통령'이라는 뉴스를 듣고 싶은 욕심에 미래의 시간을 당겨왔다.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기에 여름휴가를 간다. 휴가 때 읽을 책을 준비한다. 필부들은 일상에 쫓겨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대통령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이번 대통령 휴가에 따라가는 책이 광고처럼 뉴스가 되기도 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람들 생각을 들어보면 바쁘니까, 책 읽을 마음의 시간이 없어서, 이유도 가지가지이지만 가장 마음에 와닿는 말은 물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으면 수긍이 간다.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물질을 얻는데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책(자기 계발서)은 문학책에 비해 여전히 사람들 손을 탄다.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대통령이 국정에 힘을 쓰다 외로운 결단을 내릴 때, 시를 읽으며 그 시간을 벗어났다는 말을 듣고 싶다. 2022년 이런 지도자가 세계적으로 몇 명이나 될까. 솔직히 이런 통계를 본 적이 없어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들어보지 못했다.

 

내 생각에 몇몇 분은 대통령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가. 하며 점잖게 나무라는 사람도 있고, 네가 시를 쓰니까 별 허접한 상상을 다 한다고 말할 것도 같다. 기왕에 한 상상이니까 욕을 먹더라도 좀 더 안으로 들어간다.

 

대통령이 국민을 위한 신년사를 하고 끝 무렵에 시 한 편 낭송하는 모습 어떤가. 상상만 해도 즐거워진다.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잘 먹고 잘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이 강하고 더 잘 산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도 좋지만 이런 고민 끝에 읽었다는 시 한 편, 대통령의 목소리로 낭송한다면 불편한 국민 몇 명이나 될까.

 

숫자에 매인 삶에서 숫자가 아닌 통계가 아닌 그래프가 아닌 감성지수를 정화할 수 있는 감정통계를 생각한다. 비록 국민은 대통령께 우리를 잘 살게 해달라는 말을 앞세운다고 해도 대통령은 그런 국민에게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다짐하는 마음으로 숫자 대신 시를 읽어준다면 지지율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질까.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 수준은 세계에서 볼 때 열 손가락 안에 있다. 대중문화는 세계시장에 나가 선진국이라는 나라들과 어깨를 견줄만한 분위기가 작년에 몇 번 뉴스를 탔다. 이에 힘입어 사람들도 문화에 대한 생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작금의 세계는 무역 전쟁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물건을 만든 기업들의 고민은 인간을 위한 편리한 물건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만, 그것에 감성을 보탤 생각을 한다. 아무리 편리한 기술이 나온다고 해도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으면 그 기술은 온기 없는 쇠붙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도자가 되겠다는 분들의 입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문화예술을 꺼냈다. 군수가 되었든 시장이 되었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지역을 문화예술이 숨 쉬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대통령이 먼저 시 한 편을, 소설의 한 문단을, 수필 이야기를 하는 모습 보고 싶다. 먹고 사는데 바쁜 국민을 위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시민을 위로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을 빌려 오지 않더라도 앞으로 대한민국의 먹거리는 문화예술을 입은 물건을 만들지 않으면 시장에서 사장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 말에 고무돼 시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는 상상을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해본다.

김희정 시인(미룸 갤러리 관장) 중도일보 2022-02-02

 

 

개에게서 배우는 행복

태어난 지 달포나 되어 보이는 앙증맞은 시바견 네 마리가 산책하는 사람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어댄다. 짧은 목줄이 불편해 보이건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옆에 있는 어미 개 역시 목줄에 매인 채로 물끄러미 산책객들을 살핀다. 담장에 적힌 글을 보니 분양을 하는 모양이다. 귀엽지만 벌써 늠름한 티가 나는 저런 강아지라면 곧 새로운 주인이 나타날 것이다.

 

울타리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고, 주는 것만 먹어야 하고, 더욱이 곧 강제로 생이별을 경험하게 될 처지인데도 어미 개와 새끼들은 태연하다. 내가 만약 이들의 처지에 있다면 어떠했을까? 새끼를 지켜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어미에 대한 그리움으로 평생을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복수를 다짐하였으리라. 그렇지만 이들은 여전히 꼬리를 흔들며 사람을 반긴다. 분양이 끝나면 이들은 곧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것이고 이제 곧 봄바람과 새싹의 향기를 쫓아 잔디밭을 뛰놀 것이다.

 

사람은 이들과 무엇이 다를까? 왜 사람은 월등히 나은 환경에서도 행복하지 못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존을 바탕으로 진화한 다른 동물과 달리 고차원 의식을 발달시키는 방향으로 차별화하여 진화하였고, 그 결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은 현재의 순간을 과거의 기억으로 반추하고 그렇게 재생된 사태를 미래에 귀속시킨다.

 

인간은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고행복해하기도 하지만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앞서 걱정한다. 인간은 타자를 구분하고, 가까운 것과 먼 것, 양의 많고 적음과 질의 정도를 계산한다. 그리고 자신을 그러한 세상 가운데 위치시켜 우월감과 열등의식을 느끼며 분노하고 좌절한다. 사람은 고차원의식을 발달시킴으로써 지혜를 획득하였지만, 현재의 순간과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을 상실함으로써 행복을 맞바꾸어 버렸다.

 

의식 또는 생각은 언어로 표출된다. 어류는 약 10~15, 조류는 15~25, 포유류는 25~45개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은 어떨까? 2017년 타임지에 의하면 영어 단어의 수가 100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문장이 단어의 조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단어로 만들어질 수 있는 문장의 수는 실로 천문학적이다. 생각의 양이 이처럼 광대하다는 사실은 사람이 그만큼 세계를 잘게 쪼개어 개념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며 시간과 공간, 곧 세계 속에 주어진 사물들을 범주화하는 능력을 선험적으로 갖고 태어난다고 하였다. 달리 말하면 구분하고 분별하는 특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불교와 기독교, 도가의 성인들은 분별심을 깨트려야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의 제법무아유식무경이 그러하고, 날마다 자신을 비우라는 노자의 위도일손이 그러하다. 121일 틱낫한 스님께서 입적하셨다. 행복해지려면 생각을 멈추라는 스님의 일생의 가르침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날 일은 그날에 족하다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하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기억하고 미래를 염려함은 시간을 인지하는 우리의 한계성 때문이다. ‘나 아닌 것을 구분하고 사물에 경계선을 짓는 행위는 공간을 쪼개는 우리의 태생적인 습성에 기인한다.

 

본질적 한계를 벗어나야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우주 자연의 일부이며, ‘나 아닌 것의 또 다른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 분리와 경계 짓기, 이분법적인 사고로 과학의 진전을 이룰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행복은 없다. 너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가 될 때, 저 하늘에 일렁이는 구름과 빗줄기 속에서 나를 만날 때 행복은 거기에 있다. 지금의 순간이 오롯이 나의 전부일 때 행복이 찾아온다. 개의 순수함은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 사람과 견주어 턱없이 낮은 지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분별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생각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를 사는 그들에게서 행복을 배운다.

손광락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뉴스민 2022-02-02

 

문재인의 어두운 유산, 윤석열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등 사회 각계 원로들은 지난달 28반역사적·반민주적 세력이 시대를 전복하려 들고 있다“2017 촛불시민이 다시 나서서 투표로 지켜내야 한다고 했다. 사진은 2017218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모습.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등 민주개혁정부를 염원하는 원로시민모임 인사 130명은 설 연휴가 시작되는 지난달 28반역사적·반민주적 세력이 시대를 전복하려 들고 있다한국 민주주의의 오늘이 있도록 헌신한 2017 촛불시민이 다시 나서서 투표로 지켜내야 한다고 했다. 대선이 30여일 남았는데,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본인·부인·장모 의혹에도 여전히 강세다. 걱정이 태산 같을 것이다.

 

사실 촛불시민이 윤석열 후보를 안 찍을 이유를 찾는다면 이미 차고 넘친다. 그러나 2030 남녀 갈라치기, 중국 혐오 부추기기, 남북대결주의 등 그의 시대착오적 인식과 언행, ‘여성가족부 폐지’ ‘사드 추가 배치처럼 몇 글자로 뜻을 밝히는 단순함에도 그의 지지율이 유지되는 건 정권교체 열망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지난 5년은 아쉽고, 안타깝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국정농단 세력을 심판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적자인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권을 맡겼지만 실망은 깊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취임사처럼 불평등과 불공정 해소를 기대했다. 하지만 성적표는 초라하다. 투기세력에 패배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부동산 정책은 문재인 정부 최대의 망작이 됐다.

 

정치 개혁도 내세울 게 없다. 선거제도 개혁은 배신의 상징이 됐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하려 보수 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었을 때 문 대통령과 민주당은 맞서지 않고, 되레 그 대열에 합류하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진보 진영의 파이를 함께 키워야 할 정의당의 뒤통수를 쳤고, 심상정 대표를 비롯한 정의당 지도부를 물정 모르는 무능 집단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4·15 총선에서 민주당은 180석을 얻었지만, 케이(K)방역의 성공신화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로또 당첨에 버금가는 압승을 거뒀지만, 그 뒤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민주당 소속 단체장의 성폭력으로 서울시장, 부산시장 재보궐선거가 치러졌지만 민주당은 당헌·당규를 바꿔 후보를 냈다. 이번에도 구실을 내걸어 정당화했다. 이제 와서 송영길 대표가 서울 종로 등 민주당이 유발한 3개 국회의원 재보선 지역에 무공천을 약속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속된 말로 쫄리니까, 마지못해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게도 구럭도 다 잃은 뒤늦은 행동이다.

 

문 대통령이 약속한 광화문 시대는 또 어떤가. 결국 윤석열 후보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취임 첫날부터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집무를 시작하겠다고 다시 공약한다. 대선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각설이 공약이 된 느낌이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 지지율이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높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레임덕이 없는 대통령이라는 허울 좋은 미망에 사로잡혀 있기보다는 절망한 내일 없는 젊은 세대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원로시민모임의 지적을 깊이 새겨야 한다.

윤석열 후보는 우리 민주당 정부의 어두운 유산입니다. 우리의 오만과 내로남불의 반사효과입니다.’ 송영길 대표의 이런 고백이 그나마 엄정한 진단이다. 어두운 유산이 최고권력을 쥐고,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되려 한다. 만약 현실화한다면 검찰개혁을 소명으로 삼았던 촛불정부 최악의 아이러니가 될 것이다. 그를 검찰총장으로 초고속 부양한 문 대통령의 과오로 기록할 수밖에 없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최근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문재인과 민주당 처음부터 이 사회를 제대로 바꿀 청사진과 준비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국힘, 수구세력에 의해 심판받아서는 안 됩니다. 문재인 싫다고 상황에 냉소하면서 수구세력의 쿠데타에 동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대선의 시대정신? 매우 안타깝지만 그런 거 논할 단계 지났습니다. 쿠데타 막아야 합니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쿠데타로 보는 그의 시각엔 논란이 따를 것이다. 쿠데타라 할지라도 그것을 막기 위해선 국민을 먼저 설득해야 한다. 원로들의 요구처럼 문재인 대통령의 처절한 사과와 반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재명 후보는 왜 이재명이어야 하는지 또렷하게 드러내야 한다. “막힘없이 말은 잘하는데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들, “개천 용이라는데 노무현처럼 개천 냄새가 안 나고 기득권이 된 것 같다고 말하는 촛불시민이 있다는 걸 이 후보는 뼈아프게 생각해야 한다./ 신승근 | 정치에디터 한겨레 2022-02-02

 

 

여가부 폐지, 윤석열이 꿈꾸는 세상은 뭔가

그래서 여성가족부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달 7일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일곱 글자를 올리며 젠더 이슈를 핫 이슈로 끌어올린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암호에 가까운 일곱 글자, 공약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한 달이 되도록 진지한 후속 논의나 설명은 없다. 원희룡 국민의힘 선대본부 정책본부장은 최근 일단 해체부터 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125일 세계일보 인터뷰)고 밝혔다. 무책임하다. 나머지 주요 후보들은 모두 초기 입장을 견지한 예측 가능한 방향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여가부를 ()평등가족부로 바꾸고 일부 기능을 조정하는 방안을,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성평등인권부로 바꾸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여가부를 성평등부로 개편하고 역할과 권한 강화를 약속했다.

 

여성가족부는 2001년 김대중 정부에서 출범했다. 200016대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여성 정책 공약을 내놓던 터였다.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도 여성부 신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여가부 출범 뒤엔 기혼여성노동자의 급증에 따라 양육과 돌봄의 문제를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거센 요구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저출생 문제까지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여가부는 성매매방지법 제정, 호주제 폐지, 모성보호 3법 도입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보완 등 굵직한 일들에 중요 역할을 했다.

 

2022년 여가부 예산은 14650억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0.24%에 불과하다. “여성만을 위한 부처” “남녀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일지만, 여가부 예산의 61.9%(9063억원)는 아동양육비 등 한부모 가족과 1인 가구 지원, 아이돌봄 서비스 등 남녀 구분 없는 가족 관련 정책에 쓰인다. 그다음으로 많은 예산(18.5%, 2716억원)은 위기청소년, 학교 밖 청소년 등을 지원하는 청소년 관련 사업에 돌아간다. ‘여성·성평등예산은 7.2%(1055억원). 이 중 상당 부분(737억원)은 경력단절여성 지원에 투입된다. 일각에선 업무 중첩과 종합성을 고려해 여가부의 역할을 보건복지부나 교육부, 고용노동부 등 다른 부처로 나누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각 부처로 가면 부처 고유업무에 여가부의 기존 업무가 밀릴 수밖에 없다. 모두의 책임은 아무의 책임도 아니게 된다.

 

20205월 기준, 전 세계 97개국에 여성·성평등관련 장관급 부처가 있다. 다양성과 성평등 관점은 세계적으로도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여러모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한국의 최근 안티 페미니즘은 선진국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미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지난 24일 자신이 진행하는 CNN방송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놀라운 반페미니스트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 그는 선진국 중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크고 상장사 여성 임원 비율이 5%에 불과한 나라에서 젊은 남성들의 반여성주의 운동과, 이들의 환심을 사려는 우파 정치인들의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을 전하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다시 국민의힘과 윤석열로 돌아가보자. 윤 후보는 지난해 10월 여가부를 양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겠다고 약속했다. 페미니스트 정치인 신지예씨를 영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달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 봉합 직후 여가부 폐지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입장으로 급선회했다. 여가부 폐지 이후의 대안은 저출생 대책에 주력한 인구가족부쯤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조각조각 나오고 있는 공약들도 출산과 보육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성을 저출산 극복의 도구로 삼았다는 비판을 받은 대한민국 출산지도파동, 젠더 관점이 결여된 국가주의 출산장려 정책이 얼마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었는지 잊은 걸까.

 

후보도, 정당도 입장이 바뀔 순 있다. 그러나 최소한 충분한 설명과 설득이 따라야 한다. 20년 넘게 지속됐던 정부 부처를 없애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국제적 추세를 거스르는 움직임이다. 급변하는 사회, 다양화되는 가족 상황에서, 사회 전반의 성평등 요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여가부의 역할은 향후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걸린 현안이다. 장난 같은 일곱 글자와 맥락 없는 파편적 공약으로 다뤄선 안 되는 문제다. 그런데, 아직껏 여가부를 왜 폐지하자는 건지, 어떤 대안, 어떤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그렇게 만만한가. 이런 무책임, 이런 오만함이 없다.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경향 : 2022.02.03.

 

 

 

선제타격과 전면전

대한민국 헌법 제4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헌법은 우리에게 평화통일을 명령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규범인 헌법에 따라 우리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해야 한다. 국민의 힘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연일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이 우리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면 선제적으로 타격하여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안보의 위협, 즉 우리의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것을 지키겠다는 뜻일 테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긴다. 선제타격 그 후엔?

 

윤 후보는 구체적으로 선제타격을 바로 한다는 것이 아니다”, “침략적 도발 행위를 할 것이 확실시될 때에, 우리가 적의 미사일 발사기지와 그 도발을 지시한 지휘부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능력이 있고, 그럴 의지가 있다고 천명하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에 매우 중요한 우리의 애티튜드라고 저는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선제타격의 대상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기지와 군 지휘부다. 미사일 기지와 군 지휘부에 대한 선제타격이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지휘부를 타격당한 북한은 어떠한 대응을 할까?

 

대남 전에 있어 북한의 주력 무기는 미사일이 아니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꾸준히 장사정포를 개발해 왔고 실전에 배치했다. 휴전선에 배치된 장사정포는 대부분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을 겨냥하고 있다. 많은 수의 장사정포는 선제타격으로 모두 무력화시킬 수도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적 자본 대부분은 수도권에 집중되어있다. 많은 군사전문가는 한반도 전쟁 시 초기 북한의 대응은 엄청난 양의 장사정포를 이용한 수도권의 집중타격이라 예상한다. 사실상 전면전의 발발이다. 이는 헌법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평화통일에 전면 배치되는 상황이다.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은 전면전을 감수해야 하는 행위다. 윤 후보 역시 선제타격은 전면전의 시작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침략적 도발 행위를 할 것이 확실시될 때라는 가정이 그것이다. 북한에 의한 남침이 확실시될 때, 즉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발생할 것이 확실시될 때 선제타격을 감행하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전면전이 발생할 것이라면 내가 먼저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침략적 도발 행위를 할 것이 확실시될 때는 알 수 없다. 남성 우월주의적 발언이지만 총도 잡아본 적 없는 윤 후보가 그것을 알 리 만무하다.

 

전 세계에서 상대국 군 지휘부에 대한 정밀타격을 시행하는 국가는 미국이 유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지난 2020년 이라크 공항에서 드론을 사용하여 이란의 군사령관인 솔레이마니를 사살한 것이 대표적이다. 타군 사령관에 대한 사살의 정당성은 차치해 두더라도 솔레이마니 사살 후 이란은 보복을 천명하고 미군이 주둔한 이라크 아인 알아사드 공군기지 등에 지대지 탄도미사일 수십 발을 발사했다. 명실상부 세계 최대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마저도 타국 군지휘부에 대한 타격은 보복공격을 감수해야 하는 행동이다. 이를 윤 후보가 알기는 하는지 의문이다. 안다면 선제타격은 입에 올릴 수 없을 것이다.

김광민 변호사 경기신문 2022.02.03.

 

 

우크라이나와 한국 얼마나 다른가

2차 대전 직후부터 서유럽과 미국에 가장 큰 근심거리는 소련의 침공 가능성이었다. 붉은 군대가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면 속수무책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 전술 핵무기를 개발해 서유럽에 배치한 것도 막강한 소련 지상군과 탱크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그 수십년 공포를 끝내는 냉전의 종식에 승자 쪽에선 역사의 종말이라는 환호성이 터졌다. 이제 러시아가 요란한 복귀를 알리니 역사의 부활이라고 해야 하나.

 

세계를 뒤흔드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국에는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 보자. 지리적으로 먼 두 나라를 쉽게 비유하는 게 섣부른 측면은 있다. 두 나라는 경제력 등 국력 차이가 크다. 우크라이나는 국경을 맞댄 러시아의 침략 위협을 받지만, 한국이 당면한 큰 위협은 북핵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에 맞서는 중국한테 경우에 따라 견제를 받는 정도다. -중은 공식적으로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서유럽의 지원을 받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 아니라서 집단안전보장을 기대할 수 없다. 반면 한국은 미국과 군사동맹 관계다.

 

그러나 역시 지정학적으로 취약한 한국으로선 눈여겨야 할 점들이 있다. 우선 강대국 간 노골적인 국제정치 방식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난 한 세대 동안 미국의 일극 체제나 테러와의 전쟁 등에 가려져 있던 거대한 갈등과 모순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도 그런 차원이다.

 

강대국들이 역사적 연고권을 들먹이는 것도 이웃나라엔 억지스럽고 불쾌한 일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발표한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의 역사적 통합성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두 나라 국민들이 한 민족이라고 했다. 1천여년 전 역사까지 동원한 주장은 강제 합병을 합리화하려는 계략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푸틴의 주장은 2017년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더라고 한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트럼프가 중국 지도자 말을 그대로 옮겼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비슷한 말을 듣지 않았나 하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묘한 양상을 보면 우리 편이 정말 우리 편인가라는 딜레마도 떠오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쪽에선 러시아가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것처럼 위기의식을 한껏 고취시키고 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정부는 미국이 필요 이상으로 사이렌을 울린다며 자제를 요구한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1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자리에서 러시아군이 침공하면 유혈 저항을 만날 테고 러시아 어머니들은 (아들을 전선에 보낸 것을) 후회할 것이라는 자극적인 발언을 내놨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침착하자는데 돕겠다는 나라들이 강경 드라이브를 주도하니까 체스판의 졸이라는 말이 나온다. 미국 등의 주목적이 약소국 보호보다는 러시아의 부상 억제에 있고, 우크라이나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태를 몰고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미국이 중국의 부상이나 북핵 대응 과정에서도 한국을 체스판의 졸로 쓰려 한다면 동맹의 의무에 소홀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에서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북의 공세적 태도에 트럼프가 화염과 분노로 대응하겠다고 해 전쟁위기설이 고개를 들던 때였다. 문 대통령의 말은 졸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유라시아 질서 변동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래저래 주시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한겨레 2022.02.03.

 

 

윤석열 후보의 위험한 혐오 선동

설연휴가 한창이던 지난 일요일. 윤석열 후보는 국민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외국인 건강보험 문제 해결이라는 새로운 공약을 발표했다. 그는 외국인 직장가입자 중 다수 피부양자 등록 상위 10인은 무려 7~10명을 등록했다라고 지적하며 외국인 건강보험 급여 지급 상위 10명 중 8명은 중국이며, 이 중 6명이 피부양자라고 했다. 또한 어떤 중국인은 피부양자 자격으로 약 33억원의 건보급여를 받았지만, 10%만 본인이 부담했다며 우리 국민이 느끼는 불공정과 허탈감을 해소할 방안을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했다. 국민이 애써 만든 건강보험 체계가 중국인들의 숟가락 얹기때문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바로잡겠다는 거다.

 

윤 후보는 대놓고 중국인 등 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비난했지만, 실제 내용은 왜곡하거나 극단적으로 과장했다. 먼저 외국인 보험가입자의 피부양자가 많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201912월 기준으로 내국인 직장 가입자는 1812만명에 피부양자가 1910만명으로 1인당 피부양자 수는 1.05명이다. 외국인 직장 가입자는 51만명에 피부양자가 20만명으로 1인당 피부양자는 0.39명이다. 외국인 피부양자가 내국인보다 2.7배나 적다. 그런데 피부양자를 많이 등록한 10명만 꼽아서 일반적인 사실인 것처럼 왜곡했다.

 

중국인을 꼽은 것도 지나친 과장이다. 국내 거주 외국인 중에서 절반쯤은 예전에 조선족이라 부르던 중국 교포를 포함한 중국인들이다. 다른 어느나라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게다가 중국 교포들은 50대 이상이 많기에 병원 진료가 잦을 수밖에 없다. 50세 이상 전체 외국인에서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65%나 된다. 건강보험 지급 순위에서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혈우병이라는 희소병을 앓아 많은 급여를 지급했던 사례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면서 외국인이 건강보험 재정을 축내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사실은 온통 거꾸로다. 외국인 처지에선 건강보험 가입이 불리하기 짝이 없다. 내국인보다 더 많은 보험금을 내야 하고 자격도 까다롭게 따진다. 내국인을 상대로 한 건강보험은 늘 적자투성이지만, 외국인 대상 건강보험은 언제나 엄청난 흑자를 기록했다. 흑자 폭은 20197월부터 외국인 건강보험 의무가입제도를 시행하면서 부쩍 늘어났다. 2018년엔 2251억원이던 흑자가 2020년엔 5715억원으로 늘었다. 2020년 한 해 동안 외국인들은 14915억원의 보험료를 냈지만, 이들에게 지급한 급여는 9200억원뿐이었다. 2015년부터 6년 동안에만 외국인 상대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거둔 흑자가 2조원이 넘는다. 엄청나게 수지맞는 장사를 한 셈이다.

 

2020년 국민건강보험의 적자는 2531억원이었다. 외국인이 아니었다면, 적자는 9000억원대가 되었을 거다. 외국인의 곤궁한 처지를 악용해 떼돈을 벌었다고, 내국인에게 쓰는 급여비용을 외국인에게 떠넘긴 셈이다. 숟가락을 얹은 건, 외국인이 아니라 내국인이라고 비난해도 뭐라 변명할 말이 없다.

 

사실 윤 후보가 제기한 문제는 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던 사안이라 국민건강보험공단 홈페이지나 기사 검색만으로 간단하게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의 적자를 외국인들이 메워주고 있는데도, 아주 극단적인 단 하나의 사례, 또는 10명의 사례만을 꼽아서 국내 거주 중국인들 때문에 우리 국민이 불공정한 상황에서 불이익을 당해 허탈하다고 선동을 했다.

중국 교포를 포함한 국내 거주 중국인 대다수는 내국인이 피하는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에 종사하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도 못하며 살고 있다. 게다가 외국인이란 이유만으로 건강보험료도 훨씬 많이 내야 하는데, 거꾸로 유력 대선 후보에 의해 이런 모략까지 당하고 있다.

 

윤석열 후보의 이번 공약은 누군가를 미워하라고 손가락질하며 나머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뻔한 행태다. 그 누군가는 매번 약자 또는 소수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약한 사람들을 골라 갈라치기를 하면서 혐오를 선동하는 거다. 고전적인 파시스트 수법이다. 문제는 이런 메시지가 반복적이라는 거다. 여성가족부 해체, 멸공 놀이, 죽창가 운운하는 것도 비슷한 차원이다. 선거전략으로 일부러 그러는 거다. 2022년 대선에서 인종차별적 혐오를 선동하는 후보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은 이렇게 만만하지 않다.

 

아무리 대선 승리가 중요해도 거짓말을 반복하며 반인권적 인종차별을 부추겨선 안 된다. 정말이지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경향: 2022.02.04

 

 

누가 집권해도 후폭풍, 칼날 위에 선 민주주의

5년 후에도 똑같은 대선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대선이 불과 30여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진영대결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제 대선 후를 상상해봐야 한다. 현재의 추세로 볼 때 이재명 후보나 윤석열 후보 중 한 명이 당선될 확률이 높다. 어떤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정국은 임기 시작부터 냉각될 공산이 크다.

 

야당이 집권하면 국회는 여소야대의 상황을 맞게 된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여소야대 정국은 익숙한 구도이지만 분점정부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력을 나눠서 행사하는 경우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많았다. 그렇지만 행정권력과 입법권력, 지방권력을 어느 한 정당이 독점하는 것 역시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용이하게 할 위험성을 내장하고 있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 네거티브 공방이 치열하고 정당 간 적대의 정도가 극심한 이번 선거의 후폭풍은 상상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정권재창출과 정권심판론 중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도 선거 이후에도 여야의 극한 대결이 연장된다면 정치는 존재할 이유조차 없다. 비록 대선이 한 달 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정치제도화와 개혁 이슈가 대선 담론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 86세대 용퇴론과 동일 지역구 4선 이상 금지 등의 정치관련 이슈를 대선의제로 꺼내들었지만 이슈의 파괴력은 전무하고 오히려 진정성조차 의심받는 이벤트로 표를 얻으려 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윤미향, 이상직, 박덕흠 의원 등에 대한 윤리위 제명 의지를 천명했지만 진작 이뤄졌어야 할 사안을 무슨 생색내듯이 발표한 태도도 그렇고 실천이 될 지도 불투명하기에 전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다.

 

선거에서 대결과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권력을 두고 다투는 데에 네거티브 역시 마냥 적대시할 것도 아니다. 의혹 검증과 네거티브의 경계가 모호한 본질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권력의 정점을 차지한 세력이 야당과 권력을 분점할 수 없거나 권력을 분할해도 제한적이고 형식적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데에 있다. 정당구조가 다당제의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적대적 양당 구조 하에서 타협과 절충이 의회의 중심문화로 자리잡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권력구조 개편 자체가 시민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대선 후보들이 매크로한 방향 설정과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에 대한 의제를 쟁점화하기보다 지역 맞춤형 공약과 세대와 지역별로 모순되는 사안들을 열거하듯이 발표하고 있다. 이들에게 한 국가의 통치를 맡을 정치인으로서의 정치철학과 리더십을 발견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통치체제이다. 시민이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통치를 담당할 대표를 뽑는 통치의 유형이다. 따라서 통치자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대표와 원리와 책임성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제는 의회가 중심이 되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이 시민에 대해 책임지는 데에 취약성을 드러낸다. 미국의 대통령제는 강력한 의회와 철저히 독립적인 사법부의 존재가 대통령제의 많은 문제점을 보완하고 견제와 균형이라는 기본 원리에 충실하다. 그러한 미국의 민주주의도 대통령제가 갖는 승자독식의 한계 때문에 점점 오염되고 있다. 하물며 한국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들의 대통령제에 대한 막연한 선호와 무능했던 장면 정부의 내각제에 대한 부정적 경험 때문에 내각제에 대한 선호가 낮은 편이다. 내각제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는 것처럼 인식될 정도다. 더구나 이번 대선에서는 권력구조 논의 자체가 이슈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의회가 중심이 되지 못하고 여당이 청와대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구조가 혁파되지 않으면 5년 후 대선도 20대 대선과 판박이가 될 것이다. 명실상부한 다당제의 대표 체계가 확립되고 연립정부적 성격을 지닌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면 한국 권력의 운용 방식은 변할 수 없으며 한국 민주주의는 항상 위기의 칼날에 서게 될 것이다.

 

정치공학적 공동정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군소후보들이 양대 후보의 틈새에서 총리 등의 관직 등을 매개로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것은 연립정부와는 거리가 멀다. 진정한 연대를 기본으로 하는 연합정치는 지금의 권력투쟁 방식에서는 불가능하다.

 

고소영, 성시경, 캠코더 인사는 이번 대선 후에는 사라질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러한 코드 인사의 수혜자가 되려고 수많은 정치권과 주변 인사들이 선거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정치와 역사에 대한 혜안과 통찰이 없는 후보들의 경쟁으로 점철되는 이러한 대선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가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 프레시안 2022.02.04.

 

 

은행들의 성과급

성과급은 말 그대로 생산량과 성과에 따라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임금이다. 추가 지불을 미끼 삼아 생산성 증대를 유도하려는 자본가의 착취 의도가 들어 있다. 그럼에도 직장인들은 잠정 실적이 나오는 연말 성과급에 큰 기대를 한다. 사실 성과급은 개인의 능력보다 기업의 실적에 따라 규모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호황을 누린 업종의 기업들은 거액의 성과급을 지급한다. 정유업계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월 기본급의 110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지급했다. 2020년 영업이익 적자에서 지난해 17656억원 흑자로 돌아선 것에 대한 보상이다. 에쓰오일이나 GS칼텍스는 성과급 규모를 확정하지 않았는데 1400%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해 에쓰오일과 GS칼텍스는 SK이노베이션보다 영업이익을 더 많이 냈다. 이 회사 직원들은 연봉만큼을 성과급으로 받는 셈이다.

 

지난해 호황을 누린 곳을 따지자면 은행을 빼놓을 수 없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금융 등 4대 금융지주의 지난해 순이익 합산 전망치는 전년보다 33% 급증한 144000억원에 이른다. 핵심 자회사인 은행의 이자이익이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은행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기본급 300%+α를 성과급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은행의 이익 증가는 은행의 노력보다 영업환경 변화 덕분이기 때문이다. 가계와 소상공인 대출이 늘고, 기준금리 인상으로 예금·대출 금리차가 확대된 결과이다. 정부 허가를 받은 이자 장사로 번 돈을 자기들 배불리기에만 쓴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성과급 지급은 일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초 중소기업 800곳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37.6%만이 설 상여금 지급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상여금 규모도 1인당 평균 447000원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닐 수 있는 직장이라도 있다면 다행이다. 지난해 구직단념자는 628000명으로 2014년 이후 가장 많았다. 6개월 이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장기 실업자는 128000명인데, 이 중 절반은 2030 청년이다. 은행들이 지난해 거둔 초과이익을 청년 구직자와 영세 소상공인을 지원하는 기금에 내놓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안호기 논설위원 경향 : 2022.02.06

 

 

일곱 정권과 2030의 정치효능감

기명칼럼을 쓴지 옹근 20년이 되었을 때 조용히 접었다. 2019년 가을, ‘서초동 촛불을 보며 내가 써온 칼럼들의 효능감에 회의가 들었다. 2021년 오월, 다시 칼럼을 열었다. 내 영혼의 빛이자 빚인 오월의 민중 영전에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전두환 체제에 마침표를 찍고 6공화국을 일궈낸 대한민국은 어느새 일곱 정권을 거쳤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권이다. 어떤가. 그 일곱 정권에서 민중의 삶은 나아졌는가? 부익부빈익빈은 사라졌는가? 아니, 적어도 줄어들었는가?

 

새삼 비장감에 젖은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설날에 나온 통계청 발표다. 월평균 가구소득 600만 원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91%가 자신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이하로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월평균 소득 구간이 가장 높은데도 그렇다. 둘째, 대선 의제다. 한 달 전에 쓴 칼럼에서 나는 자살률 1, 출산율 꼴찌, 산업재해 1, 비정규직 불평등 통계를 어느 후보가 어떻게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지 언론이 대선 의제로 설정하길 촉구하며 그것이 정권교체의 참뜻이라고 제안했다.

가계수지. 연합뉴스

 

하지만 대선이 다가오는데도 그 문제를 해결할 정책들은 신문과 방송에 부각되지 않는다. 가장 높은 구간의 소득을 누리면서 자신을 중하층으로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언론인들이 있다는 의심마저 든다. KBS 수신료 인상 논란 때 평균 연봉 1억 원이라는 비판 여론이 일자 능력 되면 입사하라고 버젓이 거드름 피운 직원을 떠올린다면 과민일까.

 

우리 모두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세계불평등연구소의 보고서(2022)를 찬찬히 새겨볼 일이다. 대한민국 하위 50%의 자산은 평균 2700만원이다. 자살률 1, 출산율 꼴찌의 나라답게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2%(664만 가구)에 이른다. 더구나 무직 비율이 높다.

 

단순한 현실이 아니다. 세계불평등보고서가 분석했듯이 1990년 이후 하위 50%의 점유율은21%에서 16% 미만으로 떨어졌다. 반면에 대한민국 상위 10%의 점유율은 35%에서 45%로 늘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에 이르는 일곱 정권을 거치며 부익부빈익빈이 되레 깊어진 것이다.

 

그렇다. 정권을 주고받았지만 민중 대다수에게 정치효능감은 없다. 두 거대 양당이 정권을 주고받을 때, ‘정치효능감을 한껏 만끽한 자들은 대통령의 측근이나 캠프 인사, 두 정당의 국회의원들과 친분을 쌓은 이들 뿐이다. 상층 10%나 월 소득 600만 원 이상은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재산을 늘린다.

 

대다수 민중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일해도 부자들과의 거리가 좁혀지기는커녕 멀어졌다. 2030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부모 절대 다수가 민중이다. 더러 부모가 지역 연고에 따라 투표를 하더라도 각자도생의 살벌한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고 외려 심해졌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2030세대가 쿠데타정당의 후예들 못지않게 민주당에 등 돌리는 합리적 이유다. 물론 두 정당 밖에 진보정당들이 있다. 하지만 저마다 노선이 다르다며 갈라져 있다. 국회에 의석을 가진 정의당은 양대 정당도 하지 않는 대선 후보직 독점이 이어지고 있다. 당원들의 투표 결과라지만, 경쟁 상대가 될 만한 사람들을 당 차원이든, 몇몇 정파 차원이든 내내 배제해온 것은 아닌지 성찰해볼 일이다. 노동운동에 평생을 바친 헌신적 당원들보다 박근혜 추천으로 국회의원을 한 이주민을 앞세운 비례대표 명단은 심상정 지지율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다. 지금부터라도 대선 후보들이 2030들 앞에 작은 사탕들을 나눠주려고 다투기보다 각자도생의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지 철학과 비전을 보여주기 바란다. 일곱 정권이나 가도록 민중이 도통 느끼지 못한 정치효능감 앞에 겸손하되 결연한 자세를 보고 싶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2.02.07.

 

'트럼프 바이러스'로 정권 잡겠다는 건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에서 패배하고 퇴장할 당시 많은 미국 언론은 "트럼피즘(Trumpism)이 앞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럼피즘이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독특한 정치 전략, 그리고 이로 인해 형성된 정치·사회적 현상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트럼피즘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편 가르기, 인종주의, 혐오와 배제, 반엘리트주의, 파시즘, 포퓰리즘, 반세계화, 반공주의, 우익대중주의, 남성우월주의, 반지성주의, 동성애 혐오 등 여러 개념이 혼재돼 있다. 사실과 거짓 뒤집기, 전문가 무시, 막말과 선동 등의 행동 양태도 내포한다. 비합리적이면서도 무정형, 그러면서도 막강한 폭력성의 에너지가 '트럼피즘'이란 단어에는 뭉뚱그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유럽의 극우 세력이 더 발호하면서 "트럼피즘이란 세균이 포퓰리즘의 얼굴로 지구를 덮고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트럼프 바이러스'가 태평양 건너 한국 정치에도 상륙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잇달아 발표한 각종 공약과 선거운동 양태가 그렇다. '여성가족부 폐지', '달파멸콩' '사드 추가 배치', '건강보험 외국인 숟가락론' . 원조 바이러스와는 다른 '한국형 변이 바이러스'지만, 특정 계층의 분노를 혐오로 돌려서 정치적으로 악용한다는 점에서 트럼피즘과 근본적으로 겹친다.

 

반페미니즘은 트럼피즘이 출현하기 전부터 형성된 유럽 극우주의의 대표적 특성이다. 유럽 극우는 여성을 약한 존재로 규정해 차별화하는 기존의 '온정적 성차별주의'에서 한 걸음 나아가 최근에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려 한다고 보는 '적대적 성차별주의'가 더욱 노골화하는 추세인데, 국민의힘과 윤 후보도 여기에 따르는 모습이다. '달파멸콩, 멸공 자유'는 극단적 반공주의이며, 사드 추가 배치와 건강보험 숟가락론은 중국에 대한 혐오 부추기기로 트럼피즘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행동 양태의 측면에서 봐도 그렇다. 사실의 왜곡과 부풀리기, 막말과 선동은 트럼피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외국인 건강보험 특혜론의 경우,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의 자료를 보면 오히려 외국인 대상 건강보험 흑자가 계속 늘고 있어 사실 관계가 엉터리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도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1천 발 이상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굳이 값비싼 중장거리 미사일로 남한 수도권을 향해 고각 발사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분석이다. 그런데도 윤 후보는 우리 국민이 외국인들 때문에 건강보험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선동하고, 사드 배치만이 유일한 안보 전략이라고 우긴다.

 

트럼프는 여러 가지 상식에 어긋나는 무식함으로 구설에 자주 올랐는데 윤 후보도 이에 못지않다. 최근에는 'RE100'(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제 캠페인) 용어 자체를 모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 지도자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고 실행 계획을 고민해야 할 단어인데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모를 수도 있지 않나. 설명해 주는 게 예의"라고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 "무식함은 미덕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6년 럿거스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를 향해 날린 일갈이다.

 

윤 후보의 '트럼프 따라하기'는 원조 트럼피즘보다 훨씬 더 나쁜 측면도 있다. 트럼피즘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좌우 엘리트에 대한 불신 등 반엘리트주의 속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지금 윤 후보의 정치 행보는 우리 사회 기득권층과 우파 엘리트들의 연합작전이다. 검찰을 비롯해 개혁 대상인 세력이 권토중래를 꿈꾸며 일제히 총궐기한 모양새다.

 

트럼프의 행태에 대해 미국의 언론은 <폭스 뉴스>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판적이었으나 한국의 대다수 언론은 윤 후보의 가장 강력한 지원 세력이다. 윤 후보를 검찰총장 시절부터 '인큐베이팅'해서 오늘의 대선 주자를 만든 게 바로 언론이다. 그러니 윤 후보의 트럼프 따라하기를 꾸짖을 리 없다. 혐오와 차별을 동원한 선거운동을 묵인·동조하는 차원을 넘어 은근히 부추기기까지 한다. 반페미니즘 선거 전략에 대해 "20대 남성을 겨냥한 선거 전략이 효험을 보고 있다"고 칭찬하는 식이다.

 

윤 후보의 '혐중 정서 부추기기'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경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위험하다. 트럼프의 반중 정책은 중국을 압박하고 견제하려는 세계 패권 전략의 일환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중국과 무역전쟁을 불사할 정도의 ''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중 관계는 미-중 관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외교적, 경제적으로 뒷감당할 자신도 없이 표를 겨냥해 무턱대고 '혐중 정서'를 부추기는 게 과연 한 국가를 책임지겠다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인지 참으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피즘이 미국 사회에 남긴 어두운 그림자를 다시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국이 그토록 자랑해온 민주주의가 뿌리부터 흔들렸다. 트럼프 시대에 창궐한 분열과 갈등의 악령은 앞으로도 계속 미국을 괴롭힐 것이다. 한 미국 평론가는 "트럼프의 온갖 실패와 거짓 주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권자들이 그를 지지했다는 '정치적 컬트'가 트럼프가 남긴 가장 해로운 유산"이라고 짚었다.

 

지금 이 땅에도 이미 '정치적 컬트'가 펼쳐지고 있다. 상식에 어긋나고 시대에 역행하는 언동에 오히려 일부 세력의 환호가 쏟아진다. '혐오와 배제'의 선거 전략이 활개를 치며 지지율을 끌어올린다. 민주주의의 후퇴, 분열과 갈등의 심화가 불을 보듯 뻔한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병리 현상에서 벗어날 '트럼피즘 바이러스 백신'은 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김종구 (언론인) | 2022.02.07.

 

 

윤석열의 혐오 세일즈’, 그리고 우익포퓰리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이하 윤석열)TV토론에서 다른 후보를 바라볼 때 자세를 바꾸지 않고 고개만 돌리는 모습을 보여 지적받았다. 이를 두고 누군가의 제스처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고 쓴 글을 소셜미디어에서 접했다. 공감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은 모르는(혹은 알면서도 못 고치는) 습관이 있게 마련이다. 그 습관은 신체 조건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경우가 많다. 검증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습관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다. 타인의 생각을 읽는 길은 그의 말과 글을 통해서다. 최근 윤석열의 대표적 어록은 국민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외국인 건강보험 문제를 해결하겠다일 터다. 이미 여러 언론이 팩트체크한 바와 같이, 사실과 다르다. 외국인 건보 재정은 흑자다.

 

선거 국면이 본격화된 이후여서 파장이 컸을 뿐,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의 징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사람이 손발 노동으로, 그렇게 해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그건 인도도 안 한다.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다.”(지난해 9) 그는 최근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현장에 가서도 어디 후진국이나 미개한 국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윤석열의 또 다른 어록은 여성가족부 폐지. 그는 성평등 정책 주관 부처를 없애는 대신, 인구감소 문제를 다룰 부처를 만들겠다고 했다. 성범죄 피해자 중 무고죄로 기소된 비율이 0.78%(2019)에 불과한데 성폭력처벌법에 무고죄를 신설하겠다고 했다. 역시 전조는 있었다. 지난해 8페미니즘이 악용돼 남녀 간의 건전한 교제도 막는다고 말했다. 7일자 한국일보 인터뷰에선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고 선언했다. 무지인가 오만인가. 둘 다인가.

 

윤석열의 반외국인·반페미니즘 행보를 두고 20대 남성 표심을 공략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이 많다. 의도엔 관심 없다. 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주목할 뿐이다. 포퓰리즘 연구자인 카스 무데 미국 조지아대 교수가 2019년 펴낸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한국판은 20212월 출간)21세기 우익포퓰리즘의 실체를 이렇게 설명한다.

 

극우는 외국인을 경멸적 용어로 묘사한다. 예를 들어 인도인민당의 아미트 샤는 인도의 방글라데시 이민자들을 침입자‘(인도를 갉아먹는) 흰개미라고 비난했다.”

극우에서 여성은 어머니(또는 예비 어머니)로만 정의된다. 헝가리의 급진우익 총리 오르반 빅토르는 새 헌법에 가족주의를 포함했다. 극우는 전통적 성역할을 촉진하는 정책에는 관대하지만, 임신중절 합법 같은 정책은 반대한다.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단체와 개인에게 공격성을 드러낸다.”

 

외국인을 혐오하고, 여성을 차별하는 행태는 늘 있어왔다. 그럼에도 온라인을 포함한 공적 공간에서 이를 발화하는 일은 암묵적으로 규제돼왔다. 혐오와 차별은 공동체가 함께 지켜온 을 깨뜨리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선을 넘었다. 유력 정치인과 정당의 혐오 세일즈는 위험한 신호를 주고 있다. 수면 아래 잠겨 있던 혐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던 차별이 스멀스멀 공론장으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진지한 토론 주제로서가 아닌, 몇 글자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콘텐츠)이 되어 떠돈다.

 

윤석열은 8일로 예정됐던 한국기자협회 주최 TV토론에 참여하기로 했다가 무산시켰다. 그가 토론에 소극적인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페이스북의 일곱 글자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데, 굳이 2시간 넘게 서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윤석열은 최근 광주에서 내편 네편 가르지 않는 통합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갈라치기 행보에 대한 반성일까. 역시 호남 맞춤형 일 것이다.

 

다시 무데의 책이다. “주류(우익) 정당과 우익포퓰리즘 정당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우익포퓰리즘 정당과 이념은 언론과 경제, 시민사회, 정치권에 의해 용인되고 받아들여진다. 이는 영국의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을 계기로 새 국면에 도달했다.” 아직까지는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주류 후보·정당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한두 발만 더 옮기면 우익포퓰리즘 딱지를 떼기 어려울 것이다.

 

무데의 결론은 이렇다. “극우 정치에 면역력을 가진 나라는 없다. 아직까지 극우 정당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나라들이 있다 해도, 수요 문제라기보다 공급 문제일 뿐이다.”

김민아 논설실장 경향 : 2022.02.07

 

 

필사적 보수, 이대남 결집, 오미크론

여론조사에서 드러나는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 보수 유권자가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이다. 어떻게든 정권교체를 해야만 한다는 결기가 데이터의 흐름에서 여러 차례 읽힌다. 둘째, 이대남의 결집이 강력한 변수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이 두 가지로 거의 다 설명이 된다. 남은 한 달 동안 판을 뒤집을 수도 있는 새 변수는 오미크론이다. 단일화를 비롯해 막판 변수들이 작동하겠지만 게임 체인저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필사적 보수와 결집한 이대남이라는 최대 변수 두 개를 제대로 이해한 유일한 정치인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이다. 그의 정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이준석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옳으냐 그르냐는 도의적 기준이다. 이준석이 맞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맞냐 틀리냐는 전략적 기준이다.

 

정권교체를 위해 필사적인 유권자는 윤석열 지지자의 3분의 1 정도로 보인다.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뭐든 하겠다는 사람들이다. 선거운동 초기 윤 후보의 잇따른 실언과 선거대책위원회 갈등이 불거지자 어쩌면 정권교체를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들은 즉시 대안을 찾기 시작했고, 윤 지지자의 3분의 110~12%포인트 정도가 안철수 후보로 옮겨갔다. 윤석열로 정권교체를 못한다면 안철수로라도 하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선대위 갈등 수습과 함께 선거 캠페인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그렇다면 윤석열로 정권교체를 하는 게 더 확실하지라는 판단을 내리고 상당수가 다시 윤석열 지지로 복귀했다. 그래서 윤석열 지지율은 변동폭이 크다. 안 될 것 같으면 크게 떨어지고 될 것 같으면 크게 오른다.

 

이대남의 결집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는데, 정치판의 주류인 86세대 정치인 중에 이것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인이 30대이면서 제1야당 대표가 됨으로써 86세대가 만든 제도권 정치를 점령한 이준석이 대체 불가능하게 된 이유이다.

 

2019년에 시사IN에 연재되어 큰 주목을 받았던 20대 남자 기획기사는 20대 남성의 무려 25.9%가 안티 페미니즘 전사(戰士)에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안티 페미니즘 성향이 25.9%라는 게 아니라 페미니즘 비슷한 것은 어느 것 하나 용납할 수 없다는 똘똘 뭉친 투사들이 25.9%라는 것이니, 20대 남성에서 그 외연은 훨씬 넓을 것이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86세대 정치인들은 청년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임대주택을 제공한다 하고 선대위 자리를 나눠주고 장관을 시켜준다고 약속하면 될 줄 알았지만, 그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평창 동계올림픽과 조국 사태 때 이들이 공정을 외쳤다고 해서 너도나도 공정이 시대정신이라 했지만 게으르기 짝이 없는 현실 인식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한 달 남은 지금 과연 누가 공정을 말하나.

 

최대 변수 두 개를 합치면? ‘세대포위론이라는 논리적 귀결이 얻어진다. 여야를 막론하고 아무도 비슷한 수준의 큰 전략을 내놓은 바 없다. 선대위 자리를 내던진 이준석이 궁지에 몰릴 때조차 그렇다면 대전략을 내놓으라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같은 논리의 연장선에서 단일화 협상의 전략이 나온다. 필사적인 보수들이 정권교체를 위해 안철수에게 옮겨갔을 때가 그의 협상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복귀하면서 안철수의 카드는 줄어들고 있다. 그는 두 자릿수 득표율 유지에 사력을 다하든가 아니면 별로 얻는 것 없는 단일화에 응해야 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은 오를 때도 내릴 때도 미세하게 움직일 뿐이다. 가장 낮았던 조사에서도 30% 밑으로 간 적은 없고, 가장 높았던 결과도 40% 턱걸이를 했다. 윤석열 지지율이 최저 20%대 중반, 최고 40%대 중반을 찍은 것과는 큰 대조를 보인다. 그의 고민은 지지층 결집이냐 과감한 중도 확장이냐이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는 지지층 결집의 최대치가 40% 전후일 가능성을 말해준다. 흔히 당선 가능한 변곡점이 43%라고 예측하는 것을 감안하면 부족한 수치이다. 과감한 중도 확장은 진정성을 인정받아야 할 텐데, 선대위 해체 수준의 후보의 결단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부터 떠오를 변수는 오미크론이다. 상대적으로 접종률이 낮은 20대에서 확진으로 인해 투표를 못하는 유권자가 많아질 경우, 방역지침 변화와 확진자 폭증으로 정부 책임론이 커질 경우, 투표 못하게 되는 유권자가 너무 많아져서 선거 무효 논란으로 번질 경우 등에 따라 대선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 2022.02.

 

 

생각 없는중도층의 생각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중원에서는 서로 중도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싸움이 치열하다. 두 진영으로 나뉘어 적대적으로 대립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중도층이 갑자기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두 정당의 세력이 비슷하여 백중세를 이룰 때는 중도층이 그 승패를 결정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 외에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팬덤 정치가 점차 힘을 잃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판세를 가늠할 수 없는 혼미한 지금의 상황이 정치인들에게는 불안하고 불편한 시간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거꾸로 건강한 민주주의의 중간 허리인 중도층을 복원할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각 정당이 중도층의 표를 갈구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중도층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중도층으로 확장하거나 적어도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말한 것처럼 이번 대선은 조마조마한 초박빙의 진영 싸움일 수도 있다. “걱정하지 마라. 안 진다는 그의 말은 자신감보다는 오히려 불안감을 내비친다. 적대적으로 분열된 정치문화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우리 편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러난다. 중도층은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이 짙게 깔려 있다.

 

진영논리에 영혼이 잠식된 정치인들은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만이 생각할 줄 알고, 그들과 다른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생각이 있다면 우리 당 후보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한 진영에 속한 사람이 이렇게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은 이렇게 응수한다. 감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천박한 쌍욕을 거리낌 없이 해대는 사람을 어떻게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수 있는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부적격자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상대방을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열광적인 맹신자로 배척하면서 자신만이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내세운다.

 

정치빠, 맹신으로 독재 토양 조성

두 진영의 중간에 서 있는 중도층이 정치적 진지전의 총알받이가 된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는 역동적 상황에서 중간은 결코 안정과 평화의 지대가 아니다. 바로크 시대 어느 시인의 말처럼 위기와 엄청난 비상사태에는 중간의 길은 죽음을 가져온다”. 양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중도층이 관심을 받는 것은 오직 선거 때뿐이다. 중도층은 이성적 숙고와 선택을 강요받는다.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말한다. 잘 생각하면 선택은 결국 우리 당일 것이라고 설득한다. 중도층은 마치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도 없는 것처럼 취급받는다.

 

중도층은 정말 생각이 없는가? 중도층을 향해 생각이 없다고 비판하는 정치적 진영이 생각이 없는 것인가? 정치는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권력의 싸움이다. 나라가 나아갈 방향이 비전이라면, 정치권력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의 말로 표현하면, ‘비전 없는 정치권력은 맹목적이고 정치권력이 없는 비전은 공허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영논리는 비전에 대한 정책적 대결은 하지 않고 오직 정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의 비전을 생각하지 않는 이런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이 마치 국민의 이익인 것처럼 위장하고 선전한다. 진영논리는 자신들만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자기기만에 기반한다. 이렇게 진영논리는 독선과 독재의 토양을 만들어낸다.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 사람들에게 중도층은 의심스러운 존재이다. 그들은 확신과 신념이 없이 기회에 따라 이리저리 쏠리는 사람들이라 의심받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바로 광화문 촛불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중도층이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팬덤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한 박사모의 무조건적 충성과 극렬함에 비판적 거리를 둠으로써 문재인 정권의 탄생에 도움이 되었다. 소위 말하는 극렬한 정치빠와 거리가 먼 유권자 집단이 바로 중도층이다.

 

중도, 비판적 지지로 정치적 균형

이런 중도층이 이제는 운동권 정권이라 할 수 있는 문재인 정권에 등을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박사모 못지않게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집단인 문빠에 기반한 팬덤 정치가 국가를 두 진영으로 분열시키고 정치문화를 타락시키는 것을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던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국가통합이라는 비전을 믿었던 중도층의 지지가 문빠의 맹목적 지지와 혼동되고 이용당하는 사실에 분노한다. 중도층은 맹목적인 박사모도 싫어하고, ‘문빠도 싫어한다. 자신만이 옳고 자신과 다른 집단은 무조건 틀렸다는 팬덤 정치가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중도층이다.

 

중도층은 이렇게 우리 사회가 양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정치적 균형추다. 중간에 서야 좌우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중도층은 좌우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를 감각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어떤 정치적 집단에도 맹목적이고 열성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그들도 물론 투표를 하는 순간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들의 선택은 비판적 지지에 가깝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은 완전무결해서 무엇을 해도 괜찮아.’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선이니까 어느 정도의 오류는 문제가 되지 않아.’ ‘정치빠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면, 중도층은 어떤 정치적 무결함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약점과 결점을 인정하면서도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더 적합한 후보를 선택하고 투표한다.

 

정치빠들이 보이는 절대적 신념과 맹목적 확신이 없기 때문에 중도층은 공격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생각이 없다는 가장 모욕적이고, 가장 잘못된 공격을 받는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모욕적인 말도 없다. 이 말을 좀 더 본질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신념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근거로 지지 후보를 정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진리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어느 편이 진리인지를 확신하는 정치빠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의 진리를 확신하기 때문에 묻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생각하기도 전에 후보를 정하고 열광적 지지를 보낸다. 도대체 누가 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인가? 맹신하는 정치빠들인가 아니면 비판적인 중도층인가?

 

중도층이 생각이 없다는 비난은 건전한 정치문화를 갉아먹는 최대의 오류이다. 선거 때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가 등장한다. 모두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그들은 자신만이 진정으로 생각하고, 생각 없는 유권자들은 포퓰리즘의 희생자가 된다고 안타까워한다. 어떤 때는 유권자인 국민 전체를 생각이 없다고 질타하지만, 진영이 확실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생각 없는 집단은 중도층으로 좁혀진다. 그러나 중도층은 사안에 따라 자기 입장을 정하는 유연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확신하지는 않지만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중도층은 한 사람, 하나의 진리, 하나의 정당만을 지지하는 정치빠와는 달리 포퓰리즘에 저항할 수 있는 면역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독선이 진리의 폭정을 낳고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중도층이 이제 선택할 시간이다. 비전도 명확하지 않고 정책의 차이도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도층은 무엇을 근거로 선택해야 하는가? 중도층은 정치는 진리가 아니라 의견의 영역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중도층은 같은 사안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상식을 가진 집단이다. 중도층은 민주주의 전제조건이 의견의 다양성이고, 다양한 의견을 통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후보, 어떤 정당이 독선과 독재의 유혹에 덜 빠질 수 있는지를 판단하기만 하면 된다. 어떤 정당이 헌법정신과 민주주의에 더 기여할 수 있는가만을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생각 없다고 비난받는 중도의 생각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경향 : 2022.02.09.

 

누구를 찍을 것인가

대선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서든 갑론을박이다. 35년 전 처음 대선 투표를 했다. 35년간 대선 풍경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절대적으로 확신했지만 세월이 지난 후 하도 터무니없어 실소를 짓거나, ‘그토록 상황 판단을 못했나하는 생각에 뼈저리게 후회했던 생각들이 어김없이 리바이벌된다. 35년간 생각하는 방식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여전히 여론을 조작하는 세력이 재미를 보며 성업 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보자.

 

역대 최악의 후보만 나와서 찍을 사람이 없다고 땅이 꺼져라 한숨들을 쉰다. 양김시대에도, 노무현-이회창 때도 듣던 얘기다. 해방 후부터 모든 선거에는 항상 역대 최악의 후보만 나왔다. 후보들의 네거티브 공세를 탓한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더 큰 문제는 언론이다. 그들은 작은 문제를 작게, 큰 문제를 크게 보도하지 않는다. 모두 똑같이 나쁘다는 식으로 몰고 가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 거기에 말려 누구를 찍든 거기서 거기고,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빠지면 이성을 잃고 만다. 악당들에게 유리한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 지도자나 정신적 스승을 뽑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흠결이 있고, 살다 보면 이런저런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과거를 들춰 작은 실수를 침소봉대해가며 사람을 평가하다 보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게 된다. 이 사람이 되면 이런 짓을 저지를 것 같고, 저 사람이 되면 저런 식으로 나라를 말아먹을 것 같다. 근거 없는 불안을 키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약속을 하는지,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자. ‘모 아니면 도라는 사고방식보다 해로운 것은 없다.

 

1990년대 초 매사추세츠공대(MIT) 대학생들이 미국 내 카지노를 돌아다니며 도박을 벌여 엄청난 돈을 땄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이야기다. 카지노는 절대 망하지 않는 사업이다. 도박꾼도 아닌 대학생들이 어떻게 카지노를 이길 수 있었을까? 답은 확률적 사고, 즉 과학이었다. 학생들은 딜러가 카드를 나눠 줄 때마다 그림과 숫자가 몇장 나왔는지 세는 방법으로 남아 있는 카드 중에 그림이 몇장이나 있을지 확률을 계산했다. 그리고 충분히 유리해졌다고 판단한 순간 판돈을 걸었다. 항상 돈을 딴 것은 아니다. 때로는 거액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확률은 자연법칙이다. 근소한 차이라도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큰 차이를 빚어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근소한 차이를 알아보는 힘이다. 어느 쪽이 내가 꿈꾸는 세상을 향해 한발짝이라도 가까이 가는 길인지 냉정하게 따져보고 1%라도 확률이 높은 쪽에 표를 행사해야 한다.

 

정권교체가 시대정신이란 말도 들었다. “못 살겠다 바꿔보자!” 역시 오래된 구호다. 바꾸면 정말 살아볼 만할지 묻는 것이 지혜다. 한때 반공을 국시로 삼은 적이 있다. 국시란 무엇인가? 국가가 어디로 갈지 정한 것이다. 국가의 목표이자, 존재 이유다. 사람이든 국가든 무엇에 반대하기 위해 존재할 수 있을까? 선거도 마찬가지다. 반대가 아니라 실현하기 위해 표를 던져야 한다. 복수심에 불타오를 것이 아니라 꿈을 꾸어야 한다. 심판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까운 과거에 대한 평가는 조금만 지나도 180도 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마지막으로 후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대통령 선거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도 차를 고르거나, 어떤 대학에 갈지 결정하는 것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누구나 차를 살 때는 직접 타본다. 대통령을 찍을 때는 신문이나 방송만 본다. 언론이 사실을 보도한다고? 천만에! 언론은 사실을 취사선택하고 각색한다. 사실이 아닌 의도를 대중의 의식에 각인한다. 언론을 보고 마음을 정한다면 불순한 의도에 놀아나는 꼴이다. 토론이든 연설이든, 한번이라도 좋으니 후보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누구나 당대를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선거가 되기 바란다.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한겨레 : 2022.02.09.

 

누가 누굴 키워?

지난 수년간 청년 정치인을 지원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단체에서 일해왔다. 그 일이 탐탁지 않아 보였는지 그렇게 해서 청년을 몇이나 키워냈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무도 키우지 않았다. 애당초 난 청년 활동가를 키우거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간 내가 한 일이란 나이 든 사람들한테서 배우려 하지 말고 전례가 없는 길을 스스로 내어 가시라고 격려한 것뿐이다. 나를 포함한 이른바 586이 그리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니 그들의 성취와 비교하지 말고, 다만 586보다 더 단단하게 횡적 연대를 가져야 그들을 넘어설 수 있다고, 그러니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정치 지형에 갇히지 말고 큰 꿈으로 평생 갈 동지를 만드시라고.

 

그들끼리 신명 나서 의기투합을 하는 자리에 밥상을 내오거나, 하나둘 이런저런 일로 다치고 지쳐서 쉬고 싶어 찾아올 때 아궁이를 뜨듯하게 지펴주는 주막집 주모 역할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내 몫의 일이라고 여겨왔다. 주모를 자처하며 그들을 만나는 동안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사람은 사실 나 자신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오십 넘어 새로 배운 것의 대부분은 그들에게서 나왔다. 그러니 그들이 나를 키운 것이지 내가 그들을 키운 게 아니다.

 

내가 만난 청년, 청소년 중에는 기후위기, 동물권, 채식주의에 관심이 높은 이들이 많다. 며칠씩 함께 먹고 자는 워크숍에서 우유나 달걀도 먹지 않는 비건 참가자들이 있으면 삼시 세끼를 준비하는 일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멸치 국물도 안 되고 젓갈이 들어간 김치도 안 된다니 거기 맞춰 별도로 음식을 해줄 식당을 섭외하거나, 버터나 달걀이 안 들어간 빵을 멀리서 공수하느라 애를 먹었다. 물론 나는 그들 곁에서 천연덕스럽게 고기도 먹고 달걀도 먹었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채식을 고집하는지, 쓰레기 안 만드는 일에 어떻게 그렇게 열심일 수 있는지, 신기하고 궁금했다. 논리나 이념을 주창하는 것보다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는 게 백만 배는 더 힘든 일인데 말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 깨닫게 된 한 가지는, 이들이 가진 기후위기 감수성이 대체에너지나 그린산업 논의를 훌쩍 넘어서는 전환적 세계관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양적 성장과 물질적 풍요, 인간중심 개발주의에 대해 회의하고, 적게 쓰고 나누는 삶,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외, 평화로운 순환, 평등한 존엄을 중시한다. “지구온난화? 그거 뭐, 탄소포집기술로 해결하면 되지 않아?” 하던 내 또래 친구들의 근대적 세계관으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내게 페미니즘을 다시 생각하도록 가르쳐준 것도 젊은 여성들이었다. 처음 미투가 터졌을 때 내심 당혹스럽고 불편했던 건, 그런 관행에 익숙한 나이 든 남성들만이 아니다. 적당히 침묵하고 외면하고 까칠하게 굴지 않는 게 경제적인 처신이라고 여겨온 우리 세대 여성들에게도 미투는 따끔한 회초리였다. 오래전 우리에게 페미니즘이란 민주화운동의 부문 운동이었고 민주화의 대의조직의 보위를 위해 일상의 성차별·성폭력 문제는 공론화하지 않는다는 묵계에 대다수가 갇혀 있었다. 나이가 들어 딸한테서 엄마는 명예남성이야!”라고 욕을 먹었다는 친구의 푸념을 들으며 지금 딸 자랑하는 거지?”라고 박수 치며 웃어대던 내 여자 동창들의 환호는 진심이다. 동성혼을 지지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게 왜 폭력인지,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고 왜 세상을 재해석하는 프리즘인지, 내 뒤처진 성인지 감수성을 지적하고 일깨워준 젊은 여성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내가 만난 젊은 친구들이 청년세대를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후 세상을 바꿀 힘은 이런 젊은이들에게서 나온다. 내가 일하는 주막집을 거쳐 간 이들 가운데 정당인이 되고 시의원·도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 이들도 생겼지만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내 꿈은 이들이 의회의 다수가 되고 대선 후보가 되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꿀지 치열한 설전을 벌이는 걸 보는 것이다. 차차기, 이르면 차기 대선에서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설렘을 안고 대선 토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때까지 나처럼 늙은 주모가 할 일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열심히 배우고 변화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늙은이가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지만, 배우지 않아 낡은 이가 되어 재활용도 안 되는 폐자재가 되는 건 세상에 누를 끼치는 일이다. 늙었는데도 배우지 않고, 낡았는데도 가르치려 드는 이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 주인 행세를 하는 게 창피스럽다.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한겨레 : 2022.02.09.

 

내 마음의 센트럴 파크

뉴욕의 맨해튼에는 고층건물이 많다. 그렇게 높다란 빌딩 숲 가운데엔 나지막한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걷고, 달리고, 때로는 잔디밭에서 앉아 쉬거나 호수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다. 한 해에 4,200만 명이 방문한다는 이 공원의 이름은 센트럴 파크Central Park이다.

 

1850년대 초반, 뉴욕 주의 행정부는 시민들이 스트레스를 풀고 재충전할 공원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도심에서 좀 떨어진 땅을 부지로 선정했고, 이곳에 미국 최초로 조경 공원을 만든다는 법까지 제정했다. 이어서 디자인 공모전을 열었는데, 조경가 옴스테드가 응모한 시골 들판처럼 손대지 않은디자인이 뽑혀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센트럴 파크가 만들어졌다. 1876년의 일이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회전목마, 스케이트장, 동물원 같은 놀이 시설이 추가되었는데, 처음에 정한 시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유해환경을 넣지 않는다는 설립 기준을 그대로 지켰다. 150년의 공원 역사를 훑어보면 군사 요새나 도로를 신설하라는 입김이 있었고, 경제 대공황 시기엔 관리자 없이 방치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연과 교감하는 공원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었다. 주변의 여러 유혹과 압박에도 공원이 그대로 유지되어온 비결은 무엇일까? 청정한 녹지가 주는 가치와 그 위력을 정확하게 알고 신뢰해서가 아닐까 싶다.

 

센트럴 파크가 들어설 당시를 한번 상상해 보자. 시민들을 위한다는 데엔 대부분 찬성했겠지만, 몇몇은 투자의 측면을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개발자의 눈엔 100만 평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공원이 생산성 없는, 노는 땅으로 비쳐졌을 것이고, 고층아파트나 상가를 지어 경제적인 가치를 높이자는 의견을 냈을 법하다. 게다가 그 수익금으로 공원 관리비를 충당한다면 매우 합리적인 발상으로 들렸을 것이다. 만약에 그 말대로 공원 귀퉁이에 상가를 짓고 아파트를 분양했다면, 오염으로부터 소음으로부터 온갖 스트레스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려는 공원의 존재 이유는 퇴색되지 않았을까. 센트럴 파크를 디자인한 옴스테드가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으면 100년 후에는 이 넓이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쉼터는 우리 일상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도시마다 있는 공원처럼, 우리 개개인의 마음에도 공원과 같은 쉼터가 필요하다. 당장의 효과를 놓고 보면 성공에, 재산증식에, 건장한 풍채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해 보이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마음속 공원이 당장 필요한 것이다. 그 공원은 어떠해야 할까?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쉬면서 감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사랑을 받는가? 어리고 약할 때, 못나고 부족할 때 사랑의 눈길과 손길이 우리에게 이어진다. 그 사랑의 힘으로 잘 살다가 어느 날 성공 궤도에 오르면 사람들은 사랑을 주는 자가 되려고만 한다.

 

마음의 공원은 지금 자신의 능력과 지위에 상관없이, 사랑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허용되는 곳이다. 가진 재산과 이룬 성공을 다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던 모자란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만 그곳을 찾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삶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정확히 아는 그들은 공원의 위치도 정확히 안다. 우리가 마음의 공원을 찾아가는 것은,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 경쟁하고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애쓰던 데에서 벗어나 새소리, 풀내음, 바람의 촉감에 경이를 느꼈던 작고 부족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내 존재의 근원을 알게 하는 출발 지점이 바로 마음의 센트럴 파크인 것이다. 우리 몸이 자연에서 쉬듯 마음은 사랑 안에서 쉬어야 한다. 새해를 맞아 많은 계획을 하겠지만, 사랑이 가득한 마음의 센트럴 파크도 자주 찾아가보길 바란다.

조현주 발행인 | 데일리투머로우 2022.01.25.

 

 

작정한 외면은 죄가 된다

새해 들어서도 일터에서 날마다 사람이 죽는다. 아파트 공사를 하다가, 배관 보온 작업을 하다가, 철판을 쌓다가 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죽음의 자리로 밥벌이하러 갔던 이들은 모두 하청노동자였다. 이들은 죽어서야 세상에 ○○씨로 불려 나왔다. 벽이 무너져 6명이 숨진 광주의 아파트 신축 현장은 공사를 최대한 빨리 끝내려다 보니 안전은 뒷전이었다. 부딪히고 끼여서 노동자 1명이 각각 사망한 포스코 포항제철소, 울산 현대중공업 작업장도 마찬가지. 안전 규정을 따르지 않았고, 둘이서 해야 할 일을 혼자 했다는 증언들이 잇따른다. 이들이 위험에 내몰린 이유는 하나, 비용 절감이었다. 수십년간 그래왔고, 지금도 저 어디에선가는 그렇다.

 

늘 그렇듯 비극은 도돌이표처럼 돌아왔다. 광주의 아파트에서 황망한 죽음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경기 양주 삼표산업 채석장에서 토사가 쏟아져 3명이 스러졌다. 이런 죽음을 막아보려고 큰 사고가 나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틀 만인 지난달 29일의 일이다. 광주에서 마지막 매몰자를 수습한 8일에는 경기 성남시 판교2테크노밸리 건물 신축 공사 현장에서 승강기 설치 작업을 하다 노동자 2명이 추락해 사망했다. 두 곳 모두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으로 법 위반 여부는 수사를 지켜봐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죽음 생각보다 많아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은 지난 4일 성명을 내고 알려지지 않았던 사망사고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따라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사고가 없던 게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만들지 않은 사업주가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산재사망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밝혔다.

 

노동계의 주장처럼 알려지지 않고 숫자로만 남은 죽음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 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지만, 트위터 계정 오늘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laborhell_korea)’에는 지금까지(29) 60명의 기록이 쌓였다. 이 계정은 그날 죽은 노동자를 매일 업로드한다. 고용노동부 산업재해통계를 보면 2020년 한 해 사고로 882, 질병으로 1180명이 사망했다. 하루에 6명가량이 일하다 죽은 셈이다.

 

이쯤 되면 중대재해법으로 올해 들어 목숨을 잃은 누군가의 죽음은 언론의 관심을 받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알다시피 중대재해법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2018년 사망한 김용균씨와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만든 법이다. 마침 고 김용균씨 산재사망 관련 1심 선고가 10일로 예정돼 있다. 선고를 앞두고 산재 유족들과 시민 1만여명이 법원에 보내는 의견서를 썼다고 한다. 책임을 회피하는 한국서부발전에 책임을 물어 달라는 탄원서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한번씩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하루에 6명씩 국회의원이 목숨을 잃는다면” “만약에 하루에 6명씩 대학교수가 목숨을 잃는다면” “만약에 하루에 6명씩 예술가가 목숨을 잃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고요

 

김용균재단이 공개한 의견서 중 은유 작가의 의견서를 읽다 가슴이 뜨끔했다. 그의 말대로 노동자 목숨을 깃털처럼 가볍게 취급하는 현실은 누가 피해를 보느냐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한국 사회 가장 열악한 위치에서 일하는 이들의 죽음에는 눈을 감아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보니 그 죽음이 왜인지따지지도 않는다.

 

이 슬픔이 반복되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법 시행만으로 죽음의 일터가 대번에 좋아질 리는 없을 것이다. 중대재해법은 국회 통과 과정에서 취지가 크게 훼손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틈을 촘촘히 메우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변화란 거저 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고개 숙일 수밖에 없어 슬픈

그리고 재발 방지라는 말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돈 때문이든 비겁함 때문이든, 작정한 외면은 죄가 된다. 이게 중대재해법의 알맹이다. 이 법의 취지는 안전을 돈으로만 따지느라 관리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법적 책임을 물어 산재사망을 막자는 것이다. 책임자가 안전 조처를 충분히 했다면, 혹여 사고가 나더라도 처벌받을 일도 없는데 뭐가 걱정인가.

 

분명한 것은 누구 말마따나 날마다 명복을 빌며 더 이상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어서 슬프다.

이명희 사회에디터 경향 : 2022.02.10.

 

마음은 흐리고 몸은 뻣뻣한 후보가 집권하면

문재인 정부 스스로 문제될 게 없다면 불쾌할 게 없지 않겠나.”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집권하면 현 정부 적폐 수사를 하겠다고 발언한 데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사과를 요구하자 윤 후보는 이렇게 대꾸했다. 다음날엔 내 사전에 정치보복은 없다. 어떠한 사정과 수사에도 관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후보가 사정 수사는 하겠지만 정치보복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술은 마셔도 음주운전은 아니다는 말처럼 교묘한 언사로 들린다. 역대 어느 대통령후보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치보복을 시사한 사례는 없다. 윤 후보의 발언은 검사 마인드로 국가를 이끌어가겠다는 위험한 발상의 단면을 드러낸다.

 

죄 없으면 두려워할 게 뭐 있나.’ 밀폐된 조사실에서 검사가 쉽게 던지는 이 말은, 바꿔 말하면 탈탈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 어디 있겠나라는 일종의 겁박이다. 2006년 서울중앙지검 검사이던 금태섭씨는 <한겨레신문>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검찰은 발칵 뒤집혀 금 검사를 인사조처했고, 연재는 첫회만 실린 채 중단됐다. 이 글의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수사기관에 입건되어 피의자가 된 때의 곤혹스러움은 경험자가 아니면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도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기까지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는다. 심지어 오랫동안 판사, 검사, 변호사로 활동하던 법률가나 수사가 직업인 경찰관도 피의자가 되면 불안에 떤다.” 피의자의 이런 불안감을 최대한 이용해 실수를 이끌어내고 유죄로 몰아가는 게 검찰의 수사 기법임을 이 글은 말한다. 검사가 피의자에게 할 법한 말을 지금 유력 대통령후보의 입에서 듣는 건 소름 끼치는 일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국무부 이메일 논란에 대해 내가 대통령이 되면 힐러리는 감옥에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발언을 두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선거에서 이기면 정적을 구속시키겠다고 말하는 후보가 있다. 이에 비하면 모든 문제는 부차적이라고 트위터에 썼다. <시카고트리뷴>의 에릭 존은 칼럼에서 아직 바닥이 아닌 건가?”라고 아연해했다. 트럼프 집권 시기에 미국 사회가 얼마나 분열되고 전세계에 갈등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는지 우리는 기억한다. 지난해 10월 미국 퓨리서치 여론조사를 보면, ‘정치적 갈등이 가장 심한 나라공동 1위가 바로 한국과 미국이다. 윤 후보의 발언이 현실화하는 순간 한국은 독보적인 1위로 올라설 게 분명하다.

 

논란이 커지자 그는 역대 정부에서 이전 정권 비리에 대한 수사가 없었던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집권세력이 공개적이고 전면적으로 이전 정권 수사를 벌인 적은 두 번 있다. 한번은 문재인 정부 때고, 다른 한번은 중단 없는 개혁과 사정을 천명한 김영삼 정부 시절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직후에 집권했다. 김영삼 정부는 수십년간의 군부 통치 이후에 등장한 첫 민간 정부였다. 둘 다 적폐 수사의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 외엔 어느 대통령후보도 상대 후보 또는 정치세력을 겨냥한 사정 수사를 다짐하진 않았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김대중 후보는 정치보복은 없다고 선언했고, 2012년 박근혜 후보조차 ‘100% 대한민국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해도 이전 정권 수사는 되풀이됐고,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으로 이어진 게 한국 정치의 아픈 현실이다. ‘집권하면 전 정권 수사를 할 거냐는 질문에 해야죠. 해야죠. 돼야죠라고 세번이나 강조한 윤 후보 말을 그냥 흘려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이 발언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강렬한 증오의 표현이지만,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게 오직 수사니까, 그 수사에 정치적 명운을 걸고 국가를 이끌어가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비리 수사하듯이 국정 운영을 해도 될 만큼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그리 한가한가. 모든 사람이 현 정부의 적폐 수사가 지나쳤다 비판해도, 그 칼을 휘두른 윤 후보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백인정권에 27년간 투옥됐던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이 된 뒤 증오는 마음을 흐리게 한다. 지도자는 누군가를 미워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윤석열 후보의 마음은 흐리고, 몸은 열차 객석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정도로 뻣뻣한 것처럼 보인다.

박찬수 | 대기자 한겨레 :2022-02-14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어제는 하루종일 필자가 근무하는 철도가 세간의 화제였다. 열차의 맞은편 좌석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윤석열후보의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사진을 보고 에이 설마?”싶었다. 올해 정년퇴직을 앞둔 철도기관사 입장에서 지금까지 이런 고객은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도 못봤지.. 예전에는 빈자리 많을 때 신발벗고 앞 좌석에 발 걸치고 가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요즘은 그런 것도 눈치 보여 거의 없는데 어딜 신발을 신은채로.. 말도 안되지라며 혀를 내두른다.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는 말이다. 하긴 윤석열후보 입장에서는 구두가 뭐 그리 더럽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과거 국정감사에서 김진태의원이 질의했듯이 윤석열후보는 기업인들과 술자리에서 자기 신발에 양말을 벗어 넣고 술을 따라 마시게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사실이라면 그에게 구두란 술잔이나 다름없을 터이니 말이다.

 

난 정치인의 사생활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가 집에서 무얼 하든, 점을 보건, 바람을 피건 당신들 일이다. 그러나 정치인이라면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 기본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수신제가 클리어 한 다음에 치국을 순차적으로 하란 말은 못하겠다. 그렇게 하다간 아무도 치국을 할 사람이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으면 타인에 피해를 주지않는 수준의 수신은 되어야할 것 아닌가? 공중을 위해서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공중도덕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면 그 여백은 특권의식 외에 무엇이 채울 것인가?

 

나는 윤후보의 진상행동을 보고 두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하나는, 만일 이런 일이 다른 선진국에서 일어났으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둘째, 이재명후보가 이런 행동을 했으면 언론은 어떻게 다루었을까?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벌써 이 사건이 외국언론에 다루어지면서 대충 답이 나왔다. 정치생명이 끝날 정도의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반응이 다수였다. 공적 자질의 함량미달로 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의문은 우리가 지겹도록 보아왔기에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대부분의 주류언론은 약속처럼 사냥대형으로 집결, 무참히 십자포화를 퍼부을 것이다. 조그만 흠결만 드러나도 지레 먼저 사과부터 해야 하는 이재명캠프에 비해 윤석열캠프는 그 숱한 본부장 의혹과 문제발언에도 진의가 잘못 전해졌다며 눙치며 넘어갈 수 있다.

 

이러니 그의 안하무인은 점점 도를 더해간다. 캠프는 벌서 대선이 끝났다는 분위기란다. 예전부터 대선도 필요 없고 곱게 정권 내놓고 물러가는 게 정답이라고 말하더니 이제는 임기5년짜리의 정권이 겁도 없이검찰조직을 바꾸려했다고, 현정권의 적폐수사를 할 것이라 공언할 지경이다. 그에게 국민이란, 국가란 어떤 의미일까? 무소불위의 검찰조직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지금은 그의 구두 밑에 좌석이 있지만 집권 후에는 국민이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제부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내가 품은 의문들을 국민들이 가지게 될 때 선거판세는 결정날 것이다. 나는 촛불혁명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집단지성을 여전히 믿는다. 윤후보에 압도적이라는 젊은 층의 지지는 사랑처럼 쉬 변한다. 그의 편향된 세계관과 호전적 선제타격론은 한반도를 위기에 빠뜨릴 것이 분명하다. 결국 헤로도토스의 말처럼 평화로울 때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묻지만 늙은이들이 전쟁을 결정하면 부모들이 아들들을 땅에 묻게 되는 법, 특권의식에 찌든 안하무인의 검객에게 더 큰 권한은 위험하다. 그는 원래 그랬다. 그걸 몰랐단 말인가? 그걸 알아차리는데 어제의 철도사진이 작은 기여를 하였기를 바란다.

최영 기관사 경기신문 :2022-02-15

 

문화는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

며칠 전에 열린 베이징겨울올림픽 개막식은 일각의 국내 누리꾼 사이에서 소위 한복 논란을 촉발시켰다. 중국 56개 소수민족 대표들이 다 같이 중국의 오성홍기를 전달했는데, 그중에 재중국 동포(조선족)로 보이는 한 여성이 한복처럼 생긴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놀랄 만한 일도, ‘논란까지 일으킬 일도 전혀 아니다. 소수민족들이 등장하는 중국의 거의 모든 공식 행사에서는 소수민족의 하나인 연변의 재중국 동포 여성들이 관습적으로 한복을 입곤 한다. 꼭 중국에서뿐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다민족 국가로서의 러시아의 성격을 과시해야 하는 행사마다 늘 한복을 입는다. 재미 동포들도 종종 그렇게 한다. 한데 중국 등 이웃나라를 제외한 그 어느 나라에 대해서도 국내 누리꾼 사이에서 한복 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 한복이 등장하면 국내 누리꾼에게는 그게 오히려 국위선양으로 보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역내 국가,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에서 등장할 경우에는 문화 공정내지 왜곡이라는 혐의가 당장 생기는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유럽이나 북미 내지 남미, 아랍권 등과 달리 동아시아에는 그 어떤 초국가적인 포괄적 지역 국가 연합 등이 아직 성립된 바 없다. 심지어 유럽이나 북미에서의 영어나 중남미의 스페인어, 중동의 아랍어나 구소련 지역의 러시아어와 같은 지역적인 공통어마저도 없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공통어는 한문이었지만, 요즘 한국 같으면 대학생 중에서 자기 이름조차 한자로 못 쓰는 사람이 10명 중 2명 정도다. 여기 오슬로대학에서 중국, 한국, 일본 유학생들이 서로 만나게 되면 잘 안되는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통이다. 한반도의 분단, 그리고 한쪽의 북-중 동맹과 다른 한쪽의 한--일 동맹 사이의 대립까지 겹쳐져 동아시아 공동체라고 할 만한 게 사실 거의 아무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문화 민족주의를 매우 배타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켜왔다. 공통의 과거 지역 문화를 우리 민족 문화와 같은 방식으로 전유하고, 과거의 역사 등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한다. 한국 누리꾼들이 특히 중국에 대해 문화 공정혐의를 품고 있지만 사실 한, , , 그리고 북한과 베트남의 우리 민족 문화구축 방식에서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그 배타성이나 과거 지역 문화의 비역사적인 민족화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구미 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양심적인 일본 학자들도 일본 군주의 칭호인 천황의 유래를 본래 중국에서 전래된 도교에서 찾고 있다. 고대 중국의 천황대제 등 도교의 신격들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군주의 칭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와 같은 학설들이 일본 학교 교과서에서 소개될 수 있을까? 답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이번 한복 논란과 관련해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고구려와 발해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라고 반응했다. 발해의 일부 유민들이 고려에 흡수되어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역사의 일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또 다른 발해 유민 집단이 요나라나 금나라에도 존재하여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애써 배제할 필요가 있을까? 사실 고구려·발해 문화는 한반도 문화에 흡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만주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동북(만주)지역 문화의 기반을 구축했지만, 한국(과 북한)의 교과서들은 대개 고구려·발해를 배타적으로 한반도의 역사에만 귀속시킨다.

 

그런가 하면 중국 정부의 간행물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표기해 그 역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한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중국어에 들어온 소수민족이라는 표현을 고대사에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비역사적이며 무리하지만, 중국 정부나 관변 지식인들은 개의치 않는다. 역사에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욕망들을 그대로 투영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배타적인 민족주의 잔치에 잠재적으로 가장 불리한 것은 바로 한국의 입장이다.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중국이나 일본, 혹은 북한과 베트남 등보다 훨씬 높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내 가장 많은 디아스포라들은 바로 한반도 출신들이다. 지리적으로도 한반도는 동아시아 지역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과거의 지역적 문화 유산을 동아시아 주민 모두의 공동 유산으로 여기는, 좀 더 차분하고 객관적인 입장이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의 한국 국익에 더 부합된다. 그러나 중-미 대립이 격화되고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혐오 감정들이 무분별하게 분출되는 가운데 대선 정국을 맞아 표심에 목을 매는 정치인들까지 가세해 어떤 긍정적인 의미도, 필요도 없는 한복 논란을 마치 큰일인 것처럼 키웠다.

 

예컨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은 지난 5일 성명을 통해 아무런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중국의 문화 동북공정강력히 규탄한 뒤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펼쳤다. 지금 유럽에서는 중국인들이 버젓이 한식당을 열어 한류를 돈벌이에 이용하며 한식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오슬로에서 흔히 스시(초밥) 식당들을 운영하는 한국 교민들은 남의 나라 음식을 팔지 말고 자진 폐업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선진국이 된 나라에서 이와 같은 농도의 자폐적 국수주의가 국회에서 발설될 수 있다는 것은 충격이다. 한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문화 공정 반대를 외치는 등 이 배타주의적 감정의 분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편승하기 바빴다.

 

아쉬운 일이다. 시민들에게 냉정함과 객관성, 그리고 포용성과 국제 감각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는 정치인들이 국수주의적 광란에 가세하면 이는 상황을 대대적으로 악화시킬 뿐이다. 사실 민주화를 자기 힘으로 이룬 유일한 동아시아 국가인 한국이야말로 문화를 소유하려는 퇴영적인 배타주의에 가장 잘 맞설 수 있는 역내 국가이다. 내 꿈 같아서는, 한국에서 점차 한국사라는 이름의 일국 역사 대신에 세계사적 내지 지역사적 맥락에서 본 한반도의 역사를 각급 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쳤으면 한다. 시야를 동아시아 지역 전체나 세계로 넓혀야 각종 문화들이 서로 어울리고 섞인 한반도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목을 이수할 학생들에게 이번 한복 논란같은 해프닝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는가?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2-02-15

 

그놈들의 전략

그냥 싫어.”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이 그냥 싫다는데 논리적 근거를 요구할 수도 없는 일. “생긴 것도 싫고 말투도 싫고 손짓 발짓 몸짓 숨소리까지 싫다니까.” ‘비호감은 매우 강력한 감정이다. 싫다는 감정에 사로잡히면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사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사라진다. 무엇 때문에 싫은가조차 생각해볼 필요가 없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감도 대체로 맹목적이다. 비호감과 함께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감정이어서, 딱히 명징한 판단에 기반하지 않는다.

 

정치와 선거에도 감정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선거마저 역대급 비호감이라고 규정된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즉각적으로 싫다는 감정이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반면에 한국 사회는 강렬한 정치 팬덤을 경험해왔다. ‘대깨문이니 태극기부대니 자랑스럽게 자칭하며 극렬과 열혈, 적극과 극단을 넘나드는 현상은 몇 년 동안 무척 뜨거웠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특정 정치인에게 바쳐지는 뜨거운 애정과 맹목적 지지는, 개별적으로 따져볼 여지는 있지만, 웬만한 연예인을 향한 팬덤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역대 최고의 정치 팬덤 현상의 일차적 귀결이 역대 최악의 비호감 대선이 아닌가 싶다. 맹렬한 추종의 감정이 반대 방향을 향할 때 강력한 비호감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팬덤이 그렇듯, 비호감 역시 물음과 판단 없이 전개된다. 팬덤의 열광적 지지 이면에는 반대를 위한 선택이 남을 뿐이다. 필요한 것, 바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비호감의 대상을 감정적으로 골라 배제하는 모양새다. 저쪽이 싫어서 하는 투표에는 저쪽만 아니면 된다는 기준만 적용된다. ‘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미디어다. ‘역대급 비호감이라는 손쉬운 규정이 남발될수록 시민들은 나쁜 프레임에 빨려 들어간다. 비합리적 감정이 근거를 얻고 더욱 부풀어 오른다. 양비론은 한국 사회를 좀먹어왔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기 양비론이 즐겨 악용된 것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어용 언론과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양비론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시민의 눈을 가렸다. 언론의 게으른 프레임 설정과 소셜미디어의 부풀리기에 영향 받는 시민들의 비호감은 더욱 확산하고 언론 불신도 함께 커져간다. ‘찍을 놈이 아무도 없다는 인식이 확산될수록 더 나쁜 놈은 더 크게 웃는다. 레거시 미디어(전통 매체)와 소셜미디어가 합동으로 일궈내는 역대급악순환이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직관적이고 빠르게 생각해내 자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신중하고 느리게 생각하는 대신 게으르고 주저하기 일쑤인 사람이 있다. 전자는 경험에 의존하고 후자는 기억에 의존한다. 행동경제학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이 두 사람이 우리 머릿속에 공존한다고 설명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만 편향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지닌 직관 사고틀이 비호감과 팬덤을 작동시킨다. 그래서 경험적 자아는 판단 사고틀의 논리적 자아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인간은 대체로 직관을 활용하다가 잘 안 풀리면 판단을 가동시키는데, 판단은 겁이 많고 게을러서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카너먼은 지적한다. 그렇다. 우리는 멍청하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 지금이라도 거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것은 그대들뿐이다.” ‘육법전서와 혁명에 담긴 김수영 시인의 한탄은 오늘도 유효하다.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선거판을 비호감 잔치로 흥청이게 하는 그놈들의 전략에, 게으르고 무능한 그놈들의 상업적 프레임에, 현실의 불만과 분노를 감정으로 해소하고 기분에 놀아나는 불쌍한 백성들역대급 비호감대선의 최대 피해자일 뿐이다.

김진철 | 책지성팀장 한겨레 :2022-02-20

 

주택은 선택이다

집을 보금자리라고 한다. 실제로 주거의 뜻으로 보면 사람이 주인이 되는 공간이고, 가족을 이루고 오래 살아가는 터전이다. 그런 집이 언제부터인가 재산목록이 되고 돈벌이 수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적응이 잘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현실은 가구당 평균 자산의 70% 이상이 주택에 몰려 있다. 그나마 이게 조금 내려온 수치다. 종전에는 80%가 넘었다.

일러스트 김상민기자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집을 향한 애착과 사회적 열망이 높아진 결과다. 30대 후반 지나서야 집을 장만하던 우리 사회의 오랜 경향에 비춰볼 때 놀랄 만한 일이다. 2021년에 주택을 구입한 세대 중 2030세대 비중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취업도 어렵고, 창업도 어려운 현실에서 이들이 이렇게 서둘러 집 장만에 나선 걸 보면 앞으로 가구당 총자산에서 집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누구나 살아야 하는 집으로 돈을 벌겠다고 너도나도 뛰어드는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국정을 맡은 정치인들도 어느 진영을 막론하고 집값 안정을 주된 정책목표로 삼고 있다.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주택자산의 가치가 늘어나는 것을 본 상당수의 국민이 주택을 재테크로 인식한다. 주택에 매기는 세금에 더 거세게 저항하는 추세다.

 

집을 재테크로 인식하는 사람들

주택은 인간의 유구한 생활양식이다. 수렵채취 시대에서 농경사회로, 또 산업사회로 변화해오면서 주택은 점점 도시 안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지능운영 시스템이 됐다. 그 안에서 주택은 새로운 형식과 구조로 변혁을 거듭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더 안전하고 건강하고 문화적이며 과학적인 지식통제 기능이 커지는 도시의 구조 속에서 주택은 미래개념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서울을 중심으로 보면 광역고속 교통망 안으로 신규주택이 들어오고 있다.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 전시장 주변에서 서울 삼성 코엑스 전시장까지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를 이용하면 30분 이내에 도착 가능하다. 미래의 주택은 역사(驛舍)를 중심으로 생활 거주 서식지를 형성해갈 것이다. 오래도록 빈터였던 일산 킨텍스 주변 부지에 압축된 도시생활 문화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는 초고층 주거타운을 건설하고 있다. 서울 강남에 살 것인가, 아니면 일산 킨텍스 인근에 거주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노선 이용자들 사이에선 이는 취향의 문제로 자리 잡을 것이다. 흔히 강남의 거주지 같은 곳을 타운하우스라고 부르고 킨텍스 거주지 같은 곳을 컨트리하우스라고 한다.

 

국민소득 35000달러 돌파를 앞두고 있다. 머지않아 국민소득이 4~5만달러 정도가 되면 도심의 타운하우스와 교외의 컨트리하우스 두곳에 집을 다 장만하는 가구도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주택 소유자의 세제정책도 변하게 마련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즈음이면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해진다는 점이다.

 

덴마크를 예로 들어보자. 국민소득 6만달러인 그들은 우리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주택을 바라보지 않는다. 수도 코펜하겐처럼 국제적인 역할을 하는 곳의 집세는 비싸다. 외국인의 왕래가 잦아서다. 자연히 매매 가격도 높다. 자연환경을 보호하려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작은 도시에서 자기 방식으로 일하고 사는 사람들은 편리하고 쾌적한 집에서 산다. 그 집은 그리 크지 않고 비싸지도 않다. 우리로 치면 실내 공간이 20평 내외다. 굳이 집을 사지 않고 조합주택이나 공공주택을 임대하는 사람도 많다.

 

문제는 마음의 가치와 생각의 여유다. 소득이 올라가면 사회가 관대해지고 다양해진다. 우리가 그 초입에 있다. 갈등 국면이다. 우선 도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집 장만이 두드러져 대도시의 집값이 많이 들썩인다. 시간이 갈수록 자기가 일하고 거주하고 싶은 곳으로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 것이다. 그 방향이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렵고, 일률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삶의 형태에 맞는 집 찾아나설 것

뉴욕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30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면 스카스데일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숲속의 작은 이 마을은 집값이 퍽 비싸다. 학교도 있고 쇼핑도 가능해 생활이 편리하다. 맨해튼의 고임금자들이 많이 산다. 일터까지 기차로 30분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시간은 가족과 쾌적한 숲속 마을에서 지낸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런던의 베스널 그린 같은 곳에는 조금 오래된 작은 집들이 많다. 실내 공간이 협소하고 임대료도 대체로 비싸다.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만족하며 산다. 선택의 문제다.

 

우리는 지금 공공 임대주택이나 민간의 임대용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선택이 다분히 제한적이란 얘기다. 도시주택 공급을 오래도록 시장에 맡겼기 때문이다. 나라가 가난한 탓에 공공으로 집을 지어줄 형편이 못 됐다. 민간 건축업계에 주택사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이런 구조를 변경하는 건 쉽지 않다. 공공보다 민간의 공급이 많은 나라여서 공간의 서비스 기대가 높다. 그만큼 건축비가 많이 든다. 이윤도 많이 남기려고 한다. 주택 공급을 늘리려면 부득이 민간업자들을 지원하고 규제를 완화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지난 10년 동안 서울은 이 문제가 원활치 않았다. 그 와중에 코로나19가 덮쳤다. 서울 집값이 폭등했다. 신규주택의 선호도까지 높아져 얼마 안 되는 새집들이 집값의 고공행진을 부추겼다.

 

앞으로 사람들은 점점 자기 삶의 형태와 방식에 맞는 집을 찾아갈 것이다. 다양성과 실용성을 추구할 것이다. 지금의 MZ세대가 앞장설 것으로 보인다. 달라지는 도시 전체는 주택의 중요한 인프라를 형성한다. 분당과 일산의 1기 신도시는 국민소득 1만달러 즈음에 만들었다. 동탄은 2만달러를 전후해 만든 신도시다. 광교는 3만달러에 진입하면서 등장했다. 4만달러 진입을 앞두고 1기 신도시들이 재건축과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이전보다 도시 인프라가 크게 나아질 것이다. 가격상승 요인이다. 신규 효과일 뿐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집이나 돈이나 직업을 너무 획일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팽배하다. 소득이 높은 나라일수록 집은 마음의 자산이다. 마음이 크고 넓은 사람은 누옥도 고래등으로 여기며 산다. 정치의 계절이다. 너무 집으로 표를 사려고 하지는 마시라.

<엄길청 국제투자분석가·전 경기대 경영전문대학원장> 주간경향 2022.02.21

 

윤석열의 상식 밖 언행, 참을 수가 없다

지난 15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상식 밖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국정을 운영해보겠다고 나선 대선 후보의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지난 18일 경북 상주시 풍물시장에서 유세를 마친 뒤 어퍼컷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후보는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유세에서 문재인 정부가 28번의 주택정책으로 계속 실패를 거듭했지만 실수를 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집 없는 사람이 민주당을 찍게 하려고 일부러 악의적으로 집값을 폭등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부동산 논객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황당무계한 소리를 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유력 대선 후보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집 없는 사람의 표를 얻으려고 집값을 고의로 폭등시키는 정부가 세상에 어디 있나. 무주택자들을 바보로 아는가. 근거도 맥락도 논리도 없는 발언이다. 현 정부의 정책이 왜 실패했는지 원인을 찾아내고 대안을 제시해 수권 능력을 평가받을 생각은 안 하고 허무맹랑한 선동을 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이걸 부동산 민심공략이라고 한다.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윤 후보는 같은 자리에서 민주당이 못사는 사람들은 자기편이라고 생각해서 양극화를 방치하고 조장했다고도 했다. 증오를 부추기는 갈라치기도 문제이지만 서민들을 우습게 여기는 편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윤 후보는 18일 대구 달성군 유세에선 광주시민들의 투쟁 의지가 약해질까 봐 민주당이 대형 복합쇼핑몰 유치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대형 쇼핑몰에 있는 좋은 물건들, 명품들 이런 것에 도시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면 자기들의 정치 거점 도시에 투쟁 능력, 투쟁 역량이 약화된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할 소리가 아니다. 유통 대기업의 매장 신설은 골목상권 보호와 소비자 편익이 충돌하는 민감한 문제다. 광주뿐 아니라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등 주요 대도시마다 갈등을 조정하고 상생의 해법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윤 후보는 이런 사실을 모르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악의적으로반사이익을 얻기 위해 갈등을 조장하는 건가. 국민의힘은 이걸 호남 민심공략이라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민생 문제에까지 이념의 굴레를 씌우는 것도 문제이지만 민주화에 앞장서온 광주시민에 대한 모독이다.

 

사실 윤 후보의 아무말 대잔치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120시간 노동’ ‘없는 사람은 부정식품이라도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 ‘집 없어서 청약통장 만들어본 적 없다등 셀 수가 없지만, 선거가 다가오면서 더 악성화되고 있다. 무개념에 적대감까지 더해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승리하겠다는 욕망의 민낯이 보인다.

 

입만 열면 쏟아내는 막말은 또 어떤가. 시도 때도 없이 허공에 어퍼컷을 날리며 박살 내겠다” “말아먹었다” “거덜냈다” “나라 꼬라지” “족보 팔이” “약탈 집단” “무식한 삼류 바보등 험악한 말들을 내뱉는다. 최소한의 품격도 찾아볼 수 없다. 유세장에 모인 지지자들이 호응해주면 신이 나서 더 한다.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할까 걱정된다.

 

자신의 문재인 정부 적폐 수사발언에 대한 여권의 반발에 대해선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즘,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 하던 짓이라고 성낸다. 진솔하게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되레 뒤집어씌운다. 히틀러도 이렇게까지 수준 낮은 선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재명 후보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 후보도 문제성 발언을 해왔다. 하지만 윤 후보와는 수위와 빈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시시비비를 엄정하게 가려야 하는 선거판에서 꿰맞추기식 양비론은 비겁한 물타기다.

 

윤 후보는 왜 이렇게 터무니없는 발언을 하고 거친 말을 쏟아낼까? ‘반문 세력결집을 위한 선거전략이라는 분석이 많다. 복잡한 공약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건 어렵지만, 막말은 힘도 안 들고 전달력도 좋다. 맹목적 지지자들의 마음에 바로 와 닿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는다. 비정상적 언행이 끊이지 않는 탓에 기본 자질과 소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몸에 뱄다는 얘기다. ‘구둣발 무례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민의힘은 다리가 아파 불편해서 그랬다고 대리 해명을 했는데, 보통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최소한 신발은 벗는다.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열차 좌석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걸 제대로 지적하는 언론이 거의 없다. 또 비판하면 윤 후보는 친여 매체가 민주당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고 공격한다. 자신의 허물을 겸허히 인정하고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적의를 드러낸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능력이 결여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사람이 현재 지지율에서 선두를 다투는 유력 대선 후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래저래 근심과 걱정이 쌓이는 대선이다.

안재승 논설위원실장 한겨레 :2022-02-21

 

가장 약한 자가 떠받치는 나라

또 너무 힘들다 그러네. 만원 올려서 하루 12만원 드리기로 했어.” 처의 말에 한숨이 묻어나왔다. 교통사고로 입원 중인 장모님을 돌보는 간병인에게서 온 전화였다. 장모님은 건널목에 서 있다가 택시에 부딪힌 오토바이가 덮치면서 발목이 심하게 골절됐다. 어려운 수술이라더니 천만다행으로 수술이 잘돼서 회복 중이다. 처음 1주일은 처가 간병을 했고, 이후에는 60대 여성 간병인을 썼다. 처도 하던 일인데 간병인은 통화 때마다 힘들다며 푸념을 했다. 결국 만원을 올려달라는 말이었다. 간병인이 힘들다면 장모님 마음도 편치 않을 터. 올려줘야지 별수 없는 노릇이다.

 

안 그래도 힘든 간병이 코로나19 탓에 더 어려워졌다. 보호자든 간병인이든 한명만 허용된다. 코로나 검사도 때맞춰 받아야 하고, 외출도 사실상 금지다. 감옥살이나 다름없다. 장모님이 입원한 병실은 6인실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간병인까지 열두명이 24시간 부딪히니 자잘한 사건과 사연이 넘쳤다. 답답한 마음에 처는 병상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칼럼 주제로 전전긍긍하는 내게 일지를 내민다. 모두 처가 몸으로 감당한 이야기다. 마음뿐인 내가 글로 전한다.

 

수술 후 무통주사를 맞는 동안 장모님은 계속 구토를 했다. 다리를 못 쓰자 대소변이 어려워져서 간호사가 처치를 해야 했다. 몸에서 나왔으되 가장 더러운 것들을 받아내고 치우는 일이 계속됐다. 숙련이 필요한 일이라 어떤 간호사는 단번에 처치하지 못하고 장모님을 여러번 힘겹게 했다. 그럴 때면 간호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단다. 처치를 위해 밤새 간호사들이 드나드는 통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간병하는 이들 중엔 가족도 있고 간병인도 있다. 사연을 들어보면 가족 중에는 대개 형편이 어려운 딸이 간병을 맡게 된다. 폐암으로 몇달째 기약 없이 투병 중인 엄마를 돌보던 딸은 어느 아침, 가족이 주고 갔다며 마른 반찬과 귤을 가져왔다. 돌봄을 떠안은 여동생의 고단함을 저 음식들로 퉁치려는 건 아닌가, 처는 문득 부아가 치밀었단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돌봄은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으로 못하면 돈으로라도 감당해야 한다.’ 처가 일지에 써둔 말이다.

 

간병인은 한국인과 중국동포로 나뉜다. 너무 힘든 일이라 이제 한국인은 소수다. 치매환자를 돌보던 중국동포 간병인이 성품이 조용해 보여 호감이 갔는데, 지저분하다며 한국인 간병인이 험담을 했단다. 온갖 음식과 양념까지 다 챙겨 다니니 그렇게 보이기도 했겠다. 간병인의 세계에도 계급이 있어서 힘든 환자일수록 대개 동포들이 맡는다. 간병비는 한국인보다 1, 2만원 더 적다.

 

돌봄노동의 가장 낮은 곳에 간병이 있다. 자동화될 수도 없고, 코로나 같은 비상시국에도 멈출 수 없다. 그래서 필수노동이다. 얼마 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필수노동자의 67.4%가 여성이고, 돌봄 및 보건 서비스의 경우는 93.8%가 여성이다. 필수노동자의 4분의 160세 이상 여성이다. 가난한 여성 노인들의 골수와 뼈를 내놓는 노동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가장 약한 이들이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

 

때로 의사보다 간병인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병의 현실이다. 6개월 이상 장기요양 판정을 받아야 적용받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제외하면 간병노동은 아직 사회보장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했다. 간병인들은 어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며, 때로 간병비조차 다 못 받는다. 병원비보다 더 큰 간병비 부담에 환자와 가족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가장 약한 가족 구성원이 희생되는 이유다. 초고령화, 노인빈곤, 젠더차별, 이주노동 등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문제들이 간병노동에 집약되어 있다. 우리 공동체가 함께 부담을 나누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장모님은 며칠 전 우리 동네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새로 온 50대 후반의 중국동포 간병인은 싹싹한데다 머리도 잘 감겨주고 힘이 좋아서 화장실에서 부축도 잘 해준단다. 힘들어요를 입에 달고 살던 이전 간병인보다 한결 낫다며 장모님도 좋아하신다. 병원 옮기며 간병비 지급을 위해 주민번호를 확인하니 60대 초라던 그 간병인은 일흔일곱, 장모님과 동갑이었다. 간병받을 나이에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힘들다던 하소연이 머리를 맴돈다. 여기가 대한민국이다. 가장 약한 자가 떠받치는.

조형근 | 사회학자 한겨레 :2022-02-21

 

 

손꾸락 콱 잘라뿌고싶은 이에게

손꾸락을 콱 잘라뿌고 싶소.” K는 말했다. 투표 다음날부터 배신당하고 후회하는 시민. 그는 몇 번이나 손가락을 잘랐을까. 이번에도 그는 암만 생각해도 찍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열네 명의 대통령 후보 중에, 내가 살고 싶은 세상 같이 꿈꾸는 이가 정말로 한 명도 없는 건가. 양당체제가 고착된 이후로 당선 가능한 후보와 지지하는 후보 사이의 간극은 점점 멀어져 갔다. 안 찍으면 안 찍었지, 더 나쁜 놈 막으려고 덜 나쁜 놈 찍는 그런 투표 다시는 하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투표일이 다가오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세상이 더 나빠질까봐. 하지만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 건 손가락을 그렇게 꺾고도 당신이 또 예전과 똑같은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최악을 막겠다며 차악에 투표하고, 그 사람이 싫어서 더 나쁜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 미워도 다시 한 번 하며 표를 주는 것. 누가 우리의 정치적 선택을 공학과 확률의 선택으로 좁혀놨는가.

 

투표에서 한 표의 의미를 생각할 때 나는 아테네 민주정의 태동기를 떠올리곤 한다. 물론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공직자를 투표로 뽑진 않았다. 추첨으로 뽑힌 각 지역의 데모스가 돌아가면서 공직을 수행했다. 하지만 민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투표를 통한 다수결정제에 따랐다. 부자든 빈자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똑같은 한 표를 행사했다. 원래 위계와 권위는 귀족사회의 전통이다. 민주정 이전에는 아테네도 그런 사회였다. 그런데 똑같은 한 표가 어떻게 발명되었을까. 역사는 전하기를 그리스 전역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 아테네에서 독특한 방식의 토지분할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테네는 다른 곳과 달리 농민들이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는 대신 자신의 몫을 다른 곳에 요구했다. 자신들의 몫, ‘클레로스를 민회의 한 자리에 할당했다는 것이다. ‘으로 번역하는 클레로스는 원래 토지를 분배한 할당지를 일컫는다. 프닉스 언덕에 고작 자기 엉덩이만 한 땅뙈기를 얻었다고 놀림을 받았지만 이 몫이 한 표의 권리가 되었다.

 

나중에 다른 이웃 폴리스에서는 쫓겨난 귀족들이 힘을 규합하여 다시 돌아와 반란농민들을 진압하고 땅을 빼앗았지만 아테네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부채를 탕감하고 채무를 빌미로 농민의 땅을 빼앗고 인신을 예속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데모스는 중요한 결정마다 민회에서 투표로 관철시켜 나갔고, 부유한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민중의 힘을 강화할 여러 제도들을 고안하고 법으로 강제했다. 공공축제나 선박의 건조, 축성, 공공식사 등 큰 국가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고 부자가 대도록 한 레이투르기아라 불린 공공봉사도 그런 제도였다. 매년 레이투르기아를 통해 최고 부자의 재산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에 아테네에서는 부에서 다른 시민을 압도하는 시민이 나올 수 없었다.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고대로부터 민주주의 이념을 빌려와 구체제를 타파했지만 민중의 표가 정치적 힘이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여러 장치를 만들었다. 대의제도 그중 하나다. 사표론도 정치적 상상력을 봉쇄하는 데 기여한 대표적 논리다. 사표론은 당신의 표를 훔쳐가기 위해 선거전문가들이 고안해낸 정치공학의 기술이다. 당신이 지지하는 이에게 표를 던지면 결과적으로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당선된다는 말은 협박이다. 지지와 투표를 분리시키고, 소수정당을 압살하며,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고약한 논리다. 내가 안 찍어서 세상이 더 나빠질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인질로 잡고서, 바둑판을 내려다보듯이 선거 판도를 보면서 표를 이동시키고 수집하는 선거장사치들의 관점이다.

 

어떤 식으로든 표를 긁어모으려는 이들에겐 숫자로 집계되는 수많은 투표 수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나의 한 표는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전부인 한 표다. 그 한 표에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내가 원하는 정치, 꿈꾸는 세상이 무엇인지가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정치적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일생 동안 내가 한 투표는 나의 정치적 삶의 궤적으로 남는다. 아무도 당신을 탓하진 않지만 손가락을 자르고 싶었던 건,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자신에게 부끄러웠기 때문이 아닌가. 함께 모인 표는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을 드러낸다. 권력자들이 두려워하는 건 그렇게 드러나는 사람들의 뜻이요 마음이다. 당장 거둘 확실성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확실한 희망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다. 이번에는 낼모레 선거 말고 5년 후, 10년 후, 백년 후에 투표하자. 우리의 존엄에 표를 던지자.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채효정오늘의 교육편집위원장 경향 : 2022.02.21

 

대선의 시간, 질문의 시간

말도 참 얄밉게 한다. “한국의 민주화 역사상 가장 역겨운(distasteful) 선거라니. 지난 13일 영국의 보수 일간지 더타임스 일요판이 한국 대통령 선거를 평가한 말이다.

 

이번 대선을 역대급 비호감이라고 하는 걸 그들 식으로 옮긴 모양인데, 표현이 더 얄궂다. 해외 언론의 평가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던 시절도 아니지만, 남의 잔치-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고들 하지 않나-에 감 내놓아라, 배 내놓아라 한다고 넘기기엔 께름칙하다. 해외 언론마저 주목하게 만든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 자기실현적 예언처럼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공식 선거운동 한 주를 채우기도 전에 이번 대통령 선거는 비호감 대선을 넘어 해괴한 대선으로 치닫고 있다. 한 대선 후보는 열차에서 맞은편 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올려놓았다가 논란이 일자 장시간 이동으로 인한 경련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그러고는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상대 당 대선 후보의 과거 사진으로 반격한다. ‘동물 지지를 두고 야당 대표와 여당 의원 간 논쟁이 펼쳐진다. ‘소가죽 굿판의혹이 나오고, ‘기생충 가족’ ‘까도비(까도까도 비리만 나오는) 후보등 막말이 동원된다.

 

두 후보 모두 통합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지만,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은 그 반대다. 거대 양당과 후보들은 분노와 배제,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는 선거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상대를 용납할 수 없는 적으로 보고, 악마화도 서슴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은 엽기 굿판과 신천지 의혹을 끌어들여 주술 프레임으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공격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는 최모(최순실)씨는 점은 좀 쳤는지 모르겠지만 주술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주술에 국정이 휘둘리면 되겠나라고 말했다. 윤석열 후보는 여권을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에 빗댔다. 그는 자기 죄는 덮고 남은 짓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서 선동하고, 이게 원래 파시스트들,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수법이라고 공격했다. 양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음 대통령은 이변이 없는 한 주술사 대통령아니면 파시스트 대통령이 된다는 얘기다.

 

후보들의 비호감 경쟁에, 진영 대결에 기반한 네거티브 공방에 이번 대선의 시대적 의미를 따지고 향후 5년간 국정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제시하는 과정은 묻혔다. 다시 해외 언론이다. “국내로는 소득과 성 불평등을 둘러싼 분쟁이 심화하고 국외로는 한국의 문화적·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가운데 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과의 관계에서 미래를 형성해야 하는 중요한 선거”(워싱턴포스트), “북한의 안보 위협, 부동산 문제 등 심대한 위기현안에 대한 논쟁도 없다”(더타임스).

 

적어도 이번 대선에 대해 우리가 동의하는 게 있다. 이번 대선이 코로나19 이후 대전환기에 대한민국호를 이끌어갈 선장을 뽑는 시대적 의미를 띤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 하나하나가 웬만한 노력으로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재난이 빈부의 깊은 골을 타고 찾아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각자도생을 강요받고 있는 서민들의 일상적인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기후위기, 에너지와 식량 위기, 세계 경제의 침체 조짐 등 엄청난 파고들이 밀려오고 있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훨씬 복합적이고 심대하다.

 

이런 눈앞의 현실과 곧 다가올 미래를 함께 바라보면서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정신이나 비전 논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상대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와 증오다. 대전환의 시대, 뉴노멀의 시대에 필요한 정책·비전은 보이지 않고, 선심성 공약이 난무하고 있다.

 

정말 건드려야 될 큰 문제는 안 건드리고 개별적인 문제들만 가지고 씨름하는 것 같다. 시대는 어마어마한 전환기에 들어가고 있다고 그러는데, 이 시기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은 어마어마한 전환기를 준비해야 될 첫 번째 대통령일 텐데 그 무게를 거의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걱정이다.” 중도보수 성향의 노()정객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대선 이후가 걱정이라는 말이 나온다. 책임은 후보·정당만이 아니라 유권자에게도 있다. 그러니 투표일까지 계속 질문해야 한다. 상대방이 나쁜 X’라는 주장은 알겠고, 당신은 뭘 할 거냐고. 우리는 당선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변화가 보고 싶은 거라고. 그 때문에 한 표를 행사하는 거라고./김진우 정치부장입력 경향 : 2022.02.21

 

 

대선후보의 수준, 대한민국의 수준

대선후보의 수준은 대한민국의 수준일까. 얼마 전 미국 신문이 한국 대선에 던진 냉소가 새삼 떠올랐다.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때 실소마저 떠올랐다. 한국 대선을 조롱할 겨를이 있다면 미국의 두 차례 대선에서 나타난 트럼프 현상을 심층 취재하라고 권하고 싶기도 했다. 적어도 촛불혁명을 거친 대한민국에선 트럼프처럼 민주주의 의식이 빈곤한 정치인은 나타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 사이에 스멀스멀 의구심이 올라온다. 일부 언론이 승기를 잡았다고 보도하는 유력후보의 민주주의 의식 수준이 갈수록 심각해서다. 그는 경북 유세에서 문재인 정부가 고의로 집값을 폭등시켰다고 주장했다. 말실수가 아니다. 전날에도 서울 유세에서 같은 말을 했다. 솔직히 나는 그 발언을 처음 접하고 낚시 제목으로 여겼다. 기사를 읽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사뭇 명료했다. “악의적으로 집값을 폭등시킨 것이라고 부르댔다. 이어 민주당 정권은 선거 공학에 전문가라고도 했다.

 

고의적 집값 폭등선거공학 전문가라는 말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했다. 여러 보도를 찾아보고서야 그의 심오한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집값을 폭등시켜야 집 없는 사람과 집 있는 사람을 갈라치기해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한테 누워서 표를 받는 거란다. “집이 없는 사람은 임대인의 횡포에 시달려봐라해가지고 자기들이 힘없고 가난하고 서민이고 노동자의 정당이다그래서 누워서 선거 때마다 표 받기 위해 만든 구조란다.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조선 신방복합체조차 감히 시도하지 않는 음모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광주 복합 쇼핑몰공약을 언급하며 대형 쇼핑몰에 있는 좋은 물건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 자기들의 정치 거점도시의 투쟁 의지와 역량이 약화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그 또한 모든 신방복합체를 뺨치는 논리다.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들,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수법이라고 몰아세운 그는 주말유세에선 다시 현 정부를 좌파 혁명이론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비즈니스 공동체로 몰아쳤다. 그가 케케묵은 색깔공세를 펼 때마다 참석자들이 빨갱이를 외친다는 보도는 섬뜩하다. 유세를 한다며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맞은 편 의자에 버젓이 구둣발을 올려놓은 모습이 살천스레 겹친다. 비판이 커지자 국민이 바라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사뭇 겸허한 듯 말했다. 아니다. 초점이 틀렸다. ‘국민이 바라는 행동과 무관하게 그런 행태는 인성의 문제다. 구둣발 올린 그 자리가 일상적으로 민중들이 앉는 의자이기에 더 그렇다.

 

물론 문재인 정부는 촛불의 뜻을 구현하지 못한 과오가 크다. 부동산 폭등도 실정임에 틀림없다. 야당 후보로서 현 정권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다만 묻고 싶다. 집값 폭등이 악의적 고의였다고 정말 생각하는가. 문재인을 히틀러나 무솔리니, 공산주의자에 비유해도 좋은가. 그를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발탁한 이가 문재인이라는 말은 접겠다. 검사로만 살아온 탓이라며 그의 심하게 뒤틀린 의식구조를 이해한다면 그 또한 검사 일반에 대한 모욕일 터다.

 

문제는 음험한 논리를 펴는 그의 자리가 너무 커졌다는 데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나는 박근혜의 거울이라는 책에서 그녀가 거울을 들여다보길 권했다.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은 물론 인간 박근혜에게도 불행이 되리라고 썼다. 근거는 간명했다. 박근혜의 능력이 조동에 의해 부풀려졌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노상 국민이 키운 후보를 자처한다. 그에게 거울을 권한다. 그를 대선 후보로 키운 것은 국민이 아님을 누구보다 자신은 알고 있어야 한다. 문재인의 책임도 있지만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을 날마다 대서특필한 조동 신방복합체가 그를 키웠다. 대선후보의 수준과 대한민국의 수준이 종종 심하게 어긋나는 까닭이다.

기자명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2.02.21

 

법 앞에서 불평등”, 굴종의 사슬을 끊자

정치와 법의 기만

 

정치인들은 어떤 존재인가? 표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받고 돈은 부자들에게 받는다. 그러고는 둘 다 보호하겠다고 말하지만 정작은 누구 편인지 분명하다.”

 

미국의 진보적 정치학자 마이클 패런티(Micahel Parenti)의 경고다. 그가 쓴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Democracy for the Few)에서 한 말이다. 미국 정치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기만(deceit)과 부패(corruption) 그리고 약탈(plunder)’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20년 전, 이 주장은 정치에 대한 과도한 비판과 비관이 담겨진 것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정치의 모순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되면서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고 부자들을 위한 국가 시스템이 시민의 정치기본권을 법과 제도로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은 근대 민주주의의 혁명적 성과이나 현실은 큰 범죄에 형벌이 아예 없거나 또는 작든지, 그리고 작은 범죄에 큰 형벌이 내려지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은 멀쩡하면서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석해서 감옥에 갇히더라도 힘찬 걸음을 내딛는 모습으로 실형 기간을 채우기 전에 석방된다. 우리가 매우 흔하게 보는 광경이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는 이제 거론하기에도 식상한 슬픈 상식이 되고 말았다. 그에 더하여 권력기관에 속해 있거나 그와 인연이 깊은 특권 세력이면 법은 한없이 너그럽다. 법은 빈자(貧者)와 부자(富者)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는 미소짓고 누구에게는 호통을 치는 야누스다.

 

-약자를 희생시키는 법과 불평등의 법정

미국의 전설적인 대법관 휘고 블랙(Hugo Black)그 사람이 지닌 돈의 규모에 따라 재판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평등의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고 분노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법은 가혹하다. 그리고 그 가혹함을 벗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꼼짝달싹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잘못된 판결을 뒤집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변호비용과 재판기간에 겪어야 하는 일상의 압박은 그 삶을 해체해버릴 정도다.

 

약자가 희생되는 구조를 법이 보장해주고 있다면 그건 정의를 파괴하는 사회다. 마이클 패런티는 이런 현실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사회적 논쟁거리로 만드는 노력이 무고한 희생을 소멸시키는 행동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정치를 연구하는 것 자체가 곧 정치행위라고 일깨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점은 누가 지배하는가?”와 함께 누가 이득을 얻고 있는가?”를 깊게 따져 묻는 태도이며 이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령 대장동 사건도 이런 각도에서 보면 그대로 답이 나온다. 특별할 것이 없는 상식적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언론에 의해 대체로 증발되기 일쑤이다. 그래서 더더욱 이 질문을 꼭 붙들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해진다. 우리는 대장동 뇌물 사건에 급기야는 현직 대법관 연루라는 보도까지 접하게 되었으니 한국 정치에서 격파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법의 불평등을 주도하는 세력이 바로 그 법에 대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은 따라서 철저하게 분쇄되어야 한다. 법정의 공간구조부터 완전히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재판관은 높은 상석에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보다 아래에 앉아야 하는 것은 이미 불평등한 권력질서다.

 

재판관이 입장하면 모두 일어서야 하는 것도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까지 고치지 않고 있는 게 기이한 습속이다. 뿐만 아니라 재판관을 부를 때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을 붙이지 않을 경우 법정을 모독하는 경칠 인간이 되어버리는 현실은 속히 내버려야 할 봉건적 유제(遺制) 일뿐이다. 그건 상호적이지 않은 인간 능멸의 풍속이다.

 

이런 공간구조는 법정의 권위를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법관의 오만을 제도화할 뿐이며 시민들은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법의 존중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법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약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에 대해 그 현장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법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신()뿐이지 않은가?

 

신조차도 인간이 되어 그 밑바닥에까지 내려가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이런 모든 봉건적 권위주의가 얼마나 야만적인가 하는 것을 일깨운다. 이 일깨움을 받아들이지 않는 법정의 구조와 법관의 의식은 자신이 신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세상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모든 나라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건 반드시 타파되어야 할 낡은 시스템이다.

 

그 대안은 오로지 시민법정일뿐이다. 법률가는 법적 권력의 행사자가 아니라 전문적 조언의 역할에 그쳐야 옳다. 법이 시민의 상식과 논리를 넘어서면 그건 폭력이다.

 

흑인들의 해방을 외치며 결성된 블랙팬더 재판이 진행 중이었던 1971년의 뉴욕 법정의 상황을 돌아보자. 피고가 된 이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이들의 목소리가 집단으로 들리게 되자 재판장인 존 머타(John Murtagh)법정모독죄를 선언한다.

 

그러자 피고석에 앉아 있던 리차드 무어가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우리가 법정 모독을 했다고? 당신이야 말로 정의를 모독하고 있소. 백인들은 이 나라에서 흑인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고 지난 300년간 모독해온 사실을 모르오?”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의견을 서로 주고받는 권리조차 봉쇄해버리고 이를 시끄럽다며 법정모독으로 몰아간 기존질서에 대한 주저없는 반격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작업에는 엄청난 용기가 요구된다.

인권변호사이자 형법전문 법학 교수로 활동해온 마이클 타이거(Michael Tigar)는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미국 대법원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가들을 석방시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로써 그 역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후 그는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상대로 그에게 희생된 이들을 옹호하는 운동과 함께 고문과 살인 혐의로 피노체트를 기소하는 운동도 벌였다. 인권과 정의가 법으로 구현되지 않는 사회는 야만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그의 소신과 의지의 발동이었다.

 

이때 그가 택한 원칙은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지 않는다(Not As Usual)”이다. 부당한 질서를 격파하기 위한 첫 번째 문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회고록 정의가 무너지는 것에 민감하라(Sensing Injustice)는 우리의 현실에서도 필독서다. 아직 번역되지 않았으니 역서(譯書)가 발간되어 널리 읽혔으면 하는 책이다.

 

바로 이렇게 당연하게 여겨온 법의 명령과 제도에 대해 그걸 계속해오던 대로 하는 게 옳은가를 묻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동이 된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사회가 대선을 치르고 있는 과정에서 선관위의 선거관리는 중대한 자가당착의 모순을 당연한 논리처럼 내세우고 있다는 걸 모두 알 필요가 있다.

 

촛불혁명 완수를 가치로 삼는 시민들의 연대조직인 개혁과전환 촛불행동연대가 정치검찰의 국가권력 장악을 저지하기 위한 현수막 행동전에 들어가자 현수막 문구를 문제삼아 선관위가 제동을 거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동일한 문건을 정당은 되고 일반시민은 불허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뿐만 아니라 현수막 제작업체의 내용까지 자료로 제출하라면서 마치 수사기관처럼 월권까지 한다. 시민의 정치기본권을 침해하고 시민들을 협박하는 태도이니 경악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는 선관위가 이렇게 시민들의 정치기본권을 훼손하는 것은 중대한 사태다. 선거의 공간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과 과제를 누구나 자유롭게 거론하고 의사표시를 해서 올바른 선택으로 가는 길을 여는 공동체 전체의 정치적 축제다. 그런데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단속하는 것을 법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면 이는 선거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축제는 사라진다.

 

만일 그런 논리에 따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문제가 된다면 정당과 언론은 선거기간 중에 모든 행동을 정지해야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 선거의 공간은 당연히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을 토대로 하는 것인데 이를 문제 삼는다면 그런 선관위야 말로 선거에 영향을 나쁘게미치는장본인이 된다. 그렇다면 더는 존재 이유가 없는 기관이다.

 

유권해석의 과정도 없이 범죄혐의 운운으로 걸고 1년 이하의 징역 등으로 시민을 겁박하기까지 한다. 이런 선관위는 말하자면 법정에서 상석에 자동적으로 앉는 법관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구조가 당연하게 여겨지면 시민들은 부당한 법에 굴종을 강요당한다. 이는 같은 사안에도 정당에게는 권리인정을, 시민에게는 권리박탈이라는 법 앞에서의 불평등을 대단히 위협적으로 관철하려 드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굴종의 거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파시즘으로 궤멸된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은 일종의 계급 타협적 산물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계급적 갈등과 모순을 은폐하면서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법 앞에서의 불평등의 문제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걸 적극적으로 풀어나갈 의지를 담지 않은 헌법은 그 갈등을 이용한 파시즘 세력에 의해 반격당하고 무너져 내려앉는다. 이 문제를 깊게 파고든 프란츠 노이만(Franz Neumann)의 역작 괴물(Behemoth)의 분석이다.

 

그는 현실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적대적 갈등을 대의제 속에 담아 은폐해버린 결과 파시즘 세력을 진압하는 정치가 붕괴되고 말았다고 갈파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우리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촛불혁명 정부를 자임했던 문재인 정부는 출범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촛불혁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 시작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연설에서 촛불혁명의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되었고 협치라는 방식으로 갈등을 은폐하고 타협하는 노선을 취하면서 프란츠 노이만의 말대로 파시즘 세력의 반격 앞에서 휘청거리게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법 앞에서의 불평등 구조를 혁신할 수 있는 시민의 정치적 의지와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스스로 시민들로부터 고립을 자초하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 안에 촛불혁명의 동력은 그렇게 꺼져 버렸다. 그 결과는 검찰 쿠데타의 주모자와 주도세력의 정치력 확장이었고 이를 막아내려는 시민들만이 지금도 고통을 치르는 중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들 정치검찰은 검찰개혁을 요구한 시민들을 무법천지를 만들어 사법처리가 되어야 할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에 대한 비판은 일체 없는 채 이들이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것만 문제삼고 분노했다. ‘시민이 없는 정부의 지독한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이제 다시 법 앞에서의 불평등으로 돌아가보자. 법의 명령이 인권을 유린하고 시민의 정치적 기본권을 침해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면, 이에 그대로 굴종할 것인가?

 

우리를 모독하고 능멸하는 법의 명령은 당연히 거부해야 옳다. 베트남 전쟁에 징병제로 동원되는 것을 거부했던 청년들은 바로 그 굴종의 현실에 반기(反旗)를 들었다. 마이클 타이거는 이 반기의 최전선에서 법의 정의를 세우는 투쟁을 벌여 성공했다. 법의 불평등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노예의 정치다. 육법전서로는 혁명을 하지 못한다고 했던 시인 김수영의 시 "육법전서와 혁명"은 이걸 제대로 본 통찰이다.

 

이에 대한 굴종을 거부하는 생각 자체가 이미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정치가 우리에게서 표는 가져가고 정작 지켜주는 것은 강자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체제 변혁은 이렇게 기존질서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는 데서 비롯된다.

 

법은 절대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법 위에 있다.

김민웅 경기신문 2022.02.21

 

 

 

대선과 숨죽인 부동산

거래절벽을 마주한 부동산 시장이 대선을 지켜보며 숨죽이고 있다. 21일 기준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집계된 2월 서울 아파트 매매거래는 136. 이대로라면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해 넉 달 연속 1000건대라는 신기록이 작성된다.

 

현재의 부동산 시장은 말 그대로 숨죽이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대출규제가 있었다 해도 거래량이 적어도 너무 적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경기는 위축돼 있지만 여전히 시중에는 유동성이 넘쳐난다. 부동산 시장 역시 아직 활황이다. 작년 오피스텔 매매거래금액은 13조원을 돌파해 역대 최대 규모였다. 돈이 아파트 대신 아파트와 비슷한 것에 몰리고 있을 뿐이다.

 

공급자인 집주인과 수요자인 세입자 모두 치열하게 시장 분위기를 살피며 눈치를 보다보니 지금과 같은 역대급 거래절벽이 완성됐다. 과거 이와 필적할 만한 거래절벽이 각각 글로벌 금융위기(2008), 초강도 부동산규제(2019)라는 배경이 있었다는 점과도 비교된다. 부동산 시장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확실성이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래 눈치란 게 어찌해야 할지 난감할 때 살피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이 대선을 눈여겨보는 이유도 이 같은 불확실성을 걷어낼 수 있는 게 대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증시에는 이른바 허니문 랠리가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초기에 왕왕 주가가 오르는 것을 빗댄 말이다.

 

그렇다면 부동산은 어떨까. 통계를 뒤져보면 사실 대선과 부동산은 허니문 랠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18대 대선은 부동산 침체기에 치러졌다. 선거일 직전 한 주간 -0.13%를 기록한 서울 아파트 가격은 대선 후 두 달여간 매주 평균 -0.11%의 가격 하락을 나타냈다. 반면 부동산 상승기였던 19대 대선은 가격 상승 효과를 가져왔다. 선거 직전 0.08%였던 서울 아파트값 상승폭은 이후 두 달여간 매주 평균 0.19%의 상승폭을 나타냈다. 상승폭이 두 배 이상 뛴 것이다.

 

가격 흐름만 놓고 보자면 최근의 부동산 시장은 이제 막 하락장이 섰다. 앞선 두 차례의 대선 후 시장의 향방은 대선 자체보다는 기존 시장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모습이었다. 추정컨대 대선 후 현재의 하락세가 극적으로 반전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물론 변수는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서서 시장에서 제기하는 여러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걷어내는 경우다. 대출을 풀고, 보유세와 거래세를 낮추고, 재건축초과환수제 등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것 등이다. 이에 대한 각 후보의 입장은 공약집에 나와 있다. 이번 20대 대선은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가장 치열한 계층투표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누가 당선되더라도 겨우 폭등세가 진정된 부동산 시장에 선뜻 손을 대긴 쉽지 않다. 국민과 함께 이뤄낸 ‘K방역으로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던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 폭등으로 지지율을 잃기까진 딱 석 달 걸렸다. 시작부터 난제를 안고 가야 하는 차기 정부 입장에서 부동산 정책에 대한 운신의 폭도 넓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부동산은 이념의 문제도, ‘젠더의 이슈도 아닐 것이다. 공교롭게도 먹고사는 문제가 대선 한복판에 걸렸다. 이제 다시 공약집을 들춰볼 때다. 송진식 경제부 차장입력 : 경향 2022.02.22.

 

배신의 미학

배신이라 함은 자기를 믿고 등용해준 사람의 등에 칼을 꽂거나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버리는 짓이다. 배신하기 전에 변절이란 내부(마음속) 단계가 있는데 자신이 줄곧 지녀왔던 신념이나 인생관을 포기하는 것이다.

 

배신이나 변절은 결코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좋은 쪽으로 바꾼 것이라면 전향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비나 일본의 사무라이나 중국의 협객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끝까지 충성하고 죽음을 불사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사람을 잘 살펴 모실 만한(사귈 만한) 사람을 모셔야 한다. 그래야 끝까지 충성하고 죽음을 불사하는 가치가 있다.

 

변절이나 배신은 욕심으로 인해 머리가 돌아버리거나 너무 배가 고파 눈깔이 뒤집히는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시기, 질투나 과대망상증으로 눈이 머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시대정신이니 정의니 대의를 내세우기도 하는데 몽땅 헛소리다. 내 평생 살아오면서 변절 덕분에 자리를 얻거나 먹을 걸 얻는 이들을 숱하게 봐왔다.

 

변절이나 배신에는 대가가 따르는데 일찌감치 30~40대 때 변절할 경우 (아주 운이 좋으면) 얻는 것이 잃은 것 보다 많은 경우도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이 그의 변절 사실을 모르거나 잊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대 접어들어 변절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평생 자기도 모르게 쌓아온 것(인연이나 명성 등 잃을 것)이 어마무시하게 많은 반면 얻을 것은 무엇보다 남은 수명과 체력 때문에라도 기대보다 훨씬 작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건 배신이 보답 받는 건 보질 못했다.

 

배신은 배신을 낳고 한 번 배신자는 두 번, 세 번 배신한다. 배신자는 배신자를 오래 챙겨주지 않는다. 또 배신자는 배신자끼리 변절자는 변절자끼리 모이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나는 그 더러운 꼴 보이지 않고 살아 온 것에 감사한다. 나는 민주시민이고 최대한 양심을 지키려는 언론인일 뿐이지 무슨 지켜야 할 대단한 이념이 있어서 그걸 지키려고 발버둥친 게 아니다.

 

한미한 신분이라 유혹 자체가 많지 않았던 면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큰 자리 욕심 없었고 눈깔 뒤집힐 만큼 배를 곯지 않았을 뿐이다. 내 주변 99%의 사람들이 다 그렇다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뉴스프리존 2022.02.22

 

 

촛불혁명과 대통령 선거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는 역사학자 이 에이치(E. H.) 카의 명언이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빛을 급속히 잃어갔다. 인터넷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면서 과거를 돌아보는 힘을 빠르게 상실했기 때문이다. ‘속도가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신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만 달려가게 한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니 과거는 잊힐 수밖에 없다. 과거의 중요성은 현재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척도의 역할에 있다. 이 척도를 상실하면 현실에 매몰되어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16년의 마지막날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 시민들. 촛불집회는 2017429일까지 이어졌다. 이정우 선임기자

 

20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대선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한 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촛불혁명을 다시 돌아볼 가치가 있다. 201610291차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201742923차 촛불집회까지 183일 동안 16852천명의 시민이 참가해, 구속자와 사망자 한명 없이 민주주의의 질서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평화롭고 장엄한 혁명은 부패와 무능, 통치 권력의 비정상성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2014416일 세월호가 304명의 생명과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이게 나라냐라는 절망스러운 깨달음과, 국민이 뽑은 대통령 권력이 비선실세에 의해 행사되었다는 사실로부터 형성된 분노였다. 집회에서 한 시민이 치켜든 팻말의 문구 모이자! 내 나라다에 주권자의 분노와 간절한 열망이 집약되어 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박정희 카리스마였다. 그러한 후광에 감정이입 된 이들이 박근혜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는 물론 박근혜도 불행에 빠뜨린 것이었다.

 

촛불혁명이 진행되던 2016년 겨울의 주말은 유독 추웠고 눈비가 많이 내렸다. 서울에 첫눈이 내린 1126, 광화문광장이 휑할까 걱정하며 나온 사람들이 150만명이었다. 영하 11도로 집회 이후 가장 추웠던 2017114일과, 한파에다 강풍까지 휘몰아친 218일에도 촛불의 열기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 열기로 집회장 안의 온도가 바깥보다 4도에서 6도까지 높았다.

 

촛불혁명이 그전의 혁명과 구분되는 것은 혁명의 주체가 라는 사실 때문이다. 수많은 가 저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외치고, 노래 부르고, 퍼포먼스를 하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속에서 파편화되어버린 우리로 변화하면서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피 흘림 없이 승리를 쟁취한 혁명을 이룬 것이었다.

 

2017310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함으로써 촛불혁명은 나라의 주인이 국민임을 세계에 확인시켰다. 촛불혁명이 시작된 2016년의 세계는 인종주의, 쇼비니즘, 기독교 근본주의, 안티페미니즘 등으로 무장한 극우 포퓰리즘에 신음하고 있었다.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심화되어가는 부의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분노가 극우 포퓰리즘이라는 악성의 형태로 분출되어 난민 약자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 테러와 전쟁이 난무하는 지구적 상황 속에서 한국의 촛불 시민들은 민주주의 원리를 평화적으로 구현하여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 그들의 놀람은 도시가 시위의 불빛으로 이렇게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름답다라는 국외 네티즌의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한국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피와 눈물이 배어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좌절의 절망과 고통을 견디며 조금씩, 느리게 민주주의를 쌓아나가 19876월 항쟁에 이어 촛불혁명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생명체이듯 민주주의도 불완전한 생명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욕망 사이에서 늘 위태로웠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 너머 저쪽에 있었다. 촛불 시민들이 광장에서 꿈꾼 것은 잘못 선출된 권력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민주주의 너머에 있는 저쪽의 민주주의였다.

 

다가오는 대선은 역사적 주체로서의 촛불 시민을 광장으로 다시 소환한다. 대선은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역사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촛불의 염원을 얼마나 구현해왔는가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터이지만,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 비율이 높다는 사실에 통절한 성찰이 필요하다.

 

한국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촛불혁명은 우리에게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이다. 촛불의 빛은 지금도 우리 사이를 흘러가고 있으며,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밝히는 척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차기 정부가 갖추어야 할 것들 가운데 촛불혁명을 구현하는 의지와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깨닫게 된다.

 

촛불혁명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한국을 꼭두각시 대통령의 나라라고 보도했던 외신 매체들이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지자 한국인의 높은 민주주의 의식에 놀라움을 표현하는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그동안 미국이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전형으로 여겨왔고, 한국이 민주화를 이룬 지 불과 30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경이로운 진보다라고 했고,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촛불혁명을 계기로 재벌이 주도하는 허약한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는 물론 외교정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개혁을 추진하는 동력을 얻었으며, 세계 신생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모델이자 지정학적 핵심 플레이어가 되려는 순간과 마주 섰다라고 썼다.

 

촛불 시민들이 희구한 것은 훼손되지 않는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것은 주권자의 존엄성이 훼손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은 훼손된 유권자의 존엄성을 되찾는 역사적 행위였고,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사람다운 삶은 훼손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 깨달음을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은 신냉전과 극우 포퓰리즘,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 등 갈수록 위험해지는 세계 속에서 민주주의의 역할이 그만큼 높아져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차기 정부는 문재인 정부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정부여야 한다는 당위성이 형성된다.

 

20대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는 촛불혁명의 계승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차기 정부를 선택해야 하는 유권자의 손에 촛불혁명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정찬 | 소설가 한겨레 :2022-02-22

 

 

이재명과 박수영의 업무추진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쪽의 경기지사 시절 업무추진비 사용을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핵심은 업무추진비의 사적 사용이다. 또 업무추진비가 매달 고정적으로 현금으로 지출돼 또 다른 의혹까지 더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민의힘은 이 후보가 성남시장 시절 하루 9차례 법인카드를 결제했다고 폭로했고, 이준석 대표는 어떻게 법인카드로 하루에 9번씩 밥을 먹느냐. 세금 도둑이다라며 이 후보를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이런 의혹을 집요하게 제기하며 이재명 저격수로 나선 이는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부산 남구갑)이다. 그는 경기도 경제투자실장과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김문수·남경필 지사 시절인 20134~20159월 경기도 행정1부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경기도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아는 빠꼼이. 이 때문에 박 의원이 던지는 의혹은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로 들린다. 또한, 연일 의혹 해명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그는 이재명과는 사뭇 다른 인물이란 신뢰의 프레임도 짜졌다.

 

그래서 박 의원이 경기도 넘버투였을 때 업무추진비를 어떻게 썼나 훑어봤다. 경기도청 누리집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부지사로 재임하던 25개월7일 동안 그가 사용한 업무추진비는 1263건에 418919650원이다. 박 의원 역시 하루에 업무추진비를 2~3번 쓴 것은 기본이고, 4번이 40, 5번이 21, 6번이 14건이다. 하루 7번 업무추진비를 쓴 날이 나흘이었고, 9번 집행이 한차례, 10번 집행이 두차례 있었다.

 

더욱이나 박 의원이 이 후보를 맹비난한 수상한현금성 지출도 있었다. 그는 경기도 부지사 시절 매달 공무원 급여일(20) 전후로 20~30만원씩 일정 금액을 반복적으로 빼갔다. 26차례 730만원이다. 집행 대상자는 총무과운전원으로 특정돼 있다. 이런 현금 지출은 경조사비를 포함해 모두 5190만원에 이른다. 현금 지출은 업무추진비 사용지침에 따르면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박 의원과 국민의힘이 이 후보에게 던진 의혹의 시선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 또한 수상한 현금 흐름아닌가.

 

앞서 박 의원은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이재명 후보가 (경기지사 시절) 업무추진비로 14천만원 정도를 현금으로 집행했다. 해당 업무추진비는 매월 20일을 전후해 150만원씩 동일한 액수가 출금됐고, 품의서상 명목은 수행직원 격려였다이는 운전기사 월급으로 사용됐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리해보면, 박 의원 역시 그가 비판한 이재명처럼매달 같은 날짜에 수차례 업무추진비를 집행했고, 경기도 부지사 재직 기간 내내 정기적·반복적현금성 지출도 했다. 근무 시기와 액수만 차이가 있지 경기도 넘버원과 넘버투의 업무추진비 집행 내역은 본질에서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업무추진비는 투명하게 운용·공개되고 검증받아야 한다. 또한, 사적 용도로 썼다면 범죄행위다. 의혹을 받는 이 후보 쪽은 터무니없는 음해라고만 되뇌지 말고, 밝힐 수 있는 만큼 모두 당당하게 밝히고 문제가 있으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면 된다. 대신 의혹을 제기하는 박 의원은 이 후보에게 들이댄 잣대를 자신에게도 그대로 들이대야 하지 않을까.

 

공교롭게도 이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 지난 20일 박 의원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그는 제가 경기도 행정1부지사 시절에 사용한 업무추진비 내역을 분석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중략) (이재명 캠프와 민주당이) 제가 공개한 자료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니 (저의) 흠을 찾느라 바쁜 모양이다. 전형적인 좌파의 모습이라고 썼다. 그의 말대로라면 박 의원의 과거 업무추진비 사용내역을 뒤적거린 나는 좌파다.

 

그렇다면 똑같은 행위를 한 자신의 과거에는 눈감으면서, 남에게는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 박 의원의 태도는 전형적인 우파의 모습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김기성 수도권데스크 한겨레 :2022-02-23

 

 

이재명·윤석열 후보의 같음과 다름

양비론과 진영 논리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다른 사고방식을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사회변화는 기존과 다른 글쓰기, 말하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지난달 나는 이 지면에 현대 사회의 팬덤 문화에 대해 썼다. 문재인 대통령의 팬덤은 확장성이 없고 BTS의 팬덤은 바람직하고’, 윤석열 후보는 독특하게도 지지자를 모욕한다고 말했다. 나의 주장은 정치인 팬덤이 대중 예술인의 팬덤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윤석열 후보의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관련 발언은 그 자체보다, 그런 생각을 공적으로 발화하는 그의 반사회성이 놀라웠다. 어쨌든 나는 세 가지 팬덤의 다름, 즉 지극히 당파적인 글을 썼는데 몇몇 독자로부터 양비론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글은 윤석열 후보 비판이 초점이었고, 이를 위해 문 대통령과 BTS를 비교했다. 윤 후보에 대한 일방적 비판을 피하려다 보니,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문 대통령 팬덤은 긍정적으로 쓰지 않은 데다 분량이 많다보니, 양비론으로 읽힌 것 같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글쓰기가 양비론인데, 그런 지적을 받으니 내 글이 읽히는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양비론만큼이나 오해가 많은 개념도 없을 것이다. 양비론과 양시론(兩是論)이 아니라 불가능한 관념이다. “둘 다 틀렸다, 둘 다 옳다는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문제는 양비론이 아니라 양비론의 기준이다.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같고, 어떤 경우에는 다르다.

 

캐롤 타브리스의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도 똑같지도 않은 이유>(또하나의문화, 2010)는 같음과 다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이의 기준이 무엇이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를 보여준다. 책의 원제 ‘The Mismeasure of Woman’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의 개념을 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모든 언어는 대상과의 차이와 거리에 의해 정해진다. 허공에서 만들어진 말은 없다.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반대말, 비슷한 말 공부가 중요한 이유다. 민주주의는 차이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를 둘러싼 끊임없는 갈등 과정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차이는 존중하되 차별은 안 된다는 통념이 너무 강력하다 보니 논의의 진전이 어렵다. 차별은 권력이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인지 아닌지를 규정한 결과다. 삼라만상에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차이가 모두 다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특정한 다름을 차이로 만드는 권력의 임의성이다.

 

양비론 기준 유권자가 만들어야

그러므로 근본적인 문제는 개념을 만드는 세력(권력)이 정하는 다름의 필요성이다. 한족이 절대 다수이지만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전쟁을 뜻하는 단어가 달랐다. 중화의 사고방식에서는 모든 무력 분쟁이 같은 급일 수 없다. (), (), (), (), (), () 등 다른 문자로 표기했다. ‘()’ ‘적국(敵國)’은 동등한 정치 집단에만 사용했다. 철저히 힘의 원칙에 따른 표현이지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우리도 성인과 어린이가 싸우는 것을 전쟁이라고 하지 않는다.

 

내로남불도 양비론과 관련된 언설이다. 이는 위선이라기보다 자기 위주의 부분적이고 한시적 경험이다. 정확히 말하면, 비유로서는 성립 불가능한 말이다. 로맨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맨스는 선남선녀 이성애자를 향한 로망이고, 윤리적이지 않은 사랑(‘불륜’)은 제도 밖의 관계가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거나 상대가 미성년자이거나 헤어질 때 비열한 행위 등을 말한다. 내로남불의 진짜 현실은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행동이다. 그들은 자국이 하면 전쟁, 다른 나라가 하면 테러라고 주장한다. 전쟁과 테러의 차이는 미국이 정한 것이다. 그러니 테러와의 전쟁처럼 도착적인 단어도 없다. 전쟁과 테러가 같은 의미인데, 테러와의 전쟁이라니.

 

이번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후보는 14. 모두 다른 인물이지만, 여야 후보에 대해서는 사상 최악이라는 여론이 유난하다. 공통점은 1960년대 출생 남성, 사법시험 합격자, 기득권 거대 양당 소속, 자신이 극우 마초(male chauvinist)인지 모르는 지극히 한국적인 남성, ‘아무 말 대잔치. 녹색당, 정의당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제도권 정치문화의 산물이다. 부디 건설(파괴) 공약이 실현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다른 점도 많다. 부모의 배경, 군대 면제 이유, 가족 논란, 경력, 가치관, 소속당 국회의원들의 선거운동 참여도까지. 각기 장점이든, 단점이든 차이가 크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이질적인 대통령 후보들이다. 두 사람이 같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같음과 다름의 기준 그리고 그 기준이 상식에 부합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차이와 큰 차이도 여기에서 정해진다.

 

양비론 논란은 무엇이 기준이냐에 따라 달려 있다. 김혜경씨는 도지사 부인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을 했고, 김건희씨 모녀는 주가조작을 비롯해 온갖 소송에 연루되어 있다. 무엇보다 김건희 박사는 학력과 경력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이것을 같은 수준의 흠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심지어 전자가 더 잘못인가? 이는 정해진 원칙에 따른 약점이 아니다. 유권자의 의식, 즉 어떤 문제에 더 분노하고 더 관대한가에 따라 달라진다.

 

여성 검사가 남성 피의자와 결혼?

두 후보의 가장 큰 차이이자 이번 대선의 중대한 쟁점은 이들이 법적 부부가 된 사연이지만, 의외로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소개팅과 검찰 문화 비호 아래 검사와 피의자의 신분으로 만난 경우, 이것이 같은 부부의 연인가. 나는 여성 검사남성 피의자와 결혼했다는 사례는 알지 못한다. 병역 면제도 마찬가지다. 윤 후보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시력 차가 0.7이 넘어 면제받았지만, 검사 임용 당시 시력 차는 0.2였다. 윤 후보의 면제 사유와 10대 소년이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프레스 기계에 왼팔이 끼여 6급 장애 판정을 받은 경우가 같다고 할 수 있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3D 프린터를 삼디라고 발음한 사실과 윤석열 후보가 ‘RE100’을 아예 모르는 것은 같은 차원이 아니다.

 

대선의 쟁점인 젠더 갈등도 차이의 기준을 교묘히 이용한 사례다.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둔갑시킨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개인의 무지인지 아니면 한국 사회의 무지를 활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전략은 성공한 듯 보인다. 그는 여성들 간의 차이, 남성들 간의 차이를 남녀 차이로 환원했다. 과잉 재현된 극히 일부 중상층 20대 여성과 징병 대상 흙수저 20대 남성을, 남녀 차이 일반으로 대립시켜 착시 현상을 만들었다. 계급 문제를 성별 갈등으로 조작한 것이다. 50대 가난한 여성과 50대 중산층 남성은 비교하지 않는가.

 

양비론의 반대 상황은 편들기가 아니라 같음과 다름의 기준을 살펴보는 지성과 윤리다. 차이의 기준을 유권자 스스로 만들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뭣이 중헌디를 알 수 있다. 흠 없는 사람도, 정치인도 없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핵심적 이유, 중요한 차이는 윤 후보가 검사라는 사실과 그들이 부부가 된 사연이다. 이것은 흠이 아니라 결정적 결격 사유이자 범죄 행위도 될 수 있다.

 

무엇이 큰 차이고 작은 차이인가도 중요하지만, 특히 정치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작은 차이가 더욱 중요하다.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의 선택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재명 후보는 흠결이 많고, 윤석열 후보는 무능하다고 한다. 해석하기에 따라 이는 큰 차이다. 흠결이 자수성가한 이의 불가피한 상처라면? 무능이 무개념, 반사회성이라면? 윤 후보는 실력을 논하기 전에 경력이 없다.

 

역대 대통령 중 유능한 리더들이 얼마나 있었던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피해자에 가까웠다. 우리는 해방 후에도 한참 동안 대통령이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 세월을 살아왔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지만 무능을 넘어 분별력이 없었다. 윤 후보의 현수막은 국민이 키운 윤석열인데, 국민이 그를 키울 시간이 있었던가? 이재명 후보는 위기에 강한 유능한 경제대통령이다. 유권자 스스로 어떤 지점에서 가치(차이)를 찾을 것인가가 양비론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 2022.02.23.

 

 

최악의 대선에서 차악의 기준 찾기

다음달 10일 자정을 넘어선 어느 시점, 누군가는 대선 승리를 선언할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통합의 정치를 통해 국가를 한 단계 도약시키겠다. 그러나 당선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 외침은 이미 공허해진다. 그 말을 믿을 시민이 절반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갈등과 투쟁의 시간은 시작된다. 승리한 쪽은 통합 약속을 저만치 뒤로 미뤄놓을 것이다. 승리의 전리품을 넘길 생각은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혹여 당선자 측이 통합을 말해도 실행 가능성은 없다. 통합은 그 필요성을 뼛속까지 절감하고 실행 의지를 다지고, 실행 계획까지 세워도 쉽지 않다. 하물며 입에 발린 말로 하루아침에 약속한다고 될 일인가.

 

대선을 정확히 14일 앞둔 오늘, 유권자 대부분은 지지 후보를 이미 정했다. TV토론을 하든 대장동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든, 이들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과는 아예 말조차 붙이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승부의 키를 쥔 사람들은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갖고 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를 주인공이 이런 사람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주변의 말을 들어보면, 이런 유권자들이 먼저 떠올리는 선택은 무효 또는 기권인 듯하다. 소극적으로나마 현 상황에 저항하고 싶은 것이다. 5년 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당선될 때, 기권표가 25.4%였다. 투표장에 나가 무효표를 던진 사람은 11.5%에 달했다. 10명 중 한 명이 투표장에서 후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위한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와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과반을 얻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결선투표를 하는 프랑스와 달리 우리는 한 번 기권표나 무효표를 던지면 끝이다. 분풀이는 될지언정 무의미하다. 오히려 최악의 후보에게 국정을 맡기는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남은 방법은 최악을 피하는 것이다. 흔쾌하진 않지만 최악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댄 고육지책이다. 그렇다면 최악은 무엇이고, 차악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최악은 권력의 독식을 방조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이번 대선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진영 대결을 줄이면서 정치교체를 실현하고, 대전환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단순히 정권의 교체를 넘어선 한 단계 진전된 정치가 절실하다. 그리고 정치교체의 핵심은 독식 체제를 개선하는 것이다. 지난 21일 이홍구·최장집·박명림 등 존경받는 사회 원로와 학자들이 권력 독점을 가능케 하는 제왕적 대통령제 해소를 역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정치권력의 독점을 가능케 하는 핵심 구조는 소선거구제이다. 단순다수제 승자에게 모든 것을 독식하게 하는 이 선거구제를 통해 거대정당은 권력을 농단하고 있다. 우리는 이 독식구조를 개선하라는 시민의 요구가 어떻게 좌절되는지 지난 총선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했다. 국민의힘 쪽이 먼저 법의 허점을 악용해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민주당도 고민하는 척하다 결국 뒤를 쫓았다. 그때 시민의 요구를 유린한 것이 지금 민주당 위기의 근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독식의 구조는 비단 중앙정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중앙보다 더 철저히 독식구조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 지방의회이다. 2인 선거구에서는 민주당과 국민의힘만 독식한다. 4인 선거구를 만들어 여러 의견이 골고루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광주를 제외한 광역시 이상 도시에는 4인 선거구가 하나도 없다.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선거구 획정위에서 4인 선거구를 다수 만들라고 했음에도 지방 정치권이 이를 무산시켰다. 그런데 정치권은 이 문제에 대한 개선을 외면하고 있다. 선거 6개월 전까지 정하도록 한 선거구 획정도 못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번 대선에서 지방의회 독식 해소를 아예 공약하지 않은 후보와 당이 있다. 어떻게든 선거에서 이긴 뒤 똑같은 방식으로 독점의 지위를 즐기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후보나 저 후보나 다 똑같다는 생각은 차악을 선택하는 길이 아니다. 비록 다 함께 죄는 지었어도 더 큰 죄를 범한 자는 있게 마련이다. 반성하지 않는 자가 큰 죄인이다. 대선 후 할 일도 자명하다. 독식 타파를 위한 개헌과 대선 결선투표제를 마련하는 것이다. “누구를 찍으면 누가 된다거나 누구를 찍으면 사표가 된다는 압박감에서 이젠 벗어나야 한다. 단일화 논의도 고민할 필요도 없다. 누가 독식 철폐를 선언하고 통합을 약속하는지, 또 누가 더 진실하게 이 문제를 고민하는지, 어느 세력이 정치적 다양성 확보를 위해 노력해왔는지를 따져야 한다. 남은 두 주 동안 중도층 유권자가 할 일이다.

이중근 논설주간 경향 : 2022.02.23.

 

 

노무현의 고뇌를 아는가

대통령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국가 미래를 위한 담론은 보이지 않고, 국민 통합을 위한 길잡이 대신 기생충, 파시스트, 주술사 등 막말이 오가는 역겨운 선거로 치닫고 있다. 와중에 대선 후보들 너도나도 선거운동에 노무현을 소환했다. 그들은 노무현이 품었던 고뇌를 가슴 저리게 한 번만이라도 느껴 보았을까?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알기는 하는 것일까? 그가 남긴, 미완성 <진보의 미래> 책자를 다시 꺼내 들었다.

 

노무현의 고민은 힘없는 보통 사람이 살기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로 시작한다. 그는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소득 불균형에 주목한다. 상위 10% 소득증가분이 평균 소득증가분보다 높고, 하위 90%의 소득증가분은 평균 이하에 머문다. 시장의 힘이 아닌 사회 규범과 제도 변화가 소득 불균형을 확대하는데, 그 뿌리가 정치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상위 25%가 순자산의 75%를 점유하고 있고, 하위 50%가 갖는 순자산은 전체의 10%에도 못 미친다. 그런데도 대통령 후보들이 양도세와 종합부동산세 완화, 가상자산 투자 소득에 대한 비과세 혜택 운운하는 걸 보면, 소득 및 자산 불균형에서 오는 양극화에 대한 국가의 대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세금을 낮추면 누구의 세금이 줄어드는가? 감세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감세는 투자와 소비를 활성화하는가? 감세로 인해 경제는 성장하는가? 가난한 사람들도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성장인가? 입술에 묻어나는 그들의 거친 말투를 듣고 있노라면 노무현이 했던 고민은 대선 주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1929년 대공항으로 몰락한 미국경제의 활기는 소득세와 법인세를 통한 증세로 가능했다. 우리나라는 현재 인구 고령화와 생산인력 감소 등의 사회적 변화로 나랏돈 지출이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나랏빚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을 넘어섰고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2026년이 되면 달러·유로·엔화 등 기축통화를 법정 통화로 사용하지 않는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가 국가부채 비율 3위까지 오를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하였다. 증세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후보 누구도 증세를 말하지 않는다. 솔직함이 없는 건지, 어느 부분에서 증세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대선 후보들은 경제성장을 제일의 화두로 삼는다. 여기에도 노무현의 고민이 묻어 있다. 그는 묻는다. 어떤 성장이 좋은 성장인가? 성장과 복지 중에서 왜 성장에만 계속 매달리나? 시장을 위한 성장인가? 사람을 위한 성장인가? 성장과 분배(복지)는 서로 배타적인가? 노무현에게 복지는 목적이었다. 경제는 복지를 위한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노무현은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예시로 충분한 경제력이 없는 모든 사람이 남부럽지 않게 존립할 수 있도록 사회 보조나 주택 확보를 위해 보조를 받을 권리를 인정한다는 문구에 주목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구매한 주택 소유주들은 낮은 예금금리와 높은 대출금리로 배를 불린 은행권 뒤에서 신음하고 있다. 규제산업인 은행업에 정부가 개입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노무현은 묻는다. 국가는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가? 그는 사회 구석구석을 고민했다. 승자와 패자가 더불어 사는 사회, 국제정치, 교육, 지역발전, 생태 지속 가능성 등 다 헤아릴 수 없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서 그가 남긴 말을 되새겨 본다. 언론은 여론을 조작하고 지배한다,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권리를 찾아 올바르게 행사해야 한다. 보복과 공안의 정치, 검찰 공화국으로 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간다.”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경향 : 2022.02.23

 

 

윤석열과 이명박,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한다지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갈수록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를 닮아가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이념을 넘어선 실용주의를 이야기한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는 이명박식 실용주의와 철학 부재를 덮으려는 윤석열식 실용주의가 같을 수는 없으나 근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윤 후보는 선거의 가장 큰 대의가 정권교체라고 했는데, 이씨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을 잃어버린 10이라고 낙인찍으면서 2007년 대선을 치렀다. ‘이핵관으로 통했던 이명박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그랬듯 윤 후보 측근 세력은 윤핵관으로 호가호위 논란을 일으켰다. 이씨는 재임 내내 법치주의를 외쳤는데, 공교롭게도 검찰총장 출신인 윤 후보 역시 법치주의를 앞세우고 있다.

 

두 사람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굳혀가던 와중에 윤 후보가 4대강 사업 복원을 수차례 언급했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중 폐기할 대상으로 4대강 재자연화 사업을 지목하고, 낙동강이 흐르는 경북 상주에선 이것(4대강)을 잘 지켜서 농업용수와 깨끗한 물을 마음껏 쓰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4대강으로 물이 깨끗해진다는 주장은 검증된 바 없다. 실상은 정반대다. 4대강 보로 인한 수질악화 때문에 녹조라떼유행어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급기야 윤 후보는 국민약탈 행위는 벌 받아야 한다문재인 정권 적폐수사를 공언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정치보복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퇴행이 윤 후보 집권 후 반복될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만났다. ‘여성가족부 폐지’ ‘검찰권 강화’ ‘민주당이 무솔리니와 히틀러(처럼 한다)’ ‘권력층의 국민약탈등 윤 후보의 발언들은 듣기 불편하다. 정치권 입문 당시 실언에 가까웠던 윤석열표 막말은 지지율 상승과 맞물려 험악해지고 있다. 2007년 대선에서 역대 최저 투표율(63%) 속에 당선되고도 온 국민 지지를 받은 양 역주행했던 이씨와 오버랩된다. 국민을 갈라치기하고 반대편을 손봐줘야 할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선거운동을 넘어선 선동이다. 윤 후보는 패권적 정치교체를 원하는가.

 

다만 관점을 바꿔 2007년 대선을 복기해보려 한다. 이명박 정권의 독주는 그만의 문제였을까. 이명박과 맞선 대통합민주신당(현 더불어민주당)의 책임은 없었나. 당시 정동영 민주신당 후보 측은 이씨의 비리만 터뜨리면 승리할 수 있다는 최면에 걸려 있었다. 정권심판론은 강고했고, 정 후보 개인도 당내 경선에서 박스떼기 논란으로 타격을 입었던 상황이다. 그럼에도 정 후보 측은 큰 것 한 방으로 여론을 돌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BBK 등은 흐름을 반전시키지 못했고, 당황한 정 후보 측은 이것저것 막 던졌다. 정 후보는 크게 졌고, 후폭풍은 이듬해 총선 참패로 이어졌다. 이명박 정권은 무능하고 무력한 야당 덕분에 마음껏 역주행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의 선거전을 보면 2007년의 악몽이 재연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수시로 바뀌는 이재명 후보의 말은 좌충우돌하는 당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50% 안팎의 정권교체론을 네거티브로 넘겠다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 윤 후보 부인 김건희씨 공격에 모든 것을 건 듯하더니, 이 후보 부인 김혜경씨 과잉 의전 의혹이 터지면서 역풍을 맞았다. 윤 후보와 신천지 교주 이만희씨의 손짓이 비슷하다며, 윤 후보 신천지 연루설을 펴는 것은 자해행위다. 일각에서 제기됐던 86세대 용퇴설은 없던 일이 됐고, 이광재·박재호 의원이 부산에서 골프회동을 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민주당이 절박한 자세로 선거에 임하는지도 의문이다. 이대로 대선에서 패한다면 6월 지방선거에까지 악영향이 미칠 것이고, 민심에 버림받은 공룡야당의 설 자리는 좁아질 것이다.

 

이번 대선의 결과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대다수 조사에서 이 후보가 윤 후보에게 뒤지지만, 오차범위 안팎의 근소한 차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흠집내기식 선거운동을 계속한다면 반등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이다. ‘윤석열은 안 된다’ ‘윤석열은 위험하다는 비판을 넘어 왜 민주당이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게 옳다. 그리고 그간의 오만과 위선, 내로남불 행태에 대해선 진정성 있게 계속 사과해야 한다. 이 후보와 민주당이 자주 소환하는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원칙 있는 승리가 첫 번째고, 그다음이 원칙 있는 패배, 그리고 최악이 원칙 없는 패배다.” 민주당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이용욱 논설위원 경향 : 2022.02.24.

 

 

이재명윤석열 공약, 정말 차이가 없는가

조중동 신방복합체가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모를 바보는 없다. 적잖은 이들이 한겨레와 경향신문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더러 오해를 불러올 보도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한 양비론을 펼치는 모습은 안쓰럽다. 저널리즘에서 중립이 주요 가치일 수 없음은 이미 미국 언론학계에서도 보편적 합의를 이루고 있다. 양비가 아니라 시시비비가 저널리즘의 본령이다.

 

이도 윤도 성장 외치지만양극화엔 침묵.” 한겨레의 224일자 신문 6면 중간기사의 제목이다. 인터넷 판에는 이도 윤도 성장론만 외쳐양극화·불평등 주요 의제 사라졌다로 구성됐다. 기사는 여야 유력 후보들이 앞 다퉈 성장 경쟁만 벌일 뿐,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대안은 거론하지 않아 누가 돼도, 그들이 그리는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썼다. 마지막 단락에서도 어느 교수를 인용해 어떤 후보가 되어도 성장으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구나라는 점이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확인될 것이라고 정리했다.

 

과연 그런가. 기사에도 한 구절 나오지만 이재명 후보는 기본소득 공약을 제시했다. 한겨레 기사는 선거 과정에서 이를 앞세우면 별로 표가 되지 않는다는 주변의 만류에 따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 판단의 옳고 그름이나 공약의 찬반은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을 비롯해 윤 후보와 차이가 뚜렷한 불평등과 양극화 해소공약이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선관위에 등록한 두 후보의 경제정책 차이는 크다. 가령 일자리대전환으로 성장하는 사회 실현을 목표로 내걸고 노동자든 자영업자든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를 명시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보장 기본법을 제정하겠다는 공약도 그렇다.

 

한겨레는 같은 면 머리기사로 윤 후보의 주식 양도소득세 폐지공약의 문제점을 부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후보가 되어도 성장으로 간다는 보도가 괜찮은 것은 아니다. 한겨레는 다른 기사에서도 이 후보의 기본소득과 기초생활보장수급 대상자 확대 등 복지 공약과 병사월급 200만원 지급과 같은 정책의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안이 없다고 썼다. 하지만 그 기사에서 적시했듯 애초 국토보유세로 불렸던 토지이익배당과 탄소배당(탄소세)을 재원으로 추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심상정 후보는 방송 토론에서 그것을 일러 이재명 후보에게 정직하라고 다그쳤지만, 과연 그것이 정직의 문제일까? 기사에 나오는 민주당 선거대책위가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고 국민들이 그 안전망의 효력을 체감한 뒤 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세금을 늘리는 경로를 만들어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은가.

 

양비론은 이에 앞서 경향신문 정치부장 칼럼에서도 나타난다. 두 유력후보의 양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음 대통령은 이변이 없는 한 주술사 대통령아니면 파시스트 대통령이 된다는 얘기라고 주장한다(221). 과연 그런가. 칼럼은 국내로는 소득과 성 불평등을 둘러싼 분쟁이 심화하고 국외로는 한국의 문화적·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가운데 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과의 관계에서 미래를 형성해야 하는 중요한 선거라는 미국 언론의 개탄을 소개한다. “북한의 안보 위협, 부동산 문제 등 심대한 위기현안에 대한 논쟁도 없다는 영국 언론도 덧붙인다. 하지만 어떤가. 사드를 추가 배치하고 종합부동산세를 폐지하겠다는 후보가 집권할 때와 다른 후보가 집권할 때 차이가 정말 없는가. “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과의 관계에서 미래를 형성하는 문제에 두 후보 차이는 정말 없는가.

 

미국과 영국 언론의 주제넘은 보도에 성찰할 주체는 두 후보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한국 언론이다. 물론 그 책임의 상당수는 신방복합체들에 있다. 그렇다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설정할 의제는 무엇일까. 공약에 대한 더 촘촘한 분석과 분명히 존재하는 차이점 부각이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2.02.24.

 

 

'정권교체론'은 허구다

새로운 정치의 본질은 기득권 해체

이번 대선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변인은 정권교체다. 민주당 심판론이다. 1야당인 국민의힘이 일찌감치 외쳐오던 것이다.

 

지금 국민의힘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은 확률상 절반 이상으로 보인다. 그러면 선거가 끝나고 국민의힘과 국민은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살게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그의 경험의 한계 때문에, 또 절대 열세인 의석 수 때문에 국정운영에 곧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사실 나는 그보다는 우왕좌왕 하며 철 지나고 엉뚱한 정책공약을 후보에게 쥐어주는 국민의힘이 더 걱정스럽다. 그래서 여의도에서는 황당하지만 탄핵 이야기도 스멀스멀 돌아다니고 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민주당이 형편없어서 국민의힘에게 기회를 줬더니, 결국 2년 후 있게 될 총선에서는 다시 국민의힘을 갈아치우기 위해 민주당을 선택해야 하는 당혹스러운 순간을 우리 국민들이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사를 건 치열한 대선 판국 와중에도 지금 여의도에서는 '윤석열이 당선되더라도 제대로 못 할 것이기 때문에 2년 후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이길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조용하게 돌고 있다. 586용퇴론이 안 먹히는 이유다.

 

정권교체론은 허구다

유래 없는 비호감 대선이라 한다. 그래서 국민들은 '차선' 또는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고뇌를 강요당하고 있다. 이번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 국민은 정말 불행한 국민이다.

 

반세기 넘도록 두 기득권 정당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주고받으며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이번에 지더라도 다음 기회는 금방 온다. 기득권이란 측면에서 이들은 정확하게 한 덩어리다. 일당 독재를 할 수는 없으니 양 당으로 적당히 편을 나눠 서로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영속적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박근혜 탄핵도 결국 두 당이 함께 하지 않았나. 이런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외양적 조건도 충족시키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권력만 왔다갔다 하는 게 아니라 사람도 수시로 왔다갔다 한다는 점이다.

 

이들 간 '정권교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들에게 정권교체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대선을 내주더라도 무슨 큰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총선에서 이기면 나의 신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총선 지더라도 지방선거에 나가 고향에서 왕노릇 하면 된다. 이도 저도 아닐 땐 정치권 통해 자리 하나 얻어 가면 세상에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이들의 기득권은 끝이 없다. 얼마 전까지 논의되던 국회의원 4선 연임제한 논의도 "헌법정신 위배다,"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지금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 왜 헌법정신을 위배하고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면서까지 자치단체장은 3선까지만 가능하도록 못을 박았을까? 나중에 자기들이 그쪽으로 갈지도 모르니 미리 길 닦아 놓은 것 아니겠나.

 

그리고 혹시 들어봤는가? "3선 쯤 하니까 정치가 다시 보이더라." 3선을 하면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는 말인가? 간단하다. 다선 중진이 되니 '쪽지예산'에 관록이 생기고, 분과위원장이 되니 권한은 늘어나고, 당 지도부와는 물론 여야 간 밀실야합에 자기 몫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20, 30년 하기 위한 합리화다. 이렇게 체계적이면서도 도무지 빈틈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기득권이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을까.

 

5년 전 탄핵시킨 세력에게 국정을 맡겨야 하는 '불행의 악순환'

지금 한국사회에 만연한 정치 혐오는 결국 이들 양당 기득권 독점 체제가 만들어낸 것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국민만 열불이 오르고 속이 터질 뿐이다. 어떻게 바로 5년 전 탄핵시킨 정당에게 다시 국정을 맡겨야 할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는가. 국민만 불쌍할 뿐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양 당은 정책공약 보다는 네거티브에 매진하고 있고 미래 구상 보다는 과거 들추기에 혼신을 다하는 듯하다. 점점 퇴행하고 있는 한국정치를 바꿀 수 있는 방안은 과연 없는 것인가. 탄핵 당한 세력으로의 정권교체가 과연 지금 우리에게 온당한 것인가. 반복되는 불행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는 지혜는 없는 것인가.

 

결국 정치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교체가 본질이다. 이재명 후보는 이를 (다소 애매하게) 정치교체라고 하는데 더 분명하게 하자면 권력교체이고 세력교체이면서 인적교체이어야 한다. 바로 기득권의 해체다. 안철수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은 새정치다.

 

많은 이들이 제도 탓을 하는데 제도는 죄가 없다. 제도가 잘못돼서 문제인 경우는 별로 없다. 언제나 사람이 문제였다. 그런데 기존 양당 기득권 세력은 허구헌날 제도만 가지고 떠들어댔지 자신들의 문제엔 눈을 감았다. 이들은 절대로 세력의 교체, 인적 교체는 원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똘똘 뭉친다.

 

새로운 정치의 시작은 가능할까

한국정치가 이러한 구체제에 억눌려 있다보니 국민의 투표성향도 점차 구체제적(?)이 되어버렸다. 이미 버렸던 놈인데 어쩔 수 없으니 다시 가져다 쓰는, 반복되는 행태 말이다. 그런데 이게 양쪽을 오가며 반복되다 보니 국민은 어느새 열불이 올라 결국 분풀이식 투표를 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는 다시 구체제를 강화하고 결국 우리는 불행의 악순환이 마치 순리인 듯 정치를 혐오하며 또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행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게 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재명 후보는 20SNS를 통해 안철수 후보의 "구체제 정치 종식과 새 정치를 향한 정치교체의 열망과 의지에 공감한다"면서 양당 독점 체제가 국민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해왔고 제3의 선택이 불가능한 정치환경은 결국 퇴행적인 구체제 정치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구체제 정치의 종식을 위해 '묻지마 정권교체'를 넘어 더 나은 '정치교체'가 되어야 하고 이 정치교체가 세상교체, 시대교체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실 이재명은 정치교체, 세상교체, 시대교체를 이야기 했지만 핵심은 기득권의 해체이고 이를 위해서는 선거제도와 개헌을 포함한 정치개혁이 그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이재명이든, 안철수든 해낼 수 있을까? 시도라도 할 수 있을까?집권가능성을 감안하면 이재명의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안철수는 단일화든, 공동정부든 연대에 나설 경우 가능해 보인다. 어쨌든 이들은 평소 정치개혁을 지향해왔을 뿐 아니라, 기존 정당의 기득권 내에서 정치적 성장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상대적이나마 높다. 생각해보라. 경선 당시 민주당 내부에서 이재명의 대선후보 도약에 떨떠름했던 이유 말이다. 홍준표가 국민의힘 경선에서 결국 떨어진 이유랑 똑같다.

 

그렇다면 윤석열은? 그는 삶 자체가 기득권이었고 검찰총장까지 지냈으니 대한민국 최고 권력집단의 수장이었다. 특히 정치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당 내에 신세진 사람이 많고 또 자신의 역량만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역량의 한계는 결정적이다. (전문가를 쓰면 된다고 스스로 수차에 걸쳐 공언했다.) 당연히 정치개혁은 언감생심이다.

요즘 유래 없는 비호감대선이라는 탄식이 난무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 중 떠오르는 것이 바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다. 사회주의체제의 완성을 꿈꾸던 마오쩌둥과 달리 권력을 이어 받은 덩은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쥐만 잘 잡으면 되지 고양이의 색깔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개혁개방에 나서 중국을 지금의 강국으로 발전시킨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번 대선 양강 후보가 모두 여의도 정치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 우리는 양당 독점 기득권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정치로 방향을 전환할 대통령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또 국민은 과연 자존심을 버리고 실용적 판단을 할 것인가? 아니면 묻지마 정권교체를 통해 구체제의 자리바꿈에 만족할 것인가. 곧 판가름 날 것이다.

정희준 전 동아대학교 교수 | 프레시안 2022.02.24

 

 

대선과 냉전 콤플렉스

레드 콤플렉스는 보수주의의 정치적 자살골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극도의 공포에서 비롯된 레드 콤플렉스는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무자비한 인권탄압도 정당화했다. 적색공포에서 비롯된 집단적 히스테리는 이민자=빨갱이또는 유대인=빨갱이라는 등식을 낳고, 반유대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을 부추겼다.

 

레드 콤플렉스에 빠진 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적이 됐다.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를 침해해도 좋다며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했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적색공포의 히스테리 앞에서 무시됐다.

 

1968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1975년 월남의 적화 통일,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등을 거치면서 고조된 레드 콤플렉스는 10월 유신과 잇단 긴급 조치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작용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를 희생해도 좋다는 논리가 판쳤다.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미국은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에 오염될지 모른다는 적색공포에 떨었다. 1930~1940년대 파시즘과 투쟁하느라 잠잠했던 미국의 레드 콤플렉스는 1950년대 매카시즘으로 되돌아왔다. ‘빨갱이라는 혐의만으로 문화계의 자유주의자들이 매장됐고, 심지어는 메이저리그 야구팀 신시내티 레즈조차 레즈’(Reds)라는 이름을 버리는 촌극도 벌어졌다.

 

반공 진영이 레드 콤플렉스의 유령에 쫓기고 있을 때, 공산 진영은 포위된 요새신드롬에 갇혀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에 포위된 사회주의의 요새 소련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는 억압해야 마땅했고, 일상의 행복에 대한 인민들의 욕구는 혁명의 추상을 위해 양보해야 했고, 노동조합은 당의 명령에 복종하는 위성 조직으로 전락했다.

 

존 리드가 <세상을 뒤흔든 10>에서 묘사한 격정적인 자유 토론 당시 지도부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땀내 나는 노동자들의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스탈린주의의 관료적 명령체제에 질식해 버렸다. 노동자가 주인인 사회주의 요새를 구출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의사를 짓밟는 것은 볼셰비즘의 새로운 상식이 되었다.

 

제국주의에 포위된 요새에서 인민을 위한 독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자유는 무시되어야 마땅했다. 당의 명령 아래 강철 대오를 이루어야만 제국주의의 간섭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은 인민을 사회주의라는 기계의 톱니바퀴로 만들었다. 당의 명령은 토의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관료제의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인민에게 전달되는 일방통행이었다.

 

무엇이 행복인가는 인민이 정하는 게 아니라 당이 결정했다. 당이 결정한 행복에 반대하는 자는 인민의 적이고 계급의 적이었다. 공산주의의 가장 끔찍한 점은 인민에게 당이 정한 행복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불행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는 극히 불행한 사회이다. 강요받은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유주의가 자유를 위해 자유를 죽였듯이, 포위된 요새 신드롬 환자였던 공산주의는 인민을 위해 인민을 죽였다.

 

대선을 2주 앞두고 갈라질 대로 갈라진 한국 사회에서 냉전의 잔영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일까? 레드 콤플렉스를 비판하는 사람은 포위된 요새 신드롬에 눈을 감고, 포위된 요새 신드롬을 비판하는 사람은 레드 콤플렉스에 눈을 감고 있다. 어느 한편을 비판하면 반사적으로 다른 한편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단순 논리 앞에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냉전 콤플렉스를 낳은 제로섬게임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구기 어렵다.

냉전체제에 청년기를 보낸 우리 세대의 대부분은 극히 단순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데 익숙하다. 당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레드 콤플렉스를 부추기는 반공주의 선전이나 지상낙원을 약속하는 공산주의 선전둘 중 하나였다. 냉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폭력은 그만큼 총체적이었다.

 

한 폴란드 친구의 농담처럼, “자본주의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밟고 서 있는 체제라면, 사회주의는 거꾸로 다른 인간이 한 인간을 밟고 서 있는 체제이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 위에 서 있으면 정의롭고 다른 사람이 내 위에 서 있으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좌파와 우파는 많이 닮아 있다. 참을 수 없이 저속한 네거티브 선거전을 보다 보면, 우리 사회에 깊이 드리운 냉전의 그림자에 새삼 놀라게 된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 경향 2022.02.26

 

 

지역균형발전 사기극

속도 내는 GTX교통혁명인가 수도권 블랙홀인가”. 201812월에 나온 <한겨레>의 기사 제목이다. 정부의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건설 계획이 탄력을 받고 있다는 걸 소개하면서 광주대 교수 이민원의 우려를 곁들인 기사였다. “비수도권에 투자를 해도 모든 자원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상황이다. 지티엑스가 개통되면 수도권 블랙홀 현상이 심화돼 국가균형발전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지티엑스는 교통 불편 해소와 집값 부담 완화가 목적이었다지만, <중앙일보> 교통전문기자 강갑생이 잘 지적한 것처럼 부동산 시장의 태풍의 눈이 되고 말았다. 아니 지티엑스 전쟁이었다. 노선과 역의 수혜를 입은 지역의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고, 이를 지켜보는 비수혜 지역의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는 거세게 타올랐으며, 이는 격렬한 항의 집회로 이어지곤 했다.

 

지티엑스와는 무관한 지방민들은 지티엑스를 위해 투입될 100조원 넘는 재정의 일부라도 지방으로 돌리라고 요구할 법도 한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난 수십년간 역대 정권들이 벌여온 지역균형발전 사기극에 당할 만큼 당했기에 체념의 지혜를 터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방민은 그저 각자 자기 지역에 국한된 공약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며, 일부는 자식을 서울로 보내는 각자도생 문법을 택했다.

 

국가의 장래를 논의하는 대선을 맞아 이대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겨레> 경제에디터 김회승은 20217대선 후보들한테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지티엑스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지티엑스는 지방 인구와 경제력이 수도권에 더 강력히 흡수되는 빨대 효과를 부를 공산이 크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도권 진입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고, 지티엑스 노선을 따라 줄줄이 더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서울 도심과 강남은 더 붐빌 것이다. 지금도 전 국토의 12% 남짓한 공간에 국민 절반이 모여 산다. () 지방 소멸은 더 빨라질 것이다. 현재 전국 면 단위 지역 중 병원이 없는 곳이 76%. 슈퍼마켓 하나 없는 곳도 45%나 된다. 학교는 어떤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하는 중이다. 말로는 지역균형을 외치면서 온갖 인프라는 수도권에 집중한 당연한 결과다. 후보들의 해법이 궁금하다.”

 

문제의 핵심을 짚은 탁견이다. 그러나 거대 양당의 후보들이 내놓은 해법은 지티엑스 확장이었다. 두 후보는 마치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처럼 신나게 지티엑스 확장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들은 수도권 전역을 평균 30분대 생활권으로 연결하는 지티엑스 혁명이라는 천진난만한 꿈을 이루겠다는 점에선 똑같았다. 이를 보다 못한 <경향신문> 논설위원 박종성은 최근 칼럼에서 지티엑스 공약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역균형발전은 선거용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이하랴. 두 후보는 물론 두 정당의 진심은 지역균형발전은 선거용 정치적 수사라는 것이니 말이다. 앞서 소개한 이민원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대선 후보들에게 사기의 의도는 없었다고 한다면, 이건 분업의 저주. 지역균형발전은 산업정책, 교육정책, 부동산정책, 교통정책과 연계돼 있으며 그렇게 다뤄야만 한다. 일자리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수도권에 집중시키는 한 지역균형발전은 불가능하다. 수도권의 부동산·교통정책이 기존 수도권 집중 추세를 전제로 하는 한 더 많은 사람들을 수도권으로 불러들여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산업·교육·부동산·교통정책과는 아무런 연계도 없이 외딴섬처럼 고립돼 있다. 그저 선거 때만 내놓는 구색 맞추기용 정책에 불과하다. 그래도 민심이 들끓지 않는 게 우리의 현실이자 숙명이라면, 감수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거짓말이나 희망고문은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

 

이 글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할 독자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30년 넘게 같은 주장을 반복하다 보니 나 스스로 질린다. 나 역시 체념의 지혜를 발휘하면서 가급적 지방 문제에 대해선 글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다만 대선 후보들이 지방에만 오면 지역균형발전을 큰소리로 외치는 걸 참기 어려웠을 뿐이다. 지역균형발전은 산업·교육·부동산·교통정책과 한묶음으로 추진해야 작은 개선이나마 이룰 수 있고, 이게 지방 소멸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출발점이다. 지방 소멸을 당하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나 당하자.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한겨레 2022.02.27

 

 

성장사회와 성숙사회

성장이라는 단어는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아이의 키가 자라고 지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기쁜 것도 없다. 화분의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 학생이 선생의 학문을 넘어서는 것, 낡은 사회적 통념이 깨지는 것도 성장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렇듯 가슴 떨리는 성장이라는 단어 앞에 꼭 경제를 붙이는 버릇이 있다. 사회의 미래 방향을 가늠하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성장은 늘 정책공약의 1번을 차지했다. 역대 정부의 성패는 경제적 성장을 일궈냈는지에만 달려 있다. 이 때문에 경제부처는 다른 부처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중요한 행정부가 됐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가장 중요한 뉴스는 다음해의 경제성장률 전망이다.

 

경제적 성장의 한계가 이미 50년 전 로마클럽의 보고서에서 확인되었지만 성장, 그다음의 비전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지속가능성장, 동반성장, 혁신성장, 포용성장 등이 지금까지 대안적 비전으로 거론되었지만, 여전히 성장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성장 앞에 무엇을 붙이든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소비와 생산이 증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기후위기와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팬데믹의 숱한 징후에 둔감했을까.

 

지난해 국회미래연구원은 3000명 대상의 온라인 조사와 202명의 시민이 참여한 숙의토론형 공론조사를 통해 새로운 선호 미래상으로 성숙사회를 도출했다. 성숙사회는 효율성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국가 주도의 경제적 성장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사회다. 각 개인의 처지에 맞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형평성, 사회적 신뢰나 연대, 건강의 증진 같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 생물다양성 보존과 기후변화 대응에도 적극적인 사회다.

 

조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물과 흙이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전국에 웬만한 땅 파보면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나온다고 증언했다. 또한 경제성장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시대는 지나갔다한 방향으로만 가는 사회에서 끝이 없는 경쟁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성장을 위한 기계로 사람을 취급하는 것은 멈춰야 한다고도 했다. 이런 의견들은 성숙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짐작하게 한다.

 

성숙사회의 원류를 찾아보면 물리학자(197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이자 시대사상가인 데니스 가보르가 1972년 펴낸 책()이 나온다. 그는 성장사회가 잃어버린 개인의 행복 능력, 놀이와 여가,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이 성숙사회의 과제라며 시급히 성장사회에서 퇴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보르의 성숙사회는 한동안 잊혔다가 유엔이 설립한 대학에서 2013년 성숙사회를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다시 언급되었다. 이 자리에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파르타 다스굽타는 국내총생산(GDP)으로 성장을 측정하는 관행을 비판하면서 자연 자본과 개인의 건강이 훼손되지 않는 성장을 주장했다. 그는 미래세대의 웰빙까지 고려하는 것이 성숙의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성숙사회를 저출생과 고령화를 겪고 있는 일본의 관점에서 비전으로 제시하는 시각도 있다. 일본 교토대학 히로이 요시노리가 펴낸 <에이아이(AI)가 답하다. 일본에게 남겨진 시간은?>(2019)에서 일본이 지속가능하려면 도시집중에서 지역분산형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과 물건, 돈이 지역 안에서 순환하는 분산형 사회시스템이 성숙사회를 실현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강조한다.

 

아직은 경제적으로 더 성장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당장 성숙사회로 이행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숙사회가 성장사회에 짓눌려 새로운 선택지로 등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껏 하던 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그건 정말 매력도 없고, 성장하지 않는 사회다

박성원 |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한겨레 2022.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