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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1.11.1~30 검찰에 휘둘리는 대선, 대선판을 주도하는 검찰

by 이성근 2021. 12. 2.

제민주화에 역행하는 '김종인의 선택' 프레시안 2021.11.01

백년하청 오적(五賊) 경남도민 2021 11 2

미래세대라는 돌림노래를 멈춰라 프레시안 2021.11.02

급변하는 대학 청년문화 경향 : 2021.11.02

김오랑, 강경대, 노태우, 이재명 경향 : 2021.11.02.

위드 코로나’, 위드의 새로운 발견 한겨레 :2021-11-03

법정의 존엄과 팔짱? 한겨레 :2021-11-03

1986 2 28, 현대 정치의 시계는 멈춰 버렸다 프레시안 2021.11.04.

일그러진 청년서사 설거지론그들은 왜 여성들을 노리나 한겨레 2021.11.07.

이재명과 윤석열의 대결이 아니다 한겨레 2021 .11.9

독박 간병 사회 경향 : 2021.11.10

이상한 대선 구도의 뿌리 한겨레 2021-11-10

고교 한국사 축소, 문 대통령도 아시나요? 한겨레 2021-11-10

 

국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경향 : 2021.11.12

대선판을 주도하는 검찰 경향 : 2021.11.12.

검찰에 휘둘리는 대선, '쌍특검'이 답이다 프레시안 2021.11.12.

엄마는 법정 증언을 반대했지만 저는 하고 싶었어요 시사인

노동귀족들의 적반하장 미디어오늘 2021.11.15.

OECD 가입 25, 한국의 현주소 한겨레 2021.11.15.

김혜경 vs. 김건희, '퍼스트 레이디 리스크' 프레시안 2021.11.15

 4일제와 정규직 중심주의 경향 : 2021.11.16

대선 승자는 이미 결정됐다..., 이재명도 윤석열도 아니다 프레시안 2021.11.16.

자연에 바쳐라 경향 : 2021.11.20

시대정신 외면하고 행동 않는 지성은 곧 인간다움을 잃은 죄인 경향 2021.11.19.

공감의 폭력 경향 2021. 11.23

법과 정의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프레시안 2021.11.29.

역대급' 방송 사고, '역대급' 편향 보도 프레시안 2021.11.29.

촛불로부터 네오직접민주주의 시대를 생각한다 프레시안 2021.11.29.

동 신방복합체, 10년의 불편한 진실 미디어오늘 2021.11.29.

독점재벌 해체하라! 매일노동뉴스: 2021.11.29.

닥치고 이재명’ ‘묻지마 윤석열경향 : 2021.11.30

한국, 왜 우경화하나? 한겨레 : 2021.11.30

기소 당하면 인생이 절단난다 한겨레 2021-11-30

우리가 몰라서 금전수를 죽였나 한겨레 2021-11-30

 

 

조중동의 문재인 조롱과 진실

임기 말 문재인 조롱이 한창이다. 대통령의 자화자찬이란 말이 신문과 방송에 넘실댄다. 중앙 신방복합체는 의 마지막 시정연설11300자중 자화자찬이 7800 아래 “40분에 달한 연설에서 나온 자성이나 반성이 담긴 내용은 한 단락에 불과했다고 꼬집었다. 심지어 조선일보에서 상대적으로 유연했던 논설고문 강천석까지 노태우 재평가와 문재인 송덕비 제목의 칼럼에서 현재의 정치 상황을 말기 암 증세라며 나라 전체에 전이돼 간단한 수술로는 도려낼 수 없는 지경이라고 부르댔다. 518학살 주모자는 대통령으로서 큰 치적을 남겼지만, 민중의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대통령은 나라를 말기 암에 이르게 했단다. ‘문재인 정부가 가장 잘한 것에 대해 질문한 결과, ‘없다 37.4% 1위를 차지했다는 쿠키뉴스의 여론조사 결과는 신방복합체들을 비롯해 언론 여기저기서 줄이어 부각됐다.

 

직무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과 언론의 평가가 사뭇 다른 셈이다. 조중동 특히 조선 신방복합체가 정부 출범부터 살천스레 비판비난해온 사실을 톺아보면 언론의 조롱이 새삼스러울 수 있다. 언론이 대통령 치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1030일 조선일보 강천석 칼럼 “‘노태우 재평가 문재인 頌德碑’”

진실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가 짚어 마땅한 대목이 있다. ‘문재인 정부가 가장 잘한 것을 묻는 설문에 소득격차와 사회적 양극화 해소 및 복지 응답은 4.2%로 낮았다. 중앙의 시정연설 기사는 대통령이 경제(32), 지원(27), 고용일자리(18), 성장(8) 등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분배(0), 평등(1) 등 정부 초기 관심사와 관련된 말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어떤가. 때맞춰 비정규직 노동인이 처음으로 800만명을 돌파했다는 통계청 보고서가 나왔다. 비정규직 비중도 38.4%로 역대 최고치다.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은 노동인들을 감안하면 비율은 훨씬 높아진다. 대졸 새내기노동인 기준 대기업과 중소기업 임금이 2020년과 2021년 사이에 더 커졌다는 통계도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간명하다. 대통령이 문파들의 결집력 높은 열정을 정책으로 강력히 모아내지 못한 결과다. 조중동이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집요하게 비난하자 대통령은 직접 나서서 경제 패러다임 변화의 절실함을 호소할 섟에 몇몇 참모들에 둘러싸여 슬금슬금 접었다. 신방복합체들이 노동존중 사회 공약을 물고 늘어지자 우물쭈물했다. 민주노총 한상균 전 위원장 석방을 미룰 만큼 미루다가 석방하더니 기어이 현 위원장 양경수를 구속했다.

 

촛불혁명의 물결을 타고 지지도가 올라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문파와 민주당에만 의존한 채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 건강한 비판을 제기한 진보세력을 좌적폐로 여긴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이제 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은 촛불혁명 5주년을 맞아 다시 촛불을 들었다. “상식과 정의를 외쳤던 대통령은 불법파견 범죄자 재벌총수들을 청와대로 초대해 맥주 만찬을 벌이고, 국정농단, 재벌적폐 총수인 이재용을 풀어줬다. 노동존중, 비정규직 제로시대,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는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문재인 정부 내내 비정규직은 일하다 죽거나 잘리거나 거짓 약속에 속았다는 절규는 선동 가짜 뉴스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가. 민주노총을 노상 귀족노조로 몰아친 조중동 신방복합체는 정작 비정규직노동인들이 든 촛불에 모르쇠를 놓거나 단신으로만 보도했다. 과연 그들이 민주노총은 비정규직을 외면한 이기주의 노조라고 몰아세울 조금의 자격이라도 있을까. 민중을 이간질하는 기만 아닌가. 민주노총을 마녀로 여기는 사람들과 꼭 나누고 싶은 물음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비정규직인들이 애면글면 든 촛불은 두 공영방송에서도 찾기 어렵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에서도.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미디어오늘 2021.11.01.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김종인의 선택'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 박사(그동안 너무 많은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그냥 '박사'로 표기한다)의 정치 행보를 지켜보며 한때 공자를 떠올린 적이 있다. 공자는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실현할 제후를 찾아 14년 동안 주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이른바 '주유천하'(周遊天下). 김 박사 역시 성격이 다른 여러 정권을 넘나들고, 여와 야를 횡단하는 특이한 정치궤적을 이어왔다. '출사'(出仕)에 크게 성공하지 못한 공자와는 달리 청와대 경제수석, 거대 양당 비상대책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섭렵했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5차례나 지내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남겼다.

 

공자가 현실 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한 이상은 인()에 기반한 도덕 정치였다. 세상의 혼란이 '인의 부재'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힘의 통치가 아닌 인치와 덕치를 통해 난세를 바로잡으려 했다. 김 박사의 트레이드마크는 '경제민주화'. 그는 "어느 특정 경제 세력이 나라를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균형과 조화를 통한 사회의 안정"을 주장한다. 이를 두고 "경제 주체 간의 세력균형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입장"(권도혁·강정인, '경제민주화 담론에 대한 정치사상적 고찰')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어쨌든 경제민주화는 '정치인 김종인'이 끈질기게 추구해온 이상이자, 그의 현란한 정치궤적을 정당화해주는 명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김 박사를 공자에 비유하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밀려온다. 공자는 천하를 주유했으나 결국 무도한 정치 세계에 대한 실망감을 안고 말년에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치에서 일절 손을 떼고 학문과 교육, 집필에만 힘을 쏟았다. 그런데 김 박사는 나이가 들어가도 정치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의 평생 화두인 경제민주화를 향한 '이상 실현의 정치'는 어느 틈에 실종되고, 노회한 정치인으로서 킹 메이커의 위력을 과시하는 '게임의 정치'를 하고 있다.

 

김 박사는 며칠 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자리에서 "내년 대선은 이재명 민주당 후보 대 윤석열 후보의 경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최종 대선후보 결정을 코앞에 두고 누가 봐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었다. "홍준표 후보가 무섭게 추격하니 제동을 걸었다"는 등의 분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김 박사와 홍준표 후보의 악연(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관련 구속 등)을 생각하면 그가 홍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윤 후보를 돕는 것은 그가 꿈꿔온 경제민주화나 보수의 개혁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국민의힘은 지난해 9월 초 새 당명으로 재출범하면서 '새로운 보수'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당 강령 제1 1항에 '기본소득을 통해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선언을 명기했고, 사회적 약자 배려, 노동 존중 등 기존 정책과는 다른 내용을 정강정책에 많이 담았다. 김종인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의 강력한 드라이브 결과다. 하지만 지금 국민의힘은 보수 혁신은커녕 오히려 '보수 뒷걸음질'이 확연하다.

 

신보수의 깃발이 퇴색한 데는 윤석열 전 총장의 ''이 크다. 그는 사회적 약자 배려나 노동 존중 등 보수의 새로운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도 당내 유력주자인 윤 후보 쪽으로 의원들의 줄서기가 이어지니 새로운 정강정책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김 박사가 굳이 '국민의힘 멘토'를 자처한다면 홍준표 후보가 아니더라도 다른 보수개혁적 후보를 밀어야 옳다.

 

김 박사는 박근혜 대선 후보의 '일등 책사'로 경제민주화 공약을 설계했으나 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경제민주화 공약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그는 용도폐기됐다. 김 박사는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박 전 대통령을 평했다. 그렇다면 지금 윤석열 전 총장은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김 박사는 "(윤 전 총장이) 사물을 보는 자체가 정확하다"고 말했다. '전두환 옹호 발언'을 비롯한 그의 숱한 '망언과 실언' 시리즈를 보면서도 과연 그런 평가가 나올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은 윤 전 총장이 사물을 보는 눈 자체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여기고 있다.

 

김 박사는 회고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박근혜는 일단 문제를 일으킬 조건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가족과 친인척 문제는 걱정하지 않고 재벌이 유혹하는 손길만 차단하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이야기다. 김 박사는 삼성이 "대통령의 최측근 최순실"을 정확히 찾아내 "원포인트 뇌물"을 준 것을 지적하며, 삼성을 비롯한 재벌의 뛰어난 정보력과 로비 능력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했다.

 

'재벌의 유혹' '가족·친인척 문제'에서 윤 전 총장은 어떤가. 그의 부인 김건희씨는 이미 불투명한 재산 형성 과정을 놓고 삼성 등 재벌과의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남편이 유력한 검찰총장 후보로 떠오르면서 김씨의 회사 '코바나컨텐츠'가 기획한 전시공연에는 삼성, LG, GS 등 대기업과 은행 등의 협찬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협찬 기업들 중에는 환경 오염과 채용 비리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기업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김건희씨와 삼성의 관계다. 김씨를 전시공연 업계의 떠오르는 스타로 만든 '마크 로스코' 전시회에 협찬을 한 기업이 바로 삼성이다. 심지어 김씨 소유의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아파트에 삼성전자가 비정상적인 조건으로 전세권 등기 설정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삼성의 뛰어난 정보력과 로비 능력은 이미 김건희씨를 향해 빛을 발하기 시작한 셈이다.

 

김종인 박사가 회고록에서 했던 말을 윤석열 전 총장에 대입해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일단 문제를 일으킬 조건이 너무나 차고 넘친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재벌이 유혹하는 손길 차단은 물 건너가고 가족과 친인척 문제부터 크게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훗날 '회고록'을 쓰지 않고 지금 '현장 르포'를 써도 이런 기술에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떠돌이 시절 공자의 초라한 모습을 '상가지구'(喪家之狗)라고 표현했다. 난세에 태어나 여러 나라를 떠돌았으나 결국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이루지 못해 지친 모습을 '상갓집 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공자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 아니다. 한 위대한 인간이 가졌던 염원과 포부, 굴욕과 좌절을 통해 우리는 공자의 인간적인 진면목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김종인 박사의 요즘 모습을 보면서도 '상가지구'라는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말에는 공자의 아우라는 없다. 이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허욕과 자기과시의 초라함이다. 베이징대 중문과 교수인 리링 같은 학자는 ''() '잃어버리다' '상실하다'는 동사로 해석해 '상가지구' "집 잃은 개"라고 해석한다. 어떤 해석을 따르더라도 무방하다. 지금 김종인 박사는 평생 추구해온 '경제민주화'라는 '이상의 집'을 잃어버린 채 정치적 영향력 과시란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김종구 (언론인) | 프레시안 2021.11.01

 

백년하청 오적(五賊)

대통령 선거가 점점 다가오니 예비 후보들 똥줄이 타나 보다. 서로 허물을 들춰내느라 케케묵은 일까지 뒤지며 난장판이다. 우리네 돌쇠 먹쇠 마당쇠들에겐 듣도 보도 못한 별나라 이야기 같은 어마무시한 일들이 비리한 냄새를 풍기며 끝도 없이 까발려진다. 선거판이 아니었으면 우리에겐 있는지조차 모를 저들만의 이야기들이다.

 

지난날에는 붓끝 험했던 한 거지 시인이 볼기에 불이 확확 나게 맞을 작심하고 별별 이상한 도적들 이야기를 하나 했는데 바로 이들의 이야기다. 50년 전 김지하의 담시에 오른 오적(五賊)은 지금도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 본디 오적은 백 년도 더 지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 나라를 팔아먹은 다섯 매국노들인데 일제 귀족 작위를 받고 백성 피와 살로 빚은 술과 안주로 부어라 마셔라 떵떵거렸다. 일제가 패망을 하고 나라를 찾았지만 오적은 이름을 바꾸고 되살아난다.

 

거지 시인의 붓끝을 빌려 볼작시면 유신 독재가 만들어준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오적은 더욱 교활하고 야비했다.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온갖 특혜로 성장한 재벌이 그 첫째 도적이란다. 귀띔에 얻은 정보로 땅장사에 한몫 잡고 수천 배 남는 공사로 금 칠갑을 하고도 노동자 임금에는 절레절레 도리도리. 둘러치는 재주는 손오공 할아비요 구워삶는 재주는 되놈 숙수 뺨친단다. 쭉 째진 배암 혓바닥에 구호만 와글와글한 국회의원이 두 번째 도적이다. 전쟁에선 이기는 것이 목적이니 속임수를 쓴다지만 나랏일은 염불이요 집권이 잿밥이라 눈 가리고 아웅이고 어제 말이 오늘 다르고 오늘 말이 내일 다르다. 산같이 높은 책상 바다같이 깊은 의자에 우뚝나직 셋째 도적 고위 공무원은 공이랄 것 없으면서 하늘같이 높이 앉아 되는 것도 절대 안돼 안될 것도 문제없으니 책상 위엔 서류뭉치요 책상 밑엔 지폐뭉치라. 위로는 삽살개요 아래로는 사냥개로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해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구름아 물어보자 한다. 넷째 도적이라 하는 것이 전쟁에 임하여서 제 군대 작전도 남의 나라에 물어 하는 주제에 뒤로 호박씨 까는 똥별 장성이니 세금으로 주는 녹봉조차 아깝구나. 마지막 장차관이 나온다. 예산에서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어 냄새 맡고 쫓아온 말 잘하는 반벙어리 신문기자 앞에 두고 일국의 재상더러 부정이 웬 말인가 을러댄다.

 

거기다 오적을 잡으라는 포도대장마저 매수당해 오히려 오적을 지키는 개가 되어 감싸고 덮으니 속에서 비린내가 하늘을 찔러도 알 수가 있나.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아! 대한민국에는 또 다른 아, 대한민국이 있었다. 농민 노동자 서민들은 말고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은 허리 잘려 찢긴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에게 마른 무릎을 꺾인 고단한 민중은 눈 가려지고 귀 막혀서 살았다. 이 나라에 대장동이 어디 저곳뿐일까. 이 나라에 부모 뒷배로 난동 부리는 아이가 하나둘일까. 오적이 주는 고기를 먹고 몸을 불린 포도대장이 어디 어제오늘이던가. 백 년 묵은 오적이나 오늘 오적이나 처단하지 않고서는 길이 만대로 저들의 노예로 개돼지로 살 것이라. 생 논둑을 끊기는 어려우나 한 번 터진 물꼬로 물길 내기는 쉬운 법. 이 기회에 끊어내야 흙수저 내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겠다.

 

김지하의 '오적'과 정수라 '! 대한민국', 정태춘 ', 대한민국'을 부려 썼습니다.

박보근 노동자 경남도민 2021 11 2

 

미래세대라는 돌림노래를 멈춰라

체제전환은 불가능한 공상이 아니다

미래세대'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 희망이 섞여 만들어진 말이다. 불안정 노동과 부동산 불로소득 사회, 이미 현실이 된 기후재앙, 혐오와 차별이 그려낸 폭력적 일상이 빚어낸 대안의 부재가 '미래세대'라는 낱말을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세대'라는 낱말로 수행되는 정치는 당사자로 지칭되는 청년의 것이 아니다. 젊은 세대를 명분 삼아 현실변화의 설득력을 높이는 정치적 전략이다.

 

그러나 '미래세대'의 정치는 당사자 청년도,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는 시민도 모두 배신했다. '미래세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당사자 청년도, 현실의 변화를 바라는 시민도 아닌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부와 자본이다. 탄소중립위원회가 겉으론 기후위기 당사자 청년을 위한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표방했지만, 실제론 이들을 들러리로 세우로 산업계의 이해관계를 민주주의라는 포장지로 감춘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미래세대'를 기만하는 배신행위가 아닌 '미래세대'라는 낱말 그 자체이다. 애초부터 청소년과 청년을 기후위기의 당사자가 아니라 '미래'의 주역으로 호명할 때, 지금 당장의 문제에 대해 발언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청년을 '미래세대'로 호명하는 건, 지금의 사회적 주도권은 정부와 자본이 가져가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정부는 현실적 문제를 운운하며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목소리 지우고 산업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이렇듯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미래의 몫으로 유예하는 '미래세대'의 기후정치는 당장 코앞으로 닥친 일상적 기후재난을 막아낼 수 없다. '미래세대'라는 시혜적 틀로 협소한 발언권을 부여하는 것에 만족할 게 아니라, 왜 기후위기 당사자가 '미래세대'라는 유예된 권리의 주체로서만 공론장에 서야 하는지 따져야 한다.

 

기후위기가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어 온 것 역시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권리를 유예하고, 기존의 기득권에게 사회적 주도권을 몰아주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권리를 유예할수록, 기후정의도 유예된다. '미래세대'는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권리를 미래로 유예하는 자기모순적 정체성이고, 이는 적극 활용할 틀이 아닌, 거부해야 할 억압에 불과하다.

 

청년에게 '미래세대'라는 제한된 자격을 부여한 것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조율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내 불평등을 합리적 질서로 속여 왔다. 이는 불평등의 당사자에게 제한된 발언권을 부여함으로서 가능했다. '취약계층'이나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 청년이 아닌 '미래세대', '학생', '정상인' '비정상인' 등 불평등의 당사자들은 제한된 권리를 부여받은 채로만 공론장에 설 수 있었다. '미래세대'의 문법 역시 청년을 기후위기 당사자가 아닌 미래의 주역이라는 모호하고 불투명한 권리를 부여하며 공론장에서 쫓아낸다.

 

탄소중립 없는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발표한 탄소중립위원회를 통해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통한 기후위기 대응의 실험은 끝난 게 드러났다. 오늘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야기한 탄소자본주의를 멈추는 변수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의 현실논리를 강화하는 거수기로 전락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답은 체제전환이다. 탄중위를 통해 당사자의 자격을 박탈하는 시혜적 공론장으로서는 기후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자본주의를 통한 기후정의 실현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이제 기후정의의 실현 가능성은 자본주의 바깥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체제전환은 불가능한 공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통해 기후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공상이다.

 

체제전환을 통한 탈탄소 사회는 작금의 수치와 통계로 설명되는 탈탄소와 정반대일 것이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수치와 통계,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기업들의 약속에 미래를 맡기는 것이 아닌, 공공재에 대한 공적 소유를 바탕으로 한 산업의 통제로 실질적인 탈탄소를 실현해야 한다. 독점 자본의 이윤에 저당 잡힌 지구와 삶의 터전을 모두의 것으로 되돌리는 것만이 탈탄소와 기후정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대가 아닌 체제를 전환하라, 이것이 체제전환을 위한 청년시국회의의 슬로건이다. 세대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기성세대가 되어도 기후위기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다시금 '미래세대'에게 안전한 지구를 물려주자고 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모두의 권리를 유예하며 오늘의 현실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닌가? 실은 '미래세대'는 비단 당사자 청년들의 권리만 유예하지 않는다. 기후정의를 유예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를 유예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 서로에게 이름표를 지어주는 공허한 정치는 중단하고, 자본주의의 들러리로 서 있던 유예되고 소외된 이들의 반란으로 체제전환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김건수 체제전환을 위한 청년시국회의 집행위원 | 프레시안 2021.11.02

 

 

급변하는 대학 청년문화

최근 기업 인사담당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사람은 올해를 ‘2년제 전문대생 중 단 한 번도 등교하지 않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취업전선에 나오는 때라고 평했다. 비단 전문대생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작년에 고3이었다가 올해 대학교 1학년이 된 학생들은 수능 준비를 비대면으로 하고, 대학교 입학 역시 비대면으로 했으리라. 3년제나 4년제 대학생들도 졸업 학기까지 수업을 비대면으로 진행한 사람들이 많으리라.

 

그러나 오늘 이 글에서 주목할 부류는 졸업해 나오는 학생들보단 여전히 학교 안의 생활을 영위하는 학생들이다. 1학년 입학 시기에 2~3주씩 입학이 미뤄지고 비대면으로 2학년까지 온 학생들. 그리고 곧 3학년이 될 학생들 말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3학년은 학과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학생회장이나 학회장 등이 되어 학과의 문화 전통을 이어가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문화 중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걸 과감히 혁신·타파하고, 이어 나가야 할 전통은 유지·보수한다. 많은 신입생은 대학의 3학년들을 보고 학과의 분위기와 학과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의 3학년들은 과거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오프라인 문화를 체험해본 적이 없다. 신입생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축제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그리고 학과 MT나 졸업식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같은 행사들 말이다.

 

물론 이 글이 개인주의적 삶이 강해진 현대사회에서 집단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술자리를 강요하거나 FM 구호 등을 제창하며 사발식을 하는 고전적이고 야만적인 대학 문화를 되살리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핵심은 대학의 청년문화가 급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과 대표들이 축구나 농구 등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e스포츠의 전장에 접속하는 정경이 낯익다. 몇 년 전부터 대학 축제에 소소하게 있었던 행사가 작년부터 대표 행사로 급부상한 것이다. 게더타운 같은 메타버스의 공간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에브리타임 등 학교의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유무형의 동아리 활동을 진행한다. 오픈카톡방을 중심으로 한 동아리들의 이주가 진행되고, 학과의 정보 교류부터 문화 교류의 방식들이 한 번에 전환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히 온라인의 행사가 활발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중·고등학교 때부터 즐겨왔지만 제대로 된 문화로 평가받지 못했던 수많은 서브컬처들이 갑작스럽게 대학 청년문화의 주축으로 아카데미 담론장에서 축제로, 그리고 축제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이다. 단계적 방역 완화와 위드 코로나 이후 확진자 전망을 살피면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지 않을까.

 

대학교라는 공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적 청년문화는 청년담론과 세대론을 이끌던 주축이었다. 새로운 문화운동의 주축으로 이론적 기반을 다지고 운동권의 활동을 통해 사회개혁을 이끌었던 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대학의 청년문화는 바뀌고 있다. 지난 2년의 변화를 경험한 학생들이 내년이면 3학년이 된다. 그들은 지금의 변화를 문화로서 전달할 것이고 곧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간극을 더욱 넓혀놓지 않을까.

이융희 문화연구자 경향 : 2021.11.02

 

김오랑, 강경대, 노태우, 이재명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느냐고 묻지 마라. 너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노태우 전 대통령의 타계 소식에 존 던의 시가 생각났다. 그의 역사적 죄와는 별개로, 이 시처럼 그의 죽음에 같은 인간으로서 애도를 표하고 나자, 떠오른 것이 김오랑, 강경대, 이재명이다.

 

사법적 심판까지 받은 12·12군사반란 등에도 그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른다는 발표에 착잡한 심정으로 나는 김해의 한 초등학교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공수특전단 베레모를 쓴 군인의 흉상이 있다. 그는 이 학교 출신으로 12·12 당시 반란군에 저항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 불법체포에 저항하다 사살당한 김오랑 중령이다. 충격에 실명한 부인이 비극적 죽음을 맞은 뒤 그는 명예회복도 되고 훈장도 받았다. 하지만 참군인의 상징으로 그의 동상을 모교인 육사에 세우려는 노력은 기득권세력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반란군의 핵심은 자칭 촛불정부에 의해 국가장의 예우를 받은 것이다.

 

주목할 것은 노태우에 대한 잘못된 평가이다. 그가 전두환과 달리 부드러운 2인자 12·12 5·18 등 신군부의 반역사적 폭거에 책임이 덜 하다는 평가는 틀렸다. 그는 12·12 당시 전방부대 사령관으로 쿠데타세력이 열세에 놓여 있을 때, 북한이 쳐들어오든 말든, 전방부대를 빼내 서울로 끌고 와 전세를 역전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안보 공백을 야기하면서까지도 자신의 야심을 위해 신성한 군을 사병화해 우리 군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최소한 전두환은 전방부대를 빼오지는 않았다. 노태우가 전방부대를 빼오지 않았다면, 12·12쿠데타는 실패했을 것이고, 따라서 1980 5월 광주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달려 나와 이룬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분열 덕분에 올라서는 안 되는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에도 1991년 공안정국으로 강경대 열사 등 1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군사반란 등에 대한 그의 역사적 죄가 과소평가받고 있다면, 역설적으로 대통령으로서 그의 업적 역시 과소평가받는 부분이 있다.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인 토지공개념, 구체적으로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개발이익환수제이다. 이 정책은 김영삼·이명박·박근혜 등 그의 뒤를 이은 보수정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를 자처해온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 등 자유주의적 개혁정권, 나아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성남시장·경기도 지사 시절 부동산정책보다 100배는 진보적이다. 보수정권인 노태우 정부 근처도 못 가는 보수적 정책으로 투기세력의 배만 불린 정권이 무슨 진보인가? 이들이 진보를 자처하는 것은 진보에 대한 모독이다. 쟁점인 대장동게이트도 마찬가지다. 한심한 검찰의 봐주기 수사를 볼 때, 특검이 아닌 이상 진실을 밝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보수정권에 의한 구조적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권한 내에서도 이 후보가 한심한 측근에 대장동을 맡겨 초과이익환수조항을 삭제하는 등 투기세력에 엄청난 수익을 안기고 국민들을 절망에 빠트린 무능과 낙하산인사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위드 코로나’, 위드의 새로운 발견

얼마 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한국어 단어 26개를 새로운 표제어로 등재했다. ‘오빠’, ‘치맥’, ‘먹방’, ‘한복 등을 태권도’(1962) 김치’(1976)처럼 영단어로 인정한 것이다.

최근 한국에선 위드 코로나가 널리 쓰이고 있다. ‘코로나는 라틴어 학명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나왔고, ‘위드는 영어 전치사다. 전치사는 기능어다. 외래어의 기능어는 그 뜻을 전달하기 어렵고, 처음 들을 때 누구나 다소 독특한 느낌을 갖는다. 의미 전달이 쉬운 건 명사다. 공교롭게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새로 등재된 한국어는 거의 다 명사다.

 

한국어와 영어처럼 언어학적으로 거리가 먼 언어 사이라면 문자나 문법 구조, 단어의 구성 방식이 많이 달라 단어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의미의 이해는 언어적인 거리의 한계보다 외교 관계 또는 문화 교류의 밀도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영향으로 한국어는 영어에서 많은 단어를 흡수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디지털 혁명과 가속화된 글로벌화에 따라 언어 전반에 영어의 영향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렇게 보면 위드 같은 기능어를 받아들이는 것도 시간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위드 코로나는 특이하다. ‘위드 같이라는 뜻인데, 한국어로 옮기면 코로나와 같이 사는 것이 되고,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표현으로 바꾸면 코로나와 같이 살자쯤이 된다. 완전 방역은 어렵고, 이제부터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면 한국어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데,  위드 코로나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외래어 사용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원래 기존 언어에 없던 것을 언어 속으로 유입시키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영어권에서 받아들인 ‘김치’는 물론 이번에 등재된 ‘한복’처럼 영어에 없던 것을 있는 그대로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하나는 이미 있는 것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래어는 처음 받아들일 때 사용자로 하여금 일정한 정신적 거리감을 갖게 한다. 따라서 낯설기도 하지만 원래 알던 사물이나 현상을 다소 미화하거나 매력적으로 여기게 한다.이번에 등재된 또 하나의 단어인 ‘오빠’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영어에는 이미 ‘빅 브러더’(big brother)가 있는데 ‘오빠’를 새로운 단어로 받아들인 이유는 뭘까. 영어권에서 ‘big brother’는 친오빠가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다. ‘오빠’보다 의미가 좁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팝의 ‘오빠’는 ‘big brother’보다 더 매력적인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학습되었고, 결국 공식 단어로 받아들여졌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국 남성들은 배우자를 ‘집사람’ 대신 ‘와이프’로 지칭한다. ‘집사람’은 가부장적인 남성 우월주의를 드러내는 듯한 어감이 있는 반면 ‘와이프’는 한결 중립적이고, 선진적인 느낌을 준다.한국 사회의 ‘위드 코로나’ 채택은 어쩌면 두번째 이유에서 비롯한 게 아닐까 싶다. 한국인 모두 코로나19가 완전히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이 답답하다. 지쳐 있다. 어쩔 수 없이 이제는 코로나19와 함께 살아야 하는 이 현실을 국민들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덜 답답하게 여기길 바라는 마음, ‘코로나’는 어쩔 수 없지만 어쩐지 ‘위드’를 앞에 붙이면 국민들이 막막한 현실을 조금은 멀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말이다.

미국 역시 이런 현상은 비슷하다. 거의 모든 전문가는 코로나19와 같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위드’를 사용한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이 주제의 언급은 어떻게든 피하면서 백신 접종만 강조한다. 여기에서 미국 언론이 부쩍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endemic’(풍토병)이다. 17세기 중반 영어에 등장했으며 고대 그리스어에 뿌리를 둔 라틴어에서 온 것이니, 물론 새로운 외래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다. 답답한 현실을 다루면서 굳이 이렇게 낯선 외래어를 쓰는 것 역시 대상과의 거리를 갖게 하려는 의도의 일환이다.코로나19와 같이 살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넓어지고, 일상으로 받아들여진 뒤에는 이 현실을 굳이 외래어로 미화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드 코로나’라는 표현 역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위드 코로나’로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위드’는 이미 한국어에 정착을 시작했고, ‘위드 코로나’가 사라진 뒤에도 한국어에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로버트 파우저언어학자 한겨레 2021-11-03

법정의 존엄과 팔짱?

불쾌함보다는 의아함이었다. 공권력이 나에게 팔짱을 풀라고 명령하는 2021년의 상황. 조용해야 할 법정 방청석에서였지만, ‘왜요?’라는 반문은 머리가 아닌 몸에서 나왔다.

 

지난 930일 오후, 의뢰인의 선고를 듣기 위해 서울남부지방법원 408호 법정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재판부가 낭독하는 내 의뢰인에 대한 선고 이유를 팔짱을 끼고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법정 경위가 어깨를 쳤다. 팔짱을 풀라는 몸짓을 했다. 왜 푸냐 질문했고, 경위는 말로 법정에서는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건 이유가 아니었기에 규정 있냐고 물었다. 있다고 했다. ‘팔짱을 끼면 안 된다는 명문 규정이냐물었고, 그렇다고 했다. 확인시켜달라 했고, 가지고 오겠다 했다. 거짓말이었다. 팔짱 행위를 특정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위는 다시 오지 않았고, 선고가 끝났기에 의뢰인과 법정을 나섰다.

 

의아함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방청석에서 팔짱을 끼는 행위가 도대체 재판의 진행에, 법정의 질서 유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아무런 영향 없다. 법대 위에 앉은 판사들을 향해 방청석의 시민들은 공손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불경한 자세는 안 된다는 군기 잡기일 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법정 경위의 과도한 언행이었겠지 생각했다. 서울남부지방법원에 민원을 넣었다. 팔짱 끼는 행위가 법정에서 금지되는 행위인지 확인해달라, 만약 금지되지 않는다면 사과와 재발 방지 교육을 해달라 요청했다.

 

두번의 민원접수 끝에 1014일 받은 남부지원의 공식 답변이다. “법정에서 당사자나 방청인이 팔짱을 끼고 있는 경우 팔짱을 풀 것을 요청하는 것이 법원 경위의 통상적인 업무방식임을 알려드립니다.” 꽤 명확한 답변이다. 알려드립니다. 대한민국 법정에서, 방청석에 앉은 시민들은 팔짱을 낄 수 없습니다.

 

법원의 시대착오적인 입장은 확인되었으니, 이유를 찾아보자. 무엇을 위해, 법정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신체의 자유가 침해되어야 하는가. 법정 질서와 관련된 유일한 법률 조항인 법원조직법 제582항은 법정의 존엄과 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는 사람에게 질서유지에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법정의 존엄또는 법정의 질서를 위해 강제력 행사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가만히 앉아 조용히 팔짱을 끼는 행위와 질서는 상관이 없다. 결국 법정의 존엄이다. 법정의 존엄을 위해, 팔짱은 안 된다.

 

존엄의 사전적 의미는 감히 범할 수 없는 높고 엄숙한 성질이다. 통상 사람, 생명, 인권 같은 단어와 어울린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신성함과 유사어다. 대한민국 법률 중에 존엄을 사람이 아닌 대상에 사용하는 경우는 딱 두가지다. ‘법정의 존엄국립묘지의 존엄’. 국립묘지 역시 묻힌 망자에 대한 존중이기에, 결국 사물에 존엄이 붙은 경우는 법정이 유일하다. ‘법정의 존엄, 신성함을 위해 자세를 단정히 하라.’ 이유조차 시대착오적이다. 만약 대학교에서 어느 교수가 내 수업은 신성하니 팔짱 끼는 사람은 강의실에서 나가라라고 한다면 당장 징계다.

 

팔짱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헌법은 재판의 공개를 원칙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중요한 수단이다. (n)번방 사건 등으로 촉발된 디지털 성착취 사건 재판 방청 운동이 최근 사례이다. 질서 유지와 아무런 상관없는, 방청자의 자세나 복장을 이유로 방청을 방해하거나 법정에서 쫓아낸다면, 이는 공개재판 원칙의 침해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 문제에는 사법부의 삐뚤어진 권위의식이 집약되어 있다. 재판거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피고인석에서 종종 장시간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 있다고 한다. 그 어떤 판사가 그의 자세를 지적했나. 양승태도 팔짱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권위를 신성하게 포장하기 위해 단정한 자세운운하면서도, 정작 권력자들에게는 한마디 못 하는 꼴이 희극이어서다.

임재성변호사·사회학자 한겨레 2021-11-03

 

 

1986228, 현대 정치의 시계는 멈춰 버렸다

헨리크 베리그렌의 <울로프 팔메>를 읽고

무려 1,000쪽이 넘는, 스웨덴 전 총리 울로프 팔메의 전기가 나왔다. 헨리크 베리그렌의 <울로프 팔메: 우리 앞에 펼쳐진 멋진 나날>(조행복 옮김, 아카넷, 2021)이다. 협소한 한국 출판 시장에서 40여 년 전 사망한 다른 나라 정치가, 그것도 미국이나 여타 주요 강대국 중 하나가 아닌 나라 정치가의 장대하고 상세한 전기가 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팔메가 그렇게나 대단한 인물인가? 약간의 정보만 놓고 봐도, '그렇다'고 답할만하다. 우선 스웨덴 같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현직 총리가 암살로 돌연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극적이다. 더구나 암살의 배후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암살범 후보 중에는 스웨덴 내 극우파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인종주의자들까지 있다.

 

왜 하필 머나먼 아프리카의 반동 세력이 암살자로 지목되는가? 이것은 팔메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스웨덴인 가운데 한 사람인 또 다른 이유와 관련된다. 1960년대에 팔메에게 국제적인 명성(혹은 악명)을 안겨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68221일에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항의하는 횃불 행진에 참여한 교육부장관 팔메의 모습이다. 이 자리에 북베트남 대사까지 참석해 팔메와 나란히 서는 바람에 한때 미국 정부와 스웨덴 사회민주당 정부 사이에는 차디찬 북극 바람이 불었다.

 

이것은 그저 예외적인 일화만은 아니다. 팔메는 정치가로 활동하는 내내 남반구(당시는 주로 '3세계'라 불린) 해방운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사회민주당 정부를 격렬히 비판하는 신좌파 청년들과 함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행진에 참여하는가 하면, 총리로 재직하면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에 맞서는 국제 여론전에 앞장섰다. 그의 암살을 놓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거론되는 이유다.

 

이 정도 정보만으로도 팔메가 왜 지금껏 전 세계적으로 주목과 기억의 대상이 되는지 일정하게 설명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사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가 배출한 위대한 정치가들을 놓고 따지면, 팔메 홀로 우뚝 서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웨덴 현대사에서 가장 궁금해 할 복지국가 건설 과정에서는 팔메보다 더 주목받아야 할 이들이 수두룩하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당의 아버지 격인 얄마르 브란팅이 있고, 대공황 와중에 복지국가 건설에 처음 시동을 건 페르 알빈 한손이 있는가 하면, 팔메 직전에 23년간이나 총리를 지내며 복지국가 전성기를 이끈 타게 엘란데르가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국어 전기는커녕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반면에 팔메는 이번에 번역된 책을 비롯해 전기가 벌써 2종이 나와 있다.

 

이것은 그저 심각한 지적 불균형 상태의 결과일 뿐인가, 아니면 나름의 이유가 있는가? 걸출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팔메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며 지금도 회자되는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헨리크 베리그렌 저, 조행복 역 <울로프 팔메> 아카넷

 

전기만은 아닌, 스웨덴 현대사이자 사회민주주의사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도 우선 <울로프 팔메>를 용기 내어 펴봐야 한다. 한데 많은 이들이 책의 서두에서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팔메 집안 이야기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세하고 길게 나오기 때문이다. 팔메는 '좌파' 정치가였지만, 좌파 정치가 상당수가 그랬던 것처럼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다. 그것도, 한국이라면 '재벌' 범주에 들 수 있을 대자본가 가문 태생이었다. 책은 100쪽에 걸쳐 이 집안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울로프 팔메>는 그저 일반적인 전기가 아니다. 팔메 개인만이 주인공이 아니다. 스웨덴 산업자본주의의 청년기를 흥미롭게 풀어놓으며, 사회민주당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한다. 팔메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료 사회민주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 격인 역사적 인물들(대표적으로 엘란데르)에게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더 나아가서는 왼쪽(공산당, 신좌파)과 오른쪽(우파 정당들)에서 사회민주주의를 공격한 인물들도 거의 주연급으로 출연한다.

 

말하자면 <울로프 팔메>는 팔메의 전기이면서 동시에 20세기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이고, 더 넓게는 지난 세기에 이 나라 전체의 정치, 경제, 문화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살펴볼 수 있는 스웨덴 현대사이다. 팔메 집안 내력에 관한 소상한 소개도 이런 총체적 서술의 일환이다. 그래서 지극히 부담스러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감히 추천 도서 목록에 올려본다. 특히 스웨덴 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다.

 

물론 이런 종류의 책이 늘 그렇듯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저자의 정치적 입장이 눈에 거슬릴 수도 있다. 저자 베리그렌은 아마도 사회민주당 안의 급진파보다는 현실파에 공감하는 것 같으며, 그래서인지 신자유주의에 맞서려 한 몇몇 급진적 기획(가령 루돌프 메이드네르의 임노동자기금 방안)을 다룰 때는 필치가 다분히 냉소적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추천을 꺼릴 이유는 되지 못한다.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조차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기 때문이다. 팔메가 핵발전소를 별 고민 없이 지지하다 이 때문에 총선에서 패해 반세기에 걸친 사회민주당 장기 집권을 끝내는 과정도, 임노동자기금 안을 둘러싸고 노동조합운동과 사회민주당 안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실은 메이드네르의 안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던 팔메가 이 논쟁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모두 이 책이 아니면 접하기 힘든 생생한 역사적 경험이다. 마치 참여자인 듯 이런 장면들 속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 쪽짜리 책의 완독에 도전할만하다.

 

단점이라면, 팔메의 삶에 배경을 이루는 대하(大河)를 포착하느라 막상 총리 팔메의 활약은 책의 마지막 1/3 쯤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외관상의 단점일 뿐이다. 책 전체의 1/3이라 해도 300쪽이 넘기에 그 시기의 서술이 결코 소략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 부분에 밀도 있게 기술된 사건과 쟁점들을 통해 우리는 팔메의 정치 역정이 21세기 지구인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를 향해 한 발 더 다가가게 된다. 도대체 어떤 사건들이, 어떤 쟁점들이 있는가? 위에 이미 언급한 핵발전소 논란이 있고, 1980년대 초의 경제 위기에 대응하며 스웨덴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바람을 타기 시작한 시장주의 흐름이 있다(팔메는 이를 수용하기도 했고,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두 가지에 주목했다. 하나는 팔메 총리의 쿠바 방문으로 상징되는 남반구 민중과의 연대이고, 다른 하나는 임노동자 기금 논란이다.

 

복지국가를 넘어 나아가야 했던 시대, 사회민주주의의 조타수

복지국가가 정점에 도달한 1960년대부터 스웨덴 안에서는 복지국가를 '넘어서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했다. 사회민주당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사회민주당의 성과를 부정하며 복지국가를 흔드는 흐름도 강력히 등장했지만,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복지국가를 더욱 굳건히 하면서 그 다음 단계 과제로 넘어가야 한다고 외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래야만 기왕의 복지국가조차 무너지지 않고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출현한 '복지국가를 넘어서자'는 흐름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타났다. 한 방향은 군나르 뮈르달의 1960년 저작 <복지국가를 넘어(Beyond the Welfare State)>(1960)에 명쾌히 정리돼 있다. 뮈르달은 <울로프 팔메>에서는 마오주의자로서 부모 세대의 성취를 신랄히 비판한 아들 얀 뮈르달 탓에 다소 희화화돼 있다. 하지만 그는 사회민주당 전성기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스웨덴이 자랑하는 경제학자였다.

 

<복지국가를 넘어>에서 뮈르달이 제시한 복지국가 건설 이후의 방향은 일국적 개혁을 넘어 전 지구적 개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스웨덴처럼 작은 수출중심국가 안에서 민주적인 혼합경제체제를 유지하려면 주요 산업국가들 사이의 경제 협력과 거시경제정책 조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웨덴 같은 나라에 등장한 일국적 경제계획을 국제적인 경제계획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뮈르달은 발전된 산업국가들의 협력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새로운 관계였다. 뮈르달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국내에 관철시킨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옛 제국주의 국가들과 옛 식민지 국가들 사이에 확대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지 않으면 전 지구적 불평등이 복지국가라는 요새들을 위협하리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민-난민 문제를 통해 뮈르달의 예언이 실현되는 묵시록적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한편 '복지국가를 넘어서자'는 흐름에는 이와는 방향이 다른 시도도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메이드네르의 임노동자기금 방안이었다. 뮈르달이 일국적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초국적 지향을 제기했다면, 메이드네르의 임노동자기금 안은 분배 영역의 민주화를 넘어 생산 영역의 민주화로 나아가자는 구상이었다.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의 본령인 기존 생산 관계의 변혁을 다시 당면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과거 교의의 집착만은 아니었다. 절박한 현실적 근거가 있었다. 생산 영역에서 계속 자본가 독재가 관철되는 한, 분배 영역을 비롯해 사회 전체에는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지닌 특수계급, 즉 자본가 계급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복지국가 같은 양보 조치를 언제든 회수할 수 있으며, 노동계급에게 공세를 재개할 수 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이런 일이 스웨덴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임노동자기금 안은 이런 가능성을 미리 막고 전혀 다른 미래를 열려던 진지한 시도였다.

 

팔메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바로 이런 문제의식과 구상들이 대두하던 시기에 사회민주당을 책임지던 조타수였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비록 '복지국가를 넘어서자'는 전망의 두 방향 중 어느 하나도 만족스럽게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두 지향이 반영된 구체적 정책들의 집행자 역할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남반구의 해방적 흐름과 연대하려 한 팔메의 노력은 이를테면 뮈르달식 지향의 조심스러운 실천이었다. 또한 그는 좌파-노동 진영이 임노동자기금 안에 합의하자 우파-자본 진영의 격렬한 반발에 맞서며 이를 입법화했다. 팔메는 어쨌든 성실한 조타수였다.

 

1986228일에 멈춰 버린 현대 정치의 시계

물론 베리그렌의 문장들이 전하듯이, 팔메는 확신을 갖고 당대의 가장 급진적인 비전을 밀어붙인 지도자는 아니었다. 복지국가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던 그의 정치는 1930년대에 복지국가 시대를 처음 연 페르 알빈 한손 같은 선배들만큼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그 또한 후세대가 '넘어서야' 할 인물이다.

 

그러나 팔메는 적어도 그의 사후에 사회민주주의 진영을 평정한 지도자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동시대의 대다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들과도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프랑수아 미테랑처럼 자기가 국유화한 기업들을 다시 사유화하지도 않았고, 해럴드 윌슨처럼 자기 당의 급진적 정책에 동의하지 못한다 하여 밀실정치를 통해 이를 무력화시키지도 않았다. 게다가 토니 블레어 같은 후배 정치인들이라면 임노동자기금 안 같은 구상이 등장하기 전에 이런 주장을 꺼낼만한 사람들을 이미 당에서 청소했을 것이다.

 

팔메는 나름대로 한계와 모순을 짊어진 정치가였지만, 그가 떠난 뒤에 사회민주주의 진영은, 혹은 인류는 그에 근접한 정치가조차 경험해보지 못했다. 적어도 집권까지 한 정치가들 가운데에서는 말이다.

 

1986228, 현대 정치의 시계는 멈춰 버렸다. 그날 돌연 우리 곁을 떠난 사람(팔메)은 정치가 문명을 앞에서 이끌던 시대의 마지막 증거가 되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4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을 이제 우리는 어떻게 벌충해야 할 것인가?/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프레시안 2021.11.04.

 

일그러진 청년서사 설거지론그들은 왜 여성들을 노리나

누구나 살다 보면 어느 정도는 이상해질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다. 대학 졸업하고 구직할 때가 그렇다. 분명히 사회가 하라는 대로 다 열심히 한 것 같은데 기대와는 다르게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념은 원한으로 누적된다. 하고 싶은 것들 참아가면서 따랐던 사회가 하라는 것에 대한 원한이다.

 

주목경제 시대에 사실상 모든 재화는 그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서 인간의 주목이 필요하다. 그것의 사용가치만으로는 값이 제대로 매겨지지 못한다. 손목시계를 예로 들면, 그로부터 기대되는 바의 기능은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훨씬 웃돈다. 가격 차이가 백배, 천배 이상 나는 두개의 손목시계가 실제 성능 차이도 그만큼 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손목시계의 가격을 높이는 것은 브랜드, 기호다. 고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상류층의 기호, 평범한 장삼이사와 나를 구별 짓는 기호에 비싼 값이 매겨진다. 이 기호를 제값에 팔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의 주목이 없어선 안 된다. 성능 면에서 대동소이한 상품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품질만큼 마케팅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

 

사회 요구에 관종도 마다않았지만 불공정·불평등 퍼진 사회 겪은 뒤

노동력도 주목받아야 하는 시대

주목경제의 논리는 인간의 노동력에도 해당한다. 인간의 노동력이 제값을 부여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역시 주목이 필요하다. 사람은 많은데 대학 진학률은 갈수록 올라가며 학력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전반적인 작업 역량과 교양 수준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이제 구직자들은 자격증, 외국어 실력 등 스펙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과시해야만 하게 되었다. 신규 채용도 갈수록 줄어듦에 따라 지금 청년 구직자들은 치열한 스펙 경쟁에 주목 경쟁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한다.

일을 얼마나 잘할 준비가 돼 있고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지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얼마나 잘 뽐낼 수 있느냐다.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주목이 가치를 결정하는 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때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관종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원래 모습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가꾸는 것을 넘어 그것을 더 많은 사람의 눈에 보이게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관종이라는 말은 더 이상 조롱이 담긴 멸칭이 아니라 현대인 혹은 신인류의 특징으로까지 거론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관종은 욕으로 쓰였지만 이른바 좋은 관종도 있으며 모두가 좋은 관종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관종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임홍택 작가는 21세기를 리드하는 좋은 인재가 되기 위해 좋은 관종이 되기를 요구한다. 겸손함이 미덕인 시대는 갔다. 자신의 역량을 과하지는 않게, 적당한 수준으로 적절한 때에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만 유능한 인재로 눈에 띌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유능한 인재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 스펙뿐만 아니라 인격도 도야해야 하고 가식이라도 떨면서 착한 척하며 봉사 활동도 해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더 치열한 주목 경쟁과 항시적인 인정투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사회가 하라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괜찮은 일자리는 좀처럼 구해지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누구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너무 쉽게 정규직이 되는 것 같고, 공정과 평등을 외치던 정치인들이 특권을 이용해 자식들을 명문대에 보내거나 좋은 데 취직시키는 사례가 너무 많이 눈에 띈다. 착한 척, 가식은커녕 일체의 사회적 의례를 무시해버리고 금도를 완전히 깨버리는 선 넘는콘텐츠로 일약 스타 유튜버가 되어 떼돈을 버는 사람도 너무 많이 보인다. 지켜야 할 것 다 지키며 살아왔던 자신만 손해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당장 하고 싶은 것들 조금만 참고 노력하면 언젠가 성공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하던 기성세대, 위정자들의 저 위선에는 치가 떨린다.

 

위선을 향한 분노는 뚜렷한 기대 이득과 성과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인정투쟁에 대한 환멸과 겹치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말의 의례, 예의범절, 가식, 가면 일체를 내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극하곤 한다. 지금 20대 안에서 지고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위선은 나쁘다라는 명제는, 특히 위악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의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에 익숙한 20대 남성들에게 자신들의 (적어도 웹상에서나마의) 반사회적 언행들을 정당화하는 명제가 된다. 이들은 인터넷을 떠도는 온갖 사이다, 예컨대 맘충이나 잼민이들을 참교육했다는 경험담들을 읽으며 파워트립의 환상에 젖어들고, ‘어느 누구도 감히 그러지 못하지만, 유일하게 용기를 내서 상대방에게 일침을 빙자한 폭언을 시원하게 퍼붓는 나를 상상하며 조커에 빙의한다.

 

위선핑계로 잇단 반사회적 행동

약자인 여성·어린이 공격대상 삼아

 

자기 합리화 위해 약자를 저주

그리고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최소한의 매너까지 내던져버린다. 교사들로부터 공부를 더 하면 아내 얼굴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한 이들에게 구애 활동이란 구직 활동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구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해도 어차피 운 좋게 잘생기게 태어났거나 돈 많은 사람들에게 이성을 빼앗기므로 잘 보이려고 노력해봤자 부질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사랑해주지 않는다며 여성들을 저주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변변한 일자리도 못 구하고 연애 및 결혼에도 실패한 자신의 쓸쓸한 신세에 상대적 우월감이나마 얻고자 상상으로 밟고 오를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대상은 여성과 어린이 외에는 별로 없다. 그래서 만들어낸 서사가 이른바 설거지론이다. 새롭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역사가 유구한 취집서사와 다른 건 전혀 없는데, 여성을 욕하는 것을 넘어서 취집하는 여자결혼한 남자에 대한 조롱이나 연민이 한 층위 더해진 것이다. 조롱이든 연민이든 핵심은 결혼 못 한 내가 결혼한 남자 혹은 퐁퐁남보다 차라리 낫다는 위안이다. 보잘것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아침밥 차려주고 도시락 싸주는 여자를 기다리며 결혼을 미루는 내가 현명한 것이라는 위안이다.

김내훈 미디어문화 연구자 한겨레 2021.11.07.

 

이재명과 윤석열의 대결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이재명 전 경기지사로 결정된 데 이어, 국민의힘 후보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으로 결정됨에 따라 양대 정당의 경선이 끝나고 본선 경쟁이 시작됐다. 이변이 없는 한 이번 대선의 최종 승자는 두 후보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선거의 의미를 이재명 대 윤석열의 대결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만 사고한다면 한국 정치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것이다.

 

이번 대선은 비호감 선거라고 불릴 만큼 두 유력 후보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회의적인 유권자가 많다. 심지어 지지의 배경에도 부정적 동기가 작지 않다. 윤석열은 절대 안 되니 이재명을 찍는다거나, 민주당은 절대 안 되니 윤석열을 찍는다는 식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누가 당선되어도 출발점부터 지지기반이 너무나 좁고 국정수행에 파열음도 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회피하면 정치는 더 망가질 것이다. 직시해야 한다.

 

이런 대결정치는 두 인물의 특성에 기인한 면도 있겠지만, 왜 그런 두 인물이 최종 후보가 되었을지를 생각하면 더 깊은 구조적 맥락을 묻게 된다. 두 후보의 공통점은 양당 핵심 지지층의 열망을 가장 확실히 실행할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본선에서 외연을 넓히는 전략은 그다음 문제다. 이재명 대 윤석열 구도는 그동안 심화된 정치 양극화와 진영대결이 차기 정권에서 더욱 격화되고 공고화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선거 과정에서 그런 대결의 정치가 계속된다면 윤석열 후보가 유리할 것이다. 그는 그동안 가족 문제, 잦은 실언, 철학의 빈곤, 정책 현안에 대한 무지 등 여러 약점을 보였지만, 그런 개인적 요인들 때문에 이재명 후보가 유리할 것이라고 보는 건 안이하다. 2007년에 이명박 후보는 전과 18소리를 들으면서도 정동영 후보를 역대 최대 격차로 이겼다. 후보 간의 전투는 민심의 지도 위에서 벌어진다. 그 지도의 형세가 더 중요하다.

 

윤석열 후보는 희망, 신뢰, 공감 같은 긍정적 에너지로 이 자리까지 온 게 아니다. 그는 분노, 증오, 복수심, 배신감 등 온갖 부정적 에너지의 응축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수모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진보좌파를 뿌리 뽑자는 사람, 부동산세를 참을 수 없는 사람,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에 실망한 사람 등 이질적 동기가 섞여 있다. 그 힘이 지금 대단하기 때문에 윤 후보는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분노의 기관차를 몰고 가고 있다.

 

그에 반해 이재명 후보가 대결정치로 규합할 수 있는 세력은 제한적이다. 대통령 지지율은 낮지 않지만 반대 여론이 거의 두배이고 그중 강한 반대층이 다수다. 정권교체 여론은 60%에 달하고 민주당 지지율은 탄핵 이전으로 돌아갔다. 부동산 가격 폭등, 검찰개혁 추진 과정의 갈등, 안희정·조국·박원순 등 거물급 인사들의 이슈를 포함해서 다양한 계기가 누적되어왔다. 그래서 윤 후보에 대한 반감으로 추가할 수 있는 우군이 많지 않다.

 

민심 잃은 여당과 비전 없는 야당, 이 불행한 구도는 몇몇 정치인의 잘못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정부·여당은 너무 잘하고 있는데 적폐세력만이 문제라고 믿는 한편의 사람들, 그 반대편에 민주당과 진보·노동 세력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적대적 공존을 공고화시켜온 것이 더 큰 맥락이다. 이런 환경에서 여당이 오류를 수정하면서 더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됐고, 보수가 탄핵 이후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기회도 날아갔다.

 

여기에는 더 넓은 제도적, 사회적 맥락이 있다. 근본적인 배경은 현재의 양당 독점 체제다. 대통령제와 지역구 승자독식 선거제 아래에서 치러진 지난 총선 결과 1, 2당의 의석이 전체의 94.3%에 달했다. 또한 지난 몇년 사이에 정당 당원 수가 급증해서 현재 유권자의 20%에 달하는데 그중 87%1, 2당의 당원이다. 양당의 권리당원 수도 전체 권리당원의 90%에 가깝다. 양당 대결 너머의 다양한 정치적 선호와 의제가 반영되기 힘든 구조다.

 

지금 이재명 대 윤석열의 강대강 대립 구도가 탄생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역학, 제도적 환경, 사회적 기초의 효과가 중첩된 결과다. 이재명인가? 윤석열인가? 이 틀에 갇혀 있는 한, 누가 당선되든 한국 정치는 영원한 도돌이표의 저주에 갇혀 있을지 모른다. 과거에 의해 주어진 선택지를 넘는 미래를 구상해야 할 때다. 그것을 위해 각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두 후보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길 기대한다.

신진욱ㅣ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21 .11.9

 

독박 간병사회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지난 522세의 청년이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굶겨 사망케 한 사건이 뒤늦게 알려졌다. 청년은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홀로 아버지를 돌봤다고 한다. 그러나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자 병원에서 퇴원시켰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빚 독촉과 생활고를 피할 수 없었다. 비극을 직감한 아버지는 부를 때까지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고 자포자기한 청년은 아버지가 숨진 뒤 경찰에 신고했다. 1심에서는 존속살해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2심이 진행 중이다. 인터넷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건에 아들에 대해 살인이 아닌 유기치사로 판단해 달라는 탄원이 이어지고 있다.

 

가족에게 간병의 시간은 전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건너야 할 두려운 강이다. 태어나고 자랄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듯 질병이나 노화로 스스로 거동할 수 없을 처지에 이르면 조력을 받아야 한다. 어려서는 육아·보육, 늙어서는 간병의 시간이다. 그 강을 어떻게 건너느냐에 따라 가족은 화합과 파탄을 오갈 수 있다.

이번 사건에는 두 가지 이슈가 있다. 하나는 돌봄을 도맡은 영 케어러즉 젊은 간병인의 책임이며, 다른 하나는 돌봄의 대상인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간병을 이야기할 때 관심사는 주로 어떻게 환자를 돌보는가에 집중된다. 가족의 입장이다. 간병하는 가족은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한다. 우선 불확실한 미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간병의 기간이다. 고령자의 경우 정상으로 복귀는커녕 더 악화하지 않기만 기대해야 한다.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뎌야 하는 데서 좌절은 깊어진다.

 

여기에 현실적인 비용 부담은 또 하나의 허들이 된다. ‘54세의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졌다20대 중반 딸의 사연이 청와대 청원에 올라왔다. “재활병원 병원비는 180만원, 간병인 비용은 하루에 11만원씩 한 달에 350만원 이상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간병비에 대한 복지가 전혀 없습니다.” ‘학생 신분으로 간병비를 책임져야 한다는 청원인은 터무니없는 간병인 비용에 대한 대책을 호소했다. 병상에 누운 환자가 있으면 가족 중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병원비·간병비를 대다 간병 파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간적인 갈등도 크다. 자신을 키워준 부모에 대한 도덕적 의무와 이를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는 간병 문제의 절반이다.

 

간병의 다른 한편에는 환자가 있다. 간병 논의에서 환자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환자 자신도 나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본다는 자책감에 속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인권은 사각지대에 놓인다.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치매라고, 감정표현이 서툴다고 환자를 마치 물건다루듯 한다.

 

인권침해는 환자 주변의 가족이나 간병인에서 나온다. 인권위가 2018년 실시한 노인인권 모니터링결과는 요양기관의 인권침해 현주소를 보여준다. 과도하게 신체 억제대를 사용하거나, 욕창관리를 부실하게 하고, ·퇴소 시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거나, 환자와 보호자의 알권리를 침해했다. 간병인들의 입원 환자에 대한 폭행 신고도 빈번하다. 동물권, 식물권에 이어 무생물인 로봇권을 이야기하는 세상이다. 로봇에 대해 공감능력을 요구하면서 실상 인간에 대해서도 제대로 공감능력을 보이지 못한다.

 

그런 대우를 받는 환자의 입장은 어떨까. 영화 <더 파더>는 치매환자의 시각에서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려준다. 주인공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무시로 일관한다. 환자는 투명인간이다. 주인공은 원치 않으나 딸은 그를 요양원에 보내려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반대할 권리가 없다. 주인공은 말한다. “집 마련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젠 내 몸 하나 누울 곳도 없다.” 그는 좌절한다.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65세 인구가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 반면 합계출산율도 1명이 무너진 지 오래다. 병시중 들 가족은 줄고 환자는 늘고 있는 것이다. ‘독박 간병은 급행열차를 탔다. 국가의 책임을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개인의 영역일 뿐이다. 영화 <더 파더>의 주인공은 이사를 가겠다는 딸에게 묻는다. “가라앉는 배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딸은 대답을 못한다. 그러나 눈으로 말한다. “나도 이것이 최선이에요.” 간병이라는 파도에 가족이라는 배가 침몰하고 있는 것 같다.

박종성 논설위원 경향 : 2021.11.10.

 

이상한 대선 구도의 뿌리

문재인 정부의 최대 실책은 국민의힘을 다시 살려내고 윤석열을 제1야당 후보로 만든 것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최근 한 말이다.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현 정부의 검찰총장이 제1야당 대선 후보가 되어 정권의 명줄을 끊겠다고 달려드는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대진표가 확정되면서 대선 시계는 빨라지고 있다. 양대 의혹 사건과 정책 쟁점 등 온갖 이슈가 대선판으로 빨려들 것이다. 하지만 그 소용돌이에 그냥 휩쓸릴 일은 아니다. 이 판의 뿌리가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민주당 사람들은 이리 짜인 대선 구도의 원인을 살피는 게 마뜩잖을 수 있다. 윤석열 후보의 오래된 야심과 권력의지 탓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이렇게 되진 않는다. 정권 핵심의 잘못된 판단이 일을 키우고 또 키웠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외도 역시 이들의 정치 바람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누구의 잘못인가. 말할 것도 없이 문재인 대통령 책임이 크다. 인사가 사실상 파탄 났다. “그 사람이 정말 그럴 줄 몰랐다고 남 탓할 일 없다.

 

이른바 조국·윤석열 사태 와중에 두 사람은 누구도 옳지 않았다. 586세대 도덕적 해이의 단면을 보였다는 점에서 조 전 장관에게 책임이 분명 있다. 윤 전 총장 역시 적폐 검찰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에 못지않다. 조 전 장관 일가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 윤 전 총장 징계가 적법하다는 행정법원 판결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재명 후보의 강점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보가 됐고, 자치단체장으로 쌓은 업적을 바탕으로 승산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도도한 정권교체 흐름과 대장동 의혹이 겹치면서 판세는 엇비슷하거나 비세로 보인다.

 

누구나 다 아는 대선 구도의 배경을 구구절절 설명한 건 민주당 사람들이 이를 외면한 채 돌격 앞으로만 하면 된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총선 압승으로 짜여진 유리한 환경이 인사 실패와 내로남불, 오만과 독선으로 지금의 이상한 대선 구도로 바뀌었다. 부동산 실정이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멀리 갈 것 없이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이런 식이었다. 무난하게 대처해서 무난하게 패했다. 박원순 전 시장의 성희롱 의혹을 뒤로한 채 앞으로만 내달렸다. 진심 어린 참회라기보다 어정쩡한 반성이었다. 당시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않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단안을 내리는 게 더 현명했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능력을 가졌어도 딛고 선 기반이 퇴행적이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내로남불과 실정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참회, 일대 쇄신 없이는 진보의 정권 재창출은 공염불이 될 수 있다. 쇄신하지 않으면 돌아선 2030과 눈을 마주치기조차 어렵다.

 

어떤 형태로든 그간 문제에 대해 사죄하고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동안에도 너무 많이 사과하고 반성했다고 한다. 일본이 여전히 용서받지 못하는 건 피해자, 즉 상대방이 받아들일 때까지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과를 많이 해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이 아니다.

 

첫째, 문 대통령의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지난번 국회 시정연설처럼 잘한 건 잘했다, 못한 건 못했다 하면 된다. 인사 난맥과 검찰개혁 혼란에 대해 국민에게 머리 숙여야 한다. 정권 핵심에 있던 인사들도 스스로를 낮추고 겸허해져야 한다. 국민이 이해할 때까지 사과하고 반성하는 언행을 보여야 한다.

 

둘째, 이재명 후보가 국민이 민주당 사람들에게 갖는 의구심과 불만을 해소해야 한다. 가능한 수준에서 예비내각이나 집권 시 참모 그룹을 가시화해 인적 쇄신의 단초를 보여야 한다. 정권이 연장되면 이전 사람들이 다시 자리를 꿰차거나, 이권세력들이 날뛸 것이란 국민의 의심을 지워야 한다.

 

셋째, 정책적 전환과 계승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실패에 대한 성찰 없이 새로운 진전은 어렵다. 계승할 건 계승하되, 부동산 정책, 양극화 해소 등에서 정책 방향의 명확한 재설정이 필요하다.

넷째, 심상정 후보를 비롯한 제3세력과의 연대에 명확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이는 단순히 단일화나 정책 연정 차원이 아니다. 그간 민주당 정권의 과오를 반성하고 일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선거공학이 아니라 진정한 반성을 위한 연대가 돼야 한다./  백기철편집인 한겨레 2021-11-10

 

고교 한국사 축소, 문 대통령도 아시나요?

교육부, 고교 한국사 수업 축소 논의교육계 현대사 제대로 못 배워반발

 

교육담당 기자가 보내온 <한겨레> 1027일치 9면 기사를 처음 받아보곤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였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역사 교사들이 충돌했다고?’ 정권을 불문하고 교육당국과 현장 교사들 사이에 상존하는 갈등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서슬 퍼렇던 시절 교육 기자로, 문재인 대통령이 대표로 있던 새정치민주연합과 역사 교사들이 원팀으로 역사 전쟁을 치른 과정을 취재했던 제게는 예상치 못한 전개입니다. 급기야 지난 9일치 1면에는 굵고 붉은 글씨로 교육부는 역사교육의 파행을 불러올 고등학교 한국사 과목 수업 시수 감축안을 당장 폐기하라고 성토하는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의견광고가 게재됐습니다. 이 역시 교육과정 개정 때마다 수업 시수를 더 확보하려는 과목별 교사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시절 밥그릇을 깰 각오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온몸으로 저지한 교사들을 본 저로서는 쉽게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고,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던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된 뒤 국민 절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정화를 정권 주요 과제로 밀어붙였습니다. 학생들에게 승자 중심의 단일 역사관을, 역사적 사실도 왜곡해가며 가르치겠다는 실로 대담한 기획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자유민주주의 파동과 박근혜 정부 교학사 교과서 파동을 겪은 역사 교사들은 일찌감치 이 전쟁을 예견하고는 큰 그림을 그리며 국정화에 대비했습니다. 2015114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고 비장한 역사국정교과서 불복종 운동을 선언했습니다. 그때부터 불붙기 시작한 촛불이 국정농단 사태를 거쳐 결국 박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질 때까지,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많은역사 교사들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 같은 기자들이 쓴 기사, 당시 문 대표를 비롯한 야당 정치인들이 정부 여당에 날을 세울 무기로 쓴 주장과 정책의 밑바탕이 된 자료들은 바로 역사 교사들의 밤낮과 주말을 잊은 피, , 눈물의 소산이었습니다.

 

함께 큰 전쟁에서 승리한 문 대통령과 역사 교사의 균열은 지난달 22일 교육부가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현행 3년간 총 102시간인 한국사 필수 이수 학점을 80시간으로 줄이는 방안(6단위에서 5학점으로)을 발표하면서 돌출했습니다. 역사 교사들은 현대사 교육이 부실해질 거라 우려합니다. 현 교육과정은 중학교에서 근현대사 이전 중심, 고교에서 근현대사 중심으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교육부는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늘리는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국어·영어·수학 등 주요 과목을 모두 2학점씩 줄인 가운데 한국사는 필요성을 인정해 1학점만 줄인 상황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교육부가 국영수 필수 이수 학점을 줄이더라도 일선 학교들이 알아서 입시 영향력이 큰 과목을 최대치로 편성할 겁니다. 사회(역사 포함과학 과목에서 줄어든 필수 이수 학점은 해당 선택과목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반면 한국사는 필수 이수 학점만큼만 최소치로 가르칠 것입니다. 역사 교사들 입장에서는 이명박근혜 정부 10년에 걸친 역사 전쟁의 결과가 한국사만 수업 시수 감축으로 허무하게 끝나는 셈입니다. 한국사 적정 시수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특수 과목임을 고려하면 분명 토론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더욱이 교육부가 선수들은 빤히 아는 얕은 꼼수로 이를 정당화하려 든 건 역사 교사들의 불신만 자초한 오판이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대통령꼬리표가 억울할 리 없는 기획자였습니다. 반면 굳이 그럴 이유도 없는 문 대통령이 교육부의 꼼수로 인해 한국사 교육을 약화시킨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함께 촛불을 들었던 역사 교사 2115명과 척을 진다면 몹시 억울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이 모든 사실을 보고받았다면 정책 결정 과정에 유감을 표하며, 대통령도 몰랐다면 총론 확정 전 공론화와 재검토를 촉구합니다.

전정윤사회정책부장 한겨레 2021-11-10

 

국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은 불행의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알아간다는 것일까.

경제부처 출입기자 시절 잠시 친했던서기관이 있었다. 체격도 좋은 데다 배려심 많고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휴일 아침 과천청사 기자실에서 일하다 우연히 마주친 날, 날씨는 왜 그리 화창했던지. 자연스럽게 신세 한탄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생생하다. 그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급작스럽게 부음을 들었다. 심장이 좋지 않았는데 과로가 원인이라고 했다. 빈소에는 중학생 외아들이 상주로 앉아 있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오래 살아주는 것도 아버지의 역할이다 싶었다. 과로사한 지인도 처음이었지만 꿈이 커갈 시기에 아버지를 잃은 충격이 얼마나 클까 생각하니 감정이 북받쳤던 것 같다. “소년소녀가장도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도 잘 듣고 더 잘 커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도 하늘나라에서 안심할 거예요.” 주제 넘은 줄 알면서도 그리 말했다.

 

그때까지 내 인식에서는 불우한 청소년의 대명사가 소년소녀가장이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기도 전 부모를 여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들. 그래도 어른이 되면 생활형편이 나아지고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다 몇 년 전 보호종료아동의 실태를 접했다. 나아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보육원 등에서 보호를 받는 아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국가의 보호조치가 종료돼 지내던 시설에서 퇴소해야 한다. 나이가 찼다는 이유로 독립당하는그들은 자립 수단도, 지낼 곳도 마련하기 힘들어 가난의 굴레를 맴돈다.

 

매년 2000명 이상이 보호종료아동이 된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지자체가 주는 몇백만원의 지원금으로 살 집을 구해야 한다. 연평균 임금은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일을 해도 생활은 궁핍하다.”

 

영 케어러(Young Carer).’ 병에 걸린 부모나 가족을 간병하는 청년들을 일컫는 말이다. 국내에선 영 케어러를 3만명가량으로 추정할 뿐 제대로 된 실태조사조차 이뤄진 바 없다. ‘간병 살인으로 재판에 넘겨진 22세 청년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이들에 대한 지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고백건대 나는 이 단어가 몹시 낯설었다. 권력의 이면과 사회의 그늘을 비춰 조금은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것이 저널리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단어에 대한 생경함은 직업적으로 게으름의 결과이다.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니 2018년 일본의 간병 살인에 대한 책 소개 기사에 처음 등장했다. 이듬해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10여년간 직접 돌본 조기현 작가의 <아빠의 아빠가 됐다>가 출간된 후로 점차 퍼져나갔다.

 

검색 결과에 나온 노컷뉴스의 동영상을 보며 이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 날마다 발생하는 사고. 갑자기 아빠의, 엄마의, 할머니의 보호자가 된 이들의 일상은 일--돌봄의 반복이었다. 저출생·고령화 사회로 가면 영 케어러도 늘어날 것이다.

 

아버지가 아픔으로써 가난했어야 됐고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인생에서 선택지가 다양할 수 없었어요. 포기하는 게 일상이었어요.”(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 돌봄을 시작한 29세 김율씨)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니까 눈앞에 일이 있으면 무조건 일해야 되는 거예요. 취업준비 이 말도 실감이 안 나는 거죠. 좋은 일자리에 가기 위해서 취업을 준비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가니까.”(조기현 작가)

 

다음주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다. 단 한번의 시험으로 향후 삶의 가능성이 갈리는 시스템은 날이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지난달 30일 치러진 어른들의 수능인 공인중개사 시험 응시자는 40만명을 넘어 역대 최다를 기록했는데, 집값이 뛰고 취업난이 겹치면서 공인중개사 시험에 뛰어드는 2030세대 청년 비율은 39%에 달했다.

 

불행의 바닥은 깊어지는데 행복에 올라타는 울타리는 너무나 높다. 양극화다. 대장동 개발 의혹에서 보듯 고관대작의 자녀는 수십억원의 퇴직금을 받고, 아파트도 쉽게 분양받는다. ‘성공은 노력의 결과라는 능력주의는 한국 사회를 유령처럼 점령하며 불평등을 고착화시킨다.

 

가정을 지탱하는 부모의 질병은 자녀들의 일상과 미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사회와 국가의 불공정과 부정의는 청년들의 현재와 미래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동안 국가는 어디에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박재현 콘텐츠랩부문장 경향 : 2021.11.12.

 

대선판을 주도하는 검찰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초현실적이었다. 괴상했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검찰총장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어쩌면 내년 5월부터 윤석열 대통령 시대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국민의힘 당원들은 26년 동안 당에 헌신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고, 당심은 민심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정당의 일반원칙마저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윤석열이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며 검찰총장을 그만두고 정치에 뛰어든 게 지난 3월이었다. 말뿐이었어도 내내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던 검찰총장이 곧바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건 정의와 상식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동안 강조했던 정치적 중립운운하는 소리는 선출 권력을 비켜가기 위한 말장난이었고, 자기 정치를 위한 발판이었을 뿐이다. 학살자 전두환을 찬양하고 사과는 개나 주라며 국민을 모독하는 등 망언을 쏟아냈지만, 정치 신인 윤석열은 보란 듯이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제 웬만한 기관장들은 대통령을 꿈꿔볼 만한 세상이 되었다. 윤석열이 물꼬를 텄고 김동연, 최재형 같은 이들도 대권을 꿈꾸며 몸을 움직였다. 뭐라 변명하든 이제 공직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자기 선거운동을 위한 디딤돌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현상이 문재인 정부의 인사실패에서 도드라진 건 맞지만, 머슴이 주인 노릇에 익숙해진 탓이 훨씬 크다. 여야보다 관료들의 패거리인 관당이 실질적인 집권세력이 된 오늘의 한국적 민주주의가 낳은 폐해이기도 하다.

 

대선 후보가 되었어도 윤석열의 태도는 섬뜩하다. 현 정권에 대한 분노에서 멈추지 않고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집념까지 내비친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홍준표의 말처럼 석양의 무법자처럼 돼가고 있다. 법도 없고, 상식도 통하지 않는 세상, 그저 총을 빨리 쏘는 사람만 살아남는 그 옛날의 무법천지를 닮아간다는 거다. 이기면 대통령이 되지만, 지면 감옥에 가는 처절한 대선이란다. 경선 패배자의 푸념만은 아니다. 국면 자체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 사활을 건 거친 싸움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여덟 번째 대선인데, 구도와 수준은 유례없는 최악이다.

 

대선판을 주도하는 건 검찰이다. 검찰 수사결과에 따라 대선판이 요동칠 테고, 결국 대통령은 검찰이 낙점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검찰이 이번 선거에서 어떻게 움직일지는 뻔하다. 자기들이 모시던 검찰총장이 후보로 출마했으니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닐 거다. 요즘은 말뿐이라도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검찰이 주도하는 대선, 이건 사실상의 쿠데타다.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밑천이 총과 탱크였다면,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 그리고 형집행권이 바탕이다. 형사사법을 좌우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옛날에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군복을 벗고 정치를 시작했다. 번거로워도 최소한의 절차는 거쳤다. 요즘의 검사들에게는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검찰총장에서 대선 후보로 직행한 윤석열에게는 군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것 같은 최소한의 절차조차 없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 검찰은 무한하다.” 이런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떠돈 지 벌써 수십 년이다. 군인들 세상이 물러가자, 검사들 세상이 왔다. 검찰은 주권자의 선택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도 자기 권력을 영속화하고 있다. 임기 제한조차 없다. 그래서 검찰을 민주적 통제 아래 두기 위한 검찰개혁을 진행했지만, 검찰의 전면적 반발에 혼란이 반복되었고, 마침내 대선 후보 윤석열이라는 보고도 믿기 힘든 괴상한 현실로 이어졌다.

 

윤석열은 야심차게 대통령을 꿈꾸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물론 김대중과 노무현까지 계승한단다. 두둑한 배짱이다. 그렇지만 김대중은 검찰에 대해 최대 암적 존재라 질타했고, 노무현은 검찰 때문에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언젠가 검찰은 집권 초기의 대통령 권력을 빼고는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이라고 쓴 적이 있다. 현직 대통령도 집권 후반기에는 검찰에 밀릴 정도로 검찰의 힘이 세다는 것이었지만, 이젠 바로잡아야겠다. ‘대선 후보 윤석열에서 보듯 검찰권력이 전면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보수세력과 결탁해 자기 이권을 챙기거나 기껏해야 몇몇이 정치인이 되는 수준이었지만, 이젠 사뭇 달라졌다. 현직 검찰총장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소수의 쿠데타 세력과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을 다시금 펼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비상 상황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경향 : 2021.11.12.

 

검찰에 휘둘리는 대선, '쌍특검'이 답이다

과거를 정면돌파해야 미래가 열린다

20대 대선의 대진표가 짜였지만 최종 투표일에 어느 후보가 남을지 막판까지 안갯속 대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단일화 국면은 이번 대선에서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후보 한 명이 사퇴하는 기계적 단일화보다 연정의 형태를 띤 연합정치가 시도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3지대의 존재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정치적 상상의 기반위에서만 정확하게 관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역대 선거보다 증오심과 적대가 선거의 지배적 동인으로 작용하는 선거구도는 정치적 패배가 사법 영역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이는 선거 구도의 변동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 작용하는 여러 요인들은 씨줄과 날줄로 연결되어 있다. 세대와 지역에 따른 지지 성향의 뚜렷한 차이, 정권심판과 정권유지 등 생각의 차이가 중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재명 대 윤석열의 대결의 저변에는 대장동 사건 대 고발사주 사건 수사 전개에 따른 불가측성이 내포되어 있다.

 

대장동 개발 사업에서 민간사업자의 천문학적 수익과 이익이 어떻게 가능했느냐는 문제가 여전히 사건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범죄혐의자들이 구속되고 일부는 기소된 상태이지만 검찰 수사가 이른바 '윗선'까지 진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결국 검찰 수사는 민간사업자의 사법처리로 마무리되고 '윗선' 수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집권당 대선 후보를 검찰이 소환하는 것조차 상정하기 어렵다. 그의 측근인 '정실장'에 대한 소환도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사건의 전말이 한 줌도 안 되는 민간비리업자들의 사법처리로 끝날 때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규명된 것인가에 대해 여권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정관계 로비 의혹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축의 대척엔 고발사주 의혹이 있다. 이 역시 제1야당의 대선 후보가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민생을 위한 정책과 공약이 중요하고 대선이 미래지향적인 전망적 투표의 성격을 띤다고 하지만 이러한 흠결 대 흠결의 프레임을 방치한 채 설정되는 미래 대 과거의 구도는 공허하기만 하다.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지 않는다면 미래로 갈 수 없다. 정권 초기의 적폐청산은 그래서 시민의 지지를 받았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위선과 거짓이 선거판을 규정하고 있는 현실은 최악만은 피하자는 차악을 가려내는 선거로 전락하고 있다. 여당의 경선은 마지막까지 사퇴 후보들의 무효표 처리로 깔끔한 결말을 장식하지 못했고, 야당은 경선 역사상 초유로 민심을 이기는 당심이 대선 후보를 탄생시켰다.

 

양 진영의 사법 리스크를 안고 치르는 대선이 과연 온당한지 성찰할 시간은 충분하다. 대장동 의혹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미진하다고 믿는 여론이 다수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특검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여론이 높은 것이 팩트다. 여당과 야당의 주장이 양극으로 갈려있고 강성 지지자들의 의견 역시 접점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첨예한 문제에 대해서는 여론을 따르는 게 민주주의의 정신이다. 여야 경선에서 왜 일반 여론조사를 가지고 후보를 선택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대장동 사건이나 고발사주 사건의 성격과 의미 등이 다르지만 실체적 진실에 따라 진영의 사활이 걸려 있는 사건이 된 것이 현실이다. 이의 결과에 따라 어느 한 쪽은 치명적 패배를 안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양보할 수 없는 제로섬 게임에서 기왕에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쌍특검'을 여야가 합의할만하다.

 

미래는 과거의 청산에서 나온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에 근거해 이루어진 이유이다. 대선 자체를 오염시키고 표심을 왜곡할 수 있는 사건을 뒤로 한 채 정책 제시가 국면 전환의 정치공학으로 비친다면 정책의 신뢰는 금이 갈 수밖에 없다.

 

여야가 특검에 합의한다면 대선 전에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특검이 만능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미래는 과거의 규명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특검을 통해 국면을 정면돌파하는 쪽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조건부 특검은 또 하나의 정치공학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프레시안 2021.11.12.

 

 

 

 

 

동 신방복합체, 10년의 불편한 진실

폭력적 처리. 그 말은 분개를 자아내기 십상이다. 그 말 앞에 사과한 뒤를 붙이면 분노마저 부걱부걱 일어날 성싶다. 조선일보가 특정 대선후보를 겨냥한 사설 제목을 보자. “사과 큰절 뒤 폭력적 법안 처리 주문이다. 당에서도 공포를 느낀다고 강조했다. 최근 민주당의 민생·개혁 입법 추진 간담회에서 이재명 후보가 발목 잡으면 뚫고 가야하고 책임 처리, 신속 처리가 필요하다고 한 말을 조준했다. 사설은 이어 이 후보를 독재독선으로 덧칠했다.

 

쓴웃음이 나온 까닭은 마침 조동 신방복합체 개국 10년을 맞고 있어서다. 새삼 강조하거니와 신방복합체는 폭력적 법안 처리의 산물이다. 더구나 헌법재판소도 인정했듯이 위법적 처리였다. 물론 조선일보는 폭력이라 개탄하지 않았다. 날치기와 위법을 민주주의 다수결 원리로 언구럭 부렸다. 당시 민주당은 자신들이 국회에서 다수당이 되거나 정권을 되찾으면 미디어관련 법을 개정하겠다고 다짐하며 유권자의 표심을 한껏 자극했다.

2009722일 미디어법이 직권상정 돼 당시 한나라당이 일방 처리하는 모습. 이 법의 처리로 종합편성채널의 허가가 가능하게 됐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하지만 어떤가. 촛불혁명으로 행정부에 이어 입법부까지 거머쥐고도 개정은 아예 생각조차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차분한 복기가 필요하다.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해야 옳다. 동 신방복합체 등장의 근거가 된 법이 폭력적 처리된 뒤 겨우 석 달 만이다. 민주당에 해괴한 흐름이 감지됐다. 재보선 결과에 흡족한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좌와 우의 이념 논쟁을 초월하겠다보수진영 정책도 채택할 건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나는 칼럼 민주당의 축배와 독배”(한겨레, 200911)에서 중심 없는 좌우 초월은 우왕좌왕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곧이어 한겨레는 조폭언론 일망타진제목의 정연주칼럼을 실었다. 노무현 정부시절 KBS사장이던 그는 폭력적으로 처리된 미디어법 체제로 탄생할 조중동 방송죽음의 덫이 되어 방송의 모태인 조중동 신문까지 함께 껴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그 결과는 일망타진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년이 지나서도 조폭언론 일망타진2”(20111)를 썼다. “종합편성 채널 4개를 허용한 지금, 그 생각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며 그들이 망하는 건 자본주의 시장의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주장했다.

 

참 소박한 논리에 곧장 반론을 펴고 싶었지만 지면이 없었다. 조중동 일망타진을 주장한 정연주칼럼은 내가 써온 칼럼을 대체해 들어간 첫 글이었다.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조폭언론 일망타진의 글은 조동 신방복합체에 경계의식을 상당히 무너트렸다. 기실 더 결정적 변수는 손석희다. JTBC가 공영방송에서 청취자의 사랑을 듬뿍 받던 손석희를 스카우트하면서 채널 인지도를 빠르게 높여갔다. 당시 박근혜 정부 아래 KBS, MBC가 제 구실을 못했기에 더 그랬다. 손석희의 활약으로 조동 신방복합체에 대한 민주진영의 거센 비판여론은 시나브로 사라졌다. 개인 손석희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자본의 전략이 적중한 셈이다. 이제 민주당 당직자들은 물론 진보 논객들의 얼굴을 JTBC는 물론 TV조선, 채널A에서 쉽사리 만날 수 있다.

 

사적 인연들이 얽혀 쓰고 싶지 않은 글을 꾹꾹 적는 까닭은 애오라지 하나다. 동 신방복합체를 이대로 두어도 과연 좋은가라는 물음을 우리 사회의 뜻있는 모든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다. 신방복합체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식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정확히 직시할 때, 신문과 방송의 분리세 종편의 독립여론이 다시 꿈틀댈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미디어정책에 발언권이 있을 정연주가 그의 예견과 달리 되레 막강해진 신방복합체에 침묵해왔기에 더 그렇다. 신방복합체 사주들의 힘은, 대한민국 자본의 힘은 정연주나 손석희의 생각보다 무장 강력하고 치밀하다. 민주당도 그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해왔다. 동 신방복합체가 조선동아 100처럼 앞으로도 우리 민족과 민중의 삶에 벅벅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면 상상해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1.11.29.

 

독점재벌 해체하라!

요즘 TV드라마는 재벌을 소재로 하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한편 영화는 지옥물들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재벌 드라마가 헬조선의 지배계급의 모습을 반영한다면 지옥물은 헬조선의 피지배계급의 모습을 반영한다. 이 두 개의 모습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결합해 존재한다. 이것들은 한국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대립하는 양 측면이다.

 

삼성재벌 총수 이재용이 가석방된 지 석 달 만에 미국을 방문했다.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는 그가 가석방 상태에서 보호관찰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경영활동을 하고 외국에 출장 갔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와 야의 구별이 없다. 이 나라는 삼성공화국이고 재벌공화국이다.

 

지난주 수요일 전경련회관 앞에서 독점재벌 해체를 촉구하는 정치집회가 있었다. 전경련회관은 50층짜리 초고층 빌딩이다. 마치 서초동 삼성사옥들을 보는 것 같았다. 외장이 유리로 돼 삐까번쩍 하는 것도 닮은꼴이다. 그 두 곳은 남한 자본주의와 독점재벌이 하늘 높이 우뚝 섰음을 과시하고 있다. 서초동 새 삼성사옥(2008년 완공)과 여의도 새 전경련회관(2013년 완공)은 개발독재 시대를 지난 자본독재 시대 재벌의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개발독재 시대에는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것은 군부독재 정권이었으며, 그 시대의 사회악은 일차적으로는 군부독재정권에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비록 재벌이 정치권력에 뇌물을 주고 특혜를 받아 부를 축적한다고 비판받기는 했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재벌공화국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김지하 시인의 담시 <오적>에서 첫 번째 도적으로 지목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 사회의 계급지형은 크게 바뀌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것은 독점재벌이다.

 

876월 민주항쟁으로 87년 체제가 수립되면서 정권이 관장하는 경제와 사회에 대한 국가관료기구의 지배력은 크게 후퇴했다. 이렇게 구 권력이 후퇴한 빈 공간은 노동자·민중의 것으로 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현장권력을 쟁취하고 88년 첫 노동자대회에서 여의도 전경련회관으로 몰려가 구속 전두환” “퇴진 노태우” “타도 민정당과 함께 해체 전경련을 외쳤다. 그러나 내외 지배세력은 노동자·민중이 경제·사회·정치적으로 큰 권력을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정치권은 보수대연합으로 방어벽을 쳤으며, 재벌은 군부독재가 후퇴하면서 생긴 권력공백을 놓고 노동계급과 각축을 벌였다. 재벌은 7·8·9월 대투쟁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현장권력 쟁취에 맞서 치열하게 신경영전략을 펼치며 자본의 현장지배력을 재구축했다. 그와 동시에 시민사회와 정치에 대해 새롭게 지배력을 구축해 나갔다. 이로써 재벌은 김영삼 정권 시기에 국가권력과 거의 대등한 지배력을 갖게 됐다. 삼성재벌 총수 이건희는 1995년 중국 베이징 한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경제는 2, 관료조직은 3, 정치는 4라며 정치 위에 경제, 즉 재벌이 있음을 공언했다.

 

기고만장하던 독점재벌은 ‘IMF사태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 자금 지원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으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병행발전노선에 힘입어 정치권력에 대해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삼성재벌이 서 있었다. 김대중을 계승한 노무현 정권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면서 재벌에 국가 주도권을 이양했다. 2005516일 청와대에서 열린 ·중소기업 상생협력 대책회의모두발언에서 한 얘기다. 그 자리에는 총리·부총리·청와대 정책실장과 함께 전경련 회장, 이건희·정몽구·구본무·최태원 같은 재벌 총수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 군사독재로부터 민주화를 거친 이후 이 나라의 주인은 노동자·민중이 아니라 재벌이 됐다. 이렇게 된 것은 재벌과 국가기구가 재벌우위로 지배블럭을 재구성한 것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의 일익인 자유주의세력이 노동자·민중을 배반하고 이 지배블럭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자타가 인정하듯이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 문제다. 그것은 곧 자본의 문제고, 독점자본의 문제며, 독점재벌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은 일차적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불평등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자본은 독점자본이다. 그리고 한국의 독점자본은 재벌이라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독점자본주의 일반에서는 불평등을 줄이려면 독점자본의 이윤추구 활동을 사전적으로 제한하고 사후적으로 이윤을 재분배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독점재벌에게는 그러한 규제나 재분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재벌이 공룡화해서 경제에서 나아가 사회와 정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총수일가가 소유·지배하는 대규모 기업집단인 재벌은 존재 자체가 불법이며, 그 경영활동이 불법투성이인 범죄적 기업조직이다. 상호출자나 지주회사 형태에 의한 대규모 기업집단 형성은 공정경쟁에 어긋나는 불법행위다. 총수일가가 기업집단을 소유하고 그중 일인이 총수가 돼 기업경영을 지배하는 것은 주주가 선출한 이사나 대표이사의 경영권과 노동자의 노사관계 결정권을 원천적으로 무력화한다. 재벌은 또한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자금 제공과 특혜를 주고받는 부정축재에서 생겨나고 성장했다. 그리고 불법적·탈법적으로 노동자를 초과착취하고, 중소기업·자영업자들과 소비자대중을 초과수탈하고, 탈세를 하고 비자금을 조성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이런 범죄적 기업조직은 어떤 이유로도 그 존재가 인정돼서는 안 된다. 그리고 총수일가의 재산은 원래의 주인인 국민에게 귀속돼야 한다.

 

범죄적 기업조직 재벌이 존재하는 상태에서는 부정부패도 불평등도 결코 줄지 않는다. 해체를 통한 획기적 개선만이 현실적이다. 재벌은 총수일가 퇴진, 부정축재재산 몰수, 기업집단 해체를 통해 완전 해체돼야 한다.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매일노동뉴스: 2021.11.29

 

닥치고 이재명’ ‘묻지마 윤석열

한 번도 경험 못한 대선이 석 달여 남았다. 어쩌면 조선 왕조 500년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긴 시간이다. 벌써 화석처럼 굳어지는 흐름이 있다. 이재명, 윤석열 후보 지지층의 결집도가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8할가량이 계속 지지하겠다는 절대 지지층이다. 계속 불거지는 치명적 흠결과 실언, 후보의 명운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검찰·공수처 수사가 남아 있음에도 닥치고 이재명’, ‘묻지마 윤석열로 진영 대결이 첨예해지고 있음이다. 아마도 내년 39일 대선은 진영 투표의 성격이 여느 선거보다 강력하게 표출될 것이다.

 

진영 대결이 극단화되는 데 맞춰 대선전이 갈수록 살벌해지고 있다. 후보끼리 대놓고 당신은 감옥에 갈 것이라고 공박한다. 소시오패스 정신병자, 사기꾼, 파렴치범, 무식자, 조폭 변호사, 가족사기단, 살인자 가족 등 주고받는 언어에는 온통 핏빛 적의가 넘실댄다. 공존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응징과 절멸의 대상으로 보니 증오 마케팅이 선거전을 지배하고 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상대 후보들의 사소한 의혹만 불거져도 고발장을 들고 검찰로 달려간다. 유력 대선 후보가 이렇게 많은 사안의 피고발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피의자신분이 된 적도 없다. 상대를 악마로 몰아가는 네거티브로 점철된 선거에서 정책과 비전 경쟁이 제대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지난 10월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전 세계 17개 선진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치적 갈등조사 결과를 내놨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정치적 갈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로 나타났다.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심하거나 매우 심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90%에 달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절실했던 통합의 메시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해졌고, 특히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서초동과 광화문의 세 대결로 상징되는 정치적 양극화는 결국 이번 대선을 최악의 진영 대결로 치러지게 만들었다.

조국 사태의 반대편 주인공인 윤석열이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순간, 대선은 진영 간 사생결단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은 보수층의 분노, 증오, 응징, 복수심 등 부정적 에너지의 응축이다. 진즉에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이길 수만 있다면 윤석열이 괴물이면 어떻고 악마면 어떤가라고 했다. 가족 문제, 잦은 실언, 비틀린 역사인식, 철학의 빈곤, 정책 현안에 대한 무지 등 결정적 실수와 자질 결함이 드러났지만 윤석열의 지지율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석열은 후보로 확정되고 나서도 이재명을 겨냥하는 대신 반문재인에 초점을 맞춘 과거 심판형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반문정권교체 깃발만 펄럭이며 보수층의 분노를 동원하려는 전략이다.

 

어찌 보면 이재명도 진영 정치의 수혜자다. 여권 세력의 배신자 윤석열에 대한 적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유능함과 더불어 적폐청산을 밀고나갈 이재명의 전투력이 그를 여당 대선 후보에 올려놓았다. 민주주의 리더십의 요체인 대화와 타협, 설득과 공감 능력보다 돌파형 자질이 소구된 것이다.

 

진영 정치의 양극에 자리하는 이재명과 윤석열의 대결 구도는 필시 정치 양극화를 극한으로 몰아갈 것이다. 차기 정권에서 진영 대결이 더욱 격화되게 만들 토양이다. 통합이나 화합의 DNA가 애초에 없어 보이니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분열과 적의를 국정 동력으로 삼은 미국 트럼프 시대의 모습이 한국에서 재현될 수도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서로를 공존 불가능한 적으로 보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설령 윤석열이 보수의 절대적 지지 속에서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180석 거대 야당의 반대와 저항에 직면해 국정을 제대로 이끌기 힘들 터이다. 극한 갈등과 사회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뻔히 내다보이는 지옥도를 피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 화끈한 공약과 정책을 쏟아내면서도, 진영 정치를 넘어설 통합의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가 어디에도 없다.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 수술 같은 근본적 대안,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거대한 청사진까지 기대하지 않는다. 심각한 수위에 도달한 진영 갈등과 정치 양극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통합의 정치를 다짐이라도 하는 후보를 보고 싶다.

양권모 편집인 경향 : 2021.11.30

 

한국, 왜 우경화하나?

나는 요즘 흥미로운 현상 하나를 보게 된다. 내가 잘 아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회주의가 한창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일련의 여론조사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18~24살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지지율은 50~55% 정도로, ‘자본주의지지를 앞지르고 있다. 물론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노르웨이 같은 사민주의적 국가 정도를 의미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아성이었던 미국에서 이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사민주의 사회가 존재하는 노르웨이에서는 급진 좌파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지금 오슬로대학교 같으면, 전체의 3분의 1이나 되는 학생들이 급진 사회주의 정당인 적색당이나 사회주의좌파당을 지지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가장 주시하는 외국이라면 독일일 텐데,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서는 최근 대형 부동산회사의 보유주택 20만여채를 몰수해 공유화하는 방안을 놓고 주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과반이 이에 찬성했다. ‘몰수공유화는 다시 인기 있는 표어가 되어가는 추세다. 권위주의 정권인 러시아에서도 지금 독재의 대항마로 다시 부상하고 있는 세력은 바로 최근 총선에서 의석을 크게 늘린 연방공산당이다. 내가 아는 어느 사회를 둘러보아도, 팬데믹과 경제, 환경 위기 속에서 좌파가 득세하고 있는 것 같다.

 

두개의 예외를 이야기하자면 바로 일본과 한국이다. 한국의 경우는 4년 전에 촛불항쟁으로 물러난 강경 보수 세력들이 부활하여 대선 정국의 강자로 부상했다. 구미권으로 가면 갈수록 희망을 의미하게 된 사회주는 이들 세력에게는 욕 중의 욕이다. 이들은, 객관적으로 보면 중도의 사회적 자유주의 정도로 규정될 수 있는 현 집권 세력을 공격할 때에도 늘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식의 비난을 퍼붓는다. 정작 사회주의로 불릴 만한 그 어떤 정책도 지난 4년 동안 전혀 시행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강경 보수의 이 과시되는 우경화 분위기 속에서 극우의 행동대는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망동도 종종 벌인다. 몇주 전에, ‘위안부피해자들의 수요집회에 자유연대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극우 단체 회원들이 나타나서 위안부 강제 동원은 거짓말과 같은 표어를 들고 일장기를 흔드는 광경을 인터넷으로 지켜보면서 믿을까 말까 한 적이 있었다. 몇년 전만 해도 극우들이 일장기를 들고나와서 피해자들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모독하지는 못했을 터인데, 이제 이런 공개적 행동이 가능해질 정도로 이 사회의 제재력이 약해진 것이다. 일장기를 흔들면서 전쟁 피해자들을 모욕해도 이 망동을 막을 만한 시민들의 공분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구미의 다수 국가에서 급진 좌파의 인기가 특히 젊은층 사이에서 크게 오르는 이유들은 쉽게 이해된다. 첫째, 기후위기와 같은 지구적 재앙들을 이윤추구 시스템을 통해선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수십년 동안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가면 갈수록 젊은 세대로 하여금 안정된 직장이나 내 집을 마련하여 가정을 이룰 꿈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평균적인 영미권 20대는 플랫폼 노동을 하거나 불안한 직장에 다니며 계속 비싸지는 주택 임대료를 내고 대출받은 학자금을 상환하느라고 거의 저축을 할 수 없는 현대판 무산자. 재산을 가지지 못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자원의 공유를 지지하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은가? 셋째, 역사적 기억들은 좌파 부활을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구미에서는 1950~60년대에 재분배 정책의 대대적인 실시와 함께 대중의 삶이 크게 좋아진 경험이 있으며, 역사 교육이나 언론 등은 이 경험에 대한 집단 기억을 유지시키고 있다. 사민주의자들의 장기 집권을 경험한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젊은 유권자들이 급진 좌파가 집권해 덜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서 다수의 삶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기대한다. 러시아에서의 괄목할 만한 좌파의 부활 역시, 모두가 안정된 직장을 영위했으며 국가로부터 무료로 주택을 배분받을 수 있었던 소련 시절에 대한 기억에 기대는 편이다.

 

한국의 상황은 이와 꽤나 다르다. 첫째,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한국의 주류 언론들은 애써 외면한다. 죽도록 피곤한 일상에 지칠 대로 지친 다수의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미래 걱정자체는 사치로 보일 수 있다. 현 정권의 그린뉴딜은 결국 탈성장이 아닌, 단지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새로운 방식의 기술 집약적 성장인데, 이처럼 전혀 급진적이지 않은 기후 정책에 다수의 한국 젊은이들은 그다지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둘째, 젊은이들의 박탈감은 구미권보다 한국에서 더 심한데, 문제는 박탈이라는 상황을 언론 등 여론 주도세력이 어떻게 포장하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20대의 자가 주택 보유율을 보면 한국은 24%에 그친다. 반면 미국 20대는 34%나 자신이 사는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한국의 20대 근로자들 중에 무려 40%가 비정규직인 데 비해, 노르웨이의 경우는 15~24살 근로자의 27%, 그리고 24~29살 근로자의 15%만이 비정규직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젊은이들보다 미국이나 노르웨이 젊은이들이 훨씬 더 급진적인 정치 성향을 나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한국의 여론 주도세력들이 부동산 문제의 심화나 비정규직 양산 등을 진보 정권탓이나 귀족 노조탓으로 성공적으로 돌려왔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 시기에 시작된 다주택 임대사업자들을 위한 세제 특혜도 폐지하지 못하는 현 정권이 과연 진보인가? 유럽과 달리 경영 참여도 못 하는 노조는 과연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물음들은, 이미 보수적 여론 주도세력의 프레이밍에 익숙해진 많은 이들에게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셋째, 이미 유권자들을 많이 실망시킨, 진정한 의미의 진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현 정권보다 더 급진적인 정치세력들은 구미권과 달리 한국에선 집권한 적이 없다. 그들은 승리의 기억에 의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지지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쉽게도 한국인의 표심은 강경 보수 대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진자처럼 왔다 갔다 하곤 한다. 강경 보수의 적폐에 대한 분노가 쌓이면 자유주의 세력들을 택하고, 자유주의 세력이 집권해 부동산과 불안 노동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 다시 강경 보수의 인기가 오른다. 이 폐쇄회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정치에 과연 희망이 있을까?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 2021.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