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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2.2.28~3.31 이번 대선은 망했다

by 이성근 2022. 4. 3.

봄씨앗 심상정·이백윤·김재연 매일노동뉴스 2022.02.28.

모든 진실한 것들은식상하다 한겨레 :2022-03-01

1987년에 머물러 있는 정치'낡은 렌즈' 벗어던지고 새 시대 열자 한국경제 2022.03.02.

대통령선거와 선택 이로운 넷 2022.03.01.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경향 : 2022.03.02.

노동이 실종된 대선, 노동자는 국민 아닌가 매일노동뉴스 2022.03.02

이번 대선은 망했다, 결선투표제라도 도입하자 경향 : 2022.03.02

진보의 재탄생을 기다리며 경향 : 2022.03.03.

누구에게 내 한 표를 던질 것인가 한겨레 :2022-03-03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지배구조 경향 : 2022.03.04

묻지 마 정권교체는 곤란하다 경향 : 2022.03.04

승자독식 대통령제의 늪, 단일화 프레시안 2022.03.04.

지방 쇠퇴를 맞이하는 자세 프레시안 2022.03.04.

손가락 자르고 싶을 것이라던 안철수의 원칙 없는 단일화 한겨레 2002 3.4

국민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프레시안 2022.03.07.

2030 세대의 고통과 조선일보 미디어오늘 2022.03.07.

선거란 다름을 인정해 가는 험난한 과정이다 경향 : 2022.03.09.

 

국민통합, 잘돼야 할 텐데 경향 : 2022.03.10.

정말 화합하려면 원전부터 시작하라 경향 : 2022.03.12.

부동산 계급투표? 한겨레 2022-03-13

승자가 보이지 않는 선거 경향 : 2022.03.14.

지난 대선의 아이러니 경향 : 2022.03.14.

두 얼굴의 국가, 윤석열의 국민통합 미디어오늘 2022.03.14.

노동자 정치세력화사반세기의 종착역 매일노동뉴스 2022.03.14.

누가 국민을 패배자로 만들었나 한겨레 :2022-03-15

윤석열 시대의 갈등의 점화 장소 한겨레 :2022-03-15

윤석열의 나라에서는 매일노동뉴스 :2022-03-15

우크라이나 사태에 미국과 나토의 책임은? 시사인 2022.03.16

부나 권력이 없어도 빛나는 사람들의 특징 한겨레 :2022-03-17

대선에서의 불길한 방화범들 한겨레21 : 2022-03-18

용산 시대말하는 권력의 자아도취 한겨레 :2022-03-20

 

풍수''안보'를 이겼다 프레시아 2022.03.21.

윤석열 당선인의 가능성 제로정치 경향 2022.03.21.

9·11의 백악관, 윤석열의 청와대 한겨레 :2022-03-21 1

''국방부 강제퇴거 사건', 그 총체적 난맥상 한겨레 :2022-03-22

제왕적 당선자의 또 다른 구중궁궐 한겨레 2022-03-23

기레기의 오만, 깨시민의 자만 미디어오늘 2022.03.28.

아니 그건 말이 안 돼, 한국이? 한겨레 2022-03-28

검찰의 시간이 오고 있다 한겨레 2022-03-29

수상한 만인산 성명경향 2022.03.31.

부자 연습 경향 : 2022.03.31

 

봄씨앗 심상정·이백윤·김재연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이 어둠은 곧 동이 튼다는 신호다. 그러니 답답해하지 마라. ‘조국 사태에 위성정당에 막장 대통령선거까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상황을 연달아 겪으며 머릿속에 내려앉은 경구다.

 

국민의힘이 최소 10년은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기간이면 정치·경제·사회의 굵직한 적폐를 어느 정도 청산할 테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다음 단계로 나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더불어민주당이 10년간 집권한 뒤에, 진보정당이 이어서 집권하는 희망도 품었다.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국민의힘은 불과 5년 만에 다시 회복했고 대통령 당선까지 넘보고 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국민의힘이 뼈를 깎는 반성을 거쳐 합리적 보수로 거듭난 결과라면, 이 상황은 기립박수를 받을 일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니다. 적폐 청산을 자임한 민주당이 적폐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적폐의 대열에 합류한 결과다.

 

조국 사태가 변곡점이었다. 그 어떤 이념과 학문을 불문하고 인정하지 않는 명백한 불공정, 세계 어느 나라의 보수도 인정하지 않는 명백한 불공정, 독재자도 차마 부끄러워 공개적으로 옹호하지 못하는 명백한 불공정을 감히 진보와 민주를 걸고 옹호했다. 결과는 서글펐다. 조국 사태는 능력주의를 불렀다. 그 이전에는 비정규직 처우개선에 대놓고 반발하는 사회 현상은 없었다. 일부 상층 노동의 이기주의 행태에 그쳤고, 그들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조국 사태 이후 달라졌다. 조국 사태가 명분을 제공했다. 최상위 1% 조국 가족도 자신의 성채를 더욱 공고히 구축하려고 저렇게 불공정하게 살았는데, 진보라는 학자와 민주당은 촛불까지 들면서 조국 가족에게 잘못이 없다고 옹호하는데, 정해진 총량에서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하면 내 몫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조국 가족보다 한참 못 사는 내가 왜 동의해야 하나, 내 몫이나 더 달라, 반발하고 주장하는 능력주의 흐름에 날개를 달아 주고 말았다.

 

민주당과 그 나팔수 어용학자들은 그것도 모자라, 지난 총선에서 듣도 보도 못한 위성정당 만행을 저지르며 국회 의석을 독식했다. 권력자의 성폭력을 고발한 미투에서는 피해자를 모욕하며 2차 가해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 결과였다. 국민의힘이 기적처럼 회복했다. 상황이 그렇게 됐으면, 민주당은 자신들 행태를 성찰하며 거듭나야 할 텐데 상황을 모면하려는 임기응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았다. 대통령선거에서도 쥴리운운하며 반인권 작태를 서슴지 않고, 전쟁으로 죽어 가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모욕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상위 10%가 총소득의 절반이나 가져가는, 즉 나머지 90% 국민이 겨우 절반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불평등 상황에서도 최상위 1%에 근접한 민주당 주도층은 자기 몫 늘리기에만 여념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향후 60년간 원전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이 180석이나 차지한 국회에서도 차별금지법은 금지당하고 있다. 어둡고 암담하다.

 

이 어둠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87년 체제가 사회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의미를 상실했다는 증거다. 박근혜 탄핵의 서막을 연 조선일보, 탄핵에 동참하고 구속을 수용한 국민의힘은 반민주 세력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대통령을 몰아낼 만큼 민주주의가 고착됐다. 민주당은 이제 더는 진보가 아니다. 민주당이 진보를 팔수록 진보의 가치가 망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87체제를 넘어 새로운 단계로 나가야 한다.

 

핵심은 불평등 완화, 기후위기 해소, 차별·혐오 해소에 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 양당 체제로는 불가능하다. 두 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고, 기후위기를 회피하고 있고, 차별·혐오를 확산시키고 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경쟁은 염치도 팽개친 구적폐와 신적폐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자연 현상에서는 그냥 기다리면 된다. 그렇지만 인간사회는 그렇지 않다. 행위가 없으면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는 계단식으로 발전하지 않고 나선형으로 발전한다. 어둠을 극복하려는 행위가 없으면 나선형의 후퇴 단계가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

 

문제는 진보정치다. 진보정치가 유력한 세력이 돼야 민주당은 합리적 자유주의가 되고 국민의힘은 합리적 보수로 거듭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진보정치는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다. 양당 체제가 만든 어둠이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힘을 모으면 된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가능성을 본다. 정의당과 노동당과 진보당, 그리고 녹색당이 예전처럼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각자의 길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각자의 한계도 느끼고 있다. 선거 공학이 아닌 진보의 가치를 다시 세우고 있다. 대통령선거 직후의 지방선거가 첫 관문이다. 관문을 통과하고 총선까지 지혜를 모으면 된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심상정과 이백윤과 김재연은 진보정치의 푸르른 여름을 열어 갈 소중한 희망의 봄씨앗이다.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한 표라도 더 모아야 한다. 나는 심상정을 지지한다. 심상정을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즐겁게 표를 모을 것이다. 이백윤과 김재연을 지지하는 이들도 건투하기를 빈다.

한석호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매일노동뉴스 2022.02.28

 

 

모든 진실한 것들은식상하다

내가 쓰는 글이나 하는 말에 대해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자주 듣는 평가 중 하나는 식상하다는 것이다. 수십년 전부터 해온 얘기들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힐난이 스며 있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모든 진실한 것들은 식상하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가 자신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속표지에 친필로 쓴 내용을 우리는 대부분 익숙하게 알고 있다. “200년 전에 노예 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100년 전에 여자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50년 전에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테러리스트로 수배당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다.

강의 끝 무렵에 그 글을 가끔 인용한다. “그 사회에서 누군가는 200년 동안, 100년 동안, 50년 동안 계속 활동했다는 뜻인데, 누구였겠는가? 바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었다라고 격려하며 스스로 다짐한다.

 

드라마 <송곳>의 한 장면도 가끔 인용한다. 구고신 노동상담소장이 하는 말이다. “1800년대 유럽에서 노동자 두명이 술집에 모이는 것도 불법이던 시절, 일곱살짜리에게 하루 열네시간 일을 시켜도 그것이 고용의 자유이던 시절, 그런 시절부터 피 흘려 만든 법이야, 노동법이누가? 당신 같은 사람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못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못 받는 인간들. 세상의 걸림돌 같은 인간들.” 노동운동 하는 우리가 비록 사람들 눈에 걸림돌처럼 보일지라도 그런 걸림돌들이 세상을 바꿔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죽지 말자는 뜻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내뱉은 말의 100분의 1만큼이라도 실천하며 살자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한다.

 

며칠 전, ‘무노조 경영의 상징처럼 여겨져온 대기업에서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하는 소수의 노동자들을 만나 같은 내용으로 강의를 마무리했을 때, 한 청년이 그 장하준 교수의 책 속표지를 다시 보여달라고 했다. 받아 적겠노라고. 이미 컴퓨터를 끈 다음이어서 인터넷 검색해보시면 쉽게 찾을 수 있어요라고 답했는데 그 청년이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지금도 미안하다. 혹시라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걸 모르고 있느냐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후회가 막심하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식상할 정도로 익숙하지만 그것이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역사학자 박준성 선생이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노동운동사 강의 중에 이런 얘기를 했다. “원산 총파업 당시 항구에 정박해 있던 일본 상선의 일본인 선원들이 조선 노동자들 파업 승리 만세!’를 외치며 박수를 쳤다는 장면을 김학철의 <격정시대>에서 읽은 뒤로 저는 일본 놈들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무렵 일본 산켄전기가 100퍼센트 투자한 한국 기업 한국산연이 폐업을 한 뒤 한국 노동자들이 폐업 철회를 요구하는 천막농성을 300일 넘게 하고 있었고, 그 투쟁에 연대하는 일본 시민들의 소식을 들었다. 일본 본사 앞에 찾아가 위장폐업을 용서할 수 없다”, “코로나19로 한국의 노동자들이 올 수 없으니 일본에서 우리가 대신 싸워야 한다”, “한국산연노조 힘내!”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여는 일본 사람들을 보면서 만국의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야욕”, “세력 균형과 민족 분쟁등 보는 관점이 제각각이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원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총을 드는 시민이나 러시아에서 연행될 것을 각오하고 전쟁 반대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억압적 지배에 반대하며 진실이 통하는 사회를 원하는 것이지 친서방친러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볼 일은 아니다.

 

1931531<조선신문>에 실린 우리나라 최초 고공농성 노동자로 불리는 을밀대 체공녀 강주룡이 아버님에게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불초여식은 소원이 성취되면 다시 뵙겠으나 그렇지 아니하면 훗날 땅속에서 뵙겠습니다.” 그 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노동자들이 비슷한 유언을 남기며 산화했다. 그 유언들을 식상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강주룡김진숙씨가 해고된 지 37년 만에 복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훗날 땅속에서라도 만나겠다는 그런 다짐 때문이었거늘.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한겨레 :2022-03-01

 

 

1987년에 머물러 있는 정치'낡은 렌즈' 벗어던지고 새 시대 열자

2022년은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지 35년째가 되는 해다. 전후 34년 동안, 1987년에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기까지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제1막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제2막은, 급격히 달라진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1987년의 방법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로 인해 사람들에게 싫증만 남기며 지지부진하게 끝나가고 있다. 문제는 새로운데 대안은 그렇지 못하고, 2막에 태어난 청년들은 제1막의 조연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화와 정보화로 달라진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제3막을 기대할 수 있을까.

 

[임명묵의 21세기 렌즈] 1987년에 머물러 있는 정치'낡은 렌즈' 벗어던지고 새 시대 열자

19876월은 대한민국이 한 시대를 결산하는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쟁의 폐허만 가득했던 1953년 이래로, 34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1987년에 이미 한국은 굴지의 대기업 집단을 거느린, 선진 산업 세계의 일원이었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은 사실상 완벽한 승리로 끝난 상태였다. 1953년부터 1987년까지 34년의 역사는 경제적 기적과 신화의 역사였다. 한편으로 이 34년의 역사는,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 전반에 몰아친 자유화의 역사이기도 했다. 독재 시대에도 급속한 도시화, 중산층과 대중문화의 성장, 미국 및 유럽과의 교류로 태동한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대두로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미리 연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1953년부터 1987년의 한 시대, 대한민국 역사의 제1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는, 한국 사회를 규정했던 핵심적인 과제인 산업화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고 질주한 시대였다.

 

그렇다면 그다음 시대, 대한민국 역사의 제2막은 어떠했는가? 올해는 1987년 제6공화국이 시작된 지 35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34년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제1막과 달리 제2막이 어떤 시대였는지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물론 이 시기에도 한국 사회는 쉼 없이 질주했다. 2막 동안에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자 글로벌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중심국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 시기 정치적 과제의 대부분은 제1막에서 제시됐던 문제의 연장이었다. 좌우 정치 세력은 자신들이 제1막의 위대한 성취를 이뤘던 영웅들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그 영웅들이 성취한 바를 지키겠다고 공언했다. 실제 1987년 이후 한국에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은 모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기존의 문제의식으로 정당화되거나 논박될 수 있었다. 현대사의 제1막은 1987년에 말 그대로 막을 내렸지만, 35년간 펼쳐진 제2막은 실질적으로 제1막과 똑같은 배우와 소품으로 진행된 셈이다. 당연히 1987년에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해서 시대의 문제가 즉각 해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은 제2막에서도 지속적인 발전을 경험했다.

 

기성세대의 해법에 동의하지 않는 청년층

하지만 제2막이 공연되는 가운데, 1987년까지 한국 사회를 규정했던 제1막의 문제의식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속출했다. 저출산과 고령화, 지방의 쇠퇴와 수도권 과밀화, 부동산 가격 폭등과 갈수록 벌어지는 자산 격차, 교육 비용의 상승과 경쟁의 심화, 악화하는 취업난, 다문화 사회로의 전환, 젠더 갈등의 폭발,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국제 질서의 격변. 표면적으로 보이는 한국의 놀라운 성공 이면에,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기본적으로 이 같은 새로운 문제들에서 기인한다.

 

물론 기성세대라고 묶이는 노년층과 중장년층은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2막의 각종 문제가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변되는 제1막의 서사가 충실히이행되지 못했기에 발생한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 지금한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제1막의 철학, 즉 산업화 혹은 민주화로 국가를 움직여야 하고, 이 과제의 완성을 방해하는 상대를 척결해내야만 한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노년층은 안보와 성장을 지상 가치로 다시 확립하고, 친북과 친중 성향 인사들을 솎아내고, 좌파 지식인의 영향력을 철저히 차단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중장년층은 민주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제1막의 지배층이라고 규정한 재벌, 검찰, 보수언론의 연합을 파괴했을 때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층은 기성세대의 인식과 해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1994년생인 내가 태어날 때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목전에 둔 문민정부의 민주 국가였다. 산업화나 민주화가 이미 달성된 뒤의 세상에서는 이런 목표들이 절실하게 다가올 수가 없다. 설령 말로 아무리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삶과 경험으로 그것을 느껴온 앞선 세대와 같은 수준일 수는 없다. 청년층에게 1987년 이전의 시대와 1987년 이후의 시대는 아예 다른 시대고, 이런 인식은 기성세대가 제2막도 제1막의 연장이라 생각하는 것과 대조된다. 그렇다면 청년층이 마주했던 지난 35년은 대체 어떤 시대였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1막의 주제인 산업화와 민주화가 20세기 서구 사회를 참조하며 만들어진 것처럼, 한국 바깥의 세계를 볼 필요가 있다.

 

탈냉전 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는 지난 30년은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였다. 철의 장막이 무너지면서 세계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통합됐다. 사람, 자본, 기술, 문화, 정보, 상품 등 모든 것이 국경을 넘나들며 교환됐다. 문제는 국경을 넘나드는 통합이 역설적으로 국경 안에서의 분리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었다. 생산성을 뽐낼 수 있는 사람들은 글로벌 네트워크의 허브인 세계 도시로 몰려들었고, 상시로 다른 세계 도시들과 소통했다. 특히 서구의 세계 도시는 지구적 경제를 조율하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지역에 자국의 자본과 기술을 투여하며 부를 흡수하는 진정한 중심으로 거듭났다. 반면 세계 도시의 배후지, 국경에 매여 있는 지역은 반대로 세계 도시와의 긴밀한 연결을 상실해갔다.

 

서구 세계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사회 경제적 문제는 대부분 세계화의 결과로 탄생한 이중경제체제에서 기인했다. 서울은 서구 어느 도시에도 밀리지 않는 최고의 세계 도시로 우뚝 섰다. 사람들, 특히 청년층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 서울로 몰려들었으며, 자연스레 지방은 위축됐다. 도시가 농촌을 흡수하는 과거의 이촌향도는 수도권이 광역시마저 흡수하는 제2의 이촌향도로 재현되고 있고, 지방의 공백은 기회를 찾아온 아시아 각지의 이주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한편 글로벌 영역에서 빨아들인 돈이 서울의 상위 노동자들에게 유입되며, 수도권의 공간 가치는 극도로 올라갔고, 자산 격차는 극대화됐다. 도저히 좁힐 수 없어진 격차로 인해 청년층의 생애주기는 세계와 연결된 세계 도시의 상층 노동시장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한국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상징하는 입시 문제는 유년기부터 청년기의 끝까지 확장됐고, 상층 노동시장 진입을 향한 길고 고된 여정의 일부로 편입됐다. 물론 이런 경쟁은 대부분 제1막에서 사회 경제적 자본을 쌓은 부모들의 지원을 받는 이들의 독무대가 됐고, 청년층은 제2막이 수저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라고 느끼게 됐다.

 

과거의 성공 공식 반복하는 정치세력

한편 청년층이 유년기부터 함께했던 정보 기기들은 그들의 가장 내밀한 일상까지 파고들며 삶의 모든 부분을 바꿔 나갔다. 타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엿볼 수 있게 된 정보 기기와 SNS 플랫폼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청년층의 인식을 뒤흔들었다. 한편으로는 그간 사회의 주류에 가려 흩어져 있던 다양한 정체성이 제각기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뭉치며 일종의 정치적 부족으로 발전했다. 소통을 통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온라인 공간은 곧이어 이런 부족 간의 격렬한 투쟁이 상시 벌어지는 전쟁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청년 남성과 여성은 모두 과거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됐던 사회적 역할을 거부하면서도 상대방 성별은 그러한 역할을 그대로 수행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소비와 여가가 변하고, 남녀가 관계 맺는 방식도 변하면서 결혼과 가족의 의미도 달라졌다. SNS를 통한 과시 열풍은, 과하게 높아진 정상성의 기준, 사실상 그 누구도 온전히 달성할 수 없는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에게 열패감을 심어주고 있다. 사람들의 불만은 커뮤니티에 모이고, 그곳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알맞게 적대감을 투사할 대상을 향한 증오가 누적된다. 그렇게 청년층의 젠더 갈등은 사회 변동과 정보화가 만들어낸 압력이 폭발하는 활화산 같은 영역이 됐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세계화와 정보화를 통해 무섭게 성장한 중국을 향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제1막이 끝난 뒤에 태어난 이들이 피부로 느끼는 제2막의 풍경이다. 그러니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제1막의 도구로는 실질적으로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의 시선은 여전히 1987, 1막이 화려하게 막을 내리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향한다. 전례 없는 호황과 성장을 누리는 가운데, 공산권은 무너지고 있으며, 폭압적 독재 정부도 물러나던 그 순간 말이다. 한국의 좌·우파는 모두 제1막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고, 각자의 머리에 있는 제1막의 악역을 물리치면 제2막도 1987년처럼 화려하게 막을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대사의 제2막은 청년층이 제1막의 주연들 생각대로 연기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끝을 향해 달려갔다. 민주화 세력은 청년층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의 무대에서 조연으로 서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20대는 민주화 세력의 조연으로 열연을 펼쳐봤자 문제가 개선되기는커녕 나빠지는 것을 실감했다. 산업화 세력은 20대가 자신들의 조연으로 들어오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20대는 이미 제1막의 진부한 무대가 반복되는 상황이라면 그 무엇이든 거부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20대 남성은 국민의힘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 돼 주었으나, 1막의 주연들을 오히려 자신의 연기에 따르는 조연들로 격하시키는 데 성공했다. 20대 여성은 아예 이 무대에 서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배역들이 제 역할을 해주지 않을 때 공연은 유지될 수 없다. 35년에 걸친 제2막의 막이 빠르게 내려오고 있는 것은 이제 확실하다.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않은 위기의 시간

아마 진짜 문제는 이미 지나버린 제2막이 아니라, 어떻게 시작될지 누구도 감을 잡지 못하는 제3막일지도 모른다. 이번 대선은 정말 찍고 싶은 사람이 없는 대선이라는 이야기가 유독 많았다. 과거의 서사는 통하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서사를 만들지 못하니, 상대방에 대한 자극적인 공격만이 유일한 논쟁거리가 됐기 때문이리라. 2막에 태어난 청년들도 제2막이 뭔가 잘못됐다고 아우성치지만, 문제 제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야기는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90년 전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야기한,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않은 위기의 시간”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나는 공백기는 그 어느 때보다 2022년의 한국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표현인 것 같다.

 

이미 결과를 기다려야만 하는 대선을 두고 불만을 길게 토로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대선의 승자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에 관한 전망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새로운 대통령은 제1막의 주제를 외치며 제2, 198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시간을 연장하고자 할까? 아니면 지난 35년간의 제2막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대임을 직시하고, 새로운 과제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추구하는 제3막을 시작할까? 그람시의 시대가 오싹한 전체주의의 시대였고, 그 주인공이 장기화된 혼란 끝에 질서를 찾겠다며 일어선 당대의 청년들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전자의 길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후자의 길이 쉬웠다면 제2막이 이런 식으로 끝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과거와 무엇이, 왜 달라졌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삶과 경험을 의심하며, 바뀐 세상을 직시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보통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새로운 대통령이 그 누가 되든 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거의 렌즈를 벗어던지고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펼쳐진 제3막이라면 1987년 이후의 세대, 2막의 세대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활약할 수 있지 않을까.

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 지역학 전공/ 한국경제 2022.03.02

 

대통령선거와 선택

다음 5년을 책임질 정부의 선출이 코 앞이다. 이번 20대 대통령선거는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라 불린다. 과거 선거와 달리 어느 후보도 후보의 매력으로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다고 정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보다, 네거티브가 더 기승인 선거여서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라는 공감을 얻고 있다.

 

여야 모두 처지가 그러다 보니 이번 선거는 깻잎 한 장 차이의 격차로 당선자가 가려질 공산이 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선거운동 기간 내내 비호감이라는 이유로 외면하던 유권자들이 막판으로 가면서 결국은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로 결집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선거운동 기간에 사회혁신, 사회적경제 등 여러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시민사회도 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사회적경제연대회의, 사회혁신가네트워크, 한국마을지원센터연합,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협의회, 전국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등 5개 영역이 이재명 후보 선대위 사회혁신추진단 등 각 후보 진영과 정책협약을 맺고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정책들이 공약으로 반영되기를 요구했고,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개인과 단체가 시국 성명() 내는 등 활동이 이어졌다. 그중 일부는 특정 후보() 지지하는 흐름도 있었다.

 

매번 선거 때마다 협약식과 지지 선언 같은 활동은 반복되고 있다. 실제로 그 외 다른 방법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에는 현행 선거법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이런 노력은 후보의 공약에 반영되고 있다. 이재명 후보의 경우, 5년 전 당시 민주당 후보인 문재인 후보의 공약 반영 정도와 비교하면 훨씬 구체적이고 분명한 요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조직의 구축 및 비영리 스타트업의 성장을 지원하도록 하는 것, 참여예산의 확대 등 시민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 등이 후보의 공약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지난 5년의 과정을 돌아보며 공약으로 반영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와 관계없이 실현 여부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예컨대 민주당이 다수당임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 자신의 의제이기도 한 사회적경제기본법은 임기 말인 현재까지도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처럼 다수당의 공약인데도 실현이 잘 안 되는 이유는 가치는 옳다고 생각해도 법을 요구하는 유권자들의 표의 크기가 작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

 

지난 5년 동안에도 시민사회의 생태계는 더욱 확장되어 협동조합도 많아지고 사회적기업도 늘어났으며, 주민참여의 경험도 쌓이면서 거버넌스의 사례도 많아졌다. 사회적 난제가 많은 시대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확장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그럼에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이나 제도, 정책은 여전히 의제에만 머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시민사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예전만 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통령선거라는 정치적 공간에서 시민사회가 자신의 의제를 관철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이유기도 하다.

하승창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 이로운 넷 2022.03.01.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세계는 지금 불안과 공포 그리고 무력감에 젖어 있다. 2년 넘게 지구촌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면서 근 600만의 목숨을 앗아간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세는 여전히 꺾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224일 새벽에 전격적으로 감행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은 지구촌의 운명이 앞으로 어디로 끌려 갈지 속단할 수 없게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우선 인간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시세계와의 힘든 싸움이지만, 그래도 과학의 힘을 빌린 예방과 치료를 통해서 점차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고 있다. 이에 비하면 전쟁을 억제하는 평화체제의 구축은 인간이 함께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신념이 일찍부터 있었다. 그럼에도 크고 작은 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끝이지 않고 있으며, 유럽 대륙에서 다시 일어났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국경과 영토를 가리지 않고 동시적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재앙이지만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개별 국가의 역사나 영토가 지닌 의미가 점

차 사라지면서 결국 하나가 된 세계사회가 올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서도 회의하게 만든다.

코로나 위기는 인간이 자연세계에 대해 아직도 많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인간이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어떤 결손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평화는 이성의 최고 작품이다라는 칸트의 도덕적 요청도 기실 그렇지 못한 인간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긴급히 보도하는 새벽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 역사와 지리적 조건, 그리고 복잡한 민족문제 때문이라도 우크라이나가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의 길을 왜 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핀란드가 1948년부터 걸었던 길이다. 이것이 물론 소련(러시아)에 대해 예속적이라는, 일종의 부정적 의미도 내포하지만 현실주의적인 대안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084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와 직접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가능성을 열어 준 후, 특히 20192월 헌법 개정을 통해 나토와 유럽연합(EU) 가입을 목표로 삼은 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경고는 줄곧 있었다.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진 이래 나토 가맹국의 숫자가 16개국에서 30개국으로 늘어난 상황이어서 러시아가 안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국제정치 틀 바꿀 시대의 전환점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자유민주주의 완전 승리의 기점이라고 해석했던 때로부터 불과 30여년 만에 지구촌은 이제 전망하기 어려운 새로운 냉전의 블랙홀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번 전쟁이 과연 얼마 동안 지속될 것인지, 친러시아 정권이 우크라이나에 들어설지, 우크라이나의 중립을 보장하는 평화조약의 체결은 가능할지, 바르샤바조약 가맹국이었으나 지금은 나토 가맹국인 폴란드와 발틱 3국을 비롯한 다른 동유럽 국가까지 이번 사태가 번질 것인지, 정말 핵전쟁으로까지 갈 것인지, 어느 것도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측은 즉각 경제 제재를 중심으로 한 강력 대응으로 러시아를 응징하겠다고 나섰다. 그렇다면 푸틴은 이를 계산에 넣지 않고 우크라이나 침공을 결심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동기는 무엇인가.

 

사라진 소비에트 제국에 대한 짙은 향수와 더불어 현실감의 결손이 그로 하여금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했다거나, 소련의 해체로 독립한 조지아(옛 그루지야) 공화국에서 일어난 200311장미혁명20142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오렌지 혁명이 몰고 온 민주화가 그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강박감이 함께 작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 푸틴의 정신세계를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조명하는 연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사상가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반 일린(1893~1934), 레프 그미료프(1912~1995), 알렉산드르 두긴(1962~) 등이다.

 

이들이 표명하는 사상의 공통적 핵심은 러시아는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과 이의 부르주아가 걷는 쇠락과 타락의 길 대신에 광활한 대지의 기를 받은 건강한 러시아 영혼을 의미한다. 일린은 이를 정신적인 충격’, 그미료프는 내적인 에너지’(파쇼나로스트)라고 표현했다.

 

이런 정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의 하나로 나는 다재다능했던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보로딘(1833~1887)의 교향시곡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를 떠올린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러시아 제국에 병합시켰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즉위 25주년을 맞아 작곡,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광활한 초원에서 러시아 병사와 카라반을 이끄는 동방의 현자(賢者)의 만남을 그렸다.

이런 문화주의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두긴은 지정학적 의미에서 새로운 유라시아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EU에 대응해서 러시아,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20151월 공식적으로 출범시킨 유라시아 경제연합’(EAEU)은 이런 새로운 유라시아주의의 표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치 엘리트는 물론 많은 러시아인은 1990년대 소련 해체 이후 걷잡을 수 없는 국내 정치의 혼란, 이와 함께 온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 추락을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러시아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느끼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은 강력한 국가뿐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흔치 않은 기회

동서 냉전의 종결과 더불어 러시아에도 새로운 출발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많은 러시아인은 서방 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승리를 자축하면서 미국의 주도하에 나토의 동방 확장에나 열심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20144월 푸틴이 크림반도를 전광석화처럼 합병하자 그들은 전폭적으로 이를 지지했다.

 

그사이에 미국을 정점으로 한 헤게모니 체제는 금융위기를 맞았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거듭된 패착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중국이 등장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미국은 중국과 경쟁,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대만문제로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물론 대만과 우크라이나를 단순하게 등치시켜 볼 수는 없지만, 중국은 이번 사태를 하나의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는 게 분명하다.

 

1996년 중국과 러시아가 주축이 된 상하이협력기구가 발족한 이래 두 나라 사이에 경제는 물론 군사 부문에서도 협력이 꾸준히 확대되었다. 지금 러시아에 중국만큼 강력한 지원 세력은 없다. 중국은 미국과 유럽의 관계를 저울질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자국의 지원 정도와 속도를 조절할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든 러시아에 대한 서방 측 경제 제재의 최대 수혜자는 중국이 될 것이다.

 

미국은 이번 사태로 조성된 유럽 내의 반()푸틴 정서를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고 있다. 교전국에는 무기를 공급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금기를 깬 데 이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러시아 주요 금융기관을 퇴출하는 데 독일이 동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유럽의 안보 분위기가 급하게 변하고 있다. 독일 총리 숄츠는 시대의 전환점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는 우크라이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냉전기의 최초의 열전이었고 여전히 평화의 길이 먼 한반도이기에 새로운 냉전의 최초의 열전이라고 평가되고 있는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계속 맹위를 떨치는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오랜 싸움에 모두 지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우크라이나 사태가 예고하는 국제정치적 틀의 변화를 한반도도 피해 갈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냉전의 시발점에서 치르는 이번 대선의 무게는 그래서 절대 가볍지 않다. 비록 역대급 비호감대선이라는 자조적인 평까지 나돌고 있지만,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경향 : 2022.03.02.

 

노동이 실종된 대선, 노동자는 국민 아닌가

20대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러 언론 매체에서 쏟아내고 있는 관심 키워드를 검색해 보니 공정성·일자리·국가운영능력·정치이념(가치관민생해결·인성 등이 나왔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언론이 하나같이 어려움에 놓인 자영업자·소상공인 지원에 대한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그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관심 있는 언론 기사를 찾아볼 수가 없다.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말이라도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노동이 사라진 대선을 치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국민일보가 전국 성인 남녀 1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1·2위가 일자리 창출부동산 문제 해결로 나타났다. 일자리·부동산·빈부격차 완화 등 경제 관련 문제를 차기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라고 꼽은 응답자 모두를 합하면 무려 67.4%. 그렇다면 일자리는 노동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다. 이처럼 역대 대선에서 노동문제가 이슈화되지 않는 대선이 또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부정적 여론 때문에 득표에 별 도움이 되질 않아서라는 표현이 솔직할 듯싶다.

 

대선 캠프에 있는 지인들에게 살짝 이유를 여쭤 봤다.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정작 노동계 당사자들이 분열돼 있어 한목소리를 못 내고 있고 자꾸만 노사문제로만 접근하고 있다. 그렇기에 일반 국민 여론은 식상하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일자리도 분명 노동문제다. 오죽하면 보수를 지향하는 윤석열 후보는 자신의 노동부문 공약집 제목에 노동개혁이라고 적었을까. 이 말에는 많은 함축적인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양극화(빈부격차)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는 임금노동자부터 프리랜서와 자영업자까지 2760만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의 빈부격차를 일컫는다. 재벌들의 곳간에 쌓여 있는 사내유보금과 연말이면 직원들에게 수천만원의 성과급을 푸는 대기업 돈은 하청업체들의 깎인 납품단가와 그 밑에서 일하는 수백만명 비정규직의 노동 대가라는 사실들을 알기나 할까?

 

지난 1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잠깐 언론들이 노동문제를 언급한 후 대선 정국에 노동문제는 사회적 화두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20대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들의 공약집 중 노동부문 공약을 분석해 봤다. 이재명(10개 영역 29개 세부과제), 윤석열(4개 영역 11개 세부과제), 안철수(8개 영역 17개 세부과제), 심상정(6개 영역 22개 세부과제)가 있었다.

 

이재명 후보는 노동공약 슬로건은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외치고 있다. 윤석열 후보는 노동개혁”, 안철수 후보는 강성 귀족노조 혁파하는 강력한 노동개혁 추진”, 심상정 후보는 모든 일하는 시민에게 노동권을 노동 분야 슬로건으로 외치고 있다.

 

20대 대선에서 가장 언론에 화두가 된 노동이슈는 윤석열 후보의 120시간발언 정도가 고작이었다. 각 후보들의 노동공약들을 잘 살펴보면 주목받을 공약들도 많다. 가령 이재명 후보는 특수고용직·프리랜서·플랫폼노동 등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과 노동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안전보건청 신설, 윤석열 후보의 근로시간 등 노사자율 결정 확대와 임금체계 유연화를 외치고 있다. 두 후보는 공공기관의 노동이사제도입에 찬성하고 있다. 안철수 후보의 근로시간 계좌제또한 앞으로 변화되는 노동시장에 신선한 노동공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심상정 후보의 주 4일제 도입 공약도 한층 진보된 공약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4차 산업의 대전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장밋빛 청사진과 달리 해외 석학들은 이구동성으로 자동화에 따른 노동의 종말우려하고 있다. 청년 유권자를 의식해 청년 지원 공약이 매일매일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왜 이 땅 청년들이 중소기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공무원·대기업만 고집하며 수년간 실업자로 지내고 있는지 근본적인 고민을 안 하고 있는 듯해 씁쓸하다. ·중소기업 격차 해소와 지금의 노동시장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환경을 만들어 놓지 않고 청년들에게 아무리 많은 공약을 쏟아낸들 쇠귀에 경 읽기식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 각 대선 후보들의 공약이 당 홈페이지에 올라 있다. 노동자인 유권자 모두 바쁘겠지만 꼼꼼히 비교해서 읽어 보고 현명한 투표를 해야 할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박종국 전 경기도노동권익센터장 매일노동뉴스 2022.03.02

 

 

이번 대선은 망했다, 결선투표제라도 도입하자

처음엔 가짜 뉴스인 줄 알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조원진 우리공화당 후보에게 국민통합정부 참여와 정책연대를 제안했다고 했을 때다. 민주당과 우리공화당의 아득한 거리, 믿기지 않았다. 정치연합과 연립정부가 보편화된 유럽 국가에서도 극단 세력과의 연대는 금칙이다. ‘심상정’(정의당)에서 조원진’(태극기부대)까지 아우르는 통합·연대라면 정치사를 새로 써야 할 사건이다. 가치와 이념, 정체성은 몰각되고 날것의 승리지상주의만 활개 치는 선거판이다. ‘닥치고 정권교체못지않게 묻지마 반윤연대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야권발로 맹목적 단일화 게임이 막판 대선판을 덮쳤다. 충격적인 스캔들과 언행이 터져도 요지부동이던 박빙의 구도가 단일화 이슈에 출렁이고 있다. 가뜩이나 정책과 비전 경쟁은 뒷전으로 밀리고, 공약 검증은 턱없이 부실한 상황이다. 단일화 논란이 불거지면서 남은 기회마저 빼앗겼다. 오늘 저녁 마지막 TV토론도 단일화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이다. 대통령 선거에만 3번이나 출마하는 안철수20대 대선에서 키맨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정체성도, 정책 공유도 없이 오직 선거 승리를 위해 안 후보 끌어들이기(사퇴 vs 완주)에 목매는 상황이다. 민주당이 선거를 목전에 두고 안철수의 꿈”(이재명)인 정치교체를 내건 것도 실은 단일화 게임의 대응 측면이 크다.

 

이대로 4자 구도로 선거가 치러지더라도 제3후보 공간은 형편없이 쪼그라들 것이다. 안 후보의 득표율은 2017년 대선(21.41%)과는 비할 바 없을 터이다. 심상정 후보도 마찬가지다. 양대 정당 후보가 비호감이면 제3후보의 영역이 확대되어야 하는데 반대다. 3의 선택을 봉쇄하는 단순다수대표제 때문이다. 사생결단식 진영 대결 속에서 가혹한 양자택일만 놓여 있다. 중도층에게 차악론이 유일한 투표동기가 되는 것만큼 이번 대선의 최악 상황을 웅변하는 것도 없다. ‘누구 찍으면 누구 된다는 사표론에 포획되어 좋은 후보를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쁜 사람을 떨어뜨리기 위해투표장으로 향해야 한다. 참으로 우울한 대선이다.

오래된 미래인 결선투표제를 상상하자. 결선투표제가 도입되면 후보들은 단일화와 사표론 압박에 시달릴 필요 없이 정책과 비전을 내놓고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다. 소수 정당과 진보정당 후보의 경쟁 운동장도 확보된다. 유권자들은 사표론에서 벗어나 정책과 이념 선호에 따라 진실투표를 할 수 있게 된다. 밀실 흥정과 벼랑 끝 협상에 의존하는 단일화가 아니라, 결선투표 과정을 거치면서 투명하고 명분 있는 정치연합이 이뤄질 수 있게 된다. 결선투표제는 이렇게 다당제를 가져오면서 정당 간의 연합 가능성을 높인다’(듀베르제 법칙).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대통령 후보의 검증·평가·결정 과정이 너무 허술하다. 단일화나 네거티브 한 방에 휘청거리는 도박판같은 대선이 전개되고 있다. 결선투표제로 선거를 두 번 치르게 될 경우 리더십 검증과 평가의 부실을 막을 수 있을 터이다.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서 후보 TV토론은 치열한 정책 논전과 무한 검증의 장이다. 결선투표제는 과반을 확보한 당선자가 나오게 해 소수 대통령의 대표성과 정당성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결선투표제는 공론화 과정을 통한 논의와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도입할 수 있다. 개헌 같은 지난한 과제보다 훨씬 도입이 용이하고, 더 민주주의에 부합한다는 대의도 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95개국 중 89개 나라에서 결선투표제를 실시하고 있다. 양대 정당, 여야의 유불리도 딱히 갈리지 않는 사안이라 타협과 절충의 여지도 총선 선거제도보다 높다. 역대급 비호감, 혐오 대선을 치르면서 결선투표제의 필요성이 부각된 상황이 기회다. 민주당의 정치개혁안에도 결선투표제가 들어 있다. 약속대로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결선투표제 도입을 추진해 매번 반복되는 대선의 난장을 끝내기를 바란다.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비호감, 혐오 대선에서 교훈을 얻어 결선투표제 도입의 당위에 공감이 마련된다면 그나마 위안 삼을 만하다. 제도적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2027년 대선도 마찬가지 모양일 게 뻔하다. ‘차악론사표론의 찝찝함을 안고 유권자들은 다시 투표장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이번 대선 과정은 망했다. 5년 후 대선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라도,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 양권모 편집인 경향 : 2022.03.02

 

진보의 재탄생을 기다리며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화두는 진보세력의 공정성이었다. 이명박 정부에 광우병이, 박근혜 정부에 세월호가 있었다면 문재인 정부의 정권연장을 가로막는 것은 역시 내로남불이다. 실력으로 보나 콘텐츠로 보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도 이상하게도 어려운 선거를 하고 있는 이재명 후보가 이를 잘 알고 재차 삼차 사과를 하고 있는 이유이다.

 

보수를 단순화시켜보자면 역사 속에서 우연히 확보한 부를 지키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있는 정치세력이다. 진보는 그런 역사가 만들어낸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운동을 해온 집단이고 공정성은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런데 왜 진보진영에서 특혜 문제가 더 두드러져 보일까? 첫번째 이유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 및 법체제에서 많은 특혜가 법제화되어 있어 보수 쪽이 더 운동을 벌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불공정들도 많이 있다.

 

바로 진보진영은 투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투쟁에 대한 보상심리 내지는 동지들 사이의 연대감이 강하다. 물론 정치세력의 발전과 정치의 발전이 겹치는 면이 있다. 과거에 민주화세력의 발전은 곧 정치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더 이상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동조합을 위해서 싸웠던 사람들도 더 이상 진보를 대표하지 않는다.

 

개혁이 어느 집단의 성공으로 환원되는 시대는 지났다. 흑인대법관이 나오는 것이 개혁인 시대가 지났고 여성대통령이 나오는 것이 개혁인 시대도 지났음은 한국과 미국만 봐도 알 수 있다. 흑인이라는 집단의 성공도 여성이라는 집단의 성공도 그 자체로 개혁이 될 수 없듯이 민주세력의 성공도 그 자체가 개혁목표가 될 수 없다.

 

필자도 20대 때부터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자의 반 타의 반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진보에 그 집단이 잘되는 것은 개혁과 분리하기 어려워지는 면이 있다. 이에 비해 보수 쪽에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각자 잘되는 것이 각자의 지상과제이다. 서로 무언가 안 맞으면 언제라도 이합집산하고 싸울 수 있는 그룹이다. 이러다보니 더욱더 서로에게 엄정해지기도 한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한 것은 김대중이 아니라 김영삼이었다.

 

진보집단의 생존은 중요하다. 옛날의 민주세력은 기초적인 생존을 위해 단결해야 했다. 지금의 민주세력은 기초적인 생존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얻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단결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개인적인 결격사유들이 드러나도 깨끗이 자리를 고사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고 서로 간에 이를 감싸주려는 모습이 보인다. 투쟁을 했었다고 해서 반드시 장관을 해야 하나, 반드시 국회의원을 해야 하는가? 투쟁과 생존을 위한 상부상조와 권력과 지위를 위한 상부상조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집단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놓아줄 때가 되었다. 우리 모두가 사회의 한 사람이다. 지역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할 때다. 운동권이었다는 이유로 곧바로 전국과 역사를 가로지르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놓아줄 때가 되었다.

이제 진보정치는 적들이 권력을 잡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내용을 채워야 한다. 지금까지는 민주화가 그 내용이었지만 민주화는 이뤘고 이에 대한 논공행상도 충분히 이루어졌다. 앞으로 정권을 잡으려면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는 것 외의 새로운 주장들이 있어야 한다. 그중의 하나는 대기업 중심 경제구조의 개혁이고 또 하나는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대표되는 관용의 사회화이다.

 

하나를 더 들자면 공정성의 성숙을 말할 수 있겠다. 20년 전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비현실적인 규제들을 많이 접했다. 명분만으로 만들어진 규제와 문서화 요구들을 대부분 개선하려 하기보다는 편법으로 비켜가고 있었다. 그 후 법치주의는 강해졌고 그 규제들은 결국 실제로 집행되었다. 특히 디지털시대가 되면서 편법들의 기록이 쉽게 증거로 남았고 확대경을 어디에 들이대는가에 따라 편법들이 포착되고 처벌되었고 그 확대경을 쥔 검찰은 막강해졌다. 앞으로도 힘들어 보인다. 주변에서 정당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원칙과 가치보다는 자신이 믿는 집단의 득세에 모든 것을 걸고 서로 감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결국 저 확대경을 치우지 못하고 확대경 아래서 불타버릴까 걱정된다. 지역사회 리더가 전국적인 초역사적인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사회의 일원으로서 진보정치인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오픈넷 이사 경향 : 2022.02.28.

 

 

모든 표에는 생명이 있다

이번 대선이 신나지 않는다. 정권 사수 혹은 교체가 간절한 분들도 많지만, 나와 비슷한 심정인 사람들도 흔히 본다.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투표를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면서도 이번만은 투표하기가 싫단다. 비호감 후보들을 두고 차악을 뽑아야 하는 강요된 투표가 민주주의인지 의문까지 제기한다. 단지 인물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복지 발전의 계기를 기대했던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복지공약에서도 실망이 크다.

 

2012년 대선에서는 신이 났다. 당시 무상급식 논란으로 타오른 복지 논쟁은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과 반값등록금(31)을 엮어서 보편복지 담론을 만들었고 박근혜 후보조차 아버지의 꿈이었다며 복지국가를 내걸었다. 시민들은 서구 나라 이야기로만 여겼던 복지국가를 한국에서도 그려볼 수 있었다.

 

2017년 대선은 과거와 다른 대한민국을 꿈꾸게 하였다. 문재인 후보는 나라를 나라답게만들자며 투표로 촛불혁명을 완성해달라고 요청했다. 거리의 승리를 경험한 시민들은 대한민국이 건국할 때 이루지 못했던 기득권 적폐를 청산하는 감격으로 투표장에 나갔다. 모처럼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사실 1년 전만 해도 이번 대선에서 또 하나의 도약을 생각했다. 코로나19를 맞아 한국 사회의 불평등이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복지정책 경쟁이 뜨거우리라고 예상했다. 전 국민 고용보험, 실시간 소득 파악 등 혁신 의제가 등장했고 이재명 후보는 기본소득을 주창하며 소득보장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그러나 정작 대선장이 열리자 선두를 다투는 두 후보 사이 논쟁을 찾아볼 수 없다. 기본소득은 공약 여부가 애매하다가 공약집에 임기말 연 100만원으로 담겼으나 이마저도 이 후보는 지난주 유세에서 재정상의 부담이 있어 조금 미뤄 하겠다로 후퇴하였다. 윤석열 후부는 경쟁 후보의 핵심 공약이 오락가락해도 대응하지 않는다. 자신에겐 소득불평등을 해소할 묵직한 공약이 아예 없으니 말이다.

 

연금개혁도 두 후보에겐 과제가 아닌 모양이다. 두 후보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연금개혁 내용을 차기 정부 연금개혁위원회 운영으로 미루었다. 사실 이러한 공약이 없더라도 국민연금법에 따라 5차 재정계산해인 내년에 정부는 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하고 보통 사회적 논의기구도 만들어진다. 구체적 연금개혁 방안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있으나마나한 문구로 때운 것이다.

 

부동산 공약은 참담하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눈앞이 깜깜한 사람은 국민 절반의 세입자들이다. 당장 올해 7월 계약갱신권이 종료되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도 두 후보는 부동산 자산가격이 올라간 집소유자의 세금 부담을 걱정한다. “여러분, 집값이 갑자기 올라서 세금이 확 오르니 화나죠. 저도 화나더라”(이재명), “집값 올라간다고 부자가 된 것인가세금으로 다 뺏기지 않나”(윤석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억강부약을 강조하던 이 후보는 민주당이 부동산 감세 법안을 추진할 때 침묵하고, 윤 후보는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취득세를 모두 깎아주는 종합감세안을 내걸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건강보험에선 병원비를 해결하는 보장성 종합 목표는 사라지고 탈모 등 개별 질환이 전면에 등장해 동네 선거라는 비판이 나온다. 조세 분야에선 이 후보는 공공연히 별도의 증세 계획은 없다고 말하고 윤 후보는 주식양도소득세를 폐지하겠다는 공약까지 내놓았다. 선거 때마다 공약집 마지막에 실리는 공약가계부(전체 소요재정과 재원방안)도 이번에 두 후보 공약집에선 볼 수 없다. 유권자 국민을 이리 가볍게 대할 수 있다니!

 

지난 10년 복지정책이 대선 의제 경쟁을 통해 복지국가체제에 부합하도록 정비되어야 할 시점에 의외의 장벽을 만난 셈이다. 누가 당선되든 지금의 공약에서는 불평등에 저항하는 아래로부터 목소리와 갈등이 클 듯하다. 세입자들은 집값 하락과 주거안정을 외칠 것이고,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실질적 소득보장 요구도 높을 것이다. 장수시대에 병원비와 노후생활을 걱정하는 한숨도 깊어지고, 청년들은 지속 가능한 연금을 촉구할 것이다. 증세 없이 계속 국채에 의존하는 나라살림은 소모적 논란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대선 투표의 시야가 39일에 멈출 이유는 없다. 당선되지 않을 후보에게 던지는 표라도 그 후보가 담대한 의제와 절박한 민심을 담고 있다면 차기 정부에서 다른 목소리를 낼 씨앗이고 거름이다. 사표는 없다. 강요된 투표가 답답하고 속상한가. 내 몫을 위해 투표장에 가자. 모든 표에는 생명이 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경향 : 2022.03.03.

 

누구에게 내 한 표를 던질 것인가

사상 최악의 대선이라고들 한다.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최악이라 예단하는지 모르겠다. 내겐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가 당선될 때가 최악이었다. 굳이 최악을 논하자면 아마 그렇게 몰고 가는 언론들의 수준이 그럴 것이다. 설사 최악이라 한들 5년마다 한번씩 대통령을 바꿔서 새로운 대통령에게 자신의 미래를 위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숙명일진대, 그 중요성까지 최악일 수는 없다. 이 선거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지금처럼 주로 후보들의 인성이나 자격을 둘러싼 온갖 마타도어와 가십만이 난무하는 저열한 수준으로 간다면 오히려 그것이 바로 이 대선을 최악이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본말 전도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대통령으로 누가 당선되든, 그리고 그의 인물 됨됨이와 능력이 어떻든 그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투표일이 임박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선거 이후 최소 5년간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일일 것이다.

 

나는 이번 대선이 다음과 같은 우리 시대의 절박한 과제들을 해결해나가기 위해 내딛는 첫 발자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통치 25년이 낳은 양극화와 불평등의 해소, 둘째, 기후위기에 대한 비상한 대처, 셋째, 한계에 이른 성장주도 경제 프레임의 변환,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구축 등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인권 증진 및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의 확충, 세대 및 젠더 갈등 같은 과제는 첫째 과제와 연결되며, 4차 산업혁명 대응, 그린성장 같은 과제는 둘째와 셋째 과제에 두루 걸쳐 있고, 자주국방이나 외교 문제는 네번째 과제의 하위 과제들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런 과제 인식 아래서 이번 대선 주요 후보들의 대표 어젠다를 검토해보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대표 어젠다는 대전환공정성장이다. ‘대전환이라는 어젠다에는 추상적이나마 양극화와 기후위기 극복이라는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고, ‘공정성장은 나름 그 방법론일 것이다. ‘공정은 양극화 해소 과제와 연결될 것이고, ‘성장은 디지털, 그린산업 등을 통한 성장률 제고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공정성장어젠다가 토지보유세 징수를 통한 기본소득제를 야심차게 내걸고 출발한 그의 비전과 잘 어울리는 어젠다일까. 특히 재임 중 상당한 고성장을 약속하고 있는데 전세계적인 저성장 기조에서 그 가능성이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무리한 고성장론은 결국 기업우선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성장과 분배의 두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이러한 전략은 실제로는 이미 낡아빠진 낙수효과론의 재판일 뿐 결코 신자유주의체제의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는 우리 사회 구성원 90%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정의로운 처방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대선국면용이라 할지라도 그로부터 진정한 대전환의 모멘텀을 얼마간이나마 기대했던 나로서는 적이 실망스럽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대표 어젠다는 정권교체. 그저 권력을 뺏어오고 싶다는 유아적인 권력욕의 표현만이 아니라면 여기엔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 우선 현 정권의 지난 5년 동안의 통치가 확실하게 실패했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들이 제시되어야 하며 또 자신들이 이 실패를 확실하게 뒤집어 위에서 제시한 우리 시대의 주요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비전과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현 정권은 성공하지 못한 정권이다. 그것은 촛불정권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요구한 것은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아온 구 기득권 세력의 확실한 청산과, 지난 신자유주의체제 20여년의 사회경제적 파탄의 청산이라는, 거의 혁명에 가까운 이중의 청산이었다. 하지만 현 정권은 집요한 저항에 밀려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지도 못했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담대한 기획을 실천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현 정권의 의지와 역량의 부족이기도 했지만 조국 사태가 말해주듯 이미 그들 자체가 신자유주의체제 아래서 기득권층으로 편입했다는 뼈아픈 한계로부터 온 것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 기득권의 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재벌체제와의 여전한 밀월 관계, 기득권층과 서민층의 요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부동산 정책 등은 그러한 실패의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는 구호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고, 남은 것은 기후위기에 대한 미온적 대처와 야심적으로 착수했으나 비운으로 끝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프로젝트 추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성공적인 대처와 그에 바탕을 둔 성장률의 안정적 지속, 그리고 선진국 그룹 편입과 한류의 주목할 만한 성취로 인한 국가신인도의 상승 등을 생각하면 매우 보수적 관점이기는 하나 과연 현 정권이 특히 이전 이명박, 박근혜 정권과 비교할 때 그토록 저주를 받아 마땅할 정도의 부실정권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게다가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은 그 정체성 자체가 문제적이다. 이 정당은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한국 정치의 현장에서 애초에 사라졌어야 할 수구세력과 그나마 합리적 보수를 추구하던 세력이 동거한 채로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에 기생하여 반사적으로 존립 중인 정당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설사 운 좋게 집권하더라도 현 정권이 좌초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기는커녕 과거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훨씬 크다. 게다가 그들은 나름 경력과 소신을 지닌 자당 내부의 후보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현 정권에 대한 배신 행위로 인해 얻은 명성을 이유로 아직 정치적 능력도 정체성도 제대로 검증받은 적이 없는 일개 검찰공무원 퇴직자를 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이처럼 오로지 정권탈취 욕구 외엔 어떤 정치윤리도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는 정당이 수권정당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후보는 안 된다는 시중의 담론에 정서적으로는 동조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리 동의하지는 않는다. 후보의 자질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이 그 후보를 내세운 정당이나 세력의 성격이나 역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번 대선이 보수 양당 지배체제를 쌍끌이하고 있는, 무능한 거대 여당과 파산유예 중인 제1야당 간의 이전투구 이상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이 위중한 당면 과제들을 과감히 추진해나갈 대안적 정치 주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헌법상의 권리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비록 다시 헛된 희망고문이 될지라도, 1퍼센트라도 이 암담한 현실과 맞설 의지가 보이는 쪽에 표를 던지는 시시포스의 노고를 기꺼이 감내하고자 한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한겨레 :2022-03-03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지배구조

성장이라는 개념은 투자자들을 매혹시킨다. 미국 나스닥의 기술주에 열광하는 서학개미들과 몇 해 전에 나타났던 중국과 베트남 투자 붐은 이 땅에서 충족되지 않는 성장에 대한 욕구를 해외투자를 통해 발현했던 사례들이다.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와 산업에 내 돈을 투자해 증식을 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성장과 투자의 성과가 늘 비례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 경제가 요즘보다 훨씬 활력 넘쳤던 시기는 1980~1990년대다. GDP 성장률은 쉽게 10%를 웃돌았고, 생활인으로서의 체감경기도 훨씬 좋았던 때다. 그렇지만 당시 한국 증시의 성과는 부진했다. 1986~1988년의 3저 호황 국면에서만 반짝 강세장을 경험했을 뿐 이를 제외한 시기에는 코스피가 500~1000포인트의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성장이 둔화되면서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졌던 2000년대 들어 코스피는 2000포인트를 넘어 3000포인트대로 도약했다.

 

3저 호황 이후 1989~2002년 한국의 명목 GDP성장률은 연평균 12.6%였지만, 코스피의 연평균 수익률은 -2.6%였다. 반면 2003~2021년에는 연평균 명목 GDP성장률은 5.3%에 그쳤지만, 코스피는 연평균 8.5% 상승했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관찰된다. 최근 10여년간 중국의 명목 GDP성장률은 연평균 8%대로 글로벌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지만, 상하이종합지수는 2007년에 기록했던 사상 최고치 6100포인트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3000포인트대에 머물러 있다.

 

주식투자엔 지배구조가 매우 중요

성장이 주가와 관련 없다는 결론은 현상에 대한 오독이고, 성장이 주가 상승을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주가는 기업이 벌어들이는 이익에 수렴하는데, 고성장을 하는 국가에 속한 기업은 이익을 늘릴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투자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이 주주들과 잘 공유될 수 있을지 여부이다. 기업의 부와 주주들의 부를 연결하는 일련의 과정이 거버넌스(지배구조)이다.

주식투자에는 지배구조가 매우 중요하다. 주식은 출발점부터 지배구조와 관련된 이슈가 내재돼 있었다. 주식과 채권은 일종의 권리 또는 소유권에 대한 증서임과 동시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자산들이다. 주식과 채권을 제외한 다른 자산들에 대한 투자를 모두 대체투자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식과 채권은 대표적인 금융자산으로 기능해왔다.

 

주식과 채권 중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자산은 채권이다. BC 3000년 바빌로니아 때부터 채권의 맹아적 형태가 기록돼 있으니, 채권의 역사는 5000년에 달한다. 반면 주식회사의 기원은 160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이니, 주식은 400년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채권이 주식보다 역사가 긴 것은 구조가 훨씬 단순하기 때문이다. 자금 대여자와 차입자, 만기와 이자율 정도가 채권 투자에 필요한 모든 것이다.

 

주식이 채권보다 복잡한 것은 지배구조 때문이다. 동인도회사의 예를 들어보겠다. 동인도회사의 소유권은 회사에 출자한 주주들에게 있지만, 주주들이 동인도회사의 구체적인 영업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지로 항해해 향신료 등을 싣고 오는 것은 주주들이 아니라 회사에 고용된 선장과 선원들이다. 이들이 아시아에서 싣고 오는 각종 물품을 빼돌리거나 감추는 것은 주주들의 부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주식 투자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기업을 실제로 운영하는 임직원들이 기업의 소유주인 주주들의 부를 잘 지켜줘야 한다. 상장된 회사들은 주요 경영사항을 외부에 알려야 할 공시 의무가 있는데, 공시는 경영진에 대한 주주들의 감시에 다름 아니다. 회사의 중요한 일을 감추지 말고, 기업의 주인인 주주나 투자를 고려하고 있는 예비 주주들에게 투명하게 알리라는 게 공시제도의 목적인 것이다

 

1980~1990년대 고성장 국면에서 한국 주식시장의 성과가 부진했던 이유도 지배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주식이라는 무형의 재산권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경제적 신뢰 인프라가 취약했다. 무엇보다도 정치권력이 시장을 지배했다. 198510대 재벌이었던 국제그룹이 권력자의 눈 밖에 나자 곧바로 무너졌다. 또한 만연했던 분식 회계와 정보 비대칭성에 기댄 소위 작전은 주주들의 부를 파괴했고, 감시받지 않는 소수 지배주주들의 전횡도 주주가치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관투자가 주주행동주의에 주목

중국 증시의 장기 성과가 부진한 이유도 지배구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진핑 정부가 말하고 있는 공동부유는 사회주의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그들 나름의 결정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정책 기조가 주주친화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빅테크에서 차량공유업체까지 중국의 정책 리스크는 광범위하게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 증시의 경우 분식회계나 내부자가 개입된 불공정 매매 행위 등은 많이 근절됐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치권력으로부터 기업과 시장이 가지는 자율성도 크게 높아졌다고 본다. 남아있는 과제는 적은 지분으로 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소수 지배주주와 압도적 지분이지만 분산돼 있는 다수 소액주주의 이해관계 불일치이다. 배당과 기업분할 등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언제든지 주식을 팔고 나갈 수 있는 소액주주들의 이해관계가 기업의 장기 가치 제고의 방향과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주주들의 단기성과 지향이 장기적인 기업가치 제고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주주 이외 다른 이해 당사자들의 이익도 고려하는 ESG 경영이 화두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주주자본주의 과잉을 걱정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주식투자인구는 1000만명을 넘어섰다. 주주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주주자본주의 결핍으로부터 발생하는 코스트가 더 큰 것 아닌가 싶다. 소액주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기관투자가의 적절한 주주행동주의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완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경향 : 2022.03.04

 

 

묻지 마 정권교체는 곤란하다

오늘부터 사전투표가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국민이 선택할 시간이다. 그동안 대선 후보들은 저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당선 가능성이 큰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는 각각 유능한 일꾼론과 정권교체론으로 맞서고 있다.

 

집권세력이 제대로 못했다면 바꾸는 게 맞다. 어떤 정부도 예외일 수 없다. 정권교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세력에 책임을 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묻지 마 정권교체는 곤란하다. 집권세력이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꼼꼼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정권을 바꿀 까닭을 분명하게 확인했다면, 그다음엔 좋은 정권교체인지 물어야 한다. 정권을 바꾼 결과가 더 나쁘다면 선거는 그저 단순한 분풀이에 불과하게 될 거다. 5년 만의 대선을 그렇게 허비할 수 없다. 선거 결과에 따라 국민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권교체가 의미가 있으려면, 이전 정권보다 더 잘할 거란 확신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안철수식 묻지 마 정권교체가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 거다. 얼마 전 유세에서 윤석열이 되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겠는가. (윤석열을 찍은) 내 손가락 자르고 싶어질 것이라고 비난했던 사람이 갑자기 윤석열 후보를 지지해달라며 사퇴한 것도 정권교체를 위한 것이란다. 다당제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사람이 결국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윽박지르는 형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권교체의 유력한 대안으로 윤석열 후보가 꼽히지만, 더 좋은 정권교체를 실현할 사람인지 의문이다. 다들 알고 있듯 윤석열 후보가 이재명 후보나 문재인 대통령보다 무엇이든 더 잘할 가능성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윤 후보는 무엇보다 대통령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시민으로서의 기본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부족해 보인다. 사람들은 열차 좌석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사진을 보고 경악했다지만, 그건 몰상식하고 매너 없는 사람이라 여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국정운영은 전혀 다르다.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에 따라, 그 지도자의 역할에 따라 국민은 생사 갈림길에 서기도 하고 나라의 운명이 뒤바뀌기도 한다.

 

국민 앞에서 진행한 텔레비전 토론에서 보여준 윤석열 후보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윤석열 후보는 국정 운영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했다. 기본적인 용어도 모르고 정책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모르고 있었다. 상대가 질문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하는데 아예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때론 두루뭉술하게 말하거나 동문서답을 했다. 토론의 규칙도 자주 무시했다. 검사 시절 피의자를 두고 호통치던 모습이 저렇겠구나 싶었다. 토론 내내 이재명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에만 집중했다. 기회만 있으면 대장동에 대해 공격했지만, 막상 이재명 후보가 선거 이후라도 대장동 특검을 도입해서 끝까지 책임을 묻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이것 보세요만 반복했다. 다섯 번을 물어도 끝내 답하지 않았다.

 

토론에 임하는 윤석열 후보는 상대 후보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었다. 토론을 엉망으로 만들어 미래의 정책과제를 챙겨야 할 귀한 시간을 날려버리고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이는 상대 후보만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는 국민마저 우습게 여기는 태도다. 후보 시절에도 저렇게 행동하는데,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할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텔레비전 토론을 처음 시작한 1997년 대통령 선거부터 지금까지 어떤 선거에서도 이런 적은 없었다.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렇게까지 무례한 후보는 일찍이 없었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벼락공부로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후보로 나섰으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자기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아무 말이나 하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의도가 잘못 전달되었다며 주워 담는 건 너무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검사 시절의 일탈, 명백한 범죄를 짐짓 모른 척 봐주거나 거꾸로 결론을 정해놓고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혔다는 의혹도 많다. 대장동과 부산저축은행, 삼부토건, 고발사주, 판사사찰 등의 의혹도 끊이지 않는다. 부인과 장모의 주가 조작 의혹 등 여러 범죄혐의도 만만치 않다. 일부러 병역을 피했다는 의혹도 해소되지 않았다. 남들이 써준 것을 읽기만 할 정도로 실력도 형편없다. 국정 과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한 사람이, 무엇보다 기본적인 태도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이 정권교체론에 기대서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그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경향 : 2022.03.04

 

 

승자독식 대통령제의 늪, 단일화

정치담론 실종된 20대 대선

대선에서 단일화는 예외 없이 선거의 최대 이슈였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처음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은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당선을 결과했고 유사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지연시켰다. 199715대 대선에서 이인제의 한나라당 탈당은 보수의 분열을 가져왔고 DJP 연대를 성사시킨 김대중이 승리했다. 200216대 대선에서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 역시 지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대선의 최대 이슈였다.

 

200717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이 당시 여당이었던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을 압도하면서 단일화 이슈는 승패의 관건이 아니었다. 201218대에서는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가 최대 이슈로 떠올랐지만 안철수는 대선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출국했다. 사실상 단일화는 실패했고 박근혜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박근혜 탄핵으로 치러진 지난 19대 대선에서는 문재인의 승리는 정해진 것이었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오세훈·안철수의 단일화는 위력을 발휘했다.

 

현대정치에서 가치와 지향,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세력의 통합과 분화는 그 자체로 정치의 동력이다. 권력의 쟁취를 목표로 하는 권력정치에서 연합정치의 긍정적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다당제를 통한 시민사회의 균열을 반영한다는 것은 기득권 정치를 깨고 과다대표 되는 계층과 과소대표 되는 시민의 이해를 조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당위적으로 옳다.

 

그러나 연합정치라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정치공간에서의 단일화와 연정 등의 정치과정이 권력구조와의 연관성에 대한 고려 없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적실성의 문제를 살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27일 휴일에 의원총회를 열어 국무총리 국회 추천, ··정 정책협의체 구성, 연동형 및 권역별 비례대표제, 지방선거에서의 3인 이상 중대선거구제 도입과 개헌 사항으로 4년 임기의 대통령 중임제, 결선투표제 등 추진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이번 대선에서 정치개혁 관련 제도개선과 거대담론이 실종되었다는 비판에 비추어볼 때 긍정적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불과 선거 열흘을 앞두고 쫓기듯 쏟아내는 정치담론의 진정성이 얼마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안철수 후보와의 연대를 모색하는 차원의 정치공학적 접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정치에서 거대정당에 의한 독점적 기득권 카르텔의 정치의 폐해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승자독식의 권력구조가 거대 양당제에 기인한다는 분석도 보편적 타당성을 얻고 있다. 다당제는 양당제의 대척에 있는 제도로서 이의 대안으로 거론됐고 이를 위해 선거제도의 개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권력분산의 차원에서 국회 추천 총리제는 '책임총리제'와 함께 단골메뉴로 떠올랐다. 통합정부나 공동정부의 설계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도적 디자인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대통령제에서 다당제를 통한 연정과 여··정 협의체 구성이 과연 제도적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현행 권력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대통령제의 얼개를 그대고 유지하는 대통령 중임제가 한국정치의 폐단으로 지적되고 있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혁파할 수 있는가의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내각제 구조가 아닌 권력구조에서 다당제가 연정의 일상화로 이어질 확률은 희박하다. 다당제 구조에서 선거 때 단일화 논의는 예외 없이 부상할 수밖에 없다. 내각제에서의 연정과 단일화 논의를 통한 공동정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재의 한국 정당체제는 다당제다. 물론 제도개혁의 차원에서의 다당제로의 개혁은 지금보다 강화된 다당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이완된 양당제와 왜곡된 다당제의 정당구도를 타파하고 내각제하에서의 대연정과 소연정 등이 가능한 구조로의 변화는 대통령제 하에서는 매우 제한적이다.

 

더구나 선거제 개혁은 국회에서 일반 의결 정족수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될 수 없다. 반드시 여야 합의로 통과되어야 한다. 지난 국회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패스트 트랙으로 강행 처리된 이후 형해화된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한국 대선에서 단일화가 많은 문제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한다면 여전히 단일화의 늪을 상정할 수 있는 대통령제에서의 다당제가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전투표가 오늘 내일 양일에 걸쳐 치러진다. 대선의 승자가 누가 되도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여야 관계가 순항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이러한 극단의 대결 구도의 제거는 현행의 권력구조를 존속시킨 채 다당제와 중대선거구로의 변화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정치개혁 의제는 선거기간 동안 충분히 쟁점화되고 공약으로 제시되어야 했던 사안들이다. 20대 대선은 정치교체를 위한 거대담론이 실종된 선거로 기록될 것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 프레시안 2022.03.04.

 

 

지방 쇠퇴를 맞이하는 자세

[경제지리학자들의 시선] 지방 소멸은 위기인가?

좁은 국토에서의 지역 불균등 발전

 

운전하거나 기차를 탈 때 주변 경관을 살피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러한 취향을 가지지는 않는다. 특히 차양을 걷고 창문 밖을 바라볼 때 기차를 탄 주변 사람들은 햇빛에의 노출과 단잠의 방해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들에게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은 의미 없는 시각적 공해일 뿐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아주 약간의 공간만 열어놓은 채 차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은 공간에 대한 끈질긴 애정과 관심을 반영한다.

 

경관을 살피는 행위는 곧 살기 좋은 국토 공간에 대한 소망과 연결된다. 좋은 국토란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필요를 적시에 충족시키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전국에 걸쳐 건설된 고속도로, 철도, 그밖에 정보통신 인프라는 각종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시킨다는 점에서 좋은 국토를 위한 실천 사항이 된다. 문화적·경제적 서비스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교통·통신 인프라의 확충은 어찌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맞다.

 

하지만 효율적이고 살기 좋은 국토를 위해 이제는 교통망 확충을 넘어 지역 도시의 질적 성장을 고려할 시기이다. 도시의 질적 성장은 고밀도화된 공간으로부터 비롯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공간의 집약과 응집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부족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차근차근 살펴보면 공간 낭비의 습관이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곳곳에 파헤쳐지고 있는 국토를 보면 이러한 아쉬움은 더 커져만 간다. 공간 집약의 실행 없이 이어지는 교통 인프라 확충과 연결성 향상은 오히려 이러한 공간의 비효율을 심화시키고 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도시에 만연한 집약적 공간 이용의 부족을 다루고 효율적 공간 이용을 통한 지역 발전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고속도로와 KTX 노선과 같은 전국적인 교통망 확충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서울로의 집중과 지역 불균등 발전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역 불균형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 도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효율적이지 못한 공간 이용과 이로 인한 매력적인 '지역' 도시의 상실로부터 비롯한다.

 

집약적 공간 이용과 도시 성장

우리나라의 주택가를 거니노라면 효율적이지 못한 공간 이용이 눈에 띈다. 한국의 주택은 기본적으로 연이어 짓는 것보다는 독립된 건물 형태를 지향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필요하게 버려지는 자투리 공간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한국의 일반적인 골목길을 유심히 살펴보면 주택 사이의 벌어진 공간이 아무런 역할과 쓰임 없이 버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두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이 큰 의미를 가질 리는 없다. 이런 공간만 모아도 한국의 도시는 지금보다 훨씬 높은 인구 수용력을 가질 것이다. 주택 사이의 버려진 공간은 한국의 비효율적 공간 활용을 반영한다.

 

주택가에서 발견되는 우리나라 국토의 비효율적 공간 이용은 점점 모호해지는 도시와 촌락의 경계에서도 발견된다. 도시의 외연적 팽창 속에서 주거지역, 산업 시설의 외곽 이전은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흐름이 무질서하게 두드러진다. 도시의 외연적 팽창은 구도심과 신규 택지 사이의 공간적 괴리감과 응집력의 저하를 일으켰다.

 

지방 혁신도시의 건설과 공공기관의 이전은 이러한 도시의 외연적 분산을 가속화시킨다. 구도심 인근에 지어지는 혁신도시는 타지 인구의 신규 유입보다는 기존 주거지의 인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경우 기존 지역 도시와 혁신도시는 서로의 성장을 위한 시너지효과보다는 황량한 도시 분위기를 연출할 뿐이다.

 

지역 도시 특유의 을씨년스러움은 도시 발전에 있어 부정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경제지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공간의 황량함은 도시 내 가치 창출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한국 주택가의 비효율적인 거리 띄우기가 암시하듯이 집약적이지 못한 도시 공간 이용은 고정 시장 형성에 필요한 인구의 밀집과 응집력을 흩어놓는다.

 

한국의 도시는 인구 규모에 비해 시가지 영역이 집약적이지 않고 다소 넓으며 특히 중소도시의 경우 자가용이 없이는 이동 활동에 제약이 뒤따르는 현실에 처해있다. 시내버스는 기본적으로 20-30분 이상의 대기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대중교통 이용의 이러한 불편함은 지방 중소도시 시민들을 더욱 자가용에 의존하게 만든다. 지금과 같이 밀도가 약한 도시 공간 구조에서 대중교통의 안정적 고정 시장 형성은 요원하다.

 

약한 공간 밀도와 자가용 위주의 교통 조건은 도시 내 혈액 순환의 장애를 야기한다. 도시 내 바람직한 경제지리 조건은 소득, 나이, 지위 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필요한 공간에 자유롭게 접근하여 돈을 쓰는 것이다.

 

자가용 위주의 교통환경은 다양한 시민들의 이동권과 도시 경제 활성화를 제한한다. 도시 내 다양한 인구의 이동과 만남은 경제의 원활한 순환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도시를 인간의 몸에 비유했을 때 핏줄을 따라 적혈구만 돌아다니고 혈액 안에 포함된 영양소, 산소, 백혈구 등이 적시에 공급되지 못하는 경우 신체는 활력을 잃게 되는 것과 같다.

 

도시 내 필요한 서비스로의 접근을 위해 이동해야 하는 거리는 짧을수록 좋다. 인구 30-40만 규모의 중소도시는 지금의 시가지 면적을 더 집약시켜야 하며 그로 인한 높은 밀도와 대중교통·도보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이상적인 도시계획으로 판단된다.

 

높은 밀도는 경관적으로도 인간의 정서에 안정감을 주면서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의 장을 활성화시킨다. 우리가 유럽의 도시에서 느끼는 문화적 활력은 비단 유럽의 건물이 가지는 고풍스러움이 아니라 도시 내 건물과 밀도의 집약, 그리고 이동의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개발도상국 도시의 혼잡함과 선진국, 특히 미국 도시의 쾌적함을 비교하며 우리는 고밀도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밀도가 아니라 어떻게 관리하느냐이다. 높은 밀도의 효율적 관리는 홍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좁은 통로를 통해 대량의 인구를 효율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홍콩의 트램이나 도시철도는 결국 공간의 밀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방소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나라는 도덕적인 잣대에 민감한 편이다. 이는 지방소멸 문제에도 적용된다. 지방의 줄어드는 인구와 지자체의 소멸에 대한 우려도 어쩌면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방소멸이 어떤 문제를 유발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된 바는 없다. 대다수는 지방소멸 가속화의 원인으로 수도권 과밀화를 지적한다. 그러나 지방소멸의 문제를 수도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지역 도시에서 해결되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같다.

 

서울의 기능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것보다는 지방 도시를 살고 싶은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문제 해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도시 활력의 밀집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경제적·문화적 활력의 저하와 삶의 질 하락을 막지 못한다면 지방 도시로의 인구 유입은 요원하다.

 

따라서 이제는 지방소멸보다 지방 쇠퇴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다. 지방소멸은 한편으로 국토 공간 재편의 과제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지방소멸에 대한 우려보다는 이에 대해 발전적인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그동안 서울 집중과 지방 쇠퇴는 지역 도시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매력적인 지역 도시를 키우는 일은 도시 내 응집력 있는 발전 핵을 형성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는 인구와 도시시설의 공간적 집중으로부터 출발한다. 혁신도시와 같이 도시 내 밀도를 흩어놓는 실천은 지역 도시의 성장과 국토의 균형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집중시킬 지역 도시는 밀도를 강화하되 인구가 소멸하는 지역은 행정적인 정리를 과감히 시행하여 농업 분야의 규모화를 이뤄야 한다.

 

파편화된 농업 구조를 정리하고 대량의 작물 생산 기틀을 마련하는 것 역시 한국의 식량 주권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지방소멸을 억지로 저지하기보다는 이를 국토의 효율화를 위한 공간 재편의 기회로 삼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한다. 지방의 흩어진 인구를 지역 도시 중심으로 모으고 매력적인 중소도시를 키우는 작업은 서울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과정에도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지역 도시 공간의 고밀도와 대중 친화적 이동성을 고려한 중소도시로의 과감한 인프라 투자가 동반되어야 한다. '지방소멸 방지'에서 '지역 도시 성장'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한국의 경제지리 르네상스와 도시 중심의 지역 활성화를 유도하리라 전망한다.

윤지환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 프레시안 2022.03.04.

 

 

손가락 자르고 싶을 것이라던 안철수의 원칙 없는 단일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3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단일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3일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지지를 선언한 뒤 후보직을 사퇴했다. 지난달 27일 전남 여수 유세에서 이순신의 12를 언급하며 완주 의지를 밝힌 지 나흘 만이다. 투표일을 불과 엿새 앞두고 이뤄진 단일화로 ‘4자 대결로 진행돼온 선거 구도가 급변하게 됐다.

 

안철수 후보는 이날 오전 8시 국회 소통관에서 윤석열 후보와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더 좋은 정권교체를 위해 뜻을 모으기로 했다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루고 미래 지향적이며 개혁적인 국민통합 정부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두 후보는 정권 인수위원회와 공동정부 구성까지 함께 협의하겠다고 했다. ‘정권교체론이 꾸준히 우위를 지켜온 여론 지형을 고려하면, 야권 후보들이 정권교체라는 목표를 위해 힘을 합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다자 구도에서 승리를 위한 단일화는 결선투표가 없는 현행 선거 제도 아래선 공학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을 배제하기 힘든 탓이다.

 

하지만 모든 단일화가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일화는 유권자의 선택지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행위라는 점에서 목적뿐 아니라 절차와 과정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윤석열·안철수 단일화는 원칙 없는 단일화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두 후보는 이날 국민통합 정부라는 공동의 목표를 내걸고 더 좋은 정권교체를 명분 삼아 인수위 공동 구성등 단일화 후속 프로세스를 국민 앞에 제시했지만, 이런 내용은 지난달 27일 안 후보가 단일화 결렬을 선언하기 전부터 양쪽이 논의했던 것들이다. 불과 나흘 사이에 그때는 안 되고 지금은 되는어떤 사정 변경의 사유가 생겼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안 후보는 아무런 설명도 내놓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그토록 반대했던 닥치고 단일화’ ‘무조건 단일화와 무엇이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실망스러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안철수 후보는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거듭 완주를 공언해왔다. 지난달 제안한 여론조사 방식의 단일화가 거부당한 뒤에는 유세 차량 사고로 숨진 당직자의 유지까지 언급하며 철수 불가론에 힘을 실었다. 지난달 23일 울산 유세에선 상대방을 떨어뜨리기 위해 무능한 후보를 뽑으면 1년이 지나 그 사람 뽑은 손가락 자르고 싶다고 할 것이란 얘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윤석열 후보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윤 후보의 당선은) 진정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적폐교대라는 말은 수시로 해왔다. 누구보다도 안 후보가 잘 알 것이다.

 

다당제가 소신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혀온 안철수 후보가 선거 후 합당에 합의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합당이 안 후보에게 당대표나 총리, 수도권 광역단체장 같은 정치적 미래를 열어줄지 모르겠으나, 그의 소신이라는 다당제 정착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2일 마지막 TV 토론회 뒤 단일화 담판을 요청한 게 안철수 후보 쪽이었다는 보도는 충격을 더한다. 밖으로는 단일화는 끝났다고 선언하고 물밑에선 접촉을 이어가며 단일화 성사에 매달렸단 말인가. 지지자와 국민에 대한 명백한 기만이다.

4일부터 사전투표가 시작되고 엿새 뒤엔 본투표다. 두 사람의 단일화가 명분 있는 선택인지, 권력 나누기식 야합인지는 유권자들이 평가할 몫이다. 유권자들은 후보들이 내세운 비전과 공약뿐 아니라, 그동안의 말과 행동에 진정성이 있었는지도 면밀히 따져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를 바란다. 한겨레 2002 3.4

 

 

국민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20021219일 아침 <조선일보>'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16대 대선 투표 개시를 불과 7시간 남짓 앞둔 18일 밤,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는 갑작스럽게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노무현 후보를 한사코 반대했던 보수언론에는 신나는 사건이었다. 조선일보 사설은 "16대 대통령 선거의 코미디 대상(大賞)은 단연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라고 규정한 뒤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 우리 유권자들의 선택은 자명하다"고 썼다. '정몽준 대표마저 노무현 후보를 버렸으니 국민도 버리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담은 사설이었다.

 

그런데 국민은 오히려 조선일보 사설을 버렸다. 정 대표의 지지 철회에 대한 분노의 역풍이 거세게 불면서 선거는 결국 노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최소한의 상식과 순리를 외면한 정치에 대한 응징이었다. 합리와 이성에서 벗어난 언론 역시 질타의 대상이 됐다. 조선일보 사설은 시민단체 '대선미디어국민연대 선거보도감시위원회'가 뽑은 '19일자 오늘의 나쁜 기사'에 이어 '선거 기간 중 가장 나쁜 보도 5'에 들어갔다. '코미디 사설 대상감'이라는 누리꾼들의 비판과 조롱도 쏟아졌다.

 

정치는 결코 산수가 아니다. '1+1=2'의 등식이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고, '2-1'의 답이 꼭 1이 아닐 경우도 있다. 정치의 오묘함이 여기에 있다. 후보 단일화 성사-파기의 결과는 좋은 예다. 세상일에는 어렵더라도 걸어야 할 정도(正道)가 있고, 아무리 욕망이 솟구쳐도 넘지 말아야 할 금도(禁度)가 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는 것은 정치에서 변치 않는 진리다. 사사로운 이익에 취한 나머지 금도를 어기지 않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일보 20021219일자 사설.

 

20년의 세월이 흘러 정말 '코미디 대상'에 뽑힐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정치인의 말 바꾸기'야 한국 정치의 익숙한 풍경이지만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말 바꾸기는 '비교 불가' 역대급 수준이다. "마음에 안 들고 무능한 (윤석열) 후보를 뽑으면 1년 만에 손가락 자르고 싶어질 것" 등의 '사자후' 메아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윤석열 후보 지지를 위한 사퇴'를 발표했다. 계속 직진 신호를 보내며 질주하다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해버린 셈이다. 아마도 '초단시간 중앙선 침범 역주행' 부문에서 쉽게 깨지지 않을 신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를 '16대 대선 코미디 대상'이라고 폄하했던 조선일보는 이번에는 '결단과 용단으로 단일화, 정권교체 여론 따른 순리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극찬했다. 야권 후보 단일화가 아무리 반가워도 안 대표의 납득하기 어려운 '표변'에 대한 비판도 적당히 가미해가며 기뻐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다. 20년 전 '대선미디어국민연대 선거보도감시위원회'는 조선일보 사설을 '나쁜 보도'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정몽준씨의 행태에 비판을 가하는 대신, 정몽준이 노무현을 버렸으니 국민도 버리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했다""언론사 간판을 달고 있는 한 최소한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를 현재에 원용하면 "안철수씨의 행태에 비판을 가하는 대신, 안철수가 윤석열을 지지하니 국민도 지지하라고 선동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20년 전에는 시민단체의 이런 눈물겨운 선거보도 감시 노력이라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노력조차도 발붙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언론 환경이니 씁쓸할 뿐이다.

 

2002년과 2022년 상황은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하다. '국민통합21 내홍' 기사가 '국민의당'으로 당명만 바꿔 다시 등장했다. "더는 신뢰할 수 없다" "당 대표의 일방적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당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통탄한다". 과거의 목소리인지 현재의 목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다. 이번에도 역풍의 기미는 곳곳에서 확연하다. 관건은 역풍의 강도다. 20년 전의 강풍이 이번에도 불 것인가. 쉽게 짐작하기 힘들다.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안철수 대표의 정치생명이 종말을 고했다는 것 말고는 아직은 모든 것이 안개 속이다.

 

선거는 결국 더 간절하게 원하는 쪽이 이긴다. 더 간절하고, 절박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지닌 쪽으로 승리가 돌아간다.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수구보수 세력도 무척 간절하고 절박하다. 더는 진보 정권이 나라를 운영하는 꼴을 보지 않겠다는 간절함이 절절히 넘친다. 그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노무현 후보가 도덕적 결함이 있어서 기를 쓰고 반대했는가? 자신들이 반대하는 후보의 조그만 약점과 빈틈만 있으면 부풀리고 왜곡해 타격을 가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같다. 그것은 간절함을 넘어 '악착같음'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것이다.

 

정권 탈환을 추구하는 세력의 집요함은 과연 나라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걱정과 희망에서 나오는 것일까. 꼭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증진, 경제적 양극화 해소, 평화와 안보, 사회적 통합, 생태와 환경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 전환 등 우리가 마주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후보들의 인식과 능력, 그리고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의 효율성과 적실성에 대한 평가는 관심 사항이 아니다. 알맹이는 사라진 정권교체 깃발만 나부낀다.

 

그러면 다른 반대편 쪽 유권자들의 간절함과 절박함은 어떤가. 대선 초반부터 그런 간절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이번 선거다. 다만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변화의 흐름이 엿보이고, 안철수 후보 사퇴도 하나의 기폭제가 됐다. 결국 이번 선거는 유권자들이 지금의 시대적 좌표를 어떤 지점으로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증진과 후퇴, 경제적 양극화 완화와 심화, 사회적 통합과 분열, 평화와 대결, 생태·환경 보호와 훼손 등의 갈림길에 마주하고 있다고 판단할지, 또 그런 인식의 강도가 어느 정도 절박할지에 따라 선거 결과가 판명날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정치를 지탱하는 최대의 힘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정치는 어느 순간 무너질 허무한 바벨탑일 뿐이다. 며칠 전 친한 선배 한 분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그 유명한 시 '너에게 묻는다'를 패러디한 시를 문자로 보내왔다. 정치의 요체, 선거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해주는 것 같아 '후보에게 묻는다' 패러디 시를 소개한다. '대한민국 유권자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힘없는 국민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김종구 (언론인) | 프레시안 2022.03.07.

 

 

2030 세대의 고통과 조선일보

이재명 지금 군사독재와 다르지 않다논란이준석 급하니 도 맹공’” 대선 마지막 주말에 조선일보가 인터넷에 부각한 기사 제목이다. 부제도 달렸다. ‘국민의힘을 인용해 이재명, 선거 위해서라면 대통령 법정 세우겠다고 얼마든지 몰아세울 사람이라고 달았다.

 

표제만 보면 이재명이 문재인을 군사독재자로 비난했다고 여기기 십상이다. 그가 당선될 때 문 대통령을 법정에 세울 수 있다는 암시까지 담겨 있다. 당선을 위해 온갖 비열한 술수를 쓴다는 이미지마저 그려진다. 궁금해서 기사를 접속했다. 기사는 이준석을 비롯해 조롱 발언을 한껏 나열한 뒤 긴 기사 마지막에 가서야 이재명이 하고 싶었던 말을 슬쩍 담았다. 그는 CBS라디오 연설에서 자신이 19876월항쟁 뒤 처음 투표를 했다며 내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를 얻기 위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다치고, 갇히고, 거리에서 싸웠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때도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사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공권력의 위협과 폭압이, 양극화와 불평등저성장기회 부족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재명은 이를 바꾸기 위해 청년층의 투표와 정치 참여가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어떤가. 저 발언을 두고 조선일보처럼 기사를 쓰고 제목을 달 수 있을까. 이재명의 발언에 찬반을 떠나 양극화와 불평등, 저성장으로 2030세대의 삶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문제의식을 표명한 대목 아닌가.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이미 대선 이전에 칼럼과 책을 통해 청년들이 1980년대까지 군부독재의 억압 아래 있었다면 현재는 경제적 억압 아래 놓여있다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이재명의 발언을 거두절미한 정당은 본디 군사독재의 후예에다 선거판이라 그렇더라도 명색이 언론기관은 왜 그럴까. 선거 막판 친문세력을 최대한 갈라치기 하려는 셈법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미 몇몇 친문단체의 윤석열 지지를 대서특필했음에도 아직 부족하다고 본 걸까.

 

다음날 또 다른 보도를 보자. “영호남이 달라졌다?대선, 결국 텃밭에 달렸다기사를 인터넷 판에 부각했다. 기사는 지역별로는 윤 후보가 우세한 권역이 넓지만, 인구가 많은 경기남부 지역에서 이 후보가 우세하고, 호남에서의 지지세가 결집되면서 전체적으로는 접전 양상이라는 분석이라고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쓴다. “특히 전통적으로 보수 진영이 우세했던 영남 지역에서의 윤 후보 지지율이 아직 50%대에서 60%대에 머무는 반면, 호남은 이 후보가 결국 80% 내외의 지지율을 가져갈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승부는 끝까지 혼전 양상을 이어갈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기사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군사독재 시절 경제개발이 영남에 집중되어 비영남인구가 많이 유입된 현실은 접어두자. 영남의 유권자들을 자극해서 윤석열에 투표하라는 의도가 기사에서 읽혀지는 것은 나뿐일까. 지역감정에 때 묻지 않은 영남의 젊은 세대에게 저 기사는 어떻게 다가올까.

 

딴은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조선일보는 내내 청년의 고통을 의제로 설정하지 않아왔다. 군사독재 시대에는 군사독재에 아부하며 지역감정 선동에 동참했고 그 이후에는 자본의 논리에 앞장서왔다. 마침 군사독재에 맞서 언론자유를 지키려다가 조선일보에서 해고된 기자들이 성명을 냈다. “조선일보는 언론을 포기하고 자신의 특권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정치집단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윤석열이다. 그는 조선 신방복합체를 비롯해 대다수 언론이 그를 돕고 있음에도 대한민국 언론은 반성해야 한다며 언론노조를 첨병 중의 첨병이라고 거칠게 비난했다. 언론노조에 대한 중대하고 심각한 명예훼손이다. 끝을 모를 그의 폭주가 어디까지 갈까 심히 우려스럽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2.03.07.

 

 

선거란 다름을 인정해 가는 험난한 과정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한 지인이 말했다.

 

이제 적과 아군을 확실히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과의 친분을 재산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생각이 맞는 사람들하고만 연락하기로 했습니다. 팔로하는 사람을 잘랐습니다.” 지난 주말 고등학교 동창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한 동창생이 대통령 선거에 나온 한 후보를 지지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전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 자제할 것을 권한 바 있으나 재발했다. 이를 보고 다른 친구가 커뮤니티를 떠났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온라인 언론 사이트가 정치논쟁의 싸움터로 바뀌었다. 분노, 혐오, 질시, 증오가 쏟아진다. 곧바로 주먹다짐으로 이어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정치 문제로 술자리에서 드잡이를 하던 시절은 차라리 낭만적이다. 온라인 뉴스 대화창은 24시간 선수들이 링에 올라 치고받는 아레나가 됐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생기면서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고 원활한 소통으로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으로 기대됐다. 물론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성화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혐오를 부추기는 표현과 비방이 난무하면서 난장판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짜뉴스와 부풀리기가 판을 치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어 끼리끼리 뭉치고 상대방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교육 수준이 낮아서인가. 우리나라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비율이 50%를 넘는다. 주요국 가운데 캐나다·일본에 이어 세계 5위다. 안타깝지만 많이 배운다고 배려와 아량, 공감능력이 향상되지 않았다. 오히려 배울수록 자만과 아집에 빠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민주화 수준이 낮기 때문인가.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민주화지수에서 우리나라는 101개국 중 16위다. 일본(17)보다 높다. 후발국 가운데 우리나라 정도로 위상이 높아진 나라는 찾기 힘들다.

 

물론 미디어 플랫폼의 책임도 부인할 수 없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는 구독자들을 오래 플랫폼에 머물게 할수록 돈이 벌린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구독자가 원하는 정보만을 뽑아서 제공한다. 구독자는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보게 된다. 정보의 편식은 사고의 편향을 불러온다. 균형감각은 사라지고 확증편향은 고착화된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책임은 부차적이다.

 

문제는 아직도 한국 사회가 공동체 내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되지 못한 데 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면 적이고, 같으면 동지로 나눈다. 끼리끼리 집단화하는 부족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나의 동료동료 아닌 사람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의 폭력 본능을 말한다. 뇌에서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화학물질이 분비되면 누군가를 해하고 싶다는 마음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폭력의 회로는 자신이 속한 집단보다 다른 집단에 더 쉽게 작동한다고 한다. 또한 집단이 되는 순간 행동은 비이성적으로 변한다.

 

1954년 미국의 무자퍼 셰리프라는 심리학자가 남자아이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로버스 동굴 공원 실험이다. 두 그룹에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 뒤 이들이 서로 만나 경기를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그룹 내의 동료의식은 높아졌지만 상대 그룹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다. 험담은 물론 공격적인 행동도 잇따랐다. 적대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식사를 하거나 영화감상을 했지만 쉽게 개선되지 못했다. 일단 형성된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데는 적극적인 노력이 수반돼야 했다. 2014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행동 패턴을 실험했다. 집단이 되어 행동하면 개개인의 도덕심이 마비되고 윤리관이 무너지는 것으로 나왔다

 

20대 대통령 선거는 가장 혼탁한 선거라고 한다. 정책 대결은 사라졌고 상대방을 향한 비방과 거짓선전, 사생활 파헤치기가 대부분이었다. 지지자들도 피 터지게 싸웠다. 편가르기는 심해졌고 적대감은 커졌다.

 

성숙한 시민사회는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 다를 수 있고 그것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본능에 저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선거 이후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다

박종성 논설위원 경향 : 2022.03.09

 

 

국민통합, 잘돼야 할 텐데

국민통합 하겠다. 진보 정책, 보수 정책 가리지 않고 쓰겠다.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 다양한 정치세력과 늘 소통하고 협치하겠다.” 이번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후보들이 쏟아낸 국민통합관련 말이다.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로 선거운동 과정은 비난 공방으로 얼룩졌으나 국민통합이라는 말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부터 선거운동을 마감하는 심야 연설장까지 후보들은 국민통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새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잘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후보들은 국민통합이라는 말을 선거 프레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진정성을 알 수 없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후보가 쓰는 모든 말은 선거용이겠으나 국민통합이라는 말은 특히 그랬다. 초기에 그 말은 상대 후보는 편파적이고 협량하지만 자신은 포용적이며 도량이 넓다는 생각의 틀을 주입하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국민통합을 외치면서도 국민분열을 조장하는 상대 폄하에 주저하지 않았다. 심각한 경우도 있었다. 기존의 사회적 균열을 과장하고 확대하면서 지지기반을 만드는 일이야 선거운동 현장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부추기며 지지자를 동원해내는 언술은 정말 걱정이었다. 그래서 국민통합이라는 말이 진정일까? 말처럼 잘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이다.

 

선거운동 후반에 접어들면서 국민통합 담론은 중도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고 경쟁상대를 고립시키려는 전술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재명과 윤석열이 안철수와 손잡기 위해 제시한 구애의 핵심 고리는 국민통합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안철수의 행보가 벌거벗은 권력정치였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내세웠던 국민통합의 깃발은 빛이 바랬다. 안철수가 윤석열을 최종 선택하면서 두 사람이 국민통합을 약속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안철수를 놓쳐버린 이재명은 그와 상관없이 국민통합에 필요한 정치개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지만, 국민통합의 앞날은 불안하게 되었다.

 

국민통합의 미래에 불안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국민통합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모든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외쳤다. 그러나 모든 대통령의 국민통합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반공, 승공을 내세우며 국민통합을 외쳤고 박정희는 부국강병을 위해 국민통합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시기의 국민통합은 상징 조작과 국민계몽을 통한 권위주의적 동원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동원된 국민통합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민주화 이후에도 국민통합 의제는 주요한 국정과제로 다루어졌다.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은 국민대통합연석회의라는 국무총리 소속의 국정협의기구를 만들어 노사갈등 해소를 포함한 폭넓은 분야의 과제를 다듬었다. 이명박은 사회통합위원회를 대통령 소속 기관으로 만들어 당면한 사회갈등 문제와 국가비전을 검토하였다. 박근혜도 국민대통합위원회를 대통령 소속 자문기구로 만들었다. 문재인은 국민통합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구를 만들지는 않았으나 사회갈등 해소와 국민통합 의제를 다루는 다양한 기구를 두고 대통령이 직접 챙기도록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국민통합정책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기구 구성과 활동에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지 않는가라는 의구심이 국민통합 정책의 추진 동력을 약화시켰다. 국민통합이 비판 세력을 흡수하려는 정치적 기획이 아닌가? 이런 막연한 경계심도 있어서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원인은 국민통합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 정책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민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통합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나? 이런 질문이 이어졌기 때문에 국민통합이란 정책의 목표, 대상, 사업 등이 명료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국민통합이란 하나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 민주적으로 공존하는 상태로 보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국민통합이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갈등 해소의 제도화가 국민통합에 중요하다. 그리고 다양한 가치, 이익을 반영하고 수렴할 수 있는 정치적 대표체제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 국회, 선거, 정당 등 정치개혁이 절실한 이유이다. 모든 정부가 높이 내걸었으나 어느 정부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국민통합이란 과제를 새 정부는 성공하길 바란다.

김태일 장안대 총장 경향 : 2022.03.10.

 

 

정말 화합하려면 원전부터 시작하라

48.56% 47.83%, 24만여표 차이.

과연 대통령 선거로서 유의미한 차이인지 알 수 없다. 상식이라면 결선투표를 하는 게 맞다. 그런 제도가 갖춰지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대화와 화합의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또다시 승자독식, 국정의 불연속성, 제왕적 대통령제 같은 한국 정치의 폐해가 지금의 균형을 악화시킨다면, 이 중요한 역사의 전환기에 우리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대선 캠페인이 막바지로 치닫던 무렵, 동해안 산간지대에서는 유례없는 산불이 시작됐다. 축구장 수만 개 규모의 무서운 불이 건조한 날씨와 바람 탓에 활활 타올랐다. 서울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이었지만 불안이 느껴질 만큼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은 늘 말하던 기후위기였다. 소방관들의 피땀으로 불길은 신한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갔지만 기후위기와 원전의 거리는 이렇듯 가까웠다. 그런데도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원전을 짓겠다는 게 보수 후보들의 공약이었다.

 

이제 당선인이 된 윤석열 후보는 실현 가능한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및 2050 탄소중립 달성방안을 수립 추진하겠다고 했다. ‘실현 가능한방안이란 원전을 늘리자는 것이다. 공약에 따르면 설계까지 마친 신한울 3, 4호기 공사를 바로 재개하고 추가 부지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신한울 3, 4호기까지는 짓겠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거센 탓이다. 윤 당선인 주장대로 2050년에도 30%(현재 계획은 6~7%) 원전을 유지하려면 폐로를 고려해 20~30기가 더 필요하다.

 

대안으로 수명 연장 방안이 있다. 안전하게 가동한다면 분명 경제성이 있을 것이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월성1호기를 정치적 판단으로 중지시킨 문재인 정부에 반발해 정치에 입문하고, 마침내 정치 1번지 종로구 국회의원이 된 계기이다. 단순히 불법만 감사한 게 아니라 원전을 지지하는 그가 국회에 입성했으니 정책은 탄력을 받겠지만, 경제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계산은 달라진다. 지역주민들의 몸에서 방사성 물질이 나오고 핵폐기물이 계속 쌓인다면, 기후위기가 원전사고 위험을 높인다면 경제성을 계산하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과 최재형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원전을 좋아할까. 공직자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 분들인데, 국민들이 방사능에 오염되고 원전사고가 나는 걸 바랄 리 없다. 단 상식을 존중하는 분들이라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수출대국이자 생활수준이 높은 선진국이고 많은 전기가 필요한데 화력발전소, 원전 모두 줄이면 어떻게 전기를 만들 것인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설득력 있고 신뢰 가는 답변을 내놓지 못한 것이 문재인 정부의 잘못이고 한계이다.

 

이제 탈원전이 친원전으로 바뀌는 길목에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동의할 수 있는 충분하고 투명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전기? 만드는 것보다는 절약하고 효율을 높이는 게 우선이다(그러려면 전기료를 올려야 한다). 원전? 다른 지역 주민, 미래세대의 희생이 따른다. 재생에너지? 석유는 1800년대, 원전은 1900년대 중반 에너지로서 발명됐다. 재생에너지로 바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산업? 국가적 힘을 모은다면, 전환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무엇보다 친원전과 탈원전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안철수의 생각이 중요하며 그의 역할을 기대한다. 그는 주요 대선 주자 가운데 가장 강력한 원전진흥정책을 내놓았다. “이미 제출한 국가감축목표를 하향조정하고, 혁신형 차세대 원전(SMR) 기술개발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고, 2030년까지 폐쇄 예정이던 원전 11기를 정상 가동하고, ·미 원자력협력 강화로 평화적 재활용 기술(파이로 프로세싱)을 활성화하겠다고 했다. 그는 경제와 과학의 전문가임을 자처했으며 차기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치적 지분을 확보한 그가 경제와 과학의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해주길 바란다.

 

정말 화합하려면 탈핵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인류는 70년에 걸쳐 원전을 가동했고 가능한 모든 기술을 실험했다. 원자력의 장점과 단점을 수없이 논의한 끝에 채택했던 탈핵 정책(2084년 끝나는 점진감축정책)5년 만에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 맞는가? 최재형 의원의 감사원장 시절 말을 빌리자면, “공약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윤 당선인은 이념 말고 과학과 데이터를 놓고 이 문제를 결정하자고 했다. 찬성한다. 그렇게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합의할 수 있다면, 다른 문제도 그렇게 풀려나갈 것이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경향 : 2022.03.12.

 

 

부동산 계급투표?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소설은 당대 시대상을 잘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엔 기존 체제의 폐허 위에 자본주의가 세워지고 있었다는 것도 포함된다. 두 체제가 교차하는 시기에 등장한 오스틴의 소설이 자본주의 특유의 인간상, 그리고 인간관계의 본질을 기막히게 잡아냈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교의 관점을 쉽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공기와 같다. 평소 우리는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산다. <오만과 편견>이나 <맨스필드 파크> 같이 200년 넘은 작품이 오늘날에도 현실성을 갖고 새삼스러운 놀라움을 주는 것은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토마 피케티는 경제학자로서는 매우 드물게 이런 점에 천착해, 자신의 세계적 히트작 <21세기 자본>에서 오스틴이나 발자크 같은 이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논변을 펼치기도 했다.

 

 

오스틴이나 발자크의 소설이 전하는 자본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재산의 의의가 변한다는 것이다. 과거 재산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이젠 아니다. 어디에 어떤 땅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땅에서 한 해에 얼마의 소득이 나오느냐가 중요하다. 소설 속 인물의 묘사나 사교모임 여성들의 귓속 대화에서 소득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이런 변화를 반영한다. 아무리 멋진 고택을 가지고 있어도, 거기서 소득이 안 나오면 무용지물이다. 재산보다 소득이 중요하므로, 그 소득이 꼭 땅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 공장을 돌리든 돈놀이를 하든, 여하튼 현금이 나에게 정기적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요즘 뉴스나 소셜미디어를 보면, 자신이 어떤 체제에서 살고 있는지를 잊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이번 대통령선거 결과를 둘러싼 해석들을 봐도 그렇다. 특히 서울에서 현 정권 기간에 집값이 크게 오른 동네에서 보수 후보의 지지세가 강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화제였다. 실제로 강남 3야 말할 것도 없고 목동부터 마포와 용산을 거쳐 성수에 이르는 한강 벨트 전체가 대체로 그랬다. 이를 계급 투표의 결과라면서 그 원인을 문재인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뜻 보면 그럴싸한 얘기지만, 여기엔 구멍이 숭숭 나 있다. 첫째, 부동산정책 실패 여부를 떠나, 정부 정책으로 집값이 많이 올랐다면 그 소유자는 정부에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왜 그 반대편 후보에게 몰표를 줬다는 건가? 둘째, 어떤 이들은 위에서 거론한 지역에서 세입자 비율이 높음을 들어, 위 결과를 부동산정책 실패로 전·월세 주거비가 오른 데 대한 반응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말은 더 되지만, 주거비가 치솟는데도 굳이 강남 등에 사는 사람은 어떤 이들일지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는 상식선에서만 생각해도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왜 저 강남 사람들은 자신의 집값을 올려준 정부에 저토록 반기를 드는 것인가? 어차피 집값이라는 건 원칙상 평가액일 뿐이고, 중요한 건 오스틴이 알려줬듯 소득이다. 이번 정부는 의도치 않게 강남 부자들의 집값은 올려줬을지언정 소득세와 법인세도 올렸고, 부동산 보유세와 금융 관련 세제 또한 강화했다. 고소득 전문직,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종사자가 대부분일 강남의 세입자들도 결국 이런 정책의 피해자. 종부세 등이 시행과정에서 누더기가 되었을지언정, ‘진보정권의 지속은 저들에게는 사활을 걸고 막아야 할 일일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에서 계급성은 재산이 아니라 소득의 크기와 성격과 더 관련이 깊다. 이른바 계급투표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도 언론과 소셜미디어는 온통 부동산 얘기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번 정부의 출범 이후 내내 부동산은 가장 뜨거운 경제 이슈였지만, 그것은 분에 넘치는 주목을 받았다.

 

한편, 언론이 아무리 부동산 노래를 불러도, 정부 정책이 자신의 소득을 옥죈다는 것은 부자들에겐 엄연한 현실이다. 오직 부자들만이 자신의 계급성을 자각한 것은 그 결과다. 나는 돈은 알아도 드는 돈은 모르는 게 사람인 걸까? 부자의 소득을 통제하는 정책은 고스란히 서민에겐 이득이지만, 이것이 집단적인 자각이 이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한 서민의 계급성을 일깨워 계급성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은 향후 우리 사회가 전진하기 위한 중요한 한 걸음일 것이다. 여기서도 재산보다는 소득이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김공회 |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 2022-03-13

 

 

승자가 보이지 않는 선거

박빙의 승부에서 패자만 보이고 승자는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인의 득표율이 48.6%에 달하지만, 기권율을 합산하면 37.4%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당이 턱밑까지 추격한 것을 볼 때 선거일이 하루 이틀 후였거나 결선 투표가 있었다면, 국민의힘이 이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특히 20~30대 여성 유권자로부터 외면당해 갈라치기가 되치기당했다는 평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당선 후 일성으로 강조한 통합은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다(물론 병은 치유되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도 예상외로 선전했다는 이유로 패하지 않았다고 자위할 수 있는가. 촛불 혁명을 계승한 정부라고 자부한 문재인 정부는 2년을 허송세월하면서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지난 총선에서 180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을 안기며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다. 그 결과는 또 한 번의 허송세월이었고, 이번 선거는 그에 대한 심판이었다. 만일 더불어민주당이 흠결 많은 후보를 내세워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면 호기만장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3지대도 패배했다. 사전 투표에서 안철수 후보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의 배신감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 지지율이 3%에 훨씬 못 미쳤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제1 진보 정당이 대선에서 얻은 득표율 중 가장 낮은 수치다. 안철수 후보 지지자의 이동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정의당은 안철수 지지로 대표되는 제3지대 열망을 흡수하지 못하고 전통적 지지층조차 전략 투표로 빼앗긴 것이다.

 

권력 구조 개편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정치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은 양대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96%가 넘는다는 것은 권력 구조 개편의 패배를 의미한다. 사실 정의당조차 권력 구조 개편을 전면화하지 않았다. 세 정당의 공약 모두 기존 구조의 리모델링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권력 구조 개편 여부가 대선의 주요 균열 축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3지대 정당에 대한 득표율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표출되었다면, 권력 구조 개편의 불씨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제3지대 정당이 내각제나 비례대표제에 더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양대 정당의 득표율이 압도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적어도 단기적으로 권력 구조 개편 논의가 재개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양대 정당의 압도적 득표를 인민 주권의 일부 패배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자당 후보들이 여의도 정치에서 배출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통해 양대 정당은 신선하다는 착시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매우 영리한 후보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기득권 정치 엘리트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득표에 유리하면 서슴지 않고 상대의 공약을 베끼고 집권하면 실현 가능성이라는 명분으로 공약을 뒤집거나 정책과 무관한 네거티브 공세로 경쟁을 극화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승자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당선인과 득표수로 가시화된 승자 속에 보이지 않는 실질적인 승자가 있다. 무엇보다 인민 주권의 패배라는 이면에 기득권 엘리트의 승리가 숨어 있다. 민주당이든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이든, 그들은 엘리트를 대표해 왔다. 양대 정당의 극한 대립은 엘리트의 궁정 게임에 불과하다.

이번 대선에서 표현된 집단 지성은 반만 눈을 떴다. 뜨지 않은 반 꺼풀 속에 권력 구조 개편과 엘리트 정치 극복이 가려져 있다. 반 꺼풀 열린 눈동자는 민주당의 오만과 국민의힘의 독선, 정의당의 진부함을 보았다. 정의당에는 각고의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에는 행정부와 의회의 상호 견제를 통한 합리성을 주문했다. 대선의 연장전이 될 2024년 총선에서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 의회에 대한 중간 평가가 치러질 것이다.

 

그러나 협치와 견제가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궁정 게임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현 권력 구조로는 소외된 목소리가 반영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양대 정당의 협치가 게임의 틀과 규칙을 바꾸는 고육지책이라도 강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원적인 계기와 동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촛불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잘못이 과연 정부에만 있을까. 촛불 혁명에 불을 댕긴 것이 국민이라면, 그것을 완수하는 것도 국민이다. 국민이 유권자로서 선택한 결과에 대해 책임지고 선택 후 할 일을 고민해야 할 때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 : 2022.03.14.

 

지난 대선의 아이러니

50대 초반인 또래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다. 대선 투표일을 앞두고 20대 초반인 아들과 마주앉았는데, 이재명을 찍어야 한다고 설득하자 아들이 그러마라고 하면서도 영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다. 그 아들은 처음에는 홍준표를, 다음에는 안철수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지난해부터 여러 명에게서 들었다. 전하는 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참하며 개탄하거나 어이가 없다는 식이었다.

 

문득 십수년 전 보수논객 조갑제가 주창한 어버이 역할론이 떠올랐다. 휴대전화와 인터넷 커뮤니티로 무장한 젊은 세대가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게 20년 전이다. 당시 기성세대가 느꼈을 당혹감과 허탈감이 어쩌면 지금 50대가 느끼는 것과 비슷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0대는 과거 6·25 세대나 산업화 세대처럼 기성세대가 되었구나.’ 이 엄연한 현실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대론의 대두는 정치적·사회적 살부(殺父) 절차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보여주듯 과거 기성세대는 윽박지르고 명령하는 권위주의적 아버지로 표상됐다. 거기에 대고 대한민국 학교 다 ×까라 그래라며 대든 게 지금의 50대다. 지금의 20대에게 50대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도덕주의적 아버지에 가까울 것이다. 둘의 공통점은 귀를 막고 제 생각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주먹으로 때리느냐, 말로 때리느냐가 다를 뿐이다.

 

이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든 게 이준석이다. 이른바 50대 포위론이 그것이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윤석열이었지만 선거 캠페인을 지배한 건 이준석이다. 여성과 남성을, 20대와 50대를, 친미와 친중을, 친북과 반북을 거침없이 갈라쳤다. 그의 언어는 당 공약에, 윤석열의 발언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일종의 복화술을 보는 것 같았다. 여성가족부 폐지도 이준석의 의제였다. 윤석열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여성가족부 폐지’ 7자 공약을 올렸을 때 눈앞에 아른거린 것 역시 이준석의 해사한 얼굴이었다.

 

비유하자면 이준석은 태블릿PC에 그려진 도표, 지지율 등락곡선에 따라 정치적 위치를 잡는다. 선거 당일 지상파 3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예상과 다르게 나오자 당황하는 모습은 마치 공식대로 수학 문제를 풀었는데 오답이 나오자 어쩔 줄 몰라하는 학생 같았다. 그에게 정치인의 소명의식과 실존적 고뇌 따위는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공리공론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것은 게임이고, 게임에선 이겨야 한다. 이기는 것은 선이요, 지는 것은 악이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선거에서 이기기보다는 선거에서 이기려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배치한다. 정치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은 공동체의 통합이지만 이기기 위해서라면 분열과 혐오의 정치를 거리낌없이 동원한다. ‘한국판 트럼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준석의 남녀 갈라치기와 세대 포위론이 온전히 먹혔다면 지난 대선은 이준석의, 이준석에 의한대선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준석의 혐오 정치가 20대 여성 유권자의 집단적 정체성을 흔들어 깨웠다. 그와 함께 세대 포위론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준석의 복주머니는 하마터면 재앙주머니가 될 뻔했다.

 

젠더 이슈를 투표 기준으로 삼은 20대 여성 유권자의 등장은 그 자체로 한국 정치사의 일대 사건이다. 이렇게 한 번 자각된 집단적 정체성, 여성혐오에 편승한 정치를 보란 듯이 표로 응징한 집단적 힘의 기억과 효능감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준석은 20대 여성의 목소리를 누르려고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당장 국회 과반 의석을 점한 더불어민주당은 여가부 폐지에 제동을 걸 정치적 의무와 동력이 생겼다. 난제를 받은 건 집권당이 될 국민의힘이다.

 

 

최근 한국 정치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2016년 촛불은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촛불을 거쳐 고양된 정치적·도덕적 기준은 그대로 문재인 정부를 평가하는 잣대가 됐고, 그 결과가 정권교체로 나타났다. 촛불의 요구는 소박하게 말해 내로남불하지 마라’ ‘여야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혁파하라’ ‘부패와 특권을 용납하지 마라’ ‘절차적 정의를 지키라는 것일 텐데, 이 기준은 윤석열 정부에도 가차없이 적용될 것이다. 촛불정신이라는 다모클레스의 칼이 항시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인수위 구성과 첫 조각이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정제혁 사회부장 경향 : 2022.03.14.

 

 

두 얼굴의 국가, 윤석열의 국민통합

선거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국민 통합을 부르댄다. 마치 시대정신이라도 된 듯하다. 대선 직후 언론이 가장 많이 인용한 윤석열 당선자 발언도 통합이다. 딴은 좋은 말이다. 국민 통합은 한국 정치의 숙원이기도 하다. 대선 과정에서 편향 보도에 앞장섰던 조선일보도 사설을 통해 “247000여 표라는 적은 표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 이를 보며 나라가 반으로 갈라졌다고 걱정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172석의 민주당과 2년간 함께해야 하는 현실로 볼 때도 이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 통합에 정략적 접근은 한계가 또렷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갈라진 현실을 직시해야 옳다. “공존과 포용의 정치를 아무리 되뇌어도 현실과 동떨어질 때 허언이 되기 십상이다. 반쪽으로 갈라진 투표보다 더 근원적 문제는 두 얼굴의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30-50 클럽에 속한 7개국 가운데 제국주의의 더러운 과거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자부할 만한 성취다. 하지만 슬픈 얼굴이 있다. 자살산재출산율과 비정규직 비율이 세계 최악인 살풍경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이미 선진국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공언하는 기득권층을 보면 스멀스멀 분노가 올라온다. 수구적 보수정당과 조중동 신방복합체만이 아니다. ‘비정규직 제로를 공약한 문재인 대통령까지 그랬다. 정당들은 그렇더라도 명색이 언론기관이라면 자살산재출산율과 비정규직 비율이 최악이라는 참담한 통계를 의제로 설정해가야 마땅하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저널리즘의 의무다. 문 정권 초기에 임기 말에도 그 통계가 전혀 변함이 없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한다며 노무현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고언 한 이유, 조중동 신방복합체를 내내 비판해온 이유다. 때로는 한겨레와 경향신문, KBSMBC가 서운해 할 비평도 했다.

 

2022 대선에서 6공화국 일곱 대통령에 걸쳐 이어온 부익부빈익빈 흐름이 역전될 가능성이 보였다. 선호가 뚜렷했지만 이재명 후보의 민생 정책과 실천 능력은 평가할 만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과 부동산 실정, 조중동 신방복합체의 벽을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앞으로 5년 내내 대한민국 정부를 책임질 대통령은 윤석열 당선자다. 그가 국민 통합을 중시한다면 반가운 일이다. 다만 통합을 이루려면 당선자 자신의 성찰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두 얼굴에 모르쇠를 놓고 하나의 얼굴만 바라보며 국민 통합을 외친다면, 그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국민 통합을 정말 이루겠다면 두 가지 성찰이 필요하다.

 

첫째, 선거 과정에서 편 음모론과 색깔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그는 아파트 값 폭등을 두고 문 정부가 의도했다는 음모론을 폈다. “사회주의국가로 탈바꿈시키려는, 좌파 혁명이론에 빠져있는 이 소수에게 대한민국의 정치와 미래를 맡겨서 되겠느냐고 외쳤다. 자신의 사드 추가 배치발언을 비판하자 생각이 평양과 똑같다. 북한 어디 노동신문이나 당 기관지 같은 데서 나오는 거랑 같은 얘기를 늘 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모두 진심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중앙SUNDAY 3122

 

둘째, 듣그럽겠지만 자신의 사회 인식과 독서 범위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다. 그의 주변에는 케케묵은 냉전론자들이 있다. 가령 선거직후 조중동이 앞 다퉈 지면을 할애한 ‘102세 철학자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면서 북한 같은 나라가 돼도 좋으니 통일만 하면 된다는 식이라며 그것은 자유와 평화를 포기하겠다는 건데푸틴보다 더 나쁜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허수아비 공격으로 분열적 여론몰이를 서슴지 않으며 통합을 언죽번죽 주창하는 논객들이 국힘당 안팎에 넘쳐난다. 당선자를 위해서도 경계하기 바란다.

 

이재명과 심상정에 과반이 투표했다. 그들도 당선자가 공정과 상식의 나라공약을 지키길 바랄 터다. 임기 시작에 앞서 진지한 성찰, 진솔한 성찰을 촉구하는 까닭이다.

기자명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2.03.14.

 

노동자 정치세력화사반세기의 종착역

20071217대 대통령선거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712121(3.01%)를 얻었다. 선거 결과를 두고 참패라는 평가가 나왔고, 결국 이를 빌미로 민주노동당에서 노회찬과 심상정으로 대표되는 그룹이 갈라져 나갔다. 평가 기준은 이전 대통령선거 득표와의 비교였다.

 

이번 20대 대선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803358(2.37%)를 얻는데 그쳤다. 17대 대선의 경험에 따르자면, 당이 쪼개지고도 남을 결과다. 19대 대선에서 심 후보는 2017458(6.17%)를 얻었다. 하지만 아직 이번 선거 참패에 대한 평가는 없고 지못미 12억원의 미담을 알리는 언론홍보만 눈에 띈다. 2020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6석을 얻고도 참패로 규정짓고 당지도부를 교체하던 모습과도 대비된다. 필자가 보기에 지난 총선에서 최대 승자는 손쉽게 6석을 얻어 의석수를 그대로 유지한 정의당이었다.

 

이번엔 미안해요. 다음 대선엔 꼭 찍어 줄게요는 노무현이 당선된 200212월의 16대 대선 때부터 되풀이한 철 지난 레코드 소리다.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957148(3.89%)를 얻었다. 이번에 심상정에게 오려던 ‘2030여성의 표가 이재명으로 대거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표들이 다음 대선에서 정의당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21세기에 들어와 이뤄진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돌아보면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승리한 선거에서 진보정당도 승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212월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이 이겼을 때, 권영길도 최다 득표를 했다. 20044월 국회의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압승을 거뒀을 때, 민주노동당도 10석을 얻어 당당히 국회에 진출했다. 20173월 대선도 마찬가지다. 문재인이 이겼을 때, 심상정도 200만표 넘게 얻었다. 지난 2020년 국회의원 총선거도 마찬가지다. 당시 정의당이 얻은 6석은 투입(input)을 훨씬 뛰어넘은 산출(output)이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정부를 심판하는 표가 심상정이 아니라 윤석열에게 간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또한 윤석열은 아니라는 표가 심상정이 아니라 이재명에게 간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양당 정치가 혐오를 뿜어낼 때 정의당이 그 대안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선거는 한국 대통령선거 역사상 최초로 진보정당을 끼운 3자 구도로 펼쳐졌다. 그런데도 정의당 심상정의 득표율은 민주노동당 탈당 그룹이 참패라고 평가한 2007년 대선 권영길의 득표율만도 못하다.

 

이번 대선에는 정의당 말고도 스스로를 좌파라 규정한 정당들도 후보를 냈다. 김재연 진보당 후보 37366(0.11%), 오준호 기본소득당 후보 18105(0.05%), 이백윤 노동당 후보 9176(0.03%)였다. 심상정을 비롯해 모두 4명의 진보정당 후보들이 얻은 표를 합하면 8685(2.55%)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민주노총 100만명 조합원의 표는 얼마를 차지할까. 이들 정당은 대부분 이런저런 모양새로 민주노총 내부의 정파 구도에 관여하고 있다.

 

 

 

 

필자는 이번 대통령선거의 의미를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력의 역사적 실패로 규정하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1997년 출범한 국민승리21’을 계승해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에서 이어져 온 정치운동을 말한다. 1987년 여름의 노동자대투쟁으로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이 주도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악전고투를 벌이다 드디어 그 종착역에 다다른 것이다. 정의당은 조직 노선에서 다수자 정당을 버리고 소수자 정당으로 전환함으로써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깃발을 내렸다. 나머지 진보정당들은 정파 정치를 뛰어넘는 현실적 대안이 전혀 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면면을 볼 때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의 참패는 노동조합운동에 기반한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식 정치세력화 노선이 좌초했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인적 구성과 물적 자원, 그리고 조직적 기반을 고려할 때 이후 언제 다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을지 현재로선 예측할 수 없다. 또한 그 방식이 노동조합운동을 통한 정당의 건설이 될지, 역으로 정당 건설을 통한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이 될지도 현재로선 예측할 수 없다.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매일노동뉴스 2022.03.14.

 

 

누가 국민을 패배자로 만들었나

월드컵 결승전도 아닌데 티브이 앞에서 밤을 새웠다. 그렇게 하룻밤 잠을 설친 후유증은 일주일이 지나도 쉬 가시질 않는다. 대선 후유증이다. 국민의힘이 잘해서 이긴 선거라기보다 민주당이 못해서 패한 선거라 더 씁쓸하고, 앞으로도 특별히 나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더 암담하다.

 

이번 대선이 역대 최악의 선거라는 표현은 사실 어폐가 있다. 투표함을 바꿔치기하고 고무신과 막걸리로 표를 매수하던 이승만, 박정희 시대도 있었고 광주학살의 주범을 99.37% 찬성으로 뽑은 전두환 시대의 체육관 선거도 있었다. 876월항쟁 이후 노태우 시대에도 공공연한 공개투표로 여당 후보를 찍도록 강제하는 군대 내 부정선거가 횡행했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본 꼴도 갖추지 못한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인데 이번 선거의 체감온도가 최악인 이유는 뭘까? 이번 대선은 과거 어느 때보다 국민의 눈높이와 정치권의 수준 사이에 가장 큰 간극이 발생한 선거이기 때문이다.

 

20대 대선은 5년 전 촛불항쟁으로 정권교체를 한 이후 처음 맞는 대선이다. 촛불 전과 후의 국민은 다르다. 촛불 하나 달랑 들고 거대한 통치권력을 무너뜨린 자부심과 기대, 새로운 정치에 대한 목마름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던 유권자 앞에 던져진 선택지는 참담했다. 양당 후보의 개인 비리와 가족 비리는 까도 까도 양파처럼 점입가경이고 표심 잡기용 아무말 대잔치가 경쟁적으로 난무했다.

 

국민의힘은 닥치고 정권교체를 위해서 젠더 간, 지역 간 혐오와 분열을 재생산하는 데 핏발을 세웠고 민주당은 수도권 민심을 잡겠다며 재개발 요건 완화, 종부세 감면을 전면에 내세웠다. 보수를 자처하는 국민의힘에는 공공선을 위한 공화주의가 없었고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당에는 자산격차와 불평등 해소에 대한 지향이 없었다. 그것은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권력 획득을 위한 이익집단 간의 경쟁일 뿐. 이번 선거는 앞으로 전진하려는 국민의 추동력을 후진기어로 역진시키려는 두 바퀴 양당 권력 간의 거대한 힘겨루기였고 누가 당선자가 되든 패배는 국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선거였다.

 

앞으로 어떤 정국이 펼쳐질까? 다당제와 선거구제 개편을 주장해온 안철수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민주당은 지난달 긴급의총에서 대선 결과에 상관없이 반드시 실천할 것을 국민 앞에 약속한다면서 위성정당 방지,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기초의회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을 뼈대로 하는 정치개혁안을 채택했다. 안철수 인수위와 민주당 비대위는 양당체제 종식을 위한 정치개혁의 약속을 지켜낼까? 부디 그러기를 간절히 두 손 모아 기원하지만, 상황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양당은 서로 적대하며 공생과 장생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 꼼수 위성정당을 만들어서 비례대표를 싹쓸이하는 데서나, 기초의원 선거구 쪼개기로 양당 이외의 군소정당 후보가 등장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하는 데서도 양당의 행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가올 지방선거에서도 국민의힘은 여소야대 정국을 버텨낼 수 있게 힘을 몰아달라고 할 것이고,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를 견제하려면 민주당으로 표를 몰아줘야 한다고 호소할 것이다. 땅 가진 사람, 지역 기득권을 유지해온 토호들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해서 도처에서 개발 공약과 유치 공약이 여야 구분 없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대선 투표에 임해야 했던 유권자들에겐 다시 겨자 가득한 선택지가 주어질 공산이 크다.

 

그래도 이민 갈 생각은 하지 말자. 개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이 패배자가 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하자.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40 40의 고정지지층 외에 나머지 20%가 한국의 정치지형을 결정한다는 게 통설이다. 이번엔 그 20%를 양당이 엇비슷하게 나눠 가졌지만 이들은 언제든 선택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양당이 깊이 인식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지지 못하게 하자.

 

혐오정치에는 또 다른 백래시가 따른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준 2030 여성들, 차악을 선택하느니 투표를 거부하거나 무효표를 만드는 길을 택한 저항적 유권자들, 맹신과 광기로 가득한 팬덤 정치꾼들의 선동에도 꿋꿋하게 진실을 가려보려고 했던 합리적 시민들, 그리고 이 당이 싫어 마지못해 저 당에 투표했지만 품격이 다른 정치를 열망하는 대다수 유권자의 간절한 마음이 새 출발의 보루이다. 가치와 철학을 갖춘 지도자를 주야장천 기다리느니 가치와 철학을 가진 시민들이 새로운 깃발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개혁과 상생을 위한 시민연대가 필요하다. 이제 겨자밥은 그만 먹자.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한겨레 :2022-03-15

 

 

윤석열 시대의 갈등의 점화 장소

이번 대선은 최악의 비호감, 네거티브 선거로 불렸지만 흥미롭게도 유권자들의 냉담이 아니라 뜨거운 대결이 벌어졌다. 윤석열 후보 쪽의 각종 도발과 그에 대한 반발이 맞서는 구도가 형성되면서, 한국 사회 심층 균열들이 정치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반페미니즘, 여성가족부 폐지, 멸공, 선제타격, 120시간 노동, 최저임금 조정 등, 밈과 말을 툭 던지면 세대, 젠더, 평화, 노동 등 핵심 이슈에서 거대한 갈등구조가 솟구쳤다. 이러한 사회 균열들의 정치화는 우리 사회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각별한 주목이 요구된다.

 

담론 투쟁 측면에서 가장 폭발력 있었던 것은 단연 세대 이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세대포위론을 전략으로 내세우며 노인과 청년을 보수화하여 4050세대를 이긴다는 프레임을 짰다. 하지만 이 전략은 실패했다. 보수의 혐오정치에 대한 반발이 커짐에 따라 20대는 결국 이재명 표가 더 많이 나왔다. 30대의 보수 투표는 집값 폭등이라는 문재인 정부 실정의 결과이지 이 대표 작품은 아니다.

 

세대 이슈에서 오히려 중요한 사실은 세대 균열 자체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 결과는 40·50대에서 이재명 승리였지만, 문재인 정부 중반까지 30·40대가 핵심 지지층이었고 이 중 30대가 나중에 돌아섰다. 지금 20·30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동적이다. 세대 내 균열이 크고, 특정 정당 지지층이 적다. 청년은 단일한 정치세대를 이루고 있지 않다. 현재 상황의 핵심은 청년세대 내 주도권을 쥐기 위해 다투는 세대정치가 격렬히 벌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거기서 청년층 내의 갈등과 경합이 꿈틀거린다.

 

 

그러한 청년 세대 내 균열들 중 가장 새롭고 예리한 측면은 성별 균열이다. 청년층 성별에 따른 정치성향의 차이는 몇년 전부터 계속 심화했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20년 총선, 2021년 보궐선거를 거치면서 청년 남성은 범보수가, 여성은 범진보가 다수가 되어 서로 멀어졌다. 40, 30, 20대로 연령이 내려갈수록 성별에 따른 정치성향 차이가 벌어진다. 이번 선거에서 20대 남녀의 양쪽 후보 지지율은 각각 58%로 정확히 거울상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세대 균열처럼 성별 균열도 역동적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이, 페미니즘과 같은 가치 이슈에서 어떻게 갈라질지 예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2030 여성들과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같은 반혐오 저항행동이 이룬 큰 성취는, 극단 혐오 세력이 청년의 다수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는 데 있다. 이번 대선은 20대 남성들의 반페미니즘 정서가 상당한 폭발력을 내장하고 있음을 드러낸 동시에, 남녀 차이를 넘어 성평등과 반혐오에 대한 광범위한 가치 합의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도 했다.

 

끝으로 문재인 정부 임기 내내 사회 저변의 가장 광대한 갈등의 저수지였으며, 대선 결과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된 중대한 균열이 바로 계급 균열이다. 문 정부와 민주당은 그들의 담론과 의제에 모든 선한 가치를 담았다. 평등, 공정, 정의, 복지, 노동존중 같은 것들 말이다. 이들이 이러한 가치를 실제 추구한 곳에선 공산주의를 타도하자는 기득권 계급의 격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러한 가치를 배반한 곳에선 위선을 역겨워하는 민중 계급의 외면을 초래했다. 이러한 이중적 균열이 주택 이슈만큼 첨예했던 곳은 없다.

 

부자들은 집값 폭등으로 10억원을 벌었어도 100만원의 종부세를 용서할 수 없다. 젊은 중산층은 대출 규제 때문에 집을 살 수도 없고, 불안한 세입자로 살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갇혔다. 하층민은 억대의 집값을 보며 망연자실 상태에 놓였다. 이처럼 각기 다른 계급이 각기 다른 이유에서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 부동산이 전부겠는가. 비정규직, 일자리, 소득 등 많은 문제에서 지금 한국 사회의 밑바닥은 계급적 분노와 적대로 지글거리고 있다. 그 결과가 민주당의 패배였다. 하지만 그 대안이 윤석열이 아님은 명백하다.

 

윤석열 정부하에서 이러한 심층균열들은 문재인 정부 때와 전혀 다른 정치환경에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지 모른다. 노골적인 검찰 지배, 친기업, 반노동, 반페미니즘의 강성권력이 등장한다면 억눌린 사회적 저항들은 폭발적으로 분출될 것이다. 이번 대선은 그러한 갈등의 점화 장소들을 미리 보여주었다.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22-03-15

 

 

윤석열의 나라에서는

1. “TV 켜지 마.” 이번 대선의 후유증이 대단했다. 지난 10일 길었던 하루를 보내고서 집에 돌아와 저녁뉴스를 보려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TV를 켜지 말라고 마누라가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개는 출근하기 싫은데 억지로 사무실에 나왔다 하고, 다른 아무개는 두문불출이라 하고, 또 다른 아무개는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살까 한숨을 짓는다더니 우리 집에도 그런 이가 있었다. 20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뒤에 일어난 일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큰일이 일어난 것처럼 낙담해 이렇게까지 하는 게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윤석열이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들이 무심한 나와는 너무도 다르다고 느꼈다. 뭐라 하거나 말거나 봐야 할 뉴스는 보겠다고 나는 TV를 켰다. 그리고 어떤 세상이라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니 오늘도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면서 사건 더미에 파묻혀 종종거리며 나는 일해야 했다. 이렇게 나는 이재명이 낙선하고 윤석열이 당선된 것보다도, 사용자가 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를 정당하다고 판결하고, 공공기관 자회사 근무는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상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라고 판결하는 법원의 태도에 절망한다. 어떻게 노동자 권리를 위해 바로잡을 수 있을지에 골머리가 아프다. 20대 대통령 선거일을 하루 앞두고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자신이야말로 국민을 위하는 후보이고 상대방은 그렇지 않은 후보라며 대선후보들이 쉴 틈 없이 선거운동을 하던 있던 8일에도 나도 오전에 서울중앙지방법원, 오후에는 서울고등법원으로 바빴다. 다른 사업장 사건이지만 같은 쟁점에 관해서 노동자의 청구를 인정해 주지 않는 법원 판결이 잇달아 나오고 있어서 심란한 임금피크제 사건 재판에, 자회사 전환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청구를 인정해 주지 않은 1심 판결에 불복해서 항소심에서 다투고 있는 불법파견 근로자지위청구 사건 재판까지 어떻게 해야 승소할 수 있겠는지를 궁리하면서 변론하느라 바쁘기만 했다. 이렇게 지난 한 주를 나는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바빴다고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2. 물론 나로서도, 윤석열의 나라에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 염려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표준임금체계와 성평등 임금공시제 도입을 공약한 데 대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연공급제의 임금체계를 직무가치·성과 반영 임금체계로 개선하겠다고 공약했다. 임금제도에 있어서 노동자의 임금 권리 향상을 공약하지 않고 근속에 따라 임금이 상승하는 연공급제를 직무·성과급제로 바꿔 내겠다고 공약한 것이니 공약대로면 윤석열의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또 다시 사용자 자본과 권력의 직무·성과급제 도입 타령을 지겹도록 들어야 하게 생겼다.

 

이 나라에서 권력과 자본이 직무·성과급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노래한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이미 노무현 정권이던 2003년 마련된 노사관계 로드맵에서도 임금체계 합리화로 성과주의 임금제도가 검토 방안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서 임금제도 개선 방향으로 도입하고 추진했다. 따지고 보면, 노동존중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성과주의 임금제도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문재인 정부가 천명했던 것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 아래서도 직무·성과급제로 임금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끊임 없이 제기돼 왔다. 그렇더라도 노골적으로 대선공약으로 들고 나온 윤석열의 나라에서는 이전보다 맹렬하게 몰아붙일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이번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다는 이른바 이대남이 공정 운운하면서 늙은 노동자가 많은 임금을 받고 자신들이 적게 받는 데 불만이 있다고 보수언론 등에서는 보도해 왔는데 적극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실 공공을 내세우고 있지만 도대체가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공공을 말한다면, 그동안 연공급제로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던 임금부터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그 방안부터 제시해야 했다. 연공급제란 근속기간이 짧은 시기에는 낮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받고 근속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호봉 상승 등으로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제도라서 지금 고령의 장기근속자에게는 사용자가 과거 수십년 동안 낮은 임금을 지급했다는 걸 실토하고 있다.

 

이런 직무·성과급제와 결을 같이 하는 임금제도가 바로 임금피크제다. 정년을 몇 년 앞둔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해 지급하는 임금제도가 오늘 이 나라에서 사업장에서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임금피크제다.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자신이 받아 온 임금을 대폭 삭감하도록 한 이 제도를 노동자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받아들여야 한다. 노동자는 도대체가 납득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노동자들을 대리하는 나는 서울중앙지법에서 임금피크제가 무효라며 삭감한 임금을 지급하라는 소송 사건으로 바빠야 했다.

 

3. 이번 대선을 앞두고 <매일노동뉴스>에서 기획특집으로 한눈에 보는 대선후보 노동공약라는 분석 기사를 내보냈다. 그 공약 사항 중 비정규직 대책도 포함돼 있었다. 이재명 후보는 상시적이고 생명·안전 관련 업무에는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하고 비정규직 공정수당을 도입하겠다고 공약하고,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비정규직 사용사유를 제한하고 비정규직 평등수당을 도입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윤석열 후보는 없었다. 기사가 후보들의 공약을 제대로 분석·정리한 것이 맞다면 아무것도 공약하지 아니한 윤석열의 나라에서 어떠한 비정규직 대책이 나올 것인가. 공약한 것이 없으니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하는 대로 하는 것일까. 그나마 파견법,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 등 비정규직법을 사용자에게 비정규직을 보다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으로 개정하겠다고 공약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아무것도 공약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대로 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문재인 정부에서 해 오던 대로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전혀 그럴 것 같진 않다. 의문은 자꾸만 의심으로 달려간다. 문재인 정부에서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추진됐다. 대거 자회사 방식으로 변질돼 추진됐다. 그 때문에 비판할 수밖에 없지만 공공기관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는 당초 취지만큼은 비난하고 싶지 않다. 20대 대선을 하루 앞둔 8, 서울고법에서 나는 자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을 대리해 자회사 근무가 파견법상 사용사업주의 고용의무를 이행한 것도 아니고, 파견법상 파견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해야 했다. 재판장과 주심 판사의 태도에 주눅이 들었는지 법정을 나오면서 원고들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판사의 태도를 가지고 판결을 연결짓지 말라고 말하면서 살펴봤다. 그들은 여전히 소송하겠다고 찾아왔을 때의 표정은 아니었다. 그들도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 것에 낙담하고 있을까. 어쩌자고 이렇게 나는,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 선출 소식에 거창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의뢰인 노동자의 표정을 소심하게 살피는 것일까.

 

4. 위와 같이 살펴본 윤석열의 나라에서 염려되는 임금제도, 비정규직 대책은 결코 거저 오지 않는다. 대통령 맘대로 오지 않는 것이다. 비정규직 대책은 아무것도 공약하지 않았으니 지금 윤석열의 나라에서 나올 대책을 구체적으로 살피기 어렵다. 연공급제를 직무·성과급제로 바꾸는 일에 대해 살펴보자. 이 일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대통령령이나 행정집행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사 당사자 간 합의로 정해야 할 임금제도를 법률로 정하기도 어렵다. 그걸 대통령 맘대로 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권력으로 압박해 도입을 추진하더라도 사업장에서 적용받고 있는 임금제도를 변경해야 한다. 노동자·노조가 동의해 주지 않는 한 원칙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신규채용되는 이대남에게는 사용자 맘대로 취업규칙을 변경해서 적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노동자 일반에게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알고서 보면, 노동자 대응은 어렵지 않다. 동의로 거래하지 않으면 된다. 지금까지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사업장을 보면, 대부분 사용자와 동의로 거래했다. 버티면 될 일이다. 그리고 윤석열 후보의 공약 중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에 좋지 않은 것을 보자. 노조의 불법을 엄정하게 대처하고,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을 현행 1개월 또는 3개월 이내를 1년 이내로 확대한다는 것 정도다. 노동에 관한 공약은 많이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 중 노동자의 권리에 해당하는 것은 노동시간에 관해서 공약한,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 기간을 확대하는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을 개정해야 이행할 수 있는 공약이다. 그러니 과반의석을 넘어 170여석을 가진 민주당이 반대하면 윤석열의 나라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지 않고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됐다고 노동자가 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를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실현을 걱정할 일이면 이재명이 당선됐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더구나 현행법은 1개월 또는 3개월 이내의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로 사용자가 도입·시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근로자대표가 합의해 주지 않으면 사업장에 도입할 수가 없다.

 

문제는 노동자의 자유에 관해서다. 공약한 대로 윤석열의 나라에서 노조의 불법을 엄단한다면 걱정이다. 불법을 엄단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도, 이 나라에서는 노조는 겁을 먹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노동자의 자유, 노조활동이 당연하게 인정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은 노조를 통해 교섭·쟁의행위를 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서 주체, 목적, 시기와 절차, 수단과 방법 등을 규정해 놓고 이를 준수할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노동기본권을 보장한다고 말하는 나라 중에 이런 나라는 없다. 노동자가 노조를 조직해서 활동하는 단결의 자유가 원칙적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다. 노동존중을 외쳐 온 문재인의 나라에서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런 법을 두고서 윤석열은 불법 엄단을 말한다. 노동자의 자유, 단결의 자유를 알지 못하고서 하는 말이다. 무지가 일반화돼 공공연하게 노조활동에 대해 불법 엄단을 말하고 공약하고 있다. 그래서 공약을 이행할까 봐 염려가 된다. 그런데 말이다. 언젠가, 어떻게든 넘지 않고는 달리 길이 없다. 노동자의 자유, 단결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노동자 자신의 투쟁으로 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매일노동뉴스 :2022-03-15

 

 

우크라이나 사태에 미국과 나토의 책임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작전을 시작하면서 러시아 방송을 통해 한 시간이 넘는 긴 연설을 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답지 않게 감정이 많이 들어간 이 연설에서 푸틴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겨냥한 말을 했다. 하나는 우크라이나에 대량살상무기(WMD)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나토의 계속된 확장이 러시아의 목에 겨눈 칼날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1994년에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WMD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푸틴이 모를 리 없다. 2003년에 미국이 있지도 않은 WMD를 구실로 이라크를 침공한 것을 빗댄 얘기였다. ‘너희도 이익을 위해 침략의 구실을 만들어내지 않느냐는 게 푸틴이 하려던 말이다.

 

이라크 침공에 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꾸준히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던 반면, 나토의 확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외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잘 아는 사람들은 냉전 후 일극 체제에 익숙해진 미국이 지나친 이상주의적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1990년 미국은 소련(러시아)이 독일 통일에 협조를 해주면 나토는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라며 안심시켰는데, 나토와 미국은 그 약속을 어기고 (이에 대한 나토의 입장은 그런 내용을 담은 서명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꾸준히 확장해서 이제는 러시아와 접경한 우크라이나까지 가입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나토 확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푸틴의 편이라기보다는 특정 세계관에 입각한 현실주의를 대변하는 학자나 전직 외교관들이다. 흔히 현실정치(Realpolitik)’라 불리는 이들의 생각은 냉전시대 미국 외교를 대표하는 헨리 키신저의 사고방식이기도 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힘의 논리에 기반한 사고다. 이들은 국제정치에서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것을 옹호한다기보다는 양쪽의 힘이 어느 정도 균등할 때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현실적인 주장, 힘의 균형이론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균형 자체가 불가능한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에서 힘의 균형 논리는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지난 20여 년간 외교의 일선에서 물러나는 듯했다. 힘의 균형 이론을 대표하는 시카고 대학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이제 워싱턴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현실주의 외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핵을 가진 러시아를 지나치게 밀어붙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며 지난 몇 년 동안 다시 목소리를 키워왔다. 그리고 지난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이상주의적 외교의 실패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이상정치 vs 현실정치

소련 붕괴 이후 군사력보다는 경제력과 국가 간 조약에 의존하는 이상주의적 노선에 대한 비판은 나이 든 냉전시대의 학자들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2021년에는 미국의 보호 아래 이상주의를 체화하며 독일 밀레니얼 세대가 푸틴의 군사적 위협 앞에서 전략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한 30대 군사 분석가로부터 나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각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푸틴의 위협이 현실화하고, 그 대응으로 독일이 국내총생산(GDP)2% 이상을 국방에 투자하기로 하면서 더욱 힘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20세기 말에 끝난 줄 알았던 현실정치와 힘의 균형론은 다시 화려하게 귀환하는 걸까? 이상주의 정치는 일극 체제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걸까? 무엇보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그런 이상주의에 빠졌던 미국과 나토의 실수가 만들어낸 걸까?

 

이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현실정치의 대척점에 있는 이상정치(Idealpolitik)’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보다 인권과 민주주의 같은 이상을 앞세우는 이상정치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를 교과서를 통해 배워왔다. 바로 삼일운동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는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대표적인 이상정치의 사례다. 미국에서 윌슨주의(Wilsonianism)로 통하는 이 사상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이 대부분 독재체제인 적대 국가를 상대로 사용하던 사상적 무기였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에 속한 미국이 식민지에 남아 있을지, 독립할지는 그 나라 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라고 선언한 민족자결주의는 사실상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무늬만 이상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던 한민족에게 미국의 진정한 의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현실에서 이상(ideal)은 북극성과 같은 존재다. 태평양 너머에서 윌슨이 한 말에 힘을 얻어 거리로 뛰쳐나온 조선 사람들에게 그 이상이 정말로 이뤄질 것 같으냐하는 질문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온 세상을 나눠 가진 제국들의 압제하에서 숨이 막히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의 운명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줄기 빛이고, 소중한 한 줌의 산소 같은 존재다.

 

미어샤이머를 비롯한 현실정치 옹호론자들은 나토가 2008년에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을 지지한다고 밝히는 바람에 이들이 가입을 추진했고 그 결과 몇 달 뒤 조지아가 푸틴의 군대에 무참히 짓밟혔고, 이제는 우크라이나가 같은 운명에 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절대 실현될 가망이 없는희망을 준 미국과 나토 국가의 이상주의 정치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비판이다.

 

우연히도 삼일절에 쓰게 되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1919년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고, 그 결과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뉴스를 읽은 서구 열강의 학자와 외교 전문가들이 윌슨 대통령이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를 늘어놓는 바람에 한반도에서 수천 명의 양민이 죽지 않았느냐라고 비판하는 모습,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총칼을 무릅쓰고 거리에 나온 조선인들에게 소파에 앉아 이론을 늘어놓는 학자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상이 비현실적이었어도, 혹은 미국의 위선이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시민군이 항전가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트위스티드 시스터스의 노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너희들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 1919년에 우리가 했던 말이다. 비록 해방을 맞기까지 우리는 다시 26년을 기다려야 했지만, 한민족은 결국 해방을 맞았다. 미국은 똑같은 경험을 1776년에 했다. 우크라이나는 그 순간을 지금 맞이한 것뿐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더 이상 푸틴의 압제를 참지 않기로 했다면, 그래서 목숨을 걸고 총을 들었다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이번 사태는 저들에게 헛된 희망을 준 미국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비판으로 포장된 전형적인 제국주의적인 태도다. 민족의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박상현 (오터레터 발행인) 시사인 2022.03.16

 

 

부나 권력이 없어도 빛나는 사람들의 특징

윤동주 시인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표현했다. 불완전한 인간이 어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 있겠는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기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잘 못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런 삶을 지향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 삶을 지향하며 살기 위해서는 시인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아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자아의 능력은 학력과도 무관하며, 사회적 성공과도 무관하다. 우리 사회에 최고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 재력가, 권력가들 중에 심각한 거짓자기로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이들은 거짓말을 일삼고 부와 권력의 유지, 사회적 지위 상승 등 개인의 욕망을 위해 부도덕한 행동을 하고, 진실을 감춘다. 부끄러움을 모르며,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아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심리학에서는 부끄럼 없이 떳떳하고 진실함을 추구하는 자기를 참자기라고 한다. 진실하다는 것은 ‘~ 척하는 가식이나 위장이 없고, 조작이 없는 일치성과 순순한 특성을 뜻한다. 그래서 진실한 사람들은 없어도 있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부정한 행동을 했으면서 안 한 척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고 언행이 자연스럽다.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이다. 반성할 줄 알고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안다.

 

참자기는 인간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지만 완성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생 발달시켜가야 한다. 식물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고 꽃을 피우려면 적당한 흙과 수분, 햇빛과 공기 등이 필요하듯이 참자기가 발달하는 데에도 적절한 환경과 양분이 필요하다. 아동정신분석학자 위니캇은 참자기가 발달할 수 있으려면 충분히 좋은 모성의 제공이 필요하다고 했다. 충분히 좋은 모성의 특징은 돌봄과 수용, 공감과 존중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하고 존중해 주면 그 아이 안에 내재된 참된 자기가 발달한다는 것이다.

대학 초년의 한 학생이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학업에 전념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성적을 받아보니 몇 과목 과락을 했다. 자기에게 기대가 높은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급기야는 성적표를 조작해서 보냈다. 부모는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이 학생이 어린 시절에 학교를 다녀오면, 숙제, 예습 복습 등을 철저히 하도록 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아이는 부모와 다른 기질과 성품을 지녔다. 공부보다는 친구를 좋아하고 밖에서 노는 것을 좋아해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는 심하게 비난했고 폭력을 행사했다. 서서히 아이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전략이 생겼다. 숙제를 안 했으면서도 했다고 했으며, 친구하고 놀다 와서는 공부하다 늦었다고 했다. 아이의 인격안에 거짓이 시작된 것이다. ‘거짓 자기는 심리적 생존을 위한 방어인격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부모와 관계 맺고,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는 심리적 보호기제다.

 

다행이도 이 학생의 부모는 자녀의 상태를 뒤늦게 깨닫고 몹시 마음 아파했다. 부모에게 진실을 말하고 받아들여지면서 학생의 마음은 더없이 밝고 자유로워졌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다시 시작할 의욕도 생겼다. 어깨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며 당당해졌다. 진실한 마음이 상처 난 거짓 인격을 치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심리치료는 그 사람 안에 감추어진 참자기를 회복하는 일이며 사람이 가지고 태어난 참된 본성, 진실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다. 내면의 빛으로 사회를 밝고 정의롭고 건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진실한 사람들이 번듯한 내 집하나 없어 고생을 해도, 돈이 없어 호위 호식하지 못해도 서로 돕고 연대하며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자신들이 바로 세상을 선하게 만드는 빛나는 사람들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신선미/가톨릭전진상영성심리상담소장 한겨레 :2022-03-17

 

 

대선에서의 불길한 방화범

통치는 열렬 지지자들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에서 시작해야

초박빙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1%가 안 되는 표차로 당락이 갈렸다. 1%의 의미를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질 것이다. 아마 정반대 해석도 난무할 것이다. 또한 이 의미를 두고 당선자가 어떤 태도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나뉜 의견이 나올 것이다. 역설적으로 저 1%가 말해주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가 완전히 두 진영으로 갈려 있음을 방증한다.

 

사회가 존재함을 느낄 때

잠시 돌아가보자. 이번 선거 기간 한국 사회의 불길한모습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그림이 있다. 첫 번째는 강원도와 경북에서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산불이다. 울진의 산불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발생한 강릉은 방화였다. 방화범은 이웃이 자기를 무시해서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선거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가 말한 무시는 지금 한국 사회가 어떤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두 번째는 전직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고 그걸 공공연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은 다르다. 그들이 수행하는 업무의 특징은 그들의 얼굴이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정치적 중립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핵심적 안보를 다루는 사람들의 직업윤리와 관련된 문제다.

 

이 두 사건이 상징적인 이유는 사람의 행동에 제동이 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방화범과 같은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화난다고 호떡을 기름에 던져 상인이 다치거나 마스크를 쓰라고 했다고 운전기사를 습격하는 등 이미 한국 사회에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거기에 어떤 제동도 걸지 않고 있다.

 

국정원 직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정치적 신념이 어떠하건, 나라의 안보 상황에 대한 우국충정이 어떠하건, 직업윤리는 사람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아무리 그게 문제가 없거나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해도, 심지어 옳은 일이라 해도 멈칫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국충정이라는 이름으로 오죽하면나서겠냐는 말로 그들의 집단행동이 정당화된다.

이 두 가지 일은 한국 사회가 망가졌다는 상징이다. 사람은 평소 살아갈 때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다들 개인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의지와 생각대로 행동하고 말한다. 그러다 사회가 존재함을 느낄 때가 있다. 좋은 경우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경제적 이유로 곤경에 처했을 때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에 따르면 개인적 불행을 겪는 이가 몰락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장치가 작동할 때 사람은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여러 복지제도를 사회적 안전망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사실 이런 경우보다 사회의 존재를 흔히 느끼게 되는 것은 억압을 통해서다. 평소엔 별다른 제동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떤 말이나 행동이 을 넘을 때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사회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강한 압력으로 물러서게 된다. 자기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는 강력한 억압 장치다.

 

한국이 오랫동안 좋은 보호망으로서의 사회가 부재하고 부실했다는 것은 넘어가자. 반면 한국은 전자의 억압 장치로서 사회가 매우 발달한 곳이다. 심지어 시위하면서도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 버리지 않는 희한한사회였다. “○○일보가 보고 있어요라며 시위 현장에서 공중도덕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면 동료 시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시민은 휴지통을 찾지 못하면 손에 쓰레기를 들고 오랫동안 헤매면서도 쉽게 길거리에 버리지 못했다. 사람들의 높은 시민의식이라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가 그만큼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무장해제해도 살 수 있다는 믿음

그런데 안전망으로서의 사회가 부실한 가운데 후자로서의 사회도 무너져가고 있다. 이웃 주민이 무시한다며 방화한 것과 국정원 직원들의 집단 선언이 불길하게 느껴진 것이 바로 이 이유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양상 또한 심각해지고 있다. 많은 이가 나만 왜?’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다수의 사람은 불안해하며 사회의 존재를 불신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며 각자도생을 강화한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개인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무장해제하고 살더라도 별일이 안 벌어짐을 믿게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을 정치가 주지 못할 때 비극이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 기간 경북 포항에서 일어난, 손님이 택시에서 뛰어내려 숨진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다수 사람은 그 정도로 안전하지 못하다는 불안감을 느끼면 패닉에 빠지고 모두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동료 시민이 위협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 항의할 때조차 말과 행동에는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발언권과 행동에 권리가 없다는 것. 이것이 억압 장치로서의 사회가 하는 역할이다. 한 사회에 속한다는 것은 그런 형식을 배우고 따르는 일이다. 물론 이 형식은 그 정당성을 끊임없이 의심받으며 계속 수정돼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의 형식이 붕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의라는 이름으로도 결코 정당화할 수 없을 만큼 형식이 파괴되고 붕괴한다. 형식의 정당성에 도전하는 항의들도 항의의 형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적 항의는 그냥 분출되는 경우는 없다. 항의는 무질서해 보이는 그 순간조차 질서를 따른다. 반면 사회 붕괴란 일체의 형식을 갖춰야 한다는 의식 자체의 붕괴를 말한다. 걸러지는 것 없이 그저 분출된다.

 

말과 형식의 붕괴. 이번 선거가 어느 쪽이 당선되는지와 상관없이 불온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뜩이나 뜨거운 열기에 취해 극단적인 언설과 행동이 난무하기 쉬운 것이 선거와 같은 정치 페스티벌이다. 그렇기에 정치인은 득표라는 단기적 이익에 맞춰 극렬 지지자들의 형식 파괴에 취하거나 그것을 부추기기보다는 통제하고 제지해야 한다. 선거 같은 정치 과정에서부터 말과 행동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해야지만 발언권이 생기는 것을 정치인과 열렬 지지자들부터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 이후 사회를 구축하자는 정치의 말에 힘이 실릴 수 있다.

 

실망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후보자들부터 자신의 말과 행동에 형식을 부여하기는커녕 파괴를 통해 주목받으려 했다. 그 파괴에는 어떤 형식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파괴가 아니라 붕괴에 가까웠다. 지지자들의 형식 파괴를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기고 부추겼다. 한 현장에서는 흥분한 지지자들의 ○○○이는 죽여도 돼!”라는 고함이 내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말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라고 하는 것, 그것이 사회를 통해 통치하려는 선거에 나온 정치인의 임무인데도 그 현장에서는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 현장을 지나던 지인은 너무 섬찟하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유세 현장에서의 파괴 혹은 붕괴

아무렇게나 말하더라도 사회적 발언권이 생기는 것. 오히려 더 주목받고 권력까지 생기는 것. 이것은 사회의 구성원에게 매우 나쁜 신호를 보낸다. 동료 시민을 공격하고 사회를 파괴해도 된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발언이고 정치이고 권력이고 돈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미 정치에 정치의 형식이 작동하는 게 아니라 주목 경제의 논리와 형식이 지배하는 것이다. 정치의 자율성은 무너지고 주목 경제의 식민지가 됐다.

 

이것이 어떤 파괴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실히 보여준 것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마지막에 터진 의회당 습격 사건이다. 미국인들에게 이것은 그냥 폭력 사태가 아니었다. 그저 광기 어린 열렬 지지자들의 난동이 아니었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넘어 사회적 삶 자체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것은 정치 형식을 파괴한 트럼프식 정치의 당연한 결과였다.

 

선거는 끝났다. 그리고 이 선거 기간 형식 파괴의 뒷감당을 해야 할 때다. 통치자로서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사회 붕괴에 공안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개인은 각자도생을 위해 무장할수록 부족함을 느끼며 끝내 치안 강화를 바란다. 강력한 감시와 처벌을 요구한다. 이게 통치자가 정치 실수를 은폐하며 택할 수 있는 손쉬운 길이다. 물론 이 길의 끝은 동료 시민 간 더 큰 불신과 불안, 그리고 공안적 경찰국가의 탄생이 될 것이다.

 

좁지만 다른 길이 있다. 다시 시민들이 삶에 사회적 형식이 부과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통치자 스스로의 말과 행동에, 통치자 최측근의 말과 행동에, 그리고 통치자의 열렬 지지자들의 말과 행동에 형식을 요구하며 그것을 벗어날 경우 발언권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아래로부터의 직접민주주의니 시민 행동이니 하며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를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주목 경제와 결합한 팬덤 정치다.

 

정치를 타락시킨 주범이 된 팬덤 정치

한국 사회의 밀실화된 정치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준 팬덤 정치는 그 시대적 소명을 끝냈다. 지금 팬덤 정치는 그 자체로 주목 경제이며 정치를 주목 경제의 논리로 타락시키는 주범이 됐다. 자극적이어야 주목받을 수 있고 자극적이려면 더 과격하게 형식을 파괴하며 보는 이에게 쾌감을 줘야 한다. 이 때문에 팬덤 정치는 자신들이 숭배한다는 우상을 사실은 검투사로 콜로세움에 세운다. 정치적 삶의 형식을 파괴하며 이를 눈치챈 사람들은 정치로부터 도망가게 만든다.

 

다행히 이번 선거의 마지막에 한국 시민은 다시 뭉쳤다. 누가 보기에는 양쪽으로 똘똘 뭉친 진영 선거지만 그 이면에는 역대급 비호감 선거에서 난무하는 혐오와 과격 발언에 질려 정치로부터 탈주하던 중도층시민이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발길을 투표소로 돌렸다. 예상과 달리 투표율이 낮지 않았던 한 요인이다.

 

당선자는 발길을 돌려 투표소로 향한 이들, 정치의 파괴에 강력한 경고를 주고 저지하려던 시민들을 귀하게 여기고 이들에 근거해야 한다. 이제부터 통치이기 때문이다. 통치는 열렬한 지지자들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그게 사실은 통치자 자신을 콜로세움에서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사회는 통치자에게도, 시민들에게도 누군가의 돈벌이를 위한 콜로세움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한겨레21 : 2022-03-18

 

용산 시대말하는 권력의 자아도취

윤석열 당선자는 자신을 새 역사의 창조자며 메시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한 달 남짓한 기간에 헛돈을 펑펑 써가며 대통령실 용산 시대를 연다는 어리석고 무모한 발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윤 당선자가 보기에 청와대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작해 진보와 보수 대통령이 번갈아 제왕적 권력을 누린 전근대의 상징이다. 차제에 수치스러운 백 년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권력을 만들겠다는 사고는 가히 혁명적이다. 윤 당선자가 단 하루도 청와대에 갈 수 없는 사정은 새로운 공화국을 탄생시킬 원조라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독특한 소명 의식에 있다.

 

한없이 커진 욕망은 숱한 문제점을 보아야 할 시야를 흐렸고, 여러 의견을 경청해야 할 귀를 닫아버렸다. 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가 말한 권력의 전략적 자아도취현상이다. 일요일인 20일 오전에 진행된 윤 당선자의 대통령실 용산 이전 공식 발표를 보자. 집권과 동시에 용산 시대를 열겠다는 목표는 선명했지만 예산 조달과 국가 위기관리에 관한 문제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설명으로 퉁치고 말았다. 그가 집권한 이후 밀어붙이기식으로 진행할 국정 스타일의 예고편이다. 상식적으로 5월까지 국방부와 직속 기관, 직할부대, 경호처와 통신단 등 5천여명의 이사가 완료되어야 하는데 윤 당선자는 이사비용으로 496억원의 예비비만 쓰면 별 문제 없다고 말한다.

 

참으로 순진한 발상이다. 이 문제의 본질은 이사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 위기관리의 콘트롤 타워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느냐다. 청와대가 수십 년간 구축해온 국가 위기관리, 경호 상황관리 체계가 한 달 만에 용산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순 없다. 아마도 윤석열 대통령은 안보와 경제에서 혼란이 예상되는 집권 초, 가장 무능하고 불안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가 뒤섞이고, 순수 군사 시설인 합참의 지휘통제실과 지하 벙커를 대통령이 사용한다면 그 기능이 온전히 발휘되겠는가. 대대장의 지휘 시설에 사단장이 들어와 앉으면 지휘가 엉망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군 지휘부의 고유 공간을 대통령이 침해하면 위기관리의 전문성과 자율성이 상당 부분 침해될 것이다. 이런 문제는 회피하면서 저렴한 이사 비용을 강조하는 윤 당선자는 아직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는 자린지 모르는 것 같다.

 

시민에게 개방된 대통령실 바로 옆 건물에 절대로 개방될 수 없는 국방부와 합참이 계속 함께 자리 잡을 수는 없다. 당장 1년 내에 국방부, 합참, 근무지원단, 합동전투모의센터, 시설본부, 국방홍보원, 심리전단, 사이버사령부 등이 새로 입주할 건물을 짓거나 찾아야 한다. 특수한 방호 및 보안 시설과 정보시스템을 갖춘 새 시설 건립에 국방부는 5천억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고했다. 그런데 윤 당선자는 이를 외면하며 몇 번이고 이사비용 496억원만 강조했다. 국방 관련 기관 이전은 까다로운 국회 심의를 통과해야 하며, 특수정보를 제공하는 미국의 동의 없이는 동맹국의 연합지휘통제 시스템을 이전할 수도 없다. 아마도 미군은 상당할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윤 당선자의 대답은 아는 바 없다로 요약된다.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엉뚱하게 윤 당선자는 집무실을 광화문 외교부 청사로 옮기면 외교부는 어디로 가겠느냐는 친절한 배려를 보여주었다. 그보다 몇 배나 더 어렵고 규모도 큰 국방부에는 왜 그런 자상함이 없는지도 의문이다. 이렇게 눈과 귀가 꽉 막힌 권력의 자아도취는 직언할 줄 모르는 참모들과 융합되어 새로운 역사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일단 20일 발표로 용산 시대는 공식화 되었다. 새로운 정부의 모델과 권력의 질, 진화된 국가 위기관리, 공론의 거버넌스에 대한 통찰력도 없이 용산에 대해 뷰가 좋다”, “역사적 장소다”, “소통의 시민공원이 탄생한다는 한가한 소리로 국민을 기만하지 말라. “장소가 중요하다는 막연한 말로 새로운 대통령 시대가 탄생한다는 거짓말은 더더욱 하지 말라. 정부와 권력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빈곤하고,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지도자에게 있어 시민과의 소통은 기만적인 퍼포먼스일 뿐이다.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한겨레 :2022-03-20

 

 

 

풍수''안보'를 이겼다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 부재,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 타자에 대한 배려 부족, 무속과 역술에 대한 지나친 몰입. 대선 과정에서 윤석열 당선인을 반대한 사람들이 느낀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그의 부적격 사유들이다. 특히 무속·역술에 대한 지나친 선호는 국가 중대사를 비합리적으로 결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합리와 이성이 최고도로 작동해야 할 국가 운영에 비합리와 맹신이 개입하면 국가에 대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가 생각보다 일찍 현실로 나타났다.

 

청와대를 국방부로 옮기겠다는 계획은 상식적 사고의 눈으로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비합리적 결정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과 교감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청와대를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 등 윤석열 당선인이 2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청와대 이전의 명분은 막대한 예산 소요, 안보 시스템 교란 등 엄청난 혼란과 문제점에 비하면 합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윤 당선인은 '제왕적 대통령제와의 결별'을 외치지만 오히려 지금의 태도는 '제왕'의 모습 그 자체다. 천하를 손에 얻었다고 한껏 기고만장해 권력에 취한 왕의 모습이다. 국방부에 '강제 퇴거'를 명하는 고압적 태도부터 그렇다. "짐이 그곳에서 살아야겠으니 하루빨리 방을 빼도록 하라. 이것은 지엄한 어명이니라." 국방부 쪽의 고충 따위는 알 바도 아니다. 아직 군통수권자도 아니고, 현 정부와 협의도 없이 이런 지시를 내릴 법적인 권한이 없다는 지적 등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는다. 곁에서 부복한 신하들, 그리고 그동안 '비판언론'을 자처했던 보수언론들은 입을 모아 "폐하의 총명하신 결정이 국가의 큰 복이옵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린다. 앞으로 전개될 브레이크 없는 밀어붙이기 국정 운영이 상상 이상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윤 당선인은 청와대 이전의 명분을 국민과의 '소통'에서 찾고 있는데 정작 청와대 이전을 추진하는 행태는 '불통'의 극치다. 국가운영과 안보의 중추 시설인 청와대와 국방부를 한꺼번에 옮기는 일은 비할 데 없이 엄중한 국가 중대사다. 청와대 집무실은 윤석열 당선자 한 명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올 새 대통령들의 거처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졸속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 충분히 토의하고 국민적 합의 속에 진행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윤 당선인 쪽은 청와대 이전에 대한 여론조사도 한 차례 한 적이 없고, 그 흔한 공청회 한번 열지 않았다.

 

윤 당선인은 "용산 공원에서 시민과 소통" 운운했으나 이 역시 어불성설이다. 본질적으로 공원이니 시장이니 하는 곳에서 권력자가 시민들과 만나는 것이 실제로는 보여주기용 '소통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사람도 없다. 소통은 집무실의 위치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열린 마음'이 있으면 어디에서나 소통할 수 있다. 마음은 꽉 닫아놓고 소통을 말하는 것은 기만이고 사기다. 이런 일방통행식 국가 운영 행태로 협치와 상생, 화합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청와대를 국민의 품에 돌려드리겠다'는 말 또한 허점투성이다. 청와대 이전은 아무리 줄잡아도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1조원 가까운 예산이 들어가는 '대역사'(大役事). 군의 특수 방호·보안 시설과 정보 시스템을 갖춘 새 시설 건립에만 5천억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국방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했다고 한다. 이런 막대한 예산 투입을 단순히 "국민의 품" 운운으로 눙치고 넘어갈 문제인가. 청와대 터는 조선시대 이래 시민들의 공간인 적은 한 번도 없으니 사실 정확히 말하면 '되돌려준다'는 말부터가 어폐가 있다. 그러니 청와대를 돌려주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청와대 이전에 소요되는 막대한 예산을 아껴서 국민복지로 되돌려 주었으면 한다. 멀쩡한 궁을 놔두고 새 궁으로 옮기느라 백성의 고혈을 짜는 일부터 멈추는 것이 국민을 위하는 일이다.

 

윤 당선인의 '타자에 대한 배려 부재'는 이미 '열차 안 구둣발' 사건으로도 감지됐으나 실제 나타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국방부 퇴거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게 마치 생이빨을 무조건 뽑으라는 식이다. '군은 사기를 먹고 사는 조직'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군을 무참하게 만들어 놓고 무슨 군의 사기며 안보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청와대를 국방부로 이전하는 것의 문제점을 일일이 꼽자면 한이 없다. 아무리 따져봐도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이 두드러진다. 결국 풍수지리적 연관성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 터가 좋지 않다'는 말은 그동안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풍수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일찍이 "경복궁 북쪽 문인 신무문과 청와대 정문 사이에 난 도로를 경계로 하여 그 아래는 사람들의 거주처고 그 위쪽은 신령의 강림지다"고 말해 청와대 터 논쟁에 불을 당겼다. "청와대 터는 신사(神祠)를 지어야 마땅한 터"(김두규 우석대 교수) 등 청와대 흉지(凶地)론은 풍수 쪽 세계에서는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사실 그동안 역대 정부에서 청와대 이전을 검토한 배경에는 현재의 청와대가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지 않게 너무 폐쇄적인 공간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 말고도 풍수지리적으로 '나쁜 터'라는 인식도 깔려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이전' 보류를 발표하며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청와대를) 옮겨야 하는데 못했다"고 덧붙였다가 '풍수 논쟁'이 벌어진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런데도 역대 정부가 결국 청와대 이전을 보류한 것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난점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윤석열 당선인은 모든 시급한 현안을 뒤로 하고 청와대 이전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으니 여기에는 분명히 곡절이 있을 법하다.

 

윤 당선인의 부인 김건희씨는 <서울의 소리> 이명수 기자와의 '7시간 통화'에서 청와대 영빈관 이전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이 기자가 "내가 아는 도사 중에 총장님이 대통령 된다고 하더라, 근데 그 사람이 청와대 들어가자마자 영빈관을 옮겨야 한다고 해"라고 말하자 김씨는 ", 옮길 거야"라고 답한다. 이 기자가 거듭 확인하자 ""이라며 확신에 찬 답을 되풀이했다. '청와대 터가 나빠서 역대 대통령이 불행한 말로를 맞았으므로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는 풍수인, 도사, 지관들의 주장에 동조해 이를 실행에 옮길 생각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번 대선은 결과적으로 김건희씨의 '예언'이 맞았다. 그는 "내가 웬만한 무당보다 낫다" "이번에는 우리가 된다"고 미리부터 승리를 예언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러니 무속, 역술, 풍수 등의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윤 당선인 부부의 지난 행적을 보면 중요한 고비마다 역술인, 무속인 등의 '컨설팅'을 받은 흔적이 역력한데 청와대 이전에 대해서도 강력한 조언을 받았을 가능성이 짙다.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 역시 "누가 봐도 용산으로 간다는 것은 풍수지리설을 믿는 것"이라며 "개인 살림집을 옮기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집무실을 옮기는데 무슨 풍수지리설 따라가듯이 용산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개탄했다.

 

윤석열 당선자는 20일 기자회견에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말 역시 풍수지리적 인식을 담고 있다. 사람이 어느 곳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생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것은 맞지만 '의식이 지배를 당한다'는 말은 의미가 사뭇 다르다. '지리적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고, 기운을 결정하고, 결국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이 바로 풍수지리학의 뼈대다. 현재의 청와대 터를 두고 "대통령이 생활하는 관저를 풍수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곳에 머물게 되면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밖으로 나가기 싫어지고, 은둔하게 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폐쇄적인 성향으로 변하게 되며, 우울증 등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조수범 단국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과 교수) 등의 주장이 있는데, 윤 당선자는 이런 말을 깊이 신봉하고 있는 셈이다.

 

용산이 청와대 새 터로 낙점된 것도 풍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용산이 "수태극(水太極)의 땅"으로 '명당'이라는 주장은 예로부터 많았다. "()도 임금이고, ()도 임금으로 대통령 기운에 맞는다" "국방부 터는 용산의 내청룡(內靑龍)에 해당돼 권력·명예의 기운이 강한 땅이다" 등 풍수지리 용산예찬론이 적지 않다. 풍수지리학자 지창학씨는 한 걸음 나아가 "용산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용산을 지배했던 세력이 한반도를 좌지우지했으며 강대국이었다. 이번 대통령부터 용산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우리가 강대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윤석열 당선인과 김건희씨는 아마도 이런 주장에 솔깃했을 수 있다. 지금의 청와대를 떠나 '새로운 왕조시대'를 열겠다는 야심이 청와대 용산 이전의 밑바탕에는 꿈틀거리는 듯하다. 대선에서 승리는 했지만 도덕적·법률적 약점이 많은 상태에서 ''를 피하기 위해서는 '터가 나쁜' 청와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할 법도 하다.

 

윤석열 당선인과 김건희씨는 술사, 도사, 지관 등의 말을 맹신한 나머지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이전에 사력을 다해 뛰어들었을 수 있다. 그러나 '풍수의 진짜 고수'들은 술사나 지관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말한다. 청와대가 나쁜 터라는 문제를 처음 제기한 최창조 교수는 저서 <땅의 눈물 땅의 희망>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수가 진정 중시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다. 땅은 그저 무대일 뿐이다. 무대는 중요하다. 그러나 무대가 좋아도 엉터리 배우들이 비윤리적 각본을 가지고 공연을 한들 좋은 연극이 될 까닭은 없다. 반대로 훌륭한 배우들이 인간적인 각본을 가지고 연기를 한다면 비록 무대의 품격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크게 비난받을 연극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죄 없는 무대를 덧대어 그 터가 나쁘니, 살이 끼었느니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엉터리 배우들이 죄 없는 무대 탓을 하면서 좋은 무대로 옮겨서 비윤리적 각본을 가지고 공연을 하겠다고 나선 형국, 지금 윤 당선인이 보이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김종구 (언론인) | 프레시아 2022.03.21.

 

 

윤석열 당선인의 가능성 제로정치

청와대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고”(2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기존 청와대로 윤석열 당선인이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16일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

 

윤석열 당선인(이하 윤석열)이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을 서울 용산의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20일 기자회견 직전까지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속도조절론이 흘러나왔으나 윤석열은 돌파를 택했다. 대통령 집무실이 국방부로 옮겨가고 국방부·합동참모본부가 연쇄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 문제를 여기서 거론할 생각은 없다. 안보공백 우려도 마찬가지다. 관심 갖는 건 차기 대통령의 정치하는 방식이다.

 

일반 가정에서도 50일은 이사하기에 빠듯한 시간이다. ‘용산행을 공식화하되, 이전 작업은 단계적으로 진행해 올해 안이든 내년 5월까지든 마무리하겠다면 이해 못할 사람이 드물 터다. 그런데 510일 임기 첫날을 용산에서 시작하겠다고 한다. 국방부 말을 빌리면 짐 빼는 데만 20일가량 24시간 엘리베이터 4대를 풀가동해야한다. 북한도 울고 갈 천리마식 속도전을 펼칠 참이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은 자연스럽다. 회견에서도 이 부분에 질문이 집중됐다. 윤석열은 시간이 걸리면 결국 (청와대에)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가서 근무를 시작하면 여러 가지 바쁜 일들 때문에 이전이 안 된다고 했다.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권한이 제한적인 당선인 시절에도 밀어붙일 수 있다면, 모든 권한과 권력이 집중되는 대통령 임기 초에 못할 일이 뭔가. 무속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건 무속 관련성이 아니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절차를 제대로 밟았는지, 밟고 있는지, 밟을 것인지다

 

윤석열은 여론이 안 좋으면 철회할 계획도 있느냐는 질문에 여론조사에 따라서 하는 것보다는, 정부를 담당할 사람의 철학과 결단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기자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내려놓겠다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강화해 사용한다는 지적이 있다고 하자 제왕적 대통령제를 내려놓는 방식을 제왕적으로 한다는 말씀인데, 결단하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답을 내놨다. ‘결단이란 말을 되풀이했다. 결정적 힌트다.

지금 그는 용산 시대를 열겠다는 소명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공화국을 이끌 새 지도자에게 소명의식은 필요하다. , 정치가 소명의식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실패한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막스 베버의 유명한 비유를 소환한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다”(<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 이 책의 번역자이자 40여년간 베버 연구에 천착한 전성우 한양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널빤지란, 온갖 종류의 복잡다기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뒤엉킨 현실이다. 더 들어보자. “우선 이 널빤지에 구멍을 뚫겠다는 열정이 있어야 정치를 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 널빤지를 단칼에, 즉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는 독선으로 뚫어버리겠다고 한다면, 그는 이 널빤지 자체를 깨어버릴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윤석열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널빤지를 강하게, 단칼에 뚫고자 한다. 하여, 공청회나 국민과의 대화 같은 여론 수렴 과정은 가볍게 건너뛴다. 언론사 여론조사 결과 등 국민 반응을 기다릴 생각도 없다. 주권자의 대표인 국회와 협의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물러갈 정부에서 예비비만 받아내면 될 뿐이다. 소통을 위해 이전한다더니 소통은 온데간데없다. ‘균형감각결여다. 자칫하면 널빤지 자체가 깨질 수 있다.

 

정치는 밀어붙여서 되지 않는다. 아니, 밀어붙일수록 반작용이 커지는 게 정치다. 검사는 공소장으로 평가받지만, 정치지도자는 의도·과정·결과를 총체적으로 평가받는다.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싶은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고리를 끊고 싶은가? 길은 명확하다. 510일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철회하고, 일단 청와대로 들어간 뒤 차근차근 준비하면 된다. 윤석열은 지난 18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첫 회의를 주재하며 국민 목소리를 경청하고 국민 눈높이에서 문제를 풀어가길당부했다. 그것이 정도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번에만제왕적 방식을 사용하겠다는 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번에만독재를 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 민주주의는 없다. ‘절대안 되는 정치, ‘가능성 제로의 정치도 없다.

김민아 논설실장입력 : 경향 2022.03.21.

 

9·11의 백악관, 윤석열의 청와대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밀어붙이는 대통령 집무실의 국방부 청사 이전에 대해 전직 국방장관과 합참의장들도 정부와 군 지휘부를 동시에 타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목표가 된다며 반대했다. ‘9·11 테러가 겹쳐졌다.

 

알카에다의 20019·11 동시 테러 때 공격받은 목표물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 펜타곤이었다. 실패한 목표물도 있었다. 백악관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4대의 비행기 중 1대는 워싱턴으로 날아오던 중에 펜실베이니아 섕크스빌에 추락했다. 기내의 승객들이 제압하려 하자, 테러리스트들이 여객기를 추락시켜 버렸다. 워싱턴에서 약 200거리였다. 여객기를 가속하면 10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추락한 여객기의 테러리스트들은 백악관이나, 상황을 봐서 의사당을 공격하려고 했다. 여객기의 승객들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9·11 동시 테러에서 가장 비판받은 지점은, 쌍둥이빌딩이 공격받는 초유의 비상사태가 발생하고 거의 한시간이 지났는데도 미국 국방의 지휘부로 최고 보안 대상인 펜타곤이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민간 여객기의 공격에 허망하게 당했다는 것이다. 추락한 여객기가 계획대로 워싱턴으로 날아왔다면 백악관 역시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백악관과 펜타곤이 같은 공간이나 인접한 장소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그날 미국의 전쟁 지휘본부는 상당 기간 완전 먹통이 됐을 것이다. 국방부를 옆으로 밀어내고 대통령 집무실을 꽂아넣겠다는 발상을 놓고 9·11 테러의 교훈까지 끌어대는 것은 민망한 일이기는 하다.

 

물론 9·11 테러의 교훈은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민간 여객기로도 세계 최강국의 최고 안보시설물들이 공격당할 수 있다는 안보의 불가측성이며, 백악관 등 미국 지도부가 그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는 것이다. 안보 위기를 안보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이데올로기가 결부된 대외정책의 관철 기회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은 9·11 테러 당일 알카에다가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텅 빈 훈련장을 공습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며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오콘의 핵심인 더글러스 파이스 국방차관은 9·11 테러 당일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던 기내에서 후세인을 타도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가, 동석한 존 애비제이드 대장한테서 후세인은 아니다, 알카에다와 관련이 없다는 반박을 받기도 했다. 9·11 테러 발발 뒤 일주일 동안 부시 행정부의 고위 외교안보회의, 이른바 전쟁위원회9·11 테러나 알카에다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라크 응징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결국 아프간 침공을 우선시하기로 결론이 났으나, 이라크 전쟁은 9·11 테러 당일 결정된 것이나 진배없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미 자유주의 정권을 수립해서 중동을 바꾸겠다는 중동 개조론9·11 테러 대책의 결론으로 둔갑했다. 그 산물인 이라크 전쟁이 미국에 어떤 재앙을 불러왔는지는 거론할 필요도 없다.

 

부시 행정부는 9·11이라는 위기 앞에서 즉각 이라크를 조건반사처럼 끄집어냈다.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장악하고 있던 네오콘의 머리에 뿌리박힌 미국의 가치, ‘반미 국가에 대한 혐오로 채워진 우파 이상주의가 그런 조건반사를 일으키게 했다.

 

부시 행정부는 9·11이라는 위기가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는 이유라도 있었으나, 윤석열 당선자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위기를 자초하는 것은 도대체 그 이유를 알기 힘들다.

 

부시 행정부 네오콘들의 머리에 우파 이상주의가 박혀 있던 것과 비슷하게, 윤 당선자와 핵심 측근인 윤핵관들의 머리에는 용산으로 가야만 하는 풍수와 도참사상이 박혀 있다는 말인가?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9·11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는데, 윤핵관들은 청와대 이전으로 위기를 만들어서 기회로 삼으려는 것인가? 대선에서 승리한 당선자인데도 지지율이 부진하니, 이걸로 당선자의 밀어붙이기를 보여줘 정국을 장악하려는 의도인가?

윤 당선자는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겠다며 더 이상 청와대는 없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이 말이 총각 자취방 이사하듯이 감행하는 그의 집무실 이전 구상보다도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청와대란 그저 대통령 책상이 있는 사무실이고, 5년간 자신이 마음에 들어 써야 할 개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청와대는 없고, 윤석열의 집무실만 있을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한겨레 :2022-03-21 1

 

 

''국방부 강제퇴거 사건', 그 총체적 난맥상

 

하승수 뉴스타파 전문위원 /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변호사)

 

 

전쟁, 혹은 진실의 순간

진부한 말이지만, 전쟁은 악 그 자체다. 특히 침략 전쟁을 그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 그 침략을 미국이 범하든 러시아가 범하든 같은 태도로 침략에 대한 반대를 외치는 것은 타당하다. 한데 범죄인 전쟁은, 동시에 진실의 순간이기도 하다. 여태까지 각종의 선전 등으로 가려진 부분들이 전쟁의 순간에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가령, 미국의 이라크·아프간 침공은, 미국의 상대적인 군사적 우위와 함께 총체적 헤게모니의 쇠락도 동시에 여실히 보여주었다. 미군은 정규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이라크·아프간 거점들의 점령에 성공했지만, 그 두 국가에서 안정적 친미 정권의 수립에 실패하여 결국 점령을 종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전쟁 덕에 우리는, 미국이 비록 여전히 세계 군사 최강대국이지만, 북미와 유럽, 그리고 일본·한국 등 그 핵심 영향권 이외의 중동 같은 주요 지역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이미 3주 이상 지속된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첫째, 러시아군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총동원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징병제와 모병제의 혼합으로 운영되는 상비군은 우크라이나와 같은 세계 22위의 중간 규모 군대도 속전속결로 이기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소모전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그다지 우수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비록 정확한 숫자는 아직 없지만, 서방 각국 군사 전문가들의 추측을 종합해보면 지난 3주간의 러시아 쪽 인명 손실은 이미 약 5천명 정도나 됐다. 이는 8년간의 이라크 침공이 초래한 미군 인명 손실 규모와 비슷한 숫자다. , 러시아군은 여전히 기술보다 병사들의 희생에 더 기대는, 20세기 중반과 같은 구식군대다. 침략 전쟁의 명분도 매우 약해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돼 있다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우리에게 중요한 포인트는, 이와 같은 군대로 러시아가 추가적 영토 팽창을 도모한다는 게 아마도 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이 전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러시아의 주요 동반자인 중국 역시, 이 침략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러시아를 관찰하고 나서는 대만 침공 등 군사 모험주의 노선을 좀처럼 쉽게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최근 미국의 경쟁국으로 부상했다지만, 그 군사력은 여전히 미국에 크게 밀리는 편이다.

 

둘째, 군사력 차원에서 많은 약점을 드러낸 러시아가 외교전에서는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는가? 러시아의 군사력은 생각보다 우수하지 못한 반면, 침략에 대한 외교적 반응은 생각보다 획일적이지 않았다. 이 차원에서 지난 2,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규탄 결의를 둘러싼 유엔 총회의 투표 결과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가 그 결의를 지지했지만, 중국과 인도, 이란, 남아공 등 주요 비서구권 대국 내지 중진국들이 기권을 했다. , 러시아와 서방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를 제외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의 주요 국가들은 차라리 중립에 더 가까운 입장을 취한 것이다.

러시아가 역사상 최고 수위의 서방 제재에도 불구하고 계속 대서방 대결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중국이나 인도 내지 터키나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 남미 등을 통해서 제재를 우회할 수 있을 것으로 여전히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과 같은 미국의 동맹국마저도 대러시아 제재에 불참했다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 군사적으로는 밀리지만, 다극화돼 가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미국의 경쟁국들이 상당히 높은 수위의 대미 도전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 전쟁에서 눈으로 확인했다.

 

셋째, 정보전이나 여론전에서 러시아는 완벽하게, 여지없이 완패했다. 독재국가에서 권력에 대한 아부비위 맞추기효과라고나 할까? 지도부와 국가의 수령이 기다리고 기대했던 이야기, 즉 우크라이나 군대와 민간인들이 친서방 정책에 염증을 느껴 러시아군을 해방군 대접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정보요원들이 아낌없이 상부에 제출했던 모양이다. 알고 보니 저들이 작성한 분석이나 보고서들은 그저 소설수준이었다. 차라리 러시아 침공을 예고한 서방 정보기관들이 훨씬 더 높은 전문성을 드러냈다. 러시아의 전쟁 프로파간다는, 그 정보력만큼이나 믿지 못할 정도로 초라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를 가족으로 둔 유대인을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를 탈나치화하겠다든가,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자적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을 한다든가, 아니면 미국 전문가들이 우크라이나에 실험실을 차려 오로지 러시아 민족만을 겨냥한 특수 생물학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공상과학소설(SF) 같은 이야기는, 애당초에 서방권이나 한국과 같은, 개방돼 있는 여론 시장에서 먹혔을 리가 만무했다.

 

러시아의 국가 선전기관들이 주로 유치한 소설 쓰기나 하는 이유는, 그들의 국내 여론 시장이 준폐쇄 시장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일부 고학력 중산층은 서방 등 외국 매체를 종종 인터넷으로 접하지만,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한다는 60~65%의 러시아인들은 주로 러시아 매체에만 노출돼 있다.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정보의 거대한 캡티브 마켓(captive market), 즉 경쟁자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독점 시장을 가진 중국의 국가 프로파간다도, 서방이나 한국에서는 거의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역시 권위주의 국가들의 주요 약점 중의 하나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미국 패권 쇠락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군사적으로 미국보다 열세지만, 미국의 주요 경쟁국인 중, 러 가운데 비교적 약세인 러시아는 이제 미국과 유럽의 하위 파트너를 직접 군사적으로 침략할 정도로 미국 패권의 상대적 약화에 고무된 것이다. 전세계의 부정적 여론, 그리고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이 침략이 경제적으로 가능해진 이유는, 다극화된 세계에서 서방을 대체할 만한 파트너들을 구할 수 있겠다는 러시아 쪽의 기대 때문이다.

 

이 국면에서 세계 시민사회에 절실한 것은, 헤게모니 다툼의 어느 한 을 드는 것보다는 자기 조국을 용감히 지키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그리고 반전과 독재 타도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하는 러시아 활동가들을 지원하고 지지해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푸틴의 침략을 격퇴하고 독재를 끝장낼 힘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의 민중에게만 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2-03-22

 

제왕적 당선자의 또 다른 구중궁궐

정권교체기의 정부 인수인계 작업은 힘들 수밖에 없지만, 이번처럼 스스로 문제를 키우는 인수위는 처음 보는 거 같다. 이명박 인수위 때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오륀지발언이 실소를 자아냈지만, 적어도 국정 운영에 대한 기대치까지 낮추지는 않았다. 그런데 윤석열 인수위는 어떤가. 지난 21일 리얼미터 조사에서 윤 당선자가 국정 운영을 잘할 것이란 기대감은 49.2%, 한주 만에 3.5%포인트 떨어졌다. 출범도 하기 전에 지지율이 50%를 밑도는 건 전례 없는 일이다. 청와대 이전에 관한 윤 당선자의 고집이 국민 기대감을 낮춘 결정적 요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지난 대선 결과가 말해주듯이 정치적 분열과 갈등이 너무 심해서 이것이 윤 당선자 지지율에 그대로 투영된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윤 당선자 스스로 약속했듯이, 모든 국민을 포용하려 애쓰고 반대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닐까. 비리로 구속된 자기편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라고 요구하는 걸 국민 통합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다.

청와대는 제왕적 권력의 상징으로,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윤석열 당선자는 용산으로 급히 대통령실을 이전하려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 제왕적 문화에 젖어들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윤 당선자는 구중궁궐이란 단어에 얽매여, 해방 이후 청와대에 쌓인 전직 대통령들의 유산이 대통령실 기능을 어떻게 확장하고 보완해왔는지 전혀 보지 못하는 듯하다. ‘제왕적 대통령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이 제왕적 당선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2003년 문을 연 청와대 상황실이 대표적이다. 이 상황실은 청와대 비서동 부근의 지하벙커에 만들어졌다. 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 공격에 대비해 마련한 것이다. 2000파운드 폭탄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었다. 오랫동안 버려졌던 벙커가 있었기에 첨단 상황실을 훨씬 적은 예산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실에선 군·경찰·소방본부 등 22개 기관의 주요 정보가 실시간 취합되지만 곧 문을 닫아야 한다. 용산 국방부 상황실을 새로 활용한다지만, 여기엔 군 관련 정보만 들어올 뿐이다. 기능을 업그레이드할 순 있겠지만, 그 기간 동안 국가위기 컨트롤타워로서 대통령실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사이에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50일 만에 집무실 책상과 캐비닛은 옮길 수 있을지 모르나, 대통령의 긴박한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수십년간 구축해온 경호·군사·지휘 시설을 그렇게 단기간에 옮기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믿음으로 사안을 판단하려 한다. 권력자의 오만은 여기서 싹튼다. 박근혜 대통령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세월호 7시간 공백이 그런 경우다. 그날 박 대통령은 본관 집무실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날뿐 아니라 외부 행사가 없는 1주일에 사나흘은 관저에서 혼자 업무를 봤다. 왜 그랬을까.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청와대 본관엔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함께 있었다. 어린 시절 그걸 보면서 자란 박근혜 대통령은 관저가 곧 집무실이란 인식을 가졌던 게 아닐까.

 

많은 이들이 윤 당선자에게 우려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건, 평생 누군가를 수사하는 검사로만 살아온 경력 때문이다. 가식적이란 비난을 받긴 해도 국민과 여론을 앞세우는 정치인으로서 경험이 없다. 그런 게 오히려 솔직함으로 어필해서 대선 승리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정 운영은 검찰 수사와는 다르다. 일단 목표를 정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죄 혐의를 입증하려 애쓰는 수사와 달리, 정치는 국민 뜻에 따라 때로 물러서고 때론 멀리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갈등을 줄일 수 있다. ‘광화문 집무실이 어렵다는 걸 깨닫고 주저없이 용산으로 방향을 튼 것은, 애초 수사에서 진전이 없자 별건 수사로 피의자를 옥죄는 검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청와대를 구중궁궐로 만든 건 바로 사람이다. 지금 인수위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집무실 이전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걱정을 솔직하게 전달하기는커녕, 당선자의 굳은 의지를 칭송하고 반대는 곧 대선 불복이라며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윤핵관들로 넘쳐난다. 이렇게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선 청와대를 용산 아니라 강남 한복판으로 옮겨도 구중궁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제왕의 독선은 그런 환경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라 결국에는 대통령의 마음을 잠식하고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박찬수 | 대기자 한겨레 2022-03-23

 

 

기레기의 오만, 깨시민의 자만

옹근 20년 전 이맘때다. 노무현 바람이 솔솔 일었다. 그 바람을 일으킨 노사모에 경의를 표하며 쓴다. 아홉 달 전이다. 대선 정국에서 조국 전 법무가 회고록을 내자 문파는 책 보급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나섰다. ‘조국 사태당시 국민과 청년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그러자 문파는 송 대표의 사퇴를 요구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선을 전망했다.

 

명토박아둔다. 내년 봄까지 문파가 지금처럼 행동할 때, 민주당은 정권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문파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대선 후보들 흠집 내기를 이어간다면 정권은 벅벅이 바뀐다. 그럼에도 확증편향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면 하릴없는 일이다.”(검찰개혁의 산, 언론개혁의 길).

 

그랬다. 강성 문파의 성찰을 기대했다. 하지만 험한 댓글들이 달렸다. “국민의힘이 정권 잡아야 논평한답시고 밥벌이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비아냥, “그대도 강준만이랑 함께 강단을 떠나는 게 좋겠어. 언론개혁 차원에서라며 조선일보를 쇼파에 편히 앉아 탐독하는 것으로 오늘 세상을 다 알았다 착각하지 말고, 그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이들이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다는 걸 견지하라는 훈계도 있었다.

 

자만심이 뚝뚝 묻어났다. 굳이 댓글까지 소개하는 이유다. 문파 일각의 날 선 공세는 처음이 아니었다. 20202KBS 저널리즘토크쇼에 출연하며 나는 평생 가장 심한 모욕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일보와 다를 바 없다며 질펀한 인신공격이 빗발쳤다. 사실 관계를 설명해도 들으려하지 않았다. 저널리즘 비평의 양념이 아니라 비평을 훼손하는 자가당착이었다. 문파의 인신공격이 이어지자 제작진이 흔들렸다. 언론을 바로 세우는데 관심 있는 후배들 돕겠다고 출연 요청에 응했다가 짐이 된 꼴이었다.

 

개인적으로 의미가 컸던 날이었기에 시대가 건네는 독특한 선물로 여겼다. 다만, 나라의 내일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깨시민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자 책을 구상한 이유다. 자유언론실천재단이 제안한 조선일보동아일보 평전을 먼저 쓴 뒤 작심하고 기레기의 오만, 깨시민의 자만을 주제로 미디어리터러시의 혁명을 썼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일까, 동과 공영방송은 물론 종합일간지 어디서도 단 한 줄 소개조차 없었다. 깨시민들의 생각이 한 단계 더 나아가지 않으면 역사적 반동을 맞고 이 나라의 미래가 어둡게 된다는 절박감으로 썼기에 안타까웠다. 문파의 자만심이 불러올 위험을 경계한 책이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를 터였다.

 

불행히도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강성 문파는 끊임없이 문재인만 비호했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대선 후보에 흠집 내기를 이어갔다. 심지어 서초동 촛불집회에 가장 앞장섰다고 자부하는 일부 문파들은 민주당 후보 비난에 그치지 않고 국힘당 후보 쪽으로 옮겨갔다. 그때마다 조선일보는 개개인을 크게 부각하며 사실상 선거운동을 벌였다. 중앙일보는 대선이 끝난 뒤에도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서초동 촛불집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정부에 등을 돌렸는데 거기에 앞장섰던 강성 문파의 일부가 윤석열을 만나 촛불을 사과하는 풍경은 생게망게했다. 그가 문재인의 검찰총장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에 색깔론과 아파트값 음모론을 편 국힘당 후보였음에도 그랬다. 노사모를 언론개혁과 정치개혁의 주체로 내내 추억해왔기에 더 씁쓸했다.

 

그렇다. 20년 전 김대중 정부에 실망한 사람들이 대선 패배를 예감하고 있을 때 노무현 바람을 일으킨 사람들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노사모는 역사와 정치의 주체가 민중임을 새삼 깨우쳐주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오늘, 노무현처럼 문재인도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지금, 꾹꾹 눌러 적는다. 현실을 학습하지 않으면 누구든 미래가 없음을. 나침반 바늘은 북극을 가리키려 끊임없이 떨고 있음을, 기레기의 오만을 깨시민의 자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2.03.28.

 

 

아니 그건 말이 안 돼, 한국이?

보수 정부가 들어선다 해 여성의 삶이 돌연 추락하진 않는다. 정권이 재창출됐더라도 불법 임신중절약을 먹고 조산한 아이가 방치되어 사라지는 일은 발생했겠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3년째 입법 조치, 중절약 유통 하나 되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를 죽였다, 20대 여성 혼자 호된 매질을 감당 중이다.

 

한국 사회는 어쨌건 전반으로 발전해왔다. 2~3년 새 높아진 국격은 이전 국외를 가본 이들에게 마치 다른 나라 얘기처럼 감각될지 모른다. 건축가인 말레이시아 지인과 소식을 나누다 5명 중 1명이 코로나에 감염된 사정을 전하자 그가 되물었다. “아니 그건 말이 안 돼, 한국이?”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받는 무참한 성적은 따로 있다. 여성가족부가 여가부 폐지공약보다 더 끔찍해할, 그래서 박근혜 정부는 티에프(TF)와 목표 점수까지 세웠던, 그러든 말든 다수 남성은 믿지 않겠다는 희한한 수치들. 세계경제포럼(WEF)이 해마다 발표하는 성 격차지수’(Gender Gap Index). 경제·정치·교육·건강 부문별 남성의 기회나 지위를 1점 삼고 여성의 수준을 상대 계량해 각 국가 내 젠더 차별을 드러낸다. 잘사는 나라도 남성이 다 해먹으면 0, 못사는 나라도 성별 몫이 균등하면 1점 만점이다. 해서 점수엔 표정이 있다. 남녀가 함께 누려 행복하면 기쁜 1, 같이 못 누려 같이 불행하면 슬픈 1점이랄까.

 

코로나 팬데믹 1년을 보낸 20213월 발표된 한국의 성 격차지수0.687점으로 156개국 중 102위였다. 남성이 누리는 기회선진국이 되었으니 행복이라 쳐보자68.7%만 여성 몫이란 얘기다. 점수는 줄곧 오른 편이다. 다만 첫 발표였던 200692, 이명박 정부 뒤인 2012109, 박근혜 정부 뒤인 2017118위였으니 다른 나라들 젠더 격차가 좀 더 해소된 모양이다.

 

한국이 가장 취약한 과목이 경제 부문이다. 남녀 노동참여, 임금격차, 공직·기업 고위직 실태 등이 합산된다. 특히 공직·기업 고위직 점수는 십수년 요지부동 바닥권(2021년치 134)이다.

이다지도 후진 나라인가, 한국이. 아니다 말하는 데이터는 많다. 미국 연구기관 소셜 프로그레스 임페러티브’(SPI)가 해마다 내놓는 사회발전지수도 그중 하나다. 기본 욕구·웰빙·기회 부문 50여가지 지표값을 종합한다. 지난해 한국은 세계 17위다. 168개국에서 한국을 앞선 데는 유럽 일부와 일본,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뿐이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경제강소국 싱가포르보다 우리가 낫다고 소셜 프로그레스 임페러티브는 말한다.

 

17위 한국이 어중간 80위 밖으로까지 밀려난 지표는 딱 3개다. (악명 높은) 미세먼지(96) 외 정치권력에서의 성평등(102), 성취에서의 성평등(106).

17위 한국의 청년발전지수(15~24살 대상, SPI의 별도 보고서)만 보면 22(전체 163개국)로 내려간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싱가포르와는 위아래가 바뀌고, 그 사이 동유럽 국가도 낀다. 80위 바깥의 지표도 6가지로 늘고, 격차는 훨씬 벌어진다. 정치권력에서의 성평등(96), 의회 청년 비율(104), 자유로운 삶 결정(113), 공기질 만족도(115), 성취에서의 성평등(117), 교우 관계의 기회(138).

 

즐비한 세가지 지수의 함의 하나를 추리면 이렇다. 한국인 삶의 평균 수준, 그로 투사될 이른바 선진국격은 여성, 특히 미래 여성세대의 기회를 희생시키며 구축된다.

통계는 개인을 묻고 사연을 덮는다. 지난 대선일 지나 새벽 3시 반 너무 끔찍하네요외마디 문자를 보내온 20대 여성의 마음도 담을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젠더 공약이 혹여 어떤 평균값에 기댄다면, 성평등 특화 부처나 정책의 필요성도 저 평균값에서 구해지고, 더 많은 필요들이 숨은 디테일, 저마다 삼킨 사연들에 있다.

 

최선을 다해 여가부를, 여성할당제를 폐지한다는 정권에서도 성적표는 국민에게 발부된다. 직선제 이후 대개 정치적 뒷바라지만 하던 50~60대 대통령 아내들과 달리, 최초의 만 40대 커리어우먼을 퍼스트레이디로 맞는 2022년이 충분히 화제가 되질 못하는 봄을 건너는 중이다.

임인택 | 스페셜콘텐츠부장 한겨레 2022-03-28

 

 

검찰의 시간이 오고 있다

검찰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정권 이양기에 때아닌 대형 사건 수사에 속도를 내면서 분주한 모습이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첫 번째 검찰 인사가 마무리되면, 준비 기간을 거쳐 주요 사건 수사를 본격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금은 정권 교체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대형 수사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수사의 칼날이 벌써부터 문재인 정부를 향한다는 점에서 검찰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와의 코드 맞추기에 공을 들이는 모습도 감지된다.

 

서울동부지검은 지난 25일 산업통상자원부를 전격적으로 압수수색한데 이어, 28일에도 산업부 산하 공공기관 8곳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이른바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서다. 이 사건의 핵심은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산업부가 탈원전 정책에 반대하는 산하 기관장의 사직을 압박했다는 의혹이다.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이 20191월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 등을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는데, 서울동부지검은 캐비닛 속에 묵혀둔 이 사건을 32개월 만에 꺼내 든 것이다.

 

검찰은 늘 그렇듯, ‘원칙대로 수사하고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산업부 사건과 유사한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대법원 판단을 기다렸고, 이 의혹의 정점에 있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지난 1월 징역 2년을 확정받은 만큼, 산업부 수사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비슷한 사건에 대한 사법적 최종 판단이 내려지고, 대선 기간에는 선거 개입 논란이 우려되는 탓에 수사에 착수하지 못했으니, 선거가 끝난 뒤 수사에 나섰다는 설명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왜 꼭 지금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32개월을 묵혀왔는데 앞으로 새 정부 출범까지 남은 40여일은 왜 못 참은 것일까, 새 대통령 취임 전에 서둘러 강제 수사에 나선 것은 새 정부에서 수사가 시작되면 표적·보복 수사라는 비판을 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삼성 관련 수사도 검찰이 선제적으로 윤 당선자의 의중을 받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서울중앙지검은 일감 몰아주기 혐의로 고발된 삼성전자와 삼성웰스토리를 28~29일 압수수색했다. 삼성웰스토리는 급식 사업을 하는 삼성 계열사다. 주목할 점은 수사 자체가 아니라, 검찰이 수사에 나선 시점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이 사건을 검찰에 고발한 것은 지난해 6월이다. 검찰은 지난 아홉달 동안 사건을 묵혀두다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에서 이기기 무섭게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윤 당선자는 대선 후보 시절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에 대해 특수관계로 설립한 회사에 일감을 집중적으로 몰아주는 문제는 분명히 법에 저촉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강력한 법집행을 하는 게 맞다고 말한 바 있다.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취임도 하기 전에 납작 엎드려 대통령 당선자 심기를 살피며 코드 맞추기에 나선 검찰이 새 정부에서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 공정성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윤 당선자는 불과 1년여 전까지만 해도 검찰총장이었다. 검찰 장악력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법전에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검찰 위계를 암묵적으로 규율하는 검사동일체 원칙이 대통령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검찰총장이 아닌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대통령-검사동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이라는 게 잡으면, 우리가 안 시켜도 경찰들이 알아서 입건한다. 그게 무서운 거지.” 대선 기간 공개된 이른바 ‘7시간 통화녹음에서 윤 당선자 부인 김건희씨가 한 말이다. 김씨의 말 가운데 경찰검찰로 바꾸면, 작금의 현실이 오버랩된다. 김씨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권의 시간이 다하면, 검찰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적 순환고리다.

다시, , 검찰의 시간이 오고 있다.

김경욱 기자 ㅣ법조팀장 한겨레 2022-03-29

 

 

수상한 만인산 성명

때는 구한말. 소격동 한 주사는 이 판서에게 줄을 대어 밀양군수에 임명된다. 무능력자가 관직에 오르면 결과는 뻔하다. 재정은 파탄지경, 군민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임기가 끝나가자 한 주사는 유임을 위해 여론을 조작한다. 신문을 이용해 자신을 청백리로 포장하고 시정잡배를 동원해 만인산을 만들게 한다.

 

만인산은 1만 명의 이름을 적어넣은 양산이다. 선정을 베푼 지방관에게 백성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기념품이다. 한 주사는 싫다는 백성을 협박해 만든 만인산을 이 판서에게 보여준다. 이 판서는 유능한 인재를 알아본 자신의 안목을 자화자찬하며 한 주사의 유임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해조의 소설 <만인산>(1909)의 전반부 줄거리다.

한 주사는 탐관오리다. 그는 백성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이려고 만인산을 만들었다.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오늘날 전국 각지의 박물관에 소장된 만인산은 이와 같은 조작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현전하는 만인산 7점은 모두 조선 말기의 유물이다. 이 중 충청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교동부사 전세진의 만인산은 1890년 강화군민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전세진의 첫 부임지는 경남 남해였다. 그는 이곳에서 조운선 제조와 운영, 각종 인사에 개입하여 무려 23910냥에 달하는 뇌물을 받았다. 1883년 암행어사 이헌영이 밝혀낸 사실이다. 전세진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무슨 재주인지 오래지 않아 유배에서 풀려나 교동부사에 임명되었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적에 백성들이 만인산을 만들어준 것이다.

 

울산박물관 소장 1887년 언양현감 윤병관의 만인산도 수상하다. 윤병관은 언양현감에서 물러난 뒤 종성부사로 이임했다. 이때 거액의 공금을 횡령해 전북 위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남원부사가 되었으나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동학농민운동을 증언한 <영상일기>에 따르면 윤병관은 아전을 보내 민간에서 토색질을 하니 민심이 흉흉했다”. 청렴하던 관원이 탐관오리로 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탐관오리였을까.

 

만인산은 비싸다. 1896년 부패혐의로 고발된 희천군수 경광국의 횡령액 8000냥 중 2000냥이 만인산 제작에 들어갔다. 백성을 위하는 지방관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백성이 만인산을 만들었다면 이미 실패한 수령이다. 지방관의 임기는 2, 3년이 고작이다. 일개 고을 수령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사이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겠는가. 그런데도 무리해서 만인산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의 이름을 이용하여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서다.

만인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빼곡하다. 진짜 1만명은 아니다. 넉넉잡아 2000명 정도다. 일부를 제외하면 이름뿐이니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확인하고 싶어도 찾을 길이 없다. 이 점은 1만명이 연명한 상소 만인소역시 마찬가지다. 만인소는 공론정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여론몰이의 상징이며 정치적 퍼포먼스에 가깝다. 오늘날의 집단성명과 마찬가지다.

 

대장 64명을 포함한 예비역 장성 1000여명이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찬성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실명은 26명만 밝혔다. 나머지는 유령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전국 교수 5000의 시국선언이라는데 소속과 성명을 밝힌 건 몇 사람뿐이다. 그냥 많단다. ‘50개 시민단체의 합동성명이라지만 명단에 낯익은 단체는 드물다. 검색해도 활동 기록이 없다. 1인 단체거나 성명 발표를 앞두고 급조한 단체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의사를 표명하는 서명운동도 이름, 주소, 연령을 함께 기입해야 유효하다. 요건을 갖추지 않은 서명은 무효다. 이름조차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자들의 성명이 무슨 소용인가. 공공연한 여론 왜곡에 불과하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입력 : 경향 2022.03.31.

 

부자 연습

나중에 부자 될지도 모르는데 궁상맞게 아꼈다가 후회할 수도 있으니, 우리 저축은 하지 말고 버는 만큼 그냥 다 쓰자고 아내를 설득했다가, 진짜 부자가 된 지인이 있다. 철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미래에서 가불해서 쓴 덕분에 그의 과거는 궁상의 그늘을 피할 수 있었다.

 

재운을 당겨쓴 지인의 부자가 된 이후 경험담도 흥미로웠다. 부자가 되어보니 먼저 부자가 된 선배 혹은 자기보다 나중에 부자가 된 후배와 마주치게 되는 곳이 세 군데였단다. 고급 룸살롱, 비싼 수입차 판매점 그리고 회원권이 비싼 골프장. 성실했던 사업가들이 예측 가능한 졸부의 길을 걷게 된다고.

 

계속 부자였던 사람과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의 소비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 소비의 방향성을 보면 쭉 부자는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잘 찾아가고 급부자는 남들이 좋다는 것을 구비해 놓는데 정신이 없다. ‘쭉 부자는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지만 급부자는 부자로 알아봐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급부자에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죄다 모아들인다. 홈바를 만들면 술집보다 더 많은 술을 구비해 두고 손님을 맞이한다. 불러들이는 대상도 무한 확장된다.

 

한국에 부자는 많은데 취향 부자는 드물다. 바꿔 말하면 부자가 되어서 저렇게 누리고 살 수 있구나,라고 부러워할 만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서구 귀족 사회가 대를 이어 가꿔온 취향의 맥락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취향의 세계에는 돈 외에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한국의 부자들은 단시간에 돈으로 따라잡으려 한다. 하지만 취향 부자는 하루아침에 될 수 없다.

 

나중에 부자 될지도 모르니 지금 당겨쓰자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부자인 것처럼 전략적 과소비를 하고 있다. 기자생활 20년 동안 평범한 월급쟁이였고, 퇴직 후에 여행감독을 시작한 뒤로는 코로나19 때문에 고전하고 있지만, 부자 연습을 시작했다. 레스토랑 투자자로, 숙소 투자자로, 심지어 요트 투자자로 나섰다. 사람들이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미리 경험해보기 위해서다.

 

단골손님 대접을 받으며 서비스 안주를 더 받는 것 정도가 부의 상징이었는데, 투자한 레스토랑에 특정 메뉴를 개발해 달라고 부탁하고 모임을 위해 특별한 음식을 부탁해서 함께 간 사람들에게 생색을 낸다. 코로나19로 해외로 신혼여행을 못 가고 제주로 간 후배에게는 투자한 제주 레스토랑에서 특별한 저녁을 대접한다. 투자한 숙소에서는 우리 여행클럽을 위한 모임을 도모한다. 요트 투자는 코로나 시기에 지인들이 관심을 보이기에 함께 시작해 보았다.

 

지인들에게 이 정도 소비를 하려면 어느 정도 벌어야 가능할 것 같냐고 물었더니, 수십억 자산가도 누리기 쉽지 않을 경지라고 한다.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부자 연습을 해볼 생각이다. 해외의 별장을 한 달 정도 빌려서 함께 이용할 사람을 조직하고, 크루즈선도 한 블록을 통째로 빌려서 우리들만의 행사를 기획해 보려고 한다. 이런 허비에 나서는 이유는 여행이 경험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를 제안하기 위해 열심히 부자 연습 중이다.

고재열 여행감독 경향 : 2022.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