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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2.4.1~29 한국 보수는 창피함을 모른다

by 이성근 2022. 4. 29.

지역 간 격차, 지역 회복력이 우선돼야   프레시안 2022.04.01.

아파트 계급 투표'의 재구성   프레시안 2022.04.04.

경향의 먹고사니즘   뉴스프리존 2022.04.06

대통령 오른팔이 검찰 요직에, 그게 정상인가   한겨레 :2022-04-07

불평등 문제의식의 대가’    경향 2022-04-10

삼성 수사와 윤석열의 친기업’   2022-04-10

아이폰과 검찰, 신뢰    민중의 소리 2022-04-10

 

누가 한국 언론의 전설인가     미디어오늘 2022.04.11.

한덕수 총리 지명을 반대하는 이유    2022.04.11.

윤석열은 지금도 검찰주의자인가    경향 : 2022.04.12.

한국 보수는 창피함을 모른다     경향 : 2022.04.13.

코로나는 기획됐다? 누가, 왜 코로나 음모론을 믿는가   프레시안

헌법정신역행하는 권력기관 사유화 :   2022.04.15.

2년 만의 전면해제, ‘거리두기가 우리 사회에 남긴 과제-   /한겨레 사설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 대통령 정치철학을 보라    프레시안 2022.04.15.

윌 스미스를 보면서 폭력의 합리화를 찾는 아이러니    미디어오늘 2022.04.16

공교육 걱정없는 세상    경향 : 2022.04.16.

촛불 꺼진 이후의 반동, K-트럼프 리스크    프레시안 2022.04.18.

어퍼컷과 글로벌 포퓰리즘   경향 : 2022.04.19.

말 바꾸는 이들이 가짜다   경향 : 2022.04.19.

내로남불, 그들만의 리그    한겨레 : 2022.04.19.

정의당은 어디로    경향 : 2022.04.19

대한민국 내로남불 과거사 청산   한겨레 : 2022.04.19.

 

윤석열 인수위, 위험한 부동산 불장난    한겨레 2022-04-20

법 지키지 않는 법원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   시사인 2022.04.23.

조국과 다른, 정호영에게 침묵하는 2030'선택적' 공정   뉴스프리존 2022.04.23

늙은 모자의 죽음, 낡은 정치의 죽임     미디어오늘 2022.04.25.

미국 패권 이후의 세계      한겨레 :2022-04-26

불복종을 위한 교육      한겨레 :2022-04-26

적어도 한 사람은     경향 : 2022.04.28

검사의 말, 대통령의 말, ‘진보의 말     한겨레 :2022-04-28

지식의 범람, 지식인의 고갈    한겨레 :2022-04-28

사법의 그림자    경향 : 2022.04.29

 

 

 

지역 간 격차, 지역 회복력이 우선돼야

[경제지리학자들의 시선] 성장과 포용, 환경을 동시에 고려해야

1. 전 세계적 의제로 등장한 지역 간 격차

20161217일자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일국 내 지역 간 격차의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섬뜩하게 지적한 바가 있다. "주류경제학이 지역 간 불평등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하고 있지 않으며", "경제학자들이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면 포퓰리스트 반군이 할 것이다."

 

이후 2018년 지역 정책에 몹시 비판적이었던 오스틴, 글래셔, 서머스 등과 같은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자들도 장소 기반의 지역 정책을 제안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국 내 지역 격차 이슈와는 거의 관계가 없을 것으로 기대되는 IMF201910<세계경제전망>(World Economic Outlook) 보고서 2장에서 선진국의 지역 간 격차를 진지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일련의 논문과 보고서를 내놓았다.

 

무슨 일로 지역 간 격차 문제에 사실상 백안시하던 언론, 학자, 기관이 이 문제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수행하고 정책 처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선진국에서 1990년대 이후 지난 30여년 간 지역 간 소득격차가 심화되고 있으며, 특히 미국의 경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역 간 경제적 격차가 더 확대되고 있으며, 이러한 지역 간 격차가 정치적 포퓰리즘(populism)과 연결되어 민주적 질서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 2016년 미국 대선, 2016년 오스트리아 대선, 2017년 프랑스 대선, 2017년 독일 총선 등에서 지역 간 불평등 양상이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투표 행태로 이어졌다.

 

IMF 분석에 따르면 선진국 가계의 소득 불평등에서 지역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5% 내외이다. 따라서 선진국의 지역 문제에서는 소득의 지역 간 격차도 중시되지만, 삶의 질 및 괜찮은 일자리의 지역 간 격차가 더 강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역 간 격차의 의제는 노무현 정부 시기 강력하게 제기되었다가 그 이후로는 다소 잠잠해졌다. 이는 개인 간 불평등에 비해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9년 수도권 인구가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서면서, 비수도권이 공동화되는 지방소멸의 위험이 가시권 안에 들어오면서 다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 중에 86개 본사가 수도권에 위치하고 공장은 주로 비수도권에 있는 이른바 '구상과 실행의 공간적 분업'이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두드러진다. 이는 비수도권에서는 화이트칼라 직종과 같이 미래 전망이 있는 일자리 기회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지방대의 신입생 정원 미달 사태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저출산 고령화로 기존 농산어촌의 낙후지역이 사실상 지방소멸의 길로 가고 있는 것과 동시에 부울경과 같은 기존의 산업지역이 경제적으로 쇠퇴하여 소위 한국판 러스트벨트(rust belt)가 나타날 소지가 있다. 2010년대 이후 기존 낙후지역의 주변화와 비수도권 산업도시의 경제적 쇠퇴라는 이중의 지역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2. 지역 간 격차가 일으키는 문제

지역 간 격차의 심화는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첫째는 형평성 문제이다. 이는 소득 불평등 및 기회의 불평등과 연관되어 있다.

 

하버드대학의 기회의 형평성 연구(Equality of Opportunity Project) 결과는 미국에서 소득 분배의 하위 20%에 속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린애는 디트로이트의 비슷한 어린애보다 성인으로서 상위 20%에 속할 확률이 두 배나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어디에서 태어난 것인가가 소득격차와 기회의 창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 저성장지역의 제한된 기회가 지역 잠재력의 저활용을 낳고, 이는 전체 경제성장을 제약할 수 있다. 이에 대해 EU는 장소 기반의 스마트 전문화 전략을 제시하며 각 지역이 가진 역량의 함양과 발굴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는 사회적 긴장과 병리를 일으킬 수 있다. 이는 진영 논리에 입각한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2010년대 중반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도시 엘리트에 대한 지리적 불만(discontent)과 포퓰리즘이 나타나 기존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3. 현 정부가 놓치고 있는 지역 정책의 방향

지역 정책을 적극적으로 입안하고 시행한 정부는 참여정부이다. 그 후에 집권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각각 5+2 광역경제권과 지역행복생활권 구상을 내세웠다. 현 정부는 '지역이 강한 나라, 균형 잡힌 대한민국'의 비전을 제시하고 사람, 공간, 산업을 중심으로 '지역 주도의 자립적 성장기반'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고용률 격차의 감소 등 일부 부문에서 소기의 성과도 있었지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생산과 분배소득의 지역 간 격차 확대, 비수도권 대학의 미충원 증가 등과 같은 비수도권 서비스 접근성의 질적 수준이 미흡한 점, 청년층의 인구 이동으로 인한 수도권 인구집중 가속화 등에 따라 수도권 집중 반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지역 정책은 어떤 공간적 단위에서 어느 정도의 공간적 정주 여건을 갖추어 주는가가 핵심이다. 정주 여건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이번 대선에서 광주 지역에서 '복합쇼핑몰 유치' 문제가 나타난 것은 이를 보여준다.

 

현 정부의 균형 정책에서는 균형 정책의 공간적 단위가 명확하지 않았다. 공간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부문정책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 공간, 산업은 부문 정책을 지역별로 분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종 부문 정책이 지역 내에서 통합적으로 연계 조정되어야 지역 정책의 효과가 배가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제도적 개혁이나 조치는 단행된 것이 없다.

 

또한, 부울경 같은 초광역 경제권 논의도 중앙정부 차원에서 제안한 것이 아니라 지자체 수준에서 자율적으로 나온 것이고, 정권 말기에 들어서 이를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토건 위주 지역의 숙원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를 회피하거나 지역 뉴딜사업으로 포함된 것이 사실이다. 지역의 장기 비전과 부합되지 않는 토건 위주의 개발사업은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하지 못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제고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개발사업이 특히 지역의 소수 이해관계자에 의해 좌지우지되면 부정부패와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수가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EU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정책설계에 참여하여 지역 전략을 공유하고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평가하는 장소 기반 정책을 시행할 것을 권고한다.

 

현재의 지역 정책은 인구문제(지방소멸), 디지털 전환, 에너지 전환 등 대전환의 시대적 화두와 긴밀하게 연계가 되어 있지 않다. 인구문제는 지역 차원에서도 지방소멸 문제로 인식되어 초미의 관심사이지만, 디지털과 에너지 전환 문제는 부문 정책으로 다루어져 지역정책과는 접점이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과소인구 문제로 씨름하는 농산어촌의 경우 로컬 푸드, 지역협동조합, 지역화폐 등 사회적 경제 부문의 확대 등 비시장적인 지역 내 순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리적으로 상이한 경험기반 숙련을 가지는 지역특산물을 발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가 있다.

 

단지 효율성을 내건 소규모 농산어촌형 지자체의 통합과 폐지를 통한 인구감소지역의 압축 도시화는 과소 농산어촌을 방기하겠다는 것이어서 반발이 심할 수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주민의 이동성을 전제로 한 지역재생은 쉽지 않으며, 장소 기반의 정주 여건을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할 필요가 있다.

 

원자력과 화석원료를 주로 사용하는 중앙형 에너지원 대신에 분산형 친환경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에너지 전환이 지역정책과 맞물려야 한다. 그리고 부울경 지역과 같은 산업지역이 제조역량에만 특화되어 생산자서비스와 융합하여 새로운 기회와 경쟁력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가령, 스마트공장의 구축도 역내에서 독자적으로 구축할 역량이 부족하다. 따라서 디지털 전환은 구상과 실행의 공간적 분리를 지양하는 방향으로 지역에서 추구될 필요가 있다.

 

4. 지역 회복력이 우선이다

앞에서 선진국의 지역 간 격차에서 처분가능소득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양질의 일자리 전망 부재와 상대적 삶의 질의 악화가 더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지역 간 격차는 특히 진영 논리에 기반한 포퓰리즘으로 이어져 사회경제적 긴장과 갈등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일종의 공간적 물신론이 계층과 계급을 대체하여 민주적인 건설적인 대화와 논의를 가로막을 수 있다. 지역은 강력한 정체성의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지역 정책은 글로벌 가치 사슬의 변동과 그에 따른 한국경제의 구조적 전환과 결부된 지역 간 격차 확대를 직시하지도 못해 기존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는 정책 매너리즘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저출산·고령화, 디지털 전환, 에너지 전환 등 시대적 대전환의 과제를 지역 정책에 충분히 투영하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소득 불평등의 심화에 따라 지역 간 격차도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향후 지역 문제는 일자리의 기회 및 전망 문제와 더욱더 결부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역의 삶의 질 제고와 혁신역량의 확충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청년층이 대도시를 선호하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선진국도 마찬가지이다. 대도시는 청년에게 거대한 노동시장의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습득하는 장일 뿐만 아니라 소비 기회와 개선된 인프라를 제공한다. 이러한 선호를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향후 지역 정책은 사회가 합의하는 공간 단위를 설정하여 성장, 포용, 환경 등 삼자를 동시에 고려하고 지역 주민에 대한 역량 투자를 강화함으로써 경제적 쇼크, 기후변화, 전염병 확산 등과 같은 외부 충격에 대한 지역의 회복력(resilience)을 신장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정준호 강원대 부동산학과 교수 | 프레시안 2022.04.01.

 

아파트 계급 투표'의 재구성

대선이 끝난 뒤 아파트값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윤석열 후보의 당선으로 부동산 규제 완화 등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서울의 아파트값 하락세가 둔화하는 추세다. 강남구와 서초구는 아파트값이 다시 오름세로 돌아섰다고 한다.

 

이런 뉴스를 접하면서 여러 의문이 밀려온다. 첫째, 20대 대선 결과를 두고 대다수 언론이 "집값 급등에 화난 민심이 문재인 정권을 심판했다"고 분석했는데 다시 집값이 들썩이는 현상은 무엇인가? 둘째, 문재인 정부에서의 집값 폭등을 그처럼 격렬히 성토했던 언론들이 대선 이후 부동산 가격 인상 조짐에 대해서는 왜 우려보다는 환영 일색일까? 셋째, 서울의 경우 강남, 서초구 등 아파트값이 비싼 지역일수록 윤석열 당선인의 득표율이 높았는데, 그런 지역의 아파트값부터 상승세로 돌아선 것은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까?

 

이번 대선의 승패를 가른 곳은 서울이었다. 강남, 서초, 송파, 용산, 성동, 양천구 등 아파트값이 높은 곳에서는 대부분 윤석열 후보가 승리했다. 반면에 강북구, 금천구 등 아파트 가격이 낮은 곳에서는 이재명 후보가 앞섰다. 아파트값 상위 5위와 하위 5위 지역의 윤석열 당선인 지지율이 정확히 일치했다는 분석 결과도 나왔다. 결국 아파트값이 높은 서울 중심 지역 유권자들의 윤석열 후보 지지가 아파트값이 낮은 변두리 지역 유권자들의 이재명 후보 지지를 압도하면서 국민의힘은 최대 승부처인 서울에서 민주당을 제쳤다.

 

그렇다면 '집값 폭등에 대한 불만'이 선거 결과에 깃든 민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분석인가. "내 집 마련의 꿈이 멀어진 20대와 30대 상당수가 지지 정당을 민주당에서 국민의힘으로 바꿨다"는 분석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오히려 고가의 아파트 자산을 소유한 유권자들의 '집값 하락에 대한 우려''세금 혐오'가 더 위력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내가 소유한 아파트의 자산 가치가 높아진 것은 환영하지만, 세금은 내기 싫다. 그리고 앞으로 아파트값이 떨어지는 것은 더욱 싫다.' 이런 심리가 결국 투표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유권자들의 기대와 희망에 부응이라도 하듯 강남구와 서초구를 필두로 아파트값이 오름세로 돌아선 것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부동산값 급등을 융단폭격했던 대다수 언론이 대선 이후 부동산 가격 인상 조짐을 긍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은 우리 언론의 이율배반적 보도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윤석열 시대-화색 도는 부동산 시장" "재건축·재개발 봄바람" "재건축 완화와 집값 상승에 기대". '민주언론시민연합'이 꼼꼼히 분석한 것처럼, 대다수 언론은 최근의 집값 인상 동향에 대해 긍정 일색으로 보도하고 있다. 집값이 오를 조짐에 오히려 박수를 치며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언론의 태도 역시 선거 결과 분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이번 대선 결과는 부동산, 더 구체적으로는 '아파트'의 소유 여부와 가격의 높낮이가 '정치적 선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상관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연구 필요성을 제기한다. 지역·이념·세대 등 기존의 사회적 요인에 덧붙여 '소득과 자산' 등 경제적 요인도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는 쪽으로 한국 정치 지형은 변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 대선 결과를 보면 한때 완화 조짐을 보였던 지역·이념·세대 등 이른바 '핵심 균열'도 다시 과거회귀형으로 돌아갔다. 선거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소득과 자산에 기반한 '계급 투표'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 결과는 우리나라 선거에서는 소득보다는 오히려 자산이 정치적 선택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확연히 보여준다. 19대 대선 투표 결과를 분석한 한 논문(이지은·강원택)을 보면, 가장 보수적인 집단은 '고자산-저소득' 집단이었고, 가장 진보적인 집단은 '저자산-고소득' 집단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 자산의 대부분은 아파트 등 부동산이다. 무주택자에 비해 유주택자의 정치적 성향이 1.15배 더 보수적이라는 연구 결과(김대환·김보경)도 있다. 소득만으로 보면 '계급 배반' 투표 행태가 나타나지만, 자산을 중심으로 분석하면 대체로 '계급 정합' 투표의 특성이 나타난다는 것이 그동안의 대체적 연구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보도 방향은 정치적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부동산 세금 폭탄론'은 이번 대선에서도 아낌없는 파괴력을 발휘했다. 대다수 언론의 이중잣대도 빼놓을 수 없다. 자신들이 싫어하는 정권 아래서 일어난 집값 폭등은 융단폭격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자신들이 응원하는 정권의 집값 인상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언론 환경에서 과연 유권자들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국민의힘은 이런 언론의 응원까지 힘입어 선거에서 날개를 단 반면에 민주당은 집 없는 사람들의 지지를 충분히 결집하는 데 실패한 것이 이번 대선 결과의 한 측면이다.

 

윤석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비상식적으로 높은 아파트 가격을 낮추고 집 없는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주거권을 보장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윤 당선인은 재건축·재개발 기준 완화와 용적률 상향을 통한 공급 확대, 유주택자의 세금 부담 경감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면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는 집값 안정보다는 집값 급등을 이끄는 견인차였다. 그리고 그런 조짐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값 폭등에 대한 불만의 표를 던진 무자산 유권자들은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일까. 오히려 내 집 마련의 꿈은 더 멀어져 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집값 폭등으로 이미 이득을 본 고가 아파트 소유자들에게는 더 살맛 나는 세상이 오는 게 아닐까. 부동산 부자들이 집 소유를 늘릴 기회와 공간이 넓어지고 자산 가치도 더 높아지는 세상 말이다. '아파트 계급 투표'가 빚어낸 물구나무선 풍경이다.

김종구 (언론인) | 프레시안 2022.04.04.

 

경향의 먹고사니즘

적당히 흉내 내는 진보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경향신문이 자사 소속 강진구(Jinkoo Kang) 기자를 결국 해고했다. 열린공감TV 활동을 해고 이유로 삼은 것 같다고 한다. 강 기자는 그동안 줄곧 자신을 매개로 한 경향-열공TV의 협업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를 거부한 것은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 내에서 강 기자의 활동영역을 아예 치워버렸다.

 

나는 이로써 경향신문이 진보언론은커녕 한 언론사,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기업체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회사의 존립과 발전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본다.

 

경향신문이 그런 의지가 있었다면 강진구 같은 탐사전문 대기자를 쫓아낼 것이 아니라 그를 격려하고 회사 내에서 그에게 더 큰 역할을 부여하면서 우리에게는 강진구가 있소~!” 자랑하며 선전했어야 했다. 진실을 희구하는 수백만 언론수요자들에게 경향신문의 귀중함을 소구했어야 했다.

 

나는 경향신문 경영기획실장(2001~2002), 신문유통원장(2005~2008),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2019~2021)을 역임하면서 한 언론사가 보도나 경영 면에서 제대로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리더십-인사-교육-소통-책임의식이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저널리즘에 대한 신념과 경영에 대한 확고한 목표의식을 지닌 경영진이 적재적소에 사람을 기용하거나 뽑고(신입.경력) 구성원에 대한 끊임없는 교육, 경영진-간부-기자 등 직원들 간의 수직적.수평적 소통, 최종적으로 (경영진.기자 포함) 모든 구성원들의 잘잘못에 대한 신상필벌이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언론사 뿐 아니라 모든 회사가 다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내 이론에 의하면 강진구 기자 해임은 잘못된 인사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결국 잘못된 리더십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향신문에 기대하는 바, 진보언론을 제대로 구현하고자 하는 리더십이라면 강진구 기자를 쫓아낼 것이 아니라 강진구 기자 같은 자질과 소양을 갖춘 신입기자들을 뽑기 위한 기준을 세워야 했고 전국 곳곳에서 강진구 같은 기자들을 발굴해 스카웃했어야 한다.

 

듣기로는 강진구 기자 후배들이 오히려 더 강 기자를 배척했으며, 구성원들의 선거로 뽑히는 경영진이 이들(후배권력)을 두려워했다는 말도 있다.

 

진보언론을 제대로 하려면 목숨을 걸 것까지는 없겠지만 최소한 밥그릇은 걸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진보언론은 진보진영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언론이 아니라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을 뜻하는 것이며 우리 사회의 돈과 권력은 그 진실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당히 흉내 내는 진보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경향신문의 진보연하는 행태는 그저 밥벌이의 한 수단이다. 경향신문 경영진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강진구 기자를 해고한 이 시점이 묘하다.

 

옛날(198912)에도 경향신문 경영진이 그 전 해(19882~19892)에 노조활동을 했던 초대 노조 간부 5인을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한 바 있다. ‘경영상의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다. 당시 경향신문은 대기업 인수를 앞두고 있었고, 편집권 독립을 위해 밥그릇을 내던질 각오를 하고 싸웠던 초대 노조 간부 5인이 대기업의 경향신문 인수에 결정적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그 이래 40여 년 간 경향신문은 쭉 뻗어나가지 못하고 다시 제 자리로 회귀한 느낌이다. (당시 경향신문 사장이었던 분이 며칠 전 돌아가셨다. 해고된 노조 간부들의 선배이기도 한 분이다. 코로나 탓보다도 왠지 가보고 싶지 않아 조문을 하지 않았다. 지금 강 진구 기자를 해고한 경향신문 경영진도 강 기자의 회사 직계 선배들이다. 당연히 모두 내 후배들이다)

강기석(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뉴스프리존 2022.04.06

 

 

대통령 오른팔이 검찰 요직에, 그게 정상인가

검언유착의혹으로 수사를 받아온 한동훈 검사장이 6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증거 불충분이라는데, 핵심 증거물이라 할 수 있는 한 검사장의 아이폰은 비밀번호도 풀지 못한 상태다. 검찰은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휴대전화 잠금해제 시도가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사건관계인(한 검사장)의 불안정한 지위를 걱정했다. 휴대전화에 대한 조사 없이 무혐의 결론을 내는 게 적절한지도 의문이지만, 이번 결정에 주목하는 또다른 이유는 불안정한 지위를 벗은 한 검사장의 이후 행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이미 선거운동 기간에 한 검사장을 중용할 뜻을 밝혔다. 벌써부터 한 검사장이 핵심 요직인 서울중앙지검장이나 수원지검장으로 갈 것이라는 관측이 떠돈다. 서울중앙지검은 현재 윤 당선자 부인 김건희씨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가담 의혹 등을 수사 중이다. 전국 최대 검찰청으로, 앞으로도 정국에 영향을 미칠 주요 사건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수원지검은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관련한 고소·고발 사건을 맡고 있다. 산하의 안양지청이 법무부·공수처 관련 사건을 관할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수사가 벌어질 가능성이 큰 곳이다. 검찰의 직접 수사 범위를 넓히려는 윤 당선자의 공약이 현실화한다면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들에 대한 검찰의 장악력은 더욱 커질 것이고, 이는 서울중앙지검이나 수원지검에 국한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 검사장을 비롯한 이른바 윤석열 라인검사들이 요직에 포진하는 게 정상적인 일인가.

만약 어느 대통령이 자신의 복심과 같은 측근을 법무부 장관에 앉히고 이 장관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사사건건 수사지휘권을 행사하며 개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나라가 뒤집어질 것이다. 그런데 윤 당선자의 측근 검사들이 검찰 요직을 차지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 수사를 지휘한다면 실질적으로 하등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된다. 오히려 법무부 장관과 수사지휘권 발동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외피를 쓰지 않고도 대통령의 뜻이 얼마든지 관철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다.

 

이런 비유가 가능한 것은 검찰총장 출신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검찰총장이 정치로 직행함으로써 검찰의 정치적 중립 원칙은 타격을 받았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정권과 검찰의 관계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사태를 맞았다. 정권과 검찰 일반의 관계에서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이 지켜질 것이란 신뢰가 현저히 침식당했을 뿐만 아니라 검찰 내 윤석열 라인의 존재로 인해 정권과 개별 검사의 관계 또한 전에 없이 밀착의 우려가 커진 것이다.

 

검찰총장 시절 윤 당선자는 인사에서 측근들을 노골적으로 챙겨 검찰 안에서조차 반감을 샀다. 윤 당선자는 검언유착 의혹을 받는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감찰·수사를 방해하다 징계를 당하기까지 했다. 법과 원칙보다 앞서는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검언유착 사건이 불거졌을 때 한 검사장은 김건희씨와 수백차례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김씨의 ‘7시간 통화 녹취파일에는 그가 한 검사장을 한동훈이라고 칭하는 대목까지 나온다.

이제 한 검사장을 비롯한 윤석열 라인 검사들의 중용은 검사로서의 능력 등 일반적 인사 기준을 근거로 한 설명으로는 도저히 해소될 수 없는 원천적 의구심을 낳게 됐다. 자기 사람을 통한 검찰 장악 속에 검찰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은 절멸하지 않을까.

 

예단을 할 게 아니라 이들이 중용된 뒤 실제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며 판단해야 하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법적 정의는 실현돼야 할 뿐 아니라 외관상 실현되고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유럽연합의 로마헌장 제6조는 검사는 독립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하며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도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이 원칙을 상기시키고 있다. 검찰청법이 현직 검사의 대통령비서실 파견을 금지하고 퇴직한 검사도 1년 이내에는 대통령비서실에 임용되지 못하도록 한 것도 이 원칙에 따라 대통령-검찰의 외관상 연결고리를 차단한 것이다.

 

윤 당선자의 측근 검사들이 요직을 차지할 경우 그것은 누가 봐도 대통령-검찰 친정체제. 이들은 요직에서 배제돼야 한다. 개인으로선 억울하달지 모르나, 모두 윤 당선자가 초래한 일이다.

박용현 | 논설위원 한겨레 :2022-04-07

 

불평등 문제의식의 대가

복잡한 세상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한다는 건 매혹적인 일이다. ‘세계화는 비교적 최근까지 그런 키워드였다. 한때는 이 단어를 입에 담지 않고서는 교양인들 간의 대화가 성립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찬성이든 반대든 우리는 세계화에 대한 입장을 가져야 했다. 지금은 어떤가.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세계화가 주춤하더니, 이후 계속된 경제 침체 속에서 트럼프의 보호주의, 푸틴의 전쟁 등의 와중에 어느새 세계화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런 사례는 키워드의 폐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세상은 키워드 몇개로 요약하기엔 너무도 복잡하고, 키워드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부작용이 날 수밖에 없다. 학문의 영역에서 부작용이라 해봐야 별것 없겠다. 하지만 그와 긴밀히 연결된 정책의 영역에선 얘기가 다르다.

 

최근에 내가 그런 위태로운 키워드로 주목하는 게 불평등이다. 지금 불평등은 학문과 정책 모두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 중 하나다. 일국의 정부나 국제기구에서도 불평등이라는 키워드로 현실을 이해하고, 불평등 해소를 기치로 다양한 정책을 펴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불평등에 대한 엄중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첫발을 떼었다. 그 결과는 어떤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자평이다. 대개 불평등은 소득불평등의 줄임말인데, 소득불평등을 재는 대표적 지표들이 문재인 정부 들어서 상당히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76.96에 달했던 소득5분위배율이 20186.54, 20196.25, 20205.85 등으로 꾸준히 줄어들어왔다.

 

여당과 정부는 이러한 정책 성공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데 불만이 큰 것 같다. 맞다. 언론 환경이 그들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위 성과를 가린 것은 언론뿐이 아니라, 불평등 지표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은 일터에서 노동자 사망, 다방면에서의 불공정 시비, 재벌 총수에 대한 봐주기’, 부동산 가격 폭등 등의 현실이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키워드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환원주의에서 유래한다. (소득)불평등의 프리즘을 통과한 세상에서는, 온갖 사회경제적 문제가 소득격차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리하여 성별 간에, 또는 고용 형태에 따라 존재하는 다양한 구조적 차별이 임금격차의 문제로 축소되는 것이다. 본래 사회경제적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회경제적 구조의 산물이고, 따라서 그 진정한 해결은 그러한 구조의 개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불평등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기선 모든 문제가 소득격차로 환원되므로, 그 해결도 소득격차의 개선, 곧 정부의 소득재분배로 해결될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물론 자본주의에서 소득은 중요하다. 그러나 비정규직 차별이 어디 소득의 문제만이겠나.

 

이런 사정은 문재인 정부 기간에 개선되었다는 경제지표를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봐도 잘 드러난다. 위에서 인용한 소득5분위배율은 처분가능소득을 기준으로 산정된 것이다. 이에 비해,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5분위배율은 201711.27에서 코로나19가 퍼지기 직전인 201911.56으로 외려 증가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덕에 11.37로 소폭 감소했으나 2017년에 비해서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처분가능소득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의 결과 얻는 시장소득에 더해 정부의 조세재정 정책에 따른 소득 이전이 적용된 소득으로, 정부의 재분배 정책의 효과가 반영된 소득이다. 따라서 처분가능소득기준 소득분배가 개선되었다는 것은 우리 정부가 그만큼 재분배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시장소득기준 소득분배는 왜 나빠졌을까? 혹시 이는 불평등을 낳는 경제의 구조는 더 고착화했음을 시사하는 게 아닐까.

 

이러한 사태를 온전히 정책 실패의 결과로만 봐서는 안 된다. 범지구적 자본주의의 거대한 힘을 어찌 한 나라의 정부가 바꿀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범진보 진영은 이를 허심탄회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우리 경제의 구조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지 한층 더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다음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실리적으로 따져도, 불평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정부의 소득재분배에 과부하가 걸리게 되고, 이는 고스란히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김공회 |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경향 2022-04-10

 

 

삼성 수사와 윤석열의 친기업

검찰이 최근 삼성전자와 웰스토리를 압수수색했다. 공정위가 지난해 6월 삼성전자 등이 웰스토리에 사내 급식 물량 몰아주기를 했다면서 234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고발한 지 9개월 만이다. 그동안 뒷짐 지고 있던 검찰이 윤석열 정부 출범을 코앞에 두고 수사에 착수했다는 점에서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검찰과 윤 당선자의 사전교감, 또는 윤 당선자의 의중을 반영한 코드수사가능성이 제기된다.

재계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을 주도한 윤 당선자와 악연이 있는 삼성은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다. 한 임원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마음 졸이면서 수사를 지켜보는 수밖에라며 말끝을 흐렸다. 검찰은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5월 대통령의 눈 밖에 난씨제이(CJ)에 대한 전격 수사에 나섰다. 이재현 회장은 수천억원의 비자금 운용과 탈세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부당지원 혐의뿐만 아니라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의 연관성도 들여다보고 있다. 삼성전자 등은 2013~2020년 그룹 미래전략실의 개입 속에 이 부회장 일가 회사인 웰스토리에 사내 급식 물량을 몰아준 혐의를 받고 있다. 웰스토리는 이를 통해 매년 600~800억원대 이익을 낸 뒤, 총수 일가가 최대주주인 삼성물산에 4천억원에 가까운 배당을 했다. 부당지원의 최종 수혜자인 이 부회장으로 불똥이 튈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재계에선 삼성 수사가 기업 경영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윤 당선자의 친기업기조와 상충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걸었던 이명박 정부가 임기 중반 갑자기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으로 돌아선 일을 떠올리는 기업인들도 있다. 당시 재계는 엠비(MB) 정부가 오른쪽 깜빡이 넣고 좌회전한다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친기업정부의 사전적 의미는 기업과 친하게 지내거나 기업에 우호적인 정책을 채택하는 정부다. 윤 당선자는 당선 인사에서 민간 중심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며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했다. 경제6단체와의 만남에서도 현장의 어려움을 이유로 중대재해법 완화 요구에 화답했다.

하지만 윤 당선자는 대선 공약으로 공정과 상식의 회복을 강조했다. 대선 과정에서도 일감 몰아주기 등 시장 공정성을 저해하는 행위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검찰총장 시절에도 유난히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을 강조했다. 취임사에서 형사 법 집행에서 최우선 가치는 공정한 경쟁질서의 확립이라고 말했다. 사석에서 경쟁질서를 해칠 우려가 가장 큰 집단으로 대기업(재벌)을 꼽았다는 뒷얘기도 들린다. 윤 당선인으로서는 낡고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하면서, 기업의 불법과 반칙을 엄단하는 것은 상충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엄밀히 보면 친기업은 실체가 불분명하다. 우리 국민 중에서 기업을 부정하는 이른바 반기업정서가 과연 얼마나 될까? 오히려 국민은 기업에 지나치게 우호적이다. 재벌이 불법 비리를 저질러도 선진국처럼 기업의 주가가 폭락하거나, 불매운동이 벌어진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친기업은 허구적 이데올로기인 반기업과 쌍생아인 셈이다.

 

친기업은 정책적 지향점도 모호하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상대로 갑질을 하면 정부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 대기업을 엄단해야 하나, 아니면 중소기업의 고통을 외면해야 하나? 재계가 반기업정서 때문에 기업 하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불법 비리를 호도하고 처벌을 면하려는 궤변에 가깝다. 보수정권도 이를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선거 때마다 친기업을 내세우는 것은 빨갱이처럼 진보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윤 당선자는 법치주의 구현을 위해 양손에 칼과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을 바라보며 27년 동안 검사 생활을 했다. 이제 대통령으로서 한손에는 친기업’, 다른 한손에는 공정이라는 결코 조화가 쉽지 않은 두 깃발을 들고 출발하려고 한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2022-04-10

 

 

아이폰과 검찰, 신뢰

채널에이 기자가 취재원에게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대한 비리 폭로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한동훈 검사가 공모했다는 혐의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주된 사유는 한 검사가 아이폰의 비밀번호를 제출하지 않고 버티는데 이를 풀지 못해 증거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검찰과 언론이 권력이 되어 특정 세력을 억압하는 도구로 작용했던 매우 중요한 혐의를 다룬 것이라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럼에도 관련 의혹이 해소되지 못하고 사건이 종결되는 상황은 매우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 법적으로는 타당할 수 있지만 공인, 특히 법을 다루는 검사는 자신과 관련된 의혹을 적극적으로 해소하는 것은 의무일 것이다. 검사가 증거를 놓고 보여주는 이중적 태도에 어떤 정당함이 있는지, 검찰의 직업윤리에 대한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권과 언론이 그를 향후 요직의 후보로 거론하는 것은 그의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그의 행위에 포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은 정치, 검찰, 언론에 대한 신뢰를 크게 훼손하고 있다.

 

윤석열 당선인의 신정부는 실용을 우선적인 정책기조로 내세우고 있다. 맹목적인 명분, 원칙에 사로잡혀 실질적인 국민 복리를 저해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능력 있는 검사를 중용하는 것이 그런 실용의 연장선일 수도 있겠다. 인간의 이기심을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믿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용주의에 반대하는 국민이 그다지 많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업화한 현대 사회에서 이기심을 공동의 가치로 전환하는 과정은 공유된 규범에 의지하고 있으며, 명분과 원칙이 가지는 힘은 여전히, 아니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화폐에 대한 믿음, 국가 질서에 대한 신뢰와 같이 사람들의 협력을 가능케 하는 각종 명시적, 암묵적 제도들을 상상의 질서라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의 믿음과 무관하게 항상 존재하고 작동하는 자연의 질서와는 달리 우리가 가진 제도들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공유된 가치, 신념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임을 상상이라는 단어로 강조한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기에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을 뿐 공유된 가치와 신념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힘이다. 그렇지만 공유된 가치와 신념이 당연히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한 사회의 생산력을 결정짓는 자본을 물리적, 인적, 사회적 자본으로 구분한다. 생산설비나 도로와 같은 물리적 자본, 기술을 체화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적 자본의 중요성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때로는 간과하기 쉬운 사회적 자본이란 협력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의 믿음, 상상의 질서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신뢰가 언급된다. 법보다 가까운 주먹에도 불구하고 종이쪽지에 불과한 계약서를 믿고, 때로는 그조차 없이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 모든 것을 감시하지 않고도 직원이 열심히 일하리라 기대하는 것, 다음 달 월급이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후진국들은 단지 물적, 인적 자본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치인을, 직원을, 사장을 믿지 못해서 생기는 갈등과 불신으로 사회가 가진 힘을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진국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물적, 인적 자본과는 달리 신뢰와 같은 사회적 자본은 사용할수록 증가하는 속성을 갖는다. 주고받으며 커가는 개인 간의 신뢰와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가 가지는 신뢰 또한 신뢰를 경험할수록 커진다. 반대로 불신의 경험이 쌓이면 신뢰는 무너지고 서로를 믿지 않는 것이 최선이 된다. 법이 사람을 차별할 때, 편법과 비리로 누군가가 성공할 때 신뢰는 무너져 내린다.

 

우리 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이미 선진국이지만 신뢰의 측면에서는 뒤쳐져 있다고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 검찰, 언론에 그 책임을 묻는 것이 근거 없어 보이지 않다. 법 앞에서 누구든 평등하리라는 믿음에 금이 가고 있다. 당선인이 강조해온 공정과 정의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 단기적인 경제성장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

송재도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민중의 소리 2022-04-10

 

 

누가 한국 언론의 전설인가

그 물음을 던지기 민망하다. 언론의 불신이 극에 달한 지금 누가 한국 언론의 전설인가를 따따부따하기란 계면쩍은 일이다. 그런데 다름 아닌 조선일보가 한국 언론의 전설을 또 기사화했다. 김대중 전 주필이 그렇단다. ‘신문의 날을 맞아 인터뷰한 기사는 권위주의 시대, 신문기자가 맞서 싸울 대상 있어 행운이었다는 말을 표제로 부각했다. 군부독재와 싸운 투사라는 투다. 창간 100년을 맞은 해에도 그를 전설로 기사화하며 기자정신을 들먹였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그를 조선일보의 전설이라 부르대는 것은 자유다. 실제로 그는 조선일보 논조를 대표해왔다. 하지만 그를 한국 언론의 전설이라 여론몰이 하는 선동은 남세스럽다. 그렇지 않아도 기자정신이 시나브로 옅어가는 우리 언론계를 위해, 작게는 조선일보의 젊은 기자들을 위해 자숙을 권한다. 김대중이 강조한 기자정신에 정작 자신이 어긋난 언행은 하나둘이 아니다. 아니, 넘친다. 다만 여기서는 인터뷰 기사에 도드라진 대목만 짚자.

 

 

조선일보 47일 온라인판 “‘58년 기자김대중 권위주의 시대, 신문기자가 맞서 싸울 대상 있어 행운이었다”” 기사 갈무리. 사진=조선일보 홈페이지

혹시 회한이 남는 일이 있는가?” 묻자 김대중은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취재 기사를 꼽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변명했다. “맨 첫 문장에서 한 번만 난동자라고 쓰고 나머지는 그들은’ ‘그들은으로 표현한 기사를 내보냈다그후 왜 난동자라고 했느냐며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단다. 여전히 진솔한 사과는 없다. 되레 억울하다는 속셈마저 묻어난다.

 

광주에서 군부쿠데타에 맞서 피어린 민중항쟁이 벌어질 때 사회면 머리로 실린 그의 기사는 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불안감만무정부 상태 광주’ 1라는 큼직한 표제 아래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민중을 겨눠 총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린다고 썼다. 그의 기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로 학살 현장을 취재한 사회부 기자들은 부장인 김대중에게 결코 폭동이 아니라는 것을 꼭 써달라고 했음에도 그랬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바로 옆에 시위선동 남파간첩 1명 검거기사가 큼직하게 편집됐다. “남해안 침투/ 광주잠입 못하자 상경/ 체포순간 독침자살 기도와 같은 부제가 더해졌다. “무정부 상태 광주제목과 시위선동 남파간첩의 제목은 기사를 가르는 선 하나를 두고 붙어있어 동일 사건인 듯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신문사에서 사회면에 실린 모든 기사는 사회부장이 최종 손질해서 출고한다. 사실 확인이 안 된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 크게 부각한 조선일보 사회면은 남파 간첩들이 광주에 개입했다는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물론 광주 잠입운운한 기사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김대중이 의도했든 아니든 전두환 군부의 야만적 유혈 폭력을 정당화 한 기사에 사과할 기회는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늘 변명하고 합리화했다. 그를 전설로 추앙하며 상품화하는 조선일보를 믿어서일까. 하지만 기자정신의 생명은 진실 아닌가. 군부의 검열을 거부한 올곧은 기자들이 당시 조선일보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인터뷰 기사는 김대중이 83세까지 한 신문에만 글을 써왔다고 찬양한다. 쓴웃음이 나온다. 그 나이까지 글 쓰고 싶지 않은 기자가 있단 말인가. 문제는 그의 입사 동기들은 물론 그의 후배들이야말로 독재에 맞서 언론자유를 지키려다가 1975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대량 해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권력과 사주의 언론자유 유린에 모르쇠를 놓아 살아남았을 따름이다. 이후에도 많은 후배들이 명퇴당하거나 양심을 지키고자 사표를 던졌다. 그는 여든 살이 넘어 쓴 칼럼들에서 내내 문재인 정부를 친북좌파로 몰아치는 독창적 관점을 퍼트려왔다.

 

 

동아일보 언론인들은 19741024일 동아투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참에 힘주어 쓴다. 우리 언론에 전설이라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의 기자들이다. 군부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1975년에 기자들이 언론자유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동아일보로 시작해 한국일보·조선일보, 다음 날 경향신문·중앙일보를 비롯해 전국의 거의 모든 신문·방송·통신사 기자들로 퍼져갔다. 그랬다. 오롯이 기자정신으로 뭉쳤다. 그 전설의 진실을, 기자정신의 고갱이를 조··동 신방복합체는 물론 모든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과 새삼 새기는 까닭이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2.04.11.

 

 

한덕수 총리 지명을 반대하는 이유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김기춘이 전격적으로 돌아왔다. 그때 박근혜의 시대라는 것을 절감했다. 한덕수가 총리 지명을 받게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딱 박근혜가 김기춘을 불러오던 순간이 머리에서 떠올랐다. 보수 정권은 과거 회귀적 인사를 하고는 했다.

우석훈 성결대 교수·경제학자

우석훈 성결대 교수·경제학자

 

요즘 공감 능력과 관련해서 한국 톱뉴스 1번을 연일 장식하는 이준석은 청년 보수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만약 낡고 낡은 우리의 헌법이 그에게 피선거권의 기여를 제약하지 않았다면 좋든 싫든, 윤석열의 시대는 없고, 그가 당선인의 자리에 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당 대표로 갈 때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분명히 국민의힘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기운으로 대선을 치렀다. 그렇다면 첫 총리는?

 

한덕수 총리 지명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한동안 고민을 하였다. 좋은 점은 오랜만의 경제 인사라는 점이고, 그가 흔히 모피아로 비난을 받는 전형적인 금융 관료가 아니라는 것도 인상적이다. 금융과 실물이라는 눈으로 보면, 매우 드물게 실물에 대한 이해를 가진 경제 관료라는 것이 한덕수가 가진 희소성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로펌에서 근무하면서 받은 금액에 대해 얘기하는데, 돈 크기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에 비하면 경력도 짧고, 능력도 딱히 낫다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민간 기업에서 훨씬 더 많이 받아가기도 한다. ‘업계 공정가라는 표현을 쓴다면, 그걸 많이 벗어나지 않는 선으로 보인다. 물론 건당 인센티브 등 이면 계약이 없다는 전제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청렴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부패한 인사라고 한덕수를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액의 액수 때문만은 아니다.

 

한덕수는 사적 직장이라고 그가 일하던 로펌을 표현하였다. 사적인 것은 맞고, 개인의 선택 영역이기는 하다. 일부에서는 법률 전문가도 아닌 그가 왜 로펌에서 돈을 받느냐고도 지적을 하는데, 전직 관료들이 대형 로펌에 취업하고 차량도 제공받는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가 일했다는 그 사적 직장이 법률 소송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많은 전직 관료들을 관리하면서 일종의 로비스트처럼 움직이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는 어두운 곳들이 있다. 법률과 경제, 두 곳에 대표적으로 어두운 밤의 세계가 펼쳐진다. 박근혜가 손잡은 김기춘은 결국 우병우와 함께 이 시대와 맞지 않는 어두운 세계를 가지고 통치하려고 했다. 망했다. 고위 경제 관료들이 로펌과 함께 움직이는 세계도 매우 어둡다. 여기에는 좌우도 없고, 오직 명예와 맞바꾼 돈 그리고 이너 서클속에서 움직이는 로비와 어두운 이권만이 존재한다. 이게 관치 경제를 오래 유지했던 한국 경제에 생겨난 암종과 같은 것이다. 그걸 유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 부처 내부에서도 젊은 공무원들이 그 선배들의 이런 관행을 낡은 모습이라고 반발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한덕수가 무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사적 직장이라고 불렀던 로비의 세계는 그가 공직을 그만두고 간 곳이다. 그들은 한덕수의 지식이 아니라 그가 가진 인적 네트워크에 돈을 지불한 것이다. 그 선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로비의 세계로 간 사람이 다시 고위직으로 가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유능은 과거적 유능이다. 경제 버전의 전관예우의 세계를 이렇게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고위 관료들에게 당신들도 로펌 같은 곳에서 적당히 로비스트로 살다가 한덕수처럼 화려하게 복귀하라고 하는 시그널이다. 마치 김기춘이 박근혜 때 다시 전성시대를 맞은 것과 같다. 사법에 전관예우가 개혁 대상이라면, 한덕수 역시 개혁 대상이지, 그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총리의 나이가 문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로펌과 함께 로비의 세계로 갔으면, 선택은 내려진 것이다. 그렇게 관직과 로비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도록 하면 정부 주도의 관치 경제가 피하기 어려운 어두운 면이 더욱 강화된다. 경제 민주화는 이제 통보식 밀실 행정에서 벗어나,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를 의미한다. 토론과 논쟁 그리고 합의는 보수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한덕수의 유능함은 관치 경제의 시대, 뒤에서 로비하고 합의하고, 사람들은 과정을 알기 어려운 밀실 행정 시대의 유능함이다. 로비스트들이 로펌 출신 총리를 뒤에 업고 국정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것, 이 시대가 가야 할 길은 아니다. 그 어두웠던 관행은 이제 새로운 대통령과 함께 끊어내는 것이 옳다. 국민은 윤석열을 선택했지, 로펌과 로비스트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한덕수 총리 임용에 반대한다. 밤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 정부에서 일한 것을 자산으로 부를 획득하지 않은 사람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 박근혜가 김기춘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은 비극이 되었다. 한덕수 역시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 될 것이다. 국민들은 점점 더 민주주의의 밝은 세계에 익숙해지고 있다.

우석훈 성결대 교수·경제학자 : 2022.04.11.

 

윤석열은 지금도 검찰주의자인가

시간은 사람마다 속도감이 다르다. 대선 후의 첫 주와 첫 달이 유독 그렇다. 뉴스도 보기 싫은 쪽은 한 달이 1년 같고, 이긴 쪽은 하루하루가 새롭고 마디지게 흐른다. 인지상정이다. 보수·진보 논객들의 글엔 걱정도 쌓인다.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치 세우고)로 부동산·물가·재정의 험로를 헤쳐갈 수 있을지, 늙은 내각닥치고 한·미동맹으로만 가는지, 최저임금과 52시간제는 어찌 바뀔 건지. 새 정부 출범까지 다시 한 달, 길찾기 부산한 세상엔 큰 불덩이도 하나 던져졌다. ‘검란(檢亂)’이다.

 

전조(前兆)는 여럿이었다. 325, 검찰은 3년 묵은 산업부 블랙리스트 수사를 꺼내들었다. 44, 경찰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부인의 법인카드 사건에 대해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46, 검찰은 검·언유착 의혹 수사를 받아온 한동훈 검사장을 무혐의 처분했다. 정권 이양기부터 사정 시비가 인 것은 전례없고,

2년째 휴대폰 포렌식을 못해 끌어왔다는 수사를 정권 바뀌자 종결한 것은 옛 버릇 그대로의 블랙코미디였다. 47, 민주당이 국회 법사위에서 의원 사·보임(辭補任)을 했다. 검찰은 그걸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채비로 읽고 집단행동에 나섰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묻고 따진다. 큰 의미는 없다. 검찰이 자극했고, 172석 민주당은 칼을 뽑았다.

 

검경이 움직인 세 날 모두 소환된 이가 있다. 문재인 정부 적폐와 이재명 수사를 공언하고, 측근 한동훈을 중용하겠다고 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다. 그는 집권하면 검찰의 직접수사를 넓히고, 예산권도 주고, 고위공직자 수사를 우선토록 한 공수처법 24조를 없애고, 법무장관 수사지휘를 폐지하겠다고 했다. 다 묶으면 다시 검찰공화국이다. 미래권력을 쥔 검찰총장 윤석열은 그 자체로 검란의 불쏘시개가 됐다.

 

서초동엔 두 개의 시금석이 생겼다. 인사는 한동훈, 수사는 김건희다. 윤석열이 독립운동하듯 살았다고 호명한 한동훈과 또 다른 한동훈들은 검찰의 실세가 됐다. 그 배치도는 이제 정치중립을 재는 잣대가 될 판이다. 대통령 부인이 될 김건희는 익명 계좌에서 도이치모터스 주식 125만주(40억원)284회나 시세조종한 게 포착됐다. 검찰은 그 범죄일람표를 쥐고도 여태껏 소환조사를 하지 않았다. 조국 딸의 대학·의전원 학력이 취소됐다는 기사에도, 경기도 5급 공무원이 도지사 부인에게 3년간 700~800만원의 법인카드를 썼다는 기사에도 댓글이 붙는다. “그럼 김건희는?” 이 댓글은 윤석열이 법치와 공정을 말할 때도 따라다닐 것이다.

 

3년 전이다. 검찰 고위간부가 신문 만평에서 한 글자가 빠지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법복 입은 검사 감투에 쓰인 자와 자는 지은 죄를 수용하겠으나, 검사를 개로 그리는 일은 없어지길 바랐다. 스폰서·전관예우 검사에 붙는 떡검이나 성폭력 검사를 지칭한 색검보다 개검은 정치검찰이나 일사불란한 검사동일체(상명하복) 문화를 비웃을 때 화백들이 그린다. 그는 거악과 싸우고 서류 더미에 묻혀 사는 검사도 많다 했고, 바람 부는 방향으로 눕고 공작하는 정치검찰이 검찰을 먹칠하는 적폐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달라지지 않는 검찰의 속성이 그것이다.

 

민주당이 124월 국회에서 검찰 수사·기소권을 분리하는 입법을 하기로 당론을 정했다. 법 시행은 3개월 뒤로 미루고, 검찰에서 나오는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산업·대형참사) 수사를 어디로 넘길지 추가 논의하기로 했다. 장기적으로는 한국형 FBI’도 구상하겠다고 한다. 대안 논의는 열어놓고 개문발차하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까지 경고하며 막겠다고 했다. 국론은 분열되고, 여의도는 전운 가득한 4월이 불가피해졌다.

 

수사·기소권 분리는 괴물 검찰을 개혁하는 제도적 종착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사사법체계와 수사역량을 교통정리하는 선결과제가 이뤄졌을 때다. 몇가지 원칙이 절실해졌다. 정치가 복원돼야 하고, 민생의 파행은 없어야 한다. 국회에서 합의안을 만드는 끈기와 유연성도 포기해선 안 된다. 분명해진 것은 또 있다. 이 순간, 리더십을 보여줄 가장 큰 정치인은 윤석열이다. 그의 검찰권 강화공약이나 거부권 행사전망이 여야 간 긴장을 높였음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검찰주의자인가. 국정과 국민을 맨 앞에 두고, 대통령은 민생·개혁 과제의 합의와 타협을 추동하는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 2022.04.12.

 

 

한국 보수는 창피함을 모른다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경제 6단체장들과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손경식 경총 회장은 기업규제 완화,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중대재해처벌법 보완, 김기문 중기중앙회 회장은 최저임금 차등화 필요성을 언급했다. 윤 당선인은 이에 화답하듯 기업의 자유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최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또한 경쟁, 능력, 효율 등을 상징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그럴듯한 자유시장경제철학이다. 그러나 한꺼풀만 벗기면 한국 보수의 민낯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 보수는 창피함을 모른다.

 

이날 행사는 전경련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은 박근혜 정권에서 어버이연합 관제데모를 조장하고, 미르재단을 위해 재벌들의 기부금을 모집한 국정농단 연루단체이다. 정경유착의 핵심이 자유시장경제를 주창하는 정권에서 부활하기 시작한다. 한술 더 떠 이 전경련 산하의 한국경제연구원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할 경우 국내총생산이 약 3조원 늘어날 것이라는 보고서를 기가 막힌 시점에 내놓았다. 이런 보고서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이 그들이 그토록 주창하는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인가? 이 정도 되면 자유시장이 아니라 유착과 연줄을 모토로 내건 단체로 전환해야 솔직한 것이다. 이런 전경련 부활과 겹치는 것은 전 세계적 화두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의제로 만들려던 대한상의의 후퇴이다.

 

지난달 경제개혁연대 등 몇몇 시민단체가 윤석열 인수위 구성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추경호, 최상목 등 과거 불법·부적절 행위에 연루된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은 2003년 재경부, 2011년 금융위원회 관료로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및 매각과 관련이 있다. 최상목 농협대 총장은 2015년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재직 당시 안종범 경제수석의 지시를 받아 기업들로부터 미르재단 출연금을 모집하는 등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 관여되어 있다. 그런데 결국 이들이 경제부총리로 지명되고, 금융위원장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 족탈불급(맨발로 뛰어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남)이라는 낯 뜨거운 찬양까지 받으면서 말이다.

 

여기에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는 최근까지 4년여 동안 김앤장에서 18억원이란 고액의 고문료를 받은 것이 드러났다. , 이게 청문회 낙마수준인지는 국민판단의 몫이라 치고 이런 내각을 구성하는 보수들이 진보의 내로남불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었던 거나 되짚어보자. 장삼이사들의 진보정권 권력자의 내로남불에 대한 분노는 이해나 간다. 보수엘리트들은 도대체 왜 분노하며 막말을 쏟아낼까? 대중에게 내로남불은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담론이지만, 자칭 족탈불급 보수엘리트들에게는 자기보다 능력 없어 보이는 경쟁자를 베어내는 칼일 뿐이다.

 

차기정권에서 재계와 보수관료의 화려한 부활은 이미 예견되었다. 윤석열 당선인은 이번 대선을 미래담론과 성장전략 하나 없이 정권교체와 대장동으로 치렀다. 경제에 관해서 기억나는 것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시장경제철학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이다. 이준석 대표는 어떤가? 대선기간 그의 비단주머니에서 나온 정책은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혐오조장이다. 어찌 보면 윤석열 당선인보다 이준석 대표가 더 문제일 수도 있다. 평생 검사로 있다가 1년 정치를 한 사람과 10년 넘게 정치를 한 사람이 누가 더 내공이 있어야 할까? 근데 이준석 대표는 모든 문제의 야마만 잘 따는 방송 패널로만 보인다. 여성가족부 폐지 이후의 그림도 없고, 장애인이동권이라는 본질보다는 효율이라는 본인의 정치적 자산 만들기에만 관심이 있다. 설마 그가 그리는 경쟁사회의 실제모델이 미국일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윤석열 당선인, 이준석 대표가 그렇게 좋아하는 자유시장경제철학의 본산이 미국 시카고 대학이고 거기에 조지 스티글러 센터라는 것이 있다. 프리드먼과 함께 자유시장이론의 거두인 조지 스티글러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연구소이다. 거기 홈페이지 한번 가보자. 10여년 전부터 공정경쟁을 방해하는 정치, 경제, 문화적 요소, 정책담당자에 대한 포획, 천민자본주의 등에 연구가 넘쳐난다. 왜 그럴까? 그게 미국 시장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유시장경제철학은 경제학원론 수준에서나 하는 얘기다. 정권의 핵심관계자들이 내용이 없을 때 모든 건 재계와 관료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서랍 속 아이디어를 다 꺼내오면 청와대와 집권여당은 폼 잡고 앉아 그들에게 모욕감만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 경향 : 2022.04.13.

 

코로나는 기획됐다? 누가, 왜 코로나 음모론을 믿는가

"'플랜데믹' 문제, 포퓰리즘 그 자체에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2년 넘게 이어가도록 국내외적으로 코로나에 대한 대응은 여전히 어렵다. 그 이유는 신종 감염병이라는 생물학적 속성과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영향 외에도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전파되는 '음모론(혹은 가짜뉴스)'의 영향 등을 들 수 있다. 영국에서는 '5G 전자파가 코로나를 확산시킨다'는 루머로 인해 기지국 방화사건이 발생했으며, 한국에서도 '백신에서 괴생물체가 발견되었다'는 루머가 온라인상에서 유포된 바 있다.

 

황당무계한 음모론적 주장은 '일부'를 넘어, 전 지구적 범위에서 팬데믹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과학 지식의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대중적 불안감은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코로나 이후 또 다른 공중 보건 위기 상황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누가, 왜 음모론을 믿으며 그 여파는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국학부모단체연합 등 60여개 단체가 지난해 129일 충북 오송 질병관리청 앞에서 청소년 방역 패스 철회 등을 요구하는 항의 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이를 위해 국제학술지 <선거, 여론 그리고 정당>에 실린 '포퓰리즘에서 플랜데믹으로: 왜 포퓰리스트들은 코로나 19 음모를 믿는가'라는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바로 가기 : From populism to the “plandemic”: why populists believe in COVID-19 conspiracies)'플랜데믹(plandemic)'은 코로나19가 기획되었다는 뜻으로, 미국에서 2020년 공개된 영상의 제목이다. 연구진은 포퓰리즘적 태도가 음모론을 믿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예측하고, 설문조사를 통해 이를 검증하였다.

 

포퓰리즘적 태도란 정치·사회적 엘리트들이 순수하고 정직한 대중을 배반한다고 비판하고 회색지대가 없는 흑백세계를 상정한다. 팬데믹 국면에서 포퓰리스트들은 정부나 의회 같은 정치 제도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 역시 기술관료 엘리트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역학자, 바이러스학자 등이 미디어에 빈번하게 등장하게 된 환경적 상황은 때론 엄격하면서도 갑작스럽게 결정되는 정부의 코로나 대응이 엘리트들 간의 거래의 결과라고 주장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러한 포퓰리즘적 태도는 좌·우파 모두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포퓰리즘적 태도와 음모론을 믿는 정도의 관계에 대해 검증하기 위해 연구진은 20205월에 조사된 오스트리아 코로나 패널 연구 자료(6, 9)를 분석했다. 응답자는 823명이었다.

 

연구진은 음모론에 대한 믿음을 평가하기 위해 코로나 19에 대한 다음 8개의 진술이 어느 정도로 참 또는 거짓이라고 생각하는지 5점 척도로 측정했다(매우 확실히 거짓 ~ 매우 확실히 참). (1) 코로나 백신은 이미 개발됐지만, 대형 제약사들에 의해 보류되고 있다. (2) 코로나 백신은 이미 개발됐지만, 정부에 의해 보류되고 있다. (3) 현재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고 있으며, 광범위하게 테스트되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는 시험용 백신이 있다. (4) 코로나는 인간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발된 생물무기다. (5) 코로나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여 팬데믹을 일으킨 자연 전염병이다. (6) 코로나는 미군의 비밀 군사 실험 중에 우연히 방출되었다. (7) 빌 게이츠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강제로 인류에게 백신 접종을 하려고 한다. (8) 새로운 5G 송신탑은 코로나 확산에 책임이 있다.

 

분석 결과, 연구 응답자 중 음모론을 믿는 비율은 결코 낮지 않았다. 전체 응답자의 69%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음모론에 대해 '확실하지 않다'거나 심지어 '꽤 확실하다' 혹은 '매우 확실하다' 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3%8가지 음모론 중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음모론을 소수의 비이성적인 사람들만 믿는 것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워 보인다.

 

또한 포퓰리즘적 태도와 음모론에 대한 믿음은 양의 상관관계가 있었다. 두 변수의 인과관계를 보다 상세하게 검증하기 위해, 연구진은 정치제도에 대한 신뢰와 과학 제도에 대한 신뢰의 매개효과를 추가로 분석하였다. 포퓰리즘적 태도는 정치제도와 과학제도에 대한 신뢰와 모두 음의 상관관계가 있었고, 정치제도와 과학제도에 대한 신뢰는 음모론에 대한 믿음과 음의 상관관계가 있었다. 이는 포퓰리즘적 태도가 음모론에 미치는 간접적인 효과의 경로를 보여준다. 이 관계는 연령, 교육 수준, 젠더, 정치 이데올로기, 정치적 관심 변수를 통제한 상태에서 유효했다.

 

현실에서는 (재선에 실패한 트럼프와 같은) 우파 정치인들이 주로 코로나 음모이론의 공급과 확산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연구는 현재 음모론의 확산은 좌·우파 어느 한 편만의 문제이자 위기가 아님을 시사한다. 문제는 포퓰리즘 그 자체에 있다.

 

포퓰리즘이 정부 차원에서 발현될 때 이것의 여파는 단순히 음모론을 횡행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선다. 코로나와 백신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에도 피해를 준다. 42개국을 대상으로 코로나 초과 사망률에 대해 조사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포퓰리즘 정부의 초과 사망률은 비포퓰리즘 정부와 비교할 때 2배 이상 높았다.(관련 기사 : <프레시안> 128일 자 ''포퓰리즘' 정부에서 코로나 초과 사망률 2배 높았다')

 

음모론이 퍼져나가는 동안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통 사람들'의 개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고통의 이야기는 얼마나 알려졌는가. 현재의 포퓰리즘이 누구에 의해 어떠한 목적으로 이용되는지 의심해봐야 할 이유다.

 

*서지정보

- Eberl, J. M., Huber, R. A., & Greussing, E. (2021). From populism to the “plandemic”: why populists believe in COVID-19 conspiracies. Journal of Elections, Public Opinion and Parties, 31(sup1), 272-284.)

권시정 시민건강연구소 영펠로우 / 프레시안

 

헌법정신역행하는 권력기관 사유화

박빙 대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권교체기의 낯익은 풍경이 연일 이어진다. 말의 성찬과는 달리 행동의 냉혹함이 현실을 지배한다. 윤석열 당선인의 일성이었던 국민통합은 그들만의 통합임이 점점 노골화되고 있다. 결단의 고통을 감내한 주권자 국민의 정신적 위무를 위해서라도 지켜져야 할 새 정부 출범의 허니문을 스스로 깨뜨리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상징을 무너뜨린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제왕의 방식으로 대통령집무실 이전을 속전속결로 강행한다. 식사정치는 요란하지만 성가신 언론매체는 출입불가로 일관한다. 공약임을 내세워 여론에 역행하는 정부조직개편은 요지부동이다. 법치와 자유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더니 스스로 기소한 국정농단 범죄자를 찾아 사죄하고 명예회복을 약속한다. 능력주의랍시고 최소한의 다양성마저 상실된 성별·지역·학력·세대 편중, 비전부재의 첫 내각을 구성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최측근 현직 검사를 법무장관 후보로 전격 지명하고 학연이 두드러진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를 인선한 조치에서 보듯 권력기관의 직할 체제를 전면화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열거하기에도 만만찮은 행보는 진영논리라고 쉽게 치부하기 힘든 행태적 방향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검찰총장 출신 당선인이 스스로 살아있는 권력이 되어서는 권력기관 직할 의도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 것은 민주공화 헌법에 비추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는 행보다. 아직도 혹시나하고 있을 많은 국민들의 순진한 낙관이, 오히려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은 날씨만큼 처량해 보인다.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이 듣기를 거부하더라도, ‘역시나의 허망함을 짊어질 이들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헌법이 전제하고 있는 정권교체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헌법에 정권교체는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권력분립, 견제와 균형, 법치, 보통선거 등 민주공화제의 기본원리를 고려할 때 주기적인 정권교체는 당연히 전제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제의 경우 정권교체는 총선과 대선으로 이원화되어 있고, 입법권과 행정권 사이에 권력분점이 빈발하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번에도 총선이 아직 2년이나 남았는데 야당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게 되는 권력분점이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이번 대선에 따른 정권교체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당선인이 보여주는 행태는 그토록 공격하던 내로남불을 넘어 반헌법적이기까지 하니 국민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헌법상 권력분점을 해소하는 방법은 입법권을 장악하고 있는 야당과 협치하는 방법과 국민의 신임을 두고 경쟁하여 정국주도권을 장악하는 방법이 있다. 둘 다 민주공화 헌법이 허용하는 방식이지만, 두 번째의 경우 헌법이 묵시적으로 금지하는 금단의 영역이 있다. 대통령이 법집행권을 남용하여 사정정국을 조성하고 상대를 위력으로 제압하는 방식이다. 민주화 이전에는 너무나 당연시되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근절되지 않은 이 선별적 법집행권의 방식은 법 앞의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법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로 민주적 대통령제가 도입되었지만 제왕적 대통령 현상이 끊이지 않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던 근본원인이 되어 왔다. 문제의 법무장관 후보자가 나쁜 놈만 잘 때려잡으면 법치라고 했다지만, 열 명의 범죄자를 풀어주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국민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주공화국 헌법의 법치이다. 스스로가 이와 같은 국민의 적법절차적 권리를 지렛대 삼아 실체적 진실발견을 임무로 하는 검사로서의 직업윤리를 저버리고도 법치의 상징인 법무장관으로 나서는데 아무런 법적 장애가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촛불로 국정농단 대통령을 탄핵한 것이 불과 5년 전임에도, 탄핵의 원인이자 제왕적 대통령제의 요체인 권력기관의 사유화를 노골화하고 있는 행태는 도대체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 성과 여부에 대해 당연히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문재인 정부가 검찰개혁과 관련하여 지향한 방향성에 있어서만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사회 모든 세력의 원론적 입장이 다를 수 없다. 현실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법무부를 그 외청에 불과한 검찰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탈검찰화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남긴 유산의 단절을 위해 필수적이다. 정치인 배제를 공언하고서도 정작 행안부 장관을 자기 사람으로 고집하는 것 또한 정권교체라는 명분과 어울리는 일인지 의문이다. 간곡히 청하건대, 제발 민주공화적 헌법정신에 입각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되새기시라.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2022.04.15.

 

2년 만의 전면해제, ‘거리두기가 우리 사회에 남긴 과제

정부가 15일 사적 모임 인원과 다중이용시설 영업시간, 집회 등 행사 인원 제한을 18일부터 전면 해제하기로 했다. 이번 조처로 사회적 거리두기2년 남짓 만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게 된다. 다만 마스크 착용과 확진자 격리 의무 등은 상황을 봐가며 해제 시기가 결정된다. 오미크론 유행은 끝나지 않았다. 날마다 세자릿수에 이르는 사망자를 줄이는 문제가 급선무다. 특히 고령층 등 고위험군의 보호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하루 평균 15만명대를 유지하는 확진자 수도 줄여야 한다. 개인 방역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처음 도입된 건 2020322일이었다. 코로나19 유입 초기 대구·경북지역에서 극심한 혼란과 피해를 겪고 난 뒤 이른바 ‘3’(밀집·밀접·밀폐)을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멈춤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기 위해 크고 긴 고통을 겪었다. 대다수 소상인·자영업자들은 한동안 아무런 경제적 보상 대책 없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려야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수준의 재정을 투입하고도 지속가능했던 케이(K)방역은 고통과 희생을 감내한 국민들 덕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케이방역을 두 축으로 떠받친 건 방역·의료 최전선의 보건의료인들이었다. 이른바 검사·추적·격리’(3T) 전략은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억제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이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인력이 필요한데도 정부의 뒷받침은 부족했다. 현장에서는 갈아넣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보건의료인들이 극한의 격무에 시달렸고, 견디다 못해 일을 관두는 이들이 속출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오미크론 변이의 등장으로 케이방역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사망자가 폭증한 것은 오미크론의 전파력이 강해서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수십년간 방치해온 공공의료 인프라 부족 상태가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미크론 상황 종식을 섣불리 예단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길고 어두웠던 터널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후위기와 밀접히 닿아 있는 팬데믹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 새로 들어설 윤석열 정부 역시 이를 엄중하게 인식하고, 지난 2년여의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근본과제를 풀어나가길 바란다. 임기 초부터 제대로 대책을 세워 실행하지 않으면 언제든 일상은 또다시 무너질 수 있다. /한겨레 사설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 대통령 정치철학을 보라

장관국회의원 겸임, 논공행상 인사가 승자독식

한국 대통령제에서 제왕적 대통령은 극복의 대상이다. 본래 '제왕적 대통령'이란 단어는 미국의 역사학자인 아서 슐레진저가 그의 저서에서 닉슨 행정부를 비판하면서 처음 소개됐다. 대통령제는 입법, 행정, 사법의 삼부가 상호 견제하는 구조 위에 서있다.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은 전제정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의 사회세력이나 집단이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력을 동시에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한국 대통령제는 구조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을 극복하는 데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의회에 독점적으로 입법권을 부여함으로써 철저히 권력분립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우리는 대통령이 법률안 제출권뿐만 아니라 긴급 처분 명령권, 계엄선포권을 가지고 있다. 사실상 입법부의 역할을 공유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예산편성권을 하원이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입법부가 예산편성권을 갖고 있지 않다. 1987년 개헌에서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을 없애고 의회의 국정감사를 부활시킴으로써 대통령의 권한이 축소되었지만 여전히 행정부 우위의 구도다.

 

이러한 사항들은 한국 대통령이 제왕적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게다가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의 겸임이 가능한 제도를 두고 있음으로써 대통령의 영향력이 국회에 직접적으로 미칠 수 있는 구조이다. 대통령의 법률안 제출권, 예산편성권, 긴급 처분 명령권 등은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항들이다.

 

대통령이 의회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의 겸임 제도는 폐지하는 게 옳다. 이는 개헌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국회가 의지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민주당이 지난 대선 막바지에 정치교체를 강하게 드라이브 할 때에도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겸임 폐지는 정치개혁 조항에 포함되지 않았다.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겸임 폐지는 국회법만 개정하면 된다. 헌법 제43조에 '국회의원은 법률이 정한 직을 겸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국회법 제29조에는 '의원은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 직 외의 다른 직을 겸할 수 없다'고 되어 있어서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의 길을 열어 놓았다. 따라서 이 조항만 개정하면 헌법 개정 없이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의 겸임을 금지할 수 있다.

 

겸임이 부당한 이유는 입법부 소속인 국회의원이 하루아침에 행정부 소속으로 바뀌어서 선출권력이 아닌 임명직 공무원으로 전환되는 것은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상호견제를 기본으로 하는 삼권분립 대통령제의 기본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가장 직접적인 인사권의 차원에서 의회의 일원을 내각으로 편입시키는 것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경계를 허물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이 의회를 기속할 수 있다는 면에서 부적절하다.

 

지난 정권들에서 장관과 국회의원의 겸임이 오히려 더 많을 정도로 일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겸임 폐지는 정치개혁의 의제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지난 국회들에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제도는 여야의 이해관계 일치에 의해 쟁점조차 되지 않는다.

 

대통령제의 승자독식을 완화하기 위해 다당제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중대선거구제 도입과 거대양당에 의한 기득권 정치 타파를 내세우지만 대통령제에서 과연 연합정부 구성이 실효적인가를 생각해 볼일이다.

 

승자독식의 정치의 혁파는 누구나 공감하는 정치의제이지만 대통령제에서 승자독식의 타파는 대통령의 의지에 달린 면이 더 많다. 내각 구성 때 야당의 동의를 구하거나 야당 추천 인사에게 내각 자리를 일정 부분 배려하는 것 등이 정치적 관례로 자리잡으면 바로 그게 협치이고, 통합이며 정치교체이다. 판에 박힌 다당제 연립정부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물론 야당에게 장관 몇 자리가 돌아간다고 해서 승자독식이 극복되는 것도 아니다. 이긴 쪽이 공직과 공공기관 자리는 물론 코드인사와 낙하산 인사의 방법으로 논공행상을 하는 것이 바로 승자독식이다.

 

제왕적 대통령 폐지는 제도와 관행, 의지가 연계되어야 가능하다. 대통령에 법률안 제출권이 부여되어 있고, 행정부에게 예산편성권이 있으며 감사원이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등의 제도 역시 개정의 대상이다. 물론 의회가 더 권능을 갖추도록 하는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개헌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실천 가능하다.

 

대통령의 정치철학이 전제되면 정치개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정치교체는 거창한 구호와 요란스런 제도 변화가 수반되지 않더라도 가능한 부분부터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제왕적 대통령 극복의 단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 프레시안 2022.04.15.

 

윌 스미스를 보면서 폭력의 합리화를 찾는 아이러니

윌 스미스가 향후 10년간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지난달 27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 도중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탈모를 소재로 농담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린 결과다. 이번 아카데미의 조치는 윌 스미스가 받은 오스카 트로피를 박탈한다거나, 앞으로 후보로 지명될 권리까지 빼앗은 것은 아니다. 시상식 직후 윌 스미스의 트로피를 박탈해야 한다며 들끓었던 미국 내 여론을 생각해본다면, 비교적 유한 조치가 내려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번 사건에 대한 미국 대중의 반응은 분명하다. 미국 연예 매체인 TMZ가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83%가 윌 스미스의 행동을 폭행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스포츠 도박 회사 BetOnline.ag는 트위터에 게재된 관련 해시태그를 조사했는데, 미국 50개 가운데 41개 주에서 크리스 록을 지지하는 의견이 우세했다고 한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물리적 폭력은 허용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미국적 사고 아래, ‘흑인 여성의 탈모는 인종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인 만큼 조롱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논리도 힘을 잃는다. 2015JTBC <비정상회담>혐오 표현도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나라는 주제로 토론한 일이 있는데, 이날 방송에서 미국 국적의 방송인 타일러 라쉬의 발언을 떠올려보자. 당시 타일러는 혐오 표현도 표현의 자유라는 데 동의하며 표현의 자유는 케이크처럼 한 조각만 잘라서 이것만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가치다. 혐오 표현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지만, 법으로 대응하는 순간 표현의 자유는 사라진다고 말했다. 혐오 발언에 대한 법적 처벌 여부에 대한 의견이었지만, 수정 헌법 제1조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미국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에 대한 의견도 이러할 진데, 할리우드 톱스타 부부인 윌 스미스와 제이다 핀켓 스미스를 향한 조롱은 말해 무엇할까. 더군다나 대중의 관심을 기반으로 막대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스타들인 만큼, 사생활이나 인격 역시 (어느 정도는) 대중의 즐길 거리로 제공해야 한다 생각하는 미국인들도 많다. 한국 기준 범죄에 가까운 파파라치들의 사생활 취재, 아카데미나 그래미 같은 시상식에서 오가는 수위 높은 조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연합뉴스 유튜브 윌 스미스에게 뺨맞고 처음 입 뗀 크리스 록 아직 처리 중”” 갈무리. 사진=연합뉴스 유튜브

 

조크가 업인 크리스 록이 그날의 주인공 유력 후보인 윌 스미스와 그 아내를 주제로 던진 조크.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윌 스미스의 격분은 유명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물리적 폭력으로 크리스 록의 표현의 자유, 미국 대중들의 조크를 즐길 자유까지 침해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한국 대중 반응은 조금 다르다. 공식적으로 진행된 여론 조사가 없기에 단정할 순 없지만,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반응, 인터넷 뉴스 댓글 등에서는 윌 스미스에 우호적인 의견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아픈 가족에 대한 모욕을 참으란 말이냐’, ‘나라도 한 대 때렸다며 윌 스미스의 분노에 적극 이입하는 이들부터, ‘왜 미국인들은 윌 스미스의 물리적 폭력만 비판하고, 크리스 록의 언어폭력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나’, ‘하비 와인스타인의 트로피도 박탈하지 않은 아카데미가 (결국 박탈되진 않았으나) 윌 스미스의 트로피 박탈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코미디다등 윌 스미스만을 향하고 있는 미국 내 비판 여론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누군가는 이 차이를 두고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폭력 감수성이 둔해서라고 해석했다. 교사들은 교권 추락의 이유를 체벌 금지에서 찾고, 국가가 규격을 정해 준 사랑의 매국가가 허락한 폭력이 행해지던 야만적인 학창 시절을 보낸 대한민국 30대로서 딱히 부정하기도 어렵다. ‘어떤 이유에서건 물리적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대외적으로도 떠들지만, 최근만 해도 상간녀의 머리채를 잡은 부인, 여자친구를 성폭행한 범인을 감금 폭행한 남자에게 내 마음속 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자꾸만 윌 스미스에게 기우는 마음을 다잡으며, 내 안의 폭력 감수성을 끌어올리려는 이유는, 폭력을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아내의 명예를 위한 가장의 폭력을 용인하면,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명예 살인도 용납해야 한다. 약자에 대한 조롱이나 혐오 발언을 폭력으로 응징하기 시작하면 우리 사회에 매로 다스려야 할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물리적 대응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윌 스미스의 폭력은 그의 생애 첫 오스카 트로피의 영광을 퇴색시켰을 뿐 아니라, 크리스 록을 향했어야 할 비판의 화살을 모두 자신에게 돌리고 말았다. 이번 사건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피해자인 제이다가 지워졌음은 물론이다. 아내를 지키기 위해 휘둘렀다는 손바닥이, 아내가 사과받을 기회를 앗아간 것이다.

 

윌 스미스 덕분에 크리스 록은 언어폭력의 가해자가 아닌 물리적 폭력의 피해자로만 남게 됐다.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크리스 록의 공연이 모두 매진되고 기립 박수까지 받았다는 기사를 접하니, 앞으로도 선을 넘는그의 조크가 멈출 일은 없을 것만 같다. 제이다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윌 스미스의 폭력을 너그럽게 이해한 프로’, ‘대인배이미지까지 얻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아무리 둔한 폭력 감수성을 가진 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윌 스미스는 없고 크리스 록은 있을 아카데미를 10년쯤 시청하다 보면 더 절절히 깨닫게 될 것이다. ‘, 이래서 폭력이 안 된다는 거야

윤정 칼럼니스트 미디어오늘 2022.04.16

 

 

공교육 걱정없는 세상

지난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교육 공약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는가? 대부분 없다고 답할 것이다. 무엇보다 뾰족한 대학 개혁안이 나오지 못했는데(발표된 공약은 대학원개혁안에 가까웠다), 이는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관계자들을 수평적으로 모아놓은 탓이다. 또한 학부모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정책이 나오지 못했는데, 이는 교육정책단위 구성원 가운데 50·60대 남성이 75%나 된 탓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아이 교육은 엄마 몫으로 치부되지 않았던가? 여성의 비율이 75%였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사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진보는 사교육의 원인이 서열화에 있다고 보고, 대학 서열을 완화·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는 사교육의 원인이 공교육 부실에 있다고 보고,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엔 양쪽 다 맞다. 2016년 마크로밀 엠브레인에서 서울·경기 지역 초등학생 엄마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사교육을 하지 않으면 공교육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문항에 65.9%그렇다고 답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단순히 공교육을 따라가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통계청 사교육비 조사에서 사교육 이용 목적을 묻는 질문에는 뭐라 답했을까? 대학 서열로 인한 사교육과 공교육 부실로 인한 사교육의 비율이 동등했다. 가장 최근인 2016년 조사의 경우 경쟁적 사교육76.3%, ‘보완적 사교육76.8%로 거의 똑같았다(복수응답 허용·전자는 선행학습진학준비’, 후자는 학교수업 보충이라고 답한 비율).

 

이렇듯 엄마들은 진보와 보수의 진단에 모두 동의한다. 대학 서열뿐만 아니라 공교육 자체의 부실함도 절절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교육이 부실한 것은 교사 책임인가? 그렇다. 하지만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나머지 공부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학습부진이 우려되는 학생들을 교사가 방과후에 남겨 지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하교시키라는 학부모의 민원 앞에, 방과후학교에 자리를 내주고 마땅한 공간을 구하지 못하는 교사들 앞에, 관료와 관리자들은 보신주의로 일관해왔다.

 

정치권은 학급당 교사를 2명으로 늘리겠다는 가성비가 의문스러운 방안을 놓고 몇 년째 논의만 하고 있다. 이보다 더 시급한 일은 어떻게든 나머지 공부를 유지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소수의 교사들을 멸종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숙제라고 하는 중요한 전통이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말 자체가 수업()만으로는 되지 않고 익힘()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핀란드에는 숙제도 없고 수준별 교육도 없다는 미신을 퍼뜨리면서, 숙제를 줄이거나 없앨 것을 종용한 진보 교육계 인사들이 있다. 실상은 핀란드에서 엄연히 초등 1학년부터 숙제가 주어지며, 의무교육 9년 중에 나머지 공부(보완교육 특별반)의 혜택을 경험하는 비율이 30%에 달하고, 고등학교 졸업자 가운데 직업교육 이수 비율이 55%(2018·성인 재교육 제외)에 달해 수준별 교육의 기능을 분담한다. 직업계고 재학생이 18%에 불과한 한국의 경우, 일반고에 수준별 수업은 꼭 필요하다. 나는 수준별 수업을 부활시킬 진보 교육감 후보들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엄마들은 알고 있다. 아이가 형편없는 수학 점수를 계속 받아오거나 방학만 지나면 영어를 다 까먹는 게 뻔히 보여도 공교육은 별다른 대책을 세워주지 않는다는 것을. 교사들은 알고 있다. 적극적 교육활동을 억압하는 자연선택의 압력 속에서 마음을 다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국민들은 알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학력 양극화 앞에서 온라인 나머지 공부온라인 맞춤형 숙제같은 아이디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은, 교육계의 무사안일이 진보의 승인을 얻어 보편화된 탓임을.

 

 

이재명 후보의 공약으로 돌아가 보자.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창한 항목에 학력이라는 두 글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기초학력은 ‘1교실 2교사제의 몫으로 한정되고 디지털 전환은 태블릿 기기를 나눠주겠다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교육의 핵심은 교사와 소프트웨어인데, 최근 학교건물 구조나 태블릿 같은 하드웨어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한마디로 주객전도다. 적극적 교육활동에 나서려는 교사들의 교권을 보호하는 조례를 제정하고, 기업들이 탑재하고 교사가 선택하며 정부가 종량제로 후불하는 인공지능 활용 학생별 맞춤형 숙제플랫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경향 : 2022.04.16.

 

 

촛불 꺼진 이후의 반동, K-트럼프 리스크

피플없는 포퓰리즘, 갈라치기 + 신자유주의 ?

조만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다. 여러모로 불안한 시작이다. 그들 스스로가 잘해서라기 보다 80%(?)는 상대방이 헛발질한 덕분이다. 보수쪽의 무슨 전향적 혁신같은 것이 있었나?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낡은 것이 죽지않고, 늘어놓는 레파토리도 별반 변함없이 다시 찾아 왔다고 하면 좀 심한가? 하지만 경쟁상대와 0.73%의 차이라 해도 국민의 다수가 선택한 건 분명하다.

 

이로써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삼인방의 권력사유화와 국정농단, 뜨거운 아스팔트 촛불항쟁의 힘으로 기회를 얻었던 문재인 중도자유주의 정부의 시간은 허망하게 퇴장하고 보수정부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분단체제하 중도와 보수라는 거대양당의 게임, 그들끼리 '적대적으로 공생'하는 가운데 제법 치열하게 경쟁하는 한국판 진영정치 사이클은 이번 시간에도 이렇다할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사실 대선 이전에 이미 문재인정부는 촛불을 꿀꺽 삼켜버렸다. 촛불이 꺼지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은 텅빈 메아리만 남아있는 씁쓸한 종말과 불안한 새 정치적 순환의 시작과 마주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

 

승자와 패자 모두 묵직한 숙제를 받았다. 그들은 대선이후 숙제를 잘하고 있나? 당장은 아니라도 앞으로 잘하려고 하나? 그들의 말을 또 믿어도 될까? 다가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도 국민의 심판이 기다린다. 하지만 정치는 선거이상의 것이다. 한국정치에서 어느 때보다 신뢰, 믿음이 중요해졌다. 선거가 아니더라도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더 바라볼게 없다. 패자든, 승자든 숙제를, 약속을 여하히 잘 이행하느냐, 이를 통해 어떻게 신뢰를 회복하느냐에 따라 다음도 기약할 수 있고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이른바 '국민통합'의 길도 달라질게다. 그런데 '검찰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강대강'으로 충돌하는 걸 보니 초장부터 뭔가 꼬인다는 생각을 숨길 수가 없다.

 

중도권력의 기득권화, 촛불삼킨 촛불정부

오늘날 세계 정치에서 중도권력의 기득권화 현상(토마 피케티는 '브라만화'라고 불렀다)은 널리 퍼져있다. 우익포퓰리즘이 득세하는 것도 다분히 여기에 연유한다. 패권국으로 글리벌리즘을 주도해왔던 미국에서 반()세계화 자국우선주의에 인종차별과 혐오정치를 뒤섞은 깃발로 트럼프가 다수의 지지를 얻었던 것도 기득권 민주당이 밀고갔던 맹목적 세계화, 월가 및 대기업, 빅데크와 결탁한 신자유주의 기조가 낳은 불평등과 일자리 문제, 불로소득 문제앞에 속수무책이 되었던 결과다. 어떤 논자는 클린턴,부시,오바마의 경제 독트린은 낙수효과경제학을 신봉하는 네오리버럴이라는 점에서 사실 가족친화성을 가지며 트럼프는 반세계화 보호주의, 블루칼러 노동자 일자리 만들기, 재정건전성에서 벗어난 돈풀기로 이들과 결을 달리했다고 지적한다. 꽤 일리있는 말이다. 바이든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 민주당세력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뉴딜의 재창조' 노선으로 불평등 및 불로소득문제에 전향적으로 대처하려 했고, 또 집권후 트럼프의 정치가 워낙 저질이고 무능했던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유령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한국에서 중도자유주의 성향의 문재인 민주당정부가 기득권화해 촛불개혁 기운이 꺼지고 그 반동으로 우익포퓰리즘 성향의 윤석열정부가 출범하기에 이른 것은 기본선에서 미국민주당 세력이 트럼프에 권력을 넘겨주었던 것과 돌아가는 흐름이 많이 닮았다. 물론 차이도 있지만.

 

첫째, 문재인정부는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5년만에 정권을 넘겨주는 신기록을 세웠다. 한국판뉴딜을 내세우고 루즈벨트를 들먹이기도 했지만 정작 뉴딜형다수자연합을 만들기 위해 어떤 정치를 해야할지 고민은 없었다. 촛불연정은 일찍 기각되었고 말기에는 국민의 힘과 다투어 위성정당까지 만드는 꼼수를 서슴치 않았다. 둘째, 문재인 집권기를 통해 한국은 뚜렷하게 자산소유자 지배사회로 변모했다. 어슬픈 소득주도성장의 기조는 빠르게 꺾이고 불로소득성장 및 낙수효과성장으로 돌아갔다. 자산불평등이 심화되고 불로소득이 번창하는 사회, 대중들이 뿌리뽑혀 삶의 불안에 내몰리고 각자도생을 추구하는 상황이 곧 우익포퓰리즘 창궐의 의 온상이다. 셋째, 불평등의 벽에 내로남불식 위선이 포개졌다. 불평등 문제보다 오히려 공정문제가 더 중심 화두로 부상하고 여론전에서 공정과 상식의 가치를 국민의 힘이 가져갔다. 넷째, 코로나 위기상황에서도 문재인정부는 기재부 주도의 재정 건전성 신화에 포획되었다. 대선 국면에서도 소상공인자영업자 손실보상 문제는 오히려 윤석열 후보가 기선을 잡았다(취임후 100일내 50조투입).

 

다섯째, 남탓하거나 '다음에'라며 미루는 건 민주당의 큰 장기였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이 버릇은 결코 남 주지 않고 있다. 대선 결과에 상관없이 확실히 실천하겠다며 당론으로 채택했던 '국민통합 정치개혁' 약속은 이번에도 '검수완박' 검찰개혁 우선에 밀려나 '다음에'로 가고 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피플없는 포퓰리즘 = 갈라치기 + 신자유주의 ?

윤석열은 'K-트럼프'라는 말을 듣는다. 혐오와 차별로 갈라치기, 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반문명적으로' 고립화시키기, 그리고 감세 규제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강행과 저항 대중에 법질서(규율) 세우기가 윤석열 정부 사회경제 정책의 핵심적 기조로 읽힌다. 주거 부동산의 경우 투기공화국을 가속화시킬 정책으로 임대차법 폐지·축소 및 등록임대사업자 제도 활성화, 민간임대주택 활성화, 재건축·재개발 사업 규제완화, 분양가상한제 폐지, 그리고 세금 깎아주기 정책으로 부동산 공시가격 2020년 수준으로의 환원, 공정시장가액비율 95% 수준으로 동결, 1주택자 세율의 문재인정부 이전으로 인하, 장기보유자에 대해 연령 상관없이 매각 상속 시점까지 납부이연 허용, 세부담 증가 상한율의 인하,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한시적 배제 등이 화려하게 진열되어 있다. 청와대 직제도 슬림화된다. 청와대 정책실장직을 없애는 등 경제정책은 처음부터 기재부 주도로 끌고가려고 판짜기를 하고 있다.

 

이처럼 혐오로 갈라치기, 한층 가열찬 불로소득 성장과 대기업 주도 '낙수효과' 성장의 기조, '작은 정부' 기치를 가지고 새 정부의 핵심가치인 공정과 상식을 세우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일, '새로운 국민의 나라'(!)가 어떻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크게 불안해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한국판 트럼프가 우익포퓰리즘으로서는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포퓰리즘이란 절차는 거추장스럽게 여기면서 '피플'에 다가가 지지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원조 트럼프의 경우, 알고보면 우익포퓰리스트답게 대중에 실제로 어필하는 정책 지향을 갖고 있었다. 반세계화 자국시장 보호주의와 일자리를 잃은 블루칼러 노동자 대중에 조준된 일자리 창출하기, 위기 시대 재정건전성 족쇄를 벗어난 확장재정 정책 시행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최근 프랑스 대선에서도 우익포퓰리즘의 변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극우 성향 르펜이 높은 지지율을 얻었는데,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이는 등 극우 이미지를 탈색하는 정책 및 친서민, 친노동자 정책을 내놓은 것이 주효했다고 들린다. 르펜은 고속도로 국유화 공약을 내걸었다.

 

반면에 비슷한 성향의 우익포퓰리스트라지만 K-트럼프에는 원조 트럼프나 르펜에 있는 피플 친화적인 정책을 찾아보기 어렵다. 박근혜가 원조격인 신자유주의적 '줄푸세'는 있으나 '피플'이 없다. 중대한 결함이 아닐수 없다. 한마디로 잡탕이고 너무 올드하다. '피퓰이 없는 포퓰리즘'은 오늘날 새로운 대안우파가 되기에는 능력미달, 더 심하게 말하면 실격이다. 우리는 박근혜정부 시기 경제부총리 최경환이 한때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운운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MB정부도 후반기에 '중도실용'이라는 것을 꺼내들었었다. 문재인정부는 그래도 K-방역으로 세계의 칭송을 받기도 했었다. 윤석열정부는 무슨 수로 대중의 실제적 삶의 문제에서 그들의 호응을 얻겠다는 걸까? 이 정부가 보이는 이념적 기조의 정체는 뭘까?

 

새 정부 관료들의 실력은 ?

역대정부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윤석열 정부를 이끌 경제 관료들의 실력이 문제가 된다. 새 정부의 내각 수장으로 한덕수, 최경호가 각각 총리와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장관으로 지명되었다. 실력과 전문성, '경륜'을 갖춘 인물이라 발탁되었다고 한다. 비서실장 후보자조차 이례적으로 정통 경제관료출신이다. 발탁 이유는 그럴싸해도 사실 올드한 사람들이다. 우선, 총리및 부총리는 론스타 사태 및 기타 다른 의혹에 연루되어 논란 대상이 되고 있다. 더구나 한덕수후보는 김앤장법류사무소에서 4년여간 18억원의 고문료를 받은 인물이다. 사실상 일급 로비스트로 일한 자가 왔다갔다하면서 공정과 상식을 내건 새 정부 총리직을 수행하겠다는 꼴이다.

 

정책지향은 어떤가. 한덕수 후보는 "엄청난 확장재정에 위기의식을 느낀다"며 시종 재정건전성기조를 강조했다. 또 최저임금이 올라 기업에 부담을 줄까봐 걱정을 많이 한다. 그리고 추경호 후보는 "기업 모래주머니 규제를 벗겨주겠다"면서 규제 완화와 친기업 이윤 주도 성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기조를 분명히했다. 그는 다주택자 규제 및 갭투자 규제, 분양가상한제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반대한 바 있다.

 

앞으로 윤석열정부와 결합한 관료들은 어떻게 실력을 발휘할까? 처음부터 확실히 기재부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재정건전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며(비서실장까지 재정건전성 수호 합창을 한다), 규제완화를 저돌적으로 밀어부칠 듯한 기세의 인물들이 경제사령탑이 된 상황에서 윤석열이 약속한 50조 원 규모 추가경정예산(추경)은 어떤 결말을 볼지, 나아가 금리인상과 물가인상 파고가 밀려오는 전환기에 물가집값가계빛의 '3대 리스크'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이병천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 프레시안 2022.04.18.

 

 

어퍼컷과 글로벌 포퓰리즘

당선인의 어퍼컷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효과가 꽤 괜찮아 보였던지 상대 후보도 발차기로 화답했다. 선거 기간에는 그런 보디랭귀지가 허용된다. 말과 글로만 하는 유세가 아니라 모든 정보를 통해 자기를 홍보하는 것이 필요하고, 유권자들 또한 표정 하나하나로부터 정보를 읽을 수 있는 직접 정치력을 지니고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의 시간이 끝나면 당선인은 두 나라가 아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말과 글은 이제 선전과 선동이 아니라 과학과 책임의 영역으로 박제가 되어 국격이 된다.

 

유세장에서는 눈앞의 군중에 매료되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보디랭귀지가 지지자의 환호를 가져오는 그 순간 가장 큰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고 환호하는 군중 그들만이 진정한 애국자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의 실패가 시작되는 메커니즘이다. 어퍼컷의 팬덤 정치가 가져올 수 있는 폐해이다.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이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가를 보기보다는 그 규모와 환호의 강도에 시선이 꽂히게 된다.

여러 공론장을 통해 단련된 정치인들은 이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빨리 배운다. 그러나 공론장의 다양성과 비정형성에 익숙하지 않거나 이를 소모적이라고 보는 리더들은 팬덤의 환호에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의 전환적 리더십은 힘 있는 집행력과 효과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동일체가 되어 가는 대중을 상상한다. 수평적으로는 배제와 마이너스의 정치이지만 수직적으로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강한 정부를 만들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다는 태세이다. 이른바 포퓰리즘의 프리퀄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포퓰리즘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경제적 포퓰리즘은 장·단기 이익을 구분하지 않고 장기적 전략보다는 눈앞의 성과에 매몰되는 경제 정책을 선호하는 행태를 말한다. 기본소득 논의가 국가 재정 건전화와 같은 장기 전략과 배치된다면 이런 의미의 포퓰리즘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정치적 포퓰리즘은 대의제를 적대시하는 일종의 반엘리트주의를 의미한다. 정치적 포퓰리즘은 직접정치를 추진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장점이 있다. 대의제 속의 기득권화된 엘리트 체제가 제도 변환을 거부할 경우 현상타파적 직접정치가 새로운 정치 바람을 만드는 추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정치라는 점에서 그것은 온택트 시대의 대안적 민주주의로 선호되기도 한다. 하지만 후쿠야마는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오랜 공식과의 공존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최근 새로운 포퓰리즘의 글로벌화가 화제다. 일부에서는 이를 3의 권위주의 물결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5년 전 트럼피즘이나 현재의 프랑스 대선 현상처럼 소위 선진국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현재의 포퓰리즘을 권위주의 유사 현상으로만 등식화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세 번째 포퓰리즘은 앞서 정치 팬덤 현상이나 특정 문화적 가치 혹은 정체성과 관련된 정치 행태를 칭한다.

 

주지하다시피 신생 리더십이 특정 정체성에 근거한 팬덤식 정치를 몰아칠 경우 대의와 대표는 왜곡된다. 소위 정체성 정치와 연결된 문화적 형태의 포퓰리즘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다. 후쿠야마가 이 세 번째 포퓰리즘을 정체성 정치와 연결짓고 있는 덕분에 소수자 정체성을 옹호해 온 좌파들이 욕을 먹고 있긴 하지만, 후쿠야마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정체성 정치는 더 이상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젠더 선동이나 반이민자 선동, 인종주의 같은 행태는 우익 포퓰리즘의 전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를 경제적·정치적 포퓰리즘의 대표자로 지적하면서도 그에게서 세 번째 포퓰리즘은 찾을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적어도 베네수엘라 국민들을 갈라치기 하는 정체성 정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세번째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는 조금 더 분명해진다.

 

대선 기간 내내 포퓰리즘의 물결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한국 정치에 어떤 포퓰리즘의 잣대를 들이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새 정부의 정책을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프리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대남 선동과 같은 젠더 갈라치기나 대중혐오론과 같은 정체성 정치가 지속될 경우 대의와 대표의 왜곡은 불가피하다. 민주 정부를 약한 정부로 바라보는 착시가 스토롱맨에 대한 환호로 이어진다면 어퍼컷의 포퓰리즘 또한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그러다보면 지방선거 내내 리틀 어퍼컷과 리틀 발차기라는 칼군무들이 전국을 휩쓸지도 모를 일이다. K포퓰리즘이 타임지의 제목이라도 된다면, 이 해프닝을 누가 책임져야 할 텐가?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경향 : 2022.04.19.

 

 

말 바꾸는 이들이 가짜다

기다려라’(Wait)라는 말은 거의 언제나 안 돼’(Never)라는 말이었습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비폭력 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된 뒤 띄운 편지의 한 대목이다. ‘시기상조등 온갖 핑계를 대며 인종차별을 철폐하지 않으려는 백인들의 의도를 꿰뚫어본 것이다.

 

우리 형법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는 엄상섭 국회의원은 1954년 법전편찬위원회 공청회에서 우리나라도 조만간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에는 경찰이 너무 힘이 센 데다 친일 경력자도 많아 견제 차원에서 검찰에 일시적으로 수사권까지 주었다고 한다.

 

조만간은 해방 이후 70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세계에서 비교 대상국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수사권, 기소권, 영장청구권 등을 한 손에 틀어쥔 검찰은 국민의 인권보호보다 독재의 도구로 작동한 때가 많았고, 일관된 제 식구 감싸기는 불멸의 신성가족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드디어 검찰총장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측근이 법무부 장관 지명을 받자 반대진영에서는 검찰공화국이 완성됐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검찰과 국민의힘, 그리고 보수언론의 반대 논리는 수사권을 분리하면 부패가 만연해 국민이 피해를 본다는 거다. 그러나 지금도 형사사건 수사는 대부분 경찰이 하고 있고, 수사권을 분리하더라도 경찰 수사가 미진하면 검찰이 보완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

 

·영 등 선진국들 수사·기소 분리

수사권 분리법안에 동력을 만들어준 것도 검찰의 불공정한 법집행들이었다. 김학의 차관 불기소, 유우성씨 간첩 조작, 검사들 접대비 쪼개기 불기소, 고발 사주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수사 기피 등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기소를 목표로 한 강압수사로 자살자가 속출해 국민의 생명권에도 피해를 줬다. ‘국민 팔이에 수긍하기보다 전관예우 등 이해관계와 조직이기주의를 반대의 동기로 짐작하는 국민도 많을 터이다.

 

수사·기소 분리 국가가 거의 없다는 주장은 가짜뉴스. 미국은 검찰이 공소유지에 필요하면 수사를 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 한정되고 원칙은 경찰에 수사권이 있다. 프랑스는 수사 여부까지 판사가 결정한다. 영미법계 원조인 영국에 6년 머무는 동안 TV를 보면서 특이했던 점은 중요 범죄 수사 보도가 대개 스코틀랜드 야드로 불리는 런던 경찰청을 배경으로 이뤄진다는 거였다. 한국에서는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 현관 포토라인에 중요 범죄 피의자가 서는 장면을 보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기소는 검찰이 하지만 기소 후에는 언론이 법정공방을 중심으로 보도하니 우리 검찰처럼 수사과정에서 피의 사실을 흘려 피의자를 압박하는 일도 없다.

 

영국 등 많은 국가의 검찰청 이름은 기소청’(Prosecution Service)이다. 우리도 영어 명칭은 같은데 수사권까지 갖고 있다. 기소에 관해서도 미국에서는 기소배심, 일본에서는 검찰심사회 같은 시민통제가 이뤄지는데, 우리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한다. 검사는 법률전문가일 뿐 수사에 관해서는 형사가 받는 교육도 받지 않은 비전문가들이다.

 

법무부의 영어 명칭은 정의부’(Ministry of Justice). 한동훈 법무부 장관 내정자는 나쁜 놈만 잘 때려잡으면 된다고 말했는데 나쁜 놈은 누가 정하느냐고 되묻는 기자가 왜 없는지 모르겠다. 국민 중에는 그를 나쁜 놈으로 지목하고 싶은 이도 있으리라. 인권보호 부처의 최고 책임자로서는 부적절한 발언이다. 세상의 많은 불의는 일부 집단이나 독재자가 정의를 독점하고 적 만들기를 하면서 빚어졌다.

 

당선인·검찰총장 한때 분리 찬성

수사·기소 겸임에 따른 문제점은 국민의힘 쪽에서도 잘 알고 있다. ‘검수완박도 아니지만 이를 천인공노할 범죄라고 말한 권성동 원내대표는 2019년 자유한국당 사법개혁특별위원장으로서 수사권을 경찰에 넘기는 법률안을 발표했다. 검찰총장 청문회 때 윤석열 후보자는 수사·기소 분리는 아주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했고, 사직한 김오수 총장도 찬성했다. 주호영 의원은 2020수사·기소 분리가 세계적 추세라고 말했다.

 

변호사협회, 시민단체, 정의당,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안에도 졸속 입법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수사·기소 분리는 70년 넘은 과제이고 2017년부터는 여야가 모두 입법 준비를 해온 터였다. 시기상조론을 펴거나 시류에 따라 말을 바꾸는 이들이 가짜다.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경향 : 2022.04.19.

 

 

내로남불, 그들만의 리그

20171월 특검 사무실로 강제 호송되던 최순실(최서원)억울하다고 고함을 치고 난동을 부리자, 그 모습을 본 청소 아주머니가 한마디 툭 던졌다. “염병하네!” 전국에 생중계된 이 소리로 국민대변인이란 별칭을 얻은 청소원 임아무개씨는 당시 정황에 대해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청소 일 하면 100만원 남짓 받는데 세금 꼬박꼬박 낸다.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나라 망하게 해놓고 되레 뻔뻔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걸 보니 못 견디겠어서 한마디 퍼부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박영수 특검은 대장동 화천대유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최순실은 이를 두고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 돈벼락 잔치를 벌였다공정과 정의가 사라졌다고 호기롭게 일갈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면되어 지지자들의 뜨거운 환대 속에 귀환했고 그간 자신을 변호한 유영하 예비후보의 후원회장이 되어 나의 못다 한 꿈을 이뤄줄 인물이라며 정치 재개를 선언했는데,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그런 박근혜를 찾아가 참 면목이 없다. 늘 죄송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최순실이 검찰 조사를 받으러 나올 때 흘리고 간 검은색 프라다 신발 한 짝이 불길한 역사의 전조였을까? 머리에 꽃 꽂은 신데렐라처럼 국정농단의 주역들은 화려한 복귀를 꿈꾸고 그 입으로 공정과 정의를 외친다.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자녀의 편입학, 병역 특혜 의혹으로 새 정부 출범 전부터 논란이 무성하다.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 의혹에 대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를 투입해 서울대·부산대 등 30여곳을 압수수색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외쳤던 윤석열 당선자가 이번에는 부정의 팩트가 확실치 않다며 자기편 감싸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조민씨의 입학 취소 조치가 가혹하고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정호영 자녀에 대해서도 조국 때만큼 탈탈 털어 강도 높게 수사하라며 강경 대치 중이다. 조국에게 칼침이 되었던 내로남불의 공정성 논란은 부메랑처럼 다시 윤석열 정부를 향하고 있다.

 

조국 사태 당시에도 왜 정유라 입시비리 때처럼 처리하지 않느냐?”는 비판론이 드셌다. 정유라는 1심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청담고 입학이 취소되고 이화여대에서 퇴학 조치를 당했으며 이화여대 총장과 입학처장을 비롯해서 입시에 관여한 교수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정유라-조민-정호영의 아들딸로 이어지는 입시비리 사건 때마다 공격수와 수비수의 포지션만 바뀔 뿐, 똑같은 질타와 똑같은 반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 재생된다. 그 모든 내로남불의 공방은 그들만의 리그안에서 일어난다. 교수나 의사, 고위직 공무원을 부모로 두지 못한 대다수 청년들에게는 로맨스불륜이고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조국의 자녀 입시비리 의혹이 터졌을 때 자식들 스펙을 위한 부모 품앗이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되냐?”고 연민을 표하던 이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다. 일부는 분개한 음성으로, 일부는 은밀히 고해성사를 하듯이 내 자식이 다니던 학교에도 그런 일은 흔했다열심히 공부한 애들이 무슨 잘못이냐?”고 되물었다.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의 안정된 지위에 있는 이들이 이런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좁은 커뮤니티 안에서 세상을 재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진보도 보수도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득권자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자신보다 더 많은 자산, 더 높은 직위를 가진 이들에 비하면 너무나 소소하고 어설픈 지원일 뿐이라며 부모로서 자괴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편법은 늘 칼자루를 쥔 자에게 유리하고, 그래서 칼자루를 잡는 일은 그 모든 반칙을 덮을 만큼 중요하다.

 

특권층에게 정의는 칼자루를 잡기 위한 명분일지 모르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겐 생명과 생계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수단이다. 월급 100만원에 세금 꼬박꼬박 내고 산다던 청소원 아주머니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실까? 운동장 바깥에 선 이들에게는 검수완박을 둘러싼 칼자루 잡기 싸움보다 중하고 시급한 일들이 많다.

 

시민은 법을 원하며 법이 준수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지배계급의 경우는 이와 사뭇 다르다. 이들의 사회적 조건은 특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특권을 추구한다. 만약 이들이 법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것에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법관 노릇을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루소, <산에서 쓴 편지>, 1764)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한겨레 : 2022.04.19.

 

 

정의당은 어디로

유일한 원내진보정당인 정의당이 위기다. 대선 득표율이 지난 대선의 절반 이하로, 권영길 때보다도 떨어졌다. 위기는 드루킹 사건에서 시작됐다. 불똥이 엉뚱하게 노회찬 의원에게 튀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당의 한 축의 상실을 넘어 심상정 의원을 견제할 균형추가 사라졌다. 득표만큼 의석을 갖게 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과시키기 위해 조국 문제에 침묵한 것은 결정적 패착이었다. 대중의 신뢰를 잃었을 뿐 아니라 실리도 못 챙겼다.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의힘과 함께 위성정당을 만들어 이들 독점은 오히려 심화됐고 정의당은 10% 득표에도 불구하고 의석의 2%6석에 그쳤다. 더불어민주당의 사악함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명분과 실리 모두 잃고 만 것이다. 대선에서 심 의원이 완주해 이재명이 졌다는 비판은 위성정당을 만들어 민주대연합을 먼저 깬 것은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적반하장식 주장이다.

 

2020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1·2번에 청년을 배치한 것도 전략적 오류다. 물론 청년을 우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전체 전략 속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문제는 위성정당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동형으로 비례대표가 15명 이상 나온다는 낙관적 오판에 기초해 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 결과 젊은 비례의원의 타투 합법화 캠페인 등과 관련해 정의당=타투당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젊은 의원들이 발랄한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과거 신경 쓰지 못한 분야에 눈을 돌리는 것은 박수를 쳐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당 의원이 15명 이상 되는 상황에서 한두 명이 그런 식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의원수가 6명밖에 안 되고 언론들이 선정주의적 시각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타투당이미지가 생겨났다. 진보교수들로부터 이 같은 비판을, 주변에서 당이 타투당이 돼서 탈당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차세대 주자인 김종철 대표의 성추행 스캔들은 당 이미지에 먹칠을 했을 뿐 아니라 세대교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그를 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성을 이유로 당의 혁신노력과 미래비전을 알릴 수 있는 서울시장 등 지방선거 재·보궐선거에 불출마하기로 한 것도 자충수였다. 대선에서도 심 후보가 다시 출마하면서 신선함을 잃어버렸다. 2008년 심상정·노회찬에게 세대교체 요구에도 불구하고 권영길이 대선 3수를 해 분당사태를 가져온 것이 생각난다. 심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김동연 새로운물결 후보의 3지대 공조론도 악수였다. 정의당은 진보정당이자 소수정당이라는 이중성을 갖는데 소수정당을 강조해 더불어민주당보다도 보수적인 정당과 손을 잡은 제3지대론은 진보지지층의 이탈을 가져왔다. 결국 심 후보는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자기반성을 한 뒤 운동을 재개했지만, 대중적 지지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과의 전쟁보다 대선 약속처럼 위성정당을 금지하고 다당제를 제도화해야 하고, 유권자들도 한국 정치가 좌우의 날개로 날 수 있도록 진보정당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의당의 혁신이 필요하다. 첫째,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특히 현 정국에서 조국 때의 잘못을 반복해선 안 된다. 둘째, 긴 호흡의 시각에서, 여의도 중심주의를 벗어나 밑으로, 풀뿌리로 내려가야 한다.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당이 좌경화해서가 아니다. 셋째, 정의당이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 정당과 어떻게 다른가를 중심으로 정서적 지지자들을 정치적 진보로 성장시킬 진보정당 정체성 교육과 선전 프로그램을 강화해야 한다. 넷째, 지금까지는 상충된 면이 적지 않았던 생태운동, 페미니즘, 소수자운동과 노동운동 등 전통적 진보운동을 어떻게 접합시켜 ··적 연합’, 무지개연합을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다섯째, 특정 정치인이나 정파의 필요성에 따라 수시로 비례대표, 공직 후보 선출 방식을 바꾸고 보수정당처럼 언론에 주목을 받을 만한 인물을 영입해서 미는 한탕주의등을 바꿔야 한다. 이 같은 관행 때문에 이정미 등을 제외하고 서기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비례의원들은 이후 지역에서 출마, 지역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의원의 단물만 빨아먹고 당 활동을 중단했다. 이 같은 관행을 바꾸고 풀뿌리에서 고생하는 당원들을 우대하지 않는 한, 유명인사들이 입당해 비례 한번 하고 떠나고 지역출마 의원은 거의 없는 떴다방 정당을 벗어날 수 없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경향 : 2022.04.19

 

 

대한민국 내로남불 과거사 청산

과거사 청산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성취는 빼어나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독립적 위원회가, 학살 이후 약 40년 만에 최초로 법률에 따라 설치되었다. 제주4·3의 경우 포괄적인 배·보상 제도가 갖춰졌다. 진실규명을 넘어 피해 보상까지 국가가 온전히 책임지는 기념비적인 성취다. 여순사건 역시 진실규명에 착수할 위원회가 사건 발생 74년 만인 올해 드디어 출범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2020년부터 다시 활동 중이다. 사건별로 구성된 개별위원회가 포괄하지 못하는 다양한 사건들을 접수하고 조사하는, 과거사 청산의 지붕같은 기구다. 1970~1980년대 부랑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을 강제수용했던 형제복지원 사건을, 현재 진실화해위가 조사하고 있다.

 

이런 문재인 정부였기에, 간절한 기대를 가졌던 이들이 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다. 20194월 베트남인 피해자 103명은 이름, 주소, 서명, 사진과 피해 사실까지 첨부해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에게 청원했다. 청원서 중 일부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제주4·3, 광주5·18, 한국전쟁 등 과거 발생한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진상조사를 하여 진실을 밝혔다는 사실을 높게 평가합니다. 우리는 한국 정부의 그러한 일관된 원칙이 당연하게도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에서도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누가 베트남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가.

 

전후 최초의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공식적 요구. 대한민국은 국방부 명의로 다섯달 후 한장짜리 답변을 했다. “국방부에서 보유하고 있는 한국군 전투사료 등에서는 주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국가범죄가 공문서에 기재되어 있을 리 없다. 답변이 기가 막혀, 어떤 자료를 검토한 것이냐 물었다. 국가정보원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자료는 확인했냐고 물었더니, 확인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베트남 퐁니 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응우옌티탄이 <한겨레21> 취재진에게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자국민의 피해에 대해서는 법률을 만들고 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폭력에 빼앗긴 삶과 세월에 충분한 위로가 될 때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할 것”(김부겸 총리, 20224·3 추념사)이라 다짐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외국인일 때, 해당 국가가 피해자들을 충분히 대변하지 않아 목소리가 크지 않을 때, 대한민국은 확인 불가라고 답변한다. 자국 군대의 불법행위 의혹이 50년째 제기되고 있고, 피해자들이 그 시간 동안 절규하고 있는데, 조금 더 지나면 사과할 당사자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는데, 최소한의 진실규명 절차는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냐 물어도 답이 없다. ‘내로남불이며 이중잣대다.

 

19682, 응우옌티탄은 8살이었고 베트남 중부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복부에 총격을 당했다. 같은 자리에서 오빠를 뺀 가족은 모두 한국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고아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온 응우옌티탄은 103명 청원인 중 한명으로 대한민국의 사과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조금 더 해보기로 했다. 그는 20204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접수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관련 최초의 국가배상 소송에 원고가 되었다. 2년의 변론 끝에, 오는 89일 응우옌티탄이 직접 대한민국 법정에 서서 진술한다. 그가 원 없이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같은 19682월 베트남 하미 마을에서는 135명 이상이 역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당시에도 한국군은 학살이 범죄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군은 사건 다음날 다시 하미 마을로 와 불도저로 시신들을 훼손했다. 증거인멸을 위한 반인륜적 행동이었다. 그 하미 마을 학살 피해자 중 5명이 오는 25일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성취로 만든 대한민국 과거사 청산의 지붕 같은 기구에, 당신들만이 아닌 모두의 진실을 규명해달라는 요구를 전달한다. 신청인 중 한분의 이야기다. “피해자들이 정의를 되찾을 수 있도록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시길 희망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침공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보도가 이어진다. 한국 내 분노의 여론도 크다. 그 분노가 부디 내로남불이 아니길 바란다. 한국이 벌인 민간인 학살과 그 책임에 대해서도 똑같이 분노해주시길.

임재성 |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한겨레 : 2022.04.19.

 

 

윤석열 인수위, 위험한 부동산 불장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출범한 지 한달이 지났다. 안정세를 찾아가던 서울 집값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서울의 주간 아파트 매매가격 지수는 대선 직전 주간 상승률이 -0.03%까지 떨어졌지만, 대선 이후에는 보합세로 전환되고, 강남 4구는 결국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재건축 완화 공약에 대한 기대가 시장을 요동치게 하고 있다. 대선 결과를 좌우한 것은 부동산이었다. 윤석열 당선자는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부동산만큼은 자신있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지금까지만 보면 안정돼가던 부동산 시장을 다시 들쑤셔놓았다. 그리고 인수위는 아무런 대책도 내지 못한 채 정책 발표를 뒤로 미루며 집값 불안만 키우고 있다.

 

윤석열 당선자는 유세 기간에 문재인 정부가 득표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집값을 올려놓았다고 주장했다. 집을 가지면 사람들이 보수화되기 때문에 집값 상승을 부추겨 이를 막았다는 것이다. 논리도 근거도 없는 정치적 선동이다. 아무리 선거 기간이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대한민국의 어느 정부도, 어느 대통령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은 없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바뀐 지금 아마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부동산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국민의 원성이 들끓고, 가계부채로 경제가 위태로워지며, 정치적으로는 필패라는 사실을.

 

윤석열 인수위의 부동산 대책은 단순했다.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시장을 왜곡한 비정상적 정책이므로 이를 뒤집는 것이 곧 정상의 회복이며 집값 안정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수요를 억제하는 대신 재건축 규제 완화를 통해 요지에 주택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 대출 규제를 완화해 실수요자들이 쉽게 주택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등. 하지만 부동산 시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주 매끈하게 작동하는 경제학 교과서의 시장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부동산 시장이다. 단기간에 공급이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예상이 큰 역할을 하며, 금리나 유동성 같은 금융 요인이 가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곳이 부동산 시장이다.

 

공급을 늘리면 가격이 하락한다는 그 단순한 경제원리를 몰라서 정책이 실패했겠는가? 공급을 늘리려면 재건축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실패했겠는가? 재건축 규제 완화의 작은 조짐만 보여도 구축 주택 가격이 급등하고 그 효과가 주변으로 전염되기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대출을 규제하면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피해 본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정책을 도입했겠는가? 그 피해보다는 규제하지 않았을 때의 집값 급등이 그들에게 더 큰 피해라고 판단해서 대출을 규제한 것이다. 그 덕분에 현 정부의 정책 실패는 그나마 끝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게 되자 대출 제한이 불편했던 은행들은 눈치를 살폈다. 대출 규제 완화를 공약한 당선자를 믿고 한 은행이 슬쩍 부동산 대출 재개를 발표했다. 인수위에서 아무런 경고도 없었다. 곧 여당 의원이 될 금융권 출신 유력 의원은 은행 대출이 정상화되어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러자 은행들이 일제히 대출 한도를 없앴다. 시장이 이런 신호를 놓칠 리 없고, 서울 집값은 다시 들썩이고 있다.

 

나는 윤석열 당선자의 목표가 부자 감세가 아니라 집값 안정이라고 굳게 믿는다. 국민의 삶을 살펴야 할 대통령 당선자이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떠나는 정부보다 부동산 전쟁에서 훨씬 유리한 사이클 위에 있다. 금리를 인상하고 유동성을 흡수하는 국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부동산 열기는 결코 식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당선자는 이런 점에 각별히 유의해주길 기대한다. 우선 부동산 문제를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장관이나 참모가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둘째, 교과서를 들먹이며 부동산 문제가 단순한 것처럼 말하는 참모는 멀리해야 한다. 얼치기 전문가일 가능성이 크다. 셋째, 정책결정자가 건설사나 은행의 이해관계에 포획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포획은 부정한 거래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업계의 이해와 논리가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포획이다. 마지막으로, 집값 안정은 국토교통부 장관이 아니라 경제부총리가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집값 안정의 핵심은 건축이 아니라 금융이기 때문이다. 박복영ㅣ경희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보좌관/ 한겨레 2022-04-20

 

 

법 지키지 않는 법원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

연극이 끝난 뒤 객석에 홀로 앉아 있는 것처럼 선고가 끝난 뒤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다. 그럴 때마다 헌법을 펼쳐본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제2).’ 오늘은 유독 이 헌법 조항이 눈에 밟힌다.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27조 제3).’ 2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 노동자가 있다. 그는 상사의 강압적인 의사결정, 욕설과 폭언에 시달리다가 후배들과 함께 회사 감사실에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해결될 것을 기대했지만 두 달 뒤 노동자는 회사로부터 이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조직의 안정화를 위해 인사이동을 시행하고자 하오니 협조하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괴롭힘 가해자는 그대로 남고, 이를 신고한 노동자들만 뿔뿔이 흩어지는 이런 부당한 인사 조치에 대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건 20204월이었다. 2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 사건 소송은 아직 1심 진행 중이다. 소송을 제기한 노동자는 상사의 괴롭힘보다 부당한 인사 조치를 한 회사가 밉고, 회사보다 2년째 이 사건을 끌어온 법원이 더 밉다고 한다.

 

직장 내 괴롭힘보다 당사자에게 더 괴로운 2, 1심이 진행된 2년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20427일 소장을 제출하고 손꼽아 기다렸던 재판은 12개월이 지난 2021610일에야 열렸다. 그해 916, 1028, 이렇게 세 차례 재판이 진행되었고, 선고기일은 지난 210일로 잡혔다.

 

당사자는 4개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앞이 깜깜했지만 그만큼 재판부가 신중하게 판단해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재판부는 선고기일 일주일을 앞둔 24일 갑자기 재판을 다시 열겠다는 변론재개 결정을 내렸다. 324일 제4회 변론기일, 재판부 구성원 3명이 모두 바뀐 상황에서 재판장은 당사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변론재개가 된 것과 관련하여 이전 재판부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이 있는가?”

 

 

20205월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한 김명수 대법원장.

연합뉴스

 

746일의 재판 기간이 더 괴로웠다는 외침

이전 재판부가 판결을 선고하지 않고 재판을 다시 열겠다는 변론재개 결정의 이유를 소송 당사자에게 질문한 것이 민망해서일까? 새 재판부는 허겁지겁 재판을 종결하고 선고기일을 약 2개월 뒤인 5월로 잡았다. 상사의 괴롭힘, 회사의 부당한 인사 조치보다 746일의 재판 기간이 더 괴로웠다는 당사자의 외침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민사소송법 제199조는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 207조는 판결은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2주 이내에 선고하여야 하며, 복잡한 사건이나 그 밖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에도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4주를 넘겨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은 법전에는 존재하나 현실에서는 효력을 부정당하고 있다.

 

법은 사회적 약속이다. 사회적 약속인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시민들은 형사처벌을 받고 민사상 배상책임을 진다. 그러나 시민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법관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며 너무나 당당하다. 법을 지키지 않는 법원을 우리는 언제까지 참고 견뎌야 할까? ‘검찰개혁보다 시민들의 삶에 더 영향을 끼치는 법원개혁이라는 싸움에 이제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최정규 (변호사·불량 판결문저자) 시사인 2022.04.23.

 

 

조국과 다른, 정호영에게 침묵하는 2030'선택적' 공정

조국에 분노한 ‘2030의 공정과 정의를 이용하는 수구보수, 언론의 민낯들

요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참모진 인선 문제로 시끄럽다. 연일 터지는 참모진의 비리와 의혹은 공정상식을 따지는 윤 당선인이 명확한 국가 비전을 가지고 참모진을 구성했는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이에 쐐기를 박은 건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 특혜 의혹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정 후보가 경북대 원장, 부원장 시절에 딸과 아들이 잇따라 경북대 의대에 편입했고, 학부생 시절 논문의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며 편입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 논란, 어딘가 모르게 데자뷰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불과 몇 년 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특혜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때 서울대, 고려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국 부녀가 불공정하다고 강하게 비판했고, 이에 조국 장관 사퇴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조 전 장관에게 불공정하다고 말한 대학생들이 왜 정 후보에게는 잠잠한 것인가? 그토록 공정에 대해 투철한 2030이라면, 조 전 장관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 후보가 불공정하다고 지적하는 것을 넘어 후보 검증 및 사퇴도 요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조 전 장관 때 시위를 주동했던 대학생들의 행동이 정 후보와는 무척 다른 것을 보면서, 2030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정확히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2030이 외쳤던 공정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정의를 기반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어떤 사안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어떤 결과를 보며 스스로 불공정하다고 규정지은 사안에 대해 투쟁적으로 공정을 논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도출되었을 때, 이를 정의라고 여기는 듯하다. 달리 말하면, 2030의 공정은 선택적공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 기성세대인 586 세대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586 세대도 현 2030의 인식처럼 자신들의 공정을 따지며 주장을 관철하고자 시위를 했는가? 논점을 전개함에 앞서 현 586 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잠시 내려놓고, 그들이 과거에 이루었던 민주화에 대한 것만을 말하고자 함을 명확히 밝혀둔다.

 

586 세대가 2~30대이던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군사정권의 독재 시기였다. 이들은 역사적·철학적 사유를 통해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으로 다수 국민의 삶을 억압하고 통제하던 방식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수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면, 공정한 환경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이러한 사고가 일종의 공동체로 여기던 국가에 대해 애국적 면모로 드러나기도 했고, 급기야 시대적 사명이었던 민주화를 일궈내는 주체로서 기능했다. 이들은 사회를 정의롭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나 사람에 대해 투쟁하고 저항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586 세대는 () 정의, () 공정을 주창했다. 그 결과 힘들게 민주화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반면 현 2030() 공정, () 정의를 외쳤다. 그렇다면 2030공정과 정의를 말하여 무엇을 얻었는가? 이를 위해 다시 조 전 장관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현재 정 후보의 논란에 잠잠히 대응하는 언론과 검찰의 수준과는 확연히 다르게, 조 전 장관의 논란 때에는 자유한국당과 더불어 보수 언론과 검찰이 지속적으로 이를 문제 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경쟁적인 삶으로 자신의 기회를 뺏길까 두려워하는 2030에게 조국은 불공정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끊임없이 인식시켜 주었다. 거기다 불공정한 조 전 장관과는 반대로 당시 수사를 진행한 윤석열 검찰총장은 공정한 인물이라 규정했다. 훗날 윤 총장이 보수 대권 후보가 되었을 때, 보수 진영은 바로 이런 배경 하에 공정하다는 프레임을 자연스럽게 씌우는 빅 픽처를 선보였다. 보수가 공정을 정치적 개념으로 만들어 갈 동안, 2030은 자연스럽게 보수시각의 공정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2030은 조 전 장관을 사퇴시켜야 한다는 광화문 집회나 조 전 장관을 지켜야 한다는 서초동 집회에 참여하여 각자의 공정과 정의를 외치며 분열했다. 누군가는 불공정한 조국을 사퇴시키는 것이 정의라고 여겼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강압적이고 지나친 수사를 받는 조국을 지지하고 지키는 것이 정의라고 여겼다. 누구나 옳다고 여기는 정의라는 공적 개념이 사적 영역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보수는 공정이라는 단어로 2030의 심리를 계속 자극하여 조 전 장관의 불공정에 분노하도록 했고, 결국 그는 66일만에 사퇴하였다.

 

문제는 현재 정 후보의 경우 역시 상당히 불공정한 것인데도, 대다수의 2030이 조 전 장관 때처럼 들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보수가 2030의 공정을 굳이 언론에서 연일 대서특필하며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2030의 공정을 이용해봤던 보수이기에, 이제는 그들의 방식대로 2030을 다룰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2030공정과 정의를 외침으로써 얻은 건 보수의 정치적 이용대상이 되었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제라도 2030 청년들은 과거 586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정의와 공정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86 세대가 시간이 지나 기득권이 되어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586 세대가 자신의 삶을 내던지면서까지 외쳤던 정의와 공정은 보고 배워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2030들의 '정의에 대해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하며 공정을 이야기할 수 있고, 2030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 정의와 공정으로 각성된 2030들이 많아져, 진정한 정의가 회복된 대한민국을 선도해가기를 소망한다.

이인애/통일비내리는날 교육팀장 뉴스프리존 2022.04.23

 

 

늙은 모자의 죽음, 낡은 정치의 죽임

사회적 타살. 20224월 서울 창신동에서 몸이 불편한 80대 노모와 병을 앓던 50대 아들이 숨지고 한 달이 넘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 송파에서 일어난 석촌동 세 모녀의 동반자살을 떠올리게 한다. 창신동 모자에게 촛불은, 문재인 정부는 무엇이었을까.

 

현장 취재기자들의 보도를 종합하면 ‘90년 전 지어져 낡고 다 쓰러져가는 집안에는 각종 공과금과 신용카드 대금 독촉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전기요금을 내지 않았다며 공급을 끊겠다는 경고도 문 앞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여든두 살의 노모는 거동하기 어려운 몸으로 3년 전까지 일을 했다. 모자는 1930년대에 지어진 집을 2020년 매물로 내놨지만 팔리지 않았다. 그 집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계급여 신청에서 연이어 탈락 당할 때 모자의 절망은 무장 깊어갔을 터다.

 

부검 결과 혈관에 지병이 있던 아들이 먼저 사망했고 뒤이어 노모가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자신을 수발하던 부정맥의 50대 아들이 죽은 사실을 알았을 때 노모의 심경을 헤아려본다. 그 여성이 세상을 뜰 때까지 종로는, 서울은, 대한민국은 서러운 지옥이 아니었을까. 이 땅의 반지르르한 정치인들에게 차가운 분노가 치미는 까닭이다.

 

대다수 정치인들이 모르쇠를 놓을 때 서울시장 오세훈이 나섰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참사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음직하다. 그런데 영악하게 자신을 부각했다. “지금 시범사업 중인 안심소득 시스템이 이미 작동 중이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비통한 심정이란다.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분들이 이런 가슴 아픈 일을 겪지 않도록 안심소득 실험을 반드시 성공시켜서 시민의 삶을 지키겠다고 다짐도 했다.

 

하지만 안심소득을 짚어보면 그 비통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시는 선거정국에 들어선 올해 3월 말이 되어서야 기준 중위소득 50% 이하이면서 재산 32600만 원 이하인 시민을 대상으로 안심소득 참여 가구를 모집했다. 신청한 33803가구를 놓고 세 차례 절차를 걸쳐 선거가 끝난 뒤인 6월 말이 되어서야 그것도 500가구를 선정한다. 신청가구의 절대다수인 33303가구는 헛물만 켜는 셈이다. 게다가 5년간 시범사업을 연구한단다.

 

노모와 아들이 숨지던 시기에 창신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청와대에선 대통령 부인의 옷값이 신문과 방송에 화제가 되었다. 청와대 예산으로 산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대통령이 받는 고액의 연봉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사치는 몹시 개탄스러운 일이다. ‘선진국자화자찬에 앞서 대통령 문재인의 뼈저린 성찰을 촉구한다.

 

더 큰 문제는 살풍경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있다. 윤석열 당선자는 문재인 정부의 실망스런 복지정책마저 훌닦았다. 그럼에도 보라.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정호영은 날마다 불거지는 의혹에 한 점 부끄럼 없다우리 국민은 위대하다. 세계 10위의 경제 규모를 갖고 있고, 자부심은 세계 첫째다노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를 설계할 복지국가를 이루고 싶다고 언죽번죽 말했다. 사퇴는커녕 임무를 완수하도록 도와달란다. 윤 당선자도 조국에 들이댄 칼날과 전혀 달리 정호영을 두남둔다. 조선 신방복합체의 잣대는 춤춘다. 두루 도긴개긴이다.

 

예서 차분히 짚어볼 일이다. 만일 기본소득이 한 해 100만원이라도 나온다면, 비극적 고통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더러는 한해 100만원을 껌 값으로 조롱했다. 물론 가진 자들에겐 그럴 터다. 하지만 석촌동 세 모녀, 창신동 두 모자에게 가족 1인당 연간 100만원은 희망을 줄 수 있는 돈이다. 더구나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면 해마다 늘릴 수 있다. 그것이 정치 아닌가.

 

언제쯤일까, 석촌동 모녀나 창신동 모자의 비극에 가장 책임이 큰 저 낡은 정치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을 날은. 전망은 어둡다. 더 꾹꾹 눌러 쓰는 까닭이다. 모든 사회적 타살은 정치적 타살이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2.04.25.

 

 

미국 패권 이후의 세계

나는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한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중국 지배자들은 늘 천하통일을 이상으로 내세우지만, 사후적으로 보면 역사의 진보가 가장 빨랐던 시기는 바로 천하가 통일되지 않았던 시대들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가나 도가, 법가 등이 형성된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는 분열의 시대였지만, 아마도 중국 역사상 가장 풍부한 유산을 남긴 시대이기도 했다. 중국 고전 사상의 형성뿐만 아니라 진나라에서 상앙(기원전 390~338)의 개혁이 만든 세계 최초의 능력주의 관료국가도 피비린내 나는 전란시대의 유의미한 사회적 실험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와 비교가 가능한 시기는 송나라(960~1279)와 요나라(916~1125), 금나라(1115~1234)처럼 한족이 아닌 오랑캐들이 세운 왕조들이 공존한 10~13세기였다. 이웃과의 경쟁 속에서 송나라에서는 수력방직기나 화약 사용 등으로 기술이 발전하고 지폐·어음 사용을 바탕으로 상업경제가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부터 선불교까지 다양한 사상들이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유럽보다 반천년 먼저 송나라에서 근세’(early modernity)가 출현한 것이다. 반대로 천하통일을 이룬 명·청 시기에는 역사 발전이 훨씬 더 느렸다.

 

패권이 약화하거나 교체되는 시기는 근현대 세계사에도 있었다. 1870년대 초반 독일의 부상 이후로 비록 영국의 세계패권은 기본적으로 유지되면서도 신흥 산업대국인 미국, 독일과의 경쟁 속에서 날이 갈수록 약화했다. 하지만 1914년까지 지속했던 이 패권국가 쇠퇴의 시기는 아마도 세계사에서 기술발전이 가장 빨랐던 시대이자, 노동운동이 대대적으로 발전한 시대이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부터 니체 사상까지 오늘날 우리 생각의 지형을 형성하는 사상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뚜렷한 패권국가가 없었던 1914~1945년 사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시기는 세계사에서 가장 담대한 사회적 실험들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1917년 이후 소련에서 대안적 근대의 모델이 뿌리를 내렸고, 중국 공산당이 역사상 최초로 농민 기반의 사회혁명을 시도했다.

 

1945년 이후 미국 패권의 역사적 궤도는 단순하지 않았다. 1940년대 후반 절정에 이르렀던 미국의 패권은,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 서독과 일본의 부상과 미국 제조업의 상대적 후퇴,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패배 등으로 다소 위축됐다. 그러다가 1989~91년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인터넷의 상업화와 미국이 주도한 새로운 디지털경제의 출범은, 쇠퇴 일로에 있던 미국의 패권에 돌연히 새로운 을 불어넣었다. 소련은 이미망했고, 중국은 아직본원축적과 공업경제의 압축성장 시대를 경유하던 1991~2008년 사이 미국 패권은 1950~60년대에 버금가는 2의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에 비하면, 이미 디지털경제의 영역에까지 매우 성공적으로 진출한 중국식 관료자본주의는 비교적 더 강한 생명력을 보였다. 이라크 전쟁에서의 사실상의 패배 등 악재가 겹친 미국이 약해진 틈을 타, 중국과의 본격적 유착에 들어간 러시아는 2008년에 친미 성향 이웃 나라인 조지아를 침공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패권은 점차 경향적으로 약화해갔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전개를 배경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도 가속화됐다.

 

최근에 벌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역시, 미국 헤게모니 약화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 이 침략 자체는 세계사를 바꿀 만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될 리도 만무하지만, 설령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체를 점령해 자국 내로 편입시킨다 해도 세계경제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몫은 여전히 2~3% 안팎일 것이다. 침략 그 자체보다 세계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 침략을 계기로 분명해진 세계의 양분이다. 구미권과 한·일 양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은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했지만, 제재를 가한 나라들의 인구는 세계 총인구의 14%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중국은 물론, 인도나 터키, 사우디, 브라질, 남아공 등 세계 각 지역 강국들은 러시아 제재에 불참함으로써 미국의 리더십에 사실상 도전장을 던졌다. 미국과 유럽의 은행에서 러시아 자산이 갑자기 동결된 것을 본 중국은, 자국 화폐인 위안화의 국제결제 비율을 높이는 등 자국 중심의 국제금융시스템 구축에 앞으로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시스템이 구축돼 중국이 최고 순위의 미국 금융제재를 견뎌낼 정도가 된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미국 패권 이후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이미 그 조감도가 어느 정도 그려지는 미국 패권 이후의 세계는 안정되거나 평화롭지 못할 것이다. 핵 사용 위험은 과거의 패권교체기였던 제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사가 벌어질 가능성을 낮추지만, 우크라이나 침략처럼, 지역 강자들이 주변에서 벌이는 크고 작은 대리전들은 종종 발생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대신해서 국가 주도 산업정책이 새로운 정상이 되고 서로 경쟁하는 각국의 집중적인 연구·개발 투자로 기술발전은 빨라지겠지만, 열강의 각축은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피해자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한데 이와 동시에 위태로워 보이기만 하는 미국 패권 이후의 세계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도 할 것이다. 전쟁·제재 속에서 유가와 함께 각종 물가가 오르고 인플레가 심해지면 다수의 구매력이 위축되는데, 그 빈곤화의 정치적 결과는 다양할 수 있다. 가난해진 대중은 오른쪽뿐만 아니라 왼쪽으로도 급진화될 수 있다. 최근에 인기가 오른 프랑스의 극우 정객인 르펜뿐만 아니라 대선에서 승리한 칠레의 전형적 밀레니얼 좌파보리치도 새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서방과 중국 사이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이루어지는 만큼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각국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재공업화가 요구될 터인데, 산업 노동자들의 계층이 다시 커지는 만큼 좌파의 대중적 기반도 튼튼해질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나 포스트사상의 위축 내지 퇴출로 생기는 이념 시장의 틈새, 극우민족주의뿐만 아니라 새롭고 혁신적인 마르크스주의도 메울 수 있다. 일국 패권 이후의, 강국 경합의 세계가 동시에 계급투쟁과 기후정의를 위한 투쟁의 세계가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2-04-26

 

 

불복종을 위한 교육

어른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한국의 어른들은 절대 믿지 마세요. 그들은 여러분의 미래에 관심이 없습니다.”

청소년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 요즘 자주 하는 말이다. “어른들을 믿어서는 여러분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무책임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어른들처럼 젊은 세대에 대한 책임감이 박약한 이들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지난해 9월 독일 연방의회 선거와 올해 3월 한국 대선을 지켜보면서 더욱 굳어진 확신이다.

지난 독일 총선에서 가장 큰 정치적 쟁점은 생태, 기후변화 문제였다. 선거 뒤 이뤄진 조사를 보면 전체 선거 쟁점 가운데 무려 46%가 생태, 기후변화 관련 이슈였다. 그 결과 선거의 최대 승자는 녹색당이었다. 한마디로 지난 독일 총선은 미래를 위한 선거였던 것이다.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상, ‘미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선거판 전체를 압도했다.

 

이에 반해 우리의 대선을 돌아보라.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22세기는 오지 않는다’, ‘현재의 인류가 최후의 인류가 될 것이다라는 생태적 묵시록의 준엄한 경고가 번져가는데 한국의 어른들은 관심조차 없다. 기후·생태 문제는 티브이 토론 주제로도 오르지 못했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문제는 역대급 비호감 선거여서가 아니라 미래의 비전이 없는 과거 선거였다는 점이다.

 

한국의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미래에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현재의 고통에도 너무나 무감각하다. 한국의 학생들은 세계적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프랑스의 권위지 <르몽드>는 한국의 교육을 집중 취재하고 나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한국의 학생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이다. 한국의 교육이 가장 경쟁적이고, 가장 고통을 주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국영방송은 한국 교육을 취재하러 왔다가, 학생 인권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보냈다. 한국의 교육은 일상적인 인권유린이자 학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 지옥이 계속되는데도, 교육 문제는 이번 대선에선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대한민국이 젊은이들의 지옥이 된 것은 이처럼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기성세대 때문이다. 세월호의 비극은 전형적이고 상징적이다. 침몰하는 배 안에 아이들을 가만히남겨두고 자기들만 구조선에 오른 8년 전의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어른들은 파괴되는 지구와 망가지는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눈앞의 정치적 이해득실에만 골몰해 있지 않은가.

 

이제 더는 젊은 세대는 가만히 있으라는 복종의 명령에 굴복해서 안 된다. 복종의 노예도덕을 미덕이라고 가르쳐온 잘못된 교육을 따라선 안 된다. 세월호의 비극이 대한민국호의 비극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 생태지옥, 입시지옥으로 몰아대는 세상을 향해 이제 젊은 세대는 확실하게 아니요라고 외쳐야 한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교육을 위해 불복하고, 저항하고, 분노하고, 비판해야 한다. 정치의 세계를 전복하고 정복해야 한다. 아버지 세대가 큰 희생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의 광장에서 맘껏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권리를 누려야 한다. 노예의 굴종을 걷어차고, 자기 자신을 자유인으로 해방하는 것, 이것이 한국의 젊은 세대에 부여된 시대적 과제다.

 

이제 우리에게도 불복종을 위한 교육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히틀러 파시즘의 뿌리에는 복종 교육이 있었음을 깨달은 독일인들은 불복종을 위한 교육을 과거청산의 핵심 문제로 보았다. 어려서부터 학생들에게 비판교육, 반권위주의교육, 저항권교육, 선동가판별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한 결과, 오늘날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의식을 가진 국민이 되었다. “복종의 문화를 깨부순 것이 독일 68혁명의 가장 중요한 업적”(페터 슈나이더)이었던 것이다.

 

불복종을 위한 교육이 가장 필요한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대단히 무책임한 어른들이 여전히 이곳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복종은 교육의 문제를 넘어 생존의 문제다. 기성세대에게 불복하고, 저항하고, 대결하는 비판정신을 가져야만 야만적 경쟁교육을 넘어, 참혹한 생태지옥을 넘어, 우리 아이들도 행복하고 건강한 미래를 꿈꿀 수 있다.

복종하지 않는 능력, 거짓 권위에 도전하는 능력, 사악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이야말로 이 거대 위기의 시대에, 이 대전환의 격변기에, 이 땅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능력이다.

김누리중앙대 교수·독문학 한겨레 :2022-04-26

 

적어도 한 사람은

얼핏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인간으로 보이잖아요. 근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본인이 지향하는 특정한 가치만은 한 번도 버린 적 없어요. 가끔 존재하죠. 그런 사람들이.” 제주에 출장 오신 선생님과 식사하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분이 누군가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언급하신 그 공인에 대해 사실 그다지 관심 없었지만 저 말씀은 깊이 닿았다. 발화내용에 동의했다기보다 발화자의 시선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위안 같은 걸 받았다. 다음날 커피 마시면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아침 방송에서 본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농담의 소재인 줄 알고 키득거릴 채비하던 내게 그분이 이야기했다. 겉으론 실리를 추구하며 세속에 젖어 사는 것처럼 보여도 혀끝만 정의로운 자들보단 세상에 무언가 더 보태는 이들이 있다고. 그런 일상의 삶들을 자신은 좋아하며, 지켜주고 싶다고.

 

실리적혹은 세속적보단 차라리 몽상적이나 착한 척같은 비판이 어울릴 부류에 속한다. 또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까지 추구할 어떤 가치를 품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선생님이 지켜주시려는 대상 범위에 아마 포함되지 못할 거다. 그럼에도 스치듯 하신 저 두 이야기가 마음에 깃들어 지금껏 떠나지 않는다.

 

드물지만, 살면서 이따금 아름다운 결을 지닌 이를 만난다. 남루한 차림 속에서 형형히 빛을 발하는 깨끗한 얼굴 같은 사람. 반듯하고 견고한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진 사람. 단단한 갑옷 틈새로 무언가 닿으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사람. 사회적 가면을 쓴 무리 안에서 그런 희소한 존재들을 감별해낼 줄 안다는 데에 난 자긍심을 가졌다. 그들이 세상에 머물고 있으며 내가 그들을 곧장 알아보았음을 상기하면 내면에 램프가 환하게 켜지곤 했다.

 

한편 누군가의 빈틈을 우연히 목도하기도 한다. 세련된 매너에서 어색함을 감추려는 몸짓을 읽었을 때나, 냉소 이면의 뜨겁고 서투른 열정을 보았을 때. 사람을 막연히 동경하는 건 상대의 매력과 장점 때문일지라도 그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건 저런 빈틈을 통해서였다. 더 나아가 내가 지닌 모종의 빈틈으로 타인의 그것을 알아차리고 네가 바로 나구나확인하기도 한다. 특히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모델이나 근사한 멘토는 되지 못할지라도 군중의 틈바구니에 숨은 수줍어 인사 못하고’ ‘소심해서 예의 없는얼굴들을 알아보고 이해의 눈길을 보낼 수 있었다.

 

아름다운 결을 가진 존재들. 빈틈을 통해 가까워진 관계들. 나와 닮은 취약성을 지닌 이들. 이제껏 내가 세심히 살피며 다정한 시선을 보내온 대상 범위는 딱 거기까지였다. 저 세 범주 너머엔 너그러움을 가장한 채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다. 고백하면 일부에겐 경멸감을 품었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하거나 동정심과 비분강개로 쉽사리 정의감을 표출하려 드는 이들을 속물로 치부했다. 그들 역시 여린 속내를 지녔을 테고 저마다의 상흔을 앓았을진대 이에 대해선 알려 하지 않았다.

 

이렇듯 내가 입술로는 예의 바른 웃음을 꾸며내면서 내심 경멸했던 존재들에게 누군가, 적어도 한 사람은 눈길을 두는 것이다. 알아보고 지켜주고자 하는 거다. 나보다 예민하고 날 서 있을, 나보다 좋은 사람임이 틀림없을 한 사람이. 그 사실은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흘러 젊음의 마지막 반짝임마저 지워질 때쯤 나 역시 대다수의 관심 바깥의 존재일 거니까. 연구자로서의 태도는 쓸데없이 진지한데 연구성과는 대단치 않은, 강의도 재미나게 못하면서 교육자적 애착만 강한, 집도 차도 없는 주제에 가진 걸 나눈다며 얇은 호주머니를 자꾸 여는 몽상적이며 착한 척하는 자일 테니까. 그때 어딘가,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그 볼품없는 삶을 들여다보리란 희망을 내 쪽에서도 품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경향 : 2022.04.28

 

검사의 말, 대통령의 말, ‘진보의 말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외교를 해내야 하는 나라 중 하나다. 한중수교 이후 30년 동안 한국 외교의 틀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북핵 문제는 미·중과 협력해 풀어간다는 것이었다. -중 패권 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세계를 분단시키면서, 그 틀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안보와 경제가 하나로 얽히고 있는데, 경제는 중국 의존도가 과하게 높고, 북한 핵 위협도 더욱 위험해졌다. 난제를 해결할 쉬운 길은 없을 것이다.

 

대중국 포위망의 최전선에 앞장서지 않으면서도, 국제사회와 공조하며 국제질서의 변화에 적극 대응해나갈 지도자의 신중한 언행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윤석열 당선자는 지난 14<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해 더욱 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중국은 북한과 동맹이고,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했다. ‘북한의 동맹인 중국도 주적이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대통령 당선자의 발언으로는 지나치게 단정적이다. 유죄, 무죄를 흑백 논리로 따지는 검사의 어법이다. 외교안보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하지 않고 있다. ‘대북 선제타격이나 사드 추가 배치같은 엄중한 문제를 전임자를 공격하기 위한 국내 정치 이슈로 소비하고 있다. 한 외교 전문가는 윤 당선자가 지금까지 해온 언행대로 외교를 하면 1년 안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당장 취임 열하루 뒤 초고속으로 열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다음달 21일 정상회담에서, 윤 당선자가 한국과 미국의 국익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보수진영을 대변하는 윤 당선자의 흑백논리가 위태롭다면, 진보진영 안에는 또다른 흑백논리가 존재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책임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진을 추진해 러시아의 안보 우려를 무시한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고, ‘나토 가입을 추진하다가 전쟁터가 된 우크라이나 정부의 외교 무능을 조롱하는 이들이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달러 패권이 무너지면,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대안적 국제질서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반미의 시각이 지금 중국과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퇴행적 변화를 은폐하는 장막이 되어서는 안된다.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에 미국이 승자의 관용을 보이며 러시아를 포용하는 질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 하더라도,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이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추진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이후 강고해진 대러시아주의의 산물이다. 2007~2014년 러시아의 군비 지출은 2배로 증가했지만 나토의 군비 지출은 절반으로 감소했다. 나토의 동진만을 탓할 수 없다.

 

지금의 세계를 만들어낸 전환점은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미국이 과도한 신자유주의의 후유증과 불평등으로 휘청거리는 틈을 노려 푸틴은 2008년 조지아를 침공했다. 뒤이어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강군몽을 추구하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정상회담이 열릴 때마다 다극체제” “국제질서의 민주화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미국의 일극체제를 흔들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이 세력권을 나눠 각자 주변 약소국들을 통제하는 새로운 제국적 질서를 추구하려는 것이다. ·러는 국가 주도 자본주의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시민사회/민간의 자율성을 철저히 차단하고 국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국가주의를 실현해가고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벌이고 있는 살육과 파괴, 중국의 권력이 제로 코로나정책을 통해 수천만명을 가둘 수 있는통제와 감시 시스템은 이들이 대안이 아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미국 편이냐, 중국·러시아 편이냐는 논쟁은 세계를 좌-우의 흑백논리로 보게 하면서, -아래의 문제로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우리 사회 진보 가운데 일부가 가진 것 없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덜고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 실제로 노력하기보다는 민족주의와 반미의 깃발로 진보의 선명성을 주장하는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제 권력자들의 대결에 훈수를 두는 책사의 역할을 멈추고, 평범하고 약한 이들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물어야 한다. 러시아의 침공을 멈추고, 한반도와 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한국이 국제사회와 함께 해야할 역할이 적지 않다. 전쟁과 국가폭력,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서서 더욱 포용적인 방향으로 우리 사회와 국제질서를 개선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박민희 논설위원 한겨레 :2022-04-28

지식의 범람, 지식인의 고갈

20대 대선이 수구보수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선거 기간에도, 박빙으로 선거가 끝난 지금도 여전히 의문인 것은 자유주의보수세력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수구보수세력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는지다. 촛불혁명의 요구를 뚜벅뚜벅 실행해 나가기는커녕 눈치 보고 자만하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치고 무사안일과 내로남불에 정신 못 차리다가 결국 심판대에 서게 된 자유주의보수세력에게 매운맛을 보여주는 것은 이해되지만, 기후위기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넘어서는 대전환이라는 시대정신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국형 수구보수세력들에게 권력을 맡겨도 상관없다는 발상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나의 세계인식이 너무 나이브한 탓인지는 모르나, 나는 한국 사회의 여론 지형과 이를 둘러싼 지적 환경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가치가 지배하던 20세기가 저물고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며 그로부터 새로운 공동의 가치를 일궈내야 하는 것이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가치의 다양성 혹은 가치의 상대성이라는 탈근대적 지향성은 종종 몰가치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허용과 옹호를 낳기도 한다. 근래에 내 페이스북 글에 비아냥대곤 하던 어떤 젊은 여성이 나에게 어쩔티비?”라는 댓글을 달아 쓴웃음을 지은 일이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겠다는데 네가 어쩔래?” 하는 뜻을 가진 유행어라고 한다. 내가 무조건 옳다는 우격다짐인데 이른바 포스트트루스(탈진실) 시대의 한 단면이다. 한 사회가 가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다양한 가치들이 산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그 가치들 사이의 관계와 위치에 대한 대등하고 진지한 토론과 상호참조를 통해 더 나은 공통의 가치에 대한 민주적 합의에 도달하려는 노력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무시되면 각각의 상대적 가치는 고립된 절대적 가치로 고정되고, 그다음에는 그 절대성 사이의 어떤 교섭도 없는 적나라한 적대 상태만이 남을 뿐이다. 나는 이번 대선 과정과 결과 앞에서 이 위험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에스엔에스(SNS) 등에서 거칠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일반 대중은 물론 나름대로 지적 훈련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인문학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나 실용의 세계를 다루는 게 아니라 가치를 다루는 학문이기에, 이러한 가치의식의 혼란은 인문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싹터온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에서부터 이러한 혼란은 예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에 기초한 인류사의 진보와 발전이라는 근대의 신앙은 제국주의의 세계 침탈이나 두차례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되었으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넘어서겠다던 사회주의적 기획 역시 결국 전체주의로 전락했다.

 

이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한 68혁명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는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모든 유토피아적 기획들에 내재한 권위주의와 교조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가치의 위계화 대신 수평화를, 축조 대신 해제를, 일원성 대신 다원성을, 구심성 대신 원심성을 이 근대성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로써 우리는 비로소 대문자 세계가 아닌 소문자들의 세계,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들의 세계, 서구-백인-남성의 헤게모니의 전제적 지배 아래서 고통받아온 비서구-비백인-비남성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포스트모던적 사유체계가 지닌 이러한 전복적인 해방성은 근대성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어떻게 근대 이후의 새로운 일상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나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라는 과제는 불가피하게 공통의 중심 가치를 설정하고, 이를 위한 노력과 실천들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의 대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동원이라든가 어느 정도의 위계관계의 수립 등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는 곧 근대 및 근대 이전의 모든 권위주의적 비전들의 작동 방식과 다를 바 없는 것이기에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2008년 월가 점령 운동을 이끌었던 주체들이 지도부를 내세우거나 강령을 제정하는 것을 거부했다든가, 2016~17년 촛불시위에 모인 대중들이 이 시위의 힘을 정치조직화하는 것에 적극 반대했다든가 하는 것은 포스트모던적 사유가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질 때 흔히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자신의 문제는 중요하고 심각하나, 이 문제가 전체적인 정치적 과제의 하나로 배치되는 것에는 반대하는 정체성 정치라는 현상도 이와 비슷하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와 실천에 내재한 곤경은 198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 운동 방식의 변화와 맞물려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집단적 사회변혁의 기획들을 낡아빠진 것으로 간주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교묘히 편승해 사람들을 집단과 공동체로부터 분리해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의 이미지, 즉 노동자가 아닌 자기경영 주체, 수동적 소비대중이 아닌 능동적 소비주체라는 허구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고 선동해 결국 기존 자본주의체제의 자발적인 노예들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마도 포스트모던과 신자유주의의 결합이 낳은 세기적인 아이러니한 풍경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는 지향해야 할 공동의 중심 가치는 해체되고, 변혁을 위한 모든 구심적 기획들은 거부되며, 이를 수행해야 할 공동체들은 붕괴하고 오로지 자기 문제만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고독한 개인들의 세계, 어떤 진리나 진실도 내 이해관계와 좁은 입장에 어긋나면 거부되는 세상, 팩트와 지식은 넘쳐나는데 그 팩트와 지식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어떤 사회적 공준도 설 자리를 잃은 지식의 1차산업 시대를 살고 있다. 수많은 지식과 사실의 더미들을 분류하고 가공하고 연마하여 지혜의 보석을 생산해야 할 거의 유일한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수 중 겨우 20%만이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자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대학신문> 2022420일치 뉴스레터)은 지식산업시대라고 일컫는 현시대가 사실은 얼마나 지식이 빈곤한 시대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오늘날의 대학을 주도하고 있는 세대들은 청춘을 민주주의라는 중심 가치를 위해 싸웠다고 자부하는 7080세대들이다. 대학 시절 몰가치적 대학교육에 저항하여 독자적으로 진보적인 아카데미즘을 추구한 바 있던 이들의 자만과 무책임, 체제순응을 넘는 기득권층화가 유난히 뼈아프게 다가온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한겨레 :2022-04-28

 

사법의 그림자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힐 위험에 놓인 가난한 시민을 돕기 위해 만든 장발장은행. 간단한 심사만으로 무담보, 무이자 대출을 해준다. 그러니 벌금 낼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쏟아져 들어온다. 최근 대출심사를 하면서 한 통의 약식명령서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여성이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렸지만 갚지 못했고, 이 때문에 사기죄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은 사건이었다. 빌린 돈만큼의 벌금을 받았다. 개인 사이의 민사는 이렇게 형사사건으로 둔갑하고, 단순 채무불이행은 사기범죄가 된다. 전과자를 양산하는 이상한 시스템이다. 법원은 피고인이 빚을 갚을 의지나 능력이 없으면서도 공연히 돈을 빌렸다, 피고인의 저 깊은 속내까지 파악해 형사처벌을 한다.

 

깜짝 놀랄 대목은 따로 있었다. 피고인의 약식명령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피고인은 유흥접객원으로 일하던 사람이다.”

약식명령이든 판결문의 첫머리에는 이런 식의 인정신문 내용이 붙기도 한다. 피고인을 특정할 만한 표지를 꼽거나 범죄와 관련해 꼭 짚어야 할 사항을 적어두기도 한다. 그렇지만 유흥접객원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범죄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저 혐오성 낙인에 불과하다. 판사는 왜 이렇게 오금 박듯 적어두었을까. 왜 과거에 종사했던 일이 유독 이 여성에게만 중요한 표지가 되었을까. 그 사람은 40, 여성, 한부모 가정의 어머니, 어느 지역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이것 말고도 그를 알려줄 표지는 훨씬 더 많을 거다. 그런데도 유흥접객원을 유일한 표지로 꼽은 건 왜일까.

 

만약 그의 과거 이력이 범죄와 연관이 있다면 또 모르겠다. 과거에 전문적인 사기집단의 조직원으로 일했다거나, 돈 떼먹는 일을 직업적으로 했다면 그럴 수 있을 거다. 만약 피고인이 남성이라면 이런 식으로 함부로 낙인찍힐 일은 없었을 거다. 법원이 대놓고 판결문을 통해 인권을 침해하는 이런 식의 사례는 숱하게 많다.

 

판사들이라고 변명할 말이 없지는 않을 거다. 인력은 적고 일은 많다는 흔한 이야기부터 적용 법률과 양형이 맞는지 살펴보는 게 급선무라 놓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약식명령서를 판사들이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검찰에서 넘겨준 공소장을 그대로 옮긴다. 검사의 이름을 판사의 이름으로 바꾸는 게 전부다. 마찬가지로 검찰은 경찰이 작성한 서류를 그대로 옮긴다. 아무리 그래도 기껏해야 몇 줄 안 되는 약식명령을 쓰면서, 아니 검토하면서, 맨 앞줄에 적힌 유흥접객원운운을 챙기지 않았던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이런 잘못은 서류 작성의 맨 앞에 있었던 경찰관에게서 비롯되었을 거다. 그러나 우리의 형사사법시스템은 수사기관의 잘못을 기소기관이 걸러내고, 기소기관도 챙기지 못한 것은 법원이 바로잡으라는 차원에서 설계되었다. 사법절차는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마치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듯 기계적으로 돌아가기만 해서는 안 된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의 밥그릇 싸움을 보면,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는 업자들만의 다툼을 확인할 수 있지만, 사법절차의 진짜배기 핵심은 서로 다른 기관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잡아서 잘못을 줄여보자는 거다.

 

벌금형 선고가 예상되는 형사사건은 중요하지 않은 사건으로 취급하겠지만, 빌린 돈도 갚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벌금까지 매길 때는 판사의 고민이 담겨야 한다. 매년 수만명의 사람이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가는 현실을 고려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벌금형은 징역형과 별다르지 않다. 법원으로서야 크고 작은 사건이 따로 있는지 모르지만, 당사자 처지에서는 자기 사건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검찰개혁은 검사들이 국민을 위한 호민관 역할은 제쳐두고 오로지 제 잇속만 챙기며 생긴 반작용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틀어쥔 권한의 독점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오로지 국민만 쳐다보고 일해 왔다면, 민주주의 원리에는 맞지 않아도 검찰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바탕으로 그 정도 권한은 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 높았을 거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법원에서 보통의 시민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생각하면 아뜩해질 지경이다. 법원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자기 혁신의 노력부터 기울였으면 좋겠다. 그동안 벌금형에 대해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던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벌금형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그나마 다행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경향 : 2022.04.29